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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팍스 건설(2)

문명화의 필요성을 여실히 체감하고 있던 나.

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후우!"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 이마의 땀을 훔치는 아발론 청년.

똥 밭에 쭈그려 앉은 채, 서서히 일을 정리하는 그에게 장로 윌그라임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험험."

"아, 장로님."

청년이 반갑게 윌그라임을 맞았다.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그를 도와주었던 윌그라임이었으니.

"아까는 고함쳐서 미안함세. 자네가 급한 듯하여 나도 목소리가 높아졌구만."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편하게 일을 보지 않았습니까?"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 빙긋 웃는 청년.

엘븐하임과 마찬가지로, 되살아난 아발론 사람들 또한 구김살이 전혀 없었다.

마찬가지로 웃음을 띤 윌그라임이 그에게 초록색 잎사귀 두 장을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세계수 잎일세. 원래라면 꿈도 못 꿀 호사지만······ 정겸 대표 덕분에 세계수가 정말 많아졌거든. 자, 얼른 이걸로 처리하시게."

"자, 장로님······!"

청년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나중은 생각조차 못 한 채, 후다닥 바지부터 내렸던 그였다.

뒤처리가 고민이었는데, 어찌 고맙지 않으랴?

윌그라임이 내민 것은 손바닥 반만 한 잎사귀 두 장.

하지만 아발론의 검소한 청년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잘 접으면 열두 번 정도는 거뜬히 닦는다고요!"

"에헤이 이 사람아! 내가 700년 동안 한두 번 닦아본 것도 아니고, 그걸 모르겠나? 여유 좀 부리라 이거야, 여유 좀!"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이웃 간의 정.

구수한 똥 밭에서 화장지 한 칸의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무한히 복사할 수 있는 세계수를 대체 왜 절약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애당초 화장지를 쓰면 될 일이 아닌가?

후두둑.

두둑.

갑작스레 떨어지는 빗줄기.

그들의 찢어질 듯한 검소함은 계속됐다.

"이런! 양동이 내놓아야 하는데!"

아까운 물을 다 놓치게 생겼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윌그라임.

그런 그를 깔끔하게 뒤처리를 마친 아발론 청년이 다독였다.

"장로님. 그거라면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자, 보세요."

청년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쏴아아 떨어지는 물줄기, 입 한가득 물을 담아 마신 그가 말을 이었다.

"양동이까지는 아니어도······ 이렇게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지 않습니까?"

"허허······ 이거 젊은 친구인 줄 알고 방심했는데. 내가 한 방 먹었구먼그래."

"이래 봬도 80년 동안 죽어있던 몸입니다. 세월이라면 꽤 보냈죠. 흐흐."

지나온 세월을 뽐내며 겨루는 엘븐하임과 아발론의 흙수저 배틀.

그 빈궁함에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저려올 지경이었다.

"진짜 왜 저러는 거냐고? 물류센터에 쌓인 게 생수인데."

연이은 나의 의문에, 엘븐하임과 아발론의 행동 패턴을 학습한 팍스가 대답해주었다.

[반복 행동의 결과로 추정됩니다.]

[이 모두는 인간들이 '절약'이라 부르는 행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엘븐하임과 아발론 모두 장기간에 걸친 빈곤의 경험으로, 특유의 행동 패턴을 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식량과 자원을 무한히 내어주었지만, 엘프들의 습성을 고칠 순 없었다.

그들은 물류센터의 자원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정작 몸으로는 실천하지 못하는 인지의 부조화를 겪고 있었으니까.

쏴아아아아······.

빗줄기가 점차 거세졌다.

밭에 쌓인 거름이 우르르 무너졌고, 탁한 빗물이 흙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런, 결국 이렇게 되네요."

"아무렴. 한낱 피조물이 거대한 자연의 생태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 우리는 거기에 발맞춰 살아갈 뿐이고."

수십, 수백 년에 걸친 빈곤의 결과다.

그들의 뇌는 이미 안빈낙도의 삶에 절여져 있었다.

'할 일이 태산이네.'

서울 다음으로 팍스FC의 주요 거점이 된 엘븐하임이다.

그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때, 상하수도 시설이 없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그에 더해 한순간에 집을 잃어버린 아발론 백성들의 새집도 지어줘야만 했다.

대규모 공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멀끔한 집이 들어선다면 이들 또한 더 나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지 않을까?

다만, 기반 시설과 거주시설을 세우는 것이니만큼, 나름의 전문적인 체계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곧장 합참의 유성철에게 연락을 넣었다.

'재건 프로젝트'와 관련한 것이라면 그를 빠뜨릴 수 없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유성철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기반 시설과 주거시설의 건설이라······ 하지만 엘븐하임을 파헤칠 수준이라면 사람이 보통 많이 필요한 게 아닐 텐데요?"

"그래서 아예 이라는 단체를 신설해서, 건설 쪽 인력만 따로 관리할까 합니다. 팍스맨 중에서 새로 모집했으면 하는데······."

수망교와의 일전 이후, 팍스맨들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비록, 그중 각성자의 비율은 10%도 채 되지 않았지만······.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들을 선별해주세요. 수도 전문가, 건설기사, 전기공, 열쇠집 아저씨 등등 공사하는 데 필요한 사람은 싹 다."

꼭 각성자일 필요가 없었다.

멸망한 세계에는 그들이 여전히 필요했으니까.

***

팍스맨들에게 모집 공고를 내린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난 시점.

하지만 유성철이 전해준 명단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200명? 이게 다라고요?"

"지원자가 워낙 적어요. 아무래도 구미가 당기질 않았던 모양입니다."

전투원으로 훈련된 팍스맨들과는 달랐다.

팍스FC의 소속원이 되었을 뿐, 별다른 소속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 일반인들.

팍스FC에게 고마움을 느낄지언정, 충성심이나 의리보다는 생존과 안위를 둘러싼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의 입사 조건으로 신선한 식재료와 물류센터의 상품들을 내걸었던 참이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호응을 끌어내기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유성철이 덧붙였다.

"어차피 식수나 식량은 꾸준히 보급되고 있으니까요."

"이런······."

보급품이래 봤자 쌀이나 빵, 라면, 식수와 몇 가지 생필품이 고작이었다.

어차피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자가 제공되고 있는 상황.

그 정도 수준에 만족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번에도 안빈낙도인가.'

엘븐하임이나 아발론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지구의 사람들 또한 지구에 들이닥친 멸망에 적응해가고 있었으니까.

좋게 말하면 유유자적하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빈곤에 길든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성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좀 더 과감한 전략을 제안했지만······.

"아예 물자 보급을 줄여버리는 건 어떨까요? 사람들에게 역할을 강제할 수 있도록요."

나는 서둘러 그를 진정시켰다.

"사람들을 옥죄는 건 팍스FC의 정신이 아닙니다. 줬다 뺏으면 되레 앙심만 품을 테고요. 차라리 무한한 혜택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게 우리 방식이죠.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무료배송.

무료반품.

최저가 보장까지.

나는 팍스를 업계 최고로 만들어줬던, 압도적인 수준의 혜택들을 떠올렸다.

"욕심을 자극하는 겁니다."

팍스는 소비에 대한 욕망을 살찌웠다.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안빈낙도를 깨뜨리는 것.

팍스맨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물자가 보급되고 있기는 했지만, 딱 하나 아직 제공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집······ 갖고 싶지 않을까요?"

"집이요?"

물론 한국이든, 해외의 어느 도시든 집은 많았다.

아무리 주택난이라지만, 파괴된 주택 이상으로 죽어 나간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대다수의 생존자가 니것 내것 할 것 없이 빈집을 점유해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멀쩡한 집은 아니잖아요?"

단순히 바람만 막아줄 뿐이었다.

물도, 전기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껍데기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바로 그 집을 지을 인력이 부족한 상황 아닙니까?"

"딱 몇 개만 일단 만들어두는 거죠. 일종의 모델하우스처럼. 대신, 물도, 전기도, 가스도 들어오는 '진짜' 집으로요."

많이 만들 필요도 없었다.

도시별로 몇 개씩이면 충분했고, 심지어 원래 있던 건물을 보수하는 형태가 될 테니까.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예 거기에 하루씩 머물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일종의 관광상품처럼."

몇 달 만에 되찾게 될 일상의 편의.

그걸 맛보고도 다시 안빈낙도의 삶으로 돌아갈 순 없을 테니까.

우리는 곧장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강남과 부산, 그 밖의 몇몇 해외 도시들을 선정했고, 에 자원한 200명을 우선적으로 동원했다.

새로 짓는 것이 아닌, 손상된 건물들을 조금씩 손보는 식의 작업.

건설 능력 각성자들의 능력까지 동원된 덕에, 완성까지는 채 3일이 걸리지 않았다.

천천히 문자 메시지를 적었다.

사람들이 들이닥친 멸망에 그저 주저앉지 않기를 바라며.

***

멸망 전만 해도 전기 기술자로 일했던 팍스맨, 박윤호.

그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뭐, 특별할 건 없긴 한데······."

그가 예전에 살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된 27평짜리 쓰리 룸 아파트.

나름 차이가 있다면 창문을 열었을 때 한강이 보인다는 점일까.

옛날이라면 억대급 프리미엄이 붙었겠지만, 세상이 뒤집어진 이후로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편······.

"와! 와아!"

거실에 놓은 검은색 가죽 소파.

그 푹신한 질감 위로, 그의 어린 아들이 껑충껑충 뛰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박윤호 또한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게 원래 맞는 건데.'

집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그것은 저 시기의 어린아이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환경이었다.

하지만 멸망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지난 몇 달, 저 어린 것이 얼마나 많은 몹쓸 상황들을 목격했던가?

'후우······.'

참으로 오래간만에 평화를 만끽한 그였지만······.

불쑥 들어온 아들의 질문이 그 안식을 깨뜨렸다.

"아빠! 여기가 이제 우리 집이야?"

"하하······ 집은 아니야. 오늘만 하루 놀러 온 거야."

집이 아니라는 말.

그 말에 아들의 얼굴이 금세 그늘에 가려졌다.

"······그럼 우리 내일 나가야 해?"

"······."

퇴실시간은 내일 오전 11시까지였다.

고작 하루 만에 이 집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박윤호는 새삼 기분이 착잡해졌다.

괴물이 나타날 걱정도 없다.

물을 틀면 물이 나오고, 스위치를 켜면 불이 켜졌다.

심지어 에어컨까지 달려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상의 풍경.

그 모두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여보, 식사해요."

아내의 부름에 따라 들어간 부엌에는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에 들어갈 때쯤, 아내가 차려주곤 했던 따뜻한 식사.

팍스FC가 마련해준 아파트에는 밥솥을 비롯한 각종 생활 가전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고,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 안에도 각종 식자재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야······."

잘 구워진 고등어구이를 뜨끈한 쌀밥 위에 얹었다.

입안 가득 풀어지는 밥알을 느끼며, 포근한 미역국을 흘려 넣었다.

한참이고 음식을 삼키던 그는 결심했다는 듯, 서투른 젓가락질을 하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형아. 우리 여기서 살까?"

"응? 정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주도한다던 대규모의 건설 사업.

사업에 참여한 인부들에게는 전투원들 다음 순번으로 거주 권한이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까.

한편, 그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할 거라고 했었잖아요? 그냥 조용히 묻어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바뀌었어. 사실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잖아? 그리고 크게 본다면, 나도 한 손 보태는 셈인 거야. 팍스FC는 모든 걸 옛날로 되돌릴 생각이라고."

박윤호의 욕망이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그리고 그 욕망은 팍스FC가 내세운 대의에 고스란히 겹칠 수 있었다.

세계를 복구하려는 팍스FC의 방대한 스케일에서는 그 누구든 자신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정말 옛날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감히 그렇게 꿈 꿀 수 있었다.

***

얼마 뒤, 유성철이 미소를 띤 채 물류센터로 들어왔다.

"됐습니다. 지원자가 몇 배는 늘었어요."

마침내 매듭이 풀렸다.

사람들이 원하는 집을 내어주고, 또 그들을 동원해 집을 짓는 형태.

덕분에 상하수도 시설을 비롯한 이런저런 토목 사업을 계획할 수 있게 됐다.

조금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엘븐하임과 아발론의 거주지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있을 터.

시름 하던 고민이 해결된 참이었지만, 유성철이 걱정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그런데······ 공사 인력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렇죠?"

"사람들이 집을 받은 뒤에도 일하려 할까요? 너무 쉽게 집을 내어주시는 건 아닌지······."

그의 말대로였다.

집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나설 이유가 없어질 테니까.

하지만 괜찮았다. 소유에는 지속적인 비용이 따르는 법이었으니.

"그래 봤자죠. 수도니, 전기니 우리가 공급해줘야 할 텐데."

그들은 계속해서 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팍스 에너지 공사로부터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을 테니까.

더욱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할 겁니다."

"······어째서요?"

"잃을 게 생겼으니까요. 목숨 하나 부지하려 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지겠죠. 가장 좋은 방법은 팍스FC에 힘을 보태는 걸 테고요."

"아······!"

그 말 그대로였다.

가족들과 함께 머무를, 안락한 집을 얻게 된 팍스맨들.

그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상공회의소의 침략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될 터였다.

"이제 뭐든 지어보죠. 일꾼들이 확보된 참이니."

무너진 콘크리트로 뒤덮인 세상.

이제야 비로소 팍스 건설의 첫 삽을 뗄 차례였다.

팍스 건설 (3)

109화 팍스 건설 (3)

팍스 건설에서 주택을 분양한다는 소문.

그리고 인부들에게 우선하여 분배된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를 휩쓸었다.

신기루가 아니었다.

서울, 부산, 도쿄, 뉴욕, 시카고 등등.

팍스맨들은 세계 각지에 마련된 팍스FC의 모델하우스를 방문했고, 그곳이 꿈에 그리던 진짜 '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똑똑이 목격했으니까.

"에이······ 그게 말이 돼?"

"옛날에 살던 집이랑 똑같더라니까? 거기 세탁기도 있었어. 옷가지 가져간 거 싹 다 새로 빨아왔다고."

"어, 진짜네? 섬유 린스 냄새잖아?"

생생한 경험담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생존자들 사이에서 팍스건설의 아파트는 일종의 실존하는 유토피아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선착순이라고?"

"말이 안 되긴. 아무리 팍스라고 해도, 그런 집이 무한정 있겠어?"

하지만 그것은 한정된 유토피아였다.

기회를 놓칠지 모른다는 아찔한 감각이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그 결과 너나 할 것 없이 수천 명의 사람이 팍스 건설의 인부로 지원했다.

인력 문제는 해결을 넘어, 아예 사람을 선발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잘 골라주셔요. 아버지."

"오냐. 걱정 붙들어 매거라."

아버지를 비롯한 아공간의 기술자들이 인부들을 선별했고, 충원된 인력을 토대로 상하수도관을 놓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간단히 말해, 땅을 파는 작업.

하지만 아직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정겸아. 땅 밑으로 파이프 몇 개 파묻는 거야 일도 아니다만, 하수 처리는 어떡하냐? 그대로 강에다 버릴 수도 없고, 바다로 내보내자니 거리가 너무 멀어."

그게 문제였다.

아무리 각종 전문가를 모아냈다고 한들,

하수처리장 같은 복잡한 시설을 뚝딱 만들어 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거야 간단하죠."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내게는 아공간 포탈이라는 능력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오물의 특급 배송 체계를 설계할 수 있었으니까.

"마을 하수관마다 포탈을 하나씩 설치해 줄 거예요. 이면 아공간을 들리지 않고 바로 다른 장소로 옮겨놓을 수 있을 테니까."

방법은 간단했다.

하수관을 통해 흘러든 오물을 마을 단위로 모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모인 오물을 포탈을 이용해 또다시 외곽에 있는 오물 탱크에 저장하는 것.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다면 파이프를 연결하지 않더라도 바로 바다로 내보낼 수 있겠구나."

"에이, 그러면 환경 오염이 되잖아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오케이?"

"······그럼 어쩌려고?"

하수처리장과 같은 하이테크는 없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로우테크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다.

엘븐하임의 엘프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화'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엘프들이 정기적으로 오물탱크를 정화하게 할 거예요."

처음 해변에서 엘프들을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웃는 얼굴로 오염된 바다를 정화하던 엘프들.

그 대상이 오물 탱크라 해서 달라질 건 없었으니.

***

본격적인 공사에 돌입했다.

엘븐하임의 땅을 헤집으며, 에메스 창고에서 꺼낸 파이프관을 곳곳에 파묻기 시작했을 즈음.

"······저건 왜 저래?"

고작 반나절 만에 문제가 발생했다.

기왕 땅을 갈아엎는 겸이다.

상하수도관의 매설과 주거시설의 기초공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고, 시멘트로 굳힌 평평한 바닥에는 이미 하수관으로 연결되는 작은 배수구가 뚫려 있었다.

푸시이이이이익!

물을 빨아들이기는커녕, 분수처럼 내뿜는 배수구.

갑작스러운 역류 현상에 당황을 금치 못하려던 찰나······.

"제가 설명드리죠."

드루이드 족장, 핀드릭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다가왔다.

한참 동안 엘븐하임을 둘러싼 공간 왜곡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그.

결국,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지하의 일부 공간이 왜곡돼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때 하도 장난질을 쳐놓은 탓에······."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을 혼쭐내 주었던 드루이드들.

당시 엘븐하임 등지에 갖은 공간 왜곡을 설치했던 터였다.

지하의 일부 구역에 그들이 펼친 왜곡이 남아 있었고, 그 결과물의 흐름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소리.

원래대로라면 드루이드들이 도로 공간 왜곡을 걷어내면 될 일이었지만······.

"그게 어딜 어떻게 비틀었었는지는 기억이 잘······ 허허."

"······."

그 위치가 드루이드들의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곤란하구나. 명색이 하수관인데 지상에 설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걱정스레 도면을 들여다보는 아버지.

내가 아버지와 핀드릭에게 말했다.

"어쨌든 그 왜곡된 위치만 찾아내면 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지라······."

나는 잠시 핀드릭의 말을 멈춰 세웠고, 물류센터의 AI, 팍스를 불러냈다.

"이번에 아직 개방 안 한 능력들 있었지? 그중에 쓸만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목록을 띄워드리겠습니다.]

띠링!

----[개방 가능 항목]----

[비용 50,000]

◈ 아공간 실험실 (4) (New!)

-홀로그램을 아공간 밖의 대상으로도 투사할 수 있습니다.

-홀로그램을 통해 외부 환경에 기반한 시뮬레이션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 단, 대상에 대해 확인된 정보만 시뮬레이션에 반영됩니다.

◈ 카테고리 파티션 (New!)

-아공간을 여러 개의 섹터로 분할할 수 있습니다.

-섹터마다 별개의 입장 권한을 부여할 수 있으며, 시설이나 사물을 임의로 배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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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아공간 7레벨을 달성하며 주어진 두 개의 능력.

하나는 실험실의 홀로그램 능력을 아공간 밖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공간 내부를 정리할 수 있는 일종의 관리 능력에 가까웠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역시 실험실이지."

그야말로 건축에 찰떡같은 능력이었다.

홀로그램을 이용한 시뮬레이션 기능.

직접 수고하지 않더라도 시설이나 건물의 성능을 미리 확인해 볼 수 있었으니까.

하수관 또한 예외는 아닐 터였다.

[알겠습니다.]

[마석 100,000개를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362,115개입니다.]

"일단 파이프 관부터."

곧장 실험실 능력을 사용했다.

지이이잉.

붉은색 홀로그램으로 된 에메스 차원의 I자 파이프를 모습을 드러냈고,

눈앞의 선명한 광경에, 모두가 하나같이 탄성을 자아냈다.

"오오······!"

물이 터져 나오는 배수구 아래에 파이프를 달았다.

엘보를 달아 이웃한 파이프와 연결했고, 최대한 직선구간을 유지하면서 오수를 흘려보낼 적당한 기울기를 유지했다.

복잡한 수학 공식처럼 얽히는 붉은색 홀로그램 파이프들.

거기에 수천 리터에 달하는 가상의 물을 쏟아부었고······.

"찾았다! 저기였어!"

오래된 주택의 숨은 누수를 잡아내듯, 물이 팽글팽글 맴도는 구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아공간 실험실의 기능은 그 이후로도 알차게 써먹었다.

새롭게 건설될 아발론 사람들의 주거시설.

시뮬레이션을 통해 기둥에 가해지는 하중과 지반이 버틸 수 있는 무게를 가늠했고, 실제 시공이 진행되는 중에는 붉은색 홀로그램을 띄워 일종의 가이드 역할로 활용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 건설 속도.

덕분에 불과 며칠 만에 아발론 사람들을 위한 공동주택 한 동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정겸 대표님."

아발론의 경비단장, 베론.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번듯하게 들어선 건물을 둘러보았다.

"일단 시범 삼아 지어본 거니까······ 둘러보고 아쉬운 점이 있으면 이야기 해줘. 반영해서 쭉쭉 더 지어 줄 거니까."

"아쉬운 점이 있을 리가요. 이것 참······."

층고 3층짜리의 조립식 건물이었다.

노숙자처럼 엘븐하임의 숲 이곳저곳에 넝마처럼 널려 있던 아발론 사람들.

집의 퀄리티보다는 한 채라도 더 빨리 만드는 게 중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대충 만든 건 절대 아니었다.

전기, 수도, 가스가 원활하게 공급됐고, 공들인 상하수도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니까.

사람이 많은 탓에 함께 먹고 자는 공용 주택의 형태로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요지경 세상에 이만하면 호텔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끼이익.

부드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베론.

그가 벅찬 얼굴로 공동주택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풋풋하네.'

쏴아아······.

촤아아아악!

수돗물을 틀어보고, 변기물 내려보는 모습.

이제 막 자취방을 구하기 시작한 사회초년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때마침 화장실을 둘러보던 그는······.

"죄송합니다. 배가 아파서 잠시······."

벌컥!

아발론 공동주택 화장실 첫 개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나오길 기다리며, 나는 란슬롯과 함께 공동주택의 이모저모를 둘러보았다.

"뭐······ 이걸로 부족함을 다 채울 순 없겠지만."

한순간에 고향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말뿐이라도 지구가 그들의 고향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문명의 이기 속에서나마 위안과 만족을 누렸으면 했다.

집이 없어 나무 아래로 비를 피하고, 잘 곳이 없어 덤불을 이불 삼아 흙바닥에 몸을 뉘던 아발론 사람들.

그것이 엘븐하임에서의 공사를 우선한 이유였다.

폐허와 빈집이라도 주어진 우리와 달리, 아발론 사람들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채우고말고요. 주군께서 이리 마음을 써 주셨는데요."

내 말을 십분 이해하겠다는 듯, 란슬롯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화장실 안쪽으로부터 베론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란슬롯 경, 그······ 혹시 닦을 만한 게······."

"아, 채워 놓는다는 걸 깜빡했네."

집만 완성되었을 뿐, 아직 이런저런 생필품을 채워 넣지 않은 상태.

휴지를 출하해 주려던 나는, 문득 화장실에 그보다 더 좋은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베론, 오른손이 닿는 부분에 버튼이 보이나?"

"예? 예, 보입니다. 이런저런 것들이······."

"파란색 물줄기가 그려진 버튼을 눌러. 그거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삑.

위이이잉.

버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작게 울리는 진동 소리.

나는 가만히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휴지도 뭐 나쁘지 않지만······. 아무렴 비데와 비교할 순 없지.'

화장실마다 일괄적으로 비데를 깔아놓은 터였다.

수세식 화장실조차 낯선 그들에게는 상상조차 못 해본 편의 도구일 터.

그렇게, 상쾌한 표정으로 돌아올 베론을 기대하려던 참이었다.

"흐아우으아아아아!"

베론의 비명이 들려왔다.

세상이 무너질 듯한 처절한 소리.

화들짝 놀란 란슬롯이 후다닥 화장실 문 앞으로 달려갔다.

"베론! 무슨 일이냐! 베론!"

"아, 아무것도 아닙니아하하아아아악!"

아발론 경비단장의 격렬한 반응.

그의 무력한 울음에 란슬롯이 문고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철컥! 철컥! 덜걱!

"바르나울의 기습인가? 조금만 기다려라, 베론! 일단 이 문을······!"

"제발!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호오오오옥!"

상황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쿵쿵!

란슬롯이 어깨를 이용해 문에 충격을 가했고, 베론은 사정이 여의찮음에도 손을 뻗어 애처롭게 문이 열리는 것을 막아냈다.

취이이이익!

비데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물줄기 소리.

이제는 아예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는 란슬롯을 애써 제지했다.

"진정해. 저건 누가 도와줄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우뚝 자세를 멈춰 세운 란슬롯.

내 말의 의미를 짐작한 그가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베론이 자신만의 힘으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겨내야만 하는 싸움이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어."

"그랬군요. 자기 자신과의 싸움······."

"······."

우리는 잠자코 베론을 기다렸다.

흰 타일로 둘러싸인 자기만의 방.

그로부터 베론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길 바라며.

"······정겸 대표님."

그리고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베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다.

대체 비데로 뭘 한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만큼.

"······베론."

더 이상 그에게서 고향의 그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문명 생활의 은혜로운 축복이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으니까.

"······풍족하게 채웠습니다. 한가득이요."

그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

.

.

이제 막 공동주택에 아발론 사람들을 입주시켰을 즈음.

용산에 있던 유성철이 대뜸 나를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여쭤볼 게 있어서요. 혹시 용산 쪽에 추가로 포탈을 설치하신 적이 있습니까? 한강대로 쪽으로요."

"네?"

금시초문이었다.

설치할 때마다 마석이 소모되는 포탈 설치.

이미 합참에 설치된 포탈을 하나 더 설치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역시 그랬군요. 붉은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뭔가 당장에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아공간 포탈은 푸른색이었으니.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만들어 놓은 포탈.

어쩌면 예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한 놈뿐이었다.

"······상공회의소가 다시 움직이는군요."

게이트 포탈을 설치할 수 있는 존재.

그건 오로지 나와 상공회의소뿐이었으니까.

곧장 팍스에게 요청했다.

"팍스, 뭔가 새로 진행되는 게 있는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아공간에는 상공회의소의 유럽 본부가 들어와 있었다.

놈들이 뭔가 시작했다면, 나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1)

110화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1)

붉은색 포탈의 정체를 찾기 위함이다.

팍스가 동기화된 상공회의소 시설의 데이터를 뒤져주었고,

그 결과 적어도 지구에서만큼은 가장 빠르게 새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띠링!

[지금 막 내려온 지령입니다.]

[상공회의소 주관하에, 3차 자유 개척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역시나 괴물들의 방문 소식이었다.

다른 게이트 포탈과 마찬가지로, 붉은색 포탈 역시 타 차원의 침략자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하지만, 여느 때와는 그 방식이 달랐다.

"······몬스터 웨이브?"

[그렇습니다.]

[지역별로 '기간제 게이트 포탈'을 통해 타 차원의 진입이 허용될 예정입니다.]

간단히 말해 괴물들이 쏟아진다는 소리였다.

단, '자유 개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특정 차원 세력이 아닌, 무작위적인 적들이 쳐들어오는 구조.

'지금도 괴물이 안 들어오고 있는 건 아니지만······.'

1차, 그리고 2차 자유개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 생긴 균열을 통해 소소한 잡몹들이 넘어오고 있었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그 규모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웨이브마다 1천 이상의 병력이 포함됩니다.]

[구획 내에 5백 이상의 병력이 진입한 경우, 해당 지역의 소유권을 탈취하게 됩니다.]

"그렇게나 많이?"

[그렇습니다.]

자그마치 1천에 달하는 병력이, 그것도 주기적으로 밀려든다는 것.

규모면에서도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대형 이벤트였고, 심지어 한국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구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행사입니다.]

[인구밀집, 마석매출, 인접지형 등을 기준으로 200개의 지역이 선정되었고, 순차적으로 '기간제 게이트 포탈' 설치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현 위치에서 가까운 순으로는 서울, 부산, 도쿄, 상하이······.]

200개의 지역마다 쏟아지는 1천 마리의 괴물들.

머지않아 지구는 들끓는 괴물들로 인해 한바탕 홍역을 치를 예정이었다.

[지구 차원 존재들에게는 적대 세력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제공됩니다.]

다행히, 일종의 어드밴티지가 주어져 있었다.

상공회의소의 안내창을 통해, 다가올 적들에 대한 정보를 미리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더욱이 나는 상공회의소를 품고 있는 만큼, 더 빨리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용산으로는 어떤 놈들이 들어오는 건데?"

[튜토리얼 웨이브에 대한 정보를 띄워 드리겠습니다.]

띠링!

팍스가 홀로그램 이미지를 띄워 주었다.

머지않아 용산으로 들이닥칠 1천 마리 괴물의 정체는······.

"······저글링?"

의외로 익숙한 놈들이었다.

머릿속에 저절로 그림이 그려졌다.

붉은색 포탈에서 쏟아질 1천 마리의 저글링.

그리고 순식간에 피로 뒤덮일 한강대로의 모습을.

***

"그렇군요. 저글링이라······."

붉은색 포탈의 정체를 유성철에게 공유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

아이러니하게도, 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끼친 괴물 중 하나가 바로 이 저글링이었다.

"인덕원에서 놈들 때문에 2개 사단이 궤멸했었죠. 워낙 수가 많기도 했지만, 총이 잘 통하질 않는 놈들이어서······ 물론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지만요."

확실히 그때와 같을 수는 없었다.

그사이 우리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고, 합참의 각성자 부대라면 그깟 저글링쯤이야 가볍게 해치울 수 있었으니까.

물론 저글링들 또한 한층 발전된, 8위계를 두른 강화 저글링이었지만, 강화 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깟 8위계쯤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여 버릴 수 있었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튜토리얼에 불과하니까요."

"물론입니다. 군에도 방비를 확실히······."

다가올 적들을 상상하며, 의지를 다지는 유성철.

그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우리를 찾아왔다.

"······리디아?"

"정겸 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악마와 흑마법사들에 의해 망가진 유럽을 재건하며, 틈날 때마다 세계수의 성장을 돕고 있던 그녀.

당분간 프라하에 있겠다며 돌아갔던 그녀가, 돌연 하루 만에 돌아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프라하가 위험해요. 아니, 정확히는 유럽 전체가요."

유럽에도 붉은색 포탈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곧 지구 전체에서 3차 자유 개척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가 맞닥뜨린 적은 타 차원의 침략자들이 아니었다.

"페르메곤이 점령했던 지역은 대부분 서유럽 국가들이었어요. 영국, 프랑스, 독일······ 이런 쪽이죠. 하지만 남유럽 쪽에서는 몇몇 국가들이 입찰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들었어요. 아마도 그동안 한국처럼 독자적으로 성장했을 테고요."

세계는 넓었고, 사람은 많았다.

대다수의 지구인은 끔찍한 패배를 겪었지만, 우리처럼 승리를 거두며 성장한 사람들도 있는 법.

리디아가 마주한 적은 다름 아닌, 인간들이었다.

"놈들이 선전포고를 했다고요?"

"네. 아직 시스템을 이용한 건 아니고······ 항복을 요구하고 있어요. 나름 선전을 응원하곤 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이긴 뒤, 돌연 새로운 침략자로 돌변한 놈들.

그 목적 또한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서유럽 곳곳에 깔린 포탈을 노리는 게 분명해요. 저희가 그 포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내가 남겨두고 온 포탈을 이용해, 유럽에서의 뒷수습을 도맡은 프라하 그룹.

사실 나와는 달리, 다른 각성자들에게 있어 포탈은 일종의 전리품에 가까웠다.

선전포고 시스템을 이용해, 영토분쟁에서 승리한 지역은 게이트 포탈을 그 보상으로 얻을 수 있었으니까.

"번지수를 잘못 찾았네요. 그거 쓰지도 못할 텐데."

놈들이 쓸 수 없는 포탈이었다.

유럽에 설치된 서른 개의 포탈은 상공회의소의 것이 아닌, 나 김정겸의 사유 재산이었으니.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싸움.

하지만 그로부터 놈들이 품고 있는 야욕만큼은 읽어낼 수 있었다.

리디아가 그 야욕의 정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주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세계정복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나름 명분으로 내세운 건 있어요. 세계정부를 만들겠다고······."

덜컹!

순간, 테이블이 거칠게 흔들렸다.

엎질러진 찻잔에서 쏟아진 물이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졌고,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도깨비 같은 살벌한 표정을 뽐내고 있었다.

"정부······세계······정부······월드······가버먼트······."

"진정하세요, 본부장님."

'세계'와 '정부'를 주문처럼 읊으며, 묘한 트랜스 상태에 접어든 유성철.

그의 꿈을 위협하는 적대 세력의 등장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세계 통합을 꿈꾸는 남유럽의 각성자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아니, 그럼 평화롭게 손을 내밀면 될 것이지······ 왜 선전포고를 하는 건데요?"

"그게······ 이렇게 정리하는 게 빠를 것 같네요."

푹 하고 한숨을 꺼뜨린 리디아가 말을 이었다.

"······자신들을 신이라고 칭하고 있어요. 세우겠다는 세계 정부도 신권(神權) 국가의 일종이고요."

"아······."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는 정신질환자들의 모임.

그제야 단번에 이해가 됐다.

"······설마 그래서 단체 이름이 인 거예요?"

"······그렇죠."

"세상에."

사업 영역을 공유하는 새로운 경쟁사의 출현.

놈들이나 우리나 세계 정부를 꿈꾸고 있었지만, 그 방향성은 현저히 달랐다.

팍스FC가 세계와 삶의 회복을 목표로 했다면, 가 노리는 것은 고대 사회로의 끔찍한 퇴행이었으니까.

팍스FC에 맞서는 의 십자군.

놈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본부장님?"

한편, 누구보다도 의지를 다지는 사람이 있었다.

합참 본부의 작전본부장 유성철.

그를 한평생 움켜쥐고 있던 대한민국과 국군의 개념이 흐릿해진 지금, 그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목표는 팍스FC의 세계 정부로의 진화였다.

한참이나 '세계 정부'를 되뇌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김 대령 님."

그는 여전히 나를 김대령이라 부르고 있었다.

세계 정부를 운운한 날 이후, 나를 총통이라 부르려던 걸 간신히 뜯어말렸는데, 그나마 입에 붙은 대령 딱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거국적인 합의를 이뤘던 터였다.

호칭과는 별개로, 유성철은 팍스FC의 장기적인 미래에 관해 항상 진지한 의견을 피력해 왔다.

그는 줄곧 내가 가진 아공간 물류센터가 들이닥친 멸망을 타개할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아공간 포탈이 다가올 세계의 새로운 상징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으니까.

그가 선명한 눈빛으로 내게 덧붙였다.

"이건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의 구심점은 단 하나가 되어야 해요."

그러곤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구심점이 여럿이 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구심점이 아니게 됩니다. 그저 각축장을 벌이는 고만고만한 세력들의 싸움이 되어 버리죠. 그리고 이건 인류의 역사 동안 여느 때건 있었던 일입니다."

유성철이 바라는 것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정치체였고, 오직 그것만이 대한민국의 재건이라는 유성철의 꿈을 덮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유성철로서는 팍스FC의 유일성을 저해하는 의 행보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더욱이, 유성철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그것만이 아닌 듯했다.

그가 리디아에게 물었다.

" 놈들이 '신'으로 자칭하는 인원이 몇이나 된다고 했죠?"

"열 한 명이에요. 줄었다가 늘기도 하고······ 몇 번 바뀌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사실상 개 족보에 가까운, 난잡하게 짝이 없는 의 신전.

나나 리디아나 실로 한심하단 반응이었지만, 정작 유성철은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그가 나를 지그시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도 이대로 있어선 안 됩니다."

"······그러면요?"

"당장에야 놈들이 올림푸스 신을 운운하는 게 우스워보일지는 모르지만······ 효과가 없는 건 아닙니다. 민중들이 지도자의 형상을 상상하고 떠올릴 수 있게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 팍스FC는 대표나 사장 같은 조금 밋밋한 호칭이 고작이잖습니까? 그러니······."

유성철은 말없이 주섬주섬, 국방색으로 된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미리 접어둔 페이지 펼쳐 보여주며 내게 말했다.

"호칭 바꾸죠. 제가 생각해온 게 많거든요."

"싫어요."

"여기 목록 중에서 골라보세요. 제국 황제, 풀필먼트 대제, 신세계의 신, 킹 갓 엠페러 정겸 킴······."

"······."

그의 눈이 점차 광기로 물들어 갔다.

***

머지않은 와의 충돌.

하필이면 3차 자유 개척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맞닥뜨린 시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유럽 쪽으로 가긴 해야겠는데······."

라는 우스꽝스러운 네이밍과는 별개로, 리디아로부터 전해 들은 놈들의 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순수한 무력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점령하고 있던 타차원 세력을 불과 2주 만에 쓸어 버렸다고 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전투력에 대응하기 위해선 내가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

하지만 곧 이어질 몬스터 웨이브를 어찌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내가 없어도 괜찮을까?'

휘이이······.

합참 본부 옥상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한강대로의 풍경.

머지않아 괴물들로 뒤덮일 도로를 바라보고 있을 참이었다.

"뭘 그리 걱정하냐.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함께 용산으로 건너온 아버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어디로 오는지, 얼마나 오는지, 심지어 어떤 놈들이 오는지까지 다 확인이 된 상황 아니냐. 그럼 상하수도 공사랑 다를 바가 없지."

상공회의소가 설정한 '구획'은 붉은색 포탈에서 시작해 한강대로를 따라 삼각지역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이곳 합참 본부에서도 그 길목이 훤히 보이는 형태.

그 기다란 길을 천천히 시선에 담은 아버지가 내게 덧붙였다.

"나는 걱정은커녕, 기대가 되는구나."

돌연 아버지는 마에스트로처럼 두 손을 펼쳤다.

그리고······.

지이이이잉.

붉은색 홀로그램이 한강대로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거대 바리케이드와 같은 장애물부터, 각종 전투 포탑, 거기에 디버프나 버프를 활용하는 특수 포탑까지.

우르르르르!

붉은색 포탈에서 홀로그램이 이뤄진 수백 마리의 저글링이 쏟아져 나왔고, 포격 포탑이 뿜어낸 불이 놈들을 산채로 집어삼켰다.

-카아아악!

-캐객!

새빨간 피를 뿌리며, 산산히 흩어지는 저글링의 몸.

그 위로 위풍당당하게 선 아버지의 포탑들을 보며,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이건······."

의 결과였다.

형수가 아공간에 있는 실험실을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포탈 근처에 있는 한, 내가 허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실험실 능력을 활용할 수 있었으니까.

최소 수십 개에 달하는 포탈이지만, 건설에도 문제는 없었다.

팍스 건설은 이미 천여 명에 달하는 전문 인부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내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재밌게 놀다 와라. 집은 애비가 지킬 테니."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2)

111화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2)

곧 진행될 몬스터 웨이브의 튜토리얼.

유럽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에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아버지의 격려 덕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한 곳이 아닌 게 문제긴 한데······."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3차 자유 개척.

서울과 부산, 중국과 일본, 미국과 유럽, 심지어는 엘븐하임까지, 내 영향권 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다방면의 도시가 몬스터 웨이브의 격전지로 선정된 터였다.

팍스FC의 일원들 또한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김솔과 민우가 부산, 운양을 비롯한 무림인들이 상해로 떠났고, 엘프와 드루이드들이 엘븐하임을 방어하는 한편, 합참의 병력과 팍스맨들이 비상 상황에 대비해 아공간에 상주하기로 의견을 나눴다.

"그 정도면 괜찮겠지."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아직 튜토리얼 단계였고, 강화됐다고는 하나 아직은 저글링 수준이었으니까.

혹여나 문제가 생기는 지역이 있더라도, 그때그때 포탈을 타고 가 지원해 주면 될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단계를 거듭할수록 몬스터 웨이브에서는 더 강한 적이 몰려들 테니까.

"일단은······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걸 목표로 해보죠."

부아아아아앙!

내가 덧붙인 말에, 이용수가 지그시 액셀을 밟았다.

나는 운전을 맡아줄 이용수, 그리고 리디아를 대동하고 프라하의 외곽 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 병력을 이끌고 접근했다던 장소.

위기를 느낀 리디아가 재빨리 포탈을 타고 내게 소식을 알려온 참이었다.

부우우우······. 우우웅!

세찬 울음소리를 내는 파란색 스포츠카.

콧구멍처럼 생긴 그릴로 유명한 독일 모 브랜드의 차량이었는데, 독일 현지 판매장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걸 카테고리 수용으로 집어넣었었다.

끼이이이익!

드드드득!

이런저런 장애물로 가득 찬, 굽이진 도로를 달려야 하는 난이도 높은 운전이었다.

질겅질겅 세계수 잎을 씹는 이용수에게, 안전 손잡이를 꽉 쥔 리디아가 추가 버프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차가 참 멋지네요."

"허허.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차가 참 멋지네요."

"멋지다마다요. 이 모델이 제로백이 몇 초냐면······."

"차가 참 멋지네요."

"그렇습니다. 제가 이 차를 처음 잡지에서 봤던 게 벌써 몇 년 전이네요. 콘셉트 카를 봤을 때만 해도 충격이었는데······."

철컥!

드르륵!

'······그렇게 좋을까.'

이용수가 핸들과 기어봉을 바쁘게 조작했다.

차량을 출하했을 때부터 설렘을 감추지 못했던 그.

기계적인 질문이 질리지도 않는지, 면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한편, 줄곧 버프를 이어가던 리디아가 내게 몬스터 웨이브에 관해 물었다.

붉은색 게이트는 프랑스나 독일 등지에도 형성돼 있었고, 모두 하나같이 리디아의 프라하 그룹이 관리하던 장소였으니까.

우선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발론의 경비단과 왕립 기사단을 보내 뒀습니다. 최소 7위계는 되는 친구들이니, 저글링 막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거예요."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대부분이 민간인들인 터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리디아.

적지 않은 각성자들이 버티고 있는 한국과 달리, 유럽은 유달리 비각성자들의 비율이 높았다.

페르메곤과의 전쟁에서 상당수가 죽어 버렸을뿐더러, 바르나울에 의해 희생된 것 또한 대다수가 각성자들이었으니까.

만약 별다른 지원 없이 몬스터 웨이브가 진행됐더라면, 그들 모두가 괴물들의 먹이가 되었을 터였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이용수가 덧붙였다.

"몬스터 웨이브가 계속된다면······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겠군요."

"그렇겠죠. 그게 상공회의소가 줄곧 추구하던 방향이기도 하고요."

힘이 없는 사람들은 웨이브에 휩쓸려 죽어갈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각성자들은 몬스터 웨이브를 통해 마석과 경험치를 수급하며 빠르게 성장해 나갈 터였다.

바로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상공회의소의 입장에선, 지구가 단순히 사냥터인 것만은 아니니까요."

침략자들을 불러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상공회의소는 지구에 새로운 침략자들을 양성하고 싶어 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을 일으켰을 때만 보더라도, 남부 지도자 메디슨에게 은근한 지원을 몰아주고 있었으니까.

이제 능력의 차등과 양극화의 심화는 상공회의소가 사용하는 주된 전략 중 하나라 봐도 무방했고, 실제로 그 방면에 있어 상공회의소의 '침략 프로그램'은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용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같은 지구인 중에서도 적이 많아지겠군요. 미국에서도 그랬고······ 이번 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각성의 축복 아래, 멸망이라는 환경을 딛고 일어난 타자들.

그들은 팍스FC와 같이 침략을 막기 위한 수호자가 될 수도, 혹은 인간의 탈을 쓴 또 다른 침략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리디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약자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가 관건인 것 같아요. 모두가 팍스FC처럼 사람들을 터울 없이 대해준다면 참 좋겠지만······."

그녀가 말끝을 흐리듯,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우리가 마주하러 가는 부터가 '신'을 운운하고 있었으니.

반면, 나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

그들은 멸망이 사라진 세계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준비물이었으니까.

이번 건축 사업에서도 보았듯, 간단한 집 한 채 짓는 데에도 수십 명의 전문 인력이 필요하지 않았던가?

"각성자 비각성자 가릴 것 없이, 결국 모든 사람이 다 필요해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성과였으니.

이용수도, 리디아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이익!

그렇게, 의 병력이 있는 접견 장소에 다다랐을 즈음······.

"······어쩜 말하자마자 이러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쨍쨍 해가 내리쬐는 가운데, 푸른 잔디로 뒤덮인 농경지.

그 위로 수백 명의 사람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엎드린 방향으로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신전 기둥이 놓여있었고, 나와 눈을 마주한 리디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또 언제 지은 거야······."

병력과 함께 들이닥쳐, 항복을 요구했던 .

막상 도착하고 보니, 아예 사람들을 붙잡은 채 묘하게 생긴 건축물에 절을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우르르르르!

고대 튜닉과 후드를 둘러쓴 놈들이 곳곳에서 몰려나와, 순식간에 차량을 둘러쌌다.

그러곤 양손으로 쾅쾅 차창을 때리며, 연신 큰 소리로 외쳐댔다.

"성전을 향해 고개를 숙여, 신들께 머리를 조아려라!"

"올림푸스에 너의 신앙을 증명해라!"

콰아앙! 콰앙!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게 가 약자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걸.

기껏 수용소에서 구해낸 유럽의 포로들이 다시금 의 강압에 짓눌려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뭣들 하나! 어서 차에서 나오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올림푸스의 신관.

이용수, 리디아와 잠시 멋쩍은 표정을 주고받은 뒤, 나는 가만히 읊조렸다.

"너희가 바라는 게 그런 거라면야······."

***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빈.

모두가 테라포밍의 영향이었다.

스멀스멀 솟아오른 알프스 산맥이 도심 외곽의 호텔 한 채를 집어삼켰고,

은은한 안개구름이 펜트하우스 파티장의 드라이아이스 연기와 뭉쳐 들었다.

"휘우!"

"야, 마셔!"

남녀들의 호탕하면서도 교태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계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쿵! 쿵!

책상만 한 크기의 스피커가 쉬지 않고 EDM 사운드를 뿜어댔고, 몇 사람이 우유색 액체가 담긴 술잔을 치켜드는 중에도, 몇몇은 입가에 토사물을 흘리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스에서 출발해, 세르비아와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에 당도한 의 신들.

그들이 벌이는 광란의 파티는 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치렁치렁 커튼처럼 내려오는 튜닉의 옷자락 사이로는, 너나 할 것 없이 탄탄하면서도 관능적인 신체를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쟤네 또 뻗었어?"

'제우스'가바닥에 널브러진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을 보며 투덜거렸다.

"두 시간 뒤에 토하고 또 먹는다는데 내 봉알 건다."

'포세이돈'이 낄낄대며 웃었고, 이번엔 자기가 만든 폭탄주 덕분이라며 '디오니소스'가 허리를 잡고 으스댔다.

한편, 튜닉을 펄럭거리며 다가온 관능적인 여인, '아프로디테' 볼멘소리를 냈다.

"야, 이거 언제까지 입어야 돼? 존나 쪽팔려 진짜."

"뭐래? 평생 입으셔야죠, 여신님."

"니미."

이들이 처음부터 의 신을 자칭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이들은 부유한 2세들의 비밀스러운 사교 모임으로, 멸망이 들이닥친 직후 다 같이 진탕 놀다 죽기를 결의했더랬다.

멸망이 시작된 직후, 괴물들이 나타났다.

도로가 폭파되고, 하루가 무섭게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호텔 문을 걸어 잠근 채 술과 음악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결과······.

-너희는 선택받았다.

라는 이름의 타 차원의 존재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이름과는 달리, 그들은 신화도, 종교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사업체'였는데, 부유한 2세들에게 특별한 제안을 하나 건넸다.

-우리와 가맹 계약을 맺어라. 너희의 각성 능력을 증폭시켜줄 테니.

"······왜 우리입니까?"

-너희는 우리와 닮았으니까.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구의 신화가 틀림없는 그리스신화를 왜 타 차원의 존재들이 들먹이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정신만큼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본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지구 가맹점장, 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가 격이 다른 존재이기는 해."

많은 차이가 떠올랐다.

들이닥친 멸망 앞에, 서민들은 편의점을 털어 소주와 맥주를 꺼낼 것이다.

하지만 의 신들은 펜트하우스 아지트에 진열돼 있던 위스키를 섞어 '넥타르'를 만들어 마실 것이다.

인간들이 단순히 죽는다면, 신들은 죽을 것처럼 마실 것이다.

멸망 이전이나, 이후에나.

다만, 올림푸스의 신이 된 그들에게는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다.

-신도들을 모아라.

증폭된 '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도들의 숭배, 그리고 그 숭배의 그릇이 될 이 필요했다.

의 가맹이 된 그들은 괴물들을 쓸어 버렸고, 신전을 건설하며 신도들을 모아 나갔다.

상당량의 마석을 매번 올림푸스에 가맹료로 지불해야 했지만······.

"아무튼 우리가 세상을 구하고 있단 거지."

"인간들만으로는 무리니까."

그들은 정말로 스스로를 신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리스부터 오스트리아까지, 거대한 땅덩어리를 모두 점령한 .

제우스가, 옆에 앉은 포세이돈에게 물었다.

"프라하 쪽에선 뭐래?"

"신전부터 세웠다는데, 그쪽 대빵이라는 여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더라."

"X나 비협조적이네. 짜증 나게."

제우스는 팍스FC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페르메곤이라는 악마들을 치워버리고 서유럽 대부분을 손에 넣은 단체.

일개 쇼핑몰에 불과한 그들이 감히 신들의 행보에 거역하고 있었으니까.

"맞으면 정신 차리겠지."

"오! 심판이냐!"

이미 신관들로 구성된 병력을 보내 둔 터였다.

프라하에 설치된 놈들의 포탈만 점유한다면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갈 수 있을 터.

제우스가 천천히 입맛을 다시던 중,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발코니로 들어왔다.

"바람돌이 왔냐."

포세이돈이 헤르메스를 반겼지만······.

정작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냐?"

"프라하 신전······ 박살 났어."

"뭐?"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팍스FC······ 이쪽으로 오고 있어. 신전 하나하나 깨부수면서."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3)

112화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3)

보글보글.

출하 스킬로 꺼내 온 가스버너가 새빨간 국물을 끓였다.

국물의 정체는 매콤한 소고기 대파 육개장.

냄새만으로도 전해지는 감칠맛, 빨간 기름 주변으로 잘게 찢은 소고기와 계란이 먹음직스럽게 떠올라 있었다.

후우. 후우.

탱글탱글한 당면을 건져 올렸다.

입에 넣은 고기와 대파에서 달큰한 국물이 새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밥.

혀가 데일 듯 뜨겁게 적셔진 밥알을 흘려 넣으며, 나는 거듭 감사를 표했다.

"매번 참 고맙습니다."

"입에 맞으시니 다행입니다. 많이 드세요."

이용수의 아내, 오지수의 요리였다.

유럽으로 차를 몰고 나간다는 말에 싸준 한식.

포탈만 있다면 그곳이 그곳일 텐데도, 유럽에선 한식이 그리울 거라며 대뜸 육개장을 포장해 준 터였다.

한편, 그와는 별개로······.

"똑바로 안 박냐?"

"죄, 죄송합니다. 신이시여······."

미친 듯이 차장을 두드리던 광신도들은 일제히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수백 명의 포로를 신전에 조아리게 했던 올림푸스의 신관들.

그 값을 치르려면 원산폭격쯤은 되어야 했으니까.

벌써 여덟 번째 신전이었다.

체코에서 시작해, 놈들이 모여 있다던 오스트리아 빈으로 차츰 다가가고 있는 상황.

눈에 보이는 족족 신전을 파괴하던 중에, 잠시 쉬어갈 겸 테이블을 펴고 찌개를 끓이며 잠시 식사시간을 이어가고 있었다.

후루루루루룩!

리디아도 아주 잘 먹고 있었다.

중간중간 빵을 찍어 먹고 싶다느니 하는 섬뜩한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오지수의 육개장이 입에 잘 맞는 모양.

고작 세 사람이 밥솥만 한 냄비를 뚝딱 비워낸 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쟤들이겠죠?"

"한눈에 봐도 그렇네요."

누군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고대 그리스식 전통 복장을 걸친 사람들.

그리스 신화를 따라 하려는 것인지 치렁치렁한 머리칼과 빽빽한 수염을 붙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극한의 콘셉트였지만······.

정작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건 올림푸스 쪽이었다.

"······."

테이블 위로 뜨끈하게 끓어오른 육개장, 그리고 등 너머로 모락모락 먼지를 풍기며 반파된 신전.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동서양의 조화에 올림푸스의 신들은 도무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올림푸스 코스프레와는 별개로, 놈들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떡진 머리에 퀭한 눈빛, 멀찍이서부터 풀풀 풍겨오는 술 냄새에 육개장을 보며 꼴딱꼴딱 침을 삼키는 행색까지.

영락없는 새벽 주당들의 모습에 나는 끌끌 혀를 찼다.

'이딴 게······ 신?'

그런 나의 감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림푸스의 술꾼들이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싸움을 시작하기보다는, 우선은 대화를 해 보겠다는 마음가짐.

하지만, 그 말투에는 짜증에 물들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뭐가?"

"신전 말이다! 고작 하루 만에 너희가 대체 몇 개나 부쉈는지 알기나 해?"

실로 알코올성 치매가 의심되는 발언이었다.

저들이 프라하까지 쳐들어와 감 놔라 배 놔라 했던 건 까맣게 잊은 모양.

그런 그들에게, 나는 손가락을 들어 우리의 발목을 가리켜 보였다.

"그게 싫었으면 이딴 장난은 치지 말았어야지."

우리의 발목에는 푸른색 사슬이 걸려있었다.

체코를 지나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지났을 즈음, 우리의 발목을 휘감았던 정체불명의 힘.

당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확인했더랬다.

[올림푸스의 영역에 진입했습니다.]

[영역 효과, '프로메테우스의 족쇄'가 적용됩니다.]

유럽에서 일종의 테라포밍이 이뤄지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의 지대가 차츰 올라갔고, 주변 평지를 집어삼켰다.

그 주변으로는 그리스식으로 지어진 올림푸스 신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올림푸스'의 영역을 위해, 다른 존재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우위에 서기 위해.

"니들이 귀찮게 이딴 걸 깔아놔 갖고······ 모조리 부숴 버릴 수밖에 없게 됐잖아."

처음에는 실로 당황스러웠다.

'프로메테우스의 족쇄'로 인해 눈에 띄게 느려진 발걸음. 

지금껏 보지 못했던 독특한 광역 효과라는 것도 문제였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방해가 될 줄이야.'

다리에서 결코 벗겨지지 않는 족쇄.

동시에 아공간에 수납되지 않는 탓에 포탈을 넘어갈 수 없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 족쇄가 걸려 있는 한, 포탈에 몸을 숨기는 것도, 포탈을 타고 다른 일행들을 지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

결국, 다짜고짜 올림푸스의 신전들을 파괴했던 것은 단순히 심기가 거슬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들이닥칠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라도, 한시라도 빨리 올림푸스의 영역 효과를 제거해야 했으니까.

"······."

한편, 올림푸스의 신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자신들에게 반기를 드는 인간은 처음 본다는 듯이.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한 놈들이 싸늘한 표정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의견이 좁혀질 여지는 없는 것 같군."

먼저 나선 것은 푸른색 머리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였다.

스스로를 '포세이돈'이라 소개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금빛 삼지창을 '척'하니 겨눴다.

탁 트인 벌판이었던 탓에, 놈의 무기랄 만한 물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가라, 미노타우로스."

환하게 그려진 마법진 위로, 3미터쯤 되는 거대한 체구의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소환되었다.

쿵! 쿵!

우리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미노타우로스.

그런 녀석을 막아세운 것은······. 

콰아아앙!

"이 녀석은 제가 맡겠습니다."

다름 아닌 이용수의 기간트였다.

우어어어어어!

푸시이이이이이-!

타아앙!

양쪽으로 맞붙은 손바닥.

미노타우로스의 근육이 씰룩거릴 때마다, 맞은 편에 선 기간트가 거친 증기를 뿜어냈다.

딱 봐도 만만치 않은 미노타우로스의 완력이었지만, 기간트도 그에 못지않았다.

제임스와 드워프들에 의해 꾸준히 개량이 진행되어 온 기간트였으니까.

'족쇄'가 이용수의 발목을 잡고 있기는 했지만, 기간트에게까지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이용수는 압도적인 컨트롤을 이용해 족쇄의 저주를 상쇄시켰고, 그 결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기간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꾸준히 공방을 이어 나간 결과······.

타아아아앙!

마침내 기간트의 주먹이 미노타우로스의 안면을 강타했다.

쿠당탕!

탕!

바닥을 구르는 미노타우로스.

이용수는 흙먼지에 싸인 놈을 보며 나지막이 덧붙일 뿐이었다.

"아서라, 너는 헤매는 데 전문이겠지만······ 나는 찾아가는 데 전문이거든."

"우어어어어어어!"

미노타우로스는 포효했지만, 좀처럼 승기를 가져가지 못했다.

그가 영원한 미궁 세계의 주민이었다면, 이용수는 그 미궁 속에 지점, 지점마다 강철 주먹을 배달하고 있었으니.

매마른 땅에서 유일한 전력을 불러냈던 포세이돈이 땅으로 삼지창을 내동댕이쳤다.

한편······.

"그냥 적당히 협조해 주면 안 돼?"

자신을 '아프로디테'라고 소개한 올림푸스의 여인.

그녀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며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교태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누구 좋으라고?"

"좋을 게 뭐가 없어? 말만 잘 들으면 내가 좋은 선물을 줄 텐데."

입술을 핥으며 은근슬쩍 어깨끈을 늘어뜨리는 그녀.

끈적한 말투에는 그녀의 각성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다.

말끝마다 귓가가 저릿하게 따끔거렸고, 몸이 무거워지는 것과 함께 서서히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좀 귀찮겠는데.'

알게 모르게 그녀의 말에 복종하고 싶어지는, 틀림없는 '현혹'의 효과.

세뇌를 벗겨내기 위해 머리라도 포탈에 넣었다 빼야 할지 고민이 되려던 찰나······.

"······다, 닥쳐 골빈 년아!"

"······뭐?"

리디아가 디버프가 실린 독설로 아프로디테의 현혹을 말끔하게 날려 버렸다.

"······너 뭐라고 했니?"

아프로디테의 눈길은 매서웠지만, 리디아는 멈추지 않았다.

'니들 옷 개 구리다'는 말을 시작으로, '우리 증조할머니도 니들처럼은 안 입겠다'와, '나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못 돌아다닌다'는 말로 연달아 타격을 입히며 아프로디테의 현혹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그만······! 그만해!"

기다란 가발을 떨어뜨리며, 머리를 쥐어뜯는 아프로디테.

발가벗겨진 콘셉트질의 후폭풍에 의해, 올림푸스의 세력들이 하나같이 디버프에 휘감겼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명령했다.

"다 필요 없어! 저놈부터 노려!"

신전을 부쉈다며 가장 먼저 버럭 소리를 질렀던 놈이었다.

올림푸스 세력의 중심에 있던, 미루어 짐작하기론 제우스에 해당할 녀석.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대 튜닉을 입은 올림푸스의 신격들이 다 같이 내게 달려들었다.

"정겸 씨!"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하고 있던, 이용수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다방면으로 들어오는 공격이었다.

족쇄에 묶여 있는 한, 포탈로 들어가 몸을 숨길 수도 없는 상황.

확실히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출하."

그만큼 나 또한 손속을 봐주기가 어려웠다.

콰아아아아앙!

타아앙!

"커어어억!"

"끄흑!"

"어으윽!"

주변으로 H형강과 성창, 그리고 불타는 볼링공 따위를 미친 듯이 던져댔다.

놈들이 거대한 형강과 함께 흙먼지처럼 쓸려나갔고, 날아든 성창에 팔다리가 꽂혀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가까이 오지 마. 무서우니까."

사방으로 무기를 뿜어낸 푸른색 포탈들이 팽그르르 자리를 맴돌았다.

놈들이 몇 위계를 두르고 있는지는 몰라도, 접근을 허용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이······ 무슨!"

사방에 널브러진 채, 곡소리를 내는 아폴론, 디오니소스, 헤르메스 등등.

저마다 굵직한 분량을 차지하는 유사 그리스 촌극의 주인공들이 취객처럼 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원거리 공격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두 팔을 하늘 높이 처들은 제우스가 나를 향해 주먹을 뻗었고,

삐잉-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주변을 삼키는 강력한 전격.

땅을 태운 매캐한 연기가 먼지와 함께 나를 집어삼켰다.

그 속에서 제우스가 가만히 조소를 흘렸다.

"······심판이다. 인간."

강하게 흔들리는 지축.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놈들이 제우스의 이 원거리 광역기를 가장 큰 무기로 삼아 왔었다는 걸.

실로 아찔한 공격이었지만······.

"뭘 이 정도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벼락이라는 이름답게, 하늘로부터 수직으로 떨어지는 공격.

그 위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포탈을 우산처럼 펼쳐두는 것만으로도 완벽히 막아낼 수 있었으니까.

쐐애애액!

"······욱!"

날아든 성창이 제우스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슈우우욱!

슈우욱!

마저 날아든 두 자루의 성창이 놈의 양쪽 팔을 꿰뚫었고,

"허억······ 헉······."

놈은 땅에 처박힌 채 가만히 숨을 헐떡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 아래와 옆에서 솟구쳐 들어간 죽창.

그 날카로우면서도 비스듬한 각도가 신의 날개를 황량한 땅에 핀처럼 꽂아 넣었다.

후우웅!

후웅!

쓰러진 올림푸스의 신들 위로, 죽은 신들의 살점을 노리는 수십 자루의 성창이 까마귀처럼 맴돌았다.

"······."

그렇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을 즈음이었다.

"허으으으어어윽!"

난데없이 부르르 발작을 일으키는 '제우스'.

그의 눈이 푸른색 섬광으로 물들었다.

"······이제야 진짜 적임자를 찾았군."

또 다른 제우스의 목소리와 함께.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4)

113화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4)

휘이이······.

머리를 쓸어 넘기는 적막.

그 가운데 놓인 것은 정체불명의 안광으로 뒤덮인 제우스의 모습이었다.

"아주 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의도하지 않게 좋은 구경을 했어."

날렵한, 하지만 그러면서도 깊이감이 묻어나는 목소리.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찌이이이······.

찌이익.

놈이 팔을 움직였다.

그러곤 양팔과 옆구리를 관통한 기다란 창대로부터 천천히 몸을 꺼냈다.

고통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후우."

자리에 남은 것은 피로 물든 세 자루의 성창뿐이었다.

놈의 양 팔과 옆구리는 너덜너덜하게 벌어져 있었지만, 무슨 수를 쓴 것인지 피가 쏟아져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출하.'

쐐애애액!

곧장 새 성창을 날려 보냈다.

5단계까지 강화된 성창이 놈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갔지만······.

티이잉!

놈의 살갗을 뚫지 못한 채, 보란 듯이 옆으로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그새 위계가 올라갔다고?'

그것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놈을 손쉽게 요리하던 무기였으니까.

날아들었던 공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놈이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나는 제우스라고 한다."

간단한 소개.

하지만 동시에 종잡을 수 없는 소개였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푸른 안광을 끔뻑거린 제우스가 말을 이었다.

"이 몸의 주인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걸 말해 줘야겠군. 나는 본산에 속한 직계 4대손 제우스다. 이제 좀 알겠나?"

"······전혀 모르겠는데. 그럼 얘들은 뭐였는데?"

제우스와 한 차례 눈을 마주한 나는, 멀찍이 널브러져 있는 올림푸스의 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주변을 둘러본 제우스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야······ 다차원에 넓게 흩뿌려진 올림푸스의 가맹(加盟)들이지. 우리가 자손 번식에는 나름 진심이거든."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두 가지는 확실했다.

'올림푸스'가 복잡하게 꼬인 개 족보라는 것.

그리고 이 우주에 수천, 수만의 제우스가 존재하리라는 것.

일단은 신중하기로 했다.

방계 제우스의 몸을 타고 들어온, 직계 4대손 제우스.

이 햄스터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으니까.

"흠······."

나와 이용수, 그리고 리디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우스가 입을 열었다.

"저 친구는 마차 끄는 일을 하니 헬리오스가 좋겠고······ 저 입 매운 여인은 아테나가 제격이겠군. 어떤가? 너희도 우리 올림푸스의 일원이 되는 건? 나름 가족 같은 분위기의 좋은 일자리라고."

올림푸스는 우리를 원하고 있었다.

남유럽의 각성자들처럼, 또 하나의 n번째 올림푸스를 만들려는 심산.

그 힘을 빌리면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고, 바다를 가르는 것과 같은 신들의 힘을 다루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미안하지만 가족 회사라면 이미 하고 있어서. 족보도 너네보다 훨씬 깔끔하고."

힘을 빌릴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팍스FC의 힘으로 올림푸스를 찍어누른 상태였으니까.

대답을 들은 제우스가 너덜거리는 팔로 머리를 긁었다.

"······끄응. 문화의 차이를 모르는군. 그래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

"어쩔 건데? 한 판 뜨기라도 할 거야?"

"아쉽게도 그럴 만한 상황은 못 된다. 나는 지금 그저 마이크를 빌린 것뿐이니까. 그래도······ 방법이 영 없는 건 아니야."

제우스가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결과······.

[올림푸스의 영역에 들어와 있습니다.]

[영역효과, '프로메테우스의 족쇄'가 강화됩니다.]

"······!?"

까드드드득!

수백 킬로그램짜리 추를 단 듯, 무거워진 발이 땅을 단단하게 파고들었다.

무겁게만 느껴지던 족쇄.

하지만 놈에 의해 강화된 뒤에는 아예 미동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의 공간이 길게 세로로 왜곡되었고, 그 중심부 터로부터 붉은색 파장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결과······.

'게이트 포탈······?'

곧 이어질 몬스터 웨이브의 통로.

그 붉은색 게이트가 눈앞에 보란 듯이 생겨났다.

눈을 마주치자, 제우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만든 거 아니다. 뒷돈 조금 찔러넣었을 뿐이지."

상공회의소가 지구에 만든다던 200개의 포탈.

제우스의 조작에 의해 그중 하나가 내 눈앞에 생겨난 참이었다.

지지지직······.

파드득!

공교롭게도, 상공회의소에 의해 예고된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새빨간 게이트.

그 시점을 똑딱거리며, 두 팔을 늘어뜨린 제우스가 말했다.

"올림푸스의 자녀가 될지 말지는 천천히 생각해 봐라. 가만히 서서 웨이브를 막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테니."

옴짝달싹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공간 포탈을 이용한 탈출도 불가능한 상황.

당장에 들이닥칠 저글링쯤이야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곤 하더라도, 웨이브의 난이도가 점차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내가 문제가 아니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한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 미국과 유럽 등지에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될 몬스터 게이트.

나름 방비하고 왔다곤 하지만 머지않아 내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올 테니까.

"그럼,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제우스는 너덜거리는 두 팔을 휘저으며 떠나갔다.

그러곤 혼절한 채, 바닥에 널브러진 올림푸스의 신들을 끌어모아, 그 위로 구름처럼 생긴 은은한 장막을 둘렀다.

곧 이어 들이닥칠 웨이브 중에도, 자신의 가맹만큼은 보호하려는 모양이었다.

"정겸 씨!"

그새 미노타우로스의 목숨을 끊어낸 이용수.

두 발이 묶였음에도, 조작 방법을 변경한 그가 기지를 발휘해 기간트를 운용했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리디아를 데리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멀찍이 떨어진 제우스와 올림푸스의 세력들을 의식하며, 떠듬떠듬 내게 목소리를 전해왔다.

"정겸씨, 제가 저놈을 처리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족쇄도 분명······."

"아뇨, 그래도 이건 안 풀릴 거예요. 애초에 쟤를 죽일 수도 없고요."

마이크에 불과하다곤 했지만, 5강 성창으로도 죽일 수 없었던 제우스다.

이용수의 기간트로 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한 상황.

더욱이, 족쇄의 원인은 그가 아니었다.

주변 곳곳에 퍼져 있는 올림푸스의 신전.

그렇게 형성된 '올림푸스의 영역'이 내게 족쇄를 부여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방법은 두 가지뿐이에요."

'올림푸스의 영역'을 형성하는 신전들을 모두 파괴하는 것.

혹은 제우스의 말에 따라 올림푸스의 일원이 되는 것.

하지만 신전을 파괴하러 다니자니 두 발이 꽁꽁 묶인 상태였고, 난데없이 올림푸스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 또한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 어떡하죠?"

기간트에서 머리를 내민 채, 망부석이 된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용수.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걱정을 덜어줄 만한 시간이 없었다.

"준비하세요. 옵니다."

붉은색 게이트 포탈이 몬스터를 토해내기 시작했으니까.

3차 자유 개척, 몬스터 웨이브의 시작이었다.

***

카가각!

카가가가각!

이용수의 기간트가 내 후방을 감싼, 임시 방편의 진형.

그 앞으로 천 마리의 저글링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콰아아아앙!

투두두두두!

다가오는 놈들을 향해 수십, 수백 발의 강화된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했고,

이따금 빠져나오는 놈들을 이용수와 리디아가 소총으로 마무리했다.

아주 어렵지는 않은 상대.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이건 고작 튜토리얼에 불과했으니까.

"계속해서 나오네요······."

질린다는 듯 이용수가 말했고, 리디아 또한 이마를 부여잡았다.

저글링으로 구성된 웨이브가 끝나자마자, 1, 2, 3차 웨이브가 연달아 이어졌다.

고블린, 오크, 트롤.

마찬가지로 1천 마리를 채운 괴물들이 그 순서를 이었고, 매 단계가 거듭될 때마다 적들의 수준이 차츰 올라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푸욱!

성창이 마지막 남은 트롤의 목을 꿰뚫을 때까지, 이렇다 할 위기는 없었다.

그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우리를 관망하고 있는 제우스가 신경 쓰였을 뿐.

5차, 6차, 아니 10차 웨이브가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막아낼 자신이 있었지만, 정작 문제는 우리가 아니었다.

"······한국은 괜찮을까요?"

이용수가 걱정스레 물었고, 리디아 또한 근심어린 표정이었다.

용산은 물론, 프라하에도 몬스터 웨이브가 진행되고 있을 테니까.

"······그러길 바라야죠."

가족들에게서는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무소식을 희소식처럼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

여러모로 최대한 빨리 올림푸스와의 상황을 일단락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곧 만나게 될 겁니다."

불안해하는 이용수와 리디아를 격려하며, 우리는 신중하게 4차 웨이브를 기다렸다.

"이상하네요. 이번 쉬는 시간은 유독 긴 느낌이······."

그렇게, 묘한 적막이 흘러갔을 즈음.

마침내 4차 웨이브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종류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매번 천 마리씩 몰려오던 때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쿠웅.

쿵.

"······한 마리?"

단 한 마리뿐이었다.

지축을 울리며 걸어오는 거대한 체구의 오우거.

놈의 온몸에는 두꺼운 철판이 비늘처럼 뒤덮여 있었다.

우리는 황당함에 몸을 떨었다.

"······보스 스테이지까지 있다고?"

우어어어어어어어-!

강철을 두른 오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카아아아앙!

티잉!

이용수의 기간트가 놈의 주먹을 다급하게 막아 세웠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기간트의 양팔이 외장갑을 튕겨냈다.

꽈드드드득!

아슬아슬한 대치 상태.

하지만 균형은 명백히 오우거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용수가 다급하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정겸 씨. 이 수준이라면 용산에 설치된 포탑도 가볍게 날려 버릴 겁니다."

여기에만 오우거가 나타났을 리 만무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몬스터 웨이브이니만큼, 지금쯤 팍스FC 휘하의 다른 단체들에서도 충돌이 벌어졌을 터.

3차 웨이브까지라면 몰라도, 이제 슬슬 위기에 봉착한 지역이 속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조금씩, 입이 말라오려던 찰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군."

먼 여행을 떠나보냈던 카멜롯의 망령들이 마침내 내게 돌아왔다.

그들에게 올림푸스의 신전들을 찾아내라 일러둔 터였으니까.

"찾았어?"

"빠짐없이 찾았습니다. 마지막 신전 하나를 동굴 속에 숨겨두었더군요. 그것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좋았어."

마침내 걱정거리가 사라진 상황.

나는 강철 비늘로 팅팅 성창을 튕겨내는 오우거를 향해 H형강을 출하했다.

까앙!

까아앙!

까아아아앙!

한 개, 세 개, 아홉 개 혹은 그 이상까지.

떨어진 형강을 로 다시금 회수해 가며, 강철을 두른 오우거를 곤죽이 될 때까지 짓이겼다.

쿠우우우······.

무너진 공사장처럼 쌓여있는 수십 개의 쇳덩어리.

그 아래로 거대한 몸집의 오우거가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한 제우스.

놈이 우리에게 다가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걸어다니는 병기고가 따로 없군. 아무래도 조건을 바꿔야겠어."

그러곤 여전히 너덜거리는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단순히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본산의 직계로 넣어줄 테니······ 아예 내 아들이 되는 건 어떤가?"

"그딴 거 안 한다니까."

파격적이면서도 뜬금없는 입양제의.

내 단호한 거절에, 제우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대체 왜 고집을 부리는 거지? 어차피 넌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웨이브는 계속될 거고, 아무리 너라고 한들 언젠가는 숨이 끊어질 테니. 그에 비하면 올림푸스의 가계로 들어와 천수를 누리는 게 백번 나은 일이 아닌가?"

놈의 말대로였다.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고, 웨이브에서는 점점 더 강한 괴물들이 건너오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발이 묶여 있는 한에서였다.

"이제 막 배송 출발했거든."

지이이잉!

등 뒤로 열리는 여덟 개의 포탈.

그로부터 언데드가 된 가고일 백여 마리가 와르르 날아올랐다.

"······저건?"

제우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고일들의 손에는 저마다 '헬파이어' 미사일이 들려 있었으니까.

망령이 된 기사들이 곳곳에 숨은 올림푸스의 신전들을 빠짐없이 확인하고 온 참.

제우스가 방비에 나서기 전, 단번에 수십 개의 신전을 폭파할 작정이었다.

"······안 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제우스가 구름 방벽을 세워 가고일들의 진로를 막아 세웠지만······.

퍼득.

퍼드득.

백여 마리에 달하는 가고일은 유유히 경로를 피해 신전이 세워진 곳곳으로 뻗어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뻐어어엉!

뻐어엉!

멀찍이 하늘로부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폭탄이 투하되고, 하나둘 신전이 사라질 때마다, 내 발을 묶은 족쇄는 느슨해졌고, 제우스의 푸른 안광 또한 조금씩 흐릿해졌다.

상태창으로부터 올림푸스의 영역이라는 낱말이 사라졌고, 쓰러져 있던 남유럽 각성자들 또한 두르고 있던 올림푸스의 기운을 서서히 토해냈다.

이제야 비틀비틀 몸을 휘청거리기 시작한 제우스.

사라질 듯 말듯, 마지막까지 짜낸 힘으로 놈이 내게 말했다.

"아쉽게 됐구나. 다음에 꼭 데리러 오지."

콰아아아앙!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으로는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히말라야산맥 곳곳으로 수십 개의 불기둥이 새카만 먼지구름을 만들어냈다.

오래된 형광등처럼 꺼질 듯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제우스.

땅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는 거센 불길을 바라보며, 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렇군. 너는 프로메테우스였는가."

"그딴 거 안 한다고······."

풀썩.

제우스가 쓰러졌고,

차르륵!

내 발을 붙잡고 있던 족쇄 또한 감쪽같이 사라졌다.

"바로 가죠."

곧장 이용수와 리디아를 불러세웠다.

이제 괴물들의 파도와 마주했을 가족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으니.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5)

114화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5)

이곳은 용산에 있는 합동참모본부.

한강대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포탈 이래로, 운양이 인사를 건넸다.

"그럼, 무사히 다시 뵙죠."

"그러지요. 조심하시구랴."

운양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정겸의 아버지.

운양과 무림인들은 북경과 상해, 두 곳에서 진행될 두 개의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 위해 서울을 떠나는 참이었다.

지잉.

정겸이 설치해둔 포탈을 타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사라지는 무림인들.

일견 신비로워 보이는 그 모습을 정겸의 아버지와 김솔이 공연히 바라보았다.

"이젠 정말 다들 한 식구가 됐구나."

아버지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멸망이 들이닥치고, 아공간 물류센터가 '집'으로 자리매김한 다음이다.

그들의 집과 마당은 무한정 넓어지고 있었고, 가족, 이웃이라 부를만한 존재들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가만히 귀를 후비고 있던 김솔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뭐, 다들 제 집들 지키러 갔지. 이젠 다 우리 앞마당 아니겠냐."

정겸이 유럽으로 건너간 동안, 남은 팍스FC의 일원들은 저마다 방어해야 할 지역들을 배분했다.

팍스FC가 점유하고 있는 지역 중, 붉은색 포탈이 발견된 장소는 총 열일곱 곳.

한국과 일본이 각각 둘, 미국과 유럽이 각각 넷, 중국이 다섯 곳이었고, 마지막으로 엘븐하임에도 몬스터 웨이브의 징조가 포착됐다.

"잘들 할 거야. 다들 쟁쟁한 사람들이니까."

비교적 사람이 적은 중국과 미국, 그 밖의 몇 개 도시에 대피령을 내렸고, 열일곱 지역 중 방어지역을 열 한 곳으로 좁혔다.

한국의 지역대표들, 그리고 각국의 각성자들이 저마다 국토를 수호하러 떠났고, 엘프와 드루이드들이 엘븐하임을 방어하는 한편, 김솔과 아버지는 용산을 방어하기 위해 남은 참이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막아야 한다는 거지?"

"저기 군인들이랑 성기사들이 도와준다더구나."

정겸의 아버지가 턱짓하자, 강화된 소총으로 무장한 합참의 군인들, 그리고 커다란 '전투 망치'를 들쳐 멘 팍스맨 성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겸이 떠나간 이후 홀로그램에 불과했던 포탑들 대부분이 완성됐으니까.

그 종류도 다양했다.

소총수들을 지켜줄 벙커부터, 화염방사기가 부착된 스플래시 포탑, 기둥처럼 굵직한 창을 발사하는 발리스타에, 적을 얼어붙게 만드는 특수 포탑까지.

그동안 레벨업을 거듭해온 성과가 한강대로를 기준으로 트로피처럼 세워져 있었다.

"근데 아부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김솔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포탑이 건설되는 동안, 이미 수차례 홀로그램을 띄워 직접 맞붙어본 그녀였다.

튜토리얼 웨이브를 비롯해, 지금까지 상공회의소 시설에 의해 충분히 예고된 적수들.

합참의 군인들과 함께 실험해 본 결과, 저글링으로 시작해 고블린, 오크, 트롤에 이어지는 총 네 번의 웨이브는 다소 버겁기는 해도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것 정도론 안 돼. 아주 편하게 이긴 것처럼 보여야지."

'······왜?"

"정겸이가 보면 걱정할 거 아니냐."

그러곤, 몇 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그거 기억나? 정겸이가 수능 끝나고 친구들이랑 배낭여행 간다고 나갔다가······ 너 몸살 났다고 그래서 집에 돌아왔었잖아."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걱정이 됐던 거지. 그때 집에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돌봐주긴 개뿔, 들어와서 잠만 자더만?"

딱히 병간호를 해 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집에 돌아왔을 뿐.

오히려 다음날 김솔이 씻은 듯이 낫자, 정겸은 천하의 김솔을 걱정하다니 자신이 어리석었다며 후회막심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하여간 고놈 시끼는······."

지금 떠올려도 열이 받친다며, 김솔이 한창 미간 주름을 잡으려던 찰나.

아버지가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솔아. 정겸이는 세상이 무너지건 말건 가족부터 챙길 놈이야. 실제로도 그랬고."

"아직 철부지라 그렇지."

"그러니 우리도 제 몸하난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겸이가 편하게 쉬든, 밖으로 나돌아다니든 할 거 아니냐."

공교롭게도 졸업여행을 떠났던 어느날 처럼, 이곳에는 정겸이 없었다.

곧 이어질 괴물들의 파도를 예고하며, 붉게 타오르는 게이트 포탈.

김솔과 아버지는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카가가각!

카가각!

본격적인 웨이브가 시작됐다.

좁은 게이트 포탈을 비집고, 쏜살같이 빠져나오는 저글링 무리.

이를 향해 합참의 병사들이 강화된 탄환을 미친 듯이 쏟아부었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저글링의 살갗을 찢으며, 때로는 불길을, 때로는 얼음을 피워내는 강화 탄환.

자그마치 천 마리에 달하는 저글링들이었지만, 단단한 벙커의 장갑이 병사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있었기에 그 발톱이 병사들을 할퀴는 일은 없었다.

케에에······.

이윽고 천 마리의 고블린이 나타났다.

총탄은 여전히 유효했으나, 영악한 고블린들은 포복하거나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방패 삼아 차근차근 한강대로를 뒤덮어갔다.

놈들이 벙커 주변을 빼곡이 에워쌌을 즈음······.

쏴아아아!

화르르륵!

포탑이 길게 쏘아낸 화염이 고블린들을 단숨에 불살랐다.

웨이브는 곧장, 계속해서 이어졌다.

방패와 갑옷으로 무장한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쿠어어어어!

더 강한 위계와 방패를 앞세워, 날아드는 화염과 총탄을 가뿐하게 막아냈다.

놈들이 한 발 한 발, 길목을 거슬러 올랐지만······.

쐐애애애액!

타아앙!

폭탄처럼 날아든 발리스타의 쇠창이 오크들의 방패를 꿰뚫는 한편, 이어진 총격이 오크들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마지막 3차 웨이브로 나타난 트롤들도 동일한 전철을 밟았다.

총탄을 튕겨낼 만큼 질긴 가죽, 그리고 발리스타의 쇠창을 쳐낼 만큼 강한 순발력과 완력을 지닌 트롤들이었지만······.

"가자! 다 끝나간다!"

"와아아아!"

합참 본부의 두꺼운 철문을 박차고 나온 김솔,

그리고 커다란 망치를 든 팍스맨 성기사들이 트롤들의 길을 막아 세웠다.

타앙!

콰아앙!

커다란 몽둥이와 성기사들의 망치가 비등비등하게 뒤엉키는 듯했으나······.

포탑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트롤들의 몸을 굼뜨게 만들었고, 연이어 날아든 주먹과 망치에 무두질이 된 트롤들이 피를 토하며 납작하게 죽어갔다.

피 칠갑이 된 저글링과 검게 그을린 고블린, 온몸이 벌집처럼 뚫린 오크들과 푸른 반죽이 되어 버린 트롤들까지.

정겸의 가족과 팍스맨들로 이루어진 방어선은 강고했고, 그 결과 형형색색의 사체들이 한강대로를 빼곡하게 장식했다.

"후우······."

김솔이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 남은 트롤 한 마리를 고스란히 깔아뭉갠 참이었다.

좀처럼 괴물을 뱉어내지 않는 게이트 포탈을 바라보며, 천천히 평화로운 적막을 만끽하려던 찰나,

쿠웅.

쿠웅.

불길한 발걸음이 붉은색 포탈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온몸을 비늘 갑옷으로 두른, 거대한 오우거였다.

다시 몸을 일으킨 김솔이 퉤하고 침을 뱉었다.

"······하여간 그러면 그렇지."

잊고 있었다.

세상일이란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걸.

멸망이 들이닥치고, 정겸과 재회한 이후로 오히려 줄곧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같이 세지면 좀 좋아? 지 혼자 사기 스킬 얻어 가지곤."

거의 모든 부분을 정겸에게 기대고 있었다.

아공간 물류센터의 복제 능력이 더없이 풍족한 자원을 보충해 주었고, AI팍스가 공격부터 보급까지 자잘한 수고를 도맡아 해결해 주었으니까.

타앙!

탕!

오우거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발리스타의 쇠창을 튕겨냈다.

길게 방사된 화염을 귀찮다는 듯 흩어 버렸고, 성기사들의 망치 또한 별달리 힘을 쓰지 못한 채 겹겹이 쌓인 쇠 비늘을 파르르 울릴 뿐이었다.

"······빡세네."

정겸이 사라지자마자, 금세 다시 멸망으로 물들어 버린 세상.

착잡한 마음을 뒤로한 김솔이 발돋움했다.

콰득!

포탑의 외벽을 박차 날아올랐고,

오우거의 팔뚝에 올라타, 그 거대한 몸체를 산처럼 타고 올라갔다.

쐐애애애액!

타아앙!

몸에 달라붙은 벌레를 쫓듯, 육중하게 날아드는 오우거의 손길.

하지만 무공서를 통해 얻은 보법을 밟고, 배리어로 그 충격을 상쇄시켜가며 빠르게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빈틈이 없네."

오우거의 몸 곳곳을 돌아다닌 김솔이 포기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곤 오우거의 목덜미를 덮은 강철 비늘을 움켜쥐었다.

꽈드드드득······.

두꺼운 나무뿌리처럼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는 비늘.

쿠어어어어어어!

고성이 들려왔고, 벼락처럼 떨어지는 손바닥을 몇 번이고 피해냈다.

그녀를 떨어내기 위해 오우거가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지만······.

콰득!

악착같은 힘을 발휘해 강철로 된 비늘을 찌그러뜨렸고,

둥글게 말린 비늘을 손잡이처럼 움켜쥐었다.

더 이상 어깨에 붙은 김솔을 떼어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오우거.

전략을 수정한 놈이 대뜸 한강대로를 내달렸다.

두두두두두두!

타앙!

퍼어엉!

총탄이, 쇠창이, 폭탄이 날아들었지만, 그 무엇도 오우거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쿵쿵!

쿵쿵!

자신을 공격하는 벙커와 포탑들을 무시한 채, 맹렬히 돌진을 이어 나가는 오우거.

놈이 합참 본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솔이 아연실색했다.

"······거기다 박으면 곤란한데?"

명실상부 팍스FC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분명 머지않아 정겸이 돌아오겠지만, 이대로라면 반파된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본부 건물을 보게 될 터.

웨이브를 말끔하게 처리해 녀석의 걱정을 지워 버리자던 아버지의 구상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결과였다.

"안 되지. 안 돼."

자동화된 물류센터처럼, 모든 일이 쉽게 쉽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자고 일어나면 놓여 있는 마법 같은 택배 상자처럼, 세상이 그렇게 저절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세상이 요지경인데, 집구석이라도 멀쩡해야지."

김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야 철부지 김정겸이 걱정 없이 밖을 쏘다닐 테니까.

쐐애애애액!

바람에 나부끼는 짧은 머리칼.

김솔이 다시금 힘을 주어 강철 비늘을 뒤집었다.

까드득!

그 아래로 울긋불긋한 오우거의 살점이 드러났다.

곧장 허리춤에서 꺼낸 단검을 찔러넣어 봤지만······.

콱콱!

오우거의 척력을 뚫어낼 수는 없었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모골이 송연해졌다.

얼마 전 7위계를 달성한 김솔.

그녀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오우거가 더 높은 위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쐐애애애액!

합참 본부의 성채가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머지않아 충돌이 예견된 상황.

그러던 중, 김솔이 발견한 것은······.

"······아빠?"

직접 포탑에 설치된 발리스타를 당겨, 오우거에게 성창을 겨누고 있는 아버지였다.

각성 능력을 이용해 건설한 포탑이었기에, 정겸이 강화한 성창과는 규격이 맞질 않았다.

자동 발사가 불가능하거니와, 명중률이 심하게 떨어진다는 걸 함께 확인했던 터.

하지만 아버지는 수동으로 시위를 당기며 억지로 오우거를 겨냥하고 있었다.

"아오!"

그녀가 재빨리 움직였다.

암벽등반을 하듯 오우거의 목을 타고 옆으로 넘어갔고, 목젖 부분을 덮은 비늘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쿵! 쿵!

오우거의 움직임에 따라 뒤틀리는 시선.

들이닥친 멀미를 가까스로 몰아낸 김솔이 손끝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결과······.

콰아아앙!

증폭된 '배리어'가 폭발을 일으켰고, 김솔이 비늘과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서둘러 뿜어낸 장막으로 충격을 흡수한 김솔.

그녀가 목격한 것은······.

"······잡았다."

성창에 의해 목이 꿰뚫린 채, 허물어져가는 거대한 오우거의 모습이었다.

***

고작 10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오래되지 않아 정겸이 용산으로 돌아왔다.

방금까지 전투를 치르다 온 것인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그.

싸늘하게 죽은 오우거 위에 앉아, 충분히 숨을 고른 김솔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뭘 그렇게 허겁지겁 들어오냐? 사내새끼가 간이 콩알만 해가지고."

정겸이 그녀의 등 뒤로 놓인 오우거의 사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뭐야, 어떻게······ 잘 잡았네?"

정겸의 얼굴에서 진한 안도감이 묻어나왔다.

걱정을 끼치지 말자던, 아버지의 바람이 달성된 순간.

하지만 어쩐지 열이 뻗쳐 오른 김솔이 힘이 다 빠진 주먹으로 정겸에게 알밤을 쥐어박았다.

빠악!

"아!"

"이눔 시끼가 지금 몇 시인데 이제 들어와?"

"갑자기 왜 이래?"

김솔이 모른 척 덧붙였다.

흥건하게 흘렸던 땀이 그새 다 말라 있었으니까.

"몰라 이 새끼야."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6)

115화 신전 부수기와 타워 디펜스 (6)

슈욱!

곧장 포탈을 타고 넘어갔다.

용산에서 가족들과의 해후를 마쳤지만, 다른 지역에서 몬스터 웨이브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니까.

서울, 상하이, 엘븐하임 등등은 어렵지 않게 웨이브를 막아냈지만, 부산, 시카고, 오사카 같은 대다수의 도시에서는 아직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겸 씨!"

"됐다! 이겼어!"

곧장 포탈을 타고 넘어가 화력을 지원했고, 내가 나타나자마자 가까스로 웨이브를 막고 있던 각성자들이 쾌재를 내질렀다.

쐐애애액!

까아앙!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괴물들의 파도.

성창을 발사해 트롤들의 살갗을 꿰뚫었고, 형강을 쏟아 거대한 오우거를 반죽처럼 눌러버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일행들이 지키던 열한 곳의 전투를 모조리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예 방치된 구역도 있다는 거죠?"

"네. 인구도 적고, 특별히 중요한 시설이 있는 곳도 아니라······ 물론 사람들은 모두 대피시켜둔 상태입니다."

일행들이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 아예 텅 비워둔 남은 여섯 개의 도시.

그 나머지까지 모조리 청소를 마친 뒤, 나는 의 방식을 나름대로 유추할 수 있었다.

"꼭 저들끼리 같은 편은 아니었구나."

1차, 2차, 3차로 나뉘어 들어오는 몬스터 무리는 완전히 별개의 세력들이었다.

예컨대 웨이브를 타고 들어온 고블린들이 점령에 성공했다면, 다름 아닌 그들이 다음 차례로 들어오는 오크들을 방어해야 하는 형태.

대부분은 주변이 쑥대밭이 된 채, 오우거 한 마리만 덜렁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따금 트롤이나 오크들이 최종 승리자가 된 곳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 나가주셔야지."

트롤이 남든, 오우거가 남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모두 하나같이 내가 던진 성창에 머리가 꿰뚫린 채, 생을 달리했으니까.

그렇게, 몬스터 웨이브는 잠시 휴식기에 접어든 듯 보였다.

아공간에 수용된 상공회의소 시설을 통해서도, 당장에는 아무것도 조회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레드 게이트, 그러니까 붉은색 게이트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언제든 또다시 새로운 적들이 밀려들리라는 사실을 짐작게 한 채.

.

.

.

몬스터 웨이브와는 별개로 한 가지 일이 더 남아 있었다.

리디아를 따라 넘어갔던 중부 유럽.

산맥 곳곳에 깔린 신전들을 파괴하는 한편, 올림푸스의 신을 코스프레하는 컨셉충 각성자들을 박살 낸 참이었으니까.

나름 멸망한 세상에 적응한 각성자들답게, 올림푸스의 각성자들은 제법 쓸 만한 장비들을 가지고 있었다.

"차례로 아스트라페······ 트라이던트······ 아이기스······ 이런 이름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볼 수 있었던 거창하기 짝이 없는 이름들.

하지만 실상은 남유럽 각성자들이 괴물을 처치하던 중 얻은 전리품에, 제우스 4센지 4센티인지 하던 놈이 특수한 효과를 부여해준 아이템에 불과했다.

"······이젠 하다 하다 아이템까지 코스프레냐."

그 배경이 어떠했건, 세 가지 모두 나름 '에픽'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부여된 효과를 면밀히 살펴본 나는, 나름 어울리는 동료들에게 아이템을 배분했다.

"받으시고······."

"감사합니다, 주군!"

전격 능력을 증폭시켜주는, '아스트라페'라는 이름의 피뢰침처럼 생긴 단검은 전기 채찍을 사용하는 카멜롯의 기사, 라이오넬에게 넘겼고,

"또 받으시고······."

"허허, 이거 재밌는 물건이군요. 꼭 마쎄라티 생각이 나는데요."

지나치게 길고 두꺼웠던 탓에, 정작 포세이돈에게는 기우제 지팡이로 쓰이던 '트라이던트'를 기간트를 운용하는 이용수에게 넘겼으며,

"거듭 받으시고······."

"오, 미친 개꿀!"

세로로 길쭉한 커다란 타원모양의 방패, '아이기스'를 팍스FC의 전담 탱커 김솔에게 넘겼다.

어린이날 선물이라도 받은 듯, 깡충깡충 뛰며 한껏 들뜬 세 사람.

옹기종기 모여 기쁨을 나누던 중, 이용수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정겸 씨, 그러고 보니······ 그 올림푸스 각성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걔들이요?"

아이템의 원래 주인들이 궁금해진 모양.

나는 입술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지금쯤 술 깨고 있을 거예요."

***

"허어억!"

깊은 잠에 취해있던 제우스.

화들짝 정신을 차린 그가 자신의 팔과 복부를 연신 더듬었다.

"······살아있네?"

분명 팍스FC와 전투를 벌이던 중, 놈이 쏘아낸 창에 몸통이 꿰뚫렸던 터.

하지만 그새 치료를 받은 것인지,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온통 황량한 논밭이었다.

주변에는 다른 올림푸스의 각성자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하나둘 이마를 부여잡고 미간을 구기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우스가 옆에 쓰러져 있던 포세이돈을 흔들어 깨웠다.

"이, 일어나봐."

"으으······ 이게 무슨 냄새야?"

은은하면서도 구수한 향기.

농촌 특유의 거름 냄새가 그들에게 밀려들고 있었다.

단연코 살면서 전혀 맡아본 바가 없는 냄새였다.

"머리가······ 너무······."

"어디 물 없나? 죽겠네, 진짜······."

이들은 전례 없는 취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올림푸스가 부여해준 '신의 육체'를 믿고 특제 '넥타르'를 걱정 없이 입에 털어 넣었던 그들.

하지만 신전이 모조리 파괴되며 연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돌아왔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강력한 숙취가 전신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아으으······."

그렇게 바닥에 널브러져, 지렁이처럼 흙바닥에 볼을 부비고 있을 즈음······.

"오, 일어났구나?"

누군가 나타났다.

올림푸스의 각성자들은 두 눈을 의심했다.

'엘프······?'

판타지 영화에서나 보던 고귀한 엘프가 그들 앞에 서 있었으니까.

다만, 묘한 이질감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구수한 느낌이 들지? 앞니는 얻다 팔아먹은 거고?'

왜 자신들이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는지, 왜 갑자기 엘프가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올림푸스의 각성자들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엘프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이름은 에단이야. 엘븐하임의 전사장을 맡고 있지. 정겸 씨로부터 너희에 대한 처분을 일임받았어."

각성자들은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이 팍스FC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걸.

꿈처럼 몽롱하기만 했던 어젯밤의 기억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렇지, 우리 졌었구나.'

눈앞에 들이닥친 아득한 현실.

무슨 처우를 받게 될지는 차마 가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무조건 진다.'

눈앞의 엘프가 자신들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올림푸스의 힘을 상실한 상태였으니까.

맞서 싸우는 것은커녕, 도망치는 것조차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불안한 표정으로 처분을 기다리는 그들이었지만······.

에단은 어린아이처럼 맑은 미소로 그들의 마음을 녹여주었다.

"근데 너희······ 온몸에 독소가 가득하네. 이것부터 정화해야겠는데?"

'아아······!'

앞니 빠진 해맑은 미소로 '정화'를 제안하는 엘프.

심각한 숙취로 인해,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낼 듯한 올림푸스의 각성자들이 화색이 되었다.

"조금만 기다려."

에단은 수풀이 우거진, 2-30미터가량 떨어진 수풀로 다가갔고, 거기서 식물의 줄기를 따 길게 길게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그 모양새가 엉성하기는 했으나······ 나름 아름다운 기예라 할 수 있었다.

"그래, 뭐가 됐든 엘프들이야."

"생각보다 친절한데?"

"휴! 살았다, 진짜 죽을 뻔했는데······."

올림푸스의 각성자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들에게 날아든 것은······. 

촤악!

"아악!"

세계수 줄기를 길게 엮어 만든, 에단의 특제 '채찍'이었다.

"자자! 얼른 움직이자! 땀 흘리는 것만큼 독소 빼는 데 좋은 게 없거든."

"······!"

여전히 앞니 빠진 미소를 하고있는 에단.

각성자들의 시선 속, 그 미소가 양옆으로 울렁거리며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너는 돌 큰 거 보이면 주워서 밖으로 빼내! 그쪽 너! 너는 여기 와서 묘목 심어보고."

촤악!

촥!

"아아악!"

아찔한 타격에 허리가 활처럼 휘는 올림푸스의 각성자들.

그들의 이마에서는 구슬땀과 같은 '독소'가 맺혀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 푯말 보이지? 오늘 안으로 저기까지 다 심는 거야."

"저, 저걸 다 말입니까?"

촤악!

촤악!

구렁이처럼 자유자재로 채찍을 휘두르는 에단.

그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정겸 씨가 그러시더라구. 너희가 '일'이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너희가 그렇게 불행한 환경에서 자란 줄 미처 몰랐지 뭐야······ 자, 내가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까······."

사실이 그랬다.

올림푸스의 일원들 모두 부유한 재벌 3세 출신들로, 살아생전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경험이 없었으니까.

낮에는 학교 다니되, 밤에는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삶의 형태였다.

"아, 그런 이야기도 하셨어. 신이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고······."

촤아악!

에단이 채찍을 휘두르며 덧붙였다.

"아악! 인권······! 인권은요······!"

"하하, 무슨 소리야. 사람이 돼야 인권이 있지!"

그들은 깨달았다.

녹읍으로 둘러싸인 구수한 논밭.

그 위에 떠 오른 화창한 미소 속에 지옥이 숨겨져 있었음을.

***

이곳은 엘븐하임의 갈라돈 의회.

창고로 쓰던 공간을 급하게 치웠더니, 취조실 느낌이 물씬 났다.

"들여보내."

덜컹!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한때,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청년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한편, 고된 노동으로 인해 두 다리가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끼이익!

친절이 맞은편 의자를 꺼내주었고, 한껏 의기소침해진 '제우스'가 다소곳이 의자에 앉았다.

"그래, 원래 이름이 뭐였다고······?

"제······ 제리코입니다."

제우스가 아닌, 제리코.

나름 '제' 씨라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었다.

"헉!"

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테이블에는 따끈따끈한 로스트 치킨과 볼로네제 스파게티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고, 내 쪽에는 뜨겁게 달군 뚝배기에 뽀얀 국물의 설렁탕이 놓여있었다.

숟가락으로 딱 맞게 토렴 된 밥알을 건져 올리고, 그 위로 싱싱한 깍두기를 얹었다.

입안 가득 채운 달큰한 한 입.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깍두기가 설렁탕의 기름기를 말끔하게 날려버렸다.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야."

"어······ 어떤 거죠······?"

"너희가 속해있던 올림푸스. 대체 뭐하는 단체지?"

나를 꼭 데리러 오겠다던 제우스 4센티.

또다시 만남을 예고한 만큼, 놈들의 정체를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킁킁 새콤한 스파게티 냄새를 맡으며, 제리코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단체가 아닌······ '사업체'입니다. 저희도 고작 가맹으로 속해있던 것뿐이라 아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업체?"

"예, 보통은 저희 같은 가맹 단체를 늘려서······ 마석을 가맹비로 받아 가는 식입니다. 대신 보셨다시피······ 올림푸스와 관련한 이런저런 능력을 지원해주고요."

방법이 달랐을 뿐, 역시 다른 침략자들처럼 마석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각성자들을 성장시키고, 지구에서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점점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을 터.

'그래서 그렇게 날 데려가려고 난리를 피웠구나.'

다른 이유가 없었다.

내가 올림푸스의 일원이 된다면, 어마어마한 가맹비를 뜯어낼 수 있었을 테니까.

물론 내가 놈들의 성전을 깡그리 날려버린 탓에, 더 이상 지구에서는 장사를 못하게 되었지만.

올림푸스가 거대한 '사업체'라는 것.

놈들이 지구 곳곳에 '가맹점'들을 세워 마석을 거둬들이려 한다는 점까지 확인했지만, 아직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남아 있었다.

"일단 거기까지는 알았고······, '프로메테우스의 족쇄'인지 뭔지 했던 거. 그건 대체 뭐야?"

꽤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족쇄였다.

유럽에 깔린 성전을 빠짐없이 파괴할 때까지, 아공간 포탈을 넘나들 수 없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스파게티에 시선을 두고 있던 제리코.

녀석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그, 그건······ '사업체'를 통해 발휘할 수 있는 효과입니다. 일종의 '필드 효과' 같은 거죠. 사업체의 규모가 클수록, 거기에 속한 가맹들의 힘이 강할수록 점점 더 효과가 증폭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놈들이 다짜고짜 프라하에 신전부터 건설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올림푸스의 '필드 효과'가 있다면 한층 더 유리한 싸움을 벌일 수 있었을 테니까.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제우스, 아니 제리코의 응큼한 속내.

나는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아악!"

채찍을 주었으니, 이제 당근이었다.

나는 스윽 녀석의 앞으로 스파게티 그릇을 밀어 넣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사업체라는 거. 어떻게 만드는 건데?"

"마, 만드시게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

관심이 생겼다.

어느덧 100개가 넘는 산하 단체를 거느린 팍스FC.

하지만 사업체가 아닌 탓에, 필드 효과 같은 이점을 누리고 있지는 못했으니까.

'어떤 효과가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제리코는 '필드 효과'가 사업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고 덧붙였다.

팍스FC의 무한한 잠재력을 감안한다면, '프로메테우스의 족쇄' 이상의 강력한 효과를 기대해볼 만할 터.

간단한 상상이었다.

사업체가 된 팍스FC가 지구 전체를 포탈로 뒤덮어버린다면?

이로 인해 전 지구에 팍스FC의 '필드 효과'가 적용된다면?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몰랐다.

지구를 난공불락의 성읍으로 만들어내는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