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부터 로이드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다.
그 사실을 언제나 마음 한쪽에 새기고서 살아가는 로이드였다.
축제를 즐기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든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할 일이 산더미니까! 읏차!'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하루를 준비하는 것.
그것은 대한민국에서부터의 습관이었다.
언제나와 똑같은 시간에 깨어났다.
창밖이 밝자마자 눈을 뜨고, 하비엘을 깨웠다.
교역도시 크레모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수행 인원은 너무 많으면 오히려 곤란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타이트하게 잡아주시죠."
"그래도 괜찮겠느냐? 아무래도 안전 문제를 생각하면...."
"괜찮습니다. 아스라한 경이 있으니까요."
"흐음. 그건 그렇긴 하다만."
직접 크레모 시로 가려는 로이드였다.
그걸 안 남작은 수행 인원을 무려 100명으로 잡았다.
로이드가 기겁했음은 물론이었다.
"입이 너무 많으면 보급품도 많이 필요하게 됩니다. 게다가 공병대원들, 남아서 계속 온돌을 만들어야죠."
사실이었다.
입이 너무 많으면 필요한 식량 등의 짐이 많아진다.
짐이 많아지는 만큼 준비할 것도 많아지고, 이동도 느려진다.
게다가 이제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봄에 주민들을 대상으로 작성했던 계약서에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온돌을 모두 만들어준다는 사항이 있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계약한 온돌을 모두 완공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모두 상수도 건설 때문이었다.
계획에 없던 상수도를 만드느라 온돌을 짓던 인원까지 모조리 동원해야 했다.
"그러니 공병대원은 최대한 적게 데려가겠습니다. 모조리 온돌 공사에 투입해서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온돌 보급을 마쳐야 합니다."
"그럼 몇 명을 데려갈 생각이더냐."
"보물 실을 짐마차를 부리고 지킬 최소한의 인원으로 잡아서 스물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걸로 되겠느냐?"
"예."
로이드의 단호한 뜻에 따라 교역도시로 가는 인원은 로이드와 하비엘, 공병대원 스물로 정해졌다.
물론 인원 구성이 끝났다고 하여 곧바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출발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자작령 염료 공방에 공급할 상수도.
그걸 위한 수도관 설치 공사였다.
'어쨌건 계약을 했으니까.'
상수도 설치를 서둘러줘야 했다.
그래야 수도세도 왕창 일찍 받을 수 있으리라.
"자,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현장에서는 뭐가 제일이다?"
"안전입니다!"
"좋아. 다들 이거, 산에서 지겹게 했지?"
"예!"
"그럼 투입!"
"우오오오!"
공병대 일부를 동원했다.
영지의 정수장에서부터 자작령의 염료 공방까지.
산맥에서 수없이 치렀던 작업을 반복했다.
정해진 경로를 뽀동이가 팠다.
공병대원들이 다듬었다.
자이언트 뱀부 도관을 넣고, 연결하고, 묻었다.
그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모두 미리 준비해뒀으니까.'
측량은 물론이고 설계까지.
자작을 찾아가서 계약을 따내기 전에 일찌감치 마쳐둔 로이드였다.
자이언트 뱀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산에서 영지를 향한 도관 공사를 할 때 여분의 자이언트 뱀부를 미리 확보했다.
아예 미리 다듬고 보강재까지 다 둘러두었다.
모든 준비가 완비된 상태.
즉, 현장에서 뽀동이가 땅을 파내고 공병대원들이 다듬기만 하면?
곧바로 배관을 설치할 수 있었다.
'산에서 개고생하면서 공사하던 때를 불백 정식 차려 먹는 걸로 치자면 이건, 으음, 완전 햇반에 3분 카레 돌려먹는 기분이네.'
그만큼 편했다.
신속했다.
불과 보름 만에 거의 모든 도관을 시공할 수 있었다.
프론테라 영지와 자작령의 고저차 때문에 동부 산맥 기슭의 경사를 적절히 활용했다.
덕분에 잡힌 전체 도관의 평균 경사도는 약 0.7%.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렇게 마지막 도관이 연결되는 날.
마침내 자작령 염료공방에 첫 상수도가 공급되었다.
석회 성분이 섞인 석회수가 아니었다. 산맥 중턱의 카푸아 호수에서부터 직접 흘러오는 물이었다.
덕분에 자작령의 특산품인 라코나타도 살아났다.
예전의 색감과 광택이 돌아왔다.
라코나 자작이 감격했음은 물론이었다.
"흐, 흐흑! 드디어. 드디어...."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상수도, 놓은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렇네. 내가 어쩌자고 상수도 계약을 망설였던 건지...."
"어쩌자고는요. 수도세 때문이셨죠."
"...."
"첫 달부터 수도세, 밀리면 안 되십니다?"
"아, 알겠네."
되살아난 라코나타 원단을 안고서 감격하던 자작이었다.
하지만 '수도세'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침울하게 변했다.
로이드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런 호구는 언제나 환영이지.'
불쌍하다거나 미안하다는 생각 따윈 1그램도 들지 않았다.
위기를 기회로.
애초에 자작이 선사한 위기였다.
그걸 극복하며 오히려 자작에게 빨대를 꽂았다.
최소한 수십 년은 뺄 엄두도 못 낼 티타늄급 빨대였다.
게다가 보상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딩동.
침울해진 자작을 남겨두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맑은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당신은 상수도 체계를 도입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로라시아 대륙 역사 최초의 사례입니다.]
[당신이 선보인 상수도 건설과 체계의 활용 방법은 왕국과 대륙의 토목 건설사에 하나의 선구적 모델로 길이길이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왕국과 대륙의 건설 역사에 기록됩니다.]
[대륙 최초 업적의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600 RP를 획득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275]
'오?'
로이드가 멈칫했다.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커다란 업적을 세운 당신에 대한 소문이 인근 지방에 퍼집니다.]
[특히 왕국의 중앙 관료, 토목공학자들이 상수도 체계의 공학적, 사회적 가치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건설가로서의 명성을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신의 소문을 접한 사람들은 당신의 건설 계획에 이전보다 깊은 신뢰감을 보일 것입니다.]
'상수도 체계 도입에 따른 보상이라.'
로이드는 메시지를 찬찬히 읽으며 그 뜻을 파악했다.
'어쩐지 영지에 상수도를 다 만들어도 업적 보상이 안 뜨더라니.'
사실 조금 의아했던 부분이었다.
한데 지금 떠오른 메시지를 보니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이번엔 단지 상수도만 깐다고 되는 게 아니었던 거야. 시설을 제대로 활용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던 거지.'
그냥 상수도를 까는 게 다가 아니었다.
상수도를 통해 실제로 물을 공급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수도 요금을 받는 '체계'를 도입하는 것.
그것이 업적 성취의 조건이었던 듯했다.
'좋아. 훌륭해.'
눈앞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보상 메시지.
그걸 보며 로이드는 흡족하게 웃었다.
'RP가 아주 넘쳐나네.'
지금까지 얻어 본 중에 가장 많은 RP를 한꺼번에 얻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건설가로서의 명성과 신뢰. 숫자로는 표현되진 않았지만 이게 정말 큰 보상일 거야.'
앞으로 계속해서 큰 공사를 따내고 싶은 로이드였다.
그래야 목돈을 팍팍 벌어들일 수 있다.
남작가의 빚을 빨리 갚을 수 있다.
그런 와중에 건설가로서의 명성과 신뢰를 얻었다.
즉, 클라이언트에게 공사 발주 계약을 따내기가 이전보다 수월해질 거라는 소리였다.
'이건 앞으로 두고두고 도움이 될 보상이야.'
마음에 쏙 드는 보상이었다.
그 뒤로도 소소한 보상이 더 이어졌다.
남작 부부와의 호감도가 각각 3이 올랐다.
공사를 감독했던 바이에른 경과 2가 올랐다.
영지민 전체와는 4가 올랐다.
덕분에 126 RP를 추가로 챙겼다.
주위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도 받았다.
"부디 조심히 다녀오거라."
자작령까지 상수도 연결을 마친 다음 날.
로이드는 교역도시 크레모로 출발했다.
그런 로이드를 남작 부부가 배웅해주었다.
남작이 이쪽을 향해 끝도 없이 걱정과 당부를 늘어놓았다.
"매사에 주의하고, 어디서든 함부로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 알겠니?"
"예, 명심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스라한 경 뒤에 숨고."
"예, 꼭 그렇게 할게요."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도망치고."
"그럼 공병대원들은 어떡합니까?"
"음, 그럼 같이 도망치거라."
"...."
무한의 걱정 릴레이를 펼치는 것은 남작부인도 남편 못지않았다.
"힘들면 언제든 그냥 돌아오렴. 낯설고 어두운 밤길이나 으슥한 곳, 위험한 곳엔 절대로 가면 안 된단다?"
"예, 예. 알겠습니다."
"끼니도 절대 거르지 말고."
"예, 꼭 명심할게요."
"잘 때는 이불 걷어차지 말고."
"으음, 예에."
"그리고 이것도 받으렴."
"이건 뭡니까?"
"부적이란다."
"...이 깜찍발랄한 핑크색 인형 같은 게 말입니까?"
남작 부인이 내미는 부적(?).
그걸 받아드는 로이드의 얼굴이 살포시 구겨졌다.
부적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깜찍 통통한 곰 인형이었다.
심지어 색깔마저 곱디고운 사춘기 소녀 감성 핑크였다.
하지만 곰 인형을 건네는 남작부인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같은 거라니. 말을 함부로 하면 못쓰는 법이야."
"저기, 하지만...."
"이 엄마가 직접 밤새 만든 부적이란다."
"아...."
"입만 벌리고 있지 말고 어서 받으렴."
"대체 무슨 효능이 있는 겁니까, 이게."
"매일 꼭 안고 자면 악몽을 막을 수 있다더구나."
"크헐."
"모름지기 사람은 고운 꿈을 꾸고 푹 자야 일이 술술 풀리며 행운까지 따르는 법이란다. 하니 멀리 다녀오는 내내 이걸 꼭 안고 자도록 하거라. 알았지?"
"...."
이게 다 이쪽을 걱정해서 건네주는 배려였다.
그런 물건을 차마 내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한국에서 지내던 시절의 엄마 생각도 났다.
'엄마들은 다 이런 건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가끔은 성가시고 부끄럽기까지 한데도.
끝없이 챙겨주고, 챙겨주고, 또 안겨주는 분이셨다.
그런데 당시엔 그게 왜 필요 없다고만 여겼던 건지.
어째서 그저 거추장스럽다고만 생각하곤 했던 건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후회스러웠다.
주실 때마다 받을걸.
고맙다고 더 말할걸.
그러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 고마워요. 진심으로."
환하게 웃으며 인형을 받았다.
안심하라는 듯 든든히 안았다.
엄마에게 못 해드렸던 몫만큼 더.
철없던 시절의 후회를 담아서 더.
그렇게 남작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영지를 출발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몰랐다.
그저 낡은 보물을 처분하기 위해 교역도시로 향하는 로이드.
시골 귀족가의 이 젊은 도련님과 호위기사가 교역도시 크레모에서 두고두고 전설처럼 회자될 업적을 쌓으리라는 미래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아무도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62화. 동상을 세우는 이유 (2)
"후우. 여기가 크레모인가."
언덕 위의 로이드는 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을 따라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피어나기가 무섭게 금방 바람에 흩어졌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초겨울.
그 회색 바닷가 풍경 속에 우뚝 자리한 도시가 로이드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이 세상의 도시도 제법 볼만하구나.'
그것이 교역도시 크레모 시를 처음 본 로이드의 감상이었다.
사실 이쪽 세계의 도시가 커봤자 얼마나 클까 싶었다.
그래 봤자 한국의 현대식 도시에 비할 바는 아닐 거라고.
커봤자 지방 소도시 정도 규모가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막상 보니까 엄청 크네.'
물론 대한민국의 서울이나 부산처럼 빌딩이 팍팍 치솟아 있지는 않았다.
대개가 2층, 커봤자 3층이나 4층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도시의 규모 자체가 굉장히 컸다.
'딱 중세 버전 부산 같은 느낌이야.'
언덕 아래로 보이는 광활한 해안.
도시는 그 해안을 따라 기다랗게 형성되어 있었다.
해안에 마련된 부두를 바쁘게 드나드는 범선의 무리가 보였다.
부두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하역 일꾼들의 모습이 개미떼처럼 느껴졌다.
과연 한 지방의 중심 도시다운 규모와 활력이었다.
'그리고 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꽤 유용한 기술을 배우기도 했고.'
문득, 로이드는 프론테라 영지를 떠나고부터의 여정을 떠올렸다.
♣
"어이? 하비엘?"
"예. 말씀하십시오, 로이드 님."
"나 승마 좀 가르쳐줘."
프론테라 영지를 출발하고 사흘이 지난 아침 무렵이었다.
그동안 짐마차에서 뒹굴거렸던 로이드가 하비엘에게 말했다.
어차피 이동하는 길이었다.
이참에 승마나 배워두면 괜찮겠구나 싶었다.
종일 짐마차에서 꾸벅꾸벅 조는 게 너무 심심해서이기도 했다.
'게다가 말을 탈 때마다 하비엘 뒷자리 신세를 지는 게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사실 그는 말을 탈 줄 몰랐다.
대한민국의 김수호도.
이 몸의 주인인 로이드 프론테라도.
둘 모두 승마를 전혀 할 줄 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이드는 승마를 배울 시간에 술이나 퍼마시며 노는 걸 택했으니까.'
그런데 마침 이렇게 제법 멀리 이동할 일이 생겼다.
승마를 배우기에 안성맞춤인 기회였다.
"그러니까 나한테 승마 좀 가르쳐라. 어때?"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수락해?"
"제가 거절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딱히 없긴 한데. 왜 순순히 수락하냐고."
"...."
"너, 하비엘 맞냐? 아니지? 솔직히 말해. 우리 하비엘 어딨어. 어디 가둬놨어."
"승마, 배우기 싫으신 겁니까."
"쯧. 농담도 안 통하는 놈."
"로이드 님과 농담 같은 거, 별로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얼만큼?"
"차라리 발바닥 때를 벗겨 먹는 게 나을 정도로요."
"크헐."
그렇게나 싫었던 걸까.
하지만 말과는 달리 하비엘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이쪽으로 와 보시죠. 출발하기 전에 승마의 기본부터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비엘에게 승마를 차근차근 배울 수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느릿하고도 꾸준한 이동.
매일 하루가 지날 때마다 겨울이 다가왔다.
바람이 차가워지는 만큼 로이드의 승마 자세가 안정되었다.
그의 말타기가 그럴듯해지는 만큼 교역도시 크레모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일행은 보름의 일정 끝에 쌀쌀한 초겨울 바람을 헤치고 무사히 크레모에 도착하게 되었다.
"자자, 일단 쉴 곳부터 찾아보자."
언덕을 내려갔다.
도시로 들어갔다.
교역도시답게 대로는 넓고 혼잡했다.
온갖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짐마차와 사람이 섞여 다녔다.
상인과 고객이 흥정하느라 소리쳤다.
짐꾼들은 시뻘게진 얼굴로 땀방울을 흘려댔다.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와 어지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물결.
말 그대로 크레모 시의 중앙대로는 혼돈과 카오스의 전주비빔밥 같은 풍경이었다.
덕분에 일행은 얼이 나갔다.
스무 명의 공병대원은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대도시의 혼잡한 광경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건 하비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의 경우는 공병대원들보다 더했다.
"...."
은발 기사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사방을 살폈다.
그의 귀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감지하려 노력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눈앞에 둔 하비엘이었다.
덕분에 소드마스터 증후군인 중증 불면증을 앓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태어나 처음 겪는 혼잡한 장소에 갑작스럽게 놓였다.
모든 감각이 폭발적으로 열렸다.
남들보다 혼잡함을 더욱 선명하게 느꼈다.
그만큼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더 짙게 피어났다.
"어이."
"예, 로이드 님."
"긴장 풀어."
"풀고 있습니다."
"전혀 아닌데?"
"정말입니다."
"그런데 왜 눈동자가 가만히 있질 못하냐."
"예?"
"지금 사방을 모조리 훑어보고 있다고, 너. 완전 전쟁터에 뛰어든 사람 같아."
"...."
하비엘은 멈칫했다.
내가?
그렇게 긴장하고 있다고?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혼돈의 카오스인 건 알겠는데. 조금만 자연스럽게 있자, 응? 너무 그러니까 촌티 나잖냐."
"...."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가자."
툭.
하비엘의 어깨를 툭 쳤다.
하비엘이 약간 복잡해진 뒤를 따라왔다.
"로이드 님."
"어."
"로이드 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나? 뭐가?"
"이렇게 혼잡한 곳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으시냐는 뜻입니다."
"어. 괜찮은데. 이게 뭐가 혼잡하다고."
로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이었다.
그가 살아오고 겪어왔던 대한민국.
그곳을 떠올리자니 이곳의 혼잡함이 별것 아니게 느껴진 덕분이었다.
'출퇴근 시간 신도림역에 비하면 이건 그냥 한산한 공원 수준이지, 뭐.'
실시간으로 사람이 사람에 끼여서 무한 인간 샌드위치가 만들어지는 곳.
떠밀려서 다가오는 옆 사람 겨터파크와 내 암내 사이의 진지한 일기토를 일상으로 벌일 수 있는 곳.
그렇게 너와 나, 우리가 하나 되어 온 국민 강제 부비부비를 체험하는 곳.
그런 마성(?)의 시공간이 바로 출퇴근 시간의 신도림역이었다.
그리고 로이드는 그런 신도림역의 혼돈과 카오스를 지겹도록 경험한 역전의 투사였다.
'집에서 학교 가려면 무조건 신도림역에서 환승해야 했으니까!'
그토록 다난했던 나의 과거 한때여.
로이드는 마치 당시의 자신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기분으로 추억을 살포시 갈무리했다.
대도시의 혼잡함에 반쯤 얼이 나간 일행을 요령껏 이끌었다.
"다들 멍 때리지 말고 이쪽으로 와."
혼잡한 대로 한쪽으로 이동했다.
때로는 현지인에게 길을 물었다.
덕분에 그리 오래 헤매지 않고 적당한 여관을 잡을 수 있었다.
여관에서 간단히 짐을 풀고 몸을 씻었다.
씻은 뒤엔 곧바로 여관을 나섰다.
하비엘을 데리고 도시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 우뚝 선 대저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바로 이 도시의 주인이자 크레모나 지방의 대영주, 크레모 백작의 저택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가져온 보물을 한꺼번에 사들여줄 고마운 거래처이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이곳에 온 목적은 오크족의 보물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빚 갚는 데에 쓸 현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행히 백작가 대저택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프론테라 남작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서신으로 매입 의사를 표하신 물건을 보여 드리러 왔습니다."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프론테라 가문의 표식이 새겨진 목걸이였다.
귀족 가문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기도 했다.
그렇게 저택 정문을 통과했다.
운동장처럼 광활한 정원을 지나 저택 본관으로 들어갔다.
'어마어마하네.'
확실히 대저택다운 규모였다.
저택으로서의 구색만 겨우 갖춘 프론테라 남작 저택과는 차원이 달랐다.
가끔 티브이에서나 보던 헐리웃 톱스타들의 호화롭던 저택.
혹은 유럽 전통 귀족들이 머물렀다던 고풍스러운 저택.
바로 그런 저택이 눈앞에 펼쳐졌다.
"백작님께선 응접실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백작가의 총집사로 보이는 노인이 본관 정문에서 이쪽을 맞이해주었다.
로이드는 노인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을 걸었다.
노인, 총집사의 당부가 이어졌다.
"프론테라 가문이라. 먼 곳에서 오셨군요. 그런 만큼 백작님의 근황에 대해 모르고 계신 점이 있으실 테니, 특별히 주의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주의점이라니요?"
로이드가 물었다.
총집사가 계속 걸으며 말했다.
"요즘 백작님의 심기가 별로 편치 못하십니다. 가급적 백작님을 뵙게 되면 예의와 격식에 필요한 말 외에는 발언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요한 말 외에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함으로써 괜히 꼬투리를 잡힐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 정도로 심기가 불편하신 겁니까?"
"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조금 알 수 있을까요."
로이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작은 이 지방의 최고 권력자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상황에서 실수를 한다면?
그래서 미운털이 박힌다면?
손해가 막심할 일이다.
괜한 돌발상황을 만들기 싫었다.
하니 가능하다면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다행히 총집사도 이쪽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순순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근의 연이은 공사 연기 사태 때문입니다."
"공사 연기라니요?"
"백작께서 추진하고 계신 앞바다의 동상 설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거든요."
"동상 설치...."
아, 그건 안다.
애초에 백작이 이쪽의 보물을 매입하는 것도 동상을 장식할 중고 보석을 시세보다 싸게 확보하기 위함이니까.
"그런데 그 설치가 지지부진하다니.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네. 공사를 맡겠다고 나서는 건설자가 없는 상황입니다."
총집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애초에 백작님께서는 앞바다에 거대한 인어 동상을 만들고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도시의 오랜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오랜 골칫거리라니요?"
"기가티탄입니다."
"아."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티탄.
그 이름을 들으니 문득 떠오르는 내용이 있었다.
'기가티탄이라면 갯가재를 닮은 거대 몬스터였지, 아마.'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이었다.
몸길이는 무려 90미터.
전신에 두른 껍질은 전함의 포격으로도 뚫기 어려울 만큼 튼튼하고 두꺼웠다.
'원래는 깊은 바다에만 서식한다고 알려진 놈이지만, 그래. 맞아. 이 도시에 예외가 있었어.'
유일한 예외.
아마 지금의 시기로부터 10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평화롭던 크레모 항 앞바다에 기가티탄 한 마리가 출몰했다.
지나가던 상선 두 대를 단숨에 침몰시켰다.
그 사건 때문에....
"백작께서는 왕국에 해군을 요청하셨지요. 전하께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시곤 곧바로 요청에 응해주셨습니다. 해군 함대가 위풍당당하게 기가티탄을 토벌하러 온 것이었지요."
총집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3차에 걸친 토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해군으로서도 물속에 있는 기가티탄을 제대로 공격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해군은 전함 세 척이 대파되는 손실만 입고서 물러나야 했지요."
노인의 설명은 기억 속 소설 내용과 같았다.
로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기가티탄은 아예 크레모 앞바다를 서식지로 삼아 버렸어. 왕국 해군은 사태를 관망했지. 백작도 별수 없이 기가티탄과의 불편한 공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기가티탄이 1년에 고작 서너 번만 출몰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육지인 도시를 습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점이 괴수와 도시의 불편한 공존을 그나마 가능케 했다.
크레모 시는 인근 해안 곳곳에 감시 초소를 만들었다.
오직 기가티탄의 출몰을 감시하기 위한 초소였다.
초소는 기가티탄의 출몰을 감지하면 곧바로 봉화와 반사경으로 항구에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항구는 앞바다의 모든 선박에 대피령을 내렸다.
그러면 선박은 먼바다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런 경보 체계 덕분이었다.
기가티탄의 첫 출몰 이후로 10년.
그동안 괴수에 의해 침몰한 선박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였지. 왕국은 기가티탄에 대한 토벌 계획을 완전히 접었어. 이유는 하나. 기가티탄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입을 손실이, 불편한 공존을 선택하며 입는 손실보다 훨씬 클 것이라 계산했기 때문이지.'
사실 그 계산은 정확한 것이었다.
왕국 전체로 보면 확실히 그랬다.
괜히 저 감당 안 되는 괴수를 때려잡느라 해군력을 쏟아넣고 갈아 넣는 것보다는, 아주 가끔 상선 한두 척 파손당하는 게 손해가 적을 테니까.
하지만 크레모 백작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을 터였다.
"그렇게 우리 도시와 기가티탄이 불편한 공존을 선택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 도시의 교역량은 무려 40퍼센트나 감소했고 말입니다."
총집사가 탄식했다.
로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 시점에서 10년이 더 지나면 이 도시는 다른 항구에 그 역할을 빼앗길 정도로 쇠퇴하게 되지.'
그게 다 기가티탄 때문이었다.
기가티탄은 당장은 큰 피해가 없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난이었다.
상단의 입장에선 그것만으로도 상선을 잃을 리스크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점차 다른 항구를 이용하게 됐던가.'
아마 이번에 세우겠다는 동상.
그게 다 기가티탄에 대한 백작 나름의 대책인 듯했다.
그래서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말씀하신 인어 동상을 세우면 기가티탄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총집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미신이 아닙니다. 인어는 바다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이니까요."
"아,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곳은 소설 '철혈의 기사' 속 세계관.
여기 세계의 인어는 실로 강력했다.
뒤지니 애니메이션에서처럼 '원더 더 씨'를 노래하는 가녀린 인어 따위는 없었다.
건장한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정도는?
어린애로 보이게 할 피지컬의 소유자들이었다.
광활한 태평양처럼 드넓은 어깨 근육.
쇄도하는 운석마저 튕겨낼 가슴 근육.
통돌이 세탁기마저 울릴 빨래판 복근.
온몸에 가득한 지렁이 같은 힘줄까지.
말 그대로 평생 수영으로 단련된 수중 세계 최강의 하드코어 익스트림 스위머들이라 할 수 있었다.
육지의 몸짱이 오크라면, 바다의 몸짱은 인어인 셈이었다.
"그런데 인어 동상을 세우면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도움은 받지 못하겠지만 기가티탄을 겁먹게 할 수는 있을 겁니다."
"기가티탄을요?"
"예. 때로 인어들은 거대한 군대를 조직해 기가티탄을 사냥하기도 하니까요."
"아하. 그런 인어의 모습을 크게 만들어서 동상으로 세우면 기가티탄이 천적을 만난 것처럼 위축될 거라는 뜻이로군요."
"맞습니다. 어쩌면 위협을 느껴서 서식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을 테고 말입니다."
"흐음, 그 말씀도 일리는 있네요."
물론 확실한 투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나마 생긴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인어 동상을 세울 가치가 있다고 백작은 판단하는 것 같았다.
"한데 그 공사를 맡을 건설자가 없다니. 그건 조금 이상한데요."
확실히 그랬다.
백작이 추진하는 공사였다.
도시의 번영을 위한 공사였다.
보수가 엄청날 것이 당연했다.
한데 그걸 맡겠다는 건설자가 없다니.
그 답은 총집사가 얕은 한숨과 함께 들려주었다.
"너무 어렵고 난해한, 아니, 거의 불가능한 공사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요?"
"바다 위에 동상을 세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당연히 지반, 단단한 땅이 필요하겠죠."
"예, 맞습니다. 하지만 백작님은 그 지반을 만드는 공사에 일종의 조건을 거셨습니다."
"무슨 조건이었죠?"
"수면 위로 드러나는 땅에서부터 해저까지, 수직으로만 흙을 쌓아서 올리길 원하고 계십니다."
"쩝."
로이드는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동상을 세우기 위한 지반 공사.
그걸 하겠다고 나서는 건설자가 없는 이유를 단번에 깨달은 까닭이었다.
'평범하게 매립하는 방식으로는 그 조건, 절대 만족시킬 수 없을 테니까.'
일반적으로 바다를 메워서 땅을 만들려면 막대한 토사를 부어야 한다.
그러면 수면 아래 지반은 완만한 피라미드 형태를 띠게 된다.
한데 백작은 그 기본적인 사항에 태클을 걸었다.
피라미드 형태는 노.
수직으로만 쌓아줘.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하지만 그 조건은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로이드는 백작이 그런 조건을 내건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
"혹시 항구를 드나드는 배의 운항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인 겁니까?"
"그걸 추측하셨습니까?"
"네, 대강은."
이쪽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총집사.
로이드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확실히 여기 항구, 들어오는 물길이 넓은 편은 아니었지.'
아까 오는 길에 봤던 도시 앞바다의 지형이 떠올랐다.
반달 모양으로 움푹 파인 지형이었다.
자연 항구의 규모에 비해 드나드는 물길이 넓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백작은 피치 못하게 저런 조건을 걸며 건설자들을 난처하게 만든 것이리라.
'그러잖아도 좁은 물길이 매립의 영향으로 더 좁아지면 곤란해지니까. 매립지 주위의 수심이 왕창 얕아질 테니까.'
가뜩이나 좁은 물길.
그게 더 좁아지게 된다.
배의 운행에 차질이 생겨난다.
운이 나쁘면 배가 좌초되는 참사까지 생긴다.
자칫 기가티탄을 몰아내고자 세운 동상 때문에 물길이 좁아져 상선이 이 항구를 기피하게 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먼바다에 동상을 세우려니 수심이 깊어서 애초에 공사 자체가 불가능할 테고.'
기가티탄을 몰아내고자 세우려는 동상.
그걸 세우면서도 물길은 보존하려는 의도.
이래저래 백작의 난처한 고민이 느껴졌다.
"그럼 동상을 그냥 육지에 세우면 안 됩니까? 항구 옆에 그럴 공간이 충분해 보이던데요."
"그건 곤란합니다."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총집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동상은 무조건 물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기가티탄이 육지에 올라와 쉬고 있는 인어를 겁낼까요? 아닙니다. 인어가 물에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수면에 걸쳐져는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가티탄의 눈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 진짜 인어'처럼 보일 테니까요."
"아하."
그래서 편한 육지를 놔두고 굳이 해상에 동상을 만들려는 거였구나.
한데 그 공사가 생각대로 진행되지가 않는 상황이라니.
어째서 백작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건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어쨌건 그런 이유로 공사를 맡겠다는 건설자가 한 명도 나서지 않는 상황입니다. 벌써 몇 개월째 계속 말이지요. 그래서입니다."
어느새 도착한 응접실 앞.
복도에 멈춰선 총집사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목소리에 힘주어 당부했다.
"이제 백작님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 만남에서 필요 없는 발언은 자제해주십시오. 그중에서도 특히 '기가티탄', '동상', '공사' 등등의 단어는 절대로 입에 담으시면 안 됩니다. 꼭 명심하십시오. 이걸 명심하시라고 지금까지 질문하셨던 바를 모두 답해드린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네, 명심하지요."
로이드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집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문을 노크했다.
"뜻을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딸랑!
이윽고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듯한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총집사가 문을 열었다.
격조 있게 손짓했다.
로이드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 안쪽에 건장한 체형의 중년인이 있었다.
호화로운 복장과 곰처럼 위엄 넘치는 인상.
크레모 백작이었다.
로이드는 백작을 보자마자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방금 총집사가 신신당부했던 말을 떠올리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현명하신 크레모 백작님께 '기가티탄'을 몰아낼 '동상' 건설을 위한 새로운 해상 지반 조성 '공사'법 발주를 제의드리고자, 이렇듯 인사 올립니다."
63화. 불가능한 공사와 마법의 재료 (1)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현명하신 크레모 백작님께 '기가티탄'을 몰아낼 '동상' 건설을 위한 새로운 해상 지반 조성 '공사'법 발주를 제의드리고자, 이렇듯 인사 올립니다."
로이드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채웠다.
순간 응접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문을 열어준 총집사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로이드의 뒤에 서 있던 하비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로이드를 돌아보던 크레모 백작은....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됐다.
화를 내지 않았다.
흥미부터 드러냈다.
그걸 위해 다짜고짜 선빵(?)을 날렸던 로이드는 재빨리 대답을 꺼내놓았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여기로 오는 길에 '우연히' 백작님의 고민을 들었고, 그걸 해결할 묘책이 저에게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조금 더."
백작이 응접실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꼭 교수님 앞에서 조별과제 발표하는 것 같네.'
하지만 로이드는 긴장하지 않았다.
백작의 신분과 권력도 잊었다.
대신 백작을 이렇게 생각했다.
'저 사람은 돈이다. 나한테 지갑을 열어줄 고객이야.'
그 고객의 마음을 어떻게 활짝 열어젖힐지.
어떤 방법으로 발주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지.
마치 음식 재료를 앞에 둔 요리사의 각오처럼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백작님께서 제시하신 공사의 조건인 '수직으로 지반을 쌓을 것'은 다른 건설자들의 매립 기술로는 절대 충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라는 소리인가?"
"네."
"그럼 자네에겐 가능하고?"
"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땐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듯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좁은 수로에 최소의 면적으로 최상의 탄탄한 지반을 만들려면 마찰 말뚝 방식과 박스 케이슨(Box Caisson) 방식을 조합한 공법이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뚝? 박스 케이슨?"
"네."
"흐음, 괜찮군."
"혹시 그 공법들, 알고 계신 겁니까?"
"아니. 전혀."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마치 큰 곰처럼 씨익 웃었다.
"내가 그런 걸 무슨 수로 알겠나."
"하시면?"
"어차피 공사를 맡겠다는 사람도 없던 판국이네. 한데 저 성가신 기가티탄은 앞바다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그 때문에 우리 항구는 계속해서 교역량이 줄어들고 있는 판국이야. 한데 자네가 이렇게 자신감을 내보이니 일단 맡겨보는 것이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본전이고. 아, 물론 공사에 실패하면 그동안 들어간 공사비용을 자네가 부담해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대신 이번 공사에 성공하면?
막대한 시공비를 벌어들이게 된다.
거기에 지방 최고의 권력자인 크레모 백작과 돈독한 관계를 쌓을 수도 있다.
소위, 든든한 빽이 생기는 셈이다.
'딱 좋아.'
로이드는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총집사에게 백작의 사정을 들으면서 재빨리 떠올린 계획이었는데, 그게 제대로 먹혔어.'
지연되고 있다는 공사.
나서는 건설자가 없는 상황.
거기서부터 이미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돈 냄새를 맡은 로이드였다.
그래서 응접실까지 오는 짧은 시간에 머리를 굴렸다.
공사의 성공 가능성.
그 결과로 얻을 이득.
만약 실패할 경우에 생길 손해.
그 모든 요소를 고려하고, 계산했다.
그리고 재빨리 결론을 내렸다.
도전해볼 만하다고.
거기에 소설 철혈의 기사를 통해 읽은 크레모 백작의 성격도 참고했다.
'화끈하고 통이 크지. 능력 있는 사람을 아끼는 것은 물론이고, 거추장스러운 형식에 얽매이지도 않았어.'
능력이 있다면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수배자 신세였던 하비엘을 호의로 대해주었다.
소설이 진행되는 중반까지도 하비엘의 훌륭하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런 성격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래서였다.
빙빙 굴러 말하는 화법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백작의 흥미를 이끌어내면서 해법까지 제시할 수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 시도가 제대로 먹혀든 것이었다.
로이드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하긴 무슨. 그나저나, 난데없는 공사 이야기를 시작하는 바람에 내가 아까 제대로 못 들어서 이러네만. 자네, 누구라고 그랬지?"
"아,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로이드는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그 순간, 호인처럼 웃던 백작의 인상이 굳었다.
아까 총집사의 당부도 무시하고서 '기가티탄'과 '동상', '공사'를 언급했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이런 건방진 친구를 봤나."
크레모 백작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쪽을 그대로 지나쳤다.
하비엘 앞에 우뚝 섰다.
은발 기사를 향해 준엄한 꾸짖음을 내렸다.
"그래. 어쩐지 신기한 공사법을 말하며 자신감을 보인다 했더니. 자네가 그 소문의 프론테라 가문 장남이었던 것이로군? 내 자네가 건설에 제법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최근 여러 번 들었지. 사실 사람을 보내어 공사를 맡길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돌하고 예의를 모르는 놈일 줄은 미처 몰랐구만."
백작의 목소리가 묵직해졌다.
"조금 전까지야 공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때라 그렇다 치더라도, 감히 날 마주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는 것까지 직접 하지 않고 아랫것을 시켜? 허허허. 내 살다 살다 이런 무례를 겪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
하비엘을 향한 백작의 눈동자에 노기가 서렸다.
그래서였다.
백작의 뒤에 뻘쭘하게 남겨진 로이드.
그는 저도 모르게 턱을 긁적거려야 했다.
"으음, 저, 백작님?"
"아랫것은 더 이상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거라!"
"...."
"자, 해명을 해보게나.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여. 자네는 오늘 내게 이런 무례를 보이기 위해 이 자리까지 찾아온 것인가?"
백작의 엄격한 눈길이 하비엘의 차분한 얼굴을 향해 꽂혔다.
로이드가 서글프게 웃었다.
"저, 백작님?"
"아랫것은 조용히 있으라 일렀을 텐데?"
"저기, 죄송하지만...."
"죄송한 줄 알면 입을 다물고 있으...."
"제가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음?"
크레모 백작이 멈칫했다.
끼기긱, 그의 고개와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자네가?"
"예.'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라고?"
"예."
로이드는 그저 쓴웃음만 짓고 말았다.
크레모 백작이 헷갈리는 얼굴로 하비엘을 가리켰다.
"그럼 이 친구는?"
"제 호위기사입니다."
"진짜?"
"네."
"정말로?"
"네, 정말로요."
"쓰읍. 암만 봐도 이쪽 친구가 귀족 관상인데."
"...."
"진짠데."
"...."
"뭐 어쨌건, 소문의 능력 있는 건설자를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군."
"...네, 영광입니다."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면서 백작은 고개를 껄껄 웃었다.
제법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보았다.
"자네, 제법 그릇이 크구만?"
"예?"
"배포가 크고 마음이 넓다는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신지."
갑자기 그릇 크기라니. 배포라니.
로이드로서도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백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자네보다 더 귀족처럼 보이는 저런 말끔한 기사를 옆에 착 붙여서 데리고 다니니까 하는 말일세. 어디 가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보게. 백 사람이면 백 모두가 저 친구를 귀족으로, 자네를 아랫것으로 여길걸?"
"크헙."
"왜? 수긍이 안 되나?"
"아, 아닙니다. 너무 정곡을 콱 찌르셔서."
"허허헛. 그걸 아는데도 태연하게 저런 수하를 곁에 두다니. 자네, 보기보다 인물이구만."
"...."
저기, 이제 그만 공사 이야기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로이드는 마음속으로 진심을 담아 기원했다.
다행히(?) 백작의 팩트 폭력은 거기까지였다.
"그럼 공사 이야기나 마저 나눠볼까?"
"네, 감사합니다."
이후부터는 해상 지반 공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로 로이드가 기술적인 설명을 하고,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는 식이었다.
백작이 인력 등의 지원을 약속하고, 로이드가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사 발주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물론 원래 이곳까지 왔던 첫 번째 목적, 중고 보물의 거래도 무난하게 매듭지을 수 있었다.
"물건은 총집사에게 넘기게. 대금도 그쪽을 통해서 받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공사 제대로 부탁함세. 성공하면 보수는 넉넉히 줄 터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지갑 열어주는 고객님에게는 깍듯하게.
그 철칙을 떠올리며 로이드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언젠가 영지의 주점 주인장에게 온돌방 건설을 제안하던 날.
빙의 첫날 떠올렸던 큰 그림.
항만을 짓고, 교량을 놓고.
그렇게 큰 규모의 토목 공사를 따내겠노라 품었던 포부.
그래서 가문에 지워진 빚을 해결하겠노라 그렸던 각오.
그날의 각오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상류층 귀족에게서 따낸 첫 공사 발주.
그에게 묵직한 떼돈을 안겨줄 새로운 시공의 시작이었다.
♣
다음 날이 밝았다.
크레모 백작에게서 따낸 해상 인공 지반 조성 공사.
로이드는 그 새로운 시공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측량이었다.
"흐으읍."
철썩대는 항구 앞바다의 파도.
그 위에 띄운 탄탄한 나무 보트.
로이드는 보트 옆구리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커다란 비누 곽처럼 생긴 물안경을 얼굴에 썼다.
숨을 참았다. 허리를 숙였다. 바닷물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참방.
얼굴에 와 닿는 바닷물의 차가운 감촉.
'으으, 얼굴이 뜯기는 것 같아.'
초겨울을 맞이한 바다였다.
그런데 맨얼굴을 물속으로 집어넣으니?
말 그대로 얼굴 피부가 통째로 뜯기는 것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로이드는 얼굴을 빼지 않았다.
뺄 수 없었다.
측량을 하기 위해서였다.
'측량 없이는 어떤 공사도 진행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측량 스킬을 발동하려면? 내가 직접 현장을 눈으로 '봐야' 하니까.'
그런데 이번 시공 현장은 바다 밑바닥이었다.
즉, 바다 밑바닥을 직접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물이 맑아.'
로이드는 차가운 물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크레모 시 앞바다의 물은 탁도가 낮았다.
즉, 물속의 부유물이 극히 적어서 투명할 정도로 맑았다.
거기에 백작가에서 제공한 물안경도 성능이 괜찮은 물건이었다.
덕분에 10미터가 넘는 수심 아래쪽, 바다 밑바닥이 그럭저럭 훤히 보였다.
'흐음.'
츠츠츠츠!
측량 스킬이 발동되며 바다 밑바닥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다행히 해저면에 경사가 거의 없어. 평평해. 게다가 해저 표면은 퇴적층이 풍부해서 적당히 물렁하고. 풍화암층과 연암층은... 으음, 연암층은 안 보이네.'
연암층이란 해저 표면 아래 깊숙한 곳의 비교적 단단한 지반이었다.
한데 이곳에선 연암층이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이드가 발동하는 측량 스킬의 옵션, '지하 스캐닝'으로 파악 가능한 지하 5미터 이내엔 탐지되는 연암층이 없었다.
'아마도 더 깊은 곳에 있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어쨌건... 으으, 이제 한계다.'
해저를 살펴보며 측량하던 로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숨을 더 참기가 어려워서?
아니었다.
물이 너무 차가웠다.
얼굴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으윽.'
부그륵!
결국, 로이드는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푸와! 후우, 후욱! 수건!"
고개를 들자마자 외쳤다.
옆에서 즉시 반응이 왔다.
"여기 있습니다."
하비엘이 뽀송뽀송한 수건을 내밀어 왔다.
얼른 물안경을 벗고 수건을 받아들었다.
얼굴 가득 묻은 바닷물을 닦아냈다.
한참을 그러고서야 피부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으으, 진심 싫다.'
숨을 참는 거야 그럭저럭 할 만했다.
하지만 바닷물이 너무나 차가웠다.
이러다 얼굴에 동상 걸리는 건 아닐까.
로이드는 쑴펑쑴펑 피어나는 자괴감 속에서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어이."
"예?"
"너, 나 대신 측량 좀 해주면 안 되냐?"
진심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떠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로이드 본인도, 하비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저도 그렇게 해드리고 싶긴 합니다만-"
"합니다만?"
"싫습니다."
"어째서?"
"지금이 즐거우니까요."
"즐거워? 잠깐, 너 설마...."
"예. 로이드 님이 애쓰면서 낑낑거리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즐겁습니다."
"...어이."
"농담입니다."
"후우, 너도 농담이란 걸 할 줄 알았냐."
"모처럼 기분이 아주 즐거우니까요."
"내가 애쓰면서 낑낑거리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어서?"
"예."
"...."
"역시나 농담입니다."
"...."
이 녀석, 제대로 즐기고 있다.
하지만 로이드는 다른 한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하비엘이 무작정 이 상황을 즐기고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그나저나 이번에도 가능할까요."
"가능하냐니, 뭐가."
"공사 말입니다."
하비엘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실 조금, 상상이 되지가 않습니다."
"상상?"
"예."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여긴 수심이 그리 얕은 곳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흙과 돌을 붓지 않고서 땅을 만들겠다는 건지,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막 회의감이 들어?"
"예. 마레즈 개간지 때와는 전혀 다르니까요."
그것이 하비엘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마레즈 개간지.
원래 습지였던 곳의 물을 빼내고 경작지로 탈바꿈시킨 땅.
여긴 그곳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혹시 또 하망이에게 바닷물을 마시게 하실 생각이신 건지. 그래도 이건 불가능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하망이가 물을 많이 마실 수 있다 해도 그랬다.
바닷물은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셔도 끝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 마레즈 개간지 때처럼 주위의 물을 빼내고 공사를 벌이는 방식은 불가능할 터였다.
하비엘은 진심을 담아 물었다.
"로이드 님께선 혹시 마법이라도 준비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번만은 마법의 도움이 아니면 어려우리라.
마찰 말뚝이니.
박스 케이슨이니.
로이드가 백작에게 여러 공법을 잠깐 소개하던 걸 들었지만 여전히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심정을 이해하기에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법이라. 비슷해."
정말이다.
이번만은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테니.
하비엘이 충분히 의문을 품을 만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말했다.
"이번엔 우리, 건설 현장에서 가장 마법 같은 재료를 사용할 거야."
"마법 같은 재료라니요?"
"시멘트, 들어봤어?"
시멘트.
로이드는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나 공사 현장에 공구리가 빠지면 섭한 법이다.
64화. 불가능한 공사와 마법의 재료 (2)
시멘트.
건물을 짓는 데 쓰이는 혼합물.
건설의 필수 자재로 쓰이는 재료.
"어원은 라틴어의 시멘툼(Cementum), 잘게 부서진 돌이라는 뜻이지."
"라틴...."
"어, 그런 언어가 있어."
"혹시 고대의 언어인 겁니까?"
"맞아."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트의 노를 젓고 있는 하비엘을 피식 웃으며 쳐다보았다.
"어쨌건 이제부터 그 시멘트라는 거, 만들어볼까 해. 이번 시공에선 그게 없으면 죽도 밥도 안 될 거라서."
"그럼 마법의 힘을 빌리는 건 아니라는 뜻이로군요."
"당연하지. 공사 하나 치르다가 파산할 일 있냐?"
로이드가 일침을 날렸다.
그의 일침은 사실이었다.
마법사는 귀한 몸이다.
당연히 엄청나게 비싸다.
특히 대규모 공사에 영향력을 줄 정도로 강력한 물리적 효과의 마법을 행사할 수 있는 마법사라면?
'더 비싸지. 아예 영지 예산 전체를 탈탈 털어봤자 모셔오지도 못할걸?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이미 한 국가의 왕궁 수석 마법사 급일 테니까.'
그러니 공사에 마법사를 동원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니,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마법 같은 건 필요 없어. 아까 측량하면서 봤는데, 다행히 내가 생각한 공법이 잘 들어맞을 것 같으니까."
"마찰 말뚝인지 뭔지... 말입니까?"
"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이곳엔 마찰 말뚝 공법이 찰떡일 듯했다.
해저면 아래.
연암층이 지층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베네치아의 카날 그랑데(Canal Grande). 그 대운하 주위에 지어진 수많은 건물들의 밑바닥처럼 말이지.'
로이드는 문득, 동아리 활동을 하며 접했던 베네치아 건물들의 기초를 떠올렸다.
물 위의 도시 베네치아.
그곳의 지반 조건이 여기와 흡사했다.
두꺼운 펄과 진흙이 해저를 덮고 있었다.
연암층은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자리했다.
어지간한 건물 기초가 닿기 어려운 깊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베네치아 사람들은 지혜를 발휘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기다란 말뚝을 해저면에 박아 넣었지. 그렇게 말뚝이 진흙 속에 단단히 고정되면 그 위에 건물의 기초를 만들었어.'
심지어 그때 박아 넣은 말뚝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멀쩡하게 구조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전통적인 마찰 말뚝 방식이었다.
'물론 그 공법이 응용되어서 현대까지 쓰이고 있기도 했고.'
근본적인 원리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나무로 박던 말뚝이 더 크고 튼튼한 콘크리트 기둥, 혹은 H빔 등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로이드는 그렇게 마찰 말뚝 공법에 또 다른 현대식 공법을 접목할 구상을 했다.
"마찰 말뚝과 박스 케이슨 방식을 혼합할 거야. 여긴 베네치아보다 수심이 깊으니까. 펄과 진흙층이 두껍고 연해서 오히려 케이슨이 자체의 무게로 침강하기에 딱 좋거든."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예."
"뭐, 어쨌건, 케이슨 공법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시멘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야. 자, 가자."
어느새 보트는 부두에 닿아 있었다.
두 사람은 부두로 올라왔다.
한데 그런 이쪽을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오셨어요?"
사뿐사뿐 부드러운 목소리.
반가움에 짓는 따뜻한 눈웃음.
부끄러운 듯 살짝 붉힌 얼굴까지.
누가 봐도 미인 소리가 나올 법한 묘령의 여자가 부둣가에 있었다.
이쪽을 보며 반갑고도 수줍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음?"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에 없는, 초면인 여자였다.
한데 옷차림으로 보니 심상치가 않았다.
엄청나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런 우중충한 부둣가에 도저히 어울리는 차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은 더했다.
아예 은으로 치장된 장식용 갑옷을 걸친 기사가 다섯 명이나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저기, 실례지만 누구신지?"
아무리 봐도 평민은 절대로 아니다.
로이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이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의 살가운 눈웃음이 이쪽이 아닌, 하비엘을 향한 까닭이었다.
"말씀드리긴 부끄럽지만 제법 기다렸답니다, 아스라한 경."
"저를 말입니까?"
"네에. 그리고 이거... 부디 받아주셔요."
여인이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두 손으로 쥔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제 마음을 담았답니다."
"...."
로이드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연핑크색 봉투에 담긴 편지였다.
심지어 봉투에는 '크리스틴 크레모'라는 이름까지 예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잠깐. 크리스틴 크레모라면...크레모 백작의 외동딸?'
그 영애가 불쑥 찾아와서 하비엘에게 편지를 건네고 있다고?
로이드는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을 느꼈다.
한편, 하비엘은....
"감사합니다, 레이디."
태연하게 편지를 받았다.
능숙하게 편지를 품에 챙겨 넣었다.
어쩐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 듯 익숙한 몸짓.
그 모습에 크레모 영애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는지 몸을 확 돌렸다.
도망치듯 부두 반대편으로 종종종 멀어졌다.
그녀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당황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려갔음은 물론이었다.
덕분에 부둣가에는 로이드와 하비엘,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휘이잉, 바닷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어이."
긴 침묵을 먼저 깬 쪽은 로이드였다.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인 거냐."
"제가 편지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아는 거고. 어째서 네가 편지를 받은 거냐고."
"아마 어제 백작가 대저택에서 나올 때의 일 때문인 듯합니다."
"어제? 대저택에서 나올 때?"
"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젠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백작을 만나서, 새로운 공법을 제안하고, 공사 발주를 따냈을 뿐이었다.
그 뒤엔 총집사에게 중고 보물을 인계했다.
보물의 상태를 감정받고, 넉넉한 금화를 받아냈다.
그게 다였다.
그것이 로이드가 간직한 어제 기억의 버전(?)이었다.
하지만 하비엘이 대답하는 버전은 조금 달랐다.
"총집사에게 금화를 받고 저택에서 나올 때였습니다. 그때...."
"그때?"
"정원을 산책하던 저 여인이 우연히 우리 쪽을 돌아보더군요. 그 순간 저와 눈이 잠시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그게 끝입니다."
"...잠깐만. 눈이 잠시 마주쳤는데, 단지 그게 다였는데, 그 다음 날 백작 영애가 얼굴 빨개진 채로 너한테 편지를 건네준 이 상황이, 넌 정상으로 느껴지는 거냐, 진심으로?"
"예."
"어째서?"
"어째서라니요."
하비엘이 이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지극히 당연한 일을 가지고 왜 호들갑을 떠느냐는 듯한 눈빛이다.
이어지는 녀석의 말 역시도 그랬다.
"저와 눈이 마주쳤으니까요."
"...."
"설마 로이드 님은 그런 적 없으십니까?"
"크헐."
"지금까지 제가 그렇게 받은 고백 편지가... 어디 보자."
"세지 마."
"마흔... 예순... 백... 백오십... 으음...."
"세지 말라고."
"방금 받은 것까지 다 합치면 대략 537통쯤 되는 것 같군요."
"...."
이래서 잘생긴 놈들이 싫다.
진심으로 짜증이 난다.
'더럽고 치사한 존잘러들 같으니라고.'
로이드는 콧김을 풍, 하고 뿜었다.
"됐고. 하던 얘기나 마저 하자."
"하던 이야기라 하심은?"
"시멘트."
여관 쪽으로 걸음을 돌리며 로이드가 말했다.
"난 이대로 여관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넌 백작네 총집사에게 가."
"가서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석회석과 모래, 화산재를 각각 10킬로그램씩 여관으로 보내달라고 전해줘. 아, 작업장으로 빌릴 만한 대장간도 함께 소개해달라는 말도 빼먹지 말고."
"알겠습니다. 시키실 일은 그게 전부입니까?"
"아니. 더 있어."
"무엇이신지."
"가는 길에 눈 깔고, 얼굴 가리고 걸어가."
"예?"
"애꿎은 여자들 홀리고 다니지 말라고, 인마."
"혹시 절 시샘하시는 겁니까?"
"뭐?"
"아무리 봐도 아까부터 로이드 님이 은근히 절 샘내고 계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허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로이드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놈들이 길에서 여자한테 들이대는 놈들이거든?"
"들이댄다니요?"
"그런 게 있어. 전에도 그랬지. 대학로에서 어떤 놈이 여자한테 길 물어보려고 말 걸더라? 그랬더니 여자가 완전 큰 소리로 '저 남친 있거든욧!' 이러면서 광속으로 후다닥 도망가더라고. 그놈 그거, 얼마나 쪽팔렸을까. 보는 입장에서는 완전 웃겼는데, 솔직히 당사자는 너무 수치스럽고 허무해서 잠도 잘 안 오고 밤마다 이불 걷어차도 진심 잠이 안 오더라... 젠장...."
"...로이드 님 본인 이야기였군요."
"후우, 알았으면 얼른 가라."
"힘내십시오."
"닥쳐. 꺼져."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하비엘을 백작가 저택으로 보냈다.
저녁이 되자 총집사에게 부탁한 물건이 여관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화산재는 오지 않았다.
구하기가 어려워서 곤란하다는 전언과 함께였다.
"쩝."
로이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화산재.
가장 핵심적인 재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있어야 그리스나 로마식 시멘트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아쉬웠다.
단순히 그가 로마식 토목공학을 좋아해서?
아니었다.
로마식 시멘트에 명확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만들 수 있을 시멘트 중에서 가장 튼튼한 녀석일 테니까.'
사실 시멘트의 역사는 매우 깊다.
역사로 치면 거의 5천 년.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세우실 무렵에, 이미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공사에 원시적 시멘트가 쓰이고 있었을 정도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튼튼하고 신뢰성 있는 시멘트가 그리스와 로마의 것이었다.
'포졸란 석회와 모래, 거기에 화산재를 섞고 바닷물을 반죽했어.'
그렇게 만든 시멘트는 실로 튼튼했다.
어느 정도로 튼튼하냐 하면, 당시에 만든 시멘트 방파제가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 비결은 화산재에 있었다.
'화산재 속에 있는 응회암 덕분이지. 골재와 모르타르 사이를 광물적으로 단단히 잡아주고, 구조에 균열이 퍼지는 걸 막아주거든.'
그래서 가능하다면 로마식 시멘트를 이번 공사에 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화산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화산재는 오지 않았다.
'하긴. 근처에 화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걸 퍼 날라서 비축해두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그럼 포틀랜드식 시멘트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건 더 어려울 것 같은데.'
현대식 시멘트의 시작이라 불리는 포틀랜드 시멘트(Portland Cement).
로이드도 그 제조 방법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석회석과 점토, 규석과 산화철을 조쇄하고 건조하지. 그걸 물과 섞어서 여과하고, 석탄 가루를 섞어서 굽고, 냉각한 뒤에 석고를 섞어서 분쇄하면 돼.'
대강은 알고 있는 그 과정.
그걸 수없이 실험하고 반복해봐야 할 듯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며칠에 걸쳐 시멘트 제조에 매달렸다.
백작가에게서 지원받은 재료를 갈고, 섞었다.
대장간에서 굽고, 초겨울 바닷바람에 건조했다.
다시 갈고, 섞고, 물을 부었다.
하지만 좀처럼 원하는 시멘트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안 돼. 자꾸 부스러져.'
재료의 혼합 비율이 틀린 건지.
혹은 굽고 냉각 건조하는 과정에서 결함이 있었던 건지.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시멘트가 제 역할을 하질 못했다.
물과 모래를 섞어서 만들 때는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양생, 말리는 과정에서 쩌저적 금이 갔다.
'이걸론 시공을 진행할 수 없어.'
열흘이 가고, 보름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초조함이 생겨났다.
'화산재를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고민, 안 해도 될 텐데.'
화산재만 넉넉히 있었다면.
석회, 모래와의 비율만 실험하면 되었을 터였다.
지금보다 훨씬 편하게 시멘트를 만들고, 실험하여, 일찌감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어냈을 것이었다.
그게 너무나 아쉬웠다.
나중에는 화산재를 구하러 직접 나설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으음, 아니야. 화산재를 구할 곳도 마땅치가 않고, 그걸 실어오는 비용까지 생각하면 너무 효율이 떨어져. 시간도 엄청나게 걸릴 거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만 들었다.
'결국엔 계속 이 실험을 강행할 수밖에 없는 건가.'
시도하고, 또 도전하다 보면 성공하리라.
그때까지 멈추어선 안 되리라.
로이드는 그렇게 결심했다.
밤잠 자는 시간마저 쪼개며 실험에 매달렸다.
하지만 성과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도 그랬다.
나중엔 코피까지 터지고 말았다.
주르륵.
"...어?"
어두운 대장간 구석에서 규석을 갈아대던 로이드는 별안간 코 아래가 찝찝해지는 느낌에 손길을 멈추었다.
무심결에 코 아래를 슥 매만졌다.
손가락 가득 묻어난 코피.
"어, 뭐 이런."
소매로 코를 막고 눌렀다.
그러자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문득, 지난 시절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같네.'
일주일에 일곱 번씩 코피를 쏟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매일 의지를 불태우던 나날이었다.
오늘만 버티면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거라고.
내일도 버텨내면 다음 달은 더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언젠가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안정적인 수입을 벌어들이고, 결혼도 하고, 따뜻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버텨내고, 이겨내고자 애쓰던 시절이었다.
그날의 기억 덕분이었다.
'더 해보자.'
포기하지 말자.
쉽게 물러나지도 말자.
로이드는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규석을 잡았다.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해결의 실마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65화. 환상종 강화 (1)
"뽀동?"
"...어?"
옆에서 별안간 들려온 작은 소리.
마치 속삭이며 다가오듯.
혹은 살며시 뎅굴거리듯.
그렇게 들려온 소리였다.
덕분에 로이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매로 코피를 막던 그대로 옆을 돌아보았다.
"뽀동아?"
"뽀동!"
대장간 작업대 위에 뽀동이가 뽀잇뽀잇 올라와 있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빵빵한 볼과 까만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울!"
"하망!"
뽀동이의 뒤를 이어 방울이도 테이블 구석에서 이쪽으로 또잇또잇 기어왔다.
하망이도 행여나 늦을세라 뿌잇뿌잇 굴러 왔다.
똑같이 동그랗고 까만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으음, 너희들? 뭐하는 거?"
"뽀동!"
"방울!"
"하망!"
"뭐? 놀아달라고?"
"뽀!"
"방!"
"하!"
세 환상종이 나란히 늘어서서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이 밤중에, 그것도 한창 고민에 휩싸여 있던 와중에 와서 놀아 달라니.
조금은 난감해졌다.
"으음, 미안한데 다음에 놀면 안 될까?"
"뽀동?"
"방울?"
"하마망?"
"저기, 오늘은 내가 좀 많이 바빠. 고민하고 연구할 게 많아서. 이거, 꼭 성공해야 하는 거거든."
"뽀도동?"
"빠방울?"
"하망...?"
"미안해. 그러니까 다음에 놀자. 응? 나 지금 코피 나고 있는데도 못 쉬고 계속 여기만 매달리고 있는 거야. 사실은 나도 너희랑 놀고 쉬고 그러고 싶어."
"뽀동!"
"방울! 빠방울!"
"하마마망!"
"아, 아니, 지금 놀거나 쉬자는 게 아니라...."
"뽀도동?"
"마음만 그런 거란 뜻이야. 기대하게 해서 미안. 진짜로 미안. 응? 그러니까 다음에 놀자."
로이드는 난처하게 웃었다.
진짜로 그도 쉬고 싶었다.
잠깐이라도 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호기롭게 나서서 백작에게 따낸 공사 발주였다.
자신만의 새로운 공법이 있노라고, 그걸 쓰면 성공리에 건설해낼 수 있노라고.
그렇게나 큰소리를 떵떵 친 판국이었다.
한데 준비 단계에서부터 막혀 버렸다.
시멘트를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여기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공사가 엎어지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좀 힘들고 어려워도 이겨내야 하는 순간이야. 그래도 걱정은 말고. 나 잘해볼게. 응? 이거 다 끝내면 그땐 진짜로 재미나게 놀자."
로이드는 웃으며 세 환상종을 토닥였다.
원체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번에도 말을 들을 거라고 여겼다.
한데 이번만은 달랐다.
"뽀도동!"
"방울!"
"하망!"
어쩐 일인지 세 환상종이 단호하게(?) 버텼다.
아니, 고집을 피우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예 이쪽이 궁리하느라 끄적여 둔 시멘트 배합 노트 위에서 굴러다녔다.
"뽀도도도동!"
"방울! 빠바방울!"
"하마망! 하망!"
"어, 으음? 얘들아?"
그 뒤로도 로이드는 세 환상종을 달래고 얼렀다.
끌어안아서 토닥토닥도 해주었다.
열심히 둥가둥가도 해주었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대체 어쩐 일인지, 세 환상종이 처음으로 자신의 말도 듣질 않고 고집을 피워댔다.
아니, 나중엔 아예 이쪽을 올려다보며 까만 눈을 그렁그렁, 적시기까지 했다.
"뽀도동...."
"방울...."
"하마마아앙...."
아예 몸을 배배 꼬며 당장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
사실 세 환상종이 그러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건 그냥 투정이나 고집이 아니었다.
로이드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그 마음이 세 환상종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뽀도동, 뽀동....'
사실 반려 동물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반려인을 잘 파악한다.
이유는 단 하나.
온종일 반려인만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 환상종은 로이드의 지금 상태를 로이드 본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방울....'
세 환상종이 보기에 최근의 로이드는 너무 무리를 거듭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깨어 있는 순간에도 온종일 고민과 실험에 매달렸다.
지나친 몰입과 만성적인 피로감.
그 때문에 오히려 시야가 좁아졌다.
판단력도 평소보다 떨어져 있었다.
'하망....'
그러니 조금은 쉬게 해주어야 했다.
잠시라도 일을 내려놓고 기분전환을 하는 게 필요할 듯했다.
그래서 세 환상종은 더욱 고집을 부리고, 로이드의 일을 저지했다.
열심히 궁디를 흔들었다.
낑낑대며 굴러다녔다.
로이드의 손등과 볼을 핥았다.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고, 짧은 다리를 요리조리 뻗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산책 나가자고 떼를 쓰는 강아지 같았다.
로이드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낑낑거리는 세 환상종의 모습.
그 모습에 문득, 과거의 복슬복슬하던 친구가 겹쳐져 보였다.
'가을아.'
어린 시절 키우던 강아지.
지금은 떠나고 없는 친구.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지나간 시절 매일 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럼 우리, 산책 갈까?"
"뽀동!"
"방울!"
"하망!"
세 환상종이 동그란 머리를 뽀잇뽀잇 끄덕였다.
뽀동이와 하망이가 작전 성공을 자축하며 짧은 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손이 없는 방울이도 통통한 꼬리로 하이파이브에 동참했다.
"나 참, 그렇게 좋은 거냐."
보고 있자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세 아이를 품속에 안았다.
대장간 작업장을 나섰다.
어두운 밤거리로 나왔다.
'춥네.'
초겨울의 부둣가였다.
그저 평범한 칼바람 수준이 아니었다.
로이드는 외투 옷깃을 추켜올리며 품속을 내려다보았다.
"너흰 괜찮아?"
"뽀! 방! 하!"
안주머니의 세 환상종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더 짙어졌다.
"어이? 이거, 아무리 봐도 산책이 아니지 않냐?"
"뽀? 방? 하?"
"걷는 건 나고, 너흰 나한테 탑승한 거잖아. 그것도 무료로."
"뽀오? 바앙? 하아?"
"어쭈. 모르는 척 고개 갸웃거린다 이거지. 그러면 귀엽다는 거지. 그래, 귀엽다. 귀여워. 참 나."
이 정도면 내가 얘들한테 산책을 당하는 거 아닌가.
로이드는 그만 싱겁게 웃고 말았다.
자신을 초롱초롱 야물딱지게 올려다보는 세 아이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문득, 옛 강아지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을이도 저랬는데.'
털이 곱슬곱슬한 하얀 강아지였다.
푸들과 말티즈가 섞였다고 했던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다고.
그런데 얘는 못 데려가게 됐노라고.
아직 채 한 살이 안 되었던 가을이를 맡겼던 사람의 말이었다.
그날부터 가을이가 가족이 되었다.
자신이 중학생이던 시절의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줄로만 알았다.
매일 산책을 하면서도.
공놀이를 하면서도 그랬다.
가을이는 종종 끙끙대며 투정을 부렸다.
특히 자신이 시험공부를 할 때면 더욱 그랬다.
그때마다 다음에 놀자고.
다음에 산책 나가자고.
미안하다고 웃으며 미루곤 했다.
그래서 몰랐다.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 모든 나날이 언젠가는 흘러가고 지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그때 많이 놀아줬어야 했어.'
자신이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그동안 가을이도 함께 나이를 먹었다.
어느새 훌쩍 늙어 버렸다.
군대를 다녀왔을 무렵엔 산책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경을 많이 써주질 못했다.
집안에 드리운 커다란 빚의 그림자.
그 암운에 가족 모두가 허덕였다.
너무나 힘겨운 나날이었다.
그만큼 작은 강아지 하나에게 신경을 써줄 여력이 없어졌다.
그렇게 이처럼 초겨울이 오던 무렵.
유난히 맑던 11월 중순 어느 오후.
가을이는 잠들듯 조용히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더 챙겨주지 못했고, 더 놀아주지 못했다는 후회만 가득 안겨준 채였다.
'아, 씨.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떠올릴 때마다 속상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이렇게 떠올라 버린 감정을 다시 묻으며 로이드는 밤거리를 걸었다.
때로는 차가운 바람에 손을 호호 불며, 안주머니의 세 환상종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마다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듯 웃음 머금었다.
그걸 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반성했다.
'난 어쩌면 얘들을 이용만 하고 있던 건 아닐까.'
뽀동이도, 방울이도, 하망이도.
모두가 환상종이기 이전에 따스한 가슴으로 감정을 느끼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자신은 어떠했던가.
'필요할 때만 얘들을 찾았어.'
도구처럼 대했다.
공사 장비로만 여겼다.
'이래서는 예전 가을이를 떠나보낸 뒤 후회하던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거잖아.'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기적으로 굴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안함과 반성, 앞으로의 다짐 사이에서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대장간 작업장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딩동.
별안간, 로이드의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환상종들이 당신의 진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환상종들이 가족을 보듯 전보다 따스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보유한 환상종들과의 교감 등급이 <주종관계>에서 <무리의 일원>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어?'
예상해본 적도 없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이드의 눈동자가 바빠졌다.
[환상종과의 교감 등급 상승으로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환상종 강화> 기능이 오픈되었습니다.]
[<환상종 강화>에는 500 RP가 필요합니다.]
[<환상종 강화> 기능을 통하여 새로운 스킬을 장착할 수 있게 됩니다.]
[한번 실행한 <환상종 강화>는 되돌리기가 불가능합니다. 신중하게 실행해주세요.]
'이게 무슨... 대박.'
로이드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환상종 강화라니.
새로운 스킬의 생성이라니.
이런 게 가능할 줄은 정말로 몰랐던 그였다.
'그것도, 하던 일 멈추고 얘들이랑 산책을 선택한 결과로 이런 이득을 얻게 될 줄이야.'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더니.
때론 둘러가는 길이 가장 빠른 하이패스라더니.
'500 RP를 투자하는 강화라.'
과연 어떤 스킬이 생성되는 걸까.
로이드는 호기심 반, 기대 반의 기분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안주머니를 향했다.
여전히 안주머니에서 꼬물거리는 세 환상종.
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녀석들을 향해 물었다.
"어이, 너희들."
"뽀동?"
"방울?"
"하망?"
"으음, 혹시 너희도 느꼈어? 내가 읽은 메시지의 내용?"
"뽀! 방! 하!"
세 환상종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강화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나 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울! 빠방울! 방울!"
어쩐 일인지 방울이가 유난히 눈을 빛내며 폴짝폴짝 뛰었다.
마치 자신을 뽑아달라고.
혹은 자기가 하겠다고.
입을 벌리고서 째잭거리며 나서는 아기새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뽀동! 뽀도동!"
"하망! 하마망!"
뽀동이와 하망이가 방울이를 위로 올려주었다.
이쪽을 향해 트로피 들어 올리듯 밀어 올렸다.
마치 방울이를 선택해야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로이드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너희들, 혹시 방울이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뽀! 방! 하!"
"그럼 혹시, 너흰 자신이 강화되면 어떤 스킬이 생길지 느낄 수 있는 거야?"
"뽀! 방! 하!"
"뭐? 방울이가 이번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방울!"
마지막 대답은 방울이가 직접 했다.
"방울! 빠방울! 방울!"
"일단 믿고 강화해보라고? 손해는 절대 없을 거니깐?"
"방울!"
야물딱지게 고개를 끄덕이는 방울이.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방울이가 저렇게까지 자신하는 거라면, 어쩌면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지도.'
서서히 그런 믿음이 생겼다.
뽀동이도, 방울이도, 하망이도.
지금까지 자신에게 여러 도움을 준 아이들이었다.
언제나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역할을 맡아준 녀석들이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자신 있게 추천하는 일이었다.
분명 저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믿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밑져봐야 본전이지.'
무려 500 RP가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래도 마침 모아둔 RP가 넉넉했다.
아니, 넉넉한 정도가 아니라 넘쳐날 만큼 쌓여 있었다.
'한번 해보자.'
만일 실패하면 본전.
이 녀석들 말대로 적절한 스킬이 뜨면 대박.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환상종 강화' 메뉴를 선택했다.
딩동.
[환상종 강화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강화할 환상종을 선택해주세요.]
'방울이.'
손바닥 위에 방울이를 올려두었다.
그렇게 녀석을 선택했다.
[선택하신 환상종은 '방울이'입니다.]
[방울이 강화 비용 : 500 RP ]
[현재 보유 중인 RP : 2401]
[강화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그래.'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상종 강화를 실행합니다.]
그때부터였다.
"방울?"
화아아아악!
방울이가 투명하고도 신비로운 빛에 휩싸였다.
그러기를 잠시.
마침내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방울이의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강화 단계 : +1]
[강화 성공에 따른 보상으로 새로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방울이 보유 스킬 목록>
[흙 퍼먹기 (Lv. 3)]
[흙 소화 가속 (Lv. 3)]
[강철 끙까 배출 (Lv. 5)]
[화산 폭발 (Lv. 1)]
'...뭐?'
메시지를 꼼꼼하게 읽던 로이드의 눈길.
그 시선이 마지막 줄에 닿았다.
'화산 폭발?'
새로운 스킬의 이름을 접한 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66화. 환상종 강화 (2)
'화산 폭발?'
로이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화산이 폭발한다는 소리다.
아니, 화산을 폭발시킨다는 뜻이다.
'설마 진짜로 그런 건 아니겠지.'
만일 정말로 화산이 터진다면 그건 대형 재난이 된다.
어지간하면 써먹지도 못할 민폐 스킬인 건 아닐까.
로이드의 시선이 방울이를 향했다.
"방울아?"
"방울?"
방울이가 고개를 들었다.
강화를 했음에도 달라진 곳 없이 귀여운 얼굴.
초롱초롱 까만 눈동자가 뭐든 물어보라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로이드는 훈훈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어, 방금 새로 생긴 스킬 있지?"
"방울!"
"그거 혹시 진짜로 화산 터뜨리는, 뭐 그런 거야?"
"방울? 빠방울? 방울!"
"으음, 비슷한데 다르다고?"
"방울!"
"좀 더 설명해줄 수 있어?"
"빠방울! 방울!"
"으으음, 펑 하고 터지는 거라고?"
"방울!"
방울이가 동글동글한 머리를 끄덕였다.
"...."
비슷하면서 다르다니.
펑 하고 터지는 거라니.
저 대답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직접 확인해보는 게 제일 확실하겠지.'
로이드는 세 환상종을 안주머니에 챙겼다.
다시금 외투를 걸치고 대장간 밖으로 나갔다.
'좀 멀리 나가야겠어.'
가능하다면 사람이 없는 곳으로.
사람 사는 집도 안 보이는 곳으로.
그래서 큰 폭발이 일어나더라도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을 곳으로.
'이번 스킬의 정확한 실체를 아직 모르니까.'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는 아예 숙소에 들러서 하비엘까지 깨웠다.
"어이, 일어나."
"으, 으음."
"좀 일어나라니깐?"
"끄으음."
"이만 눈 좀 떠보세요, 아스라한 양?"
"그건 또 무슨 악담입니까."
"어이쿠. 눈 시퍼렇게 번쩍 뜨는 거 보소."
"로이드 님이 절 희롱하시니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만."
"그 말은 이미 깨어 있었다는 뜻인 거지?"
"예."
"일어나기 싫어서 계속 자는 척했던 거지?"
"예."
"헐. 부정하지도 않아."
"가능하다면 계속 잠들어 있고 싶었으니까요."
하비엘이 목을 이리저리 풀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는 모습.
아무래도 정말 깊이 푹 자다가 마지못해 깨어난 것인가 보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자신이 불면증 환자를 밤중에 깨우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뭐, 어쩌겠냐. 상황이 이런 것을."
"상황이라니요?"
"네가 잠깐 날 좀 지켜줘야겠다."
"지켜드려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을 쫓아내려 애쓰던 하비엘의 눈빛이 대번 맑아졌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화산 폭발."
"예?"
"화산 폭발로부터 날 지켜줘야겠어."
"...."
"어이?"
"...."
"어째서 말이 없냐."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어."
"로이드 님을 정신병으로부터 지켜드릴 방법을 고민하는 중입니다."
"정신병 말고 화산 폭발이 급하다니까."
"고민이 점점 맹렬해지는 중입니다."
"이보세요? 진짜라니깐?"
로이드가 방울이를 꺼냈다.
하비엘을 본 방울이가 해맑게 웃었다.
"얘가 화산 폭발을 일으킬 거야."
"...예?"
"진짜지, 방울아?"
"방울!"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는 방울이.
그제야 하비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역시, 진짜였던 거군요."
"너, 나보다 방울이 말을 더 믿는 거냐."
"방울이도, 뽀동이나 하망이도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시커먼 속을 감추고서 남 속이고 농락하며 사악하게 웃어대고 즐기는 누구와는 매우 다르게 말이지요."
"쩝."
정말 오랜만에 피부로 확 체감하는 건데, 하비엘 녀석에겐 상대의 명치에 돌직구를 160km/h로 꽂아 넣는 출중한 재능이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 태도가 하도 진지하고 진중했다.
그래서 은근 반박하기 더 어려운 돌직구였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뭐 어쨌건, 방울이가 새로운 기술을 익힌 모양이야. 화산 폭발 비슷한 걸 일으키려나 봐."
"그 새 기술을 테스트해 보시려는 겁니까?"
"어. 위력을 짐작할 수 없어서."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외투와 검을 챙겼다.
그렇게 함께 여관 밖으로 나왔다.
밤거리를 걸어 시가지를 그대로 통과했다.
해안에서 반대 방향, 내륙 쪽으로 향했다.
보초의 눈을 피해 관문을 지나쳐 도시 뒤편으로 나갔다.
인적 없는 한밤의 숲으로 들어갔다.
마침 제법 널따란 공터가 보였다.
'여기가 적당하겠네.'
로이드는 공터 중앙에 방울이를 내려놓았다.
방울이에게 빨간 해바라기 씨를 내밀었다.
"방울아?"
"방울?"
"우리 방울이, 야식 먹을래?"
"빠방울?"
"자아, 해바라기씨 야식이야."
"방울!"
해바라기씨 냄새를 맡은 방울이가 짧고 통통한 꼬리를 흔들었다.
녀석의 작은 입에 해바라기씨를 넣어주었다.
그리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변신은 즉시 이루어졌다.
뚜앙-!
10센티였던 방울이가 단숨에 5미터 크기로 거대해졌다.
로이드가 물었다.
"방울아?"
"방울?"
"혹시 조금 있다가 화산 폭발 스킬, 써줄 수 있어?"
"방울!"
"응, 고마워. 내가 신호하면 터뜨리는 거야."
"방울!"
"참, 그런데 화산 폭발 스킬 말이야."
"방울?"
"그거 쓰면 이 숲이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방울! 빠방울! 방울!"
"뭐? 쓰는 방향에 따라서 다르다고?"
"방울!"
"그럼 원하는 방향으로만 쓸 수도 있는 거야?"
"방울!"
방울이가 거대해진 머리를 뽀잇뽀잇 끄덕였다.
그리고 통통한 꼬리로 양쪽 귓구멍을 막는 시늉을 보였다.
"빠방울. 방울!"
"대신 고막 다치니까 귀 막고 있으라고?"
"방울!"
"그럼 나 멀리 안 떨어져 있어도 되는 거야?"
"방울!"
방울이가 다시금 끄덕끄덕.
아무래도 화산 폭발이라는 거, 문자 그대로의 화산 폭발과 조금 다른 면이 있는 것 같았다.
로이드는 조금은 안심하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내가 신호 보내면 저쪽으로 화산 폭발 쓰는 거다?"
"방울!"
방울이가 엄지를 척 들어 올리듯 꼬리를 치켜들었다.
로이드는 방울이에게서 10미터쯤 거리를 벌렸다.
하비엘 뒤로 몸을 숨겼다.
하비엘이 검을 뽑았다.
"전 준비 됐습니다."
아마도 고속으로 검을 휘둘러 검기의 장막을 만들려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방패 따윈 필요가 없는 거겠지.
로이드는 든든함을 느꼈다.
방울이를 향해 외쳤다.
"자, 방울아? 시작해!"
"방울!"
저만치 있는 방울이가 대답했다.
제자리에서 와구와구 흙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잠깐 소화를 시키는지 통통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딸랑딸랑딸랑!
꼬리에 달린 방울이 맑은 경고음을 울렸다.
동시에 꼬리를 한껏 치켜들었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평소 사용하던 스킬, 강철 끙까 배출과 똑같았다.
반면 그다음은 너무나 달랐다.
쿠르르르릉-!
"...!"
정말로 화산이 흔들리는 듯한 굉음.
동시에 방울이의 뱃속과 항문에서 맹렬한 물리적 현상이 일어났다.
마그마가 분출되었다.
퍼먹었던 흙으로 만들어진 마그마였다.
그렇게 분출된 마그마가 바깥으로 뿜어지며 극단적인 변화를 겪었다.
투확!
애초에 방울이의 뱃속은 마그마가 생성될 정도로 고온, 고압의 환경이었다.
그에 비해 항문 밖의 바깥세상(?)은 달랐다.
방울이의 뱃속보다 훨씬 압력이 낮았다.
온도 또한 수백 도는 족히 차이가 났다.
즉, 밖으로 분출된 마그마가 극단적인 압력과 온도 감소를 겪었다.
그 환경의 변화가 마그마의 포화기체압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마그마 내부에 녹아 있던 휘발성 물질이 요동쳤다.
물이 끓었다.
이산화탄소가 날뛰었다.
염소와 불소, 황화물질, 일산화탄소 등이 폭주했다.
즉, 그 모든 기체들이 한꺼번에 기화되며 폭발적으로 마그마를 찢고 튀어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마침내 일어난 대폭발.
마그마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갈기갈기 찢겼다.
수만, 수억 조각의 화산재로 화해 분사되었다.
과정은 길었지만, 실제로는 0.1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일어난 작용이었다.
게다가 폭발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콰아아앙-! 퍼어어어엉-! 콰앙-!
보통 오래 참은 방귀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법.
화산 폭발은 연달아 세 번이나 더 굉음을 울리고서야 비로소 멈추었다.
"커억."
절로 헉 소리가 나왔다.
'어우야. 미쳤다, 미쳤어.'
로이드는 손바닥으로 양쪽 귀를 푹푹 눌러 때렸다.
귓구멍을 꼭꼭 막았음에도 귀가 먹먹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니 먹먹한 귀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무가 다 쓰러졌네.'
저쪽으로 발사(?)한 화산 폭발.
폭발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쪽 방향의 나무가 도미노처럼 넘어져 있었다.
그 숫자만 대략 50그루는 족히 넘을 듯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화산 폭발의 결과보다 먼저 확인할 것이 있었다.
"어이, 괜찮냐?"
"...."
"이봐?"
대답이 없는 하비엘.
녀석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제야 하비엘이 상체를 움찔했다.
뒤늦게 이쪽을 돌아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어. 너 혹시, 귀 먹었냐?"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잘 안 들립니다."
"...어, 미안. 귀 막아야 한다는 걸 깜빡하고 말을 안 해줬네."
"예?"
"아냐.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예?"
"진짜 사오정이라도 된 거냐."
"예?"
"...됐다. 좀 기다리고 있어라."
녀석, 안 그래도 소드마스터 증후군 때문에 청각도 엄청 예민할 텐데.
그런 상태에서 무방비로 굉음에 노출된 탓인 듯했다.
로이드는 하비엘에게 손짓으로 기다리라고 한 뒤 방울이에게 다가갔다.
"방울아? 넌 괜찮아?"
"방울!"
"뭐? 완전 시원하다고?"
"방울! 빠방울!"
"어, 또 하는 건 좀 곤란한데. 나중에 해주면 안 될까?"
"방울!"
아쉬워(?)하는 방울이를 두고 화산 폭발이 발사된 곳을 향했다.
그곳은 이미 잿빛 세상이 되어 있었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잿가루가 눈처럼 내렸다.
그렇게 내리는 잿가루가 바닥에 회색으로 쌓였다.
풀과 꽃, 바위, 나무가 모두 회색 재로 뒤덮인 광경이 마치....
'완전 화산재에 뒤덮인 거 같네.'
어쩐지 눈도 엄청 따끔거렸다.
로이드는 소매로 입과 코를 막았다.
최대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지면을 관찰했다.
측량 스킬과 함께였다.
츠츠츠츠...!
측량 스킬이 발동되며 그의 시선이 닿는 지면의 갖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대지의 기울기가 명확히 보였다.
지층의 암반과 토질이 파악되었다.
마지막으로 지표를 이루고 있는....
'이거, 진짜 화산재잖아?'
가늘게 뜨고 있던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낮추고 손을 뻗었다.
지면을 살짝 덮고 있는 회색 재를 매만졌다.
밀가루보다 고운 감촉이 손끝에 묻어났다.
'진짜다.'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화산재.
구할 수만 있다면 시멘트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줄 화산재.
그 화산재가 지금, 눈앞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게다가 이걸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쿵쿵, 가슴이 절로 뛰었다.
'대박. 진심 초대박.'
철근에 이어서 시멘트의 주재료가 될 화산재까지 만들어주다니.
복덩이 대하듯 방울이를 돌아보는 로이드의 눈빛에서 꿀이 떨어졌다.
♣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두 방울이를 강화하며 새로 얻은 스킬, 화산 폭발 덕분이었다.
그렇게 새 스킬을 얻은 다음 날, 로이드는 부둣가의 조선소로 갔다.
범선에 쓰는 대형 돛 다섯 장을 사들였다.
사람을 시켜 돛을 바느질했다.
다섯 장을 꼼꼼하게 이어 붙였다.
그렇게 길고 거대한 원통형 기저귀를 만들었다.
기저귀 한쪽 끝에는 미세한 입자를 걸러내고 공기만 배출할 촘촘한 체 다섯 겹을 붙였다.
반대편 끝에는 지름 1미터 가량의 구멍을 만들었다.
방울이가 구멍에 허리를 끼웠다.
자연히 30미터 길이의 풍선 기저귀를 착용하게 되었다.
그 상태에서 방울이가 크레모 시 중앙 광장의 흙을 먹었다.
통통한 몸을 부르르 떨며 소화시켰다.
꼬리에 달린 방울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폭발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신호.
그 신호가 뜨는 순간 로이드가 손나발로 입을 감쌌다.
광장 둘레에 모여든 구경꾼들을 향해 힘껏 외쳤다.
"다들 귀 막으세요! 뻥이요!"
콰아아아앙-!
거대 기저귀 안쪽으로 화산 폭발 스킬이 작렬했다.
엄청난 열기의 화산재와 가스가 맹렬히 분출되며 기저귀를 부풀게 했다.
그리고 반대편에 마련된 다섯 겹의 체로 걸러졌다.
가스가 천천히 기저귀 밖으로 빠져나갔다.
체에 걸러진 화산재만 안쪽에 남았다.
로이드의 외침이 이어졌다.
"또 뻥이요!"
콰아아아아앙-!
연달아 작렬하는 화산 폭발 스킬.
그때마다 교역도시의 주민들이 진귀한 구경거리에 환호했다.
지나가던 상인들과 선원들도 진풍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중에는 도시의 경비대는 물론이고 크레모 백작까지 직접 나와서 구경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네, 광장에서 뭔가를 터뜨릴 거라며 허가를 요청했던 게 이거였나?"
"네, 백작님."
"흐음, 자네에게 저런 소환수를 부리는 능력까지 있을 줄은 몰랐구만."
"어쩌다 운 좋게 얻은 재주일 뿐입니다."
"어쩌다? 아니야. 소환술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지."
백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법적인 재능은 기본이고 소환수와의 교감도 필요했다.
'게다가 희귀한 소환수일수록 더욱 다루기 어렵다고 하던데.'
방울이는 식견이 넓은 백작도 처음 보는 소환수였다.
저렇게 흙을 퍼먹고 잿가루를 펑펑 분사하는 거대한 방울뱀이라니.
들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능력이 보통이 아닌 친구야. 호위 기사로 데리고 다니는 저쪽 젊은이도 마찬가지고.'
백작은 문득, 최근에 들은 풍문을 떠올렸다.
동부 산맥 기슭의 프론테라 영지.
그곳에 두 명의 재능 출중한 젊은이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던가.
'기기묘묘한 건설 능력으로 영지민을 결집한 영주의 장남, 그리고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른 호위 기사라 했지, 아마.'
로이드와 하비엘.
두 사람을 향한 백작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것은 질시나 탐욕의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흐뭇해하는 눈빛에 가까웠다.
'이번 일, 어떻게 치러내는지 지켜봐야겠어.'
저 두 사람의 행보를 면밀히 관찰하리라.
풍문이 과연 사실인지 확인하리라.
그 결과 저 둘에게서 풍문과 같은 비범한 면모를 엿보게 된다면?
'전하께 이 사실을 상세히 고하여 드려야겠지.'
저토록 비범한 인재가 시골구석에 파묻혀 있는 것은 명백한 국가적 손실이다. 그런 인재는 능력에 어울리는 큰물에서 자신의 뜻을 펼쳐야 한다.
그만큼 왕국은 부강해지리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자신은 그런 인재를 둘이나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크레모 백작은 생각했다.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듯 크레모 백작이 희미한 웃음을 지을 때마다 로이드의 힘찬 외침이 광장에 울렸다.
그때마다 화산재가 가득가득 쌓이고 모였다.
로이드가 구상하는 해상 인공 지반 조성 공사.
바야흐로 그의 능력이 만방에 알려질 본격적인 무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67화. 화려한 완공식 (1)
"조심! 천천히!"
쏴아아, 철썩!
크레모 항 앞바다에 초겨울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떠밀린 파도가 항구로 몰려왔다.
그러다 범선 옆구리에 가로막혔다.
커다란 범선이 움찔하며 위아래로 흔들렸다.
자연히 범선 갑판에 올려진 기중기도 함께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로이드의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집중력을 유지한 채 범선 난간 밖, 아래쪽 바다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 그를 향해 범선 선장이 다가왔다.
"혹시 옆으로 밀려났소?"
"예. 좌현 쪽으로 약 50센티 정도 밀렸습니다."
"50센티라. 그 정도 밀려난 것도 다시 맞춰야 하는 거요?"
"당연합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선장을 돌아보았다.
"조금의 오차도 생겨서는 안 됩니다. 애초에 지금 기중기로 들어 올린 저 케이슨의 크기와 형태를 생각하면 말입니다."
로이드가 위쪽을 가리켰다.
선장의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이내 선장은 목격할 수 있었다.
나란히 떠 있는 두 척의 범선.
두 범선 갑판에 놓인 기중기.
그렇게 나란히 정렬된 두 기중기에 의해 들어 올려진 채 운반되는 거대한 구조물이 보였다.
로이드가 '케이슨'이라고 부르는 구조물이었다.
가로 16미터.
세로도 16미터.
높이는 30미터.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박스였다.
한데 위쪽과 아래쪽이 뻥 뚫려 있었다.
그렇게 테두리만 남은 괴상하고도 거대한 나무 박스가 기중기에 의해 두 범선 사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옮겨지고 있었다.
선장은 생각했다.
'저걸 대체 뭐에 쓴다는 걸까.'
물에 띄우는 것도 아니란다.
그냥 가라앉히기 위해서 옮기는 거란다.
그럴 거면 왜 옮기는 건지, 저걸 가라앉혀서 뭘 하려는 건지.
선장으로선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선장님은 짐작 못 하고 계시겠지만 저 케이슨, 내려놓을 자리에 딱 맞춰서 설계하고 제작한 겁니다. 그런데 내려놓는 자리에 오차가 생기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으음, 아마도...."
"공사가 망하겠지요?"
"...."
"그럼 크레모 백작님께서 매우 해피하지 못한 감정에 휩싸이시겠지요?"
"...."
"그리고 선장님을 살갑게 초대해서 알뜰살뜰하게 책임을 물을 겁니다."
"...."
"혹시 그 사태를 감당할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무, 물론 아니오."
"아니시죠?"
"그럼, 으음, 우현으로 50센티, 맞춰주면 되는 거요?"
"네, 그겁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선장이 선원들을 닦달했다.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커다란 범선 두 척이 기우뚱,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로이드의 시선도 더욱 날카롭게 번득이며 바다를 살폈다.
측량 스킬과 설계 스킬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츠츠츠츠!
측량 스킬로 시공할 해저면 상태를 살폈다.
설계 스킬의 옵션도 활성화되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평면도 표시(3D)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눈앞 시야에 홀로그램 영상이 겹쳐졌다.
설계 스킬과 시뮬레이션 옵션을 활용하여 설계한 인공 지반의 기초.
그 기초의 모습이 해저에 입체 평면도로 보였다.
덕분에 로이드는 케이슨을 내려놓을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좋아.'
선장을 향해 엄지를 들었다.
선장이 무어라 외쳤다.
기중기의 줄이 풀렸다.
육중한 케이슨이 아래로 내려갔다.
첨벙!
물을 튀기며 물속으로 잠겼다.
계속 내려갔다.
마침내 바다 밑바닥에 닿았다.
로이드가 설계한 것과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시작이 좋아.'
케이슨의 위치가 잘 잡히니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로이드는 나무 말뚝 수백 개를 주문했다.
"길이는 15미터, 지름은 30센티미터로 일정하게. 모두 미루나무 줄기 껍질을 벗겨 다듬은 것으로만 부탁합니다."
"미루나무 말입니까?"
"네."
백작가 총집사의 물음에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도 습기에 강한 수종이니까요."
사실이었다.
실제로 미루나무는 초기 베네치아의 지반 공사에 쓰인 수종이었다.
특히 베네치아의 명물인 산마르코 성당의 기초에 쓰이기도 했다.
역사를 통해 신뢰성이 증명된 재료인 셈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튼튼하게, 빨리빨리 준비해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허? 허허, 알겠소."
한국인의 종특인 빨리빨리.
그 마법(?)의 재촉을 접한 총집사가 당황했다.
어쨌건 덕분에 로이드는 불과 사흘 뒤에 말뚝을 모두 인계받을 수 있었다.
그때쯤엔 앞바다에 내려놓은 나무 상자, 케이슨도 제자리를 잡았다.
자체의 무게 덕분이었다.
'거기에 해저면이 펄과 진흙투성이니까.'
덕분에 바다 밑바닥이 무척 부드러웠다.
그런 바닥면에 크고 무거운 구조물이 놓였다.
자체의 무게 때문에 구조물이 진흙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마치, 늪지대나 백사장에 깜빡하고 세워둔 자동차가 자체의 무게 때문에 바퀴가 깊숙하게 빠져 버리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그렇게 거대한 박스, 케이슨이 물렁한 층을 파고들었다.
그 아래의 점토와 모래가 섞여 비교적 단단한 카란토 층까지 깊이 박혀서 고정되었다.
그것이 거대한 박스, 케이슨의 아래쪽 면을 뚫어놓은 이유였다.
반면, 위쪽을 뚫어놓은 이유는 물을 빼내기 위해서였다.
"자, 하망아?"
"하망!"
"혹시 맹물 말고 소금물도 좋아해?"
"하망! 하마망!"
"짭짤해서 완전 좋아한다고?"
"하망!"
"잘됐네. 여기 소금물 완전 많아."
"하망!"
"특히 여기 케이슨 안쪽 보이지?"
"하마망!"
"다 마셔도 돼."
"하망!"
참방!
하망이가 풀장 같은 케이슨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입을 한껏 벌렸다.
바닷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하망이의 덩치가 물풍선처럼 불어났다.
그만큼 케이슨 안쪽 바닷물의 수면이 쑤우욱 내려갔다.
2미터, 3미터, 5미터... 결국 바닥이 드러났다.
"하마망! 하망!"
로이드는 거대해진 하망이를 위해 대나무 빨대까지 야물딱지게 마련해주었다.
덕분에 하망이는 케이슨 내부의 바닷물을 구석구석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서 쪽쪽 마실 수 있었다.
"하마앙!"
하망이의 행복한 웃음과 함께 케이슨 안쪽이 완벽하게 뽀송뽀송해졌다.
기초를 만들 해저 바닥면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었다.
물론 바깥의 바닷물이 들어오지도 못했다.
위쪽으로는 충분한 높이의 케이슨 외벽이 파도를 막아주었다.
아래쪽으로는 케이슨이 카란토 층까지 수 미터나 파고든 덕분에 바닷물이 유입될 수 없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완벽히 뽀송한 건설 현장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성공이다. 다행히 생각대로 잘됐어.'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대적 공사법인 박스 케이슨 공법.
그걸 나름 이곳의 상황에 맞게 응용했다.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새로운 공법이 실패할까 봐.
케이슨 안쪽으로 물이 들어올까 봐.
수없이 시뮬레이션 옵션을 돌려가며 설계를 다듬었다.
그런 노력과 연구 덕분이었다.
'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완벽해.'
일단 첫 단계는 무사히 성공이었다.
로이드는 곧바로 다음 단계의 시공을 밀어붙였다.
마찰 말뚝 삽입이었다.
"자아, 하비엘?"
"...."
"드디어 네 차례가 왔어."
"...."
"설레지? 가슴 콩닥거리지?"
"그닥... 후우."
하비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는 커다란 나무망치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걸 망치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아무리 봐도 공성추를 떼어온 것 같은데.'
실제로 망치는 실로 거대했다.
망치 머리만 1미터에 달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손잡이의 두께는 팔뚝만큼 굵었다. 길이는 2미터가 넘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쓰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그런 물건을 자신에게 떡하니 쥐여 준 로이드가 새삼 얄밉게 보였다.
"혹시 로이드 님은-"
로이드를 돌아보는 하비엘의 목소리가 절로 쌀쌀맞게 변했다.
"진심으로 절 건설장비 취급하시는 겁니까."
"응, 당연하지."
"...."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건데?"
"하지만 전 기사입니다."
"응, 알아."
"매일 이런 일만 하기 위해 검술을 익힌 것이 아닙니다."
"그럼 이젠 그 생각 바꿔."
"바꾸라 하심은?"
"매일 이런 일만 하기 위해 검술을 익힌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
"와, 보람차다. 그치?"
"무슨 그런...."
"야, 원래 세상만사 전부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너 혹시 원효대사님 알아?"
"그런 사람 모릅니다. 그런 마음도 먹기 싫습니다."
"어허.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청년일세."
"그 말씀, 정정해주시지요. 세상이 아니라 로이드 님을 부정적으로 보는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분고분 망치를 들고 있잖아?"
"그건 물론...."
"자장가 서비스를 잃지 않겠다는 애처로운 몸짓이겠지."
"...."
"자, 이제 그만 투덜거리고 일 시작하자?"
로이드가 커다란 말뚝을 세웠다.
자리에 놓고 단단히 붙잡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탱하기도 힘겨울 엄청난 무게였다.
하지만 아스라한 심법의 도움 덕분에 전력을 기울이자 그럭저럭 붙들고 버틸 수 있었다.
로이드가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씨익 웃었다.
"한 방으로. 정확하게. 알았지?"
"...알겠습니다."
하비엘이 마지못한 듯 망치를 고쳐 잡았다.
로이드가 세운 나무 말뚝 꼭대기를 올려보았다.
그 순간, 은발의 기사가 땅을 박찼다.
타앗!
단숨에 도약했다.
공성추 같은 망치를 치켜들었다.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벼락처럼 내리쳤다.
꾸아앙-!
망치 머리가 말뚝 꼭대기를 정확히 타격했다.
무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인 하비엘.
그런 그가 마나하트의 마나는 물론이고, 트리플 써클로 증폭시킨 마나까지 모조리 동원한 일격이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투뻐억!
15미터 길이의 말뚝이 단숨에 뿌리까지 박혔다.
로이드의 입가에 뿌리 깊은 미소가 피어났다.
"옳지. 하니까 잘하잖아?"
"...."
"자, 하나 더 가자."
두 번째 말뚝을 세웠다.
하비엘이 한숨과 함께 망치를 들었다.
그 후로 무수한 말뚝을 박았다.
15미터 길이의 미루나무 말뚝이 60센티미터 간격으로 빼곡하게 박혔다.
'좋아. 말뚝이 제대로 들어가고 있어.'
말뚝이 하나씩 박힐 때마다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바다의 해저에 박는 나무 말뚝.
그는 말뚝이 썩을 것을 전혀 염려하지 않았다.
이렇듯 단단하게, 지면 속으로 박아 넣으면 공기와 접촉할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무라도 땅속에 빈틈없이 박혀서 물에 잠겨 있으면 썩지 않아. 공기층에만 닿지 않으면 몇백 년도 거뜬히 쌩쌩하게 버텨.'
실제로 베네치아의 수많은 건축물이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후웅, 콰아앙-!
하비엘이 뛰어올랐다.
공성추 같은 망치를 내리쳤다.
그때마다 말뚝 하나가 지면을 파고들었다.
"좋아! 계속!"
"재촉하지 않으셔도 합니다."
로이드의 힘찬 독려와 하비엘의 까칠한 대꾸.
그렇게 크레모 항 앞바다 해저면에 또 하나의 말뚝이 박혔다.
쇠퇴해가는 항구를 부흥시키겠다는 백작의 꿈과 희망을 담은 동상.
그 동상의 밑받침이 될 말뚝이었다.
♣
며칠이 지났다.
어느새 케이슨 밑바닥엔 700개가 넘는 말뚝이 빼곡히 박혔다.
공사는 계속 막힘없이, 쾌속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말뚝 윗면의 높이를 맞추었다.
그 윗면을 철근으로 엮어 연결했다.
거기서 철근 뼈대를 더욱 늘려갔다.
그리고 케이슨 내부에 시멘트를 가득 부었다.
방울이 덕분에 대량으로 모은 화산재.
그 화산재를 배합하여 만든 로마식 시멘트였다.
그렇게 타설과 양생 과정을 거쳤다.
마침 날씨가 좋았다.
초겨울 햇볕은 적당했다.
바람은 적당히 건조했다.
타설한 시멘트가 말끔히 말랐다.
그 후에 케이슨 테두리를 제거했다.
굳은 시멘트 지반의 높이에 맞추어서 잘라냈다.
그러자 가로와 세로 각각 16미터, 총 256㎡의 면적을 지닌 해상 인공 지반이 완성되었다.
"참고로 인공 지반의 높이도 의도적으로 설정했습니다."
"높이를 의도적으로 설정했다니?"
"백작님께선 지금이 어떤 시간인지 혹시 아십니까?"
"잘 아네. 만조 때지."
"맞습니다. 만조 때의 수면 높이보다 정확히 50센티 높도록 지반의 높이를 맞추었습니다."
"허허? 흐음, 과연."
로이드의 자신 있는 설명.
그걸 들으며 수면을 본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파도가 치는 날이었다.
덕분에 파도 머리가 인공 지반 상부에 닿을까 말까 했다.
"이 정도면 훌륭하군. 만약 기가티탄이 멀리서 이곳에 세워질 인어 동상을 본다면, 필시 동상이 바다에 떠 있는 상태라고 여길 터이니."
"그걸 노렸습니다."
사실이었다.
게다가 다행히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적은 편이었다.
썰물이 되어 해수면이 내려가도 적당한 파도만 있다면?
멀리서는 좀처럼 인공지반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좋군. 매우 좋아. 하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음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로이드는 백작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자신의 공사가 끝나긴 했다.
그렇게 인공 지반이 완성되긴 했다.
하지만 아직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동상을 세우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만든 이 인공 지반.
이건 어디까지나 동상을 세우기 위한 토대였다.
"그럼 이젠 제가 기다릴 차례겠군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동상을 만들 예술가들이 움직일 시간이리라.
백작에게서 공사 대금을 받는 것은 동상이 완전히 만들어진 후가 될 것이리라.
그 정도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예상하는 로이드였다.
'백작 입장에선 당연하지. 공사 끝났다고 나한테 덜컥 공사 대금 줘서 보냈다가, 이후에 동상 세우는 과정에서 토대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해질 테니까.'
즉, 토대에 문제가 생기면 A/S를 해줄 수 있도록 자신이 당분간 여기에 머물러야 할 거라는 뜻이었다.
'이참에 며칠쯤 쉬어야지.'
남작령에서 출발하여 이곳 크레모에 도착하기까지 거친 보름의 여정.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시작한 공사 준비와 시공.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터였다.
휴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말로 푹 쉬었다.
동상이 설치되는 기간 내내.
여관에서 뒹굴거리며 매일을 보냈다.
가끔 하비엘과 끝말잇기도 하고, 수수께끼 풀이도 했다.
그동안 하비엘은 백작가 영애 크리스틴 양에게 일곱 통의 연애편지를 추가로 받았다.
그때마다 뒤따라 터진 로이드의 '이게 나라냐!'라는 개탄 섞인 외침은 보너스였다.
그리고 보름 후.
마침내 거대 인어 동상이 완공되었다.
그날 저녁엔 성대한 완공 기념식이 열렸다.
앞바다에 설치된 거대 동상 아래에 범선 여섯 척을 정박시켰다.
선상 파티였다.
물론 로이드와 하비엘도 초대받았다.
모처럼 시내에서 구입한 정복을 입고서 파티에 참석했다.
'이거, 이렇게 보니까 꼭 자유의 여신상 같네.'
범선 갑판에서 거대 인어 동상을 올려다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바다를 비추는 불그스름한 노을.
그 속에서 올려다본 동상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저런 동상의 토대를 자신이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로이드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도.
항구도시에서 하루를 마치고 있는 시민들도.
모두가 꿈에조차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르르르...!
인어 동상이 세워진 앞바다에서 제법 떨어진 해역.
그곳에서 몸길이 90미터, 체중 2,500톤에 달하는 거대한 괴수가 사나운 눈길로 인어 동상을 관찰하고 있었다.
68화. 화려한 완공식 (2)
쿠르르르... 철썩!
이곳은 크레모 항에서 멀리 떨어진 곳.
먼바다에서 달려온 파도가 출렁였다.
커다란 파도가 바위 같은 눈을 때렸다.
그러나 기가티탄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아니, 이 괴수에게는 애초에 깜빡일 눈꺼풀 자체가 없었다.
그르륵.
철썩대는 파도 사이에서 기가티탄의 눈이 번득였다.
가재나 게의 그것을 닮은 돌출형 안구.
그 두 개의 안구가 적외선 영역에서부터 자외선 영역까지 총 16종의 색 수용체를 모조리 동원했다.
인간보다 수십 배 뛰어난 시각으로 저 멀리, 크레모 항의 앞바다를 관찰했다.
그곳에 기가티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가 보였다.
그륵!
기가티탄의 입 부속지가 거칠게 떨렸다.
인어.
분명히 인어다.
크레모 항 앞바다에 우뚝 서 있는 저 형상은 인어가 분명하다.
그것도, 지금껏 본 적도 없는 거대한 인어였다.
그르륵, 그륵.
기가티탄은 고민에 잠겼다.
이 몸길이 90미터의 괴수에게도 인어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인어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강력했다.
게다가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까지.
군대를 조직해서 대규모의 사냥을 벌이기도 한다.
그르륵...!
그럼 도망치는 것이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기가티탄은 거대한 고개를 저었다.
도망칠 곳이 없다.
이 얕은 연안을 벗어나면 깊은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인어만큼이나 부담스럽고 강력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동족이었다.
그르르르르....
동족을 떠올린 기가티탄이 불편한 기색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굴욕적인 과거가 문득 떠오른 까닭이었다.
동족 간의 경쟁.
자신보다 젊고 강한 개체.
영역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싸움.
그러나 형편없이 밀려나야 했던 그날의 굴욕.
그르르!
깊은 바다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래 봤자 더 젊고 강한 동족들에게 밀려날 것이다.
운이 나쁘면 머리가 깨져 놈들의 한 끼 먹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무조건 여기 붙어 있어야 한다.
늙고 쇠약해진 자신.
그런 자신에게 이곳 연안은 10년 동안이나 편안한 보금자리가 되어준 곳이니까. 짝을 만날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인간의 큰 항구 근처이기에 인어들도 좀처럼 접근하지 않는, 매우 이상적인 서식처니까.
그르르르륵!
물러날 수 없다.
이 서식지를 포기할 수 없다.
기가티탄의 바위처럼 커다란 눈이 그런 집념으로 물들었다.
다시금 크레모 항 앞바다에 우뚝 선 인어 동상과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반가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륵!
다른 인어가 보이지 않았다.
저 괴상하도록 거대한 인어, 하나밖에 없었다.
그 뜻은 명확했다.
하나, 혼자 있는 인어라면 충분히 상대해볼 만하다는 것.
둘, 저 인어가 군단을 이끌고 오기 전에 해치워야 하리라는 것.
그렇게 기가티탄이 싸움을 결심했다.
그그르르르르륵!
기가티탄의 신중하던 두 눈에 사나운 기색이 깃들었다.
한껏 웅크린 두 앞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놈의 거대한 몸체가 수면 아래로 쑥 들어갔다.
촤학! 쏴아아아!
거칠게 요동치는 파도 아래로 몸을 숨겼다.
해저면 바닥을 짚으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괴수의 돌격이었다.
그 질주는 크레모 항 앞바다, 정확히는 거대 인어 동상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범선을 띄워놓고서 동상 완공 기념 파티에 참석한 수백 명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으음?"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가 마시기 위해 기울이던 잔 속에서 과일 음료가 출렁였다.
그 서슬에 음료 몇 방울이 튀어 스카프에 작은 얼룩을 새겼다.
하지만 하비엘은 얼룩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먼바다를 향해 있었다.
눈매를 가늘게 만든 채.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너 뭐하냐. 혹시 화장실 가고 싶냐?"
"...."
옆에서 들려온 로이드의 물음.
하비엘은 잠시 울컥했다.
그리고 인내심을 발휘하며 대꾸했다.
"지금 화장실이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라서 갑자기 인상 팍팍 쓰고 있는 건데."
"뭔가가 이상합니다."
"이상해?"
"예."
"뭐가?"
"저쪽 말입니다."
하비엘이 손을 들었다.
그들을 태우고 있는 범선 뱃전 너머.
먼바다 방향을 가리켰다.
로이드가 그쪽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노을 아래 찰랑대는 아름다운 저녁 바다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예. 보이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뭔가...."
"뭔가?"
"낌새가 이상합니다."
"...."
로이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비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는 소리.
저건 장난이나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하비엘은 그런 녀석이니까. 언제나 진지하고 진중한 녀석이니까.'
로이드의 표정과 눈빛도 진지해졌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수면 아래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여기 바로 아래에서?"
"아니요. 먼바다 쪽입니다."
"고래 같은 동물이 헤엄치는 건 아니고?"
"훨씬 거대합니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설마.
로이드가 물었다.
"얼마나 큰지도 느낄 수 있나?"
"예. 대강은. 길이로만 따지면 가장 거대한 상태의 하망이보다 큰 것 같습니다."
"그 느낌, 진짜야?"
"예."
"...."
하비엘이 저렇게 말한다면 진짜다.
로이드는 무조건 믿을 수 있었다.
'하비엘은 소드마스터를 직전에 두고 있는 녀석이니까.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고 있으니까.'
하니 수 킬로미터 밖 물속에서 다가오는 존재의 움직임도 때론 감지할 수 있으리라.
그 존재의 덩치가 수십 미터의 규모에 이른다면 더더욱.
'이건 좀 쎄해지는데.'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불길한 상상력이 날개를 펼쳤다.
이곳 해역에 살면서 하망이보다 큰 존재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 기가티탄이라는 거잖아.'
한데 그 괴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니.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화롭게 꾸민 범선 갑판.
그 위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선상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악단이 편안한 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다들 고급스러운 옷을 걸치고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는 우아한 미소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어떤 사람들은 인어 동상의 웅장함을 감상했다.
또 어느 연인들은 느릿한 춤을 추고 있었다.
로이드의 시선이 그들 사이를 재빨리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물(?)을 포착했다.
바로 이 파티의 주최자이자 교역도시 크레모의 주인, 크레모 백작이었다.
"너, 술은 안 마셨지?"
"물론입니다."
"그럼 술주정으로 한 소리는 아니겠네. 알았어. 일단 지시를 기다려."
하비엘에게 명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 크레모 백작에게 다가갔다.
"허허허, 이게 누군가. 오늘의 이 기쁨을 얹을 토대를 만들어준 주인공이 아닌가. 자, 어서 오게."
이쪽을 발견한 크레모 백작이 흡족하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오늘 내가 기쁨에 겨워 그만 소개가 늦고 말았소. 이 젊은 친구가 조금 전에 말했던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외다. 바로 저 동상 아래의 튼튼한 기초를 만들어준 장본인이기도 하고 말이오."
백작이 이쪽의 어깨를 턱, 짚으며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크레모 시의 유력자들로 보이는 늙은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다.
로이드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 백작님? 지금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백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한 눈빛이다.
로이드의 목소리가 더욱 은근하게 낮아졌다.
"기가티탄이 이쪽으로 접근해오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이번에는 백작의 눈썹 양쪽이 모두 들썩였다.
"기가티탄이?"
"네."
"확실한가?"
"최소한 확인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로이드가 말했다.
"제 호위기사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습니다. 먼 곳에서부터 수면 아래로 모습을 숨긴 거대한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게 기가티탄인 것 같다고?"
"느낌에 따른 크기로 보자면 그렇습니다."
"흐음."
백작이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 기울였다.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자네, 혹시 음주가 과했나?"
"아닙니다.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하군. 자네의 호위기사가 느꼈다는 그 감각 말일세.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가?"
백작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그곳에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기사가 있었다.
"지노반 경일세. 내 호위기사이며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른 실력자이지. 즉, 내 호위기사도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소리일세. 그런데 지노반 경, 혹시 먼바다 쪽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낌새가 있는가?"
"없습니다, 주군."
지노반 경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크레모 백작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보았는가? 지노반 경의 감각에는 느껴지는 것이 없다고 하네. 게다가 만일 정말로 기가티탄이 출몰하는 상황이라면 진즉 무수한 해안 초소에서 경보를 울렸을 것이야. 설마 자네는 지난 10년 동안 기가티탄을 겪은 내 도시의 경계 체계를 못 믿는 것인가?"
"으음, 그건 아닙니다."
로이드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영업용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이런 호화로운 자리가 처음인지라 저와 제 호위기사가 조금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허허,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어쨌거나 자네는 나와 이 도시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허허허! 겸손까지. 이 친구 아주 제대로야. 다들 보셨소?"
백작이 도시의 유력자들을 돌아보았다.
유력자들이 흐뭇한 웃음으로 응답했다.
백작이 크고 두꺼운 손바닥으로 이쪽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이 친구의 입장에선 이런 분위기에서 방금 같은 경고는 좀처럼 하기 어려웠을 텐데, 그걸 굳이 한 걸로 보면 얼마나 이 도시를 위하고 걱정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오. 허허. 내 설마 이 지방에서 이런 청년을 발굴할 줄이야. 오늘은 더없이 기쁜 날이오. 다들, 다시 한 번 축배를 듭시다. 자아, 자네도 들게. 오늘은 자네의 공적을 자부하며 그저 즐기게. 공사 대금은 반드시 두둑하게 챙겨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러면 나가린데.'
백작이 건네는 잔을 받았다.
건배를 위해 들어 올리면서 눈동자를 슬쩍 돌렸다.
그렇게 이쪽의 눈짓을 받은 하비엘.
녀석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감각이 확실하다는 뜻이리라.
로이드는 백작 몰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작이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계속 기가티탄이 온다고 우기는 것도 에런데. 그러다간 딱 찍히기 좋은데. 어떡한다.'
그는 백작의 호언장담보다 하비엘을 믿었다.
백작의 호위기사인 지노반 경이 아무런 낌새를 못 느꼈노라 해도 그랬다.
'하비엘의 감각이 더 정확할 테니까.'
로이드는 소설 철혈의 기사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지노반 경의 이름은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그 뜻은 하나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지노반 경은 듣보잡.
즉,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같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단계라 해도 실질적인 실력이 하비엘보다 뒤처진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그러니 당연히 하비엘의 감각이 더 정확할 거야.'
"건배!"
백작의 외침이 들렸다.
로이드는 잔을 기울여 술을 마시는 척만 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백작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백작에게 위험을 알려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실패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독자적으로 대응법을 찾아야 할 터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아, 저거다.'
주위를 살피던 로이드의 눈이 뱃전에서 멈추었다.
뱃전을 묶고 있는 굵은 밧줄이 보였다.
밧줄 반대편은 인어 동상의 지반에 설치된 정박용 쇠말뚝에 묶여 있었다.
범선이 파도와 조류에 떠밀리지 않고 제자리에 고정될 수 있도록 밧줄이 묶어주고 있는 셈이었다.
로이드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히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이 없었다.
연주에 심취한 악사들도.
술과 음식을 서빙하는 일꾼들도.
파티를 즐기는 귀족들과 상인 등의 유력자들도.
모두가 이쪽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선상 파티를 벌이는 주위의 다른 범선 갑판도 다들 비슷했다.
'이판사판이다.'
로이드는 하비엘에게 다가갔다.
녀석과 눈짓을 교환했다.
손을 뻗었다.
녀석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당겼다.
스르릉!
장검이 특유의 서늘한 빛을 노을 속에 토해냈다.
로이드의 걸음이 빨라졌다.
'단숨에.'
주위의 사람들이 반응할 틈도 없었다.
그가 검을 뽑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겨를도 없었다.
재빠르게 움직인 로이드가 뱃전을 훌쩍 뛰어넘었다.
인어 동상 아래의 시멘트 토대로 넘어갔다.
그곳의 말뚝에 매인 밧줄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스컥! 쩍! 서컥!
팔뚝만큼 굵은 밧줄 여섯 줄기가 차례로 잘렸다.
정박용 밧줄을 잃은 범선 여섯 척이 파도에 기우뚱 밀리기 시작했다.
선상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비틀거렸다.
연주가 중단되고, 서빙되던 와인잔이 떨어져 깨졌다.
그 와중에도 로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범선에 뛰어올랐다.
뱃전을 지나 배의 뒤쪽, 선미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닻을 끌어올리는 장치인 양묘기가 있었다.
로이드의 검이 다시금 번득였다.
쩌억! 커거거걱!
양묘기에서 뒤로 연결된 밧줄이 잘렸다.
닻을 연결한 밧줄을 끊은 것이었다.
정박용 밧줄과 닻.
배의 앞쪽과 뒤쪽.
선수와 선미에서 배를 고정하고 있던 밧줄이 모두 사라졌다.
커다란 범선이 본격적으로 기우뚱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도와 조류에 떠밀려 동상에서 훌쩍 멀어져 갔다.
당연히 갑판에선 난리가 났다.
"어엇? 무슨 일인가!"
"배가 떠밀려 가는데?"
"꺄악! 저 사람, 검을 들고 있어요!"
웅성이던 사람들 틈새에서 어느 부인이 이쪽을 가리켰다.
로이드가 들고 있는 장검을 보며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뱃전에 올라섰다.
여전히 동상 주위에 남은 범선 다섯 척을 향해 외쳤다.
"내년에 한 살 먹고 싶으면 당장 닻줄 끊읍시다! 그리고 흩어져요! 최대한!"
그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백작이 이쪽을 향해 무슨 짓이냐며 꾸짖으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바로 그때.
콰아아아앙-!
거대한 실루엣이 수면 아래에서 솟구쳤다.
폭발적인 물보라와 함께, 인어 동상과 주위에 남은 범선 다섯 척을 맹렬히 덮쳤다.
69화. 도망자와 대적자 (1)
쿠아아아아-!
폭발적인 물보라가 솟구쳤다.
그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쇄도했다.
전체 길이 90미터.
약 2,500톤의 체중을 지닌 해양 괴수.
기가티탄이 포효하며 웅크렸던 몸을 펼쳤다.
흩날리는 파도를 통째로 부수며 거대한 유성처럼 돌진했다.
육중한 머리로 인어 동상 허리를 들이받았다.
콰아아아앙-!
상아질과 키틴질이 단단히 얽힌 머리였다.
2,500톤의 체중이 고스란히 실린 몸통 박치기이기도 했다.
그 일격 앞에 인어 동상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크다고 해봤자 동상의 높이는 고작 29미터.
기가티탄의 압도적 거대함 앞에선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렇듯 초월적인 몸통 박치기에 인어 동상 허리가 단숨에 분질러졌다.
쩌컥!
쪼개진 동상 상반신이 날아갔다.
마치 투석기로 발사한 포탄처럼.
크레모 항 앞바다 상공을 가르며 무려 수백 미터의 거리를 훌쩍 날았다.
저녁을 맞이하던 평화롭던 크레모 시의 중앙 광장에 처박혔다.
콰자작! 쿠앙-!
갑작스러운 동상의 추락.
수십 톤 크기의 바위가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상이 포석과 분수대를 단숨에 박살 냈다.
거침없이 튀고, 굴렀다.
광장 가장자리를 향해 돌진했다.
평화롭던 빵집과 꽃집, 과일 가게를 포함한 건물 다섯 채를 짓뭉갰다.
이후로도 대로를 가로질러 계속 굴러가 어느 종탑에 틀어박혔다.
비명은 뒤늦게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으, 으아악!"
"저게! 저게 뭐야!"
"이봐요,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
"누가 좀 도와줘요!"
날벼락처럼 날아온 동상과 거기에 뭉개진 건물.
그 잔해에 깔린 사람들과, 그들을 구조하려는 이들의 비명과 외침이 뒤섞였다.
잔뜩 피어난 흙먼지와 널브러진 돌조각 사이로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의 어지러운 달음박질이 난리를 쳤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참상.
그러한 참상은 앞바다에 뜬 범선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대체, 대체... 이게 무슨...! 크리스틴! 내 손을 놓치지 말거라!"
커다란 재난이 덮친 와중에 딸의 손을 꼭 붙든 중년인.
크레모 백작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뻐끔거리는 입에서 혼비백산한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로선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눈으로 들어오는 참상 또한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전혀 상상해본 적조차 없는, 자신의 상식에 위배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대체 어째서 놈이 여기까지 돌진해 온 거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기가티탄은 오직 앞바다 멀리에서만 출몰했다.
모습을 드러내도 그저 앞바다를 운항하던 선박을 공격했을 뿐. 이렇듯 도시 근방까지 습격을 감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설마... 인어 동상 때문인 건가?'
백작의 일그러진 눈길이 동상이 있던 자리를 향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위용 넘치게 서 있던 동상은 사라졌다.
허리 아래만 간신히 남아 형편없이 뭉개져 있었다.
백작의 눈길이 더욱 일그러졌다.
'기가티탄이 저 동상을 보곤 위협을 느껴 서식지를 옮겨주길 바랐건만....'
어째 상황이 반대로 돌아간 듯했다.
저 커다란 괴수가 서식지를 옮기는 대신, 위협이 된다고 판단된 인어 동상을 공격하는 쪽을 선택한 듯했다.
백작으로선 통탄할 노릇이었다.
'나의 실책인 것인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
백작의 머릿속으로 지금 상황의 퍼즐이 빠르게 맞추어졌다.
'인어 동상 때문이 맞는 듯하구나. 그래서 기가티탄의 행동이 평소와 달라졌던 게야. 그래서 해안 경계 초소가 놈의 출몰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고.'
평소의 기가티탄은 오늘과 달랐다.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저 멀리 바다에서 대놓고 포효했다.
그런 웅장한 포효 덕분에 출몰을 감지하는 것도 쉬웠다.
그렇듯 이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사방에 알리는 것.
그것이 지난 10년간 기가티탄이 보여준 출몰 패턴이었다.
따라서 해안 경계 초소들도 그 모습을 발견하고 도시에 경보를 알리는 데에 주력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바다 밑바닥을 통해, 수면 아래로 잠수해서 접근해 왔어. 놀랍도록 은밀하고 과감하게.'
단순히 자신의 영역임을 알리고 과시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과시가 아닌 공격.
침입자에 대한 위협이 아닌 응징.
그것이 오늘 기가티탄이 보여준 새로운 행동패턴이었다.
'한데 저 녀석들만은 그걸 예측했어.'
백작의 시선이 갑판 반대쪽을 향했다.
그곳에 두 청년이 있었다.
로이드와 하비엘이었다.
'특히 저 당돌한 친구의 호위 기사. 저 기사가 수면 아래로 접근해 오는 기가티탄의 기척을 느꼈다고 했던가.'
자신의 기사인 지노반 경은 느끼지 못했던 기척.
그러나 저 은발의 기사는 그걸 느꼈다.
그 뜻은 명백했다.
"위험합니다, 주군! 제 손을 놓치지 마십시오!"
상념에 잠겨 있는 백작을 향해 강인한 손아귀가 뻗어왔다.
그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끌어당겼다.
마치 물에 빠지려는 사람을 구해내듯.
사력을 다해서 뻗고, 당겨 안았다.
덕분에 온통 요동치는 갑판 위에서도 백작과 백작 영애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울먹이듯 외치는 거친 목소리.
백작의 호위 기사인 지노반 경이었다.
지노반 경이 침통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크레모 백작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경은 자책하지 말게."
"하지만 주군, 저는...."
"자네는 자네의 최선을 다하였을 뿐이야. 단지 자네가 발휘한 최선으로도 저 은발 기사와의 실력 차이를 메꾸지 못했을 뿐. 우리 도시의 어느 누구도 기가티탄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네. 나도 예측하지 못하였지. 그런데 내가 어찌 자네 한 사람만을 탓하겠는가."
"주군...."
"이 상황엔 자네의 잘못이 조금도 없네. 있다면 나의 잘못일 것이야."
백작의 목소리가 침통해졌다.
그런 백작을 향해 낭랑한 외침이 날아왔다.
"백작님! 심복인 기사와 돈독한 신뢰를 쌓는 것도 좋겠지만, 잠깐만 제 말씀 좀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로이드의 외침이었다.
갑판 반대편에서 난간을 움켜쥐고서 로이드가 외쳤다.
"사람들이 빠졌습니다! 당장 선장을 불러주시죠!"
그가 외치며 가리키는 바다.
과연 그곳엔 난리가 펼쳐져 있었다.
동상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범선 다섯 척이 크게 부서졌다.
범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 다수가 바다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바다가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기가티탄 때문이었다.
무려 90미터에 달하는 덩치의 기가티탄이 거칠게 날뛴 상황이었다.
그 물결에 휘말린 인근 해역은 혼돈의 도가니와 같았다. 물에 빠진 사람과 범선의 잔해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소용돌이치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로이드의 외침이 이어졌다.
"일단 저들을 구하는 일이 가장 급합니다! 백작님께서는 이 배를 지휘해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최대한 구해주십시오! 전 도시로 가 보겠습니다!"
"도시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무래도 크레모 항이 덩치 큰 불청객을 맞이하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시금 로이드의 손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머리를 치켜든 기가티탄이 있었다.
출렁이는 파도 사이로 몸을 일으켜 한쪽을 뚫어지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괴수가 응시하는 머나먼 곳.
거기에 인어 동상이 있었다.
수백 미터나 날아가 첨탑 옆구리에 처박힌, 망가진 인어 동상의 상반신이 있었다.
"아무래도 저놈, 인어 동상이 아직 끝장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설마, 저걸 마저 부수러 도시로 상륙할 거라는 말인가?"
"충분히요!"
로이드의 대답이 울려 퍼진 직후였다.
마치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가티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을 낮추었다.
거대한 몸집으로 파도를 갈랐다.
도시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놈이 도시로 올라가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겁니다!"
"그,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는가!"
"제가 가 보겠습니다!"
"뭐?"
백작은 귀를 의심했다.
직접 저기까지 가본다니.
설마 헤엄이라도 쳐서 간다는 말인가.
하지만 로이드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은발의 기사와 눈짓을 교환했다.
함께 선미를 향해 달려갔다.
뭔가를 허공에 던졌다.
이윽고 허공에서 커다란 소환수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뽀동!"
"방울!"
"하망!"
뚜왕-! 첨벙!
거대해진 뽀동이와 방울이가 출렁이는 바다로 다이빙했다.
하망이도 마찬가지였다.
뒤를 이어 로이드와 하비엘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방울이의 등에 올라탔다.
"자, 다들! 출발하기 전에 최대한 사람들을 물에서 건져!"
"뽀! 방! 하!"
로이드와 하비엘을 태운 방울이도.
뽀동이와 하망이도.
모두 바삐 움직였다.
주위에서 허우적대던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렇게 대략 상황이 급해 보이는 노약자들을 구해낸 후, 로이드는 뽀동이와 하망이를 작게 만들어 품속에 챙겼다.
그리고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자, 방울아?"
"방울?"
"가자!"
로이드가 방울이의 옆구리를 팡팡 두드렸다.
벌컥벌컥, 딸랑딸랑!
바닷물을 마신 방울이가 꼬리를 흔들었다.
맑은 방울 소리가 울리길 잠시, 녀석의 궁딩이에서 맹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앙-!
화산 폭발 스킬이 작렬했다.
내뿜어진 가스가 파도를 맹렬히 때렸다.
그 반탄력이 물에 떠 있던 방울이의 몸을 급속도로 밀어냈다.
마치 로켓이 쏘아지듯, 혹은 바나나보트가 바다를 가르듯, 항구를 향해 쏜살처럼 내쏘아졌다.
촤아아아악!
그렇게 방울이에 탑승한 로이드와 하비엘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제야 백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들! 밧줄을 가져오도록! 선장! 선원들을 움직이게! 어서!"
지금은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해야 할 때다.
백작이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벗어 던졌다.
목청이 터지도록 선장과 선원들을 지휘했다.
길고 긴 재난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콰앙! 퍼엉! 콰아앙!
노을 뒤의 어둠이 하늘을 물들이는 시간이었다.
마치 그 어둠을 몰아내듯 굉음이 울렸다.
대포가 불길을 뿜었다.
콰아앙-!
약 14센티 구경, 9.1킬로그램의 강철 구슬이 포구 초속 408m의 기세로 날아갔다.
어두워진 앞바다의 하늘을 가르고서 목표물에 명중했다.
뻐걱!
자그마치 약 600kJ에 달하는 운동에너지가 충격력으로 전환되었다.
그 타격을 받은 목표물이 움찔했다.
간지러워서였다.
그르르르륵!
대형 컬버린 포탄에 이마를 직격당한 기가티탄이 머리를 흔들었다.
얻어맞은 자리가 간질거렸다.
간지러움은 계속 이어졌다.
쐐애액! 쐐애애액! 퍼퍽! 뻑!
해안을 따라 설치된 경계 초소.
그 모든 초소에서 해안 방어용 대형 컬버린이 불을 뿜었다.
시커먼 탄환이 날아와 기가티탄의 전신을 두드렸다.
물론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다.
고작(?) 대형 포탄 따위로는 기가티탄의 상아질과 키틴질이 결합된 껍질을 뚫을 수 없었다. 아니, 흠집조차 남기지 못했다.
기가티탄이 포효했다.
그르르르륵!
상륙은 금방이었다.
파도가 갈라졌다.
거친 물결을 일으키며 해안에 올라섰다.
지네를 닮은 여덟 쌍 다리가 해안가 바위를 밟았다. 초소를 짓뭉갰다.
"으, 으아악!"
"피해!"
크레모 해안 23번 초소를 지키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무너지는 초소 건물에 깔리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초소장이 외쳤다.
"다들 나가! 도망쳐!"
중년의 초소장이 병사들을 떠밀었다.
하지만 외침과 달리 그는 초소 밖으로 피신하지 않았다.
병사들을 모두 내보내고도 홀로 초소에 남았다.
그리고 무너진 초소 지붕을 통해 괴수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을 지키는 것이 내 임무다. 한데 그냥 쉽게 보내줄 줄 아느냐!'
어느새 초소장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넘어지고 구르는 화약통이 가득했다.
초소장이 화약통을 향해 횃불을 던졌다.
남은 병사가 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밖으로 달려나왔다.
전력을 다해서 초소에서 멀어졌다.
그사이, 불길이 화약통에 옮겨붙었다.
투콰학-!
23번 초소가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초소의 대포와 포환, 초소 건물을 이루던 벽돌이 모조리 박살 났다. 무수한 파편이 되어 솟구치고 쏘아졌다. 기가티탄의 몸체 아래쪽을 두드렸다.
"하하하! 어떠냐!"
간신히 폭발에 휘말리지 않은 23번 초소장이 외쳤다.
주먹을 휘두르며 기가티탄을 노려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타격을 받았겠지!'
당연했다.
초소에 비축된 화약이 모조리 터졌다.
그 폭발을 몸체 아래로 고스란히 맞았다.
그 어떤 생물이라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다.
'포탄 정도로 때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타격이니까!'
단단한 껍질이 불길에 휘말렸을 것이다.
수많은 파편에 짓이겨졌을 것이다.
하니 이제는 저 괴수도 더는 함부로 설치지 못할....
그르륵?
기가티탄이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홉 번째 다리를 털었다.
발가락 끝에 붙은 불길이 꺼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기가티탄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친 곳 따위 전혀 없다는 듯이.
'어?'
23번 초소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그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도 기가티탄의 거대한 몸체는 앞으로 쭉쭉 나아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었다.
교역도시 크레모의 시가지를 노려보는 기가티탄의 커다란 두 눈도.
그곳 광장 첨탑에 처박힌 인어 동상을 향하는 놈의 걸음도.
그 앞에 무방비하게 놓일 시민들과 자신의 가족도.
'이런 미친!'
까드득!
23번 초소장이 이를 갈았다.
시가지엔 자신의 가족이 있다.
결혼 10년 만에 간신히 첫 아이를 뱃속에 품은 아내가 있다.
한데 저 괴물이 아내가 있을 시가지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가고 있었다.
'무조건 막아야 해.'
초소장의 눈동자에 결의가 떠올랐다.
그가 허리를 숙였다.
돌멩이를 들었다.
달려나갔다.
내던졌다.
"으아아아! 이 개자식아! 거기 서!"
소리쳤다.
돌멩이를 던졌다.
닿지 않아도 좋았다.
타격을 줄 수 없어도 상관없었다.
설령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 해도.
오직 저 괴물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라도 끄는 것.
그 잠깐의 몇 초가 아내를 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멈춰! 거기 멈추라고!"
계속해서 외쳤다.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런 초소장의 결의 덕분이었을까.
그륵!
한순간, 기가티탄이 걸음이 마치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이윽고 거대한 머리가 이쪽으로 끼기긱 돌아왔다.
그르륵?
"하, 하하...."
눈이 마주쳤다.
초소장이 힘겹게 웃었다.
그런 그를 향해 기가티탄의 거대한 발 하나가 떨어져 내려왔다.
초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끝이구나.
돌멩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쇄도해 오는 거대한 발을 의연히 노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하망!"
뚜오앙-!
너무나 별안간.
어디선가 굴러 온 60미터 크기의 물풍선, 아니, 물 먹은 하마가 기가티탄의 옆구리에 몸통박치기를 선사했다.
70화. 도망자와 대적자 (2)
"하망!"
뚜오앙-!
거대한 물풍선, 아니, 하망이가 날아왔다.
기가티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꿀렁!
바닷물을 잔뜩 삼켜 빵빵하게 불어난 하망이였다.
그 무게만 수백 톤에 달했다.
물론 2,500톤이나 나가는 기가티탄의 체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시의 습격으로 놈을 잠깐 비틀거리게 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르륵?
기가티탄의 다리가 본의 아닌 영덕대게 스텝을 밟았다.
마치 탭댄스를 추다가 날아온 짐볼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넘어지지 않기 위해 비틀거려야 했다.
그 비틀거림이 23번 초소장을 살렸다.
콰아앙-!
"흐억!"
23번 초소장을 밟으려던 다리가 몇 미터 옆으로 밀려났다.
바위를 통째로 깨부수며 지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파편이 초소장을 덮쳐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초소장은 다치지 않았다.
그를 향해 날아온 무수한 파편.
그 파편을 막아준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엎드려요!"
"...!"
외침과 함께 초소장의 앞을 가로막은 그림자.
뭔가 끝이 넙데데한 물건을 치켜드는가 싶었다.
그 물건을 현란하게 휘두르는가 싶었다.
삽시간에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카카카카캉!
어둠을 순간적으로 밝히는 연이은 섬광.
그 섬광을 통해 초소장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삽?'
누군가가 삽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 손으로 삽자루를 넓게 쥐고서, 처음 보는 괴상한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한데 그 움직임이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과녁을 맞히는 명궁의 화살촉처럼.
날아드는 바위 파편을 하나도 빠짐없이 걷어냈다.
공중에서 후려치고, 막아내고, 흘리는가 하면, 거침없이 쳐냈다.
'저건 무슨...자루 달린 방패 같잖아.'
그것이 초소장의 감상이었다.
이윽고 삽을 든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괜찮습니까?"
"아, 저기, 나는...."
"건강해 보이네요. 따라오시죠."
남자, 로이드가 삽을 어깨에 걸치며 턱짓했다.
초소장은 얼결에 그를 따라 뛰었다.
"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긴요. 도망치는 거죠."
"예?"
"못 들었습니까? 도망치는 거라고요."
로이드가 당연한 듯 대꾸했다.
초소장의 표정이 굳었다.
"전 도망칠 수 없습니다. 여길 지켜야 합니다."
"못 지키실 텐데요."
"그래도 지켜야 합니다."
"안 지키셔도 됩니다."
"예? 그게 무슨...."
"여긴 쟤가 지켜줄 거라서요."
잽싸게 달리며 로이드가 한쪽을 가리켰다.
초소장의 시선이 절로 그 손끝을 따라갔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탄약고 유폭으로 사방에 피어오르는 불길.
그 불길 속에 은발의 기사, 하비엘이 우뚝 서 있었다.
그가 비껴든 것은 고작 검 한 자루.
하지만 그의 모습은 너무나 당당했다.
자신보다 수십 배는 큰 괴수를 정면에 두고서도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아니, 오히려 검을 치켜들어 괴수를 겨누었다.
그리고 땅을 박찼다.
파아앗!
질풍처럼 내달렸다.
바위를 뛰어넘었다.
타오르는 불길을 돌파했다.
그 앞에 기가티탄의 열한 번째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비엘의 검이 섬광이 되어 다리를 휩쓸었다.
스칵! 카캉!
불똥이 튀었다.
기가티탄의 다리 끝에 자그마한 흠집이 새겨졌다.
검을 회수한 하비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베어지지 않았어?'
최소한 절반쯤은 잘라낼 줄 알았는데.
조금은 뜻밖의 결과였다.
'다시 한 번.'
마나하트의 마나가 물결쳤다.
트리플 써클이 회전력을 높였다.
하비엘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츠파팟!
기가티탄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괴수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뛰어올랐다.
놈의 다리를 밟았다.
박차며 더욱 높이 도약했다.
그곳에 괴수의 다리 관절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껍질의 방어력이 취약해 보이는 부위였다.
'흡!'
하비엘의 검이 번득였다.
사선으로 공간을 가르며 기가티탄의 다리 관절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공간은 갈랐으되, 괴수의 껍질은 가르지 못했다.
콰아앙!
"...!"
무려 발파를 사용한 검이 튕겨 나왔다.
반탄력으로 튕겨져나가는 은발 기사의 눈동자에 놀람이 배어났다.
일찌감치 멀찍이 도망치며 그 모습을 돌아본 로이드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저놈 저거, 그러니까 싸우지 말자고 그렇게 말렸는데.'
가슴이 온통 쿵쾅거렸다.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
"자, 됐다! 방울아?"
"방울?"
"어서 이거 먹어."
"방우울?"
"파란 해바라기씨야. 저 괴물 눈에 띄기 전에 얼른."
로이드는 방울이에게 파란 해바라기씨를 내밀었다.
방울이를 타고서 바다를 가로지른 직후였다.
그렇게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해안에 도착한 터였다.
그는 일단 방울이의 덩치부터 줄였다.
사방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이제부터 어쩔 계획이신 겁니까."
하비엘이 진지한 눈길로 물어왔다.
로이드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어쩌긴. 숨어야지."
"예?"
하비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숨는다는 말씀은, 기습을 가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럼?"
"기습 같은 걸 왜 해. 숨어야지."
"예?"
"설마 넌 저 괴물이랑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냐?"
"그야 당연히-"
"아서라. 그러다 개죽음만 당한다."
로이드가 물에 젖어 무거워진 예복 외투를 벗어 던졌다.
이런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여긴 우리 도시가 아냐. 게다가 이 도시에도 군대가 있을 거잖아. 그런데 왜 우리가 총대 메고, 아니, 칼 들고 나서서 싸워야 하는 거냐."
"그야 물론...."
"정의감, 뭐 그런 거냐?"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비엘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럼 아까 범선에서 백작에게 외친 말씀은 뭐였습니까."
"외침이라니?"
"이제부터 어찌하겠느냐던 백작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가 보겠습니다'라고."
"어. 그렇게 외치긴 했지."
"한데 그 외침에 책임을 지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난 여기로 온다고만 했지, 그 뒤로 뭘 하겠단 말은 안 했는데?"
"...."
"맞잖아. 그러니까 이제부터 여기서 내가 숨건 말건 무슨 상관인 건데. 내가 왜 남의 일에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거냐고."
"하지만 로이드 님."
"넌 내가 슈퍼맨으로 보이냐?"
"예? 슈퍼맨이라니, 그게 무슨...."
"아니면 내가 세상을 구할 영웅 같은 걸로 보이냐?"
"...."
물론 아니었다.
로이드는 한 번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자신은 슈퍼맨이 아니었다.
영화 같은 활약을 펼치는 영웅도 아니었다.
'난 그저 빚이나 갚은 뒤에 평생 맘 편히 조용하게 살고 싶은 사람일 뿐이라고.'
오직 그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일 뿐이다.
그저 공사 하나라도 더 따내려고.
그렇게 돈을 마련하려고.
매일 애쓰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저런 빌딩만 한 괴물이랑 싸운다니. 그게 말이 돼?"
커다란 동상을 일격에 수백 미터나 날려 버린 괴물이었다.
몸통 박치기 한 번에 범선 다섯 척을 박살 냈다.
포탄 수십 발을 맞고도 꿈쩍도 않는 놈이었다.
그런 괴수랑 싸우자니.
할 수만 있다면 물론 해볼 거다.
하지만 가능할 거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저 괴물 때문에 피해를 입을 시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듯 로이드에겐 '저 괴물에 맞서 싸우자'라는 말이 '우리 함께 오순도순 확실하게 자살을 해 봅시다'라는 말과 똑같게 들렸다.
그래서였다.
"확실히 말해두는 건데, 난 저놈이랑 싸울 생각 없다. 그래서 백작한테 적당한 말만 해놓고 범선에서 빠져나온 거고, 이제부터 근처 안전한 곳을 찾아 숨을 거야. 이 난리가 적당히 진정될 때까지."
"그럼 난리가 진정된 뒤엔 어쩔 생각이신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백작한테 공사비 받아야지."
"...."
"공사비만 받으면 볼일 끝이야. 나도 알아. 야비하다는 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여기서 내가 뭘 더 해야 하는 건데. 대체 뭘 할 수가 있다는 건데."
"...."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는 로이드.
그런 로이드를 향한 하비엘의 시선이 냉랭해졌다.
입 밖으로 꺼내는 대꾸도 한결 쌀쌀해졌다.
"이런 분이셨던 겁니까, 로이드 님은?"
"뭐?"
"실망했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하비엘이 몸을 돌렸다.
검을 뽑았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언쟁을 바라보던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를 향해 물었다.
"저와 함께 싸울 생각이 있습니까?"
"뽀동!"
"방울!"
"하망!"
세 환상종이 다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엘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좋습니다. 그럼 가 볼까요."
"뽀! 방! 하!"
파아앗!
하비엘이 세 환상종을 안고서 달려갔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
그 모습 너머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딩동.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5 하락했습니다.]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현재 관계 : +1]
[하비엘 아스라한과의 친밀 등급이 <평범한 관심>에서 <일상적 타인>으로 1단계 하향되었습니다.]
[주요 인물과의 관계가 다소 악화되었지만, 그에 따른 RP 몰수는 없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1901]
"...."
아무래도 하비엘 녀석, 이번만은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로이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치겠네.'
자신은 물론이고, 하비엘이 저 괴물과 싸우는 것도 싫었다.
물론 하비엘이 강하다는 건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 이건 자신의 기억에 없는 상황이다.
자신이 읽은 소설 철혈의 기사.
그 소설 속에서의 하비엘은 기가티탄과 싸운 적이 없다.
게다가 지금의 하비엘은 소설에서와 같은 소드마스터도 아니다.
비록 트리플 써클을 지니고 있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직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불과하다.
운 나쁘면 정의를 위해 돌격하다가 뜬금없고도 허망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건 안 되는데.'
그런 식으로 하비엘을 잃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예뻐서?
물론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하지. 제일 쓸 만한 놈이니까!'
앞으로 자신의 가장 큰 재산이 되어줄 놈이다.
장차 소드마스터가 되어 영지를 떠받칠 인재다.
게다가 녀석은 지금 당장으로도 유능하기 짝이 없는 건설중장비였다.
발파 덕분에 얼마나 쾌적하게 채석 작업을 했던가.
지층에 구멍 뚫을 일에도 얼마나 걱정이 없었던가.
'게다가 인건비마저 공짜란 말이야!'
밥만 먹여주면 불만 없이 소처럼 일해 주는 녀석.
그런 전천후 건설장비를 이렇게 잃고 싶진 않았다.
그런 녀석을 위험 속으로 내던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였다.
'어오, 진짜.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워놨는데!'
속으로 수십 번을 투덜거리며 하비엘의 뒤를 따라 달렸다.
녀석을 어떻게든 말려보고자 애썼다.
그러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얼결에 휘말리다 보니 23번 초소장까지 구해주게 되었다.
초소장과 함께 도망치며 하비엘을 향해 야유를 퍼붓게도 되었다.
"야! 그만하면 됐으니까 좀 튀자니깐!"
"싫습니다."
타악!
어느새 저 너머에 착지한 하비엘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달렸다.
당연하다는 듯 거부 의사를 날려 왔다.
로이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버럭 외쳤다.
"야!"
"예."
"너 혹시 변태세요? 무슨 불세출 영웅 페티시라도 있는 거냐!"
"예?"
"예는 무슨! 내 말이 틀렸냐? 지금 네가 이런다고 저걸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촤아아악!
전력으로 달리던 하비엘이 멈춰 섰다.
몸을 돌렸다.
이쪽을 추격해 오는 거대한 괴수.
떨어져 내려오는 기가티탄의 압도적인 발끝.
그걸 향해 맞서듯 검을 휘둘렀다.
정면으로 발파를 내쏘았다.
콰아앙-!
맹렬한 충격파와 함께 하비엘의 몸이 퉁겨졌다. 20미터 가까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으며 두 눈동자를 활활 불태웠다.
"저라도 싸우지 않으면 저걸 막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나직하지만 마나에 실려 똑똑히 들려오는 목소리.
"헐."
누가 소설 주인공 아니랄까 봐.
정의감도, 오지랖도 이쯤이면 중증이다.
하지만 그걸 탓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녀석을 더 설득할 여유도 없었다.
"야! 피해!"
후우우웅!
계속 발파를 사용하며 저항하는 하비엘이 성가셨던 것일까.
기가티탄이 하비엘을 향해 본격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주 무기인 곤봉 같은 앞발을 휘둘러 왔다.
콰아앙!
하비엘이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그러나 앞다리 곤봉이 쉴 틈도 없이 하비엘을 향해 연달아 쇄도했다.
쐐애액, 콰앙! 콰콱!
곤봉이 지면에 내리 찍힐 때마다 땅이 쪼개지고 바위가 가루로 변했다.
무지막지한 충격파와 파편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그때마다 하비엘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했다.
동시에 이쪽과 점점 멀어져 갔다.
그쪽으로 기가티탄을 유도했다.
아무래도 자신을 향한 공격에 이쪽이 휘말릴까 걱정을 하는 듯했다.
'저 멍청한 놈이!'
대놓고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죽으려고 애쓰는 놈 같았다.
그래서 더 가슴이 쿵쾅쿵쾅 날뛰었다.
'이럴 것 같아서 싸우지 말고 숨자고 했던 건데.'
하지만 이제는 빼기엔 너무 늦었다.
뭐라도 수를 내어야 했다.
안 그러면 하비엘이 당할 것이다.
거기에 운이 나쁘면 자신도 1+1 세트메뉴처럼 함께 당할지도 모른다.
'그럴 순 없지.'
로이드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침착해지려 애썼다.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우선 현장 분석부터.'
눈가로 흘러오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렸다.
생각을 착착 정리했다.
'일단 제일 큰 문제는 하비엘이 놈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하비엘의 베기는 말 그대로 강철도 잘라낸다.
그러나 그 검격이 통하지 않고 있었다.
기가티탄의 두꺼운 껍질 때문이었다.
'딱 갯가재처럼 생겼네. 아님 곤봉 앞발이 달린 가재라거나.'
갑각류.
그 특유의 단단하고 질긴 껍질이 문제였다.
'저걸 뚫을 수만 있다면 하비엘이 뭔가 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
로이드는 날뛰는 기가티탄의 몸을 살폈다.
하지만 밤하늘이 너무나 어두웠다.
게다가 아무리 살펴봐도 기가티탄의 어디가 얇고 연약한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아, 차라리 저게 바위나 땅바닥이었으면 측량으로 지반이 얇은 곳을 모조리 다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절로 가득 차올랐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이 반짝.
'어? 잠깐만.'
한숨을 푹 내쉬던 로이드가 멈칫했다.
불현듯,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연이은 발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폭발적으로 번득였다.
측량.
땅을 파악하는 스킬.
지반의 튼튼하고 연약함을 가려내는 스킬.
옵션 덕분에 5미터 깊이까지의 모든 성질마저도 알아낼 수 있는 꿀 같은 스킬.
'그런데 그거, 저놈한테도 적용될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생물체를 대상으로 측량이라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시도였다.
될 거란 기대도 품은 적 없었다.
그런데 만약 된다면?
되면 핵이득.
안 돼도 그저 그만.
밑져야 본전이리라.
'일단 한번 해 보자. 측량!'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로이드가 눈에 힘을 빡 주었다.
측량 스킬을 발동하며 기가티탄을 올려다보았다.
츠츠츠츠츠!
[스캔을 시작합니다.]
믿기지 않는 메시지와 함께, 기가티탄의 몸 곳곳에서 맵핵과도 같은 데이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71화. 약점 공략 (1)
[스캔을 시작합니다.]
'어?'
로이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토끼눈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된다.
진짜로 된다.
'와, 이게 되네.'
지금은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째서 이게 되는 건지 의문을 품을 때도 아니었다.
감탄은 나중에 해도 된다.
이게 왜 됐는지 분석도 나중에 하면 충분하다.
'지금은 일단 이걸 써먹고 볼 때야.'
의문은 나중에.
지금은 활용부터.
로이드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의 내용에 집중했다.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츠츠츠츠츠!
눈길이 닿는 곳마다 시야가 증강현실처럼 바뀌었다.
하비엘을 잡으려 날뛰고 있는 기가티탄의 거대한 몸체.
그 몸 구석구석까지 갖가지 정보가 분석되고, 데이터로 떠올랐다.
마치 맵핵으로 기가티탄의 모공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살펴보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기가티탄이 지닌 엄청난 방어력의 비결도 알 수 있었다.
'측량 결과 저놈의 갑각 구성이... 으음, 키틴질에 상아질이 섞여 있었군.'
그것도 그냥 섞여 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분자 단위에서부터 3중 벌집 구조로 얽혀 있었다.
3중 벌집 구조가 중첩되며 다시 나선 구조로 엮여 있었다.
거의 최첨단 케블라 섬유로 만들어진 방탄복 같았다.
'심지어 그게 평균 두께가 1미터야.'
무려 1미터 두께의 최첨단 생체학적 방탄복.
방어력의 비결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갑각 표면 전체에 미세한 물결무늬가 일정한 방향으로 새겨져 있어.'
그 물결무늬는 합쳐지며 전체적으로 이마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 이마엔 가시처럼 치솟은 거대한 뿔이 있었다.
로이드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저 뿔, 그냥 장식이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모든 물결무늬가 모여드는 뿔.
한데 그 뿔은 속이 텅 비어 있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장식용은 아니겠지. 그럼 혹시 이것도 될까. 설계!'
로이드는 설계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의 옵션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딩동.
[설계 스킬 옵션 ③ : 시뮬레이션 모드를 실행합니다.]
[측량 스킬로 파악한 지형 데이터를 시뮬레이션 대상으로 지정합니다.]
츠팟!
가상의 설계 공간 배경이 밝아졌다.
수많은 점과 선이 떠올랐다.
연결되었다.
마치 폴리곤으로 구성된 그래픽처럼, 하나의 커다란 형상이 떠올랐다.
방금 측량으로 파악한 기가티탄의 몸이었다.
'좋아, 된다.'
로이드의 시선이 힐끗 움직였다.
하비엘을 잡기 위해 날뛰고 있는 기가티탄의 모습.
저 모습과 시뮬레이션 모드 창에 떠오른 모습이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딱 좋아.'
로이드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을 매만지며 시뮬레이션 모드를 조작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갑각에 새겨진 저 물결무늬와 속이 텅 빈 뿔의 관계야.'
화면을 확대했다.
기가티탄의 등쪽 갑각 한 장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시험하는 물리적 충격력은, 으음, 30톤 정도로 해볼까.'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튕긴 그의 검지 끝이 시뮬레이션 속 기가티탄의 등쪽 갑각을 두드렸다.
그러자 방금 설정한 30톤의 충격력이 등쪽 갑각에 가해졌다.
콰아앙-!
충격에 의한 힘이 전달되는 경로.
그 경로가 시뮬레이션 모드 덕분에 시각적으로 보였다.
타격점을 중심으로 붉은 파동이 생성되었다.
그런데 그 충격이 갑각 안쪽으로 파고들지를 못했다.
대신 표면에 수도 없이 새겨진 물결무늬를 따라 흐르듯이 모였다.
그리고 가시처럼 생긴 뿔로 몰렸다.
그 순간이었다.
뿔 내부의 비어 있는 공간이 공명했다.
'저거였어. 충격을 뿔 속의 공간으로 흘려내고 공명시키고 있어. 그래서 받은 타격 대부분이 진동으로 상쇄되면서 흩어지는 거야.'
로이드의 눈이 빛났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볼수록 신기한 자연의 신비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야.'
궁금증을 풀기 위해 측량과 설계를 하는 게 아니다.
지금은 이걸 통해 놈의 약점을 찾아야 할 때다.
그의 눈길이 더욱 바빠졌다.
한층 집요해졌다.
'조금만 더 버텨라, 하비엘!'
이렇게 하비엘이 시간을 끌어주는 때가 아니라면 기회가 없으리라.
그걸 잘 아는 로이드는 기가티탄의 모든 부위를 대상으로 실험을 거듭했다.
수많은 물리적 특성과 내구도를 시험했다.
마침내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다.'
로이드는 가늘게 뜬 눈으로 한 지점을 주목했다.
기가티탄의 가슴과 배가 이어지는 11번 배갑과 12번 배갑의 연결 부위였다.
'곤충이 아니라서 정확히 가슴과 배라고 할 순 없지만 어쨌건 뭐, 저곳이 그나마 제일 약해.'
실험 결과가 그랬다.
갑각이 얇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등보다 더 두꺼웠다.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나마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부위이기도 했다.
'뿔, 그리고 타격 각도. 이 두 가지가 핵심이야.'
그것이 약점 관통을 위한 조건이었다.
첫 번째 준비로는 뿔을 제거해야 했다.
'그래야 충격 분산 효과를 없앨 수 있으니까.'
갑각 표면의 미세한 물결무늬를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뿔을 제거할 수는 있다.
만약 뿔이 사라지면?
물결무늬를 따라 흐른 충격력이 뿔을 통해 공명되지 못할 것이다.
공명되지 못하고 흘러간 경로를 따라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각도야.'
11번과 12번 배갑 사이의 연결부.
그곳을 꼬리에서 머리 방향으로, 정확히 45도의 각도로 비스듬히 찔러야 했다.
물론 약한 힘으로 찌르는 건 어림도 없을 터.
'하지만 하비엘이 발파를 쓴다면 충분히 가능해.'
그 내용으로 세 번이나 실험했다.
결과는 모두 성공이었다.
화강암 암반도 쪼개는 발파였다.
약점 관통의 조건만 맞추니 무난하게 갑각을 뚫어냈다.
그 안쪽의 배신경삭과 여러 조직을 한꺼번에 관통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치명타를 먹일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어.'
로이드는 시뮬레이션 모드를 껐다.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여전히 기가티탄의 공세에 내몰리고 있는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힘껏 외쳤다.
"야! 들리냐!"
대답이 없었다.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젠장.'
더 가까이 가긴 싫은데.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하비엘이 죽을 것 같았다.
로이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오, 저 오지랖 영웅병 환자 같은 놈! 이래서 소설 주인공들은 안 돼. 도무지 현실 감각이라는 게 없다니까.'
저놈은 대체 어쩌자고 저런 괴수와 정면으로 싸우겠다는 생각을 한 걸까.
생판 모르는 시민들을 위해 나설 각오를 품은 걸까.
솔직히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영웅이 자신의 호위기사라는 사실에서 에스프레소처럼 짙은 비애감을 느껴야 했다.
'으이그, 진짜!'
각오를 다진 로이드는 달려나갔다.
150미터, 100미터....
하비엘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마침내 기가티탄의 거대한 몸체가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힘껏 외쳤다.
"야! 인마!"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나 마나를 사용해서 목소리를 보낸 건지, 딱히 외치지도 않는 차분한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로이드 님?"
"그래! 나다, 인마!"
"같이 싸울 생각이신 겁니까?"
...어째서 녀석의 목소리에서 반가움이 느껴지는 걸까.
로이드는 치를 떨며 대꾸했다.
"같이 싸우긴 개뿔! 내가 그런 짓을 왜 하냐!"
그가 외쳤다.
"지금 너 난감하지! 아무리 베고 찔러도 저놈 갑각에 흠집 하나 못 새겨서 초조하지?"
"아닙니다."
"아니야?"
"예."
"어째서?"
"일단 뿔부터 공략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뭐?"
로이드는 얼결에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기가티탄.
그 거대한 덩치 너머로 놈의 머리가 얼핏 보였다.
한데 그 뿔이, 이미 반쯤 잘려 있었다!
"이건 단순한 제 느낌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저 뿔이 충격력을 분산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 저 뿔부터 잘라낼 생각입니다."
"헐."
차분하게 들려오는 하비엘의 목소리.
그 차분함과는 반대로 질풍처럼 뛰어오르는 녀석의 실루엣.
그걸 보며 로이드는 실감했다.
'천재란 저런 거구나.'
과연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그랜드 마스터가 될 녀석이랄까.
이쪽이 측량 스킬까지 써가며 분석한 기가티탄의 약점.
그걸 하비엘은 직접 부딪치는 과정에서 본인의 느낌만으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 같았다.
"그럼 놈의 명치 쪽에 약점이 있다는 것도 파악했냐!"
"아뇨, 그건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온 거야, 인마!"
어쨌건 기가티탄의 약점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선 하비엘밖에 없다.
그러니 약점에 대한 정보를 알려줘야 한다.
그게 하비엘을 살리고 자신도 살 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외쳤다.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휘리릭, 타악!
어느새 바로 옆에 착지하는 하비엘.
녀석이 다짜고짜 손을 뻗어왔다.
"그러니 잠시 실례."
"엇?"
터업!
이쪽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땅을 박찼다.
그때부터 맨몸으로 KTX 고속열차를 타는 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으, 어어엇!"
후아아앙-!
로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발이 땅에서 뜨는가 싶었는데.
그 순간부터 지면이 쏴아악 지나갔다.
태풍 같은 바람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맞바람이 너무 강력해서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위쪽에서는 실시간으로 기가티탄의 공격이 쏟아졌다!
쐐애액, 콰아앙-! 쿠콱!
해안 바위 절벽이 실시간으로 파괴되고 무너졌다.
돌가루 파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 사이를 하비엘이 질풍처럼 내달렸다.
졸지에 그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채 아이스크림 봉다리처럼 덜렁거리게 된 로이드가 외쳤다.
"그, 와아악! 너! 평소 나한테 불만 있었냐!"
"예. 당연한 말씀을."
"...."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십시오. 저 괴물의 약점."
"우으윽! 이거 놓고 말하면 안 될까!"
"멀리 떨어져서 들으려니 내용을 잘못 알아들을까 불안해서 이러는 겁니다."
"가아악! 젠장!"
급격한 방향 전환과 가속.
그 속에서 로이드는 구토를 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외쳤다.
"아까 설명한 대로야! 저놈 가슴과 배 이어지는 자리, 열한 번째와 열두 번째 배갑 사이! 보이지?"
"예, 보입니다."
"거기 중앙을 꼬리에서 머리 방향으로! 45도로 비스듬히 찔러! 발파로!"
"그러면 되는 겁니까?"
"아마도? 일단 그 전에 뿔부터 잘라야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물음은 없었다.
쓸데없는 의문으로 낭비할 시간도 없었다.
지금은 서로를 믿어야 할 때다.
"그럼 여기 계십시오."
터억!
착지한 하비엘이 비로소 손아귀를 풀었다.
내내 붙들려 있던 로이드의 뒷덜미가 해방(?)되었다.
그리고 하비엘이 다시 도약했다.
파앗!
그렇게 로이드는 해안 절벽 바위틈에 남았다.
기가티탄을 향해 재돌격을 감행하는 하비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제 봐도 하비엘의 전투는 예술 같다고.
쒸아아아악! 콰앙-!
기가티탄의 발 하나가 땅을 밟았다.
달려드는 하비엘을 노리고 내리찍은 발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하비엘은 도약을 마친 뒤였다.
아니, 아예 기가티탄의 다리를 연달아 박차며 허공을 '날고' 있었다.
타다닷!
기둥 같은 다리를 박찼다.
빛살처럼 솟구쳤다.
그 위를 가로막는 다리 관절.
검으로 후려쳤다.
검기의 반탄력에 몸을 맡겼다.
수평으로 튕겨가다가 아래로 발파를 쏘았다.
비스듬히 상승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쇄도해 오는 기가티탄의 부속지 다섯 가닥을 피하고, 흘려냈다.
마침내 괴수의 등딱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질주했다.
투화학!
질풍이 생명을 얻어 내달리듯.
빛처럼 쏘아지는 화살 그 자체가 된 듯.
하비엘의 섬전 같은 질주가 기가티탄의 머리를 향했다.
기가티탄이 미처 몸을 털기도 전에 도약했다.
질주의 기세를 고스란히 검에 실었다.
허공에서 우측방으로 회전하며 회전력까지 실었다.
검을 휘둘렀다.
베었다.
이미 수십 번이나 똑같은 방향과 각도로 칼질이 들어간 자리였다.
서늘하게 빛나는 검날이 그곳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렇게 뿔을 스치듯 지나간 직후.
서컥!
기가티탄 이마의 뿔이 잘렸다.
그르르륵!
성난 기가티탄이 하비엘을 향해 온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때 이미 하비엘은 착지와 방향 전환까지 마친 후였다.
콰콰콰콰콰-!
괴수의 성난 돌격에 땅거죽이 통째로 뒤집혔다.
그 공세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하비엘이 내달렸다.
뒤집혀 일어나는 땅거죽 꼭대기만을 밟았다.
송곳니를 품듯 눈을 번득였다.
'바로 저곳.'
로이드가 알려준 약점 부위를 포착했다.
바람처럼 움직이며 스며들듯 기가티탄의 거대한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잡았다.'
이곳에서 머리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45도.
그 말을 되새기며 검 끝을 미세하게 치켜들었다.
마나 써클의 충돌을 만들어내며 뻗었다.
발파였다.
한데 그 발파의 기세가 약점 부위를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후우웅!
"...!"
별안간, 엄청난 기세의 돌풍이 왼쪽에서 하비엘을 덮쳐왔다.
기가티탄의 곤봉 같은 앞발이었다.
"쯧!"
반사적으로 발파의 방향을 틀었다.
쇄도해 오는 앞발을 향해 내뻗었다.
육중한 앞다리 곤봉.
날카로운 기세의 발파.
두 힘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투확!
폭발과 함께 하비엘의 몸이 퉁겨졌다.
아니,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크읍!"
콰학!
발이 바위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주저앉을 틈은 없었다.
후우우웅!
앞서의 일격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앞다리 곤봉이 떨어져 내려왔다.
하비엘은 즉시 몸을 날렸다.
바위가 폭발적으로 부서졌다.
무수한 파편 속에서 하비엘이 반격을 시도했다.
맹렬하게 약점을 노렸다.
기가티탄도 집요하게 자신의 약점을 방어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앞둔 은발의 기사와 빌딩 사이즈의 괴수.
두 존재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하게 격돌했다.
그리고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격돌을 지켜보던 로이드는 생각했다.
'하, 저대로면 힘들겠는데.'
아무래도 그냥 놔뒀다간 하비엘이 죽을 것 같다.
따라서 이제는 발을 빼기가 좀 어려워진 것 같다.
아무래도 하비엘이 놈의 약점을 안정적으로 공략할 수 있도록 이쪽도 뭔갈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오늘 이 몸의 역할은 어그로 끌기라는 거구만.'
어그로.
혹은 시선을 끄는 낚시.
그걸 해내려면 무슨 짓을 벌이는 게 좋을까.
로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저 멀리 크레모 시가지를 보았다.
그곳의 광장 구석.
첨탑에 처박힌 인어 동상이 얼핏 보였다.
'아까도 기가티탄, 저것 때문에 날뛰기 시작했었지 아마?'
그 뒤로도 시내로 날아간 인어 동상을 더 공격하기 위해 육지로의 상륙까지 감행했다.
그런데 만약, 저 인어 동상이 바로 앞에서 깔짝대며 칠성장어 승천댄스에 팝핀 훌라춤까지 흥겹게 춰댄다면 기가티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비엘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 세상에서 온몸으로 익힌 절대적 법칙 하나를 떠올렸다.
자고로 어그로를 끌 때는?
게임 x 같이 하네 소리가 나올 때까지, 상대를 제대로 빡치도록 만들어줘야 하는 법이다.
72화. 약점 공략 (2)
"비켜요! 비켜!"
"여기, 꺼내줘요!"
"불이야!"
"저쪽부터 도와줘! 다들 움직여!"
평범한 저녁이었다.
고단했던 일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식사를 했다.
그렇게 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서 쉬던 참이었다.
교역도시 크레모의 대부분 사람들이 다들 그러했던, 지극히 평범한 저녁이었다.
평소라면 그러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재난.
아니, 느닷없이 날아와 처박힌 인어 동상.
그 파괴적 사고가 터지고부터 도시의 모든 일상이 무너졌다.
재난의 밤이었다.
"여기요! 다리가 끼었어요! 누가 좀 꺼내줘요!"
"잠시만 기다려요. 사람들 불러올게요!"
광장 인근은 아수라장이었다.
무너진 건물에 깔린 사람들이 살려달라 소리쳤다.
한데 그들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재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무너진 건물의 어느 화덕에서 흘러나온 작은 불씨였다.
그러나 불씨 주위에 부서진 나무와 가구가 가득했다.
불이 금방 옮겨붙었다.
삽시간에 커졌다.
건물을 삼키고,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형 화재로 점점 커져갔다.
"불이야!"
"물 가져와! 물!"
시민들과 경비대원들이 숨 가쁘게 움직였다.
건물 잔해를 치우고, 사람들을 구조하고, 물동이를 가져왔다.
그러나 바닷바람이 문제였다.
건조한 겨울 날씨 또한 문제였다.
한번 붙은 불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메마른 바람을 타고 너무나 빠르게 번졌다.
아무리 물동이를 부어서 불을 꺼도 소용이 없었다.
불이 꺼지는 속도보다 번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대로면 자칫 시가지 전체로 화재가 번지는 대형 참사가 벌어질 판국이었다.
"1대대는 광장 인근 구조 활동에 전념하도록. 2대대와 3대대는 아직 멀었나?"
"집결 중입니다."
"늦어. 지금 당장 방화선을 구축해야 해."
크레모 시의 경비대 지휘관이 이를 갈았다.
상황이 결코 좋지 못했다.
아니, 시시각각 나빠졌다.
'큰일이다. 감당이 안 돼.'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만큼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하필이면 이렇게 강풍이 부는 날이라니. 불길이 수습이 안 돼. 게다가 부대를 지휘할 인원 다수가 주군을 모시고 앞바다에 나가서 돌아오질 않고 있어.'
수습이 안 되는 불길.
그걸 꺼야 할 경비대도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중간 지휘자 대다수가 크레모 백작을 모시고 범선에 탔던 까닭이었다.
게다가 도시 밖의 상황도 아름답지 못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초월적으로 절망적이었다.
'저놈이 뭍으로 올라오다니....'
도시의 바깥, 해안 절벽 지대.
그쪽을 돌아보면 악몽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달빛 속에서 날뛰는 90미터 덩치의 괴수가 얼핏 보였다.
기가티탄이었다.
그르르르르륵!
대지를 긁는 듯한 낮고도 위협적인 괴성이 여기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 아예 달려오듯 고막을 쿵쿵 때려댔다.
'저놈이 여기까지 오면... 끝장일 거야.'
그는 확언할 수 있었다.
그러잖아도 화재에 난장판이 된 도시.
저 기가티탄이 여기로 와서 난리를 피운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경비대를 비롯한 백작의 군대 전체가 목숨을 버려도 막을까 말까 할 것이다.
'한데 주군께서는 소식도 없으시다. 어쩌면 벌써 저 괴물에게 당하신 건지도 모르고. 우리 도시의 운명도... 오늘까지인 건가.'
경비대 지휘관의 가슴속에 암운이 드리웠다.
착 가라앉은 눈길로 시가지를 돌아보았다.
광장에서부터 시가지를 좀먹으며 번지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덕분에 그는 목격할 수 있었다.
치솟으며 번지는 불길.
그렇게 붉게 비치는 밤하늘.
그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고 있는 직경 60미터짜리 핑크색 물풍선의 위용을.
"하망!"
뚜옹-!
하망이가 외쳤다.
동시에 입을 크게 벌렸다.
크게 벌린 환상종의 입에서 10만 리터가 넘는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쏟아져 나왔다.
쏴아아아아!
상공에서 쏟아져 나온 바닷물이 공기의 저항에 부딪혔다.
조각조각 덩어리로 갈라졌다.
수십, 수백만 방울로 흩어졌다.
광장과 시가지 전체로 뿌려졌다.
촤아악!
삽시간에 쏟아진 국지성 폭우와도 같은 기세.
그 한 방으로 시가지에 번지던 불길이 단숨에 잡혔다.
옆 건물에 옮겨붙던 불꽃이 꺼지고, 기둥과 지붕을 태우던 열기가 확 식었다.
그리고 주먹 크기로 줄어든 하망이가 떨어져 내려왔다.
로이드의 손바닥 위로 착지했다.
"하망!"
찰포닥!
"잘했어."
로이드가 하망이를 쓰다듬었다.
사실은 이거, 성공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하망이가 도시 밖에서 시가지 상공까지 도약해서 날아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걱정이 기우였다.
하망이의 능력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몇 번 지면에 몸을 부딪치는 사이에 탱탱볼처럼 잘도 튀었다.
"정말 잘했어. 오늘 네가 많은 사람들을 살린 거야."
"하망!"
로이드는 하망이를 한 차례 더 쓰다듬어준 뒤에 품속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크게 외쳤다.
"더 달려, 뽀동아! 이랴!"
"뽀동!"
로이드를 태운 뽀동이가 더욱 힘껏 도도도 뛰었다.
시가지 대로를 가로지르고, 건어물가게 지붕을 뛰어넘고, 광장을 통과하며 달렸다.
그러자 마침내 보였다.
'찾았다.'
광장 한쪽에 우뚝 서 있는 첨탑.
그 옆구리에 인어 동상이 틀어박혀 있었다.
로이드는 단숨에 첨탑 아래까지 뽀동이를 몰아갔다. 외쳤다.
"뽀동아! 뽑아!"
"뽀도동!"
뽀동이가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뛰어올랐다.
첨탑 옆구리에 틀어박힌 인어 동상을 폴짝 붙잡고 매달렸다.
통통한 궁딩이를 씰룩거리며 앞발에 끙차 힘을 주었다.
콰자작!
첨탑에 깊숙하게 틀어박혀 있던 인어 동상이 단숨에 쑥 뽑혀 나왔다.
'딱 좋아.'
그의 눈이 빛났다.
형편없이 뭉개지고 찌그러진 인어 동상이었다.
아까 기가티탄의 몸통 박치기에 맞아 여기까지 날아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의 윤곽이나 실루엣은 대충 살아 있었다.
부서진 머리와 두 팔도 근처에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자아, 이거 짊어질 수 있겠어?"
"뽀동!"
다행히 뽀동이는 제 몸보다 큰 인어 동상을 무리 없이 짊어질 수 있었다.
로이드가 끙끙대며 가져온 두 팔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가자!"
"뽀동!"
그대로 광장을 뒤로하고 내달렸다.
광장에 남겨진 사람들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일 다급했던 불을 꺼주었으니, 나머지 구조 활동은 남은 경비대와 사람들이 해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으며 뽀동이를 몰아갔다.
"저쪽! 조선소로!"
"뽀동!"
로이드의 손짓에 뽀동이가 방향을 틀었다.
앞서 해상 인공 지반 공사를 치르기 위해 조선소에서 만들었던 케이슨.
그 케이슨을 주문하고 확인하러 다니느라 익숙한 길이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손쉽게 조선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염두에 두었던 물건도 금방 찾아냈다.
'대형 수레를 항상 저쪽에 세워두던 것 같던데... 옳지. 찾았다.'
로이드의 눈이 빛났다.
조선소에서 사용하는 특수 대형 수레가 그곳에 있었다.
대량의 목재, 혹은 소형 선박을 육상에서 운송하기 위해 사용하는 괴물이었다.
엄청난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굵은 바퀴 축.
사람의 키만큼 큰 여섯 쌍의 바퀴.
이 큰 도시에서도 두 대밖에 없는 특수 사이즈의 수레였다.
"뽀동아? 저기!"
"뽀도동!"
로이드가 수레를 가리켰다.
그 뜻을 즉시 파악한 뽀동이가 움직였다.
짊어지고 있던 인어 동상을 수레에 올렸다.
커다란 수레가 한 차례 출렁였지만 상관없었다.
괴물 수레답게 엄청난 무게의 동상을 충분히 버텨냈다.
로이드는 동상에 대한 응급 수술(?)을 감행했다.
'최대한 생생하게, 기가티탄의 눈에 살아 있는 인어처럼 보여야 할 테니까.'
선박용 밧줄을 넉넉히 가져왔다.
인어 동상의 몸에 꼼꼼하게 둘렀다.
그렇게 두른 밧줄로 부서진 두 팔을 연결했다.
마침 동상의 두 팔은 관절마다 야무지게 부서져 있었다.
즉, 어깨는 물론이고 팔꿈치, 손목 등이 다 분리된 상태였다.
그걸 밧줄로 죄다 묶고, 연결했다.
연결된 관절마다 쌍절곤처럼 덜렁거렸다.
부러진 목도 비슷하게 연결했다.
팔보다 덜렁거림이 덜하게.
살짝 까딱거리는 정도로만.
그렇게 임시로나마 청동제 인어 풍선 인형이 완성되었다.
'리얼리티 제대로네.'
이 정도면 수레가 흔들릴 때마다 밧줄로 연결된 관절들이 알아서 흐느적흐느적 움직여 주리라.
오히려 부서지기 이전의 동상이었던 때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이놈을 이렇게... 세워서! 으읏!'
다행히 수레는 바닥을 비스듬히 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현대의 덤프트럭이 화물칸을 기울여 흙을 쏟아내듯.
운송한 목재를 와르르 쏟아내기 위한 장치였다.
끼릭! 끼릭! 끼리릭!
레버를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때마다 수레 바닥의 장치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바닥면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자연히 인어 동상도 함께 스르륵 일어났다.
비로소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배어났다.
'이 정도면 됐어.'
적당하게 비스듬히 일어난 각도가 딱 보기 좋았다.
마지막으로 로이드는 밧줄로 동상의 몸체와 수레를 완전히 엮어 버렸다.
수레가 격렬하게 달리고 덜컹거려도 동상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수백 톤의 선박도 묶어두는 밧줄이니까, 이만큼이면 충분할 거야.'
확신한 로이드는 나머지 밧줄을 뽀동이의 허리에 묶었다.
길게 늘어뜨려 수레에 연결했다.
"자, 뽀동아?"
"뽀동?"
"달릴 준비 됐어?"
"뽀동!"
뽀동이의 까만 눈동자가 결의로 가득 찼다.
"그럼 가자! 이랴!"
찰싹!
로이드가 뽀동이의 등을 두드렸다.
뽀동이의 통통한 몸체가 폭발적인 기세로 달려나갔다.
뒤에 연결된 육중한 수레가 뽀동이의 괴력에 끌려오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처음엔 천천히.
차근차근 빠르게.
점점 가속이 붙으며.
마침내는 폭발적으로.
"가즈아!"
"뽀동!"
콰콰콰콰콰콰-!
뽀동이가 바닥을 찰 때마다 땅이 퍽퍽 파였다.
폭발적으로 흩날리는 흙 사이로 수레가 질주했다.
그렇게 조선소를 뒤로하고 달렸다.
순식간에 도시를 벗어났다.
서쪽 해안 절벽으로 질주했다.
날뛰는 기가티탄이 그곳에 있었다.
"정면으로!"
"뽀동!"
기가티탄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끌려오는 대형 수레가 해안가 울퉁불퉁한 바위 때문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콰달달달달! 쿠달달!
평탄한 길이 아닌, 울퉁불퉁한 바위 지대.
그곳을 통과하며 수레가 범퍼카처럼 날뛰었다.
미친 듯이 덜그럭대고, 흔들리며, 그럼에도 내달렸다.
당연히 수레에 실린 인어 동상도 격렬하게 흔들렸다.
카달달달달!
목이 쉴 새 없이 까딱거렸다.
두 팔이 미친 듯한 팝핀 웨이브를 선보였다.
덕분에 기가티탄의 시선이 절로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두 눈에 담고 말았다.
자신의 숙적이자 천적인 인어.
그중에서도 특히 거대해 보이는 위협적인 인어.
그 적이 자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모습을.
달려오며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훌라춤을 추는 초월적 광경을.
그르르륵!
기가티탄이 즉시 몸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집요하게 노리던 하비엘을 잊어버렸다.
놈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저 댄스 머신 인어가 자신에게 더욱 위협적인 적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반응했다.
동네 치킨집 개업 행사 풍선 인형을 향해 달려드는 아이들처럼. 혹은 오픈 특가 후라이드 1+1세트에 눈을 번쩍 뜨는 취준생처럼.
달려오는 수레를 향해 마주 달렸다.
맹렬한 포효를 내질렀다.
거대한 곤봉형 앞다리를 날려 왔다.
쐐애애애액!
"틀어!"
로이드가 외쳤다.
뽀동이의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
그의 뜻을 깨달은 뽀동이가 즉시 오른쪽으로 내달렸다.
몇 겹의 밧줄로 연결된 수레가 함께 오른쪽으로 따라왔다.
콰아아아앙-!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
기가티탄의 앞다리 일격에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뽀동이는 잘만 내달렸다.
그 등에 탄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하비엘한테 승마, 배우길 잘했어!'
이 도시로 오는 와중에 차근차근 배웠던 승마.
그렇게 승마를 익힌 덕분인지 미친 듯이 내달리는 뽀동이의 등에서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더 빨리!"
"뽀동!"
콰앙-! 콰아앙-!
파워풀한 인어 동상의 환상적인 팝핀 댄스.
그 모습에 기가티탄이 환장하며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로이드의 가슴도 불타는 드럼통 짊어지고 외줄 타기 하듯 쿵더덕쿵덕 날뛰었다.
"좀 더 빨리! 달려! 그리고 하비엘 인마! 너도 빨리 좀!"
로이드의 외침이 다급해졌다.
일단 기가티탄의 어그로를 끄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니 이제 하비엘이 놈을 잡아줘야 할 차례였다.
'이래서 이런 역할 따위, 맡기 싫었는데!'
그저 가문의 빚만 갚고 싶었을 뿐인데.
그러려고 나름 열심히 살아온 건데.
오늘도 얌전히 숨어만 있으려 했는데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위험을 떠맡게 된 건지.
로이드는 절로 나오는 탄식 속에서 자신의 팔자를 원망했다.
'이게 다 영웅병 걸린 소설 주인공 녀석, 너 때문이지 뭐!'
그는 바쁘게 뽀동이를 몰아가면서도 원망스러운 눈으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섬전처럼 도약하는 하비엘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파아앗!
이쪽을 추격하느라 무방비가 된 기가티탄.
놈의 약점을 향해 하비엘이 뛰어들었다.
한 자루 검을 끌어당기고서.
통렬히 찌를 준비를 마치고서.
마침내 벼락처럼 내뻗었다.
투확-!
하비엘이 지닌 최강의 기술.
발파가 작렬했다.
73화. 약점 공략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