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남다른 시녀
마차 안은 아주 넓어 침향 한 명이 더 타도 자리가 전혀 비좁지 않았다.
육 씨는 마차에 등을 기댄 채로 살짝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끼고는 그제야 눈을 떴다. 그리고 마차 문 쪽에 곧은 자세로 앉은 침향을 가볍게 한 차례 쳐다본 뒤, 책망하듯 제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완은 쭈뼛하며 육 씨의 곁으로 다가가 익살맞게 웃어 보였으나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제완은 더는 침향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고, 하죽을 불러 침향에게 뜨거운 차 한잔을 내주라는 분부만 내렸다. 침향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육 씨와 제완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하죽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찻잔을 건네받았다.
지금 신분이 매우 비천해 보이는 침향은 사실 영원히 남들에게 굽실거리며 살 운명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조금 전 자색 옷의 낭자보다 더 존귀한 귀인(貴人)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니 말이었다…….
제완은 전생에서 침향을 두 번이나 본 적이 있었는데, 아까 그녀의 귀 아래에 있던 붉은 반점이 아니었다면 상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할뻔했다.
침향의 원래 성은 능(凌)으로, 그녀의 부친인 능적(凌狄)은 본디 태자 밑에 있던 참모였다. 그는 태자를 위해 갖가지 계책을 강구하는 책무를 지던 자로, 몇 번이고 태자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능적 때문에 몇 차례 손해를 본 사황자가 그를 모해하려 꾀를 썼고, 종국에 태자는 자기를 보전하기 위해 능적을 포기해야만 했다.
끝내 죄를 얻어 투옥된 능적은 투옥되기 직전에 집안의 시종에게 침향을 데리고 떠나라 명했는데, 그 이후에 정말이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병사들을 피해 도망가던 도중, 그 시종이 그만 탐욕이 일어 능침향의 재물을 전부 강탈한 뒤 그녀를 인신 매매업자에게 노비로 팔아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에 발생했으며, 전생의 제완은 나중에 영가(寧家)에 들어가고 난 후에야 이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능침향이 어떻게 육황자를 만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육황자를 도와 태자에 맞섰고, 육황자가 제위에 오른 뒤 귀인으로 봉해졌었다.
* * *
제완이 전생의 기억을 되새기는 동안, 마차는 서서히 성문으로 진입했고, 금방 제가 별장에 도착했다.
육 씨는 제완의 뜻대로 하라는 듯, 침향을 어디에 안배할지 아무 분부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완은 은행에게 정원 안에 방 하나를 정리한 뒤 침향에게 내어주라 이르는 한편, 별장 내의 어린 시녀에게 의원을 불러오라 이른 후, 육 씨의 안채로 찾아갔다.
“어머니.”
입구에 친 발을 걷어 올리자, 미인탑(*美人榻: 휴식을 취할 때 사용하던 좁고 긴 의자) 위에 기대어 앉은 육 씨가 보였다. 제완이 웃으며 천천히 다가가니 육 씨가 그녀를 슬쩍 쳐다보며 입을 뗐다.
“그 시녀가 그렇게나 마음에 들었느냐? 평소에 넌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진 않았잖니?”
“그냥 첫눈에 마음에 들더라고요.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 것 아니세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완이 자색 옷 낭자에게 침향을 데려오겠다고 말하는 걸 육 씨가 묵인하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었다.
“사람은 함께 지내봐야 그 속을 알 수 있는 법이란다. 어떤 사람인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하겠지. 우선은 집에서 몸조리 잘하게 하거라.”
육 씨의 당부에 제완이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답했다.
“네, 어머니.”
“그래, 됐다. 고단하구나. 이제 가서 네 할 일을 하렴.”
육 씨의 목소리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몸은 정말이지 너무나 허약해 반나절 정도 잠깐 외출했을 뿐인데도 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완은 이를 보자 마음이 무척 조급해져, 하루라도 빨리 명의를 찾아 육 씨의 병을 고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샘솟았다.
* * *
안채에서 나온 뒤, 제완은 침향에게 내어준 방을 찾아갔다. 조금 전 의원이 처방전을 적어주고 간 바로 뒤였기에, 어린 시녀가 약을 달이고 있었고, 은행은 아까 채찍에 맞은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고낭.”
제완이 들어오는 걸 발견한 은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침향은 새하얀 등을 다 드러낸 채 내의만 입고 있었다. 등에는 아직 피가 새어 나오고 있는 상처 외에도 이미 다 나았으나 사라지지 않고 남은 예전의 상처들도 적지 않았다. 하나같이 채찍에 맞아 생긴 상처들이었다.
“고낭…….”
침향이 내의를 잡아 내리며 옷을 제대로 입고는 급하게 예를 갖췄다.
“괜찮다. 누워 있어.”
제완은 일어서려는 그녀를 제지하고 은행의 손에 들려 있던 고약(膏藥)을 건네받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이 상처들은 전부 네 주인에게 맞아서 난 것들이야?”
침향이 살짝 시선을 거두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인신 매매업자가 때린 것도 있습니다.”
제완은 조심스레 침향의 내의를 올리고 직접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널 때렸던 그 낭자는 금주성 사람이니?”
“고낭, 당치 않습니다. 소인이 직접 하겠습니다.”
침향은 제완이 직접 약을 발라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황망히 몸을 돌려 일어나려고 했다.
은행도 제완의 행동을 침향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걸 보고 다급히 끼어들며 말했다.
“고낭, 소인이 약을 발라주겠습니다.”
하지만 제완은 은행에게 시선을 주는 한편, 침향을 향해 말했다.
“그냥 누워 있거라. 이게 뭐 별거라고.”
그러나 침향은 감히 제완에게 약을 바르게 할 수는 없다는 듯 계속 머뭇거렸다.
“누우래도. 내 너에게 질문하지 않았느냐?”
착 가라앉은 제완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말을 따르라는 단호함이 녹아 있었다.
“예!”
침향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침상 위에 엎드렸고, 방금 제완이 물었던 말에 곧바로 답을 하기 시작했다.
“사 낭자께서는 금주성 서쪽 사(謝) 현령의 따님이십니다. 소인은 작년에서야 사가(謝家)에서 낭자를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제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성격에 너무 방자한 면이 있는 듯하던데, 너를 자주 때렸느냐?”
침향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자주 때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은 조(趙) 공자를 만나셨기 때문이지요. 공자께서…… 공자께서 하신 말씀 중에 사 낭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부분이 있어서 낭자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이곳에서 상처를 잘 치료하도록 하거라. 여기 있으면, 앞으로 그 누구도 널 매질할 순 없을 것이다.”
제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또 부드러운 손길로 약을 발라주었다. 제완은 침향이 말한 조 공자가 누군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어느 대가 집의 자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고낭.”
침향이 흐느껴 울었다. 그녀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 사람을 만난 건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이를 본 제완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고, 약을 다 바른 뒤 잘 쉬라고 당부했다. 또 어린 시녀에게 침향을 잘 돌보라 이른 후, 은행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은행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침향에게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마치 제완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제완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으나, 혹여라도 뭔가를 잘못 말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답답한 마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그저 제완의 마음속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확실히 다져야 할지만을 고민하고 또 고민할 수밖엔 없었다.
* * *
다음 날, 사가(謝家)의 낭자가 침향의 노비 매매 문서를 가지고 직접 제완을 찾아왔다.
이는 사씨 낭자가 이 문서를 전해주는 데에 크게 마음을 썼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 노야와 사 부인은 경도에서 온 제가의 낭자가 사가에 있던 시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틈타 제가와 친교를 맺기를 몹시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침 댓바람부터 사 낭자를 보내서, 반드시 제 낭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돌아오라며 신신당부를 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는 경도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많은 사람이 친분을 맺고자 열망해 마지않는 가문이었다.
“사 낭자께서 직접 가져와 주시다니요. 너무 죄송하네요.”
화원에 있는 응접실에서 사 낭자를 맞이한 제완은 은행에게 다과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이에 사 낭자가 재빠르게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 낭자께선 그런 말씀 마세요. 별것 아닙니다. 추국 그 아이가 일은 똘똘하게 잘하지요? 만에 하나라도 말을 잘 안 들으면, 그냥 욕을 해……, 그 아이를 꾸짖으시면 됩니다.”
제완은 그저 살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침향은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전 너무 좋아요.”
“침향으로 이름을 바꾸셨군요. 호호. 제 낭자는 역시 남들과는 다르십니다. 계집종에게조차 그렇게나 예쁜 이름을 지어주시다니요.”
사 낭자는 감정 없는 메마른 웃음을 몇 번 지었으나, 여전히 제완과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지 도통 화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제완도 사 낭자와 그다지 나눌 말이 없기에 그저 몇 마디 호응한 뒤, 가만히 앉아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사 낭자는 금주성에 있는 각 가문의 낭자들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어느 집 공자가 인기가 많은지, 또 어느 가문의 낭자가 미움을 샀는지 등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듣고 있던 제완은 결국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고는 침향의 매매 대금을 주겠다는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 낭자는 대번에 손사래를 치며, 침향은 제완에게 그냥 주는 것이기에 돈은 한 푼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만약 제가의 은자를 집에 가져간다면, 그녀의 양친이 절대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자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 피우는 그녀를 보자, 제완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완은 사 낭자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차를 대접한 뒤 그녀를 배웅하였다.
* * *
사 낭자가 돌아가자마자 영하가 제완에게 곧바로 다가왔다. 그녀는 육 씨의 병을 살펴봐 줄 의원이 이미 도착하여 지금 안채에 있다고 아뢰었다. 이에 제완은 두말없이 안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장(莊) 의원이라는 자는 제완이 특별히 모셔 온 분으로, 금주성에서 제일 명성이 높았다. 소문으로는, 고질병을 치료하는 데 매우 특출난 실력이 있다 하여 제완은 실낱과도 같은 희망을 품으며 부디 육 씨의 병이 치료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흔히 명의라는 자들은 각자 괴상한 기질이 있었는데, 장 의원 역시 점차 명망이 높아지면서 대하기가 만만치 않게 되었다. 오늘 그에게 와달라 청한 쪽이 경도의 명문가인 제가가 아니었다면, 이렇듯 쉬이 방문 진료를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반 시진(*1시간)에 걸쳐 육 씨의 맥을 짚었고, 발병했을 당시 어떤 느낌이었는지, 어떨 때 지병이 재발하는지 등에 대해 질문했다.
제완은 옆에서 모든 내용을 놓치지 않고 들으며 장 의원을 세심히 관찰했다. 장 의원은 말할 때 전혀 웃음기가 없었지만, 보통의 돌팔이 의원처럼 보이지는 않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부인의 오랜 지병은 외부의 자극 및 내상으로부터 야기된 것으로, 이로 인해 풍사(*風邪: 육음(六淫)의 하나로, 바람을 원인으로 일어난 병)가 그 원인인 구급(*拘急: 육음의 사기(邪氣)가 근맥을 상하게 하거나 혈액이 부족하여 활동에 지장을 주는 증상)이라는 장애와 더불어 경맥(經脈)이 허해져 자주 두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선, 제가 부인께 약 몇 가지를 처방해드릴 테니, 풍사를 떨쳐버리신 뒤에 내상을 치료하도록 하시지요.”
장 의원은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도에서 육 씨의 병을 봐주었던 태의 역시도 이와 똑같이 얘기했었다…….
제완은 내심 실망했지만, 한편으로 장 의원은 태의와 다른 방법으로 육 씨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