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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결혼은 싫고?

6화. 결혼은 싫고?

방으로 들어와 자신의 침대 위에 누운 민우를 보고 있노라니 영서의 기분은 사뭇 묘해졌다. 어제 저녁부터 온통 예상을 벗어난 일들 투성이었다.

“얼른 자자.”

불을 끄고 침대 머리맡의 미등만 살짝 켜두었다. 하지만 아이의 말똥말똥한 눈엔 졸음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영서는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라도 해줘야 하나⋯⋯.

“난 아는 이야기가 없어. 노래를 불러줄까?”

민우가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영서는 민우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이듯 노래를 불렀다.

“춥고도 따스한 가을날, 당신 곁에 붙어 앉아 고요히 춤추는 빛을 바라보니. 바람에 날리는 붉은 나뭇잎, 끊임없이 내 마음을 흔드네. 취했는가 아닌가 하는 사이, 참으려 해도 눈웃음은 흐르고. 구름 속 흩날리는 눈발처럼, 당신의 뺨에 차갑고도 짜릿한 입맞춤을. 나의 마음은 계속해서 일렁대. 세상 속 수많은 사랑은 계속해서 변한다지만⋯⋯.” (*진숙화의 <유광비무>, 영화 <청사>의 주제가)

노래를 부르던 영서가 순간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하고 소리를 흐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움에 빠진 나’ 라는 가사를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어린 아이 앞에서 이런 노래를 불러줘도 되나?

“흠, 이 다음 가사는 잘 모르겠다. 다른 노래 불러줄게.”

민우는 귀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영서는 한참의 고민 끝에 겨우 동요를 떠올려 냈다.

“연못가의 즐거운 작은 개구리, 왕자가 몸에 들어온 것처럼 춤을 추지요. 멋있는 눈매, 어느 청개구리보다도 멋지죠. 언젠가는 공주님이 와서 깨워줄 거예요. 난 기적이 있다고 믿어요. 당신이 있으면 자신감도 커져요. 라라라라라⋯⋯.”

작은 개구리 노래를 세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민우의 숨소리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갑자기 영서는 싱글파파로 아이를 키우는 유시혁이 존경스러워졌다.

‘민우의 엄마는 누굴까? 어째서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낳아놓고 유시혁과 함께 살지 않는 거지? 신분의 차이로 결혼 허락을 받지 못한 건가? 아니면, 유시혁과 갈등이 있었던 건가?’

이런 저런 생각과 함께 영서도 점차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거실에서 옅게 들려오는 신음이 영서의 잠을 깨웠다.

눈을 뜨고 옆을 살펴보니, 민우는 푹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영서는 살금살금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갔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침실 문을 열고 나가자 물을 뒤집어쓴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시혁이 보였다.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는 그의 얼굴은 굉장히 창백했다. 그 모습에 영서가 다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유시혁씨,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아니, 배 아프신 거 아니에요?”

시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영서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 유시혁은 원래 매운 걸 잘 못 먹나 보다. 그런데 왜 굳이 먹으려고 한 거지?

“잠깐만요. 약 좀 가져다줄게요.”

다행히 집안엔 상비약으로 가지고 있는 약이 있었다.

“두 알 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영서의 손바닥에 시혁의 손가락이 살짝 스쳤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스치고 간 곳은 손바닥이 아니라 제 마음인 것 같았다. 순간, 영서의 마음에 바람이 일었다. 손끝이 스쳤을 뿐인데, 왜 갑자기 심장이 쿵쾅대는지. 영서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태연한 척 했다.

시혁이 약을 먹는 것을 확인하긴 했지만, 곧장 방으로 돌아가기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머뭇거리던 영서가 결국 시혁의 곁에 잠시 앉았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죄송해요, 매운 걸 못 드시는 줄도 모르고⋯⋯.”

사실 매운 걸 못 먹어서 탈이 날까봐 걱정된 것은 민우였었다. 그런데 아이는 멀쩡하고 오히려 애 아빠인 시혁이 탈이 나다니.

“괜찮습니다.”

한동안 길어지던 침묵을 깬 건 시혁이였다.

“오늘 저녁 실례를 무릅쓰고 불쑥 찾아온 건, 민우가 한영서씨를 보고 싶어 해서였습니다.”

뜻밖의 말에 영서가 되물었다.

“아이가 절 보고 싶어 했다고요?”

“창고에 갇혔을 때 많이 놀랐나 봅니다. 자신을 구해준 한영서씨에게 굉장히 의지하고 있는 것 같네요.”

시혁은 아들 민우가 곁에 있거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얼음 같이 냉랭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세상 누구보다도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차갑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말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군요⋯⋯.”

영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심이 허물어지기 좋은, 깊은 밤중이라 그럴까. 영서가 줄곧 품고 있기만 했던 질문을 꺼냈다.

“저……. 무례한 질문이라는 거 알지만, 아이는 말을 못 하는 건가요?”

오늘까지도 영서는 민우가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것만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어하는 겁니다.”

“심리적인 문제인가요?”

“그렇죠.”

“그렇구나⋯⋯.”

시혁은 고맙게도 불쾌한 기색 없이 숨기지 않고 답해 주었다. 영서의 추측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아이가 말을 하기 싫어할 정도로 큰 상처를 남긴 건지, 더는 묻지 못했다.

“한영서씨.”

영서를 향한 시혁의 눈빛은 맑고도 차가웠지만, 영서는 어째선지 그 눈빛에 타버릴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예?”

“우리 어디에서 본 적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다면 바람둥이, 그것도 구식 바람둥이의 전형적인 멘트라고 치부해 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한 이는 다름 아닌 유시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눈에선 의혹이 이토록 진실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유시혁씨 같은 분을 만난 적이 있다면,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죠. 그런데 왜요?”

영서의 말투는 꽤나 확신에 차 있었다. 혹시 한씨 집안의 딸로 살았던 시절, 정재계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유시혁 같은 사람을 잊을 리 없었다.

“아닙니다.”

시혁은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면 분위기가 점점 나빠질 것 같았다.

“유시혁씨,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으면, 전 이만 가서 자도 될까요?”

영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시혁은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손을 들었다.

“조금 더 앉아계시죠.”

그 말에 영서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꼭 혼나기 직전의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윽고 시혁이 한쪽 손으로 머리를 괸 채 물었다.

“제가 무섭습니까?”

한밤중의 시혁은 낮에 봤던 때보다 더 냉랭하고 위험해 보였다.

영서는 딸랑이처럼 고개를 젓다가 이내 살짝 끄덕였다.

“전국에서 유시혁씨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시혁은 물 컵을 쥔 가늘고 긴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느릿하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절 무서워해서 한영서씨도 절 무서워하는 겁니까? 그래도 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많은데, 한영서씨는 왜 저와 결혼하기 싫어하는 거죠?”

어이없고 충격적인 질문에 영서는 하마터면 아래로 고꾸라질 뻔했다. 이미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완벽하게 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천진한 바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이 얼토당토 않는 물음에 대체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 거지?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뭐 좀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왜 저죠? 설마 아이가 제게 의지해서인가요? 그게 오래 가는 감정일까요? 전 아닐 것 같거든요. 아이의 심리가 안정되고 나면, 더 이상 제게 의지하려 하지도 않을 거고⋯⋯. 만약 제게 계속해서 의지하려 한다 해도, 유시혁씨가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는 없죠.”

시혁이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영서와 눈을 맞췄다.

“한영서씨, 전 처음부터 똑똑히 말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만약 이해하지 못하셨다면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구해준 것에 대해 저와의 결혼으로 보답하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거잖아요!’

영서가 속으로 울다시피 외쳤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무슨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곧, 영서가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실었다.

“유시혁씨, 그 호의에는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실 전 비혼 주의자거든요. 그래서⋯⋯.”

시혁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럼, 저랑 자고만 싶다는 겁니까? 결혼은 싫고?”

“그것도 나쁘지는 않⋯⋯ 아니! 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죠!”

이제 영서는 울고 싶은 지경까지 이르렀다.

‘제발 그런 충격적인 말 좀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말아줄래요?’

“유감이지만 전 혼전 순결 주의자입니다.”

“어련하시겠어요⋯⋯.”

영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내 창밖을 바라보던 시혁의 얼굴엔 약간 쓸쓸한 표정이 걸려있었다.

“우리 꼬맹인……, 어느 날 하늘에서 선물처럼 보내주신 것이나 다름없죠. 전 사실 아이 엄마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아…….”

“아들이 있어서 꺼려지는 겁니까?”

시혁이 불쑥 물었다.

“그럴 리가요!”

유시혁과의 결혼이라면, 기꺼이 아이의 새엄마가 되고 싶다고 할 여자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유그룹의 유시혁인데, 아들이 있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그럼 왜죠?”

시혁은 아무래도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전까진 포기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영서는 이마를 짚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유시혁씨, 결혼은 애들 장난이 아니에요. 보답을 위해서든,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든 저희는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잖아요. 유시혁씨, 저 잘 아세요? 제 과거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제가 결혼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의 한영서씨입니다. 과거의 한영서씨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과감하고 패기가 넘치는 답이었다. 그러나 영서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굳어갔다.

“하지만 저한테는 과거의 저도 제 일부분이에요. 전 과거의 저를 떼어놓고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유시혁씨,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달리 하는 사람과는 서로 의논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진심으로 부탁하는데, 그런 황당한 생각은 제발 그만두세요.”

차가운 침묵이 이어졌다. 또 한 번의 거절에 화를 내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그때, 시혁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영서가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

“그럼 전 이제 들어가서 잘게요. 유시혁씨도 얼른 주무세요.”

낭창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혁의 눈빛은 깊은 바다처럼 가라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바다 깊숙한 곳의 작열하는 온도는 여전히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영서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깨어나 침실 밖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시혁이 전 날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깨운 겁니까?”

그제야 눈앞의 광경을 보게 된 영서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시혁이 상의를 걸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이 남자의 탄탄한 상체라니.

영서는 괜히 코를 만지작거리며 별다른 놀란 티를 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시혁은 영서의 미묘한 반응을 읽지 못했는지 덤덤하게 소파에 놓인 셔츠를 입고 단추를 채웠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애 좀 깨워주세요.”

“아, 네.”

영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얼른 민우를 깨우러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침실 쪽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이미 문가로 나와 눈을 비비고 있는 귀여운 피카츄가 보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자신의 아빠를 바라보고 있는 민우의 표정은 어쩐지 썩 밝지만은 않았다.

“민우야, 얼른 옷 갈아입자.”

외투까지 다 입고 난 시혁이 이야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쾅하고 닫히는 문소리뿐이었다.

시혁과 영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간 멈춰있었다. 이내 시혁이 침실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렸지만, 이미 안쪽에서 잠갔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