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레이 별장의 시종들은 큰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근래 들어 류리크가 망나니짓을 그만두더니, 무려 기숙사제인 샤프란 마법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만 된다면 망나니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처음부터 모두가 철썩 같이 믿으며 만만세를 부른 건 아니었다.
―마법 대학으로 진학한다니? 당주님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어.
―샤프란 대학에서도 쉽게 받아줄 것 같진 않은데.
―잘은 모르지만 샤르미넨 총장님이 당주님과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도 있고.
그러던 와중, 류리크가 후인의 반지를 얻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후인의 반지가 뭔데?
―갖고 있으면 천민이라도 샤프란에 들어갈 수 있는 보물이야!
―지, 진짜? 그러면 류리크 님이 정말로 대학에 들어가는 건가?
―내가 알기로 샤프란 마법 대학은 전원 기숙사제일 텐데….
―그, 그러면…!
진짜 류리크가 대학에 붙을 가능성이 커져 버렸다. 오히려 이렇게 되자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시종들이 나타났다.
그러던 와중 류리크가 별장 내의 모두를 불러 모았다.
시종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품으며 하나둘 별장의 현관으로 모였다.
"류리크 님이 기숙사를 이용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쪼, 쫓겨나지는 않겠지. 류미엘 님의 인망이 있으신데. 아마 여기 위르겐하이의 별장처럼,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어?"
"그렇다 쳐도 우리 모두가 갈 수는 없을 텐데…."
"우리 모두 헤어지게 되는 거야?"
모두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가는 가운데, 그들의 바로 뒤에서 류리크가 나타났다.
"너희들이 헤어질 일은 없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시종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앗?!"
"류, 류, 류, 류리크 님?!"
"방금 저희들이 한 말은…!"
가끔 있는 외출을 제외하곤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류리크다 보니 모두 방심해버렸다. 자신들도 모르게 익숙하게 쓸데없는 잡담을 떠들고 만 것이었다.
물론 지금 한 말 중에 류리크의 험담은 없었지만, 그 변덕 심한 류리크가 무엇에 눈이 돌아갈지 모르는 것도 사실.
시종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파들파들 떨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여기서 살아남으면, 그냥 일을 그만두겠어!'
그런 시종들의 속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류리크는 넓은 아량을 베풀듯 말했다.
"내 어찌 너희들을 버려두고 가겠는가. 너희들 모두 나와 함께 간다."
같이 간다니.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설마 마법 대학의 기숙사에?
기숙사에 시종을 들일 만큼 정신머리가 없었던 것인가!
시종들이 반쯤 패닉에 빠진 상황에서 류리크는 제 할 말만 한 뒤 훌쩍 떠나버렸다. 남겨진 이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저들끼리 우왕좌왕 떠들기 시작한다.
"저게 무슨 소리래?"
"같이 간다니, 설마 마법 대학에?"
"마법 대학이라면… 나 좋을지도…."
그러던 도중, 현관에 리아가 나타났다.
리아 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겠지, 시종들이 두 손 모아 다가가자 리아가 교통정리를 하듯 설명을 시작했다.
"류리크 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여러분 모두, 제도의 아스트레이 소저택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류, 류리크 님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류리크 님은 아스트레이 소저택에서 통학을 하실 예정입니다. 그러니 소저택에서 류리크 님을 보필하기 위해 모두를 데려간다는 것이지요."
최악의 결말에 시종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었다. 그렇지만 고참 중 몇몇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최, 최소한의 인원은 별장에 남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류미엘 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그렇지만 별장 일에 익숙한 이들도 있으니…."
"소저택은 별장보다 훨씬 넓습니다. 일거리가 꽤 많아지겠군요."
리아는 거기서 딱 끊은 뒤, 총총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밤 시종들은 다 같이 모여 눈물의 회식을 했다.
* * *
제도(帝都) 뤼겐베르크, 아스트레이 소저택.
류네온 바타체스 폰 카르펜 아스트레이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저택의 정원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6년, 할카데르의 본가보다도 이곳에 친숙함이 깊었다.
"이곳도 이제 안녕이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곧 가신다는 게 실감됩니다."
줄곧 그를 보필했던 노집사가 허허, 웃으며 말한다. 그에 맞춰 류네온도 아쉬운 듯, 후련한 듯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동안 수고 많았어."
소저택이라고는 하지만, 본가에 비해서 그럴 뿐이지 적은 수의 시종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그런 저택을 노집사는 혼자서 관리해오고 있었다.
이제 류네온마저 이곳을 비운다면, 그는 혼자 남게 되는 셈이었다.
"집사, 달리 생각해 본 거처는 있는가."
"소인에겐 이곳이 고향이고, 무덤이옵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자네가 바란다면 내 작게라도 할카데르 주변에 집과 농토를 내어주겠네. 소작을 부리면 노후를 편히 살 수 있을 테야."
하지만 노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란으로 주도(主都) 할카데르에 변고가 생겼을 때, 누군간 이 소저택을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류네온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자, 노집사가 환히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수습 과정이 끝나고, 정식 수호기사로 서임을 받으셨으니 아스트레이의 영광입니다."
"내가 멋대로 수호기사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류미엘이 고생이 많았지. 그녀에겐 늘 큰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해."
"모름지기 각자의 길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요."
"나는 나의 길을 갈 테니, 자네는 류미엘에게 혹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마음 좀 써주게."
"제 신명은 오롯이 아스트레이를 위하는 것뿐입니다."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좀 놓이네. 하하."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나니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정리할 것들이 많네."
짐은 소박했으나, 갖고 있는 아이템들은 적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의복부터, 애장과 여러 아티팩트들 하나하나가 보물로 취급되는 물건들이니까.
류네온은 갖고 있던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들 모두 본가로 돌려보내야겠지?"
"수호기사는 빈손으로 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 법도이잖습니까."
수호기사가 되어 떠날 땐, 가문에서 하사받은 명검도, 자신의 애장도 함께할 수 없다. 수호기사끼리 출신이나 부 따위의 차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출신, 파벌, 경쟁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신명(身命)을 바쳐 황가를 위해 일해야 하므로.
"시간만 된다면 류미엘에게 인사라도 하면서 돌려주고 싶었는데."
황실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침이니, 오늘이 가기 전엔 약속의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 수호기사의 부름은 불현듯 찾아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숙명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저택 내의 비밀 은신처에 본가와 이어진 워프게이트가 있긴 합니다만."
"그건 한 번 쓰고 나면 무너지는 일회성이잖나. 작별의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류미엘이 복구비용을 운운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게 눈에 선해. 하하."
작게 웃어 보인 그는 어딘가 쓸쓸한 눈으로 아이템들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들이 저택의 수장고로 들어가면 오래도록 빛을 못 보겠지?"
"그럴 것입니다. 류아라 님도, 류미엘 님도 아티팩트에는 그리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니까요."
그의 심상과 맞아떨어지듯, 날이 서늘해지며 저 멀리 보랏빛 하늘이 밀려온다.
류네온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 별을 헤아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다못해 이 브로치라도, 주인을 찾으면 좋을 텐데…."
◈ 014
아스트레이의 당주 대리, 류미엘은 서류를 집어던졌다. 그녀의 손에서 날아간 서류에는 '류리크 동향 보고서'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 …그리하여 류리크는 현재 위르겐하이의 별장을 비우고, 제도 뤼겐베르크의 소저택으로 향할 계획입니다. 〕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영원히 위르겐하이에 처박혀 있어야 했을 망나니가 후인의 반지를 얻어내더니, 진짜 마법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차피 4년 동안 기숙사에만 있을 테니'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도의… 소저택을… 자기 집처럼 쓰겠다고?"
사흘째 광산 인수 건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류미엘은 결국 폭발해버렸다.
"거긴 전시를 대비해 건설한 요새다! 평시에 쓸 일이라고는 건국제, 혹은 황제 폐하의 탄신일 같은 날에 잠시 머무르기 위한 거처로 쓰일 뿐이다!"
"사실 류네온 님이 계속 사저로 쓰고 계시긴 했습니다만."
"류네온 오라버니는 딱 방 하나에서 숙식만 해결하잖나!"
자칫하다간 업무 책상에 쌓인 서류가 찢어지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겠거니, 카엘이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류리크 님이 잘 몰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모르면! 모르면 가질 말아야지! 애당초 별장에 있어야 할 그놈이 왜 밖을 나오냔 말이야!"
"법적 처분이 내려진 것도 아니고, 당주께서 '거기 처박혀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게 전부니까… 별장을 나선다고 뭐라 할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순간 류미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래! 아버지께서 '거기 처박혀 있어라!'라고 명령하신 걸 어긴 거잖나? 아버지께서 분명…."
"사실 당주께선 요즘 류리크 님이 개과천선했다는 소식에 상당히 흡족해하신다고…."
류미엘이 자신의 풍성한 머리칼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거기서! 왜! 흡족해! 하냔 말이다! 아버지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 또 멍청한 이들이 류리크를 차기 당주로 세워야 한다 어쩐다 떠들 게 뻔한데!"
"당주께선 황자의 자리마저 포기하실 만큼, 정쟁에 관심이 없으시니까요. 아마 별생각 없으실 겁니다."
그건 여러모로 곤란했다. 아버지야 자식들을 다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에 그러는 거겠지만, 이쪽은 어쩔 수 없이 피 말리는 후계 전쟁에 내몰린 상황이다.
"가서 류리크에게 전달하도록 하게. 소저택의 물건 중 하나라도 전당포에 넘어가면, 내 손으로 류리크를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내놓았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광산 인수 건이 끝나는 대로, 그놈의 면상을 한번 봐야겠어."
* * *
저택의 짐들은 모두 우정국(郵征局)에 넘겼다. 귀중품이란 귀중품은 류리크가 옛날에 전당포에 다 넘겨버렸기에, 그다지 신경 쓸 물건도 없었다.
그렇게 이삿짐의 옮기는 것을 떠넘기자, 시종들은 저들의 짐만 꾸린 채 별장을 서성였다. 급작스러운 이사 소식에 아직 열차를 예매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짐만 챙기도록 말한 뒤, 고급 차량을 빌려 태웠다.
―이, 이걸로 뤼겐베르크까지 간다고요?
―당연히 열차로 가는 줄 알고 예매하려고 했는데….
―나 자동차는 처음 타 봐….
―이거 심지어 고급 리무진이잖아?! 엄청 비쌀 텐데….
어제까지만 해도 눈물로 통곡의 바다를 이루던 시종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느 시종은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면서 꽤 훈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렇게 시종들을 떠나보내고, 리아와 함께 아스트레이가의 전용 리무진에 탔다.
"시종들을 위해 리무진을 대여하시다니, 조금 놀랐습니다."
"평생토록 저리 둘 순 없는 노릇 아니겠나. 이제라도 천천히 마음을 풀게끔 해야지."
적어도 내 방 앞에 쏟은 음식물 정돈 바로바로 치웠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느 정도 호감도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시종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면, 몇 푼이라도 돈을 쥐여주는 편이 빨랐을 것입니다."
"돈 몇 푼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을 주었으니, 그보다 오래 기억에 남겠지."
"대신 류리크 님의 지갑은 텅 비었군요."
경매장에서 얻었던 30만 리브라가 탕진되었다. 대부분은 류아라의 의뢰 대금으로 나갔고, 나머지가 우정국 직원들을 고용하고 리무진을 대여하는데 날아갔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돈이야 필요할 때 벌어 쓰면 되는 거니까.
"모름지기 아랫사람에겐 돈을 쥐여주는 게 아니라 하였다."
"......."
리아는 별다른 말을 않았다. 대신 또렷한 눈으로 '정말 네가 그 의미를 아는 것이냐.'라고 묻는 듯했다.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돈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기에, 차라리 더 돈을 들이더라도 술이든 휴양이든 다른 것을 주는 게 맞다."
"자신이 일을 더 잘하면, 그것을 돈으로 받을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이군요."
"정확하다. 그러니 나도 네게 돈 대신 홍차를 주는 게지."
일전에 주셨던 나브릭스 홍차는 동이 난 지 오래입니다. 이제 다른 홍차를 주시지요, 리아가 정중하게 눈으로 삥을 뜯었다.
나는 말없이 빙글빙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후우, 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제가 류리크 님을 보필한 것이 이제 3년입니다. 그리고 그 3년과 최근의 2주는 무척 다른 시간이었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 이전의 류리크 님에 대해서는, 글로 적힌 것밖에 알지 못합니다만… 그것과도 사뭇 다르군요."
리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갑작스레 시작된 청문회 느낌.
올 것이 온 건가, 나는 놀란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하긴 리아의 정보력과 통찰력을 고려해 봤을 때, 의심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물론 이런 상황을 가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긴 퍼즈도 로드&세이브도 없는 세계. 내게 벌어질 수 있는 대부분의 위협에 대해서는 이미 상정하고 최소한의 대책들을 세워 놓았다.
다만 이쪽에는 그다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는데.
'플랜A, 잿빛수정의 부작용으로 인한 기억상실증을 핑계로 둘러대기… 먹힐까?'
조심스럽게 그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리아가 정말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제가 모르는 곳에서 넘어져 뇌진탕에라도 걸리셨습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것 말고는 류리크 님의 변화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진심으로…."
아, 진심이다.
저 눈은 진짜 진심이다.
여기서 저 진심을 진지하게 답했다간 괜히 긁어 부스럼이 생길 것 같다. 나는 적당히 농담을 지껄이며 상황을 돌렸다.
"뭐, 그대가 원한다면 신전에서 정밀하게 진찰을 받은 뒤 치료 마법을 쏟아부어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네만."
"생각해 보니 계속 뇌진탕인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 시답잖은 잡담을 주고받자니 어느덧 제도에 도착했다.
차량에 걸려 있는 아스트레이의 문장 덕분에 이렇다 할 검문도 없이 그대로 통과할 수 있었다.
―4시부터 메이플 광장에서 음유시인 대회를 엽니다!
―방금 동대륙에서 떼온 물건들입니다! 제도가 아니면 어디서도 구경 못 할 것들입니다!
제도는 차를 타고 하루 종일 드라이브해도 좋을 만큼 볼거리가 풍성한 도시다. 덕분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축물, 축제 따위로 몇 마디를 떠들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도착했습니다. 류리크 님."
운전기사가 공손하게 말하며, 차량의 문을 열었다.
내려서 본 아스트레이 소저택은 그야말로 요새와 같은 웅장함을 자랑했다. 쇠창살이 달린 담은 5m에 육박해 성벽을 연상시켰고, 저택의 내부는 수십 겹의 방어 결계 탓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기억에 따르면 일회성이긴 하지만, 할카데르의 본가에 이 소저택과 이어진 워프게이트도 있을 터였다.
'역시 전시용 피난처라는 것인가.'
소저택의 정문에 다다르자, 옆에 따르던 리아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아니, 뭐… 그냥 여쭤봤습니다."
"왜, 본인이 이제 와 류미엘을 두려워할까. 어차피 류미엘이 허락을 않을 테니 말없이 오긴 했다만, 선객이 있을 리도 없잖은가."
"글쎄요."
뭐지, 저 미소는. 귀여운데 기분이 나쁘다.
어디서 새침데기 물약이라도 마신 건지, 전혀 리아답지 않은 모습이다. 굳이 말하자면 평소의 나 같은, 약간 장난기가 섞인 모습이랄까.
'설마 여기에 뭐가 있는 건가?'
그럴 리는 없었다. 내가 미래에서 확인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갖고 있는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여긴 아무도 없을 터였다.
"류미엘이야 할카데르의 지박령 같은 존재고, 류아라도 예르파드의 승급 심사 때문에 떠났다. 류네온은 수호기사로 서임 받은 지 오래니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을 테고."
"뭐, 그리 생각하신다면."
무언가 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리아의 표정에 이미 '천하의 류리크 님도 이건 모르셨군요.'라는 말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다.
하지만,
"왜 그러십니까? 들어가시지 않고."
"아, 참. 제도에 잠시 들를 곳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 있게.
"유감스럽게도 소저택의 마공학 출입문엔 제 홍채 정보가 저장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망할.
이 이상 말을 돌리면 뭔가 내가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리아한테는 그런 사소한 것이라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극렬하게 반대하진 않는 걸 보면, 내가 죽거나 크게 다칠 일은 없는 것 같단 말이지.'
결정적으로 『 악당의 말로 』에 반응이 없다. 내가 정말 죽을 위험에 처하면 보여야 할 그것이 조용하니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리라.
나는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출입자 :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
[ 확인되었습니다. ]
―끼이익.
문이 저절로 열리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딛자니 소저택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정원의 한가운데 누군가가 서 있었다.
'관리인이 있을 줄은 알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누군가는 평범한 관리인이 아니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곱슬과 함께 치렁이는 단발, 조각같이 미려한 외모. 그 가운데 굳은 신념의 무게가 느껴지는 눈동자.
―류네온 바타체스 폰 카르펜 아스트레이
게임의 후반부까지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긴 캐릭터가 눈앞에 있었다.
* * *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감추며 애써 평정을 가장한다.
"류네온… 아직 소저택에 있었군."
"형한테 말버릇은 여전하네. 류리크."
이상했다. 내가 파악하기로 류네온은 꽤 오래전에 수호기사로 서임을 받았을 터였다. 그 때문에 게임에서도 초반부에는 아예 찾을 수가 없는 NPC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왜 아직도 제도에 남아 있단 말인가.
"수호기사가 된 지 꽤 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은 견습이었고, 이제 정식으로 승격했으니 사라질 때가 된 거지. 오늘이 그 마지막인데, 절묘한 시기에 왔구나."
견습. 그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수호기사는 견습의 기간을 거쳐 어느 날 정식으로 서임을 받고 돌연 사라지는 것이니까.
'이 시점에서는 정식이 아닌 견습이었다니… 설정에 대해 간과했구나.'
류네온과의 만남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루시아사가 전체를 통틀어도 찾기 힘든 절대선 성향의 캐릭터.
그리고 나는 자타공인 악(惡) 성향의 캐릭터.
궁합이 가히 좋지 않았다. 물론 류네온이 류아라처럼 다짜고짜 살인 주먹부터 날릴 미친놈은 아니지만.
'찝찝하단 말이지.'
나는 애써 긴장을 감추며 류네온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갑자기 '불합리한 죽음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라는 메시지가 뜨면서 데드 엔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런 걱정을 하던 중, 류네온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샤프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위르겐하이에서 통학하기엔 거리가 멀어서 말이지."
"기사 대학이 아닌 마법 대학이라니, 의외인걸."
"좀 더 맞는 쪽을 고른 것뿐이다."
"하하. 많이 점잖아졌네. 들리던 소문이 사실인가 봐."
예전에는 대체 어땠기에 이 대화의 맥락에서 점잖다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적당히 대화를 이었다.
"너 역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베디비어'가 될 거라 하던데."
"이상하네. 나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까지나 소문이 그렇다는 거다만, 사실은 너도 생각은 하고 있을 테지. 알테온의 훈장을 받는 것이 어릴 적부터 소원이지 않았던가."
기사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이자, 동시대 단 13인만 거머쥘 수 있는 백은무공 대훈장, 알테온.
13개의 알테온 훈장에는 각각 이름이 있고, 이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없다.
국왕이나 황제가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훈장을 갖고 있는 선대(先代)에게서 '이름'과 함께 계승 받는 형태로만 얻어낼 수 있다.
"로마노프 황가의 '베디비어'가 은퇴할 거란 소문은 꽤 오래전부터 돌았지. 후인을 찾느라 혈안이라는 것도 그렇고."
세계 각지에는 알테온의 훈장을 가진 13명의 기사가 존재한다. 칼라모르 기사 대학에는 '랜슬롯'이 총장으로 있고, 제국 북부의 영원(永遠)의 벽에는 '트리스탄'이 있다.
그리고 '베디비어'는 황실의 수호기사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차기 베디비어는 류네온이 되지.'
관심 있어 할 만한 얘기를 꺼내자, 나를 보던 류네온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너는… 많이 달라졌구나."
아마 류네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터다.
―류리크는 위르겐하이에서 여전히 약물에 찌들어 살고 있을 거라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도피성으로 마법 대학에 들어가려는 거라고.
'류네온의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로는, 딱 그런 식의 추론이 가능하지.'
하지만 만나보면 다르다. 대화해보면 다르다.
나는 그 점을 파고들었다.
구태여 약물을 하지 않는다는 변명도 않고, 새사람이 되었다며 구차한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대화를 하며, 생각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터.
류네온의 눈동자가 내 깊은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 류네온 바타체스 폰 카르펜 아스트레이가 '선악의 천칭'을 발동합니다. ]
[ 류네온 바타체스 폰 카르펜 아스트레이가 당신의 어둠 속에서 웅크린 빛을 발견합니다. ]
선악의 천칭은 문자 그대로 선악을 천칭의 양끝단에 세워 판단하는 스킬.
나는 당연히 악(惡)에 관한 무언가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결과였다. 물론 나는 놀란 표정 대신 덤덤하게 대꾸했다.
"다들 그런 말을 자주 하더군."
"모름지기 사람은 바뀌는 법이지. 너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거 참 고마운 말이군."
그때 류네온이 뒤편에 있던 상자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안에서 작은 브로치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거 받아."
"이건…?"
어딘가 본 적이 있는 형태의 아이템.
나는 지그시 그를 살펴보았다.
―――― 『 밤장미의 가호 』 ――――
▶ 분류 : 아이템
▶ 등급 : 중상급
▶ 설명
: 밤장미의 요정이 축복을 내린 브로치.
▶ 효과
: 총 3회에 걸쳐 축복 '밤장미의 가호'를 부여할 수 있다.
: 밤장미의 가호를 3회 사용한 뒤엔 아이템이 파괴된다.
: 어둠 속에서 시야에 대한 보너스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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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성 아이템이지만,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밤장미의 가호는 어두운 밤에 상태 이상에 대한 내성을 높여주는 축복이다. 면역이 아닌 내성을 높여주는 정도지만 그 범위가 질병부터 정신계열까지 포함하니 그 활용도가 높았다.
"이걸, 내게 준다는 말인가?"
"나는 이제 수호기사로 서임을 받았으니,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야 하잖아. 형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하하."
나는 가볍게 의심을 던졌다.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친밀했던가."
"나는 네가 나쁜 길에 물들었을 때를 알지만, 네가 멋지게 빛나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단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
그의 눈동자는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그건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선악의 천칭에서 나를 판가름했기 때문인가.'
나는 덤덤하게 브로치를 가슴팍에 차며, 흘긋 상자 쪽을 바라보았다. 저쪽엔 아마 류네온이 짐을 정리하면서 넣어둔 다양한 아이템이 있을 터.
"거기 있는 다른 것들도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하. 이것들을 줬다간 류미엘이 정말 화병으로 쓰러질지도 몰라. 하지만 이 브로치는 온전히 내 것이니 류미엘도 뭐라고 못하겠지."
잠깐 본 것만 해도 엄청난 아이템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띄는 대태도 섬월만 해도, 내게 간절히 필요한 아이템이니까.
'하지만 욕심내선 안 되겠지.'
우연한 기회로 밤장미의 브로치를 얻었고, 류네온의 신망도 어느 정도 회복한 것 같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 할 듯싶었다.
"류리크, 아마 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건 정말 나중이 될 거야."
맞다.
이변이 없는 한, 엔딩이 다가올 무렵에나 그를 볼 수 있을 테지.
"알다시피 오늘 아침에 부름을 받고 떠나는 거라 너 말고는 제대로 인사를 한 사람이 없어. 류아라, 류미엘, 그리고 아버지에게 안부 좀 전해줘."
"만나게 되면, 꼭 전하겠다."
어느새 저 멀리 달이 떠올랐다.
류네온은 시종인에게 상자를 맡긴 뒤, 저택의 현관으로 향했다.
"한 가지… 더 부탁해도 될까."
"들어보고 결정하지."
너다운 대답이구나, 류네온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 세상을 위해 싸워줘."
그리고 나 역시 마주 보며 웃었다.
"정말 너다운 부탁이군."
◈ 015
위르겐하이의 한 도박장.
분홍 머리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능숙하게 카드를 뒤집으며 말했다.
"로~ 열 스트레이트 플러쉬~."
그녀가 장난치듯 말하자, 주변의 구경꾼들이 킬킬 웃기 시작했다. 반면에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남자는 카드를 집어던지면서 일어섰다.
"이, 이이! 이건 말도 안 돼!"
"말이 되건 안 되건 돈은 가져가야겠는데~."
여자아이가 능숙하게 쌓여 있던 칩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그러자 남자는 그것을 제지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건 사기다! 사기를 쳐 놓고! 너, 너 이 빌어먹을 년!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주겠어! 한스, 당장 경비대에 연락해!"
"내가 사기쳤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그때 생각해 볼게~. 그리고 돈은 일단 내 거니까…."
"놔라! 이 빌어먹을 년아! 이 돈은 내 것…!"
남자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화륵.
그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어, 어으 으아아악!"
그러자 경비대에 연락하려던 동료가 기겁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이 꼬맹이… 마법사였어?!"
"아, 아악! 부, 불! 부울! 살려줘! 살려줘! 제발… 살려 달라고!"
"흐응, 미안하지만 나 치료마법은 몰라서~."
"아으… 아아아악!"
남자는 결국 살아남긴 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머리에 물을 끼얹고, 뒤늦게나마 신관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결국 모든 모근(毛根)과 모든 돈을 몽땅 잃고 치료비마저 빚진 채 돌아가야만 했다.
"하이고, 이게 다 얼마래?"
칩을 환전한 여자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관객들에게 개평을 뿌렸다. 덕분에 도박장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어떤 등 굽은 중년의 남자가 소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실비아 대장, 류리크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진짜?"
"응. 듣자 하니 제도로 이사를 갔다더라고."
"제도?"
실비아라 불린 여자아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쉰다.
"참나, 우리 망나니가 요새 도박장도 안 찾아, 창관도 안 찾아… 뭐하나 했더니 아예 저 멀리 도망치셨다?"
"그러니까 말야. 그놈이 우리한테 빚진 게 얼마인데!"
"귀족이니까 독촉을 안 했더니만, 아예 안면몰수하고 아예 날라버렸다라… 하여튼 귀족들은 하나같이 쓰레기 같다니까."
실비아와 한 패거리인 구경꾼들이 다 같이 귀족들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장 어쩔 거야?"
"어떡하냐. 제도까지 쳐들어가서 돈 달라고 내놓을 새끼냐."
"그, 그건 그렇지."
도박장에서 류리크에게 돈을 꿔줬던 이들이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때 류리크의 얘기를 꺼냈던 중년의 남자가 이제 기억났다는 듯,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아, 맞다. 그리고 류리크 그 망나니가 글쎄 대학에 간다더라고."
그 말에 실비아가 코웃음을 쳤다.
"뭐? 대학? 그 망나니가? 푸핫. 그딴 놈을 받아주는 대학이 있기는 하대?"
"어… 그 뭐라더라? 후인의… 반지? 그걸 얻어서 대학에 갈 수 있다던데."
그 순간 도박장의 공기가 바뀌었다.
실비아의 몸에서 흘러나온 어두운 기운이 마력과 감응해 부(不)의 기운을 흘려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봐."
실비아의 눈이 분노와 증오를 말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살기를 머금은 듯 섬뜩하다. 중년의 남자는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덜덜 떨었다.
"왜, 왜 그래. 대장… 내,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냐, 나 진짜로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다시 한번 말해 봐."
"류, 류리크가 후인의 반지를 얻어서… 대, 대학에 간다고…."
"......…."
실비아가 말없이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던 무시무시한 기운도 사그라졌다.
숨통이 트인 중년의 남자는 멀찌감치 물러서면서 패거리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어우씨, 놀라라. 우리 대장 왜 저런데?"
"왜긴 왜야. 후인의 반지인가 뭔가, 그게 대학 들어가는 프리패스잖아."
"대학? 그게 대장이랑 무슨 상관인데?"
어휴 너는 그것도 모르냐, 패거리 중 하나가 한숨을 쉬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대장이 여기서 이 짓거리 하는 게 다 마법 대학에 가려고 하는 거잖아."
"에, 에엥? 진짜?"
"여기서 버는 돈으로 13가문에 뇌물 줘서 후인의 반지를 얻는 거, 이거 때문에 대장이 이 짓거리를 하는 건데."
"아니, 대장은 이미 마법사잖아. 대학은 왜 가려는 거래?"
"나도 잘은 몰라. 부모님의 유언이라던가 뭐라던가."
그들의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조용히 있던 실비아가 마침내 눈을 떴다.
모두가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꿀꺽, 침을 삼키는 가운데 그녀가 의자에 걸쳐 놓았던 로브를 덮었다.
그리곤 도박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얘들아, 나 어디 좀 간다."
"대, 대장? 이 늦은 밤에 어딜 가?!"
"제도. 누구 좀 만날 사람이 있어서."
* * *
입학식의 날이 밝아왔다.
그동안 저택에서의 삶에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 시종들도 꽤 익숙해진 눈치고, 나 역시 저택 내의 지리를 눈에 익혔다.
덤으로 소소하게 지팡이를 하나 장만했고, 약물 중독은 B랭크까지 떨어뜨린 것이 요 며칠간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저택을 나서게 되었다.
"드디어 가시는군요."
"얼굴이 어둡다. 온종일 같이 있다가, 막상 내가 간다 생각하니 섭섭하더냐."
"전혀."
"뭐, 본인이 그리도 그립다면 호위라는 명목으로 대학에 데려갈 수도 있네만?"
"거듭 말씀드리지만, 소인은 류리크님의 수족이 아닙니다."
리아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홍차라는 뇌물 공세에도 이것만큼은 응하지 않았다. 자신은 류미엘의 가신으로서 나를 감시하기 위해 있다는 걸, 분명히 한 셈이었다.
'내게 우호적이나, 내 편을 들어줄 수는 없다라… 갈 길이 멀다.'
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말을 덧붙였다.
"허면 그대는 왜 아침부터 얼굴이 어두운 것인가."
"소인은… 류리크 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뭐가 말인가."
리아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하는 듯 얘기를 꺼냈다.
"기사와 마법사의 갈등은 오래된 것입니다. 쉽게 해소될 만한 문제가 아니지요."
그거라면 나도 대충 짐작하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어른들의 사정이지, 학생들이 있는 마법 대학이나 기사 대학에선 크게 문제 되진 않았다.
서로의 가문을 몰살시키고, 피의 복수를 주고받는 것도 이전 시대의 얘기다. 아마 학생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는… 기껏해야 괴롭히는 정도일까.
"물론 약간의 차별은 있겠지만, 네가 우려할 정도는 아닐 터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소인은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리아가 저렇게 말하니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나는 내가 아는 게임의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애써 불안을 지웠다.
저택 밖으로 나서자니 리아가 따라붙었다.
"차량 앞까지 모시겠습니다."
"음, 어제 줬던 홍차가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구나."
"......."
저택 앞에는 차량이 대기 중이었는데, 그 앞에 웬 분홍 머리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이~ 류리크 씨~!"
심지어 무척 반가운 것 마냥 손을 흔들기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아이인가?"
리아는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위르겐하이 도박장의 사기꾼입니다. 류리크 님이 60만 리브라 정도 빚을 지셨지요."
"사기꾼이라는 말은 내가 사기를 당해서…."
"일부는 실제 빌리기도 했거니와, 어쨌건 빚은 빚입니다."
60만 리브라, 한화로 따지자면 6억.
입학식 아침부터 6억짜리 채권자가 집 앞까지 찾아오니, 참으로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돌겠군."
가볍게 뒷목을 잡으며 앞으로 걸었다. 빚이고 뭐고, 입학식 첫날부터 저런 엑스트라한테 발목 잡힐 순 없었다.
나는 낯선 채권자를 내려다보며 위엄 A를 펼쳤다.
"꺼져라."
차가운 목소리에 위엄 특성의 효과가 새겨지며, 마치 하나의 스킬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일전에 마스체니의 시종이 벌벌 떨었던 것처럼, 저 사기꾼 역시 금방 나가떨어지리라.
'지금 단계에서 빚을 갚을 생각은 없다.'
나중에 여유가 생길 때면 모를까, 수중에 돈이 없어 중저가 브랜드의 지팡이를 사서 쓰는 처지인데 어떻게 돈을 갚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런데,
―덥석.
완전 주눅 들어 뭉개져 있으리라 여겼던 여자아이가, 차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이봐, 류리크 씨. 빚을 진 건 당신인데 거 말이 좀 심해?"
안색은 조금 핼쓱했지마는 그녀는 위엄 A를 버텨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어이쿠, 이젠 기억상실증으로 모른 척하기야? 아하하."
루시아사가를 '게임'으로 접할 때는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NPC의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내게 말을 거는 이도, 내가 말을 걸 수 있는 이도.
하지만 게임이 현실이 되어버린 지금은 다르다.
길거리의 부랑자부터 기차역의 노파, 자경단의 청년까지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역사(歷史)를 가진 캐릭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만 봤을 땐 곧바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 녀석이 내가 아는 NPC가 맞는지. 아니면 그저 그와 닮은 누군가인지.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개과천선했다더니 기억까지 깨끗하게 세탁했구나? 그래, 어디 한번 그 하얘진 기억을 잘 찾아봐. 60만 리브라짜리 청구서에 실비아 반즈라는 이름이 있는지."
실비아 반즈.
어딘가 낯익은 이름이었다.
"반즈?"
나는 그리 되물으며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 불합리한 죽음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뒤편에서 있던 리아가 움찔거리고, 실비아가 서슬퍼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류리크 씨.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정말 나를 몰라?"
나는 뒤늦게나마 그녀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실비아 옥스턴 반즈.
그녀는 나와 같은 '악역'이었다.
* * *
나는 눈짓으로 리아를 진정시킨 뒤,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실비아. 이 이른 아침에 위르겐하이에서 제도까지 찾아오다니, 대체 무슨 용건이지?"
"그나저나 말투가 무슨 아저씨 같아졌네. 류리크 씨."
"용건이 없다면 나는 이만 가겠다."
내가 무시하며 지나치려 들자, 실비아가 재차 차 문을 굳게 잡으며 내 앞길을 막아섰다.
"용건이야 물론 빚 독촉이지. 류리크 씨가 내게 빚진 60만 리브라, 지금 즉시 갚아줘야겠어."
"지금은 돈이 없다. 갚고 싶어도 지닌 것이 없어 안타깝군그래."
"알아. 나도 그 사실이 무척 안타까워. 그런데 말야, 최근에 류리크 씨가 좋~은 물건을 손에 넣었다고 들었단 말이지."
물건? 경매장에서 받은 것들 중 하나를 말하는 건가?
내가 눈썹을 찌푸리자니 실비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후인의 반지라던가 뭐라던가."
빌어먹을.
속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악당의 말로 특성이 반응했다. 그녀는 엄연한 사망 플래그로 날 찾아온 것이다.'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실비아라는 캐릭터와 후인의 반지라는 아이템을 중심으로 머릿속의 퍼즐들이 빠르게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빚을 모른 체하면 그녀는 결국 나를 죽일 생각인 걸까.
―그녀는 어째서 후인의 반지를 원하는가.
―실비아라는 NPC에 대해 써먹을 수 있는 정보는 없는가.
아직은 정보가 조금 부족했다.
나는 무리해서라도 좀 더 그녀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너는 왜 후인의 반지를 원하는 거지?"
"그건 류리크 씨가 알 필요 없을 거 같은데."
"후인의 반지는 마법계의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물건,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는 이상 절대 넘길 수 없다."
나는 은근하게 위엄의 효과를 발휘했다.
여기서 대화의 물꼬가 막히면 끝이기에 강하게 나간 것이었다.
"후인의 반지를 쓸 일이야… 대학에 들어가는 거 말고 없잖아?"
"네가 간다는 말인가?"
"그래. 예전에 말해줬잖아? 내가 도박장에서 썩고 있는 건 다 13가문한테 뇌물을 줘서 후인의 반지를 얻어내기 위한 거라고."
실비아에 관한 정보는 지극히 적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류리크와 마찬가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어버리는' 악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 관한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떠올리며 정보를 종합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함인가."
넘겨짚듯 물은 것이었건만, 실비아의 눈에 경악의 감정이 떠오른다.
"류리크 씨, 당신… 뭐야. 왜 그걸 아는 거야. 내가 말해줬을 리가… 없는데."
"우리가 어디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던가. 무려 60만 리브라라는 금액으로 묶인 관계이거늘."
몇 가지의 정보가 더해지자, 대강의 윤곽이 잡혔다.
'호시탐탐 샤프란에 들어갈 기회만 노리다가 내가 후인의 반지를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건가.'
그녀가 샤프란에 들어가서 할 일도 뻔했다. 그렇기에 나는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후인의 반지를 내어줄 수 없다."
"그건 류리크 씨가 판단할 문제가 아냐."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마법을 대학에서 드러내는 순간, 죽을 것이다."
"......!"
그녀는 어둠 마법의 사용자다. 자세히 보면 흑마술이 아니라 그저 '어둠'이라는 속성을 다루는 것뿐이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이단 심문'의 대상이 된다.
그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고, 그로 인해 실비아가 악역의 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죽을 걸 알면서도 대학에 갈 이유가 있을까. 빚은 가문의 이름을 걸고 차차 갚아 나갈 테니, 지금은…."
"류리크 씨. 내가 당신한테 내 과거에 대해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모르는데… 나는 당신을 죽여서라도 그 반지를 갖고 싶거든?"
실비아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는 기사 아가씨 믿고 뻗대는 거면, 크게 후회할 거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볼게. 우리 좋게 좋게 얘기로 끝내자. 응?"
실비아 옥스턴 반즈.
류리크가 달성했다던 헤루인 다음인 루나사 등위 수준을 가진 어둠 마법사.
그녀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교단의 이단 심문에 죽어버리는 캐릭터지만 어쨌거나 현재 사망 플래그를 갖고 나를 찾아왔다.
'여기서 후인의 반지를 내어주면 차후의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하지만 후인의 반지를 내어주지 않으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골몰했다.
'리아에게 의지해도 될까.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리아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리아가 목숨 걸고 나를 지킬 거란 보장도 없다.'
그녀는 이미 류아라 때도 나를 방치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방금 전에도 확실하게 '선'을 긋기도 했고.
'젠장.'
반지를 내어주거나.
목숨을 걸거나.
그 양자택일밖에 없는 걸까.
"이봐, 류리크 씨. 머리 복잡한 건 알겠는데 나도 그 반지 들고 입학처에 가야 하거든? 빨리 좀 결정할래?"
판단해라.
생각해라.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후인의 반지 때문에 빚을 탕감해줄 필요는 없다네."
"무슨 소리일까나. 류리크 씨. 설마 공짜로 넘겨주겠단 얘기는 아닐 텐데."
현재의 내 수준은 잘 쳐줘 봐야 벨테인. 그런 반면 실비아는 이미 두 단계나 위인 루나사급 마법사다.
대학 입학을 운운하지만 이미 학생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말이다.
'두 단계의 격차, 그건 숫자로도 누를 수 없는 압도적인 차이다.'
하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에 걸고.
"후인의 반지는 본래 주인이 없는 물건. 정정당당한 결투로 그 주인을 가리면 될 뿐."
나는 그녀를 이겨 보기로 했다.
◈ 016
"푸흡, 류리크 씨.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실비아의 얼굴엔 비웃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그 태도가 싫지 않았고, 오히려 달가웠다. 그녀의 방심이 곧 나를 승리로 이끌게 될 테니.
나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은 헤루인 등위의 마법사다. 그리고 너는 그 흔한 에일레르 등위조차 받지 못했지."
"나를 그딴 개자식들이 만든 등위로 판단하지 마. 내 실력은 잘 알 텐데?"
물론 안다마다.
류리크의 과거와 별개로 나는 그녀를 알았다. 마탑에서 정식으로 등위를 받진 못했으나, 그녀의 실력은 루나사 등위의 수준.
'하지만 그 실력은 어둠 마법에 한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어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나에 대한 방심.
―내 실력에 대한 무지.
―어둠 마법을 쓸 수 없는 제약.
그리고 내게도 비장의 수단 정도는 있기에, 충분히 할 만한 승부였다. 나는 오히려 도발적으로 나갔다.
"실비아, 설마 내가 두려운 건가?"
"하하, 도발이라기엔 너무 황당해서 어처구니가 없네."
"그렇다면…."
"그런데 말야, 류리크 씨가 당당해서 더 이상하단 말이지."
실비아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류리크 씨가 개과천선하려는 건 알겠는데… 옛날 실력이 돌아왔을 리는 없잖아? 그런데 그 자신감은 뭘까."
"하하. 나야 늘 자신감이 넘쳤지. 그 때문에 60만이나 되는 거금을 잃어버렸고 말일세."
가슴 아픈 얘기를 꺼냈음에도 실비아는 섣부르게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긴 한데… 류리크 씨가 바보 같긴 해도, 멍청하진 않거든.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얘기를 꺼낼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사기로 60만을 뜯긴 시점에서 이미 멍청한 건 분명할 텐데.
나는 그녀를 속이기 위해 말을 보탰다.
"이 결투에서 내가 손해 보지 않는 것이 하나 있지."
"그게 뭘까?"
"후인의 반지를 건 마법 결투는 상대방을 해하지 않아야 한다."
마법 결투에서 상대방을 해한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후인의 반지를 얻을 자격을 상실한다… 그런 규칙이 있기에, 여차하면 질 수도 있겠다 생각은 하나 죽을 일은 없다 여겼다.
"…똑똑하네. 그런 디테일까지 알고 있었다니. 그런데 나는 애초에 류리크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방금 전에 나를 죽여서라도 반지를 갖겠다 말했던 거 같다만."
"그건 농담이지. 류리크 씨도 참~ 그런 걸로 겁먹으면 곤란해."
농담 아니다.
악당의 말로 특성이 반응했으니, 그녀의 살의는 진심이라고 봐야 했다. 아마 싹 다 죽이고 그냥 뺏을 속셈이었겠지.
나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보험을 든 것이다.
"결투는 어디서 할까. 나는 여기서도 상관없어."
"저택 안에 연무장이 있다. 거기서 하도록 하지."
"흠흠, 류리크 씨. 설마 연무장에 무슨 꿍꿍이라도 숨겨 놓은 건 아니지?"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손바닥 위를 지팡이로 탁탁 두들겼다. 그에 맞춰 리아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 * *
아스트레이 소저택은 본가보다 작다 뿐이지, 그 전체 규모는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의 설계는 모두 전시(戰時)에 맞춰 설계되었다는 점. 덕분에 미관적으로는 별로였다.
실비아는 기사의 형상을 띤 석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하나만 갖다 팔아도 60만 리브라는 그냥 갚을 수 있는 거 아냐?"
"그걸 건드리는 순간, 본인의 누이가 죽이려들 터다."
"하긴. 류리크 씨네 집안 사정은 복잡하니까~."
"연무장은 이 앞이다."
소저택의 연무장은 마스체니에서 봤던 그것보다 넓었다. 바닥을 포함해 연무장을 둘러싸은 외벽 전체가 독자적인 결계 마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설계 자체가 저택 내에서도 농성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진 것이었다.
"와, 결계 수준 봐. 저택이 왜 이렇게 다 살벌하대? 아까 기사 석상도 마법 골렘이지?"
"어디 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본가에서 너를 찾아다닐 거다."
"류리크 씨, 아까는 내가 협박했다는 투로 말하더니 이제는 반대네?"
"지팡이를 꺼내라. 입학식까지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으니."
"그 전에 잠깐만~."
실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연무장의 곳곳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구둣발로 바닥을 두들기고, 벽을 만져 보고….
"흠흠. 연무장 상태가 나쁘진 않네."
"뭘 찾는 건가."
"글쎄, 류리크 씨가 가진 근거 없는 자신감의 정체?"
"여긴 아무것도 없…."
그때였다. 계속 움직이던 실비아가 연무장의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섰다. 그리곤 무릎을 굽혀 숙이더니, 지팡이로 바닥을 쿡 찔렀다.
"어라라, 이게 뭐지?"
―파직.
작은 마력을 담은 무엇인지 모를 마법이 해제되었다. 나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연무장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
거기에 서 있던 리아는 작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하하, 류리크 씨. 연무장의 상태가 고르지 않네."
쭈그려 앉았던 실비아가 일어서면서 상쾌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순간에 맞춰 얼굴을 찌푸렸다.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였다.
"쯧."
"물론 류리크 씨가 이런 짓을 했을 리는 없지만."
실비아는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했고, 나는 속이 훤히 보이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걸로 그녀의 방심이 조금은 풀렸을 터.
'내 꿍꿍이가 그거라고만 생각해 둬라. 그게 네 패인(敗因)이 될 테니.'
내가 연무장의 한쪽에 서자, 실비아가 맞은편에 서며 지팡이를 매만졌다.
"자, 그러면 정정당당한 결투를 시작해 볼까?"
실비아가 지팡이를 자신의 코앞으로 가져가며,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치마 끝을 살짝 잡아 올렸다.
그리곤 아주 올곧은 자세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나는 불만스런 눈으로 그녀를 흘기며, 초조한 태도를 가장한다.
"…결투 예식을 알다니 의외로군."
"내가 샤프란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면 더 놀라울 거야."
실비아가 싱그럽게 웃으면서 마력을 움직였다.
"입학처까지 가려면 시간이 부족하니까, 빨리 끝내자고…!"
―스스스스스.
그녀의 머리 위로 모여든 마력들이 참새 정도의 작은 새 떼를 형상화한다. 거기에 새들의 몸에서 일렁이는 옅은 열기가, 그 정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화염 쏜살새인가.'
꽤 까다로운 수준의 중위 마법.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눈에 익었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마법의 정체는 간파했지만, 실제 보이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마도 특성 D의 한계였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로 엔딩을 보았었다.'
나는 류리크이기 이전에 한유진이다. 게임이라고는 하나 전 세계 달성률 1% 미만의 업적이자 마도의 정점, 이테아(Itea)로 엔딩을 본 사람이다.
물론 게임과 실제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신동 A 특성과 내 마법적 지식이 결합한다면…!'
보이지 않아도 마치 그것을 아는 것처럼. 나는 직감적으로 화염 쏜살새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에 마력을 욱여넣었다.
"…뭐?!"
완성 단계에 다다랐던 화염 쏜살새의 일부를 어그러뜨리면서, 본래와는 다른 형태로 변질된다.
―화륵!
만들어지다 만 작은 불덩어리들이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비산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모하는 마력은 압도적으로 적지만, 마법을 시전하는 이보다 빠르게 정체를 간파해 손을 써야하는 기예(技藝).
어지간한 마법사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테크닉이다.
실비아의 얼굴에 당혹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마력 간섭이라니… 류리크 씨, 정말로 예전의 천재성이 돌아오기라도…!"
"멋대로 생각하게."
미안하지만 내겐 시간이 없다.
'마력 간섭으로 실비아의 마법을 무효화할 순 있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마법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승부가 길어지면 곤란하다.'
유감스럽지만 그것이 내 현주소였다. 내 수준에서 발현할 수 있는 마법으론 루나사 등위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마법사의 지팡이 끝은 기사의 칼끝과 같으니.'
지팡이가 목에 닿으면 패배, 그것이 마법 결투의 대표적인 불문율 중 하나였다.
"빠른 항복도 본인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만."
나는 지팡이를 마치 칼처럼 겨누며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품위를 유지하며 서두르지 않되, 속도감을 잃지 않도록. 그 모순적인 문장을 몸에 새기며 나는 걸음을 이어갔다.
"이익! 다가오지 마!"
실비아가 손을 내젓자 이번에는 노면 위의 대기가 일렁이면서 거대한 흙창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내 마력은 그보다 한발 빠르게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돌처럼 단단하게 벼려지던 창끝이 진흙이 되어 무너져버렸다.
"마, 말도 안 돼! 헤루인의 실력이 돌아왔어도 이런 건…!"
30m 가량 떨어져 있던 간극은 어느새 10m 남짓한 거리까지 줄어들었다. 그 거리감을 인지한 실비아가 뒤늦게 여러 개의 마법을 동시에 시전했다.
하지만,
―파직!
―파즈즛!
그녀가 만들어 내는 모든 마법들은 저마다 되다 만 형태로 사라졌다. 짧은 순간 내 안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실비아의 마법을 어그러뜨리는 것만으로도 마력의 소모가 심각했다.
'…역시 쉽진… 않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여유로운 척 말한다.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떤가, 실비아."
"씨발, 웃기지 마! 이게 어떻게 온 기회인데에에!!"
장난스럽던 실비아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당혹을 넘어 완전하게 깨진 그녀의 가면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난 포기할 수 없어… 절대! 절대!"
―저건 막을 수 없다.
마법의 정체를 파악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진 그녀의 전공이 아니기에 그 완성도가 낮아 간섭할 수 있지만.
'마도 D 정도로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군.'
고무망치로 모래성은 무너뜨릴 수 있지만, 콘크리트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완성형에 가까운 정교한 어둠 마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물며 그것을 발현하는 속도도 다른 계열과 다르게 압도적으로 빨랐다.
"후인의 반지는… 절대로 놓치지 않아…!!"
눈 깜짝할 사이에 마력으로 자아낸 수십 자루의 검은 비수들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실비아의 얼굴에 동요가 엿보였다.
보여선 안 될 어둠 마법을 발현한 것, 그리고 과하게 손을 썼다는 생각이 교차하고 있을 터.
"이건 좋지 않은걸."
"자, 잠깐!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
이미 3m 남짓한 거리까지 좁혀진 상황이기에, 피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내 남은 마력을 모두 끌어모은들 저 비수 중 한 자루도 막기 버거웠다.
하지만 아직, 비장의 수단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피로감이 몰려드는 정신을 다잡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왼손의 손목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며, 내가 본래 지닌 것과는 결이 다른 규모의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몸에 새겨져 있던 고대의 비술,
―파마(破魔)의 성흔.
이 세계에 처음 들어오기 전, '긴급 밸런스 패치'로 추가된 특성.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형태의 술법을 무효화 하는 고유 등급의 특성.
"그런 마법을 쓰는 건 곤란하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야말로 수 cm까지 다가왔던 비술들이 그대로 소멸되었다.
―사아아아아….
이전처럼 어그러지거나 비틀리는 정도가 아니라, 순수한 마력으로 돌아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
후회에 물들었던 실비아의 얼굴에 이채가 서린다. 그리고 그 황망하게 뜨여진 동공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거기서 비롯된 찰나의 순간이면 충분했다.
내 지팡이가 그녀의 턱밑에 닿았다.
"윽!"
"네 패배다. 실비아 반즈."
나는 항복하라는 의미로 지팡이가 그녀의 살갗에 닿도록 쿡 찔렀다. 뒤늦게 돌아온 실비아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마법사의 지팡이 끝은 기사의 칼끝과 같으니, 그런 얘기라도 하려는 건가."
"결투 예식을 안다면 이 역시 이해할 텐데. 승부는 끝이다."
현재 내 마력은 고갈 수준이다. 그리고 성흔의 획이 소모된 손목은 타들어 갈 듯 뜨겁다. 여기서 실비아가 승복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류리크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
"패배를 인정한다면, 언제든."
"언제부터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아까 그거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생사결이 아닌 결투는 상대방이 패배를 시인해야 끝이 난다."
칫, 실비아가 그런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 류리크 씨… 깔끔하게 인정할게. 내 패배야."
* * *
결투가 끝나자 리아가 돌아왔다.
그녀는 연무장에 쓰러져 있던 실비아를 보며 잠깐 놀란 듯했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만일을 대비해 사제와 성기사를 불렀습니다만, 출장비만 나가게 생겼군요."
"여러모로 수고했다."
나는 사전에 얘기하지도 않은 채, 영문 모를 수신호만 남겼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의도를 읽고 연무장에 함정을 설치했고, 신관뿐 아니라 '성기사'까지 준비시켰다.
그 말인즉, 실비아가 어둠 마법을 쓴다는 것을 이미 간파했다는 것이기도 했다.
'역시 너는… 지나치게 유능하다.'
리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나는 밀려드는 피로감에 빨리 차량에 몸을 누이고 싶었는데, 리아가 나를 붙잡았다.
"왜 결투를 하신 겁니까."
"…그야 자네가 날 지켜줄 것 같진 않았으니까?"
"결과를 보아하니, 제가 굳이 지켜드리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그녀 앞에서 무엇을 속이랴,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나는 14살에 헤루인 등위를 달성해 천재라 불렸다지. 헌데 이제 20살이 된 저 아이가 루나사 등위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대체 얼마나 큰 재능이겠는가."
"…아이라고 말하시기엔 서로 동갑입니다만."
흠흠, 나는 헛기침으로 그녀의 딴죽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운 재능이다. 그리하여 내가 품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 실비아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는 악역'이기에 게임 내에선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다. 그리고 게임으로 그녀를 접할 때야 별다른 생각을 할 여지도 없었다.
그저 루나사 수준의 적이구나, 하는 정도일 뿐.
하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는 결코 평범한 적이 아니었다.
'20살에 루나사라는 건, 어마어마한 재능이다.'
어쩌면 신동 A를 달고 있던 류리크보다도 더한 수준의 천재. 그리고 그녀의 재능에 대한 실험은 이미 이루어진 바 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는 악역'에 대해 이상한 실험을 했던 스트리머가 있었으니까.
―김아무개수무개.
류리크 살리기 프로젝트를 했던 그는 실비아에게도 같은 테스트를 했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저 아이는 훗날 임볼릭 등위를 취할 것이다."
끝나지 않는 밤(Endless Night) 실비아 임볼릭 옥스턴 반즈.
수백, 수천, 수만 개의 갈래가 있을 루시아사가의 세계에서 억지로 찾아낸 하나의 길이지만, 그 정도 가능성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내가 품을 것이다."
"어차피 류리크 님은 제멋대로 하시겠지만… 이건 위험합니다. 이단(異端)은 황족조차 피할 수 없는 중죄입니다."
"너는 그녀의 마법이 흑마술과 같다고 보느냐."
"…제가 아는 건, 그것을 흑마술이라고 부른다는 것뿐입니다."
리아조차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어둠 속성을 다루는 마법이 흑마술로 분류되는 건, 과거부터 이어져 왔던 시대의 흐름이다. 그걸 바꾸기 위해선 오랜 시간, 혹은 많은 피가 필요할 터.
"오해는 머지않아 풀릴 터이니, 너는 염려치 마라."
어둠 마법은 언젠가 다가올 '그 존재'들을 상대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이 비밀을 지키고 있으면 된다.
나는 리아에게 차량을 준비시키라고 말한 뒤,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연무장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야, 역시 세상은 넓다니까. 내가 류리크 씨한테 감쪽같이 속을 줄이야."
"자책하지 마라. 너는 좋은 마법사다. 다만 내가 많이 뛰어날 뿐이지."
"하여튼 자뻑은."
실비아는 어딘가 후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후인의 반지는 깔끔하게 포기하겠어. 하지만! 60만 리브라는 제대로 갚아야 해?"
"그 돈을 받으면 13가문을 통해 후인의 반지를 얻을 셈인가."
"물론이지! 내 목표는 오직 그것뿐인걸!"
20살에 루나사 수준의 실력을 갖추었으나, 어둠 마법에만 정통하기에 제대로 된 실력을 내보이지 못한다.
그렇다 쳐도 그녀가 에일레르 등위조차 받지 못한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실비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류리크 씨, 아무리 질은 밥이라도 재 뿌리기는 좋지 않은데."
"13가문 사이에는 이런 불문율이 있지. 어떠한 경우에도 후인의 반지를 천민에게 넘기지 않을 것. 그리고 파면당한 마도 가계에도 넘기지 않을 것."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눈에 닿을 듯 보였다.
나는 그 흔들림 사이로 사정없이 칼을 쑤셔 넣었다.
"애초에 저들이 너를 인정할 것 같았으면, 진즉에 마도 등위를 주었을 터다. 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으니까. 본래라면 네 실력에 걸맞은 등위를 갖고 샤프란에 지원 서류를 넣으면 된다. 하지만 저들은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 봐, 류리크 씨."
"후인의 반지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 외의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저들은 어떻게 해서든 너를 샤프란에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직 모르는…."
"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녀는 말했다.
―내가 샤프란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면 더 놀라울 거야.
그녀는 오롯이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거기서 아버지의 유산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걸 바쳤다. 하다못해 마법 결투의 예식마저 아는 그녀가, 그 당연시 된 불문율을 모를 리가 없다.
"너는 샤프란에 들어갈 수 없다."
"…류, 리크 씨…. 지금 내가 졌다고… 너무 막말하는…."
하수는 상대방에게 좋은 조건을 들고 가 설득한다. 중수는 상대방을 말로 현혹하며 설득한다. 그리고 고수는,
'상대방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내 말을 이어갔다.
"단 하나, 어떤 외압도 상관없이 네가 샤프란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
"황가의 인물은 샤프란에 입학할 때 '호위'를 하나씩 대동할 수 있지."
원래는 리아를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명백히 선을 그었다. 조금 느슨해진 것 같아도, 선은 여전히 유효하기에.
"내 이름은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로마노프 제국의 심장을 품고, 바타체스의 피를 흘리는 자."
너를 본 순간부터 그리 결심했다.
네 실력을 가늠하고, 승패를 점치고, 네 과거를 짜 맞추면서… 지금 이 순간까지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리 공을 들였으니, 쉽게 놓아주진 않을 거다.
"너를 내 호위로서, 샤프란에 데려가도록 하지."
◈ 017
신기하다는 듯, 리무진 내부를 둘러보던 실비아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삼 류리크 씨가 엄청난 부자라는 걸 느꼈어."
"부자는 아니다. 이 리무진도 굳이 따지자면 가문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하긴, 진짜 부자였다면 진즉에 내 돈을 갚았을 테지. 도박장 구석구석 돈 꾸러 다니지도 않았을 거고."
대체 이놈은 온 사방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다닌 건가. 언젠가 날 한 번 잡고 싹 다 청산하긴 해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60만은 갚은 셈이니 다행이로고."
"어, 잠깐만. 그 60만이 혹시 내 60만은 아니지?!"
"정확히 그게 맞다."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실비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한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과 불만 등의 감정들이 뒤섞였다.
"잠깐만. 류리크 씨. 대학에 들어가게 해주는 건 고맙지만…."
"애초에 후인의 반지에 60만의 값어치를 매긴 건 너였다. 이걸로 그 값어치는 했을 터."
나는 논리적으로 충분히 납득 할 수 있는 설명을 했지만 실비아가 그건 아니지, 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학교에 학생으로 가는 거랑 호위로 가는 건 얘기가 다르지. 나는 정식으로 수업도 못 듣고, 학교 친구들이랑 놀지도 못하는 거 아냐?"
"애당초 네 목표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그 마법'의 부흥을 이끄는 것 아니던가. 샤프란 대학은 그저 연구실적과 논문 발표를 위한 수단일 뿐."
등위를 받지 못했다 해도, 루나사 수준의 실력이면 어디 가서도 대접받을 수 있다. 샤프란이 아닌 다른 대학이라면 교수 자리까지도 노려볼 위치.
결코 학생으로 들어가 배움을 구할 처지는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목표는 그것뿐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내 예상이 적중했는지 실비아가 기가 막히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이, 진짜. 대체 내가 얼마나 술에 취했길래 류리크 씨한테 그런 것까지 말한 거야?!"
"뭐, 그 술김 덕분에 이런 기회가 생겼으니 좋은 것 아니겠나."
"…그보다도 헤루인인 류리크 씨한테 된통 당한 걸 보면, 대학에서 다시 배워야 할 거 같은데."
"그건 내가 너무 유능해서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라."
나는 눈짓으로 '그래서 60만은?'이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러자 실비아는 푹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60만은 그걸로 퉁치자고. 하지만 내 친구들 건 꼭 갚아야 돼."
"그쪽은 여유가 생길 때 하도록 하지."
내가 여유롭게 웃어 보이자, 실비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참, 내가 알던 류리크 씨랑은 너무 다른데. 당신, 류리크 씨가 맞긴 한 거야?"
"......."
그녀는 장난삼아 물어본 것일 테지만, 실은 그것 때문에 꽤 많은 고민을 했다.
망나니로 돌아갈 수는 없고, 달라진 모습을 밀고 가자니 주변은 의심하고. 그래서 삼일 정도 고민한 끝에 나름 최적의 답을 준비해 놓았다.
"어릴 적의 나는 아스트레이의 신동이고, 세기의 천재였다. 헌데 그 어린아이가 달라져 끔찍한 망나니로 전락했지."
"흐음. 나는 망나니였던 류리크 씨가 싫진 않았는데."
"그 망나니가 다시 한번 달라져 지금이 되었으니… 뭐, 사람 일이란 모른다는 말인 게지."
사람은 바뀌는 법, 이 당연한 것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했었다.
설명을 들은 실비아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응? 뭔데?"
나는 장난기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 호위다. 그리고 호위는 보통 주인에게 반말을 사용하지 않지."
"......."
"그런데 자네는 지금 내게 반말을 하고 있군."
줄곧 생생하게 움직이던 실비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류리크 씨, 설마 지금…."
"농담이다. 부르던 대로 부르거라."
피식, 내가 가볍게 웃어 보이자 실비아가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진짜로 류리크 씨의 쫄따구가 됐다는 걸 느꼈어."
* * *
제도 뤼겐베르크의 북동부, 로팅엘 구(區).
황성에서 한참 떨어진 그곳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그 규모는 러시아의 바이칼호처럼, 도시 정도가 아니라 어지간한 국가 규모의 크기를 자랑한다.
그 호수 위에 샤프란은 마치 오래된 고성(古城)처럼 고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와, 진짜 멋지다."
"실제로 보면 훨씬 더 크게 느껴질 거다."
"실제라니?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잖아."
"레이칼 호(湖)는 수많은 결계로 인해 마력의 흐름이 뒤틀려 있어, 저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계로 구분된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실제 샤프란 대학이 있는 호수 위의 '섬'은 지도상으로 표시되는 것보다 몇십 배는 넓다. 마법 왜곡이 그런 결과를 일으킨 것이다.
"아, 알고 있었거든! 내가 샤프란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많은 걸 알아봤는데!"
"그러면 길 안내와 등록까지 자네에게 맡겨도 되겠나."
"…솔직히 말해서 입학 전형밖에 안 알아봤습니다… 죄송합니다…."
"흠흠. 학교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거라."
샤프란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다리로 이어져 있고, 그것을 건너기 전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여기가 샤프란의 입학처다."
내가 눈앞의 작은 요새를 올려다보며 말하자, 실비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입학처라기보다는 무슨 요새인데?"
"샤프란은 대륙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최중요 시설이다. 당연히 외지인의 출입을 철저히 금하는 만큼, 여기가 그 관문 역할을 하는 거다. 때문에 안에는 제도방위군 소속 군인들도 있지."
입학처가 학외에 존재하는 기형적인 형태, 그것도 높은 언덕에 방벽과 첨탑으로 둘러싸인, 마치 작은 요새와 같은 모습이니 독특하다면 독특하다고 볼 수 있었다.
샤프란의 입학처를 보는 건 처음인지, 실비아가 질색을 했다.
"엑… 학교가 살벌한 건 둘째치고, 무슨 계단이 이렇게 많아?"
"샤프란의 캠퍼스는 이보다 더할 거다."
나는 실비아를 다독이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절반쯤 올라왔을까, 로팅엘 구의 정경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며 저편에서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우…!
제국 횡단 열차가 도착한 것이었다.
「 이번 역은 샤프란 마법 대학역. 샤프란 마법 대학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 문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번 역은…. 」
기차가 정차하자,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애초에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 아니기에, 아마 저들의 대부분은 샤프란의 신입생이고, 몇몇은 그들을 따라온 학부모들일 터였다.
실비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어, 어마무시한 인파!"
저기에 휩쓸렸다간 절차가 한참은 늦어질 게 뻔했다. 나는 토끼 눈을 하고 있는 실비아를 툭 건드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입학 등록까지 해야 하니, 서두르도록 하지."
한시바삐 계단을 오르고, 요새의 입구와도 같은 부분을 지나자 접수처의 플랫폼과 직원들이 보였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직원이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샤프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신입생이십니까?"
"그렇다."
"신입생이라면 입학증서를 제출해주십시오."
나는 후인의 반지를 내보였다. 그러자 접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쪽도 신입생입니까?"
"저는…."
"내 호위다."
내가 대뜸 그리 말하자 접수원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호위 말입니까?"
"본인의 이름은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샤프란의 학칙 142조 17항에 의거해, 바타체스의 이름을 지닌 황족은 학내에 호위를 하나 둘 수 있게 되었을 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자 직원의 얼굴에 물음표가 연달아 떠올랐다.
"142조, 17항이… 어… 그… 렇군요.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접수원은 연신 당황한 티를 내더니 데스크 뒤편으로 사라졌다.
"류리크 씨. 접수원 언니가 왜 저런데?"
"별거 아니다. 황족이 호위를 데리고 입학한 게 130년 만이니 조금 당황한 게지."
내가 덤덤하게 말하자 실비아가 입을 떡 벌렸다.
"…류리크 씨는 130년 전에 쓰던 학칙을 들먹이면서 날 데려온 거야?"
"본인의 비상한 두뇌와 노고에 감탄하도록."
10초 정도 지나자, 이번엔 상급자로 보이는 다른 직원이 걸어 나왔다.
남자는 바타체스라는 이름 때문인지, 망나니라는 별호 때문인지 무척이나 격식을 갖추어 말했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입학하시기에 앞서 호위에게 몇 가지 확인 사항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저 멀리 먼지구름을 몰고 오는 인파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저쪽보다 늦지 않게만 해주게."
"금방 끝날 겁니다."
싹싹하게 웃은 그는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실비아 옥스턴 반즈."
그 대답과 함께 허공에 종이와 펜이 나타나더니 알아서 움직이며 그 이름을 써 내려갔다.
"실비아 옥스턴 반즈… 혹시 훈장이나 등위가 없습니까?"
"없는데요."
영업용이라고 땜질이라도 한 것 같던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것이… 잠시, 만 기다려주십시오."
슬쩍 종이를 보니 마도 등위, 혹은 기사 훈장에 대해 기입하는 란이 있었다. 아마 저기를 공란으로 넘겨도 되는지, 남자도 모르는 것이리라.
"죄송합니다만. 다소 절차에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입학식에 늦지 않았으면 하네만."
"그쪽은 문제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30분… 아니, 40분만 기다려주십시오. 잠시 다른 곳에 다녀오셔도 좋습니다."
남자는 잰걸음으로 사라졌고, 어느덧 신입생의 인파는 지척까지 다다랐다.
"직원 앞에서 매우 감격해서 떨 줄 알았는데… 꽤 태연하더군."
"나는 지금 류리크 씨의 호위인 거잖아. 내가 류리크 씨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굽신거리면, 그건 아스트레이에 먹칠을 하는 셈일 테니까.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만큼은 체면을 챙겨야지."
혹시나 해서 걱정했는데, 역시 개념이 제대로 된 친구이다. 하지만 구태여 그 개념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너 편할 대로 행동해라."
"으응? 하지만…."
"귀족들이 넘쳐나는 이 학교에서, 누군가의 호위라는 건 당사자 대신 괴롭히기 좋은 먹잇감이다. 특히나 망나니의 호위라면 더욱 심하겠지."
나를 싫어하는 놈들은 넘쳐나겠지만, 그 대부분이 아스트레이라는 후광 때문에 선뜻 덤벼들진 못할 터다. 하지만 호위라면 괜히 괴롭히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터.
"여기선 오히려 네가 나를 편하게 대하면서, 나와 비슷한 수준임을 내보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녀의 행동거지가 내 위신이나 평가를 떨어뜨릴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괴롭힘 때문에 흑화해서 사고 치는 편이 더 곤란하다.'
지금은 약간 힘 있고 철없는 애처럼 보이지만, 비뚤어지는 순간 무시무시한 악역이 된다. 되도록 그런 트리거를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허울 없이 어울리는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
"아무튼 시간이 비게 되었군."
"나 여기 별로 있고 싶지는 않은데…."
실비아가 몰려오는 인파를 보며 그런 걱정을 말했고, 때마침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시간을 때울 좋은 생각이 있는데."
* * *
샤프란 마법 대학, 유월의 정원.
거대한 화원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마법 결계로 인해, 내부의 모든 것이 6월이라는 시기에 계절감이 멈춰 있다.
싱그러운 햇살에 반짝이는 식물들은 여름의 흐름에 맞춰 짙은 녹음의 빛깔을 뽐내고 있다. 그런 정원의 한 가운데, 조그마한 정자(亭子).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 가운데서 내용을 전달하고 있던 학생은 들고 있던 서신을 접으며 말을 정리했다.
"…라는 것 같습니다."
사건의 개요를 전해 들은 이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들 중 하나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비죽이며 운을 텄다.
"아스트레이의 망나니가 샤프란에 입학한다고 들었을 때는 코웃음 쳤는데, 그게 실제로 벌어지게 될 줄이야."
"마스체니가 후인의 반지를 빼앗길 줄 누가 알았겠어."
다른 누군가가 흐음, 턱을 쓸며 말했다.
"빼앗겼다는 것도 확실하진 않아. 샤일라가 류리크에게 기사 서임을 받고 칼라모르로 진학했다니까."
"후인의 반지와 기사의 훈장을 맞바꿨다… 라는 거네."
이번에는 어떤 남학생이 책상을 탕! 치면서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망나니가 벨테인 등위의 마법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럴 때 총장님이 나서주면 좋을 텐데…."
누군가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반대편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스트레이의 당주가 3황자잖아. 거기에 황녀인 샤르미넨 총장이 직접 나섰다간 황실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어."
"그래. 둘 다 황위엔 전혀 관심 없는 분들이지만, 잘못 불을 지폈다간 황위 계승 건으로 내전까지…."
이야기가 산으로 가듯 흘러가자, 상석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누군가가 손뼉을 치며 중재에 나섰다.
"일어나지 않을 비약은 거기까지 하고, 현안에 집중하자고. 일단 샤르미넨 총장님의 힘은 빌리지 못한다는 전제로 보면 되는 거잖아."
"그래. 그래. 일단 류리크가 대체 왜 샤프란에 왔는지부터 파악해야지."
중구난방 복잡하던 이야기가 다소 정리되었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는 못한다. 그들 역시 류리크가 '왜' 샤프란을 선택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그게 문제란 말이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어."
"약물 사건 때문에 마법적 소양은 모두 잃어버렸다고 들었는데."
"가문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걸 억지로 선택했다라…."
쉬이 답이 나오지 않자 좌중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모인다. 회의가 시작된 이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누군가에게로.
"우리 후배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후배라고 불렸음에도 상석에 앉아 있는 여인.
그녀는 어딘가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글쎄. 그건…."
◈ 018
―시간 때울 만한 좋은 생각이라는 게… 쇼핑이야?
―자네도 그렇지만, 우리 지팡이의 상태가 별로 좋진 않아.
―류리크 씨가 중저가 브랜드를 쓰는 거지, 나는 나름 주문 제작품인데?
―마음껏 고르거라. 물론 자네의 지갑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말이지.
―뭐 그런 거라면… 이 아니라, 잠깐만. 류리크 씨. 내 지갑의 한도는 갑자기 무슨 말이야?
입학처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기에, 모처럼 상점가에 들렀다. 그래서 지팡이도 새것으로 바꾸고, 기타 필요한 물품들을 몇 가지 장만했는데… 실비아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마음껏 고르라더니, 왜 돈은 내 지갑에서 나가는 건데…."
그녀가 동전 한 푼 남지 않은 지갑을 탈탈 털며 울상을 지었다. 나는 엘프목으로 만든 지팡이를 품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차후 갚을 터이니 결국은 내가 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적의 논리를 제시하자 실비아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챙겨주는 줄 알고 고마워했던 내가 바보 같아서 싫어!"
"그래도 마음껏 쇼핑했으니 마음을 풀어라."
"남의 돈으로 당당하게 생색내지 말라고! 그리고 결국 내 지팡이는 새로 사지도 못했잖아!"
"나는 새로 사도 좋다 윤허했다. 지금 가진 주문 제작품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건 너였지."
실비아가 머리를 박박 긁으며 외쳤다.
"진짜 말도 안 돼! 얼마 전까지만 해도 60만을 빚졌던 류리크 씨한테 내가 왜 돈을 또 꿔줘?!"
"그 빚졌던 60만을 갚았으면 훌륭한 변제인이다. 오히려 신용도가 올라간 셈이지."
"돈으로 갚은 것도 아니잖아!"
아웅다웅, 그런 잡담을 하다 보니 어느새 사프란 입학처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까 전 기차에서 쏟아졌던 인파는 그새 교통정리가 되었는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우리를 알아본 입학처의 직원이 학생증을 넘겨주었다.
"오셨군요.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님, 그리고 실비아 옥스턴 반즈 님. 두 분 모두 사프란 마법 대학에 등록되셨습니다."
"왜 저한테도 학생증을 주는 거죠?"
실비아가 의문을 표하자 직원이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호위 제도가 마지막으로 시행된 것이 130년 전이라, 그때의 양식이 남아 있질 않습니다."
"그렇… 군요?"
"그리고 호위 제도를 쓸 황족분이 딱히 없으실 듯싶어, 임시로 학생증을 발급했습니다."
요컨대 자기들 귀찮아서 대충 학생증으로 때운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실비아가 표정 관리를 한다고는 하지만, 입꼬리가 계속 씰룩거리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일이 생각보다 쉬워질 수도 있겠어.'
실비아가 대학에 들어오는 목적은 어둠 마법이 흑마술이 아닌 제대로 된 학문임을 증명하는 것.
나는 실비아를 신진 교수들에게 연결시켜 주는 그림을 생각했다.
쉽지 않겠지만, 그것 외엔 딱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비아 본인이 정식 학생이 된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다.'
내가 억지로 연결시키는 게 아니라, 학부생의 연구로서 교수와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된다면… 어둠 마법이 정착되는 시일을 앞당길 수 있다는 소리다.
'녀석들이 발호(跋扈)하기 전에 어둠 마법이 정착된다면… 그 녀석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벤트의 스토리상 필연적 죽음이 예정된 NPC. 억지로 살리자면 막대한 자원이 소모되기에 지금까진 그런 선택을 안 했었지만, 실비아가 사프란의 학부생이 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기에 나는 한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호위 역시 재학생과 동일한 취급을 하도록, 명문화가 되어있을 터이네만."
"예?"
"142조, 17항의 예외 조항으로 호위가 마법사일 경우 정식으로 학적을 등록해 호위 대상과 함께 수학하도록 하게끔 되어 있을 터. 제대로 확인은 해 보았는가."
했을 리가 없다.
사프란의 학칙서는 조(條)만 300에 달하고, 밑의 항(項)으로 가면 법전을 방불케 하는 아득한 분량을 자랑한다.
심지어 보기 좋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 지하의 케케묵은 어딘가에 박혀 있다. 그래서 교직원들에겐 20개 내외의 조항만 적힌 간단한 축약본만 지급되는 것이 지금 실정.
당연히 눈앞의 이 남자가 뭔가를 알 리가 없다.
"그렇… 습니까?"
"본인의 말을 못 믿겠다면 지하 서고의 J-113칸에서 위에서 3번째 단에 학칙서가 있으니, 확인해 봐도 좋다."
"류리크 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지만, 같이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그래도 벨테인 등위를 취득해야…."
"그녀는 헤루인 등위의 마도사다."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두 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어!?"
"저, 정말입니까?"
실비아, 너까지 '어!?'라면서 놀라면 어떡하냐. 직원이 뭔가 수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더냐.
나는 직원이 의심이 커지기 전에 설명을 이었다.
"그녀는 가르시아 공화국의 마탑에서 그 등위를 수여 받는 바 있다."
"가르시아… 공화국 말씀이십니까?"
"설마 모른단 말인가? 본인이 알기에 공국 통령의 아들이 2학년에 재학 중인 것으로 알고 있네만. 작은 귀족 가문도 아니고 통령의 자손이 엄연히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그 나라조차 알지 못한다는 건…."
내가 쓸데없는 말을 길게 잇자, 직원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늦는다고 해 봐야 입학식에 불참하게 될 뿐이니까 큰 상관은 없다.
'샤르미넨의 별난 훈화 말고 들을 것도 없으니까.'
한편 직원이 사라지자 석상처럼 굳어 있던 실비아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왜 그러는가, 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니, 실비아는 자체 음소거라도 한 듯 바람 새는 목소리로 외쳤다.
"류리크 씨! 그게 뭔 헛소리야?!"
"뭐가 말이냐."
"헤, 헤루인 등위라니?! 난 에일레르 등위도 못 받았다고!"
안다.
하지만 등위를 논하기 이전에 그녀는 이미 숙련된 실전 마법사다.
"네 실력은 루나사 수준이다."
"읏, 아니… 그… 어떻게 알아?!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렇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면…!"
"들키지 않는다."
"아니, 왜 그렇게 확신을 하는 건데?!"
"가르시아 공화국은 지금 지독한 내전에 휩싸인 상태다."
가르시아 공화국은 루시아사가에서도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나라다. 소국(小國)일뿐더러, 게임 초반부부터 내전에 휩싸여 금방 멸망하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즈음이면 통령 관저가 말끔하게 전소되지 않았을까.
"내, 내전? 그게 무슨 상관인데."
"온 나라가 뒤집어지면서, 통령 관저까지 불타는 마당이다. 마탑이라고 멀쩡할 리가 없지."
그 말인즉, 연구 자료부터 마법사 등록에 관한 서류들까지 죄다 날아간다는 소리다.
"…마, 마탑에서 아예 서류가 날아가면 등록이 자동 말소되잖아? 재등록하라면서 뭐라고 할 텐데…."
"사라진 지 몇 달 된 마탑에서 등위를 받았다고 떠들면 저들도 뭐라고 하겠지. 하지만 가르시아의 내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사프란에서 확인해 달라며 연락해 봐야 받아줄 리가 없고, 그렇다고 마탑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니 등록이 말소가 되지도 않지."
시기가 절묘하다.
아마 사프란에서 제대로 뭔가를 확인하려 할 때 즈음, 딱 사라지지 않을까.
"나중에 서류라든가 내라고 하면 어떻게?"
"그건 적당히 위조해서 만들어 내면 된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내겐 '리아'라는 무척이나 유능한 NPC가 있다. 홍차 한 박스 사주면 입학처장도 속일 완벽한 위조 서류가 만들어질 터다.
"아예 재등록을 하라고 하면…."
"그건 네가 바라던 바이지 않나.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마도 등위를 획득하는 것."
"......!"
"심지어 그때는 본인이 참관을 할 터이니, 저들이 불공정한 처사를 보일 가능성도 현저히 낮다."
즉각적인 발상이라 해서, 허술하게 덤벼든 것이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변수와 만일을 충분히 고려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내가 이 게임을 몇백 회차를 플레이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게… 뭔데?"
"나는 바타체스이고 동시에 아스트레이이다. 더없이 고귀한 바타체스의 황손이며, 북방의 패자인 아스트레이의 혈통을 잇는 몸이다."
내가 약간의 과장된 액션을 섞어 말하자, 실비아가 볼을 샐쭉인다.
"자기 자랑이라면…."
"그리고 너는 그를 호위하는 자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더 이상 '반즈'의 굴레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 나와 함께하는 이상, 너는 바타체스의 그리고 아스트레이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
"네가 내 곁에 있는 한 바타체스라는 이름이, 아스트레이라는 이름이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 말을 할 즈음, 저편에서 직원이 돌아왔다.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을 보아하니,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류리크 님, 말씀하신 대로 처리되었습니다."
"좋군."
"다만 마도 등위를 취득했다는 서류는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내주 안으로 보내주지."
"감사합니다."
부탁을 하는 입장인 내가 도리어 감사를 듣자니 기분이 묘했다만, 어쨌건 일은 잘 해결되었다.
나는 직원에게 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셔틀이 보이지 않는데, 혹 늦은 것인가?"
"아닙니다. 곧 마지막 셔틀이 들어올 것입니다. 오히려 알맞게 도착하신 셈이죠."
그 말에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실비아가 그대로 멈춰 있다.
"......."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가도록 하지."
"…어, 어! 으응. 가, 가야지!"
방금,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은데….
'별거 아니겠지.'
* * *
그 길로 직원의 안내에 따라 플랫폼에 들어서자니, 때마침 셔틀이 다가오고 있었다.
―슈우우우우.
지하철 반 칸 정도 크기의 그것은, 딱 공항철도에서 공항으로 가는 그것과 흡사한 형태였다.
이미 다른 학생들은 일찍 떠났는지, 플랫폼에는 우리 말곤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실비아가 아까 전부터 처음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얏호! 내가 사프란의 셔틀에 타게 되다니!"
"그리도 좋더냐."
"학생증 건도 그렇고… 지금이라면 류리크 씨한테 뽀뽀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내 쪽에서 거절한다."
셔틀에 오르자 곧 문이 닫히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폐쇄된 내륙 수역인 만큼, 물결은 잔잔했고 멀리 보이는 사프란도 놀이공원에서 곧잘 보이던 조형물 같은 느낌이었다.
셔틀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차창 밖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한다.
"조금 있으면 경계(境界)를 지난다. 괜히 놀라지 말도록."
"밖이랑 안이랑 왜곡해서 보여주는 그거 말이지? 그래봐야 크기만 조금 다르고 그런 걸 텐데, 놀라고 말고 할 게 뭐가 있…."
실비아의 말이 잦아들면서, 돌연 세상의 풍경이 바뀌었다.
잔잔한 호수였던 레이크호의 물결이 먼바다의 파도처럼 철썩이며 부서져 내린다. 그리고 하늘은 조금 전과 아예 기후가 다른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어라?"
거기에 비가 내리며 저 멀리 천둥이 치는 것이 보인다.
실비아는 벙찐 표정으로 창밖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과 밖이 전혀 다른 세계라 했지 않느냐. 이곳은 사실상 이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듣기는 들었어. 이 안의 어딘가에 진짜 이계와 이어지는 문이 있다고…."
반쯤 넋이 나간 듯 밖을 보던 실비아가 그런 소리를 했다. 나는 그 말을 애써 모른 척하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역시… 실제가 느낌이 확실히 다르긴 해.'
나 역시 화면으로만 보던 것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남다르긴 했다. 그렇게 풍광에 감탄하면서 밖을 구경하다 보니, 금세 반대편 플랫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슈우우우우.
문이 열리면서 나와 실비아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해안의 암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들, 그 위로 두터운 성곽과 드높은 첨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입학처도 그렇더니만, 이렇게 보니까 마법 대학이라기보단 진짜 요새 같다."
"실제 요새의 기능을 하긴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계단이 정말 지랄 맞네."
다행히 사프란을 중심으로 반원의 결계가 있어, 셔틀에서 내린 뒤부터 비 맞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그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사프란의 무지막지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니, 조금 위에 이쪽을 기웃거리는 이가 있었다.
척 보니 흔하디흔한 조교수 NPC였다.
"아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류리크 학생! 입학식이 곧 시작됩니다. 서두르세요!"
◈ 019
호들갑 떠는 조교수의 뒤를 따라 대강당에 들어선다.
입학식이 이루어지는 대강당은 마치 축구 경기장 절반 정도를 뚝 떼어놓은 것 같은 규모를 자랑했다. 덕분에 수백 명의 신입생들이 모두 들어서고도 꽤 여유로웠다.
조교수의 안내에 따라 빈자리에 앉자니, 곧 연단의 구석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
"아하하. 올해 신입생들은 활기차서 보기 좋네요오~."
150이 채 되지 않는 작은 키, 자신의 머리보다 한참 큰 고깔모자를 푹 눌러쓴 이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수백 명의 신입생들을 앞에 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흠흠, 모두 반가워요오~. 총장인 샤르미넨이예요오~."
그녀가 바로 로마노프 제국의 4황녀, 샤르미넨 바타체스 폰 멘테스터 레일라인.
류오넬과 마찬가지로 황가에서 벗어나 레일라인 가문을 일군 당주이자,
임볼릭 등위를 얻어내고 이테아까지 바라보는 최고위 마도사이며,
샤프란 마법 대학의 총장직을 맡은 괴물 중의 괴물.
'50대인 류오넬과 동년배인데 키랑 얼굴은 중학생 정도라니….'
외형과 말투만 봐도 게임적인 설정이 잔뜩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는 캐릭터였다.
"저는 옛날부터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싫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훈화를 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네요~. 하하."
그녀는 자신의 농담(?)이 재미있었는지 얼굴을 뒤로하며 큭큭, 웃었다. 증폭 마법에 그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어 많은 이들이 곤혹스러워했다.
'역시 개그 코드에 나사 하나 빠진 건, 게임이랑 똑같군.'
저래 놓고 속으로는 독사를 한 움큼 키우는 흑막 같은 설정까지 품고 있으니, 그야말로 작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NPC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짧게 할게요오! 모두들 금단의 숲에는 들어가지 맙시다. 호기심 많고 혈기왕성한 친구들은 꼭 가고 싶다면, 두 가지 서류를 꼭 챙깁시다. 자퇴서와 유언장!"
샤르미넨이 이히히, 마녀처럼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금단의 숲에 들어간 것이 발각될 경우, 벌점 100점! 즉, 퇴학이니까 미리 자퇴서를 쓰시고. 금단의 숲에 들어가면 어차피 시체로 나올 테니 유언장을 미리미리 써 둡시다! 총장의 훈화 말씀은 여기까지하죳!"
순식간에 훈화를 끝낸 샤르미넨이 짝, 박수를 쳤다. 그러자 신입생들의 사이사이로 기다란 테이블이 소환되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몇몇 학생들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우, 우와. 이게 다 뭐야?"
"이런 마법도 있었어?!"
테이블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솟아나는 만찬이 가득했고, 허공에는 작은 샹들리에 같은 장식과 함께 수많은 촛불들이 나타났다.
덤으로 온갖 종류의 주류들이 즐비한 트레일러도 여기저기 생겨났다. 대강당이 단번에 연회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술이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거야?"
학생들의 긴가민가해하는 반응을 보던 샤르미넨이 와하하,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그리곤 자신의 머리만 한 잔을 치켜들었다.
"모두 먹고 마시고! 오늘 하루는 찌~인하게 놀아도 좋아요! 아하하하!"
* * *
입학식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내가 '아스트레이'인 탓에 누군가와 어울리건 교류하는 일은 없었지만, 축제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 썩 괜찮았다.
술을 입에 댄 것도 오랜만이라 나쁘지 않았고.
알코올에 취해 허우적거리는 귀족들을 보는 것도 여흥의 하나였다.
―샤프란 마법 대학의 영광을 위하여!
―그거보다는 가문의 영광을 바라는 게 낫지 않겠어?
―그렇다면 내 인생의 찬란한 앞날을 위하여!
―그건 너무 노골적이잖아! 푸하하!
하지만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순 없었다.
"류리크 씨… 좀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슬슬 돌아가자는 말에도 실비아가 아쉬운 듯, 와인 잔을 내려놓질 못했다. 친구가 없음에도, 그저 먹고 마시며 이 분위기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여기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술김에 시비라도 걸리면 곤란하니까.'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마저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내가 왜 너를 호위로 데려왔는지 아는가."
"으응? 60만을 리브라를 얼렁뚱땅 갚기 위해서?"
"아니다. 내가 널 데려온 것은, 네가 진정 뛰어난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에, 에헤이. 갑자기 부끄럽게 왜 그래에…."
나는 발갛게 얼굴을 붉히는 실비아에게,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학교에 내 적이 얼마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많기야 많겠지만… 아스트레이의 후광이 덕분에 괜찮을 거라면서?"
"모두가 내려다보는 대낮에 본인을 건드릴 머저리는 몇 없을 터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들은 더 은밀하게, 손을 쓰려 하겠지."
물론 저들이 은밀하게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긴 할 터다.
"그리고 술은 '청춘의 실수'라는 미명하에 별의별 짓거리들이 허용되는 마법의 도구지."
내가 후인의 반지로 입학한 게 오늘이라지만, 정보 빠른 녀석들은 벌써 그 소식을 접했을 터다.
어쩌면 샤일라에게 후인의 반지를 넘겨받았을 때부터 파악했을 수도 있고.
'그러니 지금 손을 쓴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앞으로 그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겠지만, 굳이 마주칠 필요는 없다. 되도록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거지.
"실비아, 자네가 믿지 않을 수 있겠다만… 본인은 아주 평범하게 이 학교를 다니고 싶다."
"......."
"물론 그 평범이 남들과 우정을 쌓고, 멋진 추억을 남기려는 건 아니다. 그저 성실하게 공부하고, 훌륭한 마법사가 되고 싶을 뿐이다."
뉘앙스가 조금 다르긴 해도, 이건 진심이다. 마법 대학 학부생 직업이 있는 지금, 내가 가진 마법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키워 놓아야 한다.
그래야 이후의 전개에서 어떤 일이 닥치든, 좀 더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혹시 '화이트윙'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는가."
"아, 그 우등생들한테만 준다는 뱃지?"
"내 목표가 그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비아가 인상을 찌푸린다.
"에엑. 전혀 안 어울리는데."
"본인은 아주 성실한 노력파이다만?"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건 진짜 공부 열심히 하고, 품행도 단정한… 진짜 범생이한테 주는 거잖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무튼 그게 왜 필요한데?"
"화이트윙 뱃지를 가진 자에겐 여러 혜택들이 있지. 성적 우수 장학금이나 기숙사 배정에 선택권을 갖기도 하지."
"류리크 씨한텐 다 필요 없는 것들 같은데."
"그리고 '지하 서고'에 대한 출입이 허용된다."
샤프란의 연혁은 그야말로 마법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래되었다.
이단의 산물이라 불리는 마술(魔術)이 마법(魔法)으로 인정받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니까.
"샤프란의 지하 서고는 워낙 오래되다 보니 그 아드리아에 없는 고서들도 그 안에 잠들어있다."
"그 세계수에도 없는 것들이 있다고?"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아드리아는 거대한 신축 도서관이고, 샤프란의 지하 서고는 오래된 고서점이지."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류리크 씨는 진짜 범생이처럼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목표이고, 꼭 이루고 싶은 꿈은 도서관에 가는 거다… 라는 거야?"
"아주 정확하다."
실비아의 얼굴이 마치 지나가던 메뚜기가 두 발로 일어나서 '제 꿈은 마술사입니다.'라고 자기 소개하는 걸 본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방금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싶다… 라고 장황설을 내뱉은 참이다만, 세상일이란 참으로 공교로운 법이로고."
실비아와 내가 있는 곳은 연회장에서 한창 떨어진 조용한 구석이다.
누군가 찾아올 일도 없는 곳이건만, 이 근처로 구태여 찾아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다.
―히끅. 저 개~자식이 학교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어.
―엘레나 씨가 얼마나 싫어하는… 데에….
―저 자식만 제대로 손봐주면… 히끅. 우리도 사교회에….
서너 명 정도의 남학생들.
취기가 도는 듯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눈에서는 적의가 철철 흘러내린다.
노골적인 저들의 태도에 실비아가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랑 친구 되고 싶어서 오는 건 아니겠지?"
"밥값 할 시간이다."
"잠깐만. 밥값이라니… 나는 엄연히 60만 리브라를… 어라? 나 왜 60만 리브라를 내고 류리크 씨의 꼬붕이 되어 있는 거지?"
실비아가 세상의 모순을 깨달을 즈음, 흔한 엑스트라 같은 양아치들이 근처까지 다가왔다.
"혹시 저 중에 마법 잘 쓰는 우등생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전혀."
내가 얼굴조차 모르는 걸로 보아,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조무래기들이다. 충분히 실비아 선에서 정리할 수 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이유는 다양하겠지. 내가 눈엣가시일 수도 있고, 내게 원한이 있을 수도 있고."
"류리크 씨… 지금 막 느낀 건데… 이거 완전 사기 계약이잖아?!"
실비아가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저쪽에서도 휘적휘적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양측이 대치하며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 불합리한 죽음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 * *
아주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청명한 하늘이 저녁노을과 맞닿아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던 중이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마법이 날아왔다.
실비아의 것도, 저 엑스트라 4인방의 것도 아닌 제 3자의 마법이.
'번개의 질주.'
내 수준에서 아슬아슬하게 감당할 수 있는 중위 마법.
하지만,
'격이 다르다.'
감히 파고들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 정교함. 마력 간섭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는 실비아에게도 마찬가지이기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파마의 성흔.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몰라도, 지금만큼은 치트키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사기 특성.
손목의 열기와 함께 나와 실비아 쪽으로 날아오던 번개의 질주가 그대로 소멸했다. 그렇지만 엑스트라 4인방에게 떨어지던 것은 그대로였다.
'파마의 성흔을 써도 마법의 일부만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그야말로 상정외라고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는 격차.
"우갸갸갸갸갸갹!"
"으게게게게게겍!"
그렇게 이름 모를 4명의 남학생이 까맣게 숯으로 변하고,
"이런. 이런. 이러언."
허공에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류리크 학생~ 정말로 헤루인의 실력을 회복한 건가요오? 아니, 이건… 그 이상인 거 같은데에~."
비정상적으로 큰 고깔모자를 눌러쓴 이가, 빗자루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실비아의 옷자락을 당겨 내 뒤로 오게끔 했다.
"내 뒤에서 가만히 있어라."
"어, 아니… 그…."
정신을 못 차리던 그녀는 내가 지팡이를 꺼내 들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빗자루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 위에 타고 있던 것은 아주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마녀'라는 단어를 떠올릴 법한 외형.
"아이참, 술김이라고 해도 폭력은 좋지 않아요오~."
"샤르미넨."
기껏해야 양아치 서넛에게 시비 걸릴 줄 알았던 와중에, 난데없는 전술핵이 떨어져 버렸다.
이제 남은 건 그것이 터지느냐, 아니면 불발탄으로 조용히 넘어가느냐다.
"샤르미넨 총장 '님'이라고 해야죠? 류리크 학생."
"유감스럽게도 본인은 경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지."
불합리한 죽음이라는 메시지까지 뜬 마당이다. 당연히 샤르미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존댓말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위엄 A의 강제력이 샤르미넨에게 존댓말을 허용하질 않는다.
물론 억지로 발음은 할 수 있겠지만, 계속 말하다 보면 존대와 평대가 섞이는 머저리 같은 상황이 나오겠지.
"배움의 터전에선 모두가 평등합니다아? 그리고 이제껏 샤프란에서 수학한 황족들 모두 스승과 웃어른 대한 존경의 의미로 존대를 사용해왔죠오~."
"그건 관습법에 의한 것일 뿐이고, 사실 제국법상 이게 맞다네."
샤르미넨의 표정이 굳어가자 나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황제 폐하의 존엄 앞에 모든 바타체스는 평등하다, 이 말을 모르진 않겠지."
"냐하하. 류리크 학생, 혹시 류오넬한테도 그렇게 말하나요오?"
"글쎄. 집을 나온 지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그래서 무슨 일이지, 나는 샤르미넨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오, 정의를 위해 순찰하던 도중 불순한 이들을 발견했다… 랄까요오?"
"그 불순분자들은 말끔한 숯덩이가 되었으니, 이제 돌아가면 될 듯하네만."
"아니요오? 안타깝게도… 진짜 불순한 것들은 아직 멀쩡하네요오?"
그녀의 시선이 내 뒤에서 숨죽이고 있는 실비아에게로 향한다.
샤르미넨이 웃었다.
"재미있는 친구를 데려왔어요."
"그녀가 꽤 재미있는 편이긴 하지."
그녀의 수준에 맞는(?) 농담을 던졌건만, 샤르미넨은 전혀 웃지 않았다.
"곤란해요오. 정말정말 곤란해요오. 반즈라니… 하고많은 것들 중에서 반즈라니요오."
누가 봐도 곤란과는 거리가 먼 미소를 띄고 있었건만, 부조리하게도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저는 말이죠오? 샤프란의 학부생 중에 흑마술을 연구하는 이단이 있다, 라는 오명은 정말로 원하지 않거든요오?"
그녀는 이 학교의 총장이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 실비아 학생을 퇴학 조치하려고 하는데, 뭐 할 말이라도 있나요오?"
◈ 020
퇴학.
갑작스런 선고에 실비아가 얼어붙는다.
"류, 류리크 씨. 나, 나 어떻…."
"뒤로 물러나 있어라. 내가 해결할 테니."
안타깝지만 여기서 실비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따질 수 있는 건, 오롯이 내 임기응변이 얼마나 잘 먹히냐는 것뿐.
"하지만…!"
"본인은 바타체스의 황족이다. 나를 믿고 기다려라."
"류리크 학새앵~ 그 바타체스라는 걸로 여기저기 뻗대고 다닌 모양인데에~ 저도 그 잘난 '바타체스'거든요오?"
나는 샤르미넨의 이죽거림을 무시하며, 실비아의 어깨를 두드려 안심시킨다.
초조한 눈빛을 보내던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 나는 천천히 샤르미넨의 앞으로 다가갔다.
"퇴학은 금단의 숲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은 것 아니었나?"
"말은 안 했지만 학교에 방화를 저지르거나, 누군가를 살인한다면 당연히 퇴학 사유가 되죠오? 상식적으로요오?"
참고로 학칙서에도 있답니다, 샤르미넨이 덧붙인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당연히 이단인 흑마술 역시, 충분한 퇴학 사유가 될 수 있을 터다."
"그걸 알면 그쪽의 반즈는 순순히 집에 가면 되겠는데요오?"
그건 곤란하다.
실비아를 통해 미래를 대비한다는 목적도 있지만, 내게 '호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기에.
"샤르미넨, 당신의 말은 잘 알겠다만… 여기 대체 누가 흑마술을 사용한다는 건지, 본인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만."
샤르미넨 바타체스 폰 멘체스터 레일라인.
그녀는 이테아 바로 아랫단계, 임볼릭이기에 실비아의 어둠 마법을 꿰뚫어 볼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임볼릭'이기에 가능한 일.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는가라고 하면,
'불가능하지.'
실비아를 죽인 뒤 사령술로 소생시켜 묻거나, 심령술로 혼백을 제압한 뒤에 묻는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거야말로 진짜 흑마술. 샤르미넨이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다.
"그렇게… 나온다는 거군요오?"
"본인은 그저 무고한 학생을 보호하려는 것뿐이네만."
내가 정공법으로 치고 들어가자니 샤르미넨은 조금 당황한 듯 말이 없다. 하지만 그도 잠시, 천진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야 뭐, 류리크 씨까지 퇴학시켜버릴래요오~."
과연.
그녀다운 발상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만?"
"냐하하. 류리크 학생을 퇴학시킬 이유야, 3,000개는 만들어 낼 수 있을 거 같은데요오~."
'이유가 있다.'가 아니라 '만들어 낼 수 있다.'
샤르미넨이 노골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나는 적당히 말을 둘러댄다.
"본인의 아비가 썩 탐탁지 않게 여길 듯하네만."
"이햣. 류리크 학생, 아무리 그래도 나는 당신보다 더 오랜 세월, 류오넬의 '가족'이었다구요오? 오빠가 이런 사소한 일에 반응할 리가 없어요오~."
"그렇지. 그대는 류오넬의 혈육이지. 그래서 한 번 묻겠네만… 나를 죽이면 본인의 아비는 어찌 반응하겠는가?"
퇴학이라면 대충 넘어가겠지만 죽는 건 다르다.
아무리 내가 가문의 망나니여도, 선이라는 게 있는 법. 참고로 류아라의 불같은 성미는 류오넬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흐으음. 유감스럽게도 류리크 씨를 죽일 생각은 전혀 없는지라~."
"하지만 나를 죽여야 할 텐데?"
"제가 왜요오오?"
샤르미넨이 조롱하듯 입술을 내밀면서까지 말꼬리를 늘어뜨린다. 물론 오래갈 태도는 아니다.
"이 학교에 자네의 수제자가 있다지? 분명 오컬…."
스릅, 실비아의 온몸에 검은 붕대가 휘감긴다.
"우그그급? 우으읍!!"
갑자기 미이라가 된 실비아가 기울어지며 바닥에 쓰러지고, 동시에 샤르미넨과 내 사이로 보랏빛 결계가 뒤덮인다.
나는 마저 말을 이었다.
"…트 연구회에 있다고 들었는데."
내내 웃는 얼굴이던 샤르미넨의 표정이 처음으로 얼어붙었다. 다만 그건 공포가 아닌 뚜렷한 살의였다.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입조심…."
"카네라 벨테인 폰 마하 아벤테일, 종종 그녀의 오컬트샵에서 꽤 재미난 것들을 사기도 했더라지."
물론 산 적 없다.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기 위해 대충 지어낸 말이다.
"......."
샤르미넨. 벌써부터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한다.
마치 가면을 벗은 양 당황해하는 그 표정조차도 '연기'라는 게 정말 가증스러워서 견디기가 어렵다.
나는 그녀의 작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자, 흥분을 가라앉히게. 우리가 적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네. 오히려 함께 어둠 마법을 진흥시켜 금단의 숲의 망령들을 막아야 하지 않겠나."
그녀가 노골적으로 덤벼들었기에, 나 역시 노골적으로 맞받아쳤다. 어둠 마법과 금단의 숲을 언급하며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나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무릎을 조금 구부렸다.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실비아는 놈들을 상대하기 위한 훌륭한 첨병이 될 걸세."
"......."
샤르미넨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카네라의 존재를 용인하고, 키워낸 것이 그녀다. 거기에 실비아의 아버지와 인연이 있기도 하고.
'아마 실비아를 쫓아내려는 것도, 어둠 마법과 연관되지 않길 바라서겠지.'
나는 그녀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거두고, 천천히 물러났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렸다. 말없이, 잠자코.
"......."
"......."
실비아는 여전히 얼어 있고, 샤르미넨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런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침내 샤르미넨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오."
"무엇이지?"
"혹여라도 '그것'에 관해 들킬 기미라도 보인다면, 제 손으로 직접 없애버릴 거예요오. 류리크 학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오~."
그땐 류오넬이고 뭐고 없어요오, 샤르미넨이 빵싯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 * *
신입생의 절반이 정신줄 놓고 떠들어대는 연회는 다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샤르미넨을 보낸 뒤 실비아와 나는 조금 더 연회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취객들이 비틀거리며 하나둘 사라질 무렵, 조용히 식장을 떠났다.
그때까지 실비아와 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 저택에 도착해, 정원을 가로지를 무렵, 실비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를 했던 거야?"
적잖은 심력이 소모된 터라 피곤했다. 네가 알 거 없다, 라고 넘기고 싶었지만 여기선 제대로 설명해주는 편이 좋겠지.
"샤르미넨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금단의 숲을 기억하는가."
"어, 응. 자퇴서랑 유서 쓰고 들어가라던 곳 말이지?"
"그곳에 있는 망령들은, 오래도록 샤르미넨의 골칫거리였다. 위협적이고, 상성이랄 것이 없는 놈들이기 때문이지."
샤프란에 있는 결계 덕분에 당장은 넘어오지 못하지만, 이후에 녀석들이 작심하고 쳐들어오는 이벤트가 존재한다.
샤르미넨이 그 미래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다. 저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그래서 미리 카네라와 같은 이들을 육성하면서 저들에게 대항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망령들을 상대할 때, 네가 가진 어둠 마법이 주효하다."
"......."
"지금은 흑마술로 여겨져 대놓고 사용할 수 없지만, 망령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힘이라는 게지."
물론 꼭 그런 이유인 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면… 그걸로 샤르미넨 총장님을 설득한 거야?"
"그래."
"그러면 나는…."
"달라질 건 없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이후 어둠 마법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그것이 결코 흑마술이 아님을 세상이 증명하면 될 뿐인 일이다."
샤르미넨, 실비아, 그리고 나.
이 셋의 이해관계는 어딘가 어긋나 있으면서도 미묘하게 엇물리고 있다. 내가 할 일은 그사이의 조정을 통해, 내게 최대한 유리한 국면을 이어가는 것.
"그런… 거구나."
앞으로도 엮일 수많은 NPC들과의 이해관계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복잡하게 이어질 터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정립되었다.
샤르미넨 총장과의 상호이용관계, 그리고 '오컬트 연구회'라는 비주류 집단과의 협력관계.
'앞으로 부총장과는 별로 좋은 관계가 되지 못할 터이고, 오컬트 연구회와 엮인 만큼 드라카르 사교회 같은 놈들과는 아예 척을 진 셈이….'
"하나 궁금한 게 있어."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또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스스로 돌이켜보게 된다.
나는 피어난 생각들을 잠시 닫아두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가 궁금하지?"
"내가 그 마법을 쓰는 거야 그렇다 쳐도, 류리크 씨는 그걸 어떻게 아는…."
그때였다.
"류리크 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향방을 좇아 시선을 옮기자니,
세상이 어둠에 잠긴 늦은 밤의 시각. 소저택의 현관 앞에, 푸른 눈동자를 품은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아, 아직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는가."
"소인이 취침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류리크 님이 잠드신 이후입니다."
류미엘에 대한 충정인지, 임무에 대한 집착인지… 하여튼 대단하다.
"모쪼록 입학식은 즐거우셨는지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당연히 사프란의 문턱을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였습니다."
리아의 서늘한 눈빛은 나에게도 내 옆으로 옮겨간다.
실비아는 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약간 몸을 움츠리며 은근히 경계하는 태도를 취한다. 나는 살얼음처럼 냉랭해진 분위기를 깨고자,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이게 다 본인의 유능함 덕분이지."
"학칙 142조를 쓰시리란 것은 예상했지만, 샤르미넨 총장을 설득한 것은… 꽤 놀라웠습니다."
"…아니, 잠깐만. 샤르미넨의 건을 네가 어떻… 아니다. 아는 게 당연하지."
너는 '리아'니까.
내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리자, 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늘 말씀드렸다시피, 소인의 장기랄 것은 유능함뿐이므로."
약간의 우쭐거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혹시 '기분이 나아졌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상태를 봤다.
잘난 척을 하면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했지만,
"그래서."
그것도 잠시, 곧바로 이전의 태도로 돌아간다. 그 시선은 실비아에게 꽂혀 있되, 말은 정확히 나를 향해 날아왔다.
"저택 내에서 저자의 신분은 어찌 되는지요."
입학이 결정되고 샤르미넨마저 묵인한 마당에 실비아를 아예 거부할 수는 없다, 리아는 그걸 전제로 깔고 들어갔다.
다만 싫다는 표현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그녀는 시종으로 저택에서 일할 것이다."
"류리크 님의 호위이니만큼, 식객으로 두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랬다간 자네가 꼭 이런 말을 했을 듯허이. '저와 시종들이 모셔야 할 상전이 두 배로 늘어났군요.'라고."
정곡을 찔린 듯 리아가 살짝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는 한편, 실비아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저기요! 시종이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요?!
―감내해라. 다행히 본인은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라, 일이 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그때 리아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우리의 논쟁을 일축시켰다.
"모쪼록 부담을 덜겠군요. 하지만… 그걸론 부족합니다."
"…그 말은?"
"홍차가 떨어졌습니다."
그놈의 홍차 괴인이 어디 가나 했다. 이제는 돌려 말하지도 않는 거냐.
"본인의 기억이 맞다면, 홍차 한 상자를 사준 것이 채 2주가 되지 않았을 터인데."
"어차피 실비아 양의 등위 관련 서류 때문에 저를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자네에게 그런 말을 했었던가."
입학처를 통과한 거나, 샤르미넨과 조우한 건 그렇다 쳐도… 거기까지 예측하는 건 조금 선 넘은 거 아닌가.
내가 비뚤어진 눈으로 그녀를 보자니, 리아는 시선을 피하며 얕게 고개를 숙였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소인은 너무도 유능한지라."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아니면 루나틱 난이도 때문에 천리안 스킬이라도 추가된 건 아닌가.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리아가 곧장 달려들었다.
"나브릭스 홍차 한 통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그건 매물 자체가 없는 물건이다. 얻을 수 없는 것을 달라 하지 마라."
"저는 류리크 님의 능력과 진정성을 믿습니다."
그녀의 고집스런 눈빛에 나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사이에 어쭙잖은 밀당은 하지 않는 걸로 하지. 어차피 내 지갑 사정이야 자네가 잘 알 테니, 편히 말해 보도록."
"그러시다면… 베렌산으로 타협하시지요."
"베레산은 시중에 유통되는 최고급품이다만?"
내 지갑 사정을 알면서 저런 고급 홍차를 바라다니!
"자네도 알겠지만, 본인은 제국중앙금고에서도 거절당하는 신용불량자라네. 더 이상의 대출은…."
"어차피 실비아 양의 주머니가 곧 류리크 님의 주머니 아닙니까. 배포를 크게 가지시지요."
설마하니 그것까지 파악했단 말인가…!
리아가 예상치 못한 부분을 파고들자, 뒤편에서 실비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 이봐요! 당신이 뭔데 내 지갑을…!"
나는 그대로 실비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알겠다. 베렌산으로 타협하지. 한 통이면 되겠느냐."
"한 상자로 하시지요."
"…알겠다."
한 상자라는 말에 우으으읍! 실비아의 저항이 거세졌다. 나는 그녀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리아를 돌려보냈다.
"실비아는 이따 보내겠다. 직무 배정과 교육은 그대에게 일임하지."
"예,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류리크 님."
그렇게 저택의 안주인(?)이 사라지자 나는 실비아의 입에서 손을 뗐다. 손에 침이 흥건해서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실비아도 무척 기분이 나빠 보였다.
"저기요?! 류리크 씨! 나를 대하는 게 점점 너무해지지 않아?!"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라. 솔직히 말해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것이다."
"싸, 싸게?! 싸게에에?! 60만을 내고 류리크 씨의 따까리에 집에서는 종노릇이라니! 이건 뭔가 잘못됐어! 잘못됐다고오오오!"
나는 절규하는 실비아에게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상점가에서 지팡이를 사느라 3만 9천 리브라를 더 빌렸었고, 베렌 산 홍차는 한 상자에 1만 리브라 정도 한다."
"갸아아아아아아악…!!"
한동안 저택이 시끌시끌하겠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 * *
늦은 밤.
길게 이어지던 입학식의 연회가 끝나고, 깊은 밤이 찾아왔다. 분위기를 잊지 못한 학생들조차도 잠든 새벽의 시간.
샤르미넨은 불 꺼진 방에 남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
그녀는 서가에 꽂혀 있던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그녀의 역사가 낡은 향수를 품고 있었다.
함께했던 동료, 스승, 가족….
그 안에는 사뭇 달라진 누군가의 어릴 적 모습도 있었다.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어릴 적 신동이라 불렸던 소년.
불세출의 천재라 불렸던 소년
그의 천진한 모습이 사진첩에 담겨 있었다. 커다란 사탕을 입에 문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
"류리크 학생, 혹시 그거 아나요?"
그리고 사진 속 류리크의 옆에는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샤르미넨이 있었다.
"지금은 제가 당신을 '학생'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전 당신의 고모랍니다."
그녀의 눈이 침잠히 가라앉는다.
샤르미넨은 류리크를 알았다. 가족만큼은 아니어도, 어릴 적 가장 순수하고 숨김없던 시절의 성정을 알았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의 입에서 왜 금단의 숲과 어둠 마법이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류리크는 천재지만, 천재에 불과했다. 그저 검을 빠르게 배우고, 마법을 잘 쓰던 천재였다. 그러던 아이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게 되었을까.
그리고,
"당신은 대체… 누구일까요오."
어쩌다 그런 '표정'까지 짓게 되었을까.
◈ 021
마법 대학의 수업은 내게 무척 중요했다. 내가 비록 게임에서 이테아(Itea)로 엔딩을 봤다지만, 게임과 현실에는 비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론은 어느 정도 비슷하게 적용될 여지가 있으나 '실전'은 다르니까.
버튼을 누르면 마법이 나가던 것과 다르게 여기서는 마력의 운용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그나마 마도를 D까지 끌어올리고, 여기에 신동 A 특성이 더해져 당장은 나쁘지 않다. 마력 간섭 같은 높은 수준의 기교도 부릴 수 있고, 여차할 때 쓸 '파마의 성흔'도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마력 간섭은 루나사 수준인 실비아가 어둠 마법을 펼치면, 아예 건드리지조차 못한다. 파마의 성흔 역시 샤르미넨의 마법은 절반 정도밖에 파훼하지 못했다.
'물론 임볼릭 상대로 뭔가를 했다는 것부터가 대단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지금 상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노려야 할 지점은 '적당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지금보다 월등히, 아득히 높은 정점을 바라보고, 거기까지 올라서야 한다.'
전무후무한 루나틱이라는 극악의 난이도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세상을 오연하게 내려다볼 압도적인 무위가 필요할 테니까.
―――― 『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 ――――
▶ 직업 : [ 황족, 조각가, 마법 대학 학부생(사프란) ]
▶ 성향 : [ 악 ]
▶ 특성 : [ 11개 ]
▶ 평판(악명) : [ 1,380 ]
――――
그 첫 단계인 마법 대학 학부생 직업을 획득했다. 무난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외에 달라진 점이 없다는 정도일까.
'경매장에서의 일도 있고 해서, 성향이나 평판에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악인 특성 때문에 평판(명성)은 아예 증감이 없었다. 명백한 선행을 하지 않는 이상 악명은 줄어들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다못해 악이 중립악만 되었어도 좋았을 텐데.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특성을 확인해 보았다.
―――― 『 특성 일람 』 ――――
▶ 검치 (A)
▶ 조각 (A)
▶ 예술적 안목 (A)
▶ 신동 (A)
▶ 마도 (D)
▶ 악인 (C)
▶ 폐인 (A)
▶ 약물 중독 (B)
▶ 위엄 (A)
▶ 파마의 성흔 (-)
▶ 악당의 말로 (-)
―――――
그래도 특성의 변화는 고무적이었다. 가장 먼저 약물 중독이 B로 떨어졌다. 이제 금단 증세로 인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페널티는 없다. 대충 견딜 만한 수준이 된 것이다.
여기에 마도도 D로 격상되었다. 영월화 덕분에 초반부의 답도 없던 성장구간을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짧은 기간 내에 꽤 괜찮게 성장을 이뤄낸 셈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벨테인이라 불릴 수준이다.'
여기서 만족하기엔 갈 길이 멀었다. 많은 분야가 그렇듯, '입문'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는 것이 힘든 것이다.
'랭크가 C만 되어도 정체가 시작되고, B부터는 그야말로 지옥이지.'
세계 각국의 내로라는 인재들의 수준이 벨테인이고, 그들이 졸업할 즈음에는 헤루인이 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면 어지간한 대학에서 교수 타이틀을 딸 수 있고, 또 한 발자국을 나아가면 이 '사프란'의 정교수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라면 나 역시 헤루인이 끝일 터다. 하지만 내겐 그 이상을 노려봄직한 변수가 있다.
'혈석(血石)….'
처음에는 단순한 페널티라고만 생각했던 약물 중독. 그런데 여기엔 의미심장한 비밀이 있었다. 관련된 모든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혈석을 부숴서 마력으로 환원시킨다.'라는 게 가능하다는 것은 확인됐다.
신동 A를 통한 정교한 마력 컨트롤과 혈석을 바탕으로 하는 마력에 대한 잠재성.
이거면 다른 학생들보다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을 터.
나는 간단하게 앞으로의 일을 정리했다.
―혈석을 부수면서 꾸준한 마력을 성장시킬 것.
―학부 수업을 성실히 들으면서 마력 운용에 익숙해질 것. (신동 특성 덕분에 수월할 것으로 예측.)
―화이트윙 뱃지를 얻어 사프란의 지하 서고에 들어갈 것. (지식을 탐하는 자, 업적 달성 가능.)
당장 떠오르는 건 이 정도였다.
이후 보조 무기라든가, 체술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겠다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혈석부터 부숴야겠지.'
나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말했다.
"찬물에 적신 수건을 준비해다오."
앞으로 땀을 잔뜩 흘리게 될 테니.
* * *
통학의 단점 중 하나는 기숙사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으로 할 때야 그런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현실이 되니 이게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다 늦은 저녁에 귀가하고, 혈석을 건드리다가 늦게 잔 탓에, 오늘 아침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아침잠이 무척 많으시군요."
리아가 무던히도 애를 썼다.
내가 '바타체스'인지라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으니,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깨워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잘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리아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평소 강인한 정신력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나는 하품을 참아가며 힘겹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육체의 나약함을 역설했지."
"잠에서 깨는 것은 육체보단 정신의 문제가 아닌가 사료되옵니다만."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지."
"그 말인즉, 류리크 님은 육체도 나약하고 정신력도 술주정뱅이 폐인과 다를 바 없다… 시인하신 것으로 봐도 될런지요."
눈을 뜨면 끝인 줄 알았는데, 아침부터 빡세구나.
나는 우울한 감정을 애써 밀어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이 빌어먹을 폐인 특성을 어떻게든 해야겠는데….'
리아가 정신이니 육체니 말을 했지만, 결론은 '특성' 때문이었다. 육체적 수준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폐인이 무려 A랭크나 되니, 아침에는 거의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할 만큼 힘겨웠다. 몸이 무거운 것도 있지만, 침대에서 좀 더 뒹굴고 싶다는 충동도 강렬했고.
'앞날이 깜깜하군.'
어제까지만 해도 앞으로의 일에 대한 파란만장한 청사진을 그렸건만, 당장 아침부터 이 꼴이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짓고 있자니, 리아가 평소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슬 채비를 하시지요. 서두른다면 지각을 면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대로 방 밖으로 빠져나와 가볍게 세안을 하고, 밖에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 리아가 툭 말을 내뱉었다.
"실비아 양의 서류는 입학처에 전달해 두었습니다."
"…잠깐만. 자네는 그걸 빌미로 어젯밤에 본인에게 홍차 한 상자를 뜯어냈던 걸로 기억하네만."
"그렇습니다만,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지요?"
어젯밤에 말을 했는데, 왜 오늘 아침에 이미 끝나 있는 거냐.
가만 보면 얘는 일부러 내 앞에서 우쭐거리려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거 같다.
"가끔 드는 생각이네만, 그 정도 능력이면 홍차 정도는 혼자 사 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제 지갑 사정이야 아주 여유롭습니다. 인맥도 넓으니 나브릭스 홍차를 얻는 것 역시 일도 아니지요."
"…그런데 대체 왜 본인을 갈취하는 것인고?"
"원래 쇼핑은 남의 돈으로 하는 것이 제일 즐거운 법이지요."
이런 부분에서는 나랑 생각이 참 비슷하구나.
다만 그 뜯어먹는 대상이 나라는 점에서, 무척 기분이 우울했다. 덕분에 잠이 달아난 것은 좋은 점이려나.
"자넨 정말 악질이야. 진정으로!"
"자주 듣는 말입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저택의 현관 쪽으로 나갔다. 그렇게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오자니, 로비에 외출 준비를 마친 실비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
멀리서 보일 적부터 그녀의 상태는 가히 좋지 않았다.
"느웨에에엑…."
"나는 밤늦게까지 수련을 해서 피곤한 것이다만, 너는 왜 몰골이 그 모양이더냐."
나랑 비슷하게 약간 굽은 허리. 짙은 다크서클에 축 늘어진 팔다리.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꽤나 쌩쌩하던 그녀였건만, 이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웨에엑… 리아 님은 괴물이야… 괴물… 괴물이라고오…."
무슨 자폐증이라도 앓는 듯한 중얼거림에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그녀를 다독이며 현관 밖으로 나서자니, 그녀의 얼굴에 생기와 함께 불만이 피어올랐다.
"나는 류리크 씨한테 64만 9천 리브라를 빌려줬는데… 이제 빈털터리인데… 왜 '류리크 님을 보필하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같은 말을 들어야 하는 거야?!"
"실비아, 그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으아아악! 역시 이건 뭔가… 뭔가 잘못됐어!"
나는 비명 지르는 실비아를 다독이며 차량에 올랐다. 그렇게 이른 아침, 등굣길에 올랐다.
* * *
날이 화창했다.
입학식은 우중충하게 비가 내렸지만, 오늘은 하늘이 높고 맑았다. 다행히 광합성을 하고 나니 실비아도 나도 우울했던 아침을 조금 떨쳐낼 수 있었다.
첫 수업이 있는 강의실은 마치 작은 고대 그리스 극장을 떼다 놓은 듯했다. 정면의 연단을 중심으로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좌석들이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지정석이 없기에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들끼리 앉았다. 대체로 사교계에서 서로 안면을 터놓은 이들끼리 뭉쳤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나와 실비아는 그들과 동떨어져 앉게 되었다.
"우리 주변으로는 아무도 안 오네."
"이 모든 것이 본인의 인덕이니라."
"대체 뭐가 좋다고 인덕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쾌적한 환경?"
최소 3칸 이상, 모두가 그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상큼한 시작이군.'
대충 예상했던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어제는 술에 취해 덤벼들던 놈들이 있었는데, 적어도 지금은 잠잠했으니까.
"후우, 그래서 이 수업은 뭐야? 우리 수강 신청 같은 것도 안 했잖아."
"신입생은 수강 신청이 따로 없다. 모두 같은 기초 커리큘럼을 이수하게 되지. 전공… 아니, 주전(主戰) 마법을 선택해서 공부하는 건 2학년 때부터다."
"그러면 1학년 때는 수백 명이 다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 하지만 여기엔 많아 봐야 백 명 정도 있는 거 같은데…."
"정확히 80명이다. 그리고 과목은 같지만, 분반을 통해서 강의가 이루어지지."
고등학교 때 각 반별로 수업을 듣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다 같은 내용을 듣고, 비슷한 수준으로 진도가 나아가는 것이다.
"왜 기초 수업을 들어? 다들 벨테인 이상이니까, 기본적인 건 한다는 거잖아."
"마법은 그 학문의 범위가 넓은 반면, 벨테인 등위는 특정 분야에서 어느 정도 실력만 보여도 취득할 수 있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실비아는 여전히 잘 모르는 눈치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화염 마법을 어느 정도 쓸 줄만 알아도 벨테인은 취득할 수 있다. 하지만 사프란에서 추구하는 것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실전 마법사. 즉,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도 어느 정도 지식은 갖추어야 한다는 소리다."
마법사는 전천후가 기본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자신의 전공뿐 아니라, 상대방이 쓰는 마법에 대한 이해 역시 필요로 한다.
때문에 사프란은 마법뿐 아니라 몬스터의 약점, 혹은 약초의 사용 등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좋은 부분을 지적하는군. 학생."
바로 뒤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니, 잘생긴 금발의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맞다. 마법사들은 어떤 상황에든 대처할 수 있도록 넓은 시야와 능력을 길러야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주전 마법'에 기반하지."
흠잡을 데 없이 정갈하게 입은 복장에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80명에 가까운 신예 마법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남자는 연단에 올라섰다.
"반갑다. 나는 맥컬런 엘베드 폰 라노 베스키르, 너희들에게 기초마법학 과목을 가르칠 것이다."
편하게 맥컬런 교수님이라 부르도록, 싱긋 웃어 보인 그는 가볍게 연단을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마법사는 드물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각자 능통한 계통과 계열, 속성이 있는 법이다. 나 역시 많은 마법을 알고 있지만, 그 모두를 주전 마법처럼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지."
그 말대로, 모든 마법에 두루 능통하려면 못해도 임볼릭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분들 역시 각기 재능이 있을 것이고, 지금도 쓸 수 있는 몇 가지 마법들이 있겠지. 그것이 자신의 주전 마법이라 여기며 말이야."
숫제 벨테인의 가장 큰 오류가 여기서 드러난다. 배움이 짧다 보니 마법이라는 넓은 학문의 일부만을 판 게 전부다. 그래서 거기서 자신이 성취한 것을 최고라 여기며 거기에만 몰두하게 된다.
"하지만 그게 정녕 자신과 맞는 마법일까. 더 잘 쓸 수 있는 분야는 없을까."
그런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바로 이 수업이고, 이런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제공하기에 마법 대학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본 수업에서는 마법의 모든 계통, 계열, 속성에 관해 가장 기초적인 지식을 가르칠 것이다. 그를 통해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한 대처 능력을 기르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고, 두 번째는 그 깨달음을 통해 진정 자신에게 어울리는 마법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
맥컬런이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그의 머리 위로 수많은 계열, 계통, 속성의 마법들이 피고 사라진다.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라고는 하나, 수십여 개의 마법들이 연달아 펼쳐지면서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는 듯했다.
그 아래서 맥컬런이 말했다.
"자, 그러면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 022
맥컬런 엘베드 폰 라노 베스키르.
고귀의 13가문, 베르키르의 신예(新銳) 마술사. 엘베드 등위를 취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샤프란에 들어온 것도 작년이 처음.
초청 교수로 이 자리에 있는 터라 아직 학과, 학파 간의 갈등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공통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거지.'
특정한 학과에 속해 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여러 파벌들도 그의 역량을 가늠하며 간만 보는 상황이다.
'나로서는 계속 초청 교수로만 남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지혜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샤프란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마전 같은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
세상일이라는 게 늘 그렇듯 그런 순수, 선량 같은 것만으로 굴러가지 않기에.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교수라는 직함을 갖는 건, 마법만 잘 쓴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치열한 눈치 싸움과 정쟁의 수라장을 거쳐야 따낼 수 있는 것이다.
'뭐… 맥컬런이 어느 파벌로 간다고 해도 적당히 이용해 먹겠지만.'
간단한 감상을 끝으로 맥컬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자니, 본격적인 강의가 시작되었다.
교단에 선 맥컬런은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허공에 반구 형태의 마력을 만들어 냈다. 어떤 술식도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마력.
그것을 가리키며 맥컬런이 입을 열었다.
"이 세상 모든 섭리와 이해, 천지 만물의 작용은 마력이라는 가장 순수한 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 말인즉, 우리는 마법을 통해 세상 모든 이치와 작용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순수한 형질의 마력이 불로, 물로, 바람으로, 흙으로 연달아 변모한다.
"그렇기에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의 육신을 소우주라 하고, 우리가 품은 소우주는 이 거대한 대우주의 질서를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루시아사가의 세계관에서 아직 우주는 막연한 형태로 묘사된다. 다른 행성이라던가, 태양계 같은 개념은 없고 그저 하늘의 위에 우주가 있다는 인식 정도.
무협지에서 무공의 이치를 운운할 때 우주를 논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론상 무한한 마력이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섭리와 작용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말이지."
속성을 보여주었던 그의 마법은 곧이어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파괴 계통을 보여주고, 조작 계통의 염동으로 연단 위에 있던 책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거대한 대우주에 속한 작은 피조물이며, 그 구성은 얄팍한 피륙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거대한 우주의 편린조차 담아내기 어렵다. 그저 우주의 섭리, 만물의 작용의 일부만을 해석해 계통, 계열, 속성으로 나누어 몇 가지 재주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 역시 주전은 조화 계통이고 파괴나 소환 계통은 영 꽝이지, 맥컬런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 수업에서 거의 모든 종류의 계통, 계열, 속성을 다룬다고 하였으나… 정말로 모든 것을 배우는 건 아니다. 이유를 아는 자 있는가."
맥컬런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서너 명의 학생들이 번쩍 손을 들었다. 맥컬런은 그중 한 명을 지목했다.
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금지 마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맞다. 흔히 흑마술이라 불리는 마법이 있다. 그 역시 분명한 우주의 일부이자, 섭리이며, 작용이지만… 그것들은 보편적인 윤리와 가치에 어긋난 것들이다."
불쾌한 기억이라도 떠올린 듯, 교수가 작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표적인 것이 혼백 계통의 심령, 사령 계열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앗아 그를 세뇌하고, 조종하는 심령. 그리고 죽은 이의 시체와 영혼을 억지로 움직이는 사령. 이 둘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흑마술이다."
"한 가지 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속성에서도 흑마술로 분류되는 것이 있다. 바로 어둠이지."
어둠 마법이 언급되자 실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슬쩍 보자니,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움찔거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했다.'
나는 내뱉을 수 없는 칭찬을 삼키며, 다시 교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성 마법은 심령술, 사령술과 마찬가지로 신전을 중심으로 예전부터 흑마술로 지정된 마법이다. 물론 남부 대륙에서는 새로운 연구와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지만…."
더 말하면 좋지 않다는 걸 느낀 걸까, 맥컬런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정리했다.
"어쨌든 어둠 마법은 명백한 금지 마법이자 흑마술. 호기심으로라도 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그에 이어 맥컬런은 강의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했다. 앞서 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흑마술을 제외한 계통, 계열, 속성의 기초를 가르치며 주전을 선택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내가 쓰는 계통에 만족하고, 주전 마법을 바꿀 생각은 없는데 굳이 다른 걸 배워야 할까. 그런 너희들을 위해 간단한 테스트를 준비했다."
테스트라는 말에 에에엑, 학생들이 작게 야유를 했다.
물론 맥컬런은 꿈쩍도 않고 미소를 지었다.
"어렵지 않은 테스트다. 여러분은 자신의 주전 마법을 밝힌 뒤, 그 계통, 계열의 마법으로만 과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의 말이 끝나자 실비아가 어딘가 초조한 눈으로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류, 류리크 씨. 주전 마법이라니… 나 어떡하지? 다른 마법은 거의 못 쓰는데…."
얘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무래도 '학생'들과 실력을 비교해볼 기회가 없었으니 당황한 것이겠다만.
"…잊어버린 모양이다만, 네 실력은 능히 루나사 등위를 취득할 수준이다. 여기 있는 학생 모두가 덤벼들어도 네 털끝 하나 못 건드리지."
"그, 그건 내 전공을 썼을 때고 다른 마법은…."
"그렇게 따져도 마찬가지다. 자신감을 가져라. 저번에 나와 마법 결투할 때 선보였던 화염 쏜살새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나름의 위로를 건넸지만, 실비아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하, 하지만 그것도 류리크 씨가 마력 간섭으로 그냥 파훼했잖아?"
"그건 내가 너무 유능해서 그런 거고."
"그래도…."
실비아가 뭐라고 더 꿍얼거릴 기색을 보이자,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긴장하지 말고, 평범하게 해라. 이 교실에서 네 실력은 두말할 것 없이 최고다. 그리고 저건 평범한 테스트다. 실패한다고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아."
실제 이 맥컬런이 선보일 테스트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마법사가 왜 '전천후'여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자신의 계통만 믿고 뻗대는 학생들한테 역상성이 뭔지를 보여주려는 거지.'
이렇게 간단한 마법을 역상성 때문에 해결하지 못한다 or 이만큼이나 고생하는 거다, 라는 의미를 담은 테스트다.
난도는 벨테인 등위가 머리만 잘 굴리면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
"제일 앞의 학생부터 앞으로 나오도록."
그렇게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 * *
테스트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교수가 애당초 시간제한을 10여 초로 두었기에, 학생들은 용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한 번에 해결하느냐, 못하느냐로 갈렸다.
그런 시간제한의 압박 때문일까, 많은 학생들이 간단한 테스트를 앞두고 좌절했다.
"저, 전혀 간단하지 않잖아…."
"분명 기초 마법인데 왜 내 마법이 통하질 않는 거야?"
"교, 교수님 시험 문제가 이상한데요!"
간단한 기초 마법을 파훼해 보라는 것이 테스트였는데, 역상성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전했다.
물론 성공하는 학생들도 적잖이 있었다.
"…바람 속성으로 산소를 제어하면, 불을 꺼뜨릴 수 있죠."
"일정 수준을 뛰어넘은 고열은 철도 녹일 수 있습니다. 바위 역시 깨지기 마련입니다."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할 수 있네요."
실비아 역시 어렵지 않게 해냈다.
"류, 류리크 씨! 나 성공했어!"
어렵지 않은 테스트에 가볍게 통과했음에도 실비아는 무척 기뻐했다. 그토록 꿈꾸던 마법 대학에 들어와 처음 뭔가를 이뤄낸 것일 테니, 썩 기분이 좋은 거겠지.
만면에 미소를 띄운 실비아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교단으로 나아가자 타닥, 누군가 책상을 가볍게 두들기며 주의를 끌었다. 약간 각도가 뒤틀려 엉성한 가발을 쓴 마법사.
그는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르겐하이의 망나니~ 폐인이 되면서 마력도 사라졌다는데, 테스트를 볼 수는 있겠어어?"
그가 운을 트자, 주변에 친구로 보이는 몇몇 이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헤루인이면서 후인의 반지로 대학에 들어왔다잖아? 뻔하지."
"어이, 한번 그 잘난 헤루인의 실력 좀 보여 달라고!"
누군가하고 보니 입학식 날 밤에 봤던 4인조였다. 내게 시비를 걸려다가 샤르미넨에게 된통 당했던 멍청이들.
나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녀석들의 야유가 불쾌한 것이 아니라,
'…너무 하찮은 엑스트라, 진짜 뭐하는 놈들인지도 모르겠단 말이지.'
NPC 도감에도 나오지 않는 진짜 4류 엑스트라. 그래서 이름은커녕 대체 뭐하는 놈들인지도 정보가 없었고, 내가 파악할 수 없는 상대라는 점에서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물론 4류 엑스트라이니만큼 조금만 조사해 봐도 밑천까지 싹싹 털 수 있겠다만.
"거기 조용하도록! 그 이상 떠들면 벌점을 부여하겠다."
맥컬런이 중재에 나서자 4인조가 입을 다물었다.
저쪽의 야유가 잦아들자, 맥컬런이 나를 보며 말했다.
"학생의 주전은 뭐지?"
"조작 계통, 간섭 계열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간섭 계열 마법은 디스펠 매직과 같은 '마법'을 의미한다. 하지만 내가 행하는 것은 그보다 원초적인 마력 간섭.
그래도 마력 간섭과 그나마 비슷해 보인 계열을 고른 것이었는데, 외야에서 재차 비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풉! 간섭 계여어얼? 그건 루나사 등위의 실전 마법사 정도는 되야 쓸 줄 아는 계열이라고! 헤루인… 아니, 에일레르도 안될 폐인 따위가 무슨…."
"거기 학생. 벌점 3점이다."
"아, 아니! 교, 교수님…!"
당황하는 엑스트라를 뒤로, 맥컬런이 내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말은 무시하게. 자네가 실력으로 증명하면 될 일이니까."
내가 알았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니, 맥컬런이 다시 이전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이 간섭 계통을 주전으로 사용한다면, 테스트는 간단하겠군. 간섭은 어지간해서 무상성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맥컬런이 바람의 속성을 발현하며 '비바람의 구슬'을 펼쳐냈다.
축구공만 한 크기의 구에 비바람을 집약시킨 것으로, 대상에게 닿을 시 거대한 풍압을 유발하는 마법.
'까다롭지만 할 만하다.'
애초에 교수가 의도한 듯, 마법의 구조가 탄탄하지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마법의 틈새로 마력을 욱여넣었고, 구의 형태를 유지하게끔 하는 겉 부분만 살짝 건드렸다.
'구의 형태만 망가뜨려도 테스트는 가볍게 통과일 터.'
그러자 마치 풍선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바람의 구슬이 추진력을 얻은 미사일마냥 움직였다.
―슈와아아악!
통제력을 잃은 비바람의 구슬은 순식간에 강의실을 가로지르며 정확히 누군가의 얼굴에 적중했다.
교수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내게 야유를 보내던 놈이었다.
―푸확!
"으아아아악!"
구슬 안에 남아 있던 비와 바람이 일시에 터지면서, 녀석의 얼굴과 상의가 홀딱 젖고 발생한 풍압이 그의 머리카락을 쳐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쓰고 있던 가발이 날아갔다.
"아, 아니… 아으아아악!!"
녀석이 허둥지둥 날아간 자신의 가발을 잡으려 했지만, 바닥이 젖어서인지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우당탕, 엎어지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건만, 어떻게 딱 저기에 날아간 거지?'
모쪼록 샘통이다.
나는 그런 4류 엑스트라를 보며, 적당히 위엄을 섞어 넣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허나 무지를 자랑하는 무식은, 부끄럽게 여길 일이지."
푸흡, 교실 안에서 누군가 참지 못한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조소와 냉소가 뒤섞이며 작은 소란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나는 새삼스레 코트의 주름을 펴며 자리로 돌아왔다.
"마, 말도 안 돼! 분명 모든 마력을 잃었다고…!"
뒤늦게 엑스트라가 절규하는 순간, 맥컬런이 그의 말을 자르며 박수를 쳤다.
"류리크 아스트레이, 훌륭한 솜씨였다. 통과!"
* * *
수업을 마친 맥컬런은 집무실에서 강의 자료들을 정리하며 출석부를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이름만 부르면서 별달리 의식하지 않았지만, 이번 수업에 꽤나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었으니까.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 왜 반말을 하는가 했더니, 황족이었던 건가.'
맥컬런은 가볍게 웃으며 다른 학생들의 서류 역시 살펴보았다.
그 밖에도 각자의 개성과 재능 있는 학생들이 있었다. 장차 샤프란과 마법계를 이끌어갈 인재들이었다.
그들만 편애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등생을 눈여겨보아 나쁠 건 없으니까.
'…다들 쟁쟁한 가문… 음, 이 친구는 의외인 걸.'
그렇게 학생 명부를 죽 훑고 난 뒤, 잠시 휴식이라도 취할 겸 카페테리아로 나왔다.
자리에는 이미 여러 교수들이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들은 맥컬런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그를 반겼다.
"맥컬런 교수, 정말 고생이 많았죠~!"
반갑다는 건지, 할 말이 있다는 건지, 말투에서 미묘한 어감이 묻어난다. 맥컬런은 카운터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한 뒤 그들의 테이블에 앉았다.
"고생이라니요. 늘 하던 대로 수업했을 뿐인데요."
"아니, 거기에 그 학생이 들어갔다면서요. 그 아스트레이의 망나니."
맥컬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누굽니까?"
"아니, 아무리 연구실에서 연구만 한다고 해도 그렇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듣고 그래야죠. 류리크 아스트레이. 아스트레이 가문의 유명한 망나니잖아요."
류리크, 라는 이름을 듣자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뒤에 망나니라는 건, 그가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제가 봤을 땐… 괜찮은 학생이던데요?"
"에이, 첫 수업이니까 그 녀석도 눈치를 봤던 걸 겁니다. 그놈 말이죠, 아주 문제가 많아요. 이 샤프란에 들어온 것도…."
그 뒤로 교수들이 입을 모아 류리크의 험담을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맥컬런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졌다.
'대학 교수나 되는 양반들이, 옹기종기 모여 학생의 뒷담화나 하고 있다니….'
물론 계속 얘기를 들으면서 류리크의 아스트레이가 '그 아스트레이'라는 걸 알게 되자, 대충 이해는 갔지만.
"…아무튼 대체 왜 샤프란에 왔는지도 모르겠다니까요? 약물에 빠져서 폐인으로 산다던 놈인데 말이죠."
"맞아요. 맞아요. 마법은커녕 몸에 마력도 없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귀에 익은 내용에 맥컬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분명… 수업 때 다른 학생들도 그런 말을 했었지. 마력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그렇다기엔 류리크는 너무 자연스럽게 마력을 운용했다.
그것도,
'…일부러 얼기설기 구성한 마법이다만, 그건 디스펠이 아니라 마력 간섭이었다.'
마력 간섭은 흔한 조작-간섭 계열의 마법보다 아득히 어려운 난도를 자랑한다. 디스펠이 여러 증상에 대충 들어맞는 약이라면, 마력 간섭은 정확히 그 증상에 들어맞는 백신과도 같은 것이니까.
'마력 간섭을 위해서는 상대방이 발현한 마법에 대한 완벽한 수준의 지식을 요구한다. 그 설계의 결점을 공략하는 방식이니까.'
여기가 이상한 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바람의 구슬은 재작년 아드리아의 논문 회의에서 나타난 조화의 마법… 평범한 학생은 아직 이 마법의 존재조차도 모를 텐데….'
아드리아의 그 녀석이 직접 가르쳤을 리도 없고, 아직 어떤 마도서에도 등재되지 않았을 터인데.
류리크는 비바람의 구슬을 알았다. 그것도 '마력 간섭'을 해낼 만큼 완벽하게.
거기서 발생하는 모순. 그리고 새로운 결론이 맥컬런의 머릿속에서 싹튼다.
'마법을 알지 못해도 마력 간섭을 해낼 수 있다는 건… 설마 마법의 안티테제(Antithese)라도 된다는 것인가?'
◈ 023
기초 마법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들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첫 수업이다 보니 모두 오리엔테이션이라며 수업 내용이나 강의 방식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있는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난 것이 3시 무렵, 아주 여유롭게 시간이 남아돌았다.
"하암! 힘들었다! 류리크 씨, 우리 이제 집에 돌아가는 거지?"
실비아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하품까지 하는 걸 보면 꽤나 피곤한 모양이었다.
아침에 학교에 올 적에, 거의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으니까.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거냐?"
"응. 마음 같아서는 집으로 전이해서 그대로 침대에서 잠들… 어, 잠깐만."
갑자기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춰선 실비아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 집은 천천히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저택이 스위트홈이 아니라는 걸 이제 떠올린 거냐.
나는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답했다.
"리아와는 빨리 친해지는 게 좋을 거다."
"류리크 씨! 우, 우리 조용한 곳에서 쉬다 갈까? 아예 푹 쉴 수 있게 괜찮은 여관이나 호텔을 잡아서…."
그건 이런 상황에서 쓸 말이 아니야, 나는 그녀의 정수리를 손날로 가볍게 때렸다.
"아직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할 일이 남아 있거든."
"으, 으응? 그렇지만 수업은 다 끝났잖아."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꼭 수업만이 공부의 전부는 아니지."
내가 당연한 소리를 하자, 실비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봐선 안 될 것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류리크 씨 설마… 아니지? 진짜, 진짜… 아니지?"
뭐냐, 그 표정은.
잘은 몰라도 이게 그렇게나 심각한 얘기인 건가.
"네가 뭘 아니라고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우리는 지금 도서관에 갈 것이다."
"그, 그러어언! 망나니 류리크 씨가 학교가 끝났는데도 공부를 한다니!"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전에도 말한 적 있을 터다. 나는 샤프란에 정말로 마법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라고."
"아, 아니 그렇긴 하지만… 교수님들도 대충 때우는 첫날인데… 첫날부터… 너무 빡센 거 아닌가…."
실비아가 쿡쿡, 검지를 떼었다 맞대기를 반복하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한다.
"여, 역시 우리 여관이나 호텔 같은 조용한 곳에서 쉬다가 가는 게…."
"오늘 도서관에서 해야 할 중요한 용건이 있다."
"중요한 용건이라니… 왜 하필 그게 하교할 때쯤 튀어나오는 건데!"
"이건 내가 후인의 반지를 얻을 무렵, 한 보름 전쯤부터 계획하던 일이다만."
"아니, 류리크 씨! 세상에 어떤 변태가 입학하기 전부터 수업 첫날 계획을 짜?!"
보통 그렇게들 하지 않나?
애당초 나는 예습으로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참이다.
"내가 그러하다만,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가."
"…치, 치사해! 치사하다고!"
뭐가 치사하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만.
다행스럽게도 실비아는 저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나는 겨우 '목적'에 관한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오웰름의 마석이라고 들어봤나?"
"오… 웰름? 어… 으음…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자아(Ego)를 가진 마석 말이다만, 들어본 적 없는가?"
"아, 맞아! 그 말하는 돌덩어리?"
표현이 참 저렴하구나. 나름 전 세계에서 샤프란밖에 없는 명물인데.
"그렇다. 우리는 그 오웰름의 마석을 보러 갈 것이다."
"으음, 그 말하는 돌덩어리는 갑자기 왜?"
"마석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재능 중, 가장 뛰어난 유형을 알려줄 테니까."
오웰름의 마석이 하는 일이 바로 그거였다.
거기에 손을 대서 마력을 흘려보내면, 그 사람의 재능을 가늠해서 알려주는 거다. 어느 계통의, 어느 계열의, 어느 속성이 가장 잘 맞는지.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시했다.
"주전 마법을 선택하는 건, 기초 마법학에서 천천히 하는 거 아니었어?"
"기초 마법학은 재능보다 선호라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것저것 다 해 보고 자신의 성격이나, 취향에 맞는 걸 고른다는 거지."
실제 그게 중요하긴 하다. 요컨대 앞으로 자신이 평생 가져갈 '직업'을 고르는데,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호를 따지기보단, 내 안에 어떤 재능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특별히 호불호가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루나틱 난이도의 최우선순위는 최대한 빠른 성장이니까.
"…그건 이해했는데, 굳이 지금 가야 되는 거야? 첫날이니까 조금 유하게…."
"네가 말했다시피 오웰름의 마석은 자아가 있는 마석이다. 그러니… 계속 일하다 보면 지쳐서 대충하게 된다."
마치 첫 출근한 신입사원과 3년 차 대리의 마음가짐이 다르듯이. 한 달만 늦게 가도 오웰름의 마석이 달라진다.
학기 말에 가면 정말 귀찮다는 듯, 말도 잘 듣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신학기가 시작된 첫날. 지금 이때 가야, 가장 최상의 컨디션인 마석에게 적절한 진단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이러한 설명을 죽 덧붙이고 나자, 실비아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아보고 계획을 짠 거야?! 독해…! 류리크 씨 진짜로 독하다고!"
* * *
도서관 건물의 어느 별실.
20여평 되는 넓은 방. 정면으로는 아치형 창이 나 있고, 그 양옆에는 천장까지 닿을 듯 높은 서가가 죽 이어져 있다.
방의 구석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고, 바닥에도 마치 고서점의 그것처럼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한가운데에는 2명이 나란히 앉으면 꼭 들어맞을 소파가 마주 보게끔 되어있고, 작은 탁상이 놓여 있다.
오웰름의 마석은 바로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끌끌끌, 첫날부터 나를 찾는 학생이 있다니… 이거 참, 신기한걸?
마석에게서 목소리가 나오자, 실비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뒤로 숨었다.
"소, 소름 끼쳐…."
―어이 거기 애송이! 지금 뭐라고 한 거냐!
나는 괜히 마석이 토라지기 전에, 본론을 꺼냈다.
"본인의 적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왔다. 지금 바로 검사하고 싶다만, 컨디션은 괜찮은가."
―에, 어흠흠. 방금 저 애송이 때문에 기분은 조금 별로지만… 방학 내내 푹 쉬어서 컨디션은 나쁘지 않지! 으흠!
쓸데없이 얘기해 봐야 시간만 아까울 것이기에 나는 그대로 마석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으흠! 성격이 급한 학생이구나! 오랜만에 찾은 학생이니, 세상 돌아가는 얘기라든가….
"내 재능은 어떤 계통이지?"
―끄응. 재미없는 녀석. 그래 어디 한번 보… 자아…?
마석의 말끝이 기묘하게 늘어진다.
까다로운 재능이라도 나타난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자니 마석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분홍 머리, 잠시 밖에 나가 있어라.
"에? 나? 나 보고 나가란 거야?"
―그래. 잠깐 나가 있어라. 원래 재능은 당사자에게만 말해주는 게 원칙이니까.
나는 마석에게 말했다.
"그녀는 내 동료다. 함께 들어도 상관없다."
―아니. 나가줘야겠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 말해줄 수 없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마석에게 '결과를 타인에게 말해줄 수 없다.'는 금언(禁言) 마법이 걸려있긴 하다만,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면 문제는 없을 터인데.
'무언가 이상한 결과가 나온 건가.'
나는 일단 실비아에게 밖에 나가 있도록 했다. 그러자 오웰름의 마석이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 재능은 현존하는 계통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외군."
―그건… 아주 오래된 저주에 근원을 두고 있지.
"......."
오래된 저주.
이 추상적인 표현에 빗댈 수 있는 것들은 많지만, 그게 '계통'이라고 한다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웰름의 마석이 깊게 시름하듯 말한다.
― …라고도 하는데, 새파란 새내기가 들어는 봤을지 모르겠군.
"글쎄, 잘 모르겠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연히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도 써본 적은 없는 계통이지만, 지식으로는 접한 적이 있기에.
―그래. 모르면… 모르는 게 다행이지. 알려고도 하지 마라. 그거에 비하면 차라리 시체로 장난치는 네크로맨시가 훨씬 나을 지경이니까.
금지 마법이자 흑마술인 사령술이 차라리 낫다고 말할 마법. 당연히 그건 쓰면 안 되는 종류의 마법이다.
나 역시 재능이 어떻고와 관계없이, '그 마법'은 쓸 생각이 없기에.
"다른 재능도 있을 거 아닌가."
―으음. 그렇지 다른 건… 어디 보자….
나는 마석에게 마력을 조금 더 불어넣었다. 그러자 마석의 빛이 조금 더 밝아지더니, 금세 답이 나왔다.
―소환 계통이 괜찮다. 정령 소환인지, 계약 소환인지는 모호하다만.
소환이라.
나쁘지 않았다.
―그밖에는 보조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특별히 못 써먹을 계통은 없군. 너, 꽤 괜찮은 놈이구나?
더욱 괜찮았다.
보조는 폐인 특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계통이었으니까.
"고맙다. 덕분에 주전을 고르는데 썩 도움이 되겠어."
―흥, 그보다도… 아까 내가 말했던 그 계통은 잊어라. 어디 가서 그 계통은 언급조차 하지 말고.
아무렴, 내가 그런 말을 떠들고 다닐까.
나는 오웰름의 마석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밖에 나가 있던 실비아를 불렀다.
"내 차례는 끝났다만, 너도 한번 검사를 받아보겠나?"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 주전 마법은 예전부터 결정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 * *
오웰름의 마석을 만난 직후, 도서관에서 보조 계통의 기초 마법 서적들을 읽었다. 도서관이라고 해 봐야 대부분 기초 마법 수준이고, 중위 수준의 마도서는 거의 없는 실정이지만.
보조 계통은 기초 마법만 해도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폐인 A를 극복할 첫 단계니까.'
그간 여러모로 골치 아팠던 폐인 특성. 그 문제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폐인 특성을 일종의 디버프라 생각한다면, 버프를 통해 이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가속, 강화, 활력… 이미 존재하는 보조 마법들만으로도 거의 모든 종류의 신체적 결함을 메꿀 수 있다. 오히려 수준이 높아지면, 기사 못지않은 근접전을 구사할 수도 있지.'
실제 보조 계통, 축복 계열에 특화된 마법사들은 지팡이로 어지간한 기사들을 때려잡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우스갯소리처럼 논하던 힘법사처럼 말이다.
[ '새싹의 활력' 마법을 습득했습니다. ]
[ '가벼운 발걸음' 마법을 습득했습니다. ]
정말 다행스럽게도 신동 A 특성 덕분에, 기초 마법은 그 자리에서 마도서를 읽는 것만으로도 습득할 수 있었다.
내가 책을 대충 읽고서 마법을 선보이자, 실비아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류리크 씨는 미친놈인 거 같아. 아니, 이게 말이 돼? 아무리 기초 마법이라지만 어떻게 읽으면서 마법을 바로 습득하는 거야?!"
"대충 배울 건 배웠으니, 슬슬 밖에 나가도록 하지."
"으응? 류리크 씨 재능이 소환이랑 보조라면서? 소환은 안 보는 거야?"
"소환은 지금 쓸 만한 것이 아니다."
일단 정령 계열은 현재의 나로서는 사용할 수 없다. 오웰름의 마석은 몰랐겠지만, 나는 '악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정령은 성향이 악한 사람과 상극이다.
'정령을 소환해봐야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고위 정령은 오히려 나를 공격하겠지.'
남는 것은 계약 계열이 되는데.
'계약 소환은 매개체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니, 적절한 준비가 필요할 테고.'
아무런 준비 없이 대충 계약 소환을 하면, 정말로 '대충' 같은 결과가 나온다. 아무짝에 쓸모없는데 마력을 낭비하는 셈이 된다는 소리다.
"뭐, 류리크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기초 마법을 바로 배운 것이 그렇게나 충격적인 걸까, 실비아는 별다른 말 없이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우리는 저물어가는 하늘을 보며 샤프란을 나섰다.
늦은 저녁이기에 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로 돌아가거나 해서, 교정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특히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는 외벽으로 나올 무렵엔 순찰대원을 빼곤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실비아도 나도 실컷 잡담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 위르겐하이에서 10만 리브라를 땄다는 거 아냐!"
"문득 든 생각이다만, 주말에는 거기서 돈을 벌 생각이 없는가."
"이봐요, 류리크 씨! 이젠 하다하다 나한테 앵벌이까지 시키려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실비아와 시답잖은 얘기를 했기에.
나는 다가오는 불운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학교생활은 즐거운가."
입학처의 험난한 내리막길을 죽 내려오자, 바로 앞에 세련된 디자인의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체의 정면에는 익숙한 엠블렘이 달려 있었다.
―아스트레이를 상징하는 문양.
처음에는 운전기사의 마중이라고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본녀는 빌어먹을 광산 인수 건 때문에 며칠 밤잠을 설쳤는지도 모르겠는데, 자네는 참으로 속 편한 인생이야. 아니 그러한가?"
내 운전기사는 온데간데없고, 아스트레이의 시종장 '카엘'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원래는 피곤한 것도 있고 해서 저택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만,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더군. 그래서 혹시 도망치는 건 아닌가 싶어, 직접 찾아왔다네."
류미엘 바타체스 폰 이피로스 아스트레이.
현재 아스트레이 가문의 당주 대리이자, 류리크의 사망 플래그 중 하나. 이미 이 세계에서도 나를 죽일 생각으로 류아라를 충동질했을 인물.
"빌어먹을 나의 오라비여."
그녀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024
리아는 늘 성실했다.
저택에서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고 누구보다 늦게 자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주어진 일을 단 한 번도 미루거나, 도중에 그만두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정기적으로 보내는 '류리크 동향 보고서'였다.
'류리크 님이 제가 감시역이라는 걸 파악한 건 꽤 의외였죠.'
이전에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말 잘 안 듣는 집사가 있다는 정도로 여기는 느낌. 실제 그가 보였던 말과 행동이 그러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류리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동향 보고서의 존재까지도 알아차렸다.
'그동안 철저히 자신을 숨긴 걸까요. 제 눈을 속일 만큼, 감쪽같은 연기를 하면서?'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근래의 류리크가 무척이나 '탁월'하다는 점이었다.
'류아라 님이 방문했을 때는 최소 불구가 될 줄 알았죠.'
'마스체니의 견제가 들어왔을 땐, 입학을 포기하실 줄 알았죠.'
'잿빛수정으로 인한 약물 중독은 끝끝내 이겨 내지 못할 줄 알았죠.'
헌데 류리크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냈다. 그뿐이랴, 거기서 비롯된 것들을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어 냈다.
류아라는 류리크를 위해 거금을 들여 영월화와 여러 경매품을 선물했다.
마스체니의 샤일라는 류리크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약물 중독은 약수병이라는 물건을 팔아치우는 역사로 활용했다.
그 밖에도 자잘한 것들은 많았다. 파르넨 시어에 빚을 지워뒀다든가. 류네온을 잘 구슬려서 소저택에 들어가게 되었다든가. 살기등등하게 왔던 반즈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든가.
'…솔직히 말해 탁월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만.'
그리고 다시 한번 그에게 고비가 찾아왔다.
류리크 동향 보고서는 늘 객관적인 내용만 담아야 하기에, 불확실한 것들은 담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객관적인 물증으로 증명할 수 없는 류리크의 업적들은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류미엘은 리아와 전혀 다른 시선으로 류리크를 보고 있다.
―능력도 없이 마법 대학에 입학한 머저리.
―멋대로 소저택을 사용하는 빌어먹을 놈.
―아스트레이에 이단의 종자를 끌어들인 대역죄인.
"리아, 류리크 그 빌어먹을 오라비는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지?"
"첫날이라 수업은 진즉에 끝났을 터입니다만."
"오라비가 멀쩡하게 수업을 들을 리가 없는데, 설마 또 무슨 사고를 치는 건…!"
류미엘은 류리크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가득하다.
이건 비단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저주와도 같다.
"젠장. 내가 직접 찾아가 봐야겠어."
류미엘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지금의 류리크에 비해서는 떨어질 수 있으나,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며… 그녀가 품은 증오의 무게는 단순한 임기응변으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다.
어지간한 감언(甘言)은 욕으로 받아칠 것이고, 이설(利說)은 허튼소리로 치부해 듣지도 않을 터.
'이번에는 어떻게 넘어가시겠습니까. 류리크 님.'
* * *
―듣는 귀가 있을 수 있으니, 차 안에서 얘기하지.
로팅엘 구의 어느 인적 없는 장소. 실비아와 카엘은 잠시 밖에 나가 서 있고, 리무진 안에서 류미엘과 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말없이 그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
"......."
뜻밖의 방문.
류미엘의 등장은 그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이 타이밍'에 '이 장소'라는 것은 그야말로 뜻밖이었기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온 건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나는 본래의 류리크와 전혀 다른 행보를 걸었다.
폐인 같던 생활도 그만두었고, 술도 약물도 끊었다. 아주 청렴한(?) 삶을 살아왔단 말이다.
일단 다행인 점은 [ 불합리한 죽음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같은 빌어먹을 시스템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는 거다만.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었다.
'아무렴, 내 사망 플래그 중 하나니까.'
나는 일단 적당히 능청을 떨며, 눈치를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만, 빌어먹을 오라비라니… 마음이 아프구나."
"그러면 본녀의 입에서 그대를 상대로 사랑의 세레나데라도 불러야 할까."
말 끝나기 무섭게 류미엘의 표정이 세상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더 놀리면 없던 사망 플래그도 튀어나올 기세.
나는 곧장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보아하니 나를 저택까지 바래다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 다행이군."
후우, 류미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샤프란을 그만두고, 위르겐하이의 별장으로 돌아가라."
"농담도 참, 신박하군."
"농담이 아니다. 이건 오라비의 누이가 아닌, 아스트레이 가문의 당주 대리로서 하는 명령이다."
"......."
진담이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긴 매일 격무에 시달려 초주검 상태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류미엘이 직접 행차한 마당이다.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닐 테지.
물론, 나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류미엘, 본인은 자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모처럼 폐인 생활을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찬물을 끼얹으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 새사람? 찬물?"
농담은 오라비가 하고 있구나, 류미엘이 예쁜 이마를 찡그렸다.
"네가 진정 새사람이 되려고 했다면, 샤프란이 아니라 칼라모르에 갔겠지."
이제는 호칭이 '오라비'에서 '네가'로 바뀌었다. 요컨대 감정이 격해졌다는 소리고, 내 입장에선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샤프란도 훌륭한 학교다. 그리고 본인은 배너렛의 기사임과 동시에 헤루인의 등위의 마법사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래. 처음에는 네가 샤프란에서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네 행보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
"글쎄. 대저 무슨 말인지…."
"마스체니에서 후인의 반지를 빼앗다니, 그게 제정신으로 할 짓인가?"
나는 소저택이나 실비아의 얘기를 꺼내 들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복병이 튀어나왔다.
"너는 네 멋대로 움직였겠지만, 그 과오는 가문의 짐이 된다. 당장에 고귀의 13가문에서 아스트레이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단 말이다."
"북방의 맹주가 그런 소문에 흔들릴 위치이던가?"
"구태여 겪지 않아도 되었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을 리스크를 말하는 것이다!"
버럭, 소리친 류미엘은 잠시 감정을 추스르듯 심호흡을 한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자, 다시금 데시벨이 잔뜩 올라갔다.
"거기에 소저택을 마음대로 사용하다니, 이 빌어먹을 오라비여. 그곳은 전시용으로 설계된 요새다!"
나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동시에 제도에서 건국제 같은 행사가 벌어질 때 거처로도 사용되지. 아, 우리도 어릴 적에 함께 오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그때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진짜…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이게 참, 직접 눈앞에서 얼굴 붉히는 것을 보니 판단이 모호해진다. 분명 머리로는 부끄러워한다는 해석이 나오는데,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진심이다.
나는 재빠르게 '우리 예전엔 좋았었지.' 작전을 파기하며,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렇다면 소저택만 포기한다면, 본인은 그대로 샤프란에 다녀도 괜찮은 것인가?"
"그럴 리가. 나는 분명히 말했다. 샤프란을 그만두고, 위르겐하이의 별장으로 돌아가라고."
"후인의 반지야 상호 납득하는 방식으로 교환한 것이고, 소저택을 쓰는 정도의 대가로 그런 처분이라니… 살짝 과하지 않은가?"
내가 논리적으로 따져 들자, 류미엘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본녀 역시, 이전까지만 해도 너를 타박하는 정도로 넘기려 했다. 하지만 오라비여, 너는 선을 넘었다."
"저 아이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차창 밖의 실비아를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밖에 있는 실비아는, 어딘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칠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류미엘 역시 나와 함께 실비아를 보다가, 이내 내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고귀의 13가문이 무어라 떠드는지, 그리고 신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아는가?"
"그야 아스트레이와 이단의 연관성에 대해 환담을 나누고 있겠지."
"그걸 알면서도…!"
"그렇다 하여도 저들은 절대로 아스트레이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는 비단 아스트레이가 북방의 맹주라서가 아니다."
북방이라는 건, 단순히 북쪽에 세력이 위치해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는 곧 대륙의 북방을 수호하고 있다는 말이며, 무너지면 더 북쪽에 있는 무언가가 움직인다는 말이다.
"당장에 아스트레이가 무너지면, 설원의 사자(死者)들을 누가 막겠는가. 고귀의 13가문도, 신전도, 그걸 알기에 절대 손을 쓰지 못한다."
내가 설마 그 정도 정치적 계산조차 없이 움직였을까… 라는 것이 내 입장이다만, 받아들이는 류미엘의 시선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정무적 능력은 리아보다 떨어진다.
척하면 척 알아듣고 서로 납득하는 스마트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지? 그리고 어찌 되었건 너의 행동이 아스트레이에 거대한 짐이 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그만 별장으로 돌아가도록."
"그건 참 곤란한데."
"리아에게도 이미 저택을 비우도록 명령했다."
"......."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따지고 싶은 거야 얼마든지 있었다.
너는 나를 죽이거나 최소 반병신으로 만들고자 류아라를 움직였다.
너는 내가 샤프란에 들어가는 걸 막고자, 마스체니를 충동질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따져본들, 결말은 하나겠지.'
파국(破局).
불합리한 일에 처했을 때, 화를 내고 욕하는 건 누구든 할 수 있다.
그에 대해 합리적으로 잘잘못을 따지며 다투는 것 역시 여러 사람이 할 수 있다.
굴종으로 상황을 모면하고, 칼을 품으며 군자의 복수를 하는 것은 몇몇 사람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제 3의 길을 찾는다.'
말을 마친 류미엘이 창문을 두들긴다. 그러자 밖에 있던 시종장인 카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리무진의 문을 열려 한다.
나는 카엘에게 잠시 멈추라고 손짓한 뒤, 류미엘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대화의 여지는 없다고 했을 터다."
"단 하나. 단 하나뿐인 질문이다. 대답을 않아도 좋으니, 말만이라도 들어다오."
내용은 간절하나, 어조는 위엄을 잃지 않도록.
그렇게 설득을 하자니, 결국 류미엘이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기색이 흘러넘치는 표정이었다만, 그거면 충분했다.
"…일단 들어는 보겠다."
경계심을 풀지 않는 눈빛. 날카로운 태도.
과연 저것을 풀어헤칠 수 있을까, 나는 희미한 가능성을 점치며 입을 열었다.
"너는 정말로 아스트레이의 당주가 되고 싶은 거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