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감사 인사
그들이 막 영서원에 당도하여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그녀들 뒤로 시녀 하나가 급하게 뛰어왔다. 전언(傳言)을 담당하는 시녀였다. 손에는 배첩(*拜帖, 옛날, 남의 집을 처음 방문할 때 가지고 가던 붉은 색 명함)처럼 보이는 물건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오니 심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뭐가 이렇게 급한 게냐? 혹 무슨 일이라도 났느냐?”
“임안후부인(臨安侯夫人)께서 배첩을 보내오셨습니다.”
지체할 수 없어 시녀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급히 사라졌다. 심하는 깜짝 놀랐다.
“임안후부인께서 왜 방문하셨지? 우리 집과 임안후부가 왕래가 있었던가?”
그것은 심요를 향한 말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심요는 득의양양했었다. 외출도 가장 빈번한 그녀였기에, 내막을 자연히 많이 알았다. 그러나 이번 일은 심요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정원으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병풍께에 이르자 노부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멀쩡하게 잘 계시던 임안후부인이 갑자기 배첩을 띄우다니?”
손 어멈이 가만히 추측해 보더니 말했다.
“설마 순국공부에서 저희 심가를 오해하여 책망한 것에 대해, 친히 납시기에 체면이 있어, 대신 임안후부인을 살짝 보내시어 말을 전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노부인은 자세히 생각해 본 후 웃으며 말했다.
“비록 우리 가문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니다. 오해를 해 괜한 탓을 하였으면 직접 찾아와 사죄할 일이야. 열에 아홉은 다른 일로 오셨을게다. 됐다. 고민해 보았자 임안후부인께서 오신 뜻을 알기 어렵겠다. 대부인에게 어서 대문까지 나가 맞이하시라고 일러라. 오래 걸려서는 아니 된다.”
시녀 양진(良辰)은 그 즉시 대부인에게 말씀을 전하러 갔다.
손님께서 내방하신다니, 그것도 후부인이면 흔치 않은 손님이라 심요를 비롯한 손녀들은 신이 났다. 손님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옷매무새와 낯빛을 다듬으려고 시녀들에게 구리거울을 가져오게 했다.
한쪽에서 앉아서 그것을 보던 자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시녀들에 비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자소는 입술연지도 거울도 가져오지 않았으니, 심모가 그것을 보고 나무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심모는 임안후부인이 오신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심모가 살이 많이 빠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임안후부인이 심모와 혼사를 맺자고 오기를 기대할 만큼은 아니었다. 법도에 따라 심가네 손녀들은 곁방에서 기다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나가서 손님을 뵐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대부인은 임안후부인을 모시고 들어왔다. 그녀의 차림새는 화려하고 고귀해 보였다. 기세나 차림새나 대부인은 그녀에게 한참 못 미쳤다.
심가의 가세가 지금은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노부인은 2품 봉호(封號, 봉건 시대에 황제가 부녀에게 내리는 작위)를 받은 몸이었다. 따라서 임안후부인을 맞이할 때 먼저 인사를 여쭐 필요는 없었다.
임안후부인과 노부인은 비슷한 또래였다. 갑자기 찾아온 임안후부인이 노부인께 예를 차리고 인사를 올리자 노부인은 놀라서 서둘러 말했다.
“어서 일어나시지요. 감히 이런 인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안후부인은 예를 다해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노부인, 제가 올리는 이 인사를 꼭 받으셔야 합니다.”
노부인은 눈앞에 안개가 낀 듯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임안후부(臨安侯府)는 심가와는 전혀 왕래가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임안후부인(臨安侯夫人)이 한껏 예의를 차리고 찾아와 그녀에게 인사를 올리다니,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노부인은 자신의 손바닥을 몰래 꼬집어 보았다. 아픈 것을 보아하니 꿈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노부인은 황급히 임안후부인에게 상석으로 앉기를 권하고 좋은 차를 올리라 시녀에게 분부했다.
차를 마신 후, 노부인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임안후부인께서 저희 집까지 와 주시다니,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임안후부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일단은 감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노부인은 어리둥절했다.
대부인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번에는 임안후부인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전혀 무슨 사정인지 모르고 있는 대부인과 노부인의 얼굴을 보니, 혹 자신이 잘못 알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원가의 심가라면 한 집뿐인데 잘못 알았을 리가 없었다.
임안후부인이 입을 열었다.
“어제 댁의 아가씨가 영천사에 가서 향을 올리지 않았나요?”
대부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곁방에서는 심요 무리가 일제히 심모를 바라보았다. 심모는 대부인이 자신을 영천사로 보낸 일을 끄집어낼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억울했다. 자신이 구해준 사람이 임안후부의 공자님인지 몰랐던 데다가 정말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집까지 찾아올 줄은 더더구나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구나.’
심모가 이런 걱정에 빠져있을 때, 심요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영천사에서 무슨 일을 했길래 임안후부인이 몸소 사의(謝意)를 표하려 방문한 걸까?’
바깥에서는 그 말을 들은 노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집에서는 영천사에 간 사람이 없습니다.”
임안후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당황했다.
“혹, 제가 잘못 알고 찾아왔을까요?”
몸소 인사를 드리러 남의 집에 방문했는데, 사람을 잘못 찾아오다니,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임안후부인은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그녀 곁에 앉아 있던 옅은 미색의 치마를 입은 한 아가씨가 벌떡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분의 시녀가 그 아가씨께서 영원가 심가의 자제시라고 하는 것을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러자 노부인은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대부인은 겸연쩍게 웃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어제, 큰아이가 영천사에 갔었습니다…….”
결코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심모가 뻔히 곁방에 있고, 후부인이 감사 인사를 하겠다고 집까지 오지 않았는가. 곁방에 있는 심모가 나와서 대답한다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니 어차피 먼저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노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모를 비롯한 손녀들은 모두 문곡성묘에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놓고 영천사로 갔다니. 마음대로 장소를 바꾸고 자신에게 일언반구하지 않았으니……. 그리고 사 왔던 그 지필연묵은 또 어떻게 된 일인지 노부인은 이 모든 것이 미심쩍었다.
그러나 노부인은 일단 시녀에게 심모를 데려오라 일렀다. 비록 심모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난각(*暖閣, 정당에 딸린 곁방)에 있었지만 ‘데려오라’고 했기에 심모는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정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심모가 정당에 들어올 때 심요와 심수, 심하도 같이 손님 앞에 나갔다. 심모를 보더니 임안후부인과 함께 왔던 아가씨가 말했다.
“어머니, 바로 저 아가씨가 우리 정이를 구해주었습니다. 소녀, 알아보겠습니다.”
아가씨는 방금 큰아가씨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심가의 큰아가씨가 그렇게 뚱뚱하다 하지 않았던가? 온 경도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어제 본 심모는 뚱뚱하다고 할 수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심모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노부인이 놀라 얼어붙었다. 방금 임안후부인이 왜 자신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는지 그 연유를 몰랐는데, 인제 보니 심모가 임안후부의 어린 세자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라니. 또 자신의 손녀 심모가 언제부터 사람의 목숨을 구할 능력이 있었단 말인지, 이 손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익혔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임안후부인은 감격에 겨워 노부인을 바라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이는 제가 수년을 빌고 기다린 끝에 겨우 얻은 귀한 자식입니다. 응석받이로 키웠지요. 그런데 어제 저를 따라 영천사에 갔다가 그런 변고를 당했습니다. 어제 바로 그 자리에서 큰아가씨께 감사의 말씀을 드렸어야 하나, 의원을 모셔 아이를 보이느라 정신이 없어 오늘에서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댁에 실례를 끼친데다 제 여식인 남청(嵐晴)이 큰아가씨 손에 상처를 입히는 무례까지 범하였습니다.”
임안후부는 이(李)씨 성으로, 그 집 큰아가씨가 바로 이남청이었다. 손을 다쳤다는 말에 심모의 손에 모두의 눈길이 쏠렸다. 심모는 손을 내밀어 보이며 웃어 보였다.
“작은 상처일 뿐입니다.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말소리도 곱고 눈빛도 온화해 한눈에도 심모의 성품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임안후부인은 밖에 나도는 소문이 왜 그렇게 퍼진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남의 집 귀한 아가씨를 오해한 것이 아닌가?
노부인은 심모가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강한 의지로 살을 뺀 일을 설명했다. 임안후부인은 감복해 마지않으면서 그 자리에서 큰딸에게 앞으로 심모를 따라 배우라 일렀다. 비록 각자 마음속에 궁금한 것이 있기는 했지만, 방 안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임안후부인 입장에서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심가의 아가씨가 영천사에 왔었다고 했을 때, 노부인은 간 적이 없다고 하고, 대부인은 왜 한참을 주저했던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집안마다 각기 사정이 있는 법, 무슨 연유인지 더 이상 따져 묻기도 불편했다. 아들을 구해 준 아가씨를 찾아 감사를 드렸으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한 것 같았다.
인사를 드렸으니 임안후부인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어제 목숨을 잃을 뻔한 아들이 아직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집을 오래 비울 수 없어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남청도 더 머무르지는 않았지만, 다음에 심모에게 초대장을 보낼 테니 임안후부에 놀러 오라고 청하였다. 대부인과 딸들이 임안후부인은 배웅했다.
며느리와 손녀들이 돌아오자 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아직까지도 정신이 혼미하구나. 너희들은 문곡성묘에 간다 하지 않았느냐? 어찌 영천사에를 갔단 말이냐?”
대부인은 순간 진땀이 흘렀으나 생각해 보면, 임안후부와 연을 맺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사실을 고해 올렸다.
“큰아이를 영천사에 가서 기도를 올리도록 제가 임의로 장소를 바꾸었습니다. 학영호수의 일이 비록 다 지나갔다고는 하나 여전히 심려되는 바가 있어 그리한 것입니다. 도군옥 아가씨가 물에 빠진 데에 큰아이의 잘못이 있다곤 하나 우리 심요도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심요는 성격이 조급하여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혹여 그때처럼 사고가 생길까 봐 아무래도 각자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제 짧은 머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어머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까 봐 감히 미리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마음대로 하였으니,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이 일을 이렇게 설명하다니 대부인은 영리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 도군옥 아가씨의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죽어도 심요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했던 그녀였다. 상황이 다 해결된 지금, 심요의 잘못을 인정해도 크게 과가 되지 않으면서 자신은 공명정대하여 친딸을 편애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신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자신이 심모를 영천사로 보낸 결과로 집안에 좋은 일이 생겼다. 심요의 성격이 조급하다는 점 역시, 만약 그런 이유가 없었다면 심모도 문곡성묘로 갔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도, 더욱이 임안후부인이 집까지 찾아와 인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에 크게 책잡히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으니 노부인도 달리 크게 나무라지 않고 그저 몇 마디만 덧붙였다.
“성격이 급한 것은 고쳐야지. 한 집안의 자매들을 한데 보내어 서로 가까이 지내도록 해야지, 오히려 각자 다른 곳으로 보내다니. 다른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면 자매들 사이가 안 좋다고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느냐?”
대부인은 조용히 그 말을 다 듣고 있었다. 심모는 사실대로 다 말하고 싶었지만, 운이 나빠 나중에라도 돌멩이로 사람을 맞춘 일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했기에 그러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일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