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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친밀한 행동



4화 친밀한 행동

말수가 없어진 4황자는 이운을 데리고 유유히 석가산으로 향했다. 앞에 복잡한 옥석 노면(路面)이 드리워지면, 4황자는 이운을 가만히 오른쪽 길로 이끌 뿐이었다.

이운 또한, 경솔히 입을 떼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런 모습이 이 육신의 원래 모습이라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두 사람이 길을 건너자, 중년의 여인이 급하게 다가왔다. 이운을 보자 화색이 돌던 여인은 돌연 4황자 앞에서는 낯빛이 흐려졌다. 하지만 여인은 표정을 숨긴 채 두 사람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4황자와 천월 아가씨께 소인 인사 올리옵나이다. 황후마마께서 천월 아가씨가 여태 정원에 오지 않으시니, 소인더러 이리 찾아보라 명 하셨습니다.”

이운은 순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대신 4황자에게서 웃음기가 배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마마마의 마음을 얻기엔, 이 아들은 아직 질녀(姪女)보다 한참 모자란 가보구나. 손 상궁이 이리 직접 월 누이를 찾아온 것을 보니, 어마마마께서는 어째 갈수록 월 누이만 더 총애하는 것 같네. 어마마마께서 내가 가는 건 몰랐다 하던가? 어째서 내겐 사람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지?”

“4황자마마, 다소 착오가 있으신 것 같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진작 황자마마께 하인들을 보냈지만, 황자마마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월 아가씨가 입궁하셨다는 전갈을 받았사온데 아직도 정원에 도착하지 않으셨다 하니, 황후마마께서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하여 소인을 보낸 것이옵니다.”

손 상궁은 허리를 곧게 펴, 곧은 음성으로 이야기 했다.

“그런 거였어. 감히 어마마마를 오해하다니 내가 불효를 했다. 내 방금 월 누이를 만났는데 우리도 마침 그리로 가는 길이니, 상궁이 먼저 가서 어마마마께 고해주게.”

“알겠사옵니다.”

4황자가 손 상궁에게 분부를 내리자, 손 상궁은 이운을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뒤 돌아 걸음을 옮겼다. 4황자는 전혀 급하지 않다는 듯 더욱 여유로운 걸음으로 이운과 함께 천천히 길을 거닐기 시작했다.

이운은 방금 얻은 정보를 흡수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 몸의 주인은 황후의 질녀였다. 방금 전, 손 상궁의 표정을 읽었던 이운은 4황자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한껏 힘을 주었다. 그러나 4황자는 더욱 손을 꽉 쥐며 이운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쨌든 볼 사람들은 이미 다 보았을 것이다. 이제와 수습하려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 *

한참을 걸어가니 궁녀와 환관들이 점점 많이 보였다. 두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자, 그들은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운은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그들의 눈빛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운의 신경은 눈앞에 보이는 호수에 머물러 있었다. 이운이 막 깨어났을 때 보았던 호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의 거대한 호수였다.

호수 한가운데엔 정자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엔 수십 명의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내와 여자라는 것 외엔 생김새까지 또렷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두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곳이 바로 문학회가 열리는 장소인 것 같았다.

생각에 잠긴 이운의 허리에 4황자의 손이 와 닿았다. 이운의 허리를 감싼 4황자는 그녀가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4황자는 다리를 밟지 않았다. 마치 잠자리가 살포시 날아들 듯, 4황자는 이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잔잔한 호수 위를 날았다.

이운은 깜짝 놀랐다. 어지러울 새도 없이 이미 호수 건너편에 도착해 있었다.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시간 보다 찰나인 것 같았다. 굳이 건너온 호수를 살펴 볼 필요도 없었다. 조금 전 4황자가 선보인 건 언젠가 무협드라마에서 봤던, 물 위를 걷는 경공(輕功)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이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4황자를 쳐다보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놀랐잖아요.”

이내 4황자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어떻게 내가 감히 월 누이를 놀라게 하겠어. 누이의 경공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데! 나는 그저 배운 걸 한 번 써 본 것뿐이다. 누이에게 보여주려고.”

순간 이운은 자신도 경공을 할 수 있다는 소식에 매우 기뻤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황자마마께서 또 무엇으로 절 농락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억울하군. 감히 내가 어떻게 월 누이를 농락하겠어?”

4황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이운의 허리에 감은 손을 풀진 않았다. 너무도 가까운 접촉이었지만 그는 태연했다.

이운은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살짝 구겼다. 이미 수십 명의 시선이 자신과 4황자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낀 이운은 더욱 침착하려 애쓰며 불편한 기색을 또렷이 드러냈다.

상식적으로 이런 시대에, 혼인도 하지 않은 젊은 여인이 사내와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처사 같았다. 특히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4황자 역시 그 점을 모르지 않을 리 분명한데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의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이런 수작을 부리는 이유가 뭘까?

역시나 4황자가 말을 마친 순간 상석 쪽에서 작은 기침 소리와 함께 온후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침착하게 4황자를 타이르는 목소리였다.

“욱아, 너는 어찌 갈수록 장난이 심해지는구나. 얼른 월 누이를 놓아주어라. 누이가 놀라지 않았느냐.”

“어마마마, 월 누이의 담력이 얼마나 큰지 모르십니까? 대체 그 어느 누가 감히 월 누이를 놀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마마마께서는 어찌 월 누이만 편애하시고 정작 친 아들인 제겐 어찌 이리 나무라시는 것입니까.”

4황자는 여유롭게 웃으며 이운의 허리와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황후 좌측에 앉은 노란색 옷차림의 사내를 힐긋 바라보더니, 깊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월 누이를 정말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합니다! 누군가의 괴롭힘 때문에 감히 호수정원에 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홀로 상심을 달래던 월 누이의 모습은 실로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운이 뭔가를 느낀 듯 4황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황후의 좌측에는 약관이 갓 넘어 보이는 젊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는 황후의 붉은 옷을 제외하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밝은 노란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이운은 그 사내를 힐긋 바라보다 곧장 시선을 옮겼다. 그가 바로 오늘만 해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태자전하라는 칭호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금세 짐작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훈련과 더불어 사람을 부려온 경험이 방대했던 이운은 직감했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저 태자전하라는 이를 절대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차올랐다.

형제라 그런지 태자와 4황자의 이목구비는 상당히 닮아 있었지만 태자는 4황자보단 조금 더 위엄이 있어 보였다. 아마도 권력의 정점에 앉아있는 자의 여유로움에서 비롯된 걸까.

깊은 눈의 그는, 입고 있는 옷의 색상과 상당히 잘 어울려 보였다. 어쩌면 세상에서 그보다 더 그 색에 어울리는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특히 그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무표정과 황금 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귀한 빛은, 그를 더욱 비할 데 없는 고귀함과 권위로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운은 문득, 곁눈에 비친 광경에 피식 웃었다. 이곳에 있는 화려한 차림새의 여인들은 모두 태자에게 홀딱 빠진 듯 너나 할 것 없이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이곳에 건너온 후부터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입만 열면 태자전하, 태자전하, 하더니. 태자에겐 사람을 홀리게 하는 마력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4황자의 말에 호수정원은 순간 적막에 잠겼다. 수십 명의 사람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 같았다.

황후는 그 말을 듣고 곁에 엄숙히 앉아있는 태자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는 무표정에 다시 4황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4황자 또한, 내내 웃음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은 좀체 읽어낼 수가 없었다. 황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천월에게로 시선을 굳힌 채, 천월을 향해 손짓하며 웃었다.

“그래? 월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해 이 호수정원에도 오기 싫어했다? 자, 월아 이 고모한테 오거라. 어느 누가 괴롭혔는지 말해 보아라. 그 어떤 대담한 자가 감히 이 황궁에서 우리 월이를 괴롭혔는지 내 한 번 봐야겠구나.”

황후의 말에 몇몇 여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황후가 이렇게나 거침없이 말할 것이라곤 이운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묻지도 않은 채, 이운이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게 곧장 복수하고 싶어 할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이운은 고민했다. 황후의 말이 정말 자신을 돕기 위한 의중이었는지, 아니면 혹여 다른 의도를 품고 하는 말이었는지 좀체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이 도성은 그렇게 크다고 할 순 없었으며, 지금 이 문학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각자의 세력을 대표하는 귀족의 자제들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튀는 행동을 해봤자 질시와 원망의 대상이 될 것은 자명했다.

훤히 드러나는 곳에서야 모두 황후를 두려워한다 하더라도,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예컨대, 오늘 일도 그랬다. 만약 이 몸의 진짜 주인이 죽지 않았다면 이운이 이 여인의 몸을 입고 다른 세상에 태어날 리도 없고, 이곳에 버젓이 나타났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들은 앞에선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있다가도, 언제든 다른 모략을 품을 수도 있는 자들이었다.

“별일 아니니 괜찮습니다. 황후마마께서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결국 이운은 담담한 길을 택했다.

“흠,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구나. 나를 고모라고도 부르지 않는 걸 보니.”

평소완 다른 그녀의 태도에 놀란 황후가 힐긋 시선을 돌려 다른 이들에게로 향했다. 하얗게 질려가는 청완 공주와 몇몇 여인들을 바라보던 황후가 이내 살짝 웃으며 낮은 음성을 냈다.

“말해 보아라, 두려워할 것 없어. 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난 그저 어느 누가 감히 내 질녀를 괴롭힐 만큼의 용기를 가지고 있는 건지 알고 싶을 뿐이다.”

낭랑하고 힘 있는 말이었다. 황후는 정말로 천월에게 모든 결정을 맡길 생각인 것 같았다.

별일 아니었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한시름을 놓았던 여인들의 얼굴이, 황후의 말에 또 다시 하얀색으로 질려가고 있었다.

“그래, 월 누이, 어마마마께서 누이에게 결정권을 주겠다 하시잖아. 누가 누이를 괴롭혔는지 말해봐. 어마마마가 계신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누이를 괴롭힌 그 하늘 높은 줄 모를 이들을 어마마마께서 필히 벌해주실 거야.”

곁에 있던 4황자가 황후의 말을 거들며, 곱지 않은 시선 속에 몇몇 여인들을 담아 한껏 노려보고 있었다.

이운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을 고민했다.

여기가 어디던가? 여긴 황궁이었다. 과거의 황궁은 파리 한 마리조차 숨길 수 없다고 알아왔는데, 황후가 어찌 방금 있었던 일을 모를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호수정원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쏟아지던 매서운 시선들은 아직 기억에 선명히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