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동방소택의 보복 (1)
마당의 분위기가 유난히 가라앉아 있었다. 천북야의 아름다운 얼굴에 억울한 기색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금 상처를 입은 듯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고약운에게 물었다.
“고약운. 방금 그 남자가 네 머리를 만졌는데, 나도 한 번 만져보면 안 돼?”
고약운은 어리둥절했다.
“왜? 나한테서 열나는 것 같아서 만지려고?”
천북야는 좀 전의 일을 떠올리곤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자는 만질 수 있고, 나는 안 되는 건데?”
“북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서 이렇게 소란 피우지 마. 그럼 나도 화를 낼 수밖에 없어.”
고약운은 일부러 정색을 했다.
“나를 따르겠다고 했으면, 내 말을 잘 들어야겠지?”
이 말을 듣자 천북야는 긴장하기 시작하더니 곧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조용히 있을게. 착하게 말도 잘 들을 거야. 그러니까 화내지 마. 나 쫓아내면 안 돼!”
천북야가 감정이 누그러진 모습을 보이자, 고약운은 절로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화 안 낼게.”
“약운. 너 참 좋다.”
이내 천북야가 웃기 시작했다. 웃고 있는 그를 보니, 경국지색이라는 말로도 그의 아름다움을 형용할 수 없었다. 마치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꽃들이 활짝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고약운은 잠시 멍해졌다. 이렇게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웃는 남자를 평생 본 적이 없었다. 천북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채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그의 곁에 선다면, 그저 들러리가 될 뿐이었다.
물론 그가 입을 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가 입을 열면 모두의 환상이 깨질 게 분명했다.
“약운. 나 혼자 자기 싫어. 어둠이 무서워. 너랑 같이 자면 안 될까?”
“…….”
“약운. 넌 왜 나랑 몸이 달라? 가슴에 부풀어 오른 건 뭐야? 만져봐도 돼?”
“…….”
천북야는 자신의 기억이 봉인됐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고약운은 이 자식이 바보인 척을 하면서 자신에게 개수작을 부린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진짜 기억에 문제 있는 거 맞아? 나를 희롱하는 거 아니냐고!’
고약운은 숨을 깊게 쉬며 천북야를 내쫓으려는 충동을 억눌렀다.
“입 다물지 않을 거면 꺼져!”
* * *
고 장군부
고일봉은 팔을 움직여 탁상 위에 놓여있던 물건들을 모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의 안색이 매우 어두웠기에, 총애를 받는 고반반도 지금은 그의 옆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고약운! 고약한 계집!”
고일봉이 차갑게 웃었다.
“대역무도한 것 같으니! 부모가 일찍 죽어서 배운 게 없는 게지. 고가에 어떻게 이런 못난 것이 나타난 게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애당초 천이에게 정체 모를 여인을 처로 들이지 말라고 해야 했어. 그랬으면 이런 망할 것은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고일봉의 아들 고천은 대륙의 천재로서 세상을 놀라게 했었다. 무왕이 된 그는 고 씨 가문의 희망이었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고 씨 가문도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청룡국을 벗어나 연기종과 같은 세력들과 이름을 나란히 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걸출한 사내 뒤엔 반드시 좋은 여인이 있어야 하는데…… 정체불명의 여인을 처로 들여선…… 결국 이런 못난 놈이 태어난 게야!”
이런 말을 하는 고일봉에게서 아들을 잃은 슬픔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지 고 씨 가문에 천재가 없다는 안타까움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아내의 진정한 신분을 알지 못했다. 고약운의 어머니 동방옥(东方玉)이 신분을 숨기고 고천에게 시집을 간 이유는 동방세가의 내막과 고일봉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렇게 말하는 고일봉을 직접 봤더라면, 동방옥은 반드시 고일봉과 연을 끊었을 것이다.
동방옥은 고 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후, 자신의 내력에 대해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 세기의 천재인 고천이 그녀를 감싸주어, 고일봉은 감히 동방옥을 욕할 수 없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고 씨 가문의 둘째 아들 고명(顾明)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형님의 죽음에 대해서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아버지는 분명 자신과의 인연을 끊으려 할 터였다.
“장군!”
이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장군부의 하인이 문밖에서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장군, 동방세가 소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동방세가?’
고일봉은 잠시 멈칫하며 되물었다.
“동방세가의 소주가 날 찾아왔다고?”
동방세가는 연기종보다는 못하나, 실력의 차이가 그리 크진 않았다. 지금 고 씨 가문은 연기종에게 미움을 샀으니 동방세가라는 발판이라도 얻어야 했다. 고일봉은 대강 두 세력의 차이와 자신이 얻을 이익을 계산해 보았다.
‘동방세가라…….’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후, 고일봉은 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라 해라.”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가볍게 웃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우아하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동방소택은 손으로는 부채를 흔들며, 아름답고 따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내 동방소택이 고일봉을 보며 말했다.
“고 장군, 제가 성급하게 찾아오긴 했으나 부디 내치진 마십시오.”
“동방 공자께서 이곳까진 어인 일로 오셨소?”
“아…….”
동방소택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세운 후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장군, 설마 제가 찾아온 뜻을 모르시는 겁니까?”
고일봉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동방소택을 바라보았다.
“공자께서 왜 오신 겐지…… 나는 모르겠소이다.”
“그렇군요.”
동방소택은 씩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저는 고천 부부와 오랫동안 친우로 지냈습니다.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다가 오랜만에 부부의 소식을 접했는데, 그들이 이번에 국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동방소택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안타까운 척 연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고천이든 자신의 누님이든, 두 사람 다 동방소택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 두 명의 천재가 세상을 뜨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당시 옥이 누님과 저는 의남매를 맺었는데, 옥이 누님의 동생인 전 그들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고 장군, 혹시 제가 누님의 제사를 올릴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고일봉이 동방세가에 힘입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자만 아니었어도, 동방소택은 고 씨 가문에서 크게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옥이 자신과 의남매 사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기회삼아 고일봉 앞에서 동방옥을 누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신분을 이제야 증명한 셈이었다.
고일봉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그 두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한 데다 무덤도 없다오. 그런데 제사를 지내다니?”
고일봉은 점점 더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동방소택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 천것이 감히 동방세가의 공자와 의남매를 맺고도 그 사실을 계속 숨기고 있었다니. 고천의 부인에게 동방세가라는 배경이 있는 줄 알았다면, 고 씨 가문이 지금 이 지경까지 왔겠는가?
‘이거 왠지…… 좋지 않은데…….’
고일봉은 동방소택의 뜻을 알 것만 같아 조금 난감해졌다. 당시 화가 났던 그는 고천 부부의 무덤을 세우지도, 사당에 자리를 마련하지도 않았다.
이때, 고반반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 두 사람이 뭐라고 무덤을 만드나요? 고가에는 그렇게 낭비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도적 같은 자들을 우리가 왜 돌보아야 하지요? 고천 백부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 여자는 고약운이란 쓸모없는 폐물을 낳았는데, 무덤은 무슨 무덤입니까?”
고반반은 평소 고약운 남매에게 불만이 많았다. 자신의 오라버니는 고생소에게 천재 자리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고 씨 가문은 고약운으로 인해 체면도 잃고 말았다. 그러니 고약운 그 계집은 진작에 죽었어야 했다. 고약운을 계속 살려두다니, 하늘은 설마 보는 눈도 없단 말인가?
“고반반, 입 닥쳐라!”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진 고일봉이 고개를 들어 동방소택의 안색을 살폈다.
동방소택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자리 잡고 있어, 화난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따듯했던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한기가 감돌며 차가워졌다.
“고가가 약운이를 대하는 것을 보니, 그 애가 ‘아주 좋은’ 가정교육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고천 부부의 손윗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까? 정말이지, 오늘 제가 견문을 넓히게끔 고 장군이 도와주시는 군요.”
사실 동방소택은 처음부터 고 씨 가문이 고천 부부를 위해 무덤을 만들어 주지 않았단 걸 알고 있었다.
동방소택의 계획은 사실 매우 간단했다. 그저 고 씨 가문으로 찾아가 소란을 피우는 것이었다. 동방세가도 공식적으로 이 일에 관여하지 못한다면, 3대 제지 역시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동방소택은 오늘 세가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단지 의남매 사이인 누님과 형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러 온 것인데, 누님을 위해 무덤을 세우지 않은 것에 대해 동생으로서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처사가 아니던가? 제 아무리 3대 제지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동방 공자. 노여워 마시구려. 이 녀석이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렇다오.”
고일봉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어색한 투로 설명했다.
동방소택은 그런 그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나이가 어려서라? 동방세가에선 열 살짜리 소녀조차도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당신 손녀는 열다섯 살이나 되었는데도,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아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치를 전혀 모르는 것 같군요.
오는 길에 당신들이 고천 부부의 여식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고가의 핏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나 싶었거늘……. 오늘 고 씨 여식이 자기 백부를 이런 식으로 욕하는 것을 보니, 약운이를 괴롭히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겠습니다.”
그러자 고일봉이 쩔쩔 매면서 말했다.
“동방 공자, 그렇지 않소! 제발 내 설명을 좀 들어주시오.”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고생소는 스승을 모시고 있으니, 이곳엔 고약운이 남았겠지요. 사흘 안에 멀쩡한 모습의 약운이를 만나야겠습니다. 약운이의 솜털 하나라도 다치거나 그 아이를 내게 데려오지 못한다면, 내가 고가를 어떻게 만들지…… 잘 생각 보십시오.”
말을 마치자 동방소택은 옷소매를 크게 떨치며 뒤를 보지도 않고 문밖으로 나섰다.
‘운아, 숙부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것뿐이다.’
동방소택이 떠나자, 고일봉은 넋을 놓은 얼굴이 되었다.
“끝났어……. 이제 다 끝났어…….”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곁에 있던 고반반은 여전히 입을 삐죽거렸다.
“동방세가가 무슨 벼슬이라도 된답니까? 우릴 이 정도로 모욕할 필요가 뭐가 있나요? 그리고 고약운을 돌보려는 자가 운이 좋기야 하겠습니까? 분명 조만간 벼락을 맞아 죽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