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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턴 언데드(Turn undead).

모든 신성마법의 꼭대기에 있는 '극대신성마법'중 하나.

네임벨류로 따지면 일반 마법의 정점에 있는 템페스트보다도 한 단계 높은 위상이다.

아크 위저드의 경지에 오르면 누구나 쓸 수 있는(정확히는 아크 위저드가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인) 템페스트와 달리, 턴 언데드는 신관의 정점인 아크 프리스트가 된다 해도 그냥은 쓸 수 없는 특별한 마법.

-턴 언데드는 강한 신념을 가진 신관이 최소 60년 이상을 수행해야 사용할 수 있는 극대신성마법이다.

네 번째 회귀 때 대신전의 고문서에서 이 문구를 발견한 이후, 나는 수백 년간 전승이 끊긴 '턴 언데드'라는 특별한 신성마법을 되살려낼 계획을 세웠다.

물론 60년은 일반인에겐 평생을 바쳐도 될까 말까 하는 아득한 시간.

하지만 회귀를 반복하는 내 입장에선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

-극대신성마법의 습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신과 자신의 연결을 느끼며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 조건도 이미 OK였다. 어차피 난 운명과 시간의 신인 로아와 반말까지 튼 사이잖아? 존재 자체를 확신하고 느끼는 건 세상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단 말이지.

그런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지난 아홉 번째 회귀의 막바지에 드디어 턴 언데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이계의 군대는 언데드가 아니라 웨이브를 막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됐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 모든 노력은 마지막 회귀의 바로 이 순간을 위한 빌드 업이었으니까.

'턴 언데드.'

마법을 발동한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빛에 휩싸였다.

마을을 포위하고 있던 엄청난 규모의 해골 병사도.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사람의 살과 내장을 뜯어 먹던 좀비와 구울들도, 모두가 공평하게 선명한 빛에 휘감긴다.

그 빛은 생명이 없는데 살아 움직이는 모든 존재에 대한 부정.

존재를 부정당한 언데드는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다. 모두가 한순간 허물어지며,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흙으로 돌아갔다.

폭음도, 비명도, 괴성도, 발악도 없이.

그렇게 모든 상황이 한순간에 종결됐다.

고개를 돌리자 기사단과 충돌한 사령군의 분대도 똑같이 사라져 있었다. 아, 멀리 칼을 빼든 듀론이 혼이 빠진 얼굴로 서 있는 게 보이는구만.

내가 굳이 적진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턴 언데드는 이름 그대로 언데드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마법. 하지만 시전자를 중심으로 사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최대한 적진 한가운데에서 사용해야 가장 큰 효과를 보게 된다.

어.... 그런데 뭔가 다리가 풀리면서 몸이 휘청거리는데?

"황자님!"

뒤를 따라잡은 메르데스가 말에서 뛰어 내렸다. 나는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잡으며 요새 안쪽으로 말을 달렸다.

"메르데스! 위험하니 물러서!"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황자님이 뭔가 하신 겁니까?"

메르데스는 놀랍게도 맨다리로 바로 옆까지 따라붙었다. 뭐야 이거 무서워. 처음 마갑을 입은 주제에 이게 되나?

"...나도 잘 모르겠어."

"방금 이 빛의 폭격, 황자님이 하신 게 아닙니까?"

"내가 한 게 맞아. 근데 나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네?"

여기서부터는 미리 준비한 멘트를 늘어놓았다. 나중에 황궁에 돌아가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엄청 해야 되겠지?

"아까 그 끔찍한 광경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막 달려 나가게 되더라. 그리고 속에서 뭔가 울컥하면서 빛이 쏟아졌어."

그리고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처럼 고양된 표정을 지었다. 투구 속에서 눈을 깜빡이던 메르데스는, 순간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소리쳤다.

"황자님! 생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새 곳곳에 주저앉은 마을 주민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좀비 무리에 살점을 뜯기다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 사람도 있었고.

"황자님!"

마침 듀론이 기사단을 몰고 요새 내부로 진입했다. 나는 말을 멈추고는 듀론을 향해 소리쳤다.

"마을에 아직 생존자가 있다! 당장 부상자를 모아 치료해야 해! 죽기 전에!"

"네? 하, 하지만 그게 그러니까...."

표정만 봐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려던 듀론은, 갑작스런 명령에 주변을 살피며 상황을 확인했다.

"큰일 났군요. 급하게 동원되느라 저희 부대엔 신관이 편성되지 못했습니다."

"뭐?"

"어지간한 부상이면 약으로 응급처치를 하겠지만 저런 심각한 중상자는...."

아, 맞다. 우리 부대에 신관 없었지.

보통은 기사단마다 파견 신관이 스무 명 정도 섞여 있는데. 이 또한 내게 엿을 먹이기 위한 제스의 흉계 중 하나였다.

망할! 그럼 어쩌지?

"...그럼 나한테 데려와!"

여기서부터는 계획 밖의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우선 말에서 뛰어 내린 다음, 양팔의 살점을 잔뜩 뜯어 먹힌 근처의 남자를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내가 고칠 수 있어! 중상자를 선별해서 나한테 전부 데려와!"

그리고는 왼손에 투명한 빛을 일으키며, 남자의 환부에 직접 가져가 댔다.

"크, 크악!"

'힐링(healing), 그리고 안티 포이즌.'

곧바로 환부에 피가 멎으며 살이 차올랐고, 동시에 언데드의 이빨에서부터 옮겨온 독기가 정화되었다. 바로 옆으로 달려와 상황을 지켜본 듀론은, 자신이 본 것을 이해하기도 전에 즉시 몸을 쭉 피며 명령을 내렸다.

"기사단은 들어라! 지금 당장 마을을 수색해서 부상자를 확인! 그중에 생명이 위급한 중상자를 추려 이곳으로 옮겨와라! 당장! 한시가 급하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주민을 살려야 한다! 어서!"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1화

4장 연쇄효과

15살의 소년 리넨은 요새마을 돌턴의 수습병사였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강제로 선발되었지만 유감은 없었다. 고향인 돌턴을 버리고 도망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죽음의 군대는 이미 지척까지 몰려온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감도 있었다.

리넨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힘만큼은 마을에서 최고였다. 특히 무거운 걸 옮기거나 오래 버티는 체력은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

하지만 전쟁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해골, 시체, 그리고 해골과 시체를 짜 맞춰 만든 괴물들.

이것들이 요새의 모든 것을 단 한순간에 휩쓸었다.

개전 10분 후, 바로 어제까지 껄껄대며 큰소리치던 옆집의 가죽장인 아저씨가 해골병사의 칼에 목이 날아갔다.

15분이 지나자 형제처럼 자란 동갑내기 친구가 산 채로 거대한 괴물의 입에 먹혔고, 자신에게 창을 주고 기본 창술을 가르쳐준 병사는 수십 마리의 좀비에 뒤덮여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리넨은 그 모든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할 뿐.

필사적으로 휘두르던 창은 어느새 자루만 남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썩은 내가 풍기는 좀비 세 마리에 짓눌린 상태였다.

캬악!

녀석들은 리넨의 얼굴부터 뜯어 먹으려 했다.

리넨이 급하게 팔로 얼굴을 가리자, 이번에는 상관없다는 듯 팔뚝을 물어뜯으며 생살을 씹어댔다.

우득.

으적.

콰득.

아아. 이제 죽는구나.

정말 신이 있다면, 정말 기적이란 게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벌어지면 좋을 텐데.

그렇게 의식이 흐려지던 순간, 정말로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번쩍!

하늘에서 눈부신 섬광이 떨어졌다.

그것이 자신을 물어뜯던 좀비들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건 대체 뭘까?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신음하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마을에 들어온 백마 탄 소년이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내게 데려와!"

그리고는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와, 다짜고짜 팔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내가 고칠 수 있어! 그러니 중상자를 선별해서 나한테 전부 데려와!"

그 순간, 투명한 빛이 리넨의 처참한 양팔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동시에 피가 멈추고 뜯긴 살이 다시 차올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것은 리넨에게 있어 기적을 넘어선 하나의 계시였다.

-원한대로 네게 기적을 내렸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 평생 저 소년을 위해 싸워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리넨은 자신이 들은 환청에 가까스로 대답하며 의식을 잃었다.

한참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을 고친 소년이 바로 제국의 막내 황자인 클로드라는 것을.

심지어 마을을 뒤덮은 사령군을 한순간에 빛으로 정화한 것도 바로 그 클로드였다. 소문에는 황자의 품행이 워낙 안 좋았기 때문에, 이를 놓고 사람들 사이에 격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망나니가 이런 기적을 일으킨 게 말이 되나?

-무언가 소문이 잘못 퍼진게 아닌가?

-클로드 황자가 빛으로 사령군을 정화했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건 못 믿어!

하지만 그런 소문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걸 현장에서 눈으로 봤고, 직접 몸으로 체험했으니까.

기적.

심지어 그 기적이 자신까지 바꿔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리넨은 그동안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새로운 힘.

자신이 손에 쥔 창이 빛으로 휘감긴다.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저 나무꾼이나 광부로 평생을 살다 죽었을 텐데.

하지만 직접 체험한 기적이, 소년의 몸 안에 꽁꽁 숨어 있던 특별한 힘을 끄집어내 주었다.

아직까지는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그것이 어떤 힘이던 간에 오직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황자를 위해 쓰여질 거란 사실 뿐이었다.

* * *

사령군이 소탕을 당한 지 나흘 뒤.

황궁 중앙에 있는 제국의 방엔 클로드에 관한 문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곧 황자님께서 입궁하시는데...."

"난 아직도 왜 이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소. 사령군을 클로드 황자가 섬멸했다고? 그야 기사단을 데려갔으니 당연한 일 아니오?"

"하지만 그 기사단이 수호 기사단 아닙니까? 대공께서도 알만한 건 다 아시는 분이...."

"어허, 그럼 수호기사단을 내린 섭정 전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뜻이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애초에 클로드 황자님이 기사단의 도움 없이 혼자서 적을 섬멸했다는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황자가 무슨 아크 위저드라도 되나? 아니면 나이트 마스터? 나이트 마스터도 혼자서 수천의 사령군을 당해내는 건 불가능할 텐데?"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라고 합니다. 듣자하니 전장에서 신성마법을 처음으로 깨우쳤다 하더군요."

"신성마법은 상처를 치료하거나 신체능력을 높여주는 마법 아니오? 그걸로 뭘 어떻게 하면 사령군을 섬멸해?"

"소문에는 전하께서 깨우치신 신성마법이 이미 전승이 끊긴 극대신성마법 중 하나라고...."

"뭐? 턴 언데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신관들이 지어낸 전설 아니오? 그런 게 있었으면 왜 아직도 이 땅에 사령군이 남아 있겠소?"

"하지만 목격자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데 제스 황자님께서는 왜 아직도 등청하지 않으시는지.... 섭정 전하께서 오셔야 클로드 황자님의 전공에 대한 포상을 논의할 텐데 말입니다."

예정대로라면 30분도 더 전에 제스가 제국의 방에 들어왔어야 했다. 그러자 논쟁을 하던 대신 하나가 굳게 닫힌 제국의 문을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 뻔하지. 동생의 승전 소식에 기뻐하다 준비가 늦어지시는 게 아니겠소? 아무튼 포상이야 딱히 특별할거 있나. 관례대로 약간의 영지와 은을 수여하면 그만이지."

"그렇게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은상도 은상이지만 관직이 수여되지 않겠습니까?"

"관직? 그 망나니에게 말이오? 그 분이 작년에 황궁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려 보는 게 좋겠군. 그보다 오늘은 계속 미뤄온 알베르트 황자와 페넬 백작의 '실종'에 관한 결론을 지어야 하지 않겠소? 누가 봐도 죽은 게 확실한데 황가에서 결론을 내고 있지 않으니...."

그 순간, 대전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오, 드디어 오셨군."

"아니, 저자들은...."

처음에는 모두가 제스 황자의 입장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몰려온건 전원이 하얀 정복을 갖춰 입은 신관들. 특히 가운데 선 신관은 옷에 금색 선이 들어간 특별한 디자인의 옷과 관을 쓰고 있었다.

"대신관!"

"대신관 에식스? 정말인가?"

"어째서 대신전을 나와 이곳까지...."

"무슨 일이지? 오늘 신전에서 황궁을 방문할 예정이 있던가?"

대신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한편 여덟 명의 고위신관을 대동하고 입장한 대신관은 제국의 방 중심에 서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형제 여러분. 감사하게도 이 위대한 제국을 떠받치고 계신 대소신료 분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계셨군요."

"그야 정례회의 시간이니...."

"대신관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저는 클로드 황자가 곧 이곳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에식스는 당연한 듯 말했다. 올해로 90살이 되는 고령의 신관이었지만, 여전히 등이 꼿꼿하고 목소리에 힘이 담겨 있었다.

"소식은 이미 들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클로드 황자를 맞이하여 사령군을 격퇴한 축하의 인사를 드리고, 더불어 잠깐의 확인 의식을 거친 다음 성자 서품'을 내리려 찾아 왔습니다."

"성자 서품?"

"그게 무엇이오? 애초에 성자라는 말을 처음 들어 보는데?"

"성자란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다섯 신의 축복을 통해, 불가능한 기적을 일으킨 인물에게 수여하는 칭호입니다."

에식스는 대신들을 돌아보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이 모르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자 서품을 마지막으로 수여한 게 무려 320년 전의 일이니까요."

"320년 전...."

"만약 엘스톤 백작령의 돌턴 마을에서 벌어진 기적이 사실이라면, 클로드 황자는 성자 칭호를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신관 수련도 없이 하루아침에 신성마법을 깨달으셨고, 여기에 전승이 끊긴 극대신성마법을 부활시켰으니까요."

"극대신성마법이라니, 그 턴 언데드라는 마법이 실존하는 것이었소?"

"물론입니다."

에식스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다만 최근 수백 년간 어떤 신관도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옛 기록에 따르면 아크 프리스트의 경지에 오른 신관이 60년간 따로 수행을 쌓아야 겨우 도달할 수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아크 프리스트에 도달하기 위해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할 텐데, 여기서 어찌 또 60년의 세월을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인간의 수명으로는 도저히...."

"결국 턴 언데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의 기적이 필요하다는 걸 완곡하게 표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엄청난 마법을 어찌 클로드 황자가?"

"클로드 황자께서는 사령군의 마수에 휩쓸리는 무고한 백성들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턴 언데드를 발동하셨다고 증언하셨다 합니다. 이는 분명 다섯 신의 축복을 통해 스스로 깨어나 기적을 일으키신 겁니다."

에식스의 음성이 어느새 흥분으로 격양되기 시작했다. 그는 어서 빨리 일을 진행하고 싶은 듯,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그 전에 서품 절차와 확인과정을 섭정 전하께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그런데 섭정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아직 대전에 등청하지 않으신 겁니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2화

4장 연쇄효과

"전하. 제국의 방에 어서 행차하시지요."

집무실에 들어온 연락관이 불안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이미 대신들이 전부 모였고, 조금 전 대신관 일행도 입장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

제스는 의자를 뒤로 돌린 채 손만 흔들었다.

"금방 갈 테니 곧 입장하겠다 알려라."

"네. 알겠습니다."

연락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사이, 제스는 움켜쥔 주먹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대신관? 그 노인네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지?"

"클로드 황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문에는 전승이 끊긴 신성마법을 되살려서 사령군을 일거에 격퇴했다니 말입니다."

경호를 서던 파이렌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제스는 자신이 어렸을 때도 이미 노인이었던 대신관의 얼굴을 떠올리며 침묵했다.

에식스.

대신관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아크 프리스트. 설사 황제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권위의 소유자다.

만약에 그런 에식스가 클로드의 뒷배가 되어 준다면?

"큭...."

제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뜯어버릴 것처럼 움켜쥐었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막강한 적을 상대로 허접한 군대를 내어 줬고, 여기에 급하다는 핑계로 파견 신관들까지 편제에서 빼 버렸다.

계획대로라면 클로드는 사령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어야 한다.

만약 기적적으로 생존해 돌아온다 해도, 당연히 패전의 멍에를 짊어지고 전 제국 시민의 비난을 한 몸에 뒤집어 쓸 예정이었는데.

하지만 승리해 버렸다.

그것도 함께 동원된 기사단이나 병사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혼자의 힘으로 모든 적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바꿔 놓았다고 한다.

"턴 언데드라니, 왜 하필 그 순간에...."

극대신성마법은 신관들이 만들어낸 전설 같은 거라 생각했는데.

하물며 독약 중독으로 다 죽어가던 클로드에게 어째서 그런 기적이 벌어진 걸까?

어쩌면 자신이 클로드의 힘을 깨운 걸까?

특수한 독약을 먹임으로써 숨겨진 능력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던가?

아니면 나와 상관없이 원래 그렇게 될 예정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사령군과의 전쟁에 내보내지 않았을 텐데...."

"전하. 일단 서둘러 제국의 방에 등청하십시오. 늦으면 늦을수록 대신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파이렌이 조언했다. 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대꾸했다.

"그래. 가서 개선한 클로드를 맞이하고 포상을 내려야지. 하지만 온 세상의 오명을 다 뒤집어쓰라고 보냈던 놈에게 내 손으로 상을 내려야 하다니!"

말 그대로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전공을 치하하고 상을 내리지 않으면 자신을 향한 여론이 땅으로 추락할건 불 보듯 뻔한 사실.

"아니, 아니야. 극대신성주문이고 뭐고.... 그 녀석은 이미 머리가 망가졌다. 한번은 어쩌다 통했어도 계속해서 그런 고급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리가 없어."

제스에게 당장 필요한 건 무너진 멘탈을 수습하기 위한 정신승리였다.

"그래. 오히려 자신의 힘에 취해 새로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오히려 은상을 잔뜩 안겨주고 거만하게 만드는 편이 좋겠군. 후우...."

몇 번이나 심호흡을 반복한 제스는, 이내 평소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제국의 방으로 간다. 훗날을 위해 오늘의 모욕은 일단 견뎌내도록 하지."

* * *

요새마을에서 신성마법을 너무 많이 쓴 덕분일까?

그 뒤로 반나절을 꼬박 기절해 버렸다. 뭐 어쩌겠나, 일단 사람부터 살려놓고 봐야지.

덕분에 예정보다 약간 늦긴 했지만, 아무튼 깨어난 직후부터 그럴듯하게 만든 이야기를 주변 기사들에게 늘어놓았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몰려오는 사령군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속에 빛이 차올랐다.

-그 뒤로 내가 빛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회복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걸로 봐서는 이것도 신성마법 같다.

-난 아무것도 몰랐다. 세상에 언데드를 한방에 죽이는 마법도 있었나?

이런 발언이 계속 퍼져 제도에 닿게 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관들이 기적이 일어났다며 알아서 호들갑을 떨게 분명하다.

왜냐고?

턴 언데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습득이 불가능한 마법이거든. 인간이 대체 어떻게 60년 동안 하나의 마법을 수련하겠어? 그전에 늙어 죽고 말지.

그러니 신께서 혼란스런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클로드 황자의 몸에 기적을 내린 거라고 해석할 것이다. 내가 전에 읽었던 고문서에도 그런 기록이 남아 있기도 했고. 아예 칭호부터 '성자'로 바뀐다고 했던가?

당연히 내 평판은 '악당 망나니 황자 클로드'에서 '신의 기적을 받은 클로드 황자'로 한순간에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추가로 제스한테 포상도 잔뜩 뜯어내야지.

그렇게 황궁으로 돌아와 제국의 방에 입장한 순간, 나는 모든 예상이 100% 적중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오오! 클로드 황자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사악한 악령군을 물리치고 돌아오신 황자님께, 다섯 신을 모시는 신전의 대표가 경축의 인사를 올립니다."

대신관 에식스가 다른 신관들을 거느리고 제국의 방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에식스가 직접?

여기까지는 예상 못했다. 모든 신관의 우두머리인 대신관이 엉덩이가 무겁다는 건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인데 말이지.

"축하드립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신관도 함게 인사를 올리자, 좌우에 나열해 있던 대신들까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음, 아주 좋아. 이거 떠날 때랑 돌아올 때랑 분위기가 완전 다르구만.

반면 제스는 언제나처럼 냉정한 얼굴로 대리 옥좌에 앉아 있는데...,

뭐 안 봐도 뻔하지. 멀쩡하게 돌아온 날 보고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후의 절차는 큰 이변 없이 예정대로 흘렀다.

온갖 미사어구로 내 승전을 치하하고, 추가로 몇 명의 대신에게 간단한 의견도 듣고, 이 자리엔 없지만 수호기사단의 단장인 듀론에 대한 칭찬도 늘어놓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스가 막 승전한 내게 은상을 내리려는 찰나. 대신관 에식스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 전에 죄송합니다만 섭정 전하.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클로드 황자님의 '자격'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음?"

제스는 순간 일그러진 표정을 급하게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라. 다만 이후로 진행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시간을 너무 빼앗진 않도록."

"잠깐이면 끝날 겁니다. 그럼...."

에식스는 바로 내 쪽으로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클로드 황자님, 돌턴 마을에서 황자님의 몸에 일어난 일은 실로 역사적인 기적입니다. 대신전의 천년 역사를 돌아봐도 그에 견줄만한 기적은 불과 두 건 정도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저 사령군이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고 눈이 돌아가서...."

제스의 눈앞이기도 하니 일부러 살짝 어벙한 모습을 연출했다. 에식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백성을 아끼는 진실 된 마음이 순간의 기적을 일으킨 겁니다. 저희 대신전은 이런 황자님께 성자의 칭호를 내리려 합니다. 그러니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곳에서 다시 한번 힘을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여기서 그걸.... 턴 언데드라 했던가? 그걸 사용하라고?"

쓰라면 쓰지 뭐. 근데 성자 칭호는 그냥 턴 언데드를 쓰면 같이 딸려오는 보너스 같은 거 아닌가?

"아닙니다. 이곳엔 언데드가 없으니, 턴 언데드를 시전하셔도 결과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에식스는 주변을 휙 둘러본 다음, 어째서인지 제스의 모습을 잠시 주시하다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황자님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신성마법에 문외한인 분이셨습니다. 평생 동안 신관 수업을 받으신 적도 없지요?"

"그야 물론...."

"그러니 아무 신성마법이나 상관없습니다. 제 손에 시전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별 생각 없이 에식스의 내민 손에 힐링 마법을 사용했다.

"오, 오오.... 역시...."

에식스는 어딘지 호들갑을 떠는 모습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기적은 증명되었습니다."

"오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다른 신관들의 입에서도 탄성이 쏟아졌다. 에식스는 내 머리 쪽으로 손을 뻗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망극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황자님의 머리에 살짝 손을 얹어도 되겠습니까?"

"음? 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에식스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는, 제국의 방에 있는 모두에게 들릴 만큼 굵고 힘 있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다섯 신을 섬기는 대신전의 수장인 나 에식스는, 지금 이 순간부터 페이우드 제국의 제6황자인 클로드 황자에게 신의 기적의 산 증인인 성자 칭호를 수여한다."

음....

그냥 이걸로 끝?

딱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걸로 봐선, 역시 그냥 딸려오는 말뿐인 칭호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걸 받았으니 앞으로 신전의 도움을 받는 게 더 수월하기 않을까? 내가 계획했던 예상치보다 더?

"...황자님."

그때 대신관이 한발 더 내 쪽으로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제 뒤로 보는 눈이 있으니, 이곳에서는 황자님께서도 불편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으, 응?"

"자세한 이야기는 대신전에서 드렸으면 합니다. 오늘밤이라도 방문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뒤로 물러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거 봐라? 이 할아버지가 뭔가 꿍꿍이가 있나본데?

그렇다면 이쪽도 맞장구를 쳐 줘야지. 나는 그저 칭호를 받은 게 좋다는 듯 멍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런데 방금 대신관의 시점에서'뒤'에 있는 눈이라면 .... 결국 제스 한 명뿐이않나?

설마 대신관은 제스의 정체에 대해 이미 파악하고 있나? 그렇다면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닌데.

지난 아홉 번의 회귀를 통해, 나는 대신관에 관한 핵심을 전부 파악했다 확신했다.

물론 중요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변동성이 있는 인물은 아니다.

핵심은 이 노인이 배신자는 절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제국은 물론 전 대륙에 퍼져있는 '다섯 신'의 신관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 와중에 제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는데.... 어쩌면 내가 너무 앞서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대신관에게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비밀이 존재 했나?

"흠, 그럼 그 대신전의 칭호 수여도 끝난 것 같으니...."

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중단된 수여식을 마저 진행했다.

"사령군을 토벌한 제국의 여섯 번째 황자 클로드에게,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마땅한 은상을 수여한다. 우선 전례대로 제국 금화 3천 개가 지급될 것이며, 현재 임시 영주가 돌아가며 맡고 있는 베리트의 절반을 분절하여 영지로 수여할 것이다."

"베리트의 절반!"

순간 조용하던 귀족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저 망나니에게 그렇게 큰 영지를...."

"쉿, 조용하시오. 지금은 큰 공을 세운 개선장군 아니오?"

"그래도 너무 과한 상이지 않나? 베리트가 얼마나 큰 땅인데!"

"물론 크긴 큽니다만, 그래도 썩 좋은 땅은 아니지 않습니까? 영민들도 대부분 난민이고...."

맞다. 베리트가 절대 좋은 땅은 아니지.

그나마 장점이 있다면 루넨브레스 저택과 가깝다는 것 정도인데.... 암튼 이걸 지금 받아버리면 곤란하다. 얼마 후에 진행할 테크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거든.

"모두 조용히!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영지의 위치나 규모 등은 며칠 안에 문서로 내릴 것이니...."

"혀, 형님, 영지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연출하며 제스의 말에 끼어들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3화

4장 연쇄효과

"뭐라? 영지가 필요 없다고?"

"그렇..., 그렇습니다. 대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곧바로 주변의 대신들이 크게 웅성대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제스를 보며, 미리 준비한 어설픈 말투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저는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요새마을에서 턴 언데드를 사용한 순간,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신의 음성!"

순간 옆에 빠져있던 대신관이 놀란 목소리로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캬, 이 할아버지가 사전 약속도 없이 합을 아주 잘 맞추는데? 이러면 내 계산보다 연출이 확 살아나는데?

"그, 그게 목소리 같기도 했지만 일종의 예감 같기도 한데.... 아무튼 사령군은 이번에 투입된 병력보다 훨씬 많은, 어마어마한 본대를 죽음의 땅에 보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의 땅은 엘스톤 백작령의 동쪽에 펼쳐진 끝없는 황무지를 말한다. 제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냐?"

"그러니까 목소리.... 아, 아니, 제 예감으로는 그곳에서 앞으로도 더 많은 언데드 군대가 침공해 올 것입니다."

"그걸 네가 어찌...."

어떻게 아냐고?

방금 대신관이 한 말 못 들었냐? 신의 음성을 들었다니까?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제스는, 이미 방안에 있는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다는 걸 파악하고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아니,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말이지?"

"그러니 제게 영지 대신, 언제든지 엘스톤에 달려가 사령군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뭐?"

순간 제스의 눈이 경직되었다. 설마 내가 이런 제안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세상에, 황자가 지금 저 힘든 일을 자처해서 맡겠다고 한 건가?"

"이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군. 그 망나니가 어떻게 된 거지?"

"엘스톤은 베리트 만큼이나 척박한 땅이지. 굳이 저런 일을 해 봤자 득 될 일도 없을 텐데?"

"역시 신의 기적? 그 개차반이 진심으로 회심한 건가?"

그래그래. 이런 노골적인 반응 아주 좋아.

나는 좌우에서 쏟아지는 대신들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간절한 표정으로 제스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대던 제스는 이내 냉정을 되찾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네게 엘스톤 지방군의 군사령관 자격을 달라는 것이냐?"

"그렇게 높은 직위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저 소소하게 사령군 전담반을 만들어 운용하고 싶습니다."

"사령군 전담반? 너를 위해 새로운 군대나 기사단을 만들라는 뜻이냐?"

"아, 아닙니다. 제가 그저 혼자 움직이는 게 좀 힘에 부쳐서...."

나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작고 병약하다는 것을 대신들에게 어필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런 말투로 겨우 말을 이었다.

"그저 움직일 때마다 보좌해 줄 몇 명만 있으면 됩니다. 음, 그게 갑자기 기존의 기사단이나 군대에서 사람을 빼가는 것도 제국에 폐가 될 테니.... 제국 사관학교에서 필요한 재원을 선발할 권한을 주시길 형님께 요청합니다."

제국 사관학교는 이름 그대로 제국에서 운용하는, 주로 하급 귀족이나 돈 좀 있는 평민들이 출세를 위해 자식들을 보내는 종합 군사 교육기관.

덕분에 여기서 생도 몇 명 데려다 쓴다고 불만을 토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좌우의 대신들은 클로드 황자가 생각이 깊다며 감탄하기 시작했고, 제스도 이건 자신의 예상보다 싸게 먹히는 거라고 판단했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좋다. 제국 사관학교의 졸업반 중심으로 사령군 전담반에 선발할 권한을 주마."

"감사합니다. 형님."

"다만 생도가 한 번에 너무 많이 빠지면 그쪽도 곤란할 테지. 너도 전담군(軍) 대신 전담반(班)을 원하는 것 같으니, 가급적 5명 내외로 선발할 것을 명한다."

당장은 다섯 명이면 뒤집어쓰고도 남는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제스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제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도 목숨을 바쳐 싸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

제스는 항상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막상 예상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종류의 인물은 아니다.

머리는 좋지만 현명하진 못하다고 해야 하나?

암튼 눈앞에서 멍한 표정으로 말도 꽤 더듬어 주었으니 아직도 내가 독약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로 생각하겠지.

"황자님, 그 독약은 절대 드시면 안 됩니다."

마차에 마주보고 앉은 메르데스가 내가 쥔 물통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나는 저택을 나서기 직전, 황궁에서 보낸 사자가 건네준 '제스표 독약'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걸 내가 왜 마셔? 잘 모셔두고 나중에 라니아한테 넘겨줄 거야. 분석할 샘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물론입니다. 시녀장님은 제가 아는 한 최고의 영약사입니다."

메르데스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챙겨온 영약을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잊어버릴 까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대신전을 다녀오시면 바로 이 성장의 영약을 드셔야 합니다."

"또? 아까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한 병 마셨잖아?"

"시녀장님의 말씀으로는 영약의 효과를 극대하기 위해, 성분을 조절해서 밤에 자기 전에 한 병 더 마실 수 있도록 만드셨다 합니다."

"그 끔찍한 걸 하루에 두 병이나...."

"그래도 동시에 세 병을 드시는 것 보단 이쪽이 좋을 겁니다. 이미 밤이 늦었으니, 너무 늦기 전에 돌아오는 마차에서 드실 수 있도록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이래서 필요 없다는데도 메르데스를 굳이 마차에 동승시켰구나. 나는 오후 내내 이야기를 나눴던 라니아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황자님이 특별한 분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신성마법이라니, 저는 놀라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거리나 시장에 나갔을 때, 사람들이 황자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서 마음이 놓입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기에 그러냐고요? 그건 그러니까....

-네? 앞으로도 엘스톤 백작령에 문제가 터지면 바로 달려가서 사령군을 막기로 하셨다고요? 아니! 왜 그런 위험한 일을 맡으셨습니까! 이번 일만 해도 제가 가슴을 졸이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황자님은 정말.... 아, 아니, 죄송합니다. 고작 시녀 주제에 제가 감히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황자님.

라니아는 짧은 순간에 냉탕과 온탕을 마구 반복했다. 그야 하나뿐인 조카가 전쟁 5분대기조 같은 일을 한다는데 걱정이 안 될 리 없지.

나야 내 몸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한 건데 무슨 놈의 용서냐며 쿨하게 넘겼고, 라니아는 감격한 얼굴로 기뻐하며 내게 각종 영약을 줄줄이 마시게 했다.

-황자님. 이건 오늘 드실 성장의 영약입니다.

-다음으로 이것은 체력의 영약입니다. 오늘은 밤늦게까지 행차하실 곳이 있다니 미리 마셔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늦게 마시면 외려 잠을 청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야간 투시의 영약인데...

덕분에 밤이 깊었지만 컨디션도 좋고 캄캄한 마차 밖이 선명하게 보인다. 메르데스는 옆에 놓인 등잔의 기름을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자님, 혹시 낮에 시녀장님과 나눈 말씀에 대해 질문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뭐?"

"황자님께서 시녀장님께 부탁하신 물건 말입니다. 설탕과 꿀로 만든다는...."

"아, '설탕바'말이지?"

실제로 원한 것은 초코바였지만, 이쪽 세계엔 초콜릿이 없는 관계로 그냥 캐러멜이나 꿀 같은 걸 견과류와 함께 뭉쳐 만든 음식을 요구했다.

내가 왜 이런 걸 라니아에게 부탁했냐 하면, 마법을 사용할 때 소모되는 '마력'이라는 개념이 실은 '두뇌의 집중력'이기 때문이다.

마법을 많이 쓰면 당이 떨어진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다가 갑자기 해롱거리면서 쓰러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하지만 그런 순간에 설탕을 대량으로 때려 박아주면 일시적으로 집중력이 회복되며 계속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설탕을 끝없이 먹는다고 마법을 끝없이 쓸 수 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수험생에게 포도당 캔디를 무한정 공급한다고 영원히 수험공부를 할 수는 없는 거랑 비슷하다. 결국 근본적인 한계는 있다는 말씀.

"별거 아니야. 그냥 출출할 때 먹으려고."

하지만 이 사실을 당장 설명할 필요는 없다. 메르데스가 딱히 마법사인 것도 아니고.

"그렇군요. 아주 좋은 생각 같습니다. 성장의 영약이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식사를 평소보다 과하게 드셔주는 편이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라니아가 식사 때마다 그렇게 배가 터져라 밥을 먹였구만. 그렇다고 요 며칠 사이에 딱히 키가 자란 것 처럼 느껴지진 않지만....

"황자님, 대신전에 도착했습니다."

덜컹.

마차가 멈추며 앞쪽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르데스는 곧장 몸을 일으키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황자님, 제가 먼저 내려서...."

"넌 여기 있어."

앞서 내리려는 메르데스를 막으며 마차 밖으로 훌쩍 뛰어 내렸다.

"혼자 다녀올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메르데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리자 한밤중에도 거대한 위용을 확인할 수 있는(물론 먼저 마신 야간투시의 영약 때문이겠지만) 대신전이 우뚝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님."

이미 신관 몇 명이 마차 근처까지 다가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명은 낮에 황궁에서 봤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대신관이 직접?"

"제가 초대했으니 제가 모시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어째 시작부터 꽤 세게 나오는데?

물론 오라고 해서 오긴 했지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날 여기까지 초대한 걸까?

* * *

에식스는 신전 내부의 길고 넓은 회랑으로 걸음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시간도 꽤 늦었고, 일부러 널리 퍼뜨릴 일도 아니라 환영식이나 만찬은 생략했습니다."

"괜찮아. 저녁 많이 먹어서 배도 안 고픈데 뭘. 그보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편하게 말해도 되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잠시...."

아직 회랑 끝에 있는 본당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에식스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옆에 서 있는 신전 경호 기사에게 말했다.

"내려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네. 대신관님."

회랑에 일정 간격으로 배치된 다른 기사와 달리, 이 기사는 검이나 창 대신 두꺼운 책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기사가 몸을 빙글 돌리며 벽의 틈새에 책을 끼워 넣은 순간....

끼긱.

바닥이 열리며 아래로 내려가는 비밀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거, 설마 시작부터 대신전 지하루트?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황자님."

에식스가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이 넓은 대신전에 마음 놓고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여기뿐이라서."

"어.... 여기 내려가라고?"

"위험한 곳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계단이 가파르니 조심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에식스는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아니 이런 횡재가. 이것만으로도 이미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거 아닌가?

대신전의 지하 루트.

바로 신전 쪽 테크트리의 최종 단계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게 어찌나 까다로운지, 지난 아홉 번의 회귀를 통 틀어 성공한 건 고작 세 번에 불과했다.

그 세 번 모두 신전과의 관계를 최고 수준까지 높인 후반에나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번에 선택한 초반 테크트리는 기대를 초월한 대성공이다!

휴, 역시 그 고생하면서 턴 언데드 배워 놓길 잘했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화

4장 연쇄효과

이곳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대신전의 숨겨진 공간.

물론 전에도 세 번이나 와 봤으니 구조는 빠삭하게 알고 있지만, 너무 태연한 척하면 의심을 살지 몰라 불안한 얼굴로 이리저리 벽을 짚었다.

"대신전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몰랐어. 혹시 몰래 숨겨놓은 술창고?"

"하하. 술도 물론 좋지요. 하지만 이곳에는 술보다 귀하고 위험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그거 뭔지 알아.

책.

대신전의 지하 루트가 중요한 이유는 이곳에 신관들이 천년동안 모으고 지켜온 책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정보의 보물창고였다. 계단을 전부 내려온 에식스는 좁은 복도 좌우에 설치된 횃불 사이에 걸음을 멈췄다.

"여기라면 조용히 말씀을 나눌 수 있겠군요."

"여기? 여기서 이야기하자고?"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봉인된 도서관의 입구가 있고, 입구 앞에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도 있는데 왜 하필 여기야?

"우선 제가 알고 있는 사실부터 털어놓아야겠군요."

"뭘?"

"섭정 전하께서 최근 몇 년 동안, 황자님께 불순한 약을 계속 드시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나는 놀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봐라?

이걸 알고 있었다고? 제스의 클로드 타락시키기 프로젝트를?

그런데 왜 지난 회귀들 때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했는데? 설마 최근 며칠 사이에 조사를 끝낸 건가?

아니, 아니지. 이건 다른 시점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

지난 아홉 번의 회귀 동안, 나는 적어도 세 번 정도는 신전과 최고의 관계를 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높은 신뢰관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턴 언데드와 함께 성자 칭호를 받으며 그 단계를 돌파했고.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미지의 영역인 셈이다. 나는 상대의 반응을 더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돌렸다.

자, 나는 이렇게 고뇌에 찬 황자 연기를 하고 있을 테니 이야기를 더 털어놓아 보시지요. 대신관 양반.

"저희 신관과 신도들은 제국의 모든 영토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시각각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지요."

"...."

"다만 황궁 쪽은 경계가 삼엄하여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아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게 좋은 약이 아니라는 정도는 짐작했죠. 황궁에 계실 때 2년 이상 복용하셨고, 이후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자 알베르트 황자님을 통해 전달받아 계속 복용하셨던 그 약 말입니다."

"그게...."

"황자님을 궁지에 몰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밝히기 힘든 여러 사정들이 있겠죠. 하지만 이곳엔 듣는 귀가 없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식스는 괴로운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황자님, 황자님께서 최근 몇 년간 수많은 악행과 망나니짓을 골라 하고 다닌 것은.... 실은 섭정 전하의 마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습니까?"

...뭐?

이건 또 무슨 신박한 해석이래? 술책? 내가 일부러 망나니 흉내를 냈다고?

"낮에 황자님을 직접 마주본 후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지금 일부러 어수룩하고 부족한 사람의 흉내를 내고 계시는구나. 안 그러면 섭정 전하의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맞지. 근데 그전에 클로드가 하던 짓은 그냥 약물에 의한 광기였고.

하지만 하나가 좋게 보이면 나머지도 전부 좋게 보이는 게 인지상정. 이것으로 에식스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했다.

물론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해도.

하지만 아무렴 어때?

사람이 보통 그렇거든. 자신이 추리하고 예상한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되면 그것에 만족을 느끼고 더욱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 이번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딱히 사전에 계획한 테크트리에 영향을 주지도 않을 것 같고.

"제스 형님은...."

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멍청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비난 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런 독약을 내린 거지. 분명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과, 어린 시절 황제 폐하의 사랑을 내가 독차지했기 때문에...."

극적인 효과를 위해 여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주자. 에식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숙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저도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섭정 전하는 겉보기와 달리 질투가 대단하신 분이죠."

"...."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신전은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방기하고 있었습니다."

그야 내가 신전과 아무 관계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황자님께서는 이제 저희 신전에 있어 누구보다 중요한 분이 되셨습니다. 심지어 저보다도 말이죠."

"대신관보다?"

"그렇습니다. 저희 신전의 가장 큰 적은 사령군이니까요."

물론 나도 알지. 전에 사령군과 편먹고 사령술을 익혔을 때 신관들이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황자님께서는 이미 턴 언데드를 통해 침략해온 사령군을 물리치셨고, 심지어 앞으로 계속 될 적의 침략으로부터 이 땅을 수호하겠다 천명하셨습니다. 그것은 기적이며, 또한 신의 전언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신전의 오랜 숙원을 풀어줄 성자 그 자체이신 겁니다."

음...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신전이 사령군과 앙숙이라는 거야 뭐 당연한 사실인데, 바로 지금 뭘 하는데?

설마 당장이라도 사령군 본진으로 날아가 '크록', 그러니까 사령군주를 제거하란 소린가?

물론 그것도 나중에 해야 할 일이긴 하다. 그렇다고 당장 진행할 테크트리는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지?

"이런,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드린 모양이군요. 부담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에식스가 표정을 살피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냥 계획대로 엘스톤 백작령을 계속 보호하면 되는 거야?"

"그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원하신다면 엘스톤 백작령의 수호를 위해, 아니 황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을 위해서라면 저희 신관들을 얼마든지 차출해 가셔도 괜찮습니다."

진짜? 정말?

사실이라면 이것도 예정에 없던 엄청난 이득.

만약 신관들을 무더기로 동원할 수 있다면, 계획한 여러 루트를 한참 빠르게 당겨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보다도 이 할아버지, 아까부터 대놓고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어필하는데.... 대체 나한테 뭘 부탁하려고 이러는 거지?

"하지만 그 전에 앞서, 아까 낮에 황궁에서 못한 진짜 확인 작업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턴 언데드 말이야? 하지만 그건 주변에 언데드가 있어야 할 텐데?"

"언데드라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충격적인 선언과 함께, 에식스는 바로 옆의 벽에 걸려 있는 횃불을 움켜쥐었다.

덜컹.

횃불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방금처럼 또다시 벽이 열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엥? 이건 또 뭐야?

여기가 대신전 지하루트의 끝 아니었어? 여기서 또 숨겨진 뭔가가 있었다고?

* * *

"세상에 채 열 명도 되지 않습니다.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말이죠."

에식스는 직접 횃불을 뽑아 들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함께 걸음을 옮겼다.

"계단이 엄청 깊네. 얼마나 내려가는 거야?"

"조금만 더 내려가면 됩니다. 워낙 위험한 것을 보관한지라, 어쩔 수가 없군요."

워낙 위험한 거? 그게 뭔데?

암튼 엄청 기대된다. 대체 얼마나 거대한 걸 숨기려고 이렇게 땅을 깊게 파고 내려간 걸까?

하지만 계단이 끝나고 도착한 곳은, 기대와 달리 고작 다섯 평 남짓한 좁은 방이었다.

방 중심부엔 거적을 뒤집어 쓴 해골이 웅크리고 있었고, 해골을 둘러 싼 세 명의 신관이 손을 뻗어 투명한 빛을 방출하고 있었다.

'안티 이블(anti evil)?'

이것은 신성마법 중에 '파사(破邪)마법'에 해당하는 안티 이블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턴 언데드의 마이너 버전.

좀비 같은 약한 언데드는 이것만으로도 소멸이 가능하며, 대상이 강력하면 적어도 움직임을 봉쇄하고 힘을 억제하는 수준까지는 효력를 발휘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신성마법 중에서는 상당히 급이 높은 마법이다. 그런데 그걸 세 명이 동시에 해골 하나에 퍼붓고 있으니....

"캬학!"

순간 웅크리고 있던 해골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거 에식스 아닌가. 대체 몇 년 만이지? 계속 똑같은 놈들만 봐서 심심하니 얼굴 좀 자주 비추라고."

이거 봐라? 말도 하고 지능도 있는 해골 언데드?

그렇다면 이건 리치(lich)다.

사령군에서 사령군주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등급의 언데드다. 사실상 죽이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골치 아픈 상대라 할 수 있고.

그런데 왜 이런 위험한 녀석이 대신전의 지하에 웅크리고 있어?

"...."

에식스는 리치의 도발에 대꾸하지 않고 주변의 신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평균 30대쯤으로 보이는 신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신관님,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쉬러 간 로이스의 몸에 문제라도?"

"함께 온 분은 누구십니까? 아직 나이가 많이 어려 보입니다만...."

"...."

에식스는 세 신관의 질문에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다짜고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성자이십니다."

"네?"

"여러분들께 알리지 않았지만, 며칠 전 기적이라 할 만한 일이 세상에 벌어졌습니다."

"기적이라면...."

"우리들이 수백 년간 기다리던 바로 그 기적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곳에서 그 기적을 다시 증명할 것입니다."

그러자 멍해있던 신관들이 동시에 놀란 얼굴로 내 쪽을 보았다. 나는 살짝 손을 흔들며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이름은 클로드야."

"...클로드?"

"클로드라니, 설마 그 망나니 황자 클로드?"

"음? 그게 누군데? 황자?"

"아니, 전에 하루 휴가를 받아 잠시 밖에 나갔을 때 들은 이야긴데...."

이 와중에도 내 악명을 접한 신관들이 뭔가를 소곤대기 시작했다.

휴.... 순간 빡쳤지만 참자. 이것도 다 유명세려니 해야지.

그보다 턴 언데드로 사령군을 소탕한 게 벌써 며칠 전인데, 아직도 그 소식을 못 들은 건가?

"모두 조용히!"

그러자 에식스가 빈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십시오. 지금부터 성자의 증명 의식을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큭큭.... 하하하!"

그러자 해골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 후. 하하하하! 이거 진짜 재밌구만. 근데 연극을 하려면 좀 제대로 하지? 이딴 꼬맹이를 데려다 놓고 성자라 하면 대체 누가 믿겠나?"

"당신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라블츠."

에식스는 건조한 목소리로 리치의 이름을 불렀다. 리치는 해골답지 않게 풍부한 표정으로 비웃기 시작했다.

"하, 웃기시네. 성자? 적어도 너 정도 되는 늙은이를 데려와야 잠시라도 속아줄 텐데 말이지. 날 겁줘서 뭔가 정보를 뜯어내려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짓이야."

해골은 킬킬대며 텅 빈 눈구멍으로 내 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즐거움을 숨기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이거 뭔데?

신전 지하에 감금된 리치와 녀석을 봉인하고 있는 신관들?

완전 새로운 전개잖아!

어찌나 새로운 경험인지 감동마저 느낄 지경이다. 진짜 신전 루트에 이런 숨겨진 이벤트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것도 리치라니!

"음? 이 새끼 갑자기 웃는데? 혹시 정신이 나간 거냐?"

리치가 턱을 달그락 거리며 에식스에게 물었다. 에식스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황자님? 무슨 일이십니까?"

"응? 아니, 그러니까.... 해골 주제에 달깍거리면서 말을 하는 게 우스꽝스러워서. 이건 뭐하는 녀석인데?"

"리치입니다. 최강의 언데드 마법사이며, 인류의 가장 큰 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리치라.... 전에 황궁 도서관에서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 리치가 왜 대신전의 지하에 있어?"

"리치의 육체는 불멸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숨긴 단지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제아무리 산산 조각으로 박살을 내도 언젠가 다른 곳에서 다시 부활합니다."

에식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치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빛을 향해 입을 벌리며 발악했다.

"그래서 이 망할 놈들이 날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수백 년 동안 괴롭히는거지! 두고 봐라! 네놈들은 영원히 이 짓거리를 못해! 한 녀석만 긴장이 풀려도 내가 전부 다 죽이고 이곳을 빠져나가 주마!"

"우린 결코 방심하지 않는다!"

순간 세 명의 신관이 동시에 외치며 쏟아내는 빛의 강도를 높였다. 리치는 몸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쳤다.

"캬악! 캬아아악!"

"세 분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이자의 도발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