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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가 다 해먹음

1화 환생 퀘스트 (1)

나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으나,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몬스터들이 더욱 가까이 접근하자 내 오른편을 지키던 흑기사가 반응했다.

묵빛 대검을 쓰윽 뽑아 들고 거대한 검기를 날린다.

- 써-걱!

참격이 지나간 곳의 몬스터들이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기사의 머리 위에는 조그마한 상태창이 떠올라 있었다.

[고요한, 흑기사] [졸업생] [등급:S]

뒤이어 내 왼쪽에 서 있던 마법사도 두런두런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곧 몬스터 군단의 머리 위에 무수한 마법진이 떠오르며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 퍼퍼퍼퍼펑!

[홍현아, 루비 마탑주] [졸업생] [등급:S]

두 S등급의 활약 덕분에 길이 열리고.

나는 가던 길을 계속 나아갔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놈들이 사방에서 덮쳐 오지만,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저절로 튕겨 나가고 소멸한다.

내 뒤를 따라 걷는 사제.

그녀가 유지하는 강력한 보호막 덕분이다.

[이서, 성녀] [졸업생] [등급:S]

이 외에 다른 파티원의 면면을 살펴봐도 S등급으로 도배를 했다.

몬스터 군단이 아무 힘도 못 쓰고 길을 내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귀찮은 날파리들을 걷어 내자 폐허가 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쯤 부서진 대문을 뻥 걷어차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전 한가운데에 제단이 하나, 그리고 그 제단에 요사한 붉은빛을 뿌리는 보석이 놓여 있었다.

대충 집어 들어 어깨너머로 내밀자, 그림자 속에서 불쑥 솟아난 여성이 그것을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받아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뾰족한 송곳니가 돋아나 있었다.

[카르밀라, 마지막 흡혈귀] [졸업생] [등급:A]

- 번쩍!

카르밀라가 받아 든 보석이 폭발하는 듯한 광채를 발산했다.

곧 점점 크기가 줄어들며 붉은 기체로 화하더니, 그녀에게 남김없이 빨려들어 갔다.

보석의 힘을 모두 흡수한 카르밀라가 눈을 떴다.

[카르밀라, 흡혈귀 여왕] [졸업생] [등급:S]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1,000번째.'

아카데미 MMORPG <용살학원>.

플레이어는 아카데미에서 수많은 사건·사고를 거치며 성장한다.

졸업 후에는 최전선에서 드래곤을 비롯한 각종 보스 몬스터들을 토벌하게 된다.

이 게임에서 내 직업은 '서포터'였다.

왜 많고 많은 클래스 중에 하필 서포터인가?

그건 내가 이 게임에서 제일 좋아하는 컨텐츠와 연관이 있었다.

바로 '영웅 키우기.'

아카데미에 막 입학하는 1학년 햇병아리 NPC를 최강의 졸업생, S급 영웅까지 성장시킨다.

그리고 서포터야말로 이 작업에 가장 잘 어울리는 클래스였다.

'처음에는 고생 좀 했지.'

플레이어 자신이 S급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NPC를 S급으로 끌어올리려 했으니.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끝내 한 명, 두 명 S급을 달성해 냈다.

휘하의 영웅이 늘어날수록 점점 노하우가 생기고 작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언제부터인가 다른 플레이어들이 나를 'S급 찍어 내는 공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의 무력도 강해졌다.

내 직업은 여전히 서포터였지만, 키우는 영웅들의 직업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다 보니 뜻하지 않게 온갖 분야에 통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방금 S급을 달성한 [카르밀라]가 1,000번째다.

휘하의 S급 영웅만 무려 1,000명.

이들을 육성하며 얻어 배운 스킬이 수천 개.

통합 랭킹 1위.

최강의 서포터.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컨텐츠가 부족해.'

아카데미를 수백 번씩 들락날락하며 천 명이나 되는 영웅을 육성했다.

그중에는 기사, 무인, 마법사, 주술사, 사제를 시작으로 탐험가, 연금술사, 대장장이, 상인에 심지어는 농부, 마부, 낚시꾼까지.

온갖 직업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싹 다 S랭크로 키워 놓고 보니 이제는 남은 게 없다.

정확히는 이미 키운 영웅들과 중복되는, 고만고만한 친구들만 남았다.

'중복이라도 키울까? 이미 중복도 많은데.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나?'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던 도중, 시야 한구석에서 쪽지 모양 아이콘이 깜빡거렸다.

중요한 알림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뜻.

[당신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S급 졸업생 1,000명!]

[특수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멸망을 저지하십시오.

▷난이도:EX급

!!주의!!환생 퀘스트입니다!!

[수락/거절]

'이건....'

S급 퀘스트는 몇 번쯤 클리어해 본 경험이 있었다.

랭킹 1위에 오른 나에게도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위 단계인 EX급은 더욱 어려울 게 분명했다.

게다가 '환생 퀘스트'란다.

일시적으로 플레이어의 모든 능력치와 장비, 스킬을 거의 초기화하는 퀘스트.

당연히 온전한 상태로 임하는 일반 퀘스트보다 난이도가 한 단계 높다.

EX급에 환생이 더해지면 도대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일까?

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S가 최고 등급이 아니었단 말이지.'

중요한 것은 방금 막 알게 된, S랭크 위에 EX랭크가 존재한다는 사실.

EX랭크 퀘스트가 존재한다면,

EX랭크 아이템과 스킬도 존재할 것이다.

'EX랭크 영웅도.'

수집욕이 불타오른다.

더 강한 영웅들을 육성할 실마리를 잡았다.

이걸 난이도가 어려워 보여서 포기한다?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수락]을 선택했고,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다.

* * *

전후좌우 빽빽하게 나무가 늘어선 숲 한복판.

<용살학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문제는 내가 곧바로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는 점이다.

가령 어디선가 솔솔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 바람에 실려 오는 옅은 풀 내음까지.

지금 이 상황은 게임도 아니고, 꿈도 아니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거, 그건가?'

소설에서나 보던 '게임 속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그 소설의 주인공이 됐나 본데,

난이도 EX급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퀘스트인데.

그리고 설령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도 나는 분명히 퀘스트를 수락했을 것이다.

EX급 영웅을 육성할 기회란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빠르게 받아들이고 나아간다.

'상태창.'

[김 호]

▷스킬

(없음)

▷특성

(없음)

▷장비

평상복(F)

▷인벤토리

5실버

깔끔해진 상태창이 나를 반겼다.

갖고 있던 것들이 사실상 모조리 날아간 것이다.

다양한 S급 스킬과 특성들도, 온몸을 도배하던 전설급 장비들도, 천 명에 달하던 S랭크 영웅들도 이제는 없다.

사실상 캐릭터를 처음 생성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면서 서포터 클래스라면 앞으로 개처럼 구르는 일만 남았겠지만,

'아직 실망하긴 이르지.'

[환생 퀘스트 특전이 부여됩니다.]

'환생'이라곤 해도 아예 맨몸으로 EX급을 깨라고 던져 버리지는 않는다.

초기화를 하는 대신 최소한의 완충재로써 플레이어에게 몇 가지 무기를 쥐여 주는데 바로 환생 특전이라는 녀석이다.

이 특전은 기존에 보유한 스킬과 특성, 장비, 달성한 업적 등을 합산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안 해 본 짓이 없는 썩은물, 나에게는 꽤 짭짤한 특전이 주어진다.

['복사-스킬'을 습득합니다.]

['복사-특성'을 습득합니다.]

['증폭(F)'을 습득합니다.]

['군주(F)'를 습득합니다.]

[복사], [증폭], 그리고 [군주].

강력하고 효용성이 높아서 즐겨 쓰던 스킬들이었다.

성장 척도인 랭크가 F로 떨어진 것은 조금 뼈아프지만, 환생 퀘스트인 만큼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랭크는 다시 올리면 그만이지.

[김 호]

▷스킬

복사-스킬[0/1]

증폭(F)

▷특성

복사-특성[0/1]

군주(F)

▷장비

평상복(F)

▷인벤토리

5실버

내가 상태창을 다 확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르는 메시지.

[튜토리얼I]

▷조건:10분 동안 생존하십시오.

▷보상:용살학원 신입생 키트

[남은 시간 9:56]

숨 돌릴 틈도 없이 튜토리얼 퀘스트를 던져 준다.

10분 동안 잘 도망 다니는 게 목표.

다만 본래 튜토리얼이라 하면 초보자 훈련장에서, 고블린이나 놀 따위의 최하급 몬스터들 틈바구니에서 10분을 생존하는 것이고,

지금 내 위치는 어디인지 모를 숲 한복판이라는 점이 다르다.

- 쿠웅! 쿵!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육중한 발소리가 울렸다.

우지끈거리며 나무 부러지는 소리는 덤이었다.

곧 수풀을 헤집고 나타난 거구의 몬스터.

"벌써부터 오우거라."

"꾸우우우...."

오우거의 등급은 C에서 D 사이.

튜토리얼에 등장하기에는 지나치게 높다.

놈은 한 손에 사람 몸뚱이만 한 곤봉을 들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뜸 그것을 휘둘러 왔다.

재빨리 옆으로 이동하자 곤봉이 섬뜩한 파공음을 흘리며 땅에 꽂혔다.

- 쿵!

곧바로 가로로 휘저어지는 곤봉을 몸을 낮춰 피한다.

C~D등급 몬스터답게, 육체 능력 면에서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하고 민첩하다.

그나마 움직임이 단조로워서 예측만 잘하면 그런대로 피하기는 하겠다.

'가능하면 때려잡고 싶은데.'

왜, 잡지 말라는 거 잡으면 보상을 더 주지 않던가.

육체 능력의 차이가 너무 극심해서 어려울 것 같지만....

'시도라도 해 볼까?'

[복사-특성]

혼자서는 제대로 된 공격 기술 하나 배우기가 힘든 서포터에게 한 줄기 빛이다.

단어 그대로 상대방이 가진 능력을 복사하는 스킬.

[복사-스킬]은 스킬을 복사하고,

[복사-특성]은 특성을 복사한다.

단, 몇 가지 제약이 걸려 있다.

상대방의 스킬이나 특성이 발휘되는 것을 직접 확인해야 하며, 이름과 랭크를 정확히 맞혀야 한다.

여태 오우거가 공격하도록 놔두고 피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눈대중으로 파악한 바, 이놈은 C등급 특성을 갖고 있다.

['복사-특성'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특성 '괴력(C)'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특성[1/1]

1. 괴력(C)

온몸에 힘이 넘쳤다.

내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감지했는지 오우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마구잡이로 곤봉을 휘두른다.

슬쩍슬쩍 피하며 접근해서,

- 퍼억!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또 슬쩍 몸을 틀자 종이 한 장 차이로 곤봉이 스치고 지나갔다.

또다시 주먹을 놈의 복부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고, 나는 나지막이 혀를 찼다.

"쯧."

나름 손맛은 좋은데 큰 피해는 못 입혔다.

남은 시간을 확인해 보면.

[튜토리얼I]

▷조건:10분 동안 생존하십시오.

[남은 시간 06:03]

벌써 반 가까이 지난 상태.

시간이 충분하면 하루 종일이라도 두들겨 패서 잡겠지만, 아쉽게도 곧 튜토리얼이 끝날 것이다.

그런데 그때,

"꾸어엉?"

오우거의 얼굴이 핼쑥해지더니, 무언가에 겁을 집어먹은 듯 덜덜 떨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오우거가 주먹 두 방 얻어맞았다고 도망칠 몬스터는 아닌데.

왜? 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크오오오오—!"

머리 위에서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위쪽으로 시선을 올리기 무섭게 거대한 비행체가 훅 하고 지나간다.

"크롸롸롸롸—!"

다시 굉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비행체의 정체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용살학원> 최강의 생명체이자 S등급 보스 몬스터,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두 마리.

서포터가 다 해먹음

2화 환생 퀘스트 (2)

온몸이 핏빛 비늘로 뒤덮인 놈은 레드, 그리고 진청색 몸뚱이와 이마에 뿔이 셋 돋아난 놈은 블루 드래곤으로, 각기 화염과 뇌전 속성을 갖고 있을 터다.

별다른 저항 수단도 없는 지금, 드래곤은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자연재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나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는 듯하다.

"크롸롸롸—!"

"크오오오—!"

두 드래곤이 격돌할 때마다 일대에 충격파가 몰아쳤다.

나는 재빨리 근처의 굵직한 거목 하나를 끌어안고 버텼다.

충격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꼴이 몹시 불편했지만 내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그것도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

최종 보스급 몬스터 둘이 눈앞에서 투덕거릴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지금 [복사]를 써서 강력한 특성을 가져가면 앞으로 두고두고 편할 것이다.

"————!"

상황은 레드 드래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격돌할 때마다 일방적으로 상처를 입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도 블루가 스쳐 지나가며 놈의 날개에 기다란 발톱 자국을 남겼다.

상처에서 푸른 전류가 파직거린다.

레드가 고통스러운 듯 포효했다.

"크오오오—!"

'화나지? 그러니까 마법 한 번만 써 봐.'

내 생각이 전달되기라도 한 것처럼 레드의 근처 허공에서 붉은 마법진이 생성되고, 화염구 수십 개가 블루에게 우수수 쏟아졌다.

블루는 피하거나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몸으로 다 맞았다.

그럼에도 온몸에 그슬린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하다.

'좋았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복사]의 사용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이다.

블루가 마법을 몸으로 때울 때 발동된 특성, [원소 저항].

불, 얼음, 번개, 바람 등 모든 원소 계열 피해를 대폭 줄여 주는 특성이며, 드래곤이니 랭크는 당연히 S급이다.

['복사-특성'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특성 '원소 저항(S)'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S)

슬롯이 하나밖에 없어서 오우거에게서 훔친 특성, [괴력]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C급보다는 S급이지.

가볍게 버리고 [원소 저항]으로 갈아탄다.

'이제 가자.'

볼 장은 다 봤다.

아직 [복사-스킬]의 슬롯은 비었지만 훔쳐도 의미가 없다.

저 드래곤들이 쓰는 스킬들이 대부분 고등급 마법이라 그에 상응하는 마나 동력로, 즉 고등급 [코어]가 없다면 어차피 못 쓴다.

해서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는데.

"크오오오—!"

연이어 당하기만 하던 레드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돌연 크게 날개를 휘저어 물러났다.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무서운 속도로 주변의 공기와 마나를 빨아들이자 배가 풍선처럼 불룩하게 부풀었다.

'승부수를 띄우려나 보군.'

블루 드래곤 역시 그에 반응하여 이마에 난 뿔에 마나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거대한 전기의 구체가 파직거리며 크기를 키워 간다.

그리고 아래에서 직관 모드에 들어가 있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놈들은 서로가 가진 최강의 일격을 준비하는 중이다.

드래곤이 가진 최강의 일격이란?

바로 브레스다.

그리고 서로 다른 속성의 두 브레스가 만나면?

상충하며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에 있는 나는?

'이거 말려들겠는데?'

현명한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져야 살 가능성도 커지니까.

하지만 나는 제명에 못 죽을 성격이었다.

또 그놈의 실험 정신이 발동한 것이다.

[원소 저항]이 S급이니까....

'정면으로만 안 맞으면 버티겠네.'

저놈들이 브레스를 나한테 쏘지는 않을 것 아냐?

고목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곧이어 두 드래곤이 한계까지 에너지를 축적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브레스를 뿜어냈다.

- 콰아아아아!

- 파지지지직!

붉은 화염 광선과 푸른 번개 기둥이 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을 만들었다.

백색 섬광이 순식간에 일대를 집어삼키고,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뜨끈뜨끈하네.'

브레스의 범위 안에서도 고작 뜨끈하고 끝이다.

드래곤과 동일한 수준의 원소 저항력 덕분에.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앞으로 내가 죽더라도 최소한 타 죽거나, 얼어 죽거나, 감전사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화살에 머리가 뚫리거나 날카로운 검에 목이 잘리는 등 다양한 위험이 남아 있지만, 이만큼 줄인 것만 해도 어디인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백색 섬광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슈우우우우....

눈앞의 풍경은 두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기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안 돼서 숲 한복판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불모지로 화한 것이다.

수백 년은 나이를 먹었을 법한 굵은 거목들도 이제 작은 불씨가 타오르는 숯덩이로 둔갑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짓을 벌인 드래곤들은 벌써 어디로 날아가 버린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시간 0:00]

시기적절하게 튜토리얼의 남은 시간도 모두 소진되었다.

[튜토리얼I 완료]

▷주어진 시간 동안 생존했습니다.

▷보상:용살학원 신입생 키트.

[용살학원 교복(D)]

▷활동이 편리하며 D등급 방어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학생증]

▷용살학원의 학생임을 증명합니다.

▷용살학원의 각종 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열차 승차권]

▷용살학원행 열차에 탑승할 수 있습니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니 평상복이 거의 넝마 조각이 되어 있었다.

하기야 일대가 모조리 타서 불모지가 됐는데, 최하급 아이템인 평상복이 멀쩡하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교복으로 갈아입자 곧바로 다음 퀘스트가 나타났다.

[튜토리얼II]

▷목표:화살표를 따라 승강장으로 이동하십시오.

▷↗24.81km

눈앞에 조그마한 화살표가 떠올랐다.

나침반처럼 한 방향만 가리키고 있으며, 아래에는 남은 거리가 적혀 있다.

퀘스트가 안내하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불타고 그슬려서 황량했던 풍경이 다시 조금씩 녹색으로 물들었다.

브레스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앞에 어렴풋이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저쪽에서도 나를 알아챘는지 곧장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세요."

'얘는 처음 보네.'

<용살학원>의 모든 캐릭터를 줄줄이 꿰고 있는 나로서도 생소한 얼굴이었다.

신규 캐릭터.

어쩌면 EX급 퀘스트의 영향이 아닐까.

사내의 나이는 내 또래로 보였고, 무복을 입고 검을 찬 모습이 무협지의 무사를 연상시켰다.

어디 깊은 오지에서 살다 나왔는지 행색이 다소 초라했으나, 얼굴에서 광채가 날 정도의 미남이라 전체적인 외견은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내 교복을 보곤 반색을 했다.

"오, 용살학원 교복이로군. 혹시 이번 년도 신입생이시오?"

"네, 그쪽도?"

"이런 기막힌 우연이! 본인도 마찬가지라오."

사내가 품에서 넥타이핀을 꺼냈다.

핀의 색깔은 학년마다 다른데, 그가 꺼낸 건 지금 내가 교복에 꽂아 둔 것과 완전히 같은 흰색이었다.

같은 학년이라는 뜻.

그는 한층 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자기소개를 이어 갔다.

"본인은 고현우라 하오.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는 형장(兄丈)보다 다소 어릴 거요. 그러니 말씀 편히 하시오."

"그래. 나는 김호야."

"김 형이군.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동행하지 않겠소?"

"나야 좋지."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가는 길에 또 몬스터라도 마주친다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텐데, 마침 이 고현우라는 녀석은 검을 차고 있으니 적당히 업혀 가면 그만이다.

앞장서는 고현우를 조금 더 주의 깊게 관찰했다.

걸음걸이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매우 절제되어 있다.

오랜 세월 뼈를 깎는 수련을 거쳤다는 증거다.

'키워 볼 만해.'

얼핏 보기에도 제법 강해 보인다.

이 정도 자질이라면 가만 놔둬도 알아서 A급, 내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S급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도.

눈에 띄는 것은 또 하나 있었다.

허리춤에는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철검, 등에는 천으로 돌돌 만 길쭉한 물체를 지고 있다.

길이로 보나 굵기로 보나 이것 역시 장검일 가능성이 크다.

"등에 그건 장검이야?"

"바로 보았소. 우리 사문의 신물(神物)이라오."

"그런데 왜 그렇게 칭칭 감아 놨어?"

천으로만 돌돌 말아 두었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위에다 쇠사슬까지 잔뜩 써서 아주 봉인을 하다시피 했다.

마치 자기는 이걸 쓸 생각이 없다고 시위하는 듯하다.

고현우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허리춤의 철검을 쓰다듬었다.

"부끄럽게도 아직 봉인을 풀 자격이 없소. 그때까지는 이 철검이 본인의 동반자라오."

"그러냐."

"하지만 걱정할 것 없소. 아직까지는 이것만으로도 적수를 찾지 못했다오. 물론 용살학원이라는 곳에 가면 어떨지 모르지만 말이오, 하하."

호언장담하는 걸 보니 실력에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고현우는 내가 지나온 곳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헌데 김 형, 저쪽에서 오는 길이오?"

"어. 그게 왜?"

"방금 전에 그곳에서 고룡 두 마리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봐서 말이오."

"방금 전까지는 있었지. 지금은 가 버렸고."

"이런, 한발 늦었나 보군. 지나가던 참에 눈요기라도 할까 싶었건만."

고현우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드러났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김 형은 무언가 본 게 있소?"

"필요한 만큼은 봤지."

"오오, 어땠소?"

나는 두 드래곤의 전투를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2% 정도 조미료를 첨가해서 묘사해 주었다.

고현우는 영웅들의 무용담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들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서로 브레스를 갈기더라니까."

"브레스? 그게 무엇이오?"

"쉽게 말하면 오의나 필살기 같은 거지."

"필살기! 과연, 아까 본 거대한 폭발이 그 브레스라는 것이었나 보군."

고개를 주억이는 고현우였다.

그러다 또 의문점이 떠올랐는지 묻는다.

"그렇다면 김 형은 그 브레스라는 것을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 아니오?"

"가깝다면 가까운 데서 봤지. 그게 왜?"

"그토록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공격이었는데, 너무 멀쩡해 보여서 말이오."

확실히 의문을 떠올릴 만한 부분이었다.

가까이서 드래곤 두 마리가 치고받는 광경은 물론 브레스까지 목격했다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에게서 털끝 하나 다친 구석을 못 찾겠는가?

이럴 때는 내가 가진 패를 숨기는 게 이득이다.

"나한테도 한 수가 있지. 네 등에 있는 그 장검처럼."

"그렇군. 세상에 강자들이 모래알처럼 많다더니, 벌써 이렇게 김 형을 만나는구려. 기회가 닿는다면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소."

"기회야 앞으로도 많겠지. 일단 가자. 열차 놓치겠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깜박 잊고 있었소. 얼른 갑시다."

고현우가 힘찬 걸음으로 앞장섰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3화 아카데미행 열차 (1)

<용살학원>에는 갖가지 세계관이 뒤섞여 있다.

검과 마법이 등장하는 중세 판타지 도시에 있다가도 한 발짝만 벗어나면 무림, 슬쩍 시선을 돌려보면 현대식 건물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니 눈앞의 승강장이 고풍스러운 전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제시간에 맞췄네."

"전부 김 형 덕분이오."

고현우가 칭찬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얘는 길 찾기에는 썩 재능이 없었다.

반면 나는 퀘스트 화살표가 지시하는 대로만 가면 됐으니 헤맬 일이 아예 없었고.

'그래도 도움은 됐지.'

고현우가 가는 길에 마주친 사소한 몬스터들을 처리했으니 나로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승강장에는 이미 열차가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었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오가는 게 눈에 띄었다.

우리는 역무원에게 다가갔다.

사십에서 오십 사이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굉장히 머리숱이 풍성했다.

게다가 머릿결은 또 어찌나 좋은지 산뜻하게 찰랑거리기까지.

'...저거 혹시 가발 아니야?'

나는 그런 의구심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승차권을 건넸다.

역무원이 승차권을 확인하고 나와 고현우를 쓱 훑어보더니 묻는다.

"1학년?"

"네."

"1학년은 1번부터 10번 차량에 타면 돼요."

"감사합니다."

줄줄이 이어진 차량들을 훑으며 걷다 보니 이내 <10>이라는 번호가 붙은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열차에 발을 올리자마자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튜토리얼II 완료]

[튜토리얼III]

▷목표:입학식에 참석하십시오.

[TIP:열차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어 보세요.]

용살학원행 열차는 객실형이다.

오른쪽 절반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왼쪽 절반은 작은 방 형태의 객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고현우와 나는 복도를 걸으며 객실 문마다 조그맣게 난 창문들을 기웃거렸다.

빈 객실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빈 객실은커녕 빈자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열차가 거쳐 온 다른 승강장에서도 학생들이 잔뜩 탔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10번 차량부터 쭉 걷고, 기웃거리고, 걷기를 반복하며 8번 차량쯤 왔을까,

마침내 고현우가 적당한 객실을 발견했다.

"김 형, 이곳에 자리가 있는 것 같소."

슬쩍 안쪽을 들여다보니 한 사람밖에 없다.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었다.

객실 내부의 크기는 두어 평 정도.

한가운데에 그리 크지 않은 탁자가 하나, 그리고 그 탁자를 끼고 붙박이 의자들이 마주 보고 있었다.

한 객실당 네 명이 앉아서 가는 구조다.

창가 쪽 좌석에는 옅은 회색빛 머리칼을 한 여학생이 엎드려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

회색 머리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미인이라는 것이었다.

미남미녀가 나름 흔한 <용살학원>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정도로.

남정네들의 본능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졸려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나른한 얼굴과 다시 잠들지 말지 고민하는 듯 반쯤 뜬 눈.

지금 막 깨어나기도 했지만, 어쩐지 평소에도 이럴 것 같다.

마지막으로, 수집가의 오랜 경험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원석이다.'

당장은 막연한 느낌뿐이지만, 이런 캐릭터는 백에 구십구는 어렵지 않게 S급에 도달했었다.

내 느낌이 들어맞는지는 앞으로 확인해 보면 되겠지.

어쨌든 계속 눈싸움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가 먼저 물었다.

"혹시 자리 비었어?"

"응."

교복 위에 걸친 후드티가 살짝 오버 사이즈인지 헐렁한 소매에 손가락만 살짝 보였다.

그 손이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친다. 여기 앉으라는 뜻이겠지?

나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앉았다.

고현우는 맞은편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본인은 고현우라 하오."

"나는 김호야."

"서예인."

간단한 자기소개가 오간 후,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살학원>의 스토리와 퀘스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네임드부터 사소한 엑스트라까지 전부 외워 두었다.

하지만 고현우, 그리고 서예인.

둘 다 처음 본다.

또 승강장에서 간략하게 둘러본 바로는 다른 학생들과 역무원들 등도 모두 낯선 얼굴들뿐이었다.

무대는 같지만, 등장인물이 다르다.

그로 인해 앞으로 발생할 사건이나 퀘스트 등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그대로일지 계속해서 주시할 필요가 있으리라.

- 덜컹,

몸이 가볍게 흔들리며 옅은 부유감이 든다.

창밖의 풍경도 점점 뒤로 처지는 걸 보니 열차가 출발했나 보다.

그런데 한참 전부터 계속 시선이 느껴진다.

서예인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덜 졸린 눈으로.

"...."

"...?"

무슨 할 말 있냐는 눈빛을 보내자 자기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는다.

귀여움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극한의 실용성만을 추구하는 택티컬한 금속 가방.

그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자그마한 종이봉투를 꺼낸다.

그리고 종이봉투에서 꺼낸 초코칩 쿠키를 나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 * *

서예인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눈이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을 수치화하여 정보로 보여 주는 눈이.

가령 무복을 입은 남학생에게서는 평소와 비슷한 것이 보였다.

[상태]

고현우

▷스킬

천류풍운검법(D)

...

▷특성

검술(C)

코어(E)

...

...

...등등.

원한다면 언제든 자세히 뜯어볼 수 있겠으나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다른 남학생의 정보는 물음표투성이였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물음표투성이.

[상??]

?????

#?▷????

?복??

??군?

▷???

▷???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창을 보는 것은 서예인이 '눈'을 가지게 된 이래로 이번이 네 번째였다.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간 무수한 상태창 중에서 네 번째.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앞선 세 명은 모두 자신에게 깊은 의미를 갖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자신을 김호라고 소개한 눈앞의 사내도 그렇게 될까?

여러 이유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계속 바라본다고 상태창을 가득 채운 물음표들이 바뀔 리가 없는데도, 그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김호가 자신을 마주 보며 의문이 담긴 눈빛을 돌려보냈다.

서예인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다가, 문득 예전에 들었던 조언 하나를 떠올렸다.

관심 가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 호의를 베풀라고 했었지.

서예인이 가방에서 쿠키를 꺼냈다.

"쿠키 먹을래?"

* * *

"어. 고맙다."

나는 얼떨결에 쿠키를 받아 들었다.

손바닥 반절쯤 되는 크기에, 동그라미에서 한참 벗어나서 울퉁불퉁하며, 군데군데 초코칩이 고르지 못하게 박혀 있다.

미관상으로는 썩 식욕이 돋지 않지만, 그래도 초코칩 쿠키 맛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

서예인이 또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맛은 어떤가 묻는 듯하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적절한 단어를 골랐다.

"...쿠키가 담백하네."

단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담백함 덩어리.

초코칩에 약간의 기대를 걸었으나 순도 65% 카카오인 듯, 단맛보다 쓴맛이 더 강했다.

물론 내가 예상하던 쿠키의 맛과 달랐을 뿐이지,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해서 쿠키 하나를 어렵지 않게 해치웠다.

"...."

그리고 서예인은 먹는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에 아무 표정도 안 나타나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못 읽겠다.

그래도 계속 눈만 마주치고 있기는 부담스러워서 화젯거리를 찾았다.

"괜찮네. 직접 구운 거야?"

"응, 하나 더 먹어."

고현우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으나,

"크흠, 실례가 안 된다면 본인도 하나."

"이게 마지막이야."

서예인은 매정하리만치 단호하게 끊었다.

동시에 종이봉투에서 나온 마지막 쿠키를 내 입에 쏙 물려 주었으니 이게 마지막이기는 했다.

어쩐지 쟤한테는 주기 싫어서 그랬다는 느낌도 적잖이 들지만....

고현우는 뭐라 말하려다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때,

- 드르르륵,

갑자기 객실 문이 열리며 깍두기 머리 남학생이 난입했다.

그리고 고현우 옆 빈자리에 턱 걸터앉았다.

"아이고 여러분,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미안한데 여기 잠깐만 앉았다 갈게요."

"본인은 개의치 않소. 편히 머물다 가시오."

"나도. 어차피 빈자리야."

"...."

서예인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깍두기 머리가 씩 웃었다.

"이런 환영받는 느낌, 아주 좋아. 나는 병철이야. 신병철."

'얘는 평범하네.'

신병철을 보자마자 대략적인 견적이 나왔다.

무난하게 가면 C급, 정말 노력하면 B급 정도일까.

고현우와 서예인에게서 보이는 잠재력이 너무 찬란해서 이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 냉혹한 평가와는 별개로 신병철과 안면을 익혀 둬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객실에 들어올 때부터 대강 정체를 짐작했으니까.

힌트를 던지자면, 저렇게 요란하게 다니는 사람이 발소리는 거의 내지 않는다는 점.

신병철의 자기소개에 모두 가벼운 통성명으로 답했다.

신병철은 유독 고현우에게 관심을 보였다.

"무복을 입은 걸 보니 문파 쪽에서 나왔나 봐? 사문이 어디야?"

"천풍문이라는 곳이오."

"천풍문? 천풍문, 천풍문.... 처음 듣는데."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인전승 문파라오. 처음 들을 수도 있지."

"그래? 일단 메모해 둘게. 보자...."

신병철은 품에서 조그마한 메모장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쓱쓱 적어 넣었다.

다음으로 서예인과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너희도 뭐 소속된 문파나 마탑 같은 거 있냐?"

"아니."

"...."

서예인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다시 메모장에 뭔가 휘갈기는 신병철.

"정보는 중요하지. 정보는 돈이 되거든."

"돈이 된다고 말하는 걸 보니 사고팔기도 하나 보네."

"당연한 말씀을. 그리고 정보만 파는 것도 아니야."

내가 관심을 보이자 잠재적인 고객이 될 수 있다 여겼는지, 잽싸게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넨다.

싸구려 주점에서 뿌리는 것과 비슷한 조잡한 디자인에, 가운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용살학원 심부름 서비스!]

"언제 어디서든 이 신병철을 찾으시라! 적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뭐든 구해다 드리지."

나는 명함을 흥미롭게 앞뒤로 뜯어보며 물었다.

"뭐든 구해다 준다라.... 다소 교칙을 어기는 것도 상관없을 거고?"

"아, 물론입죠. 말씀만 하십쇼."

"지금도 그것 때문에 쫓기는 중이고?"

"!"

신나서 주절대던 신병철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이 객실에 들어온 건 단지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티 많이 났냐?"

"아까부터 시선이 자꾸 문 쪽으로 가더라."

"헤헤, 이거 참. 숨긴다고 숨겼는데."

말 나온 김에 또 한 번—이라며 객실 밖을 기웃거리는 신병철이었다.

그러다가 뭘 봤는지 후다닥 돌아와서는 자리에 앉은 다음, 원래부터 이 객실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뗀다.

그러나,

- 드르륵!

다시 객실 문이 열렸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화 아카데미행 열차 (2)

다시 객실 문이 열리며 여학생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서예인에 비할 만한 미인이지만, 차갑고 엄격해 보이는 인상 탓에 어지간해서는 말 한마디 붙이기도 힘들 것 같다.

연한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팔에는 '학생 선도'라 적힌 완장을 찼다.

문밖에는 덩치, 귀티가 줄줄 흐르는 귀공자, 그리고 사람 좋게 방긋방긋 웃는 여학생이 자리를 잡았는데, 모두 팔에 찬 완장이 같았다.

'초반부터 선도부랑 엮였군.'

학생선도부.

용살학원 내외의 치안을 관리하는 학생 단체다.

전통적으로 1학년 선도부는 사전에 조기 입학을 하고, 기본적인 지침을 숙지한 후 곧바로 열차에 투입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각지에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이 용살학원행 열차야말로 선도부가 경험을 쌓기에 아주 훌륭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병철은 그 선도부의 경험치가 되기 직전으로 보이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여학생이 신병철을 노려보며 손을 내밀었다.

"돌려주세요. 그건 당신이 가져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신병철은 물건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유지한 채, 눈으로는 연신 여학생의 어깨너머를 흘깃거린다.

어떻게 하면 도주로를 확보할 수 있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으리라.

여학생이 물었다.

"뭐가 우습죠?"

"아니, 좀 집착이 심하다 싶어서. 얼굴은 예쁘장해 갖고 피곤하게 굴면 남자애들한테 인기 없을 거—거걱!"

- 파지직!

짧은 전류가 신병철을 때렸다.

간편 전격 마법인 [잽(Zap)]이다.

'뇌 속성 마법사는 흔치 않은데.'

가능하면 엮이지 않고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침 [복사-스킬] 슬롯이 비었으니까, 슬쩍 끼어들어서 하나 챙길까?

신병철이 전격에 격중당한 짧은 찰나 계산을 끝마쳤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서예인에게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다.'

신병철은 약한 마비 상태에 빠졌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고, 옆으로 넘어가려다가 가까스로 객실 탁자를 짚고 버텼다.

온몸의 무게가 가득 실려 있었기에 탁자를 짚는 반동이 내 팔꿈치를 때렸다.

- 턱!

'지금.'

야금야금 떼어 먹던 수제 쿠키가 내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거기에 열차가 가볍게 한 번 덜컹거리자 나에게서 더욱 멀어졌다.

이제는 너무 늦어 버렸다.

땅에 떨어지고 3초가 지난 음식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명분은 만들었고.'

이제 끼어들 타이밍만 잡으면 된다.

신병철은 비틀거리며 마비된 몸을 풀고 일어났다.

바지 뒷주머니로 손이 슬슬 움직인다.

"아~ 이거 난감하게 됐네. 정면 승부에는 자신 없는데...."

"순순히 내놓을 생각이 없나 보네요. 제압하겠습니다."

여학생이 한 손에 묵빛 장갑을 꼈다.

황금색 자수가 수놓여 있고 군데군데 깨알같이 토파즈가 박혀 있는 게 제법 고급진 아티팩트로 보인다.

손가락을 튕기자 장갑이 강렬한 빛과 함께 전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파직거리는 전류가 자그마한 벌새의 형상을 갖추더니, 신병철을 노리고 쏘아져 나갔다.

[허밍버드(Hummingbird)]

- 파지지직!!

그러나 허밍버드는 신병철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못했다.

날아가던 도중 내가 뻗은 손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내 손바닥에서 자그마한 전류의 폭발이 일어나며 스파크가 튀었다.

직접 맞아 보니 확실하다.

'D급처럼 보이지만 E급.'

나는 간질간질한 손을 털어 냈다.

뜻밖의 방해꾼에 여학생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잠시 내 얼굴을 응시하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한패가 있었나요.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서는 못 봤는데."

"한패는 아니고. 갑자기 없던 볼일이 생겨서."

"무슨 볼일이시죠."

"내 쿠키."

"...네?"

나는 지금도 바닥을 왔다 갔다 돌아다니는 반쪽짜리 수제 쿠키를 가리켰다.

"너네 때문에 떨어졌거든. 저거 돈 주고도 못 사 먹는 건데."

"고작 쿠키 때문에 선도부의 행사에 끼어드는 건가요?"

"고작 쿠키는 맞는데, 잘 먹던 사람 입장에서는 열 받지."

여학생은 별 어이없는 놈 다 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동시에 내 말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곧바로 행동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러자 뒤편에서 지켜보던 선도부 셋 중 귀공자가 객실로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허리춤의 황금빛 검을 뽑아 들 기세다.

"되도 않는 트집을 잡는군. 좋은 말로 할 때 비키는 게 어떤가? 그렇지 않으면 쿠키가 아니라 뜨거운 맛을 보게 해 주마."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라오."

고현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을 뽑을 생각이라면 본인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요."

"...."

귀공자의 시선이 고현우에게 꽂혔다.

무복을 입은 것을 확인하고 시선이 손에 쥔 검집으로 옮겨 갔다.

그것의 정체가 싸구려 철검이라는 걸 알아채자 얼굴에 비웃음이 번진다.

"보고만 있지 않으면? 어쩔 테냐?"

"...."

귀공자는 사나운 웃음을 머금고, 고현우는 침착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신병철이 훔친 물건에서 시작된 문제가 쿠키를 거쳐 두 무인의 싸움으로 번지려는 찰나,

"잠깐만요."

여학생이 손을 들어 중재에 나섰다.

그리고 이게 과연 통할까 하는, 반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묻는다.

"학생 식당에서 쓰는 디저트 쿠폰을 보내 드리죠. 이걸로 됐나요?"

"뭐, 그럽시다."

"그럼 더 방해하지 말고 물러나세요."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고현우도 내가 눈짓을 보내자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호기롭게 나선 것에 비해 너무나도 순순히 물러났기에, 선도부 몇몇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미 원하는 건 얻었다.'

['복사-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스킬 '허밍버드(E)'를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스킬[1/1]

1. 허밍버드(E)

스킬은 [허밍버드], 특성은 [원소 저항]을 저장했다.

다른 스킬이나 특성을 얻으려면 슬롯을 늘리거나, 기존의 슬롯을 덮어씌워야 한다.

"!"

기회를 엿보던 신병철이 이때다 싶었는지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연체동물처럼 몸을 구불거리며 빈틈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여학생의 손끝에서 다시 번개로 만든 벌새가 날았다.

- 파지지직!

"어으억!"

보는 사람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볼썽사납게 고꾸라지는 신병철.

거기에 앞으로 튀어 나가는 관성까지 더해져서 반쯤 열린 객실 문에 쾅! 머리를 찧고 말았다.

'어우, 저건 좀 아프겠다.'

깍두기 머리에 큼지막한 혹이 하나 생기지 않았을까?

신병철은 머리를 세게 부딪힌 충격으로, 그리고 허밍버드에 온몸이 마비되어 바닥에서 꿈틀거리기만 했다.

여학생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신병철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한 뭉치나 되는, 풍성하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었다!

"역무원분의 가발을 훔쳤더군요. 장난이 지나쳤습니다."

"아이고...."

"저런...."

나와 고현우는 바닥을 기는 신병철을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지금 보니까 선도부가 쫓아올 만했네.

병철이가 나쁜 놈이었어.

어떻게 대머리의 가발을 훔치는, 그런 반-인륜적인 짓을 저지를 수 있냐는 말이다.

선도부 4인조는 전격 마법에 살짝 그슬린 가발을 회수해 지퍼 백에 집어넣었다.

떠나기 전에 여학생이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신병철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미리 경고해 두죠. 신병철 학생은 우리 선도부에서 예의주시하는 인물입니다. 가급적이면 엮이지 말도록 하세요.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가만 안 둘 겁니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이고. 살펴들 가십쇼."

"흥."

여학생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째릿 노려보고는 등을 돌렸다.

귀공자가 떠나기 전 고현우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너, 기억해 두마."

"마찬가지요."

그리고 문을 닫고 나갔다.

"...."

"아오, 아오, 아이고, 삭신이야...."

선도부 사 인조가 떠나고 잠시 후, 신병철이 앓는 소리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파직거리는 정전기가 튀기고 그에 맞춰 몸을 펄떡거린다.

대머리의 가발을 훔친 대가로는 싼 게 아닐까?

옆에서 지켜보던 고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용살학원에는 학생선도부라는 강력한 무력 단체가 존재한다더니, 저들이 그자들인가 보오."

"끄어응윽, 맞아.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만 엄선해서 뽑으니 약할 수가 없지. 나한테 허밍버드 날린 애 봤지? 걔 누군지 알아?

"본인의 식견이 좁은 터라 잘 모르오. 가르쳐 주시겠소?"

"힌트. 송씨야."

곧바로 고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송씨라면.... 혹시 토파즈 마탑의 종주인 송씨 가문을 말하는 것이오?"

"바로 맞히네. 그 송씨 가문 맞아. 그리고 걔는 무려 우레군주 송경욱의 손녀딸, 송천혜란 말씀이야."

"허어, 범상치 않은 소저 같기는 했소만, 우레군주의 손녀라니. 오늘 안계를 크게 넓히는구려."

고현우가 나지막이 감탄성을 흘렸다.

우레군주는 번개를 다루는 수많은 영웅들의 정점.

오직 가장 강한 한 명에게만 붙는 타이틀이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탈 S급'이라고 불릴 정도니,

<용살학원>의 세계관을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강자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뒤에서 대기하던 셋도 다들 한 가락 하는 친구들이야. 덩치 큰 친구는 조벽이고, 싱글싱글 웃던 여자애는 한소미인데, 각각 권왕과 검후의 제자 되는 몸이시지."

"그 귀공자처럼 생긴 자의 정체는 무엇이오?"

"금조한. 황금련주의 하나뿐인 아들인데, 너도 봤다시피 재수 없는 놈이야. 턱걸이로 선도부에 들어갈 실력은 되는 것 같지만 앞의 셋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손색이 있지."

"대단하군. 선도부에는 다 그런 자들만 모여 있는 거요?"

그 질문에 신병철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비교적 애매한 태도로 답했다.

"어어.... 그렇기는 한데 그게, 올해가 조금 특이한 편이래. 선도부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신입생들 수준이 엄청나게 뛰었다고 들었거든? 우리 길드 선배들도 올해 기수보고 말이 많더라."

신병철은 드디어 마비가 완전히 풀렸는지 아침 체조하듯 팔을 붕붕 돌려 가며 몸을 풀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다 얘들아. 나중에 보면 아는 척하기다. 그럼 수고!"

그리고 바람처럼 객실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허허, 참으로 정신 사나운 친구로다. 안 그렇소, 김 형?"

"그러게."

나는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던 서예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다. 쿠키 맛있었는데."

"또 해 줄게."

"진짜?"

"응."

졸지에 쿠키 약속을 받아 버린 나였다.

서예인은 슬슬 다시 피곤이 몰려오는지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르 탁자에 엎드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

"...."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탓일까, 조용한 오후의 객실 분위기가 달갑다.

고현우도 나도 별다른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고현우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김 형, 하나 물어봐도 괜찮소?"

"뭔데?"

"정말 과자 때문에 끼어든 거요?"

"...."

"간식 시간이 방해받으면 화가 나는 건 본인도 동의하나.... 어쩐지 숨겨진 곡절이 있어 보여서 말이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데.'

바른 생활 청년같이 생겨서는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간다.

고현우에게서 본 의외의 일면이었다.

나는 약간은 신선한 기분을 느끼며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복사-스킬]의 조건 달성 때문이었지만, 그것을 빼놓더라도 이유가 있었다.

"워낙 보기 드문 뇌 속성 마법사니까, 가볍게 실력이나 보자 싶었지."

"으음.... 허나 김형이 한 거라곤 송 소저의 한 수를 받아 낸 게 전부 아니오?"

내가 한 거라곤 중간에 쓱 끼어들어서 허밍버드를 받고 빠진 게 전부인데, 그것만으로는 실력을 보기에 부족하지 않냐는 말이다.

내가 되물었다.

"허밍버드라는 마법에 대해 얼마나 알아?"

"방금 본 게 처음이오."

"그럼 처음 보기에는 어땠는데?"

"으음...."

고현우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본 장면들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매우 빠르고, 적에게 피해를 입히기보다 마비나 경직 등 적의 제어에 중점을 둔 기술 같소."

"반은 맞았어."

"나머지 반은 무엇이오?"

"잘 봐."

나는 손바닥 위에 허밍버드를 만들어 보였다.

파리만 한 크기라 송천혜의 벌새와 심히 비교된다.

아직 마나 동력로, [코어]를 만들지 않았기에 하급 마법이라도 제대로 구현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움직임만 보여 주는 건 이 크기로도 충분하겠지.

손 위에서 벌새가 날아올랐다.

내 조작을 따라 허공에서 8자 모양을 그리거나, 지그재그로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벌새의 비행을 따라 만들었다 해서 허밍버드거든."

"과연, 그런 움직임이라면 상대하기가 적잖이 까다롭겠소."

"술자의 숙련도에 따라 성능이 천차만별이지."

고현우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헌데 그것과 송 소저의 실력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요?"

"거꾸로 생각해 봐. 술자의 숙련도에 따라 벌새의 움직임이 달라진다면."

"...아! 벌새의 움직임으로 실력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겠구려."

"그렇지."

송천혜가 정말 숙련된 마법사였다면 내 난입을 감지한 순간 허밍버드에 어떤 움직임의 변화라도 있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내 손을 우회해서 날아갔거나, 잠시 뒤로 빠진 뒤 다시 날아갔거나.

하지만 송천혜의 벌새는 곧장 내 손바닥에 꽂혔다.

마법의 컨트롤, 또는 실전 경험이 미숙하다는 증거였다.

"송 소저의 한 수에 그토록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니."

'그게 다가 아니지.'

손수 몸으로 파악한 바로는, E급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D급이라 봐도 무방할 만큼 위력이 강했다.

마법을 보조하는 강력한 특성을 배웠거나, 또는 타고난 마력량이 어마어마하거나.

어느 쪽이든 잠재력이 높다는 뜻이다.

'우레군주의 손녀라. 확실히 이름값은 해.'

언젠가 영입할 영웅 리스트에 송천혜의 이름을 추가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 고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김 형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배우는 게 많구려. 기연이 아닐 수 없소."

"기연이라 할 것까지야. 이 정도쯤은 그냥 가르쳐 줄 수 있지."

"김 형은 역시 배포가 크군. 첫 친우가 될 사람을 잘 골랐으니 내 안목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소. 하하."

뭐든 좋게 해석해 버리는 고현우였다.

고현우는 돌연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혹 본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내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그래? 그럼 말 나온 김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랑 어디 좀 다녀오자."

히든 피스 하나만 주워 먹으러.

서포터가 다 해먹음

5화 히든 피스 뽑기 (1)

"멋진 한 수였다."

송천혜는 어깨너머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말문을 연 사람은 그녀와 같은 학생선도부의 일원, 금조한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별 시답잖은 일로도 끊임없이 말을 붙여 대는 그였다.

그것이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임을 모르지는 않으나, 호의를 되돌려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원활한 집단생활을 위해서는 아예 무시로 일관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송천혜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쿠키가 어쩌고 하면서 끼어든 방해꾼 놈 말이다. 나였으면 괘씸해서라도 뜨거운 맛을 보여 줬을 텐데, 네 허밍버드를 맞고도 멀쩡하더군."

한소미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마지막에 봐준 거지? 컨트롤이 더 좋아졌어~"

"...."

조벽은 항상 묵묵한 그답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긍정하는 분위기였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송천혜가 한순간 우뚝 멈춰섰다.

금조한이 물었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송천혜의 머릿속은 두 배는 더 복잡해졌다.

솔직히 그 남자가 끼어든 건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부끄럽게도 허밍버드의 제어가 한 박자 늦고 말았다.

폭발하는 뇌전을 봤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내가 엉뚱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일까, 그 남자는 허밍버드를 정면으로 받아 내고도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다 못해 아예 아무 영향도 안 받은 것 같았다.

마탑의 실력자들도 격중당하면 아주 짧게나마 움직임에 지장이 생기는데, 가볍게 손을 털고 끝이라니.

'어떻게 된 거지?'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던 찜찜함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송천혜는 곰곰이 방금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생각할수록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혹시 내가 무슨 초보적인 실수라도 한 게 아닐까?

마력을 충분히 싣지 않았다거나, 술식이 허술했다거나.

하지만 그녀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한쪽 귀의 소형 무전기를 통해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에.

[4-C 객실에서 학생 간 분쟁 발생. 지원 바랍니다.]

"곧 가겠습니다."

송천혜는 다른 선도부원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들 역시 같은 연락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그러지."

이내 싱글싱글 웃는 한소미에게는 큼지막한 지퍼 백을 넘긴다.

신병철에게서 압수한 가발이 들어 있는 그 지퍼 백이다.

"소미 너는 역무원님에게 이거 전해 주고 와. 아마 13번 차량쯤에 계실 거야. 오면서 슬롯머신에 문제없나 확인하고."

"오케이! 갔다 올게!"

해맑게 손을 흔들고 떠나는 한소미였다.

송천혜는 열차 복도를 따라 걸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이 산더미다.

그 묘하게 거슬리는 남자는 일단 잊어버리자.

* * *

본래 용살학원행 열차는 고위층들을 위한 관광 열차로 설계되었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 탓에 이 프로젝트는 도중에 무산되었지만, 열차 자체의 튼튼함을 높게 평가한 용살학원에서 열차를 매입했다.

지금은 용도에 맞게 개조한 후 이렇게 멀쩡히 운행 중이다.

다만 아직 열차 곳곳에 '관광 열차'의 잔재가 남아 있고, 그것은 <용살학원>에서 일종의 히든 피스 역할을 한다.

내 목표는 바로 그 히든 피스다.

1번부터 10번 차량까지가 1학년 구역, 그 뒤는 2학년과 3학년 구역이다.

우리가 8번, 9번 차량을 지나 10번 차량 끄트머리에 가까워지자 따라오던 고현우는 내 목적지가 11번 너머인 줄 알았나 보다.

"김형, 2학년 구역에 볼일이 있는 거요?"

"2학년 구역에는 2학년 선도부가 돌아다니겠지. 지금 우리 실력으로 돌파하는 건 어림도 없어."

"하면?"

"직접 봐. 다 왔다."

10번 차량의 끝자락에는 커다란 빈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낡고 작은 슬롯머신이 하나.

관광 열차의 잔재,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작은 오락실 겸 카지노의 잔재였다.

개조하는 과정에서 싹 밀어 버리기는 했는데, 어째서인지 저 슬롯머신만큼은 제거할 수 없었단다.

동전을 넣고 레버를 당기면 화면 세 개가 돌아가는 전형적인 구식 슬롯머신.

불도 전혀 안 들어오고, 심지어 누군가 동전 투입구 위에 '고장'이라고 써 붙여 놨다.

섣불리 동전을 넣었다간 낼름 먹어 버리고 돌려주지도 않을 것 같다.

고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온 거요? 고장이라 써 있소만...."

"제대로 왔어."

우선 '고장' 딱지부터 뜯어냈다.

사실 멀쩡히 잘 돌아가거든.

[인벤토리]

▷5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