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소년
“장 의원, 수고 많았네. 하죽아, 장 의원님을 배웅해 드리거라.”
육 씨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사실 장 의원이 자신의 오랜 지병을 고쳐줄 것이라는 희망은 그다지 품지 않았다.
“그럼, 소인은 물러나 보겠습니다.”
장 의원이 공수한 뒤 하죽을 따라 안채를 나섰다.
그러자 제완은 냉큼 육 씨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자신의 한쪽 뺨을 육 씨의 팔에 기대었다.
“어머니, 반드시 나으실 거예요. 반드시요.”
육 씨가 제완의 손등을 토닥이며 슬쩍 다른 화제를 꺼냈다.
“완아, 비록 우리가 지금 금주성에 와 잠시 머물고 있긴 하다만, 너의 수학이 뒤처져선 안 된다. 내 너의 공부 스승을 두 분 정도 이곳 별장으로 초청할 계획이야. 만약 이곳에 바느질과 자수에 능한 스승이 계신다면, 그것들 또한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육 씨는 줄곧 제완의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제완은 독서나 악기, 시, 그림 등에 매우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바느질이나 자수 분야의 경우에는 실로 매우 뛰어난 실력이라 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세가의 부인들과 낭자들은 제완의 바느질과 자수 재능을 보고는 그야말로 기이할 정도의 실력이라며 칭찬해 마지않았었다. 제완이 수놓는 꽃, 풀, 새, 동물들은 정말이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이 때문에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제완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웃으며 육 씨의 말을 따랐다.
* * *
안채를 나서서 자신의 서재로 돌아온 제완은 의술과 관련된 책을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제가 되어서야 자신이 경도에서 의서들을 한 상자 가져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우선 다양한 의서들이라도 정독하면 혹여 육 씨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낭, 경도에 계신 엽(葉) 낭자께서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잔걸음으로 서재 안에 들어선 은행이 달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아뢰었고, 제완의 낯빛도 일변했다.
‘엽자약(葉紫若)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고낭?”
은행은 기뻐하는 게 아니라 얼떨떨해하는 제완의 표정을 보고는 퍽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 한 번 줘 봐.”
제완은 은행이 손에 쥐고 있던 편지지를 건네받아 천천히 뜯어보았다.
경도에는 그녀와 아주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엽자약은 그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고, 또 믿을 수 있던 친구였다.
엽자약은 제완이 불행한 일을 맞닥트려 지위에 변화가 생겼을 때, 소원해진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떠나지 않은 단 두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 둘은 계속해서 제완을 좋은 친구로 생각했었고, 심지어는 뒤에서 몰래 도와주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제완이 안원후 세자의 첩실로 들어가자, 엽자약은 그녀에게 크게 실망했었고, 그때부터는 전혀 왕래하지 못했었다.
“자약아…….”
벌써 눈가가 촉촉해진 제완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에는 그녀에게 그 어떤 실망도 안겨주지 않을 것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지난 생애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엽자약은 장장 세 장의 편지를 적어 보냈는데, 요 며칠간 들었던 갖가지 소문들을 아주 자세히 제완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또 금주성에서 놀기 좋은 곳을 자신에게도 알려 달라고 적었고, 기회가 된다면 금주성에 꼭 오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제완과 함께 놀지 못한 요 며칠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으니, 자주 편지를 써달라는 부탁도 덧붙였다.
엽자약의 편지를 모두 읽은 제완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편지에 적힌 내용을 읽고 있자니, 활발하고 매력 넘치는 엽자약의 모습이 눈에 선했고, 그런 그녀가 문득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제완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엽자약에게 답신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그다지 많은 내용을 담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주(锦州)에 온 뒤, 그녀는 보름 동안을 침상에만 누워 있었다. 또 이곳에 대한 기억은 이미 희미해졌을 뿐 아니라 평안사 외에 다른 곳은 아직 가보지도 못했다.
편지를 모두 적은 그녀는 은행에게 편지를 역참에 가져가라고 분부한 뒤, 침실로 돌아와 잠시 낮잠을 청했다.
* * *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이미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고, 은행이 들어와 그녀의 치장을 다시 거들어주었다.
“고낭, 부인께서 방금 영하 언니를 보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따가 건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자고요.”
제완은 은행의 말에 가볍게 화답하고 나서, 정원의 작은 방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침향이 떠올라 곧장 질문했다.
“침향은 좀 어때?”
“어젯밤 벽(碧)이가 밤새도록 지켜봤는데 열도 없었고, 오늘 아침에는 안색이 아주 많이 좋아진 듯하다고 했습니다.”
은행은 제완이 침향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약간은 질투가 났다.
“그럼 다행이야.”
제완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말은 더 덧붙이지 않았다.
* * *
안채에서 육 씨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제완의 관심은 온통 육 씨가 장 의원이 처방해준 약을 먹은 뒤 차도가 있었는지에 가 있었다. 이에 육 씨는 웃으며 제완에게 말했다.
“이제 한 번 먹었을 뿐인데, 어찌 그렇게 빠르게 차도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겠니? 적어도 사흘은 먹어야 효과가 나타날 것이야.”
이를 들은 제완 역시 너무 마음이 앞섰다는 생각이 들었고, 웃으며 엽자약이 보내온 편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친 제완은 육 씨를 이끌고 정원 밖에 있는 작은 화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가을의 끝자락이었지만, 금주(锦州)는 아주 약간 춥기만 한 정도였다. 경도였다면 지금 시기에는 이미 바람이 쌩쌩 불며 날씨가 추웠을 것이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바깥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전해져 왔다. 육 씨가 하죽에게 눈짓을 하자, 하죽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수화문(*垂花门: 구식 저택의 중문 위를 아치형으로 만들어 조각이나 단청을 한 문)을 지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총망히 돌아온 하죽의 얼굴은 약간 경직된 듯했지만,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부인.”
하죽이 육 씨의 앞까지 다가왔다.
“바깥에 관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야간 통행 금지령을 시행해 성안의 사람들을 급히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집집이 차례대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고요.”
육 씨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더냐?”
이에 하죽이 답했다.
“저들 말로는 강호의 대도(大盜)를 잡고 있다 합니다. 성문도 이미 닫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육 씨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리고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시녀들에게 모두 잠시 방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으라 하여라. 잠시 뒤 관군들이 와서 조사를 진행할 수도 있으나, 이곳엔 모두 여인들뿐이니 그들도 대대적으로 수색을 펼치진 못할 것이다. 제완아, 너도 방으로 돌아가거라. 오늘 밤은 나오지 말도록 하고.”
“예.”
역시나 이전 생과 완전히 똑같았기에 제완은 속으로 혼자 탄식했다.
그녀는 금주(锦州)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을 겪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본채에 숨어서 밤을 보냈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아주 많은 것들을 겪은 이후이기에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 * *
제완이 은행을 데리고 자신의 거처에 딸린 정원으로 돌아왔다.
“지금 바로 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줘. 잠시 일하지 말고 모두 방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그리고 침향 쪽에도 말 좀 전해주고.”
살짝 무릎을 굽히며 그녀의 명에 답하는 은행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예, 고낭.”
집 안에만 틀어박혀 바깥세상이라곤 거의 본 적도 없는 은행이 성 전체를 폐쇄할 만한 사건 앞에 어찌 당황하거나 두렵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제완 역시 전생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듯 침착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이런 자신이 조금은 어이가 없는 듯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느린 걸음으로 방을 향해 걸어갔다.
* * *
제완이 정원 안에 있는 화단을 막 지나쳐 가던 그 순간, 돌연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는 곧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해가 다 진 시각이었고, 화단의 화초들이 너무 무성해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오거라. 내 다 보았다.”
제완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하지만 화단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제완은 일부러 차갑게 냉소한 뒤 덧붙였다.
“이래도 안 나오겠다면, 내가 어떤 조처를 한다 해도 날 탓할 생각은 말거라.”
‘설마, 내 착각이었겠지?’
제완은 지금 자기 모습에 속으로 혼자 웃은 뒤 막 자리를 떠나려 했는데 바로 그때, 간곡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낭자, 부디 그러지 마세요……. 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원래 제완은 그냥 좀 긴가민가해서 한 번 시험 삼아 말을 던져본 것이었을 뿐, 정말로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낮게 울려 퍼지는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제완은 재빠르게 몇 걸음을 뒤로 물러나 온 경계심을 바짝 세운 채로 목소리가 난 곳을 응시했다.
“누구냐?”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사방을 정신없이 살펴보았다. 정원을 담당하는 하인들의 수가 원래도 그리 많지 않은데, 조금 전에 모두 방으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으라 명했기에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낭자, 무서워할 거 없어요. 전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키의 절반 정도 되는 화단에서 호리호리한 몸을 한 누군가가 모습을 나타냈다. 얼핏 보기에 대략 열여섯 살에서 열일곱 살 정도로, 나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밤의 어둠에 가려져 생김새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윤곽으로만 봐도 외모가 아주 준수한 소년인 듯했다.
“대체 누구냐?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이야? 여봐라…….”
제완은 소리쳐 사람을 부르려 했다. 그녀는 두 세상을 겪은 사람이었기에 다른 집 고낭들처럼 두문불출한 채로 바깥세상의 일에 대해선 요만큼도 모르는 부류가 아니었다.
상대의 태도와 바깥의 관군들을 연관 지어 생각해 봤을 때, 그녀는 이 젊은 사내가 현재 관아에서 찾는 강호의 대도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소년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차례 휘둘렀고, 밤의 어둠 속에 한 줄기의 빛이 번쩍이더니 칼끝이 곧장 제완에게로 향했다. 뒤이어 소년은 불쌍한 목소리로 간청하며 말했다.
“낭자, 제발 소리 지르지 마세요. 전 절대로 낭자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저 가만히 제 말을 따라주시면 돼요.”
이 말을 들은 제완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는 차디찬 빛을 뿜어내는 날카로운 검에 시선을 고정했다.
“밖에 있는 관군들이 지금 널 찾고 있다. 그러니 감히 네가 나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이곳에서 도망칠 순 없을 것이다.”
“낭자, 어찌 제 말을 믿지 않는 겁니까? 저는 정말로 좋은 사람입니다. 의(義)를 구현하기 위해 많이 가진 자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을 뿐이에요. 그러니 정의감이 특출난 영웅이라면 모를까, 악하기 그지없는 대도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소년은 매우 진지한 어투로 말하며 칼날을 제완의 목에서 떼어냈다.
“낭자, 제 얼굴을 한번 잘 보세요. 제가 나쁜 사람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