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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아앙!

따앙!

이곳은 드워프들의 '공장.'

생산라인을 따라, 서른 명가량의 드워프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지이이잉-

푸쉬이이이······

탄성을 내지를 만한 공간이었다.

드르르르륵.

멈춤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성형 프레스 머신과 플라즈마 절단기가 쉴 새 없이 금속을 가공했고,

유도 가열기와 웰딩 머신이 딱 좋은 형태로 원통 모양의 포신을 전달해 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풍경이었지만······.

"어으으우어으아······."

"어으으으어······."

정작 드워프들의 상태만큼은 그리 온전하지 못했다.

따앙!

따아앙!

쉬지 않고 망치질을 이어가는 드워프들.

퀭한 눈빛 아래로는 새카만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구부정한 어깨와 뻐근한 허리 아래로는 불룩한 뱃살이 튀어나와 있었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의식.

드워프 중 한 명인 쿠퍼가 물었다.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미처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구인들의 겁박에 못 이겨 주야장천 대포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동료 드워프가 거칠게 그를 쏘아붙였다.

"그럴 시간 있으면 레버나 제때제때 돌려······."

책망하는 목소리였지만, 그조차도 힘이 없었다.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며 컨베이어 벨트에 자기 몸을 맡길 뿐.

벌컥벌컥.

드워프들이 인간들이 전해 준 검은색 물을 삼켰다.

잠이 깨는 건 좋았지만, 속이 더부룩한 것인지 자꾸만 역한 트림이 올라왔다.

"······."

쿠퍼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공장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공장'의 마력 원자로를 바라보았다.

츠츠츠······.

새어 나오는 은은한 푸른빛.

그 빛이 쿠퍼를 추억으로 이끌었지만······.

"이젠 저 빛을 봐도 설레지 않는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새로운 침략자가 된 인간들.

그들이 드워프들로부터 '제작'의 즐거움을 앗아가 버렸으니까.

-쓸데없는 사족 붙이지 말고, 보여 준 대로 만들라고!

-야이, 게으른 새끼들아. 한 시간에 50개씩은 나와야 한다고 말 안 했냐?

툭 하니 던져진 설계도.

원자로 마력을 무작정 출력으로 산출하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구조였다.

그 충격으로 내구성을 깎아 먹을 수밖에 없는 자기 파괴적인 방식.

한쪽에 켜켜이 쌓여 있는 '마력 대포'를 바라보며, 쿠퍼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건 아니지."

드워프들은 알고 있었다.

아이템이란 그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는 걸.

그 위로 시대와 역사, 의미와 경험, 그리고 이야기가 더해질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를 사물에 덧씌우는 것이야말로 드워프들의 진정한 재능이라는 것을.

"말괄량이 에고 소드······ 피비린내 나는 마식 흡혈검······."

유니크, 때로는 전설에 다다른 장비들.

쿠퍼는 조상 드워프들이 만들었다던 그 찬란한 영광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까짓 걸로 뭘······."

정작 눈앞에 놓인 것은 부끄럽게 그지없는 '마력대포'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바깥을 기웃거리던 드워프 하나가 공장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모두 들어봐! 이놈들 패배한 것 같아!"

"뭐? 정말?"

자신들을 겁박하고 착취하던 남부군이다.

그들의 패전 소식에 대부분의 드워프가 반색했지만······.

"누가 이기든 어차피 똑같아."

누군가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사실이 그랬다.

침략자들에게 있어 드워프들의 능력은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으니까.

모행성이 상공회의소의 '특별 관리 체제'에 들어간 이래, '공장'과 함께 다차원 곳곳에 팔려 다니며 노예처럼 부려진 것이 어느덧 수십 년째였다.

애당초 그들에게 자유란 없었다.

그 목줄을 틀어쥔 주인이 그때그때 바뀔 뿐.

하지만······.

"아니, 이번만큼은 아니야."

쿠퍼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 사생결단을 하자."

"사생결단······?"

"우리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거야. 만일 이번에도 쓰레기 같은 놈이 주인 노릇을 하려 든다면······."

노예가 된 드워프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유일한 권리가 남아 있었다.

"우리가 직접 원자로를 파괴하는 거야."

바로 죽음을 택할 권리가.

마력 원자로는 드워프들의 가치 그 자체였다.

그걸 버리겠다는 건, 침략자들에게 목을 내어놓는 것과 마찬가지.

"미, 미쳤어 쿠퍼?"

쿠퍼의 폭탄 발언.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놀란 드워프들이 학을 뗐지만······.

"······그럼 쭉 지금처럼 살 거야?"

"······그건······."

'지금처럼'이라는 쿠퍼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는 것보다 못한 삶.

그것이 드워프들의 지금이었으니.

***

휘이이이······.

폭격으로 남부의 괴물들을 쓸어 버린 다음이다.

위성을 통해 상황을 점검한 우리는 서둘러 대수림을 빠져나왔다.

꾸드드드득!

이번에도 드루이드들이 숲의 길을 열어 주었다.

가로수로 엮은 터널처럼, 일직선으로 트인 널찍한 길.

부우우웅!

이용수가 모는 오토바이가 빠르게 내달렸고, 그 뒤를 사슴을 탄 드루이드들이 바싹 뒤쫓아 왔다.

그렇게 도착한 인디애나의 황량한 벌판.

괴물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곳곳에는 희뿌연 중독 가스가 퍼져 있었지만······.

질겅질겅.

세계수를 씹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간간이 살아남은 괴물들과 남부의 잔당들을 처리한 다음이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게 공장이라 이거지?"

우리는 드워프들의 공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로 신기한 형상이었다.

십수 개의 굴뚝이 나란히 길게 이어진 건물.

거미 다리처럼 가지런한 수백 개의 다리가 '공장'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으니까.

프리스트의 설명처럼, 정말 '움직이는' 공장이었던 모양이었다.

"어디, 인사를 좀 나눠 볼까."

이제 드디어 드워프들을 만날 차례였다.

후미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우리는, 훌쩍 공장 내부로 들어갔다.

그 즉시,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

머리에 붉은색 천을 질끈 동여맨 드워프들이었다.

떡진 머리와 퀭한 눈자위.

하지만 거기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괜찮은 건가, 이거?'

문득, 걱정이 찾아들었다.

협력을 구해야 할 관계지만, 아직 드워프들과는 이렇다 할 관계를 쌓지 못했다.

하물며 이들은 방금까지도 지구인들의 착취에 고되게 시달리고 있던 상황.

같은 인간인 나를 좋게 생각할 리 만무했으니까.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당신이 이 공장의 새 주인이오?"

자신을 쿠퍼라고 소개한 드워프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당신이 이 공장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위해 일할 생각이 없소."

"······나를 테스트해 보겠다는 소립니까?"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요."

드워프로부터 주어진 난데없는 시험.

주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차후 협력을 구하기 위해 나는 신중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첫째, 당신은 주 80시간 근무제를 보장할 수 있소?"

"······?"

80시간?

절로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런 내 반응 때문이었는지······.

"······그러길래 90시간으로 하라니까!"

"어휴, 너무 욕심부렸어!"

다른 드워프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노예로 살아온 것일까?

그들의 근로 개념은 지구의 상식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쿠퍼의 질문은 계속됐다.

"둘째, 당신은 휴일을 보장할 수 있소?"

"아, 그거야······."

"솔직히 휴일을 매주 줄 수는 없겠지. 그건 우리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건 절대 물러설 수 없어!"

"······."

황당함의 연속.

드워프들의 수군거림 또한 여전했다.

"쟤 진짜 돌은 거 아니야?! 쉬는 날이라니?"

"쿠퍼, 이 미친놈아! 그건 진짜 무리수야!"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오! 당신은······."

갑자기 쿠퍼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이건 정말 안 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뭇 조심스러운 목소리.

한참이고 뜸을 들이던 그가 내게 물었고,

"봉급이란 걸 줄 수 있소······? 그······ 뭐든 상관없소! 식량이라든가······."

모두가 경악했다.

드워프들도, 그리고 나도.

녹색 인디언과 다리 짧은 블루칼라 (4)

076화 녹색 인디언과 다리 짧은 블루칼라 (4)

"······엇."

엉거주춤 아공간에 들어선 '공장'의 드워프들.

하지만 그들은 마주친 상대로 인해 주춤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세공사잖아?'

또 다른 드워프인 세공사 브로크.

같은 드워프 종족이지만, 직군이 다른 만큼 그 성향 또한 달랐다.

행색만 보더라도 그랬다.

청바지에 허름한 작업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공장' 출신의 제작자 드워프들.

반면 브로크는 말끔히 먼지를 털어낸 가죽 앞치마를 둘러매고 있었으니까.

"······."

어정쩡한 조우.

공장의 드워프들은 걱정이 앞섰다.

"괜찮을까? 텃세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차라리 못 본 척 지나치는 게······."

모행성에서 또한 알게 모르게 선이 그어져 있던 두 직군이다.

협동적인 성격이 강한 제작자들과 달리, 세공사들은 유달리 까탈스럽고 고립적인 성격이 많았으니까.

수군수군대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려던 찰나,

"······!?"

가장 앞장서 있던 쿠퍼를 세공사 브로크가 와락 껴안았다.

"그간 고생이 많았소. 동족을 보니 정말 반갑구먼······."

툭툭 등을 두드려 주며, 눈을 글썽이는 브로크.

아공간의 동료들과 어울리며, 그 또한 모종의 변화를 맞이한 터였다.

어안이 벙벙한 공장의 드워프들.

그런 그들을 브로크가 차분히 안내했다.

"따라오쇼.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 줄 테니."

"아······!"

지내는 방식.

그 말을 들은 공장의 드워프들의 목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모행성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망치를 쥐고, 성인이 되자마자 공장에 배속되는 제작자 드워프들.

그들에게 있어 공장과 기숙사는 치열한 전장의 일환이었으니까.

그렇게······.

저벅저벅.

서른 명의 공장 드워프들이 세공사 브로크를 따라나섰다.

'이곳이 우리의 새로운 일터······.'

오늘 막 출근한 신입사원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며칠, 아니 몇 주간 누적되어 온 무거운 피로가 몸을 짓눌렀음에도, 드워프들은 꿋꿋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까마득하게 높은 물류센터의 천장부터, 자로 잰 듯이 맞춰 서 있는 재고 선반들, 규칙적으로 배열된 환기구를 바라보며, 드워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혀를 내둘렀다.

"아주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군······ 확실히 체계가 있는 곳이야."

"구획 별로 레이블링도 되어 있어. 이러면 효율이 확 올라가지."

"지금까지의 작업 동선을 살펴보면······."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던 드워프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김정겸 대표······ 보기보다 굉장한 사내였군."

"이만한 공장을 설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

예상보다 자신들의 고용주가 걸출한 인물이었다는 것.

앞서가는 브로크를 바라보며, 드워프들은 남모를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제 작업 라인에 배치를 해주려나?"

"······에이, 우리 같은 신참들한테 작업 라인은 무슨? 바닥부터 쓸고 닦곤 하겠지."

벌써부터 일할 생각에 잠긴 공장에 드워프들이었지만······.

정작 브로크가 안내한 곳은 국군통신사령부의 샤워실이었다.

"일단 편하게 씻게 하라고 하더군."

"······??"

 "여기 세면도구들이 꽤 사용하기가 편하오. 여길 이렇게 올리면······."

쏴아아아아.

온수 샤워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던 드워프들이었다.

굳은 근육 사이사이를 주무르는 뜨거운 물줄기.

"아으으어어으아······."

"아우으우······."

그 강렬한 자극이 드워프들의 어깨에 얹혀 있던 피로를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이제 다음 장소는······."

땀에 절어있던 몸을 말끔히 씻어 낸 드워프들.

그들이 뽀송뽀송한 걸음으로 향한 곳은 '생활관'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원래 인간들이 사용하던 곳인데, 지금은 비어 있소. 베개랑 이불도 깔아 뒀으니 다들 우선은 눈부터 붙이라고."

"······자, 자라고?"

당황스러운 드워프들이었다.

휴식을 보장해주겠다고 말한 김정겸 대표였지만, 그게 이렇게나 빠를 줄은 미처 몰랐기에.

푹.

푹.

드워프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하나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들의 지친 무게를 덜어주는, 구름처럼 푹신한 호텔식 매트리스.

"아······."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지만······.

쿠퍼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렇군. 작업 효율을 우선시하는 스타일인가? 과연 트렌디해."

"······작업 효율?"

"그래. 쉴 때 제대로 풀어 주는 대신······ 정작 일할 땐 지옥 같은 업무 강도를 부여하는 거지. 사실 이거야말로 제대로 사람을 쥐어짜는 방법이라고."

"아······!"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는 드워프들이었다.

이 또한 업무의 일환이라면, 대뜸 휴식을 부여한 김정겸 대표의 의도 또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쿠퍼는 한 술 더 덧붙였다.

"보나마나 수면 시간도 통제할 게 분명해. 장담하건대 몇 시간 뒤면 당장 일어나라며 흔들어 깨울걸? 빨리 자자고, 한숨이라도 많이 자둬야 내일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럴듯하게 들리는 쿠퍼에 말에, 드워프들 또한 서둘러 푹신한 침대로 들어갔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그간의 피로.

스르륵 눈을 감으며······.

'김정겸 대표······.'

쿠퍼는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호락호락한 공장주가 아니었어.'

.

.

.

"빨리 일어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워프들이 곤히 잠들어 있던 쿠퍼를 흔들어 깨웠다.

"허······ 허엇!"

그제야 기억이 났다.

김정겸 대표의 제안에 따라 팍스FC에 들어왔고, 오자마자 씻고 자리에 누웠다는 사실을.

얼마간만의 잠인지, 줄곧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말끔히 사라진 터였다.

그와는 별개로······.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에, 쿠퍼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뭔 개소리야? 빨리 일어나. 자네가 제일 늦었으니까."

"······왜들 그래?"

"해가 중천이야. 벌써 열일곱 시간이나 잤다고."

"뭐? 열······ 열일곱?"

머리가 새하얘지는 그였다.

모행성의 공장에서는 고작 몇 분의 늦잠만으로도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었으니.

그렇게,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발견한 것은······.

뚜벅뚜벅.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팍스FC의 김정겸 대표였다.

"허, 허억!"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고용주.

그 넓은 물류센터를 자로 잰 듯 철저히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첫날부터 열일곱 시간이나 퍼질러 잔 그의 책임을 톡톡히 물을 것이 분명했으니.

하지만, 정작 그는 예상치도 못한 말을 꺼냈다.

"일어났으면 이제 밥 먹으러 갑시다."

"······밥?"

그는 아무렇지 않게 서른 명의 드워프들을 인솔했다.

그렇게 도착한 팍스 풀필먼트 센터의 2층 직원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간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다.

"세, 세상에!"

마치 그들이 주야장천 밤을 지새우던 공장의 생산 라인과도 같은 풍경이었지만······.

"······어떻게 이런 냄새가?"

그 품목은 완전히 달랐다.

일렬로 늘어선 수십 종류의 음식들.

뜨끈하게 데워진 음식 앞에는 집게나 국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어제 만났던 세공사 브로크를 비롯한 팍스FC의 일원들이 음식을 자유롭게 퍼 나르고 있었다.

"식사는 뷔페식이니까, 원하는 대로 퍼다 먹으면 됩니다."

"뷔······ 페?"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드워프들에게, 김정겸 대표는 그릇과 식기를 나눠주며 자세한 식사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곤······.

"아싸! 오늘 닭갈비!"

쾌재를 부르며 유유히 음식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이게 대체······."

얼떨떨한 표정으로 저마다 음식을 담아 자리로 돌아온 드워프들.

그들이 앉은 곳은 세공사 브로크가 있던 테이블이었다.

참다못한 쿠퍼가 브로크에게 물었다.

"그······ 일은 언제 시키는 건지?"

"일? 하고 싶을 때 하면 되오. 뭐, 간간이 부탁이 들어올 때도 있기는 하지."

"······!?"

겹겹이 충격이었다.

하고 싶을 때만 일하면 된다니.

그것도 대표가 일을 '부탁'한다니.

"하고 싶을 때만 하면 된다고······? 그런 걸 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 리가······."

여러모로 충격적인 팍스FC의 근로 조건이었지만······.

"쿠퍼 이것 좀 봐!"

"뭔데 그렇게······ 허억!"

동료들이 들고 온 거대한 맥주잔을 보자마자 복잡한 생각이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저기 저 기계에서 맥주가 무한으로 나와! 무한으로 나온다고!"

맥주.

거칠기만 했던 모행성의 생활이 그리웠던 가장 큰 이유였다.

수십 년간 노예가 되어 우주를 떠돈 탓에, 그 맛조차 기억할 수 없었던, 이제는 드워프들에게 있어 신화적인 음료가 된 그것.

치이이······.

차갑게 식은 맥주 위로, 보글보글 신선한 기포가 올라왔다.

꿀꺽.

꿀꺽.

그 시원한 맥주가 목으로 폭포처럼 쏟아졌을 땐······.

"아아······!"

"흐흐흑!"

지난 수십 년간 참아왔던 눈물이 함께 터져 나왔다.

펑펑 울음을 터뜨리며 무슨 하소연이라도 하듯, 브로크에게 묻는 쿠퍼.

"대체······! 우리에게 대체 뭘 시키려고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아니, 뭘 시키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절절한 동족들의 울음에, 브로크는 머쓱하다는 듯 덧붙였다.

"······이거 그냥 사내 복지야."

***

그렇게, 드워프들이 평화로운 하루를 만끽한 그날 밤.

정작 나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용수와 틈틈이 밖으로 나와 동부로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적들의 큰 전력 중 하나인 '공장'을 빼앗았다지만, 대수림을 공격한 병력은 남부 세력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들이닥쳤다.

"······투자 유치요?"

"예, 직접 보시는 게 빠르겠습니다. 여기······."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북부의 지도자이자, 프리스트인 글렌 포드.

그가 자신에게 떠오른 알림 메시지를 우리에게 공유해 주었다.

---

다차원 상공회의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성공적인 투자 유치를 축하합니다.

본 상공회의소는 귀 지역의 투자 요청을 수리하여, 현 '미국'의 실정에 가장 적합하다 판단되는 '머크우드'를 최종 투자 차원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에서의 사업 계획에 대해 안내드립니다.

7일 뒤, '워싱턴D.C' 지역에 대한 '머크우드' 차원의 통행이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제한적 허용 : 6위계, 7위계.

-무제한 허용 : 8위계.

※ 투자를 요청한 단체에는 투자 차원과의 수익 배분 및 별도의 중개 수수료가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귀 지역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다차원 상공회의소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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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유치.

새로 나타난 경제 용어였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또다시 괴물들을 풀어놓겠다는 것.

갑작스런 상공회의소의 통첩에 대해, 글렌 포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남부 놈들 짓이 틀림없습니다. 최근 워싱턴 쪽에서 전선이 교착되고 있었거든요. 거기에 공장까지 빼앗기게 되었으니······."

상공회의소의 메시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외부로부터 들어올 침략자.

하지만 그것을 불러낸 것은 다름 아닌 지구 차원의 존재라고.

"놈들도 초조했던 거겠죠. 하지만 다른 차원까지 끌어들일 줄이야······."

상공회의소가 부여한 시간은 일주일.

하지만, 이 메시지를 기점으로 전쟁은 한층 가속화되고 있었다.

"미 전역에 퍼져있던 남부의 병력들이 모조리 동북부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괴물들과 함께 워싱턴을 공격할 요량이에요."

미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워싱턴이다.

그곳에 가장 먼저 침략의 깃발을 꽂으려는 것.

먼저 워싱턴에 도달해 놈들의 진입을 막으면 될 것이었지만······.

문제는 일주일 뒤 들이닥칠 '머크우드'의 전력이었다.

"머크우드가 어떤 차원이라고 하던가요?"

"야수 종족으로 이뤄진 차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재생력이 강하다는데······ 그보다, 6위계라뇨······!"

글렌 포드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6위계.

지금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적이었다.

이번 기회에 상공회의소가 남부를 제대로 밀어주려는 모양이었다.

한편······.

'······되려나? 이거?'

나로서도 고민이었다.

내 주력 화기들의 등급은 대부분 4강.

7위계까지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6위계를 잡아낼 수 있을지는 차마 확신이 들지 않았다.

물론, 방법은 있었다.

이제는 팍스FC의 일원이 된 '공장'의 드워프들.

브로크의 말대로라면 그들이 5강 무기 제작에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으니까.

다만······.

'······꼴랑 하루 만에 일 시키는 게 좀 미안하긴 하네.'

'공장'에서 보았던 드워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퀭한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녹초가 되었던 드워프들의 모습.

최대한 휴식을 부여해 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벌컥!

그때였다.

누군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쿠퍼?"

틀림없었다.

그는 '노사협상'을 벌이던 공장의 드워프였으니까.

어쩐 일이냐 물어볼 새도 없었다.

쿠퍼가 다짜고짜 입을 열었으니까.

그리고······.

"김정겸 대표님!"

"······?"

미처 알지 못했다.

때로는 일이 너무 없는 것이 직장인들의 고충이 된다는 걸.

"미치겠습니다······! 제발 일 좀 시켜주시오!"

남북전쟁 (1)

077화 남북전쟁 (1)

'그렇다면야 뭐······.'

대뜸 일을 시켜 달라는 쿠퍼의 부탁.

나도 거리낄 것 없었다.

아예 5강 무기를 만들어 달라 부탁하면 될 것이었지만······.

"······그 정도면 무조건 원자로를 활용해야 합니다. 한데······."

쿠퍼는 난색을 표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요. 마력 원자로를 다루는 일이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쿠퍼는 고강화의 무기를 만드는 방법은 사물에 원자로의 마력을 각인하는 것이며, 높은 등급의 무기일수록 그 회로가 복잡해진다고 덧붙였다.

자연스레 제작 기간 또한 길어지게 된다고.

"그럼······ 얼마나?"

"못해도 열흘은 걸릴 겁니다."

"이런······."

열흘.

하지만 당장 일주일 뒤, 남부군과의 싸움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던 것인지, 다행히 쿠퍼가 다른 대안을 들려주었다.

"원자로를 사용하지 않고 회로를 그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위력은 분명히 증가하지만 억지로 위력을 강화한 것이다 보니······ 안정성은 훨씬 떨어지오. 사용하는 사람이 잘 컨트롤을 해야 하지."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는······?"

"쓰다 보면 폭발할 겁니다."

줄줄이 터져나갔던 남부군의 '특제 대포'가 떠올랐다.

엉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력 원자로를 이용해 만든 물건들.

그것 이상으로 불안정한 무기가 만들어질 터였다.

"나야 크게 상관없지만······."

아공간에 들어 있는 사물을 냅다 집어 던지는 것이 내 능력이었다.

그 사물이 폭탄이 됐든, 돌덩어리가 됐든 아무래도 좋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북부군부터, 가족들, 팍스맨들까지······.'

말 그대로 전쟁이다.

최소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동원될 터.

위력이 좋은 건 좋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 정도는 마련해 주어야 했다.

나는 글렌에게 물었다.

"분명 야수들이라고 했었죠?"

"예. 재생능력이 상당하고······ 상당히 날렵합니다. 피부도 단단하고요."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는 적들이지만, 그 '순수한' 강함을 무기로 삼는 녀석들이었다.

"······꽤 자세히 아시네요?"

"머크우드는 입찰 경쟁 이후로 줄곧 미국에 있던 놈들입니다. 전장에서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었죠."

잠시 기억을 되짚은 글렌이 덧붙였다.

"어지간한 차로는 따라잡을 수도 없을 만큼 몸이 재빠릅니다. 재생 능력 탓에 처리할 땐 확실하게 처리를 해야 하고요. 머리를 날린다거나······ 몸통의 절반을 갈라 버린다거나······."

문제는 그런 놈들이 7위계와 6위계의 척력을 두르고 온다는 사실이었다.

마력 원자로를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들이닥친 위협은 손속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결국 빠르게, 그것도 강력한 화력으로 단숨에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서였다.

그 모두를 상쇄할 수 있을 만한 전략 무기를 제조하자고 제안한 것은.

"탈 것을 만듭시다. 특히 싸움에 최적화된."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야수들을 때려잡을 기간트를 만드는 것.

"아주 불안정하면서도 안정적인 녀석으로요."

그것도 아주 특별하게.

***

"오우, 정겸."

내가 찾은 사람은 다름 아닌 메카닉 제임스였다.

줄곧 미국으로 오고 싶어 했던 그.

이미 오래전 애리조나의 땅을 밟았지만, 그렇다고 그와의 약속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뉴욕.

워싱턴D.C 위에 위치한 북동부 도시에 그의 집이 있었으니까.

"오우, 워싱턴이········."

나는 그에게 워싱턴으로 남부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그리고 더 강한 적들이 일주일 뒤 출몰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다음은 분명 뉴욕이 되겠군."

그러니 이번 싸움은 제임스에게 있어서도 아주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알겠다는 듯, 제임스가 내게 물어왔다.

"그래서, 무슨 도움이 필요해?"

"기간트를 만든 건데······ 설계를 맡아 줬으면 해."

"······기간트?"

이미 기간트 제작의 경험이 있던 제임스였다.

인천공항에서 얼기설기 만든 기간트를 타고, 트롤과 전투를 벌이던 그.

다만 이번에는 훨씬 더 발전된 형태의 기간트를 만들어야 했다.

"부속 하나하나를 강화한 다음, 거기에 출력이 집중될 회로를 그릴 거요. 이 회로 자체는 안정성이 매우 떨어지는데······."

기간트를 만들 재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은 쿠퍼.

그러자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재료가 달라진다 이 말이지?"

부속을 강화하고, 그 출력을 높이기 위해 회로를 그리고, 그렇게 모인 부속들을 제임스가 마지막으로 짜 맞춰 기간트를 조립하는 형태.

제임스가 전반적인 설계를 담당하는 한편, 드워프들이 장인처럼 세공과 회로에 공을 들이면 될 것이었지만······.

"할 수 있겠소? 모든 부품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을 거요."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마다 다른 위력과 출력을 가진 기간트의 부속들.

그걸 한데 모아, 조화로운 신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하지만 제임스는 자신 있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과출력이 서로를 상쇄하게 만들 거야. 부품 사이로 증기 같은 게 쓸데없이 튀어나오겠지만······ 오히려 멋있고 좋지. 그리고······."

그저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제임스에게는 벌써 완성될 기간트의 모습이 훤히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쓰고 버리는 용도로 만들면 되지."

인천 공항에서도 자동 탈출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던 제임스의 기간트다.

불안정한 기체이니만큼, 그 특징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것이 제임스의 생각이었다.

"그렇지, 정겸?"

내게 눈짓하는 제임스.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기간트는 내 능력에 의해 무한히 '양산'될 예정이었으니까.

단순한 전략이다.

한계에 달한 기간트를 아낌없이 폐기하고, 비상 탈출 장치로 날아오른 파일럿만 그때그때 상품 회수로 끌어당기는 것.

위력이 강한 기간트를 활용하면서도, 파일럿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들어 볼게. 어디, 잘해 보자고."

쿠퍼에게 악수를 건네는 제임스.

남은 일은 이제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기간트의 테스트 버전이 완성된 것은 그로부터 3일 뒤였다.

덕분에 밤낮을 지새운 드워프들이었지만······.

"에이,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오."

3일 밤샘 작업 정도는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며, 그들은 망치를 놓지 않았다.

그 덕분이었다.

최종 조립까지 시간이 상당 부분 단축되었고, 덕분에 기간트 회로들의 출력을 적절하게 조정할 수 있었다.

"오오······."

그렇게 완성된 기간트.

머리라고 부를 만한 부분은 없었지만, 거대한 몸통에 팔다리가 달린 것이 영락없는 기간트의 모습이었다.

지이잉.

쿠우웅!

내성 강화석으로 떡칠을 한 장갑판이 들썩이며 자유자재로 팔다리가 움직였다.

후방에 달린 출력 장치에서는 P-22에서 사용했던 익스플로전 마법이 한층 발전된 형태로 탑재된 상태.

제대로 완성된 기간트를 우러러보며, 제임스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가장 어려운 건 그거였어. 팔다리가 뜯어지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 출력을 상호작용하기가 쉽지 않았지. 정겸도 알겠지만······ 여기엔 특별한 연료가 들어가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가 연금술로 개발해 준 기화성 폭액.

여기에 폭발 속성이 있는 강화석을 사용한 뒤, 폭발을 견딜만한 엔진 실린저를 4중, 5중으로 설계했다.

안정성을 깡그리 무시한, 그저 폭발로만 움직이는 극단적인 설계였다.

"실린더에서 발생한 에너지가 크랭크 샤프트를 움직일 거야. 팔다리에 부착된 보조 동력과 합을 맞추면서 곳곳으로 균형감 있게 동력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난쟁이 친구들의 도움이 컸지."

드워프들이 부속에 새겨준 회로.

비록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회로였지만, 기체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출력의 흐름을 일원화해 주는 역할을 했다.

제작사 드워프, 세공사 브로크, 거기에 메카닉 제임스가 힘을 합쳐 만든 기간트였지만······.

"정겸, 이거 저번에 만든 비행기보다 훨씬 운전하기 어려워."

여전히 난항은 존재했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에겐 든든한 천재 파일럿이 있으니까.

.

.

.

"······또요?"

차량부터 헬기, 전투기와 잠수함까지.

별의별 운송 수단은 모조리 다 몰아본 그였지만······.

"이것 참, 이런 상상은 어릴 때나 해 봤는데······."

단연코 '로봇'은 처음이었다.

머쓱한 표정의 그였지만, 그래도 나름 기대가 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더욱이,

"이건 제 능력을 벗어나기는 하네요."

이번 기간트의 운행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 과제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의 능력은 .

운송수단의 숙련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능력이었지만, 어디까지 '운전'에 해당할 뿐, 그것이 기간트의 전투 숙련도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욱이······ 그의 역할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훈련생들까지요?"

기간트를 몰아야 할 사람은 비단 이용수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훈련받고 있는 여하의 '운전' 능력 각성자들.

팍스맨이 된 그들 또한 이번 미국에서의 전투에 참전시킬 계획이었으니까.

무한으로 찍어낼 기간트다.

오히려 부족한 쪽이라면 그걸 탑승할 파일럿들.

훈련에 참여하고 있는 팍스맨은 물론, 북부의 전력들에도 기간트를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거라면 정말 시간이 없네요. 일단 타 보겠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우직하게 기간트에 탑승하는 이용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우우웅!

비상탈출을 감행한 이용수의 낙하산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만 벌써 아홉 번째였다.

***

그렇게, 어느덧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지이이잉.

상공회의소의 게이트 포탈이 열리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머크우드 차원의 야수들.

흔하디흔한 변종 늑대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코요테, 납작하고 무거운 몸에 거대한 뿔을 세우고 있는 라이노까지.

많고 많은 종류의 야수들이 있었지만······.

눈에 띄는 존재들은 따로 있었다.

크르르르······,

희번뜩 노란 눈빛을 빛내는 표범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허벅지가 그 세찬 속도를 가늠케 했고, 다음으로 나타난 거대한 크기의 곰이 촘촘한 육각형 비늘로 뒤덮인 단단한 몸을 자랑했다.

모두 7위계에 해당하는 강력한 괴물들.

그야말로 아찔한 광경.

남부군의 지도자 매디슨 또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상공회의소가 아주 잘 골라줬어.'

약물을 다루는 매디슨이었다.

미국 전역을 지배했던 중독 가스의 제작자인 그는, 머크우드 차원을 위해 새로운 종류의 약물을 창조해 냈다.

고위계로 무장한 것도 모자라, 압도적인 재생력까지 지닌 야수들을 위해.

'미쳐 날뛰는 야수들만큼 매서운 건 없지.'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광폭화' 알약.

미리 머크우드 차원에 알약을 나눠준 터였고, 곧이어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성을 잃은 야수들이 워싱턴에 자리 잡은 북부군을 산채로 찢어 버릴 터였다.

그때였다.

철걱.

철걱.

갑옷을 두른 머크우드의 유인원 하나가 매디슨 앞에 다가왔다.

"부탁하고 싶은 건 없나?"

"없어. 그저 속전속결로만."

눈앞에 보이는 워싱턴 D.C의 풍경.

매디슨은 머크우드에게 워싱턴을 아예 불바다로 만들어 달라 부탁한 터였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워싱턴은 상징적인 도시다.

지금은 멸망해 버린 미국의 존엄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매디슨은 그 어떤 파괴도 용인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놈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거지만······.'

줄곧 워싱턴D.C만큼은 필사적으로 사수해 오던 북부군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미 자리를 잡은 북부군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 상태.

하지만······.

'그래봤자 얼마나 버티겠어?'

얼마 전, 드워프들의 공장을 잃은 것은 뼈아팠지만, 그런데도 저 위용 넘치는 야수 군단이 나약한 북부군에게 밀릴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북부군의 최대 전력은 기껏해야 프리스트를 비롯한 7위계 몇 명.

이쪽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일대일로 붙어도 야수들의 승리를 어렵지 않게 점칠 수 있었다.

'이제 가나? 이제······.'

한껏 가슴을 졸이던 매디슨.

이윽고 그가 발견한 것은,

타앗!

타닥!

타다닥!

유인원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뛰어 들어가는 머크우드의 야수들이었다.

꽈아아아앙!

이윽고 이어지는 파괴.

거대 표범들이 적들을 교란하는 동안, 비늘에 뒤덮인 곰이 주먹을 휘둘러 건물을 부수고 다녔다.

'빨라. 확실히······.'

정말이지 번개와도 같은 속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발견한 것은······.

깨행!

휘이이이이잉!

하늘을 날고 있는 거대 표범 한 마리였다.

"뭐지? 뭐가 있었던 거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

자세히 살피니, 흐릿흐릿한 적의 잔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마 그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간트?"

마땅한 다른 표현이 없었다.

휙휙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북부의 기간트.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놈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귀를 찢을 듯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파아아아아아앙!

-카아아악!

허리가 접힌 채 날아가는 비늘 곰.

전반적으로 우세를 점하는 듯한 북부의 기간트였지만······.

"그렇지! 거기서 그렇게······!"

어느덧 수십 마리의 야수들에 의해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크르르 이빨을 내밀며 입맛을 다시는 야수들.

놈들이 기간트의 장갑에 이빨을 박아 넣으려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지만······.

피슈우우우우웅!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비상탈출을 감행한 이용수의 낙하산이었다.

야수들이 뒤늦게나마 그를 추격했지만······.

슈우우우욱!

탈출한 파일럿이 난데없이 생겨난 포탈 안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적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야수들.

하지만······.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그들을 반긴 것은 폭발이었다.

잔뜩 과부화되어 있던 북부군의 기간트가 차마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해 버린 것.

"저런 무기가 있었다고? 북부군이······?"

쩍 하니 입을 벌린 매디슨.

하지만 그의 경악은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슈우우웅.

"······?"

갑작스레 야수들을 향해 드리운 거대한 구름.

그것은······.

"······저건 또 뭐야?"

'폭발' 속성으로 강화를 끝낸, 마력 회로가 잔뜩 그려진 H형강이었다.

남북전쟁 (2)

078화 남북전쟁 (2)

퍼어엉!

퍼엉!

매초 간격으로 쏟아부은 H형강.

이번에도 '다중 출하' 능력이 빛을 발했다.

강력한 척력을 두르고 있는 머크우드의 야수들이었다.

놈들의 방어를 뚫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퍼어어엉!

깨해앵!

부여된 '폭발' 속성과 함께 드워프들이 그려준 회로가 폭발하며, 날뛰던 야수들을 산산조각 냈다.

후두두둑!

도시를 피로 물들이는 야수들의 사체.

갑자기 하늘에서 날아든 거대한 폭탄 탓에, 야수들의 몸짓이 한층 굼떠졌다.

'······갈 데까지 가 보자고. 어차피 민간인 대피도 끝내 뒀으니.'

어쩌면 놈들은 우리가 워싱턴을 보호할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워싱턴은 과거 미국의 상징적인 도시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물론이거나, 프리스트 글렌 또한 미국이라는 옛 이름에 구태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의 최우선의 목표는 남부군을 섬멸하고, 미국에 평화를 되찾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이제 껍데기만 남은 구시대의 도시는 아무래도 좋았다.

푸쉬이이이-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연기.

남부의 지도자, 매디슨은 이번에도 역시 중독 가스를 풀어 놓고 있었다.

보나 마나 우리가 중독 가스에 취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 테지만······.

"······아주 시원하다 못해 개운하네."

질겅질겅.

다행히, 우리에겐 드루이드들이 만들어 준 세계수 잎이 있었다.

조금의 취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되레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으로 '추적 배송'과 '다중 출하'를 이용해 야수들을 도륙 내고 있을 따름.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탓에 시야가 조금 가린다는 점이 방해라면 방해였다.

더욱이······.

세계수 잎의 유용함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설마 기간트에게도 도움이 될 줄이야."

콰아아앙!

콰득!

전광석화처럼 나타난 기간트가 표범의 입에 캐논포를 꽂아 넣었다.

위이이잉-!

푸학!

순식간에 터져나가는 표범의 머리.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기간트가 십수 마리의 야수가 모인 장소로 쇄도했다.

-케에엑!?

-카악!

당황한 야수들이 서둘러 기간트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꽈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그들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

구름처럼 솟아오른 폭발 위로, 파일럿의 낙하산이 능청스럽게 포탈로 빨려 들어왔다.

운송수단을 넘어, 전투 병기가 된 기간트.

기체의 출력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또 적절한 자폭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는 기예에 가까운 반응속도가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왜 이렇게 조작이 잘 되는 걸까요······?

-어쩐지 기간트가 한 몸처럼 느껴집니다······.

세계수의 잎을 씹은 변화였다.

집중력과 반응속도, 그리고 각성효과까지.

이용수를 비롯한 기간트 라이더들 모두가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으니까.

머크우드의 맹렬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벌써 기울어져 있었다.

귀신처럼 등장한 자폭 기간트들이 적들을 교란했고, 놈들이 움직이는 경로에 따라 내가 H빔과 성창을 쏟아부었다.

북부군 또한 남부로부터 빼앗은 '특제 대포'를 이용해 적들에게 포격을 가하는 등, 힘을 실어 주는 형국.

그제야 머크우드는 전략을 수정했다.

-우우우우!

시작은 야수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갑옷을 입은 유인원이었다.

척!

척!

수신호를 보내는 것인지, 하늘을 향해 휘적휘적 팔을 뻗어대는 유인원.

그 변화는 다름 아닌 워싱턴으로 향하던 야수들에게 나타났다.

맹목적으로 날뛰던 야수들이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정신을 차린 듯, 일사불란하게 도시의 길목 길목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놈들은 차분히 기간트들이 원하는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기다렸고,

타아아앙!

마침내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피웅!

별다른 소득 없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파일럿.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간트가 폭발했지만······.

꽈아아아아아앙!

피해를 입은 야수들은 없었다.

카아아아악!

카아악!

꽈르르르르릉!

무너져 내리는 워싱턴 거리의 건물들.

놈들은 유인원의 신호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정작 싸움에 나설 때는 약물이 전해 주는 '광폭화'를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냉철하면서도, 광기에 찬 공격.

나로서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데······."

전투가 점차 비등비등해지고 있었으니까.

-어떡하죠, 정겸 씨?

무전을 통해 이용수가 물어왔다.

기간트를 이용한 전략이 차츰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으니.

오래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저 유인원이 문제였다.

머크우드의 보스일 것으로 예상되는, 갑옷을 두른 유인원.

무슨 전파라도 쏘아대는 것인지, 놈은 수백 수천 마리의 야수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고 있었으니까.

당장 놈을 먼저 처리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끝끝내 후방을 지키고 있는 것은 물론, 그 앞으로 달려드는 수백 마리의 야수들을 먼저 처치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던 중,

"용수 씨, 생각해 보니까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도 통신을 보낼 수가 있었네요."

-통신이요?

그게 당최 무슨 뜻이냐는 듯, 되묻는 이용수.

나는 즉시 야수들에게 보낼 정성스러운 메시지를 준비했다.

그것도 최대한 신경이 쓰일 만한 메시지를.

그러곤 곧장 팍스에게 요청했다.

"팍스, 머크우드 차원에서 온 놈들한테 싹 다 뿌려줘."

[알겠습니다.]

[개체 당 하나씩 메시지를 전송하면 될까요?]

"무슨 소리야? 죽을 때까지 초당 두 개씩은 보내야지. 미친 듯이 쏟아부어."

[알겠습니다.]

[메시지를 전송합니다.]

일단은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유인원을 통해 통신을 주고받는 야수들.

그 메커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천 개의 스팸 문자가 놈들의 시선을 가득 채울 테니까.

***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군."

가만히 전황을 살펴보고 있던, 머크우드 차원의 사령관, 델타라스.

갑자기 나타난 적들의 기계 로봇에 대처하기 위해, 예정보다 빨리 통신 능력을 발휘한 그였다.

-골목 끝에 기간트가 있다. 우회해서 틈을 노려.

-그 골목은 숫자를 모아서 가야 한다. 잠시 기다려, 추가 병력을 보내줄 테니까.

-그렇지! 달려들어!

유인원 델타라스는 머크우드 차원의 집단지성 그 자체였다.

머릿속을 맴도는 수백 개의 메시지.

그의 지시에 따라 야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그 덕분에 서서히 기간트를 비롯한 북부군을 몰아넣고 있었다.

"좋아, 계속 그렇게······."

서서히 허물어져 가는 북부군의 방어선.

이제 놈들을 쓸어 버릴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아주 쏠쏠하겠어."

델타라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북부군의 전력만 해도 최소 수만 명으로 예상되는 상황.

선봉에 나선 머크우드로서는 상당한 마석을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에 한탕 제대로 당기면, 건틀릿이랑······."

한참을 벼르고 벼렸던 장비들이었다.

벌어들일 수익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델타라스.

한껏 기분이 좋아진 그였지만······.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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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발신]

해외 승인 6***

마석 3,516개 결제 완료

본인 아닐 시 상공회의소 문의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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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 탓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뭐야, 이게?"

그 또한 모르지 않았다.

이 메시지가 다름 아닌, 상공회의소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걸.

하지만 그 내용이 당황스럽게 그지없었다.

"내, 내가 언제 돈을 썼다고!"

허둥지둥 각성 시스템을 열어본 델타라스였지만······.

정작 그가 신경 쓸 문제는 따로 있었다.

-띠링!

-띠링!

-띠링!

[Web 발신] 해외 승인······

[Web 발신] 해외 승인······

[Web 발신] 해외 승인······

[Web 발신] 해외······

미친 듯이 떠오르는 수십, 수백 개의 메시지.

바삐 손을 놀려 메시지 창을 걷어낸 그였지만, 정작 떠오르는 속도가 몇 배는 빨랐다.

"······뭐야 이게!"

그리고······

그렇게 날아든 피싱 문자의 효과는 상당했다.

-카아악?

-케에에······.

돌연 움직임을 멈춘 야수들.

그 모두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움직이라고! 멍청한 새끼들아!

목청이 터져라 명령을 쏟아낸 델타라스였지만······.

야수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대뜸 날아든 수백 통의 메시지 탓이다.

델타라스의 목소리쯤이야, 알림 소리에 금세 지워져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

콰아아아앙!

타아아앙!

야수들의 비명과 함께, 또다시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젠장! 젠장!"

순식간에 줄어드는 야수들.

발을 동동 구르는 델타라스였지만······.

"······저건?"

정작 더 큰 위기가 그를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뚝 멈춰 서 있는 머크우드 차원의 야수들.

그 덕분에 지휘관인 자신으로 향하는 길목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콰가가가가각!

그런 그를 향해 기간트 한 기가 미친 듯이 쏘아져 오고 있었다.

펑펑 후방을 폭발시켜가며, 어처구니없는 추진력을 뿜어내는 기간트.

휘익!

하얀 광채로 둘러싸인, 정체 모를 창을 치켜든 녀석이······.

푸욱!

"커어억!"

망설임 없이 델타라스의 몸을 꿰뚫었다.

"······어떻게?"

등 뒤로 길게 튀어나온 창.

자그마치 6위계에 달하는 척력이었다.

성창에 그려진 드워프들의 섬세한 회로, 거기에 기간트의 폭발적인 출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퍼어어어엉!

마찬가지로 파일럿이 탈출한 뒤, 폭발을 맞이하는 기간트.

지독한 열기와 고통이 델타라스를 휘감았지만······.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살아 있지?"

정확히 심장이 꿰뚫린 상태였다.

척력을 뚫고 들어오는 창을 보며, 죽음을 각오했던 상태.

하지만, 델타라스의 목숨은 아직 끈질기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꾸물꾸물.

꾸물꾸물.

관통된 배 사이로 정체 모를 촉수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델타라스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느새 주변이 분홍색 가스로 차오르기 시작했다는걸.

그렇게 그가 목도한 것은······.

"······."

담담히 방독면을 쓰고 있는 남부군의 지도자, 매디슨이었다.

광폭화를 위해 삼켜두었던 알약.

그 성분이 분홍빛 가스와 상호작용하며, 야수들의 몸에 치명적인 변이를 일으킨 터였다.

"매디슨······! 너 이 새끼!"

명백한 배신 행위다.

분노에 찬 델타라스였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의 심장으로부터 시작된 변이.

벌레처럼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촉수가 그의 온몸을 집어삼켰으니까.

***

유인원을 처치한 직후였다.

끝끝내 놈에게 창을 찔러넣은 이용수.

그런 그를 재빨리 아공간에 집어넣었지만······.

"왜 안 죽지······?"

유인원은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야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갖은 촉수로 뒤덮인 그들.

놈들은 치렁치렁 달린 징그러운 보랏빛 기관을 흔들며, 워싱턴의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문제는 놈들이 미친 듯이 강해졌다는 데 있었다.

촉수로 뒤덮인 곰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건물 한 채가 날아갔고, 가까스로 파일럿을 내보낸 기간트가 표범들에 의해 그대로 폭사했다.

피우웅!

피웅!

북부군이 부단히 포탄을 쏴 주고 있었지만,

꾸물꾸물.

꾸물꾸물.

상처가 나기 무섭게 금세 촉수가 재생될 뿐이었다.

그때였다.

"어쭈······."

남부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은.

워싱턴을 향해 쉴 새 없이 가스캔을 발사하는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지만, 뭔가 달랐다.

전장을 채운 뿌연 분홍색 연기.

거기에 촉수에 뒤덮이며 변이를 일으키는 야수들까지.

그건 아무리 봐도 놈들이 쏘아 올린 '새 가스캔'의 효과였으니까.

"몸에 좋은 건 아닌가 보네, 지들은 방독면을 쓰고 있는 걸 보면······."

한창 날뛰기를 시작한 변이 야수들.

놈들의 압도적인 무위를 보고 있자니, 기간트건 각성들이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일단은······."

상품 회수를 발동해, 모든 기간트를 회수했다.

그러곤, 팍스를 통해 북부군에게도 메시지를 전달했다.

워싱턴에 설치된 포탈을 통해, 시카고로 대피하라고.

얼마 전 개방한 '포탈 운송'을 사용하면, 구태여 아공간에 들이지 않고서도 사람이나 사물을 옮길 수 있었으니까.

이제······.

"정겸 씨, 괜찮으시겠어요?"

전장에 남은 것은 나와 이용수뿐이었다.

"비행기 추락도 몇 번이나 경험해 봤는데요."

"하하······ 그건 그랬죠."

아공간에서 새 기간트를 뽑아온 이용수.

그가 기간트의 커다란 손으로 나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타악!

깊게 디딤발을 디뎠다.

퍼어어엉!

기간트의 어깨에서 일어난 거센 폭발.

그 힘을 기반으로, 이용수가 나를 남부 진영을 향해 집어 던졌다.

쐐애애애애액!

스킬의 사정거리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날아간 끝에······.

지이이잉.

남부군의 머리맡 위로, 나를 회수해 줄 포탈이 보기 좋게 피어났다.

그러곤,

"상품 회수."

슈우우우우욱!

'의약품 카테고리'를 이용해 놈들이 애용하던 약물을 종류별로 빨아들였다.

가스캔, 알약, 거기에 가루로 포장된 약물까지.

쿠당탕!

아공간 내부로 빨려 들어온 나.

물류 상황실의 위성을 통해, 다시 움직이는 남부군을 관찰할 수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이 날아들었음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 남부군.

놈들은 천천히 변이된 괴물들을 관망하며 방독면의 끈을 고쳐잡을 뿐이었다.

"······자신 있다 이거지?"

이제는 완전히 통제를 벗어난 변이 야수들이었다.

머크우드를 통째로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건, 어떻게 해서는 놈들을 치워 버릴 자신이 있다는 뜻.

그 자신감의 근원을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알아서 자멸하게 되어 있나?"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변이지만, 분명 그 리스크가 존재할 터였다.

촉수와 함께 온몸의 장기가 튀어나오는 야수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라 보기 어려웠으니까.

워싱턴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저절로 죽음을 맞이할 머크우드의 야수들.

그것이 남부군의 자신감이었다면, 이어질 나의 전략 또한 단순했다.

"팍스, 놈들이 쓰고 있는 방독면, 모조리 회수해."

[알겠습니다.]

갖은 독성 물질로 우리를 괴롭히던 남부군이었다.

놈들을 처리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 터.

워싱턴에 달려 들어간 변이 야수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또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회수한 약을 살포해 줘. 아주 많이."

어쩌면 극독이나 다를 바 없는 성분.

그 약을 아주 찐하게 뿌려주면 될 테니까.

"······약을 풀 거면 이 정도는 풀어야지."

그것이 통 큰 물류센터의 역할이었다.

남북전쟁 (3)

079화 남북전쟁 (3)

치이이······.

치이이이······.

곳곳에 뿌려진 가스 연기.

워싱턴 시내의 초입에는 분홍빛 연기가, 남부군이 주둔하고 있던 남쪽 지형에는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변이를 일으키던 야수들에게도 제동이 걸렸다.

푸화학!

야수들의 입을 뚫고 나온 굵직한 촉수.

생명의 진화가 야수들에게 선사한 것은 더 이상 성장이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야생과 자연의 순리뿐.

결국······.

쿵!

쿵!

줄곧 고통받던 야수들이 하나둘 자리에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괴멸한 머크우드의 야수 군단.

상상을 초월하는 약물의 효과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들은 대체 뭘 만든 거야······?"

물론, 쓰러진 것은 야수들뿐만이 아니었다.

방독면을 빼앗긴 남부의 병력들.

그대로 중독 가스를 들이마신 놈들 또한 한창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으니까.

-케에에에엑!

-카아아악!

하나같이 눈을 뒤집고 거품을 물며 생을 달리하고 있는 녀석들.

대부분이 남부군에 의해 세뇌된 괴물들일 뿐, 정작 인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긴······ 가담한 사람이 그리 많을 리 없지."

각성자와 비 각성자 간의 엄연한 차별을 주장하던 남부군이었다.

멸망이 들이닥친 지금의 상황을 비추어 본다면, 비정한 적자생존을 내세운 셈.

가족도, 연인도 뒤로 제쳐두는 살벌한 논리가 그리 환영받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남부라는 거대한 세력의 허울을 뒤늦게나마 가리겠다는 듯이.

.

.

.

전투가 일단락된 직후,

아공간에 있던 나를 찾아온 사람은 북부의 지도자, 프리스트 글렌 포드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야 두 다리 뻗고 잠이 들겠군요."

덥석!

큼지막한 손을 마주 잡으며, 눈을 빛내는 그.

하지만 그는 거듭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내심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럴만했다.

어느 정도 피해를 예상한 워싱턴이었지만, 아예 중독 가스로 범벅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런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윽.

그저 워싱턴으로 열려 있는 포탈을 가리키는 것뿐이었다.

"아아······!"

탄성을 내뱉는 프리스트.

그가 발견한 것은 대수림에서 넘어온 드루이드들이었다.

"그렇군요······! 드루이드들이라면······!"

직접 드루이드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전력이 있는 그다.

그들이 왕성한 자연력과 치유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 또한 모르지 않았으니까.

사아아아······.

드루이드들이 내뿜는 녹 빛의 기운.

덕분에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중독 가스가 걷어지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지만······.

다행히 이들의 원동력이 되어 준 물건이 있었다.

질겅질겅.

낙타처럼 세계수 잎을 씹으며, 도시의 청소부를 자처한 드루이드들.

조끼처럼 생긴 가죽 주머니에는 돌돌 말아 놓은 세계수 잎이 뭉텅이로 들어 있었고, 그 풍요로움을 자랑하려는 듯, 몇 번 씹지도 않은 잎을 퉤하고 뱉어 버리는 드루이드도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그들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툭.

사아아아······.

떨어진 세계수 잎이 오염된 야수들의 시체를 정화하는 것을 보니, 의외로 다 생각이 있는 행동이었다.

물론, 세계수가 필요한 것은 비단 드루이드들뿐만이 아니었다. 

남부군과 맞섰던 북부군, 거기에 매디슨에게 가담하지 않았던 남부 사람들까지.

지금 미국에서 중독 가스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은 널리고 널렸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일일이 다 나눠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워싱턴을 중심으로 서서히 미국을 복구해 나갈 글렌.

그야말로 세계수 잎을 미국에 보급하기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한편······.

'소득이 상당하네.'

이번 미국행을 통해 얻은 전리품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세공사 브로크를 일원으로 들였고, 대수림에 고립돼 있던 드루이드들의 협력을 끌어내는 한편, 종국에는 마력 원자로를 이용하는 제작자 드워프들까지 휘하에 넣었다.

뿐만 아니라······.

'라이시온 광산, 드워프들의 공장, 거기에 대수림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상공회의소가 배치한 미국의 '거점'들이었다.

그야말로 노른자와도 같은 자원.

별도의 점령석을 얻거나 하지는 않은 공장과 대수림이었지만, 협력을 약속한 이상 팍스FC의 세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토종 한국인인 내가 이렇게 미국의 자원을 탈탈 털어먹어도 괜찮은 것일지, 사뭇 걱정되기도 했지만······.

글렌은 그런 나를 오히려 독려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정겸 씨는 미국 이상의 역할을 할 사람이니까요."

"······미국 이상이요?"

"말씀하신 것처럼 정겸 씨는 미국인이 아니죠. 하지만 우리를 대신해 남부군을 몰아내 주셨잖습니까?"

사실이 그랬다.

내가 싸우는 상대는 다름 아닌 다차원 상공회의소였고, 놈들의 침략 앞에서는 국가 구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이미 무너진 미국입니다. 저는 정겸 씨의 그릇이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고요."

"아······."

진즉 팍스FC로의 가입을 요청했던 글렌과 북부군.

붕괴한 미국에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예 없는 셈 쳐 버릴 줄은 몰랐다.

"이것 참······."

물류센터의 몸집이 어느덧 훌쩍 커 버린 듯한 기분.

그렇게······.

그와 마지막으로 손을 마주 잡으려던 찰나였다.

"······김 대령님!"

허둥지둥 아공간으로 들어오고 있는 작전본부장 유성철.

그가 급박한 소식을 전해왔다.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악마요?"

정말이지 뜬금없기 짝이 없는 소식.

하지만 사색이 된 유성철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차마 고개를 갸웃거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악마라고요?"

프리스트, 글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

제법 지난 일이지만, 시카고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유성철이었다.

북부의 지도자인 글렌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유성철은 함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글렌의 요청을 어렵지 않게 수락했다.

"일단은······ 오셔서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서둘러 아공간 밖으로 향하는 유성철.

그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합참 본부에 위치한 영상 분석실이었다.

미국에 처음 넘어갔을 당시, 자폭 갈귀들의 모습을 확인했던 곳.

유성철이 파일이 저장된 PC의 버튼을 눌렀고,

위이이잉-

전원이 켜지는 동안, 내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갑자기 웬 영상입니까?"

"인천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민우 씨가 부상을 입었고요."

"전투요? 민우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유성철의 말에 따르면 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일.

인천과 용산이 포탈로 연결되어 있던 덕에, 빨리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후송이 빨랐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에요. 한데······."

인천을 지키던 민우의 부상이었다.

하지만 유성철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듯,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저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분명 처음 보는 놈들이었습니다."

파앗!

어느덧 떠오른 영상 화면.

카아아앙!

카앙!

치열했던 인천에서의 상황과 함께, 마침내 유성철이 '악마'라고 부른 적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길게 뻗은 박쥐 날개.

인간과 짐승을 반쯤 섞은 듯한 몸통.

이마 양쪽에 솟아 있는 새카만 뿔까지.

유성철의 말마따나, 영락없는 악마의 형상이었다.

프리스트, 글렌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들이 맞군요. 뉴욕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글렌은 놈들이 '가고일'이라 불리는 7위계의 괴물이며, 유럽 지역을 장악한 차원의 괴물이라고 일러주었다.

신성력을 주 무기로 삼는 프리스트답게, 글렌은 눈을 빛냈다.

"······확실히 신성력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더군요."

남부군과의 전투와는 달리, 정작 유럽의 악마들에게 강한 면모를 보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놈들을 처리했느냐는 내 질문에, 글렌은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냥 절 무시하고 중부 쪽으로 날아가 버리더군요."

냅다 자리를 피해 버린 가고일.

그리고······.

그 상황은 한국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우 씨를 비롯한 각성자들과 몇 번 합을 겨루더니······ 그대로 해안 쪽으로 날아가 버렸거든요."

살생을 위한 것도, 침략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유럽에 있다던 가고일이 대체 왜 인천 앞바다까지 행차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 내막을 알게 된 것은······.

[정겸님.]

다름 아닌 팍스를 통해서였다.

[상급 기관에서 '일본 지부'로 내부 문건을 전해왔습니다.]

정확히는 이 일의 주동자, 상공회의소로부터.

.

.

.

상공회의소부터 흘러든 내부 문건.

팍스가 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세 가지로 정리해 주었다.

첫째는 입찰 경쟁을 통해 들어온 악마들의 차원 페르메곤이 상공회의소가 배정한 '유럽 지역'을 통합했다는 것.

둘째는 그다음 점령지로 다름 아닌 이곳 한국을 지목했다는 것.

셋째는 한국의 대표로 나를 지명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내용이었다.

사실상 일본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유신각성회.

그 휘하에 있던 후쿠오카가 부산 대표를 향해 선전포고를 날렸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게이트 포탈이 들어온다고?"

[그렇습니다.]

[문건에 따르면, 유럽 통합에 따른 어드밴티지가 적용되었습니다.]

[명시된 일시에 유럽 지역과 자유 통행이 가능한 게이트 포탈이 설치됩니다.]

전투 승리에 따른, 일종의 보상 차원으로 주어지던 게이트 포탈이었지만, 이번에 상공회의소가 내린 결정은 한층 과감했다.

페르메곤과 겨루기도 전에 대뜸 한국으로 향하는 게이트부터 열어 버리겠다는 심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유럽의 악마들이 한국을 뒤덮게 될 상황이었다.

"구태여 한국을 점찍은 이유는······."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입찰 경쟁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이제는 아예 멸망을 지워 버리다시피 한 대한민국.

힘에 자신이 있는 다른 차원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땅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제야 가고일이 미국과 한국을 기웃거렸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접 한 번 보러왔던 거구나. 어디, 붙어볼 만할지 어떨지."

[그렇습니다.]

전투 도중 도주해 버린 가고일들.

놈들의 목적은 다름 아닌 정찰이었다.

대강의 상황을 짐작한 나는 팍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 들어온다는 거야?"

[지금으로부터 14일 뒤이며, 한국 지역에는 7일 뒤에 일괄적으로 통보될 예정입니다.]

[당초 28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상급 기관에 의해 기한이 수정되었습니다.]

"이런······."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물며 상공회의소가 있던 시간마저 단축시킨 상황.

아공간에 흡수한 일본 지부 덕분에 그나마 일주일을 추가로 번 셈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심스레 내 생각을 묻는 유성철.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한국 대표로 지목된 이상, 놈들이 가장 먼저 노리는 것은 내 목숨이 될 테니까.

물론······.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광산을 얻어둔 게 효과를 보겠네요."

저주받은 카멜롯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물건.

하지만, 라이시온 광산을 얻은 덕에 내게 충분히 수급된 물건이 있었다.

"악마족이면······ 역시 신성 무기죠."

풍족하게 쌓여있는 신성 속성의 강화석.

이참에 팍스맨들을 신성 장비로 떡칠을 한 성기사단으로 만들어 볼 작정이었다.

악마와 성기사 (1)

080화 악마와 성기사 (1)

악마들의 침공 계획을 알게 된 직후, 내가 찾은 곳은 드워프들의 공장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시오?"

터엉!

한창 두드리던 망치를 내려놓은 쿠퍼.

이제는 엘븐하임에 위치한 공장이었다.

제 발로 움직일 수 있는 이동식 공장.

새로 얻은 '포탈 운송' 능력을 활용한 덕에, 아공간에 수용하는 일 없이 통째로 옮겨올 수 있었으니까.

내가 쿠퍼에게 대답했다.

"무기 좀 만들었으면 해서요."

당장 쓸 무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신성력을 최대로 강화한 에메스 여신의 H빔과 성창. 

그것만으로도 저 사악한 악마 놈들의 땟국물을 제대로 떨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쓸 수 있는 무기도 확보해 둬야지.'

상공회의소는 점점 더 강한 적들을 지구로 밀어 넣고 있었다.

놈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나 또한 그만한 전력을 갖춰야 할 터.

다행히 남부군을 상대했을 때보단 시간이 있었다.

"분명, 열흘이라고 했었죠?"

고등급 무기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

그건 '공장'의 원자로를 이용해 아이템에 회로를 그려 넣는 것이었다.

정교한 작업이니만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지만······.

"대표님 부탁이라면 안 되도 되게 해야지요."

쿠퍼가 씨익 미소를 흘렸다.

쾌적한 생활 환경과 풍성한 일거리.

워라밸의 균형을 맞춘 드워프들은 한풀 내게 살가워져 있었으니까.

쿠퍼가 내게 물었다.

"방법은 얼추 기억하시지요?"

"얼추 기억합니다. 조건을······."

이미 한차례 제작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은 터였지만, 쿠퍼가 한 번 더 상세히 '마력 회로'의 개념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마력 회로는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주인이 사물에 전하는 '말' 같은 거지요."

사물에 조건을 부여하는 것.

그것은 고등급의 아이템을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아이템에 부여할 조건을 말씀해주시면, 그 조건을 토대로 마력 회로를 새겨넣을 겁니다. 이후 그 조건이 달성되면 아이템에 랜덤한 속성이나 효과가 부여되죠."

일종의 내기와도 같았다.

다만 그 상대가 사람이 아닌 사물, 즉 아이템이라는 점.

내가 어떤 성취를 이루겠노라 호언장담을 하면, 마력 회로가 그려진 아이템이 그 결과를 두고 보는 식이었다.

조건이 성취된 것이 확인되면, 평범했던 장비가 개구리 왕자처럼 고등급의 아이템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

그리고 당연하지만······.

"대충 아무 조건이나 붙이는 건 안 되겠죠? 1시간 뒤 점심밥을 먹겠다거나······."

"물론이외다. 그런 좀스러운 조건에는 훌륭한 혼이 깃들 수 없으니까."

사물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

그건 사물에 미약하게나마 모종의 의식을 심어 주는 일이었다.

쿠퍼가 사물의 '혼'라고 부른 그것.

더 훌륭한 혼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에 걸맞은 비범한 조건을 약속해야만 했다.

"딱 좋네요. 그럼 일단 이걸로······."

지잉.

내가 꺼낸 것은 4강까지 강화를 마친, 에메스 차원의 성창이었다.

"호오······."

성창을 이리저리 살피는 쿠퍼.

드워프들의 무기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름 완성도가 좋은 무기였다.

'추적 배송'과의 시너지 덕에 자주 애용해 오던 물건.

한편, 작업물을 받아 든 쿠퍼가 내게 마지막 재료를 요구했다.

"······그럼, 어떤 조건을 새기겠소?"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당장 내가 맞닥뜨리게 될 적은 다름 아닌 악마족들.

그리고 신성력을 두른 성창은 놈들을 처리하기 위한 둘도 없는 무기였으니까.

거기에 더해 나는······.

"성창을 이용해 악마족 1000마리 처치.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이 창을 아예 악마들의 도살자를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쿠퍼는 말했다.

어떤 조건을 부여받았는지가, 향후 개화하게 될 아이템의 특성을 결정하게 된다고.

모르긴 몰라도, 천 마리의 악마를 잡아먹은 성창이 그저 그런 아이템으로 그칠 리 없었다.

"충분하다 마요. 그것참······."

흡족한 표정의 쿠퍼.

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악랄한 놈이 만들어지겠소······."

***

다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민우가 입원한 강남의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오셨군요. 이쪽입니다."

민우의 병실까지 나를 안내해 주는 세브란스의 간호사.

다행히 힐러들을 통해 치료받은 덕에, 민우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드르륵!

부드럽게 열린 병실 문.

간호사가 우리 두 사람을 남기고 나가자마자, 민우는 풀썩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다."

"뭘······ 우리보다 센 놈들 튀어나온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자그마치 7위계에 달하는 가고일.

지금의 민우로서는 이길 수 없는 적임이 분명했다.

포탈 근처로 끌어들여 싸웠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사정거리를 벗어난 위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그 치열했던 전투를 떠올리며, 민우는 몸서리를 쳤다.

"진짜 세더라. 날붙이가 전혀 안 들어가더라고."

"······'석화' 말이지?"

유성철이 보여 준 영상을 통해 이미 확인한 바였다.

자그마치 4강까지 강화된 운양검이었지만, 돌처럼 굳어 버리는 가고일의 피부를 뚫어내지 못했으니까.

녀석이 걱정스럽다는 듯, 내게 물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녀석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기존의 전력만으로는 페르메곤의 악마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걸.

하지만······.

"괜찮아, 그동안 괜히 밖으로 싸돌아다닌 게 아니니까."

다니는 족족 좋은 관계를 쌓아온 덕이다.

일본의 봉인사 다이치, 그리고 미국의 프리스트 글렌이 지원을 약속했다.

엘븐하임의 엘프들을 은 화살로 무장시키기로 했고, 대수림의 드루이드들 또한 악마족의 오염을 막아주겠다고 나선 상태.

영약을 찾으러 떠난 무림인들이 빠지긴 했지만, 그들조차도 베이징에 남아 있는 인력 일부를 파견하겠다고 전해왔다.

실로 막강한 전력이었다.

능력도, 직업도, 심지어는 인종과 종족도 다르지만, 악마족을 맞닥뜨린 이번만큼은 하나로 뭉치게 될 터.

"······그렇구나."

그제야 조금은 마음을 놓는 민우였다.

***

"어후, 힘드네······."

깜깜한 저녁이 내려앉았을 즈음.

나는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아공간으로 들어왔다.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

미국에서의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들이닥친 악마들 탓에 한껏 마음을 졸였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쉬어야지."

14일이라는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급한 일은 얼추 끝마쳐둔 참이었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여유를 부려도 될 것이었지만······.

휴식을 취하러 물류센터에 있는 내 방으로 향하던 길,

"······?"

심상치 않은 광경이 내 시선을 붙잡아 버렸다.

저벅저벅.

두꺼운 사각형 물체를 옆구리에 낀 채 물류센터를 가로지르는 김솔.

"저건······?"

타악!

서둘러 달려간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뭐가?"

"아니, 그렇잖아, 지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옆구리에 끼워진 사각형의 사물.

그건 다름 아닌, '책'이었으니까.

"벼락이라도 맞은 거야? 왜 책을······."

"······뒤지고 싶냐?"

단언컨대 살아생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책 읽는 김솔.

20년 이상 한 지붕 아래 살아 본 내 입장으로는, 그건 멸망 이상으로 생소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띠링!

[개역 개정 아가페 성경전서 새찬송가, 가격은 31,500원입니다.]

[코란(꾸란), 명문당, 가격은 18,000원입니다.]

[반야심경: 산스크리트, 가격은 19,000원입니다.]

팍스가 그녀가 들고 있던 책들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서슬 퍼런 눈빛으로 하늘을 쏘아보는 김솔.

"입 닥쳐, 팍스."

"······성서? 코란? ······반야심경?"

세계 3대 종교의 대통합을 일궈낸 그녀였다.

그리고······.

김솔이 생에 인연도 없는 책을 꺼내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너 설마······."

다른 게 없었다.

곧 다가올 악마족들의 침공.

그 소식이 아공간의 가족들에게도 전해진 참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내게 강- 같은 평화 ♬ 내게 강- 같은 평화 ♬

한쪽에 세워진 스피커에서 묘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찬송가?"

띠링!

[은혜의 찬송가 명곡집, 4CD, 가격은 13,500원입니다.]

그제야 보였다.

스피커 근처에서 엉거주춤 CD를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곳곳에 줄 달린 십자가를 걸고 있는 어머니와 형, 그리고 제임스의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한 내 표정 때문인지, 제임스는 떠듬떠듬 변명하기 시작했다.

"엑소시즘. 킬. 데몬."

"왜 갑자기 통역 안 쓰는데······."

그리고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우르르르르르!

솔렌을 비롯한 수십 마리의 마농족이었다.

지리산으로 난 포탈을 나오자마자, 내 주위로 몰려드는 마농족들.

실로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저······ 정경 님, 오늘따라 참 밤이 깊은 것 같습니다. 밤바람도 꽤 찬 것 같고······."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기는 솔렌.

그 결론은······.

"······오늘, 같이 자면 안 될까요?"

"······?"

역시나 두려움이었다.

인제 보니 파들파들 세차게 몸을 떨고 있는 솔렌이었다.

함께 건너온 마농족들 또한 상태 또한 매한가지.

짧은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털북숭이들이 촉촉한 눈망울을 빛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일인가?'

결국 이 모두가 악마족의 침공 소식이 만든 촌극이었다.

지금껏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가족들과 동료들이다.

인제 와서 악마라는 이름에 벌벌 떠는 모습이 퍽 이상하기는 했지만······.

'······민우 때문인가.'

생각해보니 이해 못 할 것까지는 아니었다.

실제로 당한 사람이 나타난 상황이니까.

그러던 중······.

뚜벅뚜벅.

또 다른 누군가가 아공간에 발을 들였다.

'······또?'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에 찬 누군가가 아니었다.

'공장'에 있던 드워프, 쿠퍼.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이어가던 그가 이제 막 아공간으로 복귀한 모양이었다.

"······이게 다 뭐요?"

천천히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

거기에 파르르 몸을 떨고 있는 수십 마리의 마농족들까지.

그야말로 개판이었지만, 쿠퍼는 오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소."

그저 내게 용건을 전할 뿐.

"뭐죠?"

"방금 회로 설계를 끝마친 참입니다. 아흐레 정도면 각인 작업도 끝이 날 것 같은데······ 14일 뒤까지면 시간이 좀 남을 것 같아서."

"······그 말은?"

"뭔가 하나 더 만들어도 될 것 같소."

그들에게 부탁했던 것은 성창에 마력 회로를 그려 넣는 것.

하지만 정작 성창은 그들이 만든 무기는 아니었다.

요컨대, 그가 제안하는 것은······.

"드워프제 무기도 하나쯤은 있으셔야지. 특별히 원하시는 무기가 있소?"

추가적인 무기 제작이었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성창과 H빔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워낙 내게 특화된 무기이기도 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더 성기사 다운 무기를 쥐여주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

"있죠. 그거라면 역시······."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성기사의 상징, 성기사의 로망 그 자체인 무기가 있었으니까.

다름 아닌······.

"망치죠. 전투용 워 해머."

악마족의 출현에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

그들 모두 믿음을 되찾을 터였다.

악마들의 뚝배기가 실시간으로 분쇄되는 것.

그 신성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게 될 테니까.

악마와 성기사 (2)

081화 악마와 성기사 (2)

지이익······.

지직······.

물류상황실 프린터로부터 뽑혀 나오는 문서.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페르메곤과의 전쟁에 관한 상공회의소의 공문이었다.

"이제 나오는구나."

이미 소식은 전해 들은 터다.

오래지 않아 유럽의 악마들이 한국을 침공한다는 것.

하지만 구체적인 위치나 룰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해 듣지 못했었는데, 그 상세한 내용을 공지하기 위해 추가적인 공문이 내려온 것이었다.

그 방식 자체는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전쟁을 선포하고, 각자 배정된 '대표'를 먼저 죽이는 쪽이 승리하는 방식.

다만······.

"한국 대표라······."

[한국 대표 : 김정겸]

부산, 후쿠오카로 싸웠던 지난 국지전과는 달리, 이제는 아예 국가 단위의 싸움이 되어 버렸다.

하물며 상대는 유럽을 통합했다고 하니 어쩌면 대륙과 국가 간의 싸움이라 봐야 할 지도.

일본 지부로 하달된 명령에는 며칠 뒤 선전포고가 내려질 테니, 그 시점에 맞춰 '김정겸'에게 홀로그램을 부여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론······.

"안 하면 그만이지."

누구 좋으라고 머리 위로 이름표를 달겠는가.

무심한 건지 뭔지는 알 수 없어도, 아직 상공회의소는 일본 지부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공문서까지 내려보내는 걸 보면.

시기도, 싸울 방식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에 설치된다는 게이트 포탈의 위치.

의외로 그리 멀지는 않은 곳이었다.

"북한산이라······."

지역을 선정한 기준은 보나 마나 나일 게 분명했다.

놈들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나를 잡아야 하는 상황.

그리고 나는 한때 상공회의소가 선정한 '서울' 대표이기도 했으니까.

한국, 그것도 내가 있으리라 예상되는 서울을 콕 집어 게이트를 열어주는 걸 보면, 상공회의소가 은근히 페르메곤의 손을 들어주는 눈치였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잘 성장한 지역, 한국.

한편, 지구에서 가장 수수료 안 내는 지역도 한국이었다. 

이윤을 숭상하는 상공회의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뭐가 됐든, 대피부터 시켜야겠네."

모르긴 몰라도 대규모 전투가 예상되는 상황.

아무리 북한산이라지만, 주변 지역의 민간인들이 싸움에 휩쓸리는 건 곤란했다.

다행히 대피가 어렵지는 않았다.

'포탈 운송'으로 다른 포탈로 옮겨 주면 될 일.

마침 대피할 만한 넉넉한 장소도 마련돼 있었으니까.

"엘븐하임이 이럴 때 참 좋구나."

비교적 작다고는 하지만, 대륙은 대륙이다.

온 땅을 뒤덮은 세계수 외에는 텅텅 비어있는 땅이 많았기에, 통제만 제대로 된다면 수십만 명의 피난민을 몰아넣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한동안 산채 비빔밥만 먹어야겠지만······ 뭐,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지금도 꾸준히 각성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살아남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 지구가 강해질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

사람을 살리는 일은 팍스FC에게 있어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럼······."

합참의 도움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수십만 명의 대피를 도우려면, 대규모의 인력 통제가 필연적이니까.

"알겠습니다. 근처 부대들에도 내용을 전달해 두죠."

나와 뜻이 다르지 않은 만큼, 유성철은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여 주었다.

.

.

.

유성철과 대화를 마친 뒤, 나는 란슬롯을 불러냈다.

용건은 간단했다.

엘븐하임으로 대피하는 민간인 행렬을 호위해 달라는 것.

행렬이 숨은 괴물을 만나거나,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만큼 크고 작은 난동이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맡겨두시지요."

여느 때처럼 충성스럽게 대답하는 란슬롯.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어쩐지 모를 그늘이 서려 있었다.

내가 덧붙였다.

"······이번은 상대가 좀 그러니까."

"물론입니다. 그저······ 주군을 보필할 수 없는 제 능력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존재 자체가 언데드인 카멜롯의 기사들.

엘프 장로들의 도움으로 간지러움으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근본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신성 무기만 아니었어도······."

강화된 신성 무기.

악마족들과 싸우기 위한 필수적인 무기였지만, 정작 해골 기사들에게는 그 신성력이 극독으로 작용해 버렸다.

잡거나 드는 것조차 어려운 마당에, 행여나 아군이 던진 성창에 스치기만 해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상태.

결국 이번만큼은 카멜롯의 기사들이 전력 외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가 조금만 더 빨리 자랐더라면.'

장성한 세계수와 숙련된 드루이드.

기사들의 회생과 관련해, 엘프 장로가 이야기해 준 요건이었다.

미국에서의 일이 일단락된 뒤, 드루이드들에게 카멜롯의 기사들을 되살려줄 수 있느냐 물었지만······.

-더 자라야 합니다. 아직은 부족해요.

카멜롯에 심어 놓은 세계수의 성장이 부족하다는 답변을 들을 뿐이었다.

'착취'를 가했다 풀기를 반복하며 세계수에 최대한의 시련을 부여하고 있는 카멜롯.

원래보다 몇 배는 빨리 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언데드의 뼈에 새 살점을 내려주기엔 아직 그 힘이 모자랐다.

하지만, 그 이상 서글펐던 것은······.

"조금만 기다려. 꼭 다시 되살려 줄 거니까."

"괜찮습니다. 주군······."

되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카멜롯의 기사들이었다.

"이미 지나간 생이라는 걸, 저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주군의 뜻을 가볍게 여길 생각을 추호도 없으나······ 그 모두가 미약한 가능성일 뿐이지요. 그 작은 가능성이 되레 주군을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질까, 저는 그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미약한 가능성은 사람을 갉아먹으며, 실패한 가능성은 어마어마한 대가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철걱철걱.

피난민들을 호위하라는 명령에 따르기 위해 움직이는 란슬롯.

발걸음에 따라 그의 저주받은 갑옷이 흔들렸다.

"주군을 위해 칼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이미 많은 것들을 이뤄왔으니까요."

란슬롯은 그렇게 덧붙였다.

***

한국으로 향하는 게이트 포탈 형성까지, 고작 한 시간을 남겨두었을 시점.

"······이제 시작이군요."

펄럭.

새카만 몸 뒤로, 큼지막한 날개를 펼친 악마, 페르메곤이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한 남자가 등을 지고 서 있었다.

예민함이 느껴지는 반듯한 정장.

거기에 남모를 연륜이 느껴지는 쓸어 넘긴 백발까지.

남자의 이름은 스탠리.

다름 아닌 상공회의소의 유럽 본부장이었다.

"본부장님의 도움이 정말 컸습니다. 처음에는 참 치열했는데······."

감회가 남다른 페르메곤이었다.

본부장 스탠리의 은밀한 지원 끝에, 다른 수십 개의 차원을 제치고 유럽의 유일한 주인으로 올라선 그.

물론 서유럽에 국한된 데다가 아일랜드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의 점령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규정을 교묘하게 비튼 스탠리가 페르메곤의 승리를 선언해 버린 상태였다.

"뭘요, 페르메곤이야말로 정말 잘해 주셨습니다."

그제야 스윽 뒤를 돌아보는 스탠리.

페르메곤 또한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는 듯, 그가 덧붙였다.

"가고일의 활용이 특히 좋았어요."

석화 가고일.

그것이 페르메곤이 유럽을 휩쓸 수 있었던 이유였다.

기민한 기동력을 지닌 가고일들이 빠르게 적진에 침투했고,

특유의 건설 능력을 이용해 적진 한 가운데에 '둥지'로 쓸 수 있는 성을 빠르게 축조해 버렸다.

페르메곤으로서는 매 전투마다, 튼튼한 전진 거점을 사용할 수 있었던 셈.

빠르게 세를 넓히는 페르메곤 앞에, 현대전에 익숙한 유럽의 각성자들은 빠르게 무너져 버렸다.

그 결과······.

유럽에는 수천 개의 성이 새롭게 지어졌다.

얼핏 보기엔 멋들어진 중세 유적과도 같은 풍경이었지만······ 실상은 포로들을 넣어두기 위한 수용소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지구인들을 살려두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제 이 '시시포스'만 똑바로 완성하면 되겠군요."

"맞습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두꺼운 원판 형태의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비스듬히 누운 케이크 같기도, 넘어질 듯 기울어진 쳇바퀴 같기도 한 형태.

그 방식은 간단했다.

인간들을 입구에 집어넣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미로를 지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시시포스가 제공하는 환상에 젖어 들도록 하는 것.

하지만 미로의 끝에서 자신의 소원에 다다랐을 때······.

휘리릭!

빠르게 원판을 굴려 출발 지점으로 되돌려보내는 것.

희망과 좌절의 수레바퀴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수렁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무한히 반복했을 때 나오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정도 수의 원혼이라면, 감히 바르나울에게 제안을 해볼 만도 하겠어요."

"벌써 마음이 뜁니다. 바르나울의 하청이라니······."

원혼, 혹은 다른 이름으로 망령.

그것이 페르메곤이 인간들로부터 얻어내려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그렇게 모은 원혼을 바르나울이라는 흑마법사들의 차원에 팔아넘기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본부장 님이 아니었다면······ 페르메곤은 한평생 중소 차원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름 아닌 스탠리의 계획이기도 했다.

한국으로의 선전포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각성 능력에 비례하는 원혼의 질.

지금 한국은 지구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원혼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페르메곤은 본부장의 깊은 속내를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정도는 돼야 바르나울을 끌어들일 수 있겠지.'

홀로 말을 삼키는 본부장 스탠리.

그가 양손에 찬 손목시계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예, 준비하겠습니다."

악마, 페르메곤이 뿔을 번들거리며 덧붙였다.

"가시죠, 한국에."

***

한국으로 향하는 게이트 포탈을 앞,

퍼드드드······

퍼드드득!

하늘을 메운 수천 마리의 가고일이 날갯짓을 했다.

녀석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벽돌이 한아름 안겨 있었다.

포탈을 통과하자마자 북한산 주변을 성벽으로 에워쌀 생각.

중간에 공격을 받더라도, 석화를 이용하면 몸과 성을 동시에 굳혀 보호할 수 있었다.

-카카카카카카······.

-카카카칵!

성을 짓고, 하늘을 누비며 인간들을 찢을 생각에 한창 신이 난 가고일들.

게이트 포탈을 둥글게 에워싼 그들이 이제는 숨죽여 페르메곤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

-카아아아아아아!!!

-카아아아아악!!

고성을 지르며 가고일들이 쏜살같이 포탈로 침입해 들어갔다.

슈우웅!

슈웅!

"어디······."

페르메곤은 즉시 눈알 악마를 보내 사태를 관찰했다.

꿀렁꿀렁 유럽에서 넘어온 가고일을 뱉어내는 게이트 포탈.

지구로 넘어온 가고일들이 저마다 정해진 위치로 산개했고······.

파바바박!

파바박!

빠른 속도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낮게 쌓은 담장이 서로서로 연결되려던 찰나······.

-카아아아악!?

"······어?"

꽈아아앙!

파사삭!

날아든 거대 망치 한 자루가 성벽과 함께 놈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화들짝 눌란 페르메곤이 두 눈을 비볐다.

아무리 기습당했다지만, 석화를 사용한 가고일이었다.

그런 놈이 단 한 방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그였지만······.

"택배 왔습니다. 문 열어주세요!"

꽈앙-!

파사사사삭!

망치를 든 팍스맨들의 파괴는 계속됐다.

꽝!

파삭!

우지끈!

가고일이 성을 쌓는 족족, 거대한 망치가 날아들어 부숴버리는 상태.

석화를 통해 내구도를 강화해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들 모여! 떨어져 있으면 각개격파 당한다! 모여서 작게 만들어!"

페르메곤의 지시에 따라 사사삭 좁은 위치로 모여드는 가고일들.

한결 빠르게 자그마한 내성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지만······

투두두두두두!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

눈알 악마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팽팽 프로펠러를 돌리며 멈춰 있는 헬기.

그로부터······

"······?"

"······?"

쿠웅!

쿵!

성기사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십, 아니 수백.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악마와 성기사 (3)

082화 악마와 성기사 (3)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가고일의 성벽.

북한산의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돌처럼 부서진 가고일의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드워프들이 만든 '전투 망치'.

아직 조건을 부여한다거나, 그와 관련한 각인 작업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효과는 탁월했다.

드워프들의 솜씨 또한 빛났다.

거대한 육면체가 양쪽으로 드러난 망치 헤드.

최소 십수 마리, 많게는 수십 마리의 석화 가고일을 깨부쉈음에도 망치의 타격면에서는 흠집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더욱이, '전투 망치'의 탁월함은 단순한 내구성에만 있지 않았다.

"마음에 드시오?"

"들다마다요."

내가 열어둔 포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쿠퍼.

그 또한 드워프들이 애써 만든 '전투 망치'의 실전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신전 기둥처럼 오목하게 파여 있는 전투 망치의 긴 손잡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실선은 에너지를 수용하고 전달할 수 있는 특수한 전도체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결과 각성 능력이나 보유한 위계의 힘을 망치 헤드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화르륵!

파지지지직!

그 결과, 화염 능력을 각성한 자들의 망치 헤드에는 은은한 잔불 어렸고, 전기 능력을 각성한 자들의 공격에서는 전기 충격이, 그마저도 아니라면 각성 또는 위계에서 전달된 위력이 파르르 진동을 일으키며 가고일들의 성벽을 볼링핀처럼 쓸어 넘길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페르메곤이 선택한 전략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악마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설마설마했는데, 대뜸 성을 지어 버릴 줄이야."

성을 짓기 위해 꾸준히 땅에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던 가고일들.

그런 녀석의 머리를 향해 성기사들의 망치가 내려꽂혔다.

'석화'가 나름의 믿는 구석이었겠지만······.

우수수······.

모래알처럼 깨지고 조각나 바닥을 나뒹구는 놈들의 사체를 보고 있자니, 그건 틀려도 단단히 틀린 생각이었다.

손쉽게 정리되고 있는 페르메곤의 악마들.

하지만, 결코 놈들이 약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망치가, 그것도 무한대로 있었으니 망정이지······."

가공할만한 건축 속도.

팍스맨들을 동원해 실시간으로 깨부수지 않았다면 정말 눈 깜짝할 사이, 북한산 한가운데에 페르메곤의 성이 생겨나 버렸으리라.

유럽을 제패했다는 이야기가 과연 허언은 아니었던 셈.

그리고 정확히 이 시점에서······.

"더러운 악마 놈들!"

"당장 이리 내려오지 못할까!"

페르메곤이 전략을 수정했다.

퍼득!

퍼드득!

더 이상 성을 짓기를 포기한 가고일들.

놈들이 날개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쐐애액!

쐐액!

나무와 바위를 타고, 날개를 접었다 펴며 하늘로 치솟아 오른 악마들.

포탈을 빠져나오자마자 하늘로 솟구치는 걸 보니, 놈들이 목적을 바꾼 것이 확실했다.

휘리릭 날개를 움직이며 곳곳으로 산개해 나가는 가고일들.

북한산이 아닌, 다른 곳에 둥지를 짓기 위해 이리저리 뻗어나가는 놈들이었지만······.

슈슈슉!

슈슉!

아무리 빨리 기교를 부리며 날아간다 한들,

나의 '추적 배송'을 피할 수는 없었다.

푸욱.

"······카악!?"

오직 지상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석화.

상공에서 뾰족하게 날아드는 성창에는 타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니들한테 방법은 없어."

비록, 나 홀로 그 많은 가고일들을 모두 커버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쏴라!"

피웅!

피웅!

다행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엘븐하임의 궁수들이 함께 하늘을 견제해 주고 있었으니까.

툭!

툭!

울창한 수림 사이로 젖은 빨래처럼 떨어지는 가고일들.

몸에는 하나같이 성창, 그리고 세공사가 깎아 만든 은제 화살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하나같이 신성력으로 범벅이 된 무기들이었기에, 가고일들의 살갗을 뚫기엔 충분했다.

카아아아악!

악마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였다.

땅에서는 망치로 아작이 나고, 공중에서는 성창에 꽂히는 신세.

그저 게이트를 빠져나온 자신들의 운명이 야속하게만 느껴질 터였다.

그렇게······

한참이고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가고일들을 처리했을 즈음.

휘이이이······

전투의 함성으로 얼룩졌던 북한산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한 마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돌처럼 부서진 놈들의 잔해가 흙먼지와 함께 바람에 휘날릴 뿐.

지이이잉.

푸른 얼룩 같은 게이트의 표면은 아무것도 뱉어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놈들이 공격을 멈췄다는 걸 의미했다.

"······끝났나?"

가고일들의 새하얀 돌가루가 눈처럼 뒤덮인 북한산.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워진 분위기 속, 누군가 그런 소리를 뱉었던 것 같다.

그리고······

후우우우웅!

후우웅!

게이트로부터 뿜어져 나온 정체 모를 바람이, 우리 주변을 휩쓸었다.

"······뭐야?"

후웅!

후우웅!

바람은 북한산 나무들의 사이사이, 그리고 성기사들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활보했고 바닥에 깔린 하얀 돌가루를 잿먼지처럼 공중에 풀어댔다.

매캐한 분진이 피어오르며, 신성한 망치질로 달아올랐던 성기사들의 흥분을 차분히 꺼뜨렸다.

후우우우욱!

후우우욱!

바람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가루만이 날렸던 것이, 이제는 손가락만 한, 아니 더 나아가 가고일의 머리통을 실어 나를 정도로 강력한 바람으로 성장했다.

아니, 이쯤 되니 더 이상 바람이 아니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가고일의 사체를 주워 나르는 것은 바람의 역할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지엽적인 풍경이었으니까.

후욱!

귓가를 스쳤고,

비명.

후회.

울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기에.

"······망령?"

정확히 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비록 저주받은 망령들이라고는 하나, 카멜롯의 망령들은 저마다 명징한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반면 페르메곤의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망령들은 흐느껴 울거나 고성을 내지르다가도 이내 깔깔거리는 광소를 내뱉으며 하염없이 북한산을 맴돌고 있었다.

살려줘.

살았다!

오래 기다렸지?

죽어!

산산조각이 난 언어들이 모래 알갱이처럼 귓가에 서걱거렸다.

한데 뒤섞인 가고일 석상의 먼지처럼, 망령들은 저마다 부딪히고 깎여 나가며 제 자신을 잃어만 갔다.

그리고······.

페르메곤이 망령들을 보낸 이유가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바람들의 움직임은 파도와 같았다.

바깥으로 쓸려나갔다가, 이내 다시 포탈을 향해 모여드는 진자운동.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는 죽은 가고일 석상의 돌가루가 모래사장처럼 되돌아왔다.

북한산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쌓인 백색의 모래성.

그로부터······.

푸하악!

콰드드득!

정체 모를 생명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작은 모래 알갱이 사이사이로 피어오르는 살점.

그렇게 나타난 것은······.

크르르르르······.

사이사이로 하얀 성에가 껴버린 듯, 얼룩덜룩한 몸을 가진 거대한 괴물이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모래성 같은 놈의 몸은 끊임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망령들은 시시포스의 언덕을 오르듯, 바닥의 모래를 퍼 올리며 계속해서 괴물의 형상을 유지해 나갔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형태를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크고 작은 가고일의 깨진 조각으로 이뤄진 몸.

북한산 곳곳에 줄기처럼 뻗은 그 몸이 이리저리 뒤엉킨 뱀의 형상과도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후우욱!

후욱!

나는 엘븐하임으로 잠시 물려두었던 해골기사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러나저러나 놈을 겉돌고 있는 망령들의 존재는 여전했기에,

.

.

.

다행히, 임무를 마친 해골기사들은 아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투두두두두두!

헬기를 탄 채, 북한산의 상황을 내려다보며,

란슬롯은 내 불안한 예감이 맞았다는 걸 확인해 주었다.

"틀림없군요. 망령들입니다."

그러곤 내 얼굴을 잠시 돌아본 뒤,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안타깝군요. 지구에서도 이런 일이······."

틀림없었다.

유럽을 제패했다던 페르메곤.

놈들이 유럽의 사람들을 잡아다 원혼으로 만든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란슬롯 또한 참담한 기색이었다.

침략자들에게 학을 떼던 그.

자신의 고향인 아발론에서 일어난 일이 다른 차원에서 반복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을 터였다.

어쩌면 나를 도와 지구의 멸망을 걷어내며,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같은 풍경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을지도 모를 일.

"이미 저렇게 된 이상······ 더 이상 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란슬롯이 말했다.

"저희처럼 아이템에 귀속되어 있다면, 최소한 맨정신이라도 유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건······ 이제 맹목적인 에너지로 그저 치환되어 버리는 것뿐이지요."

"그런가······."

어쩔 수 없었다.

구할 수 없다면 한시라도 빨리 저 고통스러운 삶을 끊어 주어야 할 것이었지만······.

후우웅!

후웅!

성기사들의 망치질은 망령들을 가볍게 스쳐나갔고,

빠르게 쇄도한 성창은 놈들이 쌓아놓은 모래에 푹푹 꽂혀 있을 뿐이었다.

신성력이고 자시고, 물리 공격 자체가 아예 먹히지 않는 녀석.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놈이 마침내 공격을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사아아아악!

사아아악!

모래 지옥처럼 성기사들을 집어삼키는 녀석.

'상품회수'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팍스맨들을 몇 이나 잃을 뻔했다.

사사사삭!

줄기처럼 뻗은 놈의 다리가 빠르게 나무와 나무 사이를 훑으며 내려가는 동안, 나는 타고 있던 헬기 안에서 무전을 넣었다.

"들립니까?!"

북한산을 누비는 팍스맨 성기사들.

그중에는 미국에서 데려온 프리스트, 글렌도 있었으니까.

망령들을 제거한다면, 저 괴물의 움직임 또한 멈춰 세울 수 있을 터.

혹시 성불도 가능하냐는 내 질문에, 글렌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아니, 저게 망령이었습니까?

다행히 그에게 성불 스킬이 주어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망령들을 성불시키면 될 일이었지만······.

놈들이 일으키는 모래폭풍이 너무 거센 탓에,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만나는 길 잃은 영혼들마다 집으로 좀 보내주세요. 제가 잘 흩어드릴 테니······."

결국, 남은 방법은 또 다른 방식의 '물리력'을 가미하는 방법뿐이었다.

내게는 폭발하는 신성 무기, H형강이 있었으니까.

잠시 한쪽으로 미뤄 뒀던 녀석이다.

지금은 악마족들을 잡아 성창의 조건을 달성하는 것이 급했으니.

불안정한 회로를 그려, 작은 충격에도 폭발하게 되어 있는 애물단지 같은 물건이었다.

거기에 신성을 최대로 부여해 둔 상태.

신성 폭발.

딱 그렇게밖에 이 무기를 특징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떨어지세요. 갑니다."

그렇게, 나는 망령들이 그러모은 모래집 위로 거대한 신성 폭탄을 투하했다.

뻐어어어어엉!

강력한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가고일 석상의 가루들.

제대로 부서지지 않은 조각들이 폭발의 충격으로 총알처럼 비산했다.

섞여 있던 망령들이 폭발에 휩쓸려 튕겨 나간 것은 물론이었다.

-억울한 죽음을 만난 원혼들이여······.

쏟아진 원혼들을 프리스트가 부단히 주워 담았고,

뻐어어엉!

뻐어어어어엉!

그렇게 북한산에는 흰 모래로 이뤄진 꽃봉오리가 피었다 오므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결과······.

"······확실히 효과가 있네."

서서히 그 크기가 줄어가는 괴물.

모래를 모아다 주는 원혼들이 또한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태산과도 같던 녀석.

이제는 큼지막한 산 바위 하나 크기로 줄어든 참이었다.

남아 있는 원혼마저 채 열 개도 남지 않았을 즈음.

구어어어어어-

녀석이 마지막 발악을 감행했다.

쐐애애애액!

남은 모래를 모두 펼쳐, 뱀처럼 몸을 뻗은 녀석.

하지만······.

터엉!

이번엔 멀쩡한 H형강을 던져, 놈의 경로를 막아 세웠다.

슈우우욱!

슈우욱!

꾸물거리며 난처하다는 듯, 몸을 움츠리는 녀석.

"그렇겐 안 되지."

놈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닌 페르메곤 차원의 게이트 핵이었다.

끗끗!

끄으읏!

징그러운 눈코입을 뽐내며 산비탈을 굴러다니는 게이트 핵.

페르메곤의 악마들이 숨겨둔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로서도 진즉 팍스맨들을 통해 그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감히 인제 와서 무승부를 하려고?"

속셈이야 뻔하다.

승산이 없는 싸움을 유럽까지 끌어오고 싶지 않았을 터.

하지만 우리로 이대로는 끝낼 수 없었다.

"손님 한 번 받아 봤으니······ 우리도 답례를 하러 가야지."

유럽의 악마들을 데려다준 게이트다.

반대로 우리를 유럽으로 데려다줄 수도 있을 터.

"니들도 곱게는 못 죽을 거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망령이 된 인간들.

그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목격해 버린 터였으니까.

악마와 성기사 (4)

083화 악마와 성기사 (4)

콰앙!

전투를 지켜보던 페르메곤이 주먹을 내리쳤다.

"······젠장!"

당초 계획했던 바는 아니었다.

한국으로 보낸 테스트 용도의 원혼들.

원래는 좀 더 가공을 거쳐 바르나울에 시제품으로 보낼 예정이었으니까.

"저······ 저······!"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산산조각이 나는 가고일들을 보고 있자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라리 안심이었다.

독일의 기갑 능력자들을 파훼했던 비장의 수단.

망령으로 빚은 모래 괴물은 지금껏 무패의 신화를 자랑했었으니.

하지만······.

"프리스트가 있다고······? 신성 폭발까지?"

섬광에 휩쓸리는 모래 괴물을 보며, 페르메곤과 유럽 본부장은 자신들의 생각이 단단히 틀렸음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털썩.

페르메곤은 풀썩 무릎을 꿇었다.

자그마치 7위계다.

유럽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끝에 본 차원에서 끌고 올 수 있었던 수백 마리의 가고일.

쉬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이렇게나 쉽게 무너질 줄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구에 온 이래, 지금껏 패배란 걸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패배자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페르메곤은 철저히 무지한 상태였다.

그때였다.

"······!!"

완전히 일그러진 표정의 본부장이 그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빨리······?'

"빨리 게이트핵부터 치우라고!"

"아······!"

그제야 페르메곤은 허둥지둥 움직였다.

곧 있으면 설치된 게이트 포탈을 타고 한국이 이곳 유럽으로 들이닥칠 터.

유럽 본부장의 득달같은 조언에, 그는 서둘러 모래 괴물에게 '마지막' 명령을 하달했지만······.

"아, 안돼······!"

이를 눈치챈, 한국 대표가 게이트 핵을 지켜내 버렸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침공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놈들의 반격에 다리를 놓아준 셈.

"아아······!"

포탈 너머로 넘실넘실 드리워져 오는 성기사들의 모습은 이제 악마들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대체 왜 한국을 치라고 해가지고······!'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유럽 본부장의 조언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애당초 페르메곤은 그리 과감한 성격이 아니었다.

본부장의 조언만 아니었어도 동유럽을 차츰차츰 정복해 나가는 것으로 만족했을 터.

바르나울에 제공할 보다 질 좋은 원혼이라는 말에 이끌려, 지구 반대편에 놓인 한국을 공격했던 터였다.

그리고······.

"······부수세요."

그때였다.

유럽 본부장이 페르메곤에게 새로운 조언을 덧붙인 것은.

"······예?"

"빨리 게이트핵 부수라고요!"

"하지만, 한국의 게이트핵은 지금······!"

"거기 말고!"

척!

유럽 본부장이 가리킨 것은, 그들 눈앞에 있는 게이트 핵.

그러니까,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된 게이트 핵이었다.

"하지만 저건······!"

파리에서의 입찰 경쟁을 통해 지구로 들어온 페르메곤이다.

그들에게 있어 콩코르드 광장 게이트는 지구 개척에서의 상징적인 기념비와도 같았으니.

"페르메곤······."

망설이는 페르메곤에게, 낯빛을 바꾼 본부장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음성은 낮췄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빨랐다.

"잘 들어요. 이대로라면 놈들이 이곳 파리로 밀려드는 건 시간문제예요. 하지만 지금 광장의 게이트를 파괴한다면, 서울 게이트와의 연결이 다른 곳으로 이전될 겁니다."

"그, 그 말씀은······?"

정복 전쟁으로 유럽의 각 지역을 섭렵해나갔던 페르메곤.

당연하게도, 그들이 유럽 각지에 확보한 게이트는 수십 개가 넘었다.

한국에 설치된 게이트가 파리와의 연결을 상실한다면, 분명 그중 하나에 다시 연결될 터.

그것이 유럽 본부장의 노림수였다.

"이제 놈들이 유럽으로 오는 건 막을 수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곧장 이곳 파리로 넘어오는 일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다른 지방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본부장은 이미 피해를 각오한 상태였다.

남은 전략이라면, 그나마 덜 중요한 지역을 내어주겠다는 것.

이곳 파리가 넘어간다면, 즉시 페르메곤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그들과 결탁한 본부장 자신 또한 끔찍한 실적을 뒤집어쓰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페르메곤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의 장기는 전투보다는 건축술과 용병술에 있었으니까.

한국 대표를 이길 자신이 없는 한, 조금의 시간이라도 확보하는 편이 최선이었다.

"······이익!"

푸하하학!

울상이 된 표정으로, 자신의 게이트 핵을 파괴한 페르메곤.

그 아래로 황금빛 액체가 주르륵 흘러넘쳤다.

수만 개의 마석이 그의 차원 계좌에 들어왔지만, 그의 기분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비튼 격이었으니.

그 때문일까?

페르메곤은 차마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본부장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껏해야 시간 벌이 아닙니까······!"

남은 전략은 많지 않았다.

병력을 규합하고, 들어올 경로를 예상해 방어시설을 보강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성기사들로 무장한 놈들을 쉽사리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페르메곤을 본부장은 여느 때처럼 구슬렸다.

"일이 아주 급해졌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바르나울의 관심을 끌어야 해요."

"바, 바르나울······."

바르나울이 지구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

이제 이들에게 남은 방법이라곤 그것뿐이었다.

이름값만으로 다차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차원이었다.

바르나울의 입장에서, 지구는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변방 중의 변방이었지만······.

"어서 시시포스를 완성하세요. 그다음 바르나울에 사업 제안서를 보내는 겁니다."

그들의 하청이 되기 위해 그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오던 그들이었다.

유럽 각지에 수용해 둔 수천만 명의 예비 재료들.

건설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원혼 탈곡기' 시시포스까지.

이 모든 걸 고스란히 넘겨줄 수 있다는 비굴한 제안을.

그것만 해도 괜찮았다.

바르나울의 밑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페르메곤에게 있어서는 우주가 뒤집힐 만한 신분 상승이었으니까.

푸드득.

말없이 날개를 펼치며 시시포스를 완성하기 위해 나선 페르메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홀로 남은 유럽 본부장 스탠리가 잘근 입술을 씹었다.

"절대 안 돼. 이런 쓰레기 같은 동네로 발령된 것만 해도 개 같은데······."

그는 누가 뭐래도 상공회의소의 베테랑 매니저였다.

직전에 머물러 있던 중견 차원에서의 실적 악화로, 이곳 지구 차원으로 좌천되었을 뿐.

그가 바라는 것 또한 번듯한 재기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이제 본부나 예하 기관은 꿈도 꾸지 않아. 그러니까······."

한국은 스탠리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지구를 통틀어 가장 적은 수익이 나는 지역.

그럼에도 가장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지역이었으니까.

알짜배기와 같은 한국 각성자들의 원혼이라면, 스탠리는 바르나울을 지구로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바르나울이 없으면 난 끝장이야."

순서가 뒤집어졌다.

한국에서 무참히 패배한 페르메곤.

이젠 한국을 미끼로 삼는 것이 아닌, 한국을 치우기 위해서라도 바르나울을 끌어들여야만 했으니까.

"······어차피 상관없어. 결과만 같으면 그만이니."

아무리 한국이 강하다 한들, 바르나울에 비할 순 없었다.

상공회의소의 규약 탓에 다소간 밸런스 조종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흑마법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구에 남은 마지막 살점 하나까지 핥아먹을 터였다.

서서히 완성되어가는 시시포스를 보며, 본부장은 천천히 되뇌었다.

지금의 수모는 그때 꼭 갚아주겠노라고.

***

지체하지 않았다.

마지막 혼신을 담아 북한산에 설치된 게이트 핵을 치우려던 페르메곤.

그 마지막 공세를 막아 세운 나는, 김솔과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게이트 포탈을 넘었으니까.

"괜찮겠지?"

상공회의소가 설치한 포탈을 사용해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인간들에게도 일종의 보상처럼 주어졌던 게이트핵이다.

인제 와서 사용이 불가하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

하지만, 그렇게 만발의 준비를 마치고 게이트 포탈을 타고 유럽으로 넘어가고 나니······.

"뭐야, 이거?"

정작 주위로 악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악마들의 성.

그 옆으로는 세계사 책에서 본 듯한 멋들어진 중세식 성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채앵!

챙!

꽈아앙!

성 너머로 울려 퍼지는 전투 소리.

그 사이로 드문드문 움직이는 악마들을 본 나는, 지금의 상황을 얼추 가늠할 수 있었다.

"······얘네 공격받고 있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위치한 곳은 페르메곤의 거점.

그 주변으로 거대한 함성과 함께, 인간들의 목소리가 몰려들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다 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애써 나설 일도 없었다.

고작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 인간들의 무리가 성안으로 물밀듯 밀려들어 왔으니까.

우르르르르!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

"이제 저 지긋지긋한 게이트 핵만 처리하면······!"

"잠깐, 그런데 저기······."

땀과 피, 그리고 먼지로 젖은 그들은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감격하던 그들이었지만······.

"······누구세요?"

포탈을 넘어온 나와 민망하게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

.

.

마석을 쥔 채, 통성명을 나눈 나와 유럽의 각성자들.

이들을 이끄는 것은 버프 능력을 각성한 '리디아'라는 이름의 붉은 머리 여성이었다.

"······프라하요?"

"그래요. 여긴 프라하고······ 페르메곤의 본거지는 파리에 있다구요."

프라하.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난데없이 체코의 아름다운 도시에 들어와 있었다.

'어쩐지 집들이 더럽게 예쁘더라니······.'

졸지에 차마 소원해보지도 못한 유럽 여행을 다 하게 된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더 이상 이곳에는 악마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페르메곤과 한국에서 전투를 치르고 넘어온 것이라 말하자, 리디아가 최근 이곳에서의 상황을 내게 전해 주었다.

"어제 갑자기 악마들의 병력이 줄어들었어요. 저희도 그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들어온 참이고······."

이들은 체코인들과 독일인들이 얼추 반반 섞인 각성자 그룹이었다.

페르메곤과의 전쟁에서 이곳 프라하를 빼앗겼으나, 방금 기적적으로 탈환하게 된 것이라고.

놈들이 갑자기 병력을 뺀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보나 마나 한국과의 전투 때문이었겠지.'

나름 총공세로 달려들었던 페르메곤이었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전투는 한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남은 일은 페르메곤 대표의 목을 베는 일.

하지만 놈들도 모르지 않는지, 나를 파리가 아닌 프라하에 보내 버린 참이었다.

리디아가 말했다.

"저희는 이제부터 이곳 프라하를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할 거예요. 속도는 더디겠지만······ 반드시 모두를 구해낼 겁니다."

그녀는 유럽에 최소 수백 개 이상의 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무슨 목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악마들이 사람들을 잡아 두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악마들이 사람들을 제물로 사용하려는 것 같다고 추측했는데, 원혼을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점에서 틀린 추론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이제 비켜주세요. 저 지긋지긋한 게이트를 치워 버려야 하니까······."

이들이 내가 타고 온 게이트를 없애려고 한다는 것.

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뭐라고요?"

리디아가 발끈하며 내게 설명했지만······.

"가만두면 또 여기서 가고일이 튀어나올 거라고요! 열 마리만 나와도······!"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 게이트는 이제부터 유럽에서의 내 '운송수단'이 되어줘야 했으니까.

"제가 타고 들어갈 겁니다. 그다음에 없애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수십 개의 게이트.

그 모두가 하나같이 페르메곤의 거점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각각 수십, 수백 마리의 악마들이 진을 치고 있을 터.

비록 이곳 프라하는 허탕이었지만, 악마 1,000마리 처치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이걸 놓칠 순 없지.'

과정은 간단했다.

포탈을 타고 넘어가 악마들을 잡으며 천 마리 처치 조건을 달성하는 것.

그리고 지나온 포탈의 게이트핵을 처치하면서 마석을 두둑이 벌어들이는 일까지.

유럽에 모인 돈을 탈탈 털어먹다 보면, 저절로 페르메곤의 악마들을 일망타진하게 될 터였다.

'파밍도 하고, 악마도 잡고.'

그 끝에 내게 주어져 있을 것이었다.

악마 천 마리를 잡아먹은 성창, 그리고 아공간의 레벨업이.

부활의 상징 (1)

084화 부활의 상징 (1)

"괜찮은 걸까······?"

한국 대표가 게이트에 들어간 직후.

리디아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체코와 독일의 각성자들을 이끌며, 직접 페르메곤의 악마들과 싸워 온 그녀였다.

하지만 김정겸이 이끌고 들어간 병력은 고작해야 스무 명 안팎.

아무리 생각해도 페르메곤의 거점을 공격하기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숫자였다.

"······어떻게든 말렸어야 했는데."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페르메곤의 게이트를 타고 움직이겠다는 김정겸의 생각은 단호했으며, 자신을 비롯한 체코, 독일 각성자들의 계획과도 맞지 않았다는 걸.

그 점이 못내 아쉽게 느껴지는 리디아였다.

"차라리 드레스덴이었다면 연합해서 움직일 수도 있었을 텐데······."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곳은 다름 아닌 드레스덴이었다.

체코의 프라하와 큰 도로를 통해 이어져 있는 독일의 도시.

리디아 자신을 비롯해, 그룹에 포함된 상당수의 독일 각성자들이 드레스덴에 가족들을 두고 있었으니까.

게이트를 통해 페르메곤의 거점을 골라 타격한다는 김정겸의 전략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들로서는 드레스덴에 갇혀 있을 가족들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생각에 잠긴 리디아가 눈앞에 놓인 황금색 물체를 바라보았다.

끗끗!

끗!

밧줄에 묶은 채, 혀를 이리저리 날름거리는 게이트 핵.

한국 대표가 던져두고 간 녀석이 거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알아서 하라고?"

쉬운 일이다.

게이트 핵을 처리하고, 프라하의 전력을 정비하면 된다.

그다음은 당초 계획했던 대로 드레스덴 탈환을 위한 작전을 준비하면 될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게이트 핵이 파괴되면 후퇴도 못 할 텐데······."

태평하다 못해, 나른하다시피 했던 한국 대표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거라면?

악마들의 힘이 한국 대표의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면?

자칫하다간 자신의 손으로 한국 세력의 퇴로를 끊어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율리안!"

그래서였다.

악마들로 이어져 있는 위험천만한 게이트 포탈.

그 너머를 내다보기 위해 정찰 능력자를 불러들인 것은.

"······시선을 공유해 줘. 한국 대표가 있는 쪽으로."

그녀는 결정 내렸다.

악마들에게 밀리고 있을지도 모를 한국 세력들.

게이트를 닫기 전에 그들을 먼저 구해 내기로.

"빨리 찾아야 해. 갑옷 입은 기사들이랑, 동양인 각성자들 몇 명······."

그녀가 급한 마음으로 덧붙였다.

정찰 각성자, 율리안이 공유해 준 시선.

하지만 그 속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어?"

페르메곤의 악마성을 공략하고 있는 수십, 아니 수백의 병력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콰아아앙!

콰아앙!

실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조각 케이크에 올려진 과일 토핑처럼 사르르 무너져 내리는 악마성의 첨탑.

와르르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 광채에 휩싸인 거대한 전투 망치가 우뚝 솟아올랐다.

목청이 터지라 울부짖는 성기사들의 포효.

"팍스FC를 위하여!"

"더러운 악마들을 정화하라!"

"······읏."

화들짝 놀란 리디아는 저도 모르는 새, 주춤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름에 절인 듯,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가던 기간트.

그 존재가,

푸슈우웅!

꽈아아아아아아-앙!

갑작스런 폭발과 함께 악마성의 입구에 처박혔으니까.

두둥실 떠오른 조종사의 알록달록한 낙하산이 되레 얄밉게 느껴질 지경이었지만, 심지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정체불명의 금속 덩어리가 쏟아졌다.

새하얀 광채와 푸르스름한 회로로 범벅이 된 그 물건은 악마성에 부딪히는 족족 폭발을 거듭했다.

-카아아아악!

-카아아악!

"아, 안돼!"

리디아는 질겁했다.

벌집이라도 건드린 듯, 악마성 주위로 가고일을 비롯한 악마들이 벌 떼처럼 쏟아져 나왔으니까.

하지만,

슈슈슈슉!

슈슉!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성창에 의해, 줄줄이 꿰뚫리는 악마들.

눈앞의 광경에, 리디아는 백치처럼 턱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저걸 전투라고 부를 수 있나?'

그게 리디아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이제야 헬기를 타고 있는 김정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

그녀가 관찰한 김정겸의 싸움은 차라리 기예에 가까웠다.

헬기 주변으로 피어오른 여덟 개의 포탈.

각각으로부터 쏟아진 수십 자루의 창은 단 한 번도 적을 놓치거나 빗맞히거나 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니야, 저건······."

고성을 내지르는 성기사들.

푸른 안광을 내뿜는 해골 기사들.

육중한 자폭 기간트와 민첩하게 하늘을 누비는 금속 형강과 유도 무기까지.

리디아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건 페르메곤과의 전투가 아닌, 그들을 향한 심판에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누가 누굴 돕는다고······."

구원이 필요한 것은 한국 대표가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까지.

***

"클리어!"

"여기도 클리어!"

이번에도 모래성을 만들어 버렸다.

산산이 부서진 악마들의 성을 등정하며, 하나둘 목소리를 드높이는 팍스맨 성기사들.

그들이 곳곳에 팍스FC의 로고가 그려진 깃발을 꽂아 넣고 있었다.

펄럭!

"저건 또 누가 만든 거야······."

악마들을 잡겠다는 목적하에, 드워프들을 통해 만든 판금 갑옷과 망치.

사실 로망과 콘셉트질의 일환이었는데, 의외로 팍스맨들의 호응도 나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유럽에서 치른 첫 전투는 싱겁기 그지없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나폴리에 세워진 페르메곤의 성을 함락시켰고, 성창으로도 100마리에 가까운 악마를 잡아낸 참.

"······이제 며칠 안쪽이면 천 마리도 채우겠네."

압도적인 무력 앞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지금이었지만······.

"이제 저게 문제인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주요 거점답게, 나폴리에도 페르메곤이 세워 놓은 거대 수용소가 있었다.

직접 세어 보지는 못했지만 어림짐작하기에도 수만 명은 족히 갇혀 있는 시설.

해골 기사들과 팍스맨들이 통제해 천천히 문을 개방하고, 물자도 나눠주었지만,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시간이 너무 끌려."

그렇다고 문만 똑 열어 두고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닭장처럼 세워진 수용소.

아무런 조치 없이 해방이 주어진다면 분명 아비규환이 펼쳐질 테니까

홀로 고민에 잠겨 있을 즈음······.

"······음?"

프라하의 각성자 그룹을 이끌고 있던 리디아.

그녀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프라하에서 전력을 정비하겠다고 했던 그녀였다.

갑자기 나폴리에 나타난 까닭이 의아할 따름.

묘하게 깍듯해져 있는 그녀에게 내가 물었다.

"이리로 넘어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알아요, 그렇게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잠시 우물쭈물 고민하던 리디아.

하지만 오래지 않아 꺼내든 본론은 다음과 같았다.

"동생이 드레스덴에 있어요."

분명 페르메곤의 점령지 중 하나였다.

리디아는 자신의 동생, 그리고 그룹의 다른 각성자들의 가족들이 드레스덴에 포로로 잡혀 있다고 전해 주었다.

과연, 프라하의 각성자들이 유독 드레스덴을 고집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드레스덴을 먼저 공략해 달라는 건가?'

그런 부탁을 들으려나 싶었지만······.

리디아의 부탁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허락해주신다면, 저희도 전투를 지원하고 싶어요. 너무 압도적인 공략 속도라······."

"아······."

그녀도 알아챈 것이다.

랜덤 게이트를 돌고 있는 내가, 그들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드레스덴에 도착하리라는 걸.

그 증거로, 나는 고작 몇 시간 만에 나폴리 공략에 성공한 참이었으니까.

'잘됐네······?'

자그마치 수천 명에 달하는 리디아의 그룹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해방과 통제를 부탁하면 될 터.

덕분에 나로서도 유럽 공략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의 능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버프, 디버프가 모두 가능하다 이거죠?"

"네. 하지만 제 목소리가 닿는 위치까지만 가능해요. 말을 통해서 전달하는 개념이거든요."

각성자들의 수장답게, 제법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그녀였다.

"정보도 이것저것 제공할 수 있어요. 악마들은······."

동생에 대한 간절한 마음 때문일까?

면접관 앞에 선 취업준비생처럼 자신의 이런저런 쓸모를 늘어놓기 시작한 그녀였지만······.

"그 정도면 충분해요."

줄줄이 늘어지던 그녀의 브리핑을 멈춰 세웠다.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버프와 디버프를 동시에 발휘할 수 있는 능력.

팍스FC에서 그녀를 위한 딱 맞는 일자리가 떠올랐으니까.

***

웅성웅성.

아공간이 시끌벅적해졌다.

위치는 다름 아닌 카멜롯 성이다.

해골 기사들이 여느 때와 같이 주변에 늘어서 있었고, 엘븐하임의 장로들과 대수림의 드루이드들이 인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이것 참······ 이런 성장 속도는 700살 평생 본 적이 없습니다."

"말을 통한 성장과 극복이라니, 어쩜 이런 생각을······."

질겅질겅.

잎을 씹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그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공간의 세계수였다.

녀석이 폭풍 같은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좀 뭐가 되는구나······."

나로서도 감회가 남달랐다.

그간 세계수를 키워내겠답시고 별의별 짓을 다 해왔으니.

'······똥꼬쇼도 그런 똥꼬쇼가 없었지.'

'병 주고 약 주고'가 핵심인 세계수 육성이다.

이를 지킨답시고 카멜롯의 착취 기능과 아공간의 생명 유지 시스템을 번갈아 적용했고, 세계수의 탄탄한 몸통을 김솔에게 샌드백으로 애용하게 했다.

큰누나에게 주기적으로 힐을 사용하게 한 것은 물론, 종국에는 매디슨으로부터 탈취한 약물을 비료로 뿌려주기까지 했던 나.

어느 정도 성과가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한 끗이 부족했던 세계수의 성장이었다.

하지만······.

리디아의 능력 덕에 비로소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계속해주세요, 리디아."

세계수와 마주 보고 있는 리디아.

진짜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였지만······.

"예······."

내가 채근하자, 마지못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떠듬떠듬, 무겁게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또박또박, 국어책을 읽는 듯한 목소리로.

"······넌 세상에서 가장 예쁜 활엽수야."

쑤욱!

놀라운 일이었다.

리디아의 말을 들은 세계수 잎이 초롱초롱 빛나며 번쩍 고개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들, 들뜨지마, 멍청한 풀 대가리야."

-!!

대뜸 돌아온 차가운 독설에, 그 잎이 금세 누렇게 시들해졌다.

추욱 고개를 떨구는 세계수였지만······.

"그래도 파릇파릇해서 보기 좋긴 해."

-!?

리디아의 말에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쑤욱!

추욱······.

쑤우욱!

추우욱······.

무한한 반복이었다.

손바닥 뒤집듯 날아드는 칭찬과 독설.

그에 따라 피었다 죽기를 반복하는 세계수까지.

얼마나 성장이 빠른지, 실시간으로 잎이 무성해지는 게 맨눈으로도 보일 지경이었다.

'버프, 디버프가 모두 가능하다길래 혹시나 했는데······.'

'말'을 통해 버프를 부여할 수 있는 리디아의 능력이었다.

대뜸 아공간에 들어오자마자 식물과 유사 과학적 대화를 나누게 된 그녀.

정작 본인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 것 같았지만······.

'······좋았어.'

덕분에 세계수가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하기야, 세계수가 괜히 신물이 아니지요. 상처와 회복을 정신적으로까지 부여할 줄은······."

짝짝!

감탄한 엘프 장로 윌그라임이 물개박수를 쳤다.

"이 정도 속도라면······."

마찬가지로 혀를 내두른 드루이드 족장 핀드릭도 내게 귀띔해 주었다.

앞으로 보름 안에 해골 기사들을 살려볼 수 있겠노라고.

한편······.

"주군······."

정작 란슬롯은 초조한 목소리였다.

저주를 벗고 되살아나는 것.

분명 그건 의심의 없이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저희의 충성이 흐려질까 걱정됩니다. 언데드로서 누렸던 능력들도 사라질 테고요."

그는 사라질 능력을 걱정하고 있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카멜롯의 기사들.

그건 분명 나의 크나큰 전력이었으니까.

기쁜 소식 앞에서도 마냥 웃지 못하는 그였지만······.

"걱정 마. 난 너희를 약하게 만들 생각이 없거든."

나는 곧장 옆에 있던 드워프, 쿠퍼를 불러세웠다.

"당장은 만들고 있는 거 없죠?"

"망치 만든 다음부터는 쉬고 있지요. 부품 조각이나 정비하면서······ 왜요, 새로 맡길 게 있소?"

드워프들을 통해 배운 마력 회로의 개념.

이를 통해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공들여 만든 사물에는 모종의 철학이나 상상이 부여되기 마련이라는 점이었다.

마력 회로를 통해 그려 넣는 '조건식' 또한 그런 의미였다.

어떤 내기를 주고받느냐에 따라, 그 사물의 가치나 방향성을 설정하게 되니까.

그런 점에서······.

"카멜롯 성에 마력 회로를 그려주세요."

카멜롯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르나울의 흑마법사들이 만든 유니크 아이템.

여기에는 귀속된 영혼을 지옥 끝까지 가둬 놓겠다는 흑마법사들의 사념이 깃들어 있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사들을 구하고자 하는 내가, 바르나울의 생각에 딴지를 걸게 된 것은.

그들이 카멜롯에 그려놓은 낙서가 '죽음'이었다면······.

"조건은 '카멜롯의 기사들을 부활시키는 것'으로."

내가 쓸 글씨는 '부활'이었다.

부활의 상징 (2)

085화 부활의 상징 (2)

리디아의 '대화 성장법' 쇼케이스가 성황리에 마무리된 다음이다.

"그럼 바로 시작하는 게 났겠소."

쿠퍼를 따라 곧장 드워프들의 공장으로 향한 우리.

그가 내게 몇 가지 주의할 점을 덧붙였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했다시피, 한번 각인이 시작되면 중간에 멈추거나 할 수가 없소. 한 번 회로의 흐름을 잃어버리면 그대로 못 쓸 물건이 되어 버리니까."

원래라면 망가진 물건을 버리고 새로 각인 작업을 이어가면 그만일 것이다.

아공간의 복제 능력을 이용하면 새 물건을 무한정 공급하는 것이 가능했으니.

하지만 이번만큼은 변수가 있었다.

"기사들의 원혼이 문제군요."

"그렇소."

나름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는 기사들이다.

카멜롯 성 자체는 몰라도, 그들의 영혼만큼은 복제할 수 없었으니까.

간단히 말해, 이런 식이었다.

카멜롯을 복제하게 된다면, 기사들의 영혼이 둘 중 어디에 속할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특히 이번처럼 마력 회로 각인을 위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중에는······.

"각인 작업 중에는 반드시 원혼이 귀속된 상태여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하신 조건을 회로에 담는 게 말이 될 테니."

아공간에 있는 카멜롯이 아닌,

마력 회로가 새겨지고 있는 카멜롯에 속해 있어야만 했다.

"물론, 오다니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을 거요. 속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니까."

다행히, 기사들을 줄곧 성에 넣어 둬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든 내용을 전해 들은 나는 쿠퍼에게 새로운 카멜롯 성을 출하해 주었다.

터엉.

어두운 회색빛을 띤, 무미건조한 생김새의 왕관.

달걀만 한 돋보기를 꺼내 카멜롯에 새겨진 흔적을 분석하던 쿠퍼.

그는 오래지 않아, 탄식을 내뱉었다.

"이것 참······."

사물을 다루는 드워프답게, 그 또한 카멜롯 성에 담긴 흉흉한 성질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야기했던 대로, '카멜롯의 기사들을 부활시키는 것'으로 조건을 달겠소. 이제부터 기존에 부여되어 있던 흑마력 각인을 역순으로 재설계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원래의 흔적은 남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

쿠퍼는 고민하는 듯했다.

이게 과연 장비 제작자로서 할 말이 맞는 것인지.

"새로 부여될 효과가 뭐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소."

어쩌면 운에 맡기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바르나울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아이템, 카멜롯.

기사들을 되살리겠다는 내 생각이 녀석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랄 수밖에.

***

그로부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페르메곤과의 전투는 여느 때와 같이 압도적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성기사들을 두 개 조로 나눠 서로 번갈아 가며 공략을 진행했고, 페르메곤이 가지고 있던 13개의 악마성을 무너뜨리는 한편, 그 주변에 있던 서른 개가량의 수용소를 해방했다.

바쁜 일정이었던 만큼, 수확도 적지 않았다.

성창의 킬 카운트가 무서운 속도로 치솟았고, 지역을 지날 때마다 아공간 포탈을 설치했다.

그때마다 황금빛의 게이트 핵을 처치했고, 덕분에 상당한 양의 마석까지 수급했다.

사실 아공간 7레벨을 달성하고도 남을 만큼의 양이었지만······.

"이게 또 돈 먹는 하마네······."

마력 회로 각인에 소모되는 비용 탓에, 당장의 레벨업만큼은 뒤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마력 원자로를 가동하기 위한 비용이다.

복잡한 조건식일수록 더 많은 양의 마석이 요구되었고, 특히 이번 카멜롯에서는 기존에 새겨져 있던 흑마력 탓에, 두 배 이상의 마석이 소모됐다.

"이러나저러나······."

유럽에서의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어 가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리디아의 말에 따르면 유럽에 위치한 페르메곤의 거점은 총 27곳.

그중에서 벌써 그 중 절반가량을 토벌한 상태였으니까.

지금만 해도, 막 발렌시아에서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스페인의 후끈한 저녁이 내려앉은 시점.

나는 조금은 멍한 상태로 아공간에 발을 들였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인가?"

애당초 낮과 밤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아공간이다.

하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나름 낮밤을 지켜 생활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처럼 바깥일을 하다 돌아온 경우에는, 적막에 휩싸인 물류센터의 풍경을 보게 되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

누군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치는 다름 아닌 카멜롯 성과 세계수가 위치한 국통사의 위병소 부근.

가까이 다가간 나는 오래지 않아,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디아?'

해방된 포로들을 돌보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던 체코의 각성자들.

하지만 리디아만큼은 그 시간을 줄곧 아공간에서 보내고 있었다.

세계수 성장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리디아의 버프/디버프 능력이었고,

먹고 자는 시간만 아니라면, 적어도 당분간은 세계수에게 꾸준히 말을 걸어주어야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때······."

아무래도 그 '대화'의 일환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사람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듯, 세계수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

본의 아니게 그 내용이 내게도 들려왔다.

"레오가 그 펜던트를 훔쳤다니까. 남자애가 무슨 그런 걸 다 좋아하는지······ 아무튼 그때 혼쭐을 내서, 제대로 용돈 모아서 사게 했었다 이거지."

'······동생 이름이 레오라고 했던가?'

드레스덴에 동생이 잡혀 있다고 말했던 그녀였다.

하루에 두 개꼴로 페르메곤의 거점을 랜덤으로 통과하고 있는 우리였지만, 야속하게도 드레스덴은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던 터였다.

리디아를 비롯한 독일, 체코의 각성자들로서는 마음이 초조해질 따름.

그런 마음의 발로인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유럽의 각성자들이었다.

그때였다.

한참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리디아.

그녀가 세계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얘 또 이거 안 먹네······! 너 이거 얼른 다 흡수해! 맨날 그렇게 입에 맞는 비료만 먹지 말고!"

추우욱.

노랗게 시들어가는 세계수의 이파리.

인제 보니 리디아의 손에는 내가 남부군으로부터 빼앗은 약물이 들려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독성 비료로 개량한, '병 주고 약 주기'의 일환으로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줄곧 엿듣게 되는 꼴이 민망했던 탓이다.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대화가 많이 발전한 느낌이네요?"

"당연하죠······ 얘가 얼마나 똑똑한데요. 적당한 말로는 씨알도 안 먹혀요."

다행히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그녀는 그다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리디아는 무지성 칭찬과 비난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며, 나름 솔직하게 세계수를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라리 편해요. 꾸며서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끝끝내 약물을 바깥 흙으로 밀어내는 세계수를 다그치고 있었다.

채찍과 당근에서의 '채찍' 파트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

어쩐지 나로서도 생각이 많아지는 풍경이었다.

'병 주고 약 주고가 아니라······ 훈육을 해야 하는 거였어?'

강하게 키운답시고 세계수에게 갖은 시련을 쏟아부었던 나였다.

새삼 세계수에게 미안해질 따름.

띠링!

[하이포넥스 활력액 식물 활성화제 10L, 1개, 가격은 317,240원입니다.]

"계수야, 계수야. 형이 맛난 영양제 한번 놓아 줄까?"

화해의 의미로 녀석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한 번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쭈욱 내게 가지를 뻗은 세계수.

그 끝에 달린 잎사귀는 정확히 이런 모양으로 접혀 있었으니까.

.

.

.

세계수로부터 엿을 얻어먹는 진귀한 광경.

피식 웃음을 터뜨린 리디아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였나요?"

"발렌시아였습니다. 방금 끝났어요."

조금 착잡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도 크게 기대했던 눈치는 아니었다.

드레스덴이었다면 전투에 앞서 미리 언질을 해 두었을 테니.

잠시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리디아가 마침내 내게 말했다.

"있잖아요. 파리 말인데······ 어쩌면 게이트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지도 몰라요."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이번 발렌시아에서만 해도······."

나 또한 동의할 만한 내용이었다.

애당초 북한산에 설치돼 있던 게이트를 직접 부수려고 했던 페르메곤.

놈들이 싸움을 끝끝내 피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으니.

"······악마들이 직접 게이트핵을 부수려고 들더군요."

어쩌면 파리의 게이트는 진즉 파괴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전략을 마냥 반복할 수는 없었다.

유럽 각지에 설치된 악마성을 무너뜨리다 보면 페르메곤을 천천히 잡아먹는 형국이 되긴 하겠지만, 놈들의 근거지인 파리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될 테니까.

'어쩌면 그냥 파리로 치고 들어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그런 생각이 찾아들었지만······.

"······주군."

란슬롯이 전해온 소식에, 이번에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가 비어 있었다고? 또?"

"예, 급하게 빼돌린 흔적이 있었습니다. 예상하기론······."

줄곧 패전을 거듭해 온 페르메곤이었다.

이제는 아예 포로들을 빼돌리고 있는 상황.

당연한 말이지만, 놈들이 육로를 이용했을 리는 없었다.

"······이번에도 게이트를 타고 넘어갔겠지?"

"맞습니다. 흔적이 이어져 있더군요."

근거지인 파리는 오리무중이었지만, 놈들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거점은 파괴당할지언정, 애써 모은 포로들은 내어줄 수 없다는 태도.

그 용도가 뻔히 그려지는 만큼, 무시하고 파리로 넘어가 버릴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다음 지역이 어디라고?"

심지어······.

"드레스덴입니다."

"······!"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장소였다.

리디아의 동생, 그리고 프라하 각성자들의 가족들이 있다던 장소.

벌떡 몸을 일으킨 리디아의 눈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한데······ 주군, 이전과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프라하의 각성자들과 함께 정찰에 나섰던 해골 기사들이었다.

정찰 각성자인 율리안을 통해 드레스덴의 모습을 직접 눈에 담았던 란슬롯.

그가 내게 적진의 상황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포로들을 추가로 이동시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드레스덴에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고요. 저희가 관측하기론······ 전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닙니다."

란슬롯은 사뭇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방어 포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거대한 장갑을 두른 거대 악마부터, 에너지 포격을 쏠 수 있는 상위 악마들까지 전선에 배치가 되어 있더군요. 물론 가고일도 많았습니다."

줄곧 우리에게 쫓기기만 하던 페르메곤이었다.

확실히 병력이 늘어난 것으로 보아, 이제야 배수의 진을 친 모양.

물론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성력을 두른 팍스FC의 병력은 악마들에게 있어 천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란슬롯의 경고는 우리가 기존의 전략을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성을 넘어, 요새라고 부를만한 크기였습니다. 높이도 두께도, 이전에 보았던 악마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더군요. 이전처럼 성을 무너뜨리며 싸우는 건······ 솔직히 어려울 거라 생각됩니다."

지금껏 우리는 악마들의 성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리며 싸워왔다.

이번만큼은 강고하게 짝이 없는 요새가 버티고 섰으니, 전략을 바꿔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었지만······.

"괜찮아. 마침······."

내게도 악마들에게 보여 줄 만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띠링!

---

[축복된 악마 포식자 +5]

등급: [유니크]

설명: [에메스 여신의 축복을 받은 성스러운 창입니다. 1,000마리의 악마를 포식하여 추가 효과가 개방되었습니다.]

속성: [신성]

옵션: [관통+5] [가속+3] [정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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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에서의 전투로 마침내 1000마리 처치를 달성한 에메스의 성창.

마력 회로가 달성한 조건에 반응한 덕에,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아이템으로 거듭난 상태였다.

껑충 뛰어오른 등급부터, 관통 수치 상승까지.

이것저것 새로운 점이 많았지만······.

띠링!

[이중 처벌 : 관련 대상에 '이중 관통' 효과가 적용됩니다.]

[포식 : 관련 대상에 한하여, 처치한 대상의 혼을 포식합니다.]

[신성 폭발 : 포식한 혼을 투사체로 뿜어내며 신성 폭발을 일으킵니다.]

아무래도 이쪽이 진짜 본론이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전략을 바꿀 수 없는 것은.

"성 무너뜨리는 거······ 재밌었다고."

이건 아무리 봐도 공성무기였으니까.

부활의 상징 (3)

086화 부활의 상징 (3)

게이트 포탈이 연결된 곳은 드레스덴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요새였다.

정확히는 그로부터 2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

"요새를 먼저 통과해야 해요. 길목을 막고 있거든요."

리디아가 덧붙였다.

드레스덴을 목표로 하던 프라하의 각성자들.

그녀 또한 요새를 넘는 것이 일차적인 관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독일의 유적지였어요. 산맥에 지어진 성채였는데······ 거기에 페르메곤이 둥지를 틀었죠."

덕분에 악마들의 요새에 관한 정보를 알음알음 전해 들을 수 있었지만······.

만반의 대비를 갖춘 것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놈들도 나름 준비를 한 모양이네요."

페르메곤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머지않아 드레스덴에 들이닥치리라는 걸.

게이트 포탈 앞에 두꺼운 바리케이드를 줄줄이 늘어놓은 것은 물론, 성벽 위로 날카롭게 생긴 포격 포탑이 포구를 살벌하게 겨누고 있었으니까.

마치 우리가 드레스덴에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드르륵.

드르르륵.

하급 임프들이 무거운 수레를 끌었다.

수레에 결속된 것은 철판을 덧대어 만든 바리케이드.

모양은 방패지만, 사실상 방어용 건축물에 가까웠다.

열세 곳의 악마성을 토벌하면서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물건.

"어디······."

우리는 곧장 공격에 나섰다.

코앞에 아공간 포탈을 전개했고, 몸을 숨긴 상태에서 페르메곤에 공격을 개시했다.

피우웅!

쐐애액!

엘븐하임의 은화살이 출하된 성창과 함께 쏘아져 나갔지만······.

파각!

팍!

고작 1,2 미터 가량을 밀어냈을 뿐,

악마들이 세워놓은 바리케이드는 생각 이상으로 견고했다.

임프들이 도로 수레를 밀어 넣은 탓에, 겨우 눈에 들어왔던 요새가 다시금 시야에서 사라졌다.

칵칵!

임프들이 빼꼼 나와 우리를 비웃었지만······.

콰드드드득!

이번에는 '악마 포식자'가 그 얼굴이 무참히 찢겨 버렸다.

"고개 내밀지 마라······."

마침내 조건을 달성한 '악마 포식자'였다.

단순한 비교에서도 그 압도적인 성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 추가된 '이중 관통' 효과 덕에, 바리케이드는 물론 몸을 숨기던 임프들까지 단번에 꿰뚫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쐐애애액!

'이중 관통'의 적용 대상은 비단 악마들뿐만이 아니었다.

바리케이드를 종잇장처럼 뚫어 버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악마를 넘어, 놈들이 세운 구조물이나 건물에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걸.

덕분에······.

쿠구구구구······.

외성채 위로 쌓아 올린 수십 개의 첨탑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와르르르!

산사태처럼 휩쓸려 내려오는 돌무더기.

그 사이로, 페르메곤의 찌를 듯한 고성이 들려왔다.

-쏴라!

꽈아아아아앙!

콰아아앙!

즉시 눈앞이 불바다가 되었다.

방어 포탑이 꾸준히 불을 뿜었고, 거대한 불덩이가 잊을 만하면 푸짐하게 쏟아졌다.

"확실히······ 이번엔 좀 거하긴 하네."

란슬롯의 말대로였다.

헬기를 타고, H빔을 떨구며 놈들의 거점을 파괴하는 전략.

지금은 헬기를 타는 것은커녕, 포탈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니.

쐐애애액!

콰아앙!

꽈르르릉!

서로 포격전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페르메곤의 견제 탓에, 나로서는 주변에 달라붙는 임프들을 처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악마 포식자'를 통해 바리케이드와 첨탑을 박살 냈지만, 정작 요새의 두꺼운 성벽에는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어느덧 교착되어 버린 전황.

단단한 갑피를 두른 악마 거인 하나가 몸을 일으켰고,

쿠웅.

쿠웅.

-구어어어어······.

낮게 포효하며, 커다란 발자국과 함께 포탈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페르메곤의 악마들이 자신감을 되찾은 모양이었지만······.

-구어어어억······!?

꽈아아아아앙!

이마를 시원하게 터뜨려 주는 것으로, 놈들의 착각을 일깨워 주었다.

"······어딜 버릇없이 고개를 쳐들려고."

띠링!

[신성 폭발 : 포식한 혼을 투사체로 뿜어내며 신성 폭발을 일으킵니다.]

이 또한 '악마 포식자'의 효과였다.

최대 1,000마리의 혼을 포식하고, 이를 내뿜어 '신성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것.

나는 페르메곤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악마들의 혼을 꾸준히 쌓아두고 있었으니까.

물론, 폭발이 일어나면 악마들의 혼 또한 소모된다.

비장의 무기처럼 사용하며, 한 방을 노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해당 사항이 없지."

혼이 쌓이는 족족 '상품 회수'를 통해 창을 아공간에 수용했다.

그러곤 수용된 창을 다시금 복제해 사출하는 방식.

덕분에 수십, 수백 번의 '신성 폭발'을 일으키더라도, 내게 악마들의 혼이 떨어질 일은 없었다.

비록 지성이 있는 악마들의 혼은 복사가 불가하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봤자 얘들은 하급 악마들이니까.'

의도적으로 임프 같은 하위 개체들을 위주로 공격하며 알뜰살뜰하게 '복사 가능한' 혼을 골라 채워 둔 터였다.

-카아아악!

-그어어어어!

악마들은 줄곧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지루하리만치 팽팽하게 이어지던 포격전.

그 기나긴 시간 내내 제 무덤을 파고 있었는 줄은 미처 몰랐을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꽈아아아앙!

꽈르릉!

악마들의 몸은 '신성 폭발'의 섬광과 함께 터져나갈 뿐이었다.

쿵!

쿠웅!

픽픽 쓰러져 나가는 악마들.

성벽을 두르고 있던 대여섯 마리의 거대 악마들을 치우고 나니, 드레스덴을 가로막은 페르메곤의 대 요새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좀 잘 보이네."

망설일 것 없었다.

'축복된 악마 포식자'에 부여된 효과를 확인했을 때부터다.

나는 줄곧 우수수 무너져내리는 페르메곤의 요새를 상상해 왔으니까.

물론 아무리 '이중 관통' 효과가 있는 악마 포식자라 해서, 요새의 두꺼운 성벽까지 꿰뚫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산맥에 건설된 것이니만큼, 페르메곤의 요새는 성이라기보단 깎아지른 절벽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꽂히기만 하면 됐지."

쐐애애액!

쐐애액!

방해되는 악마들을 모두 걷어낸 뒤다.

나는 매끈한 요새의 성벽을 향해, 곧장 수백 자루의 '포식자'를 박아넣었다.

콰드득!

콰득!

휘이이잉!

'이중 관통'의 효과가 어김없이 발동했다.

창이 나선을 굴리며 재차 성벽을 파고들었고······.

콰득!

파사삭!

주변으로 거미줄 같은 실금이 뻗어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따앙!

따앙!

으로 날려 보낸 '전투 망치'들이 벽에 꽂힌 성창을 못처럼 박아넣었으니까.

그렇게, 손잡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이 찔러넣은 '포식자'는······.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앙!

1,000마리의 혼과 함께 '연쇄 신성 폭발'을 일으켰다.

파드득!

까드드득!

빗금과 함께 성벽이 유리 조각처럼 터져나갔고······.

와르르르르!

사상누각이 된 요새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지반이 폭발하며, 반으로 접히듯 중앙으로 쏟아지는 성벽.

그 위로 도열해 있던 포격대 또한 휩쓸리듯 흙먼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카아아악······.

그것이 끝이었다.

하늘에 떠 있던 수십 마리의 가고일.

놈들이 눈앞에서 사라진 본진을 망연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

페르메곤의 요새를 깔끔하게 무너뜨린 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라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없었다고?"

란슬롯이 내게 대답했다.

"발렌시아에서 넘어온 포로들뿐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동은 그대로 비어 있었습니다. 원래 있던 포로들은······."

드레스덴에 설치된 수용소는 두 동이었다.

게이트 포탈을 통해 추적해 온 포로들만큼은 무사히 구해낸 참이었지만······.

"이미 자리를 옮긴 모양입니다."

"이런······."

드레스덴에 가족이 있다던, 프라하의 각성자들은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리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정체 모를 펜던트를 움켜쥐며 어깨를 떨고 있을 뿐.

어젯밤,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줄줄이 페르메곤의 거점으로 이어지던 게이트 포탈.

하지만 정작 본진인 파리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더 이상 게이트 포탈은 쓸모가 없기도 하고······.'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몇 번을 걸쳐 게이트를 따라 끌려가던 포로들을 마침내 구해낸 상황.

'악마포식자'를 개방한 것은 물론, 드레스덴에서 전투를 치르며 아공간 레벨업에 필요한 마석까지 모두 수급한 상태였다.

프라하 각성자들의 가족이 드레스덴에 없다는 걸 확인한 이상, 이제 놈들의 거점을 털어먹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충분했으니까.

더욱이······.

'······아직 살아 있을 거야.'

페르메곤 노리는 건 인간들의 원혼이었다.

이곳 드레스덴만 하더라도 수용소 한 동이 그대로 비어있을 뿐, 별다른 학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죽이지 않고 위치만 옮겼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고, 그 장소를 추측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리디아에게 말했다.

"파리로 갑시다."

분명 거기에 있을 터였다.

그녀의 동생도,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페르메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