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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 *

쿠구구구구!

벽라국 동부.

200년 전, 천색성이라는 성이 있던 땅.

그곳에, 한 시커먼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저벅, 저벅….

그림자는 이제는 모래사장이 된 땅을 밟았다.

[오랜만입니다. 모두.]

그림자, 서은현은 씁쓸한 목소리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가 만들었던 묘지도, 유리검들도.

하나같이 전부 긴 세월 동안 모래 아래에 파묻혀, 이젠 더 이상 본래의 형상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마… 한 달 후면 시일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노력하겠습니다.]

잠시 모래사장을 보던 그는, 결인을 맺었다.

쿠우우우우!

저주문이 그에게서 새어 나오며, 시커먼 음풍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거대한 폭풍에, 주변의 모래가 흩날리고, 천색성에 있는 모래를 주변으로 날려 버렸다.

얼마 후.

모래밭이었던 곳의 아래쪽.

그곳에, 잔뜩 낡아 있는 유리검들이 박힌, 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200년 전의 건물들 역시, 드문드문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서은현은 그중에서도, 아직까지도 가장 원본의 모습을 잘 유지하는 건물.

북향화의 공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도 이젠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무너지려 하는군.]

공방은 형태만 유지했다 뿐이지, 문자 그대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쩌면 서은현이 툭 치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수준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중에 다시 와서 모래를 파헤치려면 그것도 웃기겠지.]

그는 품에서 진법 깃발과 법기들을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 영도회에 들러 잠시 샀던 법기들.

쉬익, 쉬이익, 쉬이익!

쿵, 쿵, 쿵!

깃발과 법기들이 사방에 날아가 꽂히며, 모래바람이 묘지를 덮지 못하게 막았다.

말 그대로, 모래 폭풍만을 막아 주는 진법.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은현은 진법이 설치된 것을 바라본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에 만들었던 유리검들은 전부 부러지고 으스러져, 형체를 유지하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수천수만 개를 만들었건만, 그나마 형태가 유지라도 되는 건 5천여 개 정도.

우웅!

서은현은 어검술을 사용해, 그중 멀쩡한 유리검 중 3천 개의 유리검들만을 뽑았다.

[…이런 꼴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당신들의 힘을 빌리겠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북향화뿐이 아니었다.

나와 그녀를 축복해 주었던 이웃들.

이 성에 살았던 모든 생명들, 인연들.

그 모든 이들이, 내게 소중한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복수는 내 손으로만 끝내서는 아니 된다.

모두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묘에 꽂힌 검을 내 앞으로 끌어왔다.

법보, 무색유리검은 3천 개의 비검이 한 벌로 취급되는 법기였다.

서은현은 북향화가 남겨 둔, 무색유리검의 구조도를 꺼내 들었다.

무색유리검을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유리로 비검을 3천 개 만든다.

각각의 유리검에, 간결한 영력 회로를 하나씩 새긴다.

다만 영력 회로는 모든 검들이 각각이 전부 다 조금씩 달라야 한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북향화가 정립한 나름의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에 따라서 회로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서 새기면 될 뿐이었다.

밤낮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는 3천 개의 낡은 무색유리검들에, 결국 모든 영력 회로를 새기는 데에 성공하였다.

서은현은 그렇게 3천 개에 각각 한 개씩의 영력 회로를 새긴 후, 법보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주술문 한두 개를 각각에 더 새겨 준 후, 법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그렇게, 무색유리검들은 나를 주인으로 인식했다.

정말, 미치도록 간결한 제련 방식.

재료도 구하기 쉽고, 제련 방식도 쉽다.

'무형검을 씌워 보는 건….'

위력을 확인하는 것은, 원립의 앞에서 하기로 했다.

어차피 놈의 목을 치기 위한 것.

그녀가 위력이 부족하게 만들었을 리는 없다.

그는 완성된 무색유리검을 바라본 후, 그녀가 남긴 구조도를 보며 확인을 이어 갔다.

문제없이 완성되었다.

사락.

그리고, 서은현은 문득 구조도의 맨 아래쪽에 쓰인 글귀를 읽게 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읽어 보았던 글귀.

그녀가 내게 전하는 말.

―오라버니, 무색유리검은 3천 개가 곧 한 벌인 법보예요.

―조금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오라버니가 비검을 다루는 걸 보면 절대 못 다룰 리는 없을 것 같아요.

―그거 아시나요? 사실 원래 무색유리검의 개수는 3천 벌이 아닌, 3,650벌이에요.

―어제가, 오라버니가 천색성에 온 지 딱 10년이 되는 날인 건 아셨나요?

―무색유리검은 그걸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당신이 이곳에 와 보낸 하루하루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법보랍니다. 하지만 나머지 650벌은… 저와 오라버니가 함께 설계하고 만들었으면 싶어서, 일부러 무색유리검은 3천 벌로만 구동되게, 그렇게 미완성으로 남겨두었어요.

―아직 미완성되었지만, 앞으로 저와 함께 완성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대답을 들려주실 거죠?

치익, 치이익….

검은 눈물이, 그림자로 뒤덮인 서은현의 얼굴 부분에서, 그렇게 뚝 뚝 떨어졌다.

떨어진 눈물은 저주문으로 흩어지며, 모래를 부식시켰다.

치이이이―

서은현의 아래쪽의 모래들이, 마구 부식되기 시작했다.

그를 감싼 저주문이, 더욱더 짙어졌다.

[…이… 마음에, 담아. 완성시키겠…습니다.]

서은현은 북향화의 묘를 바라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삼천 벌의 무색유리검과 함께 천색성의 터를 나섰다.

촤아아아!

천색성에서 나와 허공을 거닐던 그의 눈에, 누군가가 잡혔다.

비검 법보에 올라탄 벽문성이었다.

[뭐냐.]

"…기다리고 있었소. 가주님께서 당신을 데려오는 임무를 맡기셨으니까."

[…슬픔은 검푸른 색이지.]

"음?"

[네 의식도 검푸르군.]

"…."

[날 기다리던 게 아니라, 너 역시 그녀를 추모하고 있던 게 아니냐.]

벽문성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서은현은 벽문성에게 말을 건넸다.

[나와 함께, 같이 들어가서 그녀를 추모해 주자꾸나.]

"…빨리 갑시다."

[그래.]

두 남자는 답천사막의 중심부.

원립의 봉인지를 향해 날아갔다.

[길고 긴 결말을 볼 때가 왔다.]

네가 밟아온 것 (9)

"제길, 날씨는 오라지게 좋군."

공묘세가의 가주, 공묘령은 얼굴을 찌푸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천기가 훤히 보일 정도로, 하늘은 새파랗게 맑았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천기는 대흉(大凶)이었다.

"빌어먹을, 결단기 수도자가, 아무리 새파랗게 어린 놈들이라고 해도 200명이나 더 늘었고, 각 가문과 세력에서 축적한 힘을 다 끌고 와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 함정도 준비해 놨는데… 아직도 천기가 대흉이라니."

"어쩔 수 없지. 그게 원영기 수도자가 아니겠소?"

벽천기가 혀를 차며 말했다.

답천사막 가운데.

그곳에 있는 원립의 봉인지, 흑색의 성.

그 주변으로, 수백 명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곽에는 각 가문에서 엄선해서 뽑아 온 축기기 수도자들 역시 빼곡히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쪽으로는 각 세력들이 준비한 전함(戰艦), 혹은 여러 명이 조종해야 하는 거대 법보, 포탑(砲塔), 충차(衝車) 등.

전쟁용 법보들 역시 잔뜩 세워져 있었다.

"축기기들은 음도호풍(陰導呼風)을 준비해라!"

막리세가 가주 막리황천의 지시에, 막리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은 뒤쪽에서 진법 깃발을 들고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그들의 진법 가운데로, 가공할 음기가 모이기 시작하며, 흉맹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진씨세가도 질 수 없지! 막리 놈들한테 지지 않게 백륭장익진(白融張翼軫), 양융적색화(陽融赤色火)를 준비해라!"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모여 진을 짠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피처럼 붉은 시뻘건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뜨거운 답천사막의 열기를 잡아먹으며 커진 진씨세가의 불꽃은 막리세가에서 모은 음풍보다도 더더욱 거대해졌다.

그 모습을 본 막리황천의 눈가가 꿈틀거리자, 옆에 있던 막리세가의 원로가 그를 알아차렸다.

막리세가의 원로는 옆에 있던, 서열이 낮은 원로에게 인상을 썼고, 인상을 받은 원로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뒤를 돌아 외쳤다.

"진가 놈들보다 더욱 크게 음풍을 키워라! 제대로 음풍을 키우면 전원 생령단(生靈丹)을 세 알씩 내리겠다! 하지만 놈들에게 뒤처지면, 아주 재밌는 일이 일어날 줄 알거라!"

쿠구구구구!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리세가의 음풍이 사막의 열기를 떨치고 더더욱 거대해졌다.

그에 진씨세가 역시 불꽃을 더욱더 키웠고, 두 가문은 서로 경쟁하며 각 가문의 비전진법을 더더욱 크게 키웠다.

그 모습을 보며, 청문중진이 피식 웃었다.

"저 두 가문은 붙여 놓으면 늘 심심할 일은 없단 말이지."

"어머나, 청문 오라버니도 맞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희 두 가문도 합쳐지면 정말로 심심할 일이 없을 텐데…."

"…진루세가 가주께선 공사를 가려 주시오."

"흥, 아직 봉명성이 나타나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그 전까진 긴장도 풀 겸 잡담도 아니 되나요?"

진루세가의 가주, 진루연천은 새카만 색깔의 장포를 입고, 푸른 빛이 도는 눈화장을 한 풍만한 미녀였다.

"그리고, 가문의 합방이 어찌 사적인 일이 되는 것인지요? 나름 공적인 일이 아닌가요? 오라버니?"

"끄음, 연천아. 지금 성제국 6가의 가주들이 이쪽을 눈을 부라리면서 쳐다보고 있다. 전쟁 전에 내분이라도 일어나면 어쩔 거냐."

"흥, 하씨, 거씨, 준씨, 열전씨, 오리씨, 전씨. 이 버러지들이 다 합쳐도 진루세가에 못 미치는데 알 바인가요? 그런 시시한 이야기 말고, 오라버니. 예전처럼 대해 주시면 아니 되나요?"

청문중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진루세가 가주께선 제자리로 돌아가 주시오."

"잘 생각해 보셔요, 오라버니. 창호자의 피를 이은 대청문세가의 혈통과, 성 제국의 개국 시조인 진루세가가 합쳐지면…."

"그만! 더 이상의 사담은 허용치 않겠소. 총사령관의 이름으로 명하니, 진루세가 가주는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이 이상은 군령(軍領)으로 다스리겠소!"

"…흥. 그러지요, 총사령관님. 잘 생각하시길 바랄게요."

진루연천은 청문중진에게 한쪽 눈을 깜빡거린 후 배시시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청문중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나저나, 서 수사는 왜 안 오는 건지…."

그는 공묘령의 옆에서 은근슬쩍 그녀에게 계속 달라붙고 있는 벽천기에게 물었다.

"벽 가주, 벽씨세가의 결단기 수사가 서 수사를 데리러 갔다 하지 않았소?"

"아… 그게 말입니다."

벽천기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공묘령은 그 사이에 벽천기에게서 멀어져 버렸고, 벽천기는 안타깝다는 듯이 공묘령을 바라보다가 안색을 찌푸렸다.

"벽 가주, 연락은 되고 있는 거요."

"하하, 그것이…."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답천사막 동쪽에서, 시커먼 그림자 덩어리가, 원립의 봉인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쿠과과과과!

시커먼 저주문이 사방으로 튄다.

그리고 그 저주문의 중앙에 있는 그림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늦진 않은 것 같군.]

파아아앗!

뒤이어 그림자를 따라온 벽문성은 곧바로 벽천기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임무 완수하였습니다."

"오, 그래. 장하구나. 하하, 총사령관님. 이제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군요."

"그렇구려…."

시커먼 저주문 덩어리로 전신을 감싼 그림자, 서은현.

흰 붕대로 전신을 감싼 동방의 군주, 만리민랍.

자신만만한 표정의 청백색 장포를 입은 벽씨세가 가주, 벽천기.

세 사람이 청문중진의 앞으로 나섰다.

"계획은 세 분 모두 숙지하고 계실 테니, 딱히 알려드릴 것은 없겠소만. 그래도 세 분 모두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상황을 미리 상상해 보기를 권하겠소."

"알겠소."

벽천기는 대답을 했으나, 서은현과 만리민랍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 후면 봉명성이 나타날 터이니, 미리 받아 두시구려."

청문중진은 벽천기와 만리민랍에게 저물법기를 건넸다.

"법기 안에 주류를 넣어 놓았소."

"하, 과연 선주(仙酒)로군. 마시는 것만으로도 단발성이나마 온갖 능력이 올라간다니."

벽천기는 저물법기를 들여다보며 감탄을 표했고, 만리민랍은 별말 없이 바로 저물법기에서 술을 꺼냈다.

그런 후 그는 그 자리에서 선주들을 전부 꺼내 바로 마셔 버렸다.

쿠구구구!

고명이 자자한 선주들을 전부 마셔 버린 만리민랍의 기세가 일변했다.

쿠구구구구!

그의 수행이 일순간 폭증하는 듯했고,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좋군, 짧은 시간이겠지만…."

"벽 가주는…."

"아, 나는 격천부를 발동시키기 전에 마셔 두겠소."

"그리하시고."

청문중진의 시선이 서은현에게 닿았다.

"서 수사는… 현재 마시고 계시는 거요?"

서은현은 저주문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며 마시고 있소.]

"그렇군, 계획이 잘 진행될 수 있기를 빌지…."

청문중진은 말을 마치고, 진중한 표정으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내에 있는 모든 결단기, 축기기 수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은현은 하늘이 아닌 원립의 성을 노려보았고,

만리민랍은 저물법기에서 커다란 함포(艦砲)를 꺼내 함포의 뒤쪽 홈에 영석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벽천기는 격천부를 꺼내 영력을 불어넣었다.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기와 천시를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시간이다!"

공묘령이 크게 외쳤다.

"해방성이…."

동방의 군주 중 한 명이 낮게 읊조렸다.

"봉명성이, 나타난다."

대초원의 부족장 중 한 명이 얼굴을 굳혔다.

쿠구구구구!

허공이 이지러지며, 허차원을 유영하던 원통형의 거대한 성이, 현실의 공간에 진입한다.

쿠구구구구!

동시에, 자리에 있는 수많은 수도자들은 인근의 천지영기가 변화한 것을 느꼈다.

해방(解放)의 기운.

막혀 있던 것이 뚫리고.

봉해져 있던 것이 풀려나고.

갇혀 있던 존재가 풀려나며.

자고 있던 이가 눈을 뜬다.

긱, 기긱, 기기기기긱!

공묘세가의 비전.

인근의 용맥을 모아 연결하여 봉인하는 팔괘흡령봉진.

진의 안쪽에서, 시뻘건 기운들이 줄기줄기 뿜어지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구!

동시에 수많은 수도자들이 영력의 압박을 느끼며 안색을 굳혔다.

안쪽에 있는 존재가, 바깥으로 나오려 한다.

해방성이 현세에 진입하여, 완전히 안착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인근의 천지영기 역시 더욱더 활발하게 해방의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쿠극, 쿠그그극!

혈광이, 진법의 곳곳에 균열을 내고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메마른 사막 전역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스아아아….

균열 사이사이로, 피 안개가 흘러나온다.

빠직, 빠지직, 빠지지직!

점차 봉인진이 깨져 나가기 시작한다.

한 결단기 수도자가 침을 삼켰다.

쿠구구구구!

진법이 조각조각 나며, 진을 이루던 천지영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화아아악!

봉인진이, 완전히 해제되었다.

시뻘건 핏빛이 온누리에 퍼지며, 사막 전체가 피비린내에 물드는 것 같았다.

쏴아아아!

흑색의 성이 피 안개에 휩싸였다.

그리고, 성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핏빛 장포.

회백색의 머리칼.

자글자글한 주름이 진 손.

그리고, 여전히 검은 안개와도 같은 기이한 반투명한 무면탈을 쓴 얼굴.

혈목자 원립이었다.

[잘 지냈느냐?]

쿠구구구구!

장내에 모인, 400에 달하는 결단기 수사, 축기기 수도자들이, 그 한 마디에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원영…."

청문중진이 그의 경지를 가늠하며 입술을 떨었다.

"중기…!"

벽천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음신(陰神)에 이어 양신(陽神)까지 형성해 낸 건가? 음양신을 자유자재로 합치고 분리한다는 원영 중기에…."

[두려워할 것 없소.]

서은현이 벽천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싸아아아―

시꺼먼 저주문이 그의 주변으로 퍼진다.

피 안개는 저주문으로 형성된 검은 안개의 영역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놈은 원영 후기에 도달해 오겠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는, 기껏해야 원영 중기를 달고 나오는군. 원영기 수사씩이나 되어서, 제 말도 못 지킨 게 부끄럽지도 않나?]

쿠오오오.

시꺼먼 저주문이 부글거리며, 피 안개에 닿자 피 안개는 그대로 썩어서 사막으로 떨어져 버렸다.

[덤벼라, 원립. 오늘 네놈은 죽는다.]

[이건 또 뭐야…. 마기는 안 느껴지는데, 영락없이 마공 같아 보이는군. 마공의 보조공법으로 만들어진 공법을 대성한 건가?]

원립은 서은현의 말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서은현을 관찰할 뿐이었다.

[그래, 재밌구나. 맹랑한 녀석이야. 하지만 한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만리민랍에게 말했다.

[공격을 시작하시오.]

만리민랍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뭐라 뭐라 떠들려는 원립을 향해, 그가 꺼낸 함포를 겨눴다.

그가 함포의 홈에 박아 넣은 수백 개의 영석이 일시에 빛난다.

그리고.

번쩍!!!

새파란 광선이 원립에게 날아간다.

푸른 광선에, 순간 천지가 밤이 된 듯, 광선으로 온 빛이 쏠린 듯한 현상이 일어났다.

쿠과과과!

소리가 뒤늦게 따라오며 사방이 진동했다.

쉬이이이….

먼지구름이 비산한다.

만리민랍이 혹시나 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치웠…."

[그럴 리가 없지. 막리세가와 진씨세가, 그 밖의 모든 세가들에서 공격을 퍼부어 주시오!]

청문중진이 내 말을 받아 사방으로 전달하였다.

그리고, 막리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준비해 오던 음도호풍의 법술을 원립에게 날린다.

진씨세가 역시 양융적색화의 법술을 일제히 원립에게 날렸다.

수 명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진법의 힘을 빌어 한데 펼치는 광역 신통이, 한 존재에게 쏘아진다.

"해치…."

[안 해치웠소. 이제부터가 시작일 터이니, 모두들 준비하시오.]

나는 저주문을 더욱더 쏟아내며 먼지구름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구름 안쪽으로 핏빛이 뻗어 나온다.

청문중진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울렸다.

"산개!!!"

콰과과광!

시뻘건 핏빛 광선이, 우리가 있던 곳으로 내쏘아졌다.

그리고, 먼지구름이 잦아들어 갔다.

쿠구구구―

흑색의 성 위쪽.

그곳에는 오연히 서 있는 원립과, 그의 아래에 도열해 있는 수천 마리의 흑적색 강시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와 있는 그의 모든 법보와 기물들.

거기에.

원립은 한 손에는 못 보던 핏빛의 파초선 역시 하나를 들고 있었다.

[200년은 나에게도 너희에게도 적은 시간은 아니었겠지. 어디 놀아 보자꾸나….]

휘잉!

그가 핏빛 파초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바람을 부치자, 피 안개가 섞인 혈풍(血風)이 천지사방으로 뻗치며 결단기 연합 전체를 밀어내었다.

네가 밟아온 것 (10)

"벽악진(壁岳陣)을 펼쳐라!"

청문중진의 고함에, 결단기 수도자들이 미리 지급받았던 진법 깃발을 손에 들고 대열을 갖추었다.

진법 깃발이 일정한 배열을 갖추자, 푸른 빛을 뿜으며 오채색의 빛을 뿜는다.

쿠구구구!

오채색의 빛은 결단기 수도자들을 지켜 주는 산악이자, 거대한 장벽이 되어 혈풍을 막아섰다.

200년 전, 다급하게 기초 진법인 호신의 진법으로 원립의 공격을 막았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정밀함.

[꽤 단단하군.]

원립의 혈풍은 산악의 벽을 뚫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청문중진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모두! 준비해 온 병기를 꺼내시오!"

그리고, 수많은 가문에서 가져온 병기들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거대한 전함에 올라탄 축기기 수도자들이 일시에 결인을 맺었다.

전함에 달린 수십 개의 함포가 원립에게 겨눠지며 빛을 뿜었다.

충차형의 법보, 함포형의 법보 역시 일제히 빛을 뿜는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각기 법보들을 꺼내 들었다.

200년 전에 비해, 각 가문에서 원립과의 결전을 준비키 위해 사력을 다해 키워 낸 새로운 결단기 수도자 200여 명.

총 400여 명에 달하는 결단기 수도자들의 법보와 법술이 한 사람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파아아앗!

수많은 폭광과 먼지구름 속에서, 혈광이 일어난다.

키륵, 키르르르륵!

동시에, 혈광의 안쪽.

핏빛의 광채로 일대를 보호하는 원립의 옆에서, 수천의 흑적색 강시들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괴의 강시 군단이다!"

키에에에엑!

기운이 강한 강시 서넛이 모여 결단기 수도자 한 명의 법보를 맞상대했다.

크웨에엑!

강시들이 비명을 지르자, 그 충격파가 결단기들의 법술을 밀어낸다.

"서, 서넛이 모이면 결단기 급이다!"

한 수도자가 안색이 창백해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때였다.

군영의 뒤쪽, 동방의 군주 열여섯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아래쪽에는 시커먼 붕대로 전신을 감싸고, 기이한 독기(毒氣)를 뿜어내는 괴인들이 있었다.

북쪽의 대초원에서, 세 명의 부족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저물법기를 열자, 각각 수많은 살덩이가 겹쳐진 괴이한 괴물이 쏟아졌다.

서방의 삼국에서, 막리세가, 오리세가, 준씨세가의 가주들이 앞으로 나섰다.

막리세가가 저물법기에서 원립처럼 강시 군단을 쏟아 냈고,

오리세가에서 해골병을 쏟아 냈으며, 준씨세가에서 원혼들로 제련한 귀혼들을 쏟아 냈다.

마도 대 마도!

막리세가의 검록빛 강시들이 흑적색 강시들에게 달라붙었다.

개개의 개체는 원립의 강시에 비해 한참 뒤처졌으나, 막리세가는 세가 차원에서 학살한 인명들로 어마어마한 강시 떼로 물량 공격을 퍼부었다.

촤아아아아!

뒤이어 막리세가의 원로 한 명이 저물대를 열자,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물이 강이 되어 쏟아졌다.

막리세가의 강시 떼들은 녹빛의 물에 닿자, 더더욱 기운과 재생력이 강해지며 원립의 강시 떼에게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원립이 풀어놓은 강시 떼의 기세가 꺾였다.

"화혼염열(火魂染悅)."

화르르륵!

진씨세가의 결단기 원로 세 명이 앞으로 나서며 결인을 맺는다.

불꽃의 령(靈)이 허공에 떠오른다.

화령(火靈)은 진씨세가 원로들이 결인을 한 번 맺을 때마다 그 원신(原神)을 부르르 떨며 쾌락에 떨어 대었다.

그리고, 화령이 한 번 쾌락에 물들 때마다 그 염혼의 빛이 점차 바뀌었다.

적색에서 주황색으로, 주황색에서 황금색으로, 황금색에서 청백색으로.

그리고, 염혼의 빛이 완전한 청화(靑火)가 되었다.

"가라!"

쿠구구구구!

진씨세가 원로원의 결인에, 염혼(炎魂)은 잔뜩 몸을 떨며, 원립이 소환한 강시 떼에게로 떨어졌다.

마도 가문인 막리세가와 수백 년 동안 경쟁을 벌여온 진씨세가는, 그만큼 마도를 상대하는 데에 특화된 가문이었다.

그들이 던진 푸른 불꽃은 삽시간에 강시 떼에게로 번지며 원립의 강시 군단을 불태웠다.

유난히 시체에게만 잘 통하는 불길이 사방으로 번진다.

더군다나 불길에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 듯, 도망치려는 강시 떼에게로 쫓아가 들러붙기까지 했다.

진씨세가의 불꽃을 떼어 내려는 원립의 강시들에게는 막리세가의 강시들이 달라붙어 물고 늘어진다.

화르르르르!

삽시간에 사막에 불바다가 피어올랐다.

서방, 북방, 동방의 마도 수도가문, 그리고 진씨세가의 합공에 원립의 강시 떼들은 전멸(全滅)하였다.

그런 줄 알았다.

콰아앙!

핏빛의 둔광이 산악의 벽을 향해 쏘아진다.

원립은 그대로 오채색의 산악을 뚫고, 그 너머로 넘어와 파초선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

혈풍이 불어닥치며, 그 주변에 있던 결단기 수도자들 7명, 뒤쪽에 있던 축기기 수도자 400여명이 그대로 갈려 죽었다.

[혈운(血雲), 적해(赤海).]

원립이 결인을 맺는다.

동시에, 결단기와 축기기 수도자들의 사체에서 생명력과 핏물들이 혈운(血雲)이 되어 허공으로 피어오른다.

거대한 피 구름이 움직이며, 숯덩이가 된 그의 강시 떼에게로 몰려간다.

직후, 숯덩이가 되었던 원립의 강시 떼에게 피 구름이 흡수되었다.

꿈틀, 꿈틀….

숯덩이가, 피 구름을 흡수하며 꿈틀거린다.

직후, 피 구름을 먹은 숯덩이들이 혈육을 재생시켰다.

쿠구구구!

그리고, 숯덩이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완전히 재생되었다.

전멸했던 강시 군단이 다시 완전히 재생한다.

[이게 끝이냐?]

원립이 비웃으며 다시 결인을 맺기 시작했다.

"다시 진법을 펼쳐라!"

쿠구구구!

원립이 쳐들어온 부분의 보호법진이 무너지고, 다시금 원립을 둘러싼 형태로 법진이 바뀐다.

그리고 그 바깥에서 수도자들은 다시금 원립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진씨세가와 막리세가의 원로들은 피식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웃기는 노괴로군. 이게 끝이냐니. 한 번 부활시켰으면, 두 번 죽여 주면 될 뿐이지."

다시금 막리세가의 강시들이 원립의 강시들에게 달려들었고, 진씨세가의 원로들이 청화를 만들어내, 원립의 강시 떼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화르르르륵!

흑적색의 강시들은, 더 이상 불에 타지 않았다.

"뭐, 뭣…!?"

진씨세가 원로들이 대경하며 눈을 부릅떴다.

흑적색의 강시들은 불에 타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불꽃을 흡수하며 더더욱 생기발랄하게 막리세가의 강시들을 쳐 죽이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흑적색의 강시들이 막리세가의 강시들을 상대하며, 막리세가의 강시들에게 손을 대자 막리세가의 강시들이 원립의 강시들에게 그대로 빨려들어 가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막리세가 원로들도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키에에에엑!

동방의 마도들과 북방의 마도 수도자들 역시 각각이 가져온 마도 생명체들을 흑적색의 강시 떼에게 흩뿌렸으나, 강시 떼는 오히려 그들의 법술을 흡수하며 더더욱 기운을 찾을 뿐이었다.

[썩 훌륭하지 않으냐? 혈목귀시(血木鬼屍)는 한 번 당한 법술에는 강력한 내성을 갖게 되고, 내성이 있는 법술은 흡수해서 제 기력을 충전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쿠구구구구!

원립이 입을 벌리자, 그의 입에서 피 구름이 뿜어지며 그를 휘감는다.

동시에 그를 뒤덮은 피 구름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결단기 수도자들의 보호법진을 으스러트렸다.

"노괴가 힘을 쓴다!"

"산개하라!"

[네놈들이 패거리로 몰려온다고 해도, 감히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쿠오오오!

피 구름이 회전한다.

촤라락!

동시에, 원립의 저물대에서 혈수들이 솟구치며, 낫을 든 귀왕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귀왕들은 원립의 피 구름과 합쳐지더니, 피 구름으로 형성된 거대한 두 명의 귀왕의 형상이 된다.

끼아아아아아!

피 구름으로 된 두 귀왕이, 낫을 들고 양옆으로 휘둘렀다.

콰아아앙!

원영기 급의 쌍격!

그 공격에, 다시금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여 펼친 수호법진이 으스러졌다.

[시시한 놈들. 전부….]

그리고, 그때였다.

파아아앗!

푸른 빛의 섬광이, 천지를 어둡게 만들며 다시금 원립에게 쏘아졌다.

[…!]

원립이 움찔거리며 결인을 맺었고, 피 구름으로 화한 두 귀왕이 낫을 교차해 들며 원립의 앞을 막아선다.

쿠과과광!

푸른 섬광이 폭발한다.

그리고, 빛이 잦아든 후.

피 구름의 귀왕은 각각 반신이 찢겨 나가 있었고, 피 구름의 가운데에 있던 원립은 보탑 법보를 꺼내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보탑 법보마저도 빛이 상당히 희미해진 것이, 방금의 공격이 꽤 충격이었던 모양새.

원립이 흑색의 반투명한 무면탈 너머에서 눈을 찌푸렸다.

[…아까는 이 위력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원립의 시선이, 저 멀리에서 그에게 함포를 겨누고 있는, 백색의 붕대로 전신을 덮은 동방의 군주, 만리민랍에게 향해 있었다.

위이이잉!

만리민랍은 한 팔로 함포를 들고, 한 팔로 결인을 맺었다.

함포의 끝이 빛나며, 다시금 푸른 섬광이 맺히기 시작했다.

방금 전보다도 더더욱 강력한 기세가 푸른 섬광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호오… 그렇군. 방금 죽었던 결단기, 축기기 수도자들의 귀혼(鬼魂)을 빨아들여, 그 혼력(魂力)으로 위력이 더 강화되는 건가…? 사상자가 많아질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대포….]

원립의 두 눈에서 혈광(血光)이 폭사된다.

[그렇군. 들은 적 있다. 흑색귀골곡 섭명함의 주포(主砲). 괴군과의 일전에서 박살 난 섭명함의 주포 중 하나가, 동방의 해안에 흘러 들어갔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저것이었나 보군.]

위이이잉!

만리민랍은 말 없이 함포를 한 손으로 든 채, 포신에 영력을 불어넣을 뿐이었다.

끼야아아….

끼아아….

함포의 안쪽에서는 은은한 귀곡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콰아아앙!

다시금 푸른 빛살이 원립에게 쏘아졌다.

방금 전보다도 더욱더 흉맹한 위력!

쿠과과광!

빛살이 폭발한다.

푸른 섬광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폭풍이 몰아쳤고, 뒤쪽에 포진하고 있던 축기기 수도자들은 폭풍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폭광이 잦아든다.

하지만 다음 순간.

촤아아악!

핏빛 둔광이 푸른 폭발을 뚫고, 만리민랍에게 쇄도하였다.

원립이 수정 해골 지팡이를 들고서 그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섭명함의 잔해라면 나도 썩 욕심이 나는군. 내놓거라…!]

만리민랍이 두 눈을 찌푸리며 다시금 함포를 발동시키려 했으나, 원립이 더욱더 빨랐다.

촤아악!

삽시간에 만리민랍의 앞에 도달한 원립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촤아아아!

그의 손 위로 거대한 혈광이 고인다.

[잘 가라.]

"…."

다음 순간.

촤라라락…!

검은 빛의 촉수가, 원립을 휘감았다.

[…!]

촉수는 생명체의 것이 아닌, 시커먼 안개로 되어 있었다.

촤아아아.

그리고 안개가 닿은 곳은 점차 어마어마한 통증을 야기하며 썩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저주문…?]

원립은 시커먼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는 깨알 같은 수천 개의 저주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촤락, 촤라라락!

저주문의 파도가 원립을 휘감았다.

그리고, 원립이 잠시 저주문에 묶인 찰나.

만리민랍이 서둘러 그 자리에서 물러났고, 갈의를 입은 방립의 노인, 월량이 만리민랍의 자리로 내려와 갈색 바퀴 법보를 꺼내 들었다.

"죽어라, 괴물아!"

촤르르르르!

갈색의 바퀴가 회전한다.

월량이 결인을 맺자, 바퀴는 원립을 향해 미친 듯이 쇄도하였다.

[귀찮은 것들이….]

하지만, 원립이 손을 뻗어 피 구름을 불러모으자, 바퀴 법보는 피 구름에 막혀버렸다.

원립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혈광을 뿜어내며 말했다.

[썩 뛰어난 저주술사인가 보다만, 한참은 부족하다. 그래도 썩 귀찮았단 점은….]

촤아아아!

핏빛이 저주문을 밀어낸다.

[인정을 해 주도록….]

그리고.

콰아아아앙!

혼자서 떠들고 있는 원립을 향해, 만리민랍의 주포가 푸른 섬광과 함께 쏘아졌다.

푸른 섬광에 휩싸인 원립을 향해, 그동안 기력을 끌어모으던 결단기 수도자들, 축기기 수도자들의 공성 병기들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

지축이 뒤흔들리고, 사막에 유리 구덩이가 생겨났다.

순간 피어난 섬광이 사막을 물들이며, 사막의 빛을 빨아먹듯 어둠이 되었다.

폭광의 중심에서, 원립은 결인을 맺으며 혈광을 자신의 주변으로 둥글게 말아 사방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나름 200년 동안 성장했군. 원영 초기였으면 위험했겠어….]

그의 방어막은 위태롭게 흔들릴지언정, 결코 뚫릴 기미는 없었다.

[버티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때였다.

[음…?]

원립의 눈에, 한 법보가 보였다.

월량이 던졌던 바퀴 형태의 법보.

미친 듯이 회전하며 그의 앞에서 돌던 그 법보가, 점차 회전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경 쓸 수준이 아니었으나, 점차 회전력과 위력이 올라갔다.

그리고, 원립이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그놈이….]

쿠구구구구!

갈색의 바퀴는 점차 핏빛으로 시뻘겋게 물들며, 새빨간 증기를 뿜으며 강력한 힘으로 그의 보호막을 압박했다.

[이놈, 진원진기를 끌어다 퍼붓고 있다는 거냐…!]

말 그대로, 월량은 피눈물을 흘리며, 입에서 피를 토해 내면서도 자신의 법보를 향해 자신의 생명력까지 불어넣고 있었다.

"죽어라, 노괴 놈아…! 내 생명력을 모조리 짜 넣어 태워 버릴지언정, 네놈에게 작은 상처라도 남기고 가겠다!"

키이이잉!

바퀴가 더더욱 빠르게 회전한다.

우극, 우그그극…!

원립은,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의 보호막으로, 점차 바퀴가 파고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이놈이, 네깟 놈에게 뚫릴 것 같으냐! 어림없는 소리!]

원립은 두 눈에서 혈광을 뿜으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때, 원립의 뒤쪽에 있던 작은 문자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서은현의 저주문.

원립은 혈광으로 완전히 떨쳐 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질척질척한 악의는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꿈틀, 꿈틀….

서은현의 저주문이, 원립의 몸을 타고 올라, 그의 심장 어림에 자리를 잡았다.

* * *

원립의 폭격 바깥.

봉명성 아래에 서 있는 서은현은 그를 돕기 위해 붙은 청문세가의 축기기 수도자에게 말했다.

[만들어 주시오.]

"알겠습니다."

청문세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사막에 씨앗을 뿌리고, 결인을 맺었다.

쿠구구구!

축기기 수도자의 목 속성 영력이 흘러 들어가자, 씨앗은 빠르게 자라나 한 그루 나무가 되었다.

축기기 수도자가 결인을 맺자, 나무는 기이한 형상으로 자라났다.

그것은, 마치 사람 같은 형상이었다.

양팔을 벌린 사람과 같은 형상.

시커먼 저주문 속에 잠긴 그림자.

서은현이 목인(木人)을 향해 손을 뻗자, 저주문 한 자락이 목인의 심장 어림에 흘러 들어갔다.

[이 그릇에, 고통이 깃들지니.]

키이잉!

목인의 심장에 흘러 들어간 저주문이 빛을 발한다.

* * *

[음?]

원립은 그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시커먼 악의에 몸을 흠칫하였다.

하지만 그가 반응할 틈도 없이, 악의가 폭발하였다.

서은현의 옆에 있던 청문세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목인의 심장을 주먹으로 후려쳐 구멍을 내었다.

저주인형이 발동한다.

[크아아아악!]

욱씬!

원립이 이를 악물며 갑작스레 그의 심장에 느껴지는 고통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새.

콰과과과과!

시뻘건 증기를 뿜어내는 월량의 법보가, 원립의 보호막을 찢어 버리고 원립에게 달려들었다.

촤라라락!

원립의 상반신의 한쪽이, 그대로 뜯겨 나간다.

월량의 바퀴는 월량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원립의 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찢긴 원립의 상반신을 향해, 수많은 법보와 법술들이 날아든다.

원립은 정순지력을 짜내어 임시로 팔을 만들고, 결인을 맺었다.

[해(解).]

그리고, 폭발이 원립을 휩쓴다.

쿠구구구….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숨을 죽이며, 폭광이 잦아든 곳을 바라보았다.

커헉, 커허헉!

월량은 평소 쓰고 다니던 방립을 떨어뜨린 채, 피를 토하며 안쪽을 노려보았다.

수많은 결단기와 축기기 수도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법술을 총동원한 공격!

모두가, 안쪽의 결과를 기대감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먼지구름 안쪽에서, 괴이(怪異)한 핏빛의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은…."

청문중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원립의 주변으로는, 어느새 일곱 개의 족자가 떠올라 있었다.

족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백지였으며, 일곱 요혼의 기운이 괴이한 핏빛의 짐승에게서 느껴질 뿐이었다.

괴이의 요혼이, 원립을 둘러싸고 지키는 중이었다.

[하하, 짜릿하구나.]

자리에 모인 연합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게 정말 끝이냐?]

원립은 상반신의 반절이 날아간 상태에서 몸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 수정 해골 지팡이가, 한 손에 파초선이 들렸다.

[조금 더 열심히 해 보거라. 아직 흥도 안 돋는구나…!]

쿠구구구구!

원립이 꺼낸 혈목귀시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빨아먹었던 법술, 다른 강시들, 다른 마도 생명체들의 기운을 짜내기 시작했다.

혈목귀시들의 몸에서 나온 기운은 핏빛으로 뭉치더니, 모두 원립을 향해 날아갔다.

촤라라라락!

원립이 수정 해골 지팡이를 들자, 수정 해골이 입을 벌리며 핏빛 기운을 빨아먹는다.

동시에, 원립이 소모했던 기력이 다시 차올랐다.

치이이이―

어느새 원립은, 그가 처음 봉인에서 나왔을 때와 완전히 같은 상태를 회복한 채였다.

[쯧쯧, 이건 뭐, 싱거워서 돋았던 흥도 식으려 하는군. 뭔가 더 보여 줄 게 정말 없느냐?]

촤라라락!

시커먼 저주문 덩어리가 원립의 밑에서 그를 삼켜 갔다.

[쯧….]

콰앙!

그러나, 이번의 저주문은 원립에게 닿지도 못하고 그의 보호막에 튕겨 나갔을 뿐이었다.

원립의 시선이, 멀리서 저주문을 조작하는 그림자에게 닿았다.

[아까부터 찔끔찔끔 저주나 섞어 보내는 게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었나. 흐하하, 이제 보니 결단기도 아니고 축기기였나 보군.]

그가, 핏빛 파초선을 들어 올렸다.

[축기기 주제에 결단기급 저주를 성가시게 쏘아 보내는 점은 인정해 주지. 썩 훌륭했다. 그리고….]

원립은 다시 뒤를 돌려, 숨을 몰아쉬는 월량을 보았다.

[목숨을 걸어서까지 내게 한 방을 먹인 건 인상 깊더구나. 뭐…. 결국 법보를 회수할 기운도 다 떨어진 것 같다만.]

원립은 진득하게 월량을 비웃으며 조롱했다.

월량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가 웃었다.

"법보를…. 회수할 기운이…. 없는 게 아니다, 이 괴물아."

[음?]

"전달한…. 거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자 그럼. 모두 고생했으니, 잘 가거라.]

총공격을 쏘아 보내, 한 차례 힘이 빠진 모든 수도자들을 향해.

원립은 핏빛 부채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

혈풍이 연합군을 뒤덮었다.

"버텨라…!"

"이제 시간이 됐다!"

"조금 있으면…."

청문중진과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피를 토하며 다시금 수호진법을 펼친다.

하지만 최초로 펼쳤던 진법과 달리, 이번에 펼친 진법은 기력이 상당히 소모된 채였고, 결국 진법 곳곳에 금이 가며 혈풍이 그 사이로 밀어닥쳤다.

"크아아아악!"

"가주님, 살려 주십시오!"

결단기 수도자들은 버텨 냈으나, 축기기 수도자들 중 상당수는 틈새로 새어 들어온 혈풍에 휩쓸리며 한 줌 핏물이 되었다.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끝없을 것 같던 혈풍도 곧이어 잦아들었다.

수호법진의 뒤쪽에서 버티던 만리민랍이, 다시금 섭명함의 주포를 들어 올렸다.

키이이잉!

죽은 축기기 수도자들의 원혼을 빨아들여, 섭명함의 주포는 더더욱 강력한 푸른 빛을 번뜩였다.

그러나 원립은 만리민랍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웃습군. 섭명함의 주포가 충전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미 파악했다. 원혼을 잔뜩 먹었어도 정작 발사되는 데엔 시간이 걸리지 않느냐.]

그가 천천히, 만리민랍에게 다가갔다.

[자아, 얌전히 섭명함의 잔해를 내놓으려무나.]

촤좌좌좍!

다시금 실지렁이 같은 저주문들이, 원립에게 날아와 그의 발을 묶었다.

원립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저주문을 날리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너 자신이 부끄럽지도 않더냐? 통하지도 않을 저주나….]

[시간이.]

그리고, 그림자는 원립의 말을 끊고 청문중진을 보며 말했다.

[시간이 되었다.]

"모두! 준비하라!"

청문중진이 고함을 쳤고, 연합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음?]

그리고, 몇몇 축기기 수도자들이 저주문으로 몸을 감싼 그림자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자의 주변 사방에 자리를 잡고, 결인을 맺자, 땅에서 제단이 솟아났다.

각각이 하늘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

원립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결단(結丹) 승급의 제단…?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거냐?]

하지만 원립은 이내 그것보다는,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끼이이이익….

봉명성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래, 됐다. 너희 버러지들을 더 상대해서 뭘 하겠느냐. 난 볼 일이 있으니, 이만 다 죽어라.]

원립의 몸에서, 혈광이 폭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무형의 검이 원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쿠과과광!

[…!]

원립은 흠칫 몸을 떨며 터트리려던 혈광을 무형의 그것을 향해 내쏘았다.

쿠구구구!

사방이 떨려온다.

[허, 이건 또 뭐야….]

원립의 시선이, 봉명성의 문을 향하였다.

활짝 열린 봉명성의 문 안쪽에서, 시커먼 저주문 덩어리가, 마치 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커먼 강의 중심에는 백의를 입고, 새카만 눈물을 흘리는 사내가 서 있었다.

[저주술사가 둘…?]

원립이 다른 한쪽에 서 있던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원립은 몸을 흠칫 떨었다.

슈우우우욱!

그림자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저주문들이, 그림자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림자의 전신이 드러났다.

그것은, 사람과 똑같은 크기의 유리 공예품이었다.

수천 개의 저주문을 넣어, 사람과 똑같이 움직이던 유리 인형(人形)!

정교하게 만들어진 유리 공예품은, 원립과 똑같은 형상으로 되어 있었다.

저주문을 흡입한 유리 공예품이 손을 들자, 그의 손에 갈색의 바퀴가 날아들었다.

―법보를…. 회수할 기운이…. 없는 게 아니다, 이 괴물아.

―전달한…. 거다.

원립과 똑같이 생긴 유리 인형은, 갈색의 바퀴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원립의 상반신에서 터져 나왔던 핏물과 살점들을 빨아들였다.

[저주인형(詛呪人形)!]

오싹!

원립은 망설이지 않고 파초선을 들어 올렸다.

'위험하다. 축기기 대원만급의 저주인형이 내 피를 머금고, 초일류의 저주술사가 저주를 내린다면….'

콰아앙!

하지만, 여지없이 무형의 궤적이 그에게 날아와 그의 행동을 방해하였다.

그리고, 봉명성에서 나온, 검은 눈물을 흘리는 저주술사.

서은현이 저주문의 강물 위에서 한 손을 치켜들었다.

"음혼귀주(陰魂鬼呪)."

시커먼 저주문들이 그의 주변에서 널뛴다.

"천린수해(千璘樹海)."

저주문의 강에서, 시커먼 저주문으로 이뤄진 검녹빛 숲이 일어났다.

"규토장성(珪土長城)."

검녹빛 숲의 사이사이로, 봉명성에 흐르던 영맥(靈脈)이 서은현의 의지에 따라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서은현의 주변으로 잔뜩 몰린 기운들은, 그의 단전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서은현의 전신에서 정순지력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규루위묘필자참(奎婁胃昴畢觜參).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이십팔수(二十八宿), 축기기(築氣期) 극성(極成)!

척, 척, 척, 척!

그리고, 서은현의 주변으로 네 명의 인영이 더 나타났다.

그들 역시 시커먼 저주문으로 몸을 감싼 그림자, 서은현의 저주인형이었다.

그리고, 저주인형들은 하나같이 축기기 대원만의 수행을 가지고 있었다.

"200년 전의 고통으로 진즉 결단기에 도달할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늘을 위해 결단을 참고, 계속해서 고통으로 늘어나는 법력을 저주인형 다섯에게 나눠 담았더니, 전부 축기기 대원만까지 올라가더군…."

뚝, 뚝….

서은현은 검은 눈물을 흘리며 봉명성에서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이….

저주문이 섞인 그의 검은 눈물이 떨어지는 곳의 땅이, 그대로 썩어 간다.

"이 고통을…. 돌려주러 왔다, 원립."

촤아아아악!

서은현의 옆에 도열했던 네 채의 축기기 저주인형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는 네 개의 제단으로 달려가, 사방을 점하고 그곳에 올라섰다.

[큭큭, 폼은 잔뜩 잡으면서 왔다만…. 지금 고작 결단기 승급 의식을 내 앞에서 위엄 잡으며 하는 것이냐?]

키이이잉!

원립이 손에 쥔 파초선이 빛나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다들 단체로 정신이 나가 버리기라도 한 건….]

"가라, 서은현!"

콰아악!

그리고, 부채를 부치려는 원립을 향해 월량이 피눈물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내가 잡고 있겠다! 놈을 죽여라!"

[쯧, 이 벌레 놈이….]

원립은 혀를 차며 그를 떨쳐 내려 했다.

하지만, 월량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촤아아아!

그의 피가 증발하며, 월량의 전신이 불타올랐다.

갈색빛으로 타오르던 귀화(鬼火)는 어느새 사막의 황금빛 모래와 같이 밝게 빛났다.

[내 생명을! 전부 태우더라도, 네놈을 죽인다!]

콰아악!

금단(金丹)을 불태우는 월량의 몸이 원립의 방어막을 깨고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콰드드득!

[이… 쓰레기가!]

[가라, 서은현! 이 시간은 벌겠다! 놈을 저주해라!]

타앗!

저주문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펼쳐진 제단의 안쪽에 들어간 서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뭣…!]

원립의 모습을 한 유리 저주인형이, 서은현의 앞에 얌전히 누웠다.

[이, 이놈이…!]

서은현은 검은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월량의 갈색 바퀴 법보를 쳐다보았다.

그가, 바퀴 법보를 들어 올린다.

유리 인형은 그가 가지고 있던 저물대를 서은현에게 건냈고, 서은현은 저물대를 받은 후 월량과 시선을 교환했다.

두 복수자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놈…!]

콰아앙!

서은현이 들어 올린 바퀴가, 원립의 피가 들어 있는, 축기기 대원만 수준의 저주인형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장창창!

유리로 된 저주인형은 산산이 박살이 나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축기기 대원만 수준의 저주인형 하나를 그대로 소모한 저주는, 그대로 원립에게 틀어박혔다.

[크웨에엑!]

원립의 칠공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여태껏 코웃음과 혀를 차던 소리만이 나오던 그의 입에서, 진심 어린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이… 망할 쓰레기 놈이…!]

원립이 진노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하나, 서은현은 원립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결단기로의 승급을, 시작한다."

척, 척, 척, 척!

그의 사방에 놓인 제단.

제단 위쪽에 올라간 네 기의 축기기 대원만 수준 저주인형.

저주인형들이 각기 결인을 맺었다.

연기기 7성에서 칠성제의를 거행해 칠수에게서 축복을 받아, 운명을 보는 눈을 개안한다.

그리고 축기기의 각 경지에서 연기기 때에 받은 축복의 도움을 받아 더욱더 빠르게 경지를 올릴 수 있다.

그리고, 결단기에 이르려면 축기기 대원만에 이른 수도자가, 28수에 해당하는 체내의 영기의 별에 각각에 맞는 제의를 다시 한번 지내야 했다.

각각의 영기의 별에 천기(天氣)를 깃들이는 것이었다.

그러한 제사 의식은 대다수의 수도자들이 겪는 의식이었지만.

세세한 제사 의식은 그들이 익히는 공법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서은현이 익힌 음혼귀주문의 공법은, 사방의 제단에 저주인형을 놓고, 저주인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저주함으로써 별에 천기를 깃들인다.

우우웅!

서은현의 제의가 시작되었다.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청존칠수께 인도(人道) 서은현이 제(祭)를 지내오니, 받아 주소사!]

동쪽에 있던 제단의 저주인형이, 저주문을 엮어 저주의 끈을 만든 후.

그 끈으로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

우드득!

동쪽 제단의 저주인형의 목이 꺾였고, 저주인형이 제단에 픽 쓰러졌다.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음존칠수께 인도(人道) 서은현이 제(祭)를 지내오니, 받아 주소사!]

북쪽 제단의 저주인형이, 저주문으로 흑색의 검을 만들어, 스스로의 목을 베었다.

북쪽 제단의 저주인형의 목이 제단 위를 굴렀고, 저주인형은 제단 위에 쓰러졌다.

[규루위묘필자참(奎婁胃昴畢觜參), 백존칠수께 인도(人道) 서은현이 제(祭)를 지내오니, 받아 주소사!]

서쪽 제단의 저주인형이, 저주문으로 흑색의 단검을 만들어, 스스로의 배를 갈랐다.

서쪽 제단의 저주인형의 배에서 시커먼 저주문들이 잔뜩 쏟아졌고, 저주인형은 제단 위에 쓰러졌다.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양존칠수께 인도(人道) 서은현이 제(祭)를 지내오니, 받아 주소사!]

남쪽 제단의 저주인형이, 저주문을 엮자, 저주문은 음화(陰火)가 되어 저주인형을 둘러쌌다.

남쪽 제단의 저주인형은 음화 속에서 불타다가 그대로 제단 위에 쓰러졌다.

사방의 제단 가운데에 있던, 서은현은 사방에서 몰아치는 저주문을 끌어모았다.

결단기 승급 의식에는 시운은 맞출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익힌 공법으로 천기를 끌어들여 이십팔수에 대응하는 영기의 별에 깃들이면 될 뿐.

파아아앗!

사방에서 몰려오는 시커먼 저주문이 그의 전신에 파고든다.

서은현은 검은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의 단전에 있는 스물여덟 별자리에, 천기가 깃들며 서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별자리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각항저방심미기는 동(東)을,

두우여허위실벽은 북(北)을,

규루위묘필자참은 서(西)를,

정귀유성장익진은 남(南)을 상징한다.

사방을 상징하는 영기의 별들이, 서은현의 단전에서 회전하며, 그의 단전 안에 [영역]을 만들기 시작했다.

천역(天域), 혹은 천구도(天球圖)라고도 불리는 것이 그의 단전에 새겨졌다.

그리고, 천구도가 새겨진 단전의 영역들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드득….

단전의 영역은 체내에 흐르는 정순지력을 끌어모아, 영역으로 가두었다.

정순지력이 더욱더 응축되고 응축되며, 단단하게 형(形)을 잡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

서은현의 육신으로, 사방의 천지영기가 마구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쿨럭, 쿨럭….]

원립은 칠공에서 피를 털어 냈다.

콰아앙!

그는 진원진기를 불태우며 그를 붙들던 월량을 멀리 던져 버린 후,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아직 축기기 대원만 수준의 저주인형을 희생시켜 맞은 저주를 전부 치유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미친놈 같으니…. 다들 우습고 우습구나. 아직 숨겨 놓은 걸 꺼낼 필요도 없겠어. 고작 결단기 하나 더 생겨난다고 전세에 무슨 변화가 생길 것 같으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그래. 결단기에 올라서 그 저주로 나와 동귀어진 하려느냐? 해 보거라! 원영기 수도자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냐! 그 수준에 이르러 저주를 걸어도, 나는 몇 놈만 잡아먹으면 금세 회복이 가능하다!]

원립이 하늘을 가리켰다.

[눈이 있다면 천기를 읽어 보아라! 네놈들이 이길 수 있을 성싶으냐! 너희에게 대흉(大凶)의 운명이 드리우지 않았더냐! 하늘도 알고 있는 것이다!]

원립의 영언이 사막 전체를 진동시켰다.

[오늘 승리하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하늘이 그것을 증언….]

그리고.

쿠릉, 쿠르릉….

티없이 맑던 사막의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콰아앙!

결단기로 승급하던 서은현이, 원립에게 날아들어 무형검으로 그의 방어막을 깨고 그의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그 좋은 하늘, 실컷 봐라."

쿠릉, 쿠르르릉….

삽시간에 나타난 먹장구름이, 하늘과 땅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천거(天拒) 현상.

종명자의 수명이 새로 새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늘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은현은 원립의 품속으로 들어가, 그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번뜩, 번뜩…!

먹장구름 안쪽.

푸른 빛살들이 꿈틀거렸다.

서은현이 축기에 이를 때보다 더욱더 거대한 빛살들이었다.

서은현이 새하얗게 웃었다.

"조금 짜릿할 거다."

하늘이, 천거자(天拒者)를 향해 청뢰(靑雷)를 떨어뜨렸다.

네가 밟아온 것 (11)

피이이이잇!

소리가 사라졌다.

오로지 하늘에서 강림한 푸른 기둥만이, 사막을 밝혔다.

거대한 청색의 빛줄기만이 사막의 빛으로 화하였고, 태양빛마저 그 앞에 빛을 잃었다.

만리민랍이 쏘았던 섭명함의 주포도,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일시에 퍼부었던 합동 공격도.

그 어떤 것도 저 빛에 비할 수 없었다.

한낱 인간의 조잡한 손으로 만들어 낸 법술과 기관의 빛이, 하늘이 직접 만들어 낸 순수한 빛에 비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연합군 모두가, 침을 삼키며 기둥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벽천기는 입술을 마구 쥐어뜯으며 손을 떨었다.

막리황천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숨을 들이쉬며 푸른 기둥을 노려보았다.

진루연천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헤 벌렸다.

막리황천이 청문중진에게 말했다.

"이, 이보시오, 청문 가주. 서 수사의 저주 작전까지는 들었지만… 이런 건 사전에 듣지 못했잖소."

"아… 이건 서 수사가 본인에게 찾아와 개별적으로 제안한 작전이었소."

청문중진이 말했다.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는 본인 또한 믿기지 않았소…. 승급 천겁(天怯)은 고작 결단기 승급에 내리는 게 아니라, 최소 원영기부터 내리치는 천기 현상이니…."

말 그대로였다.

본래 천겁이란, 고작 축기기 대원만 수도자가 결단기가 된다고 내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필멸자가 세계의 근원을 목도하기 시작하는, 원영(元靈)의 경지.

그때부터 하늘이 필멸자를 벌하는 것.

그것이 천겁이었다.

"천거(天拒) 현상이라니, 다들 누가 믿겠소?"

하지만, 꼭 그런 법칙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서를 뒤적여 보면, 고래적의 수도자들 중에는, 결단기 승급이 아닌, 고작해야 연기기에서 축기기로 승급할 때에 천뢰가 내리치는 이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연기기 7성부터 칠성제의가 막히는, 천거 현상이라는 괴악한 현상을 달고 다닌 이들이라 하였다.

약한 자임에도 하늘의 거절을 받는 이들.

그리고, 서은현은 그런 천거 현상을 지닌 천거자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나 역시 반신반의했던 일이었고, 서 수사가 간절하게 부탁하기에 받아 줬던 거요. 개별 작전으로 한 것은, 그런 허황된 전설을 연합군 전체의 작전으로 쓸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고."

막리황천은 굳은 표정으로 청뢰의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벽천기가 다가와 말했다.

"하하, 그래도, 작전의 최중요 요인 셋 중 하나인 제게는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갑작스러워 가슴이 떨리는군요."

"아, 벽 가주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외다."

청문중진은 순순히 사과를 했다.

진루연천이 그에게 다가왔다.

"역시나 오라버니세요, 이런 멋진 작전이라니.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내 작전이 아니오, 진루 가주. 서 수사의 작전이지. 그것보다 다들 왜 이쪽에 와서 잡담을 나누고 계시오? 다들 제 자리로 돌아가시오!"

"어머, 너무 그러지 마세요. 천겁이라니. 다들 저런… 무시무시한 천기 현상은 볼 일이 없었던지라, 당황해서 몰린 것일 뿐이에요."

진루연천은 손 끝으로 청문중진의 가슴을 살짝 쓸며 눈을 찡긋했다.

청문중진은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모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대열을 유지하시오! 노괴의 생명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나, 노괴가 만약 살아 있다면 다시 총공격을 가해서, 원영째로 증발시켜야 하오!"

그 말에, 연합군은 다시 태세를 갖추었다.

* * *

―――――!

소리가 사라진, 푸른빛의 세상.

그곳에는, 오직 두 존재만이 남아있었다.

나, 그리고 원립.

키이이이잉!

나는 원립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내 팔에 진득한 저주문을 잔뜩 띄워 올려, 저주문을 띄운 손을 원립의 몸체와 이어 붙였다.

녀석은 이를 갈면서도 내게서 떨어질 수 없었고, 놈은 붉은 방어막을 펼쳐 혼신의 힘을 다해 나와 천뢰를 같이 맞았다.

아니, 같이 맞았다란 말은 적합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원립이 전부 막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던 푸른빛의 세례는, 어느덧 끝나 버렸다.

치이이이―

청뢰가 지나갔고, 원립은 숨을 몰아쉬며 혈광을 뿜어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 쓰레기… 놈이…!]

그리고.

쿠릉, 쿠르릉!

하늘이, 다시금 진노하기 시작했다.

감히 타인(他人)의 도움을 받아 천뢰를 편법으로 넘기려 하느냐는 듯.

하늘은, 나에 대한 분노를 다시 푸른빛을 통하여 떨어뜨렸다.

푸른빛은 아까보다 더더욱 굵고 거대해져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원립과 나는 다시 한번 푸른 기둥 속에 갇혀 버렸다.

원립은 나를 노려볼 틈도 없이, 다시금 이를 악물고 방어막을 펼쳤다.

천뢰(天雷), 혹은 천겁(天劫), 천벌(天罰)이라고 불리는 이 천기 현상은, 전해지는 바로는 본디 원영기에 이를 때부터 내리치는 현상이라 하였다.

그리고 문헌의 기록으로 볼 때, 그러한 천겁은 천겁을 치르는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 하늘이 더더욱 진노하여 더더욱 강한 천뢰를 떨어뜨린다고 전해져 왔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든.

나는 원립의 도움을 받고 있는 모양새였다.

쿠구구구구구!

키이이잉!

원립의 법보인 네 개의 보탑이 우리를 둘러쌌다.

보탑이 적빛을 뿜어내며 우리를 감싼 결계를 이룬다.

하지만.

빠직, 빠지지직….

결계는 천겁 속에서 조금 버티는 듯하더니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원립이 이를 질끈 악무는 것이 보였다.

기이이잉!

적색의 보탑이 더더욱 적광을 뿜었다.

균열이 사라지는 듯했으나, 보탑은 무리하게 가동되는 것인지, 상태가 위험해 보였다.

그리고, 보탑의 상태가 한계에 달할 때 즈음.

키이잉!

파앗!

다시금 천겁이 그쳤다.

원립은,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죽…여…버….]

그리고, 하늘은 세 번째 천겁을 준비하였다.

번쩍!

놈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세 번째 일격이 우리에게 내리꽂혔다.

콰장창!

원립의 보탑 법보.

그 결계가 유릿장처럼 조각나 산산이 흩어졌고, 결국 보탑 법보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했는지 법보의 중간 부분에서 폭발이 일어나 버렸다.

콰과광!

펑, 퍼벙!

결국 원립의 방어를 담당했던 보탑 법보들은, 그렇게 영구히 빛을 잃고 천뢰 속에서 갈려 나가 버렸다.

기이이잉!

원립은 하늘을 향해 혈광을 폭사했다.

그리고 저물대에서 피 구름과 두 명의 귀왕을 꺼냈다.

열일곱 개의 뼈 단검을 금단에서 뽑아, 하늘을 향해 참격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혈광은 청광에 먹히고.

두 명의 귀왕은 천뢰 앞에 서자마자 혼비백산하며 도망쳐 버렸다.

단검 법보로 만든 참격은 얼마간 버티는 듯했으나 그대로 스러져 버렸다.

[그아아아아아아…!!!]

원립은 괴성을 지르며, 온 힘을 끌어모아 방어막을 펼쳤다.

원구형의 방어막이 우리를 둘러싼다.

원영 중기 수도자가 펼치는 핏빛의 방어막이 천뢰를 막아 낸다.

하지만.

피싯, 피시싯!

그의 방어막 역시 실금이 잔뜩 가기 시작하며, 천뢰가 안쪽으로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칭!

원립의 방어막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천뢰가 우리 둘을 향해 직격으로 내리꽂혔다.

원립과 나는 동시에 천겁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우리는 서로 끔찍한 고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몇 번 맞아 본 적이 있는 데다, 고통에 익숙한 나는 그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나는 그 상태에서 버티며 원립을 잡고 있는 손으로 금나수를 펼쳤다.

촤라락!!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원립의 몸을 제압하여, 그대로 내 위쪽으로 치켜들어 원립을 내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과연 원영기 수도자의 육신은 천뢰 역시 썩 잘 막아 냈다.

녀석의 육신 너머로도 간혹 천겁이 흘러들어 왔으나, 그 정도는 무형검으로 쳐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촤작, 촤자자작!

원립의 몸이, 천겁에 의해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구멍이 뚫린 곳으로 천겁이 새어 들어온다.

점차 원립의 몸에 구멍이 많이 뚫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무형검으로 천겁들을 쳐 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파아아아앗!

영원할 것 같았던 우레의 폭풍이, 드디어 끝났다.

그리고.

내가 원립을 들어서 천뢰를 막은 것이나, 무형검으로 천뢰를 튕겨 냈던 것 덕택인지.

하늘은 내가 천겁을 막아 냈다고 판단한 듯, 천뢰를 구름 속에서 흩뿌리며 으르렁거릴 뿐, 다음 천겁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먹장구름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지…금이오…!]

나는 영언을 터트리며 연합군에게 외쳤다.

피이이잉!

섭명함의 주포를 충전하고 있던 만리민랍이, 함포를 발사한다.

번쩍!

시퍼런 광선이 나와 원립을 향해 날아왔다.

나는 아직도 반쯤 정신을 잃은 원립을 광선에 가져다 대었고, 우리는 광선에 밀려, 그대로 봉명성의 안쪽으로 튕겨져 들어왔다.

'작전대로다…!'

나는 원립을 걷어차서 봉명성에 내던졌다.

쿠구구구구!

봉명성에 다시 들어오니, 익숙한 기운이 나를 반겼다.

"규토장성."

쿠구구구구!

봉명성의 영맥들이 내게 이끌려 오며, 자연스레 내 단전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결단기 승급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다.

키이이잉!

천겁을 이겨 내자, 완전히 천기가 깃든 28수의 별자리들이, 그 자리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

내 단전.

그곳에, 금단(金丹)이 맺혔다.

금단의 크기는 두 주먹을 합친 것보다 조금 컸고, 금단의 표면에는 28수의 별자리가 새겨져, 천구도(天球圖)를 그리고 있었다.

본래 단전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던,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내단(內丹)은 이젠 주먹 두 개 크기의 금단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은 마치 지구와 지구 주변을 둘러싼 천구(天球)를 표시한 천구의(天球儀)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금단에서 뿜어진 광령(光靈)이 일순간 봉명성 일대를 물들였고, 나는 광령 속에서 눈을 반개하였다.

쿵, 쿵, 쿵, 쿵!

봉명성 바깥에 머무르던 결단기 수도자들이, 하나둘 봉명성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싹 타서 숯덩이가 된 원립을 향해, 다시금 총공격을 가했다.

나는 그들이 시간을 벌어 주는 틈을 타, 아까 저주인형이 내게 건넸던 저물대를 꺼냈다.

저주인형과 나는 실시간으로 연동되어 있었다.

지네 굴에서, 나와 북향화가 구해 주었던 마을을 200년 동안 저주인형을 통해 지켜보았다.

다시 굴에서 나와 천색성으로 가, 다른 이들의 부장품으로 바쳤던 유리검들을 뽑아, 영력 회로를 새기고 무색유리검으로 제련한 것 역시 저주인형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주인형의 저물대를 통해, 비로소 전달받았다.

촤르르륵!

저물대를 열어, 어검술을 통해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을 꺼내 허공에 띄웠다.

화르륵!

연기기 14성.

무극영운의 단계에서부터, 축기기 수도자까지는 영운(靈雲)을 체내에서 뱉어 그것으로 법술을 부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금단(金丹)을 맺으며, 수도자들이 그동안 부려 왔던 영기의 구름은 질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화르르르….

영기의 구름이 더더욱 활발해지고, 뜨겁게 달아올라.

불꽃으로 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단기 수도자들은 그것을 금단에서 뿜어지는 불이라 하여, 단화(丹火)라고 불렀다.

나는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영기의 불을, 입을 통해 내뿜었다.

단화는 내 주변으로 뻗쳐 나가며, 그대로 삼천 벌의 무색유리검을 뒤덮었다.

무색유리검들에 각각이 새겨진, 하나하나의 영력 회로에 내 단화가 흐르며, 무색유리검의 주인을 확실히 나로 각인시킨다.

단화로 법기를 제련하는 과정을 통해, 법기는 결단기 수도자의 법보(法寶)로 거듭난다.

이렇게 법보화된 법기는, 결단기 수도자의 의지에 따라 수도자의 금단에 보관하여, 금단에서 타오르는 단화를 통해 세월이 흐를수록, 수도자의 수행이 증가할수록 함께 성장해 갔다.

세월이 흐르며 단전에서 단화로 배양될수록, 점차 단단해지고, 강해지며, 그 위력이 증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수도자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법보를 수도자의 본명법보(本名法寶)라고 불렀다.

'물론, 고작 방금 제련한 법보를 본명법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위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무색유리검은 특별한 재료를 쓴 게 아닌, 그저 사막의 모래를 퍼서 만든 법보였기에, 단화로 제련하는 데에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슈르륵….

나는 단화로 제련한 무색유리검 삼천 개를, 그대로 빨아들였다.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그대로 내 금단 안쪽에 안착하였다.

나는 눈을 감으며, 북향화가 설계해 준, 그녀의 흔적을 느꼈다.

'내게 힘을 주십시오.'

북향화뿐이 아닌.

무색유리검을 제련하는 데에 썼던, 천색성의 수많은 이웃들의 부장품.

나는 원립에게 학살당한, 내 인연들에게 작게 기도하였다.

쿠구구구구!

저 멀리서, 결단기 수도자들의 공격을 두들겨 맞으면서, 점차 혈광을 뿜기 시작하는 숯덩이가 보였다.

촤르르르!

봉명성 바깥.

흑색의 성에서, 진홍색의 광채가 마치 강처럼 넘실거리며 이곳을 향해 날아온다.

어설픈 핏빛이 아니었고, 원립이 모아 온 그 어떤 생명력보다 더더욱 진하고 강맹해 보였다.

촤르르륵!

기어코, 핏빛의 강은 숯덩이가 된 원립에게 내리꽂혔다.

쿠그그그극!

그리고, 원립의 몸이 재생되며,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 검은 가면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제대로 된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원립이 극대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인기에 오를 때 쓰려고, 수백 년 동안 각지에서 암약하며 성에 축적해 온 장원진력(長源眞力)을 소모하게 해…!!! 이 벌레 같은 놈들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쿨럭, 쿨럭!

하지만 완전히 몸이 재생됐음에도, 녀석은 여전히 피를 토해 냈다.

여전히 저주의 여파와, 천겁의 여파는 상당히 남아 있는 듯했다.

'천겁을 거의 맞지 않은 나만 해도 뇌기(雷氣)가 남아 체내에서 날뛰고 있는데, 천겁의 대부분을 저 몸으로 직접 맞은 저놈이 무사할 리가 없지.'

쿨럭, 쿨럭….

나 역시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겁으로 인해 확실히 나도 조금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휘익!

봉명성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저주인형은, 65개.

그 중 4개는 결단기 승급 의식에 썼고, 나머지 61개는 연기기 1, 2성 정도의 힘만이 깃든 저급 저주인형들이었다.

하지만.

"저주, 역전(逆轉)."

키이이잉!

내가 결인을 맺으며 음혼귀주문을 사용하자, 내 몸에 남아 있던 천겁의 부상과 약간의 뇌기들이, 60개의 저주인형들에게 그대로 분산되어 흩어져 버렸다.

저주인형은 상대를 저주하는 용도로도 사용이 가능했지만, 이런 식으로 미리 준비해 둔 저주인형에 내 부상을 모조리 떠넘기는 식의 사용도 가능했다.

파삭, 파삭, 파사삭….

물론, 체내에 남은 뇌기를 분산해서 받은 60개의 저주인형들은 모조리 뇌기를 견디지 못하고 바로 재가 되어 박살이 나 버렸지만.

'그래도 뇌기와 부상은 거의 다 떠넘겼다.'

나는 저물대에서 미리 지급받았던 선주들을 꺼내 마셨다.

육체의 재생력을 단기간 강화시키는 선주, 계령액.

법보를 다루는 능력이 단기간 향상되는 선주, 선염옥.

두 선주를 단숨에 마셨다.

쿠구구구!

저주인형들에게 분산시키고 남은 자잘한 부상과 뇌기가 그대로 재생력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선주를 마셨다고 해도 어마어마할 정도로 부상의 치유 속도가 빨랐다.

'이게, 결단기인가.'

결단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은 힘들겠지만, 50년에서 100년 정도만 수련하면 목이 잘려도 몇 달 요양하면 살아날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건해질 터였다.

[이… 놈들, 다 죽여 버리겠다…!]

입가에서 피를 토해 내면서도, 어마어마한 기세를 내뿜는 원립을 보며, 봉명성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문중진이 외친다.

"모두 작전대로!"

"폐문(閉門)!"

원립이 도망치거나, 더 이상 흑색의 성에 숨겨놓은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결단기 수도자들이 결인을 맺자, 봉명성의 문이 닫혀 갔다.

끼이이익, 쿵!

북쪽 대초원의 부족장들이 앞으로 나섰다.

척, 척, 척, 척!

네 명의 부족장이 원립의 주변, 사방을 점한다.

네 명의 부족장 뒤쪽으로, 각각 세 명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자리를 점했다.

세 명의 결단기 수도자들 뒤로, 일곱 명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자리를 잡는다.

북방 대초원의 비술.

"창경천라(蒼景天羅)의 진(陣), 개(開)!"

쿠구구구구!

진을 이룬 수도자들의 법력이 연결되었다.

청색의 빛이 원립을 가두었다.

진의 주축이 되는 이들은 하얀 구름이, 진의 중심에 있는 원립은 창명한 하늘의 중앙에 갇히게 되었다.

[이건….]

그리고, 원영 중기의 수행이었던 원립이, 원영 초기로 떨어졌다.

물론, 그 대가로 창경천라진을 펼친 북방 대초원의 부족장들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온 힘을 다해 그 자리에 붙박여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원립의 수행을 한 걸음 묶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한 기의 저주인형.

녀석이, 내 의지에 따라, 봉명성의 진법을 건드렸다.

키이이잉!

쿠구구구구구!

기이한 압력이 전원의 수행을 내리눌렀다.

결단기 수도자들의 수준이 축기기 수준으로, 원영기인 원립의 수준이 결단 초기 수준으로.

그렇게 내려간다.

나, 만리민랍, 벽천기가 창경천라진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만리민랍이 함포를 꺼내 원립을 겨눴고, 벽천기가 중얼거리며 품속에서 부적을 꺼내 주문을 외우며 부적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촤르르륵!

결단기 수행이 축기기 급까지 내려갔다지만, 금단의 고유 속성인 법보의 보관과 개방은 마음대로 하는 게 가능했다.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내 어검술에 의해 주변으로 떠올랐다.

우우웅!

그리고, 유리로 만들어진 연약한 비검들에, 무형검이 덧씌워졌다.

봉명성 진법의 유지 시간은, 200년 동안 진법사들이 달라붙어 연구한 결과.

반 각에서 반 시진까지 늘릴 수 있었다.

반 시진(半時辰: 60분) 안에, 결판이 나야만 할 것이었다.

나는 원립을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가, 네 무덤이다."

그리고, 우리의 결전(決戰)이 시작되었다.

네가 밟아온 것 (12)

선염옥의 선주로 인해, 처음 다루는 법보일지언정 어떻게 다루는지가 한 손에 잡혔다.

우우웅!

공방이 시작되었다.

무색유리검들이 움직인다.

콰앙, 콰앙, 콰앙!

무색유리검이 바닥으로 직격하며 주변의 땅을 마구 파헤쳐 놓는다.

비록 유리로 된 연약한 법보인지라, 그 강도는 형편없었으나.

무형검을 덧씌우자, 무형검과 똑같은 강도를 자랑하게 되었다.

[크윽…!]

원립은 무색유리검들을 피하며 나를 노려보고, 또다시 저 멀리서 섭명함의 주포에 기운을 모으는 중인 만리민랍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부적에 기운을 모으며 일격을 준비중인 벽천기 역시 쳐다보았다.

"…?"

나는 순간 의아해했으나, 정신을 집중해서 무색유리검들을 움직였다.

촤라라라락!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내 의지에 의해 움직였다.

유리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원립은 열일곱 자루의 단검 법보, 수정 해골 지팡이, 핏빛 파초선, 핏빛의 창 법보를 체내에서 꺼내 내게 대적하였다.

핏빛의 창에서 귀왕이 한 마리 튀어나와 창을 잡고 휘둘렀으며.

열일곱 자루의 단검 법보는 마치 의지가 있는 듯 그의 주변에서 참격을 흩뿌렸고, 그가 파초선으로 혈풍을 흩뿌릴 때마다 사방이 마구 흔들렸다.

하지만.

콰과과과과!

삼천여 자루에 달하는 유리의 폭풍은, 그 모든 것을 먹어치우며 원립에게 다가갔다.

쉴 새 없이 무작위로 몰아치고 있는 듯했으나, 단 한 자루의 유리검도 서로 충돌하지 않고 질서 있게 움직였다.

법보 무색유리검은 삼천 자루가 곧 한 벌인 법보였다.

삼천여 개가 곧 하나였기에, 삼천 자루를 무형검에 덧씌워서 조종하면 수많은 궤적과 궤도를 조작하는 무형검의 자유를 10할 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무색유리검, 제일형(形)."

무색유리검에는 총 세 개의 형(形)이 있었으며, 그 형태에 따라 능력이 달라졌다.

"색(色)."

무색유리검, 제일형, 색(色)은 삼천 개의 유리검에 새겨진 각각의 영력 회로를 연동(聯動)시키는 것이었다.

촤라라락!

삼천 개의 유리검이 산개한다.

그리고, 유리검들에 새겨진 영력 회로들이 각각 연동되기 시작했다.

재밌게도, 무색유리검의 영력 회로들은 각각 한 개씩이었지만, 북향화가 정한 규칙에 따라 영력 회로들의 위치는 각각이 미묘하게 달랐다.

때문에, 그 미묘한 차이로 각각의 유리검은 연동될 때 각기 다른 색채(色彩)를 내뿜는다.

파아아앗!

사방에 떠오른 무색유리검들이, 각각 저마다 다른 색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온 누리가 저마다 다른 색으로 덮인 듯했다.

단순히 색이 변한 것뿐이 아닌, 각각의 유리검들이 내뿜는 기질(氣質) 그 자체가 달라졌다.

삼천 자루가 각각이 다른 기질을 뿜어낸다.

그리고 그 기질들이 삼천 개의 유리 폭풍 속에서 변해 가는 변화 폭은.

무형검의 자유에 맞먹는, 무한(無恨)이었다.

한 기질도 다른 위치에 있으면 완전히 다른 용도가 된다.

한 자루의 유리검은 내 조작에 따라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며 몰아친다.

그렇게 끊임없이 변하는 유리검은, 삼천 자루였다.

[크윽, 이놈…!]

원립이 핏빛 파초선을 부치자 혈풍이 몰아닥치며 유리검들을 막아섰다.

하지만 나는 더욱더 정밀하게 유리검들을 조작하였다.

무한의 변화가 내 손 안에 있다.

무형검은 궤적의 자유만을 얻었을 뿐, 기질의 자유까지는 얻지 못했었다.

하지만, 무색유리검을 얻음으로써, 무형검은 더욱 더 완전한 자유의 영역에 도달하였다.

촤라라라락!

날카로운 기질, 부드러운 기질, 그 중간의 기질, 딱딱한 기질, 흘러내리는 기질….

그 셀 수 없이 많은 기운의 속성들이 전부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다채로운 색으로 사방을 물들인다.

그리고, 그 변화는 원립의 혈풍을 잡아먹으며 놈을 집어삼켜 갔다.

[흥, 웃기지 마라!]

원립은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단검 법보에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열일곱 개의 단검 법보는 미친 듯이 그의 주변을 회전하며, 시뻘건 참격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시뻘건 참격이 마치 그를 전부 뒤덮은 듯한 모양새.

하지만 나는 오히려 씨익 웃었다.

우습다.

슈릉!

수많은 변화들 사이에서, 내 시야가 정확한 틈새를 찾아낸다.

제아무리 참격들이 빈틈없이 놈을 둘러싼다고 할지라도, 파고들어 갈 틈은 충분하다.

다채로운 색의 유리검들이 놈을 향해 쇄도해 갔다.

쿠과과과광!

참격은 유리검들을 튕겨 내었다.

하지만.

[크으윽…!]

파앙!

어느새 참격이 풀리고, 안쪽의 원립이 드러났다.

놈의 몸에는 벌써 열댓 개에 달하는 유리검이 꽂혀 있었다.

유리검의 색(色)은 처음 발동할 때는 다채로운 색이 켜지지만, 그 이후에는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그냥 무색(無色)으로 되돌려도 유리검의 색을 띄웠을 때 만들어 낸 기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즉, 투명한 유리검을 날려 상대의 시야를 교란하고 검을 꽂아넣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나는 유리검에 깃든 무형검을 원립의 체내에 흘려 넣었다.

단악검법, 첩첩산중, 기산심천!

촤좌좌좍!

놈의 체내에 흘러들어간 무형검이, 가시처럼 뻗어나오며 거대하게 증폭되었다.

[크윽…!]

원립이 일순간 비명을 지르며, 다시 몸을 재생하려 했다.

하지만 놈의 체내에는 내가 유리검에 실어 보낸 저주문들이 잔뜩 섞여 들어갔고, 놈의 몸은 제대로 재생이 안 되며 썩어 들어갔다.

"죽어라."

촤르르륵!

삼천 개의 유리검이, 무방비 상태가 된 놈을 향해 다시금 몰아친다.

[크아아아아!]

그리고.

쿠구구구!

아까 천뢰 앞에서 도망쳤던 혈운의 귀왕 둘, 그리고 일곱 요혼이 합쳐진 괴이의 요혼.

세 명의 전력이, 원립의 주변으로 다시 날아와 그를 엄호하였다.

비록 봉명성의 진법 때문에 수행이 한 단계 낮아졌지만, 그들 역시 결단기 수준이었고, 놈들은 각각 전력을 다하며 유리의 폭풍을 막아섰다.

촤르르륵!

원립이 다시 그 순간에 몸을 재생하였다.

[그래, 꽤 훌륭하군.]

놈이 비릿하게 웃는다.

[이 정도로 나를 몰아붙인 네놈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 역시 조금 제대로 싸워 주마.]

그리고, 녀석이 저물대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꿈틀.

나는, 그것을 보자 절로 미간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뿌드득….

이마에서 혈관이 도드라지고, 이가 갈린다.

나는, 저 익숙한 기운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김영훈의 내단(內丹)이었다.

김영훈의 유해에서 찾지 못한 그의 내단은, 아니나 다를까.

놈이 가져간 것이었다.

[이 요단의 주인은 정말, 인상 깊던 녀석이었지. 왜 천인기 선배분들이 이 정도 성장 폭을 지닌 괴물을 안 데려갔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싸우는 도중에 실시간으로 성장하며, 죽기 직전에는… 나도 순간 심장이 철렁할 정도였다.]

기이이잉!

김영훈의 내단에는, 원립이 새겨 놓은 것인지 기이한 주술문이 새겨져 있었다.

주술문이 새빨간 빛을 내며, 기이한 인력을 뿜기 시작했다.

[그 재능의 원천을 알아보고자, 몸 곳곳을 잘라서 확인해 보았는데… 도저히 알 수가 없더군. 특이한 영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결국 인격의 문제인가 하고 혼백을 뽑아 제련해 보려 했지만, 결국 영혼은 찾을 수가 없어서 제련치 못했고.

아쉬운 마음에 놈의 요단을 뽑아 와 제련했다만… 썩 재밌는 걸 발견했다.]

꿈틀, 꿈틀….

괴이의 요혼.

혈운의 귀왕들.

세 마리의 요귀들이, 김영훈의 내단의 인력에 이끌리며, 내단을 중심으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조화력(調和力)! 이 요단은 완전히 다른 힘 역시 그 주변에서 섞이며 순환하게 할 수 있다. 압도적인 조화의 힘을 가지고 있어, 무슨 기운을 집어넣어도 조화가 되더군. 그래서….]

김영훈의 내단을 중심으로, 괴이와 귀왕이 합쳐져,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수라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원립이 결인을 맺자, 그의 창, 파초선, 수정 지팡이가 수라의 여섯 팔로 날아가 쥐어졌다.

쿠구구구구!

각각 원영 초기에서 결단 초기로 내려간 수행을 보이던 귀왕과 괴이의 요혼.

그것들은 서로 겹쳐지자, 힘이 폭증하며 결단 중기, 결단 후기까지 수행이 폭증하였다.

그리고.

푸콱, 푸콱, 푸콱!

열일곱 개의 단검 법보.

원립은 그 법보들 중 열여섯 개의 단검을 수라의 각 부위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단검.

원립은 단검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세 개 잘라, 수라의 입에 하나씩 넣어 주었다.

원립이 직접 자른 손가락은 재생이 되지 않았고, 수라는 손가락을 먹자 더더욱 수행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결단 대원만!

수라의 힘은, 원영기 직전까지 도달하였다.

[놈의 요단으로, 이런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다. 너 역시 놈의 친구에다, 생긴 건 다르지만 비슷한 괴이한 공법을 익혔으니. 너도 비슷한 요단이 있겠지? 그렇지? 네 요단도 뽑아 잘 써 주도록 하마…!]

원립은 수라의 뒤쪽에서 수라를 조작하며 외쳤다.

[덤벼라!]

"무색유리검, 제이형. 연(然)."

나는 놈을 보며 무색유리검, 두 번째 형태를 개방하였다.

무색유리검, 제이형, 연(然)은 아주 간단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무색유리검들이 서로 더더욱 강하게 연동되며, 서로의 기운이 완벽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삼천 자루의 유리검들은 연결된 상태에서 서로 기운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유리검들은 서로 기운을 순환하며, 내 무형검 역시 자연스레 순환하는 기운에 녹여 내어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서로 조금 더 잘 연동되고, 서로 연결되어 기운을 순환시키는 것.

그것이 무색유리검 두 번째 형태, 연이었다.

그리고, 연의 최대 장점은 역시 무형검 역시 순환하는 기운에 맞춰, 원하는 곳으로 순식간에 무형검을 순환시켜, 무형검의 힘을 집중시키거나 분산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무색유리검이 일렬로 늘어선다.

그리고, 유리검들에 깃든 무형검은 연의 순환에 의해 일렬로 늘어선 검의 끝에 기운을 집중하였다.

쩌어엉!

어검술에 의해 유리검은 그대로 수라에게 가서 박혔다.

수라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별 표정을 짓지 않고서 그대로 창을 잡고 휘두른다.

하지만 유리검들은 다시 바로 산개하며 자리를 잡았고, 다시금 내 조종에 의해 수라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놈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 시작했다.

수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수라는 한쪽에서는 핏빛 파초선을, 한쪽에서는 핏빛 창을, 한쪽에서는 수정 해골 지팡이를 휘두르며 갖은 법술들을 흩뿌려 댔다.

폭광이 울리며 사방팔방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나는 유리의 폭풍을 조종하며 수라를 압박해 갔다.

"무색유리검, 일, 이형. 합식(合式)."

그리고, 무색유리검의 진가(眞價)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일형, 색(色).

제이형, 연(然).

두 개의 형이 동시에 발동될 때.

무색유리검은 비로소 그 무시무시함이 드러났다.

무색유리검이 서로 연동되며, 영력 회로를 활성화시키고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무색유리검의 기운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무색유리검 각각에 깃든 서로 다른 기질들이, 순환하며 다른 유리검과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검은빛이었던 유리검의 빛이 백색으로 변한다.

각자 고유한 색을 가지고 있던 무색유리검들은, 서로의 색을 공유하며 끊임없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만색(萬色)이 춤추며 빛의 폭풍이 되어 수라를 휘감는다.

무형검의 무한한 궤적과, 무색유리검의 무한한 기질의 변화가 합쳐지며.

말 그대로 형언할 수 없는 변화의 폭을 선보였다.

핏빛의 수라는 폭풍 속에 갇힌 작은 부나방 같을 뿐이었다.

스팟, 스팟!

점차, 수라의 표면에 상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유리의 폭풍은 마구 몰아치는 것 같았으나, 하나하나가 검의 무리를 따르고 있었다.

피시시식!

수라의 몸에 생기는 상처는 점차 많아지며, 수라의 전신이 상처로 뒤덮인다.

단악검법.

이십이초.

오의.

삼천 개의 무색유리검이, 수라를 회전하며 하나의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단악(斷岳)!"

단악검법의 모든 초식을 쏟아붓는 오의가, 삼천 개의 무색유리검을 통해 한 존재에게 쏟아진다.

무색유리검이 단악을 쏟아붓고, 거기에 깃든 무형검이 단악에 깃든 변화의 폭을 다시 넓히며 놈을 사방에서 갈아 버리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앗!

빛이 터져 나가며 수라가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나는 달려가, 수라의 중심에 있던 김영훈의 내단을 낚아챈 다음, 무색유리검들을 조정했다.

"산개!"

촤르르륵!

유리검들이 사방으로 산개하며 길을 텄고, 길의 끝에 원립이 서 있었다.

"쏘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기운을 모으고 있던 만리민랍이 섭명함의 주포를 발사했다.

원립은 피하려 하는 듯했으나, 내가 결인을 맺었다.

촤라라락!

다른 이들의 정신이 팔린 사이, 내가 놈의 뒤쪽에 은근슬쩍 가져다 놓은 저주문 덩어리들.

저주문들은 마치 촉수처럼 놈의 몸을 뒤덮으며, 녀석이 도망치지 못하게 묶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축기기 수준으로 떨어진 무수한 결단기 수도자들.

그들이, 청문중진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각기 법술을 사용해 원립을 얽어매었다.

저주문뿐이 아닌 수십, 수백의 법술들이, 녀석의 몸을 꽁꽁 묶는다.

청문중진이 외쳤다.

"벽 가주, 지금이오! 당신도 쓰시오!"

벽천기 역시 법력을 불어넣던 부적을 원립을 향해 던졌다.

부적이 빛을 뿜으며 원립에게 날아간다.

그리고, 원립은 결단 초기 수준의 몸 상태로, 섭명함의 주포를 그대로 얻어맞았다.

번쩍!!!

섬광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우리는 모두 섬광의 중심을 쳐다보았다.

만리민랍 역시 이번에는 해치웠네 뭐네 같은 소리도 하지 않고, 중심을 향해 집중하였다.

그리고.

쉬이이이이….

섬광이 잦아들었다.

우리는 말 없이 원립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먼지가 잦아든다.

빛과 먼지가 잦아든 자리에 있는 것은, 아직도 서 있는 원립이었다.

하지만 장내에 있던 모든 수도자들의 얼굴에, 희색이 맴돌았다.

원립에게서, 더 이상 영기의 압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단 한 점의 영기도.

"드디어…."

청문중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끼이이이이익.

봉명성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음? 누구요? 작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봉명성의 문을 열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청문중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봉명성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봉명성의 입구를 열고 있는 자는, 동방의 군주 다섯 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의념의 색이, 이상하다.

그리고.

[훌륭하다.]

원립이, 양 팔을 들어올렸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너무나도 훌륭하다. 너희는 정말, 너무나도 훌륭하게 싸웠다. 너희의 결의에, 감동이 들 정도였으니. 이 일전(一戰)에 경의를 표하노라. 이 원립이, 혈목자 원립이 너희를 인정해 주마.]

봉명성의 문이 열리자, 결단기 수도자들은 무심코 성문 바깥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장구름은 사라져 있었고, 천기는 대흉(大凶)이었다.

"닫으시오! 봉명성의 문을 닫아!"

청문중진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문을 연 다섯 명의 군주들은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쿠르르릉!

북방 대초원의 부족장들이 모여 짠, 창경천라의 진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의 주축을 맡았던, 네 명의 부족장이 갑자기 영력의 연결을 끊고 팔짱을 끼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그들의 의념을 읽어 냈다.

지금까지는 원립과의 전투를 하느라 자세한 의념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저 치들의 의념이 다른 이들과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황금빛의, 기쁨의 의념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배신을 하는 건가!?"

청문중진이 대노한 표정으로 전신에서 푸른 빛을 끌어올렸다.

"대초원과 동방의 분들께서는 배신자들을 제압해 주시오! 서방 삼국은 서 수사와 함께 노괴를…."

그리고.

촤르르르륵!

검록빛의 강시들이,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검은 빛의 쇠사슬이 나와 청문중진을 비롯해, 성제, 연, 벽라국의 수도자들을 휘감았다.

진루연천이 쇠사슬에 묶인 청문중진에게 다가가, 고혹적인 목소리로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아, 오라버니. 결국 계획대로 되었어요. 혈목자께서 승리하셨네요."

막리황천은 강시들을 조종하며, 쇠사슬에 묶인 진씨세가 가주에게 다가가, 그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짓밟았다.

그리고, 벽천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원립의 옆으로 가서 섰다.

"벼, 벼, 벽 가주…!!!?"

청문중진은, 원립 사냥의 최중요 삼인 중 하나인 벽천기가 원립의 옆에 서는 것을 보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벽천기는 낄낄거리며 말했다.

"어떠십니까, 혈목자시여. 봉천부(封天附)의 효과가, 썩 쓸모가 있지 않으십니까?"

[좋군. 이게 천인기급의 방어력인가. 전신의 영기가 한 올도 새어 나가지 않는 것이, 썩 재밌는 기분이군.]

그랬다.

벽천기가 혈목자에게 마지막 순간 던진 것은, 천인기급의 일격을 내는 격천부가 아닌, 천인기급의 방어력을 가지게 해 주는 봉천부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촤르르르르!

봉명성 바깥.

원립의 흑색의 성에서, 아까와 같은 진홍빛의 강이 봉명성의 문으로 들어왔다.

촤르르르륵!

원립이 진홍빛의 강을 빨아먹자, 녀석의 법력이 다시 차오른다.

원립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내 아까운 장원지력을 이만큼이나 쓰게 하다니…. 수백 년간 모아온 정순한 생명의 힘이…. 뭐, 상관은 없겠지. 오늘만큼 결단기 수도자들의 생명력을 잔뜩 뽑을 기회도 많지 않을 터이니.]

"하하, 혈목자시여. 이제 봉명성의 진법이 풀리기까지 일각 정도 남았습니다."

벽천기는 아첨하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천인기급의 방어력과, 공격력을 저희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마.]

우득, 우드드득!

나는 무형검으로 검은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놈에게 무형검과 무색유리검을 쏟아 내었다.

콰과과과광!

하지만.

티잉, 티잉!

유리검들과 무형검은, 원립을 뒤덮은, 영기가 한 올도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기이한 기운에 막혀 전부 튕겨 나가 버렸다.

원립은 클클 웃으며 말했다.

[네놈 역시, 잊지 않고 기억해 주마. 정말 전의가 끊이지 않는 녀석이군. 하지만 소용없다. 봉천부를 발동한 이상, 원영기의 실력이 돌아오기까지 충분히 천인기의 방어력을 사용이 가능하지. 그리고….]

그가 벽천기에게 말했다.

[격천부(擊天附)를 내놓아라. 오늘 이곳에서, 천인기의 힘을 재현해 보이마.]

"예, 혈목자시여."

나는 이를 악물었다.

뿌드드득!

너무 세게 악물어서, 잇몸에서 피가 날 것 같다.

―답천사막 서쪽의 세 수도가문이 내게 충성을 맹세했고, 북쪽 초원의 네 부족이 내 앞에 조아렸으며, 동쪽 국가의 다섯 군주들이 나를 따르겠노라 천명하였다.

지난 생의 원립이 말했던 것.

전쟁 이후, 원립이 녀석들에게 오행혈주번을 박아 넣어 복종시킨 줄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원립은, 전쟁 이전에.

200년보다도 전에, 답천사막 서쪽의 세 수도가문.

북쪽의 네 부족.

동쪽의 다섯 군주.

이들을, 진즉에 수하로 두고 있던 것이었다.

진루연천은, 갑작스러운 배신으로 인해, 진루세가의 비전법기에 꽁꽁 묶인 청문중진의 몸을 쓰다듬었다.

"아아, 오라버니. 드디어 이날이 왔어요. 제가 오라버니를 차지할 날이 왔어요. 너무나도 기다려 왔답니다. 대청문세가, 창호자의 혈통을 손에 넣을 수 있어. 드디어, 두 가문이 진정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벽라국은 벽씨세가에게 넘겨주고, 성제국으로 가문을 옮겨요. 나머지 육가의 떨거지들은 혈목자께서 잡수실 것이니, 육가의 땅을 전부 오라버니에게 드릴게요.

지금껏 진루세가가 저 떨거지들 연합과 경쟁을 하며,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아시지요? 오라버니. 이제 성제국은 우리 것이에요. 함께 성제국의 자원을 독식하고, 함께 쌍수하여 원영기에 이르러요."

청문중진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진루연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내 가족을 죽인 원수의 밑에 기어들어 갔구나. 진루연천!"

"음, 음…."

진루연첨은 자신의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 빨고는 청문중진을 껴안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해 드릴게요. 몇 달 정도만 저희 가문 지하에서 생활하시면, 저밖에 생각이 나지 않으실 거랍니다."

"이…."

진루연천이 청문중진을 껴안았고, 막리황천은 진여운의 머리를 짓밟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진씨세가와의 기나긴 경쟁에서, 드디어 내 대에 승리하였다."

막리황천은 진여운의 머리를 잘근잘근 짓밟으며 기쁨에 찬 표정을 지었다.

"선조들이시여, 이 막리황천이, 제 대에 진씨세가를 고꾸라뜨렸습니다. 연국을 다시 찬탈하고, 막리세가의 최전성기를 이 막리황천이 이끌겠습니다…!"

"이, 놈…! 커, 커억…!"

진여운은 이를 갈며 막리황천을 올려다보았으나, 막리황천은 오히려 진여운의 입에 신발을 집어넣으며 조롱했다.

"이제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데에 익숙해져야 할 거다."

"으, 으읍…!"

그 밖에도 벽천기는 혈목자에게 붙어, 벽라국의 통치를 맡아 그에게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둥 아첨을 떨고 있었고.

동방의 배신자들.

북방의 배신자들 역시, 진루세가의 쇠사슬에 제압된 다른 자신의 경쟁자들을 마구 짓밟는 것이 보였다.

"이, 놈…!"

함께 싸웠던 만리민랍은, 다른 동방의 군주 중 한 명에게 섭명함의 주포를 빼앗겼다.

만리민랍과 정반대로 전신을 흑색의 붕대로 가린 군주는 섭명함의 주포를 가져다 원립에게 들어 바쳤다.

[논공행상은 추후에 하고, 빨리 격천부를 가져오지. 이 녀석들을 쓸어버리고, 봉명성의 전층을 붕괴시켜 봉명인을 얻어야 하니….]

원립이 벽천기를 재촉하자, 벽천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벽씨세가의 결단기 수도자들을 향해 외쳤다.

"격천부를 가져오너라!"

격천부는, 벽씨세가의 결단기 수도자들 중.

이번에 결단기에 오른 수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벽문성 역시 있었다.

나는 그들이 격천부를 전달하지 못하게 무형검을 날리려 했으나,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격천부가 봉해져 있던 함을 열어젖힌 벽문성이, 그 안에 든 격천부를 꺼내 들었다.

우우웅!

그가, 격천부를 활성화시킨다.

"음?"

[뭘 하는 거냐. 활성화시킬 필요 없다. 축기 급으로 떨어진 너희들이 얼마나….]

그리고.

벽문성이 외쳤다.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가주님!"

그 말과 함께.

벽문성을 중심으로, 벽씨세가의 젊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방진을 짰다.

"1000년 전에는 조씨세가의 하위 가문으로, 200년 전에는 정도선파 연합의 하부 세력으로, 지금에 와서는 원영기 노괴의 하부 세력으로 들어가자는 것입니까? 그냥, 청문세가와 공묘세가와 벽라국을 나눠 먹을지언정, 벽씨세가 그 자체로 존립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무, 뭣?"

[흐음….]

그가 외쳤다.

"보십시오, 가주님! 가주님이 배신만 하지 않으셨으면, 방금 그 원영기 노괴는 죽어 나자빠졌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가문으로, 누구의 밑에 들어가지 않고, 한 세력으로 당당하게 명예와 승리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이, 이놈이 미쳤느냐?"

"아니오, 미치지 않았습니다. 저뿐이 아닌 다른 자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노괴가 사냥이 끝난 후에, 사냥개를 삶아 먹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대체 어디에 있다고 가주님은 노괴의 승리에 손을 들어 주시는 겁니까!"

벽천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벽문성이 외쳤다.

"우리는, 가문의 미래를 위해,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습니다. 노괴가 죽기 직전까지 작전이 진행됐습니다. 저 빌어먹을 봉천부의 방어만 없으면 다시 노괴를 사냥할 수 있습니다! 가주님이야말로 정신 차리십시오!"

"이, 이놈! 안 된다! 정신 차려라! 지금이라면 네 일탈로 넘어갈 수 있어! 혈목자께서 숨기고 있는 힘은 이게 끝이 아니란 말이다!"

벽천기가 말했다.

"그, 그래. 최근 진가, 공묘가의 선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다니지 않았느냐? 두 가문은 이제 패배자의 가문이니, 네가 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진정하고…."

"제가 좋아한 이는."

벽문성이,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격천부를 발동시켰다.

"그들이 아닙니다."

파아아아앗!

격천부.

천인기의 일격을 발한다는 일격이, 봉천부를 두른 원립에게 쏘아졌다.

쿠과과과광!

봉명성의 한쪽 면이 뜯겨 나간다.

광풍이 몰아치며, 원립을 향해 천지간의 빛이 몰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천지간의 빛 속에서, 원립이 두른 봉천부가 벗겨지는 것을 보았다.

타닷!

무색유리검이 한데 모인다.

나는 벽문성을 스쳐 지나가며 그와 시선을 교환하였다.

이번 일격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무색유리검, 최종형(最終形)."

무색유리검의 마지막 형태.

연과 색을 넘어.

마침내 도달하는 마지막.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이, 한 자루로 합쳐졌다.

그리고, 각각 한 자루에 새겨진 영력 회로들이, 한 자루에 겹쳐지며, 무색유리검의 안쪽에는 무수한 영력 회로가 생겨났다.

회로가 많을수록, 질이 나쁜 재료를 사용해도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

무색유리검.

제삼형.

"총천(總天)."

무색유리검이, 총천연색(總天然色)으로 빛나며 원립의 단전을 찔러 들었다.

네가 밟아온 것 (13)

수많은 빛깔이 한데 모여 원립을 찔러 들어갔다.

촤라락!

원립의 양팔이 일순간 핏빛 귀수로 변한다.

핏빛의 귀수가, 내 무색유리검을 잡고 막았다.

콰드드득!

"끝이다."

쿠구구구구!

원립은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져 아래쪽.

봉명성의 바닥에 처박혔다.

놈의 뒤쪽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쩌적거리며 일어났다.

"죽어라!"

나는 그렇게, 무색유리검과 무형검의 힘을 총동원하여 녀석을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그렇게, 놈의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쿠극, 쿠그그극!

'이건….'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축기기 수준으로 막혀 있던 전신의 힘이, 결단기 수준으로 돌아온다.

주변에 갇혀 있던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제힘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말은.

'봉명성의 진법이…!'

쿠그그그극!

원립이, 다시금 원영기 노괴의 힘을 뿜어내며, 무색유리검을 잡은 손으로, 내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어째서…!? 아직 시간이 안 되었을 텐데…!?'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리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째서?

콰아앙!

그리고.

결국, 기어코 무색유리검은 튕겨 나가 버렸다.

원립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쿠구구구!

[후우….]

놈이 숨을 몰아쉬었다.

[인정하지. 몇백 년 만에, 생사를 오고 가는 전투를 해 보았다. 방금 것은 정말 아찔한 손해를 입을 뻔했구나.]

그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뭔가 결인을 맺는 벽씨세가의 가주, 벽천기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조, 조씨세가의 유적에서 발견한 비술을 사용해, 아슬아슬하게 진법을 더 빨리 해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네 공이 크다. 하지만… 네 가문의 아이가 지은 죄 또한 크지.]

"부, 부디 자비를…."

따악!

그리고, 원립이 손가락을 튕기자.

벽씨세가 가주를 비롯한 다른 배신자들이 모두 자리에 주저앉아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으아아악!"

[주인이 위기에 빠져도 벽가 놈 말고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놈들뿐이라니…. 하나같이 쓸모가 없군. 벽가 녀석조차도 제 똥을 제가 치운 것이니 사실 거기서 거기지.]

기이이잉!

나는 배신자들의 상단전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눈을 찌푸렸다.

오행혈주번의 기운이었다.

'200년 전부터 박아 놓았어서, 저항할 수 없었던 건가.'

따악!

원립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비명은 잦아들었다.

[됐다. 어쨌든 논공행상은 말했듯이 추후에 할 것이고. 지금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지.]

녀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놈들…. 이 녀석들부터 처리를 해 볼까.]

나는 녀석을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웃기는군. 네 몸 상태부터 보고 말하는 게 어떠한가?"

원립은 분명 원영기의 힘을 회복했다지만, 그 기세는 아까와 같지 않았다.

나와 싸우며, 상당히 힘을 소모한 모양새.

원영 중기의 힘을 제대로 보여 주었던 아까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었다.

녀석의 방어 법보는 천뢰에.

동급 경지의 괴이의 요혼과 혈운 귀왕들은 봉명성에서.

남은 것은 녀석의 본명 법보일 열일곱 개의 단검, 핏빛 파초선, 핏빛 창, 붉은 수정 해골 지팡이.

놈의 전력은,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쿠그그그극!

또한, 아까까지 축기급으로 수행이 떨어졌던지라, 진루세가의 법보에 속박당했던 다른 수도자들 역시 검은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배신자의 세력은 많았지만, 우리 쪽이 수로만 따진다면 훨씬 많았다.

거기다가, 아직까지 저주의 여파와 천뢰의 여파를 극복하지도 못한 게 눈에 보인다.

"네가 진정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서슬퍼런 질문에, 원립은 잠시 듣고만 있다 웃기 시작했다.

[후후, 훌륭한 전의군. 꺾어도 꺾어도 꺾이지 않아…. 거기다가 결단기에 오를 때 천겁을 겪고, 봉명성 진법 안에서도 결단기급 전력을 내는 놈….]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너, 내 혈노가 되지 않겠느냐? 말이 혈노지, 제자처럼 대해 주겠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자세를 잡았다.

[쯧, 어리석군.]

그가 양팔을 벌렸다.

나는 검을 잡고 기운을 끌어모았다.

파아앙!

말은 필요 없다.

놈에게 돌진해, 그대로 무형검을 때려 박았다.

하지만 어느새 녀석의 손에는 핏빛 파초선이 들려 있었다.

[울어라, 호풍혈파(呼風血芭).]

콰아아아아!

혈풍이 불어닥치며 나를 밀쳐 내었다.

저 혈풍에 닿자마자,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콰아아앙!

결국 나는 그에 견디지 못하고, 뒤쪽으로 밀려나 날아가 버렸다.

이렇든 저렇든.

놈은 원영기의 힘을 찾았다.

하지만 나는 딱히 절망하지 않았다.

'이길 수, 있다!'

놈의 힘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약해져 있었다.

고작 저 정도의 힘이라면, 어떻게든 떨칠 수 있다!

"모두! 저 노괴는 분명 처음보다 확연히 약해졌소! 함을 합치면 분명 이길 수 있소!!"

콰창, 콰장창!

청문중진을 비롯해서, 결단기의 수행이 전부 되돌아온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 오라버니…!"

"진루연천!!!!! 네가 감히!!!"

"아, 안 돼요!"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벽천기는 원립을 구하기 위해 봉명성의 진법을 풀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다시금 우리 편의 연합군이 힘을 찾은 것이었다.

나는 전음부를 꺼내 들어 대기하고 있는 송진과 서란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제 거의 다 되었소. 오시면 될 게요."

위이이잉!

전투가 시작 전, 몇 년 전에 송진이 봉명성에 들러 내게 붙여 준 귀신 한 마리가 내 품 안쪽에서 깨어나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조그만 귀신은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며, 전장을 두 명에게 전송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에게도 연락을 넣었다, 이제 남은 것은….'

놈을 밀어붙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그때였다.

[힘을 모아라, 호풍혈파.]

기이이잉!

원립이, 자신의 핏빛 파초선을 허공으로 띄웠다.

놈의 본명법보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 안 돼요! 오라버니, 잠시 놓아주세요! 제발!"

진루연천을 비롯해, 배신자들 몇몇이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원립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처음 제안대로, 너희가 완벽하게 놈들을 제압하지 아니했으니. 약속대로 녀석들을 살려 두지 않아도 되겠지…?]

진루연천을 비롯해, 몇몇 배신자들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혈목자시여! 제발 자비를 바랍니다! 부디 청문세가를 학살하지 말아 주십시오!"

"혈목자시여!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디 이들 부족은 부디…!"

[본래 약조가 이렇지 않았더냐. 너희가 사전에 제대로 제압을 잘 했다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늦었다.]

그리고.

파아아앗!

녀석의 흑색의 성 방향에서, 뭔가 붉은 것이 날아왔다.

오싹, 오싹!

분명 이성은 지금 당장 원립에게 달려가, 놈의 목을 날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직감이 그것을 말리고 있었다.

죽는다.

지금 나서면, 개죽음당할 것이다.

콰아앙!

흑색의 성에서 날아온 그것은, 원립의 바로 옆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원립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리는 미인이었다.

그인지 그녀인지 헷갈리는 그것은, 흑단처럼 새카만 검은 머리칼에, 시체처럼 창백한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체형을 보며 흠칫 떨었다.

'저건….'

지난 생의 막바지.

그때의 원립은, 지금의 원립처럼 백발이지도, 쪼글쪼글한 피부와 작은 체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분명, 그때의 원립은.

[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너희는 잘 싸웠다. 꼭꼭 숨겨두었던 혈체(血體)를 꺼내게 만들다니.]

쿠구구구구!

놈이 말한, '혈체'라는 젊은 원립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찌릿, 찌릿….

'미친….'

저 녀석 역시, 원영 초기 최고봉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우우웅!

원립의 본체.

본체의 백회에서, 자그마한 아기가 빠져나왔다.

지난번 보았던, 수많은 손과 눈, 입이 전신에 돋아난 기괴한 아기.

원영(元靈)의 본체!

그 아기는 사이한 웃음소리를 지으며,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원립의 혈체라는 것의 백회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아아아아―

원립의 혈체에, 원립의 본체와 같은 새카만 어둠.

반투명한 가면, 시커먼 안개 같은 것이 그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그제야 원립은 내가 지난 생에 봤던 원립과 똑같은 형태로 돌아왔다.

[후우, 좋군.]

콰득!

새 육신을 얻은 놈이, 이전의 늙은 육신이었던 자신의 머리통을 잡았다.

그리고.

촤르르르륵!

놈은 자신의 옛 육신.

늙은 육신을 그대로 빨아먹었다.

놈의 늙은 육신은 그대로 한 줌 피 안개가 되어 놈의 손으로 빨려들어 갔다.

쿠구구구구!

원영 초기 최고봉이었던 그의 수행이, 다시금 원영 중기 최고봉으로 치솟았다.

[놀랐느냐? 내 혈체라는 것으로. 천인기 선배분들이 비승한 후, 천 년은 더 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육신이다. 200년 동안 순수한 장원진력으로 수명을 늘려 놓은 것은 물론이며… 혈마진해광은 물론이고, 혈쇄수림결 등 내 본명공법까지 전부 극성으로 익히게 해 놓았지. 더불어….]

그가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허공에 띄워놓은 법보에 손을 뻗었다.

[해룡왕에게서 훔쳐 낸 공법까지 200년 동안 새로이 익히게 해 놓았노라. 200년 새에 새로 제련한 법보와, 해룡왕의 공법이 어떤 힘을 끌어내는지 똑똑히 보아라…!!]

쿠구구구구!

원립을 중심으로, 피바람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가 힘을 모으던 파초선을 잡고, 그대로 휘둘렀다.

쿠과과과과!

원립의 영언이 봉명성 전체를 울렸다.

[호풍진혈변(呼風眞血變)의 힘을 보여 주마!]

쿠구구구!

핏빛의 용오름이 봉명성 1층을 뒤덮었다.

나는 갑작스레 날아온 피바람에, 이를 악물며 무형검으로 바람결을 자르며 버텼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쉽사리 버티지 못했는지,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바람에 쓸려 나갔다.

쿠과과과과!

봉명성 1층의 전역에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원립의 일격에, 핏빛 용오름이 사방을 휩쓸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격을 버텨 냈고, 얼마나 지났을까.

휘오오오오―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장내에 남은 것은, 가주급들, 혹은 결단기 원로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이들 몇몇뿐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문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원립의 피바람이 몰아닥친 곳에는, 피 구름이 일어 오르기 시작했다.

피 구름은 원립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역시, 최고군. 호풍진혈변과 혈마진해광의 상성은….]

우득, 우드득!

원립의 이마에는, 핏빛의 사슴뿔 같은 것이, 작게 돋아나 있었다.

뿌드득….

어딘가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문중진이, 반으로 갈라져 죽은 진루연천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었다.

"왜… 같은 편까지 다 이리 잔혹하게 죽인 거냐…?"

[진심으로 내게 충절을 지키는 녀석과, 다른 목적이 있어 나를 섬긴 놈들을 구별한 것뿐이다.]

그가 말했다.

[감히 무례하게, 패배자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놈들만 골라 죽였을 뿐이노라. 패배자를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주군인 나의 선택일진대, 건방진 것들 같으니.]

녀석이 우리를 보며 비웃었다.

[그래, 여자 뒤에 숨어서 지킴 받으니 기분이 좋았나 보구나.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기는.

이 세상에, 같은 편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키이이잉!

녀석의 품에서, 익숙한 진법 깃발들이 보였다.

붉은 진법 깃발들이, 봉명성 전역으로 날아가 진을 펼친다.

번쩍!

그리고.

봉명성 1층이 무너지고, 2층과 1층이 통합되었다.

그가 말을 잇는다.

[오직 잔혹하고 비정해져야만 살아남는 것이 수도자의 세계가 아니겠느냐? 해룡왕이 동족을 죽인 나를 앞에 두고, 자신의 삼 초를 받으면 살려 주겠다 했을 때. 나는 그를 속으로 비웃었다. 어리석은 이 같으니, 적에게도 그리 자비를 베푸는 게 무슨 물러터진 마음가짐이란 말인가!]

쿠구구구!

놈의 진법은, 이전과 같이 허공으로 계속 뻗어 나가며, 봉명성의 층층들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놈에게 접근하려 해 보았지만, 놈이 두른 강대한 혈풍이, 너무 뚫기 힘들었다.

원립의 주변에서, 다시금 더더욱 강한 혈풍이 몰아닥쳤다.

[나는 놈의 삼 초를 받아내고, 해룡왕에게 실낱같은 상처를 입혀, 그의 진원진혈 한 방울을 훔쳐 냈을 뿐이 아니라, 그가 가진 해룡족의 공법서인 호풍진혈변까지 훔쳐 내는 데에 성공했다! 해룡왕의 자비를 이용하고, 강한 자의 동정을 이용하고, 약자들의 경외와 공포를 이용하고, 어리석은 이들의 피와 생명을 이용해 여기까지 올라왔다!]

쿠그그그극!

원립의 의식 영역이 압축되며, 마치 해룡족 같은 형상을 띄었다.

동시에 그에게서, 더더욱 해룡족 같은 기운이 풍겨왔다.

콰과광!

어느덧, 봉명성의 층은 거의 다 무너져 내려, 이젠 7층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용하고 훔치고 빼앗은 것들로 이 혈체를 제련하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빼앗고 빼앗고 빼앗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가 아니냐! 같은 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더 많이 빼앗아 복종시키는 자와, 덜 빼앗아서 복종되는 자밖에 없다!]

놈이 광소를 지으며, 다시금 파초선을 치켜들었다.

촤자자작!

놈의 진법 깃발들이, 봉명성 마지막 층.

7층의 천장에 꽂혔다.

저것만 무너지면, 봉명인이 나타날 터.

[죽어라, 어리석은 것들!]

그리고.

기이이잉!

봉명성 바깥.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귀무(鬼霧)가 서리기 시작한다.

전음부를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군. 섭명함의 전송 기능을 준비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란이와 얘기해 본 바, 내가 가는 것보다 녀석을 보내기로 했다.]

쿠구구구구!

귀무의 안쪽에서, 창백한 손이 뻗어 나왔다.

음산한 귀기가 허공에서 흘러나온다.

[녀석이 전황을 보더니, 자기가 정리할 수 있겠다고 하더군. 란이를 잘 지켜다오.]

그 말을 끝으로 송진은 전음부를 껐다.

푸확!

직후.

귀무에서, 익숙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반인반룡.

이제는 해룡족의 푸른 장포가 아닌, 흑색귀골곡 특유의 흑색 마의를 입은 모습.

그리고, 200년 새에 결단 중기에 오른 서란이, 이쪽을 쳐다보며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오랜만입니다, 서 선배님. 그리고 고명은 자자하게 들어왔습니다, 원립 선배님."

원립이 파초선을 내리치려다 말고, 서란을 보며 두 눈에서 혈광을 뿜었다.

[호오… 너는…!]

"해룡족의 혼혈이자, 대청색귀골곡의 문하제자, 서란이라 하옵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원립이 광소를 터트린다.

[호풍진혈변으로 제련한 해룡왕의 피가 말하는구나. 네놈, 왕손(王孫)이 아니더냐?]

"부끄럽지만, 왕의 후손이긴 하지요."

[그래, 좋구나. 너 말이다. 혹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원립이, 입맛을 다시며 서란을 쳐다보았다.

서란은 잠시 그의 시선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원 선배께서 착각하시는 게 크게 세 가지 있어.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호오, 읊어 보거라.]

"첫째, 저는 이미 스승이 있는 몸으로 선배의 제자가 될 수 없는 몸입니다."

서란이 손가락을 하나씩 피며 설명을 이었다.

"둘째, 저는 당신처럼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이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서은현 선배를 도와 당신을 죽이러 온 것입니다."

원립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 핏빛 파초선을 서란을 향해 들었다.

"셋째."

그리고, 서란이 비웃음을 흘리며 세 번째 손가락을 올렸다.

"당신이 왕에게서 훔쳤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공법의 진짜 이름은, 호풍진혈변이 아닙니다."

까딱!

서란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세 개의 손가락을 동시에 굽혔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원립은 파초선을 들려던 자세에서, 그대로 서란을 향해 무릎을 꿇어 버렸다.

[…? 뭣…?]

"호풍혈단변(呼風血團變)이 그것의 진짜 이름이지요. 당신은 왕에게서 그것을 훔쳐 내고, 왕의 자비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서란이 귀기를 끌어올렸다.

원립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 왕께서 일부러 그것을 당신에게 아닌 척 넘겼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군요. 제 스스로도 자신이 왕의 꼭두각시였다는 걸 모르다니, 딱할 지경입니다. 원립 선배님."

[이, 이게… 무슨…?]

그랬다.

원립은 제 스스로가 서휼의 호의를 이용한 것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으나.

그는 저도 모르게 서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해룡 놈! 혈목자께 무슨 짓이냐!"

막리세가의 가주 막리황천과 막리세가의 일원들이 원립에게 달려 나갔다.

진루연천처럼, 원립의 갑작스러운 처형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하지만.

서란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입 닥쳐라, 이 가축 놈들. 네놈들이 감히 내게 말을 걸 격이 된다 믿느냐? 해룡족이 비승하지 않았으면 해룡족의 눈을 피하느라 땅 밑에서 시체나 파먹었을 것들이…. 입을 닥치고, 진정한 주인의 명에 따라 원립의 다른 노예들을 막아라."

"으, 으읍…!"

서란의 명에, 막리황천과 막리세가인들은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된 상태로 다른 배신자들을 막아섰다.

서란의 눈길은, 어느새 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동방의 군주와 그의 수하들에게도 닿았다.

"막리세가가 도망친 가축들이 전부 모인 곳인 줄 알았는데. 다른 놈들도 있었군. 네놈들은 어딜 가느냐? 썩 이곳에 와서 왕손 서란의 말을 받들라!"

"끄으으으읍!"

아까 전, 만리민랍에게서 섭명함의 주포를 빼앗아 원립에게 가져다준 흑색 붕대의 군주가, 서란의 말에 그대로 땅에 떨어져 기어 다녔다.

[으… 오오오오오오오!!!]

우득, 우드득… 우득!

그리고.

서란의 명에 억눌려 있던 원립이, 원영기의 수행을 뿜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원…영…기… 수사를…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녀석은, 서란의 명에 저항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여전히 기운은 강대했으나, 그 강대한 기운의 절반 이상을 서란에게 저항하는 데에 쓰는 듯했다.

"놈이, 해룡족의 피가 깃든, 호풍혈단변을 익힌 저 육신으로 갈아타지 않았다면 저라고 해도 방법이 없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오히려 편해지는군요."

서란이 나를 보며 웃었다.

"본질적인 수행의 차이가 있는지라 완전히 잡아 둘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의미 있게 방해는 가능합니다. 선배님, 잡으시지요."

나는 서란의 미소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제야 서휼이 그토록 서란을 질기게 죽이려 했는지.

나는 이제야 이해했다.

원립은 언제고 서휼의 피를 이용하는 호풍진혈변의 공법을 익힐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하계에 남은 왕손 서란은 그 자체만으로도 원립의 존재에 약점이 되기 때문이었다.

네가 밟아온 것 (14)

[으…아아아아아!]

놈이, 파초선을 휘둘렀다.

하지만.

"흩어져라."

놈이 끌어오려는 혈풍은, 전부 서란의 명에 의해 흩어질 뿐.

[이… 빌어먹을 놈…!]

원립은 전신에 핏대를 세우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원립이 핏빛 광채를 발하였다.

번쩍!

"…!"

위험했다.

늙은 몸의 원립이 사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흉험하다.

나는 서란의 옆으로 가 무색유리검과 무형검을 겹쳐 잡고, 그대로 핏빛 광채를 향해 단악의 초식을 사용했다.

번뜩!

쿠과과과과광!

찌릿, 찌릿….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잠시 본 후, 원립을 노려보았다.

서란에게 목줄을 잡히며, 상당히 약해졌으나.

그래도 놈은 원영기 수도자였다.

그것도 동급 수도자보다 훨씬 강한!

'원영 후기에 못 오른 게 아니었다.'

내가 저주인형들에게 힘을 분산시켜 뒀던 것처럼.

놈도 자신의 수행보다, 혈체라는 것의 수행에 더욱더 신경을 쏟았기에, 원영 후기까지 못 이른 것이었다.

오히려 혈체를 얻고, 천 년에 달하는 수명을 추가로 얻은 모양이니, 놈으로서는 손해될 게 없는 모양.

정말, 패를 까 볼수록 음험하고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젠 정말 놈의 모든 패가 다 드러났다.'

더 이상 신경 쓸 것은 없었다.

벽씨세가 가주가 말했던, 놈이 숨겨 두었다는 힘 역시 저 혈체를 말했던 것.

결국, 이제는 정말로 저 몸만 쓰러뜨리면.

'끝난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원립을 향해 쇄도했다.

서란 역시 옆에서 결인을 맺었다.

"사막치고, 왜 이렇게 시원하나 했더니… 이 땅 밑에 이렇게 많은 음기(陰氣)가 잠들어 있군요."

녀석의 결인에, 원립의 흑색의 성 밑동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끼야아아아아―

끼아아아―

끄에에에엑!

어마어마한 음기와 함께, 원립의 흑색의 성 밑에서 가공할 수량의 원혼과 귀신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쿠릉, 쿠릉, 쿠르릉….

그들의 등장에, 티 없이 맑던 사막의 하늘에 음기가 충천하여 먹장구름이 다시 낀다.

"도대체, 몇천, 몇만, 몇십만 명을 학살해 잡아먹은 겁니까, 원립 선배. 가축 사육장을 관리하시던 원로님들도 고개를 흔들 정도군요."

서란이 혀를 차며 다시 결인을 맺는다.

원립은 혈광을 눈에서 폭사하며 서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나와, 다른 살아남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원립을 막아섰다.

―원망한다!

―혈목자!

―혈목자 원립!

―원립!

수많은 귀곡성은, 모두 원립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서란도 기가 질린 모습이었고, 흑색의 성 밑에서 기어 나온 귀신들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원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런 미친… 왜 해룡족이라는 놈이 흑색귀골곡의 공법을 익히고 있는 거냐…!]

"말했지 않습니까. 대청색귀골곡의 문하라고."

서란이 미소를 지으며, 수결을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녀석의 법술이 완성되었다.

[귀제(鬼祭)를 지내는 서란이 뭇 영령들께 말씀 올리노니. 그 원한의 사유를 들려주소사!]

―원립!

―원립을 죽인다!

―혈목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말씀 들어, 흑색귀골곡의 제자 서란이, 당신들에게 현신(現身)의 기회를 드리어 복수를 돕고자 하노니. 부디 당신들의 힘을 빌려주소사!]

―복수!

―복수할 수 있다!

―놈에게 복수할 수 있다!

―원립!

끼야아아아아!

기천의 귀신들이 원립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떼거지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서란의 주변으로 귀무와 함께 어마어마한 귀력이 뿜어지고 있었다.

절대 서란 개인이 뿜을 수 있는 수준의 귀력은 아니었다.

[흑색귀골곡의 제자, 서란이 제를 지내며 섭명함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당신들에게 현신의 기회를 드려, 복수를 돕겠나이다. 단, 당신들 역시 이놈에게 힘을 빌려주시기를 맹세하시오!]

서란의 영언이 천지사방에 울렸고, 원립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이놈, 무슨 법술을 쓰려는지 알겠군. 그건 천인기급의 법술인데, 네깟 놈이 그걸 감당이나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서란은 원립의 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결인을 맺어 나간다.

그리고.

―끼야아아아아!

―끄아아아아!

쿠구구구구!

서란을 둘러싼 귀무.

저 멀리 어딘가, 섭명함과 연결되었을 그 귀무에서, 장대한 힘이 뿜어져 나오며 원립에게 학살당한 귀신 떼에게 흘러 들어갔다.

작전대로라면, 송진이 섭명함을 심해 깊은 곳에 정박해 두고.

심해의 음기와 귀기를 섭명함을 통해 끌어모은 다음, 섭명함에 담긴 전송술법으로 서란에게 전송하는 것일 터였다.

쿠구구구구!

수만 마리의 귀신 떼가 힘을 얻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서란이 결인을 맺자 수만 마리의 귀신이 서란의 몸 안쪽으로 모두 쇄도하였다.

서란의 기세가,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수만 마리의 귀신 떼의 힘이, 서란에게 밀집된다.

원립은 긴장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멍청한 놈! 받아들이지 못해 폭사할 거다! 그대로 터져 죽어라, 멍청한 해룡족….]

그리고.

[스승님, 오십시오!]

서란이, 귀무를 보며 외쳤다.

싸아아아아―

오싹, 오싹!

나는 절로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서란의 상단전에, 서란이 아닌 다른 이의 혼(魂)이 씐다.

부신대법(附神大法).

자신의 원신(原神) 일부를 지정해 놓은 상대에게 붙여 기생시켜, 멀리서도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대법이라고 하였다.

"커, 커헉!"

나는 숨을 쉬기 힘들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뿐이 아니었다.

원립을 막아서던, 청문중진을 비롯한 무수한 결단기 수도자들이, 일시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그리고, 기세등등하던 원립조차 전신을 벌벌 떨고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아….]

흑색귀골곡(黑色鬼骨谷), 원로(元老), 천인기(天人期) 수도자 송진이.

원립이 학살해 온 수만 마리의 귀신 떼를 모아, 지금 이 순간.

전성기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운 정경이군.]

서란의 눈에서, 푸른 빛의 귀화(鬼火)가 타올랐다.

그의 입에서, 서란의 것이 아닌 영언이 울렸다.

송진이었다.

그는, 우리와는 무언가 다른 세계를 인지하는 것인지, 허공을 잠시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원립은 입에서 거품이 나올 것만 같은, 공포의 의념을 줄기줄기 뿜고 있었다.

[왜, 왜… 천인기 수도자가…!]

[그래, 향수에 빠지는 건 뒤로 미루도록 하지. 생전이라면 몰라도, 내 잔혼밖에 안 남은 이 혼백으로 부신대법을 펼치는 건 내 혼에도, 란이의 혼에도 상당히 무리가 가니, 빨리 죽여 주마.]

끼야아아아아!

수만 마리의 귀신 떼가 귀곡성을 지른다.

그리고, 서란의 몸을 차지한 송진의 손에, 귀조(鬼爪)가 돋아났다.

[흐아아아아아! 왜 남아 있는 거냐! 왜 천인기 수도자가 남아 있는 거냐!]

원립은 완전히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둔광을 펼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천지원기(天地原氣)가, 송진의 의지에 감응하며 천지간이 귀기와 음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죽어라.]

그리고.

쿠과과과광!

그 일격에, 봉명성의 외벽이 그대로 뜯겨 나갔고, 일격의 여파로 원립이 살던 흑색의 성.

그곳에 펼쳐진 결계가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결단기 수도자들이 한참 모여 두들겨도 아무 반응이 없던 결계였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한 천인기 수도자의 일격에, 그 고대 결계는 없느니만 못한 것 같았다.

쿠과과과광!

사막에 계곡이 생겨났다.

결단기 수도자들이 만들어 낸 어설픈 계곡이 아니었다.

사막이, 반으로 갈라졌다.

문자 그대로였다.

다른 말로 형언할 필요도, 묘사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사막이 두 쪽이 되었다.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리고.

원립은, 아니, 원립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깃덩이는, 송진의 일격을 맞고 봉명성의 구석에 떨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서휼의 삼 초를 맞고도 살아남았다는 게, 헛소리만은 아닌 듯.

놈은 송진의 일격을 맞고도, 고깃덩어리가 되어서라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쿨럭!

서란의 몸을 차지한 송진이, 시커먼 피를 토했다.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너, 저주공법을 익혔다 했지? 저주로 내 제자의 몸에 가해진 부담을, 부신대법의 시전자인 내게 다 떠넘겨라.]

"…괜찮겠소?"

[어차피 죽은 몸인데 뭐 어떻겠느냐. 잔말 말고 부담을 빨리 다 떠넘겨라.]

나는 송진의 부탁대로, 음혼귀주문을 이용해, 서란의 몸과 혼에 가해진 부담을 송진에게 저주로 전부 떠넘겼다.

송진이 스스로 허락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흐흐, 이걸로 제자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100년은 줄었군. 빌어먹을… 원립 놈이 제자에게 위협이 되는 놈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 짓은 안 했을 게다. 설마 놈을 고깃덩이로 만들어 줬는데도 못 잡지는 않겠지? 이만 난 가마.]

그 말을 끝으로, 송진은 부신대법을 풀고 서란의 몸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게… 천인기의 힘인가.'

나는 송진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천인기 수도자의 일격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쫘악 갈라진 사막의 정경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자, 이제 저놈이 완전히 무력화되었소! 모두 공격하시오!"

나는 무색유리검을 붙잡고, 고깃덩이가 된 원립에게 날아갔다.

송진의 기세에서 벗어난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도 눈을 빛내며 고깃덩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쿠르르릉!

흑색의 성에서, 다시금 진홍빛 강이 흘러나온다.

"아직도냐!"

청문중진이 질린다는 듯 외쳤다.

"모두 저게 원립에게 못 가게, 막으시오!"

나는 저주문을 쏟아 내, 저주문의 강을 만들었다.

시커먼 저주문의 강이, 원립을 휘감았다.

'장원진력이고 뭐고, 전부 썩혀 버리겠다…!'

그리고.

번뜩!

원립이 불러낸 장원진력은.

원립이 아닌, 원립이 봉명성 천장에 꽂아 놓은 진법 깃발들에게로 향하였다.

"뭣…!"

나는 이를 악물고 무색유리검을 들었다.

"모두 저걸 막으시오!"

놈이, 봉명인을 불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으오오오오오…!!!]

원립이었던 고깃덩이가, 어마어마한 핏빛 광채를 내뿜으며 내 저주문을 떨쳐 버리고 허공으로 쇄도하였다.

[나도, 목숨을 걸겠다!]

쿠구구구구!

찌릿, 찌릿!

나는 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놈은 자신의 원영을 불태우고 있었다.

잘못하면 그대로 원영이 타 버려 죽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수행이 한 단계는 떨어지는 도박!

하지만, 도박수가 성공하면.

'놈이 봉명인을 얻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전신의 기력을 폭발시키며 놈에게 다가갔다.

촤르르륵!

고깃덩이가 된 놈의 몸에서 수많은 나뭇가지가 뻗어 나오며, 핏빛의 숲이 되어 나를 가로막았다.

남아있는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두 달려들어 함께 숲을 뚫었다.

파아앗!

나는 순식간에 원립의 앞에 도달하였다.

"네놈이 바라는 대로 될 것 같으냐!"

[비켜라!!!]

촤르륵!

원립의 몸에서, 원영이 튀어나왔다.

수많은 손과 눈, 입이 달린 아기.

그리고, 그 아기가 영체에 달린 손 중 하나를 그대로 잘라 내어 내게 던졌다.

[수행이 떨어지더라도, 내 계획이 싹 다 파탄 날지라도!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없다!]

콰과과광!

놈이 자신의 원영을 희생해서 던진 원영의 팔은,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키며 나를 뒤덮었다.

단악검법, 단악!

쿠과과과과!

나는 폭발을 뚫고 원립을 쫓아갔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폭발을 뚫는 것에만 집중하였기에, 내 전신의 피부가 벗겨져 버렸다.

하지만 결단기 수도자의 생명력과, 재생력을 높이는 선주의 효과로 빠르게 피부가 재생된다.

번쩍!

놈의 진법이 작동했다.

봉명성의 마지막 층이 붕괴했고, 마침내.

파아아아앗!

봉명성의 허공에, 봉명인이 나타났다.

타앗!

나는 저물대에서 선주들을 되는 대로 집어 마셨다.

법보와의 연계가 강화되는 백홍주.

법보의 속도가 증가하는 모련섬.

힘이 강해지는 홍월루….

그리고.

콰아아앙!

나는 전신의 힘을 짜내, 무색유리검을 봉명인을 향해 던졌고.

원립은 아기 형태의 원영에 달린, 모든 손과 눈을 전부 터트렸다.

번쩍!

일순간 원영을 훼손해서 어마어마한 힘을 얻어 낸 원립.

수많은 선주들을 마시고, 그 힘을 일점으로 모아 무색유리검을 던진 나.

내 검과, 원립의 손이, 봉명인에 동시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멈춰라!"

서란의 목소리가 원립에게 닿았고.

원립의 육신이 우뚝 멈춰섰다.

내 무색유리검이, 봉명인을 튕겨 내어 멀리 던져 버렸다.

"이제 끝이다."

나는, 원립을 향해 쇄도하며 단악검법 오의, 단악을 펼쳤다.

파아아앗!

그때, 혈광이 주변을 뒤덮었다.

파라라락!

"…!"

원립이 장원진력을 집어넣었던 그의 진법 깃발들.

봉명성의 전 층을 파괴하는 데 쓰고, 허공에 떠 있던 깃발들이 움직이며, 저 멀리 튕겨 나간 봉명인을 감싸 안는다.

그와 동시에.

촤라라락!

진법 깃발들이, 원립에게 봉명인을 가져왔다.

콰악!

고깃덩어리의 한 쪽에서, 촉수 같은 것이 돋아나, 봉명인을 움켜쥐었다.

[내가, 봉명인의 주인이다…!]

쿠구구구구!

[천운이, 내게 기울었다…!!!!!]

놈의 바퀴벌레 같은 집념이, 마침내 봉명인에 닿는 데에 성공하였다.

촤르르륵!

놈이 육신을 재생하였다.

뚝, 뚝….

원립은 여전히 시커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가면의 밑으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절대 멀쩡하지 못한 상태.

하지만.

놈은 웃고 있었다.

[숨겨 두던 혈체도, 아끼던 장원진력도 모조리 다 썼다. 내 원영까지 훼손하여, 원영 초기로 수행이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해서 천운을 손에 넣었는데도 네놈들을 못 이기면, 나를 개돼지라고 불러라!]

'놈이 봉명인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서 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천운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는, 놈이 힘을 회복하지 못한다!'

놈은 지금 초죽음에 가까워져 있었고, 힘을 회복하지도 못했다.

'놈을 죽이고, 봉명인을 뺏는다!'

그때였다.

쿠르르릉….

봉명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송진의 공격을 맞고, 핵심인 봉명인까지 원립에게 뺏긴 탓인지.

봉명성의 외벽 곳곳이, 느릿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그 파편들은 정확하게 내가 있는 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붕, 부웅!

나는 외벽들의 조각을 베어 냈다.

하지만 이상하게 원립이 있는 쪽으로는 잔해들이 떨어지지 않았고, 원립은 유유히 나를 지나쳐 날아갔다.

나는 무형검을 녀석에게 날렸지만, 나와 녀석의 사이로 정확히 봉명성의 잔해가 떨어지며, 내 무형검은 놈을 맞추지 못했다.

'이게 무슨…!'

나는 당황스러워,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리석은 놈. 하늘이 내 편을 들어준단 말이다.]

서란이 놈을 향해 명을 내린다.

"꿇어라!"

하지만, 원립은 조금 움찔거릴 뿐 봉명인을 들고 킬킬 거렸다.

[이런, 우연히도 천인기 수도자의 공격을 맞으며, 몸에 남아 있던 해룡왕의 진혈이 전부 증발된 것 같군그래? 정말 우연한 일이야.]

"뭣…!"

콰아아앙!

원립이 혈광을 뿜어내었다.

서란은 그대로 혈광에 휩쓸려 흑색의 성으로 날아가 버렸다.

원립은 서란을 따라 봉명성을 그대로 나가 버렸고, 기이하게 무너지던 봉명성이, 원립이 나가자마자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멈췄다.

뿌드득….

나는 그제야 잔해더미의 폭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뭔가?

기막힌 우연 정도가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세상이 놈의 편에 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품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송진의 귀신이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처먹을!!! 저 바퀴벌레 같은 놈! 그걸 처맞고도 살아서 봉명인을 손에 넣어!]

송진의 목소리였다.

그는 다급한 소리로 내게 말했다.

[너! 주변을 둘러봐라! 주변에 남은 귀신이 얼마나 있느냐!]

송진의 목소리에, 나는 영감을 넓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방금 송진의 일격에 다 소모된 것인지, 남은 귀신이나 원혼은 거의 없었다.

"거의… 없소."

[젠장! 그만한 귀신이 더 있으면 봉명인이고 뭐고 다시 뺏어 줄 수 있는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송진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연락을 끊었고, 나는 빠르게 서란과 원립을 쫓아 흑색의 성으로 날아가려 하였다.

그때였다.

"서… 수사."

"…!?"

봉명성의 잔해 밑에서, 벽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벽… 수사?"

그는, 잔해에 반신이 깔려 있었다.

아니, 반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는 북향화처럼 하반신이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몸의 4분지 1만 남은 상태인 것이었다.

그는 그럼에도 결단기 수도자의 질긴 생명력으로, 아직도 살아남은 것이었다.

하지만.

'금단이, 깨졌군.'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죽을 듯싶었다.

벽문성은 입을 뻐끔거리며, 내게 말했다.

"…급할…테니, 오래 붙잡지, 않…겠소. 이걸…."

그는, 품에서 작은 유리 조각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건…."

저주인형의 속으로, 지네 굴에서 조각했던 유리 공예품.

그 조각의 일부였다.

"나도, 그녀를 사랑했지만. 내 마음은, 당신에 비해, 그리 깊지 않을지도 모르오. 오히려… 당신에게 그녀를 뺏겼다는 분함이 없었다면, 몇 년 가지 않아 시들해져서, 그녀를 쫓아다니는 걸 그만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소. 부디…."

그가, 내게 이를 악물며 유리 조각을 건넸다.

"그녀의, 복수를. 부탁드리오."

나는 이를 악물고, 그가 건넨 유리 조각을 넘겨받았다.

"알겠소. 쉬고 계시오."

그렇게, 벽문성은 눈을 감았다.

나는 벽문성을 뒤로하고, 살아남은 결단기 수도자들과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휘이이이이!

흑색의 성 안쪽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나는 인기척이 나는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성의 중앙.

그곳에 있는 대전.

피 냄새가 가장 진득한 그곳으로, 몇몇 생존자들이 전부 모였다.

원립은 그곳에서, 핏물로 서란을 휘감아 조이고 있었다.

쿠구구구….

나는 이를 악물었다.

원립은 느긋하게 봉명인을 쥐고 있었다.

밖에서는 원영 초기, 그것도 잔뜩 약해진 원영 초기 수준이었건만.

성 안쪽에서의 그는, 원영 중기 수준으로 다시 올라와 있었다.

[내 성에 들어와, 봉명인을 가진 나를 상대하겠다고…? 용기가 가상하군. 하지만, 내 원영까지 훼손한 네놈들은 모조리 한 줌 장원진력이 될 것이다.]

그가 악에 받친 미소를 지었다.

[천인기 수도자가 나타나 잠시 당황했지만, 그래. 귀골곡의 원로 중 한 명의 소문을 들은 적 있지. 괴군에게 목이 따여, 폐함이 된 섭명함에 지박령처럼 박혀 명계에 끌려갈 날을 기다리는 잔혼! 그 자일 테지? 하하하, 잔혼 수준으로 천인기급의 일격을 펼쳤으니, 이제 명계에 끌려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구나.]

놈이 요사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이제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겠구나. 남은 건 네놈들을 다 죽여 내 상처를 치유하는 것뿐.]

쿠구구구구!

놈의 주변으로 혈광이 번뜩인다.

[호풍진혈변이 서휼이 남긴 함정이었을 줄은 몰랐다만, 알았으니 이제 몸에서 호풍진혈변의 수행을 적출하기만 하면 된다. 네놈들은 혈마진해광과 혈령수림결로만 상대해 주마!]

이길 수, 있을까?

절망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 괴물을 이길 수 있는가.

지금 내 목숨을 걸어, 우공이산을 펼쳐도.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이 목숨이 가치가 있을까?

그때였다.

꿈틀, 꿈틀….

송진이 내 품에 남겨 놓은 귀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쪽의 상황이 어떠냐?]

"음?"

송진의 목소리에, 원립이 몸을 흠칫 떨었다.

"서란은 잡혀 있고, 원립이 봉명인을 쥔 채 원영 중기의 수행을 뽐내고 있소."

[그렇군. 조금 시끄러울 테니, 네가 서란을 잘 보호해라.]

"음?"

그때였다.

쿠과과과과광!

천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흑색의 성의 한쪽 벽면이 무너졌다.

거대한 충격파가 장내에 휘몰아쳤고, 나는 그 충격파를 견디며, 서란에게 향하는 잔해와 충격파를 베어 내었다.

그리고.

나는 충격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원립과 내가 동시에 그것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섭명함?]

"섭명함?"

그것은, 다 망가진 시커먼 폐함이었다.

송진이, 자신의 제자를 위해 섭명함을 원립의 성에 들이박은 것이었다.

[막(幕)!]

그리고, 섭명함의 잔해들이 날아와, 서란을 둘러싸고 어떠한 진법을 짰다.

원립은 방금 송진에게 당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그의 목소리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살고 싶은 놈은 내가 짠 진법 속으로 알아서 들어가라! 저 원가 놈 빼고 다 들여보내 줄 테니.]

쿠구구구!

송진은 섭명함의 조타륜을 잡고, 귀화를 이글거리며 말했다.

[저놈 때려잡느라, 현계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도 잔뜩 줄어들었고 하니. 그냥 이참에 가 버리도록 하지.]

"스, 스승니…!"

서란이 다급한 목소리로 송진을 불렀다.

송진은, 서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자야, 잘 기억해라. 귀골곡의 의지는, 이 섭명함이 아닌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어지는 것이다.]

스르륵….

송진이, 품속에서 묵빛 구슬을 꺼내 들었다.

파공주였다.

[봉명인이 무섭긴 하지만, 파훼할 수 있는 건 무려 세 가지나 있지. 첫째는 봉명인보다 강한 운명. 둘째는 압도적인 힘. 그리고 셋째는….]

"아, 안 됩니다! 파공주! 해룡왕의 후손으로 명한다, 스승님의 명에 반응치 말아라!"

쿠구구구구!

섭명함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역사(歷史). 기나긴 역사를 지닌 것이라면, 운명에 저항이 가능하다. 50만 년의 역사를 지닌, 섭명함 맛 좀 보거라…!]

부우우웅!

섭명함과, 파공주가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어,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냐! 파공주! 내 말을 들어라!"

서란은 두 눈이 뒤집혀서, 섭명함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외쳤다.

"안돼! 스승님! 스승님!!!"

[파공주, 발동. 섭명함….]

송진은 마지막 순간.

서란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귀화가 흐르는 그의 눈두덩이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다.

[자폭(自爆).]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문중진과 다른 수도자들을 황급히 송진이 쳐 준 진법 안으로 끌어들였다.

원립은 미친 듯이 이 진법 안으로 들어오려 진법을 두들겼으나, 송진이 허락지 않은 탓인지.

원립은 봉명인을 쥐고서 멍청하게 진법을 두들겨야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묵빛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 * *

폭풍이 잦아들었다.

서란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립의 핏물에서 벗어나, 눈앞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아, 아아… 아아아…."

송진이 쳐 준 진법은 간당간당하게 방금의 폭풍에서 버텼다.

무시무시한 공간 폭풍에서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진법 자체가 단단하다기보단, 섭명함의 잔해로 만든 진법이, 같은 섭명함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인 듯했다.

힘의 크기가 아닌, 속성의 문제인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법 바깥으로 나왔다.

철퍽, 철퍽….

"하…."

나는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정말, 지긋지긋하군."

핏빛의 고깃덩이.

그 고깃덩이의 위쪽으로, 푸른 룡의 형상이 떠올라, 고깃덩이를 지키고 있었다.

"서휼, 서휼, 서휼! 또 네놈이냐! 그만 좀 나와라…!"

파사사삭….

해룡의 형상은, 방금 전의 공간 폭풍을 맞고 힘을 다한 듯 그대로 스러져 버렸으나.

서휼의 형상이 지켜 준 덕인지, 원립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서휼…!"

나는 씹어뱉듯이 그 이름을 울부짖었다.

촤락, 촤라라락!

그리고, 고깃덩이가 재생하기 시작한다.

쿨럭, 쿨럭….

원립이 다시 몸을 드러냈다.

원립도 이제는 위태로워 보였다.

놈의 가면은 박살 나, 눈과 이마만을 가린 채, 입이 드러나 있었다.

놈의 수행은 이제, 결단 대원만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우우웅!

섭명함에 박살 난 흑색의 성의 잔해가, 그에게 힘을 보탠다.

우우웅!

놈의 수행이, 원영 초기까지 치솟는다.

"흐, 흐하… 흐하하…."

놈은 영언을 내뱉지도 못할 만치 약해진 건지,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봉명인이… 봉명인이… 나를 살려 줬다…! 거기다, 원영 초기라면, 아직… 네놈들 따위는…."

말을 잇던 녀석이, 왈칵 피를 토해 냈다.

"끄르럭… 꺽…!"

"쯧…."

나는 놈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놈이 손을 휘젓자, 역시나 원영 초기 급의 혈광이 터져 나오며 나를 가로막았다.

"네깟, 네깟 놈들이… 이 어린놈들이… 내가, 내가 어찌 살아왔는지 아느냐…? 900년 동안… 어떤 준비를 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 왔는지 아느냐? 죽지 않는다.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악을 쓰며, 원영 초기 급의 힘을 내뿜었다.

나는 놈을 담담하게 쳐다보았다.

"나도, 900년 정도는 살았다."

"뭐…?"

"함부로 내 앞에서, 나이를 내세우지 마라…!"

콰아앙!

나는 놈에게 달려들어, 무형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놈은 칠공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나를 떨쳐 냈고, 나는 그 반탄력에 뒤쪽으로 떨어져 나가 버렸다.

"크윽…!"

"크, 크흐… 이 쓰레기 같은 놈들. 버러지 같은 놈들이, 나를 이 꼴까지 몰아붙여…! 죽여, 죽여버릴 테다…."

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때였다.

"…?"

흑색의 성의 잔해 사이로, 옥색의 노리개가 떨어져 있었다.

노리개는, 원립의 발치 아래에 있었다.

나는 황급히 품을 뒤졌다.

"아…."

다행히도, 향화의 노리개는 내 품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저것은….

'월량의 고손자. 그의 것이군….'

그의 유품은, 원립에게 잡아먹힌 후에, 그의 성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던 것이리라.

내가 노리개를 쳐다볼 때였다.

원립이, 나의 시선을 알아채고, 이죽이며 말했다.

"아, 그래. 이 노리개. 200년 전의 네놈 옆에 있던 그 여자의 노리개였나?"

그는, 노리개로 다가갔다.

녀석은 굳이 나에게 북향화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나를 도발했다.

저열한 도발.

하지만, 녀석이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런 쓰레기 따위."

뿌득, 뿌드드득….

놈은, 그대로 월량의 고손자의 노리개를, 짓밟아 버렸다.

뿌드드득….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지니고 다니는 쓰레기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네놈들이 아무리 발악해 봐야, 천운을 손에 넣은…."

"…아니다."

"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정했다.

"…쓰레기가, 아니다."

"…하하, 이게 쓰레기가 아니라고? 잘 봐라. 이 쓰레기야. 내 발밑에 있는 이건 말이다…."

놈의 목을, 그들의 영전에 바칠 때까지, 살아 있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지금.

송진이 목숨을 바치고, 이 기회를 만들어 준 지금.

나는 이 자리에서.

놈의 목을 영전에 바치지 못하더라도.

죽기로 마음을 다졌다.

나는, 이를 갈며 무색유리검을 들어 올렸다.

"네가 지금 밟아온 것만이… 아니야."

지금 이 순간.

"네가 밟아온 것… 네가 지금까지 그 더러운 발로 짓밟아온 그 모든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나는.

"쓰레기가, 아니다!!!"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간절하게.

"보여 주마!"

검(劍)을 들고, 다음 경지를 갈구하였다.

"네가 밟아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단악검법(斷岳劍法).

"최종오의…."

제이십사초(第二十四招).

"우공이산(愚公移山)!"

단악검법의 끝.

가장 흉험한 자멸기(自滅技)가 내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네가 밟아온 것 (15)

원립의 일 수와, 서은현의 일 수가 부딪혔다.

무광과 혈광이 부딪혔다.

티잉!

맑은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맑다.

그리고, 약하다.

원립의 입가에 비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있는 대로 위엄은 잡더니만, 이게 끝인 거냐?"

약하다.

수도자도 아니다.

그냥, 범부가 칼을 잡고 세게 휘두른 수준.

어찌어찌 자신의 일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겨우겨우 막아 낸 것에 불과하다.

그게 끝이었다.

원립은 알아차렸다.

'나만 힘이 빠진 게 아니야.'

그를 상대하는 잔챙이들 역시, 힘이 잔뜩 빠져 있다.

'이놈들만 쓸어버리면, 정말로 내가 승자가 된다!'

그는 입가에 한껏 미소를 지었다.

"백날 그 멍청한 유리검으로 두들겨 봐라. 산산조각을 내 주마!"

혈광을 줄기줄기 뿜으며, 그가 결인을 맺었다.

쿠구구구!

그의 주변으로 피 구름이 인다.

그리고, 피 구름 사이에서 혈목(血木)들이 자라나며 핏빛 숲을 일구기 시작했다.

서은현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그를 도우려 결인을 맺던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인상을 쓰며 핏빛 숲에서 도망쳤다.

'놓치지 않는다.'

한 마리 한 마리 전부 다 잡아, 잘근잘근 씹어먹어 주마.

원립은 그리 생각하며, 우선 가장 성가셨던 벌레.

서은현을 향해 날아갔다.

이미 핏빛 숲에 갇혀, 멍청하게 칼질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원립의 눈에 비췄다.

"잘 가라. 그래도 인상 깊었다."

쿠구구구!

그의 손에서 핏빛 나무덩굴이 나와 서은현에게 쏟아진다.

그리고, 서은현이 유리검을 들고 나무덩굴을 튕겨 내기 시작했다.

원립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한참 약해졌군. 곧 쓰러지겠어.'

"뭘 보여 준다고 하지 않았나? 애처롭게 발버둥 치는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은데, 이만 죽…."

그리고.

투웅!

서은현의 검이, 핏빛 덩굴을 쳐 낸다.

"음?"

뭔가,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체력을 소모하면, 처음보다 약해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원립은 방금 느껴진 반탄력에,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보다, 강해졌다?'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분명히 처음보다 강하다.

'기분 탓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원립은 입술을 질끈 씹었다.

콰앙!

서은현의 검이, 다시금 그의 덩굴을 쳐 내고, 그의 핏빛 숲을 밀어낸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검은, 분명 처음보다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신경 쓸 것 없어.'

"그대로 죽어라!"

키이이잉!

혈마진해광!

원립의 손 위로, 혈해(血海)의 정경이 고이며, 서은현을 향해 내리꽂혔다.

서은현은 그에게 내리꽂히는 핏빛 물덩이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눈을 감고, 검을 들었다.

단악검법.

유곡!

그는 물덩이를 향해 날아들어, 그 틈새로 파고든 후 그대로 몸을 비틀어 올리며 물덩이를 베어 내었다.

촤라락!

원립의 법술이, 일견에 갈라진다.

원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쿠웅!

서은현이 다시 지상으로 착지한다.

그리고, 착지한 자리에는, 그의 발자국이 깊이 남았다.

콰앙, 콰앙, 콰앙!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한 번의 초식을 사용할 때마다.

발자국의 깊이가, 깊어진다.

'공격력의 증폭률이, 점차 증가한다?'

마치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그가 한 번 검으로 원립의 법술을 베어 내고, 후려칠 때마다.

그의 초식이 점차 강맹해진다.

원립은 다른 수도자들을 쫓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놈부터, 이놈부터 잡아야 해!'

위험했다.

원영기에 올랐던 그의 육감이, 운명의 불길함을 예고하고 있었다.

'봉명인까지 얻었다! 내가 질 리 없어!'

"수(水), 류(流)!"

촤르르륵!

혈수가 솟구치며, 서은현을 향해 핏빛의 강이 되어 그를 뒤덮는다.

그리고.

단악검법, 괴암.

서은현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무(劍舞)였다.

그의 검무는 단 하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강물 하나하나.

핏방울 하나하나를 모조리 쳐서 튕겨 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무위!

그리고, 서은현의 검은 여전히.

한 번 원립의 법술을 쳐 낼 때마다, 꾸준히 강해지고 있었다.

꾸준히.

* * *

단악검법 최종오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은 다음과 같은 절기였다.

첫째, 산외산부진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몸에 있는 기운이, 단 한 올도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한다.

둘째, 그 상태를 유지하며, 이십일 초 천지(天池)의 초식으로, 상대와 합을 부딪치며 생겨난 모든 흐름과 힘의 잔류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셋째, 공곡전성의 초식을 거기에 다시 적용하여, 상대의 힘까지 전부 몸에 담아 되치며 휘두른다.

넷째, 산중호걸의 초식으로 그 모든 자잘한 힘들을 한 번 휘두를 때에 일 점 집중시켜 반발을 강제로 억누른다.

다섯째, 첩첩산중과 능곡지변의 초식으로,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대한 분산시켜서 땅으로 흘린다.

어렵게 설명했지만.

한 줄로 설명하면, 상대와 한 합을 주고받을 때마다, 상대의 힘을 자신의 초식에 끌어들여 계속해서 자신의 공격을 강화하는 절기였다.

그리고, 억지로 상대의 힘을 끌어들인 대가는 시전자의 죽음이었고.

그러므로.

우공이산을 한 번 사용한 무인은, 상대와 싸우는 한 끊임없이 강해지고.

결국에는 거두어들인 힘을 억누르지 못해 몸이 터져 죽는 것이 그 운명.

콰앙!

원립의 공격을 초식에 거두어들이고, 다시 그 힘을 담아 받아친다.

그리고 산외산부진의 원리로, 되쳤던 힘까지 완벽하게 낭비하지 않고 다시 상대에게 흩뿌린다.

점차 내 공격이 강해졌다.

어느덧, 원립이 법술을 날리기만 하면 튕겨 나가지 않는 데에 급급해하던 나는, 원립의 법술을 정면에서 막아 내고 있었다.

우공이산을 펼치는 한, 한 번 상대와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최소' 1푼씩 힘이 강해진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수천 번의 공격을 원립에게 내지르고 있었다.

푸콱, 푸콱!

전신을 흐르는 거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몸 곳곳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수도자의 좋은 점은.

슈르륵….

재생력이 인간의 것이 아니란 것이다.

김영훈이 우공이산을 펼칠 때와, 내가 우공이산을 펼칠 때.

유지 시간 자체가 다르다.

콰앙, 콰앙, 콰앙!

내 발자국은 점차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 발을 내디뎠다.

쩌엉!

내 참격이, 원립의 숲을 찢어 버리며 길을 텄다.

녀석이 만들어 낸 숲은 다시 재생하는 듯했으나, 나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한 자리에서, 놈의 검을 막아 내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명백히, 놈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원립은 이를 악물며, 그의 단검 법보를 꺼냈다.

끼야아아아!

그의 핏빛 창 법보.

창 법보에서, 피 안개로 이뤄진 한 마리의 귀왕이 몸을 드러냈다.

촤락!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귀왕에게 먹이자, 귀왕의 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더욱더 강한 기세를 내뿜는다.

놈이, 핏빛 숲을 찢어놓은 나를 향해 창을 들고 달려왔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어차피 전신에서 피가 흘러, 안 보느니만 못하다.

무(武)를 익힐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자.

눈을 감고, 의념의 세계에 진입하였다.

붉고 푸른 선들.

수도자의 의식 영역을 만든 이후로는, 그 의식 영역에만 의지하여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의식 영역은 결국 의념의 흐름의 상위 호환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랜만에 절정 고수 시절로 돌아가 붉고 푸른 실을 마주하니, 예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실이, 원래 이렇게 많은 것을 담고 있었나?'

적에게서 뿜어지는 실은 붉은 빛.

감정으로 치면 분노, 혹은 살의이다.

하지만 그 살의 속에, 무수히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다음 순간 어디로 움직일 것인지부터 시작하여, 왜 이런 움직임을 지었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무(武)를 통해 어느덧 상대의 마음을 투명하게 비춰 보고 있었다.

눈앞의 귀왕은, 사실 원립의 꼭두각시.

그러므로 귀왕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원립의 감정이었다.

공포와 분노, 수치심, 모멸감, 약간의 기대.

그것이 원립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내 마음은 어떻지?'

나는 문득, 귀왕과 부딪히며, 원립의 감정이 아닌 내 감정이 궁금했다.

'아아… 그렇구나.'

내 감정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 고통의 끝에 다가올, 죽음에 대한 기대.

그랬다.

나는, 죽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나는, 죽음을 바라고 있구나.'

우공이산의 초식을 한 번 펼칠 때마다.

이제는 전신의 근육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전신 곳곳에서 피가 터졌다.

발자국이 더더욱 깊어진다.

하지만, 이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도.

나는 죽음을 앞에 두자, 절대적인 평온함이 느껴지는 것을 인지하였다.

'이게, 이번 삶의 끝인가.'

나는 검을 휘두르다가 죽을 것이다.

몇 번의 삶 동안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앞두자, 몇 번이나 찾아왔던 주마등이 내 앞을 스쳤다.

최초의 삶부터 시작해, 10번에 달하는 죽음.

900년에 달하는 삶.

그 압도적인 삶 속에서,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해 왔던 빛났던 사랑.

인간의 삶이란, 이리도 덧없는가.

나는 도대체, 뭘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가.

휘리릭!

문득.

나는 내 고통 속에서 검을 휘두르던 중.

내 마음을 참오하다, 아무것도 없는 어떠한 영역을 발견하였다.

공(空).

모조리 비어 있다.

'왜, 난 아직도 살아 있지.'

삶은 고통일 뿐이다.

음혼귀주문을 통해 깨달은 것이 아닌가.

빨리, 어서 끝나고, 다음 생으로.

그냥, 그렇게 넘어갔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할 때였다.

―삶이 허무함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함께 보낸 시간들도 허무하셨나요?

따스한 손이, 왠지 검을 잡은 손 위에 올려지는 듯했다.

'어…?'

어떠한 광경들이, 눈앞을 스쳤다.

그것은, 그녀와 함께했던 나날들이었다.

좋았던 일들, 아쉬웠던 일들, 고통스러웠던 일들….

그리고, 눈앞을 스치는 장면들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더더욱 나아갔다.

김영훈과 신마전을 세우고 승승장구했던 일들.

무공의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던 일들.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 계화가 내게 종이꽃을 접어 선물해 주었던 일.

제자들을 구하고 죽었던 일.

스승님을 만났던 순간.

그분에게 열 번의 절을 올리고 죽었던 순간.

주마등이 아니었다.

내 주마등은, 이렇게 빛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죽을 때는 늘 허무한 삶의 순간들만이 스쳐 지났으니까.

이것은….

'아, 그렇군.'

무색유리검, 제삼형.

총천(總天)의 진짜 능력은,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을 한데 모아 강화시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정(情).

무색유리검은, 인간의 정(情)을 끌어올리는 법보였다.

북향화가 무색유리검을 만들며, 인간의 칠정을 이용한 괴군의 회로를 연구했다는 것을 잊었었다.

그녀는 괴군의 괴뢰를 모방하여, 이 법보에 인간의 정(情)이 깃들 수 있게 설계한 것이었다.

인간의 의식이, 칠정을 비롯하여 수십 수만 수억 개의 감정이 엮여 만들어지듯이.

무색유리검은 한 개 한 개의 회로가 겹치고 겹칠 때, 그 무수한 회로의 조합이 수억 개의 감정을 만들고, 그 감정이 다시 무색유리검 안에 또 하나의 식(識)을 만드는 식이었다.

키이이잉!

무형검을 불어넣었다.

무형검은 본디, 강환이 섞인 나의 의식 덩어리.

그리고, 무색유리검에 담긴 인공 의식이, 내 의식에 닿자, 내 의식을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무형검의 위력이 커진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내가 처음 총천을 발동시켰을 때도 느꼈던 힘.

내가 방금 새로이 발견한 무색유리검의 힘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파아아아앗!

무색유리검이, 빛나기 시작했다.

무색유리검에 담긴 인공 의식이, 내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고, 내 강렬한 감정을 받아들여, 그대로 무형검에 더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무색유리검은, 내 감정을 받아들여 힘으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콰아아앙!

귀왕의 창이 내 일 검에 터져 나가 버렸다.

창에 들러붙어 있던 귀왕도 역시 함께 폭발하며 사라져 버렸다.

원립이 당황하며 계속해서 법술을 부리고, 스스로의 몸을 자해하면서까지 더욱더 흉험한 혈법술들을 불러냈다.

녀석은 제 몸을 깎아 나를 막고 있었고, 나는 전신을 폭발시키며 녀석에게 전진하고 있었다.

이미 그 고통에, 나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눈을 감고, 의념의 흐름만을 느끼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내 마음을 관조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공(空)의 영역.

그 허무한 영역에, 무색유리검이 지난날의 감정들을 불어넣고 있었다.

좋았던 순간, 기분 나빴던 순간.

기뻤던 순간, 노했던 순간, 슬펐던 순간, 즐거운 순간, 사랑스러웠던 순간, 미웠던 순간….

'그런가.'

이 삶은 덧없다고 생각했다.

원립을 죽이면, 언제라도 죽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색유리검이, 그녀가 남긴 의지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이 삶은, 마냥 덧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그런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나는 죽을 것이다.

삶이 덧없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강대한 적을 향해, 전신을 폭발시키며, 그렇게 죽어 갈 것이다.

'나도, 압니다. 당신과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놈에게 죽었고, 나 역시 녀석과 싸우다 죽겠지요.'

이 삶이 덧없지 아니하면!

총천연색으로 가득 차 있다면 무얼 하느냔 말이다!

인간의 의지는, 정해진 운명 앞에서 이리도 허무한데!

콰아아앙!

감정이 격렬해짐에 따라, 무색유리검이 더더욱 무형검을 증폭시켰다.

원립과 나의 사이가 뻥 뚫렸다.

녀석이 결인을 맺으며, 더더욱 흉험한 법술을 준비했다.

'아, 저건….'

못 막는다.

저 법술과 같이 동귀어진할지언정.

지금까지 강화시킨 우공이산의 힘으로도, 더 이상 막는 게 불가능했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격차라는 게 있지 않은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정해진 한계라는 게 있지 아니한가.

그 순간이었다.

'…영훈 형님이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지.'

―한계?

어쩐지, 김영훈의 내단을 넣어 둔 품속에서.

무언가 따스한 것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탓일지도 몰랐다.

―왜, 칼을 휘두를 때 그런 것부터 생각하느냐?

그의 내단에서부터,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마치, 아침 햇살 같았다.

황금빛으로 타올랐던 그의 능광도.

문득,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내 옆에서는, 김영훈이 능광도를 함께 휘두르고 있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고통에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내가 보고 있는 허깨비.

하지만, 그 허깨비는.

영훈 형님이 말할 것 같은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한계가 있으면 어쩌겠냐. 그래도, 살아가야지.

단악검법과 단맥도법.

무형검과 능광도.

나는 어느새, 김영훈의 무(武)를 따라, 그와 똑같은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우공이산을 펼치고 있었다.

쿠웅, 쿵! 쿵!

내 발자국이 깊어질 때, 그의 발자국도 깊어진다.

나와 그의 동작이 겹쳐진다.

―살아간다는 게 그런 게 아니겠냐.

―잘난 놈 있고, 그 위에 더 잘난 놈 있어도.

―뭐 어쩌겠냐. 이 자리에서, 내가 받은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냥,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이 대화는 뭘까.

허깨비가 말하는 게 아니다.

실제 있었던 대화.

회사에서, 들었던 말인 것 같다.

―무와 삶이 다르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아나?

허깨비가, 싱긋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이 몸을 받아서 태어난 이상,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허깨비의 너머로, 이 세계로 넘어오기 이전의 김영훈과 내 모습이 보였다.

―이 자리에서, 내가 받은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

김영훈과의 짧은 기억과.

허깨비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그저, 잡념 없이 나아간다는 것.

―그냥,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부드러운, 그러나, 어쩐지 굳은살이 박인 가냘픈 손이.

등 뒤에서 나를 밀어 주었다.

김영훈이, 나보다 앞서 가며 나를 끌어 주었다.

그래, 잡념을 없애자.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라는 한계가 있을지언정.

어찌하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순간, 할 수 있는 걸 하자.

삶이 덧없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 운명의 한계는 더 이상 생각지 않고.

그냥, 검을 휘두르자.

나는, 내 손에 들린 무색유리검과, 그에 겹쳐진 무형검.

둘을 보며 생각했다.

둘은 곧 내 삶.

그렇다면.

나는, 다시금 내 옆에서 함께 우공이산을 펼치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김영훈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깨비의 모습이, 점차 내게 다가오며, 내게 겹쳐졌다.

'아, 그렇구나.'

나는 지금껏.

김영훈이 밟아온 발자국들을 쭉 따라왔구나.

눈앞에 보이는 것.

김영훈이 지난 삶 막바지 보여 주었던 발자국들을, 끊임없이 쫓아왔다.

하지만.

옆에서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고.

김영훈의 목소리는, 오히려 이제 뒤에서 들리고 있었다.

―앞만 봐라, 서은현!

가냘픈 손과 함께, 우직한 손이 동시에 내 등을 떠밀었다.

―네가 밟아온 것을 믿어라!

나는 그제야.

그제야, 지난 삶에서 내가 왜 [다음] 경지를 보는 데에 실패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원립이 고통을 줬다느니 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김영훈을 따라 했다.

월도입천에서부터, 우리의 길은 서로 갈라졌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빠르지 않아도 된다.

내 검은 황금빛이 아니어도 된다.

공간을 가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나는, 김영훈이 밟아온 길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자, 다음으로.'

이 너머를 밟으면, 그가 걸어온 길에서 벗어나게 될 터였다.

'영훈 형님. 당신이 밟았던 영역, 저도 밟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밟아 가자.

나는, 김영훈이 밟아온 길을 벗어나, 내가 밟은 이 영역에서, 외쳤다.

"월도(越道)!"

미안하지만, 형님.

이 영역의 이름은, 감히 제가 짓겠습니다.

당신이 밟아온 길을 기려.

그리고, 제가 처음 밟은 이곳을 기려.

"답천(踏天)!"

김영훈의 의지를 대신하여, 그렇게 우렁차게 우짖으며.

나는 무색유리검을 휘둘렀다.

부웅!

하늘을 뒤덮었던 놈의 혈해(血海)가, 그대로 반쪽이 나 갈라졌다.

슈릉, 슈르릉!

운명에 대한 잡념을 전부 버려, 공(空)이 된 내 마음 안쪽.

그 공이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무형검이.

내 마음의 구현화가.

공(空)과 하나 되기 시작했다.

―강환은 사실 하나.

―무와 나는 일체.

지난 삶의 영훈 형님이 남겨 둔 글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천지인의 논리에 따라 강환을 쪼개고, 그 천지인이 전부 나였음을 깨달으며, 강환을 무형검으로 녹여 내었다.

하지만.

아직 안 녹인 강환이 하나가 남아 있지 않은가.

내단(內丹).

나는 아홉 개의 강환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은, 열 번째 강환이 하나 남아 있었다.

공(空)을 깨달은 순간, 내 금단의 중심에 자리 잡은 내단이, 금단의 안쪽에서 녹아들며, 무형의 기운이 되어 내 손에 쥐여진 무형검과 하나가 된다.

김영훈의 체외 내단은, 어찌 되었든 이 영역에 이르는 길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내 체내에 있던 내단과, 완전히 연결된 무형검이, 단전을 시작해서, 전신에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 전신에.

근섬유 한 가닥 한 가닥에.

그 모든 혈관에, 무형검이 깃든다.

나는, 이제 곧 무형검 그 자체가 되었다.

김영훈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 역시, 능광도가 전신에 깃들며, 마침내 새로운 영역을 밟았을 터.

열 번째 내단을 녹여 낸 순간.

무형검의 진짜 공능이 내 손에 들어왔다.

김영훈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만들어 낸, 작은 기적.

어느새, 나는 원립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혈관 한 올 한 올에 무형검이 깃든 지금.

더 이상 우공이산의 영향으로 내 몸은 폭발하지 않았다.

육신의 내구도가 극한으로 치달았다.

나는 그 상태에서, 원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월악(越岳)!

단순한 가로 베기.

원립이 방어법술을 펼쳤다.

김영훈의 능광도라면, 이 영역에서 공간째로 베어 내며 원립을 회쳤을 터.

하지만, 나는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슈웅!

새로운 영역에 도달한 무형검은, 그대로 원립의 방어막을 투과(透過)하여, 방어막 안쪽.

원립의 몸만을 베어 냈다.

"…어?"

방어막을 펼친 원립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푸콱!

분명 방어가 제대로 됐을 텐데, 방어막이 깨지는 기색조차 없이 베여 나간, 스스로의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

촤르륵!

놈의 몸이 다시금 재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부웅!

나는 다시금 놈의 몸을 베어 냈다.

부웅, 부웅, 부웅!

방어막을 펼쳐도 소용없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모든 방어와 공격을 뚫고.

내 무형검은, 끊임없이 놈의 몸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궤적의 자유뿐만이 아닌 물질과 비물질의 자유를 손에 넣었다.

놈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최종 일격을 가했다.

월도답천(越道踏天), 무형검(無形劍).

무형의 검이, 모든 방어와 공격을 투과해, 그대로 놈의 금단(金丹), 그 안쪽에 있는 원영(元靈)을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