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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흠...그 정도인가?

#91화.

슬레모킨의 설명은 대강 이러했다.

이곳은 엘프족들의 마을이라 조금 전에 보았듯 인간을 반겨주지는 않겠지만, 엘프와 약혼관계인 것이 알려진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고, 그때부터는 아주 무릉도원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다.

연방에서 큰 사고를 치고 도망쳐 왔다고 해도, 알 헤임달 시티의 엘프들은 보통 연방과 그리 친하지 않다. 그러니 여긴 신고 같은 걸 할 사람···아니, 신고할 엘프도 없다.

그러니 자신의 약혼자라 소개한다면 이곳에서 몇 달간 안전히 지내는 것은 아주 식은죽 먹기다.

말하자면, 가짜 약혼자 전략이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며 약혼자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바로 그녀와의 약혼을 허락받는 일이고.

그 허락의 주체는, 그간 베일에 싸여있던 슬레모킨의 부모님이란다.

"어차피 가짜로 하는거야. 알지? 가짜."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 별도의 입구로 들어와 잘 쓰이지 않는 개별 승강기에까지 올라탄 마당이다.

그러니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내어줬던 비밀 캐리어는 이미 돌아갔을 것이다.

우지직-

덩굴이 여기저기 붙어 있어서 그런가.

우리가 올라탄 승강기는 쓸데없이 느릿느릿했다.

그런데다가 이 승강기는 하필 통유리창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올라가는 동안 다른 엘프들의 시선을 묵묵히 견뎌내야만 하는 아주 괴상한 구조였다. 무슨 동물원 우리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어찌됐든 승강기는 느리더라도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발밑을 잠시 내려다보자, 슬슬 거대한 빌딩의 가지들이 보였다.

호숫가 위에 세워진 메카 세계수의 규모와 좌표가 고정된 개별 승강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아하건대, 그녀의 부모는 절대 평범한 엘프가 아닐 터. 이종족인 엘프 중에서도 역시 꽤 고위층이지 않을까 싶다.

나와 슬레모킨은 목적지까지 느리게 올라가는 동안, 혹시 모를 돌발질문에 완벽히 대비하기 위해 몇 가지 말을 맞춰두었다.

— 좋아하는 음식은?

— 처음 만난 장소는?

— 첫 데이트는?

— 인간이 아닌 엘프가 좋은 이유?

— 신혼집 매수비용은 몇대 몇 비율로 부담할건지?

—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도 육아 휴직이 가능한지?

간단하게 서로 어디서 만났는지부터 시작해 혼인을 준비하는 연인이라면 으레 알고 있어야 할 예민한 부분까지 말이다.

평범한 협력관계 그 이상을 연기해야 한다.

다행히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이라는 공통분모가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에 관해 적당한 얘깃거리들을 감쪽같이 꾸며낼 수 있었다.

띵.

어느 중간층 쯤에 이르자 승강기문이 열렸다.

"?"

헌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웬 화분들에 꽃이 꽂혀있고 좋은 아로마 향이 났다.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켜주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푹신한 쿠션들과 공손한 태도의 엘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여기인가."

"···아 여기? 아직은 아냐. 이 층은 별 건 아니고 조금 준비 해주는 곳이랄까."

"여기서 무슨 준비를 더 해?"

"뵙기 전에 발도 씻고 그러는 거지 뭐."

슬레모킨은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

그간의 노고를 풀어주고 간단한 단장을 위해 상시 준비되어 있는 장소라며 내게도 편하게 받기를 권했다.

부모를 뵙기 전에 따로 준비하는 방도 있다니.

엘프들은 원래 이렇게까지 효심이 깊은가?

곧, 굉장히 섬세한 손길을 가진 엘프들이 다가와 세족 세면은 물론이고 장인 정신으로 수염을 한올한올 깎고 손발톱을 만져 다듬었다. 엘프로 이루어진 테라피스트 전문가 집단이라던가.

어찌나 반딱하게 잘 닦던지, 고문당할때 빼고는 별 관심도 없던 손발톱들이 오늘 섬섬옥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후후······."

슬레모킨은 자신의 부모를 속이고 기망(欺罔)해야 하는데도 흠흠 거리며 외모를 단장하기에 바빠 보였다. 아마 그간의 혼인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릴 기회로 여기는 듯하다.

그렇게 발끝부터 머리끝에 걸친 관리가 끝나자.

"넌 며칠 여기서 지내."

"예?

루돌프놈은 이 테라피스트 층에서 강제로 내리게 되었다. 약혼자가 아니면 같이 올라갈 수 없다나.

"오 그럴까요? 오히려 좋은데?"

하지만 루돌프놈은 만족한 듯한 얼굴이었다. 엘프와의 행복한 한때를 꿈꾸기라도 하는 건가? 역시 외모에 어울리게 천박한 놈이다.

그렇게 단 둘만 남은 이후로 승강기가 도착해 문을 열어준 곳은, 빌딩 세계수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

그리고 나는, 그 꼭대기 층에 내려서야 알았다.

슬레모킨, 그녀의 부모가 보통 고위층이 아니라는 사실을.

승강기는 한 번도 꺾지 않고 코어층의 꼭대기로 그대로 올라왔다. 그러니까 이 메카 세계수의 제일 꼭대기에서 거주하는 엘프들이 그녀의 부모인 것이다.

슬레모킨의 어릴 적으로 추정되는 사진들과 같이 찍은 부모의 사진이 액자에 전시되어 긴 복도의 벽에 붙어있었다. 유복한 부잣집에서 자란 꼬마 엘프 슬레모킨은 연도가 지날수록 사춘기라도 왔는지 늘 뚱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있는 부모 엘프는.

"어때?"

수인들에게 수인왕이 있다면, 알 헤임달의 엘프들이 옹립한 왕도 있다.

알 헤임달 시티 북부의 실질적인 통치자.

엘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다 평가받는 무력의 화신. 공포스러운 이종족의 정점. 영광스럽고 위대한 엘프의 군주. 알헤임달 북부의 지배자. 철혈의 사냥꾼. 등등 온갖 호칭을 보유한 엘프.

"아이작 모드릭이잖아."

"누구?"

"저 사진, 아이작 모드릭이잖아. 엘프 군주."

"아~"

엘프 군주, 아이작 모드릭.

슬레모킨은 내 반응에도 그저 천연덕스러웠다.

"응, 사실 우리 아버지셔. 만나기 전에 긴장되면 여기서 물이라도 마시고 갈래?"

"······."

묘왕이 그녀를 '토퀸타이아의 딸' 이라고 불렀던가.

토퀸타이아는 그냥 그녀의 어머니쪽 이름이었나. 수인왕도 익히 알고있는, 이 호숫가 엘프들의 귀족 가문 여식 그런 거겠지.

귀하게 자란 티는 나지 않았는데, 이거 보통 귀한 집 자식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렇게 된다면 슬레모킨은 엘프족과 이족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군주의 딸이라는 소리군.

거기다 슬레모킨은 작게 마을이라고 불렀지만, 이곳은 사실상 엘프들의 왕국이나 다름없는 거고.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지금 하려는 것은 가짜 약혼이다. 그런데 무려 엘프들의 통치자를 기망한 걸 그것도 엘프 왕국 내에서 들킨다면······.

'어, 진짜 이래도 되나?'

저벅. 저벅.

우리는 미궁같은 복도를 함께 걷고 있었다.

루돌프놈이 말했던 것처럼, 왜인지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호흡을 길게 빼며 최대한의 평정심을 유지했다. 평범한 약혼자처럼 굴자. 약혼자처럼.

근데 약혼자면 어떻게 굴어야 하는 거지?

떠올려보니 나 지금까지 결혼해본 적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긴 복도의 끝이자 환하게 밝아지는 구역이 있다. 저곳은 슬레모킨의 부모님이자 엘프의 왕이 나를 평가하는 자리.

음, 돌아설 거면 지금이라도 돌아서야 한다.

"아무래도 돌아가봐야겠어."

처억!

그러자 슬레모킨이 팔짱을 끼며 앞을 막아섰다.

"······후후, 이제 와서? 너무 늦었지."

"그게 아니다. 이걸 봐."

"뭐를?"

"예의없는 빈손이잖아.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뭐라도 사 들고 왔어야했는데. 지금이라도 나가서 작은 과일바구니라도."

"과일바구니를 어디서 사! 그냥 들어가!"

퍼억.

답답한 얼굴의 슬레모킨이 나를 거세게 밀쳤고, 나는 발이 공중에 뜬 채 복도 밖으로 떠밀려 나온 와중에도 균형을 잡으며 목례를 했다.

쯧쯧-

나와 슬레모킨이 우당탕대며 들어오자마자, 어디선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식탁이 있었고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 건너편에는 두 명의 나이든 엘프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마치 중세 왕족들이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엘프들의 전통 예복을 입고서.

다만 약혼자를 맞이하는 자리라 그런가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딱딱했다. 느릿한 승강기에 타서 손발톱 풀 관리를 받으며 올라오는 동안 최상층에 이런 세팅을 해놓는, 대충 그런 시스템인가보군.

"흐음······."

일단 그녀의 부모, 방금 혀를 끌끌 찬 아버지쪽은 떡대가 어마어마한 거한의 근육질 엘프였고.

"반가워요."

슬레모킨의 어머니는 빼입지 않았어도 귀부인의 태가 철철 흘러넘쳤을 여인이었다. 고상한 몸짓에는 기업의 회장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품격이 배어있었다.

또한.

저릿- 저릿-

이 세계에서는 상견례 자리에 데리고 올 부모가 없이 태어난게 다행인 듯했다. 아마 있었다면 여기에 발을 들이자마자, 저 거한의 엘프가 마구 쏘아내는 투기에 기절해서 쓰러지셨을 테니까.

엘프들은 딸의 약혼자를 이렇게 맞이하나?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일단 나는 당당하게 인사를 올린 뒤, 준비된 식탁에 앉아 그들이 내게 뭔가를 물어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슬레모킨의 아버지인 아이작 모드릭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망부석처럼 앉아있다가 갑자기 식기를 들더니, 식사부터 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실로 불편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이었으나, 슬레모킨은 이 별난 상황이 꽤 익숙해보였다.

[ 식사 중에는 대화하지 않는 게 예의야. 일단 맛있게 먹어. ]

슬레모킨의 전음.

다행히도 밥은 내 입에 맞았다.

단지 엄격한 분위기가 내 입에 안 맞았았고, 샐러드를 씹는 거한의 엘프가 신경쓰지 않는척 줄기줄기 쏘아내는 강맹한 투기(鬪氣)역시 나와는 맞지 않았다.

슬레모킨의 아비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나를 향한 투기를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아직 환자인데.

어색하고 고요한 식사자리가 이어졌다.

스윽-

"옛말에, 그런 말이 있네."

그때, 돌연 아이작이 입을 닦으며 말문을 열었다.

뜬금없이 밥부터 퍼먹을 땐 언제고.

그는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엘프였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하지."

"?"

"네가 견뎌낼 수 있겠나?"

호칭은 '자네가' 도 아니고 '네가' 로군.

왕관은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고, 나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한다는 건 동네 개가 와서 봐도 알겠다.

아이작은 나를 체하게 하려는 게 목표인지, 투기를 멈추지 않고 보냄과 동시에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금 무거운 얘기를 꺼냈다.

"인류 연방에 편입되어 언데드를 막아낸지도 어언 백 년이 넘었다. 무림계와 마법계로 대표되는 인류의 무수한 기업들과 온갖 이익집단의 틈바구니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힘이 약하면 잡아먹는 세상이야. 그들 사이에서 엘프의 터전을 당당히 지켜낼 수 있겠나? 책임질 수 있겠나? 수명은 짧고 아이처럼 작기까지 한 인간의 몸으로?"

그건 당신이 유독 덩치가 큰 것 같은데···.

나는 아이작의 질문 폭탄에 슬레모킨을 슬쩍 바라봤다.

하지만 이쪽도 대충 '약혼자 데리고 오래서 막상 데려왔더니, 저 인간은 왜 또 저러는 거야' 같은 표정이었다.

슬레모킨이 어째서 도망쳐다녔는지 알겠다.

저 엘프왕, 보통 고루한 사내가 아니로군.

하지만 일단, 딸을 앞에둔 아버지가 원할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

"확실한가?"

짦은 대답과 동시에 나를 향한 투기가 강해졌다.

저릿한 감각이 전신을 내달리고, 강대한 투기에 전신이 반응해 털을 곤두세운다.

자칫하면 몸이 짓눌려 퍼져버릴 듯하다.

긴 식탁을 호랑이처럼 내달려와 목줄기를 뜯어버릴 것 같은,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아이작의 투기.

억지로 버티면 버틸수록 압박이 더 강해진다.

그런데도 아이작은 흐음-소리를 내며 모르는척 물었다.

"한낱 식사 자리조차 버거워하는데 무얼 견뎌낸다는 말이지? 어디가 아픈 건가?"

"몸은 건강합니다. 버겁지도 않고, 음식도 맛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을 마시며 답했다.

전투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몸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으나, 진짜 부서지면 나노 로봇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뭐.

그 후로 질문과 답변이 몇 번 오가는 시간동안 그의 투기를 계속 묵묵하게 버텨내자, 생각보다 흥미가 생겼는지 아이작은 이제 다른 질문으로 선회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생겼나?"

"그건 아직···."

"그래, 식은 언제 올릴 예정이지?"

"······."

"혼인을 약속해 놓고서는 그런 기본적인 것도 정하지 않았나? 그런 기본적인 것도 완벽히 해내지 못하면서, 연방 정부와 우리 엘프들간의 외교적인 마찰이 생겼을 때는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겠나?"

이제는 무슨 연방 정부와의 외교적 어쩌고까지 등판했을 때쯤, 양갓집 규수처럼 조용히 앉아있던 슬레모킨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었다.

"그거야 아버지 어머니한테 여쭤보려고 온 거죠.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알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아이작 모드릭의 단호한 축객령.

대뜸 먹다말고 압박 질문들을 던지다가 또 갑자기 물러가라고 하니, 슬레모킨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 가라고요?"

"식사가 끝났지 않았느냐! 다음에 다시 찾아와라!"

호통을 친 아이작은 이만 나가보라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그것이 슬레모킨 부모님과의 첫 대면이었다.

* * *

레반과 슬레모킨이 어물쩍 자리를 비운 후.

조용히 식탁에 앉아있던 토퀸타이아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네요.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연방을 상대로도 배짱을 부리지 않았겠어요? 나는 예비 사위가 너무 멋있는데."

"흐음······."

그러자 곧, 모습을 드러낸 아이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까 놓았던 포크를 다시 집었다.

사실 식사를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녀석들을 내쫓는 바람에 배가 덜 찼다. 불편하기만 한 예복을 벗어 던지고 식사에 열중하던 아이작을 향해 토퀸타이아가 말을 보탰다.

"너무 그렇게 고깝게만 보지 말아요. 우리 딸아이가 그 아이를 보는 눈빛이 충분히 사랑스러웠잖아요."

아이작은 샐러드를 우물대며 답했다.

"흠···그 정도인가?"

"당신, 보지 못했어요? 정말 사랑하는 게 분명해요. 딸아이가 이곳까지 데려온 남자 중에 저 정도로 눈빛을 누그러뜨린 사윗감은 없었어요. 모두 당신의 눈에 들기위해 데려온 가짜들이었죠."

"흠···그 정도인가?"

"다음에 올라오면 확실하게 결정해요. 마음에 들면 든다고 하시고, 들지 않으면 들지 않는다고 해요. 당신이 식사하는 내내 불편하게 굴었으니,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어도 사위 마음이 오죽 타들어 갔겠어요."

"흠···그 정도—"

"내가 그 말버릇 듣기 싫으니까 고치라고 했죠!"

"······."

빼액-!

품위있는 토퀸타이아의 입에서 결국 큰 고성이 터져나오자, 아이작은 곧장 조개처럼 입을 꾹 닫았다. 들고 있던 포크도 바로 내려놓았다.

"······미안하오 부인."

"식사를 목으로 넘긴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구요! 그리고 당신이 매번 이렇게 사납게 구니까 수많은 엘프 중에서도 사윗감이 없었던 거예요. 다들 당신을 두려워해서 딸아이를 피하니까요. 언제까지 우리딸 혼삿길에 훼방을 놓으실 건가요?"

"부인, 그것은 사내로써 쓸만한 놈이 없으니······."

"조용히 하세요! 딸아이 나이가 벌써 몇인데. 만약 이번에도 혼사에 훼방을 놓는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요. 다음에도 또 이러기만 해봐요."

"······노력해보겠소."

* * *

숨이 턱턱 막히는 약혼자 소개 자리에서 도망치듯 나온 뒤.

나는 꽤 넓은 개인공간을 받았다.

메카 세계수의 꽤 상층부에 위치한 큰 빌딩이었는데, 이전에 슬레모킨이 가끔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던가.

침실은 물론이고 옥상에는 넓은 공간까지 딸려있어서 수련에 매진하기가 꽤 괜찮을 듯했다.

나는 이곳에서 몇달간 휴식기를 가지면서 몸을 회복하고, 경지를 다듬을 것이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말했던 육체의 재구축도 확인해보고, 얻은 바만차의 에센스도 쓸 만큼은 써줘야겠지. 깨진 마나 회로도 다시 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튼 여기까지 잘 왔다.

"후우······."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부모들이 나를 그닥 마음에 들어하진 않는 것 같던데.

하기야, 가짜 약혼이니 깨졌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속옷 바람으로 쫓겨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

아마 그 자리에 조금만 더 머무르며 투기를 받아냈다간 필시 쓰러졌을 테니까.

수복전 이후, 몸이 많이 망가진 것을 느낀다.

나는 더 지체없이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우선, 기력부터 좀 회복해야겠군."

#92화. 몸의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92화.

레반이 알 헤임달에 머무르는 동안.

연방은 대 혼돈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라그나로크 수복전에서 큰 전공을 세운 마탑의 7레벨 마법사 '레반' 의 폭로로 시작된 불길은 언론의 손을 거쳐 모든 도시에 옮겨붙었다.

일이 터졌을 때는 상대가 연방 정부군이니만큼 노선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애송이 하나가 분수도 모르고 제멋대로 날뛰는 거 아니냐며 부정적으로 보던 언론사.

그들은 수복전에 참가한 세력들과 십이제인 진공진인, 로라 마르티네즈까지 적극적으로 논란에 가세할 기미를 보이자, 서둘러 기름을 퍼부어가며 불길 키우기에 나섰다.

정확히는 연방 자체를 공격하려는 게 아님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너죽고 나죽자 하는 치킨게임도 아니란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색출' 에 가까웠다.

다시 오기 힘든 대목에 언론사들은 펜칼을 휘두르며 연일 특종 타이틀을 걸었다.

출처가 분명한 고급 소스들도 시중에 풀렸고, 놀랄만한 대형 속보들이 잇달아 터졌다.

중간에 언론들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 라크나로크 수복전에서 연방군의 이해 못할 여러 작전 지휘들은, 인류를 배반한 변절자가 연방의 고위직에 뿌리내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로 귀결된다. ]

그렇게,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필연적으로 수복군 세력들의 피해 상황이 언론을 통해 낱낱이 보도 되었고, 그에 따라 원래는 잔치 분위기였던 증권가도 난리통을 피해갈 수 없었다.

수복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공로를 인정받은 우량 기업들이 라그나로크 시티 내의 부동산과 인프라 사업등을 갈라먹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들의 정예들이 많이 죽어나갔단다.

심각한 사안이었다.

수복전에서 중요한 편제에 들어갈만한 기업들은 대부분 독자적인 에센스 수급 부서를 갖고 있기 마련.

에센스 수급량은 기업이 보유한 무력과 상관관계가 크다.

세계에서 크레딧만큼, 아니 크레딧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에센스.

금이 곧 돈이듯, 에센스는 곧 돈이다.

연방이 망하면 크레딧은 휴지조각이 되어도, 에센스는 최후의 화폐로 통용될 거라는 소리가 있을 만큼. 에센스는 확정적인 수입원이자 든든한 자금줄이 되어주니까.

게다가 언제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따로 벌이는 사업이 없더라도, 강력한 무력만 있다면 수준 높은 에센스를 팔아먹어 막대한 자금력을 보유할 수 있고,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다른 신사업에도 진출한다.

에센스의 존재가 확인된 초기부터 무림계 구파일방과 마법계 대가문들을 비롯한 상당수의 메가콥은 그렇게 몸집을 불려나갔기에.

그런데 에센스를 벌어와야할 정예들이 죽었어?

7레벨급 정예 한명 한명이 기업 입장에선 심혈을 기울여 키운 보물이자 훌륭한 일꾼이나 다름없는데, 한 두 명도 아니고 우르르 죽어나갔으니 말 다했다.

피해가 극심한 편이라고 알려진 사천당가나 화산 그룹의 경우, 무려 9레벨과 8레벨등의 중요 자원들까지 줄줄이 사망했다. 메가콥이라 해도 주가와 기업 가치에 타격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수복전에 참가한 기업들의 주가가 미친듯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천문학적인 자금들이 증권시장에 우르르 쏟아져나와 차트 위에서 대난투극을 벌인다.

그리고 그 아비규환속에서.

"헉, 얘는 벌써 이렇게나 떨어졌어?"

"이건 지금이 최대 저점 같은데······."

"당가는 이 와중에도 잘 버티네. 확 망했으면 좋겠는데······나쁜 놈들."

개인투자자, 레나는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레반이 정크타운에서 건네준 소액부터 시작된 레나의 투자는, 자그마치 6백만 크레딧이라는 거액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레반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믿고 맡겨준 크레딧이다. 그녀는 반드시 더 잔뜩 불려서 레반에게 자랑하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변화하는 차트들을 뚫러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레나는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배우고 마법사들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하루하루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 아흠.

수업이 너무 지루한 덕에 매일 꿀잠을 잤으니까.

몇몇 재미있는 과목을 빼면, 언니인 루벤카의 족집게 과외가 차라리 나았다.

시립 아카데미 수업은 만성적인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레나에게는 최적의 수면제였다. 어떤 약도 불면증을 낫게하지 못했는데,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이 그걸 해내버린 것이다.

아카데미 일 학년 생도 레나의 일과는 간단했다.

수업 시간에 부족한 잠을 보충한 뒤, 야간에 열리는 증권시장을 종횡무진 휘젓는다.

레나는 현재 시립 아카데미에 다니며 성공한 개인 투자자로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

삶을 괴롭히던 불면증이 사라지자, 공격적인 개인 투자가의 기질이 개화하고 있던 것이다.

"괜히 고강한 마법사들이 아니야······음성에 수면 마법을 실어서 날리는 게 분명하다구."

오늘도 강의실에 생도들이 하나 둘 들어온다.

레나는 수업 시작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또 얼마나 꿀같은 잠을 잘 수 있을까. 빨리 수업 시작했으면 좋겠다.

스윽.

'좋아, 준비 해야겠다.'

레나는 몰래 반입해온 목배게를 품에서 꺼내며 레반을 떠올렸다. 연방 전체를 상대로 당당하게 욕설을 뱉던 그 남자다운 모습을. 이래야 자면서 레반의 꿈을 꿀 수 있었다.

'하지만 발할라 시티에도 들리지 않고······.'

아니, 아무렴 어때.

레반은 원래 특이했으니까 뭔가 계획이 있겠지.

단단하게 목배게를 장착한 레나는 자신의 증권계좌에 찍힌 금액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 정도 크레딧이면······.

"헤헤."

레반 오면 꼭 자랑해야지.

"그런데······언제 오는 걸까? 분명 금방 보러 오겠지?"

* * *

항간에 신기한 소문이 돌고 있다.

이번에는 다르다!

무려 수십 년 가까이, 부모의 결혼 압박으로부터 도망만 다니기 바빴던 슬레모킨에게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간이 생겼다는 소문.

심지어 이미 그 인간과 약혼까지 한 상태이고, 약혼자를 직접 데리고 와 일명 [ 혼약의 승강기 ] 까지 같이 올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진정으로 혼인할 마음이 없다면 타지 않았을 테니, 당사자인 둘은 마음을 어느정도 굳혔다는 얘기일 터.

다만 모든 엘프들에게 두려운 존재이자 존경받아 마땅한, 위대한 엘프. 아이작 모드릭의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가 큰 관심사였다. 그가 슬레모킨의 혼인에 관해서는 유독 더 깐깐하게 군다는게 정론이었기에.

오랜 기간 아이작의 눈에 들지못해 퇴짜맞은 사윗감만 대체 몇 명인가! 이미 엘프들 사이에선 도저히 사윗감을 찾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아이작의 눈에 잘못 들었다가 혼인은 커녕 오줌을 질질 지리면서 내쫓긴 수치를 당한 엘프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니 부모 자식간에 서먹해졌던 건 당연지사.

결정적으로.

"감싸고만 돌다가 너무 늦어버리지 않았나?"

슬레모킨의 나이는 혼기를 훌쩍 지난 상태였다.

딸에게는 어서 혼인을 하라며 극성으로 굴었으나, 아이작의 요구치가 사실상 너무나도 높은 탓에 결국 적정 혼기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 사실로 인해 충격받은 슬레모킨이 더 이상의 압박은 지겹다며 발할라 시티의 마탑으로 도망친 것이 옛날에 벌어졌던 도주 사건의 전말이다.

"그래도 인간이라면 비슷하게 늙어가긴 하겠군·····."

"천생연분일지도······."

다행인 것은, 슬레모킨이 8레벨의 강력한 마법사라는 사실.

그러니 일반적인 엘프보다도 노화가 훨씬 늦다.

지금이라도 혼인을 올리면 막차는 탈 수 있다.

더해서, 슬레모킨이 별장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그 약혼자의 수발을 든다는 얘기가 엘프 고위층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았다. 그 대단한 아이작 모드릭의 딸이 아픈 인간의 수발을 들어?

"진짜 대단한 일인데. 제대로 꽂혔나봐?"

"그런데 아이작께서는 그게 또 마음에 안드시나 보던데. 그 인간과의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신다는 얘기가 돌더군. 오늘이 세 달째야."

"아무리 그래도, 설마 또 방해한단 말야?"

"설마가 아니라—?"

그때.

갑자기 곰처럼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 속닥대는 엘프들의 뒤로 졌다.

"흠······재미있는 얘기로군."

"어?"

털썩.

그리고 야외 하늘공원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떠들던 엘프들은, 뒤 돌아보고 경악할 틈도 없이 아이작의 전신에서 발산된 투기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그 광경을 본 아이작의 시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알 헤임달의 대개척과 관련된 일정이 급작스레 바빠졌다는 이유를 구실삼아, 첫 만남 이후로 그 인간을 피한다는 얘기가 일반적인 주민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다.

일정 부분은 그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정 바빠도 식사 한끼 할 시간이 없을리가 없지.

물론 부인인 토퀸타이아는 절대로 딸아이의 혼사에 관여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지만, 아비가 되어서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눈에는 아직도 아이였던 시절의 해맑던 모습이 선명하거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를, 그런 비실비실한 놈의 곁에 쉬이 딸려 보낼 수는 없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벌써 세 달 전이던가."

놈이 사내라면 몸이 달아올라 애가 탈 것이라 여겼다.

해서 성급히 자신을 찾아오리라 여겼건만,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아주 인내심이 없는 놈은 아닌 듯 싶다.

뭐, 다 죽어가는 놈을 붙잡고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무런 재미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다.

허약한 놈.

슬슬 찾아가서 사내끼리 몸의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지.

"크흠······."

아이작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 * *

레반이 도착한 뒤, 이곳에서······.

세 달이란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흘렀다.

촤락!

슬레모킨은 자신이 가볍게 썼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 첫째날 ]

막내···아니, 레반과의 약혼 작전이 틀어졌다.

괜찮다. 아버지가 뭐 하루이틀 그랬던 것도 아니고.

일단, 레반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듯 보였고 내가 내준 침실에서 몸을 회복하는 데에만 매진하겠다고 했다.

무인들이 하는 운공을 시도할 때마다 식은땀을 뻘뻘 흘려 안쓰러웠지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거라던가.

첫 날은 운공을 조금 하고 곧바로 잠에 들었다.

근데, 너무 신경 안쓰는 거 아냐?

여기 내 집인데······.

[ 둘째날 ]

이틀이 지났다.

레반은 변함없이 회복에 전념하는 중이다.

워낙 무리한 탓에 기혈이 틀어져있어야 정상인데, 이틀만에 제자리를 찾는 걸 보면 로라 마르티네즈가 정말 무언가를 잡아두긴 한 모양이라며 기뻐했다.

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

예쁘지는 않던데······.

[ 일주일 ]

내가 벌써 약혼자를 데려왔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아마 그 승강기를 이용한 탓인가? 너무 오래되는 바람에 까먹었는데 별명이 혼약의 승강기인가 아마 그랬을 거다.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뜨던 목도리나 마저 떠야겠다.

[ 이주일 ]

다행이다.

레반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혈색도 돌고 가끔 검을 집어 짧게 짧게 휘둘렀다.

내가 보더라도 레반의 몸은 괴상하게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었다. 도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 이것저것 갖다줘 봤지만, 그리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해 보였달까.

난 이때를 기점으로 레반의 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레반도 침실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고, 가끔 열린 문틈 사이로 슬쩍슬쩍 보기만 했다.

어쩌다 부모님이 식사 자리에 부르진 않냐고 물어보길래 '아직' 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날, 어머니 토퀸타이아가 레반을 나름 마음에 들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아버지가 또 무슨 얕은 수를 쓰는지, 자꾸 만남이 미뤄질 일이 하나둘 생기는 중이다.

······흐음, 계속 이러면 안 되는데.

[ 한 달 ]

한 달이 지났다.

레반은 벌써 회복을 완벽하게 끝냈다.

이전보다 골격이 좋아보이는 것 같기도?

그리곤 하루종일 돌처럼 굳어 가부좌만 틀고 있다. 무인들의 훈련인가? 무슨 훈련을 하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또, 아힘사가 대장간에서 수리를 마치고 돌아왔다. 레반의 침실에서 무슨 대화를 주고 받는데 몰래 엿들으려다가 실패했다.

그런데 맛있는 간식을 주러 들어간 저녁 시간에, 꼭 부모님을 뵈러 가야하나? 계속 이렇게 조용히 흘러가도 좋을 것 같은데···라는 말이 레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차피 가짜 약혼이니 이대로 은근슬쩍 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곳으로 가자는 말로 들렸다.

나는, 그러면 안 돼! 이미 약혼자라고 소개해버려서 소문까지 다 났는데, 이제와서 우물쭈물 발 빼면 진짜 큰일날 수도 있어! 라고 설득했다. 다행이 레반은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휴······.

부모님들이 한가한 이들은 아니라, 원하고 싶을때 딱딱 만날 수는 없어. 급한 일이 생기면 다음 만남이 미뤄질 수도 있지. 라고 했어야 더 자연스러웠을까?

에잇, 잘 모르겠다.

PS - 레반에 관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놈을 잡았다. 끓는 호수 밑바닥에 5분 주기로 처박았다가 가끔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주고 있다.

[ 두 달 ]

두 달이 지났다.

레반은 여전히 자신만의 수련에 집중하고 있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기운이 조금 달라졌다.

설마 벌써 그 에센스를 복용하고 소화중인 건가?

바만차와의 전투 이후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아무튼 아버지는 오늘도 일 때문에 바쁘다며 식사 자리를 마련할 수 없다고 한다. 진짜 치사하다. 다음에 오라며?

계속 요청을 해봐도 요지부동이다. 빨리 약혼을 허락받아서 레반을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줘야 할텐데······.

그냥 어머니를 설득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결정을 일임하셨지만, 아양을 떨어서라도 어떻게든······.

아, 그리고 오늘 뜨던 양말과 팬티 셋트를 드디어 완성했다! 구멍이 좀 뚫려있긴 해도 작은 구멍이라 신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

요즘따라 뜨개질 실력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어서 기분이 좋다.

[ 두달 하고도 2주 ]

80일 가까이 지났다.

쟤는 자기가 무슨 도인이라도 된 줄 아나?

레반은 침실에 틀어박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도만 닦는다. 밥만 가끔 먹고 외부와는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아! 아힘사랑 딸기코는 가끔 만나는 것 같다. 딸기코놈은 레반의 침실에 들어가면 팔 다리가 막 이상하게 꺾여서 나오는데···나올 때마다 히죽이는 게 영 정상이 아니다.

어쨌든 은둔생활 덕분에 레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사그라들긴 했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천천히 잊혀가는 중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직도 올라오라는 말 없이 조용하다.

와, 이제는 두달이 넘었는데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으으, 싫다 진짜.

[ 세 달 ]

"음, 그리고 오늘이 딱 세 달째네."

레반의 침실 앞.

촤락!

슬레모킨은 펼쳐둔 일기장을 다시 덮고는 닫혀있는 문고리를 잡았다. 2주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게 다라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오늘은 레반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이렇게 찾아왔다. 내가 데려왔는데, 아픈데는 없는지 확인이라도 해 봐야지.

철컥.

그렇게 슬레모킨이 문고리를 잡던 그때.

"응?"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레모킨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레반을 탐탁치 않아하는 슬레모킨의 아버지, 아이작 모드릭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슬레모킨의 뒤에 서있었다.

자기 키보다 커다란 사냥활을 들고서.

"?"

#93화. 역시 우리 돌프 답구나!

#93화.

석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또 긴 시간이다.

어제부로 레반은 박살났던 몸의 회복을 얼추 끝냈다.

무리했던 몸으로 휴식기를 가지며 성취를 갈고 닦았다.

짐작하기로,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돌입했을 시점보다는 월등히 강해졌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고. 오늘을 기점삼아 전생의 경지조차 곧 뛰어넘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몇 마디로 짧게 끊어 설명할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레반에게는 있었다.

이 메카 세계수는 슬레모킨의 말대로 꽤 숨어 살기 좋은 곳이었다. 걱정했던 엘프들의 인간 배척도 없고, 감히 공주님을 빼앗아가려 하냐며 귀찮게 구는 엘프도 없었다. 당연히 슬레모킨이 신경쓴 덕이겠지만.

"준비는 됐나?"

"예."

누군가의 물음에 레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육신의 회복이 얼추 끝난 것을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찾아온 건지 모를 아이작이 그의 앞에 서있었다.

회복과 정양이 끝난 뒤, 레반의 첫 스케줄이었다.

"사냥에 나서는 사내의 패기가 이리도 없어서야.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

은근히 타박하는 듯한 아이작의 어조.

패기가 없다라···레반은 시발 뭐 어쩌라는거지? 같은 불순한 속내를 숨기며 어정쩡하게나마 몸에 힘을 넣었다. 특히 광배근에 힘을 꽉 주어 등판을 부풀리고 눈을 사내답게 부라리니, 그제서야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도 조금 낫나보다.

이 엘프도 어지간히 미친놈이라고 생각한 레반은, 광배근에 준 힘을 계속 유지했다.

괜히 성깔대로 지랄했다간 이 거물과 맞대매를 벌이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겠지.

앞뒤 안재고 달려드는 게 특기인 레반이라지만, 아무리 봐도 눈앞의 아이작이 죽은 바만차보다 밑줄에 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뒤에 일레힌 포이체카라도 버티고 있다면 또 모를까.

"더 늦기 전에 출발하지."

아무튼 아이작은 정확히 석 달째가 되는 날, 이렇듯 레반의 침실에 쳐들어왔다.

거대한 사냥활을 메고 나타난 근육질의 엘프.

우선 침실의 손잡이부터 가볍게 우그러뜨리며 압도적인 박력을 보인 아이작은, 레반에게 즉각 '사냥'을 같이 떠날 것을 종용했다.

— 아니, 지금 뭐하시는 거죠? 왜 이래!

옆에서 극구 말리는 슬레모킨도 빼놓고, 사내끼리 말이다.

"그러시죠."

레반은 갑작스러운 사냥행에 황당해하면서도, 이 덩치와 슬레모킨을 사이에 두고 치고박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겠다고 여기고 있었다.

마침 몸을 슬슬 풀어봐도 좋겠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으니.

쐐애액—

현재 둘은 엘프들의 메카 세계수를 벗어나, 계속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먼지 돌풍을 일으키며 질주하던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까마득한 고대, 원시 사회에서 수컷이 맡은 일은 단순했지. 모두를 배불리 먹일 짐승을 사냥해오고, 다른 부족들의 습격을 무력으로 막아냈다. 그것은 현재도 다르지 않다. 싸워 이겨 쟁취하고, 책임을 다한다. 수컷은 그뿐이다."

아이작은 사내라면 책임져야할 것들을 레반의 앞에 늘어놓았다.

"······."

그에 레반의 미간이 가볍게 구겨졌다.

따라 나오라길래 나오긴 했는데, 나한테 왜 저런 얘기를 할까. 듣자하니 장벽 밖에서 네가 얼마나 사나이스러운지 확인해 봐야겠다. 대충 뭐 그렇게 흘러갈 듯한데.

수컷임을 증명하려면 장벽 밖에서 시체와 춤을?

레반은 진정한 사내를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대가리는 아니었다.

'그냥 엎어?'

레반의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아이작은 대가리 속에 짱돌과 남성호르몬만 가득찬 엘프같은데, 지금이라도 약혼은 거짓말이었다고 털어 놓아야 하나···진지하게 고찰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차마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저거, 계속 보니까 나도 가지고 싶은데.'

슬레모킨이 부리는 청록빛 상어입 괴물.

일명,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은 한 마리가 아니다.

지금 아이작 모드릭이 제 몸처럼 부리는 저 괴물은 슬레모킨의 그 녀석과는 약간 다른 생김새이나, 더 강해보였다.

레반이 당장 거짓 약혼이라고 털어 놓지 않는 이유였다.

'가지고 싶다. 한 마리 달라하면 주려나.'

저것이 아까부터 계속 눈에 밟혔다.

분명한 생물체다. 기계 따위가 아니다.

그런데 그 자체로도 굉장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체를 뜯어먹더라도 감염 걱정 없이 멀쩡하다. 심지어 발할라의 산맥 봉우리 해발고도 1만미터에서 사람을 태우고 뛰어내려도 문제없는 기동성까지.

전 십이제인 카스트라 뷔에탕같은 거물도 저것을 알고 있고, 어딘가 껄끄러워하는 이질적인 존재이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보물.

서부극이든 분노의 질주든 저것만 있으면 한 편 뚝딱이잖아. 진정한 사내를 칭하는 자라면 탐이 안 나기가 힘들지 않을까.

일전에 슬레모킨에게 한 번 넌지시 물어봤던 적이 있긴 했는데, 이족이 아니면 어림 없으니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 일이라는 말만 들었다.

"······."

그렇다면 어떻게 물어봐야할까.

솔직히 이 양반은 좀 껄끄러운데.

레반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점점 가까워지는 장벽에 고개를 들었다. 알 헤임달의 높은 북부 장벽이 레반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따라 오는군.'

앞서가던 아이작은 따라오는 레반을 보며 꽤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애마가 최대 속력으로 내달리고 있다. 쏘아진 총탄만큼 빠르지는 못해도, 상대가 7레벨급 정도라면 이미 진작에 따돌렸어야 했다.

하지만 쉽게 뒤를 쫓아온다.

재미있는 점은, 저 녀석은 이 사실을 별 대단치 않다고 여긴다는 것.

내공을 그리 과하게 운용하는 것도 아니며, 억지로 따라붙느라 기를 쓰는 느낌도 전혀 없다. 경공이 몸놀림에 자연스레 배어 녹아있는 것뿐이다.

'흠.'

아이작은 과거 오로지 경공술(輕功術)만 한평생 익혔다는 무림계의 기인이사들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무림계 기업 전문 우체부라던가. 한 발로 절벽을 오르고, 도약 한 번으로 산을 뛰어 넘는다는 그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레반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곧, 애마의 등 위에 섰다.

그리고 한 번의 도약.

쐐애애액!

그러자 한순간에 점이 된 아이작의 거신은 근방에서 가장 높은 빌딩보다도 높게 솟았다. 빌딩의 꼭대기를 밟고 솟구친 아이작은, 증기를 내뿜으며 창공을 헤치며 비행하던 어느 비공정의 돛대 위에 내려섰다.

무거운 몸으로 털썩 앉은 아이작. 그는 알 헤임달 시티의 정경을 한 눈에 내려다보았다. 정겨운 석탄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리는지라 아주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가끔 경치를 즐기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그래도 시원하고 좋군."

"그렇군요."

어느새 따라와 아이작의 옆에 내려선 레반의 목소리였다.

"······흠."

사실 따라오지 못할 줄 알았다.

그는 레반을 식사 자리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육체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7레벨 주제에 겁도 없이 9레벨 네임드 개체와 일기토를 벌여 초주검이 되었다고 들었다. 분명 무리에 무리를 극한까지 거듭하였을 터.

아이작이 확인한 레반은 1, 2년 이상은 꼼짝없이 요양을 해야하는 지경이었다.

헌데 그 자리에서 자신의 투기를 버텨보이는 것도 모자라서, 정말 석 달만에 저리 완전히 회복했다는 얘기인가?

석달이면 일부는 몰라도 다 회복하지는 못했을 터.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자신의 딸을 탐낸 불청객의 심지를 꺾어버릴 생각으로 왔다.

그런데, 아이작의 생각보다 확실히 뛰어나다.

조금만 힘들어도 헥헥대며 강자의 투기에 숨부터 죽는 놈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사내는 상대가 누구든, 지키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조금은 봐줄만한 예비 사윗감이라고 할까.

"흠."

레반도 모르게 엘프들의 군주, 철혈의 사냥꾼 아이작 모드릭의 품평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콧김을 한번 내뿜은 아이작은 곧바로 돛대를 박차고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내렸다.

어느덧 그들은 장벽 밖에 이르렀다.

현재 알 헤임달은 석 달째 대개척을 벌이며 시티 주변의 시체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껏 얻어둔 개척지와 알 헤임달의 본토를 이을 장벽을 대폭 늘리는 대수술.

남, 동, 서부에서 대약진하며 시체들을 북부로 밀어 올리고 있다.

그래서 이곳 북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끊이지 않고 사방에서 밀려드는 불명의 시체들뿐. 천지사방에 움직이는 모든 것이 끔찍한 적의를 가지고 달려든다. 역겨운 종자들을 퍼뜨리고 살을 탐하기 위해.

"아휴."

이곳이 마경과도 같은 장소임을 금세 알아챈 레반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를 본 아이작이 그러면 그렇지-하며 웃었다.

몸이 굳었군.

역시나 연방에 의해 부풀려진 소문이었던가.

'딸아이가 평생 독수공방을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수컷은, 살 가치가 없다.'

7레벨급이 단신으로 보여줄 수 있는 무력의 한계는 명확하다. 한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줄행랑을 치겠지.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대대적인 변화를 끝낸 레반은 몰려드는 시체들을 앞에 두고 섰다. 지난 석 달의 성과를 확인해볼 차례라고 생각한 그는 곧바로 공력을 끌어올렸다.

— 부웨엑!

더럽고 역한 액체를 전방으로 토하는 시체.

펑!

···의 머리통이 단숨에 증발한다.

사내들의 사냥은, 레반의 손가락에서 뻗어나간 지풍(指風)이 시체의 대가리를 폭죽처럼 펑 터뜨리며 시작되었다.

"?"

활을 집어들던 아이작이 눈을 비볐다.

* * *

우지지직!

지면을 뚫고 발목을 공격하는 놈을 즈려밟아 터뜨리고, 뻗어오는 좀비의 팔을 잡아 분질러버린다.

동시에 공중으로 도약한 내가 한 곳으로 쏘아졌다.

— 갸아아악!

6레벨급은 족히 될 좀비가 놀라 소리를 지른다.

지능이 꽤 높은지 한참 뒤에 빠져있던 놈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놈의 팔을 뽑아 비명지르는 입구멍에 박는다. 놈의 뒤통수에 긴 팔이 자라났다.

텅!

탄지공(彈指功). 뭉쳐진 기운을 손가락 끝으로 쏘아낸다. 원거리에서 달려들던 좀비의 대가리들이 두부처럼 꿰뚫린다.

묘기에 가까운 공력의 수발.

기운과 정신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는 개 미친짓거리였지만, 지금의 나는 가능하다.

8레벨의 경지를 이루었으니까.

그간 바만차의 에센스를 전부 마셔버렸다.

멍청한 새끼. 나는 굉장히 멍청한 새끼다.

몇 년간 천천히 회복하고 마셨다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에센스였다. 나중에 위급해졌을 때 목숨을 살리는 데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끼고 아끼다 결국 뒈질뻔했던 기억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 또한 로라 마르티네즈의, 에센스는 상상속 엘릭서가 아니라는 말도 뇌리를 맴돌았다.

나는 본래, 가끔 생각없이 질러대며 살아온 사내. 화산에서 매화 가지도 그냥 꺾는 사내. 열 받으면 사람도 죽이는 사내. 운석과 박치기도 해본 사내.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질렀다.

스거걱!

광선을 뽑아 통쾌하게 한바퀴 돌렸다. 기운을 압축한 발검이 주위를 포위해오던 좀비들의 허리를 일시에 뎅겅 잘라낸다.

나는 그간의 한을 풀어내듯 좀비들을 썰어댔다.

한바탕 살풀이가 벌어졌다.

으지직!

마지막으로 수십 마리의 척추가 단숨에 분리되며 좀비들의 육벽에 막혀있던 아이작의 모습이 드러났다. 더 이상 덤벼들 좀비가 없었다. 지능이 낮은 놈은 다 뒈졌고, 좀 높은 놈은 진즉 도망쳤다.

촤악!

나는 상쾌한 얼굴로 피를 씻어냈다.

이제야 혈액이 빠릿하게 도는듯하다.

내가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자니, 지켜만 보던 아이작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요즘 대개척때문에 대외적으로도 정신이 없었네. 자네와의 식사 자리는 돌아가서 따로 마련하도록 하지."

몇 시간만에, 네가에서 자네로 승격했다.

역시, 대가리에 근육밖에 없는 사내로군.

나는 피도 잔뜩 본 김에 시원하게 입을 열었다.

"약혼, 거짓말이었습니다. 따님은 제게 안 주셔도 됩니다. 실은 그저 한솥밥 먹던 동료일 뿐인지라."

"자네가 딸아이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네."

"그렇습니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괜찮네."

갑자기 태도가 변한 아이작은 대인배와 군주의 면모를 동시에 뽐냈다.

"하지만······인연이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 아니겠나. 이제 스물을 갓 넘겼다고 했나? 그 어린 나이에 8레벨이라는 경지에 올랐다면, 나약한 인간처럼 빨리 늙을리도 없겠군."

"······."

후우-

나는 진득한 피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시종이던 시절의 얼굴과는 어딘가 많이 다르다.

총평하자면 평범했던 외모가 조금 볼만하게 바뀌었고, 골격도 달라졌다. 내가 그리 느끼고 있다.

아마 육체를 재구축했다는 로라 마르티네즈의 취향이 약간은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르륵-

그때, 아이작이 흙갈빛 괴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네도 하나 가지고 싶은가?"

대가리에 근육만 꽉 들어찬 줄 알았더니, 이래서 엘프는 겉으로만 보면 안 된다.

눈치는 거의 여우 이상 아니던가.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짐승' 은 흡혈귀들의 금지(禁地)에 있다.

과거 초월적으로 강력한 경지를 달성했던 흡혈귀.

혈교주, 혈마(血魔).

강력했던 시체들을 흡수해 자신의 육신과 섞어버린 혈마는, 거대한 힘과 요기를 지닌 '짐승' 을 세상에 남겼다.

시체에 시전자의 피를 뿌려 그 '짐승' 의 안에 넣으면 마치 수인의 육체처럼 강성해지고, 대단한 회복력을 갖고있는 짐승의 부스러기를 뱉어낸다.

짐승 부스러기는 피를 뿌린 주인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피로 맺어진 고위 흡혈귀의 혈술(血術)이 짐승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과거 악명높던 흡혈귀가 탄생시킨 끔찍한 산물은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현시대까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전설속의 키메라와도 같은 원리. 하나의 생물안에 형질이 다른 것들을 뭉쳐놓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시체와 인류 사이의 무언가로 변한다.

수혈팩을 병원에 팔아먹고 사는 흡혈귀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쉬쉬한다. 연방에서 그닥 반기지 않으니까. 혈마가 떨친 악명은 아직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짐승' 의 위치와 사용은 철저하게 혈교의 고위 흡혈귀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며,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아이작쯤 되는 인물이니 딸인 슬레모킨에게도 하나 장만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까지가, 아이작에게 들었던 '짐승' 에 대한 설명이었다.

척 봐도 일반적인 인간은 접근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엘프들의 군주인 아이작은 꽤 자신감을 내비쳤다.

[ 강력한 시체를 넣는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

[ 만약 시체가 아닌 사람에 피를 섞어 '짐승' 에 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

[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다만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며, 인간도 시체도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들었다. ]

[ 지금껏 그랬던 적이 있습니까? ]

[ 없지는 않다고 들었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강한 힘을 얻겠지만,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한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겠지. 정신이 과연 온전할지도 모를 일이다. ]

'흐음, 그럼 혹시 이 새끼를 넣으면······?'

꽈악.

나는 루돌프의 이두근을 주물렀다.

"이야···."

"어떻습니까?"

칭찬 비슷한거라도 받는 게 오랜만인지, 괜히 우쭐해진 루돌프놈이 몸에 힘을 주며 물었다. 나는 짐짓 감탄하며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돌프야, 너 근질이 좋구나."

"아 뭐 이 정도로 놀라고 그러십니까? 제가 그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루돌프놈은 석 달간 아주 잘 챙겨먹었는지, 이전의 멸치였던 육신에서 꽤 탄탄한 몸으로 탈바꿈했다.

마침 시기도 딱 좋군.

"그런데 살짝 아쉽네."

내가 뜬금없이 그리 말하자, 바뀐 몸에 꽤 자신이 있었는지 루돌프놈은 버럭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지금 뭐가 아쉽단 말입니까 형님?"

"조금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너한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아직 외공의 성취가 부족해."

"형님, 이거 핏줄 솟은거 안 보입니까? 다시 만져보셔야겠는데."

"됐다. 외공이나 잘 갈고 닦아라."

루돌프놈의 형형한 눈빛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사람한테 할 짓은 아니지하며 몸을 돌리려고 했다. 나는 분명 포기하려 했다.

덥썩!

헌데 그 순간, 루돌프놈이 내 팔목을 잡고는 당당히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뭔데 그럽니까!"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참 좋은 기회가 있는데, 네가 견딜 수 있나 모르겠다. 꽤 아플지도 모른다."

"아이고 형님, 팔다리 다꺾여도 웃으면서 버티는게 접니다. 아시겠어요? 이미 고통 따위에는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졌다 이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바만차와의 결투에서······."

"그래? 정말 뭐든 견딜 수 있겠니?"

"예, 걍 좆밥이죠!"

"역시 우리 돌프 답구나!"

"하하하핫!"

#94화. 역시 우리 돌프 답구나! 2

#94화.

발할라 시티,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

비어버린 통유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은 오늘도 조심스러웠다. 원래는 카산드라가 가장 아끼던 골동품을 전시해두었던 유리장이었다.

론 카산드라는 문득, 보도된 사진을 바라보았다.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의 영웅.

단 5분간의 스피치로 연방을 뒤집어버린 남자.

"아아······아스파로프님······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어쩌면 그는 이미 본래의 외형을 탈피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지.

로라 마르티네즈와 진공진인이라는 마법, 무림계의 거물들을 한데 묶어 한 팀으로 만들어버린···그 괴이하고도 유령같은 존재는 현재 몇 달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만히만 있어도 연방에서 밀어주는 수복전의 대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든 의문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잠적했다.

7레벨이 감히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니다. 상식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행동의 이면에는, 평범한 이들은 알지못할 이유가 있을 터였다.

연방의 전설, 현자 체슈탈 아스파로프.

"나만, 나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네요······."

카산드라의 확신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였다.

'레반' 이 과거 10레벨의 경지를 달성한 마법사이자 전설적인 현자, 체슈탈 아스파로프라는 것을.

그의 비범함을 자신만이 알아보았다.

일생동안 좇아온 신기루가 실제로 눈 앞에 나타났고, 그 사실을 자신만이 알고있다니. 그 형용하지 못할 감각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아아!"

아스파로프의 광팬, 카산드라 교수는 또다시 몰려오는 희열에 한참동안이나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로써 레반이라는 캐릭터는 아스파로프가 만들어낸 하나의 인격이 틀림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식사할 때 썼던 저택의 식탁보를 사랑스럽게 개어 정리했다.

그 뒤로.

"다, 다음번에 만나면······뭘 드려야 하지?"

갑작스레 카산드라 교수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기존 회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시크릿 경매장을 포함해 각종 부티크를 이잡듯이 뒤진다. 세상에 남은 그분의 물건을 찾아 자신의 손으로 돌려드릴 것이다.

정말, 상상만해도 행복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아아······."

* * *

"하하하핫! 역시 우리 돌프로구나!"

"?"

빙글빙글 웃는 레반을 바라본 밴스가 뒤통수를 긁었다.

어, 왜 저렇게까지 좋아하지?

위화감이 스멀스멀 뒷목을 타고 올라온다.

밴스는 불현듯,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뭐지?'

몸 좋아졌다는 소리에 괜히 기분이 들뜨는 바람에, 신나서 막 팔다리 부러져도 버틴다 등등 이상한 대답을 내뱉긴 했는데 그거야 일상이긴 하고······.

잠깐.

생각해보니까 뭐든 견뎌낼 수 있겠냐고?

두들겨 팰 거면 묻지 않고 때렸을 놈이다.

'아······시발.'

아무래도 이상한 도발에 걸려든 것 같았다.

느낌이 너무 쌔하기에, 그냥 안 한다고 급히 말을 바꿨다.

"저 그냥 안 할래요."

"돌프야, 언제는 좆밥이라고 하지 않았니."

"진짜 안 하겠습니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놈이 갑자기 왜 이래. 누가 너한테 뭘 하겠대?"

"오늘 일정이 바빠요. 외공 수련 해야 됩니다."

"허허."

밴스의 저항에도 레반은 다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타이르며 웃었다. 그러나 밴스는 같이 하하 웃으며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 어여쁜 엘프들도 매일 구경했다. 몇 달간 유독 운수가 좋았다. 멸치처럼 얇았던 몸도 튼튼해지고, 시궁창같던 인생에 드디어 볕이 드나 했다.

하지만 그간 개처럼 두들겨맞으며 갈고닦은, 본능적인 생존 감각이 당장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 아무튼 안한다고요. 알아 들으셨어요?"

오늘만큼은 절대 따라가선 안 된다고.

백 퍼센트 확률로 큰일이 벌어진다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엘프들의 세계수의 남아있으라고 말이다.

"돌프야, 남아일언중천금이다. 그러니 사내가 한번 했던 말을 쉽게 바꾸면 안 되겠지?"

"저 여자할게요. 그리고 이번만 바꿀테니까 좀 내버려 두세요."

"돌프야."

"네. 형님."

"그러면 잠깐만 이리와봐라."

"?"

밴스가 마지못해 다가가자, 레반은 웃는 낯으로 밴스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우득-

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밴스의 외공의 성취가 몇성이든간에 당장이라도 어깨 위에 달린 수박을 깨부술 수 있는 사내.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이치를 깨달아 외부는 멀쩡히두고 내부부터 부술 수 있는 사내.

그것이 밴스에게 팔을 두른 레반이었다.

레반은 밴스의 귀에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 지금 돌프가 하겠다고 해서 다들 애쓰고 있는데, 네가 이제와서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할까. 그냥 좆밥이니까 반드시 하겠다며. 사람들 다 불러다놓고 똥개훈련 시키는거니?

"······."

- 형이 어련히 너 해주려고 전부 세팅해뒀는데, 지금 와서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돼? 내가 뭐 너한테 나쁜거 시킨적 있어?

척! 동시에 아힘사가 뒤에 나타나 뒷걸음질 치던 밴스의 퇴로를 막았다. 사면초가. 도망칠 구멍이 보이질 않았다.

레반은 밴스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며 말했다.

"끝나면 맛있는 돈까스 사줄게. 알겠지?"

"······."

마치 허위매물 업자처럼 돌변했던 레반은 다시금 다정한 어조로 두려워하는 밴스를 달래주었다. 이미 결정했고 하기로 마음먹은 것. 사내답게 눈 딱 감고 결정하자는 식으로.

"겁먹지마. 별 거 아니야. 너 인마 잘 안죽어. 좋은 외공이라니까."

"······."

바짓가랑이나마 붙잡으려던 밴스의 모든 퇴로가 막혔다. 밴스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좀 아프더라도 또 뭔가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도축장에 끌려가는 것만 같지 않은가.

'시발. 어떡하지? 가면 좆될것 같은 분위기인데.'

그리고 레반 저 새끼 뭔가 알고있는게 분명하다.

근데 저 새끼가 마음 먹었으면 끝장이다. 아무리 지랄해도 자신의 대쪽같은 뜻을 관철시키고야 마는 놈이다. 그게 별 좆같은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이 새끼는 한다면 반드시 하는 놈이다.

이거 안 되겠다.

불안함이 전신을 찌른다. 오늘만큼은 당할 수 없다.

끝나면 맛있는 돈까스 사준다고? 시발, 나보다도 어린놈이 형님 형님 해주니까 이제 나를 아주 개무시해?

"나도 하나의 인격체라고! 뒈져 새꺄!"

화악!

울분을 한꺼번에 터뜨린 밴스는 레반의 팔을 강하게 붙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정크타운에서 갈고 닦은 퍽치기 실력을 가감없이 뽐낸 것이다. 육 성에 이른 외공에 주먹은 암석보다도 단단했다. 황소처럼 돌진해오던 시체놈도 박살내버린 몸뚱이다.

탁!

"어허. 다친다."

"!"

그러나 죽엽수로 가볍게 그 힘을 흘려낸 레반은 다치면 안된다는 듯, 살짝만 힘을 주어 제압했다.

그리고는, 그냥 내려놓았다.

평소같았으면 싸가지없이 손을 들어 올리냐며 일단 팔부터 분질러버린 다음 빨랫감처럼 쥐어짜고도 남았겠지만, 오늘 레반은 그리 흉악하게 굴지 않았다.

"돌프야, 다칠 뻔했잖아. 너 괜찮니."

"······."

밴스는 그 점이 오히려 더 두려웠다.

차라리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는게 몸은 아프지만 마음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제 마음의 준비 끝났으면 출발해볼까?"

* **

이족, 흡혈귀들의 과거 성지이자 금지(禁地).

혈교.

지금은 그저 흡혈귀들이 믿는 하나의 종교로 변모한 혈교라지만, 과거 교주였던 혈마가 죽기 전에는 교세가 대단했다.

지금 레반은 그 혈교의 중심에 있었다.

"저것이 알 헤임달의 짐승이다."

혈마가 세상에 남기고간 '짐승' 은 십 미터가 넘는 피륙의 거대한 덩어리로, 거대한 어항 속에서 피에 푹 잠겨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혈액 어항 위에는 교수대같은 장치가 하나 있었다. 아마 부스러기가 될 재료를 결박해두는 곳이겠지.

흡혈귀들의 피에 푹 담가놓은듯 보이는 짐승은, 레반이 몇 개의 생을 겪는동안 본 것들중 손에 꼽을 정도로 기이한 생김새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혈액의 어항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복어같았다.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거대 덩어리는 붉은 혈액의 늪에 잠겨 천천히 박동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놀라는 기색 없이, 익숙하게 안내했다.

"따라오도록."

그렇게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직진한 아이작은, 현재 혈교의 주교라는 고위 흡혈귀들의 앞에 레반과 밴스를 떡하니 데려다 놓았다.

— 오셨습니까······.

시리도록 창백한 피부에 하나같이 미형의 외모.

잠시 아이작과 대화를 나누던 그들의 시선이 레반에게로 향했다.

곧 레반이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를 얻고자 한다고 하니, 그들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아이작께 전해 듣긴 했습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시체가 아닌 인간을 넣겠다는 말입니까?"

"예."

흡혈귀 주교의 표정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는 건가?

흡혈귀 주교는 친절한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적당한 시체를 포박해올 자신이 없다면 도와드리지요. 인간에게 혈술을 행한다면, 평생 끔찍한 고통을 안고 살아갈겁니다. 혈술로 인한 통증은 시체이기에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그랬던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로 버티지 못할 겁니다. 살아남아 힘을 얻는다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매일같이 뒤따를 것입니다."

"······정말로요? 이것 참."

레반은 장담하겠다는 듯 극구 말리는 흡혈귀 주교를 보며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루돌프놈은 현재 한 외공을 익히고 있다.

놈은 신기하게도 성취가 굉장히 빠른 탓에 무려 육성의 경지를 이룬 상태다. 쓰레기놈이지만 특히 익힌 외공에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루돌프놈이 익힌 무공은 일생을 광인으로 중원을 주유하던 내 스승이 형산의 어딘가에서 얻어온 것이다.

무통귀갑신공(無痛龜甲身功).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거북이의 육신.

루돌프놈이 계속 물었을 때, 무공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던 이유. 사실 내가 가르치긴 했지만 명칭이 워낙에 쪽팔려서 그랬다.

어찌 되었든 이 등신같은 이름의 무공은, 중원의 형산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던 한 변태 기인이사가 창안했다.

형산의 사람들은 그 기인이사를 괴노야라 불렀다.

괴노야는 한때 소림의 중이었으나 정신머리가 온전치 못해 파계당한 땡중으로 대종사급의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소림의 중들은 고기와 술, 여인을 멀리하는 탓에 정신이 홰까닥 나가버리는 일이 왕왕 발생하곤 한다.

어느날 외공의 달인인 괴노야는 마침, 그와 똑같이 정신나간 무인인 나의 스승을 만나 한쪽은 막고 한쪽은 뚫는 생사결을 벌였고, 스승 광마가 진땀을 뺀 끝에 승리하였다.

이미 무위가 조화경에 이르렀기로 무림에 광마를 상대할만한 자가 별로 없었는데, 고작 한 합 차이로 승부가 갈렸을 만큼 괴노야는 강했다.

그리고 그 싸움 뒤에 비슷하게 정신나간 놈들끼리 쿵짝이 맞아 형입네 아우입네 하며 얻어온 무공이 바로 무통귀갑신공.

학대에 학대를 거쳐 몸에 자연히 기가 스며 극성에 이르면, 진정한 불괴지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하여 그 땡중이 지어붙인 이름이라던가.

하나하나 말하자면 너무 길고, 간단히 말해 쳐맞으면 쳐맞을수록 몸이 단단해지고 맷집이 좋아지는 미친 무공이다.

심지어 무통귀갑신공을 사성 이상 익혀버리면, 그때부터는 체질이 변하여 다른 무공은 익히기가 힘들다. 오로지 이 무통귀갑신공만을 익혀야 한다. 그러니 미친 무공이 맞다.

무공의 극의이자 추구하는 목표는 불괴지신(不壞之身).

도검이 불침하고 수화가 불침하는 경지.

아마 소림 출신인만큼 그 무공을 새로이 창안할 때, 금강불괴(金剛不壞)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허나 소림에서 말하는 금강불괴의 경지를 실제로 달성할 수 있다면, 그자체로 이미 신공절학 이상이다. 외공과 내공을 가르는 의미가 사실상 없는 수준일 테니.

그래도 일단, 무통귀갑신공은 금강불괴의 경지를 노려볼만큼 훌륭한 외공이 맞다.

다만, 하나 큰 문제가 있다면.

그 대종사급의 땡중 괴노야도 무통귀갑신공의 대성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괴노야가 무통귀갑신공을 팔 성까지 익혀보니, 인간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은 한정되어 있기에 성취를 더이상 진전시킬 수 없었다던가.

대성에는 이를 수 없는 반쪽짜리 무공인 것이다.

하기야···아무리 두들겨 패도 처음 몇 년이나 고통스럽지 시간이 지나면 루돌프놈처럼 다 적응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몸은 보통 그렇다. 통증의 상한선은 존재한다.

물론, 내 스승 광마는 최대한 고통에 적응하지 못하게 여기저기 골라 때리는 기술이 훌륭했다. 제자인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2년간 적응도 못하고 뒈지게 아프게 쳐맞은 것이지.

나는 루돌프놈에게 무통귀갑신공을 익히게 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 루돌프놈에겐 그것이 최고의 외공이었다. 데리고 다니면서 마음껏 두들겨 패도 상관없고, 다른 무공 가르치지 않아도 되고, 계속 때려도 몸은 점점 튼튼해지니까.

'허나 인간의 몸으로는 무통귀갑신공의 성취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사실 육 성이면 한계가 보이는 수준이다.

무공의 창시자조차 팔 성을 한계로 두었으니.

그 외공이 잘 맞는, 재능있는 놈을 기술적으로 패고 고문하여 고통으로 이룩해낸 경지.

헌데,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라는 가능성이 보인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 그것은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며. ]

[ 살아 남으면 강력한 힘을 얻는다. ]

[ 시전자의 피를 뿌려 그 '짐승' 의 안에 넣으면 마치 수인의 육체처럼 강성해지고, 대단한 회복력을 보유한 부스러기를 뱉어낸다. ]

저 대목들은, 듣기에 실로 달콤한 것이 아닌가.

모두 무통귀갑신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조건들.

어차피 이제 루돌프놈은 팔다리 관절을 반대로 비틀어도 그때만 소리를 지를뿐 멀쩡하다. 육체적인 고통에는 슬슬 통달했다는 뜻.

여기서 루돌프가 인간의 한계를 깬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면, 매일같이 공짜 고통을 겪으며 무통귀갑신공의 경지를 꾸준히 발전시킬 수 있다면.

거기다가 육체 강성과 대단한 회복력까지 준다고?

루돌프를 위해 준비된 종합선물세트가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무공을 창안한 대종사 괴노야조차 이르지 못한, 구 성 이상의 경지를 달성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거나,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는 것이다.

"돌프야."

그렇게 상념을 끝낸 레반이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무통귀갑신공 육 성에 이른 루돌프놈은 필시 버텨낼 수 있다. 약간의 고통이 수발될 수 있으나, 들어보니 사람이 아주 즉각적으로 묵사발이 될 정도는 아니란다.

팔 성까지 익힌 괴노야가 광마와 싸워 한 끗차이로 패배했을 정도로 훌륭한 외공이다. 자그마치 육 성이나 성취한 루돌프에게 저 따위 살덩이의 혈술이 대수랴.

레반은 그간 자신의 폭력을 견딘 루돌프라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예, 형님."

"너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지 않을 것이야."

"저, 정말입니까."

"왜냐하면 네놈을 곁에두고 평생 두들겨야하기 때문이다. 이제야 육질이 쫄깃해졌는데 순순히 죽게 놓아두겠느냐. 나는 그래선 안된다고 봐."

"······시발, 그게 무슨 개풀 뜯는 소립니까."

"들어가라. 오늘은 더 피를 보기가 싫구나."

"······진짜로 들어가요? 저 시뻘건 곳으로요?"

"괜찮다. 숨겨둔 대안이 다 있어."

"구, 구라치지 마세요. 그냥 무작정 넣어보고 조, 좆되면 그냥 에이 실패했네 하고 갈거죠? 로또 긁어보는 심정이잖아요 지금."

그렁그렁해진 밴스의 눈가를 확인한 레반은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렸다. 막연한 두려움은 인간의 정신을 파먹는다. 루돌프놈이 두려움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무대를 만들어주자.

"저기요! 이제 그만 시작합시다!"

"······."

레반이 고개를 돌리자 흡혈귀 주교들이 천천히 다가와 밴스의 양 팔을 결박했다.

그들은 아이작을 흘긋 보고는, 질질 짜는 밴스를 피의 어항 위로 터벅터벅 끌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어지는 광경을 확인한 레반이 손에 낸 상처를 지혈하며 신께 기도를 올렸다.

'제발 튼튼하고 좋은 놈으로 나오게 해주세요!'

* * *

흡혈귀들은 시리도록 창백한 피부만큼 시원시원하게 굴었다.

풍덩-

루돌프놈이 혈액의 어항, 그러니까 짐승의 구멍 속에 빠질 때까지만 해도 흐름은 좋았다.

허나 그 좋은 흐름은 아쉽게도 얼마 가지 못했다.

콰아아아아—

혈액의 어항 속에 잠겨있는, 그 짐승의 피륙덩이가 느닷없이 어마어마한 요기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혈액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바깥으로 넘치려했다.

흡혈귀 주교들의 당황한 면면들을 보면, 평범한 사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놈들은 저들끼리 생인간을 오랜만에 넣어서 그런가, 같은 추측들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들에게 따지고 들었다.

"저거 갑자기 왜 저러는 겁니까?"

"혈술에 육신이 크게 반응하는 겁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짐승의 몸에 남아있는 혈술은 그자체로 거대한 생명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강력한 시체들과 육신을 뒤섞어버린 혈마의 의지가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따라서 재료에 따라 강한 반응을 보일 수도, 약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저 짐승이 변덕을 부려서 강한 힘을 낸다는 겁니까?"

"······요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멀쩡히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 요기를 버티거나 가라앉힌다면 더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방금 들어간 인간은 강력한 시체도 아닐 뿐더러—"

흡혈귀의 얼굴에 혈색이 돈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아주 창백해진 것.

그니까,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로군.

내가 보기에 거의 바만차급에 이르는 강대한 요기다.

주교의 말대로 강력한 시체라면 몰라도, 외공 하나 딸랑 익힌 루돌프놈이 저만한 요기를 가라앉힐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저 요기만 가라앉히면 돌아온다 이겁니까?"

"그야 그렇지만, 외부에서 가라앉힐 방법이 전혀······."

나는 즉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웬 조그만한 나뭇대 하나가, 내 안주머니 안에서 급히 빠져나왔다.

#95화. 역시 우리 돌프 답구나! (끝)

#95화.

콰아아아아—

짐승의 폭주.

강대한 요기가 줄기차게 뿜어져 나오자 짐승의 몸체가 담겨있던 어항의 혈액이 철썩이며 파도를 이루었다. 이윽고 혈교단의 금지 전체를 가득 메우며 퍼지는 요기.

저런.

나는 기함하며 기운을 적당히 끌어 올렸다. 루돌프놈이 워낙 단단한 바람에 맛이 없는 걸까.

우선 안주머니에서 꺼낸 나뭇대를 이리저리 돌리며 상황을 지켜본다. 하지만 물끄러미 지켜본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흡혈귀 주교들의 말대로 짐승의 혈술이 유독 격하게 반응하는지, 요기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던 탓이다.

결국 지켜보던 내가 마땅히 말문을 열었다.

"저대로 두면 위험할 듯 하니, 손을 써야겠습니다."

"힘들겁니다. 요기의 세력이 너무나 강합니다."

내 말에 세 명의 흡혈귀 주교들은 약속이나 한듯 고개를 저었다. 일에 휘말린 루돌프놈이 멀쩡히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무언가를 시도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맞습니다. 늦었습니다.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혈술이 이미 작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멈추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짐승을 훼손시킬 작정이라면 절대로 허락할 수 없겠습니다."

주교들의 극구만류에도 나는 안주머니에서 꺼낸 나뭇대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요기만 잘 가라앉히면 강한 놈이 나온다라.

재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좋은 건지······.

이건 나만의 생각이지만, 사내는 때때로 폭력성을 배출해야한다. 물론 자주는 아니고 가끔씩 말이다.

무통귀갑신공의 창시자, 파계승 괴노야는 불가에 귀의해 숭산에 오른 뒤로 술도 못마시고 고기도 못 먹고 여인도 품지 못했다.

객점에서 흑도나 파락호들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절간에 꿇어앉아 목탁이나 쳤을 테고. 심지어 혼자 용두질마저 못 했을 테지.

소림의 규율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스러운 폭력성을 배출하지 못하였으니, 그것에 잠겨 서서히 미쳐가다가 마침내 무통귀갑신공이라는 미친 무공을 창안하고 내 스승 광마와 장단이 맞을 정도의 광인(狂人)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돌프는 상당히 중요한 자원이다.

나의 성질을 마음껏 배출할 수 있게 돕는 수단.

그러니까 정신머리가 가끔 돌아버리는 사내인 내가 인간성을 편히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욕받이인 셈이다. 전장에서 살지 않더라도, 아직까지 내가 멀쩡한 정신으로 남아있는 이유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어느날 갑자기 돌아버려서 칼춤을 추지 않게 하는. 그래, 아마도 루돌프놈은 정크타운의 하레니오 갱단 피해자들이 내려준 수호신이 아닐까. 하레니오 갱단 놈들도 저 놈때문에 다 뒈진 것이니.

뭐 루돌프놈이 그런 욕받이 신세를 원할지는 모르겠으나, 고분고분하게 굴던 내 얼굴에 칼빵이나 놓는 개놈이었으니 녀석의 신세 따위 사실 내 알 바는 아니지.

허나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내다.

루돌프녀석에게 오늘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으니, 내가 그리 만든다.

우우우웅—

흡혈귀 주교는 외부에서 요기를 가라앉힐 방법이 없다고 단언하였으나, 나는 카산드라 교수에게 받은 아스파로프의 마병, 나뭇대 지팡이에 공력과 마력을 동시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공력이 기경팔맥을 내달리고.

그 막대한 양의 기운을 순식간에 빨아삼키는 나뭇대는, 발할라 봉우리에서 사용했을 때와 같이 한 극점에 기운을 압축시키기 시작했다.

"······흐음."

당연히도 아이작의 시선이 곧장 꽂혀들었다.

나는 나뭇대에 진력을 쏟아 부으며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 아스파로프의 나뭇대에서 쏘아진 원형의 기운 덩어리는 생명체에 유효하고, 느리지만 적중당한 생명체는 급속도로 생기를 빨아먹힌다. 설산목을 상대로 실험을 해보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저걸 다 빨아 처먹을 수는 없을 터.'

이 악마같은 흡성대법 나뭇대라도 저리 강맹한 요기를 남김없이 빨아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전에 보았던 놀라운 효과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요기를 일정 부분 가라앉히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다만 혈마의 술법을 머금고 거대한 요기를 보이는 저 '짐승' 의 기운을 빨아먹는 동안 세 명의 흡혈귀 주교들이 가만히 두고 보느냐가 문제인데.

연방 전체에서 터부시되는 흑마법이나 흡성대법마냥 생명력을 쭉쭉 빨아 먹는 이 끔찍한 마병을, 아이작과 흡혈귀 주교들의 눈앞에서 쓰는 것보다 루돌프놈의 가치가 높은가?

아니다. 루돌프놈은 한낱 양아치일 뿐이니.

아이작은 어쩔 수 없고, 흡혈귀들은 그냥 때려 눕힌후에 진행해야 하나.

나는 일단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공력을 주입했다. 와중에도 짐승이 뿜어내는 요기는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렇게.

조그만한 나뭇대 하나 꺼내들고 저 미친놈이 뭘 하는거지? 하며 수군대던 흡혈귀 주교들이 점점 이상함을 느끼고는 어어, 소리를 낼 즈음이었나.

털썩-

"?"

순간, 지켜보던 아이작의 신형이 사라지나 싶더니 셋이나 되는 흡혈귀 주교들을 일시에 때려 기절시켜버렸다. 흡혈귀 주교들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상당한 실력자들인데, 저 근육덩어리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귀찮게 구는 장애물들이 잠시 퇴장했다.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연방에서 많이 꺼려한다 하더라도 '짐승' 은 혈교의 금지에 자리해 흡혈귀들에게는 신물과도 다름 없는 취급이다.

그런데도 아이작은 대놓고 내 손을 들어준 것이다.

같은 이족이 아닌 인간의 손을.

혹시나 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저 친한 동료일."

"꽤 문제가 많아보이는 물건인 듯 한데, 어서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도 맞는 말이군.

나는 아이작의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한번 끄덕여보이곤 마지막으로 공력을 쏟아부어 한계까지 채워냈다. 적어도 지닌 내공의 절반은 썼을 거다.

우우웅—

그러자 곧, 나뭇대의 극점에서 발출된 원형의 기운이 도깨비불처럼 뭉쳐 팔랑팔랑 날아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

그 기운이 방해없이 짐승의 몸체에 닿자, 놈은 금지가 떠나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짐승이 담겨있는 혈액의 어항에서 요기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소용돌이가 친 뒤, 몇 분이 지났을까.

"······."

이내 짐승이 뿜어내던 요기와 나뭇대가 쏘아낸 기운이 허공에서 얽히더니, 천천히 나뭇대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던 나뭇대는 그 기운을 잠시 되새김질하다 통째로 꿀꺽 하고 삼켜버렸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웃기는 놈이다. 설산목의 기운은 바로 뱉어버렸으면서.

나는 요기를 삼켜버린 나뭇대를 곧장 안주머니에 넣고서는 휘파람을 불었다.

"헙!"

때마침, 기절했던 흡혈귀 주교들이 부스스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냉막한 표정을 짓고있는 아이작에게는 차마 묻지 못하겠는지, 또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 무슨!"

한 흡혈귀 주교는 어항에서 한가득 흘러나온 혈액을 보고는 가여운 표정을 짓더니 소리를 질렀다. 화라도 났는지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음.

현자의 저주가 담긴 의문의 마병이 '짐승' 의 기운을 빨아먹어버렸습니다. 덕분에 요기가 줄어들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지요-

내가 그리 말할 강단까지는 없는 사내지만, 실제로 본 것과 단순히 짐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일단 흡혈귀 주교들이 이 사태에 기겁하며 격하게 해명을 요구했기에, 나는 정색을 하며 단호히 거짓을 늘어놓았다.

"요기를 잠시 가라앉힌 것 뿐입니다."

"가라 앉혔다니요? 어떤 수를 쓰신 겁니까?"

"그것까지는······여튼 그 과정에서 요기가 폭주하는 바람에 기절들을 하시더군요. 그나저나 뒤통수부터 엎어지던데 다들 괜찮으십니까."

"우리 주교들이 그 정도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리가 없습니다."

"그랬을까요?"

"······."

의심의 눈초리에 나의 주특기인 철판을 깔았다.

짐승은 이 흡혈귀 주교들도 한번 수틀리면 통제가 쉽지 않은 물건이고, 주교들은 요기가 흘러넘치는 어항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했다.

헌데 뭘 잘했다고 큰 소리인지.

괜히 자신감이 붙은 나는 뻔뻔함을 한술 더 보탰다.

"그리고 나의 절친한 벗이 죽어버리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애당초 주교님들께서 미리 설명을 잘 해주셨어야죠. 오랜만에 생 인간을 집어넣어서 그런가? 뒤에서 그리 말씀하시는거 다 들었습니다."

"······."

큼큼-

약속이나 한듯 헛기침을 한 주교들은 내 해명에 불편한 심경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아이작이 없었다면 달려들어 포박한 뒤에 감옥으로 끌고갔을 기색이다.

"아이작님의 손님이라 하셔도 방금의 행동은 정도를 한참······."

"안에 멀쩡한 인간이 들어있는데, 요기가 넘쳐흐르니 배 째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것은 안타깝지만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교단의 주교씩이나 되는 분들이 어찌 그토록 무책임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막았어요 내가! 아멘!"

"······."

나는 되려 고함을 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흡혈귀 주교들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과하게 돈다.

아니 시발 우린 반대했는데, 네가 굳이 넣겠다 했잖아···대강 그런 표정들이로군.

당장은 아이작이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기에 더 크게 따지고 들지는 못했으나, 자꾸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는 것이 굉장히 당황스러워보였다. 교에서 애지중지하던 신물이 고장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면면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어항 속 혈액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며, 웬 검고 커다란 형체가 짐승의 안에서 그 자태를 드러냈다.

화난 복어처럼 부풀어올랐던 짐승은 요기가 뽑히자 안정을 되찾더니, 금세 루돌프놈을 퉤! 하고 뱉어낸 것이다.

푹 잠겨있던 루돌프 녀석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당장 끄집어내세요!"

반색한 흡혈귀 주교들은 헐레벌떡 달려가 놈을 뜰채로 건져내고는 어서 보충할 혈액을 가져오라며 어딘가에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쪽에는 신경쓸 마음이 없어보인다.

이렇게 끝인가.

"······."

나는 주교들이 건져놓은 형체의 앞에 가 섰다.

전(前)루돌프.

그리고 이제는 전신에 어두운 칠흑빛이 도는 거체.

푸확!

놈의 입이 울컥거리더니 큼지막한 선지를 뱉어낸다.

루돌프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육체는 인간보다 두어 배는 컸다. 입은 괴물처럼 양 옆으로 찢어져 있었으며 검고 매끈한 비늘이 덮고있는 전신의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쯧, 이런 괴물의 모습을 원한 것은 아닌데."

루돌···짐승 부스러기의 전신에서는 투박하지만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공력이나 마력, 요기도 아닌 그 무언가.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쉰 나는···두 주먹을 불끈 쥐어올렸다.

"그래도 강화 성공인가!"

실로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억지로나마 힘을 내보는 것이다. 정말로 슬펐다.

하지만 그 억지 행복도 잠시였다.

"커헉!"

"?"

"어우 씨이벌! 커허헉! 아오 씨벌!"

"······."

데굴데굴-

연신 구르며 바닥에 선지를 뱉어내던 칠흑빛의 육체가 푸스스- 소리를 내며 점점 작아지나 싶더니,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어지럽게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루돌프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한바탕 욕을 뱉으며 지랄발광을 하더니 기절해 추욱 늘어진 루돌프놈은 내 발치 앞까지 굴러와 있었다.

나는 기감을 놈의 육신에 집중해 훑어보았다.

곧, 녀석의 기운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외형은 그대로이지 않은가?

혹시 멋들어진 외형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며 은근히 기대하긴 했는데.

짐승의 폭주 현상과 중간에 나뭇대가 요기를 빨아먹어버리는 변수들이 추가되어 무언가 결과가 달라진 건가.

그 사실에 나는 그만,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이거 설마 다시는 안바뀌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도 공중전은 힘들겠군."

사내의 로망,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분노의 질주는 정말로 물건너 갔단 말인가!

일단 루돌프녀석이 깨어나면, 곧장 붙잡고 캐물어봐야겠군.

나는 엎어진 루돌프놈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결의를 다졌다.

#96화. 개같은 세상이 맞군.

#96화.

찰칵- 찰칵-

부모님 차를 끌고 나왔다가 교통사고라도 난 것마냥.

어디선가 큰 사진기를 가져와 혈액 어항 주변을 세세하게 찍어둔 흡혈귀 주교들은, 내가 짐승에 무슨 심한짓을 했다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심한 짓을 한 건 맞다.

딱 잡아떼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교들은 알몸으로 엎어진 루돌프를 보곤 상당히 앙칼진 반응을 보였다.

[ 저희도 처음으로 겪는 일입니다. ]

[ 중간에 요기를 가라앉힌 부작용으로······. ]

[ 결정하셔야 합니다. 죽이든 살리든. ]

죽이긴 뭘 죽여.

아주 무책임한 놈들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도 후에 아이작의 눈치를 본 흡혈귀 주교들이 마지못해 말하길, 혈술의 효과가 자리잡고 안정화될 기간이 필요하다 일러주었다.

또한 시체들의 피륙이 뒤섞인 '짐승' 에 들어갔다 나온 이상, 겉은 저래도 완벽한 인간이라고 볼 수 없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던가.

더해서 루돌프놈은 몰려오는 고통을 참기 힘들어 필시 단명할 것이라며 폭언에 가까운 말들도 했으나, 원래 그런 말들은 의원들이 으레 하는 단골 멘트와도 같다.

담배 태우면 일찍 죽습니다. 술 마시면 오래 못 삽니다. 단 거 먹지 마세요. 짠 것도 먹지 마세요. 푹 자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세요 같은 뻔하디뻔한.

시한부에 가까운 구음절맥(九陰絶脈)을 타고난 이도 훌륭한 의원의 손에 꾸준히 치료받으면 살 수 있고, 나같이 정신병부터 달고 태어난 사내도 홧병만 잘 풀어주면 멀쩡히 살아가는데, 비교적 건강한 편이던 우리 돌프는 어떻겠는가.

"커헉!"

예상대로였다.

혈교의 금지에서 빠져나온 뒤, 루돌프놈은 메카닉 세계수에 와서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아주 멀쩡하게도 사람 말을 잘하며.

"어, 어딥니까? 시벌! 어디냐고!"

저것 봐. 팔딱팔딱 매우 건강하잖아.

기운이 힘차고, 씩씩해 보이니 문제는 없군.

강한 힘을 얻게 되었으나 단명할 체질이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든다. 흡혈귀 주교들의 저주와도 가까운 조언들은 고통이 곧 성취인 무통귀갑신공의 미친 공능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을 테니.

"······와, 저 또 살았어요? 어째서 지옥이 아니야?"

루돌프놈.

이놈은 아직 모르고 있겠으나, 전신에서 약간의 요사스러운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멋모르고 본다면 정체를 숨긴 언데드로도 오해할 법한 기운. 아직 혈술의 영향력 아래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 탓이겠지.

"형님?"

"과연 멋지게 해냈구나. 돈까스 언제 먹으러 갈까."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우선, 살아 돌아온 루돌프놈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 얼굴에 칼 댄 놈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넉넉한 인심. 이것이 나의 배포다.

"어떠냐."

"뭐가 어때요. 존나 아프지. 어휴···."

심퉁난 얼굴의 루돌프놈은 팔다리가 제자리에 다 붙어있나 확인하더니, 금방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소리를 했다.

엉엉.

"형님, 몸이 진짜 존나게 아픕니다."

크흡-

급기야는 코까지 먹으며 드러누웠다.

전매특허, 주접을 떠는 걸 보니 괜찮은가보군.

"명확히 말해야지. 어디가 어떻게 아프더냐."

"주먹에 맞으면 묵직하게 빡빡 꽂히면서 막 숨이 안 쉬어지고 욱씬거리고 이제 그러거든요. 솔직히 그건 좋아요. 이제 그 정도는 쉽게 버팁니다. 근데 시발 지금은 아주—"

"허면 여태껏 엄살을 부린거니."

"······아뇨?"

잔머리도 굴릴 줄 알았다니.

이놈이 그 정도로 지능이 높았단 말인가.

나는 땀을 삐질 대는 놈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봐라."

루돌프놈은 기다렸다는 듯 신명나게 대답했다.

"자, 들어보세요. 이건 시벌 몸을 토치로 지지는 것 같아요. 안쪽 바깥쪽 상관없이요. 라이터 백 개를 묶어다가 살껍데기에 초벌구이를 하면서도, 심각한 장염에 걸린 것 같은 복합적 고통이라~이말입니다."

"그래?"

생각보다도 예후가 좋다.

또, 기관총쏘듯 말을 뱉는 걸 보면 참을만한 듯한데?

그리고 이제 내가 구태여 두들기지 않아도, 자연스레 무통귀갑신공의 경지를 쭉쭉 성장시킬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루돌프놈은 말을 이으면서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지금 화형대에 올라서 탭댄스를 추는 것 같고요. 똥꼬쪽도 어쩐지 존나게 따가워요. 누가 사포로 똥꼬를 민 것 같아. 내장이 작살이 난거죠 그니까. 아······이거 말로는 어떻게 표현이 힘든데, 당장이라도 접싯물에 코박고 콱 기절하고 싶은. 그런 기분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음."

뭐야, 저게 다인가.

흡혈귀 주교들이 무조건 뒈질 거라며 잔뜩 겁을준 것 치고는 꽤 버텨볼만 한 수준으로 보인다.

"이해는 했다. 뭐 다른 건 없냐."

"다른 거요? 뭐 없는······어."

"?"

그때였다.

"어."

눈에 힘이 빠진 루돌프놈은 잠시 몸을 버벌대나 싶더니 몇 분이나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멈춰있었다. 내가 진득히 기다려주자, 겨우 정신을 차린 놈이 헤벌레해진 얼굴로 말했다.

"온몸이 개아픈데 살짝씩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냐."

좀 더러운데.

루돌프놈은 자기도 당황했는지, 벌떡 일어나며 사방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조, 좆됐네. 이거 큰 병 아닙니까? 뜨듯하게 느껴지면서 쾌감이 있는데, 얼굴이 달아오르는···그걸 오르가즘 말고 뭐라고 하더라. 카스타드? 카스테라스?"

"카타르시스."

"엇, 어떻게 맞추셨어요?"

"무식한 놈."

"그거 같습니다. 기분이 존나 이상한데요?"

"불안하면 병원 갈래? 진통제 처방이라도 받아보자."

"아니, 병 주고 약 줍니까 지금? 이제와서 뭔 진통제여."

코웃음을 친 루돌프놈은 가시처럼 뾰족하게 반응했다.

나는 놈의 뾰루퉁한 얼굴을 구경하다 보니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졌다. 얼굴은 이전과 똑같은데 혓바닥에 혈교주의 혈술이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이놈 이거, 오늘따라 상당히 공격적이구나. 말본새가 특히 싸가-"

그러다 문득, 말을 멈추었다.

···너는 말본새가 특히 싸가지가 없다.

중원의 미치광이. 나를 끌고 다니며 개처럼 두들기던 스승이 자주 하던 말이 아니던가.

설마, 그 빌어먹을 인간과 점점 닮아가는 건가.

그래도 스승보다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야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깊게 호흡했다.

들숨 날숨을 조절하던 나는 곧 심마에서 벗어나 한결 감성적인 남자가 될 수 있었다.

이윽고, 깊이 숨겨두었던 심정을 꺼내놓았다.

"내가 미안하다. 나의 이기심으로 너를 고통스럽게 했구나."

"······왜 이러세요. 쳐돌았나?"

저벅.

나는 깊은 뜻을 몰라주는 루돌프놈에게 실망하며 한 걸음, 두 걸음을 옮겼다. 스승같은 사내가 되지 말자.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응어리를 풀어 주자.

"네 눈치로는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내 유들유들한 태도와 슬픈 표정을 알아볼 수 없겠으나, 모두 너를 위한 거였다."

한 발자국 더.

"······가, 가까이 다가오지 마! 이 씨발놈아! 또 뭐 이상한 거 할라 그러지!"

"돌프야, 그냥 백신 한 방 맞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응?"

"이 악마 새끼야 좀 오지 말라고!"

그런데, 변화는 굉장히 의외의 상황에서 발견되었다.

턱-

"아이쿠, 시발!"

콰당탕!

어떤 이유에서인지 겁에 잔뜩 질려 도망치던 루돌프놈은 등신같이 제 발에 걸려 자빠졌다. 한데 신기한 것은, 강한 충격을 받은 뒤통수에 검은 비늘같은 것이 잠깐 돋아났다가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넘어진 루돌프놈의 뒤통수를 곧장 확인해 봤는데, 방금 나타났던 것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뭐, 뭐였죠 방금? 뇌가 잠깐 시원해졌는데요?"

"시원해?"

나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구나.

역시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 리가 없지.

"다시 해봐라."

"혼자요? 다시 안 되는데."

"흠, 그래도 공중전의 희망이 보이는군."

흡혈귀 주교들도 차마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음이 틀림없다.

나는 곧바로 낑낑대는 루돌프놈을 데리고 슬레모킨을 찾아갔다. 짐승 부스러기에 관해서는 나보다 몇 배는 잘 알고 있을 터.

후다닥!

슬레모킨은 오늘도 어울리지 않게 뜨개질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자 황급히 뒤로 그것들을 치우고는 자연스러운 척 입을 열었다.

"아버지랑 혈교의 금지에 다녀왔다며? 희한하네. 나 말고는 간 엘프도 몇 명 없는데······기회를 잘 주지도 않고."

아이작 모드릭은 워낙 고령이다.

그렇기에 그 옛날에 죽었던 혈교주 혈마와도 인연이 닿아 있었다. 슬레모킨이 듣기로, 아이작은 혈마와의 인연으로 혈교의 금지마저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짐승은 절대 함부로 쓰지는 않는단다.

슬레모킨은 그런 말들을 하더니, 다음에 은근히 기대하는 어조로 물었다.

"대체 아버지가 데리고 나갔을 때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행히도, 나를 좋게 봐주신 듯하던데."

"그래? 그럴 엘프가 아닌데······."

슬레모킨은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으나, 이미 내가 금지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상태라 대강 이해해 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짐승 부스러기를 얻는 건 정말 아무나 잡기 힘든 기회인데. 왜 굳이 쟤를 그 아까운 기회에 썼······하긴, 네가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그렇게 했겠지."

슬레모킨은 흐흐,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더 궁금했어. 짐승에 사람을 넣으면 원래 사람 형태로 유지되어서 나오는 건가?"

"간헐적으로 슬레모킨 네가 끌고다니는 짐승 부스러기의 모습으로 바뀐다. 방금 확인해보고 온 참이야."

"정말? 그건 처음 듣는데."

철컥.

루돌프놈을 다각도로 바라보던 슬레모킨은, 돌연 펌프액션 샷건을 꺼내어 꾹꾹 찔러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아까와 같았다.

슬레모킨이 유독 강하게 찌를 때에는, 여지없이 검은 비늘이 돋아나 그것을 막아냈다. 그럴 때마다 루돌프놈은 어? 생기니까 몸이 안 아픈데? 를 연발하며 꽤 만족해했다.

이윽고, 몇 번 더 찌르며 루돌프놈을 확인해보던 슬레모킨은 샷건을 거두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큰 자극을 받으면 진짜 부스러기의 외형이 나오는 것 같은데. 평소에는 사람 말을 하고······뭐지."

"사람이 거시기도 아닌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몰라. 이런 건 나도 처음 봐서······."

"허."

가만히 있어도 외공의 성취가 오르고.

큰 충격을 받으면 변신까지 가능하고.

무엇보다 외형의 멋까지 있다. 그렇다면.

완벽한 성공이군.

루돌프 저놈을 어디에 데려갈 때 가장 큰 문제가, 너무 못생긴 바람에 나까지도 창피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제 그것도 끝이다.

벙쪄있는 루돌프를 바라보던 나는, 굉장히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까스 맛집으로 찾아가야겠군."

* * *

조용히 이틀이 지났다.

몸이 조금 편해지면 별 잡생각이 떠오르기 마련.

나는 꽤 많은 생각들을 했다. 나름 알찬 시간이었다.

몇 달전, 칼드락 스미스의 대장간.

백 육십 먹은 드워프, 다르간트의 혼을 벼려내는 단조 작업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이번 생에 이룰 목표를 잡아두었다.

연방의 멸망을 조금이라도 미뤄주고, 전생들보다는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이전 생에서는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때를 제외하곤 그냥 발 가는대로 방랑하며 살았고, 전선에 살며 적국의 병사들이나 때려잡았다. 가끔 미쳐서 기억이 오락가락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는 얘기다.

불현듯, 이따위 등신같은 세상에서 나는 정해둔 목표에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이니, 아직은 너무 이른 얘기인가.

반나절의 운공을 마친 나는 눈앞에 당가의 보패와 아스파로프의 나뭇대를 나란히 꺼내놓았다.

드드드-

금지에서 짐승의 요기를 빨아먹은 일 이후부터였다.

현재, 아스파로프의 나뭇대는 어딘가에 반응해 살살 떨리고 있으며, 나뭇대 중간에 작은 문양같은 게 새겨졌다.

처음에는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어디론가 이어지는 이정표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듯했다. 대가리가 자꾸 한 쪽으로 돌아간다.

혈교주 혈마가 '짐승' 을 후대에 남겨 키메라를 만들어 내는 지경인데, 전설적인 현자 아스파로프는 세상에 무얼 남겼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것은 지금의 나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구동물품이자 마병. 확실한 것은, 이 나뭇대는 지금 시티의 장벽 바깥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

허나 지금의 나로서는 갈 수 없다. 그럴 생각도 없고.

나는 곧, 아스파로프의 나뭇대와 보패를 품속에 챙겨 넣었다. 조금 든든해졌다. 보패가 있는 이상 어디가서 객사할 일은 없으니.

스르릉—

이제는 광선을 꺼내어 바라본다.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검신이 매끄럽게 떨어진다.

뒤이어 밝아지는 천장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별일이 생기지 않으니, 잡생각이 많아지는 나날이다.

그 뒤로도.

나는 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었나보다.

누군가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몰랐는데, 고개를 돌리자 그의 가슴팍에서 환하게 빛나는 연방의 공무원증이 보였다.

이곳에서 만나리라곤 생각 못했는데.

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연방집행관, 유크 루베르겐.

"잘 지냈나."

나와 레나를 발두르 시티에서 끄집어내 주었던 유크 루베르겐. 그는 가볍게 안부를 묻고는, 곧바로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건넸다. 지체할 생각이 없다는 듯.

헌데.

"로라 마르티네즈."

그것은 로라 마르티네즈가 보낸 서류였다.

루베르겐이 건네준 서류에 적혀있는 내용은 그랬다.

연방의 거물 정치인이자 각 계의 유명 인사 몇 명이, 이번 라그나로크 수복전을 망쳐버리기 위해 손을 잡고 물밑에서 암약했다는 것.

그러니까.

라그나로크 시티 내의 시체와 접촉해 수복전에 관한 정보를 흘려주는 대신, 네임드 개체의 피를 받기로 약속했다 실토했다는 것이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예측한 연방의 멸망 기한은 최대 30년. 그 30년이라는 기한에 거세게 불을 당길만한 사건의 윤곽이, 바로 지금 내 손 안에 있었다.

"개같은 세상이 맞군."

십이제를 필두로 한 세력의 수장들은 그들을 대체 어떻게 찾아내 고문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로부터 꽤 장황한 자백을 받아냈고.

서류의 마지막 부분.

로라 마르티네즈가 직접 적은듯한 추신은.

— 지금 알 헤임달이지? 그쪽에서도 한 명 있더라. 지랄이 날 것 같은데, 너 어쩔래?

지금 알 헤임달이 벌이는 대개척과도, 그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였다.

#97화. 백리뇌부 종후표 1

#97화.

— 지금 알 헤임달이지? 그쪽에도 한 명 있더라. 지랄날 것 같은데, 너 어쩔래?

로라 마르티네즈가 손수 적어둔 추신.

이 말 그대로, 어쩔 거냐 묻는 것은 아닐 거다.

십이제라는 거물께서 굳이 추신까지 직접 적어 보내가며 내게 따로 물어볼 이유는 없으니.

적어도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뭐, 나더러 죽이거나 잡아 오기라도 하라는 건가.'

나는 곧장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을 바라봤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 소속인 점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연방 집행관의 공무를 다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겠지.

내가 물었다.

"집행관님, 마지막에 이 추신은 무슨 뜻인지."

"이걸 읽어보게."

그가 다른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서류를 펼쳐 천천히 읽었다.

연방군은 좀비를 맡고, 연방 집행관은 인간을 맡는다. 보통은 기업의 종말을 알리는 저승사자이나, 오늘은 누구의 살생부를 가지고 온 건지 이 서류가 말해주고 있다.

— 백리뇌부(百里雷斧), 종후표.

어떤 정치인에 관한 정보들이었다.

그는 부법(斧法)을 극성까지 익힌 무림계의 명숙으로, 십년전 연방 중앙 정치계에 발을 들인 무인이다. 별볼일 없는 기업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방 정치계에 입문한 뒤 칼을 갈고 닦았는지 나름 승승장구하던 인물.

별다른 명문대파나 거대 기업이 뒤에 없더라도 좋은 재능을 타고나 군계일학이 되는 자들은 언제나 있다. 백리뇌부 종후표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엄청난 거물까지는 아니나, 일단 연방 정치계에 진출한 것부터가 그만한 머리는 힘이든 봐줄만한 정도는 된다는 것이니.

눈여겨볼 점은 륭처럼 시체 사냥꾼 출신이라는 것.

개천에서 용 났군.

그런데 시체 사냥꾼 출신의 종후표가, 네임드 개체의 피를 받기로 약속했다라.

임기중인 연방의 정치인, 그것도 시체에 관해서는 빠삭한 사냥꾼 출신이 연방을 배신하는 대가로 네임드의 피를 받기로 했다고?

그런 내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루베르겐 집행관이 말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 의문점이 많네."

잠시 뜸을 들인 루베르겐 집행관이 말했다.

"연방 정부와 각 세력, 양쪽에서 이 백리뇌부 종후표를 조사하고 집행하는 일에 자네의 참여를 강하게 원하고 있네. 사실 참여가 아니라 참관인이어도 상관 없지."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연방 정부.

그들은 라그나로크 수복전의 비리를 폭로한 나를 이번 종후표 집행에 이용해, 이번 사건을 일으킨 흉수들을 잘라내고 비리와 완벽히 거리를 둔 모습을 연방의 주민들에게 내보일 심산.

로라 마르티네즈를 위시한 세력도 그것에 동의 했고, 자신은 집행의 당사자이자 경호를 맡은 셈이라는 얘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말하자면 연방의 대외적인 신뢰회복을 위한 참여 권유이자, 약간의 배려라고도 볼 수 있다. 나도 연방 정부와 평생 척을 지고 살아갈 생각은 없었으니.

* * *

메카닉 세계수의 최상층.

석 달 만에 식사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도 같이 낀 채로 밥을 먹었다.

알 헤임달의 엘프 군주.

근육덩이 아이작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사내다. 뇌까지 근육이 들어찬 것처럼 굴다가도 때에 따라 여우가 된다.

"알 헤임달에 그런 자가 숨어 있었나? 나야 연방의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네만, 후에 원한다면 이곳에서 지내도 되네."

그는 연방의 행사와 관련해서는 꽤 싸늘했다.

짐승때처럼 시원하게 도움을 주겠다거나 호의를 보이는 일 없이. 아예 엮이고 싶지 않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루베르겐 집행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와 헤어질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그래도 백 육십이나 먹은 드워프 다르간트와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을 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자신이 정해둔 신념이나 기준이 있겠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몸의 회복도 끝났고 외모도 이전과는 꽤나 달라졌으며, 나약했던 루돌프놈도 큰 변화를 겪었다.

운신의 제약도 사라졌다.

밥을 먹다 당가의 독에 중독당할 걱정이 사라졌으니.

게다가 혼란스러운 연방의 다음 스텝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을 것이다. 뷔에탕만 조심한다면 어디 가서든 뒤통수가 터질 일은 없으리라.

사실 약혼자라고 대대적으로 소문이 난 바람에, 여기서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뭐만 하면 슬레모킨의 약혼자래 수군수군.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그 말에, 정말 혼인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 세계수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흐음."

어차피 더 머물 생각도 없었고. 마침 떠날 일도 생겼다. 아이작은 어딘가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강제적으로 나를 잡아두지는 못했다. 그래도 슬레모킨이 동행한다는 것만큼은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아힘사, 루돌프놈, 슬레모킨, 유크 루베르겐.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의 일행이 즉석에서 결성되었다.

우리는 꾸물대지 않고 아이작과 토퀸타이아의 과분한 배웅을 받으며 메카닉 세계수를 빠져나왔다.

집행관은 한시가 바쁘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물론, 마탑 시절부터 시작해 슬레모킨과 루베르겐 집행관의 사이가 그닥 좋지 않기에 동행이 조금 불편하고 어색하긴 했다.

나 이전에 슬레모킨과 약혼과도 비슷한 관계에 있던 집행관. 같은 마탑 소속임에도 슬레모킨이 꽤나 싫어하는 것을 보았을 때 가짜 약혼을 해주기로 약속했다가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겠군.

"이거 봐라, 신기하지? 예쁘지?"

아무튼 슬레모킨은 루베르겐과 가까이 있기도 싫은지, 자꾸만 내 옆쪽으로 붙어 자신이 그동안 뜨개질한 것들을 자랑했다. 조금 삐뚤빼뚤하긴 해도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어때? 응?"

"와, 좋은데."

나는 슬레모킨의 자랑에 대강 맞장구를 쳐주며 걸음을 옮겼다.

* * *

목적지는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알 헤임달 시티, 북부 장벽지대 근처의 한 마을.

루베르겐 집행관은 뭔가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단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이 마을로 곧장 직행해 들어섰다.

대개척으로 인한 이유인지, 원래는 시끄러웠을 마을은 꽤나 조용했다. 석탄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리는 마을이었다.

루베르겐 집행관이 향한 곳은 영업을 끝낸 듯한 작은 주점이었다. 외부 파이프에서 증기가 나오질 않는 것을 보니, 이미 마감을 한 모양이다.

딸랑-

우리는 주점에 들어섰다.

주점 안쪽은 불빛하나 없이 어두웠다. 루베르겐 집행관이 손가락 끝에 불을 피워 사방을 밝히자.

어둑한 주점 구석에서 뒤돌아선 채, 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우리가 왔는데도, 몸을 흔들대고 있었다.

"음."

발이······허공에 살짝 뜬 채로.

그의 발은 확실히 바닥에 붙어있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위쪽으로 불빛을 밝혀보니, 목에 가는 줄이 둘러져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자가 있었다.

백리뇌부(百里雷斧), 종후표.

그는 미동도 없이 공중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사방에 역한 지린내와 인분의 역한 향이 진동했다. 뒤쪽에서 볼 때, 허리 아래까지 혀가 쭉 뽑혀있는 그 모습에 루돌프놈이 고개를 슬쩍 돌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저것은 심하게 몸부림을 쳤는지 주변이 어수선했다. 오물과 피가 뒤섞여 주점 바닥을 더럽혀 놓았다.

누군가의 침침하고 우울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루베르겐 집행관이 흔들리는 사체를 확인하러 가던 그때였다.

"늦었구만."

목을 매달고 있는 종후표에게서 말이다.

순간, 고요하고 묘한 정적이 장내에 감돌았다.

끼이익.

철판 갈리는 소리가 나며 공중에 매달려 있던 종후표의 몸이 빙글- 돌아갔다.

붉은 피로 칠갑된 종후표의 얼굴이 보였다.

더해서 종후표의 뒤쪽으로 환한 불빛이 미치자, 토끼 귀가 달린 수인이 처참한 꼴로 쓰러져 있었는데, 이 주점을 운영하던 직원으로 보였다.

연방의 중앙 정계까지 진출한 정치인이자 부법의 고수가 주점에서 난장을 피운 뒤, 피칠갑에 회한 가득한 얼굴로 목을 맬 일이 무에 있을까. 무인의 몸이라 목을 매는 것으로는 쉽게 죽지도 못할 터인데.

루베르겐 집행관이 걸음을 멈추곤 물었다.

"왜 그리 하고 계십니까."

"끅."

종후표는 아이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우리를 위에서부터 내려다보고 있었다. 충혈된 눈의 그가 말을 꺼낼 때마다 꺽꺽대는 불쾌한 소음이 들렸다. 천장에 연결된 와이어의 쇠 갈리는 소리였다.

우득. 우득.

"자네들이 나를 좀 죽여주겠나? 혼자는 못 죽겠어."

그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대로 죽어버리겠다는 듯 길게 늘어진 혓바닥을 껌처럼 질겅였다. 거기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주점 바닥을 더럽혔다. 그럼에도 종후표의 턱관절은 도통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루베르겐 집행관이 다시 물었다.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이런 모습을 보여 심히 부끄럽군."

"어떤 점이 그렇게도 부끄러우십니까."

"후회가 돼. 그때 정치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나 종후표는 이것 말고는 달리 해줄 말이 없네."

피칠갑한 얼굴만 아니라면 사람 좋다는 소리좀 들을 듯한 인상의 종후표, 모두 포기한듯 그의 눈가에서 말간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그동안 주점 안을 둘러보았다. 이제야 식탁 밑을 자세히 보니, 주점의 손님으로 추정되는 열댓의 수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몸 위에는 하나같이 옷이 덮여져 있었는데, 옆으로 빠져나온 팔 다리에 도끼날에 패이고 잘린듯한 상흔들이 가득했다. 부법의 고수인 종후표라면 수인 열댓 정도야 능히 베어냈으리라.

"······어서 집행해주시게. 내가 아직 인간일 때."

종후표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죽여달라 말했다. 그의 긴 혓바닥에서 연신 선혈이 떨어졌다.

"허면 마지막으로 한 모금 하시겠습니까."

그에 집행관, 유크 루베르겐은 자신의 궐련을 꺼내며 말했다.

저 둘은 서로 구면인 듯 보였다. 아무래도 발이 넓을 연방 정치인의 주 무대는 오딘시티일 것이고, 연방 집행관은 오딘 시티에 있는 연방 본부의 직속 전령이니까.

"······자네가 붙여주는 불이라면, 그리하지."

마지막 예우.

목을 매단 종후표가 착잡한 얼굴로 끄덕였다.

집행관의 손에서 피어난 작은 불길이 궐련 끝에 옮겨붙었다.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곧 허공에 둥실 뜬 궐련이 종후표의 입가로 날아갔다.

부르르!

그러나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종후표는 궐련을 물지 못하고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오물과 피웅덩이에 떨어진 궐련이 불빛을 잃었다. 종후표의 매달린 목에는 살갗이 까진, 빨간 자국이 남았다.

"······정말 못난 모습만 보이는군."

"괜찮습니다."

"미안하지만 다시 부탁해도 되겠나?"

종후표의 물기 가득한 부탁에 집행관은 아무런 말 없이 다시 궐련을 꺼냈다. 이번에는 불을 붙인 뒤, 그가 직접 들고서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집행관의 구둣발에 더러운 오물이 채였다.

그렇게,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종후표에게 궐련을 물려주기 위해 집행관이 한 손을 위로 뻗었을 때였다.

쉬륵!

찰나간 팔을 출수한 종후표가 궐련을 올려주던 집행관의 손목을 덜컥 잡고는, 그대로 끌어 올리려했다. 어느새 작달막한 손도끼가 종후표의 반대쪽 손에 잡혀있었다.

허나 집행관도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츠즈즈즛-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가락 끝이 갈라지더니, 거기서 싯푸른 초고압의 전류를 뿜어낸 것이다. 어두웠던 주점 안이 일순간 섬광탄이라도 터진듯 환히 밝아졌다.

"흐읍!"

백리뇌부 종후표.

백리 밖까지 도끼의 뇌성이 울려퍼진다 하며 백리뇌부. 초절정 경지의 무인이 손에 힘을 주자, 우레와도 같은 충격파가 터지며 주점의 천장을 날려버렸다.

그 둘은 손목을 잡고 붙잡힌 채 몇 합을 나눴고, 목을 맨 탓에 하체를 쓰지 못하여 자세가 불편했던 종후표는 결국 집행관의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종후표의 손에서 벗어난 루베르겐 집행관이 저린 손목을 터는 사이, 아까보다 혀가 더 밑으로 늘어진 종후표가 눈을 뒤룩 굴렸다.

끼익 끼익-

교수대 위 사형수처럼, 줄에 묶여 대롱대던 종후표가 말했다.

"그 한심한 놈들이 이 종후표를 공범으로 몰았겠지? 허나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네. 정말 아무런 관련도 없어."

"하면 해명을 하셔야지, 왜 집행관을 공격하십니까."

"······이보게 집행관, 그깟 서류에 매몰되지 말고 생각을 해보게.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권세를 누리겠답시고 그런 자들과 일을 함께 도모하겠나. 막강한 기업이 뒤에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냥꾼에서 혈혈단신으로 기어 올라온 내가 그런 바보같은 선택을 하겠나. 응?"

종후표가 자기 목을 묶고있던 줄을 도끼로 슬근슬근 잘랐다. 줄이 탱! 하고 잘려 나가며, 허공에 떠있던 종후표의 발이 바닥을 딛고 섰다.

"조금 지치고 우울해 목을 매단 것은 맞네. 그것은 사실이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듯 합니다만, 그렇습니까."

"다만, 나는 그렇더라도 아직 연방의 의원일세. 집행관의 강제집행을 거절할 특권 정도는 인정해 줄 수 있지 않은가. 부디 험하게 굴지 않았으면 하네."

"······."

루베르겐 집행관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종후표는 그것을 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모조리 설명해 줄 수 있네. 나를 거짓으로 밀고한 이들이 물밑에서 벌인 일과 일거수일투족까지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겠지. 허니 잠시만 시간을 내서 들어주지 않겠나?"

"······."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벼랑 끝까지 몰려있는 인류가 아직도 온전하게 돌아가는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 말이야. 이 도시를 두르고 있는 장벽이라는 건 말이지······."

종후표는 핏물 위를 찰박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찰박-

여느 정치인들처럼 세월의 주름이 잘 잡힌 편이라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

워낙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 철썩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도끼와 죽 늘어져 덜렁대는 혀, 피칠갑된 면상과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혈관만 아니었다면. 필시 믿어주었을 것이다.

퍼걱!

또한 숨겨두었던 기량을 드러내어 가장 약해보이는 루돌프놈을 단숨에 쳐죽이고 그 틈에 도망칠 계획을 짜지 않았다면. 한 번 정도는 더 속아주었을 것이다.

"······응?"

주르륵—

루돌프놈의 목이 순간 이동한 종후표의 도끼날에 반쯤 잘렸다가 녹은 초콜릿처럼 다시 진득하게 붙었다. 루돌프의 목덜미 안쪽에서부터 칠흑색의 비늘이 돋아나며 도끼의 흉흉한 날을 붙잡았다.

서걱.

동시에, 종후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검을 섬전처럼 뽑아 종후표의 혓바닥을 뎅겅 썰어버렸다.

— 끄아아악!

두꺼운 혓바닥이 바닥에 떨어져 펄떡댄다.

자해쇼도 잘하고 혓바닥도 긴 걸 보아하니······

"천상 정치인 맞군."

백리뇌부 종후표는, 변절한 시체이기 전에 뼛속까지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98화. 백리뇌부 종후표 2

#98화.

백리뇌부 종후표의 혓바닥이 잘렸다.

푸왁!

그래서 이제 다시는 혓바닥을 놀릴 수 없을 줄 알았건만, 잘린 혀의 단면에서 새 혓바닥이 뱀처럼 솟아났다.

종후표는 혓바닥을 쓰는데에 능숙한 인간이었다. 달변가의 기질이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하는, 변절한 시체이기 전에 위정자(爲政者)의 기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목을 대롱대롱 매달고도 달변을 펼치던 남자 답다.

후웅!

도주에 실패하자, 곧장 종후표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나는 잘못이 없단 말이다! 억울해, 전혀 몰랐다고! 꼬리자르기 모르나? 억지로 시체가 된 것이고, 내가 다 책임지고 탈당(脫黨)하면 되지 않는가!"

백리뇌부는 초절정의 무인답게 강했다.

힘은 강한데, 말은 또 많아서 정신이 사납다.

그렇기에 그는 꽤 성가신 상대였다. 억울하다며 내뱉는 괴상한 변명과 함께 번쩍이는 손도끼가 어딘가를 가르면, 반드시 선혈이나 신음이 쏟아졌다.

게다가 장애물이 많고 비좁은 주점 안, 길이가 짧은 만큼이나 공격과 회수가 신속한 손도끼만큼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다.

주점 안이 상당히 어두운 것도 한몫했다. 나중에는 마력으로 빛을 밝혀두고 전투에 집중했다. 종후표는 다섯의 격한 협공에 혓바닥이 세 번쯤 잘렸고 팔도 몇 번 날아갔다. 금방 다시 솟아나긴 했지만.

퍼억!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크헉!"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처맞을대로 처맞은 루돌프놈이, 드디어 완벽한 짐승 부스러기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종후표의 도끼질에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만해도 대단했는데, 이제는 칠흑같은 몸체에 코가 있어야할 부분이 살짝 불그스름한 괴물로 완전히 변한 것이다.

— 그르륵.

그것이 매우 흡족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전투를 미뤄두고 잠시 놈의 자태를 감상했다.

2미터쯤 되는 거체에 질겨보이는 근육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눈과 코 없이 큼지막한 입만 존재한다. 아주 위압감이 충만한 외형이다.

"역시나 우리 돌프로구나. 루돌프 루돌프 하니까 진짜 루돌프가 되었어!"

— 그아아악!

루돌프놈은 괴성을 지르며 종후표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하는 거라고는 도끼에 처맞아 뒹구는 것 밖에 없지만, 그래도 힘을 빼놓기에 딱 좋았다.

나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루돌프놈을 타고 박차를 가해 하늘 위를 날고 싶었으나, 등판에서 팔 두 개가 솟아나 총 네 개의 팔을 쓰는 종후표가 주점의 분위기를 장악한 관계로 그럴 수가 없었다.

"이놈! 전투중에 어딜 보느냐!"

지금이 전투의 분수령이었다.

뿌직!

주점이라 그런지 손에 잡을만한 무기가 많았다. 종후표는 술병과 식탁 다리를 분질러 손에 잡고 휘둘렀다. 술병 흘리고 식탁 다리 막고, 이번엔 손도끼. 손도끼는 막지말고 피해주고.

쾅!

"!"

내가 슬쩍 피하자, 종후표의 도끼가 바닥을 나무장작처럼 쪼개며 박혔다.

그러자 슬레모킨과 대검을 든 루베르겐이 합심해 헛손질한 종후표를 번갈아가며 두들겼다. 둘은 평소에는 으르렁대도 전투때는 무섭게 집중하여 사람을 개떡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크윽!"

제 아무리 시체가 되어 기운을 막 끌어다쓰는 종후표라도 8레벨 셋의 협공과 아힘사, 잘 죽지도 않는 루돌프까지 있으니 꼼짝없이 밀리는 형세.

그래도 눈먼 도끼에 맞아 뒈지는 것 만큼 한심한 일이 없기에 우리는 천천히 종후표를 몰아가며 사냥했다. 중간에 죽어있던 수인들이 감염되어 비척비척 깨어나는 불상사가 잠깐 있긴 했으나, 안광을 빛낸 아힘사의 초진동 블레이드가 일어나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수인들을 영원한 안식으로 이끌었다.

잠시 뒤.

털썩.

마침내 괴물이 된 종후표가 무릎을 꿇었다.

백리 밖까지 울렸을 도끼의 뇌성도 멈추었다. 종후표는 그다지 무릎을 꿇고 싶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양쪽 종아리가 잘렸으니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된 셈이지.

막강했던 재생력도 힘을 다했는지, 종후표는 더이상 잘린 신체를 재생시키지 못했다. 사실 전투중에 저만큼을 재생 시킨것도 충분히 사기적이다.

"실로 억울해서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이동을 제한당한 종후표는 다시금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어디 오지에 던져놓더라도 입을 멈추지 않을 사내다. 베테랑 시체 사냥꾼 출신이니 오지에서도 실제로 잘 살아가겠지.

쿵.

종후표는 부러진 손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종후표를 백리뇌부로 불리게 한 궁극의 부법이다. 과거 남궁의 가주도 절학으로 인정했을 만큼 훌륭한 부법이지. 맞서보니 어떠한가?"

가벼운 종후표의 물음에 나는 소신있게 느낀 점을 말했다.

"병신같더군. 그따위 것이 궁극의 부법인가?"

실제로 그리 대단하지는 못했다.

종후표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야 당연하다. 십 년간 수련하지 못했으니까. 이리저리 불려가 친목하며 물 빼러 다녀야 하는 정치인의 비애지."

"그게 자랑인가?"

종후표는 대답을 슬그머니 피하곤 말을 길게 늘렸다.

"······내 자리까지 올라와보면 생각보다 많은걸 알게 돼. 죽지도 않는 시체들의 피나 뽑아서 팔아먹던 백정이 꽤나 성공했고, 정말 많은 걸 알게 되었지. 흥함이 있으면 쇠락이 있기 마련이고, 그 쇠락의 끝은 정해져 있다는 것도. 대단한 지위에 있는 자도, 앞으로 권세를 누려봐야 20년이라는 것도. 이 종후표의 인생에 흥망성쇠가 있다면 고점은 지금이었어야 했다."

종후표는 슬슬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한 듯, 두서없는 얘기들을 섞어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수완이 좋은 사람이다! 멀지 않은 세상에 큰 격류가 몰아칠 터인데, 이까짓 코딱지만한 땅에서 정치좀 한다하여 뭐를 변화시킬 수 있다던가? 이 종후표는 변화의 격류 위에 올라탄 놈이야. 허섭스레기들의 피가 아니라 고귀하신 존재의 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다 망쳤다는 말이다!"

"고귀하신 존재의 피?"

루베르겐 집행관이 전에 없이 놀라며 되물었다.

종후표가 하는 말들은 대체로 흥미로워서 일단 경청하게 되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장벽 밖의 지옥과 연방 정치계라는 마경을 모두 깊숙히 경험해본 자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다. 지금 인간의 길을 버릴 용기만 있다면 이십 년. 이백 년. 아니! 족히 천 년도 군림하며 살아갈 것이다. 시체의 기원은 신인류의 탄생. 연방은 보기좋게 패배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도태될 터!"

종후표가 침을 튀겨가며 격렬히 소리쳤다.

"라그나로크의 네임드 시체들? 그놈들은 생전의 경지가 만만찮아 매우 강하지만, 열화된 피를 이어받은 놈들이야. 큰 원에서 볼 때 주변부로 밀려난 놈들이고 가진 한계가 있지.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것은 개중 자굴라뿐."

어디가서 쉬이 듣기 힘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혹은 거짓에 약간의 진실만을 섞은 것인지는 종후표만이 알 것이었다.

"천지 위에 삼존(三尊)이 있고 각 도시마다 칠좌(七座)가 버티고 있다. 그러나 삼존칠좌라도, 종국에 죽어 나자빠지면 이룩해둔 경지와 힘은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조용히 순응하며 죽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나 종후표가 장담하건대, 그들은 필시 새로운 세상에 욕심을 내고있을 것이다. 이미 종의 규격을 극한까지 초월한 이들이, 연방 주민들의 시선을 신경이나 쓸 것 같은가!"

삼존칠좌가 배반한다는 말로, 이제는 갈라치기까지 시도하는군.

"생각해봐라. 150년 전에 9레벨이면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꼽는 절대강자였다. 지금은 어떻지? 시체에서 뽑아내는 영약으로 천하에 다시는 없을 절세의 고수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9레벨! 10레벨! 11레벨! 허나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네놈들이 손바닥만한 도시 일곱 개로 과연 얼마나 버틸것 같은가!"

종후표의 이야기는 점점 혼탁하고 음울해졌다. 아까는 여기 욕했다가 이번에는 저쪽을 욕하고, 저주와 원망을 오가며 말을 내뱉었다.

"이 알 헤임달도 그렇지, 대개척같은 소리. 그깟 땅 면적좀 늘린다고 하여 세상이 바뀐다던가? 멸망이 늦춰진다던가? 에센스를 복용하고 강해져서 싸운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세상의 기운을 받아 축적하는 그들은 얼마나 강하겠나. 구름 위를 나는 이동수단으로도 진입조차 불가한 미지의 땅에······어떤 신인류가 존재할 줄 알고?"

대답을 요구하는 건 아닌듯 하나 잠시 침묵이 있었다.

지금까지 종후표를 마주한 뒤 가장 긴 침묵이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150년, 자그마치 150년 전에 첫 시체가 나타났다. 놈은 그 긴 시간을 먹지도, 자지도, 일하지도 않고 세상의 기운을 따박따박 받아 챙겼겠지. 제 아무리 지금 시대의 절대고수들이 뛰어나다 한들, 과연 비견이 되겠는가? 이족들? 혈마고 수인왕이고 철혈의 엘프고 죄다······인류에게도 밀려 변방에서 석탄이나 캐는 놈들이지. 그들의 수명이 조금 길다고 하여 시체의 강함에 비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종후표는 벌써 시체들의 편에 선채, 연방의 강자들을 거론하며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한 점이 생겨 종후표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시체가 되면 뭘 할 수 있지?"

"응?"

"개박살난 도시에서 천 년동안 용두질이나 하며 살 생각인가?"

그 말에 종후표가 너무도 답답하다는 듯.

"지금까지 무얼 들었나. 연방은 필시 망한다니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다른 길을 선택하는게 현명하다! 비록 진보한 인간의 기술들은 원시로 돌아갈지 몰라도, 필요한 기술 몇 개만 있으면 그만이다. 의복이야 입지 않으면 그만이고, 잠도 배설도 필요 없다. 식량이야 인간을 무한정 배양할 수 있는 기술이 연방에 있는데 무엇이 문제지?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들은 이 충족감을 모를 테지. 아니, 몰라도 된다. 하하하하!"

흥분한 종후표는 느닷없이 광소하더니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회한에 잠겨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종후표도 문득 저런 사실들을 깨닫고 나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더군. 몇 년간 세상이 회백색으로 보이면서 어떠한 것에도 흥미롭지 못하고 공허했네. 어느날 길을 걷다가 차에 치어 죽었으면 했어. 해서 오늘은 그냥 죽어버릴까 하고 목을 매보았지."

"흔한 우울증 증상이로군. 그러면 고쳐줄 정신과 의사를 찾았어야지. 피를 줄 시체가 아니라."

아무래도, 종후표는 우울증 환자였던 듯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희망차게 말했다.

"그런데 비슷한 처지의 인간들끼리 신인류가 되기로 결정한뒤, 다시 세상이 밝아지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네. 밑의 것들의 감시를 피해 수복전의 정보를 넘겨주었지. 아쉽게도 갑자기 사성짜리 연방 대장군이 계획과 다르게 전술핵을 투발해버리는 바람에 대부분 수포가 되었지만 말일세."

"뭘 넘겨줬다는 말이지?"

"이 종후표가 하나 묻겠네. 확고한 목표나 신념이 있나? 설마 연방의 남은 도시나마 지켜보겠다는 허황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나?"

나는 뜨끔했으나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서 입을 열면 지는거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런 시시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놈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런 것은 목표가 될 수 없다. 명성을 높이거나 인정을 받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될 수는 있겠지. 그게 전부다. 알아 들었다면 선택해라."

와득.

종후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뒤에 손바닥에 모으고 우릴 바라봤다. 아무래도 자신의 피를 마시라는 뜻 같았는데, 이 상황에서 병신이 아니고서야 저걸 마실리가 없었다.

"싫은가? 다들 아직 젊구만. 젊음이 좋아. 대단한 소신이군."

"몇 살인데 지 혼자 세상다 산 척이야? 얘, 너 몇 살이니?"

"······."

엘프인 슬레모킨은 백 살 내외고 레반은 생을 다합쳐 백을 넘겼기에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종후표는 자신의 달변이 먹히지 않는 듯 하자, 자포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숨을 몇 번 길게 내쉬고는 집행관을 불렀다.

"이제 정말 끝인가보군. 루베르겐 집행관."

"······."

"한 대 주시게. 입아프게 떠들어댄 백리뇌부 종후표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만 삼도천을 건너려하네."

"그러시죠."

집행관은 이번에도 궐련을 꺼냈고.

"이놈! 또 속았구."

아니나 다를까, 궐련을 요구한 종후표는 마지막까지 숨겨두었던 요기를 단번에 해방해 도주를 하려했다. 넘실대는 요기가 주점 내부를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후드드드드득—

종후표가 발을 움직였을 때는, 이미 수십 조각이 나있는 상태였다. 종후표의 몸통 조각들이 모판으로 자른 두부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오형검의 이 초식, 섬(纖). 종후표의 몸통을 수십조각낸 나는 뒤틀어진 어깨를 털어 맞추었다.

섬은 오형의 하나. 섬은 가늘게 뽑아낸 검이다.

실보다도 가늘고 단단한 검기가 꽃을 피워낸다. 가늘게 뽑아낸 줄의 형태라면 무엇이든 구현이 가능하다. 그것은 가는 검기의 실타래일수도 있고, 가는 검기의 꽃일 수도 있으며, 가는 검기의 공일수도 있다.

마치 촉수 줄기처럼.

가늘다는 것은 많은 이점이 있다. 극성에 이른 일 초식 출(出)과 이 초식 섬(纖)을 자연스럽게 연계하면 가늘어서 보이지도 않는 선의 날로 사람을 다진고기로 만들어버리는, 방금 전과 같은 기예를 부릴 수도 있으니.

우두둑-

물론 일 초식과 다른 초식을 연계하는 것은 그만큼 과부하가 심한 탓에 어깨가 박살나니 자주 쓸 수야 없지만, 여기서는 기운이나 마력의 소모없이 알아서 고쳐주는 나노 로봇이 있으니 괜찮다.

바만차의 에센스 절반을 소모한 로라 마르티네즈의 재구축이후 이 6세대 나노 로봇의 일처리도 더욱 빨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육체 자체의 회복력이 더 좋아진 것이겠지.

우득.

그리 생각하는 새 빠져 돌아갔던 어깨가 붙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