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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재공

1. 핵가족의 아포칼립스 (1)

여느 때와 다름없던 2023년의 봄.

우리 가족에게 핵 공격이 날아들었다.

콰앙!

진짜 핵이 터진 건 아니다.

단지 우리 김씨 일가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뿐.

시작은 첫째 형의 결혼이었다.

이어서 두 명의 누나, 김씨 시스터즈 또한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질세라 부모님까지 본가를 돌연 의정부로 옮겨버렸다.

마지막으로, 갓 전역을 하고 돌아온 나는···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학교 앞, 텅 빈 오피스텔로 홀로 떨궈졌다.

북적거리던 2남 2녀의 다복한 가정은 그렇게 원심분리가 되었다.

"···외롭네."

그때 느꼈다.

핵가족 시대를 받아들이기엔, 나는 너무 구시대적인 인간이었다는 걸.

하지만 그때만 해도 괜찮았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할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

복학까지 남은 시간은 넉 달.

물류센터 택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용돈벌이였지만, 내심 사람 냄새도 좀 맡았으면 했다.

텅 빈 자취방은 아무래도 적응이 되질 않았으니.

하지만 이곳조차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있었다.

"사람이··· 없네···"

사람이 나르는 택배는 끝났다.

바야흐로 지금은 물류 혁신 시대.

위잉- 위잉-

내 눈앞에는 백 개가 넘는 선반들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정체는 빌어먹을 '자동화 시스템'.

그렇다.

내가 들어온 곳은 평범한 물류센터가 아니었다.

이곳의 이름은 팍스 풀필먼트 센터(PAX Fulfillment Center)

줄여서, 팍스 FC라 불렸다.

포장된 소포를 받고, 또 전달하는 기존의 물류센터와 달리, 이곳 팍스 FC에는 온갖 물건들이 이미 진열되어 있었다.

간단하게는 식료품부터 어린이 장난감, 사무용품, 심지어는 건축 자재까지.

주문이 들어오면 AGV(Automated Guided Vehicle) 로봇이 알아서 물건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준비된 박스에 넣어 포장하기만 하면 됐다.

-김 씨! 간다, 받아!

-하나둘!

이런 소리는 더 이상 들어볼 수 없다.

탑처럼 쌓인 택배 상자도, 핏줄 돋은 근육의 씰룩거림도 마찬가지다.

땀내 나는 사나이들의 물류센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띡- 띡-

AGV가 가져온 참치캔의 바코드를 찍으며, 나는 속 편히 투덜거렸다.

"정 없다, 정 없어."

띠링!

[등록되지 않은 상품입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이 놈 시끼야."

내 유일한 말 상대는 센터에 탑재된 AI, 팍스(PAX)였다.

주문 접수부터 재고 계산, 심지어는 무게 측정을 통한 검수까지.

이놈이 관여하지 않는 게 없었다.

알파고 보다 몇 세대 발전된 AI라나 뭐라나.

물론, 그래도 완벽한 건 아니었다.

"김정겸 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사막에 뜬 신기루처럼, 저 멀리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내가 대답했다.

"아, 네. 신 과장님."

"참치캔 재고가 없는데 팍스한테서는 자꾸 남아 있다고 떠서요. 재고 넣는 쪽 가서 확인 한번 해주실래요?"

"아··· 네네. 지금 하고 있던 건 어떻게 할까요?"

"내가 일단 잡고 있을 테니 다녀와요. 재고 입력된 건데도 빠져있는 거 아닌지 잘 좀 봐줘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우리는 철저한 비지니스 관계였으니까.

신 과장은 말없이 바코드 스캐너를 잡았고, 나는 창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도착한 창고는 어두운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조립식 판넬 문짝을 열어젖혔다.

"어디 보자···"

창고에는 포장된 생수통 몇 개와 이런저런 잡화가 담긴 상자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몇 개를 헤집다 보니, 오래지 않아 문제의 참치캔 박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웃차."

그렇게 박스를 들고 돌아가려던 찰나,

휘이이이-!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러더니,

콰앙!

바람과 함께 판넬 문이 거세게 닫혔다.

참치캔을 내려놓고 문고리를 잡아보았으나,

철컥.

"미친?"

열리지 않았다.

뚜르르···

스마트폰을 꺼내 신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그 역시 받지 않았다.

나는 망연히 구석에 걸터앉았다.

적막에 싸인 창고.

한창 일하다 온 참이라 그런지, 멈춰 있는 창고의 풍경이 꽤 새삼스러웠다.

119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에이, 안 오면 신 과장이 찾으러 오겠지."

본의치 않은 사고다.

문은 열리지 않고, 신 과장도 전화를 받지 않으니 별수 있겠나.

덕분에 20분은 느긋하게 쉬다 들어갈 수 있겠다.

형광등 불빛 아래, 돌처럼 굳은 상자들이 스산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서울에 있는 작은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금세 답장이 돌아왔다.

소소하게 진행되던 대화였지만,

돌연, 분위기가 변했다.

뚜르르르르-

작은 누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지만,

뚝.

내가 받기도 전에 끊어져 버렸다.

뚜우- 뚜우-

다시 걸어도 신호가 가질 않았다.

"···뭐야?"

그때,

콰아아앙!

폭음이 들렸다.

아예 지면이 부르르 떨리는 수준이었다.

탁!

창고를 비추던 형광등이 꺼졌고, 붉은 적외선 비상등이 들어왔다.

빨간 조명으로 물든 창고 속.

불안감이 엄습했다.

"···?"

위잉! 위잉!

따르르르르르릉!

사이렌 경보가 울렸다.

안전 교육 때 외에는 들어본 적 없는 소리.

앞서 있었던 폭음 탓인지 그 소리가 유난히 불길하게 들렸다.

벽면에 붙은 스피커에서도 불이 들어왔다.

-전 직원, 지금 당장 하역장으로 대피하세요! 다시 한번 전달합니다. 전 직원 지금 당장 하역장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지만,

"젠장."

철컥!

다시 잡은 문고리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쾅쾅쾅쾅!

"여기 사람 있어요!"

두드리고, 발로 차보기도 했지만, 별거 아니라 여긴 판넬문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이미 대피를 마친 것인지, 아무리 목청을 틔워봐도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119··· 119···"

다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뚜- 뚜-

걸리지 않았다.

통화권 이탈을 나타내는 표시가 휴대폰 상단에 떠올라 있을 뿐.

"전쟁이라도 난 거야 뭐야···"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던 찰나.

드디어 문으로부터 기별이 있었다.

쾅! 탕! 텅!

"······?"

도무지 사람의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라고 볼 수 없는 묵직한 소리.

그 충격을 증명하듯 판넬 문짝이 안쪽으로 움푹 들어와 있었다.

'···사람이 아니다.'

위험을 감지하자,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숨마저 죽여가며 가까스로 존재감을 지워내자,

크르르···

짐승 같은 으르렁 소리와 함께,

터벅··· 터벅···

놈의 발걸음 소리가 차츰 문에서 멀어졌다.

털썩.

긴장이 풀리자마자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어떡하냐···"

아무 방법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밖에는.

***

"······"

그렇게 3일이 지났다.

먼지 쌓인 창고 속.

바닥을 나뒹구는 생수통들.

허기를 참지 못해 열어젖힌 참치캔 여덟 개가 비린내를 풍겨올 때쯤.

한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각성한 능력을 확인하세요]

만화나 소설에서나 봤음직한 푸른 창이 내게 나타났다.

그 안에는 내가 얻게 된 초능력에 대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나만의 아공간]

레벨: 1

내용: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아공간에 담을 수 있습니다.

아공간.

소설에서 본 적이 있었다.

어떤 물건이든 원하는 대로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

저 빌어먹을 판넬 문도 아공간에 넣어버리고, 이따금 지나다니며 그르릉 소리를 내는 저 괴물 놈도 넣어버리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장 가능 횟수 : 1]

딱 하나.

열하나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닌,

딱 하나의 사물만 아공간에 담을 수 있었다.

저 빌어먹을 문을 넣어버릴까?

그러자니 곧 다가올 괴물에게 목이 뜯길 것 같았고, 괴물을 담자니 애당초 탈출 자체가 불가능했다.

"다른 쓸만한 물건은···"

창고에 있는 모든 상자를 열어봤지만, 나오는 것이라곤 참치캔, 생수, 운동화, 여름우비, USB 메모리가 전부였다.

이딴 건 담아봤자 아무 쓸모가 없었다.

손바닥만 한 상자를 흔들었다.

속에 담긴 USB 메모리가 덜컹거렸다.

그러던 중,

"···잠깐."

한 가지 생각에 다다랐다.

아공간 능력으로 담을 수 있는 대상은 단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상자를 담는다면 그 안에 담긴 USB 메모리도 함께 담길 터였다.

안에 다른 사물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상자 자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 물류창고를 통째로 넣어버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바로 이곳, 팍스 FC 센터.

지상 5층으로 지어진 이 물류센터는 공교롭게도 박스 같은 육면체의 형태였다.

"시험해볼 여지는 충분해."

띠링!

[저장할 대상을 입력해주세요]

떠오르는 메시지에 이곳 팍스 풀필먼트 센터를 상상했다.

기우와 달리···

[대상이 지정되었습니다. 저장하시겠습니까?]

메시지는 긍정적이었다.

곧장 대답을 보냈다.

'예.'

[저장을 시작합니다]

"욱!"

속이 메스꺼웠다.

뒤집힐 듯 울렁거림이 찾아들었고, 머리가 팽하고 도는 바람에 다리를 휘청거렸다.

그렇게, 고통스런 감각이 차츰 사라질 때쯤.

"와······"

나는 감탄했다.

이곳 물류단지에는 A동부터 F동까지, 총 여섯 개의 물류센터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그 중, 팍스 풀필먼트 센터가 사용하는 건물은 C동.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니 왼쪽으로 B동, 오른쪽으로는  D동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팍스 FC가 위치해 있던 C동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벌판 위에 나 혼자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건물이 사라졌다.

정말로 내 아공간에 물류센터를 넣어버린 것이다.

띠링!

[저장을 완료했습니다.]

[저장된 대상에서 시스템 작동에 적합한 운영체제를 발견했습니다.]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합니다.]

[업데이트 진행률 6%···]

드디어 밖으로 빠져나왔다.

헌데, 바깥 사정 또한 그리 좋아 보이질 않았다.

"상태가 왜들이래···?"

배송차량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찌그러져 있었고, 심지어 몇 개는 완파되어 도로 한복판을 나뒹굴고 있었다.

B동 D동에도 파괴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을린 자국과 함께, 곳곳에 유리창이 박살 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적은 없었다.

한바탕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하지만 아니었다.

재앙은 현재진행형이었으니까.

쿵. 쿵.

팍스 풀필먼트 센터가 사라진 공터의 반대쪽 끝.

무거운 발걸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저건··· 오크?"

2미터가량의 거대한 몸집.

양옆으로 거칠게 삐져나온 이빨.

판타지 영화에서나 보던 녹색 거인은 어째서인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3일 내내, 문 앞을 서성이던 녀석이 분명했다.

"젠장!"

살아야 한다.

나는 서둘러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울부짖었다.

크와아아아!

내 돌발행동이 녀석의 심기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놈이 대뜸 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미친듯이 뛰었다.

분명 전속력으로 뛰고 있음에도, 등 뒤의 오크는 점차 가까워지기만 했다.

"제발··· 제발!"

도망친다 한들 희망이 있을까?

확신은 없었지만, 무작정 발을 내디뎠다.

크와악!

그렇게, 오크의 성난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올 때쯤.

띠링!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시스템이 복구되어 아공간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진입하시겠습니까?]

나는 미친듯이 '예'라고 외쳤고···

푸른색 포탈이 나를 감쌌다.

2. 핵가족의 아포칼립스 (2)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포탈 너머로, 여전히 나를 찾는 오크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여러 차례 걸어들어오려 했지만,

[외부의 존재가 입장을 시도합니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파지직!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버렸다.

타앙! 탕!

분하다는 듯 벽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놈은 더 이상 입장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실 뿐.

"살았다···"

안도의 숨을 몰아쉬려던 찰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공간에 최초로 진입하였습니다]

[튜토리얼 사용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마석 1개]

이게 그 마석이라는 것일까?

내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색 보석이 쥐어져 있었다.

능력을 각성했을 때부터 볼 수 있었던 메시지였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메시지 창에 익숙한 목소리가 더해져 있었으니.

내가 목소리의 주인을 불렀다.

"팍스···?"

[반갑습니다, 정겸 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 일터의 유일한 친구.

AI 팍스가 상태창 메시지를 읽어주고 있었다.

"대체···"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내가 있던 장소.

물류센터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정작 창문 바깥의 풍경은 흰 백지처럼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우주의 바깥, 혹은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처럼.

내가 물었다.

"여긴 어디야···? 넌 뭐고?"

AI 팍스의 대답은 빨랐다.

[이곳은 경기도 군포시에 위치한 팍스 풀필먼트 센터입니다. 지상 5층, 연면적 1만 평 규모의 시설을 갖춘 팍스 풀필먼트 센터는 고객들의 삶에 필요한 온 세상의 모든 상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50대가량의 AGV가 비치되어 있으며···]

[저는 김정겸 님의 업무를 도와드릴 풀필먼트 센터의 마스코트, 팍스라고 합니다.]

젠장, 근무 첫날인 줄 알았다.

여느 때와 같은 물류센터의 전경이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모든 조명이 꺼져 있는 것은 물론, 선반을 옮기는 AGV 로봇들과 컨베이어 벨트가 우뚝 멈춰 서 있었다.

팍스가 말했다.

[시설의 전력 공급이 끊어졌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전력을 복구해야 합니다. 공급이 지연될수록 상품 품질 유지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분탓일까?

AI치고는 어쩐지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떤 심각한 문제?"

[가장 심각한 것은 프레시 센터입니다. 냉장고, 냉동고의 작동이 중단되었고, 그밖에 자동 출하 시스템 또한 가동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냉장고가 멈췄다고?

그건 좀 곤란했다.

지금 바깥 풍경은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상황.

어쩌면 이곳 아공간 내에서 오랜 시간 버티며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

가장 중요한 자원인 식량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막아야 했다.

"전력을 어떻게 공급하는데? 여긴 아공간이잖아."

의외로 방법은 간단했다.

[마석을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개당 24시간 동안 가동이 가능합니다.]

아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받은 마석.

팍스는 그걸 원하고 있었다.

군말 없이 마석을 넘겨주었다.

"자, 받아."

나 또한 이곳의 물건들이 무사하길 바랐으니.

허공으로 마석을 들어 올리자,

[마석 1개 받았습니다.]

스르르, 흩어지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내,

탁!

위이이잉-

물류센터의 조명이 켜지며 AGV 로봇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잉 소리와 함께 환기장치까지 켜지니, 한결 안심이 되었다.

"···하루 벌었네."

[그렇습니다.]

"마석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거야?"

[각성 시스템에 의해 마석이 주어지는 건 이번 한 번뿐입니다.]

[이계의 존재들로부터 마석을 채취할 수 있습니다.]

"이계의 존재라면······"

고개를 휙 돌리자, 여전히 포탈을 앞을 지키고 있는 잘생긴 녹색 오크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 거?"

[그렇습니다.]

간단히 말해 저 오크를 잡아야 마석이 나온다는 소리였다.

목표는 정해졌지만, 처치 방법이 묘연했다.

저 괴물 같은 놈은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활용할 수 있는 도구라면 놈을 가로막고 있는 투명한 벽.

그리고···

이곳 풀필먼트 물류센터였다.

내가 물었다.

"혹시 예전처럼 물품 검색도 가능해?"

[가능합니다. 어떤 상품을 찾으시나요?]

"무기 같은 건 없겠지? 창이나 장검 같은."

[무기류는 취급하지 않습니다만, 가검 또는 캠핑용 단검은 여러 종류 취급하고 있습니다]

가검이라면 진검이 아닌 장식용 칼이란 소리였다.

단검도 나쁘진 않지만, 그걸로 저 오크를 처치하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도끼는?"

[손도끼 정도라면 있습니다. 선반 위치는 G-76. 위에서 네 번째 칸까지 모두 도끼와 관련한 공구류가 담겨 있습니다.]

자동 진열대로 들어가 G열 선반을 찾았다.

아득히 이어진 칸막이들 속에서 숫자를 찾고 있자니, 거대한 도서관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마침내 G-76번 선반을 찾았고, 수십 종의 손도끼 중 쓸만한 녀석을 찾았다.

아무래도 살상용이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개중에서는 그나마 무게도 있고, 날도 날카로워 보이는 녀석이었다.

[파스카스 도끼(소형), 가격은 72,500원입니다.]

대략 7만원의 가격.

하지만 지불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부터 이곳의 모든 물건의 주인은 다름 아닌 나니까.

그렇게 도끼를 집어 들었을 찰나였다.

"뭐지?"

손에 들린 도끼.

선반에 딱 하나 남아 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물건을 꺼내자마자, 선반에는 귀신같이 다시 물건이 채워져 있었다.

연달아 몇 번을 꺼내도 똑같았다.

[이곳의 물건들은 실체를 정보화 한 것입니다.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훼손되거나 변형될 수는 있어도 고갈되지는 않습니다.]

달리 말해서···

"물건이 복사가 된다고? 사기잖아?"

[그렇습니다.]

무한 재고의 물류센터라니.

아공간에 들여온 풀필먼트 센터는 그야말로 괴물같은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 아무튼."

그렇게 나는 도끼를 챙겨 진열대를 빠져나왔다.

오크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포탈 너머에서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집요한 놈이었다.

"니가 니 무덤 판 거야."

등으로 도끼를 숨긴 채, 조금씩 놈에게 다가갔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위협이 된다면 녀석이 도망갈 수도 있었으니까.

충분히 가까워졌을 즈음.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포탈 면적의 대부분을 가득 메울 만큼 몸집이 큰 녀석이다.

이 정도 거리라면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녀석의 '머리'를.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녀석의 눈이 신중해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휘익!

어깨에 온 힘을 넣어 도끼를 휘둘렀다.

팽그르르 회전하며 날아간 도끼는 이내···

파악!

놈의 머리에 적중했다.

촤아아악!

놈의 머리에서 녹색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쿵!

놈이 뒤로 넘어갔다.

녀석의 사체는 몇차례 꿈틀거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휴우···"

지난 3일 동안의 숙원이 시원하게 풀어졌다.

.

.

.

저벅저벅.

오크를 처치하고 난 후, 가장 먼저 향한 곳이 있었다.

전력이 돌아온 덕인지, 시설의 조명은 물론 주문을 처리하는 컴퓨터의 전원도 돌아와 있었다.

픽킹 스테이션(Picking station)에 도착한 나는, 모니터 하단에 놓인 키보드에 빠르게 정보를 입력했다.

타다다닥.

이곳 픽킹 스테이션은 일종의 '수령 장소'로, 주문한 물건을 AGV 로봇들이 이곳까지 가져다주는 구조였다.

전력이 돌아온 만큼, 이곳 시설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주문 좀 할게."

타다닥!

키보드로 물건을 입력할 때마다, 팍스가 낭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경량 컴뱃 워커, 가격은 52,500 원입니다.]

[밀리터리 전술 조끼, 가격은 58,000 원입니다.]

[알루미늄 수통, 가격은 11,800 원입니다.]

[제주 삼다수, 2L, 24개, 가격은 25,920 원입니다.]

[대용량 밀리터리 백팩 80L, 가격은 29,900 원입니다.]

[비상식량 2식단 제육 비빔밥 10개 110g, 가격은 22,500원입니다.]

"이게 다 공짜라 이거지."

배낭, 전투화와 군용조끼, 물이 담긴 수통과 비상식량까지.

쇼핑하는 맛이 제법 쏠쏠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든 물건을 하나하나 가방에 욱여넣다 보니, 남모를 기시감이 몰려왔다.

"···젠장, 이거 군장 싸는 거잖아."

전역한 지 얼마나 됐다고, 상황이 참으로 야속했다.

얼추 준비를 마친 나는 두 가지를 추가로 주문했다.

[도서, 서울 수도권 정밀지도, 가격은 31,500원입니다.]

[모나미 유성볼펜, 청색, 12P, 가격은 4,480원입니다.]

툭.

AGV 로봇이 책 한 권과 볼펜 박스를 던져 주었다.

"진짜 없는 게 없네."

이놈의 풀필먼트 센터에는 책도 있었다.

내가 주문한 것은 수도권 전지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200페이지짜리 지도책이었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인터넷이 끊어진 탓인지 아무리 해도 지도 어플이 실행되지 않았다.

팔랑.

수도권 전체가 표시되어 있는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볼펜으로 몇 군데 표시를 시작했다.

"강남에서 일하는 큰 누나, 을지로에 있는 작은 누나, 도봉구에 신혼살림을 차린 큰형 내외···"

마지막으로 의정부에 있을 부모님과 할아버지까지.

드래곤볼처럼 퍼져있는 김씨 일가를 빠짐없이 표시했다.

그야말로 핵분열이 따로 없었다.

"왜 다 쓸데없이 흩어져 갖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두 북쪽에 있다는 점이다.

가까운 순서로 하나씩 찾아내면 될 테니.

당장은 강남에 있을 작은 누나부터 찾아볼 생각이었다.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지금 나의 위치는 군포시.

나름 수도권이라 할 만하지만, 그래도 서울까지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꽤 먼 거리지만··· 가족애로 무장한다면 어떻게든 가볼 수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곳 풀필먼트 센터는 정말이지 위대해서, 쓸만한 애마(愛馬)까지 한 대 뽑을 수 있었다.

낑낑.

AGV 로봇이 낑낑대며 내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번쩍번쩍.

화려한 전조등을 비추는 녀석.

팍스가 호명했다.

[투알톤 코디악 스포츠 전기자전거 16.5Ah, 블랙색상, 가격은 1,890,000원입니다.]

철컥!

자전거를 받아들곤, 안장의 높이를 조절했다.

"일하기 전엔··· 설마 이런 물건까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지."

자동차, 오토바이까지는 못 되지만 당장은 도움이 되리라.

상품 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충전 한 번에 최대 100km까지 달리는 녀석이었다.

지금만큼은 테슬라가 부럽지 않았다.

안장에 걸터 앉은 채, 포탈 바깥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도끼를 꽂은 오크 시체가 늘어져 있었고, 그 뒤로 뒤집히고 부서지고, 불에 탄 트럭과 건물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썩 행복해 보이는 세계는 아니지만···

"가볼까."

위이잉-

전기 자전거의 시동을 걸었다.

등 뒤로는 상품 진열장이 빼곡한 풀필먼트 센터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실 것, 먹을 것부터 심지어는 놀거리까지.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으리라.

저 바깥에 비하면 어쩌면 천국이라 불러도 무방할 지도.

하지만···

"웬수 같은 우리 가족이 없잖아?"

띠링!

['웬수 같은 우리 가족'은 등록되지 않은 상품입니다]

팍스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나는 포탈 밖으로 나섰다.

연면적 1만평에 달하는 팍스 풀필먼트 센터를 등에 지고.

3. 핵가족의 아포칼립스 (3)

얼추 준비를 마친 뒤,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오크의 머리에 박힌 도끼를 빼내는 것.

푸슉!

찐득한 녹색 피가 울컥하고 튀어 올랐다.

도끼를 휘둘러 묻어있던 피를 마저 걷어냈다.

"이놈 몸에 마석이 들어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대개는 심장 근처 부위에 위치합니다.]

본격적으로 놈의 가슴팍을 뜯어보려던 찰나, 하나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아, 맞다. 단검."

손에 도끼가 있긴 했지만, 도축용으로는 불편해 보였다.

하려면 하겠지만, 어차피 아공간에 단검이 쌓여 있을 테니.

깜빡한 나에게 팍스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었다.

[아공간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바로 이곳에서 상품을 출하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것참 희소식이었다.

불편하게 물건 하나 때문에 포탈을 들락날랄거릴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하지만 제약이 있긴 했다.

[단, 출하는 30초에 한 번만 가능합니다.]

"되게 애매하게 불편한 수치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몇 종류 되는 물건을 한 번에 꺼내려면 좀 짜증날 것 같기는 했다.

더군다나 빨리빨리의 한국인이 아니던가?

웹페이지가 30초에 한 번씩 로딩이 된다면 빡쳐서 모니터를 부숴버릴지도 모른다.

[스킬을 강화하면 출하 소요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아, 그게 스킬이었어?"

[그렇습니다. 등록된 상품을 떠올리며 '출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단 단검 중 쓸만한 것들 보여줄 수 있을까?"

띠링!

곧 팍스가 목록을 띄워주었다.

픽킹 스테이션에서 모니터로 보던 것과 똑같은 화면.

상품 페이지를 '높은 가격순'으로 설정했다.

모르긴 몰라도 비싼 게 성능도 좋겠지.

개중에 고른 것은 검정과 녹색이 섞인 손잡이에, 날이 은색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정글도였다.

날의 뒷면은 나무를 자를 수 있도록 톱니가 나 있었다.

[마린포스 쿠크리 정글도 40cm, 가격은 211,120원입니다.]

[출하를 원하시면 '출하'라고 말씀해주세요.]

"어디보자··· 그래, 출하."

위이잉!

눈 깜짝할 사이, 손끝에서 자그마한 포탈이 생겨났다.

출하는 즉시 이루어졌다.

그리곤,

슈우욱- 타앙!

순식간에 땅에 처박혔다.

어찌나 빨리 튀어나왔는지, 단검이 포장 박스를 뚫고 나온 수준이었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포장을 마저 뜯으며 투덜댔다.

"···뭐가 이렇게 빨라?"

[기본 설정된 출하 속도는 시속 60km입니다.]

[원하신다면 속도를 조절하실 수 있습니다.]

의외로 세부 설정이 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역으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혹시 이것보다 더 빠르게도 가능해?"

[현재로서는 최대 시속 75km까지만 가능합니다. 그 이상으로는 스킬을 강화하셔야 합니다.]

이번에도 강화 이야기가 나왔다.

"강화하는 방법은?"

[마석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역시 그런가."

시설의 유지 비용부터 스킬 강화까지.

두루 쓸 곳이 많은 마석이었다.

우선은 눈앞의 오크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푸욱!

오크의 흉부 중앙을 찔러넣었다.

길게 살을 찢어내자, 몸통 중심부에 박힌 마석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단검을 비스듬히 찔러 툭하고 꽂혀 있는 마석을 튕겨냈다.

"다시 하나 얻었네."

[센터 전력 비용으로 사용하시겠습니까?]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하루 동안은 시간이 있으니.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출하될 때 포장을 벗겨서 내보내 줄 수 있을까?"

팍스에게 날카로운 단검과 도끼를 들어 보였다.

방금 전만 해도 확인한 참이다.

내가 직접 던지는 것보다, 아공간의 '출하' 스킬을 이용해서 물건을 던지는 것이 훨씬 더 위력적이라는 것을.

나는 이 '출하' 스킬을 본격적인 공격 스킬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AI 팍스의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가능합니다. 주문 요청 사항에 기재해두겠습니다.]

나는 한술 더 떴다.

단검을 정면으로 세웠고, 도끼 또한 날이 비스듬히 앞을 향하도록 보여주었다.

"그리고 딱 이런 각도로, 이런 방향으로. 가능할까?"

[그것도 주문 요청 사항에 기재해 두겠습니다.]

"좋아."

준비는 끝났다.

물류센터 주변은 쥐 죽은 듯 한적했다.

위이이이-

전기 자전거의 부드러운 구동음을 들으며, 근처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사라진 물류센터로부터 200여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적당한 위치에 도착한 나는 큼지막한 느티나무를 앞에 서서, 조금 전의 정글도를 떠올렸다.

출하 속도를 최대 속도인 시속 75km로 맞춰둔 상태였다.

그리고 외쳤다.

"출하."

슈우우우욱!

날카롭게 세워진 칼날이 쏘아졌고,

파악!

느티나무 한 가운데에 틀어박혔다.

얼추 보기에도 꽤나 깊게 들어갔다.

타앙!

잠시 후에 쏘아낸 도끼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게 때문인지, 칼날보다 한층 더 파괴력이 컸다.

여러모로,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30초에 한 번씩 도끼나 단검을 미사일처럼 발사할 수 있는 아공간.

이제 그게 내 무기였다.

자전거에 올라, 지도책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멀찍이, 나무가 흔들리며 푸드득 새들이 날아올랐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비명 소리?"

서둘러 페달을 밟았다.

***

"허억... 헉"

회색 직원복을 입은 두 남자가 산길을 질주했다.

마찬가지로, 두 마리의 오크가 그들을 쫓고 있었다.

"젠장···! 젠장···!"

그 중 한명인 이용수.

그는 입에선 거품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지금으로부터 3일 전이었다.

멸망은 하루아침에 벌어졌다.

돌연 TV에서 긴급 속보가 날아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

혼비백산하는 사람들을 찍은 화면, 인파에 깔려 검게 물들어간 화면, 괴물들에 의해 피칠갑이 된 화면까지.

멸망은 모든 사람에게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는 그게 전부였다.

TV, 라디오, 인터넷 등의 통신이 일제히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전쟁이 나더라도 버틴다고 하는 것이 통신사와 방송국이다.

이용수는 작금의 상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간간이 무장한 군인들을 보았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전해졌다.

그들이 하나같이 아스팔트에 갈려 죽어있었다는 소식도.

세계의 운명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생존이 제 1의 원칙이 되었던, 역사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

문명은 그렇게, 한순간에 폐허로 뒤집어졌다.

이용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주어진 것은 멸망뿐만이 아니었다.

선택받은 일부 사람들은 불현듯 이능과도 같은 능력을 각성했으니까.

이용수 또한 운 좋게 각성자가 되었지만, 아쉽게도 오크를 처치할만한 능력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멸망 앞에서, 그는 무력한 개미 한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애타게 전력을 다해 뛰었으나,

"제발··· 제발···"

거대한 그림자는 그보다 한참이나 더 빨랐다.

"···"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본 것은,

"······!"

절망이었다.

거대한 오크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스르륵.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미 한계를 몇 차례나 지나온 다리였다.

"···"

이용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담담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파아악!

소리가 들렸다.

"···어?"

터진 것은 자신의 머리가 아니었다.

털썩, 되레 쓰러진 것은 자신을 쫓고 있던 흉악한 오크.

놈의 머리에는 검은색 도끼가 꽂혀 있었다.

장작을 팰 때 쓰는 캠핑용 도끼에 불과했지만, 정작 이용수를 놀라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머리가 아예 터져버렸잖아?'

도끼가 꽂히다 못해 오크의 두개골을 박살 내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10여미터 멀치에서 손을 거두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영락없이 투척을 마친 자세였다.

이용수가 히끅 입을 다물었다.

'무슨 힘이···?'

이용수는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쫓기던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고, 오크 또한 한 마리가 아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반대쪽에서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는 동료 최병철이 보였다.

그의 뒤를 오크 한 마리가 바짝 뒤쫓고 있었다.

"···최 씨!"

발을 동동 구르던 찰나, 도끼를 던진 사내가 다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용수는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있잖아?'

무슨 묘기라도 부리는 것일까, 자전거를 타며 도끼를 던진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이용수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를 따라갔지만,

'···안 보여.'

나무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타난 사내가 최병철을 구해주기를 애타게 기도하는 수 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가 두 손을 모았고,

파악!

그 기도는 통했다.

오래지 않아 동료 최씨를 쫓던 오크의 머리통이 터져나갔으니까.

"대체······"

사내는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

푸욱!

오크의 시체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뭐가 됐든 일단은 마석부터 챙겨야 했다.

아까 챙긴 것까지 해서 두 개.

아공간 포탈 앞에서 챙긴 것까지 하면 그새 세 개를 모았다.

일단 눈에 보이기에 구해준 것도 있었지만, 나로서도 정보가 필요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왜 이런 괴물들이 돌아다니는지.

물류센터에 3일간 갇혀 있던 나보다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기 바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더군다나, 뭔가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군인이신가 봅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평범한 육군은 아니신 듯한데, 혹시 특수부대 그런 겁니까? 어떻게 자전거를 타면서 도끼를 그렇게···"

그는 내가 입고 있는 전투조끼를 보고 있었다.

내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아, 역시!"

사내의 눈빛이 한층 더 빛났다.

아니 진짜 아닌데.

"정말이지 천운이로군요. 이 근방에 사람이라곤 저희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두 분이 전부인가요?"

아무리 주택가가 아니라지만, 내려다보이는 물류단지에는 극도로 삭막했다.

이용수와 최병철, 두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E동에 사람들이 더 모여 있습니다. 열댓명 정도인데··· 다 같이 고립이 됐거든요."

"고립이요?"

이용수가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예,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원최 이곳 물류단지가 동쪽, 북쪽이 막혀 있는 구조인데··· 지금 아래 영동고속도로까지 반파가 됐거든요. 저희도 지금 차가 다닐 만한 다른 루트가 없는지 찾아보던 중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

그건 나로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렴 자전거로 강남까지 가는 건 쉽지 않을 테니.

이용수가 제안했다.

"일단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간단한 요깃거리 정도는 챙겨드릴 수 있을 겁니다."

마다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요깃거리 같은 건 필요 없었지만, 아무쪼록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니.

대강 주변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러시죠."

지난 3일.

갇혀 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4. 물류단지의 기러기들 (1)

"저희 왔습니다!"

불 꺼진 물류창고의 어두운 복도.

이용수와 최병철이 손을 들고 앞장섰다.

틱!

우리를 향해 강렬한 손전등 불빛이 쏘아졌다.

가만 보니 멀찍이 서너 명 정도가 통로를 지키고 있었다.

대장 격 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얼른 들어와. 별일 없었어?"

"별일 있었죠. 아휴, 죽다 살아났습니다."

"뭐? 어디 안 다쳤어? 잠깐, 이분은···?"

그제야 나를 발견한 사내가 물었다.

그들은 모두 식칼이 고정된 기다란 쇠막대를 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죽은 오크 시체 두어 구가 복도 구석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이용수가 나를 소개했다.

"이분이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동안은 팍스 풀필 쪽에 계셨다고 하네요."

"뭐? ···팍스면 C동 아니야? 아까 아침에 건물째로 사라진?"

이들도 목격한 모양이었다.

내 아공간에 담긴 C동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을.

나름 보답을 하려는 것일까, 이용수가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굉장히 강하신 분입니다. 오크 두 마리를 혼자 처치하시더라고요. 성격도 꽤 괜찮으시고···"

"아니··· 두 마리를 혼자서?"

문지기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원래대로라면 오크를 잡기 위해 무기를 든 장정 두엇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복도에 쓰러져 있는 오크들의 사체만 해도 온몸 이곳저곳에 자상이 가득했으니까.

다대일로 싸운 흔적이었다.

이용수가 소개한 화려한 이력 덕분인지, 문지기의 태도가 한층 더 공손해졌다.

"이것 참··· 어서 들어가세요. 용수가 안내해줄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문지기와 악수를 나눈 나는 이용수를 따라 E동 물류센터 사무실로 들어갔다.

'센터장실'로 표기된 방에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이용수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얼추 상황을 이해한 남자가 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큰 일을 해주셨군요. 선생님께서 없었다면 이 친구들이 어찌 되었을지··· 정말이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그가 서랍에서 작은 페트병 하나를 꺼내주었다.

500ml짜리 생수였다.

"드시죠. 다행히 배송 차량이 남아 있었거든요··· 덕분에 식수는 제법 넉넉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텅텅.

조끼에 매달린 수통을 두드렸다.

아무리 필수 자원이라지만, 어차피 아공간에 가면 무한히 얻을 수 있는 게 생수였다.

이들이 넉넉하다고 해봤자 내가 볼 땐 벼룩의 간에 지나지 않았다.

사내가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대현택배 군포 터미널 센터장 이진목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김정겸이라고 합니다."

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그나저나, 지금 고립된 상황이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맞습니다. 차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알아보고 있는데··· 위쪽으로는 골프장이 막고 있고 동쪽도 컨테이너들 때문에 차로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아래 영동 고속도로로는 길이 무너진 상황이고요."

"그럼 서쪽으로는요?"

나머지 한 곳은 내가 잘 아는 길이었다.

시내로 이어지는 서쪽.

내가 버스로 출퇴근하던 방향이었으니까.

"괴물들이 길목을 완전히 막고 있습니다. 오크라면 어떻게 싸워보기라도 하겠는데··· 무슨 괴조(怪鳥) 같은 게 날아다니는 통에···"

"괴조라고요?"

"젊은 사람들은 와이번이라고 부르더군요. 어찌나 재빠르고 힘도 좋은지··· 다행히 이곳 물류단지 터널 안쪽까지는 따라오지 않더군요."

오크부터 와이번까지.

완전히 판타지가 되어버린 세상이었다.

내가 물었다.

"굳이 차도를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단순히 여기를 벗어나는 거라면··· 사방으로 길은 많을 텐데요."

컨테이너 사이로 걸어도 되고, 여차하면 산길을 통해 인근 주택가로 넘어갈 수도 있다.

차만 못 다닐 뿐이지, 도보라면 사방으로 뚫려 있는 게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들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물이나 식량을 가지고 나가야 하니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타지에 가족이 있는 택배 기사들입니다. 가족들 생각에 위험을 무릅쓰고 물류센터로 들어온 거였는데··· 저 와이번들 때문에 고립된 상황입니다."

센터장 이진목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누라랑 애들이랑 집에 있을 걸 그랬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내일 밤에는 강행돌파를 해볼 작정입니다. 물론 위험하겠지만··· 이렇게 물류단지에 갇혀 있다간 바깥에 있을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이판사판입니다. 트럭마다 짐도 다 실어 두었고요."

창문으로 내려다본 출하장에는 십수 대의 배송 트럭들이 일제히 도열해 있었다.

이진목이 아차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피곤하실 텐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내려가서 쉬시죠. 식사도 좀 하시고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해주신 것에 비하면야···"

인사를 마친 나는 이용수와 함께 센터장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나를 휴게실로 안내하는 사이, 팍스에게 물었다.

"팍스, 혹시 아공간에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들어갈 수 있어?"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단, 아공간의 레벨을 올리면 가능합니다.]

"레벨은 어떻게 올리는데?"

[마석이 필요합니다.]

[레벨 2까지는 100개가 소모됩니다.]

"에이, 집어쳐."

아득한 숫자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택도 없었다.

당장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중에 가족들을 만난다면 안전히 아공간에 넣어둘 수 있을 터다.

직원 휴게실에 도착하자, 비좁은 방 안에 얼기설기 몸을 뉘인 사람들이 보였다.

이불 몇 개를 이리저리 깔아두었는데, 딱 보기에도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다.

이용수가 내게 말했다.

"구석 자리를 비워뒀습니다. 들어가서 쉬시죠. 피곤하시면 잠시 눈 붙이셔도 좋고요."

"아뇨,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는 돌연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이용수가 따라 나왔다.

"···자리가 너무 누추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저 정도면 호텔이죠. 그보다···"

"그보다요?"

"서쪽 터널을 한번 보고 와야겠습니다."

***

부르릉!

빨간색 우체국 오토바이가 속도를 냈다.

우리 모두 큼지막한 헬멧을 썼고, 이용수가 핸들을 잡았다.

"저 혼자 가도 되는데···"

"어차피 저도 오늘 중으로 가볼 생각이었습니다. 내일 도로를 넘어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해야 하거든요."

오크에게 죽을 위험에 처했던 그였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또다시 정찰 임무를 자처하는 걸 보면, 상당한 정신력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와이번들이 터널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그 안에서 보는 거라면 안전할 겁니다."

"그렇군요."

내 계획은 와이번들에게 출하 스킬을 테스트해보는 것이었다.

무차별 강행 돌파를 선택한 이곳 물류단지 사람들과 달리, 나는 확실한 결과를 원했으니까.

이용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남 쪽으로 가실 계획이라고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

"아쉽지만 목적지가 겹치는 사람은 없겠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내일 제 차에 타시겠습니까? 인덕원까지는 태워드릴 수 있거든요."

"좋죠. 댁이 그쪽이신가요?"

인덕원.

서울로 오갈 때 종종 지나치던 곳이었다.

강남까지 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만해도 감지덕지였다.

이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 같은 딸내미가 기다리고 있죠. 무사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팔락.

그가 핸들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지갑을 펼쳐주었다.

신분증이 담겨 있어야 할 사진칸에는 딸과 아내가 찍힌 스티커사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끽해야 일곱 살은 되었을까.

토끼 머리띠를 한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그럴 겁니다."

나는 불확실한 긍정을 표했다.

진정 그러길 바랐으니까.

도중에 다른 괴물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점차 와이번들의 영역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부우웅-

이윽고, 검게 그늘진 터널로 진입했고,

"······"

이용수가 말없이 속력을 줄였다.

머지않아 터널의 끝에 다다랐을 때, 오토바이는 완전히 멈추어 섰다.

이 그늘 밖으로 나가는 순간 와이번이 우리를 덮칠 테니.

끼에에에에···

어디선가 놈들의 비틀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멀찍이 드러난 도로.

발톱에 구겨진 차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똥까지 싸제낀 것인지, 거꾸로 뒤집힌 차 한 대 위로 악취가 나는 흰색 오물이 뒤덮여 있었다.

이용수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노면에 쓰러진 차들 때문에 제대로 속도를 내긴 어렵겠군요. 잔인한 말이지만··· 많이들 죽기는 하겠습니다."

그가 거친 한숨을 내쉬었지만, 내가 반박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저벅저벅.

터널을 당당히 걸어 나갔다.

그런 나를 이용수가 만류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빨리 들어오세요!"

"안쪽에 계세요. 확인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아니, 확인은 무슨 확인을···!"

위잉-

등 뒤로는 아공간 포탈을 열어두었다.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이만한 안전장치 없이 나설 수는 없었다.

변화는 금세 찾아왔다.

끼에에에에!

울음소리와 함께,

쿵!

커다란 와이번 한 마리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코를 씰룩이는 것이 마치 '감히?'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감히는 니가 감히지, 이놈 시끼야. 출하."

쐐애액!

선빵필승.

다짜고짜 칼을 날렸고,

푸욱!

끼에에에에에!!

목에 칼이 꽂힌 놈이 미친 듯이 날개를 휘저었다.

머리를 노린 거였는데, 놈의 반응이 빨랐다.

펄럭!

놈이 날개를 펼치자, 주변으로 폭풍 같은 바람이 일었다.

까아아악!

날아든 녀석이 내게 발톱을 휘둘렀지만, 

[외부의 존재가 입장을 시도합니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파지직!

나는 이미 아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놈의 날카로운 발톱은 포탈의 벽을 단 한치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그렇게, 어느덧 30초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위험을 감지한 놈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목에 꽂힌 칼날이 거슬리는지 제대로 비행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나 또한 고전했다.

상공 십수 미터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놈을 향해 30초마다 칼이나 도끼를 쏘아댔지만···

쐐애액!

휘익!

날개 주변으로 아쉽게 빗나갔다.

'···오크보다 훨씬 맞추기가 어려워.'

몸이 두꺼운 오크와 달리, 와이번은 널찍한 날개를 제외하면 온몸이 얇고 유연했다.

하지만 호전성만큼 오크 못지않았다.

끼에에엑!

놈이 제 발로 내게 달려들어 준 덕에···

파악!

도끼로 놈의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툭!

와이번의 머리가 길가에 처박혔고,

푸드득.

뱀처럼 잘린 기다란 목이 철썩 아스팔트를 때렸다.

그 끝에서 철철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놈의 최후를 확인하자마자 곧장 터널 안으로 들어왔다.

끼에에에에에!

죽은 와이번 주변으로 몇 마리의 와이번들이 모여들었다.

놈들은 나를 한껏 노려보았지만, 다행히 비좁은 터널 안쪽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오토바이로 다가가, 이용수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가시죠."

"아니, 어떻게···"

그가 기함할 듯 숨을 집어삼켰다.

와이번을 잡아버린 내가 여간 놀라운 눈치였다.

심지어 특수부대식의 투척술이 아닌, 아공간 능력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가 얼빵한 표정을 지으며, 시동을 켰다.

나는 품에서 마석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괴물들을 죽이면 이런 마석이 나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모아두고 있고요."

"잘 됐군요. 혹시 몇 개나 될까요?"

"대여섯 개 정도 될 것 같군요. 저희가 지금까지 처치한 오크 수가 그 정도 될 테니···"

부르르 오토바이를 모는 그에게, 내가 제안했다.

"여러분들의 마석을 제게 몰아주시죠. 길을 뚫어드리겠습니다."

5. 물류단지의 기러기들 (2)

"저희가 가지고 있는 마석을요?"

이용수가 되물었다.

"어려울까요?"

"아뇨, 길을 뚫어주신다는데 그깟 마석이 대수일까요. 모두 동의할 겁니다."

거래의 기본은 신용이다.

상대가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눈앞에서 와이번을 사냥한 덕일까, 이용수는 내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는 모양새였다.

사실 좀 버겁긴 했다.

아공간에서 30초마다 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지만, 그 정도로 예닐곱 마리나 되는 와이번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석만 있다면, 출하 스킬을 강화할 수 있어.'

무기를 더 빠르게, 여러 번 던질 수 있을 터.

30초 제한만 줄여본다면 와이번 놈들이 달려드는 족족 칼빵을 먹여줄 자신이 있었다.

***

그렇게 물류단지 E동으로 향하던 길.

이용수는 쉽게 수락했지만, 센터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다시 설득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정작 E동에 도착했을 땐, 그보다 시급한 일이 있었다.

입구 쪽으로 우글거리는 초록색 형상.

이용수가 외쳤다.

"···오크입니다!"

크와아아악!

다섯 마리의 오크 무리가 E동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이용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 마리씩 상대하기도 벅찬 오크다.

저렇게 여러 마리가 한 번에 밀려든다면 속수무책으로 뚫릴 게 분명했다.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갔을 즈음.

'출하.'

휘리릭!

빠르게 도끼 한 자루를 발사했다.

퀘엑!

빙글빙글 회전한 도끼날이 오크의 목에 처박혔다.

꿀렁꿀렁 목을 부여잡던 녀석은 곧 눈을 뒤집고 쿵하니 쓰러져 버렸다.

'우선은 한 놈.'

E동에 도착하자마자 추가로 한 자루를 더 소환했다.

도끼는 빠르게 날아갔지만···

퍽!

아쉽게 옆구리 쪽으로 빗맞았다.

쿠에에!

격분한 놈의 반격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위잉!

아예 놈의 면전에 포탈을 열어버렸다.

파지직!

투명한 벽에 의해 놈의 공격이 가로막혔다.

이제 보니, 일종의 방패처럼도 활용이 가능한 아공간 포탈이었다.

이번에는 조끼에 결속된 도끼를 꺼내 들었고,

촤악!

곧장 놈의 목에 꽂아 넣었다.

녀석이 털썩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아공간을 들락날락하며 놈들을 교란했고,

쿠왁!

케에엑!

칵!

남은 세 놈도 비슷하게 생을 마감했다.

쩔그럭!

바닥에 피 묻은 도끼를 떨구자, 통로 안쪽으로 나를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E동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듯했다.

.

.

.

통로 안쪽에서 센터장이 달려 나왔다.

"······"

그는 입을 쩍 벌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여지없이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얼마간 숨을 고르던 센터장이 떠듬떠듬 말했다.

"이번엔 저희까지 목숨을 빚졌군요. 이걸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용수에게 눈빛을 보내자, 그가 나를 대신해 말해주었다.

"센터장 님, 안전하게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와이번들이 사라지기라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센터장이 반색했지만, 이용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차근차근 내가 제안했던 거래 조건을 이야기해주었다.

"여기 정겸 씨 말씀으로는···"

내가 와이번들을 처치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다량의 마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까지.

한차례 무력시범을 보여준 덕일까.

센터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동의함세. 우리도 각성자가 몇 있기는 하지만··· 여기 정겸 씨만큼 효율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하루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일 아닌가?"

센터장이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모은 마석은 여섯 개야. 모두 여기 김정겸 씨에게 넘겨드리려 하는데··· 혹시 다른 의견 있나?"

"없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개중 한 사람이 부연했다.

"오늘 확실히 느꼈습니다. 여기 박혀있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요. 마석이고 자시고, 길만 열어주신다면 뭐든지 돕겠습니다."

이 또한 거한 긍정이었다.

"좋습니다."

나 또한 마석을 얻으려는 계산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물자들을 한 아름 챙겨 가족들에게 돌아가겠다는 목표.

이들은 단지 그것을 위해 죽음까지 무릅쓰고 물류센터에 찾아든 일종의 기러기 아빠들이었다.

그들이 각자 트럭을 몰고 집으로 향하게 되길 바랐다.

그 목표만큼은 나 또한 다르지 않았으니.

'뭐···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니까.'

어차피 나도 차를 타고 나가려면 서쪽 터널을 지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센터장이 마석 여섯 개를 꺼내주었다.

방금 이곳을 급습해 온 오크 다섯 마리.

놈들의 시체에서도 빼먹지 않고 마석을 채취했다.

잘그락.

원래 가지고 있던 세 개까지 합하니, 총 열네 개의 마석이 모였다.

센터장이 내게 물었다.

"그럼 출발은 언제로 할까요?"

"내일 점심쯤 출발하죠.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그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와이번들과의 싸움에서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워진다.

시간이 급한 건 사실이지만, 불필요한 위험까지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센터장이 내 말을 받았다.

"그럼 밤 중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쳐두겠습니다."

"예, 이따 준비가 끝나는 대로 한 번 더 이야기 나누시죠."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곧장 아공간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었으니까.

***

이제는 익숙한 이곳, 풀필먼트 센터에 들어왔다.

나는 팍스에게 물었다.

"출하 스킬 관련해서, 강화할 수 있는 항목은 어떤 것들이 있어?"

[목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띠링!

이윽고 팍스가 띄워준 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표시되어 있었다.

----[강화 가능 항목]----

[비용 1]

◈ 출하 소요 시간 [30초] [+]

◈ 출하 사정 거리 [10m] [+]

◈ 출하 속도 [최대 75km/h] [+]

-------------------------

"생각보단 단촐하네. 혹시 더 있는 건 아니지?"

[강화는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마석을 사용해 확장 능력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목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띠링!

----[개방 가능 항목]----

[비용 10] 

◈ 동시 출하

-최대 두 개의 상품을 동시에 출하할 수 있습니다.

◈ 정밀 배송

-원하는 타겟을 지정하면, 출하 위치가 자동으로 보정됩니다.

◈ 자동 출하

-지정된 상품을 자동으로 출하합니다. 시간 간격을 임의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안 물어보면 큰일 날 뻔했구나···"

강화가 출하 스킬의 스탯을 강화해주는 느낌이라면, '개방'은 아예 심화된 능력을 부여해주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비용 또한 단순한 스탯 강화보다 10배는 비쌌다.

하나에 마석 10개라니.

하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두 개를 동시에 출하한다고? 엄청 좋은데?"

도끼가 두 개, 단검도 두 개.

라는 능력은 딱 보기에도 전투력이 두 배가 되는 능력이었다.

도 그에 못지않았다.

"위치 자동 보정이라···"

타겟 지정과 위치 보정.

마치 추적 미사일을 연상시키는 낱말 덕일까?

몇 시간 전, 와이번을 상대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긴··· 맞추기 더럽게 어려웠어."

공중을 이리저리 날뛰는 놈들이었다.

당장 내일 그놈들에게 칼날을 발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도 구미가 당겼지만, 당장 급한 건 바로 이 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팍스에게 말했다.

". 이거부터 개방해줘."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석 10개가 소진됩니다.]

"그래."

즉시 마석 열 개를 세어 내밀었다.

적지 않은 비용이지만, 효과를 톡톡히 할 게 분명했다.

[마석 10개 받았습니다.]

지난번처럼, 손에 들려있던 마석 10개가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 네 개가 남아 있었다.

다음으로 내가 눈을 돌린 것은 출하 스킬의 '강화'였다.

◈ 출하 소요 시간 [30초] [+]

◈ 출하 사정 거리 [10m] [+]

◈ 출하 속도 [최대 75km/h] [+]

어떤 스탯을 강화할지는 이미 결정해둔 터였다.

나는 마석 세 개를 내밀었다.

"세 개. 출하 소요 시간에 사용해줘."

[사정 거리에는 사용하지 않으시고요?]

팍스가 되물었다.

고성능 AI답게, 공중을 누비는 와이번과의 싸움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확실히, 녀석의 말처럼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다면 공격이 먹히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따로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일단 출하 소요 시간에 써줘."

[알겠습니다.]

[마석 3개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마석이 사라졌다.

출하 소요 시간은···

[30초] [+]

···

[20초] [+]

[15초] [+]

금세 15초까지 떨어졌다.

마석 하나당 5초라니.

이것도 효율이 꽤나 좋았다.

아예 0초까지 줄여서 소요시간 자체를 없앨 수도 있을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불가합니다.]

[아공간 레벨 1에서는 최대 5초까지만 출하 소요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단박에 거절당했다.

"아무렴, 세상일이 그리 쉬울 수는 없지···"

마지막 하나 남은 마석은 이곳 풀필먼트 센터의 전력 유지에 투자했다.

마석이 스르륵 사라졌고, 

[마석 1개 받았습니다.]

[마석 1개를 시설 전력에 사용합니다]

[전력 가동 중단까지, 33시간 39분 11초···]

시설의 유지 기간이 늘어났다.

이로써 마석은 0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마지막으로. 팍스에게 물었다.

"프레시 센터가 3층이었지?"

[그렇습니다.]

"슬슬 저녁때니까."

3층에 도착한 나는 프레시 센터 전용 픽킹 스테이션에서 이런저런 품목들을 주문했다.

밖에서 출하 스킬을 사용해도 될 테지만··· 매번 15초씩 기다리기엔 그 종류가 너무 많았으니까.

***

"자자, 받아 가세요."

저녁 당번을 맡은 최병철이 사람들에게 초코바를 나누어주었다.

정겸이 있던 풀필먼트 센터와 달리, 이곳 대현 물류센터는 도착한 물건을 분류해서 보내는 일반적인 물류센터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널려 있는 박스들은 그야말로 랜덤박스였다.

물량은 많았지만, 뜯어서 필요한 물품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진공포장된 레토르트 해장국 같은 것들도 더러 나오기는 했지만, 냄새로 인해 몬스터를 불러들일 위험이 있어 매번 과자나 생라면, 장사천하 소시지 같은 것들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한창 초코바를 나눠주던 중, 이용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겸 씨는?"

"아까부터 안 보이시던데. 아직 그 아공간이라는 곳에 들어가 계시는 거 아니야?"

"아까 나오시는 걸 본 것 같은데··· 초코바 하나 줘봐. 내가 가져다드릴게."

"그래, 기왕에 한 세 개 가져다드려."

이용수는 초코바를 든 채, 물류창고를 돌았다.

"정겸 씨! 여기 계세요?"

"저 여기 있습니다. 잠시 좀 도와주시죠."

이제 보니 정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용수는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공간에서 수십 종류의 물건을 꺼내놓고 있었으니까.

이용수가 쩍 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 이게 다 뭡니까? "

샤인머스킷부터 딸기, 수박과 멜론.

도넛을 비롯한 각종 디저트 빵류와 훈제란, 마지막으로 얼음 바스켓에 담긴 탄산음료까지.

힘이 날 만한 음식들이 곱게 포장된 채, 가지런히 도열해 있었다.

E동 물류창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음식들.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에게 정겸이 대답했다.

"가급적 냄새 안 나는 것들로 골라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요 며칠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거든요. 일종의 전야제 셈 치고··· 다 같이 들면 어떨까 해서요."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을 빠져나갈 참이었다.

물류단지의 기러기들이 다 같이 보낼 마지막 밤이 될 터였다.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음식에, 물류센터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띠었다.

몇몇이 바깥 통로를 지키기 위해 교대했고, 그 사이 다 같이 과일을 깎고, 빵을 씹으며, 참으로 오래간만에 머리가 얼얼해질 만큼 차가운 콜라를 들이켰다.

"캬아-!"

모두가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고 있을 즈음, 90만원짜리 구스다운 침낭 스무 개를 휴게실에 깔아두었을 때는···

"정겸씨···!"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6. 물류단지의 기러기들 (3)

불 꺼진 물류센터의 휴게실.

누런 손전등 불빛이 지도를 비추었다.

"보건소가 나오는 사거리까지만 가면 됩니다. 거기서 다 같이 흩어지는 거지요."

우리는 대략적인 탈출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와이번들의 영역을 벗어나더라도, 이후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다음은 각자의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내일 오후, 새하얀 열 일곱 대의 택배 트럭은 한 줄로 검은 아스팔트를 누빌 것이며, 어느 시점에 다다라 각자의 둥지로 흩어지리라.

곱게 포장된 택배상자를 입에 물고.

하지만 적어도, 와이번들을 소탕하는 것만큼은 내 역할이었다.

애당초 그것이 약속이었으니.

이용수가 말했다.

"예상되는 숫자는 여덟마리 전후입니다. 처음 놈들을 맞닥뜨렸을 때에 비해 딱히 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아니, 반대로 아까 정겸 씨 덕에 한 마리 줄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다행히 오크처럼 개체수가 많은 놈들은 아닌 듯했다.

물론 그 수가 적다하여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이미 깨져본 모양인지, 개중 한 명이 어려움을 토로했다.

"영악한 놈들입니다.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려고 들질 않아요."

듣자 하니, 이곳 물류센터 사람들도 한 차례 와이번들을 소탕하러 나섰다고 했다.

무기를 들고 터널에 숨어 놈들을 유인했다고.

하지만 놈들은 오로지 터널 밖으로 나설 때만 공격해왔다고 했다.

자신들이 유리한 위치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터널 밖에서 싸우는 수 밖엔 없군요."

그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물론 나는 괜찮다.

위험한 순간이 있더라도 아공간에 숨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터널이든 아공간이든, 딜레마는 여전했다.

내가 안전한 싸움을 고집한다면 놈들은 또한 나와의 전투를 피할 공산이 컸다.

그렇게 되면 꼬리를 물고 올 다른 트럭들이 위험해진다.

정리하자면, 정면돌파가 필요했다.

내가 말했다.

"제가 트럭 뒤에 타서 놈들을 요격하겠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한 분은 제가 탈 차량의 운전을 맡아주세요."

E동 물류센터에는 작업용으로 사용하는 1톤 카고 트럭이 한 대 있었다.

배송트럭이 아닌 덕에 뒤쪽 짐칸이 훤히 열려 있었다.

이용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가장 위험한 역할이었다.

나야 아공간에 숨어버리면 된다지만, 일이 틀어지면 운전수는 고스란히 저승행이었으니까.

그래도 이용수는 망설임이 없었다.

"굼벵이 앞에 주름 잡는 격이라 말씀은 못 드렸지만··· 사실 저도 각성자입니다. 라는 능력을 얻었죠."

"베스트 드라이버요···?"

"탈 것을 운전할 때 동체시력과 반응속도, 숙련도를 극도로 키워주는 능력입니다. 아직 레벨이 낮아 적용되는 건 자동차와 이륜차뿐이지만···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장애물이 많은 서쪽 터널이다.

능숙한 운전실력이 받쳐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 될 터.

"그거 잘 됐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끝으로, 이곳 물류센터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저물어갔다.

***

이른 새벽, 나는 하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아암···"

밤 사이, 습격이 있었다.

새벽 중으로 한 마리씩, 총 두 마리의 오크가 찾아들었고, 보초를 서던 다른 직원들 덕분에 타이밍 좋게 나서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통로에는 간밤에 죽은 두 놈의 사체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슥슥.

칼로 놈들의 심장을 후벼 파내며, 황량한 물류단지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마지막 선물인가?"

내 입장에서는 그랬다.

지금 출하 스킬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15초.

마석 두 개를 얻은 덕에 5초까지 줄였다.

아공간 1레벨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5초] (강화 한계치에 다다랐습니다.)

나는 트럭으로 향했다.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도장이 말끔한 녀석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오늘이 마지막일 듯했다.

와이번들의 공격이 거셀 테니.

"웃차."

차량의 짐칸에 올라섰고, 그 자리에서 포탈을 열었다.

위잉-

아른거리는 푸른색 포탈을 보며, 운전석에 탄 이용수에게 말했다.

"한번 움직여보시죠."

차량이 앞뒤로 몇미터씩 움직였다.

다행히 포탈은 공중에 머무르는 일 없이, 트럭을 따라 함께 움직였다.

짐칸에 포탈을 싣고 다니는 격이었다.

훌쩍 차에서 뛰어내린 나는 팍스를 불러냈다.

"박카스 세 박스만 꺼내줘."

[동아제약 박카스 F, 120ml, 30개, 가격은 20,400원입니다.]

그러곤 마무리 작업을 하는 물류단지 사람들에게 다가가 박카스 한 병씩을 돌렸다.

"이야- 감사합니다!"

누구는 때 묻은 목장갑으로, 또 누구는 굳은살 가득한 못생긴 손을 비비며 박카스를 집어 갔다.

목에 둘러맨 수건을 보고 있자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물류센터의 풍경이었다.

불현듯 우리를 덮친 멸망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드르륵!

알루미늄 뚜껑이 시원하게 돌았고,

꿀꺽꿀꺽.

"캬아!"

달달한 카페인이 새벽을 적셨다.

모자란 듯 모자라지 않은, 120ml의 마법이었다.

***

코를 찌를듯한 기름 냄새.

우우웅-

참으로 오랜만에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줄처럼 이어지는 열일곱 대의 하얀 배송트럭.

선두는 푸른색 포터 트럭이었다.

바로 내가 타고 있는.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서쪽 터널에 도착했다.

조수석 대신 짐칸에 오른 나는 이용수에게 미리 당부했다.

"나머지 차량들은 모두 터널에 대기할 겁니다. 좋게 풀린다면 다행이지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차를 돌려 이곳 터널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정겸 씨의 포탈, 제가 안전하게 배송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우리는 그렇게 인사를 마쳤고, 나는 짐칸에 올라가 운전석 방향으로 나 있는 창살을 힘주어 붙잡았다.

딱 달라붙는 3M 장갑을 미리 준비해둔 터였다.

운전이 거칠어질 수 있으니.

휙.

백미러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고, 그렇게 트럭은 서서히 터널의 그늘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펄럭.

팔락.

와이번들이 나타났고,

시작은 탐색전이었다.

동료의 죽음을 한 차례 봤기 때문일까, 놈들은 섣불리 공격해오지 않았다.

차량은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였고, 주변을 날고 있던 와이번들이 십수 미터 떨어진 곳에 하나둘 안착했다.

차륵.

놈들이 뱀 같은 눈동자 주위로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전날 개방한 새로운 능력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바로, 능력을.

띠띠띠···

시야에 붉은색 십자선이 그려졌다.

저격수들이 사용하는 조준경 같은 느낌이었다.

'조준경처럼 확대가 되거나 하지는 않지만···'

대신 다른 게 있었다.

와이번 한 마리를 향해 십자선을 가져다 대자, 실시간으로 계산된 목표물과의 거리가 시야 우측에 표시되었다.

[17m 46cm···]

[16m 71cm···]

[16m···]

팍스가 센스 좋게 덧붙여주었다.

[현재 최대 출하 사정거리는 10m입니다.]

내가 속으로 물었다.

'거리를 벗어나면 어떻게 되지?'

[그 자리에 멈추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단, 속도가 현저히 저하됩니다.]

['출하 속도'는 애당초 물리법칙에 의해 발생한 속도 에너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위력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

결국 놈들과의 거리를 좁혀야만 했다.

그때였다.

끼에에엑!

탐색전은 이제 끝이라는 듯, 나와 마주 보던 와이번 한 마리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놈이 유선형의 몸짓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나를 향해 활강했다.

띠띠띠··· 

[11m 52cm···]

[9m 02cm···]

[6m···]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고,

카아아악!

놈이 입을 쩍하니 벌렸다.

나도 서둘러 대응했다.

'출하.'

[움직이는 타겟입니다.]

[출하 위치가 실시간으로 보정됩니다.]

[보정값 계산 완료]

몇 개의 메시지가 순식간에 지나갔고···

파학!

눈앞에서 와이번의 머리가 날아갔다.

끼이이이이익!

차를 몰던 이용수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목 잘린 와이번의 사체가 차를 향해 쓸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텅!

차체에 부딪힌 와이번의 사체가 충격을 잊지 못한 채 꿈틀거렸다.

나 또한 충격이었다.

'정밀배송··· 사기잖아?'

헤드샷, 원샷원킬.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단 한 발에 와이번의 목이 날아갔다.

까에에에에엑!

남은 와이번들이 동족의 죽음에 분개했다.

펄럭.

한 놈씩 공중에 체공하며 제비처럼 나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5초는 금세 지나갔다.

퍽!

철푸덕!

무려 여섯 배나 빨라진 속도.

정말이지 속이 다 시원했다.

팍!

투둑!

노면으로 머리 잘린 와이번들이 하나둘 툭하니 떨어졌다.

꼬리도, 날개도 아닌 머리.

일말의 고민도 없이 놈들의 죽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달칵.

이용수가 황망한 표정으로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휘이이-

물감처럼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베스트 드라이버인 그가 활약할 일은 없었다.

차량은 100여미터 가량을 저속으로 천천히 내달렸을 뿐.

이따금씩 핸들을 꺾어 날아드는 와이번의 사체를 피해냈던 것, 그게 전부였다.

툭.

나도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던졌다.

터널을 벗어날 때 송글 맺혔던 땀이 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사실···"

나도 이렇게 쉽게 끝날 줄은 몰랐다.

이용수가 다시 차를 몰았다.

전진 같은 후진으로 터널에 입성하자, 트럭에 타고 있던 물류단지 사람들이 하나둘 뛰쳐나왔다.

차는 긁힌 자국 하나 없이 깔끔했고, 그건 나와 이용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쓰러진 와이번들 사체 사이로, 쭉 뻗은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길을 되찾은 택배 기사들이 만세를 불렀다.

.

.

.

"자자, 얼마 안 남았다!"

차에서 쏟아져나온 물류단지 사람들 손에는 단검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당초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길목이 안전해졌다는 사실을 안 모두가 자처해서 마석 채취를 도왔다.

출하 스킬의 를 강화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도로의 양옆으로는 차음벽이나 이런저런 장애물이 놓여있었으니, 자칫 먼 거리에서 놈들을 공격했다간 사체를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대부분 10미터 이내에서 처리한 덕에, 사체까지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와이번의 심장에서는 마리당 세 개의 마석이 나왔다.

어제 잡은 녀석까지 총 여덟 마리의 와이번을 잡은 셈이었고, 총 스물네 개의 마석이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

괄목할만한 수입이었다.

물류단지 사람들이 하나둘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정겸 씨.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가족들을 만나게 됐어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부르릉-

그렇게, 배송트럭들이 하나둘 도로를 빠져나갔다.

말없이 그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

이용수가 내게 말했다.

"그럼··· 저희도 슬슬 갈까요?"

"그러시죠."

목적지는 인덕원.

그의 아내와 딸이 있는 곳이자,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차에 올랐고,

부릉!

시동을 걸었다.

"평소에는 30분이면 갑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며칠간 줄곧 고립되어 있었던 탓에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우리였다.

더욱이 인터넷도 사용할 수가 없었으니.

그래도···

"이상하게 불안하지가 않네요."

그가 말했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속을 든든히 채운 탑차 트럭.

그리고 재고 무한의 물류센터가 내 등에 매달려 있었으니.

7. 맹견과 담벼락 (1)

소리가 났다.

철컥!

드르륵! 탁!

위잉- 위잉!

베테랑 택배 기사 이용수씨께서 택배 탑차를 모는 소리였다.

직진, 커브, 급속 유턴과 드리프트를 비롯한 각종 곡예 운전까지.

그는 시선을 정면에 둔 채, 수동변속기를 게임기 조이스틱처럼 놀려댔다.

'이것이 베스트 드라이버의 힘인가.'

휘이이이!

차창 밖으로부터 세찬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전방에 보이는 오크 세 마리.

끼이이이이-!

이용수가 우로 꺾는 드리프트로 놈들의 주변을 돌았고,

슈우욱!

슉!

나는 5초 간격으로 도끼를 발사했다.

그야말로 액션 영화가 따로 없었다.

이런 식으로 잡은 괴물들만 벌써 일곱 마리.

즉시 내려 마석을 채취했다.

덜컹!

가속한 트럭이 방지턱을 밟고 튀어 올랐고, 크레바스처럼 갈라진 도로를 가뿐히 넘어갔다. 

멸망의 흔적은 비단 물류단지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도로 곳곳이 폭삭 주저앉았고, 쓰러진 빌딩이 대로변 사거리를 완전히 박살냈다.

이리저리 널려 있는 파괴의 흔적과 달리, 정작 사람들은 자취를 감췄다.

그럴 만 했다.

이제 이 거리의 주인은 괴물들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도로를 달리던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저건···"

시체였다.

물론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물류단지 구역을 떠나온 이래, 시체는 흔히 널려있던 것 중 하나였으니까.

괴물들에 의해 잘리고, 뜯어먹혀진 살갗들을 보고 있을 때면 내심 품고 있던 희망이 갈려 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지 모른다.

도로에 널린 시체들을 노면의 흰색 실선처럼 무시할 수 있게 된 것은.

하지만 이번만큼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군인들이로군요."

널브러진 디지털 군복의 틈새는 허전했다.

누군가는 과다출혈이 일었는지 창백한 얼굴로, 또 누군가는 몸통이 잘린 채로 단단히 졸라맨 방탄 헬멧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전역한 지 불과 두 달이다.

멸망의 순간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나도 저들 중 한명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감회를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엄청 많네요."

상당한 양의 시신들.

물론 군인들의 죽음 자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상상황에 시민들을 지키는 것 또한 군인의 역할이니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시체 수습도 아예 못 한 것 같은데···"

"···군에서도 감당이 안 되는 문제인가 봅니다."

이용수가 쓸쓸하게 되받았다.

죽은 전우의 시체를 챙길 여유조차 없다는 것.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꽤 의미심장했다.

더 이상 국가가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는 것.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으나, 탑차의 바퀴는 무심하게 굴렀다.

그렇게, 박살 난 군용 차량들 사이로 산처럼 쌓인 군인들의 시체를 지나쳤을 때.

우리는 인덕원으로 향하는 다리가 끊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이게 대체···"

이 사태의 원흉이 드글대고 있었다.

***

얼굴 양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송곳니.

갈퀴처럼 생긴 날카로운 발톱.

얼핏 보면 개처럼 생기기도 했지만, 털 없이 민둥민둥한 피부.

그 모습은 마치···

"···저글링?"

이용수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덧붙였다.

카아악!

연한 보랏빛을 띠는 살갗, 개떼와 같은 물량까지.

국민게임에서의 바로 그 저글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군인들과 끊겨 있는 다리를 보고 있자니, 얼추 그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군에서 직접 다리를 폭파한 모양이군요."

"그랬나 봅니다. 저런 놈들이 쏟아져 내려오면 그야말로 답이 없을 테니···"

이용수는 심통한 표정이었다.

바로 저 다리 너머에 그의 아내와 딸이 있었으니.

핸들을 덧잡는 손길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렸다.

"길은 많습니다. 분명 여기가 아니어도···"

하지만 아니었다.

강을 거슬러 오르고내리며 지나친 다리만 모두 아홉 곳이었다.

모두 폭발에 의해 끊어져, 단 한 개도 성한 것이 없었다.

서서히 어둑해지고 있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처음 건너려던 다리 근처로 거짓말처럼 되돌아왔을 때쯤.

내가 망연해하는 그를 안심시켰다.

"용수 씨, 가족들은 무사할 겁니다. 놈들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오크처럼 문을 부술 정도로 힘이 좋아 보이지는 않아요. 어디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다면 분명 안전할 겁니다."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걱정 마세요. 더 이상 늦지만 않으면 됩니다."

나는 그에게 한 곳을 가리켰다.

아까 눈여겨보았던, 폭발로 인해 무너지지 않은 다리.

단, 차로는 건널 수 없는 도보용 다리였다.

"진입 폭이 아슬아슬하긴 한데··· 용수 씨 운전 솜씨라면 지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리는 멀쩡했다.

흙마대를 가득 채운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을 뿐.

차폐가 쉽다 보니 군에서도 전술적인 용도로 남겨둔 모양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바리케이드 너머로 드글거리는 저글링이었다.

이용수가 물었다.

"하지만 다리를 건넌다 한들, 저 많은 놈들을 무슨 수로 뚫고 들어가죠? 아무리 정겸 씨의 능력이 있다지만··· 많아도 너무 많아요."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5초에 한 번 발사되는 출하 스킬로는 저 많은 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일단 차를 저기 바리케이드 앞까지 몰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후진으로요."

"후진이요?"

"네, 최대한 한쪽 벽에 딱 붙여주세요."

부르릉.

이용수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음을 다잡고 차를 몰았다.

이러나저러나 진입을 포기할 순 없었으니.

드르륵!

이러나저러나, 였다.

대단히 어려운 경로였음에도, 그는 핸들을 번갈아 꺾으며 차량 진입 방지용 말뚝을 교묘하게 피해 갔다.

덜컹!

차량의 후미가 다리 초입에 걸쳤고, 나의 주문대로 우측에 완전히 붙은 채 이동했다.

마침내 군에서 세워둔 바리케이드에 다다랐을 때, 차량의 왼쪽으로는 문이 겨우 열릴 만큼의 좁은 틈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비좁은 틈을 비집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나를 따라 조수석으로 넘어오는 이용수에게 말했다.

"이럴 때 쓸만한 게 하나 있더라고요."

차르륵.

나는 모아두었던 마석을 꺼내 보았다.

와이번들을 잡으며 모은 스물 네 개.

거기에 오면서 잡은 괴물들로부터 채취한 일곱을 더해 총 서른한 개가 모였다.

내가 팍스에게 말했다.

"랑 두 개 다 개방해 줘."

[도합 마석 20개가 소모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리고 출하 속도도 최대치까지 높여줘."

[알겠습니다. 추가로 마석 5개를 소모합니다.]

[최대 출하 속도가 75km/h에서 100km/h로 조정됩니다.]

[강화 및 능력 개방을 완료했습니다.]

스물다섯의 마석이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나는 그 길로 바리케이드에 다가갔다.

그리고 벽을 만들고 있는 흙마대를 하나씩 떼어내 강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첨벙!

마대자루가 물에 잠겼고, 그럴 때마다 벽은 한층 더 낮아졌다.

이용수가 황급하게 나를 만류했다.

"잠깐만요, 그 벽을 허물면 저글링들이···"

"당장은 완전히 트지 않을 겁니다."

내가 치운 것은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카가각!

카악!

벽이 서서히 낮아지는 것을 느낀 저글링들이 신이 나 발작했다.

마지막으로 두어개의 마대를 한 번에 치웠고, 그 틈새로 저글링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비집고 들어오려던 찰나.

깨행!

내가 발사한 도끼가 놈의 입에 처박혔다.

쓰러진 놈을 짓밟고, 곧 이어 다른 녀석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깨에헥!

2.5초 만에 발사된 도끼가 또다시 놈의 목숨을 끊었다.

생성된 두 개의 포탈에서, 각 5초마다 번갈아 가며 '자동'으로 도끼를 쏘아댔다.

심지어 시속 100킬로미터로 그 위력 또한 강화된 공격이었다.

나는 흙이 묻은 손을 훌훌 털어냈고, 비좁은 틈새로 이용수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깨앵!

칵!

그러던 중에도 끊임없는 저글링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내가 말했다.

"이렇게 개체수를 한번 줄여보죠."

입구막기.

저글링 잡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전략이었다.

***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밀려드는 저글링을 '자동'으로 사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빴다.

"···웃차."

좁은 틈 사이로 쌓인 저글링의 사체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꺼낸 사체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푹.

찌익-

가슴팍을 갈라내고, 마석을 꺼냈다.

그렇게 껍데기만 남은 사체를···

휙-

첨벙!

강으로 던졌다.

피로 물든 강에는 수면 위까지 저글링들의 사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용수와 역할을 나눴고, 동작도 점차 빨라지고 능숙해졌다.

깨행!

칵!

아공간에서 꺼내온 고무장갑은 어느덧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그 덕분일까, 벽 너머로 보이는 저글링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물론 이 일대 전체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차츰 길이 생겼다는 거였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전진했다.

군에서 세워둔 바리케이드를 완전히 치웠고, 탑차의 후미를 바리케이드 대용으로 썼다.

조금씩 후진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창 작업이 이어진 덕에, 이제 도끼가 먼저 죽은 사체에 가로막히는 일도 없어졌다.

별다른 조치 없이 두어도 알아서 저글링들이 죽어주는 상황.

완전한 '자동화' 공정이었다.

덕분에 여유가 생겼다.

위잉-

아공간 포탈을 열었다.

마석이고 자시고, 체력이 빠져 손가락 까닥하기가 힘들었다.

이용수에게 말했다.

"좀 쉬었다가 하시죠."

"아뇨, 쉬다 오십시오. 제가 작업해두고 있겠습니다."

그가 새빨간 눈으로 대답했다.

그는 이 고된 반복 작업과 가족들의 목숨을 저울질해가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어차피 저글링들은 자동출하가 잡아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에게 말했다.

"가족들한테 그러고 가시려고요?"

"아······"

그가 멋쩍은 듯, 자신의 행색을 살폈다.

저글링 피로 뒤덮인 옷이 축축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비린내 또한 진동했다.

아무리 '일하다 온 아빠'라지만, 애들 보여주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말 없이, 훌쩍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팍스에게 물었다.

"여기 뜨거운 물 나오나?"

[마석을 소모하면 가능합니다.]

[수도/가스 비용을 합쳐 24시간에 마석 1개가 소모됩니다.]

"···틀어줘. 전력은 얼마나 남았지?"

[약 7시간 정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럼 전력도. 각각 우선 이틀치씩 부탁해."

[마석 4개 받았습니다.]

이로써 전기/수도/가스라는 문명생활의 삼신기가 완성됐다.

세어보진 못했지만, 저글링들로부터 채취한 마석의 양이 꽤 쏠쏠했다.

뜨거운 물에 마석 하나쯤은 태워도 무방했다.

다음으로, 픽킹 스테이션으로 가서 몇 가지 상품을 주문했다.

[휴대용 물통 샤워기 15L 세트, 158,590 원입니다.]

[남성 복서 브리프 3종, 40,680 원입니다.]

[남성 반팔 카라티···]

직원 샤워실로 가 물통 샤워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았고, 나머지 물건들을 마저 챙겨 포탈 밖으로 나섰다.

이용수는 여전히 쉬지 않고 마석을 채취하고 있었다.

"받으세요. 옷은 차에 넣어둘 테니 입으시고요."

이용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샤워 물통을 받아들었다.

내가 말했다.

"각자 씻고 오죠."

다시 돌아온 풀필먼트 센터.

직원 샤워실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맞았다.

이용수도 데리고 왔다면 수고가 덜했겠으나, 아직은 나밖에 들어올 수 없었다.

쏴아아-

정수리를 타고 들어오는 뜨끈한 감각이 실로 아찔했다.

"미쳤다···"

샤워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주문하자마자 AGV 로봇이 옷을 가져다주니 이보다 편할 수가 없었다.

오늘의 교훈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동··· 최고야."

옷을 바꿔 입으니 몸도 새것이 된 것만 같았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전기포트에 생수를 끓였고, 육개장 사발면 두 개에 각각 끓는 물을 부어 가지고 나갔다.

이용수 또한 샤워를 마쳤는지 깨끗한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캐행!

캥!

다른 한쪽에서는 자동출하가 저글링을 잡아 죽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늦은 저녁 식사를 들었다.

물놀이라도 한 것처럼 온 몸이 싸늘했다.

촉촉하게 젖은 면발을 후후 불어 입안으로 가져다 넣었을 때.

"미쳤다···"

이용수가 외쳤다.

그의 입에서 구름 같은 입김이 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쳤을 즈음, 배경음 같던 저글링들의 비명이 멈추었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그 너머로는 뻥 뚫린 길목이 드러나 있었다.

텅!

텅!

2.5초마다 튀어나오는 캠핑 도끼가 애꿎은 바닥을 때렸다.

8. 맹견과 담벼락 (2)

부아앙!

트럭이 달렸고,

깨행!

달려들던 저글링이 차에 치여 운명을 달리했다.

지긋지긋하던 놈들의 물량을 줄여놓고 나니, 잡아내기가 한 결 수월했다.

애당초 하나하나의 전투력이 오크에 미치지 못하는 녀석들이었으니.

"···여기 3층입니다."

이용수가 핸들을 잡은 두 손을 벌벌 떨며 말했다.

그의 집은 주택가에 놓인 낡은 빌라였다.

유리로 된 공동현관은 박살이 나 있었고, 주변 전봇대 아래로 수거되지 못한 음식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행인 점은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시신이 발에 채이듯 있던 대로변과는 썩 다른 풍경이었다.

어찌 보면, 좋은 징후였다.

작은 빌라였다.

탑차로 주차장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은 뒤,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도착하기까지 힘주어 액셀을 밟던 이용수였으나, 정작 집 계단을 오르는 속도는 더뎠다.

문지방 너머에 있는 것이 축복인지 재앙인지 알 수 없는 그였기에.

어쩌면 그 결과가 끝없이 유예되기를 바라는지도 몰랐다.

그의 고뇌가 무색하게, 초인종 버튼은 너무나 가벼웠다.

마치 실수로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띵동-

초인종의 잔음이 길게 늘어지려던 찰나.

인터폰에서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