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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상공회의소의 유럽 본부장, 그리고 페르메곤은 오래간만에 반가운 소식을 나누고 있었다.

"완성! 완성입니다!"

줄곧 건설해 오던 원혼 추출기, 시시포스.

지구 개척의 핵심이 될 시설이 마침내 완성된 참이었으니까.

"고생 많았습니다, 페르메곤."

짝짝.

손뼉을 친 본부장이 페르메곤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시포스에······ 재료들까지 모아 둔 상태이니, 이제 바르나울의 반응만 남았군요."

"예, 바르나울 쪽에도 공식적인 사업 제안을 보내 놓은 상태입니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후우.

본부장은 묵은 한숨을 내뱉었다.

비로소 바르나울과 거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됐다.

그들이 지구로의 사업 진출을 선언한다면, 유럽을 관할하고 있는 그 또한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될 터.

'한국 놈들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 또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차원에 존재하는 그 누구라도, 바르나울의 사업을 방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패배를 거듭해 온 탓일까?

페르메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바르나울만 들어오면 다 괜찮은 겁니까? 등급 제한에도 걸릴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등급 제한.

갖은 편법을 동원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6위계가 고작이었으니까.

아무리 바르나울이라 한들, 다차원 상공회의소가 설정한 원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본부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페르메곤을 안심시켰다.

"물론 아주 강한 흑마법사가 들어올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준비해 둔 게 있지 않습니까?"

"아······!"

"우리는 원혼만 만들어 두면 됩니다. 그 모두가 바르나울의 전력이 될 거니까요."

이 또한 그들의 노림수였다.

시체와 원혼들로 가득 찬 유럽.

그건 바르나울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진 페르메곤에게, 본부장이 여유롭게 너스레를 떨었다.

"놈들은 바르나울의 상대가 못 됩니다. 어디 드루이드들과 손이라도 잡았답니까? 어디 번듯한 세계수라도 하나 구해 왔다고 해요?"

본부장의 농담에, 페르메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럴 리가요."

다차원을 통틀어 씨가 말랐다고 전해지는 세계수였다.

하물며 그런 세계수 없이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드루이드들.

한때, 바르나울을 위협했지만, 지금은 다차원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존재들이었다.

탁!

본부장이 페르메곤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은 바르나울로부터 답신을 기다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페르메곤이 시간을 잘 끌어줘야 합니다. 자신 있지요?"

"물론이죠, 드레스덴 요새만큼은 쉽게 뚫지 못할 겁니다. 못해도 일주일은······."

덜컹!

그때였다.

악마 하나가 척하니 페르메곤에게 달려온 것은.

"큰, 큰일입니다!"

"뭐?"

슥.

페르메곤의 머리에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애써 구축해 놓은 요새가 반나절 만에 뚫려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하지만······.

"성기사들이 파리에 진입했습니다!"

날아든 소식은 그의 불안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부활의 상징 (4)

087화 부활의 상징 (4)

드레스덴 요새를 무너뜨린 지 고작 몇 시간 뒤.

우리는 악마들이 진을 치고 있는 파리 근교에 도착해 있었다.

"오면 또 금방이지."

자폭 갈귀들이 들끓던 태평양을 단숨에 가로질렀던 우리였다.

비록 변방이라고는 하나, 독일에서 파리까지 오는 건 일도 아닌 셈.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반가운 손님에, 페르메곤의 악마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왔지만······.

꽈아아앙!

화르륵!

카아아악!

우리의 발을 조금도 묶어두지 못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과연 페르메곤의 근거지답게, 파리 근교부터 빼곡히 방어선을 구축한 악마들이었지만,

"어딜 뒈질라고."

우리는 놈들의 머리를 깨부수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할 뿐이었다.

아주 어려울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모아온 전력을 보따리처럼 풀어 놓았을 뿐.

자그마치 열네 곳의 거점을 연달아 빼앗긴 페르메곤이 이제 와 우리를 막아 세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위이이잉!

쿠웅!

이용수를 비롯한 기간트 라이더들이 거대 악마들의 발을 묶었고,

쐐애애액!

푹!

뻐어엉!

총알처럼 날아든 포식자가 악마들의 미간을 꿰뚫으며 신성 폭발을 일으켰다.

투두두둑!

우수수 주변으로 흩뿌려지는 악마들의 살점.

그러거나 말거나, 비정한 창날은 악마들의 원혼을 집어삼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드레스덴 요새의 폭격 앞에서 몸을 사렸던 성기사들이었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달랐다.

후우웅!

따아앙!

성기사들의 망치가 바람을 일으켰고, 휘말린 악마들이 얇은 뼈를 으스러뜨리며 추풍낙엽처럼 흐트러졌다.

"팍스FC를 위하여!"

수십 종류의 명품관이 들이찬 파리의 아케이드 거리.

그곳에 성기사들의 낯간지러운 소리가 울려 퍼질 즈음······.

"······뭐야?"

우리는 돌연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길을 잃은 건 아니었다.

악마들이 파리 근교부터 건설해 놓은 석조 터널.

그 모두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결과적으로 파리 중심부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물론 파리는 초행길에, 지금까지 봐 왔던 악마성에 비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지만······.

[페르메곤]

그 위로 버젓이 떠 있는 붉은색 홀로그램을 두고 길을 잃어 버릴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분명 저기인데."

하지만 갈 수 없었다.

지이잉!

지이이이이잉!

우리 눈앞에는 투명한 황금빛 장막이 높다랗게 세워져 있었으니까.

성기사들이 전투망치를 휘둘러봐도, 심지어는 H빔이나 '악마 포식자'를 이용해 신성 폭발을 일으켜봐도 장막은 끄떡조차 하지 않았다.

"뭐야, 이게?"

대뜸 진로가 가로막힌 상황.

장막을 면밀히 살펴보던 중 기시감이 찾아들었다.

"잠깐, 이거······."

틀림없었다.

투명한 황금빛의 장막.

처음 지구에 '입찰 경쟁'이 벌어졌을 당시, 에메스 차원의 성기사들과 지구의 존재들을 가로막았던 바로 그 장막이었으니까.

퉁퉁!

서로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상공회의소의 절대적인 방어막.

두드린 충격을 물결처럼 퍼트리는 황금빛 장막을 보며,

"이 새끼들이······."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르메곤과의 싸움에, 마침내 상공회의소가 끼어들었다는 걸.

하지만 그 정체를 알았다 한들, 의문을 지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인제 와서?"

물론 상공회의소가 칼을 빼든 것일 수도 있다.

게이트 핵을 설치하고, 전쟁을 일으켜 수수료를 얻어먹는 상공회의소.

반면 나는 돌아다니는 족족 상공회의소의 ATM을 털어먹고, 그 자리에 내 포탈을 설치하며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한국의 김정겸이란 놈이 장사를 말아먹고 있다며, 뒤늦게 조치에 나선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편을 든다고?"

이 지점에서만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중립'을 지켜오던 상공회의소였으니까.

물론 아예 없던 일은 아니다.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태평양에 엘븐하임 대륙을 통폐합하고, 남부의 침략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에 광산과 공장 같은 거점을 넣어준 전력이 있는 상공회의소.

하지만 이 모두가 일종의 '게임'의 형태였을 뿐, 지금껏 상공회의소는 결코 '중개'라는 역할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개인적 일탈로 유신각성회와 결탁했던 일본 지부장 헨리마저도, 눈앞에 무적의 장막을 세워 버리는 식의 월권은 벌이지 못했었으니까.

"······여기서 장막을 세워 준다는 건 진짜 말이 안 되는데."

대놓고 페르메곤을 감싸고 도는 상공회의소의 태도 변화에, 당황을 금치 못하려던 찰나······.

"······저건?"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상공회의소는 자나 깨나 '중개' 기관이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카아아악!

-카아악!

황금빛 장막으로 가둬진 우리.

그 속에서 페르메곤의 악마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쿠웅!

드레스덴 요새에서도 심심치 않게 봤던 거대 악마.

놈이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거칠게 바닥에 휩쓸렸다.

후훅······.

그런 녀석의 머리를 짓누르며, 게걸스럽게 목을 뜯는 존재는······.

"······언데드?"

앙상한 두개골 주변으로 썩은 살점이 너덜너덜하게 걸고 있는 거대한 언데드였다.

파리에 입성하던 중, 우리가 처치해 두었던 녀석.

놈이 알 수 없는 힘으로 되살아 난 채, 페르메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고일은 물론, 임프, 그렘린과 같은 여하의 하급 악마들까지.

언데드로 변한 악마들이 그 질긴 가죽을 흰 뼈 위로 거적때기처럼 늘어놓고 있었으니까.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새 손님이 찾아왔다는 걸.

***

"끄르륵······."

악마들의 수장인 페르메곤.

그가 왈칵 피를 쏟았다.

그를 공격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수하들.

어느덧 언데드로 변해 버린 악마들이 그의 몸통 곳곳에 기다란 손톱을 찔러넣었다.

"제기랄······."

페르메곤은 끔찍한 후회 속에 몸을 허물어뜨렸다.

본부장 스탠리에게 요청해 본 차원으로부터 들였던 고위계 악마들.

그것이 되레 독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한편······.

"······이게 대체?"

상공회의소 유럽본부장 스탠리.

악마들과 달리 털끝 하나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정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파리 곳곳에 눈코 뜰 새 없이 불어나고 있는 언데드.

이건 아무리 봐도 죽음과 시체를 사랑하는 흑마법사들의 소행이었으니까.

바르나울의 개입.

스탠리 또한 바라오던 일이었다.

이를 위해 페르메곤을 지원하며 시시포스를 세우도록 종용해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시점이 문제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유럽은 스탠리의 관할 구역이다.

하지만 바르나울로부터의 진입 요청은 들어본 바가 없었다.

개척 차원으로의 진입은 상공회의소의 절대적인 권한.

어떻게 바르나울이 소리 소문도 없이 지구로 진입할 수 있었는지, 스탠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후욱.

"유럽 본부장 되십니까?"

그림자 속에서 창백한 얼굴을 드러낸 바르나울의 흑마법사, 가츠로부터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감찰국에서 바르나울을 보냈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감찰국.

개척에서의 공정성을 감시하는 다차원 상공회의소의 산하 기관.

두말할 것 없이, 까마득하게 높은 상급 기관이었다.

스탠리는 꿀꺽 침을 삼켰다.

원칙 이상으로 페르메곤을 지원했던 그.

나름 선을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트집 잡을 구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저희가 지구로 온 이유는······."

다행히, 감찰국이 목표로 삼은 건 스탠리가 아니었다.

흑마법사 가츠가 축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규제를 어긴 아이템이 있다고 하더군요. 시간이 조금 지난 일인데······ 최근에 다시 추적되기 시작했다고. 공교롭게도 우리 쪽에서 만든 물건이라, 감찰국에서 바르나울에 직접 회수를 요청했습니다."

"아······ 혹시 어떤 아이템이?"

"카멜롯입니다. 소유자가 정신이 나갔던 건지······ 자유 개척에서 7위계를 소환했다더군요."

그제야 스탠리는 알 수 있었다.

파리 중심지에 형성된 기간제 장막, 거기에 대뜸 진입이 허락된 바르나울까지.

이 모두가 감찰국의 소행이었다는 걸.

차라리 다행이었다.

바르나울을 지구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스탠리로서는 절회의 기회.

이 젊은 흑마법사가 당장에라도 자리를 떠나지는 않을까, 조바심에 찬 스탠리가 물었다.

"혹시 페르메곤으로부터 사업 제안을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그야 받았죠······ 우리 바르나울이 많이 한가해 보였나 봅니다. 이런 미개한 차원에 코 묻은 돈이나 만지러 오라 한 걸 보면."

툭.

흑마법사 가츠는 투덜거리듯, 바닥에 뉘어 있던 페르메곤의 사체를 걷어찼다.

그가 안심하라는 듯, 히죽 입술을 일그러뜨렸고,

"걱정 마세요. 기왕 온 거, 용돈벌이 정도는 하고 돌아갈 거니까. 그리고 어차피······."

하나둘 죽어 가는 악마들을 보며, 스탠리에게도 은근한 미소를 던졌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계셨을 것 아닙니까?"

"하하······."

너털웃음을 흘리는 유럽본부장.

사실이 그랬다.

바르나울을 불러들이기 위한 징검다리였을 뿐.

중위 차원에 불과한 페르메곤을 파트너로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저건 대체 뭐 하자는······."

그때, 지그시 콩코르드 광장을 내려다보던 가츠가 표정을 굳혔다.

광장에는 비스듬한 원판 형태의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페르메곤이 구슬땀을 흘려 만들었던 시시포스.

하지만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휙휙.

그의 손짓에 따라, 언데드로 변한 수십 마리의 가고일이 시시포스로 몰려들었다.

그러곤 핵심 부속을 제외한 나머지 자재 모두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이런 허접한 시시포스는 불쾌하기 그지없군요. 생존 욕구에 급급한 망령들이라니······ 이런 저급한······."

바르나울의 뒤처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언데드 가고일이 상공회의소 유럽지부를 통째로 들어 올렸고, 방금 해체된 시시포스의 핵심 부속과 함께 이동을 시작했다.

"저건······."

"왜요, 같이 일할 거 아니었습니까?"

그의 말에, 유럽본부장 스탠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아무리 감찰국에 의해 들어왔다지만, 바르나울 또한 상공회의소가 부과한 원칙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고위계를 불러들일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장막에 7일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 상황.

그동안 가츠는 입맛에 맞게 시시포스를 개량하는 한편, 겸사겸사 유럽 지부의 공조를 얻어낼 작정이었다.

"일어나라."

쿠루룩······.

죽은 페르메곤까지 되살려 시시포스의 개량에 착수한 바르나울.

하지만 스탠리가 한 가지 걱정을 덧붙였다.

"장막 주변으로 한국에서 넘어온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신성 무기를 사용하는 놈들이라······."

"신성무기라······ 그건 좀 까다롭긴 하겠군요."

슬쩍 맞장구를 친 가츠이지만······ 이내 피식거리는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사자들의 혼이 우리에게 있는 한, 놈들은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의 군대와 싸워야 할 테니."

더욱이······.

"시시포스가 있는 한, 바르나울은 지지 않습니다."

그 효과가 일시적인 여하의 흑마법과는 달랐다.

시시포스를 이용한다면, 원혼을 영원토록 사물에 귀속시켜 놓을 수 있으니까.

가츠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고귀했던 아발론의 기사들.

카멜롯을 지키려던 그들을 되레 성에 귀속시켰던 그 짜릿함을.

운명의 장난이 가츠를 또다시 카멜롯으로 이끌었지만, 정작 그는 새 장난감을 만들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놈들은 우리의 노예가 될 겁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영원한 노예."

가츠는 애지중지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갖은 보물이 담겨 있다는 루브르, 그 위로 세워지고 있는 시시포스의 모습을.

부활의 상징 (5)

088화 부활의 상징 (5)

끼기긱······.

소름 끼치듯 맞물리는 뼈.

언데드로 되살아난 페르메곤의 악마들이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끼익.

그들이 멈춰 선 곳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쿵 소리와 함께, 시시포스의 핵심 부속 그리고 상공회의소의 유럽 본부를 내려놓았고······.

퍼드득.

퍼득.

마찬가지로 완연한 해골이 된 채, 그 중심으로 날아든 페르메곤이 시시포스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유럽본부장 스탠리가 물었다.

"왜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겁니까?"

"그럴듯한 물건이 많더군요. 뭐, 일종의 진열장 개념이죠."

흑마법을 이용한 회생은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다.

불안정한 원혼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사물에 귀속시키는 것.

나름의 미학을 추구하는 바르나울답게 평소 귀금속이나 보물을 그 대상으로 삼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이곳 루브르에는 지구인들이 모아 놓은 갖은 미술품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렇게, 유럽 본부와 시시포스, 마지막으로 루브르를 하나로 연결되는 사이······.

퍼드득.

퍼드득.

박물관으로 날아들어 간 언데드들이 오래된 그리스식 신전 기둥을 끌고 나왔고, 바깥에서는 아직 숨이 붙은 악마들이 결박당한 채 끌려들어 왔다.

가츠가 말했다.

"당장은 전력이 필요한 시점이니······ 페르메곤을 위주로 작업을 진행할 겁니다. 인간들은 그다음이고요. 시간이 없어 대단한 명품은 못 만들겠지만······ 뭐, 지구 버러지들을 치우기엔 충분하겠죠."

당장은 시시포스의 개량을 끝마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페르메곤과 인간들의 원혼을 노예로 부리고, 중간중간 지구인들을 잡으며 용돈벌이도 하게 되곤 하겠지만······.

"일주일 뒤, 카멜롯을 회수하러 갈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바르나울의 최종 목표는 카멜롯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츠는 스탠리에게 한 가지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통폐합 말입니까?"

"예, 유럽 본부에도 권한이 있다고 하던데요."

외부 차원의 일부 지형을 지구로 옮겨다 놓는 통폐합.

분명 유럽 본부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상대가 다름 아닌 바르나울이었기에 스탠리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바르나울 같은 거대 차원을 그렇게 들일 순 없습니다. 원칙상······."

"압니다. 어차피 우리한테는 그럴만한 땅도 없고요."

다차원 곳곳을 떠도는 바르나울이었다.

애당초 모행성이랄 만한 게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해적 집단.

결국 가츠가 요구한 것은 손톱만 한 크기의 텅 빈 인공섬, 그리고 유럽과 연결될 게이트뿐이었다.

"아, 그 정도라면······."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의 요청.

감찰국의 공조 요청을 받은 그였기에, 스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황색 장막 앞에 당황스럽게 멈춰 서 있던 나.

그런 내게 새로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띠링!

[불법 아이템 자진 신고 기간 운영]

[다차원 상공회의소 감찰국에서 안내 말씀드립니다······.]

"뭐야?"

감찰국.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메시지의 내용을 면밀히 살펴본 나는, 일행들과 함께 감찰국이라는 놈들의 요구 사항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카멜롯을 내놓으라고?"

감찰국은 카멜롯이 불법적으로 사용된 전력이 있는 아이템이며, 부여해 준 기간 내에 자진 신고해 반납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며 자애를 베풀고 있었다.

해마다 경찰청이나 행안부에서 벌이던 불법무기 자진 신고 프로그램과 비슷한 느낌.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이 빌어먹을 침략자 새끼들이 공무원인 척 점잔을 빼고 있다는 데 있었다.

"······주군."

시골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란슬롯.

당연히 기사들을 상공회의소에 헌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반납 장소 : 다차원 상공회의소 유럽 본부]

[반납 일시 : 7일 이내]

[기간 만료 시 강제 추심이 집행됩니다.]

놈들도 순순히 받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지, 당장 일주일 뒤로 강제 집행 의사를 타진해 왔다.

내가 소유주라는 걸 특정할 수는 없었는지 다른 팍스맨들에게도 모조리 전송된 일종의 월드 메시지였지만, 어떻게든 카멜롯을 손에 넣겠다는 의지만큼은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침 딱 일주일이다.

공지된 장막의 유지 기간과 동일한 시간.

심지어 반납 장소까지 유럽 본부인 걸 보며, 나는 어렵잖아 감찰국의 집행관들이 바로 저 장막 너머에 들어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쟤들이 바르나울이라 이거지?"

"예, 주군께서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들에게서 저희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걸요."

"뭔가 오싹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긴 한데······."

그 집행관이 기사들의 원수인 바르나울이라는 것까지.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네."

이미 상공회의소는 페르메곤의 죽음을 알리며 나를 승자로 선언한 상황이다.

보상이랍시고 파리로 향하는 게이트를 설치해 준다느니, 홀로그램 딱지를 떼어 주겠다느니 하는 망발을 늘어놓았지만······.

애당초 상공회의소의 게이트는 줘도 안 쓸 저질 교통수단이었으며, 홀로그램 또한 내게 붙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 분명했다.

유럽의 포로들이 아직 장막 너머로 갇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카멜롯을 강제 추심하겠다는 놈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물며 그 상대는 그 악명높은 바르나울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지잉.

아공간 포탈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은.

.

.

.

"······엘리?"

나를 찾아온 것은 엘븐하임 갈라돈 의회의 의장, 엘리였다.

"이것 좀 보세요."

"이건······."

엘리가 꺼내 든 것은 큼지막한 흑색 DSLR이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팍스FC의 세계수 심기 캠페인으로 나날이 푸르게 변해가고 있는 엘븐하임.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들답게 그 모습을 기록하고 싶다기에 내어준 물건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뭔가 다른 걸 찍어온 모양이었다.

달칵달칵.

엘리가 서투르게 카메라 버튼을 조작했다.

선캡과 선글라스를 낀 이 빠진 엘프들의 등산 사진이 우수수 지나갔고,

"잠깐만요, 이게 아닌데······!"

좌절스러운 각도로 촬영된, 목 접힌 엘리의 셀카 여러 장을 애써 모른 체 했을 즈음······.

마침내 자연풍광도, 엘프도 아닌 섬뜩한 무언가가 화면에 드러났다.

"······이건?"

사진에 드러난 것은 광활한 바다였다.

엘븐하임의 해변 어디를 가서라도 볼 수 있는 푸른 지평선.

하지만, 그 한 가운데에는 거무죽죽한 섬 하나가 둥둥 떠올라 있었다.

엘븐하임으로부터 고작 수십 미터 떨어진 거리.

공교롭게도 섬은 방금 전 우리가 보았던 황색 장막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틀림없어요. 바르나울이에요."

그 정체를 엘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

바르나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비단 카멜롯의 기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이 씹어먹을 놈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파르르 몸을 떨며, 앞니 사이로 산채 비빔밥을 튀기는 엘프들.

이제 엘프들에게 있어 지구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희번뜩 눈깔을 뒤집어 봤자 솔직히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그럴만하지.'

그들의 분노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르나울에 의해 바닥까지 짓밟혔던 그들이다.

세계수와 함께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던 엘븐하임의 모습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하물며 지금은 바로 그 바르나울의 섬이 코앞에 생겨난 상황이 아닌가?

더욱이, 바르나울의 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그닥! 다그닥!

사슴을 타고 포탈을 건너온 대수림의 드루이드들.

유럽 전선에서는 잠시 빠져 있었지만, 바르나울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그들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세계수 비료로 줘도 시원찮을 놈들!"

"다차원 우주가 허락한 우리의 유일한 즐거움을!"

지금까지도 질겅질겅 세계수 잎을 씹고 있는 드루이드들.

그런 이들에게 세계수를 앗아갔던 존재 또한 다름 아닌 바르나울이었다.

카멜롯의 기사들부터, 엘프, 거기에 드루이드들까지.

바르나울을 미워하는 삼 종족이 모두 모인 상태였지만······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삼종족을 둘러놓은 뒤, 내가 말했다.

"놈들이 카멜롯을 추적할 수 있는 게 분명합니다."

기사들을 손에 넣은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카멜롯은 내 아공간 안에 들어간 이래,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변화가 있었다면 딱 한 가지.

"여기에 카멜롯이 있으니까요."

엘븐하임에는 드워프들의 공장이 있었고, 다름 아닌 카멜롯에 마력 회로를 새기고 있었다.

기사들이 있었던 유럽에 둥지를 틀고, 공장이 있는 엘븐하임에 멀티를 깐 걸 보면, 그 정확성이 어느 수준인지는 몰라도 대략적이나마 감찰국에 카멜롯을 추적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더욱이, 바르나울이 카멜롯에 접근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란슬롯의 의견이었다.

"······바르나울이 생산한 아이템에는 흑마법사들이 소유권을 회수할 수 있는 표식이 부여돼 있습니다. 감찰국이 바르나울을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이겠죠."

자칫하다간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기사들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상황.

하물며 지금은 드워프들의 각인 작업 탓에 아공간에 카멜롯을 들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단 일주일 뒤면 바로 저 거뭇한 섬에서 흑마법사들이 들이닥칠 터.

"정겸 님, 세계수만 있다면 싸워 볼 수 있습니다."

긴장되어 있던 내 표정 때문이었을까?

엘리가 내 팔을 붙잡았고, 주변의 드루이드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 아닌 세계수로부터 힘을 얻는 자연 종족들.

엘프들은 '정화' 능력을, 드루이드들은 '재생' 능력을 발휘해 바르나울의 흑마법을 견제할 수 있었다.

애당초 이들이 바르나울의 집중포화를 받은 것 또한 세계수를 부릴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야죠. 그리고 더 잘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적들의 목표는 싸움이 아닌, 카멜롯의 회수.

흑마법사들의 접근을 허용한다면 싸움의 승패와 무관하게 카멜롯을 빼앗기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물류센터의 주인으로서, 다른 건 몰라도 아이템을 빼앗기는 일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곧장 드루이드 족장, 핀드릭에게 말했다.

"이곳 엘븐하임에도 공간 왜곡을 펼쳐줄 수 있습니까? 세계수는 무한정 제공하겠습니다."

"이것 참······ 며칠 내내 나무만 심어야겠군요. 바라던 바입니다."

용케 엘븐하임까지 찾아온 바르나울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엿가락처럼 배배 꼬인 드루이드들의 길을 놈들에게도 선사할 예정이었으니.

그 사이사이로 엘프와 드루이드들이 게릴라전을 곁들여 줄 참이었다.

더욱이,

"양동작전으로 갈 겁니다. 놈들도 두 곳으로 왔으니, 이쪽에서도 양 싸다구를 때려 줘야죠."

한 번 당해본 적이 있어서일까.

죽은 자들의 혼을 되살리는 바르나울에 대해, 엘리는 내게 한 차례 경고했었다.

곧 무한히 되살아 나는 불사의 군대와 싸우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 무한이라는 말은 못 쓰게 될 겁니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요."

그 누구도 내 앞에서 무한을 자랑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제때 못 죽는 것도 병이다.

그리고 내게는 '불사'를 치료하기에 딱 좋은 장침이 구비되어 있었다.

띠링!

[포식 : 관련 대상에 한하여, 처치한 대상의 혼을 포식합니다.]

'축복된 악마 포식자'에 달린 설명.

흑마법사들이 죽은 자의 혼을 되살린다면, 그 혼을 모두 먹어 치우면 그만 아닐까?

대강의 준비는 끝났다.

미로처럼 얽힌 엘븐하임의 오솔길에 카멜롯을 감춰두고, 나는 몸 아픈 유럽의 좀비들을 치료해 주기 위해 의료봉사를 떠나면 될 터.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마음가짐뿐이었다.

"괜찮겠지?"

마지막으로 란슬롯의 어깨를 잡았다.

유럽에서 언데드들을 마주했을 때부터, 유달리 굳어 있던 해골 기사들이었으니.

바르나울을 쳐부수는 것과는 별개로, 이들이 저주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길 바랐으니까.

고맙게도, 란슬롯은 내게서 남모를 힘을 건네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따르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활의 상징 (6)

89화 부활의 상징 (6)

"그랬지······ 그땐 정말······."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엘프와 드루이드들.

그들이 하나같이 바르나울로부터 겪었던 치욕을 떠올렸다.

자연 종족들의 능력은 특별했다.

이들의 혼은 죽음이 아닌 자연에 귀속되는바,

카멜롯의 기사들처럼 원혼이 되어 바르나울의 노예로 부려지는 수모를 피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역으로······.

"맞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바르나울의 견제를 받아, 집요한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흑마법으로는 공략할 수 없는 특별한 종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엘리가 먼저 입을 뗐다.

"울창한 꽃과 나무로 가득 차 있던 엘븐하임에 놈들이 불을 질렀죠. 우리 엘프들이 혼비백산한 틈을 타 대륙 곳곳에 저주를 뿌려댔고요."

그 결과는 나 또한 모르지 않았다.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던 엘븐하임 대륙. 

그 참담한 풍경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으니.

심지어······.

"불 끄는 걸 도와주겠다며 더러운 오줌을 갈기더군요."

엘븐하임을 몰락시킨 것도 모자랐다.

바르나울은 자신들의 개차반 인성을 어김없이 과시했고, 엘프들의 가슴에도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고개를 끄덕이는 족장, 핀드릭.

드루이드들이 당한 수모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하루아침의 일이었습니다. 창고에 쌓아두었던 세계수 잎을 모조리······."

사라진 세계수 잎.

범인은 바르나울의 서리꾼들이었고, 장난이라 하기엔 드루이드들이 입은 피해가 실로 막심했다.

"부족원들 모두가 하루가 가기 무섭게 피폐해져 갔지요. 어느 날 대뜸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이 나타나 세계수 잎을 들이밀기는 했지만······."

이미 드루이드들은 흑마술의 환각에 걸린 채였다.

흑마법사들이 손바닥에 버젓이 세계수를 올려두었지만······.

"세계수를 입에 넣고 싶다는 환각에 휘둘리며······ 놈들의 발이든, 흙바닥이든 개처럼 핥아댔습니다. 우릴 보며 미친 듯이 비웃더군요."

바르나울은 잔인했다.

흑마법의 노예가 되지 않는 드루이드들.

드루이드들의 뿔을 짓밟은 건, 그 알량한 자존심을 채우기 위함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를 겁니다."

다시 만나게 될 바르나울.

내 말에, 엘리와 핀드릭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어느덧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시시포스를 건설하고, 악마들의 원혼을 갈아 넣으며 바쁜 한 주를 보낸 바르나울.

이제 감찰국에서 요청한 대로 카멜롯을 회수하기 위해 나서면 될 일이었지만······.

"우리끼리 가라고?"

"예, 가츠 님께서는 박물관을 둘러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가츠는 돌연 카멜롯의 회수를 부사령관 말키오스에게 모두 일임해 버렸다.

부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엘븐하임이니까요."

"뭐, 그렇긴 하지."

흑마법을 통해 추적한 카멜롯의 위치.

공교롭게도 원래 지구에 있던 지역이 아니었다.

가츠는 유럽 본부의 통폐합 기록을 확인했고, 그곳이 엘븐하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귀신같이 흥미를 잃어버렸다.

"······완전히 몰락해 버린 차원에 무슨 재미가 있겠어?"

왜 카멜롯이 엘븐하임에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직접 저주를 뿌렸던 곳이니만큼, 가츠는 지금쯤 엘븐하임이 어떤 꼬락서니를 하고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말키오스 또한 흥미가 덜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임무는 임무.

황금빛 장막이 거둬지자마자, 그는 수십 명의 흑마법사를 이끌고 게이트 포탈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언데드로 되살린 뼈 가고일을 타고 날아올랐고,

퍼득!

퍼드득!

흑마력을 덧씌운 썩은 날개 가죽이 그 알량한 무게를 감당했다.

북태평양에 끌어들인 작디작은 인공섬.

엘븐하임 대륙 위로 드높게 날아오른 흑마법사들은······.

"······어?"

콰아아앙!

돌연 알 수 없는 중력에 이끌려, 엘븐하임에 추락했다.

입안 가득, 깔깔한 해변의 모래가 씹혔다.

흑마법사들은 가고일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뭐야, 왜 이래?"

다른 이유가 없었다.

엘븐하임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는 방대한 자연력.

고작 갓 되살린 가고일의 흑마력으로는 버틸 수 없었으니까.

"페르메곤 쓰레기들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그나저나······."

흑마법사들은 달라진 엘븐하임의 모습을 눈에 담았고, 너나 할 것 없이 충격에 휩싸였다.

"······이게 엘븐하임이라고?"

숯검댕이처럼 대륙을 휩쓸던 저주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파릇파릇한 녹림과 생동감 넘치는 물결을 확인할 수 있을 뿐.

그로부터 말키오스가 느낀 감정은 짜증, 그리고 불쾌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새싹 하나까지 말끔하게 태워 버린 터였다.

매 걸음 저주를 박아넣으며, 혹시 모를 세계수의 준동에 대비했던 그들이었으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도 아니었다.

추적 흑마법에 줄곧 감지되고 있던 카멜롯.

그 흉흉한 실루엣이 엘븐하임 숲 너머로 아른아른 비쳐오고 있었으니까.

결국, 말키오스가 선택한 전략은 단순했다.

과거를 다시 반복하는 것.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태워 버리면 그만이지.'

말키오스가 흑마법사들을 이끌고 숲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충분히 깊숙이 들어왔다고 판단했을 즈음, 부하들에게 틱틱 손가락을 튕겼다.

"알지? 시작해."

"알겠습니다."

흑마법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란히 펼친 두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댄 그들.

훅훅!

날숨으로 뱉어 불씨를 만들었고.

쓰으읍······!

또다시 폐부로 빨아들이며, 농축된 흑마력을 붉게 달궜다.

치이이······.

흑마법사들의 손끝에 맺힌 불씨.

겉보기엔 별것 아닌 불씨였지만, 이것이 한때 엘븐하임을 불길로 뒤덮었던 화마(火魔)의 정체였다.

휙!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손가락을 튕겨, 숲 곳곳에 불씨를 퍼뜨리는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

이제 불길에 휩싸인 숲과 눈물 콧물을 쏟으며 뛰쳐나오는 엘프들을 구경하면 될 일이었지만······.

"······왜 안 타는 거야?"

아무리 불씨를 던지고, 입김을 불어 넣어도 도무지 불길은 번질 기미가 없었다.

그들은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숲의 대부분이 단 한 가지 종류의 식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뻗어 나온 수백 개의 가지.

그 끝에 달린 잎사귀들이 하나같이 독특한 모양으로 말려 있었다는 것.

생명력으로 가득 찬 그 떡잎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흑마력의 불이 붙지 않았다.

.

.

.

"헉······ 헉······."

부사령관 말키오스는 전략을 수정했다.

움직임을 멈춘 가고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숲을 불태우는 여흥 또한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

그 모두를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다 집어치워. 카멜롯만 가지고 돌아가면 돼. 카멜롯만······."

추적 마법은 여전히 가동되고 있었다.

숲 중심부에 놓인 카멜롯의 실루엣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었지만······.

"분명 가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걸어도 걸어도 목적지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부사령관님······."

상황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촘촘한 잎사귀 사이로 떨어지는 찬란한 빛.

경사를 따라 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 소리까지.

불쾌한 환경을 도무지 참지 못한 부하 몇몇이 훌렁 허리끈을 풀어 버렸다.

"······이젠 못 참겠습니다!"

흑마법사들은 어느덧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연환경에 굴복하고야 말았다는 모멸감이 그들을 휘감고 있었고······.

쏴아아······.

다소 찌질한 방법이기는 하나, 주변 경관에 오줌을 갈기는 것으로 파괴와 부패를 상징하는 흑마법사로서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투두둑.

투둑.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샛노란 빗줄기를 맞으며.

그제야 부사령관 말키오스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줄곧 쫓아온 카멜롯의 형상이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지금껏 공간 왜곡으로 생겨난 신기루를 좇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은 깨달음이 비릿한 오줌 냄새와 함께 뒤늦게 찾아왔다.

"히히힉!"

폐부를 채우는 청명한 공기에, 반쯤 정신줄을 놓아 버린 흑마법사들.

곳곳에 오줌발을 휘갈기고, 손끝에 되도 않는 불씨를 키우고, 흑마력 포션을 삼키고 남은 플라스크를 이곳저곳에 내팽개치고 둥, 진상 등산객으로서의 종합 예술을 선보이던 찰나······.

삑삑! 삑삑삑삑!

어디선가 발굽 소리와 함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뭐······ 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은 말키오스.

그가 발견한 것은 정글모와 선글라스를 쓴 채, 고라니를 타고 있는 드루이드였다.

"어째서······? 어떻게 드루이드가 여길······?"

있을 리가 없는, 있어서는 안 될 드루이드다.

아니, 있다고 한들 세계수 잎이 없어 사경을 헤매고 있어야 할 존재들.

하지만 눈앞에 선 드루이드는 사슴뿔과 함께 위풍당당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거- 아저씨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질겅질겅, 낙타처럼 턱을 움직이는 드루이드.

그는 바르나울이 지엄한 수림의 규율을 어겼다며, 그 죄를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여된 형벌이란······.

"히히히힉!"

"흐이이이이히히힉!"

흑마법사들에게 '재생'을 부여하는 것.

하나같이 흙바닥을 뒹굴었다.

어둠의 계약을 통해 부패와 손상에 내맡긴 앙상한 육신.

그 사이로 새살이 돋기 시작했으니, 끔찍한 가려움에 고통이 동반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으으으으으으윽!"

압도적인 상성.

그들이 세계수를 멸절시키고자 했던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였다.

바르나울은 세계수로 무장한 드루이드들을 절대 이길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때였다.

"저 놈들은······."

스륵.

스르륵.

순박한 엘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들은 이 빠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엘프 거렁뱅이 새끼들이!"

드루이드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엘프들이라면?

'너희만은 죽인다'는 맹목적인 적개심과 함께, 흑마법사들이 불굴의 의지로 몸을 일으켰고······.

"죽어!"

흑마력으로 뒤덮인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탁!

"······어?"

확연한 차이였다.

바람에 의해 훌렁 걷어진 흑마법사들의 소매.

그들의 앙상한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은······.

"뭐가 이렇게······ 두꺼워?"

팍스FC의 무한 산채비빔밥으로 뼛속까지 영양 보충을 마친,

구릿빛으로 보기 좋게 그을린 엘프들의 두꺼운 팔뚝이었다.

"잡았다."

씨익.

앞니 빠진 미소.

자다 일어난 듯, 한껏 눌려있는 새집 머리.

통통한 볼살을 사선으로 지나는 흰 콧물까지.

보기만 해도 된장 냄새가 풍겨 오는 순진무구한 모습이었지만······.

"아······ 아악······!"

흑마법사들에게는 오히려 정반대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공포라는 감정을.

"으아아아아악!"

니 편 내 편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혼비백산하는 그들.

하지만 타잔처럼 나타난 엘프들이 무 뽑듯이 흑마법사들의 머리채를 붙잡았고, 이따금 벗어나더라도 공간 왜곡에 되돌아오거나, 그도 아니면 발을 헛디뎌 실족사로 생을 마감할 뿐이었다.

"말도 안 돼······."

한편, 말키오스는 억울했다.

아무리 자연이라 한들, 죽음과 생의 사이클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마련이다.

울창한 숲일수록, 흑마력을 추출할 만한 죽음의 환경 또한 갖춰져 있는 것이 타당할 터.

하지만······.

"대체 뭐냐고! 이 괴물 같은 공간은······!"

이 숲에는 죽음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부터 끝까지 세계수의 생명력에 의해 지탱되는 공간.

무한한 생명력으로 가득 찬 엘븐하임은 바르나울이라는 병균에게 있어 무균실로 작용하고 있었으니까.

"······헉! 헉!"

말키오스는 달렸다.

드루이드의 '재생'을 피해.

엘프들의 '정화'와 완력을 피해.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죽음의 신이 그를 구원하려는 것일까?

탁! 탁!

그는 마침내 소원해마지않던 죽음의 대상을 맞닥뜨릴 수 있었다.

"찾았다! 저것만 있으면······!"

수풀 사이로 짐승 한 마리가 창백하게 쓰러져 있었다.

사슴 같으면서도, 그렇다고 사슴은 아닌 어정쩡한 생김새였지만······ 종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부패와 죽음은 흑마법사들의 자산이다.

그는 이 망망대해에서 마침내 자신의 무기를 발견한 참이었으니까.

쓰으으······.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흑마력.

그가 입술 사이로 사악한 언령을 내뱉었다.

"일어나라."

벌떡!

반응은 빨랐다.

몸을 일으킨 짐승.

자신을 일으킨 주인을 향해 촉촉한 눈망울을 드러낸 녀석은······.

-꿰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이이익!

"워메 X발!"

대뜸 괴랄한 소리로 흑마법사를 주저앉혔다.

다그닥. 다그닥.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며, 비명과 함께 멀어지는 고라니.

껑충껑충 뛰어나가는 고라니의 뒷모습을 말키오스는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

푸욱.

그는 고개를 파묻었다.

엘븐하임에는 정말 단 하나의 죽음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세계수를 내준 보람이 있네."

한편, 엘븐하임의 전투를 둘러본 나는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바르나울은 절대 세계수로 무장한 엘븐하임을 뚫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엘프와 드루이드들이 활약해주고 있는 만큼, 카멜롯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아직 끝난 건 아니지."

지이잉.

나는 유럽으로 가는 포탈에 서 있었다.

란슬롯을 비롯한 카멜롯의 열두 기사들과 함께.

바르나울에 원한이 있는 건, 엘프와 드루이드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가자."

내가 눈짓하자, 카멜롯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빚을 되돌려 받기 위해.

부활의 상징 (7)

090화 부활의 상징 (7)

을씨년스럽게 변해 버린 파리.

콩코르드 광장 주변으로, 썩은 정원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왔나?

아니, 착각이었다.

붉은 노을에 그을린 에펠탑.

그 주변을 맴도는 건 좀비처럼 변해 버린 가고일이었으니.

죽음의 상징인 까마귀조차, 바르나울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모두, 힘내세요."

세계수 곁에 선 리디아가 우리를 배웅했다.

동생의 생사 탓에 불안에 휩싸인 그녀였지만, 덕담만큼은 효과를 발했다.

"가죠."

광장은 넓었고, 처리해야 할 적도 많았다.

팍스FC의 성기사들과 기간트 라이더, 그리고 프라하의 각성자들까지.

우리는 빳빳한 세계수 잎을 씹었고, 리디아의 버프를 두른 채 만반의 태세로 포탈을 통과했다.

우르르!

성난 폭도처럼 수백 명의 전력이 포탈을 통과했지만, 파리는 이미 죽음의 존재들에 의해 채워져 있었다.

달칵!

탁!

검은 아스팔트 위로, 분필 같은 발목을 끌고 지나가는 해골들.

뿔 달린 두개골 뒤로 앙상한 날개뼈를 채찍처럼 늘어뜨린 그들은, 분명 페르메곤의 악마였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유럽을 휘어잡았던 그들이었으나, 지금은 하나같이 바르나울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다.

놈들이 우리에게 희번뜩 푸른 안광을 비추었을 때쯤,

"위치로!"

성기사들이 나를 에워쌌다.

그어어어어어!

타앙!

언데드의 울음과 함께, 대규모 난전이 시작됐다.

페르메곤의 위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탓에, 상당한 맷집을 자랑하는 언데드.

우리는 양쪽으로 방패를 세우고 망치와 창을 휘두르며, 미리 위치를 파악해 두었던 포로수용소를 향해 조금씩 진로를 확보해 나갔다.

모두의 손에는 '신성 망치'가 들려 있었다.

보랏빛 흑마 법에 휩싸인 해골들을 와르르 무너뜨렸고, 나 또한 H빔과 같은 중량 무기로 놈들을 빗자루처럼 쓸어버릴 때도 있었지만······.

츠츠츠······.

죽지 않고 돌아온 원혼이 무너진 뼛조각을 빠르게 수복했다.

"엘리가 말했던 게 이건가."

덜그럭!

무한히 되살아나는 불사의 군대.

신성력은 분명 유효한 공격수단이었지만, 언데드와 싸우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곧장 '악마 포식자' 수십 자루를 곳곳으로 출하했고,

쐐애애애애액!

카득!

뿔 달린 악마들의 두개골을 박살 냈다.

'포식자'는 놈들의 혼을 탈취해 유유히 아공간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달그라락!

악마들의 사체가 깨진 그릇처럼 와장창 바닥을 나뒹굴었고, 더 이상 되살아나지 못했다.

'무조건 마무리는 내가 해야겠네.'

자연스레 각자의 역할이 배정됐다.

일행들의 신성 망치가 적들을 무력화하는 한편,

내가 '포식자'를 이용해 마지막 숨통을 끊어내는 것으로.

콰아앙!

채앵!

카멜롯의 기사들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갖가지 속성 강화석이 부여된 그들.

란슬롯의 지휘 하에 베디비어가 주먹을 휘두르고, 라이오넬이 전기 채찍을 휘두르는 등, 효과적으로 언데드들의 발길을 묶어주었다.

하지만······.

"괜찮아?"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기사들의 몸짓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으니까.

스릉!

란슬롯은 재차 칼을 휘두르며 내 걱정을 몰아내기 위해 애썼다.

"······괜찮습니다. 주군."

흑마법의 기운이 기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페르메곤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악마 포식자'가 놈들의 혼을 차분히 적립하며 포로 수용소에 한결 가깝게 다가갔을 즈음, 기사들을 번민케 하는 진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힐끔.

불안한 듯, 텅 빈 눈동자를 들어 올리는 카멜롯의 기사들.

그들의 시선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 너머에 비스듬하게 눕혀진, 정체 모를 둥근 원판 모양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는걸.

"저게 설마······."

"예······."

란슬롯도 인정하는 눈치였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시포스입니다."

이미 한 차례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바르나울에게는 포로들을 원혼으로 환원시키는 시설이 있으며, 놈들은 이 시설을 이용해 원혼을 사물에 귀속시켜 아이템을 만들곤 한다고.

그것이 바르나울의 빌어먹을 '사업 아이템'이었고, 그 대표적인 아이템이 다름 아닌 '카멜롯'이었을 뿐이었다.

푸쉬이-

뭉게뭉게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보랏빛 구름.

팽글팽글, 회전을 거듭한 시시포스의 원판이 자욱한 증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칼을 쥔 란슬롯의 손목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일종의 트라우마인가.'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바르나울에 의해 카멜롯의 망령이 된 기사들.

당연하게도, 이들 또한 '시시포스'를 겪었을 테니.

"란슬롯."

어쩌면 그들을 아공간에 들여놓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숙적인 바르나울과 싸우겠다며 참전을 간청한 카멜롯의 기사들.

나 또한 그 의지를 존중하고 싶었지만, 이대로라면 과거의 상처만 자극하는 꼴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저희는 카멜롯에서 최후의 농성을 벌였습니다. 수백 번이나 시도했지만······ 바르나울의 군세를 막을 수는 없었죠. 어떤 방법을 시도하든, 놈들은 성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카멜롯이 놈들의 놀이터라도 된 듯이요."

스릉!

단칼을 휘둘러 해골 임프의 발목을 잘라낸 란슬롯.

하지만 정작 시선을 멀리 둔 그는 어쩐지 과거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동문에 맞붙은 산맥에 숨은 병력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병력을 집중했지만······ 거짓말처럼 정문 방향으로 적들이 몰려들었죠. 산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후웅!

그의 칼끝을 따라 흑마법의 보랏빛 기운이 움직였고, 그 은은한 기운이 허공에 지도를 그려놓았다.

"경비단장이 바르나울의 첩자였습니다. 그를 처단하고 시작했더니······ 이번에는 재무대신이 북문에 걸린 빗장을 열어젖히더군요. 들이닥친 해골들이 카멜롯을 뒤덮였습니다."

그의 기억은 철저히 뒤틀려 있었다.

수백 번이나 반복되었던 전투.

그 모두는 시시포스가 부여한 환상에 불과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성벽에 설치된 대포였죠. 병기고의 화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게 그 원인이었습니다. 탄약병을 배치하고 포탄이 떨어질 궤도를 수정했지만······."

수백 번은 더 떠들어 댈 수 있었다.

이 모두는 그가 처절하게 겪은 현실이었으니.

뭉게뭉게 피어오른 보랏빛 연기 속, 기사들은 투쟁하고 또 투쟁했다.

하지만······.

"······결국 아서를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

시시포스는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코 이뤄질 수 없도록 설계된 소원.

수백 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이 모두가 지옥 같은 몽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정신을 차려보니 카멜롯에 사로잡힌 망령이 되어 있더군요."

그들은 피와 눈물에 사무친 유령이 되어 있었다.

쐐애애액!

채앵!

란슬롯이 내게 날아든 화살을 단칼에 쳐냈다.

어느덧 그의 푸른 시선이 내게 돌아와 있었다.

"아서는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기사였습니다. 수백 년 동안 내전으로 지쳐있던 아발론을 평화와 설득으로 통합했죠. 상공회의소가 나타나며 아발론은 다시금 전화에 휩쓸렸지만······ 그래도 아서만 지켜낸다면 희망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만났던 기사왕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아서는 기사들과 함께 자라난, 그들의 주인이자 친우였던 아발론의 왕이었으니까.

카아아아악!

나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이 차츰 늘어나고 있었다.

필시 언데드들 또한 '악마 포식자'의 주인이 나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

덕분에 나를 지키는 기사들의 움직임 또한 점점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킬 수 없었습니다. 장대에 목이 매달린 아서,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난 아서, 독주를 마시고 목을 움켜쥔 아서······ 비록 꿈이었지만, 현실이 운명처럼 날아들었죠."

란슬롯의 복잡한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카멜롯 성이 아닌, 아서라는 인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시시포스를 통해 좌절되었던 그 소원이, 지금 모종의 계기로 연장되고 있다는 것까지.

아공간이라는 새로운 장소.

그리고 세계를 통합해 나갈 새로운 인물.

물론 난 아서가 아니었고, 기사들의 충심 또한 카멜롯의 저주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나.'

그들은 여전히 아발론의 비극 속에 살고 있었다.

.

.

.

그들을 꿈에서 깨운 것은 거울처럼 나타난 또 다른 불행이었다.

"잠깐, 저건······."

정확히는, 바르나울이 생산한 스켈레톤.

악마들을 이용해 언데드를 생산하던 놈들이, 마침내 인간에게까지 손을 댔으니까.

"······포로들을 재료로 사용했군요."

"이 새끼들이······."

끼리릭.

끼릭.

수십 마리의 스켈레톤이 육중한 수레를 끌고 나왔다.

그 위에 놓인 것은 심상치 않은 고대 그리스식의 조각상.

나무에 묶인 두 팔에 매달린 채,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고통스러운 남성의 군상이었다.

일종의 비유적인 형상인 것일까?

조각상의 정체는 수백의 원혼이 귀속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카멜롯'처럼, 조각상 또한 특별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크으윽!

조각상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비틀었고······.

달그락!

생전의 능력을 되찾은 스켈레톤이 우리를 향해 쇄도했다.

불길을 내뿜고, 괴력을 발휘하며 성기사들의 방어선을 위협하는 스켈레톤 무리.

"막아!"

후웅!

성기사들이 휘두른 망치에 와르르 무너져내렸지만······.

츠츠츠······.

달그락!

조각상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스켈레톤을 다시 일으키며, 전투는 다시금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갔다.

"왜 공격하다 말아!? 거기 뚫리지 말라고!"

"하지만······! 저건······."

프라하의 각성자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해골 중에 그들의 가족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조각상을 부수면 스켈레톤은 모두 힘을 잃을 겁니다. 하지만······." 

한편, 란슬롯이 각성 스켈레톤을 처치할 방법을 제안했지만······.

"원혼들 또한 함께 소멸해버리겠죠."

그 또한 차마 내게 조각상을 부수라 말하지는 못했다.

얼마 전만 해도, 카멜롯의 기사들 또한 저들과 똑같은 입장이었으니까.

그들 또한 시시포스를 거쳤을 것이다.

구원이 됐든, 생존이 됐든, 저마다의 절실한 소원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원이 수십, 수백 번 미끄러졌을 때, 원혼이 된 자신을 발견했을 터.

그들의 숨을 우리 손으로 끊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기 그지없었지만······.

"······장례를 치르더라도, 우리 손으로 치러야지."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바르나울이 조롱하다시피 세워놓은 비석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거기에 깃든 혼령을 데리고 장난질하는 것도.

"출하."

쐐애애애액!

포탈에서 빠져나온 성창이 빠르게 조각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차앙! 타아앙!

흑마법으로 된 몇 겹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간 성창은······.

파각!

하늘 위로 묶인 조각상의 두 팔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와르르······.

수레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돌무더기.

동시에, 각성 능력을 펼치며 날뛰던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 또한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띠링!

[754/1,000]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악마 포식자'가 조각상에 귀속되어 있던 인간들의 원혼을 무사히 흡수했다는 걸.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바르나울에 휘둘리던 그들의 고통 또한 함께 사라졌을 터였다.

나는 다시 한번 란슬롯에게 '시시포스'에 관해 물었다.

"······수백 번을 반복한다 이거지?"

말 그대로 희망 고문이다.

이룰 수 없는 소원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끔찍한 고문 도구.

"그렇다면······."

바르나울도 직접 한 번 갈려봐야 하지 않을까?

문득, 놈들이 내지르게 될 비명 소리가 궁금해졌다.

부활의 상징 (8)

091화 부활의 상징 (8)

"······역시 새 주인이 있었군."

흑마법사 가츠가 덧붙였다.

곳곳에 퍼져 있는 망령들로부터 시선을 공유받은 그.

파리로 진격해 들어오는 성기사들을 살펴보던 중, 이질적으로 섞여 있는 카멜롯의 기사들을 발견했다.

"몰라볼 수가 없지······. 내 새끼들인데."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또한 아발론을 짓밟고 카멜롯을 제작했던 장본인 중 하나였으니까.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영웅의 처절한 죽음.

그 죽음은 절망을 사랑하는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에게 잊을 수 없는 향취를 남겨주었다.

"그런데······."

아련하기 짝이 없는 기억이지만, 지금으로선 그 추억을 음미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파리 시내로 밀려드는 성기사들을 보며, 가츠가 유럽 본부장에게 물었다.

본부장 스탠리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신성 무기를 사용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잘난 무기가 드워프들이 강화한 에메스제 성창이라는 말은 안 했잖아요. 대체 저런 물건이 왜 이런 하위 차원에 있는 겁니까?"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다행이었다.

바르나울의 저력은 불사의 군대로 이루어진 압도적인 물량.

그 어떤 영웅이든, 아이템이든 가볍게 꺾어버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게 대체 몇 자루냐고!"

붕붕.

하늘을 수 놓는 수백 자루의 성창.

심지어 원혼을 포식해버리는 탓에, 불사의 군대라는 바르나울의 수식을 한낱 허명으로 추락시키고 있었다.

덜그럭!

싸늘하게 내동댕이쳐진 백골들.

가츠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다차원 중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바르나울이다.

당연히 이 모두를 압도할 만한 저력이 있었지만······.

'······이런 깡촌만 아니었어도.'

지구에 부여된 규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감찰국을 통해 들어왔다곤 하나, 모든 절차는 상공회의소의 지엄한 개발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 법.

위계 등급 하락, 중상급 이상의 흑마술 봉인, 병력 제한, 특정 설비 반입 제한 등등.

강력한 힘을 가진 바르나울이니만큼, 그들을 옥죄는 제약 또한 상당했으니까.

-와아아아!

성기사들은 포로수용소를 향해 빠르게 접근해나가고 있었다.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린 가츠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카멜롯을 회수하는대로 바르나울은 지구에서 손을 뗄 겁니다. 그렇게 알아두세요."

"잠시만요, 사령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거운 추를 주렁주렁 매단 채, 코 묻은 돈벌이에 집착하는 것.

백번 천번 생각해도 당장 때려치우는 것이 옳았으니까.

하지만 감찰국으로부터 수주한 '카멜롯 회수' 임무마저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이미 수십 명의 흑마법사가 회수 작전을 위해 엘븐하임으로 투입된 상태였지만, 가츠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래야 한 톨의 원혼이라도 아낄 수 있을 테니까.

"다시 생각해보세요. 가츠 사령관. 지구는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차원입니다. 조만간 상당한 수익이······."

신분 상승을 꾀하던 스탠리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그가 애타게 가츠를 설득했지만······.

"철수 신청입니다. 접수 바랍니다. 본부장."

가츠는 단호하게 자기 의사를 전달했다.

'······이쯤에서 서로 좋게 좋게 끝내자고.'

이제부터는 그가 직접 움직일 생각이었다.

최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며, 카멜롯을 회수하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