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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배 진짜 크네."

회귀 때마다 반복해서 경험하는 광경이긴 하지만, 구스프 상회가 동원한 선박은 볼 때마다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구스프 상회는 대륙 반대편에 있는 카림 왕국은 물론이고, 아예 동쪽에 있는 라그란 대륙까지 무역을 하던 대규모 상회입니다. 한창때는 이런 대형 선박을 열 대씩 운용했습니다."

카일은 담담한 얼굴로 설명했다. 당장 동원한 대형 상선은 총 두 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차압당한 걸 현장에서 금화를 주고 풀어준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 카일의 아버지가 인덕이 있었던 게 다행이다. 수소문한 끝에 배를 움직일 선원들이 금방 모였고, 여기에 요튼 만에서 가장 큰 대형 어선 네 척까지 추가로 섭외했다.

"이제 곧 요튼 만의 출구에 도착합니다. 슬슬 선단을 멈추라 지시할까요?"

카일이 정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주변 풍경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좀 더 가까이 붙어도 돼."

요튼 만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만을 품고 있는 거대한 초승달을 연상시키는 지형.

그리고 초승달의 두 꼭지가 닿으려는 출구에 '크라운 블랙 피쉬', 일명 '돌고기'라 불리는 생선의 어장이 최대 규모로 형성되어 있다.

시 서펜트 무리가 굳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도 넘치는 돌고기를 손쉽게 포식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4년 정도 가만 놔두면 돌고기 어장이 완전 소멸, 시 서펜트도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게 된다.

물론 그때까지 내버려 두면 지역경제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고, 이후로도 안 좋은 나비효과를 계속 발생시킨다.

대표적으로 부하로 얻은 카일이 기가 죽어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덩달아 근처에 있는 '오우거 반란' 루트의 정상적인 진행도 불가능해진다. 이것만해도 어마어마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저기 바다뱀 무리가 보입니다!"

뱃머리에 있던 선원 하나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좋아. 슬슬 시작이구나. 시 서펜트는 선원의 말처럼 몸통 곳곳에 다양한 지느러미가 달린 바다뱀이며, 성체는 최대 10미터까지 자랄 정도로 엄청난 덩치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밖에 특별한 능력은 없다.

불을 뿜거나 독액을 토하지도 않고, 괴성을 질러 대상을 마비시키거나 섬광을 방출해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만약 이놈들이 지상에 사는 괴물이었다면, 적당한 기사단 하나만 출동해도 퇴치가 가능했을 정도.

하지만 이 녀석들은 바다의 괴물이다.

기사들이 그 무거운 마갑을 입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심지어 마법사조차도 해수라는 거대한 장벽에 막혀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 힘들다.

"템페스트를 바다 속으로 쑤셔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 방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옆에 있던 카일이 긴장한 얼굴로 반응했다. 나는 뱃머리 쪽으로 한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이제 시작할 테니 배를 멈추라고 전해줘."

"전 선단에 알린다!"

순간 카일의 목에서 상상도 못할 만큼의 엄청난 성량이 폭발했다.

"지금 당장 배를 멈춰라! 황자님의 명령이시다! 지금 당장 배를 멈추고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

저 타고난 성량. 거기에 지휘관으로서의 판단력이 더해지면 전장에서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킨다.

"좋아. 그럼 슬슬...."

나는 눈을 감고 바다 깊이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에 집중했다.

'라이프 디텍션(life detection).'

이것은 일정 범위 안에 생명을 탐지하는 생명감지 마법이다.

보통은 재난 현장이나 전장에서 생존자를 찾아내는 용도로 쓰는 신성마법이지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런 식의 독특한 활용도 가능하다.

"...온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3화

7장 사냥과 협상

길이가 약 7미터쯤 되는, 긴 뱀처럼 생긴 생물이 무역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온다.

수심 15미터 정도. 호기심이 강한 두 마리가 유독 앞서서 속도를 높이고 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시 서펜트가 범위 안으로 접근한 순간, 나는 새롭게 발동시킨 양손의 마법을 녀석들의 몸에 적용시켰다.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이것은 목표의 중력을 짧은 시간 동안 반전시키는 신성마법이다.

푸확!

한순간 수면으로 끌려나온 시 서펜트가 엄청난 기세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찬란한 태양 아래 바다뱀의 은색 비늘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나는 수십 미터 상공으로 떠오른 녀석들의 몸에, 중력 방향을 측면으로 새롭게 바꾸며 근처에 있는 어선의 갑판을 향해 내리꽂았다.

콰앙!

물론 그냥 꽂았으면 침몰했겠지만.

모든 배의 갑판에는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대량의 짚과 솜뭉치가 깔려 있다. 월척을 낚아 상쾌한 기분이긴 한데, 순간 집중력이 확 풀리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컨트롤이 어렵다니까?

곧바로 십여 마리의 시 서펜트가 새롭게 선단을 향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가까운 곳에 있던 두 마리를 새롭게 낚아챈 다음, 이번에는 내가 탄 무역선의 갑판 위로 단숨에 내리꽂았다.

"으악!"

"왔다! 모두 준비해!"

대기하던 선원들이 창을 들고 시 서펜트에 달려든다. 배 위로 엄청난 양의 물보라와 짚더미가 날리고, 곧 새빨간 핏물이 분수처럼 사방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에에에엑!

어우 시끄러워.

강제로 뽑혀 나온 바다뱀이 발작을 일으키고, 마구 창을 휘두르던 선원들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이놈들 힘이 엄청나!"

"조심해! 서너 마리만 모여도 배를 침몰시키는 괴물이라고!"

하지만 시 서펜트는 물에서 벗어나면 급속도로 약해진다.

바다 속에서는 자신의 몸을 강철만큼 단단하게 유지할 수 있지만, 일단 물 밖으로 나오면 피부가 축 처지며 외부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 상태로 가만 내버려 둬도 10분 안에 죽는다. 여기에 선원들이 창으로 찔러 피를 빼기 시작하면 채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키이이이이익!

키에에에에에에엑!

한편, 다른 배 위에서도 바다뱀의 구슬픈 비명이 본격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다른 배에 탄 봉인신관들도 신성마법에 있어선 가히 스페셜리스트라 불러도 될 만한 인재다. 내가 고안한 '생명감지 마법과 반중력 마법을 통한 바다뱀 사냥'을 한번 듣고는 곧바로 이해했다.

"황자님. 여기 말씀하신 설탕물입니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디디가 급히 달려와 큰 컵에 담긴 뿌연 물을 내밀었다. 나는 주저 없이 컵을 비운 다움 입술을 혀로 핥았다.

후.... 좋아. 앞으로 계속 건져내려면 미리미리 당분을 보충해야지.

그나마 다행인건 이게 직접 전투를 치르는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제작에 수고가 드는 설탕바 대신, 미리 준비한 설탕물로 뇌에 에너지를 공급하기로 했다.

디디는 빈 컵을 돌려받으며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바로 새 설탕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냐. 당장은 필요 없어. 천천히 가져와도 돼."

그렇다고 무한정 마시는 만큼 무한정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

물론 당장 이 정도로 내 마력이 고갈될 일도 없고. 나는 새롭게 접근하는 바다 뱀 무리를 감지하며 디디에게 물었다.

"근데 디디야? 혹시 지금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

"황자님이 말씀하신대로, 시 서펜트가 배 위로 마구 쏟아져서 무척 놀랐습니다."

근데 말투가 전혀 놀라는 분위기가 아닌데? 얘도 메르데스처럼 감정표현하는데 살짝 문제가 있나?

"아니, 그런 거 말고. 눈앞에서 시 서펜트를 보고 뭔가 친숙하다던가, 아니면 이걸 어떻게 키워볼 생각이 든다던가 그런 생각 안 들어?"

"...죄송합니다. 황자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디디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시 서펜트도 마수의 일종이 아닐까 해서 끌고 왔는데, 아무래도 그쪽과는 관련이 없는 모양이구만.

나는 픽 웃으며 녀석의 등을 두드렸다.

"알았으니까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 있어. 내가 여섯 마리쯤 더 낚아 올리면 그때 설탕물 추가로 가져다주고."

"네. 알겠습니다."

디디는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뒤로 빠졌다.

그 사이 카일이 선원들을 지휘하며 죽은 바다뱀을 뒤쪽으로 치웠고, 동시에 대기하던 신관들이 죽은 바다뱀에 달라붙어 부패를 막는 신성마법을 시전하는 것도 보였다.

좋아. 다들 잘 하고 있구만.

마침 옆 배에 탄 봉인신관 바리스가 능숙하게 바다뱀을 배 위로 낚아 올리는 게 보였다. 저 녀석, 봉인신관 중에서도 신성마법 잠재력이 최고였지? 역시 센스가 좋은데?

예전 회귀 때는 혼자서 이 짓을 하느라 반나절 내내 고생했는데 이번엔 훨씬 빨리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잘하면 다음 연계 루트인 '오우거 반란'까지 사흘 안에 끝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 * *

요튼 만의 포구에서는 밤새도록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 서펜트 사냥에 동원된 어민들은 물론이고, 소문을 들은 인근의 모든 주민들이 몰려와 클로드 황자의 업적을 기리며 잔을 부딪쳤다.

"위하여!"

"위하여!"

"클로드 황자님을 위해!"

"마셔! 오늘밤은 실컷 마시는 거다!"

"이것 좀 먹어봐! 오늘 간만에 조업해온 신선한 돌고기라고!"

모두가 기쁜 얼굴로 환호성을 질렀다. 클로드와 신관들이 오늘 하루 건져 올린 시 서펜트의 숫자만 총 38마리였다.

물론 이것은 만을 점령하고 있던 녀석들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사냥당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게 핵심이었다. 남은 녀석들은 크게 동요해 만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바다로 물러났다.

덕분에 어민들이 짧게나마 다시 조업을 시작했고, 파리만 날리던 지역 상회들은 당장 벌어진 축제판에 술과 음식을 공급하며 재개될 무역의 인력수급에 열을 올렸다.

"내가 벌써 2년을 꼬박 놀았잖아! 근데 아까 낮에 주란 상회 사람이 찾아와서 다시 같이 일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어허, 주란도 주란이지만 당연히 구스프 상회부터 도와줘야지 않겠어? 이번에 클로드 황자님이 오신 것도 주란 상회 도련님이 간곡히 부탁해서 이뤄진 거라 하던데!"

"정말이야? 그럼 나도 구스프 상회 배나 타야 겠구만! 내일부터 다시 바다에 복귀한다!"

최근 몇 년간 침체에 빠진 요튼 만 일대가 오랜만에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한편 사람들 틈에 끼어 모르는 척 이야기를 듣던 카일은, 어느새 옆에 다가온 트리멈이 내민 술잔을 받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님 오셨습니까?"

"어디 갔나 한참 찾았습니다. 카일 경."

"경이라니요. 저는 귀족도 아니고, 그저 사관학교의 일개 생도에 불과합니다."

카일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트리멈은 무슨 소리냐는 듯 웃으며 카일의 옆에 앉았다.

"카일 경은 이미 기사입니다. 기사를 경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문제일까요?"

클로드가 뽑은 사관학교 생도에겐 자동으로 졸업증과 기사 자격이 수여된다.

심지어 훈련기사가 되어 거쳐야 할 1년간의 검증기간도 생략하니, 카일은 이미 명실상부한 기사가 된 셈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만.... 여전히 실감은 안 납니다. 아무튼 신관님 편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카일 경."

트리멈은 씩 웃으며 멀리 뒤쪽에 보이는 구스프 가문의 저택을 가리켰다.

"여기보단 저택의 파티가 음식도 좋고 술도 많습니다. 굳이 왜 나오신 겁니까?"

"별건 아니고,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습니다."

"분위기요?"

"그냥 취미입니다. 예전부터 현장의 분위기나 정보 같은걸 수집하는 걸 좋아해서요."

카일은 멋쩍게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트리멈은 눈을 크게 뜨고 잠시 생각하다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 역시 황자님이 따로 찾아가 모셔온 분답습니다. 이런 흥겨운 축제에서 정보수집이라니, 확실히 재기가 넘치시는군요."

"과찬입니다. 여태껏 뭐 하나 제대로 성공한 적 없는 애송이인데.... 황자님은 대체 뭘 보고 저를 데려다 쓰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카일에게 있어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었다.

물론 일련의 과정만 놓고 보면, 클로드는 카일이 아니라 카일의 가문인 구스프 상회의 힘을 노린 것처럼 보인다.

바다에 나가기 위해 배를 구하고, 배를 움직이기 위해 선원을 구하고, 좀 전에는 대량의 수송마차까지 전부 구스프 상회가 수소문을 해서 구해 줬으니까.

하지만 이런 건 돈만 있으면 다른 어떤 상회도 해줄 수 있는 일.

굳이 망해가는 구스프 상회에 빚까지 갚아주며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

"술 맛이 정말 좋군요."

트리멈은 손에 쥔 술잔을 쭉 들이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속의 즐거움은 절제하는 게 옳습니다만, 그래도 취할 일이 없으니 가끔은 즐기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신관님은 술이 강하신가 보군요?"

"해독마법을 쓰면 취기가 풀리니까요."

"아."

"본래 하던 일이 스트레스가 워낙 심한 일이라.... 신전 내에서 유일하게 음주가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잘 마시는 편이죠."

대체 신전 안에서 술을 퍼마시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뭘까? 카일은 호기심을 참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님을 호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래도 지금 일이 예전 일보다는 부담이 적은가 보군요."

"마음의 부담이 열 배쯤 줄었습니다. 아니 백 배 쯤? 그러고 보니 저녁부터 황자님도 안 보이시는군요?"

트리멈은 왁자지껄한 주변을 한동안 살피다 말했다.

"술은 안 드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역시 바다에서 고생하신 것 때문에 바로 잠자리에 드신 모양입니다."

"그건 아니고...."

잠자코 있던 카일이 목소리를 낮추며 사실을 털어 놓았다.

"황자님은 이미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네? 언제 말입니까?"

"해가 저물기 전에 시 서펜트를 실은 짐마차를 어딘가로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네. 엄청난 마차의 대열이었죠."

"황자님도 그곳에 합류하셨습니다. 제게는 이곳 사람들과 며칠 쉬며 시간을 보낸 다음, 분위기가 정리되면 모두를 통솔해서 루넨브레스 저택으로 복귀하라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황자님의 곁을 호위할 사람이...."

"같이 따라간 건 그 시녀 한 명뿐입니다."

카일은 매 시간마다 황자에게 칼같이 영약을 먹이던 장신의 시녀를 떠올렸다.

"아, 그리고 디디도 따라갔군요. 물론 그 두 사람이 황자님을 제대로 호위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황자님은 다섯 신의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 아! 저도 한잔 주십시오!"

트리멈은 술통을 들고 돌아다니는 어부에게 공짜 술을 한잔 얻어 마시며 말했다.

"신성마법의 극에 달하셨으니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몸을 상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호위신관님들을 따로 부르지 않은 거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경호는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싱글벙글거리던 트리멈의 얼굴에서 한순간 표정이 사라졌다. 카일은 분위기가 빠르게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신전을 나오기 전, 저는 대신관님께 클로드 황자님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귀띔을 들었습니다."

"어떤 상황 말씀입니까?"

"카일 경은 황자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맥락 없이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카일은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았다.

"제 역량으로는 도무지 황자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

"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신관님도 아시다시피, 그분이 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상식의 틀을 깨는 파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마치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처럼 자연스럽게 진행하십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범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저 제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신다는 것 정도만 파악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며칠간 클로드를 접한 카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트리멈은 동감이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일은 잔에 남은 술을 들이켜며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 하나 신기한 건, 그분은 절 이미 옆에 오래 두고 부린 가신처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고작 만난 지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가끔은 너무 거리감이 없어서 놀랄 정도입니다."

"그거 부럽군요. 저한테는 아직 좀 거리를 두시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하."

"저도 차라리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말은 안 하시지만, 뭔가 제게 엄청난 걸 기대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거 하난 확실합니다."

"무엇 말입니까?

"아무래도 전 앞으로 평생 클로드 황자님의 밑에서 일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감이 아닌 확신이었다. 트리멈은 그런 카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그런 카일 경을 믿고, 황자님을 둘러싼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

"지금 제국 황가에서, 클로드 황자님의 존재는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그 전까지 황자님의 행실이.... 여기에 황비문제도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현재 섭정이신 제스 전하께서, 카일 황자님을 눈엣가시처럼 견제하고 증오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 입니까? 소문에는 그나마 섭정 전하가 형제 중에 클로드 황자님을 가장 아끼신다고 하던데?"

"신전에서 확인한 정보이니 확실합니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서는 황자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추가적인 경호가 필요 할지도 모릅니다."

트리멈은 차마 제스가 클로드에게 장기간 독약을 먹였다는 이야기까지는 꺼내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카일은 이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그건 무서운 이야기군요. 사관학교조차 제대로 졸업 못한 풋내기에겐 차마 감당 못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황자님은 카일 경을 아끼십니다."

트리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분을 위해 모든 걸 걸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황궁의 변란, 황족들의 권력 다툼, 피비린내 나는 숙청.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카일의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만약 이런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면 고작해야 지방 상회에 불가한 자신의 가문은 한순간에 풍비박산 날지도 모른다.

"현명한 분이시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감내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그분의 곁을 따르십시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분의 손을 들어 드릴게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거리를 두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충고라기보다는 경고였다. 카일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클로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중요한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작 만난 지 나흘밖에 안 지난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걱정 마십시오. 날짜로만 치면 저도 황자님을 만난 지 닷새밖에 안 지났습니다."

"황자님은 이미 모든 걸 계획에 두고 계실 겁니다."

"네?"

"방금 신관님이 말씀하진 문제를 포함해서, 그것을 해결할 해결책까지 전부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따로 걱정할 일은 아마 생기지 않을 겁니다."

"오...."

트리멈은 놀란 눈으로 카일을 보았다. 그러다 처음처럼 즐거운 얼굴로 돌아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황자님이 선택한 분은 다르군요.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봅니다. 하하, 하하하! 여기 저도 한잔 더 주십시오! 오늘은 술이 정말 달군요! 목에 착착 감기는 게 너무 좋습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4화

7장 사냥과 협상

요튼 만에서 서북쪽으로, 마차를 타고 나흘 거리를 지나면 거대한 산맥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이곳이 바로 자이루트 산맥.

제국의 서쪽으로 자연 국경을 형성하는 지형으로, 원칙적으로는 제국의 소유지만 실제로는 수천 년간 산맥을 지배한 오우거의 영토로 인정받고 있었다.

대부분의 오우거는 인간과의 교류를 부정했다. 그들은 산맥을 내려가는 것도, 반대로 인간들이 산맥으로 올라오는 것도 거부했다.

접점이 있는 것은'마르'란 이름의 부족이 유일했다.

그들은 광산에서 은을 캐 인간들에게 주었고, 대신 음식이나 잡다한 생필품을 받으며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마르 오우거가 갑자기 조약을 깨고 제국의 마을을 점령하는 폭거를 일으켰다.

"더는 못 기다린다!"

자신들이 점령한 마을의 한복판에서, 마르 오우거의 족장인 '세눈박이'가 거대한 몽둥이를 허공에 휘둘렀다.

"이대로 가면 우리 부족 망한다! 세눈박이는 부족을 지켜야 한다! 여자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때를 놓친다!"

"아니다! 족장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자 뒤에 있던 부족의 장로, '여섯손가락'이 세눈박이의 등을 껴안으며 제지했다.

"지금 제국 땅 쳐들어가면 우리 다 죽는다! 인간은 작고 약해도 갑옷 입은 인간은 강하다! 머리 숫자도 우리보다 백배 천배 더 많다! 그리고 마법사도 있다!"

"본 적도 없는 마법사 타령 하지 마라! 그리고 여기도 이미 제국 땅이다! 이 마을 점령한 지 1년 넘었다! 그런데도 제국은 반응 없다!"

세눈박이는 달라붙은 장로를 한 손으로 잡아 멀리 집어 던졌다.

콰앙!

한순간 커다란 집 하나가 통째로 박살났지만, 잔해에 파묻힌 장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일으키며 다시 족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 온 거 열밖에 안 된다! 만약 진짜 전쟁하고 싶으면 부족전사들 더 불러와야 한다!"

"더 불러오면 다른 부족이 우릴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우리만으로 어떻게든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싸움은 안 된다! 마르는 제국과 협정을 맺었다!"

"협정을 먼저 깬 건 제국이다!"

"맞아. 제국이 잘못했어. 내가 대표로 사과할게."

나는 마을 한복판에서 은신을 풀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 세눈박이가 자신의 세 눈알을 동시에 부릅뜨며 소리쳤다.

"넌 뭐냐! 인간!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냐!"

"아까부터 여기 숨어 있었어. 딱 봐도 내가 몸이 좀 작지? 그래서 들키지 않게 몰래 숨어들어서...."

"잡아라! 저 인간을 잡아!"

곧바로 근처에 있던 오우거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나는 녀석들을 동시에 리버스 그래비티로 하늘 높이 날려 버린 다음 마법을 풀어 버렸다.

쿵!

추락한 녀석들이 요란하게 흙먼지를 날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는 어벙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대기 시작했다.

"어? 어? 방금 그거 뭐였냐? 나 하늘 날았냐?"

"...."

"혹시 네가 한 거냐? 인간? 엄청 재밌었다. 또 한 번 해줘라. 빨리."

표정만 봐도 방금까지 날 잡으러 달려든 걸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이 멍청한 놈들.... 근데 또 그게 이놈들의 매력이기도 하지.

"알았으니 진정해. 협상만 잘 끝나면 다시 둥기둥기 해줄 테니까."

"정말이냐! 그럼 나 두 번 더 해주는 거다!"

"나는 세 번! 세 번 더 하늘을 날고 싶다!"

봤다시피 오우거 전사의 몸뚱이는 강철 그 자체.

생긴 건 무슨 찰흙을 대충 패대기쳐다 뭉친 것처럼 제멋대로인 주제에, 내구력과 완력은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물론 정말 죽이고 싶으면 원소마법을 쓰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내가 참아야지.

"암튼 진정하고 내 이야기 좀 들어. 나는 페이우드 제국의 황자인 클로드다."

"황자? 그럼 네가 황제 아들이냐?"

곧바로 세눈박이가 부하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이런 세상에 거대하기도 하셔라. 녀석이 앞에 서자 태양이 가려지며 순식간에 주변이 캄캄해진다.

"으응? 근데 너...."

키가 4미터쯤 되는 녀석은 어떻게든 눈높이를 맞춰보려 몸을 쪼그렸다. 하지만 그래도 높이가 맞지 앉아 몸을 좌우로 심하게 기울이기 시작했다.

"몸이 너무 작다. 인간은 작지만 너는 특별히 더 작은 것 같다."

그러게 말이야. 벌써 한 달째 그 끔찍한 영약을 마시고 있는데도 딱히 키가 안 자란다니까?

"나도 그게 불만이야. 암튼 제국 대표로 협상하러 온 거니까 싸우지 말자."

"제국 대표! 왜 이제 왔냐! 제국에 경고하려고 우리가 이 마을 점령한 지 벌써 1년 지났다! 제국이 협정을 깨버려서 우린 급하다!"

"미안해. 이쪽도 문제가 있었어."

"문제? 무슨 문제냐?"

"우선은 커뮤니케이션 문제. 마르 오우거와 제국은'은을 받고 고기를 준다', 그리고 '상호 불가침'으로 협정을 맺었잖아?"

"그렇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국은 둘 중에 '상호 불가침'에 큰 의미를 두고, 은을 받고 고기 주는 거래는 그냥 곁가지 정도로 생각했어. 정작 너희들에겐 그게 가장 큰 문제였는데."

이것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세눈박이는 눈을 부릅뜨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냐? 우린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불가침이야 거래만 지속되면 당연히 따라오는 거 아니었냐?"

"그러게 말이야. 오우거한테는 고기야말로 정말 중요한 건데."

이렇게 말하면 이놈들이 무슨 고기에 환장하는 고기 덕후처럼 보이는데.... 아, 물론 고기 덕후인건 맞고.

하지만 그전에 종족의 생존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다.

"지금이 오우거 여자들이 배란... 아니, 임신할 수 있는 기간이지? 오우거는 10년마다 한 번씩 아이를 낳을 수 있잖아? 그것도 평생에 한두 번 정도밖에 기회가 없고."

"헉! 그건 우리 비밀이다!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아까 말했잖아. 나 여기에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고. 숨어서 너희들 이야기하는 거 전부 엿들었어."

물론 뻥이지만.

실제로 도착한 건 불과 5분 전의 일이다. 이놈들 입장에선 내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으니 대충 둘러댈 수밖에.

세눈박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숨어서 엿듣는 거 좋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널 찾아내지 못했으니 우리 잘못도 있다. 그러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다. 대신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안 된다."

"입 꽉 다물게. 암튼 오우거 여자들이 지금 대량의 고기를 섭취해야 하는 것도 알아. 그래야 임신이 잘 되고, 만약 임신이 되었다 해도 사산될 확률도 줄일 수 있고."

"맞다. 근데 여기서 내가 그런 이야기까지 했었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세눈박이는 멍청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악 냄새! 나는 녀석의 몸에서 풍기는 엄청난 악취에 살짝 뒷걸음을 치며 말했다.

"아무튼 제국이 몇 년 전부터 꾸준하게 보내던 고기를 갑자기 끊어버렸지?"

"그래! 제국이 보내던 물고기 끊어버렸다! 근데 우린 다른 부족과 다르다! 그동안 제국에 고기를 의존했다! 그래서 이렇게 나선 거다!"

"다시 한번 사과하지만 미안해. 원래 요튼 만이란 곳에서 잡은 돌고기를 제국 정부가 구입해서 이쪽으로 보냈는데, 몇 년 전에 요튼 만에 바다괴물이 창궐해서 어업이 막혀버렸어. 그래서 고기를 공급하지 못하게 된 거야."

그렇게 하여, 나흘 전에 완료한 '시 서펜트 루트'가 지금의 '오우거 반란 루트와 연결된다.

덕분에 나도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직접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마차에서 잠을 자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진짜 사지가 찢어지는 것만 같다. 흑흑.

"흐음.... 그러니까...."

세눈박이는 이해력이 딸리는지 거의 1분간 눈을 껌뻑이다 대답했다.

"제국이 바다괴물 때문에 낚시를 못해서, 우리한테 고기를 못 줬다 이거냐?"

"맞아. 물론 협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돌고기 말고 다른 가축이라도 도축해서 보내줬어야 하는데, 아까 말했듯이 제국은 불가침 조약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정작 은과 고기의 거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라고 판단했어."

그래서 결국 이 난리가 벌어졌다.

물론 집정자인 제스 입장에선 기사단이라도 파견해 협정을 깬 마르 오우거를 싹 쓸어버리고 싶었을 테지.

하지만 당장의 마르 오우거만 해도 만만한 부족이 아니며, 일이 커졌을 때 자이루트 산맥에 있는 모든 오우거가 힘을 합쳐 제국령으로 쳐들어오는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

이미 제국의 영토는 바다를 제외한 모든 곳이 제국에 적대적이거나, 혹은 비우호적인 종족들로 포위되어 있다.

만약 어느 한쪽으로 균형이 깨져버리면 다른 쪽에서 기회를 틈타 공격해 올지 모른다. 제국의 군사력은 최강이지만, 그만큼이나 넓은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 사방으로 분산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하필 그때가 부족의 가임기 시작이었어. 일단은 급한 대로 인근의 산을 빡빡 뒤져 산짐승이라도 긁어모으려 했지?"

"어.... 그랬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산짐승도 과거에 비해 한참 모자랐고. 조사를 해보니까 인간들이 마르 오우거의 산에 함부로 들어와 광산을 마구 채굴한 바람에 산짐승이 확 줄어 버린 거야. 자이루트 산맥의 광산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독소가 분출되니까."

"맞다. 인간들은 우리처럼 광산일 제대로 못한다. 광맥은 제대로 못 찾으면서, 정작 독맥(毒脈)만 잔뜩 터뜨려 놓았다."

"그래서 열 받은 너희들은 인간들이 오우거와 교역을 위해 만든 여기 마을을 강제로 점령해 버렸어. 정작 교역은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주제에, 산을 못 쓰게 만들어 놓은 광부들이 거점으로 쓰고 있었으니까."

"...너 참 신기하다."

세눈박이가 놀란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냐? 혹시 우리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재주 있냐?"

"여기 숨어서 너희가 하는 말 다 들었다니까? 암튼 상황은 다 파악했으니 좋게 협상으로 풀자. 우선 내가 당장 필요한 고기를 좀 가져왔어."

"고맙다. 하지만...."

세눈박이는 내 쪽으로 코를 킁킁대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너무 작다."

"뭐?"

"네가 챙겨온 고기 정도는 우리 부족 여자들 배불리 먹일 수 없다."

"내가 너희 주려고 주머니 속에 육포라도 가져왔겠냐? 좀 기다려. 지금 이쪽으로 짐마차가 오고 있으니까."

"짐마차?"

"족장! 족장! 냄새가 난다! 물고기 냄새다!"

그때 마을 입구를 지키던 오우거가 양손을 치켜들며 소리를 질렀다. 요튼을 떠난 수십 대의 짐마차 행렬이, 장장 나흘 만에 자이루트 산맥의 초입에 있는 이곳에 도착하려 하고 있었다.

* * *

그날 밤, 부리나케 부족 마을에 다녀온 세눈박이가 기쁜 얼굴로 양팔을 펼쳤다.

"고맙다 황자! 네가 가져다준 고기는 정말 좋은 고기다! 부족 여자들도 맛있다고 난리 났다!"

"그게 요튼만을 점령했던 바다괴물 고기야. 근데 껴안는 건 참아! 나 죽는다고!"

아슬아슬하게 몸을 옆으로 날리며 세눈박이의 태클을 피했다. 에구, 몸 상태가 엉망이니 이런 동작 하나하나가 고역이구만.

"엇, 미안하다. 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앞으로 일주일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흥분했다."

세눈박이는 쓰러진 내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켜주며 웃었다. 근데 그 거대한 시 서펜트 30마리를 일주일 안에 해치운다고? 이놈들 뱃속엔 무슨 거지가 들어앉았나?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맛이다! 바다괴물 고기 너무 맛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맛있는 고기 처음 먹어본다! 황자 너도 맛보이려고 이렇게 한 덩어리 가져왔다!"

"난 많이 먹어서 물렸어. 괜찮으니 너 먹어."

"그래도 되냐? 알았다!"

세눈박이는 허벅지에 매달아 놓은 커다란 시 서펜트 고기를 입안에 넣고 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오우거한테는 엄청난 미식인 모양인데, 정작 인간에겐 너무 질기고 기름져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우물우물. 이거 너무 쫄깃하고 맛있다! 실은 지금까지 보내준 그 조그만 물고기는 작아서 별로였다. 또 소금을 너무 쳐서 짰고, 그마저도 신선하지 않았는데 이번 고기는 신선해서 너무 좋다!"

이번 루트에 신관을 동원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일정 시간마다 안티 커럽션을 사용, 고기가 썩지 않도록 신선도를 유지해준 신관들에게 감사해야지.

하지만 이런 대단한 수고가 단순히 오우거들의 입맛을 챙겨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시 서펜트 고기는 오우거에게 특별한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오우거 여성들이 이 고기를 대량 섭취하는 과정에 임신을 하면, 태내의 아이에게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같은 루트를 전개했던 지난 두 번의 회귀를 통해 증명된 사실.

오우거는 저 세눈박이처럼 눈알이 더 많던가, 팔이나 손가락이 더 많은 돌연변이일수록 더 강한 힘을 가진다.

다만 이런 경우는 오우거 사회에서 백에 하나가 될까 할 정도로 드문 일.

그런데 시 서펜트를 먹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오우거는 무려 절반 이상의 확률로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아무튼 세눈박이는 오늘 너무 기쁘다. 인간과 싸우지 않고 끝내서 너무 좋다. 그러니 오늘 만큼은 부족의 금지를 풀고, 인간인 황자 너를 우리 부족의 보금자리로 초대하겠다!"

세눈박이가 엄청난 결심을 한 얼굴로 소리쳤다. 휴, 이 말 안 나오면 어쩌나 했네. 나는 예상대로의 반응에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괜찮으면 호위로 인간 두 명 더 데려가도 돼?"

"두 명? 상관없다. 와서 우리 마르 오우거가 담근 벌꿀주와 산딸기주를 마음껏 맛봐라!"

세눈박이는 호기롭게 웃으며 부족마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뒤쪽의 수송마차 근처에 있던 메르데스와 디디를 부르며 세눈박이의 뒤를 쫓았다.

모든 건 예정대로.

하지만 긴장을 풀면 안 된다. 바로 지금부터가 이번 '시 서펜트와 오우거 반란 연계루트'의 결실을 맺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니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5화

8장 첫 번째 정령

그것은 거대한 술판이었다.

키가 3미터를 넘는 거인들이 사람 머리통보다 큰 술잔을 원샷 때리고, 사람 몸통보다 굵은 고기를 뜯으며 흥겹게 몸을 들썩인다.

둥.

두둥.

두두둥.

사방에서 짐승가죽으로 만든 북소리가 울린다. 어둠속에서 이걸 듣고 있자니 뭔가 장엄한 느낌마저 드는데.... 왜 축제에 행진곡 리듬을 두드리고 있는 거지?

암튼 오우거들에겐 오늘 만큼 기쁜 날이 또 없겠지.

하지만 손님으로 초대된 입장에선 참기 힘든 고통의 시간일 뿐.

다 필요 없고, 아무튼 냄새가 너무 끔찍해!

오우거의 몸에서 풍기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악취, 거기에 점점 상해가는 시 서펜트 고기의 비린내가 더해진 결과는 가히 생물학적 재난이었다.

제발 이놈들아! 제발 그만 좀 들썩거려!

"후우...."

맘 같아선 템페스트라도 날려서 이놈들을 모조리 불로 정화해 버리고 싶구만.

하지만 안 된다. 참아야지. 고향에선 화생방 훈련도 버텼는데 겨우 이걸 못 참을까?

"근데 이게 가스체험보다 더 힘들어...."

"황자님? 방금 뭔가 말씀하셨습니까?"

옆에 있던 메르데스가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물었다. 나는 똑같이 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냄새 지독하다고."

"눈을 뜨기 힘들 정도입니다. 표정이 무척 안 좋으신데 이쯤 어울렸으면 그만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안 돼."

나는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 온 지 한 시간도 안 지났어. 힘들더라도 좀 참자."

"저는 상관없지만 황자님이 걱정입니다. 괜찮으면 이거라도 좀 맡고 계시는 게 어떨까요?"

메르데스는 품속에서 가느다란 영약 병을 꺼내 내밀었다. 잠깐, 근데 방금 어디서 꺼낸 거야? 영약 병이 묘하게 따끈따끈한데?

"이게 아마.... 야간투시 영약인가?"

"밤이 깊어 혹시 하고 챙겨왔습니다. 굳이 드시진 말고 냄새만 맡으세요. 향이 나쁘지 않으니 잠시 동안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일이.

나는 군말 없이 병을 열고 냄새를 코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흐읍...."

독한 민트, 살짝 썩은 나무뿌리, 그리고 젖은 흙냄새.

백번 양보해도 좋다고는 말 못할 냄새다. 그래도 주변에서 풍기는 악취에 비하면 천상의 향기라 할 수 있지.

"흐읍.... 흐읍.... 하아...."

이러고 있으니 무슨 약쟁이라도 된 거 같네.

그렇게 한참동안 후각을 정화하던 중, 문득 반대편에 앉은 디디를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약병을 내밀었다.

"디디야."

"네. 황자님."

"여기 냄새 끔찍하지? 괜히 끌고 와서 고생하네. 이거라도 좀 맡고 있어."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예전에 있던 곳에 비하면 견딜 만합니다."

"진짜? 여기보다 더 끔찍한 곳이 있다고?"

"네."

디디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녀석이 제국에서 가장 큰 슬럼가인 자그라 출신이긴 한데, 아무리 그쪽 동네가 위생이 나빠도 설마 여기보다 악취가 심할까?

"크하하! 뭐하고 있나! 마셔라! 여기 술 가져왔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세눈박이가 커다란 술잔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영약 병 대신 술잔에 얼굴을 파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바로 이거지...."

"황자님, 아직 해독기간이라 가급적 술은 드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시녀장님도 따로 주의를 주셨습니다."

"마시는 거 아니야. 냄새만 맡는 거야. 이거 냄새 엄청 좋아."

세눈박이가 가져온 술은 꿀로 담근 향긋한 벌꿀주였다. 메르데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받은 잔을 홀짝였다.

"벌꿀로 만들었는데 정작 달지는 않습니다. 신기하군요."

"대신 향이 좋지? 오우거들이 술 담글 때 향초를 많이 집어넣어서 그래."

"저는 술을 거의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술은 무척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것 같군요."

메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모금 더 마셨다. 실제로 9회차 때 이걸 대량으로 가져다 팔았더니 제국 주류업계가 뒤집힐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보여줬지? 덕분에 나도 돈 꽤나 만졌고.

이렇게 마르 오우거와 친해지면 두고두고 얻을 게 많다.

물론 핵심은 반제국전쟁 때 오히려 제국 편을 들어준다는 것과 이계와의 전쟁에 전사를 보내 나름 큰 역할을 해준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시 서펜트 30마리를 여기까지 끌고 온 고생은 보답 받고도 남는다.

하지만 지난 아홉 번의 회귀를 전부 돌아보면, 정작 오우거와 협력할 때보다는 싸우고 전멸시킬 때가 훨씬 많았다.

왜 그랬냐고?

냄새가 너무 끔찍해서...는 물론 아니다.

처음엔 이놈들의 장점을 잘 모르기도 했고, 반대로 제거했을 때 챙길 수 있는 이점도 제법 있었다.

만약 이놈들을 싹 몰아내면, 자이루트 산맥에 있는 풍부한 광물을 자유롭게 무한정으로 캘 수 있다.

추가로 산맥 너머에 있는 대표 국가인 알비어스 왕국과의 교류도 한층 원활해지며, 알비어스가 훗날 이계와의 전쟁에서 지원군을 보내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의 광맥은 잘못 건드리면 독을 뿜어 광부들의 소모가 너무 심하고(반면 오우거는 광독에 면역력이 있다), 알비어스 왕국의 지원군도 오우거의 지원군에 비하면 전혀 우월하다 볼 수 없다.

무엇보다 마르 오우거와 친해지면 다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이곳만의 특별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지금도 그걸 위해 여기까지 직접 온 건데.... 으, 근데 대체 언제 시작하려나?

"오! 저긴 벌써 시작했나! 하하하하! 좋다, 좋아!"

그때 세눈박이가 멀리 흔들리는 오두막집을 보며 웃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쿠쿵!

집 전체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덜컹거리는데....

아, 망할.

이놈들 축제로 흥분해가지고는 끼리끼리 집으로 들어갔구만.

누가 오우거 아니랄까봐 거사를 치르는 스케일 한번 무지막지하다.

신선한 시 서펜트 고기는 그 자체로 오우거에게 최음 효과라도 내는 걸까?

저번 회귀 때 고기의 선도가 안 좋았을 때는 축제 첫날부터 이런 난리판이 벌어지진 않았는데....

삐걱삐걱!

쾅! 우당탕!

텅! 텅! 텅! 텅!

얘들아. 이건 너무하잖아.

마치 옆집에 이사 온 신혼부부 덕분에 밤마다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는 것 같은 분위기다.

"세눈박이, 나도 짝과 잠시...."

"족장, 자리 좀 비우겠다."

"그래그래! 어서 들어가 봐!"

근처에 있던 두 오우거도 세눈박이에게 인사를 하더니 슬그머니 빠져 뒤쪽에 있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 격렬한 자진모리장단이 시작됐다. 그러자 순진한 메르데스가 요동치는 집을 보며 질문했다.

"황자님, 저 집들은 왜 저렇게 심하게 덜컹거리는 겁니까?"

"글세...."

무심결에 벌꿀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고개를 저었다.

"집수리라도 하나? 나도 모르겠네."

몰라요. 이 작고 어린 클로드 황자 애기는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암튼 빨리 시작했으면 하는 게 저 오우거들의 큼지막한 박수소리는 결코 아니다. 난 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이 모든 고통을 참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

"계시다!"

바로 그때, 마을 안쪽에서 팔이 네 개 달린 오우거가 급하게 달려 나왔다.

"성역에서 계시가 나왔다!"

휴. 드디어 시작됐구나.

"뭔데? 저 오우거는 왜 저래?"

다 알면서도 세눈박이에게 질문했다. 세눈박이는 당황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네팔이! 네팔이는 우리 성역을 관리하는 주술사다!"

"주술사?"

"그렇다. 항상 성소를 지키며 주인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근데 왜 저러지? 설마 축제에 끼워주지 않았다고 저러는 건가?"

"주술사는 축제에 끼면 안 돼?"

"그렇다. 주술사는 언제 주인님이 말씀하실지 모르니 항상 성소 입구를 지켜야 한다."

"그거 힘든 일이네. 근데 주인님? 그건 또 뭔데?"

"주인님은 이 산맥의 주인이다."

세눈박이는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분은 거대한 바위정령이다. 우리 오우거들의 수호신이고."

"바위정령이라...."

"그렇다. 인간들은 정령을 모르나?"

"이야기 정도는 들었어. 근데 여기 그런 것도 있었어?"

"그렇다. 정령은 항상 성소에 있다. 우리 마르 오우거가 성소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산맥의 모든 오우거 중 우리가 대장 부족이다."

"세눈박이! 거기 있었구나!"

그때 주술사가 이쪽으로 달려오며 급히 소리쳤다.

"방금 성역에서 주인님이 말씀하셨다! 우릴 도와준 인간을 성역으로 데려오라 하신다!"

"인간을 성역으로? 정말이냐?"

"정말이다! 빨리 데려가지 않으면 주인님이 노하신다! 어서!"

주술사는 조급한 얼굴로 나를 포함한 인간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나는 세눈박이를 보며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뭔데 이거? 위험한 거야?"

"어.... 위험하진 않을 거다. 주인님은 오우거를 해치지 않는다. 그리고 넌 오우거의 친구다. 그러니 주인님은 오우거의 친구를 해치지 않을 거다."

이상한 삼단논법이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갈게. 이것도 오우거 스타일의 환영행사 같은 거지?"

"황자님, 거대한 바위정령이라는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메르데스가 날렵하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오우거의 수호신이라잖아. 칭찬하려고 부르는 게 아닐까? 불안하면 너도 옆에 따라와."

"당연히 따라가겠습니다. 황자님 혼자는 절대 못 보냅니다."

"맘대로 해. 디디? 너도 같이 올래? 평생에 이런 경험하기 쉽지 않을 걸."

"...알겠습니다."

미리 일어나 분위기를 살피던 디디도 뒤를 따랐다. 그러자 앞서 걷던 주술사가 화들짝 돌아보며 소리쳤다.

"잠깐! 왜 너희 셋 다 따라오냐? 한 명만 와라!"

"주인님이 오우거를 도와준 인간을 성역으로 데려오라고 했다며? 우리 셋 다 오우거를 도왔으니 당연히 셋 다 들어가야 하지?"

"어.... 그런가? 알겠다."

주술사는 머리를 긁적이다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어벙한 오우거 같으니라고. 이러다 나중에 주인님에게 크게 한번 혼나지.

하지만 작전 상 어쩔 수 없다. 누군가는 내가 성소에서 벌일 한바탕 사기극의 희생자이자 목격자가 되어야 하니까.

오우거 반란 루트에서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건 처음이긴 한데.... 딱히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니 문제는 없겠지?

* * *

마을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자 나뭇가지와 꽃으로 장식된 커다란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부턴 나 못 들어간다."

주술사는 입구 옆의 커다란 비석 앞에 걸음을 멈췄다.

"주인님이 부르셨으니 너희만 들어가라."

그리고는 근처에 꽂아둔 횃불을 뽑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 위에 빛을 내는 신성마법을 발동시켰다.

"횃불 없어도 돼. 안이 많이 어두워?"

"통로는 어둡지만 가장 깊은 곳으로 가면 다시 밝아진다. 나중에 내가 주인님께 혼날지도 모르니 빨리 들어가라."

미안, 넌 나중에 분명 혼나게 될 거야. 그래도 불쌍하니까 내가 잘 말해줄게.

나는 표정을 감추며 앞장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따라 들어온 디디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자님, 저는 이번 일에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같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일은 오롯이 황자님께서 해내신 업적입니다. 괜히 다른 인간이 들어갔다가 바위정령이 화를 내는 게 아닐까요?"

메르데스도 함께 물었다. 나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도와준 인간을 오라고 해놓고 설마 화를 내겠어?"

"지당한 말씀입니다만, 정령은 인간의 도리로 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들었습니다."

"아무렴 어때. 화내면 사과하지 뭐. 근데 바위정령이라.... 오우거는 바위정령이구나."

"네?"

"인간 말고 다른 종족은 저마다 정령의 비호를 받는다는 이야기, 혹시 들어봤어?"

메르데스와 디디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엘프는 숲의 정령의 비호를 받고 있으며, 멀리 남쪽 섬에 있는 고대의 물개 같은 것들이 불의 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원체 유명하니까.

덕분에 인간이 정령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이종족의 성역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억지로 밀어 붙이면 정령마법을 얻는 게 아니라 정령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그러니 해당 종족에 필요한 걸 주고, 정령의 신임을 받아 서로가 윈윈 하는 방법이 베스트다 이말이지.

"황자님, 저곳이 성소인 것 같습니다."

메르데스가 동굴 끝의 환한 빛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 서 넓은 공간에 발을 내딛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26화

8장 첫 번째 정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