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1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08화

31장 소문(6)

나와 엘로디는 하늘로 날아올라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조종당하는 학생들과 아닌 학생들이 한눈에 보였다. 멀쩡한 학생들은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확연했으니.

...그래도 조종당하는 학생들이 한참 많다. 놈들은 내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 이 건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즉 여기도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

"프론디어, 마침내 전교생을 적으로 돌리고 만 거야?"

"마침내라니."

내가 계획한 거 같잖아.

"농담이야."

엘로디는 그렇게 말하며 건물 아래의 학생들을 굽어보았다.

"...낯익은 표정들이네."

"기억하고 있구나."

내 말에 엘로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디는 오두막 사건 때 함께 있었으니까. 세르프의 능력을 알고 있다.

엘로디가 물었다.

"세르프 다니엘이 살아 있는 거야?"

"...모르겠어."

지금 학생들을 조종하고 있는 건 분명 세르프의 능력이다. 방금 방송으로 그의 목소리도 들렸고.

그러나 석연치 않다. 아직 세르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건 물론이고, 나는 여전히 그가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신위의 활 '크리셀라카토스'는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고.

"저번에도 상대해 봤지만 꽤 골치 아프단 말이지. 기절도 소용없으니."

엘로디가 중얼거렸다. 실제로 세르프에게 조종당하는 사람들은 기절시킬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기절한 상태다. 아마 당사자들은 꿈속을 휘적거리는 기분이겠지.

거기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는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멀쩡하네. 네가 적이었으면 정말 간담이 서늘했을 텐데."

물론 엘로디 말고도 제정신인 학생들은 몇 명 있었다. 엘로디도 그냥 그렇게 운 좋게 피했을 뿐인가?

"...."

그런데 엘로디는 돌연 침묵했다. 그 입이 우물쭈물 열리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했다. 왠지 귀도 빨개진 거 같고.

엘로디는 그러다 힘겹게 뱉었다.

"...나는, 그, 소문의 당사자잖아."

"응?"

"너와 관계된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이 세르프의 명함도 함께 나눠주고 있는 거야. '인더스'라는 명칭은 신뢰도가 높으니까. 아마 한 사람에게 명함 다발을 주었겠지."

"...아. 그럼 명함을 받은 애가 자기 친구나 지인에게 다시 나눠주는 거구나. 자기가 들은 소문의 설득력을 높이려고. 그런 식으로 명함을 받은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건가."

엘로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소문의 당사자들은 명함을 받을 일이 없지. 소문을 퍼트리려는 학생과 진위를 알고 싶어 하는 학생은 별개니까."

흥미로운 소문은 그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는 재미있는 오락 거리다. 그러니 퍼트리고 싶다.

그런 이들의 입장에서 소문의 진위는 나중에 밝힐수록 좋다. 밝혀지면 재미있는 시간이 끝나버리니까.

때문에 명함은 소문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즉 당사자들은 받지 않는다.

...한데.

"아, 그러면 너도 아는 거구나. 지금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야, 내가 조금 전까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곤혹스러웠는데, 너랑 내가 사귀고 있다는,"

화륵-

말하던 내 앞으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두 발자국 떨어져 있는데 섬뜩한 열기가 피부에 닿았다.

엘로디의 눈이 번뜩였다.

"헛소문이니까, 오늘로 끝날 거야."

"...그렇지."

왜 화를 내냐.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인데.

그런데 엘로디는 가라앉은 눈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뭐, 그것만 아니면 다른 얘기들은 퍼져도 괜찮지. 사실이니까."

"...응?"

그때였다. 옥상을 향하는 입구에서부터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간을 모았다.

"조종당하는 애들이 벌써 온 건가."

"아마."

엘로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론디어, 너는 세르프가 어디 있을지 알아?"

"...응."

"그럼 그 녀석을 찾아. 학생들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의 목적지는 방송실이다. 세르프 녀석이 거기서 방송을 퍼트렸으니.

아무래도 세르프와 그레고리는 날 죽이고 싶은 것 같다.

이렇게까지 긴 작전을 펼친 걸 보면. 그렇다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치진 않겠지. 나를 죽여야만 할 테니.

...그런데, 이 옥상에서 어떻게 방송실로 가지? 옥상 문으로는 학생들이 오고 있을 테니 갈 수가 없는데.

"이쪽 걱정은 말고 어서 가. 방송실 건물은 땅으로 착지해서 서쪽으로 달리면 금방이야."

엘로디는 마나를 끌어올리면서 내게 말했다.

...음, 착지하라는 건, 여기서 추락하라는 거지?

나는 건물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음, 5층 건물이었던가.

엘로디 안에서 내 평가가 상승한 것은 참 좋은 일이다만, 내 능력은 조건이 덕지덕지 붙는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알면 안 되지만.

'그래, 이번에야말로 묠니르를,'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시야의 저 멀리, 지면 위에서 누군가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도 잘못 볼 리가 없는, 새하얀 실루엣.

아텐이었다.

빙계마법 1식

범위 증강, 지속

비상탈출

옥상에서부터 아텐이 있는 지점까지를 하나로 잇는, 긴 미끄럼틀이 만들어졌다. 물론 얼음이었다.

"뭐야, 아텐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왜 가만히 있나 했더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엘로디가 핀잔을 주었다.

...음,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나는 미끄럼틀 위에 섰다. 얼음이라 차가웠지만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그럼 갈게, 엘로디! 조심해!"

"어서 가! 그리고 선생님들을 조심해! 지금까지 교사들이 대처하지 않고 있다는 건 거기에도 누군가 조종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니까!"

맞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끄럼틀에 몸을 실었다. 팔로 밀어 경사에 몸을 맡겼다.

"와아아~"

"그냥 조용히 가면 안 되냐?!"

* * *

건물 입구로 쏟아져 들어와 척척척 올라가는 다수의 학생들은 그것만으로도 진풍경이었다.

아직 제정신인 학생들은 그 모습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딱 봐도 표정들이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그 행렬 중에는 로발드가 있었고, 그게 다른 학생들이 더더욱 피하게 되는 원인이었다.

"어, 로발드, 어디 가냐?"

다만 그런 것 따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아스터는 어마어마한 수의 학생들의 행렬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 사이에 껴 있는 로발드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했다.

물론 의식을 잃은 로발드는 그저 말없이 걸었다.

아스터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옆을 지나치는 로발드를 가만히 보았다.

그러다, 로발드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프론디어..., 죽인다...."

"어, 잠깐. 잠깐잠깐잠깐."

아스터는 곧장 로발드 옆으로 따라붙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불온한 말과 목소리였다.

"프론디어를 죽인다고?"

"...죽인다...."

"──호오."

제정신이 아니군.

빠르게 판단을 내린 아스터가 검집에 담긴 검으로 로발드 앞을 가로막았다.

"그 이상은 못 간다, 로발드."

"...."

로발드의 초점 없는 눈이 아스터를 향했다. 그 눈을 보니 확신이 든다. 로발드는 지금 무언가에 당했다. 아마 지금 이 수많은 학생들 전부.

"다른 애들 다 보내주어도 프론디어가 어떻게든 할 테지만, 넌 안 돼. 넌 제정신이 아니어도 위험한 녀석이거든. 제정신이어도 골치가 아프지만."

"...방해...."

로발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고, 목에서부터 시작한 근육이 선명해졌다. 이내 그의 체적이 조금 커졌다.

그저 전신의 힘을 준 것만으로, 몸 전체의 팽창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싸우게 될 줄은."

언제나 먼저 싸우자고 난리를 피우던 게 로발드였는데, 정말로 싸울 때는 내가 시비를 거는 쪽이라니. 아스터는 뭔가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아스터의 검집이 푸른 기운을 띠었다. 그 선명한 색깔은 그리 기감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번 방학 동안에 습득한, 자유자재로 발현되는 '오러'였다.

신력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아스터의 목적은 로발드를 제압하는 것이지, 그를 상처 입히는 게 아니다.

로발드 정도 되는 녀석을 큰 부상 없이 제압할 수 있을까.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그러나 아스터는 겁 없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강해졌는지 확인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

로발드는 전투 자세를 취했다. 의식은 잃었어도 몸이 기억하는 동작이었다. 아스터도 검을 뒤로 당겨 몸을 낮추었다. 검집은 풀지 않았다.

"좋은 기회네."

직후, 둘은 공기를 끊어놓듯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 * *

나는 아텐과 함께 방송실을 향해 달려갔다.

"메노소르포."

나는 마법진을 발동시키고, 공격해 오는 학생들을 방패로 밀어냈다.

여전히 나를 노리는 학생들이 많았으나 아텐의 도움이 있어 어찌어찌 대처하고 있었다.

얼음 마법이 특기인 아텐은 학생들을 상처 입히지 않고 막아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너도 명함을 받지 않아 다행이야!"

"저도 소문의 주인공 중 한 명이기에."

아텐은 나와 함께 달리면서 답했다. 여전히 담백한 그 얼굴은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프론디어 씨."

"응?"

"프론디어 씨는 저를 노예로 삼고 싶으십니까?"

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아텐을 보았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여전히 아텐은 그 얼굴 그대로였다.

이럴 때는 이 담백한 얼굴이 너무 무섭다.

"...어, 농담이지?"

"그럴 리가요. 저에 관한 소문은 대체로 그런 거였습니다. 제가 약점을 잡혔다든가, 그래서 협박을 당했다든가 하는 얘기였죠."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방금 전에 그거 때문에 로발드랑 싸웠어.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혹시 프론디어 씨는 내심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 말이 있잖아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일단 내가 땐 굴뚝이 아니다? 난 그런 걸 바라지 않아."

제국의 황녀를 노예로 삼는다? 망상 속에서도 개연성을 따질 만한 얘기다.

"하지만 이유로는 충분하잖아요."

"무슨 뜻이야."

"제가 프론디어 씨를 따라다니는 것에 의문을 품는 학생들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협박당하고 있다면 학생들의 의문은 해결될 테니까요."

"학생들의 의문을 해결한답시고 진짜로 너를 노예로 삼는다고?"

이건 그건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를 만들어주라는.

아텐이 나를 따라다니는 적당한 이유를 붙이기 위해 협박하고 있다는 설정을 추가하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를 그런 취급하는 것도 못할 짓이고."

"...딱히 저는 그렇게 불만은 없,"

"시끄러!"

이상하다. 아텐은 머리가 나쁘진 않을 텐데. 묘한 곳에서 자꾸 핀트가 어긋난다.

그리고 그 상황의 해결책은 훨씬 단순하지 않은가.

"애초에 그냥 네가 안 따라다니면 되잖아!"

"기각이네요."

이 자식이.

"그럼 네 의견도 기각이야! 노예는 무슨! 농담이라도 할 소리가 아냐!"

"농담은 아니었습니다. 1할 정도의 진심이 들어가 있는,"

"그런 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

아텐이 나를 보며 눈을 크게 열었다.

"그런 거였습니까?"

...아.

빨리 세르프가 보고 싶다. 놈을 쳐 죽이고 싶다.

방금의 촉발된 감정이 절대 아니고, 원래부터 그랬다.

...사지를 찢어 죽여 버릴 테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09화

32장 크라켄(1)

나와 아텐은 방송실 앞에 도착했다.

"...세르프가 아직 있을까요?"

"그 녀석이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지켜보고는 있겠지."

명함을 받은 학생들 전체를 이용해 날 죽이려 했다.

어지간히도 날 죽이고 싶은 모양이니, 그냥 튀진 않았겠지.

"그럼 이 방송실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내가 여기로 올 수밖에 없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아텐이 손을 들고 눈을 감았다.

"...마나는 느껴지지 않네요. 마법 함정이 설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위를 찬찬히 살피고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쓰러진 학생들이 있었다.

"아텐."

"예."

아텐이 다가가 학생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동안 나는 방송실 기기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 찾을 수 있었다. 세르프가 의도한 게 뭔지.

[강당으로 와라.]

짤막한 한 줄. 놈은 나와 만날 장소를 지정해놓았다.

그사이, 쓰러진 학생들의 상태를 확인한 아텐이 말했다.

"...출혈이 심하네요. 지금 당장은 괜찮아도 내버려 두면 위험하겠어요."

"즉, 너를 여기에 묶어놓겠다는 거지."

아텐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요? 강당은 정말로 함정인 것 같은데."

"학생들을 계속 저렇게 둘 수도 없으니."

나는 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하시게요?"

"응. 형한테."

필리의 운전기사가 가드레일로 차를 들이박은 갑작스러운 기행.

그건 십중팔구 '명함' 때문이다.

전화를 받고 그 기행을 벌였으니, 전화에서 세르프 다니엘의 목소리를 들은 거겠지. 지금 그 '명함'으로 인한 기행이 콘스텔 전체에 퍼졌으니, 앗지에에게 알려야 한다.

필리에게 전하고 싶지만, 옆에 앗지에가 있다면 또 나에게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

잠시의 통화음이 들리고.

-...프론디어.

앗지에가 전화를 받았다.

"아, 형님. 접니다. 지금 콘스텔은 개판이 났습니다. 저번 황후 전하의 운전기사의 기행을 대부분의 학생들이 벌이고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설명했는데, 어쩐지 통화 건너편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앗지에는 입을 열었다.

-프론디어, 나도 전할 것이 있다.

"뭐죠?"

-음, 그렇지. 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앗지에는 어딘가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이쪽도 개판이다.

"...예?"

-아니, 조금 정정하지. 상황이 어지러운 것은 아니다. 허나,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틀림없지.

"무슨 일입니까?"

-황궁의 기사들 대부분이 멈춰 서 있다.

"멈춰 서 있다고요?"

-그래. 시선이 멀고, 표정이 꼭 시체 같군. 네가 말한 전하의 운전수랑 비슷한 느낌이다. 지금 죄다 그런 얼굴을 한 채로, 가만히 서 있다.

그렇다면 분명 세르프의 짓이다. 기사들에게도 명함을 나눠준 것이다.

한데 의아한 일이다.

앗지에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말했다.

-그러나 범인의 목적을 모르겠군. 저번처럼 차를 가드레일에 들이박을 정도의 명령을 할 수 있다면, 이만한 기사를 모아놓고서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왜 이렇게 세워두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군.

나 또한 같은 생각이라 눈가를 찌푸렸다.

세르프라면 훨씬 다양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

나는 고개를 들었다.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단순한 일이었다.

"...그렇구나."

-프론디어?

"그래. 놈이 살아 있을 리가 없어."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이 그레고리와 세르프의 합동 작전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처음 생각한 것,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맞았다.

"아, 감사합니다. 우선 끊을게요."

-그곳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서둘러라. 이쪽은 업무 마비로 비상이 걸려 있다.

"예."

나는 통화를 끊었다.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앗지에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은 지금 초비상이 걸려 있다.

* * *

텅 빈 강당은 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터벅, 터벅,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강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여어."

그리고 강당의 중앙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인사하듯 한 손을 들었다.

"안녕, 프론디어."

그는 나를 아는 듯이 굴었으나, 나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 당연했다.

나는 '그레고리'의 얼굴을 지금 처음 마주한다.

"...다쳤군."

"어어."

가까이서 보니 그레고리의 상태는 심각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특히 옆구리 쪽은 심각했다. 피가 흐르고 있지는 않지만, 저건 아마.

"괴사 중이다. 이리저리 도주하다가 다쳤는데, 병원을 갈 수가 없었거든. 이젠 수술밖에 답이 없어."

"...약국이나, 돌팔이라도 찾지 그랬나."

"핫하. 너는 인더스를 너무 몰라."

그 한마디로 설명이 되었다.

합법이 아닌 대부분은 인더스의 눈과 귀가 있다. 도망치는 몸으론 그럴 수 없었겠지.

"역시, 세르프가 아니었군."

"그래. 알고 있었잖아. 그 녀석은 오두막에서 죽었다. 화살을 맞고. 이마 정중앙에 그림으로 그린 듯이 꽂혔지. 그렇게 되고서 살아 있으면 내가 녀석이랑 붙어 다니진 않았을 거다."

명함을 나눠준 것도, 방송실에서 나를 죽이라 명령한 것도 전부 그레고리였다.

"용케 세르프의 음성을 구했구나."

"딱 한 문장이다. '프론디어를 죽여라'. 그놈 자기 죽은 자리에서 십 수 번을 그 소리나 외치고 있었으니. 녹음기로 잔존 마나를 분석해서 녹음해놨지."

세르프는 죽었으나 명함은 남아 있었다.

그 명함은 여전히 세르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르프가 없기에 무용지물이었으나, 그 음성 하나만이 남았다.

그레고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체념과 포기의 감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프론디어. 나를 체포해다오."

"...."

"인더스에게는 달아날 수 없다. 모든 동물의 눈과 귀를 빌려봐도 무리였어. 수사망은 점점 좁혀오고. 이렇게 된 바에야 경찰에 잡히는 편이 나아."

"잡히려고 이 사달을 벌였나?"

"그렇지. 내가 지금까지 모아온 정보를 바탕으로 봤을 때, 큰 소란을 일으키기엔 네가 제격이었다."

나는 콘스텔 내의 많은 네임드 캐릭터와 연결되어 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눈에는 그게 오히려 이용할 만한 가치가 되어 있었던 건가.

"황궁에는 무슨 짓을 했지?"

"별거 안 했다. 처음에는 뒤가 구린 기사들의 정보를 캐내어 협박했지. 그래서 사소한 범죄를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물론 인더스의 이름을 빌렸지."

"...인더스의 눈을 황궁 쪽으로 돌린 거군."

그레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콘스텔에서 벌어지는 소란.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사건처럼 보이지만, 바깥에서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반면에 황궁의 사건은 지금쯤 떠들썩하겠지. 안 그래도 신입, 말단 기사들의 사건 사고가 있어 왔는데, 오늘은 기사단이 단체로 가만히 멈춰 있으니.

"명령은 똑같다. 당연히 '프론디어를 죽여라'였지. 하지만 기사들은 프론디어라는 게 누구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세르프가 죽었다고 확신했던 건 이 때문이었다. 세르프가 다른 명령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나를 죽이라는 명령 말고는 못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저 체포당하고 싶은 것치곤 일을 크게 벌여놨군. 그냥 자수를 하면 될 일이었을 텐데."

"내가 이번 일을 벌이지 않고 자수를 했다면, 나는 길어야 1년을 살고 나올 뿐이다. 오두막 사건 때의 나는 그저 정보제공자에 불과했다. 그 이전에도 대체로 그런 일뿐이었지. 나는 '염탐꾼'이니까. 그럼 석방되고 난 뒤엔 다시 인더스에게 노려질 뿐이야."

"...사고를 일으켜 복역 기간을 늘렸다는 건가? 오래 복역하더라도 사는 게 중요해서?"

"당연하지. 나는 미친 듯이 살고 싶다. 그리고 다른 녀석은 안심할 수 없다. 체포당해도 그사이에 인더스가 나를 빼내 올 수도 있어. 본인도 유명하고, 가문의 위세가 아주 드높은 녀석이 필요했지."

거기서 내가 안성맞춤이었다는 거군.

그레고리는 이야기를 다 했다는 듯이 후련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양손을 내밀었다.

"자, 체포해."

"...일단 나에게는 수갑과 밧줄이 없다."

"그럼 맨손으로 제압이라도 해놔라. 이런 건 연기가 중요하니까."

당당히도 말하는 그레고리.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레고리에게 손을 뻗었다.

순간.

"──찾았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 같은.

그저 불쾌함만 끈덕지게 번져 나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촤르륵!

그레고리의 뒤편에서 검은 뭔가가 튀어나와 그의 목을 감았다.

"커흑!"

그레고리는 목에 감긴 채 무력하게 끌려갔다. 우당탕! 의자가 넘어지고 그레고리는 미친 듯이 다리를 휘저었으나 무력하게 미끄러졌다.

'채찍?'

아니,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아주 희미한 보라색 빛이 섞인, 그 찐득하고 물컹한 것이 그레고리를 잡아채는 순간, 그건 연체동물의 촉수 따위를 연상케 했다.

그 촉수는 어떤 사람에게서 뻗어 나왔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혹은 처음부터 있었던 건지. 놈은 눈앞에 있어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다른 부분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인데, 오른팔이 촉수로 변해 그레고리를 붙잡고 있었다.

...저 오른팔 하나만 변할 거란 보장이 없다. 저 인간인 척하는 몸 전체가 연체동물 따위의 무언가일 지도 모른다.

"꺽... 꺼억...."

그레고리는 목에 감긴 촉수를 떼어내려고 손을 휘적거렸다. 그러나 손은 마치 물을 통과하는 것처럼 촉수를 쥘 수 없었다.

──저 촉수, 상대의 물리력을 무시한 채, 저 스스로는 일방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한다.

"안녕, 프론디어 드 로아흐 님."

그 목소리답게, 놈의 얼굴과 몸은 성별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저는, '인더스와 무관한 사람'이야."

이상한 말투와 목소리, 기괴한 외모, 전부가 나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인더스와 무관한 사람이라, 허.

"그레고리를 풀어줘, 인더스."

"네? 어째서? 방금까지 적이었잖아요. 갑자기 친한 척 굴면 못 써. 그리고,"

놈은 왼팔을 뻗었다. 그 검지손가락이 치켜 올려졌다 생각한 순간,

피슉─

놈의 촉수가 내 관자놀이를 스쳤다. 역시, 촉수로 변할 수 있는 건 오른팔뿐만이 아니다.

"인더스가 아니야. 방금 말했지요?"

"그래, 그럼 뭐지? '인더스와 무관한 사람' 넘버는 몇 번째냐?"

내 물음에 놈은 빙긋 웃었다. 눈과 입이 초승달처럼 구부려지는 그 얼굴의 조작은 인간의 미소가 아니었다.

"넘버는 알 필요 없지만, 글쎄요."

놈은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응. '크라켄'이라 불러요."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소개했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0화

32장 크라켄(2)

크라켄. 유명한 바다괴물이다.

아마 사람들이 아는 강력한 괴물 중에 열 손가락 안에는 들지 않을까.

문헌에서 종종 나오는 크라켄은 보통 아주 거대한 문어나 오징어의 형상을 하고 있다.

게임 에티우스에서도 외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에티우스의 크라켄이 실제의 그것과 가장 다른 점.

크라켄은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크라켄은 영혼이다.

"어울리네. 본명이야?"

"어머. 그럴 리가 없잖아요?"

크라켄은 능청스럽게 대꾸했으나, 나는 저 크라켄이 정말로 전설의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켄은 심해의 괴물이고, 즉 인간의 입장에선 아득한 바깥의 괴물이다. 그 지능도, 능력도 허접한 마물과는 궤를 달리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나는 놈에게 잡혀 있는 그레고리를 보았다.

...저대로 두면 곧 죽겠다.

메노소르포, 허공 직조

등급 - 전설

그람

나는 놈의 촉수 뒤에 그람을 '설치' 하고, 세로로 빙글, 돌렸다.

서걱.

"...어머?"

그레고리는 바닥에 떨어져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크라켄은 자기의 떨어진 팔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생긴 것 때문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예요, 어떻게 했어?"

"베었지."

"저의 촉수는 무기로 벨 수 없는데?"

그래 보인다. 아까 그레고리가 허우적댄 것만 봐도.

그러나 난 좀 다르다. 직조는 결국 마법이니.

나는 '마법'으로 베었을 뿐.

"어떻게 하셨냐니까?"

"알 필요 없다."

알면 안 되기도 하고.

"경고하지. 그레고리에게 손을 대는 순간, 그 목을 날려 버린다."

"...흐응."

크라켄은 입가를 힐쭉 올렸다. 아마 내 말이 90%는 허세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크라켄은 자신의 팔이 어떻게 날아갔는지 모른다. 그 답을 알기 전까지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메노소르포로 행하는 허공 직조는 적의 눈에 보인다.

방금은 시야의 뒤에 설치했기에 가능했던 거지,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금방 들킨다.

...무엇보다, 마나가 부족하다. 드래곤하트를 먹을 틈이 있을까.

"좋아요. 이깟 녀석 죽일 필요도 없어. 필요한 건 챙겼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크라켄은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에는 명함 다발과, 녹음기를 쥐고 있었다.

놈은 그 명함 다발을 쭈욱 펼쳤다.

"와아, 그렇게 많이 썼는데도 뭉텅이네요. 세르프 녀석 자기 명함으로 세계 정복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정말 가능할지도? 그렇게 혼잣말을 지껄이며 크라켄은 쿡쿡 웃었다.

그러곤 나에게 한마디 했다.

"걱정 마요. 앞으로도 세르프 다니엘은 우리의 가슴 속에서 살아 있을 거야."

"그걸 어디다 쓰려고?"

내 질문에 크라켄은 웃었다. 아까와 비슷한 불쾌한 미소였다.

"당신을 죽이려고."

"...."

"가장 완벽한 날, 가장 완벽한 장소에서 너를, 당신을, 그대를, 죽이려고. 뭐 오늘은 그 날이 아니지만요. 때가 있으니 기다려요."

살인예고라.

인더스의 시점으로 볼 때 나라는 개인은 대단치 않을 것이다.

나를 죽여서 얻는 것은 아마 상징성일 테지. 로아흐라는 상징성. 나의 아버지 앙페르 드 로아흐는, 개인으로서는 귀족 중에 가장 영향력이 강하니.

...어쩌면 나를 인더스 혁명의 신호탄으로 만들려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뭐, 그냥 이대로 돌아가자니 아쉽고, 또 이 오른팔의 값도 있으니."

그렇게 말하고 크라켄은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강당 끝 계단에 앉았다.

"관전이나 할까요."

"...뭐?"

그때였다.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전투술 기본 교사, 파스칼 쉴리츠였다.

"...!"

파스칼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 손에는 이미 칼이 쥐어져 있었다.

"내가 한 거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감각이 좋아서, 누가 오고 있는지 정도는 알거든요~"

나는 긴장한 채로 파스칼을 보았다.

세르프의 명함 효과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파스칼이 칼을 든 채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파스칼."

나는 자그마한 기대를 걸어보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허나.

휘익!

파스칼은 그 칼을 주위에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바람 같은 기의 동심원이 넓게 퍼져 나갔다. 이윽고 나와 파스칼의 주변으로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직조(織造), 흑천(黑川)

등급 - 일반

공방 단검 1번제

나는 목걸이를 부숴 단검을 만들고, 시험 삼아 그 막에 투척했다.

파드득, 소리를 내며 단검은 튕겨 나갔다. 파스칼이 이 공간 안에 나를 가둬놓은 것이다.

"와아, 그렇게 해놓으시니 정말로 대련장 같아."

'넌 닥치고 있어라 크라켄.'

나는 닐 자크의 소검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파스칼이 들고 있는 칼날이 빛을 발했다. 오러였다. 그걸 확인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맨손으로 만든 오러도 겨우 튕겨냈는데,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버텨낼지. 게다가 이번에는 장난기조차 없다.

직조(織造), 흑천(黑川)

등급 - 유니크

닐 자크의 소검

단검으로 던졌던 흑천이 다시 나의 손에 빨려들었다. 나는 닐 자크의 소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파스칼의 공격을 오랫동안 버텨낼 만한 것, 당장엔 이것밖에 없다.

쉬익!

꽈아앙!

"큭...!"

나는 파스칼의 내려치는 검을 간신히 막았다. 피하려고 했으나 그럴 틈이 없었다. 끼긱거리는 소리가 귀를 찌르고,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이 악물고 버텨냈다.

계속되는 힘겨루기. 나와 파스칼의 칼날은 조금씩 각도가 바뀌었으나 여전히 붙어 있었다.

'계속 이렇게 맞부딪힌다면.'

──방금 전의 일격은 너무 빨라서 대응을 못 했으나.

이렇게 계속 붙여놓는다면 내겐 방법이 있다.

'낙장'.

"...!"

나는 낙장을 사용해 파스칼의 검을 공중으로 날렸다. 이번엔 제대로 성공했다. 내 검을 놓치지도 않았고, 몸의 통증도 없었다.

됐다, 라는 생각이 든 순간에.

퍼억!

"크억!"

나는 복부에 발차기를 얻어맞고 쭉 밀려났다. 그 사이 파스칼은 공중에 날아간 검을 도로 잡았다.

저 자연스러운 움직임, 대처. 파스칼은 앗지에의 낙장을 알고 있다. 아니, 당해본 건가.

탓!

파스칼은 다시 나에게 돌진했다. 또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종베기.

나는 그걸 막아내면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수업 때 파스칼의 공격을 막아내기 힘겨웠던 건, 파스칼의 공격에 대응하기 어려운 현란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파스칼은 장난 삼아 했을지언정 나는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 결국 틈이 열리고, 어쩔 수 없이 직조를 사용하게 된 것.

그러나 지금의 파스칼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공격.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힘겨루기. 전혀 그답지 않았다.

뭐지. 이건 '명함'의 영향인가? 의식을 잃었기에 단순한 공격밖에 못하는 건가?

그때였다.

서로의 칼날이 긁혀 소리를 내고, 힘겨루기로 맞붙고 있는 그 사이에.

파스칼의 입이 열렸다. 목소리를 내진 않았으나, 그 입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입으로,

──'독순술'은 쓸 줄 아나요? 프론디어.

라고 말했다.

"...!"

그 순간 나는 직조를 펼쳤다.

지금의 직조는 레벨업을 거쳐 그 대상이 '스킬'에까지 확장되었다.

다만 문제는 '스킬'은 공방에 담을 수 없다는 거였다.

즉 '스킬'을 직조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스킬을 사용할 때 그것을 실시간으로 복제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처럼.

직조(織造)

대상, '파스칼 쉴리츠'

스킬, '독순술'

그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조종당하는 게 아니셨던 건가요?]

내가 입을 열자 파스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당하지 않았습니다. 저 문어 놈을 잡아야 해서, 그런 척을 했지만요.]

[명함을 받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레고리라면 그렇게 했을 텐데요.]

파스칼은 내 검을 쳐내고, 다시 두어 번 휘둘러 나와 날을 맞부딪혔다. 그 모든 궤도가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

[명함은 받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명함을 받았으면 조종에 걸릴 텐데?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 해도 전혀 영향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의문에 파스칼은 답했다.

[받긴 받았는데, 누군지 까먹었습니다.]

[....]

참으로 뻔뻔한 대답이었다.

[마침 잘됐습니다, 프론디어. 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죠.]

[그게 무슨 뜻이죠?]

나의 질문을 듣고 파스칼은 뒤로 물러섰다. 그 위치는 크라켄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즉 그의 입이 크라켄에게 보이지 않았다.

[프론디어.]

파스칼은 어쩐지 반짝이는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

[오러를 배워보죠. 바로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

나는 크라켄보다 파스칼이 더 미친놈 같았다.

* * *

퀴니에는 교실 안에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퀴니에는 명함을 받지 않은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프론디어와 관계되지 않았어도, 그녀 또한 요즘 떠오르는 소문의 주인공이기에, 명함은 그녀에게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프론디어 쪽 이야기처럼 즐겁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퀴니에 드 비에트는 시체에 대한 극도의 공포증을 갖고 있다.]

마법 대자보로 쓰여 있던 그 문장.

'...들켰어.'

시체를 극도로 두려워한다. 콘스텔의 학생으로서 절대로 가져선 안 될 약점.

물론 시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퀴니에가 가진 그 공포는 아예 격이 다르다.

이미 그 대자보를 본 사람들이 다수 있겠지. 퀴니에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떤 자식인지 몰라도 대단한 정보통이시네.'

퀴니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밖은 한참 소란 중이었다. 보아하니 학생들에게 이변이 일어난 듯했다. 프론디어를 죽여야 한다나 뭐라나.

엄청난 숫자였지만, 그걸 막고 있는 학생들 몇몇이 워낙 강해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퀴니에는 쉽사리 프론디어를 도울 수 없었다. 프론디어를 도울 마음은 충분히 있었다. 프론디어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으니까.

허나, 퀴니에는 의식을 잃은 학생들의 얼굴을 본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시체 같았다.

'...한심하다.'

진짜 시체도 아닌데, 그저 '시체 같은 얼굴'이라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다니. 퀴니에는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트라우마를 치료할 기회일지 모른다.

학생들은 진짜 시체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시체랑은 거리가 멀고, 그저 의식을 잃었을 뿐이다.

그들의 얼굴을 마주한다면, 언젠가 시체를 보아도 아무렇지 않은 날이 오겠지.

"...좋아."

퀴니에는 일어섰다. 지금 학생들은 프론디어에게만 시선이 쏠려 있다.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녀도 안전할 것.

퀴니에는 결심을 내리고 걸어갔다. 당당히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어?"

그리고 그 눈앞에는, 또 한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퀴니에의 친구, 안느였다.

안느가 시체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1화

32장 크라켄(3)

퀴니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안느는 가만히 서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퀴니에를 향해 다가왔다.

"윽...!"

퀴니에는 뒤로 물러섰다. 안느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퀴니에가 오른쪽으로 두어 걸음 걷자, 안느는 그 옆으로 퀴니에를 지나쳤다.

안느는 퀴니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 교실 안에 프론디어가 있는지 찾고 있었을 뿐.

"...프론디어. 죽여라. 죽어라."

중얼거리는 안느. 그 섬칫한 소리에 퀴니에는 침을 삼켰다.

친구의 상태를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니 지금 프론디어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학생들이 지금 프론디어를 쫓고 있다. 그것도 죽이기 위해서.

'선생님들도 당한 건가?'

범인이 프론디어를 죽일 목적이라면, 당연히 교사들부터 조종할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정도의 사태가 되어서도 선생님들의 대처가 없다면 조종당하고 있는 건 거의 확실한 듯했다.

"...안느."

퀴니에는 여전히 초점이 멍한 안느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 그 얼굴은 정말로 시체를 닮았다.

그러나.

"...아니야."

자신의 친구를 보면 확실하게 느낀다. 시체가 아니다. 시체 따위 없다. 친구를 보면서 그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말이나 되는가. 퀴니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녀올게, 안느."

굳은 결심을 하고, 퀴니에는 교실의 자기 자리로 향했다.

거기에 놓인 가방을 들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콘스텔은 지금 정확한 위치를 말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고, 박살이 나고 쓰러진다. 조종당하지 않는 학생들이 프론디어를 지키기 위한 결과였다.

퀴니에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창문 밖으로 상황을 확인했다.

한데 무언가 이상하다. 소리는 시끄러운데 여기서는 학생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종당하지 않은 것 같은 학생들 몇몇만이 눈에 띄었다.

'왜지? 아까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제법 많이 있었는데.'

그러다 하나의 생각이 닿았다. 설마, 하는 가설이 머리를 스쳤을 때 이미 다리는 뛰고 있었다.

타다닥, 빠르게 건물의 계단을 올라가 옥상에 도달했다.

철컹!

문을 열고 퀴니에는 옥상 위에서 바깥을 확인했다. 그녀가 있는 제2본관, 그 앞으로 보이는 1본관, 그리고 오른쪽 아래의 운동장, 그 앞이-

"강당...!"

퀴니에는 보았다. 수많은 학생이 강당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프론디어의 위치가 발각된 것이다.

그 앞으로 얼음벽, 집풍 따위가 강당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 아텐, 엘로디, 그 밖에 마법사들의 마법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가 너무도 많아, 이들을 다치게 하지 않고 전부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큭."

퀴니에는 부채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전속력으로 옥상 위를 내달렸다.

그 끄트머리에서 뛰어 부채를 휘둘렀다. 그녀가 한 번 부채를 저을 때마다 그녀는 공중에서 다시 도약한 것처럼 떠올랐다.

가벼운 부유감,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는 바람을 느끼며 퀴니에는 다음 건물로 착지했다.

다음 건물, 그리고 또 다음 건물을 향해. 보다 강당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아니! 좀! 멈추라고!!"

"이 자식들은 왜 머리를 후려쳐도 계속 가는 거야!"

"말했잖아! 기절시키려고 해봤자 소용없다니깐!!"

가까이 다가가자 엘로디나 아텐 등, 다른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가 조종당하는 학생들이 강당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끔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퀴니에는 여기서 가장 지각한 셈이었다.

'으으윽...!'

퀴니에는 가까이서 보이는 학생들의 무리에 기겁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시체 같다. 시체들이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 같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져 온다.

"어! 퀴니에 선배!"

무리의 앞에 서서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던 사이벨 포르테가 퀴니에를 발견했다. 퀴니에는 싸하게 식은 얼굴로 겨우 손을 들어 그 목소리에 응했다.

사이벨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이들도 잠깐 퀴니에를 보았으나, 일단 학생 무리를 막아내는 게 더 급했다.

"사이벨, 프론디어는 강당 안에 있는 거야?"

"그런 거 같아요! 근데 누가 해놓은 건지 결계 때문에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범인의 짓인가?"

"잘 모르겠지만, 범인의 짓이라면 일단 학생들을 막고 봐야죠!"

사이벨은 학생들을 막아내면서 성실하게도 퀴니에를 향해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근데 괜찮아요, 선배? 안색이 안 좋은 거 같은데!"

"그, 그럼. 괜찮아. 이제부터 안 괜찮아질 거 같지만."

"네?! 무슨 소리예요?!"

사이벨의 물음을 뒤로하고.

퀴니에는 스읍, 하아, 하면서 깊은 심호흡을 반복했다.

'아으, 하기 싫다.'

퀴니에는 무릎을 꿇고 가져온 가방 문을 열었다. 그 안을 뒤적이면서도 울상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꺼낸 것은, 웬 투명한 마스크팩이었다.

퀴니에는 마스크팩을 들어 착, 하고 얼굴에 붙였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광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학생의 무리. 그들을 막아내는 것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퀴니에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 안의 내재된 기가 빠르게 끓어올랐다.

3학년인 그녀에게, 오러의 발현은 아주 손쉬운 일이며, 같은 3학년들과 비교해서도 그 수준이 한층 다르다.

퀴니에는 그렇게 오러를 잔뜩 담아 외쳤다.

"내가 프론디어다──!!!"

강당은 물론 콘스텔 전체에까지 울릴 정도로 벼락 같은 목소리. 예전에 아스터가 도망치는 마물 무리를 막아내기 위해 외친 것과 비슷한 발현이었다.

그 거대한 목소리는 강당 쪽을 향하는 학생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고,

놀랍게도, 무리는 전부 강당에서 등을 돌려 퀴니에에게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히이익!'

퀴니에는 마스크팩 아래의 얼굴에서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들을 막고 있던 엘로디나 아텐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갑자기? 학생들이 갑자기...."

그들의 시선이 자연히 퀴니에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퀴니에를 본 그들은 굳어버렸다.

프론디어였다. 프론디어가 거기 서 있었다.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에, 새까만 부채를 들고, 슬랜더 같이 여리여리한 몸매를 갖고, 딱 얼굴만 프론디어인.

...보기 아주 별로인 프론디어가 서 있었다.

* * *

퀴니에가 쓴 마스크팩은 그녀가 알고 있는 인물의 얼굴로 변장할 수 있다.

다만 사용자의 기억에 의존하기에 잘 모르는 얼굴이거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면 정확성이 떨어진다.

퀴니에가 처음 이 아이템을 생각해 낸 건 마물 습격 이후였다.

퀴니에는 마물 습격 이전에, 프론디어에게 습격의 예고를 들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녀뿐만 아니라 프론디어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몇몇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들은 거의 전부 습격에 대한 대응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프론디어의 말을 믿을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을 프론디어의 어머니인 말리아가 해주었다.

"알레스가 자백했거든."

"자백이요?"

"그래. 프론디어가 엘리시아와 같은 편인 척을 하고, 알레스에게 '당신이 의심스럽다'라는 식의 블러핑을 했는데, 그게 잘 먹힌 거지."

블러핑이라. 확실히 프론디어답다.

"어떤 식의 블러핑이었죠?"

"바꿔치기가 된 게 아니냐는 거였어. 알레스는 렌조, 엘리시아와 한 패였잖아? 그러니 렌조가 실패한 것은 알레스가 바꿔치기 된 것이다. 진짜 알레스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당신은 가짜 알레스다. 이런 식이었지. 참 뻔뻔해. 렌조를 방해한 건 자기였으면서."

프론디어가 뻔뻔하다는 사실에는 적극 동의하는 퀴니에였다.

한데 바꿔치기라....

"확실히 그런 아이템이 있죠."

"뭐, 그렇지. 요즘 마공학의 수준은 어마어마하니까. 근데 그런 식의 타인의 얼굴을 모방하는 제품은 완성도가 높을수록 엄청나게 비싸. 그리고 대부분 일회용이고."

"즉, 돈이 많다면 가능하다는 거군요?"

"...퀴니에."

말리아는 반개한 눈으로 퀴니에를 보았다. 퀴니에는 그저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그런 퀴니에의 의도를 알고 말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주의를 주었다.

"교내에서 쓰면 안 된다? 교칙 위반이니까."

...그리고 지금.

'교칙은 정말로 중요한 거구나!'

퀴니에는 몰려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역시 선생님의 말은 듣고 봐야 했다.

* * *

철푸덕, 나는 또 한 번 바닥에 나뒹굴었다. 옆에서 후아암, 하는 크라켄의 하품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비틀비틀 일어서는 내 앞으로, 무표정한 파스칼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파스칼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집중해요!]

[제가 집중을 안 하는 걸로 보이십니까?]

실수했다간 죽게 생겼는데.

파스칼의 공격은 나를 훈련시키기 위한 거라는 걸 알고 있어도 자비가 없었다. 확신했다. 파스칼은 다른 사람을 가르쳐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렇게 힘조절이 개판이지.

카앙, 깡!

검에 부딪히는 손이 얼얼하다.

[프론디어 학생은 무기를 썩히고 있어요.]

[나도 알아요! 그렇다고 오러를 이 자리에서 쓰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파스칼의 말대로 다른 어설픈 무기였다면 파스칼의 오러에 이미 작살이 났겠지. '닐 자크의 소검'이니까 버티는 것이다.

[제 말을 잘못 이해했군요.]

파스칼은 검을 비틀어 어깨로 파고들었다. 카가각, 맞부딪힌 검이 마찰에 소리를 냈다.

[제가 말한 '무기'라는 건 당신입니다. 당신 그 자체.]

[...뭐라고요?]

[저와 대련한 마지막 순간, 제 무기를 쳐냈잖아요?]

[알고 계시겠지만 그건 오러가 아니에요.]

[그것 자체가 오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지?

나는 파스칼의 검을 쳐내며 거리를 벌렸다.

[프론디어, 생각해요.]

파스칼은 그렇게 말했으나, 내 머릿속은 더욱 혼란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나를 꿰뚫어 보듯이, 천천히 다시 그 입을 움직였다.

[당신은 이미 오러를 사용할 수 있어요.]

'뭐...?'

그때였다.

나는 파스칼의 발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무언가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아서.

처음에 떠올린 것은 의아하게도 처음 던전에서 처치한 슬라브의 목소리였다.

-그런가. 나는 아직 그분의 검에 닿을 수 있는가.

그 목소리가 왜 지금 떠오르는지.

다음에 떠오르는 것은 렌조의 목소리였다.

-꽤 재밌어 보이는 녀석이었지만 결국은 풋내기인가.

그 다음은 황후 필리의 목소리.

-프론디어, 오러를 쓸 줄 몰라요?

지금까지 들었던 말들이 하나하나 나 뇌리를 스쳤다. 어째서인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예전의 대사들이 내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앗지에의 한마디가 머리를 스쳤을 때.

-너는 이미 '낙장'을 쓸 수 있다. 어설프지만.

"...어?"

나도 모르게 소리 내었다.

나는 어째서 낙장을 쓸 수 있지? 아무리 위저그램으로 열심히 보고 따라했다고는 하나, '낙장'이라는 건 본래─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그리고 최근까지도 생각했던.

에티우스 세계의 뻔한 설정 하나를 떠올렸다.

에티우스 세계에서 마나와 오러는 기본적으로 같은 물질이다.

그 모든 것을 깨닫고, 마침내 내가 내뱉은 말은.

"...어?"

여전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2화

32장 크라켄(4)

오러와 마나는 같은 물질.

나는 지금까지 직조가 완전 별개의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조는 별개의 무언가가 아니다.

이전에 내 스스로 말했듯 직조는 마나를 소모하는 '마법'이다.

그러나 직조는 어떠한 술식도 필요치 않다. 공방에 무기가 저장되어 있다면 바로 사용할 수 있다.

...술식이 필요하지 않은 마법.

[조금은 알게 된 거 같네요.]

내 표정을 확인하고 파스칼은 입을 움직였다.

나는 자세를 잡았다. 흑천으로 만든 칼 한 짝은 버렸다. 실물의 소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지금의 내게 쌍검은 집중하는 데에 방해가 될 뿐이다.

'후우.'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재인식에 가깝다.

나는 직조를 감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게임의 스킬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았다.

쓸 수 있기에 사용했고, 내 마나가 어떻게 직조로 변화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부터 나는 그것을 해야 한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부리는 것이 그저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니듯이.

내 몸 안에 있는 기를 돌려, 직조로 만들어지는 감각을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

[알아챈 건 좋습니다. 그런데 프론디어 학생.]

[네?]

휘익-

꽈앙!

나는 갑작스레 달려든 파스칼의 공격을 서둘러 받았다.

[크라켄을 속이고 있는 입장에선 마냥 기다려줄 수가 없답니다.]

[그랬... 죠...!]

[싸우면서 깨달으세요. 어느 누구도 깨우치는 걸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스파르타.

하지만 파스칼의 말이 맞았다. 크라켄이 언제까지 기다려줄지, 눈치채지 않을지 모른다. 이미 슬슬 지겨워하는 눈치고.

'...좋아.'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나는 검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내재된 마나를 끌어올렸다.

파스칼과 맞대고 튕겨 나가는 검의 궤도와 함께, 나는 직조의 수법을 떠올린다.

나의 몸은 이미 알고 있다. 내 몸은 이미 직조를 성공시킨다. 늦는 건 내 몸이 아니다.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생각해라. 나의 기술이다.

쉬이익!

필요한 건 그저 직조의 감각을 익히는 게 아니다. 술식이 없는 마법을 성공시킨다면, 내가 가진 기를 무기에 담는 것 또한 가능할 터.

검을 휘두른다. 파스칼의 검을 막아낸다. 뒤로 당겨놓은 검을 들어 올려 공기를 찢듯이 내리친다.

내 한번의 휘두름에, 바람이 점차 뒤따라왔다.

[...!]

파스칼의 눈에 이채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나 또한 느끼고 있었다. 몸 전체를 감도는 기가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조금씩, 기는 검에 깃들었다.

파스칼은 검을 나를 노리고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그 궤적이 멎은 것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오른발이 깊이 틀어박혔고, 지지대가 되어 허리, 어깨, 팔이 쭈욱 뻗었다. 그 모든 기세가 검에 실렸다.

앗지에 창술 기본

프론디어식 검술 변형

사선베기

[...훌륭해.]

마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파스칼의 입을 보고,

콰앙-!

나는 파스칼의 오러를 담은 검을 쳐냈다.

쳐낸 나의 '닐 자크의 소검'은.

부족하다 싶었던 칼날의 길이를 위로 길게 채우는, 무색의 오러로 뒤덮였다.

* * *

프론디어와 파스칼의 싸움을 지루하게 보고 있던 크라켄이 몸을 일으켰다.

'...무색?'

좀 전까지 오러를 전혀 쓰지 못했던 프론디어가 갑자기 오러를 발현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의 오러가 무색이라는 것이 크라켄의 눈가를 찌푸리게 했다.

'뭐에요 저건? 저것도 오러야?'

프론디어의 오러는 너무 투명해, 기감이 뛰어난 검사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 색이 전혀 없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원래 오러라는 게 보이지 않지만, 오러 자체가 투명한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사이 프론디어는 오러로 뒤덮인 자신의 검을 보고, 본인마저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분명 자신도 무색의 오러가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겠지.

프론디어는 곧 다시 자세를 잡았다. 오러를 발현한 프론디어, 과연 싸움의 양상이 변할 것이가.

탓!

자신감을 찾은 듯 이번엔 프론디어가 먼저 파스칼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러가 발현된 덕에 프론디어는 그 질주의 속도가 격상했다. 그 기세를 위협이라 느꼈는지 파스칼은 옆으로 피했고.

"...어쩐지. 그럴 줄 알았네요."

프론디어는 그 질주 그대로, 크라켄에게 달려들었다.

파스칼은 그저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제정신이었다.

바람에 가까운 속도로 프론디어는 접근했으나 크라켄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쉬익, 크라켄은 자신의 오른 손가락을 촉수로 바꾸어 프론디어를 향해 쏘았다.

이 단순한 공격조차 아까 프론디어는 반응하지 못했다.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는 허세였는가, 지금 확인해 볼 기회다.

'응?'

그런데 돌연 프론디어는 정지했다. 분명 그대로 검을 휘두를 거라 여겼는데, 돌연 질주를 멈추고 자세를 낮추었다. 무릎, 허리를 굽히고, 그 머리를 숙였다.

──프론디어의 몸으로 가려진 그 뒤로, 반월의 오러가 쏘아져왔다.

"아니...!"

서걱!

크라켄이 쏜 촉수 전부가 그 오러에 잘려나갔다.

파스칼이 저 먼 거리에서 오러를 쏘아 날렸다. 저 남자 평범한 기사가 아니다. 적어도 오러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한 실력가.

더불어, 미친 놈이다.

'조금만 숙이는 게 늦었어도 베이는 건 프론디어였잖아요?'

누가 작전을 짰는지, 방패 뒤에서 오러를 쏘는 놈이나, 방패인 놈이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했다.

이번에야말로 프론디어는 그 검을 휘둘렀다. 파스칼은 왼손을 뻗었다. 잘려 나간 촉수는 복구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프론디어 따위, 왼손 하나로 충분,

"나와라."

프론디어가 말했다. 나오라니? 뭘? 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뭐가 진짜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크라켄의 바로 앞에서. 웬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애가,

후두둑.

"...?"

그의 왼손이 툭 떨어졌다. 잘려나간 것도 아닌데, 마치 분해당한 조립 완구처럼 툭, 하고. 떨어진 손에는 수 개의 바늘이 꽂혀 있었다.

바늘? 지금 바늘에 꽂혀서 손이 떨어졌어? 왜? 나의 촉수는 무기에 상처 입지─

"죽어라, 문어 자식아."

서걱-

그 생각이 완료되기도 전에.

무색의 오러가 크라켄의 목을 날려 버렸다.

* * *

크라켄의 머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멈췄다.

과연 문어인지 피조차 나지 않았다.

'...뭔가, 벤 거 같지가 않아.'

오러를 사용하는 감각이 처음이라 그런지 몰라도, 죽였다는 실감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선 확인할 것이 있다.

나는 쓰러져 있는 그레고리에게 다가갔다.

"그레고리, 괜찮냐?"

그레고리는 답하지 않았다. 완만하게 움직이는 어깨를 보니 기절한 듯했다.

일단 나는 안심했지만 좀 고민이 되었다. 이녀석을 깨워야 학생들을 멈출 텐데.

옆에 선 셀레나를 보았다.

"수고했다."

"예. 사실 좀 더 빨리 나올까 고민했으나, 그랬다면 결과가 좋지 않았겠군요."

"그래. 잘해주었다."

나는 셀레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올리고서 나 스스로 놀랐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셀레나도 약간 당황한 듯 눈동자만 위로 올려 나를 보았다.

"...아, 저기."

그때였다.

"──나 죽은 줄 알았어요?"

또 그 불쾌한 목소리가 귀를 더럽혔다.

목이 없는 크라켄이 저 스스로 일어섰다. 그러다 꾸물꾸물, 가슴에서부터 덩어리진 게 목 위로 올라왔다. 이리저리 뒤틀리더니 곧 크라켄의 머리가 다시 완성되었다.

"진짜로 불사신인가."

"아뇨오, 좀 죽기 어렵지만, 불사신은 아니야."

나와 셀레나, 파스칼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파스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됐네요. 이 머리는 제 진짜 머리가 아니었답니다. 다리 하나를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놨을 뿐이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크라켄의 머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다리였다. 저 문어는 정말로 기이할 정도로 몸을 바꿔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인더스는 여전히 더러운 짓만 골라 하는구나."

그때 셀레나가 한층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라켄이 셀레나를 보았다. 크라켄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놀랍게도 그 눈동자 안쪽에서 짙은 혐오의 색이 배어나왔다.

"그러는 너는 '만곶'이죠? 그 전이 수법을 보면 티가 나죠. 대륙의 추방자, 탈락자, 인간의 격을 상실하고 도망쳐 나간 떨거지들."

하, 셀레나가 겁없이 웃었다.

"거머리가 사람 피를 빨더니 저가 사람 말을 한다고 착각하는구나. 각혈을 오래도록 뱉을 뿐인데."

...아무래도 '인더스'와 '만곶'은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게임에서는 순차적인 메인 이벤트라 서로 무관한 듯한 느낌이었는데.

"뭐 아무튼, 난 이만 가도록 하죠. 나름 재밌는 시간이었어. 유익한 정보도 얻었고."

"보내줄 것 같나?"

"물론이죠."

크라켄이 답한 직후 놈의 뒤에서 타원형의 문 같은 것이 열렸다.

타원의 경계는 빨려들어가는 듯한 물결치는 파도와 보랏빛의 색깔로 채워져 있어, '포탈' 따위를 연상케 했다. 실제로 그게 틀림없을 거다.

다만 경계가 아닌 중심에는 포탈 너머의 배경이 보였다. 어둑한 주위, 회색 공간, 물 따위가 흐르는 듯했다. 아마 어딘가의 하수구인 듯했다.

"프론디어 님, 잊지 마. '명함'과 '녹음기'. 당신의 목숨은 '인더스'가 쥐고 있답니다."

크라켄이 제 품에서 명함을 꺼내 들고 팔랑거렸다.

하.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방금 내 신경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직조(織造), 흑천(黑川).

등급 - 신위(神位)

크리셀라카토스, 이오케이라.

"어머, 정색하긴. 빨리 도망쳐야겠네."

허나 내가 직조를 마치고 놈을 조준했을 때, 이미 크라켄은 포탈 너머로 도망친 뒤였다.

"...갔네요."

셀레나가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아무튼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니..., 프론디어 님?"

셀레나가 의아한 듯 나를 보았다.

당연할 것이다.

나는 아직,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뭘 어떡하시려고...."

나는 말없이 포탈과 함께 사라진 크라켄의 빈 공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오러를 펼쳤다.

─오러는 무기의 본연의 힘을 꺼낸다.

모든 사람이 무기를 가리듯이, 모든 무기 또한 주인을 가린다.

그저 나에게 너무도 과한 무기들을 휘둘렀을 뿐인 지금까지와 달리.

오러가 깃든 신위의 활은 천천히 눈을 뜬다.

"프론디어... 님...?"

"프론디어 학생, 놈은 이미 도망쳤어요. 무슨 생각을...."

나의 오러는 무색.

그러나 오러를 불어넣은 신위의 활은, 지금까지와 다른 빛을 발한다.

오러가 있다고 해서 무기의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 필중 : 사용자가 노린 적을 반드시 맞춘다.

나의 머릿속에는 아직, 나의 눈앞에는 여전히, 도망치기 직전의 크라켄과 그 포탈 건너편의 모습이 남아 있다.

크리셀라카토스를 들고 있는 지금, 그 광경은 내 눈앞에 선명히 떠올라, 실제의 이 강당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크라켄."

너는 아직, 나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

슉-

나는 활시위를 놓았고.

화살은 사라졌다.

날아간 것이겠으나, 오러를 쓰고 있는 내 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3화

32장 크라켄(5)

크라켄은 어느 하수도에 발을 디뎠다. 프론디어가 본 포탈 너머의 광경이었다.

하수도는 그 장소답게 썩은 악취가 났다. 그러나 크라켄은 그에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물 속의 냄새를 먹어치워 왔으므로. 물 속에서 썩은 모든 것이 그의 양분이 되었으므로.

"흐흠~ 프론디어 님, 생각보다 재밌는 사람이었어."

크라켄은 마치 소개팅을 하고 온 사람처럼 흥얼거렸다.

본래의 목적은 그저 '명함'뿐이었고, 프론디어라는 남자는 아직 그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프론디어는 그저 그의 위치가 인더스가 올라설 제물이 되기에 적합했을 뿐, 그 자체는 대단치 않았으니.

"하지만 화를 좀 삭일 필요가 있어, 프론디어 님. 세상만사 그렇게 감정만으로 움직여서 해결될 것이,"

크라켄은 들리지도 않을 훈수를 중얼거리다가 멈췄다.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아니, 날아오는 것을 느낀다.

아니 이 속도는, 그저 날아온다 하기에도.

"어, 뭐,"

크라켄이 그렇게 멍청한 소리를 흘리는 사이.

핏-

피비빅-!

하수도를 타고 들어온 그것은, 크라켄의 눈조차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수 번을 꺾어 들어와,

피슉-

찰나와 같은 속도로 크라켄의 오른쪽 무릎을 꿰뚫어놓았다.

"허윽?!"

크라켄은 몸 전체를 무너뜨리며 비명을 내었다.

오른쪽 무릎. 크라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꿰뚫린 무릎을 눈동자를 굴려 보았다.

그곳에는 그의 심장이 있었다.

털썩.

크라켄은 쓰러졌다.

"하악! 헉! 허억...!"

그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침과 바보같이 열린 입가가 전부 촉수처럼 늘어지려다,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고서 몇 초 후, 크라켄은 겨우 가쁜 호흡을 가다듬었다.

'화살...?'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으로 간신히 잡힌 그것은 화살의 형상을 한 듯했다.

분명 포탈은 넘어오기 직전, 프론디어가 활을 꺼내 들었었지.

"내 심장 하나를...."

크라켄에게는 세 개의 핵이 있다. 그저 인간인 척을 하고 있을 뿐인 그에게 심장 따위는 없으나. 그는 스스로 핵을 자신의 '심장'이라 부른다.

그 어디를 자르고 불태워도 크라켄은 본래의 몸을 복구하지만, 세 개의 핵이 전부 박살 나면 그는 죽는다.

그중에 하나.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방금 날아갔다.

'계획이....'

그는 인더스의 일원. '혁명'이 지상명령인 그들에게는 수많은 준비를 진행시켜야 한다.

크라켄 또한 목숨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있다.

3개의 목숨 중 두 번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한 계획이 있었다.

그런 게 이따위 화살로 하나를....

"크...."

그러나 크라켄은 웃었다. 이걸로 프론디어는 한 가지 오해를 할 게 틀림없다.

내가 죽었다고.

나의 심장이 세 개가 있다는 걸 모르는 프론디어는, 반드시 착각하겠지.

"크... 흐흐...."

그러므로 이 목숨 하나는 언젠가 프론디어를 궁지에 빠트릴 포석이 될 것이다.

보아라, 프론디어. 나는 건재하다.

죽지 않았으니 계획은 진행할 수 있다. 다소의 수정만 진행되면, 얼마든지.

죽지 않았으니 되었다.

죽지 않았으니....

"크... 흐흐... 프론디어...."

...허나.

그 입가가 점차 기우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의 눈에 핏발이 서는 것은 어째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 고개를 쳐들어.

"프론디어어어어어───!!!!"

미친 듯이 소리치는 그 연유를, 크라켄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 * *

그레고리를 깨운 뒤 학생들에게 걸어놓은 명령을 해체하도록 시켰다.

다행히 명령을 내리는 건 세르프의 목소리였어도, 그걸 취소하는 건 명함을 나눠준 그레고리의 몫이었다.

파스칼은 그레고리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애초부터 잡히는 게 목적이었던 그레고리는 얌전히 따랐다.

"이제 쉬도록 해요. 이후는 선생님들의 역할이니까."

"선생님들...."

나는 파스칼의 말을 듣고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다른 선생님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역시 명함을 받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다.

명함을 받았다면 조종당해서 나를 공격하러 왔을 텐데, 그런 선생님들은 아무도 없었다.

파스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들 명함을 받은 것처럼 보이더군요. 한데."

"한데?"

"선생님들 전원, 저항했습니다."

파스칼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스피커로 '프론디어를 죽여라'라는 명령이 들린 직후, 근처에 있던 선생님들 전원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습니다. 의식을 잃진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저항력이었죠."

그 말에 나는 사이벨을 떠올렸다.

사이벨도 세르프의 명함을 받고, 의식을 잃지 않고 저항했었다. 그런데도 그 저항이 버거워져서, 자칫하면 나를 죽일 뻔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전부 저항해 내었다는 건가. 이 긴 시간 동안.

"교장 선생님은 아예 자기 의지로 움직이시더군요. 마법까지 사용하시고. 그건 놀랐습니다."

"마법... 교장 선생님은 무엇을?"

"교사들을 가두는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저항에 실패한 교사가 당신을 죽이려 들면 그건 정말 대사건이 될 테니까요."

과연. '조디악'인 오스프리트는 그 정도까지 가능한 건가.

그때 강당의 문이 열렸다.

"아, 있다! 프론디어!!"

먼저 들어온 것은 사이벨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 뒤로 엘로디, 아텐 등 나를 도와준 학생들이 들어왔다.

"이제 괜찮은 거야?"

"난 더 못해! 이제 뭐 들 힘도 없다!"

녀석들은 나에게 다가와 한마디씩 얹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가슴속에서 감사함이 차올랐다. 그래, 이번 사건은 이들이 없었다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워. 너희들이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사이벨을 보고, 엘로디를 보고, 아텐을 보고, 프론디어를 보고.

....

프론디어?

"어?!"

나는 본능적인 공포에 전신이 솟구쳐올라 뒤로 풀쩍 뛰었다.

뭐, 뭐뭐뭐냐 저 녀석은? 도플갱어?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그 녀석인가? 소검이 어디 갔지? 젠장, 당장에 직조를 가동해─

"프론디어, 진정해. 퀴니에 선배야."

"응?"

사이벨이 그렇게 말하자 프론디어의 얼굴을 한 사람이 아, 하고 소리 내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가져가 귀 아래에서부터 자신의 얼굴을 벗겨내었다.

그 안에 드러난 진짜 얼굴은, 정말로 퀴니에 드 비에트였다.

"...아. 가면이었군요."

얼굴을 보고 너무 당황해서 그러지, 얼굴 말고는 전부 다 달랐다. 머리카락의 색과 길이, 몸매, 옷차림, 게다가 퀴니에의 시그니처인 부채까지 들고 있었다.

조금만 침착했으면 바로 알았을 것이었는데, 너무 놀라버렸다.

"맞아."

퀴니에는 대답하면서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냥 안 좋은 게 아니고, 정말로 곧 죽을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가운데 그 안색은 거무죽죽했다.

"이딴 짓, 다신 안 할 거야."

"...아."

그 혼잣말에 나는 앞뒤를 짐작했다.

퀴니에가 가면을 쓰고 나인 척을 해서 학생들의 시선을 끌어준 거구나. 의식을 잃은 시체 같이 움직이는 학생들이 자신을 습격해 오는 장면은 꽤 공포다.

...시체같이.

나는 입을 다물고 퀴니에를 보았다. 퀴니에는 부채를 펼쳐 자기 입가를 가리고 눈으로 대신 말했다.

'티 내지 마.'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스터는 어디로 갔지?"

"걔는 지금 싸우고 있어."

엘로디가 말했다.

싸운다고?

"왜? 학생들도 의식을 되찾았을 텐데."

"그래서 싸워."

"응?"

그때였다.

콰아-앙-!

강당 밖 운동장 위로 무언가 격렬하게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나와 일행들은 강당 밖으로 나가 상황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밑에 깔린 아스터가 발로 로발드의 면상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너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

"인정 못 한다! 이따위 싸움으로 이겼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딴 생각 안 하니까 좀 꺼져 인마!"

오, 저렇게 거칠게 말하는 아스터는 좀 신선하다.

엘로디가 말했다.

"아스터가 정신을 잃은 로발드를 오러를 써서 거의 다 제압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근데 로발드가 의식이 깨어나서, '이건 승부가 아니야!'라고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거지."

"...로발드답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둘을 보았다.

"아스터! 재승부다! 지금 바로! 내 진짜 실력을 보여주지!"

"제정신이냐! 난 지금 못 싸워!"

"왜지!"

"정신 나간 널 막느라고 힘을 다 썼다! 이 멍청한 자식아!!"

아스터가 외치자 로발드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아스터에게 들이밀던 걸 멈추고 일어섰다.

"흠. 그렇군. 나를 막느라고 힘을 다 썼다. 흠. 그렇군."

"...그래."

"즉 의식을 잃은 나였어도 굉장히 강했다는 소리로구만."

아, 그거면 된 거냐.

난 요상하게 분위기가 풀릴 것 같아 한시름 놓았다.

쟤네 둘이 싸우면 어디서 어떻게 새우등이 터질지 모르니까. 그 새우가 나일 수도 있고.

"아, 그런데 말이다. 로발드."

그런데 아스터가 툭툭 털고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뭐냐, 아스터."

그렇게 되묻는 로발드를 보고 아스터는 생긋 웃었다.

그 얼굴에 힘줄이 돋아있었다.

"넌 의식이 없을 때 더 잘 싸우더라."

"...뭣이?"

"다음에 나랑 승부하고 싶으면 어디서 대가리 한 번 박고 와라. 그럼 네가 이길 수도 있겠어."

"이 새끼가아아!!"

로발드가 달려들었다. 둘은 다시 치고받고 싸우며 뒹굴었다.

나는 그저 참으로 식은 감정으로 되어서, 영화 보듯 둘을 쳐다보았다.

"그냥 대충 넘어가면 되지. 아스터도 참."

엘로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아스터도 자존심이 엄청 세니까."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이 게임의 주인공이라는 거지.

* * *

밤,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셀레나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 앞에 서서 잠깐 고민했다.

...내 호위의 방에 갈 때는 뭘 해야 할까. 그냥 부르는 것이 낫나, 아니면 노크를?

잠시 고민하다 노크했다.

똑똑.

"셀레나, 나다."

"프론디어 님? 명령을 내리신다면 곧장,"

"아니다. 네 방 안에서 볼일이 있다."

"...제 방 안에서 말입니까?"

"그렇다."

나의 대답 이후로 방 안에서 잠깐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러면 5분만 기다려주십시오. 금방입니다."

"5분? 그냥 문만 열어주면 된다. 내가 들어갈 테니,"

"아! 안 됩니다! 금방 갈아입, 아니 금방이면 됩니다."

그리고 부산스러운 소리가 방 안에서 돌아다녔다. 부스럭부스럭, 옷감이 쓸리는 소리, 목재의 문이 열리는 듯한 마찰음.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옷 갈아입을 필요 없다. 하등 관계가 없는 용건이다."

소리가 뚝 멈췄다.

"옷 갈아입지 않았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신 건지 모르겠으나 저는 어디까지나 프론디어 님을 방 안에 들이기 위한 올바른 절차를 위해,"

"알았다. 그 절차는 끝났나?"

"...예. 들어오시지요."

그제야 문이 열렸다.

셀레나는 펑퍼짐한 잠옷 차림이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입은 그 착 달라붙어 불편해 보이는 잠옷과는 전혀 다른 옷이었다.

...그래. 어련히 그렇겠지.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안을 쭉 둘러보았다. 음, 있을 만한 건 다 있군. 역시 로아흐 저택이다.

"무슨 일이신지요."

"너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나의 대답에 셀레나의 표정이 긴축했다. 그래,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다음 말을 했다.

"오늘부터 너에게 '고대어'를 가르칠 것이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4화

33장 까마귀

나는 셀레나의 창가 쪽 벽의 책상을 확인했다. 음, 전혀 문제없다.

"...고대어요?"

뒤에서 셀레나가 물었다.

"그래.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이었다뇨?"

"너는 만곶에 보고를 해야 하니까."

셀레나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그 눈동자를 크게 했다.

"...그럼 저보고, 문장을 만들어서 보고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나중에는 그렇게 해도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만곶에게 전하면 된다."

"아, 알려주라고요? 만곶에다가?"

"그래. 진짜를 보여줘야 믿을 테니까."

나는 실제로, 셀레나를 통해 만곶에게 고대어를 '조금'은 알려줄 생각이다.

그래야 만곶이 셀레나를 신임할 것이고, 또한 나의 고대어 해석 능력을 쓸 만하게 여길 테니까.

"만곶에다가 있는 그대로 전해라. 내가 너를 가르치기로 했다고."

"무, 무슨 이유로요?"

"뭐든지 상관없지. 내가 너의 호위 능력을 신용하게 되었다거나, 너의 유혹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한다거나, 어떤 핑계든 좋다. 어차피 만곶이 원하는 결과가 그것이니. 적당히 선택해서 만곶에 전하면 좋아할 것이다."

"...."

셀레나가 대답하기 어렵다는 듯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뭐, 양쪽 다 셀레나가 노리는 효과였는데 그걸 거짓말로 고하라는 얘기니까.

"...그, 프론디어 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뭐지?"

"제 호위 능력이 믿음직하지 않으십니까? 유혹은 쓸데없었다 치고 말입니다."

쓸데없었다 치고.

예의는 없었지만 마음에 드는 표현이었다.

나는 양쪽 입가를 위로 당겼다.

"믿음직하다. 아주. 그러니 호위로 삼고 있는 것이지."

"...미소를 지을 때는 눈도 같이 웃어야 좀 더 그럴듯합니다."

"그렇군."

나는 미소를 지웠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셀레나의 전투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셀레나가 있은 뒤로는 그녀를 믿고 지금까지 다소 무리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는 '쓸데없었다 치고'라 말했으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예?"

"하지만 되지도 않는 표정이나 몸 연기보다는."

나는 셀레나를 보았다.

다음 말을 하는 동안, 내 얼굴에 분명 무언가 담겼다.

"지금이 낫다."

내 말에 셀레나는 어딘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한쪽 입가를 슬쩍 올린다. 뭔가 억지인 듯한 느낌이 든다.

"...방금 제가 말한 걸 시험해 보신 거죠? 습득력이 빠르시네요."

"이제 잡담은 되었다. 바로 시작하지. 책상 앞에 앉아라."

"오늘부터 바로요?"

"물론이지. 이미 충분히 시간이 지났다. 이 이상 만곶에 이렇다 할 수확을 전하지 못하면 네가 의심받을 거다."

내 말에 셀레나는 또 입을 우물쭈물하다가 걸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빈 노트를 꺼내서 셀레나 앞에 펴주었다.

"내가 단어를 적어줄 테니 잘 보아라."

"단어.... 글자부터 가르쳐주는 게 아닙니까?"

"불가능하다."

셀레나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건 설명보단 보는 게 빠르다.

나는 펜을 들어 마나를 흘려보냈다. 오러를 습득한 응용이었다.

이것이 가능해졌기에, 이제야 셀레나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두 개의 똑같은 모양으로 된 단어를 적었다.

"두 단어가 어떻게 보이나?"

"...똑같은데요?"

그렇다. 겉보기에는 완전히 똑같은 양쪽의 단어.

"셀레나, 오러는 사용할 수 있겠지?"

"...네."

"손끝에 기를 모아 글씨에 갖다 대어 봐라."

셀레나는 내 말에 따라 왼쪽 단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순간 셀레나는 놀래서 손가락을 다시 움츠렸다.

"...소리가 들려요."

"그러면 오른쪽 단어에도 갖다 대어 봐라."

셀레나는 이번엔 오른쪽 단어에 갖다 대었다.

"...여기도 소리가 들려요."

"그 두 개의 소리가 어떤가? 같은 소리로 들리나?"

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다른 소리였어요."

"그래, 그것이 고대어의 특징이다."

고대어는 고대 마법사들의 언어. 그답게 고대어는 마법적 특성을 가진다. 문자 안에 발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기에는 완전히 같은 글자를 썼음에도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고대어가 기록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지금껏 해석되지 못했던 이유다."

"...글자에 담은 '목소리'는 사라지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가 사라져 버린 반쪽짜리 문자. 당연히 해석될 리가 없다.

다만 유일하게, '프론디어 드 로아흐'만은 글자만을 보고도 직관적으로 그 뜻을 꿰맞출 수 있었다.

또한 같은 글자 안에서 완전히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소리의 차이라는 걸 간파해 냈다. 이후 완전히 터득하게 된 뒤에는 굳이 오러를 쓰지 않더라도 프론디어는 고대어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오러가 없으니 글에 목소리를 담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있는 글을 읽을 수는 있게 된 것이다.

엘로디를 향한 복수심이라는, 딱히 건설적이지 않은 방향이라고는 해도 대단한 재능과 노력이었다.

"그러니 글자를 먼저 익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먼저 결합되는 공식을 알아야 한다."

"공식...."

"소리를 담아낸다고 해도 아무 소리나 붙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고대어는 단어 자체에 중의적인 이미지를 겹쳐 그린다. 소리도 그 이미지 중에서만 골라 넣을 수 있다."

그러니 고대어는 그 이중 삼중으로 겹쳐 그린 글자의 선을 먼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걸 봐라. 떨어진 글자처럼 보이지만 긴 직선이 연결되어 있지. 이런 식으로 독립된 직선은 위에 덮어 씌워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 프론디어 님."

수업 도중 셀레나가 내 말을 끊었다. 건방지군.

그런데 셀레나는 아주 진지한 눈빛을 나에게 향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냐."

"정말로, 저에게 이것을 가르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셀레나는 꼭 엄청 깊은 각오를 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도, 내 대답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다.

"정말로 나를 배신할 생각이라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인더스와 만곶은 양쪽 다 제국을 대적하는 거대한 세력이나.

인더스는 제국의 뒷면이라면, 만곶은 제국의 업화다.

업화는 업이 사라질 때까지 그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러나 셀레나는 만곶의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다루는 깃발이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 * *

그로부터 3일 후, 콘스텔을 등교하는 중.

나는 까마귀를 만났다.

"...."

까-악-

까마귀는 주택가의 담벼락 위에 앉아있었다. 나에겐 별 관심도 없는 듯이 제 날개를 다듬고 있었다.

...그래, 아니겠지. 까마귀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 다섯 걸음 정도.

[아직 조금 더 보는 눈을 길러야겠어.]

그 말에 멈춰서고, 다시 되돌아가서 까마귀를 보았다.

까마귀는 좀 전의 뻔뻔한 연기를 집어치우고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레고리."

[그래, 나다.]

"감옥에 박혀 사는 줄 알았는데."

[물론이지. 더럽고, 안전하고, 더럽게 안전하지. 하지만 내 능력을 막을 수는 없다. 나의 능력은 마법이 아니야. 혈통 능력이다.]

에티우스의 죄수들은 구속구를 착용한다. 착용자는 마법이든 오러든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혈통 능력은 그 구속을 뚫을 수 있나.

[하지만 혈통 능력은 보통 살상력이 없지. 그래서 제국도 그냥 쉬쉬하고 넘어가는 것뿐이다. 아니면 마공학이 아직 여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거겠지.]

"그래서, 죄수가 무슨 일로 나를 불렀냐."

까마귀에다 대고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거는 내가 쪽팔린다.

이왕이면 용건을 빨리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너무 경계할 것 없다. 난 도움을 주려고 왔으니까.]

"도움이라."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 생명의 은인이다. 까마귀는 보은의 동물이지. 어때? 신뢰가 가지?]

내 앞의 까마귀가 으스대는 것처럼 제 날개를 팔딱였다.

...뭔 상관이라는 걸까.

[정보를 주려고 왔다. 중요한 얘기야.]

"뭐냐."

까마귀는 제 고개를 좌우로 한 번 까닥였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중요한 얘기인 모양이다.

[콘스텔에 퍼진 소문 중에, 내가 퍼트리지 않은 게 있다.]

"...!"

과연.

이건 정말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얘기다.

"...다른 놈이 그때를 노리고 다른 소문을 퍼트렸단 말이냐?"

[그래. 그 혼란 속에서 이득을 챙기려는 녀석이 있는 거지. 아니면 복수를 원하거나. 어느 쪽이든 위험한 놈이야.]

나는 당시 워낙 많은 학생들에게 쫓겨 정신이 없었기에 생각을 못 했지만.

이렇게나 다량의, 진위를 모르는 소문이 퍼지면 그 사이에 새로운 걸 끼워 넣는 놈들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문을 흘린다는 것만으로 위험한 녀석일까? 장난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보는데."

[물론 그게 대다수겠지. 하지만 생각해 봐라. 나는 인더스의 눈을 돌리기 위해 황궁에까지 침입해 기사들을 조종해서 바깥의 눈을 돌렸다. 그런데도 크라켄에게 들켰지. 왜라고 생각하나.]

"왜냐니. 크라켄의 감지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인더스의 추적 능력은 탁월하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감지력이라면 나는 예전에 잡혔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내가 묻자 까마귀의 눈이 나에게 향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새의 눈은 어딘가 오싹했다.

[콘스텔 학생 중에 '인더스'가 있는 거다. 그놈이 내 정보를 크라켄에게 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놈이 소문을 흘리는 녀석이고?"

[내 생각이 맞다면.]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크라켄과 싸운 게 불과 3일 전이다. 벌써부터 또 뭔가 사건에 휘말릴 것 같은 게 눈앞이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시리다.

"...일단 알겠다. 한 번 찾아보마."

[그래.]

나는 힘이 쭉 빠져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고 까마귀가 내 왼쪽 어깨에 올라탔다.

"...뭐하냐."

[나도 같이 가자.]

"어깨 무거우니까 저리 가라. 알아서 조사하든가."

[콘스텔의 교내까지 들어가려면 단순한 까마귀로는 무리다. 콘스텔 학생이 테이밍한 동물이어야 보다 자유로운 조사가 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테이밍한 까마귀인 척을 하겠다고?"

[척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네가 하는 거지. 이 까마귀를 테이밍한 척을 해라. 그럼 학생이나 교사들도 별말은 안 할 거다.]

나는 진짜로 눈앞이 깜깜해져 손으로 가렸다.

에티우스에서 까마귀는 한국처럼 불길의 상징이자, 더불어 마녀의 상징이다.

나는 열심히 이미지를 개선하려 노력한다고 하는데, 프론디어 드 로아흐에게는 계속 안 좋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럼 가자. 나는 학교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두근거리는군.]

까악- 놈은 제멋대로 지껄인 뒤에 제멋대로 울어댔다.

이딴 걸 테이밍 했다고 다른 애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건가.

어깨가 무겁다.

왼쪽이 특히.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5화

34장 사고

교실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학생들의 시선이 까마귀에 집중되었다.

호기심 반, 경계심 반 정도인 느낌이다.

"테이밍 하신 건가요?"

아텐이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까마귀를 쓰다듬었다.

"응, 뭐, 그렇지."

여기서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이 되면 내보내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시간이 되면 알아서 나갈 테니까."

"알아서 나간다구요?"

"응."

지가 안 나가고 배겨.

그러나 아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까마귀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음, 그레고리는 훌륭한 연기를 계속해 주고 있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보여주실 수 있나요?"

"응?"

"알아서 나간다는 게 궁금해서...."

흠.

나는 까마귀를 보았다. 까마귀와 서로 눈이 맞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하란 뜻이었다.

까마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이미 아텐의 눈이 커졌다.

까악!

까마귀는 한 번 울고는 가볍게 날아올랐다.

내 머리 주위를 한 바퀴 돌거나, 내 왼쪽 어깨에 앉았다가 오른쪽 어깨로 넘어가거나. 내가 팔을 들면 팔을 타고 걸어가 손끝에 앉기도 했다.

내가 적당히 움직이는 것에 까마귀가 적당히 맞춰주고 있으니, 정말로 내가 눈짓 손짓으로 까마귀를 다루는 것 같다.

"와아."

아텐의 감탄은 작았지만 눈이 반짝거렸다. 이렇게 알기 쉽게 좋아해 주는 아텐의 얼굴은 처음 본다.

적당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나는 까마귀를 어깨에 다시 앉혔다.

"음, 이런 느낌이야."

"굉장해요. 이렇게 완벽한 테이밍은 처음 봐요. '발언'을 하거나 마나를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손짓이나 눈짓으로 동물을 조종할 수 있다니."

그야 테이밍이 아니니까.

아텐이 말한 걸 듣고 보니 좀 지나치게 한 듯도 싶다.

아닌 게 아니라 교실 내의 학생들도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테이밍을 하는 학생들은 드무니까, 그것도 이 정도 훈련이 된 거면 더더욱 흔치 않고.

그때 수업 종이 울리고, 까마귀는 창문 밖으로 날아올랐다.

"...진짜로 알아서 나가는군요."

눈빛의 반짝임이 더욱 영롱해진 아텐이었다.

* * *

프론디어는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 등, 시간이 빌 때마다 수소문을 했다.

그레고리가 말한 또 다른 소문을 흘리는 녀석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레고리도 까마귀의 모습으로 이곳 저곳을 날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사이.

콘스텔의 회의실 내에서는 무거운 공기가 넘실거렸다. 그건 이미 살기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

"...."

"...."

회의실 내에 있는 교사들 전원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분노를 참는 눈동자가 여실히 드러났다.

긴급회의라는 명목으로 모였으나 다들 이번의 회의가 왜 열렸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사건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명함'의 영향이라 해도, 프론디어를 공격하려는 의지에 저항한 것만도 대단한 일이라고 해도, 그 따위 것은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후우."

그러나 이렇게 꾹 입만 다물고 있어서야 회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본 교사 빈키스가 폐의 모든 공기를 다 빼내듯이 뱉었다. 그리고 가볍게 들이마신 뒤,

"수치스럽네요. 저희 전원."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한마디를 차갑게 내밀었다.

교사들은 대못에 꿰인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으나 직접 들으니 어디로 숨고 싶어진다.

"학생 한 명이 죽을 위기에 빠졌는데 건물 내에서 꿈쩍도 않고 가만히 서 있다니, 야아, 중앙 대륙 최고의 전투원을 양성한다는 콘스텔이 말이죠. 알고 보니 겁쟁이들의 집합소였어요."

빈키스의 말에 모두들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빈키스 또한 콘스텔의 교사, 명함의 효과에 당해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니 빈키스가 하는 말은 지금 스스로를 찌르는 것과 다름 없었다.

"빈키스 선생, 그 정도면 되었다."

"...총장님."

총장 오스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교사들 중, 명함에 완전히 저항해 마법까지 펼친 것은 오직 오스프리트 뿐이었다.

다른 교사들의 폭주를 염려해 그 또한 건물 밖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그는 분명 명함의 효과를 이겨냈다.

"강력한 힘이었어. 프론디어 학생과 가까이 있었으면 나도 어떻게 됐을지 몰라."

그 오스프리트가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완전한 저항헤 성공한 오스프리트가.

교사 제인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명함의 힘에 버티느라 온몸에 근육통이 일었다. 다른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건 보고를 들어보니, 그 명함을 다른 누군가가 훔쳐 도주했다고 합니다. '크라켄'이라고 자칭했다더군요. 이번 사건의 범인은 아니지만, '명함'으로 벌어질 재난이 또 닥쳐올 거라는 뜻이죠. 그 힘에 완전히 저항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야말로 '조디악' 정도는 되어야겠죠."

제인의 말에 교사들의 표정이 더 암울해졌다.

이마에 파스를 붙이고 있던 말리아가 말했다.

"프론디어가 말하길, 크라켄은 본인을 '인더스가 아닌 자'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말장난을...."

다른 교사가 으득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범인인 그레고리의 전후 사정을 보건대 명함을 훔친 자는 '인더스'의 일원임에 틀림없다.

교사 이사마야가 말했다.

"크라켄도 아는 겁니다. 지금 콘스텔에서 '인더스'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죠. 평민의 아군이라고 불리던 인더스가 범죄에 가담했다는 것을 대중은 믿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인더스는 시민들 앞에 드러내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발각되지 않는 이상에야, 개인의 단독 범행으로 취급될 것이 뻔해요."

그 말을 듣고 제인은 잠시 생각했다.

분명 지금 당장 인더스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러나 저희는 알게 되었죠. 인더스가 범죄를 일삼는 조직이라는 것을. 물론 인더스가 알려준 셈이지만, 애초에 이렇게 되길 바라진 않았을 거예요."

제인의 말에 이사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만큼 인더스는 '명함'이 필요했던 겁니다. 콘스텔에 발각되는 걸 각오하면서도. 그들의 계획에 아주 중요한 아이템이었던 거죠."

"그 명함의 원래 주인은 '세르프 다니엘'. 애초에 인더스 소속이었습니다. 즉 세르프가 인더스에 있었던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은 준비되고 있었을 거예요."

인더스가 하려던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계획에 반드시 '명함'이 필요하다면, 상상은 어렵지 않다.

"대규모의... 혼란, 그 틈을 타서 본래의 목적을 수행한다거나."

"혼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교사들 몇몇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들었다. 정보를 듣고 자기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참, 프론디어 학생은."

그런 와중 쌩뚱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스칼이었다.

"이번이 처음인가요? 사건에 휘말렸다든가 하는 게?"

파스칼은 콘스텔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흥미 본위로 물어본 것이지만.

콘스텔의 교사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프론디어는 오히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편이죠."

누군가의 말에 말리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 아들이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흐음, 그렇군요."

파스칼은 그렇게 답한 뒤 손을 입에 가져갔다.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그사이 이사마야가 제인에게 말했다.

"제인 선생님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담당 반의 학생인데, 5반 맞죠?"

"네에. 그래도 괜찮아요. 성정이 그른 아이가 아니고, 실력도...."

실력도....

그러고 보니 프론디어는 강한 걸까?

방학 전이 잠깐 떠오른다. 기말고사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1등을 차지한 프론디어.

그 직후 방학이 되어서 기억은 희미해졌으나, 프론디어의 강함은 척도로 나타낼 수가 없었다. 어느 것 하나 익숙한 방식이 아니기에.

"...뭐, 아무튼 저로서는 이 이상 사고를 안 치길 바랄 뿐이에요."

제인은 마치 기도하듯 그렇게 읊조렸다.

* * *

슬슬 가닥이 잡혔다.

수소문을 위해 내가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접근할 때마다 그들이 깜짝깜짝 놀라곤 했는데, 정중하게 물어보면 그래도 다들 제대로 답해주었다. 그동안의 이미지 개선 노력이 아주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학생들이 알고 있던 콘스텔 내에서 도는 소문과, 까마귀가 물어온 정보를 종합한 결과.

우리는 어느 교실 복도 앞에 도달했다.

"이거네."

나와 까마귀는 눈앞의 벽을 보았다.

[퀴니에 드 비에트는 시체에 대한 극도의 공포증을 갖고 있다.]

[퀴니에 드 비에트는 실력을 키우기 위해 콘스텔에 입학한 것이 아니다. 콘스텔에 숨은 것이다.]

마법 대자보로 새겨진 이것.

나뿐만이 아니라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벽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부채로 표정을 가리고 있는 퀴니에도 있었다. 가리고는 있으나 그 눈가를 보건대,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선배."

"아, 프론디어."

"최근에 떠들썩한 소문들은 전부 헛소문으로 나왔는데, 이건 왜 남겨두고 있나요?"

퀴니에가 고개를 저었다.

"남겨두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럼...."

"이 대자보, 안 지워져."

그렇게 말하고 퀴니에가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마나가 피어올랐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 대자보를 지우는 마법 같은 거겠지.

허나.

파지직, 전류가 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퀴니에의 마법이 공중에서 사라졌다.

"상당한 수준의 보안 마법이야. 이 정도 되면 제대로 된 수순으로 해제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려. 아마 빈키스 선생님이나..., 에드윈 정도는 되어야 해제할 수 있을 거야."

퀴니에가 설명하는 동안에도.

주변에는 다른 학생들의 불쾌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퀴니에는 안 들리는 척 했지만 그럴 리 없다. 애초에 들으라고 말하는 것들도 있으니까.

"퀴니에 선배, 이 소문에 대해 할 얘기가 있어요."

"난 없어."

퀴니에는 홱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뒤에 대고 말했다.

"헛소문이잖아요. 신경 쓰지 마요."

"벌써 사흘이 지났어. 이거 전부 해제하고 지우는 데까지 못해도 2주는 더 걸려. 그레고리가 퍼트린 소문은 전부 헛소문으로 끝나고, 이 글귀는 남아 있으니까. 난 포기하기로 했어."

그렇게 손을 팔랑거리며 퀴니에는 걸어갔다.

그 뒷모습은 일견 평소와 같아 보였으나.

그 얼굴을 내게 보여주지 않는 이상, '평소와 같은 뒷모습' 따위 하등 믿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프론디어 학생. 여기 있었군요."

교사 제인의 목소리였다.

다만 나는 좀 더 급한 과제가 있었다.

"퀴니에 선배. 얘기 좀 해요."

"귀찮게 굴지 말고 너 할 거 해. 선생님이 부르시잖아."

그렇게 퀴니에는 계속 걸었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한 번 보고, 복도 천장을 보고, 마법 대자보를 보았다.

그리고.

직조, 동시 복제

황궁 무기고

창, 동종 복제 12기

콰과과과───!!

그 벽을 박살 내놓았다. 대자보고 뭐고 전부 날아가, 휑한 바깥으로부터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

"...??"

주변에 있던 학생들 눈이 죄다 휘둥그레졌다. 저 뒤에서 '프론디어어어어?!' 하는 제인의 외침이 들렸다.

퀴니에는 내가 벽을 부숴놓고 나서야, 그 걸음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보고, 놀라서 부채로 가리던 것도 잊고 그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미친놈 보듯 하는 퀴니에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다시 말했다.

"얘기 좀 해요, 퀴니에 선배."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6화

35장 진품

프론디어가 벽을 박살 내자 그 소리를 듣고 주위의 학생들이 전부 몰려들었다.

모두가 프론디어의 시선을 따라 퀴니에를 보았다. 퀴니에는 얼굴 전체에 귀까지 다 빨개졌다.

"잠깐이면 됩니다."

"너, 너, 너, 진짜 미친 거야?!"

퀴니에는 뚫린 벽으로부터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의 촉감이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진짜라는 걸 알려주었다.

그사이 학생들은 더 몰려와 퀴니에와 프론디어의 대치구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뭐야, 뭐야? 무슨 일이야?' 하는 속삭임이 이곳저곳에서 날아들었다.

퀴니에는 진짜로 죽고 싶어졌다. 아, 그래서 프론디어가 벽을 뚫어준 건가? 저기로 뛰어내리라고?

"...프론디어 학생."

그때 싸늘한 목소리로 프론디어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교사 제인이었다.

프론디어가 돌아보자, 제인은 안광으로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이 프론디어를 보았다.

"퀴니에 학생과 얘기하기 전에, 저랑 좀 얘기하죠?"

"...아, 제가 굉장히 바쁜 일이 있어서,"

그렇게 제인의 시선을 피하는 프론디어였으나, 제인은 그의 어깨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저도, 잠깐이면 돼요."

제인은 웃었다. 프론디어도 웃었다.

결국 프론디어는 제인의 뒤를 따랐다. 척척, 멀어지는 프론디어를 보며 퀴니에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퀴니에에게 프론디어는 목을 젖히고 또 한 번,

"그럼 방과 후에 봐요. 제가 선배 교실로 갈게요."

"알았으니까 꺼져!!"

마지막까지 복도에 소란을 일으키는 프론디어였다.

* * *

제길, 제인 때문에 생각보다 지체되었다. 아니, 나 때문인가.

나는 제인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의도가 선행이었다는 점에서 겨우 참작되었다. 부숴진 벽은 뭐, 가문이 알아서 수리비를 지원해 줄 거다.

방과 후에 퀴니에의 교실로 가니 다행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온 걸 확인하고 표정이 대번에 안 좋아지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기다리고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용건만 빨리 말해. 나 바쁜 몸이니까."

"여기서는 안 됩니다. 장소를 이동하죠."

내 말에 퀴니에가 슬쩍 나를 보았다. 미심쩍은 눈초리였다.

"정말로 그 정도로 중요한 얘기야? 내 온유한 학창 생활을 파괴할 만큼?"

"전 선배의 학창 생활을 지켜주려고 온 겁니다."

틀린 말은 안 했다.

그레고리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지금 콘스텔 내에 숨어 있는 인더스 학생은 퀴니에를 노리고 있을 테니.

"...에휴, 알았다."

퀴니에는 체념한 듯 일어섰다.

"어디로 갈래?"

"음, 단련실로 가죠."

"단련실? 그렇게 멀리? 그냥 근처 빈 교실도 있는데."

"'바람 속삭임'도 보안에 완벽하진 않다는 걸 최근에 알았거든요."

방음 마법, 바람 속삭임.

그저 소리를 좀 줄여주는 어설픈 게 아니라 완전히 차단시켜 버리지만, 생각보다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한다. 말리아의 '감각 공유' 능력만 봐도 그렇고.

그에 비해 단련실은 그 공간 자체가 훈련 집중을 위한 모든 배려가 다 되어 있어, 이미 보안을 생각할 때 완벽한 처리가 완성되어 있다.

"흠, 그래, 정말로 그만한 사안인지 보겠어."

퀴니에는 귀찮아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주었다.

...물론.

퀴니에를 보내고 나서 단련실에서 단련을 할 거라 동선이 절약된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

개인단련실 안에서 나와 퀴니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았다.

난 퀴니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 많은 소문들 중, 퀴니에의 소문만은 어딘가 다른 냄새를 풍겼다.

그레고리는 프론디어에게 최대한 많은 학생들이 집중되도록, 모든 소문들을 프론디어와 연결시켜 놓았다.

그러나 퀴니에의 소문은 이질적이다. 오로지 퀴니에에게만 향하는 악의적인 소문.

...그리고 '사실'이기에 질이 안 좋다.

"즉, 다른 사람이다?"

"네. 소문들의 들끓는 사이, 누군가 기회를 엿본 거죠."

흐음.

퀴니에는 눈을 살짝 가라앉히고 부채 끝을 입가에 대었다. 그 눈동자가 천천히 좌에서 우로 훑었다. 마치 눈앞에 뭐라도 쓰여 있는 것처럼.

나는 퀴니에를 살피며 물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없나요? 퀴니에 선배의 적이라든가."

"...내 적들만 모아도 콘스텔의 운동장 정도는 꽉 채울 수 있을 텐데."

무슨 삶을 살아온 거지.

아, 생각해 보니 나도 다를 거 없구나.

"하지만 학생들 중에선 적지 않겠습니까? 범인은 콘스텔의 학생일 확률이 높습니다."

"학생이라...."

이번에는 퀴니에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학생이라고 하니 또 모르겠네. 언제나 다른 가문 사람들만 상대해 봐서."

확실히 퀴니에가 다른 학생들과 적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럴 틈도 없을 테고.

그럼 적은 역시 '인더스'인가. 퀴니에의 가문을 노리는 건가. 목적은 돈?

"...그런데 말이야, 프론디어."

"예."

"나는 사실, 너도 좀 의심스러운데."

퀴니에는 그 눈동자를 힐끗 나에게 향했다. 퀴니에답게, 그 눈빛은 어느새 나를 판별하는 천칭이 되어 있었다.

"너 예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 죽는 거 싫어하잖아요'라고."

"...그건,"

"그건 누구나 싫어하잖아요, 라고 말할 거라면 진짜로 화낸다? 넌 그걸 날 설득하기 위한 재료로 삼았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잖아."

역시 그렇게 쉽게 넘어가주진 않나.

물론 나는 퀴니에의 '시체 공포증'을 알고 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까지도.

허나 늘 그렇듯 '게임으로 해봐서'라는 말은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퀴니에에게 함부로 거짓말을 했다간, 정보통이자 상인인 그녀에게는 언젠가 들통나기 쉽다.

그렇기에.

"비밀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뭐?"

퀴니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툭-

퀴니에는 자신의 부채를 내 가슴 위에 얹었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동작이었으나, 이 부채 안에는 고속 사출이 가능한 칼날이 내장되어 있다.

"나 방금 전에 너 의심한다고 했는데? 각오하고 하는 얘기야?"

퀴니에는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해 항복이나 자백을 받아냈다.

그 안에는 이러한 살해 협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방식은 황후 필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나는 필리 앞에서는 정말로 죽을지 걱정하지만, 퀴니에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필리가 회색이라면, 퀴니에는 검은색 셀로판지를 덮은 백색이다. 눈물이 날 정도의 착한 성정을 악이라는 껍데기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하여, 나처럼 퀴니에가 어마어마한 선인이라는 걸 아는 입장에서는.

"그렇다 해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협박은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좋아. 그렇다면 세 가지만 대답해."

그리고 퀴니에는 세 손가락을 들었다.

"하나. 너는 내가 가진 '약점'을 언제부터 알게 됐어?"

"아주 오래전부터입니다."

이 세계에 내가 들어온 것보다도 한참 전이다.

"둘. 너는 그 약점을 '정보통' 따위를 통해 들은 거야?"

"아닙니다."

내가 직접 보았다.

"셋.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공유한 적이 있어? 혹은 내 약점을 알았을 때 같이 알게 된 사람이 있어?"

"없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건 이전 세계의 얘기다.

"...."

퀴니에는 내 눈동자를 가만히 살폈다. 나는 그저 진실만을 말했기에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그래, 좋아."

그리고 퀴니에는 부채를 거뒀다.

당장의 테스트는 통과한 모양이었다.

"네가 아니라면, 그래. 대충 예상 가는 녀석이 있긴 해."

"그게 정말입니까? 누구죠?"

나는 생각 외의 정보에 몸을 기울였다.

범인을 빠르게 찾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다. 인더스의 꼬리를 잡을 수 있으면 더 좋고.

"아, 근데 그 전에."

"전에?"

퀴니에가 다시 부채를 내밀었다. 이번엔 내 코 앞이었다.

"빚진 걸 돌려받아야겠어."

"...빚진 거요?"

내가 되묻자 퀴니에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설마 그새 잊었냐'는 듯한 눈초리였다.

"설마 그새 잊었어?"

정확한 눈빛이었다.

"아, 뭐였죠?"

"조종당하는 학생들이 강당으로 몰려들었을 때! 내가 가면 써서 다시 유인했던 거 기억 안 나니?!"

아.

그건 정말로 빚진 게 맞았다.

학생들을 막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으나, 퀴니에의 공로는 너무 명확하고 강력했다.

무엇보다,

"내 약점을 알고 있는 네가! 이러면 안 되지!"

그렇다. 그렇기에.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당연히 보답해드려야죠."

"...흥. 그래. 알면 바로 일어나. 가자."

"...어딜 말입니까?"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 할 일이 있어."

그렇게 말하며 퀴니에는 툭툭 털고 일어섰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물론 보답해드려야겠지만, 뭐든 하겠습니다만, 좀 나중에 하면 안 됩니까?"

나로서는 소문을 섞은 범인을 찾는 게 더 중요한데.

아니, 퀴니에의 입장에서도 그렇지 않나?

"안 돼. 오늘 물품이 들어왔으니까. 애초에 너한테 맡길 걸 상정해서 맡은 일이라."

이게 무슨.

그럼 처음부터 날 써먹을 예정이 되어 있었다는 거 아닌가.

"그리고 뭐, 내 생각이 맞다면 범인 잡는 건 나중에 해도 돼."

"예?"

"아무튼. 너 박물관 때의 일, 잊지 않았지?"

"...아."

그 짝퉁 그림 얘기인가.

설마 그럼 이번에 물품 들여왔다는 게.

"그 능력, 좀 써먹자."

퀴니에는 날 보며 씨익 웃었다.

간만에 보는 '소악마'다운 얼굴이었다.

* * *

퀴니에의 저택에 도착하자 의외의 환대가 있었다.

"비에트 가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 네. 환대해 주시니 송구합니다."

집사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빙긋 웃었다.

"듣자 하니 젊은 나이에 아주 뛰어난 실력의 감정을 하신다고."

"...아,"

나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보다 옆에 있던 퀴니에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떤 물품이든 한눈에 '진품'을 판별해 낼 수 있는 감정사라고."

...그렇군. 퀴니에가 나를 감정사라고 소개했군.

어쩐지 이 환대가 이해가 간다.

"그러면 들어오시죠. 가주께서 주문한 물품이 많으십니다."

"뒤샹, 왠지 뼈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집사의 이름이 뒤샹인 것 같다.

퀴니에와 뒤샹은 서로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를 안내했다.

도착한 곳엔 과연, 엄청난 양의 온갖 장식품들이 쌓여 있었다.

"감정사님께서는 저기 앉아주시면 됩니다. 저희 사용인이 알아서 앞의 선반 위에 물품을 올려드릴 겁니다. 그러면 감정을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집사는 뒤편의 의자로 나를 안내했다. 어딘가 고풍스러운 의자였고, 그 앞에는 집사의 말대로 깨끗한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저 위에 물품이 올라가면 의자에 앉은 사람과 눈높이가 맞을 것이다. 세심한 배려였다.

"오는 길이 힘드셨을 텐데 조금 쉬시겠습니까? 다과와 차, 커피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뇨, 바로 시작하죠."

나는 얼른 끝내고 싶었기에 안내된 의자에 앉았다.

집사는 끄덕이고 사용인을 불렀다.

"그럼, 첫 번째 물품입니다."

사용인은 조심스럽게 손에 들어 선반 위로 물건 하나를 올려놓았다. 목걸이였다. 박혀 있는 보석이 상당한 가격을 짐작게 해주었다.

"가운데에 박힌 루비는 세공사 브라이언 님께서 흠결 없이 처리한 물품으로,"

"진품입니다."

나는 집사의 설명을 끊고 말했다.

앞서 얘기했듯 얼른 끝내고 싶다.

"...진품이라고요? 이제 막 보기 시작하셨잖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내 말에 집사 뒤숑이 나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다소 엄해지더니, 그는 퀴니에에게 다가가 조그맣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 얘기를 들은 퀴니에가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퀴니에가 무어라 반박했으나, 뒤숑이 한층 진지한 눈빛으로 속삭이자 퀴니에의 고개가 피곤하게 젖혔다.

'...아, 연기라도 할걸.'

아무래도 얼른 끝내기는 글러 먹은 듯했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7화

35장 진품(2)

집사 뒤샹은 퀴니에와 무언가를 속삭이더니, 곧 나에게 왔다.

"죄송합니다, 감정사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역시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 해드린 것 같습니다. 금방 차와 다과를 대접해드리겠습니다."

"그러죠."

뒤샹은 나의 대답에 또 빙긋 웃고는 하녀를 불렀다.

"여기, 감정사님께 차와 간식을. 아끼지 말고 가장 좋은 것을 내오거라."

"예."

그러곤 뒤샹은 곧장 방을 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감정사를 부르려나 보네."

"맞아."

퀴니에는 감출 것도 없다는 듯 순순히 긍정했다.

내가 하고 있는 방식을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 다른 감정사를 부르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퀴니에가 소개시켜 준 사람이고, 실례를 보일 수 없으니 몰래 부르려는 것이다.

"저 아저씨, 아직 내 이름도 안 물어보네. 자기소개도 안 하고."

"그러게. 신용이 없네."

그렇게 말하며 퀴니에는 쿡쿡 웃었다. 니 집사잖아.

그 사이 하녀가 차와 다과를 가져왔다. 뒤샹이 말한 대로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고급품이었다.

차를 마시며 기다림을 섞은 휴식을 취하고 있자 뒤샹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어떻습니까 감정사님. 입맛에 맞으십니까?"

"이 차는 누구라도 좋아할 것 같네요."

나는 솔직하게 칭찬했다. 뒤샹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 지었다.

사람은 대개 좋은 말은 짧게 오가고 나쁜 말은 길게 오가는 법이다.

칭찬은 한두 마디로 끝나지만 반박은 수십 마디의 언성이 반복되고, 자리에 없는 사람을 칭찬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하나 뒷담은 한 시간을 내리 떠들어도 지치지 않는 것.

그러니 말을 짧게 하고 싶다면 칭찬을 하자.

나는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럼 준비가 되면 시작해 주십시오."

"네, 바로 하죠."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고, 하녀가 솜씨 좋게 식기를 챙겨 물러났다.

그리고 아까 했던 것처럼 사용인이 물품을 올려놓았고, 나는 보고서 말했다.

"진품입니다."

"...."

그 뒤 사용인은 이번엔 아무 말 없이 그 물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다른 방에 있는 감정사에게 전달하는 모양이었다.

....

한참이 지나고, 나는 의자에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좀 건방져 보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턱이라도 괴고 있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져서 잠들 거 같다.

"다음 물건입니다."

사용인이 선반 위에 도자기를 올려놓았다.

"진품."

사용인은 그걸 가지고 나갔다. 한참 뒤에야 다시 들어왔다.

"다음 물건입니다."

사용인이 선반 위에 목걸이를 올려놓았다.

"진품."

사용인은 그걸 가지고 나갔다. 또 한참 뒤에야 다시 들어왔다.

"다음 물건입니다."

사용인이 선반 위에 세공된 보석을 올려놓았다.

"...다이아몬드. 얼마짜리인지는 모릅니다."

"예. 확인 감사합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퀴니에가 끼어들었다.

"야, 너 제대로 하는 거야?"

"엄청나게 제대로입니다. 제 영혼과 몸이 한 몸이 되어서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가짜가 나오길 바랄 정도입니다."

하고 있는 작업은 별거 없다.

공방에 담아 물품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분석' 스킬을 사용하고.

문제는 이 일은 너무 지루하다.

다른 감정사들이야 돋보기로 세세한 흠집이나 결을 확인하고, 해당 자료들을 뒤져가며 분석해 진품을 판별하겠지만, 나는 그냥 보면 되니까.

게다가 내가 판별한 물품을 또 새로 부른 감정사에게 가져가서 이중 감정을 하게 하니,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차라리 뒤샹에게 '감정사 새로 부른 거 알고 있으니 옆에서 같이 하게 해줘요.'라고 전하고 싶을 정도다.

게다가 지루해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주위를 보세요, 선배. 여기서 눈 초롱초롱한 건 선배밖에 없습니다."

처음엔 이 저택의 하녀나 집사들도 나를 보면서 흥미로워했다. 퀴니에가 나를 한눈에 진품을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감정사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진짜로 '한눈에' 확인한다.

집사뿐만 아니라 이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그냥 어떤 물품이 나오든 '진품'이라고 대답하고만 있는 사람처럼 보일 테니.

그야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걸 봤으면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는 나를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제발 가짜가 나와라.'

그리고 사용인이 다음 물품을 올려놓았다.

이번엔 펜던트였다. 가운데에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었고, 그 주위를 상당히 복잡한 기계가 정교하게 짜여져 있었다. 원의 고리가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어, 축을 기준으로 각 고리를 회전시킬 수 있었다.

...호오, 이건.

"진품입니다."

나는 말했고 사용인이 물품을 가져가 밖으로 나갔다. 이제 다시 감정사가 감정을 마칠 때까지 나는 또 기다려야 한다.

그때 퀴니에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거, 뭔가 있는 거지?"

그 말에 나 또한 속삭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 표정이 그랬으니까."

역시 퀴니에다.

물품을 감정하는 거라면 몰라도, 사람 속을 읽는 것에는 그녀와 견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사용인과 뒤샹이 같이 들어왔다.

"음, 그, 감정사님?"

"예."

"방금 보신 펜던트 말입니다만. 그것이...."

나는 볼을 긁적였다. 뒤샹이 무어라 말할지 예상이 갔다.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 편하게 해주도록 하자.

"다른 감정사를 불렀죠?"

"...예?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분을 여기로 모셔주세요.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린 것 같으니."

뒤샹은 내 말에 조금 놀란 듯하더니 깊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나갔다.

곧 중년의 마른 남자가 뒤샹과 함께 들어왔다. 가는 눈매에 안경을 쓰고 있으니 상당히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일어섰고, 우린 서로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쿠엔틴이라 합니다."

"프론디어입니다. 반갑습니다."

상대가 성을 말하지 않기에, 나도 이름만 소개했다.

어차피 로아흐의 이름을 대는 건 여기서 의미도 없고, 좀 추하니까. 그런데 옆에 있던 뒤샹은 내 이름을 듣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딴 곳을 보며 갸웃하고 있었다.

"먼저 말씀드립니다만, 이 펜던트는 가짜입니다."

쿠엔틴이라 자신을 소개한 감정사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펜던트를 들어 보였다.

"이 중앙의 보석은 분명 진짜입니다. 허나 보석을 둘러싼 고리의 연결부, 그리고 각 고리마다 손상 정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부품이 바꿔치기 된 것이죠. 처음에 산 사람이 무언가의 이유로 파손, 분실되어 다시 끼워 넣은 것이라 추측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쿠엔틴은 나를 흘겨보았다.

"젊은 감정사님께서는 보석의 진위만을 보고 진품이라 말씀하신 것 같으나, 제대로 된 감정사라면 물품의 전체적인 디테일을 신경 써야 하지요. 아직 경험이 부족하신 것입니다."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으나, 그 눈빛에 엄청난 경멸이 들어있다.

아마 내가 감정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뒤샹에게 들었겠지. 나를 사기꾼으로밖에 보고 있지 않으니, 이 정도 변호도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서 말한 셈이다.

그래서 좀 미안해진다.

"이 펜던트의 고리가 바뀐 이유는,"

베테랑 감정사의 의견을 무너뜨려야 하니까.

"제작자가 부품을 교체했기 때문입니다."

하, 쿠엔틴의 조소가 들린다.

"제작자가 부품을 교체한다니, 무슨 이유로요? 처음에 만들어놓은 장식을 바꾸게 되면 가치가 떨어질 뿐입니다."

쿠엔틴의 말은 사실이었다.

쿠엔틴 스스로가 그러했듯 교체된 부분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헌 장식과 새 장식이 섞여 있다면 당연히 전체 물품의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그러나 이 펜던트는 그런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 펜던트의 고리는 장식이 아닙니다."

나는 장갑을 끼고 쿠엔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쿠엔틴은 눈가를 살짝 찌푸렸지만 별 말 않고 펜던트를 내게 주었다.

나는 펜던트를 들어 고리를 이리저리 조작했다.

보자, '분석' 스킬이 알려주는 메뉴얼에 따르면....

철컥.

끼릭끼릭.

정확한 순서대로 조작하자 어느 순간 겹겹이 쌓인 고리가 저 알아서 움직였다.

일렬로 정렬한 순간 고리들은 그 간격을 좁혀 보라색의 보석 안쪽을 틈 없이 채웠다. 그러자 이번엔 보석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미스틸테인은 나뭇가지가 아니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속은 거라고! 미스틸테인은 우연히 신력이 깃든 나뭇가지 따위가 아냐! 애초부터 만들어진 무기라고! 그건─]

두 사람의 음성이 들리고, 곧 도중에 끊어진 것처럼 종료되었다.

...음, 이런 소리가 들릴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이 펜던트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보안 처리가 된 기계장치죠. 근데 이제 마공학을 좀 곁들인 겁니다."

"...."

내 설명에 모두가 놀라서 그저 보고만 있었다. 쿠엔틴도 마찬가지였다.

"이 펜던트는 정확한 순서로 조작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동되려면 상당한 수준의 정밀한 작업으로 만들어져야 하죠. 그래서 부품이 계속 바뀐 겁니다. 즉 이 펜던트는 제작자의 수많은 실패가 온전히 담겨져 있는, 최종 완성품이죠."

마치 보고서의 '진짜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 수정' 같은 거다.

나는 뒤샹을 보았다. 쿠엔틴을 보고 말하는 게 맞는 거 같지만, 너무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것 같아 뭐라 하기가 그랬다.

"그래서, 이건 진품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가격은 모르겠습니다."

"...그, 그렇군요."

뒤샹은 얼결에 대답했다.

* * *

퀴니에는 지켜보는 동안 순수하게 놀라고 있었다.

프론디어를 믿고 있기는 했지만, 그가 보여주는 과정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저 장식이 기계장치라는 걸 깨닫고, 그 조작을 직접 행해서 보여줬어.'

게다가 그걸 확인하려고 감정하는 데에 고작 3초 정도 걸렸다.

그렇군. 저 펜던트는 암호가 걸려 있는 녹음기였구나. 아무나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을 음성으로 저장해두었다가 중요할 때 꺼낼 수 있도록.

...그런데 그 암호를 해제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용도 뭔가 신경 쓰이고.'

미스틸테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굉장히 심각하고 급박한 목소리. 게다가 완료되지도 못하고 도중에 끊어졌다.

그러나 우선은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퀴니에는 프론디어에게 다가갔다.

"프론디어, 대단하네. 역시 실력이 녹슬지 않았어."

그리고 퀴니에는 뒤샹을 지그시 보았다.

"뭔가 할 말 없어?"

"...함부로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감정사님. 아니, 프론디어 님."

뒤샹은 이번엔 허리를 90도로 꺾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사죄를 보고 퀴니에는 미소 지었다. 프론디어를 의심한다는 건 소개해 준 퀴니에의 눈을 의심한 것과 같았으니.

그럼 그렇지, 내 눈은 정확하다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퀴니에 선배."

그때 프론디어가 입을 열었다.

"응?"

"그저 사죄만 받고 끝내기에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응?"

프론디어는 퀴니에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저 미소 어디서 봤는데, 어디더라.

아. 내가 거울 앞에서 연습하던 그 얼굴이랑 비슷해.

"선배도 언제나 '보상'을 중요시하는 편이죠?"

"...아, 어?"

"제가 퀴니에 가문에다 물건을 팔 테니, 좀 사주시겠습니까?"

"어? 뭘 샀는데?"

"테르스트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퀴니에는 그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백화점은 말이야 듣기 좋지만, 이 대륙에서 '백화점'이란 정말이지 온갖 물건의 가치의 천장과 바닥이 끝도 없는 곳이다.

"물론,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프론디어는 여전한 미소를 퀴니에에게 보였다.

아카데미의 무기복제자 1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