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길드 확장(2)
다음 날.
강현은 이른 아침부터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자신의 전용 회장님 의자에 몸을 뉜 강현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종말이라..."
처음 한세연을 만나던 날.
그녀는 신태길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
-강현 씨는 현재의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 것 같습니까?
-저는 5년 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어야 3년. 그 안에 존립의 위기에 처해지는 국가들이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그
사실 그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베이트 길드 사건이 막 끝났을 때였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일한 해답은 자신의 성장뿐이라 여겼다.
"뭐, 이제 와서 그게 바뀐 건 아니지."
강해진다.
단지 그것에 스스로의 성장뿐만 아닌 길드의 성장이 추가됐을 뿐이다.
"그래... 강해지면 다 해결될 일이야."
강현이 단숨에 맥주 캔을 비워냈다. 그리고 빈 캔을 보지도 않고 집어던졌다.
-팅, 탁!
한차례 벽을 두들긴 캔은 정확하게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재문아."
"네..?"
강현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구석에서 일을 하던 한재문이 움찔했다.
"길드원 모집 공고 때려."
"예..?"
"길드원 모집하라고."
"갑자기요..?"
"어."
"갑자기 그러시면... 저기 예산 문제도 있고... 또 어떤 분야에 사람이 필요한지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일단 공고 때려! 하라면 하는 거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어!?"
"예..."
한재문이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사무 인력도 대대적으로 뽑아 줄게.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저기... 인원은 어떻게..."
"전투원만 100명 정도 뽑을 거니까 지원자 최대한 많이 받아둬."
"예."
조용히 키보드를 두들기던 한재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길드장님..."
"또 왜?"
"자격 요건은…."
"나이, 성별, 레벨, 아무런 제한 없음. 대신 무조건 독한 놈들만 받는다고 미리 공지해 둬."
"예."
"다른 거 물어볼 거 있으면 지금 물어봐."
"이제 없습니다..."
"그래. 짜증 내서 미안하다."
답답한 마음에 한차례 머리를 쓸어 넘긴 강현이 냉장고로 다가갔다.
덜컥, 하고 문이 열리자 보이는 수십 캔의 맥주들. 강현은 그것을 흐뭇하고 바라보고는 다시 한 캔을 꺼내 들었다.
"좋다. 이게 인생사는 맛이지."
"길드장님."
시원하게 또 한 캔을 비워내던 도중 누군가 강현에게 다가왔다.
"왜?"
"저기... 누가 찾아오셨습니다."
"누구?"
대답은 바로 뒤쪽에서 들려왔다.
"나다."
"뭐야. 로리 오타쿠. 뭔 일이냐. 오늘 복장은 더 쇼킹하네."
윤나래. 그녀가 배데스 길드 사무실에 찾아온 것이었다.
"흥. 추잡한 피규어나 파는 변태가 내 예술을 알겠어?"
윤나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같은 복장은 하고 있었다.
"거 참 고상한 예술이네."
"뭐?!"
"됐고, 왜 왔어?"
"나도 여기 길드 들어오려고."
"푸후훕!"
윤나래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강현이 마시던 맥주를 뿜어냈다.
"꺄아악! 더럽게 뭐하는 짓이야?"
"미쳤냐?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들어와?"
"왜? 이런 누추한 곳에 나처럼 귀한 분이 오시면 감사합니다 해야지. 나 정도면 굉장히 고급 인력이거든?"
짐짓 화를 내는 듯한 표정. 하지만 강현은 그녀의 눈동자가 저 멀리서 게임을 하는 안유성을 힐끔거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쯧, 밝히기는."
"뭐, 뭐가?!"
"됐고. 나는 아무나 길드원으로 받지는 않아."
"..?"
"길드에 들어오고 싶으면 당연히 시험을 치러야지."
"내가?!"
"그래. 네가 하지. 아니면 누가 해?"
"너. 지금 나 영입하고 싶어서 매달리는 길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강현의 냉정한 말에 윤나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래. 해 까짓것. 그깟 시험 통과하면 될 거 아냐?"
"좋네."
"그래서 시험이 뭔데?"
윤나래를 지긋이 바라보던 강현이 돌연 씨익 웃었다.
"나랑 1대1 대련이다."
**
"좋은 말로 할 때 장비 착용하지 그래?"
"필요 없어."
윤나래는 완전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모든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강현은 평소 사무실에 있을 때처럼 맨몸.
"자만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윤나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어.'
물론, 강현도 생각이 없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차이가 뭔지 보여주지.'
이미 윤나래의 전투 방식에 대해서 안유성에게 들었다.
강현은 아무런 장비가 없어도 충분히 이길 거라 확신했다.
"규칙은 없음. 대련을 통해서 적당히 센스만 보이면 통과시킬 거야."
"흥."
"뭐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라도 나한테 항복을 받아내면 당연히 무조건 통과고, 부길드장 자리 넘겨줄게."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여기 증인이 몇 명인데 내가 그런 구라를 치겠냐? 들어오기나 해."
"간다!"
윤나래가 기합을 넣었다.
'할 수 있어.'
강현의 전투력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하지만 그중에는 다소 과장된 것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원래 이길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장비를 벗고 있다면 말이 다르지.'
장비만 없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슈욱
윤나래는 가볍게 견제할 생각으로 마력 화살을 날렸다.
'전반적인 신체 능력, 전투 스타일 파악만 끝나면 넌 끝이야.'
-펑!
"어?"
분명 강현은 근접 공격을 주로 하는 딜러이다. 따라서 예상대로라면 강현은 마력 화살을 피하며 자신에게 달려들어야 했다.
"뭐하냐."
그런데 강현은 제자리에 서서 자신의 스킬을 손으로 후려쳐 버렸다.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들어와. 아니면 먼저 간다."
"흥!"
코웃음으로 당황을 숨긴 윤나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마법 저항력이 높나? 아니면 쉴드 마법? 숨겨진 장비가 있어? 아니면 액세서리?'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민에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어차피 견제용으로 날린 거였잖아. 제대로 다시 스킬을 날려보자.'
그녀는 굉장히 다양한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
기본적인 원소 마법부터 시작해서 전투에 유용한 보조 마법들까지.
원래라면 그것들을 적절히 조합해서 강현을 천천히 괴롭혀줄 생각이었으나, 그 무엇도 강현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윤나래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너, 너, 너!"
"뭐."
"무슨 개수작이야!"
"뭔 개소리야."
윤나래가 잔뜩 흥분해서 소리치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도대체 왜! 내 마법이 통하지 않냐고! 템빨이야? 아니면 숨겨둔 스킬?!"
"자꾸 헛소리할래?"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너 지금 좀 당황한 것 같은데, 오히려 진짜 당황한 건 나거든?"
"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윤나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안유성한테 좀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영 시원찮네. 걔 눈이 이렇게 낮았나?"
"..."
"이딴 느릿느릿하고 파워도 약한 공격을 요즘 세상에 누가 맞아줘?"
강현은 자신의 몸을 속박하고 있는 스킬을 내려다봤다.
"이 스킬도 말이야. 뭐 마력 구속 그런 거겠지? 그런데 너무 강도가 약해. 끽해야 E등급 정도겠네."
"그걸 어떻게...?"
"이건 해제 스킬도 필요 없이."
-뚜둑, 뚝
강현의 움직임에 마력 구속이 허무하게 끊어졌다.
"힘으로 끊기는데? 몬스터한테 효과가 있어? 이딴 게?"
윤나래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무슨 상황이냐고?!'
처음에는 반쯤 장난이었지만, 나중에는 정말 진심으로 마법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강현은 멀쩡했다.
강현이 마법을 피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강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력도 절반 넘게 떨어졌는데... 도대체 저 괴물은 뭐야?'
그 모든 마법을 전부 맞은 강현은 겨우 생채기 정도만 생겼을 뿐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없어졌네...'
그나마 생겼던 작은 상처들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너 사람이 맞기는 한 거야? 사실은 몬스터가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거나 그런 거 아냐!?"
"지랄. 신부님 작두 타는 소리 하고 있네. 이게 끝이면 넌 탈락이다."
"으으... 기다려! 이제 시작이니까!"
윤나래는 근접전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높으면 검으로 해결하면 돼.'
그녀는 올라운드형이었다.
근접, 원거리, 서브까지 고루 평균 이상의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접근전으로 강현과 싸운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탓!
자리를 박찬 윤나래가 날아가듯이 강현에게 다가왔다.
"하압!"
빠르게 횡으로 휘둘러지는 검. 맨몸인 강현은 뒤로 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챙.
"쯧. 이럴 줄 알았다."
"뭐야..?"
그러나 이번에도 예상은 처참히 무너졌다. 그녀의 검이 강현의 맨손에 허무하게 붙잡힌 것이다.
"어금니 꽉 깨물어."
"자, 잠깐..."
크고 단단한 주먹.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 위협적인 흉기가 윤나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퍼억!
**
"생각보다 효과가 좋네."
쓰러진 윤나래를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
"엔트리아의 외피는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시켜야겠어."
강현의 체력 스텟은 31. 거기에 웨인의 비기를 활성화하면 50. 마지막으로 칭호와 액세서리를 합치면 61이 된다.
그 무시무시한 체력 스텟에 B등급의 엔트리아의 외피까지 더해지자 어지간한 공격은 아프지도 않았다.
그나마 자잘하게 생기는 상처들은 상급 육체 재생(A)으로 순식간에 아물어 버린다.
간혹 날아드는 위험한 마법은 임의로 마력을 방출시키면 충분히 무마 가능한 수준이었다.
"솔직히 상성이 좋았어."
윤나래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하지만 결국 어떤 분야든 최고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특히나 공격력 같은 경우, 비슷한 수준의 능력자들보다 오히려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공격이 안 통하는데 센스고 뭐고 필요 없지."
최고의 센스와 강력한 파괴력.
그 두 가지를 안유성은 완벽하게 잡았지만, 윤나래는 그러지 못했다.
"쯧. 어쨌든 키워는 봐야지."
하지만 자신을 상대로 상성이 나쁜 것일 뿐, 다른 적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약한 공격력의 경우 충분히 보완할 방법이 많았다.
"야."
생각을 끝낸 강현이 윤나래를 불렀다.
-짝, 짝
"..."
뺨을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성아."
"예."
"물 한 바가지만 퍼와 줘."
"알겠습니다."
어쩐지 들뜬 듯한 모습의 신성아가 재빨리 물을 퍼오고, 그것을 받아 든 강현이 거침없이 윤나래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푸아아악!"
"정신 차려."
"하아, 하아. 뭐지..?"
"뭐긴 뭐야. 네가 쳐 발린거지."
"아..."
잠시 멍하니 있던 윤나래에게 이윽고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턱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은 덤이었다.
"흐, 흑... 흐흑..."
"너 우냐?"
"흐윽! 흐아아앙!"
윤나래는 억울했다.
지난 1년간 생사를 넘나들며 노력해온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흐흑, 네가 뭔데!"
"됐고, 넌 탈락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길드에 들어오기엔 너무 약해."
"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윤나래는 눈물 콧물 가리지 않고 질질 흘려대며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녀의 짙은 화장이 순식간에 번졌다.
"나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들어갈 거야!"
"진짜 들어오고 싶냐?"
"그래!"
"그러면 네 태도부터 고쳐."
"뭐..?"
"앞으로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하면서 길드장님이라 부르고, 시키는 건 무조건 군말 없이 따라."
"그, 그건...!"
"꼽으면 들어오지 말든가. 대신 들어오면 언제든지 다시 나랑 붙어도 돼. 이기면 네가 길드장을 하든 뭘 하든 신경 안 쓸게."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고민에 휩싸였다.
'저 변태한테 길드장님이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서 존댓말까지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한다고..?'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자신을 본뜬 피규어가 헐벗은 채로 인터넷에서 팔리고 있었다.
"그건 안 돼. 이 변태야!"
"이게 미쳤나!? 싫으면 곱게 꺼져!"
"간다! 가!"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붙잡으며 윤나래가 잽싸게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강현 님."
"응?"
윤나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신성아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영입하시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맞아."
"그런데 저렇게 두시는 겁니까?"
"조만간 다시 찾아올 거야. 뭐 안 오면 어쩔 수 없고..."
"예."
그리고 다음 날.
마법처럼 강현을 찾아온 윤나래는 길드 가입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예..."
"내가 누구지?"
"기... 길드장 님이요..."
"그래! 내가 네 길드장 님이지! 크하하하-!"
강현이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는 모습은 정말 변태가 아닌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79화 길드 확장(3)
79. 길드 확장(3)
서울에 위치한 마천루.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건물의 최상층에서 한 남자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음..."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남성의 사무실 하나. 족히 수백 평은 될 법한 공간을 통째로 쓰고 있는 비효율적인 공간 활용의 극치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러한 사치 정도는 여유롭게 부려도 될 정도의 세계에 속해있었다.
"안유성. 그놈이 강현이란 자의 길드에 들어가 있다고?"
"예."
미소를 지은 남자가 자리에 앉았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소파가 부드럽게 그를 안아 들었다.
"그 양아치 같은 놈에게도 드디어 쓸모라는 게 생겼군."
"..."
"안유성은?"
"지금 아래에 대기 중입니다."
"불러와."
"예."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는 연결된 마이크에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금세 거대한 문이 열리며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앉아라."
"예. 아버지."
**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자신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나약한 놈.
그게 안유성이 기억하는 가장 오랜 된 기억이었다.
천천히 시간이 흐르고, 안유성이 성장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호통을 쳤다.
그것에는 항상 언어적, 육체적 폭력이 동반되었다.
그랬던 그가 유일한 취미이자 안식처를 찾은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사고로 상처를 입어 처음으로 자신의 피를 본 날이었다.
다친 팔과 다리가 쓰라렸지만, 그는 묘한 안도감을 얻었다.
동시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크큭. 흐히히흑...
피를 보자 고통과 함께 수반되는 쾌감. 그 쾌감은 금세 다른 곳으로 번져갔다.
자신에게서 작은 곤충.
작은 곤충에서 작은 동물.
그 뒤에는 사람까지.
다른 것들을 파괴하고, 그 피를 볼 때 젖어드는 쾌감이 그를 유일한 안식으로 인도했다.
그 때문에 처음 튜토리얼이 시작되고 몬스터가 등장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에 덜덜 떨었지만, 그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희열을 느꼈다.
-마음껏 파괴하고, 부술 수 있어.
그는 폭주했다.
항상 던전에 틀어박혔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강한 아이템, 스킬을 모았다.
내다 버린 자식 취급을 받아도, 돈만은 항상 넉넉하게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친놈아!
그렇게 멈출 줄 모르고 달리기만 하던 그의 폭력성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강현을 만나고 나서이다.
강현을 만나고 안유성은 처음으로 평범한 일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요즘 능력자가 되었다면서. 제법 바쁘다 들었다."
겨우 안식을 찾은 그의 일상에 다시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는 여전했다. 60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눈에서는 광채가 흘렀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오자 안유성이 손을 꽉 쥐었다.
"듣자 하니 그 강현이라는 자와 붙어 다닌다지?"
"예."
"도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이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지 궁금해졌다."
"그건..."
"데려와라."
당연하다는 듯 떨어지는 명령에 안유성은 따르지도, 반박하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대답해."
"..."
"20년 만에 너에게도 쓸모라는 게 생겼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냐?"
"죄송합니다..."
"그래. 너 따위 놈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
"나가."
안유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거대한 펜트하우스에서 벗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강 비서"
"예. 회장님."
"강현이란 놈. 내 앞에 데려다 놔."
"알겠습니다."
**
강현과 신성아. 이제는 단짝이 된 둘은 C등급 던전 하나를 박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C등급 던전도 이제 제법 무난한 것 같지 않아?"
"확실히 그렇습니다. 아직 보스 사냥은 제법 버겁지만요..."
베난디의 숲 클리어 이후 3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다.
그동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베난디의 숲이 C등급 던전 중 최상위에 위치한 던전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상성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참 재수가 없는 경우였지."
"맞습니다."
잠시 스마트 폰을 확인하던 강현이 신성아를 바라봤다.
"요즘 B등급 던전이 나타난 걸로 난리네. 우리도 가볼래?"
"아직 정보가 많이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정보? 그런 건 몸으로 겪으면서 배우는 거지. 인생은 실전이야. 실전."
"..."
인생은 실전이다.
신성아는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돌아올 말은 뻔했다.
"그나저나 안유성은 왜 안 나온 거야? 던전 간다 하면 자다가도 뛰쳐나오는 놈이."
"볼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한동안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던 도중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던 것이 왔다.
"왔네."
한눈에 봐도 배데스(Badass) 길드 소속임을 알 수 있는 요란한 밴(Van)이 둘 앞에 멈춰 섰다.
"가자."
"예."
밴에 탑승한 강현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강현의 모습에 신성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그냥.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까 해서."
"으음..."
"성아야."
"예?"
강현이 성(姓)을 빼고 이름으로만 신성아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름 공격에 당황한 신성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검술 연습을 해야 할까?"
"음, 오, 아, 예."
"뭐라는 거야?"
신성아의 괴상한 말에 강현이 눈을 흘겼다.
"검술 등급을 더 올리시려는 겁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신성아가 정상적으로 말을 이었다.
"어. 고민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다."
얼마 전 강현은 검술이 아닌 마력으로 승부를 보자 다짐했지만, 복면인을 만나며 다시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또 검술을 연습하자니 효율이 좋지 않았다.
"강현 님의 검술은 C등급으로 알고 있는데, 이미 충분히 높으신 것 아닙니까?"
"보통 능력자보다 높으면 뭐해, 주위에 괴물들이 수두룩한데."
상급 검술(C)
검을 쓰는 능력자들 중에서는 나름 상위권에 위치한 등급이기는 했다.
확실한 통계는 아니지만 대략 상위 30% 안에는 들어갈 것이다.
"주위에 상위 0.1%가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지."
"확실히 그것도 그렇군요."
"솔직히 내가 검에 대해 재능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 이대로면 죽도록 뒹굴어 봤자 A등급에 오를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야."
답답한 마음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궁술 따로 있지?"
"예."
"등급이 뭐야?"
원래 능력자들끼리 서로의 스킬, 스텟을 묻는 것은 실례지만 강현과 신성아, 둘 다 그런 것을 신경 쓸 사이는 아니었다.
"B등급으로 오른 지 두 달 정도 됐습니다."
"뭐?! 왜 그렇게 높아?"
"처음 활을 잡고 시작했을 때 D등급까지 단번에 올랐습니다. 아마 이전부터 활을 다뤄오던 경험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B까지 올렸다니. 그것도 두 달 전에?"
"별거 아닙니다... 헤헤."
신성아가 다른 것을 포기하고 주야장천 활만 연습한 것을 고려하더라도 높은 수치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단 말이지."
'나도 검술만 죽도록 파면 B등급까지는 오를 것 같긴 한데...'
시간이 아까웠다.
강현은 신성아가 활을 다루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지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자신도 이미 비슷한 시간을 검을 다루는데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다.
"도착했습니다."
강현이 고민하는 사이, 밴은 어느새 길드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차량에서 내린 강현이 때마침 걸어오고 있는 안유성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디 갔다 왔어?"
"집에요."
"그래? 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뭘요?"
갑작스러운 강현의 자신을 붙잡고 흔드는 강현의 모습에 안유성이 미친놈 보듯 강현을 바라봤다.
"너도 검술이나 궁술 같은 기본 스킬 있지?"
"예."
"등급이 어떻게 돼?"
"무기술 B, 둔기술 A인데요."
"뭐?"
순간 이해하지 못한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기술 B에 둔기술 A라고요."
"뭐야? 둔기술은 그렇다 쳐도 무기술은 또 뭔데?"
"그냥 저절로 생기더니 올랐어요. 어떤 무기를 쥐든 B등급으로 보정이라던데요."
"미친..."
강현은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재능충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둔기술은 왜 이렇게 높아?!"
"이것도 그냥 싸우니까 쭉쭉 오르던데요?"
강현의 몸속에서부터 깊은 분노가 올라왔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야."
"왜요."
"한판 붙자."
"또요?"
"시벌. 나도 검술 스킬 좀 올려보게. 왜? 싫어!?"
"형은 재능이 없어서 안 돼요. 효율 측면에서도 너무 구려."
"아니,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흥분으로 눈이 뒤집힌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꺼내려 하자 안유성이 제지했다.
"그런데 왜 형이 굳이 검술 스킬을 올리려고 하는 거예요?"
"무슨 소리야?"
"형 장점은 따로 있잖아요. 파워, 막무가내 전투. 거기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해요?"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한 것 같으니까 그렇지."
강현도 전투에 있어서 자신의 장점, 단점 정도는 잘 파악하고 있다.
다만, 조금이라도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무엇 하나라도 더 해보려는 것이다.
"그럼 잘하는 걸 더 잘하게 해야지. 못하는 걸 굳이 더 잘하려 할 필요 없어요."
"으음..."
"적어도 형한테는 검술 훈련이 너무 비효율적인 것 아닌가 싶은데."
자신도 평소에 생각했던 내용이었지만, 전투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안유성이 말을 하니 더욱 공감되는 느낌이었다.
"나도 그런 생각이었긴 한데, 결국 박살내고 부수는 걸로는 한계가 온 것 같은데..."
"그거 말고요."
"그럼?"
"형도 알고 있지 않아요? 본인이 마력에 제법 재능이 있다는 걸."
마력에 대한 재능.
솔직히 강현도 얼마 전까지는 본인이 마력에 대한 재능이 뛰어난 편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복면인의 완성된 마력 운용을 보고 그 생각 또한 버린 지 오래였다.
"마력 운용도 찾아보면 더 재능 있는 놈들이 수두룩할걸?"
"그건 당연한 거고요. 형은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이나마 나은 분야가 있는 걸 감사해야 해요."
"이 새끼가 아까부터!"
**
모두가 퇴근하고 텅 빈 사무실.
혼자 남은 강현은 오랜만에 독극물 족욕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마력을 직접적인 전투에 활용하려면 조금이라도 마력을 외부로 방출해야 하는데, 그것은 극심한 마력 소모를 동반한다. 거기에 엄청난 정신력 소모는 덤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평소 마력을 최대한 아껴야 하는 강현으로서는, 전투에 마력을 활용한다는 발상 자체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
"마력이라... 확실히 마력에 대해서 전반적인 이해도, 활용을 늘릴 필요는 있어."
독에 닿은 피부가 찌릿찌릿해지며 통증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욱 맑아지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스킬은 마력을 통해서 이뤄지는 거지."
날카로움을 더하는 일도양단.
마력을 폭발시키는 마력폭발.
근력을 상승시키는 거인의 힘.
피부를 단단하게 하는 엔트리아의 외피까지.
모든 스킬은 종류에 관계없이 마력을 소모함으로써 이뤄진다.
"엔트리아의 외피."
강현이 스킬을 활성화했다.
몸속의 마력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피부 근처에서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걸 느끼는 것만 해도 시간이 제법 걸렸지."
강현이 생각했을 때 이러한 작용은 스킬 그 자체의 권능 따위가 아니었다.
오직 마력의 움직임, 활용으로 이뤄지는 것.
"웨인의 비기."
스킬을 사용함과 동시에 전신에 힘이 차오르고 육체가 불타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비명을 지를 만한 격통이었지만, 강현에게는 익숙한 통증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다른 느낌이란 말이지."
어떤 작용으로 신체가 강화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실시간으로 파괴되는 육체가 회복되느라 마력이 격하게 움직여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하아..."
머리가 복잡해진 강현이 모든 스킬을 취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임으로 마력을 움직여 손으로 방출했다.
-우우웅
작은 소리지만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공간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시 손을 내려다보던 강현이 책상을 내려쳤다.
-콰앙!
가볍게 내려쳤지만 손에 있던 마력이 폭발하며 단숨에 책상이 박살 났다.
그러나 마력 폭발을 근접에서 사용할 때와는 달리 손에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지는 않는다.
"신체 강화와 폭발이 동시에 이뤄지는 건가?"
뭔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콰앙, 콰앙!
강현이 몇 번 더 책상을 내려쳤다.
"이렇게 해보면 어떻지?"
-쾅!
"이건?"
-콰앙!
늦음 밤에 시작된 강현의 폭발 실험은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
마력폭발(C → B)
마력감지(D → C)
마력운용(E → D)
무려 하룻밤 사이 등급이 오른 능력과 스킬들이었다.
강현은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지만, 상태창을 보는 순간 모든 피로가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흐뭇하게 웃던 도중, 돌연 사무실 문이 열렸다.
한재문이었다.
"왔냐."
"예..."
아침 7시.
항상 가장 먼저 출근하는 한재문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뭐야...'
길드 사무실의 집기들이 초토화되어 있는 모습.
한재문은 혹시 밤사이 누군가의 습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길드장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
"어? 하하하! 있기는 했지."
"혹시 지난번 그 테러리스트들이…."
"아냐. 그냥 뭐 연습 좀 한다고. 밖에서 했어야 하는데, 나가려니까 집중한 게 깨질 것 같더라고."
"..."
"상쾌한 아침인데 사무실 청소부터 시작할까?"
"예..."
뒤이어 출근하는 직원들도 두 사람이 청소하는 모습에 말없이 빗자루를 꺼내 들었다.
"이번 길드 확장할 때, 청소부도 몇 명 뽑아야겠다. 그렇지?"
"예에..."
한재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저 길드장님."
"왜?"
"내일부터 면접입니다."
"그래? 빨리 모였네."
길드원 모집을 말한 것이 벌써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예.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조기 종결시켰습니다."
사실 지원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강현은 의외의 말에 반색했다.
"그거 좋네. 몇 명이나 모였는데?"
"5000명입니다."
"뭐...?"
80화 길드 확장(4)
80. 길드 확장(4)
F등급 던전 라이커 부락.
중소 길드인 메이커 길드 소속의 던전이다.
"오늘도 열심히 하자!"
"예에!"
메이커 길드의 간부인 이윤형은 길드원들을 보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평소 이곳에서는 이윤형을 포함한 열 명의 메이커 길드원들이 사냥을 한다.
하루 일당 평균 20만 원.
목숨 걸고 일어하는 능력자의 직업 특성상 상당히 적은 수입이었지만, 매일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기에 불만을 가진 이는 없었다.
"오늘은 대박 떴으면 좋겠다."
"그러게. 뭐 안 나오려나?"
메이커 길드는 이 라이커 부락을 차지하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최근 정부의 정책으로 수도권에 던전이 대거 클리어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메이커 길드 같은 중소 길드는 F등급 던전 하나를 차지하는 것에도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화악!
그때 던전 입구가 열리며 몇 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당신들 뭡니까?"
"예?"
"여기는 메이커 길드 소유 던전입니다. 나가주세요."
보통 던전을 소유한 길드들은 약탈을 일삼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무력시위도 하지만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잘 타이르면 조용히 밖으로 나갔기에 굳이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 라이커 부락 아닌가요?"
"맞습니다."
"오늘 여기서 면접이 있다고 했는데..."
"뭐라고요?"
이윤형은 금시초문이었다.
'길드장님이 새로 길드원들을 모집하시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이 던전을 관리하는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불쾌했다.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길드장님께 연락하고 다시 말씀드릴 테니 일단 밖에서 대기해 주시죠."
"뭐야."
"배데스 길드 면접 여기 아니야?"
"저 사람이 모르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이윤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배데스?"
그도 배데스 길드에서 새로운 길드원들을 뽑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최근 너무 유명해진 강현의 길드였기에 원치 않아도 주위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당신들 배데스 길드 면접을 보려 하는 겁니까?"
"예. 혹시 배데스 길드 소속 아니세요?"
"아닙니다만..."
이윤형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였다.
-화악, 화악!
닫혔던 던전 입구가 다시 열리며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끊임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은 금세 100명을 넘기고 이내 던전 입구를 가득 메웠다.
족히 천명은 넘는 인원.
이윤형은 이제껏 이렇게 많은 능력자가 모인 것을 처음 봤다.
"면접은 언제 시작하는 겁니까?"
"이 많은 사람을 한 번에 테스트한다고? 가능해?"
"감독관이세요? 안유성님은 언제 오시나요? 완전 팬이에요!"
"빨리 시작해줘요!"
"아, 아니! 나는 배데스가 아니라 메이커 길드..."
이윤형은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당신들은 누구야?"
그때,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윤형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강현...?"
"와! 강현이다."
"야야. 강현 떴어!"
주위의 호들갑을 무시하고 강현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신들 처음 보는데 왜 우리 길드원인 척하고 있어?"
"아니 그러니까 저기..."
"뭐야. 들어오고 싶으면 오늘 면접보고 들어오든지 해요. 장난치지 말고."
"그게 아니고... 여기는 저희 길드 소유 던전인데요..?"
"예?"
뜬금없는 이윤형의 말에 강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저희 메이커 길드 소유 던전입니다만..."
"아, 소유자가 있는 던전이었구나. 미안해요. 몰랐네."
"하하..."
강현이 정말 몰랐다는 얼굴을 하자 이윤형이 안심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길드 소유 던전은 레이더에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지만, 뭐 모를 수도 있는 일이다.
'바빠서 확인을 못 했나 보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이윤형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주시겠습니까? 저희도 일을 해야 해서."
"예에?!"
순간 강현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뭐라고요?"
"던전에서 나가 주시면..."
"내가! 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걸까?"
"당연히 여기는 메이커 길드의 던전이…."
"오늘부터 이 던전은 배데스 길드 꺼야."
"...?"
"어차피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당신들도 힘으로 차지한 던전이잖아. 내 말이 틀려?"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던전 소유가 법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암묵적으로 길드끼리 영역을 나누는 것이기에 힘으로 뺐고 뺐기는 일은 흔했다.
당연히 메이커 길드 또한 다른 길드원과의 전쟁 끝에 이 던전을 차지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아닌데. 내가 오늘 잠을 못 자서 좀 예민하거든? 꼬우면 그냥 덤벼."
면접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갑자기 벌어진 설전에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같은 유명인이 이렇게 막 나와도 됩니까?"
"시발, 유명인이건 아니건 어쩌라고. 너희가 힘으로 차지한 걸 내가 다시 힘으로 뺏겠다는데 문제 있어?"
"이 작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결국 참지 못한 이윤형이 칼을 빼들었다.
-짜악
그게 이윤형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뭐, 뭐야?"
"지금 싸대기 맞은 거야?"
"나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강현은 쓰러진 이윤형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다른 메이커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오늘 하루만 빌려 쓸 테니까 곱게 가요. 일당 못 받은 건 우리 길드로 청구하시고."
"예, 예!"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끄덕인 메이커 길드원들이 곧장 이윤형을 둘러업고 던전 밖으로 나갔다.
"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면접을 시작하죠."
강현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면접 대기자들을 바라봤다.
"면접 전에 1번부터 1000번까지 각자 번호를 부여받았을 겁니다. 사전에 설명했듯이 100번 단위로 모여주세요. 순서는 관계없습니다. 그냥 100명만 모이면 됩니다."
강현의 말에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번호를 떠올리며 모여들었다.
1~100번
101~200번
⦙
901~1000번
100명씩 총 10개의 팀이 나눠졌다.
"다 된 것 같네요. 그럼 1번 팀 앞으로 나와 주시죠."
강현의 말에 100명 의 사람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면접 방식은 간단합니다. 삼십 분이 지났을 때 여기 서 있으면 1차 면접 합격입니다. 디버프 스킬은 사용 금지이고, 도망치는 것도 바로 탈락으로 간주하겠습니다."
"...?"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사람들이 의문에 빠져들었다.
"지금 여기 100명이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라 이겁니까?!"
"이런 시험 방식은 너무 잔인합니다.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어요."
곳곳에서 터지는 반발에 강현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아니니 안심하시죠. 여러분은 한 팀입니다."
"뭐야. 그러면 몬스터 사냥이 시험인가?"
"여기는 F급 던전인데... 너무 약하지 않아?"
"조용!"
다시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강현이 소리를 질러 정리했다.
"룰은 간단합니다. 여러분 100명은 한 팀. 그리고 적은 저 혼자. 삼십 분 버티면 승리. 이해 가요?"
**
"오늘 길드 면접일이 맞습니까?"
"예."
오랜만에 사무실을 찾은 한시환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길드장님은..?"
"형이라면 면접 진행하러 갔어요."
"아..."
안유성의 대답에 한시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부길드장님..?"
"그냥 편하게 불러요."
"그럼 유성 씨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예."
"유성 씨. 제가 면접 내용에 대해 들었는데, 그... 단체로 싸운다는 게 맞습니까?"
"맞아요."
안유성의 태연한 대답에 한시환을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걱정 안 되십니까? 저희라도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강현이 형을 걱정한다고요? 어차피 첫날은 저 레벨 위주로 뽑은 거라 상관없어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려 100명입니다. 게다가 제압까지 해야 하는데,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가보세요."
조금 까칠한 안유성의 말에 한시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으음..."
한시환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안유성이 신성아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예."
"웬일로 형이랑 같이 안 가고 사무실에 남았어요?"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별일이네요."
"새로운 길드원들의 재킷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그럼 그렇지."
잠시지만 신성아가 일을 한다 생각했던 안유성이 반성했다.
"그러는 안유성 씨는 왜 여기 계십니까?"
"가서 뭐해요. 재미도 없을 거."
"어쨌든 전투지 않습니까?"
"그게 뭐가 전투예요. 애들이랑 놀아주는 거지. 저는 육아에는 취미 없어요."
"그렇습니까."
**
한시환은 지금의 생활이 좋았다.
이전에 박세현과 함께했던 수호자 길드 시절.
항상 사명감 차 있던 그때도 분명 좋았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좋다.
자유로운 길드 분위기.
강함을 추구하는 것.
길드장 강현은 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악인도 아니었다.
항상 멋대로 행동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하고, 행동에 책임질 줄을 안다.
"가끔 너무 제멋대로라서 힘들게 하기는 하지만 말이지."
어쨌든 자신과 수호자 길드원들을 거둬준 강현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다.
그런 그가 곤란한 상황을 겪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도착했다."
F등급 던전 라이커 부락에 도착한 한시환이 곧바로 던전에 입장했다.
-화악
이제는 익숙해진 몸이 떠오르는 감각.
'제발 별 일이 없기를...'
마침내 던전에 들어온 한시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것밖에 안 돼? 이딴 깡다구로 뭘 하겠다는 거야?!"
주위에는 이미 수백 명이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 꿈틀거리는 것이 죽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제법 오래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다.
"뒤에 대기 순번들. 못할 것 같으면 지금 나가. 시간 아까우니까."
강현은 무기도 들지 않은 채로 면접자들을 두드려 패고 있었다.
그들이 온갖 스킬로 공격을 가해왔지만 기본적인 신체 스펙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래! 간다! 이딴 게 뭐가 면접이야?!"
"당신 신고할 거야!"
"거기 너. 다 들었어. 꼭 신고해라. 안 하면 뒤진다!"
면접은 절반 정도 진행된 듯했는데 뒤쪽에 대기자들 대부분이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뭐야. 한시환 씨?"
그때, 한시환을 발견한 강현이 말을 걸었다.
"예. 길드장님."
"여긴 무슨 일이에요?"
"길드장님이 힘들지 않으실까 해서..."
"확실히 이런 거지근성들 지켜보는 게 힘들기는 하네요."
말을 하는 강현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20분이나 남았는데 벌써 다 누웠어? 다음 들어와."
강현의 외침에 20명 가량의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다.
"뭐야? 이게 다예요?"
"..."
"601번부터 700번까지 맞아요?"
"예."
"나머지는?"
"다들 돌아갔습니다..."
"하."
옆에서 서있던 길드원의 말에 강현이 헛웃음을 삼켰다.
"그냥 지금 남은 지원자들 전부 모여 봐요."
원래라면 400명의 인원이 모여야 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을 전부 모아도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깔끔하게 마지막 한 번에 진행할게요. 규칙은 앞이랑 같습니다."
"..."
강현의 말에 모두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들어와요."
"으아아아!"
한시환은 분명 강현을 걱정해서 왔다. 그러나 이제는 남은 면접자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게 면접이라고...?'
이런 면접은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한시환이 생각하기에 이건 면접을 빙자한 구타였다.
"으악!"
-퍽
"꺄악!"
남자든 여자든, 덩치가 크든 작든, 모두가 공평하게 얻어맞았다.
그래도 앞의 장면들을 보고 남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동시에 안쓰러웠다.
'길드장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어쩐지 강현의 표정이 꽤나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더욱 걱정이 커져만 갔다.
"이거지! 이번에 남은 사람들은 근성이 좀 있네!"
피투성이가 돼서 바닥에 쓰러져도, 뼈가 부러진 것 같아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며 강현이 더욱 밝게 미소 지었다.
"삼십 분만 더 버티면 전원 합격이다!"
**
지옥 같은 면접이 끝나고, 실신한 사람들은 정부 사람들이 나와 부축해 갔다.
500명 정도 되는 대인원이라 그런지 파견 나온 이들도 상당히 대규모였다.
"왔어요?"
"하아, 강현 씨.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소식을 듣고 찾아온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해 준다면서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면접을 기획했습니까?"
"맞습니다. 이번에는 길드장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저도 사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신태길에 이어 한시환까지 거들자 강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
"농담하지 마시죠. 몇몇은 조금만 더 늦었으면 목숨을 잃을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하하. 이미 면접 보기 전에 서류에 사인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크흠. 농담이에요. 농담. 혹시나 해서 전문 치료인력도 다 대기시켜 놨잖아요."
신태길이 정색을 하자 강현이 민망함에 웃었다.
"어쨌든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기! 근성 있는 놈들을 뽑으려고요."
"근성 말입니까...?"
"예. 근성. 오늘 모인 애들은 전부 30 레벨 이하 저 레벨들이에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신태길 씨. 전에 저한테 한번 말한 적 있죠? 능력자들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고."
"예..."
능력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의 정체. 오래전에 한세연도 한번 한 이야기이다.
"그 이유가 뭐일 것 같아요?"
"으음..."
"제 생각에는 말이에요. 우선 재능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예요. 재능충! 그 재수 없는 놈들은 짜증 나게 레벨업도 빠르거든요."
"맞습니다."
같은 몬스터를 잡아도 성장 속도가 제각각이란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어요."
갑자기 무게를 잡으며 말하는 강현의 모습에 신태길이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게 뭡니까?"
"깡다구가 없다는 거."
"깡다구요?"
"깡다구! 다른 말로 오기, 독기, 배짱, 근성!"
"..."
"지금 능력자들한테 필요한 건 그 깡다구예요.
언뜻 헛소리처럼 들렸지만, 잘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능력자들은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일반인보다 강한 육체.
많은 돈.
무리하지 않고 E등급 던전만 공략해도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보다 많은 돈을 번다.
한 던전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어떠한 위기도 없이 편안하게 몬스터를 잡을 수 있다.
"현실에 안주해서 성장이 정체됐다는 겁니까?"
이런 작금의 상황을 정부에 있는 신태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거죠. 재능충이 아닌 이상에야. 강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치고받고 한계까지 몰아붙여야 돼요. 그런데 매일 잡았던 몬스터만 똑같이 잡고 있으니 하루 종일 사냥을 해도 레벨업이 될 턱이 없죠."
"으음..."
"그래서! 저는 멀리 내다보고, 정말 강해지고 싶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몸이 박살날 것처럼 아파도 일어나서 다시 싸울 놈들이 있어야 합니다."
"..."
"그러면 재능이 없어도 강해질 수 있어요.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벌어질 겁니다."
강현의 말에 신태길과 한시환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시환의 경우 당장 본인과 수호자 길드 출신들의 성장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회복 마법이 많이 대중화됐고, 앞으로 갈수록 좋아질 거란 말이죠. 제 생각에는 모든 능력자들이 즉사가 아닌 이상 죽지 않고 회복하는 시절이 분명 옵니다. 지금의 저처럼요. 그때가 되면 말이죠. 내 몸 안 사리고 몬스터 아가리에 머리 들이밀 줄 아는 놈들이 살아남고, 더 강해는 거예요. 내기해도 좋아요."
"하아..."
결국 신태길도 강현의 말에 설득당했다.
"그래서 이 짓을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면 해야죠. 길드 키우라면서요? 그런데 저는 어디 쭉정이들 아무나 다 받아들일 생각은 없거든요."
강현이 뒤를 돌아 면접자들을 바라봤다.
"저기에 서 있는 애들 봐요. 멋지지 않아요?"
강현의 시선 끝을 확인한 신태길은 강현처럼 웃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정말 독기에 가득 찬 눈빛으로 피투성이가 돼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현은 그중 한 여성에게 다가갔다.
"이런 일에는 남자고 여자고 없어요. 어차피 능력치 보정받는데 신체 차이가 어디 있어요. 안 그래요?"
강현이 웃으며 말했지만 여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응?"
그런 여성을 살피던 강현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선 채로 기절했어?"
이번 지원자들은 독기는 이미 강현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81화 변화의 바람(1)
81. 변화의 바람(1)
"야. 소문 들었냐?"
"뭐가?"
"배데스 길드 면접 있잖아."
"그 정신 나간 면접?"
"어. 통과자가 60명도 안 된다더라."
"5000명이 지원했는데? 거의 100분의 1 수준이네. 미친."
"너무하지 않냐? 아무리 강현이 있다지만 10대 길드도 아니고 신생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고작 그런데 들어가려고 고생하는 놈들도 제정신은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나 같으면 차라리 10대 길드 지원하겠다. 뭐하러 배데스 같은…"
"야야! 닥쳐!"
한창 주저리 떠들던 남자는 갑작스레 친구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갑자기 왜…. 허억!"
하지만 남자도 이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숨을 들이켜고는 입을 다물었다.
"크으으..."
그곳에는 던전 공략을 마친 배데스 길드원들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들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잠시 후.
배데스 길드원이 모두 지나가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발, 표정 살벌한 거 봐."
"저것들 던전에서 사람 죽이는 연습한다는 소문도 있어."
"앞으로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자..."
대한민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면접이 끝나고, 마침내 최종적으로 56명의 합격자가 나왔다.
그들은 레벨, 나이, 성별 모든 것이 천차만별이었고, 심지어 인종까지 다른 사람도 있었다.
가장 레벨이 높은 이와 낮은 이의 차이가 30이 넘게 날 정도로 각양각색인 이들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점만이 존재한다.
"진짜 독기 있는 놈들만 뽑았다는 게 사실인가 보네..."
바로 독기.
배데스 길드의 들어오는 조건은 단순하다.
독하면 됐다.
누가 보더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독하고, 끈기 있고, 무모하다면 누구라도 길드에 들어올 수 있었다.
"으으으... 죽을 것 같아."
"아직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
이미 강현에게 역량을 시험받고 길드에 들어온 사람들. 그 독한 사람들조차도 배데스 길드의 훈련을 겪으며 앓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야. 나 때는 말이야. 길드장님이 직접 지도했는데, 그때는 이것보다 더 심했어. 너희는 다행인 줄 알아."
그들의 가장 선두에 있던 남자 김진섭. 그는 수호자 길드 출신으로 초반에 강현을 따라 개고생을 했던 멤버들 중 하나였다.
"예. 팀장님."
김진섭의 레벨은 55.
현재 길드의 가장 정예인 수호자 출신 중에서도 제법 높은 편이었다.
덕분에 전원이 30레벨 이하인 신입 길드원들 사이에서 잔뜩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다.
"너희도 열심히 해. 나도 배데스 길드 와서 레벨업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으니까."
"재미 좋아요?"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껄렁한 목소리에 김진섭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어떤 새끼가 비꼬고 있어?"
"전데요."
"헉! 부길드장님..."
"하시던 거 계속하세요."
"아, 아닙니다."
안유성을 마주한 김진섭이 잔뜩 얼어붙은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 또라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세간에는 강현 이외에 배데스 길드에 대해 잘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김진섭은 알고 있다.
부길드장인 안유성이야말로 강현을 넘어서는 진짜배기 미친놈이라는 것을.
"어디 가십니까?"
"그냥 산책 나왔어요."
"예..."
평소 안유성은 던전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면 길드 사무실에 박혀 있다.
사무실에서는 주로 게임을 하고 길드 굿즈 상품을 디자인하는데, 간혹 신성아와 단검으로 다트를 해서 보는 사람들을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안유성이 산책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김진섭은 멍청하게 토를 달거나 하지 않았다.
"그럼 수고하세요."
"예!"
90도로 숙여진 김진섭의 허리는 안유성이 완전히 떠나기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
안유성은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아버지..."
이제는 완전히 자신에게서 관심을 끊은 줄만 알았던 남자.
앞으로 마주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관심을 끌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마 형을 직접 불러내겠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움켜쥐었던 남자다. 목표가 생겼으니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뤄낼 것이 분명했다.
"미리 말해줘야 하는데..."
차마 강현에게 먼저 말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 미안함, 자괴감.
그 외에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뒤엉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기력함에 안유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음?"
어디선가 들려오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안유성이 멈춰 섰다.
주위를 둘러보자 놀이터에서 혼자 그네를 타고 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상당히 낡은 놀이터.
저 아이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장소다.
안유성은 어쩐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느낌에 자연스럽게 발길이 이어졌다.
"...?"
갑자기 등장하는 자신을 보고 아이는 경계심을 가지는 듯했다.
안유성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뒤로하고 그네에 털썩 걸터앉았다.
-끼익, 끼익...
가볍게 땅을 박차자 낡은 쇠사슬이 아련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저씨도 그네 타러 오셨어요?"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경계를 풀었다.
"저는 여기 매일 와요."
안유성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이는 오랜만에 만나는 말 상대가 반가운지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다 학원 가서 없어요."
"너는 학원 안가?"
"저도 보내 달라 했는데 엄마가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놀면서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려요"
"..."
"아저씨. 여기 그네가 엄청…."
"아저씨 아니야."
"네?"
"형이라고 불러. 나 아직 19살이니까."
"아저씨. 엄마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아이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유성은 황당함에 그저 실소했다.
"아저씨."
"왜."
"몸에 그린 그림은 뭐예요?"
"문신이란 거야."
"얼굴에 구슬 같은 건 뭐예요?"
"피어싱."
"안 아파요? 엄마가 그런 건 나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 했는데."
"나 나쁜 사람 맞아."
안유성의 말에 당황한 아이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저씨 나쁜 사람이에요..?"
그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형아!"
"엄마!"
그 소리에 아이는 금세 얼굴이 환해져서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뭐하고 있어?"
"아저씨랑 이야기했어."
"무슨 아저씨?"
"저기 저 아저씨."
"..."
"몸에 그림도 많고, 자기가 나쁜 사람이랬어."
아이의 말에 여성이 당황한 표정으로 안유성을 바라봤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흡사 유괴범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다.
안유성은 최대한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태형아. 얼른 가자!"
"네?"
안유성의 미소를 보고 경악한 아이의 엄마가 허둥지둥 아이를 껴안았다.
"내일부터는 이 놀이터 나오지 마! 알겠지?!"
"엄마. 그럼 어디서 놀아…"
멀어지는 모자의 대화를 들으며 안유성이 실없이 낄낄거렸다.
"하하. 하하하..."
하지만 웃음도 잠시.
-끼익, 끼익...
놀이터에는 금세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로 채워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주변은 어둠이 들어서 있었다. 그동안 안유성은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갔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문제에 더 깊이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모래 위를 지나는 개미들.
평소라면 무시하거나 혹은 단숨에 짓밟았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가만히 바라보고 싶었다.
"뭐하냐."
그때였다.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유성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왔어요?"
"네가 무슨 곤충학자 빠브르야? 개미는 왜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집에 돌아가면 한 번에 죽이려고요."
"미친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강현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농담하지 말고, 진짜 여기서 뭐하고 있었냐. 폰도 꺼놓고 말이야. 내가 시발, 너 찾는다고 얼마나 돌아다닌 지 알아?"
"왜요?"
"네가 저번에 마력을 키워보라 했잖아. 성과가 좀 있었거든. 그래서 고맙다고 인사하려 했지. 겸사겸사 자랑도 좀 하고."
"축하해요."
"영혼 좀 담아서 말해라. 인마."
피식 웃은 강현이 안유성 옆의 그네에 걸터앉았다.
"야. 맥주 한잔 하자."
"저 아직 미성년자인데요."
"X같은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사 올 테니까 기다려."
"형도 제가 아저씨로 보여요?"
"무슨 개소리야!?"
징그러운 물건을 보듯이 안유성을 쳐다본 강현이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너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내가 마시는 거 사 왔다."
잠시 후, 검은 봉투를 들고 온 강현이 안유성에게 맥주를 내밀었다.
"저 술 처음 마시는데요."
"지랄."
"정말인데."
"진짜냐?"
"예..."
강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보통 아버지가 집에서 한 잔 주고 하지 않냐? 너 고등학교도 졸업했잖아."
"없어요. 그런 거."
"그럼 나한테 배워. 어차피 내일이면 1월 1일 새해잖아. 하루 먼저 마신다고 죽냐?"
그렇게 둘은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몸을 쓸어왔지만, 둘 다 어지간한 날씨에는 영향을 받는 몸이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 눈이다."
"그러네요."
그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함박눈이었다.
"형."
"왜."
"제 아버지가 형을 만나고 싶대요."
"나를? 왜?"
"뭐, 이유야 많겠죠."
"그래."
"..."
"그게 다야?"
"예?"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은 그게 다냐고."
"예."
"시발, 그런데 무슨 초상집처럼 분위기가 죽어있어?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형은 잘 모르겠지만, 이게 이미 큰일…."
"벌써 왔어."
"예?"
"벌써 사람 왔다고. 나는 누군가 했더니 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었나 보네."
강현의 말에 안유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손을 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뭘 어떻게 해. 자꾸 지랄하기에 면상에 한방씩 꼽아줬지."
"그리고요?"
"그리고 뭐, 자기들이 누군지 아냐 어쩌고저쩌고 시끄럽게 굴어서 한방씩 더 꼽아줬어."
"..."
"그 뒤로 아무도 안 오던데?"
아마 밑의 사람을 시켜 강현을 찾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여기서 멈출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이제 시작이다.
본격적으로 강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자신에게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협박 또한 서슴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
"너답지 않게 왜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원래 형 인기가 좀 많냐."
"그 정도면 고질병이네요. 크큭."
싱거운 농담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풀어지고, 맥주 캔을 단숨에 비워낸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디를요."
"네 아버지한테 가보자고. 얼굴 한번 보자는데 내가 그렇게 비싼 얼굴도 아니고. 까짓것 한번 보면 되지. 안 그러냐?"
"고마워요."
안유성의 대답에 강현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미친놈. 소름이 다 끼치네. 하던 대로 해. 인마."
82화 변화의 바람(2)
82. 변화의 바람(2)
"여기야?"
"네."
"더럽게 높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빌딩을 보며 강현이 감탄했다.
그 높이만 무려 666m.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으며 또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이었다.
혜성(彗星) 그룹의 혜성 타워.
자본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 강현과 안유성이 서있었다.
"이 빌딩이 통째로 너희 거야?"
"지금은 많이 팔았죠. 어차피 이거 말고도 빌딩은 많아요."
"부러운 새끼."
강현은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런 차원이 다른 규모의 돈덩어리를 보고 있자니 절로 배가 아파왔다.
"강현 씨. 맞으십니까?"
"예."
빌딩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가 안내한 곳은 VIP 전용 엘리베이터.
이런 것을 처음 본 강현은 내심 신기해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역시 최상층이겠지?"
"그렇죠."
"우리나라 양반들은 왜 그렇게 꼭대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내려다보는 기분이 그렇게 좋나?"
"크흠, 흠..."
강현의 필터 없는 말에 안에 있던 남성들이 헛기침을 했다.
잠시 후,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빌딩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강현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을 막아서는 거대한 문에 입이 벌어졌다.
"이거 문 한 짝만 팔아도 평생 먹고사는 거 아니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대답을 하는 안유성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야. 왜 이렇게 긴장을 해?"
"긴장 안 했어요."
말과는 달리 안유성의 두 주먹은 꽉 쥐어진 채로 떨리고 있었다.
"가자."
그런 안유성의 어깨를 한차례 두들겨 준 강현이 문을 열어젖혔다.
'많이도 모였네.'
이미 문밖에서 마력으로 감지한 상태였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기가 찼다.
공놀이를 해도 될 정도로 드넓은 공간.
중앙에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있고, 그 주위를 무려 200명이 넘어가는 능력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강현이 느끼기에 그들 하나하나가 최소 40레벨은 넘은 중상위권 이상의 능력자들로 보였다.
"재미있네. 기를 죽여놓고 시작하겠다는 건가?"
"아닐세. 이들은 그저 나의 안전을 위해서 모인 이들이니 신경 쓰지 말게나. 이리 와서 앉지."
소파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그의 머리는 이미 새하얗게 세어 있었지만 당당하게 펴진 어깨와 곧은 허리가 여전히 정정한 사내임을 알려주었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유명인을 만나다니, 반갑구만. 나는 안무석이라고 하네."
"하하. 그쪽이 좀 더 신사적으로 초대해줬으면 저도 반가웠을 텐데, 아쉽네요. 강현입니다."
강현의 대답에 순간 안무석의 눈이 날카롭게 찢어졌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젊은 친구가 조금 더 언행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이네."
"쓰읍... 그쪽은 부하 교육을 다시 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강압적으로 데려가고 싶었으면 적어도 한주먹거리인 놈들을 보내면 안 됐죠. 아, 이건 허약한 부하를 내보낸 상사 문제인가?"
강현의 광역 공격에 뒤에 있는 능력자들의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무석은 의외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세. 오늘 자네가 찾아온 것도 이런 이유는 아닐 테니."
"저도 바쁜 몸이니 용건만 간단히 하죠. 저를 찾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자네가 배데스라는 길드의 대장이라지? 안유성 저놈이 부대장(副大將)이고."
"맞습니다."
"그 정도면 굳이 더 보지 않아도 수준은 알만하겠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 내 밑으로 들어오게."
안무석의 말에 강현이 코웃음을 쳤다.
"하! 안유성.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 너희 아버지 머리가 많이 불편하시냐?"
"..."
강현의 말에 안유성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평소라면 웃으면서 받아쳤겠지만, 지금은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타올라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자네... 지금 도를 넘고 있어."
"도를 넘는 건 당신이지. 무슨 근거로 수준을 알만하다고 지껄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 밑으로 들어갈 수준은 아니니 다시 짱구를 굴려 보는 게 좋을 거야."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말조심하게."
안무석은 더 이상 분노를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본색을 드러낸 그에게서는 마치 역전(歷戰)의 전사와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가히 무일푼에서 시작해서 세계적인 거대 기업을 키운 남자다운 모습이었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능력자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모르는데."
"푸훕...!"
강현의 심드렁한 대답.
끝끝내 버티던 안유성의 입에서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감히 네놈들이 나를 가지고 놀아!? 안유성.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비웃느냔 말이다!"
"네까짓 거라... 얘는 당신이 말했듯이 배데스 길드의 부대장, 서브 마스터야. 내 부하라고. 언행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여."
-콰앙!
결국, 참지 못한 안무석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여기 모인 이들은 대한민국 6위의 강신 길드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올라가 단군의 자리를 빼앗을 이들이지."
안무석이 열을 내며 떠드는 동안 강현은 앞에 있는 차를 호로록 마셨다.
차 맛이 아주 좋았다.
"후우... 차 맛이 좋네."
"건방진 놈! 너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아 뒀다. 정부의 비호를 받는다지? 하! 고작 그것만 믿고 유난 떠는 거라면 큰코다칠 거다."
"..."
"강신은 원래부터 거대한 길드였다. 거기에 이제 나의 투자로 완전히 날개를 단 격이 됐지. 그런데 이제 조금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네까짓 놈이 강신 앞에서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강신 길드.
길드장을 중심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춘 거대 길드였다.
원래 국내 10위에 랭크돼 있었으나, 안무석 회장이 투자를 시작하면서 무섭게 치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시벌. 그놈에 네까짓. 네까짓! 듣기 싫어 죽겠네."
"네놈이 그런데도…!"
"저기요. 안유성 아버님. 저랑 내기 하나 하시죠?"
"갑자기 무슨 소리냐."
"며칠 전에 B등급 던전이 생기기 시작한 건 알 겁니다."
"..."
경어와 비어, 존칭과 비존칭을 넘나드는 강현의 근본 없는 화법에 안무석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B등급 던전 메인 코어 2개. 그걸 먼저 가져오는 쪽이 내기에서 이기는 겁니다. 당신 말처럼 정말 우리가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면 이 정도 내기는 가뿐히 이기겠죠."
"내기에 무엇을 걸 거냐."
안무석은 내기 내용에 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이 이길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쪽이 이기면 저를 마음대로 하시죠. 저도 군말 없이 따를 테니. 대신 내가 이기면..."
강현이 고개를 내밀며 음험하게 웃었다.
"나한테 딱밤 한 대만 맞읍시다."
"뭐...?"
"딱밤 한 대만 맞자고요. 왜? 싫어요?"
"지금 장난하는 거냐!?"
"장난 아닌데."
말을 하며 강현이 손을 들었다.
중지를 말아 엄지에 걸고, 탄성을 이용해 총알을 쏘듯이 중지를 날린다.
-콰아아앙!
조금 전 안무석 회장이 주먹으로 내려쳤던 두꺼운 원목 테이블. 천만 원은 넘어가는 그 테이블이 단숨에 수십 조각으로 박살 났다.
"장난 아니라고."
**
강현이 떠나고 난 후.
강현이 부순 테이블은 어느새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안무석 회장의 자존심은 테이블처럼 갈아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건방진 놈..."
소파에 앉아 있는 안무석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런 꼬맹이에게 놀아나다니. 후우..."
나오는 말과는 별개로 안무석은 강현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보여준 엄청난 괴력.
그것이 스킬인지 순수한 완력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고작 딱밤 한방으로 그 단단한 나무를 박살 내 버렸다.
시험 삼아 다른 능력자들에게 시켜 보았지만, 강현과 같은 위력을 보인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스킬을 사용했음에도 말이다.
"그냥 속 빈 강정은 아니라는 거냐."
안무석은 튜토리얼 1단계를 통과해 각성한 능력자였지만, 그뿐이었다.
굳이 그가 목숨을 걸고 괴수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안무석은 능력자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앞으로 세계의 판도는 어떤 능력자를 가지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초기부터 그러한 생각을 한 안무석은 능력자에 대해 철저히 파악했다.
고유 능력, 일반 능력, 스킬, 스텟. 그것들이 가진 효과와 가능성까지.
모든 것을 보고받으며 분석했고, 마침내 적당한 길드를 찾아냈다.
자신이 직접 능력자를 키우지 않고 이미 성장한 자들을 데려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새로운 능력자들을 키워낼 생각이었으나, 그의 생각보다 능력자들의 성장 속도가 훨씬 빨랐던 것이다.
특히나 현대의 군대가 벌써부터 능력자들에게 밀리라고는 안무석 회장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강신이라는 길드를 찾아냈으니 잘 된 일이지."
그러던 와중 그의 눈에 들어온 강신 길드.
처음에는 이름 없는 중소 길드에 불과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치고 올라오더니 단숨에 10대 길드의 말석을 차지한 길드이다.
적당히 강하며, 적당히 탐욕적이고, 적당히 도덕적이다.
강신은 여러모로 안무석이 눈독을 들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 1위인 단군을 제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지."
단군 길드.
국내 재계 3위 그룹을 이끄는 한신성 회장의 외손녀.
안무석의 생각에 단군이 국내 1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에 빠른 투자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이제 자신이 능력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투자하고, 연구를 시작했으니까.
안무석의 목표는 단순히 국내 1위 길드 같은 것이 아니었다.
혜성 그룹처럼 세계에서 우러러보는 길드.
그것이 안무석의 목표였다.
**
길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안유성과 강현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고마워요."
조용한 엔진음만 들리던 차 안에 안유성의 목소리가 떠돌았다.
"뭐가."
"그냥요."
"오그라드는 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강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너 걔들 상태 봤냐?"
"강신인가 하는 놈들이요?"
"어."
"왜요. 뭐가 이상했어요?"
"그냥... 묘하네. 예전에 약쟁이들 기억나지? 분명 다르기는 한데, 이상하게 걔들이랑 싸울 때가 자꾸 생각나서.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강현이 말을 이었다.
"평균 마력이 지나치게 높아. 전부 마법사로 이뤄지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지. 특히 길드장이라는 놈은 지금까지 본 능력자 중 거의 가장 높았던 것 같단 말이지."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야. 니가 쓰는 직감인가 예감인가 하는 거 완전히 만능이더만, 이번엔 뭐 없었어?"
"육감인데요."
"그거나 이거나."
강현의 말에 피식 웃은 안유성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확실히?"
"모르겠네요."
"뭐?"
"모르겠다고요. 솔직히 거기서 머리가 하얗게 돼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요. 형이 막말을 좀 했어야지."
"시발. 모르면 모르는 거지 왜 뜸을 들이고 지랄이야!"
"재미있잖아요. 크큭."
안유성이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형이나 누나나 감이 좋은 편이야.'
하지만 그 속내는 달랐다.
안유성은 분명히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다.
다만, 너무 추상적인 느낌이었기에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 것뿐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들을 마주하는 내내 그의 육감이 쉴 새 없이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건들이 벌어질 거라고.
'앞으로 재미있어지겠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83화 연구소(1)
83. 연구소(1)
"읏차. 슬슬 가볼까."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낸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나가십니까?"
"신태길 팀장 만나러. 나 혼자 갈 거니까 나올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따라 나오려는 신성아를 말리고 강현이 사무실을 나왔다.
"크으, 날씨 좋네."
새해가 밝았다.
튜토리얼이 시작되고 세상이 변한 지 벌써 1년이 지난 것이다.
작년의 강현은 이맘때 한창 추위에 떨어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1월 초의 쌀쌀한 날씨는 강현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크아아!"
차갑게 식어있는 맥주를 넘긴 강현이 탄성을 내뱉었다.
알싸한 맛에 시원한 목 넘김.
과하지 않은 탄산이 항상 그의 기분을 좋게 했다.
"여, 왔어요?"
검은색 세단을 본 강현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창문을 내리자 운전대를 잡은 신태길이 보였다.
"대낮부터 술입니까?"
"내가 운전할 것도 아닌데 어때요."
"하아, 됐습니다. 타시죠."
한숨을 내쉬는 신태길에 빙긋 웃어준 강현이 조수석에 탑승했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어렵게 잡은 약속입니다."
"예."
"혹시라도 사고 치시면 안 됩니다."
"아니. 내가 무슨 사고를 치고 다녔다고..."
말을 하던 강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많은 사건 사고들이 떠올랐다.
"음. 조금 사건에 휘말리긴 했네."
"아시다니 다행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해피 엔딩이었잖아요?"
"해피 엔딩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쯧. 그냥 넘어가죠."
한동안 창밖을 멍하니 보던 강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신태길 씨."
"예."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한테 주기로 한 무기는 어떻게 됐어요?"
"챙겨 왔습니다."
"오오."
지난 최민준 사건 때 강현은 빌게인의 장검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신태길에게 장검의 수리를 맡김과 동시에 임시로 사용할 무기 부탁했었다.
"장신구랑 내성 능력은요?"
"전부 가져왔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오오! 구하기 힘들다더니 하니까 되잖아요. 하하!"
강현의 웃음소리를 듣는 신태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만한 예산을 어디서 구한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강현 씨에게 투자하는 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능력, 스킬을 습득하는 아이템은 비싸다. 그리고 내성과 관련된 것은 더더더 비싸다.
신태길이 그 천문학적인 예산을 가져오기 위해 한 노력을 강현은 전혀 몰랐다.
물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예.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죠."
갑작스러운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부탁인데 그래요?"
평소 강현은 특수 능력자 관리팀 소속으로써 어지간한 것들은 다 나서서 해결해 왔다.
비록 사건들이 자신과 관련되어 있어 움직이기는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자신만큼 열심히 일한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건 아직 확실해진 것이 아니라. 조만간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쳇, 싱겁기는. 알겠어요. 할 수 있는 거면 다 해야죠."
내성 능력을 습득하는 아이템만 무려 100억 이상이다.
게다가 그 돈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평소 꽤나 뻔뻔한 강현도 이 정도로 귀한 물건을 받았으면 어지간한 일은 군말 없이 해주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뭔데요?"
"싸게 스킬북을 가져오는 조건으로 필요할 때 강현 씨를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예?!"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해외 파견 소식에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외에도 이번 사태 때 피해를 입은 수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쪽에서도 대한민국에 능력자 지원을 요청하면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요."
"현재 우리나라에 파견을 나갈만한 능력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
"저희 팀에서 지원을 나갈 것 같습니다."
"으음, 신태길 씨."
"예."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그냥 특수 능력자 관리팀 나갈래요."
"강현 씨. 혹시 '인쓰'십니까?"
"그게 뭔데요?"
"인성 쓰레기."
"뭐요?!"
강현이 소리를 지르며 날뛰자 승용차가 거칠게 요동쳤다.
"하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난동을 멈춘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갈 곳이나 이야기해줘요."
"용인 시에 위치한 아이템 연구소입니다."
"아이템 연구소라..."
"원래 한석 그룹에서 투자하던 연구소였습니다만, 그룹의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 여파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요?"
한석 그룹.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하여튼, 거기 가면 검을 고칠 수 있다는 거죠?"
"예. 최근 연구소의 소장인 정서빈 씨와 연락이 닿아서 가게 된 겁니다."
"검을 고칠 수 있는 다른 곳은 없어요?"
"현재로서는 지금 가는 곳이 유일할 겁니다. 한석 그룹이 초창기부터 아이템 연구에 열을 올려서 가장 성과가 높은 곳이거든요."
**
"반갑습니다. 신태길 팀장입니다."
"반가워요. 정서빈이에요."
"강현입니다."
"네. TV에서 많이 뵀어요."
"제가 좀 유명하긴 하죠."
정서빈은 3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연구소 소장' 이라고 하면 당연히 지긋한 노년의 남자를 떠올렸던 강현은 예상 밖의 미녀가 등장하자 감탄했다.
"능력이 좋으신가 봐요."
"젊은 여자가 소장이라니 이상한가요?"
"조금 어색하긴 하네요."
강현의 솔직한 말에 정서빈이 웃었다.
"요즘은 능력 지상주의 시대죠. 강현 씨와 같은 능력자들만 봐도 그렇잖아요?"
"으음..."
"능력자들은 나이, 성별, 인종, 국적. 아무것도 따지지 않죠. 오직 실력으로 던전을 부수고, 승리를 쟁취하니까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녀의 설명에 강현이 납득했다.
"그만큼 정서빈 씨도 능력이 있다는 말이죠?"
"네."
강현의 물음에 정서빈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우선 무기부터 볼까요?"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빌게인의 장검을 꺼냈다.
"B등급의 무기라. 내구도 강화까지 걸려 있네요."
정서빈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무기의 특성을 알아봤다.
"능력자였어요?"
"마정석과 아이템에 관한 연구를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죠."
빌게인의 장검을 집어 든 정서빈이 가볍게 벽에 두드렸다.
"일부러 박살 내려고 해도 쉽지 않을 텐데. 어지간히 험하게 다루셨나 봐요."
"그냥 뭐... 하하..."
할 말이 없었던 강현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수리는 가능해요?"
"다수의 마정석. 그리고 최소 B등급 이상의 마정석도 하나 있어야 해요. 높을수록 좋겠군요."
"음..."
"그리고 수리비용도 꽤나 들어요. 아직 효율이 그렇게 좋지 못해서."
비용 이야기에 강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제 막 길드 자금이 흑자로 전환됐는데...'
지금까지 강현이 돈을 쏟아부은 결과, 이제야 막 길드의 순익이 흑자로 돌아선 상태였다.
그마저도 본전을 찾으려면 한참은 걸릴 듯했다.
"얼마 정도면 됩니까?"
"최소 5억?"
"시벌..."
"몇 달 정도 기다리시면 훨씬 싼 가격에 수리할 수는 있을 거예요."
"됐어요. 바로 해주세요..."
강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 수리를 하면서 경우에 따라 약간의 성능 향상이 가능해요."
"그건 좋네요."
성능 향상이란 말에 강현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요?"
"무조건 단단하게, 그리고 무겁게. 옵션을 추가하는 건 관계없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옵션은 반드시 유지할 것."
"으음... 알겠어요."
정서빈은 충분히 가능하리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끝입니까?"
무기를 맡기고 생각보다 빨리 용건이 끝나자 강현이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거면 신태길 씨 혼자와도 됐을 것 같은데."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
"어떻게 보면 이제 본론이라 할 수 있겠군요."
갑작스러운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요?"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잠시 그녀를 따라 걷자 이내 넓은 홀이 나왔다.
"음...?"
홀을 둘러본 강현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장검, 카메라, 음식, 라디오까지 여긴 뭐하는 곳이에요?"
"한번 직접 확인해 보시겠어요?"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옆에 놓인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이름 : 맛없는 햄버거
등급 : F
내구도 : 1 / 1
설명 : F등급 마정석을 이용해 조제한 햄버거다. 상당히 맛이 없다. 복용 시 소량의 마력을 회복시켜 준다.
"이게 뭐야...?"
햄버거를 집자 떠오르는 설명을 보며 강현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이 아이템이 됐어..?"
"맞아요."
"이게 가능해요?!"
강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임상 실험을 거쳤죠. 조심히 다뤄주세요. 100만 원은 넘어가는 햄버거니까."
"허... 여러 가지 의미로 혁명적이네."
일반적인 음식이 아이템이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제 던전에서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겠네요. 짐도 가벼워질 테고."
"그렇죠. 여태껏 능력자의 인벤토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들은 한정되어 있었죠."
"..."
"무기, 갑옷과 같은 아이템들. 그 외에 것들은 하나하나 가방에 챙겨서 무거운 짐을 지고 움직여야 하죠."
정서빈의 말대로 능력자의 인벤토리는 한정적이다.
아이템으로 인정받는 것 외에는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이템은 대부분 던전에서 나오는 장비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설마 여기 있는 것들이 전부?"
"네. 전부 아이템이에요."
정서빈의 말을 들은 강현이 카메라를 만졌다.
이름 : 시험용 카메라 7
등급 : F
내구도 : 20 / 20
설명 : 정서빈이 만든 시험용 카메라이다. 마법과 과학의 합작품으로 마정석을 연료로 작동한다.
"조심해요. 그거 하나를 만드는 데 지금까지 수십억은 쏟아부었으니까."
강현이 얼른 카메라를 제자리에 내려놨다.
"엄청나네요. 던전에서 전자기기를 사용하다니."
"지금 목표는 던전 내부에서 통신이 가능한 장치를 개발하는 거예요."
"허..."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강현도 외국에서 그런 것들이 개발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실제로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뭡니까?"
뜻밖의 신문물을 접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강현은 이러한 것들을 자신에게 보여주는 의도가 궁금했다.
"지금까지 이것들을 개발하는데 얼마나 들었을 것 같아요?"
"많이 들었겠죠."
"무려 조에 가까운 돈이 들어갔어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얻은 수익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직 테스트 중이라 그런 것이지만, 몇몇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는데도 말이에요."
"왜죠?"
"생산 단가가 맞지 않아서요."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곧바로 납득했다.
"햄버거 하나를 몇 백만 원 주고 먹을 바에는 그냥 배낭을 싸고 가는 게 낫기는 하겠네요."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자가 국내에만 1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 능력자들 모두가 일반적인 회사원보다 많은 돈을 벌어드린다.
하지만 아무리 고수익의 능력자라도 던전 한번 공략하는데 굳이 그만한 돈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돈 모아서 더 좋은 장비나 맞추고 말겠죠."
"맞아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상황이죠."
정서빈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아이템들을 바라봤다.
"저는 순수한 연구자이자 과학자예요. 하지만 세상은 수많은 이해관계들로 얽혀있죠. 이 거대한 연구소는 무료로 운영되지 않아요. 모든 것은 천문학적인 돈으로 움직이죠."
"그렇게 보이네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성과물들 가지고는 투자자들의 인정을 받기 힘들어요. 우리 외에 이런 연구를 하는 곳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 가장 큰 투자처였던 한석 그룹이 손을 떼 버렸죠. 이대로면 길어야 한 달 내로 연구소가 문을 닫을 거예요."
"흐음..."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말을 저한테 하는 의도를 모르겠네요. 제가 돈이 제법 많기는 한데, 이런 연구소에 대줄 정도로 거부는 아니거든요."
"알고 있어요. 지금 연구소가 살아날 방법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는 것뿐이죠."
"그래서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강현 씨."
정서빈이 강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연구소와 제휴를 맺지 않겠어요?"
84화 연구소(2)
84. 연구소(2)
"우리 연구소와 제휴를 맺지 않겠어요?"
"제휴라니... 무슨 뜻이죠?"
강현의 물음에 정서빈이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예요. 저희와 계약을 맺어서 서로 협력하며 함께 성장하는 거죠."
강현이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로써 제가 얻는 이득.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요."
정서빈이 아이템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것들을 만드는 데는 대량의 마정석이 필요해요."
"그렇겠죠."
"배데스 길드에서 저희 연구소의 마정석 공급을 맡아주세요."
"공짜로?"
"예."
당당한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당황했다.
"지금 우리 길드 수입의 절반이 마정석 판매금액인 건 알아요?"
"생각보다 낮은 비율이네요. 보통은 70% 내외일 텐데."
정서빈의 예상보다 베데스 길드 수입에서 마정석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았다.
이는 베데스 길드의 수입이 다른 길드보다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거야 길드 굿즈도 제법 팔리기 시작했고, 몬스터 사체도 팔고, 게다가 우리 길드는 던전을 공략하면 코어는 무조건 박살 내니까요."
일반적으로 던전에서 사냥하는 능력자들은 코어까지 이동하지 않는다.
길드 단위로 움직인다 해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노말 코어를 제거할 뿐이다.
하지만 배데스 길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던전 공략을 시작하면 메인 코어까지 한 번에 공략하거든요."
"다른 길드보다 수입이 많을 수밖에 없겠네요."
"뭐,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마정석 판매 금액이 없이는 이제 유지가 힘들어요. 길드 규모를 계속 확장 중이라."
강현의 말을 들은 정서빈이 확신에 찬 얼굴을 했다.
"딱 한 달. 한 달만 버티면 돼요. 그 안에 분명 성과가 있을 거예요."
"무슨 근거로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 핫한 길드 배데스. 그곳에서 사용하는 아이템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분명 구매 문의가 많아질 거예요. 생산 단가 문제도 차차 나아지고 있으니 수익이 나는 것은 금방이겠죠."
"흐음..."
강현도 현재 배데스 길드의 유명세는 실감하고 있다.
이번에 모여든 길드 가입 희망자만 봐도 그렇다.
"사실 그것들은 부가적인 거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배데스 길드가 함께 함으로써 투자자들의 이목을 모을 수 있다는 거죠."
"결국 도박 아닌가요?"
"맞아요. 도박. 어차피 그 안에 성과가 없으면 우리 연구소는 문을 닫아야 해요. 그러니 도박이라도 해봐야죠."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연구소가 안정을 찾고 아이템이 팔리기 시작하면, 그 수익을 연구소와 길드가 나누자는 거죠?"
"네."
"정산 비율은?"
"연구소가 7 배데스 길드가 3."
"하, 참."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헛웃음을 삼켰다.
"지금 한 달 마정석 매출이 얼마인지 알아요? 그걸 투자하고, 가장 중요한 홍보까지 해주는데 우리가 고작 3이다?"
"길드에 필요한 아이템은 최대한 원가에 가깝게 제공해 드릴게요."
"그래서 성공할지 실패할지 확신도 없는 사업에 길드 돈을 쏟아 부어라?"
강현과 정서빈이 서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둘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듯했다.
"누굴 호구로 보나. 5대5. 이 정도면 많이 양보했어요."
"이만한 연구소를 운영하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요? 65 대 35"
"정서빈 씨. 연구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더니,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네요?"
"온전히 연구에만 관심을 가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죠."
그녀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5 대 5"
"아니... 정말 그렇게 해서는 남는 게…."
"대신!"
정서빈의 말을 막은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 홍보라는 거. 확실하게 해 드리죠."
**
한동안 이어진 강현의 설명에 정서빈은 결국 납득했다. 그렇게 정해진 최종 비율은 6 대 4.
아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강현은 미래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득이란 생각에 만족했다.
"끄아아! 피곤하네. 얼른 돌아가죠."
연구소 밖으로 나온 강현과 신태길은 곧장 차량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재미있었어요."
"그랬습니까. 하하."
재미있었다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저한테 주기로 한 아이템 언제 줄 거예요? 줄 거면 빨리 주지 왜 뜸을 들여."
"여기 있습니다."
신태길이 강현에게 주기로 한 장검과, 반지, 능력 습득 아이템(스킬북)을 꺼내 들었다.
강현이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집어가려던 순간, 돌연 신태길이 자신의 인벤토리로 되돌렸다.
"뭐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정서빈 소장에게 한 말 있지 않습니까?"
"예. 그게 왜요?"
"생각해보니 괜찮은 아이디어 같습니다."
"역시 그렇죠?"
연구소 홍보 전략.
강현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니까 빨리 아이템 넘겨요."
"거기에 정부도 한발 걸치게 해 주시죠."
"뭐요?"
"이미 위쪽에 허가는 받아둔 상태입니다."
"허... 이럴 때만 엄청 빠르네."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어떻게 걸친다는 건데요?"
"강현 씨가 시행할 그것. 좀 더 체계적으로 만들어서 몬스터 사냥에 교본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교본...?"
"예."
강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교본이라... 어쩌면 원래 하려던 것에 더 좋은 시너지가 나올 수도 있겠어.'
한동안 고민하던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하셨습니까?"
"예. 그렇게 하죠. 대신 제작 지원비 내놔요."
"..."
"싫어요? 싫으면 말고."
"알겠습니다."
똥 씹은 얼굴을 한 신태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이템 내놔요."
"쳇. 여기 있습니다."
아이템을 건네받자마자 설명을 확인한 강현이 감탄을 터뜨렸다.
"호오..."
이름 : 장인의 장검
등급 : B
내구도 : 398/400
설명 : 하세니스 제국의 이름난 장인 하라스가 만든 명검. 일반적인 철을 사용해 만들었지만 하라스의 솜씨에 의해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졌다. 하라스의 요청으로 뛰어난 마법사가 검의 마무리를 맡았다.
능력 : 날카로움, 자가수복
*날카로움 –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검의 예기가 극에 달해 있다.
*자가수복 –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검은 스스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와, 이거 물건이네요. 어디서 구했어요?"
"출처는 묻지 마시죠. 최대한 강현 씨에게 알맞은 장비들로 빼돌렸습니다."
"빼돌렸어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신태길이 헛기침을 했다.
"아닙니다. 구한 겁니다."
"빼돌렸구만."
"크흠... 팔찌와 스킬북도 살펴보시죠. 마음에 드실 겁니다."
씨익 웃은 강현이 팔찌를 살펴봤다.
이름 : 오리엔의 팔찌
등급 : B
내구도 : 97/100
설명 : 히오시스 왕국의 마법사 오리엔이 만든 팔찌. 마법 연구에 전념한 나머지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육체가 노쇠한 오리엔은 마법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능력 : 근력 5 스텟 증가, 체력 5스텟 증가.
열기 내성(F)
능력 : 열기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한다.
설명 : 열기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감소한다.
"이것들도 좋네요. B등급 장비가 이렇게 쏟아지나?"
"이번에 워낙 많은 능력자가 죽었으니까요. 마음에 드십니까?"
"예. 전부 좋아요."
"최대한 강현 씨가 사용하기 적합한 장비들만 챙겨 온 겁니다."
"빼돌리는데 힘들었겠네요."
"예. 정말 힘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신태길이 역정을 냈다.
"아니! 발품 팔아 구한 거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알겠어요. 알겠어. 왜 화를 내고 그래요? 답지 않게."
"크흠, 어쨌든 돌아가면 바로 시작하실 겁니까?"
"아뇨.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일단 무기 수리에 필요한 마정석부터 구해야죠. 계획은 그 뒤로.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강현은 대화를 하며 열기 내성을 습득하고, 오리엔의 팔찌를 착용했다.
액세서리는 총 4개만 착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기존에 쓰던 근력을 2스텟 증가시키는 반지는 뺄 수밖에 없었다.
"상태창"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3개
▫레벨 : 66
▫상세 능력치 :
·근력 30 (+4)(+5)
·순발력 30 (+3)
·체력 31 (+3)(+13)
·마력 34 (+3)(+4)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상급 검술(C), 하급 방패술(E), 최하급 석궁술(F), 중급 체술(D), 하급 둔기술(E), 마력감지(C), 독 내성(E), 마력운용(D), 열기 내성(F)
▫스킬 : 분노의 사자후(C), 상급 육체 재생(A), 일도양단(D), 거인의 힘(B), 마력폭발(B), 웨인의 비기(C), 엔트리아의 외피(B)
추가된 능력치와 열기내성을 보며 강현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을 때였다.
"도착했습니다."
"벌써요? 시간 잘 가네."
어느새 차량은 배데스 길드 사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고마워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예. 일이 시작되면 연락 주시죠."
떠나가는 신태길에게 손을 흔들어준 강현은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후우, 뭔가 일이 많아서 피곤한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제 시작이지."
본격적인 일은 이제부터였다.
**
길드 사무실에 도착한 강현은 안유성, 신성아를 포함한 주요 간부들과 한재문을 불렀다.
그리고 연구소에 다녀온 일을 말해주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전부 이해했지?"
"예."
"음식과 전자기기를 인벤토리에 넣고, 던전에서 사용까지 가능하다니. 정말 혁명입니다. 미국에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국내에서도 이렇게 발맞춰 움직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한시환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충분히 도박을 걸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계약을 맺은 거야."
"하지만... 길드장님. 현재 채취하는 마정석을 전부 연구소로 넘기면 당장 길드에 돈이 부족할 겁니다..."
"재문아. 너는 항상 돈이 없다는 말밖에 못 해?"
"아니... 그러니까..."
강현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한재문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었다.
"말 더듬지 말고 팍팍 말해봐!"
"돈이 부족합니다."
"내가 벌어다 주는 건 도대체 어디다 쓰는 거야? 너 따로 빼돌리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한재문이 발끈하며 외쳤다.
"농담이야. 자식. 흥분하기는. 크큭."
강현은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한재문은 그런 강현을 몰래 흘겨봤다.
"어쨌든, 앞으로 바빠질 거야. 한동안 소홀했던 던전 공략도 본격적으로 할 거고."
"예."
"한시환 씨. 그리고 조성찬, 조동원 씨."
이름이 호명된 세 남자가 강현을 바라봤다.
"여러분은 갑자기 새로운 길드원들을 이끌게 돼서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괜찮습니다."
"수고 좀 해줘요. 미리 말했듯이 던전에 들어가면 무조건 코어를 부수는 게 목표입니다. 그래야 돈이 남으니까."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나오는 대답에 강현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안유성, 신성아."
"예."
"한동안 굿즈 디자인 같은 거 할 시간 없을 거야. 본격적으로 던전에 들어간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해결하자."
중요한 것이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강현에게로 모였다.
"중요한 것 말입니까?"
"그래. B등급 던전 클리어해야지. 재문아."
"예..."
"이제 슬슬 B등급 정보 좀 떴지? 나온 지 한 달은 넘었잖아."
"많은 건 아니지만, 정보가 조금 풀리긴 했습니다..."
"그러면 소수 정예로 움직여야 하는 B등급 던전 하나 찾아둬. 정예들만 데리고 빠르게 클리어 할 거야."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부탁해."
"예..?"
지금 시각은 저녁 6시였다.
"다른 업무도 밀려 있는데..."
"그거 던전 좀 찾는 게 오래 걸려? 전국에 B등급 던전이 해봤자 몇 개나 있다고."
'그럼 네가 직접 찾으면 되잖아!'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참아내며 한재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힘 좀 내라! 너 월급도 많이 주잖아 내가.
"예..."
확실히 매달 1,000만 원이 넘게 쌓이는 통장 잔고를 보면 없던 힘이 솟아나기는 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됐어. 새해도 시작됐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소고기 파티다!"
"와아아아!"
강현의 말에 모두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사무실.
한재문은 마지막까지 남아 주섬주섬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 재문아!"
"예?"
순간 잊었다는 듯이 사무실로 돌아온 강현.
'그래도 나를 생각해 주긴 하는구나...'
강현이 내심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는 생각에 한재문이 콧잔등을 슥슥 문질렀다.
"너는 바쁘니까 사무실에 남아."
"시발..."
85화 미친개(1)
85. 미친개(1)
평화로운 아침.
새소리가 들리는 밖과는 달리 배데스 길드 사무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강현은 무언가 불만족스러운지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고, 한재문은 그 옆에서 잔뜩 움츠려 있었다.
"폐쇄형 던전인 것도 모자라서 미로형 던전이라고?"
강현의 날 선 말투에 한재문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딴 귀찮은 곳을 고른 거야?"
"그게... 신태길 팀장 님께서 적극 추천하셔서..."
"그 양반이? 왜?"
"지금 해당 던전은 코어 제거가 한 번도 안 이뤄져서 포상금이 많이 올라간 상태라고 합니다..."
한재문의 질질 끄는 말투가 강현의 화를 더 돋웠지만, 내용은 상당히 흥미가 동했다.
"아직 노말 코어도 제거하지 못했다고?"
"예..."
B등급 던전이 나타난 지 한 달이 넘었다.
10대 길드는 진작 노말 코어 공략에 성공했고, 단군 길드와 불사 길드 같은 경우에는 메인 코어 공략도 이미 끝난 참이다.
굳이 10대 길드가 아니더라 다수의 중견 길드들 또한 B등급 던전 공략에 착수한 상태.
"그런데 아직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했다라..."
턱을 쓰다듬던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래서 포상금이 얼만데?"
던전은 일정 시간 동안 코어가 제거되지 않으면, 문이 개방되고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다.
자연스레 그 기간이 가까워질수록 포상금도 올라가기 마련이다.
현재 B등급 던전 공략의 포상금은 노말 코어 3억, 메인 코어 20억.
모르긴 몰라도 1.5배는 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강현이 잔뜩 기대했다.
"노말 코어 10억. 메인 코어 40억입니다... 다만, 베난디의 숲처럼 노말 코어가 아예 없는 경우일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됐어."
강현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거기다. 40억이라니... 미친!"
아무도 공략하지 못한 곳이라는 곳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신태길 팀장이 생각이 있으니 추천한 거겠지, 또 소수정예 하면 우리 아니겠어?'
자기 합리화는 누구보다 빨랐다.
40억. 현재 능력자들에게 많은 돈이 풀린 관계로 돈의 가치가 하락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어머어마한 금액인 것은 분명했다.
"그 돈만 있으면 한동안 마정석 판매 대금이 없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크흐흐."
연구소로 빠져나가는 돈을 메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강현은 욕망이 끓어 넘치는 눈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어휴... 내가 저런 속물 길드장 밑으로 들어오다니..."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윤나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뭐? 속물!? 길드에 보탬이라곤 전혀 안 되는 주제에 그런 말이 나오냐?"
"내가 왜 보탬이 안 돼요!?"
"이번 공략에는 윤나래 너도 참가해."
"내가 왜…."
"안유성도 참가한다."
안유성도 참가한다는 말에 똥을 한 무더기 씹은 표정을 하고 있던 윤나래의 단번에 얼굴이 환해졌다.
"가죠!"
"어휴... 내가 저런 속물을 길드원으로 데려오다니..."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이번에 보상이 상상 이상으로 쏠쏠해. 그만큼 위험도 크다는 거겠지."
"..."
"우리가 B등급 경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메인 코어 공략은 처음이야. 게다가 지금껏 한 번도 공략되지 않은 던전이지."
"예."
강현의 말에 모두가 금세 진지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르겠냐? 하던 대로 하자. 단번에 노말 코어를 깡그리 쓸어오고, 메인 코어까지 정리한다."
"..."
"끝나면 소고기 회식이다!"
"우오!"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주먹을 들어 올리며 힘차게 대답했다.
안유성은 빙그레 웃고 있었고, 윤나래는 그런 안유성을 바라보기 바빴다.
'다행이야. 어쩌면 이번에 하려는 일이랑 어쩌면 잘 맞아떨어질 것 같아. 후후...'
그사이에 강현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몰래 웃음을 흘렸다.
**
B등급 던전 베일의 미로.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한 명성을 가지게 된 던전이다.
"물론, 명성이란 것이 악명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유명하다는 거지?"
"예."
"그럼 됐어."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웃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래..."
윤나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강현을 바라봤다.
"어허, 길드장님 선택에 딴지는 용납하지 않는다."
"..."
"꼬우면 나 이기고 길드장 하라고 했지?"
"더럽고 치사해서 안 하네요."
윤나래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강현이 장비를 꺼내 들었다.
평범해 보이는 카메라를 집어 든 강현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다들 이것 좀 봐라."
"뭔데요?"
"뭐긴 뭐야. 카메라지. 그것도 인벤토리에 담을 수 있는!"
"아, 예..."
"인벤토리에 카메라가 담기다니, 혁명 아니냐? 게다가 던전 안에서 사용까지 가능하다고!"
"쯧쯧, 외국에서는 진작에 그걸로 촬영하고 있었는데..."
윤나래의 딴지에 강현이 인상을 팍 구겼다.
"닥쳐!"
"쳇..."
그사이 신성아가 다가와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게 저번에 말씀하신 연구소에서 가져온 물건이군요?"
"맞아. 앞으로 우리의 효자. 밥줄이 될 놈이지."
"밥줄 말입니까...?"
"그래. 우리는 이걸로 위튜브를 한다!"
위튜브.
세계 최대 규모의 동영상 공유 서비스다.
이미 몇몇 능력자들은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개인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강현의 생각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우리는 이걸로 던전 공략 영상을 제작할 거야."
"흥, 그런 게 통할 리가 없…."
"재미있겠는데요?"
재미있겠다는 안유성의 말에 윤나래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하겠네. 좋아 보여요."
잠시 윤나래를 흘겨본 강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단순히 던전 공략뿐만 아니라, 몬스터 별 공략, 던전 정보까지 체계적으로 뿌릴 거야."
"흐음..."
"이건 우리뿐만 아니라 연구소와도 연계되고, 정부에서도 투자하는 사업이니 아주 진지하게, 본격적으로 해야 돼."
"역시 강현 님입니다."
신성아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아부에 강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
금수 길드의 길드장, 조운성은 잔뜩 흥분해서 벽을 걷어찼다.
"씨발!"
B등급 던전 베일의 미로에 들어온 지 벌써 열흘 째.
처음 계획했던 노말 코어는 발견도 하지 못하고, 이제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밖으로 나가는 길조차 잊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조운성이 발로 찬 벽은 어제 그가 지나치며 표시를 해 둔 벽이었다.
"길드장님. 여기도 왔던 곳입니다."
"나도 알고 있으니까. 닥쳐!"
"..."
베일의 미로가 악명 높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언데드 던전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데드 던전에는 먹을 것이 없다. 그리고 개인이 배낭에 담을 수 있는 물과 식량은 한정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로형 던전이라 길을 잃기 십상인데, 식량까지 구하지 못하니 강제로 타임어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끝났어. 전부 죽을 거야."
"명성에 미친 길드장 말을 무턱대로 듣는 게 아니었는데..."
"뭐라고?!"
길드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언데드 몬스터.
곳곳에 산재해 있는 함정.
그나마 전투로 많은 인원이 죽어 식량에 제법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위로 아닌 위로이었다.
"너희들도 전부 동의해서 와 놓고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길드장님이 무조건 클리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길드 운용 자금을 털어서 구했다는 그 지도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그건..."
길드장 조운성은 머뭇거릴 뿐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비싼 지도'가 사기인 것은 이미 공략 초반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가 이상한데...?
분명 던전의 초입부는 정확했다.
삼일 동안은 지도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일 째가 되는 날.
지도에 표기돼 있는 노말 코어에 도착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 공략 들인 돈이 얼마인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나갈 수는 없어.
결국 조운성은 지도에 표기되지 않는, 던전의 더욱 깊숙한 곳까지 이동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순간의 욕심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은 이제 금수 길드 전체의 목숨을 벼랑 끝으로 내밀고 있었다.
어쩌면 지도의 판매자는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그에게 지도를 판매한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베일의 미로에 깊숙이 들어가서 살아남은 공략대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길드장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돌아갈 건데? 저 길드장이라는 인간은 진작에 길을 잃어버렸다고! 그런데 어떻게 돌아갈 거야!?"
"으아아! 이렇게 죽기 싫어!"
길드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길드원들이 미친 듯이 벽을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젠장! 이건 왜 이렇게 단단해!"
"나 좀 내보내 달라고!"
-쾅, 쾅!
베일의 미로를 이루고 있는 검고 두터운 벽은 부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길드원들도 몇 차례 시도를 통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패닉에 빠진 이들은 그런 기억조차 잊어버렸다.
-쾅, 쾅!
"전부 조용히 해!"
그때 가만히 서있던 조운성이 소리쳤다.
"당신이나 조용히 해!"
"아직도 니가 길드장인 줄 알아!?"
"닥치란 말이야!"
결국 참다못한 조운성이 칼을 빼들었다.
"..."
조운성의 무력은 금수 길드 내에서도 압도적이다.
본래 단군 길드의 입단 시험까지 통과했던 그이기에 일반적인 능력자와는 궤를 달리했다.
그런 그가 검을 빼들자 길드원들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전부 정신 차리고 들어 봐. 무슨 소리 안 들려?"
조운성의 진지한 말에 길드원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쿵... 쿵...
멀리서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아까는 알지 못했던 땅의 울림까지 느껴졌다.
"모, 몬스터 무리인가?"
"분명 대형 몬스터인 거야... 이제 끝이라고!"
"소리 지른 놈 누구야?!"
대규모 혹은 거대 몬스터의 이동이라 생각한 길드원들이 다시 패닉에 빠져들었다..
"안 돼! 가까워진다!"
"으으으... 나는 살 거야. 이렇게는 못 죽어!"
"여기 도망칠 곳이 어디 있어?!"
그러는 사이 소리는 이미 코앞까지 도달했다.
"이미 늦었어..."
-콰아앙!
모두가 체념하던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지며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켈록, 켈록!"
"거봐. 내가 무슨 소리 들렸다고 했지?"
"역시 강현 님이십니다."
먼지 사이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금수 길드원들의 눈이 잔뜩 커졌다.
"사람인가?"
"방금 강현이라 하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인간이 던전 벽을 부수는 게 가능하다고..?"
이내 먼지가 걷히며 등장한 인물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예. 사람 맞습니다."
정체는 물론 빙긋 웃고 있는 강현과 배데스 길드원들이었다.
"정말 강현이다!"
"미친, 이걸 뚫고 온 거야?"
"배데스 길드야. 이제 살았어!"
살았다는 안도감에 금수 길드원들의 얼굴이 환해지며 정신없이 떠들어 댔다.
"자, 다들 진정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죠?"
"예. 맞습니다!"
"저희 좀 구해주세요!"
"여기 길드장이 누구죠?"
강현의 말에 금수 길드의 길드장, 조운성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길드장입니다."
"이제부터 저희가 도와드릴 건데, 대신 촬영을 좀 해야 하거든요. 괜찮죠?"
"예...?"
뜬금없이 나온 촬영이란 단어에 조운성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촬영 말입니까...?"
"예."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괜찮습니다. 던전에 나가서 인터뷰든 뭐든 가리지 않고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안에서 촬영할 거예요."
"예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운성을 향해 강현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아! 지금 표정 아주 좋아요."
"저기... 이게 무슨...?"
"그리고 여기 이건 촬영 협조 사례입니다."
말을 한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햄버거...?"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상황이 들이닥치자 조운성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던전에서 맛도 없는 보존식품만 먹으니 지치셨죠? 여기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게다가 인벤토리에 들어가 반영구적으로 보존 가능한 신선한 햄버거 좀 들어요."
"예에..."
"마력 상승에 효과가 있을 수도 있는 아주 대단한 햄버거입니다."
강현이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기세에 얼떨결에 햄버거를 받아 든 조운성이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하고 햄버거를 씹어먹던 조운성의 표정이 급격히 구겨졌다.
"으... 맛없어..."
순간 고개를 든 조운성이 강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은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 맛난다...?"
86화 미친개(2)
86. 미친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