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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가 지나면, 당신은 스스로의 뒤틀림을 외부에 풀어낼 수 있는 존재가 될 겁니다."

몸을 비틀기 시작한 백작을 내려다보며, 후원자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양팔을 펼쳤다.

"그때는 부디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펼쳐 주십시오. 당신이 만들어내는 혼돈이, 훗날 저희의 침략을 수월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하지만 후원자의 마지막 목소리는 백작의 귀에 닿지 못했다.

외견상으로는 큰 변화가 없지만, 백작의 몸속에선 마치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것만큼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고치 속에서 스스로의 몸을 녹이고 다시 재구축하는 벌레처럼.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5화

21장 좌절감이 사나이를 뒤트는 것이다

"황자님."

다비가 정원 한복판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기 취한 것처럼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여자는 누구입니까?"

"응? 저거? 톨라리."

"톨라리라면...."

순간 다비의 얼굴이 경직되며 손이 허리춤의 칼로 움직였다.

"설마 아크 위저드 톨라리 말씀입니까?"

"그 톨라리 맞아."

나는 편지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는 칼자루를 움켜쥔 채 톨라리를 주시했다.

"그 톨라리가 어째서 여기 있습니까? 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만, 아크 위저드면 아무리 저라 해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톨라리는 이제부터 내 부하야."

나는 다 읽은 편지를 다비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니 경계할 필요 없어. 앞으로 협력해서 할 일이 많을 거야."

"하지만 황자님. 저게 진짜 톨라리라면.... 문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 무슨 문제?"

"톨라리는 성격이 괴팍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매직 길드의 원로들을 함부로 대하고, 자신을 찾아온 지체 높은 사람들을 엄청나게 하대해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야 뭐, 나한테도 말을 놓는데."

"네?"

"원래 말투가 좀 이상해. 제국 공용어를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까지만 배운 것 같아. 애초에 이쪽 대륙 출신이 아니고."

"그럼 외국인이란 말씀입니까?"

"동대륙 출신인데, 어렸을 때 마법 배우러 이쪽으로 넘어왔나 봐."

"으어...."

그때 톨라리가 내 쪽으로 손을 뻗으며 좀비처럼 흐느적댔다.

"우어... 머리에서 쓴맛이 안 사라져... 제발 지워줘...."

"저 여자는 대체 왜 저러는 겁니까? 뭔가 병이라도 걸렸습니까?"

"영약 효과가 남아서 그래. 그나마 내가 만든 거라 저 정도지."

만약 라니아가 만든 뇌가속 영약이었다면 바닥에 쓰러진 채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한동안 톨라리를 지켜보던 다비는 겨우 칼자루에서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제가 생각하던 톨라리와는 많이 다르군요. 명색이 제국의 4대 아크 위저드 중 한 명인데. 사정은 모르지만 뭔가 허당 같습니다."

"실제로도 허당이야. 마법 쓰는 거 말고는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만난 지 불과 이틀도 안 지났는데 확신을 가지고 내린 결론이다.

머릿속에는 오직 마법에 대한 생각 뿐.

생활력도 없고 타인에 대한 관심도 적으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왜 이런 황무지에 마탑을 세우고 틀어박혔냐고? 귀찮게 사람 안 만나도 되니까?

여기까지 온 것도 루넨브레스 저택이 도심과 동떨어진,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설명을 들은 다비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까... 뭔가 마법적으로 새로운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여기까지 따라와서는 황자님이 만드신 영약을 넙죽 받아먹고 저 지경이 되었단 말씀입니까?"

"맞아."

"대충 어떤 인물인지 감이 오는군요. 그런데 황자님."

다비는 돌려받은 편지를 들어 올리며 화제를 바꿨다.

"보셨다시피, 저는 당장 북부로 올라가 봐야 합니다."

"그래. 백기사단에 인수인계 문제가 생겼나 본데?"

"제명당할 때까지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진행됐으니까요. 분명 후임들이 고통받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늦어도 닷새 안에 인수인계를 끝내고 다시 돌아올 테니, 제가 없는 동안 기초 훈련을 꼬박꼬박 진행해 주십사 당부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얘는 이 와중에도 내 훈련 이야기만 하고 있구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뭔가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 이 시기에 북부라면...."

"황자님?"

"요즘 깨달은 게 있거든. 같은 사건이나 같은 인간이라도, 시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대표적인 게 바로 옆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저 톨라리다.

그저 평소보다 몇 년 일찍 찾아간 것만으로, 최악의 적이 최강의 동료로 변해 버렸잖아?

그러니 미리 세워놓은 일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제국과 대치 중인 이종족연합을 건드리는 건 내년 이후부터인데, 지금 미리 찾아가서 관계를 만들면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맞는 말씀입니다. 항상 시기를 놓이지 않는 게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지금 황자님께 가장 중요한 건 몸을 만드는 기초훈련...."

"같이 가자."

나는 다비의 말을 끊으며 선언했다.

"이번에 북부에 가는 거 나도 따라갈게. 상관없지?"

"상관은 없습니다만."

다비는 놀란 얼굴로 잠시 침묵하다 되물었다.

"목적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리 안면 좀 터놓으려고."

"이종족연합과 말씀입니까? 설마 황자님의 힘으로 전선을 쓸어버리시려는 계획입니까?"

"아니, 싸우는 거 말고. 말 그대로 친목도모."

원래는 동대륙에 대량으로 주문한 보리와 술이 도착하고 나서 움직이려 했는데.... 뭐 짐을 줄이고 미리 가볍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엘프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드워프를 노리고 계시겠군요."

"맞아. 술이나 잔뜩 챙겨가야지. 카일한테 말해서 시중의 술을 싹 긁어오라고 해야겠다."

탈리스만의 금고를 털었더니 돈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좋구만. 그래도 너무 펑펑 쓰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너무 티 나지 않는 수준에서 과소비를 시전해 볼까?

* * *

북부로 떠나는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나는 저택 정원에서 톨라리와 함께 마법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우물우물. 설탕바 맛있어. 완전 행복해."

"좀 아껴 먹지 그래? 이러다 영약 마시고 입가심할 것도 없겠다."

"황자님 말이 맞아. 근데 보는 순간 손이 막 가네."

톨라리는 새로운 설탕바를 입안에 넣으며 오물거렸다. 당장 내가 없는 동안 먹을 뇌가속 영약과 설탕바를 잔뜩 챙겨 놔주긴 했는데.... 설마 하루 만에 다 먹어 치우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암튼 황자님 대단해. 이 설탕바. 원래 마력 회복을 위해 만든 거라며?"

"맞아. 뇌는 당분을 필요로 하니까."

"당분. 그거 좋은 표현이야. 확실히 달달한 거 먹으면 머리도 잘 돌아가고 스트레스도 풀려. 그리고 마력은 결국 집중력이니까."

"그래. 마력은 집중력이지."

"황자님은 말이 통해서 너무 좋아. 그 망할 매직길드 원로들은 도무지 내 말을 들어 쳐먹질 않더라. 이런 멋진 발명품까진 아니더라도...."

톨라리는 눈앞에 쌓인 설탕바를 품 안에 와락 안으며 웃었다.

"흐흥. 대신 꿀이나 설탕물 같은 걸 생각했어. 근데 내 말에 동의를 안 하더라. 화가 나서 다 때려치우고 나와 버렸지."

"그거 때문에 매직 길드를 나온 거야?"

"이유가 그거 하나는 아니야. 내 말투도 엄청 따지고 들었고. 암튼 이런저런 일로 많이 싸웠어. 그런데...."

톨라리는 어느새 바로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키 큰 시녀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이 아가씨는 누구?"

"루넨브레스 저택의 시녀인 메르데스입니다. 황자님의 개인 기사단에 속한 기사이기도 합니다."

"시녀인데 기사?"

톨라리는 자신보다 두 뼘은 큰 메르데스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대단하네. 키도 엄청 크고 박력 있다. 근데 얼굴도 잘생겼어. 아니 여기서는 예쁘다고 해야 하나?"

"...."

"근데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 내가 설탕바를 너무 많이 먹었나?"

"톨라리 님이 황자님을 대하시는 태도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메르데스는 대 놓고 톨라리에게 불만을 토했다.

와, 눈에서 불꽃 나올 거 같네. 저러다 한 대 치기 전에 빨리 진화해야겠다.

"괜찮아 메르데스. 톨라리는 외국인이라 우리말이 서툴러서 그래."

"하지만 황자님...."

"그리고 아크 위저드잖아? 제국을 통틀어도 네 명밖에 없는 귀하신 몸이라고."

희귀도만 치면 일곱 명이나 되는 황제의 자식들보다 높은 셈이다. 물론 지금은 황자 둘이 죽어서 다섯 명이 되었지만.

"그러는 황자님께서도 아크 위저드... 아닙니다. 저 같은 게 끼어들 문제가 아니겠죠. 실례했습니다."

메르데스는 내 쪽으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앞으로 톨라리도 저택에서 살 테니 친하게 지내."

"맞아. 우리 친하게 지내."

톨라리는 이때다 하고는 갑자기 메르데스에게 바짝 붙으며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톨라리 님?"

"근데 너 영약 냄새난다? 너도 영약 만들어? 그런데 뭔가 신선한 재료 냄새도 나는데?"

"부족하지만 영약도 만들고, 재료 채취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진짜? 대단하네. 완전 다재다능하잖아?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난 너처럼 근사한 사람이 좋아. 아니면 귀여운 사람이라던가."

그러면서 내 쪽을 힐끔거리는 눈빛이 뭔가 불길한데.... 나는 헛기침을 하며 급하게 화제를 바꿨다.

"근데 무슨 일이야? 뭔가 할 말이라도?"

"방금 카일 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짐마차를 전부 준비했으니 바로 북부로 떠나도 된다고 하십니다."

"좋아. 그럼 메르데스?"

"네. 황자님."

"나 없는 동안 저택을 잘 부탁해. 닷새면 돌아올 거야."

"부족한 몸이지만, 기대에 부흥하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메르데스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이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톨라리는 그런 메르데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게 존재감이구나."

"뭐?"

"가만있어도 사람이 근사하잖아? 나 같은 건 어디 가서 구석에 입 다물고 있으면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못 알아봐. 몸도 비리하고 자세도 구부정해서."

그리고는 마치 노인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헛기침을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이것 참, 주사를 맞기 전의 톨라리는 정말이지 하루가 멀다 하고 내 이미지를 박살내 주는구만.

"이상한 흉내 그만하고, 할 이야기 있으니까 몸 좀 펴봐."

"응? 뭐라고? 내가 나이를 먹었더니 귀가 잘 안 들려서...."

"너 싸울 수 있지?"

"응?"

톨라리는 그제야 몸을 바로 세우며 날 마주보았다.

"무슨 소리? 나 싸울 일 있어?"

"다비랑 내가 저택을 떠나면, 여기서 가장 강한 건 바로 너야."

"아마 그렇겠지?"

"어쩌면 그사이에 누군가 저택을 노리고 쳐들어올지도 몰라. 그러면 네가 나서서 다 죽여 버려."

"죽이라고?"

"응. 죽여."

"나 지금까지 사람 죽인 적 한 번도 없는데?"

"내 암살 의뢰까지 받은 주제에,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 아냐. 의뢰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

"진짜?"

"응. 말했다시피 이번에는 돈이 급해서. 그리고 황자님이랑 한번 마법으로 대결도 해보고 싶었고. 그런데...."

톨라리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곧 암살시도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나 빼고도 잔뜩 모았을 테니."

"그래서 일부러 저택을 떠나는 거야. 여기서 싸우면 쓸데없는 피해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가능하면 요란하게 짐마차도 준비하고 하면서."

"역시 황자님.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그놈들이 생각보다 더 멍청할지도 모르잖아? 목표가 사라진 빈집을 노리고 쳐들어올 가능성도 있어. 그럼 네가 미리 나서서 전부 쓸어버려."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숲에서 말이지? 저택까지 접근하면 괜히 시녀들 다칠 수 있으니?"

"바로 그거야."

"근데 내가 자는 동안 쳐들어오면? 설마 나 닷새 동안 잠자면 안 되는 거야?"

"그럴 리가. 정찰까지 할 필요는 없어. 디디 알지?"

"디디? 황자님과 비슷하게 조그맣던 그 아이? 어제 같이 훈련받던?"

"...맞아. 정찰은 디디와 디디 친구가 할 텐데, 너는 연락을 받으면 그때부터 움직이면 돼. 할 수 있겠어?"

"당연히 해야지."

톨라리는 나른한 표정과 함께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 황자님한테 충성 맹세했잖아? 명령인데 당연히 따라야지."

"닷새만 수고해 줘. 혹시 만약의 일이 벌어져도 너라면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을 거야."

탈리스만 백작이 모으는 떨거지 따위,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톨라리 선에서 커트가 가능하다.

물론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요란하게 판을 벌인 내 쪽을 습격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기왕 금고까지 털린 입장이니, 반대로 적의 빈집털이에 로망을 느낄지도?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6화

22장 감염 군주

"새벽 5시입니다. 결행까지 10분 남았습니다."

복면을 쓴 남자가 회중시계를 보며 보고했다. 란텔 남작은 초조한 얼굴로 캄캄한 하늘을 살폈다.

"동이 트기 전에 거사를 끝내고 철수한다. 제발 그 녀석이 저택에 있어야 할 텐데...."

여기서 그 녀석이란 물론 암살 목표인 클로드 황자다.

지금으로부터 열네 시간 전.

암살의 가장 큰 걸림돌인 나이트 마스터, 바로 다비가 저택을 비우고 북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탄 것까지는 확인 했다.

문제는 다비를 태운 마차를 제외하고도 다섯 대의 짐마차가 함께 북부를 향했다는 것.

이 과정에서 클로드가 시중에 있는 고급술을 모조리 긁어모았다는 소문이 퍼졌고, 클로드 본인도 다비와 함께 북부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남작님. 소문처럼 저택에 황자가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복면을 쓴 부하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란텔은 초조한 듯 연신 입술을 씹어댔다.

"아니, 그럴 리 없다. 클로드 황자가 북부로 갈 이유가 전혀 없어."

"엠퍼로드의 술이란 술을 모조리 긁어모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백기사단에 뇌물이라도 주려고 가는 게 아닐까요?"

"황자가 백기사단에 뇌물을? 어째서?"

"그건 저도...."

"아니, 요즘 황자가 사설 기사단 훈련에 한창이라던데, 혹시 다비 말고 다른 기사를 더 빼올 생각인가?"

말하고 보니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란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금이라도 거사를 취소해야 할까?

하지만 반대편에 있는 암살조에게 연락을 할 시간이 없는데?

"여기들 있었군."

그때 등 뒤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린 란텔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숙부님!"

"어허, 한밤중에 목소리를 높이면 쓰나."

바로 이 순간만큼은, 절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바로 탈리스만 백작.

"...!"

심지어 어둠 속의 백작은 아무 변장도 없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란텔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백작을 다그쳤다.

"숙부님!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눈에 띄면 곤란하니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일이 어떻게 되고 있나 궁금해서 왔지."

"아무리 그래도 이런 차림으로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적어도 복면이라도 쓰고 정체를 감추셔야...."

그런데 가까이 다가온 백작의 모습은, 고작 복면 정도로는 감출 수 없는 뚜렷한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뭐지 이건?'

비대하다.

고작 하루 안 봤을 뿐인데, 가뜩이나 비대하던 백작의 몸이 놀랄 만큼 크게 불어 있다.

마치 물에 빠져 죽은 시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모두가 경악하며 백작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오는 동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 염려 마라. 그보다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냐? 이번 거사에 우리 가문의 입김이 닿았다는 건 철저히 감춰야 할 텐데?"

"그것은...."

지금 그게 당신이 할 소린가? 란텔은 식은땀을 닦으며 어쨌든 이유를 설명했다.

"이곳에 있는 건 제가 따로 키운 사병들입니다. 암살을 위해 모인 건 아니고 뒤처리를 맡을 예정입니다."

"뒤처리?"

"거사가 끝났을 때 쥐새끼 한 마리라도 숲을 빠져 나가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택에서 누군가 도망친다면, 당연히 시내와 가까운 이곳 서쪽 출구로 빠져나올 겁니다."

"그래서 이곳을 틀어막겠다?"

"그렇습니다. 물론 쥐새끼가 사람 다니는 길로만 도망친다는 보장이 없으니, 지금부터 병력을 숲으로 퍼뜨려서 포위망을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숙부님께서 오셔서...."

"좋아. 이해했다."

탈리스만은 조카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짜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소리겠군."

"물론입니다. 주력 병력은 기습의 효과가 있도록 숲의 동쪽과 남쪽에 분산 배치했습니다."

"나이트 커맨더 셋에, 나이트 익스퍼트 열일곱?"

"그들은 남쪽입니다. 동쪽에는 일반 용병기사 200기를 배치했습니다."

"그럼 북쪽은?"

"숲의 북쪽 출구엔 클러스터 암살단이 보낸 50명의 요원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저희처럼 직접 저택을 공격하는 대신, 행여 북쪽으로 빠져나갈지 모를 적의 잔당을 처리하는 역할입니다."

"철저하군. 아주 좋아. 히끅."

"그게 실은, 전혀 좋지가 않습니다."

란텔은 어째 괴상하게 반응하는 백작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쪽은 톨라리가 행방을 감췄기 때문에 마법 전력이 제로입니다. 제아무리 기습에 성공하더라도... 일격에 클로드 황자의 숨통을 끊지 못한다면 그의 반격에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황자 역시 아크 위저드니까요."

"그래봤자 스무 살도 안 된 꼬맹이지. 그에 대비해서 준비도 했다고 하지 않았나?"

"네. 익스퍼트급 이상 기사에게 마법 전용 마갑을 지급했습니다. 성능만 보면 안티매직 나이트의 마갑에도 뒤쳐지지 않는 물건입니다."

"그럼 아무 문제없지 않나?"

"문제는 그 황자가 저택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백작은 핏발이 선 눈을 크게 껌뻑이며 물었다.

"그놈이 집에 없다고? 왜?"

"그것이.... 실은 숙부님께서 어제 하루 종일 외부와 연락을 끊으셔서 보고를 못 드렸습니다. 클로드 황자가 다비의 북부행에 동행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희 모두 헛물을 켜는 셈이라...."

"아니, 꼭 그렇지도 않지."

백작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얼굴로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클로드가 집에 없으면 또 어떤가?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어."

"잘되다니,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녀석이 자리를 비운 동안 보금자리를 불태워 버리는 거다. 가깝게 지내던 모든 사람을 죽이고, 가진 재산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거지. 그럼 녀석도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 않겠나?"

"그야 물론.... 하지만 숙부님, 그래봤자 정작 황자 본인을 제거하지 못하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의미는 내게 있다."

백작은 순간 정색하며 사방에 모인 사병들에게 선언했다.

"내가 바로 의미이자 명분이다. 중요한 건 새롭게 바뀐 내 마음과 의지뿐이다. 란텔?"

"...."

란텔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백작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겨우 대꾸했다.

"네. 숙부님."

"이곳에 몇 명이나 있지?"

"모두 150명입니다."

"아주 좋아. 그중에 기사는?"

"30명입니다. 그중에 나이트 익스퍼트도 다섯 명 있습니다."

"그럼 일단 기사부터 전부 가까운 곳으로 모아라."

"어째서 기사를...."

"이건 명령이다. 설마 본가의 가주인 내 명령에 거역할 셈인가?"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란텔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일단 기사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모았다. 백작은 모인 기사들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여기까지 잘 왔다. 지금은 우리 탈리스만 가문에 있어 매우 뜻 깊은 시간이자,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그동안 받은 모든 치욕을 되갚아 줌과 동시에...."

그리고는 긴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영문을 모른 채 일단 공손한 자세로 백작의 연설을 경청했다.

"...그리하여 가문의 모든 조상님들께 이 영광을 바치도록 하겠다. 모두 눈을 감고 1분간 묵념!"

갑작스런 묵념 선언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대는 본가의 가주인 탈리스만 백작. 어느 안전이라고 명령에 거부할 수 있겠는가?

"...."

그렇게 모두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란텔 역시 짧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고 묵념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촤륵!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백작의 몸에서, 수십 가닥의 촉수가 옷을 찢으며 사방으로 솟구쳤다.

촉수 끝에는 길고 가느다란 바늘이 달려 있었다. 백작은 눈을 감은 기사들의 투구 틈새로 순식간에 바늘을 찔러 넣으며 무언가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쭈우우우우우욱!

"커억...."

란텔을 포함한 30명의 기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고꾸라졌다. 그러자 주변에 퍼져있던 다른 백여 명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으아아악!"

"뭐야 저거!"

"괴물! 괴물이다! 백작님이 괴물이 되셨다!"

"도망쳐! 빨리!"

숲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백작은 기사들의 몸에서 뽑아낸 촉수를 다시 온 사방으로 뿌리며 수십 명의 병사들을 추가로 감염시키기 시작했다.

"왜 도망치려 하지?"

"컥!"

"이건 영광스런 일이다. 오늘밤에 너희 모두가 내 충실한 신하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기대되지 않나?"

"크악!"

"어때?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

"으으...."

그 순간, 먼저 바늘에 꽂혔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온몸에 혈관이 부풀어 오르고, 피부가 회색으로 바뀐 기묘한 모습으로.

백작은 그런 기사들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다, 어느 순간 옷 속에 감춰져 있던 터질 듯한 몸을 정말로 폭발시키듯 부풀렸다.

"크하!"

한순간 열 배 이상 부풀어 오른 백작이 환호성과 함께 저택 방향을 주시한 순간.

촥!

동시에 감염된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저마다 무기를 뽑아들고,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끔찍한 새벽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백작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군단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더는 인간의 목소리라 할 수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죽이고... 모두 집어 삼켜라. 마지막에 그분들께서 승리하실 수 있도록. 근데 그분들? 그게 누구지? 내 머릿속이 이건 대체...."

백작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을 떨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 망할 꼬맹이에게 나와 같은 고통을 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 * *

같은 시간, 조금 떨어진 숲의 나무 위. 조그만 소년이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번뜩였다.

"...저놈도 움직인다."

소년은 바로 디디였다. 디디는 괴물로 변한 백작이 마치 공처럼 몸을 굴리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나무 아래로 몸을 던졌다.

"몸을 굴려서 움직이는데... 뭔가 엄청 느리네. 아무튼 황자님 말씀대로 밤에 순찰 나오길 잘했어. 르갈?"

"...."

"빨리 저택에 돌아가서 톨라리 님에게 알려. 황자님도 안 계시고 기사단장님도 없으니, 당장 저런 괴물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톨라리 님뿐이야."

"...."

하지만 나무 아래 웅크리고 있던 르갈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디디는 르갈의 몸을 양손으로 강하게 흔들며 물었다.

"르갈? 왜 그래? 르갈?"

"...아니다."

가까스로 입을 연 르갈은 백작이 굴러간 방향을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택에 돌아가서 알리는 건 네가 해라."

"내가? 그럼 너는?"

"난 이대로 북부로 간 황자를 뒤쫓아 다시 불러오겠다."

"...왜?"

"저건 심상치 않다."

르갈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저놈이 풍기는 냄새는 이질적이다. 마치 하수도를 점령했던 그것들처럼."

"하수도? 데스웜이나 슬라임 말이야?"

"그런 조무래기와는 격이 다르다. 모든 원흉이었던 피 웅덩이와도 다르고. 마치 현실에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냄새.... 내가 가늠할 수 없다. 황자 없이는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몰라."

그리고는 북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디디는 쌩하니 부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떨었다.

르갈이 무언가를 저렇게 경계하는 건 처음 본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적들이 이곳 한 방향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것.

디디는 곧바로 저택을 향해 달리며, 지금부터 세 방향에서 몰려올 적들의 구성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톨라리 님이 어느 한 군데는 막아 주실 거야. 하지만 다른 두 곳은 어떻게 하지? 우리가 이걸 전부 다 막을 수 있을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7화

22장 감염 군주

루넨브레스 저택의 거실에는 세 명의 기사와 네 명의 신관,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가 집결해 있었다.

"으으.... 살려줘...."

그중 막 잠에서 깬 톨라리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더 자게 해줘.... 난 아침에 약해.... 아직 동도 안 텄는데.... 근데 뭐라고?"

"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숲의 북쪽 출구를 제외한 세 방향에서 전부."

전력질주로 달려와 온몸이 땀에 젖은 디디가 다시 한번 보고를 반복했다.

"숲의 동쪽 출구로부터 용병기사가 200명. 남쪽엔 나이트 익스퍼트 17명에 나이트 커맨더 3명입니다. 그리고 서쪽엔 탈리스만 백작이 1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직접 오고 있습니다."

"백작이 직접?"

톨라리는 잠이 덜 깬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 사람 미쳤대? 기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닌데 왜 직접?"

"백작은 괴물로 변했습니다."

"응?"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모릅니다. 르갈과 함께 야간 정찰 중에 발견했는데, 갑자기 온몸이 부풀어 오르면서 열 배는 커졌습니다."

"사람이 열 배로? 어떻게 그게 가능...."

순간 톨라리가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디디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뭔가 알고 계십니까?"

"후원자 때문일 거야. 아마도."

"후원자? 그게 무엇입니까?"

"그런 게 있어. 아후. 그 녀석도 소원을 빈 인간이었나? 분명 주사를 맞은 거야. 첫 번째 말고 두 번째나 세 번째. 나도 하마터면 큰일 날 뻔."

"...네?"

"그러니까 그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갑옷을 챙겨 입은 카일이 대화를 끊으며 앞으로 나섰다.

"중요한 건 적을 저택까지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전에 숲에서 요격해야 합니다."

"왜?"

"저택에는 비전투요원이 많으니까요. 디디? 적의 구성에 마법사는 없다고 했지?"

"네. 원래 톨라리 님이 끼었어야 하는데 끌어들이지 못해서, 이번 암살단에 마법사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걸 다 들었어? 대체 얼마나 가까운 곳까지 간 거야?"

톨라리가 혀를 내둘렀다. 디디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간단히 설명했다.

"르갈이 절 살려준 이후로 감각이 좋아졌습니다."

"르갈? 그 커다란 늑대?"

"네. 그리고 적들은 익스퍼트 이상의 기사들에게 마법 전용 마갑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성능이 안티매직 나이트에 지급하는 마갑과 비슷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티매직 나이트라, 그럼 좀 귀찮은데."

"톨라리 님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 전에 저택의 시녀들을 지하실로 숨기는 게 좋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톨라리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왜?"

"마법사가 없다면 적어도 저택에 불을 지를 위험이 적으니까요. 일이 끝날 때까지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디디? 동쪽에 기사 200기라 했지? 그냥 일반 기사?"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동쪽으론 리넨을 보내는 게 좋겠어."

"네? 저요?"

순간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소년이 깜짝 놀라며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야 싸우라면 어디든 가서 싸우겠습니다만, 그래도 상대가 기사 200명이라면...."

"요즘 신관님과 함께 훈련하던 거 있지? 그걸 해보자. 홀리 랜스를 증폭시켜서 흩뿌리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리스 님?"

카일의 질문에, 경호신관 중 가장 어린 바리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뭉쳐있다면 강력한 효과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홀리 랜스는 적을 살상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몸을 마비시킬 뿐이죠."

"그렇게 마비된 적을 재빨리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어야겠군요. 가급적이면 몸이 날렵한.... 디디?"

"네. 카일 님."

"지금 바로 싸울 수 있어? 방금 달려오느라 완전 지친 거 같은데?"

"체력은 금방 돌아올 겁니다. 이미 많이 회복됐습니다."

"좋아. 그런데 할 수 있겠어?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그것도 못 움직이는 사람을 최대한 빠르게, 많이?"

불안한 표정의 카일과 달리, 디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직 사람을 죽인 적은 없지만, 죽은 사람은 많이 봤습니다."

"음?"

"빈민가 있을 때도 그랬고, 하수도에서 살 때도 죽은 시체가 떠내려오는 걸 자주 봤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카일의 정신세계로는 시체를 많이 본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 사이의 연관관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믿는 수밖에.

"좋아. 맡길게. 그리고 나는.... 후우."

"카일 님?"

"나도 같이 간다. 마비가 풀리기 전에 최대한 많이 죽이려면 한 명으론 부족할 테니까."

이런 어린아이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주제에, 자신이라고 발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일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톨라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쪽은 톨라리 님이 혼자 막아주셔야겠습니다. 안티매직 나이트 급의 기사 20기인데, 가능하시겠습니까?"

"하음...."

톨라리는 하품과 함께 눈을 비볐다.

"가능할 거야. 약간 까다롭겠지만. 황자님한테 따로 명령도 받았으니 열심히 할게. 그래도 시간은 좀 걸릴 듯?"

"죄송한 말씀이지만 시간도 촉박합니다."

"그래?"

"최대한 빠르게 남쪽의 적을 무력화시키고, 바로 저택으로 돌아와 모두와 합류해서 서쪽의 적을 막아야 합니다."

"그럼 빠듯하겠네. 근데 서쪽을 제일 나중에 대처해도 괜찮아? 무슨 괴물이라며?"

"알 수 없는 적에겐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톨라리 님에 비하면 저 같은 평기사는 아무 도움도 안 되겠지만, 여기 계신 신관님들이나 리넨은 경우가 다르니까요. 그리고 디디?"

"네. 카일 님"

"아까 괴물로 변한 탈리스만 백작의 움직임이 느리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몸을 천천히 굴려서 움직이는데, 평범한 걸음걸이 수준입니다."

"아하. 그래서 이렇게 시간차로 작전을 세운 거구나."

톨라리는 뒤늦게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카일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 장군감이구나. 판단 빨라서 좋네. 네 말대로 할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은 신관 세 분은 일단 저택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빠져나온 적들이 저택으로 오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요."

"맡겨주십시오. 적들이 저택에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경호신관의 리더인 트리멈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작전지시를 끝낸 카일은 순간 이 자리에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메르데스 양은?"

"그러고 보니 메르데스 아가씨가 안 보이는데요?"

리넨도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때 지하실과 연결된 통로 쪽에서 시녀장인 라니아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시녀장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적들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으니 어서 다른 시녀 분들과 함께 지하로 대피를...."

"메르데스가 영약재로를 채집하러 숲에 나갔습니다."

"네?"

카일은 움찔하며 바로 되물었다.

"재료채집이라니, 이 한밤중에 말씀입니까?"

"새벽에 채취하면 약성이 좋아지는 영약이 있습니다. 이번엔 꽤 먼 곳까지 채집을 나갔을 거예요. 위치는 저택의 남쪽입니다."

"하필 남쪽...."

숲의 남쪽엔 적의 정예 기사들이 몰려오고 있다. 그러자 톨라리가 번쩍 손을 들며 지원했다.

"메르데스가 그 키 큰 여자애지? 어차피 내가 갈 곳이니, 당장 날아가서 도와줄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시녀장이 끼어들며 선언하듯 말했다.

"저희 시녀들은 숲에서 적을 발견할 경우에 취해야 할 행동강령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도 결코 함부로 싸우지 않을 겁니다. 저희들은 바로 메르데스가 있는 쪽으로 가서 그 아이를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통로 쪽에서 커다란 나무통을 든 열 명의 시녀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카일은 당황한 얼굴로 시녀들을 살폈다.

"시녀 분들이 말입니까? 하지만 기사 한 명이 마음만 먹으면 여러분 모두 순식간에...."

"당연히 직접 싸우진 않습니다. 루넨브레스 가문에는 대대로 이런 경우를 대비한 방어법이 있지요. 사방에서 오는 적을 막는 건 어렵지만, 만약 한 방향에서 오는 적이라면 반드시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게...."

어찌나 자신 있게 말하는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카일은 일단 라니아가 했던 마지막 이야기에 집중해서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런데 어째서 한 방향만 가능한 겁니까?"

"바람은 한 방향으로만 부니까요."

라니아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뒤쪽의 시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녀들은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한 얼굴로 나무통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마침 같은 시녀인 메르데스가 그쪽 방향에 있어서 잘 됐습니다. 그럼 여러분?"

"네! 시녀장님."

"지금부터 작전을 시작합니다. 당장 모두 남쪽 숲으로 움직이세요."

"네. 시녀장님."

시녀들은 마치 사전에 훈련이라도 받은 듯 일사분란하게 저택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라니아는 마지막으로 문 앞에 서서 거실에 있는 모두에게 당부했다.

"지금 이후로 남쪽 숲엔 다른 사람을 보내시면 안 됩니다. 명심해 주세요. 지원군은 필요 없으니 절대 아무도 오면 안 됩니다."

"아니, 대체 어째서...."

라니아는 대답 없이 저택을 빠져나갔다. 카일은 난처한 얼굴로 라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톨라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럼 톨라리 님은 대신 서쪽 숲으로 가서 탈리스만 백작의 군대를 상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험하다 싶으면 정면승부 대신 시간만 끌어 주셔도 됩니다."

"알았어. 괴물인지 뭔지 몰라도, 안티매직 마갑 없으면 오히려 더 빨리 끝날지도?"

톨라리는 느긋한 걸음으로 거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가려는 톨라리를 디디가 재빨리 붙잡으며 당부했다.

"톨라리 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서쪽의 적은 심상치 않습니다."

"응?"

"르갈이 그렇게까지 적을 경계하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백작과 같이 있던 부하들도 처음엔 별거 아니었지만, 나중에 백작의 몸에서 뻗어 나온 뭔가에 찔린 이후로 괴상하게 변했습니다. 물론 당신은 아크 위저드고 저는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릅니다만, 그래도 이번 적은 경계하셔야 합니다."

"...귀여운 녀석."

톨라리는 순간 눈웃음을 지으며 디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황자님이랑 스타일은 다른데, 암튼 너도 귀여워서 맘에 들어."

"...네?"

"여긴 맘에 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분이 좋아. 매직 길드에 있을 때는 완전 칙칙했는데. 암튼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조심하셔야 합니다. 황자님도, 기사단장님도, 르갈도 없으니 믿을 건 톨라리 님뿐입니다."

"그럼 내가 그 늑대보다 아래?"

"아니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농담이야. 나이도 어린 게 정색하긴."

톨라리는 미소와 함께 공중에 떠오른 다음, 아직 열려 있던 저택의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럼 빨리 끝내고 도와주러 갈게! 다들 그때까지 죽지 마! 나중에 황자님한테 혼나기 싫거든!"

* * *

메르데스는 어두운 새벽 풀숲을 조심스레 헤치고 있었다.

야간투시의 영약 덕분에 한밤중에도 등잔 없이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린 싹의 군락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가을 냉이라 불리는 풀의 새싹.

바로 클로드 황자를 위해 만드는 성장의 영약의 재료 중 하나다.

'많기도 해라.'

시녀장의 지시로 남쪽 숲 부근에 씨를 많이 뿌려 놓은 게 적중했다. 새싹을 하나씩 뽑아 바구니에 담던 메르데스는, 어느 순간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어둠 속에 몸을 낮췄다.

"...."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길이 좁고 험합니다. 정말 이게 제대로 된 길이 맞습니까?"

조금 떨어진 숲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메르데스는 한쪽 눈만 내밀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기사.

대략 스무 명쯤 되는,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 숲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68화

22장 감염 군주

'다들 움직임이 부드러워.'

모두가 마갑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것만 봐도 등급이 높은 기사란 걸 예측할 수 있었다. 메르데스는 다비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기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싸우기 전에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건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명심해. 기사는 디테일한 동작 하나하나에서 능력을 파악할 단서를 얻어내야 한다.

-물론 상대 역시 그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동작을 숨기거나 가짜 움직임을 섞을 수도 있지. 그것까지 파악하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수 싸움이 시작되는 거다.

기사의 속임수.

자신의 실력을 감추거나, 혹은 부풀리는 것.

하지만 이런 한밤중에 떼로 몰려오는 주제에, 일부러 실력을 과장하기 위해 가벼운 몸놀림을 보여줄 것 같진 않다.

"근데 대장. 황자를 죽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꼭 저택에 있는 사람을 몽땅 죽여야 하는 겁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쓸데없는 소리. 너 이 짓 하루 이틀 했냐?"

"하지만...."

"이번 의뢰는 기밀이 생명이다. 무려 황족을 암살하는 거라고. 단 한 명도 밖으로 빠져나가면 안 돼. 나중에 황궁에서 조사단이 나왔을 때 그 어떤 증거도 남기면 안 된다고. 알았나?"

적의 정체는, 다름 아닌 클로드를 노리는 암살자였다.

숫자는 모두 스무 명.

전원이 나이트 익스퍼트 급 이상이며, 맨 앞의 세 명은 더 강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이트 커맨더급?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 물론 단장님만큼 강한 건 아니지만. 난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적의 정확한 실력을 가늠할 수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와중에 자신은 마갑조차 착용하지 않은, 평범한 시녀복장이다.

물론 마갑을 안 입어도, 마갑 입은 평기사 정도는(예를 들면 카일 같은)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전원이 나이트 익스퍼트 이상. 만약 마갑을 입고 있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야.'

그녀는 자신이 기사이기 이전에 저택의 시녀라는 것을 떠올렸다.

루넨브레스 가문의 시녀가 숲에서 적을 발견할 경우, 적들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몸을 숨기는 게 원칙이다.

그리고 적이 완전히 사라지면 시녀들만 아는 숲의 지름길을 통해 최대한 빠르게 저택으로 복귀한다. 그래야 모두에게 위기를 알리고 대응을 할 수 있으니까.

"결국 이번 암살은 우리가 주력이다. 동쪽 길로 오는 떨거지들이야 머릿수 채우려고 고용한 거고."

"저희가 먼저 신속하게 잠입해서 황자의 목을 따야죠. 기왕이면 황자가 잠에 푹 빠져 있으면 좋겠군요."

"깨어나도 상관없어. 이건 안티매직 마갑이니까. 무슨 짓을 해도 최소 한 번은 무조건 막아줄 테니.... 모두 듣고 있지? 황자가 갑자기 마법을 날려도 겁먹지 말고 뛰어 들어라."

"네. 대장."

"좋아. 그럼 속도를 높인다. 다른 녀석들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 선에서 깔끔하게 끝내자고. 그래야 뒤탈이 없을 테니."

그리고는 대장이 한쪽 손을 치켜들었고, 동시에 기사 전원이 보통 걸음에서 속보로 속도를 높였다.

문제는 그게 어지간한 일반인의 달리는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

"...."

상황을 파악한 메르데스는 입술을 깨물며 새로운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러면 내가 나중에 지름길로 돌아가도 저 녀석들보다 늦어.'

그렇다면 이곳에서 시간을 끌면서, 동시에 신호를 보내 저택에 적의 침입을 알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물론 어떻게든 싸움이 시작되면 저택 쪽에서 눈치를 채고 대응을 시작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은 반드시 죽는다.

일단 발각되면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중급 마갑으로 육체를 강화한 기사는 순간 속도가 말보다 빠르니까.

'일단 정령을 소환하자. 그걸로 시선을 끈 다음에....'

하지만 클로드 황자가 계약한 '바위 정령 룩카르'면 모를까, 자신이 덤으로 계약한 조약돌 정령으로는 단 1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갑을 입고 나오는 건데.'

만약 지금 마갑을 착용한 상태였다면, 조약돌 정령과 연계해서 어떻게든 적의 시선을 끌고 활로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없는 걸 탓 해봐야 소용이 없다.

당장은 부족하더라도 정령을 소환해 시선을 끈 다음, 자신은 반대 방향으로 도망쳐 지름길로 저택을 향해 전력질주 하는 게 최선이다.

'만약 발각되면 순식간에 따라잡혀 죽겠지만....'

반대로 그녀가 여기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저택에 있는 시녀장과 다른 시녀들은 물론이고, 어쩌면 황자가 아끼는 다른 기사들까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기느니 자신이 죽는 편이 낫다.

각오를 마친 메르데스가 막 정령을 소환하려는 순간.

-기다려.

머릿속에서 정령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

-난 너와 계약한 조약돌 정령, 크발이다.

메르데스는 경직된 자세로 숨을 죽이며 중얼거렸다.

"아니.... 네가 왜...."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안다. 적에게 발각될지 모르니 입으로 말하지 마라. 생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무슨 일이야? 지금까지 이런 적 없었잖아?'

-위급한 상황이라 예외를 적용했다. 네가 바라는 절실함이 날 행동으로 이끌었다.

'그렇지 않아도 널 소환할 생각이었어. 지금 시간이 없어. 당장 이러는 순간에도....'

-넌 방금 마갑을 바랐지?

갑작스런 뜬금없는 질문에, 메르데스는 숨도 쉬지 않고 대꾸했다.

'맞아. 하지만 당장 없는 걸 원해서 뭐해?'

-마갑은 착용한 인간의 신체를 강화하는 능력을 가진 도구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 역할, 나 같은 정령도 대신할 수 있다.

'뭐?'

-그것을 우리는 '빙의'라 부른다. 우릴 세상에 소환하는 대신, 정령사의 육체에 빙의하여 일정 시간 동안 정령사의 신체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메르데스는 점점 멀어지는 적들을 보며 초조한 마음에 소리쳤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어지간한 인간은 정령빙의를 다룰 수 없고, 또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뭐?'

-심지어 타고난 육체적인 강함을 갖춘 너조차 빙의가 풀린 순간 찾아올 후유증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지금 나중에 올 후유증이 문제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 생각도 그렇다. 더욱이 너는 최근에 한층 강력한 육체적 훈련을 쌓았다. 그러니 빙의된 내 힘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뭐든 상관없어. 싸울 수만 있다면. 빙의는 얼마나 지속되는데?'

-당장은 아무리 길어도 5분이다.

'5분이면 충분해. 빙의하면 정확히 얼마나 강해지는데?'

-네가 마지막으로 착용했던 마갑을 기억하나?

'낮에 훈련할 때 입은 거? 하급 마갑?'

-나와 빙의한 순간, 그보다는 좀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명심해라. 네가 빙의된 몸으로 격렬하게 싸우면 싸우는 만큼....

'당장 해! 빨리!'

-음... 충격에 대비해라.

바로 그 순간, 메르데스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마치 온 사방에서 날린 돌팔매질에 두드려 맞는 느낌.

"...."

메르데스는 억지로 비명을 참았다. 그리고 짧은 통증이 사라진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이 투명한 바위 같은 형상에 덮여 있는 걸 발견했다.

'이게 정령빙의?'

놀랄 만큼 단단한 육체적인 안정감이 느껴진다.

증강된 힘 역시 하급 마갑보다 한 수 위였다. 무엇보다 마갑을 착용했을 때 느껴지는 압박감과 몸의 짓눌림이 전혀 없었다.

'이 정도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순간 앞서간 적들을 향해 달려간 메르데스는, 그간 어깨너머로 배운 나이트 스킬을 적의 후방을 향해 쏟아냈다.

풍압검.

그것도 검도 없이 맨손으로.

콰광!

한순간 쏟아낸 충격파가 적의 후열에 있던 기사의 등에 적중했다.

"컥!"

직격을 맞은 적의 등판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게 보였다.

'성공이야!'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메르데스는 녀석이 떨어뜨린 칼이 땅에 닿기도 전에 뛰어들어 그것을 낚아챈 다음, 한발 더 나아가 바로 앞에 있던 두 기사의 허리를 동시에 베어 버렸다.

촥!

촤악!

그것은 극도로 넓은 반경의 회전 베기였다. 키가 크고 팔이 긴 메르데스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정도로.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부드러워.'

분명 단단한 마갑을 베었다. 그런데도 감촉이 부드럽다고 느껴진 건 왜일까?

"적이다!"

동시에 적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고, 메르데스는 그중 가까운 곳에 있던 기사의 몸을 일격에 사선으로 쪼개 버렸다.

콰직!

이번에도 적의 마갑은 종잇장처럼 쉽게 잘렸다.

정령빙의로 힘이 올라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의 감각이 뭔가 이상해졌나?

"기사! 하필 마갑이 이지경인데...."

'마갑? 마갑이 뭐가 어쨌는데?'

"모두 비켜!"

그때 적의 선두에 있던 기사가 소리를 질렀고, 다른 기사들은 마치 썰물처럼 좌우로 길을 비켰다.

"감히 기습 따윌!"

그게 한밤중에 암살하러 온 주제에 할 소린가?

쾅!

녀석이 내리친 칼날이 땅을 강타한 순간, 맹렬한 충격파가 지면을 타고 고속으로 쏟아졌다.

'파형검!'

최소 나이트 커맨더는 되어야 쓸 수 있는 기술.

휩쓸리는 순간 풍압검의 몇 배나 되는 충격에 온몸이 갑옷째 박살난다.

-잘 봤나? 이것이 파형검이다. 위력 하나는 절륜하지만 약점도 분명하지.

동시에 다비의 가르침이 뇌리를 스쳤고, 메르데스는 쏟아지는 충격파 위로 반사적으로 몸을 날린 상태였다.

"...!"

파형검을 날린 기사의 눈이 한순간 경악에 물들었다. 아슬아슬한 높이로 충격파를 뛰어넘은 메르데스는, 마치 모든 것이 한 동작인 것처럼 단숨에 검을 휘둘렀다.

촤악!

그 일격에, 기사의 몸에 붉은 선이 수직으로 그어졌다.

"내 파형검을...."

기사는 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메르데스는 칼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전율하다, 어느 순간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주변을 살폈다.

'포위됐어.'

좌우로 갈라졌던 적들이 어느새 메르데스를 사방에서 에워싸고 검을 겨누고 있었다.

메르데스는 조금씩 뒷걸음을 쳤고, 적들 역시 메르데스의 움직임에 호응하며 천천히 함께 움직였다.

"대단하군."

그 와중에 한 녀석이 죽은 기사의 절단면을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안티매직 마갑을 입었어도 이렇게 깔끔하게.... 이건 제대로 수업 받은 솜씨야. 혹시 나이트 마스터의 작품인가?"

"...."

메르데스는 대꾸 없이 기사를 노려보았다.

부대장급 정도로 보이는 기사는 바닥에 길게 난 파형검의 흔적을 살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파형검에 이런 약점이 있을 줄이야.... 나도 주의해야겠어. 하지만 그걸 보자마자 뛰어드는 것도 엄청난 강심장이군."

"...."

"그런데 어째 복장이.... 설마 저택의 시녀인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마갑도 안 입고?"

실제로 정령마법을 활용한 거니 마법이 맞긴 맞다.

하지만 메르데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기사는 투구 사이로 눈을 번뜩이며 손을 천천히 위로 치켜들었다.

"뭐 좋아. 죽이고 나서 천천히 알아봐도 되겠지."

그렇게 치켜든 손을 내리며 일제 공격을 지시하려는 순간.

'냄새?'

이상을 감지한 메르데스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저는 메르데스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검을 땅에 떨어뜨리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루넨브레스 저택의 시녀이며, 페이우드 제국의 황자이신 클로드 황자님의 신하입니다. 당신들은 황자님의 사유지를 무력으로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족이 모두 처형될 만큼의 대역죄입니다."

그리고는 품속에 천천히 손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손에서 칼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포위한 기사들은 별다른 경계 없이 히죽대기 시작했다.

"대역죄도 걸리지 않으면 의미 없겠지? 어차피 이 숲은 완전히 포위됐다. 개미새끼 하나 빠져나갈 수 없어. 그런데 대체 뭘.... 영약병?"

기사는 메르데스가 꺼내든 작은 영약병을 바라보았다. 메르데스는 영약병의 뚜껑을 열고 곧장 입안에 부어 넣은 다음, 양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몸을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