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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납치와 낚시 사이 (3)

 

 

"전하, 특사단의 로이드 프론테라와 일행이 당도하였사옵니다."

"들라 하라."

이곳은 마젠타노의 왕궁.

그 호화로운 중심처의 훈련장에서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훈련장의 문이 열렸다.

"...."

술탄국의 반군 리더, 테르메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지금 눈앞에서 열리는 문도.

활짝 펼쳐지는 광활한 훈련장의 광경도.

그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붉은 머리칼 여자의 모습도.

모두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얼결에 로이드를 따라 걸음을 옮겨 여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는 자신의 모습 또한, 지독하도록 비현실적이었다.

"아르코스 프론테라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가 국왕 전하를 뵙사옵니다."

"수, 술탄국의 다미에타 테르메스가 마젠타노의 국왕을 뵙사옵니다."

혹시 말을 더듬진 않았을까.

혹은 인사말을 틀리진 않았을까.

아까 왕궁에 도착한 뒤부터 수십 번은 속으로 연습했는데. 혹여나 실수라도 할까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인사말을 꺼냈다.

그 말이 틀렸는지, 말을 더듬진 않았는지도 스스로 점검할 수 없었다.

테르메스는 그저 가쁜 심호흡을 내쉬며 긴장감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 문득,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떠올렸다.

'정말로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고.'

닷새 전의 밤이었던가.

로이드 프론테라를 납치했던 자신과 동지들이었다.

술탄의 끄나풀로 보이는 로이드.

그를 납치해서 심문했더랬다.

칸다라의 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저의를 밝혀내려고.

술탄이 무슨 짓을 꾸미려는지를 알아내려고.

독한 마음을 먹고 납치를 했더랬다.

'한데 그 자리에서 그런 엉뚱한 제안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로이드 프론테라.

그는 납치된 주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제안을 해왔더랬다.

반군이 아지트로 쓰는 땅굴을 모두 넘기라고. 그래야 지하수로를 건설해서 가뭄을 해결할 수 있다고.

그걸 받아들인다면?

술탄의 해코지를 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영지에서 망명을 받아주겠다고.

말도 안 되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그런 제안을 해 왔더랬다.

당연히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믿음이 가질 않았으니까.'

로이드가 술탄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안 믿었다.

어떻게 그 제안을 신뢰하겠느냐고.

그 제안의 진실성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고.

거칠게 다그쳐 물었다.

그랬더니 로이드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국왕 알리시아에게 망명 허가서를 받아오자고 했지.'

당연히 미친 소리인 줄 알았다.

곁의 동지들도, 자신도 그렇게만 여겼다.

그런데 그때 로이드가 뭐라고 했던가.

 

'뭐, 못 믿겠으면 앞으로도 계속 이 도시에서 오순도순 가뭄에 허덕이시든가.'

 

한심하다는 듯 피식거리며 이쪽을 쳐다보던 그 눈빛.

그 눈빛 때문이었다.

자신의 고향을 뒤덮은 가뭄이 떠오른 것은.

목마름에 허덕이며 죽어가던 자신의 어린 아들이 떠오른 것은.

그 앞에 철저히 속수무책이었던 자신.

그날의 울분과 절망감, 비애가 새삼 되살아나 가슴을 저민 것은.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좋다. 함께 가서 확인하지. 다만, 그 제안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살아남을 생각은 하지도 말도록.'

씹어먹을 듯 로이드를 노려보며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로이드와의 여정에 나섰다.

로이드에게 당할 걱정은 하지 않았다.

검술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괴상하고도 커다란 뱁새를 타고 함께 날았다.

서쪽을 향해 부지런히 이동했다.

그동안 마음속에 품은 생각도 조금씩 변해갔다.

사막을 건너면서는 여전히 의심을.

산맥을 넘으면서는 호기심을 품었다.

마젠타노의 국경을 건너며 내심 놀랐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내 경악하게 되었다.

지금, 이렇듯 마젠타노의 국왕과 대면하게 되면서 말이다.

"그대가 로이드 프론테라와 함께 왔다는 술탄국의 반군 리더인가?"

 

움찔!

 

상념에 잠겨 있던 테르메스의 의식을 나직한 목소리가 일깨웠다.

테르메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크게 흠칫 떨었다.

"예, 예! 그렇사옵니다!"

저도 모르게 쩌렁쩌렁 엄청난 목소리로 대답해 버렸다.

국왕 알리시아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괜찮다. 짐은 그대를 해칠 생각이 없으니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해치지 않아요.

나직하지만 힘이 실려 신뢰가 가는 한마디.

비로소 테르메스의 어깨에 과도하게 맺혀 있던 긴장감이 살짝 풀렸다.

그는 감히 고개를 살짝 들었다.

국왕 알리시아의 모습을 일순간 훔쳐보았다.

'저 여자가 진짜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마젠타노 왕가의 국왕이자 소드마스터.

소문은 수없이 들은 바 있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했다.

수많은 정치적 음모와 투쟁을 모두 이겨내고 왕위를 거머쥐었다고도 했다.

그야말로 문무겸비.

거기에 정치력 또한 빼어나다 했던가.

'그런데 저런 모습일 줄은 몰랐어.'

권위 가득한 모습으로 호화로운 왕좌에 앉아 자신을 맞이할 줄 알았다.

한데 실제로 와보니?

아니었다.

국왕 알리시아는 흙투성이 모습이었다.

수수하게 차려입은 훈련복.

그 부츠와 무릎 보호대는 모래와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상의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비록 진흙이 묻진 않았지만 대신 땀투성이였다.

원래는 갈색이었을 셔츠가 땀에 절어 검은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목에 걸고 있는 수건은 어떠한가.

손에 쥔 장검은 어떠한가.

손잡이가 손때로 가득했다.

그 모든 모습은 왕의 것이라기보다는 훈련을 갓 마치고 나온 기사의 것에 훨씬 가까웠다.

자신을 맞이한 장소 또한 그러했다.

'방금까지 훈련을 하고 있었던 건가.'

우뚝 선 국왕 알리시아의 뒤편.

모래 깔린 드넓은 훈련장 곳곳에 기사들이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저마다 팔이며 다리, 어깨 등을 부여잡고서 끙끙대고 있었다.

그 숫자가 어림잡아 쉰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아마도 방금까지 저 여자에게 얻어터지고 있었던 거겠지.

'소드마스터란 건 저런 거구나.'

왕궁에 있는 기사의 실력이 떨어질 리가 없다.

그런 자들 50명을 연습 삼아 검 한 자루로 땅바닥에 굴리는 저 여자가 괴물인 거다.

그리고 자신은 망명을 허가받기 위해 그런 괴물을 만나러 온 거다.

'이거, 진짜 현실인가.'

테르메스는 다시금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상황이 잘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국왕 알리시아의 실소가 흘러내렸다.

"놀랍군."

국왕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테르메스와 나란히 무릎을 꿇은 로이드를 향했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오랜만이로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저도 전하의 존안을 뵙게 되어 실로 반갑기 그지없사옵니다."

"정말로?"

"...맹세코 사실이옵니다. 그러니 머나먼 술탄국에 있다가도 전하의 존안을 뵙기 위한 일념 하나로 이렇듯 달려온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쯧. 감히 짐을 상대로 뻔히 보이는 아양을. 순리대로 따지자면 그대는 짐의 명에 의해 술탄국 수도 아힌샤에 체류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지금 이곳, 짐의 면전에 와 있는 것인가."

"간략히 고하여 드리면 되겠사옵니까?"

"상세히 고하라."

"명, 받들겠사옵니다."

로이드가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 기나긴 설명을 시작했다.

최대한 디테일하게, 차근차근, 순서대로 모든 것을 고하였다.

마침내 그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국왕 알리시아의 미간에는 살짝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술탄국이 짐의 특사단을 매우 홀대하였고, 그대는 그 홀대를 깨고 협상을 시작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술탄과 건설 계약을 맺었으며, 그 건설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기 위해 저 반군 리더의 협조가 필요하였다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여 짐이 저 반군 리더에게 망명 허가서를 내리길 원한다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감사는 성급해. 짐은 아직 그대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오나 저 로이드 프론테라는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을 굳건히 믿고 있사옵니다."

"쯧. 그대의 뻔뻔함은 대체 어디까지일는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놈의 매일 망극한 성은."

국왕 알리시아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참으려 했는데 웃음이 절로 나와 버리고 만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 황당한 자의 더욱 황당한 행동거지를 보자니 웃음을 아니 맺을 수가 없다.

'그래. 반군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이 술탄의 끄나풀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내 앞으로 오는 방법이 가장 확실했겠지.'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적국의 반군 리더를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대담한 발상?

그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

놀라운 건 그 대담한 발상을 정말로 행동으로 옮겨 버리고 마는 정신 나간 수준의 실행력이었다.

'이건 대범한 건지, 아니면 겁이 없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타입인 건지.

알리시아의 쓴웃음이 살짝 짙어졌다.

"로이드 프론테라여."

"예, 전하."

"그대는 참으로 버르장머리 없는 충신이로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니, 사죄할 필요는 없노라. 어차피 오늘 벌인 일 또한 큰 시각으로 보자면 특사단의 일을 조력함으로써 짐에게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행동일 것이니."

"소인을 헤아려주시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쯧. 마음에도 없는 성은은 그만. 하면 짐이 저자에게 망명허가서를 내려주면 되는 것이겠지?"

"그러하옵니다, 전하."

로이드가 더욱 납작 엎드렸다.

알리시아가 좌우를 불렀다.

그녀가 허가서의 내용을 읊고, 궁내부원이 서류를 작성했다.

그렇게 불과 5분 뒤.

무려 국왕의 직인이 들어간 공식 망명허가서가 테르메스의 손에 쥐어졌다.

"...자, 이것이 있다면 그대와 그대를 따르는 이들은 언제든지 마젠타노의 백성이 될 자격을 얻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테르메스는 떨리는 심정으로 허가서를 챙겼다.

닷새 전 칸다라 외곽의 창고에서 로이드의 호언장담을 들을 때만 해도 속으로 코웃음을 쳤었는데.

'설마 그 말이 진짜 현실이 될 줄이야.'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국왕 알리시아에게 인사를 하며 물러날 때도.

그 와중에 국왕 알리시아가 로이드를 불러세울 때도 그러했다.

"...참, 로이드 프론테라여. 기왕 이렇듯 만난 김에 짐이 그대에게 일러둘 일이 있노라."

"어떤 일이시옵니까, 전하."

"그대가 나마란에서 잡아들인 흑마법사 칸나바로 말이다."

"예, 전하."

"조만간 그에 대한 심문이 마무리가 될 듯하구나. 어쩌면 그때쯤 짐이 조력을 얻기 위하여 그대를 왕도로 불러들일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도다."

"...소인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러하다. 혹 그대는 짐의 부름이 내키지 않는가?"

"물론 아니옵니다."

"그렇지?"

"그렇사옵니다."

"맞아. 그래야겠지. 오늘처럼 이렇게 대뜸 짐을 찾아온 것만 보아도 그럴 테지. 그대에게 짐은 언제나 만나고 싶은 대상일 테니까. 그렇지 않나?"

"무, 물론이옵니다."

"흐음. 방금 그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 것 같은데."

"아, 이건 요즘 소인이 과로를 거듭하였던지라."

"짐을 보기 위하여 밤낮없이 날아오느라?"

"그러하옵니다."

"그럼 다음에 짐이 부를 때도 이번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아오겠다는 뜻이로군?"

"물론, 이옵니다."

"또 또. 눈꼬리가 떨렸는데."

"역시 과로 때문이옵니다."

"그렇군. 역시 과로 때문이었군."

"그렇사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대는 자신이 필요로 할 때만 짐을 만나러 오는 그런 얄밉고 이기적인 자가 결코 아니어야 할 거야. 그렇지?"

국왕 알리시아가 어쩐지 뒤끝 있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로이드가 진땀 어린 미소로 황급히 어전에서 물러났다.

"후아."

국왕의 훈련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뒤.

비로소 로이드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테르메스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이젠 좀 신뢰가 생겼는지."

"...."

테르메스는 말없이 시선을 움직였다.

자신의 손에 들린 한 장의 서류.

무려 국왕 알리시아의 직인이 찍힌 망명허가서였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 이게 진짜로 될 줄은."

"몰랐지요?"

"후우. 몰랐소. 진심으로."

"그럼 제가 했던 제안, 이젠 받아들이실 겁니까?"

"물론. 땅굴을 모두 양보하리다."

테르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눈앞의 이 엉뚱한 도련님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만약, 반군 동지 중에 아직도 그를 못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직접 도시락을 싸들고 동지를 따라다니면서라도 설득하리라는 각오마저 들었다.

"그럼 이제 다시 칸다라로 돌아가는 거요?"

"네, 그래야죠. 출발할 때 말했던 것처럼."

"11박 12일. 맞소?"

"네. 날씨가 계속 좋다면 하루쯤 일찍 돌아갈 수도 있을 듯하구요."

"그렇구려."

"네, 그렇죠."

둘은 잠시 말없이 왕궁 밖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정식으로 통성명을 나눈 적은 없지 않던가요?"

"음?"

"정식으로 인사하죠. 마젠타노 왕가에 충성하는 프론테라 백작령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

어느새 이쪽을 향해 내밀고 있는 손.

테르메스도 손을 내밀었다.

로이드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프론테라 백작령으로의 망명 예정자, 다미에타 테르메스외다. 앞으로 잘 부탁하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 사이에 납치극은 없는 걸로."

"당연하오. 내 미래의 주거지 통치자가 되실 예정이시니."

"그럼 오밤중에 몽둥이로 이마를 때리는 일도 없겠군요?"

"...그건 매우 미안했소."

반군 리더, 테르메스는 그만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엿새 후.

꼬밍이의 부지런한 날갯짓 덕분에 로이드는 테르메스와 함께 사막의 도시 칸다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오랜 가뭄을 끝내기 위하여.

반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등에 업고서.

카나트 건설을 위한 본격적인 측량을 시작할 때였다.

194화. 구멍 뚫는 사람들 (1)

 

 

본격적인 측량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시공을 할 때마다 반드시 치렀던 과정.

매번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항상 똑같지만은 않았던 과정.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땅속에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는 땅굴을 연결하는 시공이니까.'

위치도.

길이도.

깊이도.

방향마저도.

모두가 제각각인 수십 개의 땅굴이었다.

그런 땅굴들이 이곳 칸다라 시에서 서쪽 산맥 기슭 사이의 황량한 평원에 무작위로 흩어져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깊이가 지면에서부터 5미터 이상 아래였다.

즉, 지상에서 측량하는 것으로는 지하 스캐닝 옵션으로 땅굴의 모양과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한 거고 말입니다."

이곳은 칸다라 시 외곽의 버려진 창고.

보름쯤 전엔 로이드가 납치되었던 장소.

그 추억(?)의 장소에서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창고에 모인 모두를 둘러보았다.

"제가 말씀드린 지도는 안 빠뜨리셨지요?"

 

끄덕.

 

로이드의 물음에 테르메스와 반군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르메스가 모두에게서 걷은 수십 장의 지도를 테이블 위로 수북하게 쌓았다.

"여기 있소."

그가 지도를 하나하나 펼쳐 보였다.

"우리가 확보하거나 파악하고 있는 땅굴 대부분이 표시된 지도외다. 일단 나름 분류도 해놓았고 말이오."

"분류라니요?"

"칸다라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거리가 비슷한 경우엔 규모가 큰 순서대로. 두 가지를 기준으로 삼아 분류를 해보았소."

"오오."

로이드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반군 리더인 테르메스 씨.

기대보다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좋군요."

지도를 살펴보는 로이드의 눈빛에도 만족감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지도가 제법 상세했다.

게다가 나름 체계적으로 지도를 관리했던 건지, 지도의 표기법이나 단위, 기호가 제법 말끔하게 통일되어 있었다.

'좋아. 매우 좋아.'

이러면 일거리가 팍팍 줄어든다.

중구난방인 지도를 정리하고 단위를 통일하느라 골머리 빠개지는 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럼 이제 제 차례가 왔군요."

 

뚜두둑, 뚜둑!

 

지도를 챙긴 로이드가 테이블 앞에서 물러났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온몸을 풀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테르메스가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차례라니?"

"아."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싱긋.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좀 뛰려고요. 여러분이 제공해준 지도를 기반으로."

"설마, 땅굴 속을 뛰어다니겠다는 거요?"

"예."

"...."

"당연한 겁니다. 측량을 해야 하니까요. 제 눈으로 직접 봐야 합니다."

"거리가 상당할 텐데."

"그러니 이렇게 옷을 편하게 입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미 로이드는 편안한 셔츠와 헐렁한 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심지어 목에는 수건까지 한 장 두르고 있었다.

본격적인 동네 마라토너 복장이 이럴까.

"그래도 지도를 워낙 잘 정리해준 덕분에 뛸 거리가 생각보다 절반쯤 줄어들 것 같습니다. 여기, 이 통로 보이죠? 이런 곳처럼 아예 갈 필요가 없는 곳들이 잘 파악이 돼서요."

"이거,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거요?"

"예. 그러니 응원해주시죠."

몸을 다 푼 로이드가 창고를 나섰다.

밖에선 10미터 크기의 뽀동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뽀동!"

"꼬밍이는?"

"뽀도동! 뽀동!"

"아직 뭉친 날개 근육 안 풀렸대?"

"뽀동!"

"알았어. 안 그래도 걔, 이번에 왕도 다녀오느라 고생 많이 해서. 당분간 쉬게 해줄 참이야."

"뽀동! 뽀도동!"

"그래, 어서 가자. 자, 테르메스 씨도 타시죠."

로이드는 테르메스와 함께 뽀동이의 등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몽실몽실 뽀동뽀동한 승차감(?)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렇게 뽀동이를 타고서 서쪽으로 내달렸다.

테르메스의 안내에 힘입어 얼마 가지 않아 칸다라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땅굴에 도착했다.

땅굴에 들어갔다.

그리고 홀로 뛰었다.

측량을 위한 본격 마라톤의 시작이었다.

"후욱, 후우욱!"

가볍게 숨을 고르며 통로를 달렸다.

때로는 곧게.

때로는 구불구불.

올림픽 성화 봉송하듯 횃불 하나 들고서 통로를 달리는 동안 측량 스킬을 발동했다.

 

츠츠츠츠...!

 

땅굴의 수많은 정보가 측량으로 파악되었다.

'나 참, 이젠 내가 이런 짓까지 다 하네.'

졸지에 지하 몇 미터 아래에서 팔자에도 없던 마라톤이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여러 기억도 떠올랐다.

'처음 검술 배우던 때 생각나네.'

영지의 배신자 노이만 경을 처단하려는 결투를 위해서였던가.

당시 하비엘에게 처음 검술을 배우며 기초체력을 닦았더랬다.

평생 뛴 걸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뛴 듯한 나날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빠르게, 오래 뛸 수 있었다.

트리플 써클을 이룬 아스라한 심법, 그리고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수준에 다다른 마나하트 덕분이었다.

"후우욱! 후욱!"

또 언제 이렇게 열심히 달렸더라.

아, 그렇지.

'야수 개미.'

영지에 석탄 광산 시공을 하던 때였던가.

광산 막장이 야수 개미의 땅굴과 맞닿아 버렸었다.

덕분에 야수 개미를 유인하느라 땅속을 달리고 또 달렸더랬다.

'그때 생각 많이 나네.'

다시 한 번 피식.

떠오르는 추억을 갈무리하며 달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땅굴의 마지막 부분까지 도착했다.

그는 지도를 살폈다.

'좋아. 지금까지 달린 경로대로 수로를 조성하면 되겠어. 물이 다른 곳으로 흐르지 않도록 여기, 여기, 그리고 이쪽을 막아두면 될 듯하고.'

그는 재빠르게 지도의 여러 장소를 체크했다.

그렇게 한두 시간 만에 땅굴 하나의 측량이 끝났다.

그 후에는?

"자, 또 움직이자."

"뽀동!"

다시금 뽀동이를 타고서 이동했다.

테르메스의 안내로 다음 땅굴에 도착했다.

물론 그 사이에도 로이드는 쉬지 않았다.

첫 땅굴과 두 번째 땅굴 사이의 경로를 자세히 측량했다.

두 땅굴을 연결할 최단거리의 경로를 예측하고, 계산했다.

그러는 사이 두 번째 땅굴에 도착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뽀동이랑 기다리고 계세요. 심심하면 둘이 끝말잇기 하며 노시구요."

"끝말잇기?"

"네. 뽀동아?"

"뽀동?"

"너부터 시작해볼래?"

"뽀동!"

"자아, '동'으로 받으시면 됩니다."

로이드가 테르메스를 돌아보았다.

테르메스가 얼결에 끝말잇기를 받았다.

"...도, 동그라미."

"자, 뽀동아?"

"뽀도동!"

"미술가, 라고 뽀동이가 말했네요. 그래도 뽀동이식 발음은 '동'으로 끝났으니까, 아시죠?"

"...."

이런 끝말잇기는 사기다.

테르메스는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서 땅굴 속으로 쇽.

측량을 위한 부지런한 마라톤의 길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결국, 홀로 남겨진 테르메스는 뽀동이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동전."

"뽀동!"

"동대륙."

"뽀도동!"

"...."

테르메스는 술탄에게 반기를 들던 시절보다 더 큰 벽에 부딪힌 기분을 느꼈다.

 

 

스칵!

 

"헉...! 허억!"

거대한 벽.

크기를 가늠하기에도 아득한 벽.

그러한 벽에 부딪히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세라자드는 가슴을 저며오는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치잇!"

 

쉬이잉-!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수없이 갈고 닦은 검이었다.

그 피와 땀의 정수가 고스란히 밴 일격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검에 자신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닥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후웅...!

 

"...!"

빗나갔다.

스치지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도 못했다.

'어째서?'

세라자드의 흑진주 빛깔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재빠르게 상대의 궤적을 추적했다.

돌아올지도 모를 반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상대는 반격하지 않았다.

그저 이쪽의 검격 궤도에서 살짝 물러났을 뿐.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세라자드의 떨리는 목소리가 숙소 내부를 채웠다.

그러자 상대, 하비엘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닙니다."

"그럼?"

"말했을 텐데요. 저는 로이드 님의 지시를 따를 뿐이라고."

"날 여기에 가두어두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지시?"

"로이드 님은 당신을 여기에 가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잘 모시라고 했을 뿐."

"그게 그거잖아!"

 

쉬칵! 샥!

 

발끈한 세라자드가 두 발짝 재빠르게 전진 스텝을 밟았다.

엇박자로 박자를 쪼개며 두 번의 공세를 퍼부었다.

사막 지방 특유의 곡도, 시미터가 사선으로 공간을 갈랐다.

호흡과 호흡의 틈새를 파고드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만약 상대가 보통의 검사였다면.

아니, 엇비슷한 실력의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였다면.

충분히 허를 찔려 당황했을 법한 공세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녀의 상대는 하비엘이었다.

"...."

 

스윽.

 

하비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반걸음을 움직였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세라자드의 비장의 공세는 이번에도 헛되이 빗나갔다.

하비엘 근처에 있던 애꿎은 탁자 하나와 의자 등받이만 쪼갰다.

"날 모신다고? 웃기지 마. 난 호위무사야. 술탄께서 임명하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이미 말씀드렸지만 로이드 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그 작자가 뭐랬길래!"

"사막의 햇볕이 피부에 안 좋다고 하더군요."

"...뭐?"

숨 쉴 틈도 없이 하비엘에게 공세를 퍼붓던 세라자드.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한쪽 눈썹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로이드 님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겁니다."

"무슨...."

"사막의 햇볕은 자외선이라는 것이 강해서 피부 노화를 촉진한다더군요. 게다가 공기까지 건조해서 더 최악이라고 했습니다. 또 미세먼지도 많아서 호흡기에도 별로 좋은 영향이 가질 않으며, 장기적으로는 각종 폐 질환에 걸릴 확률을 높인다고 했습니다."

"...."

저거, 무슨 말일까.

그녀는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하비엘의 말을 들었다.

"사실 저도 자외선이 뭔지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낮 동안 당신을 숙소에 붙잡아두는 게 즐거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못 나가게 막는 건데?"

"여러 번 말했지만, 로이드 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또! 또 그 말!"

발끈한 세라자드가 시미터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사실 그녀는 가슴 한쪽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안 돼.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어.'

벌써 며칠째 이렇게 발이 묶여 있는 자신이었다.

낮엔 하비엘에게 가로막혀 숙소에서 나갈 수 없었다.

밤엔?

로이드가 찾아왔다.

찾아오자마자 주술 같은 괴상한 말을 지껄여댔다.

대화 비슷한 걸 나눠볼 틈조차 없었다.

로이드의 괴상한 말을 들으면 졸음이 홍수, 아니, 해일처럼 몰려왔다.

저항하려 눈을 부릅떠보아도.

허벅다리를 힘껏 꼬집어도.

결국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인생에서 손으로 꼽을 만큼 안락하고 편안한 꿀잠이었다.

'그래서 문제야!'

꿀잠까진 좋았다.

하지만 일어나고 나면?

이미 아침이 쨍쨍하게 밝아 있었다.

로이드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소드마스터 하비엘이 자신의 앞을 막았다.

오늘처럼, 지금처럼, 이렇게 숙소를 나갈 수 없게 했다.

사실상 밤낮으로 빈틈없이 돌아가는 완벽한 감금체계였다.

'이거, 다분히 의도적이야. 저 두 사람이 대놓고 날 여기 묶어두고 있어. 왜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날 따돌리려는 의도라는 것만은 확실해.'

그래서 초조해졌다.

기껏 술탄께서 기회를 주셨는데.

기대에 부응할 찬스를 잡았는데.

저 남자, 로이드 프론테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래서 술탄의 사위로 만들어 데려가기만 한다면.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그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날릴 순 없어!'

그러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로이드의 곁에 호위로 붙어 있어야 한다.

그렇듯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늘려야 한다.

그러니까, 일단 이 지긋지긋한 숙소를 벗어나야 한다!

세라자드는 이를 갈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닿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옷깃 끝자락에마저도.

전혀 닿을 수 없었다.

하비엘이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그랬다.

심지어 맨손인 상태에서, 두 발짝 안쪽의 범위에서만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그 사실이 세라자드를 더욱 미치게 했다.

"그아아아악! 제발 좀!"

잡혀줘.

칼 한 번만(?) 맞아줘.

그녀는 간절히 바라듯 외치며 시미터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물론 하비엘은 그녀의 간절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세라자드의 모든 공격을 너무나 간단히 흘려냈다.

동시에 세라자드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로이드 님이 귀띔해주었던가.

이 여자, 사실은 술탄의 딸이라고.

순수하게 호위를 위해 일행이 된 게 아닐 거라고.

그러니 딴짓 못하도록 이 숙소에 발을 묶어두는 게 좋겠다고.

술탄의 딸과 반군이 마주치는 상황도 만들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그렇게 로이드가 해주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뭐, 이 정도의 실력자라면 내게도 도움이 되기도 하고.'

세라자드를 바라보는 하비엘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그녀의 수준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

자신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는 단계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검에는 상대를 섬찟하게 만드는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가 있었다.

'훌륭한 재능이야.'

하비엘은 내심 감탄했다.

아무나 이런 기세의 검을 뿌리진 못한다.

이건 단지 수준만 높다고 해서 낼 수 있는 기세가 아니다.

'재능의 영역인 거지.'

재능으로만 치자면 국왕 알리시아에 버금갈 듯했다.

그러니 좋은 스승과 적절한 계기를 만나기만 한다면?

머지않아 소드마스터로서 찬란한 재능의 꽃을 피워낼 수도 있으리라.

'로이드 님도 그런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하비엘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생겨났다.

자신이 아는 로이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눈앞에서 날뛰는 술탄의 딸이 어떤 가능성을 지녔는지 모를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자신을 붙여주었다.

숙소에 발을 묶어두라고.

필요하다면?

참교육을 해줘도 좋다고.

진짜 검술이 뭔지를 체험시켜줘도 상관없다고.

피식 웃으며 일러주었던가.

"...."

만약 저 여자가 자신과의 대결을 통해 소드마스터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술탄의 딸.

적국의 공주.

그런 여자가 소드마스터가 된다면?

적국이 한층 강성해지는 결과가 생길 텐데.

'그럼에도 내게 이 일을 맡긴 거라면... 로이드 님이 뭔가 더욱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라고 봐야겠지.'

믿는다.

지금까지 겪은 로이드라면.

그가 그리고 있을 계획을 믿을 수 있다.

'그럼 그 계획, 저도 거들어드리도록 하지요.'

결심했다.

제대로 굴려주리라.

그 순간 하비엘의 손이 움직였다.

숙소 한쪽의 촛대를 집어들었다.

 

카아앙-!

 

그의 촛대가 세라자드의 시미터를 여유롭게 가로막으며 불똥을 튀겼다.

"...!"

세라자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비엘의 눈빛이 냉정하게 번득였다.

그때부터였다.

세라자드는 검술 외길 인생을 걸어온 자신의 어린 시절 선택을 진심으로 후회하게 되었다.

195화. 구멍 뚫는 사람들 (2)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처리수의 수질이 비교적 양호하며 대장균군 1,000개(100mL, MPN) 이하, 생물학적 산소요구량(BOD) 2mg/L 이하, 최고 탁도 10도 이하인 경우에는 완속여과방식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잠깐."

"원수는 지하수, 부영양화가 진행되지 않은 댐수, 호소수, 오염이 진행되지 않는 하천수 등에서 원수 중에 소량의 탁질 및 미량의 유기물질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처리방법이다. 완속여과방식은 비교적 얇은 사층을 통과하여 천천히 여과함으로써 원수를...."

"그... 만...."

"이 작용에 의하여 탁질로부터 미량의 암모니아성 질소, 망간, 세균, 냄새 물질 등도 제거한다. 연 최고 탁도 10도 이하에서는 침전지가 불필요하고, 연 최고 탁도 10~30에서는 보통침전지는 설치하며, 연 최고 탁도 30도 이상에서는 약품처리 가능한 침전지를 설치한다."

"...드르렁, 퓌유으."

세라자드의 고개가 뒤로 팍 젖혀졌다.

이내 우렁차게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이드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좋아.'

푹 잠든 세라자드의 모습으로 미루어보건대 낮에 엄청나게 힘을 뺀 것 같다.

하비엘이 열심히 검술로 굴려준 덕분이겠지.

그는 곁에 서 있던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손짓으로 뜻을 전달했다.

"다 됐어. 청각 열어."

그의 손짓을 본 하비엘이 반응했다.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던 청각을 열었다.

"끝난 겁니까."

"어. 자장가 못 들어서 아쉽냐?"

"아니요. 전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젓는 하비엘.

로이드의 미소가 짓궂어졌다.

"전혀? 진짜로? 정말?"

"예. 단연코."

"속마음은 아닐 텐데. 자장가 듣고 싶을 텐데.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습니다."

"상상해봐. 완전 편하게 잠드는 거야. 살랑살랑 자장가를 귀에 담으면서 꿈나라로 가는 거야. 그곳엔 어떤 고통도, 고민도 없는 거지. 완벽한 휴식. 발바닥 각질마저 편안하게 풀어지는 완전한 릴렉스. 늘어지고. 따뜻하고. 포근하고. 두둥실. 생각만 해도. 캬아. 멋지지 않냐?"

"...."

"그거 알아? 너 방금 눈 살짝 풀렸다?"

"...."

"어허. 새삼 눈 부릅뜨지 말고."

"...."

"그런다고 이제 가자미눈 뜨고 째려보는 거야?"

"...후우. 진짜."

하비엘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얄밉다.

아주 얄미워서 미치겠다.

생각 같아선 진짜 한 대쯤 알밤이라도 때려주고 싶다.

만약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이제 일을 하러 나가야 할 때가 왔으니까.

"어제와 똑같이 하면 되는 겁니까."

"어."

하비엘은 잠시 로이드를 향해 보글거리던 원망을 재빨리 접었다.

대신 침착하게 오늘의 할 일만 사무적으로 물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 내가 표시해둔 곳이 있을 거야."

"터널의 크기와 경사도 똑같이 유지하면 됩니까?"

"어. 어제랑 똑같이 가이드라인으로 표시해뒀으니까. 그대로 하면 돼."

"알겠습니다."

하비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챙겼다.

최근 며칠간 똑같이 그러했던 것처럼.

간편한 셔츠 위에 튼튼한 가죽조끼를 걸쳤다.

자욱한 먼지로부터 코와 입을 지켜줄 마스크도 챙겼다.

"그럼 조금 쉬다가 오시지요."

"어. 너도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아마도 로이드 님은 평소처럼 두어 시간쯤 눈을 붙이다가 현장으로 나오겠지.

그러니 자신은?

로이드 님이 올 때까지 지정한 곳을 파면 된다.

정해진 구역에 구멍을 정확히 뚫어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비엘은 숙소를 나섰다.

카나트 건설을 위한 굴착 시공.

그 시공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갔다.

현장까지 이동하는 동안 이 도시에서 치른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벌써 두 달이 지난 건가.'

이 도시에 온 지도 2개월이나 되었다.

첫 한 달은 숙소에서만 지내야 했다.

로이드가 측량과 설계를 하는 동안 숙소에서 세라자드와 투닥거리는 것이 자신의 일과였다.

다행히 심심하진 않았다.

더욱 높은 검술 경지를 위한 적당한 몸풀이와 자극이 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로이드의 땅굴 측량과 카나트 설계가 끝났다.

서쪽의 머나먼 산맥 기슭.

그곳에 조성할 취수장에서부터 여기까지 36킬로미터의 간격을 최단거리로 연결할 땅굴의 설계에 성공했다고 하였던가.

그날부터였다.

'제대로 잔 것이 한 달 전인 건가.'

두 번째 달에 들어서는 잠을 거의 못 잤다.

이유는 간단했다.

낮에는 세라자드와 검술을 겨루며 그녀를 묶어두어야 했다.

밤에는 현장에 나가서 열심히 땅굴을 파느라 바빠졌다.

덕분에 극심한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기본이었다.

가끔은 현기증도 났다.

보통의 소드마스터를 능가하는 엄청난 밀도의 마나하트.

거기에 아스라한 심법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하비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세라자드를 단숨에 기절시키고 휴식을 취할 간단한 방법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온종일 대결에 응해주며 스스로를 혹사했다.

'극도의 피로 상태를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단련이 되니까.'

더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만 안주하지 않을 것이다.

아스라한 심법의 수준도 더욱 높은 곳까지 끌어올릴 것이다.

그러자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안 된다.

그저 그런 각오로는 턱도 없다.

하비엘은 그 사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수준에 오르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야 했다면?

그 위를 노리는 지금은 아예 인간의 굴레를 벗어야 한다.

모든 악조건을 견뎌내야 한다.

이겨내야 한다.

말 그대로 전인미답.

그 누구도 밟아본 적도, 도달한 적도 없는 곳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런 초월적인 경지를 향해 나아가려는 자신이니까.

이 정도의 고난과 어려움은 당연한 거라고 하비엘은 생각했다.

오늘도 이겨내리라 각오하며 현장에 도착했다.

"저 안쪽부터 작업을 시작하면 될 거라고 했소. 따라오시오."

현장을 지키던 반군 사내의 안내를 받았다.

기나긴 땅굴 속을 걸었다.

걷고 있자니 낮 동안 로이드가 벌였던 작업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기존에 있던 땅굴에서 수로로 쓰이지 않을 나머지 통로를 모두 막고 있는 거구나, 로이드 님은.'

곳곳에 쌓인 벽돌과 시멘트가 보였다.

원래 뚫려 있던 통로 대부분을 단단히 막고 있었다.

아마도 완공될 카나트 내에서 물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듯했다.

'분명 로이드 님도 온종일 애를 쓴 거겠지.'

잘 모르는 사람이 저 벽돌과 시멘트를 보면?

그냥 통로를 막았구나 하고 간단히 여겼을 터다.

그러나 하비엘은 달랐다.

저런 방수 시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수많은 공사에 참여해본 덕분이었다.

저 간단해 보이는 시멘트벽.

그저 단순해 보이는 벽돌벽.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노력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공학적 계산과 숙고, 경험을 거친 결과물이었다.

시공 과정 또한 그러했다.

설계를 제대로 했다고 해서 결과물이 제대로 지어지리라는 법은 없다.

그렇기에 더욱 신경을 쓰고, 노력하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방울이가 화산 폭발로 분출한 화산재를 열심히 모아야 한다.

그걸로 시멘트가 갈라지지 않도록 잘 섞어야 한다.

벽돌의 크기와 각도를 정확히 맞춰야 한다.

위치와 각도가 틀리지는 않았는지.

두께가 모자라진 않는지.

행여나 물이 새거나 습기가 스며들 미세한 빈틈이나 구멍은 없는지.

일일이 신경 쓰며 쌓고, 바르고, 점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로이드 님은.'

예전엔 그저 흥청망청 놀기만 좋아하는 도련님에 불과했는데.

가족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서 이런 일들을 이토록 능숙하게 익힌 걸까.

'꿈속의 신기한 학교에서 지식을 배웠다고 둘러댔었지, 전에는.'

문득, 떠올랐다.

예전, 라코나 자작이 강물에 장난을 쳤던 때였던가.

그 강물 오염 사태를 극복하고자 영지에 상수도를 건설하던 무렵이었을 터다.

로이드에게 물었었다.

이런 걸 어디서 배웠느냐고.

그랬더니 로이드가 농담처럼 대답했더랬다.

꿈을 꾼다고.

꿈속에서 자신은 처음 보는 신기한 대학의 학생이 된다고.

그 대학에서 건설에 관련된 지식을 쉼 없이 배우는 거라고.

덕분에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거라고.

그런 대답을 돌려주었더랬다.

'어쩌면 그게 농담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당시엔 자신을 농락하려는 성의 없는 대답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어쩌면 그 터무니없던 대답이 진짜였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여기외다."

상념에 잠긴 채 걷던 이쪽의 의식을 반군 사내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하비엘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땅굴 끝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의 암벽에 반투명하게 새겨진 갖가지 표식이 보였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점과 선, 선과 면.

로이드가 남긴 시공 가이드라인이었다.

그 곁에는 로이드가 붙여둔 쪽지도 보였다.

작업 내용을 지시하는 메모였다.

 

[네가 이걸 팔 동안 난 푹 잘 거다. 화이팅.]

 

"...."

확 숙소로 돌아가서 한 대 때려 버릴까.

검을 쥔 하비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카나트 시공이 계속 이어졌다.

매일 비슷한 공사가 반복되었다.

해가 지면 하비엘이 현장으로 출근(?)했다.

로이드가 남겨둔 시공 가이드라인에 따라 굴을 팠다.

그의 검이 번득일 때마다 정교하게 조절된 발파가 쏘아졌다.

순식간에 20미터 길이의 기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너비는 60센티.

높이는 1미터.

딱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비좁은 통로였다.

얼핏 보면 너무 좁아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작업의 효율과 안정성을 위해 세밀하게 계산된 크기의 굴이었다.

'당연하지. 그것보다 넓으면 붕괴 위험이 팍팍 증가하니까.'

굴이 너무 넓으면 그만큼 굴에 가해지는 토압이 증가한다.

그만큼 굴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였다.

처음부터 로이드는 이번 공사를 최대한 빠르게 치러낼 셈이었다.

그러기 위해 수로로 파낼 통로를 가장 적절한 크기로 잡았다.

크기의 기준은 딱 두 가지.

터널의 지지구조물인 강지보재, 숏크리트, 록볼트 등의 도움 없이 수로가 자체적으로 하중을 견딜 수 있을 최대의 크기일 것.

동시에 완공 이후 굴을 관리할 인력이 드나들 수 있을 최소한의 공간이 확보될 것.

그러한 두 가지 기준을 근거로 삼아 설계에 임했다.

그것이 너비 60센티, 높이 1미터의 굴이었다.

물론 시뮬레이션도 수없이 돌렸다.

수로 내부에 수십, 수백 년간 물이 흘렀을 때 구간별로 붕괴가 일어날 확률이 어떨지.

구간마다 각각 다른 토질, 암석의 구성 등을 놓고 수없이 실험을 거듭했다.

덕분에 결과적으로 하비엘이 잔뜩 고생을 했다.

"후, 후욱!"

수로로 쓰일 터널이 너무 좁았다.

높이가 1미터밖에 안 되다 보니 항상 쪼그려 앉아서 이동해야 했다.

너비가 60센티에 불과하니 몸을 돌리거나 검을 다루기도 까다로워졌다.

그러나 오늘도 소드마스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철혈의 기사께서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그 모든 악조건마저도 훈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투화학-!

 

하비엘의 발파가 번득일 때마다 수로가 연장되었다.

연장된 수로가 기존의 땅굴 사이를 최단거리의 경로로 연결했다.

마치 땅속을 연결하는 모세혈관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밤사이 하비엘이 굴을 파고 나면, 아침에 로이드가 작업을 이어받았다.

"룰루루. 라랄라. 뻥이요!"

"방울!"

 

퍼어엉-!

 

방울이의 화산폭발로 화산재를 모았다.

모은 화산재로 시멘트를 알차게 비볐다.

비벼낸 시멘트와 벽돌로 통로 곳곳을 막았다.

수로의 물이 엉뚱한 곳으로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안 막으면 난리 나니까. 엉뚱한 곳으로 샌 물이 흐름이 정체된 채로 고이면 세균이 대량으로 번식하기 딱 좋아지니까.'

그런 사태가 생기면 카나트의 물이 모조리 오염된다.

즉, 기껏 끌어온 물을 아예 못 쓰는 사태가 생기는 셈이다.

그런 참사를 막고자 로이드는 수로로 쓰이지 않을 땅굴의 구역을 모조리 꽁꽁 틀어막았다.

그렇게 철혈의 기사가 뚫고.

귀족가문 도련님이 틀어막고.

두 작업이 밤과 낮마다 반복되었다.

열흘, 보름, 한 달, 두 달째.

칸다라 시 인근에서 시작된 수로가 마침내 서쪽 산맥 기슭의 취수용 모정 인근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길었던 시공의 마침표를 찍게 될 겁니다."

마침내 완공을 앞둔 날.

로이드는 하비엘과 반군 작업자 전원을 모이게 했다.

모정 위쪽의 지상, 완공이 예정된 장소에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다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테르메스를 비롯한 반군 사내들의 얼굴에 감개무량한 감정이 떠올랐다.

모두가 함께 밤낮으로 먼지를 덮어쓰며 함께 일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공사 기간이 훨씬 길어졌을 거야.'

로이드는 내심 반군 사내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이 터널의 쓸데없는 곳을 혼자 막았겠는가.

아니었다.

반군 사내들이 함께 시멘트와 벽돌을 옮겼다.

파낸 흙을 밖으로 옮긴 것도 저들의 공로였다.

그 외에도 저들은 100미터 간격으로 깊이 20미터에 달하는 수직 구멍을 수없이 뚫었다.

이후의 관리와 보수를 위해 지상에서 카나트 수로로 내려올 때 이용할 통로였다.

'그런 잡다한 작업을 모두 도맡아줬지.'

공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작업자가 하나로 뭉쳐서 서로를 도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트러블이 일어나기도 하고, 사소한 이익과 손해를 따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모두가 하나가 되어 완공의 마지막 삽을 떠야 한다.

그게 바로 현장이다. 공사다.

"그래서입니다. 그동안 함께 흙먼지를 기꺼이 뒤집어쓴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시공의 마지막 순간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그러면 수로 끝 부분에서 다 함께 삽질을 하는 거요?"

로이드의 연설이 끝나자 테르메스가 질문을 해왔다.

그 물음에 로이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큰일 나요."

"예? 큰일이라니...."

"죽어요."

"...."

테르메스가 대답을 잃었다.

로이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실진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파낸 수로의 끝자락과 취수용 모정 사이엔 딱 3미터 정도의 암벽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저 모정, 깊이가 지표에서부터 30미터가 넘거든요. 그만큼 들어찬 물도 많고, 수압이 엄청나기도 하고요."

"하면 그 사이의 암벽을 뚫어서 수로를 연결하는 순간...."

"예, 맞습니다. 모정에 고여 있던 물이 펑, 하고 엄청난 수압으로 수로 내부를 휩쓸게 되지요. 당연히 마지막 순간에 터널을 뚫은 사람은 뭐."

로이드가 손날로 자신의 목을 슥 그어 보였다.

"그냥 훅 가는 겁니다."

사실이었다.

수로와 모정이 연결되는 순간 터지는 수압은 인간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즉사를 피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실제로 카나트를 건설한 고대 중동의 작업자들은....

"혹시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는 거요?"

"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염두에 둔 방법이 있다.

"한 사람이 희생하면 됩니다."

고대 중동의 작업자들이 그렇게 했다.

작업자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이가 카나트 공사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했다.

엄숙하게, 담담하게, 마지막 곡괭이질을 했다.

그렇게 수로와 모정을 연결했다.

죽었다.

수많은 이들, 후손들에게 맑은 물을 제공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 것이었다.

"하지만 뭐, 실제로 우리 중에 누구 하나가 죽어나갈 필요는 없구요."

그것 또한 당연한 이야기다.

고대 중동은 중동이고.

여긴 여기다.

그러니 멀쩡한 생사람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

아무런 피해 없이 그런 일을 태연하게 해낼 존재가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지?"

로이드가 싱긋 웃으며 반군 사내들의 어깨너머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반군 사내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눈길이 향한 뒤편.

산기슭의 바위 둔덕 너머.

그곳에서 목이 앞으로 굽은 해골 병사 하나가 두개골을 쏙 드러냈다.

모두를 향해 뼈다귀 손을 들었다.

언젠가 로이드에게 배운 대로.

인사 대신 대한민국표 손가락 하트를 뾰로롱 그려 보였다.

 

삐그닥!

 

프론테라 영지에서부터 산 넘고 사막 건너 이곳까지 로이드를 찾아온 골병대 리더, 해골 병사 거북목이었다.

196화. 고인물 도련님 (1)

삐그닥!

 

거북목이 두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뼈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그의 뒤에서 다른 해골 병사 몇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 함께 모두를 향해 손가락 하트를 발사했다.

자신들이 주인이자 은인으로 여기고 있는 로이드.

그를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담은 인사였다.

'크흡. 여기까지 오느라 우리 진짜 힘들었다.'

거북목의 3번 경추가 감격으로 달그락 떨렸다.

문득, 이곳까지 오느라 겪었던 기나긴 여정이 두개골 속으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건 로이드가 국왕의 특사단과 함께 영지를 훌쩍 떠난 다음 날 아침의 일이었을 것이다.

'대장!'

모두가 하릴없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였다.

인간들의 공사 일정에 맞춰서 지내느라.

골수에 새겨진 신체 리듬에 따르느라.

아침 일찍 관뚜껑을 열고 일어나 멍하니 햇볕을 쬐고 있던 때였을 터다.

골병대원 중에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뜬금없이 손가락뼈를 놀렸다.

허공에 자신의 심정을 재빠르게 썼다.

인간이라면 선뜻 알아보기 어려웠을 손놀림.

하지만 나머지 골병대원들은 동료가 쓰는 그 손짓의 글자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읽을 수 있었다.

그 골병대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허전하다!'라고.

나머지 골병대원들도 두개골을 끄덕였다.

'맞다. 나도 그렇다.'

'나도 똑같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싱숭생숭해.'

'난 갈빗대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기분이다.'

'원래 바람은 계속 들어왔는데?'

'아, 기분이 그렇다는 뜻이잖아. 골반도 나보다 작은 게.'

골병대원들이 다들 한마디씩 글씨를 써댔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누군가는 다투기도 하며.

자신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음을 토로했다.

그러기를 잠시, 그 모습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거북목이 글씨를 썼다.

'어쩐지 난 이유를 알 것 같은데.'

'뭔데? 대장은 아는 건가?'

'빨리 알려줘.'

다들 어미 새를 보듯 거북목을 쳐다보았다.

거북목이 아래턱을 달각대며 소리 없이 웃었다.

'로이드가 우리 곁을 떠나서 그런 거다.'

'앗, 아아.'

모두가 일제히 두개골을 끄덕끄덕.

삼삼오오 제 할 말을 써댔다.

'그럼 우린 어떡하면 좋으냐, 대장?'

'설마 로이드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허전하게 지내야 하는 건가?'

'그건 싫다. 이러다가 골다공증 걸릴 거 같은 기분이다.'

'맞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뭔가 하자!'

다들 억눌려 있던 감정이 터졌다.

은인이자 주인인 로이드에 대한 그리움.

그가 곁에서 사라져서 생긴 공허함.

그걸 메꾸고 싶어서.

해결하고 싶어서 안달했다.

그런 골병대원들을 다독이느라 거북목은 한참 애를 써야 했다.

'워워. 다들 진정해라. 너무 흥분해도 뼈에 안 좋다. 윤기 떨어지고 마디 삭아.'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냐, 대장?'

'글쎄. 내심 떠오르는 생각이 있긴 한데.'

'뭐냐, 빨리 말해라!'

다들 거북목의 손끝만 주시했다.

거북목이 허공에 자신의 생각을 썼다.

'우리가 로이드를 찾아가는 거다.'

'오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어. 우리 중에서 정예만 추려서 찾아가는 게 좋을 거 같다.'

'왜? 어째서?'

다들 두개골을 갸웃거렸다.

거북목의 손글씨가 이어졌다.

'생각해 봐라. 로이드야 우리 주인이니까 우릴 안 무서워하는 거고. 여기 프론테라 영지 사람들도 로이드에게 이야길 들었으니까 괜찮은 거지만, 다른 사람들은?'

'....'

'우릴 보자마자 난리를 칠 거다. 무서워서 도망치거나, 혹은 우릴 때려잡으려 들겠지. 다들 그걸 원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래서다.'

거북목의 손짓이 빨라졌다.

'가급적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200구나 되는 우리 모두가 움직이면 언젠가는 목격될 위험성이 커진다. 그러니 우리 중에 대표를 몇 구만 뽑아서 로이드에게 보내는 거다.'

'로이드의 일을 돕기 위해 가는 건가?'

'그렇다.'

거북목이 두개골을 끄덕였다.

'로이드라면 어딜 가서든 또 공사를 벌일 거다. 이유는 몰라.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사실 안 벌여도 상관없고. 어쨌건, 우리 중에서 정예를 뽑자. 스무 구 정도로만. 그 인원만 로이드를 찾아가서 그의 일을 돕는 거다. 어떠냐?'

'그럼 나머지는?'

'어쩔 수 없다. 정예로 뽑혀간 동료들의 건투를 바라며 만족할 수밖에.'

거북목이 냉철하게 뜻을 밝혔다.

골병대원들이 침묵했다.

200구 중에 20구의 정예를 선발.

그럼 자신이 뽑힐 확률은 1/10 정도.

만약 뽑힌다면 주인 로이드를 만나러 갈 수 있다.

못 뽑힌다면 여기서 종일 햇볕을 쬐거나 손가락뼈를 빨며 사골 국물이나 뽑아야 한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대장 거북목의 말은 언제나 옳으니까.

'좋다, 난 찬성.'

'나도 찬성!'

'어서 뽑자. 정예를 뽑자!'

골병대원 전원이 찬성했다.

정예를 뽑는 과정은 간단했고 신속했다.

'자, 20구씩 조 짜서 조장 뽑아. 조장끼리 공평하게 가위바위보!'

'보!'

수 라운드(?)의 접전과 엇갈리는 탄식, 환희 속에 행운의 20구 골병대원이 선발되었다.

대장인 거북목과 부대장 오십견, 그 외의 18구 해골 병사들이었다.

'그럼 남은 대원들의 지휘는 사각턱, 너한테 맡긴다.'

'...훌쩍. 그래, 우리 몫까지 잘 해내라 대장.'

'맡겨둬.'

그렇게 거북목과 오십견, 18구의 해골 병사가 삽을 챙기고서 야밤에 프론테라 영지를 출발했다.

그들은 길을 헤매지 않았다.

애초에 언데드 지배 스킬에 의해 로이드에 종속된 그들이었다.

덕분에 로이드가 있는 방향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동쪽이다!'

'가즈아!'

동부산맥을 넘었다.

결코 편한 여정은 아니었다.

수많은 야생동물과 몬스터들이 일행의 윤기나는 뼈다귀를 탐냈다.

그중에서도 특히 늑대 무리가 수시로 군침을 흘리며 일행을 괴롭혔다.

하지만 이겨냈다.

무사히 동부산맥을 넘었다.

물 한 모금 찾기조차 어려운 황무지가 펼쳐졌다.

그때부턴 여정이 한결 편해졌다.

애초에 물이고 뭐고 필요 없는 골병대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크겔겔, 종일 햇볕 쬐니까 따뜻하다!'

식량도, 물도 필요 없었다.

사막이 펼쳐져도 그랬다.

오히려 사람의 눈에 띌 위험이 적어서 더더욱 편했다.

그렇게 사막을 횡단했다.

가끔 오아시스나 마을 인근을 지날 때도 큰 문제가 없었다.

다들 사막 모래 언덕이나 구덩이 곳곳에 널브러져서 낮을 보냈다.

그러면 근처에 사람이 지나가도 괜찮았다.

그저 널브러진 뼈다귀를 보며 '쯧쯧, 조난당했던 건가.'라는 식의 안타깝다는 혼잣말을 남기고는 떠날 뿐이었다.

그렇게 요령껏 위장을 겸하며 계속 이동했다.

중간엔 로이드의 위치가 갑자기 확 바뀌는 일도 있긴 했다.

'어, 방금 로이드가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갔다!'

'뭐? 진짜로?'

'나도 봤다! 로이드였다! 꼬밍이 타고 날아갔다!'

잠시 모두가 혼란에 휩싸였다.

동쪽의 사막 건너에서 느껴지던 로이드의 위치가 한순간에 왕도 마젠타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혼란도 잠시.

서쪽에서 동쪽 사막 너머로.

다시 로이드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때부턴 모두가 꾸준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기나긴 여정 끝에 한 구의 낙오자도 없이 이곳까지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로이드도 언데드 지배 스킬의 연결 덕분에 골병대의 이동과 접근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하여간 기특한 놈들.'

기어코 여기까지 찾아온 거북목과 오십견, 그리고 18구의 해골 병사들.

그들을 보는 로이드의 눈빛이 흐뭇함으로 물들었다.

'먹을 것도, 거창한 숙소도 요구하지 않아. 지치지도 않고 요령도 좋아. 심지어 일당도 안 받잖아? 어유, 이 금덩이들.'

한데 이제는 스스로 일을 돕겠다고 이역만리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왔다.

예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골병대를 보는 나머지 반군들의 심정은 조금 다르긴 했다.

"어, 어엇?"

"뭐야, 저거!"

반군 리더인 테르메스.

그리고 나머지 반군 사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거북목의 모습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삽이며 곡괭이 등을 들었다.

만약, 로이드가 적절한 타이밍에 만류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골병대에게 돌격했을지도 모를 기세였다.

"워워워. 다들 진정하시고."

로이드가 테르메스의 삽을 콱 붙잡았다.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모두를 잽싸게 돌아보았다.

"놀라지 마세요. 저 친구들, 제 말을 듣는 녀석들입니다."

"...저 해골들이 말이오?"

"예."

"혹시 당신, 흑마법사였소?"

"아, 그건 아니고."

로이드의 미소가 한결 능글능글해졌다.

"사연이 좀 있습니다. 혹시 듣고 싶은 겁니까?"

"아...."

로이드의 반문에 테르메스와 모두가 멈칫.

이내 그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처음 로이드를 납치했던 날.

그날 질문 한마디를 잘못 던졌다가 한 시간이 넘도록 로이드의 대답을 들었던 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테르메스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오.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까진 없을 것 같소."

"그렇지요? 우리가 뭐 그런 게 필요한 사이도 아니고."

"맞소. 아암, 당연히 그렇지."

테르메스가 다급하고도 어색하게 웃음을.

로이드도 흡족한 미소를 피워냈다.

"믿어주시니 고맙네요. 어쨌건, 쟤들 안 물어요. 때리거나 덤비지도 않을 겁니다. 나름 성실하고 착한 애들이라서 제 말도 잘 듣고 말입니다."

"그렇소?"

"예. 저래 봬도 제 영지에서 일하는 정규직 인부들이거든요."

무려 빛나는 정규직.

로이드의 그러한 소개에 거북목과 오십견, 나머지 골병대원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삽을 어깨뼈에 턱 걸쳤다.

그렇게 대략 골병대를 향한 오해를 풀어낸 로이드가 말했다.

"어쨌건, 수로의 마지막 수맥을 뚫어줄 인재가 이렇게 때맞춰 와서 참 다행이네요."

싱긋 웃으며 거북목의 어깨를 탁.

모두의 눈의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 해골 병사가 마지막 수맥 뚫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거요?"

"예. 그래야 아무도 안 죽으니까요."

당연한 말이다.

카나트 수로의 수맥을 뚫는 마지막 작업은 지극히 위험하다.

어느 정도로 위험하냐면 사망률 100%의 작업이다.

즉, 무조건 죽는다.

그래서 실제 고대 중동 지방에서 카나트를 팔 때는 가장 나이 많은 인부가 마지막 수맥 작업을 도맡았다. 아니, 희생을 자처했다. 그렇게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젊은이들과 후손들에게 맑은 물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여기 이 거북목과 골병대원들이 수맥 작업에 투입될 겁니다."

"그,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겁니까?"

"예, 뭐. 대신 수로 하류에 거름망 정도는 설치해둬야겠죠. 그래야 이 친구들이 뼈다귀를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까."

"...."

모두는 조금은 압도당하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지막 작업이 준비되었다.

수로 하류에 몇 겹의 거름망과 거름틀을 설치했다.

그리고 거북목과 오십견, 골병대원들이 투입되었다.

"자, 여기부터 이쪽으로 가이드라인 방향 보이지? 그대로 파면 돼."

 

삐그닥!

 

힘차게 두개골을 끄덕인 거북목과 골병대가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쉼 없이 곡괭이로 암반을 내리치고 삽으로 파냈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수맥이 뚫렸다.

 

퍼어어엉-!

 

'...!'

엄청난 수압이 터져 나왔다.

거북목을 비롯한 골병대원들은 0.1초도 버티지 못하고 전신의 뼈마디가 우수수 흩어졌다. 수로를 따라 맹렬한 급류에 떠내려갔다. 그리고 잔뼈다귀 하나 잃어버리지 않고 거름망에 걸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물이 계속해서 수로를 따라 흘렀다.

 

콰아아아-!

 

드넓고 황량한 사막 아래 땅굴을 거쳐.

정확하게 계산된 경로를 따라 흘러서.

마침내 종착지에 도달했다.

카나트의 끝자락.

칸다라 시 한쪽에 마련된 정수장으로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무려 36킬로미터 떨어진 산자락에서부터 흘러온, 만년설이 녹은 물이었다.

"물이다! 진짜로 물이 흘러나온다!"

정수장을 순식간에 채워가는 물줄기.

그 모습에 칸다라의 시민들이 감격해서 외쳤다.

사실 로이드를 별로 믿지 않았던 시민들이었다.

처음엔 술탄의 앞잡이 끄나풀인 줄 알았다.

나중엔 반군의 이야기를 듣고 오해를 풀긴 했다.

사실은 서쪽 먼 나라에서 온 귀족 도련님이라고.

이곳의 가뭄을 없애줄 공사를 하러 온 분이라고.

그 속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로 로이드가 여기까지 물을 끌어올 수 있을까 의구심은 계속 들었다.

저 먼 산자락에서 물을 끌어온다니.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부질없는 희망이라고.

헛된 소망이라고.

내심 그렇게 치부하고 있었다.

우리 왕인 술탄마저 포기한 곳인데.

도시의 관리도 줄행랑을 친 지가 옛날인데.

남의 나라 도련님이 선뜻 그런 일을 해줄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고.

너무 기대하면 실망이 큰 법이라고.

언젠가 낙담하게 될 상황을 내심 대비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저 로이드라는 자의 호언장담이 맞았다.

정말로 그가 말했던 모든 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지금 자신들의 손을 적시는 차가운 물이.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이 안심하고 마시는 맑은 물이 증거였다.

'다행이야.'

가뭄 한가운데에서 마르지 않을 물을 얻게 된 시민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만 그는 시민들처럼 무작정 환호하거나 기뻐하진 않았다.

아직 기쁨에 몸을 맡기기엔 너무 이르다.

수로의 나머지 종착지를 살펴야 한다.

'카나트의 수로는 여기만이 끝이 아니니까. 거길 모두 확인해야 하니까.'

로이드는 술탄과 맺은 공사 발주 계약을 떠올렸다.

계약의 내용은 '칸다하르 지방 전체'의 가뭄을 카나트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한데 이곳 칸다라 시는?

칸다하르 지방의 중심도시일 뿐.

지방 전체가 아니었다.

그래서였다.

'애초에 반군의 땅굴을 무작정 다 막지는 않았지.'

막을 곳은 막고, 뚫은 곳은 뚫어두었다.

정교한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거쳤다.

그래서 수로가 거미줄처럼, 혈관처럼 칸다하르 지방 곳곳의 소도시와 촌락으로 통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테르메스 씨? 이제 저랑 같이 좀 움직이시죠."

"어디로 말이오?"

"이 지방의 다른 소도시들과 촌락이요."

그들은 아직 카나트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도시와 촌락 근처까지 뻗어 있는 반군의 땅굴.

그 땅굴을 따라 맑은 물이 흘러오게 됐다는 것도.

그 굴이 천연 우물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음도.

따라서 그곳에서 물을 떠내기만 하면 더는 목마름에 시달리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임도.

테르메스와 함께 날아가서 자세히 알려주어야 하리라.

그러면 비로소 자신도 술탄과의 계약을 완수했다 말할 수 있게 되리라.

"자, 가시죠."

그날부터였다.

장장 사흘에 걸쳐 로이드는 칸다하르 지방의 각 소도시와 촌락에 순회공연을 감행했다. 방문지의 사람들에게 카나트의 존재와 사용법, 관리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렇듯 마침내 마지막 촌락까지 방문을 마친 순간.

반갑고도 알찬 메시지가 로이드의 눈앞에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기발한 기지와 대담한 협상 능력, 정확하고 끈질긴 시공법을 통해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에 기적의 물줄기를 연결하는 위업을 이루어냈습니다.]

[이에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칸다하르 지방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크나큰 찬사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새로운 찬사가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찬사, <서쪽 나라 도련님의 고인물>이 생성되었습니다.]

197화. 고인물 도련님 (2)

 

 

딩동.

 

[새로운 찬사, <서쪽 나라 도련님의 고인물>이 생성되었습니다.]

 

'오옷.'

눈앞에 알차게 숑숑 떠오르는 메시지.

그걸 보며 로이드는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미 수많은 공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그였다.

다양한 업적과 찬사를 두루 챙긴 바 있는 그였다.

당연히 이번에도 번듯한 찬사 하나쯤 나와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아니, 이젠 이런 거 안 뜨면 섭섭하지.'

무려 4개월이나 시간을 투자한 공사였다.

무덥고 건조한 사막에서 인생의 봄날 한 페이지를 갈아 넣어야 했다.

그러니 이 정도 보상은 나와줘야 한다.

로이드는 기대하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서쪽 나라 도련님의 고인물]

[찬사 등급 : 지역 위인전기]

 

물이 없어요.

목이 말라요.

술탄이 우릴 버렸어요.

관리마저 도망치고 말았어요.

아무도 우릴 도와주지 않아요.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언제까지고 그럴 거라고.

모두가 죽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렇게 다들 포기하고 있었더랬죠.

그래서였어요.

어느 날 밤 이웃 나라 도련님이 우릴 깨웠을 때.

온갖 생색을 다 내면서 물을 나누어줬을 때.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뭔가 음흉한 사람이라고도 여겼어요.

그땐 몰랐죠.

그 도련님이 우릴 포기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요.

술탄마저, 관리마저 버린 우리를 위해 매일 온몸에 모래를 덮어써 가며 일할 거란 사실을요.

그래서 지금 이곳이 어떻게 바뀌었냐구요?

대답 전에 질문부터 드릴게요.

손님, 어떤 차를 좋아하세요?

 

[찬사 효과 : 당신은 칸다하르 지방의 고질적인 가뭄을 해결함으로써 지역민 전체의 은인이자 위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미담이 입과 입을 통해 사막 지역 전체로 퍼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막 부족민 샤먼이 감사와 존경을 담아 당신의 이름에 축복을 부여합니다. 덕분에 당신은 찬사의 효력이 미치는 지역 내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탈수 증상을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찬사 지역 : 모든 사막 지역, 연평균 기온 섭씨 40℃ 이상의 모든 지역]

[찬사 유지 기간 : 300년]

[찬사의 효력은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 내에서 24시간 적용됩니다. 또한, 추후 당신의 행적에 따라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이 확장 및 연장, 축소 및 단축될 수 있습니다.]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4]

 

[현재 보유 중인 CP : 614]

 

'와우.'

찬사 내용을 다 읽은 로이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탈수 증상 면역 효과라니.'

사막 지역, 혹은 연평균 40도 이상의 지옥 같은 환경.

비록 그런 환경적 조건이 단서로 붙긴 했지만, 그럼에도 탈수 증상 면역이라는 건 엄청난 효과라 할 수 있었다.

탈수증.

그것만큼 손쉽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증상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몸에서 수분이 약 12%만 빠져나가도 사람은 죽어 버리니까. 그런데 탈수 증상이라는 거, 걸리기가 아주 막 어려운 게 아니거든.'

몹쓸 병에 걸려서 구토와 설사를 반복한다든가.

지나치게 땀을 흘린 채 수분 보충을 등한시한다든가.

혹은 사막이나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한다든가.

그렇게만 되어도 금방 신체에 수분이 부족해지고 탈수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한데 그걸 막아준단다.

최소한 사막에서는 목이 말라서 죽을 일이 없게 되었다는 소리다.

'혹은 엄청난 불운으로 불지옥에 떨어진다든가.'

뭐, 당연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듯 기분 좋게 새로운 찬사를 얻었음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가 만끽해야 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메시지로 떠오르는 찬사 외에도.

실제로 귀청을 때리는 찬사가 쏟아진 덕분이었다.

"아저씨, 물!"

칸다하르 지방 곳곳의 촌락에 카나트 사용과 관리법을 알려주고 돌아온 직후였다.

칸다라 시내에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외쳤다.

이제 겨우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쪼끄마한 꼬마애가 도도도 뛰어왔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나무 잔을 불쑥 내밀었다.

 

찰랑!

 

잔 속의 물이 반 넘게 푸확 튀었다.

이쪽의 바지를 왕창 적셨다.

"으엇?"

로이드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꼬마를 탓하지 않았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꼬마의 초롱초롱한 눈빛 때문이었다.

"무울!"

"...나 마시라고?"

"웅!"

"그럼 이거, 나 주는 거야?"

"웅!"

꼬마가 호빵 같이 상기된 볼따구를 하고서 고개를 끄덕.

까만 눈을 더욱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엄마가 그랬어! 아저씨가 셀림한테 물 줬다고 그랬어!"

"아, 혹시 네 이름이 셀림이야?"

"응!"

"그럼 셀림도 아저씨한테 물 선물하는 거야?"

"웅! 아저씨도 목마를 거랬어!"

"...."

반도 안 채워진 물잔을 받았다.

천천히, 마셨다.

그동안 이쪽을 향해 모인 시선이 느껴졌다.

칸다라의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흐뭇한 눈길로. 또 누군가는 박수를 치며. 저마다의 고마움과 호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

난 그저 내 목적을 이루려고 한 일일 뿐인데.

특사단의 협상을 성사시키려고.

술탄국과의 사이에 일어날 전쟁을 막으려고.

그렇게 나 편하게 살아보자고 벌인 일일 뿐인데.

그런데 나, 이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

'이상해, 이런 기분.'

쑥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특히, 테르메스 씨를 비롯한 반군 사람들에게 그랬다.

"...아까 그 칭찬과 성원,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받아야 했던 건데 말입니다."

그날 저녁, 로이드는 테르메스에게 솔직한 기분을 말했다.

"그동안 이 지방을 포기한 술탄에 맞서서 여러 활동을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나름 자금을 모아서 물을 사들여 급한 이들을 돕기도 하고, 도망친 지방 관리들이 포기한 우물을 복구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고."

로이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테르메스를 비롯한 반군의 활동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방금 언급한 일들.

그것들을 하는 와중에 지방 토후들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수도 아힌샤에만 집중된 풍요와 부를 지방에 분배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지방에 분산된 군사력을 한데 모아 술탄을 압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토후들의 연대를 끈질기게 촉구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지방 전체에 물을 성공적으로 공급하지는 못했잖소."

이쪽을 돌아보며 피식 웃는 테르메스.

그는 어느새 여행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군 간부들도.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튼튼한 여행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낙타 등엔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가득 싣고 있기도 했다.

오늘 밤, 프론테라 영지로의 망명을 위한 여정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테르메스가 말했다.

"우리가 애를 썼던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그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 그러니 우리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소.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오, 이건."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덕분에 이 지방의 사람들이 살 길을 찾게 되었소. 우리 또한 프론테라 영지에서 새로운 터전을 얻어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소. 그때, 우리에게 납치당했던 때에 그쪽이 했던 말이 모두 실천되었단 뜻이오."

"테르메스 씨."

"고맙소. 우리의 은인이나 다름없으시오. 그래서외다."

 

털썩.

 

별안간 테르메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뒤의 반군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테르메스가 선언하듯 말했다.

"본인, 무라트 테르메스의 아들, 다미에타 테르메스와 동지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그대, 로이드 프론테라에게 죽음의 순간까지 변치 않을 충성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헐.'

딱히 말릴 틈도 없었다.

다짜고짜 무릎을 꿇은 테르메스가 충성 맹세를 질러 버렸다.

동시에 로이드의 눈앞에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호감도 개방]

[술탄국 반군 리더 다미에타 테르메스가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다미에타 테르메스는 당신의 은혜를 평생 소중히 간직할 것이며, 죽음의 순간까지 변치 않고 당신을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이에 앞으로 다미에타 테르메스와 호감도를 올리고 RP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호감도 개방 보너스로 50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755]

 

[다미에타 테르메스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11 상승하였습니다.]

[다미에타 테르메스와의 현재 관계 : +61]

[등장인물과의 관계 개선으로 77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2,832]

 

[또한, 다미에타 테르메스와 함께 충성을 맹세한 반군 동지들의 호감도 수치는 프론테라 영지 전체 주민의 평균 호감도에 합산됨을 알려드립니다.]

 

'워우.'

찬사에 호감도에 RP까지.

오늘 무슨 날인가.

로이드는 아주 귀에 걸리려는 입꼬리를 재빨리 컨트롤했다.

그리고 '진짜 충성은 죽은 다음부터지!'를 손짓으로 외치는 거북목을 애써 외면하며, 테르메스와 반군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모두들."

사람이 진심으로 무언가를 밝힐 때는, 건넬 때는, 똑같이 진심이 되어야 한다.

아니,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예의다.

로이드는 진지한 표정과 눈빛, 목소리로 테르메스의 충성 서약을 받아들였다.

"저도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주군."

"밤이 추울 겁니다. 모쪼록 프론테라 영지까지 무사히 가시구요."

"예, 주군. 그럼 저희 먼저 가 있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거북목?"

 

삐각!

 

로이드의 부름에 거북목이 재빨리 나섰다.

"이제부터 너와 골병대가 이분들을 위한 안내인이 되어줘야 해. 잘해낼 수 있겠지?"

 

삐그닥!

 

거북목이 씩씩하게 두개골을 끄덕였다.

이미 한 번 사막을 횡단해 왔던 거북목과 골병대였다.

덕분에 어느 길이 살아 있는 인간에게 위험한지, 어떤 경로가 쾌적할지를 온몸의 뼈마디로 느끼며 파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테르메스를 비롯한 반군 사내들은 사막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었다.

골병대라는 든든한 길 안내자.

거기에 사막 출신 여행자들이 조합되었다.

프론테라 영지를 향한 일행의 여정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렇게 골병대와 테르메스, 반군 세력이 칸다라를 떠나 기나긴 망명길에 올랐다.

그제야 로이드는 숨을 편하게 푹 내쉴 수 있었다.

겨우 부담감을 내려놓은 덕분이었다.

"후아."

메시지로 받는 찬사는 익숙한데.

진짜 사람들한테 면전에서 대놓고 받는 현실 찬사는 좀 달랐다.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고 쑥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민망하기도 했다.

반군의 협조를 받겠답시고 얼굴에 철판 깔면서 선행을 홍보하고 다닐 때는 그래도 마음이 편했는데.

'어째 정작 멍석이 깔려서 진짜 칭찬을 들으니까 완전 부끄럽기만 하잖아. 이건 뭐 청개구리도 아니고.'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로 예정된 술탄국 수도 아힌샤로의 여정을 준비했다.

한데 그곳에서도 이쪽을 향한 부담스러운 현실 찬사가 이어졌다.

다음 타자(?)는 뜻밖에도 술탄이 이쪽에게 붙여준 수행원이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로이드 님."

"...."

이 아저씬 또 왜 이러는 걸까.

숙소 복도.

그곳에서 로이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수행원 단장을 쳐다보았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수행원 단장이 근엄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지요. 로이드 님이 이곳에서 활동하는 반군의 협력을 얻어 공사를 진행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 역시 그랬나요?"

"예."

수행원 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눈과 귀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지해야 하나. 감히 술탄께 반기를 드는 자들과 손잡았음을 고발해야 하나.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째서였죠."

"로이드 님이 카나트를 완성하는 일이 곧 이 지방 주민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길이고, 그것이 또한 술탄께 이득이 되는 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큰 시각으로 보자면 술탄께 충성하는 일이라 여긴 건가요?"

"공적으로는 그렇고, 사적으로는 아닙니다."

"사적으로는 아니라뇨?"

"개인적으로 존경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크헐."

"존경합니다, 로이드 님."

"아, 알겠습니다. 이 손 좀...."

"10초만 더 잡고 있으면 안 될까요. 아힌샤에 돌아가면 존경스러운 사내의 손을 맞잡은 이야기를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기히입."

오그라든다.

손발뿐만 아니라 시상하부 말단 뉴런 조직이랑 십이지장 융털돌기까지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명절 특가 패키지로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혼신의 정신력으로 그 순간을 참아냈다.

40대 아저씨의 초롱초롱 부담스러운 눈초리도 인내했다.

심지어 아저씨가 내미는 종이에 사인까지 해주기도 했다.

'아, 젠장. 어째 자꾸 시커먼 아저씨들만 날 좋아하냐, 이렇게.'

매번 이쪽을 사위로 삼으려는 장인어른 후보들도 그렇고.

충성을 바치니 존경하니 멘트를 서슴없이 발사하는 사나이들도 그렇고.

생각할수록 비애감이 쑴펑쑴펑 치솟았다.

그런 심정을 곱씹으며 다음 날, 일행과 함께 칸다라를 출발했다.

시민들의 환호 가득한 배웅을 받았다.

사막 밤의 추위와 흔들리는 낙타 등을 만끽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의 여정 끝에 술탄국 수도 아힌샤로 돌아왔다.

한데 여기서도 이쪽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쪽의 장인어른 되기를 자처하는 아저씨 중의 끝판 왕이 아힌샤의 궁궐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껏 짐의 사위가 아니 된 것인가?"

카나트 완공을 보고하기 위해 입궁한 자리.

이쪽을 보자마자 술탄 사마르칸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를 갈며, 열화와 같은 팬심(?)을 대놓고 드러냈다.

198화. 능구렁이의 생존법 (1)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껏 짐의 사위가 아니 된 것인가?"

"...예?"

이글거리듯 왕좌 아래로 울려 퍼진 술탄의 물음.

그 말에 놀란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 뻔했다.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술탄의 얼굴을 올려다볼 뻔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지.'

저 아저씨.

생각보다 훨씬 노빠꾸네?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연했다.

카나트를 무사히 완공했노라고.

덕분에 칸다하르 지방의 가뭄이 해결될 것이라고.

기쁜 보고를 하러 온 판국이었다.

한데 그렇게 만난 술탄이 이쪽을 보자마자 대뜸 꺼내는 게 저런 소리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난감했다.

술탄의 저 직진 노빠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떤 반응을 해야 이 난감한 상황에서 절묘한 탈압박을 해낼 수 있을까.

그렇게 로이드가 뿌리보다 깊은 고민에 풍덩 빠져들 무렵이었다.

"그대는 뭘 그리 놀라는가."

술탄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르코스 프론테라의 아들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대와 같은 인재를 보았을 때, 그대와 같은 재인이 홀몸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런 그대의 재주를 탐하지 않을 군주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아, 그건...."

"그런 짐의 소망을 잠시 솔직하게 밝혔을 뿐이야. 그래, 내 딸이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나 보군."

"소인이 눈치챈 것을 알고 계셨사옵니까?"

"그 아이에게 소상한 이야기를 들었도다."

"...."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세라자드가 이미 술탄과 만난 거겠지.

아힌샤로 돌아오자마자 술탄에게 이번 일을 모두 보고했을 터다.

'설마 이상하게 고자질을 한 건 아니겠지.'

로이드는 약간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침묵을 지켜갔다.

술탄의 말이 이어졌다.

"본디 남녀 사이의 일이라는 것, 짐이 아무리 원한다 해도 당사자들의 생각이 다르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여 아쉬운 마음에 해본 소리이니 너무 마음에 두진 말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은 그대의 주군에게서 찾고."

"...."

이거 뭔가 혼나는 기분인데.

다행히(?) 술탄은 그 화제를 오래 끌고 가지 않았다.

"그래, 하면 이제는 더 중요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할까. 카나트가 완공되었다고?"

"그러하옵니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이시여."

마침 화제 전환이 절실하던 로이드였다.

술탄의 물음에 잽싸게 대답했다.

"총 4개월의 시공 끝에 산맥 기슭의 물을 끌어올 수 있었사옵니다. 이는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과의 계약을 지키기 위한 소인의 노력 덕분이었사옵니다. 또한, 덕분에 칸다라 시를 비롯한 칸다하르 지방의 대부분 촌락에 성공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이 역시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과의 계약을 지키기 위한 소인의 노력 덕분이었사옵니다."

"...그대가 애를 쓴 덕분이다?"

"그저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을 따름이옵니다."

"그 말은 짐에게도 약조를 지키라고 신신당부하는 걸로 들리는군."

"어찌 감히 소인이 그런 망발을 뱉겠사옵니까."

"뱉고 있는 듯한데."

"결코 아니옵니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께서는 위대하고 전능한 분이시니 보잘것없는 소인과의 약조 정도는 가볍게 지켜내실 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사옵니다. 한데 소인이 굳이 그런 망발을 뱉을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그래, 짐더러 마젠타노 특사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으라는 소리렷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쯧."

술탄 사마르칸은 혀를 찼다.

실로 능력 있고 뻔뻔한 자로다.

한데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는 자로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탐이 났다.

'정말로 내 사위가 되어주면 참으로 좋으련만.'

사위가 되어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오른팔로 삼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재주를 한 방울의 낭비도 없이 모조리 이끌어내고 싶다고.

그렇게 이 술탄국의 미래를 바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그 멍청한 여자는 어째서 저런 인재를 더 적극적으로 쓰질 않는 건지.'

그럴 거면 차라리 나 주지.

그런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그만큼 아쉽고, 그래서 탐이 났다.

이번 칸다하르 지방의 가뭄을 해결한 건도 그랬다.

이미 그는 딸인 세라자드를 비롯해 로이드와 함께 움직였던 수행원들에게서도 상세한 보고를 들은 터였다.

'반군의 협조를 얻었다지. 게다가 성공적으로 일을 치른 다음엔 반군을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보내기까지 했다고.'

들으면서 손뼉을 칠 뻔했다.

그만큼 완벽한 일처리였다.

로이드 프론테라와 그에게 협력한 반군도, 가뭄에서 벗어나게 된 칸다하르 지방의 주민들도, 지배자인 자신도.

관련된 모두가 최대한의 이득만 얻을 수 있게 하는 일처리 방식이었다.

술탄은 로이드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저 일만 잘하는 게 아니야. 머리만 좋은 것도 아니야. 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서 세상을 배운 놈들과는 격이 달라.'

그저 공부만 한 샌님은 해낼 수 없는 방식이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 혹독하게 굴러본 자의 처세다.

로이드를 보는 술탄의 눈동자에 짙은 갈망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술탄은 근엄한 낯빛을 되찾았다.

사막의 지배자다운 풍모를 드러내며 말했다.

"알겠노라. 그대와 짐이 맺은 것은 명백한 약조이자 계약. 그대가 먼저 계약을 지켰으니 이제는 짐의 차례일 터. 이 자리에서 공언하노니, 짐은 명일 중으로 마젠타노의 특사와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성은, 여기서 찾지 말라니까."

술탄이 피식 웃으며 로이드를 물렸다.

그렇게 로이드가 물러난 후.

술탄의 눈빛이 로이드가 있던 빈자리를 향했다.

"...."

아무래도 아쉽다.

이렇게 순순히 놓치기엔 너무 아깝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해볼까.'

천천히 끄덕이는 술탄의 고갯짓.

사막 지배자의 눈동자에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다음 날.

술탄의 약속이 실현되었다.

정말로 협상 테이블이 열렸다.

특사 벤투라 백작이 긴장한 표정으로 입궁했다.

이날 술탄의 궁은 이례적으로 고요했으며 차분했다.

원래부터 엄숙한 곳이긴 했지만, 이날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모두가 숨죽여 협상의 결과를 기다렸다.

술탄과 특사.

오직 두 사람만이 입장한 협상장.

그곳의 문이 열리고 드러날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사단의 수행원들도.

술탄국의 관리들도.

수도 아힌샤의 시민들도.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니, 딱 한 명의 예외가 있긴 했다.

"로이드 님은 별로 신경 안 쓰이시는 겁니까."

"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에 문 빨대를 힘껏 빨았다.

 

쪼로로록!

 

아힌샤 인근에서만 자란다는 특산 야자수의 과즙이 순은 빨대를 통해 시원하게 입안으로 들어왔다.

달콤하고 새콤했다.

짭짤한데 담백했다.

시원하며 짜릿했다.

"캬아."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이 맛.

역시나 한 통에 금반지 하나 값을 한다는 특산 야자답다.

고귀한 토후들도 아껴서 먹는다는 이 지방 최고의 명품 과일다운 풍미다.

'굳이 비교하자면 으음, 방금 병뚜껑 딴 콜라랑 비슷한 맛이라고 해야 하나.'

설마 이곳 세상에서 콜라 비슷한 맛을 볼 줄이야.

로이드는 감격스러운 심정으로 특산 야자 열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내가 그 협상에 신경을 왜 쓰냐. 그것보단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이거나 실컷 마셔둬야지. 안 그래?"

"안 그렇습니다."

하비엘이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국가의 중대사가 판가름날 협상입니다. 협상에 실패할 경우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신경 쓰심이 옳지 않을까요."

"신경 써서 뭐하냐?"

"예?"

"어차피 내가 끼어들 수도 없는 협상이잖아. 게다가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뭐."

"결과가 정해져 있다니요?"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협상 잘될 거야. 그럴 수밖에 없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술탄이 전쟁을 벌일 이유가 사라졌거든."

사실이다.

애초에 칸다하르 지방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가뭄.

그에 따른 대규모의 민심 이반을 걱정하던 술탄이었다.

그래서 국내의 여론을 잠시나마 돌리고자 마젠타노 왕가와의 의도적인 갈등을 선택하고 있던 사막의 지배자였다.

한데 이제는?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가뭄을 해결해줬잖아. 물론 이후로도 술탄 하기에 달린 면이 없는 건 아닌데, 일단 당장의 대규모 민심 이반은 걱정할 필요가 거의 사라졌어. 술탄의 입장에서도 외교적 갈등과 전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지."

"그럼...."

"아마도 몬스터 도미노 사태의 책임을 인정할 거야."

로이드가 말했다.

하비엘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물어도 됩니까."

"응. 뭔데."

"그렇게 명쾌한 결론이 이미 정해진 거라면 협상이 길어질 이유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반나절이 넘도록 협상이 이어지는 걸까요."

"그거도 간단해."

로이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조율을 하고 있는 거겠지. 책임을 인정한다면 어디까지 하느냐, 그에 따른 배상액은 얼마나 내느냐 등등 말이야. 게다가 너무 일찍 협상을 끝내는 것보단 이쪽이 더 모양새가 날 테니까."

"모양새라니요?"

"술탄의 모양새. 너무 빨리 협상을 끝내면 술탄이 이번 이슈에서 완전히 밀려서 GG... 아니, 일찌감치 항복을 선언했다는 인상을 주게 되니까. 그러니 협상장 안쪽에서는 이미 양쪽의 조율을 다 마친 채로 찻잔이나 홀짝거리고 있을걸. 그렇게라도 해서 대외에 협상이 길어지는 걸로 보일수록 술탄의 체면이 사니까."

"그런 겁니까."

"어. 그러니까 우리도 이거나 열심히 마셔야지."

로이드가 특산 야자를 들었다.

"이거 엄청 비싼 거야. 위대하고 전능하신 술탄이 전부 쏘시는 거라고. 게다가 이거,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면 먹고 싶어도 못 먹어요. 아무리 배로 실어오고 수입한다 해도 여기서 먹는 이 맛은 죽어도 안 날걸?"

"...."

"뭐하냐. 얼른? 더 먹자니까?"

"...."

로이드가 성큼 내미는 특산 야자.

그걸 받아든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치 걸신들린 사람처럼 야자수액을 흡입하는 로이드의 모습을 보자니 한숨이 더더욱 깊어졌다.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

똑똑한 건 맞긴 한데.

가끔 이럴 때는 솔직히 좀, 속물 같아서 부끄럽다.

하비엘은 못마땅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우리, 이런 거 말고 그냥 평범한 식사를 하면 안 됩니까?"

"응?"

"식사 시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거 시킨 건데?"

"...."

"오늘 밥 안 나와. 내가 다 취소시키고 이거만 왕창 가져오라고 했어."

"어째서 그러신 겁니까."

"말했잖아. 이거 여기서밖에 못 먹는 거라고. 엄청 비싼 거라니까?"

"...후우, 진짜."

정말로 한숨을 안 내쉴 수가 없다.

결국, 하비엘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그럼 딱 하나만 먹겠습니다. 식사를 거를 수는 없으니까."

배가 고프니까.

식사 때이기도 하니까.

딱히 내키진 않지만, 물배라도 채우자는 심정으로.

예의상 맛만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야자 열매를 집어들었다.

빨대에 입을 가져갔다.

빨아먹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빨아먹고, 쭉쭉, 또 빨아먹고.

정신없이 빨아먹다 보니 야자 열매가 텅텅 비었다.

"원샷했네?"

"...."

이쪽을 보며 키득거리는 로이드의 모습.

그 얼굴을 보고서야 하비엘은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하나 더 줄까?"

"...."

"싫어? 그럼 말...."

"주시죠."

 

턱.

 

소설 철혈의 기사를 빛낸 진정한 주인공이자 절세의 영웅, 하비엘 아스라한.

그런 그도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콜라 맛 야자수액 앞에서는 별수 없는 20대 젊은이였다.

 

 

술탄과 특사의 협상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됐네. 드디어 해냈어."

특사 벤투라 백작이 상기된 얼굴로 영빈관에 들어섰다.

기다리던 특사단 전원이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렇게 웃으시는 건 설마...."

"그 설마가 맞다네."

특사 벤투라 백작이 활짝 웃는 얼굴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술탄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네. 그것도 모조리 말일세."

"모조리요?"

"그게 정말입니까?"

"하하핫, 이 사람들이 속고만 살았나. 내 말 그대로일세. 전부, 모조리 성공했다네. 술탄이 몬스터 도미노 사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했어. 게다가 배상금도 우리가 요구한 조건 그대로를 모두 수용했네. 게다가 우리가 바라지도 않던 조건에까지 먼저 협조를 해주었어."

"우리가 바라지도 않았던 조건이라니요?"

특사단 전원이 귀를 쫑긋거렸다.

영빈관 한쪽에서 야자 수액으로 가득 찬 배를 통통 두드리던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추가 조건? 술탄이?'

이상한 일이다.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만 지불하면 끝날 일인데.

그런데 이쪽이 요구하지도 않은 뭔가를 더 나서서 퍼줬다니.

'어째서?'

궁금해졌다.

로이드의 귀가 더욱 쫑긋거렸다.

특사 벤투라 백작의 기쁨에 겨운 말이 이어졌다.

"허허허. 이제부터 다들 귀를 의심하지 말게나. 술탄이 말일세, 앞서와 같은 몬스터 도미노 사태가 절대로 재발하지 않을 것임을 약조하는 협정서에까지 서명을 해주었다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저 술탄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자신의 권위를 손수 꺾어가면서까지 우리에게 진심 가득한 사과를 표했다는 말일세."

"오,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특사 벤투라 백작의 의기양양한 발표.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성과에 한껏 달아오른 특사단 수행원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한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이드는 불현듯 콱, 잘 먹었던 특산 야자수액이 체하는 기분을 느꼈다.

'재발 방지 협정서? 술탄 그 양반이? 그런 걸 퍼줬다고? 잠깐만. 와나. 이거 설마?'

문득 쌔한 예감이 싸아악.

척수를 타고 올라왔다.

그 순간.

로이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숙소로 뛰어갔다.

빛의 속도로 야반도주용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199화. 능구렁이의 생존법 (2)

 

 

바스삭! 꾸깃꾸깃!

 

로이드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각종 옷가지와 장갑, 부츠, 두건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식량 담을 자루와 수통을 줄줄이 챙겼다.

그동안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낼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낭비할 조금의 시간도 없다는 듯이.

그야말로 맹렬하고도 맹목적인 기세로 배낭을 꾸리는 일에만 완벽하게 몰두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자네, 뭐 하는 건가?"

특사단의 수행원 하나가 와서 넌지시 물어왔다.

그제야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수행원을 슬쩍 돌아보았다.

"보시다시피 짐을 싸는 중입니다."

"짐? 무슨 짐?"

"야반도주용 짐이요."

"야반... 도주?"

"예."

다시 부스럭부스럭 꾸깃꾸깃.

대답을 마친 로이드의 손이 바빠졌다.

그러는 사이, 영빈관 응접실에서 웃고 기뻐하던 모든 이들의 이목이 이쪽, 응접실 한쪽에 붙어 있는 로이드의 방으로 쏠렸다.

"야반도주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프론테라 공자?"

급기야 특사 벤투라 백작이 다가와서 물었다.

백작을 힐끗 돌아보는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내걸렸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야반도주에 별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도망을 치겠다는 말인가? 여기서? 오늘 밤에?"

"예."

"대체 왜?"

"그래야 할 이유가 방금 생겼기 때문입니다."

대답하면서도 로이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사막에서 선크림 대용으로 사용할 곡물 기름, 혹독한 밤을 지켜줄 담요 등을 야물딱지게 챙기며 로이드가 말했다.

"조금 전에 모두에게 말씀하셨지요? 생각보다 엄청나게 잘 풀린 협상의 결과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랬지."

"그래서입니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술탄이 몬스터 도미노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고, 우리 측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액 수준을 순순히 수용하고, 거기에다 사건에 대한 재발 방지 협정서까지 먼저 제안을 하고 추진을 결정했다고 했지요?"

"물론 그랬지. 그게 문제가 있단 말인가?"

"예. 저한테만 문제가 됩니다."

여전히 짐을 꾸리는 가운데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여기 술탄, 그렇게 인심 좋은 사람 아닙니다. 멍청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런데 저런 파격적일 정도의 조건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면 당연히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설마... 술탄이 노린다는 게 자네와 관련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예. 믿기진 않으시겠지만."

"아니, 믿어봄세. 더 말해보게."

특사 벤투라 백작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이제는 로이드의 능력을 완전히 인정하게 된 벤투라 백작이었다.

당연했다.

로이드가 아니었다면 협상을 벌일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의 이런 엄청난 외교적 성과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한데 그렇듯 크나큰 공훈을 세운 로이드가 하는 말이었다.

결코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다고 백작은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자네가 하는 말을 믿어보겠네. 더 말해주게나."

"예,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로이드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이건 순전히 제 감이긴 한데, 아마도 술탄은 제 발을 묶어두려는 것 같습니다."

"자네의 발을?"

"예. 저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하거든요."

"...허허?"

"사실입니다. 이미 칸다하르 지방에 다녀올 때 자신의 딸 하나를 제 호위로 붙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예. 개인적인 사안인 데다 대외적으로 떠들 일이 아니라서 굳이 말씀드리진 않았지만요."

"그래. 그럼 자네의 말은, 술탄이 자네를 사위로 삼기 위해 이번 협상안의 조건들을 모두 순순히 수용한 거라는 뜻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째서?"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겠지요."

"관대함이라."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술탄 자신의 그릇이 크고 군주로서의 덕망이 뛰어남을 이번 협상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만약 이런 제 예상이 맞다면...."

"맞다면?"

"내일 날이 밝자마자 술탄이 절 궁으로 불러들일 겁니다."

"자네가 방금 말한 군주로서의 큰 그릇과 덕망을 자랑하기 위해서?"

"예. 거기에 덧붙여 제게 새로운 일거리를 맡기려 들겠지요."

로이드의 말에 벤투라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거리라. 자네가 그걸 안 받아들이면?"

"아마 오늘 협상의 결과를 뒤엎겠노라 저를 압박할 것입니다."

로이드가 담담하게 꺼낸 대답.

벤투라 백작의 콧수염이 꿈틀거렸다.

"사람 하나를 얻자고 무려 외교적 협정을 뒤엎겠다니. 술탄이 그 정도로 자네를 탐낸단 말인가?"

"뭐,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하려니 좀 부담스럽긴 하네요.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진짜로 벌어질 것 같아서 곤란한 겁니다."

로이드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 농도가 최고치에 달했다.

정말로 저 정신 나간 예상이 실화가 될 것 같아서 곤란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보고 겪은 술탄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곤란했다.

'술탄 그 아저씨, 겉으론 나름 쿨한 척하는데 집착 쩔었어.'

어제 만났던 때도 그랬다.

카나트 건설 완료를 보고하러 방문했던 자신인데.

그런 자신을 향해 노골적인 욕심을 드러내던 술탄이었다.

한데 그 술탄이 이렇게 무리수라고 봐도 무방할 협상 퍼주기를 시전했다?

어쩌면.

정말로.

자신을 불러들여 이상한 압박을 할 것 같단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협상에서 퍼준 조건들을 인질로 삼을 것 같았다.

자신의 일거리를 받으라고.

안 그러면 협상을 파토내겠다고.

그러면 그 협상 결렬의 책임도 너에게 있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뒤집어씌우기까지 시전할 것 같았다.

그러면 이쪽은?

'울면서 겨자 먹기로 일거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그래야 협상이 유지되고 평화가 이어질 거니까. 프론테라 영지가 전쟁에 휘말리는 참사를 막아야 할 테니까.'

그렇게 한번 술탄에게 말려들면?

'개미지옥인 거야. 그렇게 맡은 일이 한 번으로 끝날까? 아니, 천만에. 절대로 안 그럴걸. 하나 끝내면 또 하나, 그다음에 또 하나. 계속 그렇게 붙잡아두는 거야.'

일단 그러면 게임 끝이다.

계속 발이 묶인 채 여기서 지내게 될 거고.

그동안 술탄의 숱한 영입 유혹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몇 년 묶여 있다 보면 자신도 흔들리게 될 것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여기 눌러앉게 되었더라.

막상 살아보니 나쁘지 않았더라.

그런 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진짜로 근거 없는 촉이고 정신 나간 수준의 예상이긴 한데, 이런 촉은 또 은근 잘 맞는단 말이지.'

나름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한 촉이었다.

특히 고시원에서 지내던 시절이 그러했다.

종종 고시원비가 살짝 모자란 때가 있었다.

받아야 할 일당이 밀리는 때가 그랬다.

그러면 피치 못하게 며칠 정도 밀려서 고시원비를 내야 했다.

그럴 때의 대처가 중요했다.

'고시원 총무의 동선을 잘 파악해야 했어. 다른 사람들의 대화하는 목소리 톤이나 행동 변화만 보고서 고시원 총무가 근처에 있는지도 간을 봐야 했지.'

복도 끝에 있던 공용 화장실에 갈 때라든가.

혹은 공용 주방에서 라면을 끓일 때가 특히 그랬다.

만약 눈치 싸움에 실패해서 총무와 마주쳐 버리면?

꼼짝없이 원비 안 내냐는 추궁을 들어야 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며칠만 시간 좀 달라고 사정해야 했다.

그런 수많은 실전(?)을 통해 단련된 바퀴벌레 같은 눈치.

그 감각이 지금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으으, 싫다.'

술탄의 술수에 말려들었을 경우에 펼쳐질 자신의 미래.

그걸 예측해보던 로이드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오소소 밀려오는 소름을 얼른 털어내며 말했다.

"그래서입니다. 저쪽이 막무가내로 나오는 거라면 이쪽에서도 막무가내로 대응해야죠. 최대한 신속하고 단순해서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래서 야반도주를 한다는 말인가?"

"예. 어차피 여기서의 볼일은 끝났으니까요. 설령 제 예상이 틀려서 술탄이 절 찾거나 하지 않더라도 딱히 야반도주 때문에 손해 볼 일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야반도주를 한다고 해서 손해를 볼 일은 없다.

혹시나 만약에 벌어질 술탄의 술수를 피할 수도 있고.

혹은 예상이 틀렸다 해서 나쁠 일도 없다.

"그러니 백작님.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셔야겠습니다."

 

탁.

 

어느새 야반도주용 배낭을 다 꾸린 로이드가 돌아섰다.

배낭을 어깨에 걸며 벤투라 백작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앞에 벤투라 백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마젠타노의 특사, 벤투라 백작은 날이 밝자마자 술탄의 호출을 받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술탄이 궁으로 불러들인 로이드를 대신해서' 술탄을 만나러 갔다.

"특사 벤투라 백작이여. 어찌하여 짐이 부른 자가 아닌 그대가 이곳에 온 것인가."

검은 대리석이 반들반들한 어전.

그곳에 술탄의 물음이 떨어졌다.

의아함과 불만이 함께 서린 술탄의 목소리에 특사, 벤투라 백작은 살며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그 젊은 친구의 예상이 사실이었던 건가.'

전날 저녁, 로이드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술탄이 아침에 자신을 궁으로 부를 거라고.

만일 정말로 그런다면.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은 걸로 봐야 할 거라고 했던가.

'참으로 똑똑한 친구 같으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백작은 떠올렸다.

로이드가 야반도주를 실행하기 직전에 남겼던 부탁을.

"제가 술탄의 부름에 응하여 이곳에 온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습니다."

"거창하지 않다라. 그 이유를 밝혀주시게, 마젠타노의 특사여."

"예, 술탄이시여. 오늘 아침 술탄께서 부르신 로이드 프론테라는 현재 본국으로 급히 귀환하는 중입니다."

"...무어?"

술탄이 멈칫.

벤투라 백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솔직히 고하자면, 애석하게도 로이드 프론테라가 지독한 풍토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아마도 고향을 너무 오래 떠나 있어서인 듯하여, 피치 못하게 먼저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설마 요양을 위해서라는 구실을 붙이려는 건 아니겠지."

"애석하오나 그에게 고향에서의 요양이 다급히 필요하던 상황이 맞습니다."

"그대는 짐이 그런 핑계를 믿으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실로 애석하긴 하나...."

"됐네. 그만하면 되었어."

술탄이 손을 저었다.

그런 사막 지배자의 입가엔 이미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설마 짐의 의도를 간파한 것인가.'

애석했다.

일부러 마젠타노의 협상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는데.

그걸 빌미로 로이드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려 하였는데.

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협상을 무효로 돌리겠노라 압박하려 하였는데.

그렇게 발을 묶고.

억지로 눌러 앉혀서라도.

자신의 신하로 삼아보려 했는데.

'어제의 협상 결과만 보고서 짐의 의도를 눈치채? 심지어 요양을 핑계로 야반도주를 감행해?'

무슨 이런 바퀴벌레 같은 자가 다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쓰디쓴 웃음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동시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졌구나. 졌어. 병을 핑계로 내뺀 타국의 신하를 무슨 수로 다시 불러들인단 말인가.'

무리수를 두면 그리할 수 있기는 하다.

전국에 수배령을 내릴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러면 모양새가 심히 나빠진다.

요양을 하러 가는 이를 억지로 붙잡아 주저앉힌 꼴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그런 모양새를 만든 상황에서 협상의 결과를 인질로 삼아 일거리를 맡기려 든다면?

자신의 의도가 너무 백일하에 드러나 버린다.

게다가 로이드의 입장마저 난처해진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일거리를 받아들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마젠타노를 저버리겠다는 뜻을 대외에 노골적으로 선포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즉, 자신과 로이드 양쪽에게 모두 무리수가 되는 셈이다.

'하.'

단순한 야반도주 하나로 자신의 계획에서 모든 명분을 앗아가 버렸다.

심지어 양쪽 모두의 실리마저 깨끗이 지워 버렸다.

붙잡으려야 붙잡을 수 없는.

그래야 할 의미마저 없어지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셈이다.

'이러니 내가 탐을 내지 않을 수가 있나.'

술탄은 그만 허탈하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벤투라 백작을 향해 물러나라 손짓했다.

그렇게 홀로 남은 왕좌.

그곳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은 그냥 보내주겠노라. 하지만 언제까지고 짐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 여기진 말도록.'

로이드 프론테라.

언젠가 꼭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이다.

사위로 삼든, 태자 다음 가는 권력을 안기든.

그 건방진 자의 능력을 활용하여 왕국의 천 년을 능히 떠받칠 기틀을 마련하리라.

술탄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하지만 이 순간, 술탄이 까맣게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인재 영입을 위해 야욕을 불태우는 자신.

로이드를 손에 넣겠노라 다짐하는 자신.

그런 자신이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가장 장래성 있는 인재 하나가 자신의 휘하를 벗어났음을. 오히려 로이드를 만나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나 버렸음을.

술탄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 세라자드가? 사라졌다고?"

슬하의 자녀 중에서 가장 잠재력이 있는 아이.

언젠가 반드시 소드마스터가 될 거라는 기대를 받던 딸.

세라자드가 남긴 편지를 받아든 술탄은 저도 모르게 뒷골을 억세게 부여잡고 말았다.

200화. 능구렁이의 생존법 (3)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후우, 드디어 이곳과도 작별이로구나.'

마젠타노의 특사, 벤투라 백작은 감회에 젖은 눈길을 들었다.

이제는 눈에 익은 아힌샤의 술탄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렇게 오래 머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자신이 국왕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왔던 때가 벌써 5개월쯤 전이었던가.

당시에만 해도 금방 술탄과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될 줄 알았다.

한데 도착하고 보니 아니었다.

이곳의 반응이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노골적인 무시와 홀대를 겪어야 했다.

만약, 그때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 로이드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협상은 요원한 일이었겠지.'

여전히 무시와 홀대만 감내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술탄과 협상을 벌이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빈손으로 본국에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말이다.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매우 성공적인 협상 결과였다.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가면 국왕에게 큰 치하를 받을 것이다.

'그것 또한 모두 로이드, 그 젊은 친구 덕분이고 말이지.'

그 친구는 아힌샤를 잘 빠져나갔을까.

무사히 야반도주에 성공한 걸까.

백작은 잠시 염려에 잠겼다.

그러다 금방 피식 웃고 말았다.

아직껏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최소한 붙잡히진 않은 듯했다.

게다가 오늘 술탄궁의 분위기를 보니, 겨우 외국의 특사단 수행원 하나가 사라진 일에 신경을 쓰기엔 너무나 큰 사건이 벌어진 듯했다.

"간밤에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인 건가?"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백작의 물음에 수석 수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궁이 계속 어수선하더군요. 그래서 그동안 안면을 튼 궁내부원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궁내부원이 뭐라고 하던가?"

"공주 하나가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술탄의 딸이?"

"예."

"설마 납치라도 당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제 발로 궁을 떠난 듯합니다."

"허어? 그럼 가출이 아닌가."

"예, 맞습니다."

"허허허."

벤투라 백작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게다가 폐쇄적이기 짝이 없는 술탄의 궁에서 가출을 감행한 공주라.

'그렇다면 저런 어수선함도 이해가 되는군.'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늘 아침의 술탄궁은 평소와 달랐다.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비롯한 마젠타노의 특사단이 궁을 떠나고 있는 마당임에도 그러했다.

거창한 환송식은커녕, 술탄이 배웅을 해주지도 않고 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게다가 술탄의 딸이 사라진 일이야 자신이나 특사단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벤투라 백작은 특사단 일행을 이끌었다.

술탄궁 궁내부원들의 조촐한 환송을 받으며 궁을 나섰다.

수도 아힌샤를 벗어났다.

본국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여정은 순조롭고 무사무난했다.

올 때와 같은 길을 거쳐 가도와 도시를 지나쳤다.

사막의 가장 안전한 경로를 따라 이동했다.

마침내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국경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이드, 하비엘과 합류했다.

"자네들, 많이 기다렸나?"

"으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법요?"

국경에서 조금 떨어진 황무지 바위틈.

그곳에 캠프를 차리고 있던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벤투라 백작과 특사단 일행을 반갑게 둘러보았다.

"아무도 술탄에게 죽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오셨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하하. 그래, 다행이지. 우린 누구와 다르게 술탄이 눈독을 들인 사람이 아니라서 말일세."

"어라? 말씀에 가시가 있으십니다?"

"왜 없겠는가. 내가 자네 때문에 흘린 식은땀을 생각하면 이것도 많이 봐준 걸세."

"그렇습니까?"

"아무렴. 그렇다마다. 자네가 풍토병에 걸려 급히 귀환했다는 말을 들은 술탄의 표정과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후우."

"마음고생이 많으셨겠군요."

"그래 봤자 별다른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서 야반도주를 했던 자네만 했겠는가. 어떤가. 고생은 하지 않았고?"

"예, 다행히 별로."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곁의 하비엘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 친구 덕분에 말입니다. 소드마스터라는 존재가 워낙 유용해야 말이죠."

사실이었다.

아힌샤에서 야반도주를 결심하고 감행하던 날.

그가 챙긴 최고의 준비물(?)이 바로 하비엘이었다.

소드마스터였다.

누가 추격을 해오거나 체포를 시도하면?

무력으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면 그만일 터였다.

그러다가 사막이나 황무지에서 몬스터와 조우하면?

'저건 사막의 무시무시한 몬스터 아무개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점심이지요.'라고 중얼거릴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게다가 자신이 최근에 얻었던 찬사, <서쪽 나라 도련님의 고인물>이 지닌 옵션마저 효과만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탈수 증상을 겪지 않게 됐지. 모든 사막 지역, 연평균 기온이 섭씨 40도 이상인 모든 지역에선 말이야.'

처음엔 의구심이 없던 게 아니었다.

제대로 발동이 될까 싶기도 했다.

한데 야반도주를 하며 사막을 횡단해 보니?

최소한 이곳에서는 그만한 꿀 옵션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온종일 사막 땡볕 아래에서 탭댄스를 춰도 탈수 증상이 없을 정도였지.'

함께 사막을 횡단하던 하비엘이 놀라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소드마스터인 자신도 지치는 걸 느끼는데.

어떻게 로이드 님이 멀쩡한 거냐고.

놀라며 묻는 하비엘 녀석에게 자신은 의기양양한 일침을 날려 주었던가.

'인마, 싸나이는 정신력이야. 정신력.'

...이라고 말이다.

어쨌건 덕분에 야반도주가 생각보다 편했다.

특사단 일행과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별다른 고난이 없었다.

"어쨌건 다들 이렇게 무사히 만나게 되니 참 반갑네요."

"나도 같은 마음일세. 아, 그리고...."

벤투라 백작이 훈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자네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직껏 못했지. 제법 늦었다만 이제나마 말함세. 참으로 고맙네."

"아, 감사합니다."

"아니. 자네가 아니라 우리가 감사해야지. 처음엔 그저 자네를 속물 취급하기만 했던 나였는데 말일세."

"하하. 속물 맞는데요."

"아니지. 아니야. 자넨 우리의 은인일세."

로이드가 멋쩍게 내뱉은 너스레.

그 말에 벤투라 백작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술탄과의 협상은 이루어지지도 못했을 걸세. 그 상황에서 술탄이 준 파다샤르를 그렇게 흥청망청 써 버림으로써 술탄의 이목을 끄는 방법을 우리 중에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자네가 술탄과 계약을 맺고서 성공리에 치른 공사...."

"카나트 말씀이신가요?"

"그래, 카나트. 그것 덕분에 협상 테이블을 열 수 있었어. 난 알고 있네. 자네가 그 공사를 성공리에 치러내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협상을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네."

백작이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사실이었다.

로이드가 카나트 공사를 하기 위해 칸다하르 지방에 가 있던 동안이었던가.

처음엔 몇 달쯤 기다리면 술탄을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품기도 하였더랬다.

한데 지나면서 보니 아니었다.

한 달, 두 달, 넉 달.

실제로 지내면서 술탄궁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궁내부원이 무시하며 언급했던 대기 기간 최소 6개월.

그건 6개월을 기다리면 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6개월? 그걸론 어림도 없었을 거야. 아니, 설령 6년을 기다린다 해도 여전히 기약이 없었을 테지.'

백작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술탄은 이쪽을 영원히 만나줄 생각이 없는 거였다.

그걸 깨닫고서 자신은 얼마나 낙담했던가.

자신의 무능함을 그 얼마나 자책하였던가.

"전하께서 내리신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어서. 협상에 임할 수 없게 되어서. 그렇게 빈손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될 결과가 보여서. 결국엔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해서. 그리고... 전쟁터에서 무수한 젊은이들이 희생될 미래가 뻔히 보여서.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다네. 한데 자네가 일을 치러낸 거지."

벤투라 백작이 로이드를 보았다.

"모두 자네의 공일세. 협상에 성공한 것도. 전쟁을 막아낸 것도. 무수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살려낸 것도 말이야."

"어, 으음, 전 그저 제 영지가 전쟁에 휘말리는 게 싫어서...."

"그게 그거라네."

"아, 옙."

강하게 힘주어 말하는 벤투라 백작.

그걸 보며 로이드는 직감했다.

이 아저씨, 은근 답정너 기질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였다.

이어지는 백작의 말에 로이드는 기함하고 말았다.

"자네의 이번 공로는 내, 왕도에 돌아가면 전하께 매우 소상히 고하여드리겠네."

"...제발 그것만은 좀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되네. 이것만이 내가 자네에게 은혜를 갚을 길일세."

"...."

하아.

이렇게 또 공적을 세워 버리고 말았구나.

제발 이번 공적 때문에 국왕 누님한테 불려 갈 일은 없으면 좋겠는데.

로이드는 진심으로 바라고 기원했다.

그렇게 특사단과 합류를 마쳤다.

함께 황무지를 건넜다.

동부산맥을 넘었다.

그립고 그립던 꿀단지 같은 고향.

프론테라 백작령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백작 부부와도 재회할 수 있었다.

부부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백작 부인의 더욱 뜨거운 걱정 세례도 받았다.

"이런. 괜찮으니?"

"아, 예."

"어쩌면 이렇게 야위었니."

"음, 하도 잘 먹어서 살쪘는데요. 살짝."

"아니야. 아주 볼이 푹 들어가고 난리도 아니구나. 자, 어서 오렴. 식사부터 하자꾸나."

"저기, 식사는 아까 산맥 내려오면서...."

"뭐부터 먹고 싶니?"

"아, 그게 아니라, 혹시 거북목이 이끄는 망명자들이 오지 않았나요? 테르메스 씨라고...."

"왔단다. 오리 고기가 좋겠니?"

"...아니, 그, 저기, 그럼 아직 도자기랑 비단 같은 것들 도착 안 했죠? 사실은 배편으로 크레모를 거쳐서 오도록 보낸 물건이 있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도자기나 비단은 모르겠고, 오늘은 소고기가 좋겠구나."

"...."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여독을 풀기도 전에 강제 먹방부터 체험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바로 동생인 줄리앙의 아카데미 졸업 소식이었다.

"놀라지 말거라. 줄리앙이 졸업생 중에 차석을 차지했단다."

"...정말요?"

프론테라 백작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전해준 소식.

식사 중이던 로이드는 진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박.'

무려 아카데미 차석이라니.

그건 진짜로 장난이 아닌 일이었다.

'당연하지. 왕도 아카데미는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만, 졸업은 훨씬 더 어려우니까.'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간략하게 언급된 아카데미의 체계가 떠올랐다.

왕도의 아카데미는 졸업 난이도가 높기로 악명이 높았다.

입학생이 100명이 있다면?

그중에서 졸업에 성공(?)하는 인원은 겨우 20명 남짓이라던가.

게다가 졸업만 한다고 만사형통인 게 아니었다.

'졸업생 중에 상위 10퍼센트 성적에 든 사람들만 왕실의 관리로 임용되지. 나머지 졸업생은? 그냥 일반인들과 함께 임용 시험을 따로 쳐야 해. 물론 가산점 특혜를 제법 받긴 하지만.'

그런데 줄리앙이 졸업생 중에 2위, 차석을 했단다.

즉, 왕실의 관리로 다이렉트 임용이 보장되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공무원 시험.

그것도 5급 시험.

즉, 행정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한 것과 버금가는 성과일 터였다.

'녀석, 국왕 누님한테 신 나게 굴려지겠구나.'

로이드는 한편으로 남몰래 애도를 표했다.

국왕 알리시아는 인재를 그냥 두는 성격이 아니다.

능력이 있는 자를 발견하면 그 능력을 밑바닥까지 알뜰살뜰 싹싹 긁어서 쓰는 알뜰착취형 군주다.

그러니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하며 그 똘똘함을 증명한 줄리앙은?

아마도 신 나게 혹사당할 것이다.

만성피로를 호소할 정도로 굴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혹사가 줄리앙에겐 기쁨이리라.

그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것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물었다.

"그럼 녀석, 집으로 오는 건가요?"

"그렇단다. 발령을 받기 전까지 집에서 지낼 시간이 조금 난다는구나.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왕도를 출발하면서 너에게 보낸 편지가 있단다. 여기, 직접 보렴."

백작이 편지를 내밀어 왔다.

로이드는 편지를 읽었다.

 

- 형에게.

나 졸업했어. 성적도 제법 나쁘지 않게 받았어. 모두 형 덕분이야. 온전히 공부에 매진할 수 있게 돼서. 정말로 열심히 매달릴 수 있게 되어서. 그리고 오랜만에 형을 만나면서 느꼈던 게 많아서. 덕분에 이렇게 해낼 수 있었어.

고마워.

곧 보러 갈게.

- 형의 자랑스러운 동생이고 싶은, 줄리앙이.

 

"...."

로이드는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살폈다.

새하얀 종이 위에 쓰인 까만 글씨들이 하나 빠짐없이 전부 대견해서.

몇 줄 되지도 않는 내용이지만 읽으며 자꾸만 흐뭇해서.

저도 모르게 편지를 다섯 번이나 읽었다.

한편으로는 뭔가 대리만족을 얻은 기분마저 들었다.

'졸업이라.'

자신도 졸업, 하고 싶었는데. 졸업하고 기사 시험 붙어서 취직,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미처 그 노력의 결실을 보기도 전에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물론 그때 익힌 지식으로 이렇듯 잘 지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졸업장을 따진 못했다는 미련이 내내 가슴 한쪽에 머물러 있던 터였다.

'뭐, 졸업장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긴 하지만.'

흔한 대학 졸업장 하나 따냈다고 만사가 풀릴 정도로 대한민국이 만만한 동네가 아니다.

아니, 진짜 살벌한 싸움은 그때부터가 시작인 치열한 세상.

그래서 창칼이 난무하는 이곳보다 어찌 보면 더 빡쎄고 팍팍하며 살벌한 세상.

그런 곳이 대한민국이었다.

'그래도 졸업장, 따고는 싶었어.'

노력했는데 따내진 못한 거.

그래서 미련이 남았다.

가끔 생각이 나곤 했다.

한데 줄리앙이 이렇듯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단다.

게다가 그게 모두 이쪽 덕분이라고.

자랑스러운 동생이고 싶다고.

기특한 말까지 적어 보냈다.

그게 고마웠다.

흐뭇했다.

마치 자신이 바라던 졸업장을 대신 따준 것만 같아서, 너무나 대견했다.

'짜식.'

오면 알밤 같은 머리통에 꿀밤이나 한 대 먹여줘야지.

로이드는 그렇게 다짐하며 줄리앙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행여나 구겨질까.

조심조심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 뒤로 식사를 이어가면서도.

백작 부부와 오랜만의 재회를 누리면서도.

한쪽 손을 자신의 가슴 어름에 계속해서 얹어두었다.

그럴 때마다 안주머니 속에서 살며시 대답하듯 바스락거리는 편지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게 또 흐뭇하고 고마워서.

내내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로이드를 바라보는 백작 부부도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다.

언제나 사고만 치던 큰아들이 어느덧 저렇게 듬직한 기둥이 되었구나 싶어서.

항상 소심하던 둘째가 나랏일을 떠맡을 사람으로 자라났구나 싶어서.

아니, 그 전에 두 아들이 모두 착실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구나 싶어서.

온 세상.

온 우주를 다 품은 듯한 기쁨에 부부도 함께 미소 지었다.

그렇기에 백작 부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장남에게 용건을 지닌 한 불청객이 영지 외곽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후우."

드디어 기나긴 여정 끝의 도착인가.

그렇다면 이제, 로이드 프론테라를 만나서, 그가 나불거리는 신기한 자장가를, 이 마법 구슬에 녹음해서 담아가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럼 다시 편히 잘 수 있을 거야.'

술탄국의 고귀한 공주.

그러나 이제는 자장가 금단 현상에 시달리게 된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검사.

세라자드는 동부산맥 기슭에 자리한 프론테라 영지를 내려다보며 흑진주 같은 눈동자를 빛냈다.

201화. 자장가라는 이름의 감옥 (1)

 

 

"비벙-!"

동부산맥 호숫가에서부터 울려 퍼져 오는 우렁찬 알람.

비벙이의 목소리와 함께 프론테라 백작령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로이드의 눈도 반짝 뜨였다.

"하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그리웠던 자신의 침실.

왕도의 별궁이나 술탄국의 영빈관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대신 포근했다.

익숙했다.

술탄국에 다녀오는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이 저택의 침실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로이드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이쪽이 기척을 내자마자 문밖에서 조심스레 물어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 또한 익숙하고 반가웠다.

"어, 들어와."

천천히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하녀 에밀리가 고개를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아침 가져왔어요."

"고마워. 많이 기다렸어?"

"아뇨. 조금요."

"큰일이네. 많이 기다렸나 보네."

"아뇨. 정말 쪼금만 기다렸어요. 괜찮아요."

에밀리가 쟁반으로 옮겨온 아침 식사 향기마저 반가웠다.

위장에 부담되지 않을 콩 수프와 삶아서 잘게 찢은 닭고기, 통밀빵과 소시지 두 덩이, 반숙으로 적당히 익혀낸 달걀프라이와 염소 젖 치즈 한 덩이, 그리고 따끈하게 데운 우유까지.

귀족가답지 않은 소박한 아침이었다.

그래도 로이드는 이게 제일 좋았다.

'고시원 시절에 비하면 뷔페지, 뷔페.'

너무 호화스러운 아침 식사는 이쪽에서 사절이다.

위장으로도, 기분으로도 부담스러우니까.

그러니까 딱 이 정도가 좋다.

"고마워. 잘 먹을게."

"네, 도련님. 식사 마치시면 제가 치우러 올게요."

"응."

"아, 참."

쟁반을 내려놓고 침실을 나서려던 에밀리가 멈추어섰다. 이쪽을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배시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세요."

"...어."

에밀리는 이쪽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살랑살랑 침실을 떠나갔다.

로이드는 잠시 침실 문을 쳐다보았다.

인싸의 기분이 이런 걸까.

모두에게 두루두루 환영받는 이런 기분.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좋다.

'이래서 여기가 좋다니까.'

절로 미소가 나왔다.

문득, 이곳에 처음 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이쪽을 보는 모두의 시선이 너무나 차가웠는데.

마치 못 볼 인간을 봤다는 듯이.

또 귀찮은 진상과 마주쳤다는 듯이.

껄끄럽고, 피하고 싶고, 얽히기 싫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었는데.

그랬던 시선들을 저렇듯 따스한 환영의 인사로 바꾸어냈다.

누가?

바로 자신이.

'그동안 내가 참 애썼구나.'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 이유는 별거 없다.

자신이 열심히 애썼고, 노력했고, 그만큼의 성과를 만들어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그 노력으로 만든 꿀단지만 편하게 빨면서 살고 싶었다.

'할 수 있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했던가.

영지의 빚을 갚고, 몬스터 도미노를 막아냈다.

피난민들을 받아들여 정착시켰다.

전염병을 예방했다.

넉넉한 자금을 확보했고, 술탄국과의 전쟁도 피했다.

'그걸 다 해결했지. 누가? 내가. 그러니까 이제는 놀 거야. 지긋지긋한 노가다와는 안녕이야. 평생 뒹굴거리면서 건물주처럼 살아줄 테다. 국왕이 날 부르지만 않으면 돼. 그럴 일만 없도록 판을 짜내면 되는 거야.'

로이드는 새삼스러운 장래희망(?)을 알차게 다지며 포크를 들었다.

소박하지만 맛있는 아침을 즐겼다.

꿀 빠는 인생 1일차를 만끽했다.

오전에는 산책을 했다.

초여름의 따스하고도 촉촉한 햇볕을 즐겼다.

그 와중에 반가운 얼굴들도 만났다.

술탄국 출신의 반군 세력.

그러나 이제는 망명을 와서 프론테라 영지의 주민이 된 자들.

테르메스와 반군 간부들이었다.

"다들 무사히 잘 도착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들은 이쪽보다 닷새쯤 일찍 여기에 도착했다고 했다.

남녀노소 가족들과 함께한 여정이라 빠르게 이동할 수는 없었지만, 거북목과 골병대원들의 보호와 안내 덕분에 무사히 사막을 건너고 국경을 몰래 넘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 뒤로도 꿀 빠는 인생 1일차의 하루가 보람차게 흘러갔다.

오전이 반가운 만남의 시간이었다면?

오후는 더 반가운 택배 수령의 시간이었다.

"이게... 다 무엇이더냐?"

점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수십 대의 짐수레가 프론테라 영지로 들어왔다.

커다란 궤짝이 가득 실린 수레였다.

수레바퀴가 내려앉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 모습에 프론테라 백작이 입을 쩍 벌렸다.

그때였다.

"로이드 프론테라 씨? 혹시 여기 계십니까?"

선두의 짐마차를 이끌던 남자가 저택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에 로이드가 저택 앞으로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예! 갑니다!"

자고로 택배를 받을 때는 신속하게.

최대한 두근두근 즐거운 마음으로.

수령장에 서명을 마쳤다.

그 즉시 일꾼들이 수레에서 궤짝을 내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거, 무슨 일이니?"

그 모습을 보던 프론테라 백작이 떠듬거리며 물어왔다.

로이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택배, 아니, 귀중한 배송품요."

"배송품?"

"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

백작의 귀가 번쩍 열릴 소리를 했다.

"도자기, 비단, 양탄자, 향신료,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어쨌건, 전부 술탄국 수도 아힌샤의 특산품들입니다."

"...아힌샤의? 특산품?"

"예."

"이런 걸, 대체 누가 보낸 것이더냐?"

"제가요."

"하?"

"제가 보냈습니다. 아힌샤에 갔을 때 말이죠."

로이드가 더욱 짙어진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백작에게 아힌샤에서 벌였던 돈지랄을 간략하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상선을 고용했고 수송 의뢰를 맡겼지요."

"크레모 항을 거쳐서 여기로 오게 했단 말이니?"

"예. 그렇게 하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드네요. 야무진 상선을 잘 골랐나 봐요. 워낙 먼 거리라 물건이 제대로 제때 올까 걱정이었는데."

"...."

태연하게 씨익 웃어 버리는 로이드.

그 모습에 백작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 많은 궤짝 안의 물건이 모조리 동부의 도자기와 비단 등등의 특산품이라니.

"그럼, 이 아비가 뭘 하면 되겠느냐."

백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정신을 붙잡았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듯한 로이드의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판매처를 알아봐 주시면 될 듯합니다. 왕도, 크레모, 나마란 등등에서요. 물론 한꺼번에 다 팔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거고 말이죠."

"그건 그렇겠지."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양의 특산품이었다.

저걸 한 번에 다 팔 수 있을까?

그건 아닐 거라고 백작은 생각했다.

'그런 판매처가 있다면 정말 좋겠지. 하지만 어지간한 대형 상단들도 그만한 자금을 한 번에 쏟아부을 여력은 안 될 테니까.'

게다가 특산품, 특히 사치품은 수요에 한계가 있다.

그걸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을 지닌 소비층이 정해져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저만한 양을 한꺼번에 다 팔려야 팔 수가 없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래, 이 아비에게 맡겨두려무나."

"예, 천천히 조금씩 처분해도 상관없으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시구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토닥여 오는 백작.

이쪽을 대견해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렇게 로이드는 열심히 택배(?)를 받았다.

골병대를 불러 특산품 궤짝을 창고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러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후아. 이제 좀 사람 사는 것 같다. 그렇지?"

창고에서 나오며 뒤를 향해 물었다.

종일 말없이 곁을 지킨 하비엘이 그곳에 있었다.

한데 녀석은 이쪽의 질문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

아닌 게 아니라 하비엘 녀석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딱 한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새로 산 비싼 운동화 태그를 떼기도 전에 개똥을 질컹 밟아 버린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하비엘을 보는 로이드의 눈빛이 짓궂어졌다.

"쯧. 뭔 일이 있긴 있구만. 그렇지?"

"...."

"뭔데. 설마 또 나한테 불만 있는 거냐."

"예."

마침내 돌아오는 대답.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나한테 불만이라. 어떤 불만인데?"

"...."

"여전히 입 닫고 있는 걸 보니 진짜로 삐쳤나 보...."

"로이드 님의 자장가, 공짜였던 겁니까."

저물어가는 노을 아래.

하비엘이 까칠하게 고개를 까딱,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쪽을 향해 더욱 까칠한 눈을 반짝 빛냈다.

"저는 로이드 님의 자장가가 상당한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자 말입니다."

"세라자드?"

"예."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

더욱 강렬해진 가자미눈을 반짝.

"칸다라에 도착했던 첫날을 기억하실 겁니다. 세라자드 양에게 처음 자장가를 불러준 직후에 로이드 님이 그러셨지요. 자장가, 공짜가 아니라고. 지금의 넌 모르겠지만 자장가에 걸맞은 대가를 두둑하게 받아낼 거라고 말입니다."

"응, 그랬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결국 로이드 님은 그 여자에게서 아무런 대가도 받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음, 그렇게 생각해?"

"예."

나란히 걷는 동안 하비엘의 까칠한 말이 이어졌다.

"설마 그 여자를 재운 대신에 반군의 도움을 수월하게 받은 것, 그걸 대가로 여기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응. 당연하지."

"그럼 대체 뭘 받으신 겁니까."

"그 여자의 미래."

"...예?"

태연하게 돌아온 로이드의 대꾸.

그 말에 하비엘이 멈칫했다.

어느새 이쪽을 보는 로이드의 입가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배어나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자장가, 비싸. 그 여자의 미래를 저당잡았으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비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장가로 세라자드의 미래를 저당잡았다니.

"설마 그 여자가 자장가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바칠 거라는 뜻인 겁니까."

"어, 대강은."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자드 양은 엄청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 그건 직접 검을 부딪쳐본 네가 잘 알 거야. 그렇지?"

"예."

"정확히 느낀 대로는 어느 정도였어?"

"20년 이내로 반드시 소드마스터가 될 재능이었습니다."

"맞아. 내 생각도 그래."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진짜다.

하비엘의 저 평가는 사실이다.

실제로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세라자드가 그렇게 소개되었으니까.

마젠타노의 국왕 알리시아에 비견될 재능의 소유자라고.

20년 이내에 반드시 소드마스터가 될 재목이라고.

'하지만 그 재능의 꽃을 피우지 못했지.'

이유는 간단했다.

그 전에 죽어서였다.

'반란에 내몰린 술탄을 지키려 끝까지 싸웠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아버지가 자길 인정해주길 바라면서. 퇴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무리수를 뒀어.'

그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찬란한 재능의 꽃을 피워내지 못했다.

한데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져 버렸다.

자신이 만든 카나트 때문이었다.

'이젠 그 반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카나트 때문에 칸다하르 지방의 가뭄이 해결됐으니까. 주민들의 불만이 잠재워졌으니까. 그러니 술탄이 반란군에 포위되는 일도 없을 거고, 세라자드가 술탄을 지키려 싸우다 죽을 일도 없겠지.'

즉, 그녀가 죽지 않게 된다.

안정적으로 살아남아 20년 이내에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래서야."

로이드가 못을 박듯 말했다.

"20년 이내에 소드마스터가 될 인물이 우리의 잠재적인 적국에 있어. 게다가 술탄의 딸이야. 미래의 어느 날엔가 우리 영지를 향해 검을 겨누는 순간이 다가올 수도 있다고. 그걸 그냥 내버려둬?"

"그건...."

"당연히 손을 써야지."

"어떻게 말입니까."

"그 싹을 내 것으로 삼든가, 못 가진다면 덜 자라게 약을 치든가."

싱긋 웃는 로이드의 미소가 살포시 사악해졌다.

"지금이야 술탄과 우리의 관계가 좋아졌지. 하지만 10년, 20년 뒤까지 그러리란 보장이 없잖아. 결국엔 잠재적인 적국인 거야. 그래서야. 칸다라에 있는 동안 세라자드 양에게 매일 자장가를 불러준 게."

"...습관을 만들어 버린 거였군요."

"오, 벌써 눈치챘어?"

"제가 그렇게 당한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맞아. 정답."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 여자, 무려 넉 달이 넘도록 자장가를 들었지. 덕분에 푹 자면서 지낼 수 있었고. 한데 지금은? 자장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 몹시 당황스러울 거야. 숙면을 이룰 수 없게 되어서."

사실이다.

매일 잘 자던 중에 갑자기 돌아온 불면증.

그 급격한 변화에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차라리 자장가를 몰랐던 시절이 좋았다고 여기고 있을 거야. 왜냐. 자장가의 맛을 봐 버렸거든. 그 편안함이 뭔지 알아 버렸거든. 그러니 이젠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해. 악과 깡으로 수면부족 상태를 버텨내던 예전과 달라져 버린 거야."

"...그 여자에게서 스스로 소드마스터 증후군의 벽을 깰 독기를 제거해 버린 겁니까."

"어."

로이드가 단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어떤 일이든지 그렇다.

전엔 불편함을 감수하며 그럭저럭 지내던 사람이라도, 한번 편안함을 맛보고 나면 달라지게 된다.

리모컨 사용이 익숙해져 버리면 그다음부턴 티브이를 볼 때마다 리모컨을 끼고 살게 된다.

선풍기만으로 나름 잘 버티던 사람도 에어컨의 맛을 보면 그 앞을 벗어나질 못한다.

난로도, 승용차도, 엘리베이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모두 그렇다.

'하물며 몸에 직접 영향을 주는 잠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소드마스터 증후군에 시달리던 세라자드도 그럴 터다.

온종일 괴로움을 안겨주던 지독한 불면증.

예전엔 그걸 당연한 듯 감내하고 있었을 터다.

그런 혹독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훈련하며 차근차근 경지를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그러다가 갑자기 자장가를 맛보게 되어 버렸다.

극상의 편안함을 알아 버렸다.

"그러니 이젠 예전으로 못 돌아가. 전과 같은 독기를 발휘하며 경지를 끌어올리지 못하게 됐을 거야. 뭐, 물론 예상 밖의 저력을 발휘해서 예전만큼의 독기를 가까스로 되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릴걸."

"소드마스터가 될 시기를 많이 늦출 수 있으리란 뜻인 겁니까."

"어. 만약 여기로 오지 않는다면."

"진심이십니까?"

"어."

"...로이드 님, 당신은 정말."

"욕해도 돼."

"...."

이쪽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로이드.

어쩌면 그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비엘은 자신이 아는 가장 찰진, 오랜 시간 품어왔던 욕을 로이드에게 발사했다.

202화. 자장가라는 이름의 감옥 (2)

 

 

"로이드 님."

"어."

"로이드 님은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음?"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

하비엘의 냉랭한 눈동자가 한층 서늘한 기운을 머금었다.

"부지런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참 성실하기도 하지요."

"어이?"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비엘 녀석이 왜 저럴까.

욕할 거면 그냥 하라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저런 칭찬을 할 녀석이 아닌데.

혹시 모르는 사이에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걸까.

그 사이에도 이쪽의 얼떨떨함에 아랑곳 않는 하비엘의 칭찬 릴레이가 이어졌다.

"게다가 꼼꼼하십니다. 빈틈이 없고, 매번 착실하게 뒷일을 준비하기도 하지요. 또한, 좀처럼 자신이 정한 길에서 어긋나지 않는 면도 지니셨습니다."

"으음, 그래?"

"예. 그래서 보고 있자면 참 정감이 가기도 합니다. 특히 시공을 진행하느라 흙을 뒤집어쓴 로이드 님의 모습을 보면 뭐랄까, 거만한 귀족이라기보다는 친근하고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온달까요."

"친근? 익숙?"

"네."

"예를 들자면?"

"땅강아지요."

"...."

"부지런하게 땅을 파고, 성실하게 굴을 뚫고, 꼼꼼하게 흙을 다지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특히나 삽질을 하느라 볼품없고도 형편없이 실룩거리며 낑낑대는 뒤태를 보자면 영락없는 땅강아지가 따로 없을 지경입니다. 그뿐일까요. 뒤끝에서 나는 냄새 또한 그렇습니다."

"야, 내 냄새가 뭐 어때서."

"잘 모르시나 본데, 땅강아지는 위협을 느끼면 항문에서 지독한 악취를 지닌 갈색 액체를 뿜지요. 혹시 맡아보셨습니까? 그거, 강아지 똥과 푹 썩은 진흙을 섞은 냄새라서 로이드 님의 더러운 뒤끝과 절묘할 정도로 비슷한데 말입니다."

"...어이."

"왜 그러십니까. 욕, 해도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 그랬지."

"그래서 했습니다. 속 시원하게."

"차라리 뼈를 부러뜨리지 그랬냐."

로이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비엘이 더욱 까칠한 눈매로 한 마디 덧붙였다.

"로이드 님처럼 천하의 몹쓸 짓을 하는 분에겐 이 정도 욕설도 과분합니다."

"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더 미워할 거냐?"

"...."

"쯧, 그렇게 대놓고 가자미눈 뜨진 말고."

"더 심한 욕을 떠올리려 애써볼까요?"

"아니, 살려줘."

로이드는 엄살 섞인 웃음을 떠올렸다.

하비엘 녀석, 어쩌면 사실은 이쪽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해주고 있는 걸까.

까칠하게 폭언을 퍼붓는 반응과는 달리, 정작 녀석의 호감도는 1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뭐, 실은 나도 세라자드에게 아주 몹쓸 짓만 한 건 아니니까.'

사실이 그렇다.

자장가로 세라자드의 성장에 의도적인 족쇄를 채운 것은 맞았다.

그게 제법 치사한 수법이라는 점도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자신은 그녀에게 생명의 은인이다.

'내가 건설한 카나트 덕분에 그 여자가 안 죽게 됐으니까. 그게 어디야.'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이 세라자드에게 베푼 은혜.

그건 하비엘도, 세라자드 본인도, 나머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종류의 은혜였다.

'미래를 바꾸어 버렸으니까. 반란에 휘말려 죽어갈 운명을 바꿔 버린 셈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바뀐 미래를 아무도 모르리라.

로이드는 그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 하나 살렸으면 된 거지, 뭐.'

감사는 필요 없다.

딱히 바라지도 않는다.

족쇄를 채운 걸로 퉁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홀가분했다.

로이드가 말했다.

"어쨌건, 그래서 난 그 여자가 보일 반응을 기대하고 있어."

"반응이라니요."

"내 자장가 때문에 큰 영향을 받았잖아? 그러니까 아마도 두 가지 반응 중에 하나를 보일 거야."

"둘 중의 하나라. 어떤 겁니까."

"여기로 찾아오거나, 그냥 술탄국에 머무르거나."

"설마 로이드 님의 자장가를 잊지 못해서 여기까지 찾아올 거란 말씀인 겁니까."

"어. 그런데 아직껏 안 나타나는 걸 보면 후자를 선택할 생각인 건가 봐."

"홀로 난관을 극복하는 쪽이겠군요, 그건."

"어."

"그래서 아쉽습니까?"

"음,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세라자드가 굳이 오지 않아도 크게 아쉬운 건 없다.

자장가의 편안함을 알아 버린 채로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극복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할 테니까. 덕분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10년쯤은 시간을 더 허비하게 될 테니까.

그만큼 술탄국이 강성해지는 시기가 늦춰질 테니까.

"그러니까 딱히 아쉬울 건 없어. 뭐, 이러다가 어느 날 그 여자가 불쑥 찾아와 주면 더 좋은 거고."

"로이드 님, 설마."

"음, 벌써 감 잡았어? 똑똑하네. 그 설마가 맞아. 그 여자가 오는 날이 공병대에 새 고급 건설 장비, 아니, 인력이 추가되는 날이 되겠지?"

"...."

"그럴 거 같아서 내가 고용 계약서도 미리 만들어뒀거든. 완전 꼼꼼하게."

"...."

신이시여.

부디 바라건대 그 가련한 여자를 구원하소서.

하비엘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과 동병상련(?)의 운명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를 세라자드.

그녀가 프론테라 영지 근처까지 와 있는 거라면.

당장 도망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그렇듯 쑴펑쑴펑 치솟는 찜찜한 기분 속에서 하비엘은 그림 같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은발의 기사를 향해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나란히 걷는 사이.

어느새 저녁이 저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하비엘이 염려하던 일이 정말로 벌어지고 말았다.

 

 

"비벙-!"

프론테라 영지의 아침이 밝았다.

밤새 피어난 산자락 안개를 밀어내며 햇볕이 반짝거렸다.

그 촉촉한 공기 속에서 프론테라 백작은 어깨를 풀었다.

"후우."

힘들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은근 많이 고되다.

그런데 이미 시작한 걸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모종삽을 야무지게 쥐었다. 움직였다. 버석. 흙이 갈라졌다. 잡초 한 뿌리가 뽑혀 나왔다. 백작의 이마에서도 땀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후우우."

다리가 아프다.

이렇게 쪼그려 앉는 건 익숙하지가 않아서.

꽃밭을 다듬는 일도 낯설기만 해서.

벌써부터 무릎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결리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백작은 꿋꿋하게 참아냈다.

아내와의 약속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이런, 열이 있는데. 감기 기운이 있는 건가? 부디 내일은 무리하지 말아요.'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부인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처음엔 안 좋은 일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조금 뒤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평소보다 뜨거웠다.

미열이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부인에게 당부했더랬다.

이러다가 감기가 심해지면 큰일이라고.

하니 부디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부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안 돼요.'

'어째서 말이오?'

'꽃밭에 잡초가 많이 자랐어요. 그거 어서 뽑아야 해요.'

'하지만 꽃밭보다 건강이 중요하지 않겠소?'

'그렇지만....'

'그럼 내가 대신하리다.'

'네?'

'며칠쯤은 괜찮아요. 꽃밭 관리, 내가 하리다. 그럼 마음이 놓이겠소?'

'당신....'

저택의 꽃밭 관리는 아내의 거의 유일한 취미였다.

얼마나 그 취미를 소중히 여기냐면, 하녀나 하인들에게도 좀처럼 관리를 맡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이쪽의 말을 듣고는 얼마나 고마운 눈빛을 하던지.

얼마나 포근하게 손을 맞잡아주던지.

'그래, 약속했어. 그러니까 조금 힘들다고 대충 하면 안 돼.'

다른 이도 아닌 아내와 한 약속이다.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지켜야 한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결려도 이 잡초들, 다 뽑아야 한다.

프론테라 백작은 그렇게 다짐하며 모종삽을 놀렸다.

버석, 버서석, 조금은 어설픈 삽질과 함께 꽃밭의 잡초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동안 백작의 잡념도 사라졌다.

시큰한 무릎도.

결리는 어깨도.

차례차례 잊어갔다.

대신 보람찬 마음이 가슴을 채워갔다.

'그러고 보면 난 참으로 행복하구나.'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랬다.

영지를 억누르던 자금난이 사라졌다.

수없이 몰려든 난민도 모두 정착했다.

그렇듯 걱정이 없는 매일이었다.

게다가 두 아들은 어떠한가.

'로이드야.'

한때 골칫덩이였던 첫째를 떠올리자면 절로 흐뭇한 웃음이 나온다.

온돌이라는 걸 만들겠다고.

그걸로 돈을 벌겠다고.

그러니 경비대 일부를 부릴 수 있게 지원을 약속해달라고.

나름 진지하게 요구하던 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백작이었다.

'녀석, 그때 했던 약속을 지금까지도 지켜내고 있어.'

지원을 약속받는 대신에 술을 끊겠다고 했다.

사실 처음엔 별로 믿지 않았다.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녀석이었으니까.

한데 녀석은 그 약속을 정말로 지켰다.

지금까지도 잘 지켜내는 중이다.

어디 그것뿐일까.

너무나 성실하고 듬직하게 변한 첫째를 보자면, 어쩌면 저런 모습을 보기 위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뿌듯했다.

'그리고 줄리앙.'

둘째도 그러했다.

비록 첫째처럼 애를 먹인 건 아니었다.

언제나 착실하고 현명한 아들이었다.

다만 심약한 면모가 있었다.

그래서 내심 염려가 되었다.

험한 세상 풍파를 어찌 헤쳐갈까.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 상태에서 뭘 해먹고 살까.

간혹 떠오르는 걱정 때문에 남몰래 한숨을 쉬곤 했다.

한데 이젠 아니다.

왕도의 아카데미에서 차석으로 졸업을 했단다.

말 그대로 상급 관리로의 탄탄대로가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아비는... 정말로 행복하단다.'

두 아들이 어느덧 이렇게 잘 자라주어서.

아픈 곳 하나 없이 건강하게 커 주어서.

이제는 자신의 보호나 도움 없이도 세상을 훨훨 날아갈 날개를 갖춘 듯해서.

그 사실이 너무나 대견하고 뿌듯했다.

흐뭇하고 행복했다.

그만큼 백작의 삽질에 힘이 들어갔다.

초여름 꽃봉오리 사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거기, 멈추시오."

"무슨 일로 이곳에 왔습니까?"

정문에서 들려오는 소리.

저택 경비병들의 목소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방문자가 온 걸까.

그런데 이런 시간에 저택을 찾아올 사람이 누굴까.

정문은 백작이 있는 화단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백작은 쪼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쭉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울타리를 따라 흐드러지게 핀 초여름 장미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것이라고는 두 경비병의 뒷모습뿐.

닫힌 정문 건너편에 있을 방문자의 모습은 장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경비병의 태도로 봐선 이곳 토박이는 아닌 듯하고.'

애초에 그리 크지 않은 영지였다.

몇 다리만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얼굴이었다.

한데 경비병이 저렇게 딱딱한 태도를 보인다는 건 방문자가 피난민이거나 외지인일 거라는 소리다.

'그래도 뭐, 경비병이 알아서 하겠지.'

백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누군지도 모를 방문자를 일일이 상대하는 건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이 어떤 때인가.

아내의 소중한 화단을 가꾸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제 겨우 쪼그려 앉은 자세가 익숙해지려던 참이라, 도중에 어설프게 일어나서 자세가 바뀌면 다리가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백작은 모종삽을 계속 움직였다.

귀만 계속 열어두었다.

누군지 모를 방문자와 그를 제지한 경비병.

그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가 차근차근 들려왔다.

"여기, 프론테라 백작가 저택이 맞나요?"

방문자의 물음이 들려왔다.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문자가 젊은 여자인 듯했다.

게다가 발음이나 억양이 조금 독특했다.

아무리 봐도 이곳 지방의 말씨와 제법 다른 억양이었다.

백작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경비병의 응대가 이어졌다.

"프론테라 백작가문 저택이 맞습니다. 방문한 분은 어디서 오셨는지, 신분과 목적을 밝혀주십시오."

"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동쪽. 술탄국에서 왔습니다."

"술탄국... 말입니까?"

"네."

"그, 그럼 방문 목적은 어떻게 되시지요?"

"이 가문의 장남인 로이드 프론테라를 만나러 왔습니다."

"로이드 도련님을 말입니까?"

"네."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

프론테라 백작의 삽질은 어느새 멈추어져 있었다.

'로이드를? 저 여자가? 술탄국에서?'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탄국에서 온 여자라니.

로이드를 찾아왔다니.

뭔가 평범한 일이 아닐 듯했다.

더는 방관할 수 없을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 멀리서 우리 아들을 찾아왔지.'

결국, 백작이 모종삽을 놓았다.

시큰거리는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서서히 시야가 높아졌다. 트였다.

흐드러지게 핀 울타리 장미 너머로.

마침내 방문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제법 큰 키.

이국적인 술탄국 전통 복장.

더욱 이국적인 연갈색 피부.

당찬 콧대와 주눅들지 않은 표정.

흑진주처럼 빛나는 눈매로 경비병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동쪽 술탄국 출신의 세라자드라고 합니다. 방문 목적을 밝히자면, 이 저택의 장남인 로이드 프론테라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혹시, 로이드 도련님을 만나려는 이유를 밝힐 수 있습니까?"

"네."

여인, 세라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로이드를 찾아온 이유.

그걸 밝히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프론테라 백작의 귀도 한껏 쫑긋거렸다.

마침내, 세라자드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 남자 없이 잠들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203화. 자장가라는 이름의 감옥 (3)

 

 

"후우."

이곳은 프론테라 저택의 응접실.

단정한 실내에 깊은 한숨이 흘렀다.

하지만 그렇게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딱히 가슴이 가벼워지진 않았다.

그 사실을 절감하며 프론테라 백작은 옆을 돌아보았다.

부인을 향해 눈짓으로 물었다.

'로이드는?'

'불렀어요.'

부인이 눈짓으로 대답했다.

이윽고 서로를 바라보던 부부의 시선이 나란히 정면으로 향했다.

응접실 테이블 너머.

의연한 자세로 앉은 이국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후우."

그 모습을 보자니 또 한숨이 흘러나오는 백작이었다.

로이드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이기에.

술탄국에서 어떤 일을 겪은 것이기에.

저 여자의 입에서 차마 표현하기도 민망한 '그런 말'이 나왔단 말인가.

그래서였다.

백작은 진심으로 바랐다.

로이드가 빨리 좀 와주었으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좀 빨리 바꾸어 주었으면.

다행히(?) 백작의 그런 바람은 금방 현실로 이루어졌다.

 

똑똑똑.

 

누군가가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이윽고 로이드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 찾으셨다구요?"

"어서 들어오렴."

백작이 벌떡 일어났다.

손수 응접실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면서 아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어?"

응접실로 들어서던 로이드가 멈칫했다.

이국의 여인을 발견한 로이드.

눈매가 살짝 동그래졌다.

놀란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계속 로이드의 반응을 살피던 백작은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아들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미소와 작은 혼잣말을.

"결국 이 선택인 거네."

"...."

결국?

이 선택?

아들의 저 말은 무슨 뜻일까.

백작은 조금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로이드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너도 앉거라."

"예."

로이드가 소파에 앉았다.

한데 그 앉은 자리가 묘했다.

자신들의 옆도 아니고, 여인의 옆도 아니었다.

양쪽 모두와 90도를 이루는 자리에 앉아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여자의 일 때문에 절 부르신 거로군요?"

"그렇... 단다."

의외로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아들.

그 모습에 백작은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아들이 술탄국에서 사고를 쳤다거나 하진 않은 듯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하기에 일러.'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도 아는 게 없다.

그러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여나 아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백작은 명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으음.... 로이드야, 이 아비가 묻는 말에 솔직히 답해줄 수 있겠니?"

"예. 물론입니다."

"그럼, 넌 이 숙녀분과 구면인 것이더냐?"

"네. 아는 사이입니다."

"하면... 혹시, 으음, 이분께 폐를 끼친 일이 있었니?"

"폐를 끼친 일이라. 글쎄요."

로이드는 피식 웃어 버렸다.

아침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불려 온 그였다.

그럼에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세라자드가 마침내 이곳까지 찾아와줘서.

미래의 소드마스터를 이렇게 붙잡아둘 수 있게 되어서.

알차게 익은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 같은 흐뭇함이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금은 의아한 부분이 있긴 했다.

"이분이 제가 끼친 폐를 어떻게 말하던가요?"

대체 세라자드가 백작 부부에게 무슨 말을 한 걸까.

어떤 소리를 했길래 아까부터 백작 부부가 저리도 전전긍긍인 걸까.

'분명 뭔가 이상한 소릴 했을 거야.'

차분하게 앉아 있는 세라자드.

그와 상반되게 안절부절못하는 백작 부부.

뭔가 상당히 궁금하고 걱정되는 일이 있는데, 그걸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였다.

마치 안심하라는 듯.

나쁜 일이 없었다고 말씀드리듯.

로이드가 착실한 아들의 미소를 그려냈다.

백작 부부를 향해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오해가 생긴 상황인 것 같은데, 제가 듣고 대답을 드릴게요."

"으음."

이쪽의 말을 들은 백작 부부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난감한 눈짓을 교환했다.

부인이 백작에게 눈치를 주었다.

백작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거, 분명 내키지 않는 총대를 메는 사람 같은 표정인데.

그렇게 로이드가 생각하는 순간.

백작이 조금은 붉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으음, 이걸 대체 어찌 말해야 할지... 그게 말이다, 으음, 이 숙녀분이 말하길...."

백작의 얼굴이 아예 새빨개졌다.

"그게, 으음, 네가 없으면 잠들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셨다는구나."

말했다.

말해 버리고 말았다.

'어이구, 무슨 이런 민망하기 짝이 없는.'

백작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찻잔을 들었다.

그런 그의 손을 부인이 꼭 잡아주며 잘했다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백작의 말을 들은 로이드는....

"아, 그거 사실입니다."

"...푸읍!"

백작이 찻물을 뿜어냈다.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그대로입니다. 이분, 제가 없으면 제대로 잠들 수 없는 몸이 된 건 맞아요. 물론 디테일한 부분을 모조리 건너뛰고 말하는 바람에 의미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죠."

"쿨럭! 코, 콜록! 의미? 그게 무슨 뜻이니?"

찻물을 뿜어내다가 사레가 들린 백작이 기침을 연발하며 물었다.

로이드가 손수건을 백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제 자장가를 뜻하는 겁니다. 아시죠? 제가 아스라한 경에게 읊어주는 거."

"...."

알고 있다.

자장가.

백작 부부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사실은 하비엘이 남모를 지독한 불면증을 겪었다는 것도.

그것이 어느 날부터인가 로이드가 읊어주는 방대한 지식의 낭독에 의해 치료되었다는 신통방통한 이야기도.

오직 백작 부부만이 알고서 쉬쉬하던 사실이었다.

간신히 기침을 가라앉힌 백작이 떠듬떠듬, 세라자드를 가리켰다.

"그럼, 저 숙녀분도 설마?"

"네. 아스라한 경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자장가를 불러줬단 거니? 아스라한 경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 덕분에 숙면을 이룰 수 있게 되었지요. 뭐, 그러다가 제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다시 불면증이 도졌던 거겠지만 말입니다. 맞죠?"

로이드의 마지막 물음이 세라자드를 향했다.

그동안 침착하게 앉아 있던 세라자드.

그녀가 흑진주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제가 없으면 잠을 못 이루는 몸이 되었다는 그 묘하기 짝이 없는 느낌의 발언, 일부러 한 거겠군요."

"당연하지요."

세라자드가 다시 고개를 끄덕.

로이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게 그쪽을 가장 빠르게 대면할 방법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사실이었다.

이미 하루 전에 프론테라 영지에 도착했던 세라자드였다.

그녀의 계획은 지극히 단순했다.

가능한 가장 빠르게 로이드를 만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가져온 값비싼 마법 구슬에 로이드의 자장가를 녹음하는 것.

'그 목적까지 달성하고 나면 미련 없이 아힌샤로 돌아갈 생각이었어.'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오직 자장가.

그것만 얻어내면 된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성 하나를 통째로 사들일 수 있을 값비싼 마법 구슬. 약 20분가량의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마법의 장치.

그걸 발동한 채 로이드에게 자장가를 읊게 하면 되니까.

그렇게 자장가를 녹음해가면 될 테니까.

그러니까 몰래 로이드와 접촉하면 된다.

자신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신의 방문 자체가 비밀로 남을 수 있도록.

몰래 로이드에게 다가가서 녹음을 부탁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현실은 조금 달랐지.'

세라자드는 어제의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이곳에 도착한 직후부터였던가.

그녀는 자신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생겼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비엘 아스라한, 그자 때문이었어.'

은발의 기사가 로이드의 곁에 하루 온종일 붙어 다녔다.

그 서슬에 좀처럼 로이드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소드마스터의 감각을 뚫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조차 아슬아슬했다.

그래서였다.

세라자드는 로이드에게 몰래 접근해서 자장가 녹음을 따내겠다는 계획을 접었다.

대신 정면 돌파를 택했다.

밤을 지새운 고민 끝에 이른 아침에 저택을 찾아왔다. 저택 사람들의 이목을 한 방에 휘어잡을 폭탄발언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듯 로이드와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쯧, 심보 한번 고약하셔라."

로이드가 더욱 짙어진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백작 부부를 돌아보았다.

부부도 이제는 자신들이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이쪽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이드는 세라자드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게서 자장가를 원하는 거겠지요?"

"네."

"설마 날 술탄국으로 데려갈 생각은 아니실 거고."

"당연하죠."

세라자드가 정색했다.

품속에서 자두 크기의 투명한 구슬을 꺼냈다.

"마법 녹음 장치입니다. 약 20분가량의 소리를 담을 수 있죠."

"거기에 내 자장가를 담아가시겠다?"

"그렇습니다."

세라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더 큰 건 바라지 않습니다. 딱 20분만. 한 번의 자장가만 여기 담아주면 됩니다."

"그래요?"

"네."

"흐음, 그런데 어떡하나."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한쪽으로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얄밉게 말했다.

"세상에 공짜 없는데."

"...."

"설마 내가 공짜로 자장가를 제공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순진하시네."

"그래도 이렇게 먼 길을...."

"아니,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교통 조건이야 그쪽 사정이고."

"...."

세라자드는 할 말을 잃었다.

로이드의 대꾸가 맞는 말이긴 한데.

한 대쯤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한데 로이드는 더욱 태연하게 싱긋 웃으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펼쳐 보였다.

"이게 뭐죠."

"고용 계약서입니다."

"네?"

세라자드는 귀를 의심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고용 계약서라니, 이런 걸 왜 꺼내나 싶었다.

그런데 로이드의 이어지는 말은 너무나 태연하기만 했다.

"자장가, 얻고 싶죠? 그래서 편하게 숙면을 이루고 싶죠? 그래서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거죠? 그렇죠?"

"네, 맞긴 한데."

어쩐지 찜찜하다.

세라자드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록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바로 그때, 로이드가 얄밉게 미소 지었다.

"그럼 자장가에 걸맞은 값을 치러야죠. 그러니까 자아, 여기에 서명."

"...."

설마.

세라자드는 철렁하는 기분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고용 계약서의 내용을 살폈다.

이내 그녀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공병대 입대? 프론테라 영지의 각종 시공에 참여하여 규정을 준수하며 현장의 노동에 임한다? 설마, 이걸 저한테 하란 건가요?"

"예."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

로이드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웃었다.

"딱 5년만 일하시죠."

"...."

"그럼 자장가, 기꺼이 녹음해드리겠습니다."

"...."

무슨 이런.

세라자드의 어금니가 굳게 다물렸다.

로이드의 양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압니다, 그쪽이 어떤 신분인지.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서 안 어울리는 일을 강요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그거, 대단히 잘못된 생각일 텐데요."

"잘못된 생각이라니요."

"설마 공병대가 하는 삽질과 곡괭이질을 천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

무심결에 대답하려던 세라자드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딱히 염두에 둔 적도 없는 문젠데.

돌이켜보니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던 거, 맞았다.

계약서를 통해 본 공병대.

땅을 파고 공사를 하는 부대라고 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거기 소속되라고 하는 건?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삽질, 곡괭이질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술탄국의 공주인 자신에게 말이다.

'그거, 말도 안 되는 건데.'

그런 일을 자신에게 제안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모욕이며 무례인데.

그런데 그걸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바로 로이드의 오묘한 말투 때문이었다.

"생각해보시죠. 삽질이 천한 겁니까? 곡괭이질이 못난 자만 하는 일인 겁니까? 그렇게 몸으로 하는 노동이 전부 별것 아닌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

"전부 우리 삶을 떠받치는 일들입니다. 삽질이 없으면 건물도 없습니다. 반듯한 길도, 강을 건널 다리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그쪽이 지금 지닌 검, 보석, 갖가지 도구까지, 모두 곡괭이질과 삽질로 땅에서 파낸 광물로 만든 것들입니다."

"...."

"그런데 그걸 천하게 여기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당연히...."

"아닌 거지요?"

"...네."

결국, 세라자드는 로이드의 말에 수긍하고 말았다.

듣고 보니 백번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로이드의 계약서에 서명할 생각까지 하진 않았다.

그녀가 로이드를 향해 말했다.

"그럼 돈은 어떨까요."

"네?"

"고용 계약서에 서명하는 대신 돈을 드리겠습니다. 충분히 많은 돈을요. 어떤가요?"

"필요 없는데요."

"...."

"이제 우리 영지, 돈은 넉넉해서. 술탄이 제대로 쏘셨거든요. 비단이랑 도자기랑."

"...."

"그러니까 고용 계약서, 서명하시죠."

"...."

세라자드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결국, 남은 선택은 둘 중의 하나였다.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 불면의 나날을 이어가느냐.

자존심을 다 버리며 5년 노동 계약서에 서명하느냐.

그러나 어느 쪽도 선뜻 선택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망설였다.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네, 좋습니다. 즉석에서 정하기엔 어려운 선택이겠지요. 그럼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요?"

"네. 며칠간 손님으로 머무르며 고민해보시죠."

"...."

그거라면 환영이다.

여기서 당장 결정을 강요하는 거, 너무 가혹하다 느껴졌으니까.

세라자드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였다.

심사숙고의 나날이 그녀 앞에 펼쳐졌다.

프론테라 저택에 머무르는 내내 온종일 고민에 휩싸인 채로 지냈다.

제법 정갈하게 제공되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귀빈용 깔끔한 숙소의 쿠션에 몸을 누이고서도.

그러고도 결심이 서질 않아 온종일 산책을 하면서도.

시종일관 그녀의 미간 사이 주름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프론테라 저택에 머문 지 닷새째.

가슴이 답답해진 세라자드는 평소보다 더 멀리 산책을 나갔다.

서쪽으로, 영지의 외곽으로, 경계를 넘어, 숲 속 오솔길을 하염없이 한숨 푹푹 내쉬며 걷다가.

뜻하지 않은 인물과 마주쳤다.

"...어?"

프론테라 백작가의 둘째 아들.

고향으로 돌아오던 줄리앙 프론테라와의 예정에 없던 조우였다.

204화. 뜻밖의 조우 (1)

 

 

아주 간혹,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꿈속임에도 너무나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생생한 존재와 맞닥뜨리는 순간이 그러할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 네가 로이드 프론테라인가?

"...."

로이드는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불타는 에베레스트 산이 자신에게 말을 걸면 이런 기분이 들까.

눈앞에 거대한 화염의 거인이 서 있었다.

온몸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두르고서, 구름조차 뚫을 높이의 저 아득한 곳에서 두 눈을 활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이런 꿈이 다 있지.'

그래도 일단 꿈이니까.

최소한 저 화염 거인에게 죽을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한 로이드는 어깨의 힘을 풀었다.

"네, 제가 로이드 맞는데요."

- 거짓말.

"...."

- 김수호, 내가 널 모를 줄 알았나?

"어, 그건."

순간적으로 대답이 궁해졌다.

저 화염 거인, 혹시 자신의 양심이 아닐까.

그래서 진짜 로이드를 밀어내고 그의 행세를 하는 자신의 죄책감을 푹푹 찔러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화염의 거인이 말했다.

- 나는 영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자이자 업화의 지배자. 열아홉 연옥의 감시자. 지옥의 왕 헬카로스.

천둥이 몰아치듯.

혹은 산사태가 이쪽을 덮쳐오듯.

지옥왕의 온 세상을 쩌렁쩌렁 뒤흔드는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 그리고 네 손에 쓰러진 지옥의 기사 지오렉시우스의 주인이기도 하지.

"아, 그 헬나이트 말입니까?

- 그렇다.

 

쿠구구구...!

 

지옥의 왕, 헬카로스가 허리를 숙여 왔다.

마치 산봉우리가 이쪽을 굽어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로이드는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애써 펼치며 고개를 들었다.

헬카로스를 마주 올려보았다.

"혹시 그래서 제 꿈에 찾아온 겁니까?"

- 그래, 맞다.

"설마 보상을 요구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거, 엄연히 쌍방과실에 정당방위였는데."

- 쌍방... 과실? 정당방위?

"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

더욱 또랑또랑하게 대꾸했다.

"그쪽 분의 부하나 저나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상황이었잖습니까. 그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해쳤다고 해서 살아남은 쪽에 무조건적인 책임을 부과할 수는 없겠지요. 안 그렇겠습니까?

- 넌 내가 고작 책임 따위를 논하고자 널 찾아온 줄 아는 건가.

"그럼 왜 찾아오셨습니까?"

로이드가 물었다.

지옥의 왕, 헬카로스가 입가에 화염 섞인 헛웃음을 투화학, 흘렸다.

- 지옥에 어울리는 자의 자질을 살피러 왔지.

"예?"

저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옥왕의 말이 이어졌다.

- 네가 지오렉시우스를 상대하던 순간부터 쭉 관심을 두고 지켜봤다. 한데 네게서 사뭇 남다른 구석이 엿보이더군.

"남다른 구석이라 하심은?"

- 쪼잔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끝이 더러웠다. 저렇게 치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한밤중에 피를 빨다가 분노한 인간을 피해 침대 아래로 숨어 버리는 모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

저기요, 왜 갑자기 생사람 뼈를 때리고 그러십니까.

로이드는 사뭇 차오르는 비애감을 느꼈다.

지옥왕의 칭찬을 빙자한 디스가 계속 이어졌다.

- 게다가 치밀했다. 도망칠 구석을 반드시 만들어두는 쥐새끼처럼. 야비했다. 우리 지옥의 악마들에게 모범으로 삼으라는 말을 해주고플 만큼. 그뿐일까. 그 노래. 듣는 순간 온몸에 힘이 탁 풀리며 귓구멍을 지워 버리고 싶게 만드는 그 노래. 지옥의 왕으로 살아온 나날에 대한 회의감마저 만끽하게 하던 그 엄청난 노래 말이다.

"제 노래가 어때서...."

- 지옥에 몇만 년쯤, 매일 24시간 울려 퍼지게 하고 싶은 노래였다.

"왜요?"

- 그래야 지옥에 떨어진 모든 영혼이 한층 더 커진 괴로움에 몸부림칠 테니까.

"저기, 설마 절 지옥 방송 라이브 스피커로 쓰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 왜 아닐까.

"...."

- 실로 탐나는 노래 실력이며 목청이었다. 게다가 너라면 그 노래에 항의하는 악마들마저 온갖 수단으로 마음껏 농락하고 희롱하는 일이 가능하겠지. 그러니 어떤가. 로이드, 아니, 김수호여. 나를 믿고 지옥에서 그 재능을 떨쳐볼 생각이 없는가?

없는가...!

는가...!

가...!

지옥왕의 천둥 같은 소리가 꿈속의 모든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큰 소리가 아니었다.

영혼의 밑바닥 머리채를 붙잡고 마구잡이로 뒤흔드는 종류의 파장이었다.

그 파장의 격류 앞에 로이드는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

 

째재잭, 짹짹!

 

초여름 아침을 지저귀는 새 소리.

침실 한쪽 창가 하얀 커튼이 살랑살랑.

그 사이로 스며든 햇볕이 볼을 간질이고 있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로이드는 생각했다.

'개꿈이네.'

지옥왕은 개뿔.

뭐?

내 노래를 지옥 방송으로 쓰겠다고?

그러면 지옥에 떨어진 모든 악한 영혼들이 더욱 알차게 괴로워하며 몸부림칠 거라고?

'그 지옥왕 참 알뜰한 양반이네.'

피식, 방금까지 꾸던 꿈을 떠올리자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생생해서 어쩐지 더욱 찜찜하게 느껴지는 꿈이었다.

'개꿈 주제에 쓸데없이 생생해가지고.'

로이드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사실은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었다.

나마란에서 지옥의 기사,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 경을 쓰러뜨린 직후였던가.

당시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를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분명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더랬다.

 

[당신이 보여준 이 엄청난 위업 앞에 지옥의 왕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휘하 군단장을 잃은 지옥의 지배자가 당신의 재능과 기지, 발전 가능성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라고.

"...."

쯧.

생각하지 말자.

그냥 개꿈일 뿐이다.

설령 지옥의 왕이 이쪽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한들, 설마 노래 솜씨 때문에 영입 의사를 불태우겠는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설마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로이드는 일부러 크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커흠! 흠!"

곧, 침실 밖에서 반응이 왔다.

"로이드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어. 들어와."

평범한 일상의 아침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목소리.

하녀 에밀리가 배시시 웃으며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안 물으셔도 돼요. 오늘도 별로 안 기다렸어요."

"어, 딱히 물어볼 생각 없었다고 말하면 삐치겠지?"

"도련님 하시는 거 봐서요."

"알았어. 격하게 물어볼 생각이었어."

"헤헷. 오늘 수프 맛있어요. 드세요."

"응, 고마워."

로이드는 스푼을 들었다.

지옥은 개뿔.

이런 평화로운 일상만 평생 즐길 테다.

그렇게 다짐하며 로이드는 수프를 맛나게 먹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이제 닷새쯤 됐나.'

세라자드.

자장가를 얻으러 사막을 건너온 술탄의 딸.

그녀에게 자장가 녹음의 대가로 공병대 입대 조건을 내건 지 벌써 닷새가 지난 터였다.

'슬슬 고민을 끝낼 때가 됐을 텐데.'

지난 닷새 동안 세라자드는 종일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느낄 수 있었다.

조만간 그녀가 결정을 내리리라고.

또한, 그녀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게 자신에게 손해가 되진 않을 거라고.

'당연하지. 공병대에 입대하면 소드마스터의 재능을 지닌 사람을 곁에 묶어두는 셈이 되는 거고. 만약 거절하고 술탄국으로 돌아간들 소드마스터가 되는 시기가 많이 늦춰질 거니까.'

자신한텐 어느 쪽도 손해가 아니다.

'그럼 어떤 대답을 가지고 나올까.'

딱 먹기 좋게 식은 수프.

남은 수프를 원샷하며 로이드는 호기심 반 기대감 반의 감정을 느꼈다.

 

 

"후우."

지금 심정을 말하자면?

딱 막막함 반 난처함 반이다.

세라자드는 그렇게 자신의 기분을 정의했다.

더욱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째재잭, 째잭.

 

숲 속 오솔길 나무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이 보였다.

그 사이로 초여름의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도 엿보였다.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타국에서 5년이나 머물러야 한다니.'

그녀는 막막함을 느꼈다.

자장가 하나를 얻어가자고 그런 짓까지 해야 할까.

자신의 인생에서 5년이라는 시간까지 투자해야 하는 걸까.

게다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되면,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난리가 나겠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누군가.

술탄의 딸이다. 일국의 공주다.

물론 왕비가 아닌 후궁의 딸이긴 하지만.

수십 명 딸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술탄국의 공주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난처했다.

'멋대로 아힌샤를 떠나왔는데 남의 나라 공병대에 5년이나 몸을 담는다면 술탄께서는... 후우, 예상이 안 돼.'

난리가 나는 건 확실할 텐데.

어느 정도의 난리가 날지 감히 예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난처했다.

'하지만 난 소드마스터가 되어야 해.'

그것만이 가장 확실하게 술탄께 인정받을 길이니까.

일단 소드마스터의 경지에만 오른다면.

모든 이야기가 달라질 테니까.

'그걸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해볼 만도 하고.'

자장가가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다시 지옥 같은 불면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그만큼 검술 훈련에 집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장이 더뎌질 것이다.

소드마스터를 향한 길 또한 멀어질 것이다.

'아버지의 진노를 감수하면서 5년이란 시간을 투자하느냐, 아니면 안전하게 아힌샤로 돌아가 스스로 불면증을 감당하느냐, 그 사이의 선택인 건가.'

세라자드는 다시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저 건너편 수풀 너머.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것과 비슷한 한숨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

누굴까.

여긴 프론테라 영지에서도 제법 떨어진 외곽인데.

민가는 물론이고 사냥꾼도 잘 들어오지 않는 깊은 숲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홀로 고민을 돌아보기에 좋을 듯하여 산책을 나온 곳인데.

"...."

세라자드는 그쪽을 향해 걸었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숨 소리를 낸 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아이? 아니,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눈길이 향하는 수풀 건너.

그곳에 앳된 얼굴의 '어른아이'가 있었다.

키는 겨우 160센티가 될까 싶었다.

곱슬곱슬한 오렌지색 머리칼.

그 아래 주근깨 박힌 볼은 동글동글.

유난히 영리해 보이는 눈매마저 토끼처럼 보드라운 인상이었다.

작은 키에 어울리는 아담한 체구가 그런 순한 느낌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누구지?'

세라자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인적이 없는 깊은 숲 속이었다.

한데 전투 능력은 고사하고 주먹싸움도 엄두를 못 낼 듯한 저런 소년이라니.

결코 어울리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년의 주위에는 호화로운 마차와 일행의 짐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흠, 무슨 일이지.'

일단 위험해 보이는 상대는 아니었다.

소년의 자세와 동작에서도.

검술을 익힌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줄리앙 님!"

저쪽 반대편에서 어떤 사내가 소년을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가빠진 숨을 고르며 소년의 앞에 멈춰 섰다.

"후우, 훅.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뇨. 전 괜찮아요. 바위는요?"

"그게, 오늘 중으론 힘들 것 같습니다."

사내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줄리앙이라 불린 소년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가요. 그거 큰일이네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치워보려고 애를 쓰고는 있긴 한데...."

"그럼 저도 같이 거들까요?"

"예? 아뇨!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이런 일에 줄리앙 님의 조력까지 바라겠습니까."

"으음, 전 괜찮아요. 그래 봤자 같이 소매를 걷고서 진흙을 치우고 바위를 밀어내는 일인 건데요."

"그, 그래서 저희가 하는 겁니다."

"그런가요...."

"예."

사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앙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괜히 죄송하네요. 제가 아카데미 차석 졸업생만 아니었어도 왕실로부터 이 마차를 하사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이 마차만 아니면 여기서부턴 그냥 걸어서 영지로 가도 될 텐데. 여러분께서 고생하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어휴,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사내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명예로운 차석 졸업생이신 겁니다. 그런 분을 모시는 저희도 명예로운 일을 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중이고 말입니다. 게다가 이 마차, 말씀대로 무려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귀한 물건이잖습니까. 차석 졸업생에게 내리는 명예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마차일 뿐인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흰 진짜로 괜찮습니다. 예로부터 왕가로부터 이 마차를 하사받은 졸업생은 반드시 이 마차를 타고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영예로운 전통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와서 길이 무너져 있을 줄은...."

"길을 무너뜨린 게 줄리앙 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무너진 산길이 제법 질척거리고 길을 가로막은 바위가 생각보다 좀 크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오늘 하루만 좀 힘쓰면 충분히 치울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차라리 영지에 사람을 보내서 상황을 알리는 건 어떨까요? 거리도 멀지 않은데...."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으십니다. 저희 체면도 살펴주십시오. 저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저희가 줄리앙 님을 수행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럼 제가 좀 거드는 건...."

"편히 기다리고 계십시오. 죄송하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사내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 사내의 온몸은 진흙투성이였다.

그럼에도 줄리앙이라는 소년을 보좌하는 일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 보였다.

세라자드에겐 그런 소년과 사내의 모습이 제법 인상 깊게 느껴졌다.

"...."

줄리앙이라.

수풀 너머에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떠올랐다.

프론테라 백작 저택에 머물러 온 지난 며칠 동안이었던가.

하인과 하녀들이 즐겁게 나누던 이야기를 몇 차례인가 어깨너머로 들었다.

이 집안에 로이드의 동생, 둘째 아들이 있다고 했다.

제법 영민하다 했다.

왕도 아카데미에서 무려 차석 졸업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던가.

그래서 며칠 내로 영지에 금의환향할 거라고도 했다.

'저 소년, 아니, 남자가 그 둘째 아들인 건가.'

생각했던 이미지보다 훨씬 앳되다.

그리고 제법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는 듯하다.

'확실히 이틀 전에 큰 소나기가 내리긴 했지.'

간만에 제대로 퍼붓던 빗줄기였다.

한데 그 비 때문에 산길 일부가 내려앉아 끊긴 듯했다.

그래서 왕실에서 하사한 마차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리라.

'이거, 나한테 이득이 될지도.'

세라자드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무너진 산길.

치우기 어려운 커다란 바위.

그 때문에 발이 묶인 줄리앙 일행.

한데 만약 자신이 줄리앙을 돕는다면?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에게 좀 더 편하게 자장가 녹음을 요구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동생에게 은혜를 베푼 상황이 되는 거니까.'

협상에서 유리한 카드를 쥐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건, 명백한 기회다.

'좋아. 돕자.'

세라자드는 계산을 마쳤다.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놓고 은신을 풀고 수풀 너머로 다가갔다.

줄리앙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엄마얏!"

"...."

"까, 깜짝 놀랐잖아요. 누구세요?"

이쪽이 너무 스르륵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걸었던 탓일까.

줄리앙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을 보며 세라자드는 저도 모르게 문득, 생각했다.

이 남자, 어쩐지 뽀송뽀송한 아기 토끼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