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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파이어 볼 (1)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수송 트럭에서 우르르 내린 각성자들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해골 기사.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만, 어거지 공격을 쏟아붓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결했다.

'···왜 그렇게 세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비슷한 놈이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구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을 터.

다행히 작전 성공은 물론이요, 본부장이 벌벌 떨던 해골 기사까지 해치웠다.

도착한 합참본부에는 어느덧 까맣게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셨군요!"

주차장으로 한달음에 내려온 작전 본부장이 초롱초롱한 눈빛이 빛냈다.

사심이 그득 담긴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정겸 씨, 제발 저희와···"

"죄송합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그에게서 말년 내내 전문하사를 권하던 행보관의 얼굴이 겹쳤다.

일평생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인고의 계절.

과거의 상념을 내쫓으며, 내가 물었다.

"헬기는 준비되어 있습니까?"

"···따라오시죠.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그가 앞장섰고, 나와 이용수가 그 뒤를 따랐다.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오르며, 작전본부장은 서울 중심부에 자리 잡은 저 기괴한 성벽에 관해 몇 가지 정보를 건네주었다.

"군에서도 성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부대를 파견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두절된 상태죠. 그 이후로는 공중에서만 성벽 내부를 틈틈이 정찰하고 있는데, 다행히 안쪽에선 사람들의 활동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흔적.

그것만큼은 좋은 소식이었다.

작은누나가 무사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니까.

하지만 다른 소식도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자라난 성벽의 상단부가 점차 지붕을 만들 듯 오므라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애당초 땅에서 자라난 성벽이다 보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인지 안쪽은 낮에도 제법 어둑합니다."

뜬금없이 나타난 괴물, 각성 능력과 땅에서 자라난 성벽, 말하는 해골까지.

기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여깁니다."

달칵!

작전본부장이 옥상 문을 열었다.

마침내 다다른 헬리포트에는 국방색으로 물들인 헬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앞면 유리가 둥그스름하게 생긴 것이, 잠자리 같은 귀여운 외모였다.

'좀 작기는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헬기다.

작전본부장이 확실히 약속을 지켜준 것.

헬기 쪽으로 성큼 다가서려던 찰나, 그가 나를 막아 세웠다.

"그쪽이 아닙니다."

"···?"

그가 돌연 방향을 바꿨다.

옥상 출입구의 반대 방향에 연결된 두 번째 헬리포트였다.

그리고 그곳엔···

훨씬 더 우람한 수송용 헬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의문스러워하는 나에게, 작전본부장이 입을 뗐다.

"원래는 먼저 보신 500MD로 빌려드리려 했지만··· 해골기사까지 해치우고 돌아오신 정겸 씨께 확실하게 성의를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텅!

선명하게 새겨진 육군 마크.

그가 헬기 몸체에 턱 하니 손을 올렸다.

"UH-60 블랙호크입니다. 보통은 별 세 개 달아도 탈까 말까 한 헬기죠. 뒤에 사람도 스무 명은 거뜬히 태울 수 있습니다. 미사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기관총이라도 달아드리면 좋았겠지만··· 그건 저희 내부적으로도 반발이 있을 수 있어 연료탱크로 대체해서 달아두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미처 몰랐다.

대한민국 군대를 향한 호감도가 0.1퍼센트 상승할 만큼, 나로서는 대사건이었다.

'무기가 없는 건 살짝 아쉽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제대로 된 사용 방법도 모를뿐더러, 대부분의 현대식 화기는 조금 전 보았던 '해골기사' 같은 놈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으니까.

평범한 와이번들을 상대로는 팍스를 이용한 을 활용하면 될 터였다.

나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답했다.

"···고맙습니다. 잘 쓰고 꼭 돌려드리죠."

아쉽지만 헬기는 아공간에 등록된 상품이 아니었다.

아공간에 넣을 수도 없을뿐더러, 부서지거나 망가지더라도 고쳐낼 방법이 없었다.

애당초 양도가 아닌 대여였으니, 최대한 조심해서 쓰고 돌려줄 수밖에.

얼추 정리가 되었을 참, 그 사이 작전본부장은 부관으로부터 작은 상자를 받아서 돌아왔다.

그러곤 내게 그 상자를 내밀었다.

"정겸씨, 우리는 당신을 확실한 우군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꼭 기억해주세요."

"···이게 뭡니까?"

"마석 200갭니다. 군사지원본부장을 구워삶았죠."

"···!"

자그마치 200개.

날 '갖고 싶다'는 군의 강력한 어필의 일환이겠지만··· 어쨌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이것 참···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파일럿은 있습니까? 저희 전속 파일럿을 파견해드릴 수도 있는데요."

"아, 그거라면 여기 이분께서 맡아주실 겁니다."

나는 옆에 선 이용수를 가리켰다.

작전본부장이 걱정스레 운을 뗐다.

"괜찮으시겠어요? 밖에서 볼 수 있는 민수용 헬기와는 장치가 많이 다를 겁니다."

이번엔 이용수가 답했다.

"괜찮습니다. 헬기 같은 건 몰아본 적 없지만···"

"···?"

"레벨만 올리면 된다고 하네요. 시스템이."

의 능력은 비단 자동차나 오토바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내가 레벨업을 할 때마다 새로운 사물을 아공간에 넣을 수 있는 것처럼, 그 또한 레벨을 올릴 때마다 새로운 운송수단의 조작 방법을 익히는 것이 가능했다.

완전한 숙련자의 수준으로.

레벨업에 필요한 마석의 양은···

"50개가 든다고 나오네요."

나는 즉시 팍스를 불러 마석 50개를 꺼내주었다.

근본적으로는 작은 누나를 구하러 가기 위함이었지만, 이용수라면 마석 50개쯤 내어주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더욱이, 이번 작전에서 해골들을 치우며 지갑 또한 빵빵하게 채워둔 상태였으니.

우리는 작전 본부장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척.

그가 우리를 향해 경례를 붙였다.

사단장이 납신다 하여 몇 시간 내내 경례 연습을 했던 것이 어제 같은데, 공교롭게도 별 셋짜리 작전본부장께서 먼저 팔을 걷어붙여 주셨다.

착.

경례를 받았다.

이용수가 헬리콥터를 점검하는 동안, 포탈을 열어 아공간으로 들어왔다.

.

.

.

"팍스, 지금 마석이 얼마나 모였지?"

[현재 보유하고 계신 마석은 1,393 개 입니다.]

볼링공으로 후두려 팬 해골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었다.

구출 작전에서만 500개가 넘는 마석을 쓸어모았고, 작전본부장으로부터 200개의 마석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대형 마석의 가치를 개당 100개로 환산했습니다.]

해골기사에게서 얻은 두개의 큼지막한 마석까지.

여기에 이용수에게 제공한 50개의 마석을 제한 나머지 값이 1393개였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1000개 지불할게. 레벨 3으로 올려줘."

마지막 채비였다.

얼마든지 해골 기사 같은 괴물들이 다시 튀어나올 수 있었으니.

나로서도 총력전이었다.

팍스가 내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공간 레벨 3에서는 전력 유지 비용이 24시간마다 마석 10개로 조정됩니다.]

[수도/가스의 합산 비용 또한 동일합니다.]

이제는 날마다 마석 20개.

숨이 턱 막히는 액수였다.

혹시나 싶어 꼼수를 부려봤으나···

"혹시 레벨 2에서 미리 지불해두고 넘어갈 수도 있을까?"

[불가합니다. 이전에 결제해두신 유지 비용은 레벨3으로 이월되지 않으며, 이미 비용이 지불된 잔여기간은 일별 계산하여 자동 환불됩니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얄짤 없었다.

더욱이 그렇다면,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없었다.

"그럼 바로 레벨 올려줘. 그리고 유지비용도 3일치 미리 끊어주고."

[알겠습니다.]

[잔여기간에 따른 마석 59개 환불을 진행합니다.]

[레벨업 진행 및 유지비용 3일에 필요한 마석 1,060개를 받았습니다.]

[남은 보유 마석은 392 개입니다.]

[레벨업 진행 중···]

두웅-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붉은색 파장이 공간을 덮었다.

물류센터만 덩그러니 놓인 흰 배경에는 어느덧 국방색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던 터였다.

모든 과정을 마친 팍스가 돌아왔다.

[레벨업이 완료되었습니다.]

[레벨 3에서는 출하 스킬에 대한 추가 강화는 물론, 아공간과 관련한 새로운 능력을 개방하실 수 있습니다.]

"새로운 능력?"

출하 스킬이 강화되는가 했는데, 뭔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목록을 띄워드리겠습니다.]

----[개방 가능 항목]----

[비용 250] 

◈ 아공간 실험실 (New!)

-아공간에 등록된 상품들을 조합하고 분류 및 가감할 수 있는 연구실을 설치합니다.

◈ 아공간 생명유지 시스템 (New!)

-아공간 내부에서의 자연적인 부패, 변질, 노화가 극도로 지연됩니다.

-아공간 내부에 미약한 치유 효과가 부여됩니다.

◈ 카테고리 상품 등록 (New!)

-카테고리에 부합하는 외부의 사물을 아공간에 등록할 수있습니다.

(단, 사물의 가치/크기/무게에 따라 책정된 등록 비용이 별도로 소모됩니다.)

-------------------------

"···더럽게 비싸잖아?"

[그렇습니다.]

마석 250.

레벨 2 때와 비교하면 자그마치 다섯 배가 뛰어올랐다.

이미 레벨업에 천 개를 쏟은 탓에 지갑이 너덜너덜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천천히 목록을 살폈다.

그러던 중, 마지막 항목 에 시선이 멈춰섰다.

"잠깐··· 사물을 등록할 수 있다고?"

내 아공간의 최대 단점이었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단 하나의 대상만 담을 수 있다는 것.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물류센터니, 군부대니 하는 규격 외의 대상들만 담아오던 터였다.

팍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단, 현재 등록되어 있는 '물류센터'와 '군부대', 두 개의 카테고리에 부합하는 상품만 등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별도로 등록 비용이 소모됩니다.]

역시나 제약이 있었다.

특정한 물건만 넣을 수 있으며, 그마저도 등록을 위한 비용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혹시···"

나는 곧장 밖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

.

.

우선은 욕심부터 부려봤다.

"혹시 여기 합동 참모 본부를 등록할 수도 있나?"

['군부대' 카테고리에 해당하므로 가능합니다.]

[등록 비용 책정 중···]

띠링!

[등록에 필요한 비용은 마석 11,780,331 개입니다.]

"아냐, 잘못했어."

머리가 절로 아득해지는 액수였다.

물론 진짜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UH-60 블랙 호크 쪽으로 다가가자, 꼬리 쪽 프로펠러를 살피고 있던 이용수가 내게 다가왔다.

"오셨군요. 점검은 거의 끝나갑니다. 날 밝으면 출발한다고 했었죠?"

"잠시만요, 그 전에···"

내가 팍스에게 물었다.

"이것도 등록 가능하지?"

['군부대' 카테고리에 해당하므로 가능합니다.]

[등록 비용 책정 중···]

띠링!

[등록에 필요한 비용은 마석 107 개입니다.]

"옳지."

드디어 인간적인 숫자가 나왔다.

나는 능력을 개방한 뒤, 곧바로 UH-60 블랙호크 헬기를 등록했고··· 

"어어···?!"

당황한 이용수가 소리를 뱉었다.

눈 앞에 있던 커다란 헬기가 감쪽같이 사라진 탓이었다.

그리고···

'출하.'

다시 헬기를 뽑아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돌아온 헬기.

황당한 표정으로 나와 블랙호크를 번갈아 보는 이용수에게 말했다.

"헬기 반납한다고 전해주세요. 고맙게 잘 썼다고."

"예? 그럼 성에는 어떻게 들어가시려고요?"

"우리는···"

새로 뽑아서 쓸 거다.

이제 이 블랙호크는 무한으로 생성이 가능하니까.

***

투두두두두···

이른 새벽부터 프로펠러가 세찬 소리를 울렸다.

이용수가 베테랑 조종사처럼 헬기를 몰았고, 나는 부조종석에 앉아 지난 일을 회고했다.

새로 얻은 것은 비단 헬기뿐만이 아니었다.

큰누나가 병원에서 챙겨왔던 약과 간단한 의료도구들.

군부대 내에 의무대가 있어서인지, 의외로 카테고리에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밖에도 다양한 활용 방법이 떠올랐다.

장갑차나 탱크, 각종 군사 무기들까지 수용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놈들을 잡을 방법이 없어.'

끝끝내 잡아냈던 해골 기사, 그웨인.

놈에게는 총이나 폭탄 등, 현대의 화기가 통하지 않았다.

나 또한 볼링공과 수류탄을 이용해 반쯤 '억지로' 잡아낸 셈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런 요행이 통할 리 없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놈은 잡고 나온 붉은색 마석이 바로 그것이었다.

팍스를 불렀다.

녀석은 물류센터의 AI를 넘어, 내 각성 시스템 자체와 결합이 되어 있었으니.

처음부터 마석의 쓸모에 대해 알려준 녀석이라면, 바로 이 붉은색 마석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은 정확했다.

띠링!

놀랍게도, 붉은색 마석은 각성 시스템창을 통해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

[강화석(D)]

속성 : 불

옵션 : [관통], [점화]

---- 

간단하게 짝이 없는 설명.

팍스가 부연했다.

[강화석은 일반적인 마석과 그 원천은 동일하지만, 별도의 성질이 부여된 것입니다.]

[각성 시스템을 이용할 경우 강화석을 소모해 사물에 특정한 성질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계신 마석에는 '불' 성질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불이라···"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해골 기사 그웨인이 담고 있던 불길이 바로 이 강화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썩둑썩둑 볼링공을 잘라내던 놈의 칼날이 떠올랐다.

단면에 남았던 검은 그을음까지.

놈이 보여주던 압도적인 절삭력은 바로 이 강화석의 효과에서 비롯된 것일 공산이 컸다.

[관통], 그리고 [점화]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놈들이 쓰는 공격 수단이니만큼, 어쩌면 소총이 통하지 않는 놈들에게도 먹힐 수 있을지도.

잠시 고민하던 나는 팍스에게 물었다.

"사물에 사용하면 된다, 이거지?"

.

.

.

포탈에 들어온 뒤, 픽킹 스테이션에서 한 가지 물건을 주문했다.

바로···

[STORM ULTIMATE PHAZE 볼링공, 16파운드, 가격은 239,000원입니다.]

아까 유용하게 사용했던 볼링공이었다.

이윽고 황량한 군부대 연병장에 볼링공을 내려놓은 뒤, 팍스에게 부탁했다.

"여기에 강화석을 사용해줘."

[알겠습니다.]

[강화석 한 개 받았습니다.]

[강화 적용 중···]

[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화르르르륵!

볼링공에서 거친 불꽃이 솟아올랐다.

불이 붙을만한 소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 위로 삼킬듯한 불길이 자리잡고 있었다.

겉에 그려진 붉은색 마블링이 더 이상 장식이 아니게 되었다.

그때, 시스템 창이 다시 떠올랐다.

띠링!

----

[STORM ULTIMATE PHAZE 볼링공, 16파운드 +1]

등급: [레어]

설명: [정보를 불러오는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불]

옵션: [관통], [점화]

----

잔망스러운 +1 표시와 함께, 강화석에 있던 옵션이 고스란히 볼링공에 부여되었다.

마치 이 볼링공이 원래부터 게임 속 아이템이었다는 것처럼.

"···조···좋은데?"

당연하게도, 다음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거, 상품으로 등록해 줘."

미처 몰랐다.

내가 진짜 '파이어 볼러'가 될 줄은.

20. 파이어 볼 (2)

빛이라고는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궁전.

긴 복도로 늘어선 알현실에는 외로운 존재가 홀로 왕좌를 지키고 있었다.

펄럭.

그의 발걸음에 따라, 걸치고 있던 흑색 휘장이 바닥을 긁었다.

절그럭절그럭 요동치는 갑옷.

그 위로 백골의 붉은색 안광이 드리웠다.

"허···"

짧은 탄식을 뱉었다.

수하의 비보를 들은 터였으니.

물론 진정한 죽음은 아니었다.

카멜롯의 기사들에게는 생이란 개념 자체가 전무했으니.

그저, 망령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그들을 표현하기엔 충분했다.

바로 그 망령, 해골기사 그웨인의 혼이 자신에게 되돌아온 터였다.

혼은 전했다.

-마법사를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기사왕은 그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 마법사라니? 그 콧대 높은 놈들이 벌써부터 이런 구멍가게까지 들쑤시고 다닐 리 없어."

이제 막 '개척'이 시작된 지구 차원이었다.

다차원 상공회의소가 진입을 허가한 등급은 9위계부터 최대 8위계까지가 고작.

이 빠듯한 조건을 맞추기 위해, 본래 5위계였던 기사왕 자신 또한 굴욕적인 등급하락을 감수한 참이었다.

반면, 마법사들이 어떤 존재인가?

귀족적인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등급과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족속들이었다.

기사왕 자신처럼 비굴한 방식으로 지구를 찾을 리 만무했다.

시이익-

또 다른 혼 하나가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기사왕을 따르는 망령 중 가장 강력한 혼, 란슬롯이었다.

"아무래도 주군만큼이나 과감한 놈인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놈도 개방이 전면화 되기 전에 여길 선점할 생각인 거야."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기사왕은 잠시 고민했다.

등급 하락까지 감수하는 기행을 차원 단위에서 벌일 리가 없었다.

보나마나 돈독이 지독하게 오른 사짜 마법사의 무모한 단독 행동일 터.

잠시 기사들을 모아 놈을 처리할까도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놔둬라. 어차피 성 밖에서 벌어진 일이니. 무엇보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야."

"···'수확'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웨인이 당한 건 아쉽지만··· 강화석이야 다시 얻으면 그만이야. 슬슬 '숙성'도 마무리되어가고 있으니."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성, 카멜롯.

그것은 일종의 생명의 용광로였다.

그 안에 담긴 생명체들을 대가로 강화석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즉, 기사왕으로서는 어쩌다 끼어든 날파리를 처리하는 것보다, 카멜롯을 통해 강화석을 추수하는 문제가 훨씬 더 시급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탕 하는 거야."

남모를 흥분에 싸인 기사왕.

한편 무언가 낌새를 차린 란슬롯이 그에게 전했다.

"···뭔가 성으로 들어왔군요. 인간들인 것 같습니다."

"또 그 장난감이겠지. 놈들도 호기심이 여간하군. 결국 다 죽을 운명인 것을···"

"어떻게 할까요?"

"내버려 둬라. 어차피 곧 지붕이 올라갈 테니. 카멜롯에게 줄 밥이 늘어났을 뿐이야."

어차피 이곳 성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독 안에 든 쥐였다.

'숙성'이 완료된다면 알아서 그 제물이 될 테니까.

그렇게, 기사왕은 잊어버렸다.

낯선 손님의 방문을.

***

투두두두두-!

블랙호크의 프로펠러가 우렁찬 소리를 뿜었다.

끼에엑!

와이번 몇 마리가 나타나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화르르륵!

주변으로 아찔하게 불타는 볼링공 몇 개를 휘둘러주니 금세 줄행랑을 쳤다.

기사왕의 성이 남산을 끼고 명동까지 드리워 있었기에, 도착까지는 십여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눈앞에 드리운 성채.

하지만 정작 성벽은 황량했다.

널리 알려진 중세 성벽의 형태라면 그 위를 지키는 병력이 있어야 했겠지만, 기사왕의 성은 애당초 그런 설계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투두두두-

우리는 작은 누나의 자취방이 있는 을지로4가에 다다랐고, 

이용수의 유려한 운전 솜씨를 앞세워, 천천히 운동 경기장 구멍처럼 생긴 성벽의 커다란 천장 구멍으로 빠져들어 갔다. 

우리의 머리맡으로도 금세 그늘이 쏟아졌다.

그리고 즉시, 공격이 시작됐다.

카가가가각!

시작은 프로펠러였다.

끼익!

끽!

새카맣게 모여든 박쥐들이 미친 듯이 프로펠러를 향해 달려들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프로펠러가 놈들의 살갗을 찢었지만, 놈들은 죽음도 불사했다.

투두두두-!

소총을 쏘아 놈들을 떨어냈지만,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로터에 달라붙은 놈들을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칫하다간 우리 손으로 로터를 고장 낼 수도 있으니.

트득!

트드드득!

헬기는 놈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휘청거렸다.

이용수가 기지를 발휘했고, 차츰 누나의 자취방인 구축 오피스텔에 가까워졌으나···

카각!

종로 4가 사거리에 높게 솟아 있던 카드사 건물에 날개 끝이 걸려버렸다.

후웅!

헬기가 휘청거렸고···

결국 우리의 운명은 추락이었다.

위잉!

재빨리 를 사용했다.

대상은 이용수와 나.

후루룩!

우리 두사람은 눈 깜짝할 새 아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한편, 포탈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수차례나 이리저리 뒤집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퍼엉!

액션의 한 장면을 마무리하듯, 군으로부터 받은 블랙호크가 폭발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폭발이 이곳 아공간으로 흘러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착륙은 착륙이었다.

성공적이지는 않았어도.

[표준 가정용 분말 소화기 3.3kg, 가격은 19,900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소화기를 든 채, 타오르는 불길을 잡으며 천천히 헬기를 빠져나왔다.

폭발로 인해 우리가 죽었으리라 생각한 것인지, 박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곳저곳에 떨어진 박쥐들의 사체.

를 사용해 알뜰하게 마석을 챙겼다.

사거리 곳곳을 메우고 있는 조명 가게들.

그중 한 곳을 끼고 돌아 들어가자, 작은 누나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목이 나왔다.

그 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뚫려있지도 않았다.

일전에 보았던 스켈레톤은 물론, 좀비처럼 온몸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들개들이 우리를 반겼다.

심지어 그 크기가 사람만 했는데, 줄줄 녹색 침을 흘리는 것이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위협적이진 않았다.

볼링공을 던져 놈들을 불살라 버릴 수 있을 테니.

"어디···"

하지만, 그렇게 공격을 시작해보려던 때였다.

퍼억!

스-팡!

경쾌한 소리가 길목 반대편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그 박자에 맞추듯, 스켈레톤의 두개골이 빙그르르 회전하며 하늘로 치솟았다.

끼잉!

깽!

그 아래로는 좀비 들개들이 양옆으로 걷어차이며, 골목 주변으로 녹색 스프레이를 뿌려댔다.

골목을 메우고 있던 놈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를 향했지만···

달그락!

깨앵!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싸늘한 사체가 되어 길바닥을 장식했다.

그렇게, 나는 소리의 주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김솔!"

그녀의 정체는 김씨스터즈 2호.

작은누나였다.

.

.

.

어린 시절.

큰누나가 그저 공부를 못했다면, 작은누나는 그야말로 파멸적인 성적으로 학업과 관련한 모든 기대를 저버리게 했다.

대신 운동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는데, 일찍이 발견한 재능을 살려 어려서부터 격투기 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 명성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나의 중학교 시절 내내 별명은 '김솔 동생'으로 고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그 어떤 양아치 고딩들을 마주쳐도 김솔이라는 이름만 대면 홍해처럼 길이 갈라지곤 했다.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고 했던가.

김솔은 자신의 무력을 허투루 사용하는 경우가 없었고, 덕분에 누굴 때렸다는 이유로 불려가거나 한 소식을 들어본바 또한 없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내게 있어서는···

"김정겸, 뒤지기 싫으면 컴퓨터 놓고 나와라."

그 누구보다도 형제 같은 존재였다.

.

.

.

서로를 마주보는 두 여자.

김씨스터즈가 재회했다.

"···오랜만이다. 1호."

"못 본 사이 더 강해졌구나, 2호···"

가벼운 포옹을 나눈 두 사람이 주먹을 맞부딪혔다.

합체 로봇의 잃어버린 두 다리가 마침내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큰누나는 내과과장의 횡포와 싸우고 있었고, 작은 누나 김솔은 해골과 좀비를 쥐잡듯 패며 갑작스레 나타난 멸망에 대처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 아포칼립스 시대를 굳건히 해쳐나갈만큼 강인한 신여성들이었다.

김솔은 난데없이 헬기가 추락하는 걸 보고 집에서 뛰쳐나왔다고 했다.

"뭐··· 원래 이 시간에 산책하기는 해. 겸사겸사 나왔지."

"산책···?"

아포칼립스에 산책이라니.

김솔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물론, 마냥 즐겁게만 있던 건 아닌 듯했다.

"혹시 엄마아빠 소식은 못 들어봤어? 여기는 무슨 이상한 벽이 세워져서 그런지 전화도 안 터지더라고··· 마지막으로 너랑 연락했던 거 기억하지?"

"바깥에서도 전화 안 터지는 건 마찬가지야. 그래서 지금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가는 중이고."

나는 함께 있던 이용수에 대한 소개와 함께, 내가 각성한 아공간 능력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

"아니, 그런 게 된다고···? 레벨이 몇인데?"

이 모든 게 게임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고조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작 놀란 건 나였다.

"···레벨이 5라고?"

"뭘 그리 놀라냐? 마석 250개만 모으면 되는 걸···"

그녀는 레벨업마다 마석 50개가 요구되었으며, 지금까지 레벨을 올리더라도 그 요구치가 늘어나는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각성한 능력, 사람에 따라 요구되는 마석의 양이 제각기 다른 모양이었다.

이용수도 똑같이 50개였던 걸 보면, 아무래도 100개, 1000개씩 마석이 요구되는 내 쪽이 특이 케이스일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혈혈단신으로 마석 250개를 수급한 김솔의 괴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 괴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던 길목을 뚫어버린 걸 두 눈으로 목도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땅에 떨어진 돈을 줍지 않을 순 없었다.

상품회수를 사용해 후루룩 마석만 골라 빨아들이고 있자니, 김솔이 나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혼자 치트 돌렸냐? 왜 이딴 게 되는 거야?"

"설명하자면 길다."

"개사기네 진짜···"

그녀는 세상 불합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툴툴 바닥에 놓인 뼈다귀를 걷어찼다.

그때였다.

쐐애애액!

나를 향해 뾰족한 물체가 날아들었지만,

타아앙!

김솔이 주먹을 내질러 막아냈다.

그야말로 귀신 같은 속도였다.

김솔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가 각성한 능력의 이름은 였다.

신체에 닿는 부위까지 자유자재로 방어 장막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었는데, 김솔은 이를 센스 좋게 공방에 두루 활용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주먹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뾰족한 물체는 손이었다.

정확히는 갑옷을 입은 또 다른 해골기사가 두 손을 채찍처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파지지직-!

전기 성질이 부여된 것인지, 바늘처럼 뾰족한 손가락 뼈마디에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놀랍게도, 김솔은 녀석과 구면인 듯했다.

"얘 또 나왔네. 그거 아냐? 얘 말도 할 줄 안다?"

알고는 있지만, 그걸 듣고도 여태 살아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물었다.

"···이길 수 있어?"

"아니? 얘는 암만 때려도 안 죽더라고. 그래도···"

카앙!

김솔이 놈의 날카로운 공격을 튕겨냈다.

그러곤 답했다.

"···진 적은 없어."

공격이 여러 차례 막혔음에도, 해골 기사는 꿋꿋이 공격을 이어 나갔다.

김솔을 향해 쇄도하는 공격.

가뿐하게 자세를 굽힌 김솔이 놈의 배에 로우 어퍼를 꽂아 넣었지만···

터엉!

놈에게는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다.

김솔이 나를 보며 외쳤다.

"계속 주고받으라면 할 수는 있는데···, 어떡할까? 네 아공간인지 뭔지에라도 들어갈까?"

예상했던 대로 또 다른 해골기사, 그웨인처럼 가공할 만한 맷집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작은 누나를 데리고 아공간으로 피신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그 사이 새로운 무기를 얻은 참이었다.

"일단 그놈 발 좀 묶어줄 수 있어?"

"왜?"

"잘하면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타앙! 탕!

김솔이 주먹을 연달아 내질렀고, 그때마다 쫄깃한 파공음이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갔다.

애당초 별 타격이 없는 공격.

놈은 아예 방어를 포기한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끝을 찔러 넣을 타이밍을.

하지만, 다른 타이밍도 있었다.

내가 신호를 주자, 김솔이 훌쩍 놈으로부터 비켜섰고···

쐐애애액!

불 붙은 볼링공 네 개가 놈을 향해 쇄도했다.

반면, 놈은 놀란 눈치였다.

날아드는 불길을 바라보며, 놈이 망연히 읊조렸다.

"파이어 볼···?"

콰과광!

이어지는 폭음.

"아니야, 이건······"

놈의 허망한 목소리가 먼지 섞인 연기와 함께 천천히 흩어졌을 땐···

놈이 박살 난 갑옷과 함께 쓰러져 있었다.

나 또한 망연히 읊조렸다.

"···이렇게 바로 죽는다고?"

놈의 갑옷 사이, 푸른빛으로 빛나는 강화석이 눈에 들어왔다.

21. 어둠 속으로 (1)

산산이 조각난 갑옷 속.

은은히 빛나는 강화석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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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석(D)]

속성 : 전기

옵션 : [관통], [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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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간단하게 짝이 없는 설명.

다만 그 속성이 전기라는 것과 [점화] 대신 [감전]이라는 옵션이 달린 것만 달랐다.

직전에 만났던 해골기사 그웨인과 달리, 놈은 볼링공 몇 발을 맞고 단숨에 죽어버렸다.

똑같은 16파운드짜리 볼링공.

출하 속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차이라고 한다면···

'···강화를 한 것밖에 없는데.'

그러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옵션이 하나 달려있기는 했다.

[관통]

말 그대로 꿰뚫는다는 뜻이다.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점화]나 [감전]과 달리 정확히 어떤 기능을 하는지 명확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이게 놈들의 방어를 뚫는 수단이라면?'

[관통]이라는 글씨가 그저 장식은 아닐 터였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강화석은 현대 화기가 통하지 않는 상위 개체들을 처치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한번 두고 보자.'

그 효과에 대해서는 차차 확인해나가면 될 것이었다.

마침 두 번째 강화석이 손에 들어왔으니.

물론 얻은 건 강화석 뿐만이 아니었다.

개당 100개로 환산되는 대형 마나석 두 개.

도합 200개의 마석이 추가로 내 주머니에 들어온 참이었다.

훌훌 먼지를 털어냈다.

"그럼···"

어찌어찌 해골 기사를 해치웠다.

이제 여기를 벗어날 차례였지만···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며칠 성벽 안에서 고초를 겪은 김솔이 증언했다.

"나가려고 몇 번이나 해봤지. 근데··· 여기 애초에 나가는 문 같은 게 없어."

중세 느낌의 고성.

쇠사슬에 매달린 육중한 문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무리 봐도 거대한 정문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성벽에 맞붙은 내성(內城)에 작은 출입구가 나 있을 뿐.

그건 출구라기보다는 또 다른 장소로 이어질 입구에 가까웠다.

물론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고민이었다.

아공간에 담아 온 헬기가 있었으니.

[UH-60, 블랙호크, 가격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덜컹!

포탈에서 헬기가 빠져나왔다.

능력을 사용하는 족족, 김솔은 진심으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하다 하다 헬기를 소환하네···"

탈출하는 건 좋지만, 내심 분한 눈치였다.

김솔은 일평생 게임에서만큼은 내게 밀린 적이 없었으니까.

투두두두-!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헬기는 무심하게 세차게 날개를 회전시킬 뿐이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바람을 느끼며, 우선은 작은누나를 포탈에 집어 넣었다.

주먹이 무기인 김솔이 공중에서 활약할 일은 딱히 없을 테니까.

머리 위로 보이는 것은 칙칙한 성벽에 둘러싸인 푸른 하늘.

우리가 뚫고 지나가야 할 길목이었다.

하지만···

투두두두두-!

헬기가 하늘로 떠오른 지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이변이 일어났다.

"······?"

분명 뻥 뚫려 있던 하늘이었다.

쿠구구구구···

그 위로 거대한 솥뚜껑이라도 덮이는 것처럼, 금세 우리를 향해 칠흑 같은 어둠이 들이닥쳤다.

쿠우웅······

그 거대한 문이 닫히는 소리 앞에, 헬기는 독 안에 든 파리처럼 무력해졌다.

그리고···

카가가가각!

성벽을 넘어 들어올 때 만났던 박쥐들이 또 다시 달려들었다.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놈들을 떨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갈 수도 없어.'

놈들이 없다하여, 탈출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지붕에 의해 위로 뚫려 있던 거대한 하늘이 일순 자취를 감추었으니까.

파다다다닥!

헬기 창문을 새카맣게 채우는 박쥐들.

콰아앙!

콰앙!

강화된 볼링공을 쏘아 천장, 그리고 성벽을 연신 때려보았지만···

거대한 성채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더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이용수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즉시 아공간 포탈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휘청.

텅 비워진 조종석과 흔들리는 헬기의 풍경.

두 번째 블랙호크 다운이었다.

.

.

.

아공간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그야말로 검은 도화지 그 자체였다.

하늘이 덮이며 외부로부터의 빛이 완전히 차단된 탓이다.

전력마저 완전히 끊긴 도시이니,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외에는 달리 찾을 것이 없었다.

밖의 상황이래봤자 불 보듯 뻔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격추된 블랙호크.

그 근처를 스켈레톤과 좀비 들개들이 서성거리고 있을 터였다.

이제는 우리를 덮친 미친 박쥐 떼까지.

이로써 나는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우리가 이곳에 갇혔다는 자명한 사실.

그리도 두 번째는···

김솔이 탈진 직전이었다는 것.

"······"

마냥 쌩쌩한 줄 알았던 작은 누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물류센터 한편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매트리스.

통신대대장 한경호를 간호하던 곳이다.

아무래도 이곳 아공간이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그간의 긴장이 풀려 잠에 든 모양이었다.

새삼 낯선 모습이었다.

나는 일평생 김솔의 강인한 모습만 보며 자라왔으니.

아무리 그녀라 한들, 멸망한 세계는 버겁고 무거운 것이었다.

"일단은···"

한숨 돌리기로 했다.

포탈 너머,

때 이른 밤을 맞이한 도시가 물결처럼 아른거렸다.

***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갈 즈음.

-!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휴게실 침대로 옮겨 두었던 김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딜 갔지?"

김솔은 금세 발견되었다.

픽킹 스테이션에 도착하자마자, 눈꼽도 떼지 않은 채 상자 하나를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품에 가득 안기는 커다란 상자.

팍스가 뒤늦게나마 주문목록을 확인해주었다.

[플레이스테이션5 디스크에디션, CFI-1218A01, 가격은 618,090원입니다.]

작은 누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정겸, 사랑한다."

"······"

이 지독한 겜순이께서 이런 아포칼립스 상황에서도 도파민을 추구하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지금 하겠다는 건 아니지···?"

"···그게 내가 우울한 이유란다."

그녀는 벅벅 손톱을 세우면서도, 정작 박스를 뜯지는 못했다.

그새 언제 친해진 것인지는 몰라도, 이용수의 딸 유정이가 친근하게 김솔의 근처로 다가왔다.

김솔이 유정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정아, 이 상자 안에는 세계가 담겨 있단다."

나는 유정이를 떼어내 주변을 서성이던 이용수에게 맡겼다.

초면에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었다.

이런저런 소란으로 잠기운을 몰아낸 참,

"야! 일어났어?"

계단 쪽에서 큰누나가 우리를 불렀다.

그녀를 따라 2층으로 향하자, 아니나 다를까 이용수의 아내 오지수가 직원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누나가 일을 거들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오지수가 내게 불만 사항을 접수했다.

"···왜들 이리 식사를 안 챙겨요? 기껏 만들었는데 식고, 버리고··· 지금까지 냉동실로 들어간 음식도 수북하다고요."

"아···"

바깥일에 치중하다 보니, 그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프레시 센터의 신선한 음식들을 뒤로하고 그때그때 가공식품으로 허기를 채웠던 걸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는 아포칼립스를 가장하며 지내왔는지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안 상하게 상품으로 등록해드릴까요?"

"정 없게··· 그런 말이 아니라요···"

정 없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결국, 그녀의 요지는 간단했다.

"잘 좀 먹고 나가요. 그래야 힘내서 남은 가족들도 찾죠."

그녀의 뒤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오색찬란한 밥상이 놓여 있었다.

밥심은 강인한 마음의 힘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그 강력한 힘에 굴복하여 전투적으로 수저를 들었다.

그렇게,

젓가락이 전투기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뭐부터 먹어야 하지?'

공습 위치를 도무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달큰한 소스가 뭉근하게 발라져 있는 장어구이.

자작하게 부쳐낸 호박전과 육전.

육질이 촉촉하게 젖은 소갈비찜과 새콤한 고추장 양념 위로 깨가 솔솔 뿌려져 있는 도라지무침까지.

화려한 라인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모두 출발은 동일했다.

구수하게 김을 피워내는 아욱 된장국.

보드라운 아욱이 솜이불처럼 혀를 덮었고, 섬유 사이로 구수한 국물이 흘러나왔다.

에너지 그 자체를 마시는 기분.

피로 그 자체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

그 정겨움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

어둠에 싸인 도시.

유일한 길이었던 하늘이 막혀버렸다.

'어떻게든 나가야겠는데···'

처음에는 이곳 성 자체를 아공간에 넣어버리는 것도 생각했다.

이미 나는 레벨 3을 달성하고 난 뒤였으니.

이 기묘한 성의 정체가 무엇이었든 간에, 곧장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커.'

스스로 자라나는 성.

왜 자라나는지, 갑자기 뚜껑은 왜 덮인 것인지.

나는 이 성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전혀 없었다.

섣불리 넣었다가 물류센터에까지 영향을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능력이 아깝기도 하고.'

레벨마다 단 한 번만 수용이 가능한 아공간 능력이다.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최대한 도움이 될만한 공간을 넣는 편이 좋았다.

이런 거대한 흉물이 아니라.

그리 생각을 정리하고 아니, 결국 남은 길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김솔이 말했다.

"성으로 들어가야 돼. 뭐가 됐든 성벽과 연결된 곳이니까, 안을 해집다 보면 밖으로 나가는 길도 언젠가 나오겠지."

하지만 문제는···

이용수가 말했다.

"출입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요? 박쥐들 탓에···"

헬기가 성벽의 그늘에 다다랐을 때, 그리고 방금처럼 완전히 어둠에 잠겼을 때.

놈들은 여지없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미루어 짐작하기론, 어두운 곳에 머무르는 것이 놈들의 습성일 듯싶었다.

소총을 난사해서 잡아내는 수도 있겠으나···

"크기가 작기도 하고··· 개체 수가 너무 많아요."

접근해 들어오는 놈들을 빠짐없이 잡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붙은 볼링공이나, 단검을 이용한 , 그리고 도 마찬가지였다.

초당 네 발씩 무기를 뿜어내더라도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을 만큼, 놈들은 많고 또 촘촘했다.

큰누나가 의견을 냈다.

"여기 물류센터에서 파는 조명을 쏴보면 어때? 최대한 강한 걸로."

빛 속성 힐러다운 좋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조명이랑 배터리랑 전부 들고 다녀야 할 텐데···"

어쩐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장비 탓에 두 손이 묶일뿐더러, 움직일 때마다 사각지대가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니.

잠시 고민하던 나는 팍스를 불렀다.

한 가지 실험해보고 싶은 게 떠올랐다.

.

.

.

[비용 250]

◈ 아공간 실험실 (New!)

-아공간에 등록된 상품들을 조합하고 분류 및 가감할 수 있는 연구실을 설치합니다.

아공간에 등록된 상품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다.

팍스 풀필먼트 센터의 각종 잡화류는 물론, 국통사의 통신장비와 총기, 탄약, 차량까지.

그것들을 조합하고 변형할 수 있다는 것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쉽사리 감이 오질 않았다.

팍스가 간단히 부연해주었다.

[첫째로, 조합을 사용하게 되면 물리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두 개 이상의 사물을 서로 덧붙일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일전에 사용하신 볼링공 두 개를 겹쳐 눈사람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전에도 탄창에 총알을 넣어 상품으로 등록한다든지, 안전핀과 클립이 빠진 수류탄을 등록한다든지 하는 꼼수는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간단한 조작을 넘어, 완전히 물건을 원하는 형태로 덧붙여버리는 느낌이었다.

다음으로는 '분류 및 가감'이었다.

[분류 및 가감을 사용하면 등록된 사물의 원하는 부분을 따로 떼거나, 그 양을 늘리거나 줄여 출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L짜리 생수에서 페트 재질을 제거하여 오로지 50L의 물만 출하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얼추 이해가 되었다.

'조합'을 이용한다면 도끼나 칼을 조합해 기상천외한 무기를 디자인해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분류 및 가감'을 이용한다면 한 번에 수십 리터의 기름을 쏟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확실히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리라 싶었기에, 냉큼 비용을 지불했다.

[마석 250개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37 개입니다.]

팍스가 대답했다.

***

나와 이용수, 그리고 두 누나까지.

총 네 명이 군용 코란도 스포츠에 몸을 실었다.

검게 칠해진 바깥 풍경.

곧 이용수가 액셀을 밟으면 은빛 코란도가 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갈 터였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차량이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엄청 튼튼하겠는데요."

이용수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겉으로만 보면 장갑차를 방불케 했다.

실험실에서 '분류 및 가감'을 이용해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제거했다.

그렇게 철판만 남은 둥근 프라이팬을 유리면을 비롯한 차량의 약한 부분에 덧대 붙였다.

차체가 좀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박쥐들의 자잘한 공격을 막아내기엔 충분할 터.

우우웅.

코란도의 두꺼운 등껍질이 된 수십 개의 프라이팬.

완전히 하나의 사물이 되어서인지, 차량의 떨림에도 그 흔한 달그락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부우웅!

우리는, 그렇게 포탈 밖을 빠져나왔다.

끽!

끼익!

여느 때와 같이, 박쥐들이 날아들었지만···

이제 상황은 여느 때와 같지 않았다.

달칵!

조수석 천장에서 데롱 내려온 스위치를 켜자, 차량의 헤더에서 사방으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차에 융합한 건 비단 프라이팬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트렁크에 실어 놓은 캠핑용 파워뱅크 배터리가 전원을 공급했다.

차량의 헤더에는 으레 사진관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사각 조명이 360도 사방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구의 형태를 띠게 된 조명은 완연한 하늘의 태양을 모방하듯 티끌만 한 그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쏘아진 빛은 비단 박쥐들을 내쫓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아예 타 버리는데요?"

가아아아악!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박쥐들이 화마에 삼켜졌다.

그리고···

툭.

투둑.

흔적도 없이 사라진 놈들 아래로, 마석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두두둑.

투두두두두!

난데없는 기상변화.

우박처럼 떨어진 마석들이 프라이팬에 팅팅 부딪히며 승전고를 울렸다.

그 축연을 를 통해 모조리 빨아들였음은 물론이다.

어둠 속에 잠긴 성채.

우리는 천천히 출구를 찾아 나섰다.

단 한 마리의 반딧불이가 되어.

22. 어둠 속으로 (2)

성벽에 연결된 내성.

그 출입구로 들어서자, 어둠에 잠긴 고풍스러운 회랑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늘어선 기둥.

차로 지날 수 있는 구역은 아니었기에, 우선 이용수는 아공간에 들어가 있도록 했다.

배리어 능력을 두른 작은 누나 김솔이 전위에 섰고, 큰누나를 중간에 둔 채 내가 뒤따랐다.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은 저마다 휴대용 서치라이트를 든 채, 천천히 어둠을 헤쳐 나갔다.

내부는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눈앞으로 뻗은 회랑은 아주 깊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끝에 좌우로 연결되는 또 다른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간단히 말해 양 갈래 길이었지만···

아직은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아!"

앞장서던 김솔이 목덜미를 짚었다.

그리고···

사삭!

움직이는 그림자 하나가 포착됐다.

하지만 서치라이트를 아무리 휘저어봐도, 두꺼운 기둥으로 둘러싸인 회랑, 그리고 어두운 적막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큰누나가 작은누나 김솔의 목덜미에 빛을 비추자, 두 개의 이빨 자국이 선명히 드러났다.

김솔이 길길 날뛰었다.

"뭐야, 뭐 물린 거야?"

"잠깐 기다려 봐."

큰누나의 손을 가져다 대자, 은은한 빛과 함께 금세 상처가 아물었다.

"아··· 간지러워."

김솔은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짜증 나는 여름날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삭!

또다시 놈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물건을 출하했다.

코란도에 장착했던 스튜디오 조명이었다.

화악!

어둡고 축축하던 회랑이 선명한 태양 빛 아래 놓였다.

그러자···

멀찍이 기울어진 기둥의 그림자와 함께, 놈들의 신체가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두 송곳니, 그리고 박쥐 날개.

우리는 판타지 세계에 등장하는, 아주 고전적인 종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

.

.

"아 왜 이렇게 가렵지?"

"조금만 참거라 중생아."

다행히 김솔은 눈동자 색이 뒤바뀌며 괴로워한다든지, 대뜸 피를 갈구한다든지 하는 흡혈귀들의 클리셰를 답습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누나의 치유 능력 덕에, 남아 있던 상처마저 말끔하게 사라진 터였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삭!

사사사삭!

삭!

놈이 한 마리가 아니었다는 것.

회랑 기둥마다 십수 마리의 뱀파이어들이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삭!

사삭!

한 마리가 날아들어 시선을 끌더니, 이내 다른 한 마리가 다가와 목덜미를 노렸다.

다가온 놈을 낚아채려 들면 또 어느새 새로운 한 마리가 나타나 팔뚝에 이빨 자국을 새기곤 돌아갔다.

물론 큰누나의 힐 덕분에 크게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빼앗긴 피까지 재생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금세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찾아들었다.

사사삭!

사삭!

말도 안 되게 빠른 스피드.

좀처럼 공격을 받아칠 기회가 오지 않았다.

투다다다다다!

소총을 꺼내어 쏘아보았지만, 대다수 빗나갔을뿐더러 몇 발 맞더라도 일전의 해골 기사들처럼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밖에 상주하던 박쥐들보다는 확실히 상위 개체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관통] 옵션이 붙은 볼링공+1이라면 효과가 있겠지만, 아무리 150km/h의 속도로 자동추적을 날린다 해도 놈들의 속도를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그저···

콰아앙!

애꿎은 회랑의 기둥만 때릴 뿐.

상황이 이쯤 되자,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작은누나 김솔이 우리 중 최고의 맛집이었다는 사실.

사삭!

뱀파이어가 달려들었고···

타앙!

김솔이 배리어를 두른 주먹으로 놈을 쫓아냈다.

스삭!

탕!

이들은 서로 캐치볼을 하듯, 묘한 여름날의 생태계를 연출했다.

그리고 뱀파이어들은···

부우우우애애앵푸드득!

잊을 만하면 귓가에 소름끼치는 날갯짓 소리를 들려주었다.

"아, 진짜 개 짜증 나네!?"

김솔이 주먹을 휘둘렀다.

모기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여자.

그것이 내 누나였다.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했다.

"왜 자꾸 나만 무는 거야?"

"땀내 나서 그런 거 아닐까?"

"죽는다, 김정겸."

서서히 후텁지근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난공불락처럼 느껴지는 회랑.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잡을 수 없다면 피하는 수밖에.

우리는 모기장 같은 포탈을 펼쳐두곤, 곧장 아공간 내부로 되돌아왔다.

팅! 팅!

뱀파이어들이 망에 걸린 모기처럼 포탈 주변을 기웃거렸다.

지저분한 날갯짓 소리를 흘리며.

***

"어렵네···"

아직 제대로 된 출구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뱀파이어의 공격에 지속해서 노출된다면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피곤해질지 불 보듯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두 번째 해골기사를 잡고 얻은 강화석을 사용하기로.

처음에는 소총을 강화하는 쪽을 고민했다.

하지만 소총은 탄환을 발사하는 역할을 할 뿐, 직접 적을 타격하는 물체는 아니었다.

소총에 [관통] 옵션을 달아봤자, 탄환에까지 그 효과가 적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렇다고···

"···총알에 쓰기도 좀 그래."

본래 소총은 공이가 탄피의 뇌관을 때리며 발사되는 구조다.

일종의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는 소린데, 만일 [감전] 옵션이 이때 발동되기라도 한다면, 소총을 잡고 있는 내가 먼저 사망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일전에 [점화]가 붙어 있던 불속성 강화석을 소총 대신 볼링공에 사용했던 것 또한 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뭘 골랐냐고?

이곳은 실험실의 모의 가상공간.

팍스가 내가 주문한 상품의 홀로그램을 공중에 띄워주었다.

[전기 해충 모기퇴치기 특대형 IA-ic200, 가격은 59,000원입니다.]

우우우웅-

은은한 푸른빛에 감싸인 신비로운 물건.

모서리가 둥근 타워 모양의 포충기였다.

"은근히 그럴싸하네."

고심해서 고른 물건이다.

그 어떤 물건이라도 시속 150km의 공격 속도로 놈들을 타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지만, 방어는 그 자체로 최고의 방어이기도 하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지난여름, 방충망을 넘어오던 우리의 그리운 아디다스 모기와 팅커벨 친구들이 떠올렸다.

탁! 타닥!

더운 여름, 우리의 날벌레 친구들을 한층 더 뜨겁게 만들어주었던 짜릿한 물건.

나는 그 물건에 어제 얻은 강화석을 사용해볼 작정이었다.

[강화석(D)]

속성 : 전기

옵션 : [관통], [감전]

이러나저러나 이것도 [관통] 옵션이 부여되어 있었다.

소총이 통하지 않는 뱀파이어들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인 수단이 될 터.

나는 이 포충기를 방패, 또는 장벽처럼 두른 채 회랑을 벗어날 계획이었다.

팍스가 물었다.

[해당 상품에 강화석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적용해 줘."

[알겠습니다.]

[강화석 한 개 받았습니다.]

[강화 적용 중···]

[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지지-지지직!

따악!

듣기만 해도 살벌한 소리가 포충기로부터 들려왔다.

저기에 손끝이라도 닿았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 흥미로운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시스템창이 띄워준 아이템 설명이었다.

----

[전기 해충 모기퇴치기 특대형 IA-ic200 +1]

등급: [레어]

설명: [정보를 불러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전기]

옵션: [관통], [감전], [도발]

----

본래 강화석에 붙어 있던 옵션은 [관통], 그리고 [감전]이 전부였다.

하지만 한 가지 덧붙여진 것이 있었다.

"···도발?"

보통은 적의 어그로를 끄는 능력을 말한다.

더 좋은 타격 위치로 유인하거나, 또는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달리 말해···

"포충기가 하는 역할이잖아···?"

강화된 모기퇴치기에는 여전히 은은한 블루라이트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날벌레들을 사로잡기 위한 매혹적인 불빛.

그 기능이 강화된 옵션에 달려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구태여 포충기를 방패처럼 두를 필요도, 뱀파이어를 향해 힘들여 포충기를 '출하'할 필요도 없었다.

애당초 그렇게 쓰는 물건이 아니니까.

다시 말해···

그냥 밖에 놔두기만 하면 됐다.

***

따악!

딱!

전깃불에 콩 굽는 소리가 포탈 너머로 들려왔다.

옵션에 달린 [도발]이 뱀파이어들에게 확실히 먹혀들고 있었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닥!

"오, 한놈 아주 제대로 걸렸나 보네."

의 홀로그램을 조작해 한땀한땀 수십 개를 이어 붙인 포충기였다.

각각에는 캠핑용 대용량 파워뱅크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새끼들 다 뒈졌어."

우리의 김솔 여사께서 몽둥이를 들고 출타하셨다.

내가 을 이용해 만들어 준 무기였다.

----

[전기 해충 모기퇴치기 특대형 IA-ic200 + 나무 야구 배트]

등급: [준 레어]

설명: [정보를 불러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직접 설명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속성: [전기]

옵션: [관통(-1)], [감전(-1)], [도발(-1)]

----

푸른색 원형 코일이 감긴 야구 배트는 퓨전 펑크적인 광선검과 야만적인 부족장의 나무 방망이 사이를 오가는, 현대적이면서도 시대착오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냥 전기 파리채지.'

강화된 포충기와 비교하면, 성능 자체는 떨어졌다.

+1 표시가 사라졌고, 등급은 준 레어로 격하되었으며, 옵션에도 마이너스 딱지가 붙었다.

아무래도 강화된 아이템을 다른 사물과 조합하면서 기존의 힘이 약화된 듯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관통'이 붙어있기는 했다.

다시 말해···

퍽!

퍼억!

김솔 여사께서 날아드는 뱀파이어를 후드려 패기에는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이어지는 연타석 홈런.

하지만 뱀파이어의 맷집을 감당하기엔 부족했는지, '포충 배트'는 때리는 족족 부러져버렸다.

김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유히 빠던을 선보이며, 내게 손을 내밀 뿐.

나는 상품으로 등록된 '포충 배트'를 새로 출하해주었다.

퍽!

빠악!

그렇게, 회랑에서의 여름나기가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거국적인 인간의 승리였다.

.

.

.

전깃불에 구워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뱀파이어들의 사체.

아쉽게도 강화석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석은 좀 챙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낯선 존재감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은은한 푸른빛을 보고 달려들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큰누나가 작게 입을 열었다.

"···귀신?"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회랑의 기둥 사이를 타고 움직였다.

셋··· 넷···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쿠구구구구!

석벽, 기둥, 회랑을 이루는 모든 구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아치형 구조의 복도는 거대한 괴수의 목구멍을 연상시켰고, 결정적으로는 위아래로 내성의 계단이 톱니처럼 쏟아져나왔다.

두두두두두!

부르르 떨리는 자갈처럼 요동치는 바닥.

그 위아래를 뚫고 나온 계단이 서로 맞부딪히며 우리를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은 마치···

'···이빨?'

성의 구조는 당장에라도 우리를 먹어 치울 듯 맹렬했다.

며칠은 족히 굶은 짐승들의 우리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물론, 꼭 그럴 필요는 없었다.

를 이용해 누나 둘을 데리고 포탈로 들어갔다.

그러곤, 안전한 창문이 된 포탈을 바라보며 천천히 바깥 상황을 살폈다.

드드드드드득!

쇠 톱니가 맞물리는 파쇄기에 들어간다면 이런 풍경을 보게 될까?

하지만 그 어떤 충격이 있어도 파괴되지 않는 아공간 포탈이었기에, 우리는 그저 돌무더기가 이리저리 뒤섞이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우리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

그때, 풍경 속에서 죽은 뱀파이어의 사체가 돌무더기와 함께 두둥실 떠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계단을 이빨처럼 사용하는 괴상한 성채.

놈의 목적이 모두를 먹어 치우는 것이라면···

우리의 목적지는 놈의 대사 과정의 끝에 있을 터였다.

23. 어둠 속으로 (3)

"···이럴 수가 있나?"

기사왕이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어 돌아온 두 번째 기사, 라이오넬이 사념으로 전한 메시지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아이템을 가진 마법사가 침입했습니다.'

마법사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웨인을 죽인 것이 놈이었으니까.

한데···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니?"

구태여 아이템에 연연하지 않는 마법사들이다.

무기에 의존하지 않아도 월등한 힘을 자랑할 수 있으니까.

하위계 마법사들일수록 아이템 사용 자체를 치욕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 말은 반대로···

"최소 6위계는 된다는 건데···"

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충분한 경지에 오르면 작은 완드 하나쯤은 장난감처럼 들고 다니게 된다.

6위계 마법사에게 템빨을 운운하는 멍청이는 차원 전체를 뒤져도 찾아볼 수 없으니.

하지만 기사왕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 아케인의 고귀한 마법사가 갓 개척이 시작된 미개한 차원을 찾아온단 말인가?

더욱이, 서로 알 것 다 아는 사이에 왜 멀쩡한 남의 사업장에 와서 훼방을 놓는단 말인가?

"말도 안 되지. 라이오넬이 잘 못 본 게 분명해."

후우욱!

기사왕은 카멜롯의 망령들을 흩어 보냈다.

수수께끼 같은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을 뱉었다.

"···진짜였다고?"

망령들이 발견한 것은 새카맣게 구워진 사체였다.

개척을 위해 기르던 유체(幼體) 상태의 뱀파이어들.

아끼던 놈들의 죽음에 망연자실할 겨를도 없었다.

아무리 유체라 해도 준 8위계에 달하는 녀석들이었으니까.

적어도 평범한 수준의 적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뼈가 바싹 말라 들어가는 듯한 긴장감이 기사왕을 엄습했다.

그리고···

"······"

망령들의 시선이 추가적인 증거를 포착했다.

신비로운 푸른색을 내뿜는 촘촘한 창살.

난생처음 보는 생김새에, 용도조차 예상이 안 가는 흉물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아이템'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망령들을 통해 카멜롯의 대사를 따라 움직이는 푸른 '포탈'을 발견했을 때···

그는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포탈은 조작계 마법사들의 전유물이었으니.

"아···"

기사왕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케인 차원의 미치광이가 깽판을 치러 왔다는 사실을.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그가, 한 원혼을 불렀다.

"란슬롯."

"예, 주군."

"너를 소환해야겠다."

란슬롯의 혼이 빙글 돌며 만류했다.

"상공회의소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란슬롯의 소환 등급은 자그마치 7위계.

상공회의소의 제한에 맞추기 위해 8위계까지 등급을 깎아 먹은 기사왕, 자신보다도 강했다.

명백히 금지된 일이었지만,

더 이상 기사왕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미 강을 건넜다. 전 재산을 때려 부었는데··· 이대로라면 이걸로 죽나, 저걸로 죽나 똑같아."

기사왕의 뼈가 떨렸다.

"대화할 의지조차 없는 놈이다. 이곳 카멜롯의 수확을 날름 가로채려는 게 분명해. 보나 마나 제 차원에도 알리지 않고 들어왔겠지."

만일 그렇게 된다면 기사왕은 크나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상공회의소는 그런 '손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존재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악.

그것이 모든 차원 존재들이 이해하는 손실의 의미였으니까.

"···알겠습니다."

란슬롯이 무겁게 동의했다.

기사왕이 남은 세 명의 해골기사들을 불러들였다.

트리스탄, 모드레드, 퍼시발까지.

그리고···

서컹!

단칼에 이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렇게 나온 세 개의 강화석.

이들에게 투자했던 마석의 손실이 어마어마했지만, 기사왕은 눈물을 머금고 이를 감수했다.

그러곤, 그 모두를 란슬롯 하나에게 쏟아부었다.

"나와라."

쿠구구구···

허공에서 빚어지는 저주받은 갑옷.

그 안으로 세 개의 빛이 스며들었다.

이윽고, 붉은 안광을 내뿜은 란슬롯이, 자신의 주군 앞에 부복했다.

"위대한 카멜롯의 주인이시여. 명령을 내리십시오."

기사왕은 다시금 망령들의 시선을 전달받았다.

드드드···

저주받은 카멜롯 성의 출렁임.

죽은 유체 뱀파이어들의 사체를 카멜롯이 게걸스럽게 씹고 있었다.

출렁이는 석벽과 계단의 움직임 속에서, 무심히 휩쓸리고 있는 푸른 포탈이 눈에 들어왔다.

놈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카멜롯을 상징하는 가장 신성한 장소이자, 탐욕스러운 배설부이기도 한 곳.

'마법사'는 포탈을 타고 바로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펄럭!

기사왕이 망토를 휘날렸다.

"가자, 아케인 차원의 벌거숭이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따르겠습니다."

두 해골은 그렇게 나란히 걸음했다.

***

뱀파이어들의 사체는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꾸물꾸물 움직이는 성채에 의해, 갈가리 찢기며 조각이 났기 때문이다.

반면 아공간 포탈만큼은 그러한 물리적 충격으로부터 면역이었기에, '소화'의 최종 과정에서 따로 내뱉어졌다.

그렇게, 우리가 떨어진 곳은 원형 돔 천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간이었다.

출구와 가까워졌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꽤나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사실만큼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공간은 거대한 성당의 예배당과도 같은 모양새였는데, 다만 으레 성당에서 보일법한 화려한 장식이 없는 음침한 아치형 골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낸 공간이었다.

"어디···"

일단은 먼저 포탈 밖으로 빠져나왔다.

고고한 회당 사방으로 길이 뻗어있었으므로, 마땅한 출구가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려던 찰나···

쿠구구구···

거대한 석벽이 벽돌을 달그락거리며 진동했다.

가장 움직임이 심한 곳은 천장이었다.

네 개의 반구로 둘러싸인 정중앙의 돔.

그 가운데가 움찔움찔 꿈틀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막대기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달그락!

탁탁!

달그라라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터엉!

유난히 뾰족한 송곳니가 달린 두개골이 소리를 울리며 떨어졌다.

분명, 우리가 잡아낸 뱀파이어들의 유골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이 그저 평범한 성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일종의 생명체에 가까우며, 피와 살점을 포식한다는 것.

이쯤되자, 기사왕이 이 성을 어떻게 활용하려던 것인지 얼추 짐작되기 시작했다.

"이 새끼···"

거대한 성벽, 그리고 마지막 하늘을 덮은 뚜껑까지.

이곳은 영락없는 가마솥이었다.

기사왕은 성으로 둘러싸인 수십만의 시민들로 국을 끓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작은누나 김솔을 포함해서.

'진짜 아공간에 넣어버려야 하나···?'

최후의 수단으로, 그런 방법까지 고민하고 있을 찰나였다.

또각.

또각.

멀찍이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목소리와 함께.

"천하의 아케인이라는 이름이 울겠군. 이런 구멍가게까지 찾아들 정도라니···"

입구 한쪽에서 유유히 걸어오는 두 명의 해골.

놈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서 특유의 절그럭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는 투구에 기다란 푸른 천을 매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검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망토를 두른 녀석이 이 성의 주인, '기사왕'이라는 걸.

놈이 말했다.

"한 가지 묻자. 고명하신 마법사께서 대뜸 돈독이 올랐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이거야, 그런데 남의 영업장까지 와서 깽판을 치는 건 대체 무슨 이유지?"

아케인, 마법사, 영업장까지.

놈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아무리 아케인에서 왔다 해도··· 나도 이제 뒤가 없는 상황이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뭐라도 아는 내용이 있어야 말을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놈의 심기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말조차 섞기 싫다 이건가? 젠장··· 너희 마법사들이 그렇게 잘났어?"

갑자기 놈이 폭발했다.

정확히 뭐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 외계인 놈들 사이에서도 학벌 차별, 인종 차별, 고향 차별 등등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사람 사는 곳 다를 바가 하나 없었다.

놈이 펼치는 일인극이 절정에 다다랐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농담처럼 들리지? 같은 8위계끼리면 질래도 질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거기까지밖에 생각하지 못한 게 네 실수다."

​후우.

한숨을 몰아쉰 기사왕이 말했다.

"죽여라, 란슬롯."

"예, 주군."

탁!

해골 기사가 투구의 푸른 끈을 휘날리며 날아들었다.

카아앙!

놈의 검격을 포탈로 막아내자, 멀찍이 지켜보던 기사왕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황당하군. 포탈 결계를 방어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이번에는 내 공격이었다.

를 이용해 네 개의 포탈을 모두 가동했고, 을 이용해 수십 개의 불타는 볼링공을 란슬롯을 향해 출하했다.

화르륵!

매서운 불길이었다.

하지만···

슈슈슈슉!

슈슉!

텅!

타아앙!

타탕!

놈은 매서운 속도로 주먹을 휘둘러, 단 한 번의 타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건틀릿 위로 [점화]의 은은한 잔불이 어렸지만, 그뿐이었다.

여전한 위세를 뽐내는 놈은 앞서 상대한 두 명의 기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때였다.

"잠깐···!"

기사왕이 다급히 수하를 멈춰 세웠다.

란슬롯 또한 휙 하니 제 주인의 곁으로 되돌아갔다.

기사왕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마법사가 아니구나?"

드디어 들켰다.

놈은 뼈다귀를 부르르 떨어가며, 기적이라도 본 듯 중얼거렸다.

"설마 인간인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양의 아이템을···"

아이템.

아무래도 불타는 볼링공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강화석을 사용한 물건이라 뭐가 다르다 싶긴 했었지만, 그게 기사왕의 눈길을 끌 줄은 미처 몰랐다.

기사왕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꽃밭을 거닐 듯, 주변에 널린 수십 개의 불꽃을 두런거리면서.

놈의 시선이 내게 도착했다.

기억났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눈빛.

전역을 한 달 앞두었을 즈음, 날 보던 행정보급관이 분명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해골에게 눈 따위는 없지만서도.

놈이 말했다.

"너, 아이템을 복제할 수 있구나. 그렇지?"

들켰다.

딱히 숨긴 적은 없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놈은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런 미친 축복을 보았나! 인간··· 네가 지금 어떤 능력을 얻은 건지 알기나 해?"

몰랐다.

가족들을 데리고 이 더러운 성을 떠나고 싶을 뿐.

그저 저 까다로운 란슬롯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참이었다.

놈이 내게 제안했다.

"너, 나와 동업하자. 내 말을 들어보면, 분명 너에게도 내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놈이 저벅저벅 회당의 기둥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기둥을 탕탕 두드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전문하사가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직업인지 설명하기 위해 혀를 놀리는 행보관의 모습이었다.

"네가 아이템을 복제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카멜롯을 이용해 강화석을 생산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무한으로 강화된 아이템을, 무한으로 찍어낼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오···"

제법 구미가 당겼다.

무한히 찍어내는 건 이미 하고 있는 일이지만, 강화석이 보충된다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더 높은 등급의 아이템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

"뭐, 중간에 인신공양 과정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강화석을 얻을 수 있는 마당에 그게 대수는 아니다."

"아···"

그건 별로였다.

아무리 강화석이 필요하다 한들, 무고한 사람들을 갈아 넣어서까지 얻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내 굳은 표정 때문일까.

놈의 기색에서 은은한 살기가 돌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제안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강요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전력의 우위를 확인한 이상, 놈은 나를 제압해서라도 제 구미에 맞는 노예로 쓰려할 테니까.

나는 표정을 풀곤, 놈에게 물었다.

"이 카멜롯이라는 성··· 제대로 통제할 수 있겠나? 멋대로 나까지 먹어 치우면 곤란할 텐데."

"흐흐··· 촌놈답게 귀여운 걱정이구나. 걱정 마라, 이 카멜롯 또한 '아이템'이니까. 식탐이 많은 놈이기는 하지만 주인의 통제에 벗어나지는 못해."

내 불안을 덜어주려는 것일까, 기사왕이 말했다.

"오히려 너는 더 안전해질 거다. 이제 이 카멜롯에 속한 기사들이 너를 지켜줄 테니."

놈이 옆에 선 란슬롯의 갑옷을 텅텅 두드렸다.

그 든든함을 너도 한번 느껴보라는 듯이.

과연, 카멜롯의 기능은 비단 강화석을 생산하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주한 해골기사들.

그들 모두가 바로 이 카멜롯의 주민이었다.

놈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제야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군. 잘 생각했다. 너의 능력과 이 카멜롯만 있다면··· 다차원의 모든 마석을 쓸어 담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

그의 장밋빛 사업 설명회가 결론을 맺었다.

나는 고개를 파묻었다.

거칠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밀려드는 세찬 감동을 느끼며.

그 모습이 영 이상해 보였는지, 카멜롯의 왕이 내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기사왕."

내가 덧붙였다.

"사업 아이템··· 눈물 나게 고맙다···"

"···뭐?"

즉시 요청했다.

"팍스, 카멜롯을 아공간에 넣어줘."

24. 카멜롯의 기사들 (1)

카멜롯 성의 정체,

그리고 기사왕의 목적을 알고 나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아껴두었던 3레벨에서의 보상.

그 보상으로 바로 이 카멜롯으로 택했다.

카멜롯.

생명을 대가로 자원을 만드는, 그야말로 악독한 물건이지만···

'그런 기능이야, 안 쓰면 그만이지.'

놈의 말마따나 이 성이 '아이템'의 일종이라면, 새로운 소유주가 될 내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혹여나 기사왕과의 모종의 연결이 있다 하더라도, 포탈을 통해 외부와의 에너지가 차단될 터.

기사왕으로부터 카멜롯을 오롯이 빼앗을 수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쿠구구···

진동이 일었다.

"윽···!"

잘 익은 기사왕의 김장독, 카멜롯.

그 달달하고 새콤한 맛을 느끼며, 나는 잠시 찾아드는 격통을 힘껏 견뎌냈다.

한편, 기사왕은 허둥지둥 정체 모를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을 때.

화아악!

우리는 찬란한 정오의 태양을 마주했다.

빛을 머금은 도시.

카멜롯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치워낸 그 도시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기사왕이 텅 빈 눈동자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서울 한복판을 감싸던 흉물스러운 김장독을 치웠다.

아니, 항아리째로 삼킨 참이었다.

놈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에게서 소유권 자체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내 카멜롯이! 전 재산을 태워 산 내 카멜롯이!"

놈의 버럭 소리를 조롱하듯, 붉은 망토가 펄럭였다.

쏟아진 태양은 초췌한 도박 중독자들을 일깨우는 카지노의 새벽빛과도 같았다.

"미천한 9위계 노예 따위가··· 감히! 당장···"

스릉!

기사왕이 검을 뽑아, 내게 달려들었지만···

카앙!

누군가가 그 공격을 막아 세웠다.

은빛 갑주에 싸인 낯선 등짝.

투구에 달린 푸른 천이 크고 널찍한 등을 타고 내려왔다.

기사왕이 황망한 소리를 흘렸다.

"······란슬롯?"

"무엄하구나. 카멜롯의 주인께 예를 갖추어라."

기사왕의 명을 받들던 해골기사 란슬롯.

그가 이제는 나를 주군으로 섬기고 있었다.

카멜롯의 소유권이 온전히 내게로 넘어왔다는 증거였다.

"란슬롯! 이 배은망덕한 새끼가!"

카아앙!

명색이 '기사왕'의 공격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란슬롯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질 않았다.

란슬롯이 여유롭게 칼을 주고받으며 내게 물었다.

"주군, 이 자를 어찌 처분할 것인지,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죽여라."

무고한 사람들을 항아리에 담가 먹으려던 놈의 계획이 떠올랐다.

그것이 제 재산을 불리기 위함이었다는 것까지.

살려 줄 이유가 없었다.

"존명."

란슬롯이 대답했고,

휘릭!

곧장 기사왕의 목이 날아갔다.

파삭!

재차 란슬롯이 놈의 척추를 짓밟았다.

재생의 중추를 파괴하기 위해.

순식간에 자신의 옛 주인을 처치한 란슬롯은···

철컥!

놈의 사체에서 꺼내온 전리품을 들고 내 앞에 부복했다.

사태의 해결부터 원흉의 처치까지.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

.

.

정작 전리품을 받아들었을 땐, 어쩐지 아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게 다인가?"

'기사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란슬롯의 손에는 노란빛을 띠는 강화석 단 한 개만 놓여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때, 팍스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정겸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현재, 차원 계좌가 개방되었습니다.]

"···차원 계좌?"

[기사왕의 차원 계좌가 란슬롯에게 소유 이전되었습니다.]

[더불어 란슬롯의 소유자가 정겸 님으로 확인되어, 정겸 님이 차원 계좌 명의 소유자로 최종 확인된 상태입니다.]

"그게 뭔데···?"

팍스는 머나먼 친척 어른의 부고를 알리는 변호사처럼,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직 내게 받을 것이 있다는 듯이.

[차원 계좌는 각성 시스템을 통해 차후 개방될 기능이었으나, 현재 소유 이전으로 인해 조기 개방된 상태입니다.]

[계좌 내역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상황은 이랬다.

기사왕 할아버지께서 내게 물려주신 건···

황량한 카멜롯 성뿐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들어 있길래 그래?"

미처 몰랐다.

내게 사업 아이템을 넘겨주신 기사왕 할아버지.

[마석 3,086개입니다.]

그가 사업 자금까지 물려주고 가셨을 줄은.

***

나는 우선 란슬롯을 데리고 아공간으로 돌아왔다.

새로 들어온 카멜롯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괜히 원래 있던 공간이랑 섞이지 않으면 좋겠는데."

카멜롯을 얻었지만, 마냥 좋아하기엔 일렀다.

그 크기가 쓸데없이 클뿐더러, 인신 공양이라는 불길한 기능 또한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물류센터의 창가를 두리번거렸다.

새로 들어선 카멜롯 성이 배경을 채우고 있을 테니.

하지만···

"어딨지?"

아무리 둘러봐도 성벽 같은 건 아무 데도 보이질 않았다.

그때, 함께 들어온 란슬롯이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어두운 회색빛을 띤, 무미건조한 생김새의 왕관.

분명, 카멜롯이었다.

란슬롯이 말했다.

"이게 카멜롯의 원래 크기입니다. 단, 주군께서 원하시는 크기로 설치하실 수 있죠."

"아··· 그런 거였어?"

그제야, 아이템 '카멜롯'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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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롯]

등급: [유니크]

설명: [저주받은 기사들의 궁전입니다. 원하는 크기로 설치할 수 있으며, 크기에 비례하는 설치 비용이 소모됩니다.]

속성: [특수]

옵션:

[피의 제사]

-내부에 담긴 생명력을 '숙성', 또는 '착취'하여 강화석(랜덤)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망령 소환]

-카멜롯의 망령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기사 서임]

-망령을 해골기사로 서임할 수 있습니다. 관련 비용이 소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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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롯의 크기 설정을 통한 [피의 제사].

의외로 전략적인 활용이 가능한 아이템이었다.

작게 만들어 소소한 이득을 노리거나, 아니면 크게 만들어 한탕을 노려보거나.

다시 말해···

"기사왕이 욕심이 그득했구나···"

"그렇습니다."

서울을 뒤덮은 장엄한 크기는 기사왕의 탐욕에 비례하는 것이었다.

단, 그것마저도 공짜는 아니었다.

"크게 만들수록 마석이 더 많이 든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기사왕이 세웠던 건 얼마나 들었었어?"

"저도 확실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못해도 수만 개는 사용했을 겁니다."

어마어마한 액수.

과연 전 재산을 털었다는 기사왕의 말이 허풍은 아니었다.

"딱히 클 필요는 없어. 괜히 불편하기만 하지."

강화석이 탐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사왕처럼 사람을 떼거리로 모아다 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더욱이, 란슬롯에 따르면 나중에 거둬들였다가 다시 설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설치할 때마다 비용이 새로 들기는 하겠지만.

물론, 지금과 같은 왕관 크기로는 부족하긴 했다.

아공간에 새로운 입주민이 생긴 참이니.

란슬롯에게 물었다.

"너희가 지낼 정도 되려면 얼마나 써야 하지?"

"아··· 그 정도 크기라면 300개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이제는 나의 수하가 된 란슬롯.

더욱이 카멜롯에는 아직 기사로 서임되지 않은 '망령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누나들이나 이용수까지는 별 문제 없겠지만, 그의 아내 오지수나 딸 유정이가 본다면 까무라칠 게 분명했다.

하여, 나는 카멜롯을 아공간에 딸린 유령의 집 정도로 안배해둘 생각이었다.

"좋아. 그럼 그 정도로 하지."

위치는 국통사 위병소의 옆쪽이었다.

물류센터에 직접 닿지는 않지만, 거리상으로는 가까운 곳.

두 누나와 이용수는 우리가 성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새 건물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기꺼이 준공식에 참여해주었다.

란슬롯의 설명에 따라, 바닥에 마석 300개를 뿌려놓고는 그 위로 왕관 크기만 한 카멜롯을 던져두었다.

꾸물꾸물.

서서히 생물처럼 움직이던 카멜롯은···

우적우적!

게걸스럽게 마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곤 땅속으로 자취를 감추더니···

드드드···

이내 아래로부터 성벽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기사왕 때보다 훨씬 작아서인지, 자라나는 속도가 한결 빨랐다.

쿠구구궁.

어느덧 그렇게 완성된 카멜롯 성.

내가 세운 성은 고풍스러운 유럽식 고성도, 미니어처처럼 장난감 같은 성도 아니었다.

소소하게, 작은 빌라 한 동 정도 되는 크기. 

그것은 마치···

"···모텔 같네."

"모텔이잖아."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 묘한 싸구려 감성이 카멜롯 성에 감돌고 있었다.

한편···

"어찌 주군을 두고 저희가 이 성을 차지한단 말입니까!"

"아니, 너네나 써···"

"주군!"

란슬롯이 펄쩍 뛰었다.

카멜롯을 란슬롯과 망령들의 거처로 내어주겠다고 한참이었다.

생명을 먹어 치우는 성.

솔직히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았다.

"주군께서 옥좌를 차지하셔야···!"

란슬롯은 지지리도 눈치가 없었다.

***

카멜롯에 갇혀 있던 것은 비난 둘째 누나 김솔뿐만이 아니었다.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합참에서 정찰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나 임무 중간에 고립된 병력들도 일부 자리하고 있었으니.

모두가 돌아온 태양을 반겼고, 그 빛에 허물어지는 괴물들을 보며 환호했다.

공권력에 대한 믿음은 아직 남아 있었다.

고립되어 있던 합참 소속의 군인들이 사람들을 통제했고, 현 상황과 정부의 대처, 그리고 각성자 모집에 대해 간단히 안내했다.

"받으세요."

거들 겸, P999K 통신기 한 대를 출하해주었다.

아무쪼록 본부와 연락이 닿는 것이 이곳 시민들을 통솔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

통신기를 받아든 장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척하니 경례를 붙여주었다.

지금 그들에게 이것만큼 고마운 물건은 없을 테니.

이제 출발할 차례였다.

기사왕의 성을 무너뜨렸으니, 이제 다음 행선지는 큰형의 신혼집이었다.

위치는 도봉구 방학동.

부모님이 계실 의정부와도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새로 헬기를 출하해 이동을 시작하려 할 때쯤, 조금 전 통신기를 건네받은 장교가 내게 달려왔다.

"···잠시 받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작전본부장님이십니다."

내게 연락이 왔다.

.

.

.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내게 들려준 것은 1군단의 소식이었다.

정확히는···

"220 보병여단이 1군단에 붙었습니다."

220 보병여단.

유성철에 따르면, 내가 향할 도봉구는 물론, 도중에 지나야 할 성북구와 강북구까지 담당하고 있는 부대였다.

원래는 예비군 편성을 주력으로 하는 부대로, 전투력 자체는 크게 대단할 것 없는 부대이지만···

"이것저것 1군단으로부터 장비를 지원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산에 있는 방공기지까지 놈들에게 넘어간 상태고요."

요컨대, 유성철의 결론은 간단했다.

"헬기로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중간에 요격당할 게 분명해요. 가더라도 길게 우회해서 가셔야 합니다. 사실 남양주 쪽 부대들도 상황을 알기 어려워 그마저도 권해드리기 어렵습니다만···"

그는 내가 탄 헬기가 방공기지의 공격을 받을까 걱정되어 연락을 준 참이었다.

내가 물었다.

"놈들의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죄송합니다.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지금 위성 정보를 사용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띄워 보낸 정찰기나 드론마저도 매번 격추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유성철은 그 드론으로부터, 우리가 타고 가게 될 헬기나 운명을 점치고 있었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그 너머에서 뭔가 일을 벌이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상당히 강박적으로 정찰을 막고 있거든요. 육로로 조금만 접근해도 곧장 총알이 날아오고 있고요."

"···그렇군요"

놈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리로 넘어가야 함은 물론, 큰형 내외와 부모님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

어쩌면 괴물보다야 나을 수는 있겠지만, 이런 시국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놈들이다.

그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남양주 방향으로 우회하는 것도 가능은 하겠으나, 나는 더 이상 가족을 찾는 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위급하다면 더더욱이 그랬다.

유성철에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정겸씨···?"

"살펴보고 가기는 할 겁니다. 드론보다 더 좋은 게 생겼거든요."

아공간에서 카멜롯의 기능에 대해 살펴보고 온 터였다.

그리고, 카멜롯에는 기가 막힌 정찰기들 또한 탑재되어 있었다.

"아무렴, 유령을 요격하지는 못하겠지."

카멜롯의 망령들.

녀석들을 이용할 차례였다.

25. 카멜롯의 기사들 (2)

카멜롯에 속한 열두 기사들.

그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마석과 강화석을 지불해 실제 전투를 치르는 기사로 서임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망령 그 자체로도 쓸 수 있다는 거지."

물론 만능은 아니었다.

탐색 거리의 제한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총알, 폭탄도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망령은 드론을 압도하는 최고의 정찰 수단이었다.

"···그럼 어떻게 움직여 볼까?"

합참이 전해준 소식을 천천히 정리했다.

1군단 휘하에 들어간 56사단, 그중에서도 220여단은 북한산 아래 국민대학교에서 출발해 중랑천을 낀 한국외대로 이어지는 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일단은 조금 더 들어가야겠네."

현재 우리의 위치는 3호선 안국역 인근.

망령의 탐색 거리가 닿도록, 놈들의 방어선 가까운 곳까지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그 아래 위치한 성신여대와 고려대에는 1군단이 아닌 합참 휘하의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작전본부장 유성철과 미리 이야기를 맞춰둔 나는, 그곳까지 우선 헬기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렇게,

투두두두···!

헬기 창문에 청명한 하늘이 담긴 것과는 대조적으로, 내려다보이는 갈색빛 도시는 저마다의 멸망을 얼룩처럼 점점이 물들이고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10여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부군이 확보한 안전한 상공이었기에, 별다른 공격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금 얼쩡거리는 와이번을 혼쭐내어 주었을 뿐.

성신여대에 도착하자, 그곳을 지키던 수도방위군 장교가 '척'하니 경례를 붙였다.

베레모에는 영관급을 나타내는 대나뭇잎이 두 개 박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교들은 만나는 족족 내게 먼저 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그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김정겸 대령님."

"···??"

듣자 하니 합동참모본부에서 내게 명예 대령 계급을 부여했다고 했다.

애당초 내가 퇴짜를 놓았으니 지휘권 같은 건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모든 군 병력들에게 예우를 다하라 지시가 내려왔다고.

"그러니까, 이건··· "

나를 잡기 위해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벌이는 눈물의 똥꼬쇼였다.

예비역 병장에게 대령이라니, 군 계급 체계에도 아포칼립스가 들이닥친 게 분명했다.

황당하기는 해도, 가타부타할 시간이 없었다.

곧장 일행들과 함께 그가 내어준 강의동 옥상으로 향했다.

방어선으로 망령들을 보내두어야 했으니.

웃겨 죽겠다는 듯, 김솔과 큰누나가 연신 내게 충성이니 단결이니 하며 경례를 올렸지만···

나는 그들의 잔망스럽게 꼬부라진 손날을 애써 무시하며 망령들을 불러냈다.

후욱.

후우욱.

내 주변으로 희끄무레한 원혼들이 떠올랐다.

기사로 서임된 란슬롯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이었다.

쐐애액!

일제히 그들을 쏘아 보냈다.

북한산 아래 국민대부터 중랑천 옆 한국외대까지, 열하나의 원혼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했다.

놈들의 전력을 확인한다면, 가장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갈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내가 노리는 건 오히려 그 반대였지만.

"뭘 숨기고 있는 거지?"

놈들이 강박적으로 정찰을 막고 있다는 작전본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병력이 집중된 것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을 터.

본래 뒤가 구린 놈들은 그 구린내를 숨기려다 되레 정체가 탄로 나는 법이었다.

쐐애액!

망령들이 빠르게 달렸다.

흐릿한 영체로 적진을 종횡무진하는 녀석들.

오래지 않아, 녀석들이 제각기 보내오는 열 한 개의 시선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나는 TV 리모콘을 누르듯 장면을 전환해가며 전반적인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2번 카메라가 특이점을 포착했다.

북한산의 우측, 서경대학교로 향했던 망령, 퍼시발이었다.

나무와 뼈 장식, 그리고 낡고 붉은 천으로 장식된 움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주술적인 느낌의 건물까지.

딱 봐도 지구상의 것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계의 건축물이 군의 간이천막들과 한데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거기서 보게 된 것은···

"···뭐야, 저건?"

뾰족한 귀와 징그럽게 내려앉은 코.

진흙 같은 녹색 피부까지.

널리 알려진 상상의 생명체였다.

"···고블린?"

오크, 와이번, 스켈레톤까지 돌아다니는 마당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만···

"왜 안 싸우지···?"

220여단의 병사, 장교들은 거적때기를 걸친 고블린들이 주변을 지나도 아무런 기색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마저도··· 어딘가 달랐다.

반들반들한 살색 피부 위로, 진흙 같은 녹색 피부가 얼룩덜룩 섞여 있었으니까.

놈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구시대의 계급장을 그대로 붙인 채, 심지어···

"부르셨습니까, 여단장님."

저들끼리 대화하기 시작했다.

경례와 존칭을 써가며.

놈들은 분명 인간이었다.

아마도 아직은.

여단장이 말했다.

"제단은 설치가 끝났나?"

"예, 끝났습니다. 정부군 놈들 훼방만 없었어도 횔씬 편했을 텐데요."

"어쩔 수 없지. 놈들이 그리 빨리 알아차릴 줄 누가 알았겠나? 지난 일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각별히 더 유의하자고."

"물론입니다. 아래쪽에도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후우.

여단장이 흉측한 코를 벌렁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대공 방어선은 어때?"

"새 한 마리 넘어오지 못하게 깔끔하게 끊어내고 있습니다. 분명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래. 계속해서 시간을 좀 벌어 봐. 놈들도 대놓고 밀고 들어오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여기 일이 까발려지면 여러모로 귀찮아지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한 음모론이었다.

괴물처럼 변모해버린 220여단의 수뇌부들.

하지만, 부관의 한마디로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장면이 나의 현실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지시하신 대로, 오늘부터는 방학동에서 인력 수급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가까운 데서 시작하면 괜한 소문 돌아서 내뺄 수 있으니··· 뭐, 의정부 쪽이야 그쪽에서 알아서 할 테고."

도봉구 방학동.

큰형 부부의 신혼집이 있는 장소였다.

의미심장한 인력 수급이라는 말.

여단장이 물었다.

"우리 쪽에 붙겠다는 애들은 얼마나 되나?"

"많지는 않습니다. 뭐, 특별히 강요한 것도 아닌데다가··· 제물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반감을 갖는 놈들이 많아서요. 그래도 하겠다는 놈들이 사오백 명 정도 되는데, 모두 존재 등록해서 배치해 두었습니다."

"좀 적긴 하군. 뭐, 상관없지··· 그만큼 제물이 많다는 소리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거의 2만 명이 넘어가니까요."

잠시 책상을 또옥똑 두드리던 여단장이 말을 이었다.

"도태될 놈들은 도태되어야 하는 게 맞아. 제사장님께서 친히 새로 거듭날 기회를 주셨는데,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앞서가는 소수가 세상을 이끌어가는 법이지요. 여단장님께서도 혜안을 발휘하셨던 것 같습니다."

"됐네, 이 친구야. 입 발린 소리 하고 있어, 흐흐."

끅끅 바람이 새어 나오는 여단장의 웃음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서서히 놈들의 형상이 흐릿해졌다.

후우욱!

망령들을 거둬들였다.

아리송한 대화지만, 몇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놈들이 타차원의 괴물인 고블린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아예 스스로 고블린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제물이라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제물로 쓰기 위해 가둬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목적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놈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저버렸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같은 인간을 제물로 바쳐가면서까지.

더욱이, 놈들의 다음 목적지는 형의 집이 있는 방학동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방향을 정했다.

놈들을 쓸어버리며 올라가는 것으로.

***

다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헬기 위에서 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것도 생각했다.

하지만 의 사정거리는 고작해서 50미터 수준.

추가로 강화하더라도, 북한산과 방어선 곳곳에 늘어선 대공포의 사정거리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냥 육로로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나?"

물론 이 또한 쉽지는 않을 터였다.

놈들이 방어선을 굳게 구축해둔 상태였고, 수뇌부가 있는 서경대학교 쪽은 병력이 몇 배는 더 많았으니까.

그러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게는 새로운 병력이 생긴 참이었으니.

"부르셨습니까, 주군."

해골 기사 중에서도 월등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란슬롯이다.

놈들이 쏘아대는 총알과 폭탄도 쉽게 튕겨낼 수 있을 터.

나는 여기에 새로운 전력을 하나 더 추가할 생각이었다.

눈앞에 들어온 고풍스러운 모텔··· 아니, 성채.

카멜롯에 속한 열둘의 망령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망령 하나를 기사로 서임하는 데 드는 비용은 마석 500개와 강화석 한 개.

마석은 넉넉했지만, 수중에 가지고 있는 강화석은 단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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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석(D)]

속성 : 없음

옵션 : [관통], [근력 강화]

---- 

란슬롯이 그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들려주었다.

"라이오넬과 그웨인은···"

이제 남은 것은 어떤 망령을 불러낼 것인지 결정하는 일.

기사들 저마다의 특징을 살리는 한편, 강화석과의 궁합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 중, 관심이 가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베디비어라는 이름의 기사로, 놀랍게도 팔이 한쪽 밖에 남아있질 않았다.

란슬롯이 부연했다.

"베디비어는 한때 불세출의 천재 궁수였습니다. 화살을 쏘아 날아가는 화살을 맞추곤 했거든요. 한데···"

생전, 그는 공작의 직할 기사단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공작의 첩실이 그에게 연정을 품었고, 분노한 공작은 끝끝내 베디비어의 왼쪽 팔을 잘라버렸다.

나날이 전공을 쌓아가던 베디비어의 유명세를 지워버릴 의도와 함께.

짧은 이야기였다.

더 이상 궁수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된 그의 남은 생애는 훨씬 더 길었겠지만.

과거가 어쨌든지 간에, 내게는 꽂히는 단어가 한 가지 있었다.

그가 천재적인 '궁수'였다는 것.

.

.

.

카멜롯에 강화석과 마석 500개를 지불했다.

후우욱!

성에서 빠져나온 베디비어의 망령.

철컥! 절그럭!

그 주변으로 낡은 갑옷이 빚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척!

외팔이 기사 베디비어가 내 앞에 부복했다.

----

[베디비어]

등급: [8위계]

설명: [원탁의 기사 중 1인입니다. 카멜롯의 효과로 소환할 수 있습니다.]

속성: [없음]

옵션: [관통], [명중], [근력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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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는 란슬롯보다 두 배는 두꺼운 오른팔을 자랑하고 있었다.

왼쪽 팔이 없는 대신이다.

란슬롯에 따르면, 이만해도 베디비어는 충분히 괴물이었다.

가뜩이나 힘이 한쪽 팔에 집중되어 있는 마당에, 강화석으로 근력까지 키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저 두꺼운 팔로 휩쓸기만 해도, 어지간한 적들은 비명횡사를 할듯했다.

든든한 전력이 될 터.

하지만 염두에 두고 있는 쓸모는 따로 있었다.

"······?"

베디비어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체 모를 빨간 공을 들려준 탓이었다.

[STORM ULTIMATE PHAZE 볼링공, 16파운드, 가격은 239,000원입니다.]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강화되기 이전 버전이었다.

지금은 시범 연습을 해볼 때였으니까.

녀석이 큼지막한 손을 이용해 볼링공을 한 손으로 받아들었다.

"네가 보고 왔던 것들 기억하고 있지?"

베디비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만에도 망령 상태였던 그는 북한산에 위치한 대공 기지, 그리고 방어선에 배치된 유도 대공포들의 위치를 꼼꼼히 확인하고 온 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머지 망령들이 흩어져 있는 대공포의 위치를 시선에 담아주고 있었다.

정확한 '타격' 유무를 확인해주기 위해.

천재적인 궁수.

옵션에 [명중]까지 붙어 있는 녀석이다.

화살로 화살을 쪼갰다던, 그 신화적인 이야기에 기대보기로 했다.

혹여나 실패하더라도 위험부담은 없었다.

놈들이 나를 잡으러 나와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고마운 일이 될 테니까.

그제야 뭘 원하는지 알겠다는 듯, 베디비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일단, 1번 타깃부터."

척!

베디비어가 볼링공이 든 손을 뒤로 뻗었다.

그야말로 투포환 선수와도 같은 자세.

한 팔이 없는 탓에, 앞 다리를 길게 뻗어 균형을 잡았다.

그러곤···

파앙!

힘껏 던졌다.

쐐애애애액!

투척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무슨 대포 같네.'

귀를 찢을 듯한 포격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볼링공.

출하로 내보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그렇게 날아간 볼링공은···

1번 타깃으로 삼았던 방공 기지 근처.

왼쪽 100여미터 부근을 강하게 타격했다.

꽈아아아앙!

그 충격이 상당했던 탓에, 그 광경을 담고 있던 망령 퍼시발의 시선이 흔들거렸다.

왜애앵-

놈들 또한 공세를 알아차렸고,

방공 기지의 사이렌이 울기 시작했다.

위이잉- 철컥!

방공 기지의 대공포가 가동되었다.

개틀링 건을 닮은 우람한 포신이 45도 각도로 고개를 처들었지만··· 

까아아아앙!

불 붙은 볼링공에 얻어맞아 금세 자신감을 상실했다.

어느덧 비굴한 포물선을 그리게 된 포신.

그 끝에는 은은한 잔불이 눈물처럼 어려 있었다.

이번에 던진 것은 실전용으로 강화된 '파이어 볼'이었으니.

최강의 근력을 자랑하는 베디비어의 투구로 그 위력이 한층 극대화된 참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또 다른 방공기지, 그리고 방어선에 길게 배치되어 있는 유도 대공 포대들.

도합 아홉 개의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파아앙!

세찬 파공음을 쏟으며, 검붉은 운석이 베디비어의 손끝을 떠났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던 놈들.

자신감을 제대로 꺾어줄 필요가 있었다.

26. 카멜롯의 기사들 (3)

화르르르···

북한산의 방공기지들이 통째로 불살라졌다.

화재의 원인은 갑작스레 날아든 정체 모를 운석들.

수십 개의 소행성이 하늘을 기웃거리던 대공포를 박살 냈다.

꽈아아!

그 장엄한 소리는 지금도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몇 배는 강력해졌다.

투두두두두···

우리는 헬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방공기지, 그리고 방어선을 두르고 있던 유도 대공포 모두를 박살 낸 덕이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시작이지."

꽈아아아앙!

꽈르릉!

블랙호크의 수송 칸에 걸터앉은 채, 아공간에 들어 있는 온갖 물건을 투하했다.

25kg짜리 크롬 도금 아령부터, 세열 수류탄, P999K 무전기, 코란도, 레토나, 두돈반 트럭, 심지어는 블랙호크까지.

중력의 힘이 실린 파이어볼을 섞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꽈아앙-!

예상했던 대로, 그 충격은 막강했다.

찌를 듯한 굉음과 함께, 떨어진 사물이 지반 자체를 날려버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폭염.

놈들의 주요 거점을 모조리 박살 낸 참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띠링!

[보유하고 계신 마석의 양은 2,819개입니다.]

[보유하고 계신 마석의 양은 2,827개입니다.]

[보유하고 계신 마석의 양은 2,841개···]

차츰 불어나는 계좌의 잔고.

와는 관련이 없었다.

헬기 위에선 회수 사정거리가 닿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마석은 들어오고 있었다.

요컨대···

"이게 차원 계좌의 용도구나."

"그렇습니다."

옆에 앉은 란슬롯이 부연했다.

"차원 계좌가 있다면, 타 존재의 생명을 끊는 것만으로도 마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동화 시스템.

이제는 구태여 마석 회수를 위해 를 발동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저 볼링공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적들의 숨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그만이었으니.

거의 3,000개에 달하는 마석.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거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막막함은 여전했다.

팍스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해 들은 터였기에.

[레벨 4 달성을 위해 필요한 마석은 10,000 개 입니다.]

'진짜 더럽게 비싸네···'

성장세가 무색하게, 그새 열 배가 또 껑충 뛰어올랐다.

다음 레벨업은 과연 언제가 될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이제 곧 목적지였다.

헬기의 고도를 낮춘 탓에, 적들의 비명이 한층 더 가깝게 들려왔다.

"쿠와아아아악!"

소름끼치는 고성.

지금 내가 죽이고 있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사람이었던 것들.

뾰족한 귀가 피부를 뚫고 나왔고, 온몸에 우둘투둘한 녹색 피부가 덕지덕지 붙었다.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괴물 이상의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들.

란슬롯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준 8위계 존재들입니다. '척력(斥力)'을 얻기 위해 인위적인 작업이 이루어진 존재들이죠."

"준 8위계? 척력···?"

내가 되물었다.

모르는 단어가 두 개나 튀어나왔으니.

란슬롯이 말했다.

"모든 차원 존재들에게는 등급이 존재합니다. 그걸 '위계'라고 표현하죠. 그리고 척력이라는 건···"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직접 보는 것이 빠르겠다는 듯, 란스롯이 뒤에 앉은 베디비어에게 눈짓했다.

철컥!

베디비어가 수송칸에 비치되어 있던 소총을 빼 들었다.

그러곤 익숙한 자세로 지상을 겨냥했다.

타앙!

"···!"

녹색 피부가 뒤섞인 변종 인간의 머리가 뒤로 홱하니 젖혀졌다.

중세 기사인 베디비어가 이렇게나 명사수인 줄은 미처 몰랐지만···

사실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살아 있잖아?"

"저걸 가능하게 하는 게 '척력'입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즉사일 터.

하지만 놈들은 해골 기사들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걸출한 방어 능력이 보유하고 있었다.

란슬롯이 덧붙였다.

"척력은 일종의 권리입니다.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부터 안전할 권리죠. 물론,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한때 주군께서 그웨인을 처치하셨던 것처럼요."

"자신보다 낮은 존재라···"

다시 말해 저 변종 괴물들이 8.5급 귀족이라는 소리였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루트를 밟은 건 아닌 듯했지만.

그러고 보니, 포로들을 '제물'로 사용하려 한다는 놈들의 계획이 떠올랐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는 거야? 그 '위계'란 걸 얻으려고?"

"아마 아닐 겁니다. 편법을 쓴다면 준 8위계에 다다르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한 포석일 겁니다."

간단히 정리할 수 있었다.

1군단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

그에 모자라 제 동족까지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완전 미친놈들이잖아···?'

쿠데타를 넘어, 아예 전 인류를 향한 팀킬을 자행하고 있었다.

준 8위계에 다다른 반 고블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부관의 언급.

제 발로 놈들의 계획에 동참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렇게···

어느덧 우리는 서경대학교에 다다랐다.

이 모든 작전을 지휘한 220여단장이 있는 곳이었다.

녹색 우레탄이 깔린 커다란 중앙 운동장.

그곳에 헬기가 둥근 바람을 일으키며, 서서히 내려앉았다.

투두두두두!

연신 프로펠러를 돌리는 헬기를 뒤로 하고, 훌쩍 지상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단장을 찾아볼 작정이었다.

이곳의 책임자 격이니, 놈들의 계획에 대해서도 캐내 볼 수 있을 터.

물론, 내가 앞장설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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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슬롯]

등급: [7위계]

설명: [원탁의 기사 중 1인입니다. 카멜롯의 효과로 소환할 수 있습니다.]

속성: [없음]

옵션: [관통], [가속], [면역], [통솔], [치명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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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롯의 기사 중 가장 강한 란슬롯이었다.

베디비어가 8위계였던 것과 달리, 란슬롯에게만큼은 7위계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와르르르!

사방에서 고블린 '변종'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탁!

발돋움한 란슬롯이 곧장 앞으로 쏘아나갔다.

투두두두두두!

포탈을 방패처럼 두른 나와 달리, 란슬롯은 날아드는 총알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다.

팅! 탕! 티이잉!

무력하게 튕겨 나오는 총알.

란슬롯이 칼을 휘둘렀다.

촤악!

녹색 점액질이 섞인 붉은 피.

반 고블린 병사들의 몸이 일순에 두동강이 났다.

소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놈들이 이번에는 총검을 결속해 달려들었지만···

카앙!

캉!

이 또한 통할 리 없었다.

겉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 놈들의 총검이 미끄러졌다.

란슬롯은 놈들보다 배는 강한 척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란슬롯이 병사들과 전투를 이어가는 동안, 나는 이번에도 망령을 불러냈다.

후욱.

내 주변을 맴도는 열 명의 망령.

"여단장이 있는 위치를 알아 와. 멀리 못 갔을 테니."

화아악!

망령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간이 막사부터 캠퍼스 건물 내부까지, 벽이나 문으로 이루어진 장애물을 유유히 통과하며 놈의 위치를 찾아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캠퍼스를 벗어나려는 코란도 차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급하게 빠져나온 참인지, 차량 뒷좌석에는 수북이 쌓인 문서들이 지저분하게 엉켜있었다.

하지만 놈의 차량이 다다른 캠퍼스 후문에는···

"···?"

무서운 선생님께서 학생의 땡땡이를 감시하고 계셨다.

거대한 외팔의 기사, 베디비어였다.

"······"

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베디비어가 한 손으로 코란도를 들어 올렸고,

휘이익!

투포환을 던지듯 강하게 내던졌다.

하늘을 나는 코란도.

그 장엄한 풍경은 녹색 우레탄 바닥에 와장창 내려꽂히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베디비어의 배달은 팍스의 만큼이나 신속, 정확했다.

"쿨럭!"

"욱···!"

220여단장, 그리고 놈과 대화를 나누던 부관이 찌그러진 차 틈을 비집고 빠져나왔다.

란슬롯이 말한 '척력' 탓인지, 강한 충격이었음에도 놈들은 다친 곳이 없었다.

그저 놀란 가슴을 잠재우며 헛기침을 내뱉을 뿐.

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 급습의 주인공이 나라는 게 분명해 보였을 테니.

"···너··· 누구야?!"

내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그걸 말한들 이놈이 알 리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친분을 과시할만한 게 하나 생기긴 한 참이었다.

"김 대령입니다. 선배님."

"씨발, 내가 왜 니 선배야!"

보기보다 냉정하신 분이었다.

하기야, 사람을 잡아다 제물로 쓸 정도였으니.

내가 놈에게 물었다.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왜 고블린이 된 거지? 제물은 또 뭐고?"

"······"

놈은 대답이 없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팍스에게 부탁해, 기습적으로 감사를 실시했다.

"저 차량에 있는 기밀 서류들 전부 으로 넣어줘."

['군부대' 카테고리에 등록을 진행합니다.]

[등록 비용 책정 중···]

띠링!

[등록에 필요한 비용은 마석 21 개입니다.]

"진행해."

후루루룩!

회수용 포탈로, 기밀 서류들이 빨려 들어왔고, 고블린 여단장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아, 안돼···!"

"···?!"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기밀 서류들을 보며, 놈이 돌발행동을 벌였다.

제 품에서 마석이 담긴 주머니를 꺼내 펼쳐 들더니,

으적으적.

고블린처럼 추해진 혀를 날름거리며 미친 듯이 제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를 이용해 나머지가 놈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막아냈지만··· 이미 상당한 양의 마석이 놈의 배로 들어간 참이었다.

기이하게도, 놈이 삼킨 마석은 로도 빨아들여지지 않았다.

"쿠웨에에엑!"

놈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푸욱!

"···끄륵."

고블린이 되어 날카롭게 벼려진 손톱.

제 부관의 목에 그 날카로운 손톱을 찔러넣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푸학!

부관의 시체가 싸늘하게 널브러졌다.

반면, 여단장의 신체는 미친듯한 변형을 거듭했다.

드드득!

붉은 머리칼이 피를 뿜으며 솟아나더니 저절로 매듭을 만들었다.

굽은 허리 아래로, 얇은 팔이 발톱과 함께 길게 자라났다.

방금까지 그의 모습이 인간에 고블린을 섞은 것이었다면···

지금은 고블린에 훨씬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고블린보다 훨씬 더 강해 보이는.

란슬롯이 긴장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놈이··· 8위계가 되었군요."

하지만···

"너는 몇 위계인데?"

"아, 7위계입니다."

대답과 함께 긴장감이 사라졌다.

여단장의 변신이 너무 화려했던 탓에 자신의 강함을 그새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런 촌극에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처치해."

"존명."

화아악!

고블린 여단장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눈동자를 휘덮는 검은 그림자.

촤아악!

란슬롯의 칼날이 길게 선을 그었고···

꾸물꾸물 움직이던 여단장의 몸이 변화를 멈추었다.

놈의 머리통을 데구르르 바닥을 굴렀다.

"별 얘기를 못 들은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놈이 가지고 나가려던 기밀문서들을 손에 넣은 참이다.

애초에 놈이 제 입으로 말해주지도 않을 것 같았고.

그러던 중,

"뭐지 이건?"

능력으로 수용했음에도, 아직 바닥에 서류가 남아 있었다.

군에서 사용하는 기밀문서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서류는 두 종류였다.

수십 장에 달하는 메모지 크기의 낡은 양피지.

그리고 단 한장의 빳빳한 A4용지.

한국말로 쓰여 있는 A4 서류와 달리, 양피지에는 낯선 이계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놀랍게도, 어렵지 않게 그 내용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서류 모두···

[차원 존재 등록 신청서]

이런 제목이었다.

27. 집으로 (1)

투두두두···

다시 떠오른 헬기.

나는 란슬롯과 함께, 헬기 수송 칸에 앉아 있었다.

220 여단을 말끔히 처리했다.

남은 것은 제물로 쓰이기 위해 잡혀 있던 사람들 뿐.

곧장 형의 신혼집으로 향해야 했기에, 무전기로 정부군에게 뒤처리를 부탁했다.

여단장의 기밀문서도 남겨두었다.

온갖 통신 용어로 암호화되어 있던 탓에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으니.

차후 합참 쪽에서 해독한 정보를 내게 공유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제대로 챙겨왔다.

[차원 존재 등록 신청서 (8위계)]

"존재 등록이라···"

익숙한 크기의 A4 용지.

서류에 담긴 내용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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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원 존재 등록 신청서 (8위계)

귀하의 존재 등록을 환영합니다.

신청 이전에 아래 항목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존재 등록 발급 준비물 : 본인 명의의 차원 계좌

존재 등록 발급 수수료 : 마석 1,000개

본인 : (자필 서명)

▣ 다차원 상공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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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동사무소냐고···"

존재 등록.

마치 주민등록을 연상시키는 표현이었다.

준비물로 차원 계좌가 요구된다는 점도 아이러니했다.

주민등록과 본인 명의의 계좌.

그건 현대 사회에서 어엿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었으니.

그때, 란슬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벌써 돌아다닐 물건이 아닌데···"

그는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위계와 척력에 대한 정보에도 빠삭했던 란슬롯이었다.

내가 물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개척 사업이 지구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렇게 막 개척이 시작되는 곳도 있는가 하면···"

란슬롯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 개척을 못 이겨내고 파산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전말은 이랬다.

그 또한 어느 평범한 차원의 주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공회의소가 주도한 '개척'이 시작되었고··· 그가 속한 차원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었다고.

유니크 아이템, '카멜롯'의 망령이 된 것은 그것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익숙해져 있던 것이다.

멸망 그 자체에.

그가 말했다.

"주군, 존재 등록을 하시죠.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기사왕을 처치하며 차원 계좌를 얻었다.

220 여단장을 죽여 신청서까지 손에 넣었으니, '차원 존재'가 될 조건을 완벽히 갖춘 셈이었다.

하지만···

솔직한 말로, 재수가 없었다.

애당초 침략을 주도하는 놈들이다.

다차원 상공회의손지, 공상회의손지 이놈들이 대체 뭐길래 전 우주에 주민등록까지 요구한단 말인가?

등급을 매기고, 하위 존재들을 벌레 취급하면서까지.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는 게 맞는 거야? 마석을 천 개나 갖다 바치면서까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차원 존재가 되시면···"

그가 덧붙였다.

"척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어?"

척력.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는 신비로운 힘.

그 척력이 내게도 깃든다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해?"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한 니까요."

구미가 당겼다.

아공간 포탈은 무적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니까.

포탈을 벗어난 상태라면, 단 한 발의 총알로도 내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반드시 갖고 싶은 힘이다.

하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나도 고블린처럼 된다거나 하지는 않을까?"

220여단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완전히 고블린으로 탈바꿈했던 그의 모습.

그 이전에도 고블린의 피부가 덕지덕지 섞여 있던 놈이었다.

내 걱정에, 란슬롯이 고개를 저었다.

"놈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의 를 사용했습니다. 고블린들의 차원이었겠죠. 보나마나 등록 비용이 말도 안 되게 저렴한 하위차원의 것을 이용했을 겁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놈들이 서서히 고블린이 되어 갔는지.

그들은 타차원의 힘을 얻는 대신, 정작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었다.

란슬롯이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서류가 어떤 언어로 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시죠. 주군께서 사용하시던 지구의 언어가 맞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대로 서류를 살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서류에 적힌 글씨는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한글이었다.

내가 가진 가 지구 차원의 것이라는 뜻.

잠깐의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좋아. 해보자."

"서류 하단에 서명하시면 바로 신청이 완료될 겁니다."

팍스를 통해 볼펜 한 자루를 출하했다.

그리고···

[정겸]

서명란에 바른 말 고운 말로 이루어진 내 이름을 정자로 새겼다.

변화는 즉시 이루어졌다.

[보유하고 계신 마석의 양은 3,422개···]

.

.

.

[···2,422개입니다.]

계좌에 있던 마석 천 개가 수수료로 빠져나갔다.

들고 있던 신청 서류 또한 눈꽃 같은 알갱이로 사르르 녹아 없어진 상태였다.

싸아아···

몸에는 잠시 동안 은은한 빛이 어렸다.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끝난 거야?"

"그렇습니다."

새로 전입신고를 했다하여 사람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나 또한 별다른 체감 없이 어느덧 8위계의 차원 존재가 된 참이었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척력을 테스트해본답시고, 내 몸에 총을 쏴보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련히 란슬롯의 설명대로 8위계가 되었겠거니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쯤 되니,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나중에 우리 가족들도 모두 등록시켜버리는 게 좋겠어."

척력을 얻기 위함이다.

적어도 총이나 평범한 괴물에 의해서는 죽지 않는 몸이 될 테니.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한 일이었다.

신청 서류를 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요구되는 마석 또한 상당했으니.

투두두두!

생각을 정리하자, 새삼 힘차게 회전하는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지고 부서진 도시였지만, 서서히 익숙한 풍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울창한 나무로 뒤덮인 도봉산.

그 아래에 보기 좋게 연식이 쌓인 고층 아파트가 놓여 있었다.

산으로부터 불어 드는 세찬 바람이 매력인 집.

입주한 지 채 몇 달이 되지 않은 형의 신혼집이었다.

***

그 주변에도 역시나 괴물은 존재했다.

고블린과 비슷한 체구로, 개와 돼지를 섞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란슬롯은 이 녀석들을 '코볼트'라고 불렀다.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이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전투력 자체는 오크에 미치지 못하는 잡몹이었다.

큰누나와 김솔이 나와 파티를 갖췄고, 란슬롯과 베디비어의 도움으로 빠르게 놈들을 치워나갔다.

깨행!

쿠확!

놈들을 치우다 보니, 어느덧 건물 입구에 다다랐다.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자갈무늬가 섞인 회색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나갔다.

그렇게···

마침내 현관 앞에 다다랐다.

한껏 마음을 졸이는 두 누나를 뒤로하고, 서서히 초인종에 손을 가져다 댔다.

덜걱.

어딘가 나사 빠진 소리.

초인종이 작동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을 두드렸다.

쾅쾅!

"형! 나야!"

하지만 굳게 닫힌 현관문 너머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곧장 베디비어를 불러냈다.

"이 문 좀 열어줘."

베디비어는 끄덕 고개를 숙이더니, 문고리를 움켜쥐곤 특유의 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빠득!

소리와 함께, 아예 문고리가 부러져버렸다.

하는 수 없었다.

트드드드득!

이번에는 구멍을 잡고, 아예 문짝 전체를 뜯어버렸다.

쿠웅!

한편으로 치워진 현관.

그 안으로 황량한 거실이 펼쳐져 있었다.

리모델링을 갓 마친 신혼집이었기에, 모든 것이 새것 같고 깨끗했다.

마치 이 안에 그 누구도 산 적이 없었던 것처럼.

허전한 마음이 찾아들었다.

차라리 주소를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 그리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늦었나?"

그렇게, 망연히 생각을 정리하려던 찰나,

"여기 뭐가 있어!"

주방으로 향했던 큰누나가 뭔가를 발견했다.

.

.

.

큰누나가 발견한 것은 편지였다.

누가 수신인이 될지 모르는 막연한 편지.

형은 혹여나 자신을 찾아올 지 모를 동생들에게 메시지를 남겨둔 참이었다.

우리 세 남매는 둥글게 모여,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주연, 솔이, 정겸아. 너희 중 누가 이 편지를 읽게 될 지 모르겠다. 전화도 터지질 않는 상황이고, 혹시나 너희가 여기에 올 수도 있으니 이렇게 편지를 남긴다.

과연 형은 우리가 찾아올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것까지.

다만, 그 가능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 편지는 그의 소원을 담고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나마 만남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소원.

핵심은 다음 문장에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 집에 가보려고 해.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안전하게 계실지 확신이 서질 않아. 처가댁이 근처이기도 하고. 그 밖에도 이상한 일들이 여럿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설명할 만한 시간이 없구나.

마지막으로, 형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네가 주연이가 됐건, 솔이가 됐건, 정겸이가 됐건 반드시 살아 남아주기를 부탁할게. 의정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리 세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놓았다.

형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야."

편지에 적힌 날짜는 멸망이 시작된 다음 날.

괴물들이라면 몰라도, 1군단이 본색을 드러내기 이전의 시기였다.

그러니···

부모님이 계실 의정부 집에 무사히 합류했으리라.

그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곧장 부모님의 집이 있는 의정부로 향하기로 했다.

헬기로 간다면 채 2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

위잉-

누나들이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이용수에게 소식을 전할 겸, 이런저런 출발 준비를 부탁했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역할이었다.

공터에 착륙한 헬기로 되돌아가는 일.

길목에 괴물들이 서성이고 있을 테니, 다시 란슬롯과 베디비어를 꺼내 보려던 참이었다.

그렇게, 텅 빈 거실을 벗어나려던 찰나.

투두두두두두두두!

와장창!

산산이 조각한 유리조각과 함께, 거실 안쪽으로 두꺼운 총알이 날아들었다.

타앙! 팅! 탕! 티잉!

벽면 이곳저곳을 찌른 총탄이 아무렇게나 튀어 올랐고, 새로 짠 혼수 가구들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새 옷처럼 깨끗하던 집은 그대로 풍비박산이 되었다.

이윽고,

슈우웅!

헬기로부터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꽈아아아아앙!

총알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강렬한 폭발에 의해, 펑하니 조명이 터져나갔다.

총탄 자국이 장식처럼 새겨진 벽.

그 위로 매캐한 얼룩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화르륵···

찢어진 벽지 위로 서서히 잔불이 어렸다.

한편 나는···

"멀쩡하잖아···?"

그야말로 미칠듯한 공격이었다.

미니건에서 쏜 총알이 내 몸통을 정확히 쓸고 지나갔으니.

하지만 내가 전해 받은 것은, 그저 약간의 반동뿐이었다.

총알은 닿는 족족 미끄러지듯 튕겨 나갔고, 미사일로 인한 폭발마저 눈앞에 흩뿌린 모래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물론···

"개 따갑네···"

낯선 감촉에 피부를 벅벅 긁을 수밖에 없었다.

을 통해 얻은 척력.

과연 그 힘은 대단했다.

갖은 무기를 장비한 UH-60 블랙호크를 공원 비둘기처럼 느끼게 만들었으니.

녀석은 베란다 너머로 날개를 돌리며,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집과 함께 나를 통째로 날려버리려던 것이 분명했다.

새카맣게 그을린 형의 신혼집.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물건에는 죄가 없는 법이다.

물건을 다루는 사람에게 죄가 있는 법.

나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새카만 비둘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온, 블랙 호크야."

을 발동했다.

미니건과 미사일로 무장한 블랙호크다.

일단 새장에 넣어둘 필요가 있었다.

조종사는···

죽든지 말든지.

28. 집으로 (2)

['군부대' 카테고리에 부합하는 상품입니다.]

[등록 비용 책정 중···]

띠링!

[등록에 필요한 비용은 마석 141 개입니다.]

무기가 달려있어서일까.

합참본부에서 받은 헬기보다 가격이 비쌌다.

다행히, 이제는 그리 부담되는 가격이 아니었다.

"진행해."

[마석 141개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2,347 개입니다.]

휘익!

상공에 떠 있던 블랙호크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예상했던 대로, 반 고블린 변종이 되어버린 놈들이었다.

두 명의 조종사.

그리고 수송칸에서 미니건을 쥐고 있던 두 병사가 공중에 남겨졌다.

그다음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놈들을 끌어당겼다.

낙하산 하나 주어지지 않은, 15층 높이에서의 자유낙하였다.

"크우와아아아아악!"

고블린 특유의 비음과 함께, 놈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서서히 멀어지던 소리는 끝내···

파삭!

알량한 소리로 끝을 맺었다.

척력 덕분에 죽지는 않았겠지만, 적잖은 타격을 받았으리라.

"죽는 줄 알았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었다.

척력을 얻지 못했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덕분에 '무장된' 블랙 호크를 손에 넣었다.

아직 [관통] 옵션은 없지만, 그 밖의 잡몹 처리에는 이만한 물건도 없으리라.

당연하지만, 놈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계단을 통해 층 하나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대뜸 출몰한 고블린 인간들이 내게 소총을 발사했다.

팅! 티잉!

날파리처럼 달라붙는 총알을 걷어내며 란슬롯을 꺼냈고,

"존명."

"쿠와아아악!"

놈들의 머리가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얼추 1개 중대쯤은 되는 수였다.

주차장에 아예 진을 치고 있던 소총 부대를 전멸시킨 뒤에야 제대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싸늘한 사체들.

어느덧 내 계좌의 밥이 된 놈들이었다.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웬 놈들이지? 220여단은 분명 끝장을 냈는데···"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사랑을 받는 내게 총질을 할 만한 세력.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1군단이구나.'

놈들도 220여단이 괴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앙갚음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220여단은 그렇다 치지만··· 이 미친놈들이 도봉구까지 와서 설친다고···?"

1군단 사령부의 위치는 고양.

하지만 대부분의 전력은 파주에 배치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파주와 고양 모두, 도봉구와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사이에 두고 있다.

놈들이 정부군이 있는 서울을 넘어온 것이 아니라면···

"···벌써 의정부를 먹었구나."

부모님이 계실 집.

무사히 도착했다면, 형과 형수도 분명 그곳에 있을 터였다.

"···젠장."

인륜을 거슬러, 사람을 잡아다 제물로 삼는 놈들이다.

만일 가족들이 놈들에게 사로잡혔다면?

그다음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공간에서 나온 이용수가 물었다.

그와 누나들에게도 상황을 전했다.

그러곤, 곧장 새 헬기를 출하했다.

새로 들인 '전투용' 블랙 호크였다.

조종석에 앉은 이용수가 헬기 헤드셋을 꺼내며 물었다.

"요격은 이제 괜찮은 걸까요?"

"괜찮을 겁니다. 놈들의 방공라인은 이미 무너졌으니까요."

이곳의 대공 전력은 대부분 강북구와 노원구 아래에 집중되어 있었다.

앞으로의 길은 한결 수월할 터.

만에 하나 요격당하더라도, 아공간 포탈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과감하게 움직일 때였다.

"알겠습니다."

투두두두두!

이용수가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헬기가 도봉역, 그리고 장암역을 지나쳤다.

의정부 용현동에 있는 부모님의 집은 직선 거리상 그리 멀지 않았다.

어느 정도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망령들을 불러냈다.

란슬롯, 그리고 베디비어를 제외한 10명의 원혼이었다.

"아래 상황을 살펴줘."

후욱!

충성스런 망령들이 새처럼 용현동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의정부의 현 상황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휘이이-!

바람에 날린 뼈 장식이 흔들렸다. 

불꽃이 피어오르는 주술적인 느낌의 건물.

놈들이 '제단'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단에 딱 붙게, 돔 형태의 포로 '수용소'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 주변을 고블린 변종이 된 병사들이 지키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게 다 몇 개야···?"

그 개수가 상당하다는 것.

의정부는 1군단이 도봉구보다 먼저 손에 넣은 곳이다.

더욱이, 정부군으로부터 자신들의 동태를 완전히 숨길 수 있는 성역이기도 했다.

파주와 고양.

그다음으로 제멋대로 가지고 논 구역이 바로 이곳 의정부였다.

후우욱!

망령 하나가 서서히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곳저곳이 파괴되고, 불길에 삼켜진 의정부.

이기적이지만, 부모님의 집만큼은 포근한 옛 느낌을 간직하고 있길 바랐다.

들이닥친 멸망이, 그곳만큼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를.

하지만···

"···?"

그런 내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이게 대체···"

이 집이 맞나?

망령이 집 주변을 배회했다.

왼쪽의 빨간 벽돌집, 그리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동네 슈퍼.

위치상으로는 분명 나의 부모님의 거처가 맞았다.

현관, 뒷문, 그리고 모든 창문에 두꺼운 철판이 덧대여 있었다.

마치 갑옷이라도 두른 것 같은 모양새.

그 주변으로 순수 고블린들과 반 고블린 인간들이 연합해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타앙! 타아앙!

탕!

놈들이 둔기로 강철로 덧댄 전원주택의 현관을 노크했다.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위잉-

묘한 기계음과 함께 지붕이 열렸고,

두쿵!

그 사이로 정체 모를 탑이 세워졌다.

"···뭐지 저게?"

놀랄 새도 없었다.

탑의 작은 틈새에서 순식간에 화살이 빠져나왔으니까.

쐐애액!

날아든 화살은···

푹!

고블린의 살을 깊게 꿰뚫었다.

그것도 연이어서.

쐐액!

쐐애액!

푹!

푹푹!

공격을 받은 고블린들이 충격과 함께 나자빠졌다.

깨지고, 무너지고, 불에 뒤덮인,

완전히 박살이 난 의정부 지역이다.

하지만 유독 부모님 집만큼은 제법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앙!

반 고블린 변종들에만큼은 그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준 8위계가 된 놈들에게는 '척력'이 부여되어 있었으니까.

"크크크크···"

허무하게 땅을 구르는 화살.

놈들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전원주택'의 잔디를 밟았다.

놈들이 화살을 막아 세웠고, 뒤따르는 고블린 무리가 손쉽게 마당을 점거했다.

터엉!

텅!

놈들이 하나둘 둔기를 꺼내 전원주택의 철판을 두드렸다.

본격적인 공성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슉!

슈욱!

지붕 위의 탑이 부단히 화살을 쏘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놈들은 때려도 맞지 않고, 찔러도 죽지 않는 준 8위계의 존재들이었으니.

텅!

터엉!

'요새'가 된 전원주택.

그 외부 장갑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미처 몰랐다.

부모님의 집이 이토록 외로워 보일 줄은.

이런 절박한 모습은 본 적도, 차마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아주 늦지는 않았다.

투두두두두두!

바람을 가르는 헬기 소리.

"크와아아아악···?"

고블린들이 허둥지둥 짧은 목을 두리번거렸다.

"이 새끼들이···"

전원주택의 상징은 푸른 잔디밭이다.

인조 잔디를 마다한 아버지가 애지중지 키운 천연 잔디 마당.

얼마 전만 해도 여기에 소 한 마리 키워도 되겠노라 우스개를 주고받았었다.

하지만 그런 산뜻한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흙으로 지저분히 뒤덮이고, 너덜너덜해진 마당.

이를 대신하려는 것인지, 놈들은 그 위로 기이하게 뒤섞인 녹색 피부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남의 집 마당에 불경한 녹색을 섞고 있는 이 불순분자들을 남김없이 도륙할 작정이었다.

나의 '식구'들과 함께.

철컥!

문이 열리며, 헬기의 수송칸이 내부가 버젓이 드러났다.

그 안에 앉아 있는 해골 기사, 베디비어.

녀석의 손에는 우람한 크기의 미니건이 들려 있었다.

7.62mm 탄약을 주렁주렁 매단 채.

위이잉-

미니건의 총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투두두두두두두두-!

캐애액!

카악!

피잉!

핑!

초당 수백 발에 달하는 총알이 고블린들을 휩쓸었다.

곳곳이 터져나간 놈들이 싸늘한 사체로 마당을 덮었다.

하지만 아직 불순물이 남아 있었다.

총알이 통하지 않는 반 고블린 변종들.

하는 수 없이, 란슬롯이 직접 빗자루를 들었다.

서컹!

쉬이익!

삭!

특유의 [가속] 능력, 그리고 [치명타] 옵션을 발휘했다.

주변으로 솟구치는 굵직한 핏줄기.

분당 수십 번씩 움직이는 검의 잔상이 방금 핀 꽃처럼 아른거렸다.

전원주택과 퍽 잘 어울리는 훌륭한 조경이었다.

그리고···

"주거침입은 법적으로 사형이지!"

법에는 문외한 돌머리 김솔께서 '포충배트'를 꺼내 들었다.

지지지지이이이···

시선을 빨아들이는 은은한 푸른 빛.

고루 감긴 전기 코일 위로,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전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휘이이익!

김솔이 한껏 과충전된 포충배트를 크게 휘둘렀다.

파아앙!

가루처럼 터져 나오는 번갯불.

놈들의 머리가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일순에 분쇄되었다.

예의 격투 게임에서 보는 듯한 짜릿한 쾌감이 그녀의 손끝, 그리고 우리의 시선에 머물렀다.

왼손으로 만든 배리어를 방패처럼 사용하는 그녀는, 용감무쌍한 SF 판타지의 바바리안이라는, 장르 융합의 최전선을 달리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무기를 들었다.

[파스카스 도끼(소형), 가격은 72,500원입니다.]

'척력' 탓에 소총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다.

강화된 볼링공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님의 집에는 작은 그을음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사실 여유를 부린 것이기도 했다.

이미 싸움은 압도적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포충배트에 겁먹은 녀석들이 밋밋한 내 도끼를 보고 히죽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퀙!"

보기 좋게 정수리에 바람구멍이 났다.

나는 이미 명실상부한 8위계였다.

준 8위계로 위장 전입한 반 고블린 괴물들과는 달라도 아주 달랐다.

원거리 무기인 총으로는 타격을 줄 수 없었던 것과 달리, 직접 들고 있는 도끼에는 내 위계의 힘이 제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놈들이 준 8위계의 척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의 캠핑 도끼는 여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놈들의 정수리를 파고 들어갔다.

"쿠왁-!"

반대로, 놈들의 공격은 내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나는 놈들보다 높은 격을 가지고 있었으니.

"야··· 한 대라도 좀 맞아봐!"

지이잉.

힐러인 큰누나는 실직 직전이었다.

나나 김솔이나 전혀 다치지 않는 탓이다.

그저 힐이 쏟아지는 손끝을 응원봉처럼 길게 휘두를 뿐.

한편, 헬기에서 내려온 이용수는 혀를 내둘렀다.

"이 집안은 무슨···"

그는 역사적인 가족 상봉의 산 증인이 될 터였다.

.

.

.

그렇게, 우리는 마당 청소를 마쳤다.

뒤엎어진 잔디밭, 발로 차인 듯 쓰러진 바베큐 그릴.

찌그러진 창고와 깨진 벽돌까지.

정겹던 마당은 한바탕 태풍처럼 쏟아진 멸망을 이제 막 걷어낸 참이었다.

철판으로 뒤덮인 전원주택.

텅! 텅!

그 현관을 두드렸다.

그리고 이건, 노크가 아니었다.

멸망이라는 쓰레기통 속.

어쩌면 세월의 풍파 속에 흐릿해졌을지도 모를,

또 어쩌면 너무 멀어진 탓에 서로의 자력(磁力)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그 무형의 울타리가 아직 남아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애탄 질문이었다.

다행히 대답은 있었다.

끼이이···

천천히 열리는 두꺼운 철문.

그 틈새로, 

집 냄새가 났다.

29. 집으로 (3)

아버지에게는 꿈이 있었다.

널찍한 마당이 딸린 전원주택에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꿈.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다.

잊을 때면 유튜브에서 건축 브이로그를 뒤져보고, 건축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각종 자재를 빼곡하게 정리한 노트를 만들던 것이.

바글바글한 네 남매가 푸른 잔디밭을 뛰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던 아버지다.

하지만 형이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누나들이 독립 계획을 밝혔을 즈음, 아버지는 그 꿈이 너무 오래 미뤄져 왔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도 집은 집이다.

본가(本家).

떠나온 곳이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그 상상의 공간을 위해, 아버지는 땅을 사들이고, 주춧돌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렸다.

주말, 휴가, 명절··· 그도 아니면 가끔 생각날 때만이라도.

가족이라는 인력에 의해 되돌아올 자식들을 떠올리며, 핵분열에도 끄떡없을 자전 축을 설계했다.

그렇게 완성된 단란한 전원주택.

흐릿한 블루프린트부터 서늘한 감촉의 현관 문고리까지.

아버지의 입김이 닿지 않은 것이 하나 없었다.

그래서였다.

이 강고한 요새에서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진 것은.

"어떻게 된 거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새가 된 전원주택의 활약을 이미 목도한 바였지만, 멀쩡히 살아남은 가족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적처럼 느껴졌으니까.

부모님과 할아버지, 형네 부부까지.

심지어 형의 처가 식구들까지 모여있었고, 누구 하나 털끝 하나라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욕봤다."

아버지는 말없이 우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봉의 해후를 나누며, 아버지가 설명했다.

"각성했다. 나보고 라고 하더라. 반평생 키보드 두드리고 살았는데 건축가는 무슨···"

"이 양반 또 젠체하네. 신나서 망치 두들길 때는 언제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전히 사이가 좋았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일단 살아야겠어서 집도 요새로 만들고 업그레이드도 하긴 했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화살 포탑 하나 올라간 게 전부야."

그간 아버지는 마석을 긁어모아 2레벨을 달성했으며, 레벨에 따라 장갑을 강화하거나 포격 포탑 같은 상위 등급의 방어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관련 자재가 요구되었지만, 다행히 집을 지을 당시 쓰고 남은 자재가 창고에 남아 있어 알뜰하게 건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나만큼이나 아포칼립스에 최적화된 능력을 각성한 아버지였다.

그래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아버지가 탄식했다.

"아쉽다! 마석만 더 있었어도··· 대 요새를 건설할 수 있었는데···"

"아빠, 김정겸 얘 돈 개많··· 읍"

김솔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입을 틀어막았다.

"다들, 일단 들어가시죠."

"···어딜?"

우선 모두를 아공간에 들이기로 했다.

그게 설명이 빠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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