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형수님
영서가 시혁의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뽀얀 귀염둥이 민우가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침부터 창문에 기대어 영서를 기다린 것 같았다.
순식간에 아까의 찝찝한 기분이 날아간 영서는 평소처럼 민우에게 뽀뽀를 퍼부었다.
“민우 밥 먹었어? 나 기다리지 말고 밥 먹으라고 메시지 보냈는데, 말 잘 들었어?”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착해!”
영서는 민우에게 주는 상으로 민우의 볼에 또 뽀뽀했다.
“먼저 놀고 있어. 이모 올라가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올게!”
그 말에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 창문에서 아래의 광경을 바라보는 시혁의 얼굴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질투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시혁은 이제, 자기 아들 민우에게도 질투를 하게 되었다.
영서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들에게 뽀뽀를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시혁은 그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영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제일 먼저 브래지어를 벗었다.
‘이렇게 무더운 날, 이 답답한 걸 차는 건 정말 고문이야!’
손을 뻗어 뒤의 후크를 풀고 브래지어를 벗어 막 옷 밖으로 꺼내려던 차에, 영서의 방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렸다.
“한…….”
시혁은 말을 하려다 바로 굳어버렸다. 손은 여전히 방문을 잡고 있었고, 얼굴에는 경악이 어려 있었다.
* * *
영서도 어색한 자세로 몸이 굳었다. 브래지어를 옷 밖으로 잡아당기자니 그건 또 아니고, 다시 옷 안으로 집어넣자니 그것도 이상했다. 그야말로 민망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제일 민망한 건, 오늘 영서가 입은 브래지어의 무늬였다. 이 브래지어는 그녀가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으로, 양쪽에 삼각형의 슈퍼맨 로고가 새겨져 있어 멀리서 봐도 눈에 띄었다.
그 로고를 본 시혁은 양미간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신사답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문이 안 닫혔길래…….”
말을 마친 시혁이 방을 막 나서려고 할 때 영서가 소리쳤다.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문 닫는 걸 깜빡했어요!”
영서는 오히려 담담하게 브래지어를 잡아당겨 이불 속으로 집어넣더니,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아유, 정말 너무 덥네요!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런 고충을 절대 모를 거예요! 그, 그 무슨 일로 찾아왔죠?”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습니까? 약속 있었어요?”
시혁은 무심하게 물어보았다.
“약속은 무슨 약속!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그냥 몇 마디하고 온 것뿐이에요.”
영서는 다시 아까의 일이 생각나자 재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시혁은 영서의 반응을 보자, 자신이 우려했던 약속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 시혁의 굳은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밥 남겨 놨어요. 씻고 와서 밥 먹어요.”
“밥은 제가 차려 먹을 수도 있는데…….”
영서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숟가락 하나만 더 얹으면 되는 건데요.”
“음, 알겠어요.”
시혁이 방을 나가자, 영서는 재빨리 방문을 잠갔다.
잠시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결국,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영서는 다음부터는 반드시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샤워하고 밥을 먹은 후, 영서는 침대에 편하게 누워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민우는 책상에 엎드려 여느 때와 같이 책을 읽고 있었다.
[한새론 대중들 앞에서 재벌 2세 남자친구 밝혀, 조세진 현장에서 질투심 대 폭발]
[한새론, 후배 한영서의 미모와 실력 극찬]
[한영서 연예계 제일 미녀라 해도 손색없어, 가볍게 고청 눌러]
[<천하>제작발표회 현장, 명장희의 눈부신 미모(사진)]
[<천하>촬영 첫날, 한영서 재벌 2세 남자친구 현장 방문]
[떠오르는 신예 한영서의 부자 팬, 촬영 첫날 장미꽃 보내 세트장 도배시켜(사진)]
……
여기까진 인터넷 뉴스가 정상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점점 뒤로 갈수록 기사 내용이 이상해졌다. 뒤의 기사 내용은 전부 ‘한영서 스폰’, ‘한영서 배후의 물주는 누구인가?’, ‘한영서 남성 편력 심해’, ‘한영서 사생활 복잡해’ 등이었다.
영서는 촬영장에서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이런 기사를 봐도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진 않았다.
만약 강목원과 YS의 사건이 없었어도, 영서가 가진 이미지는 스캔들에 휩싸이기 쉬웠고, 이러한 사실을 영서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기사들은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어 모두 애매모호한 문구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정확한 증거도 없이 쓴 것이었다. 하지만 영서는 진짜든 가짜든 너무 많이 언급되어, 사람들이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을까 두려웠다.
“제 도움이 필요합니까?”
그때, 귓가에 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서는 노트북을 안고 일어나서 턱을 괴고 웃으며 말했다.
“유 사장님, 저 좀 잘되게 해주실래요?”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시혁은 영서와 민우에게 우유 한 잔씩을 건네며 말했다.
“영서 씨한테 준 우유는 저지방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서는 잔을 건네받았다.
“유시혁 씨의 호의는 너무 감사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전 시간이 모든 것을 증명해줄 거라 믿고 있거든요.”
“저도 당신을 믿습니다.”
시혁이 말했다.
영서는 잠시 멍하니 시혁을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유시혁 씨,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여심 저격을 잘한다고 말한 적 없어요?”
“여심 저격?”
시혁은 영서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보아하니 인터넷 용어의 뜻을 모르는 듯했다.
“음…… 여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준다는 뜻이에요!”
영서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 말을 듣자 시혁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평가를 들으니 꽤 흐뭇하군요. 이건 저한테 호감 있다는 말입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가 묘해졌다.
영서의 두 뺨이 뜨거워지고,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빨리 아무거나 말해야 해! 얼른 이 주제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말해!’
다행히 시혁은 매번 적당한 시기에 물러났다.
“전 방에 가서 서류를 봐야 합니다. 일찍 쉬세요. 잘 자요.”
영서도 대답했다.
“잘 자요.”
민우는 말이 없었다.
“…….”
민우는 그저 표정으로 ‘빨리 가, 나랑 영서 이모 좀 방해하지 마’라고 말했다.
* * *
다음 날 아침.
영서가 떠난 뒤, 시혁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촬영장에 사람 좀 보내서 영서 씨 좀 지켜보라고 해봐.”
“형, 누가 형수님 괴롭힐까 걱정돼? 사실 이런 건 스타가 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경험들이야. 이런 걸 겪고 마음을 단련시켜야 영서 씨한테 더 좋다고! 만약 이런 경험이 없으면 나중에 어떻게 홀로 설 수 있겠어?”
“영서 씨는 그런 경험 따위 겪을 필요 없어.”
이 말속에는 영서를 감싸고픈 시혁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에 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에겐 한없이 냉정한 사람이 영서 씨는 또 끔찍이 아끼다니…… 시혁은 예전에 아무런 언질 없이, 지훈을 헤이데이라는 이상한 곳에 보내놓고,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못하게 했던 사람이었다.
친형의 차별대우에 지훈의 마음이 씁쓸해졌다.
“알겠어, 알겠어. 내가 사람 시켜서 미행하라고 할게! 영서 씨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말라고 할게!”
“다음 달에 너한테 일주일 휴가 줄게.”
“하…… 형 방금 뭐라고 했어?”
지훈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형이 나한테 휴가를 준다고? 그것도 일주일씩이나? 형, 3년 동안 나한테 휴가 한 번 안 내줬잖아!”
“싫어?”
“아니, 아니! 당연히 좋지!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지훈은 시혁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번뜩 형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유가 스쳐 지나갔다.
‘형수님.’
자신이 영서를 형수님라고 불렀기 때문에? 만약 그 때문이면 지훈은 시혁에게서 받은 휴가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큰 도련님, 의사 선생님 오셨습니다.”
가정부가 서재 밖에서 일러주었다.
가정부 옆에는 늘씬한 체구의 남성이 서 있었다. 가벼운 캐주얼 차림에 온화해 보이는 얼굴과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어, 매우 친근감 있어 보였다.
시혁은 전화를 끊고 그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왔어? 여기 앉아.”
진태하가 손에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민우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직접 가서 보면 알 거야. 민우 지금 주방에 있어.”
“주방?”
진태하는 시혁의 말을 듣곤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곤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 * *
잠시 후, 태하가 돌아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민우 언제부터 주스 짜는 취미가 생긴 거야? 게다가 기분도 매우 좋아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요 며칠간 무슨 일이 있긴 했어. 며칠 전에 내가 일이 바빠서 민우를 잘 돌보지 못했는데, 지훈이가 몰래 민우를 데리고 호텔에 갔더라고…….”
시혁은 태하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태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얼굴빛이 수시로 바뀌다가, 마침내 기뻐하며 말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네! 내가 전에 말했다시피, 민우는 현재 너무 무기력한 상태야. 만약에 민우가 관심이 가고 힘이 날만한 동력이 생기면, 민우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더군다나 지금 민우 보니까 엄청 활력이 넘치는데? 그 여성분을 보모나 가정교사로 고용해서 민우 옆에 두는 건 어때?”
시혁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 사람은 미래의 민우 엄마가 될 거야.”
“콜록, 콜록…….”
태하는 매우 놀라,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그러곤 시혁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 결정은 민우를 위한 거야, 아니면 널 위한 거야?”
순간 무표정했던 시혁의 얼굴이 눈 녹듯 풀렸다. 시혁은 창문을 바라보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전에 네가 내린 결론이 맞았어.”
“너…… 너 지금 그 여성분을 좋아하는 거야?”
태하는 시혁의 말을 듣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네! 역시, 유시혁은 무성애자가 아니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자세히 얘기해봐. 그 여성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가 들끓는 것 같고, 같이 자고 싶어?”
시혁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 * *
시혁은 예전에 태하에게 여자를 좋아하면 무슨 감정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태하는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고 대답했었다.
당시 시혁은 태하의 대답이 너무 허무한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혁은 영서를 만나고 나서야 태하가 대답하지 못한 그 진리를 깨달았다.
“정말 축하해! 무성애자들은 한평생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데 말이야.”
태하는 진심으로 오랜 친구를 축하해 주었다.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는 다른 성향이 또 존재한다. 바로 무성애자다.
무성애자는 몸에 문제가 있다거나 성별의 취향이 다른 이와 다르거나,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이끌리지 않는 사람을 말했다.
5년 전, 시혁의 어머니는 아들이 연애에 통 관심이 없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그에게 약까지 먹여보려 했었다.
“이거 완전 겹경사네. 언제 국수 먹게 해줄 거야?”
태하가 크게 웃었다.
“노력 중이야.”
시혁은 어떤 일이든 항상 자신감 넘쳤지만, 영서와 관련된 질문만 나오면 확신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태하가 놀라며 물었다.
“지금 진행 중이라고? 난 이미 그 여자분이랑 잘 된 줄 알았는데. 네 마음에 드는 여자라니, 평범하지는 않겠네. 그래서 이번에 날 찾았구나? 어떻게 여자 꼬시는지 알려달라고 말이야. 비록 연애 경험은 너희 지훈이랑 비교가 안 되지만, 이론상으로는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을 걸?”
왜 모든 사람들은 시혁에게 여자 꾀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시혁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가 널 찾은 건, 그 사람이 나타난 게 민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서 그런 거야.”
태하는 시혁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봐봐,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어. 그 여성분이 나타난 건 좋은 일이긴 하지만, 네가 전에도 말했다시피 민우는 그 분을 만나기 위해 떼를 쓰고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거야. 그래서 네가 어떻게 민우를 가르치냐가 제일 중요한 관건이지.
네 사심이든 아니든, 그 여성분을 집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 그 여성분께 도움을 요청하고 민우를 데리고 이리저리 놀러 다니게 해. 그리고 때가 되면 민우 학교도 보낸 다음, 그분더러 민우 데려다주게 해도 되고. 민우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봐. 난 민우가 잘 지낼 수 있게끔 2년이란 시간을 민우에게 썼지만 아무 소용없었어. 하지만 그 여성분이라면 가능할 수도…….”
“알겠어. 시도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