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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며느리 바라기

7화. 며느리 바라기

시혁이 영서를 돌아보며 물었다.

“방 키 있습니까?”

난감한 표정의 영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긴 있는데, 방 안에 있어요.”

시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3분 줄게. 나오지 않으면 다시는 여기 못 올 줄 알아.”

그러나 3분이 지나도록 방 안에서는 인기척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나오라니까! 아빠가 나서게 되면 결코 좋은 말이 안 나올 텐데?”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민우는 계속해서 시혁의 체면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곁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영서 또한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심정이었다.

“저도 좀 있다가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긴 해요. 그때까지 아이를 여기 남게 해서, 조금 더 놀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 말에 시혁이 난색을 표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 화면을 힐긋 엿보니 그는 아마도 정신과 의사에게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이런 일로 정신과 의사에게까지 전화를 하다니. 영서는 그가 작은 일을 오히려 더 크게 만드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제가 한 번 해볼까요?”

잠시 머뭇거리던 시혁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영서는 침실 문에 딱 달라붙어서 부드러운 말투로 민우를 어르기 시작했다.

“꼬마야, 누나도 조금 있다가 출근해야 해서 너를 돌봐줄 수가 없어. 일단 아빠랑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문 안쪽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할까? 언제든 연락할 수 있게 우리 번호 교환하자. 나랑 영상통화도 할 수 있잖아!”

순간 방 안에서 주저하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회사 지각하면 감독님이 엄청 혼낼 거야. 무서운 감독님한테 혼나면 불쌍한 누나는, 흑흑흑⋯⋯.”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문이 열렸다.

오랜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시혁의 눈은 휘둥그렇게 떠졌다가 이내 복잡한 빛을 띠었다.

영서는 단 세 번 만에 민우를 달래는 데 성공했다.

지난번에도 민우는 다락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온 가족과 집사, 메이드, 정신과 의사, 심지어는 협상 전문가까지 대동해 입술이 닳도록 어르고 달랬는데도 아무런 소득이 없어, 결국 문을 뜯어내었다. 민우는 그 후로 무려 한 달간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려 하지 않았었다.

당연히 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영서는 민우를 마냥 귀여워하며, 낙담한 표정의 민우를 끌어안고 마구 칭찬했다.

“오구구, 정말 착하다. 고마워!”

칭찬받은 민우는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표정으로 영서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일련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어, 이게 네 번호야? 좋아, 누나가 꼭 저장해 놓고 일 끝나는 대로 전화할게!”

시혁은 약간 의아했다.

‘우리 민우는 핸드폰이 없는데, 어디서 난 번호지?’

이내 시혁이 우월한 키를 이용해 힐긋 내려다보니, 종이에 적혀 있는 건 다름 아닌 그의 번호였다.

‘잘했다. 역시 내 아들이야!’

* * *

스타라이트 엔터, 사무실 안.

상희는 죽상을 하고 있었다.

“한영서가 서브 여주 배역을 따냈어!”

“서브 여주?”

새론의 미간이 팩 구겨졌다.

“그 오디션 있을 때, 이상한 삼류영화 촬영하고 있던 중 아니었어? 서브 여주 오디션을 언제 봤던 거지?”

“나도 몰랐어. 그런데 어제 여주 오디션 마치고 나가려는 심사위원들 앞에 한영서가 나타났다는 거야. 그 애가 서브 여주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단박에 픽스했다는 거 있지? 네가 그 애에 대해 그렇게 신경 쓰는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집요할 줄이야. 오디션이 끝난 뒤에 심사위원 앞에 어슬렁거려서 배역을 따낼 줄 누가 알았겠어!”

상희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영서의 외모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으니 심사위원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한 것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한영서를 제대로 키워보려 했었다. 갑자기 나타난 한새론에게 시선이 돌려지기는 했지만.

빽도 없고 힘도 없는 생짜 신인과 집안도 빵빵하고 배경도 든든한 유명인 둘을 놓고 비교할 때 전자를 고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연예계도 예쁜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고는 해도 그 작품, 진짜 대작이잖아!”

새론의 낯빛이 굉장히 어두워졌다. 영서가 주인공이 아닌 서브 역할을 맡은 것도 못마땅한 게 분명했다. 난처해진 상희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좀 골치 아프겠다. 회사에서도 그 작품에 많은 돈을 투자했으니까, 여주랑 서브 여주 둘 다 우리 회사 소속 배우로 낙점된 것에 대해 사장님이 굉장히 기뻐하실 거야. 우리 회사에 한영서보다 더 적절한 배우가 있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번 오디션에서 전부 떨어졌으니, 이제 와서 한영서를 갈아치울 수도 없고⋯⋯.”

새론은 무슨 생각이라도 떠올렸는지 갑자기 차분해져서는 정리가 잘 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됐어. 그렇게 음탕하고 여우같은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면, 그러라고 해! 망국의 근원인 요녀 역할, 잘 어울리네!”

* * *

영서는 상희에게 <천하>의 서브 여주로 확정이 났으니, 잘 준비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천하>의 여주인공은 공명정대하고 총명하며 용감하여 남자 주인공이 제왕의 자리에 오르도록 보필하는 역할이었다. 그에 반해 서브 여주인공은 망국의 근원인 인물로, 각종 음험한 수단을 쓰다가 결국 여자 주인공에 의해 바위에서 낙사하며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역할이었다.

새론이 이 상황에 대해 관대하게 군것은 다 이런 인물 설정 때문이었다.

<천하>의 서브 여주를 따내긴 했지만 영서에게는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다른 작품에서 남편을 빼앗은 셋째 부인을 연기하고 있는 영서는, 오늘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흠씬 얻어맞는 신을 촬영해야 했다.

그러나 이 5분가량의 장면을 위한 실제 촬영 시간은 두세 시간에 달했다. 왜냐하면 영서를 둘러싼 단역들은 대부분 경험이 없는 신인들이라 표정과 동작이 모두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영서는 계속해서 맞고 또 맞는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영서는 습관적으로 TV를 켠 뒤 피곤에 절은 몸을 소파에 뉘었다. 잠시 누워있으려니 뭔가 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 뉴스가 방영되고 있는 TV에서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잘생긴 얼굴, 넓은 어깨, 긴 다리⋯⋯. 민우의 아빠 유시혁이었다.

그는 어떤 계약을 위한 회의에 참가한 듯 몇몇 외국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앵커는 약간 고조된 말투로 대유그룹이 이탈리아 DR브랜드와의 제휴 협정에 성공했고, 유럽 시장에 진출하게 된 대유그룹의 시장 가치는 두 배로 뛸 것으로 예측된다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었다.

그 화면을 멍하니 보던 영서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민우와 통화하기로 했던 아침의 그 약속을.

* * *

플래티넘빌.

외국에서 돌아온 시혁의 부모님까지, 총 다섯 명의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3년 동안 기획한 계약이 마침내 달성되었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시혁의 아버지는 시혁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지훈에게까지도 칭찬을 건넸다. 하지만 말의 주요 골자는 그 뒤에 있었다.

“시혁아, 일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민우에게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바쁜 일도 마무리 되었으니,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민우랑 함께 해야 해!”

“시간이 없다면 너 대신 민우를 돌봐줄 사람이라도 들여야지. 우리 민우도 저만큼 컸으니 네 사정을 이해해 줄 거다.”

“너희 엄마 말이 백번 옳아!”

‘이런, 우리 엄마 아빠가 또 시작이시군.’

지훈이 힐끔 시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시혁은 쏟아지는 목소리에도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점점 공기가 무거운 고요로 가라앉았다.

한편 민우는 핸드폰을 꼭 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목석처럼 아무런 반응 없는 두 부자 탓에 노부부는 조바심으로 애가 탔다.

“시혁아,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거냐? 그리고 우리 민우는 왜 저러는 거냐? 저녁도 한 입 먹지 않고 핸드폰만 쥐고 있구나!”

지훈은 탕수 갈비를 문 입으로 우물거리며 말했다.

“우리 꼬맹이, 예쁜 누나 전화 기다려요!”

시혁의 어머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예쁜 누나라니, 누구?”

“어머니, 조바심 낼 것 없어요. 형한테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그게 정말이니? 지훈아,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시혁의 어머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시혁의 아버지 역시 젓가락을 탁 내려놓더니, 추궁하는 듯한 시선으로 지훈을 지그시 응시했다.

“제가 거짓말을 왜 해요. 완전 팩트만 말씀드리는 거죠. 믿기지 않으신다면 형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시혁아, 지훈이 말이 사실이냐?”

시혁의 아버지가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아들. 뭐라고 말 좀 해 보렴!”

연이어 어머니의 애 끓는 재촉이 더해지자 마침내 시혁이 입을 열었다.

“네.”

그 짧고도 간결한 답에 어머니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답을 듣는 순간, 뱃속에 불이 이는 느낌이었다.

“녀석, 좀 더 자세히 말해줘봐. 말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입이 무거워!”

“정말이에요.”

“⋯⋯.”

성실한 한 마디에 노부부는 다시 말을 잃었다. 그래, 어쨌든 한마디 더 했다 이거지. 시혁의 어머니는 그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는 듯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시혁아,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 여자니, 남자니?”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진 시혁은 이를 악문 채로 다시 짧게 답했다.

“여자예요.”

그러자 지훈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정도로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여자죠. 게다가 무지 예뻐요! 우리 꼬맹이도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지금도 그 여자 전화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시혁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조상님께서 역시 우리를 보필해주시고 계셨구나! 시혁아, 어느 집 아가씨니? 나이랑 직업은? 가족관계는 어떻게 돼? 우리한테 일절 가르쳐 주지도 않고⋯⋯.”

길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지훈이 황급히 가로막았다.

“엄마, 좀 진정하세요! 아직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거 얘기하지 않은 것도 다 엄마가 먼저 나서서 난리칠까봐 그러는 거 아니에요!”

부모님이 한영서에 대해 알게 된다면, 더군다나 그녀의 평판이 업계에서 딱히 좋지 않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린다면, 일이 분명 어긋나게 되리란 걸 지훈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잠자코 있던 시혁의 아버지가 말을 보탰다.

“시혁이가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이라면 괜찮은 사람이겠지. 걱정하지 말자고.”

“어떻게 걱정 안 해요? 당신도 걱정하잖아요. 밤새 뒤척이면서 잠 못 든 게 누구고, 또 내내 발코니에 나가서 줄담배를 피운 게 누군데요?”

그러나 시혁의 어머니는 자비 없이 남편을 타박했다. 그래도 남편의 말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는지, 곧 그녀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요. 시혁이 눈이 높으니까 흠 같은 건 없는 아가씨겠죠. 게다가 우리 민우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어디 흔하던가!”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민우가 저녁 내내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혁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이내 지훈이 고개를 쑥 빼 핸드폰에 뜬 번호를 확인했다. 한영서의 전화였다.

“그 아가씨 전화니?”

어머니가 당장 며느리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몹시 감격해서 물었다.

지훈이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민우가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민우는 핸드폰을 다루는 데 영 서툴렀다. 이전에 시혁이 핸드폰을 사주기는 했었는데 몇 번 가지고 놀지도 않았고,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이 순간, 식탁에 둘러앉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민우의 손에 들린 핸드폰에 쏠렸다.

지훈은 심지어 핸드폰에 귀를 바짝 대고 통화 내용을 엿들으려 시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