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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취직 (2)

* * *

"어떤 상황이라도, 노동교화소보다는 낫겠지."

희미하게 다가오는 졸음 속에 카이루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버티지 못하고 미치거나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즐비한 지옥에서, 카이루스는 6년을 버텼다.

베넷 시 또한 지옥이라면, 이미 다른 종류의 지옥을 한번 경험하고 벗어난 자신이 이겨내지 못할 리 없다. 카이루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인 다음 생각을 정리했다.

"황제가 왜 나를 놓아주었을까?"

다시금 떠오르는 의문.

카이루스 입장에서는 그냥 바보라서 그런가? 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치워버릴 수도 있는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끝낼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풀어줘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 놓아 준 거다. 그냥 무죄가 밝혀졌다고 이제 와서 풀어줄 정도로 발로른 제국의 황제는 착한 놈일 리가 없다.

답을 찾을 수 없는 고민을 거듭하던 카이루스는 마침내 잠들었고, 새벽 댓바람부터 밖에서 울려퍼지는 우렁찬 구토 소리와 함께 기상했다.

"아침부터 드럽게시리."

하루 종일 퍼먹은 술을 그날 새벽 게워내는 소리와 함께, 카이루스의 상쾌한 아침이 열렸다.

1층의 부엌에서 몸을 씻은 다음, 카이루스는 조나단이 가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뭐야, 후딱도 일어났다."

"첫날부터 게으름 피우면 미움받지 않겠습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직도 처자고 있었으면 대가리에 물을 한 사발 때려박으려고 했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 빼내려면 쌔빠지게 부지런해야 하는 법이지."

"역시 두령님이십니다."

카이루스가 엄지를 세우며 말하자, 조나단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점에 저런 말을 하면 진짜 남의 돈을 터는 강도들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텐데.

"아침에 하는 일은 간단하다."

부족한 식자재를 구매해서 채워야 한다. 배달 대행 같은 건 없으니 모두 다 직접 나르고 옮겨야 한다.

"조리는 안 합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널 뭘 믿고 요리를 시키겠냐?"

마찬가지로, 창고의 식자재 재고 파악도 카이루스가 하지 않는다.

고용한 종업원이라고 해도, 조나단은 롱웨이브 비스트로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돈이 오가는 일들을 카이루스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차피 식자재를 챙겨오는 곳도 파악하고 장미정원에 보증도 받을 겸 오늘은 같이 이동한다."

조나단의 말에 카이루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대필은 받으셨습니까?"

"그래. 어디, 읽어볼 테냐?"

조나단이 순순히 챙겨온 서류를 보여주었다. 타자기로 입력된 내용을 확인한 카이루스가 혀를 내둘렀다.

"우와. 이건 완전 노예 취급인데요."

이 내용에 따르면 카이루스는 대충 12시간 정도의 노동을 해야 할 예정이다.

"뭔 개똥같은 소리를 씨부리고 있어. 진짜 노예 한번 해 볼 생각이냐? 그럼 네 이름부터 갈아치워야 하는데."

조나단이 입담배를 꺼내 씹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말이 12시간이지, 바쁘게 일하는 시간은 해질 때 즈음부터 시작해서 대략 5―6시간 정도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닌 게 사실이니까. 카이루스는 저 조건에 동의하기로 결정했다. 최소한 잘 곳과 삼시세끼는 해결된다.

"최소한 제가 그만두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긴 하네요."

반대로, 조나단은 카이루스를 해고하고 싶어도 해고 의사를 통보한 이후 최소한 한 달의 여유를 줘야 한다.

설사 해고한다 해도, 카이루스에게 다른 일을 알아볼 시간적 여유를 주겠다는 뜻이다.

"토미 놈의 소개로 온 거니 그래도 나가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가게 해주는 거야 이놈아."

교화소에 있는 지인의 추천이 아니었으면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는 형태의 계약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사실, 베넷 시에서는 아예 먼저 목돈을 지급한 다음 그걸 다 갚기 전까지는 때려칠 수도 없고, 해고당하면 그게 그대로 빚이 되어버리는 식의 계약도 흔하다.

심지어 먼저 지급한 목돈에는 상당한 수준의 이자도 붙고, 제공되는 숙소와 식사는 별도 비용까지 뜯어가는 경우도 있다.

"아이란 공화국의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제공하는 숙소의 숙박비를 매일 25드램, 제국 화폐로 환산하면 반 파인트 정도의 돈을 내야 하는데, 숙소 꼴이 어떤 줄 아냐?"

"아니요."

"의자를 일렬로 쭉 배치하고, 그 의자 앞에 사람 가슴 정도 높이의 밧줄을 걸어둔 게 숙소다."

한참 고민하던 카이루스는 결국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숙소면, 어떻게 잠을 자라는 겁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앞으로 엎드리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의자에 앉아서, 걸어놓은 밧줄에 상반신을 올려두고 잠을 자는 거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 같네요."

그딴 게 심지어 유료 숙소다. 공짜도 아니고 돈을 내야 사용할 수 있는 잠자리라는 뜻이다.

"너그러운 처우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두령."

카이루스는 방금 전에 자신이 노예와 다름없는 처우를 받는다고 했던 걸 취소하고 싶어졌다.

조나단과 함께 보증소로 동행하던 카이루스가 질문했다.

"장미정원의 보증소는 여기에서 멉니까?"

"아니. 그렇게 멀지 않다."

조나단의 대답대로, 두 사람은 얼마 걷지 않아 금방 장미정원의 보증소가 있는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큰 크기는 아니었다. 조나단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이루스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동의했으면, 그 계약은 준수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카이루스가 선선히 동의했다. 곧바로 남자가 좋아요, 라고 말한 다음 말을 이었다.

"계약 내용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만, 어차피 구두로 내용이 오갔을 테니 제가 직접 이 서류의 내용을 읽어드리죠."

"그럴 필요 없으이. 저 녀석 글 읽을 줄 알아."

조나단의 말에 보증을 담당하는 남자가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신기하다는 듯이 카이루스를 바라본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데 종업원이라. 어쨌든, 그렇다면 일이 더 빠르게 처리됩니다."

남자가 조나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약 위반 시, 어떤 대가를 상대로부터 받으시겠습니까?"

"오른팔."

저런, 카이루스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조나단을 바라봤다.

"돈을 받아 가실 줄 알았는데요."

"종업원으로 일하겠다고 들어온 녀석이 무슨 돈이 있겠냐."

조나단은 그렇게 말하고 검지로 내 오른팔을 슥 자르는 시늉을 했다.

"네놈이 계약을 어긴다면, 돈 받기는 글렀으니 그냥 기분전환이라도 하겠다는 거지."

기분전환으로 오른팔을 가져가다니.

"상대분은?"

남자가 카이루스를 바라봤다.

"1년 치 주급."

하지만 카이루스에게는 기분전환보다는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더 중요하다. 카이루스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의 계약은 장미정원의 이름으로 보증됩니다. 계약 위반이 있을 시 장미정원에서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지금 상호 합의한 위약금을 받아 갈 겁니다."

남자는 추가 서류에 빠르게 내용을 기록한 다음, 조나단과 카이루스를 바라봤다.

"알고 계시겠지만, 대가를 지불할 수 없거나… 그 대가를 잃고 싶지 않을 경우에는 딱 한 가지 대체방법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조나단이 엄지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지불하기로 한 대가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자살. 장미정원이 보고 있는 앞에서 죽으면 된다.

"알고 계시다니 기쁘네요."

"그런 조항을 넣는 이유가…?"

카이루스의 질문에 남자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최근 사례의 경우에는 결혼한 남녀가 있었는데, 불륜 행위를 통한 임신이 발각되면 그 아이를 여자가 자기 손으로 죽이는 계약이었죠."

서로 동의했다고 해도, 그건 좀 잔인한 것 같은데. 카이루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무렵, 남자가 대답했다.

"여자가 정말로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런 잔혹한 계약의 이행을 원치 않을 경우… 우리가 마련한 대체방법이 도움이 될 수 있지요."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자신이 죽는 거다. 장미정원이 허락하는 유일한 대체방법이다.

"목숨보다 중요한 무언가, 또는 목숨을 잃더라도 하고 싶지 않은 행위가 있다면 장미정원은 그것까지 강요하지는 않는다. 뭐, 그런 취지로 마련된 제도입니다."

보증소 직원은 실제로 그 여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해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계약이건, 장미정원의 보증을 받게 되면 그 내용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대가건, 장미정원 앞에서 말했다면 계약을 어겼을 시 장미정원은 그걸 가져간다.

정 대가를 지불하기 싫다면 장미정원의 참관하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된다.

"그럼, 보증의 대가를 계산하겠습니다. 이런 평범한 노동계약의 경우 1500파인트입니다. 지불은 나눠서 해주셔도 됩니다만, 그럴 경우 보증된 내용의 이행은 전액 지불 후 이루어집니다."

조나단이 곧바로 지폐를 꺼냈다.

"일시불로 하지."

"확인해보겠습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두 분의 계약 내용은 장미정원이 사본을 보관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다음, 남자가 우리 두 명이 동의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의 문양은 장미 장식이 달린 깃펜 모양이었다.

"그럼, 정식으로 일하게 된 걸 축하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령."

카이루스는 이걸로 마침내 롱웨이브 비스트로의 종업원이 되었다.

최소한 노숙자 신세는 면한 셈이다.

어디까지나 잠깐 몸을 의탁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이루스가 대충 일하는 시늉만 할 생각인 건 아니다.

상호 동의하에 약속 한 일이고,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굳이 장미정원의 보증을 받지 않아도 카이루스 자신이 약속이라고 인지한 것들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한다.

* * *

이후, 카이루스는 롱웨이브 비스트로에서 약 2달을 일했다.

롱웨이브 비스트로는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영업한다. 가게를 열기 전 준비해야 할 것들이나, 닫고 난 다음 해야 할 일들도 있다.

그 시간까지 모두 제외하고 나면 카이루스에게는 하루에 대충 서너 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이 생긴다.

적은 시간은 아니지만, 농조연운의 흔적을 수색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여가시간이다.

거기에 더해 이 베넷 시는 기본적으로 처음 보는 양반들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자리잡고 있기에 혼자 농조연운의 행방을 수색하는 진척은 느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2달 정도 일하는 사이, 카이루스는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알아냈다.

어린 소년이 가게에 전보 한 통을 전해주자, 그걸 받아든 조나단이 곧바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외출하십니까?"

"그래."

롱웨이브 비스트로는 배달도 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대부분의 배달은 카이루스가 직접 음식을 챙겨들고 요청한 곳으로 가는 방식이다.

그게 흥미로운 건 아니다. 조나단은 열흘마다 한 번, 카이루스에게 가게 열 준비를 맡기고 자신은 직접 어딘가로 음식을 배달한다는 점이 흥미로운 거다.

가게 주인이 종업원에게 가게를 맡기고 직접 배달을 가는 것도 신기한데, 조나단이 직접 배달하는 음식도 다른 배달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

아니… 애초에 사용하는 재료 자체가 다르다. 금눈돔에 소고기 채끝살, 갖은 식용 야생버섯은 물론이고 꿀과 버터, 후추, 회향, 정향 따위 갖은 향신료들까지.

카이루스가 몰락 귀족이 아니었다면 볼 기회조차 없었을 식재료들이다.

어디에서 구해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카이루스가 식자재를 받아오는 가게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것들뿐이다.

8화 불청객

* * *

생각을 이어가던 카이루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왕이라도 대접하는 건가."

카이루스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 정도의 식재료를 이렇게나 마음껏 쓰는 경우는 페더윙 가문에서도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의 아버지는 필요 이상의 사치를 별로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긴 뭐, 누군지는 몰라도 고작 음식 배달을 시키려고 전보를 치는 사람이니.'

음식 배달이 가능하다는 건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는 뜻이다. 사람을 보내지 않고 대신 전보를 치는 건 상당한 돈 낭비다.

어쨌든, 조나단이 저 '특별 배달' 때문에 자리를 비우면 대략 3―4시간 정도 카이루스 혼자 남아 가게 열 준비를 하게 된다.

"다른 건 다 끝났고…."

오늘도 조나단이 자리를 비운 사이, 카이루스는 가게를 열 준비를 이어가고 있었다.

테이블 세팅을 하고 있는 카이루스의 등 뒤로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롱웨이브 비스트로입니다. 지금은 영업 중이 아닌…."

상대를 확인한 카이루스는 하던 말을 멈췄다. 코트와 중절모를 갖춰입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다.

카이루스가 말을 멈춘 이유는 복장 때문이 아니다.

"… 신사분, 팔이 참 기네요."

팔이 얼마나 긴지 무릎을 살짝 넘을 지경이고, 입고 있는 코트의 소매는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다.

"아,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조나단 씨 되십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바짝 마른 나무등걸을 갈퀴로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카이루스와 수상한 남자는 서로 시선을 마주친 채 잠깐 동안 시간을 보냈다.

"신사분이 먼저 이름을 밝히는 게 예의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가게는 아직 영업 중이 아닌데요."

카이루스의 말에 남자가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신분을 밝힐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내 질문에 대답해주면 참 좋겠습니다."

척, 하고 남자가 한 걸음 카이루스에게 다가왔다. 스릉, 하는 낮고 섬뜩한 쇳소리가 카이루스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저 남자의 긴 소매 아래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붙이가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소리였다.

"어려울 거 없죠. 시청에서 몇 가지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주시면 요청하신 사안을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카이루스가 대충 개소리를 늘어놓으며 시간을 벌려고 하자마자, 남자가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카이루스도 검을 뽑아들고 대항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카이루스가 쥔 검이 남자가 휘두른 팔과 격돌했다.

질질 끌리는 긴 소매 아래에 숨어있었던 건, 네 뼘 정도의 칼날 길이를 자랑하는 한 쌍의 클로였다.

검과 클로의 칼날이 서로 비벼지며 끼긱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여긴 식당이다. 손톱관리는 메뉴판에 없어, 긴팔원숭이 새끼야."

"이거 참, 너 같은 놈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돈을 좀 더 받았어야 하는데."

실력은 카이루스가 위다. 하지만 카이루스가 눈앞의 남자를 상대하는 데 있어 문제가 하나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초라한 식당에서 일하는 꼴을 보니 주머니 사정도 알 법하군. 그러니 장비도 허접하지."

상대가 가진 배틀기어의 출력이 카이루스의 것보다 훨씬 좋다. 소매가 잘려나가고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클로에는 선명하게 '베네루스'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벨라진 아머리에서 생산되는 상위 라인업 브랜드다. 가격도 비싸고, 비싼 만큼 성능도 뛰어나다. 그리고 가장 큰 특징이라면….

슬쩍 뒤로 물러난 상대가 양손에 장착한 클로를 서로 비비자, 양 클로에 화염이 확 일어나고 잦아들기를 반복한다.

"도대체 그걸 어디에서 구했냐?"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배틀기어가 화염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특허권도 있을 거다.

"이 일을 오래하다 보면 돈도 많이 만지고, 친한 사람들도 생기는 법이지."

아는 사람 통해서 돈 주고 구했다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한다. 카이루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움직임을 준비하자, 녀석이 슬쩍 자세를 풀며 말했다.

"돈 받고 죽이기로 한 건 이 가게의 주인장인 조나단이야. 종업원을 죽이라는 이야기는 없었어."

클로를 낀 남자는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겨 나가는 문을 내주었다.

"그냥 나가지 그래? 난 공짜로 사람 죽이는 취미가 없단 말이지."

카이루스가 남자의 말에 하하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리 신사분은 조용히 우리 두령님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겠지?"

카이루스가 저 제안을 받아 가게를 나가면 조나단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가게로 돌아올 거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을 거다. 조나단은 배틀기어를 다룰 줄 알고, 실력도 분명 나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방심한 와중에, 저 정도의 실력자에게 급습당해도 살아남을 정도의 실력자는 아니다.

고로, 여기에서 카이루스가 떠나면 조나단은 확실하게 죽는다.

"너랑 관련 없는 일이지 않나?"

"고용주가 뒈질 판인데 고용인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맨날 사람만 죽이지 말고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좀 해보는 건 어때. 인생경험은 소중한 거야."

먹고살 길 없는 카이루스를 교화소에 가 있는 친구만 믿고 고용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 주는 양반이다.

물론 카이루스도 그만큼의 노동을 제공하고 있으니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냥 갈 수는 없다.

대답을 들은 남자가 팔을 천천히 들어올려 카이루스를 겨눈다.

"그럼, 거절로 이해하면 되는 건가?"

"삐꾸 새끼. 설마 동의하는 걸로 들렸냐?"

더 이상 카이루스와 남자가 나눌 대화는 없다.

클로를 장착한 양팔을 축 늘어뜨리고 천천히 흔들던 남자가 양발에 힘을 주었다.

납작 엎드려서 사방팔방으로 요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꼭 바퀴벌레 같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상대의 시야각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예리하게 노리고 있다.

"그 말 후회하게 해주지. 나는 너같이 건방 떠는 새끼들을 무수히 상대해왔다!"

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가속한 상대가 카이루스의 목을 노리고 한 쌍의 클로를 휘둘렀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쇳소리와 함께, 그가 휘두른 클로를 카이루스의 검이 막아선다. 쇠와 쇠가 마찰하며 끼긱, 하는 듣기 싫은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퍼진다.

"상대가 병신같이 약했나보지. 내가 알 게 뭐야? 이미 뒈진 새끼 시체라도 붙들고 물어볼까?"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카이루스가 단언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끼릭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이루스의 검을 클로가 조금씩 깎아나간다.

"혓바닥은 잘 놀리는구나. 이대로 그 너절한 검과 함께 썰어주마."

"음. 검이 좀 싸구려긴 해."

장인이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건 개소리가 확실하다.

저렴한 싸구려 배틀기어가 카이루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싸움을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는 너 따위는 씨발라먹을 수 있는데."

싸우는 법을 제대로 공부할 기회도 가져보지 못한 놈이다.

길바닥을 굴러다니며 본능적으로 사람 멱 따는 법을 알게 된 것뿐이다.

"싸움을 공부한다고? 별 개똥같은 소리 다 들어보겠군."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이루스를 바라봤다.

자고로 전투는 머리로 익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구르고 경험하며 몸이 익숙해져야 한다. 그게 이 남자가 이해하고 있는 강해지는 법이다.

"전투를 글줄로 배우는 병신이 있다니."

상대가 카이루스를 대놓고 무시한다. 카이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럼 넌 딱 거기까지라는 뜻이야. 배틀기어 사용법을 알게 되었지만 그 이상의 욕심은 없는 재수좋은 망나니."

뒤로 약간 물러난 카이루스가 허공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배틀기어가 가지고 있는 출력은 가장 단순하게는 마력이라는 단위로 표현된다.

뭔가를 측정하는 단위는 직관적이고 확실한 게 좋다. 그래서 배틀기어의 출력을 전부 힘으로 전환했을 때 말 몇 마리에 해당하는 힘을 낼 수 있는지를 기준단위로 삼은 거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사람들은 오랜 세월 배틀기어를 연구 및 개발하고, 적절한 사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식과 경험, 데이터는 공부할 가치가 있는 학문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당장 너 같은 녀석들은 자기가 쓰는 배틀기어가 어떤 원리로 불을 만들어내는지도 모르잖아."

"칼이 잘 썰리면 끝이지, 원리까지 알아야 하냐?"

꽤나 타당한 반박이었다. 원리를 몰라도 쓸 수는 있다. 카이루스는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맞아. 굳이 알 필요 없어."

카이루스가 손에 쥔 칼에 화염이 피어오른다.

"평생 배틀기어 제조사에서 제공해주는 기능만 써도 만족하는 너 같은 머저리들은."

배틀기어의 출력을 활용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힘만 강해지는 게 아니다.

"출력을 활용해 불을 만드는 원리를 모르면, 벨라진 아머리가 어떻게 그런 클로를 만들겠냐? 생각을 좀 해봐라."

원리를 모르면 만들 수 없다. 고로 만들 수 있다면 원리를 아는 거다.

검이 휘둘러진다. 검에 휘감긴 불꽃으로 달궈진 열풍이 검을 타고 퍼져나가며 휘몰아친다.

자신에게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을 견디며, 상대가 이를 간다.

"바람? 너 이 새끼, 설마하니 페더윙 밑 닦아주던 놈이었냐."

"거참, 검술이 너무 유명해도 문제라니까."

페더윙의 검술 중에서는 제풍이 가장 유명하다. 페더윙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면 외부인도 배울 수 있는 검술이었으니까.

사용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으니 세간 사람들이 견식 할 기회가 가장 많았던 검술이고, 그렇기에 가장 유명하다.

제풍의 위용은 페더윙이 멸문당하고 6년이 지난 지금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는 카이루스를 페더윙에서 제풍을 배운 외부인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페더윙은 멸문당해 전부 죽었다고 알려졌으니까.

"유명 같은 소리하네. 황제에게 깝치다가 멸문당한 등신들 졸개노릇하다 이 망할 도시까지 굴러들어온 놈이."

식당 안에 몰아치는 열풍 속에서 상대는 발악하듯 계속 말을 이어간다.

"애초에, 별로 강하지도 않으면서 소문만 근사한 녀석들 아니었냐? 제국 최강이라고 불리던 것들이 황제가 변심했다고 쉽사리 멸문당할 정도니."

제국에서 가장 강한 가문이라는 페더윙이 왜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멸문당했는가.

카이루스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새끼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다.

"그래? 멸문당한 등신들의 검술에 뒈진 다음, 지옥 가서 자랑이나 하셔."

카이루스의 검을 타고 바람이 따라 춤춘다.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몰아친다.'

식당 내부를 휘도는 인위적인 바람이 카이루스의 움직임에 힘을 더하고, 적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탁월풍(卓越風).

배틀기어의 출력과 검의 움직임으로 바람을 만들어내고, 방향성을 유지하며 힘을 더한다. 제풍의 기초다.

탁월풍을 해내지 못하면 다른 기술은 가르쳐주지도 않고, 설사 가르쳐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을 허공으로 날려버릴 정도의 강풍은 아니다.

'만들 수는 있는데.'

그 정도로 강력한 상승기류를 이딴 출력의 배틀기어로 만들어내려면 허공에 약 5분 정도는 칼질을 해야 한다.

쌈박질하는 와중에 5분 동안 헛칼질을 하겠다고?

'그 지랄하다 죽으면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지.'

그런 바보짓을 하지 않아도 지금 만들어낸 탁월풍만으로도 카이루스는 충분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9화 불청객 (2)

* * *

"야, 너도 불꽃 피워봐. 비싼 배틀기어 알차게 써먹어야지."

입으로는 상대를 비웃으면서도 카이루스의 몸은 쉬지않고 검의 궤도, 무기와 무기의 격돌이 만들어내는 충격에 맞춰 움직인다.

단순히 공방을 이어가는 걸로 끝이 아니다. 카이루스의 움직임은 지금 실내에 몰아치는 바람을 유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버텨야 한다. 휘말리면 죽는다.'

카이루스를 상대하는 적 또한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바람에 의해 균형을 잃는 순간, 강풍은 살점을 베어내는 소용돌이로 변해 칼날과 함께 대상을 분쇄육처럼 갈아버린다.

탁월풍에서 이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연계다. 하지만 이 기초적인 연계에 죽은 녀석들이 공동묘지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을 거다.

"이거 참. 원래 이런 식으로 처리 할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상대가 뒤로 물러나며 길게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날카롭고 높은 음색이 퍼져나간다.

휘파람 소리가 멈추자마자, 식당 문이 박살나며 무장한 남정네들이 마구 들이닥친다. 카이루스가 그 광경을 본 다음 애매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에이 씨발, 혼자 온 줄 알았는데 단체손님이었네."

카이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이 녀석이 혼자 활동할 거라고 단정 지은 것을 이제서야 후회했다.

하지만 오히려 저걸 상상하는 게 더 힘들긴 했다. 자신만만하게 혼자 들어온 녀석이 사실 쫄보처럼 밖에 동료들을 대기시켜 놓았을 거라고 생각하긴 힘드니까.

동료를 부른 녀석이 양손의 클로를 마찰해 불꽃을 피워올리며 히죽 웃었다.

"가능하면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원칙이었거든. 하지만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원망하시던가."

"원망까지 할 거 있나. 하지만, 이래서는 네놈이 온 목적은 달성 못하지?"

원래 저 녀석의 목적은 기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나단은 장님이 아니다. 식당 문을 저렇게 박살 내놓은 이상 당연히 조나단도 자기 식당에 뭔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상관없다. 임무를 실패하면 돈을 못 받지만, 여기서 죽으면 다 끝이니까."

스물정도 되어보이는 남자들이 카이루스를 중심에 두고 둘러싼다.

"그건 그래."

죽으면 다 끝이다. 하지만 죽지 않고 있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결국 카이루스도 죽지 않고 버티는 데 성공했기에 그 끔찍한 노동교화소를 벗어나 베넷 시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실력으로 안 될 것 같으니 양으로 밀어붙여서 어떻게든 해보시겠다?"

카이루스의 질문에 녀석들 중 한 명이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페더윙에서 칼질 배운 새끼들은 실내 떼싸움에 약하다고 하던데."

끌어들일 외부의 바람이 없는 실내전과 바람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움직임이 많은 다대다 싸움에 약하다.

꽤나 많이 알려진 제풍의 약점이다.

"소문을 다 믿지는 마."

검을 살짝 들어올린 카이루스가 확언과 함께, 사선으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방향을 잃고 위태롭게 넘실거리던 바람이 그 움직임과 함께 폭발하듯 카이루스에게로 빨려들어간다.

방금 전까지 움직임을 방해하던 탁월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항해보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강풍에 떠밀려 카이루스를 향해 질질 끌려가고 있다.

"약점이라고 알려진 것들 중 대부분은, 그냥 진 새끼가 이긴 놈보다 약했을 뿐이거든."

카이루스는 코앞까지 끌려온 녀석을 붙잡아 목에 칼을 쑤셔박았다.

"너처럼."

으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칼끝이 두개골을 부수고 파고든다. 칼끝이 뇌 속을 후빈다. 눈과 코, 귀에서 뇌수 섞인 피가 쏟아져내린다.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카이루스는 죽은 시체의 머리통을 잘라낸 다음 발로 툭 차서 적들 앞으로 굴려보냈다.

"…."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을 바라본다.

굴러가던 머리통이 녀석들 앞에 딱 멈췄다. 녀석들 중 한 명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미친 새끼. 이미 뒈진 놈 머리통은 뭐하러 자른 거냐."

"미친 새끼? 멀쩡한 대낮에 사람 죽이겠다고 식당 문을 때려부수고 들어온 녀석들이 누구보고 미친 새끼라는 거야."

먼저 미친 짓을 한 건 카이루스가 아니라 저 녀석들이다. 그리고 카이루스가 이런 짓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늑대 한 마리가 양 100마리를 학살할 수 있는 이유는 늑대 한 마리가 양 100마리의 반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서가 아니다.

양 100마리가 반격이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으니까 가능한 거다.

기세에서 이기고 들어가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승기를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일부러 죽은 사람 머리를 잘라서 볼링을 친거다.

"덤비거나, 아니면…."

카이루스는 검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카이루스가 빨아들인 바람은 그의 주변을 휘감은 채 낮게 진동하고 있다.

"꺼져."

말을 하면서, 카이루스는 이따금 바람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다. 자신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게 가둬두는 동시에 바람이 힘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행동이다.

칼질을 반복하며, 카이루스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중인데, 이 말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으면 너희들 중 몇 명은 후회하게 될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이루스가 느긋하게 휘두르던 검에 갑자기 힘과 속도가 붙었다.

뭔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내 팔이!"

감싸 쥔 팔의 절단면에서 울컥거리며 피가 쏟아져 내린다. 한 명만 그 꼴이 된 건 아니다.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는 녀석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비명을 질러야 하는 머리가 떨어져 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으니까.

"말했잖아.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마지막 기회다. 계속 그렇게 숫자 믿고 고집부리다가 머리통이 잘리거나…."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른손 엄지를 척 하고 내밀었다.

"순순히 항복한 다음, 주로 쓰는 손 엄지를 하나 포기하는 대가로 살아서 두 발로 이 식당을 스스로 나가."

엄지를 내놔라.

카이루스의 말에 깡패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은 모두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손가락이 있다면 당연히 엄지다.

없으면 못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진다. 엄지가 없으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중 상당수를 할 수 없게 된다.

근데 이 망할 식당의 종업원으로 보이는 저 자식은 지금 이 깡패들에게 스스로 그 중요한 엄지를 잘라버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거다.

"뭐야 그 표정들은. 관짝 들어갈 때 대가리 없는 것보다 한 손 엄지 없는 게 더 싫냐?"

카이루스는 이들 중 몇 명의 목숨을 석 달 굶은 거지가 식은 스튜 먹어치우듯 해치워버렸다. 슬프게도 카이루스와 이들 사이의 실력차는 명백하다.

그나마 카이루스를 잠시나마 막을 수 있는 녀석이라고 해봤자 양손에 클로를 차고 있는 긴팔원숭이 정도다.

저 녀석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번다면 아마 여기 있는 녀석들 중 70% 정도는 살아서 도망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선택을 과연 저 클로 낀 녀석이 할까?

"지미럴, 이건 또 다 무슨 소란이야!"

하지만, 한참 전에 박살난 식당 문 너머에서 조나단의 외침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그 희미한 가능성조차 박살나버렸다.

이미 식당 문이 박살나 있는 시점에서 뭔가를 눈치챈 모양인지 이미 조나단의 양손에는 금속 광택이 반짝이는 너클이 끼워져 있다.

조나단이 바닥에 입담배를 퉤 뱉은 다음, 양손의 너클을 부딪쳐 금속음을 낸다.

"두령님, 이게 처음부터 말하자면 좀 긴 이야기인데요."

"요점만."

조나단의 요청에 카이루스가 순순히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말했다.

"일단 제 잘못은 아닙니다."

재빠르게 책임회피를 하는 카이루스의 모습은 차라리 식당 종업원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마리 게으르고 무능한 공무원과 같았다.

대답을 들은 조나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이루스를 바라본다.

"할 말이 그게 전부냐?"

"그러니 해고하지 말아주세요."

아직 베넷 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때가 되면 더 이상 신세 지지 않고 떠날 생각이지만, 카이루스에게 있어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해고하면 이 핏자국이랑 시체는 누가 치워. 이렇게 나이 처먹고 늙은 내가 치우리?"

조나단은 그렇게 말하며 문 앞에 척 하니 멈춰선 채 우락부락한 근육을 꿈틀거린다.

"두령님은 늙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근육질인데요."

젊은 청년 한 무더기가 덤벼도 조나단이라면 웃으며 너클을 휘둘러 강냉이를 죄다 털어낸 다음, 팝콘으로 만들 수 있을 거다.

조나단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씹는 입담배의 유독성분도 아마 저 근육이 무서워서 몸 안에서 별 개짓거리 안 하고 얌전히 있을 거 아닐까?

"비, 비켜!"

어리석은 머저리가 슬프게도 무기를 휘두르며 조나단을 향해 덤벼들었다. 조나단의 우람하고 탄력적인 근육을 보고도 감히 달려들 생각을 하다니.

"허어, 요것 봐라."

번쩍이는 금속 너클이 순식간에 상대의 옆구리를 강타하고, 썩은 나뭇가지 같은 게 바스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상대가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턱주가리에 어퍼컷이 추가로 작렬한다. 상대는 피와 강냉이를 폭포수처럼 하늘로 뿜어올린다.

"이야. 실력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으신데요."

카이루스는 그 연격을 보며 감탄했다. 실로 깔끔한 공격이었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무조건 기술이 화려한 건 아니고, 기술이 화려하다고 무조건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러냐?"

"군인들 사료로 제공되는 한 덩이 건빵같이 단단한 일격이었습니다."

"새끼, 띄워주긴."

단순하지만 실력의 깊이가 느껴진다.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빵 이야기 나와서 말인데, 얼마나 남았냐?"

카이루스는 덤벼드는 녀석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한 이틀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대답했다.

"이 자식들 대충 처리한 다음, 가서 빵 좀 더 받아와라."

"네? 충분할 것 같은데."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대답했다.

"내일은 성 페테스 대축일이다."

덤벼든 상대가 잘려나간 손목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비명을 지른다.

그사이 카이루스는 성 페테스 대축일이 뭐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케케묵은 기억을 떠올리고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생각해보니 그런 날도 있었네요."

2년 동안 이어진 기근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다 못한 사제가 기도를 통해 호수 하나를 빵으로 가득 채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 기적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성 페테스 대축일이다.

"그냥 제빵사들이 대충 지어낸 이야기 같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코웃음 쳤다.

"무슨 상관이야. 사람들이 그 날 빵을 잔뜩 먹으니, 우리는 돈을 벌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세상만사가 다 그런 법이다.

"일단, 빵을 받아오건 뭘 하건 간에 당장 이 잡것들을 처리하는 게 최우선이죠? 두령님께 뭔가 좋은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어보고 싶습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기가 막힌 방법을 알고 있거든."

조나단이 녀석들 중 하나에게 달려들어 양손으로 그놈을 번쩍 들어올린 다음, 곧장 자신의 무릎 위로 녀석의 허리를 내려찍었다.

뼈가 아작나고 어긋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상대는 더 이상 척추가 곧추서지 못하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보던 카이루스가 작게 어우, 하는 소리를 내고는 다른 녀석들에게 말했다.

"항복하고 싶으면 지금도 늦지 않았어. 방법은 이미 알려줬고."

엄지 하나를 내놓으면 된다. 이젠 적의 머릿수도 하나 더 늘어서, 일제히 도주한다고 해도 살아남을 가망이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엄지 하나를 바치고 살아서 나간다는 게 이들에게도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가장 먼저 무기를 버리고 자신의 오른손 엄지를 잘라낸 것은 흥미롭게도 카이루스가 제일 먼저 상대했었던 긴 팔로 클로를 사용하는 녀석이었다.

"이건 좀 의외인데. 너가 제일 먼저 자를 줄은 몰랐다."

"의외? 의외 같은 소리하네. 난… 살고 싶다고."

녀석이 막 잘라낸 엄지를 카이루스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 네가 원하는 내 엄지다. 이제 보내줘."

"잠깐만. 손 내밀어봐."

카이루스는 그 엄지를 확인한 다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대의 손에서 엄지가 진짜 잘려나갔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10화 불청객 (3)

* * *

잘려나간 엄지의 단면을 보면, 조금의 고민도 없이 절단한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좋아. 이제 나가봐."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놈아. 여긴 내 가게야."

"하지만 이 녀석들을 주로 상대 한 건 저잖아요."

적으로 맞이해서 상대한 건 카이루스니까, 이 녀석들의 처우도 카이루스가 정하는게 딱히 이상 할 건 없다.

"나를 노리고 온 거잖냐."

"이제 안 노릴겁니다. 정확히는, 못 노리지 않을까요?"

엄지가 없으면 무기를 꽉 쥘 수 없으니, 제대로 쓸 수 있는 무기의 숫자는 굉장히 제한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떤 새끼가 돈을 내고 내 멱을 따려고 했다는 거잖아. 그게 중요한거다."

카이루스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 클로쟁이를 바라봤다.

"나는 보내주고 싶은데, 우리 두령님은 누가 널 고용 한 건지 말해야 보내 줄 모양이야."

카이루스의 말에 상대가 억울하다는 듯이 카이루스를 바라봤다.

"엄지만 자르면 보내 준다고 하지 않았냐!"

"나는 보내 줄 용의가 차고 넘쳐. 하지만 말이야."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한 다음 조나단을 바라봤다.

"뭐라고 해야 하나. 허가를 한 명한테 더 받아야 되는 상황이 된 셈이지. 약속이라고 해도 우리 두령님은 내 부하거나 고용된 사람이 아니거든."

카이루스가 명령을 내려서 따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카이루스가 조나단에게 고용된 부하다.

위쪽에서 거절하면, 이미 한 약속이라고 해도 지켜질 수 없는 법이다. 카이루스가 한 약속은 카이루스만 구속하니까.

아까도 카이루스가 생각한 거지만, 이 긴팔 원숭이는 사회생활을 좀 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카이루스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 두령님도 누가 보낸 건지만 알게 되면 내 제안에 동의 할 거야. 그렇죠?"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시킨 건지만 털어놔. 그럼 이 녀석의 제안대로 하지."

판은 마련되었다. 결국 엄지가 잘려나간 단면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던 녀석이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듣지는 못했어. 애초에 돈을 받았으면 상대가 누군지 알 바는 아니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저런 대답으로는 당연히 조나단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래도 뭔가 특징 같은 건 있었을텐데."

조나단은 제거하기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거물은 아니다. 과거에는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싸움을 제법 잘하고 요리를 맛있게 하는 식당 주인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런 의뢰를 한 상대도 당연히 무지막지한 강자나 무수한 부하를 데리고 다니는 암흑가의 거물 같은 녀석들이 아니라는 뜻이지.

본인이 직접 의뢰를 했을 확률이 높고, 그게 아니라 해도 접선한 상대의 특징을 알아낸다면 그 흔적을 따라가는게 어렵진 않을거다.

"왼팔뚝에 문신이 있던데. 머리카락 대신 뱀이 달려있는 여자의 얼굴이었어."

"아주 기가 막힌 등신 새끼로군.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거람?"

카이루스는 곧바로 한 마디 했다. 세상에, 사람 죽여달라는 의뢰를 하러 가면서 문신을 새겨놓은 팔도 안 가리다니.

베넷 시가 아니라도 뭔가 뒤가 구린 일을 할 때 문신 같은 특징을 숨기는 건 상식이다.

게다가 무슨 닻 문신이나 해골, 장미 같은 흔해 빠진 문신도 아니다. 그 정도면 사실 상 찾아내서 죽여달라고 비는 수준이다.

죽여달라는 사람이 사실은 자신이었던 거 아닐까?

"그 정도면 될 것 같군."

조나단도 저 정도 특징이라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곧바로 옆으로 약간 비켜서며 나가는 길을 내주었다.

"꺼져, 그리고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손님으로 와라."

"망할, 너 같으면 오겠냐?"

녀석이 곧바로 반박했다. 개처럼 두들겨맞다가 엄지가 잘린 다음 꼬리 말고 도망간 곳이다.

며칠 굶었다고 해도 여기에서 돈 주고 밥 먹고 싶은 생각은 없을거다.

"그럼 잘 가고. 손님으로 와도 진상질하면 다른 손 엄지도 날려버린다."

카이루스는 그렇게 인사를 한 다음 남은 녀석들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어쩔래. 엄지? 아니면 머리?"

둘 중 하나는 잘려야 여기에서 나갈 수 있다. 카이루스의 말에 사람들이 이를 악물고 자신의 엄지를 바라본다.

"아, 혹시 직접 자르는 게 무섭다면 내가 직접 해줄 수도 있어."

남 배는 칼로 쑤셔도 자기 엄지를 바늘로 찔러서 피 내는 건 못하는 녀석들도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카이루스는 기꺼이 남의 엄지를 썰어 줄 준비가 되어있다.

"크하아…."

그리고 하나씩, 사람들이 자신의 엄지를 썰어내기 시작한다. 다들 머리가 잘리는 것보다는 엄지를 자르는 편을 선택한 모양이다.

"야, 너는 멈춰."

카이루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 명을 멈춰 세웠다.

"나… 나 말인가?"

카이루스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왼손잡이잖아. 근데 왜 오른손 엄지를 잘랐냐. 나랑 장난치고 싶은 모양이지?"

카이루스의 말에 녀석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벙긋거린다.

"난 원래 오른손잡이야."

"지랄하네. 방금 전에 싸울 때 왼손을 주로 쓰는 걸 다 봤어 새끼야."

카이루스의 말에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잠깐 사이에 본 걸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고?

설마하니 여기에 있는 녀석들이 어떤 손을 주로 쓰는지 다 기억하고 있는 건가.

지적을 받은 남자는 눈앞이 컴컴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서 왼손 엄지 다시 잘라."

그리고 카이루스는 그가 잘라서 건네준 엄지를 다시 녀석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뭐… 다시 이어붙일 재주가 있으면 이어붙여보든가. 왜 엄한 엄지를 자르고 지랄이야."

결국, 잔꾀를 부렸던 녀석은 양손의 엄지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 잘라야 하는 엄지가 하나에서 둘로 늘었다지만, 여전히 머리가 잘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다 기억하고 있으니 개수작 부리지 말고 지금이라도 순순히 잘라라. 방금 전에는 처음 걸린 거니 그냥 경고만 했지만…."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하고 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다음 녀석부터는 걸리면 경고 없이 바로 어깨 위에 달린 수박 수확을 실시한다."

머리통이 없어진 다음에는 후회도 하지 못한다.

게다가 방금 전 다른 손의 엄지를 자른 녀석을 귀신같이 찾아낸 걸 보면 카이루스의 엄포를 단순한 협박으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대충 5명 정도가 눈속임을 시도한 대가로 양손의 엄지를 모두 잃게 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들은 아직까지 엄지를 자르는 걸 주저하고 있었을 뿐이다.

"앞으로 서로 평생 동안 볼 일 없이,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며 세월을 보내다 늙어 죽자고."

카이루스는 필요한 절차를 모두 끝낸 사람들을 향해 안부인사를 하며 길을 내주었다.

녀석들이 다 돌아간 다음, 카이루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걸레를 챙기러 부엌으로 향했다.

"왜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나단이 대뜸 카이루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바닥이 더럽잖아요. 두령님, 설마 이대로 장사하실 겁니까? 손님들 밥맛도 떨어지고 매상도 떨어질 텐데."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대답했다.

"그거 말고 이 새끼야. 굳이 여기에서 저 새끼들을 상대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잖냐."

베넷 시에서는 흔한 일이다. 고용주고 나발이고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면 일단 살고 보자는 생각으로 도망치는 게 일반적이다.

사실, 그게 상식이기도 하고. 카이루스는 부엌에서 대걸레를 꺼내오며 대답했다.

"두령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제가 가게를 지키기로 했잖습니까. 전 약속은 지키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어디까지나 노력하는 거다. 지킬 수 없게 된 약속이라면 그건 카이루스도 지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 지키게 된 약속을 지켜보겠답시고 떼를 쓰지는 않는다는 거다.

카이루스의 삶에 규칙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겠지.

대답을 들은 조나단이 잠깐 카이루스를 보다가 입에 씹는 담배를 한 줌 넣으며 말했다.

"그러냐? 알았다."

카이루스와 조나단은 다시금 부지런히 움직여 어떻게든 가게 문을 열 시간이 되기 전에 가게 안을 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박살난 문은 어쩌죠? 오늘 중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닌데."

"그냥 둬. 이 동네에 문짝 박살난 가게가 한두 개 있는 것도 아닌데. 다들 뭐 강도라도 들었었나? 같은 생각 하면서 들어올 거다."

그게 정상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나단의 대답이 너무나도 시원스러워서 카이루스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식당 주인 죽이겠답시고 청부살인을 하는 동네다. 식당 문짝이 박살난 건 베넷 시에서는 사실 서빙하다 유리잔 하나 깨진 정도다.

"어쨌든, 고맙다."

카이루스가 식당에 들이닥쳤던 녀석의 말을 순순히 듣고 그냥 식당을 나갔다면, 조나단은 죽었을 거다.

조나단이 아직까지 살아있고, 심지어 자신의 죽이라고 청부한 녀석을 추격 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카이루스가 식당을 버리지 않고 조나단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를 조나단이 아니다.

"그 애뜻한 마음을 월급 인상이라는 확실한 방식으로 표현하실 수도 있습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대답했다.

"월급을 올려줄 생각은 없는데."

카이루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한탄했다.

"아이고, 목숨 걸고 식당을 지킨 대가가 1파인트 가치도 없는 공치사라니."

한탄을 듣고 있던 조나단이 말을 걸었다.

"너, 이 식당에서 평생 일할 생각은 아니겠지."

조나단의 말에 카이루스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통 다른 사람들은 식당에서 일하고 나면 남은 시간에 자빠져 잔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식당에 취직한 뒤 2달 동안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해도, 체력이 좋은 것과 일로 인해 지친 것은 차이가 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몸 쓰는 일을 하고 나서 피로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닌 법이니까.

하지만 카이루스는 일이 끝나고 나면 항상 외출해왔다.

"네가 혼자 돌아다닌다고 베넷 시에 대해서 뭐 얼마나 알 수 있을 것 같냐."

조나단의 말에 카이루스가 애매한 표정으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확실히 저 혼자 돌아다니는 걸로는…."

뭔가 그럴듯한 정보는 찾아낼 수 없었다. 이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거는 행위는 대부분 구걸이나 강도,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재수가 없을 경우, 모르는 사람과 함부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납치당해서 바다 건너 저 멀리 어딘가의 노예로 평생을 일해야 할 수도 있다.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고 장수하기 위해서, 이 도시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강하다.

"사람이라도 찾는 거냐?"

조나단의 질문에 카이루스가 순순히 대답했다.

"사람은 아니고, 물건들입니다."

조나단도 카이루스가 구체적으로 뭘 찾고 있는 건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카이루스도 조나단이 해주고 있는 나름의 배려를 이미 인지했다.

"만약 베넷 시 내부에서 유통되는 장물 같은 걸 찾는 거라면, 아름드리 전당포가 제일 확실하지."

아름드리 전당포.

"운하 운영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조직 중 하나."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제국 치안대나 공화국 경찰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거물급 범죄 조직 중 하나라는 거다.

"녀석들의 사업장 중 하나를 알고 있어. 업사이드에 있지.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데."

"그런 거물께서 저 같은 놈이 물건 찾으러 왔다고 하면 어디 거들떠나 볼까요?"

11화 장미의 여왕

* * *

카이루스의 질문에 조나단이 뭔 개똥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건 팔고 사들이는 장물아비 입장에서는 돈 내겠다고 찾아오는 놈이 왕이지. 거들떠보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간단하게 말해서, 주머니가 두둑한 상태로 찾아간다면 카이루스는 페더윙 가문의 소실된 비전이나 농조연운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식당 종업원이 월급을 아껴 모은 쌈짓돈이라면, 아름드리 전당포라는 곳이 손님대접을 해줄까요?"

"그럴 리가 있냐. 그딴 푼돈 들고 찾아가면 그땐 진짜 거지 취급이지. 사지가 부러진 채 작대기에 매달려 장난감 취급받을걸."

택도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조나단이 귀띔해준 덕분에 갈피를 잡았다.

결국 큰 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조나단은 딱히 월급을 올려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고민하던 카이루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보증받은 계약에 따르면 저는 부업 금지 아니었습니까?"

"그래. 하지만 뭐, 네 녀석은 제법 믿어 볼 만한 놈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으니까. 이전과 같은 대접을 할 수는 없지 않겠냐."

조나단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남는 시간에 부업까지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부업 하다가 본업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도록 해."

조나단은 카이루스로 하여금 짬짬이 틈을 내서 돈 벌 만한 일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베넷 시는 돈 벌 기회가 넘치는 곳이다. 잘 찾아보면 말이지."

"당연히 정당한 방법은 아니겠죠."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이 정당하게 떼돈 벌 방법 알고 있으면 나도 좀 같이하자. 씨발 거, 나도 이 그지같은 식당 좀 때려치고 그 일 하면서 탱자탱자 놀고먹게."

돈이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목돈을 만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결국 범죄다.

흉기 한 자루와 복면이라는 저렴한 종잣돈을 마련하고, 추가로 약간의 용기 정도만 챙기면 준비가 끝나니까.

필요한 용기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냐고 묻는다면, 붙잡혔을 때 노동교화소에 가서 얼어죽을 때까지 노동하는 걸 감당할 정도면 충분하다는 대답이 돌아올 거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짧은 시간 안에 큰돈을 벌고 싶으면, 자고로 인생을 걸어야 하는 법이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뭔가 적당한 일을 좀 알아보겠습니다."

"명심해라, 개인적인 일보다 식당 일이 우선이다.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할 일이 생기면 미리 말해. 며칠간 자리를 비울 경우 네가 부업으로 벌어들인 수익의 2할은 내가 가진다."

카이루스가 부업으로 벌어들인 금액의 20%.

많다고 하면 많고, 적다고 하면 적은 금액이다. 하지만 애초에 지금 조나단이 말하는 내용은 장미정원에서 보증받은 계약과 다르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근데 이미 장미정원이 보증해준 계약 내용도 개정할 수 있는 겁니까?"

"계약 당사자들이 전부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참고로 담보가 바뀌는 게 아니라면 꽤나 헐값으로 해주는 편이야."

장미정원에서 실제로 관여하는 건 계약을 어겼을 때 담보를 회수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계약 내용이 바뀌는 건 신경 쓰지 않지만, 담보가 변한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막대한 비용이 추가된다는 게 조나단의 설명이었다.

"담보를 바꿀 때는 아무리 적게 불러도 최초 지불한 금액의 두 배 정도는 요구하는 걸로 안다."

"이야."

담보만큼은 신중하게 정하라는 일종의 경고이기도 한 모양이다.

"장미정원을 운영하는 대장이 궁금해질 정도네요."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혀를 찼다.

"대장이 아니라 대표님이라고 불러라. 그리고 알아서 어디에 쓰게? 우리 같은 아랫바닥 인생은 그런 높으신 분들 정체를 궁금해하면 안 되는 법이야. 이제 준비 끝났으니 가게나 열어라."

카이루스는 조나단의 말에 엄지를 한 번 세워보였다.

* * *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밤, 베넷 시에서 약간 떨어진 동북쪽 근교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으로 붉은색 자가용 한 대가 도착했다.

"저택이 아니라 무슨 궁전을 지어놓았군."

하인이 조수석에서 열심히 빗자루로 앞유리의 빗물을 닦는 사이 레인코트와 단안경을 쓴 중년이 자가용 뒷좌석에서 내렸다.

그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딱 치고는 눈앞의 저택을 바라봤다.

"천것들이."

중년은 그렇게 말한 다음, 천천히 저택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를 뒤따르는 시종이 입을 열었다.

"문을 열어라."

곧바로 문 너머를 지키고 있던 남자들 중 하나가 말했다.

"신원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불가하다. 기다리도록."

차가운 대답이 돌아오자 곧바로 중년의 표정이 변했다.

"어허, 이분이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시종의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모르니까 알기 위해 기다리라고 하는 거다."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이 말했다.

"이런 천하의 상것들을 봤나. 제국 재무청의 관세국장을 오가라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불쾌하거늘, 이 엄동설한에 외부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문을 지키던 남자들 중 하나가 초소 내의 동료에게 슬쩍 시선을 보내자, 곧바로 그가 초소에 비치된 수화기를 들었다.

"신원이 확인되면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할 것이다. 기다려라."

관세국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참으며 기다렸다. 잠시 뒤, 초소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이내 문이 열렸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중년이 문을 지키던 남자들 중 하나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이 썩을 것들이!"

하지만 지팡이가 남자의 머리를 때리는 일은 없었다. 휘둘러진 지팡이는 남자의 손에 꽉 붙잡혀 있었다.

"저택에서의 폭력 행위는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구두 경고는 이번뿐입니다. 관세국장님."

"당장 놓지 못하냐! 너 같은 새끼들을 노동교화소에 처박아서 몇십 년이고 썩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야!"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관세국장을 바라볼 뿐이다. 그가 붙잡고 있는 지팡이에서 우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길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관세국장이 잠깐 녀석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냐, 내가 이 저택의 주인과 직접 말을 해야겠다."

이내 씩씩거리면서 관세국장은 상대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관세국장은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살폈다.

저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꾸며놓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재질의 장식을 써야 하는지, 그리고 그 장식은 어떤 색과 잘 어울리는 질감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냥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벼락부자가 된 천것들과는 다르다. 정갈한 동시에 화려하지만, 그 화려함이 천박함의 영역으로 가지는 않고 있다.

"관세국장님. 어서 오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문을 열어주자, 전반적으로 어둡고 붉은 톤으로 장식되어 있는 방이 나왔다.

마련된 테이블에는 두 명이 앉아있었다. 한 명은 관세국장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베넷 시의 치안대장이다.

"젠슨 러드보우 치안대장."

관세국장은 간단하게 그 인사를 받아준 다음, 다른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붉은 실크 셔츠와 검은 넥타이, 군청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성이었다.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무더운 날 상쾌하게 달리는 맑은 냇물처럼, 굉장히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저 계집은 또 뭐야?"

관세국장이 목소리의 주인을 슥 훑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봐 치안대장.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 해도 술집 작부년을 이런 장소에 들이면 쓰나."

관세국장의 말을 듣자마자 치안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기, 이분은…."

치안대장이 말을 더 이어가려는 순간 여자가 살짝 손을 들어올렸다. 그 즉시 치안대장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이 술집 작부년에게는 세실리아 롱호른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제 저택에 오신 걸 환영해요."

이 저택의 주인이라면… 눈앞의 여자가 장미정원의 수장이라는 뜻이다.

그제서야 관세국장이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순간 침을 삼키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내가 아무래도 실례를 한 모양인데."

"실례를 했다는 건 알고 계시는군요?"

세실리아 롱호른은 흑발을 쓸어넘기며 문을 향해 혀를 몇 번 차서 신호를 보냈다.

곧바로 문이 열리고 몇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저 신사분 좀 붙잡아주겠어?"

세실리아 롱호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들이 달려들어 관세국장의 몸을 꽉 붙잡았다.

"뭐, 뭐 하려는 거냐. 이거 놔!"

관세국장이 소리치며 입을 크게 연 순간 세실리아가 그의 입에 개구기를 쑤셔넣었다.

"쉬이. 밤에는 조용히. 의젓한 신사께서는 예절을 지키셔야죠."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과 함께, 커다란 집게 하나가 관세국장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집게를 손에 쥔 세실리아 롱호른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살짝 따끔해요."

그리고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관세국장의 입 안에서 어금니 하나가 생으로 뽑혀나갔다.

따끔, 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격통이 관세국장의 뇌리를 강타했다.

이후 세실리아는 어금니가 뽑힌 자리를 소독하고, 거즈를 채워넣은 다음 관세국장의 입에서 개구기를 뺐다.

"거즈는 앙 하고 물고 계세요. 최소 2시간 이상 물고 계시고, 침이나 피는 뱉지 마세요. 자, 이제 놔드려도 괜찮아. 고생했어."

졸지에 눈 뜨고 어금니 하나를 털린 관세국장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세실리아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

"너, 너 이...!"

"네?"

세실라아가 손에 쥐고 있는 집게로 딱, 하는 소리를 내며 관세국장을 바라본다.

뭐라고 말을 하려던 관세국장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세실리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나라의 큰일을 하는 분답게 머리가 좋으시네요. 벙어리가 되실 뻔했는데."

세실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혀를 살짝 빼물고는 검지로 툭툭 쳤다.

쇠집게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다음, 그녀는 맞은편의 좌석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설마 이빨만 뽑고 돌아가시지는 않겠죠? 여기 치과 아니에요."

곧이어 방금 전 관세국장을 붙잡고 있던 남자들에게 말한다.

"이제 괜찮아. 다시 나가서 대기해줄래? 아, 그리고 이 신사분의 몫으로 준비한 다과는 가져올 필요 없어."

방금 어금니가 뽑힌 참이니, 다과를 가져와도 먹지 못한다.

세실리아는 방금 전 일어났던 일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장미정원의 대표 세실리아 롱호른입니다."

"제국에서 네가 나에게 한 짓을 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나?"

관세국장은 세실리아의 인사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었다. 순식간에 생 어금니 하나가 뽑힌 지금 그녀의 인사가 눈에 들어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알폰스 킴벌리 관세국장. 당신은 말하지 않을 거랍니다. 그러니 발로른 제국이 알 리도 없죠."

방금 전 멀쩡한 사람의 어금니를 뽑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실리아의 목소리에는 확신과 무심함이 절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멀쩡한 사람의 생니를 뽑았는데… 내가 이걸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외침을 들은 세실리아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검지로 빙빙 감아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루미스 앤 웨슨 운송회사를 통해서 구입한 남자 노예 15명은 지금 어디에서 뭐 하고 있나요?"

세실리아의 말에 방금 전까지 그녀를 죽일 듯이 바라보던 알폰스 관세국장의 얼굴이 확 굳었다.

"이런 씹새끼들이, 비밀은 절대적으로 엄수한다고 했으면서!"

"베넷 시에서 우리의 보증 없는 약속은 의미 없다는 사실,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12화 장미의 여왕 (2)

* * *

장미정원 덕분에 베넷 시에 최소한의 신용이라는 개념이 생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장미정원의 보증이 없는 계약과 약속은 모조리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확실하게 비밀을 보장받고 싶다면 장미정원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

보증을 받게 되면 절대 말하지 않기로 약속한 비밀은 자연스럽게 장미정원이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게 싫어서 장미정원의 보증을 받지 않으면, 상대가 비밀엄수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얽혀있는 비밀이라면, 내가 모를리 없어요."

장미정원의 대표 세실리아 롱호른.

[비밀을 지키려면, 비밀을 말해라.]

이 기묘한 모순을 만들어낸 그녀라면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

사실, 약간의 허세가 섞여있긴 하다. 대규모 조직 내부에서 은밀히 유지되는 비밀 같은 경우는 세실리아로서도 알 방법이 없긴 하니까.

하지만 그런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세실리아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들, 장미정원에 보증받지 않은 비밀은 돈을 적당히 쥐여주면 바로 털어놓는답니다."

슬프게도 관세국장 잭슨 킴벌리는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남자 노예를 베넷 시의 범죄조직을 통해 구매했다.

관세국장 알폰스 킴벌리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장미정원의 보증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베넷 시의 범죄조직들이 장미정원의 보증 없는 약속 따위를 지킬 리가 없다.

"아내가 있는 걸로 아는데. 남색을 밝힌다는 비밀이 알려지면 여러 가지로 재미있겠네요."

세실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관세국장 알폰스를 계속 응시한다.

"그래서, 제가 당신 어금니를 뽑은 사실이 제국의 귀에 들어갈 것 같나요?"

"…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 이야기를 하지."

결국 알폰스 관세국장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비밀은 제국법상으로 충분히 이혼사유가 된다.

알폰스 입장에서 솔직히 아내 따위는 어떻게 되건 상관없고, 관심도 없다.

중요한 건 처가를 잃게 된다는 점이다. 처가의 도움 없이 알폰스가 지금의 인맥과 위치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서슬 퍼렇던 알폰스의 기세는, 마치 소금물에 절여진 배추처럼 팍 죽어버렸다.

코앞에서 깝치던 상대의 풀이 확 죽은 모습을 보면 즐거워할 만도 하건만, 세실리아는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문을 지키고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봤다.

"오늘 오전에 전달받았던 서류, 지금 가져와주면 좋을 것 같은데."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세실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건 언제나 권유 아니면 부탁이다. 부하에게 명령의 형태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장미정원의 조직원인 이상, 세실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다.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다음, 세실리아의 시선이 젠슨 러드보우 치안대장에게 향했다.

"서류에 적혀있겠지만, 역시 직접 듣는 편이 빠를 것 같은데요."

"롱호른 대표, 일을 시키기에 적당한 인원의 알선과 의뢰 내용의 보증을 좀 부탁하고 싶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며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젠슨이 곧바로 대답했다.

"어떤 일에 대한 알선을 원하는 건지 궁금해지네요."

"세금 강도."

대답한 것은 관세국장 알폰스였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세실리아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세금 강도라면 지금 말하신 분이 전문가 아니신가요?"

졸지에 세금 강도 취급을 받은 관세국장 알폰스가 순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방금 전 어금니가 뽑힌 자리의 욱신거림이 그로 하여금 거친 반응을 참게 한다.

"크흠, 세금 포탈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알폰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세실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국세 수송단을 털어달라는 말이었군요."

세실리아는 혀를 차며 검지 손톱으로 텅 빈 유리잔을 살짝 튕겼다. 곧바로 장미정원의 조직원이 다가와 잔에 음료를 채운다.

잔을 들어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세실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순간 고민했는데…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왜? 같은 질문을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장미정원이 부탁받은 일은 알선이다.

제국의 보호 아래에 수송되는 세금을 털어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만 구해서 소개해주면 된다.

알선을 마치고 나면 장미정원에서 소개한 사람과 이들이 직접 협상에 들어갈 거다.

장미정원이 해야 할 일은 쌍방이 합의한 계약을 보증해주면 그걸로 끝이다.

"가능할 것 같나? 목표로 하고 있는 수송단에는 가려뽑은 정병 5,700에 기사 5명이 따라붙을 예정이라네."

관세국장의 질문에 세실리아가 잔을 내려놓으며 코웃음 쳤다.

"가려뽑은 정병? 관세국장님이 참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네요."

그런 표현은 제국군에 어울리지 않는다. 제국군 전술전략의 기본이자 근본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 목숨에 귀천 있다.]

배틀기어를 사용하는 기사 한 명을 살리거나, 배틀기어 한 점을 보존하기 위해 수만에 달하는 일반병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게 바로 발로른 제국군이다.

발로른 제국군 최고의 장점이 어마어마한 머릿수다 보니 가능한 방침.

"병사들이야 큰 걱정 없지만, 기사가 다섯 명이나 붙는다면 아무한테나 맡길 수는 없겠네요."

따라붙은 5,700의 병사들은 사실상 고기방패 역할 및 기사들의 시중을 드는 역할이다.

수송단을 지키는 진짜는 배틀기어를 사용하는 다섯 명의 기사다.

"월백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야. 견습 세 명에 평기사 하나. 그리고 성기사가 한 명."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며 음료수가 담긴 잔을 이리저리 흔들던 세실리아가 잔을 내려놓았다.

성기사. 기사이면서 동시에 주신 이테라를 섬기는 사제이다.

평상시에는 소속된 기사단의 종교행사 주최 및 상담과 사기증진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낮에는 검 휘두르고 밤에는 기도하는 그 근육빵빵 채식주의자들?"

성기사의 실력이 약하냐? 라고 한다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성기사로서 직무를 수행하려면 수훈 이력이 있어야 한다.

즉.

"수훈기사라는 뜻인데."

평범한 기사와 수훈기사 사이에는 최소 강아지와 늑대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일반인들과 달리,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기사는 제아무리 큰 공을 세웠더라도 훈장을 수여받을 수 없다.

즉, 훈장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사들 중에서도 특출난 실력자라는 점이 증명되는 거다.

"몇 급 훈장이죠?"

거기에 더해, 수여된 훈장에 따라 수훈기사의 실력 격차가 다시 한번 나눠진다.

"백로 3급 훈장으로 알고 있다."

백로 3급.

원정 토벌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3급 훈장 중에서는 수훈 자격이 제법 까다로운 편에 해당하는 훈장이다.

세실리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노리는 목표에 수훈기사가 붙어있다는 것만으로도 알선해 줄 만한 실력자의 선택지가 꽤나 줄어든다.

"성기사가 따라붙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세금 수송만 호위하는 병력들이 아닌 것 같지만…."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그것만 대답하게."

"어머, 보채시기는. 예약해둔 숙소로 가서 어금니 빠진 자리나 관리하고 계세요. 대충 윤곽이 나오면 다시 불러드릴게요."

알폰스의 재촉에 세실리아는 손을 휙휙 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치안대장과 관세국장은 별수 없이 나머지 일은 세실리아에게 맡기고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두 명이 돌아가고 난 다음, 곧바로 세실리아는 생각에 빠졌다.

세금 수송단을 턴다는 건 간접적으로 제국 국고를 터는 것과 같다. 특정 조직을 고용해서 움직이라고 지시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다.

제국 상대로 시비를 걸라는 뜻인데, 잘못되었을 때 생기는 온갖 문제를 감당하려면 장미정원 정도 규모의 조직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베넷 시에는 규율과 질서를 갖춘 조직들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근에 좀 잘나가는 건축사는 누가 있을까?"

고민을 이어가던 세실리아가 문을 지키던 부하에게 질문했다.

"청홍이 여전히 최고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머, 청홍은 이런 일에 부르기엔 가격이 쎄잖아. 제국 중앙은행을 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최근 봄달래라는 녀석이 좀 흥하는 모양입니다."

세실리아가 턱을 쓰다듬었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래? 최근 성과를 말해줘."

"보석회사 소피아 소유의 광산을 폭발시키고 광석을 털어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세실리아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설계는 건축사 중 좀 친다 싶은 녀석들은 그리지 않니?"

"공기 3일짜리 설계였다고 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이틀 뒤에 내 저택에서 점심이나 한 끼 하자고 전해줄래?"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부하의 말에 세실리아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일 시키려고 부르는 건데 든든히 먹여야겠지."

"알겠습니다. 가게 주인이 약간 놀라겠는데요."

부하의 말에 세실리아가 자기 손톱을 이리저리 살피며 대답했다.

"뭐 어때. 우리가 공짜로 먹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바깥 음식은 거기가 제일 입에 맞고."

"납치해서 주방장으로 쓰실 수도 있습니다."

세실리아가 부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혼자 즐기기에는 아까운 솜씨야. 게다가 맛있는 음식은 가끔씩, 약간 기다리다 먹어야 제값을 하는 법이거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세실리아는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고생했어. 이제 금일 당직 빼고는 가서 쉬어도 괜찮아."

"침소에 드실 겁니까?"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천천히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 * *

조나단은 열흘마다 한 번, 저녁에 카이루스에게 가게를 맡기고 자신이 직접 어딘가로 음식을 배달한다.

롱웨이브 비스트로의 주인인 조나단이 직접 수수께끼의 인물에게 배달하는 음식은 사용하는 식재료나 요리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

심지어 카이루스마저도 이 정도면 페더윙 가문에서 먹던 식사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고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이거 참…."

그리고 그 정도로 뛰어난 요리실력을 자랑하는 롱웨이브 비스트로의 주인장 조나단은 지금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본래 항상 자신이 직접 배달하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예정에 없던 배달을 요청했다.

"돌아버리겠구만."

요리를 하는 건 문제가 없다. 식자재 같은 경우에는 배달을 요청한 분께서 항상 준비를 하니까, 조나단은 그 재료로 요리만 하면 된다.

하지만 오늘은 조나단이 식당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냥 사정을 설명하고 못 간다고 하셔도 되잖아요, 두령."

옆에서 그의 고뇌를 지켜보던 카이루스의 조언에 조나단이 기겁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이 새끼. 날 죽이고 싶으면 차라리 식칼로 내 뒤통수를 쑤셔라. 차라리 편한 죽음을 택하겠다."

못 간다고 절대로 대답할 수 없는 배달 주문이다. 큰일 날 거다.

"그럼 저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면 어떨까요?"

조나단은 두려움에 떨고 있고, 카이루스는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배달을 요청한 상대가 그렇게 무섭다면, 식당에서 밥을 먹는 친구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

카이루스의 제안은 지극히 정상적인 이성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기는 베넷 시.

이성의 목소리가 품고 있는 냉철한 반짝임은 이곳에서 가끔씩 그 빛이 바랜다.

"루카스의 아이들 소속이다."

루카스의 아이들 또한 대운하 운영 위원회에 소속된 조직이다. 즉, 장미정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력이라는 뜻이다.

13화 아주 특별한 배달

* * *

카이루스는 식사를 하고 있는 루카스의 아이들을 곁눈질로 살폈다.

"몸을 캔버스처럼 쓰는 친구들이네요."

카이루스의 짤막한 감상에는 가감 없는 진실이 담겨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 한 녀석은 눈깔에도 문신을 했다. 눈꺼풀이 아니라, 흰자위에!

문신사가 도대체 무슨 마법 같은 기교를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멀쩡한 흰자위에 파도무늬 문신이 새겨져 있는 모습은 굉장히 기괴하다.

"눈알에 그림 그려넣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문제는 저 손님들에게는 설득과 부탁이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야."

그들은 식사를 하면 돈을 낸다. 루카스의 아이들은 가격을 깎아달라고 하거나, 공짜 음식을 달라는 식의 요구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삼류 양아치가 아니다.

하지만 무시받거나, 자신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복수한다.

사실, 루카스의 아이들이 저지르는 복수는 복수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다.

"예전에 루카스의 아이들의 조직원 오른팔을 못 쓰게 만든 남자가 있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카스의 아이들에게 붙잡혔어."

"저런, 마찬가지로 오른팔이 불구가 되었나요?"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끝내는 건 루카스의 아이들 스타일이 아니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었지. 루카스의 아이들은 그 남자에게 아내의 오른팔을 자르라고 명령했고… 잘라낸 아내의 팔을 손에 쥐게 하더니 그걸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게 시켰다."

하지 않으면 자식의 오른팔도 잘라버린다고 협박했다고 들었기에 남자는 저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이루스가 얼굴을 구겼다.

"미친 새끼들이잖아. 그건 복수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지경인데요."

복수의 선을 한참 넘은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 이름 모를 불쌍한 남자가 아니다.

"지금 두령이 저 사람들에게 급한 배달이 있으니 나가라고 하면…."

중요한 건 지금 카이루스의 앞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오가지 못하고 있는 조나단의 처지였다.

"뻔하지 않냐?"

돈을 내고 밥을 먹고 있는데 중요한 배달이 있다고 나가달라고 하는 건, 그 배달을 시킨 녀석이 루카스의 아이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쉽게 말해 그런 요청을 하는 것만으로도 루카스의 아이들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는 거다.

"그 순간 롱웨이브 비스트로는 문 닫는 거다."

"그리고 저는 자동 해고로군요."

"해고? 너도 목숨 걱정을 해야 할걸. 루카스의 아이들이 복수하는 범위는 자기들 마음대로야."

루카스의 아이들 정도 되는 규모의 조직들이라면 어지간한 수훈기사도 당당히 상대할 수 있는 강자들이 드글거린다.

원래 싸움실력과 도덕성이 언제나 정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뛰어난 실력의 연쇄살인마나 마약에 중독된 검술의 달인 같은 건 이 더러운 사바세계에서 충분히 가능한 조합이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경찰이 수십 명 달려들어도 다 때려잡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공권력도 우습게 보이는 법이다.

즉, 힘이 있으면 항상 범죄의 유혹에 시달린다. 그리고 모두가 유혹을 참는 데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럼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루카스의 아이들에게 돌아가달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요리 배달을 안 할 수도 없다.

고민을 거듭하던 조나단이 카이루스를 바라봤다.

"…이번 배달은 네가 가라."

"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두령? 굉장히 중요한 배달로 알고 있는데."

절대로 카이루스에게 시키지 않던 배달이다. 조나단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씹는 담배를 한가득 입 안에 우겨넣고 질겅거리며 대답했다.

"달리 방법이 없잖냐. 싫으면 네가 직접 저 사람들 앞으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던가."

카이루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완벽한 상태로 배달하겠습니다."

남편 보는 앞에서 아내 팔을 자르고 그걸로 자식을 쓰다듬게 한다는 정신 나간 또라이 새끼들과 대화해서 좋은 끝을 볼 자신?

카이루스에게는 도무지 없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막론하고, 미친 자식들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최고다.

심지어 그 미친 자식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이 도시를 주름잡을 정도의 규모와 위세를 자랑한다면 더더욱 피해야 한다.

"좋은 생각이다. 포장 끝나면 부르마."

"근데 어디로 배달 가는 겁니까?"

아직 카이루스는 자신이 어디로 배달 가는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조나단이 대답했다.

"베넷 시 외곽, 장미정원 대표님의 저택."

대답을 들은 카이루스가 작게 하, 하는 소리를 냈다.

루카스의 아이들이 자랑하는 악명이 그토록 살벌함에도 불구하고 배달을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뭔지, 이제 카이루스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카이루스는 배달을 가기 싫어졌다.

"제가 살아서 다시 두령을 만날 수 있을까요?"

카이루스의 말에 조나단이 대답했다.

"예의 바른 태도로, 상식적으로 사람이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마. 그래도 장미정원은 베넷 시에서 보기 드물게 신사적이니까.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만약 제가 실수를 하거나 그 친구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카이루스의 이어진 질문에 조나단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 죽는다지만… 죽는 순간 하게 되는 마지막 생각이 깊고 짙은 후회일 필요는 없잖냐. 실수하는 일 없도록 해라."

참 좋은 말이다. 카이루스도 기왕이면 후회 같은 칙칙한 감정보다는 조금 더 즐거운 생각을 품은 채 죽고 싶다.

"요점을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두령."

장미정원의 조직원들이 신사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루카스의 아이들 같은 또라이들에 비하면 신사적이라는 뜻일 뿐이다.

베넷 시에서 친절하고 상냥한 모두의 이웃과 같은 태도를 견지하면 개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조나단은 전달받은 재료를 가지고 빠르게 요리를 시작했다. 카이루스는 조나단이 요리를 진행하는 사이 계속해서 가게일을 하며 완성을 기다렸다.

"다 끝났다. 주소는…."

조나단이 카이루스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었다. 거리가 제법 되고, 준비한 음식의 양은 많다.

"배달과정에서 음식 모양이 망가지면 뒷일은 책임 못 진다. 혹시 누가 시비를 걸면 장미정원으로 배달 중이라고 말해. 베넷 시 시장도 네 앞은 못 막을 거다."

"알겠습니다."

카이루스는 차곡차곡 음식을 쌓아올려 만든 탑을 장착한 지게를 짊어지고 조나단에게 인사했다.

"살아서 뵙겠습니다."

"그래, 무사히 돌아와라. 이제 와서 갑자기 혼자 일하면 더럽게 피곤할 것 같으니."

카이루스는 지게를 짊어지고 조나단이 말해준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습격받을 가능성은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장미정원 두목이 먹을 음식을 나른다는 말을 듣고도 계속 시비를 거는 놈은 베넷 시에 없다.

"이봐, 거기 잠시 멈춰봐."

지게를 짊어지고 걸어가던 카이루스를 누군가 멈춰세운다. 아이란 공화국의 경찰이다.

창백한 스파크가 파팍, 하고 튀는 진압봉 형태의 배틀기어를 손에 쥔 경찰이 카이루스를 보며 히죽거리고 있다.

"무슨 일이시죠?"

"그 짐은 다 뭐냐. 어디로 가는 거야. 똑바로 말해."

경찰의 말에 카이루스가 순순히 대답했다.

"도시 외곽의 장미정원 저택으로 갑니다."

"…알았다. 서둘러."

뭔가 사악한 의도를 품고 접근했던 공화국 경찰은 카이루스의 대답을 듣자마자 서둘러 옆으로 길을 비켜주며 턱짓으로 지나가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협조하는 건 경찰뿐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듯 구경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리고 카이루스는 엄청난 기적을 목도했다.

대로의 자동차들이 옆으로 비켜서고, 행인들은 벽으로 바짝 붙어 카이루스가 지나갈 공간을 마련해준다.

가판대를 열어놓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허겁지겁 늘어놓은 물건을 제대로 정리도 안 하고 쓸어담아 거리를 비운다.

"세상에."

왕이라도 행차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도로가 훤하게 뚫렸다.

다들 두려워하고 있다. 혹시라도 카이루스가 옮기는 짐에 자신의 털끝 하나라도 스치게 될까봐. 그리고 그로 인해 장미정원의 눈 밖에 나게 될까봐.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으로 인해 카이루스는 안타리아 대운하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는 조직의 위세, 장미정원의 힘을 똑똑히 실감하게 되었다.

'이건 예전의 페더윙 가문보다 더하잖아.'

이들의 행동은 공포와 두려움에 기인한 행각이다.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발악이다. 그렇기에 더 필사적이다. 사람들이 페더윙 가문을 향해 보내던 존경과 경외의 태도와는 느낌이 다르다.

물론, 이 또한 지배와 통치의 형태 중 하나라는 점을 카이루스는 부인하지 않았다.

원인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복종한다는 결과는 같으니까. 카이루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 정도의 위세라면 진짜 실수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네."

카이루스는 장미정원의 통제력이 이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상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니, 생각보다 더 심하다.

저절로 어깨끈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별일 없을 거라고 카이루스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설마하니 대표라는 사람이 눈 하나 달린 식인 괴물은 아닐 테니까."

그렇게 열심히 지게를 짊어지고 이동한 카이루스는 마침내 베넷 시 근교에 위치한 근사한 저택의 대문을 슥 훑었다.

대리석과 상아를 기초로 금과 은을 풍성하게 사용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구름과 바람, 이파리와 꽃 따위가 떠오르는 무늬를 산뜻하게 그려냈다.

"리보네 양식을 약간 변형했네."

보통 이런 식으로 멋대로 변형하면 오히려 원래 양식이 가지고 있는 맛을 해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건 원래 양식이 가지고 있는 멋을 살리면서도 적절한 정도의 변형을 주었다.

"외눈박이 괴물은 아닐 것 같구만."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조직의 대장답지 않게 이런 분야의 조예가 굉장히 깊은 것 같다. 외눈박이 괴물일 가능성이 한층 더 낮아진 셈이다.

"누구냐."

"롱웨이브 비스트로의 종업원입니다. 주문하신 식사를 배달하러 왔습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저택의 대문을 지키던 자가 카이루스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저택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남자는 명백하게 카이루스를 의심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평상시 롱웨이브 비스트로에 세실리아가 식사를 배달시키면 항상 오던 조나단의 모습과, 지금 식사를 배달하러 왔다고 하는 카이루스는 그 모습이 굉장히 달랐으니까.

"내가 알고 있던 녀석이 아닌데."

"이번에는 제가 배달왔습니다."

카이루스도 정문을 지키는 남자가 의심하는 것을 이해했다. 카이루스가 이 저택의 경비라고 해도 당연히 의심할 거다.

"잠시 기다려라."

"네? 저는 그냥 음식만 두고 가면 될 줄 알았는데요. 혹시 제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까?"

카이루스의 질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질문을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

여기에서 괜히 친한 척 몇 마디 말을 더 붙였다가는 좋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될 거라는 직감이 카이루스의 경종을 울렸다.

이 거대한 저택을 지키고 있는 저 문지기는 딱 봐도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성격이 아닌 것 같다.

사실 그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성격이 이 남자가 저택의 정문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기다리고 있도록."

카이루스에게 지시를 내린 다음, 정문의 경비는 수화기를 들고 말하며 카이루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경비가 카이루스에게 말했다.

"너, 허리에 찬 검은 뭐냐."

"호신용입니다. 세상이 좀 험하잖아요."

배달부가 검을 차고 다니는 건 상식적으로 굉장히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베넷 시라면 그렇게 대단할 일도 아니고,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여기는 베넷 시, 아이들이 땅바닥에 그림 그려놓고 땅따먹기를 하다가 시비가 붙으면 대뜸 팔뚝만 한 칼을 뽑아드는 기가 막힌 동네니까.

"호신용이라."

"아는 사람에게 빌렸습니다."

빌리는 형식은 선조치 후보고였다. 빌려준 사람은 카이루스가 검을 빌렸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14화 아주 특별한 배달 (2)

* * *

카이루스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살천성이라는 살벌한 이름의 너절한 배틀기어는 본래 주인의 허락 없이 카이루스가 무기한 임대 중인 상황이다.

"게다가 지금은 다시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카이루스는 원래 주인이 찾아와서 돌려달라고 하기 전까지 이 검을 가지고 있을 예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수 있어야 하겠지만.

"보나마나 어디서 사람 하나 죽이고 빼앗은 거겠지."

"제가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검의 원래 주인은 늑대가 돌아다니는 숲속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대가를 목숨으로 지불했을 뿐이다.

"그렇겠지."

하지만 경비는 카이루스의 말을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런 잡담을 하고 있는 사이 저 멀리에서 또 다른 경비 한 명이 카이루스에게 다가왔다.

"대표님께서 널 호출하셨다."

카이루스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대표라면, 장미정원의 두목을 뜻한다.

"저 같은 놈을 뭐하러…?"

"우리는 지시에 따를 뿐이다. 무기의 소지는 금지되어있으니 몸수색을 하겠다."

카이루스는 순순히 양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장미정원 조직원들의 몸수색에 응했다. 당연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배틀기어 또한 맡겨두어야 했다.

"따라오도록."

도대체 왜 장미정원의 사장이 오라고 한 건지 카이루스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카이루스는 챙겨온 음식을 다시 짊어지고 조직원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묵묵히 조직원을 따라 이동하던 카이루스는 저택 3층에 자리잡은 거대한 문 앞에 섰다.

"고개는 대표님이 허락하기 전에는 절대로 들지 말아라. 먼저 말하지 말고 질문에 대답만 하도록. 지시는 절대적으로 이행해라."

카이루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문이 열리고, 카이루스는 고개를 숙인 채 열린 문 너머로 걸어들어갔다.

"어머, 젊으시네요."

여자의 목소리에 카이루스는 고개를 들 뻔했다.

"장미정원의 대표님을 뵙습니다."

"그래요. 세실리아 롱호른이에요."

카이루스가 인사하자, 다시금 그의 인사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형태가 있다면 분명히 미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미성이지만, 동시에 상당히 건조한 어투다.

"내가 왜 불렀는지 궁금할 텐데. 혹시 짐작 가는 이유가 있다면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이건 질문이겠지. 카이루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음식에 장난질을 했거나, 뭔가 실수가 있으면 이 자리에서 즉결처분이 가능하기 때문 아닐까요."

카이루스가 음식만 덜렁 넘겨놓고 나서 도망쳐버리면, 나중에 음식에 개수작을 부린 것이 들통났을 때 카이루스를 다시 추격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끌고 와서 대기시켜놓고 식사를 시작하면,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자리에서 카이루스의 목을 칠 수 있다.

"세상에, 그런 소리를 참 쉽게 하네요? 무서워라. 다들 들었어? 내가 사람을 죽인대."

무섭다고 말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름다운 미성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있지 않다.

"농담이에요. 방금 한 짐작이 맞아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네."

뭔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고개는 들어도 좋아요."

카이루스가 고개를 들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군청색 랩스커트를 입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어색한 웃음을 띠고 있는 약간 살찐 중년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눈에 보인 건 세실리아가 오른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바닥에 고정된 금속제 구속의자였다.

앉게 되면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이 의자에 달린 구속구로 고정될 거다.

"아까 정답을 말했으니 이번에도 기대해볼까. 이제 당신이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카이루스는 대답 대신 구속의자로 걸어갔다.

"난 눈치 빠른 사람들이 좋더라."

그가 의자에 앉자, 곧바로 장미정원의 조직원들이 카이루스의 몸을 의자에 구속한다.

"어때요, 아프지는 않아요? 표정이 담담한 걸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제 고용주가 이 저택으로 음식을 배달하라고 지시했고, 저는 그 지시를 이행했을 뿐입니다."

카이루스는 잠깐 자신의 사지를 구속한 구속구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믿는 구석이라면 제가 떳떳하다는 점입니다."

"아하, 그러시구나."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살짝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말을 끝으로, 세실리아는 카이루스에 대한 관심을 끊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살찐 중년을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본명으로 부르면 곤란하겠죠? 봄달래라고 부를게요."

"네, 넵! 배려 감사합니다!"

세실리아의 말에 봄달래라고 불린 중년 남성은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대답했다.

"아직 따뜻하네, 식사하죠. 손님 먼저."

말이야 손님 먼저라고 표현했지만, 음식에 독이 들어있으면 맞은편의 중년이 먹고 죽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제안한 것이다.

중년남성도 세실리아의 의도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어느 안전이라고 그걸로 시비를 걸까.

"그래서, 가능하시겠나요?"

음식을 접시로 옮기던 봄달래가 세실리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법 준비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머릿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실력이 뛰어난 녀석들이 필요합니다. 혹시 장미정원의 조직원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봄달래의 말을 듣고 있던 세실리아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일에서 우리 역할은 알선이에요. 직접 참여할 생각은 없어요."

제국의 세금을 터는 건 장미정원 정도 규모의 조직 입장에서 별로 맛좋은 먹거리가 아니다.

카이루스는 지금 오가는 대화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 저 봄달래와 세실리아 사이에 오가는 대화만으로 판단하면 장미정원이 봄달래에게 어떤 일을 지시하는 모양이다.

그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봄달래에게는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다. 당연히 그 실력이라는 게 쿠키 굽는 실력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참 우연히도, 카이루스는 실력이 있고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저기."

"지금 우리 이야기 중인데?"

갑자기 카이루스가 입을 열자, 곧바로 세실리아가 짤막한 면박을 준다. 방금 전까지의 무심한 목소리와는 달리 말꼬리에 확실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세실리아가 먼저 질문하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말 걸지 말아라.

이미 장미정원의 조직원들이 카이루스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카이루스도 지금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봄달래라고 했나?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나는 어때."

그래서, 카이루스는 세실리아에게 말을 거는 대신 봄달래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배가 올챙이처럼 통통한 중년에게 말을 걸었다.

"뭐 임마? 새끼가 돌아가지고는. 지금 이 자리가 식당 종업원 따위가 껴도 되는 곳으로 보이냐?"

당연히 좋은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요즘 좀 일이 잘되어서 제법 명성도 얻고 수입도 짭짤하게 만지고 있는데, 갑자기 장미정원에서 불러들이더니 발로른 제국의 세금 수송단을 털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그 와중에 식당 종업원이 튀어나와서는 자기가 실력이 있으니 고용해달라고 한다.

안 그래도 상당히 빡쳐있던 봄달래 입장에서는 충분히 욕이 튀어나올 만하다.

"내 계획에 음식 배달은 필요 없을 예정이니 꺼져."

봄달래의 말에 곧바로 카이루스가 대답했다.

"나 싸움 좀 하는 편인데."

봄달래가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이내 카이루스를 보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수훈기사… 아니지, 성기사 한 명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겠군."

지금 봄달래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바로 세금 수송단에 따라붙은 성기사다.

어지간한 수준의 실력자들로는 훈장을 받은 수훈기사를 상대하기 힘들다.

이야기를 들은 카이루스가 잠깐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수훈기사라. 카이루스는 잠깐 옛날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훈장 종류가 뭔지 알 수 있을까? 네 대답에 따라 내 대답도 바뀐다."

카이루스의 말에 봄달래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단순히 가능 불가능을 말하는 대신, 훈장의 종류를 물어볼 줄은 몰랐던 거다.

"백로 3급."

봄달래의 대답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카이루스에게 별다른 흥미를 품고 있지 않던 세실리아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이루스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카이루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백로훈장. 원정지에서 전공을 세웠을 때 받을 수 있는 상훈.

3급이라면 한 전투에서 50명 이상의 적을 죽이거나, 소규모 작전 중 할당된 임무목표의 달성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을 경우 수훈된다.

"조건 한 가지만 맞춰진다면 충분히 상대 가능한데."

"그래요? 그 조건이라는 게 궁금하네요."

세실리아의 질문에 카이루스가 순순히 대답했다.

"좋은 배틀기어가 필요합니다."

배틀기어가 카이루스의 실력을 제한하고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군 보급용 싸구려 배틀기어로는 절대 수훈기사를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장비만 제대로 갖출 경우, 카이루스는 백로 3급의 수훈기사는 다섯 명 이상도 감당할 자신이 있다.

세실리아가 카이루스를 턱을 괸 채 카이루스를 바라본다.

"그런가요?"

사람을 보는 시선이 절대로 아니다. 차라리, 요리사가 수산시장 경매에 올라온 생선을 평가하는 표정에 가깝다.

그 시선을 마주한 카이루스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장미정원의 사장 세실리아가….

베넷 시 최악의 조직 중 하나를 부리는 수장답게 정상인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카이루스가 세실리아를 보며 나름의 확신을 가지는 사이, 세실리아 또한 카이루스에 대한 평가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녀의 평가 기준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준과는 좀 다르다.

"이름이?"

"카이루스입니다."

방금 전까지 세실리아는 카이루스를 그저 수상한 음식 배달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갑자기 세실리아는 어떤 결론을 내린 건지 카이루스에게 관심을 보이는 중이다.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르죠. 가장 자신 있는 무기는?"

"검입니다."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검으로 하죠."

세실리아는 빠르게 결정을 내린 다음, 여전히 시선은 카이루스에게 향한 채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문밖에 누구 있니?"

곧바로 문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창고에서 31번을 꺼내서 가져와주면 좋을 것 같아."

지시를 들은 문밖의 조직원은 곧바로 지하로 내려갔다.

"그럭저럭 쓸 만한 검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가격은 3년 전 감정가 기준으로 5만 파인트. 하지만 실제 가치는 내 기준에서 70만 파인트 정도에요."

"… 좋은 배틀기어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요."

카이루스의 대답에 세실리아가 스스로의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가 부하에게 지시해 가져오라고 한 배틀기어를 누군가 구매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필트릭스 제강소 임원의 추천서, 몇 개의 저명한 사교클럽들 중 하나의 회원증, 마지막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명성까지.

명품은 아무에게나 팔지 않기에 명품이 되는 거다. 배틀기어 대량양산체제가 정립된 지금에 와서도 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고로, 세실리아가 가져오라고 한 배틀기어의 실제 가격은 5만 파인트가 아니다.

실제로 그 돈을 지불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노력과 시간, 재능까지 모조리 돈으로 환산한다면 세실리아가 부른 가격은 결코 바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명성과 기품, 자격 같은 건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텐데요."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는 작게 코웃음 쳤다.

"지금 가져오라고 한 배틀기어는 내 소유에요. 가지고 있는 물건에 어떤 가격표를 붙이건 그건 주인 마음이죠."

말이야 틀린 말이 아니다. 세실리아는 아까보다 조금 더 흥미가 생긴 듯한 표정으로 카이루스를 훑었다.

15화 아주 특별한 배달 (3)

* * *

베넷 시의 사람들은 잘 찾아보면 나름의 사정이 있는 분들이 제법 있다. 카이루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실력은 어느 정도 있을 것 같은데."

"네, 그렇습니다."

카이루스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세실리아가 다소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실력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그게 중요해요."

세실리아는 천천히 왼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배틀기어가 도착하면 제가 당신에게 가격표를 붙일 거예요. 제가 가져오라고 한 검의 가격은 70만 파인트였죠."

그리고, 세실리아가 들어올린 왼손에서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제가 당신에게 붙인 가격표가 10만 파인트 이상이라면 가져온 배틀기어를 단기임대 해드릴게요. 만약 당신의 가격표가 30만 파인트 이상이라면 장기임대도 가능해요."

원래 카이루스는 질문하면 안 된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직감이 카이루스의 머리를 스쳤다.

"대가를 알 수 있을까요?"

세실리아가 배틀기어를 공짜로 카이루스에게 줄 리가 없다. 세실리아는 순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중에, 장미정원을 위해 일을 하나 해줘야 해요. 단기임대냐 장기임대냐에 따라 부탁의 난이도가 달라지겠죠."

가격을 지불할 돈은 없지만, 대신 실력이 있으니 배틀기어의 값은 몸으로 때우라는 뜻이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제안이다.

카이루스가 세실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질문이 두 개 더 있습니다. 해도 괜찮을까요?"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방금 전 그건 질문으로 안 칠게요. 성실히 대답해 볼 테니 한번 말해보세요."

허락을 받은 카이루스가 첫 번째 질문을 했다.

"제 가치가 70만 파인트 이상이면 어떻게 됩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듣고 있자니 참 웃기는 질문이다.

스스로의 가치가 70만 파인트를 넘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세실리아는 어이없음과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검이 마음에 들면 가지시고, 마찬가지로 그 값에 걸맞은 일을 하나 처리해주시면 될 일이지요."

이제 두 번째 질문이다.

"대표님 기준에서 성채 하나의 가격은 얼마 정도 합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저건 또 무슨 질문이람.

"흠결사항이 없는 평범한 성채라는 전제하에, 저는 1,500만에서 2,700만 파인트 사이의 가격표를 붙이겠네요."

마치 이전에 생각해 본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실리아는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카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섭운까지 완성한다면, 성채 하나 이상의 가치가 있다.

카이루스가 가문의 어르신들에게 검을 배우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다.

제풍은 완성했지만, 섭운은 아직 배움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지금의 카이루스에게, 과연 이 장미정원의 대표님은 어느 정도의 가격표를 붙일까?

"대표님, 지시하신 배틀기어입니다."

조직원이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양손으로 검을 바친다.

"고마워."

검을 받아든 세실리아가 천천히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칼날이 칼집에서 뽑혀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검이라는 뜻이다.

"꼭 교회를 장식하는 색유리 같지 않아요? 그래서 검 이름도 색유리에요."

세실리아가 뽑아든 검은 칼날 너머가 비춰질 정도로 투명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색으로 빛나고 있다.

색유리는 일견 보기에는 굉장히 연약해보였다. 상대의 공격을 막으려 드는 순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카이루스는 한 눈에 그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좋은 배틀기어입니다."

색유리는 양산체제 확립 전에 생산된 걸작 배틀기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세실리아가 부른 가격은 과장이 아니다. 그 정도 값은 충분히 하고도 남는 배틀기어다.

"이 검을 받으시면, 저는 당신을 시험한 다음 적절한 가격표를 붙일 거예요."

세실리아가 이미 했었던 말을 반복하며 검을 칼집에 밀어넣고는, 카이루스에게 검집째 그 칼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감정가가 잘 나올 자신이 없다면 사과하세요."

카이루스는 세실리아의 말에 대답했다.

"설마, 사과하면 용서받고 끝입니까?"

세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말로 하는 공허한 사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에게는 마음이 담긴 진실된 사과와 반성 따위보다, 모욕과 함께 바닥에 던져주는 충분한 합의금이 훨씬 가치 있다.

"광산에 당신을 팔아넘길 거예요. 5년간 무보수 노동을 조건으로 넘기면 지금 제가 당신으로 인해 낭비한 시간과 노력 정도는 벌충할 수 있으니까."

5년의 무보수 노동. 지금 사과하면 카이루스가 받게 될 처벌은 거기에서 끝난다.

하지만, 여기에서 카이루스가 스스로의 증명을 위해 검을 받아든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검을 받은 이후, 제가 평가한 당신의 가격이 10만 파인트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차분은 그대로 당신의 빚이 됩니다."

카이루스가 그 빚을 갚지 못하거나, 갚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당신은 평생 노예로 살게 될 거예요."

카이루스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제 인생이 10만 파인트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카이루스의 말에 세실리아가 웃음을 한 번 터뜨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인생은 알뜰하게 써먹을 경우, 10만 파인트 정도의 가치는 충분히 있어요. 어디 보자…."

세실리아는 다시금 카이루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후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면 카이루스가 당하게 될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노동과 매춘으로 시작하겠죠. 이후 오랫동안 혹사당해 더 이상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구걸을 시킬 거예요. 그 와중에 당신의 머리카락은 주기적으로 잘라내 가발 공장에 팔고."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10만 파인트를 벌충할 수 없다. 어림도 없다. 정말 중요한 역할은 저런 게 아니다. 세실리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장미정원이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면, 당신이 우리 대신 그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벌받게 될 거예요."

일종의 대타로 쓰이는 거다. 카이루스는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바로 이 시점이 되어서야 카이루스는 그가 빚진 10만 파인트의 대부분을 갚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대부분을 갚은 거지, 아직 전부 갚은 게 아니니까.

"이후 당신이 죽으면 그 시신은 해부용 시체로 매각할 거예요."

말이야 죽으면, 이라고 했지만 카이루스의 수명은 15년을 넘지 못한다.

"15년 뒤에도 당신이 아직 살아있으면, 그때는 강제로 죽일 거예요. 새로 출시 예정인 자동차 모델의 충돌 실험 따위에 써먹으면 되겠네요."

마네킹이 아니라 산 사람으로 충돌 실험을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할 테니까. 즉, 카이루스는 죽을 때도 돈을 벌며 죽게 된다.

"사후 당신의 신분증은 위조용으로 활용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카이루스는 자신의 빚을 갚는 데 성공하게 된다. 세실리아는 카이루스를 향해 엷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인생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당신의 삶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답니다."

10만 파인트. 세실리아가 인생이라는 개념에 붙인 가격표의 최솟값이다.

제아무리 쓰레기 같은 삶이라 해도, 밑바닥까지 박박 훑어내고 긁어내서 쥐어짜면 그 정도는 충분히 뽑아먹을 수 있다.

"다 생략하시고 마지막 말씀만 하셨다면 저도 아마 조금은 감동받았을 것 같습니다."

카이루스는 손을 뻗어 세실리아가 내밀고 있는 검을 받아들며 말했다. 세실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당신의 감동에는 제가 가격표를 붙일 이유가 없어요. 아직은."

가격표를 붙일 이유가 없다는 건, 세실리아에게 있어 카이루스의 감동이라는 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부하도 아니고 협업자도 아닌 카이루스의 감동 따위는 세실리아 입장에서 줘도 가질 이유가 없으니까.

"경고는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잡은 건 당신이에요. 탐내면 안 될 것을 탐낸 바보인지, 아니면 자격이 있기에 당당했던 건지. 이제 밝혀지겠죠."

세실리아는 다시금 문밖에서 대기 중인 조직원을 불렀다.

"사라를 지하 1층으로 불러서 대련 준비를 해줄래? 바쁠 텐데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도 전해줘."

이후, 세실리아는 계속 자리에 앉아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봄달래를 향해 말했다.

"봄달래, 당신과 나눌 이야기는 끝났어요. 식사를 마저 하시고 나면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그래도 보고 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봄달래 입장에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경고도 아니고 장미정원의 사장인 세실리아가 직접 경고한 거다.

하지만 저 카이루스라는 녀석은 그 경고를 듣고도 검을 받아들었다. 정말로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지독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라는 뜻이다.

둘 중 어디에 해당되더라도, 지켜볼 가치가 충분하다.

"네, 그러세요. 평가가 괜찮은 건축사는 역시 좋은 선택을 하는군요."

"건축사?"

뭐야, 저택의 개보수 공사라도 있는 건가. 카이루스의 표정을 보더니, 세실리아가 간단하게 대답해주었다.

"공사의 설계도를 그리는 사람들이죠."

공사.

은행강도나 기차털이 같은 큰 건을 해먹기 위해 일시적으로 뭉친 다음, 일을 마치면 수익을 나눠 가진 다음 해산하는 방식의 범죄를 공사라고 한다. 일종의 단기 프로젝트다.

건축사들은 이런 공사를 전문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녀석들을 일컫는 단어다. 직접 범죄 현장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고, 하는 일의 성격상 신분 또한 철저하게 감춘다.

"당신이 이 일에 참가한다면, 시공업자가 되는 거죠."

시공업자. 건축사가 짜놓은 계획에 따라 움직이며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대표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꽤나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지, 설명을 이어가던 세실리아는 노크 소리를 듣고 하던 말을 멈춘 다음 카이루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자 그럼. 따라오세요."

세실리아가 앞장서 문을 나섰다. 봄달래와 카이루스가 그 뒤를 따랐다.

세실리아의 저택, 그러니까 장미정원의 근거지는 지상의 구조물보다 지하가 훨씬 더 넓고 거대하다.

지상에 지어진 저택의 크기가 결코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하는 지상의 구조물과는 그 궤를 달리할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미적 감각을 중시해서 쌓아올린 지상과는 달리, 땅을 파내고 마련한 장미저택 지하의 공간은 그 목적이 처음부터 다르다.

"튼튼해 보이죠?"

지하의 바닥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냥 평범한 바닥이 아니다.

두 개의 판 사이에 벌집형태의 합금 구조물을 샌드위치처럼 끼워놓고, 그 위에 충격흡수를 위해 특수제작한 바닥재를 깔았다.

여기라면 코끼리들이 단체로 족구를 해도 문제가 없을 거다.

카이루스가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크기가 3m는 될 것 같은 거한이 2m는 될 것 같은 워해머를 바닥에 질질 끌며 등장했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 코끼리가 튀어나올 필요는 없는데."

저 거대하고 장대한 몸의 소유자가 바로 세실리아가 이번에 카이루스의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부른 사라라는 여자였다.

카이루스는 3m를 약간 넘어가는 거구의 근육질 여성을 올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사라라고 했었나? 뭘 먹으면… 아니지, 뭘 잘못 먹으면 그렇게 커지는거야."

카이루스의 질문을 들은 사라가 육중한 워해머를 자신의 옆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물."

대답을 듣자마자 카이루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 같은 소리 하네. 사람이 무슨 대나무냐. 물만 먹고 2m 이상 자라게."

키뿐 아니라 저 여자, 몸도 대단하다.

근육의 사이즈를 키우고 더 많은 무게를 들어올리는 걸 지상과제로 삼는 사람들이 사라의 몸을 본다면, 금강석을 깎아낸 것 같은 그녀의 자태에 눈이 멀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딴 건 카이루스의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건, 저 금속을 주물러 빚어낸 것 같은 강철의 여자를 그가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쑤시개라고 부른다. 어때, 멋지지 않냐?"

사라가 카이루스에게 말을 건다. 설마하니 자기 옆에 세워놓고 있는 공성추 사이즈의 워해머에 이쑤시개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건가?

"댁 이름이 사라인 것만큼이나 깜찍하군."

저 이쑤시개라는 이름의 워해머는 당연히 배틀기어다.

즉, 더 힘이 강해질 필요가 없어보이는 몸을 한 주제에… 저 여자는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힘이 더 강해질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16화 부업개시

* * *

사라가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의 가슴을 한 번 쿵 치며 말했다.

"사라 박사라고 불러라. 나는 아이란 공화국 페트릭 대학교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박사 학위를 주지 않으면 머리통을 호두처럼 부숴버리겠다고 지도교수를 협박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저 사라라는 여자는 훌륭한 몸에 머리까지 좋고, 지도교수의 온갖 갑질을 견뎌가며 비위를 맞춰 줄 정도의 근성과 눈치가 있다는 뜻이잖아.

육체와 정신이 모두 강철같다는 증거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내 손으로 망가뜨려야 하다니."

카이루스는 천천히 검을 들어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작지 않은 목소리였기에 사라도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웃기는 난쟁이로군."

"그래, 댁 덩치를 고려하면 나는 상대적으로 난쟁이가 맞다."

심지어 조나단조차 지금 카이루스 앞에 서 있는 사라 앞에서는 꼬마나 다름없을 지경이니까.

"계속 입만 움직이면서 시간을 끄실 생각은 아니실 테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실리아가 마침내 서두르라 재촉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가 자신의 옆에 세워두었던 워해머를 양손으로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어이구 맙소사. 저걸 진짜로 드네."

상대가 무기를 들었는데 계속 구경하며 감탄할 수는 없다. 카이루스도 세실리아에게 건네받은 검을 뽑아들었다. 철컥, 하는 느낌이 몸을 타고 퍼진다.

겉보기만 훌륭한 물건이 아니라, 출력도 훌륭하다. 적게 잡아도 30마력 이상의 출력은 너끈히 뽑아낼 거다. 이거면 된다.

"시작하자고. 네 갈비뼈를 실로폰처럼 두들겨주마."

입고 있는 옷을 뚫고 나올 것처럼 사라의 근육들이 요동친다. 그 장엄한 광경을 멀리에서 봤다면 카이루스도 작게 감탄했겠지.

비극적이게도, 근육의 약동과 함께 휘둘러지는 워해머가 노리는 건 카이루스였다.

와플 기계에 눌린 반죽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감탄이 아니라 대응을 해야 한다.

"이놈! 이놈!"

살벌한 소리를 내며 휘둘러지는 망치가 바닥을 강타할 때마다 충격파가 터져나가며 카이루스의 몸을 뒤흔든다.

사라의 공세가 기마대처럼 카이루스를 향해 밀려든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가 될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쌓아올린다."

공세를 피하며, 카이루스는 새로 얻은 색유리의 출력을 끌어올렸다. 바람이 공간의 점유권을 주장한다.

사라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든다. 한 장소에 몰린 공기가 나갈 곳을 찾기 위해 위쪽으로 솟구친다.

곡풍. 자신을 향해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으로 인해 사라는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야, 이게 안 뜨네."

큰 덩치에 들고 있는 배틀기어의 무기도 장난이 아니다. 사라의 몸을 허공으로 띄우려면 더 큰 바람이 필요하다.

상관없다. 지금 만들어낸 바람의 목적은 사라를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게 아니니까.

사라의 머리 위에 공기를 쌓는 거다.

"산곡."

사라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승기류가 그녀 주변의 공기의 밀도를 높아지게 만들었다.

카이루스가 잔뜩 쌓여있는 공기에 아래쪽 방향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면, 사라의 머리 위에 쌓여가던 공기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그 방향으로 쏟아져나오며 강렬한 하강기류를 형성한다.

산풍.

"크… 하악…!"

그 흐름은 망치처럼 사라를 강타한 다음, 계속 짓누른다.

사라의 몸이 크게 휘청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이쑤시개를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한다.

"후으으으으읍!"

내려찍히는 압력을 이겨내며 허리를 세운 사라가 카이루스를 향해 돌진한다. 그 기세가 증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기관차 같다.

"기가 막히네."

카이루스는 산곡풍이면 충분히 사라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사라의 강철같은 근육과 그에 못지않은 근성은 카이루스의 예상을 뛰어넘었던 모양이다.

"박사 학위가 있다 그거지."

대학원생 생활을 버텨내고 따낸 박사 학위는, 사람의 근성을 다이아몬드처럼 단련시키는 모양이다.

"한겨울에 이딴 부채질로 뭘 하겠다는 거냐!"

몰아치는 바람을 이겨내고 들어올린 워해머가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굉음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조막만 한 새끼가."

워해머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 덕분에 사라도 알 수 있었다. 워해머는 카이루스의 살을 으깨고 뼈를 부수는 데 실패했다.

"부채질이라니, 말조심해야지."

카이루스가 손에 쥔 색유리가 갑작스럽게 무지막지한 열기를 뿜어내며 공기를 뜨겁게 달군다.

바람이 들끓는 열기를 품고 날뛴다. 살을 익히고 눈앞을 아찔하게 만드는 열풍이다.

[국지풍 캄신]

50일 동안 멈추지 않으며 여행자들의 피와 살을 바짝 말려 모래에 파묻힌 미라로 만든다는 사막의 열풍이 지금 이 자리에 모사된다.

벽에 걸려있는 온도계가 열풍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어머, 비겁해라."

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던 세실리아가 카이루스에게 시선을 향한다.

그는 차가운 공기를 자기 주변에 가둬버렸다. 지금 이 공간을 통째로 익히고 있는 열풍에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놓은 거다.

"꽃탕의 최고 온도가 200도라고 하던데."

저 남쪽에 자리잡은 다연 대왕국에는 황토로 만든 토굴에서 숯을 구운 다음, 하루 정도 방치해서 열기를 좀 식히고 그 안에 들어가 열기욕을 하는 문화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온도의 토굴을 꽃탕이라고 하는데, 최고온도가 200도 정도다.

사라가 지금 견디고 있는 고통은 꽃탕에서 공업용 강풍기 바람을 정면으로 쐬고 있는 고통과 다를 게 없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고통 속에 바닥을 뒹굴 것이다.

"이겨낼 수 있다. 이 정도는 이겨 낼 수 있어."

사라의 피부에 시뻘건 열꽃이 피어난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간다.

"와, 이런 질리는 여자를 봤나."

그냥 맨몸으로 이 열풍을 버티며 기어이 뚜벅뚜벅 걸어와서 거대한 워해머를 들어올리는 사라의 모습은 무너지는 지붕도 떠받칠 수 있을 만큼 굳건해 보인다.

"흐어어어어."

그런 소리를 내며 사라가 크게 심호흡을 하는 순간, 카이루스는 열풍을 멈추고 빠르게 공기를 식혔다.

저 워해머가 어디를 강타하건 카이루스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공기층은 박살난다. 그러면 카이루스도 열풍에 그대로 노출된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사용한 기술이 의미를 잃는 거다. 거둬들이는 게 좋다. 방금 전까지 열기를 내뿜던 색유리는 이제, 반대로 냉기를 뿜어내며 공기를 식힌다.

빠르게 실내의 온도가 내려간다.

"하, 이제 좀 살겠구나. 더워 죽는 줄 알았지 뭐냐."

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사라가 워해머로 카이루스를 가리킨다.

"잔재주는 끝이…."

카이루스가 발을 내딛자, 그의 발아래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시술을 통해 구조가 변한 슬개골과 거기에 맞춰 변화된 신체가 가속을 시작한다.

보통의 육신으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급가속과 급정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뭐… 뭐야."

봄달래는 자신의 눈을 비볐다. 봄달래는 카이루스의 움직임을 볼 수 없다.

사라는 순간순간 카이루스의 움직임을 놓쳤다가 따라잡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중이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눈은 정확히 카이루스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보이는 모양이구나.'

저 여자. 그냥 조직을 잘 운영하고 수완이 좋아서 장미정원이라는 거대 조직의 두목이 된 게 아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세실리아가 카이루스의 속도를 따라잡았다는 뜻은, 속도만으로는 그녀를 밀어붙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속도만이 카이루스가 가진 무기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고."

잠깐 다른 생각을 하던 카이루스는 자신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사라의 이쑤시개를 급하게 피했다.

일단 지금 상대에 집중하자.

눈앞에서 워해머를 운석처럼 휘두르는 사라의 목을 따는 건 카이루스의 목적이 아니다.

이겨도 세실리아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다. 최대한 스스로의 몸값을 올릴 수 있는 행동을 이어가야 한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시험이다.'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어떤 재능과 쓸모가 있는지를 증명하고 어필해야 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카이루스가 가장 강렬하게 세실리아에게 자신의 쓸모를 자랑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라의 가장 큰 강점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강인한 육체에 배틀기어의 출력을 더해 뿜어내는 압도적인 힘이다.

그렇다면….

그걸 상회하는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며 정면돌파하는 게 가장 큰 점수를 따는 길이다.

카이루스는 자신을 향해 혜성처럼 떨어져내리는 워해머를 노리고 검을 들어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고작 공성추만 한 워해머와 성채를 바꾸는 바보는 없다.

카이루스가 성채 하나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 페더윙 가문의 직계라면, 이 정도는 몇 번이고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증명한다. 흘리거나 피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

검은 버텨 줄 수 있다. 저 공격에 당한다면 그건 배틀기어의 문제가 아니라, 카이루스 자신의 기량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추락하는 워해머를 노리고 베어올리는 검과 베어올리는 검을 노리고 추락하는 워해머가 마침내 격돌한다.

"으음!"

고막을 찢고 심장을 터뜨릴 기세로 충격파가 퍼져나가고 사라가 낮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지하에서 폭발하듯 솟구친 충격파는 벽을 때린 다음, 무수한 굉음의 메아리가 되어 방금 전 충돌의 파괴력을 대변하듯 연달아 울려퍼진다.

"뭐해. 한 번 때리고 지쳤나?"

카이루스는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망치를 검으로 떠받들고 말했다.

"지쳐? 내가? 너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거대한 워해머를 꽉 쥐고 있는 손의 힘줄이 꿈틀거리고, 손가락 뼈마디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정면으로 받아낸 사람은 존나게 오랜만이라 놀랐을 뿐이다."

"내가 원래 좀 놀라운 사람이야. 비밀도 많아서 매력적이지."

카이루스를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망치가 휙 하고 들어올려졌다. 카이루스와 사라의 시선이 서로 마주친다.

사라의 얼굴은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귀신처럼 일그러져있다.

카이루스는 양 어금니를 꽉 문 채 불꽃이 튈 것 같은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

"대표님의 자작요리처럼 만들어주마!"

거대한 망치가 휘둘러진다. 세실리아의 눈썹이 잠깐 꿈틀거렸지만, 카이루스나 사라는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검과 망치가 다시 격돌한다. 검을 튕겨내고도 여력이 남은 망치가 계속해서 카이루스의 머리 위로 추락한다.

머리 위로 망치가 떨어지기 전에 카이루스는 튕겨져 나간 검을 다시 휘두른다.

"더 빠르게."

다시, 또다시. 망치가 검을 튕겨내고도 힘이 남아 계속 카이루스를 향해 밀고 들어온다면 카이루스가 할 일은 한 가지다.

다시금 휘두른다. 망치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때린다.

"조금만 더. 계속할 수 있잖아."

휘둘러지는 거대한 망치가 오래된 거목이라면, 카이루스가 휘두르는 검은 그 거목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신 휘둘러지는 도끼다.

"…."

다시금, 검과 망치가 서로 부딪친 채 허공에 멈췄다. 망치가 멈추기 전까지 카이루스는 다섯 번의 검격을 휘둘러야 했다.

사라는 계속 망치를 휘두르고, 카이루스는 그 망치를 향해 반복해서 검을 휘두른다.

한 번의 강격을 막아내기 위해 휘두르는 다섯 번의 속공이 강철의 우산처럼 허공에 펼쳐진다.

"미친놈. 그럴 거라면 그냥 피하던가!"

사라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사라가 한 번 휘두를 때 검을 저렇게나 많이 휘두를 수 있다면, 피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널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거든."

카이루스의 목표는 증명이다.

17화 부업개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