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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맹견과 담벼락 (2)

부아앙!

트럭이 달렸고,

깨행!

달려들던 저글링이 차에 치여 운명을 달리했다.

지긋지긋하던 놈들의 물량을 줄여놓고 나니, 잡아내기가 한 결 수월했다.

애당초 하나하나의 전투력이 오크에 미치지 못하는 녀석들이었으니.

"···여기 3층입니다."

이용수가 핸들을 잡은 두 손을 벌벌 떨며 말했다.

그의 집은 주택가에 놓인 낡은 빌라였다.

유리로 된 공동현관은 박살이 나 있었고, 주변 전봇대 아래로 수거되지 못한 음식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행인 점은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시신이 발에 채이듯 있던 대로변과는 썩 다른 풍경이었다.

어찌 보면, 좋은 징후였다.

작은 빌라였다.

탑차로 주차장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은 뒤,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도착하기까지 힘주어 액셀을 밟던 이용수였으나, 정작 집 계단을 오르는 속도는 더뎠다.

문지방 너머에 있는 것이 축복인지 재앙인지 알 수 없는 그였기에.

어쩌면 그 결과가 끝없이 유예되기를 바라는지도 몰랐다.

그의 고뇌가 무색하게, 초인종 버튼은 너무나 가벼웠다.

마치 실수로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띵동-

초인종의 잔음이 길게 늘어지려던 찰나.

인터폰에서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야?"

***

"······!"

딸이 그에게 안겨 울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작은 토끼 같은 딸이었다.

딸아이의 울음 앞에, 이용수와 그의 아내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어느 정도 감정이 추스러진 뒤에야 이용수가 나를 소개했다.

"김정겸 씨라고···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셔. 이분 아니었으면 여기 오는 건 고사하고 애초에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야."

그가 물류단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거론했다.

오크에게 쫓기던 그를 구해준 일.

와이번들을 해치워 물류단지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 일.

마지막으로 자동 출하 스킬을 이용해 저글링들을 소탕해 길을 열어준 일까지.

듣다 보니 나까지 그런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보통 은인이 아니잖아?'

그저 서울로 가려 했을 뿐인데, 본의치 않게 그를 아주 많이 도와준 셈이 되었다.

물론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으리라.

이용수의 말이 끝나자, 그의 아내가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이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정말··· 이 사람 없으면 못 살 것 같았거든요."

애써 참던 눈물이 터졌다.

아장아장 걸어 온 딸아이도 조막만 한 고개를 숙였다.

"감샤합니다."

감동스럽지만, 또 한 편으론 어색한 분위기.

이용수가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일단 좀 앉아서 쉬시죠. 요기할 만한 거라도 내오겠습니다."

그는 안방에 있는 소파에 나를 앉혀두곤 거실로 나갔다.

두런두런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내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어느덧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 일찍부터 와이번을 해치웠고, 한참 동안 도심을 누빈 다음 한숨도 자지 않고 새벽 내내 저글링을 잡았다.

잠이 모자란 건 둘째치고, 피로감부터가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 집에 먹을 게 없어서··· 물도···"

바깥으로부터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지만,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흐릿해지는 시야를 애써 붙잡던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

"···!?"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미처 잠이 들 줄은 몰랐던 탓이다.

내 몸은 소파에 길게 눕혀진 채, 위로 따뜻한 담요가 덮여 있었다.

옆에는 이용수가 있었다.

보아하니 그도 침대에 기대어 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말했다.

"식사하시라고 할까 하다가··· 곤히 주무시길래 깨우질 않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잤죠?"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얼마 안 주무셨습니다. 3시간 정도?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그를 따라 거실로 나가자, 식탁 위로 무언가 이것저것 세팅되어 있었다.

그 위에 차려져 있는 것은 놀랍게도···

전형적인 한국인의 밥상이었다.

휴대용 가스버너 위로 전골냄비가 올려져 있었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김칫국물 사이로 통통한 꽁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거기에 고소한 냄비밥 냄새까지.

'···이게 가능한가?'

며칠 내내 맡아오던 멸망의 냄새가 일순에 지워졌다.

이용수의 아내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더 좋은 걸로 대접해드려야 하는데··· 재료 종류가 많지 않아서요. 아쉬운 대로 볶음김치랑 꽁치통조림으로 만들어봤어요. 저랑 딸아이는 먹었으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드세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딸이 있는 작은 방으로 떠나갔다.

간단히 말해 이건 그거였다.

꽁치 김치찜.

내가 자는 사이 트럭에서 재료를 꺼내온 모양이었다.

그중에 쓸만한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특식을 준비해준 셈이다.

이용수가 채근했다.

"어서 드세요."

"아··· 그럴까요?"

후르릅.

국물은 더한 감동이었다.

볶음김치의 달고 기름진 맛을 어떻게 해소한 것인지, 입안에 남는 것은 담백한 꽁치와 김치의 감칠맛뿐이었다.

김치 조각이 작은 건 아쉬웠지만, 자작이 끓은 국물과 밥알을 섞으니 별미도 이런 별미가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단숨에 그릇을 비웠고, 마찬가지로 식사를 마친 이용수가 믹스커피 두 봉을 꺼내왔다.

그러곤 가스버너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버너에 피어오른 푸른 불꽃을 바라보던 중, 이용수가 입을 열었다.

"목적지가 강남이라고 하셨죠?"

"예, 우선은요."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쉬실 만큼 쉬시다가··· 편하실 때 출발하시죠."

"예?"

당초 그가 동행하기로 한 것은 이곳 인덕원까지였다.

서울로 통할 수 있는 길목 중 하나였으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아내와도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정겸 씨가 가족을 찾으러 간다고 했더니··· 어디 우리 가족만 가족이냐고 하더군요. 아내나 딸아이나, 트럭에 챙겨온 물자들을 내려놓고 가면 최소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제가 그전에는 돌아오겠지만···" 

서울로 오가는 길.

그 길이 위험천만할지도 모른다는 당연한 말을, 그는 하지 않았다.

쪼르륵.

그저 시치미를 뗀 채, 내 잔에 뜨거운 물을 따를 뿐이었다.

뭉근하게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커피 프림을 보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놀란 이용수를 향해 말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아공간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

.

.

"팍스, 레벨을 올리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들일 수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타인(他人)은 2레벨부터 수용이 가능합니다.]

"2레벨이 되면, 몇 명이나 수용할 수 있어?"

[최대 20명까지 수용이 가능합니다.]

"오··· 꽤 되네?"

[그렇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펼쳐 우리 가족의 수를 헤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형과 형수, 그리고 두 누나까지.

이들을 빼고도 열세 자리가 남았다.

이용수와 그의 가족들을 너끈히 넣고도 남는 숫자였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마석 100개라는 어마어마한 가격.

하지만··· 

잘그락!

나는 큼지막한 더플백을 풀어헤쳤다.

새벽 내내 저글링 도축쇼를 벌였을 때 마석을 담아두었던 가방이다.

"세어줄 수 있어?"

[확인해보겠습니다.]

[···총 116 개입니다.]

"레벨업, 진행해줄래?"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공간 레벨 2에서는 전력 유지 비용이 24시간마다 마석 3개로 조정됩니다.]

[수도/가스 비용 또한 24시간마다 마석 3개로 동일합니다.]

더 큰 능력에는 그만한 비용이 따른다는 거였다.

적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겁낼 비용은 아니었다.

나는 점차 강해지고 있었으니.

[알겠습니다.]

[레벨업 진행 중···]

두웅-

순간, 붉은색 파장이 번쩍하고 공간을 휘감았다.

눈 깜짝하는 사이 원래의 흰 배경이 돌아왔고···

"끝난 거야?"

[그렇습니다.]

[이제 원하시는 대로 타인도 아공간에 수용하실 수 있습니다.]

레벨 2를 찍었다.

새로운 능력이 무엇인지, 어떤 스킬을 강화할 수 있는지는 차차 확인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있었으니.

그렇게, 아공간을 빠져나왔다.

.

.

.

"···오셨습니까."

이용수가 식은 커피잔을 홀짝거렸다.

애써 서울로 데려다주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돌연 내가 자리를 벗어났으니 조금은 멋쩍기도 했으리라.

내가 그의 제안에 답했다.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용수 씨."

"예예, 마음 정하셨군요. 그럼 언제···"

"단, 혼자는 안 됩니다."

"예?"

위잉-

포탈을 열어둔 채 말했다.

"아공간의 레벨을 올렸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도 들일 수 있어요. 용수 씨도, 용수 씨의 가족들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가 반색했다.

내 아공간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무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무한한 물자가 들어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으니.

지구상에 존재할 그 어떤 요새보다도 안전할 터였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면···"

"강남이 끝이 아닙니다. 을지로, 도봉구, 의정부까지. 끝까지 저를 데려다주시죠. 제 가족을 구하는 일에 계속해서 힘을 빌려주신다면··· 저 또한 용수 씨의 가족을 끝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그에게 내가 필요한 것처럼, 나 또한 그가 필요했다.

먼 길을 이동해야 하는 나에게 그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될 테니.

벌떡!

내 말을 들은 이용수가 몸을 일으켰다.

"둘을 데려오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죠."

***

[외부의 존재가 입장을 시도합니다.]

[이용수, 오지수, 이유정의 입장을 허가하시겠습니까?]

"허가할게."

내 허락이 떨어지지마자, 세 사람이 아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와아···"

세 사람은 포탈을 넘어오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다.

창문 밖으로 광활히 펼쳐진 아공간도 그렇지만, 애당초 풀필먼트 센터의 시설 자체가 장관이기는 했다.

미래 도시를 연상시키는 최신식 시설에, 자동화된 AGV 로봇이 이리저리 선반을 옮기고 있었으니.

나는 이용수와 그의 아내 오지수를 데리고 가장 먼저 픽킹 스테이션으로 데려갔다.

"여기 보이는 PC에서 품목을 검색하고 주문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그러면 물건이 여기로 자동 배달될 거예요. 지내시면서 필요한 물건은 알아서 주문해서 쓰시면 됩니다."

아포칼립스에서의 즉시 배송이라니, 이용수는 기함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그의 아내, 오지수가 눈을 빛냈다.

"혹시 식재료들도 많이 있을까요?"

"여기가 1층인데, 3층에 프레시 센터가 있어요. 어지간한 음식 재료는 거기에 다 있을 테니··· 필요하면 주문해서 쓰세요."

"세상에··· 너무 좋아요!"

그녀가 감탄하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각종 채소류에 고기, 싱싱한 해물들까지.

정작 나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던 곳이었다.

직원 식당에 있는 조리실까지 그녀가 알뜰살뜰하게 써먹어 줄 듯했다.

분위기도 살릴 겸, 물건을 주문하는 법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시크릿 주주 캐릭터 하우스, 가격은 41,360 원입니다.]

AGV로봇이 분홍빛 찬란한 여아용 장난감을 가져왔고, 딸 유정이에게 선물을 건넸다.

선물을 받은 아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자기 부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쩐지 멋쩍은 기분이 들어, 농담을 건넸다.

"···취향에 안 맞으면 교환도 가능하단다."

그제야 이용수가 딸의 등을 토닥였다.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샤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유정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오지수와 유정이를 직원 휴게실에 데려다준 뒤, 이용수와 나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가 운전하는 차가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자신이 살던 오래된 빌라를 눈에 담기 위해.

세 들어 살던 월셋집.

멸망한 세상 속, 소유권의 개념 자체가 풍비박산 난 지금이었지만, 그가 온존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법적 효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가족사진 하나 챙겨오지 못했다.

아공간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허락된 것은 그저 거대한 풀필먼트 센터, 단 하나뿐이었다.

돌이켜 보자면···

아공간 물류센터에는 세상의 모든 물건이 담겨 있었다.

단, 없는 것만 빼고.

9. 소영주의 꿈 (1)

"서울로 가려면 과천대로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큰길에는 아직 저글링들이 있을 테니··· 샛길로 우회해서 한번 가보겠습니다."

백여 마리가 넘는 저글링을 해치웠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했다.

인덕원역 흥안대로에는 여전히 수백 수천마리의 괴물들이 들끓고 있었으니.

다행히 이곳 지리에 빠삭한 모양인지 이용수는 익숙하게 차를 몰았다.

부르릉.

서울로 향하고 있음에도 점차 시골길처럼 변하는 도로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가 근처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이 근방이 청동기 유적지라나 뭐라나··· 그 탓에 개발이 안 됐다더군요."

금세 거칠어지는 자갈길에, 차체가 연신 울컥거렸다.

과거 시대에 대한 역사적 보존.

더 이상 그런 게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이제 인류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갈 테니.

그렇게 굽이진 도로를 십여분 가량 달렸을 즈음이었다.

"···앞에 뭐가 있군요."

멀찍이 놓인 철제 바리케이드가 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노란과 검정 패턴.

군에서 사용하는 철제 바리케이드였다.

그 앞으로 날카롭게 못을 세운 철침판이 놓여있었기에,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용수가 물었다.

"군이 아직 있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이 옆에 군부대가 하나 있긴 하거든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바리케이드 옆을 지키고 있는 사내들을 가리켰다.

"군복을 안 입고 있어요."

스포츠 바람막이부터 반팔차림까지.

그 팔뚝에는 형형색색의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이었다.

내가 말했다.

"···소총이네요."

"이런··· 다른 길로 돌아갈까요?"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빵빵-

뒤에서 하이빔을 켠 레토나 차량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완벽한 양동작전에 걸려든 참이었다.

내가 말했다.

"용수 씨, 일단은 포탈 열어 드릴 테니 들어가 계세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장롱 면허지만 엑셀 정도는 밟을 줄 압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다짜고짜 총부터 쏘지는 않겠죠. 지금도 그러고 있고요. 기습만 아니라면 죽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그가 없는 편이 더 나았다.

아공간 포탈을 벽처럼 세우면 총알도 막아낼 수 있을 테지만, 이용수에게 그런 방어 수단은 존재하지 않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그도 내 뜻을 이해했는지, 조수석 사이로 생성된 포탈에 서둘러 몸을 구겨 넣었다.

나 또한 덜덜거리는 차체의 진동을 느끼며, 천천히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막상 핸들을 잡으니 머리가 하얬다.

젠장 운전 어떻게 하더라.

손을 대충 얹어 놓은 뒤,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다시 속도가 붙은 트럭이 놈들이 세워 놓은 검문소 앞까지 다다랐고,

덜컹!

철침판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창문을 내리자 소총을 목에 건 사내가 실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운전 한번 뭐같이 하네. 바퀴 터지는 거 한번 구경해볼까 했더니만."

"···무슨 일입니까? 군에서 나오신 건 아니신 듯한데."

사내가 보글보글한 파마머리를 흔들며 히죽 웃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바로 1대대장이야-!"

그의 과장스런 몸짓에, 반대편에 있던 남자가 맞받아쳤다.

"야이 새끼야. 니가 대대장이면 난 뭐가 돼?"

"아 형님은 연대장 아니겠습니까! 충성!"

"씨팔, 연대장이랑 대대장이 위병소 뺑이치고 지랄이다 새꺄."

제 형님과 장난을 주고받던 사내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오늘부로 말뚝 박기로 했어. 됐지? 그래서 우리 애기는 어디까지 가려고 이 큰 차를 몰고 계실까? 황천길?"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탑차의 뒷문이 열렸다.

뒤를 따라오던 레토나에서 내린 졸개들이 그새 문을 연듯했다.

놈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님! 이 새끼 미쳤는데요?"

"와 씨바, 존나 대박이네!"

짐칸에는 이용수가 물류단지에서부터 챙겨온 각종 물자가 가득 실려있었다.

생수부터 통조림, 방한용품까지.

없는 게 없을 터였다.

졸개들을 따라 트렁크를 둘러보고 돌아온 사내가 오두방정을 떨었다.

"택배기사 아저씨셨네? 물건 이렇게 삥땅 쳐도 괜찮은 거야?"

"다 가져가셔도 상관 없습니다. 더 구해다 드릴 수도 있고요."

"정말? 너 되게 협조적이다?"

그때였다.

수풀 너머로 나타난 또 다른 부하가 그에게 외쳤다.

"형님! 이제 한 시입니다!"

"아, 벌써?"

사내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일단은 내려. 여기 접어야 하니까."

우선은 그의 말에 따랐다.

출하 스킬을 쓰면 단숨에 제압이 가능하겠지만, 그러기엔 놈들의 수가 많았다.

하나같이 소총을 들고 있다 보니 좀 더 확실한 기회를 살피기로 했다.

내심 믿는 구석도 있었다.

2레벨을 달성한 아공간.

그 이점은 단순히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는 데서 그치지 않았으니까.

놈이 다른 부하 한명을 불러왔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니가 이거 몰고 들어와. 얘는 내가 데리고 들어갈 테니."

"데려갑니까?"

"엉. 이거 박스 더 갖다줄 수 있다대? 큰형님이 좋아하시지 않겠냐?"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나를 뒤에 있는 레토나 차량으로 데려갔다.

그러곤 나를 뒷좌석에 태운 뒤,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총구는 여전히 내 가슴팍에 향해있는 상태였다.

"여기 두어 시쯤 되면 뭐가 졸라게 튀어나오거든. 밖에 안 나와 있는 편이 좋아."

그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차가 덜컹이며 언덕을 올랐다.

놀랍게도 놈들이 향한 곳은 진짜 군부대였다.

차가 다다르자, 철로 된 위병소 문이 옆으로 드르륵 열렸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 또한 군인이 아니었다.

내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사내가 위병소를 지키던 부하들에게 말했다.

"이따 늦지 않게 들어가라. 벌써 한 시다."

"알겠습니다. 형님."

부대 안은 놀라우리만치 한적했다.

이따금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눈에 띄었을 뿐.

어쩌면 저글링들에 의해 떼죽음을 당한 병사들의 소속이 바로 이곳이었는지도 몰랐다.

"내려."

우리가 내린 곳은 연병장 한쪽 끝이었다.

과연 그 앞에는 화려한 부대 마크가 박힌 건물이 드리워 있었다.

그것이 이곳의 이름이었다.

그가 나를 건물 내부로 안내했다.

건물의 3층에 올라, 그의 '큰형님'이 있다던 방에 다다랐을 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날 뻔했다.

방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나를 안내하던 사내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형님, 저 석준입니다."

"어, 들어와라."

내부는 정갈한 집무실이었다.

벽면에는 태극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휘장들이 깃대에 걸려 있었고, 그 앞에 놓인 책상에 한 사내가 담배를 태우며 앉아 있었다.

헐렁한 셔츠 차림에 흰 바지를 입은 사내의 얼굴에는 큼지막한 흉터가 대각으로 그어져 있었다.

재떨이가 없었던지, 그는 피우던 담배를 책상에 비벼 꺼뜨렸다.

암만 봐도 '사령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서 일 봐."

"예, 형님."

석준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문을 닫고 나갔다.

사령관은 턱 하니 책상에 무언가를 올려두었다.

새까만 권총이었다.

그가 물었다.

"그 많은 물건을 어디서 다 났어?"

무전을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를 이미 건네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사실대로 답해주었다.

"군포 물류센터에서 챙겨왔습니다."

"아! 물류센터!"

그가 미처 몰랐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머리 존나 좋네. 나도 그런 델 먼저 먹었어야 했는데."

"···여긴 어떻게 된 겁니까?"

"흐흐, 오면서 군바리들 다 뒈져있는 거 못 봤어?"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 지들끼리 무슨 작전이랍시고 설치다가 다 뒈지더라고. 안에 잔당만 조금 남았길래 쓱싹하고 접수했지. 내가 행동력 하나는 참 빨라."

내심 자랑스런 표정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문제가 좀 있어. 총도 있고, 수류탄도 있고 다 좋은데··· 정작 먹을 게 별로 없더라? 전투식량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고, PX도 코딱지만 하고. 그래서 니가 수고 좀 해줘야 할 거 같아."

그가 몸을 일으켜 저벅저벅 걸었다.

그러곤 대단한 작전 브리핑이라도 하는 양, 나에게 상세한 계획을 전달해주기 시작했다.

"트럭 몰고 그 잘난 물류센터에 좀 다녀와. 애들 딸려 보낼 거니까 허튼 생각하지 말고 방향만 똑바로 안내해. 뭐··· 원한다면 우리 쪽에 붙어도 좋아. 당분간 좀 구르긴 하겠지만, 괜히 밖에 돌아다니다가 괴물들한테 뜯겨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그때, 창밖으로 낯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에에-

끼에에에-!

세찬 울음소리가 연거푸 겹쳐 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해가 가려졌다.

퍼득.

퍼드드득.

수천 장의 날갯짓 소리가 우레처럼 쏟아졌다.

짙은 먹구름처럼 하늘을 메우는 놈들을 보며, '사령관'이 투덜거렸다.

"오늘은 좀 빠르네. 평소엔 두 시에 오더니만."

놈들은 와이번이었다.

하지만 터널에서 보았던 놈들과는 뭔가 달랐다.

"저건···"

"미쳤지? 쟤가 우두머리거든."

유난히 몸집이 큰 한 마리의 와이번.

머리와 몸통이 검게 물들었고, 꼬리와 다리는 기름이라도 덮인 양 무지갯빛으로 아른거렸다.

그 크기가 유난히 거대했다.

어쩌면 와이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드래곤?"

그렇게 부를 만한 존재였다.

저런 놈은 도끼를 수백 번 던져도 도무지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놈이 수천 마리의 와이번과 함께 상공을 휘저었다.

'사령관'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잘 들어. 우리 애들이랑 같이 일단 물류센터에 다녀 와. 니가 허튼수작만 안 부린다면 우리 식구로 받아줄 테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가 검은 권총을 들어 보였다.

그러곤 주먹을 움켜쥐었다.

으드드득···

총신이 조금씩 우그러졌고,

타앙-!

천장으로 총알이 발사되며 권총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엄청난 괴력이었다.

"나는 각성자다. 이라는 능력을 얻었지. 이 시스템 창은 도무지 거짓말이란 걸 하지 않아. 내가 최강이라면 최강인 거다. 그러니···"

그가 봉신계약의 최종 조건을 제시했다.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식량 찾아오고, 마석도 좀 찾아오고. 그러면 내가 널 괴물들로부터 지켜주마. 세상이 변했어. 이제 힘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거지··· 그러니 바로 이 내가···"

그의 장광설이 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그는 어딘가 취해있었다.

어쩌면 멸망 그 자체에.

무너진 문명 속에서, 그는 낡은 구시대의 향취를 좇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나는 왕이 될 거다. 여기가 내 나라가 될 거고."

하늘을 날고 있는 또 다른 왕, 드래곤이 슬쩍 이곳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건물 안에 있어서인지 그저 와이번들과 함께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과연 우두머리란 존재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가족은 이딴 드잡이질이나 일삼는 깡패 새끼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령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나대로 계획하고 있는 바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팍스에게 말을 걸었다.

바로 오늘, 아공간 레벨 2를 달성한 상태였다.

유지 비용이 늘어나고, 한층 더 스킬을 강화할 수 있게 됐지만 가장 큰 성과는 따로 있었다.

팍스가 내게 물었다.

[저장할 대상을 입력하시겠습니까?]

[저장 가능 횟수 : 1]

내가 답했다.

'이곳 국군 지휘 통신 사령부를 넣어줘.'

나는 사령관의 영지를 송두리째 탈취할 작정이었다.

10. 소영주의 꿈 (2)

[대상이 지정되었습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그래.'

[저장을 시작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속이 메스꺼워졌다.

면적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일까, 풀필먼트 센터를 넣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욱!"

깡패 사령관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멀쩡하던 내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며 쓰러졌으니.

"···?"

하지만 그가 놀라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도 마찬가지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뭐야 시발···?"

우리가 선 곳은 거대한 연병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확히 이곳 군부대의 구역 전체를 도려낸 것인지, 케익조각처럼 잘려 나간 산의 단면이 보였다.

쿠구구구···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흙과 바위, 그리고 나무가 산사태처럼 쏟아졌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저장을 완료했습니다.]

이곳 군부대를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다른 말로는, 사령관의 영지를.

사태의 원인이 나라는 것을 간파한 놈이 붉으락푸르락 성을 갈았다.

"너 이새끼 내 땅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땅이라니.

과연 소유욕이 대단한 놈이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혹여 놈에게 잡혀 있었다면 각종 자원은 물론 마석까지 얻는 족족 갖다 바쳐야 했으리라.

영노가 자신의 소작을 영주에게 바치듯이.

하지만 놈은 이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

법적으로도 그랬고, 스스로 자랑하던 힘의 논리에서도 그러했다.

위잉-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아공간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와이번들의 무리가 어느덧 하늘을 새카맣게 물들이고 있었으니.

"그럼 이만."

냉큼 포탈로 들어가 버렸다.

텅 비어버린 공터에는 사령관과 그의 연대장, 대대장 및 졸개들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놈들이 사령관을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형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시팔··· 야, 총 들고 다 이리로 모여! 숲 쪽으로 대피한다!"

그가 리더십을 발휘했다.

물류단지 터널에서 맞닥뜨렸던 와이번들의 습성이 떠올랐다.

숲속 같은 그늘진 장소라면 놈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능력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뽀글머리 대대장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게··· 총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군용 차량까지···"

"그게 왜 사라져 씹새끼야!"

사령관이 애꿎은 대대장을 갈궈댔다.

총이건 차량이건 본래 이곳 부대의 물건이었을 터.

아공간이 그 속에 속한 물건으로 인지하여 함께 흡수한 모양이었다.

살길이 묘연해졌다 느꼈는지, 사령관이 대뜸 포탈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외부의 존재가 입장을 시도합니다]

[조광식의 입장을 허가하시겠습니까?]

"···아뇨?"

터엉!

투명한 벽에 가로막혔다.

그가 재차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개새끼야! 죽여버리기 전에!"

텅텅!

그는 끝까지 힘의 논리를 내세웠다.

힘의 논리라 그런지 그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펄럭.

더 큰 힘의 소유자가 바람을 일으키며 땅에 내려앉았다.

검은 머리의 드래곤.

사령관 조광식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강자였다.

크르르르···

콧김에 바닥의 먼지바람이 일었고, 놈은 흥미롭다는 듯 내가 숨은 아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다른 괴물들을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지성이 있는 건가?'

내심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드래곤은 이내 내게 관심을 거두었다.

그의 눈앞에는 싱싱한 먹잇감들이 벌판에 놓여 있었으니까.

수천 마리의 와이번들이 퍼드득 놈들을 향해 날아들 찰나.

"팍스야, 문 닫아."

[알겠습니다.]

포탈을 꺼뜨렸다.

구태여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저게 다 뭡니까···?"

몸을 돌려보니, 입을 쩍하니 벌린 이용수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서 있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포탈 너머로 보이던 와이번들의 수는 가히 압도적이라 할만했으니.

더욱이 와이번의 무서움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이용수였다.

내가 대답했다.

"당장은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놈들이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요."

깡패들이 이야기하던 '시간'.

그건 짐작하건대 바로 저 드래곤+와이번 무리의 이동 스케줄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놈들의 순찰이 무슨 목적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같은 곳에 계속 머무르지는 않을 터.

이용수가 긴장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주변으로 몇 가지 물건들이 널어져 있었다.

매트리스, 의자, 식탁 같은 가구들이었다.

그렇다.

이놈의 풀필먼트 센터에는 가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용수의 아내, 오지수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휴게실을 꾸며두고 있었어요. 쉬실 때 침대 같은 게 있으면 편하실 것 같아서 준비하다 보니··· 하나 둘 일이 커졌네요."

나름 이곳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을까 고심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남의 집에 얹혀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을 테니.

일이 커졌다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무한 재고의 무료 쇼핑몰.

거기서 마음대로 골라잡아 방을 꾸밀 수 있는데 신이 날 수밖에.

"물건이 좀 많죠···? 하하···"

이용수가 멋쩍게 웃었다.

가구들의 무게가 제법이다 보니 그도 한 발 거들고 있던 모양.

나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게 될 시간이 많을 거다.

그런 공간을 알아서 고치고 꾸며준다니, 고마울 수밖에.

이용수가 말을 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한숨 주무시겠어요? 휴게실에 침대 한 세트는 완성해둔 참이거든요."

확실히 그의 말대로 잠이 부족하긴 했다.

더욱이 지금은 꼼짝없이 이곳 아공간에 머물러야 할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먼저 쉬고 계세요. 저는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가만히 물류센터의 창문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흰 공백과도 같은 풍경이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더해져 있었다.

방금 저장한 군부대.

국군지휘통신사령부의 전경이 창문 밖으로 내다보였다.

이용수가 말했다.

"그런데 저건 뭡니까? 갑자기 떡하고 군부대 시설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새로 흡수한 공간입니다. 말씀대로 실제 군부대고요."

"아니 무슨 군부대를 통째로···?"

놀라운 것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류센터에 이어 군부대까지.

내가 봐도 가공할 만한 능력이었다.

"어떻게 활용할지는 차차 생각해보죠."

.

.

.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왔다.

저벅저벅.

물류센터의 옆문을 통해 나가니, 마당과 부대 위병소의 정문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안쪽 막사로 향하는 오르막을 걸었다.

군부대 지형 전부를 들여온 탓일까?

이곳이 안인지 밖인지조차 구분이 잘 가질 않았다.

흰 도화지 같은 하늘을 보며, 이곳이 아공간 내부겠거니 어렴풋이 짐작할 뿐.

"확실히··· 꽤나 넓긴 하네."

[그렇습니다.]

팍스가 맞장구를 쳤다.

군부대의 활용 방안은 무궁무진하다.

총기, 탄약이나 폭약, 군용 차량부터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는 방독면과 같은 전략 물자까지.

조광필이 머리 좋게 선점한 것처럼, 아포칼립스를 대비하기에 이만큼 좋은 장소도 드물었다.

다만···

"활용하기는 좀 번거롭겠어."

기존 물류센터에서는 손에 닿듯이 원하는 물건을 받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출하' 스킬을 이용하면 물건이 밖으로까지 배달되곤 했으니.

그것 자체가 내 장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부대는 물류센터가 아니다.

총기는 무기고에서, 탄약과 폭약은 탄약고에서, 차는 예하의 수송대대에서 직접 가져와야 했다.

모두 위병소와 썩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소총 한 정 출하, 이런 식으로 받아볼 수는 없다는 거네."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하지만, 팍스의 의견은 달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 아공간은 저 AI 팍스에 의해 물류 시스템을 포맷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새로 편입된 이곳 섹터 2 또한, 물류창고의 일종으로 취급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설마···

[현재 전산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섹터2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에 대한 상품 코드 분류가 끝나는대로, 기존에 등록되어 있던 상품들처럼 출하 스킬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잠깐, 그럼 소총도 복사가 된다는 거야···? 물류센터에 있던 상품들처럼? 출하 스킬로도 내보낼 수 있고?"

[그렇습니다.]

"개사기잖아?"

[그렇습니다.]

[단, 말씀드린 것처럼 현재는 전산 작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사용이 불가합니다.]

[현재 작업 진행률은 0.81%입니다.]

"다 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항목별로 소요 시간이 다르기에 정확한 예측이 어렵습니다.]

[단, 원하시는 품목을 말씀해주시면 우선해서 상품 코드를 배정할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상품이 있으실까요?]

"총기류랑 탄약류, 폭약 같은 것 먼저 등록해줘. 아, 차량이랑 기름도."

[말씀하신 품목들은 6분 내로 우선해서 상품 코드를 배정하겠습니다.]

[총기와 탄약, 폭약은 픽킹스테이션에서도 수령이 가능합니다.]

"아, 그래. 대신 다른 사람들은 주문할 수 없게 막아줘."

[알겠습니다.]

[해당 품목들에 대해서는 주문 권한을 제한해두겠습니다.]

필요한 조치였다.

이제 이 아공간에 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니.

이용수와 그의 가족들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누가 아공간 안에서 총질이라도 해댄다면 꽤나 곤란할 터였다.

"이런 건 미리미리 조심해둬야지."

[그렇습니다.]

알파고 쌈 싸 먹는 고성능 AI 께서도 내 의견에 동의를 표하셨다.

아무튼 팍스가 매끄럽게 처리를 해준 덕에, 불필요하게 이곳 군부대를 해집을 필요가 없어졌다.

총이건, 방탄이건, 탄약이건, 편하게 배달로 받아보면 될 터.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물류센터 건물로 향했다.

돌아와 보니, 이용수와 그의 아내는 연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뭘 하고 있었나 했는데, 그새 휴게실을 살기 좋게 꾸미려 구슬땀을 흘리고 있던 모양이다.

이용수와 그의 아내, 오지수가 나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한번 보세요. 맘에 드실 거예요."

"아니 이게···"

수십 센티 높이에 달하는 호텔식 매트리스.

그 주변으로 고급스런 원목 탁자와 스탠드를 배치해두었다.

심지어 그 위로 깨끗한 유리병과 잔까지 비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바닥과 판넬 벽만 없었다면 호텔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오지수가 말했다.

"여기 남자 휴게실을 정겸 씨 전용 공간으로 꾸며봤어요. 여기 물류센터에 정말 없는 물건이 없더라고요."

분명 고생이 많았을 텐데, 이상하게 그녀는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새 피골이 상접해진 이용수는 별로 안 그래 보였지만.

내가 오지수에게 답했다.

"이것 참, 고맙네요. 눈 깜짝할 사이에 새집이 됐네···"

집 꾸미는 센스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용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괜찮으시다면 저희는 여자 휴게실에 있는 큰 방에 지내도 괜찮을까요? 불편하시면 다른 공간을 내어주셔도 좋고요."

이런, 그러고 보니 이들 가족을 들인 뒤 제대로 거처를 지정해주질 않았었다.

나도 서둘러 대답해주었다.

"제가 깜빡했네요. 그러지 말고 여자 휴게실 통째로 쓰셔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중에 가족분들도 들이셔야 할 텐데요."

"괜찮습니다. 저기 군부대 생활관도 있고··· 보아하니 간부 숙소까지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용수 씨는 워낙 저랑 같이 움직이실 일이 많으니까요. 가까이 계시는 게 편할 듯합니다."

어차피 공간은 넉넉했다.

여차하면 나중에 5성급 호텔을 통째로 넣어와도 좋으리라.

이용수가 대답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일단은···"

위잉-

밖으로 나가는 포탈을 열어보았다.

퍼드득.

퍼득.

여전히 태풍처럼 밖을 휩쓸고 있는 와이번들의 모습.

반면 사령관, 조광식과 그의 부하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아직 나갈 수는 없었다.

"한숨 자고 출발할까요?"

이곳 아공간은 평화로운 폭풍의 눈이다.

완전히 안전한 장소지만, 아쉽게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와이번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다시 서울로 움직여볼 생각이었다.

강남까지 가는 게 이렇게나 고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제 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이제 내게는 군부대에서 얻은 소총이 있으니까.

심지어···

탄약도 무제한이었다.

11. 무한탄창의 거부(巨富) (1)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나는 흰 구스다운 이불 틈에서 눈을 떴다.

탄탄한 매트리스 쿠션 덕분인지, 뻐근하던 어깨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가뿐하게 움직였다.

침대 옆 탁자에는 투명한 물병이 놓여 있었다.

쪼르르···

병에 담긴 물을 따라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자취방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좋은데···?'

누가 이걸 아포칼립스에서의 삶으로 보겠는가.

사우디 거부들의 지하 벙커도 이곳 팍스 풀필먼트 센터에 비비지는 못하리라.

니네 창고는 무한 아니잖아.

그렇게 일어나 차림을 정리하고 있자니,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겸 씨, 접니다."

"예, 용수 씨. 들어오세요."

"집사람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일어나셨으면 같이 드시면 어떨까 해서요."

"좋죠."

나는 대답과 함께 전투화 끈을 조였다.

빳빳한 새 양말의 감촉이 부드럽게 발을 감쌌다.

휴게실 바깥에서는 먼저 채비를 마친 이용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2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집사람이 신이 났습니다. 여기 주방에 없는 게 없다고···"

평소 수백 인분은 기본으로 하는 직원 식당이었다.

어지간한 장비는 모두 갖추어져 있을 터.

간혹 없다 해도 아래 물류센터에 널린 게 조리 도구였다.

달칵.

식당의 문을 열어젖히자,

킁킁.

코끝이 절로 반응했다.

주방 가까운 위치에 있는 식탁.

바로 그곳에 이용수와 나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방장 오지수가 오늘의 요리를 설명했다.

"이번에는 간단하게만 차려봤어요. 사실은 주방이니 프레시 센터니 돌아보다가 시간이 부족해져서··· 그래도 아침으로는 꽤 괜찮을 거예요."

각자에게 주어진 넓적한 접시.

그녀의 말마따나, 복잡한 요리는 아니었다.

노른자가 살아 있는 달걀 프라이 세 개, 껍질 끝이 살짝 그을려 있는 독일 소시지, 두꺼운 베이컨 세 줄과 구수한 베이크드 빈, 마지막으로 수풀레처럼 촉촉한 팬케이크까지.

그녀가 이 장엄한 협주곡의 정체를 밝혔다.

"럼버잭 브랙퍼스트라고, 저희가 자주 해 먹는 거예요."

"무슨··· 잭이요?"

옆에 앉은 이용수가 귓속말로 대처법을 알려주었다.

"···그냥 세상에 그런 게 있겠거니 하면서 드시면 됩니다."

"아···"

과연 경험자답게, 연륜이 묻어났다.

어색한 표정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나란히 들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더 있으니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그녀는 방긋 웃으며 접시에 담긴 팬케이크에 메이플 시럽을 부어주었다.

포크로 촉촉한 팬케이크를 잘랐다.

그러곤 반쯤 터진 노른자와 베이컨, 베이크드 빈을 끼얹었다.

"···!"

팬케이크가 입 안에서 크림처럼 흩어졌다.

그 빈 자리를 채우는 베이크드 빈의 진한 맛.

마지막으로 단단한 베이컨이 식감을 채웠고, 마지막으로 잘 구워진 독일 소시지를 베어 물었을 땐···

"···미쳤다."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라기엔 일렀다.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주인공이 남아 있었으니까.

툭.

오지수가 나와 이용수 앞으로 뜨끈한 블랙커피를 내려놓았다.

"제가 너무 갖고 싶던 커피머신이 물류센터에 있더라고요. 신혼살림 꾸릴 때 그렇게 사자고 조르던 건데···"

흰 찻잔에 담긴 커피가 뭉근하게 향을 피워 올렸다.

브런치 메뉴에 커피라니.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후릅.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잔을 들어 올린 우리 두 사람은···

"미쳤다."

"미쳤다."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

1층으로 돌아온 나는 한껏 부풀어 오른 배를 탕탕 두드렸다.

단, 그 행복은 공짜가 아니었다.

[전력 가동 중단까지, 약 36 시간 남았습니다.]

[가스/수도 공급 중단까지, 약 43 시간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은 하루 하고도 한나절 정도.

그리고 내 수중에 남은 마석의 양은··· 열여섯 개에 불과했다.

"은근 돈 먹는 하마네, 이거···"

레벨이 오른 것 자체는 좋았지만, 유지 비용이 껑충 뛰어버렸다.

이제 하루에 필요한 마석은 자그마치 여섯 개.

단순 계산해도 사흘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킬도 강화하고··· 능력도 개방해야지."

띠링!

팍스가 창을 띄워주었다.

----[강화 가능 항목]----

[비용 5]

◈ 출하 소요 시간 [5초] [+]

◈ 출하 사정거리 [10m] [+] (단, 15m까지는 비용 1이 적용됩니다.)

◈ 출하 속도 [최대 100km/h] [+]

-------------------------

----[개방 가능 항목]----

[비용 50] 

◈ 동시 출하(2)

-최대, 네 개의 상품을 동시에 출하할 수 있습니다.

◈ 추적 배송

-출하된 상품이 설정된 목적지를 자동으로 추적합니다.

◈ 상품 회수

-별도의 포탈을 열어 상품을 회수합니다. (단, 아공간에 등록된 사물에 한합니다.)

-------------------------

아공간 레벨 2를 달성한 덕이다.

출하 스킬을 더 강화하거나, 새로운 능력을 개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가격이 이게 맞나?"

강화 비용은 5, 능력 개방 비용은 50.

자그마치 기존의 다섯 배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가장 가관이었던 것은···

[레벨 3 격상을 위해서는 마석 1,000 개가 소모됩니다.]

천 개.

기존 대비 열 배에 달하는 비용이었다.

"당분간은 꿈도 못 꾸겠네."

그래도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다.

마석을 얻는 속도가 차츰 빨라지고 있었으니까.

더더욱이 이번만큼은,

"새 무기를 얻었으니까."

나는 픽킹 스테이션에서 상품 하나를 주문했다.

덜컹!

별다른 포장없이 투명 비닐에 덩그러니 싸여 있는 물건.

물건을 묵직하게 받아들자, 팍스가 상품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K2 소총, 가격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추가로 이것저것 더.

[5.56mm NATO 탄, 10개 * 3세트]

[STANAG 30개입 탄창]

[K413 세열수류탄 * 3세트]

비릿한 쇳내.

새삼 내 전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이건 캠핑용 손도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살상용 무기였으니까.

철컥! 철컥!

5.56밀리 탄 하나하나를 탄창에 끼워 넣었다.

꽉 채우면 고장이 잦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 딱 스물여덟 발만 채워 넣었다.

그러곤 묵직해진 탄창을 팍스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렇게도 출하가 가능할까?"

[두 상품을 합쳐 세트 상품으로 출하가 가능합니다.]

[세트로 등록해드릴까요?]

"그래 부탁해."

[알겠습니다.]

전투조끼, 전투화, 소총을 추가로 주문한 뒤, 이용수를 불러왔다.

"부르셨습니까?"

"이거 받으세요. 군대 다녀오셨죠?"

"아아, 그럼요. 다녀왔죠."

그가 익숙한 솜씨로 소총을 받아들었다.

"이제 나가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여차하면 이걸로 싸워보죠."

"소총이라니··· 이젠 정말 무서울 게 없네요."

서서히 아포칼립스의 최강자로 거듭나고 있는 우리였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 포탈로 뛰어드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다칠 순 없죠."

그 또한 의지를 다졌다.

밖으로 향하는 포탈이 열리자, 이용수가 말했다.

"다행히 이제 다 물러갔나 봅니다."

구름떼처럼 하늘을 뒤덮던 놈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어둡고 푸른 초저녁의 하늘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천천히 포탈 밖으로 발을 디뎠고,

휘이이-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 뭔가를 발견했다.

"그 깡패들이네요."

사령관, 연대장, 대대장, 그리고 그 밖의 졸개들까지.

놈들의 옷가지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그 위로 말라붙은 검붉은 핏자욱이 놈들의 시체를 대신했다.

"우선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 보죠."

서둘러야 했다.

시간이 되면 놈들이 돌아올 테니.

하지만 그렇게 채비하려던 찰나,

"···젠장."

나는 우뚝 자리에 멈추어 섰다.

"왜 그러십니까?"

이용수가 물었지만,

위잉-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우선 포탈부터 열어두었다.

"놈들이 아직 떠나질 않았어요."

"···놈들이요? 설마 아까 그 와이번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불현듯, 아까 마주쳤던 드래곤의 눈빛이 떠올랐다.

"···여태 우리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끼에에에에에에-!

끼에에에!

울창한 숲으로부터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퍼드득!

퍼득!

수 없이 겹치는 날갯짓 소리.

놈들이 하늘을 까맣게 채우기 시작했다.

이용수가 당장 포탈로 들어가자며 나를 채근했다.

"정겸 씨, 너무 빨리 나온 것 같습니다. 일단은···"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놈들은 계속 기다릴 겁니다. 다른 곳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것이 내 아공간 능력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포탈의 위치가 안전하지 않다면, 역으로 아공간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놈들이 아직 모르는 게 하나 있죠."

철컥!

포탈을 등지고, 날아드는 와이번들을 향해 총구를 들었다.

그러곤,

투다다다다다다-!

미친 듯이 총알을 갈겼다.

군 생활 내내 결단코 사용해본 적 없던 조정간 '연사'였다.

당연히 몇 초 만에 탄알이 바닥났고,

툭.

빈 탄알집이 땅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슈슉!

갓 출하된 새 탄창이 내 손에 쥐어졌다.

미리 탄알을 끼워둔 스물여덟 발짜리 탄창이었다.

철컥!

탄알을 마저 장전했고, 

투다다다다다!

다시 총알을 발사했다.

총알이 초저녁 하늘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끼에에엑!

끼엑!

하늘은 괴성을 되돌려주었다.

이용수도 하늘을 향해 매캐한 탄알을 쏘아 올렸고,

'다중 출하' 능력을 이용해 그에게도 5초마다 새 탄창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두 개의 소총이 불길을 토해냈다.

팅! 달칵! 텅! 덜컥! 땡그르···

발 밑으로 탄피와 빈 탄알집이 수북히 떨어졌다.

그리고 그건 와이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끼에엑!

콰앙!

총알 세례를 받은 놈들이 연거푸 공터에 처박혔다.

그렇게 하나둘 모인 사체는 총성 소리에 맞춰 차츰 언덕을 쌓아나갔다.

놈들을 시원하게 벌집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두머리가 남아 있었으니까.

펄럭.

완전히 다른 존재감의 날개짓.

놈이 하늘로 떠올랐다.

흠칫.

순간 나는 몸을 떨었다.

놈의 샛노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쩐지···

나와 내 포탈을 번갈아 보는 것 같았다.

이용수가 희소식을 전했다.

"정겸 씨···! 저놈들 가는 것 같은데요?"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검은 드래곤은 후욱 거친 콧김을 뿜으며 멀어져 갔고, 그 뒤를 공격을 멈춘 와이번 무리가 따랐다.

검은 드래곤.

괴물이라지만, 지성이 있는 놈이었다.

아공간 포탈이 있는 한, 나를 잡을 방법이 없다고 여겼는지도 몰랐다.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살았네요."

이제 남은 건 뒤처리였다.

이용수가 와이번들의 사체를 보며, 질린다는 듯 말했다.

"이거 언제 다 채취하나 싶네요. 최소 백 마리는 되는 것 같은데···"

"그거라면 제가 생각해둔 게 하나 있습니다. 우선은 50개까지만 빠르게 모아보죠."

부족한 마석의 양은 서른네 개.

푹!

가슴을 가르고, 마석을 끄집어냈다.

대부분 3개, 이따금 4개의 마석이 나왔다.

"이제 됐네요."

정확히 열 마리의 와이번을 도축하고 난 뒤, 마석 50개를 채울 수 있었다.

열 마리를 정리했는데도, 최소 수십여 구의 사체가 여전히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곧장 팍스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이번에 개방할 수 있는 능력 중에 '상품 회수'라는 거 있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이런 설명이었다.

◈ 상품 회수

-별도의 포탈을 열어 상품을 회수합니다. (단, 아공간에 등록된 사물에 한합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아공간에 등록된 사물'이라는 문구였다.

원래는 출하한 물건을 도로 아공간으로 회수하는 쓸만한 능력이었다.

가격이 비싼 게 흠이었지만.

"마석도 회수가 가능할까? 이것도 아공간에 등록된 사물이기는 하잖아. 처음 각성했을 때 내게 마석을 주기도 했었으니까."

[확인해보겠습니다.]

[연산 중···]

얼마간 뜸을 들인 팍스가 마침내 대답했다.

[마석의 분류 코드를 확인했습니다.]

[분류 코드는···]

[비매품입니다. 아공간의 등록된 품목에 해당하므로 회수가 가능합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말아쥐었다.

"상품 회수, 바로 개방해줘."

[마석 50개를 받았습니다.]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곧장 '상품 회수'를 발동했다.

회수의 범위는 출하 스킬의 사정거리인 10미터.

나는 수북히 쌓인 와이번들의 사체를 거닐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엄청난 장관이 펼쳐졌다.

"···세상에."

이용수가 도무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머리 위로 생성된 회수용 포탈.

바로 그곳으로 탄피, 그리고 사용하고 남은 빈 탄창이 후루룩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뽁!

뽀옥!

마석들이 와이번들의 사체를 찢으며 날아올랐다.

슈우우우욱!

포탈이 마석을 빨아들였다.

마치 블랙홀처럼.

그렇게 빨아들인 마석의 양은···

자그마치 311 개에 달했다.

.

.

.

"바로 출발하십니까?"

"그래야죠."

나는 팍스를 불러내, 상품 페이지를 살폈다.

와이번들에 의해 이용수의 트럭이 박살이 난 상태였지만, 군용 차량을 새로 출하해 타고 나갈 계획이었다.

나는 지도를 펼쳐, 목적지를 이용수에게 보여주었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

큰누나가 근무하는 직장이었다.

세상이 요지경임에도, 분명 의료인의 사명 어쩌구를 운운하며 병원에 틀어박혀 있을 게 분명했다.

"꼭 살아 있어라. 김 씨스터 1호."

이제 강남까지 차는 전속력으로 달릴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할일은 있었다.

'마석 벌어야지.'

달리는 차 안에서 거리에 있는 괴물들을 향해 소총을 쏜다.

동시에 상품 회수를 통해 놈들의 마석을 쪽쪽 빨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아포칼립스의 콤바인.

그런 이름으로.

12. 무한탄창의 거부(巨富) (2)

가장 먼저 한 일은 와이번 사냥으로 벌어들인 마석을 사용하는 일이었다.

우선은 공과금부터.

"아예 열흘 치 끊어줘."

[전력 비용으로 30개, 수도/가스 비용으로 30개 받았습니다.] 

[전력 가동 중단까지, 약 273시간 남았습니다.]

[가스/수도 공급 중단까지, 약 280시간 남았습니다.]

덕분에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제는 출하 스킬을 강화할 때였다.

아직 마석은 여유롭게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전략적인 소비를 하기로 했다.

"소요 시간을 최대로 줄이면 얼마나 들지?"

[현재 출하 소요 시간은 5초이며, 아공간 레벨 2에서는 최대 1초까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비용은 초당 마석 5개로, 총 20개가 소모됩니다.]

"진행해."

[알겠습니다.]

드디어 1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가장 시급하다 여기던 출하 소요 시간이었지만··· 사실 이번만큼은 다른 노림수가 있었다.

팍스에게 물었다.

"사정거리를 최대로 높이면 얼마야?"

[현재 사정거리는 10m이며, 최대 50m까지 강화가 가능합니다.]

[15m까지는 미터 당 레벨 1에서의 강화 비용인 마석 1개가 소모되며, 이후 50m까지는 마석 5개가 소모됩니다.]

[도합 180개입니다.]

180개.

상당히 큰 비용이었지만···

"진행해."

고민의 여지는 없었다.

출하 사정거리는 동시에 마석의 회수 반경이기도 했으니까.

앞으로의 수입을 불려줄 고마운 능력인 만큼, 그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로써 사용한 마석의 양은 260개.

남은 51개는 나중에 상황에 따라 사용하기로 했다.

능력이 강화된 만큼,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다.

이제 내 포탈에서는 탄창과 도끼가 1초마다 튀어나오게 될 테니.

모든 채비를 마친 나는 은빛으로 빛나는 말끔한 SUV 앞에 섰다.

이용수가 말했다.

"차량을 다시 구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것 참··· 꼭 한번 몰아보고 싶었던 모델이었는데."

그가 군침을 다셨다.

차량의 정체는 군용 코란도 스포츠.

후방 부대의 차량이라 그런지 별도로 위장 도색이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헤더에 더듬이 같은 안테나 두 개가 뻗어 있었다.

'내가 이걸 타게 될 줄이야.'

군에 있을 때 대대장이 타고 다니던 걸 본 게 전부였다.

자랑스러운 예비역 병장으로서 절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브르릉!

이용수가 차의 시동을 울렸다.

그러곤, 여느 때와 같은 감각적인 손길로 이 거친 코뿔소의 고삐를 잡았다.

차는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와이번들의 사체를 요리조리 피해 나갔다.

우리는 그렇게 다음 장소로 향했다.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황량한 벌판을 남겨두고.

.

.

.

변화는 불과 몇 분 만에 일어났다.

정확히는, 내가 차량에 달린 장비를 켜면서 시작됐다.

-치익··· 칙!

장비의 정체는 차량에 탑재된 녹색 무전기였다.

애당초 지휘관들에게 배정되는 차였다.

헤더에 장착된 안테나 또한 전시나 훈련 시 아군과 통신하기 위한 물건이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아공간에서 보조배터리까지 주문해 항상 잊지 않고 충전해왔지만, 정작 전화도 인터넷도 터지질 않았다.

연결 실패를 나타내는 텅 빈 스크린.

문득 나는 통신장비로 눈길을 돌렸다.

'군용 장비라면 다르지 않을까?'

기지국을 거치지 않으며, 통신사도 필요 없다.

미리 설정된 주파수만 공유한다면 통신이 가능할 터.

심지어 무전기는 아공간을 통해 무한히 생산할 수 있으니, 모든 통신이 끊어진 지금 사태를 감안한다면 그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시험 삼아 장비가 정상 작동하려 보려 했으나···

아쉽게도 나는 통신병이 아니었다.

"사용 방법을 모르겠는데··· 에라, 모르겠다."

[I/O] 모양으로 생긴 전원을 켰다.

뭔가 미리 설정되어 있었는지, 몇 가지 숫자가 표기되며 작동음이 들렸다.

-치익··· 칙··· 

생생한 백색 소음이 수화기로 흘러들었다.

그때였다.

-치익··· 여기는 찰리··· 여기는 찰리··· 폭스트롯은 응답 바란다. 여기는 찰···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수화기 너머의 사내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젠장, 여기 다 뒈졌다고! 제발 살려줘! 폭스트롯 개새끼들아!

뭔가 대단히 화가 난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기론, 군용 통신장비의 통달 거리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많이 쳐줘야 몇 킬로 남짓.

이 목소리의 주인이 우리 근처에 있다는 소리였다.

이용수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고민이었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큰누나가 있는 강남에 도달해야 했으니.

하지만 '찰리'의 애닳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인덕원 흥안대로에 널려있던 군인들의 시체가 떠올랐다.

'군인이라면 괴물들의 동향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더욱이 궁금하기도 했다.

어떻게 괴물들이 현대화기로 무장한 군을 이토록 쉽게 괴멸시킬 수 있었는지.

거기에는 뭔가 다른 변수가 개입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궁금증이 들었다.

단, 욕심을 부리기 보단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냈다.

"가는 길에 있으면 데려가죠.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러곤 수화기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소리가 바뀌는 것이, 이번에는 내 목소리가 상대에게 전달될 듯했다.

"그래서, 지금 어디야?"

반말로 송신이 왔으니, 나도 그렇게 했다.

상대는 제법 놀란 눈치였다.

-···누구?

잠시 망설이던 그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그래, 시발. 목이 달아나게 생긴 마당에··· 여기 정부청사다! 과천! 과천정부청···

뚝.

소리는 그렇게 끊어져 버렸다.

내가 운전석 쪽을 바라보자, 이용수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정확히 바로 앞이네요."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었다.

.

.

.

타앙!

멀찍이서 마른 총성과 함께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정체는 신호탄.

아주 살려달라고 발악을 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이라는 말이 과연 과장은 아니었는지, 탁 트인 정부청사 공원에는 저글링을 비롯한 잡다한 괴물들이 개떼처럼 몰려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드래곤이나 와이번은 보이지 않았다.

투다다다다다!

조수석 창문으로 무차별 총알을 갈겼고,

깨앵! 캥!

저글링 몇 마리와 변종 늑대들이 속도를 잃고 허물어졌다.

뽀옥! 뽁!

놈들의 사체에서 마석이 튀어 올랐다.

차량 위에 뜬 포탈은 괴물들로부터 튀어나온 마석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우리의 모습은 마치 입을 쩍 벌린 채 맹렬히 발을 내딛는, 한 마리의 탐욕스런 짐승과도 같았다.

자그마치 50미터까지 늘어난 회수 반경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신호탄의 연기가 피어오른 곳은 3층 짜리 청사 건물 옥상이었다.

하지만 그 연기를 따라온 것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괴물 전부가 청사 건물 주변으로 몰려들었으니.

"···쉽지 않겠군요."

이용수가 이리저리 핸들을 꺾으며 말했다.

투두두두두두-!

나는 탄창을 갈아가며 여전히 총을 갈기고 있었다.

방아쇠를 누르는 손가락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탁!

녹아버릴 만큼 달아오른 소총이 비명을 질렀다.

노리쇠 안으로 탄알이 제대로 끼어버렸다.

총을 로 넣어버리고는, 다시금 상황을 살폈다.

총으로 괴물들을 잡고, 상품 회수로 마석을 얻는 것.

그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길이 완전히 막혀버리네요."

이용수가 말했다.

청사 건물로 향하는 진입로.

죽은 괴물들의 사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제는 소총도 의미가 없었다.

사체로 쌓은 산이 놈들의 방패가 되어주었으니.

되레 그 산을 타고 위협적인 공격을 가해올 뿐이었다.

이용수가 넌지시 운을 떼었다.

"···포기하는 게 어떨까요? 진입로가 너무 좁아요."

"수류탄을 한번 써보죠."

"아! 수류탄이 있었군요."

이용수가 그거면 되겠다는 듯, 눈을 빛냈다.

수류탄 또한 무한히 사용이 가능하겠지만, 한 가지 응용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곧장 아공간 포탈을 열었다.

"잠시 차를 돌리며 시간을 벌어주세요."

"예? 지금요?"

"금방 올게요."

돌아온 물류센터.

나는 서둘렀다.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내가 향한 곳은 아공간에 연결된 군부대.

그중에서도 위병소 건물이었다.

콘크리트 벽이라면 수류탄에서 나온 파편 정도는 막아줄 테니.

조끼에 결속한 세열 수류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신속히 안전핀을 빼어냈다.

손으로는 여전히 안전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이대로는 터지지 않는다.

투척한 순간 손잡이가 따로 떨어지며 장약에 불이 붙는 구조니까.

팍스에게 말했다.

"이대로 상품 등록하는 것도 가능할까? 안전 손잡이가 결속된 상태로."

출하될 탄알집에 미리 총알을 끼워둘 수 있었던 것처럼, 이곳 아공간에 있는 상품들에는 미리 약간의 변형을 가할 수 있었다.

그것의 응용 버전이다.

이번에는 이 수류탄의 특정한 '상태'를 상품으로 등록해볼 작정이었다.

팍스가 대답했다.

[새로운 사물이 아닌, 기존에 존재하던 상품에 변형을 가한 것이므로 가능합니다.]

[등록을 완료했습니다.]

[현 시간부로 출하를 통해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혹시 출하되기 전에 여기서 터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출하 스킬은 아공간 내부의 물리적인 공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재고 상태에서 즉시 출하되는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거 다행이네. 그럼···"

상품으로 등록하고 남은 수류탄을 위병소 창문 밖으로 힘차게 던졌다.

그러곤, 얼른 벽으로 몸을 숨겼다.

몇 초의 시간이 지났을까,

꽈앙-!

폭음과 함께, 후두둑 흙먼지가 쏟아졌다.

마음에 들었다.

저런 위력이라면.

.

.

.

"오셨군요···!"

이용수가 반색했다.

그는 건물 주위를 돌며 괴물들과 함께 곡예 운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투두두두두-!

나는 소총 한 정을 새로 출하해 뒤따르던 놈들을 단숨에 처리했다.

상품 회수로 마석을 챙기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이제 남은 일은, 저 득실거리는 괴물 놈들을 단숨에 쓸어버리는 일이었다.

즉시 마석을 한 번 더 소진했다.

"동시 출하, 한 번 더 개방해줘."

[마석 50개 받았습니다.]

아공간 레벨 2를 달성하며, 한 번 더 동시출하 능력을 개방할 수 있게 됐다.

이제 한 번에 출하가 가능한 물건은 네 개.

다시 말해···

"한 번에 수류탄 네 개가 날아가는 거지."

그것도 안전핀이 뽑힌 채로.

위잉- 위이-

달리는 차체 위로, 네 개의 작은 포탈이 생성되었다.

띠띠띠···

그러곤 이전에 개방해두었던 '정밀 배송'으로 놈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을 설정했다.

손을 뻗었고,

'출하.'

그렇게, 상품이 출하되었다.

피웅-

나란히 쏘아 올린 네 개의 공.

그 주변을 감싸던 안전 손잡이가 띵 소리와 함께 분리되었다.

쏘옥.

바글대던 괴물들의 틈새로 숨어들어 간 수류탄은···

꽈아아앙-!

쾅-!

타아앙!

갖은 폭음과 함께 놈들을 쓸어버렸다.

남은 일은 같은 과정의 반복이었다.

나는 자동 포탑처럼 놈들의 주변으로 꾸준히 수류탄을 뿌려댔고···

콰과광!

놈들은 연쇄 폭발에 장렬히 산화했다.

뽀옥! 뽁!

그와 동시에 마석이 회수되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졌다.

오래지 않아, 적어도 건물 주변만큼은 깔끔하게 청소가 되었다.

우리는 청사 건물의 진입로로 차를 몰았다.

두꺼운 고무바퀴가 질겅질겅 괴물들의 사체를 씹었다.

하지만 홍염이 피어오르는 건물 옥상을 발견했을 때, 상황은 여전히 급박해 보였다.

탕! 타앙!

옥상 끝에 내몰린 사내.

그가 안쪽으로 권총을 발사했다.

건물 내부로도 괴물들이 침입한 모양이었다.

"···@$···!"

그는 계속해서 우리를 곁눈질하며, 무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자신을 구해주길 애타게 요청하는 듯했다.

끼이이이이익!

이용수가 차를 건물 옆으로 바짝 붙여 세웠다.

나는 조수석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뛰어내려!"

낙하할만한 지점에 포탈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살면서 포탈 같은 건 듣도보도 못했는지, 우물쭈물 옥상 난간에서 위태로운 대치를 계속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카아악···!

옥상에 있던 저글링이 사내의 복부에 송곳 같은 뿔을 찔러넣었다.

"···커헉!"

저글링은 양옆으로 머리를 휘저으며 사내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툭하니 그를 밖으로 던져버렸다.

터억! 우지끈!

던져진 사내가 나무 위로 떨어졌다.

투두두!

깨행!

소총을 쏘아 옥상의 저글링을 처치했다.

나무 사이로 떨어진 사내를 확인했지만···

"······"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복부에서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상황.

다급히 포탈을 열었다.

***

붕대에 싸인 사내를 침대에 바로 눕혔다.

아공간 밖에서는 이용수가 강남을 향해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다행히 피는 멈췄다.

소독제를 들이부었고, 붕대를 주문해서 꽁꽁 싸맸다.

이래도 될까 싶었지만, 연고도 몇 개 까서 발라주었다.

그래도 사내는 도무지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가능하면 살아줬으면 했다.

그에게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으니까.

"이 양반 운 한번 억세게 좋네···"

마침 우리가 향할 곳도 병원이었다.

큰누나가 근무하고 있는.

텅텅!

이용수가 포탈을 두드렸다.

마침내, 강남에 다다랐다는 신호였다.

13. 기울어진 저울 (1)

"금방 도착했네요."

포탈에서 나온 내가 조수석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원래 거리상 아주 먼 곳은 아니니까요. 수류탄 나눠주신 게 컸습니다. 위험하다 싶을 때마다 한 발씩 던져가며 달리니··· 뒤따라오는 놈들 떨어내기엔 이만한 게 없더라고요."

소총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운전 중에는 영 불편할 듯싶었다.

하여 나눠준 것이 수류탄이었다.

바깥은 완전히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군부대에서 빠져나올 때만 해도 서서히 어둑해지는 초저녁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밤이 내려앉았다.

도심을 누비는 괴물은 많았다.

아직 몇 마리 차량을 뒤쫓는 놈들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소총을 회수용 포탈로 집어넣었다.

그러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용수에게 미리 언질을 해 두었다.

"당분간은 소총이나 수류탄은 넣어두죠. 병원에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니···"

한국은 총기 소유가 불법인 나라다.

이 용맹한 충무공의 후손들 대부분은 지금쯤 부엌칼이나 골프채 같은 걸로 멸망에 대처하고 있을 텐데, 대뜸 총기를 들고 나타났다간 괜한 오해와 경계를 살 여지가 있었다.

더욱이, 우리가 향하는 강남 세브란스 병원은 상당히 큰 대형병원이었다.

많은 인파가 모여있을 가능성이 컸고, 그만큼 변수도 많았다.

이런 시국일수록, 괴물보다 앞서 사람을 경계해야만 했다.

이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하기야, 어딜 가든 이상한 사람 한둘은 끼어있기 마련이니까요.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또한 힘의 여유에서 나올 수 있는 전략이었다.

총을 잠시 넣어둔다 한들, 매 초마다 날아가는 캠핑 도끼는 여전히 강력한 공격 수단이었으니까.

마침내 보이는 병원 건물.

환자들이 머무는 병동 건물부터, 진료시설이나 연구실이 몰려있는 건물까지.

모든 출입구를 여러 대의 버스나 앰뷸런스 차량이 바리케이드처럼 막고 있었다.

널찍한 지상 주차장을 빙빙 돌며 도끼를 던졌고,

퍽!

캐앵!

칵!

서성이던 괴물들을 처치했다.

후르르륵!

마석을 회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병원의 지상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았을 때쯤,

건물로부터 두 명의 사내가 뛰쳐나왔다.

그들은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지상 주차장의 괴물들을 몰살시켜버렸으니까.

스으응-

그들에게 창문을 내린 뒤 물었다.

"여기 김주연 간호사 있습니까?"

***

불 꺼진 병원 로비.

대기용 의자들에는 잠을 청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병원 마크가 새겨진 이불부터, 겉옷, 심지어는 수건까지.

온갖 물건들이 모두 침구로 쓰이고 있었다.

나는 이용수와 함께 소식을 기다렸다.

걸출한 전투력을 미리 보여준 덕일까.

어렵지 않게 병원에 들어올 수 있었고, 우리를 마중했던 사내들은 큰누나를 불러주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 큰누나는 살아 있었다.

'역시 아직 병원에 있었구나.'

어릴 적 큰누나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내가 고작 일곱 살에 불과했던 어느 날 여름, 중학생이었던 큰누나는 내게 대뜸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오늘의 나는 아픈 사람들 대가리에 붕대를 감아줄 거야.."

뒤에 놓인 탁자에는 라는 작은 책자가 놓여 있었다.

의사가 되겠다는 꿈과 교훈적인 이야기가 섞인 순수하면서도 기괴한 발언이었다.

어릴 때라도 알 건 다 알았는지, 그때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누나 공부 못하잖아."

"이놈 시끼가."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

큰누나의 성적표를 보며 한숨을 꺼뜨리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김씨스터즈 1호 김주연은 의외로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서부터 성적이 수직 상승하더니, 목표로 하던 의대까지는 못 갔지만 간호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렇게, 그녀는 사람들 대가리에 붕대를 감아줄 수 있게 되었다.

그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김정겸!"

아주 오랜만에 만난 건 아니었다.

세상이 요지경이 되기 얼마 전에도 가족 모임에서 만났던 큰누나였으니.

그래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거친 뒤여서일까, 유달리 그립게 느껴지던 그녀였다.

재회의 포옹을 나눴지만,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큰누나에게 말했다.

"환자가 있어."

"뭐? 어디에?"

환자라는 말에, 그녀는 자동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깐, 이리로."

나는 큰누나를 인적이 드문 복도로 데려갔다.

그러곤 포탈을 열었다.

***

이곳은 물류센터 안.

'찰리'는 흰 매트리스 위로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붕대에 둥글게 그려진 붉은 피.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공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내 능력이 무엇인지 설명할 겨를도 없이,

나는 곧장 큰누나에게 물었다.

"바로 꺼내야 할까? 밖에서 수술이라도···"

그녀는 말없이 감긴 붕대를 풀더니, 사이로 드러난 상처를 자세히 확인하며 말했다.

"이 사람 못 살아."

"아···"

아무래도 저글링의 공격이 너무 깊었던 모양이었다.

착잡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려던 찰나, 큰누나가 마저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

그러곤 찰리의 복부에 가깝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지잉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광채가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부연했다.

"힐러로 각성했거든. 쩔지?"

간호사에서 힐러로.

못 본 사이 큰누나는 성공적으로 전직을 마친 뒤였다.

지이잉-

큰누나의 치료는 20분 정도 계속됐다.

치료를 마친 그녀가 손을 거두며 말했다.

"아직 레벨이 낮아서··· 오늘은 이 정도가 한계야. 그래도 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고."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급한 불을 끈 나는 이곳이 내 아공간이며, 물류센터를 통째로 들어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큰누나는 맨입이 아니었다.

언제 끓인 것인지 오지수가 뜨끈한 소고기뭇국을 대령해 왔으니까.

큰누나는 냉큼 맑은 국물에 뜨끈한 햇반을 말았다.

그러곤 프레시 센터에서 가져온 포장김치를 죽죽 찢어가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정겸, 사랑한다."

웃지 않는 그녀의 입술에는 김칫국물이 짙은 립스틱처럼 묻어있었다.

큰누나가 주방장 오지수를 바라보며 또한 덧붙였다.

"뉘신진 모르겠지만, 사랑합니다."

초면에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더럽게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니까.

찰리의 치료도 해결이 되었고, 만나려던 큰누나도 만났다.

이제 함께 작은 누나를 찾으러 가면 될 일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지금 여기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야."

"무슨 일이 있길래?"

"이곳 병원에만 800명 정도가 모여 있어. 지속해서 관찰이나 투약이 필요한 환자들도 있긴 한데···"

환자들을 두고 갈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나 했다.

큰누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상황은 좀 더 복잡했다.

"아무튼, 내가 없다고 해서 누가 죽고 이런 상황은 아니야. 문제는···"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한편, 내과 과장 진성학은 한밤중 날아든 소식에 잠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그의 방처럼 쓰이게 된 병원장실에는 약무국장 구민철과 영양팀장 박종현이 자리해 있었다.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약무국장 구민철이 말했다.

원래는 병원 내에서 의약품을 담당하는 직책이었지만, 지금은 진성학의 휘하에서 수용 중인 환자들이나 각성자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보초를 서던 각성자들에게 들어보니 전투력이 상당하다더군요. 허공에서 도끼를 소환하는 능력이라던데··· 지상 주차장에 있던 괴물들을 전부 쓸어버렸답니다. 차림새도 그렇고, 군용 차량을 몰고 온 걸 보면 어디 특수부대 군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양팀장 박종현이 조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과장님, 그게 사실이라면 최대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내과과장 진성학은 끌끌 혀를 찼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 그 자식 하필이면 김주연이 동생이라며? 우리를 고깝게 보기나 하겠나?

"···그럼 어떻게 해야?"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먹고 잘 곳 필요해서 온 걸 텐데, 이곳 식량은 우리가 꽉 쥐고 있잖아?"

"아-! 그건 그렇죠. 다 먹자고 하는 짓이니···"

영양팀장이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병원의 영양팀은 환자들의 병원식을 만들고 식자재를 관리하는 업무를 했다.

그리고 이를 알고 있던 내과 과장 진성학은 병원을 접수하기에 앞서, 바로 이 영양팀장부터 구워삶았다.

사태가 벌어진 이튿날, 난데없이 병원에 식량 배급제도가 생긴 것은 내과 과장의 재빠른 전략이었다.

그것은 권력이 될 터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내과과장 진성학의 무기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정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뭐, 작업해버리는 수밖에 없지."

"가능할까요? 환자가 아니라 약을 쓰기도 어려울 텐데···"

"밥에 섞어서 주면 돼. 혈관 주사보다 효과는 좀 떨어지겠지만."

진성학 또한 각성자였다.

능력은 .

상대를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드는 강력한 능력이었지만, 그만큼 제약도 컸다.

상대의 의식적인 저항을 뚫어내야 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성학은 병원에서 취급하는 마약성 진통제를 활용했다.

그들의 의식이 흐릿해지는 그 틈새를 노릴 수 있도록.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입원 환자 중 각성자들을 골라 링거에 약을 타 세뇌를 걸었고,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약품들을 관리하는 약무국장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세 사람의 공모관계는 아주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이 멸망을 기대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진성학이 대화를 정리했다.

"아무튼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레벨만 올라가면 약이니 뭐니 그런 거추장스런 짓거릴 할 필요도 없으니까. 항상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멸망한 세상이라 해도 힘센 바보들보다는 우리처럼 머리 좋은 사람들이 지배자가 되어야 하는 법이야. 다가올 세상에도 그게 유익하지 않겠나?"

"흐흐. 정말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웃었다.

***

"···세뇌?"

황당한 소식을 들은 내가 되물었다.

큰누나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해. 그렇지 않고선···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어."

전날만 해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환자들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보자마자 학을 떼더니, 돌연 내과과장 패거리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뭔가 제약이 있는 것 같기는 해. 일단 나나 간호국 사람들이나 모두 멀쩡하거든. 이상해진 건 입원 환자들뿐이야. 그중에서도 특히 각성자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과 과장 진성학 패거리는 식량을 빌미로 남은 각성자들에게도 정찰대와 보초 임무를 강요했다.

그러곤 그 과정에서 얻게 된 마석까지 깡그리 거두어 갔다.

더 강한 각성자들에게 우선해서 분배하겠다는 명목이었지만··· 당연히 제대로 분배가 이뤄질 리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완전히 균형이 넘어간 상태더라고."

그 결과 놈들이 하라는 대로 정찰대에 차출당하고, 마석을 빼앗기며, 애걸하며 주는 밥을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다.

들고 일어나고 싶어도, 세뇌된 각성자들 탓에 그 누구도 쉽사리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큰누나가 말했다.

어딘가 결심에 찬 목소리였다.

"놈들 몰래 마석을 모으고 있어. 치유 능력 레벨이 올라간다면 세뇌된 각성자들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지금도 약물 중독같은 건 치료가 가능하거든. 그러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는 솔이랑 엄마아빠한테 먼저 가봐. 나도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볼 테니까."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남은 가족들을 구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큰누나를 뻔히 아는 위험 속에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하물며 레벨을 올려 세뇌를 치료하겠다는 계획은 막연한 기대일 뿐, 확실히 보장된 계획이라 보기 어려웠다.

주변적인 이유지만, 찰리의 치료 또한 마무리되지 않은 터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내가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자."

"어떻게?"

당장 놈들이 쥐고 있는 무기는 식량이었다.

다음으로는 세뇌된 각성자들로 만든 정찰대.

이 둘을 이용해 마석을 수급하며, 차츰 힘의 불균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결론은 간단했다.

"균형을 깨버리면 되는 거잖아? 자원으로든, 힘으로든."

내겐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14. 기울어진 저울 (2)

콰앙!

소식을 들은 내과 과장 진성학이 책상을 내리쳤다.

"이 새끼들이 건방지게···"

이른 아침부터 약무국장이 전해온 소식이었다.

김정겸 일행에게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이곳의 통제에 따를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김정겸은 밥이든 잠자리든 니들이나 처먹고 몸 뉘시라며 정중히 제안을 거절했고, 정찰대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겠노라 못 박았다.

진성학은 짜증이 확 치밀었다.

"그 새끼들 여기 눌러앉으려던 거 아니었어? 대체 식량은 어떻게 구하려고 그런 똥배짱인 거야?"

"그건 잘··· 오히려 놈들이 간호국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환자들에게도 조금씩 흘려주고 있는 것 같고요. 그 양이 적지 않습니다."

"···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 며칠간 잘 꾸려온 생태계다.

더불어 스스로 그 생태계의 왕이 되었노라 자부했던 진성학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대체 식량을 어디서···?"

하지만 이대로라면 균열이 생긴다.

식량만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었다.

세뇌되지 않은 각성자들도 정찰대 차출에 거부할 것이며, 진성학의 레벨업을 위한 마석을 모으는 속도도 차츰 더뎌질 것이었다.

'안돼, 그건······'

순간, 섬뜩한 이미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레벨업을 달성하기도 전에, 김정겸과 세뇌되지 않은 다른 각성자들이 규합해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장면이.

그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과장님? 어디 가십니까?"

그는 대답이 없었다.

흰 가운을 휘날리며 병원장실을 빠져나갈 뿐.

***

저벅저벅.

나는 큰누나와 함께 병실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간밤에 그녀가 내게 해 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인데··· 여기 환자 중에 을지로에서 온 사람이 있어."

"을지로?"

"어, 이 난리 통에 어떻게 한강 다리까지 건넜는지 모르겠지만··· 모시던 홀어머니가 여기 입원해 계시거든."

파국적인 상황.

가장 먼저 가족을 떠올린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요점은 그의 가족애적 감동스토리가 아니었다.

을지로.

김씨스터즈 2호, 김솔의 자취방이 거기 있었으니까.

물론 아무리 그가 을지로에서 왔다고 한들, 작은누나의 행방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서울 인구가 몇 명인데 그런 소식을 기대하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그곳의 대략적인 상황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어떤 괴물이 출몰하며,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해나가고 있는지에 관한.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질문에 답을 해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반쯤 탈진 상태로 도착해서··· 여기서 하루 정도 입원 치료를 했어. 근데 다음 날 되어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더라."

그는 초월적인 근력을 자랑하는 신체 능력 각성자였다.

내과 과장 패거리에 의해 가장 먼저 세뇌된 각성자 중 하나였는데, 그게 바로 내가 큰누나와 함께 그의 병실로 향한 이유였다.

[송현구 M/47]

[최영자 W/72]

그의 이름은 송현구.

그가 한강을 넘어 만나러 온 어머니와 한 병실을 쓰고 있었다.

문에 달린 투명한 창문.

그 너머로 보조 의자에 앉은 송현구와 침상에 누운 그의 어머니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저 나이 든 어머니를 간병하다 잠시 쉬고 있는 중년 남성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 눈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나는 탄식했다.

"사랑이··· 정이···  없잖아?"

가족사랑.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다.

형제자매끼리 반말을 써재끼고, 혼쭐이 나는 형을 보며 히죽히죽 웃는 동생이라도, 그 모두는 모종의 가족적 유대라는 편안함의 범주에 속해있다.

사 오라는 메로나를 깜빡하고, 컴퓨터 1시간을 두고 쌈박질을 하고, 소등 노예로 부리기 위해 갖은 낚시질을 하는 것도 모두 서로 편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가족 지론에 큰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새끼 또 시작이네."

가족적 편안함.

하지만 그의 어머니의 눈에서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식을 향한 이질감, 눈치, 어쩌면 더 나아가··· 

'공포.'

그의 어머니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다.

47세 송현구, 그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슬슬 결정의 시간이었다.

힘으로 내과 과장 패거리를 치워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다고 세뇌당한 이들이 정상으로 돌아올지는 미지수였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세뇌당한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면 이 또한 찝찝한 일이 될 터.

잠시 고민하던 차, 간호국에 식량을 나눠주러 갔던 이용수가 돌아왔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용수씨, 어디 아파요?"

"대기실에서 잠시 졸았거든요. 그러다 잠에 깼는데··· 눈앞에 그 내과과장이라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 이후로 줄곧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네요."

좋지 않은 신호였다.

놈들의 세뇌가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이용수마저 세뇌에 걸린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터.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많지 않았다.

내가 대답했다.

"아공간에 들어가 계시죠. 불편하시겠지만··· 잠시 갇혀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세뇌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자칫하다간 아내와 딸도 내팽개쳐 둔 채, 진성학 패거리를 추종하게 될지도 몰랐다.

일단은 그를 물류 창고 한 곳에 가둬놓을 작정이었다.

이용수 본인 또한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그게 낫겠습니다. 부디 큰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위잉-

그렇게, 그를 데리고 포털을 넘어간 찰나였다.

대뜸 팍스가 말했다.

[외부로부터 진입이 시도된 정체불명의 에너지를 차단했습니다.]

[아공간은 사용자의 독립된 영역이기에, 외부와의 에너지 연결이 불가합니다.]

동시에, 이용수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가 사라진 통증을 두고 마임을 하듯, 자신의 이마, 머리 이곳저곳을 손으로 짚어댔다.

"···머리가 안 아프네요?"

"···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방금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건망증 환자들처럼.

전말은 이랬다.

알다시피, 아공간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무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비단 물리 공격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신 공격까지 막아낸다고···?"

그게 가능했다.

.

.

.

우리는 곧장 포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눈앞의 어머니를 잊은 채, 진성학의 꼭두각시가 된 불효자 송현구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팍스에게 물었다.

"아공간에 들어온 사람을 내쫓을 수도 있나?"

[가능합니다.]

[출하 스킬로 방출하실 수 있습니다.]

막상 아공간에 들였다가 세뇌가 풀리지 않으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강퇴 기능이 있었다.

방장이 괜히 방장이 아닌 것이다.

덜컹!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이, 우리는 훌쩍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당신들?"

퀭한 눈의 송현구가 경계하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대화를 시도하는 척 그와의 거리를 천천히 좁혔고,

"반갑습니다. 송현구 씨.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

화아악!

포탈 속의 이용수가 그를 잡아당겼다.

택배 상자를 나르던 근력으로 기습적으로 잡아당긴 덕에, 아무리 각성자라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포탈 안으로 들어온 송현구는···

"···뭐죠?"

벙벙한 표정의 선량한 아저씨로 돌아와 있었다.

.

.

.

예상했던 대로, 그는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되찾았다.

"아이고··· 아이고···"

송현구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았고, 그녀 또한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연신 매만졌다.

나 또한 안심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 있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져 있었으니.

자주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아니지만··· 가족끼리 주고받을 수 있는 표정임에는 분명했다.

우리는 곧장 사람들이 모여 있을 병원 로비로 향했다.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세뇌된 각성자들을 치료할 가장 쉽고 명확한 방법이 손에 들어왔으니.

그렇게 백여 명의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는 병원 메인 로비에 다다랐을 때··· 

"이봐, 김정겸씨!"

마침, 내과 과장 진성학이 나를 불렀다.

갑작스런 샤우팅에 돌아보니, 그의 얼굴이 밥솥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버럭버럭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알 거 다 알만한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단체 생활 몰라?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왜 갑자기 급발진을 하나 했더니, 정찰대에 참여하지 않겠노라 못 박은 것에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병원에 계속해서 식량을 뿌려대는 것 또한 그의 심기를 자극하고 있을 터였다.

그가 말했다.

"짧게 이야기하지. 식량도, 묵을 곳도 필요하지 않다면 당장 여기서 나가. 당신 같은 사람 있어봤자 물만 흐릴 뿐이니까. 다들 좋아서 정찰대로 나가는 줄 알아? 다들 목숨 걸고···"

입바른 소리로 궤변을 이어 나가려던 그를 막아세웠다.

"할게. 정찰대."

"···뭐?"

"대신 너네랑은 같이 안 해. 듣자 하니 마석 삥땅 치는 고약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게 무슨···!"

그제야 내과과장은 로비를 가득 채운 인파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알 사람들은 알 만한 진실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까발리기엔 그도 부담이 있으리라.

"정찰대 활동이라는 게, 식량 구해오면 되는 거지? 내기라도 해볼까? 당신네 정찰대랑 나랑 누가 더 많이 구해오는지 한번 보자고."

"이 자식이··· 식량 구해오는 게 장난인 줄 알아?"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그런 말이 있지. 안 내면···"

"뭐?"

나는 말을 끝맺었다.

"진 거."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로비를 빠져나갔다.

.

.

.

휘릭! 퍽!

깨액!

다가서는 괴물들을 향해 도끼를 던지며 병원 앞을 걸었다.

내기라고는 했으나, 실은 구실에 불과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면상에 도끼를 꽂을 수는 없는 일이니.

조금 거칠어질 수 있으니 자리를 옮긴 것뿐이었다.

나름대로 확신도 있었다.

야금야금 사람들의 숨통을 죄며 암약하는 놈이다.

외롭게 병원을 빠져나온 나를 은밀하게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한편으로는···

'···정말 날 죽이려 들까?'

툭툭 발걸음을 옮기며, 놈들이 따라 나오지 않는 미래도 상상했다.

아무리 세상이 망했다지만, 고작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니까.

아무리 법도 질서도 없다지만, 거슬린다는 이유로 사람 죽일 결심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놈들이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위인일지.

하지만 그런 나의 인류애적 관점을 비웃듯···

부스럭.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과 과장 진성학과 놈의 오른팔인 약무국장, 그리고 세뇌된 각성자들 무리가 서서히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끌어모은 것인지, 그 수가 족히 서른 명은 될 듯했다.

진성학이 옅은 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이봐, 김정겸 씨.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굴러온 돌이면 얌전히 굴어야 하는 법이야. 아니면 우리 병원이 그렇게 우스워 보였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대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침 그가 내어준 참이었으니까.

그가 껄렁하게 발을 움직이며, 약무국장을 비롯한 각성자들에게 지시했다.

"준비해."

그 또한 각성자였는지 약무국장이 몸을 부풀렸고, 다른 각성자들 또한 저마다의 능력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나는 무심히, 포탈을 열었다.

이들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었다.

터벅터벅 포탈 밖으로 빠져나오는 송현구.

그를 발견한 약무국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씨발, 알 게 뭐야! 빨리 쳐!"

쐐애액!

내과과장 진성학의 호통에 세뇌된 각성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딱히 정면승부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송현구를 데리고 포탈로 들어갔고,

쩌엉!

각성자들이 포탈에 가로막혔다.

그러자 아공간 안에서 유정이와 놀아주고 있던 이용수가 다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들이 좀 와서···"

텅! 텅!

손님들은 격하게 포탈 문을 두드렸다.

"···열어드리려고요."

[외부의 존재가 입장을 시도합니다]

[입장을 허가하시겠습니까?]

"허가해."

슈우욱!

각성자들이 하나둘 아공간 속으로 들어왔고,

"···?"

"······?"

3초 만에 기억을 잊어버린 금붕어처럼 멍한 눈을 껌뻑였다.

개중 한 사람이 물었다.

"···뭐죠?"

그들의 세뇌가 풀렸다.

15. 기울어진 저울 (3)

"···뭐, 뭐야?"

내과과장 진성학은 입을 쩍 벌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 탓이다.

어젯밤 찾아든 김정겸 일행.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식량과 다른 각성자들을 앞세우면 충분히 구슬리고 지배하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놈은 제안을 걷어찼다.

꾸준히 자신에게 반기를 들어온 간호사 김주연의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불안은 증폭됐다.

마음이 급해진 탓에, 얼빵해 보이는 운전수 녀석에게 세뇌를 시도했다.

약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잠결에 세뇌에 걸린 사람은 몇 있었으니까.

결과는 반쯤 성공이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운전수에게 걸어둔 세뇌가 효과를 발휘할 찰나...

[하수인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상태창의 메시지가 비보를 알렸다.

"···누구지? 뭐야, 누가 풀린 거야?"

하수인 중 누구의 세뇌가 풀린 것인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채 10여분이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메시지를 발견했을 땐···

[하수인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

진성학은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잃어버렸다.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는 몰라도, 놈들이 세뇌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래서였다.

대뜸 김정겸에게 추방령을 내렸던 것은.

그가 반발한다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수긍한다면 뒤쫓아 목숨을 끊어놓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알아서 밖으로 걸어나가는 김정겸을 보며, 진성학 또한 재빨리 움직였다.

서둘러 세뇌된 각성자들을 소집해 김정겸을 뒤쫓았고···

"···저게 대체 무슨 능력이야?"

그 결과를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허공에 생긴 포탈에서 세뇌된 각성자 중 한 명이었던 송현구가 튀어나왔다.

다음은 나머지 서른 명의 각성자들이었다.

그들은 백화점의 회전문을 들락거리듯 포탈을 들어갔다가 빠져나왔고, 나오는 족족 진성학을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한편, 진성학은 떠오르는 메시지에 아예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하수인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하수인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하수인과의 연결이···

수차례 떠오르는 메시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나온 송현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를 뱉었다.

"···정겸씨가 들어오시랍니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씨발, 내가 거길 왜 들어가!"

그야말로 마굴이다.

애써 세뇌해 두었던 각성자들이 저 문을 통과하자마자 놈의 수하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 있어 김정겸의 포탈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저 깊은 바다의 심해처럼.

그리고 그는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다.

휘릭.

몸을 돌린 그는, 병원을 향해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약무국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 어디 가십니까? 야, 야!"

진성학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

휘이익!

쿵!

송현구가 약무국장을 끌고 포탈로 들어왔다.

그 또한 각성자였지만, 초월적인 근력을 자랑하는 송현구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나는 제압된 약무국장을 뒤로하고, 잠시 포탈 밖으로 나왔다.

저 멀찍이 줄행랑을 치고 있는 진성학의 모습이 보였다.

방향을 보아하니, 병원 쪽으로 숨어들 작정인 듯했다.

"그렇겐 안 되지."

나는 곧장 능력을 사용했다.

시야에 그려진 붉은색 십자선.

실시간으로 놈과의 거리가 표시되었다.

[41m 19cm···]

[43m 56cm...]

[44m···

현재 내 출하 스킬의 사정 거리는 최대, 50m.

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신속하게 스킬을 사용했다.

"출하."

쐐애애액!

내 앞을 날아가는 건, 도끼도, 단검도 아니었다.

바로 송현구가 제압해둔 약무국장 구민철이었다.

그는 재빠른 날다람쥐처럼, 믿기 어려운 속도로 쏘아져 나갔고···

콰앙!

이내 도주하던 진성학의 등을 덮쳤다.

퍽! 타앙!

동귀어진하듯 함께 10여미터를 날아간 두 사람은, 인근 상가 유리창을 와장창 박살 내며 처박혔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잘 맞았네요."

이용수가 옆에서 사장님 나이스샷을 덧붙여주었다.

아공간 내의 사람을 로 추방할 수 있다는 걸 응용한 공격이었다.

물론, 실전에서는 쓸 일이 거의 없겠지만···

그러다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가 가능하다는 건··· 반대로 회수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니까.

만약 그렇다면 한 가지 테스트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뚜벅뚜벅.

송현구가 쓰러진 두 사람을 들춰 매고 돌아오고 있었다.

쿵!

둘을 떨궈 놓으며, 송현구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세뇌를 시도하더군요. 아주 난 놈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나는 그에게 부탁하여, 두 사람을 다시 포탈에 던져놓도록 했다.

그러곤, 으로 가까운 건물의 외벽을 조준했다.

조금 색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내 포탈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마법의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문을 거쳐 간 서른 명의 각성자들은 말짱한 정신을 되찾았으니까.

혹시 아는가?

이 두사람이 수십 차례 포탈을 오가며 선한 마음을 되찾게 될지?

나는 간절히 바라며, 주문을 외웠다.

"출하."

쐐애액!

진성학과 약무국장이 빠른 속도로 바람을 갈랐고···

콰아앙!

건물 콘크리트 벽에 거칠게 부딪혔다.

그리고···

"상품 회수."

쐐애애액!

다시금 염력처럼 포탈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포탈을 이용한 '인성 검사'는 몇 차례나 반복됐다.

타앙!

슈우우욱!

타앙!

슈우우우욱!

덕분에 목표 지점으로 쓰던 건물 외벽이 박살 났지만···

그건 진성학과 약무국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끝끝내 두 사람은 착해지지 않았다.

그들의 씁쓸한 말로가 비통할 따름이었다.

.

.

.

한편, 사람을 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젠 사람까지 상품 취급인가."

아공간에 물류센터를 집어넣은 순간부터, 나의 모든 스킬은 피도 눈물도 없는 AI 팍스의 관점에서 설계된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차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단, 인간은 복사가 불가합니다.]

[마석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복제 불가능한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로서도 인간 클론이 된 이용수를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발견의 효용성이었다.

당장 떠올려보더라도, 그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했으니까.

가장 대표적으로는···

"···도망갈 때 쓰면 되겠네?"

[그렇습니다.]

큰누나와 이용수 모두 각성자이기는 하지만, 전투력만큼은 별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공간 안에서라면 몰라도, 밖에서는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를 사용한다면 두 사람을 즉시 위험에서 구해주는 것은 물론, 나 또한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기잖아?"

[그렇습니다.]

와···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싶었다.

안전한 나만의 아공간.

그곳이 한층 더 안전해졌다.

***

놀랍게도, 진성학은 '내기'를 하자던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송현구가 내게 말했다.

"지금쯤 약속 장소에 식량을 꺼내뒀을 겁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식량을 새로 얻은 것처럼 속여 가져간 게 한 두번이 아니었거든요. 다 보여주기식이었습니다."

나는 각성자들을 따라 그들이 말하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툭.

통조림 박스를 떨어뜨린 영양팀장 박종현과 마주쳤다.

그의 주변에는 여전히 세뇌된 열 명가량의 각성자들이 있었지만···

"···뭐죠?"

모두들 마법의 회전문을 거치고 나니 제정신을 되찾았다.

박종현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까··· 그게···!"

그가 지난 동안의 일을 실토했다.

왜 식량을 통제했고, 어떻게 사람들을 세뇌할 수 있었는지.

진성학과 약무국장이 나를 죽이러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는 허둥지둥, 진성학이 모아둔 마석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서로 이야기가 정리된 후, 그가 내게 물었다.

"···진짜 가요?"

내가 대답했다.

"그 짓을 해놓고도 병원에서 지낼 수 있겠어요?"

그가 내 주변을 둘러싼 각성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본인도 안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걸.

발걸음을 옮기는 그에게, 나는 물건을 하나 출하해주었다.

[오리온 초코파이 정(情) 12개입, 468g의 가격은 4,320원입니다.]

마석의 위치를 알려준 값이었다.

한때 병원의 모든 식량을 주무르던 그였다.

가볍게 짝이 없는 초코파이 상자를 받아들며,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터덜터덜.

그러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서서히 떠나갔다.

그는 추방자였다.

한때는 시스템의 중추에 있었던.

***

"···!"

병원 로비가 한껏 시끄러워졌다.

내기의 결과를 기다리던 병원 사람들은 내가 가지고 돌아온 방대한 양의 식량에 하나 같이 혀를 내둘렀다.

승자는 나였고, 패자인 진성학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성학의 세뇌에 걸려있던 각성자들.

그들 대다수는 송현구처럼 누군가의 가족이었으니까.

"아빠!"

"···여보!"

제정신을 찾은 그들 가족과 재회하는 한편, 지금까지 진성학 패거리가 벌인 행각을 낱낱이 폭로했다.

덜컹.

한편, 나는 병원 지하 복도 끝에 놓인 작은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영양팀장 박종현이 알려준 장소였다.

끼이이···

안쪽 배전함을 열자,

차르륵.

마석이 가득 담긴 주머니가 발견됐다.

팍스를 통해 셈해보니, 그 개수가 227개였다.

과천청사에서, 그리고 올라오는 길에 모은 마석의 양만 거의 400개에 육박하니, 합치면 자그마치 600개가 넘는 마석이 내 손에 들어온 셈이었다.

"···어떻게 쓰면 좋을까?"

처음 이곳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바로 이곳 강남 세브란스 병원을 넣어버리는 것.

근처로 사냥을 나서 마석 1000개를 채운다면 아예 불가능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자그마치 800여명의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나나 내 가족이 우선이라고 해도, 그런 병원을 날름 먹을 만큼 파렴치한 놈은 아니었다.

게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어딘가 다칠 일이 생기더라도, 큰누나의 치유 능력을 사용하면 될 테니까.

무리하면서까지 병원을 손에 넣기보다는, 그럴 마석으로 큰누나의 레벨업을 돕는 편이 나았다.

결국, 3레벨에 뭘 넣을지는 차차 고민하기로 했다.

아직 마석을 충분히 모으지도 못한 상황이니까.

얼추 생각을 마무리 한 나는, 다시 병원 로비로 빠져나왔다.

이용수는 타고 온 차량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고, 큰누나 또한 약무국에서 쓸만한 약을 챙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류센터에도 구급상자 같은 게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실제 병원에서 사용하는 것보다는 질이 떨어질 테니까.

병원 로비에는 아직 한낮의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지금 시각은 오후 세 시.

어젯밤에 도착했던 걸 감안하면, 그래도 하루를 완전히 넘기지는 않았다.

다음은 을지로로 향할 차례였다.

서둘러 갈 채비를 하려던 찰나,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송현구였다.

"정겸씨, 을지로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꼭 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그가 을지로에서 피신해 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다급히 나를 찾아온 것 보니 그곳에 뭐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가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을지로에 성벽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높게요."

16. 새로운 국면

"성벽이요?"

내가 되물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을지로와 남산을 끼고 거대한 성벽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저도 스스로 이런 설명을 하는 게 황당하지만, 정말 어린 아이 이빨 나오듯이 지하로부터 석벽이 솟아 올라왔습니다."

그의 말대로 황당했다.

현대전에서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완전한 관광지로 전락한 성곽들이다.

그런 성벽이 땅에서 자라다니?

"가까스로 탈출했습니다. 성벽에 완전히 갇혀버릴 뻔했어요. 그랬다면··· 영영 어머니와도 생이별을 해야 했겠죠."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었을까요? 위험한 거라든지···"

내가 걱정스런 마음에 물었다.

"성벽이 세워지기는 했지만, 그 안이라고 바깥과 다를 건 없었습니다. 아, 그건 좀 차이가 있었네요. 저도 여기 내려와서 조금 놀랐는데··· 괴물들의 종류가 달랐습니다."

오크와 와이번, 그리고 저글링과 변종 늑대까지.

지금까지 목격한 괴물의 종류가 아주 다양하지만은 않았다.

송현구는 거기에 또 한 가지의 바리에이션을 추가했다.

"아무래도 가장 많았던 건··· 스켈레톤이었습니다."

솟아나는 성벽부터 스켈레톤까지.

멸망은 카멜레온처럼 다재다능한 테마를 선보이고 있었다.

문제는 그 언데드 테마파크에 내 작은누나, 김씨스터즈 2호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명실상부하게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을지로가 될 터였지만···

송현구가 한 가지 걱정거리를 덧붙였다.

"성벽 탓에 을지로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분명···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거든요. 그간 얼마나 자라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 속도라면 지금쯤 어지간한 빌딩 높이까지는 올라왔을 겁니다."

빌딩 높이.

달리 말해 차로 넘어갈 생각은 엄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런 현대 세계에 '진짜로' 기능하는 성벽이라니.

내심 황당한 기분이었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아뇨, 제가 받은 도움만 할까요."

세뇌가 풀린 직후, 알게 모르게 각성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그였다.

내가 병원을 떠난다면 자연스레 이곳의 지도자가 될 그였기에, 그들을 대표하여 물이나 보존식량, 발전기와 같은 적당한 물자들을 출하해주었다.

송현구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러려면 꼭 살아남으셔야겠네요."

"물론입니다. 정찰대도 새로 꾸리고 마석도 수급해서, 잘 한번 살아남아 보겠습니다."

내 도움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멸망한 세계에 대처해나가는 일은 그들 자신의 몫이었다.

다만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필요는 있었다.

을지로에 성벽이 세워지고, 난데없는 스켈레톤이 돌아다니는 상황.

이런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는 정보가 곧 힘이자 생명이 될 수 있었다.

하여, 마지막으로 군용 통신기인 P999K를 출하해주었다.

정확한 사용 방법이야 모르겠지만, 같은 물건을 복사한 것이니 주파수가 얼추 맞춰져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회색 코란도가 바퀴를 굴렸고, 병원 사람들이 바리케이드 앞까지 나와 박수로 우리를 배웅했다.

우리는 그렇게, 강남을 빠져나왔다.

***

송현구가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옥수동과 금호동으로 이어지는 동호대교는 진즉 위쪽에서부터 끊어져 있었다고 했다.

하여, 우리의 계획은 바로 왼쪽에 있을 한남대교를 통해 한강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포탈 안에서 큰누나가 소식을 전해왔다.

"그 사람 정신 차렸어. 찰리··· 라고 했던가?"

.

.

.

.

차가 한남대교를 향해 달리는 동안,

나는 잠시 찰리의 상태를 보기 위해 아공간으로 들어왔다.

"정말 고맙습니다."

넓적한 하관을 가진 40대 초반의 남성.

그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다행히 기억상실증에 걸리지는 않았다.

나의 도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다행히 '찰리'를 대신 할 멀쩡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국통사 50정보통신대대를 맡고 있는 중령 한경호라고 합니다."

국통사는 국군 지휘 통신 사령부의 준말이다.

즉, 그는 내가 아공간으로 흡수한 부대의 장교인 셈이었다.

내가 물었다.

"국통사 장교분께서 왜 정부청사에 계셨습니까? 그것도 죽을 위기까지 처해가면서요."

"그게 실은···"

그의 말에서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가 멸망에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

"과천, 그리고 안양 지역에 있는 사병 각성자들을 소집하고 있었습니다. 예비군들까지 포함해서요. 저희 대대는 통신 지원을 맡았고,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군용 통신망을 제외하면 마땅한 통신수단이 전무한 상황입니다."

그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지금 군과 행정부에서는 각성자들로 구성된 새 부대편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지요."

듣기로는 그럴싸했지만, 정작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발 살려줘 폭스트롯 개새끼들아를 외치던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했다.

때마침, 궁금증을 풀 차례였다.

"어째서 군이 괴멸당한 겁니까? 괴물들에게 총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던데요."

"그야 대부분은 그렇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놈들이 있습니다."

총이 통하지 않는 괴물.

개중 하나는 나도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과천, 안양의 병력들이 드래곤 한 마리에 괴멸됐습니다. 검은색 몸통에, 하반신이 무지개색으로 번들거리는 녀석이죠. 놈에게는 총알도, 포탄도, 그 무엇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양에 나타난 사이클롭스, 청계산에 나타난 거대 두더지도 그랬습니다. 타지역에서도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고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군이 어째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하지만, 정작 한경호는 여전히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곤 하지만··· 분명 지원이 오기로 했었습니다. 최소한 발을 묶어 대피할 수는 있었죠. 하지만 지원부대도, 지통실도 모조리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만일 통신기를 확인하러 옥상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도 다른 전우들처럼 거기에 묻혔을 겁니다."

나는 국통사를 조직폭력배들이 점거했었노라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본부가 그 지경이 되었다면, 분명 저희 쪽에도 기별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그런 것보단··· 뭔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저희를 내팽개치듯이요."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죠? 부대로 가봐야겠습니다. 지통실을 뒤져본다면 뭐라도 나올지도 몰라요."

"아마도··· 아직은 강남입니다. 그래도 부대는 보실 수 있어요."

"···예?"

"여기 있거든요. 국통사."

나는 물류센터의 창밖을 가리켰다.

국군 지휘 통신 사령부의 위병소가 내다보이는.

.

.

.

나는 당장에 지통실로 뛰어가려는 그를 잡아 세웠다.

그러곤 팍스에게 물었다.

"혹시 전에 한다던 전산 작업 다 끝났나?"

[현재 모든 전산 작업이 완료되어 있습니다. 섹터2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를 다른 상품처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잘됐네. 따라오세요. 직접 찾는 것보다 빠를 겁니다."

나는 한경호를 데리고 픽킹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그리고 PC에 '기밀문서'를 검색했다.

3급, 2급, 심지어는 1급 보안문서까지.

국통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밀 서류들의 제목이 주르륵 목록에 표시되었다.

"싹 다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AGV 로봇이 두꺼운 서류철을 가져다주었다.

펼쳐보니, 안의 서류들이 작성 시기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세련된 AGV 로봇들이 군의 기밀문서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며, 한경호는 황망한 표정을 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

.

.

.

팔랑팔랑.

한경호는 말없이 서류를 넘겼다.

자신이 확인한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아니,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애타게 바라며.

하지만 명백한 증거에 그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결론을 내렸다.

"1군단이··· 쿠데타를 일으켰군요."

그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

나는 한경호와 함께 포탈을 빠져나왔다.

운전석에서는 이용수가 여전히 차를 몰고 있었다.

나는 한경호를 뒷좌석에 앉힌 뒤, 조수석으로 돌아왔다.

한경호가 말했다.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그는 합동참모본부가 있는 용산으로 가고 싶어 했다.

목적지가 달랐기에, 우리는 한강 다리를 건너는 대로 그를 내려주기로 했다.

도로의 괴물은 뜸했다.

휑한 노면을 달리며, 나는 궁금증을 풀었다.

"파주에 있을 1군단이 왜 안양에 훼방을 놓은 겁니까?"

"1군단에서도 산하에 각성자 부대를 편제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안양과 과천에 모인 각성자들은 모두 수도 방위 병력으로 편제될 예정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부가 병력을 모으는 걸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국통사 사령관도 그쪽에 붙었던 모양이고요. 세상이 이 지경인데··· 한다는 짓이 정권 탈취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네요."

멸망이라는 적 앞에, 또다시 적으로 갈라서는 것이 인간들의 사회였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멸망은 조력자일지도 몰랐다.

모든 기반을 뒤집고, 새로운 시작을 이뤄주기 위한 밭 갈기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차를 멈춰 세운 이용수가 말했다.

"···다리가 끊어졌네요."

한강진과 남산 1호 터널을 지나 을지로로 향하려던 계획이 무산됐다.

서둘러 반포대교를 통해 녹사평을 지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으나···

정작 도착해보니 반포대교는 물론 잠수교마저 무너진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간을 더 달렸을까.

이용수가 반색했다.

"아, 여기는 갈 수 있겠습니다."

유일하게 성한 동작대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아무래도 용산을 거쳐서 가야겠는데요."

동작대교 앞에 선 용산공원을 끼고 돌면 자연스레 합참본부 근처에 다다랐다.

이용수의 말에 한경호의 표정이 화색이 되었다.

정말이지, 억세게 운이 좋은 인간이었다.

.

.

.

우리는 심장을 졸이며 한강을 건넜다.

강물 속에서는 난생처음 보는 괴생물체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탕!

타앙!

중간에 날아드는 와이번들을 몇 마리 잡아내기도 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리를 건너 삼각지역에 다다랐을 때 드러났다.

"저건 설마···"

이용수가 하늘을 가리켰다.

실로 거대한 건축물.

창백한 회색 벽이 하늘에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높이.

송현구가 말한 바로 그 '성벽'이었다.

'···차로는 절대 못 넘어가겠네.'

서서히 합참 본부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이때다 싶었는지 한경호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김정겸 씨, 저와 같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정부에서는 각성자들에게 마석을 제공하는 등 초기 성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정겸 씨가 정부 소속이 된다면··· 분명 적지 않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병원에 있을 때부터 나의 능력을 지켜본 그였다.

걸어 다니는 인간 황금마차에 전투 능력까지.

나를 탐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을지로에 있을 작은 누나에게 먼저 가봐야 합니다. 마석이라면 제 스스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요."

쓸데없이 정부의 명령을 받고 씨름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 나는 우리 김씨 일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니.

하지만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 보였다.

나는 잠시 대답을 멈춘 채, 물끄러미 차창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높은 성벽.

그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철옹성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제야 필요한 물건이 하나 떠올랐기에, 한경호에게 물었다.

"합참본부라면··· 헬기 한두 대쯤은 가지고 있겠죠?"

"헤···헬기요? 예, 그렇죠."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17. 찾아가는 서비스 (1)

"후우···"

이곳은 합동 참모 본부의 작전본부.

홀로 남은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지난 며칠간 군이 수행한 여러 작전들의 현황 및 결과들이 빠짐없이 표기되어 있었다.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주 깜깜이구만. 깜깜이."

현황판이 보여주는 결과는 암담했다.

말 그대로 보이질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뚝하고 통신이 끊겨버린 부대가 한둘이 아니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건 부대가 괴물들에 의해 송두리째 집어삼켜졌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니, 자잘한 패전이야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점차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전국 각지에 있는 상급 지휘부대들에 새로운 병력 편제를 구성하라 명령했다.

온갖 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는 이런 상황에는 무엇보다 구심점을 구성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으니까.

기존 병력 편제에 각성자들을 추가로 구성하여 시나 군 단위로 결집하도록 했으나, 정작 그 결집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과천, 안양도 그대로 날아간 듯하고··· 56사도··· 그나마 제대로 모인 곳이 1군단인가."

혼잣말로 상황판을 정리하던 그는, 문득 불경한 말을 주억거렸다.

이곳 합참의 작전본부는 군사 작전을 쥐락펴락하는, 그야말로 권력의 중심부였으니.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과연 정부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국가는 실체가 아닌 개념이지만, 제도와 군사력을 통해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씁쓸하게 군복 카라를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세 개의 별.

검은 자수로 박힌 그 별은 이미 그 빛을 다한 채 죽어있었다.

그때, 누군가 회의실로 들어섰다.

유성철의 전속부관이었다.

"본부장님,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데 그래?"

"국통사 50정보통신대대장인데, 정부 과천청사 집결지에서 통신 지원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본부장님께 반드시 전달해야 할 소식이 있다고···"

"···과천? 그게 정말이야?"

전멸했으리라 짐작만 했던 정부청사의 병력.

생존자의 소식에 유성철이 반색했다.

"당장 들어오라고 해."

검게 물들었던 시야, 마침내 작은 샛별이 찾아들었다.

.

.

.

"···쿠데타라고?"

유성철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의 손에는 통신대대장 한경호가 건네준 몇 장의 기밀문서가 들려 있었다.

그중 두엇은 바로 이곳 합참본부의 지령에 따라 작성된 것이다.

하지만 몇 개는···

한경호가 덧붙였다.

"예, 1군단입니다. 본부장님."

바로 1군단에서 전달된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문건은 아니지만, 그 내용만큼은 확실했다.

수도 방위군으로 편성될 부대 집결지에 대한 지원과 통신을 끊어버리는 것.

부대 편성의 실패를 괴물들의 습격으로 위장하여 보고하는 것.

'이 새끼들이 제정신인가?'

정황적인 증거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제대로 부대 편성이 정비되고 있는 곳은 1군단과 전방 몇 사단, 그리고 후방의 상급 부대들 뿐이었다.

개중 가장 처참하게 집결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곳 수도방위 병력이었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대체 이 문서를 어떻게 가져온 거지? 미안하지만 자네 직책으로는 손도 대기 어려운 문건들일 텐데. 과천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것도 이상하고···"

"원래라면 그랬겠죠. 해서, 본부장님이 꼭 만나보셨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경호는 지난 며칠간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김정겸이라는 사내가 자신을 구해주었으며, 그의 아공간에 국통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물론 막강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능력이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작전본부장 유성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작전본부장 유성철은 나를 만나러 직접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이용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나는 즉시 그와 교섭을 시작했다.

미리 부탁했던 대로, 한경호가 본부장에게 내 능력을 설명했을 터였다.

"지금 제 가족이 저 성벽 너머에 있습니다. 해서, 헬기를 한 대 빌렸으면 하는데··· 내어주신다면 그 이상의 물자를 대가로 드리겠습니다. 물이나 식량, 군수품도 가능하고요."

"김정겸 씨의 능력은 여기 통신대대장에게 건네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능력이군요. 헬기는 상당히 중요한 전략 자산이지만··· 전해드리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내가 반색했다.

이렇게 쉽게 내어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단, 조건이 있습니다. 군 소속 각성자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정부는 현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겸 씨가 우리 군에 합류해주신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정부의 상황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당장은 가족들을 구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우선에 둘 수 없어요."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을 모두 찾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을 찢어발기는 괴물들이나 이 마당에 권력을 탐하는 1군단 놈들이나 싸가지 없게 느껴지는 건 매한가지지만, 이 정부가 존속할 수 있을지부터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본부장이 대답했다.

"그것참··· 안타깝군요. 그러면 헬기는 내어드리기가 어렵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더 여쭤보지는 않도록 하죠."

터엉!

나는 즉시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헬기를 얻기는 어려워졌지만··· 어차피 성벽을 제대로 확인하고 온 상태도 아니었다.

수류탄 수천 개를 까 던지면 어떻게든 구멍이 뚫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똑똑.

밖에서 차창을 두드렸다.

지잉.

창문을 내리자, 본부장 유성철이 큼큼 목울대를 다듬고 있었다.

"그럼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이것만 도와주신다면 헬기를 내어드리죠."

***

부르릉.

우리는 달리는 코란도 안에 있었다.

쑤욱.

이용수와 나 사이에 열린 포탈에서 마른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영화 '링'의 한 장면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 손에는 천 보자기에 싸인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즉, 오지수의 손이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감사를 표하자, 손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천천히 포탈 속으로 되돌아갔다.

이번엔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이었다.

보자기를 열자, 안에는 직접 만든 두툼한 수제 샌드위치가 담겨 있었다.

꾸준히 밖에서 돌아다니느라 식사를 거른 나와 이용수를 위한 배려.

프레시 센터에 완제품 샌드위치가 널려 있었을 텐데도, 직접 수제 햄을 굽고 치즈에 불을 입혀 만든 고오급 샌드위치였다.

"···!"

당연히 그 맛 또한 기가 막혔다.

이용수 또한 핸들을 바삐 돌리며, 남은 한 손으로 샌드위치를 씹었다.

이 인간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었다.

입에 담긴 빵과 고기, 채소를 우물거리며,

나는 조금 전 작전본부장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성철, 그는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다.

"성의 주인은 '기사왕'입니다. 당연하지만 인간은 아니고요."

"기사왕이요···?"

퍽 신화나 게임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이름이었다.

그것도 그런데··· 괴물들에게 이런 명예로운 이름이 붙어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은 아닙니다. 종종 '해골 기사'라는 엘리트 괴물이 나타날 때가 있는데, 놈들이 '기사왕의 명예를 위하여'라는 말을 읊어대거든요."

괴물이 말을 하다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유성철이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혹여나 작전 중 해골기사를 만나더라도, 최대한 싸움은 피하세요.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무조건 후퇴하셔야 합니다. 놈들에게는 우리 공격이 통하질 않으니까요."

통신대대장 한경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총을 비롯한 현대식 화기가 통하지 않는 적.

이곳도 과연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해골 기사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스켈레톤뿐입니다. 전투력 자체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지만··· 의외로 총으로는 잡기가 어렵죠."

"어째서요?"

"일단 온몸이 뚫려 있어서 그런지 총알이 꽤 비껴나갑니다. 거기다 마석으로 이루어진 '코어'를 제대로 깨뜨리지 않으면 뼈가 다시 모이며 재생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코어란 건 어디에 있는 겁니까?"

"머리에 달려 있었다면 참 좋았겠습니다만··· 오른쪽 아래 마지막 갈비뼈 중간 부분이 마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석이 분리되면 놈들도 힘을 잃고 쓰러지게 되죠."

적들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전해준 그는 마침내 본론에 다다랐다.

애당초 내게 작전을 도와달라 부탁했던 그였으니까.

"놈들은 남산 아래로 후암동, 남영동, 청파동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최근 예비군 각성자들을 소집했던 곳이 바로 서울역이었죠. 다행히 그쪽과 통신은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해골들 때문에 길이 막힌 상황입니다. 초기 각성자들인 탓에 전투력은 별 볼일이 없고, 저희 쪽에서 구출 작전을 벌이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죠."

"간단히 말해, 그 사람들을 꺼내와 달라는 거죠?"

"맞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시간이 끌리는 건 불편했지만, 다행히 서울역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더욱이 이번 일로 헬기를 얻는다면 성벽을 넘어 을지로로 향하는 과정에 한층 더 속도가 붙을 터.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조건을 추가로 덧붙였다.

"단, 구출 과정에서 생기는 마석은 모두 제가 갖겠습니다."

나 홀로 참여하는 구출 작전은 아니었다.

수송 트럭 몇 대와 지원 병력이 함께 진입하기로 했는데, 그 정도 거들어 놓고 마석 소유권에 시비를 걸면 곤란했다.

지금까지 수중에 모인 마석은 도합 617개.

어마무시한 양이었지만, 아공간 레벨 3을 달성하기에는 여전히 모자랐다.

마석을 모두 넘겨달라는 내 조건에, 의외로 본부장은 쉽게 수긍했다.

"그러시죠. 애초에 인명 구출이 목적인 작전이니··· 하지만 마석을 수거하는 것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시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을 구하시고 나면 바로 여기 본부로 돌아와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기 위한 일시적인 거래였다.

작전본부장답게, 그가 상상력을 발휘했다.

"아공간에 있는 어떤 물건이든 불러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두돈반 트럭 같은 걸로 해골들을 쓸어버리며 가시는 건 어떠실지요. 놈들이 다시 살아나기는 하겠지만··· 움직이는 데 필요한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겁니다."

"아··· 예, 참고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달리는 차 창 바깥.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나는 마저 생각을 정리했다.

트럭을 소환하자는 유성철 본부장의 기획.

나쁜 방법은 아니지만··· 어쩐지 성에 차지 않았다.

아공간 2레벨을 달성한 이후, 내겐 아직 개방하지 않은 능력이 있었으니까.

팍스가 창을 띄워주었다.

----[개방 가능 항목]----

[비용 50] 

◈ 추적 배송

-출하된 상품이 설정된 목적지를 자동으로 추적합니다.

-------------------------

출하 위치를 조정할 수 있었던 을 넘어, 이제는 아예 추적 미사일이었다.

목적지는 스켈레톤들의 오른쪽 아래 갈비뼈.

추적 배송을 통해 놈들의 갈비를 제대로 털어줄 생각이었다.

18. 찾아가는 서비스 (2)

띠링!

팍스가 목록을 띄워주었다.

----[강화 가능 항목]----

[비용 5]

◈ 출하 소요 시간 [1초]

◈ 출하 사정거리 [50m]

◈ 출하 속도 [최대 100km/h] [+]

-------------------------

소요 시간과 사정거리는 2레벨에서의 최대치를 달성했다.

하지만 아직 출하 속도는 올려두지 않은 터였다.

시속 100킬로미터.

느린 속도는 아니지만, 충분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얼마까지 최대로 올릴 수 있다고 했지?"

[아공간 레벨2에서는 최대 150km/h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진행할까요?]

"그래 최대치로 찍어줘. 그리고 도 열어주고."

[출하 속도 5km/h 당 마석 5개, 개방에 마석 50개가 소진됩니다.]

[모두 합쳐서 마석 100개 받았습니다.]

[남은 보유 마석은 517 개입니다.]

150킬로미터.

투수가 파이어볼러라는 이름에 턱을 걸칠 수 있는 구속이다.

물론 나는 단순한 파이어볼러가 아니었다.

추적배송을 활용한다면 제구력까지 갖춘 괴물 같은 투수가 될 테니.

지속적인 소탕 작전 덕인지, 합참본부 주변만큼은 별다른 위협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남영역 근처를 지나자마자, 우글대는 회색 해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으로는 군경 방위군이 흙 마대로 덧댄 두꺼운 바리케이드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차를 멈추자, 책임자가 다가와 척하니 경례를 붙였다.

엉거주춤 경례를 받았다.

"무전을 통해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문이 열리는 동안 사격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건투를 빕니다."

총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스켈레톤이다.

군 또한 놈들에게 불필요하게 탄환을 낭비하지 않았을 터.

다만 예외적으로 문이 열리는 동안 엄호를 해주겠다는 뜻이었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끼이이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투다다-!

투두!

사병들의 총성이 이어졌다.

수천 발의 총알이 빠르게 스켈레톤을 덮쳤지만, 

퍽!

후웅!

놈들의 텅 빈 몸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반, 아니 반의반도 타격을 주지 못하는 꼴이었다.

그래도 총알은 총알인지라 놈들이 조금씩 주춤거리기는 했으나···

갈비뼈에 달린 마석만큼은 멀쩡했던 탓에, 깨지고 부서지는 와중에서 서서히 회복을 거듭했다.

한참 해골들이 총알과 춤사위를 나눌 때쯤.

나 또한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아니, 준비랄 것도 없었다.

그저 바리케이드가 다 열리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위잉-

위잉-

차량에 탄 채, 주변으로 네 개의 출하용 포탈을 형성했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해골을 상대로 단검이나 도끼는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해서, 특별한 상품을 준비했다.

[STORM ULTIMATE PHAZE 볼링공, 16파운드, 가격은 239,000원입니다.]

매끈매끈한 볼링공이었다.

검은 구체에, 붉은 마블링이 물결처럼 그려진.

합참의 작전본부장이 두돈반 트럭으로 해골들을 치워보라 제안했지만, 적어도 해골들에게만큼은 이 볼링공보다 적절한 무기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오른쪽 갈비뼈를 효율적으로, 집중해서 타격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다만 문제는 계속해서 죽어 나갈 해골들을 그때그때 일일이 목표로 설정할 수 없다는 데 있었는데···

이 또한 해결 방법이 있었다.

"해골들의 오른쪽 아래 갈비뼈를 맞혀 줘."

[알겠습니다.]

[타격이 끝난 뒤에는 그다음 위치에 있는 개체들로 목적지를 자동 설정하겠습니다.]

척이면 척 알아듣는 팍스다.

다음 타겟을 찾아 조준해주는 일 정도는 쉽게 맡아줄 터.

심지어 우리 차세대 AI께서는 멍청한 나보다 몇만배는 연산 속도가 빠르셨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비로소 게임을 시작했다.

"오케이, 출하."

슈우웅!

네 개의 볼링공이 일순에 해골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명치를 얻어맞은 해골들은···

달그라라라락!

볼링핀처럼 와르르 무너지며 뼈를 뱉었다.

150킬로 미터로 날아간 16파운드의 볼링공.

과연 그 위력은 상당했고,

달그락!

달그라라락!

전방에 있던 해골들은 물론, 그 뒤와 뒤에 서 있던 해골들까지 한 줌의 뼈마디로 흩어버렸다.

타앙!

탕!

프로 볼링 선수가 봤다면 심사위원에게 하소연을 했을 지 모른다.

-이건 조작이에요!

맞다.

그야말로 자동 유도 포격에 다름없었다.

능력과 AI팍스의 궁합은 그야말로 찰떡이었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슈우우우욱!

쏘아진 볼링공들이 다시금 를 통해 내 포탈로 되돌아왔으니.

심지어 기특하게도 빈손이 아니었다.

빠악!

해골들이 얼얼한 뒤통수를 붙잡고 쓰러졌다.

놈들의 뒤를 후려치기에 이보다 좋은 능력이 없었다.

이제 출하에 소요되는 시간은 단 1초에 불과했다.

좀 더 효과적인 타격을 위해 간격을 3~4초 정도로 조정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장엄한 풍경을 자아내기는 충분했다.

은색 코란도가 수북이 쌓인 뼈 무더기를 밟았다.

덜그럭덜그럭 묘한 승차감을 느끼며, 이용수는 놀라워했다.

"···무슨 놀이공원에라도 온 것 같습니다."

타앙!

달그라락!

주변으로 수십 개의 볼링공이 해골들을 향해 꾸준히 날아들었다.

회수용 포탈로 되돌아오는 볼링공.

전장에 흩뿌려진 마석들이 또한 후루룩 함께 빨려들어왔다.

우리 뒤로는 고립된 각성자들을 태우기 위한 수송 트럭 세 대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아···"

그들의 반응 또한 이용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을 각오한 작전이 사파리 체험만도 못하게 되어버렸으니까.

손에 쥐어진 워키토키 무전기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소리를 뱉었다.

-목적지··· 도착했습니다.

수송 지휘를 맡은 장교의 목소리였다.

***

그렇게 도착한 서울역.

타앙!

탕!

달그라락!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서울역 광장을 서성이던 해골들을 한 번 더 쓸어버렸다.

각성자들이 모여있는 곳은 옛 서울역사로, 지금은 '문화역 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문화공간이었다.

낡은 고딕 느낌의 건물이었지만, 아무래도 사방이 뚫려 있는 서울역사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장소로 보였다.

스르륵.

공중을 누비던 볼링공과 마석들을 모두 회수한 나는, 옛 서울역사 내부로 들어섰다.

주변으로는 소총이나 둔기를 든 사병들이 저마다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나를 엄호해주었다.

안쪽으로 무전이 닿은 것인지, 두꺼운 문이 스르르 열렸다.

문을 연 안쪽 사람들이 반색했다.

"···!"

"···사···살았다!"

퀭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던 그들은 구조대를 보자마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들 모두가 각성자이기는 했지만, 아직 스스로를 지킬 만큼 충분한 전투력을 갖추지는 못 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정부로부터 마석을 지원받아 건실한 군 병력으로 성장하게 될 이들이었다.

우르르!

수십 명의 사람이 서둘러 군의 수송 트럭에 올라탔다.

"복귀!"

"복귀-!"

분대장들이 서로를 채근하듯 외쳤고, 나 또한 차로 되돌아갔다.

부르릉.

이용수가 다시 선두로 차를 몰았고, 구조 인원을 빼곡하게 실은 수송 트럭이 우리 뒤를 이어 따라왔다.

수송 작전은 성공이었다.

이대로 합참 본부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하지만 일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

끼이익-!

이용수가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덜컹 소리와 함께, 우리를 뒤따르던 수송 트럭들 또한 일제히 멈추어 섰다.

차창 앞에는 한 명의 해골이 서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해골은 아니었다.

"···갑옷?"

중세 영화에서나 보던, 전신 아머.

심지어 놈은 뼈와 갑옷으로 이루어진 해골마를 타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작전본부장이 보는 즉시 후퇴하라 당부했던 '해골 기사'였다.

덕분에 우리 작전에도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놈은 도로 위로 빼곡하게 쌓인 뼈 무더기를 보며···

"···Absurdum est, cur omnes?"

말했다.

말하는 괴물이라니, 이런 건 듣도보도 못했다.

"출하."

나는 즉시 볼링공을 집어 던졌다.

슈우우우욱!

볼링공이 빠르게 놈을 향해 쇄도했지만···

썩둑!

놈이 내지른 칼날에 두쪽으로 잘려버렸다.

놀랍게도 놈이 잘라낸 볼링공의 단면에는 은은한 잔불이 어려 있었다.

쐐애애액!

몇 개가 추가로 날아들어도,

서컹!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두두두-!

사병들이 차에서 내려 놈을 향해 사격했다.

팅! 팅! 탱!

놈의 갑옷 위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놈은 천천히 텅 빈 눈자위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나를 바라보기 위해.

"Dicemus salve···"

놈이 품에서 꺼낸 것은··· 놀랍게도 마석이었다.

녀석이 뼈로 된 주먹으로 마석을 힘껏 움켜쥐었다.

파창!

마석이 깨져나갔고···

"···반갑다, 이계인. 나는 기사왕을 모시는 해골 기사, 그웨인이라고 한다."

이 미친 해골 놈이 한국말을 하기 시작했다.

달그락 벌어지는 입 사이로, 붉은 홍염이 언뜻언뜻 비쳐보였다.

암만 봐도 평범한 해골은 아니었다.

팅! 타앙! 팅팅!

총알이 온몸에 쏟아지는 중에도, 놈은 제 할말을 꿋꿋이 이어갔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이런 한지에서 조작계 마법사를 마주할 줄이야."

그러곤 알기 어려운 말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염동을 다룬다고 해도 그렇지··· 다른 것도 아니고 마력구(魔力球)를 집어던지며 싸울 생각을 하나? 내 살다 살다 너 같이 무식한 마법사는 처음 본다."

'마력구···? 아.'

놈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볼링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몸체에 붉은색 마블링.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놈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기사왕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 개척 초기이니만큼 조급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서로 상도덕은 지킬 줄 알아야지. 지금 너 때문에 난 손해가 얼마인 줄 아나?"

타앙!

놈이 새로 날아든 볼링공을 잘라냈다.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묘한 살기를 꾸준히 풍겨댔다.

당장이라도 내게 쇄도할 것만 같았다.

탕!

타앙!

연달아 볼링공을 쏴댔고, 놈이 허허 웃으며 칼을 휘둘렀다.

"소용없다니까."

탕!

탕탕!

카아아앙!

"거참, 소용···?"

놈이 화들짝 칼을 휘둘렀다.

볼링 공의 수가 점차 불어난 탓이다.

네 개의 포탈에서 쏟아져 나온 볼링공은 수십, 아닌 백 여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놈이 불꽃과 함께 경악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캉!

타앙!

텅!

아무리 놈이 고수라 해도, 동시에 날아드는 모든 볼링공을 베어낼 수는 없었다.

미처 잘라내지 못한 볼링공이 놈의 갑옷, 그리고 해골마를 때렸고···

터엉!

"윽!"

마침내 놈이 떨어졌다.

놈은 곧장 몸을 일으키고는 길길이 성을 냈다.

"···돈이 썩어나기라도 하나? 마력구를 이런 식으로 낭비해?"

하지만 그 말이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텅!

날아든 볼링공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놈의 얼굴을 때렸다.

터어엉!

그와 동시에, 멀찍이 뒤로 넘어갔던 볼링공 하나가 로 되돌아오며 놈의 뒤통수를 때렸다.

앞에서 때렸을 때보다 한층 더 경쾌하고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참으로 오묘했다.

그리고··· 나는 연주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텅!

터엉!

실로 단단한 놈이었다.

총알을 튕겨내는 것은 물론, 16파운드 짜리 볼링공을 150킬로로 얻어맞았는데도 작은 흠집 하나로 그칠 뿐이었다.

우선은 접근을 막으려 했다.

불붙은 칼로 볼링공을 반토막 내는 괴물.

저런 놈이 달라붙어 칼을 휘두른다면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불 보듯 뻔했으니까.

왜 작전본부장이 후퇴를 조언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해볼 만큼은 해볼 생각이었다.

돈이 썩어나지는 않아도··· 물자만큼은 썩어나고 있으니까.

텅!

티잉!

터어엉!

와 을 동시에 발동해 양철 해골을 후두려 패기 시작했다.

밸런스 좋게 좌우앞뒤를 골고루 때려 제자리에서 옴짝달싹 못하도록.

아무리 피해를 받지 않는다지만, 물리적 충격 자체는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놈이 텅텅 맑은 종소리를 울리며 볼링공 사이로 고정되었다.

순식간에 악기가 되어버린 놈이 몸을 떨며 말했다.

텅! 팅! 탕!

"···너···이···자식··· 당···!"

미안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렸다.

하지만 이것으론 현상 유지가 전부였기에, 간간이 새로운 품목을 섞어주었다.

K413 세열수류탄이었다.

팅! 탕!

맑은소리와 함께···

꽈아앙!

수류탄의 낮은 베이스가 박자를 맞췄다.

놈이 경악했다.

"너··· 조···조작계가 아니었나?"

"자꾸 뭐라는 거야···"

사실은 내가 더 놀랐다.

이 미친 해골은 대체 얼마나 단단한 걸까.

이미 수류탄을 족히 수십 발은 터뜨린 터다.

볼링공에 에워싸진 놈은 온몸 그대로 그 충격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이쯤되니 얼추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그렇게까지 죽어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다행히··· 놈의 내구력은 무한이 아니었다.

내 물류센터와 달리.

쩌적.

병아리가 알을 깨듯,

마침내 놈의 갑옷에 균열이 일었다.

그렇게···

몇십 발의 수류탄을 추가로 떨어뜨렸을까.

쩌저적!

파창!

갑옷이 몇 조각으로 쪼개지며, 놈이 털썩 주저앉았다.

볼링공에 그려진 불꽃 마블링, 그리고 수류탄에서 터져 나온 진짜 불길에 휩싸이며, 놈이 중얼거렸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박살 난 갑옷을 입은, 고스트 라이더와 같은 행색이었다.

"마법사··· 이걸로 끝이라 생각 말아라."

그 말만큼은 이상하게 귀에 잘 들어왔다.

놈이 풀썩 쓰러졌다.

불길이 가신 뒤에는···

새카맣게 그을린 뼈 사이로, 유난히 큼지막한 마석 두 개, 그리고 붉은색 마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