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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공간의 시간법칙은 현실과 다르다.

그 기묘한 공간 내부에서 며칠.

몇주를 싸웠다 한들 현실로 나온 순간 채1분도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덜컹!

"큭."

유신이 떨어진 곳은 위태롭게 기울어가는 빌딩 내부의 철골이었다.

불과 몇 미터 아래에는 해수면이 요동치고. 거대한 해양 괴물들이 지느러미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움찔.

그곳에는 카르갈이 쓰러져 있었다.

중상을 입고 다 죽어가던 그 때 그 모습으로.

하지만.

'여기까진가.'

유신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사아아아.

카르갈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었기 때문이다.

카르갈 역시 지금껏 이 망가진 세상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초인.

유신이 비장의 수들을 여러 개 숨겨 뒀듯. 그 역시 자신의 목숨을 구명할 수단 정도는 마련해두었다.

에스트가 차단되어 발동되지 못한 유물들이 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잠시 후.

스으윽.

카르갈이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손짓 한 번으로 능력자들을 도살하던 그 때의 그 오만한 모습으로.

섬뜩한 에스트를 줄줄이 뿜어내며.

하지만 그 속에는 지독한 찬사 역시 섞여있었다.

"···진심으로 감탄했다. 능력자 유신."

처음 아공간 속에서 보여준 격전.

죽음을 대가로 피워올린 기습.

그 모든 것은 이 한 방을 만을 위해 준비된 치밀한 설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뻔 했고.

이 모든 결과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둘.

눈앞에 있는 사내의 강인한 정신력과 판단력.

꺼지지 않는 투쟁심.

"그리고 사과하겠다."

그리고 방심.

한 인간이 수 많은 권능들을 다룬다는 것에서 온 호기심.

자신이 쌓아올린 힘에 대한 자부심.

오만과 탐욕에 대한 대가.

카르갈은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눈앞에 있는 사내를 얕봤다.

손속에 여유를 두었기에 지금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 널 상대하겠다."

넌 내 호적수다. 목숨을 걸고 처리해야 할 강적.

카르갈은 유신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자세를 잡았다.

스으윽.

무릎을 살짝 굽히며 왼발을 앞으로 내민다.

검을 든 손은 등뒤로 뻗으며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다.

남은 한 손은 아무렇지 않게 축 늘어트린 것이.

그냥 어디 한량이 등에 검을 이고 다니는 듯한 불성실한 자세였다.

하지만.

유신은 카르갈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기세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흑도가 쇳소리를 낸 순간 그려지는 자신의 주마등 역시도.

철컥.

흑도가 번뜩였다.

유신을 휘어잡았던 살기의 끈들이 폭발하며 검날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칼날이 또 한 번 유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없었다.

챙! 누군가가 유신의 앞을 가로막은 채 카르갈의 검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꾸우욱.

그것도···

"늦지는 않은 것 같네."

검지와 중지 단 두 개의 손가락만으로.

"···?!"

말도 안 되는 기행을 벌인 당사자는.

그녀의 정체는 에바그린이었다.

***

폐허가 된 수중도시의 한복판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닥친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채 위태로운 철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챙!

그러자 카르갈은 다급히 흑도를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언··· 나이트."

카르갈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갑작스러운 난입자에 대한 분노보다 좀 더 짙은 감정이 깔려있는 듯 했다.

이에 대응하는 에바그린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참 어지간하네. 팔 하나랑 얼굴 반쪽 날아간 것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나봐?"

유신은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미루어보아 상황을 파악해보았다.

아마 카르갈의 손과 얼굴을 저렇게 만든 것은 에바그린인 것 같다.

그리고 카르갈은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오늘의 습격전을 계획했고.

"이 순간만을··· 쿨럭, 쿨럭. 기다렸다."

유신의 추측대로였다.

"오직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날의 치욕을 갚기 위해."

뿌득 이를 악문 카르갈의 모습이 변했다.

누더기 같은 옷 대신 검은색 도포가 생겨나고. 뒤틀린 얼굴에는 새하얀 도깨비 가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었다.

카르갈은 들고있던 흑도로 제 가슴 부근을 찔렀다.

꿀렁꿀렁.

그러자 주인의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먹은 흑도의 색깔이 시뻘겋게 변했다.

곧 섬뜩하면서도 강맹한 기운을 줄줄이 뿜어내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저 모습이다.

저게 유신이 알던 카르갈의 본모습이다.

"흑도 쿠로이츠키. 주인의 생명력을 갈취하고 그 대가로 잔혹한 힘을 해방시키는 마검···"

에바그린은 굳은 얼굴로 카르갈의 모습을 살피더니.

"근데 괜찮겠니? 지금 네 수준으로 감당하기에는 좀 벅차 보이는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외팔이 주제에."

"네노오오오옴!"

두 사람의 신영이 사라졌다.

────────!

곧 우레와도 같은 굉음과 함께 해수면이 요동치고, 주변에 있던 폐허 건물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0.1초. 아니, 그보다도 더 빨리.

찰나의 순간 수 없이 많은 공방을 주고받는다.

그건 유신의 눈으로는 쫒을 수 없는 영역의 싸움이었다.

이 망가진 세상의 꼭대기에 다다른 초인들의 구역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니, 인지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순간.

사아아아.

에바그린과 카르갈은 어느새 수면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천지차이였다.

"허억, 허억."

반쯤 깨진 가면과 찢겨진 도복.

카르갈은 검을 수면에 박은 채 거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반면에 에바그린은 숨조차 흩트러트리지 않은 채 태연하게 카르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유신과 카르갈의 싸움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무 약해졌네. 이거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인걸."

에바그린이 귀를 후비며 하품했다.

"그러게 상처도 채 추스르지 못했으면서 왜 일을 벌였대?"

그녀의 모욕적인 언사에 카르갈은 피가 베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

하지만 곧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고요히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는 어떤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스르릉.

카르갈은 너덜거리는 의수 대신 왼손으로 검을 바꿔쥐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마검에게 자신의 생명을 먹이며 그 흉폭함을 키우기 시작했다.

마검이 빛을 번뜩일 때 마다 카르갈의 육신이 쪼그라들었다.

팔을 잃었음에도 위풍당당했던 전사는···

"크흐. 콜록, 콜록."

한 순간 비렁뱅이 황무지인처럼 변했다.

하지만.

고오오오오.

카르갈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났다.

그의 손에 들린 마검 역시도 주인의 명에 따라 마지막 불꽃을 섬뜩하게 피워올리고 있었다.

"···"

그 기세는 에바그린 또한 허투루 넘길 수 없었던 것일까?

팔짱을 푼 그녀가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으로 바람이 불며 그녀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투명했기에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분명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무형검(無形劍)이었다.

다음 순간.

탁!

무형의 검과 마검이 맞부딪쳤다.

두 개의 강맹한 힘이 충돌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 어떠한 굉음도 울려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에바그린과 카르갈이 서로를 스쳐지나간 순간.

또르륵.

수면 위로 고요한 파문이 일었다.

직후 억눌려있던 용수철이 튕겨나가 듯.

────────────!

거센 에스트의 폭풍과 힘의 파동.

천둥을 수십배는 압축시킨 듯한 굉음.

섬광과도 같은 눈부심이 한대 어우러져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솨아아아.

두 사람이 서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깊은 심해의 바닷물도, 종말에도 끈질기게 버텨왔던 폐허 건물들도 모든 것이 소멸했다.

우두커니 서있는 에바그린과 카르갈의 주변은 황폐한 황야 뿐이었다.

맞부딪친 힘의 크기를 가늠이라도 하듯 말이다.

그 때.

털썩.

카르갈이 무릎을 꿇었다.

격전을 못이기고 터져나간 의수 대신 남은 한 손에 쥔 검으로 바닥을 짚은 그는···

"커헉. 크흐."

피를 토하며. 억울해 죽겠다는 심정으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닿지 못하였는가···"

단말마를 내뱉는다.

"복수는 누구나가 꿈꿀 수 있지만."

그의 앞에 서있던 에바그린은 잘려나간 셔츠의 앞섬을 만지작거리더니.

"그걸 이룰 수 있는 건 강자의 권리."

모든 것을 불태운 이 도전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무형검을 들어올렸다.

"잘가라 전 칠검사(七劍士)."

저것이 바로 아이언 나이트.

모든 것을 제 손아귀에 넣고, 내키는대로 폭군처럼 군림해도 그녀가 지탄받지 않는 이유였다.

강하다. 그저 압도적으로 강하다.

강자지존. 약자멸시의 세상에서 이 명제가 주는 의의는 컸다.

에바그린이 검을 내려찍던 그 순간.

어디선가 터져나온 불협화음이 거목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아주 잠깐의 틈. 격전으로 인해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들의 사이를 뚫을 정도로 교묘한 타이밍에.

탕!

미간에 구멍이 뚫린 카르갈이 털썩 쓰러졌다.

에바그린이 삐딱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그곳에는 유신이 있었다.

연기를 피워올리는 리볼버를 남은 한 손으로 꽉 쥔 채.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새로운 힘]

< 새로운 권능과 요양 그리고 제안 >

강대한 힘의 파동에 모세처럼 갈라졌던 파도들이 다시금 쏟아진다.

에바그린은 카르갈의 시신과 마검을 회수하고는 몸을 날렸다.

바로 유신이 쓰러져 있는 그 자리로.

"너···"

에바그린의 눈초리는 복잡미묘했다.

책망, 미심쩍음, 진한 호기심.

퍽 다양한 감정들을 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이를 어떻게 넘길까 고민했겠지.

하지만 유신은 지금 이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지독한 격전과 출혈로 인해 정신이 흐릿하기도 했거니와···

[절명검(絕命劍)의 오의]

[잔혹한 도깨비 감투]

[절정에 이른 검사의···]

그런 상태로 카르갈이 남긴 유산들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최선인가?

저 중에 무엇을 택해야 지금의 나한테. 그리고 앞으로의 나한테 가장 효율적이며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인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유신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능력을 흡수합니다]

[과도한 능력 흡수!]

[그릇이 넘칩니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나이트워커의 형태없는 어둠이 사라집니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에스트 장벽이 사라집니다]

한 가지를 선택했다.

***

-네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

-부탁한다! 부디···

푸르스름한 액체 너머에서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곧이어 그 모습이 꿈처럼 사라지고.

-아들. 일하느라 힘들지? 이것 좀 먹고 해.

이번에는 방문이 열리며 나타난 주름진 중년인이 과일 접시를 내민다.

역시나 그 장면 역시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넌 처음부터 이곳 사람···

걸색 머리칼을 한 구릿빛 피부의 여급이 기가 차다는 듯 웃어 보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들의 편린들 속에서 헤엄치던 유신은···

"···"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과 코끝으로 스며드는 소독약 냄새.

삑-삑

옆에서 고요하게 제 존재감을 알리는 심박동 기계까지.

여긴···

"병원인가···"

유신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곧 피어오르는 현기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난 눈만 뜨면 늘 이런 신세인 것 같은데···

잠시 신세를 한탄한 유신은 허전함과 맞지 않은 무게중심을 느끼며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없었다.

어깨춤부터 팔뚝, 오른손까지가 싹둑 잘려나가 있었다.

그 때 격전에서 싸웠던 그 대로.

영구적인 신체의 손실.

보통 사람이라면 오열하며 절망이 빠질법한 그런 상황이지만 유신은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안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싸게 먹힌 편이지.'

이 망가진 세상에서 칠검사가 주는 위명이란 그 정도였다.

적으로 마주치면 무조건 죽는. 목숨을 건진 것이 신기할 정도의 기행.

하지만 유신은 카르갈과 마주친 후 살아남았다.

아니, 오히려 심리전을 통해 그를 죽음의 직전까지 몰아넣기까지 했으며...

[절명검(絕命劍)의 오의]

마지막에는 카르갈을 처치하고 그의 힘을 강탈하는 것에도 성공했다.

유신은 내면에 새롭게 맥동하고 있는 이 힘을 살폈다.

강하다.

웬만한 능력자들의 권능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그 구조와 특성을 파악할 수 있던 유신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끝모를 아득함 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이 권능에 새겨진 이름.

카르갈이 싸우던 모습, 일부분이나마 엿본 권능의 틈새에서 찾아낸 알고리즘으로 인해 약간이나마 파악해볼 뿐.

'아마 그때 보여줬던 그 검술이겠지.'

이상한 자세를 취하며 자신을 끝장내려 했던 그 검술.

마지막에 아이언 나이트와의 격전에서 맞부딪쳤던 그 검술.

모니터 밖의 지식으로 판단하건데 카르갈에게 절명검이란 이명을 준 그 검술.

[패검 : 뇌락일섬]

그걸 맞고 죽은 캐릭터들만 몇 개였더라?

현실에서 느낀 위압감은 그 이상이었다.

마치 마력에 사로잡힌 듯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으니까.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한 줄기 섬광."

유신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강했다.'

카르갈은 잘 쓰는 오른팔을 잃은 상태였음에도 강했다.

심지어 몸에 문제라도 있는지 호흡마저 불안정해보였음에도 강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힘을 강탈했다.

아직 그 힘을 온전히 다 흡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검에 있어서 만큼은 수십 단계의 진보를 이뤄냈다.

물론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신체의 결손과 유물[데프크라토스의 흑마술 반지]를 이용함으로써 깎여나간 영혼력 말고.

설마하니···

'그릇을 두 개나 잡아먹을 줄이야.'

막대한 힘은 막대한 대가를 필요로 하기라도 한다는 걸까?

절명검의 권능은 유신의 내면에 자리한 그릇을 두 개나 잡아먹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유신은 나이트워커의 힘과 베리어를 지워야 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강대한 능력은 그만큼 그릇의 소모가 크다는 것을 학습했을 뿐더러.

어차피 나이트워커는 환경에 따라 제약을 많이 받는 힘이었고.

베리어는 무형갑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우선 이 팔부터 치료해야겠지.'

'트롤을 잡든 포션이든 뭐든···'

유신이 생각할 때.

덜컥.

문이 열렸다.

나타난 것은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다.

그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하지만 조심스런 손길로 유신을 진단하고 자기들끼리 뭐라 말하더니 금새 사라졌다.

그제서야 유신은 주변을 좀 더 둘러볼 생각이 들었다.

여기 평범한 병실이 아니다.

특실이다.

하루 입원하는데에만 수천 단위의 크레딧이 깨지는 상류층의 전유물.

어째선지 그정도의 중상을 입었는데도 죽을만큼 괴롭지는 않더라...

그리고 방금.

"깨어났군."

그 은혜로운 손길을 선사한 이가 나타났다.

또각또각.

에바그린은 흩트러짐 없는 자세로 유신에게 다가왔다.

"자, 이제 대화를 좀 나눠볼까?"

"우리. 할 말이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

곧 선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신 역시 허허 웃어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머리를 부산하게 굴렸다.

어떻게 해야 칠검사(七劍士)를 아무렇지 않게 쳐죽인 이 괴물에게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

"우선 지망생 유신.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끝까지 시험을 치른 것은 물론. 습격자들과 대치. 본 시험관들이 대처할 시간을 벌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유신의 짐작과는 달리 에바그린이 취한 것은 취조가 아니었다.

감사인사였다.

살짝 목례하는 에바그린의 모습에서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게 시험관이자 클레이모어로서 취해야 할 행동에는 걸맞지.

습격자들이 경기장을 습격한 것은 명백히 컴퍼니의 실책이니까.

하지만 에바그린의 의도를 알고 있는 유신으로서는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개소리 하고 있네. 일부러 뜸을 들였으면서.

'너 정도 되는 능력자가 말이야.'

그 때의 에바그린은 단신으로 카르갈은 물론 난입한 다른 습격자들 역시 쳐죽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망생들이 수 없이 죽어나가기도 전에.

그 정도의 여유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짐작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신은 에바그린의 성격을 알고 있으니까.

"지망생 유신의 용기있는 행보에 대해서는 차후 적절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이름까지 불러주며 친절하게 치하하던 것도 잠시.

"그 때 우리가 만났을 때 너는 분명 스스로를 재생 능력자라 밝혔다. 하지만 지난 시험에서 네가 보여준 능력은 신체 강화였어. 어떻게 된 거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댄다.

유신은 우선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기보다 우회하는 것을 택했다.

"고맙다고 할 때는 언제고. 대뜸 호구조사인가? 그게 은인에 대한 태도?"

에바그린은 속으로 웃었다.

분명 자신과 카르갈의 싸움을 봤을 텐데도 이 녀석의 뻣뻣한 태도는 여전했다.

이 '나를' 상대로 말이다.

보통 범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다.

'하긴 그 정도쯤 되니까 칠검사하고 싸워볼 생각을 했겠지.'

흥미로운 녀석.

아니···

대단한 녀석.

에바그린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태도에 불만족스러움을 느끼는 점. 충분히 이해한다. 온당한 반응은 아니야. 하지만."

"지망생 유신은 모르겠지만 지금의 컴퍼니는 꽤나 위태로운 상태다. 일전의 범죄자들부터 시작해서 광신도, 볼셰비키, 부패한 인사 등. 내외부적으로 불순불자들이 상당히 많아. 그렇기에 작금의 조사 정도는 이해해주기를 바라."

지망생 유신이 우리들과 같은 배를 타고 싶다면 말이지.

명분과 함께 은근한 협박까지 일삼는다.

'내 비밀을 봤을까?'

'그냥 때려쳐?'

유신은 생각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런다고 해도 감시의 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하게 붙겠지.

여기서는···

맞부딪쳐야 한다.

"능력 재단의 오판이었다."

"흐음?"

"재생력이 아니라 신체강화 능력이었다는거지."

신체강화는 재생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메트로폴리스 쯤 되면 갖가지 정밀검사로 능력을 정확히 재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곽은 야만적인 촌동네였다.

능력을 다루는 능력자들 역시 자신의 힘을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유신 정도로 철저한 자가 자기 능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괴변에 가까웠지만.

'알빠냐?'

뭐, 본인이 몰랐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지금은 신체강화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흐흠. 그래? 그렇단 말이지."

유신이 불길함을 느낄 정도로 에바그린은 입가를 가린 채 키득거리다가.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품에서 수정구를 하나 꺼냈다.

곧 그곳에서는 영상이 하나 재생됬는데.

공교롭게도 마침 유신이 카르갈을 상대로 아공간 능력을 펼칠 때의 상황을 담고 있었다.

잠깐의 일렁거림과 함께 두 사람이 잠깐 사라지는 그 찰나의 광경을.

'염병.'

유신이 건물을 폭발시킨 이유는 제 능력의 비밀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걸 저런식으로 잡아냈을 줄이야.

그 철저함에서 유신은 생각했다.

에바그린은···

'이미 알고 있다.'

하긴 애초부터 이 상황을 완전히 잡아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기에는 유신이 벌인 일의 결과가 너무나도 컸다.

그 칠검사를 상대로 살아남았으니까.

'이 세상 녀석들은 결코 생각 없는 마네킹이 아니야.'

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집착할 줄은 몰랐는데."

"이제야 인정하는군."

싸늘하게 식은 머리를 굴린다.

그래도 최악보단 차악을 택해본다.

유신이 말했다.

"난 세 개의 능력을 다룬다. 화염, 신체강화, 아공간···"

"그게 아니지 않나?"

고오오오.

순간 에바그린으로부터 거센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네 능력은 그게 아니지 않아?"

곧 손가락을 까딱거리더니.

"네 능력. 죽인 타인의 힘을 흡수하는 거잖아. 안 그래?"

유신의 은밀한 비밀을 거침없이 파해친다.

***

"연기는 그럴듯 했어. 지금껏 잘 숨기기도 했고 말이야. 하지만 끝까지 숨기고 싶었더라면 그 한 발만은 쏘지 말았어야지."

-탕!

카르갈의 숨통을 끊은 그 한 발.

유신에게 새로운 힘을 준 그 한 발.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살떨리는 강자들간의 격전에서. 어쩌면 그들의 진노를 살 수도 있는 타이밍에 구태여 끼어든다?

그것도 지금껏 에바그린을 요리조리 피해다닌 유신이?

"너무 속보였다니깐?"

에바그린은 그것을 포착.

지금껏 유신이 보여준 미심쩍은 행동들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위의 가설을 대입하자 놀라울 정도로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볼때마다 확연하게 강해지던 에스트도.

남들과는 다른 그 행보도.

철두철미함 속에 일견 보이던 그 어색함도.

에바그린은 애초부터 유신을 떠보기 위해 난입을 허락한 것이다.

꾸우욱.

붕대로 감은 상처부위에서 핏물이 베어나온다.

살기만으로도 온 몸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공간 속에서 유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게 뭐냐."

그건 시인과도 다름 없는 말이었다.

"후훗."

그러자 거짓말처럼 살기가 사라졌다.

에바그린은 내가 언제 살기를 뿜었지? 라는 표정으로 살포시 웃었다.

"우선 하나.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말 것."

그리고 둘.

"내 밑으로 들어올 것."

곧 손가락을 펴보이며 제 본심을 내보였다.

"···"

에바그린 쉘라이트.

동아시아 지역 유일의 7위계 능력자.

철의 마녀.

살아 움직이는 성채.

흡혈군주의 목을 벤 자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자.

이 세상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최강자 중 한 명.

그 정도 되는 존재의 노골적인 스카웃 제의에 유신의 눈이 가라앉았다.

< 거래와 후견 임명과 행보 >

이 세상을 모니터 밖으로 알던 때에.

강대한 능력자나 초인 캐릭터들을 수천 번은 키워냈을 시절에도 유신은 에바그린으로부터 단 한 번도 스카웃 제의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명함이나 컴퍼니의 영입 같은 것이 아니라.

이런 노골적인 제의 그 자체를.

"너 정도 되는 강자가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하다니. 역시 내 능력 때문인가?"

유신의 능력은 특별하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전율적인 권능이다.

하지만 에바그린 역시 특별했다.

날 때부터 강했던 저 여왕은 이 세상의 먹이사슬의 꼭대기 층을 차지한다.

"호기심이 없다고는 말 못해. 하지만 그보다도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네 가능성이야."

"가능성?"

"그래, 가능성."

에바그린이 미소 지었다.

"궁금해졌어. 타인을 죽여 그 힘을 갈취할 수 있는 네가 어느정도의 경지까지 올라올 수 있을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말이야."

곧 투쟁하고 살아남으며 이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선.

"여기까지 올라온다면 말이야. 호적수란 게 없다? 나와 비슷한 자리에 있는 녀석들도 하나같이 몸을 사려."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원동력을 밝힌다.

"조직이 최우선이라느니. 세상의 균형이 무너진다느니 겁쟁이 같은 소리나 하면서 말이야."

"···"

"그 녀석들도 옛날엔 그러지 않았어. 그저 몰아치는 폭풍에 맞서 살기위해 싸워나갈 뿐이었지. 하지만···"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더군."

가라앉은 에바그린의 눈동자는 한때 찬란했던 과거를 그리는 고리타분한 어른의 것과 닮아있었다.

유신은 생각했다.

'끝없이 투쟁하는 전사. 아이언 나이트.'

그녀의 본성은 그 옛날 발할라의 전사들을 닮았다.

무(武)를 갈망하며 승천을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던 진정한 전사들.

어떤식으로든 강해지기 위해 혹은 자신이 속한 조직을 위해 강탈 능력을 탐내는 승냥이 때 보다는 훨씬 낫다.

아이언 나이트의 저 순수한 호기심과 갈망은 적어도 유신 자신의 배를 가르며 생체실험 같은 짓을 하지는 않을 터이니.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게 빠졌다.

"내가 네 밑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이언 나이트라는 방패가 생기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면 곤란하다.

하지만 에바그린의 답변은 역시나 범인의 그것과는 달랐다.

"달라지는 건 없어. 그냥 넌 너대로 살면 돼."

"호오."

"그냥 싸우고 살아남아. 그리고 점점 더 강해져. 지금껏 했던 것 처럼 말이야. 그럼 끝이야."

유신은 에바그린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비록 미래에는 재앙이 다가오고, 주변에서는 심상찮은 기류가 흐른다고는 하나 이 세상의 정세는 퍽 안정적이다. 정확히는 에바그린의 피를 끓게할 정도의 호적수가 없다.

날때부터 투쟁하던 저 여전사는 그걸 견디지 못한다.

그렇기에 판을 뒤엎으려고 한다.

유신이라는 체스판의 말을 사용하여.

그녀는 유신이 점점 더 강해지고 수면에 파장을 일으켜서 저 꼭대기에 안주해있는 권좌들을 움직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해는 되는군.'

하지만···

"그걸 부하라는 말로 칭해도 되는 건가?"

이 경우에는 비즈니스 적인 관계라고 해야 되지 않나?

유신으로서는 아무런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이다.

"뭐, 조건이 아주 없지는 않아."

에바그린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펴 보였다.

"내가 심심할 때마다 와서 말 상대 좀 해주고. 둘이서 네 능력에 대한 연구도 좀 해보고. 정도?"

참고로 네가 절명검을 상대로 아공간 능력을 쓴 것도. 괴이의 힘을 써서 녀석을 거의 다 잡을뻔 했다는 것도.

"나만 알고있다?"

아직까지는.

마지막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건 자신한테 이득이 되면 됐지 손해가 되지는 않는다.

잽싸게 머리를 굴린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하지. 보스. 아니면 스승이라고 부를까?"

그 태세전환에 당황이라도 한 걸까?

"···"

에바그린은 멍한 눈으로 유신을 바라보더니.

"오글거리게 왜 그래? 죽여버리기 전에 그 입 닥치도록."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

유신은 피식 웃었다. 에바그린 역시 곧 웃었다.

"자, 그러면 영광스런 부하 1호님한테 무슨 선물을 줄까? 어디··· 이거면 충분할려나?"

지이이잉.

에바그린의 팔찌에서 느닷없이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길게 쭉 뻗은 새카만 검신은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며 음울하게 번들거렸다.

칼날 아래 가드에 박힌 붉은 보석은 무슨 눈동자를 형상화 한 것 같다.

저건···

검사라면 누구나가 탐낸다는 보물.

칠검사(七劍士)의 상징이자 강력한 힘을 지닌 일곱자루의 마검 중 하나.

카르갈이 사용하던···

"흑도 쿠로이츠키."

"어때? 꽤 괜찮은 선물이지?"

이걸 집들이 선물처럼 이렇게 툭 던져준다고?

최상급 무구이자 유물을?

유신은 남은 왼손으로 에바그린으로부터 흑도를 건네받았다.

직후 귓가로 들려 목소리.

-피를. 죽여라. 심장을 바쳐라.

같은 저주의 말들이 정신을 뒤흔들었다.

"큭."

아직 부상을 다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유신은 순간 검의 의지에 사로잡힐 뻔 했다.

챙그랑.

그가 흑도를 놓치자 에바그린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참. 이 말을 깜빡했네.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 그 검 꽤나 앙탈이 심하거든."

명백한 고의다.

저 여자의 성격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니까.

하지만.

유신 역시 잠자코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건 선물이라 할 수 없군."

"음?"

"요즘은 주인의 물건을 다시 되돌려준 것도 선물이라 칭하나?"

"···"

에바그린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풋. 배를 부여잡으며 웃었다.

"아, 골 때리네 정말···"

카르갈을 몰아붙인 것은 분명 에바그린이다.

하지만 그의 목숨을 끊은 것은 유신이다.

즉 유신은 내가 죽인 놈의 물건이니 이건 내껀데.

왜 네가 생색내냐는 뜻을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실로 뻔뻔한,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지만···

"미안. 내가 실수했네."

이는 지루함에 몸부림치는 이 최강자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좋아. 다른 걸로 주지. 어디보자···"

잠시 후 에바그린의 손에서 나온 것은 고급스러운 병이었다.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렸는데. 햇빛에 비춰질 때 마다 오색찬란한 색으로 반짝였다.

저건···

"에린교의 성수다. 적어도 대신관급의 힘이 담겨있지."

너라면 이게 무얼 의미하는 지 알겠지?

"···"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잘려나간 팔의 단면을 만지작거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부상.

웬만한 포션이나 재생능력으로는 회복시킬 수가 없다.

무려 검기가 담긴 마검한테 당한 상처니까.

고수들하고 싸울 때 조심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들과의 격전에서 이뤄진 신체의 결손은 곧 이 세상의 신비로도 어찌할 수 없는 영구적인 결손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카르갈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방금 말한 에린교의 성수는 다르다.

온갖 광신도들이 넘실거리는 이 세상에서도 유일하게 공인된 종교로 인정받고 있는 저 권위있는 집단에서 만들어진 특별한 액체는.

'이런 결손도 치료한다.'

유신은 붕대를 풀고는 성수를 부었다.

치이이이.

곧 찬란한 빛과 함께 다시금 수복되는 오른팔에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양판소의 주인공들이 그렇게 기연. 기연 하는 거구나.

아주 그냥···

'사기적이네.'

편리하기 그지없다.

유신은 지난날 에바그린을 욕했던 것을 사과했다.

그리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되기로 했다.

아이언 나이트 만세다.

***

쉬이이익.

기관장치에서 뿜어지는 증기와 스모그로 인해 오늘도 흐릿한 안개가 낀 펑크시티 시내.

황동 거울 앞에 선 유신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체크무늬 넥타이 아래 차려입은 회색정장은 21세기의 양식을 띄고 있다.

중후한 느낌을 풍기면서도 고리타분해 보이지는 않는 게 딱 봐도 명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걸로 하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정말이지 잘 어울리시는군요!"

주인장의 환대를 뒤로한 채 유신은 걸음을 옮겼다.

"모시겠습니다."

가드의 인도 아래 도착한 곳은 웬 광장이었다.

마치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넓은 경기장이 자리한 광장.

[관계자외 출입 금지]

팻말을 지나친 유신은 어두컴컴한 통로를 성큼성큼 걸었다.

곧 빛이 떨어지는 경기장 내부로 들어선 순간.

와-아아아아아!

우레와도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경기장을 빙 둘러싼 좌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앉아서 환호하며 박수 치고 있었다.

그 열렬한 기세에 압도될 법도 했지만 유신은 덤덤히 걸어서 자신의 자리에 섰다.

경기장의 중앙에 마련된 마치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장처럼 된 공간에.

"몸은 좀 괜찮아요?"

그 자리에는 클레르도 있었고.

"내 유물 돌려주는걸 까먹은 건 아니겠죠? 임명식이 끝나면 당장 내놔요."

레오와 대머리 등.

함께 시험을 치른 지망생들이 예식용 드레스와 수트를 입은 채 주르르 서 있었다.

잠시 후.

단상 위로 헝클어진 인상의 통통한 사내가 나타났다.

"흠흠."

수염자국이 선명한 그는 이곳 펑크시티 지부의 대표이자 지배자 메이슨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싼 카메라와 관객들을 뿌듯하게 훑어보더니 말했다.

"지금부터 제 38회 클레이모어 임명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부러움과 시기질투, 호감과 흥미, 언짢음과 분노.

수만개의 시선이 수많은 감정들을 띄워낸다.

그 대상이 된 주인공들은 메이슨이 한 명씩 호명할 때 마다 단상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클레르 코스탄자. 언제나 악에 맞서 싸우며 이 세상의 정의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겠는가?"

마치 그 옛날 중세시대의 기사 임명식처럼 메이슨은 예식용 검을 쥔 채 지망생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좋다. 그대를 클레이모어로 임명하며 라이트 플로어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거룩한 분위기 아래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누군가는 꿈을 이뤘음에 눈물을 주르륵 흘렸고, 누군가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 자리에는 유신 역시 있었다.

어느새 유신의 차례가 되자 그가 메이슨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길고 길었다.'

손쉽게 끝날 줄 알았던 클레이모어 시험이 이렇게 꼬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이 세상의 미래는 함부로 점칠 수가 없다.

뭐, 얻은 것도 많았지만 말이다.

유신이 생각하고.

"유신. 언제나 악에 맞서···"

메이슨이 말을 하던 그 순간.

"잠깐. 그 친구는 내가 임명해 주고싶은데."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에바그린이었다.

'이 녀석만?'

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단상 뒤에 서있던 그녀가 앞으로 나서자 순간 메이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클레이모어 임명은 본디 각 지부의 지부장들. 즉 대표의 고유한 권한이었다.

주변에 널리 얼굴을 알리며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정치적인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끼어든 에바그린의 저 행동은 명백한 월권이었다.

주변의 카메라들 역시 이를 찍고 있었고.

-선배. 내 체면 좀···

메이슨은 에스트로 메시지까지 보내며 애원했다.

하지만 에바그린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뿌득.

결국 메이슨은 속으로 이를 갈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에바그린은 단상 앞으로 나서더니 유신의 앞에 섰다.

"능력자 유신. 언제나 악에 맞서 싸우며 이 세상의 정의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겠는가?"

"네."

유신이 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바그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 어떠한 가혹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네가 이루고자 한 바를 관철하겠는가?"

"네."

"투쟁하는 삶만이 한 인간을 완성시킨다. 나는 그대의 용기를 높이사 이 자리에서 그대를 클레이모어로 임명하겠다."

쿠르르르!

순간 에바그린의 손에서 폭풍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곧 그 자리에서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생겨났다.

-뭐, 뭐야 저건? 왜 저 사람만···

-이, 일단 찍어! 그 아이언 나이트라고!

에바그린은 거대한 대검을 휙 휘두르더니 살며시 유신의 어깨를 치며 선고했다.

"환영한다 클레이모어 블레이드."

그날 유신이 받은 임명식은 그 누구보다도 화려했으며 웅장했다.

그는 열렬한 환호 속에서 이 세상 제일가는 권력자의 한 축이 됐다.

***

임명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클레이모어로서 활동하기 전. 약간의 시간이 났다.

그 사이에 유신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에피와 헤카테를 만나 그간의 근황을 전해듣는 것이었다.

'다들 잘 하고 있겠지.'

유신은 블루로드를 가로질렀다.

화려했던 임명식에 비해 유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긴.

클레이모어가 무슨 아이돌 같은 존재도 아니었거니와.

고작해야 신입 클레이모어나 물고 빨기에는 이 도시 사람들의 삶은 퍽 각박했다.

"유시이이이인!"

접선지로 정해놓았던 오래된 여관으로 가자 금색 머리통이 우다다 달려온다.

"여어."

"여어는 무슨! 왜 이제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곧 종아리를 걷어차며 씩씩거린다.

얘 반응이 왜 이렇게 격렬한 걸까?

내가 그렇게 보고싶었나?

가만···

"헤카테는?"

어째 한 명이 보이지 않자 유신이 물었다.

치렁거리는 코트를 걸친 이제 완연한 사냥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에피는 꽤나 충격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지금 감옥에 있어!"

"···감옥?"

감옥엔 왜?

"사람을 죽인 죄로 말이야! 어쩌면 사형당할지도 몰라!"

"이 뭔···"

유신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너네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뭔 사고를 치고 다닌 거냐?

이 사고뭉치 자식들아.

< 라이센스의 중요성 >

사냥꾼이 되라고 보내놨더니만 갑자기 감옥에 가?

"자세히 말해봐라."

"그게···"

에피의 말은 이랬다. 기존의 계획대로 야경으로 가서 사냥꾼이 된 건 좋았다. 테스트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수준으론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고.

그렇게 차츰차츰 의뢰를 해결하면서 능력을 선보이고 야경에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시비가 붙었어."

"분명 우리가 먼저 받은 의뢰였고, 먼저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놈들이 갑자기 난입했어."

또 다른 사냥꾼들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시비를 걸었단다.

"언니랑 나는 최대한 좋게 풀어볼려고 했는데···"

헤카테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가볍게 사냥꾼 한 명을 밀쳤다. 그런데 그만 그 사냥꾼이 죽고 말았다.

사인은 갈비뼈 파열로 인한 질식사.

퍽 황당하게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어."

"···"

괴물을 상대로도 압도하던 육체 능력이다.

아무리 단순한 몸짓이라도 헤카테의 힘은 평범한 사람에게 충분히 재앙이 될 수 있다.

사냥꾼이라고 한들 그 근본은 인간이니까.

"조사가 들어가고 언니가 엘프인 게 밝혀지자 더 난리가 났어. 뭘 해볼 틈도 없이 감옥에 갇힌거야. 언니는 어차피 말해도 듣지도 않고, 유신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고 차라리 입을 다물었고. 나는 유신 네가 오기만을··· 훌쩍."

이 꼬맹이 운다.

하긴 오죽 답답했으면 그럴까?

이건 그들이 지금껏 당면하지 못해본 위기였으니.

유신은 자켓에 꽂혀있던 행거치프를 건네주며 말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무슨 전조 같은 것은 없었나?"

"···크응!"

염병. 코는 좀 풀지 말지.

"경고를 듣긴 했어. 신입들이 들어오자마자 손쉬운 의뢰들을 다 쓸어버린다고."

"계속 그렇게 하면 재미 없을 거라고."

에피와 헤카테 성격에 들었을까?

절대 아니다.

엿먹으라면서 계속 수행했겠지.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사냥꾼들의 방식이라기엔 너무 조잡하다.

협박도 그렇고, 차라리 훼방을 놓을거면 좀 더 그럴싸하게 나섰을 거라고.

유신은 에피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들었다.

곧 대화를 하며 걸어가다 보니 [폴리스 센터]라 적힌 건물이 나왔다.

웃기게도 이곳 펑크시티에선 경찰이란 것이 존재한다.

-잡아! 잡아!

-난 안 취했··· 끅!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 내부에서는 수갑을 찬 예비 범죄자들과 검은 정복에 난로연통 같은 모자를 쓴 경찰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기 엘프가 한 명 잡혀있다고 들었는데."

"···"

카운터를 보던 여경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 유신을 알아봤는지 동그랗게 떴다.

"다, 당신은···!"

"안내해."

그녀는 두 사람을 헤카테가 갇혀있는 구치소 앞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불똥이라도 튈까 재빨리 달아났다.

두 사람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이 더러운 귀쟁이 년이!"

감옥의 문은 열려있었다.

퍽!퍽!

그곳에서는 한 경찰관이 진압봉을 휘두르며 헤카테를 구타하고 있었다. 그 뒤편에는 치렁한 코트를 입은 사내들 역시 있었는데. 그들 또한 마구 발길질을 하며 헤카테를 짓밟고 있었다.

"이··· 시발!"

눈이 돌아버린 에피가 품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을 제지한다.

유신은 저들이 인지하지도 못할 사이에 간격을 파고들어.

"어억!"

경찰관의 진압봉을 턱 잡는 동시에 사내들을 후려쳤다.

"너, 넌 뭐···"

"이 엘프의 주인겸 보호자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유신."

엉망이 된 헤카테가 유신을 보며 미안하단 눈짓을 보냈다.

경찰관은 유신의 차림새를 보더니 목깃을 매만지며 툭 내뱉었다.

"범죄자 심문 중이었소."

"범죄라··· 아직 죄가 확정된 것도 아닌데 사람을 이렇게 이잡듯이 패나?"

"사람이 아니라 엘프요. 그리고 뭐가 모호하다는 거요? 여기 이 엘프가 죄를 인정한 것은 물론. 증인들도 여기 있는데."

경찰관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닥에 쓰러져 낑낑대던 코트 입은 사내들이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이···"

"네놈이냐? 이 짐승한테 목줄도 안 채운 미치광이가?"

그들을 바라보는 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보니 이 녀석들 머리에 피도 안 말랐다.

그리고 사냥꾼이라기엔 묘하게 광채가 나며 장비들의 때깔이 좋았다.

이거···

'사냥꾼 자식들도 아니었잖아?'

***

펑크시티는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노동자들의 구역인 블루로드와 상류층들의 거주지인 화이트로드.

그 때 봤다시피 블루로드에 사는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조차 버겁다.

하지만 그 반대로 화이트로드에 사는 상류층들은 부유하기 그지없다.

태생부터 부호이거나. 공장주이거나 가게들을 여러 개 소유하고 있는 자들.

그들은 돈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넘쳐나는 재력과 시간으로 더욱 더 자기계발에 몰두했고, 곧 지금의 위치를 보다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통칭 부르주아 계층이 탄생한 것이다.

사람이란 게 등따시고 배부르면 절로 다른 곳으로 시선이 향하는 법.

이들의 갈망은 이제 문화와 예술로 향하기 시작했다.

살롱이나 사교계 같은 (구)시대의 잔재들을 다시 부활시킨 것은 물론.

갖가지 특이한 취향이나 행동양식을 선보이며 특권계층으로서의 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무난하게 칭송받는 것이 바로 사냥이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

야만과 칼이 범람하는 중세시대에도 사냥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사냥개들과 몰이꾼을 풀어 짐승을 몰고. 그들의 주인은 시위를 당겨 누가 가장 큰 사냥감을 잡는지 내기하던 격식있는 스포츠.

즉 이런 말이다.

짐승 사냥은 괴물 사냥으로 그 종목이 바뀌었고.

얼치기 상류층 도련님들이 편법을 써서 야경의 반쪽짜리 사냥꾼이 됐다.

그리고 박제품을 좀 구하려고 하던 찰나에 헤카테와 에피가 눈에 띈 것이다.

"그래, 나다. 하지만 상황을 살펴보니 오해가 좀 있는 것 같군."

유신은 팔짱을 턱 낀 채 말했다.

"손은 그쪽에서 먼저 썼다고 하던데? 총 들고 협박했다며? 그렇다면 이건 정당방위 아닌가?"

"이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잠깐. 저 녀석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청년들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한 녀석이 긴가민가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관이 얼굴을 구기더니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건 담당자로서의 견해를 말하자면 이 엘프의 잘못이 명백하오. 펑크시티의 법상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것이오.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니. 당신은 더 이상 이 녀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소."

아무리 진보된 대도시라고는 하나. 법률부터 사법체계까지 그 모든 것을 과거처럼 재현시킬 수는 없었다. 때때로 범죄자들에 재판과 처리는 경찰들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경관 입장에서는 복잡하게 인과관계를 따지기 보다 그냥 엘프 한 마리 처리하고. 이 부르주아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더 합당한 것이다.

"공무집행 방해로 그쪽까지 같이 밀어넣기 전에 썩 꺼지시오!"

경관이 으름장을 놓으며 다시 진압봉을 들어올리고.

뿌득. 에피가 다 엎어버릴 기세로 앞으로 나선 그 순간에도.

"···"

유신은 가만히 그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직후···

짝.

"억!"

난대없이 경관의 뺨을 후려쳤다.

"···?!"

사내들이 당황했다.

경관 역시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격분해서 소리쳤다.

"네, 네놈! 감히···"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너같은 등신하고는 할 말 없다."

엘프의 주인이라고 주장한 저 사내가.

"여기 대가리 불러와."

품에서 웬 반지를 꺼내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새겨져 있는 표식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크, 클레이모어?!"

어찌나 당황했는지 창백한 얼굴로 주춤거린다.

유신은 그들을 쭉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야만적인 외곽과 대도시의 법칙은 다르다.

이곳은 당장 눈에 띄는 힘 대신 권력과 그로인해 피어난 질서와 법칙이 더 우선시 된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대우 해주지 뭐.'

클레이모어 자격을 얻은 이유 첫 번째.

이런 엿같은 일을 당할 때 마다 배로 되갚아 줄 수 있다.

***

"죄송합니다! 아랫것이 뭣 모르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장이라는 높은자가 대뜸 찾아와 머리부터 숙인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관은 무릎을 꿇은 채 시선조차 못 마주치며 벌벌 떨고있다.

모두 다 유신이 클레이모어임을 밝히자 일어난 수순이었다.

"얼굴이 다 상했잖아."

감히 우리 파티의 괴이 캐리어한테.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던 유신은 헤카테의 얼굴에 연고를 발라줬다.

이 엘프는 몸을 옥죄던 쇠사슬들을 힘만 줘서 박살내고는 킁 콧김을 뿜었다.

"그렇다면 난 무죄인가?"

애초부터 헤카테에게 쇠창살은 아무런 구속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건···"

유신이 시선을 보내자 망설이던 서장이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울상을 지은 저 얼굴은 아마 유신과 그 부르주아들 사이에 끼어서 받을 피해를 자신이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뭐, 어차피 청렴하지도 않은 녀석들.

그건 내 알바 아니다.

"다음부터는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주기를 바라지."

"네, 네!"

"저 친구는 정신교육 좀 확실하게 시키고 말이야."

유신은 두 사람을 데리고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에피가 입을 헤 벌렸다.

"클레이모어란게 진짜 좋긴 좋구나··· 저 뻣뻣한 자식들이 이렇게 쉽게··· 나도 클레이모어 시험이나 칠걸."

아서라. 네 성격상 그곳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감당할 수 있겠냐?

"도와줘서 고맙다 유신. 그리고··· 미안하다. 난 절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네 탓 아니니까 기죽지마라. 잘못된 건 먼저 시비턴 그 얼치기와 이 도시의 시스템···"

축 늘어진 헤카테를 달래주려던 그 순간이었다.

난대없이 일단의 사람들이 일행의 앞을 막았다.

저 녀석들은···

구치소에서 봤던 그 얼치기 사냥꾼들이다.

그 사이에 고급스러운 턱시도를 차려입은 노인 역시 끼어있다.

유신이 말했다.

"볼일이라도 남았나?"

"클레이모어 블레이드님이시죠? 이번에 새롭게 임명받으신."

"그렇다만?"

노인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유신과 헤카테를 주시하더니.

스윽.

"이 빚은 비싸게 먹힐 겁니다."

그들을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자식 잃은 자의 분노는 그렇게 쉽게 꺼지는 게 아니니까요."

"글쎄. 애초에 그쪽이 자식 관리를 똑바로 했다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유신이 웃으면서 걸어갔다.

노신사는 죽일듯이 그 뒷모습을 노려볼 뿐이었다.

***

유신은 두 사람을 데리고 블루로드의 시내를 쭉 걸었다.

곧 그곳에 자리한 사냥꾼들의 집단인 야경에 방문하기도 하기도 하고.

"한 푼만 줍··· 당신은?"

정체를 숨긴 채 구걸하는 (구)시대의 영웅에게 적선도 좀 하고.

마지막으로 합성육이 아닌 괜찮은 것을 파는 식당으로 가서 식사도 했다.

"이제부턴 이런 일이 안 생길거다. 너희들의 뒤에 클레이모어인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하지만."

"사냥꾼들의 배척과 경계는 더 심해지겠지."

두 집단은 공생관계인 동시에 경쟁관계다.

"맛있다아! 이 소스!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언니. 집중 좀···"

에피는 질린 얼굴로 헤카테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다 살아난 주제에 지금 밥이 넘어간단 말인가?

물론 헤카테는 접시에 고개를 처박은 채 듣지도 않았다.

유신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거렸다.

이제 알겠냐? 과거의 널 보던 내 모습을?

뭐래. 난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머리가 좀 굵어진 소녀는 유신의 시선을 부정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도 클레이모어가 되는 게 낫지 않아?"

"아서라. 클레이모어 시험은 2년에 한 번 밖에 없을 뿐더러···"

"내가 야경으로 너희들을 보낸 목적을 잊었나? 그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했잖아."

이런 변수가 발생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에피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그럼 결국 유신 네 말은 이런 뜻이네. 사냥꾼 새끼들의 배척마저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져서 꼭대기에 서란 거지?"

"그래."

"맡겨둬. 암투니 모략이니 이딴 건 못해도 죽이는 건 자신 있으니까."

에피는 품에서 총알을 하나 꺼내들었다.

직후 에스트를 끌어올렸는데.

부르르르.

총알이 이리저리 떨렸다.

유신의 눈으로 보기에 그것은 검기와 비슷했다.

총탄에 에스트를 담기 직전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호오."

물론 저걸 유지하는 동시에 격발되고 목표에 적중하는 그 순간까지 에스트를 조절하는 것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건 또 언제 배웠냐?"

"나도 그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소녀는 덤덤히 자신이 새롭게 구축한 영역을 뽐낸다.

요정 야만인은···

"한 그릇 더!"

그냥 식사를 주문한다.

아니, 잠깐.

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헤카테 저 녀석도 변화가 있긴 있다.

전에 같았으면 식사 도중 식기가 한두 개 정도는 망가졌을텐데.

달그락.

지금은 멀쩡하다.

그건 그녀가 섬세하게 제 괴력을 컨트롤하고 있단 증거였다.

유신은 웃었다.

안 그래보였지만 다들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늙은이 새끼가 수작질을 부리지는 않을까?"

"부린다해도 그건 나한테 향할거다. 그리고 그것쯤은 예상하고 있어."

복수를 덤덤하게 내뱉을 수 있는 그 자신감의 원천.

그것이 뭔지 유신은 안다.

자신이 앞으로 클레이모어로서 생활을 하면 얽히고 섥킬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어차피 부딪쳐야 했던 문제다."

유신은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이며 앞으로 벌어질 암투를 흘러넘겼다.

아무렴 그것들이 칠검사나 괴이...

"한 그릇 더!!!"

"..."

맨손으로 사람 때려죽이며 식비는 남들 수십 배는 나오는 동료의 뒤치닥거리보다 빡세겠는가?

***

여명이 밝아옴에도 이 도시의 하늘은 뿌옇기 그지없었다.

꺼지지 않는 도시라는 또 다른 이명을 자랑하듯 오늘도 가동을 멈추지 않은 공장들이 뿜어내는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출장.]

카드 위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글씨.

그 짧은 문구가 주인의 성격을 가늠케 한다.

이를 확인한 유신은 카드를 다시금 주머니에 넣고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 목표는 높게 솟은 마천루다.

뚜벅뚜벅.

얼굴조차 반사될 정도로 투명한 대리석 바닥 위로 수많은 구두소리가 울려퍼진다.

걸어가는 유신의 옆과 그리고 또 옆에는 그와 비슷한 복장을 한 자들이 덤덤히, 혹은 자신만만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유신이 피식 웃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양복을 입은 채 21세기 양식의 빌딩으로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의 그 때로 돌아온 것 같다.

하지만.

바깥의 저 황무지에서는 여전히 괴물들과 식인종들이 득시글거린다.

이 비즈니스맨들은 전자기기나 서류와 씨름하는 대신 가공할 권능을 사출하며 온갖 신비와 사투를 벌인다.

유신은 그 속에 내던져진 빌어먹을 이레귤러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고 있는 이방인.

"어서 오십시오."

안내 데스크로 가자 전에 봤던 직원이 목례했다.

유신은 사원증 겸 클레이모어의 증표를 꺼내보였다.

아직 자신이 배속받을 부서와 팀을 전해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들은 설명에서도. 모니터 밖에서도 분명 이렇게 하는거랬지?

"제38기 수료생. 클레이모어 블레이드. 확인 되셨습니다."

또각.

직원은 싱긋 웃더니 한 쪽 손을 뻗었다.

엘리베이터로 몸을 밀어넣는 양복 무리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VIP]

라고 적힌 홀로 동떨어져 번쩍거리는 엘리베이터를.

"저걸 타고 꼭대기층에 위치한 사장실로 가시면 됩니다."

"···"

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신입 사원이 첫 출근하자마자 사장과의 대면이라.

그래, 이것 역시 과거와는 다르군.

아무래도 나···

'출세한 건가?'

< 멸망한 세상의 비즈니스맨 >

사내 규정 제1조.

컴퍼니에 소속된 모든 능력자들은 옷차림에 있어 격식을 갖춘다.

클레이모어에게 있어서 정장은 이제 하나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의문이 들법도 했다.

21세기 양식으로 지어진 빌딩은 분명 멋과 공간의 활용도에 있어서는 최적이었다.

그러나 저 황무지의 괴물과 불순분자들의 방지에 있어서는 최악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높게 솟은 건물은 그저 손쉬운 표적이 될 뿐이니.

왜 구태여 실용적이지도 않은 건물에.

불편한 드레스코드를 고수하는 걸까?

그건 동경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피어나는 권위 때문이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현장직과 사무직.

문관과 무관.

누가 더 덩치가 크고 힘이 센지.

누가 더 똑똑하며 편하게 근무하는지.

누가 더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구분했으며 계층을 만들었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암암리에 인정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결코 평등할 수 없으며.

계층 사다리라는 것은 정말 편리하며 매력적인 장치라는 것을.

당장에 바깥에서는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공장의 부품이 되어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동한다.

그보다 더 바깥으로 나가 메마른 황야 속으로 간다면 인간들은 원시시대로 돌아가 난민보다도 못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 속에서 아득하게 빛나는 저 마천루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채 온갖 권능을 뽐내는 저 사람들의 모습은...

절로 시선을 끌 수 밖에 없다.

선망이란 감정은 탐욕과 경외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압도적으로 치솟은 경외심은 절로 두려움과 공포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곧 범접할 수 없는 하나의 '위상'이 된다.

컴퍼니의 초대 설립자인 알렉산더 회장은 인간에게 내재된 본능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띵!

63층 입니다.

부드럽게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도 이 정도 높이의 건축물을 쌓아올리다니...

새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혀를 내두른 유신은 일자로 쭉 뻗은 복도를 걸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붉은 융단이 깔려있었고. 벽면에는 금으로 된 램프 형태의 조명들이 반짝였다.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잠시 걷자 [사장실]이라고 적힌 문이 보였다.

그 앞에 있는 데스크에는 메이드 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클레이모어 블레이드님?"

목소리가 묘하게 친절하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여자. 아이언 나이트의 팬이었지?

끄덕.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메이슨의 비서 독설가 레이첼.'

귀여운 외관과 요상한 복장과는 달리 상당한 실력을 지닌 능력자였다.

유신은 그녀를 힐끔 살피다가 사장실로 들어갔다.

"왔나?"

수염자국과 툭 튀어나온 배.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던 사내는 결코 멋이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유신은 메이슨과 눈을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 담긴.

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사의 고락을 넘겨온 전사만이 내뿜을 수 있는 권태감을.

"편하게 앉아."

[마에스트로 메이슨]

[슬레이어 살해자 메이슨]

전 세상에 단 일곱 개 밖에 존재하지 않는 대도시의 주인 중 하나.

그 지위는 결코 허투루 따낸 게 아니다.

카르갈 만큼의 강자인 것이다.

유신이 자리에 앉는 동시에 문이 열렸다.

쟁반을 든 레이첼이 다과를 세팅하고는 차를 따라주었다.

쪼르르륵.

오직 유신의 앞에만 말이다.

메이슨이 험험 헛기침을 했다.

"레이첼. 내껀?"

"···"

쾅!

레이첼은 손에 들린 찻잔을 소리나게 메이슨의 앞에 내려놓더니···

"너 같은 변태돼지는 알아서 타먹어."

차갑게 일갈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

저게 비서의 행동이란 말인가?

아니, 저런 캐릭터였지?

'실제로 보니까 더 당황스럽군.'

침묵에 잠긴 방안에서 유신은 입을 다물었다.

"미친년이야. 또라이지. 하하."

분위기를 잡던 메이슨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가 직접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래, 블레이드. 듣기로는 선배··· 아니, 아이언 나이트와 안면이 있다던데."

"거창한 건 아니고 은혜를 좀 입었지."

"겸손이 과하군. 그 인간은 내가 잘 알아. 절대 함부로 선의를 베풀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메이슨은 후루룩 차를 훔쳤다.

"그 절명검을 상대로 살아남았다는 것부터가 네 우수성을 증명해주고 있으니까."

"금칠이나 해주려고 불렀나?"

"어, 맞아.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불렀어. 그때 임명식에서는 선배 때문에 제대로 못 봤으니까."

말끝 마다 에바그린을 언급한 메이슨은 유신의 허리춤을 눈짓하더니.

"흑도 쿠로이츠키까지 양도할 정도라니. 선배가 어지간히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

"혹시 사내 연구팀에서 그걸 잠깐 분석해봐도 되겠나?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 '펑크시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한 가지 요구를 해왔다.

"···"

고강한 유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연구할 거리가 넘쳐나는 보물이다.

괴물의 서식지와 생태. 하다못해 지역별 황무지인들의 특성까지도 연구하는 컴퍼니의 특성상 이건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하지만.

"거절하지."

유신은 단칼에 이곳 우두머리의 요청을 거절했다.

내 물건을 왜 남의 손에 맡긴단 말인가?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더 놀라운 건 메이슨의 반응이었다.

그는 입맛만 쩝 다실뿐 이 건방진 신입에 대해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건 컴퍼니의 또 다른 규정 때문이다.

클레이모어들은 모두가 평등하다.

당장에 메이슨이라고 해도 컴퍼니에 큰 사단이 닥쳤을 때 클레이모어들의 소집권한만 있을 뿐. 평시에는 강제적으로 부릴 수 없다.

경직된 것처럼 보여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퍽 자유분방한 조직인 것이다.

"할 말은 그걸로 끝인가?"

"그래. 가봐."

유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곧 퍼뜩 생각나서 물었다.

"아직 내가 배정받을 부서와 팀에 대해서 듣지 못했는데."

"아아···"

메이슨은 의자에 깊숙히 기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31층 B플로어가서 팀 얼라이브를 찾아."

'낮은 층수. 게다가 들어본 이름도 아닌데.'

유신은 미심쩍음을 뒤로한 채 메이슨이 말해준 곳으로 이동했다.

[팀 얼라이브]

곧 문을 열어재끼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

기름칠 안 된 문이 끼이익 비명을 지른다.

달려있는 명패는 덜렁거렸고. 문을 열어재끼자 뿌연 담배연기가 훅 풍겨온다.

"신입인가?"

"뭘 했길래 시작부터 여기 처박힌거야?"

"담배 좀! 끄라고 했잖습니까!"

유신을 맞이한 것은 생동감이라고는 없이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세 명의 인간들이었다.

턱살과 뱃살이 두툼하게 올라 셔츠가 터질 것 같은 중년사내.

다크서클이 진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묶음 머리의 안경 여자.

포마드로 머리를 올리고 가슴께를 해친 껄렁해보이는 남자.

퍽 다양한 개성을 가진 저들 중에서 한 명은 구면이다.

"어? 너는?"

일전에 펑크시티의 입구에서 시비를 걸었던 녀석.

매드독이라 불린 클레이모어.

"이야.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유신을 알아본 매드독은 그 때의 일은 까먹었는지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

유신 역시 첫날부터 구태여 트러블을 일으키긴 싫었기에 무시로 일관하기로 했다.

내가 알던 팀 분위기 하고는 좀 다른데···

찝찝함을 뒤로한 채 유신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번에 이곳으로 배정받은 블레이드다. 잘 부탁하지."

"···"

안경 여자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담배를 비벼 끈 중년사내는 허허 웃으며 이를 받았다.

"들어본 적 있네. 시작부터 절명검과 마주치고 살아남은 그 화재의 친구라지? 그런데 자네같은 인재가 왜··· 흠흠. 아니네."

중년사내는 측은한 눈으로 유신을 바라보다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나는 매지컬 레이디스. 그냥 편하게 매지컬씨라고 부르게. 이 팀의 팀장을 맡고있지."

"그리고 여기 이 아가씨는 폴터가이스트, 저 친구는 매드독이네."

클레이모어들의 이명은 보통 가진 능력과 상관관계가 있다.

'여자쪽은 염동력, 저 한량은 변이나 신체강화, 중년쪽은···'

유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지컬 레이디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불길함을 뒤로한 채 유신은 매지컬씨의 말을 경청했다.

"궁금한 게 많을테지만 우선 컴퍼니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부터 설명해주겠네."

세상에는 다양한 능력과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만큼 컴퍼니도 이에 따라 인력을 분류.

최적의 효율을 내기 위해 조직을 구성했다.

특성에 맞게 세분화 시킨 각 부서들이 그 예다.

연구부서, 조사부서, 지원부서, 정보부서, 특별대책부서.

연구부는 괴물의 특징이나 유물의 원리같은 신비들을 연구한다.

정보부는 괴물이나 빌런, 테러리스트 같은 불순불자들의 소재지와 특성을 파악. 그들이 컴퍼니에 얼마나 위협적일 수 있는지 등급을 매긴다.

조사부는 그런 정보부의 정보를 바탕으로 위험종들의 서식지를 보다 면밀히 조사. 정보의 신뢰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순분자들의 격살을 도맡는다.

"지원부서는 말 그대로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원업무를 맡고있네. 평소에는 그렇게 돌아가다가 손이 부족한 부서나 사태를 해결하는데에 있어 특정한 능력이 필요한 때에 파견식으로 와서 도움을 주기도 하지."

속된 말로 땜빵팀.

좋게 말하면 만능 재주꾼들이다.

"마지막으로 특별대책부서는···"

"감당키 어려운 이상 현상이나 괴물, 빌런에 대응하지."

고르고 고른 클레이모어들 중에서도 엘리트들.

혹은 전투에 최적화된 인간들.

"흠흠. 바로 그거네. 그리고 우리 팀 얼라이브는 조사부서 쪽이네. 일단은."

각 부서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 멸망한 세상의 트러블들을 해결한다.

꽤나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꼭 팀 단위로 움직일 필요는 없네."

컴퍼니의 특별한 점은 또 있었다.

"페이가 높은 일감들은 다 팀 단위로 수주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것만 아니면 개인적으로 움직여도 상관 없어."

더 높은 성과와 보상을 얻기 위해서라면 팀 단위의 움직임은 필수다.

하지만 구태여 이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퍽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멸망한 세상의 비즈니스맨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치 용병들처럼.

"부서나 팀을 옮기는 것도 자유. 업무에 참여할지 말지도 자유네. 정해진 할당량만 채운다면 말이지."

겉만 회사의 외양을 하고 있지 그 내부는 다르다.

내가 알던 것과 틀리지 않다.

"그러니까 팀을 옮기고 싶어도 조금만 참게. 신입연수만 끝나면 자네에게도 기회가 올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말이지.

저 말이 신경쓰인다.

그리고 이곳의 시설과 가라앉은 분위기 자체도.

유신이 물었다.

"아까부터 팀을 옮긴다. 기회가 온다. 왜 이런 곳에 왔냐. 같은 말을 하던데. 대체 왜 그러는 거지?"

"크흐흐흐."

유신의 말에 매드독이 낄낄거렸다.

"···"

폴터가이스트는 쥐고 있던 팬대를 뿌득 부서트렸다.

팀장인 매지컬씨는···

"아, 자네 몰랐나보군. 우리 팀 얼라이브의 소문을."

허허.

사람 좋게 웃어보이며 충격적인 소식을 밝혔다.

"여긴 말일세."

실적 꼴찌.

할당량 미달율 99%

팀 만족도 최악의 설문율 결과를 자랑하는 이곳 팀 얼라이브는.

"유배지나 다름 없다네."

클레이모어들 중에서도 잉여 중의 잉여를 모아놓은 수용소였다.

'노골적인데.'

눈을 가늘게 뜬 유신은 이번 수작질의 배후에 대해서 생각했다.

추정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 멸망한 세상의 비즈니스맨 >

컴퍼니의 지침 아래 클레이모어들은 모두가 평등하다.

그러나 그것이 꼭 보이지 않는 격차마저 좁혀주지는 않는다.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위계에 따라 강함을 나누듯.

이들 역시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들 나름대로의 서열이란 게 있다.

[컴퍼니란 곧 성난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약육강식의 새로운 정글인 것이다.]

-한 클레이모어의 회고록

이번 38기의 기수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유신을 시작부터 이런 곳에 처박는다?

이건 효율을 중시하는 컴퍼니의 지침과는 정반대되는 상황이다.

다분히 엿 먹어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유신은 생각했다.

다른 신입들은 모두 출근과 동시에 부서와 팀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자신만은 그들과 따로 떨어져 사장과 대면했다.

그 사이에 벌어진 변수라고는 이것뿐이라는 거다.

즉 이 사태의 배후는···

'마에스트로 메이슨.'

펑크시티의 지배자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 대신.

유신은 전에 메이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검을 잠깐 맡겨라. 그러면 '펑크시티'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유독 펑크시티란 어감에 집중했었지. 말 중간중간 에바그린을 언급하기도 했고.'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메시지를 던지며 이쪽을 떠본 것이었다.

에바그린 대신 이쪽에 붙을 의향이 있느냐고.

즉 유신은 다분히 정치적인 상황에 휘말린 것이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모니터 너머로 봤을 때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에바그린은 과거의 모습을 잃고 나태해진 후배를 못마땅해했지만 그뿐이었고.

메이슨은 여전히 자신을 뭣 모르는 루키로 다루는 선배가 언짢았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유신이라는 변수가 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금을 가게 만들었다.

정확히는 에바그린 특유의 폭군스러운 성격이 유신을 통해 발현되었고. 메이슨은 이를 좌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단 게 크겠지.

'귀찮게 됐군.'

한 마디로 나 지금 찍혔다는 거잖아?

유신이 생각하든 말든 나무와 황동, 동그란 키캡으로 이루어진 타자기를 툭툭 두들기던 매지컬씨는.

"회의실로 가세. 미스터 블레이드에 대한 연수장소가 정해졌네."

사람 좋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

보통 신입사원 연수라 하면 한날한시 입사자 전원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무늬만 회사인 컴퍼니의 연수는 조금 달랐다.

팀 단위로 진행되며. 소속된 선배 클레이모어들의 인도 아래 일정 수준 이상의 업무를 처리한다.

드르르륵.

브라운 계통의 회의실 내부.

방안에서는 태엽과 파이프관으로 된 영사기가 돌아간다.

이 근방의 지도를 띄워놓은 매지컬씨는 레이저 포인터로 특정 지점을 가리키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천해산 근방에 에어리어가 하나있네. 고리의 성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모든 에어리어가 제 땅을 버리고 메트로폴리스 내부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일부는 전쟁에서 패하기 전의 영역을 그대로 보존 받은 채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컴퍼니에 이바지하고 있다.

고리의 성 역시도 그런 에어리어 중 하나였다.

천해산 근방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주변의 천연 자원들을 채취. 펑크시티에 매달 공급하고 있다.

멸망한 세상 속에서도 인구 수십만의 대도시가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에는 이런 뒷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곳 성주가 중병에 걸렸다더군. 에어리어 내부의 의료체계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수준인가봐."

폴터가이스트는 화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거렸다.

매드독은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월하게 브리핑을 진행하는 매지컬씨는 퍽 노련해 보였다.

아니면 그냥 다 포기했던지.

유신은 고리의 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별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성주가 꽤나 강력한 능력자였다는 것만 빼면은 들어본 적이 없다.

메인 시나리오에서도 퀘스트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다.

즉 트러블은 안 생길 확률이 컸지만...

'이미 미래는 바뀌었다. 지금도 바뀌어가고 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네. 이 치료제를 그쪽에 전달해주기만 하면 돼. 최대한 빠르고 안전하게."

매지컬 씨가 탁자에 놓여있던 키트를 열어재꼈다.

그 안에는 잘 포장된 고급스러운 유리병이 놓여있었다.

"이야~엘릭서잖아. 오리지널일리는 없고 흉내낸 열화판인가? 갖다 팔면 얼마나 나올까? 흐흐."

"다 죽어가는 주제에 돈 좀 썼습니다? 쳇. 재수 없어라."

의뢰품을 보면서 매드독은 입가를 다셨고. 폴터가이스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반응만으로도 이 두 사람의 인성과 사회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정상적인 친구들은 아니야.'

괜히 이런 팀에 처박힌 게 아니란 건가?

"대략적인 내용은 이게 끝이네. 자세한 건 서류를 참고해주게."

멀쩡한 건 매지컬씨 저 인간 하나같은데.

팀원들을 힐끔거린 유신은 책장에 놓여있던 서류를 살폈다.

[의뢰수당 : 4만 1천 크레딧]

[정보부 공인 위험도 : D]

[주의 : 언제든지 변동될 수 있음]

보수를 양분해도 두당 10000크레딧은 돌아간다.

고작해야 D등급으로 측정된 의뢰가 말이다.

저 밖에서 피터지게 노동하는 일꾼들의 몇 년치 봉급.

유신이 과거에 이 정도 금액을 모으기 위해 1년이 넘도록 발품을 팔았던 걸 생각하면 참 막대한 액수다.

유신 본신의 무력이 높아진 만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진 만큼 노는 물 역시 달라진 것이다.

'돈이 다 떨어지기는 했어. 도시로 들어오고 나서는 계속 돈 나갈 곳 밖에 없었으니까.'

'여왕이 깨어나기 전에 준비를 끝마치려면 세력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본 역시 필요하다.'

'옥션이 열리기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유신의 고민을 다르게 해석한 걸까?

매드독이 유신의 어깨를 툭 치며 피식거렸다.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말라고 신참. 이건 고작해야 푼돈일 뿐이니까. 클레이모어가 된 이상··· 돈 벌 방법은 무궁무진해."

악동같은 그 미소는 범죄자의 그것과도 닮았다.

너도 그쪽이냐?

백휘도한테 죽을 지도 모르겠구만.

유신은 무시하며 서류를 살폈다.

-도심과 어느정도 거리가 있음. 중간에 열사의 사막이 위치해 있어 주의 필요.

서류에는 의뢰를 수행하는데에 있어 주의해야 될 점부터. 의뢰주인 고리의 성의 주인 에반 자이로스와 그의 에어리어에 대한 특징까지 체계적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새삼 컴퍼니의 강대한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달까?

"이걸 따낸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허허. 아주 그냥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더라니깐?"

"또또 이빨턴다. 크크. 보나마나 좋은 건 다 뺏기고 남는 거 중에서 하나 가져왔을거면서 뭘."

"이보게 매드독. 신참 앞에서 꼭 무안을 줘야겠는가? 허허."

손발을 맞춘지 꽤 됐는지 매드독과 매지컬씨는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 때. 안경 쓴 여자 폴터가이스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꼭 참여해야 합니까?"

"몸이라도 아픈건가?"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저···"

"그저···?"

"사막은 덥잖습니까?"

덤덤한 얼굴로 황당한 말을 꺼낸다.

'또라이네 저거.'

유신이 생각했다.

매지컬씨는 익숙한지 허허 웃으며 대처했다.

"신입연수가 끼면 웬만하면 빠질 수 없다는 것 자네도 알지 않나? 인원도 딱 맞아떨어지고 말이야. 아니면 자네. 대타라도 구해보겠는가?"

"···"

폴터가이스트는 대타라는 말에 입을 꾹 다물더니.

"참여하겠습니다."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자. 더 이상 질문할 것 없나? 특히 블레이드는 이번이 처음 업무일텐데 말일세."

"딱히?"

거창하게 업무라는 딱지를 달고있지만 실상은 단순 심부름이다.

그것도 능력자 넷이서 하는.

유신이 그동안 넘어온 고락에 비한다면 하품이 나올 수준이다.

"하하. 역시 화재의 루키는 다르구만. 그럼 여기서 해산하도록 하지. 다들 내일 늦지않게 모이게나."

매지컬씨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후다닥 회의실을 벗어났다.

"뒷정리도 안 하고 진짜. 빌어먹을 잉여들 같으니!"

폴터가이스트는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며 주변을 정리했다.

유신이 옆에서 거들자 오히려 미간을 구기며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친다.

'머리에 문제 있나?'

그 신경질적인 모습에 괜히 건드리기 싫어 밖으로 나오자 매드독이 아는 척을 했다.

"여어. 신입. 혹시 담배 태우나?"

"아니."

"그래? 그럼 음료 정도는 어때? 내가 사지."

무슨 꿍꿍일까? 라는 생각도 잠시.

공짜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유신이 매드독을 따라 갔다.

주변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널따란 테라스에는 재떨이 및 자판기도 존재했다.

단순히 건물 하나 차이일 뿐이건만 방금 전의 영사기도 그렇고. 프린트도 그렇고 없는 게 없다.

이 빌딩은 이 근방에서 가장 진보된 문명의 중심지였다.

이러니까 선민의식이 안 생길 수가 있을까?

덜컹.

매드독은 음료를 뽑아 유신에게 휙 던지며 담배를 꼬나물었다.

"고생이 많아. 나름 풀린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꼬여버려서 말이야."

"무슨 뜻이지?"

"네가 여기 온 이유 말이야. 메이슨한테 찍혀서 맞지?"

"호오."

매드독이 상황을 꿰뚫어보자 유신이 피식 웃었다.

아주 바보는 아닌가?

"메이슨하고 아이언 나이트님간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은 유명하니까."

한 명은 모든 컴퍼니의 전신인 헬리오스사의 대표이사.

다른 한 명은 현재 이 일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도시의 지배자.

두 거목 사이에 낀 새우. 아니, 그 탈을 쓴 늑대.

"어쩌면 연수가 끝나도 괜찮은 팀으로 옮기지 못 할 수도 있어. 회사에는 메이슨을 따르는 무리가 과반수거든. 아무리 아이언 나이트님이 강하면 뭐해. 여기서는 메이슨 그 놈이 왕인데."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뭐지?"

매드독은 연기를 후 뿜으며 웃었다.

"뭐, 비슷한 처지끼리 서로 돕고 살자는 거지. 나나 너나 지금은 유배지에 처박힌 신세니까."

"줄 한 번 서보는 거야. 흐흐."

매드독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유신의 위상이 달라졌기에 태도를 바꾼걸까?

약삭빠르기 그지 없는 인간이다.

뭐가 됐든 첫 인상만큼 최악은 아니군.

치익.

유신은 음료를 따며 입으로 가져갈려다가 멈칫했다.

곧 써있는 라벨을 보고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맥콜]

"이 자식이···"

역시 저놈은 쓰레기가 맞다.

***

다음 날.

각자가 여정에 필요한 물품을 챙긴 후에 한 자리에 집결했다.

빌딩 외부.

지상에 넓게 조성된 주차장이었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은 팀 얼라이브의 악명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선들이 느껴졌던 것이다.

무시, 비웃음, 경멸 같은.

구태여 티는 내지 않지만 은연히 깔린 음습한 감정들.

이건 뭐 고결한 영웅들이 아니라 사내정치 놀음하는 너구리 새끼들을 보는 것 같았다.

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라도 차부터 뽑는게 좋을걸세. 맨다리로 수십 수백킬로를 가로지를 수는 없지 않나? 보험 드는 것 역시 까먹지 말고. 괜찮으면 내가 소개···"

유신에게 조언을 해주며 키를 꺼내는 매지컬 씨의 앞에는 낡은 SUV차량 한 대가 점멸하고 있었다.

"단체 출장은 오랜만이라 그런가? 좀 떨리는구만. 하하."

에바그린의 쿠페처럼 진짜 21세기의 골동품은 아니다.

태엽과 증기기관 장치로 새롭게 재탄생시킨 (신)시대의 차량이었다.

바퀴 역시 험준한 땅을 손쉽게 가로지를 수 있도록 특수처리된 제품이다.

"폴터가이스트 양은 아직 수리가 다 끝날려면 멀었을테고. 매드독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나도 신세 좀 질게 아재. 저번에 출장 갖다오고나서 뭘 잘 못 밟았는지 차가 퍼졌어."

"하하. 알겠네. 간만에 북적북적 하겠구만."

매지컬씨가 문을 열던 그 순간.

"여어. 매직박. 의뢰 나가나?"

일단의 양복쟁이들이 우르르 나타나며 말을 걸었다.

"···"

그들이 나타난 순간 폴터가이스트의 얼굴이 구겨지며 차량의 유리창이 덜덜 떨렸다.

매드독은 담배를 꼬나물었고. 매지컬씨는 역시나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간만이구만 드미트리 허허."

말을 건 자는 선두에 있던 금발머리칼의 사내였다.

허리춤에는 검을 찬.

"웬일이야. 우리의 얼라-이브들께서 단체의뢰를 다 나가시고?"

하지만 그 진중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입담은 퍽 가벼웠다.

"이번에 신입이 들어와서 말이네. 연수차 같이 나가게 됐네."

"오호. 신입이라. 불쌍하기도 해라. 하필이면 이딴 곳에 들어오다니."

비아냥거린 드미트리가 유신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유신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휙휙!

저 무리 사이에 끼어있던 클레르가 이쪽을 힐끔거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유물! 도대체 언제 돌려줄건데요?!

-그래, 나도 반갑다.

그렇게 입술만 달싹거리며 해후를 나누던 찰나.

"네가 그 건방진 루키구나. 임명 받자마자 아주 그냥 제 멋대로 날뛰었다던데."

눈을 가늘게 뜬 드미트리가 툭 내뱉었다.

임명 받자마자?

그 짧은 단어에서 유신은 상황을 추론했다.

아아. 네가 그 늙은이가 믿고 있는 끈이로군.

이런···

"별 것 없는 놈도 뒷배라고."

"···"

피식 웃은 유신과 드미트리 사이에서 에스트가 피어올랐다.

주변의 공기가 부르르 떨리며 날카로운 기세를 흘려댔다.

무언의 기싸움이 벌어지며 긴장감이 퍼지던 그 때.

"이크!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구만!"

매지컬씨가 유신을 잡아끌며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자네들도 욕보시게들!"

쿠르르르!

직후 나머지 두 사람 역시 태우고는 냅다 액셀을 밟은 것이 아닌가?

"콜록콜록!"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드미트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매연을 들이마쉬며 콜록거렸다.

"나이스 타이밍이야 아재!"

"웬일입니까?! 맨날 입 꾹 닫은 채 흘러넘기기만 했으면서?"

낄낄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해묵은 감정의 찌꺼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신은 적에 대한 조사도 할겸 물었다.

"저 녀석들은 뭐지?"

"팀 라이노라 불리는 녀석들일세.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사부서에 속한 친구들이지. 방금 본 드미트리가 팀장이고 말이야."

매지컬 씨는 라디오의 음량장치를 돌렸다.

낄낄거리던 것도 잠시 매드독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2군조차 안 되는 삼류라면 저쪽은 1군이라고 할 수 있지."

비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거지?

보니까 앙금도 있는 것 같고.

유신은 백미러를 힐끔거렸다.

이 SUV조차 낡아빠진 고물로 보이게 할 정도로 삐까뻔쩍한 차량들이 줄줄이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

클레이모어들은 분명 이 세상 권력의 꼭대기층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본다면 내부에도 서열이란 게 존재한다.

마치 산 위의 산 이랄까?

하지만 유신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괴이와 칠검사를 비롯한 온갖 사선을 넘나든 전사의 눈으로 보기에는.

'꼴깝 떨고 있군.'

그 모든 것이 도토리 키재기처럼 보였다.

쿵짝! 쿵짝!

"노래 좀! 바꿔주십시오!"

"허허! 친근하고 좋지 않나?"

도심을 벗어나 황무지에 접어든 SUV에서는 오래된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

덜컹덜컹!

"점점 더워지는군. 온도를 조금 더 낮추겠네."

황야의 후덥지근한 기온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빵빵하게 가동되는 에어컨.

"좀 더 먹어 신입."

공장에서 특별히 생산된 스낵과 음료 같은 주전부리들까지.

최악의 팀이라는 오명과는 다르게.

마치 세상이 망하기 전에 소풍이라도 나온 것 처럼.

차량은 그 어느것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수월하게 황무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유신이 클레이모어로서 맡은 첫 의뢰는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손쉬우며 편안하게 진행 되고 있었다.

의자에 기댄 채 젤리를 질겅거리며 유신은 생각했다.

'이렇게 손쉬워도 되나?'

대륙을 가로질러 펑크시티에 입성할 때와는 천지차이다.

그 때는 하루가 멀다할 정도로 괴물과 가혹한 환경, 식인종들과 싸워댔으니까.

물론 상황이 수월하게 풀리는 이유는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첫째. 괴물들은 자기와 덩치가 비슷하지만 더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며 굉음을 내뱉는 이 쇳덩이를 경계했다.

둘째. 대륙의 밴디트들은 차량 안에 타고있는 자들의 신분을 알아챌 정도로 영악했다.

셋째. 루트 역시 위협적이거나 사나운 위험종의 영역을 최대한 피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다 철저하게 준비 된 계획 아래의 태만이었다.

하지만 유신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건 클레이모어들의 뛰어난 분석과 장비, 위상의 틈새에서 찾아낸 의심은 아니었다.

그동안 겪어온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미심쩍음이었다.

꼭 이렇게 살만하다 싶으면 뭔가 사건이 터졌단 말이지.

마치 어디 양판소의 주인공처럼.

유신이 생각할 때.

거침없이 달려가던 suv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이와 비례해 낮아진 매지컬 씨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제부터 긴장하도록 하세."

라디오마저 꺼버린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신중하게 운전대를 돌리고 있었다.

"···"

유신이 전방을 살폈다.

떨어지는 태양 아래.

끝도없이 펼쳐진 토사의 무덤이 이글거리며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

고오오오.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는 불꽃들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지금부턴 열사의 사막이니까 말이야."

< 열사의 사막 >

핵전쟁의 폭풍이 모든 것을 다 황무지를 뒤바꾸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기괴하게 자라난 초목의 생태를, 때로는 모든 것이 얼어붙은 혹한의 지대 역시 만들어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열사의 사막 역시 인간의 악의와 신비가 합쳐져 만들어진 괴지대 중 하나였다.

[살아 움직이는 불꽃]

차량의 주변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도깨비불 같은 녀석들을 칭한다.

2급 위험종으로서 이런 사막지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영체형 괴물이었다.

유신이 이 세상에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쏠쏠히 도움을 준 녀석이기도 했다.

'오아시스로 유인해서 물을 끼얹어서 잡았었지.'

가까이 접근하기만 해도 지독한 화상을 입는다.

생긴 건 저래 보여도 위험한 괴물이었다.

통상적인 물리공격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고오오오.

작열하는 태양빛과 잘 못 내디디면 푹 빠지는 모래의 늪.

갖가지 기괴한 괴물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것이 이 괴지대의 두려움이었다.

"블레이드는 분명 화염과 신체강화 계열이라고 했지?"

"음."

"상성이 좋지 않군. 어쩔 수 없이 매드독 자네가 고생 좀 해줘야겠네."

"쳇. 신입 주제에 벌써부터 선배나 부려먹고 말이야."

매드독은 혀를 찼지만 몸은 잽싸게 문을 열고 나가 차량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처음 봤던 안하무인했던 모습과는 달리 손발을 줄곧 맞췄다.

보면 볼 수록 의외성을 보여주는 놈이었다.

유신은 생각했다.

이들은 아직 자신이 가진 힘을 모르고 있다.

아무리 상성이 좋지 않아도 그리폰의 화염이라면 저 정도 위험종은 그냥 소멸시킬 수 있다.

하지만 구태여 나서서 고생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유신 역시 이 세상에서 맛보는 에어컨의 편리함에 푹 빠져있었으니.

"꺼져! 꺼지라고! 이 새키들!"

매드독은 손을 짐승의 그것으로 변이시킨 채 휙휙 휘둘러댔다.

타격은 입지 않아도 저기서 뿜어지는 칼바람은 불꽃들을 쫓아내기에 충분했다.

"폴터가이스트양은 루트를 좀 확인해주겠나?"

"알겠습니다."

폴터가이스트는 열사의 사막의 지도를 펼쳤다.

곧 우리들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정지."

끼리릭.

"약 50미터 전방에 딥홀이 있다고 합니다. 우회해야 합니다."

근방의 위험지역을 파악해가며 꼼꼼히 길잡이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유신은 과자를 씹으며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데? 실적 꼴지는 몰라도. 의뢰 미달율99%를 찍을 팀은 절대 아니야. 그런데 왜···'

그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이 새끼들이!"

차량의 속도가 줄어든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괴물들의 개체수가 많았던 걸까?

매드독이 쫓아내는 숫자보다 들러붙으려 드는 불꽃들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

뿐만 아니었다.

쿠르르르!

느닷없이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 앞에 있던 토사가 소용돌이 치듯 빨려들어가면서 거대한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건···'

유신이 재빨리 차문을 열고 나간 것.

매지컬씨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소리친 것.

그 구멍 속에서 집채만한 크기의 곤충형 괴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동시였다.

키이이이익!

원동형의 아가리에는 수 백개의 이빨이 환공포증을 자극하듯 수도없이 박혀있다.

갈색빛을 띠는 두터운 가죽에는 사막의 열기를 견디기 위해서인지 끝없이 진물을 방출하고 있었다.

3급 위험종 샌드웜이다.

'날 한 번 시험해볼까.'

스르릉.

유신은 허리춤의 흑도로 손을 가져가다가 곧.

"내가 처리하겠다."

[아룡의 화염]

손아귀에서 불꽃을 뿜어냈다.

고작해야 3급 위험종 이걸로도 충분할테니까.

그건 검을 휘둘러 저 괴물의 체액을 덮어쓰기 싫다는 마음도 있었다.

"죽어라!"

하지만 유신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은 매드독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는 움직이는 불꽃들을 쫓아내는 것을 관둔 채 개 형태의 수인으로 변해 샌드웜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콰장창!

차량의 창문들이 깨지며 강대한 염동력파가 두 사람을 후려친 것 역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아아아악!"

"허···허."

"켁!"

터져나간 충격파에 토사 밑으로 쓸려내려가는 차량.

비명을 지르는 안경 쓴 여인과 곤란하다는 듯 웃고있는 중년인.

튕겨져나가 토사에 머리부터 처박힌 껄렁한 사내.

───────!

그러는 와중에도 화염을 조절하는 쾌거를 발휘해 샌드웜을 태운 유신은 생각했다.

'이 팀이 왜 만년꼴찌라 불리는 줄 알겠구만.'

***

"하나 둘!"

작열하는 사막 한복판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네 명의 남녀가 로프를 잡아당겼다.

"으그그극!"

"한 번 더! 하나 둘!"

한참을 그렇게 끙끙거렸을까?

샌드웜이 나온 구덩이에 처박혔던 suv가 겨우겨우 지상으로 끌어올려졌다.

유신이 땀을 닦으며 폴터가이스트를 바라봤다.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건가?

일순 주변에 막대한 물리력을 끼친 염동력.

그녀가 보여준 능력은 꽤나 강력했다.

그러나 통제 되지 않는 힘이라면 없느니만 못한다.

"시, 시끄럽습니다! 잠깐 실수했을 뿐이에요! 염동력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폴터가이스트는 오히려 꽥 소리쳤다.

잘못은 자신이 했건만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아고, 죽겠다!"

매드독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폴터가이스트를 노려봤다.

"어이 레이. 내가 분명히 말했지? 그 능력 함부로 쓰지 말라고. 이게 뭔 꼴이냐? 창문 다 깨졌잖아. 이제 더워뒤지겠구만. 또 모래바람도 들어올테고···"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는 있는지 얼굴을 구긴 상태에서도 시선을 피하던 그녀는.

"네가 그러니까 아직까지 애인도 없고 월세나 전전하지. 도무지 그 능력은···"

매드독의 비난이 계속 되자 또 한 번 소리쳤다.

"닥치십쇼! 깜둥이 들개 주제에!"

"허. 지금 큰소리친거야? 누구 때문에 이 사태가 벌어졌는데?"

"애초에 당신이 불꽃들을 늦게 쫓아냈기 때문에 샌드웜에게 포착당한 것 아닙니까?"

"너 말 잘했다. 처음부터 영체형 괴물은 사이킥 계열인 네가 맡는게 맞다고. 알아? 그런데 넌 그것마저 못했잖아! 왜냐고? 잘난체는 있는대로 다 하면서 제 능력을 다루지도 못하···"

쿠르르르!

두 사람의 열전을 끊은 것은 우렁찬 엔진음이었다.

메지컬씨는 본넷을 열어 차량을 살피더니 허리를 폈다.

"다행히 시동은 걸리는구만. 그쯤하고 어서들 가세. 지체하면 괴물들이 더 몰려올거야."

샌드웜의 시신에 추출기를 뽑아 크레딧을 회수한 유신은 차량에 올라탔다.

"···"

그러자 두 사람 역시 고개를 홱 돌리더니 각각 조수석과 뒷좌석에 올라탔다.

전처럼 쾌적한 여정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차량은 수월하게 목적지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이!

"방사능 수치가 장난 아니군. 우회하겠네. 혹시 모르니 모두 방독면을 쓰세나."

때로는 방사능이 과하게 밀집된 지역을 우회하고. 또 다른 괴물이나 모래폭풍을 헤친 후에야 그들은 사막의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금방이다.

열사의 사막만 지난다면 목적지인 고리의 성까지는 코 닿을 거리니까.

물론 그와 동시에 날도 져버렸기에 야영을 준비해야 했지만 말이다.

"암석지대가 그나마 괜찮을 텐데."

매지컬씨가 운전대를 돌리며 괜찮은 장소를 물색할 때.

킁. 킁킁.

"잠깐. 어디서 데저트 베어 냄새가 나는데··· 동굴이다! 오늘 저곳에서 하룻밤 보내는 건 어때?"

매드독은 변이 계열 능력자의 강력한 후각을 발휘해 근방의 있던 동굴을 찾아냈다.

깊진 않고 암석 지대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작은 토굴이었다.

괜찮은 생각이었기에 다들 동의하며 동굴의 입구 근처에 차를 댔다.

곧 야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모닥불 대신 버너와 증기 난로로 불을 때고.

금속으로 된 식기에 통조림을 비롯한 레토르트 식품을 데우고.

오리털로 된 침낭까지 깔아놓자 근사한 야영지가 만들어졌다.

유신이 에피와 헤카테와 함께 야전에서 하던 생존을 위한 야영이 아니라.

21세기의 캠핑을 연상케 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불침번은 두 시간씩 서는 걸로 하지. 내가 초번초로···"

"엿먹어 아재. 크크.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하자고."

"난 오늘 차량이 망가졌다만?"

"어차피 보험들어 놨잖아. 그리고 창문값은 다 받을 거 아니야?"

"···알겠네. 그렇게 하세."

"쳇. 또 B형입니까? 맛 없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유신은 전투식량에 담긴 미트볼을 맛나게 섭취했다.

방사능 들개나 트롤의 노린내 나는 고기에 비한다면 이건 진미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과거 생각도 나고.'

그렇게 액상으로 된 레몬맛 음료까지 타먹자 유신의 생각은 좀 더 다른곳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니까 지금 이 팀 얼라이브의 문제점에 대한 것들로.

유신이 생각하기에 이 팀의 문제점은 두 개다.

우선 서로간에 대한 믿음의 부재.

그리고··· 강력하다 못해 튀어나오려는 각자의 개성.

개성이 넘처나니 서로에 대한 화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서로간에 믿음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다.

그렇다보니 다시금 위와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는 클레이모어 특유의 개인주의.

폴터가이스트의 능력의 불안정성.

"하하. 내가 이겼구만. 그럼 난 막번초를 서겠네."

팀을 이끌어야 하는 장임에도 그저 손을 놓고 있는 매지컬씨의 행보가 더해져 최악의 시너지를 내고 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으려고 하면 제지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 이상 나아가지는 않는다.'

일정한 선을 정해두고 이를 지키는 느낌.

분명 친한 것 같기는 한데. 때때로 거리감을 느끼는 친구같은 느낌이랄까?

팀에 합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은 특유의 눈썰미로 이들에 대해 파악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무슨 선택을 해야 자신에게 가장 이득이 될지 생각했다.

'연수가 끝나면 다른 팀을 찾는 게 합리적이겠어.'

'메이슨의 수작질 때문에 그게 어렵다면 차라리 내가 창설하는 것도 낫겠지.'

'내 무력에 혹했거나 지금 처지가 마음에 안 드는 신입들도 분명 있을테니까.'

초반엔 캐리어로서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짊어진다고 생각하자.

그러다가 가능성이 보이는 녀석들을 포섭. 세력을 꾸려나가자.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성과를 보인다면 메이슨으로서도 닥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건 레오나 대머리, 클레르 정도인가?'

계획대로 베르망 그 양반이 합류해준다면 참 든든할 텐데.

"하아암. 무슨 일 생기면 깨워달라고 신입."

"차량도 신경쓰는 것 잊지 말게나."

고민을 거듭하다보니 어느새 불침번 시간이 되었다.

초번초는 유신이었기에 그는 흑도를 어깨에 기대며 동굴 입구를 주시했다.

딱 좋은 타이밍이다.

유신은 신체강화 능력을 활성화시켜 감각은 예리하게 일깨운 채 내면을 관조했다.

[새로운 그릇]

카르갈과의 격전과 그 힘의 흡수가 어떤 깨달음을 준걸까?

유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던 찬란한 가능성 중 하나가 또 다시 싹을 틔워올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창조까지 81%]

아마 이걸 수치화 시킨다면 이 정도쯤 되지 않을까?

'날 잡고 명상하면 일주일이면 될 것 같은데.'

점점 그릇이 생겨나는 주기가 빨라지고 있다.

이건 그만큼 확 달라진 주변 환경과 강해진 유신의 힘이 강탈자로서의 재능을 끌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에스트 주입 인형1호]

유신은 손에 들린 미니어처 형태의 봉제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세상에 강적은 널렸고, 위협적인 신비들은 더 널렸다.

그 사이에 끼인 유신은 어떻게든 생존의 확고성을 보장받기 위해.

재앙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하며 고민했다.

이건 그 과정에서 시도하고 있는 실험물 중 하나다.

만약에 말이다···

내가 지금껏 생성하고 있는 에스트 인형들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내구도와 힘을 두 개로 합치고.

그걸 또 합치고. 합친 녀석들을 또 합쳐서 또 다른 인형을 창조해낼 수 있다면?

악몽의 나락을 개조시켜 공간이동의 묘리를 끼워넣은 것처럼 다른 쓸만한 비수가 생겨나지는 않을까?

[에스트 주입 인형 22···]

파삭.

유신은 마치 찰흙처럼 서로 들러붙다가 끝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파스스 부서지는 봉제인형들을 아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흠."

하지만 낙담하지는 않았다.

'가능성은 충분해.'

에스트든 권능이든 가장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은 능력자 본인의 정신력과 의지니까.

분명 가능성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으니까.

철그럭.

순간 어깨에 기대어 두었던 흑도가 흔들렸다.

유신은 힐끔 시선을 올렸다.

내면 세계를 관조하고 있었지만 분명 오감은 예리하게 일깨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동굴 입구.

불꽃이 닿지 않는,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과 빛의 그 경계선 사이에는 어느새 시커먼 그림자 두 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벅.

당황했는지 그림자들은 잠깐 주춤거렸다. 그러나 곧 한 발자국 다가왔다.

랜턴의 시야에 닿는 그들은 두 명의 남녀였다.

여느 황무지인들이 그렇듯 더러운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삐쩍 마른 인상을 한, 아주 평범한 이곳의 주민들.

사내가 말했다.

"지나가는 여행객. 입니다만. 잠깐 신세 좀 져도 되겠습니까?"

"···"

"아내가 많이. 아픕니다. 부디···"

사내의 목소리는 거칠었으며 혼탁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는 어깨에 기대어 있는 여자를 걱정하는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유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철컥.

기대어두었던 흑도를 쥐었다.

그야···

삐-이이이이이!

차량 내부.

그리고 동굴내부에 설치해두었던 방사능 수치계가 요란한 소리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도로 위험]

휙휙 돌아가는 지침은 붉은 표시선의 끝자락까지 닿아있었다.

일순 자신의 감각조차 속일 정도의 은밀함.

평범한 인간의 외양.

하지만 고장이라도 난듯 울려퍼지는 방사능 수치계.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모두 기상! 돌연변이다!"

그것도 두 마리.

스르릉.

검집에서 빠져나온 흑도가 서슬퍼런 빛을 흘렸다.

유신은 벼락처럼 달려들어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의 가슴팍을 찔렀다.

< 열사의 사막 >

아무리 오합지졸이란 평가를 듣고 있어도 팀 얼라이브의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그 악명높은 클레이모어 시험을 통과하고 지금껏 살아남은 전사들이었다.

그렇기에 울려퍼진 방사능 수치계의 소음.

유신의 외침을 듣고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캬아아아악!

그들이 본 것은 로브가 찢어지며 기괴한 형태로 변태하던 한 사내.

이를 덮치며 날아가는 유신.

꾸드드득.

역시나 변이를 시작하며 유신에게 덤벼들려던 여자 돌연변이였다.

"어딜!"

폴터가이스트가 주먹을 꽉 쥐더니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초록색 빛이 터져나가더니 벽면 전체를 가격하며 돌연변이를 내동댕이쳤다.

"돌연변이라니···! 재수가 옴 붙었구만! 변신하겠네! 시간을 벌어주게!"

"우엑! 설마하니 내가 그 꼴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매드독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으며 근육질의 수인으로 변신했다.

직후 자세를 다잡던 돌연변이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어.

콰득.

"꺼억."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의 배를 꿰뚫는 동시에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고개를 젖혔다.

잘려나간다는 표현보다는 뜯겨나간다는 것이 걸맞는 잔혹한 공격법.

튀어오르는 붉은 핏물.

아니.

끈적하게 이어지며 점성처럼 들러붙는 유기체들.

"부정형이다! 커허어어엉!"

매드독이 비명을 질렀다. 들러붙은 젤(Gel)들이 피부를 녹이고 찔러댔기 때문이다.

그 순간.

"물리면역이로군! 물러서게에!"

하이톤의 목소리가 울리며 광선이 번뜩였다.

이에 가격당한 돌연변이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인간의 형태마저 잃어버린 그것은 점액질의 육신 안에. 토막난 살점과 두개골 같은 사람의 뼈대만 남아서 꿀렁거렸다.

이 기행을 행한자는 한 소녀였다.

치렁거리는 프릴 드레스와 가슴께의 리본.

양갈래로 묶은 은색 머리칼에 별과 날개로 장식된 마법봉을 쥐고 있는 소녀.

바로···

"클레이모어 매지컬 레이디스 등장이네★"

변이계열 능력자 매지컬씨의 변신 형태.

40대의 배 튀어나온 중년인은 어디가고 귀여운 미소녀가 당당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키아-아아아악!

돌연변이는 주변으로 산성침을 흩뿌리며 튕겨나가는 용수철처럼 달려들었다.

"흐읍!"

하지만 매지컬씨는 잽싸게 이를 피하는 동시에 지팡이를 망치처럼 휘둘렀다.

번쩍!

그리고 또 한 번 터져나가는 광선.

[그래비티 바인드]

아예 대상을 짓뭉개버릴 기세로 염동력을 뿜어내는 폴터가이스트.

쿠르르르.

그 강맹한 공격에 동굴 바닥에 쩍 금이 간다.

녀석은 연기로 기화까지 하며 발버둥쳤지만 결국 두 사람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한줌 재가 되었다.

"하아, 하아."

"커헉. 이봐. 레이··· 시스터. 다 끝났으면 어서 능력부터 풀어. 나 죽··· 켁!"

폴터가이스트는 거친숨을 내쉬다가 초록색으로 물든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그녀의 섬세하지 못한 능력에 같이 휘말려 끙끙거리던 매드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소녀가 된 매지컬씨가 소리쳤다.

"아직 끝이 아니네! 블레이드가 혼자서 싸우고 있지 않나아! 어서 도와줘야···"

그 순간.

저벅저벅.

고요한 발소리가 울렸다.

시커먼 음영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보다 더 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뚝뚝.

돌연변이의 목이 들려있었다.

마치 길거리의 쓰레기라도 주운 듯이 가볍게.

"오. 제법 빠른데?"

유신이 휘파람을 불었다.

세 명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버버 거릴 수 밖에 없었다.

화재의 루키다. 대단한 신입이다 했는데 정말로 저 신입.

"미친 괴물이었잖아?"

***

스코프의 십자선 너머로 뾰족한 바위산들이 스쳐지나간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그것은 곧 목표물을 포착하고는 천천히 초점을 고정시켰다.

-하하하하!

-···박! 야들··· 어린놈이···

조준경에 비춰지고 있는 것은 더러운 행색의 사내들이었다.

비교적 잘 보존된 콘크리트 건물의 앞마당에서, 의자와 탁자까지 펼쳐놓은 채 사냥감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

애석하게도 그 사냥감이란 사람이었다.

성별, 연령불문의 다양한 사람들이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거나. 끓는 물에 강제로 입수당해 인간 육수가 되거나. 사후 신체의 일부마저 밴디트들의 놀잇감이 되며 고통받고 있었다.

'해골 목걸이를 쓴 녀석은 안 보이는데···'

그 참혹한 광경 속에서도 에피는 침착했다.

눈앞에 있는 학살의 현장 따위 아무런 감흥도 못 느끼겠다는 듯 스코프의 조준경을 늘렸다 줄였다 주변을 살폈다.

'가급적이면 대가리부터 잡고 시작하고 싶었지만··· 안되겠다.'

그들만 알아들을 수 있게 은밀히 수신호를 보낸다.

직후 에피는 거리낌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더벅머리 사내의 머리통이 박살났다.

그는 죽음이 들이닥친 그 순간까지도 사람의 다리를 뜯다가 팔다리를 늘어트렸다.

추욱.

거친 화약소리가 바위산들을 지르르 울린 시간은 1초.

"···!"

동료의 죽음에 눈을 부릅 뜬 밴디트들이 이를 인지한 시각 역시 1초.

탕! 철컥!

탕! 철컥!

그 찰나의 순간 울려퍼진 것은 두 번의 총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막 무기로 손을 가져가던 밴디트와 소리를 지르던 보초를 나란히 침묵시켰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한 속사였다.

'이쯤됐으면 날아오겠지.'

충분히 더 타격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피는 냅다 자리를 피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콰아아앙!

곧바로 건물 쪽에서 불빛이 번뜩이더니 그녀가 있던 자리가 폭발했으니까.

"미친 새끼들."

몸을 웅크린 채 파편들을 피한 에피가 다시금 포지션을 잡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대륙 대륙하더니 클라스부터가 다르다.

방금 전에 날아온 것은 유탄 발사기였다.

한낱 식인종 새끼들이 침입자에 대응해 냅다 폭발물부터 쏴재낀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날아오는 총알들.

타타타탕!

대응은 빨랐으며 적의와 저돌성은 그 이상이었다.

"죽여!"

"북쪽! 고지대다!"

밴디트들은 흥분한 몸짓으로 바위산을 기어오르며, 눈동자는 냉정하게 굳힌 채 침입자를 맞이했다.

대륙의 괴물들과 인간이 (구)한국에 비해 수준이 높다면 도살자 역시 응당 그 이상이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탕!

아무리 인간사냥에 동이 튼 백정들이라고 해도 소녀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커헉."

그녀는 한 발에 하나씩.

엄폐물 사이로 미세한 틈이라도 보인다면 치명적인 총탄을 꽂아넣었다.

몸놀림은 또 어찌나 잽싼지 사각을 노린다면 금세 이를 알아차리고 도망쳤다.

결국 술래잡기의 승리자는 에피가 되었다.

"켁, 켁켁···"

소녀는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밴디트의 머리에 리볼버를 쏴주고는 콘크리트 건물을 바라봤다.

"흐음."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인기척은···

에피는 M40을 어깨에 매고는 주변을 굴러다니던 유탄발사기를 집어들었다.

직후 건물의 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아앙!

강렬한 폭발음과 작열음 사이로 섞여드는 비명.

안에 트랩이라도 깔아뒀던 건지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다.

에피는 유신의 신중함과 효율적인 전술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시체도 안 남았으면 어떡한다."

소녀는 바싹 탄 시체들과 인육들의 혈겁을 뒤로한 채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지글지글.

연기와 불꽃으로 가득한 복도 내부에서 일순 스쳐지나가는 그림자.

탕!

소녀가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쓰러지는 것은 이미 죽은 시체였다.

에피는 이상을 감지하고는 곧바로 오른손을 털며 땅을 박찼다.

콰앙!

그 순간.

그녀의 옆에 있던 벽이 부서지며 거대한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사냥꾼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이를 쥐고있던 문신 가득한 사내의 목에는 사람 두개골을 엮어만든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탁!

에피는 곧바로 창문으로 몸을 날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동시에 입에 물고있던 격발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음속보다 빠른 총탄도 튕겨낸 기예를 선보인 사내도.

콰아아앙!

발밑에 있던 지뢰의 폭발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해치웠나?'

에피가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곧 혀를 찼다.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벼락처럼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강신 : 자이언트 닉스]

"대가리 굴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쥐새끼들!"

달려드는 사내의 뒤편에서는 흐릿한 형상의 수중 괴물이 포효하고 있었다.

에피는 당황하지 않았다.

도끼가 날아드는 그 순간에도 뒷걸음질 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사내는 이번에도 도끼를 비스듬히 굴리며 총탄을 튕겨내려 했다.

그 순간.

[일곱번째 기회]

총탄이 기묘한 각도로 휘어졌다.

곧 그것은 당황한 사내의 도끼를 피해 어깨에 박혀들었다.

"유도탄?!"

대단한 기예였지만 그뿐이었다.

"시발."

사내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고,

[강신 : 웨어울프]

그의 손에 들린 도끼는 이미 에피의 얼굴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뒈져라 꼬맹이! 산채로 배를 갈라 나의 신께 제물로···"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누군가가 순식간에 자신의 간격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찰랑거리는 은발 머리칼에 맹수같은 눈동자.

날아드는 굳은살 박힌 주먹.

쾅!

살과 쇳덩이가 부딪쳤다기엔 믿기지 않는 굉음이 울렸다.

"크윽!"

사내는 손아귀가 찢어진 상태에서도 자세를 다잡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흐읍!"

탕!

헤카테와 에피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낼 수는 없었다.

"커허···"

"나이스 타이밍 언니!"

적절한 타이밍에 난입해준 헤카테한테 엄지를 치켜올려준 에피가 나이프를 뽑았다.

"으으! 왜 이렇게! 안 잘려어!"

직후 죽은 사내의 머리통을 수확하고는 품에서 꺼낸 전단지와 대조하기 시작했다.

"맞지? 주술사 라이베르."

"확실하다."

헤카테는 사내가 휘두르던 도끼를 회수하고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걸로 오늘도 한 마리 처리 완료."

유신은 에피와 헤카테더러 무작정 야경으로 가서 들이박으라고 하지 않았다.

몇 가지 지령을 내려주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지금과 같은 악인의 처단이다.

정확히는.

-수배범 중에서 위험한 녀석들이 몇 명 있다.

마치 유신을 만나기 전 에피의 미래가 그랬듯. 훗날 혈겁을 일으킬 정도의 가능성을 내포한 놈들.

유신은 이런 악의 싹들이 꽃을 피우기 전에 짓밟히길 원했다.

저격수이자 히트맨인 에피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보기좋게 맞아 떨어져 가고 있었다.

"후우. 왜 하필 그 때 그게 어깨에 맞고 지랄이야."

에피는 머리통을 아이스 박스에 넣으며 침을 퉤 뱉었다.

에피의 권능인 [일곱번째 기회]는 일곱 번째에 발사한 사격은 반드시 명중하는 능력이다.

그녀는 그 능력 덕에 베테랑 사냥꾼인 게릭을 처리했으며, 닥쳐드는 갖가지 위협에서도 제 한몸 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거 똥이야."

타격지점이 랜덤이다.

그렇다고 기관총 같은 걸로 능력을 사출하기에는 에스트의 소모가 너무 컸다.

"무슨 주사위 도박도 아니고."

"하하! 뭐 어떠냐? 난 능력도 없지 않나?"

"언니는 그 몸뚱이가 이미 능력 그 자체···"

에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말했다.

"에휴 됐다. 챙길거 챙기고 어서 튀자."

***

바를 개조한 공간으로 보이는 곳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자들이 득시글 거렸다.

곳곳에 놓인 게시판에는 갖가지 수배범들의 사진과 의뢰서들이 나풀거렸다.

야경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곧바로 의뢰완료 보고부터 했다.

"···확실히 라이베르가 맞군."

"돈 내놔."

은퇴한 사냥꾼인 바텐더는 굳은 얼굴로 수급을 받아들더니 크레딧을 내밀었다.

직후 떠나려는 두 사람을 붙잡더니 말했다.

"이봐."

"뭔데?"

"일손이 부족한 일이 있다. 관심 있으면 5층 들개 문양이 찍혀있는 방으로 가봐."

널려있는 게 의뢰다.

하지만 일손이 부족하다니? 이건 은어였다.

그 말에 몇몇 사냥꾼들이 눈을 반짝였다.

바텐더의 저 제안은 하나의 인정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에피와 헤카테 역시 이 사실을 유신으로부터 이미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들뜬 걸음으로 바텐더가 말해준 곳으로 갔다.

끼이익.

방안에는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코트를 벗은 채 하얀 셔츠만 입은 상태였는데. 잘 단련된 육신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능력자다.

"어서오게. 사냥꾼 에피. 그리고 헤카테."

에피는 유신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야경은 분명.

-세 명의 마스터에 의해 돌아간다. 각각 인간과 괴물, 트레져 헌팅의 달인들이지.

'들개는 분명 인간 사냥꾼이라고 했어. 저 노인네는···

"반갑네. 헉스라고 한다네."

마스터 헉스.

도살자라고도 불리는 현상금 사냥의 귀재이자 은퇴하지 못한 노괴.

"우리 이름을 알아?"

"요 몇주 자네들을 지켜봤네. 일처리 속도가 무시무시하더군."

끌끌.

헉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러나는 감정은 명백한 호감이었다.

헤카테가 엘프인 것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설마하니 그 라이베르와 밴디트 하우스까지 둘이서 소탕할 줄이야."

녀석은 조커급 능력자였다.

신체강화와 강신술이라는 신비. 두 개의 권능을 동시에 괴물.

당장 이 야경에서도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사냥꾼들은 별로 없다.

"뭐, 우리가 좀 대단하긴 하지."

에피는 어깨를 으쓱였다.

강하고 약삭빠른 놈이었다.

처음부터 자신과 헤카테 둘이서 덤볐다면 놈은 전략을 다르게 짰을 것이다.

아님, 그냥 도망쳤던지.

"흘흘. 요즘 것들은 말이야. 패기가 없어. 조금만 승산이 없다치면 냅다 몸부터 사리거든."

헉스는 잠시 뒤바뀌어가는 야경의 분위기를 한탄하다가 제안을 던졌다.

"아무튼 내가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별게 아니네. 사냥꾼으로서. 목숨보다 크레딧을 더 귀하게 여기는 속물들로서 더 큰물에서 놀아볼 의향이 있냐는 거지."

-아마 이런 제안을 할텐데. 그러면 받아들여라. 앞으로 너희들이 활동하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될거다.

유신의 말을 떠올리던 에피와 헤카테가 악동처럼 웃었다.

"좋아. 어디 한 번 들어나 볼까?"

"컴퍼니로부터 공동협조 의뢰가 내려왔네. 전 노스트라의 멤버이자 현 A급 수배자 인형사와 관련된 일인데···"

***

그냥 흑도로 벴다.

그뿐이다.

유신이 돌연변이를 상대하게 된 자세한 경위 말이다.

갑작스레 침입한 두 마리의 돌연변이.

녀석들이 변태하기 전 어떻게든 먼저 피해를 줬어야 하는 상황.

유신은 제 육신과 능력을 믿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여차하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숨겨둔 힘을 선보일 요량으로.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흑도로 가슴을 찌른 순간 돌연변이는 거칠게 발광하더니.

서걱.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르자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죽었다.

돌연변이 특유의 까다로운 특성마저 발현하지 못한 채.

"적어도 C+급. 이 정도 수준이라면 B-는 판정받을 개체였어. 그렇게 쉽게 잡힐 녀석이 아니었는데···"

매지컬씨의 말처럼 돌연변이들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다.

그 날 하브람으로 가는 도중 만났던 영체형 돌연변이보다도 더 수준 높았다.

하지만 유신은 그걸 손쉽게 썰어버렸다.

여차하면 절명검의 오의를 쓸 각오 역시 하고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흑도 쿠로이츠키.'

일곱자루의 마검 중 하나이자 그 귀한 유물들 중에서도 꼭대기층을 차지하는 귀물.

내재된 능력을 해방시키지도 않았건만 이 녀석은 그 안에 담긴 힘 만으로. 돌연변이의 육체와 정신 모두를 찢어발긴 것이다.

그야말로 가공할 파괴력.

왜 모든 검사들이 이 검을 탐내는지 알 것 같았다.

"···"

유신은 섬뜩한 기세를 풍기는 마검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검집에 넣었다.

녀석이 뿜어내는 저주의 정신파에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지금 상태론 오래 휘두를 수 없겠어. 자칫 하다간 정신이 잠식당한다.'

그만큼 이 마검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와 비례할 정도의 페널티를 가지고 있었다.

이걸 물 흐르듯이 휘두른 카르갈이 미친 놈이었던거지.

그리고···

이변은 또 있었다.

죽인 상대의 능력 중 하나를 흡수하는 강탈의 권능이 돌연변이를 대상으로는 발동되지 않은 것이다.

이건 앞으로 유신의 계획에 차질을 줄 수도 있는 변수였다.

이 녀석들을 잡는 건 득보다는 손해가 크단 것이 되니까.

'괴물과 능력자는 되는데. 방사능에 감염된 돌연변이는 또 안 된다? 이건 무슨 원리지?'

마치 정신 그 자체에서 거부하는 듯한 느낌.

"어음. 블레이드님?"

그 때 매드독이 말을 건넸다.

말투마저 바뀐 그의 얼굴에는 비굴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헤헤. 대체 어떻게 하면 아이언 나이트님께 호감을 살 수 있죠?"

그는 유신의 강함의 원천이 흑도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템빨은 항상 옳으니까.

유신이 감탄하는 것은 저 놈의 휙휙 바뀌는 태도다.

"글쎄."

"에헤이. 그러지 마시고··· 제가 앞으로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유신은 기어이 가르침을 내려줬다.

"칠검사를 상대로 살아남으면 된다."

"아하. 그렇구나. 그거 참···"

매드독으로서는 결코 이룰 수도 없고 이루기도 싫은 가르침을.

"존나게 어려운 일이잖아."

매드독은 푸후 한숨을 쉬면서 담배를 꼬나물었다.

매지컬씨는 여전히 변신한 그 상태로 허허 웃고있었다.

"깔깔깔!"

소녀의 모습으로 아저씨 같은 모순적인 포즈로.

설마가 맞아떨어질 줄이야.

유신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변신하면 성격도 바뀌나?"

"아주 약간?! 정도라네! 기분이 붕 뜨는 느낌이지! 깔깔깔깔!"

약간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뭐, 알고 있던 대로군.

이따금 있다.

짐승이나 괴물 형태가 아닌. 옛 전설 속에나 나오는 신비들로 변신하는 자들이.

꽤나 강력하며 희귀한 능력이다.

하지만 그와 비례해 페널티 역시 존재했다.

행동이나 말투가 미성숙해 지는 것은 약과요. 잘못하면.

'변신 그 자체에 잡아먹히거나. 정신이 오염될 수도 있다.'

유신은 나서기를 꺼려하던 매지컬씨의 행동.

느슨했던 그 정신머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다 제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저건 진짜 강탈하고 싶지 않구만.

"아재. 이제 그만 변신 좀 풀지 그래? 존나 기분 나쁘다고."

저런 이쁜 미소녀의 정체가 실은 다리털 숭숭한 아저씨인 게 말이야.

"나도 그러고 싶네. 깔깔깔! 그런데 이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요즘은!"

매드독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지컬씨는 웃으면서 가슴을 쳤다.

"그래? 에휴. 그나저나 죽다 살았군. 갑자기 돌연변이가 두 마리나 나오다니. 정보부 새끼들은 대체 뭐하는 거야? 이거 확실하게 따지자고. 그래야 뭐라도 좀···"

그 순간.

"으, 으으으···"

쪼그려 앉아있던 폴터가이스트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꺄아아아악!"

곧 비명을 지르면서 눈동자를 초록색으로 번뜩였다.

쾅!

순간 강력한 중력이 몸을 옥죄며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부유감.

폴터가이스트의 능력이 또 한 번 터져나가며 이곳 일대 전부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시, 시발?!"

"깔깔깔깔!"

무저갱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와중에도 유신은 침착했다.

아니, 오히려 아무런 수도 쓰지 않았다.

그야···

'이 아래에 이게 있었단 말이야?'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저 지하 속에서 또 한 번의 기연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운이 좋군."

< 설계자의 미로 >

황무지의 습하고 탁한 공기 대신 좀 더 쿰쿰한 공기가 코끝으로 느껴진다.

기온도 어째 더 낮아진 것 같다.

화르르륵.

무형갑을 해제시킨 유신은 손아귀에서 불꽃을 피워올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황토빛을 띠는 석실 내부다.

벽면에는 허리를 굽힌 인간들과 그들을 짓밟고 있는 괴물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피라미드 내부를 연상케 하는 듯한 구조도.

'확실하군.'

설계자의 미궁이 맞아.

이번에는 이런 컨셉인가?

유신은 고개를 끄덕이던 그 순간.

"흐으윽."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유신이 시선을 돌리자 석실의 한 구석.

정장을 입은 여자가 쪼그려 앉아 흐느끼고 있다.

폴터가이스트다.

'매드독하고 매지컬씨는 다른 곳으로 떨어진 모양인데.'

그게 이 유적.

설계자의 미로의 특성 중 하나다.

유신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디 다쳤나?"

"···"

답은 없었다.

그러나 유신은 그녀의 한쪽 발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떨어지면서 다친 모양.

매디슨 키트를 잃어버렸나?

유신은 매고있던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내밀었다.

"이걸로 치료해라. 값은 나중에 청구하겠다."

"···"

답은 없었다.

염병.

내가 무슨 보모도 아니고.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거야?

그래도 일단은 같은 팀원이니까...

"손을 못 쓰겠다면 내가 치료해주지."

쾅!

발목에 손을 대자 또 한 번 그녀로부터 염력이 터져나갔다.

하지만 유신은 이미 폴터가이스트의 성향을 파악. 실드를 활성화 시킨 상태였기에 잠깐 밀려났을 뿐 피해는 없었다.

위력도 강하지 않았고.

그래도··· 짜증은 난다.

하. 그냥 버리고 갈까?

아니면 죽이고 능력을 강탈해?

어차피 유적 내부라 아무도 모를텐데?

첫인상부터 나쁜 모습만 보여주니 아무리 유신이라고 해도 이런 마음이 치솟았다.

유신이 실제로 그 행동을 반쯤 옮길까 고민하던 그 때.

"죄송합니다···"

"어둠 공포증이··· 있어서···"

폴터가이스트가 속삭였다.

"···"

유신은 기본적으로 제 이득을 위해서 행동하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지만 악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호구는 아니었다.

"포션값이랑 치료비 다 해서 1000크레딧이다."

몇 배는 후려쳤다.

전처럼 능력이 터져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의 발목을 도로 맞춘후에 포션을 부었다.

연금 공방제 물약이라 금세 상처가 호전되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유신이 손에서 피워올린 불꽃 덕분인지 진정된 폴터가이스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곧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알긴 아는 모양이군.

자기 실수로 인해 이런 노다지를 발견. 아니, 엿같은 상황에 빠진 것을.

"능력이 한 번 발동되면 갈무리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앙칼졌던 전과는 달리 가라앉은 어조.

그래도 죄책감이나 감사는 느끼는 모양이다.

'여기서 다른 방으로 가는 입구가 어디더라.'

유신은 석굴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랬나?"

"그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제 뜻대로 컨트롤이 가능했습니다."

폴터가이스트 역시 유신을 따라 벽면을 살폈다.

"결단코 이런 꼴이 아니었다고요···"

곧 어둠에 잠긴 석굴 안에서 느릿하게. 한 여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이 흘러나왔다.

37기 클레이모어 시험 우수 합격생.

염동력이라는 강력한 권능과 특유의 꼼꼼함과 판단력.

폴터가이스트는 유신과 똑같이 컴퍼니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인재였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바로 잘나가는 1군 팀으로 스카웃 될 만큼.

"목숨이 위태로운 날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저는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몰아치는 수준 높은 의뢰가 힘에 부칠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힘겨움 조차 잊게 할 정도로 그날은 더 없이 찬란했다.

주변 사람의 인정.

스스로의 가치의 재확인.

나날이 강해지는 능력과 불어나는 재산에 대한 성취감 같은.

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마약같은 감정들을 해일처럼 느꼈으니까.

"하지만 그 날을 계기로 모든 게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폴터가이스트의 황금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점점 더 강해지던 능력이 어느날 임계치를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하루 팀 얼라이브가 겪었던 현상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그렇다보니 팀에서 방출당한 것은 물론. 컴퍼니 내에 그녀가 있을 자리는 점점 더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자신의 능력조차 제대로 못 다루는 머저리를 곁에 두고 싶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도요."

"이 유배지 빼고는."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의 여자가 처량하게 미소지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한과 굴곡, 고통은 여전히 깊어보였다.

이에 대한 유신의 답은···

"한 마디로 잘나갔다가 갑자기 몰락해서 너무 슬프다. 이 뜻이로군."

이거였다.

유신은 폴터가이스트의 처량했던 과거를 짧게 요약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푸훗."

배를 부여잡으며 낄낄거렸다.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저 원래는 존나게 잘나갔습니다. 이딴 시궁창에서 썩어빠질 인재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능력만 폭주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날선 반응과 높은 자존감.

그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건가?

방어기제 였던거지.

유신은 생각했다.

확실히 그녀가 보여준 염동력은 강력했다.

전후좌우. 언제든지 상대를 짓뭉게버릴 수 있는 권능의 특성상 발휘할 수 있는 물리력이 제한됨에도 말이다.

그건···

'타고난 재능. 목숨을 넘나들며 쌓인 경험 덕분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염동력의 수월한 컨트롤까지는 이끌어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염동력은 그 특성상 능력이 강해질 수록 이를 다루는 난이도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니까.

이른바 신이 정해놓은 저울추라는 거다.

'흠.'

이거 뭔가 괜찮은 그림이 그려지는 것도 같은데···

유신은 폴터가이스트를 유의깊게 살피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코드네임 말고 본명."

"레이시스터."

레이··· 뭐?

"레이시스트?"

"레이시스터 입니다! 똥양인! 누구를 역겨운 인종차별주의자들과 같이 보지 마십시오!"

"···"

모순적인 말투로 그렇게 말해봤자 하나도 설득력 없다.

염동력자들은 다른 사이킥 계열에 비해 또라이가 많다더니 그 말이 틀린 게 하나 없구나.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레이시스트."

"레이시스터 입니다!"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

"뭐, 뭡니까?"

"지금 네가 앓고있는 그 고민을 내가 해결해준다면 넌 나에게 뭘 해줄 수 있나?"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이건 컴퍼니의 어떤 능력자나 치료술사들도 못 고친···"

하지만 레이시스터의 눈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엿보였다.

입사 때부터 온갖 소문을 몰고다닌,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던 천재에 대한 기대감이.

정확히는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간절함이리라.

그렇기에 말한다.

"당신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흠?"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제안할 수 있는.

저 사내의 만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답변을.

"난 당신 같은 부류를 잘 압니다. 당신은···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이런데서 처박혀서 만족할 인간이 아니에요."

"···"

"메이슨의 수작질로 인해 곤경에 빠져 있는 것 다 압니다. 이상을 펼쳐야 하건만 제대로 된 동료들 역시 모으기 힘들겠죠.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닥친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내가 당신의 동료가 되겠습니다. 언제든지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말을 하던 레이시스터가 눈을 부릅 떴다.

갑작스레 몸 안으로 낯선 힘이 새어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고고곡!"

마치 막혀있던 혈을 뚫듯 내부를 타고흐르며 기묘한 상쾌함을 선사했다.

"약속한거다."

좋아. 입구도 찾았으니 이제···

유신은 바닥에 쓰러져 달아오른 얼굴로 경련하는 그녀에게서 손을 땠다.

직후 벽면의 어느 그림을 꾹 눌렀다.

쿠르르르.

유물이나 찾으러 가볼까?

기하학적으로 갈라지는 벽과 그 너머로 나타나는 통로를 보며 유신이 씨익 웃었다.

[설계자의 미로]

설마 여기서 이런 노다지를 발견할 줄이야.

***

화르르륵.

방을 빠져나오자 보인 것은 두 명이 나란히 지나갈 정도의 복도다.

역시나 그림이 그려진 벽면에는 횃불들이 일자로 걸려 불꽃을 이글거렸다.

"유적이라기엔 퍽 인위적인 모습이군요."

레이시스터의 얼굴은 그런 상황에서도 평온해보였다.

그건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 때문이었다.

내부에서 날뛰던 이 힘이.

머리가 깨질 정도의 편두통마저 선사하며 자신을 늘 신경질적이게 만들던 그 힘이.

지금은 어느정도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워. 대체 어떻게···'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신은 덤덤하게 답했다.

"이곳은 평범한 유적이 아니니까."

"네? 유적이 아니라고요?"

"설계자라고 들어본 적 있나?"

"설계자!"

컴퍼니 공인 5급 위험종.

4급을 넘어서 5급이라는 딱지가 붙는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괴수라고 불리는 존재다.

단신으로 한 지역을 초토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위협.

어지간한 클레이모어라고 해도 단일 사살은 무리.

정보를 수집하고 가이드 라인에 의거 대규모로 팀을 이뤄 처단해야 하는 괴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설계자는 특이하다.

가진 무력이나 흉포함보다는 그 특수성으로 인해 5급의 판정을 받은 괴물이다.

녀석은 침식형 개체다.

특정한 공간에 자리를 잡은 채 자신의 특성에 따라 그 공간을 제 마음대로 뒤바꾼다.

전에 봤던 구더기 인간처럼 기생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한 지역 전체를.

즉.

저 밖의 광활한 열사의 사막은 이 녀석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다.

이곳은 그런 녀석의 심부인 셈이고.

'다분히 인간에게 위협적인 생태계를 구성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5급 판정을 받은 괴물.'

"내부 꼴이 이런걸로 봐서 어디 이집트나 중동 지역에서 건너온 친구같군."

내부가 무슨 피라미드 던전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리라.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할까요."

설계자는 분명 까다로운 괴물이다. 하지만 강력한 무력이 필요한 동급의 괴물들 보다는 더 수월할 수도 있다. 설계자를 처리하는 방법은···

"갈림길이군."

녀석이 고안해낸 미궁을 돌파하여 심처에 도착해 놈의 코어를 파괴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바꿔 말한다면 이에 특화된 능력이 없다면 영원히 놈의 뱃속을 헤매다가 죽을 수도 있단 뜻이다.

"신중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계자의 까다로운 점 중 하나.

이곳은 계속해서 공간이 뒤바뀐다.

그렇기에 이런 갈림길에서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그걸로 끝이다.

다시 되돌아 와봤자 또 다른 길이 펼쳐져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

유신은 갈림길을 슬쩍 살피더니 오른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당당한 걸음에 레이가 물었다.

"이곳이 맞는 길입니까? 어떻게 알아 낸 겁니까?"

"알아낸 거 아닌데?"

레이가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그럼 지금 아무것도 모른채로 왔단 말입니까?! 미쳤습니까?"

그러나 등뒤에는 어느새 딱딱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공간이 또 뒤바뀐 것이다.

"무슨 수가 있어보여서 따라왔더니만! 이럴거면 차라리 제 방법대로 하는 게 나을 뻔 했습니다!"

호오. 내 계획보다 더 좋은 수가 있다고?

"그게 뭐지?"

레이시스터는 가슴을 내밀며 거만하게 말했다..

"막대를 세워놓고 떨어지는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

기대하던 유신의 표정이 구겨졌다.

얘 그래도 폐급 3인방 중에서는 가장 똑 부러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만.

유신의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뭐, 뭡니까 그 표정은!"

레이시스터가 화를 냈다.

"근거 없는 추론은 아닙니다. 염동력자는 그리고 제 감은 꽤 좋은 편이란 말입니다."

그래, 그런 연구결과가 있긴 했지.

능력자에게 있어 감은 꽤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빈약한 확률에 매달리는 것 보다야···

"닥치고 따라와. 이 방법이면 적어도 길은 잃지 않을테니까."

내 공략법 대로 하는 게 맞다.

< 설계자의 미로 >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갈림길이 나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유신은 아무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만만해 보여서 따라오긴 했는데···'

유신에 대한 경악도 잠시.

레이시스터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싹 틀 때 쯤.

이번에는 갈림길이 아닌 웬 방이 튀어나왔다.

쿠르르르.

두 사람이 방안에 들어선 순간 역시나 왔던 공간은 가로막혔다.

곧이어 벽면과 바닥이 찰흙처럼 꿀렁거리더니 어떤 형태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어-어어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붕대로 몸을 감싼 썩은 시체들이다.

"룬머미인가."

그 녀석은··· 없군

"다 처리해."

레이시스터가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직후 터져나간 염동파가 시체들을 짓이기고 부서트렸다.

"···!"

그녀는 놀란 분위기였다.

능력이 자신의 뜻대로 수월하게 움직이니 그런 거겠지.

"가자."

그 후로 몇 번이나 더 갈림길.

그리고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방들이 나왔다.

대부분이 1급과 2급이었지만. 때로는 3급 위험종도 섞여 있었기에 유신 역시도 전투에 나서야 했다.

그러기를 잠시.

"저놈은 죽이지 마라!"

유신이 소리치자 레이시스터는 깜짝 놀라며 능력을 거두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호랑이만 한 크기의 황색빛 고양이가 있었다.

[2급 위험종 데저트 캣]

유신이 찾고 있던 괴물이다.

"이놈 말입니까? 이 녀석을 왜···"

캬아아아아-켁!

유신은 사납게 날뛰는 데저트 캣을 후려쳤다.

손발톱과 이빨이 빠진 괴물은 그 흉포함을 잃은 채 골골대기 시작했다.

레이시스터가 뭐하는 짓인지 쳐다보고 있자 유신이 말했다.

"레이시스터."

"네."

"엑토플라즘을 만들 수 있나?"

"가능합니다. 어떤 형태로?"

"올가미."

"알겠습니다."

레이시스터는 초록빛 엑토플라즘을 뽑아낼 때 까지도.

유신이 이를 이용해 데저트 캣을 구속할 때 까지도 유신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곧 통로를 지나쳐 갈림길에 다다른 순간 그녀는 유신의 노림수를 알아챌 수 있었다.

스윽.

유신은 갈림길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일부러 올가미를 놓았다.

그러자 데저트 캣은 망설임도 없이 한 쪽 길을 택하며 달렸다.

그 상황이 시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괴물을 이용하여 미로에서 길을 찾는다.

"이게 가능합니까?!"

레이시스터가 눈을 부릅 떴다.

캬오오오!

유신은 올가미를 다시금 붙잡으며 생각했다.

'나도 실제로 해보는 건 처음인데.'

이건 모니터 밖의 지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냥 불가능하다고 생각 되지가 않는 게 괴물에게는 인간에게는 없는 감각이 존재한다.

심지어 이 괴물은 설계자에 의해 창조된 생명이다.

귀소본능을 발휘해도 이상하지가 않을 터.

유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점점 더 많은 갯수의 갈림길이 나타난 것은 물론.

방안에서 등장하는 괴물들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당신 생각이 맞았군요."

레이시스터가 혀를 내둘렀다.

컴퍼니의 자료실에서 본 설계자의 미궁의 해결법은 이것과는 달랐다.

그곳에서는 인해전술을 권장한다.

각 갈림길마다 사람들을 배치해놓고 올바른 루트를 찾을 때까지 욱여넣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퍽 실용적인. 하지만 소수만이 고립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는 방법.

'일부러 짐승형태의 괴물을 택한 것도 지능의 차이를 고려했기 때문이겠지. 지능이 높다면 오히려 이쪽의 생각을 알아차릴 테니.'

뭐가 됐든 놀랍다.

레이시스터가 감탄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그냥."

"···?"

"잔머리 좀 굴려봤지."

유신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분명 이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구태여 밝히지는 않았겠지.

이런 지식은 곧 힘.

경쟁관계 사이에서 우위를 잡을 수 있는 노하우니까.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은 죽었을테고.'

화르르륵.

유신은 손을 털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바닥을 굴러다니는 괴물들 대부분은 3급 위험종이다.

이쯤되면 어지간한 클레이모어들도 이제 위험하다.

"그 친구들은 무사할려나?"

유신은 다른 곳으로 낙오당한 매드독과 매지컬씨를 떠올렸다.

"뭐, 괜찮지 않겠습니까?"

"별로 걱정하는 투가 아닌데."

레이시스터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정확하게 맞췄습니다. 별로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래도 동료 아니었나?"

내가 합류하기 전에도 꽤나 부대 낀.

"그야···"

레이시스터의 답변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칙칙한 머리색에 어두운 피부톤을 가졌으니까요."

"···"

미친 년.

이쯤되면 천하의 유신이라도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저 차별주의적인 사고관은 둘째 치고.

"애초에 너 때문에 지금 사태가 벌어졌잖나!"

"···흥."

어딘가 결여된 인간과의 미로 탐험은 계속 이어졌다.

이제 갈림길은 전후좌우에서. 나중에 가서는 수십 개가 나타나기도 했다.

캬-오오옹!

훌륭한 길잡이가 없었다면 틀림 없이 길을 잃었을 거다.

뿐만 아니었다.

"문이 닫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다음 구역에 도달할 때까지 미동도 없던 통로가 저절로 폐쇄되고 있었다.

"달려."

이제는 갈림길이 아닌 느닷없이 천장에서 생겨나는 문.

은신해있다가 공격해오는 괴물.

쐐애액!

"꺄악!"

느닷없이 땅이 꺼지거나 벽면에서 튀어나오는 화살비 같은 함정들.

'설계자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

위협은 늘어났지만 이 현상은 한 가지 사실을 시사했다.

"놈의 심처까지 거의 다 왔군."

궁지에 몰린 짐승은 더 사나워지는 법이니까.

쿠르르르!

잠겨 있던 석실이 열린다.

곧이어 지금까지의 방 보다는 몇 배는 더 넓은 광장같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크기와는 달리 광장은 꽤나 비좁아보였다.

이글거리는 횃불들의 아래.

광장의 벽면에는 거대한 석상들이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끝자락.

마치 투탕카멘을 연상케 하듯 황금색 가면을 쓴 석상이 권좌에 앉아있었다.

한 손에는 알록달록한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밝게 점멸하고 있는 구슬을 쥔 채.

"설계자입니다."

레이시스터가 반짝이는 구슬을 눈짓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신중하게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저 석상들은 골렘같은데···"

설계자와 그를 지키는 가디언들.

도감에는 실리지 않는 괴물들이다.

그렇기에 그 강함이나 특성 역시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설계자가 까다로운 이유 중의 하나다.

"그래도 동급보다는 훨씬 강할 겁니다."

유신이 수용소에서 상대했던 골렘들과는 질량 자체가 다르다.

무슨 갑옷과 방패. 무기를 들고있는 녀석들도 있다.

"설계자를 지키고 있는 저 황금색 석상은 4급. 아니, 어쩌면 5급 정도의 수준일지도 모릅니다."

설계자가 모든 힘을 짜내 창조해낸 우두머리급 가디언.

오래 묵은 설계자일수록.

구축한 영역의 에너지들을 더 많이 빨아먹은 놈들일 수록 더 넓은 미궁을 구축하며 더 강하다.

이 정도쯤 되면 확실히 보통 이상이다.

레이시스터의 얼굴에 낭패감이 드러났다.

"일단 후퇴하는 게 어떻습니까?"

레이시스터가 봐온 유신은 분명 강하다.

능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자신 역시 웬만한 팀의 클레이모어들보다는 강하다.

하지만.

"전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저 괴물들은 녹록치 않아 보였다.

"고립되어 있을 두 사람이 합류한다면··· 가능성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실낱같은 확률이겠지만 말이다.

"···"

이에 대한 유신의 답은.

스르릉.

허리춤의 흑도를 뽑아드는 것이었다.

"시간 없다."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

하지만 레이시스터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

그 안에 에스트의 고갈은 물론 식량마저 다 떨어질 수도 있다.

때로는 저돌적인 행보가 답일 수도 있다.

실패하면 죽겠지만.

'이 엿같은 세상에서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는 일이 있을까?'

레이시스터는 결연한 얼굴로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틈을 만들어 주십시오. 당신 보다는 제가 더 확률이 높을 겁니다."

염동력이란 그런 힘이었다.

환경과 상성에 대한 구애를 극도로 받지 않는다.

골렘을 무시하고 설계자만 처리할 수 있다면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탁!

유신은 피식 웃더니 냅다 땅을 박찼다.

"다른 녀석들이나 맡아."

"앗! 자, 잠···"

석삭들의 눈이 휘리릭 돌아갔다.

곧바로 유신을 향해 손에 들린 무기를 휘둘렀다.

몇 개는 무형갑의 중첩시킨 실드로.

"이 등신 같은 똥양인아!"

몇 개는 레이시스터가 염동력으로 막아냈다.

찰나의 순간 생겨난 빈틈.

유신은 곧바로 광장을 질주 설계자의 앞까지 다다랐다.

그 순간.

쿠웅!

황금색 가면을 쓴 석상이 벼락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손에 들린 설계자를 천장으로 휙 던지는 동시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번쩍!

'역시나!'

이를 보고 있던 레이시스터가 비명을 질렀다.

예상대로 저 황금색 석상은 강했다.

날랜 것은 물론이거니와 녀석이 광선을 뿜어내자 유신을 둘러싼 베리어가 순식간에 깨져나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었다.

고오오오!

그 틈을 노리고 무기를 찍어내리는 석상들의 물리력은 아무리 유신이라고 곤죽이 될 수 밖에 없는 맹공이었다.

"어서!"

레이시스터는 염력으로 놈들의 행동을 최대한 지연시키며 소리쳤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그러나 유신은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마치 한량처럼 검을 어깨에 걸친 채 석상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 말이··· 큭! 안 들립니까?!"

울컥 피를 토해낸 그녀가 한계를 맞이하며 무릎을 꿇고.

저항이 사라진 악의가 유신을 향해 떨어지던 그 순간.

스르릉.

검날이 마찰하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석실 내부로 한 줄기의 바람이 불었다.

다 포기한 레이시스터가 직후 본 것은.

───────!

벼락이 치는 굉음과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석상들의 모습이었다.

"···!!!"

[패검 : 뇌락일섬]

***

그저 한 번의 까딱거림.

단 한 번의 휘두름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로인해 발생한 상황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툭, 투둑.

없다.

현재 이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 석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많던 괴물들이 단 일검에 돌무더기로 돌아간 것이다.

"어, 어떻게···"

레이시스터는 입을 쩍 벌렸다.

"후우."

이를 행한 당사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경련하고 있는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과연 절명검의 비기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강력했다.

최강급 유물인 흑도와의 시너지는 전율이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이 정도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유신은 카르갈과의 격차를 또 한 번 느꼈다.

카르갈이 이 기술을 사용했을 때는 이런 벼락소리도. 대상이 산산조각나지도 않았다.

그저 깔끔하게 반토막이 났을 뿐이다.

이건 곧 그만큼의 힘의 낭비가 일어났다는 뜻이고.

유신이 이 기술의 진가를 다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반동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겠지. 한동안 검을 쥐는 것 조차 버겁다.'

'세계관 최강자의 기술쯤 되면은 날로 먹을 수 없다 이거냐?'

아마 육신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유신이 카르갈로부터 흡수한 것은 [뇌락일섬]이라는 비기 뿐.

신체능력은 3위계 능력자의 것 그대로니까.

"후우."

그렇지만···

유신은 주먹을 꽉 쥐며 웃었다.

강력하기 그지없다.

위험부담을 무릎 쓸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지금 이 힘은 유신이 가진 최고의 패임과 동시에.

'잘만 갈고 닦는다면···'

그 이상을 바라볼 수도 있는 조커니까.

"쿨럭, 저길··· 보십시오."

유신이 그렇게 돌무더기 사이에서 피식거릴 때. 비틀거리며 다가온 레이시스터가 허공을 손짓했다.

고오오오.

투명한 구슬이 마치 감정이라도 가진 양 요동치다가 어딘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유신의 공격을 피한 설계자가 도망 친 것이다.

레이시스터가 낭패어린 얼굴로 말했다.

"놓쳤습니다. 이제 어떻게···"

"상관없어."

"네?"

"설계자가 심처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곧 구축한 영역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래, 이제 다 끝났다는 거지."

녀석의 능력을 흡수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유신은 미련을 털어내고는 돌 무더기를 뒤졌다.

곧 토막난 황금색의 석상 아래에서 웬 상자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채 반짝거리고 있는 작은 큐브 형태의 상자였다.

이를 본 레이시스터가 눈을 부릅 떴다.

"그, 그건 유물 아닙니까?!"

세상에.

자료에 나온 대로잖아?

"그래."

유신은 웃는 낯으로 큐브를 만지작거렸다.

설계자가 노다지라고 불리는 이유.

녀석이 구축해낸 미궁을 소멸시키면 100%확률로 유물이 나온다.

그리고 유신의 손에 들린 이 녀석은 충분히 대박이라고 부를만한 소득이었다.

[탐욕스러운 자의 미스테리 큐브]

이 녀석은 유에서 더 큰 유를 창조해낸다.

뽑기라고 들어봤는가?

< 에어리어 : 고리의 성 >

유물을 챙긴 순간 미로는 붕괴되었다.

동굴 내부에서 유신과 레이시스터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의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직후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수습하고.

괴물들에 의해 완전히 부서진 자동차 대신 도보로 움직이고.

마침내 네 사람은 이 의뢰의 본래 목적지인 천해산의 중턱.

고리의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늦으셨군요. 콜록, 콜록. 내 분명히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했을 텐데요."

화려한 권좌에는 병마를 앓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파리한 안색을 한 노령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미안합니다 성주. 우리도 나름대로 여러가지 상황에 휘말려버려서."

매지컬씨가 사과하고, 유신은 그녀를 바라봤다.

흰 머리와 자글한 주름은 굳이 병마가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꼿꼿한 허리와 깊은 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이 여자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맹수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대전쟁의 생존자이자 왕관을 잃은 자.

패배자들의 영원한 왕.

에어리어의 성주 에반 자이로스.

'여간 내기가 아닌데.'

에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유신은 혀를 내둘렀다.

하긴 작금의 성주들은 모두 한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했던 능력자들의 후손들이다.

혈통 자체가 남다르다는 거다.

저 여자 같은 경우는 세월의 힘도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일정한 경지를 넘어선 순간 노화속도가 극도로 줄어든다지.'

어쩌면 그 지옥 같은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일지도 모른다.

에반 자이로스의 수준은 옆에 있던 경호원인 노기사의 기세만 봐도 짐작이 가능했다.

'검기를 다루는군.'

"그런 변수마저 차단하기 위해 거금을 주고 컴퍼니에 의뢰를 한 것이거늘···"

성주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일행을 훑어보다가.

"뭐, 됐습니다. 콜록, 콜록. 물품 확실히 받았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여독을 풀다 가시지요."

상자에서 앨릭서를 꺼내 들면서 축객령을 내렸다.

대기 중이던 하인이 안내를 자처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성내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준비해뒀습니다."

고리의 성은 여러 개의 첨탑과 내성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중세시대 양식의 건물이다.

그 내부 역시 이와 비슷했고 탑의 꼭대기와 가문의 문양에 고리가 걸려있다고 하여 고리의 성이라 불린다.

"햐아. 그래, 우리 원래 임무가 이거였지? 그 사이에 겪은 일들이 너무 스펙타클해서 까먹고 있었어."

따라가는 와중 매드독이 큭큭거렸다.

매지컬씨 역시 허허 웃었다.

"돌연변이에 이어 설계자라니! 누구도 믿지 못할 걸세! 이렇게 살 떨려본 적이 얼마만인지 원."

그 후로 중간에 마주친 성주의 피붙이들과 인사하고, 호화로울 정도로 넓고 깨끗한 방을 1인당 1개씩 배정받았다.

대리석 욕조는 뜨거운 물이 펄펄 나왔고 목욕 시중. 혹은 그보다 더한 것을 들어주는 하녀 역시 배정되었다.

클레이모어는 분명 고용인일 뿐이건만 현재 이 에어리에서 왕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내가 씻지."

"하지만···"

"불편해서 그래. 야단맞을 것이 걱정된다면 저기 뒤돌아서서 그냥 가만히 서 있도록."

유신은 하녀를 물리고는 욕조에서 몸을 씻었다.

괴물 기름과 재로 만든 비누로 몸을 행구며 슬쩍 살피자 깡 마르기만 했던 몸에 살집과 근육이 제법 붙었다.

오오.

그러고보니···

허구헌날 나오던 기침 역시 거의 잦아들었다.

늘상 달고 다니던 두통 역시 미약해졌다.

이 땅에 떨어진지 2년이 흐른 지금.

유신은 이제서야 평범한 사람의 몸뚱이가 됐다.

'이 정도로 몸을 케어하는데 얼마나 들었더라?'

귀한 약초와 세계수의 열매.

컴퍼니의 최신식 의료체계와 에린교의 성수.

범인이라면 상상도 못할 기연들.

그것들을 다 처먹어 넣고도 이 정도라.

정말 구리기 그지 없는 연비로군.

적어도 육신에 관해서는 말이야.

유신이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오자 때맞춰 세 사람 역시 나왔다.

그 중 매드독은 가운을 걸친 채 끽해야 중학생처럼 보이는 하녀의 가슴을 마음껏 주무르고 있었다.

"여어! 다들 좋은 시간 보냈나!"

"짐승 같은 놈."

유신이 이를 보며 차갑게 일갈하자 매드독이 당황했다.

"브, 블레이드? 왜···"

"그렇게 어린아이를 건드리고 싶나?"

"뭐가 어리단 거야? 이 정도면 다 컸구만! 그리고 팁 역시 두둑하게 줬다고!"

매드독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이건 다분히 이 망가진 세상의 사고관과 현대인의 가치관이 대립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매드독 정도면 신사적으로 행동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손찌검이나 하드한 플레이도 요구하지 않았고 돈도 챙겨줬으니까.

하지만.

"역시 넌 쓰레기다."

유신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잔재마저 버린다면 자신은 완전히 이쪽 세상에 동화될 테니까.

"이봐아··· 블레이드. 그러니까 그게···"

유신의 힘을 실감하자 매드독은 쩔쩔맬 수 밖에 없다.

"풋. 이렇게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까? 안 어울리게."

이를 보던 레이시스터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신의 태도가 꽤나 마음에 든 듯 했다.

"자자! 그만들 하고 오늘 밤은 다 같이 한 잔 땡기는 게 어떻겠는가?"

이를 중재한 것은 역시나 매지컬씨였다.

"···?"

"다들 잊었나 본데. 이건 블레이드의 신입 연수였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어쨌든 무탈하게 끝난 것을 축하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종차별주의자와 권력자에게 찍힌 낙하산, 마법소녀 아저씨, 변태한량.

끔찍한 조합을 자랑하는 팀으로서 해낸 첫 의뢰였던 것이다.

"오오. 맞는 말이야 아재!"

"좋습니다."

"레이시스터? 네가 참가한다고?"

매드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가운 인상의 미녀는 덤덤하게 되물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 뭐. 네가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건 처음보는 것 같아서."

이 자식들이 누구 멋대로 뭘 하네 마네야?

"거절하지. 나는 따로 할 일이···"

"허허. 부끄러워하지 마시게나."

매드독과 매지컬씨가 유신의 양팔을 붙들었다.

끝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파동이 유신을 구속했다.

유신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너, 너 임마? 부하가 된다면서?

"첫 회식자리에 상사가 불참해서야 됩니까?"

레이시스터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렇게 유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술판이 벌어졌다.

"어떻게 설계자를 잡을 수 있었나? 비법 좀 알려주지 않겠는가?"

"강해지는 비법이라도 있어? 아이언 나이트님께 수련받으면 되는 건가?"

성내에 구비된 식당에서 사용인들은 물린 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콰앙!

느닷없이 식당 문이 거칠게 열어젖혀졌다.

"어떤 새끼야?"

인상을 구기며 일어선 매드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은편에 있던 상대들 역시 당황한 듯 했다.

"너희들은···"

***

나타난 무리는 일전에 주차장에서 시비가 붙었던 드미트리 일당이었다.

팀 라이노.

조사부서 실적율 1위를 달리는, 팀 얼라이브와는 달리 1군이라고 불리는 엘리트들의 집단.

하필 여기서 이들과 마주하다니... 이쯤되면 악연이라 부를만 했다.

"여어. 이런 곳에서 다 만날 줄이야. 의뢰는 해치웠나?"

드미트리가 말했다.

"퉤. 당연한 소릴 하는군. 안 그럼 여기서 뭐하러 노닥거릴까?"

취기가 올라서 그런가? 아니면 지난번 겪었던 사태에 자신감을 얻은 걸까?

매드독이 거칠게 대꾸했다.

하지만 드미트리와 그 일당은 와하하 웃어재꼈다.

"크흐흐. 보나마나 시덥잖은 의뢰나 끝마치고 쉬는 중이겠지. 왜? 너희들이 잘하는 거 있잖아. 설렁설렁 클레이모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기생하기."

"이 새끼가!"

"우린 지옥개미 소굴을 정리하고 오는 길이다. 내부에는 여왕과 왕 역시 존재했지."

드미트리의 얼굴에서는 거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 수 밖에.

지옥개미들의 왕과 여왕은 둘 다 4급 위험종이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만한 대단한 실적이었다.

"하. 우리들은 돌연변이들을 둘 처리했다. 그리고 설계자 역시 잡아냈지!"

매드독이 항변했다.

"오호. 돌연변이? 그리고 설계자? 그것 차암 대단하시군~"

하지만 드미트리 일당은 삐뚜름한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누가 봐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

"이익! 블레이드! 이렇게 듣고만 있을거야? 무슨 말이라도···"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어린애들도 아니고 저런 유치한 말다툼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어차피···

'조만간 저 매끈한 고개를 처박게 될 테니까.'

"그냥 방으로 가서 마저 마시지."

"···"

"허허. 좋은 생각이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법이니까."

네 사람이 식당을 나갔다.

"하하하하! 뭣도 없는 겁쟁이 새끼들 주제에!"

"어이 너! 블레이드라고 했나?! 더러운 꼴 보기 싫으면 미스터 토마스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는 게 좋을거다! 그 더러운 엘프의 머리통이랑 함께 말이야!"

그들을 비웃어준 팀 라이노는 마치 식당을 제 것인양 활보하기 시작했다.

이 야밤에 에어리어 소속 악단을 부르고 고용인들에게 시중을 들게하면서 말이다.

그 모습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영웅들이라기보다 난봉꾼에 가까웠다.

***

유신이 잠깐 바람을 쐰다고 나갔다.

방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매드독이 슬쩍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저기 레이시스터."

"뭡니까?"

"블레이드 말이야. 대체 몇 위계야?"

"···"

"넌 같이 있었으니까 알 거 아니야."

고기를 씹고있던 매지컬씨 역시 호기심을 내비췄다.

"설계자는 5급 위험종이지. 비록 잠깐 둘러봤을 뿐인데도 미로의 크기가 심상치 않았네. 괴물들은 물론 놈을 지키는 가디언들 역시 대단한 수준이었을 거야."

레이시스터는 입술을 씹으며 고민했다.

이걸 말해야 돼? 말아야 돼?

왜 하필 이럴 때 자리를 비워서···

고민하던 레이시스터는 결심한 듯 안경을 까닥거렸다.

"최소 5위계입니다. 마검을 제외한 순수한 역량만으로도 말입니다."

"···!"

"5, 5위계!"

"어쩌면 최상급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아니라면 유신이 보여준 그 때의 그 무력은 설명되지 않는다.

레이시스터는 절명검의 비기를 목격한 후 그렇게 생각했다.

이 말을 들은 두 사람의 눈은 이제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 그 정도면 1군팀의 팀장··· 아, 아니! 특수대책부서 녀석들 급이잖아!"

능력자들의 강함을 위계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위계가 높아질 수록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은 극히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5위계 정도 되는 능력자는 컴퍼니나 펑크시티 내부로 봐도 희귀하다.

"괴물이군··· 역시 아이언 나이트가 점찍은 사내란 건가?"

"레이시스터 네가 변하게 된 것도 블레이드의 그 무력에 혹했기 때문이구나!"

매드독이 달라진 그녀의 태도를 지적했다.

레이시스터는 콧방귀를 꼈다.

"뭐라는 겁니까. 난 그냥···"

"그냥?"

"그 사람이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에 든 것 뿐입니다."

"···"

그 무렵 유신은 복도의 한 쪽에 마련된 테라스로 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다.

별건 아니고 이 에어리어나 한 번 구경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잘 깔린 판석과 벽돌집들.

중간중간 설치된 랜턴들.

펑크시티 만큼은 아니어도 웬만한 자유도시나 타운보다는 진보된 환경이다.

'성주의 명에 절대복종해야 된다는 것만 뺀다면 에어리어도 제법 괜찮지.'

'큐브 덕분에 준비를 더 빨리 끝마칠 수 있겠어. 완수금을 받아서 뽑기만 돌려도 돈은 순식간에 벌 수 있을테니···'

그럼 그걸로 이제 옥션에 참가해서 유물들을 쓸어모으고.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던 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으윽.

내성의 바깥.

야밤의 산 속을 가로지르고 있는 어떤 자들 때문이다.

척척척.

그들은 온 몸을 청록색 우의로 뒤집어 쓰고 있어 정확한 식별이 어려웠다.

정확히는 유신의 시선이 아니라···

[에스트 주입 인형1호]

혹시 몰라 에어리어에 들어오기 전에 배치해둔 정찰용 인형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 모자이크라도 끼인 듯 흐릿했다.

하지만.

유신은 사내들의 복장과 일사불란한 제식에서 놓쳐서는 안 될 단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저 녀석들은···?'

생각은 짧았다.

행동은 더욱 더 짧았다.

유신은 에스트 인형과의 연결을 끊으며 재빨리 방으로 되돌아갔다.

"모두 일어나."

"응?"

"왜, 왜 그러십니까아. 블레이드니이···"

"적이다. (신)군부 놈들이야."

유신이 무형갑의 힘을 끌어올리며 베리어를 친 그 순간.

콰아아아앙!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 빛이 반짝이며 강력한 폭발이 터져나갔다.

***

어두컴컴한 집무실 내부.

성주 에반 자이로스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저 아래에서는 왁자지껄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감히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왕인 자신의 눈치조차 보지 않은 채.

뿌득.

에반의 손에 있던 유리잔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곧바로 와장창 깨어져 버린다.

"고정하시지요. 왕이시여. 건강에 좋지 않사옵니다."

그녀의 옆에 시립해 있던 노기사가 손수건을 건낸 그 순간.

"결정을 내리셨소?"

어둠 속에서 끈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아직도 망설이고 계시오? 언제까지 저 나태한 돼지들의 방종을 용납할 셈이오? 당신의 백성들이 다 굶어죽을 때까지? 저것들이 당신의 뺨을 후려치며 면전에 침을 뱉을 때 까지?"

서늘한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어딜 감히···!"

노기사가 검을 뽑아들던 그 순간.

"협조하겠다."

에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끌끌. 잘 생각하셨소."

"승산은 있는거겠지? 설마 우리들을 이용해먹고 버릴 생각이라면···"

에반의 주위에서 강력한 에스트가 휘몰아친다.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그 기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결코 좋지 않은 미래가 너를 기다릴 거라고.

그림자는 여전히 여유롭게 웃으면서.

"걱정마시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으니까. 우선 당신의 땅에 기생하고 있는 그 돼지들부터 처리하도록 하겠소. 참. 그 전에···"

웬 병을 하나 내밀었다.

"이건 동맹에 대한 징표요. 그 분의 작은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

병 안에는 탁한 붉은 액체가 끈적하게 꿀렁거렸다.

에반이 이를 미심쩍은 듯이 쳐다보자 그림자가 재차 말했다.

"그딴 열화판 엘릭서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물이요. 시간이란 극독에 중독된 당신을 멀끔하게 치료해줄 수 있는 귀물이지."

"···!"

순간 에반의 냉정한 눈동자게 열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한참이나 병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마개를 따고는 쭈욱 들이켰다.

꿀꺽꿀꺽.

붉은색 액체가 식도를 타고넘어갈 때 마다 성주의 모습이 변화한다.

주름진 살결이 다시금 탱탱하게 펴지고.

허옇게 센 머리칼이 본래의 찬란한 색을 되돌려받는다.

"하아아···"

차오르는 활력감에 깊은 한숨을 내쉰 에반 자이로스는 붉은 입술을 훔치며 미소 지었다.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다시금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왕의 주변에서 강맹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녀는 기꺼이 저 악의 축들을 짓밟고 땅에 떨어진 권위를 되찾으리라 다짐했다.

"새로운 대전쟁을."

성주의 입매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들거렸다.

< 에어리어 : 고리의 성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