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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통신 (2)

070화 이동통신 (2)

터벅터벅.

이곳은 한적한 강릉 시내의 어느 길목.

세 명으로 구성된 각성자 파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거 뭐야?"

힐러 강희영이 탱커 박병우를 보며 물었지만,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네모난 유리 액정.

그건 멸망 전이라면 누구든 손에 달고 살았던 평범한 스마트폰이었으니까.

그러자 이번엔 근접 딜러 이혁수가 못마땅하다는 듯 덧붙였다.

"강릉역에서 받아왔대. 쟤 그거잖아, 팍스맨."

"또? 포탈 근처로 갔던 거야?"

강희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최근 창궐했던 괴물들을 단번에 일소해 주었던 팍스FC.

생존에 필요한 물자까지 아낌없이 지원해주던 그들이었지만, 아직 강희영과 이혁수에게 있어 팍스FC는 의심의 대상이었다.

이혁수가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병우야.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지금이야 퍼주면서 인기몰이하겠지. 하지만 나중에 분명 도로 다 빼먹으려 들 거라니까."

그동안 줄기차게 해 오던 이야기였다.

멸망한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남에게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지킬 힘을 갖춰야 한다고.

팍스FC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와중에도, 그는 단단히 고삐를 쥐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편, 동료들의 핀잔에도 박병우는 조금도 풀 죽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스마트폰의 전원을 켜, 두 사람에게 화면을 보여 줄 따름.

---

■ 상품 주문

■ 112

■ 119

---

그게 전부였다.

화면에 뜬 버튼을 손으로 가리키며, 박병우가 말했다.

"여기 아래 보여?"

"112······ 119······? 뭐야 이게?"

"각각 지원요청이랑, 구조요청이야. 그냥 꾹 누르기만 하면 돼."

스윽.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은 박병우가 말을 이었다.

"네 말도 맞아, 혁수야. 하지만 목숨이 날아가는 것보다는 이게 나아."

그라고 어찌 의심 한번 해 본 적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스마트폰에 '지원요청'과 '구조요청' 기능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새벽, 박병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강릉역으로 향했더랬다.

그리고, 그런 그를 이끈 것은 단순한 생존 욕구가 아니었다.

"······그게 너희나 우리 가족들의 목숨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박병우의 단호한 태도에, 이혁수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위험한 일 없게만 해."

아무쪼록 평화롭게 마무리되어가는 대화였지만······.

"잠, 잠깐!"

힐러 강희영의 손짓과 함께, 그 평화는 산산이 박살 났다.

"크르르르르······."

예고도, 조짐도 없었다.

골목 앞, 그리고 뒤로 나타난 다섯 마리의 드레이크.

"카아아악!"

놈들이 세 사람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힐러, 강희영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쓰러진 박병우를 치료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미처 몰랐다.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드레이크 중에 고위계가 섞여 들어 있었을 줄이야.

놈들의 공격을 정면에서 방어하던 박병우의 배에서는 울컥울컥 피가 치솟고 있었다.

"어떻게 좀······!"

아무도 없었다.

가까스로 마지막 드레이크를 처리한 이혁수.

그마저 놈들이 쏜 마비 독 탓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으니까.

힐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었지만, 상처가 워낙 컸다.

치료되는 것보다 악화되는 속도가 곱절은 빠른 상태.

파학!

솟구치는 피를 애써 손으로 막아 세웠다.

모두를 지키겠다며 의지를 다지던 박병우.

그런 그가 울컥 피를 쏟고 있었으니,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담함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

스르륵.

박병우의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스마트폰을 발견한 것은.

그녀는 황급히 달려들었다.

"······팍스!"

거대 쇼핑사이트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는 박병우가 알려준 스마트폰의 사용 방법을 떠올렸다.

꾸욱.

터치스크린에 닿은 그녀의 손가락.

그렇게······

3분 아니, 2분이나 지났을까?

부우우우우웅!

강희영이 발견한 것은 맹렬하게 달려오는 두 대의 택배 트럭이었다.

"······팍스?"

문명 시절, 아파트 입구에서 매일 같이 마주쳤던 팍스의 배송 트럭.

그 알듯 말듯 한 기시감이 그녀는 어색하기만 했다.

벌컥!

차량의 뒷문이 활짝 열렸고,

드르르륵!

척! 척!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네 명의 팍스맨이 들것을 끌며 절도 있게 다가왔다.

사실상 외관만 택배 트럭일 뿐, 활짝 열린 화물칸 내부는 완벽한 앰뷸런스 그 자체였다.

"환자!"

"아! 여, 여기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멍하니 넋 놓던 강희영이 황급히 대답했다.

"하나, 둘!"

무거운 택배 상자를 드는 듯, 균형 잡힌 호흡.

드르륵!

팍스맨들이 들것에 실린 박병우와 이혁수를 앰뷸런스에 밀어 넣었고, 

탁!

조수석에 강희영을 태운 채, 냅다 골목을 달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익!

거칠게 바퀴를 들며 골목을 꺾어 나온 배송트럭.

지그시 눌린 액셀과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주변 풍경.

그 끝에 강희영이 본 것은······.

화아아악!

그들을 덮치는 푸른색 포탈이었다.

.

.

.

하얗게 물든 응급 병동.

삐이- 삐이-

전력이 공급되고 있는 것은 물론,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병실 내부로 의료진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멸망한 세상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 또한 환자였다.

머리에 칭칭 붕대를 감은 강희영.

병실을 두리번거리며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 읊조렸다.

"······여기가 강남이라고?"

강릉에서 강남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나 빠른 환자 후송은 멸망 전에도 불가능했으리라.

한창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을 즈음, 흰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운에는 이름표가 없었다.

하지만, 강희영은 머리맡에 뜬 홀로그램을 통해 그녀의 소속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팍스FC 화타, 김주연]

"······화타?"

"아, 이건 신경 쓰지 마세요. 동생 새끼 때문에······."

잠시 불끈 주먹을 쥔 김주연이 말을 이었다.

"일행분들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 마세요. 한 열흘 정도면 치료가 끝날 것 같고요."

"열흘이요······?"

배가 꿰뚫린 관통상.

심지어 주먹만 한 크기였다.

그런 상처의 치료가 고작 열흘 만에 끝난다니, 강희영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힐러분들이 아주 많아요. 위급했던 환자라 우선 치료를 하다 보니······ 오히려 다른 분들보다 치료 기간이 짧아졌네요."

"아니, 어떻게 그런 게······."

힐러들의 치료에 뒤덮여 있을 박병우의 모습.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뒤늦은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래서일까?

똑.

똑.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제야 알았다.

아무리 각성했다곤 하지만, 그들 자신 또한 보호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걸.

아주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강도가 들어왔을 때 신고할 수 있는 경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요청할 수 있는 구급대원.

그 일상적 인프라가 얼마나 큰 심리적 보탬이었는지, 멸망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저런······."

김주연은 그런 강희영을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곤 벌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강희영 씨도 치유 능력 각성자라던데, 맞나요?"

"네······ 하지만 아직 레벨이 낮아서······."

한껏 주눅이 든 목소리.

작게 숨을 몰아쉰 김주연이 강희영에게 말했다.

"레벨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초적인 응급처치 정도는 숙달하고 있는 게 좋아요. 치료 효과가 극대화되거든요."

"응급처치요······?"

그것이 김주연이 이곳 세브란스 병원을 택한 이유였다.

현대의학과 치유 능력을 동시에 적용한 치료.

그 효율은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생각조차 못 해 봤다는 듯한 강희영의 표정.

그런 그녀에게 김주연은 제안했다.

"팍스FC에서 진행하는 힐러 훈련프로그램이 있어요. 따로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수료한 다음에는 여기 힐러로 일할 수도 있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돌아가도 되고요."

"훈련······ 프로그램······."

잠시 고민하던 강희영은 덥석, 김주연의 손을 움켜쥐었다.

"······할래요! 시켜주세요!"

그녀는 여실히 깨달은 터였다.

'······다시는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죽어가는 동료의 모습을.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며, 김주연 또한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드르르륵!

커튼을 가린 채, 쿵하니 돌아누운 이혁수.

조금 전 힐러들이 그의 독을 모두 치유해 준 터였다.

의도치 않게 강희영의 자책 어린 목소리를 듣게 됐다.

하지만 이혁수 또한 자신의 무력함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박병우에게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느니, 장광설을 늘어놓았던 그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족한 능력 앞에서, 그는 이 모두가 허풍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오만했어.'

자립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도 능력이 받쳐줘야 할 수 있는 것.

지금의 이혁수는 자립은커녕 스스로를 지킬 만한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돼. 나도······."

더 성장해야 한다는 명백한 자각.

하지만 별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막막함이 그를 찾아올 때쯤······.

펄럭.

"······?"

텁.

어디선가 날아온 전단지가 이혁수의 얼굴을 덮었다.

"뭐야······?"

팔랑.

무심결에 종이를 펼쳐본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팍스FC 각성자 훈련 프로그램 개설]

☞ 김솔과 백민우의 무림생활

☞ 이용수의 운전면허학원

☞ 레고 조립보다 쉬운 에메스 건축

☞ 최시은의 연금성

☞ 맥가이버 제임스의 튜닝스쿨

☞ 엘븐하임의······.

---

***

"······효과가 어마어마하네요."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감탄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김 대령께서 마련한 신고 시스템 덕에 괴물들을 출몰하는 족족 잡아내고 있어요. 지역 각성자들의 참여율도 올라가고 있고······ 가장 주목할만한 건······."

"사람들이 차츰 팍스 FC와의 관계를 쌓아 가는 거죠."

"맞습니다. 바로 그거예요."

그간 팍스FC의 포탈, 그리고 합참의 병력이 지역 방어에 힘써왔지만, 한국 전체를 커버하기에는 그 전력이 현저히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야말로 선순환 구조네요."

지원이나 구조를 요청한 각성자들에게 팍스맨들을 급파하고, 그렇게 구조한 이들이 다시 새로운 팍스맨이 되는 구조.

전투 능력 각성자들은 물론, 드라이버, 건축가, 메카닉 등 유용한 보조 능력을 갖춘 이들까지 대거 유입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렇죠. 이건 각성자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테니······."

물류센터가 지원하는 무기와 물자.

거기에 훈련과 양성 프로그램까지.

우리는 생존에 급급했던 각성자들을 한 단계 도약시켜줄 계획이었으니까.

한층 더 강해질 각성자들을 떠올리며, 유성철은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 정도면······ 정말 우리가 미국의 전쟁을 종결시킬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나는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모두 데려가지는 않을 겁니다.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겠지만······ 훈련과 테스트를 통해 인원을 선발해서 데려갈까 해요."

각성자들의 손을 빌려야 하는 대규모의 전투다.

하지만 그들의 피까지는 빌리고 싶지 않았다.

"테스트라면······ 어떤 걸 말이죠?"

각성자들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가늠하는 것.

이를 위해 나는 아공간 의 홀로그램 기능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괴물들의 홀로그램을 띄울 수 있어요. 타격을 주고받고 하는 식으로 상호 작용도 가능하고요. 그걸로 모의 전투를 시켜보면, 실력에 따라 랭크를 부여해 줄 수 있겠죠. 뭐 대충······ A급부터 F급까지 다양하게······"

"그렇군요. 랭크라······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인데요."

이제 알겠다는 듯, 유성철이 내게 덧붙였다.

"그럼 전국 각지에 있는 모든 각성자들의 신상 기록을 보유하게 되겠군요. 어떤 능력의 각성자들이 있는지······ 또 몇 명이나 있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팍스FC의 산하 기관을 만들까 해요. 팍스FC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단체라면, 이건 각성자들만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단체이니까요."

"그렇군요. 확실히 그게 깔끔하기는 하겠습니다. 혹시 이름은 정해두셨습니까?"

테스트를 거쳐 랭크를 부여받게 될 각성자들.

그들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멸망 그 자체를 사냥할 수 있을 만큼 주도적인 존재여야만 했다.

멸망한 세계를 딛고, 새로운 계급으로 올라설 그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산하 기관의 새 이름을 떠올렸다.

"헌터 관리국. 어떨까요?"

이동통신 (3)

071화 이동통신 (3)

한국의 각성자들이 가파른 성장을 이어가는 동안, 아공간에서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우선은 드워프 세공사, 브로크에 관한 것이었다.

아공간에 지낼 만한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내 제안에, 브로크는 간결하게 답했다.

"자는 곳이야 아무래도 좋소. 그보다는 작업공간을······."

그렇다고 대단한 시설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책상과 조명, 자질구레한 공구 몇 개가 그가 요청한 전부였으니.

하지만 물류센터 한쪽에 위치한 에메스의 자재 창고, 그리고 그 옆에 붙은 제임스의 작업 공간을 발견했을 때.

"······이 무슨······!"

브로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제 타공판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

벽면 곳곳에 수십 종의 공구가 질서정연하게 전시되어 있었고, 층층이 쌓인 선반에는 각종 나사나 부속류가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기술자로서 탐내지 않을 수 없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공간.

물류센터의 복제 기능이 없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입을 떡 하니 벌린 브로크.

딱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부러워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황급히 얼굴을 붉히며 돌아서는 브로크.

책상과 조명이면 충분하다며 너스레를 떤 것 치고는 꽤 색다른 반응이었다.

'하기야······.'

욕망이라는 것이 그렇다.

이전에는 생각조차 못 했던 물건.

하지만 그 물건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자마자, 욕망은 맹렬하게 재촉하기 시작한다.

'어서 저 물건을 가져오라'고.

그리고······.

내가 하는 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멸망한 세계 한가운데서 풍족한 물류센터를 전시하는 일.

그것은 평화롭던 세계의 흔적을 전시하며, '어서 다시 세계를 되찾자'고 그들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한편 우리가 보고 있건 말건, 메카닉 제임스는 여전히 작업에 열중이었다.

치이이이!

용접을 하고······.

팔랑!

귀에 연필을 꽂은 채 도면을 확인하고,

슥슥! 슥슥!

멋지게 도면을 수정하면서.

다만······.

'······제스처가 좀 과한데?'

가만 보니 제임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브로크가 그의 작업을 우두커니 보고 있던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던 모양.

제임스는 끝끝내 브로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사회성이 바닥이었지······.'

서로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드워프와 미국인.

덕분에 나도 덩달아 낯이 간지러워질 참이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사람이 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허참, 이리 와 봐!"

수시로 자재 창고를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였다.

제임스와는 숱하게 맥주를 기울이며 친분을 쌓은 상태.

그의 손을 잡아끈 아버지가 성큼 브로크에게 다가와 물었다.

"기술자시라고? 어떤 작업을 주로?"

"그, 보석 세공을······."

"세공? 이야······ 전문가들이 아주 가득가득 차는구먼."

가볍게 운을 뗀 아버지는 시시콜콜하게 브로크의 작업 도구들의 용도를 묻거나, 제임스가 말을 덧붙이도록 유도하는 등, 서서히 대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그렇게 한참이나 대화를 이어간 끝에······ 아버지는 결정을 내렸다.

"그럼 우리가 공방을 만들어 주면 되겠네. 위치는 어디가 좋겠어요? 이쪽?"

"아, 아닙니다! 그렇게 수고 끼칠 것까지는······!"

브로크가 손사래를 쳤지만······.

"캄다운, 브로크. 정겸스 파더, 솜씨 훌륭해. 내 작업실 뼈대도 튼튼하게 잡아 줬었다고."

그새 긴장이 풀린 제임스가 브로크를 독려했다.

"그럼······."

그제야 눈을 들어 제임스의 작업실을 살펴보는 브로크.

그도 이런 작업실을 갖고 싶기는 한 모양이었다.

"너무 신세 끼치지 않는 정도로만······."

"그럼! 그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공간의 기술자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던 나 또한.

***

그로부터 며칠 뒤.

브로크의 공방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아공간으로 향했다.

곧장 제임스의 공방에 다다른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좋네."

제임스의 작업실만큼이나 훌륭한 공간이었다.

선명한 LED 조명, 광택기, 드릴링 머신, 주물 작업에 필요한 도가니까지.

물류센터에 있는 물건이라면 빠짐없이 지원해 주었고, 그렇지 않은 물건이라도 제임스가 손수 필요한 장비를 만들어 준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저건?"

낮은 높이의 사각형 테이블.

가운데에는 둥근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 주위로 날카롭게 솟은 8개의 송곳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두런두런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타난 세 사람.

그들이 하나둘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제 확실히 친해졌나 보네.'

첫날의 어색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절친한 팍스FC의 대표 기술자들이 모여앉아 있을 뿐.

테이블의 정체는 곧장 드러났다.

달칵.

가운데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불길.

제임스가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소시지를 꺼내 푸욱 송곳에 찔러 넣었다.

그러곤 테이블 한쪽의 버튼을 누르자, 꼬챙이에 매달린 소시지가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치이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거대한 소시지.

그와 더불어,

꼴꼴꼴.

저마다 든 잔에 시원한 맥주가 따라졌다.

새로 제작된 자동 야식 테이블.

날마다 고된 작업을 이어가는 세 사람이 함께 위안을 갖는 자리였다.

"이것 참······."

"오우, 정겸. 왔어?"

하는 수 없었다.

차디찬 맥주와 코를 찌르는 짭짤한 냄새까지.

그들 사이에 자리를 꿰차는 수밖에.

"앗 뜨······."

"천천히 먹어라."

입을 식힐 겸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고 있자니,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브로크가 말했다.

"사실 강화석을 세공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냥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소. 평생 보석을 다듬다 죽는 게 내 소원이었으니까. 하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하지만 어수룩하던 첫날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고맙네. 이런 선물까지 받게 될 줄은 미처 몰랐어. 정말······."

선물.

라이시온에 갇혀 기약 없이 클레멘타인을 찾아다녔던 그다.

그 외로운 존재를 꺼내 온 것은 나로서도 기껍게 그지없던 일.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건 그렇고······ 아쉽게 됐네."

그가 착잡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어쩔 수 없죠. 브로크 씨 때문도 아니잖아요."

강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공방이 건설되는 중에도, 브로크는 틈틈이 카멜롯에서 생산된 강화석을 세공해 주었다.

덕분에 가지고 있던 장비 대부분을 4강까지 대폭 강화할 수 있었지만······.

정작 5강을 진행하려 했을 땐, 역으로 아이템이 무참히 박살 나 버렸다.

브로크가 그 이유를 부연해 주었다.

"강화석으로 위력을 더하기 위해서는, 아이템도 그만한 수준까지 올라와야 해.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지."

평범한 공산품부터, 군용품, 심지어는 타차원의 하급 무기까지.

지금껏 모두 유용하게 사용해 왔지만, 정작 카멜롯 같은 '제대로 만든' 물건은 부재했다.

덕분에 성장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그렇게······.

'······어디서 전설의 대장장이라도 데려와야 하나?'

그런 생각을 주억거리고 있을 때였다.

"······!"

물류센터에 난 포탈을 통해 헐레벌떡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정체는······.

"아저씨?"

"정겸······!"

코리안 카우보이, 박동관.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 그가 다짜고짜 내게 어느 물건 하나를 들이밀었다.

"뭐예요, 이게?"

RPG-7처럼 생긴 로켓 발사기.

하지만 정작 탄두나 로켓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발사 장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박동관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라이시온에 침입자가 있었어."

"침입자요?"

그랜드캐니언에 있는 라이시온 광산.

박동관을 비롯한 한인들에게 이곳 광산의 관리와 통제를 부탁했던 터였다.

그리고 다행히, 광산을 지키는 건 이들 한인뿐만이 아니었다.

"가디언들이 모두 처리하기는 했어. 그런데······."

"······그런데요?

"이 무기가 영 수상해서 말야."

철컥.

그가 로켓 발사기의 발사관을 들어 보였지만, 정작 그 실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띠링!

[정보 열람이 제한된 아이템입니다.]

"······강화된 무기인가요?"

"그랬음 다행이게. 강화된 무기도 아니야. 그런데도······."

눈으로 보는 게 더 빠르겠다는 듯, 박동관은 발사기를 치켜들었다.

그러곤 아공간의 머나먼 빈 공간을 겨냥했다.

철컥.

지체 없이 당겨진 방아쇠.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우우우우웅!

발사관에 그려진 복잡한 푸른색 회로.

사방으로 퍼진 푸른 빛이 서서히 앞으로 밀려들더니······.

콰아아아앙!

발사기부터 모종의 푸른색 에너지가 뿜어져 나갔다.

꽈아앙!

멀찍이서 들려오는 타격음.

분명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음에도, 무기에서는 무언가 '발사'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죠?"

"······내 말이."

지금으로서는 본 적도 없는 무기였다.

원리도, 기능도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무기.

우리의 의문을 풀어준 건, 다름 아닌 세공사 브로크였다.

성큼 다가와 발사기를 집어 든 브로크.

그가 발사기에 각인된 회로를 면밀히 살핀 뒤 말했다.

"이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지."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드워프들이야."

***

브로크, 유성철 등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엘븐하임으로 향했다.

그리고,

"······드워프들이 만든 무기라고요?"

갈라온 의회 앞에서 만난 엘리.

그녀는 우리만큼이나 놀란 기색이었다.

홱!

복잡한 표정으로 브로크를 바라보는 엘리.

브로크는 틀림없다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들이 지구에 들어왔어."

혹시 무기만 흘러들어온 것은 아니냐는 내 질문에, 브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지구인들의 무기를 흉내 낸 형태요. 지구인들의 요청을 받아 제작한 게 분명해."

드워프들이 지구의 인간들을 위해 무기를 만들었다는 것.

엘리는 그 사실을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드워프들은 엘프만큼이나 평화로운 족속들이에요. 이런 무기를 앞세워서 침략 전쟁에 나설 리가 없죠. 포로가 되거나 노예로 부려지는 거라면 모를까······."

정황적인 증거도 있었다.

라이시온의 침입자들은 드워프가 아닌 인간들이었으니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엘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드워프들의 '공장'이 지구에 통폐합된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에 의해 점령당한 거죠."

상공회의소가 미국 전역에 배치해 놓은 점령지.

그중 하나가 라이시온 광산이었다면, 이번에는 드워프들의 생산 공장이었다.

엘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내 예상이 틀렸어요. 인간들이 이렇게나 빨리 점령에 성공할 줄은······."

나름 시간이 있다고 여겼던 미국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부의 침략자들은 위협적인 성장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덧붙였다.

"확장세가 상상 이상입니다. 극 서부에 가까운 애리조나인데······ 벌써 여기까지 와서 기웃거린다는 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추가적인 점령지들가 남부 침략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으니까.

더욱이, 새로 얻은 라이시온 광산을 보호할 필요도 있었다.

내가 말했다.

"일단은 어떻게든 북부와 합류해 보죠. 그쪽도 과연 멀쩡할지 모르겠지만······."

남부와 치열한 전선을 유지하고 있다던 북부였다.

다소 열세라고 듣기는 했지만, 분명 이들 또한 상당한 전력을 이루고 있을 터.

남부를 적대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였다.

다만 문제는 만나는 장소였다.

미국과의 핫라인은 진즉 끊어졌으니, 남은 것은 그 흔적을 뒤지는 일이었다.

"북부 쪽에서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던 곳이 어디라고 했었죠?"

"그나마 일리노이가 최근까지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유성철이 내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리고······.

"······역시 시카고겠죠."

다음 우리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이동통신 (4)

072화 이동통신 (4)

출발은 라이시온 광산이 위치한 애리조나.

이번에도 이용수의 운전 솜씨가 빛을 발했다.

"한결 낫네요."

태평양을 건너며 녹초가 되었던 그다.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던 경험 덕인지, 이번 비행이 유난히 쉽게 느껴지는 모양.

간간이 괴물들이 날아들었음에도, 이용수의 운전과 나의 출하 스킬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미 대륙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시카고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세 시간 정도.

널찍한 터를 골라 착륙에 성공한 우리는 새로 차량을 출하해 시카고의 도심으로 이동했다.

숲처럼 늘어선 빌딩, 도시를 두른 아름다운 강까지.

황량하기만 했던 서부와 달리, 또 다른 미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이것 참 새삼······."

그만큼이나 멸망의 흔적이 역력했다.

곳곳에 처박힌 차량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전신주, 곳곳에 널린 시체까지.

팍스FC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지금의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 우리에게 미국은 보여 주고 있었다.

멸망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카아아아아아악!"

"케이이이익!"

시작은 사나운 울음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우두두두두두두!

반대편 골목으로부터 괴물이 미친 듯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쿠와아아아악!"

고블린, 오크, 놀, 드레이크를 비롯한 수많은 종류의 괴물들.

놀라운 점은 놈들이 서로 합심하여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대체 뭐지?"

저마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괴물들.

그들은 인간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 심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이용수가 추가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원래 눈이 저랬던가요······?"

새빨갛게 충혈된 괴물들의 눈.

그뿐만이 아니었다.

축 늘어진 팔다리, 거기에 흐느적거리는 움직임까지.

영락없는 좀비 그 자체였다.

물론······.

투두두두두!

투두두두!

"케에에에엑!"

"끼이이이이이익!"

그렇다 한들 우리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4강까지 내성을 끌어올린 소총.

거기에 1강 수준의 탄환을 사용하니 소총이 터져나가는 문제가 완전히 해소됐으니까.

좀비들을 잡기엔 더할 나위 없는 무기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도로가 정리됐다.

철컥.

함께 소총을 내려놓은 이용수와 나.

멸망이 시작된 직후, 국통사에서 와이번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아무쪼록 급한 건 눈앞의 괴물들이었다.

"왜 무리 지어 다니는 걸까요? 그것도 이런 이상한 상태가 되어서······."

이용수의 질문.

나로서도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괴물이 많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과 달리, 다수의 입찰 경쟁에서 패배한 미국이었으니까.

무수히 많은 차원으로부터 침략이 이뤄졌을 터.

"이제 차차 확인해 봐야죠. 시카고의 각성자들이라면 뭐라도 알고 있을 테니."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일명 '루프'라고 불리는 호수 앞의 번화가.

그곳이 유성철이 알려준 시카고 세력의 주둔지였으니까.

.

.

.

부우우웅.

도심을 가로질러, 마침내 '루프'에 도달한 우리.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은 것은 시카고 힐튼 호텔에 매달린 거대한 스피커였다.

-북부 해방군에서 알립니다. 생존자들은 이곳 힐튼 호텔로 오십시오. 마실 물과 식량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생존자들께서는······.

북부는 스스로를 해방군이라 칭하고 있었다.

타 차원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중이니,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쯤 되니 정말 영화 같네요."

이용수의 감상이었다.

'미국식' 아포칼립스의 전형.

하지만 그 장대한 포부와는 달리, 시카고의 각성자들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여느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카아아아아악!"

"키에에이익!"

쿵! 쿵!

호텔 입구에 몰려든 수백 마리의 괴물들.

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강철로 덧댄 호텔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생존을 내세운 해방군이었지만, 찾아온 괴물들이 원하는 것은 살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 정작 우리에게는······.

"생존자가 아니라······ 구원자를 찾는 것 같네요."

궁지에 몰린 그들이 애처롭게 보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철컥!

다시 무기를 드는 수밖에.

그럴듯한 '미국식' 아포칼립스를 재차 경험할 기회였다.

***

우리를 맞이한 것은 시카고의 지역대표, 케이트였다.

"그렇군요. 한국에서······."

포탈을 통해 불러들인 작전본부장 유성철이 그녀에게 우리의 신분을 확인해 주었다.

핫라인이 끊어져 버린 한국.

그 먼 곳으로부터 지원이 도착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했었는데······."

그들은 한창 궁지에 몰려 있었다.

괴물들을 처치하지 못해, 마냥 버티기만 한 것이 어느덧 일주일이 되었다고.

나 또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들은 대체 뭡니까? 무슨 좀비처럼······."

"아, 그건 말이죠······."

후우.

얕은 한숨을 뱉은 케이트가 말을 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좀비는 아니에요. 그저 약에 취해 있을 뿐이죠."

"약이요?"

"남부 사령관의 능력이에요. 정체불명의 성분으로 된 약을 만드는 능력인데, 중독성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요. 괴물들에게는 세뇌 효과까지 일으키는 탓에······ 괴물들마저 놈의 입맛에 따라 움직이는 상태고요."

드워프들의 공장을 점령하는 등, 상상 이상으로 빨랐던 남부군의 약진.

그 배경에는 남부 사령관의 독특한 능력이 있었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케이트.

"이제는 아예 기체 형태로 살포하고 있다는 게 문제예요. 이상한 대포에 넣어서 우리 진영 쪽으로 쏘아 넣는 식인데······."

"대포라면······."

드워프들의 대포.

다른 것을 의미할 리 없었다.

해방군은 드워프들의 존재를 몰랐다.

하지만 '공장'에서 생산되는 무기의 위험성만큼은 여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화약 없이도 발사되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는데, 아예 약물을 살포하는 용도로 쓰고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가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아악!

-히익, 히히힉!

쿵쿵.

발버둥 치는 소리와 함께, 모종의 비명이 들려왔다.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는 케이트.

비명의 주인공은 남부군 발사한 약물에 중독된 시카고의 각성자들이었다.

-으흐윽!

쾅! 쾅!

벽을 때리며, 울부짖으며, 중독된 약의 기운을 떨어내려 애쓰는 그들.

그 고통 어린 목소리가 내게도 괴롭게 들려왔다.

"······잠시 기다려보세요."

차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팍스 FC에 구조대를 요청했다.

우르르르르!

포탈을 타고 나오는 수십 명의 팍스맨 힐러들.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중독자들이 머무는 방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흐으으······.

-흣······!

한결 완화된 반응.

하지만 통증을 가라앉힐 수 있을 뿐, 중독된 약 기운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무력감이 찾아들었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본론에 다다를 차례.

상황이 얼추 정리되었을 즈음, 유성철이 케이트에게 물었다.

"글렌을 만나고 싶습니다. 북부를 지원할 생각이에요."

진즉 무너져 버린 미 연방 정부다.

몇몇 주는 주 정부군이 그 역할을 대신했지만, 이곳 시카고처럼 지역 대표가 세력의 구심을 이루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글렌 포드.

그는 프리스트 능력을 가진 각성자로, 북부 주요 도시 세력을 규합한 해방군의 지도자였다.

북부와의 연합을 위해서는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

하지만 케이트가 뜻밖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행방불명이에요."

"······예?"

그리고 그 경위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핵심 인원들을 데리고 직접 남부로 내려가셨어요. '공장'을 찾기 위해서요. 약물 중독까지는 방법이 없더라도, 놈들이 점령한 공장만 멈출 수 있다면 전황을 바꿀 수 있을 거라며······."

"그럼 남부에서 행방불명이 된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공장을 발견했으니 복귀하겠다는 무전을 받았고, 얼마 뒤 문제없이 신시내티를 지났다고도 전해 들었으니까요. 다만 이곳 시카고에 다다랐을 즈음에······."

작전을 무사히 완수한 글렌 포드.

하지만 그런 그를 붙잡은 것은 남부가 아닌 별개의 존재였다.

"인디애나에 형성된 대수림이 있어요. 통폐합으로 형성된 점령 지역 중 하나인데, 그 위를 비행하시다가 그만······."

결론은 간단했다.

점령지로 생겨난 타차원의 대수림에 추락해 버렸다는 것.

"잠깐만요, 인디애나라면······."

미국 지리에 빠삭한 유성철이 되묻자, 케이트가 대답했다.

"맞아요. 시카고에 인접한 곳이죠. 심지어 대수림은 여기서 50마일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아요."

"수색은 해 보셨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그를 만나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드워프들의 공장의 위치까지 알고 있는 그였으니.

내 질문에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해봤어요. 하지만······ 사실상 수색이 불가능한 땅이에요. 항공기는 나는 족족 격추되고, 육로로 들어간 탐색조도 헤매기만 하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어요. 돌아온 각성자가 증언하기론 숲이 끊임없이 변형됐다고 해요. 나침반이고 뭐고 도무지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고······."

그야말로 미지에 둘러싸인 대수림이었다.

그곳에 떨어진 북부군의 수장, 프리스트.

말은 행방불명이라 했지만, 케이트는 더 이상 그의 생존을 확신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제가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푹 고개를 숙인 그녀가 천천히 어깨를 떨었다.

"그래도 글렌 님께서 계셨을 땐 희망이 있었어요. 제한적이기는 해도, 프리스트의 능력으로 약물의 기운을 정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그때였다.

-아아아악!

-흐히익!

옆 방으로부터 찌르듯이 흘러나온 비명.

힐러들의 치료가 임시방편에 불과했음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케이트의 마지막 기둥을 무너뜨렸다.

"지금까지 미국이 패배한 입찰 경쟁만 자그마치 스물다섯이에요. 그중 게이트를 닫은 곳은 다섯 곳이 채 되지 않죠. 그런데 남부 사령관은······."

담담히 적의 전력을 가늠하는 그녀.

내게는 그 목소리가 또 다른 비명처럼 들렸다.

"거기서 쏟아진 괴물들을 제 수족처럼 부리는······ 진짜 괴물이에요."

한 도시를 이끄는 수장이 할 말은 아니었다.

애써 이들을 도우러 온 우리가 들을 말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차마 나무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절망은 무거웠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희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프리스트, 살아 있어요."

"네?"

홱 하니 고개를 든 케이트.

유성철과 이용수 또한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프리스트, 글렌이 대수림에 추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나는 곧장 아공간에 들어있는 상공회의소의 메시지 시스템을 이용했다.

"검색해 봤거든요."

꽤 방대한 거리까지 적용이 가능한 메시지 시스템.

메시지를 수신할 대상을 자유롭게 세부적으로 설정할 수 있었고, 글렌의 이름과 성별을 토대로 대수림에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는 인물이 있는지 팍스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메시지 전송이 가능합니다.]

프리스트의 생존 신고였다.

"잠시 이리들 와 보세요."

남은 일은 간단했다.

케이트를 비롯한 일행들을 호텔 창가로 이끄는 것.

이제 어둑했던 밤이 가고, 이른 새벽의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과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던 케이트의 말이 맞았다.

회색을 섞은 듯한 밝은 하늘 아래로, 프리스트를 삼킨 인디애나의 대수림이 한눈에 내다보였으니까.

그리고······.

"정말이었군요······."

"그럼 이제 저것만 따라가면······."

"······뭐, 뭐예요, 저게?"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용수와 유성철.

반면 케이트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했다.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못 했을 능력.

울창한 대수림 위로, 내가 글렌에게 지정한 거대한 붉은색 화살표가 난데없이 떠올라 있었으니까.

선명하게 띄워놓은 홀로그램.

그것이 우리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었다.

우선은 프리스트, 그리고 다음은 남부의 공장으로까지.

녹색 인디언과 다리 짧은 블루칼라 (1)

073화 녹색 인디언과 다리 짧은 블루칼라 (1)

투두두두!

멀지는 않은 거리였다.

헬기를 통한 20분 남짓한 비행.

하지만 정작 숲의 초입에서 헬기를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도 다 있군요."

황당하다는 듯, 이용수가 덧붙였다.

비행기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던 바였다.

추락을 각오하고 낮은 고도로 비행했지만, 대수림은 우리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가해진 중력.

그 힘이 우리가 탄 헬기를 거칠게 잡아끌었지만······.

투두두두두!

이용수의 신들린 운전 덕에 가까스로 착륙할 수 있었다.

짹짹.

졸졸.

그렇게 맞이한 울창한 대수림.

남은 길은 육로뿐이었다.

"······운송 수단은 많으니까요."

덜컹.

곧장 출하된 오토바이 한 대.

얼마 전, 부서진 모터사이클 전시장에서 담아 두었던 물건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마저 길을 나서려던 찰나······.

"정겸씨! 저기······!"

피우웅!

하늘로부터 무언가 날아들었다.

깡! 까앙!

퉁퉁 땅을 튕기며 떨어진 은색 가스 캔.

그리고 그로부터······

푸쉬이이이!

희뿌연 연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용수 씨, 받아요!"

지잉!

[K-5 방독면, 가격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후다닥!

숨을 참고, 재빨리 방독면을 뒤집어쓴 덕이다.

연기를 들이마시지는 않았지만, 이곳 대수림에는 희뿌연 연기가 가득 차올랐다.

마치 신비로운 안개처럼.

"정겸 씨, 이거 혹시······."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대포알처럼 날아온 가스 캔, 그리고 정체불명의 연기까지.

그 정체를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까.

"······이게 바로 그 중독 가스인 모양이네요."

피웅!

피우웅!

푸쉬이이이······.

연달아 떨어지는 가스 캔.

남부군이 어느덧 이곳 대수림까지 도달했다는 의미였다.

"어서 가죠."

서둘러야 했다.

자칫하다간 프리스트가 놈들에게 먼저 사로잡힐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탓!

부우우웅!

서둘러 오토바이에 올라탄 우리는 울창한 숲길을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늘 위로 떠 오른 붉은색 홀로그램을 마주하며.

.

.

.

부우우우웅!

출발한 지 대략 30분이 다 되어갈 즈음.

뒷좌석에 탄 나는 이용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용수 씨 반대쪽입니다."

"또요? 이것 참······."

끼이이익!

즉시 핸들을 반대로 꺾는 그.

어느덧 수십 차례였다.

멀쩡히 뻗은 길을 내달리다가, 돌연 방향을 바꾼 것은.

"무슨 이런 곳이 다 있는지······."

어쩔 수 없었다.

줄곧 앞으로 향하다 보면, 멀쩡히 떠 있던 목표 지점의 홀로그램이 어느덧 등 뒤에서 발견되곤 했으니까.

대관절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숲길을 이루는 공간 전체가 완전히 왜곡되어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콤파스 나침반, 혼합색상, 가격은 22,790원입니다.]

휘리리리릭!

손에 든 나침반의 바늘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살아있는 동물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나무들.

눈앞의 길 하나를 지워 버린 숲이, 이번에는 왼쪽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냈다.

"이러니 못 찾지······."

시카고의 탐색조가 길을 잃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미로와도 같은 공간.

그것이 인디애나 대수림의 숨은 정체였으니까.

물론······

'바뀌든지 말든지······.'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방향이 뒤집히든 말든, 우리는 상공회의소의 홀로그램을 따라 길을 나아갈 뿐이었으니까.

그 덕분일까?

서서히 주변 풍경 또한 변모하고 있었다.

한층 어두컴컴하고, 빽빽한 나무로 들이찬 풍경으로.

대수림의 심층부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한참 숲을 가로지르던 찰나.

"······?"

누군가 앞을 막아 세웠다.

끼이이익!

황급히 오토바이를 멈춰 세운 이용수.

사뭇 긴장감이 피어올랐지만, 눈앞의 상대는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척하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마 위로 솟아오른 커다란 사슴뿔.

깃털 머리띠를 쓰고 검고 긴 머리를 뒤로 늘어뜨린 존재.

구릿빛 피부와는 달리, 눈 주위로는 새빨간 페인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괜찮은 건가?"

숲 전체에 중독 가스가 가득 차올라 있었음에도, 그에게는 딱히 괴로운 기색이 없었다.

그저 뭔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우리에게 말을 건넬 뿐이었다.

"길 잃은 영혼에 있는 것은 무지와 자만, 노여움과 질투, 그리고 욕망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길을 알고 있군요."

간단히 말해, 길을 참 잘 찾는다는 소리였다.

대단하다는 듯, 우리를 추켜세우는 사슴뿔 인간이었지만······.

"······그냥 홀로그램 보고 온 건데."

"쟤들한테는 내비게이션이라는 것도 없나 봅니다."

딱히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의 어정쩡한 반응 때문일까?

잠시 큼큼 목울대를 정리하던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 정체는 내 귀를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드루이드?"

"예, 세레니티아의 드루이드, 오브스틴이라고 합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카멜롯의 기사들을 되살리기 위한 조건.

그건 성장한 세계수, 그리고 숙련된 드루이드였으니까.

오브스틴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족장님께서 당신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이미 길은 알고 계시겠지만······."

콰과과곽!

꽈드득!

손짓 몇 번으로 나무들을 움직여 통로를 만들어내는 그.

하지만, 나는 고민이었다. 

'······.'

줄곧 찾아오던 드루이드다.

그 초대가 기꺼운 것도 사실이지만······.

'······프리스트를 찾아야 하는데.'

당면한 과제가 있었다.

북부의 지도자 글렌 포드.

그를 찾아 남부의 드워프 공장을 탈환하는 것.

프리스트를 찾는 것과 해골 기사들을 살려내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시급한지 가늠해 보려던 찰나.

드루이드가 내 고민을 줄여주었다.

"프리스트를 찾는 거라면······ 그는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아······?"

아니나 다를까, 하늘 위로 뜬 홀로그램은 정확히 그가 만들어놓은 오솔길로 향해 있었다.

"그런 거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대뜸 나타난 드루이드.

그가 우리에게 지름길을 놓아 준 것이었으니.

***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

우리는 드루이드의 마을, 세레니티아에 당도했다.

"후우······."

코로 청명한 공기.

정체 모를 신비한 공기가 세레니티아를 외부로부터 방어하고 있었다.

남부군의 중독 가스를 차단해 준 덕에, 그제야 답답한 방독면을 벗어 던진 우리였다.

듬성듬성 놓인 원뿔 형태의 움막이 눈에 띄었다.

주위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동물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고, 선명한 색감으로 그려진 걸개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깃털 머리띠를 끼고, 눈가를 빨갛게 칠한 드루이드들.

그들을 하나둘 스쳐 지나간 우리는······.

"······찾았다."

동물 가죽에 비스듬히 누운 사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은 북부군의 지도자, 글렌.

오브스틴이 그의 용태에 대해 말해 주었다.

"온몸이 부러져 있었습니다. 얼추 치료가 끝났으니 지금은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되고요. 보기에는 이래도 오늘내일 중으로는 정신을 차릴 겁니다."

전신 골절.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고비를 넘긴 프리스트였다.

골절은 팍스FC의 힐러들에게 있어서도 어려운 치료였다.

치유 능력이 뼈에는 제대로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

그런 그를 어렵지 않게 치료하는 드루이드들을 보고 있자니, 해골 기사들의 회생이 성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더욱이, 드루이드들의 능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이용수에게 말했다.

"분명, 중독 가스에도 멀쩡했었죠."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저희는 방독면을 쓰고 있었는데······."

간단한 결론이었다.

만일 드루이드에게 중독 가스를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남부와의 전투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해질 테니까.

한참 그런 생각을 주억거리고 있던 때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드루이드 족장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먼 길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세레니티아의 족장, 핀드릭이라고 합니다."

길게 인사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으니.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 족장이 길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예언을 들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많은 길'이 주어져 있다고 하더군요. 길 잃은 우리 드루이드들에게 '길'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존재는 당신뿐이라며······."

내가 요약을 부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에게서 차원 이동의 힘이 느껴지거든요······."

운명이니 뭐네 이상한 운을 떼기는 했지만······ 영험하기는 했다.

내 능력을 어렴풋이 감지했다는 거니까.

상공회의소에 의해 원치 않게 지구로 떨어진 그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능력이 없었다.

"제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아주 나중에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길은 걸어야 이어지는 법이니까요."

나중을 기약하는 것.

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음에도, 족장 핀드릭은 친절하게 나에게 되물었다.

"그건 그렇고······ 저희에게 부탁하고 싶으신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크게는 두 가지 부탁이었다.

해골 기사들을 회생시키는 일, 그리고 당장에는······.

남부군의 중독 가스를 이겨내는 일.

당면한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한 나는, 핀드릭에게 물었다.

"드루이드들은 중독 가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 같더군요. 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중독의 치료법까지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하지만······."

이해했다는 듯, 족장이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정체는······.

"잎사귀······?"

빳빳하게 말린 한 장의 잎사귀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우두두두두두!

주변을 배회하던 드루이드들.

잎사귀를 발견한 그들은 낯빛이 돌변하더니, 이내 하나같이 족장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타앗!

탓!

샥!

그들이 잎사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홱!

휘릭!

족장은 노련하게 손을 움직여 부족원들로부터 잎사귀를 지켜냈다.

그러곤 그런 그들을 꾸짖듯 덧붙였다.

"이건 돛대일세. 우리 부족을 이끌어 줄 마지막 잎새지."

"아악! 족장니임······!"

거품을 물며, 자지러지는 부족원들.

지금까지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자세히 살피지 못했지만,

다시 보니 마을 드루이드들의 행색에는 하나같이 묘한 구석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달달달달.

세차게 떨리는 손과 다리,

홱!

홱!

그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연신 손톱을 뜯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봐도 금단 증상인데······?'

족장의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드루이드들.

"훠이! 훠이!"

한사코 그들을 몰아낸 족장이 그제야 잎새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드루이드의 기술로 처리한 세계수의 잎입니다. 입에 씹고 있기만 해도 어지간한 외부로부터의 오염은 정화할 수 있어요. 마중을 보냈던 오브스틴에게도 하나 물려서 보냈더랬죠."

"아······."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중독 가스.

공교롭게도 그 해답이 내 안에 있었다.

정확히는 내 아공간 안에.

한편······.

나를 안내해줬던 드루이드, 오브스틴 또한 고초를 겪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전력으로 마을을 질주하는 드루이드들.

그 모두가 오브스틴을 쫓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시뻘건 눈을 하며 오브스틴을 쏘아붙였다.

"빨리 안 뱉어 이 새끼야?!"

"니 입만 입이야? 니 입만 입이냐고!"

우물우물.

오브스틴은 연신 세계수의 잎을 씹어가며 줄행랑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을에 놓인 조각상을 뜀틀처럼 짚고 넘어가는 그.

세계수를 향한 집착과 열망이 물씬 풍겨 나왔다.

그 모습이 개탄스럽다는 듯, 족장이 말을 이었다.

"세계수는 우리 드루이드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곳 지구 차원에 떨어지면서 세계수와도 멀어져 버렸죠. 그러니 중독 가스에 대한 대처방안은 없다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세계수의 잎.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지만, 정작 이들에게는 더 이상 세계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세계수가 그렇게나 쓸모가 많으냐는 내 질문에, 족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많지요. 말려서도 먹고, 무쳐서도 먹고······ 말린 뒤 빻아서 향으로도 태우고······ 목욕할 때도 한 개씩 톡하니 띄워도 좋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레파토리.

이들에게 있어 세계수는 김치, 된장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상당한 중독성을 곁들인.

"아이고 그랬구나. 그게 다 떨어졌군요. 아이고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그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다는 듯 맞장구를 치는 내게, 족장이 물었다.

"······그런데 왜 웃고 계십니까?"

"아뇨, 그냥······."

나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세계수가 참 효자 상품이다 싶어서요."

녹색 인디언과 다리 짧은 블루칼라 (2)

074화 녹색 인디언과 다리 짧은 블루칼라 (2)

세계수가 사라진 대수림의 아포칼립스.

우리는 그 속에서 드루이드의 다양한 군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드루이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내 오래된 연인이여!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뒤적뒤적.

혹시 누가 씹다 뱉은 세계수 잎이라도 나올까, 조각상과 움막 아래를 샅샅이 뒤지는 모습.

흙먼지를 쓸어 담는 모습이 궁상스러우면서도,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두 번째 드루이드는 하늘을 향해 두 손가락을 펼쳤다.

"······내 손이 만일 세계수의 가지였더라면."

쓰읍.

두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는 드루이드.

하지만 그의 입술에 닿은 것은 앙상한 손가락뿐이었다.

그의 손은 세계수가 아니었으니.

세 번째 드루이드는 무려, 연극을 하고 있었다.

"후······ 니들은 이런 거 피지 마라······."

뻐끔뻐끔.

애꿎은 나뭇가지를 오물거리며, 공연히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

세포에 각인된 세계수와의 추억이 그의 대뇌피질을 자극하고 있었다.

갖은 전략을 동원해 세계수의 상실을 위로한 드루이드들이었지만······.

결국 그들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세계수를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을.

"어으으으어어억······."

"아으억······."

물에 담근 빨래처럼, 곳곳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드루이드들.

발에 채는 것이 절망한 드루이드요, 그걸 피하다 다시 발에 채는 것이 우울한 드루이드였다.

한편,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다는 듯 이용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게 대체 다 무슨 소립니까······?"

"그야······."

숲의 시인이라 불리는 드루이드들이다.

혓바닥에 기름이라도 절인 것일까?

이놈의 드루이드들은 말 한마디 곧이곧대로 내뱉는 경우가 없었다.

물론,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도와달라는 소리죠."

결국, 그런 뜻이었고······.

"우리도 도움을 받아야 하고요."

또 그런 뜻이었다.

중독 연기로부터의 면역 효과.

단순히 세계수의 잎을 씹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드루이드들의 특수한 가공 처리가 필요했으니까.

더욱이······.

"분명 치료 효과도 있다고 하셨죠?"

"예······ 그렇긴 한데, 정말 지구에 세계수가 존재한단 말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되묻는 드루이드 족장 핀드릭.

그 후유증이 어마어마한 남부의 중독 가스다.

세계수의 잎을 이용해 중독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터.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는 핀드릭 앞에, 나는 포탈을 열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그 이상을 얻기 위해.

***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

자욱한 수증기에 세계수 잎을 쪄내는 것이 '가공'의 첫 번째 과정이었다.

"아아! 그대를 찾았나니! 그대를 향해 이 노를 젓나니!"

커다란 주걱으로 휘휘 물을 젓는 첫 번째 드루이드.

웃음에 찬 그의 눈이 하회탈처럼 보기 좋게 구부러져 있었다.

"나 자신이 세계수가 된다면······! 나 자신이 세계수가!"

아직 채 가공되지 않은 이파리를 미친 듯이 입에 쑤셔 넣은 두 번째 드루이드.

곧장 팔다리가 붙잡힌 채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고, 남은 이들이 부드럽게 익은 세계수 잎 위로 각종 첨가물을 뿌려 넣었다.

그다음은······.

빠사삭.

빠삭.

강렬한 태양 빛 아래, 젖은 이파리를 말리는 마지막 공정.

빳빳하게 굳은 세계수 잎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독특한 광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드루이드는······.

"후우······ 니들은 이런 거 피우지 마라."

보따리에 잎을 능청스럽게 쓸어 담고 있었다.

"이 새끼 잡아!"

이를 적발한 다른 드루이드들이 그를 제압한 덕에, 드루이드들의 특제 '세계수 잎'이 무사히 완성될 수 있었다.

김장을 담그던 할머니의 손길처럼, 주름진 손으로 완성된 세계수 잎을 건넨 족장 핀드릭.

나 또한 사양하지 않고 날름 세계수 잎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오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나를 찾아들었다.

부드럽게 구부러지는 이파리.

하지만 이파리는 이에 끼거나, 씹히는 일 없이 입 안을 자유롭게 헤엄쳤다.

맛깔나면서도 중독성 있는 식감.

하지만 놀라운 것은 식감뿐만이 아니었다.

"향긋하고······ 청명해······!"

실로 놀라운 느낌이었다.

입천장을 넘어 비강까지 단숨에 뚫고 지나가는 세계수의 향.

알싸한 박하 향이 머리에 쌓인 노폐물을 깨끗하게 씻어 버렸고, 두뇌의 자잘한 회로들이 단숨에 연결되며 서울대 정문을 부숴 버릴 듯한 짜릿한 지적 충족감이 대뇌를 휘감았다.

"정겸 씨, 이거 정말······!"

함께 세계수 잎을 받아먹은 이용수 또한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졸음운전에 특효약이겠는데요!"

물론, 그 적용 범위는 조금 달랐지만.

우리 인간들에게는 중독성이 없는 세계수의 잎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 달고 살고 싶을 만큼 압도적인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껄껄! 이게 다가 아니지요!"

체통 따위는 내다 버린 채, 터질 듯이 입에 세계수 잎을 집어넣은 족장 핀드릭.

그의 말처럼, 세계수의 활용 방안은 실로 다양했다.

드루이드들이 모여 빳빳하게 마른 세계수잎을 잘게 빻았고, 그 가루를 다른 세계수 잎으로 돌돌 감싸 불을 붙여 피우거나, 아예 한데 모아 태우며 자욱한 연기를 만들기도 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백색 연기.

사뭇 남부군의 중독 가스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지만, 그 효과는 정반대였다.

드루이드들은 힘을 되찾았고, 우리 지구인들은 침략자들의 능력에 대항할 무기를 얻었으니까.

이를 모르지 않는지, 족장 핀드릭이 내게 말했다.

"정겸 님,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옛날 옛적에 세계수 한 그루와 젊은 드루이드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루이드가······."

"······결론만 말해 주세요."

"······너무너무 감사하다고요."

꾸벅, 내게 고개를 숙이는 드루이드들의 족장.

이를 발견한 드루이드 모두가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나, 그리고 새로운 '길'의 상징이 될 아공간 포탈을 향해서.

그리고······.

자욱한 연기와 함께, 모두가 한창 행복해지고 있을 때였다.

안개 사이로 찌르듯 날아든 소식.

"프리스트가 깨어났습니다!"

북부의 지도자, 글렌 포드가 눈을 떴다.

.

.

.

우물우물.

질겅질겅.

한 움큼 쥐여준 세계수 잎.

프리스트, 글렌이 커다란 입을 움직이며, 쫄깃한 이파리를 씹었다.

기억력에도 특효약인 세계수의 잎이었다.

남부의 상황, 그리고 드워프들의 공장이 있는 위치를 떠올리도록 하기 위한 도움이었지만······.

"공장의 위치를 확인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가 보고 온 것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공장이 움직이거든요."

글렌은 2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몸을 자랑하는 흑인이었다.

그런 그가 어깨를 부여잡으며 파르르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남부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생각해 보니······ 지금도 이럴 때가 아닙니다······!"

그가 몽롱한 잠에서 깨어난 듯,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요?"

"놈들이 올라오고 있어요. 얼른 시카고에 소식을 전해야······!"

움직이는 드워프들의 공장.

그것은 꽤 많은 것을 의미했다.

"······놈들에게는 보급로라는 개념이 없어요. 아예 전장 근처로 공장을 보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곧 있으면 중독 가스와 괴물들이 시카고에 들이닥칠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다급하게 움직이는 그.

하지만 나는 그에게 검은색 스마트폰을 내밀 뿐이었다.

"······?"

지금 장난하는 거냐 묻는 듯한 표정.

미안하지만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골절된 몸을 이끌고 100km를 횡단하는 것보다야 백번 빠른 방법이었으니까.

"문자 한 통 넣어주면 되죠."

테스트 단계의 문자 시스템이 부여된 스마트폰이었다.

케이트에게 스마트폰을 출하해 주고 온 참이었으니, 시카고에 남부군의 침공을 전할 수 있을 터였다.

이건 포탈과 포탈을 통해 연락이 닿는 구조였으니.

"그리고······."

지금 문제는 시카고가 아니었다.

"남부군이 노리는 건, 이곳 대수림이에요."

"······예?"

"놈들이 줄곧 대수림에 중독 가스를 풀어놓고 있었거든요."

세뇌 효과를 발휘하는 중독 가스.

놈들의 전략은 간단했다.

드루이드들을 세뇌하는 것.

이를 통해 '거점' 중 하나인 대수림을 손에 넣는 것.

물론······.

"······슬슬 전략을 바꿀 때가 되긴 했지만."

세레니티아는 대수림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마냥 가스를 살포하는 것이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걸 놈들도 알아차렸을 터.

이를 증명하듯······.

꽈아아아앙!

꽈아앙!

남부군의 포격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가스 캔은 없었다.

섬뜩한 포격음을 내뿜는 드워프들의 대포.

그 충격에 휘말린 대수림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쿠구구구······.

바닥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진동.

난데없는 공격에, 드루이드들 또한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오브스틴!"

"예, 족장님!"

"전사들을 모아라. 지금 당장······."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남부군의 공세였다.

대수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앞선 모양이었지만······.

내가 그들을 막아 세웠다.

"나가면 안 됩니다. 바깥은 벌판이에요."

"······!"

줄곧 세레니티아에 박혀 있던 드루이드들은 모를 것이다.

이곳 대수림 바깥에는 황량한 미국식 황야가 펼쳐져 있다는걸.

자연환경을 활용하는 드루이드들의 특성상, 효율이 떨어지는 전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할 차례였으니.

"대수림의 공간 왜곡. 혹시 직접 다룰 수도 있나요?"

이곳저곳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버리는 기상천외한 공간.

그것이 드루이드들의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부족원 모두가 힘을 쓴다면 가능이야 하겠습니다만······."

"포격을 다른 한곳으로 몰아넣어 주세요. 이곳 세레니티아는 안전할 테니."

적들의 공격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전략.

하지만, 족장 핀드릭은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물론이다.

그렇게 피하기만 한다면 단단한 가드를 올린 채, 마냥 남부군의 주먹을 맞고 있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아니었으니.

곧장 스마트폰을 꺼낸 나는 팍스에게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우르르르르르!

포탈을 타고 나온, 수백 명의 팍스맨이 세레니티아에 들이차기 시작했다.

맨몸이 아니었다.

RPG-7을 닮은 드워프들의 대전차 로켓.

그에 못지않은 멋들어진 무기가 팍스맨들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으니까.

[현궁(晛弓) AT-1K Raybolt +4, 가격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합참으로부터 불하받은 대전차 미사일.

무기부터 미사일까지, 모두 한계치까지 강화해 둔 물건이었다.

척!

그렇게 팍스맨들이 겨냥한 것은······.

↓↓↓

팍스가 거대 홀로그램으로 표시해 준 사격지점이었다.

바로 남부군의 포대가 위치한 곳.

이제 남은 것은······.

"화력전이지."

꽈아아앙!

꽈릉!

놈들의 포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드워프 공장의 생산력을 앞세운, 무차별한 포격.

하지만 나는 그런 놈들의 포격에 과부하를 걸어 버릴 작정이었다.

'······한번 해 보자고.'

드워프 공장의 생산력, 그리고 물류센터의 재고 간의 싸움.

'둘 중 누가 먼저 거덜이 날지.'

녹색 인디언과 다리 짧은 블루칼라 (3)

075화 녹색 인디언과 다리 짧은 블루칼라 (3)

피우우웅!

꽈아앙!

하늘을 향해 쏘아져 나간 푸른 빛의 에너지.

수백 정에 달하는 드워프들의 '특제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피우우웅!

피웅!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풍경이지만······.

정작 이번 '시카고 작전'을 맡은 남부군의 장군, 페릭스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리송하단 말이지."

신비롭기 짝이 없는 대수림이다.

며칠 내내 가스 캔을 쏟아부었음에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상황.

거기에다,

"침투조는 아직도 안 돌아왔어?"

"예, 들어가는 족족 소식이 끊어지고 있습니다. 무전도 닿질 않고요."

대수림으로 잠입해 들어간 요원들이 하나같이 실종되어 버렸다.

하물며 지금은······.

"야! 골고루 쏘라니까, 저게 뭐야?"

"죄, 죄송합니다. 분명 산개해서 쏘라고 지시했는데······."

꽈아아앙!

꽈릉!

애먼 곳에 화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왜 아무도 없는 데다가 헛발을 쏘냐고!"

아무것도 없었다.

포격에 의해 발갛게 드러난 맨땅.

울창한 대수림 한쪽에 아담한 원형 탈모가 자리를 잡았을 뿐이었다.

"아예 불바다를 만들라니까!? 내 말 못 알아들어?"

그것이 원래 남부군의 계획이었다.

거대한 대수림의 모든 부위를 빠짐없이 타격하는 것.

그리고 이를 피하려 빠져나온 외종족들을 처치하거나, 세뇌하는 것.

하지만 자신도 할 말이 있다는 듯, 부관이 대답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닙니다! 저길 보십쇼!"

"보기는 뭘 보라는······!"

"어?"

우뚝 멈춰 선 페릭스.

그가 발견한 것은······.

꽈아아아앙!

꽈르릉!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들어 가는 남부군의 포격이었다.

"······저게 왜 저기에 떨어져?"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공격.

결국 남부군은 대수림에 아무런 피해도 끼칠 수 없었다.

정작 문제는,

퍼어어엉!

그들 자신으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엘더 고블린들이 둘러메고 있던 '특제 대포'.

발갛게 달아오른 포신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으니까.

퍼엉!

퍼퍼엉!

과부하가 걸려 있던 다른 대포들이 공명하듯 함께 터져나갔고,

곁에 있던 수백 마리의 세뇌된 괴물들이 거대한 폭발에 휘말렸다.

찌이이이이-

싸아아······.

이명과 함께, 때늦은 적막을 전해 주는 섬찟한 바람 소리.

그 아래로,

후드득.

후드드득.

갈가리 찢긴 괴물들의 사체가 모래에 섞여 떨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대포가 버티질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일개 대대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대체 누가 포격을 맞은 건지 구분이 안 갈 지경.

드워프들의 대포가 이런 후폭풍을 몰고 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장군, 페릭스는 서둘러 부관에게 지시했다.

"당장 멈추라고 해! 쉬었다가 쏘라고!"

과부하가 문제라면, 잠시 쉬면 될 일이다.

어차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는 대수림이니까.

하지만······.

"머······ 멈추질 않습니다! 괴물들이······!"

"뭐?"

고블린, 오크, 잡종 뱀파이어, 트롤과 외눈박이까지.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놈들이었다.

중독 가스에 의해 세뇌된, 살아도, 죽어도 그만인 괴물들.

하지만 그 괴물들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피우우웅!

피우웅!

갑자기 대수림으로부터 날아든 포격에 있었다.

꽈아아아앙!

꽈르르릉!

'특제 대포' 못지않은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공격.

탄두에서 산개되어 빠져나온 불똥이 괴물 부대를 비처럼 감싸 버렸다.

-끼에에에엑!

-카아아악!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괴물들.

그리고······.

그런 괴물들이 선택한 전략은 실로 단순한 것이었다.

-까아아악!

악다구니를 내뱉으며,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기는 고블린들.

살의를 일으키는 약 기운에 취해, 이성을 잃은 괴물들이 미친 듯이 대포를 발사했다.

"멈춰! 멈추라고! 멈추라고오오오!"

갈라진 목소리로 목청을 틔우고 있는 장군, 페릭스.

부관을 비롯한 하급 지휘관들이 그의 지시를 일사불란하게 전달했음에도······.

-히히히힉!

-히히히히히히힉!

괴물들의 뜨거운 광란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아예 자리에 말뚝을 박아버린 채, 무지성 방아쇠를 당기는 괴물들.

날아든 포격과 과부하로 인한 폭발이 타차원의 괴물들을 하나둘 전장에서 지워나갔다.

"후퇴! 일단 피하고 본다!"

"후퇴! 후퇴!"

남은 건 지휘부였다.

이동하는 드워프들의 공장을 뒤로 물러 세운 채, 적들의 포격을 피하는 그들이었지만······.

꽈아아아!

퍼어엉!

자로 잰 듯한 정밀한 포격이 그들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마치 누군가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화르륵.

화마에 휩싸인 남부군의 지휘부.

수시로 위치를 바꾸고, 견제 사격을 날려보아도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었다.

"분명 저기인데! 저기로 쏘기만 하면 되는데······!"

눈에 훤히 보인다.

대수림 중심에서 놈들의 포탄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하지만 아무리 공격해도, 남부의 공격은 닿지 않았다.

그렇게,

"아아아아아악!"

"하아아악!"

'시카고 작전'의 지휘부가 불길에 삼켜졌다.

새로운 지배자가 되겠다는 부푼 꿈과 함께,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남부의 침략자들.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대수림으로부터 날아든 공격.

그것이 끝끝내 드워프들의 공장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