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약 조제
빙판길을 지나자 전방이 탁 트인 광활한 공간이 나왔다. 그 가운데 철로 된 감옥이 여러 개 있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철 기둥들은 청백색의 얼음송곳을 연상케 했다. 저 멀리에는 네 사람이 둘러쌀 정도로 커다란 아홉 개의 거대한 천주(天柱)가 있었다. 그 기둥들은 빙판에서 생겨난 것처럼 보였고, 각각의 얼음 자물쇠를 휘감고 있어 위압감을 자아냈다.
바로 그 근처에서 사릉고홍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짙은 청색의 의자, 순백색의 옷이 광활한 빙판에서 더욱 그를 돋보이게 했다. 빼어난 이목구비를 담은 얼굴은 하늘이 빚은 정교한 조각 같았고, 눈동자 안에서 빛나는 얼음 결정들은 달빛의 정수를 담아 놓은 것 같았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릉고홍의 모습은 마치 얼음과 눈의 신을 형상화한 듯했다.
그의 뒤편엔 사방각주들이 서 있었고, 앞에는 여인 네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네 명은 모두 당염원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당염원이 다가가자 사릉고홍의 감정 없던 얼굴이 부드럽게 변했다.
“원아.”
당염원이 그의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사릉고홍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당염원은 좌우를 한 번 훑어보더니 그의 다리 위에 앉아 사릉고홍의 두 팔이 자신의 가는 허리를 감싸도록 했다. 그의 턱이 당염원의 어깨에 닿아 사릉고홍은 그녀에게서 나는 맑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사릉고홍이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어찌 지금 이렇게 온 것이오?”
“주 사무관이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본래 지금은 당염원이 혼자 있을 시간이었다.
그 말을 듣고 사릉고홍은 다소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곤 당염원의 가는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이자들을 아시오?”
당염원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네 명을 둘러보았다. 수람, 춘설, 하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 씨가 있었다. 당염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압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었으니. 그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설옥연고를 바른 덕에 그날의 상처가 씻은 듯이 아물었지만, 당염원은 마음속 깊이 그날의 원한을 새겨 놓았다.
당염원의 기분을 알아챈 사릉고홍이 그녀를 달랬다.
“지금 복수하지 않으면 이자들은 모두 당신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오.”
당염원이 사릉고홍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복수할 수 있도록 이자들을 잡아들인 건가요?”
“모두 당신을 다치게 했으니.”
“아.”
사릉고홍이 그녀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당염원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이 많이 변해 버린 유 씨를 바라보았다.
유 씨는 이미 이전의 우아하고 아름답던 미모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유 씨는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는 뒤틀린 얼굴로 당염원의 눈빛에 빠르게 반응하며 미소 지었다.
“나의 딸 원아, 이게 무슨 일이니? 시집간 뒤로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니? 이렇게 보게 되었는데, 어찌…….”
살며시 사릉고홍 쪽으로 시선을 돌린 유 씨는 이내 차갑고 적막한 눈빛에 놀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 절세미남이 바로 말로만 듣던 설연산장의 장주?
유 씨는 마음속에 커다란 바위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사릉고홍의 앞에서는 숨조차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원아.”
당염원이 계속해서 말이 없자, 사릉고홍이 물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죽여도 되겠소?”
유 씨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나머지 세 사람은 무어라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이 사내 앞에서는 그럴 용기도 차마 낼 수가 없었다.
당염원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유 씨의 눈이 다시 빛났다. 당염원이 말을 이었다.
“그건 너무 가볍습니다.”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 가며 말했다.
“저자는 저를 열여덟 번 꼬집고, 제 양발을 밟았으며, 저에게 치명적인 독까지 먹였으니까요.”
그러곤 다시 눈앞의 사릉고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단칼에 죽이는 건 공평하지 못합니다.”
‘주모님, 대체 얼마나 치밀해야 그 모든 걸 기억한단 말입니까?’
당염원의 말에 뒤편에 서 있던 사방각주들과 주묘랑의 표정이 다소 변했다.
사릉고홍이 당염원에게 제안했다.
“그렇다면 저자의 손발을 끊은 뒤 독약을 먹이는 건 어떻겠소?”
당염원이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독약은 며칠 뒤에 먹여도 될까요?”
“당연히 되오.”
“그 약을 제가 직접 조제하고 싶은데…….”
“잠시 뒤에 내가 연단방(煉丹房)에 데리고 가겠소.”
당염원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는 빙연곡에서 조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약초밭에 있는 약초들도 사용해도 될까요?”
당염원은 이후 약재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말을 덧붙였다.
“약 조제는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요.”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변명 아닌 변명 덕분에, 그간 서운한 게 많았던 사릉고홍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방해하지 않겠소.”
주묘랑과 사방각주들 외에 유 씨를 비롯한 네 명의 여인들 모두 눈앞에 두 사람의 대화에 놀라 넋을 잃고 말았다. 설연산장의 장주가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하다니, 방해하지 않겠다니!
다음 순간 사릉고홍이 손을 들자 주묘랑은 곧바로 무슨 말을 하려 했다.
‘장주님, 평소엔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지만, 지금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 주모님께서 장주님을 피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은빛이 번쩍하고 지나가자 유 씨의 사지가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저자가 죽지 못하도록 하라.”
사릉고홍이 주묘랑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묘랑이 황급히 다가가 정신을 잃은 유 씨에게 단약 한 알을 먹였다. 그러자 유 씨가 깨어나 눈을 부릅뜨고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려 했다. 주묘랑은 얼른 다시 그녀를 기절시켰다. 주묘랑은 고개를 돌려 당염원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당염원을 보고, 주묘랑은 안심함과 동시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이 일단락되자 사릉고홍이 물었다.
“그럼 이자들은?”
당염원이 춘설과 하매를 각각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는 유 씨의 명을 받아 저에게 독이 든 연지를 발랐고, 저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뒤 수람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자는 제 사람입니다. 아무 죄가 없습니다.”
사릉고홍이 뒤쪽으로 눈길을 주자, 서수죽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제가 독단적으로 이자들을 데려온 것입니다.”
송군경 역시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웃으며 말했다.
“장주님, 주모님께서 이곳 생활이 익숙지 않으실 것 같아 원래 생활하던 곳에서 함께 지내던 몸종을 데려왔습니다. 더 편하실 것 같아서요.”
그러자 사릉고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는 남겨라.”
춘설이 이 광경을 보고 용기 내어 소리쳤다.
“둘째 아가씨! 저는 그저 둘째 부인의 명을 받아 그랬던 것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발 너그러이 저를…….”
“난 너그럽지 않아.”
당염원이 단호하게 춘설의 말을 끊었다.
춘설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당염원은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연지를 발랐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춘설은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원망스럽게 소리쳤다.
“이런 악독한! 무정하기 그지없는…… 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춘설의 머리가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녀는 편히 눈을 감지도 못했다.
당염원이 아무렇지 않게 혼잣말을 했다.
“이제 알았나.”
“당신 말이 모두 맞소.”
사릉고홍은 이미 완전한 당염원의 편이었다.
당염원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았던 하매는 주묘랑에게 넘겨져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억이 지워진 채 설연산장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수람은 어찌나 놀랐던지 당염원이 사릉고홍에게 안겨 자리를 벗어날 때에도 감히 그녀를 부르지 못했다. 주묘랑은 그녀를 백앵각(佰鶯閣)으로 데리고 가 많은 것을 가르치고 조율한 다음 당염원에게 보냈다. 제아무리 당가의 사람이어도 설연산장에 남기 위해선 이곳의 규율과 금기를 모두 숙지해야 했다.
* * *
약밭의 모든 약초를 사용해도 된다는 특권을 얻고, 당염원은 매우 편안한 나날들을 보냈다. 모두가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주모님, 땅을 갈고 약재를 키우는 기술이 대단하시네요!”
엽연교(葉連翹)가 동그랗고 큰 눈을 깜빡이며 경탄 어린 표정으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약밭을 일구는 당염원을 바라보았다.
엽목향(葉木香) 역시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외쳤다.
“이 추로향(鞦露香)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주모님의 손길로 다시 살아났어요!”
똑같은 두 얼굴에 모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일제히 흥분해 소리쳤다.
“주모님, 정말 대단하세요!”
하지만 곧 당염원의 손길에 다시 살아난 추로향이 뿌리째 뽑혔다.
그러자 엽연교와 엽목향이 떨기 시작했다.
당염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 이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자꾸나.”
“주모님, 어렵게 다시 살려낸 약초를 어찌 이렇게 써 버린단 말이에요? 약방에 이미 만들어진 것도 있고, 약밭에 다른 추로향도 많은데 하필!”
엽연교가 속상한 마음에 소리쳤다.
당염원이 손에 든 싱싱한 추로향을 보며 말했다.
“어렵지 않아. 살리는 건 아주 쉬워.”
그녀가 가진 약력은 이러한 일반적인 약초들에 큰 효과를 보였다.
엽목향이 연이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주모님께서 열심히 일군 약초들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군 것 아니겠니?”
당염원은 엽목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지 않으면 네가 계속 움켜쥐고 있을 것도 아니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주모님 말이 맞습니다.”
엽연교와 엽목향이 당염원의 눈빛에 굴복했다.
당염원은 다시 빙연곡으로 향했다. 그녀는 기쁨에 찬 눈으로 연못 위에 떠 있는 벽주월화 아홉 송이를 바라보았다. 요즈음 그녀가 계속해서 약력으로 보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그러나 평소에 꽃잎 한 장 정도를 따는 것은 상관없었다.
“녹녹.”
곧 눈앞에 푸른 물결이 일렁였고, 그 위로 당염원의 아리따운 얼굴이 비쳤다. 마치 푸른 물결 위의 선계처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