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나이트 (1)
189화. 다크나이트
39번 구역은 소울 시티 동쪽 끝에 있다.
내륙을 오가는 도로가 39번 구역을 거쳐 가는 탓에 이곳은 주로 물류센터나 운송회사가 밀집된 지역이었다. 소울 시티 외곽에 있으면서 40번대 구역으로 격하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탓이다.
소울 시티의 경계선을 지나면 그때부터 야생의 세계가 펼쳐진다. 아마존 밀림처럼 우거져서가 아니라, 진짜 정비 되지 않은 허허벌판 도로만 끝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 적을 둔 회사들은 모두 자체 무력을 어느 정도 겸비한 곳들이 많다.
그건 아직도 내륙 곳곳엔 오염체 무리가 서식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운송트럭과 트레일러를 노리는 갱과 도적 떼들을 막기 위해서가 더 컸다.
그래서 흔히 39번 구역의 운송회사와 물류센터를 두고, 매드 패덱스(Mad FedEx) 혹은 맥드 맥스(Mad MaX)라고 불렀다.
그들의 운송을 막는 존재는 모조리 처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는.
"여기부터 막아!"
"씨발! 기관총이 안 먹혀!"
"수류탄 여분은?"
"플라즈마 방사기는 아직 충전 덜 됐어?"
다급해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숨을 헐떡거리며 건물에 기대어 앉아있다.
이곳은 39구역의 한 물류센터. 내륙을 오가는 물류가 오가는 허브 중 한 곳이다.
한창 로봇과 사람들이 물건을 옮겨야 하는 시간이건만, 그들은 그저 총을 움켜쥐며 어둠 속을 바라봤다.
원래 로봇과 운송트럭으로 가득 찼어야 할 작업장이 어둠에 잠겼다.
물류센터를 환하게 밝혔던 투광탑은 꺼진 지 오래고, 창고에 달린 전등만이 아슬아슬하게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휘이이잉.
침묵을 머금은 바람이 한차례 물류센터를 휘감는다.
꿀꺽. 누구인지 모를 침 넘기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린다.
그때 아슬아슬한 창고 조명에 닿은 어둠 끝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왔다! 쏴! 쏴라!"
"죽어어어어!"
"개새끼! 죽어! 죽어! 죽어!"
사람들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총격을 퍼부었다.
투타타타타탕!
콰쾅! 콰콰쾅!
어둠을 가로지르며 무수한 탄환들이 궤적을 그린다.
그 사이로 긴 불꽃 꼬리를 남기며 미사일이 날아갔고, 그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안색은 밝지 않다. 오히려 초조함이 엿보였다. 어둠 너머, 불기둥이 넘실거리는 곳을 향해 끝없이 탄환을 쏟아부을 뿐이었다.
"제, 제길! 모조리 막고 있어!"
"빌어먹을 각성자 새끼가!"
"바, 방법이······"
저마다 다른 말을 내뱉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똑같이 일그러졌다. 어둠 너머, 그림자 속을 서성이는 존재가 멀쩡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벅저벅.
점점 걸어서 다가오기까지 했다.
그때.
"이 좆만한 각성자 새끼! 이거나 먹어라!"
성인남자 허리통만 한 무언가를 짊어진 사내가 호기롭게 외치며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콰아아아아아―――!
내밀어진 입구에서 빛기둥이 솟구쳤다.
그건 거대한 플라즈마 기둥이었다. 적색을 띠던 불꽃은 이내 푸른색과 백색이 섞인 백청색으로 변하며 주변을 물들였다.
어마어마한 고온과 압력. 거기에 담긴 에너지가 전방으로 폭사했다.
어둠은 물론이고 그림자까지 모조리 사라진 작업장 위로 불청객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불청객은 검은색 타이즈를 전신에 뒤집어쓴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가리는 일체형이었다.
그렇게 불청객의 모습 위로 플라즈마 불꽃이 뒤덮었다. 불청객은 어떤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불길에 삼켜졌다.
후욱!
플라즈마 방사기가 그 소임을 다하고 꺼졌다. 켜졌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윽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지만, 불꽃이 남긴 잔불이 작업장 바닥을 비롯한 곳곳을 태우며 주변을 비쳤다.
그래서 보였다.
조금 전까지 불청객이 서 있던 자리에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
그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에 인체가 노출된다면 불타는 게 아니라 증발되어 사라진다.
"해, 해치웠나?"
플라즈마 방사기를 힘겹게 내려놓은 사내가 두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푹!
날카로운 무언가가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치밀어오르는 끔찍한 고통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가슴을 내려다봤다.
거기엔 마치 그림자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시커먼 칼날이 있었다.
"끄, 끄윽······!"
사내가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런 그의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건방지게 이딴 장난감으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검은색 타이즈를 뒤집어쓴 불청객이었다.
"쏴, 쏴라!"
"죽여! 코앞에 있다!"
"으아아아! 죽어! 죽어!"
투타타타타탕!
불청객을 확인한 사람들이 발작하듯 다시 총을 갈겨댔다. 이번엔 창고 안까지 진입했기에 그의 모습이 환하게 보였다.
제대로 조준만 한다면! 단 한발만 맞춘다면! 그럼 놈도 인간인 이상 죽는다!
하지만 이내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사람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티티티티티팅!
불청객의 그림자에서 솟구친 검은색 줄기가 펼쳐지더니 우산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탄환들은 단 한발도 펼쳐진 우산을 뚫지 못했다.
타타타탕! 탕!
철컥! 철컥철컥!
하나, 둘 노리쇠가 비어있는 탄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마치 시한부 선고와도 같았다. 이어지는 총격 소리가 끝나면, 그들의 목숨도 끝난다는 사형 선고.
철컥! 철컥!
이윽고 마지막 남은 탄창이 전부 비워졌다. 사람들은 이제 진짜 장난감으로 변해버린 총을 들고 공포에 질린 채 불청객을 바라봤다.
"자······ 그럼 우리 몸의 대화를 시작해볼까?"
우산처럼 펼쳐진 그림자를 치운 불청객이 섬뜩하게 웃으면서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자, 잠깐! 우, 우리가 물러나겠소! 원하는 물건을 가져가든, 센터 금고를 털든 알아서 하시오!"
그때 그들 중 그나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인이 양손을 들며 말했다. 반항하지 않고 그냥 물러설 테니 살려달라는 뜻이었다.
불청객이 피식 웃었다.
"더 일찍 말했어야지."
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우, 우리 전부 다 죽이기라도 할 생각이오? 아무리 각성자라도 우리를 다 죽인다면 무사하지 못할 거요!"
"무사? 누가 뭘 어쩔 건데? 맛이 간 시 정부? 아니면 자경단 좀 한다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해방전선?"
불청객이 킥!하고 웃었다.
"미안하지만, 둘 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빠서 여긴 신경도 안 쓸걸?"
이윽고 그들 앞에 다가선 그가 헤벌쭉 웃었다.
"그럼 네가 한번 해볼래?"
푹!
검은 벼락이 번쩍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청객 그림자에서 솟구친 촉수 하나가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꺼, 꺼어어······!"
"이런. 이것도 못 받아내면서 날 어떻게 한다고?"
불청객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그건 격발이 됐다.
"아, 아버지! 우아아아!"
"괴물 새끼! 죽어어어!"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며 불청객에게 달려들었고.
"도, 도망쳐야 돼!"
"죽고 싶지 않아!"
누군가는 반대로 도망쳤다.
장내는 순식간에 살육의 현장이 됐다. 무기를 들고서도 불청객을 어쩌지 못했는데, 맨몸으로 그게 될 리가 없다.
"커, 커억!"
"사, 살려······"
"끄, 끅!"
그림자 촉수가 춤을 췄다. 사방을 헤집으며 뱀처럼 이빨을 박아넣었다.
"아하하하! 더 발악해라! 더 비명을 질러!"
불청객은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광소를 터트렸다.
그 손짓을 따라 그림자 촉수가 수십 개씩 늘어나며 달려들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도망치는 사람들까지 죽이고 있었다.
가히 학살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때.
서걱.
그림자를 넘나들며 도망치는 사람들의 등 뒤를 노리던 그림자 촉수가 끊어졌다.
"음?"
불청객이 이상함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서걱.
서거거걱!
이내 빛의 잔상과도 같은 궤적들이 허공에서 유영하더니, 그 궤적에 걸린 그림자 촉수가 모조리 끊어졌다.
"끼, 끼아아아! 누, 누구냐!"
한꺼번에 끊긴 촉수의 충격으로 불청객이 비명을 질렀다. 그림자 촉수와 연결된 링크로 섬뜩한 기운이 타고 올라왔다.
"재밌게 노는군."
어딘가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저음 속에 섞인 조롱.
하지만 불청객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디냐! 어디냐고! 모습을 드러내!"
분명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어디에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청객이 충혈된 눈으로 사방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그의 그림자 주위로 넘실넘실 일어난 그림자 촉수는 언제라도 적을 향해 내뻗을 준비가 된 상태였다.
"내가 안 보이나? 네 앞에 있잖아."
"무, 무슨 개소리를······!"
불청객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방을 바라보는 순간.
깜빡.
분명 없었는데, 눈을 한번 깜빡인 순간 거짓말처럼 누군가가 나타났다.
온통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칼잡이가.
* * *
택배기사 카를로스는 오늘 참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웬일로 일어났을 때 술병이 나지 않았고, 도시락 자판기에서 도시락이 2개나 떨어졌으며, 즉석복권 5등에 당첨돼 무려 본전을 건졌다.
물류센터에서 배정받은 물건도 좋았다. 무려 그레이트 필드 중앙에 기업들이 새롭게 건설중인 개척센터로 배달하는 일이었다. 위험도도 낮았고, 시간도 짧았다.
'일당 받으면 파칭코 좀 돌려봐야겠군. 이런 운이라면 한몫 땡길 수도 있지 않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화물을 분류하던 와중이었다. 이제 간단히 새벽 조회만 하고 출발하면 똑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씨발! 씨발! 씨발! 이게 무슨 개 좆같은 일이야!'
그런데 난데없이 물류센터가 공격을 받으면서 모든 계획이 엎어졌다.
무려 각성자의 공격으로 추정되는 습격에 물류센터 입구를 지키던 경비원들은 초반에 죽었고, 남은 건 택배기사들뿐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들은 오십 명이 넘었고, 전부 무기를 잘 다루며, 숱한 전투경험도 있었다.
도로에서 화물트럭을 노리는 갱들을 상대한 게 한두 번이던가. 각성자도 신비한 힘을 쓰긴 하지만, 몸에 총알이 박히면 뒈지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습격자에겐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총도, 수류탄도, 폭탄도, 심지어 화물트럭도 쇳물로 만들어버리는 플라즈마 방사기까지.
그 이후엔 살육의 현장이었다. 함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던 동료들이 거짓말처럼 죽어 나갔다.
카를로스는 도망쳤다. 오늘 하루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더니, 자신을 죽이기 전에 마지막 선물이랍시고 줬던 행운이었나보다.
그리고 마침내.
쑤우우욱!
난데없이 정면에 나타난 촉수가 운이 다한 그의 가슴을 꿰뚫으려는 순간.
서걱.
"······?"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휙하고 스쳐 가더니 촉수가 잘리며 연기처럼 흩어졌다.
"끼, 끼아아아! 누, 누구냐!"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카를로스의 머리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저 목소리는······ 그 괴물 각성자 목소린데?'
두근두근두근두근!
카를로스의 발걸음이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들렸던 곳을 향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당장 도망치라고 머릿속에서 명령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잔뜩 쌓인 화물 컨테이너 너머로 비스듬히 바라본 광경에는······.
'······! 저게 무슨?'
카를로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들을 철저하게 살육했던 불청객의 그림자 촉수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수백, 수천 마리의 뱀이 서로 얽히고설켜 거대한 기둥이 됐다.
순간 소름 끼치는 살기와 악의가 주변을 휩쓸었다. 몰래 숨어보고 있는 카를로스의 정신이 한순간 아찔해질 정도였다.
'누, 누구와 싸우는 거지?'
그 거대한 악의가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치렁치렁한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가 고고하게 서 있었다. 거대한 악의의 폭풍이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는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러다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사내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는 게 보였다.
'······칼? 설마 칼잡이라고?'
카를로스가 입을 떡하고 벌렸다. 지금 저 거대한 힘에 맞서고 있는 게 칼잡이란 말인가?
그 순간, 그림자 촉수로 만들어진 악의의 기둥이 칼잡이를 집어삼켰다.
'아, 안돼! 죽는다고!'
카를로스가 속으로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이제야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칼잡이라는 걸 알았지만,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빌어먹을! 우릴 살려줬으면 자기도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너무 빨리 죽어버렸다. 최소한 고맙다는 말은 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번쩍!
그림자 촉수 기둥 사이로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넋 놓고 광경을 바라보던 카를로스의 시야 사이로 기다란 십(十)자선이 그어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끼에에에!
캬아아아아악!
빛에 닿은 그림자 촉수 기둥이 바스라지며 소멸했다. 수백, 수천 마리의 뱀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갔다.
그리고도 십자선은 멈추지 않았고.
"······케, 케에에엑!"
불청객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툭. 투둑.
완전히 갈라진 타이즈가 먼저 뜯어지며 불청객을 맨몸으로 만들었고.
후두두둑!
뒤이어 십자선 그대로 4등분이 돼버린 불청객이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미, 미쳤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한 수다.
그토록 강하고 괴물 같았던 각성자를 단칼에 4등분으로 갈라버리다니?
그때 넋 놓은 그를 향해 칼잡이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다.
"······!"
시선을 마주한 카를로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마주한 시선이지만, 그 눈빛에 담긴 강렬함이 카를로스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
이내 시선을 돌린 칼잡이가 허리춤에 칼을 넣으며 몸을 돌렸다. 이곳을 떠나려는 모습이다.
그제야 카를로스도 깨달았다. 이 지옥 같았던 전투가 끝났다는 걸.
그래서일까?
카를로스가 발작적으로 컨테이너 사이에서 뛰쳐나와 소리쳤다.
"은인!"
걸어가던 칼잡이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은인! 혹시 이름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사이 더 멀어져 백여 미터 가까이 벌어진 간격.
여전히 칼잡이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지만······.
"다크나이트."
카를로스의 귓가엔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렸다.
"······다크나이트. 다크나이트."
혼자서 작게 중얼거리던 카를로스가 이제는 그림자에 파묻혀 사라진 어둠의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다크나이트!"
하지만 그 외침은 시작에 불과했다. 카를로스처럼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며 소리쳤으니까.
"고맙습니다! 다크나이트!"
"오늘 일 잊지 않겠습니다!"
"다크나이트! 다크나이트!"
어둠의 기사를 찬양하는 외침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다크나이트 (2)
190화. 다크나이트
어둠과 빛은 상극이다.
항상 빛을 피해 모습을 감추고, 온 세상이 빛으로 물든 낮이 되면 지하로, 그림자로 숨어든다.
빛이 있는 곳엔 어둠은 없다. 절대로 공존할 수 없고, 한쪽이 소멸해야 한쪽이 창생하는 관계다.
그리고 그 상극의 관계에선 언제나 빛이 선이고, 어둠은 악이다. 빛은 승리하고, 어둠은 패배한다. 언제나 빛이 강하고, 어둠이 약하다.
'이게 흔히 알려진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논리지.'
하지만 나는 그게 얼마나 잘못된 편견이고 선입견인지 알고 있다.
누구보다 밝게 빛나야 할 사람들이 사실 진정한 악의 근원이었다.
누구보다 선하고, 청렴하며, 정직해야 할 사람들이 가장 악하게 가진 힘을 약자에게 휘둘렀다.
나도 한때 약자였다.
거대한 권력에 부딪혀 절망했던, 삶까지 포기하려 했던······ 무수히 많은 들풀 중의 하나였다.
그들이 사뿐히 즈려밟고 가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그런 들풀.
그래서 뼈저리게 알고 있다.
'악은 그저 악일 뿐이다. 그게 빛이든, 어둠이든, 희망이든, 절망이든, 어느 곳에서 비롯됐더라도 차이가 없다.'
빛이라 선하고, 어둠이라고 악하지 않다. 그건 그저 색깔일 뿐, 선과 악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저벅저벅.
망가진 가로등 구역을 지났다. 어둠이 내려앉았던 길엔 언제 그랬냐는 듯 오색찬란한 네온사인 빛이 반짝였다.
빛으로 물든 거리를 어둠을 그려놓은 듯 새까만 코트를 휘날리며 걸었다.
-이렇게 도시에 또 하나의 전설이 나타나는 건가요? 다크나이트?
귓가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백한 듯 짧게 내뱉은 말이지만, 그 속에 담긴 장난기마저 숨겨지지 않았다.
"······놀리는 거냐?"
-제가요? 설마요? 저는 다크나이트의 충실한 종이랍니다!
"······."
이런 요오망한 AI 같으니라고.
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물었다.
"그건 그렇고, 사진은 잘 찍었어?"
-네. 마스터께서 포즈도 멋지게 취해주셔서 아주 멋지게 찍혔어요! 다크나이트, 그 자체였다니까요?
"내가 언제 포즈를······ 후, 됐다. 아무튼, 제대로 찍혔다니 다행이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요망한 AI가 놀릴 거리를 찾았으니, 당분간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게 분명했다.
-그런데 마스터. 갑자기 사진은 왜 찍으신 건가요? 혹시 마스터께서도 SNS 인플루언서를 노리시는 건가요?
투명한 목소리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어왔지만, 그 안에 담긴 장난기는 여전했다.
내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내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의도는 뻔했다.
입꼬리를 올린 나는 이브의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비슷하지. 유명해지려고 하는 거니까."
-······어, 네? 지, 진짜요?
내 진지한 반응에 이브가 오히려 당황한다. 설마 장난 같은 질문이 진짜일 거라곤 이브도 상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 소드마스터와 달리 다크나이트는 홍보가 필요하거든. 요즘 스타그램이 제일 잘 나간다며?"
-······홍보 말씀이십니까? 그럼 진짜 스타그램 개설을 하시려고······?
목소리에 혼란이 섞인다.
연산과 딥러닝에 의해 구현된 이브의 지각능력이 흔들렸다.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과 전혀 다른 대답이 나와서 당황한 모습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놀리는 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듯하다. 혹시나 오늘 일을 진짜라 여기고 딥러닝에 들어가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스타그램 개설은 장난이고. 나는 조금 더 원론적인 홍보를 사용해야지."
-원론적인 홍보 말씀입니까?
"그래. 홍보하면 뭐겠어? 뉴스지."
-······뉴스요? 하지만 뉴스는 우리가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하는 이브에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잊었어? 다크나이트에 대해서 잘 써줄 기자, 알고 있잖아?"
* * *
SCMP(Soul City Morning Post)의 사회부 기자 톨레도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금천교의 난 이후, 어떤 사건을 취재해도 반응이 시원찮았다. 도시 전체가 겪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금천교의 난 이후로도 도시 공백을 대신한 해방전선이라든가, 각성자들이 나타난 사실이라든가, 이어지는 각성자 범죄와 각성자 사냥꾼들까지.
이제 웬만한 사건들로는 클릭을 유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하는 사실은······.
"이야! 에밀리 테일러의 섹스비디오가 풀렸다고? 상대는 메가코프 중역?"
"조회수 미쳤네! 이번 달 신기록 아니야?"
"아닐걸요? 조이 그레이엄이 양성애자 커밍아웃한 게 1등일 거예요."
"그건 지난달 아니었나?"
"지난달 기록은 태권보이즈의 멤버 둘이 결혼 발표한 거였어요. 인공자궁 시술도 이미 받았다고 했었나?"
연예부 기자들이 떠드는 저런 가십거리에 불과한 기사들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사실이다.
그가 몇 주를 날밤을 새우며 취재한 기사들보다 압도적으로.
조회수가 수백 배에서 수천 배까지 차이가 나니, 이러다가 SCMP에서 사회부 취재 기자들 중 강력범죄팀을 없앤다는 말까지 나도는 상황이었다.
"선배. 오후 취재는 어떻게 할까요?"
"음. 나가야지."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톨레도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눈망울이 똘망똘망한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이름은 에미르로 회사에서 그의 부사수로 붙여준 신입기자였다.
쯧하고 짧게 혀를 찬 톨레도가 가방을 챙겼다.
사회부. 그것도 강력범죄팀의 부사수로 이런 초짜 신입기자를 보냈다.
이것만 봐도 위에서 강력범죄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강력범죄팀은 적당히 언론사의 구색만 맞추는 용도로 전락했다.
'······대체 이 도시가 어떻게 돌아가려고 이러는 건지.'
가방을 챙긴 그가 파티션 너머로 아직도 하하호호 떠들고 있는 연예부 기자들을 봤다.
다들 삐까뻔쩍한 옷과 악세사리를 걸치고, 여유롭게 웃으며 농담을 따먹고 있다.
사람들 규모도, 근무환경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더러워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하지만 하지 못할 걸 안다.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위험한 범죄 현장에 몸을 욱여넣고 취재하는 일뿐인데, 여길 나가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다들 한다는 닭집?
'에휴.'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픈을 축하한다며 찾아갔던 닭집 중 아직까지 장사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선배!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 나가······ 잠시만."
신입 기자의 말에 걸음을 옮기려던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관자놀이에 연결된 통신 단말기가 깜빡거린다. 이내 그의 사이버아이가 푸르게 점등됐다.
'취재용 이메일?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무슨 연락이 왔나 했더니, 취재용 이메일에 메일이 한 통 접수됐다.
도시가 난장판이 된 이후로, 취재용 이메일은 잠정휴업상태였다. 당장 문밖에 나가면 사방에서 강력범죄가 벌어지는데 무슨 제보를 하겠나? 아직도 치안이 복구되지 않아서 대다수가 범죄에 노출된 상태인데 말이다.
'그럼 뭐지? 스팸메일인가?'
고개를 갸웃한 톨레도가 메일을 확인했다. 푸른빛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가 허공을 쫓으며 움직였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냥 메일을 확인하고 지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
메일 제목을 확인한 톨레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고.
[다크나이트 활동 개시]
홀린 듯이 이메일을 연 그의 입에선 넋 나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 진짜 다크나이트다······"
그곳엔 치렁이는 검은색 코트를 걸친 채 어둠 속에 고고히 서 있는 칼잡이.
그가 최초로 목격해 별명을 붙였던 존재의 사진들이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 *
[······각성자 범죄 현장을 다크나이트가 덮칩니다. 이후 범죄자는 반항하지만, 이내 다크나이트의 칼을 피하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택배기사 A씨: 다크나이트가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죽었을 겁니다. 구원자라고요!
물류센터 직원 B씨: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번쩍!하고 나타나더니 범죄자를 단칼에······
다시 나타난 다크나이트의 활동에 시민들은 우려의 시선보다 환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시민 C씨: 이렇게 시국이 뒤숭숭할 때 다크나이트가 다시 나타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시민 D씨: 예전에 살인마 잭을 처단했을 때도 얼마나 멋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남모르게 활동하는 칼잡이! 캬! 얼마나 멋집니까?
여론이 우호적으로 돌아가자, 시 정부에선 다크나이트를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최근 설치된 행안부 산하 각성자관리청 소속으로 스카웃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각성자관리청 공무원 E씨: 시 정부는 다크나이트의 자경활동을 지원할 의지가 있으며, 소속 에이전트로 최고의 대우를······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다크나이트가 도시의 치안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가운데, 여전히 각성자 범죄는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시민들에겐 다크나이트와 같은 어둠의 기사가 여전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SCMP, 톨레도 기자였습니다.]
* * *
"차 맛은 어때요? 어둠의 기사님?"
맞은편에 앉은 로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얼굴엔 한껏 장난기에 떠오른 상태다.
"······이번엔 너냐."
"······? 뭐가요?"
"아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각오는 했지만, 다크나이트라는 이름을 꺼내오자마자 놀릴 생각부터 하다니.
'그러고 보니 소드마스터라는 별명을 지어다 붙인 게 로제였는데······ 그건 아무렇지 않았나?'
내가 보기엔 소드마스터나, 다크나이트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말이다.
"그나저나 이럴 거면 그냥 시 정부 의뢰받는 게 낫지 않아요? 굳이 다크나이트로 명성을 나눌 필욘 없잖아요."
로제가 TV 화면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그곳엔 다크나이트에 대한 후속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다크나이트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그의 타겟은 철저히 각성자 범죄자를 향해 있다는 것.
로제가 시 정부 의뢰 이야기를 꺼낸 이유였다.
시 정부에서 바로 직전에 의뢰했던 내용이 각성자 범죄자들을 잡는 거니까. 어차피 각성자 범죄자들을 잡을거면 소드마스터로 잡는 게 낫지 않냐는 의미였다. 해결사에게 명성은 곧 돈과 직결된 문제기도 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다크나이트의 이름이 필요해서 움직인 거야."
"에, 엣? 진짜 어둠의 기사로 활동하기라도 하려고요?"
화들짝 놀란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아니다. 정체를 오래 감출 수도 없을 테고. 다만, 조만간 다크나이트의 이름값이 필요한 때가 올 거야."
"다크나이트의 이름값이요? 음······ 아무리 각성자 범죄자를 열심히 때려잡는다고 해도, 소드마스터의 명성보다 못할 텐데요?"
고개를 갸웃한 로제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각성자 범죄자 몇 놈 때려잡는다고 절대 소드마스터가 이뤄놓은 명성의 티끌도 되지 않는다. 당장 소드마스터라는 이름으로 이 도시에서 지낸 날이 며칠이며, 이룩한 업적이 몇 개던가?
하지만 나는 다크나이트의 명성이 필요한 게 아니다. 다크나이트라는 이름 앞에 새겨질 이미지와 그 이름값이 필요했다.
어둠 속에서 악을 처단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신비한 칼잡이.
로제가 장난스럽게 말한 어둠의 기사처럼 말이다.
특히, 지금처럼 범죄자가 날뛰고 치안이 엉망이 된 상태라면, 더더욱 다크나이트라는 이름이 널리 퍼질 거다.
소드마스터처럼 대단한 일을 해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도시에서 다크나이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는 그게 필요했다.
"······도대체 왜요?"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차 묻는 로제를 향해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명성이 높다는 게 좋지만은 않아. 때론 그 명성을 이용해 짓밟으려는 사람들도 있거든."
"소드마스터를 말인가요?"
"그래."
"대체 누가······?"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누구겠어?"
다크나이트 (3)
191화. 다크나이트
"설마 시 정부가요?"
로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재차 물었다.
"대체 그들이 왜······ 설마? 의뢰를 거절했다고 그런 치졸한 짓을 한다고요?"
"이 도시의 시 정부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그건 그렇지만······ 너무 과대해서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아무 일도 없으면 어쩌려고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로제가 그럼에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아무 일도 없으면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거지. 다크나이트도 다시 어둠 속으로 숨는 거고. 손해 볼 건 없잖아?"
"그렇긴 한데······"
말꼬리를 흐린 로제가 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봤다. 뭔가 찜찜하긴 한데, 그게 정확히 뭔 줄 모르니 저러는 거다.
물론 저런다고 정확한 이유를 말해줄 순 없었다. 그걸 말한다면 정보의 출처를 물을 텐데, 내가 했었던 게임의 시나리오 내용 중 하나라고 대답할 순 없으니까.
나는 그녀의 호기심이 더 커지기 전에 일어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부탁했던 일을 확인했다.
"그럼 이만 일어나지. 너는 내가 말한 것만 잘 준비해줘."
"······진짜 그래도 되겠어요?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그런 게 외부로 노출되면 리스크가 커요."
"리스크 없인 얻는 것도 없어. 이번엔 충분히 걸어볼 만한 도박이야."
"하아······ 알겠어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난 모르는 일이에요."
"고마워. 그럼 내일 보지."
그렇게 뒤돌아서 나가려는데.
"잘 가, 어둠의 기사."
어디선가 한껏 귀찮아 죽을 것 같은 가녀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목소리를 이 공간에서 낼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데이지······ 너 마저······"
그런데 저거, 왜 소파 위를 놔두고 소파 뒤로 넘어가 있는 거야?
그걸 발견한 로제가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데이지! 너 언니가 거기 들어가지 말랬지! 거기가 얼마나 더러운데!"
그리곤 데이지의 볼을 잡고 그곳에서 꺼냈다.
데이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 내밀었고, 로제는 그런 데이지의 입술을 꼬집듯 잡으면서도 먼저 묻은 옷과 머리를 정리해주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자리를 떴다. 언뜻 비치는 유리문으로 반사된 내 얼굴이 보였다.
피식거리며 웃고 있는 얼굴이.
* * *
하늘섬 여의의 지하벙커.
지난 1세기 동안 은밀한 공간으로 남아있던 이곳에 최고 의원 5명이 모여있다.
"소드마스터가 의뢰를 거절했더군. 예상은 했지만 괘씸해."
백발의 노년 신사인 커티스가 한껏 불쾌한 목소리로 어딘가를 노려본다.
소드마스터 강현재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적힌 홀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그건 장내에 앉은 다른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건방진 놈!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해결사 뿌리가 어디 가겠습니까?"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군요. 감히 소울 시티에서 빌어먹는 칼잡이 따위가 시 정부의 일을 거절하다니."
"이대로 놔둬선 안 됩니다! 지금도 저리 제멋대로인데 나중에 머리가 더 크면 우리 목에 칼을 들이밀지도 몰라요!"
의원들이 저마다 성을 내며 소리쳤다.
그들에게 시 정부란, 곧 자기 자신의 권력이었다. 그게 겨우 한낱 해결사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니 열이 받는 거다.
커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자. 진정들 하게. 그놈이 그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지 않나?"
그러면서 중절모의 신사, 에드가에게 눈짓했다. 이제 네 차례라는 의미였다.
중절모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놓는다. 에드가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 소드마스터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떠돌이 들개에 불과한 놈에게 우리가 고맙게도 친절히 목줄을 건넸는데, 그걸 걷어찬 겁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죠. 말 안 듣는 개는 매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지만 에드가 의원. 내가 듣기론 때리는 매가 부러졌다고 하던데?"
외눈 안경을 쓴 학자풍 노인이 삐뚜름한 시선으로 에드가를 바라봤다.
그러자 다른 의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들었어요, 에드가 의원. 최근에 아큐마 제약 본사에서 사람이 왔다더군요. 그리고 며칠째 행방불명이고 말이죠."
"아큐마 제약에서 용병단 하나에 의뢰를 넣었더군. 의뢰내용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그 용병단이 모조리 죽었어. 소드마스터의 지역이라 할 수 있는 33구역에서 말이네."
"정황상 실패한 거로 보이는데······ 아닌가? 에드가 의원? 우리가 아큐마 제약을 너무 믿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모두의 시선이 에드가에게 향한다. 커티스는 여전히 별다른 감정을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머지 의원들의 시선엔 그럴 줄 알았다는 고소함이 엿보였다.
에드가가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중절모를 고쳐 쓰곤 대답했다.
"하하하. 다들 관심이 많으셨나 봅니다. 이렇게 빠삭하게 알고들 계실 줄이야."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보게. 아큐마 제약도 실패한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설마 군대라도 동원하려는 건 아니겠지?"
"군대는 절대 안 됩니다, 에드가 의원. 차라리 행안부의 각성자들을 사용해보는 건 어때요?"
"오호! 그것 좋군! 에이전트라면 은밀히 처리할 수도 있지 않나?"
뱀들의 속삭임이었다.
아큐마 제약 본사도 소드마스터를 죽이는데 실패했다. 그런데 에이전트라고 별수가 있겠나?
시 정부의 에이전트들은 전투 요원보단 공작활동에 초점을 맞춰서 교육하고 있다. 각성자를 더 각성자답게 사용하기 위해서. 전투야 군대도 있고, 사이버웨어도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저 늙은 뱀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속삭이는 거다. 자신이 가진 권력의 축인 행안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에드가가 속으로 비웃음을 숨기며 말했다.
"그건 어렵습니다. 차리리 군대를 동원하면 모를까."
"그건 안되오!"
"왜 안됩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거요? 한낱 해결사에게 어찌 군대를 동원한단 말이오? 그것도 여론을 등에 업은 소드마스터에게!"
구릿빛 피부의 전직 군인인 프랑코가 버럭 소리쳤다. 마치 그것도 모르냐는 듯 매섭게 나무라는 목소리다.
하지만 에드가는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뭣······?"
"우리가 소드마스터를 직접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 바로 여론이 소드마스터에게 호의적이라는 점이죠."
군대라는 날이 바짝 선 칼을 갖고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
그건 소드마스터가 여론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도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던 소드마스터는, 지난 금천교의 난을 종식시키는 업적을 세웠다. 도시가 실시간으로 망가지는 와중에 그 뿌리를 뿌리째 뽑아버린 거다.
어찌나 여론이 들끓던지, 오죽하면 시 정부에서 여태껏 인정하지 않았던 마스터급 해결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이 결정에 시민들이 환호했다. 영웅은 항상 혼란 속에서 태어나는 법이니까.
즉, 소드마스터는 명실공히 소울 시티 시민들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드마스터에게 군대를 보낸다? 간신히 진정됐던 도시가 다시 들끓을 일이고, 그건 곧 불길이 되어 시 정부를 뒤덮을 거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말입니다."
서늘하게 목소리를 낮춘 에드가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소드마스터에게 호의적인 여론이 뒤집히면 어떨까요? 가령······ 끔찍한 살인마라는 이유로 말이죠."
에드가의 말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여태껏 듣고만 있었던 커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금상첨화겠지. 하지만 어떻게 말인가? 아무리 여론의 속성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변하더라도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터인데?"
커티스의 물음에 에드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금까지 소드마스터가 해결했던 의뢰를 모조리 찾았습니다. 그걸 토대로 사실만 전달하면 됩니다."
"사실을 전달한다?"
고개를 갸웃하는 의원들에게 에드가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소드마스터가 죽인 사람 숫자가 몇인 줄 아십니까?"
"죽인 사람 말인가? 그딴 게 뭐가 중요하지?"
난데없는 질문에 매이슨이 이마를 찌푸렸다. 좁혀진 미간으로 외눈 안경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에드가가 미소를 잃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냥 생각들 해보십시오. 몇 명이나 죽였을 것 같습니까?"
"글쎄······ 그래도 백 명은 넘지 않겠나?"
"제 생각도 비슷해요. 그래도 소드마스터라는 이름까지 붙었으니 그 정도는 죽였겠죠."
"나는 방위군 후배에게 들은 게 있어서 삼백 명은 될 것 같군."
"삼백? 프랑코 의원. 아무리 군인 출신이라지만 너무 허세가 심한 거 아니오? 칼잡이가 어찌 삼백 명이나 죽인단 말이오?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매이슨 의원. 당신이 책상물림이라서 현장을 모르나 본데, 당장 방위군 특수부대 에이스들도 칼 한 자루만 있으면 적진 한가운데서 백 명 모가지 따는 건 일도 아니오."
"당신? 지금 당신이라고 했소!? 모래 먼지나 맡던 자답 게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식? 무시익? 이 늙은이가 보자 보자 하니까······!"
에드가와 프랑코. 두 의원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서로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이 오갔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주먹다짐이 오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최소 천 명."
좌중을 바라보던 에드가가 느릿하게, 하지만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음?"
"······지금 뭐라고?"
"······천 명?"
"뭘 잘못 말한 게 아닌가요?"
언제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였는지 벙찐 얼굴로 에드가를 바라보는 둘과 나머지 의원들.
"다시 말씀드리죠. 소드마스터가 여태껏 죽인 사람의 숫자. 최소 천 명입니다. 최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줘서 말한 에드가가 홀로그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소드마스터 강현재에 대한 인적사항과 사진들이 떠 있던 홀로그램이 무너지며, 새로운 기록이 떠올랐다.
그건 소드마스터 강현재의 지난 의뢰기록들이었다. 가장 가까이 시 정부의 의뢰부터 강현재가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으로 불리기 전, 소울 시티에 들어온 뒤 맡았던 최초의 의뢰까지.
"텍스트로 보면 별거 없습니다. 특히, 소드마스터가 유명해지고 나서 맡은 의뢰들은 건별로는 대단하지만, 살인을 많이 하진 않았죠. 하지만 말입니다······"
에드가의 손짓에 홀로그램에 떠 있던 기록 중 어느 한 곳이 확대된다. 소드마스터가 비교적 초창기에 맡았던 의뢰들이었다.
"이 초창기 의뢰들은 좀 다릅니다. 주로 갱 소탕이나 요인암살이 대부분인데······ 이놈 완전 사람 죽는데 타고난 백정이에요."
그의 목소리에 따라 홀로그램이 변형되더니, 이번엔 어딘가를 찍은 사진으로 바뀐다.
난장판이 된 클럽. 사방이 총탄과 폭발의 흔적이 선명했다. 소방 스프링클러가 터진 듯 바닥엔 물이 잔뜩 고여 있었는데, 그 위로 잘린 팔, 다리와 머리들이 둥둥 떠다닌다.
"이게 첫 번째 의뢰인데, 이날 클럽에서 죽은 사람 숫자만 오십 명에 달합니다. 보다시피 전부 칼에 당했죠."
"첫 번째 의뢰를 갱단 소탕을 받았다고? 그건 말이 안 되는······"
"네. 아닙니다. 그건 말이 안 되죠. 의뢰내용은 도난당한 물건 회수였습니다."
"······!"
"그런!"
"허어?"
의원들의 반응이 다들 비슷한 가운데, 홀로그램 사진이 변환한다.
이번엔 어느 공장 사진이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죽어 나간 사진들이 선명히 찍혀있다.
"여긴 갱단에 점유된 공장입니다. 소드마스터에게 갱단 소탕 의뢰를 넣었죠. 정확하진 않지만, 이날 소드마스터에게 죽은 사람은 대략 서른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리고 다음은······"
이후에도 홀로그램이 바쁘게 움직였다. 주로 의뢰 현장을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죽은 모습들만 확대시켰다.
각 의뢰 현장마다 죽은 사람의 숫자는 대략 스물에서 많게는 쉰 이상.
이런 의뢰가 끝도 없이 나열된다.
"······그만. 이쯤이면 그만 봐도 되겠군."
커티스가 손을 들어 다음 사진을 설명하려는 에드가를 제지했다. 너무나 처참한 현장 사진에 질리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아니었다.
커티스의 눈빛엔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대신 설명이 필요하다는 의문만이 있었다.
커티스가 품고 있는 의문.
그건 바로······.
"소드마스터가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건 알겠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겨우 사람 좀 많이 죽였다고는 소드마스터를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어중이떠중이 해결사가 아니라 무려 소드마스터니까.
게다가.
"소드마스터가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전부 누구 손에라도 죽었을 쓰레기들을 죽였어. 오히려 시민들은 환호할 수도 있다네. 사회악을 처리해줘서 말이지."
갱단이나 범죄자집단을 주로 죽인 소드마스터의 의뢰기록은 오히려 여론에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진 않았다.
그런 커티스의 말에 다른 의원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놀랐던 이유도 별거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생각보다 사람을 많이 죽여서지, 그게 충격적이거나 끔찍한 일이라서가 아니었다.
사실 이 자리의 있는 의원들 모두 세 치 혀로 지시해 죽인 사람의 숫자를 따지면 소드마스터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들은 대량살상이 가능한 군대를 동원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에드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커티스 의원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대로' 퍼진다면 말이죠. 하지만 대중들은 자극적인 사진들과 메시지만 기억할 겁니다."
입꼬리를 올리는 에드가의 태도에 커티스 의원이 껄껄 웃었다.
"역시 자네는 다 생각이 있구만? 뭘 준비했나?"
"소드마스터를 살인에 미친 살인마로 몰아갈 겁니다."
"쉽지 않을 텐데?"
"그렇겠죠. 그래서 사진도 적당히 양념으로 뿌리고, 내용도 적당히 가공해서 뿌릴 겁니다. 소드마스터가 떠난 현장엔 어떤 생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죠. 마침 타이밍도 좋지 않습니까?"
"타이밍? 무슨 타이밍 말인가?"
"각성자 범죄가 들끓고 있지 않습니까? 몇몇 범죄는 며칠간 뉴스에 나올 정도로 끔찍했고 말입니다. 그때 거기에 조미료를 살짝 쳐주는 거죠."
에드가가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귀밑까지 찢으며 중얼거렸다.
"만약 소드마스터처럼 강력한 각성자가 범죄자가 되면 얼마나 끔찍할까? 라면서 말이죠."
"······!"
"······!"
이번에야말로 좌중의 모든 의원들이 놀랐다.
만약 정말 저렇게 여론이 흘러가기만 한다면······ 소드마스터에게 쏠렸던 호의적인 시선은 단번에 공포와 경계로 뒤바뀔 거다.
소드마스터가 이뤄냈던 무수한 업적과 명성이······ 단번에 그의 목을 옥죄는 올가미가 되는 거다.
"푸하하하! 맘에 들어! 아주 맘에 들어!"
만족한 커티스 의원이 떠나가라 웃었다.
"감사합니다, 커티스 의원님."
에드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에드가를 보는 다른 의원들의 눈빛 아래엔, 처음으로 경계심이 떠올랐다.
'심계, 언변, 계획, 태도, 하나도 빠지는 게 없어. 더 힘을 쥐여주면 위험하겠는데?'
'커티스 키즈라서 밀어주는 줄 알았더니, 이 정도로 성장하다니. 앞으로 주시해야겠어.'
'쳇! 점점 더 마음에 안 드는군. 앞으로 얼굴이 더 뺀질거리겠어. 어린놈의 새끼가.'
이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커티스 의원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말일세. 최근에 뉴스에 자주 보이는 자가 있던데."
"아, 다크나이트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런 요상한 이름이었지. 그자도 해결사던가?"
"아닙니다. 아직 정체가 밝혀지진 않았는데, 들려오는 말론 홀로 자경단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홀로 자경단이라?"
에드가의 말에 커티스가 눈을 빛냈다. 잠시 뜻 모를 미소를 짓던 그가 입을 열었다.
"소드마스터도 나가리고······ 그 다크나이트라는 녀석이 새로운 카드가 될 수 있겠군.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게."
다크나이트 (4)
192화. 다크나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