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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 살짝 솟아오른 언덕 위로 웅크린 곰 같은 형상을 한 거대한 바위산이 있었다. 바위산 아래로 작게 샘이 솟고 있고, 그 근처에 수백 개의 가죽 천막들이 도열해 있다. 이 가혹한 땅의 진정한 지배자, 푸른 곰 부족의 봄 야영지였다.

타시드와 다른 두 오크 사내들이 터틀 라이온을 짊어지고 언덕을 내려오자 마을에 남아 있던 오크들이 환호를 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손을 흔들어 그들의 환대에 답하며 타시드는 마을로 들어섰다. 두 배 가까운 크기의 커다란 천막 앞에 도착하자 휘장이 걷히며 검붉은 피부색에 탄탄한 근육, 풍만한 유방을 가진 오크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한인 타시드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로 여장부라 불릴 법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구의 여인이었다.

타시드가 터틀 라이온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의 수확입니다, 대모님."

"아이들이 굶지 않겠구나."

오크 여인, 스탈라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터틀 라이온의 살코기 하나를 들고서 가볍게 양쪽으로 찢었다. 구운 것도 아니고 생 고깃덩어리를 그냥 악력만으로 북 찢은 것이다. 생사람 한둘쯤은 가볍게 포 뜰 어마어마한 괴력이다. 하지만 오크들은 다들 전혀 놀라지 않고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쪽으로 찢은 고깃덩어리를 들고 스탈라가 축복을 내렸다.

"이 살과 이 피가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될지니 이를 취하고 운명에 맞서 싸우라!"

축복을 내린 뒤 다른 여성 오크들이 칼을 들고 저마다 고깃덩어리를 잘라 갔다. 오크 여성들답게 하나같이 전신이 탄탄한 근육으로 잘 짜여 있었다. 물론 남성 오크와 달리 여성적인 특징은 명확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나 엘프 여성처럼 부드럽고 날씬한 몸매를 지닌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크들에게 있어 비만의 기준은 몸에 얼마나 군살이 붙어 있느냐인지라, 아무리 수수깡처럼 말라도 근육이 없다면 '살찐' 여성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마흔 살이 되는 스탈라는 실로 무시무시한(?) 미녀였다. 그녀의 군살은 실로 피부라는 단어와 동의어! 모든 오크 남성들이 침을 줄줄 흘릴 쭉쭉빵빵 미녀라 아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스탈라는 저런 바위 같은 근육을 지녔음에도 불구, 가슴도 풍만했다. 그 풍만한 가슴으로 무려 서른 명이 넘는 어린 오크들을 먹여 살린 어미 중의 어미인 것이다. 뭔가 포인트가 이상하다는 느낌도 들겠지만, 어쨌거나 오크 기준에서는 존경받을 만한 여성이었다.

터틀 라이온의 살코기를 들고 가는 부족의 오크들을 보며 스탈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곁에 서서 마찬가지로 뿌듯해하는 타시드를 보며 다시 한 번 찬사를 내렸다.

"수고했다, 타시드."

"별것 아니었습니다."

이 녹색 피부의 오크 청년은 원래 그녀의 부족이 아니었다. 4년 전, 시련의 땅을 통해 나타난 외부인이다. 원래는 인간의 노예로 살아가던 오크였다가 기이한 인간의 인도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스탈라가 그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대를 인정치 않는 이가 없구나."

당시에는, 오크의 혼도 긍지도 잃은 외부인을 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반대도 많았다. 그때 모든 반대를 뚫고 어린 타시드를 받아들인 것이 스탈라였다. 현명한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의 사슬을 부수고 전사의 혼을 일깨운 타시드의 잠재력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배우고 익혀 전사의 긍지를 영혼에 지니는 것은 물론 대단하다. 하물며 이 아이는 배우지도, 익히지도 못했음에도 그 영혼에 긍지가 가득하다. 이 아이가 전사가 아니라면 그 누가 전사임을 자처할 수 있단 말이냐!

스탈라의 일갈은 푸른 곰 부족 전체를 일깨웠고, 모두들 부끄러워하며 그 어린 오크 소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빈약한 몸을 지녔던 그 어린 오크는 이제 푸른 곰 부족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전사가 되었다.

"너를 직접 가르친 보람이 느껴져서 좋구나."

온화한 스탈라의 말에 타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워낙 잘났잖습니까?"

퍽!

스탈라의 백 너클이 타시드의 안면을 직격했다.

"녀석, 잘난 척은."

"에구구~."

타시드가 얼굴을 움켜쥐고 아픈 척 엄살을 떨었다.

물론 정말 아픈 것은 아니다. 콧대 높은 인간이었다면 이 한방에 코뼈쯤은 가볍게 나갔겠지만, 납작한 들창코를 가진 오크들에게 이런 식의 안면 가격은 말 그대로 장난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인간들끼리 어깨를 툭툭 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뭐, 인간들은 이런 오크들을 보며 난폭하고 야만적이라며 치를 떤다. 신체 구조상의 차이가 낳은 오해랄까?

그렇게 스탈라와 타시드가 한가하게 장난을 치던 중이었다. 저만치 언덕 위에서 한 오크 전사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산양처럼 단숨에 언덕을 내려온 그 오크가 스탈라 앞에 도착해 소리쳤다.

"대모님!"

"웬 난리냐, 마가단?"

마가단이라 불린 오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서쪽에서 양을 치던 앙가트가 알려 왔습니다."

타시드와 스탈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가하게 불을 피우던 다른 오크들도 눈을 빛내며 하던 일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군대인가?"

마가단이 고개를 저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들었습니다."

"그냥 모험가 부류인가?"

스탈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모험가들이 이 시련의 땅으로 들어오곤 했다. 오크들이 목적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은의 시대 유적을 노리는 탐사자들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들에게 있어 오크는 그저 야생의 몬스터일 뿐이다. 조우할 때마다 전투가 벌어지고는 했다.

문득 스탈라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가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알려 줘야겠구나. 이 대지의 진정한 주인을!"

☆ ☆ ☆

글로텐 산맥을 따라 남하한 지 일주일째, 레펜하르트 일행은 어느새 페틀랜드 평원을 지나 시련의 땅에 들어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족히 스무 날은 걸릴 거리였다. 평소처럼 두 발로 걷는 여행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돈이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레펜하르트 일행은, 이번에는 과감히 지갑을 풀고 전원 말을 구입하고 마구 달린 것이다. 돈이 넉넉하니 각 역참을 통과할 때마다 지친 말을 바꿔 타는 사치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일단 시련의 땅에 들어서자 레펜하르트 일행은 이동 속도를 낮추었다. 지금까지처럼 지친 말을 교환할 곳이 없으니 말들의 체력을 신경 써야 했다.

"정말 황량한 곳이군요, 형님."

속보로 걸어가는 말 등에 오른 채 러스는 주위 경관을 훑어보았다. 페틀랜드 평원에서 멀어질 때마다 점점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마주치던 초원을 방랑하는 유목민들의 원뿔형 천막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앞장서 말을 몰던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들이 괜히 그런 오해를 받는 게 아니지."

오크들은 거칠고 잔인하며 야만적이다. 이것이 인간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크들이 사는 가혹한 환경을 반영할 뿐이다. 허약한 아기가 태어나면 키울 생각 않고 황야에 버려 버린다는 오크들의 잔인한 육아 방식은 사실, 실제 그들의 풍습이었다. 또한 노쇠해진 오크들은 마을에서 쫓겨나 황야 속에서 굶주려 죽어 간다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진실이었다.

"단지, 오크들은 사실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을을 떠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길 뿐이지만."

그러면서, 명예를 모르는 오크 역시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쏙 뺀 레펜하르트였다. 어쨌거나 쫓겨나는 것은 마찬가지란 소리다.

하여튼, 야만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풍습은 사실, 삶과의 힘겨운 투쟁이 낳은 가장 현명한 생존 방식일 뿐이다. 그런 레펜하르트의 말에 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게 결국 야만적이란 소리 아닌가요?"

솔직히 드워프는 뭐 지상낙원 차지해서 저렇게 건물 올리고 살고 있냐? 어차피 오지에서 힘겹게 살기는 마찬가지구만. 그녀 입장에서는 여전히 오크들은 야만적인 놈들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자 시리스가 입을 삐죽였다.

"그야 드워프들은 운이 좋아서 이것저것 많이 건져 놨으니까 그런 소릴 할 수 있겠죠."

드워프들이야 인간의 노예로 살면서도 옛 조상의 지혜를 많이 간직했으니 오지로 쫓겨나도 나름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밑천 싹 다 털리고 도망가야 했던 엘프 입장에서는 틸라야말로 배부른 소리 하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아니, 그래도 아이를 귀히 여기지 않고 연장자조차 저버리는 이들이 야만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엘프들도 그러진 않잖아요?"

"그렇다 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이거죠. 드워프들이 건축 기술, 대장 기술 다 잃고도 그렇게 그랜드 포지를 개조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말 위에서 두 여인이 티격태격 실랑이를 벌인다. 엘프가 오크를 감싸는 그 진귀한(?) 풍경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으, 저것도 문제는 문제지. 그러고 보니.'

비록 틸라와 시리스의 사소한 말싸움에 불과하다지만, 레펜하르트는 저 모습이 시사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학대받는 이종족들이라 해도, 그들이 연합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뭉칠 거라는 건 참으로 세상모르는 순진한 기대일 뿐이다. 전생에도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 사이에는 이런저런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애초에 종족도 문화도 다른 이들이 그리 쉽게 융합될 리가 없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는 굳이 인간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아무리 합리적인 엘프, 진실을 듣는 드워프, 긍지 높은 오크라지만, 그들의 합리와 진실과 긍지의 기준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결국 여러 놈 모아 놓으면 문제 생기는 것은 인간이건 엘프건 드워프건 오크건, 하나 다를 것 없었다.

'쩝, 예전에야 황제의 권력으로 밀어붙였다지만 그럴 수도 없고....'

레펜하르트는 난처해하며 뺨을 긁었다. 이 문제도 나중에 마켈린이랑 상의 좀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시리스와 틸라는 대충 말싸움을 끝내고 다시 말을 몰고 있었다. 둘 다 뺨을 가득 부풀리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모른 척 계속 걸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나름 지혜를 얻은 그였다. 자고로, 여자들 싸움에 남자가 끼어서 좋은 꼴 보는 경우는 절대 없다.

실란 역시 저 '지혜'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슬쩍 레펜하르트에게 다가와 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걸 보면.

"그런데 레펜 씨, 오크들은 어떻게 설득할 건가요? 아, 물론 레펜 씨라면 다 방법이 있겠지만, 그래도 그냥 궁금해서."

엘프도 드워프도 쉽게 설득했으니 당연히 오크도 그러려니 하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법이 있긴 한데 조금 자신은 없어."

실제로 레펜하르트는 고민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엘프들도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이들인 데다가, 세계수 부활 의식이라는 히든카드가 있어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크들에게 자신이 적이 아니며, 그들의 편인지를 알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만 해 뒀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도 이번에는 부딪쳐 봐야 알겠는데."

그러자 시리스가 말을 달려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전생에서 했던 방법대로 하는 것 아니었나요?"

이미 한번 설득해 봤으니 별문제 없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레펜하르트가 난감해하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게... 그때는 타시드가 있었거든."

전생에서 레펜하르트가 타시드를 만난 것은 시리스와 함께 대륙 각지의 유적을 탐사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레펜하르트는 이미 대륙 각지의 이종족들을 만나 새로운 마법의 경지를 쌓으며 틈틈이 학대받는 엘프와 오크들을 구하고 있었다.

아직은 안타레스 제국이 생겨나기 전, 그 당시 타시드는 푸른 곰 부족을 나와 학대받는 오크들을 구하기 위해 대륙을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것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그 하나의 힘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한참 좌절할 때였다.

그런 타시드에게 레펜하르트의 존재는 구원과 같았다. 레펜하르트를 찾고, 자신의 검으로 그를 시험한 뒤 타시드는 레펜하르트야말로 자신의 꿈을 이룰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시리스, 타시드와 함께 은의 시대 유적을 탐사하고, 오지의 이종족들을 찾아가고, 학대받는 이종족 노예들을 구하며 대륙을 떠돌아다니던 시절.

레펜하르트에게 있어서는 가장 황금 같던 시간이었다. 꿈과 희망이 가득 차 있고 자유로웠던 행복의 시간.

이후, 레펜하르트는 덩치가 커져 버린 이종족들의 마을을 연합시켜 결국 안타레스 제국을 세우고 타시드와 함께 푸른 곰 부족으로 향했다. 이미 안타레스 제국의 위명이 대륙 전역에 퍼진 이후였다. 푸른 곰 부족도 별다른 반대 없이 그와 뜻을 함께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타시드라는 중개인도 없고, 딱히 해 놓은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오크들에게 자신의 꿈과 의지가 거짓이 아님을 전달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을 수밖에 없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전혀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일단은 만나 봐야지."

그때, 문득 러스가 인상을 쓰더니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일행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뭔가가 옵니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에서 내렸다. 이내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서 한 무리의 무장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피부에 가죽 갑옷과 투박한 검이며 도끼를 든, 건장한 스무 명 정도의 오크들이었다.

그들의 복색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말했다.

"오크 순찰자Orc Scouter들이군."

"아까 우리를 정찰하고 간 놈들의 동료인가 보군요."

러스는 예민한 오러 유저의 감각으로 이미 오크 하나가 자신들을 살피고 갔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덤벼들 것 같은데? 되도록 상처 입히지 않게 조심들 하라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친선의 뜻으로 이곳에 온 거니까."

오크들이 검을 빼 들고 천천히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 일행도 말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포진했다. 틸라와 시리스가 실란을 보호하며 무기를 빼 들고, 실란도 신성 주문을 외우며 원호할 준비를 했다.

갑자기 선두에 선 오크가 괴성을 터트렸다.

"주디하 카들 메탈카! 사칸 다 타를카!"

실란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는 거예요?"

"이곳은 우리의 땅. 인간은 모두 죽인다."

레펜하르트의 번역에 틸라가 고개를 저었다.

"살벌하네."

레펜하르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푸른 전사의 영혼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막 오크어로 적이 아님을 피력하려 할 때였다. 스무 명의 오크들이 동시에 고함을 내질렀다.

"사칸 다 타를카!"

그리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일행에게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말이 통할 분위기가 아닌데요?"

3

"크아아아!"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투박한 오크의 검이 허공을 가른다. 시리스는 가뿐히 검을 피하며 오크의 넓적다리를 가격했다. 일부러 검을 눕혀 옆면으로 때린 것이기에 피가 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오크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크어어억!"

그 와중에 다른 오크가 연거푸 공격을 해 온다. 시리스는 가뿐히 몸을 놀리며 공격의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연속으로 발차기를 날려 오크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퍼어억!

두 명의 오크가 뒤통수를 맞고 비틀댄다. 그들의 다리를 틸라가 도끼자루로 길게 쓸어 갔다. 훌렁 넘어지며 오크들이 신음을 흘렸다.

"으그그극!"

러스도 검을 놀리며 오크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오러는 쓰지도 않았다. 그저 검집째로 오크들을 상대하며 하나 둘 두들겨 팰 뿐이다.

퍽퍽퍽퍽!

심지어 레펜하르트는 피하지도 않고 있었다.

"타카라!"

"크랏타!"

근성 가득한 오크들의 기합이 터지며 쇠망치와 돌도끼가 동시에 레펜하르트의 명치와 등을 후려갈긴다.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으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쇳덩이를 친 것 같은 손맛에 오크들이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투지를 불태우는 그들이라지만 이런 광경에서까지 경악을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맨몸으로 칼날 튕기는 묘기는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 일행은 스무 명이 넘는 오크들을 간단히 압도하고 있었다.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와 러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시리스와 틸라도 일족 내에서 손꼽히는 전사다. 게다가 강력한 신관인 실란의 가호까지 받고 있었으니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과는 별개로 레펜하르트 일행은 감탄하고 있었다.

"굉장하군요, 오크들은."

검집으로 오크들의 공격을 걷어 내며 러스가 뇌까렸다. 상대하는 오크 입장에서야 분통 터질 노릇이겠다만, 사실 그는 이 오크 전사들의 기량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가 속했던 테네스 기사단의 기사들과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일행의 실력이 너무 높은 것뿐이지, 사실 이들만 해도 어지간한 기사단과 맞서 싸울 강력한 병력으로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동의하며 말했다.

"굉장하긴 굉장하지. 문제는 오크들에게 심각한 취약점이 있어서...."

그때였다. 오크들이 일제히 분노의 외침을 터트렸다.

"크으으으!"

"크아아아!"

한참을 덤벼들어도 상처 하나 내지 못하자 다들 굴욕감에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어지간하면 역량의 차이를 실감하고 물러설 법도 하건만, 오히려 다들 생명을 도외시한 채 검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전사를 숭상하는 오크들에게, 상대가 사정 봐주는 이런 전투는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다들 눈에 독기가 올라 번들거렸다.

생사를 도외시하는 이들은 기량에 상관없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법이다. 특히나 이쪽은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시리스와 틸라의 움직임이 일순 흔들렸다. 그때,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전신으로 칼날을 버텨 내며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모래여, 흘러라. 심연의 꿈이 되어라! 매스 슬립!"

양손으로 모래를 뿌리자 가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오크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순간 러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엥?"

그토록 기세등등했던 스무 명의 오크들이 일제히 쓰러져 버린 것이다. 풀썩풀썩 쓰러지더니 바로 엎드려 얕은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 레펜하르트가 시전한 2서클 광역 수면 주문, 매스 슬립의 효과였다.

실란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아니, 뭐 이렇게 효과가 빨라?"

원래 슬립 주문은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은밀하게, 상대가 눈치 못 채게 자연스럽게 졸음이 오게 하는 주문이다. 그걸 한창 전투 중에 구사하고, 또 그게 먹힌다고? 이쯤 되면 2서클 주문이 아니라 무슨 고위 마비 주문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슬립이란 거, 실전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주문 아니었나요?"

실란의 의문에 레펜하르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오크들이 그토록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도 인간들에게 밀린 이유다."

그렇다. 오크들은 마법 저항력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던 것이다.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정신력이 뛰어날 경우 집중을 통해 마법사의 정신계 주문에 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오크는 태생적으로 그런 부분이 너무 취약했다. 아무리 강력한 전사라도 하찮은 하위 마법사의 정신계 마법에 농락당할 정도로.

"옛 시절에는 마법사가 워낙 귀해서 오크들도 별문제가 없었지만...."

예전에는 마법의 존재 자체가 극히 귀했다. 아주 소수의 마법사만이 은밀히 비전을 전수하며 그 명맥을 이어 갔다. 하지만 마탑을 세우고 정식으로 마법사를 육성하게 된 지금 마법사는 예전만큼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여전히 귀하긴 했지만, 적어도 어지간한 백작 이상의 귀족이라면 가문마다 마법사 한둘쯤은 둘 수 있을 정도로 숫자가 불어난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서 점점 인간은 마법의 힘을 키워 갔다.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살던 오크들도 점점 마법병단을 내세운 인간들에게 패해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현 시대에는 대부분의 오크들이 노예 신세가 된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설명에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아무리 강력한 전사라 해도 별로 쓸모가 없는 것 아닌가요?"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실란, 네가 만약 간단한 정신계 방어 가호 주문을 이들에게 걸어 주었다고 생각해 봐."

그러자 실란이 표정이 기묘해졌다.

"어, 확실히...."

정신계 수호 주문은 그리 고난이도의 주문이 아니었다. 실란 정도라면 아예 장시간 유지 가능한 수호 부적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오크들의 약점은 분명 심각한 것이지만, 그것은 오크 자체의 문제일 뿐 다른 종족이 아주 조금만 도와줘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전사도 아니야."

이어진 레펜하르트의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뛰어난 실력을 지닌 오크들이 전사도 아니라고?

"푸른 곰 부족의 진정한 전사들은 부락을 수호하고, 양이나 염소를 치며 식량을 지키고 습격해 오는 마물들을 사냥한다. 아직 전사가 되지 못한 오크들만 이렇게 황야를 떠돌며 순찰을 하지. 그러면서 기량을 높여 전사의 자격을 얻는 거다."

인간의 상식과는 거꾸로 된 것 같지만, 이들의 생활을 생각하면 또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실력이... 전사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어쨌든 상황이 끝났으니 레펜하르트 일행은 다시 말들을 모았다. 잠든 오크들은 그냥 이렇게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평소에도 황야를 떠돌다 아무데서나 잠드는 이들이다. 이런 곳에서 한두 시간 정도 잠들어 있다고 해서 큰 변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비 주문이 아니라 그냥 수면 주문이니까,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금방 깨어날 거야. 그 정도 단련은 다들 되어 있으니."

그리고 레펜하르트 일행은 오크들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든 오크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멀어지자 다시 말에 오르며 레펜하르트가 동쪽을 바라보았다.

"이리로 죽 가면 푸른 곰 부족의 야영지가 나올 거다. 지금 시기라면 그곳에 있을 테니까."

☆ ☆ ☆

레펜하르트 일행은 푸른 곰 부족의 봄 야영지까지 가지 못했다. 그 전에 이미 한 무리의 오크들이 그들을 마중 나온 탓이었다.

아우우우우!

오크들을 태운 다이어울프들의 울부짖음이 초원의 하늘을 가득 울린다. 황량한 대지 위로 투지가 피어오른다. 말들이 공포에 질려 발을 굴린다. 말들을 달래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재빨리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눈앞의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러스가 자기도 모르게 칼자루에 손을 가져가며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저들을 보니 왜 아까 그 오크들이 전사가 아니라고 했는지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냥 서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그 오크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숫자는 열댓 명에 불과했지만 하나하나가 강인한 기세를 뿜어내는 전사들이다.

그 사이로 거구의 오크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전신을 회색빛 망토로 감싸고, 머리까지 두건을 써 두 눈동자만 보이는 오크였다.

오크가 입을 열고 우렁차게 외쳤다.

"이곳은 우리의 땅! 인간은 오지 못한다!"

제법 또렷한 공용어였다. 음성에 담긴 카리스마에 전율하면서도 러스는 문득 의아해했다. 어째 목소리 톤이 좀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고결한 전사의 영혼들이여!"

순간 살기를 내뿜던 오크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 불청객의 입에서 그들의 언어가 흘러나온 것이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던 기세가 이내 누그러졌다. 오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역시 이종족을 상대할 때, 그들의 언어를 아는 것은 효용 가치가 대단히 크다. 일단 자신들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의가 반은 수그러드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전생에서 괜히 그토록 열심히 이종족의 언어를 배운 것이 아니다. 뭐, 전생의 그는 워낙 천재라 열심히 배웠다기보다는 대충 석 달쯤 머무르면 자동으로 현지인 수준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만.

레펜하르트가 오크어로 외침을 이었다.

"그대들과 친분을 쌓고자 이곳에 왔소이다!"

"...친분이라고?"

거구의 오크 여인, 스탈라는 당황했다. 그녀의 삶 속에서 오크와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단순명료했다.

인간이 나타나면 싸운다. 그리고 죽이거나 죽음당한다. 그것이 전부.

인간이 먼저 손을 내미는 상황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상황 판단이 되질 않았다.

그녀가 고함을 지르며 공용어로 대꾸했다.

"인간은 잘 속인다! 나는 믿지 않는다!"

레펜하르트가 오크어로 외침을 받았다.

"알고 있소! 그렇기에 그대들에게 우리의 신뢰를 보이고자 하오!"

'알고 있다고?'

스탈라는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눈앞의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음성이며 태도에서 전혀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는 아무래도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인간은 간교하니 이 정도로 신뢰할 수 없지만....

"무슨 수작인가, 인간! 그대는...."

공용어로 외치다가 스탈라는 문득 웃었다. 생각해 보니 상황이 웃겼다. 저 인간은 능숙하게 오크어로 말하고 있는데 정작 오크인 그녀는 인간의 언어로 대답하고 있다니?

말하다 말고 스탈라가 오크어로 언어를 바꿨다.

"그대는 마치 우리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소."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레펜하르트는 스탈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명백하게 적의가 사라진 상대의 눈동자를 보며 그는 속으로 흐뭇해했다.

'일단 대화는 통한 것 같군.'

원래대로라면 이 황야의 오크들이 인간과 대화 따위를 나눌 리가 없다. 보이는 즉시 칼부터 들이대야 정상인 것이다. 조금 전 만났던 오크 스카우터들처럼.

저들이 오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전사라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스스로의 강함에 자신이 있는 진정한 전사들이기에 상대가 오크어를 하는 걸 보고 당황할 정도의 여유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되었다 뿐이다. 오크들은 여전히 레펜하르트 일행을 경계하고 있었다. 조금만 분위기가 이상해져도 바로 무기를 휘두를 태세인 것은 여전하다. 레펜하르트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오며 말을 이었다.

"고결한 전사여, 우리들의 신뢰를 증명할 기회를 줄 수 있겠소?"

스탈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리 오크들이 인간을 증오한다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단순하고 호쾌한 종족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무턱대고 적의를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눈앞의 인간은 축복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들의 언어를 저토록 능숙하게 구사하며, 저토록 정중하게 요청하는 상대를 이유 없이 내치는 것은 결코 전사의 도리가 아니었다.

스탈라의 어조가 누그러졌다.

"말해 보시게. 어떻게 자신들을 증명할 것인지."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인간인 저들이, 오크인 자신들에게 무슨 수단으로 신뢰를 증명할 수 있을지.

레펜하르트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정한 전사는 검으로 그 영혼을 빛내는 법. 우리의 진실됨을 증명하기 위해 호투好鬪의 의식을 제안하는 바이오."

호투의 의식.

이것은 원래 오크 부족끼리 교류를 가질 때 흔히 벌어지는 의식이었다.

강자를 숭상하는 오크들은 서로의 기량을 겨루며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로의 혼이 담긴 무기를 맞부딪침으로써 서로의 영혼이 통하며 진실로 상대와 교류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크들은 부족 단위로 교류를 가질 때 각 부족의 전사들끼리 서로 검을 나누어 상대의 신뢰를 측정하곤 했다.

비열한 자는 결코 강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강한 자는 믿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크들의 믿음인 것이다. 인간이 보기엔 참으로 단순 무식한 사고방식이겠지만, 적어도 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문제는... 저들이 과연 인간을 상대로도 호투의 의식을 인정할 것이냐인데....'

내심 초조해하며 레펜하르트는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호투의 의식은 오크들의 풍습, 과연 이걸 이종족과의 관계에서도 인정할지는 확신이 없었는데....

"호투의 의식이라니!"

"인간이 위대한 전통을 알고 있구먼!"

"대모님! 받아들입시다!"

역시 저들은 오크였다. 애당초 그렇게 깊이 생각하는 종족이 아닌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제안에 표정이 일변하며 적의가 싹 사라지고 흥미 가득한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기 시작한다.

"인간 주제에 호방함을 알고 있군!"

"아무렴! 진정한 대화는 칼날이 부딪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지!"

...기대 이상으로 신이 난 분위기다. 그저 상대가 자신들의 전통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호감도가 팍 올라간 모양이었다. 역시 오크들이 괜히 단순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 틸라며 시리스가 혀를 찼다.

"...다, 단순해!"

"역시 오크네요."

그때였다. 스탈라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오크들 사이의 술렁거림이 싹 사라졌다. 그녀가 레펜하르트를 진지한 눈빛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침을 삼켰다. 아무리 오크들이 호응해 준다 해도, 눈앞의 이 오크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스탈라가 말했다.

"인간이 위대한 전통을 알고 있군."

"인연이 닿아서."

내심 초조해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문득 스탈라가 피식 웃었다.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레펜하르트."

턱을 쓰다듬더니 스탈라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레펜하르트, 다른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인간은 우리와 달리 검의 노래를 배신한다는 것을. 자신의 영혼이 담긴 검조차도 배신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젠장, 실패인가?'

그때 스탈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대는 축복의 언어를 알고, 우리의 전통을 알았다. 그런 이를 상대로 검을 나누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스탈라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강함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신뢰를 얻을 수는 없으리. 검에 실린 영혼의 울림이 그대들을 판가름할 것이다. 하겠는가?"

레펜하르트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명한 눈빛에 스탈라가 손을 높이 쳐들더니 고함을 터트렸다.

"푸른 곰 부족의 스탈라! 호투의 의식을 받아들이겠다!"

☆ ☆ ☆

"...이렇게 되어서, 다들 한바탕 싸워 줘야겠다. 미리 이야기 안 해서 미안."

호투의 의식에 대해 설명한 뒤 레펜하르트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일부러 감춘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오크들이랑 일찍 조우하게 될 줄 몰라서 미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랑 형님이야 당연히 나가서 싸워야겠지만...."

러스가 시리스와 틸라를 돌아보았다.

"시리스와 틸라도 싸워야 하는 겁니까? 인간도 아니고, 특히나 여성인데?"

"어차피 오크들 입장에선 똑같은 외지인일 뿐이니까. 같은 오크라 해도 싸워야 하는걸? 인간의 사고방식이랑은 좀 다르지. 게다가 오크들은 전투에 있어서 남성, 여성 구분 없어."

호투의 의식은 상대에게 전투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엘프인 시리스와 드워프인 틸라 역시 전사임을 자처하는 이상 예외가 될 수 없다. 즉, 오크들에게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으려면 결코 이 의식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도끼를 쥐며 틸라가 눈을 빛냈다.

"저 역시 스틸해머 일족을 대표하는 전사. 결투라면 환영이에요."

시리스도 시미터의 날을 매만지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표시다.

반면 실란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혹시 저도 싸워야 하는 거예요?"

뒤에서 보조하는 것에는 베테랑이지만, 일대일로 싸우라 하면 실란은 지나가던 민간인에게도 두들겨 맞을 것이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실란까지 내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넌 안 싸워도 돼."

"그럼 대우 제대로 못 받는다면서요?"

"넌 전사가 아니잖아. 이건 어디까지나 전사들 한정이라고."

안심한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사실은 아이라서 괜찮은 것이지만 그 말은 쏙 뺀 레펜하르트였다. 아무리 무식한 오크들이라도 실란 같은 어린애―적어도 외모 상으로는―까지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리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만큼 의식을 치르고 나서도 실란은 애 취급을 받겠지만....

'저 녀석은 어차피 애 취급 받고 있잖아? 본인은 모를 거야. 아마.'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레펜하르트는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순서를 정한 뒤 오크들 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준비되었소!"

오크들이 넓게 서서 자리를 만들었다. 중앙에 커다란 공터를 만든 뒤 오크들이 고함을 지르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음 속에서 스탈라가 선언했다.

"이방인들이여, 호투의 의식을 시작하겠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자, 나서라!"

미리 정한 순서대로, 시리스가 천천히 공터 한복판으로 걸어갔다. 스탈라가 시리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일족을 향해 소리쳤다.

"잘카토! 호투의 의식에 임하라!"

양손에 두 자루 검을 든 건장한 오크 전사 하나가 날쌔게 뛰어나오며 외쳤다.

"영광입니다, 대모님!"

두 눈을 번쩍이며 잘카토라 불린 오크 전사가 전신에 투기를 피워 올린다. 어지간한 오크 검투사를 능가하는 기세로 잘카토가 검을 허공에 교차하며 소리쳤다.

"나는 데라타의 아들로 아버지의 검을 물려받은 자, 잘카토! 그대를 상대할 이름이다!"

시리스는 멀뚱히 잘카토를 바라보았다. 뭔가 으르렁대는 걸 보니 오크어로 뭐라 한 모양인데 알아들을 재간이 없었다. 잘카토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언어로 바꿔 소리쳤다.

"나, 잘카토! 너랑 싸운다!"

유창하지 않지만 알아듣는 데는 지장 없는 공용어였다. 실란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어, 저 오크도 공용어 할 줄 아네...."

혼잣말이었는데, 용케도 멀리서 스탈라가 알아듣고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세상, 인간의 것. 오크도 공용어 알아야 한다. 전사들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몰락한 종족의 서글픈 면모였지만, 실란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헉! 그럼 오크 전사들은 다들 공용어가 가능하단 소리?"

저 무식해 보이는 오크들이 사실은 2개 국어가 가능한 인텔리였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시리스나 틸라도 자신의 종족 언어와 공용어, 두 가지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실란이 문득 깨달은 얼굴로 러스를 바라보았다.

"러스 씨, 혹시 공용어 말고 아는 언어 있어요?"

"어, 없지? 공용어만으로도 사는 데 불편함이 없는데...."

"사, 사실은 우리가 제일 무식한 것 아닐까요?"

"으음...."

두 인간 남정네가 자괴감에 빠져 있건 말건, 의식은 계속 진행된다. 잘카토를 보며 시리스 역시 시미터를 들고 자신을 소개했다.

"단하임 일족의 시리스 발렌시아입니다."

그녀는 일족의 이름, 세렌디 엘 아렐피아나를 쓰지 않고 레펜하르트에게 받은 이름을 댔다. 사소해 보이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레펜하르트에 대한 마음의 보답이었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더러 저런 섬세한 부분을 눈치채라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다.

'쳇....'

살짝 삐친 그녀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눈앞의 대적자를 향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검을 겨눈 시리스와 쌍검을 길게 늘어뜨린 오크 전사 잘카토가 서로를 노려보며 투기를 불태운다.

어느 순간.

두 전사가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4

"타아앗!"

"크아아아아!"

두 줄기 기합과 함께 시리스의 시미터와 두 자루 오크리시 소드가 검날을 마주했다. 칼날이 마찰하며 연이어 불똥을 피워 올렸다.

파지직!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금속음 속에서 시리스와 잘카토는 검을 마주한 채 둘 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칼날을 밀어붙이며 잘카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빈약한 몸에 어떻게 이런 힘이?"

놀랍게도 시리스는 오크 전사, 잘카토를 상대로 정면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시리스의 허리가 잘카토의 허벅지보다도 가늘다는 걸 감안하면 실로 상식 밖의 광경이라 하겠다.

물론 정말로 시리스가 잘카토와 맞먹는 완력을 지니고 있어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힘이 좋기는 한데... 그래 봤자....'

평소의 대련을 떠올리며 시리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 분명 잘카토는 오크 전사다운 괴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평소 대련하던 상대는 틸라와 레펜하르트였다. 강검强劍을 상대하는 수법 따윈 지겹도록 겪은 것이다. 아무리 강맹한 검력이 실린 일격이라 할지라도, 무릎과 허리의 탄력을 이용해 받아 흘리며 힘을 순차적으로 감소시킨다면 시리스의 완력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엘프 소녀와 오크 전사는 그렇게 검을 마주한 채 상대를 바라보았다.

잘카토가 힘으로 누르려 하면 그때마다 시리스가 시미터를 살짝 비틀어 공격점을 옆으로 흘린다. 역시 체중 차이가 있는 만큼, 잘카토의 근력은 시리스보다 훨씬 우위에 있지만 힘의 흐름이 엉뚱하게 새어 나가니 제대로 밀어붙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감탄을 터트리며 잘카토가 뒤로 풀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대단하다! 엘프 여자! 그대 진짜 전사군!"

물러서는 잘카토를 향해 시리스가 대뜸 공격을 감행했다. 시미터를 연거푸 휘두르며 사선 베기를 날린다. 은색의 칼날이 잘카토의 허리와 어깨를 동시에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잘카토 역시 노련한 전사였다. 순간 당황해 밀리면서도 그는 금방 자세를 가다듬고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탕! 타타탕!

차분하게 자세를 바로 잡은 잘카토가 다시금 양손을 어지러이 놀리기 시작했다.

쌍수로 든 검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요란하게 움직이며 반격을 시도한다. 좌검으로 날아드는 시리스의 검격을 튕겨 내며 동시에 우검으로 섬광 같은 찌르기를 날린다. 시리스가 찌르기를 피하는 순간, 방어를 담당했던 좌검이 공세로 변환해 재차 공격해 온다. 양손에 든 두 자루 검이 연환해 공격과 방어의 역할을 수시로 바꾸니 마치 두 명의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까다롭기 그지없다.

공방을 주고받으며 시리스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거 장난 아니네....'

엘븐하임의 노예 시절에도 어지간한 인간 기사들과 맞붙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 이름 높은 황금기사, 유서스 경이라도 검술만을 보면 그녀보다 뒤떨어졌다. 하물며 지금의 시리스는 레펜하르트와 러스, 두 명의 오러 유저와 항시 대련하며 더더욱 실력을 높인 후였다.

현재 그녀의 수준이라면 오러 유저가 아닌 한 거의 적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일개 오크 전사가 그녀와 동등한 기량을 무리 없이 선보이고 있다. 새삼 레펜하르트의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은 지상 최강의 전투 집단이다. 인간과 엘프, 드워프를 모두 포함한다 할지라도.

확실히, 저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이 모두 이 정도 기량을 지니고 있다면 지상 최강의 전투 집단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승패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둘 중 한 명에게 확연한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섬뜩한 예기를 발하는 시미터를 휘두르며 시리스가 눈을 빛냈다.

'확실히 저 자의 검술은 경지에 오른 것이지만....'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잘카토의 쌍검은 여전히 그 기세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엘프다운 그녀의 정교한 눈은 그 쌍검의 상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검이 실력을 따라가질 못 하나....'

수십 차례의 격돌로 인해 잘카토의 쌍검은 이미 이빨이 여기저기 빠져 있었다. 드워프 명장이 전력을 다해 벼리고 레펜하르트가 온갖 보조 마법을 건 시리스의 시미터와 달리, 잘카토의 쌍검은 그저 조악하게 만든 싸구려일 뿐이다.

'그렇다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시리스는 검을 휘둘러 상대의 공세를 흘렸다. 두 자루 검이 잠시 옆으로 새어 나간 틈을 타 그녀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이잇!"

시미터를 양손으로 굳게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전신의 탄력을 실은 내려치기!

전력을 싣다 보니 동작이 상당히 커지긴 했지만 시리스가 절묘하게 타이밍을 잡은 탓에 잘카토도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잘카토가 허겁지겁 쌍검을 머리 위로 교차해 방어에 나섰다.

"허억!"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가 노리던 것이었다. 목표는 잘카토가 아니라 그의 쌍검이었다. 무기 파괴를 노린 것이다.

"타아아앗!"

온몸을 내던진 강렬한 일격이 교차한 칼날을 향해 뇌전처럼 내려찍혔다. 그 순간, 잘카토가 어금니를 드러내며 기묘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스케반! 사타라!"

검이 울었다.

우우우!

쌍검의 칼날 위로 희뿌연 백색이 덮였다. 이가 빠질 대로 빠져 몽둥이나 다름없었던 잘카토의 애검, 스케반과 사타라가 빛을 발하며 방금 벼린 것처럼 무시무시한 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타앙!

울부짖은 두 자루 검은 시리스의 시미터를 무리 없이 감당해 냈다. 마치 철벽을 내려친 것 같은 육중한 감각에 시리스가 놀라며 공중제비를 넘어 거리를 벌렸다.

"이, 이건?"

빛을 발하는 쌍검을 양손에 쥐고 잘카토가 호탕하게 외쳤다.

"소용없다! 엘프 전사! 무기는 곧 나의 혼! 전사의 혼은 부러지지 않는다!"

시리스는 말문을 잃은 채 잘카토의 검들을 바라보았다. 백색의 빛을 발하는 검날이라니?

"설마 오러?"

하지만 시리스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확실히 오러는 아니었다. 일단 블레이드 오러라고 치기에는 그리 빛이 밝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레펜하르트의 외침이 들려왔다.

"당황하지 마, 시리스! 오크들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이다!"

☆ ☆ ☆

모든 오크들은 전사로 타고 태어난다.

그런 오크들에게 무기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스스로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자신이자, 피를 나눈 가족이나 아내보다도 더욱 가까운, 영혼이 이어진 맹우인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오크 전사는 검의 영혼과 소통할 수 있었다. 전사의 손에서 단련된 무기는 전사의 영혼을 나누어 받으며, 위대한 무기가 되어 그 영혼을 빛낸다는 것이 오크들의 믿음이다. 그리고 그 무기의 영혼을 이끌어 내 함께 싸우는 것이 바로 오크들 특유의 비전인 스피리츠 웨폰이었다.

이름을 불러 검의 영혼을 끌어내는 스피리츠 웨폰을 구사한다는 것은 오크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전사의 증명.

잘카토가 자랑스럽게 검을 들어 보이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날 꺾지 않으면 검도 꺾이지 않으리!"

실로 전사다운 호쾌함이 가득한 외침, 호투의 의식을 관전하던 오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오오오오!"

"크아아아아!"

한편 시리스는 인상을 쓴 채 잘카토를 살펴보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라며 레펜하르트가 조언을 던져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래서 저게 뭔데?'

달랑 이름만 알려 주면 어쩌라고? 좀 더 실용적인 설명을 해 줘야 할 것 아닌가?

레펜하르트도 아차 했는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냥 검이 엄청나게 단단하고 예리해진다고 보면 돼!"

사실은 숙련된 오크 전사의 경우 스피리츠 웨폰을 구사하는 훨씬 더 다양한 용법이 있지만, 거기까지 설명하자면 여기서 자리 깔고 강의를 해야 할 판이다.

"아...."

그리고 이 정도만으로도 시리스는 만족했다.

'그러니까 틸라 양의 대지 공명처럼 오크들 특유의 기술 같은 거라 이거지?'

퍼포먼스에 좀 놀라긴 했지만 듣고 보니 그렇게 대단한 기술은 아니었다.

'그냥 상대가 명검을 들었다고 치면 되는 거 아냐?'

뭐, 이름난 명검들 가격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경제적인 기술이라 하겠다만, 전투에 있어서 크게 좌우될 정도는 아닌 것이다. 틸라가 구사하는 근력 뻥튀기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지는 감이 있다.

안심한 시리스는 당황을 가라앉히고 재차 몸을 날렸다. 은백의 시미터가 화려한 검무를 추어 댔다.

"하압!"

"크오오오!

잘카토도 오크다운 고함을 내지르며 다시 검투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코 닿을 거리까지 근접한 순간, 시리스가 갑자기 몸을 최대한 낮추며 수면 차기를 날렸다. 당연히 검이 날아들 것이라 생각한 잘카토가 당황해 쌍검을 낮게 휘둘러 공격을 막으려 했다.

'걸렸어!'

눈을 빛내며 시리스가 무릎을 접어 걷어차던 발길질을 회수했다. 칼과 달리 발차기는 이렇게 중간에 접어 버릴 수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쌍검을 피해 낸 뒤 시리스는 곧바로 늘어뜨린 쌍검의 칼날 옆 부분을 강하게 밟았다.

"타앗!"

그렇게 쌍검의 움직임을 봉쇄하며 시리스가 몸을 날려 참격을 날렸다. 잘카토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밟힌 검에 연연하다간 목이 날아갈 판이다.

"큭!"

결국 잘카토는 검을 놓고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이겼다!'

시리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사가 무기를 손에서 놓았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패배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가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잘카토가 손을 뻗으며 오크어로 소리를 질렀다.

"나의 맹우여!"

그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두 자루 검이 제멋대로 붕 날아오르더니 시리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건 뭐야!'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분명 굴러다니고 있던 검들이 스스로 허공에 떠서 내리쳐지는 것이다. 화들짝 놀라며 시리스가 허겁지겁 시미터를 들어 두 검을 쳐 냈다.

타탕!

연거푸 금속음이 울리며 그녀의 시미터가 교차한 쌍검과 마주해 소음을 뿌려 댄다. 시리스는 허공의 검을 강하게 밀쳐 냈다. 튕겨 나간 검들이 두둥실 떠다니며 잘카토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아차 싶은 레펜하르트의 외침이 이어졌다.

"아, 맞다. 가끔 검이 지가 알아서 날아다니기도 해!"

아무리 냉정한 시리스라도 저 소리를 듣고 나니 열불이 뻗치지 않을 수 없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쏙 빼먹다니?

"인간아!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하도 기가 막혀 버럭 소리를 지른 뒤 시리스는 애써 숨을 골랐다. 잘카토가 허공에 뜬 두 자루 검을 재차 쥐며 감탄사를 건넸다.

"진짜 대단하다, 엘프 전사. 친구와 함께 싸워야 할 줄은 몰랐다."

냉정을 되찾은 시리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명색이 한 종족의 비전인데 무기 성능 올리는 정도로 끝날 리가 없지."

잘카토의 공격이 이어졌다. 연신 반격하며 시리스는 진땀을 흘렸다. 쌍검을 교묘히 휘두르는 그 수법은 아까와 같았지만, 그 사이사이 상식 밖의 기술이 이어지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다 말고 갑자기 허공에 놓아버리고 좌측을 공격하면 그사이 공중에 뜬 검이 그녀의 우측을 향해 날아드는 식이다.

"끄응...."

연거푸 뒤로 밀리며 시리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도 상대하기 힘든 잘카타였는데, 이젠 검 하나가 따로 놀며 엉뚱한 데로 날아오고 있으니 도무지 승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떠다니는 검 쪽은 움직임이 지극히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잘카토의 손에 들린 검이 예리한 궤도로 날아들며 급소를 노리는데 비해, 비검飛劍쪽은 문외한이 휘두르는 것처럼 기초적인 동작밖에 하질 못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승패가 갈렸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딱히 현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없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이대로 패배를 인정해야 하나?'

어차피 이 호투의 의식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잘카토로 하여금 전력을 다하게 만들었으니 이쯤에서 손 털어도 충분히 전사로 인정은 받겠지만....

'그래도 지는 건 싫어!'

시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겉으로는 냉정한 척 굴지만, 사실 그녀는 꽤나 호승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상대가 레펜하르트나 러스 같은 오러 유저라면 아예 경지가 다르니 패배해도 어쩔 수 없다 하겠지만, 기량 면에서 큰 차이도 없는데 종족적인 특성 때문에 패배하는 것은 너무 억울했다.

'가만, 종족 특성?'

문득 시리스의 눈이 빛났다. 상대, 잘카토는 오크 특유의 비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엘프들에겐 특유의 비전이 없는 건가?

아니었다.

"에잇!"

뭔가 떠오른 듯 그녀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시리스가 기합을 외치며 공중으로 높게 몸을 띄웠다. 엘프다운 도약력으로, 그녀의 신형이 잘카토의 머리 위를 한참 지나 하늘 높이 떠올랐다.

"으응?"

잘카토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상대의 움직임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잘 싸우다 말고 갑자기 웬 헛짓거리?'

상대보다 높은 위치를 점유하는 것은 분명 전투에 있어 유리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뭐든지 정도가 있는 법이다. 저렇게 높게 뛰어 봐야 허공에 발판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제 움직임만 제한될 뿐인 것이다. 전투의 무리에서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짓이다.

'이겼군.'

마음을 놓으며 잘카토는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 두 검을 움직여 허공으로 내던졌다.

"가라! 맹우여!"

그때였다. 갑자기 부드러운, 감미롭기까지 한 목소리가 잘카토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나의 친구 사라나, 우정의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요...."

노랫가락 같은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한 줄기 바람이 불어 허공에 응집된다. 대기의 흐름이 어지러이 얽히며 귀여운 소녀의 형상을 일구어 낸다.

관전하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람의 정령, 사라나?"

단하임 일족을 떠난 이래 시리스가 틈만 나면 정령술 수행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은 레펜하르트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마법을 가르칠 틈이 안 생겨 살짝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벌써 정령 구현이 가능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니힐렌의 조력이 있었다지만, 상당한 진도인데?'

소환된 바람의 정령, 사라나가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며 신비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불렀나요? 내 친구 세렌디...."

그렇게 막 우아하게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푹!

시리스가 정령의 머리를 짓밟아 버렸다!

"꽥!"

실로 인간미 넘치는 비명이 저 신비로운 바람의 정령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렇게 시리스는 사라나를 발판 삼아 허공에서 다시 몸을 날렸다. 떨어지는 궤도를 예측하고 검을 던졌던 잘카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어어?"

단숨에 잘카토의 등 뒤로 떨어진 시리스가 그의 목덜미에 검을 겨눴다.

"체크메이트!"

자칼토가 신음을 흘리며 패배를 인정했다. 스탈라가 손을 들어 올리며 우렁차게 외쳤다.

"이방인이 승리하였다!"

일행에게로 돌아오는 시리스를 향해 실란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괜찮아, 시리스? 혹시 다친 덴 없고?"

"멀쩡해요, 실란."

레펜하르트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수고했어, 시리스."

"네, 레펜하르트 님."

반겨 주는 동료들을 향해 시리스는 빙그레 웃었다. 틸라가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런데 그거 막 밟아도 돼요? 어째 삐친 것 같던데...."

틸라는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소환되자마자 봉변당한 바람의 정령, 사라나가 연신 뭔가를 구시렁대며 흐릿하게 사라지는 광경을.

"표정이 왕창 구겨진 게, 아무래도 좋은 감정 가진 것 같지는 않던데요?"

시리스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레펜하르트가 걱정 말라며 부연 설명을 붙였다.

"정령은 순수한 존재, 자연의 근원에 닿은 존재들이야. 인간들처럼 사소한 일을 일일이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거든."

즉, 어차피 다음에 소환될 때쯤엔 이번에 있었던 일은 싹 잊었을 것이라는 소리다. 러스가 입을 쩍 벌리며 중얼거렸다.

"...붕어 대가리냐?"

신비롭다는 정령에 대한 이미지가 대폭 감소하는 느낌이다.

어쨌거나 정령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시리스도 속으로는 내심 반성하고 있었다.

"에휴, 다음에는 이러지 말아야지...."

나직한 그녀의 혼잣말에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의 정령을 '밟아 가며'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놀리는 것이 바로 전생의 그녀가 가장 애용하는 전법이었다는 걸.

'나중에는 동시에 12개체를 소환해서 밟고 다니기도 했었지, 아마?'

정령을 저리 막 대하고도 7대 정령술을 몽땅 마스터한 걸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그랬다.

'하긴, 나중에는 바람의 정령들이 손으로 받쳐 주곤 했으니 별로 기분 나쁠 건 없었겠다.'

하도 밟히다 보니 나중엔 바람의 정령들도 알아서 두 손으로 그녀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지경까지 갔던 것이다. 그걸 보며 정령들이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은 틀린 속설이 아닐까 학술적인 고민을 한 적도 있다.

'하여튼 시리스 쟤도... 평소엔 엄청 예의 바른데 일단 친해지면 은근 막 대하는 구석이 있단 말이지.'

레펜하르트가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자 시리스가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흘긴다. 고개를 저으며 레펜하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스탈라가 다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호투의 의식, 두 번째 결투를 진행하겠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자, 나오라!"

오크어는 모르지만 다들 분위기만으로 스탈라가 뭐라 하는지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틸라가 자신의 배틀 액스를 움켜쥐며 웃었다.

"으차! 이번엔 제 차례네요."

☆ ☆ ☆

틸라는 아쉽게도 패배했다.

딱히 그녀의 기량이 모자라서는 아니었다. 틸라도 초반에는 오크 전사와 호각을 이루며 뛰어난 무위를 선보였다. 문제는 오크 전사가 스피리츠 웨폰을 구사하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틸라와 싸운 상대는 거대한 한 자루 해머를 다루고 있었는데, 주로 체술로써 상대를 압박하다가 틈이 보이면 그 거대한 해머로 필살의 일격을 날리는 수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 오크 전사가 해머에 깃든 혼을 끌어내기 시작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스스로 날아다니는 해머의 일격 사이로 오크 전사는 맨손 체술을 구사, 틸라를 정신없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적인 면이 뛰어난 시리스는 상대가 양방향에서 공세를 퍼부어도 감당할 만한 기량이 있었지만, 파워로 밀어붙여 상대가 기술을 발휘하기 전에 끝내는 방식인 틸라의 전법은 아무래도 상성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벌이는 호투의 의식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사투死鬪가 아닌 기량을 겨루는 결투 형식이라는 것도 불리한 부분이었다.

틸라는 스틸 해머 일족의 '유일한' 전사다. 주위에 검을 겨룰 다른 동료 없이 항상 홀로 무술을 수련해 왔다는 소리다.

레펜하르트를 만난 이후 시리스와 많은 대련을 겪고, 또 그랜드 포지에서 다른 드워프 전사와 겨루며 상당히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그녀는 자신이 휘두른 공세를 완벽하게 제어하질 못하는 수준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상대가 죽을까 봐 전력으로 도끼를 휘두르지 못한 것이다. 50년 넘게 이놈저놈 다 상대해 본 시리스야 전력으로 휘두른 검을 급소 앞에서 딱 멈추는 짓이 가능했지만, 안 그래도 기량에 비해 완력이 월등히 높은 틸라에게는 흉내도 못 낼 묘기였다.

그래서 틸라는 언제든 공격을 멈출 수 있게, 전력의 절반 정도로만 도끼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대지 공명의 힘도 구사하지 못했다. 지금 힘도 제대로 제어 못 하는 판에 그걸 열 배로 늘려 봤자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명색이 친분을 쌓으러 온 주제에 상대를 두 동강 낼 수도 없고....

뭐, 사실 오크들은 동족이 두 동강 나도 그것이 '정정당당한' 결투에 의한 결과라면 오히려 기뻐했을 것이다. 애당초 그런 작자들이니까.

하지만 틸라야 그것까진 모르고 있었고, 설사 안다 해도 그럴 성품이 아니었기에 결국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제가... 졌습니다...."

상대한 오크 전사가 해머를 거두고 승리의 포효를 터트렸다. 스탈라가 손을 들어 푸른 곰 부족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리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틸라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워프 여인이여, 그대는 전사로서 뛰어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구나. 전력을 다하지 않음은 상대에 대한 무례이나, 그것이 그대의 의도가 아님을 읽을 수 있었다."

예리한 안목을 지닌 스탈라는 이미 틸라가 왜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지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스탈라가 엄격한 목소리로 꾸짖듯 말을 이었다.

"생명을 앗는 싸움이 아니니, 스스로의 기량을 파악하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손을 쓴 그 태도는 분명 전사의 도리다. 하나, 드워프 여인이여. 그대는 상대의 기량을 파악할 만큼의 안목은 아직 없는 것 같구나. 설사 전력을 다했다 해도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는 그대의 안목이 부족함이니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엄숙한 스탈라의 발언에 틸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 숙였다. 그리고 터덜터덜 일행에게로 돌아와 물었다.

"...뭐래요?"

순간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라가 참 좋은 말씀 해 주기는 했는데, 문제는 오크어로 했다는 점이다. 틸라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있나?

레펜하르트가 대충 요약했다.

"주제 파악한 건 좋은데, 주제 파악할 필요 없었대."

"...에?"

너무 요약한 모양이다. 틸라가 연식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니. 하지만 더 설명하기도 귀찮아 레펜하르트는 대충 손사래를 쳤다.

"뭐, 어쨌거나 인정은 받았으니까 된 거야."

어쨌거나, 비록 패배했다 해도 틸라의 강렬한 일격은 오크 전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들 그녀를 신뢰할 수 있는 뛰어난 전사로 인정하고 환호를 터트려 주었다.

레펜하르트가 이번엔 러스의 등을 툭 치며 앞으로 밀었다.

"자, 이제 네 차례다. 살기는 피우지 마."

"예, 예."

고개를 끄덕이며 러스가 공터로 나섰다. 검을 뽑아 들며 그가 호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테네스의 검을 이은 자, 사이러스 폰 테네스! 전사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이 자리에 섰소!"

기사다운 호방함이 가득한 러스의 모습에 오크들은 환호했고 레펜하르트 일행은 오글거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탈라도 별수 없는 오크인지라 그런 러스의 태도가 심히 마음에 들었는지 호의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처럼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고 걸맞은 전사를 내보내기 위해 스탈라가 러스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번에는 자신을 지목해 달라며 오크 전사들이 목을 빼고 그녀의 지명을 기다린다. 그러던 중, 문득 스탈라의 안색이 굳었다.

가만히 서 있는 러스를 보며 그녀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카루가!"

투사鬪士라는 의미의 오크어였다. 갑자기 스탈라가 왼손을 옆으로 주욱 뻗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던 오크 전사들이 움찔하며 그들의 대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들 놀랐다.

언제나 침착하던 스탈라의 눈동자가 붉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전투를 기대하는 흥분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자는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스탈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크 전사들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예?"

"대모님이 어째서 직접?"

스탈라가 후드를 걷고 얼굴을 드러내며 야수처럼 미소 지었다.

"이자는 투사Karuga다! 위대한 투혼Debata의 축복을 받은 자!"

제16장 영혼의 형제

1

투혼의 축복을 받은 자, 카루가.

이는 오러를 각성한 전사를 칭하는 오크 특유의 표현이다.

스피리츠 웨폰, 무기의 혼을 끌어내는 수준에 다다른 오크들은 전사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리고 그 전사들 중에서도 월등하게 뛰어나 오러를 각성한 이는 투사, 카루가라 불리며 전사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고대에는 모든 투사들의 인정을 받아 오크 부족 전체를 지배하는 대투사, 타이카루가라는 직위도 있었다지만 각 부족 대부분이 오지에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현 시대에선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일 뿐. 즉 투사의 칭호는 현 시대의 오크들에게 가장 위대한 전사를 칭하는 표현인 것이다.

스탈라 랑가르 베타.

그녀는 푸른 곰 부족에서도 두 명밖에 없는 투사의 칭호를 지닌 이였다. 모든 오크들의 존경과 경애를 받고 있는 최강의 무인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인간을 투사라 칭하다니? 오크 전사들이 다들 경외 어린 시선으로 러스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루가!"

"카루가 클타 차세르!"

오크어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러스는 오크들이 자신에게 상당한 경의를 보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자신이 겸손한 성격은 아니란 걸 알지만....

'아니, 나 정도로 놀라면 나중에 형님 보고는 어쩌려고?'

후드를 걷은 스탈라가 공터로 걸어 나온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러스는 잠시 당황했다.

'어, 여성이었나?'

위압감이 대단했기에 당연히 스탈라가 남자라고만 생각했던 러스에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비록 시리스나 틸라와 함께 다니며 그녀들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는 그였지만, 아무래도 기사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여성은 보호해야 할 약한 존재란 인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거, 여자를 상대로 검을 휘둘러야 하나?'

난처해하며 러스가 마지못해 검을 뽑을 때였다. 가까이 다가온 스탈라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던졌다!

휘리릭!

스탈라의 전신이 황야의 햇살 아래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러스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여성?'

뭔가 이상했다.

아니. 분명 여자는 여잔데... 저 우락부락한 이두박근과 삼두근, 대퇴근이 참 사람 섬뜩하게 만든다. 아니, 자고로 체지방은 골고루 빠져야 정상이거늘 저 오크 여인은 어떻게 배에는 선명한 식스팩 복근을 새겨 놓고도 저리 풍만한 가슴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오크족의 특성인가 싶어 다른 오크들도 힐끔거렸는데, 전사 중에도 간간히 민둥민둥한 복부가 보이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기가 막혀하는 러스를 향해 스탈라가 자신의 애병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무기는 길이 40센티미터 정도의 두 자루 단검이었다. 대부분의 오크들이 '무기는 자고로 커야 아름다운 법!'이라 여기는 풍습이 있는데 그녀는 독특하게도 단병을 애용하고 있었다.

두 자루 단검을 쥐고 자세를 잡은 뒤 스탈라가 공용어로 고함을 질렀다.

"푸른 곰 일족의 어미, 투사 스탈라! 너와 싸운다!"

☆ ☆ ☆

우우웅!

굉음과 함께 러스의 롱 소드가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가장 순수한 파괴의 빛, 블레이드 오러가 황야의 대지 위로 그 찬란한 자태를 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텔라의 쌍수 단검 역시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냈다. 청보랏빛 오러가 단검의 날을 감싸고 눈부시게 백열한다.

웅웅웅웅!

투기가 피어오르며 러스와 스텔라 사이의 대기를 달구기 시작했다. 투기의 흐름이 공기를 찢고 희미한 소음을 일으킨다. 러스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저 자세를 잡고 서로를 노려볼 뿐인데....

'강하다!'

스탈라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소리 없이 흘러와 그의 전신을 얽맨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전신이 위험 경보를 계속 울린다. 더 이상 상대가 여성이니 오크니 하는 것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눈앞의 저 오크 여인은, 레펜하르트 이후 처음 만나는 엄청난 강자였다!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 오러 유저들보다도 더한 기운이다!

'기세에서 더 밀릴 수는 없지!'

러스의 검 끝이 살짝 흔들린다. 스탈라의 두 자루 단검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타아아앗!"

기합을 길게 늘어뜨리며 러스가 선공에 나섰다. 4미터의 거리를 격한 채 그가 검을 길게 휘둘렀다. 청색의 오러가 채찍처럼 늘어나며 스탈라의 다리를 후려갈겼다.

"하핫!"

웃음을 터트리며 스탈라가 땅을 박찼다.

콰앙!

폭음이 울리며 박찬 부분에서 흙먼지가 폭발같이 일어 올랐다. 무시무시한 다리 힘으로 땅을 박찬 스탈라가 곧바로 러스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청보라색 오러를 머금은 두 자루 단검이 러스의 시야를 어지럽게 뛰어논다.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스탈라는 단숨에 러스의 전신 급소를 정신없이 찔러 댔다. 반격 대신 러스는 몸을 비틀어 치명상을 피하며 오히려 스탈라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저 수많은 공격을 일일이 쳐 내느니, 차라리 화끈한 일격을 가해 스스로 물러서게 만드는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랄까?

"오? 그대 영리하다!"

날아오는 공격을 무시하고 오히려 반격하는 짓은 어지간히 노련한 전사가 아니면 실행하기 힘든 짓이다. 감탄하며 스탈라는 재빨리 공격을 거두고 단검을 교차해 가슴을 지켜 냈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와 두 줄기 청보라색 오러가 허공에서 교차해 강렬한 파문을 터트렸다.

쩌엉!

뇌성이 울리며 일어난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땅거죽을 파헤치고 대기를 달구었다. 연달아 칼날이 맞붙으며 연신 파동을 퍼트렸다. 강렬한 파괴의 잔재가 애꿎은 황야의 대지를 열심히 갈아엎기 시작했다.

"타아앗!"

"크라라라!"

스탈라와 러스는 그렇게 수십 차례의 검격을 교환하며 맹렬히 싸워 댔다. 기량이나 오러의 위력은 스탈라가 확실히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재능만큼은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는 러스였다. 모자란 경험이나 기량을 오로지 본능만으로 커버하며 러스는 놀랍게도 스탈라와 평수를 이루는 위업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하는 스탈라의 얼굴에 점점 더 감탄의 빛이 짙어졌다.

'참 신기하기도 하네. 어떻게 저기서 저런 공격을 하지?'

러스의 검은 실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분명 등을 돌렸는데 갑자기 좌측에서 검이 날아오는가 하면, 분명 내려 베기였는데 예기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예의 그 '러스 특유의 자유로운 공격'이었다. 무술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검격이 그녀의 예상 범위 밖에서 계속 치고 들어와 승세를 유지하면서도 정작 결정타를 먹일 수가 없었다.

하여튼 신 나는 싸움이었다. 투혼의 축복을 받은 이래 이 정도로 손맛이 오는 상대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흥이 오른 스탈라가 입을 열어 러스를 향해 찬사를 내뱉었다.

"재능이 대단하구나, 젊은이! 하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군!"

떠들고 나서야 상대가 오크어를 모른다는 것이 떠올랐다. 스탈라는 공세를 피하며 공용어로 다시 외쳤다.

"너 잘났다! 하지만 난 늙었다!"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았다. 스탈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끙, 저 말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어쩔 수 없다. 아무리 현명한 스탈라라 한들 어쩔 수 없이 오크는 오크다. 제 아무리 머릿속에 현자의 언어가 가득하다 한들 오크의 혀와 성대로는 단순한 공용어밖에 나오질 않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역시 러스는 어리둥절해할 뿐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스탈라가 말을 이었다.

"칭찬이다!"

"...?"

"됐다! 그냥 싸우자!"

스탈라의 단검이 화려하게 춤을 췄다. 러스의 롱 소드도 그에 맞춰 부드러운 궤도로 흐르듯 움직인다. 검과 검이 손잡은 화려한 연무, 그렇게 둘은 이 황야의 무도회장에서 칼날의 춤을 추며 한껏 어우러졌다.

얼마나 정신없이 싸웠을까? 둘 다 슬슬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수없이 검격을 교환했지만 정작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진 못했다. 애꿎은 황야만 봄철 보리밭처럼 신 나게 갈아엎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밑천을 좀 꺼내야 쓰겠는데?'

갑자기 스탈라가 양손의 단검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리고 소리쳤다.

"세테아! 란다트!"

애병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는 단검의 혼을 일깨웠다. 청보라색 오러가 순수한 보랏빛으로 변하며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 상태로 스탈라가 양 손바닥을 펼쳐 수도의 형태를 취했다.

우우웅!

양손에서 오러의 칼날이 일어나 길게 뻗어졌다. 그녀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가자, 나의 자매여!"

보랏빛 단검들이 허공을 비행하며 러스의 좌우로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 ☆ ☆

두 자루 단검이 섬뜩한 기운이 담아 좌우로 날아온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파괴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러스는 검을 고쳐 쥐며 안색을 굳혔다.

'저게 형님이 말한 그거군.'

이미 시리스와 틸라를 통해 본 수법이지만, 그래도 직접 마주하니 당황스러웠다.

오러 유저가 된 이래 어지간한 건 척 보면 요령을 파악할 수 있었던 그다. 드워프들의 수법, 대지 공명도 신체가 달라 따라 하질 못할 뿐이지 방식 자체는 파악한 지 오래다.

그런데 저 수법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거참....'

러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검을 허공에 띄워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는 건 오러 유저에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검에 오러를 덧씌운 뒤 의지력으로 움직이면 되는 문제니까.

문제는 그래 봤자 딱히 쓸 데가 없다는 점이었다. 허공에 뜬 검 조종하느라 정신 팔리다 칼침 밖에 더 맞겠나? 원거리 공격이 필요하면 그냥 오러를 날리면 된다. 굳이 칼을 던질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저 수법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오러 유저인 러스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스탈라와 단검 사이엔 어떠한 기운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스탈라가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단검들이 저 혼자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정신 팔릴 일도 전혀 없을 터.

'역시 형님 말씀대로 오러와는 전혀 상관없는 건가?'

오러 영역권을 넓혀 단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러스는 눈을 부라렸다. 방금 전 레펜하르트의 설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크들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은 검과 소통해 그 혼을 일깨우는 수법이라고 한다. 뭐, 저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거지, 실제로 내가 연구해 본 바론 좀 달랐지만.

틸라가 싸우는 시간 동안 레펜하르트는 시간을 들여 러스에게 오크들의 비전에 대해 아는 대로 자세히 알려 주었다. 시리스 때의 실수를 또 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틸라야 상황이 급해 그냥 내보냈지만 다음 차례인 러스는 시간이 제법 있었으니까.

오크들의 믿음과 달리 단순한 도구일 뿐인 무기에 정말 영혼이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오크 전사들이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하면 정말로 무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인다. 이 비합리적인 현상을 마법사인 레펜하르트가 연구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안타레스 제국 황제이던 시절 그는 타시드며 다른 오크 전사들을 연구하며 그들의 비전에 대해서도 상당히 파악한 바가 있었다.

-정확히는 검의 영혼이 아니라, 오랫동안 애용해 온 무기에 오크 전사 자신의 사념이 깃드는 거야. 장시간 자신의 의식을 투영해 잔존 사념을 남기고, 그 사념력이 무기를 일종의 반 정보체로 만드는 거지. 마법으로 비유하면 인공 지능 상태라고 해야 하려나? 뭐, 마법사의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단순한 상태지만.

이성을 지닌 존재가 강렬한 감정이나 의식을 동반하면 세상의 흐름에 자취를 남긴다. 그것이 잔존 사념.

-오크들은 세상의 종족들 중에서도 단순하기로 이름 높은 이들, 단순한 만큼 그들의 사고는 강렬하지. 그들이 자신의 무기를 애지중지하는 행위가 곧 무기에 잔존 사념을 싣는 행위가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저 스피리츠 웨폰이다. 저 능력을 응용해서 자신의 사념을 투영해 짐승을 길들이거나 하는 짓도 가능하더군. 다이어울프 같은 사나운 맹수를 오크들이 길들일 수 있는 것이 그런 이유지.

오크들의 진정한 종족 특성은 단순히 무기를 날아다니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물체에 깃든 자신의 사념력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연구 끝에 오크들의 진정한 힘을 깨달은 레펜하르트는 전율했다. 즉, 오크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만 한다면 그저 생각만으로도 사물을 움직이거나 타인을 정신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에.

그래서 안타레스 제국 시절, 레펜하르트는 한때 수하 오크들을 모아서 자신의 이론을 가르치고 의식적으로 사념력을 발동시키는 훈련을 하기도 했었다. 잘만 하면 엄청난 무기가 오크들에게 주어질 거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오크들의 사념은 분명 물리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위력이 너무 미미했다. 오랜 기간, 올곧게 정신을 집중해야 간신히 그 사념력이 현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즉, 잔존 사념이라는 형태가 될 때까지 사념력을 집중해야만 비로소 물리적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집착에 가까운 애정, 진정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 아니면 잔존 사념은 남지 않는다. 그걸 깨닫고 아쉬워하며 결국 실험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전생의 이야기를 러스에게 할 수는 없는 법, 그 부분은 쏙 빼고 레펜하르트는 실용적인 부분만 설명해 주었다.

-무기에 깃든 사념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무기는 진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인다. 아마도 오러 유저 정도 되면 거의 분신이라고 봐도 좋다. 잔존 사념에 담긴 본인의 정보가 많을수록 본인의 기술이나 경험 역시 많이 남아 있으니까.

날아드는 단검의 움직임을 느끼며 러스는 내심 혀를 찼다.

'과연, 아까까지의 오크들과는 움직임의 차원이 다르군.'

오러가 깃든 두 자루 단검은 춤추듯 허공을 유영하며 러스의 빈틈을 교묘하게 노리고 있었다. 공격 하나하나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하고 섬세했다. 같은 쌍검이라지만 잘카토가 선보였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정말로 보이지 않는 두 명의 스탈라가 더 있어 합공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으, 진짜 까다롭네.'

이를 악물며 러스는 연신 공격을 피해 댔다. 반격할 여력은 없었다. 단검을 날린 스탈라 역시 가만히 서 있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양손에 오러를 가득 머금고 계속 위력적인 수도를 휘두르는데, 그것만으로도 땅이 파이고 대기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콰콰콰쾅!

단검과 스탈라가 동시에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뻗어 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각도, 러스는 이번에도 방어 대신 오히려 길게 칼을 찔러 넣었다.

"타아앗!"

아까처럼, 공격을 일일이 막아 내는 대신 오히려 마주 칼을 날려 상대를 물러나게 하는 수법이었다. 역시나 스탈라도 공격을 거두고 수도를 교차해 방어 태세를 갖추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결과는 조금 전과 달랐다.

스탈라는 물러섰지만 그녀의 단검, 세테아와 란다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파앗!

섬뜩한 소음과 함께 한 줄기 섬광이 러스의 어깨를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신음을 흘리며 러스가 오른팔을 늘어트렸다.

뚝! 투둑!

오른팔을 타고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최대한 몸을 틀어 좌측, 세테아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지만 역시 우측 단검, 란다트의 오러까지 피할 겨를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잘리진 않았지만 힘줄을 당했는지 팔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으윽...."

왼손만으로 검을 든 채 고통을 억누르는 러스를 보며 스탈라가 호탕한 외침을 토했다.

"나의 승리다!"

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대의 실력이 그보다 위인 것은 이미 인정한 지 오래다. 경험, 기량, 오러의 위력. 모든 점에서 러스는 아직 스탈라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기는 역시 아쉬웠다.

그는 아직 모든 것을 보여 주지 못했다!

갑자기 러스가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아직은 아니오!"

퍼엉!

러스의 발밑이 폭발했다. 몸을 날리는 기세가 지나쳐 땅이 움푹 파인 것이다. 그 상태로 돌진한 러스가 왼손에 쥔 롱 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채 스탈라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며 이를 악문다.

'아직 실전에서 쓸 만큼 숙달되진 않았지만....'

그랜드 포지에서 갑자기 닥쳐 온 깨달음, 일주일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그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 덕에 작은 것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상대가 오크라는 것 따윈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스탈라는 분명 그가 존경할 만한 위대한 검사였다. 그런 검사에게 뭔가 보여 주고 싶었다.

검을 내리치며 러스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제발 성공해라!'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팬텀 디바이드!"

칼날의 꽃이 화려하게 만개했다. 수십 개의 참격이 스탈라의 시야를 가득 메우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 ☆ ☆

시야 가득 칼날의 폭풍이 불어닥친다. 푸르디푸른 오러가 수십 개의 참격에 깃들어 사방에서 쏟아져 온다.

하지만 스탈라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뭐지?'

겉보기에는 엄청나게 화려한 기술이겠지만, 그래 봤자 결국은 칼질 좀 많이 하는 것뿐이다. 보통 전사들에게야 저런 어지러운 환검幻劍이 효과가 있겠지만 그녀는 오러 능력자였다. 저 무수한 참격 중 어느 것이 실체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기척이 느껴지는 것은 세 개뿐. 나머지는 속임수군.'

오러 능력자에게 저렇게 덤벼 봤자 결과는 팔다리 날아가고 바닥을 뒹굴 뿐이다. 상대도 오러 유저이니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아무래도 마지막 힘을 폭발해 생사를 도외시한 최후의 공격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인간 무인이 보았다면 어리석은 자살행위라며 비난해 마지않았을 것이지만....

"젊은 총각이 싹수가 있구먼!"

오크인 스탈라는 오히려 좋아하고 있었다.

'암, 자고로 검 든 놈이 그까짓 팔다리 한두 개에 연연해서야 쓰나?'

흡족해하며 스탈라는 마주 돌진해 불어오는 칼날의 폭풍 사이로 뛰어들었다. 속임수에 불과한 참격 대부분을 무시하며 그녀는 오러 깃든 수도로 진짜 공격을 쳐 냈다. 그녀의 단검들도 남은 두 개의 검격을 허공에서 막아 냈다.

콰콰쾅!

오러와 오러가 맞부딪쳐 폭음이 울렸다. 그렇게 러스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낸 뒤 스탈라는 남은 한 손으로 길게 블레이드 오러를 뻗어 냈다. 목표는 허벅지, 상대를 죽이지는 않되 확실하게 상처를 입혀 승부를 가릴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막 오러의 수도를 휘두르려던 차였다.

번쩍!

섬광이 번뜩이며 순간 옆구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분명 자신의 수도에 가로막혀 있을 러스의 롱 소드가 어느새 좌측에 위치해 그녀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크억?"

신음을 흘리며 스탈라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분명 이쪽으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니, 이건 대체?"

"어, 오러를 응용하면 저런 것도 할 수 있구나."

관전하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조금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같은 오러 유저인 그는 지금 러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내 알아챌 수 있었다.

스탈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러를 끌어내 옆구리를 지혈하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척과 실체를 분리하는 기술인가?"

지금 러스는 오러와 실검을 섞은 뒤, 오러로 자신의 기척을 가장해 실체를 숨겨 참격을 날린 것이다.

그 절묘한 오러 운용 방식에 스탈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런 짓거리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센스를 타고 나야 가능한 수법. 실제로 레펜하르트와 스탈라도, 뭔지는 알아보았을지언정 따라 할 수는 없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정작 러스는 그리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검을 쥔 채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쳇, 실패인가...."

구경하고 있던 오크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칼 잘 먹여 놓고 뭐가 실패라는 것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하지만 스탈라는 이해한 표정이었다.

"제법 쓸 만한 공격이었지만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스탈라는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러스의 저 수법의 약점을 알아챌 수 있었다. 기술을 따라 할 수는 없지만 그 기술을 파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냥 기척을 무시하고 실체가 가르는 공기의 물리적 진동에 감각을 집중하면 되는 문제다.

즉, 러스의 이번 공격이 스탈라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한 이상 저 수법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러스가 실패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간다.

"자, 그럼 젊은이에게 한 수 가르쳐 주지!"

자세를 취하며 스탈라가 의기양양하게 몸을 던졌다. 그리고 단검과 연계하며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냈다. 러스도 재차 검을 들고 반격에 나섰다.

"팬텀 디바이드!"

또다시 무수한 참격이 비처럼 쏟아진다. 하지만 이번엔 스탈라도, 그녀의 사념이 깃든 두 단검도 기척을 무시하고 대기의 진동을 인식해 반격에 나섰다. 눈부신 블레이드 오러가 허상을 연달아 베어 내며 러스의 실체를 향해 매섭게 검을 찔러 간다!

"타아앗!"

순간 러스가 기합을 터트리며 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검의 환영이 그녀의 허벅지를 노리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그것은 기척일 뿐이다.

목을 노리는 진짜 참격을 인식하며 스탈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확실히 실체다! 대기의 흐름이 그것을 증명한다!

"헙!"

고함과 함께 당당히 수도로 검을 막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러스의 롱 소드가 딱 1미터 아래로 이동하며 그녀의 허벅지를 베어 갔다!

"크윽!"

스탈라는 인상을 구기며 뒤로 물러섰다. 러스가 혀를 찼다. 너무 얕았다. 고작해야 거죽만 베었을 뿐이니 그녀의 전투력에는 거의 지장이 없으리라.

하지만 스탈라는 입은 상처 이상으로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베였다.

그것도 이번엔 기척에 베였다.

아니다. 정확히는 갑자기 공간이라도 이동한 것처럼 실체와 기척의 공격이 서로 위치를 바꾼 것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도, 러스가 희열에 차 중얼거렸다.

"서, 성공했어!"

오크들의 표정이 더더욱 기묘해졌다. 아까는 제대로 칼침 놔 놓고 실패라더니, 이번엔 슬쩍 스쳐 놓고 성공했다고 좋아한다.

'대체 왜 저래?'

반면 러스의 수법을 알아볼 안목이 있는 스탈라는 경악한 얼굴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대단... 하다... 이건 대체?"

"헤에...."

러스와 스탈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감탄을 흘렸다.

지금 러스가 한 짓은 그 역시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저것은 그가 익히고 배워 온 무예와 전혀 궤를 달리 하는 부분이라, 비록 레펜하르트가 러스보다 더 강한 오러 능력자라 한들 알아볼 수 있는 수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뭔 짓을 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스탈라의 착각과 달리 러스는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해 실패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첫 번째 팬텀 디바이드는 기술 시전을 '실패'했던 것이다. 기척과 실체가 분리되는 그 효용은 그저 실패한 기술의 부산물일 뿐이다.

성공한 팬텀 디바이드는 단순히 그 정도 기술이 아니었다.

'벌써 허공검에 대한 감을 잡은 건가? 진짜 천재는 천재네.'

지금 러스가 한 짓이야말로 전생에서 타시드를 그토록 괴롭혔던 검성 사이러스의 절기, 허공검虛空劍의 초입이라 할 수 있었다.

대륙의 모든 무예를 벗어나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어 낸 최강의 검사, 검성 사이러스.

그의 검은 공간을 넘나들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몇 미터에 불과한 협소한 범위에서만 가능한 기술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위업은 모든 무인과 마법사들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현 시대의 어떤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3대 요소.

시간과 물질, 그리고 공간.

오러를 극한으로 연마한 그는 결국 검 한 자루로 세상의 법칙을 타파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대마법사인 레펜하르트도, 심지어 사이러스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냥 감각적인 부분이라 이론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덕분에 사이러스의 수많은 제자들도 허공검만큼은 수련은커녕 감조차 못 잡고 포기했었다.

'저걸 다시 보니 참 기분 묘하네.'

레펜하르트는 씁쓸해하며 뺨을 긁었다. 전생의 타시드가 저 허공검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었는지 익히 봐 온 그였다. 칼날이 공간을 뛰어넘어 베어 오는데 피하거나 막거나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크다운 강건한 육체가 아니었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시드 놈은 결국 막아 냈지만.'

저 수법에 대한 타시드의 대응책은 실로 오크다운 것이었다.

'그냥 감으로 때웠지, 아마?'

허공검 자체야 대뜸 나타나는 식이니 도저히 예측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 검을 휘두르는 사이러스는 명백하게 인간인 것이다.

타시드가 한 짓은 검이 아닌, 그걸 휘두르는 사이러스의 생각을 예상하고 막아 내는 방식이었다. 좋게 말해서 예측이지, 진실은 '하도 자주 상대하다 보니 본능적으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감이 와서.'라는 쪽이 옳다.

하여튼 지금 하는 걸 보니 러스는 저 젊은 나이에 벌써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 단초를 잡은 모양이었다.

'그랜드 포지에서 며칠 틀어박혀 있더니, 결국 저걸 건져 온 모양이군.'

턱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는 상념을 거뒀다. 러스가 저런 모습을 보인 이상, 스탈라도 이제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 레펜하르트는 공터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긴장된 분위기가 황야의 하늘 위로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탈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러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상대의 체력이며 오러의 양이 확 떨어진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역시 방금의 그 기술로 힘을 상당히 소모한 모양이었다. 오른팔을 당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지친 듯 보인다.

'슬슬 끝을 봐야겠군.'

아쉽지만, 스탈라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러스는 충분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스탈라는 러스 말고도 한 사람을 더 상대해야 하는 몸이었다.

'저 덩치 큰 인간 역시 투혼의 축복을 받은 자....'

이쪽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스탈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오러 유저뿐이다. 지금 이 자리의 오크 전사 중 오러 유저는 스탈라 자신뿐, 러스와 싸우고 연이어 레펜하르트를 상대하려면 힘을 비축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스탈라가 손을 뻗었다. 허공의 두 자루 단검이 그녀의 손아귀로 날아와 잡혔다. 러스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스피리츠 웨폰을 거두다니?

스탈라가 어금니를 한껏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재밌었다! 이제 끝을 보자!"

러스도 움직이는 왼손을 들어 재차 자세를 갖추었다. 지금 그의 상태로 선공은 무리였다. 남은 체력으로 가능한 것은 상대의 공세에 맞춰 카운터를 날리는 것뿐.

'한 번 더 팬텀 디바이드를 발동할 수 있을까?'

체력도 한계에 달했고, 게다가 이 팬텀 디바이드는 그리 성공률이 높은 기술이 아니었다. 그토록 연습했지만 아직도 열 번에 한 번 성공할까 말까였다. 그나마 방금, 두 번 중 한 번이나마 성공한 것도 사실 행운의 여신의 축복이라 할 정도다.

'에이, 지면 지는 거지.'

러스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어차피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오크 투사, 스탈라의 감탄도 끌어냈다. 할 만큼 했으니 딱히 더 욕심날 것도 없다.

검을 겨눈 채 러스가 마지막 투기를 끌어 올렸다. 아무리 패배를 각오했다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져 줄 생각은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를 뿐!

스탈라도 투기를 끌어 올렸다. 어찌나 강렬한 기운인지 그녀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처럼 대기가 일그러지고 있다. 그렇게 두 오러 유저는 서로를 보며 최후의 일격을 가할 틈을 노렸다.

"하압!"

먼저 몸을 날린 것은 역시 스탈라였다. 스탈라가 단검을 든 두 팔을 등 뒤로 길게 늘어트리며 새처럼 돌진했다. 러스가 카운터를 노리려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갑자기 스탈라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고함을 내질렀다.

"나의 열두 자매여!"

스탈라의 품 안에서 열 자루의 단검이 더 튀어나왔다! 미리 들고 있던 두 자루 단검을 합쳐 모두 열두 자루, 그 모든 단검이 화살처럼 일제히 쏘아졌다.

휘이이이익!

바람을 찢는 열 두 개의 굉음 속에서 러스는 경악했다.

"뭐, 뭐야?"

입이 쩍 벌어졌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러스도 이번만큼은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섬뜩한 기세를 담고 날아오는 열두 자루의 단검, 그 모두가 칼날에 보랏빛 오러를 여실히 담고 넘실거리고 있었다. 날아오는 궤적도 채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교하다.

눈앞 가득 다가오는 열두 파괴의 빛, 러스는 카운터를 포기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본능이 그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대책 없다.

이건 전혀 대책이 없다.

러스는 재빨리 검을 놓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나의 패배요!"

2

황야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연이은 사투로 어느덧 해가 저무는 것이다. 석양을 등진 채 스탈라가 당당히 선언했다.

"호투의 의식, 세 번째 결투는 푸른 곰 부족의 승리다!"

그리고 곧바로 러스를 향해 소리쳤다.

"인간 투사여! 내 비록 승리했으나 그대의 패배가 강함을 가리지는 못하였으니, 그대는 진정한 전사이며 투사로 인정하겠다!"

"오오오오!"

"와아아아아!"

오크 전사들이 흥분한 고함을 터트렸다. 그 환호 속에는 스탈라뿐만 아니라 러스에게 보내는 환성 역시 섞여 있었다. 저 이방인은 무려 푸른 곰 부족의 투사와 저만큼이나 겨루어 자신을 증명한 것이다. 저런 자를 전사라 칭하지 않으면 누가 전사라 자처할 수 있겠는가?

"사이러스 카루가!"

"카루가 사이러스!"

러스의 이름을 환호하며 오크들은 주먹을 흔들어 댔다. 비록 패했지만 미련이 없는 듯 러스도 후련한 얼굴로 일행에게 돌아왔다. 실란이 잽싸게 신성력으로 그의 어깨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는 러스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잘했다, 러스. 그런데 대체 그건 언제 익힌 거야? 역시 그랜드 포지?"

"네, 그렇죠. 뭐."

"그 기술, 팬텀 디바이드라고 했었나? 나중에 나랑 붙을 때도 보여 줘 봐. 한번 맛보게."

"형님 상대로는 그리 쓸모가 없어요. 애당초 피한다는 개념이 없는 양반이 뭘...."

쓴웃음을 지으며 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스탈라나 다른 오러 유저라면 공간을 뛰어넘는 이 팬텀 디바이드가 무시무시한 기술이겠지만, 레펜하르트에겐 그리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스파이럴 가드로 몸을 감싸 버리면 어디서 뭐가 날아오건 별 상관이 없으니까.

팬텀 디바이드는 그 기적적인 효과만큼이나 구현에 필요한 오러양도 극심한 기술이었다. 공간을 넘는 데 힘 다 빼고 나면 정작 레펜하르트의 스파이럴 가드를 뚫을 여력이 남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것도 형님에겐 크게 문제 되지 않겠군요."

스탈라를 돌아보며 러스가 피식 웃었다. 열두 개의 단검을 자유롭게 다루는 스탈라의 저 수법은 러스에겐 실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냥 몸으로 때우면 그만이다. 아무리 무기가 스스로 움직인다 해도 그 속에 깃든 오러는 분명 스탈라의 것, 열둘로 나누어진 오러에 스파이럴 가드를 뚫을 힘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붙어 봐야 아는 것이긴 하지만...."

그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을 풀었다.

"자, 그럼 내 차례구먼."

☆ ☆ ☆

레펜하르트는 겉옷을 벗고 공터로 걸어 나갔다. 혹시 전투로 인해 옷이 상할 수도 있으니 아예 미리 벗고 나간 것이다. 한때 한 나라의 황제로까지 군림하던 작자치고는 참으로 쪼잔한 면모라 하겠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 시절 워낙 없이 살아서인지 현재의 레펜하르트는 그런 인식을 미처 못 하고 있었다.

웃옷을 홀랑 벗으니 강철의 육체가 여실하게 드러난다. 걸어 나오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환호를 날리려던 오크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헐...."

"으음...."

전사를 숭상하는 오크들이다.

강함을 찬미하는 오크들이다.

그런 오크들에게 저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멋지다 못해 실로 황홀할 지경이었다. 저 무시무시할 정도로 단련된 저 육체라니! 그것도 인간도 아닌 오크들 기준에서!

"허어."

스탈라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잠시 후 진정이 가득 담아 찬사를 건넸다.

"몸매 죽이는데?"

"으음...."

참으로 오크다운 칭찬에 레펜하르트는 얼굴을 붉혔다. 동족의 반응을 지켜보며 스탈라가 피식 웃었다.

"댁은 의식 안 해도 되겠다. 지금도 다들 뻑 간 눈치구만."

확실히, 오크 전사들은 레펜하르트가 웃통을 깐 것만으로도 전사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저 정도 육체를 지니고 있다면 전사가 아닐 리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순박한 마초란 표현이 딱 걸맞은 이들이라 하겠다.

"뭐, 그렇다고 정해진 의식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중얼거리며 단검을 꺼내 드는 스탈라를 향해 레펜하르트도 싸울 태세를 취했다.

그가 선언하듯 외쳤다.

"내 이름은 레펜하르트 왈드 안타레스! 호투의 의식에 임하겠소!"

스탈라도 단검을 고쳐 쥐며 의식대로 자신을 소개했다.

"푸름 곰 부족의 투사 스탈라, 그대와 싸우겠다. 원래 호투의 의식은 서로 한 명씩 내보내는 것. 하나 투사인 그대와 맞설 수 있는 것이 나 뿐이라 어쩔 수가 없군. 용서하라."

"상관없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레펜하르트가 기합을 터트렸다.

"으랏차차!"

황금색 오러가 불길처럼 일어 올라 그의 전신을 감쌌다. 스탈라도 포효를 터트리며 청보랏빛 오러를 끌어 올렸다.

"크라라라!"

그렇게 두 오러의 보유자가 서로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중후한 음성이 그들 사이를 끼어들었다.

"어이, 마누라! 그 친구는 내가 맡으면 안 될까?"

순간 놀라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허억!'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그 음성은 오크 전사들 쪽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일행들이 서 있는 곳, 바로 그 뒤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시리스며 틸라, 러스도 놀라 등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대검을 등에 멘 한 명의 오크가 서 있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의 스탈라처럼 전신을 망토로 감싸 눈만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강함이 느껴진다.

"누, 누구?"

"언제 여기에?"

다들 경악해 입을 벌렸다. 엘프의 예민함을 지닌 시리스는 물론 오러 유저인 러스조차도 누군가가 등 뒤에 다가올 때까지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망토를 두른 오크가 어금니를 매만지며 레펜하르트 일행 옆을 지나 공터로 다가간다. 스탈라가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남편?"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오크 사내를 보며 스탈라가 자세를 풀었다. 단검을 품에 갈무리하며 그녀가 물었다.

"언제 왔소, 남편?"

"아까 왔다, 마누라. 재밌어 보이기에 구경하고 있었지."

레펜하르트 일행 전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저 망토를 두른 오크 사내를 바라보았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대체 어디서 구경하고 있었단 말인가?

오크 사내가 힐끔 러스며 시리스를 훑어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들 등 뒤를 가리키며 공용어를 내뱉었다.

"그대들, 안 놀란다. 나 저 바위에 있었다."

그가 가리킨 것은 일행의 등 뒤에 펼쳐진 황야, 2~300여 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였다. 그제야 레펜하르트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 거리에 숨어 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법도 했다. 게다가 오러 유저의 시력이라면 2~300미터 정도 거리는 그리 멀다고 할 수 없으니 구경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바로 등 뒤까지 오는 동안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저 오크 사내가 적의를 지니고 있었다면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칼 맞고 쓰러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러스며 시리스는 여전히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오크 사내를 향해 경계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오크 사내가 스탈라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후드를 걷었다. 검붉은 피부에 오크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칼이며 제법 주름진 얼굴이 상당히 나이를 먹은 듯했다.

스탈라가 그를 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어째 벌써 왔소? 뱀들의 왕은 어쩌고?"

뱀들의 왕.

인간들은 엘더 드레이크라고도 부르는 이 강력한 몬스터는 오랜 세월 동안 푸른 곰 부족을 괴롭혀 온 천적 중 하나였다. 보통 드레이크들보다 두 배는 거대한 육체에 블레이드 오러로도 잘 베이지 않는 단단한 비늘을 지닌 이 흉폭한 마수를 사냥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이 홀로 부족을 떠난 것이 고작 열흘 전, 벌써 돌아왔을 것이라곤 스탈라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크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이미 잡아서 잘 토막 내 넘겨주고 오는 길이여."

"벌써? 역시 내 남편이네. 한동안 포식하겠구먼."

"잘했지?"

"잘했소, 잘했어."

부부 간의 오붓한(?) 재회를 마친 뒤, 오크 사내가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유쾌한 어조로 소리쳤다.

"반갑소, 이방인 용사여. 푸른 곰 부족의 족장, 투사 칼켄이오."

☆ ☆ ☆

레펜하르트 앞에 선 칼켄이 망토를 벗어 던졌다. 살짝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터질 듯한 근육으로 무장한 젊디젊은 육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허허, 사부 이후로는 처음일세?'

레펜하르트는 오랜만에 타인을 올려다보는 경험을 하며 어색해하고 있었다.

칼켄의 신장은 2미터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거의 왕년 권왕 테스론과 맞먹는 것 같았다. 뭐, 사부인 제라드보다는 살짝 작아 보였지만 오크들은 원래 인간보다 평균 신장이 약간 작고 대신 좌우로 넓은 체형이다. 딱 벌어진 어깨에 두꺼운 팔다리를 보면 덩치 자체는 오히려 사부보다도 더한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와 칼켄이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관전하고 있던 몇몇이 무심코 눈을 비볐다. 무지막지한 덩치 둘이 나란히 서 있으니 원근감에 혼란이 온 것이다.

칼켄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인간 투사여, 아내를 대신하여 내가 그대를 상대해도 되겠는가?"

레펜하르트가 호쾌하게 대꾸했다.

"좋소!"

이것이 승패에 연연하는 결투였다면 굳이 지친 스탈라 대신 상대하기 까다로운 칼켄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겠지. 하지만 어차피 호투의 의식은 승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의를 거부할 경우 '전사답지 않은 치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니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호쾌한 모습을 보여 점수라도 더 따는 게 낫지.

"바라던 바요!"

칼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좋다! 남자답다!"

칼켄이 등 뒤에서 대검을 꺼내 들었다. 2미터를 훌쩍 넘는 칼켄보다도 더 긴 대검이었다. 검신 폭도 무지막지해서, 옆으로 뉘여 놓으면 족히 서너 명은 비 피할 공간이 나올 것 같았다.

우우웅!

거대한 대검의 검신 위로, 더더욱 거대한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한껏 머금어진다. 오러를 끌어 올려 검을 겨누며 칼켄이 외쳤다.

"무기를 들라!"

두 주먹에 황금빛 오러를 담은 채 레펜하르트가 자세를 취했다.

"나 자신이 곧 무기요!"

"호오?"

칼켄이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크들에게도 물론 전래되어 오는 맨손 체술이 있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맨손으로 무기를 상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스피리츠 웨폰이라는 비전이 있는 이상 무기가 있는 쪽이 오크는 월등히 강한 것이다.

"흥미롭군!"

눈을 빛내며 칼켄이 포효를 터트렸다.

"싸우자!"

순간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꿈이여, 깃들라. 임프로브드 슬립!"

동시에 달려들려던 칼켄이 풀썩 엎어져 버렸다.

"드르렁~!"

"...."

관전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다들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강력한 오러 유저의 대결을 기대하며 막 눈을 빛내고 있었는데 이런 사태라니?

아무리 날고뛰어 봤자 오크는 오크였다. 오러 유저라고 없던 마법 저항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실란이 벙찐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 허무해...."

러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설마 이걸 승리로 치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시리스가 혀를 찼다. 호투의 의식은 어디까지나 전사의 기량을 가늠하는 행위다. 여기서 마법을 보여 봤자 오크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도대체 레펜하르트가 왜 저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래서야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될 텐데?'

역시나, 스탈라는 황당해하며 자빠져 주무시는 그녀의 남편과 손을 거두는 레펜하르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 이건 전사의 방식이 아니다!"

억울한 듯 외치는 스탈라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손짓을 했다.

"깨우시오."

스탈라가 혀를 차며 남편 곁으로 다가가 발로 툭툭 걷어찼다. 칼켄이 하품을 하며 눈을 뜨더니 두리번거리며 맹하게 중얼거렸다.

"응? 피곤이 풀리지 않았나?"

"마법에 당했어, 남편."

"어? 저 친구 마법사이기도 했어?"

칼켄은 놀란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리 놀라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칼켄은 레펜하르트가 강력한 오러 능력자라는 걸 이미 파악한 것이다. 강력한 전사의 힘을 지닌 자가 마법까지 구사할 수 있다니?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나는 전사이자 마법사.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알렸을 뿐이오."

오크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전사를 숭상하는 만큼 오크들은 마법사의 존재를 멸시한다. 아무리 단련해도 막을 수 없는 마법이라는 존재는 오크들에게 악마의 수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경멸하기에는, 레펜하르트는 누가 봐도 강력한 전사인 것이다. 대체 인정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당황한 칼켄이며 다른 오크들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의 육체처럼 마법 역시 나의 무기. 지닌 모든 것을 다해 그대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무례가 아니오?"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 같았다. 칼켄이 애매해하며 중얼거렸다.

"그, 그런가?"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레펜하르트는 내심 초조해하며 오크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끙, 어떻게 나오려나?'

사실 레펜하르트라고, 마법에 대한 오크들의 반감을 몰라서 굳이 수면 주문을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오크들의 신뢰를 사야 하는 몸이다. 어차피 평생 오크들 앞에서 마법을 쓰지 않을 것도 아닌데, 마법사라는 것을 숨겼다가 나중에 들키면 오히려 더 신용을 잃게 된다.

신뢰는 얻기 힘드나 잃는 것은 한순간.

비록 경계를 받는다 해도 지금 솔직하게 모든 것을 보이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는 더욱 나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나름 믿는 구석도 있었다.

'칼켄은 마법에 대한 인식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까.'

역시나, 칼켄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마법 역시 그대의 무기라면 그걸 쓰지 않음은 오히려 명예롭지 않은 일일 터."

마법의 존재를 인정하는 칼켄의 발언에 다른 오크들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웅성거렸다.

"마법은 나쁜 거잖아?"

"하지만 무기가 있는데 안 쓰는 것도 나쁜 거잖아?"

"하지만 마법이 무기인가? 그거 치사하잖아?"

"호투의 의식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더 치사하잖아? 솔직해서 좋구먼."

"어렵다...."

웅성대던 오크들은 결국 그들다운 결론을 내렸다.

"에이, 족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역시나 단순한 종자들답게, 깊이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그냥 칼켄이 말했으니 그러려니 해 버린 것이다. 칼켄이 대검을 들고 몸을 일으키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인간 투사여, 그대의 배려에 감사한다."

확실하게 마법을 인정하는 목소리였다. 내심 안도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칼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신뢰를 얻을 수는 없을 터다."

"알고 있소."

마법을 인정했다 해서 칼켄이 마법사 또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레펜하르트의 무기 중 하나로만 여겼을 뿐이다. 레펜하르트가 전사답지 않은, 마법사다운 수법으로만 칼켄을 상대한다면 승리한다 해도 강한 마법사로 인식될 뿐이지 저들의 신뢰를 얻을 수는 없다.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오크들의 신뢰를 얻은 것은 그가 보여 온 행적과 오크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결코 강력한 마법의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토록 열성으로 오크들을 대하고도 마법사란 사실 때문에 끌어들이는 데 엄청 고생을 했었다.

'지금은 이 육체 덕분에 좀 더 그 과정이 빨라지겠군. 이건 좋네.'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칼켄이 대검을 들며 선언하듯 외쳤다.

"그럼, 다시 호투의 의식을 시작하도록 하지!"

"좋소!"

레펜하르트가 두 주먹을 칼켄에게 겨누었다.

칼켄 역시 녹색의 오러를 피워 올리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재차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전의 가득한 눈으로 칼켄과 레펜하르트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 흉포한 투기가 피어올라 아지랑이처럼 어우러졌다.

어느 순간.

"타아앗!"

"카아아앗!"

두 오러 유저가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3

칼켄의 대검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길게 휘둘러졌다. 2미터가 넘는 검신에 녹색의 오러가 맺혀 넘실거리며 파괴의 빛을 흩뿌린다.

콰콰콰쾅!

오러가 스친 곳마다 폭음이 일어나며 흙먼지를 피워 올린다. 두 팔뚝에 스파이럴 가드를 펼쳐 칼날을 막아 내며 레펜하르트가 왼 주먹을 길게 뻗었다.

"기격탄!"

황금빛 포탄이 칼켄의 정면으로 날아든다. 칼켄이 몸을 날려 피하며 재차 검을 내리쳤다. 전신의 오러를 한 점에 집중한 일격, 그 속에 담긴 기세에 전율하며 레펜하르트는 스텝을 밟아 공세를 피했다. 어지간한 건 몸으로 때우는 것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이지만, 지금 칼켄의 검에 맺힌 기운은 결코 어지간하지 않았다. 레펜하르트의 스파이럴 가드를 뚫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닌 참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스치듯 피하며 거리를 좁힌 레펜하르트가 연거푸 주먹을 뻗으며 소리쳤다.

"연환 기격탄!"

수십 개의 오러 포탄이 칼켄의 사방을 점유하며 쏟아진다. 일일이 쳐 내기에는 너무 많은 궤도, 하지만 칼켄은 검면을 방패 삼아 간단히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펑펑펑!

오러와 오러가 맞붙어 굉음을 울린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거리를 벌렸다.

'역시 오크들은 저런 거대한 무기를 잘도 다루는구먼.'

오랜 세월 발달된 오크들의 무술은 그만큼 오묘한 부분이 있었다. 무기가 크다 하여 결코 동작이 둔한 것이 아니다. 검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강렬한 일격을 날리고 원심력을 이용해 다시 궤도를 바꿔 연환하는 칼켄의 수법에 레펜하르트는 당장 어찌할 바를 못 찾고 연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계속 주먹을 뻗고 두 다리를 휘두르며 레펜하르트는 칼켄의 공격을 열심히 막아 냈다.

콰콰콰쾅!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가며 뇌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한참 싸우다가 슬슬 레펜하르트가 눈치를 봐서 마법을 시도했다.

"꿈이여, 깃들라. 임프로브드 슬립!"

이미 한번 써먹었던 개량화 수면 주문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고생한 덕에 이제 하위 서클의 마법은 전투 중에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 한 방이면 칼켄은 또다시 잠들어 버릴 테니 상당히 치사한 수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정도 상대했으면 전사의 자격은 충분히 증명했을 테니까, 뭐.'

솔직히 계속 싸우면 누구 하나 다칠 것 같으니 이쯤에서 결투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역시나....

"드르렁~!"

슬프게도 바로 걸려 버린다. 정신계 주문은 불꽃이나 전격처럼 눈에 보이며 쏘아지는 방식이 아니다 보니 피하고 자시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 이겼다고 생각하며 레펜하르트가 살짝 일격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드르러어엉!"

코고는 소리가 기합처럼 요란하게 터지며 잠든 칼켄이 그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에 나섰다!

"케엑?"

너무 놀란 나머지 옆구리를 허용했다.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워낙 맞고 산 덕분에 본능적으로 스파이럴 가드가 발동, 다행히 참격을 쳐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당황은 여전했다.

"마법이 먹히지 않은 건가?"

그건 아니었다. 여전히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도 몸은 제대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자면서도 알아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잠시 후 칼켄이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하아암! 이런, 또 당한 건가?"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재차 결투에 임한다. 황당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칼켄이 이런 기술도 가지고 있었나?"

☆ ☆ ☆

결투를 지켜보던 실란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러스에게 물었다.

"우와, 자면서도 싸우네? 오러 능력자는 저런 것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러스는 실란의 의문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감탄한 듯 나직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진짜 공부가 되는군...."

타인의 비기 빼먹는 데는 거의 산업 스파이급 안목을 지닌 러스다. 보는 순간 바로 칼켄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칼켄은 오러의 일부를 체내 신경계에 잔존시킨 뒤, 뇌내 명령이 끊김과 동시에 육체가 자동으로 반격을 하도록 미리 설정해 놓은 것이었다. 가끔 오러 능력자가 심한 부상으로 의식을 잃었을 때 오러가 저절로 일어나 신체를 치유하는 경우가 있다. 육체의 생명력에서 발현되는 오러는 이런 식의 자기 보호적 성향도 지니고 있는데, 칼켄은 섬세한 오러 운용으로 그 성향만 분리해 끌어낸 것이다.

'저렇게 오러를 운용하면 인위적으로 조건반사 성향을 부여할 수도 있구나. 저건 나중에 나도 연습해 봐야지.'

또다시 새로운 수법을 하나 얻은 러스가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새삼 레펜하르트를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고 있었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다른 오러 능력자와 싸우는 경우는 사실 그리 없다. 오러 능력자는 그 자체로 전략 병기나 다름없는 존재. 국가 간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이 직접 나설 일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무인의 기술에 대한 정보는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으니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오러 유저 간의 대련 역시 기피되곤 한다. 러스 정도는 아니더라도 경지에 오른 오러 유저라면 상대의 수법을 대충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러스는, 레펜하르트를 따른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섯 명의 오러 능력자와 만났다. 드워프 오러 유저와의 대결 때도 그렇지만, 칼켄과 스탈라에게서만도 벌써 건진 수법이 몇 개인가? 게다가 인간과 달리 다른 종족들은 오러를 다루는 수법 역시 독특하기 그지없다.

들뜬 얼굴로 러스는 계속 공터에 정신을 집중했다. 언제나 무술에 굶주려 왔던 러스에게 저들의 결투는 눈앞에 차려진 화려한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레펜하르트는 계속 칼켄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의 기억 속 칼켄은 이런 수법을 구사한 적이 없었다.

'아니, 구사할 필요가 없었던 건가? 그 당시 내 밑의 오크들에겐 싹 다 정신계 주문 방어 부적을 보급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때는 마법에 의해 정신을 잃을 일이 없었으니 저 수법을 쓸 일도 없었을 것 같다. 확인 차 레펜하르트가 다시 한 번 마법을 시도했다.

"그대, 돌처럼 굳을지어다! 패럴라이즈!"

칼켄에게 항마력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이번에도 마법은 제대로 먹혔다. 하지만 여전히 효과는 없었다. 다시 예의 그 '자동 전투 모드'가 되어 반격할 뿐이다.

"마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반격하며 칼켄이 버럭 소리쳤다. 그를 뚫어져라 살피던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러스보다 좀 시간은 걸렸지만, 그도 결국은 칼켄의 수법을 알아챈 것이다.

'저런 수법이었나? 그럼 정신계 마법은 안 통하겠군.'

정신계 마법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뇌에 간섭하는 행위다. 간섭당하는 순간 목 아래가 뇌와의 연계를 끊고 자율적으로 움직여 버리니 전혀 소용이 없을 수밖에.

'다른 마법을 써 볼까?'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굳이 정신계 마법이 아니더라도 항마력이 약한 오크에게 통용될 주문은 많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고민을 접었다. 그는 호투의 의식에 임하고 있다. 명색이 마법사인지라 잠깐 그쪽으로 머리가 돌긴 했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전사로서의 기량을 보여야 할 때인 것이다.

자세를 취하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가겠소!"

씨익 웃으며 칼켄이 말을 받았다.

"바라던 바다!"

☆ ☆ ☆

오러 실린 대검이 공기를 찢으며 굉음을 울린다.

황금빛 철권이 허공을 가르며 장대한 파문을 낳는다.

철권과 대검이 서로 맞붙어 하늘을 떨쳐 울리고 땅을 파헤쳐 뒤엎는다.

쩡! 쩌정!

무시무시한 뇌성이 고막을 찢을 듯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찬란한 오러가 서로 어우러져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연거푸 공격을 피하고, 막아 내고, 반격한다. 그동안 익힌 모든 기술을 발휘하며 칼켄과 레펜하르트는 조금도 밀리지 않은 채 박빙의 승부를 보이고 있었다.

"으하하! 즐겁도다!"

대검을 휘두르며 칼켄이 흥에 겨워 소리쳤다. 레펜하르트도 맞받아치며 신이 난 듯 소리쳤다.

"멋진 수법이오!"

아까는 명색이 마법사라더니, 어느덧 레펜하르트도 분위기에 휘말려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리 영혼이 마법사라 할지라도 육체가 무인의 것이다 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시대에 되살아난 레펜하르트가 무인으로서 수행해 온 지도 어언 6, 7년 가까이 된다. 굳이 육체 타령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훌륭한 무인으로 재탄생해 있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싸워 댔을까? 대검을 휘두르며 칼켄이 외쳤다.

"슬슬 끝을 보겠다! 인간 투사여!"

대검을 향해 앞차기를 찔러 넣으며 레펜하르트 또한 대꾸했다.

"나 역시!"

서로의 역량에 대한 탐색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슬슬 확실한 일격을 시도할 때라는 걸 두 사람 모두 깨닫고 있었다. 연신 공방을 퍼부으며 서로 틈새를 노린다.

어느 순간, 레펜하르트가 칼켄을 향해 연신 공중차기를 날렸다. 오러가 실린 양다리가 풍차처럼 휘몰아치며 칼켄의 정면을 쇄도해 갔다. 칼켄이 대검을 비틀어 방어했지만, 육중한 킥이 연달아 적중하며 뒤로 한참이나 밀려갔다. 지탱한 두 다리가 땅을 파헤치며 밭고랑처럼 길게 흔적을 남겼다.

"으음!"

검면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팔이 저려 왔다. 칼켄이 신음을 흘릴 때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무릎을 굽히며 오른 주먹을 뒤로 길게 당겼다.

웅웅웅!

황금빛 오러가 점차적으로 그의 주먹에 모여든다. 현재 그가 가진 최강의 일격, 캘러미티 혼이었다.

칼켄도 본능적으로 상대의 기술을 알아보고 경각심을 드높였다. 단순한 무인의 결투였다면 상대가 저렇게 뭔가를 준비할 때 그냥 칼을 푹 찔러 넣으면 상황 끝나겠지만, 오러 능력자끼리는 저 와중에도 오러가 전신을 방호한다. 여기서 위력이 낮은 기술로 상대의 허점을 노려 봤자 오히려 치명적인 반격을 당할 뿐.

그렇다면 지금 칼켄이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다.

그 역시, 가진 최강의 기술로 맞선다!

칼켄이 대검을 등 뒤로 길게 뻗었다. 그 상태로 그가 포효를 터트렸다.

"크아아!"

대검의 녹색 오러가 폭발하듯 빛을 발한다. 서로가 한 점에 자신의 전력을 담아 상대를 노려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전사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뻗었다. 황금의 오러가 한 점으로 수렴되며 가공할 파괴의 뿔로 화해 칼켄에게 쏘아졌다.

"캘러미티 혼!"

칼켄도 검을 내리그었다. 대검에 실린 오러가 불규칙적인 궤적을 발하며 뇌성을 발했다. 대검이 한 줄기 번개가 되어 레펜하르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벼락 떨구기!"

서로의 비기가 서로 적중하며 황야의 하늘을 진동시켰다.

콰아아아앙!

☆ ☆ ☆

"아구구, 살살 좀 해, 실란!"

레펜하르트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실란이 마주 인상을 쓰며 외쳤다.

"좀 참아, 이 양반아! 죽을 만큼 아프겠지만!"

실란은 완전 걸레짝이 된 레펜하르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신성 주문을 발동하고 있었다. 분홍빛 성광이 전신으로 스며들 때마다 찢어진 피부며 터진 근육이 놀라운 속도로 아문다. 그리고 그 놀라운 속도와 비례해 레펜하르트의 비명도 더욱 커진다.

"아윽! 아야! 야, 이거 언제 끝나?"

"금방 끝난다니까요. 나 참."

캘러미티 혼과 벼락 떨구기.

서로가 가진 최강의 기술의 충돌은 무승부로 끝났다. 집중될 대로 집중된 파괴의 힘은 서로 반발하며 무자비한 폭발을 낳았고, 레펜하르트와 칼켄은 둘 다 오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각자 반대편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얼마나 강한 기술이었는지, 대부분 상충되고 남은 잔여 파괴력만으로도 둘 다 전신이 너덜너덜해졌다. 호투의 의식을 주관하는 스탈라가 오크 특유의 전통적 표현으로 무승부를 선언했다.

-두 투사의 기량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같도다!

그러자마자 걸레처럼 나뒹군 레펜하르트와 칼켄을 허겁지겁 양쪽에서 달려 나와 부축해 갔다. 그리고 바로 실란이 치유술을 시전해 레펜하르트를 치료하는 중이었는데....

"아윽! 으으극!"

연신 신음을 흘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틸라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아니, 필라넨스의 신성 치유가 저렇게 고통스러운 거였나요?"

틸라가 레펜하르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극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조차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으며 통증을 참는 레펜하르트를 이미 보아 온 것이다. 솔직히 그때에 비하면 그리 심한 부상도 아닌 걸로 보이는데, 저렇게 비명을 지르다니?

"아, 아뇨? 나도 실란한테서 치유술 많이 받아 봤지만 오히려 기분이 편안해졌는데...."

시리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실란이 치유술을 시전한 채 설명했다.

"그게 아직 레펜 씨 체내에 상대의 잔존 오러가 남아 있어서 그래요."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설명을 시작했다.

"워, 원래 오러와 신성력, 마력은 서로 성질이 다르거든. 오러는 마력과 신성력처럼 서로 반발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질이 다른 이상 어느 정도 융합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특히나 지금 내 몸에 있는 건 내 것이 아니라 칼켄의 오러란 말이야. 타인의 오러가 육체를 복구하려는 신성력이랑 반발하는 거야. 아, 아으윽! 아파 죽겠네!"

다들 감탄한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유식함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저 와중에도 떠들어 대는 근성에 감탄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곧 죽어도 설명하고 싶어 하는 마법사의 고질병이라 하겠다.

"그러게 내가 시간 좀 지나면 치료하자고 했잖아요?"

계속 성광을 흘려 가며 실란이 인상을 썼다. 그도 명색이 성직자인데, 치료라는 남 좋은 행위 하면서 고문하는 기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잔존 오러는 어차피 몇 시간만 지나면 사라질 건데...."

구시렁대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오크들은 완전히 우리 편이 된 게 아니잖냐.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부상당한 채로 있을 순 없어서 그런 건데... 아윽! 그냥 좀 있다가 할 걸 그랬나?"

솔직히 말하면 레펜하르트도 괜한 짓 했다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지금 푸른 곰 부족의 표정을 보면, 확실하게 자신들을 신뢰할 수 있는 전사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상황이 나빠질 것이란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일부러 치유술을 부탁한 건 만에 하나의 경우에도 신경을 쓰는 마법사의 습성 탓도 있었고....

'짐 언브레이커블 시절 온갖 고통이란 고통은 다 당해서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을 줄 알았지, 뭐.'

그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며 레펜하르트는 고통을 참아 냈다. 이윽고 통증이 싹 가시며 놀라운 활력이 전신에서 솟구쳤다. 드디어 치유술이 끝난 것이다.

"아, 죽는 줄 알았네."

"치유술 받은 사람이 할 소리예요, 그게?"

멀쩡해진 레펜하르트에게 핀잔을 던지며 실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크들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쪽도 치료해 줄까요?"

칼켄은 레펜하르트보다도 훨씬 더 부상이 심한 상태였다.

기술의 위력은 동등했을지 몰라도 육체의 내구도에서 둘은 상당한 차이가 난다. 칼켄의 육체도 강건하기 그지없었지만, 애당초 몸 단단하게 만드는 데 인생을 건 짐 언브레이커블에 비하면 상당히 모자란 면이 있었다. 솔직히 실란이 보기엔 레펜하르트보다 칼켄이 더 급해 보였다.

실란의 따스한 호의에 칼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이미 저 '치유술'이란 짓거리가 레펜하르트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본 것이다.

'저토록 용맹무비한 전사가 저렇게 비명을 지르다니!'

아무리 봐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잡고 있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나, 난 됐다, 인간 아이. 그냥 놔두면 낫는다."

칼켄은 스탈라의 도움을 받아 부러진 팔에 부목을 대고 터진 상처에 붕대를 감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뒤, 애써 힘을 모아 칼켄이 레펜하르트에게 소리쳤다.

"인간 투사여! 그대를 신뢰할 수 있는 전사로 인정한다!"

오크들이 다 같이 입을 모아 함성을 내질렀다. 호투의 의식이 훌륭히 끝마쳐졌음을 축하하는 행위였다.

칼켄이 절뚝거리며 레펜하르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엄숙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인간 용사들, 이제 우리는 형제다."

레펜하르트 일행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공용어를 쓴 칼켄이었다.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레펜하르트가 반색을 하며 오크어로 입을 열었다.

"기쁜 일이오, 푸른 곰 부족의 칼켄이여. 이제 형제가 되었으니 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막 용건을 꺼내려는 레펜하르트를 만류하며 갑자기 칼켄이 손을 휘저었다.

"나중에."

"응?"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씨익 이빨을 드러내 웃었다.

"일단 술 먹자."

"...."

"칼로 대화했으니 술로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술 먹자는 소리에 오크들이 좋다고 또 환호를 지른다. 뭐, 호투의 의식은 오크 부족들 간의 관계를 다지기 위한 의식이니 끝나고 축제가 이어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칼켄이 다른 일행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공용어로 호쾌하게 외쳤다.

"우리 집 가자! 거기 술 많다!"

오크어를 알아듣는 레펜하르트가 있음에도 굳이 공용어를 쓰는 것은 칼켄이 외모와 달리 사려 깊은 성품이라는 걸 증명한다. 듣기엔 우스워 보이지만 다들 칼켄의 배려에 감사하며 말을 불러 모았다. 오크들도 다이어울프에 올라타고 떠날 채비를 갖췄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덧 저녁, 황혼의 석양이 황야의 대지 위로 깊게 드리운다, 오크들과 레펜하르트 일행은 사이좋게 머리를 나란히 하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3

어둠이 깃든 황야의 대지를 밝히며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을 맞이한 푸른 곰 부족이 만남의 축제를 벌인 것이다.

모든 오크들이 공터에 모여 앉았다. 레펜하르트 일행도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 의자라는 개념이 없는 오크들이다 보니 그냥 땅바닥 아무데나 주저앉는 것이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 일행은 귀빈 취급을 해 주는지 자리에 짐승 가죽을 하나씩 깔아 주고 있었다.

모닥불 앞에 서서 칼켄이 뿔로 만든 술잔을 들어 올리며 고함을 지른다.

"새로운 형제를 만났으니 실로 기쁜 일이다! 모두 술잔을 들어 축하하자!"

"와아아아!"

레펜하르트 일행을 향해 오크들이 반가움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환대 어린 함성을 보냈다. 물론 당하는 일행 입장에선 눈을 번들거리며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 어째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처럼 보였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오크어를 모르는 실란과 러스가 삐죽거리며 어색하게 술잔을 마주 들었다.

"분명 좋은 의미라는 건 알지만요...."

"이거야 원 살벌해서 술 먹겠나...."

하여튼 오크들이 진심으로 일행을 맞이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인간의 침입을 경계하며 나간 동족들이 엉뚱하게 그들을 형제랍시고 데리고 왔는데도, 오크들은 아무도 의심하거나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그 속에 레펜하르트의 마법에 당했던 오크 스카우터들도 있었는데, 그들조차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위대한 전사들이 인정했으니 당연히 그들도 인정한다는 식이다.

'참 변함이 없구먼. 이래서 옛날에는 많이 당하기도 했었다는데....'

옛 기록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상대가 어느 종족이건 강함을 선보이면 형제처럼 대하는 오크들의 습성은, 그만큼 인간들에게 자주 이용되기도 했다. 인간이 대륙을 지배하기 전에는 저러다가 인간에게 속고 배신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던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은 동족 이외의 전사는 아무리 강해도 전사로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시각이 오크족 사이에 만연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대부분의 오크들이 오지로 밀려나고, 인간이 굳이 계략을 써서 오크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어진 지금은 오크들도 다시 예전의 순박한 상태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원래 모습을 되찾았으니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도로 멍청해졌으니 나쁘다고 해야 할지....'

오크들은 단순하기에 강하다.

인간의 계략을 마주해 함께 머리를 쓰기 시작하며 오크족 역시 한때 교활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크들에게는 오히려 독이었다.

교활해진 만큼 오크들은 약해졌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고, 잡념이 늘어나며 그들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과 맹수 길들이기 기술도 잃어갔다. 거기에 지나치게 허약한 항마력이 결합하니 결국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기고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푸른 곰 부족의 오크들은 틀림없이 조상들의 원시적인 강함을 유지하고 있다.

갑자기 칼켄이 레펜하르트를 불렀다.

"형제! 내 술을 받게!"

칼켄이 자신의 술잔을 가득 채워 레펜하르트에게 건넸다. 덩치 큰 칼켄답게 그의 뿔 술잔은 실란이 모자로 써도 될 정도의 사이즈를 자랑하고 있었다.

술잔을 받으며 레펜하르트는 잠시 속으로 떨떠름해했다.

'윽, 이거 그거군.'

그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크들이 주로 마시는, 양젖이나 말젖을 발효해 만든 이 시금털털한 액체를. 전생에, 안타레스 제국 황제 시절 이미 마셔 보았다.

'그야말로 더럽게 독하고 더럽게 맛없는 술이었지.'

하지만 상대의 호의에 얼굴 찌푸릴 수는 없는 노릇. 레펜하르트는 애써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예전엔 이거 한 잔 마시고 그대로 쓰러져서 오크들의 조소를 받았었는데....

"어? 맛있네?"

역시 몸이 바뀌니 입맛도 바뀐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부 제라드 밑에서 온갖 악식은 다 경험해 본 그였다. 그랜드 포지에서 바실리스크 고기도 맛있다고 씹어 댄 그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맛있다고 느껴질 만큼 그의 미각은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입에 맞나 보군? 인간 입에도 맞을지 조금 걱정했는데."

자신들의 술이 칭찬받자 칼켄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 뭐, 러스나 실란이 한 모금 마셔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보면 딱히 인간 입에 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시리스나 틸라의 표정을 보면 엘프나 드워프에게도 비슷한 것 같다.

칼켄이 스탈라를 돌아보더니 버럭 소리쳤다.

"나의 형제가 우리의 술을 즐겨 하니 이 아니 기쁠쏜가? 마누라, 술통째로 들고 와! 오늘 형제와 화통하게 술통을 비워야겠다!"

"술 먹을 핑계는 귀신같이 찾는구려."

핀잔을 던지며 스탈라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양팔에 술통을 하나씩 끼고 나왔다. 실란 정도는 구겨 넣으면 통째로 들어가고도 여분이 남을 거대한 술통이었다. 그것을 받아 들더니 칼켄이 각자 앞에 하나씩 놓고 레펜하르트에게 말했다.

"마시자!"

그리고 뚜껑을 따더니 술통째 들고 벌컥벌컥 비운다. 단숨에 술통을 싹 비운 칼켄이 불룩해진 배를 두들기며 트림을 거하게 했다.

"꺼억! 역시 술은 통으로 마셔야 맛이지!"

시리스며 틸라, 러스와 실란이 동시에 기가 차 입을 쩍 벌렸다. 오크들 무식하다는 소리 많이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지금 사람더러 술잔도 아니고 술통을 한 큐에 비우라는 건가?

반면 레펜하르트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운 사이즈구먼.'

사부 밑에서 저보다 더 큰 사이즈의 죽을 매일 입에 달고 살았던 적도 있다. 이까짓 술통 하나쯤이야?

짐 언브레이커블의 추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술통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 동안이나 술통을 든 채 목청으로 벌컥벌컥 술을 넘긴다. 오크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져 갔다.

잠시 후, 레펜하르트는 술통을 싹 비운 채 거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오오오!"

"대단하다!"

"과연 투사다!"

원래 오크들은 술 센 놈이 힘도 세고 정력도 세다. 다들 레펜하르트를 대단히 위대한 수컷으로 보며 더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고, 축제도 점점 더 무르익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푸른 곰 부족의 모든 오크들이 신 나게 술과 고기를 퍼먹었다. 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타시드가 잡아온 터틀 라이온에, 칼켄의 수확물인 엘더 드레이크 고기까지 있으니 먹을 것은 풍성하고도 남았다. 황야에서 살다 보니 소금기라곤 어쩌다 발견되는 암염이 전부, 어차피 장기 보존 방식이라곤 원시적인 훈제 수법밖에 가지지 못한 오크들이다. 먹을 게 생기면 그때그때 싹 비우는 습성이 뿌리에 박혀 있다.

배불리 먹고 마음껏 취한 오크들이 여기저기서 오크어로 노래를 뽑기 시작했다. 오크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전통요였는데, 격렬한 리듬이며 투박한 가락이 거의 군가나 행진가 수준의 열혈을 자랑하고 있었다. 노래에 맞춰 몇몇 오크들이 싸움박질을 시작했다.

"크아아! 덤벼! 덤벼!"

"눕혀 주마, 이 자식!"

원래 오크들의 축제에는 다른 종족들처럼 춤이란 개념이 없다. 대신 오크들은 축제를 시작하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싸운다.

"심지어는 결혼식 때도 신랑과 신부가 박투를 벌여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을 안고 신방으로 향하는 풍습도 있다?"

레펜하르트의 설명에 실란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것참 섬뜩한 풍습이네요."

왠지 다른 이유가 있는 듯, 유달리 덜덜 떠는 실란이었다.

싸우지 않는 오크들은 레펜하르트 일행에 관심을 갖고 서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주로 오크 여성들이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속담은 전 종족 공통이라는 놀라운 범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엘프들은 저렇게 뚱뚱한가? 저런데도 강하다니 놀라워."

"저 드워프 여자도 뚱뚱하잖아? 어떻게 전사가 될 수 있었을까?"

자신들을 향해 숙덕거리는 오크 여인들의 모습에 시리스가 슬쩍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뭐래요?"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뚱뚱하단 소리를 들은 시리스와 틸라의 표정이 팍삭 구겨졌다. 오크들에겐 아무리 겉보기에 가녀려 보여도 근육이 드러나지 않으면 뚱뚱한 것이다. 바로 레펜하르트에게서 설명을 들어, 오크들의 '뚱뚱함'이란 게 어떤 기준인지야 알았지만....

"거참, 기분 묘하네요."

"그러게요."

팔뚝이 자기 허벅지보다도 두꺼운 여자들에게 뚱뚱하단 소릴 듣고 있자니 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틸라가 신경질적으로 술을 들이 킨 뒤 캑캑 기침을 해 댔다.

그 옆에서, 실란은 눈앞에 수북하게 쌓인 고기를 보며 난처해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크 여인들이 계속 그 앞에만 자꾸 음식을 가져다준 것이다.

"아, 저 이제 배부른데...."

"케찰드! 케찰드!"

전사들과 달리 이들은 일개 부족민이라 공용어까진 모르는지, 계속 오크어로 실란을 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손짓으로 저것이 먹으라는 의미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음식을 계속 주는 걸 보면 상당히 환대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난처해하면서도 실란은 기뻐하고 있었다.

물론 오크들의 말을 이해했다면 결코 기쁘지 않았겠지만.

"저거, 남자애래."

"세상에! 남자애가 저리 말랐대?"

"곧 죽겠는데?"

"불쌍해라. 전사들 사이에 껴 있으며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을까?"

곧 죽을 부실한 아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실란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방실 웃을 뿐이었다.

"아, 저기. 고맙습니다만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만 주셔도 되는데... 아이고, 또 주시네."

한편 러스는 모닥불 옆에 앉아 오크들의 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그도 레펜하르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크들은 무식해 보이지만, 그만큼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용맹함과 전사에 대한 사상은 기사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기사란 존재도 무식하기는 꽤나 만만찮아서, 기사단에서 술판 벌이면 지금의 작태와 별로 다를 것도 없다. 러스 입장에서는 오히려 드워프 때보다 더 감성적으로 와 닿는다.

"으음, 이게 형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바인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