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보옥을 아십니까 (2)
"육지의 사람은 다 이렇소? 이렇게까지 남을 못 믿을 수가 있다니. 그럼 귀를 열고 잘 들으시오. 진실의 보옥에 대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테니 말이오."
"예에. 예에."
"우선 진실의 보옥은 그저 단순한 신화 속의 허황된 존재가 아니외다."
"예에. 그래서요?"
"정말로 존재했던 것이 맞소."
"예에. 그런데요?"
"저, 정확히는 두 번째 신화의 시대, 그러니까 세상에 봄과 여름만 존재하던 시절까지는 분명히 진실의 보옥이 바다에 있었소."
"흐음, 그런가요?"
"그렇소. 정말이오."
"음, 그래서요?"
"정말로 존재했던 것이 맞단 말이오."
"으음, 그런데요?"
"읏, 이잇, 하지만 그 뒤에 사라졌소. 아니, 무너졌소!"
"흐음, 그런가요?"
"...."
저 육지 인간 놈 저거, 딱 한 대만 후려칠까.
열심히 설명하던 인어 로토루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그래도 괜찮다면.
눈 딱 감고 딱 한 번만 저 얄미운 인간의 알밤 같은 뒤통수를 해머링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기적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저 아득한 어린 시절 어른들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참자. 참아. 참으면 돼. 조개가 진주를 품고 키워내는 비결도 인내라고 그랬어. 그러니까 지금은 참아야 해.'
보옥에 관심을 지닌 자신 외의 존재.
그런 존재는 오늘 만난 이 인간, 로이드가 처음이었다.
한데 순간의 울컥함을 참지 못하여 이 귀중한 만남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로토루아는 경동맥으로 왈칵왈칵 치솟아 오는 혈압을 누그러뜨리려 애쓰며 말했다.
"...후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진실의 보옥은 물건이 아니오."
"물건이 아니라시면?"
"건물이었소."
로토루아의 말이 이어졌다.
"바닷속에 지어진 가장 빛나는 진주이자 보배 같던 건물이 바로 진실의 보옥이었다고 하오. 실로 거대했고, 웅장했으며, 찬란했지. 비록 신화의 시대가 저물며 무너지고 말았지만 말이오."
"흐음."
"자, 이젠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소?"
"흐으음, 글쎄요?"
"...."
"보옥이 물건이 아니라 건물이었다. 뭐, 그 정도는 조금만 잔머리를 굴리면 꾸며낼 수 있는 이야기 같은데 말입니다?"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았소. 진짜외다. 지금까지 우리 가문의 조상들께서 발굴해낸 일부의 기록들, 여러 유물을 통한 해석과 추론을 종합하자면 진실의 보옥은 정말로 건물이었소. 확실하오. 그것도 그냥 건물이 아니었소. 단순히 화려하기만 할 뿐 쓸데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럼 뭐였습니까?"
"마법진이었소."
"마법진이라뇨?"
"건물의 모든 요소들, 그러니까 기초부터 바닥과 기둥, 천장까지 그 어느 부분 하나 빠짐없이 모든 요소가 마법적 구조물을 이루는 거대한 마법진이었단 말이오."
"흐음, 그 말씀을 요약하자면, 진실의 보옥은 거대한 건물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마법진이었다, 이 말인 겁니까?"
"바로 그렇소."
믿어준다.
저 인간, 이쪽의 말에 흥미를 보였어!
로토루아의 입가에 희망(?)을 엿본 자의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야 자신의 이야기가 조금은 먹히는 것 같아서.
비로소 저 인간이 이쪽을 믿어주는 건가 싶어서.
기뻤다.
설레었다.
그때부터였다.
인어 로토루아의 혓바닥이 태풍 부는 날 설치된 풍선인형처럼 열심히 움직였다.
"건물의 기초부터 바닥재와 기둥, 들보, 지붕까지 모든 요소들이 마법적 힘의 흐름에 따라 설계되고 지어졌다고 하오. 그리하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지성체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고도 하고 말이오."
"지성체라니요?"
"스스로 생각하고 추리하며 논리적인 답을 꺼낼 수 있는 마법적 지성을 지닌 존재였소."
"흐음?"
설명을 듣던 로이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로토루아의 말을 듣자마자 대한민국에서 익숙하던 개념 하나를 떠올렸다.
'저거, AI 같은 인공지능을 말하는 건가?'
그럼 설마 진실의 보옥이라 불렸던 건축물.
하나의 마법진이나 다름없었다는 보옥.
그 실체가....
'마법의 힘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같은 거였구만?'
건물 자체가 슈퍼컴퓨터였던 것이다.
단지 그 작동 방식이 과학이 아닌 마법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실의 보옥이 어떤 존재였는지 대번 이해가 되었다.
거기에 계속 이어지는 로토루아의 설명.
그걸 듣자니 더욱 확실하게 진실의 보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진실의 보옥은 마법적 지성을 지닌 건물이었소. 지혜로웠고, 현명했소. 덕분에 어떤 어렵고 복잡한 질문에도 명쾌한 답을 알려주었지. 사소한 개인적 고민에서부터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대한 고뇌까지, 그야말로 진실과 사실을 비추며 가장 정확하고 현명한 답을 알려주는 위대한 존재였다고 하오."
"그런데 그게 어느 날 무너졌고,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렇소."
로토루아가 침울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에 따르면 신화시대의 마지막 날, 거대한 재난이 이 세상을 송두리째 흔들었다고 하오. 그 여파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전쟁을 벌였고. 진실의 보옥은 그 전쟁에 휩쓸려서 그만...."
"파괴된 겁니까?"
"아마도. 적의 수중에 보옥이 넘어가 활용될 것을 두려워한 이들의 짓이라 추정하고는 있소."
"하긴."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랬다.
어떤 어려운 질문에도 척척 답을 해주는 마법적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그런 존재를 손에 넣으면 세상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특히, 모두가 각자도생을 위해 생존의 전쟁을 벌이는 환란의 시기라면 진실의 보옥은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유용하고 위협적인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걸 마지막으로 활용한 이가 부숴 버린 거겠지. 아무도 갖지 못하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마 자신이라도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로이드는 다리가 풀릴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
'그렇다는 건 어쨌건, 진실의 보옥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네.'
생각해보니 그랬다.
신화시대에 존재했다는 핵쩌는 인공지능 건물.
그게 레알 쿨하고 쩔어주던 물건이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결국엔 파괴되고 말았단다.
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단다.
그 뜻은 즉....
'쯧. 삽질했네.'
이제는 남아 있지도 않은 물건을 찾겠답시고 이 머나먼 인어왕국까지 왔다니.
암만 봐도 자신이 시간 낭비를 한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음? 그게 무슨 뜻이오?"
신이 나서 보옥에 대해 설명하다가 멈칫하는 로토루아.
그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향해 물어 왔다.
"날 못 믿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믿을 수 있게 되면 함께 보옥을 찾아보기로 하려던 거 아니었소?"
"음, 그랬지요. 그런데 그 보옥, 파괴됐다면서요."
"그렇소."
"그래서 이러는 겁니다. 보옥 그거, 부서진 걸 찾아봤자 뭐합니까. 써먹지도 못할 텐데."
사실이었다.
그냥 물건도 아니고 엄청난 건물이었단다.
그냥 건물도 아니고 정교한 슈퍼컴퓨터 마법진이었단다.
그게 부서져 버린 거다.
한데 그 흔적을 찾아내고 발굴해봤자?
사용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사실 전 보옥을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 탐사를 하고 있던 겁니다. 그런데 부서졌다면서요. 그토록 정교한 마법진이고 건물이었던 건데.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하면 작동도 안 될 것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소."
"그렇지요? 그렇다고 족히 수천 년은 지났을 흔적만으로 예전의 정교했던 건물을 그대로 복원할 수도 없을 거고. 안 그렇습니까?"
"안 그렇소."
"...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로토루아.
그 모습에 로이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안 그렇다니요? 그럼 복원할 방법이 있는 겁니까?"
"물론이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보옥의 설계도가 있기 때문이오."
"설계도가 있습니까?"
"그렇소."
"그게 어디 있습니까?"
로이드는 가슴이 콩당콩당 뛰는 걸 느꼈다.
'와씨. 설계도가 있었다니!'
그러면 굳이 보옥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설계도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연구하며 건물을 지으면 된다!
하지만 그의 콩당거리던 기대감은 로토루아의 이어진 말에 짜게 식어 버렸다.
"보옥이 무너진 터. 그 터전 자체에 보옥의 정교한 설계도가 새겨져 있었노라는 기록이 있소."
"...."
"그러니 보옥이 있던 터를 발굴해야 하오. 그러면 보옥도 고스란히 복원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나는 품고 있소. 내 조상들도 모두 그러했소. 그렇기에 수십, 수백 세대를 거쳐 오며 희망을 잃지 않고서 발굴에 매달렸던 것이고 말이오."
쩝.
'결국엔 보옥이 있던 터를 찾아야 하는 거구나.'
로이드는 내심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게 완전히 헛걸음은 아니니 다행인가.'
로토루아의 말을 들으면서 보니 그랬다.
보옥이 파괴되긴 했지만.
그래서 사라졌긴 했지만.
보옥의 터를 찾으면 설계도를 얻을 수 있단다.
하니 그 설계도만 있으면 어찌어찌 보옥을 복원할 수 있을 듯했다.
'뭔가를 짓고 만드는 건 그나마 나한테 익숙한 일이니까.'
희망이 엿보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삼 로토루아를 의심하며 낚시질을 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인어, 내 의심 때문에 억울함에 흥분해서 자기가 아는 걸 거의 다 떠들었어.'
말 그대로 알아서 술술 불었다.
덕분에 너무나 편하고 신속하게, 일목요연하게 보옥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로토루아의 본심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최소한 사기꾼은 아닌 게 확실해.'
아까부터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게 보였다.
물론 연기력이 뛰어난 사기꾼들도 저런 모습을 충분히 보일 수는 있을 터다.
하지만 로이드는 로토루아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까부터 눈앞에 실시간으로 떠오르고 있는 메시지 덕분이었다.
딩동.
[인어 로토루아가 자신의 진심을 좀처럼 믿어주지 않는 당신의 철벽같은 태도에 초조함과 실망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인어 로토루아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2 하락하였습니다.]
[인어 로토루아와의 현재 관계 : +14]
[주요 인물과의 관계가 약간 악화되었지만, 그에 따른 RP 몰수는 없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482]
'이렇게, 벌써 호감도가 개방되어 버렸으니까.'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그걸 보는 로이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RP를 제공해주는 호감도 관계.
그건 아무에게나 개방되는 게 아니었다.
이쪽의 세력에 상대가 진심으로 포섭이 되었을 때에만 호감도 시스템이 열렸다.
즉, 이렇게 로토루아와의 호감도 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이쪽의 사람이 되기로 진심으로 결심하고 있다는 증거지.'
그런 결심은 거짓말로는 나오지 않는다.
이쪽에게 사기를 치려는 자도 저런 결심은 못 품는다.
애초에 그런 자와는 호감도 시스템 자체가 열리지도 않을 것이다.
덕분에 로이드는 이제 로토루아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의심을 한 덕분에 중요한 걸 확인했어.'
그의 입가에 스며든 미소가 살짝 짙어졌다.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거.
그건 중요했다.
특히 지금처럼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선 더욱 그랬다.
'앞으로 3년도 남지 않았어. 그때부턴 백작님을 시작으로 모두가 줄줄이 죽어나가기 시작할 거야. 그걸 막으려면 시간이 얼마 없어. 누군가에게 속고, 낚이면서 낭비할 시간은 더더욱 없어.'
그러니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자와 함께, 완벽히 믿을 수 있는 정보만을 토대로 움직여야 할 터였다.
누군가에게 속아서.
멍청하게 덜컥 믿다가 낚여서.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될 터였다.
그래서였다.
일부러 로토루아를 의심했다.
돌다리, 아니, 텅스텐 3중 코팅 다리를 오함마로 두들겨보고 건너는 기분으로 행동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의심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을 통해 로토루아를 압박했다.
덕분에 로토루아의 진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그쪽의 말대로라면, 보옥의 터를 찾기만 하면 된다는 거로군요?"
"맞소. 바로 그거외다."
이쪽의 물음에 로토루아가 반색했다.
"그럼, 이제는 날 믿어주는 거요? 보옥 발굴에 동참해주는 것이오?"
"으음, 아마도요?"
"아마도라니?"
"어떤 방식으로 발굴을 하고 있었는지, 우선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로이드가 말했다.
"그쪽 말대로라면 수십, 수백 세대를 거치며 보옥 발굴에 매달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소."
"한데 그 오랜 시간 대를 이어가며 매달린 일인데도 아직 보옥이 있던 터를 찾아내지 못한 거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소만."
"그러니 제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의구심이라니?"
"대체 어떤 비효율적인 방법을 썼길래 수십, 수백 세대 동안 대대로 발굴을 해오면서도 아직껏 보옥을 못 찾아낸 겁니까?"
"그건...."
"그건?"
"그냥, 열심히 팠소."
"파다니요?"
"그냥 팠소. 진짜로."
"...."
로토루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이쪽의 시선에 뻘쭘함을 느낀 걸까.
로토루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조개껍데기 삽으로 해저를 파고 다녔소. 열심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말이오."
"설마 세상 모든 바다를 그렇게 파뒤집고 다녔다는 건 아니겠지요?"
"아, 조상님들은 그렇게 하긴 했는데...."
"그럼 지금은요?"
"나름의 자료 조사를 통해 보옥의 터가 북극해 인근에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소. 그래서 온 세상의 해저를 다 파뒤집는 건 그만뒀소."
"대신 북극해 해저를 다 파뒤집고 있었겠군요. 혼자서. 맞습니까?"
"맞소."
"...."
로이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보옥 발굴에 평생 매달렸는데도 어째서 그걸 못 찾았나 했더니.
'비효율의 끝판대장이네, 완전.'
전 세계의 바다.
아니, 북극해의 바다로만 한정해도.
그 해저의 면적이 얼마나 될까.
한데 그걸 혼자 삽질하고 또 삽질하며 찾고 있었다니.
그러니까, 이건 아주 간단한 확률의 문제였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그러니까 못 찾았지요."
"뭐요?"
"아뇨. 됐고. 일단 그럼 같이 가보죠."
"가보자니, 어딜 말이오?"
"그쪽 분이 발굴에 매달리고 있던 현장 말입니다."
"아, 그럼 발굴에 동참해주는 것이오?"
"아뇨. 동참은 아니고."
"그럼?"
"발굴, 순식간에 끝내 버리려고 말입니다."
어서 앞장서라며.
안내하라며.
로토루아의 등을 떠미는 로이드의 입가에 자신감 서린 미소가 맺혔다.
딸랑 삽으로 해저를 파며 터를 찾는 비효율?
이제는 그 비효율을 끝낼 때가 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측량.'
츠츠츠츠츠!
로토루아의 안내로 발굴지에 도착하자마자 측량 스킬을 발동했다.
그의 눈길이 사방을 꼼꼼히 훑었다.
측량 범위에 들어온 모든 해저면.
그 아래 5미터 깊이까지의 지형 데이터가 순식간에 스캔되기 시작했다.
262화. 인어는 찜질이 제맛 (1)
[스캔을 시작합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그와 함께 로이드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원래는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어두운 심해 바닥이었다.
그나마 함께 있는 하비엘이 오러로 주위를 밝혀줘서.
그 작은 빛으로나마 주위를 간신히 식별할 수 있던 터였다.
하지만 측량 스킬을 사용하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츠츠츠츠츠...!
마치 적외선 야간 투시경을 사용하듯.
시야가 흑백으로 처리되며 주위의 모든 풍경이 또렷하게 보였다.
근처에서 이글거리는 심해 열수구.
그 외에는 대부분 평탄하기 그지없는 고요한 황무지.
그것이 측량 스킬을 통해 비친 심해 바닥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심해 풍경의 신비로움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보옥 터부터 찾아야 할 판국에 심해 풍경은 개뿔!'
그의 시선이 심해 밑바닥을 향했다.
심해 바닥에서부터 5미터 아래.
지하스캐닝으로 엿보이는 지하의 모습을 주목했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힘들게 직접 삽으로 파면서 보옥 터를 왜 찾아? 지하스캐닝이 있는데.'
지표면에서부터 5미터 아래 지하까지 두루 스캔할 수 있는 측량 스킬의 옵션.
지금까지 이 옵션의 덕을 많이 본 그였다.
눈길만 스윽 던지면 지하까지 다 보였다.
일일이 지하 구조 분석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
가히 그가 지닌 스킬 옵션 중에 은근히 제일 편리한 기능이라 할 수 있었다.
오늘 또한 그러리라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어차피 해저면이든 뭐든 측량으로 다 보일 거니까. 그 아래 파묻혀 있을 보옥의 터도 마찬가지겠지.'
하니 이렇게만 하면 된다.
측량 스킬을 발동하며 북극해 바닥을 모조리 조사하면 된다.
물론 면적이 제법 넓기에 한두 달은 족히 걸리겠지만, 몇 명이서 일일이 삽질하며 찾는 것보다 수천 배는 빠르게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그리고 정확히 1분쯤 후.
그의 확신은 집에 가는 막차 전철을 눈앞에서 놓친 사람의 눈빛처럼 바운스바운스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뭐야. 펄이... 왜 이렇게 두꺼워?'
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곳곳의 해저면 아래 지하를 살폈다.
한데 온통 펄밖에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두꺼운 펄과 진흙만 잔뜩 보였다.
그나마 그 사이로 보이는 특이한 거라고는 진흙 속에서 꿈틀대는 심해 장어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듯 측량 스킬로 심해 장어 승천댄스를 라이브로 감상하는 순간 로이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망했다.'
생각보다 해저면에 쌓인 펄이 너무 두꺼웠다.
이곳이 심해라서.
해류의 영향마저 극도로 적게 받아 변화가 없는 환경이라서.
그저 머나먼 위쪽 얕은 바다에서부터 눈송이처럼 나풀나풀 떨어져 내려오는 각종 유기물과 흙먼지가 두껍게 쌓이기만 하는 곳이라서.
'측량 스킬의 지하스캐닝 옵션 범위보다도 펄의 두께가 더 두꺼워. 여기뿐만이 아니라 저기도, 저곳도, 전부 똑같아.'
로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이러면 나가린데.'
애초에 해저를 삽질하며 보옥 터를 탐색해왔다는 로토루아를 안타깝고도 한심하게 여겼던 자신이었다.
자신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측량 스킬이 있으니까.
지하 스캐닝이 빛을 발할 거니까.
그걸 믿고서 호기롭게 여기까지 왔다.
한데 막상 와서 측량을 해보니 낭패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쓰읍. 어떡하지.'
난감해졌다.
드넓은 심해 해저면 어디쯤에 보옥의 터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런데 예상보다 두껍게 쌓인 펄 때문에 측량 스킬마저 무용지물이 될 판국이었다.
게다가 옆에선 로토루아가 슬그머니 질문마저 날려 오고 있었다.
"직접 와서 살펴보니 어떻소? 보옥 터를 빠르게 찾아낼 희망이 보이오?"
"아뇨."
로이드는 뻘쭘함을 누르고서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미지나 체면 따위를 챙기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기 위해서.
그걸 막을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진실의 보옥을 발굴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심지어 시간이 널널한 것도 아니야. 엔딩 스포일러로 본 3년 후? 3년 그거, 긴 시간 같겠지만 은근 금방일 거니까.'
따지고 보면 진짜로 그랬다.
자신이 이곳, 철혈의 기사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것도 벌써 3년을 훌쩍 넘긴 터였다.
하니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금방 운명의 복원 현상이 시작되리라.
로이드는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와서 보니 여기, 생각보다 너무 넓네요. 게다가 해저면의 펄이 너무 두꺼운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소."
"예. 한데 저 두꺼운 펄을 혼자 삽질로 파내면서 보옥을 탐색하고 있었던 겁니까?"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오."
로토루아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라고, 내 조상님들이라고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오.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이라면 다른 인어들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알면서도 쓸 수 없는 방법이었소."
"협조해주는 인어가 없었던 거로군요."
"그렇소."
로토루아의 미소가 더욱 씁쓸해졌다.
"그쪽 분도 이곳의 인어들에게 보옥에 관한 걸 물으며 다녀봤으니 이곳의 분위기를 잘 알 거라고 보오. 여기 인어들? 보옥에 대해 관심을 지닌 이가 아무도 없소. 그저 까마득한 옛 시대의 전설일 뿐이라고. 그걸 어떻게 찾느냐고. 심지어는 그걸 왜 찾아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일 지경이오."
"지금 이대로도 살아가는 데에 불편함이 없어서인 겁니까?"
"아마도 그런 거겠지. 보옥을 찾느라 헛수고를 하는 것보다 수영을 하며 몸을 단련하는 게 더 낫다고들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오."
"역시 그렇군요."
로이드는 로토루아의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이곳 인어들은 보옥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데 그들을 설득해서 보옥 탐사에 동원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터였다.
'쓰읍. 그래도 좀 아까운데. 여기 인어들, 확실히 피지컬이 미친 수준이니까. 동원할 수만 있으면 저 미친 근지구력으로 온종일 해저면에 삽질을 해줄 수 있을 거야.'
로이드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수록 더욱 안타까워졌다.
저토록 엄청난 피지컬을 지닌 인어들을 수백 명쯤 동원한다면?
이 해역 일대의 해저면을 파서 뒤집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러면 보옥 터를 찾아낼 확률도 훨씬 올라갈 터였다.
'그러니까 이건 로또 당첨 확률이랑 똑같은 거야.'
간단한 문제였다.
드넓은 해저를 한 명이 파는 것과 수백 명이 파는 것.
동 시기의 로또를 한 장만 사는 것과 수백 장씩 사는 것.
아무래도 후자가 당첨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반드시 당첨될 보장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확률만은 확실하게 올라갈 것이다.
거기에 하비엘까지 가세해서 해저면 가득한 펄을 뒤집어 까면?
그러면 보옥 터를 찾아낼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니까 인어들, 동원할 수만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아님 그냥 용용이라도 확 불러와 버려? 아니야. 그랬다간 지난번 용용이 사태의 배후에 내가 있었다는 게 탄로날 거야.'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본드래곤 용용이를 부를 순 없다.
그렇다고 하비엘만 주구장창 으샤으샤 굴리는 것도 비효율적일 터였다.
'녀석이 수천 다발의 오러를 날려대며 해저면 펄을 걷어낼 순 있겠지. 하지만 지상에서 그러는 것보단 위력이 훨씬 약할 거야. 여긴 수압이 엄청난 심해니까.'
이런 심해의 수압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도 그냥 초월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지구의 가장 깊은 곳인 마리아나 해구 바닥에서 핵폭탄을 터뜨린다면?
심지어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핵폭탄인 RDS-200, 차르봄바를 터뜨린다면?
'예전에 다큐에서 봤지. 차르봄바? 그거 장난 아니었어. TNT 50메가톤의 위력에, 충격파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고, 버섯구름 높이만 해도 56킬로미터 상공까지 솟구쳤다고 하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충격파만으로 천 제곱킬로미터 범위의 모든 것을 휩쓸고 파괴했다.
분출되는 에너지만으로도 어지간한 호수 하나를 통째로 증발시킬 정도였다.
그냥, 폭발할 때 생성되는 화구의 지름만 10킬로미터에 달했다.
화구 꼭대기가 거의 대류권과 성층권 경계면에 닿는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 심해에서 그걸 터뜨리면? 결과가 많이 다를 거야.'
지상에서는 10킬로미터에 달할 화구의 크기가 고작 1킬로미터까지만 커질 것이다.
엄청난 수압과 난류에 짓눌려 화구가 찌그러질 것이다.
그렇게 부서진 화구는 결국 약간의 따뜻한 방사성 기포가 되어서 보글보글 수면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냥 물속에서 방사능 방구 한 번 크게 뀌는 거. 딱 그 정도로 그치고 마는 거지. 그 엄청난 차르봄바가 수압 때문에. 수압에 짓눌려서.'
그게 바로 심해 수압의 위력이었다.
그러니 하비엘이 발사할 수천 가닥의 오러도?
지상에서처럼 단숨에 수백 미터 범위의 땅을 휩쓸거나 할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수십 미터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나나 로토루아 씨가 삽질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그래도 그걸론 아쉬워. 이곳 환경에 최적화된 인어라는 고급 인력이 있는데 하비엘한테만 의지하는 건 아쉽잖아?'
이곳의 수압에 익숙한 존재들.
여기서도 아무렇지 않게 끙차끙차 힘을 쓸 수 있는 인어들.
인력을 쓴다면 그런 이들을 동원하고 싶었다.
그래야 보옥 터를 발견할 확률이 확연히 올라갈 터였다.
한데 그들을 설득하고 동원할 방법이 막막했다.
'쓰읍. 뭔가 방법이 아주 없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인어는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나 탐나는 인력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움직여라 대뇌야. 굴러라 전두엽!'
로이드는 간절한 염원으로 머리를 굴리고 고뇌했다.
방법을 고심하고 비책을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주위를 서성서성.
마치 서성이듯 물결을 따라 헤엄치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고민에 잠겼을까.
얼마나 멀리까지 헤엄쳤을까.
문득, 그는 주위의 풍경이 약간 바뀌었음을 느꼈다.
'어?'
낯선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서 올라온 굴뚝 같은 기둥들.
기둥 꼭대기에서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뜨겁고 시커먼 물줄기.
시커먼 물줄기 주위로 와글와글 모여 있는 심해 생명체들.
비로소 느껴지는 매캐한 유황 냄새.
아까 측량 스킬을 발동하던 때 잠깐 멀찍이 보였던 장소였다.
'심해 열수공?'
열수공이란 해저 지각 아래로 스며든 지하수가 깊은 곳의 마그마 열기에 고온으로 가열되어 다시 솟구치는, 일종의 해저 지하 온천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쯧, 피해가자.'
어째 고민에 휩싸여 정처 없이 헤엄치다 보니 이런 곳까지 와 버린 것 같았다.
열수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화수소 가득한 유독성 바닷물.
그 매캐한 냄새와 열기에 기겁하며 로이드는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어라? 잠깐.'
반짝.
그의 대뇌피질 전두엽에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돌리려던 발길을 멈추었다.
빛의 속도로 열수공을 돌아보았다.
"저기, 로토루아 씨? 제가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 말입니다."
걱정되는 기색으로 이곳까지 따라와 준 로토루아.
그에게 물었다.
"당신과 같은 인어들, 혹시 늙으면 관절 질환이 심해지는 편입니까?"
"뭐요?"
"관절 질환 말입니다. 뼈마디가 수시로 쑤신다든가 하는 관절통이요."
"뭐, 대강은... 그렇긴 하오."
로토루아가 떠듬떠듬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많이 보셨겠다시피 우리 인어들은 근력이 매우 뛰어난 편이라서 말이오. 대부분의 인어들이 그 지나친 근력 때문에 관절에 무리를 겪는 일이 많소. 특히 그런 무리가 누적되면서 나이를 먹으면 관절 통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제법 많아지고 말이오."
"그렇습니까? 역시."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얼마 전, 인어들에게 보옥을 묻고 다녔던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도를 아십니까 취급을 받던 당시, 자신을 몹시 귀찮아했던 어떤 할머니 인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그 할머니 인어가 그랬지. 그렇잖아도 관절 쑤셔서 미치겠는데 왜 귀찮게 붙잡는 거냐고.'
그 할머니 인어, 연신 어깨며 허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정말로 관절 통증이 심한 사람 같았다.
한데 돌이켜보니 그 할머니 인어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인어도, 아저씨 인어들도 그랬어. 내가 붙잡았던 수많은 인어들 중에 청년기를 넘긴 인어들은 대부분이 어딘가가 쑤시고 아픈 기색이었지.'
마치 온종일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 직장인처럼.
하루 내내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택시, 버스 기사들처럼.
아니, 그보다는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몸을 혹사하다가 은퇴한 운동선수처럼.
아픈 관절을 습관적으로 주무르거나 두드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래서 추측했다.
나름 짐작했다.
여기 인어들, 과도한 근력 때문에 항상 관절을 혹사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관절 통증에 시달리는 건 아닐까 하고.
'그 추측이 맞았어. 그러면 가능성, 충분히 있을 거야.'
로이드는 직감했다.
직감을 연결했다.
조합했다.
고질적 관절 통증에 시달리는 인어들.
방금 발견한 심해의 뜨거운 열수공.
이곳에서 보고 들으며 얻은 정보들.
전혀 연관성이 없을 듯한 상황들과 요소들.
그걸 하나로 엮었다.
뒤섞고, 조립하고, 조합했다.
마침내 하나의 사업으로 구상했다.
그 사업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룰 방법도 떠올렸다.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내기 위하여.
그 방법을 알아내기 위하여.
진실의 보옥 터를 발굴하기 위해서.
수많은 인어들의 인력을 동원하기 위한 비결을 움켜쥐었다. 끄집어냈다.
"우리, 여기 찜질방 만들면 대박 날 거 같은데 말입니다."
263화. 인어는 찜질이 제맛 (2)
찜질방.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어지간해선 다들 좋아하는 공간.
쫀득쫀득 퍽퍽한 찐 달걀 한 입 베어 물고서 켁켁거리다 얼음 동동 띄운 식혜 한 모금으로 그동안의 모든 번뇌와 피로를 씻어내는 마성의 공간.
로이드도 대한민국에서 찜질방에 가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한창 현장일 미친 듯이 연타 찍던 때였지.'
유독 일복이 터진 시기가 있었더랬다.
쉴 틈도 없이 매일 현장을 들락거렸더랬다.
일당이 쭉쭉 벌리고 쌓여서 정말로 좋았다.
대신 몸 상태는 나날이 안 좋아졌던가.
'피로를 풀 틈이 없었어. 현장일 마치고 고시원 가도 못 쉬었으니까. 공부해야 했으니까.'
마침 다음 학기 등록금 때문에 휴학 중이었지만.
그래서 과제의 압박에서는 벗어났다지만.
그렇다고 마음 놓고 탱자탱자 쉴 수는 없었다.
자신에겐 목표가 있었다.
졸업하고 기사 자격증 취득.
그래서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기.
매일 목을 죄는 지긋지긋한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비로소 평범한 가정을 꾸려서 큰 걱정이나 풍파 없이 평범하게 살 수 있게 되기.
그게 대한민국에 있던 시절 자신이 품었던 최대의 인생 목표였다.
남들에겐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한 목표.
하지만 자신에겐 더없이 절박하고 절실했던 목표.
그걸 위해 하루도 제대로 쉰 날이 없었더랬다.
일주일에 일곱 번은 코피를 쏟았더랬다.
그 와중에 영양 상태도 별로 좋지 못했다.
대부분의 식사를 고시원에서 공짜로 주는 쌀밥과 라면 사리, 김치에 의존했다.
당연히 안색도 매일 싯누렇기 일쑤였다.
그래서였을까.
유독 어깨를 짓눌러 오던 피로에 등이 축 늘어지던 날.
그렇게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장에서 나와 고시원으로 돌아가려던 날.
당시 함께 일하던 형 하나가 자신을 불렀더랬다.
'수호야, 끝나고 일 없으면 찜질방이나 갈래?'
...라고 했더랬다.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찜질방이라니.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였다.
그런 곳에 갈 돈으로 차라리 라면이나 참치캔 몇 개쯤 사두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더랬다.
쪽팔려서 차마 돈 없다고는 말 못 하고.
오늘 바쁘다고.
형 혼자 가시라고.
그렇게 에둘러 거절을 했었더랬다.
한데 그 형이 대뜸 이렇게 대꾸했던가.
'인마, 너 그렇게 살다간 늙어서 골병든다? 형이 돈 낼게. 가자, 새꺄.'
공짜.
...나이스.
그렇게 따라가 본 생애 첫 찜질방은 실로 충격이었다.
황토 찜질방.
다이아몬드 해수 찜질방.
그 밖에도 지지고 볶고 데치고 난리부르스 온갖 컨셉의 찜질방이 있었더랬다.
상상을 초월하는 장소였다.
게다가 그곳에서 맛본 삶은 달걀은 또 얼마나 맛있고 고소하던지.
이게 자신이 아는 달걀이 맞나 싶었다.
게다가 달걀이랑 같이 흡입한 얼음 동동 띄운 식혜는 어땠던가.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을 정도였다.
매일 고시원의 미지근하기 짝이 없는, 언제 청소했는지도 모를 정수기 물로만 목을 축이던 자신에겐 그렇게 달콤한 감로수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좋았지.'
그렇게 그 형과 찜질방에서 몸을 푹 지지고 나오면서는 다짐했었다.
나중에 취직하고 돈 벌면.
비로소 사람답게 살게 되면.
그땐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찜질방에 와야겠다고.
그렇게 내심 야물딱지면서도 비장한 다짐을 품었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 다짐을 지키지는 못했다.
'취직이고 뭐고. 해보기도 전에 여기로 와 버렸으니까.'
로이드는 입꼬리 끄트머리에 피어난 쓴웃음 사이로 추억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여기서 새로 맺은 인연들이 있었다.
수려한 그림처럼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있는 하비엘.
이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로토루아.
둘 모두 의아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아, 둘 다 찜질방은 처음 들어보겠구나.'
생각해보니 그럴 터였다.
로이드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흠흠, 찜질방이라는 거, 로토루아 씨는 처음 들어보시겠지요?"
"그렇소. 그게... 뭐길래 여기다 만들면 대박이 날 거란 확신을 하는 거요? 게다가 그걸 여기 만드는 것과 보옥 터를 발굴하는 일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건지."
"예. 두 질문 모두 간단히 대답하자면 예, 라고 대답하고 싶네요."
"찜질방이 대체 무엇이오?"
"뜨거운 물이나 증기, 공기로 몸을 지지는 겁니다."
"지진다고 말이오?"
"아, 물론 생선 지지듯이 하는 건 아니구요."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피부가 화상을 입지 않을 적당한 열기로 몸을 푹 덥히는 거지요. 근육이 이완되어서 긴장이 풀리도록 말입니다."
"음, 그런 찜질이라면 나도 알고 있소. 우리 인어들도 찜질을 안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정말이오. 다만 그게 불법이긴 하지만."
"불법이라니요?"
로이드가 물었다.
로토루아가 답했다.
"말 그대로외다. 혹시 그쪽은 저곳의 열수공을 보며 찜질방이라는 걸 떠올린 모양인데, 사실 우리 인어들도 저런 열수공에서 몰래 찜질을 즐기곤 하오."
"몰래 말입니까?"
"그렇소. 위험하니까 말이오."
"위험이라...."
"저곳의 물은 너무 뜨겁소. 거리를 적당히 잘 지키고 위치를 잘 잡으면 찜질을 하기에 적절한 온도가 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오."
"하긴 그렇겠군요."
"그렇지.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저곳의 물이 맑지가 않다는 거요."
"혹시 유독 성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유독 성분이라. 아마도 그럴 거요. 저곳의 물을 잘못 들이마시면 정신이 혼미해지오. 호흡을 할 수 없게 되고, 의식마저 순식간에 잃곤 하지. 그러면 매우 위험해지오."
"으음... 바로 옆에 엄청나게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장소에서 정신을 잃고 둥둥 떠다니면 확실히 위험해지겠군요."
"그렇소. 심한 화상을 입기 십상이지. 운이 나쁘면 죽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이곳에선 열수공에서 찜질을 하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소."
어느새 이쪽을 보는 로토루아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잔뜩 배어나 있었다.
그가 물어왔다.
"한데 이곳에서 찜질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겠다니. 여왕께서 그걸 허락하지 않을 거요. 아니, 한다 해도 인어들의 찜질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은 해본 거요?"
"예."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이라면 너무나 간단하다.
"들어보니 좋은 지적입니다. 적절한 열기의 통제. 그리고 유독 성분이 찜질방 시설로 들어오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 그게 이번 찜질방 시공의 핵심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럼 그걸 관리할 방법이 있다는 거요?"
"물론이지요."
로이드는 자신 있게 답했다.
진심으로 물론이었다.
'당연하지. 이게 장난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일을 주먹구구로 추진할까 봐.'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최대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줄이며 보옥 터를 찾아야 한다.
터에서 찾은 설계도를 바탕으로 보옥을 복원해야 한다.
그 뒤에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을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그 방법을 실행하는 데에는 또 얼마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까.
그런 생각을 하자면 단 하나의 스텝도, 과정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찜질방을 만들면 인어들이 막연하게 좋아해 주고 호응할 거란 생각? 그 정도 순진한 생각으로 일을 추진하는 거라면 때려치우는 게 낫지.'
그는 이미 훨씬 꼼꼼한 단계까지 계획을 모두 세운 터였다.
찜질방의 안전 대책.
인어들이 찜질방에 매력을 느낄 요소.
그걸 통해 인어들을 어떤 식으로 찜질방에 중독시킬지.
그 중독성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여 그물을 칠 것인지.
최종적으로는 그 그물에 걸려 퍼덕대는 인어들에게 어떤 내용의 노동 계약서를 들이밀 것인지까지.
로이드에게는 말 그대로 계획이 있었다.
"그러니 일단 안내부터 좀 해주시죠."
"안내라니, 어디로 말이오?"
"가까운 곳에 해저 동굴이나 그 비슷한 장소가 있습니까?"
"있소."
"거리가 얼마쯤 됩니까?"
"음, 기가티탄 다섯 마리쯤 거리일 거요."
"기가티탄 다섯 마리라면... 400미터가 좀 넘겠군요."
"아마 인간들의 거리 단위로는 그럴 거요. 거기로 안내해달라는 말이오?"
"예."
"...."
로토루아는 묘한 눈길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육지 인간은 좀 특이하다.
아니, 특이하다기보단 이상하다.
처음엔 진실의 보옥을 찾겠답시고 인어 도시에서 설쳐댔는데.
그래서 이쪽이 반갑게 접촉했는데.
다음엔 이쪽을 의심하는가 싶더니.
의심을 푼 후에는 대뜸 찜질방인지 뭔지를 여기에 만들겠단다.
마치 그렇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듯이 행동하고 있다.
게다가....
'이 육지 인간의 곁에 붙어 있는 은발의 인간. 저 인간의 태도도 신기해.'
로토루아의 시선이 하비엘을 향했다.
아마도 저 육지 인간 로이드의 아랫사람으로 보이는 은발 인간.
로이드의 어떤 행동도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어떠한 의문을 표하지도 않았다.
찜질방을 만들겠다는 저 엉뚱한 소리에도 그저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로이드의 계획을 따르면 정말로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흠.'
로토루아는 몰래 침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저 육지 인간 둘이 자신을 속이고 이용하려는 건 아닐까.
소문으로 듣기엔 육지의 인간들은 얍삽하기 그지없는 족속들이라던데.
그저 황금이나 돈이라면 눈이 희번득해지며 사악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른다고도 들었는데.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보옥을 찾겠다는 자는 평생 처음 봤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자신도 보옥 탐사에 조금은 지쳐 있던 참이기도 했다.
'막막했으니까.'
나름 20년 넘게 매달렸다.
그런데도 아직껏 조금의 성과도 없었다.
그 사실이 가끔 숨 막히는 불안감을 선사하곤 했다.
어쩌면 이대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바다 밑바닥만 파다가 늙어 죽는 건 아닐까.
자신의 수많은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자신도 아들에게 '꼭 보옥을 찾거라'라는 유언만 남기고는 덜컥 죽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건 싫어.'
두려웠다.
그런 허망은 인생은 싫었다.
한데 이대로만 살아간다면?
결국엔 그렇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한데 오늘, 이렇듯 생각지도 못한 조력자를 만나게 된 자신이었다.
'어쩌면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몰라.'
처음 만나본 자신 이외의 보옥 탐사자.
로토루아는 그 사실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마음을 굳힌 그가 로이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소. 해저 동굴이라. 안내하리다. 따라오시오."
그렇게 로토루아가 앞장을 섰다.
해저 동굴 도착은 금방이었다.
"오."
동굴 입구를 쳐다보는 로이드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거 좋은데?'
기대 이상이다.
일단 입구가 큼지막했다.
입구의 폭만 해도 족히 7미터, 높이는 무려 10미터에 달했다.
'안쪽은 어떨까.'
그는 하비엘의 오러를 등불 삼아 동굴로 들어갔다.
내부는 더욱 기대 이상이었다.
'허헐. 이거 대놓고 노래방 같네?'
동굴 전체의 길이는 약 250미터.
중앙의 메인 통로가 입구에서부터 반대편 출구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그 메인 통로를 따라 크고 작은 방들이 상하좌우 입체적으로 달려 있었다.
작게는 대학가 원룸 정도.
제일 큰 방은 학교 강당 면적쯤 되어 보였다.
'대박이다. 좋아. 딱 좋아.'
쿵덕쿵덕, 동굴 내부를 둘러보는 동안 로이드의 가슴이 절로 뛰었다.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던 찜질방의 대략적인 구조.
그 구조를 적용하기에 너무나 이상적인 공간 배치였다.
'이 정도면 큰 줄기 공사는 이미 치러진 거나 다름없는 수준이야. 기초 공사? 거의 필요도 없어. 이거, 그저 울퉁불퉁한 곳들 좀 깎고. 갖가지 컨셉으로 구분할 찜질방에 따라서 구역 경계 좀 확실하게 나눠주고. 그다음에 열수 공급관 배치하고. 갖가지 편의 시설에 인테리어 공사 좀 하면서 마무리 치면 되겠는데?'
그러면 크게 수고를 들이지 않고 공사를 신속하게 마칠 수 있을 듯했다.
그날부터였다.
로이드는 곧바로 시공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나흘 정도 수시로 동굴을 들락거리며 내부 구조 전체를 측량했다.
동시에 설계 작업에 매달렸다.
보수해야 할 곳.
보강해야 할 곳.
막아야 하는 장소와 터야 하는 지점.
열수관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경로.
그 모든 요소를 고민하고, 계획하고, 설계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 하비엘을 신나게 굴려먹기도 했다.
"어이, 하비엘."
"또 무슨 일을 시키시려는 겁니까."
"하. 이젠 이름만 불러도 대강 아는구나?"
"하도 절 부려먹으셔서 말입니다."
하비엘의 입꼬리에 쓴웃음이 내걸렸다.
"이쯤이면 제 본분이 로이드 님의 호위기사인지, 아니면 그저 써먹기 유용한 공사 장비인지 저 스스로도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래? 아직도 그게 구분이 안 돼?"
"설마...."
"너 기사야. 자부심 가져. 설마 내가 널 대놓고 공사 장비 취급을 하겠냐?"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당연하지. 너 기사 맞아. 완전 명예로운 기사 하비엘 아스라한 경이잖아?"
"흐음."
"왜. 뭐. 왜. 좋은 말을 해줘도 그렇게 가자미눈 뜨기냐?"
"또 뭔가 꿍꿍이가 있으신 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꿍꿍이라니. 그런 거 없거든?"
"정말이십니까."
"그것도 당연하지. 왜 그러세요, 아스라한 경? 제대로 기사 취급받는 게 어색한 거야, 설마?"
"그건 아닙니다."
"아니지?"
"예."
"그럼 가서 일 좀 하자."
"...."
"아까 그 열수공 기억하지? 거기 가면 대나무처럼 기다랗게 쭉 뻗은 모양의 조개가 있을 거거든."
"...."
"그게 심해 관조개라는 거야. 그거 껍질 좀 모아와라. 최대한 많이, 허벅다리 둘레보다 두꺼운 것들로만. 금이 가거나 부러진 것들은 꼼꼼하게 솎아내고."
"...."
"혹시 하기 싫은 거야, 아스라한 경?"
"...."
쯧.
결국엔 이렇게 달콤한 말로 공사 장비 취급할 거면서.
'후우. 진짜 로이드 님도 아닌 주제에.'
확 그냥 저 알밤 같은 뒤통수에 꿀밤이나 한 대 먹여 버릴까.
하비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시며 열수공으로 향했다.
어쩐지 이글거리는 울분(?)을 담아 심해 관조개 껍질 수집에 박차를 가했다.
그동안 로이드도 해저 동굴 찜질방 설계에 매달렸다.
이번 설계에는 상수도의 도, 송수관 설계 방식을 응용했다.
관 두께의 결정과 관로 설정, 급수관 분기 방식, 노출 면적 산정, 매설법까지.
정상적인 공사가 아닌 심해 수중 환경에서도 시공에 이상이 없도록 자신이 아는 지식을 모조리 동원하여 응용하려 노력했다.
설계도면을 노려보는 로이드의 눈에 실핏줄이 알차게 돋아났다.
심해 관조개 껍질을 채집하는 하비엘의 동작이 날로 익숙해졌다.
그렇듯 다시 닷새의 시간이 더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좋아.'
로이드는 완성된 설계도면을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사상 초유의 해저 찜질방을 통해 이곳 인어들을 노동계약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264화. 인어는 찜질이 제맛 (3)
해저 동굴 찜질방 시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넌 이제부터 관벌레 분비액을 담아오면 된다는 거지."
"벌레... 분비액을 말입니까."
"어."
"얼마나 가져오면 되는 겁니까."
"최대한 많이. 그냥 계속. 내가 그만 가져오라고 말할 때까지."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소라 껍질을 내밀었다.
일반적인 소라 껍질과 차원이 다른 사이즈.
어지간한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껍질이었다.
껍질을 받아드는 하비엘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어쩔 수가 없다.
저 가짜가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그럴듯하니까.
'매번 엉뚱한 일을 벌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을 내리거나 기행을 보이기도 해.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면 그 행동이나 명령에는 항상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어.'
그렇게 지금까지 프론테라 가문을 위기에서 건져낸 가짜 로이드였다.
하비엘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해저에 찜질 시설을 만드는 게 어떻게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는 일과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따르자. 믿어보자.'
하비엘은 지금까지 보고 느꼈던 가짜 로이드의 행적을 떠올리며 순순히 움직였다.
부글거리는 열수공에 접근했다.
쉬이잇!
수백 마리의 관벌레가 그를 맞이했다.
위험을 감지한 듯 끈끈한 분비액을 발사했다.
하비엘이 재빨리 소라 껍질을 들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움직이며 소라 껍질로 관벌레 분비액을 받아냈다.
'이거, 평소에는 저 벌레들이 집을 만드는 데에 쓰는 끈끈이인 건가. 아교 같군.'
비로소 로이드가 왜 관벌레 분비액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수중에서 시멘트 대용으로 이 분비액을 쓰려는 거다.
그때부터였다.
하비엘은 종일 관벌레 분비액을 받아내고, 찜질방 시공 현장으로 옮겼다.
현장의 로이드는 분비액을 해저면의 펄과 섞었다.
그리고 수중 동굴의 바닥과 벽면, 천장에 척척 발랐다.
'유흠, 우흐흠. 룰루루.'
콧노래와 함께 수중용 특수 관벌레 시멘트를 바르는 로이드.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공사 현장의 미장공 같았다.
실제로 그는 찜질방으로 쓰일 수중 동굴의 거의 모든 면을 관벌레 시멘트로 매끈하게 마감했다.
혼자서 해내기에는 엄청난 수준의 노가다였다.
하지만 그의 체력은 이미 일반인의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훕! 훕훕! 훗훗훕!'
어느새 중급 소드 익스퍼트에 다다른 마나하트.
추가로 프리플 써클까지 갖춰 버렸다.
그 결과는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 체력이었다.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 와중에 열수공에서 뜨거운 물을 끌어올 열수관을 확보하고 매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이, 이제 관벌레 분비액은 됐으니까 다른 거 좀 가져오자."
"혹시 관조개 껍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 말 안 해도 척척인데?"
"로이드 님과 함께 치른 공사가 한둘이 아니니까요."
하비엘의 한숨 섞인 푸념이 이어졌다.
"측량 다음엔 설계. 기초 시공. 지반 정리하고. 골조 짜고. 시멘트 붓고. 마무리하고. 만약 배관을 매설해야 하는 경우엔 지금과 같은 타이밍에. 이제는 대강 알겠습니다. 현장이 어떤 순서로 돌아가는지를 말입니다."
"그러냐."
"예."
"와아, 좋겠다. 부럽다. 즐겁겠다. 진심으로 축하해."
"...."
쓰읍 진짜.
자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바다 밑바닥까지 끌려와서 저 인간과 이런 공사를 치르고 있단 말인가.
하비엘은 영혼의 뿌리 끝까지 착잡해지는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분주한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미리 채집해둔 관조개 껍질을 가져왔다.
로이드와 함께 열심히 재단했다.
관이 매설될 사이즈에 맞추어 자르고, 다듬었다.
관 사이의 연결 부위는 관벌레 시멘트로 접합했다.
그리고 심해 열수분출공 굴뚝 다섯 개를 열수관과 연결했다.
"야! 밀어!"
콰득!
로이드와 하비엘이 한 호흡으로 움직였다.
열수에 화상을 입지 않도록 멀찍이에서 관을 밀었다.
미리 사이즈를 맞춘 열수관이 열수분출공 굴뚝을 딱 맞게 덮었다.
부그르륵! 콰륵!
열수분출공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던 섭씨 400도의 강산성 황화수소, 납, 철 농축 해수가 열수관으로 밀려들었다.
그 순간 로이드는 측량 스킬을 발동했다.
[스캔을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츠!
그의 눈길이 설치한 열수관을 꼼꼼히 훑었다.
혹여나 열수가 새어나오는 곳은 없는지.
유독 성분이 흘러나오진 않는지.
모처럼 받은 월급으로 호주산 소고기 등심을 고를 때처럼 매의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잠시 후 안심할 수 있었다.
'좋아. 새는 곳이 하나도 없어.'
열수관이 시작되는 열수분출공에서부터 찜질방 안쪽까지.
더 나아가 찜질방 동굴 너머 출구까지.
열수가 새는 곳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시공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시공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열수관 매설에 더욱 매달렸다.
쓸데없는 곳에서 열이 새지 않도록 관벌레 시멘트로 대부분의 열수관을 덮어 버렸다.
대신 열기가 흘러나와야 하는 곳, 찜질방 내부의 각 방에서는 확실하게 열수관을 노출시켰다.
그러자 확실한 변화가 생겨났다.
'오옷, 더워졌다.'
찜질방 내부의 온도가 확 올라갔다.
그 뒤부턴 동굴 내부를 말끔하게 다듬었다.
대형 조개껍질과 게딱지 등으로 문을 만들어 달았다.
각 찜질방 구역별로 테마도 만들었다.
전통(?)의 황토식 찜질방.
해초 가득한 해수림욕 찜질방.
신비로운 발광 플랑크톤 유리구슬을 채운 에메랄드 찜질방.
따끈하게 데워진 새하얀 모래에 파묻혀서 몸을 지지는 컨셉인 열대해변 찜질방.
그 밖에도 히말라야 빙산 찜질방, 통돌이 탈수기 찜질방, 익스트림 번지점프 찜질방까지.
찜질방을 찾을 손님 인어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썼다.
그리고 메인이 될 가장 넓은 강당 크기의 공간에 휴게실을 마련했다.
'한국식 찜질방으로 치면 뒹굴거리면서 만화책 읽고 달걀 까먹는 장소인 거지.'
그렇게, 장장 21일에 걸친 시공이 끝났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찜질방이 완성된 것이었다.
'후아. 다행이다. 운 좋게 열수공 근처에 해저 동굴이 있었던 덕분이야.'
마침 동굴의 구조 또한 기가 막혔다.
대놓고 찜질방 만들라고 자연이 준 선물 같았다.
덕분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기초 공사를 거의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열수관 설치와 매설, 인테리어 공사에만 치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손님을 받을 차례지.'
찜질방을 완성했으니.
이젠 푹 쪄낼(?) 인어들을 데려와야 할 터였다.
그 역할은 로토루아가 맡기로 했다.
"어떻습니까? 오기로 한 분들은 언제쯤 온다고 하셨죠?"
"아, 그게...."
찜질방이 완성된 날 저녁.
로토루아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으음, 그게 말이오. 몇몇 지인들에게 며칠 전부터 약속을 받아내긴 했었소. 찜질방이 완성되면 나중에 꼭 한 번은 오겠노라고 말이오. 다들 분명 그렇게 약속을 했었는데...."
"했었는데요? 설마?"
"...."
"다음에 오겠다고 하는 거군요?"
"미안하오. 면목이 없소."
로토루아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쯧쯧. 어쩐지 느낌이 쌔하더라니.'
원래부터 인어 사회에서도 아웃사이더, 친구가 거의 없는 로토루아였다.
그래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몇몇 지인에게 약속을 받아냈다고.
활짝 웃으며 자랑하던 며칠 전에도 '과연?'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한데 그때의 그 예감이 역시나 맞는 듯했다.
'다음에 오겠다는 건 안 오겠다는 거나 똑같은 거지. 한국인으로 치면 다음에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 라는 말과 동급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로이드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토루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제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으음, 혹시 이런 경우를 미리 대비하셨던 거요?"
"예."
당연한 소리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 인어들에겐 찜질방이라는 장소가 너무 낯설겠지요. 처음 보는 개념일 테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같은 인어도 아닌, 저나 하비엘 같은 육지의 인간이 만든 시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입니다."
"인어들이 찜질방을 별로 좋지 않게 볼 거라고 생각한 거요?"
"예. 저들의 호기심이나 기대감을 확 끌어올릴 방법을 쓰지 않는다면 손님을 끌어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으음, 하면 어떤 대비를 미리 해두신 거요?"
"이겁니다. 잠시만요."
로이드가 찜질방 카운터 뒤에서 뭔가 커다란 덩어리 두 개를 꺼냈다.
그 덩어리(?)의 정체를 깨달은 로토루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거... 심해 왕가재와 왕게 껍질 아니오?"
"예, 맞습니다."
로이드가 씨익 웃었다.
"저와 하비엘이 이걸 쓰고 찜질방 홍보를 할 겁니다."
지금껏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하비엘의 어깨가 살짝 흠칫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미친놈 보듯 로이드를 향했다.
로이드의 미소가 더욱 뻔뻔해졌다.
"뭐. 왜. 뭐."
"...."
"눈으로 욕하지 말고 입으로 말을 해보세요."
"입으로 말 말고 욕하면 안 되겠습니까."
"왜? 이걸 쓰라고 해서?"
로이드가 사람만 한 왕게 껍질을 들어 보였다.
하비엘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전 광대가 아닙니다."
"응. 알아. 기사지."
"예.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한데 어째서 로이드 님은 기사인 제게 그런 꼴사나운 물건을 덮어쓰라고 하시는 겁니까."
"네가 충성하는 가문을 위해서?"
"...."
"네가 이걸 쓰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프론테라 가문이 더 융성할 거고. 위험을 모면할 수도 있겠지. 이거, 따지고 보면 나 하나 좋자고 하는 거 아니야. 나도 이런 거 싫어."
"...."
"그런데 만약 네가 이걸 거절하면? 아아, 그래서였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프론테라 가문 몰락의 시발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하지만 이미 비극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답니다... 라는 역사 선생님 목소리가 200년쯤 후의 어느 교실에서 울려 퍼지지 않을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아스라한 경이 협조하지 않아서. 인어들을 손님으로 끌어오는 데 실패해서. 찜질방이 망하고. 보옥을 못 찾고. 가문이 몰락하고. 사회가 무너지고. 영지민은 도탄에 빠지고."
"...."
"도탄에 빠진 어느 영지민 소년은 온종일 굶었어요. 강아지도 함께 굶었어요. 둘은 꼭 끌어안은 채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차가운 밤을 보냈어요. 그러나 그 누구도 소년과 강아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어요. 그렇게 소년과 강아지의 마지막 숨이 천천히, 확실하게 끊어졌지요. 그 마지막 순간, 소년의 눈꼬리에 이슬 같은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답니다. 소년이 최후의 숨결에 섞인 슬픈 혼잣말을 흘려냈어요. 아아, 그때 아스라한 경이 왕게 껍질만 써줬어도...."
"...."
"그 유언을 들은 강아지가 끙끙대며 소년의 볼을 핥았어요. 하지만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답니다. 강아지는 깨달았어요. 자신도 소년의 곁을 따라가야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래서 강아지는...."
"쓰겠습니다."
"응, 잘 생각했어. 강아지야."
"...."
"아, 네가 쑤욱 끼어드는 바람에 내가 착각을. 흠흠, 잘 생각했어, 하비엘."
"...."
하비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의 품으로 왕게 껍질을 떠넘겨 버리는 로이드.
그 뻔뻔한 면상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정해야 했다.
'후.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 가짜 로이드는 정말로 가문을 살리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게 맞다.
그 방식의 엉뚱함과 괴랄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은 저 가짜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는 것 또한 맞다.
안 그러면 주군이 3년 뒤에 돌아가실 테니까.
"...."
그러니 쓰자.
눈 딱 감고 써보자.
하비엘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핑크색 왕게 껍질을 덮어썼다.
집게발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껍질 아래로 다리만 내놓은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 사이에 로이드도 왕가재 껍질을 덮어썼다.
심지어 목에는 미리 준비한 팻말도 걸었다.
팻말에는 <오픈 기념 대박 이벤트. 찜질방 이용 완전 무료!> 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자, 가자."
"...."
"뭐해? 얼른 안 따라오고."
"...."
왕가재 껍질을 덮어쓰고 뒤뚱뒤뚱 걸어가다가 이쪽을 빼꼼 뒤돌아보는 로이드의 뒷모습.
그걸 보던 하비엘은 애끓는 심정의 사직서를 현장에서 일필휘지로 써갈기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후우.'
참자. 참아.
이게 다 주군과 가문을 위한 일이다.
그 일념으로 그는 로이드와 함께 뒤뚱뒤뚱 움직였다.
인어들의 도시로 들어갔다.
가장 붐비는 알집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로이드가 호객을 위해 열심히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여러분! 이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무려 인어 왕국 최초의 찜질방 오픈 기념! 완전 무료 행사입니다! 유황 냄새 안 맡고 안전하게 근육 피로를 풀고 싶으시다구요? 요즘 관절이 찌뿌둥하시다구요? 일단 지져보십쇼, 형님 누님들!"
"...."
저런 말들을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외칠 수 있다니.
하비엘은 새삼스럽게 여러(?) 의미로 로이드에게 감탄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저래 봤자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래 보였다.
이쪽의 특이하다 못해 튀는 복장.
로이드의 호들갑스러운 외침.
덕분에 제법 많은 인어들이 헤엄을 멈추기는 하고 있었다.
인어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주위로 몰려들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다들 비웃고 있어.'
그저 신기해서.
웃겨서.
마치 광대를 보듯이.
이쪽을 향해 아주 잠깐의 관심을 던져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한낱 구경거리로 삼아 시시덕대고 있을 뿐이었다.
저렇게 모인 인어들 중에 정말로 찜질방에 관심이 있는 이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이런 짓, 암만 봐도 효과가 없다.
그저 처량하고 꼴사나운 몸부림일 뿐이다.
왕게 껍질 속 하비엘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제라도 저 가짜 로이드를 말리는 게 좋지 않을까.
노골적인 비웃음이라도 면하게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품는 순간.
로이드가 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형님 누님 인어님들! 저희 찜질방에 오시면!"
호들갑스럽게 외치며 두 손을 뻗어왔다.
이쪽의 어깨, 아니, 왕게 껍질을 짚었다.
갑자기.
확.
눌렀다.
"찜질하면서도 이 얼굴을 계속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아!"
뽀칵!
너무나 갑자기, 힘껏 왕게 껍질을 내리누른 로이드의 손길.
마치 쿡 짜낸 뾰루지 핵이 피부를 뚫고 올라오듯.
순식간에 왕게 껍질을 깨부수며 짜란 올라온 하비엘의 머리.
그렇게 느닷없이, 하비엘의 얼굴이 드러났다.
"...!"
그 효과는 굉장했다.
265화. 인어는 찜질이 제맛 (4)
지옥을 피해 도망치는 곳.
그곳에 진정한 지옥이 있다.
원래 로이드는 저런 류의 말을 잘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 대한민국 고시원에서 지내던 시절.
너무나 힘들고 무더운 노가다에 지친 나머지.
애타게 도망치는 심정으로 다른 알바를 구한 날.
그는 비로소 저 말을 온몸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로 인형탈 알바 첫째 날이었지!'
인형탈 알바.
설레는 마음으로 복실복실한 치킨 인형을 썼던 첫날.
마침 삼복 중의 2번 타자인 중복이었던 그날.
갓 오픈한 치킨집 앞에서 뙤약볕 아래 치킨 인형 쓰고 전단지를 돌려야 했던 바로 그날!
그는 인간 세상의 생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먼지 풀풀 나고 거친 욕설 오가는 건설 현장.
처음엔 그곳을 벗어나 새로운 알바를 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과 설렘은 딱 처음 1분까지였다.
무려 중복 더위였다.
그런 날에 털 복실복실한 치킨 인형을 쓰고 길거리를 돌아다녀야 했다.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동원하며 전단지를 돌렸더랬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땀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형탈 보며 쪼르르 달려와 꺄르르 해맑게 웃으며 발길질을 해대는 동네 꼬꼬마들이 악마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잘생긴 얼굴은 통한다는 비정하고 냉정한 현실 또한!
'영진이 형이었나. 어휴. 이름도 안 까먹어지네.'
같이 인형탈 알바를 했던 형이었다.
원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날 딱 하루 만났던 사이였다.
그런데 그 형의 이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그날의 어느 사건 덕분이었다.
'같이 전단지 돌리다가 너무 더워서, 쓰러질 거 같아서, 음료수나 한 캔 사 먹자고 했지.'
그 형이 쏜다고 했다.
마침 이쪽도 쓰러지고 싶던 참이었다.
냉큼 편의점으로 달려가 이온음료를 샀더랬다.
그렇게 목이라도 축이려고 편의점 앞 파라솔에 쓰러지듯 앉아서 그 형과 나란히 인형탈 머리를 벗었더랬다.
한데 그 순간.
완전히 난리가 났었다.
'그 형이 인형탈 머리 벗으면서... 완전 잘생긴 얼굴이 샤라방 드러나고... 땀에 젖은 앞 머리칼 촥 넘기고... 새하얀데 살짝 달아오른 뺨에 흐르는 땀 닦으면서 캔음료 원샷하고... 칼날 같은 턱선 아래 목울대가 꿀렁꿀렁 바운스하고... 지나가다가 그 모습 본 여학생들이 난리가 나고....'
그날, 오픈했던 그 치킨집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더랬다.
심지어 그 형은 '홍대 치킨집 인형탈남'이라는 이름으로 SNS 벼락스타가 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형, 그날의 사건 덕분에 어디 연예인 기획사에 들어갔다던가.
"...."
더럽고 치사한 존잘러 놈들.
로이드는 잠시 떠오른 추억을 서둘러 꾸깃꾸깃 뇌 주름 사이로 접어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몇 년 전의 중복날 치킨집 인형탈 사건.
그날의 경험을 교훈 삼아 설계한 상황이 오늘, 이곳에 성공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자신이 난데없이 내리누른 왕게 껍질.
껍질 윗부분을 부수며 튀어나온 하비엘의 머리.
덕분에 모두의 앞에 확 드러난 녀석의 꽃다운 미모.
과연 그 반응은 뜨거웠다.
'녀석, 처음 인어 왕국에 올 때도 저 얼굴로 출입허가를 따냈을 정도니까.'
이미 충분히 검증된(?) 존잘력이었다.
게다가 방금은 의도적인 연출까지 곁들였다.
예전, 보옥을 아시느냐며 인어들에게 묻고 다니던 때와는 달랐다.
당시엔 하비엘 녀석이 이쪽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시종일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더랬다.
게다가 인어들이 이쪽의 질문세례에 기겁하며 헤엄짓을 서두르기도 했었더랬다.
덕분에 대다수의 인어들이 하비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반면, 오늘은 달랐다.
왕게 껍질을 쓰고 있느라 녀석은 완전히 무방비였던 상태.
그 상태에서 갑자기 껍질을 내리누른 이쪽 덕분에.
껍질이 적절하게 뽀각 부서진 덕분에.
녀석의 얼굴이 만천하에 확 드러났다.
그 결과는?
성공적인 찜질방 오픈이었다.
하비엘의 얼굴에 이끌린 인어 몇이 마침내 찜질방의 첫 손님이 되었다.
낯설고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찜질방에 들어갔다가.
완전 행복하게 늘어진 표정으로 나왔다.
그날부터였다.
그 첫 손님들이 찜질방 홍보대사가 되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닷새가 지나며 인어 왕국 곳곳에 소문이 퍼졌다.
가서 뒹굴기만 하면 근육의 피로가 풀리고 관절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찜질방이라는 곳이 있다더라.
그런데 그게 공짜라더라.
심지어 안전하기까지 하다더라.
소문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디테일하게, 깊이 퍼지고 스몄다.
그리고 마침내 찜질방을 오픈하고 엿새째인 오늘.
웅성웅성! 와글와글!
로이드의 시선이 닿는 찜질방 내부.
그 모든 공간에 인어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떤 인어는 실크 같은 머릿결을 살랑거리며.
또 어떤 인어는 불끈거리는 근육의 피로를 풀며.
누군가는 지느러미를 기분 좋게 움직이고, 또 누군가는 편안하게 잠을 청하며.
각자 취향껏 찜질을 즐기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제가 여기 먼저 줄 서고 있었다니깐요!"
"무슨 거짓말을! 난 어젯밤부터 줄 서고 있었는데!"
찜질방 밖에선 수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인어들이 몰려들어서.
수용인원 초과 때문에 입구컷을 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인어들 사이에 새치기와 다툼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말 그대로 대박.'
로이드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귀에 걸렸다.
찜질방을 만들어 인어들을 동원하겠다는 계획.
그 계획의 알찬 첫 단계를 성공적으로 실현했다.
그러니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로이드는 직감했다.
바로 지금이다.
이곳의 모든 인어들을 찜질방의 신세계로 안내했으니.
그들을 헤어날 수 없는 찜질방 마니아로 만들었으니.
이제는 다음 단계의 계획을 실행할 때다.
그날 밤.
하루의 영업을 종료한 이후.
로이드는 찜질방 입구 앞에 새로운 팻말을 큼지막하게 세웠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어이쿠? 이게 뭐야?"
인어 왕국의 할머니 인어 하나가 침침해진 눈을 비볐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근육질 목을 갸웃거리며.
찜질방 입구 앞에 세워진 팻말을 쳐다보았다.
팻말에는 실로 청천벽력 같은 내용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찜질방 오픈 이벤트 종료]
[금일부로 찜질방 무료입장이 금지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쪽을 참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라는 문구였다.
'대체 이게 무슨?'
할머니 인어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무료입장 금지라니.
이제는 뭔가를 내야 찜질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까.
대가를 지불해야만 뜨끈한 물에 온몸을 지지며 관절통을 잊을 수 있다는 걸까.
'그럼 대체 뭘 내야 한다는 거지?'
오늘은 어제보다 더 알차게 찜질을 즐길 거라고.
아예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온종일 지질 거라고.
나름 야물딱진 각오를 하고서 찾아왔던 할머니 인어였다.
그런 만큼, 생각지 못한 팻말 내용이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애써 당혹감을 누르며 눈길을 돌렸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쪽을 보라고?'
마침 그곳에 납작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바위 위에는 반듯하게 두루마리처럼 손질된 미역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미역 두루마리 한 장을 집어들었다.
펼쳤다.
안쪽에 쓰인 깨알 같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찜질방 회원 가입서?"
할머니 인어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그녀의 눈길이 빠르게 샤샥 움직였다.
[해저 동굴 찜질방 회원 가입서]
[본 가입서는 해저 동굴 찜질방의 원활하고 쾌적한 이용을 돕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우선 가입 전에 회원 약관을 꼼꼼히 확인하시고 문서를 작성해주시길 바랍니다.]
'회원 약관이라니....'
할머니 인어는 까닭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걸 느꼈다.
그녀의 눈길이 약관 내용으로 향했다.
[해저 동굴 찜질방 회원 약관]
(1) 해저 동굴 찜질방(이하 '찜질방'으로 통칭)은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됩니다. 회원이 아닌 이용객은 찜질방 입장 및 이용이 제한됩니다.
(2) 회원별 찜질방 일일 이용 최대 시간은 12시간으로 제한됩니다.
(3) 모든 회원은 찜질방 이용 시 소정의 이용료를 지불하여야 합니다. 이용료는 금전이나 물건이 아닌, 찜질방 주인인 로이드 프론테라가 지정하는 장소에서의 노동력으로 제공하여야 합니다.
'...뭐? 노동력? 로이드 프론테라, 그 육지의 인간이 원하는 곳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거라고? 찜질을 하는 대신에?'
할머니 인어의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
이내 괘씸함도 함께 떠올랐다.
'무슨 이런 미친 인간이 다 있을까. 우리 인어들을 뭘로 보고?'
화가 났다.
차라리 진주나 귀한 조개껍질을 받는다고 하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을 텐데.
찜질방을 이용하는 대신에 일을 하라니.
'건방진 인간 같으니라고!'
역시 이래서 육지 인간들은 안 된다.
어딜 가든 그곳을 들쑤시고, 환경을 더럽히고, 엉망진창을 만들곤 하니까.
할머니 인어의 노기 서린 눈동자가 더욱 바쁘게 약관서를 훑었다.
(4) 찜질방 이용에 필요한 노동력은 일일 찜질방 이용 시간의 절반입니다. (예시 : 찜질방 6시간 이용시 = 3시간 노동으로 이용료 지불) (5) 찜질방 이용료인 노동력은 찜질방을 이용한 날짜로부터 이틀(48시간) 이내에 지불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할 시, 해당 회원은 3회에 걸친 이용 제한 조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이용 제한 조치?'
할머니 인어는 쯧쯧 혀를 찼다.
무려 노동력으로 이용료를 받겠다는 것도 기가 차는데.
그 이용료를 48시간 내로 지불하지 않으면 찜질방 이용에 제한까지 가하겠단다.
그야말로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구나 싶었다.
'오냐. 그 잘난 제한 조치가 뭔지나 봐주마.'
할머니 인어의 눈빛에 오기가 서렸다.
(6) 이용료 미납 회원에 대한 찜질방 이용 제한 조치.
① 1회 미납 시 : 10일간 찜질방 입장 및 이용 금지.
② 2회 미납 시 : 30일간 찜질방 입장 및 이용 금지.
③ 3회 미납 시 : 회원 자격 박탈. 회원 재가입 불가. 찜질방 입장 및 이용 영구 금지.
(7) 찜질방 회원제 전환 선착순 이벤트 : 회원 등록을 해주시는 신규회원님 100분께는 찜질방 이용권 60시간을 무료로 제공해드립니다.
"...."
할머니 인어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약관서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런 거다.
'찜질방을 쓰려면 시키는 일을 하고, 그걸 하지 않으면 3회 경고를 받는데, 세 번째 경고를 받으면 영원히 찜질방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런 건가?'
할머니 인어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
구부정한 그녀의 상반신에 꿈틀꿈틀 지렁이 같은 힘줄이 돋아났다.
"에라이! 내가 더러워서 안 하고 만다, 찜질 같은 거."
쫘아악!
회원 약관이 적힌 미역 두루마리가 할머니 인어의 손아귀에 갈기갈기 찢겼다.
그렇게 할머니 인어는 분노로 대흉근을 불끈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이후에 찾아오는 인어들도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찜질이 좋다지만... 내가 육지 인간의 일꾼 노릇까지 해야 하는 걸까?"
"하아, 진짜. 이건 대놓고 우리 인어들을 무시하는 처사 아닌가?"
"내 말이. 아무리 잘생긴 육지 인간이 있다지만. 찜질이 편안하고 좋다지만. 이용료를 진주도 아닌 노동력으로 받겠다니 말이지. 우리 인어들을 뭘로 보는 거야? 우리가 아무 데나 동원되는 값싼 일꾼이라는 거야?"
"차라리 찜질 안 하고 말지."
"동감이에요. 우리, 찜질 없이도 지금까지 잘 지내왔잖아요?"
"맞습니다. 원래 누리고 있던 찜질도 아닙니다. 그런 거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생각도 같소! 찜질이라는 거, 우리 인생에 잠깐 찾아왔던 따스했던 추억 정도로 남겨둡시다!"
어떤 인어는 약관서를 보며 회의감을 느꼈다.
어떤 인어는 가슴 깊이 분노했다.
아무리 찜질이 좋아도 이건 좀 아니라고.
저 육지의 인간이 인어들을 아주 우습게 보는 것 같다고.
찜질, 그런 거 없이도 잘만 살아왔다고.
앞으로도 아쉬운 거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다들 공감하고, 분노하고, 분개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찜질방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매정하게 발길을 돌렸다.
아무도 회원 가입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찜질방 내부는 모처럼 썰렁해졌다.
인어들이 온통 북적이던 황토 찜질방엔 정적만이 맴돌았다.
손님들이 무난하게 좋아했던 해수림욕 찜질방에도, 이국적인 정취가 좋다며 인기 폭발이었던 열대해변 모래식 찜질방에도.
손님 하나 없이 심해 플랑크톤만 떠다녔다.
"이거, 아무래도 망한 거 아닙니까."
보다 못한 하비엘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태연히 어깨만 으쓱였다.
"글쎄. 며칠만 기다리면 달라질걸."
"달라질 거라니요."
"보면 알아."
로이드가 빙긋 웃었다.
그는 내심 확신했다.
지금은 예기치 못한 약관서 내용에 분개하며 걸음을 돌린 인어들.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상황이 바뀔 것이다.
로이드는 자신했고, 기다렸다.
인어들의 분노와 로이드의 자신감 속에 시간이 흘러갔다.
하루, 이틀, 나흘.
마침내 엿새째가 지난 뒤.
왕국의 인어들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자신들이 찜질 없인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는 냉엄한 현실을.
266화. 인어는 찜질이 제맛 (5)
무언가에 중독되었다는 것.
도저히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었다는 것.
거기서 빠져나오기는 생각보다 굉장히 어렵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엔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해서 건강 망치고 후회하는 담배도.
그 담배 좀 끊어보겠다고 담배 대신 매일 피웠더니 덜컥 중독되어 버린, 담배보다 더 비싸서 난감한 금연초도.
오늘은 우상향 그릴까.
내일은 대박 치지 않을까.
밥 먹다가도 가즈아를 외치게 만드는 주식과 비트코인도.
하다못해 3일만 손에서 놓으면 꿈에서 소환사의 협곡을 보게 된다는 게임도.
그 모두가 중독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진리는 이곳 바닷속 깊은 곳 인어 왕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구야, 온몸이 쑤시는구만."
어느 할머니 인어가 연신 투덜거렸다.
우람한 전완근 불끈거리며 허리를 두드렸다.
그때마다 큰북 치는 듯한 펑퍼펑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할머니 인어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허리 관절이 너무 쑤셨기 때문이었다.
'하아.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 돌핀킥을 너무 많이 했어, 쯧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피부도 탱탱하고 근육은 더 탱탱해서 대왕고래와도 능히 몸통박치기를 겨루던 그 창창했던 시절.
그땐 자신의 근력이 영원할 줄 알았더랬다.
튼튼한 자신의 몸이 천 년 만 년 갈 줄로만 알았더랬다.
한데 조금만 세월을 지내보니 아니었다.
서른, 마흔, 쉰.
그렇게 환갑마저 넘기고 나자 그렇게 온몸이 쑤실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의 엄청난 근력 때문에.
관절들이 그 근력에 혹사당해서.
늙으면서 지옥의 관절통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찜질 그거, 참 좋았는데 말이지. 안 그렇수, 영감?"
"호홀홍홍, 나야 뭐 오랜만에 할망구 찜질방 간 사이엔 등쌀에 안 시달리니까 더 좋았지."
"영감?"
"응?"
"사는 게 지겨워졌수?"
"...커흠! 흠!"
목숨의 위기(?)를 감지한 인어 할아버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인어 할머니의 얼굴에 고민의 주름이 깊어졌다.
'에휴. 영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찜질 그거 따로 할 방법이 없을까.'
아쉬웠다.
적어도 찜질방에서 몸을 지질 때만은 행복했는데.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관절 통증을 잊을 수 있었는데.
한데 이제는 그걸 즐길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이게 다 그 얄팍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는 육지 인간 놈 때문이야!'
찜질방을 만들고 운영하던 그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라고 했던가.
생각할수록 그렇게 치사할 수가 없었다.
'찜질방을 공짜로 계속 운영할 수는 없겠지. 당연히 이용료를 받아야겠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이용료가 노동인 건지, 쯧쯔!'
차라리 진주나 귀한 조개껍질을 받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 로이드라는 인간이 시키는 노동을 해야 한단다.
그래야만 찜질을 즐길 수 있단다.
그래서였다.
'에잉! 찜질 그거 안 하고 말지!'
...라고 홧김에 외쳤더랬다.
찜질방 회원 가입 약관이 적힌 미역 두루마리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는 분통을 삼키며 찜질방을 뒤로하고 돌아왔더랬다.
한데 며칠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결정이 후회가 되었다.
'찜질 그거, 안 하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잊을 수 있을 거라고.
한 며칠쯤 아쉽다가 까먹게 될 거라고.
언제 그랬냐는 듯 찜질 없이도 잘 살아가게 될 거라고.
나름 자신했고, 확신했더랬다.
그런데 막상 찜질이 사라진 며칠을 지내고 보니 전혀 아니었다.
잊기는커녕 자꾸 더 생각이 났다.
아쉬움이 없어지긴커녕 더 커져만 갔다.
급기야 찜질 없인 못살겠다는 기분만 자꾸 들었다!
'이대론 안 되겠어.'
할머니 인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영감. 아무래도 안 되겠수. 여기 잠깐 있어 보슈."
"엥? 어딜 가는겨?"
"찜질방."
가서 뭘 어쩌려는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렇게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쑤시는 관절이나 두드리면서.
그렇게 있자니 이건 아니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뭐 그렇다고 그 육지 인간 놈 술수대로 찜질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저 확인만 해보자고 생각했다.
혹시나 자신처럼 아쉬움에 몸부림치는 다른 인어가 있을지.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찜질방 근처를 헤엄치는 인어가 있을지.
'그냥 진짜로 슬쩍 살펴만 보는 거지 뭐.'
물론 할머니 인어는 확신했다.
찜질방에 가봤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설마 그 근처를 서성이는 인어가 있겠냐고.
자신처럼 어리석은 그런 인어는 이 왕국에 없을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뭐여 이게.'
할머니 인어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와 본 찜질방 근처.
그곳은 전혀 한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북적북적했다!
그야말로 물 반 인어 반이었다!
심지어....
"아이구, 왕언니? 이제 왔어요?"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다른 할머니 인어들이 이쪽을 보며 반색했다.
지느러미 살랑거리며 다가와서는 어깨를 팡팡 쳐 댔다.
평소 종종 어울려 다니던 동년배 동생들이었다.
"니들이 왜 여기 있는겨?"
"왜 여기 있긴요. 찜질하러 왔지."
"언제 왔는데."
"우리요? 어제부터."
"...."
"언니?"
"이 배은망덕하고 의리도 없는 것들."
"아이고, 우리 언니 또 삐치셨네. 이리 와, 이리 와. 내가 등 밀어줄게. 그러니까 입술 삐죽 내밀지 마시고. 그러다 예쁜 입가에 주름져. 응?"
동년배 동생 인어들이 깔깔 너스레를 떨며 할머니 인어의 등을 떠밀었다.
할머니 인어는 툴툴거리면서도 마지못한 척 찜질방으로 갔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이미 희미한 미소가 배어나 있었다.
그렇게 찜질방 입구에서 빛의 속도로 회원 가입을 마쳤다.
카운터를 지키던 로이드의 입가에도 보람찬 미소가 꽉 찬 명란젓 알집처럼 새록새록 돋아났다.
'후후후. 모든 것은 계획대로.'
그야말로 작전 성공.
그는 흐뭇한 시선을 던졌다.
회원 가입 신청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찜질방 안쪽도 북적북적 장난이 아니었다.
꽉 차 있었다.
인어가 없는 곳이 없었다.
황토 찜질방에도.
해수림욕 찜질방과 열대해변 모래 찜질방에도.
익스트림 번지점프 찜질방까지도.
인어들이 꽉 차다 못해 치열한 자리 쟁탈전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오픈 기념 무료 이벤트 종료 선언을 하기 전과 거의 똑같은 광경이었다.
아니, 소소하게 달라진 점이 하나 있긴 했다.
"어이, 하비엘."
"예."
"찜질방마다 돌면서 체크 좀 해 봐."
"어떤 체크입니까."
"발광 산호."
로이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까 6시간 전에 입장한 인어들이 제법 있거든. 지금쯤 손목에 찬 발광 산호 빛이 거의 희미해져 있을 거야. 더 충전할 건지, 아니면 오늘 찜질 그만하고 퇴장할 건지 가서 체크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 로이드 님은 저를 점원으로까지 쓰시려는 겁니까."
"응."
"...."
"저거 봐라. 또, 또, 또. 가자미눈 뜬다. 응? 잠깐이야 잠깐. 여기 내가 점원 모집 공고 쓰고 있는 거 보이지? 근무 기간 중에는 찜질 완전 무료. 이런 조건이면 일할 인어들 아주 줄을 설 거거든? 물론 면접도 좀 보고 그러면서 제일 성실한 인어들만 뽑을 거지만, 그래도 금방 뽑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후우, 알겠습니다."
하비엘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움직였다.
찜질방 내부를 돌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인어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그런 인어들의 손목에는 저마다 빛나는 팔찌가 달려 있었다.
심해 발광 산호 조각이 담긴 팔찌였다.
정확히 6시간만 빛을 내도록 양이 조절된 산호 조각.
그 빛이 꺼지면 인어는 선택을 해야 했다.
찜질 6시간을 연장하여 하루 제한인 12시간을 꽉 채울 것인지.
혹은 오늘의 찜질을 그만둘 것인지.
그렇게 찜질방에서 퇴장하면서는 각자의 회원기록부에 찜질한 시간을 남겨야 했다.
찜질비, 즉, 의무 노동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해저 동굴 찜질방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저기, 그러면 약관에 적힌 대로 48시간 내에 일을 해야 하는 건가요?"
"아무렴요. 바로 그거지요."
처음 찜질을 마치고 돌아가는 어느 묘령의 인어.
그녀를 향해 로이드가 인심 좋게 웃었다.
"오늘 찜질하신 분들이 내일 일하실 장소는 내일 아침, 찜질방 입구 게시판에 공표될 겁니다. 그 내용을 참고하셔서 노동에 참여하시면 되겠습니다."
"올 때 준비할 건 따로 없나요?"
"튼튼한 몸만 있으면 됩니다."
"튼튼한... 몸만요?"
"옙. 혹시 더 궁금하신 거라도?"
"...아, 아뇨, 알겠어요."
로이드는 더욱 인심 좋게 웃었다.
묘령의 인어는 불길한 예감을 쑴펑쑴펑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보옥 터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
"어흠흠! 다들 이렇게 찜질방 이용비 지급을 위해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도 인사드렸듯이 찜질방 주인,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다만 오늘은 이곳 발굴 현장의 책임자가 되겠네요."
발굴 현장이라.
아침 일찍부터 현장에 모인 120명 남짓한 인어들 중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저기요? 발굴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 발굴입니다. 이제부터 우린 바다 밑바닥에서 뭔가를 찾기 위해 삽질을 할 거니까 말입니다."
"삽질요?"
"예, 삽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해서 수북하게 쌓아둔 조개껍질 삽을 집어 들었다.
육지의 현장에서 쓰는 일반적인 삽이라기보다는, 눈을 치우는 데에 쓰이는 제설용 삽을 닮은 모양이었다.
"이게 오늘 여러분이 쓰실 삽입니다. 이걸로 제가 지정하는 구역 해저면의 펄을 모조리 퍼내시면 됩니다."
"지정해주는 구역이라니요?"
"예. 바로 저기죠."
로이드가 해저 한쪽 면을 가리키는 순간이었다.
츠스스스스!
그의 손짓을 따라 해저면에 푸르게 빛나는 직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직선이 달려가고, 이어지고, 만났다.
가로와 세로, 각각 1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정사각형을 이루었다.
모두의 앞에서 로이드가 실시간으로 시공 가이드라인 옵션을 발동한 덕분이었다.
인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육지 인간, 설마 마법사였던 건가.
모두가 웅성거리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런 모두의 귓가로 로이드의 목소리가 숑숑 스며들었다.
"다들 제가 바닥에 그어드린 선이 보이실 겁니다. 저기 정사각형 구역 안쪽 바닥의 펄을 파고 걷어내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작업하시는 도중에 삽 부러뜨리지 마시구요. 노동 시간 기록카드에 체크도 하셔야 합니다. 잊지 마세요. 체크 안 하면 아무리 열심히 일하셔도 일한 시간 다 날리는 겁니다."
꿀꺽.
로이드의 마지막 말에 인어들이 긴장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는 굳게 다짐했다.
기록 카드에 노동 시간 꼭 체크하기.
그렇게 진실의 보옥 터를 찾아내기 위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자, 시작합시다!"
"우오오!"
120인의 인어들이 조개삽을 들고 움직였다.
바닷속 괴수 피지컬의 소유자들, 인어.
그들의 해저 삽질은 가히 초월적이었다.
돌고래는 흉내도 못 낼 속력으로 해저면을 빠르게 헤엄쳤다.
그 상태에서 삽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꽈그자작!
조개삽이 해저면을 푹 파고들었다.
황소가 밭을 갈듯이.
그대로 해저면을 깊숙이 긁어 버렸다.
"그오오오오!"
콰콰콰콰콰-!
다섯 명의 인어가 1차로 해저면을 긁으니 깊이 50센티, 너비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고랑이 순식간에 파였다.
그러면 그다음 다섯 명의 인어가 곧바로 뒤를 따랐다.
"크오오오오!"
쿠콰콰콰콰-!
이미 파였던 고랑을 한 번 더 팠다.
고랑이 순식간에 더욱 깊어졌다.
그러면 다음 다섯 명의 인어가 또 고랑으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해저면의 펄이 경이로운 속도로 파헤쳐졌다.
그걸 보며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쳤다. 미쳤어, 이건.'
상상 초월의 삽질 속도였다.
인어들의 근력과 체력이 뛰어난 건 알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일을 시켜보니 이건 그냥 수중 전용 황소, 아니, 불도저 120대를 풀어놓고 땅을 갈아엎는 수준이었다.
물론 로이드도 가만히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측량!'
[스캔을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츠!
인어들이 파헤치는 해저면.
그곳을 향해 측량 스킬을 사용했다.
지하 스캐닝 옵션도 함께 발동시켰다.
덕분에 해저면 아래 5미터까지의 범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 전보다 더 깊은 곳까지 보이고 있어.'
인어들이 해저면에 두껍게 쌓인 펄을 치워 주는 덕분에.
펄 아래로 숨겨져 있던 해저면이 더 깊이 들여다보였다.
물론 그런다고 곧바로 보옥 터가 찾아지는 건 아니었다.
"자! 더 열심히! 오늘 노동으로 땀을 흘리면! 내일은 찜질방에서 땀 흘릴 수 있습니다!"
"우오오!"
로이드의 독려에 인어들이 더욱 힘을 냈다.
그렇게 로이드가 지정한 구역을 파고, 또 팠다.
그러다 보니 근육에 피로가 쌓였다.
자연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 노곤하다. 그럼 집에 가기 전에 찜질방에 들러서 몸이나 좀 풀고 갈까.'
그렇게, 발굴 작업에 참여한 인어 대부분이 퇴근(?)하던 발길을 찜질방으로 돌렸다.
그러면 현장을 지휘하던 로이드가 이번에는 찜질방 사장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아이쿠. 어서 오세요, 손님!"
"...."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일단 몸이나 풀자.
인어들은 하루 노동의 피로를 찜질방에서 풀었다.
그러고 나면?
그 찜질방 비용으로 다음 날 또 노동을 해야 했다.
열심히 발굴 현장에서 땀 흘리며 노동을 하면?
근육이 녹신녹신 노곤해지며 찜질 생각이 났다.
퇴근길에 찜질방에 들러 몸을 풀었다.
그 찜질 비용으로 또 노동해야 했다.
노동을 하고 나니까.
찜질 생각이 났다.
몸을 풀었다.
또 노동했다.
그때쯤에야 모든 인어들이 깨달았다.
'어떡하지? 이 악순환을... 벗어날 수가 없어!'
찜질을 하면 그 대가로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을 하면 피곤해서 찜질 생각이 나고.
그렇게 찜질을 하면 또 노동해야 했다.
그랬다.
이건 그냥 미친 악순환이었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마약이었다!
그렇듯 수많은 인어들이 노동과 찜질의 저인망 그물에 낚여 퍼덕거리는 사이.
로이드가 지휘하는 보옥 터 발굴 현장은 쌩쌩 잘만 돌아갔다.
노동과 찜질의 굴레에 엮인 인어가 날로 늘어났다.
발굴 범위가 나날이 넓어졌다.
로이드의 측량 탐색 범위도 확장되었다.
그러길 어느덧 2개월째.
'...오?'
마침내, 로이드의 측량에 뭔가가 감지되었다.
267화. 공적을 세워라 (1)
발견의 순간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곤 한다.
실제 역사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친 때라든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목성의 달을 발견한 순간이라든가.
작년에 실종됐던 만 원짜리를 패딩 주머니에서 발견한다든가.
등등의 모든 위대하고 사소한 발견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불현듯 찾아오곤 했다.
그건 오늘,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오?'
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벌써 2개월째 발굴 현장을 지휘하던 그였다.
매일 수백 명의 인어들을 동원해서 북극해 바다 밑바닥을 샅샅이 뒤엎던 그였다.
그럼에도 보이는 게 없었다.
측량 스킬을 써도.
지하 스캐닝 옵션을 발동해도.
아무리 펄을 걷어내고 또 걷어내도 좀처럼 탐지되는 게 없었다.
보옥의 터는커녕 보물 쪼가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심 지쳐 가던 중이기도 했다.
한데 조금 전부터였다.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인어 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
겉으로 보기엔 아무 특색도 없는 평범한 장소였다.
그저 드넓은 해저 평원의 일부일 뿐이었다.
한데 인어 군단이 그곳의 펄을 치운 직후.
측량 스킬로 들여다보니 바닥면 아래 지하에 뭔가가 보였다.
'지층이긴 한데. 너무 매끈해. 마치 인위적으로 만든 구조물처럼.'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로이드가 외쳤다.
"잠깐! 다들 작업 중지!"
그의 외침에 인어들의 삽질이 중단되었다.
로이드는 모든 인어들을 현장에서 물러나게 했다.
미간을 찡그렸다.
모든 신경을 안구에 집중시켰다.
인공적으로 보이는 지층이 탐지된 지점.
그곳을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가까이 접근하니 더욱 자세히 보였다.
'확실해. 저거, 지층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냐. 분명 인공적으로 만든 토대다.'
펄을 걷어낸 해저면에서부터 약 3미터 깊이.
그곳에 특이한 형태의 토대가 보였다.
마치 시멘트를 부어서 만든 듯이 네모 반듯했다.
특히 위쪽 면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지나치게 깔끔했다.
어쩐지 로이드에게 익숙한 형태였다.
그러니까 저건....
'암만 봐도 건물 기초 같은데. 철근 콘크리트는 아닌 거 같고. 으음, 납작하고 반듯한 바위를 쌓았던 흔적인 건가.'
대략 그렇게 보였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보옥은 건물이었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정말 저게 보옥의 토대일지도 모른다.
지난 2개월 동안의 발굴 탐사 작업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정말로 보옥 터를 찾아낸 거라면 이제부터가 중요해.'
로이드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더욱 신중한 손길로 삽을 움직였다.
파삭, 콰그작!
해저면을 파냈다.
처음에는 팍팍.
인공 토대가 드러날 때쯤엔 숟가락으로 좁쌀 한 알 떠내듯이 조심스럽게.
마지막엔 맨손으로 토대 위의 진흙을 쓸어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마침내 그는 토대의 위쪽 면 대부분을 손상 없이 노출시킬 수 있었다.
"...진짜다, 이건."
측량 스킬이 아닌 맨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인공 토대.
그걸 보자 확신이 들었다.
이건 자연적 지층이 아니다.
누군가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토대'다.
'어쩌면 보옥의 토대를 찾은 건지도 몰라.'
로이드의 눈길이 더욱 바빠졌다.
오늘 발견한 이 토대가 인공물이라는 것은 확인했다.
그러니 이제는 이게 보옥의 토대라는 걸 확인할 차례였다.
"이봐요, 로토루아 씨?"
"아, 예. 예!"
마침 멀찍이서 노심초사하고 있던 로토루아가 이쪽의 부름에 냉큼 헤엄쳐 왔다.
그에게 물었다.
"이거, 로토루아 씨가 보기엔 뭐 같습니까?"
"나도 모르겠소. 다만...."
"다만?"
"이게 보옥의 토대가 맞다면, 기록으로 언급되던 표식이 토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요."
"표식이라니요?"
"불가사리를 닮아 사방이 뾰족한 표식이외다."
"알겠습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와 로토루아는 토대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표식 찾기에 매달렸을까.
'...찾았다!'
과연 있었다.
토대 한쪽 귀퉁이에 새겨진,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불가사리 표식이 보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당연하지. 보옥 터만 찾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잖아.'
자신은 고고학자가 아니다.
보옥이 실존했던 터를 찾았다고 해서.
그 학술적 가치니 뭐니를 따지며 흡족해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단순히 유물일 뿐인 보옥의 토대엔 관심이 없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보옥이니까.
'설계도를 찾아야 해.'
그는 로토루아를 돌아보았다.
"저기, 로토루아 씨?"
"...크흐흡, 크흡!"
"그만 우시고 일단 저 좀 보시죠."
"크허흥! 크흥! 패앵! 구, 그, 그게, 이거,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만... 크흥!"
마침내 보옥 터를 찾아냈다는 기쁨 때문일까.
로토루아는 그야말로 얼굴을 감싸 쥐고서 펑펑 울고 있었다.
마치 혹독한 월세와 대출 이자에 시달리다가 로또 1등에 덜컥 당첨된 사람 같은 눈물이었다.
로이드는 잠시 기다려주었다.
이내 로토루아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험, 크흠! 미안하오. 내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소."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에 말씀하시길, 보옥 터를 찾아내면 이곳에 설계도가 있을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소."
"그럼 어딨습니까, 그 설계도."
설계도.
그게 진짜 중요한 거다.
보옥 터만 찾았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설계도면이 있어야 예전 보옥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을 테니까.
비로소 보옥을 작동해서 질문을 할 수 있을 거니까.
운명의 복원 현상 방지법을 알아낼 테니까.
'그러니까 설계도, 그게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야.'
한데 토대 어디를 보아도 설계도 비슷한 게 안 보였다.
스멀스멀 걱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데 로토루아는 태연한 기색이었다.
"아, 설계도는 간단하오. 기록에 의하면 바로 여기 있다고 하더이다."
로토루아가 손을 뻗었다.
방금 발견한 불가사리 표식을 향해서였다.
"이 표식에 관련된 기록을 발견한 분은 내 16대조 조상이셨소. 당시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이 불가사리 표식에 설계도가 숨겨져 있다고 하였소이다."
"이 불가사리 표식에 말입니까?"
"그렇소. 이렇게 누르면 된다고 했는데... 어디 보자."
로토루아가 표식을 더듬었다.
중앙 부분을 눌렀다.
달칵?
그때부터였다.
그우우우우웅-!
마치 진동 모드 알람이 울리듯.
보옥 토대 전체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진동에 주위의 바닷물이 모조리 공명했다.
공명이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오오."
로이드는 해역 전체를 온통 뒤흔드는 웅장한 공명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진짜다.
뭔가 거창한 이펙트(?)로 봐선 제대로 찾아낸 것 같다.
희망의 불꽃이 가슴 속에서 피어났다.
그리고 비슷한 시각.
보옥 토대 발굴 현장으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인어 왕국.
왕국이 담긴 거대한 알집을 지키던 더욱 거대한 문어, 크라켄의 위장 속에서도 까닭 모를 공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그우우우우우웅!
"크, 크러렁?"
크라켄은 화들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화로운 낮잠을 즐기던 중이었다.
그저 평소와 똑같은 평온한 날일 뿐이었다.
한데 너무나 갑자기, 뱃속에서 맹렬한 공명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렁? 크러렁?"
당황스러웠다.
순식간에 위장이 거북해졌다.
하지만 크라켄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다섯 번째 위장.
위벽 내부의 어느 융털 돌기 사이.
그곳에 물체 하나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그 물체가 수 킬로미터 떨어진 보옥 토대의 진동에 맞추어 공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또한.
크라켄은 알 방법조차 없었다.
그래서 더욱 당혹스러웠다.
"크러러렁! 크렁! 크렁!"
짐짓 크게 기침을 했다.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뱃속의 갑작스럽고도 요란한 공명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맹렬해지기만 했다.
그야말로 위가 뒤틀리고 창자가 꼬이는 듯이 거북하게 속이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크러렁!"
크라켄의 비명이 더욱 커졌다.
더 힘껏 움직이고 싶어졌다.
온몸을 마구잡이로 뒤틀고 싶어졌다.
그러면 이 뱃속의 요란한 통증이 가라앉지 않을까.
당장에라도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이 아픔이 누그러들지 않을까.
맹렬한 욕구가 치밀었다.
크라켄은 번뇌에 빠졌다.
자신은 함루로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나 커다란 덩치를 지녔기에.
인어 왕국이 담긴 알집을 감싸고 있기에.
예고도 없이 함부로 온몸을 움직였다간?
인어 왕국에 피해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크라켄은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했다.
"크... 크러렁!"
포효했다.
배에 힘을 주었다.
뱃속의 거북함을 억누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잠시.
금방 한계가 찾아오고 말았다.
그우우우우우우우웅-!
다섯 번째 위장 속의 공명이 한층 맹렬해졌다.
필사적인 의지고 뭐고 간에 신체적으로 참아낼 수 없을 정도의 진동이며, 공명이었다.
결국, 크라켄은 반사적으로 온몸을 뒤틀고 말았다.
"크러러렁!"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체가 발작하듯 뒤틀렸다.
그 아래 여덟 개의 다리에 감싸여 있던 인어들의 도시, 알집이 난폭한 몸짓에 분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
쿠콰아아앙-!
"...엇?"
인어들의 여왕, 키아코라는 깜짝 놀랐다.
한창 고민에 잠겨 있던 그녀였다.
북극해 상공에 열린 헬게이트 때문에.
어떻게 해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싶어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맹렬한 고민을 곱씹던 참이었다.
한데 너무나 갑자기, 왕성이 있는 알집이 맹렬한 충격에 휩싸였다.
쿠쿵! 쿠구구구-!
"무슨?"
당황스러웠다.
왕성 전체가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었다.
아니, 왕성을 담고 있는 알집이 기울고 있음을 여왕은 깨달았다.
그때였다.
"여왕께 보고드립니다! 지금 알집 외부에! 큰일이 났습니다!"
시종 인어 하나가 헐레벌떡 헤엄쳐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크라켄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뭣이? 크라켄이?"
"예!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괴성을 몇 번인가 내지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온몸을 뒤틀며 날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여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믿기지 않는 보고였다.
당연했다.
크라켄은 인어 일족의 오랜 친구였으니까.
자신이 여왕이 되기 전부터, 아니, 전대, 전전대 여왕이 알에서 깨기도 전부터 일족과 함께했던 존재였으니까.
'역대 여왕 중에 가장 존경받는 호우호라, 무려 그분과 같은 날 알에서 깨어나 함께 자란 존재가 아닌가. 심지어 마룡 카이저투스 토벌전 당시에도 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사막 원정 전투에까지 기꺼이 참가했던 존재인데. 그 뒤로도 대대손손 우리를 지켜 준 일족의 동반자인데. 그런데 갑자기 이런 난동이라고?'
어째서?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신?
혹은 야성이 살아나서?
그건 더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뭔가 원인이 있을 거야.'
이유 없이 날뛸 크라켄이 아니다.
함부로 일족을 해코지할 존재도 아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여왕은 침착한 목소리로 명했다.
"알겠다. 다만 여기는 안전하지 않은 듯하니 모두 예외 없이 몸을 피하도록. 당장."
"명을 받듭니다!"
그녀의 명에 좌우의 시종과 근위대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생애 최대의 속도로 왕성을 빠져나왔다.
기울어 가는 알집을 탈출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왕국의 알집 전체가...."
모조리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급류에 던져진 명태 알집처럼.
원래는 끈끈하게 뭉쳐 있던 수만, 수십만 개의 알이 모조리 분리되어 버렸다.
사방을 떠다니고, 떨어지고, 구르다, 충돌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단 하나.
"크러러렁!"
크라켄이 포효하며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원래는 알집을 든든하게 붙잡고 있던 여덟 개의 다리를 난폭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지름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을 사방으로 뒤틀고 있었다.
그 거대한 규모의 폭력적 몸부림.
거기에 휘말린 알집들이 부서진 명태 알집처럼 흩어지고, 물살에 휩쓸리는 중이었다.
후우우웅-!
마침 물살에 휩쓸린 알 하나가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도시를 이루는 알 중에서도 제법 큰 편이었다.
그 지름이 무려 200미터에 달했다.
"여왕님!"
"피하소서!"
좌우의 시종 인어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그러나 여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상상도 못했던 크라켄의 압도적 난동에 어안이 벙벙했던 것도 잠시.
"크흥!"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독한 눈빛을 번득였다.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알집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전완근, 이두근, 삼두근, 어깨의 삼각근에 아나콘다 같은 힘줄이 와르륵 돋아났다.
가슴과 복부, 등 근육들이 철갑처럼 성난 자태를 드러냈다.
여왕이 200미터짜리 알을 향해 정면으로 돌격했다.
"내 백성의 터전이 날려 오는데! 그걸 내버려두고 피할쏘냐!"
두 팔을 펼쳤다.
내밀었다.
가슴 근육으로 알집을 받아냈다.
콰아아아앙-!
무려 200미터짜리의, 온갖 건축물로 꽉 찬 알을 단신으로 받아낸 여왕.
여왕의 몸이 순식간에 300미터 가량 밀려났다.
그러나 여왕은 폭발적인 지느러미짓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수중에서 발휘하는 경이로운 수준의 괴력이었다.
"그... 그아아... 그으아아앗!"
쿠구구구구!
여왕의 전신에 돋아난 힘줄이 아나콘다를 넘어 이무기처럼 굵어졌다.
하지만 알집의 기세는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여전히 맹렬한 속도와 무게로 여왕을 밀어붙였다.
"그으읏!"
여왕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어쩌면 이대로 깔려 버리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여왕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여왕님!"
별안간, 옆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용을 쓰느라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로소 볼 수 있었다.
"비록 미력한 힘이나마! 저도 돕겠습니다아아! 으기잇!"
육지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였다.
그가 어느새 옆에 나란히 있었다.
두 손을 내밀고서 알을 받아내고 있었다.
마치 이쪽에게 모든 힘을 보태겠노라고.
그렇게 온몸으로 외치는 듯 비장한 모습이었다.
"육지 인간? 이방인인 네가 어째서?"
"어째서 돕는 거냐 물으시는 거라면! 그냥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냥?"
"예! 위기에 처한 남을 돕는데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더욱 서슴없이 외치는 로이드.
그 모습에 여왕은 감동받았다.
물론 그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은 로이드가 알집에 그저 손만 올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이쪽에게 힘을 보태는 척만 하고 있다는 진실을.
사실, 이 예기치 않은 사태 속에서도 로이드에겐 따로 계획이 있었다.
268화. 공적을 세워라 (2)
"위험에 처한 남을 돕는데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
뜻밖의 소리를 외친 로이드 프론테라.
인어 여왕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얼떨떨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육지 인간. 대체 뭐지.'
문득, 선대 여왕들이 남기신 당부가 떠올랐다.
육지의 인간들을 믿지 말라고 하셨던가.
그들은 철저한 기회주의자라고.
돈이라면.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친구고 뭐고 서슴없이 배신하는 자들이라고.
그래놓고도 또 이득이 걸리면 손을 잡기도 하는, 아주 상종 못 할 존재들이라고.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더랬다.
'한데 이자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어느샌가 나타난 로이드 프론테라.
지금 이렇게 더없이 위험한 상황이 펼쳐져 있는데.
서슴없이 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거대한 알집을 함께 받아내려 들고 있었다.
그 눈에 보이는 상황이.
부정할 수 없는 팩트가.
여왕을 감동의 알탕으로 몰아넣었다.
"좋다. 육지 인간 프론테라여. 기꺼이 그쪽의 도움을 받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극한의 힘을 끌어쓰고 있어서일까.
혹은 가슴 가득한 감동 때문인 걸까.
여왕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 들렸다.
로이드의 입꼬리에 보람찬 미소가 살포시 내걸렸다.
'좋아. 이걸로 일단은 큰 화를 면했어.'
그는 잽싸게 인어 여왕을 곁눈질했다.
온통 시뻘게진 얼굴.
불끈불끈 성난 근육.
200미터 거대한 알집을 막아 세우려 용을 쓰고 있었다.
자신은?
그 옆에서 나란히 손을 뻗고서 알집을 밀어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러는 척 손만 얹고 있었다.
입으로 으그그극 소리만 내고 있었다.
물론 괜히 그러는 게 아니긴 했다.
'당연하지. 저 크라켄.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보옥 토대를 찾아낸 뒤부터 날뛰기 시작했거든. 그 이상한 공명과 함께.'
문득, 로이드의 뇌리에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드디어 보옥의 토대를 발굴했더랬다.
그곳에 숨겨져 있다는 설계도면을 작동시키기 위해.
로토루아가 보옥 토대의 장치를 만지작거렸더랬다.
성공적이었다.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보옥 토대가 맹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던가.
주위의 모든 바닷물이 거세게 공명하는 모습을 보였던가.
실로 웅장했다.
확신이 들었다.
제대로 보옥을 찾아냈구나 싶었다.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크라켄이 날뛰기 시작했어.'
비록 인어들의 왕국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자신이었지만, 날뛰는 크라켄의 모습만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인어 왕국을 이루는 거대한 알집.
그 알집이 은은하게 내뿜고 있던 빛 덕분이었다.
'크라켄이 포효하더니 마구잡이로 트위스트를 추기 시작했지.'
그 서슬에 알집이 뭉개지고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제대로 보였더랬다.
마치 서투른 젓가락질에 부서지는 명란젓 같은 모습이었다.
'난 그걸 보자마자 냉큼 달려왔고.'
날뛰던 크라켄.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보옥 토대를 작동시킨 행동.
그렇게 일어나게 된 공명.
그 공명과 분명 연관이 있어 보였다.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나 타이밍이 공교로웠으니까.'
즉, 지금 크라켄이 날뛰면서 인어 왕국을 뭉개고 있는 이 사태에 자신의 책임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보옥 토대를 작동한 건 로토루아 씨지만, 발굴 작업을 지휘한 나한테도 책임이 있어. 그러니까 이거, 그냥 두면 안 돼.'
도의적인 책임감 때문에?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서?
물론 아니었다.
'도의적인 책임이나 과오는 무슨!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그런 거 느껴보기도 전에 인어 여왕한테 원펀치 명치샷 당해서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판이구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전개였다.
날뛰게 된 크라켄.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인어 왕국.
한데 그 원인이 보옥 토대 발굴이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면?
분명 인어들이 자신에게 책임을 묻게 될 것 같았다.
심지어 그건 얼버무리거나 할 수도 없을 듯했다.
'당연하지. 내가 찜질방을 운영해서 인어들을 발굴 현장으로 동원했잖아. 심지어 보옥이 발굴되던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인어들도 수백 명은 됐고. 그들이 증인이 될 거야. 이번 일은 숨기고 싶어도 못 숨겨.'
그런데 이번 사태가 이대로 수습되고 나면?
그 책임소재를 따지는 단계가 되면?
반드시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오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미리 알랑방귀 뀌고! 적극적으로 사태 수습 돕는 척하면서 공로도 세우고! 그렇게 점수 좀 따놔야지!'
그래야 나중에 비난의 화살을 덜 맞을 거다.
여왕한테 명치 맞을 일도 무마될 거다.
최소한 인어 왕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거다.
'기껏 보옥 토대를 찾았으니까.'
어렵사리 발견한 보옥이었다.
한데 지금 와서 인어 왕국에서 추방당하긴 싫었다.
지금까지 여기서 애썼던 시간.
이곳에서 퍼부어 왔던 노력.
그게 아까워서라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로이드는 그러한 계산을 야물딱지게 대뇌피질 전두엽에 새겨 놓으며 외쳤다.
"여왕님!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제가 구령을 세겠습니다!"
"그읏! 구령?"
"예! 구령에 맞춰서 함께 힘을 내도록 하죠! 하나!"
"그드읏!"
"둘!"
"그아악!"
로이드가 구령을 외쳤다.
힘을 주는 척 연기만 했다.
그때마다 인어 여왕이 더욱 힘을 내며 분발했다.
마치 헬스장에서 PT를 받을 때 트레이너가 봉을 살짝 잡아주기만 해도 한결 힘이 나는 것처럼.
들리지 않던 바벨이 조금씩이나마 들리는 것처럼.
봉 무게 20kg은 조상님이 대신 들어주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침내 200미터짜리 알집의 기세가 줄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좋습니다! 조금만 더! 하나!"
"그으앗!"
"두울!"
"크악!"
콰아아-!
인어 여왕의 대흉근과 삼두가 폭발할 듯 부풀었다.
마침내 200미터짜리 알집을 멈춰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
피지컬 터지는 인어 종족.
그들의 정점인 여왕다운 엄청난 힘과 위용이었다.
"...후우, 후욱! 여왕님,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인어 여왕이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솥뚜껑 같은 우악스러운 손이 로이드의 어깨를 짚었다.
"조금만 힘이 약했다면 그대로 밀려나서 해저에 깔릴 뻔했어. 고맙다. 그쪽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위험했을 거야."
"후우, 후욱! 아닙니다. 저야 그저 미약한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로이드는 너스레를 떨며 호흡을 가다듬는 척했다.
다행이었다.
날아오던 알집 하나를 무사히 멈춰 세웠다.
거기에 더해 인어 여왕이 이쪽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좋아. 일단 점수는 약간이나마 땄어.'
하지만 아직은 점수가 모자란 감이 있을 듯했다.
더 많은 점수를 따두고 눈도장을 받아야 할 듯했다.
그래야 이번 사태가 수습된 후에도 인어들의 지탄을 받지 않고 보옥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그러려면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워야 한다는 소린데.'
로이드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크라켄을 향했다.
크기가 도저히 가늠이 안 될 엄청난 덩치.
추측조차 어려울 정도로 길고 굵은 다리.
"크러러러렁!"
포효 한 번에 온 바다가 뒤흔들렸다.
무지막지한 덩치로 몸부림칠 때마다 도시를 이루던 알집들이 탱탱볼처럼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그걸 보던 로이드는 사골육수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회의감을 느꼈다.
'저거, 수습이 되긴 할까.'
그만큼 크라켄의 난동은 규모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인어들의 용감함도 로이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자매들이여! 일어서라!"
"언니! 내 손 잡아요!"
"오빠! 나만 믿고 꽉 붙들어!"
도시를 든든히 지켜주던 크라켄의 유례없고 갑작스러운 난동.
그 초유의 사태 앞에서도 인어들은 의연했다.
공포에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뛰어난 근력을 바탕으로 뭉쳤다.
"다들! 여왕께서 솔선수범하며 보이신 위용을 똑똑히 느꼈겠지! 우리도 해 보자!"
"우오오!"
수십, 수백의 인어들이 뭉쳐서 알집들을 받아냈다.
알집 안에서 허우적대던 인어들을 구조했다.
구조된 인어들이 곧 기력을 회복했다.
그들도 알집 저지에 가세했다.
불과 반 시간이 흐른 뒤.
인어들은 거주 구역에 해당하는 수천 개의 알집 대부분을 무사히 받아내고 해저 바닥에 안전하게 내려놓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모두가 합심했다.
난폭하게 날뛰는 크라켄을 둘러쌌다.
다만 그들은 난폭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크라켄은 우리의 친구니까!'
오늘 갑자기 날뛰긴 했지만.
살던 집이 좀 부서지긴 했지만.
거주 구역 이외의 수만 개에 달하는 알집이 완전히 흩어져 버렸지만.
그래서 도시를 재건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게 생겼지만.
그럼에도 크라켄은 여전히 친구라고 생각하는 인어들이었다.
아마도 실수로 저러는 것일 터라고.
날뛰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그러니 일단 달래야 할 거라고.
모두가 뜻을 모았다.
성대를 열었다.
진심을 담았다.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인어들의 마음이 담긴 합창이었다.
그 합창이 바다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날뛰던 크라켄의 온몸을 다독였다.
덕분에 로이드는 진심으로 절감했다.
"...자기들도 음치였으면서!"
억울함에 저도 모르게 빽 외치고 말았다.
진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저거! 음치잖아! 음정 박자 하나도 안 맞잖아! 나보고 뭐라고 비난할 입장이 전혀 아니었잖아!'
실제로 인어들의 노래는 끔찍했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노래방에 데려간다면?
신명 나던 탬버린과 조명을 일거에 시무룩하게 만들 위력(?)이 충분해 보였다.
박수치던 모두의 눈과 손을 노래방 책자, 예약 리모컨, 혹은 벽에 붙은 이달의 인기곡 순위표에 고정시킬 자격(?) 또한 충분할 듯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억울함을 더는 티 낼 수가 없었다.
옆에서 말을 걸어온 인어 여왕 때문이었다.
"음치라. 혹시 인간들의 기준으론 우리의 노래가 엉망으로 들리는 건가?"
"아, 예? 그건...."
"방금 그쪽이 외쳤지 않나."
"아하하. 그게, 실은 동질감을 느껴서였습니다."
로이드는 재빨리 둘러댔다.
인어 여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질감?"
"저도 인간세상에선 음치 취급을 받았거든요."
"그랬나?"
"예."
"그랬던 것치곤 많이 억울해하는 눈치던데."
"예. 인간 세상에서 눈총받았던 억울함이 떠올라서 그만."
로이드는 힐끔 여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여왕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직전.
"앗, 저기!"
잽싸게 크라켄을 가리켰다.
"노래로 달래는 게 안 통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처음엔 인어들의 노래를 들으며 잠잠해지나 싶었던 크라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크러러러렁! 크렁!"
또 뭔가가 몹시 불편해진 걸까.
회오리 감자처럼 온몸을 뒤틀어 대며 포효했다.
전보다 한결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인어 여왕의 표정도 굳어 갔다.
"...크라켄이 우리의 화해 요청을 거부했어."
마치 믿었던 친구에게 내밀었던 악수를 거절당한 기분 같은 걸까.
딱딱하게 굳은 여왕의 눈길은 한편으로는 서글퍼 보였다.
"육지의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여. 이제부터는 물러나 있도록."
"예? 어쩔 계획이신 겁니까?"
"계획은 무슨. 크라켄이 우리의 화해 요청을 거부한 이상, 이제는 싸워야겠지."
"싸우다니, 저놈이랑요?"
"그래."
여왕이 씁쓸한 기색으로 물어왔다.
"친구가 날뛰고 있어. 설득을 시도했어. 한데 통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뭘까."
"음, 소매 걷고 나서서 말리고 제압해야 하는 겁니까?"
"그래. 이제부터 그래 보려고."
촤아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왕이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압도적인 근력의 돌핀킥을 시전했다.
순간 일대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로이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우왁!'
탈수기에 던져진 빨랫감의 기분이 이런 걸까.
느닷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로이드는 하비엘이 뻗어온 손길에 의지하고서야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이쪽에 소용돌이를 남기고서 돌진한 인어 여왕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크러러러렁-! 크렁!"
심해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크라켄의 포효.
그에 맞서서 수많은 대열을 갖추는 인어 군단.
오랜 시간 서로를 친구라 믿으며 의지해 왔던 크라켄과 인어 군단이 충돌을 앞두고 있었다.
모두가 이쪽이 보옥 토대를 발견하고 발동시킨 까닭이었다.
물론 그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로이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죄책감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이대로 싸움이 나면 안 되는데. 그러다가 보옥 토대가 파괴되면... 완전 나가리 되는 건데!'
초조해졌다.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쓸데없는 기우가 아니었다.
'아까 발견한 보옥 토대, 여기서 몇 킬로미터도 안 되는 곳에 있으니까.'
가까운 거리가 아니긴 하다.
적어도 이쪽의 기준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크라켄의 기준에서는 어떨까.
'다리 하나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야. 사람으로 치면 뒹굴거리는 소파 앞에 놔둔 리모컨 같은 거리라고 해야 하나.'
귀차니즘 잠깐 참고서 발 한쪽 쭉 뻗으면 엄지발가락에 톡, 하고 닿을 거리.
그렇듯 저 거대한 크라켄 문어발 끄트머리에 톡, 하고 닿으면?
보옥 토대 같은 구조물쯤은 그냥 부스러지고 말 것 같았다.
구둣발로 밟은 감자칩처럼.
한 방에 와사삭.
그렇게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낼 방법도 와사삭.
'...그건 안 돼!'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로이드는 고개를 탈탈탈 가로저었다.
'이대로 인어 군단과 크라켄이 무력충돌로 가는 상황은 막아야 해. 그럼 어떡해야 하지? 뭘 해야 하는 거지?'
말아쥔 주먹에 진땀이 줄줄.
두뇌는 더없이 빠르게 핑핑.
로이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보옥 토대의 공명이 일어나자마자 날뛰기 시작한 크라켄.
그래서 인어들의 부드러운 설득과 제지도 무시하며 난동을 부리는 크라켄.
그런 크라켄을 제압하고자 무력을 동원하기 직전인 인어 군단.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맹렬하게 생각했다.
치열하게 고민했다.
단서를 얻으려 관찰했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크러러러렁! 크렁... 러우럭, 크렁!"
꿀렁!
인어 군단의 포위망 속에서 거칠게 몸부림치며 포효하던 크라켄이 딱 한 번, 이상하게 온몸을 꿀렁거렸다.
그러더니 포효의 끝에 이상하면서도 어쩐지 친숙한(?) 소리를 냈다.
"꺼어어억!"
"...."
순간, 로이드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저거, 헛트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설마?"
반짝.
머릿속 한쪽이 번득하는 기분이 들었다.
헛트림.
몸부림.
난동.
지금껏 관찰했던 크라켄의 모든 행동들.
그것들이 하나의 퍼즐로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제대로 보였다.
크라켄의 다리가 움직이며 두드리는 몸통.
그 몸통이 뒤틀리며 내보이는 무언의 제스처.
그러다가 또 일부러 내뱉는 듯한 헛트림까지.
그걸 보자 낯설지 않은 경험이 떠올랐다.
불현듯, 마침내, 답이 떠올랐다.
'잠깐. 크라켄 저거, 설마 급체 걸려서 저러는 거였어?'
269화. 급체를 해결하는 법 (1)
급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급체로 고생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속이 불편해지는 끔찍한 경험.
제발 좀 소화되라고 등 두드리고 별별 짓을 다 하게 만드는 체험.
그건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였지, 젠장.'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가슴 설레던 수학여행 첫째 날 저녁이었을 것이다.
밥 잘 먹고 친구들이랑 놀려는데 슬슬 속이 불편해졌더랬다.
처음엔 그냥 좀 이상하다 싶었다.
한데 상황이 점점 심각해졌다.
속이 울렁거리는가 싶더니 식은땀이 줄줄 났다.
친구들은 이놈 겁나 창백해졌다며 눈치도 없이 놀려 댔다.
이건 좀 아니구나 싶었다.
뭔가 조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일단 트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였어. 탄산부터 찾았지.'
원래 급체에 걸렸다고 탄산음료를 마시는 거, 안 좋다고 한다.
오히려 증상을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던가.
하지만 당시엔 그런 걸 몰랐다.
그저 시원하게 탄산 원샷을 하고 싶었다.
핵트림 한 방 제대로 발사하면 막힌 속이 탁 내려갈 것 같았다.
마침 그러던 차에 친구 가방에서 사이다를 발견했다.
500mL 페트병 사이다를 허겁지겁 열고 크게 몇 모금 벌컥 마셨더랬다.
그리고 뿜었다.
'그거 소주였지.'
말 그대로 사이다로 위장한 소주.
친구 놈이 선생님 몰래 사이다병에 담아서 밀반입(?)한 소주였다.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기겁해서 뿜었지만, 얼결에 두어 모금을 마셔 버린 뒤였다.
급체가 오는 상황에서 소주 두 모금 추가요.
심지어 그게 인생의 첫 음주였다.
그때부터였다.
위장에 핵폭탄이 투하된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거의 반쯤 인사불성이 되어서 밤새 꽥꽥 헛구역질을 해야 했다.
지금도 떠올리자면 참담함이 몰려오는 수학여행 첫째 날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기억의 되새김은 길지 않았다.
때마침 기억 사이를 비집고 날아온 물음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크라켄이 지금 급체 때문에 저러는 거라고?"
고막을 파고들어 오는 물음.
그 소리에 로이드는 상념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물음이 날아온 쪽을 돌아보았다.
인어 여왕이 있었다.
미간에 잡힌 주름.
심각하고도 황당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 예."
고개를 주억거리자니, 방금 전까지의 일이 떠올랐다.
날뛰던 크라켄.
그걸 힘으로 제압하려고 준비하던 인어 군단.
둘의 충돌에 보옥 토대가 망가질까 노심초사하던 자신.
그러던 차에 크라켄의 이상한 점을 깨달았더랬다.
헛구역질과 헛트림을 하는 모습.
팔로 배를 두드리는 모습까지.
영락없이 급체가 온 사람의 행동 같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정신없이 여기까지 헤엄쳐 왔다.
마침 인어 군단에게 돌격 명령을 내리려던 여왕에게 외쳤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라고.
지금 크라켄을 공격하면 안 된다고.
어쩌면 크라켄이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섣불리 충돌하기보다는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인어 여왕을 다급히 말렸던가.
덕분에 인어 군단의 돌격을 잠시나마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인어 여왕이 심각한 눈빛으로 이쪽에게 질문을 던져 오고 있었다.
"급체라니. 그럼 소화불량이라는 뜻인데. 그게 사실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아까부터 크라켄이 포효하는 사이에 헛트림을 했습니다. 헛구역질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고요. 게다가 저렇게 몸을 뒤틀면서 다리로 제 배를 두드리는 거, 그러면서 또 헛트림을 하는 거, 은근 급체 걸린 사람 같지 않습니까?"
"흐음, 모르겠는데. 우린 급체 따윈 걸리지 않아서."
인어 여왕이 좌우 대흉근을 번갈아가며 불끈거렸다.
"소화불량 따위, 근육 힘으로 내려가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저기, 위장은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불수의근입니다만."
"상관없어. 복근 압력으로 위장을 짓눌러 버리면 되니까."
"...."
로이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럼 아예 두뇌도 두피 근육으로 움직이면 된다고 하든가.'
물론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한 대쯤 맞을까 봐?
그것보다는 진짜로 그게 가능하다는, 해부학자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 법한 대답이 당당하게 돌아올까 불안해져(?)서였다.
로이드는 고개를 푸르르 흔들어 당혹감을 털어냈다.
"아니, 후우, 어쨌건. 제가 보기엔 저거 급체 맞습니다. 여왕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 같은 육지 인간들은 은근 종종 저런 급체에 걸리니까 말입니다."
"그 말인즉, 유경험자의 시각으로 보기에 급체가 맞다는 거로군?"
"예, 그렇습니다."
"흐음. 그런가."
다행히 여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쪽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반신반의는 금방 의심으로 변할 테니까.
그런 기색을 직감한 로이드는 재빨리 말했다.
"예, 그러니 일단 확인부터 해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확인을?"
"네. 확인을 거쳐야 대응이 가능할 테니까 말입니다."
"하면 그걸 어떻게 확인하지? 생각해 둔 방법이 있나?"
"있습니다."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있다.
여왕의 돌격 명령을 말리기 위해 급히 헤엄쳐 올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생각.
로이드는 그걸 입에 담았다.
"혹시 크라켄이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이나 간식이 있습니까?"
"음, 있다만. 그건 왜?"
"그걸 줘 보시면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어떻게?"
"만약 급체가 아니라면 여왕께서 내미는 간식에도 여전히 난폭한 반응만 보일 테니까 말입니다."
"급체가 맞다면?"
여왕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로이드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처음엔 몸부림을 멈추고 흥미를 드러낼 겁니다. 평소처럼요. 그러다가 금방 헛구역질을 하면서 간식을 외면하거나 다시 난동을 부리거나 하겠지요."
"그렇다면 핵심은 곧바로 난동을 부리느냐, 혹은 흥미를 보인 뒤에 난동을 부리느냐의 차이로군. 맞나?"
"예,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좋아. 그럼 해보지."
"설마 여왕께서 직접 실험해보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여왕이 강자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이쪽을 굽어보았다.
"저토록 험하게 몸부림치는 크라켄에게 누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을까. 나야. 이 바닷속에서 가장 빠르게 헤엄칠 수 있는 이도, 어떤 물살에도 휩쓸리지 않고 돌핀킥을 유지할 수 있는 이도, 모두 나야. 게다가 크라켄의 몸부림에 얻어맞았을 때 누가 가장 잘 버틸 수 있을까. 물론 그 또한 나지."
여왕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 근육을 퍽퍽 쳤다.
"한데 나보다 나약하고 비리비리한 다른 인어를 보낼까? 내 연약한 백성을?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일엔 더더욱 내가 나서야 해. 그게 바로 왕좌를 차지한 자의 책임이고 의무야."
"아, 옙."
"아니면 혹시 그쪽이 나서서 실험해 볼 생각이었던 건가?"
"아닙니다."
빛의 속도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정말로 이쪽을 보낼 생각은 없었던 걸까.
여왕은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녀가 비늘 사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연녹색의 반짝이는 구슬이었다.
"그건 뭡니까?"
호기심에 물었다.
여왕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마린 다이아몬드."
"처음 들어보는데요?"
"평범한 다이아몬드를 가장 깊은 수심의 수압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은 악력으로 열흘 정도 꽉 움켜쥐면 만들어지는 특수한 보석이지. 나도 일 년에 몇 알밖에 못 만들어. 그만큼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 해서."
"그, 그럼 엄청 비쌀 텐데 말입니다."
"맞아.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석 중에 하나일걸. 그래서 크라켄이 무척 좋아해."
"...."
저기, 저딴 문어 대가리 대신에 제가 누님의 크라켄이 되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만큼 마린 다이아몬드는 실로 영롱한 자태를 뽐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확인하고 오도록 하지. 전군! 대기!"
다이아몬드를 쥔 여왕이 크라켄을 향해 헤엄쳐 갔다.
크라켄은 여전히 엄청난 기세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
많이 아픈 걸까.
굉장히 불편한 걸까.
정말로 저 육지 인간의 말대로 속에 탈이 난 걸까.
여왕은 크라켄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만약 저 육지 인간의 말이 맞다면, 평생을 함께한 내가 저 인간보다 네 마음을 못 헤아려준 꼴이 되는 거니까.'
항상 함께였기에.
그만큼 익숙해서.
크라켄의 모든 걸 안다고 자만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신은.
다른 이가 알아볼 수 있는 크라켄의 괴로움을 미처 못 보고 지나쳤던 게 아닐까.
그래서 하마터면 군단을 돌격시켜 소중한 친구를 힘으로 제압하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여왕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헤엄쳐 갔다.
"크러러러렁-!"
이쪽의 접근을 알아챈 걸까.
크라켄이 한층 구슬프게 울었다.
그 순간 여왕은 크라켄과 시선이 마주쳤다.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해하고 있어.'
방금 크라켄이 이쪽을 향해 보낸 눈빛.
그건 분명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눈빛이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통증에 질려 당황하고 있는 눈빛이기도 했다.
'정말로 저 육지 인간의 말이 맞는 건가.'
여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크라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마린 다이아몬드가 놓여 있었다.
"크라켄? 이거 먹을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야."
두근, 두근!
제발 육지 인간의 말이 맞기를.
크라켄이 저 인간이 말한 대로 반응해 주길.
인어 여왕은 내심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잠시 후.
크라켄의 몸부림이 멎었다.
"크렁? 킁킁킁!"
난폭하게 뒤흔들던 몸짓을 멈추었다.
이쪽으로 머리를 들이댔다.
흥미를 보이며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크렁! 크러러... 오애액! 크렁!"
맹렬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신물까지 살짝 뱉었다.
덤으로 몸부림까지 시작했다.
후우우웅!
워낙 큰 덩치이다 보니, 살짝 몸부림만 쳤는데도 그 움직임의 범위가 엄청났다.
"...!"
여왕은 가까스로 크라켄의 다리를 피했다.
맹렬한 돌핀킥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하, 정말이지... 저 육지 인간의 말이 맞았구나.'
확인을 하러 가면서도 내심 반신반의했는데.
막상 확인해 보니 저 인간의 말대로 되었다.
크라켄이 처음엔 흥미를 보이다가 헛구역질을 했다.
트림을 하면서 신물까지 뱉어냈다.
그 확인이 여왕의 가슴에 안도감을 불러왔다.
'다행이야. 이유 없는 난동이나 몸부림이 아니었어.'
처음엔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지금껏 평생 평온하고 점잖았던 크라켄이었다.
인어 왕국의 역사를 통틀어도 오늘과 같은 난동을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일으킨 오늘의 사태가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한데 확인해보니?
정말로 급체가 원인이었다.
그래서 기뻤다.
마침내 사태의 원인을 알아냈으니까.
이젠 막막하지 않았다.
당혹감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원인에 맞는 해결책을 꺼내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이 초유의 사태도 무난히 매듭지을 수 있으리란 희망도 엿보였다.
'하지만....'
맹렬히 헤엄치며 크라켄에게서 멀어지는 인어 여왕.
그녀의 눈가에 슬픔이 깃들었다.
'미안하구나, 친구여.'
친구의 아픔을 몰라보았다.
그것도 모르고 당황하기만 했다.
하마터면 친구를 힘으로 제압할 뻔했다.
그렇듯 친구의 아픔과 어려움을 몰라보았다는 죄책감이 그녀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는 굳은 다짐을 품기도 했다.
다시는 크라켄을 아프게 하지 않으리라.
저 친구가 겪는 어떠한 아픔도 보듬고 감싸 주리라.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과 곤경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리라.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소중한 친구의 아픔을 걷어내리라.
'반드시.'
근육질 여왕은 맹렬한 헤엄짓과 물살 사이로 이슬 같은 눈물을 흘려보냈다.
살짝 붉어진 눈가를 애써 감추며 돌아왔다.
로이드에게 물었다.
"방금 크라켄 반응, 여기서도 보였겠지?"
"예, 물론입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은 그 모습을 더없이 든든하게 느꼈다.
실로 멸치처럼 비리비리하기 짝이 없는 육지 인간이라 여겼는데.
그래서 내심 저런 몸뚱아리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 걸까 싶어 안쓰럽기도 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이렇게 듬직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저 육지 인간이 보이는 자신감 서린 미소도.
이쪽을 마주 보는 당당한 눈빛도.
더없이 믿음이 가는 모습이었다.
"하면 그쪽이 짐작했던 이 사태의 원인인 급체, 해결할 방법도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나오는 대답.
여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배어났다.
저 육지 인간은 정말로 계획이 있구나 싶었다.
그러니 이제는 됐다고.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소중한 친구인 크라켄의 아픔을 덜어 줄 수 있게 되었노라고.
앞으로는 친구를 아프게 하는 그 어떤 일도 없을 거라고.
내심 안도하고, 확신했다.
그 순간.
로이드의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급체에는 손가락 끄트머리를 그냥 아주 인정사정없이 팍! 따서 시커먼 피 줄줄 빼는 게 제일이지 말입니다?"
270화. 급체를 해결하는 법 (2)
"역시 급체에는 손가락 끄트머리를 아주 그냥 인정사정없이 팍! 따서 시커먼 피 줄줄 빼는 게 제일이지 말입니다?"
"...."
보글보글.
어디선가 휑뎅그렁한 물살이 흘러왔다.
때아닌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갔다.
여왕은 실소하고 말았다.
"하?"
그녀는 황당함을 느꼈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분명 청각에는 이상이 없는데.
방금 귀에 담은 이야기가 잘 믿기지가 않았다.
"손가락을... 팍, 딴다고?"
"예."
그녀가 떠듬떠듬 물었다.
로이드가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급체에는 말입니다. 손가락 묶어다가 바늘로 푹! 이 최곱니다."
"바늘로? 손가락을? 푹?"
"예."
"그냥 손가락 아무 곳이나 찌르면 된다는 건가?"
"아뇨."
로이드가 도리도리.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톱 어름을 가리켜 보였다.
"여기, 보이십니까? 손톱 뿌리 있는 곳 말입니다. 이쪽 근처를 푹! 찔러서 팍! 따내는 거지요. 그러면...."
"그러면?"
"평소와 다르게 시커먼 피가 줄줄 나옵니다."
"그 뒤에는?"
"손가락 묶은 실 풀어내면서 등을 싹싹 쓸어 만져 주는 거지요. 그럼 트림이 나옵니다."
"트림이라면 크라켄도 아까...."
"그런 트림이랑은 다릅니다. 진실로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엑기스 같은, 그런 진정한 트림이랄까요."
"...."
저 육지 인간 놈, 혹시 돌팔이 아닐까. 혹은 악질적인 사기꾼이라거나.
인어 여왕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번뇌를 털어냈다.
'아니야. 그래도 크라켄의 소화불량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걸 유일하게 맞춘 게 저 육지 인간이잖아?'
게다가 저 인간이 하는 말.
잘 들어보니 경험이 있는 자의 말 같았다.
그러니 조금만 더 믿어 보자.
의심하는 자세를 유지하며 저 인간의 말을 들어보자.
다짐한 그녀가 되물었다.
"좋아. 그쪽의 말대로 손을 바늘... 로 찔러서 따면 급체가 풀린다고 치자고. 한데 지금 난리를 부리고 있는 건 크라켄이잖나. 크라켄에게는 손이 없는데 어딜 어떻게 따겠다는 거지? 설마 다리 끝을 따겠다는 건가?"
"물론 그렇습니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실은 급체가 왔다고 손을 딴다는 거, 의학적으로 증명된 치료법은 아닙니다. 그저 민간요법일 뿐이지요. 혹은 플라세보 효과라거나."
"플라세보 효과?"
"사실상 아무런 약효나 효력이 없는 치료법인데, 그게 효과가 있다고 믿는 긍정적 심리 때문에 증상이 치유되는 걸 뜻하는 용어입니다."
"잠깐. 그렇다면...."
"예. 여왕께서 크라켄에게 손 따기의 효과를 알려주셔야 합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확신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 상태에서 크라켄의 다리 끝을 따서 피를 내고, 플라세보 효과로 급체가 풀리길 바라야 한다는 거로군."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다행이다.
인어 여왕이 이쪽의 의도를 제대로 따라줄 것 같다.
'아마 대안이 없을 테니까.'
이곳 인어들은 급체라는 걸 아예 안 겪는다고 했던가.
그러니 급체가 얼마나 괴로운지.
그게 어떤 느낌인 건지.
전혀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땄을 때 속이 쑥 내려가는 그 느낌도 전혀 모르겠지.'
수많은 이들이 그저 플라세보 효과라고 치부하는 방법이 손따기였다.
여러 인터넷 정보 매체들이.
티브이에 출연하는 의사들이.
입을 모아 실질적인 효과는 없다고 말하는 게 손따기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람들 중엔 손따기의 위력(?)을 체험해 본 이들이 제법 있었다.
로이드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거 분명 효력이 있어. 내가 그걸 체험해 봤으니까.'
고등학교 수학여행 첫날 저녁.
생애 최악의 급체를 겪다가 실수로 소주까지 두 모금 마셔 버렸던 그날.
밤새도록 꽥꽥 헛구역질을 게워내야 했더랬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선생님께 그 사실을 알렸더랬다.
덕분에 술 냄새를 선생님께 들켜야 했지만.
선생님이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더랬다.
술을 숨겨왔던 친구들을 혼내시기보단 숙소 로비로 내려가셨다.
로비에서 가져온 실과 바늘로 이쪽의 손을 따 주셨더랬다.
'솔직히 실로 손가락 묶어서 따기 직전까지만 해도 왜 그러시나 했지. 그거 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거라고. 그런데 실제로 해 보니까? 완전 달랐어.'
손가락을 따니까 시커먼 피가 줄줄.
묶었던 실을 풀며 선생님이 등을 쓸어주셨더랬다.
그랬더니 평생 가장 속 깊고 시원한 트림이 저도 모르게 나왔던가.
동시에 막혔던 속이 쑥 내려갔다.
지금도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도 통할지도 몰라. 아니, 통해야 해.'
이대로 크라켄이 난동을 계속 부리면?
끝끝내 인어 군단과 충돌하게 되면?
그 난리에 보옥 토대가 파괴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그런 막장 사태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그러한 다짐을 되새기며 로이드가 말했다.
"솔직히 어떤 다리를 따야 효과가 있을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다 따 버리죠."
"다? 여덟 다리 전부?"
"예."
힘주어 말했다.
"여덟 다리 끝을 다 묶고, 신호에 따라서 동시에 따는 겁니다."
"으으...."
"안 죽습니다. 그거 딴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요. 크라켄이 겪고 있을 급체가 훨씬 괴롭고 아플 겁니다."
"쯧. 좋아. 그럼 해 보도록 하지."
결국, 인어 여왕이 로이드의 의견에 수긍했다.
'그래도 힘으로 크라켄을 제압하고 억누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확실히 크라켄에게도, 인어들에게도 그러할 터다.
여왕이 휘하의 장군들을 불러모았다.
작전이 신속히 전달되었다.
"...이상, 방금 전달한 내용대로 총 17개 부대로 나뉘어 움직일 것.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여왕이시여."
"다만 절대 위험을 무릅쓰거나 무리하지 말도록. 상황이 위험하다 생각되면 언제든 모든 인원을 후퇴시킬 것. 알겠지?"
"명, 받들겠습니다."
인어 장군들이 굳은 결의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가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그때부터였다.
인어들의 일사불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헤엄쳐간 이는 인어 여왕이었다.
크라켄을 향해 돌진했다.
그곳에서 외쳤다.
이제부터 치료를 해줄 거라고.
괴롭더라도 조금만 참으라고.
잠깐 따끔하겠지만 다 널 위한 거라고.
진심을 담아 외치며 크라켄의 주의를 끌었다.
그 사이, 인어 군단이 움직였다.
삐이이-익!
휘파람과 비슷한 고주파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인어 부대끼리 지정된 신호로 연락을 주고받는 소리였다.
그와 함께 인어 군단이 17개 부대로 나뉘었다.
상하좌우.
동서남북.
각각의 방향에서 일사불란하게 작전을 실행했다.
"자매들이여! 다리 끝을 목표로!"
"명심해! 끄트머리만 묶으면 돼!"
"머리칼을 이어서!"
"매듭은 단단히!"
인어들이 각자의 머리칼을 한 움큼씩 뽑았다.
모았다.
엮었다.
수십 미터 길이의 머리칼 로프 8가닥이 만들어졌다.
로프를 담당한 8개 부대의 인어들이 크라켄의 다리를 향해 접근했다.
"붙잡아!"
"버텨!"
부대별로 수백 명의 인어들이 크라켄의 다리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저마다 막강한 근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크라켄의 다리 끝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 사이, 머리칼 로프가 다리 끄트머리를 휘감았다.
"묶어!"
"당겨!"
매듭이 지어졌다.
크라켄의 몸부림이 심해졌다.
"크러러러렁! 크렁!"
손 따는 거 싫다고 몸부림치는 어린아이처럼.
크라켄이 거칠게 포효하며 여덟 다리를 휘둘렀다.
하지만 인어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바늘!"
여왕의 거센 외침.
그와 함께 바늘을 담당한 8개 부대가 움직였다.
그들은 무기고 알집에 보관되어 있던 기가티탄의 뿔을 바늘로 삼았다.
"돌진!"
각각의 뿔마다 열 마리의 인어들이 달라붙었다.
전력으로 헤엄쳤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돌진했다.
기가티탄 뿔 바늘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크라켄의 여덟 다리 끄트머리를 동시에 찔렀다.
그 순간, 인어 여왕이 외쳤다.
"비틀면서 뽑아!"
찌를 때는 깔끔하게.
뽑을 때는 일부러 살짝 비틀어서.
살점 벌어지며 생기는 상처가 커지도록.
출혈이 더 많이 일어나도록.
푸컥!
2미터 깊이까지 꽂혔던 거대 바늘이 비틀리며 뽑혔다.
크라켄의 다리 끝 살점을 일부 떼어냈다.
물론 수 킬로미터 크기인 크라켄의 덩치를 감안하자면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다.
따끔하긴 했지만.
"...크렁!"
여덟 다리에서 동시에 몰려오는 따끔함!
예고도 없이 모든 다리를 오그라들게 만드는 뜨끔함!
깜짝 놀란 크라켄이 여덟 다리를 확 움츠렸다.
동시에 밧줄 부대 인어들이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출혈이 시작되었다.
푸확!
원래는 푸른 빛깔로 보여야 할 크라켄의 혈액이었다.
한데 지금 다리 끝에서 나오는 피 색깔은....
"탁하고 어두워!"
어느 인어의 외침.
그와 동시에 모든 인어들이 황급히 물러나며 크라켄을 살펴보았다.
엄청난 기세로 휘둘러지는 크라켄의 여덟 다리.
그 끝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
과연 평소보다 탁하고 어두웠다.
그걸 깨달은 순간.
모든 인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성공이다!"
작전이 통했다.
정말로 육지 인간의 말대로였다.
크라켄이 급체 때문에 저러는 거라고.
다리 끝을 따면 어두운 피가 나올 거라고.
그러면 급체가 해결될 거라고 말했던가.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해결법이 정말로 통할 줄이야.'
하지만 아직 작전은 끝나지 않았다.
작전은 트림이 나와야 끝날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인어 여왕이 단호하게 외쳤다.
"17조!"
그 외침과 함께 대기하던 17조 부대가 움직였다.
그들은 인근 해역에서 급히 데려온 황제고래 서른 마리를 이끌고 있었다.
"접근해!"
황제고래가 17조 인어들의 인도에 따라 움직였다.
조금 겁은 나지만.
인어들의 부탁이니까 마지못해서.
크라켄의 뒤쪽으로 접근했다. 몸을 밀착시켰다. 흔히 사람들이 문어의 머리로 오해하는, 몸통 부분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비벼!"
열심히 부비부비 온몸을 비벼댔다.
크라켄의 복부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크라켄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크, 크러렁...."
살짝 나른하게.
눈동자가 풀리는가 싶더니.
"꺼어어어어어-억!"
온세상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처럼.
혹은 모든 십이지장 융털돌기를 동원한 오케스트라처럼.
일대 해역을 쩌렁쩌렁 울리는 깊고도 심오한 트림을 내뱉었다.
"...됐다."
인어 여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로 작전이 제대로 통했다.
저렇게 시원한 트림이 나왔으니까.
크라켄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으니까.
'성공했어.'
크라켄의 속이 편해질 것이다.
그럼 이제는 크라켄을 좀 달래 주고 안심시켜 준 뒤에 흩어진 알을 모으고 도시를 재건하면 될 것이리라.
인어 여왕은 오랜 시간 붙들고 있던 긴장을 끈을 놓았다.
후련하게 웃으며 로이드에게 돌아갔다.
그의 공을 치하하려 했다.
한데 그러다가 보았다.
여전히 찌푸려져 있는 로이드의 표정을.
'저거, 아직 안 끝났어. 트림이 모자라.'
작전 성공을 자축하며 환호하는 인어들.
반면에 로이드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심각한 눈길로 크라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급체가 다 안 풀렸어.'
다른 인어들은 몰라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크라켄을 향해 측량 스킬을 발동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덕분에 크라켄의 피부로부터 5미터 지점까지는 속을 내다볼 수 있었다.
물론 워낙 거대한 놈이라서.
5미터라고 해봤자 가죽도 다 못 볼 깊이였지만.
그래도 크라켄의 가죽의 움직임이라거나 속에 흐르는 혈액 흐름 등은 살펴보는 게 가능했다.
그렇기에 보였다.
'아까 한창 급체가 심할 때부터 저랬지. 몸통 가죽이 푸들푸들 잘게, 불규칙하게 경련하는 거. 그런데 지금은? 똑같아. 트림을 하면서 살짝 멈추나 싶었는데 또 시작되고 있어.'
그걸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손 따기 작전이 부족했음을.
'통하긴 했어. 그런데 2% 부족한 거야.'
워낙 심한 급체라서 그런 듯했다.
한 번의 손따기와 트림으로는 속이 다 안 내려가는 듯했다.
그래서였다.
로이드는 특단의 조치를 결심했다.
'손도 따고 등도 쓸어주고, 덕분에 트림까지 나왔는데 안 내려가면? 어쩔 수 없어. 게워내서 속을 비워야 해.'
한데 그걸 시도할 시간이 얼마 없어 보였다.
곧 다시 크라켄이 날뛰기 시작할 듯했다.
그때가 되면 다 늦으리라.
바로 지금, 주위에 알리거나 설명할 시간도 아끼며 움직여야 하리라.
그걸 직감한 로이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안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방울이를 꺼냈다.
"저기, 방울아?"
"방울?"
"미안한데, 화산 폭발 좀 써줘야겠다."
"빠방울?"
"저쪽으로. 날 싣고서. 해 줄 수 있겠어?"
"방울!"
야물딱지게 뽀잇 고개를 끄덕이는 방울이.
녀석에게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였다.
순식간에 커다래진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녀석이 벌컥벌컥 바닷물을 마셨다.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방울! 빠방울!"
딸랑딸랑딸랑!
수중을 뒤흔드는 방울이의 경고성 방울 소리.
그 소리가 퍼진 직후.
방울이가 꼬리를 치켜들었다.
후방을 향해 거센 폭발을 내쏘았다.
"방울!"
쿠콰아아아앙-!
엄청난 힘을 실은 화산 폭발이 수중에서 터졌다.
그 반탄력이 방울이의 몸을 로켓처럼 내쏘았다.
녀석의 등에 타고 있던 로이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으읏!"
엄청난 물살이 정면에서 얼굴과 온몸을 때려 왔다.
방울이의 등에 엎드리듯 최대한 몸을 낮추었다.
목표를 확인했다.
그의 눈길이 닿는 곳.
그곳에 크라켄이 있었다.
거대한 문어 괴수의 미간이 보였다.
측량 스킬로 엿본 바로는 머리와 복부가 이어지는 지점이었다.
로이드가 그쪽을 가리켰다.
"방울아!"
"방울!"
"내가 가리키는 곳 보이지! 저기 미간을 향해서! 한 번 더!"
"빠방울!"
콰아아아앙-!
수중 로켓 질주 중에 2차로 터뜨린 화산 폭발!
"...!"
속도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온몸을 한층 강하게 때려오는 물살.
하지만 로이드는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뒤편을 향해 삽을 내찔렀다.
방울이의 등을 박차며.
삼중 발파를 터뜨렸다.
투확-!
세 번째 폭발이 로이드의 몸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몸이 흡사 어뢰처럼 쏘아졌다.
그 끝에 크라켄의 미간이 있었다.
가까워졌다.
급속도로.
쇄도했다.
충돌했다.
투퍽!
물렁물렁하고도 두꺼운 크라켄의 미간.
그곳에 로이드의 몸통박치기가 제대로 꽂혔다.
해부학적으로는 머리와 복부가 이어지는 지점.
사람으로 치면 명치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즉, 로이드는 3단 로켓 모드로 크라켄의 명치에 몸통박치기를 꽂아 넣은 것이었다.
그 효과는 굉장했다.
"...오에엑!"
크라켄이 온몸을 뒤틀었다.
뭔가를 단숨에 토해냈다.
꽤액!
진실의 보옥과 똑같은 주파수로 공명하는, 에메랄드 조각상 한 덩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71화. 아오테아로아 설계도 (1)
뿌콰아앙-!
온 세상이 흔들렸다.
삽시간에 몰려오는 충격.
어느 쪽이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여기가 물속인지 땅 위인지 우주 공간인지.
그 어느 것도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아득함.
압도적인 충격과 혼돈과 어지러움 속에서 로이드는 온몸을 웅크렸다.
과거 어느 종강총회,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어라 마셔라 폭음을 한 뒤 필름이 끊겼던 다음 날 아침처럼 행동했다.
"...오애액!"
먹은 것도 없는 빈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럴 법도 했다.
'으으, 기절할 뻔했네.'
살짝 느껴지는 뇌진탕과 어지러운 메스꺼움.
그걸 간신히 억누르며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실루엣이 바로 앞에 있었다.
아니, 실루엣이라기보단 산 하나가 앞에 있었다.
단단한 기반암과 바위, 흙 대신에 두꺼운 외투막 가죽으로 둘러싸인 육중한 생명체.
몸통 둘레만 해도 몇 킬로미터는 될 법한 덩치.
그냥 아예 에베레스트 산과 맞먹을 등빨.
그토록 거대한 문어, 크라켄이 바로 코앞에서 온몸을 경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이쪽이 그랬던 것처럼 구토를 하고 있었다.
"크렁! 오에엑-!"
그걸 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다곤 하지만.
저런 무지막지한 놈에게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미친놈이 아닌가 싶었다.
'뭐, 그래도 저놈 외투막이 단단하지 않아서 감행한 시도였지만.'
로이드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인어 군단이 일사불란하게 실행했던 손 따기 작전.
성공적이었다.
크라켄의 거대한 여덟 다리를 거의 동시에 따내고 말았더랬다.
그 끝에서 검은 피가 왈칵 나오기도 했더랬다.
덕분에 크라켄이 깊고도 시원한 트림을 했던가.
'하지만 그 트림이 살짝, 딱 2퍼센트 정도 부족했지.'
원래 급체가 너무 심하면 그렇다.
정말로 심각한 급체는 소화제 먹고 손 따고 물구나무서다가 엄마한테 성적표 들켜 등짝 스매싱 맞거나, 직장 상사한테 톡 잘못 보내서 360도 토마스 돌며 그랜절을 해도 절대 안 내려가는 법이었다.
'조금 전 크라켄이 딱 그런 상태였어.'
손 따고 트림을 하긴 했는데 그게 좀 부족한 느낌.
그래서 잠깐 속이 내려가는가 싶다가도 다시 살살 불편해지려던, 딱 그랬던 상태.
그걸 깨닫자마자 움직였더랬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더랬다.
방울이의 2중 화산폭발로 추진력을 얻었다.
거기에 삼중발파로 다시 급가속했다.
그렇게 3단 부스터를 켜고서 크라켄의 미간에 몸통박치기를 감행했다.
인간으로 치자면 명치에 해당하는 부위.
즉, 명치를 x나(?) 쎄게 갈긴 셈이었다.
덕분에 크라켄이 꿀렁꿀렁.
온몸을 떨며 속의 것들을 다 게워내고 있었다!
'후아. 역시 이거지. 손 따고 뭘 해도 안 내려가는 급체에는 역시 게워내기가 최종병기인 법이거든.'
억지로 게워내기.
자칫 역류성 식도염이 도질 수도 있지만.
역류한 위액 때문에 식도고 치아고 다 상하지만.
위장 자체에도 굉장히 무리가 가는 방법이긴 하지만.
정말로 급체가 안 내려갈 땐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최후의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그래서 질렀다.
물론 그 와중에 자신의 안전도 챙겼다.
과감한 몸통박치기에 앞서 크라켄의 명치 부위를 스캔했더랬다.
그 부위가 얼마나 질긴지.
보기보다 단단하진 않은지.
그걸 모조리 파악하고 시뮬레이션 옵션까지 돌렸다.
저기에 온몸으로 부딪쳐도 자신이 크게 다치진 않을 거라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확인하고서야 과감하게 몸통박치기를 시전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쪽의 피해가 아주 없는 건 아니긴 했지만.
'으윽. 속이 계속 울렁거려.'
살짝 뇌진탕이 온 걸까.
어지럼증과 속 메슥거림이 가라앉질 않았다.
하지만 곧, 그런 피해를 넉넉히 만회해줄 보상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딩동!
[당신은 전체 상황을 파악하는 안목과 빠른 결단, 과감한 실행력을 통해 크라켄의 소화 불량을 단숨에 해결하는 위용을 선보였습니다.]
[이에 급체 치료를 받은 크라켄과 그걸 지켜본 인어 종족 모두가 당신의 행동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찬사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새로운 찬사가 생성되었습니다.]
'오옷?'
언제 보아도 반가운 메시지였다.
이번 사건도 이렇게 제대로 해결했구나 싶었다.
그 보상을 즐기는 마음으로 로이드는 새로운 찬사 내용에 주목했다.
[새로운 찬사, <명치! 명치! 명치!>가 생성되었습니다.]
[명치! 명치! 명치!]
[찬사 등급 : 해양 전설]
엄마, 나 속이 거북해요.
그러니? 명치를 대렴.
어머나 왜요 엄마?
거길 맞으면 속이 편해질 거란다.
그냥 편해지다 못해 영원히 편하게 잠들 거 같은데요.
괜찮단다, 아가. 두려워하지 말렴.
그래도 아플 거 같아요. 무서워요.
쯧쯧, 크라켄을 좀 보고 배우려무나.
크라켄이 어땠는데요?
명치 맞고도 아직 잘 살아가고 있잖니.
그렇다고 맞을 때 안 아픈 건 아니잖아요.
그럼 계속 속 거북하게 있을 거니?
으음... 아니요.
그러니까 딱 대렴.
그치만 무서워요 엄마!
괜찮단다, 아가. 엄마 손은 뭐라고 그랬지?
히잉, 야....
약손! (쾅)
[찬사 효과 : 당신은 거대한 크라켄의 소화불량을 한 방에 해결하는 위엄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소화불량의 당사자였던 크라켄은 물론이고, 수만 명의 인어 군단도 이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지요. 덕분에 당신의 영웅담이 곧 전 세계의 바다에 퍼지게 될 것이며, 명치를 강타하는 치료법이 해양 생물들 사이의 소화불량 해결법으로 각광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위업을 통하여 당신은 수중에서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는 기술인 <수중호흡>과, 어떤 상대라도 한 방에 속의 것을 모조리 게워내게 하는 강력한 수중 타격기인 <명치샷>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찬사 지역 : 바다, 강, 호수, 욕조 등 50cm 이상의 수심을 지닌 모든 환경]
[찬사 유지 기간 : 3,000년]
[찬사의 효력은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 내에서 24시간 적용됩니다. 또한, 추후 당신의 행적에 따라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이 확장 및 연장, 축소 및 단축될 수 있습니다.]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5]
[현재 보유 중인 CP : 1,312]
'...나이스. 진심 초필살 나이스.'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나 이번 찬사도 대박이었다.
우선 찬사를 통해 크라켄의 급체를 완전히 해결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찬사 덕분에 얻은 옵션도 실로 대박이라 할 수 있었다.
'수중호흡이라니. 그럼 인어들이 준 이 목걸이 없이도 수심 1미터 이상인 물속에서는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다는 거잖아. 물론 수압이나 온도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적어도 익사할 일은 없게 됐다는 거지. 거기에 명치샷은... 으음, 마음에 안 드는 놈 생기면 속 비워주는 용도로 쓰면 되겠네.'
이래저래 정말로 유용한 찬사 효과를 둘이나 얻었다.
'그러니 이제 빠르게 물러나자.'
일단 보상은 보상이고.
여기서 계속 밍기적거리다간 좋지 못한 꼴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크라켄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나한테 제대로 명치 맞았으니까. 심지어 토하기까지 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크라켄에게 앙갚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한데 그 앙갚음의 규모가 거의 에베레스트 산이 앙심 품고서 작정하고 덤비는 수준이라면?
솔직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인 하비엘이라도 막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딩동!
슬금슬금 크라켄의 눈치를 살피며 멀찍이 물러나려는데 별안간 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음?'
처음엔 뭔가 싶었다.
반사적으로 눈길을 움직였다.
뜻밖의 메시지가 추가로 떠올라 있었다.
[호감도 개방]
[크라켄이 자신의 소화불량을 해결해준 당신을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크라켄은 당신을 동등한 우정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크라켄과 호감도를 올리고 RP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호감도 개방 보너스로 50 RP가 특별지급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532]
[크라켄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11 상승하였습니다.]
[크라켄과의 현재 관계 : +11]
[등장인물과의 관계 개선으로 33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565]
'헐.'
무려 크라켄과 호감도 개방이라니.
이건 생각도 못했는데.
그때였다.
"크렁! 크러렁!"
눈앞의 크라켄이 엄청난 기세로 포효했다.
그리고 이쪽으로 눈동자를 데구르륵 굴렸다.
아니, 말이 그냥 눈동자란 거지.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
혹시 이쪽을 향해 초점을 맞춰 오는 축구장 사이즈의 눈동자로부터 그윽한 눈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행여나 취업 면접을 보다가 저런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가로 어떤 기분이 들었느냐고 면접관이 물어온다면, '오줌 안 참을 자신 있겠던데요'라고도 답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만큼 실로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기분을 헤아린 걸까.
크라켄이 다리 하나를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뻗어왔다.
"...."
죄송합니다.
앞으로 오징어 다리에 마요네즈 안 찍을게요.
거대하게 그림자를 드리워 오는 크라켄의 다리를 영접하며, 하마터면 로이드는 그렇게 외칠 뻔했다.
하지만 위압감에 눌려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기 직전.
그는 크라켄의 다리 끝 빨판에 들려 있는 뜻밖의 물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각상?'
그것은 조각상이었다.
크기는 약 3미터 남짓.
영롱한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해마 조각상이었다.
한데 그 조각상이 강렬한 진동을 선보이고 있었다.
마치 일요일 아침에 잘못 걸려온 전화처럼.
연신 '부우우우웅-!'하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데 저 진동, 낯설지가 않은데?'
조각상을 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아까 로토루아 씨가 보옥 터의 표식을 만졌을 때. 보옥 터 전체가 딱 저렇게 진동했어. 주위의 바닷물이 그 진동에 공명했고.'
한데 조각상의 진동이 아까의 그 공명과 흡사해 보였다.
아니, 진동의 세기나 패턴이 거의 똑같았다.
그걸 보자니 문득 어떤 추측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그가 크라켄을 향해 물었다.
"혹시, 방금 이걸 토했던 겁니까?"
"크렁-!"
"그럼 이걸 토해내니까 속이 편해진 겁니까?"
"크러렁!"
로이드의 말을 알아들은 크라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크러렁! 크렁! 크렁렁! 크렁!"
이거, 생각해보니 300년쯤 전에 우연히 삼켰던 것 같다고.
해저에 뭔가 반짝거리는 게 보여서 호기심에 살펴보다가 실수로 삼켰었다고.
그 뒤로 별다른 일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물론 로이드는 그러한 크라켄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신 크라켄의 태도를 통해 나름의 추측 정도는 했다.
'이 조각상을 토했고, 그 뒤로 속이 편해졌다는 건... 그렇네. 그거네. 저게 뱃속에서 진동했던 거네. 그래서 크라켄의 속이 거북해진 거였고. 급체의 원인이 저거였어.'
한데 자신이 명치샷을 때렸다.
크라켄이 조각상을 토해냈다.
덕분에 급체가 내려간 듯했다.
'게다가 저 조각상이 보이는 진동. 분명 보옥 터가 떨리는 진동과 패턴이나 세기가 똑같아. 그렇다는 건....'
저거, 보옥과 연관이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거기까지 확신한 로이드가 크라켄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제게 이걸 보여주시는 건... 제게 이걸 넘겨주시겠다는 뜻인 겁니까?"
"크렁!"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로이드는 크라켄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냉큼 조각상을 받았다.
뾱! 부우우웅-!
빨판에서 떨어진 조각상이 이쪽의 품에 묵직하게 들렸다.
'후아.'
무자비하게 진동하는 3미터짜리 휴대폰을 껴안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로이드는 재차 올라오는 어지럼증과 헛구역질을 애써 참아냈다.
그리고 재빨리 헤엄쳤다.
보옥 터가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내 추측이 맞다면 이 조각상, 보옥 터의 일부였을 거야.'
그러니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하면 뭔가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부지런히 헤엄쳤다.
크라켄의 안위를 걱정하며 몰려드는 인어들을 뒤로하고.
어느새 하비엘, 로토루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보옥 터로 돌아갔다.
그렇게 보옥에 다가갈수록 조각상의 진동도 강렬해졌다.
부와아아아악-!
'...그와악!'
그렇잖아도 뇌진탕 때문에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리는데.
로이드는 자꾸 올라오려는 신물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옆에서는 하비엘이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괜찮으신 겁니까."
"넌 내가 괜찮은 걸로 보이냐."
"음, 적당히 괜찮으면서 적당히 안 괜찮게 보입니다."
"뭐냐, 그 애매한 대답은."
"그래서 딱 적당하게 걱정되고 적당히 즐겁다는 뜻입니다."
"...."
"잠시 등, 대시죠."
고소하다는 눈길을 보내던 녀석이 손을 뻗어왔다.
이쪽의 등을 손바닥으로 짚어왔다.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하는 걸까.
따스한 마나가 등을 통해 스며오는 게 느껴졌다.
피부와 근육을 거쳐.
척추와 신경, 혈관을 타고서.
전신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는 등을 통해 빠져나가 녀석의 손바닥으로 돌아갔다.
마치 아픈 곳에 호오 입김을 불어주는 듯한 마나였다.
덕분에 어지럽고 메슥거리던 게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
"이제 좀 괜찮아지셨을 겁니다. 안색도 좋아지셨고."
녀석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얼굴이신데 안색이라도 좋아야지요."
"...그래. 눈물 나게 고맙다, 야."
"별말씀을."
"후아. 이렇게 몸은 치료해주고. 정신은 두들겨 패고. 참 좋겠네. 그치?"
"예, 좋습니다."
"헐. 대놓고 부정하지도 않아."
"이런 순간 엿보이는 로이드 님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상하는 게 즐거우니까요."
"...."
"그 즐거움으로 치료비 받은 셈 치겠습니다."
"허. 허허허."
로이드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녀석, 말은 저렇게 해도 이쪽을 걱정해준 건가 싶기도 했다.
'어쨌건 지금은 이것부터.'
그는 끌어안은 조각상에 집중했다.
부오아아아앙아아-!
진동이 더욱 거세어져 있었다.
로이드는 그 진동의 세기에 주목했다.
'아까까진 보옥 터로 돌아오는 동안 진동이 일정하게 강해졌는데, 이젠 조금 달라졌어.'
보옥 터 근처에서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진동의 세기가 달라졌다.
그게 알려주는 사실은 명확했다.
'원래 놓일 자리.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진동이 강해지는 거야.'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조각상의 진동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물살을 가르고. 걸음을 옮기며. 접근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여기다.'
보옥 토대에서 남쪽으로 약 20미터쯤 떨어진 지점.
그곳 바닥에 지름 70센티에 달하는 구멍이 보였다.
조각상 아래쪽 기단부의 모양과 일치하는 구멍이었다.
'여기, 혹시 보옥의 진입로에 해당하는 지점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조각상을 내려놓았다.
쿠득!
조각상 기단부가 구멍에 쏙 들어갔다.
그 순간, 조각상과 보옥 터의 공명이 멈추었다.
그때부터였다.
츠즈즈즈...!
화려한 빛이 조각상을 물들였다.
조각상 에메랄드 내부에서 어지럽게 반사되었다.
조각상의 두 눈을 통해 바깥으로 쏘아졌다.
물속에 입체적인 빛의 그림을 그려냈다.
화려한 선과 면.
정교한 빛의 축제.
마침내 보옥의 설계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야 이건. 피라미드? 장군총?'
272화. 아오테아로아 설계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