webnovel

6

44. 되찾을 것들을 위한 기념비 (3)

"···뭐? 지금?" 

이튿날 아침.

당장 중국에 가야 한다는 내 말에 가족들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갑작스럽지만, 무리한 출발은 아니었다.

아공간 포탈이 설치된 인천.

가족들은 이곳에 있든, 아공간에 들어가든 자동으로 나와 함께 이동하는 꼴이었다.

"다치지 말고··· 밥 잘 챙겨먹어야 한다. 알겠지?"

민우와 어머님께 인사를 나누었고, 곧장 이용수가 모는 헬기에 올랐다.

차이나타운에서 인천공항까지.

타고 내리는 시간을 제외하면 헬기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투두두두!

힘찬 헬기의 날갯짓 소리.

하늘로 떠오르고 나니, 인천공항이 들어선 영종도의 지형이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통신대대장 한경호가 유성철과의 무전을 연결해주었다.

-공항 격납고에 수송기를 마련해뒀습니다. C-130J라는 군용 수송기인데, 베이징까지는 거뜬하게 갈 겁니다. 속도도 헬기의 두어 배는 나올 거고요. 3경비단 통해서 인계받으시면 됩니다.

내가 물었다.

"인천 공항은 아직 관리가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걸 보면요."

-예. 경비단이 있기도 하고, 공항 직원들이나 엔지니어들이 아직 여객 터미널에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관제탑에서 이륙에 도움을 줄 겁니다. 정겸씨가 공항에 들린다면 그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 되겠죠.

과연 그렇긴 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나는 다니는 족족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을 뿌려주곤 했으니.

이제 남은 대화는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었다.

-한 중령이 있다지만, 중국에 가시면 연락이 어렵겠군요. 아무쪼록 무운을 빌겠습니다.

"아, 직통은 아니어도 연락이 되기는 할 겁니다. 인천을 통하면 되니까요."

나는 내가 포탈을 설치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으며, 때때로 한경호를 인천 쪽 포탈로 내보내 합참과 무전을 주고받겠노라 이야기해주었다.

유성철은 이번에도 혀를 내둘렀다.

-이미 놀랄 만큼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김 대령께서는 매번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어쩌면 정말 예전의 세계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야죠."

그에게는 국가의 재건.

나에게는 일상의 회복이었다.

서로 다른 두 목적은 멸망이라는 적수 앞에 그 몸을 꼭 맞게 포개고 있었다.

그와의 무전을 마쳤다.

우리는 서서히 인천공항의 활주로에 다다르고 있었다. 

공항 관제탑은 여전한 위용을 자랑했다.

하지만 부서진 기체와 괴물들의 사체가 듬성듬성 놓인 공항 활주로에는 단 한 대의 항공기도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투두두두두!

헬기가 땅에 가깝게 붙을 때쯤, 우리는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괴물?"

오크보다는 컸지만, 그렇다고 거인은 아니었다.

남 회색 살갗을 가진 녀석은 낡은 거적때기로 간신히 하반신을 가린 채, 커다란 몽둥이를 위협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감탄한 한경호가 작게 목소리를 흘렸다.

"···트롤?"

너무나도 적절한 이름.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세 마리의 트롤이 마주한 상대는 그보다 더 인상적인 모습이었기에.

"······기간트?"

이쯤 되자 한경호의 장르 식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대대장님, 보기보다 판타지에 소양이···"

"······"

뭐가 됐든, 눈앞에는 정말 트럭만 한 크기의 기간트가 서 있었다.

등 뒤에는 얇은 철골로 겨우 감싸인 조종석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언뜻언뜻 사람의 형상이 비쳐 보였다.

다만 그 소재만큼은 급조된 것이 분명했다.

자동차 바퀴, 보닛, 항공기 엔진 따위의 잡다한 부속들이 가까스로 모양만 맞춘 채 어지럽게 얽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기간트의 성능은 준수했다.

슈우우우웅!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트롤의 몽둥이.

기간트는 재빨리 왼손을 들어, 결속된 차량의 문짝을 방패로 내세웠다.

'···저걸로 되나?'

종잇장처럼 찢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량의 문짝이 단단해 봐야 얼마나 단단하겠는가?

타아앙!

하지만 기간트의 방패는 상상 이상으로 견고했다.

트롤의 공격을 버텨내는 것은 물론, 그 타격을 튕겨내며 성공적으로 트롤을 물러 세웠다.

슈우우우웅!

기습적으로 또 다른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꽈앙!

기간트의 흉부, 보닛에 타격이 있었지만, 잠시 주춤거릴 뿐 기간트는 무리 없이 트롤의 공격을 버텨냈다.

쿠웅!

쿵!

기간트의 반격이 시작됐다.

뻗어가는 주먹과 함께 자잘한 기계부속들이 공중에 휘날렸고,

타앙!

결과적으로 트롤의 머리를 가격했다.

피웅!

피웅!

왼팔에서는 레이저가 발사됐다.

위력은 매직 미사일과 비슷한 수준.

아주 강하지는 않았지만, 트롤 한 마리를 멀찍이 밀어내기엔 충분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무리한 움직임에 따른 결과였을까?

휘웅.

휘웅.

돌연 기간트의 시동이 꺼져버렸다.

그리고···

쿠웅!

기간트의 무릎이 땅을 때렸다.

그 직후였다.

푸슈욱!

파앙!

차량 에어백 같은 것이 터지며, 기간트의 조종사가 비상탈출을 감행했다.

솟구치는 조종석과 황당한 표정을 짓는 트롤들.

결국 녀석들의 목숨을 끊는 건 헬기에서 내린 나의 몫이었다.

쐐애액!

쐐액!

콰득!

놈들의 미간에 꽂히는 강화된 성창.

마침내 세 마리의 트롤이 나란히 활주로에 드러누웠다.

휘이이···

멀찍이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기간트의 조종사,

그 너머로 여객터미널에서 뛰어오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보였다.

.

.

.

군인들은 유성철이 이야기했던 3경비단이었다.

가장 선임자로 보이는 경비단의 장교와 인사를 나눴고,

그가 나를 공항 한쪽에 딸린 어느 항공사의 격납고로 안내했다.

그로부터 이곳의 상황을 간단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주로 제 1 여객터미널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천공항과 각 항공사의 직원들이 머무르고 있고, 우리 경비단이 주변 치안을 담당하고 있죠."

"그렇군요. 그럼 일단···"

덜컹!

툭!

사람이 많다는 소리에, 일단 기초적인 물자들을 출하해주었다.

생수, 식량, 캠핑용품은 물론, 통신장비와 국통사 유류 창고에 있던 기름까지.

풍족한 물류센터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위용을 뽐냈다.

"아니, 이걸 다······"

쏟아지는 물자들.

경비단 장교가 탄성을 넘어 경악했지만, 나는 곧장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굽니까?"

기간트를 타고 싸우던 조종사.

그가 격납고 한쪽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으니.

까슬한 수염을 가진 그는 중년의 백인 남성이었다.

네모난 투명 안경을 쓰고 너절하게 구멍 난 티셔츠를 입은 그는, 격납고 한편에 지저분하게 쌓인 기계 더미를 침대 삼아 아무렇게나 몸을 뉘고 있었다.

경비단 장교가 말했다.

"항공사에 파견 나왔던 미국인 항공기 엔지니어, 제임스입니다. 능력을 각성했다고 하더군요. 이러나저러나 지금은 이곳에 발이 묶인 상황이지만요."

"저 사람이 주변의 괴물을 퇴치하기도 하는 모양이죠?"

"예, 그렇습니다. 제법 도움을 많이 주기는 하는데, 정작 사람들과 말을 자주 붙이지는 않아요. 공항에서 남아도는 자재들을 모아서 조립하고 그걸로 싸우고··· 그동안 딱 그것만 하며 지내오고 있습니다."

인간성 제로에, 기계광.

어쩌면 딱 메카닉다운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경비단 장교에게 출하해준 식량.

거기에는 김치도 있었고, 꽁치나 황도 통조림, 그리고 비빔밥 전투식량 따위가 놓여 있었다.

이곳 인천공항 사람들 대부분은 여객터미널에 모여있을 터.

하지만 메카닉 제임스는 까칠한 수염과 특유의 '너드' 같은 행색을 자랑하며 홀로 이곳 격납고를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보여서였을까.

나는 그에게 다가가 몇 가지 물건을 따로 출하해주었다.

[맥앤치즈 (냉장) 3kg, 1개, 가격은 33,660원입니다.]

[쟌슨빌 오리지날 스모크 소시지(냉장), 1.67kg, 가격은 34,450원입니다.]

[부시맨브레드 (냉동), 8개, 100g, 가격은 11,000원입니다.]

[코카콜라 245ml, 24개, 가격은 16430원입니다.]

[르니키친 애플 브리치즈 크로와상 4개입···]

"···?"

그는 사뭇 놀란 눈치였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음식을 대뜸 음식을 건네주었으니.

나라고 뭔가 대단한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사람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을 뿐.

적어도 그에게는 치즈 묻은 마카로니가 김치요, 핫도그가 된장찌개가 아닐까 싶어 건네준 것이었다.

확실히 그는 말주변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음식들을 내려다볼 뿐.

그런 그를 두고, 나는 다시 경비단 장교에게로 돌아왔다.

이제 베이징으로 넘어갈 수송기를 받아낼 차례였으니.

장교를 따라가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C-130J 수송기 두 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짙은 국방색으로 도색된 수송기의 양쪽 날개에는 각각 두 개씩 총 네 개의 엔진이 달려 있었고, 뒤꽁무니에는 으레 첩보영화에서나 보았던 특수부대원들의 수송 칸이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송기를 복사해서 가져가시면, 합참 쪽 병력이 남은 수송기를 타고 곧장 따라붙을 겁니다."

유성철로부터 들은 대로였다.

합참 또한 베이징으로 병사들을 보내기로 했으니까.

망설일 것 없이, 곧장 수송기를 아공간에 담았다.

['군부대'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상품입니다.]

[등록 비용 책정 중···]

띠링!

[등록에 필요한 비용은 마석 473 개입니다.]

[남은 마석은 21,268개 입니다.]

마석 100개 가량이 필요했던 블랙호크에 비하면 확실히 비싼 금액이었다.

하기야 크기만 해도 블랙호크보다 배로는 큰 녀석이었으니.

슬슬 출발하려던 찰나.

경비단 장교가 우려를 표했다.

"각성 능력이 있으시니 어떻게든 잘 처리하실 거라 생각하지만··· 비행 몬스터들이 적잖이 따라붙을 겁니다. 어제부터 부쩍 와이번들도 많이 보이고 있고, 이상한 괴조 같은 것들도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거든요."

운송수단의 파괴.

확실히 곤란한 문제이긴 했다.

아무리 아공간 포탈이 무적의 방패이고,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이 척력을 두르고 있다곤 하지만 차량이나 헬기에 가해져 오는 대공 공격까지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더욱이, 이 수송기는 블랙호크처럼 무장이 장착된 녀석도 아니었다.

잠시 고민에 잠겨 있으려던 찰나···

"중국에 가겠다고요?"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메카닉, 제임스였다.

그가 뱉은 것은 분명 영어였다.

하지만 자동 번역이라도 되는 양, 내 머릿속으로 그 정확한 의미가 흘러들어왔다.

지잉.

그의 손에는 은은한 빛을 내뿜은 마석 한 개가 쥐어져 있었다.

'마석에 통역 기능이 있는 건가?'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 마주했던 해골 기사 그웨인도 마석을 깨뜨려 대화를 걸어왔었으니.

그것이 마석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미국인 제임스와의 소통이 가능한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제임스는 대뜸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내가 수송기의 장갑을 강화해주겠습니다."

"장갑을요?"

조금 전 기간트의 전투가 떠올랐다.

조악한 부품들로 이뤄진 기간트였지만, 맷집 하나만큼은 상당했으니까.

확실히 그거라면 중국행에 큰 도움이 될 듯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혹시 언젠가 미국에 갈 생각이 있나요?"

"···아마 그럴 겁니다. 정확한 시점은 기약하기 어렵지만요."

"시점까지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꼭 함께 데려가 주세요."

내가 물었다.

"미국에 꼭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가족이라든지···"

"가족은 없습니다. 하지만··· 내 고향이니까요."

그가 내가 출하해준 '미국식' 식량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서까지 가고 싶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 꽤 강한 것 같고··· 함께 간다면 안심이 될 것 같아서요. 집에 차고가 있습니다. 가족은 없어도, 꼭 되찾고 싶은 장소거든요."

멸망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기는 실로 다양한 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수송기는 무한히 복사할 수 있다.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시도해 볼 용의가 있었다.

"좋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미국에 꼭 데려다 드리죠."

"재료가 필요합니다. 아까 보니 허공에서 수송기를 만들어 내던데···"

"아, 그거라면 문제없죠."

나는 즉시 옆에 새 수송기를 한 대 출하해주었다.

제임스는 홱하니 돌아섰고, 새로 출하된 수송기에 손을 얹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지이잉···

손을 따라 그려지는 푸른빛 섬광.

수송기의 장갑판이 손쉽게 잘려 나갔다.

휘리릭!

휘릭!

그러곤 그가 손을 대는 족족, 기체 깊숙이 박혀 있던 나사들이 절로 회전하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놀랍게 그지없는 모습.

완연한 맥가이버의 재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가슴이 끓어올랐다.

덕분에, 활주로 한쪽에 몇 개의 사물을 출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UH-60 블랙호크, 코란도 스포츠, 천마, 장갑차, 레토나까지.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죠?"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좀 더러워진 것 같아서 닦아두려고요."

손에 들린 마른걸레.

나는 블랙호크의 먼지를 털어내며 혼잣말을 덧붙였다.

"뭐라고 블랙호크야?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

"하지만 지금처럼 약해빠진 몸으로는 미국은커녕 제주도도 못 가겠다고?"

"······"

허리를 세운 메카닉, 제임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번 생에 웃음은 처음인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내게는 그의 그런 변화가 좋게만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거기 둬요. 소시지값이라고 해두죠."

나 또한 씨익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탁 트인 활주로에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맥가이버 제임스가 뚝뚝 흘리는 구슬땀과 함께.

***

슈우우우.

깔끔하게 울려 퍼지는 수송기의 엔진 소리.

우리는 서서히 베이징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이륙하자마자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달라붙었고, 한참 날아간 뒤에는 외안의 괴조들이 수송기를 둘러쌌으니까.

하지만 제임스가 강화해 준 수송기의 장갑은 끄덕하지 않았다.

하단에 장착된 레이저, 수송 칸에 설치한 미니건, 마지막으로 을 통한 내 출하 스킬을 이용하니 그간 약점처럼 느꼈던 공중전이 놀랍도록 쉽게만 느껴졌다.

"편하다, 편해."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마침내 중국의 영공에 들어섰다.

다 같이 방독면을 뒤집어쓴 뒤, 단단히 끈을 조여 넣었다.

이곳의 공기는 결코 사람이 들이마실 만한 것이 아닐 테니까.

눈앞이 답답해 방독면 렌즈를 재차 닦아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희뿌연 것은 렌즈의 얼룩이 아닌 베이징 시내의 대기였으니까.

오염된 대기.

그것이 당면한 우리의 상대였다.

45. 아포칼립스의 내공심법 (1)

이용수와 합참의 부조종사.

그리고 나와 통신대대장 한경호까지.

우리 네 사람은 방독면은 물론, 화생방 보호의까지 갖춰 입었다.

목적지는 베이징의 시청 구.

베이징에서는 가장 부유하다고 하는 2환 구역이었다.

빼곡한 도심.

수송기를 착륙시킬만한 공간이 있을 리 만무했고, 베이징 외곽의 서우두 공항에 들러 새로 출하한 블랙호크로 옮겨 탈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제임스가 강화해준 녀석이었다.

투두두두!

우리는 그렇게 외곽의 5환으로부터 2환 구역까지, 차츰 부유해지는 베이징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들어갔다.

하지만 서서히 고도를 낮출수록, 밖으로 내다보이는 것은 그러한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천안문에 내걸린 옛 통치자의 초상은 여전했지만, 좌우로 늘어선 새빨간 벽돌들은 양옆으로 박살이 난 채 무너져 있었다.

휘황찬란한 고성들은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고, 드높은 베이징 도심의 빌딩들은 하나같이 아스팔트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곳곳에 널린 시체들이었다.

매 시선마다 수백, 또는 수천 구씩 눈에 들어오는 희생자들.

그 위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벌레들이 끊임없이 꾸물거렸다.

한경호가 이야기했다.

"···도마뱀은 차라리 양반이었네요."

한국에서 맞닥뜨렸던 적들은 광신도들의 에메스, 그리고 파충류들로 이뤄진 사브로스였다.

대부분 8위계 또는 7위계가 섞여 있는 정예 병력들.

하지만 중국을 침공한 세력들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부우웅!

많아도 너무 많다.

새카맣게 하늘을 덮은 벌레들.

오는 내내 수송기의 엔진에 갈려나가는 수도 적지 않았다.

제임스의 강화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놈들에게는 위계도, 척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모두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방대한 물량이 이곳 베이징을 덮고 있었다.

"···끔찍하네요."

가까스로 입을 연 것은 이용수였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은 차마 뭐라고 덧붙이지 못했다.

그렇게, 일면 화려하면서도 처참한 베이징의 시내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낯선 이름의 호텔이었다.

추레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고급스럽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곳.

이런 장소에 중국의 핵심 인력들이 모여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유성철은 중국 측 각성자들을 보더라도, 내게 '너무 놀라지 말라고' 전했다.

모든 중국인 각성자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면모가 있다고.

헬리포트조차 갖추지 못한 호텔이었다.

널찍한 도로 한 곳에 헬기를 착륙시켰고, 척력이 없는 한경호와 부조종사를 아공간에 들여보냈다.

화르륵!

나와 이용수의 손에 의해 찢어지는 '파이어' 마법 스크롤.

날아드는 곤충들이 산채로 불사르고 있을 즈음이었다.

타닥!

누군가 호텔로부터 쏘아지듯 뛰쳐나왔다.

온몸을 방독면과 보호의로 둘러싼 우리는, 그의 행색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포(道袍)?"

뒤로 흔들리는 긴 머리.

방독면 같은 건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척!

그가 우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중국인 각성자들의 무리.

그들은 우리가 호텔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문을 닫았다.

"흡!"

그러곤 다 같이 우리를 향해 손을 얹더니, 구슬땀을 흘리며 정체 모를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난해한 의식은 몇 분이나 계속됐다.

마침내 그들이 한숨과 함께 손을 뗀 뒤에야, 초라하게 짝이 없는 호텔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척!

또다시 포권이었다.

조금 전 우리를 데리러 왔던 사내.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손에는 제임스가 그러했듯 은은한 빛을 발하는 마석이 들려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적강(謫降)의 운양(雲陽)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구수한 소개였다.

현대에서는 퍽 들어보기 힘든 느낌.

실제로 그들의 행색은 영락없는 '무림인'들 그 자체였다.

운양이 말했다.

"내공으로 독은 모두 몰아냈으니, 이제 방독면은 벗으셔도 됩니다."

"내공이요···?"

"예, '무림' 계열 각성자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인데···"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너무 놀라지 말라는 유성철의 경고를 듣고 온 터였지만, 어림도 없었다.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편제하던 중국 정부는 개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이 '무림' 계열의 각성자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고 했다.

이들은 실제로도 각지에서 고대로부터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오던 무술 학파의 일원들이었는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가 각성 능력을 부여받으며 중국 정부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고.

내게 인사를 건넨 이는 이들 '무림인'들을 이끄는 지도자.

적강파(謫降派)에서 적강운검(謫降雲劍)이라는 별호를 가진, 운양이라는 사내였다.

그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감사를 전했다.

"목숨 걸고 이곳까지 와주신 데에 더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입니까?"

운양이 대답했다.

"이곳 베이징에서만 두 개의 입찰 경쟁이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입찰을 수주한 차원은 벨제부르, 한 곳이었죠."

서울보다 배는 되는 인구를 자랑하는 베이징이었다.

입찰 경쟁이 두 개가 진행됐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적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유독 가스를 내뿜는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대기 자체를 뒤바꿀 줄은 몰랐죠. 그나마 내공을 활용할 줄 아는 무림인들이 대다수 살아남긴 했지만, 이곳 베이징에만 두 개의 게이트가 열리는 걸 막을 순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적들의 수도 두 배가 되었고요."

그 결과는 우리가 지나치며 보고 온 터였다.

베이징은 물론 그 주변 텐진과 탕산까지.

족히 수천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내가 물었다.

"벨제부르의 게이트 핵을 부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까? 내공으로 독을 몰아낼 수 있다면서요?"

나는 운양이 방독면은커녕 보호의 한 조각 없이 도포를 펄럭이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독 때문입니다. 내공을 모두 해독에 할애해야 하는 탓에 정작 전투에서는 제힘을 내지 못하고 있어요. 이곳 호텔만 하더라도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독을 차단하기 위해 차례를 바꿔가며 내공을 쏟아붓고 있거든요."

당장 바깥만 하더라도 휘황찬란해 보이는 호텔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 가급적 아담한 거처를 정한 것에는 공기 정화에 따르는 내공을 아끼기 위한 계산이 들어있던 것이었다.

"방독면을 써보시는 건요?"

"그것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만··· 심법이 흐트러지니 내공 운용 자체에 문제가 생기더군요. 결국 다들 내력으로 독기를 해독하는 편이 더 낫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문을 지키고 있는 무림인들, 로비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무림인들 모두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하기 그지없었다.

두 눈자위는 퀭하니 보랏빛을 띠고 있었고, 양 볼은 핼쑥하게 파여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내가 물었다.

게이트를 닫는 일.

그 행위의 주체는 이곳에 모인 무림인들이었으니.

운양이 비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장 내일 벨제부르의 게이트로 치고 나갈 겁니다. 시간을 끌어봐야 상황만 더 악화될 뿐이니까요."

푹!

그가 갑자기 내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한국에 폐를 끼치게 된 점은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독기가 한국에까지 퍼지기 전에 반드시 결판을 내보려 하니··· 힘을 보태주셨으면 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 또한 침공당한 입장이다.

하지만 운양은 입찰 경쟁에서의 패배를 자신, 그리고 중국의 책임에 두고 있었다.

한창 눈빛을 빛내던 그가 수하를 불렀다.

"일청, 거기에 있나?"

"예, 부르셨습니까?"

"숙소로 안내해드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거야."

"알겠습니다."

운양이 내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저녁 식사까지는 조금 쉬고 계시죠. 자세한 내용은 식사 후에 다시 말씀해드리겠습니다."

그는 내게 다시 포권을 한 뒤, 유유히 호텔 정문으로 멀어져갔다.

수하들에게 독을 몰아낼 '내공'을 보태주기 위해.

"따라오시죠."

일청의 안내.

이용수와 함께 그 길을 따라나섰다.

대화 내내, 남모를 비장함이 운양에게 머물러 있었다.

베이징을 수복하겠다는 목표를 넘어,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는 사명감.

그 자신의 목숨은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말씀 들으셨겠지만, 독이 들어올 수 있으니 창문은 절대 여시면 안 됩니다."

당부를 거듭하는 일청에게, 내가 되물었다.

"혹시 호텔의 출입구가 몇 개나 됩니까? 여러분들이 내공을 활용해서 막고 있는 문이요."

"여섯 개 정도입니다. 독이 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환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거든요. 내공으로 정화된 공기만 조금씩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그렇군요."

홱!

나는 돌연 이용수와 일청을 둔 채, 몸을 돌려 호텔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운양을 비롯한 무림인들이 좁쌀만큼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를 내공으로 정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미처 몰랐는데···'

사실, 그동안 틈틈이 아공간의 을 통해 만들어 둔 것이 있었다.

실험실에서는 특정 사물에서 원하는 부분만 취하고 그걸 중첩하는 방식으로 거대한 규모의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새삼 신기한 일이지만, 물류센터의 판매 품목 중에는 '산소'도 있었다.

캔에 농축된 산소이지만, 능력을 이용해 캔을 벗겨내고 중첩해가며 거대한 크기의 산소 덩어리를 만들었더랬다.

원래는 '파이어 볼' 마법서를 얻은 뒤, 폭발을 가중하는 용도로 쓰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용도를 달리 해보기로 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며 내가 말했다.

"물러서세요."

"···예?"

운양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지만, 너무나 당당한 내 발걸음에 자신도 모르게 문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나는 즉시 외쳤다.

"출하."

콰아아아앙!

미친 듯이 쏟아져 나가는 산소.

시속 300km로 날아든 청명한 공기는 좀생이처럼 작게 열린 문을 확 열어젖히다 못해, 그 앞을 기웃거리던 벌레들을 일순에 날려버렸다.

그리고···

다음은 무한한 반복이었다.

콰과과과과!

를 통해 1초 단위로 쏟아지는 산소.

아예 설치되다시피 한 포탈은 문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채, 에어커튼을 넘어 에어캐논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독을 몰아내는 것은 물론이다.

더 나아가, 답답하기 짝이 없던 호텔에 돌연 새바람을 찾아들고 있었다.

휘이이익!

참으로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청명한 공기.

그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초강력 환풍기라도 돌아가는 듯, 호텔 1층 전체에는 신선한 공기가 맴돌았다.

콰과과과과과!

호텔 1층에 나 있는 총 여섯 개의 출입구.

그 각각에 대량의 산소가 되고 있었고, 그 맹렬한 속도가 외부 대기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쓰읍-하."

"쓰으으읍! 하아!"

무림인들의 묘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공기 순환이 유난히 좋은 자리를 하나둘 꿰차더니, 저마다 로비 곳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실시했다.

그 덕분인지, 보랏빛으로 물든 퀭한 눈자위, 그리고 누렇게 뜬 무림인들의 안색이 한결 부드럽게 뒤바뀌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변화를 여실히 체감할 수 있을 만큼.

운양이 눈을 빛내며 감사를 건넸고,

"이거라면··· 다들 내력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겸 소협!"

"고맙습니다!"

운기조식이 한창이던 무림인들 또한 등을 돌려 목소리를 모았다.

척!

그들의 포권은 언제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다들 밥 안 먹을 거야?"

호텔 식당에서 한 사내가 외쳤다.

이들의 식사를 담당해주고 있었던 모양.

하지만 무림인들은 대답조차 귀찮다는 듯, 운기조식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그깟 칼로리 바는 자네나 들게! 지금은 쓰읍! 그럴 때가 쓰읍···!"

이번에는 내가 운양에게 물었다.

"적강운검··· 께서는 식사 안 하십니까?"

"먼저 드시지요. 저도 심법을 다듬어야겠습니다. 지금은 음식 생각이 나질 않네요."

"······후회하실 텐데?"

"···?"

무림인들을 뒤로하고, 나는 이용수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이곳으로 넘어온 이후 줄곧 배가 고팠으니까.

그렇게···

고작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쓰읍··· 쓰읍··· ?!"

"쓰으으으으으읍?!"

코로 쉴 새 없이 산소를 들이마시던 무림인들은 돌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달콤하면서도, 자극적인, 아니, 냄새만 맡아도 감칠맛이 절로 느껴졌다.

운기조식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잊어버린 채, 무림인들은 콧구멍을 식당에서 새어 나오는 향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하지만 새로우면서도··· 친숙해."

끼이이···

이끌리듯 문을 연 그들은 발견했다.

식탁을 가득 채운 탕수육, 유린기, 깐쇼새우, 누룽지탕과,샤오롱바오는 물론, 당연하게 놓여 있는 수십 그릇의 짜장과 짬뽕, 삼선볶음밥까지.

내가 차이나타운에서 공수해 온 따끈따끈한 코리안 차이니즈 푸드였다.

공교롭게도, 가장 앞장서 있던 사람은 적강운검, 운양이었다.

내가 다시 물어보았다.

"···드실 거죠?"

"아······"

당연하지만, 거절은 없었다.

"와아아아아!"

무림인들이 경공까지 써가며 서로 질세라 자리를 꿰찼고, 나무젓가락을 붓처럼 들어 한국의 춘장을 맛보기 시작했다.

아공간 물류센터의 첫 수출품.

역수출 K-차이니즈 푸드는 이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46. 아포칼립스의 내공심법 (2)

이튿날.

호텔 로비에서 만난 운양은 말했다.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풍족하게 공급된 식량과 식수.

가장 결정적으로는 깨끗한 공기까지.

애당초 상정했던 조건이 송두리째 뒤바뀌었으니까.

"원래는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싸움이었습니다. 독을 정화하느라 계속해서 내공을 소모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휘이이이익!

호텔 곳곳에 몰아치는 바람.

그 신선한 공기가 운양의 머리칼을 휩쓸었다.

그는 놀랍다 못해 한편으론 황당하단 눈치였다.

"지금은 반대로 내공이 쌓이고 있습니다. 모두들 점차 강해지고 있어요."

"그 말씀은···"

"예, 한차례 숨을 고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시간이 많은 건 아니지만요."

벨제부르의 오염된 대기는 지금도 편서풍을 타고 흐르고 있었으니까.

"산둥성의 해안 도시들이 먼저 피해를 입을 겁니다. 늦어도 나흘 내로 벨제부르의 대기가 도달하겠죠. 아시다시피··· 그다음은 한국이 될 거고요."

막대한 피해가 예고된 상황.

벨제부르의 대기가 미치는 영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무너뜨렸으니까.

"베이징 주변 녹림 지대가 완전히 끝장났습니다. 게이트 핵을 부숴 대기를 정화한다 해도··· 피해를 복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어요."

결론은 간단했다.

오염된 대기가 해안 도시에 다다르기 전에 끝내야 한다는 것.

내가 상황을 요약했다.

"늦어도 나흘 내로는 매듭을 지어야겠군요."

"맞습니다. 그동안 최대한 내상을 회복해야겠죠."

기한을 확정한 우리는 재빨리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상대해야 할 벨제부르 차원의 전력에 관한 것.

설명을 위해 운양이 노트를 가져왔다.

그러곤 파브르 곤충 박사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잘 그리잖아?'

슥슥.

빠르게 완성되어가는 그림.

분명 괴물들일 텐데도, 어쩐지 그 외양이 낯설지 않았다.

완성된 곤충도감을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말벌··· 나방··· 이건 개미네요?"

"맞습니다. 맞긴 한데···"

똑같았다.

다만 사이즈가 대륙이었을 뿐.

말벌과 개미는 소 한 마리쯤 되는 크기였고, 나방은 2-3층까지 건물 크기의 괴물이었으며, 하나같이 8위계의 척력을 두르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정작 문제는 이놈들이 아니었다.

"메뚜기랑··· 꽃매미?"

"한국에도 있는 곤충일 줄은 몰랐군요. 맞습니다. 사실 이놈들이 더 큰 문제거든요."

역시나 크기가 컸다.

팔뚝만 한 메뚜기 떼가 가축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물어뜯었고, 방패연 크기의 꽃매미가 새하얀 분진을 뿌려댔다.

크기만 컸지, 척력을 두르지 못한 하위 개체들이었지만···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때려잡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요. 무시하면서 게이트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내공을 두르면 가능할 겁니다.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겠지요."

내공이 회복됐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나름 계산을 하며 하는 말이겠지만···

내게 더 명쾌한 방법이 떠올랐다.

"결국 벌레들이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살충제 뿌립시다. 저한테 많아요."

"예···?"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

.

.

우리는 곧장 실험에 돌입했다.

무림인 한 명이 거대 메뚜기와 꽃매미 한 마리씩을 잡아다 주었고, 밀폐된 컨퍼런스 룸에 팔뚝만 한 놈들을 결박해 두었다.

치이이이!

수십 종의 살충제들.

에프킬라, 홈키파, 바퀴용, 모기용, 허브향, 레몬향까지.

실험실의 연구원처럼 각 제품의 살충력을 꼼꼼하게 비교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같았다.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버둥버둥!

괴롭다는 듯, 꿈틀거리는 여섯 개의 다리.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치이익!

치익!

수십 통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아무리 약에 절여도 벌레들의 목숨을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

뭔가 다른 방법이 절실해질 시점.

"아, 그렇지."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운양에게 주어진 시간을 재확인했다.

"3일 뒤, 아침에 결행. 맞죠?"

"예. 늦어도 그때에는 승부를 봐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곧 돌아올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아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

.

.

아공간에 개방된 능력들.

내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나에게만 허락된 능력은 아니었다.

아공간 실험실.

포션을 만들 때도, 그 밖에 다른 잡다한 버프 포션을 개발할 때도 형수는 곧잘 내 아공간 실험실을 애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료를 직접 가져올 필요 없이 실험실의 홀로그램을 띄우면 되었고, 능력으로 확인한 조합식에 맞게 팍스에게 계량과 혼합을 요청하면 되었으니까.

이참에 나는 형수에게 의뢰할 생각이었다.

벨제부르의 곤충들을 쓸어버릴 초강력 살충제 제작을.

형이 걱정을 앞세웠지만···

"뭐? 살충제? 그거 아기한테 안 좋은 거 아니야?"

"홀로그램이라니까."

다행히 형수의 몸에 부담이 갈 일은 없었다.

남은 문제는 그렇게 완성한 살충제의 효과를 검증하는 문제.

다행히, 이 부분도 해결할 방법이 남아 있었다.

얼마 전, 아공간 5레벨을 달성하며 새로운 능력을 얻었으니까.

---

◈ 아공간 실험실 (3) (New!)

-외부에서 식별된 대상을 홀로그램으로 형상화할 수 있습니다.

-형성된 홀로그램을 대상으로 모의 시뮬레이션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 단, 대상에 대해 확인된 정보만 시뮬레이션에 반영됩니다.

---

이제는 외부의 적들까지 실험실에 띄워놓을 수 있게 됐다.

벨제부르의 곤충들을 띄워놓고, 그 위로 살충제를 뿌려볼 수 있다는 소리.

더욱이 그 모두가 홀로그램으로 구성되는 만큼, 완전히 안전한 환경에서 시뮬레이션을 진행할 수 있었다.

개방에 필요한 비용은 마석 3,000개.

적지 않은 비용이지만··· 항상 그랬듯 아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팍스, 개방해줘."

[알겠습니다.]

[마석 3,000개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18,877개 입니다.]

신형 살충제 개발이라는 목표.

형수는 부담 없이 의뢰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평소에 하던 일인데요, 뭐. 벌레가 좀 징그럽긴 하겠지만··· 어차피 홀로그램이기도 하고. 힐링 포션 만들었을 때만큼 보람도 있을 듯하고."

"뿌리는 건 내가 할게, 여보."

"그럼 더 좋고!"

신혼부부가 나란히 역할을 나눠 가졌다.

당장 오늘부터 메뚜기와 꽃매미에게 살충제를 뿌려가며 실험을 거듭할 터.

주어진 3일 내로 개발이 완료되기를 애타게 바랄 뿐이었다.

***

이제 남은 것은 무림인들의 준비였다.

"자- 따끔해요."

"아앗!"

큰누나가 내상이 심한 이들을 골라 치유했고,

"쓰으읍! 쓰읍!"

남은 이들은 운기조식을 이어 나가며 내력을 쌓아나갔으며,

운양처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따로 모여 실전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호텔의 컨퍼런스룸 몇 개를 연무장으로 개조했고, 수십 명의 무림인이 저마다 연공과 수련을 거듭하며 힘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운양 다음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이가 있었다.

파앙!

경쾌한 타격음.

예고된 공방이었음에도, 주먹을 받은 사내가 십여 미터 뒤로 밀려나 버렸다.

푸쉬이이···

기감으로 둘러싸인 주먹을 거두는 공격자.

그녀는 파축문(破築門)의 권룡(拳龍)이었다.

2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얼굴이었는데, 정작 주먹을 내지를 때만큼은 그런 어리숙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그 출중함이 자자한 모양인지, 그녀는 적강운검 운양 다음 가는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잠깐······?'

불현듯, 기시감이 찾아들었다.

딱 한 명 저런 비슷한 존재를 본 적이 있었으니.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면서 살아왔다.

그래서였다.

이 사자들의 무리에 호랑이 한 마리를 풀어놓은 것은.

곧장 후다닥 아공간에서 김솔을 데려왔다.

"이게 다 뭐야, 사극 찍냐?"

그러곤 운양 앞으로 끌고와 포권으로 그녀를 소개해주었다.

"대협.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얼떨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운양은 한눈에 김솔의 비범함을 알아차렸으니까.

"정겸 소협, 이분은···"

몸을 감싸는 아우라.

아무래도 몸 쓰는 사람들끼리는 그런 게 눈에 보이는 모양이었다.

운동인들의 통뼈에는 올림픽 DNA라도 담겨있는 것일까?

그저 데려다 놓을 뿐인데도···

'···왜 갑자기 싸우는 거지?'

김솔과 권룡 간의 친선 비무가 자연스럽게 성사되었다.

척!

서로 포권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슈우우욱!

타앙!

그렇게 시작된 비무.

몇 차례 탐색전을 위한 공방이 이뤄졌지만···

'아주 특별하진 않네?'

특별한 인상은 없었다.

그저 김솔을 상대로 권룡이 제법 잘 버틴다는 느낌?

하지만, 비무가 이어질수록, 묘한 분위기가 연무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슈우욱!

내질러진 김솔의 일장.

탄성이 새어 나왔다.

"정권공(井拳功)! 정권공이야!"

"그냥 주먹질 아녜요?"

"정겸 소협, 보는 눈이 없으십니다! 저게 어딜 봐서 그냥 주먹입니까?"

20년 내내 맞아봐서일까?

내게는 평범하게 짝이 없는 김솔의 주먹이 무림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쐐애액!

복부를 향해 빠르게 날아드는 권룡의 주먹.

김솔은 그 공세를 그대로 받아들더니, 허리를 축으로 돌려 고스란히 사선 방향으로 흘려버렸다.

운양을 비롯한 무림인들이 이번에도 호들갑을 떨었다.

"팔극권(八極拳)까지···?"

"······?"

"어찌 저 어린 나이에 팔극(八極) 묘리를···!"

대략 10여분쯤 지났을까.

승부를 가리기 위한 비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포권을 주고받으며 비무를 마무리 지었다.

"정겸 소협, 잠시···"

확인해볼 것이 있다며 운양이 헐레벌떡 김솔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김솔의 손목의 맥을 짚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천무지체(天武肢體)···! 세상에 천무지체라니!"

"뭐? 천무지체라고?"

쏟아지는 한자어.

마석의 힘이 통역을 해주고 있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김솔은 무림인들의 환호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는데, 무림인 한 명의 목마를 탄 채 '협은 협이요 권은 권이니' 같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따거!"

무림인들의 연호가 쏟아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림인들의 세계였지만, 운양이 간단히 정리해주었다.

"권룡이 누이분께 기술을 전수하고 싶다는군요. 본인의 수련에도 도움이 되는 모양입니다."

"아···"

서로들 뭔가 통하는 게 생긴 모양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김솔은 우리의 든든한 전력이었고, 훈련을 통해 함께 강해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으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적강운검, 운양.

그는 검강를 두를 수 있는 검의 고수가 아니었던가?

지잉.

즉시 포탈을 열어 아공간에 들어갔다.

그러곤 설치된 포탈을 통해 인천에 있던 백민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유학이다, 민우야."

녀석은 검사 클래스의 각성자였으니까.

***

그렇게, 3일의 시간이 흘렀다.

무림인들은 청명한 지리산의 기운을 통해 내력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작은누나 김솔은 권룡과 어울리며 권법의 묘리를 익혔고, 백민우는 적강운검으로부터 기초적인 수준의 검법을 사사받았다.

쿠구구구···

어쩐지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두 사람.

주먹과 칼끝에서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무형의 기운이 감돌았다.

"드디어 오늘이군요···"

운양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비장했던 3일 전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이전에는 사생결단의 투지가 담겨 있었다면, 이번에는 적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여유로운 자신감, 그리고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타앙!

허름한 호텔의 정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3일간의 폐관, 이제 그 수련의 결과를 확인할 차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가지 더 준비한 것이 있었으니.

부우우웅!

부웅!

열린 문 사이로 메뚜기와 꽃매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펄럭!

무림인들이 너른한 소매에 손을 집어 넣었다.

척!

그렇게 꺼내든 물건은···

친숙한 형태의 스프레이였다.

꾸욱 버튼을 누르자마자,

치이이이이익!

무색의 기체가 공중으로 분사되었다.

퍼드드득!

퍼드득!

까아악!

미친 듯이 거품을 물며 까뒤집어지는 벌레들.

초강력 살충제.

그것의 개발이 완성되었다.

인체에 무해(無害)한 무향(無香)으로.

47. 아포칼립스의 내공심법 (3)

쐐애액!

무림인들이 경공을 펼치며 쏜살같이 나아간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독을 중화하기에 급급했을 테니.

검기를 실을 내력도 마땅치 않은 마당에, 경공에 내공을 소모할 사치를 부릴 순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난 3일, 편히 자고, 좋은 음식을 먹고, 맑은 공기를 마셨다.

'내공심법'을 위한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

-이런 적이 있었던가?

-달라, 뭔가 근본적으로···

무림인들은 술렁였다.

단전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정순한 내력.

혈도의 순환에서 비롯되는 탄탄한 균형감.

불현듯 선물처럼 찾아온 강인한 신체가 그들을 한 가지 생각으로 이끌었다.

-그래. 원래 이랬어야 했어.

한평생 잊고 살아왔다.

만성적인 피로, 소음과 공해에 범벅이 되었던 몸.

그것이 마침내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고마운 일이야.

-큰 은혜를 입었군.

긴 시간은 아니었다.

고작 3일.

정겸이 무림인들의 숨을 되돌려주는 데 걸린 시간이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치익!

-치익!

솓을 뻗는다.

뿜어져 나온 무색무취의 연기가 눈앞의 벌레들을 걷어낸다.

실전되었다던 당문(唐門)의 독공(毒功)처럼.

오염된 대기, 손바닥만한 벌레들, 그 밖의 모든 것들까지.

그동안 모든 문제를 내력으로만 해결하던 무림인들이었지만···

마침내 느껴버렸다.

-편하다.

-편해도 너무 편하다.

문명의 사물이 가져다준 지극한 편의를.

쐐애애액!

그들은 쉼 없이 내달렸다.

벨제부르의 게이트가 자리한 백망산(百望山)을 향해.

동방에서 건너온 협(俠)에 감사를 건네며.

***

펄럭.

펄럭.

한결 홀가분한 무림인들의 도포 자락을 보며, 이용수에게 말했다.

"이제 저희도 가볼까요?"

"예, 정겸씨."

지익!

방독면의 끈을 단단히 조인 뒤, 곧장 헬기에 올랐다.

백망산은 베이징 시내에 인접한, 아름답기로 소문난 명산이었다.

2환 구역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채 10킬로미터가 되지 않는 거리.

저공비행을 통해 무림인들을 지원하며 넘어갈 작정이었다.

투두두두두!

힘껏 회전하는 프로펠러.

두둥실 떠오른 헬기가 로터를 기울이며 속도를 높였다.

슈욱!

슉!

아찔하게 스쳐 지나가는 빌딩 숲.

이용수의 곡예비행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헬기는 빨랐다.

경공을 사용한 무림인들이지만, 금세 앞서가던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출하."

포탈을 생성했고,

콰과과과과과과!

지리산 공기를 쏟아내며 그들의 행보를 응원했다.

후우웅!

화악!

교차로에서 태산처럼 인 와류.

용솟음치는 바람이 매캐한 독연과 땟국물 같은 벌레들을 단번에 씻어냈다.

마라토너들에게 주어진 얼음 생수와도 같았다.

등골이 오싹한 바람을 느끼며, 무림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고맙소!

무림인들이 감사를 전했다.

투두두두두!

벨제부르의 게이트에 다다름에 따라,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상위 개체들이 하나둘 출현했다.

부부웅!

거대 말벌, 개미, 나방까지.

척력을 두른 8위계의 괴물들이었지만, 이쪽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쿠웅!

파아앙!

권룡이 쏘아낸 권기가 말벌을 찢었고,

서걱!

가까스로 검기를 습득한 백민우가 개미들의 몸통을 잘랐다.

그중 압권은 역시 김솔이었다.

스윽.

쭈욱 뒤로 당긴 오른손.

치이이···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이이잉!

이중 삼중으로 방어막을 덧댄 주먹.

그녀의 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슈우웅!

후우욱!

커졌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방어막.

압축된 내부의 공기가 뜨겁게 달궈졌고,

"벌레 무서워!"

권격과 함께,

쩌어어어어어엉!

내력으로 녹여낸 장벽이 파도처럼 쏟아져나갔다.

출렁.

몰아친다.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게.

밀물과 썰물의 항구적인 묘리가 공방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촤하아아아악!

휩쓸리듯 가루처럼 터져나가는 건물 크기의 나방.

권룡이 경악을 내뱉었다.

"배··· 백보신권?(百步神拳)"

사실 무림인들이 어떤 기준으로 초식의 이름을 붙이는 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김솔이 똑같은 주먹을 몇 번을 휘두르더라도, 그들 입에서는 매번 다른 한자어들이 튀어나왔으니까.

어쩌면 이런저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렴 어떠랴?

중요한 것은 요 며칠간 모두가 강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야! 한 대만 더!

-좋아! 조금만 더 밀어붙여!

수십 명의 무림인이 뒤를 이었고,

-주군, 김정겸 대령을 위하여!

카멜롯의 기사들도 손을 보탰다.

투두두두두두!

그들 모두를 견인하는 것은 쾌청한 순풍(順風)이었다.

곳곳에 설치된 포탈이 신선한 공기를 뿜어주고 있었으니.

이용수가 내게 물었다.

"······우리만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는 걸까요?"

"각자 역할이 있는 거니까요."

아니나다를까, 한창 몰아치던 무림인들의 공세는 백망산 초입에 이르러 한 꺼풀 꺾여나가기 시작했다.

부부부웅!

부우웅!

점점 많아지는 벌레들이 그 원인이었다.

'집단지성이라도 있는 건가?'

벨제부르도 위험을 감지했을 터.

도심 전체에 퍼져 있던 곤충들이 게이트 주변으로 빠르게 몰려들었다.

카가가가각!

모든 것을 뜯어먹는 메뚜기들.

파바바박!

분진을 뿌리고, 형형색색의 날개로 시선을 교란하는 꽃매미들.

명산이라 불리던 백망산이지만, 더이상의 초목은 없었다.

죽은 뼈다귀처럼 헐벗은 산맥 위,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만이 하늘을 찢고 있을 뿐.

예고했던 대로, 슬슬 전략을 바꿀 시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모인 것 같네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용수가 헬기의 고도를 높였다.

투두두두두!

손바닥만 하게 작아진 백망산.

곤충들의 날갯짓 소리가 공명하며 들려왔고,

헬기는 그 위로 자리를 잡았다.

지잉.

주변에 형성된 여덟 개의 포탈.

출하 품목은 형수가 개발한 살충제였다.

무림인들에게는 스프레이 캔으로 전달된 물건.

하지만 가장 먼저 개발이 완료된 형태는 다름 아닌 '액상'이었다.

지금은 실험실 능력에 의해 수백 리터까지 중첩된 물건.

투두두두!

즉시 화재 진압에 나섰다.

목표는 주제도 모르고 들끓는 백망산의 벌레들.

그 위로,

"출하."

액상 형태의 살충제를 들이부었다.

촤아아아아악!

갑작스레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결.

부우우우웅!?

벨제부르의 벌레들의 날갯짓에 당황이 묻어났다.

시원하게 적셔진 벌레들은···

푸드드득!

푸드득!

배를 뒤집은 채 힘껏 버둥거리다가, 이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우리들의 공기를 빼앗아 간 녀석들.

놈들의 공기 또한 거두어 감이 마땅했다.

부부부우우웅!

놈들은 재빨랐다.

쏟아지는 살충제를 피하기 위해, 수천 마리가 하늘로 치솟았지만···

"해로운 곤충이다."

콰과과과과과!

내 손가락질 한 번으로 궤도를 변경한 포탈이 놈들을 촉촉하게 적셔버렸다.

후두둑!

후두두두두두둑!

비처럼 쏟아지는 백망산의 낙엽.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소방 헬기가 바다와 산을 왕복해야 하는 것과 달리, 내 포탈은 가만히 댐을 열어 놓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세상에···! 완전히 뚫려버렸어!

-이 지긋지긋한 벌레 놈들! 꼴 좋다!

 물청소가 마무리되자 무림인들이 엄지를 세웠다.

그제야 나는 한가로이 읊조릴 수 있었다.

"이제 텅텅 비었네."

지금이야말로 그간의 먼지를 털어낼 때였다.

바로 게이트 핵을 파괴함으로써.

쿠구구구···

백망산 정상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게이트.

그 각각에 두 개의 게이트 핵이 벌집처럼 매달려 있었다.

끗!

끗끗!

기괴한 눈동자를 까뒤집고, 혓바닥을 장난스레 내미는 녀석들.

예고된 죽음에도,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놈들의 목을 치는 것.

그것은 무림인들의 지도자, 적강운검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슈욱!

그가 검을 치켜들었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세워진 검.

그 새하얀 검 면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적강(謫降).

신선이 땅으로 내려오는 사건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그 몽상 같은 존재가 현실 속 미천한 존재로 추락할 때 생기는 충격을 담고 있었다.

"흡!"

초식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내려치기다.

하지만 그 안에는 태산 같은 구름이 내포되어 있었으니.

쿠구구구···

횟 빛으로 물든 베이징의 하늘.

그 곳곳에 퍼진 먹구름이 운양의 검에 모여들었다.

한낱 구름에 불과한 것.

무게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콰과과과과과!

그것이 태산같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운양의 모든 내력을 쏟아부은 검강.

끄읏!?

그 힘이 구름처럼 게이트 핵을 덮쳤고,

카가가가가각!

그대로 찢어버렸다.

까아아아악!

게이트 핵의 비명.

놈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게이트에서 추락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

아래에 놓인 게이트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끝났어! 끝났다고!"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끝이다.

이 지긋지긋한 대기를 베이징의 하늘에서 걷어낼 테니.

중국은 무너졌다.

하지만,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러한 경이가 무림인들을 휘감고 있었다.

단,

-그런데···

이 말이 들려오기 전에는.

-왜 독이 사라지지 않는 거지?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서 있던 두 개의 게이트.

운양의 공격이 태산과도 같았던 만큼, 매달려 있던 두 개의 핵을 구분할 것 없이 덮쳤더랬다.

하지만···

"남아 있어···?"

우측에 매달린 게이트 핵.

무언가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포탈로부터 빠져나온 그것은 까만 솜털로 뒤덮여 있었다.

이윽고,

브브브브···

그 무언가가 게이트를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은 다리였다.

솜털로 뒤덮인 곤충의 다리.

그다음은 촉수처럼 뻗은 녀석의 입이었고,

나머지는···

"······저게 뭐야?"

눈이었다.

수천, 수만 개의 눈.

비단결 같은 청록색이 번들거렸다.

나는 알아차렸다.

그것이 거대한 파리의 눈이라는 걸.

"우읍!"

역겨운 냄새가 방독면을 타고 들어왔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겨움.

놈의 온몸은 곳곳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하지만, 놈의 끔찍함은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상공회의소에 혼나겠네.

-이제 완전 제명되는 거 아냐?

-그럼 어쩌라구 이러다간 쪽박차게 생겼는데.

-맛있는 냄새 난다.

수만 개의 눈.

거기에는 제각기 혼잡스러운 '의식'이 담겨 있었으니까.

"출하."

곧장 놈을 향해 살충제를 쏟아부었지만,

-아악!

-야, 눈 감아!

-지랄맞네 진짜.

놈들의 기름 막처럼 얇은 눈꺼풀이 살충제를 고스란히 흘려버렸다.

"······으으."

"히익!"

무림인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모습.

하늘의 구름을 일으키던 운양마저도, 지금만큼은 넋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용기를 냈다.

파축문의 권룡.

그녀가 일장을 내질러 권기를 쏘아 보냈으니까.

그렇게 날아든 공격은···

콰앙!

파리의 눈 중앙을 강타했다.

하지만 놈들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았다.

-뭐야.

-누가 맞았냐?

-죽었대?

-피했어야지.

쿠구구구··· 

거대한 몸이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파드드드드득!

날개를 펼친 놈이 소리를 내며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벨제부르의 게이트 핵을 품에 넣은 채.

-간다.

-게이트는 어쩌고?

-나중에 다시 활성화해야지.

-이제 어디로 가지?

귀청에 꽂히는 수만 개의 음성.

그야말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이용수가 말했다.

"정겸씨 이건···"

"예, 아마도···"

익숙한 패턴이었다.

저 거대 파리 또한 게이트 핵을 들고 자리를 벗어날 심산이었다.

놓칠 수 없었다.

놈이 그대로 숨어버린다면, 벨제부르의 대기가 한반도를 덮치게 될 테니까.

"출하!"

그야말로 쏟아부었다.

수십 자루의 성창, 불붙은 볼링공, 헬파이어 미사일까지.

마법 스크롤 수십 장을 찢어 '아이스 스피어'를 곁들였다.

무림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까스로 공포를 이겨낸 그들 또한 온갖 종류의 검기와 권기, 장법을 날려 보냈다.

콰아아앙!

타앙!

쩌어엉!

강한 충격이 거대한 파리를 연달아 타격했지만···

-햐, 엄청 죽어 나가네.

-이 정도는 진짜 오랜만인데?

-당분간은 구더기 기르느라 고생이겠구만.

놈의 생명은 하나가 아니었다.

죽여도 죽여도 개중 하나의 목숨을 끊을 뿐.

거대한 파리의 움직임은 멈출 수 없었다.

브브브브···

놈의 소름 돋는 날갯짓.

놈은 죽어도 죽지 않는 '집단'의 힘을 앞세운 채, 유유히 백망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안돼.'

잡아야 한다.

그 필사적인 생각에,

"출하."

한 가지 사물을 출하했다.

계속 염두에는 두고 있었다.

중국이 벌레들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하지만, 너무나 사소하게 짝이 없는 물건인 탓에 미처 꺼내지 못했다.

번쩍.

회색으로 물든 도시.

작게 점멸하는 푸른 빛이 떨어졌다.

별것 아닌 은은한 빛이었음에도, 수만 개의 눈은 환호했다.

-와, 이거 뭐야?

-예쁜데?

-어디서 샀어?

-나한테 팔래?

놈들의 탐욕에 답하려는 것일까?

팍스가 메시지를 띄워 보냈다.

[전기 해충 퇴치기 특대형 IA-ic200 +1, 가격은 59,000원입니다.]

슈우우···

하늘을 타고 내려오는 것은 거대한 크기의 포충기였다.

[도발] 효과가 붙어있는 레어 아이템.

카멜롯 성에서 뱀파이어를 상대했을 당시, 파워뱅크 배터리를 연결하고, 수십 개를 이어 붙여 거대한 전기 담장을 만들었더랬다.

미약하게 짝이 없는 물건일지 모른다.

하지만 수만 개의 눈동자는 그 푸른 불빛에 저마다 매료되었다.

-더 줘!

-비켜봐, 안 보이잖아!

-더 없나? 몇 개나 있대?

-꺼져!

푸드드득!

놈이 포충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슈우우···

슈우우···

놈의 좌우, 사방으로 쏟아지는 푸른 불빛.

곳곳에 놓인 욕망의 이정표가 수만 개의 눈을 현혹했다.

-이쪽이라고!

-좀 있어 봐, 다 왔는데.

-아 병신 새끼들이 진짜!

-내가 저거 꼭 산다.

우왕좌왕, 파르르 떨리는 날개.

놈들은 더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밖으로 도망치기는커녕.

반면,

콰아아앙!

콰앙!

우리의 공격은 재개됐다.

무림인들이 경공을 발휘하며 눈알 하나하나를 타격했고, 나 또한 을 통해 갖가지 사물들을 사출했다.

좌르르르르르륵!

액화 석유 가스가 포함된 살충제 스프레이 수천 개를 쏟아부었고,

뻐어어어엉!

그 위로 헬파이어 미사일을 쏘아 보냈다.

치이이이···

강한 충격과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수만 개로 분리된 목숨.

그 숨통을 끊기 위해, 나 또한 수만 번의 공격을 휘둘렀다.

더디지만 확실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그 꾸준한 행보가 거대한 파리의 숨통을 조여나갔다.

그렇게,

-다들 어디 갔냐?

-내 옆에는 다 죽었는데?

차츰 놈들의 목소리도 사그라들기 시작했으며,

푸욱!

내 노력 또한 결실을 맞이했다.

깊숙이 찔러낸 성창.

파리의 새카만 손끝에서, 

촤학!

황금빛 노른자가 줄줄 새어 나왔다.

띠링!

[차원 계좌가 소유 이전되었습니다.]

[기존 예금주, ???, 잔액 : 48,881개]

[이미 차원 계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액이 합산됩니다.]

게이트 핵을 부쉈다는 증거.

[남은 마석은 74,615개 입니다.]

그리고,

화르르르륵!

마지막 하나 남은 파리의 눈알을 불살랐을 때.

띠링!

[차원 계좌가 소유 이전되었습니다.]

[기존 예금주, 파리 대왕-No. 15119, 잔액 : 1개]

[이미 차원 계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액이 합산됩니다.]

줄곧 귀찮게 떠오르던 알림을 마침내 잠재울 수 있었다.

[남은 마석은 74,616개 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스으으으으으으으읍!

벨제부르의 게이트가 거대한 들숨을 일으켰다.

휘이이이이이!

맹렬하게 불어닥치는 바람.

하지만 어째서인지, 우리 모두는 그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마치 평행우주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슈우우우우우우욱-!

사라진다.

베이징을 메우던 잿빛 하늘이.

그렇게 꾸역꾸역 벨제부르의 독연을 머금은 게이트는···

꽈아아아아앙!

여지없이 폭발하며, 빛으로 이루어진 가루를 휘날렸다.

놈들의 문을 닫는 것은 바람이었다.

편서풍을 거슬러, 동쪽으로부터 불어온 바람.

그 바람이 벨제부르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너머에 있는 문을 아주아주 세게 닫아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텅 빈 하늘이었다.

휘이이······

티 없이 맑은 하늘.

그것뿐이었다.

48. 고객 모집 (1)

어제만 해도 내내 맑게 개어 있던 베이징의 하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중서부 사막의 모래 먼지로 인해 베이징의 도심은 단 하루만에 매캐한 공기로 둘러싸였다.

"뭐, 이 정도면 양반이죠."

운양은 내가 출하해준 KF-94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전투의 흔적이 남은 황량한 백망산을 오르고 있었다.

벨제부르의 대기를 걷어낸 베이징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무너진 건물, 길가에 널린 뼈다귀, 오염된 지하수와 산림을 보고 있자면 이게 무슨 평화냐 싶겠지만, 그 끔찍한 벌레들을 쓸어낸 것만으로도 이들로서는 감동스런 일이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군요."

이번에는 꽤 긴 호흡을 가져가야 한다.

중국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지만, 베이징만큼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니까.

"거기 좀 더 쓸어 봐!"

"먼지 안 일게 조심하고!"

무림인들이다.

그들은 도시의 청소부를 자처하며 죽은 벌레들의 사체를 한곳으로 몰아넣었고, 또 한편으로는 도시의 장의사를 자처하며 베이징 시민들의 유골을 약속된 장소로 운구했다.

한차례 불길이 피어오를 것이다.

희고 매캐한 연기가 구름처럼 베이징을 덮을 것이다.

죽음을 애도하는 새하얀 천이 되어.

운양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어쩌면 그것이 이 도시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행사일지도 모르니.

"아예 버려지는 땅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사람들도 모두 죽어버린 데다가···"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선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하지만 베이징의 시민들은 몰살당했고, 세상이 멸망한 마당에 다른 지역의 중국인들이 손을 거들어줄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중국에서 인력난이라니, 과연 세상은 뒤집혀 있었다.

"그래도, 종종 들릴게요."

그 말과 함께, 우리는 고개를 돌렸다.

푸른색의 긴 타원.

벨제부르의 게이트를 치운 뒤, 베이징의 2환 중심부에 아공간에 연결된 포탈을 설치해둔 터였으니까.

완전히 무너져버린 베이징이지만, 그래도 운양을 비롯한 무림인들은 이곳에 남는다.

포탈을 설치한 것은 운양의 부탁이기도 했다.

"반드시, 반드시 도우러 가겠습니다."

운양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벨제부르와의 결전을 앞두고, 내게 은혜를 갚겠노라 약속했던 그였다.

당장의 큰 위협은 없지만, 그를 비롯한 무림인들을 전력으로 삼는 것은 실로 든든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가 준비한 보답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안 됩니다. 대협!"

무림인들이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운양의 중대 발표 때문이었다.

"빌려주는 것뿐입니다. 완전히 내어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호들갑입니까?"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 모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의 무술인들이었다.

당연히 무공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무공서는 '무림' 계열의 각성자들이 강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루트였다.

문제는 바로 그 역사와 전통이었다.

대부분의 무공서는 각 무파의 상징성과 내밀함을 담은 독문무공(獨門武功)이었고, 이는 같은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공유하지 않을 만큼 배타적인 물건이었다.

운양이 무림인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멸망이 벌어지기 전엔 그랬지요. 산세에 숨어 고고하게 옛 선조들의 유지를 떠받들 때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수백,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죽음 앞에서 이깟 비급(祕笈)이 얼마나 무게를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운양은 컨퍼런스룸 테이블의 한쪽에 앉은 김솔과 민우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무공이 우리 무림인들만의 것이 아님은 저들을 통해 확인됐습니다. 우리중 그 누가 김 소저의 재능을 부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백 소협 또한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무림'으로의 각성.

일견 중국인들만을 위한 개념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사실, 신체 능력 각성자들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거대한 줄기였다.

대표적으로, 검사 클래스를 각성한 백민우는 자신의 스킬 트리에 운양으로부터 사사받은 검법을 가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전보다 검의 위력이 한결 강해진 것을 떠올려본다면, 그 효과 또한 괄목할만했다.

"끄응···"

"아무리 그래도, 비급서를···"

힘이 잔뜩 실린 운양의 말에, 무림인들이 저마다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편···

'···가시방석이네 진짜.'

나 또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부탁한 적도 없는 일이다.

대뜸 선물을 주겠다는 이와, 그것을 만류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버린 처지였으니.

운양은 단호한 결정을 고수하면서도 정작 나에게만큼은 미안한 눈치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깬 것은 무림인들의 2인자, 권룡이었다.

타앙!

테이블이 부서질 듯, 그녀가 책 한 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무림인들이 너나할 것 없이 경악을 내뱉었다.

"파··· 파축신권(破築神拳)?"

"권룡! 지금 제정신이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히려 운양이 적강검법(謫降劍法)을 넘기겠다 선언했을 때보다 배로는 격한 반응이었다.

무림인들 사이에서, 파축신권의 비급이 어떤 위용을 가지고 있는지 절로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반면, 권룡의 말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당신들은 은혜도 모릅니까? 지금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지 못할 지경입니다."

"아니, 은혜를 모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 항변의 목소리를 냈지만,

"그럼 당신이 김 소협께 뭘 해줄 수 있는데요? 대체 무엇으로 도움을 갚겠단 말입니까?"

"······"

금세 입을 다물었고, 권룡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김 소협이 이곳에 당도했을 때, 맑은 공기를 내어주며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했습니까? 갓 만든 음식과 깨끗한 식수를 대접해주며 돈이라도 요구했나요? 하물며, 김 소협이 없었더라면 이중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잖아?'

부동자세로 그랬다.

차마 이 상황에 고개를 끄덕일 순 없었으니.

권룡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여러분 모두 김 소협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대인처럼 베풀어야 진정 커진다는 것을요."

하기야 그렇다.

무엇이든, 그저 움켜쥐기만 하면 악성 재고가 된다.

빼내고, 빼내어, 몇 트럭은 실어 보내야 비로소 새 물건이 입고되는 법이니까.

그녀의 말이 통한 것일까?

툭.

투둑.

파축신권 위로, 몇 권, 아니 십수 권의 무공서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

만약 복사가 아니었다면 나도 차마 받아가지는 못했으리라.

"으······"

그럼에도 아직 비급을 내어놓지 못하는 몇 사람이 눈에 띄었지만, 그렇다고 강요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척!

그저, 모두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보응의 취지라고는 하지만, 내게도 도움이 되는 물건이니.

한편, 이 수십 권에 달하는 비급서를 넣을 방법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

◈ 카테고리 상품 등록(2)

-물류센터에 포함될 새 카테고리를 신설할 수 있습니다. (최대 2회)

(단, 카테고리 신설에 비용이 소모됩니다.)

---

아직 내게는 카테고리를 신설할 능력이 남아 있었으니.

그 이름은···

"팍스, '무공서' 카테고리를 신설해줘."

[카테고리 신설에는 비용으로 마석 5,000개가 소모됩니다.]

[카테고리 신설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진행해."

[알겠습니다.]

[마석 5,000개 받았습니다.]

[카테고리 신설 진행 중···]

[남은 마석은 68,616개입니다.]

"여기 놓여 있는 무공서들 모두 아공간에 넣어주고."

['무공서'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품목입니다.]

[등록 비용 책정 중···]

띠링!

[등록에 필요한 총비용은 마석 4,113개입니다.]

[비용 전달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64,503개입니다.]

[등록을 진행합니다···]

[무공비급, '칠성수(七星手)'를 얻었습니다.]

[무공비급, '파축신권(破築神拳)'을 얻었습니다.]

[무공비급, '나한보(羅漢步)'를 얻었습니다.]

[무공비급, '금정대구식(金頂大九式)'을 얻었습니다.]

[무공비급, '적강검법(謫降劍法)'을 얻었습니다.]

[무공비급, '봉신곤(封神棍)'을···

수십 권에 달하는 무공비급이 아공간에 쓸려 들어왔다.

비급서들의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당장 김솔과 백민우를 성장시킬 수도 있었고, 그밖에 합참이나 다른 우군들의 전력을 한층 더 키워줄 수 있었으니까.

또한 듣기로는, 다른 무공서들은 몰라도 보법이나 경공과 관련한 능력들은 신체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도 부분적이나마 수련이 가능하다고 했다.

'···꺼윽.'

덕분에 배불리 먹은 참이었지만,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아공간 물류센터다.

먹기만 하고 싸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었으니.

커다란 컨퍼런스룸.

가운데 테이블을 둔 채, 빙 둘러앉은 무림인들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내가 먹은 무공서들을 돌려주었다.

투두두두두둑!

그들이 준 수십 권을 한데 묶어.

이른바, 무공전집(武功全集)이었다.

툭!

툭!

테이블 위로 무공서로 쌓인 탑이 늘어날 때마다, 이곳 회의실에 모인 무림인들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 권.

딱 한 권을 내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십 권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물었다.

"여러분들은 제게 무공서를 내주었죠. 하지만 그 결과, 더 약해졌습니까?"

대답할 필요조차 없었다.

물론 모두 활용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무공서는 무림인들에게 있어 전력 그 자체였으니.

그 모두가 수십 배로 뻥튀기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정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우리 중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강해지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적막에 휩싸인 회의실.

나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이 모든 상황을 사주하고 있는 건 다차원 상공회의소입니다. 놈들이 타차원의 세력들을 지구로 끌어들이고 있고, 이 모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아···"

무림인들이 침음했다.

그들 또한 '입찰 경쟁'이니, '사업권'이니 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테니.

"이 상황에서 진짜 우리한테 중요한 게 뭘까요? 무공? 레벨 업? 더 강력한 무기?"

모두 이미 내게 주어진 것이었다.

식량, 생필품, 강화된 무기, 포션, 마법, 심지어는 무공서까지.

멸망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서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사람이에요."

"······?"

무림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포탈 설치 능력까지 있다.

지금까지 모은 물건들을 세계 곳곳에 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었다.

'고객이 없어.'

팍스였다면 여기서 띠링! 고객은 등록되지 않은 상품입니다! 따위의 농담을 주억거렸을지 모른다.

고객.

물류센터와 물건을 주고받고, 어엿한 성장을 이뤄 상공회의소와의 전쟁에 참여해줄 전력.

바로 그 존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사람. 그것도 아주 많은 수의 사람이 필요해요. 우리만큼이나 강해질 수 있는 사람들 말이죠."

우리가 할 일은 간단했다.

첫째, 최대한 많은 수의 사람을 살리는 것.

둘째, 그렇게 살린 사람들을 성장시키고 무장시키는 것.

셋째, 그 모두를 모아 상공회의소의 뚝배기를 박살 내는 것.

그것이 물류센터가 가지고 가야 할 거대한 '사업 목표'였다.

좌악!

양 손을 펼쳐 든, 나는 이 장엄한 연설의 매듭을 지어나갔다.

"그러니 우리끼리 아웅다웅할 시간이 없습니다. 간이건 쓸개건 아낌없이 서로 나눠야 해요. 그걸 위해서 제가···"

"간과 쓸개를 무한히 복사해드리겠습니다."

"······?"

마무리 멘트가 좀 엉켰지만, 아무튼 그랬다.

***

무림인들과의 대화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흉흉한 주변국의 상황을 유성철과 논의해볼 필요가 있었으니.

그렇게 우선 인천에 있는 포탈로 되돌아갈 채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민우가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위계가 생겼다고?"

"아니, 아직 생긴 게 아니라··· 마석 천 개 내면 생긴다고 나왔다고."

를 통해 얻은 위계였다.

하지만 민우는 레벨 10을 달성한 순간, 마석을 대가로 8위계와 차원 계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노라 전했다.

더욱이, 위계 없이는 그 이상으로 레벨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누나는?"

"나는 그런 말 없던데?"

한편 이미 를 통해 위계를 얻은 바 있던 김솔에게는 그런 메시지가 뜬 바가 없었고, 그저 무던하게 성장하며 자그마치 13레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더 있었다.

"그럼 레벨을 올릴수록 위계도 계속 올라가겠네?"

"아마 그러겠지?"

"그럼 난 망했네?"

"······?"

김솔이 13레벨, 민우가 10레벨.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5레벨에 허덕이고 있었다.

레벨업을 하는 족족 뻥튀가 되는 비용 탓이다.

이번만 하더라도, 레벨 6달성을 위해 자그마치 10만 개의 마석이 요구되었으니까.

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유리 몸으로, 다가올 멸망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때, 적강운검 운양이 우리에게도 다가왔다.

이미 무림인들과는 작별 인사를 마친 터였지만, 그는 따로 감사와 인사를 전해왔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앞으로 무림인들의 행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어느 정도 이곳 베이징의 피해를 수습해야겠죠. 일이 얼추 마무리된 다음에는 영약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영약이요?"

"예, 운남 쪽에 영약을 만들 수 있는 각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나눠주신 무공서도 습득하고, 수련도 이어 나가겠지만, 영약이 있다면 놓칠 수 없죠."

"하··· 한입만···"

나도 모르게 게걸스런 식욕이 먼저 튀어 나갔지만, 운양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잡아주었다.

"정겸 소협을 잊을 리 있겠습니까? 영약이 복사가 될 텐데요?"

"역시 그렇죠?"

포탈에서 비비탄처럼 뿜어져 나올 환단을 떠올리며, 우리는 함께 웃음을 나눴다.

하지만 직후, 웃음을 거둔 운양이 내게 덧붙였다.

"소협, 아까 말한 상공회의소 말입니다만···"

"예, 왜 그러시죠?"

"정부 소식통을 통해서 듣기론, 일본에 곧 상공회의소의 지부가 설치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부요?"

입찰경쟁 이후.

상공회의소의 침략이 서서히 발전을 거듭하는 모양이었다.

운양이 덧붙였다.

"예. 저희도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혹 일본에 가게 되신다면 주의하셨으면 해서요."

"알겠습니다. 꼭 주의하도록 하죠."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기별 주시고요. 게이트 주변에는 항시 연락책을 놓아둘 테니까요."

그는 지원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나서겠다는 말을 한 번 더 강조했다.

"고맙습니다. 대협. 그럼···"

"예, 무운을 빕니다."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운양은 저벅저벅 호텔을 향해 돌아갔다.

하지만 정작 나는 상공회의소의 '지부'라는 말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새끼들 봐라?'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겠단 심산이었다.

일본에서 시작해 동아시아의 상권을 얻어내겠다는 심산.

감히 이 팍스 풀필먼트 센터의 영역을 노리는 것을 보아 간이 단단히도 배 밖에 나온 모양이었다.

한 가지 추가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부.

그것은 관공서의 상공회의소 버전이 아닐까?

그렇담 그 안에 저들끼리 쓰는 서류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존재 등록 신청서···도 있지 않을까? 상위 버전의?"

레벨업을 통해 위계를 얻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레벨 10, 레벨 20, 그리고 앞으로 그 이후까지.

그 많은 돈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군침이 도네."

놈들의 지부를 털어 서류를 얻어낼 작정이었다.

49. 고객 모집 (2)-여기까지 무료회차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급박하게 움직이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 있었다.

국통사 위병소 한쪽에 놓여있는 모텔··· 아니, 성.

강화석 낳는 거위인 카멜롯이 거듭해서 결실을 내어놓고 있었으니까.

땡그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에 다가간 나는, 그야말로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이게 다 몇 개야?"

말 그대로, '쌓여'있다.

그것도 수북하게.

가뭄에 콩 나듯 수급되던 강화석이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군!"

나를 본 카멜롯의 네 기사가 반색하며 뛰쳐나왔다.

물론, 간지러움을 겪고 싶지는 않은지 문턱에 서서 나를 환대했다.

네 명으로까지 늘어난 기사, 거기에 '재생' 능력을 갖춘 퍼시발의 능력이 빛을 발한 것.

그 공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엔장··· 너희들···!"

사실 그랬다.

란슬롯, 베디비어, 퍼시발, 모드레드까지.

단 네 명에 불과한 기사들이 텅 빈 카멜롯을 지켰다.

그 모습이 못내 허전해보였던 것이 하루이틀이었던가?

다른 사심이 있어서 품는 감상이 전혀 아니었다.

쿵!

나는 카멜롯 앞에 섰다.

그러곤 오래된 숙원을 내비쳤다.

"기사단을··· 재건할 때가 되었지."

"주군···!"

감동에 휩싸인 란슬롯이 입을 가렸고,

휘이익!

휘익!

여덟 마리의 망령들이 휘파람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망령들의 탐색능력이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모드레드에게 사용했던 '유체화' 강화석.

지금은 그게 몇 개씩이나 더 생긴 참이니.

이참에 아예 기사단 내의 유령 기사들을 만들어 볼 작정이었다.

"드디어 모두가 모이겠군요!"

란슬롯이 반색했다.

항상 서로 돈독한 모습을 보여주던 카멜롯의 기사들이었으니까.

"그웨인은 역시 화염이죠. 라이오넬 같은 경우엔···"

이번에도 란슬롯의 조언에 따라 녀석들에게 가장 잘 어울릴만한 강화석을 골랐고, 강화석과 마석을 소비해 녀석들을 기사로 서임했다.

차르르륵!

한 명을 서임하는 데 드는 비용은 강화석 한 개와 마석 500개.

도합 4천 개의 거금이었지만, 해골 기사들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철컥! 덜그럭!

공중에서 빚어지는 갑옷.

그웨인, 라이오넬, 갤러해드, 케이, 보호드, 헥터, 트리스탄, 캐러독까지.

"존명!"

"존명!"

형형색색의 빛을 뽐내던 여덟 명의 기사가 내 앞에 부복했고,

긁적긁적!

너나 할 것 없이 제 몸을 벅벅 긁어댔다.

이러나저러나, 해골 기사들은 영락없이 기쁜 기색이었다.

"단장!"

"어서 와라, 어서 와!"

"이게 얼마만입니까!"

웃을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해골들이다.

하지만 자연스레 둥글게 모이는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가족들과의 재회를 이뤘던 때가 절로 떠올랐다.

어쩌면 카멜롯 성의 망령들 모두가 이때만을 기다려 왔을지도.

이 아공간 속에, 또 하나의 '가족'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하물며, 그냥 가족도 아니었다.

녀석들에게는 따뜻한 '집'이 있었으니까.

나는 기사들의 재회를 축하하고, 독려했다.

"자자, 내 눈치 볼 것 없어. 얼른 들어가서 서로 인사들 나눠."

"괜찮습니다. 주군!"

"이 모두가 주군의 덕택인데 어찌···"

내가 한 번 더 독려했다.

"에헤이, 괜찮으니 빨리 들어가라니까?"

"······?"

척!

척!

직장 상사의 퇴근 독촉을 받은 것처럼, 기사들은 하나둘 내게 경례를 붙인 뒤 카멜롯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카멜롯의 그늘로부터, 기사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담한 카멜롯도 나쁘지 않군요!"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라고! 허허."

"다리 좀 치워봐, 하하!"

깡깡깡!

갑옷 소리를 울리며, 왁자지껄한 해후를 나누는 그들.

그런 그들을 감싼 '집', 카멜롯 또한 기쁜 기색이었다.

우우웅!

우웅!

이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힘차게 돌아가는 카멜롯 성.

"허허. 녀석들, 그렇게들 좋을까."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

인천을 경유한 우리는 헬기를 타고 다시 합참본부가 있는 용산으로 돌아왔다.

베이징의 오염된 대기를 걷어냈다지만, 아직 일본의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유성철로부터 자세한 경황을 들었을 때, 이건 단순한 공해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당함을 느낀 내가 유성철에게 되물었다.

"···선전포고를 했다고요?"

"예, 후쿠오카가 부산에게, 지역 대 지역으로 통첩했다더군요. 어제 상공회의소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고 부산 대표가 전해왔습니다."

일전의 입찰 경쟁과 비슷한 형태.

하지만, 지대한 차이가 있었다.

"후쿠오카라면··· 인간들이잖아요?"

타차원의 괴물들이 아닌 인간들.

그들이 상공회의소의 전쟁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말인데··· 일본의 상황이 지금 영 좋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좋지 않았는데 이제 제대로 엉망이 됐죠."

당초 합참은 일본 정부와 핫라인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 일본의 기존 행정부가 무너졌으며, 그 자리를 다른 세력이 메꾸게 되었다고.

"일본 내 극우 세력들이 유신각성회(維新覺醒會)라는 이름으로 통합됐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아예 타차원과 손을 잡은 게 문제죠.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 각성 능력과 외부 차원의 존재들을 숭상하는 게 특징입니다."

유성철이 답답하다는 듯, 덧붙였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제 일본과의 핫라인이 소실됐거든요. 아무튼 곧 놈들이 부산을 향해 밀고 들어올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통첩에는 7일 뒤로 명시되어 있었다는군요. 그게 어제 일이니··· 이제 6일 정도 시간이 남았네요."

유성철은 멋쩍다는 듯, 목소리를 졸이며 말했다.

"저희는 몇 시간 내로 출발할 생각인데··· 혹시 김 대령께도 지원을 요청드릴 수 있을까요? 이제 막 중국에 다녀오신 마당에 차마 할 말은 못 되지만···"

"그거라면 걱정 마시죠. 저도 일본에는 볼 일이 있어서. 대신에···"

"대신에요?"

"내려가는 길에 잠깐 들릴 곳이 있긴 하겠네요."

***

몇 시간 뒤, 우리는 부산 대표와 접선할 수 있었다.

휘이이이이···

거친 바다바람이 쓸려오는 부산.

이들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중소 규모의 호텔에 거점을 잡고 있었다.

숙소와 회의실, 식당까지 구비된 공간이다 보니 멸망에 대처하는 세력들에게는 이런 호텔만큼 유용한 장소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떡하죠! 어떡해!"

부산대표는 서른을 넘겼을까 말까 한 젊은 여성이었는데, 얼핏 보기엔 진중한 모습이면서도 가끔 급발진을 하며 걱정을 쏟아내는 독특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검은 머리칼을 치렁거리며, 유성철의 어깨를 흔들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시간이 너무 없는데!"

"진정하세요. 박 대표. 우선, 그 '선전포고'라는 걸 공유해줄 수 있을까요."

"아참 그렇죠! 내 정신 좀 봐!"

한 지역을 대표하는 정도라면 제법 강자란 소리일 터.

하지만 대표 직함이 무색하게 그녀는 허둥대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가 우리에게 상공회의소의 메시지를 공유해주었다.

---

다차원 상공회의소에서 알려드립니다.

귀 '부산' 지역에 대한 '후쿠오카' 지역으로부터의 선전포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원활한 분쟁 진행을 위해 상공회의소의 중개 내용을 안내해드립니다.

[장소 및 일시]

부산, 후쿠오카

7일 뒤.

※ 사전 충돌을 일으킬 경우 실격 사유로 간주합니다.

[승리 조건]

지역 대표 사살.

[보상]

패전 지역 사업권 획득.

게이트 포탈 설치 지원.

※ 설치된 게이트 포탈의 수익 중 20퍼센트는 중개 수수료 및 설치 비용으로 차감됩니다. 

---

"적들에 대한 정보는요?"

"아, 그것도 같이 왔어요."

[후쿠오카 지역은 지구 차원에서 진행된 다차원 우주 화합의 상징입니다. 샤리트 차원의 선진적인 능력을 받아들인 후쿠오카 지역은 수중에서도 전투가 가능한 어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아직 충분한 사업 경험이 쌓이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탁월한 협업 능력으로 일본 전체의 사업권을 독식한 그들의 귀추가 주목되는 바입니다.]

"어인···?"

물고기와 인간, 두 종족이 뒤섞인 모습.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1군단에서 반 고블린으로 변해버린 존재들을 한차례 목도한 바 있었으니.

하지만 놈들이 불완전한 형태의 반 종족이었다면, 후쿠오카의 전력들은 완전한 융화를 이룬 모양이었다.

부산 대표 박서윤은 여전히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인들은 모조리 위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부산에서는 저 포함해서 열 명이 고작인데···"

그럴 만했다.

10레벨까지는 그렇다 쳐도, 위계에 필요한 마석 1,000개는 일반적인 수준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거액이니까.

박서윤의 걱정은 계속됐다.

"본부장님! 대전이랑 광주 쪽에서는 응답이 왔을까요?"

모두 입찰 경쟁에서 승리한 지역이다.

합참 본부는 이들 모두와 연락망을 구성하고 있었다.

더더욱 이번에는 부산에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이들 모두에게 연락을 돌린 모양이었다.

유성철이 대답했다.

"오고는 있는데··· 며칠 걸릴 겁니다. 공중 전력이 부족해서 육로로 올 수밖에 없거든요. 위계 보유자는 각각 다섯 명씩 있다고 하더군요."

"아아! 어떡하지!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사람도 부족하고요!"

박서윤이 또 한 번 자지러졌다.

하지만 정작 나나 유성철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속을 긁은 것인지, 그녀가 버럭 성을 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태평하신 거예요!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300만 부산인들이 인어들한테 다 잡아먹히게 생겼···!"

제법 상상력이 풍부한 그녀였다.

그 사고의 영역을 넓혀주기 위해 내가 한 것은···

지잉.

"응? 이게 뭐죠?"

그저 포탈을 열어젖히는 것뿐이었다.

부산은 오롯이 부산이 아니며,

세상의 곳곳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

.

.

지잉!

지잉!

"이게 다 뭐야···?!"

우르르르!

포탈을 타고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보며, 박서윤은 도무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초 실망스러웠을 그녀다.

합참의 지원을 기대했건만, 도착한 것은 나와 유성철을 태운 헬기 한 대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르르르!

당장 눈앞에 놓인 포탈에서는 합참에서 선별한 수백 명의 각성자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아아!"

계속해서 가슴을 졸여오던 그녀였다.

터질듯한 심장을 부여잡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우르르르르!

민우가 인천에서 모아온 수십 명의 각성자, 그리고···

거구의 몸집을 가진 각성자들이 또한 백여명 가까이 추가로 쏟아졌다.

"금방 다시 뵙네요. 정겸씨."

그 정체는 강남 세브란스의 각성자들.

특히, 내가 진성학의 세뇌로부터 구해낸 송현구였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 나는 잠시 강남 세브란스에 들러 송현구를 만나 포탈을 설치했었으니까.

보기만 해도 듬직한 송현구의 어깨.

그 주변으로도 수십 명의 각성자가 득실거렸다.

"흐으으으으윽!"

기쁨에 찬 박서윤이 실신할 듯 휘청거렸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그게 끝일 리가.

"정겸 대협! 이 쪽발이 새끼들 어디에 있습니까! 내 이 왜구 놈들을 그냥···!"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경공으로 날아드는 수십 명의 무림인들을 보았을 땐···

"끄르르르르륵···"

차마 견디지 못하고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쿠웅!

결국 쓰러진 그녀.

그 손에는 '척'하니 엄지가 들려 있었다.

이로써 완성되었다.

용산, 강남, 인천, 부산, 그리고 베이징까지,

다섯 개의 터미널로 이루어진 물류체인의 기초적인 틀이.

***

레벨 5에 다다라 최대 3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해진 아공간 포탈이었다.

말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니, 그 배 이상에 달하는 인원일지라도 이동을 보조하는 것 정도는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이거라면··· 싸워볼 만하겠어요!"

기절 후 깨어난 부산대표는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고쳐잡았다.

"싸워볼 만하긴요? 아예 도륙을 내버릴 건데."

"아예 도륙··· 이요?"

내가 지금 한 것은 그저 각지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한데로 모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물류센터의 진가는 거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제 보급 작전을 실시해야지요."

이게 진짜였다.

부산에 모인 각성자 모두에게 강화된 무기를 지급할 생각이었다.

특히, 송현구와 같은 신체 각성자들에게는 무공서를 지급하고, 운양이나 김솔 같은 숙련자들을 붙여 며칠간 그들의 성장을 극대화할 계획이었다.

그 밖에 사람들도 문제없다.

마법 스크롤을 전단지처럼 나눠주면 될 테니까.

물고기가 보이는 족족 한 장씩 찢기만 해도 상당한 전력이 될 터.

결론적으로 말해, 이곳 부산에 모인 각성자들 모두 몇 배는 더 강해질 것이었다.

고작 며칠 안으로.

박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김 대령께서는?"

"여러분이 부산을 막아주시는 동안···"

방어만이 능사는 아니다.

상공회의소가 명시한 승리 조건은 지역대표의 사살.

그러니···

"후쿠오카 대표를 잡으러 가야죠."

물론 하나 더 있었다.

"···서류도 하나 뗄 겸."

겸사겸사 상공회의소를 털어먹는 것.

그것이 내 여행 계획이었다.

50. 수산시장의 숨은 영수증 (1)

부산에 집결한 수백 명의 각성자들.

그 수를 헤아리던 중, 우리는 각성자들의 능력이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능계와 강화계.

아공간 포탈을 사용하는 나 같은 사람은 이능계였고,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송현구와 같은 사람은 강화계라 할 수 있었다.

베리어를 피워내는 동시에 막강한 신체능력을 구사하는 김솔 같은 경우엔...

"뭘 꼬나봐?"

아무리 봐도 규격 외였다.

비율로 따지자면 강화계 각성자들의 수가 비약적으로 많았고, 이능계 각성자들에 비하면 그 특색도 적었지만, 무공서를 통한 수련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더욱이, 내 아공간에 담긴 강화 무기를 아주 잘 활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장점이었다.

이들이 압도적인 신체능력을 발휘하는 만큼, 성창이나 소총같은 강화무기는 몇 배로 빛을 발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뭔가 하나 빠진 느낌이....."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때마침, 저 멀치에서 적강운검 운양이 걸어오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쪽발이 어딨냐며 길길이 날뛰던 그다.

지금은 가까스로 반일 감정을 잠재우며 걸음과 심법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슥슥!

나는 문워크 뺨치는 은밀한 보법을 밟아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덥썩!

"...!"

화들짝! 놀라는 운양.

나는 그의 허리춤에 달린 검집을 움켜쥐고 있었다.

"정겸...대협?"

무공서를 익히는 각성자들이다.

그 중 상당수는 검법이었으며, 가장 괄목할 만한 무학 또한 바로 이 운양 선생의 '적강검법'이었다.

그러니 필요했다

각성자들이 사용할 만한 훌륭한 '검'이.

그러니 정당방위였다.

내가 이렇게 외친 것은.

"하...한입만...!"

"...!"

.

.

.

"진즉 이야기 하시질 그랬습니까."

적강파에 대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는 보검.

바로 그 운광검(雲光劍)을 운양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내어 주었고, 물류센터의 도검류 카테고리를 이용해 검을 수납했다.

주는 것이 아닌 빌려주는 것.

더욱이 그걸 통해서 모두 함께 강해지는 것.

베이징에서 나눴던 이야기대로, 운양은 자신의 생각을 여전히 관철하고 있었다.

"헤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또 이야기하시지요."

"그나저나, 운남에 영약을 찾으러 가신다고 하셨던 건....?"

"아니, 이 쪽발이 새끼들이 정겸 대협을 괴롭힌다는데! 당연히 회 한 사발 제대로 떠줘야...!"

만사를 제쳐두고 이곳 부산으로 달려와준 그들.

고마운 일이었고, 다행이었다.

나 또한 그들에게 도움을 되돌려 줄 수 있어서.

"오..."

강화된 검을 받아든 운양이 감탄을 내뱉었다.

----

[운광검(雲光劍) +1]

등급 : [레어]

설명 : [정보를 불러오는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 [바람]

옵션 : [관통], [가속]

----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검이 배로는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운양의 흡족한 표정.

이쯤되자 누가 누구의 부탁을 들어준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한결 가벼워진 검이지만, 역으로 위력은 강화됐을 터다.

검이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게 때문이 아니라 강화석이 부여해준 '가속'옵션 때문이니까.

'관통' 옵션도 빠짐 없이 달려 있다.

애써 검기, 또는 검강을 두르지 않더라도 척력으로 둘러싸인 어인들의 비늘 정도는 가볍게 벗겨먹을 수 있을 터.

아직 수련 시간이 부족한 강화계 각성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무기가 없었다.

운양이 기대감에 부풀었다.

"무구가 이 정도로 받쳐준다면, 몇 가지 초식을 새로 짜볼 수도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겸 대협!"

"아무렴요. 저희 각성자들 지도해주시는 것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거라면 걱정 단단히 붙들어 매시지요. 한 사람도 빠지 없이 어엿한 검수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척!

포권을 주고 받았고, 그는 널찍한 부산항의 부두로 향했다.

수백 명의 강화계열 각성자들이 자리한 곳으로.

모두가 강해질 차례였다.

***

한편, 모든 사람이 무술을 택한 건 아니었다.

분명한 길이지만, 단 하나의 길은 아니었으니.

또 다른 길을 만들어 준 것 또한 물류센터의 아이템이었다.

"신무기라고요?"

작전본부장 유성철을 아공간으로 데려왔고, 새로 강화한 아이템을 보여주었다.

----

[K2C1 제식소총 +2]

등급 : [레어]

설명 : [정보를 불러오는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 [없음]

옵션 : [내성+2]

----

"강화했습니다. 이제는 연발로 당겨도 아홉 발까지는 문제 없을거에요."

"김 대령님...!"

유성철이 감격어린 목소리를 냈다.

강화석을 통한 추가 강화.

+2 등급을 만들기 위해서는 동일한 옵션의 강화석을 두 개나 사용해야만 했다.

원래라면 상상조차 못했을 일.

최근 생산력이 극대화된 덕에 [내성]옵션이 부여된 강화석을 두 개나 챙길 수 있었다.

"이거라면 확실히 효과가 있겠습니다! 가뜩이나 수중에 있는 어인 놈들이라 총알 소진이 빠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이것도 있지요."

----

[5.56mm NATO탄 +1]

등급 : [레어]

설명 : [정보를 불러오는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 [빛]

옵션 : [관통], [발광]

----

"이건?"

"예광탄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테스트해본 결과로는 가히 섬광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한 빛이었다.

물 속에 숨은 어인들을 상대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터.

[감전]탄환과 섞어서 격발한다면, 놈들을 한층 더 효과적으로 사냥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유성철이 반색했지만.

"이거라면 전략이 훨씬 수월해지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있는데요..."

"또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따앙!

따앙!

멀찍이서 들리는 망치소리.

그리고...

치지지지지직!

용접 특유의 푸른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위치는 에메츠 차원의 자재창고.

"저건...?"

의문스러운 목소리를 뱉으며, 유성철은 천천히 나를 따라 자재창고에 들어섰다.

그러곤, 그 장엄한 풍경에 놀란듯 숨을 집어먹었다.

거꾸로 뒤집어진 완만한 곡선.

특유의 파란색 몸체와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는 고무타이어까지.

유성철은 그 정체를 단박에 알아맞혔다.

"통...통통배?"

자그만한 어선이었다.

부산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리고 그 통통배를 자르고 붙이고 있는 당사자는 인천공항에서 모셔온 메카닉, 제임스였다.

"오, 정겨므."

질겅질겅.

미국산 소시지를 씹으며, 그가 우리를 응대했다.

당황스런 표정이 역력한 유성철에게 지금 진행중인 프로젝트를 설명해주었다.

"크기가 클수록 시간이 오래 걸린다더군요. 다가올 싸움을 봤을 때...꼭 큰 배가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고요."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제부터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될 테니.

제임스가 거들었다.

"틀만 빌려쓰는 거지. 사실상 다른 물건이 될 겁니다. 엔진도, 장갑도 싹 다 교체할 거고."

에메스 차원의 자재로 강화된 선박.

그 단단함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전략무기의 진가를 드러내기에 불충분했다.

완전히 새로운 무기가 탑재될 예정이었으니까.

주변에 널려진 낯선 사물들을 보며, 유성철이 말했다.

"잠깐만요. 이건 프린터고...파쇄기까지?"

"프린터 톱니에 모터를 달 거에요. 모터가 마법스크롤을 넘겨내리면 그 아래에 있는 파쇄기가 돌아가는 구조죠."

"...그 말은?"

"마법이 발사될 겁니다. 자동으로요. 우선은 파이어볼을 넣어둘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게 대체..."

무공을 배우는 각성자들, 강화된 탄환을 뿜어낼 군인들, 거기에 마법까지.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진 전력에, 유성철은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제임스가 그려놓은 블루프린트를 보며 내가 훈수를 두었다.

"노우노우! 제임스! 이쪽에서 머리가 이렇게 쭉 뻗게 해달라니까!"

"...오우, 정겸. 그건 너무 낭만에 사로잡히 설계라고."

"나는 원한다. 그것 디자인!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대체 뭐라는 거지?'

마석의 통역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화.

유성철은 가만히 내가 펜으로 찍찍 수정사항을 남겨놓은 설계도를 펼쳐들었다.

그러곤 황당함에 숨을 내뱉었다.

"...거북선?"

머리처럼 쭉 뻗은 마법 사출구, 선체를 지붕처럼 덮는 장갑.

그건 영락없는 용 머리를 단 거북이의 형상이었으니까.

끝끝내 제임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나는 유성철에게 돌아갔다.

그는 완전히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가 꼭 해줘야 할 일이 있었다.

그가 내게 되물었다.

"잠수함이요?"

"예. 가능할까요?

"가능은 한데...시간이 좀 걸릴겁니다. 그래도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가져올 수 있겠네요. 그런데 어디에 쓰시려고요?"

전투가 시작될 즈음, 나는 곧장 일본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헬기를 타고, 축복받은 H빔을 떨구며 일본에게 좋은 추억을 선사해줄 수도 있겠지만...

당장 필요한 일은 후쿠오카의 대표를 처치해 이 싸움을 승리로 종결짓는 일이었다.

"몰래 가야죠. 후쿠오카 대표가 숨어버릴 수도 있으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공회의소의 일본 지부.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사가 필효할 테니까.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이었다.

각성자들이 무공을 수련하기를, 제임스가 K북선을 완성해주기를, 그리고 유성철이 잠수함을 가져다주기를.

모두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었다.

***

그렇게 결전의 날이 되었다.

뿌우우우...

항구의 친숙한 뱃고동 소리.

따스한 노랫가락을 연상시키는 낭만적인 소리였지만, 지금은 싸움을 알리는 전사들의 나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바쁜 시간이었다.

운양과 무림인들이 숨가쁘게 각성자들을 훈련시켰다.

군인 각성자들에게 필요한 보급품들이 지급되었고, 제임스 또한 시간 내로 마법을 발사하는 K북선을 건조해주었다.

그렇게 완성된 배를 무한정 복사한 것은 당연한 수준.

그뿐만이 아니었다.

따앙!

땅!

에메스 차원의 자재로 만든 탄탄한 방벽이 들어섰다.

아버지와 합참의 공병부대가 합심했고, 덕분에 부산의 영도, 그리고 해운데에 주요 위치한 거점들을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민간인들의 대피 또한 마무리 된 상태였다.

그렇게 맞이한 새벽.

촤학!

물소리와 함께, 낯선 생김새의 생선 한 마리가 부산 땅을 밟았다.

팔다리에는 커다란 지느러미가 돋아나 있었고, 입 주변으로는 흉측한 아가미가 입 내부를 발갛게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척!

놈이 고개를 한껏 쳐들었고.

"조센징들아!"

딱 얻어 맞기 좋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300여 명에 달하는 어인들이 이곳 부산으로 넘어오고 있다! 모두 척력을 두른 강자들이지. 알까 모르겠지만, 너희가 쓰는 총알은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피를 원하지 않는다! 순순히 부산 대표를 넘겨준다면, 너희에게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될 기회를 주마!"

후릅!

놈이 혓바닥으로 게걸스럽게 제 아가미를 닦았다.

하지만...

"우리는 자비와 융성으로 너희를 꽃피워줄 것이며, 너희는 우리 대일본이 대륙으로 나아갈 길을 놓아주면 될 것..."

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우르르르르!

부산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

어인이 멍청한 눈을 껌뻑거렸다.

'...뭐가 이렇게 많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많은 인파들은 각기 도복, 군복을 맞춰입은 채, 냉병기와 소총으로 이루어진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뭐가 이렇게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그리고...

먼저 나선 것은 칼을 든 자들이었다.

탓!

펄럭!

마치 한 몸이라도 되는 듯, 수백 벌의 도포가 바람에 휘날렸다.

"초밥 300인분!"

그런 소리를 외치며.

51. 수산시장의 숨은 영수증 (2)

휘릭!

휘리리릭!

"커허어어억!"

하나 둘 죽어가는 어인들.

어인들의 선봉대장, 히데키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왜지? 왜 죽는 거야?'

샤리트 차원의 힘을 빌려 얻은 위계와 척력이다.

아무리 레벨 10을 달성해서 위계를 얻을 수 있다지만, 마석 천 개를 모으는 것이 그리 쉬울 리 없었다.

일본의 평균에 빗대어 본다면, 부산의 위계보유자는 많아야 스무 명 남짓.

300명에 달하는 어인들의 상대가 될리 만무했으니까.

하지만...

끄아아아악!

울려퍼지는 동료들의 고성.

부산의 각성자들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어인들을 두부처럼 썰어대고 있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지?'

당초 계획은 적들의 도심에서 게릴라를 펼치며 싸움을 혼전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뭍이라 한들, 어인들은 압도적인 근력과 체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완벽히 뒤틀려버린 상황 앞에, 그는 재빨리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빠진다! 후퇴해!"

"부상자...! 부상자는 어떻게 할까요!"

"두고 빠져! 이러다간 다 죽으니까!"

후다다닥!

철퍼더덕!

특유의 점액질을 튀기며, 어인들은 재빨리 바다로 빠져들어갔다.

"후우우...!"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후쿠오카로부터 뻗어나온 오염된 해수가 그들의 상처를 수복해주기 시작했으니까.

"물은 우리의 어머니시요. 우리의 축복이시니..."

낡은 것을 고쳐 새롭게 한다는 의미의 유신(維新).

유신각성회는 역설적으로 과거 일본의 사상을 모조리 내던졌다.

히데키가 중얼거리는 것은 샤리트 차원이 내어준 새로운 경구.

어인으로서 갖게 된, 새 신체를 축복하는 타차원의 사상이었다.

하지만...

"으그그그그그극!"

축복이었떤 바다가 돌연, 저주로 돌아섰다.

비늘을 새카맣게 태워버리는 전기 충격.

그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놈들의 소총이 수면을 가를 때마다 아찔한 충격이 어인들을 휘감았다.

"끄르르르륵!"

거품을 물며, 하나씩 썩은 생선처럼 수면으로 떠오르는 어인들.

더욱이...

파앙!

파앙!

간헐적으로 터지는 예광탄이 그들의 시야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찌이이이이...

이명과 함께 상실된 방향감각.

흰색 공허와 전기 충격으로 가득 찬 바다는 더이상 그들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옥, 이건 지옥이다.'

그리 불러야 마땅할 따름.

"허억! 허억!"

히데키는 미친듯이 물살을 갈랐다.

심장을 조여오는 자극, 눈 먼 시선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애써 다스리며 서둘러 위기를 모면했다.

"으으으!"

최대한 온전한 모습으로 손에 넣고 싶었던 부산이다.

하지만 여유를 부린 것은 크나큰 패착이었고, 히데키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만큼 아둔한 인물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위험지역을 벗어난 그가, 아가미를 펼쳐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뿜어냈다.

"포격! 포격해!"

모두 어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같은 종류의 어인들은 아니었다.

브으으...

복어처럼 배를 가득 부풀린 어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배에는 미리 삼켜둔 바위나 자갈 따위가 한 가득 담겨있었다.

부산을 향해 쏘아낼 대포알로 사용하기 위해.

히데키가 명령을 내렸다.

"호텔이다! 호텔을 본격적으로 노려!"

슈우우웅!

수십 개의 바위가 부산 진영의 본거지를 향해 날아들었다.

언뜻보면 원시적으로 보이는 공격이다.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해 보일 테니.

강력한 힘을 자랑한던 과거 일본의 함대를 떠올린다며 이들 유신각성회의 전력은 명백한 추락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히데키는 자신했다.

놈들이 뿜어내는 바위에는 8위계의 힘이 농축되어 있었으니.

어지간한 콘클리트, 아니 벙커의 두꺼운 벽까지도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힘이 실려 있었다.

꽈앙!

꽈앙!

푸쉬이이!

포격 어인들의 아가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이로서 부산은 쑥대밭이 될 것이지만, 히데키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다 너희가 자초한 거야. 그러게 좋게 말했을 때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귀엽게 노예로 부려줬을 텐데."

슈우우웅!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덕이다.

히데키는 하늘을 수놓은 붉은 바위들을 흐뭇하게 관망했다.

호텔을 향해 집중적으로 쏘아지는 포격.

곧 있으면 저 거대한 호텔이 나무젓가락처럼 부서질 터였지만...

띠잉!

"...띠잉?"

낯선 소음이 그런 히데키의 감상을 망쳐놓았따.

띠잉!

띠잉!

어인들의 포탄이 튕겨져나왔다.

벽에 대고 쏜 플라스틱 비비탄처럼.

다시 살펴보니 호텔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매끈한 소재가 덧대여져 있었다.

"...왜? 왜 안 부서지는거야? 왜!"

실로 의문스러웠지만.

쏴아아아!

"...뭐야?"

차마 그 의문을 풀 시간조차 주어지질 않았다.

"...배? 아니야 저건..."

큰 틀에서 보자면 영락없는 통통배다.

작은 어선으로 사용되는 보잘 것 없는 배.

하지만 짙은 녹색의 장갑판이 둥글게 지붕을 만들고 있었고, 배의 선수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머리가 달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뭔가를 흉내낸 모양새다.

마치 거북이 등딱지에 용머리를 달아놓은 것 같...

"...잠깐?"

히데키는 우뚝 멈춰섰다.

그 또한 일본의 해군 장교였다.

과거 일본에 처절한 패배를 안겨주었던 조선의 장수.

그 장수가 만들었다던 기상천외한 배.

히데키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안돼. 그것만은..."

딱 봐도 현대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조다.

아니,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한다.

대체 오늘날 어느 선박공이 전함에 거북이 등딱지와 용 대가리를 달 생각을 한단말인가?

낭만.

그저 낭만이다.

하지만 바로 그 '낭만'으로 가득 찬 K북선이 히데키를 처절한 굴욕감에 빠뜨렸다.

"공격해! 제발...! 질 때 지더라도 저런 물건에 죽을 순 없다!"

과거에 얽매이는 존재는 도태될 뿐이다.

과거의 영광은 과거에 머무를 뿐이다.

유신각성회의 기치를 떠올리면, 히데키는 K북선에 담긴 시대착오적 정신을 비난했다.

하지만...

콰과과과과과과!

거북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십 발의 대포알.

그 불꽃이 수면의 어인들을 빠르게 덮쳤다.

꽈릉!

꽈아아앙!

까아아아악!

카아악!

하나둘 바닷 속 거품이 되어 사그라드는 어인들.

그와는 대조적으로 부산항에서는 자꾸만, 자꾸만 거북선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아니 수백.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역사에 빠삭한 히데키는 거품을 물었다.

"...저게! 저게 무슨 열두 척이야! 저게 무슨!"

그제야 깨달았다.

유신이고 나발이고...

힘과 물량이 최고라는 사실을.

낭만적인 거품에 휩싸인 어인, 히데키는 그걸 그제야 깨달았다.

***

"어휴, 금방 이기겠네."

폭풍처럼 휩쓸리는 어인들을 보며, 나는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한편, 내 눈앞에는 유성철이 가져다 준 잠수함이 바다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합참에서 잠수함을 조종할 해군 인력들을 함께 지원해주었고, 이용수 또한 조작을 거들기로 했다.

유성철이 말했다.

"장보고급 잠수함입니다. 90년대 물건이지만...엄연한 현역 잠수함이니 사용하시기에 부족함을 없을 거고요."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팍스에게 잠수함을 저장해달라 부탁했다.

['군부대'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품목입니다.]

[등록 비용 책정 중...]

띠링!

[등록에 필요한 총비용은 마석 2,675개입니다.]

"...왜 이렇게 비싸요?"

"하하... 잠수함이 원래 그렇습니다. 헬기에 비하면 많이 비싸긴 하죠."

상당한 가격이었지만, 돌이킬 순 없었다.

어찌됐든 조용하게 일본에 잠입해야 했으니까.

다행히 지금의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부담이 되는 가격이 아니었다.

[비용 전달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46,784개입니다.]

출렁!

즉시 직접 타고 나갈 잠수함을 출하했다.

촤르르륵!

잠수함 입구로부터 내려오는 사다리.

이용수를 비롯한 함참의 인원들과 함께 잠수함에 몸을 실었다.

푸쉬이!

뚜껑처럼 턱하니 닫히는 입구.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부산을 떠올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뭐, 잘들 해주겠지."

이미 바다에는 두둥실 떠오른 어인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어느정도 승리를 굳힌 상황.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후쿠오카로 향할 수...있을 줄 알았다.

띠익- 띠이-

조종석에서 돌아가는 레이더 소리.

분석관 한 명이 내게 손짓했다.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뭔가 남아 있어요."

"...예?"

휙휙 천천히 원을 그리는 녹색 레이더에 잡힌 것은 흰색 반점이었다.

다른 반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반점.

탁!

즉시 잠망경에 눈을 붙였다.

내다보이는 먼 바다의 지평선.

바로 그곳에...

"...저게 뭐야?"

부산을 향해 쇄도하는 거대한 회색 물체가 보였다.

꾸우우우우우우!

촤아아악!

마치 전함과도 같은 위용.

하지만 그 소리는 명백한 생명체의 울음이었다.

푸쉬이이이!

녀석의 등으로부터 오염된 해수가 분수처럼 치솟았고, 몸 곳곳에 뚫린 구멍에서는 어인들이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마치 항공모함이라도 되는 양.

전함고래.

어쩌면 그런 거창한 이름이 어울릴 지도 몰랐다

슈슈슈슉!

슈슉!

수백 척의 거북선이 놈에게 쉴새없이 '파이어 볼'을 뿜어댔지만...

콰아앙!

콰앙!

푸쉬이이이이...

그저 폭염이 피워오를 뿐, 놈에게는 생채기 하나 남질 않았다.

2서클 마법인 파이어볼이다.

그간의 데이터로 보았을 떼, 8위계에게도 무난히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튕겨낸다는 것은...

"...7위계구나."

타차원과 손을 잡은 일본이다.

그러니 타차원의 괴물이 전투에 나서는 것 또한 예고된 일이었다.

촤아아아아악!

서서히 부산에 다다르는 전함고래.

나는 즉시 조종실의 인력들에게 요청사항을 전달했고, 모두가 아연실색한 표정을 내보였다.

"접근하라고료?"

"괜찮을 겁니다. 안전을 대비해 포탈도 열어둘 거고요."

"아무리 그래도..."

전함 고래는 그대로 속도를 붙여 부산을 들이받을 심산이었다.

놈이 두르고 있는 7위계의 척력.

이대로라면 부산에 어떤 피해가 갈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리 비장하게 안 굴어도 돼요. 처음 잡아본 것도 아니고..."

용산으로 진격해 들어왔던 사브로스 차원.

거기에서만 두 마리의 7위계 괴물을 처치했더랬다.

그때 사용했던 무기들이 지금도 내게 주어져 있었다.

강화된 성창이 있었고.

"유쾌하게 받아들입시다. 오늘 이 잠수함은 포경선이 되는 동시에..."

축복 받은 H빔이 있었다.

"SLBM을 탑재한 핵잠수함이 될 테니까요."

나는 그 모두를 물속에서부터 쏟아낼 생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일주일, 출하 스킬을 최대로 강화해둔 참이었으니까.

시속 500km의 출하 속도, 사정거리로는 최대 500미터까지.

자그만치 8천 개의 마석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띠- 띠-

나의 요청에 따라, 우리는 고래를 향해 차츰 가깝게 다가갔다.

잠만경으로 놈의 거대한 휫 빛 체구를 들여다보았지만...

어차피 조준은 나의 역할이 아니었다.

"팍스, 모조리 쏟아부어."

슈아아아악!

시동이 거린

잠수정 주변으로 나타난 8개의 포탈이 저마다 성창을 뿜어냈다.

뽀그르륵!

맑은 거품을 뿜으며 전진하는 성창.

영락없는 작살의 모습이었다.

마냥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수십, 수백 자루의 작살, 그것이...

콰득!

콱득!

거대 고래의 살갗을 꿰뚫으며 비로소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구우우우우우우우!

뱃고동 솔리철럼 들려오는 고래의 비명.

수백 개의 작살에 꽂혀 피를 흘리는 놈이었지만, 이대로 끝이 아니었다.

"3...2...1, 발사."

푸화아아아악!

거대한 '물리'SLBM이 수면을 뚫고 발사되었다.

슈우우우우우우욱!

목적지는 고래의 정수리로부터 500미터 상공.

비행을 거듭하다, 마침내 하늘에 우뚝 멈춰 선 수십 개의 H형강은 곧...

"..."

미친듯한 하강을 시작했다.

까아앙!

까앙!

타아아아앙!

고래의 정수리가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육중한 무게는 앞서 꽂혀 있던 수백 자루의 성창을 못처럼 박아넣었다.

고래의 깊숙한 속살까지.

그러니 당연한 수순이었따.

배를 까 뒤집은 거래 고래가 물 위로 두둥실 떠오른 것은.

"...맙소사."

잠만경 앞에 모여든 잠수함 사람들.

모두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푸쉬익!

갖은 고초를 치른 끝에, 마침내 후쿠오카에 도달했다.

잠수함의 사람들을 아공간으로 들여보냈고, 타고온 잠수함 또한 아공간으로 회수했다.

"이놈들아, 감쪽같지?"

후쿠오카의 해안은 평온 그 자체였다.

내가 접근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만큼, 잠수함을 타고 온 보람이 있었다.

두 가지 작업에 착수할 때였다.

하나는 후쿠오카 대표, 다른 하나는 상공회의소의 일본 지부를 찾는 일.

다행히 그 중 하나는 아주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후쿠오카 대표]

상공회의소가 띄어준 거대한 홀로그램.

그 화살표가 놈의 위치를 바로 눈앞에 띄어주고 있었으니까.

어림잡아,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

홀로그램이 표시한 곳 아래에는 두 개의 상징적인 건물이 나란히 있었다.

하나는 후코오카 타워였다.

해안선 가까운 거리에 높에 솟은 후쿠오카의 랜드마크.

다른 하나는...

"...소라 껍데기?"

해안선에 대뜸 놓여 있는 거대한 크기의 소라였다.

곳곳에서 새어나오는 빛으로 보아, 그 용도가 건물이겠거니 어렴풋 짐작할 수 있을 뿐.

애당초 타차원과 손을 잡을 일본 세력들이다.

정체불명의 외계 건물 하나쯤 끼고 있었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는...

"둘 중 어디에 있는 건질 모르겠는데..."

홀로그램의 위치가 실로 절묘했다.

두 건물이 가깝게 맞붙은 탓에, 한참 위에 놓인 홀로그램 화살표가 정확히 어디를 지시하는 것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뭐, 직접 확인해보면 그만이지."

지잉!

열어젖힌 아공간 포탈.

그로부터 네 명의 해골 기사가 걸어나왔다.

철컥!

모드레드, 보호드, 케이, 헥터까지.

하나같이 '유체화' 능력을 가진 녀석들이다.

"둘 씩, 전우조로 짝지어서 찾아 봐. 후쿠오카 대표가 어디에 숨었는지."

"예, 주군."

슈우욱.

서서히 흐릿해지는 모습.

쐐애액!

네 명의 유령 기사들이 쏜살같이 나아갔다.

내게 적장을 대령하기 위해.

52. 수산시장의 숨은 영수증 (3)

어느덧 어둑해진 시점이었다.

슈우욱!

잔영을 남기며 사라지는 유령 기사들.

그들이 후쿠오카의 어둠에 몸을 실었다.

멸망은 이곳에도 있었다.

무너진 도시, 전복된 유람선, 갈라지다 못해 부러진 아스팔트까지.

그 모두가 멸망을 증언하는 적나라한 풍경이었으니.

하지만, '유신'을 통해 멸망을 지워낸 일본은 타차원에서 들어온 정체 모를 동력의 빛으로 후쿠오카의 항구를 빛내고 있었다.

후쿠오카 타워가 그랬고, 그 옆에 자리 잡은 소라 껍데기 같은 건물이 그랬다.

후욱!

[유체화] 능력이 빛을 발했다.

유령 기사들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건물 내부로 잠입했고, 후쿠오카 타워의 비상계단, 그리고 소라 껍데기의 내벽을 두르고 있는 나선형의 계단을 그림자처럼 걸어 올랐다.

그곳을 지키는 일본의 어인과 샤리트 차원의 어룡인들.

그들의 시선을 피해 가며, 서서히 건물의 심부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찾았구나."

헥터가 후쿠오카 대표를 발견했다.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후쿠오카 타워에 임시로 세워진 듯한 지휘통제실.

그 안에서 갖가지 무전을 받아 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놈이 있었으니까.

"이 멍청한 새끼들아! 지금 얼마 죽었는지가 문제야? 부산 대표만 죽이면 끝날 일을 왜 자꾸 징징거려!"

부산항에서의 패전.

놈은 한바탕 후폭풍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자미 같은 넓적한 입과 아가미를 씰룩거리며, 썩은 모래를 툭툭 뱉으며.

"...!"

하지만 나는 금세 시선을 거뒀다.

타차원의 건물로 향했던 모드레드와 케이.

그들이 한층 더 중요한 정보를 내게 전달해주고 있었으니까.

시야는 없었다.

신중을 기하려는 듯, 벽에서 울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저 대화일 뿐이었지만,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후쿠오카를 빼앗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걱정마십시오. 투자금에 대해서는 절대 손실이 없도록..."

걸걸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

그런데도 그 안에는 묘한 굴종의 자세가 담겨 있었다.

"이보세요, 회장. 누구 마음대로 후쿠오카를 빼앗겨요?"

예민하면서도 얇은 목소리가 받아쳤다.

"예? 하지만 부산에서의 상황이..."

"승리는 물 건너갔죠. 하지만 그게 꼭 패배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잘 떠올려보세요. 제가 분쟁 조건에 지역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말이라도 적어 놓았는지."

놈이 결론을 내렸다.

"대표만 죽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산 채로 본청 뇌옥에 집어 넣으세요. 지금 일본에서 거기만큼 확실한 장소는 없으니까."

"아...! 지부장님은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이 후쿠오카 대표보다 더 윗선의 존재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중 한명은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상공회의소의 일본지부장이라는 것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놈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대화를 맺었다.

"한국행은 당분간 미뤄둬야 할 듯하니...일단은 게이트 핵을 챙겨서 오사카로 돌아가죠. 패배에 어느 정도의 손실은 마땅히 따라오는 법입니다. 그 규모를 줄이는 데 집중해야죠."

"예, 지부장님. 명심하겠습니다."

벌컥 열리는 문.

후우욱.

모습을 감춘 기사들과 함께 소리가 뚝 하니 끊겨버렸다.

유령 기사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린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놈의 위계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억지로라도 잡을 자신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예 일본을 다 먹은 상태라고 했었지?"

유신각성회.

놈들의 세력은 비단 이곳 후쿠오카 뿐만이 아니었다.

타차원의 침략으로 얼룩진 '전국시대'를 놈들은 어인들의 세계로 통합했으니까.

놈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본진이 오사카에 있다는 소리였다.

"기왕 칠 거라면."

놈들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사카로 돌아간다는 말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상공회의소의 일본지부장이었으니까.

상공회의소 일본지부 또한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사카라 이거지..."

목적지를 설정했으니, 이제 가기만 할 테지만...

누가 데려다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척!

정찰을 떠났던 네 명의 유령 기사들이 돌아온 다음이다.

나는 후쿠오카 타워가 내려다보이는 도심 한구석에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쿵! 쿵!

후쿠오카 타워로 들어가는 건장한 어룡족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금방이었다.

온몸이 칭칭 감긴 채 펄떡펄떡 활어처럼 뛰어오르는 후쿠오카 대표의 모습이 보인 것은.

꽈아악!

놈들은 후쿠오카 대표를 커다란 나무 상자에 또 한 번 포장하더니, 그 주변으로 케이블을 감싼 채 덩그러니 내려놓았다.

그 앞에는 붉은색 일장기가 그려진 일본의 제식 헬기가 놓여 있었다.

퍽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수산물 배송 뭐 그런 건가?"

이러나저러나, 당장 해야 할 일은 저 나무상자에 따라붙는 일이었다.

쿵! 쿵!

놈들이 헬기에 정신이 팔렸을 때를 노렸다.

포탈을 열 수 있는 사정거리는 10미터가량.

끝끝내 몸을 숨긴 나는 후쿠오카 대표가 포장된 나무상자에 포탈의 좌표를 지정했고.

'상품 회수'

쐐애애액!

순식간에 나 자신을 빨아들였다.

.

.

.

쿠당탕탕!

몸을 데구르르 구르며 물류센터 안으로 들어왔다.

"아오..."

쓰라린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 안에는 한창 전투를 치른 내 가족들과 일행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음료수를 꺼내먹고 있었다.

목에 수건을 둘러맨 김솔이 내게 물었다.

"...뭐하냐?"

"...일본 여행."

부산에서의 전투는 서서히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큰누나가 부상자들을 인솔해 강남 세브란스로 바쁘게 이송했고, 나머지 인원들은 순번을 바꿔가며 혹시나 남아 있는 패잔병이 없는지 도시를 수색하고 있었다.

김솔이 마저 물었다.

"왜 다시 들어왔어? 후쿠오카 대표 찾는다더니."

"찾았지. 찾긴 했는데..."

슬쩍 포탈을 열어보았다.

휘이이이!

컴컴한 밤하늘의 풍경.

포탈은 헬기에 매달린 화물에 붙어 함께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기왕 간 거, 좀 더 둘러 보고 오려고. 일단은..."

부단히 움직이는 헬기.

홱홱 자나가는 풍경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한 숨 잘 거야."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것을 후쿠오카의 것이라 해야 할지, 부산의 것이라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무임승차의 안락한 승차감.

그것이 나를 깊은 잠에 빠뜨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