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아가씨의 마음은 정말 모질구나
진운서를 보자 거칠게 치솟던 기세가 시들어버린 나물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부 안의 모든 사람은 주 유모가 대원의 실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가씨가 왔으니 틀림없이 주 유모의 편을 들어줄 게 분명했다.
왕 집사의 낯빛이 흐려졌다.
‘이대로 일을 그만두고 진부에서 쫓겨나게 되는 걸까? 이를 어째, 집에는 아픈 아들이 있는데…….’
“아, 큰아가씨 오셨습니까? 어제 궁중 연회는 아주 성대했지요?”
주 유모는 왕 집사의 무거운 얼굴과 대비될 만큼 주름이 잡히도록 환하게 웃으며, 진운서에게 우선 연회가 어땠는지를 물었다. 그러다가 이내 화제를 돌렸다.
“큰아가씨, 보셨지요? 이 무지막지한 놈이 아가씨가 없는 틈을 타 저를 손 봐주려 했습니다!”
진운서는 아무런 말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왕 집사를 쳐다보았다.
“왕 집사, 네가 말해보아라.”
그녀의 냉담한 눈빛에 위축된 왕 집사가 즉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아가씨, 소인이 어찌 감히 주 유모를 괴롭히겠습니까? 다만 부의 규칙에 따르면 월은(*月銀: 월마다 받는 돈, 월급)을 선지급하려면 반드시 주인의 동의서가 필요하기에 거절했을 뿐입니다.”
진운서가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집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 유모가 나서서 고함을 질렀다.
“네놈도 큰아가씨가 내 주인임을 알잖느냐. 내가 부탁드리는데,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실 것 같으냐?”
월은의 선지급은 물론, 주 유모가 무슨 물건이 좋아 보인다는 말만 꺼내도 그걸 당장 내어주는 사람이 바로 큰아가씨였다.
부 전체, 심지어 이방(二房)조차 주 유모와 공공연히 맞서지 못했다. 그런데 왕 집사 따위가 어찌 조금도 그녀의 눈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주 유모는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왕 집사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 지 채 3초도 지나지 않아, 곁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더러 동의하리라는 것이냐?”
진운서의 말 한마디에 오만하던 주 유모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 왕 집사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큰아가씨께서 그새 성정이 바뀌셨나?’
두 사람이 놀라고 있을 때, 진운서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대원 사람의 일이니, 이 일은 내가 결정하겠다. 왕 집사, 장부를 대원으로 가져와 주 유모의 모든 지출을 고하게.”
그 말이 떨어지자 주 유모는 가슴이 떨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만약 아가씨가 그 일을 알아내기라도 한다면…….’
주 유모가 얼른 낯빛을 바꾸고 알랑거렸다.
“큰아가씨, 아가씨께서 선지급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소인도 받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왜 소인을 조사하려 하시는지요? 아가씨, 피곤해 보이십니다. 아가씨가 가장 좋아하는 연자갱을 만들어 올릴까요?”
확실히 연자갱은 진운서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도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혐오하고 있었다.
“진시(*辰時: 오전 7시~ 오전 9시)가 지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느냐. 나는 아주 쌩쌩하니, 모두 나를 따라 대청으로 오거라.”
말을 마친 진운서가 곧 발을 뻗어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온몸에 서린 위엄과 확고한 말투를 보니, 주 유모는 더 이상 아가씨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주 유모는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만약 그 일이 밝혀진다면……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녀가 한 일은 아주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으며, 일을 함에 있어 본명 또한 밝히지 않았었다. 하물며 그녀는 돈을 훔치지도 않았고, 모두 공명정대하게 얻어낸 것이었다.
나중에 자신의 돈을 채워 넣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만일 제 잘못이 드러난다고 해도, 기껏해야 야단 몇 마디를 듣는 일로 끝날 것이다.
‘방금은 큰아가씨께서 분명 무심코 하신 말씀일 게야. 우리 사이가 이렇게 가까운데, 어찌 나를 의심하고 나한테 칼을 겨누실 수 있겠어?
이따 대원을 나서서 몇 가지 요리를 만들어다가 아가씨를 살살 달래면 은자가 콸콸 쏟아져 나오겠지. 그때 다시 한 방을 노리면 돼. 원금이 있으면 이자가 붙어 올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주 유모는 완전히 마음이 놓여, 웃는 얼굴을 하곤 대청으로 향했다.
* * *
널찍하고 환한 대청의 앞뜰에는 푸른 녹나무가 가지런히 심어 있었다. 홍목을 정교하게 조각해 만든 난간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이 닦여 새것처럼 번쩍였다.
홍목 의자에 단정히 앉은 진운서의 눈동자에선 무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듯 주저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류의는 아가씨의 눈에서 드러나는 묘한 기류를 눈치채곤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가씨는 오늘 너무도 이상했다. 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늘 너무 이상하셔.’
그때, 왕 집사가 들어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린 후, 가지고 온 장부를 진운서에게 내밀었다.
진운서가 그것을 받아 책장을 넘기자, 주 유모가 그제야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와 태연한 표정으로 웃었다.
“큰아가씨. 다 늙은 소인이 은자에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주 유모가 웃으며 말을 이으려던 그 순간, 엄숙함을 머금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 그러자 주 유모는 이유 없이 당황스러워져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직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큰아가씨를 대충 속여 넘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탁!
홍목으로 만든 탁자 위에 장부가 매섭게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진운서의 행동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진운서는 얼굴 가득 엄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 온화하던 눈동자가 덩달아 날카로워져서, 그녀의 나이를 뛰어넘는 당당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주 유모, 매달 평균 서른 냥의 은전을 쓰는군. 대체 이렇게 많은 은자가 어디서 난 것이냐?”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커지며 성난 기색이 더해졌다.
깜짝 놀라 멍하니 입만 벙긋거리던 주 유모가 당황한 듯 말했다.
“소, 소인은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는데요.”
서른 냥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설사 그녀가 노름판에서 돈을 좀 잃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많은 은자를 쓰지는 않았다!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주 유모가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큰아가씨, 소인은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이지…….”
하지만 진운서는 그녀에게 해명할 기회를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 명백한 증거가 있지 않느냐. 모두 장부에 똑똑히 적혀 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류의를 바라보았다.
“류의야, 사동을 몇 명 데리고 전당포에 다녀오렴.”
갑작스레 이름이 불린 류의는 어리둥절했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고 얼른 예를 올렸다.
“예, 소인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전당포에 다녀오라는 말을 들은 주 유모는 더욱 당황하여 얼른 밖으로 뛰어나간 류의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아가씨, 어디서 소인을 모략하는 말을 들으신 것입니까? 이 노인네는 아가씨가 커오는 걸 지켜봤습니다. 아가씨께 지극히 충직하단 말입니다!”
순식간에 주 유모의 울음소리가 더욱 서글퍼졌다. 악독한 주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노비처럼,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리 서글프게 울면서도 주 유모는 류의를 붙잡고 있는 손에서 조금도 힘을 풀지 않은 채 계속 버티고 있었다.
옆에 있던 왕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장부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이곳에서 오직 그만이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주 유모의 씀씀이가 헤프기는 하지만 매달 지출액은 납득가는 범위 안에 있었는데, 언제 서른 냥이나 되는 은자를 썼단 말인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는 큰아가씨가 일부러 주 유모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큰아가씨께선 주 유모를 아주 중시하시는데, 그럴 리가…….’
“주 유모,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너는 부 밖에서 있던 일에 대해 언제까지 나를 속일 작정이었느냐?”
이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킨 진운서가 느린 걸음으로 주 유모의 곁에 다가갔다.
그러자 눈물 콧물을 뚝뚝 흘려가며 서럽게 울던 주 유모가 깜짝 놀라 멍해졌다. 노름 빚에 대한 얘기가 큰아가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단 말인가?
“진부는 가풍이 엄격하니 노름이나 하고 다니는 이를 데리고 있을 수 없구나. 왕 집사, 사람을 보내 주 유모를 팔아버리거라.”
팔아버리라는 말이 나오자, 왕 집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팔아…… 버리라니요?”
무릎을 꿇고 있던 주 유모는 바로 울음을 멈추고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류의를 붙잡던 손을 놓고 서둘러 진운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큰아가씨, 대체 이 노인네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이렇게 모질게 구시는 겁니까? 소인은 아가씨가 자라는 걸 다 보아온 사람입니다. 소인에게 이러실 수는 없어요!”
주 유모는 이런 대갓집에서만 몇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었으니, 그런 그녀를 다른 곳에 팔아버리라는 건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팔리게 되면 천비(*賤婢: 창기, 병사 따위의 하층 노비)가 된다. 천비에 대한 대우는 무척 좋지 않기에, 주 유모처럼 나이가 많은 이는 결코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 유모는 더욱 끈질기게 애걸하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소인을 이렇게 대하시는 걸 돌아가신 대부인께서 아신다면, 지하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진운서는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대부인의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것이다.”
진부가 평온하려면 내원이 먼저 안정되어야 했다. 진운서는 사심을 품은 간교한 노파를 단호히 쫓아낼 생각이었다.
‘전생에서 했던 그 고생을 현생에서까지 되풀이할 수는 없지!’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알아챈 주 유모는 두 손을 거세게 움켜쥐곤, 진운서의 앞에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쿵쿵쿵-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주 유모가 계속해서 거칠게 이마를 찧어대자, 그녀의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으며 말하는 목소리마저 갈라졌다.
“아가씨께서는 어릴 적에 몸이 약하셨기에, 소인은 매일매일 약으로 밥을 지었습니다. 한창 추운 섣달에도 쉬지 않고 약선을 만드느라 무릎에 고질병마저 들었지요. 아가씨께선 다 자라셨으니 이젠 이 노인네가 쓸모없어지신 게로군요.”
진운서는 주 유모의 애처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약 전생을 겪고 나서 다시 이 시기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면, 그녀도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듣기 좋은 말 속에 항상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을 인자하게 대해주면 결국 자신에게 잔혹한 결과가 찾아올 게 틀림없었다.
가볍게 웃은 진운서는 별다른 대답 없이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람들을 불러 처리하거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 유모는 머리를 찧던 행동을 멈추고 눈시울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렇게 독한 여인에게 어떤 사내가 감히 장가를 오겠습니까? 소인을 이렇게 대하셨으니, 나중에 죽어 대부인께 가서라도 반드시 고할 겁니다!”
주 유모는 이렇게 소리치더니 주인과 노비 간의 예법도 잊은 채 진운서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러자 왕 집사와 류의가 얼른 달려와 그녀를 끌고 내려갔다.
진운서는 평소와 같이 평온한 얼굴로 조용히 주 유모가 끌려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 유모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녀가 내지른 고함만은 여전히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