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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8화

12장 물고기 키우기

-나이트 파이렌과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날 암살하기 위해 청사자궁을 기습했다.

-마법사는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과거 녹사슴궁을 기습해 알베르트 황자를 죽인 암살자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과시했다.

-난 전력을 다해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나이트 파이렌까지는 제압했지만 정체불명의 마법사는 놓치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둘러댄 그날 밤에 벌어진 일의 전말이다.

다만 조사에 나선 왕실기사단의 단장, 넥스림은 내가 파이렌을 잡았다는 이야기만큼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리 황자님이 신성마법의 달인이 되셨다 해도....

-나 그냥 마법도 쓸 수 있어.

-원소 마법 말씀이죠. 하지만 상대는 나이트 파이렌입니다. 심지어 파이렌 경의 갑옷은 특수 제작된 나이트 마스터 전용 마갑으로, 항마력 또한 엄청난 수준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자님께서 대체 어찌....

나는 말없이 넥스림에게 스카이 콩콩을 몇 번 태워줬다. 넥스림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납득했다.

그날 이후, 내 이름 앞엔 '나이트 마스터 슬레이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힘깨나 쓴다는 기사들도 내 앞에서는 기가 죽어 오금을 펴지 못하게 되었는데... 뭐 이건 당장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아무튼 난 그날 밤에 제스의 존재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파이렌의 반역과 제스의 실종에 집단 멘붕을 일으켰다.

-섭정 전하가 클로드 황자를 암살하기 위해 파이렌과 정체불명의 마법사를 동원한 건가?

-아니, 내 생각에 이건 나이트 파이렌의 단독 반역이오. 그자가 섭정 전하를 살해하고 클로드 황자님까지 암살하려 한 거지. 문제의 마법사는 파이렌과 친분이 있던 거고.

-확실히 그렇게 따지면 앞뒤가 맞긴 합니다. 알베르트 황자님 사건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겠습니까?

-난 평소부터 파이렌 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소. 단 한 번도 우리 앞에서 투구를 벗지 않았지. 표정을 감추면서 황실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게 확실하오.

덕분에 이번 사건은 황실의 씨를 말리려는 불순세력이 있었으며, 그 주범이 바로 파이렌과 정체불명의 아크위저드 급 마법사라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실종된 제스가 욕 하나 안 먹고 순교자 취급을 당하게 됐다는 건데....

그래도 혼란이 가중되고 황족에 대한 불신이 늘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은 결말이다. 나 혼자 찜찜하고 말면 그만이지 뭐.

그보다 진짜 문제는, 제스가 내 계획보다 '어마어마어마'하게 빨리 죽어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

녀석이 평소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다양한 사욕을 챙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섭정의 업무를 개판으로 했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

제국의 결정권자가 책임져야 하는 업무량은 가히 살인적이다. 제스는 자신의 평판를 위해 비교적 성실하게 그 역할을 완수했다.

덕분에 제스를 대체할 사람 역시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살려'놔야 한다는 문제가 생겼다.

황제.

그리고 황태자.

황제는 의식불명으로 침대에서 자리보전 중이고, 황태자는 황궁을 나와 엠퍼로드의 서쪽 끝에 있는 별장에 은거 중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둘 중에 내가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인 것을.

심지어 곧바로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중에 제스를 제거할 때쯤 하려 했던 새로운 루트를 먼저 진행해야 하는데....

후, 이것도 당장 하려니 골치가 썩는구만.

여기에 제스가 어떻게 광전사로 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과정도 알아내야 한다. 반면 파이렌은 광전사까지는 아니고 그냥 팔다리가 쭉쭉 늘어나는 촉수괴물이 되었는데,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

그게 왜 중요하냐고?

아직도 이 세상엔 인류의 배신자가 많이 남아 있거든.

만약 그 녀석들 모두가 일제히 광전사로 변신해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으악.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지.

하지만 그 모든 문제에 앞서,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인력관리.

잡은 물고기에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건 여기선 다 헛소리다.

어떻게든 최대한 잘 먹여서 반드시 월척으로 키워내야 한다. 안 그러면 9년 후에 반드시 쏟아질 태풍에 모두 휩쓸려 날아갈 테니까.

그런데 이건 뭘까?

황궁에서 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글쎄 내가 잡지도 않은 물고기가 어항에 들어있네?

* * *

"저, 저는 엘스톤 백작령의 요새마을인 돌턴 출신의 리넨이라 하, 합니다."

저택 응접실 바닥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있는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몇 달 전 황자님께서 저희 마을을 구해주시며 제 목숨도 함께 구해주셨습니다. 제가 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라도 목숨 걸고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를 황자님의 종으로 마음껏 부려 주시길 바랍니다."

"돌턴이라...."

솔직히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내가 회복마법으로 살려낸 마을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었어야 말이지.

아무튼 간절한 얼굴로 애원하는 털북숭이 남자의 모습에, 나는 실례인줄 알면서도 일단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리넨. 암튼 다 좋은데, 너 나이가 지금 몇 살이라고?"

"15살입니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지금 나보다 연하라고?

살다 살다 내 인생에 이런 노안은 처음 본다. 아무리 산동네에서 고생하고 살았다 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15살 짜리가 이런 외모를 가질 수 있어?

키는 대충 170대 초중반으로 평범하다.

하지만 피부가 거의 고목나무 수준으로 거칠고, 덥수룩한 수염이 구레나룻과 닿았으며, 눈매와 눈썹은 마치 산적처럼 부리부리하다.

여기에 드러난 가슴팍까지 털까지 수북하다. 근데 이게 15살이라고? 진짜? 나는 둘째 치고 옆에 있는 다비보다도 더 늙어 보이는데?

"방금 보고 드린 것처럼, 리넨이 가세해준 덕에 베리트 성을 공격한 란텔 남작의 군세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아, 그래?"

옆에서 발언한 카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얜 리넨에 비하면 얼굴이 완전 애기구나. 나이는 세 살이나 더 많은데도.

"그러니까.... 홀리 랜스? 창날에 빛의 힘을 부여해서 닿으면 폭발하게 만드는 능력?"

회귀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처음 듣는 능력이다. 리넨은 생김새에 맞지 않게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황자님께서 제게 내려주신 은혜입니다."

"나? 내가 왜?"

"죽어가는 저를 황자님께서 살려주셨을 때... 제 안에 무언가 신성한 힘이 깃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힘은 황자님께서 제게 주신 힘입니다. 앞으로 황자님을 위해 쓰여야 마땅합니다."

아니, 그렇게 치면 내가 신성마법으로 살려낸 모든 사람들이 다 능력을 가졌게?

결국 이 녀석이 특별한 존재였다는 뜻이다. 그것도 특별한 상황에 특별한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감춰진 특별한 능력을 각성했겠지.

지금 2층 손님방에 쉬고 있는 루네라는 소녀도 그런 특이체험을 통해 마법의 능력을 각성했다. 나는 어디 전장에서 20년쯤 구르다 온 베테랑 용병 같은 리넨의 얼굴을 잠시 음미하다 물었다.

"그래, 중간에 엘스톤 백작을 만나고 왔다고?"

"네. 이 힘이 홀리 랜스일지도 모른다고 말씀해 주신 것도 영주님이십니다. 대신전을 찾아가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조언해주셨습니다."

"엘스톤 백작은 잡식이 풍부하니.... 그럼 그 힘으로 아무 창이나 홀리 랜스로 만들 수 있어?"

"네. 일단 창 비슷하게 던질 수 있는 거면 뭐든 가능합니다."

"한번 만들면 끝?"

"네, 네?"

"한번 홀리 랜스로 만들면 그 창은 영원히 홀리 랜스가 되는 거야?"

"그, 그렇다기보다는... 한번 던져서 폭발하면 그 뒤로는 다시 평범한 창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창을 일회용 폭탄으로 만드는 셈이구나. 오호, 이거 예상보다 더 신박한 능력인데?

"폭발은 어떤 속성인데? 화염? 아니면 그냥 물리적인 효과만 있어? 그것도 아니면 신성?"

"에, 으, 저기, 저는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는데.... 아무튼 터질 때는 빛이 조각나며 파편을 뿌립니다."

"빛? 그건 효과가 뭔데?"

"빛의 파편을 뒤집어쓰면 몸이 마비됩니다. 직격을 맞으면 기절하거나, 사람에 따라선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리넨?"

긴장해서 더듬거리는 리넨 대신 카일이 나서서 대답해주었다. 리넨은 반색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바로 그렇습니다!"

"리넨 스스로도 자신의 힘을 정확히 파악 못한 점이 있어, 제가 베리트 성에서 메르데스 양과 함께 홀리 랜스에 대해 몇 가지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잘했어. 그래서 결과는?"

"홀리 랜스는 엄청난 힘입니다. 저 같은 어설픈 기사는 수십 명이 덤벼도 홀리 랜스로 바뀐 창 한 자루에 전부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음? 이거 어째 자기 비하가 좀 섞인 평가 같은데?

아무튼 찬찬히 알아봐야겠지만, 일단 카일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이건 두고볼 것도 없이 월척이다!

카일은 평가에 있어 기사의 1 대 1 대결보다는, 전장에서 전술적인 역할을 계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카일의 평가가 좋다는 건, 리넨의 능력이 대규모의 전쟁에 특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반대로 1 대 1의 최강자인 우리 나이트 마스터께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다비? 넌 어떻게 생각해?"

"...황자님께서는 제가 이 소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물으신 겁니까?"

세상에, 저 털북숭이를 잘도 소년이라 불러주는구나.

아무튼 고개를 끄덕이자, 다비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리넨을 살피다 말했다.

"방금 이야기한 홀리 랜스라는 건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뭐라 말씀드리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보다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개성 있는 원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다비는 응접실에 모인 물고기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감탄했다.

메르데스, 카일, 리넨, 그리고 디디까지.

역시 나이트 마스터쯤 되면 분석안 없이도 기사의 재능이 또렷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일단 화제를 바꾸었다.

"원석이라. 그런데 다비?"

"네. 황자님."

"오늘 여기 와준 건 고마운데, 백기사단은 어떻게 된 거야? 슬슬 휴가 복귀해야 하지 않나?"

"백기사단은 잘렸습니다."

"엥?"

"저는 정해진 복귀 날짜를 어겼기 때문에 백기사단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문서로 통보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단의 에이스를...."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백기사단은 규율이 엄격하기 때문에 예외란 없습니다."

어째 남일 말하듯 덤덤하게 말하네? 아니 잠깐, 이러면 다비가 아직 백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걸 전제로 한 내 다음 루트가 성립이 안 되는데?

"차라리 잘 됐습니다. 저는 앞으로 황자님을 모시고 싶었으니까요. 딱히 기사단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이 리넨이란 소년처럼, 부디 실업자가 된 저를 황자님의 밑으로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아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리넨의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다비를 보며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래, 차라리 이게 더 잘 된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예정대로라면 6개월쯤 뒤에 다비를 백기사단에서 빼올 계획이었다. 덕분에 생길 손해는 내가 좀 더 고생하면 그만이고.

나는 기존에 계획했던 여러 가지 일정과 테크트리를 즉석에서 수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한테 기사단을 하나 만들 권리가 있어. 오우거 반란 사건을 해결하고 받은 건데, 아직 이름도 안 지은 따끈따끈한 기사단이야."

"새 기사단, 말씀입니까?"

"응. 그래서 여기 있는 모두를 기사단에 넣을 거야. 그중에서 다비 너를 단장으로 앉히고 싶은데, 어때?"

저쪽이 쇠뿔도 단김에 빼겠다고 작정했다면, 이쪽도 마다하지 않고 뽑아주면 그만이다. 다비는 크게 뜬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황자님.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국에 셋밖에 없는 나이트 마스터인데, 설마 실망할 일이 생기겠어?"

그러고 보니 이제 셋이 아니라 둘로 줄었지? 나는 몸을 쭈그려 무릎을 꿇은 다비와 시선을 맞췄다.

"근데 아까 원석이라고 했지? 여기 있는 녀석들 말이야."

"네. 다들 무척 훌륭한 원석입니다."

"혹시 그 원석 좀 갉고 닦아 볼 생각 없어?"

내가 은근히 떠보자, 다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며 눈을 번뜩였다.

"제가 가르쳐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전부 네 밑에 들어갈 녀석들인데."

"그것도 좋지만... 실은 제 눈에 띈 가장 뛰어난 원석은 제 위에 서 계신 분입니다."

"위에? 그게 누군데?"

"황자님입니다."

"나?"

예상 못한 대답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비는 자신의 가슴에 주먹을 얹으며 말했다.

"만약 제게 황자님께 검을 가르칠 수 있는 영광을 주신다면, 동시에 이곳에 있는 다른 모두도 함께 최선을 다해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그거. 지금 날 기사로 만들겠다고?"

"네. 황자님."

"농담하긴. 이런 팔로 검이나 제대로 쥘 수 있을 것 같아?"

헛웃음과 함께 나뭇가지처럼 마른 팔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자란 힘은 기술로 커버할 수 있습니다."

아, 또 그 소리....

"황자님은 지금껏 제가 본 사람들 중 가장 이질적인 재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십시오. 물론 다른 단원들도 모두 뛰어난 기사로 키워 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대놓고 거절해서 분위기 깨면 안 되려나? 나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른 녀석들처럼 시간 많이는 못 내."

"괜찮습니다. 제가 황자님을 무슨 나이트 마스터까지 키워 내려는 건 아니니까요."

다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주변의 다른 녀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황자님 말씀 들었지? 지금부터 각자에 맞춰 평가와 방향을 정하겠다. 모두 밖으로 나와 집합하도록!"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39화

12장 물고기 키우기

다비는 저택 옆의 넓은 공터로 모두를 불러냈다.

공터는 새로운 기사단의 본부를 짓기 위해 숲을 개간한 장소다. 사방에 집을 짓기 위한 자재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우선 인부들에게 자재를 공터의 바깥쪽으로 옮겨 놓도록 지시했다.

"황자님, 인부들에게 내린 명령을 거둬 주십시오. 이번에는 단원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다비가 인부들을 공터 밖으로 내보내며 이쪽 아이들에게 일감을 맡겼다. 나는 낑낑대며 나무토막을 운반하는 디디를 보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걸로 뭘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 가진 힘은 물론, 힘을 쓰는 방식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비는 모두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말했다.

"기본적인 파악은 좀 전에 저택 응접실에서 다 끝냈습니다. 다들 뛰어난 자질을 가졌더군요. 한 사람이 좀 많이 튀었지만 말입니다."

"누구 말하는지 알 것 같아. 근데 나도 같이 평가하는 거 아니었어? 난 일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돼?"

"황자님은 논외입니다. 설사 아니라 해도 제가 감히 황자님께 노동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걱정 마시고 마지막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다비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든 건축자재가 바깥으로 옮겨졌다. 일이 금방 끝난 것은 메르데스가 엄청난 속도로 자재의 절반 이상을 순식간에 날랐기 때문이었다.

"역시 저 아가씨는... 이미 어지간한 기사 이상이군요."

다비는 가장 왼쪽에 선 메르데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메르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비와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황자님의 명이라 이렇게 나오긴 했습니다만, 저는 그저 루넨브레스 가문의 시녀일 뿐입니다. 이제 와서 기사가 되기엔 너무도 부족한 몸입니다."

"넌 전혀 부족하지 않아. 전에도 한번 노블 나이츠의 마갑 입고 전장에 달려온 적 있잖아?"

"그때는...."

메르데스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부득의한 선택이었습니다. 시녀장님의 명령으로 급하게 나서느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상엔 마갑을 입고 싶어도 입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내가 그거 입으면 쓰러져서 움직이지도 못할걸?"

"하지만 저는 시녀일 뿐입니다."

"동시에 영약사면서 정령사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기사까지 한번 추가해 봐. 나도 기대가 커."

"...."

메르데스는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동요하던 그녀는 다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자도 기사가 되는 게 가능합니까?"

"직위를 묻는 거라면 물론 가능하다. 백기사단에도 여기사가 꽤 있다. 물론 실력을 말하는 거라면 넌 이미 기사고."

"...."

"최하급이라도 좋으니, 일단 마갑을 입고 싸울 수 있으면 그건 이미 기사다. 그리고 내 생각에 너는...."

다비는 날카로운 눈으로 메르데스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최하급이 아니라 당장 하급 마갑을 착용해도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군. 이렇게 말해도 이미 기사인 카일을 제외하면 다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자 카일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비는 가만히 웃으며 자신이 입고 온 백기사단의 중급 마갑을 손으로 두드렸다.

"그럼 지금부터 마갑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마갑은 전문적인 실력을 쌓은 장인이 특수한 재료와 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특별한 갑옷이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주먹만 한 크기의 돌을 주워들었다.

"우선 마갑을 착용하면, 착용자의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그리고는 돌을 움켜쥐며 박살냈다.

콰직!

손바닥에 남은 건 약간의 돌가루뿐이었다. 다비는 돌가루를 바닥에 뿌리며 계속 설명했다.

"이렇게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진다. 대신 마갑을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체력이 빠지며, 여기에 힘을 쓰면 쓸수록 더 빨리 체력이 고갈된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이 녀석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갑옷을 벗지 않고 저 차림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최상급 마갑도 소화 가능한 나이트 마스터이니, 중급 마갑 정도는 입은 채로 일상생활 정도는 소화가 가능하겠지?

"여기에 마갑은 그 자체로 상당한 무게를 지지고 있다. 일반 갑옷보다 훨씬 무겁지. 갑옷의 재질에 신체능력을 높여주기 위한 특수한 금속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거기, 이름이 리넨이라 했나?"

"네, 네!"

습관적으로 수염을 만지던 리넨이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다비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구를 리넨에게 던져 주며 물었다.

"자, 들어보니 무게가 어떻지?"

"엄청 묵직합니다. 속이 빈 투구인데도 마치 안에 뭔가 꽉 들어찬 것처럼 무겁습니다."

"다른 모든 부위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갑을 착용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마갑의 무게를 버텨낼 수 있는 기본적인 근력. 또 하나는 어지간히 마갑에 빨려도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이다. 사관학교 출신인 카일 군은 알고 있겠지? 학교에서 매일 점호 직후에 무엇을 하지?"

"중량구보를 합니다."

혼자 차렷 자세로 서 있던 카일이 빠릿하게 대답했다.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했다.

"중량구보가 뭐지?"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차거나, 혹은 인위적으로 무게를 증량한 갑옷을 입고 달리는 훈련입니다. 학기별로, 또한 학년별로 중량이 체계적으로 올라갑니다."

"그렇다. 기사가 되기 위한 훈련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근력과 체력 강화가 대부분이지. 그래야 일단 마갑을 착용할 수 있고, 마갑을 착용해야 기사가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움직임과 힘의 출력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은...."

콰직!

순간 메르데스의 손에서 뭔가가 박살나는 어마무시한 소리가 울렸다.

"...."

"...."

"...."

그녀는 자신에게 집중된 모두의 시선을 의식하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침 주머니 속에 돌이 있어서."

"그냥 맨손으로? 마갑도 안 입었는데?"

옆에 서 있던 카일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메르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조각을 쥔 주먹을 슬그머니 다시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죽을죄까지야. 그나저나 주머니에 웬 돌인데? 혹시 영약 재료?"

메르데스는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다 내 질문에 대답했다.

"전에 크발의, 그러니까 조약돌 정령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돌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습니다. 기념으로 챙겼던 건데 그걸 제 손으로 깨뜨려 버렸군요."

"역시 굉장하군…. 메르데스? 그럼 일단 그쪽부터 평가를 시작하겠다."

다비는 감탄한 얼굴로 메르데스를 보며 말했다.

"먼저 자신의 나이와 경력을 말하도록. 스스로 경력이라 여기는 거라면 뭐든지 상관없다."

"제 나이는 16살입니다. 경력은 루넨브레스 저택의 시녀로 4년 동안 일을 했으며, 시녀장님의 배려로 영약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특기는 영약재료 수집입니다."

"...맨손으로 돌 쪼개기가 아니고?"

누군가 옆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다비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메르데스 양. 현재 기사로서의 네 역량은 이미 나이트 익스퍼트에 근접한 수준이다. 다른 세 명과는 차이가 너무 벌어져 있으니 그에 맞는 목표와 훈련 과정을 나중에 따로 지정하지. 그러니 오늘은 우선 저택에 돌아가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도록!"

* * *

메르데스가 저택으로 돌아가자, 남은 세 명 중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리넨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나이트 익스퍼트란 게 무엇입니까?"

"기사의 칭호다. 대부분의 기사는 실력과 상관없이 그냥 평기사로 불리지만, 그중 특별한 경지에 다다른 기사에겐 칭호가 붙는다."

설명을 마친 다비는 직접 검을 뽑아 공터 반대쪽을 향해 휘둘렀다.

푸확!

순간 칼날에 맺힌 풍압이 고속으로 뻗으며 멀리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일격에 박살냈다.

"이것은 '풍압검'이라 불리는 나이트 스킬이다. 이 기술을 쓸 수 있게 되었거나, 혹은 중급 마갑을 착용하고 자유롭게 싸울 수 있으면 나이트 익스퍼트의 칭호를 얻을 수 있다."

"저 큰 나무가 한 방에...."

리넨이 놀란 눈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하지만 다비 님은 그보다 더 높은 기사지요? 나이트 익스퍼트보다 훨씬 높은?"

"나이트 익스퍼트의 윗 단계는 '나이트 커맨더'라 부른다. 이건 상급 마갑을 착용하고 전투가 가능하거나, 혹은 몇 가지 기준이 되는 나이트 스킬을 쓸 수 있으면 칭호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진동검'이 있지."

우웅!

순간 다비의 검이 마치 엔진처럼 시동이 걸린 듯 강하게 떨렸다.

"오...."

아무것도 모르는 리넨와 디디는 그저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사인 카일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진동검은 적의 공격을 피해 없이 받아내기 위해 사용한다. 물론 지금 너희에겐 필요 없는 이야기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럼 카일?"

"네. 나이트 다비."

"앞으론 단장이라 부르도록. 지금부터 너에 대한 평가를 할 테니, 먼저 앞으로 나와 자신을 소개하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카일은 긴장된 얼굴로 한발 앞으로 나섰다.

"제 이름은 카일 구스프입니다. 나이는 18세이며, 올해 제국 사관학교 졸업반에서 재학 도중 황자님의 부름을 받고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추가로 카일의 키는 170대 중반 정도이고,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며 체격은 살짝 마른 축에 속한다.

여기에 마음만 먹으면 전장 한가운데서도 온 천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의 성량도 가지고 있다. 평소의 목소리는 낮고 명확해서 듣기 좋은 편이고.

"사관학교 졸업반이라면 이미 기본적인 신체 단련이 끝났을 테고, 이는 최하급 마갑을 착용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비는 카일을 제외한 다른 두 사람에게 알려주려는 듯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사관학교는 물론이고, 기사에 입문한 자들의 절반 이상이 이 최하급 마갑에서 평생 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본인의 노력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자신이 타고난 신체능력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신체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그러자 카일이 놀란 얼굴로 곧장 질문했다.

"신체능력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사관학교는 물론이고 다른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이해한 사람이 적다는 뜻이지. 카일 너는 타고난 힘은 대체로 평범하다. 하지만 하체의 균형이나 몸 전체의 밸런스가 좋다. 마치 배 위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처럼."

"확실히 어려서 배를 많이 타보긴 했습니다만...."

"그런 신체능력의 특징을 파악해 발전 방향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넌 당장은 무리하더라도 하급 마갑을 입고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저는 하급 마갑을 착용한 경험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물며 그걸 입고 훈련이라니…."

"부족한 힘은 평균 이상의 균형감각으로 커버할 수 있다. 추가로 당장 급한 건 하체의 힘을 상체로 끌어 올리는 요령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직접 가르쳐 주도록 하지."

"단장님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카일이 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고작해야 이제 막 기사가 된 자신을, 제국 최강의 기사인 나이트 마스터가 직접 가르친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 뭐 이런 표정으로.

"당연히 내가 직접 가르친다. 더 늦기 전에 최대한 빨리 단계를 높여야 해. 그래야 나이트 커맨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나이트 커맨더!"

카일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나도 속으로 놀라며 당황했다.

엥? 정말?

카일이 정말 나이트 커맨드가 될 수 있어?

지금까지 카일이 도달한 가장 높은 단계가 나이트 익스퍼트였는데?

심지어 그 나이트 익스퍼트조차 지금처럼 다비의 개인교습을 받고 나서야 달성할 수 있었다. 다비를 너무 늦게 끌어들이거나, 혹은 아예 동료로 얻지 못했을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그냥 평기사로 머물 뿐이었고.

무엇보다 카일의 재능은 직접 싸우는 것보다는 지휘 쪽에 몰빵되어 있다.

그런데 다비는 갑자기 뭘 믿고 카일을 나이트 커맨더로 만들 수 있다 장담하는 걸까? 애초에 전과 지금이 뭐가 달라졌는데?

"2년, 아니 1년만 늦었어도 목표를 거기까지 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 몸은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았어. 내가 타이트하게 지도하면 충분한 수준의 성장이 가능하다."

아, 시간이 달라졌구나.

지금까지의 다비는 항상 20살, 혹은 21살을 넘긴 카일을 만나 가르침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의 카일은 아직 성장기가 진행 중인 창창한 18살이다. 이거 미친 황자 루트를 빠르게 진행하고 다비를 빨리 끌어들였더니 예상 못한 보너스가 들어왔네?

"물론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우선 최하급 마갑에서 벗어나 하급 마갑에 익숙해지는 게 중요하다. 혹시 하급 마갑 가진 거 있나?"

"당장은 없습니다만...."

"새로 맞추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내가 예전에 사용하던 하급 마갑을 가져다주마. 내가 그걸 입었을 때는 너와 체격이 비슷했으니 대충 몸에 맞을 거다."

"나이트 마스터의 마갑을! 영광입니다. 단장님."

카일은 기사의 경례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비는 똑같은 경례로 인사를 받으며 한발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다음은 너다."

"...."

"이름이 디디라고 했지? 지금부터 너에 대한 평가를 할 테니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저는...."

디디는 옆에 선 카일의 얼굴을 힐끔 올려본 다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좀 전에 카일 님이 하셨던 것처럼 말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그런 식이면 돼."

"제 이름은 디디입니다. 나이는 아마도 12살. 제국사관학교에서 잡부로 근무하다 지금은 루넨브레스 저택의 시종이 되었습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0화

12장 물고기 키우기

"시종이라. 그런데 잡부였다고?"

"네. 주로 말을 돌봤습니다."

"12살짜리에게 말을 돌보게 한 건가? 그보다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모르나?"

"저는 자그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선 아무도 제 나이를 알려주지 않아서 나이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자그라. 거기라면 그럴 수 있지."

다비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로 디디의 키는 나와 비슷하게 작았는데, 최근 한 달간 잘 먹였더니 순식간에 키가 자라서 차이가 약간 벌어졌다. 이런 젠장맞을 일이.

아무튼 전반적으로 귀엽게 생겼지만 표정이 무뚝뚝해서 붙임성이 없어 보인다. 특이한 게 있다면 진한 갈색의 피부인데, 빈민가 출신답지 않게 피부 결이 같은 색의 비단처럼 매끈하고 잡티 하나 없다.

다비는 그런 디디에게 한걸음 다가가며 양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흠, 그래. 예상대로 역시 근육이...."

"...."

"디디? 지금 바로 저기 끝까지 달렸다가 돌아와라."

다비는 한발 뒤로 물러서며 공터의 반대편 끝을 가리켰다. 디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즉시 되물었다.

"그냥 천천히 달리면 되는 겁니까?"

"천천히 말고 전력으로."

"알겠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디디는, 이내 다비가 가리킨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얘 생각보다... 엄청 빠른데?

12살짜리가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 있지? 전에 분석안으로 확인했을 때는 힘이 E등급 아니었나?

"다녀왔습니다. 단장님."

"좋아. 그럼 잠시 몸을 좀 확인하겠다."

다비는 몸을 숙여 디디의 무릎과 골반, 그리고 발목을 여러 차례 촉진하기 시작했다.

"아직 성장기라는 걸 감안해도... 관절이 정말 유연하군. 그리고 탄력이 좋아. 게다가 몸에 열이 많이 오르지도 않았고."

"몸에 열이 오르지 않았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몸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다만 네 경우엔 여기에 더해... 골격과 체격까지 감안하면 근육이 낼 수 있는 힘의 성장치가 미지수다. 분명 높은 수치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 기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힘을 확보하는 것도 까다로울 거다."

어흑.

똑같이 체격이 작은 내 입장에서 눈물 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구만.

그래. 몸이 작으면 기사가 되는 게 참 어렵다. 내가 해 봐서 알아.

"그러니 너는... 무작정 마갑의 단계를 높이는 것보다는, 신체의 특징을 활용해 기술을 다루는 능력을 키우는 걸 우선 목표로 삼는다."

다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디디는 좀 전에 박살난 나무가 있는 방향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기술이라면 좀 전의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힘이 약해서 절대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꼭 풍압검 같은 나이트 스킬만 기술이라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네 움직임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어."

"네?"

디디가 눈을 깜빡였다. 다비는 그런 디디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넌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다. 그것도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고 매우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움직일 때마다 척추의 흐름이 유연하게 연동된다. 마치 네 발로 걷는 야생동물처럼."

"그게 장점입니까?"

"엄청난 장점이지."

다비는 대답과 동시에 디디의 어깨를 툭 밀었다.

당연히 한방에 뒤로 넘어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밀린 쪽의 상체만 가볍게 흔들리고는, 뭔가 흐느적거리는 기묘한 움직임과 함께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역시."

다비는 미소를 지으며 원래 자신의 자리로 물러났다.

"네가 말한 '힘'을 타고난 인간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다. 원한다면 억지로 키울 수도 있고.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타고난 인간은 거의 없다. 억지로 만들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러니 난 너를 그 타고난 움직임에 기술을 연동하는 방향으로 키워 볼 생각이다. 비록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그래도 국경에 근무하며 너 같은 자들을 많이 봐서 깨달은 게 있으니 괜찮을 거다."

"방금은 저 같은 인간은 거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인간은 없지."

"...?"

"내가 말하는 건 엘프다."

다비는 자신의 한쪽 귀를 늘리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엘프의 움직임은 마치 야생동물과 흡사하다. 네게도 그런 야생의 감이 있고."

"엘프라니...."

"사실 엘프보다는 좀 더 야생동물에 가까운데, 아무튼 넌 작고 말랐지만 이상할 정도로 기초체력이 좋다. 전력질주를 하고 돌아와도 숨 한번 헐떡이지 않았어. 체력만 따지면 당장 최하급 마갑을 입어도 자연스럽게 활동이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그러기엔 절대적인 근력이 또 부족하고."

다비는 자신의 갑옷을 두드린 다음 허공에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러니 모든 훈련에 앞서, 당분간은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기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근력을 확보하는데 중점을 두겠다. 물론 처음엔 좀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부디 날 믿고 훈련과정에 따라와 주길 바란다."

"저는...."

디디는 내 쪽을 보며 먼저 허락을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이 시키는 대로 해. 너도 지금부터는 기사단의 일원이야."

"알겠습니다."

"황자님 말씀 들었지? 네 최종 목표는 나이트 커맨더를 제압할 수 있는 나이트 익스퍼트다. 그걸 염두에 두고 항상 정진하도록."

"아니,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옆에 있던 카일이 놀란 얼굴로 끼어들었다. 다비는 재밌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고말고. 내 스승님도 나이트 마스터는 아니었지만, 갓 나이트 마스터가 된 나를 제압할 수 있으셨다."

"단장님의 스승님이라면...."

"나이트 쿠엔탈. 전대 백기사단 단장이셨다. 지금은 은퇴하고 백기사단의 고문으로 계시지. 답변이 되었나?"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다비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호기심은 언제나 좋은 거다. 그게 실전상황만 아니라면 말이지. 그럼 다음으로...."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리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리넨은 긴장한 듯 다비가 묻기도 전에 알아서 자기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저는 리넨 글리프입니다! 나이는 15살이고, 엘스톤 백작령의 돌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작년에 마을이 요새로 개조되면서 마을에 온 병사에게 1개월 정도 창을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음, 창이라. 창도 좋은 무기지."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넨의 뒤로 돌아 등 쪽을 손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으, 이, 이거 밀리지 않게 버티는 것도 훈련입니까?"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서 있어라. 어차피 이 정도 힘으로 민다고 밀리지도 않을 테니."

한참을 누르던 다비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저택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대충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으.... 여, 역시 저는 기사로서의 재능이 부족한...."

"그럴 리가."

다비는 고개를 저으며 정색했다.

"많지는 않지만 너 같은 기사를 몇 명 봤다. 재능? 재능으로 치자면 가장 써먹기 쉽고 키우기도 쉬운 게 바로 네가 가진 재능이지."

"네? 제가요?"

"넌 근력을 타고 났다."

다비는 양손의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웃었다.

"이건 기사에게 있어 아주 강력한 힘이다. 아까 그 아가씨처럼."

"저, 저는 맨손으로 돌을 못 부수는데요?"

"물론 차이는 있다. 같은 근력이라도 한순간 폭발적인 힘을 내는데 특화된 타입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일정 이상의 부하를 오래 버틸 수 있는 근력이 있지. 너는 그쪽으로 완전 타고났다. 그것도 엄청나게 높은 수준으로."

"오...."

불안해하던 리넨의 표정이 한순간 확 밝아졌다. 표정 변하는 것만 봐도 어떤 성격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

아무튼 근지구력을 타고났다니 이거 부럽구만. 나 같은 건 숟가락만 오래 들고 있어도 팔이 저리는데.

"그러니 리넨. 너는 훈련만 잘 따라오면 순식간에 최하급 마갑을 넘어 하급을, 아니 중급이나 고급 마갑까지도 순식간에 착용할 수 있다."

"와, 와! 그럼 저도 아까 풍압검 같은 기술을 쓸 수 있게 되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다비는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기술을 익히는 건 당분간 생략한다. 넌 그냥 전력으로 육체를 단련해서, 최대한 빠르게 마갑의 단계를 높이 쪽으로 가야 해. 그렇게 하면 나보다도 빠른 나이에 나이트 마스터가 될 수 있다."

"나이트 마스터!"

리넨은 현기증이 왔는지 뒤로 휘청거렸다. 다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발언을 수정했다.

"정확히는 나이트 마스터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최상급 마갑'의 착용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아...."

"정작 나이트 마스터의 기술은 쓸 수 없는 반쪽짜리가 되겠지. 하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을 거라 믿는다."

"의, 의미가 있고말고요! 우와! 내가 나이트 마스터라니! 내가 나이트 마스터가 될 수 있다니!"

"...."

바로 그때, 나는 왼편에 있던 카일의 눈에서 질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오, 이건 좀 신기한데?

지금까지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또 처음 보네. 그래도 자극을 받아 빠르게 성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바람직한 결과가 아닐까?

그런데 리넨이 나이트 마스터라니.

지난 아홉 번의 회귀엔 존재조차 몰랐던 녀석이 정말 나이트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그것도 홀리 랜스인가 뭔가 하는 건 계산에 넣지도 않았는데.... 대체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다는 거야?

종족 : 인간

현재 힘 : C

잠재 힘 : A

현재 신성마법 : D

잠재 신성마법 : B

현재 부여마법 : D

잠재 부여마법 : B

컥.

감정안으로 봤더니 뭐가 엄청 많네?

일단 힘부터 확인하자. 전에 메르데스의 잠재 힘 능력이 A+였는데, 고작 A로도 나이트 마스터가 되는 게 가능하다고?

아니, 그게 아니지.

애초에 다비가 말했듯이, 일단 최상급 마갑을 착용하기만 하면 나이트 마스터의 칭호를 받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감정안에 보이는 리넨의 힘은 종합적인 수치일 뿐이다. 그것을 세부적으로 나눈 뒤에 '근지구력'이라는 부분만 따로 뺀다면 그 이상의 성적표가 나오는 셈이고.

이거 감정안도 생각보다 복잡하구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성적표만으로 평가했다간 핵심을 놓칠 위험이 있다. 앞으로는 주의해야지.

그보다 신경에 거슬리는 건 뒤에 추가로 붙은 능력들이다.

신성마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부여마법은 또 왜 여기 있는 건데?

참고로 부여마법은 인간이 다루지 못하는 마법이다. 정확히는 지난 모든 회귀 동안 그걸 다루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부여마법은 주로 엘프 같은 이 종족이 다루는 특수한 형태의 마법.

효과는 자신이 사용하는 마법을 도구에 주입하는 것으로, 대체로 화살에 바람속성 같은 원소마법을 부여해서 위력을 높이는 데 사용한다.

아, 거기까지 생각하니 단숨에 이해가 된다.

결국 리넨의 '홀리 랜스'는 자신이 가진 신성마법을 창에 부여하는 부여마법의 일종이 아닐까?

반대로 엘프는 신성마법을 못 쓰기 때문에 저런 종류의 기술을 본 적이 없던 거고.

아무튼 회귀를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이런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모두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이해했겠지? 그럼 지금은 일단 전원 해산한다. 본격적인 훈련은 내일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모두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네! 단장님!"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하며 저택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나도 같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다비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는 황자님의 차례입니다. 잠시만 이곳에 남아 주십시오."

"나? 나도 분석해?"

"물론입니다. 황자님은 여태껏 제가 경험한 사람들 중에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1화

13장 예상 못 한 루트

"재능이고 뭐고 내 몸은 너무 약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내 몸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는 내가 가장 잘 안다.

단순히 체격이 작고 힘이 부족한 게 전부가 아니다. 제스가 장기간 복용시킨 독약 때문에 체력과 내구력도 형편없으며, 그렇다고 디디처럼 작지만 민첩한 것도 아니다.

결국 신체능력에 한해서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바닥을 긴다 이 말이지. 하지만 다비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황자님의 타고난 재능은 그런 쪽이 아닙니다."

"그런 쪽이 아니면 무슨 쪽인데? 혹시 마법? 지금 기사가 되기 위한 재능을 말하는 거 아니었어?"

"맞습니다. 황자님의 재능은 바로 전투 감각입니다."

"전투 감각?"

"황자님이 최근에 많은 활약을 하신 건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엘스톤 백작령을 침공한 사령군도 물리치셨고, 요튼 만에서 시 서펜트 무리도 퇴치하셨고, 자이루트 산맥에서 오우거의 반란도 해결하셨습니다."

"그거 다 마법으로 한 거야. 몸으로 때운 거 아니고."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다비는 강렬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며 자신의 말을 강조했다.

"하지만 며칠 전 그날 밤처럼, 그렇게 강력한 적을 상대로 싸운 건 분명 처음이셨을 겁니다."

"꼭 그렇기만 한 건 아닌데...."

"상대는 나이트 마스터인 저조차도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전직 나이트 마스터까지 끼어 있었죠. 사령군이나 오우거가 아무리 흉악하다 해도, 그날 밤의 두 괴물처럼 막강한 존재는 없었을 겁니다."

아니거든?

회귀 전은 제외하더라도, 급수로 치면 사령군주인 크록이 더 강했거든?

물론 그놈은 언데드라 턴 언데드 한방에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그런데도 황자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적확하게 맞서 싸우셨습니다. 물론 나중에 온 제가 모든 걸 본 것은 아닙니다만, 황자님은 그런 처음 겪는 최악의 적들을 상대로도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아. 그런 이야기였어?

그야 당연하지. 그런 최악의 적들을 회귀 때마다 지겹게 상대해 봤으니까.

문제는 지금 이 녀석이... 내가 햇수로만 90년에 걸친 경험으로 얻은 것들을 단순히 타고난 재능으로 인식했다는 것.

"심지어 황자님은 비행마법이나 바람 계열 마법으로 기동력을 살린 전투방식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마법사들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는데, 보통 마법사는 아무리 강해도 그런 식으로는 싸우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이건 내가 처음 만들어 낸 전술이니까.

제아무리 아크 위저드와 아크 프리스트의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해도, 외부에서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마법으로 막기만 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그러니 기동력을 살려 피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특히 이계의 웨이브 같은 장기전을 버텨내려면.

"이건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지만 가장 특별하면서도 절대적인 능력입니다. 예를 들면 파이렌 같은 자를 보십시오."

"그 녀석은 왜?"

"기껏 나이트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주제에, 육체가 바뀌면 그동안 쌓아올린 감각이 전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걸 인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치곤 엄청 강했는데? 상대가 너라서 당한 거 아냐?"

"물론 그런 면도 없진 않습니다만...."

다비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전투 감각이 부족하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실전에서 활용하는 게 어렵다는 겁니다. 여기서 전투감각이란 여러 가지 다양한 능력들의 통칭입니다. 그러니까...."

다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전투에서 어떻게 활용하면 가장 효과적인지를 파악하는 '자기 인식' 능력. 목숨을 건 실전에서 위축되지 않는 '담대함', 적의 능력을 한순간에 파악하는 '통찰력', 매 순간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위기를 넘기고 적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판단력'이 포함됩니다."

너무도 거창한 설명에, 나는 그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야! 그거 전부 내가 타고난 게 아니야!

단순히 경험에서 얻은 순수한 경험치라고! 이쪽 세계로 넘어와서 아홉 번 넘게 회귀를 반복했더니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 버린 습관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잠자코 녀석이 하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 주기로 했다.

"그러니 황자님은 기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능력을 이미 가지고 태어나신 셈입니다."

"...."

"비록 몸이 약해서 높은 등급의 마갑을 착용하는 건 어렵겠지만, 그저 상대의 마갑 등급만 보고 얕보는 대부분의 기사들을 순식간에 제압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아니, 그것도 네 말처럼 쉽게는 안 돼.

내가 실제로 이걸 안 해본 게 아니다. 전에 5회차 때 기사 쪽 훈련에 몰빵 해 봤는데, 이계가 침공해오는 그 순간에도 중급 마갑조차 착용이 불가능했다고.

물론 얘가 하는 말처럼 착용하는 마갑에 비해 높은 수준의 나이트 스킬을 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보다 강한 기사를 손쉽게 상대했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왜냐고?

팔이 짧아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오, 역시 제 생각을 이해해 주신 겁니까?"

"그래. 이해는 했는데 공감은 못하겠네."

"네?"

"이쪽으로 팔을 뻗어봐."

"팔은 어째서...."

다비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단 팔을 뻗었다. 나는 거기에 내 팔을 가져가 붙이며 짧게 말했다.

"봤지?"

"...."

다비의 얼굴에 순간 당황이 스쳤다. 나는 다비의 팔꿈치를 겨우 넘는 내 팔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체격이 작은 게 문제가 아니야. 팔이 짧으면 기사가 쓰는 기술 대부분이 제대로 발동을 안 해. 그렇지?"

"그것은...."

"아까 보여준 진동검만 해도 그래. 결국 팔꿈치와 손목 사이의 공간을 엄청나게 흔들어 대는 건데, 그 공간이 짧으면 공진이 잘 안 되서 위력이 제대로 안나와. 내 말 맞지?"

"어떻게 거기까지 파악을.... 물론 그렇습니만, 음. 잠시 실례."

갑자기 눈을 번뜩인 다비는, 마치 재단이라도 하듯 내 양팔을 좌우로 벌리며 꼼꼼하게 길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역시 제 생각대로입니다. 황자님의 팔다리는 절대적인 길이로 보면 짧지만, 본인의 체형에 비하면 오히려 긴 편입니다."

"그래서?"

"몸통의 길이에 비해 팔다리가 꽤 긴 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또 이야기가 다릅니다. 좀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겠지만, 체형에 맞게 나이트 스킬을 변형해서 사용하면 충분한 위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정말?

그건 또 평생 처음 듣는 이야기다. 다비는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꽉 감았다 뜨며 말했다.

"결코 허언이 아닙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그러니 부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물론 시간은 걸리겠지만 보란 듯이 황자님을 어엿한 기사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아니, 물론 그게 되면 좋긴 한데... .

어째 이 녀석도 필요 이상으로 열을 내고 있는 거 아닌가? 지난 회귀 때는 이런 식으로 나한테 집착하지 않았잖아?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분하게 일반론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나보다는 다른 녀석들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까놓고 말해서 메르데스 같은 애는 이것저것 따질 거 없이 그냥 엄청나잖아?"

"메르데스 양은 확실히 엄청납니다."

다비는 부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 황자님도 꼭 기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반드시."

"이미 아크 프리스트에, 이미 아크 위저드인데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도 내 몸은 이 모양 이 꼴일 텐데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 이유가 바로...."

"황자님!"

바로 그때, 저택 쪽에서 약병을 든 시녀장이 종종 걸음으로 달려왔다.

"영약 드실 시간입니다! 황자님!"

라니아가 들고온 건 다름 아닌 성장의 영약이었다. 이거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헛웃음이 다 나오는구만.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후우, 방금 만든 새 영약을 바로 드시게 하고 싶은 마음에 급히 달려왔습니다."

"좀 늦게 먹어도 크게 상관없을 것을...."

"아니요, 이번엔 상관이 있습니다."

라니아는 숨이 찬지 한참을 심호흡을 하고는 소리쳤다.

"영약의 효과가 어째서 그동안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지, 드디어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에? 정말?"

"네. 그래서 영약의 재료를 약간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건 바로 황자님입니다."

"나?"

"그렇습니다. 성장의 영약이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려면 복용자의 몸에 강한 자극이 가해져야 합니다."

"...뭐?"

"격렬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방에 앉아 계시거나 평범하게 산책만 하시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최대한 몸을 혹사시켜야 멈춰버린 성장기관이 자극을 받아 성장의 영약과 호응하게 됩니다. 자, 어서 일단 영약부터 드시지요. 운동은 그다음에 하시면 됩니다."

"어...."

얼떨결에 영약 병을 받아든 나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다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비?"

정작 다비는 부릅뜬 눈으로 라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저택의 시녀장이셨죠? 결국 그 영약과 함께 황자님이 '격렬한'운동을 하면 키가 자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지금 황자님께 필요한 건 운동입니다. 그것도 좀 무리하다 싶은 걸로."

"그게 바로 제 전문입니다."

라니아와 시선을 교환한 다비는, 이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내 쪽을 돌아봤다.

"들으셨습니까 황자님? 이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황자님께 필요한 건 바로 격렬한 훈련, 아니 운동입니다."

"아니 잠깐, 그렇다고 무슨 먹잇감 발견한 것처럼 입맛을 다시진 말고."

"제가 언제 입맛을 다셨다고 그러십니까? 자, 그럼 시녀장의 허락도 받았으니 당장 오늘부터 훈련을 시작해 볼까요?"

"어머, 기사님께서 직접 황자님을 지도해주시는 건가요? 나이트 마스터라면 제국 최고의 기사일 텐데, 정말 마음이 든든합니다."

라니아도 반색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점점 좁아지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아까도 미리 말했지만 뭐가 어쨌든 시간을 많이는 못 내줘."

"하루에 세 시간, 아니 두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잘됐네요. 그럼 저도 당장 체력의 영약과 회복의 영약을 잔뜩 가져오겠습니다!"

라니아가 활짝 웃으며 다시 저택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라니아에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체력의 영약은 왜? 그런 거 필요 없어! 거기에 회복 영약은 또 어째서...."

나는 다시 한번 한기를 느끼며 다비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풀며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 필요하게 될 겁니다. 시녀장의 센스가 대단하군요."

"...."

바꿔 말하면 '넌 이제 죽었다'는 뜻이다.

아, 망할.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거 어떻게 못 빠져나가나? 확 은신 쓰고 도망쳐 버려?

* * *

이번 10회차 때는 기사 테크트리를 진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순히 고점이 낮아 포기한 게 아니다. 기사 테크트리 자체가 일종의 육체개조인데,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정신적인 피로를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거 할 시간에 다른 루트를 진행하는 게 이득이지.

하지만 난 지금 달리고 있다.

어째서?

난 누구지? 여긴 어디야? 왜 죽을 것 같은데 계속 달리고 또 달리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