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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먹고 뱉기 논란'은 한참을 이어졌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러워서 안 먹겠다는데 방법이 없었다.

억지로 먹일 수도 없고.

"······ 이 '죄인의 불'은 검은 염소, 그대가 처리하도록."

결국 황금가면은 처치곤란해진 죄인의 불을 내게 넘겼다.

다른 후견자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먹이지도 못할 것을 갖고 있어봤자 귀찮기만 하다.

이어 황금가면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허나 다음 만찬회까지 제대로된 '만찬'을 준비하지 못하면 그대는 후견자의 자리를 박탈당한다. 정통을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것 역시 후견자의 의무이니."

박탈.

적어도 사신교에 발을 붙일 수는 없게 된다는 말이다.

불을 먹고, 헬을 성장시킨 뒤 직접 사냥을 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황금가면이 다른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이대로 만찬을 진행하긴 어려울 것 같군. 그럼 다음으로 '소독'을 진행할 도시에 대해 투표해보도록 하지."

짝!

황금가면이 한차례 박수를 쳤다.

그러자 천장이 열리며, '구슬'이 내려왔다.

'염원구슬? 생긴건 비슷한데 훨씬 크군.'

이무기가 용이 되기 전에 입에 물고 있는 염원구슬과 닮았다.

하지만 염원구슬보다 그 크기가 족히 백배는 컸다.

"보이거라."

동시에.

노란 구슬의 위로 글자와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접속자 수 : 220,779」

······ 뭐냐, 저건.

동시접속자 수?

설마 현재 접속해있는 '플레이어'를 뜻하는 건가?

사신교가 플레이어의 정확한 숫자를 알고 있다고?

"22만! 아직도 우리가 단죄해야할 죄인이 이렇게나 많다. 모조리 엄벌하기 전까지, 저 숫자가 0이 될 때까지 우리의 '소독'은 멈춰선 안 되는 것이다."

황금가면의 말에 다른 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여도 줄여도 줄질 않는군."

"벌레같은 놈들······."

순수한 악의가 느껴졌다.

왜 이렇게 제국은, 사신교는 플레이어를 혐오하는 건지.

"어느 곳이 좋겠나? 특별히 검은 염소, 그대의 의견부터 들어보겠다."

황금 가면이 입가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희번떡거리는 눈.

그것은 광기에 사로잡힌 자의 눈이었다.

그 상태로 지금 내게 묻고 있는 것이다.

어느 도시에 플레이어가 많겠느냐고. 어딜 부숴야 하겠냐고!

'제정신이 아니로군.'

미쳐있었다.

나를 제외한, 이곳에 모인 모두가.

그때였다.

"어서 골라보거라. 정통의 후견자라면 그대 역시도 '신병'을 앓았던 자일 터. 그렇다면 초월한 순간 보았을 것이다. 죄인놈들이 그대를, 우리의 세계를 농락하던 모습을!"

*

······ 일련의 소란이 지나간 뒤.

사신의 만찬회가 마무리되고, 황금 가면은 나와의 약속을 이행했다.

별 의심 없이 내가 고른 '세 개의 보물'을 건네준 것이다.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없었으며, 그중에는.

'바알 갑옷!'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선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바알 세트 중 유일하게 부재했던, '바알 갑옷'을 드디어!

드디어 손에 넣은 것이다.

'더이상은 돌아가지 않겠다.'

먼 길을 돌아왔다.

처음 수련자의 산에서 검선일기를 얻고, 제국으로 흘러들어와 황실, 사신교에까지 닿고서야 마침내 취할 수 있었다.

허나, 바알 세트를 완성한만큼 더이상 돌아갈 길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건 직진뿐이다.

나는 빠르게 불길하기 짝이 없는 바알 갑옷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즉시 착용하자.

"'바알 세트'가 완성되었습니다!"

"'검선일기' 최후의 장이 생성되었습니다."

"히든 피스, 검선일기 최후의 장에 의해 '바알 세트'의 위상이 높아집니다."

"'불길한 바알'의 모습이 '황금빛 바알의 상'으로 진화합니다."

"모든 바알의 장비가 '궁극 신화'에서 '초월 신화' 등급으로 격상합니다."

"히든 옵션 '초월한 바알'이 등장했습니다!"

박살

"여,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 겁니까?"

발테.

수련자의 산에서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한 그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허드슨에게 물었다.

경매가 끝난 직후 란돌프는 돌연히 황금 가면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란돌프가 돌아올 때까지 둘은 계속해서 다르칸 영지에 남아있기로 한 것이다.

"자신을 가져라. 우리가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우아한 자태로 차를 마시며 허드슨이 말했다.

제국 귀족들 저리가라 할 품위.

"그런 모습으로 말씀하셔봤자······."

발테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문제는 허드슨의 몸과 얼굴이, 성별조차도 아예 다르다는 것이었다.

듬직하던 허드슨은 온데간데없고 웬 호리호리한 여자가 눈앞에서 허드슨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이, 이러다가 저희도 쥐도 새도 모르게 암습당하는 거 아닙니까?"

발테는 여전히 겁이 많았다.

란돌프가 직접 '버서커 세트'를 하사 했는데도 불구하고.

잠을 잘 때도 절대로 벗지 않고서 항시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란돌프님이나 허드슨님처럼 되기는 글렀어.'

발테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둘 다 제국에서 보여준 위풍당당한 모습은, 남자가 봐도 반할 수준이었다.

특히 란돌프의 그 위엄은 두 눈으로 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닮고 싶지만, 닮을 수 없는 남자.

그게 란돌프였다.

"쯧쯧."

그런 발테의 행동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찬 허드슨이, 창밖을 바라봤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워! 워!"

이곳은 영주성.

바깥에선 수많은 기사와 병사가 분주하게 무언가를 옮기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을.

"오늘은 보급품을 옮기고 있군."

"예.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라······."

사신교의 소독이 끝나자마자, 다르칸 영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자를 조달하고 있다.

정말 전쟁이라도 준비하려고 저러는 걸까?

'마치 충성심을 보이려는 듯이, 절박해 보인다.'

도시에서 소독이 진행됐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고자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만 같았다.

한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수호기사 파멜, 비룡기사와 고렘 마스터 다수, 거대하기 짝이 없는 공성 병기 수십개······ 내가 본 것만 이정도다.'

도시 몇 개는 가볍게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전력들.

웬만한 대도시도 며칠이면 박살낼 규모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국은 외부와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들어 움직인 일이 있다면.

'심연 미궁, 그리고 사흉 토벌을 위해 데르시안 가문이 움직였지.'

허드슨은 턱을 쓸었다.

플레이어 톡을 통해 플레이어들의 동향을 그는 항상 확인하고 있었다.

덕분에 데르시안 가문이 사흉 토벌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빠르게 접했다.

'내전이 아니라면, 이건 사흉 토벌을 위한 준비라고 봐야겠군.'

갑자기 다르칸 영주가 사흉 토벌을?

데르시안 가문이 실패한 일을, 자신들이 성공시키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게다가 모든 게 너무 급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허드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자,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그대들도 함께가지."

··· 다르칸 영주.

그가 수호기사 파멜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허드슨은 내심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다르칸 영주. 우리는 이곳에서 '그분'을 기다릴 거라고 말했을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분은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야."

"······ 그럼?"

"우리를 따라가면 만나게 될거다. 자, 함께가지. 가서, 그대들이 본 다르칸의 위용을 '그분'께 전해주면 진심으로 고맙겠군!"

다르칸 영주를 처음봤을 때, 그는 점잖은 인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은 광기가 가득했다.

소독을 진행한 이후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당연히 사흉을 사냥하러지!"

"사흉을? 왜?"

"'사흉'은 구제국을 몰락시킨 원흉들 아닌가! 다시금 구제국의 영광을 우리의 손으로 완성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제국의 신민들이 갖춰야할 대의이니!"

진짜로 미쳐버린 건가?

'저건 단순한 광기가 아니다.'

갑자기 미친 게 아니다.

저건 공포 때문에 미쳐버린 것이다.

사신교가 제국의 수많은 귀족을 거리낌없이 쳐내는 것을 보았기에.

제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재차 확인시키려는 몸부림이었다.

'제국은 사신교를 통한 공포로 귀족들을 통제하고 있다.'

허드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할.

설마 다르칸 영주가 이렇게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

허나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저놈은 자신들을 억지로라도 데려갈 생각이었으니까.

······ 일단은 얌전히 따라줄 수밖에.

*

지이잉!

지이이잉!

워프를 통해, 끊임없이 병사들이 흘러나온다.

모두 제국식의 장비를 착용한 병사들.

"비, 비룡기사!"

"저건 고렘 마스터 아니야?"

"제국이 사흉 사냥을 작심한 건가?"

그들을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곳은 용병도시 카르텔.

다섯 중립도시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곳.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그라시아는, 한 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순백의 기사?"

저건 분명히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아닌가.

빌헬름의 최측근이었던 그녀. 하지만 대원정 끝에서 죽었다고 알려졌다.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그라시아는 내심 의아했다.

잘못보았을 리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가 맞았다.

비록 빌헬름의 최측근이라 하기엔 실력이 부족했지만, 빌헬름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여자를, 못 알아볼 리 없지 않은가.

워낙에 많은 통수를 당한 끝에 빌헬름은 자신의 주변에 오직 믿을 수 있는 자들만을 두었다.

그 숫자가 워낙 적어서 한때는 '원탁의 7기사들'라고도 불렸으니.

허나, 그들 모두 대원정에서 죽었다고 알려졌다.

'순백의 기사가 어째서 제국과 함께 하고 있는 거냐?'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가 왜 제국과 함께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절대로 함께 있을 수 없는 조합이 함께 있다.

대체 왜?

게다가 저만한 전력.

제국에서 초월자 몇 명을 데려왔던 데르시안 가문보다 훨씬 본격적이다.

정말로 사흉을 죽이려고 모여든 것이다.

"뭐, 뭐야, 왜 우리를 미는 거야?"

"저 새끼들 설마 우리를 방패막이로 쓰려고?"

"중립도시에서 인간끼린 전투금지가 룰 아니었어?"

문제는 저 제국놈들은 중립도시의 병사들과 플레이어들을 사흉이 넘어올 워프 앞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흉이 등장할 때 방패막이로 쓰려는 것처럼.

본래 중립도시에선 인간들끼리의 전투를 금지한다.

모든 도시들이 합의한 결과다.

이는 제국이라도 지켜야만 했다.

다만, '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라시아님. 한 마디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저 새끼들 심보가 너무 뻔한데요?"

사람들이 그라시아를 중심으로 항변하자, 그라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대로 진행하지."

제국보다 먼저 자신이 죽인다.

그러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까.

왜 순백의 기사가 저쪽에 있는 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 사흉은 내 사냥감이다.'

쩌적!

쩌어어어억!

그 순간, 붉게 팽창한 워프 사이로 거대한 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흉신, 바알이 카르텔을 침략해옵니다!"

"히든 퀘스트가 도달합니다."

"'흉신 바알'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는 것을 막으십시오."

"기여도에 따라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

-와, 대박이네. 카르텔에 거의 만 명 가까이 모였다

-심지어 제국 다르칸 영지가 전력투구로 참가함

-비룡기사랑 고렘 마스터? 둘다 초월자만 가능한 거 아님?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거 질 수가 없겠는데?

플레이어 톡은 다시 한 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국, 다르칸 영지의 참전!

제국 전체는 비밀에 싸여있지만 그중 다르칸은 그나마 이름이 알려져있는 곳이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명문검가로.

그곳에서 배출된 기사는 대륙의 모든 기사들보다 수준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했으니.

-수호기사 파멜? 저 사람 혼자서 '고룡'도 잡는 괴물임

-뭐? 혼자 고룡을 잡아?

-구라치고있네 그럼 최소 3성이라는건데

-예전에 우연히 '고룡' 토벌하는 거 봤음 진짜임 ㅇㅇ

-그런데 확실히 데르시안인가 뭔가랑은 비교가 안 되긴 하다

-게다가 그라시아도 있잖아

-그라시아가 아무리 '심연 미궁'에서 런쳤다고 해도 그래도 다른 영웅들보단 격이 다른 인물이지

-아, 드디어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진짜로 사흉 지구로 오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만하면 솔직히 마왕도 사냥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그땐 제국이 없었으니까

-쌉가능

-지린다 진짜

모두가 안심했다.

저만한 전력이라면 지는 게 이상할 정도다.

아무리 사흉이 강력하다고 해도 고작해야 한 마리 아닌가.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한줄의 글귀가 떠올랐다.

"'흉신 바알'이 중립도시 카르텔을 함락시켰습니다!"

"'카르텔'이 심연으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이게 가능한 일이야?

-그 많던 병력이 또 전멸했다고?

-그라시아는? 파멜인가 뭔가 고룡도 잡던 놈이라며?

-미쳐버리겠네.....

*

모든 워프가 터졌다.

그러자, 도시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봐. 정신차려라."

쫘악!

누군가가 있는 힘껏 뺨을 때린다.

그라시아는 눈을 떴다.

'······ 아름답군.'

그라시아의 앞에, 천사가 있었다.

순백의 천사, 세렝게티.

그녀를 보는 그라시아는 생전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뺨을 때린 여자도 생전 처음이었거니와.

"그라시아. 이대로 심연에 먹힐 셈이냐? 네놈,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하더니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아름답구나."

"······?"

"너 같은 천사가 있다면, 천국도 나쁘지 않겠군."

"네놈은 지은 죄가 많아서 죽으면 지옥 확정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

"그럼 지옥에 왜 천사가 있지?"

"······!!!"

그라시아가 손을 뻗자, 허드슨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심연에 가라앉으며 정신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

'여긴 지옥이 맞을지도.'

허드슨은 주변을 둘러보곤, 침음을 삼켰다.

"죽어!"

"죽어버려!"

"키히히히히!"

바알은 오직 도시를 심연에 가라앉히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카르텔이 심연에 가라앉자 정신이 나간 자들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료였던 자가 등을 찌르고, 멀쩡해보이던 자가 갑자기 검을 들이민다.

아비규환의 지옥.

아무래도 이 심연의 특성인 것 같았다.

'이전 도시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모두 이 심연에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제국놈들은 우리들 따윈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아.'

다르칸 영주는 오직 바알 퇴치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그라시아를 억지로 찾아온 건데, 이놈도 정신을 놔버린 것 같았다.

외부의 조력을 바랄 수 없는 상황.

빠져나갈 방법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저 고치. 저게 바알이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고 있는 거다.'

허드슨은 고개를 돌려 심연의 중심부를 바라봤다.

그곳에, 정말 거대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의 고치가 놓여있었다.

카르텔을 함락시킨 뒤 바알이 스스로 저 고치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 고치만 부수면 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캬아아아아!

검은 날개.

마치 마족과도 닮은 괴물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자들, 특히 초월한 자들은 모두 마족이 된다.

더욱 강력해진 채로 달려들기에 도저히 답이 없었다.

심지어 면역이라도 되는 듯이 웬만한 공격은 통하지도 않는다.

그 위용 넘치던 비룡기사가 겨우 마족 하나를 상대할 정도였으니 말은 다했다.

'젠장할!'

당연히 초월자조차 아닌 허드슨으로선, 마족이 공격해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욕지기가 절로 나오지만 방법이 없었다.

쩌어어어억!

그때였다.

허드슨의 앞으로, 심연이 찢기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

그를 본 허드슨이 경악하며 외쳤다.

동시에.

콰직!

그는 '골통파괴자'를 휘두르며 단번에 마족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렸다.

빌헬름과 제국의 관계

황금 가면이 황궁의 은밀한 곳에 새겨진 벽화를 바라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벽화. 모두 제국의 긴 역사다.

그중 하나.

구제국을 공격하는 사흉의 흉물스러운 그림.

'사흉 바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

염소의 머리, 짐승의 몸통과 날개를 지닌 '바알'이다.

그리고 바알은 여러 이명을 가진 괴수였다.

가장 추악한 존재, 끌어당기는 자, 피를 마시는 짐승 등등.

다른 사흉보다도 이명이 많았던 이유.

바알 자체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저주와 생명, 의식을 다루며, 끊임없이 진화하니까.

"사흉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고 있느냐?"

"아, 아······."

황금 가면이 묻자 옆에서 따르던 토끼 탈을 쓴 시녀가 몸을 경직시켰다.

두려움 가득한 기색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깊은 잠에 빠진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을 다스리는 열 한 명의 존재들.

그중 가장 두려운 자가 바로 황금 가면을 쓴 이자였으므로.

"죄, 죄송합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니 죄송할 것 없다. 사흉은 '멸망'이 만든 애완동물이다. 그리고 구제국은, 그런 괴물들을 자신의 무기로 사용하려고 했었다."

"저, 저는 사흉이 구제국을 공격했다고 배웠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것은, 숨겨진 비사(祕史)다.

창피하여 지워버린 이야기 말이다.

네 마리의 강력하기 짝이 없는 괴물들.

구제국은 그 네 마리의 괴물을 자신들이 다룰 수 있다고 자신했다.

"구제국에서 가장 강성하던 네 개의 가문. 그들은 각자 한 마리씩 사흉을 제어하고,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구제국이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다."

"분명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고······."

"너는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궁금한 건 여전히 참지 못하는 성격이구나."

"죄, 죄송합니다!"

황금 가면이 피식 웃었다.

"아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데리고 다니는 게지. 어쨌거나, 너무나도 강력한 무기가 생기자 그들은 욕심이 생긴 게다. 네 가문 모두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내분이 일어났나 보군요?"

"그래. 사흉을 사용한 전쟁이 일어났다. 어쩌면 그게 처음부터 '멸망'의 의도였는지도 모르지.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

황금 가면은 작게 혀를 찼다.

구제국은 대륙 전체를 압도할 만큼 강성했으나 몰락했다.

사흉을 이용한 내분. 그 외의 여러 이유들 때문에.

"그, 그래도 결국 구제국의 후예들이 사흉을 봉인했다고 배웠습니다."

"그것도 제국의 입맛에 맞게 변형한 이야기다."

황금 가면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흉이 봉인되어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것을 봉인한 자들은 구제국의 후예가 아니다.

그저 제국을 부활시키고자 변형시킨 이야기들 중 하나일뿐.

"그럼 누가······?"

"천계."

"여신이 사는 곳이요?"

"아니, 천계는 '천상인'이 사는 곳이다. 선계(仙界)라고도 부르지. 그곳의 선인들을 '천상인'이라고 부른다더군."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시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덧 대화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사흉을 봉인할 정도로 엄청난 존재들인가보네요? 그럼 멸망을 같이 막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들은 여신의 편이 아니다. 멸망의 편도 아니고. 멸망과 여신, 그 사이의 중립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숫자도 많지 않을 거다."

게다가 그들이 그 정도로 엄청났다면 왜 사흉을 봉인만 했을까.

확실한 건 현 제국의 황제 역시 '천계'에서 왔다는 것이다.

초대 황제가 천계에서 가져온 11개의 알.

그것들을 '정통'이라 불렀으니.

오직 '황제'만이 천계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황제는 아득히 오랜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최근 사흉 중에 바알이 깨어났다고 하지 않았나요?"

"음. 어차피 사흉의 봉인이 깨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흉은 사방, 동서남북의 끝에 봉인되어 있다고 알려졌지. 그리고 최근 흑왕이 남쪽에서 무언가를 깨운 것 같더군."

"그게 사흉이라는 말씀인가요?"

"글세. 뭐가됐든, '그'가 죽은 이후 '새로운 게임'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사흉의 부활, 흑왕의 준동, 가라앉았던 '심연 미궁'의 출현 등등.

판이 달라졌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개로.

새로운 게임.

세상 곳곳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그'의 죽음 이후 시작됐다.

"그······ 라니요?"

"기사왕."

"아, 들어봤어요. 그런데 그의 죽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뜻인가요?"

인정하기 싫지만, 모든 것이 그가 죽은 이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기사이자 대원정을 일으킨 최강자.

그가 이룩한 전설을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빌헬름을 진즉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여겨만 볼뿐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실의 치부가······.'

빌헬름.

아니, '그 녀석'은 본래 황실의 사람이었으므로.

그것도 황실이 감추었던 치부와 같은 존재.

어느날 갑자기 '신병'에 걸리며 사라지더니, 빌헬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러곤 수많은 전설을 이룩하며 대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물론, 대원정은 실패했다.

그곳에서 빌헬름은 죽었고, 황실의 치부는 영원토록 사라졌다,

아니, 아니다.

황금가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죄인. 빌헬름의 몸을 움직인 그놈이 아직 살아있다.'

란돌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극한 자.

모두가 그를 '빌헬름'의 전인으로 보고 있었다.

놈이 존재하는 한, '치부'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바알이 죄인들의 고향인 지구를 침략한다. 우리로선 환영할 일.'

죄인들이 모여있는 곳, 지구.

카르텔을 무너트리면 사흉 바알이 지구를 침략하게 된다는 사실 역시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놔두었다.

다르칸 영주가 멋대로 토벌대를 꾸리긴 했지만, 그래봤자 바알만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될 테니.

'전부 불태워라.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가 겪었던 현실을 경험케 해주거라.'

*

바알 세트, 통칭 '바셋'을 완성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만 있었던, 하지만 완성한 사람은 전무하였던 신화급 세트 중 하나.

본래는 바알 갑옷과 투구, 탈리스만 셋으로 이루어졌으나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바로 검선일기.

그리고 검선일기 최후의 장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나는 바알의 '제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바알을 연구하여 드디어 이 괴수를 제어할 방법을 찾았다.

-바알의 피와 가죽, 뼈와 심장을 사용해 만든 바알의 무구들. 그리고 여기 검선일기에 담긴 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완성자여. '생명'을 바쳐라. 그리하면 바알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

제어 방법.

그것은, 나의 생명을 바치는 것.

하지만 굳이 '제어'하지 않아도 된다.

바알과 맞설 방법이 있었으니.

'초월한 바알.'

히든 옵션, 초월한 바알.

모든 장비가 '초월 신화'등급으로 격상하며 나타난 숨겨진 옵션 말이다.

[바알 갑옷(초월신화)]

-먼 옛날,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사흉(四凶)' 중 하나인 '바알'의 정수가 담긴 갑옷.

-'바알 세트'를 완성하여 등급이 격상했습니다.

-히든옵션 : 특성값이 '1,000'을 넘어, 착용자가 '초월성'을 지닙니다.

-초월성(초월한 바알) [1] : '사흉(四凶)'을 상대할 때 '바알장비'의 성능이 100% 상향됩니다.

-초월성(초월한 바알) [2] : 바알을 발견합니다. 바알이 있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리내성 : 30%

-자연재생력 : 100%

-마력 : 10

-귀속

-파괴불가

-적용 제한(1) : '신화를 완성한 자' 이상의 칭호 보유자

-적용 제한(2) : 모든 능력치 90 이상

-세트 무구(3/3)

내가 가장 약했던 부분이 물리내성이다.

마력에 의한 공격은 '거인의 항마력'으로, 정신에 의한 공격은 '영원군주의 심장'으로 막을 수 있지만, 유일하게 물리적인 공격을 막는 히든 특성이 없었다.

'물리내성 30%에 재생능력까지. 미쳤군.'

단일 갑옷이 물리내성 30%를 주는 경우는 없다.

유일급 갑옷도 25%가 최대였다.

대신 다른 옵션이 유일급에 비해 살짝 부족하지만 재생능력 100%에 마력10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어지간한 신화급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

특히 재생능력은 1,000%가 넘어가면 절단된 신체가 자라나기도 하니까.

'거기다 투구와 탈리스만의 옵션도 강화됐다.'

이 정도면, 해볼만하다.

나는 즉시 초월성을 이용해 워프를 열고, 바알에게로 향했다.

*

콰직!

본능적으로 마족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그 순간.

"'초월성'이 발휘됩니다."

"'소생한 자들의 심연', 이곳은 사흉 바알의 영역입니다. 바알 장비의 성능이 100% 향상됩니다."

"저주관통 30%, 저주반사 60%, 저주 유지시간 60%가 증가했습니다."

"자연재생력이 200% 증가합니다."

"성력이 40 증가합니다."

"성력수치가 120을 초과하여 모든 공격에 '전체관통(12%)'이 부여됩니다."

"바알이 만든 '저주의 종'을 사냥했습니다."

"기여도가 15 올랐습니다."

"다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빠르게 떠오르는 문장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하여 상향된 옵션에 2배.

역시 바셋이다. 미쳐버린 성능이었다.

무엇보다.

'전체관통이라니······!'

능력치는 120을 넘어서면 관련된 효과를 추가시킨다.

예컨대 마력은 '마력관통'을, 속성력은 '속성력 관통'을 더 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별계승자가 되며 바뀐 '성력'은 아예 전체관통 효과를 추가시켰다.

물리공격도, 저주에 의한 공격도 모두 12% 추가관통을 준다는 의미.

··· 어쩐지 손맛이 착착 감기더라니.

"후계자님!"

지척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음성.

세렝게티··· 아니, 저건 허드슨인가.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발테는?"

"그게··· 영주성에 함께 있었는데 다르칸 영주가 강제로 끌고왔습니다. 그리고 발테는 이상징후를 느끼곤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이상징후?"

"예. 심연에 가라앉자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미쳐버렸습니다. 악귀에 들린 것처럼 말입니다. 후계자께선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느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괜찮다. 너는 괜찮은 건가?"

"예. 왠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합니다."

유일하게 허드슨만 바알의 공간에서 저주를 버티고 있다.

혹시 성녀에 의해 축복을 받아서일까?

그 외엔 딱히 허드슨만 멀쩡한 이유를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이어 나는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그라시아'는 아니겠지?"

"······ 맞습니다."

시선의 끝.

"천사여, 나를 두고 어딜 가느냐!"

"······ 무시하십시오. 헛소리입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그라시아가 그곳에 있었다.

백발의 머리.

늘어난 주름.

실시간으로 그는 노쇠하여 약화되는 중이었다.

그만한 강자가 바알의 저주를 견디지 못한 건 역시 '젊음'을 빼앗겨서이리라.

생명력이 죽어가는 그는 생명과 의식을 다루는 바알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턱을 쓸다가, '죄인의 불'을 꺼냈다.

"아······ 아아······ 그건, 그건 나의 젊음이 아니느냐!"

죄인의 불, 그 가운데 있는 그라시아의 모습.

그것을 본 즉시 그라시아가 손을 뻗어 발악했다.

"되찾고 싶나?"

"되찾고 싶다. 황금 염소여! 그건 내 것이다!"

"그럼 일어나라. 일어나서 검을 들고, 싸워라."

"바알과 싸우란 말이냐? 저 괴물은 이길 수 없다. 저 괴물은 '우로보로스의 독'을 흡수해 더 강해졌단 말이다!"

덜덜 떠는 모습.

그간의 그라시아 답지 않은 모습이다.

겁에 질린 걸 보면 여전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라시아. 네가 할 일은 네가 지켜야할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다. '영웅'의 칭호를 달았다면 네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터."

"나, 나는······ 나 따윈 영웅이 아니다. 나는······ 죄 많은 인간이다."

"천하의 겁쟁이가 다 됐군."

"내, 내가 나선들 의미가 있느냐?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지속해야할 이유가 있느냐?"

허.

정신이 나갔다지만, 솔직히 실망이었다.

그간 제잘난 맛에 으스대며 오직 자신만이 1등이니 뭐니 하던 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한 모습.

이래서야 상대할 맛도 안 난다.

하지만, 이곳 심연에 도착한 즉시 나는 눈치챘다.

다섯 도시가 함락되며 사람들 모두가 죽은 게 아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아직 이곳에 살아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하나 그들을 구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바알이 진화하기 전에 승부를 봐야했으니까.

이 일은 그라시아가 제격이다.

그러니, 너는 사람들을 구원해라. 진짜 영웅처럼.

"걱정하지 마라. 바알은 내가 죽일 것이니."

······ 나는 바알을 멸할 테니.

제주도

황금 염소 탈을 쓴 남자와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 둘이 떠나간 뒤, 그라시아는 홀로 남았다.

-버러지처럼 죽던가,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귓가에 맴도는 음성.

하지만 그보다도 뇌리에 계속해서 재생되는 것은, 그의 눈이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자일진대.

눈을 마주한 순간 그라시아는 전율했다.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굳이 정의하자면 그라시아는 그 남자의 눈빛에 '압도'당한 것이다.

라일리를 눈앞에 뒀을 때도 흔들린 적이 없었건만.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생소하나, 익숙한 느낌이다.

어딘가에서 스치듯이 본 것만 같다.

애초에 그런 압도적인 눈빛을 가진 자는 많지 않으니, 봤다면 잊을 리가 없건만······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시 한번 마주한다면 확실히 알 것 같은데.

'버러지라.'

죽일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시선.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업신여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최강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패배자의 말로 아닌가.

업신여겨져도 당연하다.

'······ 연이은 실패가 나를 망가트렸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바알과의 전투에서의 패배?

사신들에게 젊음을 빼앗긴 것?

심연 미궁에서 도망친 일?

수세에 몰리고, 상황에 몰리며, 그라시아 결국 망가진 것이다.

정신을 놔버리고 치욕을 보였다.

'나는 버러지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벌레가 아니다.

그라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뒹구는 '푸른 서광'을 쥔 채.

-캬아아아아악!

촤륵!

달려드는 마족의 머리를 단칼에 베었다.

이어, 그라시아가 심연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라시아. 검성이라 불리는 최강의 전사이며 영웅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자.

*

검은 고치.

바알로 향하는 길은 시산혈해(屍山血海)였다.

다르칸 영지의 수많은 병사와 '저주의 종'이 뒤섞인 채 죽어있었다.

시체의 길은 고치까지 이어졌으며,

"······ 도움이 안 되는군."

고치의 내부로 들어서자, 그 안은 더 가관이었다.

일단 다르칸 영주가 목이 돌아간 채 사망해있다.

기세좋게 시작한 것치곤 너무 허망한 죽음이다.

죽은 모습 역시도, 그다지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경악과 놀람이 가득한 표정.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듯한 눈빛.

주변의 시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군.'

다만, 의아한 점이 있었다.

고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도망친 게 아니라,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도망치다가 죽은 자들이 상당 수 있었다.

···이상하다.

보통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도망치지 않나?

바깥에서 뭘 보고 더 위험한 고치 안쪽으로 도망친 건지.

하지만, 궁금증은 길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척. 척.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존재.

그 존재의 머리 위로 떠 오른 글자.

[바알의 종 – '수호기사 파멜']

[Lv.13]

······ 바로 다르칸 영지의 수호기사, 파멜이었다.

가장 강력했던 그가, 저주의 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파멜이 갑자기 공격해오면 그야 주변 병사들은 안쪽으로 도망칠 수밖에.

아마도 고치 내부에서 바알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은 탓에 변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만한 강자가 멀쩡하다가 갑자기 그럴 수가 있을까?

'저 녀석은 원래부터 인간이 아니었지.'

파멜은 처음부터 별을 먹어 초월한 게 아니라 인간임을 포기하고 레벨을 올려서 강해진 자였다.

말인즉슨.

놈은 원래부터 '괴물'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바알의 고치에서 더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저 모습을 보아하니, 어떻게 인간을 포기한 건지 알 것 같았다.

"··· 데몬."

흰자위 없이, 먹물같이 새까만 눈.

까맣게 물든 전신, 몸통보다 큰 두 장의 검은 날개, 양쪽에 나 있는 거대한 뿔과 도마뱀의 꼬리, 짐승 같은 하체와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괴물.

저 모습은 '데몬' 그 자체다.

여신을 배척하는 악마추종자들.

그 추종자들이 추앙하는 존재!

막심은 그저 데몬 하트를 이용해 강해졌을 뿐이지만, 수호기사 파멜은 처음부터 '데몬'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데몬이 되었거나.

'제국은 알고도 묵인한 건가? 아니면?'

왜 악마추종자들의 전신과도 같은 데몬이 제국의 영지에 있던 걸까.

그것도 어떻게 수호기사로 있을 수 있는 건지.

제국이 제아무리 플레이어를 싫어한다지만, 그렇다고 여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악마추종자들과 손을 잡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못 알아본 것처럼, 정체를 숨기고 숨어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은 눈앞의 괴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가 더욱 중요했다.

파멜은 바알의 종이 되어 그 저주로 더욱 강화된 상태.

정면에서 맞붙는다면 자살행위다.

막심과 같은 잡종이 아니니까.

당연히 비교도 불가능한 이적을 몸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할 만했다.

"······?"

내 행동을 보곤 데몬 파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게.

콸콸콸콸!

······ 성배를 들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수를 온몸에 적시고 있었으니.

*

콰릉!

콰르르릉!

쿠아아아아아앙!

쉴 새 없이 벼락이 몰아친다.

거센 태풍은 모든 걸 집어삼켰으며, 해일이 덮쳐 주변 모든 게 수장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 '붉은 워프'가 생긴 이후로 이상 현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워프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영웅 연합' 측은 이 현상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중앙재난 안전대책본부'를 1단계에서 3단계로 격상했습니다."

"현재 서귀포시의 주민들 모두가 대피한 상황이며······."

공중파 TV의 모든 뉴스에선 이와 관련된 내용을 긴급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허나 이게 평범한 기상 현상의 문제가 아님을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꼈다.

실시간으로 커지고 있는 붉은 워프.

족히 10층 건물 수준으로 커진 그 워프를, 더는 숨길 수가 없었으니까.

"··· 대체 저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려는 걸까요?"

"종말! 종말입니다! 드디어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공중파 방송뿐만이 아니다.

지상파와 수많은 방송 매체들 역시도 이 대열에 참가했다.

전세계에 나타난 워프들과 비교해도, 비교가 안 되는 압도적인 크기.

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팽창 중이었다.

대체 저 안에 뭐가 들어있는 건지 모두가 궁금해하자, 계속되는 압박에 결국 '연합장 박태우'거 직접 나서서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이세계'에서 '바알'이라 불리는 존재가 침공을 해오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서귀포시에 생성된 워프는 바알이 직접 문을 열고 나올 곳으로 추정되며······."

"박태우씨! 바알이 뭡니까?"

"고대 시리아의 태양신인 그 바알을 말하는 겁니까?"

"솔로몬의 72악마 중 하나인 그 바알이요?"

"혹시 게임에서 나오는 바알 말하는 건가요?"

기자회견실.

박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젠장. 박태우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있는 그대로 설명을 해야 할지, 조금 순화해서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바알은 '사흉'이라 불린, 이세계의 고대에 존재했던 가장 흉흉했던 네 괴물 중 하나입니다. 현재 수많은 '디맨션 워리어'들이 바알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결국, 연합장 박태우는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로 했다.

'카르텔 함락'이 의미하는 바는 곧 바알이 쳐들어온다는 뜻이었으니.

인명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있는 대로 설명하고 경각심을 깨워주는 수밖에 없다.

"그라시아도 거기에 포함된 건가요?"

"··· 아마도, 예."

"그, 그라시아가 죽었단 말입니까?"

"······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시가 함락되고, 심연에 가라앉았다.

살아서 돌아온다면 기적이다.

한없이 0에 가까운 확률을 믿고 기대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 말을 듣고 기자들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

그라시아가 사망하다니!

세계적으로 엄청난 위엄을 내뿜던, 수백 자루의 검을 방출해 수km 바깥의 괴물조차 도살해버리던 영웅이 그라시아다.

-그런 그라시아가 죽을 정도면 바알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이곳 지구의 사람들은 아직 이 정도 수준의 괴물을 겪지 못했다.

하여, 박태우는 덧붙였다.

"그라시아뿐만이 아닙니다. 바알을 저지하고자 수만 명의 전사가 희생되었습니다. 그중에는 강력한 '디맨션 워리어'들 또한 다수 포함되어있었습니다."

"······!"

"연합장님! 그럼 대책은 없는 겁니까?"

대책.

······ 대책이라.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국의 좁은 땅덩이에서 모인 플레이어라고 해봤자, 천 명도 안 된다.

수만 명의 전사가 실패한 일을 고작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기엔 무력도, 조각도 부족했으므로.

그나마의 해결책이라면.

"········· 제주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버려야 한다.

썩기 전에 과감하게 절단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피해만 더 커질 테니까.

"제주도를······?"

"포기하다니요?"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도저히 정숙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발언.

박태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현실을 전했다.

"말 그대로, 포기입니다. '바알'은 공간을 먹어치우면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제주도를 먹으면, 모습을 감출 겁니다."

······ 물론, 100% 확신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제주도를 심연에 가라앉힌 뒤, 제주도와 연결된 다른 워프로 향할 가능성이.

문제는 판게니아와 달리 이곳이 지구라는 점이다.

판게니아는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어있지 않은 탓에 이동수단이 '워프'밖에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지구는 모든 공간이 연결되어있지 않은가.

바다로, 육지로.

'그래도 세계 곳곳에 워프가 생성된 걸 보면 가능성은 있다.'

사실 희망 사항이다.

그러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알은 그 정도의 '재해'니까.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은 어떡합니까?"

"풍랑이 너무 거세서 항공기를 띄울 수가 없다고 하던데요!"

"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남아있는 주민들이다.

제주도에 터전을 둔 사람들.

그들 전부를 포기하라는 말인가?

"······."

박태우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전부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인구는 68만.

이중 제주도를 탈출한 건 소수다.

최소 수십만 명이 죽을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닌 지구인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리라.

"마스터는요? 마스터는 살아있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만······ 거절당했습니다."

그것도 단칼에 거절당했다.

도저히 제주도에 희망이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정부는 빠른 결단을······."

"그게 연합의 공식 의견입니까? 제주도를 포기하라는?"

"······."

"그럼 연합은 이번 일에 나서지 않을 생각인 겁니까?"

"그건······."

맞다.

기자의 말 그대로였다.

제주도를 포기한 뒤 바알을 파악하고 싸우는 것.

그게 연합이 내린 결론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게 쉽지는 않았다.

허나 욕을 먹고 손가락질 당해도 어쩔 수 없다.

제주도에서 전멸하면 정말 미래가 없으니까.

하지만 예상한 것보다도 시간은 훨씬 더 부족했다.

"'흉신 바알'의 진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흉신 바알'이 '심연 그 자체인 자'로 완성되었습니다."

"아아······."

박태우는 기자회견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손으로 얼굴을 쓸며 깊은 탄식을 뱉어냈다.

가장 찬란한 광명

흐릿한 시야.

흐르는 피가 눈을 가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글자'들.

"'데몬 파멜'을 사냥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불가항력'의 차이를 극복했습니다!"

"업적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승리한 자'를 획득합니다."

"업적 '데몬 슬레이어'를 획득합니다."

"명예가 300 상승합니다."

"기여도 1,500을 획득했습니다."

"'데몬 하트'가 남겨졌습니다."

"백성전의 성좌 51명이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후욱, 후우욱······."

물먹은 솜처럼 온몸이 무겁다. 거친 숨소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호기사 파멜.

13레벨의 괴물은 과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성수의 보정 효과와 관통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지금 죽은 건 파멜이 아니라 나였을 것이다.

도리어 이것만으로 이긴 게 기적과 같았다.

다르칸 영주를 죽인 뒤 다른 기사들과 싸워 힘을 빼놓지 않은 상태였다면······ 역시나 불가능했을 터.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는지.

'시간이 너무 끌렸나.'

입술을 깨물었다.

파멜을 상대로 생각보다 시간이 끌렸다.

그 사이, 바알은 진화를 끝마쳤다.

생존자가 줄어들어서?

아니, 그보단 다르칸 영주가 먹이를 너무 많이 준 것 같다.

'다르칸 영주가 끌고 온 병사들이 전부 바알의 영양분이 되어버렸다.'

환장할 일이다.

물론 그만큼 자신했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도 그만한 병력이면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다르칸 영주는 수호기사 파멜의 정체를 간과했다.

아니면 아예 모르고 있었거나.

'······ 알았다면 같이 오지 않았겠지.'

진짜 머리가 모자란 게 아닌 이상, 파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저주가 만연한 고치 속으로 같이 왔겠는가.

영주도 그가 데몬인지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덕분에 바알과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와해했다.

'이제 곧 지구로 침략할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움직이려던 찰나, 나는 파멜이 죽은 자리를 바라봤다.

도륙되어 죽은 데몬은 죽은 즉시 먼지로 화했다.

오직 '데몬 하트'만을 남기고서.

[데몬 하트(???)]

-최상질의 데몬 하트입니다.

-최대 13레벨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또한, 데몬과 계약하여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계약하는 순간 육체가 완벽하게 회복, 재생되며, 종족이 '데몬'으로 구분됩니다.

-'데몬'은 '추종자'에 따라 더욱 강력한 힘이 생깁니다.

-'별'을 이용한 '초월'이 불가능해집니다.

······ 데몬 하트를 이용한 계약.

게다가 막심이 지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당장 계약하는 것만으로도 레벨을 몇 단계는 건너뛰는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회복까지 된다면 바알을 보다 쉽게 요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몬 하트, 심장에 새겨진 악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계약하겠느냐?

그것은 순수한 '악'이다.

오로지 인간의 탐욕을 시험코자 하는 악이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 바알을 상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

쳐다도 안 보려고 했으나 눈길이 가는 건 본능에 가까웠다.

-바알을 죽여야 하지 않나? 고작 파멜에 쩔쩔매던 지금의 네가 진화한 바알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게다가 그 파멜조차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을진대?

악마의 속삭임.

녀석은 내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아니, 마음을 읽는 게 아니라 저건 내 생각 그 자체였다.

-내 손을 잡아라. 그리하여 힘을 얻어라. 내가 너에게 바알을 죽일 권능을 부여해주마. 너라면 파멜을 뛰어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계약하면 생기는 힘.

데몬의 권능!

파멜을 뛰어넘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바알을 죽여라.

어차피 불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가능케 만들라는 말이다.

-뻔뻔한 놈. 모두 네가 자처한 일 아니냐? 네가 바알을 깨우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판게니아도, 지구도, 모두 너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걷게 될 터.

'악'은 내 책임감을 부각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게니아와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건 전부 내 책임이라고.

-계약······.

콰직!

나는 그대로 발을 들어, 짓밟아, 부쉈다.

"시끄럽다."

정말 시끄러웠으니까.

놈이 하는 모든 말들은 이미 내가 상기하고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

게다가 기사왕을 계승한 내가, 여신을 배척하는 이단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건 당장의 힘을 얻고자 미래를 포기하는 짓이니.

그 순간이었다.

"데몬 하트를 파괴했습니다."

"업적 '악마의 유혹을 이겨낸 자'를 달성합니다."

"명예가 1,000상승합니다."

"기여도 10,000점을 획득했습니다."

"명예로운 자여! 백성전의 모든 성좌가 당신의 선택에 손뼉을 치며,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모든 성좌가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유혹.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그들로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했던 모양.

파멜을 죽일 때보다도 명예나 기여도의 상승이 훨씬 높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처럼 보였다.

저 데몬 하트 자체가 본체였던 게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바알을 상대할 수 없다고?'

놈이 내게 속삭인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지금의 나는, 이 몸으로는 당연히 바알을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파멜을 상대로도 끝까지 사용하지 않은 게 있었다.

지이이이이이이이이익-!

요동치는 워프.

심연을 나아가자, 그곳에 바알이 보였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어 워프를 넘으려는 바알이.

'절대로 못 넘어간다.'

넘어가게 놔둘 수는 없다.

오직 저놈 하나를 위해 아끼고 아껴둔 것.

그것을 사용할 때가 됐다.

내 전부를 쏟아부을 때가.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가 발현합니다."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에 새겨진 접두사 스킬 '가장 찬란한 광명'을 사용했습니다."

"접두사가 소멸하여 60초 이후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의 기본유지 기능이 사라집니다."

"'온전한 황금률'을 소모합니다."

*

지이이이이이이이이익-!

바알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된 이후, 제주도의 상황은 급변했다.

"저, 저게······."

"저게 지금, 무슨 상황인 겁니까?"

기자들은 당황했다.

기자들만이 아니라 지금 저 장면을 보는 모든 이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워프는 사방으로 넓어지며, 제주도 전체를 벽처럼 둘러싸 버린 것이다.

그리곤 이내 제주도가 있던 곳은 '암흑공간'처럼 변해버렸다.

"제주도가······."

"사, 사라졌다!"

공간 전체가 암흑에 먹혔다.

정말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설마 제주도 전체가 벌써 먹혔다고? 바알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여, 연합장님!"

"박태우씨!"

"무슨 말 좀 해보십시오!"

당연히 난리가 났다.

모두가 해명을 요구하며 박태우를 바라봤다.

"······."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로, 지금 저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으니까.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저 안의 사람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지금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상상을 초월한 일.

어쩌면 인류가 여태껏 겪어온 재해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공포가, 저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그라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심연 전체에 셀 수 없이 많은 워프가 열리더니,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수만명.

심연 전체로 따지면 수십만 명은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지구인이었다.

왜 갑자기 지구인들이 이곳 심연에 나타난 걸까?

그것도 저만한 숫자의 지구인이.

"잠깐. 저거 그라시아 아니야?"

"어? 그라시아님!"

"뭔지는 몰라도 살았다!"

그들은 그라시아를 알아보곤 몰려들었다.

죽었다고 전해진 그라시아가 살아있었으니.

다만, 그라시아는 의아했다.

'왜 아무도 미치지 않는 거지?'

대부분이 동양인들.

차림새나 옷에 적힌 글자로 보아, 한국인들이다.

한데, 그들은 모두 심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자신조차도 정신을 나가게 만들었던 강력한 저주가, 지금 나타난 사람들에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라시아님. 살아계실 줄 알았습니다!"

"지금 여기가 어딥니까?"

"우, 우리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거죠?"

그라시아를 장벽처럼 둘러싼 사람들.

-카아악?

-카아아악!

동시에, '저주의 종'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허억!"

"괴, 괴물이다!"

사람들은 기겁했다.

지구인들은 아직 괴물 자체에 적응하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궁금증을 풀거나 답변을 해줄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천검이여."

그라시아가 천 자루의 검을 꺼내었다.

체력이 달리지만 아직 그는 살아있다.

자신이 해야할일을 할 정도는, 남아있었다.

-카아아아악!

-키에엑!

그렇게 달려드는 저주의 종을 모조리 도륙하자.

"역시 그라시아님!"

"괜히 영웅이라 불리겠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더욱 열렬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에 그라시아는 구원자, 진짜 영웅처럼 비췄으니까.

하지만 열광은 길지 않았다.

쫘아아악!

검은 고치가 갈라지더니.

고오오오오오오오오!

······ 그 안에서 바알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보다 더욱 진화한 형태로.

펄럭! 펄럭!

몸집도, 날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한 번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거친 바람이 심연 전체를 누볐다.

"저, 저렇게 큰 괴물도 있었어?"

"미친! 63빌딩보다 큰 거 같은데?"

"괜찮아! 우리한텐 그라시아님이 계시잖아!"

내가 있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설마, 나보고 다시 저 괴물과 싸우라고?

그라시아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하며 들어갔던 황금 염소는 죽은 건지.

하기야, 저걸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라시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후 천천히 내뱉으며 다짐했다.

비록 한 번 패배했으나, 이번에야말로 영웅의 면모를 보일 차례였다.

죽더라도 영웅답게.

적어도,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지 않겠나.

고오오오오오오!

그런데 바알의 상태가 이상하다.

나타난 지구인들을 마저 죽이려고 하는 건줄 알았건만.

계속해서 고치 안쪽을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안에 뭐가 있기에?'

다르칸 영주를 비롯한 병사들이 대거 고치 안으로 들어가긴 했다.

설마 그들이 바알을 고치에서 쫓아낸 건가?

그들을 비롯한 수호기사 파멜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그라시아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바알을 고치에서 밀어낸 것.

바알이 쫓기듯이 튀어나오게 한 원인.

고치의 안에서, 바알을 쫓듯이 튀어나온 존재.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그라시아는 최근 많은 것들을 보아오며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고룡 라일이와 특이한 사신들, 성각자, 바알까지.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들 존재들을 연달아 만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나타난 저것은, 그것들과도 조금 다르다.

"······."

"······?"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알이 나올 때와도 명백하게 다른 반응.

절로 할 말을 잃게 만들었으니.

결국 고치에서 튀어나온 것을 본 그라시아는 인상을 구긴 채, 저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뭐냐, 저것은."

"Game Over"

마왕, 붉은 옥탕에 몸을 담그던 그가 불현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실로 이상하다.

이 이상 이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은 한 그가 의아함을 느낄 일은 없을진대.

'네 개의 봉인 중 하나가 제멋대로 풀렸다.'

네 개의 봉인, 아직은 풀릴 때가 안 된 족쇄들.

그중 하나가 제멋대로 풀렸다.

하지만 지금 풀리는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다.

그러한 '안배'가 아니었다.

그것을 누가, 무슨 의도로 푼 걸까.

'··· 알고 풀었다면 사흉의 봉인에 숨겨진 의도를 안다는 것인데.'

툭, 툭.

마왕은 턱을 쓸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어느덧 주변을 가득 메운 '마종(魔種)'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가 강해진 것만큼이나, 마종들 역시도 이전과 질적인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두 번째 '침략'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이미 끝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력의 강화로 인한 감흥보단 '사흉'의 봉인이 깨진 게

더욱 걸린다.

그 봉인들은 침식율이 더욱 높아진 뒤에 깨져야했기 때문이다.

'허나 무언가를 알고 풀었다고 한들 이제 늦었다. 바알은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되었으니, 그 무한히 진화하는 짐승을 막을 수 있는 건 존재치 않아.'

이내 고개를 젓는다.

우연히 풀었든, 알고 풀었든, 이제 사흉을 잡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알은 본능처럼 양쪽의 세계를 박살 내기 시작할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끊임없이 먹어치우리라.

녀석이 만족할 때 즈음엔 적어도 수십 개의 도시가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만에 하나 사흉이 잡힌다면? 그

리하여 사흉의 안에 있던 '숨겨둔 것'이 예정보다 빠르게 세상에 나온다면?

'······ 그럼 조금 귀찮아지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쯧. 마왕은 작게 혀를 찼다.

*

"'가장 찬란한 광명'을 사용합니다."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

특급 경매장에서 구매한 물건들, 엄청난 가치를 제물로 바쳐 띄운 '가장 찬란한' 접두사는

나로서도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었다.

찬란한 빛의 옥좌로 말미암아 라일리를 소환해, 심연 미궁을 클리어했으니

'가장 찬란한'은 어느 선까지 또 다른 영웅을 소환할 수 있을지.

'다른 6각의 영웅 정도로는 바알을 이길 수 없다.'

누구를 소환해야할까.

물론, 지고룡과 하나가 된 라일리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확실하지 않은 수에 모험을 걸 수는 없었다.

6각의 영웅을 뛰어넘는 존재를 소환해야만 한다. 혹은 나 스스로가 가장 찬란했다 여기는 자가 되거나.

'드디어 빌헬름을 소환할 수 있는 건가?'

어쩌면 이제야말로, 기사왕 빌헬름을 소환할 수 있지 않을지.

단순한 황금률 조각이 아닌 '온전한 황금률'마저도 사용하지 않았나.

"사용자가 현재의 상태에 걸맞은 '가장 찬란한' 형태로 완성됩니다."

그러나 '가장 찬란한 광명'은 소환의 형식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의 가장 찬란한 모습을 갖추는 것.

그럼 란돌프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걸까?

"'시체 까마귀의 왕'이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 화합니다."

"'끔찍한 흉조(凶兆), 란돌프'"

······ ?

란돌프는 란돌프인데, 맥락이 달랐다.

예상을 뒤엎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시체 까마귀의 왕을 초월하여, 그 극에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으로.

끔찍한 흉조.

불길한 조짐, 징조 그 자체보다도 더욱 끔찍한 형태!

단순한 시체 까마귀를 넘어 아예 '현상'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 내 상태에 걸맞게 완성된다는 게 이런 거였군.'

아마도 나의 상황에 맞춰 진행된 모양인데.

이게 바알 세트의 영향인지, 아니면 인간일 때보다 시체 까마귀의 왕이 더 강하다고 판단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끔찍한 흉조'는 주변의 저주와 불길함을 먹고 더욱 강력해집니다."

그럼에도, 훌륭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만큼.

이곳보다 더욱 불길한 장소가 없다.

또한, '바알'만큼이나 강력한 저주를 지닌 존재가 또 있겠는가.

그런데 '강력해진다'는 말의 뜻이 내 생각과는 약간 달랐다.

점점 비대해지는 몸.

이내 '바알'에 견줄 만큼 전신의 크기가 불어난 것이다.

'······ 웬만한 거인은 명함도 못 내밀겠군.'

강해진다는 게 이런 거였나.

이윽고 거대 괴수 두 마리가 서로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본능적으로 '끔찍한 흉조'의 불길함을 읽어낸 바알이 위협하듯 날개를 펼친 채 달려들었다.

이 정도로 큰 몸을 움직여본 적은 없으나, 기선을 잡는 싸움에서 밀릴 수는 없는 노릇.

나 역시 목청껏 기합을 내질렀다.

까아아아아아악-!

*

초거대 괴수 두 마리가 허공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심연에 가라앉은 모두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저게 뭐냐."

"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진짜 현실인가······?"

제주도에서 소환된 사람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염소의 얼굴을 한 괴수와, 까마귀처럼 생긴 새까만 새가 서로 격돌하고 있었다.

꽈아앙-!

부딪힐 때마다 지진이 일었다.

지각이 흔들리며 마치 태풍처럼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 검이여."

그라시아가 천검을 펼쳤다.

방어의 기세.

곧이어 천자루의 검이 사방에 펼쳐지며 그 사이사이로 방어벽이 생성되었다.

쿠릉! 쿠르르릉!

미친.

그저 파장을 막아서는 것만으로도 손에 저린다.

얼굴 곳곳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대체 저 거대한 까마귀는 뭐지?'

그라시아도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이다.

생김새는 까마귀와 비슷하나, 실상은 까마귀의 형태를 한 '검은 불'과도 같았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불길로 바알을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바알이 만든 심연.

심연에 바알과 같은 존재가 또 있다고?

'설마 다른 심연의 주인인가?'

심연의 주인들이 영역다툼을 할 때도 있다는 걸 들어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들어온 심연 영역은 하나뿐이다.

소생한 자들의 심연.

오직 바알의 영역이며 다른 영역이 겹쳐있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오주력?'

저만한 괴이(怪異).

심연 미궁에서 라일리를 죽였다는 그 오주력이 아닐는지.

시체 까마귀의 왕이라 불렸던, 백왕이 직접 비호했던 자.

그라시아는 항상 실체가 궁금했다.

자신이 죽이지 못한 라일리를, 단번에 꺾어버린 오주력의 존재가.

하필이면 '란돌프'의 이름을 갖고 있는 그 까마귀가······ 설마 저 거대 괴수라고?

그렇다면 자신이 아는 '란돌프'와 저 '란돌프'가 이름만 같은 다른 존재임은 확실하다.

"사, 살려주세요!"

"엄마! 엄마!"

"아아아앙!"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저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전부가 아니었으니.

"······ 저, 저건 또 뭐야?"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니야······?"

사람들의 경악어린 음성과 함께, 그라시아도 시선을 옮겼다.

격돌하며 흉조에게서 떨어진 타오르는 깃털들.

그 깃털들이 꿈틀대며 변하더니, 마치 도사마냥 도사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까마귀로 모습이 바뀌었다.

까악!

까아악!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도사 까마귀의 군단.

그것들이 한꺼번에 합장하며 까악대자 흉조의 위로 불길한 '검은 태양'이 생성되었다.

'검은 태양'에선 피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떨어진 피가 심연을 적시자.

고오오오오-!

갑자기 바알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라시아를 포함한 수많은 자들이 공격했음에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

저 검은태양이 뭔지는 몰라도, 무엇을 위해 있는 건지는 알겠다.

[죽음]

······ 저건 죽음 그 자체였다.

바알의 영역이 저 검은태양의 피로 전부 물든다면, 바알은 죽고말리라.

덜덜덜덜!

검은태양을 마주하자 몸이 떨렸다.

저것은 절대적인 죽음을 가져오는 권능이다.

자신이 갖고 온 '독'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본질적인 죽음 말이다.

'······ 진짜 괴물이 따로 없군.'

저게 오주력이라니.

미궁의 주인이 저런 괴물일 줄이야.

'백왕이 미궁을 공식천명한 이유가 있다.'

오주력을 감싸고도는 이유가 뭐겠는가.

하여, 그라시아는 다짐했다.

'오주력의 미궁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의 땅이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미궁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노라고.

지고룡 라일리를 죽이고, 흉신 바알을 압도할 정도라면, 더 설명은 필요 없을 터.

심지어 현재의 바알은 처음의 바알보다도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까, 까마귀가 이기고 있는 건가?"

"그런 거 같은데?"

"저 염소가 바알이면 그럼 우리 살 수 있는 거죠?"

고오오오오!

검은 태양의 피가 바닥을 적실수록 바알의 신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몸부림치며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흉조가 바알을 압도하는 모습.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아······!" "뭐, 뭐야!"

사람들은 기겁했다.

쩌적!

갑자기, 바알의 얼굴이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서걱!

찰나와 같은 시간.

순식간에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흉조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쿵!

쿠우우웅!

······ 머리를 잃은 흉조가, 비틀대며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한 순간의 일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예상할 수 없던 상황.

"······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둘 다 쓰러졌어?"

모든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갑자기 흉조가 머리를 잃고 쓰러진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이게······.'

그리고 그건, 그라시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흉조, 오주력만이 아니다.

바알마저도 죽은 듯이 쓰러진 채였다.

하지만 흉조와 달리 바알의 신체는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더 깊은 심연'으로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순간 떠오른 메시지를 본 그라시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미친······."

욕을 내뱉었다.

여기서 더 진화한다고?

저 괴물같던 오주력도 막지 못한 괴물을, 인류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나.

'끝이다.'

끝이라는 단어 외엔,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

"'멸망의 조각'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Game Over"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앞에 떠오른 두 줄의 글귀.

사망, 그리고 게임 오버.

어디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다.

게임을 할 때.

보통 누구에게 죽었고, 그래서 끝나는 장면을 자주 접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분명히 바알을 압도하고 있었다.

바알을 수세로 몰아넣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설마 또······.'

마왕을 죽였을 때처럼, 강제로 버그라도 일으킨 건지.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현실이다.

게임 속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있는 진짜의 세계였다.

"······진짜 뭐 이딴 쓰레기 같은 게임이 다있냐."

설마 이 말을 다시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심지어 이번엔 게임조차 아니다.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멸망의 조각.

저것도 마왕이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물건일 터.

이래서 문제다.

이놈의 세계는 잠깐 방심하면 목을 날려버리는 변수로 가득했다.

설마 가장 찬란한 빛의 옥좌까지 썼는데도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럼 여긴 사후세계인가?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 순간이었다.

"Game Ove"

눈앞에 있는 창.

거기서 갑자기 글자 하나가 지워졌다.

처음엔 잘못 본 건 줄 알았으나.

"Game Ov"

"Game O"

······ 그게 시작이었다.

모든 글자가 지워진다.

게임 오버도,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대신 그 빈 공간에, 다른 글자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생명의 불'을 소모합니다."

"히든 특성 '영원의 란돌프'가 발동합니다!"

영원(永遠)의 란돌프

화르르륵!

동시에 가슴팍에서 타오르는 불길.

순식간에 불길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 불은······.'

다만, 의아했다.

불길의 정체. 소모하여 나를 태우고 있는 이것의 진실이.

그도 그럴 게, 이것은 분명히, 사신들이 죽이고 빼앗은 영혼의 총아였다.

일명 '죄인의 불'이라 일컫던 것.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글귀는 그 죄인의 불을 '생명의 불'이라고 칭했다.

죄인의 불이 생명의 불이 될 수는 없다.

성질 자체가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아마도.

'설마 헬이 먹고 뱉어서?'

······ 유추가 가능한 이유는 헬의 영향밖에 없었다.

헬이 먹고 뱉자, 다른 정통들은 그 불을 혐오하며 멀리했다.

단순한 '먹뱉 논란'이 아니었던 게다.

더러워서 못 먹은 게 아니다.

아예 그들이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성질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한 불을 소모하여 히든 특성

'영원의 란돌프'가 발동했다······.

'신비 파괴, 철혈 군주의 심장을 영원 군주의 심장으로 진화시켰지.'

영원의 란돌프가 가진 기능.

이게 전부일 줄 알았다.

솔직히 이 두 가지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었으니까.

모든 괴물의 신비를 등급에 상관없이 파괴하고, 영원 군주의 심장은 던전에서의 '조건 삭제'를 해주지 않았나.

당연히 무언가가 더 있으리란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 한데 그 두 가지가 전부가 아니라, 세 번째 기능이 있었다.'

그것도 죽어야 발동되는 세 번째 기능이.

왜 하필 '영원(永遠)의 란돌프'였는지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생명의 불에 의해 전신이 타오르고, 마침내 나는 재가 되었다.

그 직후.

꿈틀!

검은 재에서, 변화가 시작됐다.

['천상(天上)'이 머리를 듭니다.]

['돌연변이'가 눈을 뜹니다.]

['대현자'가 바라봅니다.]

['허무'가 코를 벌렁댑니다.]

['비스트 로드'가 냄새를 맡습니다.]

['대식가'가 입을 엽니다.]

['대자연의 하이 드루이드'가 노래합니다.]

['손재주'가 손을 뻗습니다.]

['웨폰 마스터'가 심장을 쥡니다.]

['영원군주의 심장'이 격렬하게 뜁니다.]

['거인의 항마력'이 일어납니다.]

['올 마스터'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황금의 은총'이 중심을 잡습니다.]

['영원의 란돌프'가 영원(永遠)을 시작합니다.]

*

제주도를 둘러싼 검은 장벽.

영역 전체를 삼켜버린 그 주변으로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영웅 연합의 장, 박태우 역시도.

커다란 선박의 위.

"'투영' 능력자도 안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연합장님."

"'뚫어보는 거울'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곳에서 박태우는 주먹을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16일 차.

바알이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된 뒤, 워프가 제주도를 덮친 이후로, 아무런 진전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통신은 끊겼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지켜만 봐야 하는 건가?'

젠장 할.

아무리 제주도를 포기하자 했다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구출대를 꾸려서 할 수 있는 한 구조할 셈이었다.

그런데 구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 꼴이라니.

'내 불찰이다.'

자신의 불찰이다.

숨겨선 안 됐다.

붉은 워프를 발견했을 때, 공개하며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때 내가 숨기지만 않았더라도······.'

더 많은 사람이 제주도를 빠져나갔을 텐데.

하지만 후회는 늦었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현실이 달라질 리 없으므로.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나?"

박태우가 묻자, 부연합장이 답했다.

"그게······ 저희 쪽에선 접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라시아의 관계자들이 한국의 링크 자체를 차단해놨습니다."

링크 차단.

한 마디로 접근 자체를 막았다는 말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답을 들을 수도 없다?"

"예······ 관련된 발표도 없었습니다."

박태우는 그라시아의 생사만 묻고 싶었을 따름이다.

카르텔에 공식 출전하여 심연에 가라앉은 그의 '본체'가 살아있다면, 제주도의 사람들 역시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다른 사람은? 카르텔에 참전했던 플레이어는 그라시아만이 아니지 않나?"

"저희가 파악한 12명은 전원, 사망했습니다."

"······."

절망적이었다.

지구의 본체가 사망했다는 뜻이었다.

심연에 가라앉으며 죽은 것이다.

부연합장이 말했다.

"다른 루트로도 해외의 경우를 찾아보곤 있습니다만······."

"쉽지 않나 보군."

"예. 그런데 '김하나' 기자로부터 묘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하나.

디맨션 워리어와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따지지 않고 달려드는 기자.

그라시아와의 인터뷰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란돌프'를 언급한 사람이었다.

플레이어로선 괜히 껄끄러운 존재인지라 최대한 접근은 자제하고 있었건만.

"말해봐라."

"'은둔자'가 살아있는 걸 확인했다고요. 제주도 사람들이 살아있을 거라고요. 그러면서 계속 저희 쪽에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은둔자'가 누군데?"

"그걸 밝힐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말인가?"

"'은둔자'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신원을 밝히지 않겠다고 맹세했답니다."

맹세라니.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단 말인가?

하지만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면, 증거 없이는 음모론과도 다를 게 없었다.

"··· 연합장님. 정부에선 슬슬 물러나라는데요."

"······ 벌써?"

"예. 완도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랍니다."

"제주도에 가망이 없다고 보는 거로군."

입안이 썼다.

제주도를 버리고 후퇴하라니.

16일간 거의 밤낮을 지새웠지만, 박태우의 눈은 단 한 번도 제주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허나, 아직이다. 물러날 땐 나더라도 그 전에 김하나 기자부터 만나봐야겠어."

그 은둔자만 확인할 수 있으면, 제주도 사람들도 살아있다는 뜻이니.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부연합장이 고개를 숙였다.

"예. 김하나 기자를 조용히 불러오겠습니다."

*

김하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군인과 디맨션 워리어를 제외한 민간인 모두가, 제주도에 접근하는 건 금지된 일.

설령 기자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박태우가 몰래 김하나를 들여온 것이다.

"'은둔자'가 살아있는 걸 확인했다고?"

커피를 타준 박태우가 묻자.

"······ 예. 그리고 제주도의 많은 사람들도 함께 살아있어요."

김하나는 확답했다.

살아있다.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

박태우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정부는 우리더러 물러나라더군."

순간 김하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 정부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사라진 제주도보단, 살아있는 한반도가 더 중요하니 말이야."

"······."

김하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고작 16일 차에 정부가 그런 결단을 내릴 줄은 몰랐던 탓이다.

만에 하나 제주도에서 사람들이 살아 나와도 빠르게 구조할 팀은 필요할진대.

그걸 전부 뒤로 물린다고?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도 제주도가 '소실'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정부의 판단은 어찌 보면 현실적인 거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의 소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은 건 박태우뿐이었다.

박태우가 슬며시 던졌다.

"······ 그 '은둔자'를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면 모를까."

그러나 김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돼요."

"왜지? 은둔자의 생사를 확인만 시켜주면 제주도의 전선을 물리지 않아도 되는데?"

판게니아에서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이다.

만약 그 은둔자가 바알과 함께 심연에 가라앉은 상태임에도 살아있다면, 지구에서의 본체 역시도 살아있을 터.

그걸 증거로 전선을 유지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다른 정보를 드리죠."

"··· 그보다 혹할 정보가 있나?"

김하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굳은 표정으로 품에서 '책'을 꺼냈다.

"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지금 전선을 물려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요."

······ 저 책에 무엇이 적혀있기에?

건네준 책을 받아든 박태우는, 일기의 형식으로 적힌 그것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

-1일 차

거대의 괴수가 격돌하고 그 다음날. 사람들은 똘똘 뭉쳐,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아직 소수의 '저주의 종'이 살아남아,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2일 차

일어나자 모든 '저주의 종'이 사라졌다.

하지만 황량한 땅 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해하고 있었다.

머리를 잃고 쓰러진 흉조의 몸통이 '바알'에게 흡수되고 있는 것을 목격한 탓에.

-3일 차

살아남은 전사들이 모여 바알을 공격했다.

그라시아를 선두로. 그러나 바알의 외피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4일 차

심연의 끝을 확인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 역시도.

-6일 차

황무지.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는 곳.

사람들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대로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알이 흉조의 몸통을 모두 흡수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8일 차.

고오오오.

이른 아침. 묘한 소리와 함께.

··· 바알이 깨어났다.

흉조의 불길함을 더 끼얹은 채로.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깨어난 바알은 한참을 심연 속을 서성거렸다.

-9일 차

어제부터 바알이 자해를 하거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라시아가 용감하게 접근하여 바알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내부에서 서로 무언가가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자아분열이라도 일어난 걸까?

-15일 차

한참 발악하던 바알이 다시 멈췄다.

쓰러지곤, 숨을 헐떡이더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럼 죽은 건가?

하지만 죽은 게 아니었다.

진화를 끝마친 것이다.

심연 그 자체인 자가, 더 깊은 심연으로.

······ 그런데 저건 뭐지?

바알의 배가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검은색의 알이 나타났다.

설마 저게 깨지면 진짜 끝나는 걸까?

분명한 건, 저 알이 나타난 뒤 심연을 둘러싼 '장막'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서 탈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사흉 바알.

흉신이라 불리며 재앙과도 같았던 그 존재가.

지금, '먹히고' 있었다.

-어그적! 어그적!

불길한 형상을 한 무언가에.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알은 죽을 만한 위협을 느끼면 '숨겨둔 것'이 튀어나와 상대를 죽이게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죽였건만, 어떻게 다시 살아났단 말인가.

하지만 더 이상 바알은 저항할 수 없었다.

내부에서 처음 마주한 이후 '그것'은 자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무언가.

바알조차도 처음 접해본 그것이.

접한 순간, 바알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신과도 같았으나 더욱이 두려운 것이었다.

생명과 저주 그 자체라 불려지던 자신보다도, 흉신보다도 더더욱 흉흉한 것.

바알은 그것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

"대식가가 '흉신 바알'을 포식했습니다."

"대식가가 '바알의 핵'을 포식했습니다."

"포식을 완료했습니다."

"'특성 진화'가 시작됩니다."

포식 완료.

시체 까마귀의 왕이 되어, 지금의 끔찍한 흉조가 되었던 것처럼.

'그것'은 바알의 특성을 모두 가져왔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아직 바알의 전부가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바알의 혼', 그 거대한 영혼의 불길을.

-캬캬캬캬캬컄!

헬이 맛있다는 듯이 빨아들였다.

전부. 조금의 낭비도 없이.

"식사를 끝마친 '헬'이 진화를 시작합니다."

"진화를 완료했습니다."

"'흉신의 사신력'을 획득합니다!"

이윽고 헬의 등 뒤로 한 짝의 날개가 돋아났다.

부화

한국의 제주도 소실.

보름이 지난 현재 그곳의 소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만이 아닌, 해외의 수많은 '눈'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마스터는 공공연하게 '제주도에 희망은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 마스터. 한국의 제주도가 사라진 지 30일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어제, 마스터는 제주도를 포기하라고 SNS에 공식적으로 글을 올렸죠. 왜 그러셨나요?"

그리고 오늘, 미국의 유명한 TV 쇼에 마스터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두 달 가까이 잠적해있던 그가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

그의 출현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마스터는 예와 다를 바 없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진행자를 마주했다.

"저곳은 '심연'이라 불리는 장소입니다."

"'심연'이요? 그게 뭐죠?"

"죽은 땅. 가라앉은 땅. 들어서는 순간, 절대로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땅."

"······ 와. 듣기만 해도 살벌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심연'에 대한 정의가 궁금하군요.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뜻은 아닌 듯한데요?"

진행자의 예리한 지적에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세계에서 심연은 지옥을 뜻합니다."

"지옥······ 이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수많은 악마와 지옥왕이 있는 곳이죠. 아무리 위대한 전사라도 심연에 20일 넘게 있으면 죽습니다. 예외 없이."

예외는 없다.

약간의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제주도는 소실됐고, 제주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토록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는 마스터가 직접 실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지.'

판게니아의 심연은 미지의 장소다.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을 때도 있고, 절대 이길 수 없는 괴수가 도사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심연을 자유로이 탐구할 수만 있다면 제국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최강의 세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스터는 심연을 탐구했다.

수십, 수백 번.

그리고 모조리 실패했다.

'실패는 했지만 데이터는 얻었다.'

완전히 무의미한 실험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얻기 힘든 정보들을 얻었으니까.

예컨대.

'우선 심연에 들어가면 명예의 전당에서 사라지지.'

랭커가 심연에 가라앉으면, 명예의 전당은 순간적으로 해당하는 사람을 '사망' 처리한다.

아예 순위권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지금 심연에 가라앉은 랭커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명예의 전당에서 이름을 감춘 하이랭커는 팬텀 란돌프, 검성 그라시아, 은둔자 민트초코맛있어요, 용살자 바르무슈.'

현재까지도 전당에 이름이 올라오지 않는 넷의 이름.

모두가 '위험도 9' 이상을 기록하는 강자들이다.

'심연에서 4일 이상을 지내면 정신이 망가진다.'

심연을 지옥이라 설명한 이유는 또 있다.

그래서 심연을 공략할 땐 '단기전'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그저 정신만 망가진다면 모르겠지만.

'10일이 지나면 몸 전체에 멍이 들고, 신체변형이 시작되지.

그런데도 본인은 인지를 못 해.'

마치 방사성 물질에 피폭이라도 된 것처럼 멍이 들고 피를 쏟는다.

그런데, 그걸 본인이 모른다.

죽어가는 육신을 자신의 몸이 아닌 듯이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사람이 아니게 되어간다.

'20일이 지나면 죽거나, 심연의 주인을 따르는 괴물이 된다.'

예외는 없었다.

20일을 넘긴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위에 열거한 넷은 조금 더 버틸지도 모른다.

그만한 강자들로 실험을 해본 적은 없었으니. 하지만, 그래 봤자 며칠 더 버틸 수 있을 따름이다.

확신하건대 한 달이 지난 지금쯤이면 끝났으리라.

자신을 잊고 괴물이 됐거나 이미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들도 그럴진대, 지구의 인간이 심연을 버틴다?

아서라.

'그게 내가 이곳에 나온 이유이기도 하지.'

란돌프도, 그라시아도, 계속 신경 쓰이는 나머지 두 놈도 죽었다.

이제 이 세상은 대안이 없다.

"······ 제주도는 심연이 됐습니다. 입장도, 퇴장도 불가능한 지옥 말입니다. 그러나 절망하긴 이릅니다. 바알이 다음 침략을 개시할 수 없도록 제가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자신 말고는.

*

대식가가 바알을 포식하자, 온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당연한 일이다.

본디 바알은 시체 까마귀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격을 지닌 괴물.

그것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처럼 부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시체 까마귀는 인간의 구조를 이해하고, 흉내 내며, 인간을 유인해 잡아먹었다.

인간으로서의 이해와 형질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반면 바알은, 태초부터 그럴 필요가 없는 괴수였다.

멸망이 만든, 세계를 멸하고자 창조된 '악의'의 집합체와 같은 것.

무엇보다······ 바알 내부에 숨겨진 '멸망의 조각'은 히든 특성으로도 결코 분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형질을 지니고 있었으니.

대식가는 '바알'을 먹어치웠으나, '멸망의 조각'까지 소화하진 못했다.

멸망의 조각은 오랫동안 바알을 움직인 '악의' 그 자체.

-이 몸은 뛰어나구나. 내가 갖겠다.

하여 '멸망의 조각'은 도리어 이 몸을 자신이 차지하고자 하였다.

바알은 이 인간의 특성에 굴복했으나 '멸망의 조각'인 자신은 다르니까.

세계의 균형을, 규칙을 어느 정도 일그러트릴 수 있는 존재.

일종의 버그와도 같은 것이 바로 '멸망의 조각'이었으므로.

-13개의 '모든 열쇠'를 가진 인간. 하지만 문을 열지 못한 '열쇠'는 쓸모없는 법이지.

열쇠를 사용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하나도 제대로 소모되지 않았다.

하기야 인간이 '문'의 위치를 알 리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멸망의 조각은 천천히 몸의 주도권을 빼앗아갔다.

주도권을 빼앗으면 빼앗을수록, 이 몸의 가능성에 '멸망의 조각'은 만족하였다.

멸망이 창조한 바알보다도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육체.

하지만, '멸망의 조각'의 뜻대로 모든 일이 돌아가진 않았다.

"시크릿 옵션이 발동합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여 '초월한 바알 세트'가 신체와 융화됩니다."

"'바알의 완전한 제어'를 시작합니다."

"바알의 내부에서 '멸망의 조각'이 저항합니다!"

"제어를 시작합니다."

"저항이 약해졌습니다."

······ 주도권을 모두 쥐려 하는 순간.

초월한 바알 세트가 육체와 융화되었다.

그것이 바로 숨겨진 옵션이다.

바알의 '완전한 제어'를 위한 마지막 수.

구제국의 사람들은, 바알의 속에 존재하는 저 '악의'를 알고 있었다.

후대를 위해 마지막 한 수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니 이 '완전한 제어'는 오직 '멸망의 조각'을 속박하려는 방법이었다.

-그래 봤자 5:5다. 내가 절반을 유지하는 한, 너는 깨어날 수 없다.

영원히 잠든 채로 서서히 잠식되어라.

어차피 시간의 문제일 뿐.

다소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다.

그러나 '멸망의 조각'은 간과한 게 있었다.

초월한 바알 세트가 녹아들고, '멸망의 조각'과 줄다리기를 하며.

"경험이 축적되어 레벨이 올랐습니다!"

···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치가 축적 돼, 레벨이 오른 것이다.

화아아아악!

-······.

'멸망의 조각'은 어이가 없었다.

레벨이 오르다니.

레벨이 오르면, '모든 이상'을 회복한다.

모든 경험치를 사용해, 격을 올리며 한순간 회복하는 것이다.

물론 상관은 없었다.

'멸망의 조각'이 제어하고 있는 이 '이상'은 단순히 레벨업 따위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몸은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축적해야만 겨우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극악의 몸뚱이였다.

그것이 레벨업을 했다.

방대하기 그지없는 경험치가, 마치 활화산처럼 터져나가며.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몸이 데일 듯한 수많은 축복이, 계단을 하나 오르는 수준이 아닌 공간 자체를 넘어선 격의 초월이 일어났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필요 경험치'가······!

허나 '멸망의 조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여덟 번째 빗장을 풀었을진대, 이만한 '필요 경험치'라니? 열 개의 빗장 중, 겨우 여덟 번째 빗장이 풀렸다.

13개의 모든 열쇠를 지녀, 올려야 할 경험치의 절대적인 양이 늘었다지만, 도저히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이었다.

고작 7레벨에 이만한 '필요 경험치'라니? 그런 것치곤 너무나도 압도적이다.

정말 우주처럼 광활했다.

다른 무언가가 있다.

필요 경험치를 늘려버린 또 다른 것이.

-봉인이라도 풀고 있는 것이냐? 마치 봉인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만 같다.

그럼 열 번째 빗장을 풀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지만 진정 무언가가 봉인이라도 되어있는 것이라면 '멸망의 조각'인 자신이 못 알아차릴 리 없지 않나.

그럼 저만한 '경험치의 양'은 뭐로 설명한단 말인가.

모든 게 불가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후, 레벨업으로 인해 모든 '이상'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리고.

"웃기는 놈이로군."

··· 나는 눈을 떴다.

*

더, 버틸 수 없다.

버티고 싶지 않았다.

심연에서의 기나긴 방황.

그라시아는 슬슬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라시아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60만 명 전원이.

"······ 그라시아 님. 장벽이 무너지던 현상이 멈췄습니다."

"알고 있다."

장벽. 심연의 끝이 무너지며, 모두가 탈출이라는 희망을 꿈꿨다.

하지만 그 현상도 오늘로써 끝이었다.

먹지 못해 초췌해진 얼굴과 몸.

그나마 '전사'들은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지만, 문제는 지구의 사람들이었다.

장벽이 무너진다는 희망 하나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게 멈췄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대로 저희는 다 죽는 걸까요?"

플레이어들. 그들 역시도 한계였다.

그라시아가 눈치를 주어 비밀은 지키고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 이상' 같은 현상은 아직 없다는 것 정도일까.

"······ 죽지 않는다."

그리 말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이곳 심연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다.

그래도 버텨온 건 플레이어들이 갖고 있던 물과 식량 등을 모두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벤토리를 통해 상당한 비축분을 갖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마저도 동난 지 오래다.

애초에 60만 명이 먹을 식량을 갖고 다니는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선 아무것도 자랄 수가 없다.'

'씨앗'을 바닥에 심어, 여러 방법으로 빠르게 성장시켜봤지만 모두 싹을 피우기도 전에 죽었다.

"최후까지 남겨둔 식량도 이제 없습니다. 이대로면 서로 잡아먹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허락하지 않는다."

"······ 이미 죽은 사람은 먹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한 플레이어가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 그들을 먹이 삼는 건 괜찮지 않으냐고.

문제는 이게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맞습니다. 저희가 언제까지 저 사람들을 돌봐야 합니까?"

"우리는 힘이 있습니다. 입을 줄여야,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대로면 저희가 죽습니다!"

"모두 죽으면 이런 고고한 짓이 무슨 소용입니까?"

다들 미쳐버렸다.

그라시아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혹시 혼자 몰래 '식량'을 먹고 계시는 건 아닙니까?"

"······ 헛소리를 하는군."

"그거야 확인해보면 될 일! 우리는 당신처럼 고고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도 힘들고요."

스륵!

그들이 무기를 들었다.

그라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콰르릉!

순간 벼락이 쳤다.

하늘을 배회하던 천 자루의 검 중 하나가 벼락처럼 주변에 꽂힌 것이다.

반으로 쪼개져 죽은 시체를 보면, 겁을 먹고 물러날 터.

"고, 고기 냄새!"

"저······ 저 고기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 아아.

미쳐버렸다. 진짜로 미쳐버린 거다. 심연이 저들의 정신을 나가게 했다.

그라시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전부 죽인들, 끝이 날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선 절대적인 지도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건 지도력에 금이 갔다는 뜻.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겠구나.'

-버러지처럼 죽든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그게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버러지처럼 죽지 않기 위해.

최소한 인간으로서 죽기 위해선.

서로가 잡아먹는 아비규환의 지옥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라시아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볼 수 있게끔, 이들을 모조리 도륙할 작정으로.

"아, 알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달려와 그라시아에게 보고했다.

"알?"

"예! 검은 알 말입니다!"

이맛살을 구긴 그라시아가, 빠르게 이동하였다.

바알의 배에서 나온 검은 알.

그것에 금이 갔다면 곧 부화한다는 의미였으니.

이어 심연의 중심부로 다가간 그라시아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쩌적!

······ 정말로 검은 알에 금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안에서 대체 무엇이 부화하는 것일까.'

완성된 바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일는지.

알 수 없다.

예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한 존재는 아닐 거라는 것.

그라시아와 주변의 모든 이가 잔뜩 긴장한 채, 알의 부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심연의 지배자

"오오!"

"깨어난다!"

"신께서 깨어나신다!"

초췌해진 몰골.

앙상한 몸을 한 수많은 사람이 '검은 알'의 탄생에 대해 떠들었다.

'검은 알'에 대한 의견은 처음부터 분분했던 탓이다.

바알의 진화 형태, 혹은 바알을 죽인 신.

부화하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검은 알'에 무릎 꿇으며 '기도'했다는 것이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게 무엇이든, 제발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 달라고.

한 달이 넘도록 심연에 갇힌 사람들은 간절했다.

느닷없이 끌려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함으로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나마 그라시아가 강력하게 통제하지 않았다면 이미 이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리라.

서로가 물어뜯고, 죽이며, 잡아먹는.

이미 '검은 알'은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추앙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저 검은 알만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양손을 합장한 채 검은 알을 둘러싼 수십만의 광신도들.

굶주림과 피폐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라시아도 이 광적인 물결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라시아님. '더 깊은 심연'의 존재가 나올까요?"

한 플레이어의 물음에 그라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 그게 뭐가 됐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

60만의 목숨이 그들의 손 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라시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었다.

그리고.

'천검이여.'

천 자루의 검을 허공에 띄워, 검은 알의 주변에 수놓았다.

깨어난 상대가 바알이라면 그 즉시 공격할 수 있도록.

치직. 치지지직!

천 자루의 검에서 청색의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라시아의 두 눈에서도 마치 번개와 같은 안광이 넘실댔다.

그라시아가 가진 최강의 스킬, 천벌(天伐).

천 개의 벼락을 꽂혀 상대를 소멸시키는 압도적인 공격.

촤르륵!

촤르르르륵!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마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필살기다.

준비시간이 길다는 단점과 한 번 사용하면 근 일주일은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기에, 그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최후의 비기였다.

"······ 설마 '천벌 모드'인가?"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저걸 맞고 살아난 자가 없다던데."

일명 '천벌 모드'라 불리는 것.

플레이어들은 그 모습에 감탄하고 경탄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바알과 싸울 때도 저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과 달리, 그라시아는 더없이 긴장한 상태였다.

땀이 맺히자마자 증발해서 그렇지, 너무 긴장한 탓에 정말 미친 듯이 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여러분! 가까이 다가가면 위험합니다! 최대한 물러나십시오!"

그러는 와중에도 시민들을 챙기는 자가 있다.

아름다운 여인.

순백의 기사, 세렝게티.

그녀만은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곧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함께하던 염소탈은 고치 안에서 죽었을 텐데도.

'아름답군.'

그라시아는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곧은 심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다 잡혔으므로.

이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혹, 이게 사랑인가?

허나 그녀는 판게니아의 존재.

이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니, 그저 바라만 봐도 충분했다.

쩌저적!

"아···!"

"금이······!!

알에 가기 시작한 금이,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떠들던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침묵한 채, '검은 알'의 부화를 지켜봤다.

그리고.

스으으으으으으으.

검은 알에서 연기가 뿜어졌다.

연기는 곧 형태를 갖추어, 검은 유령과도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유령. 아니······ 저건.

"사신······."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사신이다.

그라시아를 지구 끝까지 쫓아오던, 그리하여 젊음까지 뺏어갔던.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하다.

여태껏 보았던 사신과는 뭔가가 다르다.

"저, 저게 뭐야?"

"귀신? 부유령?"

"저승사자 아니야?"

"사신이잖아. 낫 든 거 안 보여?"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 그게 이상한 첫 번째 이유였다.

본래 사신은 '씐 자'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라시아를 쫓던 사신들을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저 모습.

"··· 얼굴이 바알과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저 날개도······."

········· 그러했다.

사신의 형태를 갖췄으나, 묘하게 바알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신의 등 뒤로 난 세 장의 날개 중 하나가 바알의 날개와 일치하였다.

그럼 저게 '더 깊은 심연'의 존재인가?

그라시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 존재가 입을 열었다.

-캬.

······캬?

뭐라는 거지?

-캬캬캬캬컄!

사신이 경쾌하게 웃으며 낫을 휘둘렀다.

공격인 줄 알고 그라시아가 맞받아치려 했으나.

그 사신이 낫을 휘두른 방향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허공에 낫을 휘둘렀다? 왜?'

곧이어 그라시아와 모두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쉬이이익!

쩌적!

강한 충격에 부딪히는 소리.

이어 단단한 외피가 깨지는 소리.

쿠르르릉!

······ 저 멀리서, 심연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미친

아무리 발악해도 꿈쩍하지 않던 벽이었다.

심연의 끝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장막 말이다.

그게 지금 무너지며, 그 너머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머의 공간. 거기엔, 또 다른 '심연'이 있었다.

"뭐··· 뭐야 저것들은."

"아니······ 뭐야······."

"아··· 아아······."

동시에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당연하다.

그라시아도, 플레이어들도, 그 광경에 넋을 잃었다.

공간의 너머. 어둠 위로 떠 오른 것들.

수많은 심연 속 괴물들의 '눈'이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 저 눈은 전부 심연의 지배자들이다.'

그라시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심연의 지배자들, 그들이 이곳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심연의 지배자'는 그 하나하나가 막강한 괴물이다.

이곳 바알조차도 심연의 지배자 중 하나일 따름이었다.

다만, 그 숫자가.

······ '눈'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저게 전부 심연의 지배자라니.

대체 심연 속에는 무엇이 있기에?

왜 그들은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건가?

그리고 저 사신은 어떻게 심연의 장막을 가른 것일까.

지잉.

지이잉.

지이이이잉.

그 순간이었다.

의문을 느끼고, 풀 사이도 없이.

사람들의 발밑에 수많은 '워프'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한 명당 하나씩.

족히 60만 개가 넘는 워프가 말이다.

"뭐, 뭐야 이건?"

"우리가 소환됐을 때랑 같은 거잖아!"

"워프! 워프다!"

"돌아가는 거야?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저 '검은 알'의 사신께서 우리를 돌려보내 주시는 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검은 알의 사신님 만세!!!"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이 이곳에 소환됐을 때도 같은 워프가 생성되어 그들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워프는, 그들을 강제로 재차 송환하고 있었다.

빠르게 사람들이 사라져간다.

워프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떨어진 사람들.

쩌적!

··· 알은, 분명하게 부화하고 있었다.

'확인해야만 된다.'

저게 뭔지.

저 안의 존재가 무엇인지.

장벽을 부순 '사신'은 부속물 같은 것이다.

아직 진체(眞體)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라시아가 워프를 피해, 허공에 떠올랐다.

'반드시 확인해야만 된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알에서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만, 인류의 미래를 알 수 있노라고.

적인지, 아군인지, 아니면 어떻게 생겼는지 라도 파악해놔야만 한다고.

지이잉!

하지만 워프는 집요하게 그라시아를 쫓아왔다.

지잉! 지이잉!

심지어는 더 많은 워프가 생성되며 그라시아를 강제로 송환시키려고 하였다.

그라시아는 입술을 깨문 채 전력을 다해 워프를 피하며 '검은 알'의 부화를 어떻게든 끝까지 지켜보려고 했다.

이미 주변에 사람들은 없었다.

60만이 넘는 자들 모두가 워프로 이송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남은 사람은 그라시아뿐.

그리고.

쩌저적!

마침내, 알이 완전하게 깨졌다.

'저 모습은 분명히······!'

알에서 깨어난 존재를 본 그라시아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동시에 그라시아 역시도 워프에 발을 디뎌, 추락한 것이다.

*

"······."

웅크리고 있었던 자세를 편다.

허리를 곧게 뻗고, 하체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나보았다.

손바닥을 쫙 편 채, 어깨와 목을 돌리곤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군."

-캬캬캬!

헬이 웃었다.

아까의 사신으로서 커다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작아진 채로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일단 몸은 정상이었다.

··· 분명히 죽었는데, 살아났다.

'영원의 란돌프.'

영원의 란돌프가 작동하자, '죽은 잿더미'에서 '13개의 히든 특성'이 일어났다.

이후 바알을 포식하고 '멸망의 조각'을 굴복시키며 육체가 다시 조립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나는 란돌프다.

외견적인 변화는 크게 없었다.

'나는 나다.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된 것은 아니다.'

또한 영혼적인, 정신적인 면에서도 멀쩡하다.

그러나 틀림없이 나는 달라졌다.

성장했다.

······어쩌면, 진화라고 봐야 할지도 모를 만큼.

'상태창.'

내 변화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창.

그것을 띄웠다.

<상태창>

이름 : 란돌프

직업(Class) : 별의 계승자

직업(Class) : 지고의 검성

<능력치>

레벨 : 8

힘 : 117(102+15)

체력 : 115(100+15)

민첩 : 116(101+15)

지능 : 115(100+15)

성력 : 128(113+15)

<부가 능력치>

자연 재생력 : 315%

전체 관통력 : 12.8%

저주 관통력 : 15%

저주 반사 : 30%

저주 유지시간 증가 : 30%

<특이사항>

1 : '별의 계승자 - 별 3개(모든 능력치+15)' 보유

2 : '초월한 바알 세트'와 육체가 융합되어 관련 능력치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시 해당하는 부위에 새로운 장비를 착용할 수 있습니다.

3 : '영원의 란돌프' 효과로 순수능력치가 보정되었습니다.

4 : '바알의 핵(멸망의 조각)'을 심장에 보유하고 있습니다.

5 : '망자의 왕' 스킬로 힘(2)과 민첩(1) 성력(3)이 오른 상태입니다.

······.

'······ 엄청나군.'

끝없이 나오는 창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훑으며, 나는 순수히 감탄했다.

설마 바셋을 융화하여 꿀같이 달콤한 옵션만 추출해올 줄이야.

게다가 모든 순수능력치가 100을 넘겼다.

히든 특성 '영원의 란돌프'가 능력치에 보정을 준 것이다.

그중 성력이 다른 능력치보다 10가량 더 높은건 바알 세트의 '마력+10'옵션을 순수능력치로 치환한 것이었다.

'이게 레벨 8의 능력치라곤 아무도 믿지 못할 거다.'

내가 봐도 믿기지가 않았으니까.

능력치만 놓고봐도, 거의 2성 초월자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능력치를 올려주는 장비는 흔치 않은데다, 그 수치도 대부분 미비하다.

중첩도 되지 않으니 소위 '템빨'로 능력치 떡상을 노리는 건 쉽지 않다.

게다가 나는 아직 장비를 착용하지도 않았다.

'······ 바알 세트가 융화되면서 다시 새로운 장비를 착용할 수 있게 됐다.'

이게 진짜 미친 부분이다.

이렇게나 성장했는데도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

장비만 장착해줘도 더 강해질 거라는 사실이.

-캬아아아!

그때였다.

······ 헬이 고양이 마냥 위협을 시작했다.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

나 역시도 고개를 돌렸다.

검은 공간의 위로 튀어나와 있는 수많은 '눈'들.

그 눈 중에 왠지 모르게 익숙한 것들이 있었다.

신의 살갗 혼종의 눈으로 보이는 거대한 눈이라거나.

그들이 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역시도 나는 알고 있었다.

'바알의 핵. 정확히는 멸망의 조각.'

내 심장에 위치한 멸망의 조각을 저들은 묘한 눈길로 바라보는 중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또한.

'멸망의 조각은 별이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은, 멸망의 조각이 바로 '별'이라는 것이었다.

별 계승자로 내가 보유한 별은 본래 2개였다.

그런데 갑자기 3개로 늘어났다.

멸망의 조각을, 별 계승자 클래스가 '별'로 인식한 것이다.

'별은 조각난 신의 육체일진대.

그럼 멸망의 조각은 멸망의 신체라는 건가?'

작게 턱을 쓸었다.

그러다가 작게 웃고 말았다.

"너희도 보고 싶은 거냐?'

심연의 지배자들이 '멸망의 조각'을 바라보는 이유.

그들도 궁금한 건 아닐는지.

하여, 보여주기로 했다.

나 역시도 궁금했으니까.

"대식가가 발동합니다!"

"'바알의 핵(멸망의 조각)'이 발현합니다!"

쫘아아악!

신체가 변형하기 시작했다.

"'대식가' 특성이 '어둠을 피우는 자'로 진화를 완료했습니다."

시체 까마귀와는 전혀 다른, 보다 완전한 형태로.

동시에.

쩌억. 쩌어억.

심연의 지배자들이, 동공을 확대하며 '어둠을 피우는 자'를 맞이하였다.

대참사

영웅연합.

박태우에게 있어서 지난 한 달여 간은, 그야말로 질곡(桎梏)의 시간이었다.

죄책감에 제대로 잠도 못 이룰 만큼.

'김하나 기자가 가져다준 일기. 이 일기엔 매일 새로운 내용이 적히고 있다.'

우도까지 병력을 물리라는 정부를 상대로, 박태우는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김하나 기자와의 접선 이후 그녀가 가져다준 책.

그 책에 매일 새롭게 적히는 내용 때문이었다.

박태우는 벌써 천 번도 넘게 본 그 책을 펼쳤다.

벌써 30일을 넘어 매일같이 적혀있는 내용.

그중 마지막 장에 적힌 '일기'를 박태우는 바라봤다.

[38일 차]

사람들이 조금씩 미쳐간다.

제대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사람들이 아사하기 시작했다.

그 시체를 먹으면 안 되느냐고 아우성치는 자들도 생겨나고 있다.

죽은 사람보단 산 사람이 먼저 아니냐며.

전사들도 다를 바 없었다.

힘을 가진 그들은 그라시아의 지배를 못마땅해하며, 몇몇은 나눠준 식량을 뒤로 몰래 갈취하고 있었다.

··· 모두가 미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검은 알'에 더욱 의존했다.

저 알이 깨지는 날 구원이 있으리라고.

"······."

박태우는 눈에 힘을 주고 특정 단어들을 복기했다.

그라시아. 시체. 그리고 검은 알.

그저 지어낸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정황들.

'김하나 기자의 말대로, 이 일기장은 저 심연 속에서 누군가가 매일 적고 있는 내용이다.'

책의 정체에 대해 전해 듣길, 저 안의 누군가가 적는 일기장과 이 책이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심연에서 일기를 쓰는 대상은 전혀 이 사실을 모른다고.

··· 소설로 치부하기엔 일기장의 내용이 굉장히 상세했다.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주를 이뤘으니까.

하지만 정부가 이런 판타지 소설 같은 내용을 신뢰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마스터'의 말에 신빙성을 더 높게 쳐줬다.

하여, 박태우는 그저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는 중이었다.

'마스터. 그 새끼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바람에······.'

빠드득!

박태우는 이를 갈았다.

영웅이라 거들먹거리는 마스터는 소시오패스고, 기회주의자다.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놈이 전면에 나서서 '제주도 소실'에 힘을 실어주는 건, 그라시아의 자리를 자신이 대체할 작정으로 하는 짓이리라.

놈의 의도가 뻔히 보인다.

적어도 영웅연합과 마스터는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 내가 힘이 없어서.'

모두 그가, 한국의 연합이 없어서 생긴 일이다.

만약 박태우가 힘이 있었다면 마스터가 감히 한국의 제주도를 운운하며 '포기하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판게니아에서 제대로된 도시 하나만 있었어도 연합의 힘이 몇 배는 커졌을진대.

쿠릉!

그때였다.

"여, 연합장님! 장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검은 영역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

큰 소란과 함께 박태우 역시도 보았다.

검은 영역이 걷히며, 제주도가 다시 나타나고 있는 모습을.

지잉.

지이이잉.

풍덩!

······ 허공에 나타난 수많은 워프.

그들중 몇몇은 제주도 도내에 안착했지만, 몇몇은 바다에 빠지고 있었다.

"어푸! 어푸!"

"사, 살려주세요!"

그들을 보곤 박태우가 빠르게 명했다.

"모든 배를 가까이 대고 사람들을 구조해라! 연합원도 전원 지체하지 말고 나서도록!"

그 말을 남기곤 박태우는 즉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