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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6화

8장 첫 번째 정령

그곳은 종유석으로 가득한 거대한 공동이었다.

그것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눈부신 종유석이.

-어서 와라 인간이여.

중심부에는 수십 개의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메르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바위를 향해 중얼거렸다.

"바위가 움직인다...."

-나는 룩카르다.

바위들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묶이며 사람의 형상으로 일어났다. 정확히는 오우거의 형상인데 대충 그게 그거지.

-나는 자이루스 산맥의 정수이며,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오우거들의 수호자다.

"지금 무슨 소리 들려?"

혹시나 해서 메르데스에게 물었다. 메르데스는 경계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위가 스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 정령은 덩치가 엄청나군요."

역시 안 들리나보구나. 뭐 전에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바위정령이 내 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들려. 너도 내 목소리가 들려?'

-들린다. 너는 우리와의 교감이 극도로 떨어지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대화하는 방법을 능숙하게 찾아내는구나.

그야 전에도 해봤으니까.

워낙에 정령마법 잠재력이 바닥을 기는 바람에, 처음엔 이런 식의 소통 자체가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냥 들린 대로 말하는 거야. 근데 왜 굳이 머릿속에 말하는데?'

-너는 정령과의 교감이 떨어지는 인간이다.

-그래서 내가 외부로 말을 하면, 지금의 너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너 같은 인간에게 들리도록 직접 말하는 게 오히려 더 힘들다. 그래서 내 뜻을 이렇게 직접 네 머릿속에 때려 박고 있는 거다.

때려 박아? 표현방식이 어째 전에 봤을 때보다 좀 과격해진 거 같구만. 뭔가 흥분했나?

-우선 전할 것이 있다. 내가 오라고 한 건 너, 작은 인간 하나뿐이었다.

'왜?'

-오우거를 도운 건 너 혼자니까.

-하지만 이건 내게 속한 수족이 의견 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일일 뿐.

-그러니 너를 책하진 않겠다. 대신 나중에 수족을 혼내도록 하지.

'살살 해. 그 녀석 잘못이 아니니까.'

-그 녀석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면 알면서도 일부러 이리 했다는 건가?

'맞아.'

-맞다고? 왜?

'부탁할게 있어서. 아, 그 전에 엘프가 관리하는 도서관에서 너에 대한 기록을 봤어.'

물론 이번 회귀 때 본 건 아니지만.

아무튼 본 것 자체는 사실이다. 바위정령은 흥미롭다는 듯 몸을 여러 번 들썩였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널 왜 이곳으로 불렀는지도 알고 있나?

'대충은. 내가 오우거를 도와줬으니 너도 나한테 힘을 빌려주려는 거 아냐?'

정령마법 룩카르.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우거 반역 루트를 비폭력으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 녀석을 정령마법으로 처음 얻게 된 건 지난 7회차 때.

그때는 이번처럼 시 서펜트 수송에 신관을 따로 동원할 수 없었다. 혼자서 이 악물고 신성마법을 쏟아 부었지만 도착했을 때는 고기는 이미 반쯤 상해버린 상태였고.

그런데도 이 녀석은 내가 오우거를 위해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며 흔쾌히 계약을 맺어줬다!

근데 여기에 고기의 신선도까지 완벽하게 유지했다면? 이 정도 업적이면 정령마법은 물론이고 추가로 부탁 하나 정도는 더 들어 주겠지 않을까?

-그렇다. 그 전에 우선 너의 이름을 밝혀라.

'클로드.'

-클로드. 오늘 네가 한 일은 훌륭했다. 내가 수호하는 오우거들에게 매우 큰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무슨 전환점?'

-네가 가져온 그 바다의 생물은 오우거의 몸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을 먹은 자는 더 강해질 것이고, 더 강한 2세를 낳을 것이다.

'그래? 그거 좋은데?'

-정말 좋은 일이다. 너는 오우거의 역사에 큰 업적을 세웠다.

-그러니 마땅히 내 힘을 빌려줄 것이다.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나를, 너의 뜻에 따라 정령마법의 형태로 소환할 것을 허락한다.

슥!

순간 투명한 바위조각이 날아와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그렇다고 실제로 머리가 뚫린 건 아니다. 바위조각에 실체가 있던 건 아니니까.

정령과의 계약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나도 처음 계약했을 땐 죽는 줄 알고 엄청 놀랐었지?

-내 이름은 룩카르.

-네가 날 떠올리며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너의 앞에 소환되어 너의 적을 가루가 될 때까지 으스러뜨릴 것이다.

'와, 진짜? 너무 좋은데? 정말 고마워. 앞으로 잘 사용할게.'

아, 잠깐.

이거 너무 영혼 없는 리액션이었나? 그게 내 입장에선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한 거다보니....

-날 소환할 때 너의 힘은 전혀 소모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정령마법에 대한 너의 적성이 너무 낮기 때문에, 내가 소환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휴. 말하는 거 보니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네.

-다만 너의 낮은 적성도, 나와의 계약을 통해 약간은 높은 수준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만약 나를 제외한 다른 정령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를 통해 더 강력한 적성을 손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잠깐! 스톱! 멈춰! 그 전에 부탁할게 있어!'

나는 다시 바위로 돌아가려는 녀석을 급하게 멈췄다.

'이걸로 끝내면 안 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녀석은 무너지려는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휴, 큰일 날 뻔했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즉시 본론을 꺼냈다.

'아까 말했잖아. 부탁할 거 있다고.'

-부탁? 무슨 부탁이지?

'그러니까 지금 부터....'

나는 미리 계획한 간단한 사기극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녀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째서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냐? 그냥 네 옆의 인간들에게 직접 설명하면 그만 아닌가?

'말로 설명하기 까다로워. 아무튼 네 입장에서 딱히 힘들건 없잖아? 내가 여기까지 시 서펜트 고기 신선하게 운반하느라 진짜 힘들었거든. 그러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면 안 될까?'

-네 말대로... 크게 힘이 들어가는 일은 아니다.

룩카르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한층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확실히 네가 가져온 고기의 효능은, 신선하면 신선할수록 오우거의 육체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 사실이 흡족하여 내가 조금 흥분했던 것 같다. 덕분에 충분히 답례하지 못한 채 그냥 넘어 갈 뻔했다.

-그러니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겠다. 굳이 그렇게 해 주어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감안하여, 방금 네가 요구한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겠다.

'정말? 그래주면 나야말로 고맙지!'

좋아. 아무래도 어필이 먹힌 것 같구만.

-고마울 것 없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며, 오히려 이렇게 해 주어도 여전히 부족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니 추가로 한 가지 작은 선물을 더 넘겨주도록 하겠다.

'선물? 부탁 들어주는거 말고 또?'

-우선 네가 요구한 부탁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그 순간, 뭉툭하던 녀석의 얼굴에 가로로 긴 균열이 생기며 진짜 목소리가 폭발했다.

"그그그그그극! 인간들이여, 내 목소리가 드드드드들리는가?"

"들립니다!"

"들립니다!"

가만히 있던 메르데스와 디디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선 나도 같이 대답해야지?

"들려. 아주 또렷하게."

"조조조조조좋다. 나는 바위정령 룩카르이며, 지금 이 순간부터 내 힘을 클로드에게 전수하도록 하겠다."

그리고는 일부러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와, 내 이마 중심부에 손가락을 얹는 퍼포먼스를 해주었다.

꾸욱....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황자님?"

메르데스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손바닥을 펼치며 깨를 저었다.

"괜찮아. 별일 없어. 근데 방금 뭐가 내 안으로 들어온거 같은데."

"그그그그그것이 바로 나의 힘이다. 클로드. 네가 오우거를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로, 네 안에 깃든 마법의 잠재력을 깨워 주었다."

"마법? 신성마법 말고 그냥 마법?"

나는 최대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룩카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말한 대사를 그대로 읊어주었다.

"이이이이이이인간들이 원소마법이라 부르는 바로 그 마법에 대한 잠재력이다. 너는 지금부터 정령의 가호로 인해 마법을 쓸 수 있다. 그것도 아아아아아아주 강력한 마법을."

"황자님...."

메르데스가 급히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에 묻은 돌가루를 닦아주었다. 좋아. 이 정도면 내가 다음에 갑자기 마법을 써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지?

"그그그그그힘을 잘 사용하라. 내가 깨운 너의 잠재력은, 너희들이 그 아아아아아아크 위저드라 부르는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 황자님이 아크 위저드가 되셨다는 말입니까?"

메르데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이 돼?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아크 위저드가 될 수 있어?"

"하지만 황자님은 이미 신의 축복으로 단 번에 아크 프리스트 급의신성마법을 다루실 수 있게 되었으니...."

메르데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믿겨지지 않는 듯했다. 그사이, 부탁한 연기를 마친 룩카르는 갑자기 몸을 틀며 동굴의 반대 벽을 향해 손가락을 휘둘렀다.

쿠구구궁!

그러자 그곳에 쌓인 작은 돌무더기가 인간의 형태를 갖추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는 네가 부탁한 연기가 아닌, 나의 또 다른 보답이다.

순간 룩카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녀석은 대신 메르데스를 보며 물었다.

"또 다른 이이이이이인간아. 너는 이름이 무엇인가?"

"저는 메르데스입니다."

"좋다 메르데스. 너는 지금껏 내가 만난 모든 존재를 통틀어, 정령에 대한 가장 높은 교감능력을 가진 생물이다."

"...."

메르데스는 놀란 얼굴로 침묵했다. 그러고 보니 감정안으로 확인한 메르데스의 정령마법 잠재력이 A+였지?

"그런 너에게도 특별히, 나아아아아의 충실한 수하인 '조약돌 정령 크발'을 소환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 크발?"

쿵!

그러자 새롭게 나타난 작은 바위정령이 힘차게 발을 구르며 반응했다.

물론 작다고 해도 룩카르에 비해 작다는 거지, 이 녀석도 어지간한 오우거 정도는 쌈 싸먹을 정도의 덩치를 자랑한다.

"너는 지이이이이이금부터 저 메르데스라는 인간과 계약한다. 명령에 따르라."

끄덕.

크발이라 불린 바위정령, 아니 조약돌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매우 작고 투명한 돌조각을 메르데스의 이마를 향해 쏘았다.

"...!"

그런데 메르데스는 그것을 피해버렸다.

세상에, 저게 피한다고 피해지는 거였어?

"피하지 마라 인간이여. 그그그그그그그것을 맞는 것으로, 너는 크발을 정령 마법으로 소환할 수 있게 된다."

"황자님? 어떻게 할까요?"

메르데스가 내 쪽을 보며 허락을 구했다. 나는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얻어 두면 좋겠지?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그럼 황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메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새로 날아오는 돌조각을 피하지 않고 이마로 받아냈다.

슥!

"...."

이번에도 맞기 직전에 움찔하며 반응했다. 얘가 반응속도 하나는 진짜 타고난 모양이구만. 제대로 훈련시키면 진짜 엄청난 기사가 되겠는데?

"그그그그럼 마지막으로, 밖에 있는 내 수하에게 '연결석'을 달라고 해라. 내가 이미 말해 놨으니 바로 넘겨 줄 것이다."

연결석? 그건 또 뭔데?

전에는 이런 거 없었잖아? 정말 몰라서 물어보려는데, 룩카르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바위더미로 변하며 무너져 벼렸다.

쿠구구구궁!

그리고는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방금 일어난 일들을 잠시 곱씹다가 문득 디디를 떠올렸다.

"디디야? 방금 그 바위정령 보고 뭔가 느낀 거 없어?"

"무서웠습니다. 세상엔 정말 무서운 존재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표정만 봐서는 전혀 무서워하는 거 같지 않은데.... 암튼 얘가 가진 특급 재능인 '마수 친화력'과 정령은 아무 관련이 없나 보구만.

혹시나 해서 저번 시 서펜트처럼 확인하려고 데려왔는데, 역시 이번에도 꽝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기존의 목표를 완벽히, 아니 그 이상으로 달성했다.

정령마법 룩카르를 얻었고, 내가 앞으로 아크 위저드 급의 마법을 숨김없이 사용할 당위성을 얻었으며, 여기에 메르데스는 예정에도 없던 조약돌 정령까지 획득했다!

근데 연결석은 또 뭐지? 지난 아홉 번의 회귀 동안 단어조차 못 들어본 물건인데?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7화

9장 미친 황자 루트

동굴 밖에는 주술사와 세눈박이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 너 나오면 연결석 주라고 하셨다."

주술사는 회오리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돌덩이를 내밀었다. 지금 이걸 나보고 받으라고? 이게 돌덩이가 내 몸무게보다 무거울 것 같은데?

"황자님. 혹시 위험할지 모르니 제가 먼저 받아 확인해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메르데스가 대신 받아 들고는 열심히 뭔가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녀석, 주인 체면 살려주느라 고생하는구만. 아무튼 고마워라.

나는 두 오우거를 번갈아 보며 질문했다.

"이게 뭔데? 뭐 하는 돌이야?"

"연결석은 성역의 입구와 연결하는 통로다."

"...응?"

"여기 이쪽 돌이다."

주술사는 동굴 입구 옆에 세워진 기다란 비석 같은걸 두드렸다.

"이것도 연결석이다. 여기 문양이 보이냐?"

"어... 그래. 여기도 회오리 같은 그림이 새겨져 있네?"

"두 돌은 서로 연결된다. 그러니 이쪽 돌에 아무거나 가져가 대면...."

주술사는 손에 들고 있던 빈 술잔을 비석의 회오리 문양에 가져가 댔다.

우웅!

그러자 술잔이 투명한 빛을 내며 사라졌고, 곧바로 메르데스가 들고 있던 돌의 정면에 나타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

메르데스가 움찔하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술잔을 집어 들고는 입술 안쪽을 꽉 물었다.

뭐야 이거!

완전 끝내주잖아! 무슨 순간이동 장치냐?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연결석은 우리 부족의 최고 보물이다."

앞으로 다가온 세눈박이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이걸 준다는 건 우리 주인님께서 널 최고의 친구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넌 이제 우리 부족의 오우거나 다름없다."

"그거 영광이네. 근데 이거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거야? 혹시 반대 방향으로도 보낼 수 있어?"

"궁금하면 직접 해 봐라."

나는 메르데스가 안고 있는 연결석에 다시 한번 술잔을 가져가 댔다.

우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술잔이 사라지며 이번엔 비석 앞에 나타나 바닥에 떨어졌다.

"보내지는구나. 이거 진짜 좋은데?"

"원리는 나도 잘 모르겠다. 주인님의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만 안다."

"바위정령의 마력?"

"대신 규칙은 있다. 살아 있는 건 보낼 수 없고, 오우거의 주먹 두 개보다 큰 것도 보낼 수 없다."

세눈박이는 자신의 양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웃었다.

"내 주먹은 다른 오우거보다 좀 더 크다. 기준을 좀 줄여라. 아무튼 물건을 돌에 대보면 안다. 반대로 넘어가지면 크기가 맞는다는 거고, 안 넘어가지면 너무 크다는 뜻이다."

"아하."

"하루에 보낼 수 있는 횟수에도 제한이 있다. 보통은 스무 번에서 서른 번 사이. 매일매일 달라진다. 아마도 주인님의 컨디션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거리는?"

"음?"

"연결석의 거리 말이야. 여기 비석과 한참 멀어져도 작동해?"

"거리는 아무리 멀어도 상관없다. 마르 부족 전승에는 자이루트 산맥의 북쪽 끝까지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 정도면 제국령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에 맞먹는 거리다. 이거 완전 거리와 상관없이 실시간 보급이 가능한 초광속 수송 장치잖아?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근데 저 연결석은 항상 여기 있어야 돼?"

내가 비석을 가리키며 묻자, 세눈박이는 당연하다는 듯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모석(母石)은 항상 여기 있어야 한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너한테 준 자석(子石)뿐이다."

그렇다면 이 돌의 역할은, 그저 마르 오우거와 멀리서도 물건을 주고받는 정도로 한정된다.

하지만 그게 어디냐?

당장 이 연결석을 활용해 득을 볼 수 있는 아이디어가 무수히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급한 건 원래 하려던 계획이다. 나는 기존의 계획을 연결석을 활용하는 쪽으로 연결시키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희 '은' 있지? 그거 좀 줄 수 있어?"

"은? 은괴 말이냐? 은괴를 달라고?"

"공짜로 달라는 게 아니야. 전에 제국과 협정한대로 고기로 값을 치를게. 당장 시 서펜트 고기도 며칠이면 다 먹을 텐데, 앞으로도 고기는 꾸준히 계속 필요하잖아?"

"고기! 고기는 항상 매우 필요하다!"

세눈박이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제안했다.

"대신 앞으로는 제국이 아니라 나랑 직접 거래하자."

"황자 너와?"

"응. 내가 이 연결석을 통해 너희 쪽에 신선한 고기를 꾸준히 공급해줄게. 그러니 너희도 틈 날 때마다 은괴를 내 쪽으로 보내줘. 어차피 그동안 캐놓은 은이 엄청 쌓여 있잖아? 제국과 협상이 되면 다시 교환하려고 모아놨지?"

"어.... 그렇다. 역시 황자 너는 우리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 친구할 자격 있다! 우어어!"

세눈박이는 감탄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어우 깜짝이야. 왜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고 그래?

"일단 오늘 준 고기 값은 받지 않을게. 우호의 증거로."

"오! 황자 통 크다!"

"대신 계약금으로 은괴를 좀 넘겨줘. 돌아가서 고기를 사야 하니까."

"알겠다. 그럼 연결석으로 보내면 되냐?"

"당장은 마차에 실어서 가져갈게. 나중에 새로 구입한 고기를 연결석으로 보낼 테니, 다음 거래부터는 너희도 은괴를 연결석으로 보내줘."

일단 이쪽의 연결석을 안전한 장소에 보관한 다음 거래를 시작해야 한다. 세눈박이는 잠시 생각하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린지 알겠다. 순서가 중요할 것 같다."

"고기와 은괴의 거래 비율은 기존에 제국과 교환하던 것과 비슷하게 하자. 어때?"

"아주 좋다!"

세눈박이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 너라면 은이고 금이고 원하는 대로 다 보내주겠다. 우린 그거 필요 없다. 고기, 아주 많은 고기와 바꿀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잠깐, 금? 금도 있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세눈박이는 짐짓 점잔을 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물론이다. 은보다 양은 적지만 금도 있고 더 귀한 것도 있다."

"금보다 귀한 거? 그게 뭔데?"

"보면 안다. 시 서펜트 고기 더 보내주면 우리도 답례로 귀한 것들 보내주겠다."

"시 서펜트? 잠깐...."

아니, 원래 보내려던 것은 시 서펜트가 아니라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고기였는데?

음... .

뭐 아무렴 어때.

시간 내서 한 번 더 잡거나, 아니면 봉인신관을 현지에 투입해서 꾸준히 잡아오라고 시키면 그만이지.

"좋아. 당장은 아니라도 되도록 빨리 시 서펜트 고기를 추가로 보내줄게. 그 전에는 다른 고기를 보내고."

"좋다. 그런데 우리는 물고기보다는 육지고기가 더 좋다. 물론 시 서펜트는 예외다."

"접수했어. 네 발 달린 짐승고기로 최대한 좋은 걸로 보내줄게."

그리고는 세눈박이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녀석은 행여 으스러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내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금부터 제국의 여섯 번째 황자인 클로드의 일을 논하도록 하겠다."

대리옥좌에 앉은 제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녀석, 속이 부글거려서 참느라 고생 좀 하고 있겠지?

"클로드는 요튼만을 점거한 시 서펜트 무리를 퇴치하여 고통 받는 지역민들을 구제하였다. 여기에 협상을 통해 자이루트 산맥의 교역 마을을 점거한 오우거 일당으로부터 마을을 되찾았고, 그들로부터 복속의 뜻으로 막대한 은괴를 받아 제국 정부에 진상하도록 만들었다."

정확히는 선금으로 받은 고기값을 진상이란 명목으로 바쳤다. 짐마차마다 가득 실어왔는데, 녹여서 은화를 만들면 대충 2만 개쯤 되려나?

물론 아까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이렇게 해야 제국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저지른 오우거들의 죄를 지워 줄 수 있다. 바위정령과 계약한 값이라고 생각해야지.

"허나 이 모든 일은 제국 정부의 허가 없이 클로드의 독단으로 움직인 행위이며, 이는 크게 보면 반란의 혐의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큰 죄라 할 수 있다. 이에 제국의 섭정을 맡고 있는 제국의 둘째 황자, 나 제스는 이 점을 크게 감안하여...."

"섭정 전하! 이 일은 제국의 크나큰 흥복이옵니다!"

그 순간, 내무대신인 발베니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요튼 만의 시 서펜트는 바다 속의 괴물이라 기사의 힘으로도 어찌 하기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마법사들도 바다 속에는 자신들의 힘이 제대로 투사될 수 없다며 기피하였으며, 또 겨우 동원해 놨더니 결과적으로 실패 했습니다."

여기서 실패한 마법사란 제국의 4대 아크 위저드 중 한 명인 트롬본을 말한다.

그나마 아크 위저드 중 정상에 가까운 인물인데, 하필 그 양반이 마법 속성이 화염인 게 문제였다. 바다에다 불을 퍼붓는다고 수증기 밖에 더 생기겠나?

"덕분에 제국은 이 사태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기피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을 클로드 황자와 여러 신관들이 힘을 모아 해결한 겁니다!"

"...."

"이는 단순히 제국 정부의 명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를 떠나, 클로드 황자의 제국에 대한 충의의 결과라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느 개인이 나라를 위해, 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 바다 속의 괴물을 퇴치하였다 해서 그 일에 죄를 물을 수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오우거와 관련된 문제는?"

제스는 맥빠진 얼굴로 내무대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서 있던 군사대신 홉스 백작이 대신 앞으로 나섰다.

"자이루스 산맥의 오우거가 교역을 위해 설치한 마을을 점령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제국군이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근본적으로 이들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군대를 동원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상대가 자이루스 산맥의 오우거 전체라면 기사단 한두 개 가지고는 도저히 견적이 안 나오거든.

물론 실제로 싸웠다면 마르 오우거만 제압하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우거 부족들 사이의 관계를 모르는 제국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기 힘들었으리라.

"하오나 제국은 온 사방이 적인지라, 어느 한쪽에 대규모의 병력을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북방의 이종족 연합과 대치하고 있는 주력 기사단을 뺄 수도 없으며,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해 수도를 지키는 병력 역시 다른 곳으로 차출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여기서 북방의 이종족 연합이란 엘프와 드워프 연맹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사이가 더럽게 나쁜 두 종족이지만,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어째서인지(물론 난 이유를 알고 있지만) 군사동맹을 맺고 제국과 아슬아슬한 대치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그 어떤 병력 손실도 없이 서쪽의 문제가 완만히 해결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천운을 만들어낸 클로드 전하께 큰 죄를 묻는다는 것은 현 상황에서 도의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명령 없이 움직인 건 사실이지 않나?"

제스는 어딘지 반쯤 체념한 태도였다. 군사대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확실하게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만약 클로드 황자가 무단으로 제국의 군대를 통솔해 일을 해결했다면 마땅히 국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황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입장에서 오우거를 다독여 그들을 물러나게 만들었습니다.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반란에 준하는 죄를 물으시는 건 타당하지 않다 생각합니다."

이것 참, 감개무량하구만.

지난 아홉 번의 회귀 동안 대신들이 이 정도로 내 편을 들어준 건 처음이다. 역시 사령군을 물리치고 성자 칭호 받은 게 힘을 쓰는 거겠지?

"...알겠다."

제스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내무대신과 군사대신이 짧게 시선을 교환하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잘했어. 이 정도면 섭정 전하가 자기 입장 때문에 함부로 꺼내기 힘든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 드렸겠지?

대충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구만.

두 사람 모두 제스는 사실 내 편이지만, 섭정이라는 직위 때문에 대놓고 동생 편을 들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착각이 이렇게 적극적인 변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야 고맙지만 제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8화

9장 미친 황자 루트

결과적으로, 제스는 사령군을 토벌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은상과 영지를 내리려 했다.

그러자 나 역시 저번처럼 은상은 받되 영지는 거절했다. 대신 주변의 대신들에게 점수를 딸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영지는 감히 받기 어렵습니다. 대신 제가 이끄는 사령군 대책반을 기사단으로 승격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사단? 그럼 네가 직접 기사단장을 하겠다는 거냐? 기사도 아니면서?

-단장은 누가 맡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앞으로도 이번 일 처럼 제국이 쉽게 손대기 힘든 문제들을 나서서 해결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군대를 이끌겠다는 뜻이군.

-아닙니다. 군대를 동원하는 정규 기사단은 규모가 너무 커서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적은 숫자의 인원이면 충분합니다. 총원은 아무리 많아도 서른 명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서른 명? 고작 그걸로 뭘 하겠다고? 아니. 아니다. 네 뜻이 갸륵하니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당황하던 제스는 순간 뭔가를 떠올렸는지 곧장 부탁을 승인해 주었다.

물론 안 봐도 비디오다. 지난 아홉 번의 회귀 역사를 되짚어 보면, 슬슬 직접 손을 써서 날 암살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당장은 뭐든 들어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겠지?

"황자님, 방금 황궁에서 보낸 전령이 은상을 내려놓고 돌아갔습니다."

라니아가 영약 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간만에 저택에 돌아와 뻗어있던 난, 등장 순간부터 끔찍한 향을 풍기는 영약의 존재감에 탄식을 거듭했다.

"크악, 아니 세상에. 그거 냄새 좀 어떻게 개선할 방법 없어?"

"아쉽지만 냄새는 개선 사항이 아닙니다. 당장은 영약의 효과를 더 좋게 하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딱히 키가 크는 것 같지 않은데...."

"죄송합니다. 황자님."

라니아는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게 제 역량이 부족한 탓입니다. 하지만 효과는 반드시 나타날 테니, 부디 절 믿고 계속해서 복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뭘 또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 됐으니까 얼른 일어나."

"황자님...."

"세상에 너보다 뛰어난 영약사는 없어. 그러니 뭔 불평을 해도 신경 쓰지 마."

그리고는 손에 쥔 약병을 낚아채고 거침없이 들이켰다.

어우 씁!

뭐야 이거!

기껏 폼 좀 잡아 봤는데 얼굴이 다 구겨지네. 왜 이렇게 맛이 안 좋은 쪽으로 업그레이드 됐어?

"솔직히 말해서.... 어디 하수구에서 퍼온 물에 썩은 나무뿌리를 섞은 맛이야."

"미각이 예민하시군요. 실제로 재료에 썩힌, 아니 삭힌 클레졸 나무뿌리가 추가로 들어갔습니다."

"그럼 나머지 재료의 출처도 진짜 하수구?"

"그럴 리가요. 후후.... 앗, 죄송합니다."

라니아는 잠시 웃다가 급정색했다.

"실례했습니다. 지금 당장 영약에 들어간 재료를 전부 가져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괜찮아. 그보다 고기는 잘 보내고 있지?"

고기. 오우거의 주식.

사흘 전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택 뒤에 있는 커다란 창고를 싹 비우고 그 안에 연결석을 배치했다.

그리고는 시내 상점가에서 구입한 각종 고기를 오우거에게 보내도록 지시했다. 라니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했다.

"벌써 은화 500개 분량의 고기를 연결석에 집어넣었습니다. 추가로 말씀하신 곡물가루도 대량으로 구입해서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오우거 빵도 반죽해서 구워 먹나보군요?"

"빵 말고 죽을 끓여야지."

"네?"

아 실수. 이건 다른 쪽을 위해 준비한 거라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지.

"빵이든 죽이든 오우거한테 보낼게 아니야. 그쪽엔 고기만 보내."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새벽부터 상점가에 돌고기가 매우 싼 값에 대량으로 입하되었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구입해서 연결석에 집어넣을까요?"

"오우거들이 물고기는 빼 달라고 했어. 되도록 육지 고기로 보내. 그건 그렇고, 요튼 만이 열리니까 돌고기 조업이 다시 시작됐나보네."

살아남은 시 서펜트 무리는 요튼 만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조업을 시작한 어민들은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겠지만 내 입장에선 오히려 다행이었다. 녀석들이 너무 멀리 도망쳐 버리면 사냥이 힘들어질 테니까.

이미 봉인신관 세 명과 스무 명의 신관을 보내 2차 토벌을 지시했다. 내가 빠졌으니 1차 토벌만큼의 성과는 안 나오겠지만, 그래도 오우거들에게 생색낼 정도는 확보할 수 있겠지.

아무튼 이런저런 일들을 계속 벌인 덕분에 재정 상황이 말이 아니다.

엘스톤 백작령에 보내는 지원금과 구스프 상회의 부활비용. 여기에 시 서펜트 운반비용과 오우거에게 보낼 고기값이 빠지니, 처음에 포상으로 받은 금화 3천 개가 증발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이 와중에 새로운 은상이 도착했다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액수는 전보다 한참 줄어 금화 500개. 제국정부의 명령이 아니라 개인으로 움직여서 받을 수 있는 상금은 제국법상 이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곧 오우거들이 대량의 은괴를 보내 줄 테니까.

물론 은화도 아닌 은괴를 직접 처분하는 건 까다로운 일. 그래서 구스프 상회에 부탁했다. 본점을 제도인 엠퍼로드로 옮겨서 본격적으로 활동해 달라고.

"내일쯤 상점가에 구스프 상회가 들어올 거야. 고기나 영약재료는 최대한 그쪽을 통해 구입해줘. 대금은 은괴가 도착하면 그걸로 지급하고."

"알겠습니다. 창고 정리를 확실히 해 놓아야 겠군요. 은괴를 쌓아 두려면 말이죠."

"응. 어쩌면 은괴 말고 다른 게 올 수도 있으니 확인 해줘. 담당한 시녀들의 입단속도 철저히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택 근처에 기사단 본부로 쓸 별장을 추가로 만들 거야. 훈련장으로 쓸 공터까지 더해서 숲을 왕창 개간해야 하는데... 혹시 피해야 할 곳이 있어?"

저택 주변엔 루넨브레스 가문 소유의 광활한 숲이 빽빽하게 펼쳐져 있다.

대부분은 목재로써는 쓸모가 없는 잡나무. 하지만 나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아래 영약의 재료가 되는 식물이 많기 때문에 무작정 개간할 수는 없다.

"저택 근처의 나무라면 얼마든지 베어 내셔도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채집하는 영약 재료는 저택 주변에는 거의 없으니까요."

"알았어. 이것도 구스프 상회가 들어오면 그쪽에 시킬 거야. 그런데 오늘이 며칠이지?"

"9월 6일입니다."

"9월 6일이라. 점심은 이따가 내려가서 먹을 테니 그만 나가봐."

"그럼 편히 쉬십시오. 황자님."

라니아는 허리를 깊이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갔다. 굳이 알면서도 날짜를 물어본 이유는, 바로 내일이 새로운 테크트리인 '미친 황자 루트'를 시작할 D데이기 때문이었다.

"미친 황자.... 이걸 이렇게 빠르게 시작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네."

이름 그대로 내가 미친 짓을 벌여야 하는 루트.

이게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이냐 하면, 지금처럼 어느 정도 평판작업을 해놓고 시작하지 않으면 황자인데도 단번에 감옥에 처박힐 정도의 사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행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냐고?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제국 최강의 기사 중 하나를 내 사람으로 만들 유일한 기회니까.

* * *

"...이렇듯 거리마다 클로드 황자님에 대한 칭송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황실의 큰 걱정이 반대로 황실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으니, 이는 실로 제국의 큰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사원은 제스의 속마음도 모른 채 활짝 웃으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제스는 집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대로는 안 돼. 클로드의 평가가 더 올라가기 전에 끝을 봐야겠어."

"이미 사회적 말살은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검은 갑옷의 기사, 파이렌이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사령군 토벌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만, 이번 일로 대신들 사이에 클로드 황자에 대한 평가가 확 올라갔습니다."

"정례회의 때 다들 신이 나서 그 녀석을 변호했지. 몇 년 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다 무너졌어."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이젠 직접 나설 수밖에."

제스는 고개를 휙 돌려 투구에 가려진 파이렌의 눈을 노려보았다.

"더는 시간 끌지 않는다. 그냥 죽여야겠어."

"암살입니까? 명령만 내리시면 오늘밤에라도 루넨브레스 저택을 암습하겠습니다."

파이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했다. 제스는 그 제안이 무척 끌리는 듯, 흥미로운 눈으로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일은 아크 위저드의 힘을 빌린다. 슬슬 소집에 응할 때가 됐어."

제국에 있는 네 명의 아크 위저드 중 두 명이 제스와 동일한 '후원자'를 배후에 두고 있다. 파이렌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아직 그들 중 누가 알베르트 전하를 공격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상관없다. 누군진 모르지만 알베르트를 죽일 수 있다면 클로드도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클로드 황자는 신성마법을 다룰 수 있습니다. 신의 기적을 받아서 말이죠."

"기적은 얼어 죽을 기적!"

제스는 발작하듯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턴 언데드 따위는 사령군에나 통할 뿐이야! 후.... 아무튼 칼로 죽이면 뭐라도 흔적이 남겠지. 혹시라도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마법으로 증거 자체를 싹 다 지워야겠어."

"소문에는 대신전에서 클로드 황자에게 네 명의 보디가드를 붙여준 모양입니다."

"그래서?"

"신성마법에는 '프로텍션 매직'이라는 대 마법 전용 방어마법이 존재합니다. 뛰어난 신관 넷이라면 아크 위저드의 마법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파이렌의 의견은 정론이었다. 하지만 제스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신관들은 요튼 만에 남았다는 보고를 들었다. 남아 있는 시 서펜트를 사냥하기 위해서라 하더군. 그러니 지금이 오히려 기회다."

"쯧, 클로드 황자는 자신의 처지를 여전히 모르나봅니다. 어리석긴...."

파이렌이 혀를 차며 비웃었다. 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 멍청함이 갑자기 어디 가진 않겠지. 여차하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도 파견하면 된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루넨브레스 저택은 물론이고 주변의 숲까지 모조리 태워버리면...."

"섭정전하! 백기사단의 다비 경께서 접견을 희망하십니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경비가 소리쳤다. 제스는 흥이 죽었다는 얼굴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다비? 그 녀석은 갑자기 왜.... 들어오라고 해!"

"전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곧바로 두꺼운 집무실 문이 열리며, 호리호리한 체격의 젊은 기사가 안으로 들어와 경례를 붙였다.

"백기사단의 다비가 섭정 전하를 알현합니다."

"오랜만이다. 나이트 마스터(knight master). 아침에 찾아온다는 보고서를 받긴 했는데…. 어째서 백기사단인 그대가 지금 황궁에 있는 거지?"

백기사단은 제국의 주력 기사단 중 하나로, 현재는 북방에 파견되어 이종족연합의 세력과 대치중이었다.

다비는 눈을 꽉 감았다 뜨며 차분하게 말했다.

"급히 요청드릴 일이 있어 휴가를 내고 돌아왔습니다."

"무슨 요청?"

"지금으로 부터 2년 전, 백기사단이 북방에 파견되기 전에 제가 직접 섭정 전하를 찾아뵙고 올린 청원을 기억하십니까?"

"...베리트 말인가?"

"네. 전하."

베리트는 제국 수도인 엠퍼로드의 북동쪽에 위치한 지역.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제국이 마지막으로 멸망시킨 로이스 왕국의 유민과 각종 난민들을 모아 놓은 일종의 유배지다.

제국에는 출신지역에 따른 차별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베리트만은 특별히 예외적으로 차별이 허용되는 영지였다.

"베리트는 지난 100년간 임시 영주들이 돌아가며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영주민의 출신이 비천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영주들의 착취와 횡포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 그 점을 개선해 달라고 청원을 했지."

제스는 뒤늦게 다비의 청원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베리트의 존재 이유가 바로 영주민의 착취였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제국에 저항한 자들의 후예다. 철저한 감시와 착취를 통해, 제국은 이들의 힘을 빼놓는 것으로 반란의 싹을 도려내려 했다.

덕분에 지난 100년간 베리트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영주민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었고, 농토의 대부분은 급속도로 황폐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리트의 영주민들은 이 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제국민은 제국의 모든 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베리트의 영주민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고, 영주들은 영지를 떠나 도망치려는 난민을 막기 위해 거리낌 없이 군대를 동원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9화

9장 미친 황자 루트

"베리트의 영주민을 관리하는 건 오롯이 영주의 권한이다. 물론 섭정의 권한으로 권고문 정도는 보낼 수 있지만, 이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오랜 정책이라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영주민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비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탄원했다. 제스는 귀찮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베리트의 영주민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말인가?"

"재작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버텨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작년부터 가뭄이 심해, 올해 농사는 사실상 괴멸적인 상태입니다."

"흠...."

"그럼에도 영주인 탈리스만 백작은, 오히려 작년보다 더 큰 세금을 거두며 영주민들을 죽음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다비는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통곡했다. 그가 이토록 절실하게 청원을 하는 이유는, 그가 바로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베리트 출신의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이라면 죽을 때까지 베리트를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하지만 다비는 어린 시절부터 기사의 재능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를 눈여겨본 전대 영주가 특별추천으로 다비를 엠퍼로드에 있는 사관학교에 보냈고, 그곳에서 졸업도 하기 전에 백기사단의 지명을 받고 정식 기사로 임관되었다.

그때의 다비는 고작 15살이었다.

이후 엄청난 성장을 거듭해 18살에는 나이트 커맨더가 되었고, 스물 두 살에는 최고 등급인 '나이트 마스터'의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경지를 돌파했다.

"일어나라. 다비."

제스는 다비의 정수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의 제국은 사방의 적을 경계하는 상황이다. 북동쪽에는 이종족 연합이 있고, 동쪽에는 사령군이 있으며, 서쪽에는 오우거가 있고, 서북쪽에는 야만족과 도적떼가 호시탐탐 국경과 무역로를 노리고 있다."

"...."

"제국이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고생하는 만큼, 내부의 제국민도 당연히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한다. 그것은 베리트의 영주민도 마찬가지다."

"전하!"

다비가 발끈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 있던 파이렌이 허리에 찬 검을 쥐며 앞으로 나섰다.

"섭정 전하의 안전이다. 무례한 언동을 삼가라."

"나이트 파이렌...."

두 사람 모두 최강의 기사인 나이트 마스터.

하지만 마갑도 없고 무기도 없는 다비는 지금 이 순간 완전무장한 파이렌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흥분해서 주제도 모르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비는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명심해라 다비. 그대는 제국을 대표하는 나이트 마스터다.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전하...."

"베리트는 그만 잊어라. 집착하면 발목만 잡힐 뿐이니까. 네 고향은 이제 엠퍼로드라고 생각해라."

"...."

다비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스는 손사래를 치며 명령했다.

"끝났으면 그만 나가보도록. 기왕 휴가를 냈다니 엠퍼로드에서 며칠 푹 쉬다 돌아가면 되겠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비는 경례를 붙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제스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저딴 게 제국에 셋밖에 없는 나이트 마스터라니....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군."

"하지만 위협적인 존재인 건 사실입니다. 출신도 불온하고, 가능하면 제거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파이렌이 손에 쥔 검을 놓으며 물었다. 제스는 혀를 차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트 마스터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이종족 연합과 대치중인 백기사단의 핵심 이기도 하고."

"기사단에서의 평가는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대 단장이 바람막이였지만 은퇴하고 바뀌었으니까요. 물론 실력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그래. 실력이야 손색이 없지. 하지만 성분이 저래서야...."

제스는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이 와중에, 베리트 영주민 따위에 신경 쓸 마음은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이걸 어떻게 한다....'

하늘은 부끄러울 만큼 새파랗게 빛났다. 황궁을 빠져나온 다비는 고개를 치켜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베리트를 잊으라니.

고향을 떠난 지 9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여전히 그리운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비는 어려서 온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하지만 마을 전체가 나서 그를 챙겨주었다.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럼에도 악착같이 서로를 챙기며 힘든 시기를 견뎌냈다.

영주의 눈에 들어 엠퍼로드로 향하는 마차를 탔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대로에 달려 나와 손을 흔들던 그 모습.

-장하다 다비야! 장해!

-힘들어도 꾹 참아! 넌 할 수 있어!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우리 모두 가족이라고!

-넌 해낼 수 있어! 반드시!

-몸 건강해야 해! 어디서든 밥 굶지 말고!

"...."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다들 건강하게 지내고 있을까?

다른 마을에 비하면 형편이 나을 것이다. 자신이 받는 급료를 매년 몽땅 보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베리트에 큰 가뭄이 왔고,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간다는 소문에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5년 전에 새로 바뀐 영주, 탈리스만 백작은 전에 비해 더욱 가혹한 수탈로 영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베리트로 달려가, 그 망할 놈의 영주를 베어 버리고 곳간에 쌓인 식량과 물자를 풀어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

하지만 다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힘이라면 충분하다. 나이트 마스터의 힘이라면 지방의 소규모 군대 따위는 순식간에 썰어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르면 반란이 된다. 제국도 작정하고 기사단을 동원해 토벌군을 보낼 것이다.

"그건 안 돼...."

자신이야 어찌 몸을 피신해서 도망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베리트에 남는 동포들의 삶은 전보다도 더 끔찍해 질 것이다.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체 누구에게 부탁해야 베리트를 구할 수 있는 거지?''

번민하는 다비의 마음에 증오가 겹겹이 쌓였다.

철저히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 넓은 제국에 자신과 함께 베리트를 구원해줄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자신이 속한 백기사단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백기사단으로 영입한 전대 기사단장이 은퇴한 이후, 대부분의 기사는 베리트 출신인 다비에게 질투와 멸시를 보내거나, 아니면 투명인간처럼 대할 뿐이었다.

오늘따라 이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렇게 노력하고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베리트는 고사하고 자신의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다.

"빌어먹을...."

다비는 고개를 숙이며 이를 갈았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다.

그럼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작 24살 밖에 안 된 청년의 가슴을 석탄처럼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 * *

눈을 뜨자 새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침대에 뻗어버리고 싶지만 지금 일어나야한다. 으, 잠을 설쳐서 그런지 삭신이 마구 쑤셔대는구만.

"황자님께 인사드립니다."

"황자님께 인사드립니다."

복도에 나오자 업무를 시작한 시녀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대충 손을 흔들며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황자님? 벌써 기침하셨습니까?"

응접실에는 라니아가 모여 있는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쭉 폈다.

"일찍 잤더니 일찍 깼어. 근데 메르데스는? 뭐 좀 시킬게 있는데."

"메르데스는 영약재료 채집을 위해 숲에 나갔습니다. 새벽이 아니면 채집하기 힘든 재료들이 있거든요."

"약초 같은 거?"

"주로 곤충입니다."

"영약에 벌레도 들어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라니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체능력을 향상시키는 종류의 영약에 많이 들어갑니다. 잘 말린 다음에 가루를 내서 사용하죠. 지금까지 황자님이 드셨던 영약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쾅!

그때 저택 문이 활짝 열리며, 어깨부터 밀고 들어온 메르데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서 신관님을!"

"메르데스! 무슨 일입니까! 진정하세요!"

라니아가 펄쩍뛰며 메르데스에게 달려갔다. 나는 그녀가 품에 안은 소녀를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 황자 루트.

이제 시작이다. 메르데스 덕분에 예정보다 30분쯤 빨라진 것 같지만.

"숲에서 딱정벌레를 채집하다 만났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오래 굶었는지 기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단 회복의 영약을 먹였는데 워낙 굶어서 몸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급한 대로 신성마법으로 상처 치료를.... 황자님?"

메르데스는 이 새벽에 내가 여기 있을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웅크려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내려놔. 내가 볼게."

"네. 황자님."

소녀의 몸에는 상처가 수두룩했다. 그것도 이미 곪아 터져 진물이 흐르는 심각한 상처가.

나는 힐링과 안티 포이즌을 동시에 사용하며 엉망이 된 소녀의 몸을 꼼꼼하게 회복시켰다.

"으, 으으...."

정신을 차린 소녀가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나는 메르데스에게 물을 가져오라 시킨 다음, 품속에 미리 챙겨 놓은 설탕바를 꺼내 작게 부러뜨려 소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건 먹을 수 있지?"

"으.... 음음.... 으음?"

조각을 다 먹은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허우적거렸다. 나는 남은 설탕바를 소녀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이거 다 먹어도 돼. 이름이 뭐야? 어쩌다 루넨브레스 가문의 숲에 들어오게 됐어?"

"으.... 저, 저는.... 루, 루..."

이 소녀의 이름은 루네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다 말하기도 전, 갑자기 몸을 뒤집으며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마을을 구해주세요!"

"마을? 무슨 마을?"

"저, 저는 베리트에 있는 알룬 마을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순간 주변에 있던 시녀들이 헉 소리를 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역시 베리트 아이였어...."

"알룬이라면 거기지?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마을?"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이런 아이가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베리트는 차별받는 영지이기 때문에 보통은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인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시녀들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건, 여기 있는 시녀들의 절반이 바로 그 베리트 출신이기 때문이다.

"올해 농사가 너무 안 되서.... 모두 배가 고파 굶고 있어요. 근데 영주님이 남은 것도 모두 거둬가서 살 수가 없어요. 산에 벗겨먹을 나무껍질도 없고, 지하실에 숨겨 놓은 말린 감자도 다 떨어졌어요. 흐윽, 아니,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사실은 제가 감자 몰래 훔쳐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거 없어서 우리 엄마랑 동생들 다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누구신진 모르지만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우리 가족이랑 마을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말을 잇던 소녀는 어느 순간 축 늘어지며 의식을 잃었다.

후.

회귀 때마다 반복해서 본 모습인데도, 볼 때마다 가슴이 쓰려온다.

마음 같아서는 이 아이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기 전, 미리 구해서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 아이의 운명이 바뀐다. 때문에 어설프게 간섭할 수가 없다는게 문제.

마을을 떠난 루네는 총 7일의 여정을 통해 여기까지 오게 된다.

첫날에 구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후 나흘에서 닷새 사이에 구해내면, 날 발견하자마자 힘을 다하며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하지만 어떻게든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그 뒤로 이렇게 목숨을 다시 살려 놓을 수 있다.

아마도 엿새쯤에 뭔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각성의 단계가 있는 것 같다.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고.

아무튼 지난 회귀 동안 첫날에 구한 루네와, 기어코 저택에 도착한 루네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종족 : 인간

현재 마법 : F

잠재 마법 : A

그래. 이번에도 각성했구나.

분석안으로 확인하자 단번에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루넨브레스 저택까지 도망쳐온 루네는, 이후 마법에 눈을 뜨며 아크 위저드에 필적하는 마법사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건 겨우 시작일 뿐.

지금까지 서둘러서 여러 가지 테크트리를 빠르게 진행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오늘, 회귀 첫해의 9월 6일에 미친 황자 루트를 시작하기 위해서.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0화

9장 미친 황자 루트

"황자님, 여기 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베리트라면, 오래전에 멸망한 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지? 우리 영지 위에 있는?"

응접실로 돌아온 라니아에게 물었다. 라니아는 놀란 얼굴로 주저하다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루넨브레스 가문의 숲과 베리트의 남서쪽 지방이 살짝 붙어 있습니다."

"이 아이는 그쪽에서 도망쳐 온 것 같아. 농사가 망해서 다들 굶고 있다던데, 혹시 아는 거 있어?"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작년부터 그런 조짐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제국의 다른 곳은 멀쩡한데 왜 베리트만 농사가 망해?"

"베리트는 물이 부족해 가뭄의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 제대로 된 비료도 쓰기 힘들어 작황도 매우 나쁜 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주가 영주민을 착취하나?"

"그렇습니다."

메르데스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시녀 하나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으.... 흐윽...."

분명 과거 베리트에 살던 시절의 설움이 떠올랐을 것이다. 나는 울고 있는 시녀와 기절한 소녀를 번갈아 바라본 다음,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10초 정도 마음을 가다듬었다.

"...황자님?"

"라니아, 이 아이를 침실로 옮겨서 간호해줘. 탈수증상이 있는 거 같으니 물부터 먹이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창고에 있는 고기 중에 염장된 걸 몽땅 꺼내서 짐마차에 실어. 곡물가루까지. 한 번에 옮기면 마차가 부족할 테니 카일이 오면 구스프 상회에 연락해서 추가로 마차를 동원해 달라고 해."

"설마 식량을...."

"베리트의 영주가 사는 성까지 일직선으로 수송하라고 해. 가는 도중에 마을이 있으면 먹을 걸 바로 나눠주고. 특히 이 아이의 고향이라는 알룬이라는 마을부터."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황자님."

라니아는 긴장된 얼굴로 내 말을 막았다.

"황자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베리트는 국법으로 외부의 간섭이 금지된 땅입니다."

"뭐?"

"외부인은 제국정부의 승인 없이 베리트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베리트 영주민도 마찬가지로 허가 없이는 밖으로 나올 수 없고요. 물론 들키지 않게 몰래 빼내오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라니아는 분위기가 우울해진 시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황자님께서 직접 나서면 일이 커져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 아이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시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아니야."

나는 표정 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아이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베리트의 영주지."

"...네?"

"방금 내린 명령은 전부 부가적인 거야.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뒷일은 전부 내가 책임질 테니까."

"...황자님?"

라니아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메르데스에게 명령했다.

"메르데스. 넌 지금부터 혼자 들 수 있는 만큼의 영약을 몽땅 챙겨 베리트의 영주가 사는 성까지 말을 달려. 혹시 중간에 누가 막으면 내 이름 대고 돌파해."

"알겠습니다."

메르데스는 잠시의 주저도 없이 곧장 되물었다.

"영약은 어떤 종류를 가지고 가는게 좋겠습니까?"

"굶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거면 뭐든지 돼. 난 먼저 날아가서 그 영주 놈부터 처리해야겠어. 혹시 오는 길에 당장 생사가 급한 사람이 보이면 치료해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메르데스는 곧장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 쿨한 반응 보라지. 역시 얘는 담이 강하다니까?

하지만 라니아의 반응은 달랐다. 시녀장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반쯤 패닉 상태로 소리쳤다.

"아, 안 됩니다 황자님! 대체 뒷감당을 어찌 하려 그러십니까! 베리트 영주인 탈리스만 백작은 황제가 직접 임명한 자입니다! 게다가 제국 최고의 명문귀족입니다! 아무리 황자님이라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베리트는 한 번도 가보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베리트 성이 대체 어딘 줄 알고 지금 떠난다고 하십니까!"

"베리트에서 가장 큰 성이 거기겠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잘 보일 거야."

"네? 그게 대체 무슨...."

"황자님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자 메르데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신 답했다.

"자이루트 산맥의 오우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우거들의 수호신인 바위정령이 황자님을 아크 위저드에 필적하는 마법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네? 아크 위저드? 지금 아크 위저드라 하셨습니까?"

"제가 옆에서 직접 목격했습니다. 저는 마법에 대해 잘 모릅니다만, 그래도 '플라이'라는 마법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황자님은 지금 베리트 성까지 정말로 하늘을 날아 이동하려 하시는 겁니다."

깔끔한 설명 감사. 나는 메르데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메르데스. 그리고 라니아?"

"아니.... 이게 무슨...."

라니아는 혼란스러운 듯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 없는 동안 저택 잘 부탁해."

그리고는 다짜고짜 저택 밖으로 걸어 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니아가 다급히 정원으로 뛰어나왔지만, 이쪽은 이미 비행마법으로 하늘 높이 날아 오른 상태였다.

"자, 그럼 이제...."

멀리 북동쪽 숲 너머로 희미하게 펼쳐진 메마른 땅이 보였다.

저곳이 바로 저주받은 땅인 베리트.

특별히 신적인 존재나 마법이 관여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다. 그저 인간의 악의가 100년에 걸쳐 한 지역에 집중된 결과일 뿐.

이 저주를 깰 수 있는 건 오직 힘을 가진 누군가의 광기뿐이다. 그럼 이제 제대로 한번 설쳐보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