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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36화

40장 깨진 봉인

-죽음의 모든 것을 연구한 자. 그 안에 무엇보다 정교한 마력을 꽃피워 냈구나.

-죽음 그 자체에 심취한 자. 내면에 티 하나 없는 깨끗한 마력을 제련해 냈구나.

-죽음의 신비에 몸을 던진 자. 고통 속에 빛나는 순수한 마력을 빚어냈구나.

죽음의 목소리란 이런 걸까.

마친 새까만 비단이 찰랑거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동시에 강한 현기증과 함께 몸이 휘청였다.

"클로드!"

"어.... 아니, 괜찮아. 별거 아냐."

뇌리를 파고든 음성이 머릿속에 있는 마력결정 세 개를 각각 휘감으며 말을 이었다.

-죽음의 군주여, 내가 내린 과제를 잘 수행해 냈구나.

-산 자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순수한 마력의 결정 셋을 전부 모아 왔구나.

-대견하구나. 너를 위한 과제를 완수했으니, 다시 한번 나를 알현할 기회를 주겠다.

그리고 그림자 벽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아아! 퀸시시여! 어둠과 죽음의 신이시여!"

게르니트가 그 자리에 엎드리며 연신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뒤에서 르갈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나?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나?"

"...아니. 완전 깨끗해졌어."

그림자 벽이 사라지며 뇌리를 파고든 음성도 함께 깔끔히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자 놀란 표정의 르갈이 앞발로 동굴 입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잘됐군. 그럼 당장 들어가자."

그리고는 코로 내 등을 슬슬 밀기 시작했다. 아니 얜 또 갑자기 왜 이런데? 왜 이렇게 서둘러?

"들어가는 건 좋은데 무슨 문제 있어?"

"서둘러야 한다. 이러다 문이 다시 닫히면 큰일이다."

르갈은 아예 내 몸을 들어 자신의 등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 안에서 동족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꽤 많이. 그리고 살아 있다."

"살아 있어? 그거 잘됐네. 근데 이런 밀폐된 곳에서 대체 어떻게...."

"그리고 죽음의 냄새가 난다."

그리고는 곧장 동굴 안으로 몸을 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냄새는.... 결코 오래 된 냄새가 아니다."

"그러니까 에이션트 울프, 아니 데스 울프가 최근에 이 안에서 죽었다고?"

"모르겠다. 아니면 언데드가 되었을지도."

"음...."

나는 빠르게 지나가는 동굴의 전경을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안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성역이란 게 보통 내부에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동굴 아니었나?

* * *

내 예상과 달리, 퀸시의 성역은 난생 처음 보는 별천지였다.

처음엔 평범했던 동굴 너비가 점점 넓어지며 거대한 굴로 변했다.

여기에 빛을 내는 온갖 이끼와 버섯들이 자라고, 좁지만 깊은 하천도 여럿 뚫려있다.

"역시 많군."

어느새 속도를 줄인 르갈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데스 울프가 생각보다 많다. 저 안쪽에 다수가 있군."

"동굴이 이렇게 넓으니 살아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은데.... 그래도 뭘 먹고 살지? 이끼라도 뜯어 먹나?"

"그건 불가능하다."

"내 말이. 역시 전부 언데드가 된 거 아닐까?"

"확실히 살아 있다."

"그거 신기하네. 너만 해도 고기 엄청 먹잖아. 대체 여기서 뭘 먹는 거야?"

"모른다. 직접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그 순간, 어둑한 전방에 번뜩이는 푸른 눈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털의 늑대들.

예전 하수도에 살던 시절의 르갈과 달리, 이 녀석들은 정말로 털이 흑단처럼 새까맣다.

그나저나 사납게도 생겼네.

기존의 에이션트 울프도 한 야성 하게 생겼지만, 이놈들은 좀 더 날카로운 외견에 싸늘한 눈매를 가지고 있다.

다만 르갈에 비해 덩치는 한참 작다. 거의 절반쯤 되려나?

그때 가운데 나타난 검은 늑대가 입을 열었다.

"옛 동족이군. 에이션트 울프의 족장인가? 이름이 뭐지?"

"르갈. 족장은 아니다. 족장과 형제지."

"그런가."

한참동안 르갈을 바라보던 녀석은,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데스 울프의 족장인 파가브다. 그리고 넌 예전에 봤던 사령군주가 아니군."

"난 클로드야."

"클로드."

"사령군 장로한테 부탁 받았어. 죽음의 땅에 언데드가 폭주하는 문제를 퀸시에게 전해달라고."

"그런가."

"그거 말고도 할 말이 좀 있고.... 근데 왜 내가 사령군주일거라 생각했어?"

"입구의 봉인을 뚫을 수 있는 건 사령군주 크록뿐이다. 죽음의 신께서 방법을 알려준 유일한 존재니까."

"그게 어쩌다 보니 내가 해버렸네. 뭔가 문제가 있을까?"

"문제없다."

검은 늑대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들은 은총을 받고 이곳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 받은 그분의 권속일 뿐이다. 자의로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오직 죽음의 신께서만 하신다."

그리고는 몸을 휙 돌리며 다른 늑대들과 함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라. 신께서 너희를 기다리고 계신다."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러자 르갈이 녀석의 뒤에 바짝 붙으며 말했다.

"네가 족장이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덩치가 작지?"

"나만 작은 게 아니다. 우린 대부분 작아졌다."

그러고 보니 족장을 경호하는 다른 늑대들은 더 작았다. 나는 르갈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둘이 나누는 대회를 계속 들었다.

"안으로 갈수록 동족의 냄새가 더 짙게 풍긴다. 너희는 숫자가 얼마나 되지?"

"3백."

"많군. 이런 땅 곳에 그만한 숫자가 먹을 게 있나?"

"충분하진 않다. 우리가 점점 작아진 것도 먹을 게 풍족하지 않아서다. 하지만 죽음의 신의 곁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지?"

"시체벌레."

"시체벌레?"

"죽음의 땅에 묻힌 시체를 파먹고 사는 거대한 땅벌레가 있다."

잠깐, 땅벌레라고?

내가 아는 그 땅벌레 말인가? 땅강아지에 쥐며느리를 합쳐놓은 것 같은?

"다만 다른 곳의 땅벌레완 다를 것이다. 우리가 신의 곁에서 그분의 영향을 받으며 달라졌듯, 그 녀석들도 처음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을 테니까."

"그럼 그 시체벌레도 이곳에 서식하는 건가? 퀸시의 성소에?"

"그렇진 않다. 녀석들은 성소 바깥 깊은 땅속에 굴을 파고 살지. 이곳과 녀석들의 둥지를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그곳으로 나오는 녀석들을 드물게 사냥해서 먹고 산다."

오, 그렇구만.

에이션트 베어와 땅벌레는 철천지원수관계였는데, 여기는 생존을 위한 먹이사슬 관계구나.

"사는 게 불편하진 않다. 보다시피 이곳엔 물도 흐르지. 더 안에 들어가면 훨씬 수량이 깊은 지저호도 있다."

지저호. 땅속의 호수라.

확실히 다른 성역에 비하면 규모 면에서 엄청 남다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당장 이렇게 걸어가는 와중에도, 엄청 넓은 통로 옆으로 수많은 가지 길이 뚫려 있다.

길 너머로 광장도 보이고, 다른 늑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도 보인다.

"과연 동족 3백이 터전으로 삼을 만하군. 숲이 그립진 않나?"

"난 숲을 모른다. 이곳에서 태어났으니까."

"하긴 그렇겠군. 너희가 영원의 숲을 떠난 게 몇 대 전의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까지 4백이었다. 지금 3백이 된 거고."

"죽었나?"

"죽었다."

"어째서?"

"어째서냐 하면...."

검은 늑대는 말을 흐렸다. 동시에 길이 좁아지며 처음과 비슷한 사이즈의 외길이 쭉 이어졌다.

덩달아 동굴 벽에 붙어 있던 발광이끼도 줄어들었다. 내가 라이트 마법을 키자 파가브가 경고했다.

"빛을 꺼라. 곧 성소에 도착한다. 퀸시께서는 죽음과 어둠의 신. 빛은 그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내가 마법을 해제하자 르갈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앞이 안보이면 내게 붙어라. 등에 올라타도 좋고."

"괜찮아. 나도 방법이 있거든."

군주의 눈을 열면 빛 없어도 사물 구분할 수 있다.

계속 켜놓고 있으면 머리가 좀 어지럽긴 한데.... 뭐 이런 경우엔 어쩔 수 없지.

* * *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신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형상을 한 번쩍이는 빛의 덩어리였다.

하지만 퀸시는 달랐다.

군주의 눈으로 본 퀸시는 어둠 그 자체였다. 흐름이라고는 주변이 어둠을 전부 빨아들이는 흐름뿐이었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혹시나 해서 군주의 눈을 닫고 맨눈으로 봤더니, 테두리가 희미하게 빛나는 새까만 인간 형체가 우뚝 서 있었다.

"다른 자들은 밖으로 나가라."

입구가 열렸을 때 들었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자 파가브가 르갈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몸을 돌렸다.

"안 그래도 여기는 버티기 힘들군. 클로드. 난 밖에서 기다리겠다."

어째 주눅이 잔뜩 든 목소리였다. 그만큼 퀸시의 존재가 압박이라는 건가?

"응. 먼저 나가 있어. 끝나면 돌아갈게."

나는 짧게 대답하며 정면에 있는 어둠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루아의 사도로군."

그러자 어둠이 속삭이는 듯 말을 걸었다.

"심지어 우렌의 권능도 느껴진다. 원칙대로라면 넌 이곳에 들어오면 안 된다."

"...입구 열어주면서 했던 말이랑은 너무 다른데? 그땐 내가 대견하다며?"

"그거 말인가."

퀸시는 코웃음을 치며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흔들었다.

"그것은 수백 년 전에 미리 입력해 놓은 장치일 뿐이다. 크록을 위해 정성껏 준비했지. 언제쯤 과제를 달성하고 오려나 했는데.... 어디서 괴상한 말 뼈다귀 같은 게 대신 굴러 들어왔군."

"지금 그 말 뼈다귀가 어떻게든 세계를 구해보려고 고생하는 건 알고?"

"알지."

퀸시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권속을 보내 널 이곳까지 인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나의 사도를 소멸시킨 원수 같은 녀석을 말이지."

"사과하러 온건 아니야. 지금 죽음의 땅에 난리가 났어."

"나도 알고 있다."

퀸시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차원으로부터 어떤 강대한 힘이 죽음의 땅 내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덕분에 죽은 자들이 제멋대로 지상에 올라가고 있지."

"네 힘으로 어떻게 처리 안 돼? 죽음의 신이잖아?"

"난 그들에게 죽음을 줄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안식을 줄 수는 없다."

"...죽음이 안식 아닌가?"

"내게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음."

퀸시는 순간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군주의 눈으로 보자 녀석의 몸을 이루는 어둠의 일부가 서서히 일그러지며 소멸하는 게 보였다.

"괜찮아? 뭔가 안 좋아 보이는데?"

"좋지 않다. 너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내 균형이 깨진다."

"위험한 거 아냐?"

"어쩌면. 하지만 무슨 상관이지? 나는 필연을 좋아한다."

"필연?"

"죽음은 필연이지. 지금 이 순간도 필연이고. 그러니 자잘한 문제는 개의치 않겠다."

녀석은 구부정해진 몸을 다시 쭉 피며 말을 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다른 신의 사도인 너와 오래 대화할 수 없다. 섭리가 깨지니까. 다만 네겐 사령군주의 힘이 일부 깃들어 있고.... 리치의 마력 결정까지 흡수했지. 그러니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어느 정도는 간섭 할 수 있다."

"알았어. 오래 간섭하면 위험할거 같으니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거 어떻게 해야 해결 돼?"

"얼마 전, 나는 권속에게 명령을 내려 죽음의 땅 깊은 곳에 봉인을 심어 놓았다."

"봉인? 무슨 봉인?"

"죽은 자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는 봉인이다. 예전 지상의 왕국들이 멸망하고 너무 많은 시체가 죽음의 땅에 깃들어 버렸다. 이들이 한 번에 부활하지 않도록 자비를 베푼 셈이지."

"근데 그 봉인이 깨져서 이 사달이 난거고?"

"그렇다. 네가 그것을 다시 복구해다오."

생각보다 심플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게 원래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복구하면 나한테 뭐 해줄 건데?"

"뭐?"

"죽음의 땅에 벌어진 문제를 외부인인 내가 해결한 거잖아. 뭔가 대가가 있어야지. 아, 미리 말하지만 사령술 관련된 건 다 필요 없어."

지금 당장이라도 맘만 먹으면 사령술 테크트리 팍팍 올릴 수 있는데 안하는 것뿐이다. 이래 뵈도 내 사령마법 잠재력이 S급이거든.

"대가를 요구하는 건가? 나의 사도도 아닌 주제에?"

"사도가 아니라도 가능은 하잖아? 우렌도 자기 사도 아닌데 나한테 힘을 줬으니까."

"...."

"대신 대지 계열 정령 두 마리 이상 계약하고, 입구도 직접 뚫어야 하는 조건을 달성해야 했지만. 다들 그런 거잖아? 너도 따로 조건 있지?"

물론 얘는 별종이라 그런 거 없을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있든 없든 찔러는 봐야지.

"...그렇다."

퀸시는 한숨 쉬듯 몸을 들썩였다.

"네가 루아의 사도란 걸 깜빡했군. 쓸데없는 소린 하지 않겠다. 어차피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미안. 솔직히 말하자면 널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고, 어떻게 해야 뭘 얻을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몰라. 그래도 일단 지금은 잠자코 아는 척하는 게 낫겠지?

"그런데 사령술이 필요 없다고? 죽음만이 내 힘은 아니다. 난 어둠 또한 관여하지."

"...."

"원한다면 네게 그림자를 하사하겠다. 예로부터 생명을 버린 자들에게 깃드는 힘이다. 너는 물론 살아있는 인간이지만, 내 권능으로 존재 할 수 없는 잠재력을 만들어 주겠다."

그림자라면 게르니트나 후원자가가 사용하는 그거일 것이다. 그림자만 있으면 어디든지 공간이동 하는 능력.

"그래. 그걸 줘."

"당연히 당장은 안 된다. 아무리 다 알아도 최소한의 절차는 거쳐야지."

퀸시는 양 팔을 들어 올리며 선언했다.

"시련을 뚫고 이곳까지 온 그대에게, 어둠과 죽음의 퀸시가 임무를 내리겠다."

"...."

"나의 권속인 고대종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이 품은 코어를 받아 흡수하라. 그리하면 나 퀸시의 신성을 네게 부여하도록 하겠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나는 미리 다 알았다는 듯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조용히 가슴을 쓸어 내렸다.

휴....

하마터면 허풍 떨었다고 고백할 뻔 했네.

다행히 방금 그 선언으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그런데 데스 울프도 결국 에이션트 울프잖아? 그 녀석들 코어를 먹는다고 뭔가 달라지려나?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37화

41장 잠입

"어떻게 됐지?"

"어떻게 되었나? 인간?"

통로 밖으로 나오자 르갈과 파가브가 동시에 물었다.

"언데드가 폭주한 건 봉인이 깨져서 그렇대. 죽음의 땅 지하 어딘가에 있다던데."

"봉인석 말이군. 문제가 생겼다고 예상은 했다. 퀸시께서 뭐라 말씀하셨나?"

"너희 데스 울프 문제를 해결하고 코어를 받으라고."

"...그렇군."

파가브는 짧게 대답하며 몸을 휙 돌렸다.

"따라와라. 문제가 생긴 곳으로 안내할 테니."

"귀인이시여!"

그때 들어온 방향에서 게르니트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소리쳤다.

"이곳에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너도 왔어? 밖에서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엉겁결에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언데드 장로는 큰일 날 뻔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진 그림자벽이 다시 생성되는걸 보고 저도 모르게 그만.... 하마터면 중간에 끼어죽을 뻔했습니다. 죽음의 신께서 노하실까요? 지금이라도 다시 나가야 할까요?"

"넌 못나간다."

그러자 앞서 걷던 검은 늑대가 경고했다.

"나가기 위해선 그분의 뜻이 필요하다. 닫힌 그림자 벽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게르니트는 허둥거리며 내 뒤로 붙었다. 나는 좀비처럼 삐걱대는 녀석의 몸을 보며 물었다.

"왜 달려왔어? 고스트 라이딩 안 쓰고?"

"그분의 성소에서 힘을 사용하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그분은 이미 영접하셨습니까?"

"응. 만났어."

"오오.... 그래서 망자들의 폭주 문제는...."

"지금 그거 해결하러 가는 거야. 정확히 뭘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러다 문득 퀸시에게 받을 그림자 능력이 떠올랐다. 이쪽 분야는 이 녀석이 선배니 나름 잘 알고 있겠지?

"게르니트. 너 그림자 능력 있잖아. 그거 좀 자세히 설명해 봐."

"그림자 능력 말씀입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같은 노블 언데드에게만 드물게 생기는 능력입니다."

"노블 언데드가 정확히 뭔데?"

"리치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언데드는 처음엔 다 같은 하급으로 시작합니다. 좀비, 고스트, 해골병사.... 개중에는 죽음의 땅의 영향을 크게 받아 좀 더 급이 높은 언데드로 성장하는 개체가 있습니다."

"그게 너라고?"

"저도 원래는 그냥 좀비였습니다."

게르니트는 로브 밖으로 드러난 창백한 손을 바라보았다.

"다만 처음부터 어느 정도 의식이 있었습니다. 죽기 전의 기억은 없지만요. 게다가 피부도 거의 썩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퀸시의 축복인가?"

"그럼 셈이겠죠. 여하튼 사령군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는 귀합니다. 그래서 여러 일을 도맡아 하며 수십,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그림자 능력이 생겼고?"

"네. 제게 깃든 것은 그중에도 그림자 잠입입니다."

게르니트는 몸을 굽히며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포즈를 취했다.

"전에 보여드린 것처럼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잠입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정말 아무데나? 거리는?"

"너무 먼 곳은 안 됩니다. 능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거리가 멀어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거리가 허락하는 한, 한 번이라도 가본 곳이라면 아무데나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곳에 그림자가 있어야 하겠지만요."

"안 가본 곳은?"

"안 가본 곳이라 해도, 그곳에 표식이 있다면 근처로 갈 수 있습니다."

"표식이 뭔데?"

"말로 설명하는 게 좀 까다롭습니다만...."

게르니트는 자신의 뿌연 동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군주께서 살아계실 때, 그 분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표식으로 삼았습니다."

"감정안 말이지."

"감정안이라. 그분은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의 힘을 파악하고 계셨죠. 저는 보통 군주의 눈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감정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어떻게 느끼는데?"

"그게 바로 표식입니다. 그림자 능력이 생기면 같이 딸려오는 감각입니다. 실제로 느끼지 않는 이상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게르니트는 허공에 손가락을 찌르는 영문 모를 포즈를 취했다. 아무튼 생기면 알게 된다 이거지? 그럼 넘어가고.

"그림자 잠입 말고 다른 것도 있지?"

"네. 그림자 갑옷과 그림자 결계가 있습니다. 저는 둘 다 잘 사용하지 못하지만요."

장로는 바닥에 깔린 자신의 그림자를 쭉 들어 올려 손에 감았다. 헛, 뭐야 저거? 그림자를 직접 움직이네?

"고작해야 이 정도뿐입니다. 저는 이쪽에 재주가 없어 온몸을 감싸긴 어렵습니다."

"효과는?"

"방어력을 높여줍니다. 몸을 감싼 그림자가 충격을 흡수하죠. 저 말고 스키블이라는 해골 장로가 있는데 그자의 특기입니다."

"해골?"

"그 역시 처음엔 평범한 해골 병사였다고 합니다. 저처럼 의식이 있어 결국 장로가 되었지요."

스키블이라.

3회 차 때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온몸을 새까만 뭔가로 덮고 있어서 내가 모르는 언데드인가 했는데.... 실제로는 해골병사 계통이었구나. 새까만 건 그림자였고.

"스키블은 언데드가 된 지 너무 오래 지나 뼈가 부식되고 있습니다. 그림자 갑옷으로 몸을 감싸 형체를 유지할 수 있어 망정이지, 그거 아니었다면 벌써 소멸해 사라졌을 겁니다."

"자연 소멸인가. 언데드도 수명이 있을 줄은 몰랐네."

"나중에 한 번 만나보시지요. 그림자 갑옷의 전문가니까요. 그리고 그림자 결계는 대충 이런 건데...."

장로는 손을 덮은 그림자를 허공에 퍼뜨리더니, 그곳에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조그만 영역을 만들어 냈다.

"이름 그대로 그림자로 결계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오...."

"제 특기가 아니라 이거 밖에 안 됩니다만, 이것 하나만 평생 판 녀석들은 마을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거대한 결계도 만들 수 있습니다."

"효과는?"

"결계 안의 빛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자들겐 고통스런 공간이 되겠지요."

"아무것도 안 보인다?"

게르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단하는 분야만 다르지 사일런스랑 비슷한 효과구만. 혹시 이계의 웨이브 막을 때 써먹을 수 있으려나?

"크게 보면 이렇게 세 종류입니다. 다만 셋 중에 어떤 능력을 특기로 가지게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셋 다 가질 수는 없고?"

"셋 다 가질 수는 있습니다. 저도 그림자 잠입이 특기입니다만 다른 능력도 쓰긴 쓰지 않습니까? 그저 효과가 미비할 따름입니다."

원소마법에서 타고난 속성 비슷한 건가?

"만약에 그림자 갑옷이 특기인 사람이, 아니 언데드가 그림자 잠입을 쓰면?"

"거리가 짧아집니다. 방금 말씀드린 장로 스키블은 10미터도 채 이동하지 못하더군요."

그때 앞장선 검은 늑대가 굴 한쪽에 뚫린 좁은 길로 몸을 넣었다. 나는 멈춰선 르갈 대신 먼저 굴 속에 들어가 양팔을 뻗어보았다.

"르갈? 여기 좁은데 들어올 수 있겠어?"

"굴의 크기는 끝까지 동일한가?"

"응. 대충."

"그럼 할 수 있다.

르갈은 바닥에 누워 만세 하는 자세로 몸을 쭉 늘였다.

그리고는 굴속에 몸을 넣고 꼼지락대며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겠어?"

"괜찮다. 이보다 더 좁아지는 것만 아니라면."

하지만 속도가 엄청 느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뒤에서 바람 마법으로 밀어줄 걸 그랬나?

건너편을 보자 검은 늑대는 이미 통로를 빠져나간 상태. 뒤를 따라가자 주변이 확 트이며 드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땅 속에 이런 광장이라니.

전에 어둠 산의 땅벌레 굴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때도 이런 곳에서 여왕이랑 싸웠었는데.

실제로 광장 곳곳에 땅벌레를 닮은 괴상한 거대 곤충의 잔해가 널려 있다. 추가로 광장 구석에 조용히 쓰러져 있는 몇 마리의 검은 늑대들까지.

시체벌레와 싸우다 죽은 걸까?

반면 살아있는 수십 마리의 데스 울프가 광장 반대편에 뚫린, 방금 지나온 통로의 두 배쯤 되는 사이즈의 굴을 지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족장님."

굴을 지키던 늑대 한 마리가 파가브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파가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상황은 어떤가."

"여전합니다. 계속해서 시체 벌레가 끝도 없이 기어 나옵니다. 게다가 처음 보다 더 크고 강해졌습니다."

"그렇군. 이쪽은 그림자 벽을 열고 들어 온 인간이다. 그분을 영접하고 직접 임무를 받았다."

"죽음의 신께서 직접...."

검은 늑대 들이 놀란 얼굴로 주시했다. 파가브는 고개를 돌려 늑대들이 지키던 커다란 굴을 가리켰다.

"저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시체벌레의 굴이 나온다. 그곳 어딘가에 봉인석이 있다."

"그곳 어딘가??"

"자세한건 우리도 모른다. 한참 전에 선대께서 심어 놓고 오신 거라."

"퀸시는 얼마 전에 심어 놓았다고 하던데?"

"그분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르다."

"음.... 근데 왜 여기가 아니라 시체벌레의 굴에다 봉인을 만들었대?"

"처음부터 시체벌레의 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봉인석이 시체벌레들을 불러 모은 셈이다."

"응?"

"봉인석은 땅에 묻힌 언데드의 행동을 억제하는 마력을 발생시킨다. 그 마력에 시체벌레들이 모여들고, 점점 더 몸이 커지게 된다. 덕분에 우리가 이곳에서 굶어죽지 않고 긴 시간을 버틴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퀸시는 봉인석으로 이 땅에 묻힌 수백만의 언데드의 폭주를 막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권속인 데스 울프의 먹을거리까지 만들어 준 셈이다.

"일석이조네. 근데 깨진 봉인은 너희가 못 고쳐?"

"시도는 해봤다."

파가브가 고개를 숙이자 다른 데스 울프들도 묵념하듯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100이 넘는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얼마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앗.

그래서 처음에 4백 마리 이야기 했다가 3백 마리로 줄인 거구나.

"유감이네. 근데 너희도 기본은 에이션트 울프잖아? 당연히 꽤 강할 테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애초에 시체벌레는 너희 먹잇감 아니었어?"

"목숨을 걸고 잡는 먹잇감이다. 보통 시체벌레는 시체가 없는 곳에는 오지 않는다. 우린 가끔 이곳에 오는 정찰벌레를 잡거나, 반대로 녀석들의 굴속에 들어가 빠르게 한두 마리를 사냥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파가브는 근처에 떨어져 있는 시체벌레의 날카로운 집게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봉인석이 깨진 뒤로 대량의 시체벌레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막는 것도 급급하다. 그 와중에 봉인석의 위치라도 파악하기 위해 강한 전사들을 따로 뽑아 보냈지만...."

"하나도 안 돌아 왔구나."

"봉인석이 깨진 뒤로 시체벌레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흘러나오는 마력을 흡수하는 게 아닐까 싶다. 빨리 인석을 복구하지 않으면 우린 멸종한다."

"멸종이라니. 암만 그래도 퀸시가 그렇게 내버려 둘까?"

"그분께서는 직접 역사하지 않는다. 대신 사도를 시켜 자신의 뜻을 행하시지."

하지만 이제 사도는 없다.

1년쯤 전에 내가 죽여 버렸다. 사령군주 크록. 죽음의 신 퀸시의 사도....

"...알았어. 내가 들어가서 고쳐 놓을게."

"안은 엄청난 미로다. 무척 넓고 어둡다. 시간이 꽤 걸릴 텐데...."

"끄윽!"

그때 르갈이 입구를 지나 겨우 광장에 들어왔다. 나는 축 늘어진 르갈을 잠시 보다 대답했다.

"괜찮아. 알아서 잘 찾아볼게."

봉인석이 특정 마력으로 주변에 영향을 준다면, 분명 군주의 눈으로 흐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파가브가 내 몸을 위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너는 분명 강할 것이다. 하지만 체격을 보니 전사는 아니고 마법사겠군. 내 말이 맞나?"

"맞아. 그건 왜?"

"미리 말하는데, 저 안에서 강한 마법은 쓰면 안 된다."

"...왜?"

"자칫 굴이 무너지면 우리가 사는 이곳 거주구역까지 연쇄로 붕괴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잠시 조용해졌다.

아니, 얘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여보세요? 내가 마법사인데 지금 마법을 쓰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나 보고 뭘 어쩌라고?"

"모든 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강한 마법만 주의해다오."

"강한 마법을 안 쓰고 저 괴물을 어떻게 정리하라고...."

"이럴 땐 사령술이 제격입니다."

그러자 뒤늦게 들어온 언데드 장로가 헤헤거리며 말을 받았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당장이라도 저기 죽어 있는 데스 울프나 여기 벌레들의 시체를 일으켜 세워...."

"하지 마."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사령술 도움 받을 생각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 마. 결국 깨진 봉인만 다시 고치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파가브?"

"그렇긴 하다만."

"수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데? 봉인석 발견하면?"

"퀸시께서는 권속인 우리의 코어를 모아 죽은 자들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봉인석을 만드셨다."

"코어?"

"그렇다. 그러니 새 코어를 붙이면 봉인석은 다시 회복될 것이다. 쿨럭!"

녀석은 곧바로 헛구역질을 하며 자신의 코어를 토해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38화

41장 잠입

뭔가 검고 보랏빛이 맴도는 게.... 표독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생긴 것만 보면 딱 독구슬 같구만.

아니 잠깐.

딱 봐도 이거 에이션트 울프 코어랑 완전 다르잖아?

-데스 울프 코어-

관절 강화(중)

정신 내성 강화(대)

야간 시력 강화(대)

사령술 강화(개인 차 있음)

독 면역(중)

해독(중)

코어의 효과만 봐도 에이션트 울프와는 꽤 다르다.

근데 사령술 강화는 왜 있지? 이 녀석들 늑대 주제에 사령술도 쓰나?

"이걸 가지고 가라. 봉인석을 발견하면 그곳에 이걸 붙이면 된다."

"이 아까운 걸...."

"뭐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퀸시의 임무를 달성하려면 데스 울프의 코어를 직접 먹어야 한다. 그러니 미리 뽑을 수 있는 만큼 뽑아 놔야지.

"봉인석 수리 성공하면 코어 몇 개 더 줄 수 있어?"

"물론이다. 원래 코어란 다른 고대종과의 교류를 위해 필요한 것."

녀석은 즉시 코어 네 개를 연속으로 토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네가 우리의 일을 대신 해주니 이 정도 보답은 미리 해 줄 수 있다."

"오...."

"당장은 이게 다다. 고대종이 품을 수 있는 코어는 다섯이 한계라서."

"아니, 이거면 충분해."

겉으론 쿨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주먹을 움켜쥐며 쾌재를 불렀다.

만세!

코어 다섯 개라니, 지금껏 수많은 코어를 구했지만 다섯 개를 풀로 얻은 적은 처음이다.

이거 예상 밖의 수익인데? 나 빼고도 우리 애들한테 네 개나 더 먹일 수 있잖아?

다비에 메르데스에 리넨에 디디?

아니지. 봉인석 수리하는 데 하나 써야 하니 한 사람은 빼야겠구나. 그러고 보니 라니르도 뭔가 하나 먹이긴 해야 하고....

"기다려라 클로드."

내가 코어를 주섬주섬 주워들자, 어느새 옆에 다가온 르갈이 앞발로 내 팔을 건드렸다.

"데스 울프는 에이션트 울프의 변종이다. 저 코어에 무슨 효과가 있는지 모른다. 무턱대고 먹었다가 역효과가 생길지 모른다."

"난 알아."

"뭐?"

"코어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 그러니 걱정 마."

"정말인가?"

그러자 되레 파가브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정말 코어의 효과를 알 수 있나?"

"그렇대도?"

"...우리가 성역에 들어와 데스 울프로 다시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다른 종족에게 코어를 넘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코어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와 다른 점은 정신 내성을 높여주고 밤눈도 좋게 만든다는 거야. 필요는 없지만 사령술도 강화시켜 주고."

"음, 과연."

"관절 강화하는 거랑 해독 관련된 건 에이션트 울프랑 비슷하고. 대충 알겠지?"

"알았다. 알려줘서 고맙군."

파가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강한 마법을 쓰지 않고도 시체벌레 굴을 돌파할 방법이 있나? 혹시 다른 힘도 가지고 있다던가?"

"클로드를 무시하지 마라. 이 녀석은 정령도 소환할 수 있고, 정령과 빙의해서 더 큰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아니."

나는 르갈의 항변에 고개를 저으며 굴 입구로 다가갔다.

"정령도 필요 없어. 결국 봉인석에 코어를 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럼 굳이 시체벌레와 싸울 필요가 뭐 있겠어?"

"싸우지 않고 돌파하겠다고? 봉인석이 있는 곳까지?"

"응. 그럼 바로 시작할게."

나는 손을 흔들며 굴속에 들어갔다.

굴은 완전히 캄캄했다.

나는 그대로 한참동안 걸음을 옮기다, 안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고는 즉시 은신의 각인을 발동시켰다.

* * *

아홉 번 회귀를 했다는 것은, 당연히 아홉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는 뜻.

그럼에도 죽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건 바로 이 은신능력 때문이다.

보통은 도망칠 때 사용하지만 지금처럼 조용히 잠입할 때도 효과적이다. 얼마 전 클러스터 도적단에 잠입할 때도 유용하게 써먹었고.

문제가 있다면 은신 상태로는 외부에 영향을 주는 그 어떤 짓도 할 수 없다는 것.

당연히 마법도 못쓰고, 마법을 못 쓰니 라이트 마법으로 캄캄한 동굴을 밝힐 수도 없다.

하지만 군주의 눈은 발동시킬 수 있다.

벽을 따라 흐르는 미세한 흐름이 마치 희미한 네온사인처럼 보인다. 나는 한쪽 벽에 손을 짚고 네온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키긱?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뾰족한 무언가를 바위에 긁는 것 같은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

시체벌레.

분명 외형은 전에 봤던 땅벌레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군주의 눈으로 보는 시체벌레는 기묘함 그 자체였다.

언밸런스한 흐름.

우선 단단한 외피 구석구석까지 혈관처럼 생명의 흐름이 퍼지고 있는데, 그 흐름이 마치 달팽이처럼 극단적으로 느리다

천년 묵은 엘프조차도 이정도로 느리진 않았다. 어찌나 느린지 저것도 생명인가 싶어 살짝 역겨움이 느껴질 지경.

반면 신경의 흐름은 빠르고 선명하다.

외부의 미세한 자극에도 극단적으로 반응하며 빠르게 몸의 방향을 돌린다.

당장 내 존재가 완벽하게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낌새를 느꼈는지 더듬이를 연신 움직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감각이 엄청 예민한데?

그 끔찍한 사령군조차 은신의 각인을 쓴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이런 깊은 땅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저 정도의 극단적인 감각이 필요 할지도 모른다. 나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녀석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조용히.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러자 눈앞에 세 갈래 길이 보였다.

갈래 길의 중심에 두 마리의 벌레가 모여 더듬이를 맞대며 뭔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키긱.

키기긱.

냄새가 끔찍한 걸 보니 시체 같은걸 나눠 먹는 모양이다. 평소라면 속이 뒤집히는 끔찍함을 느꼈겠지만, 은신의 각인을 발동시킨 상태라 그런지 기분이 묘하게 차분했다.

그래, 니들도 먹고 살아야지.

문제는 셋 중에 어느 길로 들어가느냐는 것.

벽을 따라 흐르는 마력의 흐름은 셋 다 비슷하게 보인다.

다만 왼쪽 길이 약간 다르다. 처음엔 거의 보이지 않던, 검고 찐득한 느낌의 흐름이 희미하게 퍼지고 있다.

그래서 난 왼쪽 길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끼긱 대는 시체벌레의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식사중이라 그런가? 처음만난 녀석에 비해 외부에 대한 경계가 훨씬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

지금까지 녀석들보다 두 배는 커다란 대형 벌래가 길을 틀어막고 있다.

어찌나 큰지 통로에 빈틈이 거의 안보일 지경이다. 녀석은 자신의 거대한 앞발을 지면에 박은 채, 힘겹게 몸을 끌며 매우 느린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째 방금 꽉 끼던 통로를 통과하던 르갈 같기도 하고.

근데 이걸 어떻게 하지?

다시 뒤로 돌아가 세 갈래 길에서 다른 길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은신을 풀고 저 녀석을 제거한 다음 돌파?

아니, 그랬다간 분명 온 사방에서 시체벌레들이 몰려올 것이다. 검은 늑대가 경고했던 것처럼 굴이 무너질지도 모르고.

"...."

그때 녀석의 머리가 닿은 천장 부근에 약간의 틈이 보였다.

예전 같으면 저런 곳을 돌파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우선 뒷걸음을 쳐 거리를 벌린 다음, 가벼운 도움닫기와 함께 녀석의 머리 쪽을 향해 도약해 뛰어 올랐다.

높이.

하지만 천장엔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불타는 굴렁쇠를 통과하는 서커스의 사자처럼, 나는 아슬아슬하게 빈 공간을 스치며 시체벌레의 건너편으로 뛰어 넘을 수 있었다.

키기기긱?

순간 꿈지럭 대던 녀석의 몸이 딱 멈췄다.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 주변을 스쳐 간 것 같은데, 정작 그게 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그렇다고 그 자세로 몸을 돌려 뒤를 살피는 것도 불가능하다. 통로에 거의 꽉 끼어버렸으니까.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파가브의 말처럼 깨진 봉인석의 영향으로 너무 커져버린 걸까?

아무튼 내 몸이 작아 다행이다. 이런 걸로 좋아하고 싶진 않았는데.

벽을 보자 검고 찐득한 흐름이 미세하게나마 굵어지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이 길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기분 좋은 느낌으로 계속 걸음을 옮기는데....

끼긱.

끼긱.

끼기기기긱.

끼긱, 끼기긱.

불길한 소리가 들린다.

딱 봐도 저 건너편에 대량의 시체벌레가 쌓여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뒤로 돌아 갈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계속 전진하자 광장이 나왔다.

사이즈는 데스 울프들이 모여 있던 광장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엄청 넓은데, 그 넓은 공간에 수십, 수백 마리의 시체벌레가 빽빽하게 들어 차 있다.

세상에 맙소사.

무수한 땅벌레들이 조심스럽게 땅과 벽을 파며 광장을 넓히고 있다.

심지어 몇 마리는 서로를 밟고 올라가 천장을 긁어내고 있다. 그 와중에 생명의 흐름이 전혀 없는, 하지만 사령마법의 음울한 기운이 느껴지는 뭔가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좀비.

사령군 장로인 게르니트에 비하면 형편없을 정도로 급이 낮은 좀비 한 마리가 시체벌레무리 사이로 추락.

동시에 맹렬한 분해 작업이 시작됐다.

"그어어...."

촥!

촥!

촤좍!

좀비가 신음 한번 제대로 뱉을 틈도 없이, 시체벌레의 앞발에 썰려 수십 개의 토막으로 흩어졌다.

곧바로 주변의 벌레들이 토막을 하나씩 나눠 먹기 시작했다.

까득거리는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광장 가득 울려 퍼졌다.

그 와중에 다른 벌레들이 천장이나 벽에서 좀비나 스켈레톤을 캐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광산이다.

캐내는 광물이 금이나 은이 아닌, 언데드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난 저 시체벌레들이 가득한 광산에 진입, 저 벌레들 틈을 누비며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새로운 통로만 여덟 개.

"...."

광장 곳곳에 아득할 정도로 수많은 통로가 뚫려있다.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계속 멈춰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시체벌레들이 살아 숨 쉬는 삶의 현장에 뛰어들었고, 그중에 그나마 검은 기운이 강해 보이는 통로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검고 찐득한 흐름은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그렇게 그 흐름만 따라가면 언젠가 봉인석에 도달할 거라 생각했는데....

통로가 너무 많다.

무슨 개미굴처럼 오만 통로로 길이 갈라져있다. 그러다 어찌저찌 제대로 찾았다 싶으면, 또다시 광장이 나오며 수십 개의 새로운 통로와 연결된다.

숨이 턱 막힌다.

그 와중에 처음 길을 막고 있던 커다란 시체벌레처럼, 덩치가 커진 벌레들이 길을 꽉 막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

어떤 놈은 너무 커져서 이 작은 몸뚱이 하나 밀어 넣을 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럴 때는 다시 뒤를 돌아 새 길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고.

후....

지쳤다.

이런 빛 한 점 없는 캄캄한 지하 깊은 굴속에서, 그것도 수백 마리의 시체벌레를 피해 헤매다 보니 체력 소모가 더 극심하다.

체력 높여주는 코어를 꽤 먹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오기 전에 뭐라도 좀 먹고 마셔 놓을걸.

"여긴 뭐지...."

나는 주변에 시체벌레가 없는, 그리고 어째서인지 해골들을 잔뜩 모아놓은 방을 찾아 은신을 풀었다.

그리고 설탕바를 꺼내 입안에 녹여 먹었다. 아주 천천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챙겨둔 설탕바도 고작 한 개 뿐이었다.

"후...."

물론 설탕바는 달고 맛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안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물이 필요하다.

물. 수분.

당연하게 수통은 챙기지 않았고, 시체벌레 굴에 진입한지도 벌써 서너 시간은 족히 지났다.

"두통에 어지러워...."

수분 부족에 더해 군주의 눈을 장시간 발동시킨 후유증이다. 곧장 군주의 눈을 닫고 아주 작은 라이트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리고는 벽에 기대앉아 근처에 쌓인 해골을 보며 중얼거렸다.

"박살난 해골 병사...."

카득!

마침 턱뼈 하나가 내 쪽을 향해 달그락 거렸다. 너도 목마르냐? 내가 물 좀 있었어도 너도 한 모금 줬을 텐데.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39화

41장 잠입

"하, 하하. 하하하...."

그저 웃음만 나온다.

이제 와서 봉인석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마법 빵빵하게 날리면서 다시 원래 성역으로 돌아가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그랬다간 진짜 굴이 붕괴되어 이 안에 갇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래나 저래나 다시 은신을 걸고 조용히 움직이는 수밖에.

아니면 은신 대신 사일런스를 소환해 볼까?

어차피 시체벌레는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사물을 구분 하는 것 같으니, 사일런스로 침묵의 영역을 만들면 비슷한 효과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 아니 잠깐."

그때 어떤 정령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의 정령왕이나 대지의 정령왕보다 강력한 최강의 정령이다.

"나와 드라이어드."

우우우웅!

소환된 드라이어드가 급히 몸을 숙이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반갑습니다, 계약자님. 이곳은 천장이 아주 낮군요."

그러고 보니 얘 키를 생각 못 했네.

나한텐 꽤 높은 천장이지만 5미터가 넘는 아름드리 거목에겐 꽉 차는 좁은 공간이다. 드라이어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방안이 어둡군요. 동굴인가요? 그런데 느낌이...."

"분위기 끔찍하지? 죽음의 땅 지하에 있는 시체벌레 소굴이야."

"괜찮습니다. 아늑하고 좋군요. 적어도 불에 타거나 폭발할 분위기는 아니라 마음이 놓입니다."

드라이어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동안 얠 너무 혹사시켰구나. 정령도 트라우마가 생기는 줄은 몰랐네.

"걱정 마. 몸빵 시키려고 불러낸 거 아니니까. 싸우려고 부른 것도 아니고."

"그럼 말동무라도 되어 드릴까요?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매우 긴 시간동안 소환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좋지. 그전에 네 과일 몇 개만 좀 줘."

내가 양 손을 내밀자, 드라이어드는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가지에 열린 열매를 따 주었다.

"도시락으로 활용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 주세요."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전에는 도시락으로 활용하기 위해 불렀냐면서 황당해했던 거 같은데... 그새 성격이 많이 변했구나.

하긴 새까맣게 불에 타거나 산산 조각으로 폭발하는 것보다는 과일 따주는 게 행복하겠지.

한입 베어 물자 풍부한 과즙과 함께 입 안 가득 복숭아 향이 퍼졌다.

"오, 끝내준다.... 음?"

전에는 몰랐는데 아삭거리는 사과 같은 식감에 백포도 주스 같은 맛도 살짝 난다.

"이거 맛이 좋아졌는데? 확실히 업그레이드됐어."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계약자님께서 새롭게 그분과 계약하신 영향일 겁니다."

"그분?"

"테라직 님 말씀입니다."

"대지의 정령왕? 그게 너한테 영향을 줘?"

"물론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룩카르 님에게도 변화가 생겼을 겁니다."

"정말?"

당장이라도 소환해서 테스트해 볼까 하다 참았다.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암튼 신기하네. 테라직이 너희 권속들 때문에 정령빙의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했는데, 반대로 테라직 때문에 너희 능력도 강화되는 게 있구나."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같은 계통은 그렇게 영향을 받는가 봅니다."

드라이어드는 마치 무릎을 꿇듯 뿌리 부분을 땅에 박으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는 또 하나의 열매를 따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열매는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그보다 죽음의 땅 지하에 있는 시체벌레 소굴은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여기 어딘가에 봉인석이란 있어. 죽음의 땅에 묻힌 언데드가 마음대로 폭주하지 못하게 막는 봉인인데, 그게 저번 지진으로 고장 났거든."

"테라직 님이 말씀하셨던 그 지진 말이군요. 다른 차원에 원인이 있다는."

"응. 그래서 그거 고치러 온 거야. 사령마법 비슷한 마력을 감지해서 그거 따라서 계속 들어왔거든."

"데자르의 눈, 군주의 눈을 사용하신 모양이군요."

"맞아. 마력이 점점 강해지는 곳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예상보다 이 시체벌레 둥지가 너무 광활해."

"그거 큰일이군요."

"큰일이지. 어떻게든 봉인석을 발견해서 이 코어를 가져다 대기만 하면 끝인데."

데스 울프의 코어를 꺼내 손바닥 위에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그러자 드라이어드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혹시 제가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코어를?"

"네."

"살펴 봐. 혹시 먹지는 말고."

드라이어드는 나뭇가지를 뻗어 코어를 움켜쥐며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음.... 이것은 에이션트 울프의 코어군요. 영원의 숲에 사는."

"정확히 말하면 데스 울프야. 오래 전에 에이션트 울프 한 무리가 숲을 떠나 여기 정착하면서 종족이 변했어."

"확실히 변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았군요. 그런데 이걸 대면 봉인석이 고쳐진다고 하셨습니까?"

"응. 봉인석도 그 코어로 만든 거라더라."

"서로 본질이 같다는 뜻이군요. 그렇다면...."

드라이어드는 눈을 감으며 바닥에 잔뿌리를 깊이 뻗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낮은 진동이 바닥을 타고 먼 곳까지 퍼졌다. 이건 뭐 하는 거지? 진동이 심하면 시체벌레가 눈치 채고 달려올 텐데?

"어이, 뭔진 모르지만 살살해. 이러다 시체벌레 몰려오겠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드라이어드는 한참을 갸웃거리다 갑자기 눈을 뜨며 말했다.

"찾았습니다."

"찾았다고? 뭘?"

"이 코어와 비슷한 느낌이 진동하는 방을 발견했습니다. 몇 배, 아니 수십 배 이상 강하긴 하지만요."

"정말?"

그렇다면 봉인석이다. 녀석은 뻗은 뿌리를 조심스럽게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심지어 다른 시체벌레보다 훨씬 크고, 알을 품고 있는 벌레가 그 방에 버티고 있습니다."

"알? 여왕인가?"

"그런 듯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정말 구조가 복잡하군요. 일단 여왕의 방까지 가는 길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드라이어드는 가지를 뻗어 바닥에 슥슥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 와, 아니 여기서도 이렇게나 멀다고?"

지도의 규모는 바닥의 절반까지 퍼져나갔다. 그림을 끝낸 드라이어드는 가장 끝에 있는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여왕의 방입니다. 지도가 어설퍼서 죄송합니다."

"어설프긴. 너 완전 최고야. 이런 능력은 또 언제 숨기고 있었어?"

"저 역시 제게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또한 테라직 님의 영향으로 생긴 능력 같습니다."

드라이어드는 수줍게 웃으며 자신이 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나는 손에 남은 열매를 야금야금 베어 먹으며 지도를 반복해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래. 이것만.... 이것만 기억하면 어떻게든 여왕의 방까지 갈 수 있겠어...."

* * *

드라이어드가 남긴 지도에, 군주의 눈이 더해지자 목적지까지 일직선으로 갈 수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 일직선으로 길이 뚫려 있던 것은 아니지만....

"...."

그렇게 도착한 곳은, 언밸런스할 정도로 천장이 높은 방이었다.

폭이 30미터 정도인데 높이는 100미터쯤 되는 것 같다.

이곳에 봉인석이 세워져 있다.

문제는 그 봉인석을, 거대한 시체벌레가 온몸으로 감싸고 있다는 것.

끼긱... 키익... 끄그극....

녀석은 기괴한 소리를 쏟아내며 연신 꽁무니로 동그란 물체를 쏟아냈다.

꽤나 강한 마력과 생명이 뭉쳐 있는 사람 머리통만한 덩어리.

군주의 눈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물론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저건 알이다. 알을 낳고 있는 건 시체벌레의 여왕일 테고.

여왕이 알을 낳으면 작은 벌레들이 몰려들어 알을 들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여왕의 방과 연결된 통로가 꽤 많은데, 그중에 알을 보관하는 방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래. 뭐가 어쨌든 다 좋은데....

이걸 어쩐다?

기껏 봉인석을 찾았는데 코어를 가져가 댈 수 없다. 여왕 벌레가 봉인석을 빈틈없이 껴안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틈을 찾아 손을 넣어보려 했는데 이빨도 안 들어간다. 이거 귀찮게 됐구만.

미세한 틈으로 보이는 봉인석은 흐름이 일부 깨져있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검고 끈적한 마력을 여왕 벌레가 온몸으로 흡수하고 있다.

여기에 그 흡수된 힘이 모여.... 알주머니에 모이네?

이래서 새로 태어나는 시체벌레가 갑자기 커진 거였구나.

일단 봉인석 고치려면 저 여왕을 떼어내야 한다.

잠시 비켜달라고 말로 설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힘을 써야 할 텐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소리가 울리면?

분명 주변에 퍼져 있는 시체벌레들이 떼로 몰려들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봤는데, 여왕의 방 주변에 진짜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체벌레들이 떼로 모여 살고 있다.

그 녀석들이 전부 몰려오면 대책이 없다.

은신을 발동해도 방안에 벌래가 꽉 들어차 압사해버리지 않을까?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마법을 난사하면 붕괴와 매몰이 시작될 테고.

"...."

그렇게 1분 정도 알 낳는 여왕을 바라보던 나는 우선 여왕과 가장 멀리 떨어진 방구석으로 위치를 옮겼다.

다음으로 은신을 풀고, 은신을 풀자마자 사일런스를 소환했다.

"여기 방과 주변 통로까지 침묵의 영역을 만들어."

-알겠습니다. 계약자님.

캬갹....

그 와중에도 여왕은 알을 낳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즉시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그니스, 내가 신호 보내면 정령 빙의해 줘. 딱 5초만 부탁해.'

-괜찮겠느냐? 충격을 방지할 아무 준비도 없이?

'5초만 하는데 뭐 어때. 방금 드라이어드를 소환했다 해제해서 라이프 링크도 못써.'

-음.... 알았다. 하지만 5초가 지나면 내 임의대로 무조건 빙의를 풀어버리겠다.

'그렇게 해. 그럼....'

나는 시녀 벌레가 새로 낳은 알을 들고 통로를 빠져나가는 그 순간을 노렸다.

'지금.'

그 순간, 마치 온몸의 살점이 저며지는 듯한 격통이 쏟아졌다.

동시에 저며진 모든 살점이 화염에 뒤덮이고, 그 화염이 다시 내 몸을 휘감는 환상을 체험했다.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불로 변했다.

완전히 새로운 감각.

"...."

하지만 그 감각을 만끽할 시간이 없다.

고개를 들자 감정이 거의 없는 여왕벌레의 의식이 보인다.

생존, 방출, 생존, 방출, 생존, 방출....

소름끼칠 만큼 단편적이다. 마치 그것만을 위해 만들어 진 기계처럼.

-빨리 끝내.

여왕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나는 검을 뽑음과 동시에, 나를 감싼 불을 자연스럽게 그곳에 쏟아 넣었다.

뜨겁다.

칼날이 노란 빛으로 달아오르다. 나는 봉인석을 감싸 안은 여왕벌레의 몸을 그대로 사선으로 베었다.

칼날에 봉인석이 닿지 않도록.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왕벌레의 두꺼운 몸이 사선으로 잘리며 흘러내린다.

칼날로 직접 벤 것은 아니다. 그랬다간 근처에 있던 봉인석이 무사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대신 칼끝에 방출되는 열선으로 베었다. 나는 주저 없이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남은 몸을 반대편 사선으로 갈라 버렸다.

주룩.

아마도 그런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

반쯤 남은 몸이 또다시 사선으로 잘리며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제야 여왕벌레의 몸이 완전히 떨어지며, 새까만 봉인석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봉인이 풀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분명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아, 맞아. 지금 여기 침묵의 영역이지.

어찌나 아픈지 몸의 겉과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다. 피부가 안으로 말려들어가고 뼈가 밖으로 쏟아지는 느낌?

"...."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는데 또 그 정도는 아니다. 나는 끝없는 비명과 신음을 반복하며 내 몸에 미친 듯이 신성마법을 쏟아 부었다.

아니, 근데 이거 너무 이상하지 않나?

아무리 사전작업이 없었다 해도 이렇게 아픈 건 이상하다. 고작 5초인데? 전에 젝트바이아를 해치울 때는 2분이나 빙의를 했는데도 이것보다 훨씬 편하지 않았나?

-그때 넌 잠시 기절했었다. 네가 겪은 가장 심한 고통은 기절했을 때 다 지나갔지.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의식이 살짝 끊겼던 것 같기도 하고.

으, 암튼 죽겠다.

온몸이 불에 타고 녹아내리는 듯한 통증.

하지만 정말 죽을 정도는 아니다. 어떻게든 회복마법으로 몸을 추스른 다음, 잽싸게 코어를 꺼내 흐름이 깨진 봉인석에 가져가 대었다.

그러자 흐름이 멈췄다.

정확히는 외부로 흘러나오던 까맣고 끈적거리는 흐름이 멈추고, 대신 무거우면서도 멀리 퍼지는 둔중한 파장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온 사방으로.

"...."

한숨을 길게 내쉬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걸로 봉인석 수리 끝난 거 맞지? 이제 정말 왔던 길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