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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음 날이 밝았다.

그동안 황제는 두어 번 눈을 떴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라키엘도 간밤에 조금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꿀맛 휴식도 아침까지였다.

"전하?"

"...으음."

"전하아?"

"...으으으음."

귓가를 숑숑 찔러오는 시종장의 목소리. 라키엘은 눈살을 찡그렸다. 설마 벌써 아침인가. 잠도 얼마 못 잔 것 같은데. 밤이 깊도록 황제의 상태를 살피다가 새벽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눈을 붙인 듯한데.

'으으, 피곤하다.'

하지만 황제를 살펴봐야 한다. 라키엘은 눈두덩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후우. 무슨 일이지?"

곤란한 표정의 시종장이 보였다.

"...아, 어제 전하께서 분부하셨던 일 때문에 말입니다."

"내가 분부했던 일?"

"예, 전하."

"...."

뭐가 있었더라.

라키엘은 뇌세포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졸음을 털어냈다. 흩어지는 졸음의 끄트머리에서 달아나던 기억의 꼬리를 붙잡았다.

"...아, 황궁 내의 입단속은 잘했나?"

"물론입니다, 전하."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는 폐하께서 살짝 고약한 감기를 앓게 되셨노라고, 하여 휴식을 취하고 계신 것이라 일러두었습니다."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하와 저, 그리고 어제 이 자리에 있었던 이들이 전부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한데 지금 따로 보고할 게 있는 건가? 아까부터 표정이 조금 어두운 듯한데."

"아, 그것이...."

"말하도록."

비로소 시종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은, 아침 일찍부터 앙부아즈 왕국의 대사가 폐하를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앙부아즈의 대사가?"

"예, 전하."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앙부아즈 왕국. 모를 리가 없는 이름이다. 아니, 엄청나게 중요한 이름이다.

'150년 남짓한 짧은 역사를 자랑하는 왕국. 떠오르는 신흥 강국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 그리고 몇 년 뒤에는....'

그 돌풍이 성장하여 태풍이 된다. 군국주의적 확장의 기치를 내걸게 된다. 대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이 마젠타노 황가를 휩쓴다. 천 년 역사의 제국이 앙부아즈 왕조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그것이 원작 소설, 마검황의 주요 배경 스토리였다.

"...한데, 앙부아즈의 외교 대사가 왜 폐하를?"

라키엘은 원작 소설의 내용을 곱씹으며 물었다. 시종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사실은... 닷새 전에 폐하께서 직접 앙부아즈의 대사를 불러들이셨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예, 전하."

"무슨 일로?"

"크레모 항구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설마."

"추측하셨습니까?"

"으음."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크레모 항구의 경매장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놓고 나와 경쟁했던 거상 귀네스, 그자의 모국이 앙부아즈 왕국이었지. 게다가 그 거상이라는 작자, 사들인 미노타우로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어. 그 결과 난리가 났었고. 그런 주제에 아무런 배상도 없이 꽁무니를 빼고 혼자 본국으로 도망쳤지. 혹시 폐하께서는 그 책임을 물으려 하셨던 건가?"

"예. 정확하십니다, 전하."

...역시.

시종장의 말이 이어졌다.

"폐하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진노하셨습니다. 하여 책임을 따져 묻기 위하여 앙부아즈의 대사를 공식적으로 불러들이셨지요. 그렇게 잡았던 회담 날짜가 바로...."

"오늘이로군."

"...예."

시종장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라키엘도 혀를 찼다.

"쯧쯧."

어째서 시종장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는지 알겠다.

"들어보니 상황이 난감하군. 기껏 대사를 불러들였는데, 폐하께서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이시니."

"예, 전하. 하여 대책을 여쭙고 싶습니다."

"대책이라...."

"아무래도 대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냥 돌려보냄이 무난할 듯하긴 합니다."

"그냥 돌려보내?"

"예, 전하. 황궁에 두루 알린 그대로, 폐하께서 감기 때문에 요양하고 계시노라 둘러댐이 어떨까요."

시종장이 물어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 대뇌피질을 맹렬히 굴려댔다.

'항의를 하려고 기껏 불러들인 대사를 그냥 돌려보낸다고? 그건 좀 아까운데. 게다가 감기 때문에 국가 간의 공식적인 회담을 취소한다면... 명분이 너무 약해. 핑계로도 한참 부족해. 저쪽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거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냄새를 맡을 것이다.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돼.'

잠재적인 적국이다. 몇 년 내로 대전쟁을 치를 수도 있는 상대다. 한데 벌써부터 약점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저쪽, 앙부아즈 왕조에 책임이 있는 상태니까. 한데 오늘 그냥 돌려보내면? 같은 명분으로는 다시는 못 불러. 당연히 책임을 따져 묻는 것도 불가능하게 될 거고.'

따지려고 불렀다가 그냥 돌려보냈는데, 다시 부르자면? 모양새가 영 안 나오게 된다. 부르기도 좀 뻘쭘해진다. 지금 앙부아즈의 대사를 돌려보내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키엘은 맹렬히 고민했다.

한편으로 열심히 궁리했다.

자신이 읽은 원작 마검황. 그 속의 스토리 전개. 벌어졌던 사건들. 인물 간의 관계. 그 모든 기억을 꺼내어 늘어놓았다. 정교하고도 거대한 퍼즐로 쌓아보았다.

그러자 서서히 길이 보였다. 그럴듯한 각이 나왔다. 큰 그림이 그려졌다. 지금 상황을 절묘하게 활용할 계획이 순식간에 차곡차곡 세워졌다. 그 결론은 바로....

"그 앙부아즈의 외교 대사, 내가 만나지."

"...예?"

"내가 폐하 대신 회담을 진행하겠다고."

이쪽의 선언이 뜻밖이었던 걸까. 경악하는 기색의 시종장을 향해 라키엘은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내심 계산을 마무리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의 이 상황은 하늘이 내려준 절호의 찬스일 것이라고. 잘만 하면 제국을 휩쓸게 될 대전쟁, 그 자체를 원천봉쇄할 수 있을 거라고.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거거든.'

자신이 알고 있는 원작의 이야기.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무기들. 대략,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88화. 앙부아즈를 홀려라 (2)

나는 외교를 모른다. 당연히 해본 적도 없다. 관련 교육을 받아본 적은 더더욱 없다. 내게 외교란 그저 거창하고 막연할 뿐인 개념이다.

'간접적인 경험이 전부니까.'

뉴스에서 각국의 정상들이 모여 회담을 가졌다는 둥. 무역 협정을 맺고 블라블라 했다는 둥.

그게 전부였다.

간혹 북한이 동해에 미사일을 쐈다는 속보를 보며 치킨을 뜯은 기억 정도가 다였다. 혹은 삼국지나 문맹 게임에서 외교로 깽판을 쳐본 게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 앙부아즈의 대사와 외교적 협상을 벌이는 건? 당연히 자살행위다.

'전문가한테 깝치면... 큰일 나지.'

그게 세상의 진리다.

전문가는 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함부로 덤비다간 순식간에 영혼까지 탈탈 털린다. 만약 입장을 바꿔서, 앙부아즈의 대사가 침술학 배틀을 벌이자며 침을 들고 후후 불어대면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그것과 똑같은 이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 나는 외교의 외 자도 몰라. 이제부터 만날 앙부아즈 대사와도 외교적인 술책과 어법으로 맞서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닐 거고.'

이쪽만의 방법으로 무장해야 한다. 같은 레벨에서 외교적 협상을 벌여선 안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대사를 내 전문 영역으로 끌어들여야지.'

기나긴 복도의 끝자락.

마침내 도착한 회담장.

그 앞에서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 앙부아즈의 대사를 만나서 취할 태도와 전략을 정했다. 자신이 오늘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다시금 되새겼다.

'대전쟁을 예방하는 거야.'

마젠타노 황가의 평화를 위하여. 이 몸의 안락한 황족 라이프와 만수르급 풍족한 슈퍼리치 백수 노후를 위하여.

야물딱진 다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회담장으로 성큼 들어섰다. 다만 외교적 가면을 쓰진 않았다. 대신 스스로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걸었다.

'여긴 회담장이 아니다. 여긴 진료실이다. 아침 첫 환자가 기다리고 있고. 나는 출근길에 전철을 놓쳐서 1분 늦은 거야. 그래서 아주 살짝 지각을 한 거지.'

...컨셉 시뮬레이션 완료. 덕분에 익숙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아마도 앙부아즈의 대사라는 뱅자맹 백작이겠지.

대사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쪽의 인사가 조금 뜻밖이었던 걸까. 아니면, 회담장으로 들어온 이가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 걸까.

'아마도 후자겠지.'

대사의 당황한 표정은 0.5초 만에 사라졌다.

"오, 이런. 앙부아즈의 대사 뱅자맹이 마젠타노의 황태자를 뵙습니다."

능숙하게 예를 올리는 대사. 표정 수습 속도가 5G 이상이었다. 외교판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자다웠다.

라키엘은 대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아까 잡아둔(?) 컨셉 시뮬레이션을 유지했다. 환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대사에게 던졌다.

"음, 혹시 요즘 잠이 모자라십니까?"

"...예?"

이쪽의 질문이 뜬금포였던 까닭일까. 대사의 미소에 또다시 쩌적, 희미한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라키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을 멈추면 안 된다. 대사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면 안 된다. 외교라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끌려가는 순간, 회담의 추가 저쪽으로 기울여질 것이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눈가에 기미가 앉아 있는 게 보여서 말입니다. 눈꼬리에 힘이 없고, 손끝에 멈추지 않는 미미한 떨림이 있으며, 호흡에서 살짝 탁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요. 혹시 음주와 흡연을 즐기는 편입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무거울 겁니다. 목 주위의 승모근이 상습적으로 결리고, 뒷골이 당기면서 두통이 올 때가 많지요?"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게 지금 이 자리와 무슨 상관이신지."

"상관이 있지요."

라키엘이 방긋 웃었다.

"대사께서는 앙부아즈 왕국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본 제국의 황도에 파견된 소중하고 귀한 손님입니다. 말 그대로 앙부아즈 왕가를 대리하는 분이시지요. 한데 그렇듯 소중하고 귀한 손님의 건강에 이상의 징후가 보이는데, 그걸 제가 가만히 넘겨야겠습니까? 안 되지요, 안 돼. 절대로 아니 될 일입니다."

"그게 무슨...."

"그만큼 대사의 건강이 제게도, 마젠타노 황가에게도 중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잠깐, 손목을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어오는 황태자. 그 물음에 앙부아즈 대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황태자가 뭘 원하는지도 파악이 안 됐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머릿속에 백만 개쯤 떠오르는 의문.

사실 황태자가 처음 자신의 기미나 눈꼬리 등등을 이야기할 때는 조금 특이한 형태로 안부를 묻는 건 줄 알았다. 흔한 인사치레. 요즘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자식들은 잘 크고 있으냐고. 저번에 샀다던 집값은 좀 올랐느냐고.

그런 체면치레 인사를 약간 특이하게 던지는 것이리라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더랬다. 하여 그 인사치레에 통상적으로 응했다. 경계심 없이, 그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한데, 그게 실수였다!

단순한 인사치레인 줄 알고 말을 받아줬더니. 그걸 아예 물고 늘어지며 이쪽을 괴상한 화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통상적인 인사가 아니었던 건가? 뭐지. 진짜로 뭐지. 원하는 게 뭘까.'

대사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곧 나름의 결론이 나왔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 건강은 앙부아즈에서 함께 파견된 의사와 수행인원이 관리해주고 있으니, 황태자의 고마운 염려와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사는 손목을 내어주지 않고 움츠렸다. 인사치레도 아닌 이 괴상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자신에게 익숙한 외교적 회담을 시작하고 싶었다.

'오늘, 황제가 우리에게 책임을 따져 묻기 위해 날 불러들였으니까.'

사실 대사는 오늘 회담이 추진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본국, 앙부아즈의 유명한 거상 귀네스.

'그자가 크레모 항구에서 보였던 무책임한 대처에 항의하려는 것이겠지. 그건 그냥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으니까. 엄연히 황태자가 휘말려 위험을 겪은, 초대형 악재였으니까.'

만약 황태자가 그날 죽었다면? 이런 회담 따위는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을 터다.

'어쨌건, 황제는 그날의 일을 우리에게 따져 물으려던 것이었겠지. 배상을 요구할 심산이었을 거야.'

막대한 금전. 혹은 일방적인 무역 관세 조정. 국경 특정 지역의 배타적 개발 권리 등등. 제법 묵직한 요구를 해 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하여 황제의 그러한 요구에 대응할 준비도 모두 갖춘 대사였다.

교묘한 협상과 저울질. 이해타산을 나누고 쪼개며, 황제와 며칠간 마라톤 협상을 벌일 카드를 세심하게 준비해온 대사였다.

한데 정작 현실은?

그 카드를 써먹지도 못하게 됐다!

"어허. 아닙니다. 제 염려와 마음만 받겠다니요. 그건 아니 되실 말씀입니다. 대사께서는 저희 제국이 신의와 도덕이 없는 나라로 불리길 원하시는 겁니까? 이러다가 혹여나 대사께서 건강에 이상이 생겨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우리 마젠타노 황가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손가락질을 받겠습니까?"

"으음, 그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댁들이 내 건강, 언제부터 걱정해줬다고 이러는 건데.

대사는 진심으로 빼액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완고했다. 그리고 능숙했다. 대사가 손사래 치며 손을 드는 순간이었다. 라키엘의 손도 함께 스윽 움직였다.

한의원을 방문해서 공포에 질려 울부짖던 수많은 어린이 환자의 떼쓰는 손목을 자연스럽게 낚아채던 농염한(?) 스킬을 십분 발휘했다.

촵?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찰싹 달라붙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심지어 틈을 주지도 않았다. 대사의 맥박을 재빨리 진맥했다. 진맥 스킬도 곁들여 사용했다. 그리고 일부러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음, 역시. 평소 음주와 흡연이 너무 잦으셨군요. 물론 이 또한 마젠타노와 앙부아즈, 양국의 평화와 우의를 위해 노력하신 결과겠지만 말입니다."

"아니, 이 손목 좀 놓으시고...."

"그래서 감히 조언을 드리건대,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술과 흡연을 줄이고, 매일 30분씩은 걷는 시간을 만드세요. 그리고 아침마다 깨끗한 올리브유를 한 스푼씩 드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래야 황제 폐하처럼 되지 않으십니다."

"...예?"

황제, 폐하?

앙부아즈 대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잖아도 왜 황제 대신 황태자가 회담장에 온 건지 궁금하던 대사였다.

자신을 부른 이는 황제였는데. 뜬금없이 황태자가 와서 이러는 게 불만이기도 했다. 하여 이러한 외교적 무례를 조심스레 따져 물으며 회담의 주도권을 가져오리라 각을 재고 있기도 했다.

한데 황제에 대한 언급을 저렇듯 먼저 선수 쳐 버리다니. 대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어제부터 몸이 불편하십니다."

"어디가 불편하신 겁니까?"

"심한 몸살감기십니다."

"몸살감기라고요?"

"예. 요즘 워낙 격무에 시달리셔서 말입니다. 검술 훈련을 소홀히 하신 지도 제법 되셨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는지 부쩍 음주와 흡연량이 늘어나셨지요. 아마 그래서이실 겁니다. 고작 감기몸살 정도에 입맛까지 잃고 힘들어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흐음, 그래서 회담장에 황태자께서 대신 나오신 겁니까?"

"예. 대사께서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이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으며, 추후 따로 대사를 오찬에 초대하겠다는 황제 폐하의 전언을 제가 대신 전해드리게 되었습니다."

"...."

대사는 할 말을 잃었다.

몸살감기란다. 그래서 회담장에 못 나왔단다.

'설마하니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솔직하게 밝혀 버릴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대놓고 미안하단다. 사죄를 표하는 오찬까지 열겠단다.

'이거,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는구만.'

대사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건 황태자가 순진한 건지, 아니면 영악한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원래 외교적 무대에서 '미안하다'라는 말은 극도로 꺼리는, 거의 금기에 해당하는 발언이기 때문이었다.

'저런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명분과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주게 되니까. 그때부터는 상대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약해지고, 외교적 협상에서 극도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니까.'

그렇기에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금기다. 아주 많이 표시해봤자 '유감이다'라는 완곡한 중립적 표현 정도가 끝이다. 그런데 방금 황태자는? 황제의 전언을 전한다면서 '미안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솔직하니까 꼬투리를 잡을 구석이 없어.'

앙부아즈 대사는 내심 침음을 삼켰다.

황제가 아프다. 아파서 피치 못하게 못 나오게 됐다. 대신 황태자라도 나와서 이렇듯 성의를 보이고 있다. 그걸 솔직하고 투명하게 모두 밝히는 태도로 나왔다.

한데 그걸 따져 묻게 되면? 왜 황제가 안 나온 거냐고, 외교적 결례가 아니냐고, 항의를 하게 되면?

'이쪽이 오히려 옹졸해지며 선을 넘는 그림이 만들어지겠지. 허어. 허허허!'

오히려 이쪽이 명분을 잃게 되리라. 보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그 흐름에 앙부아즈 대사는 탄식했다.

'이렇게 내 카드 하나를 없애 버리는 건가....'

이 황태자, 보통내기가 아니다.

대사는 내심 이를 갈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대사의 머릿속 계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자신의 솔직하게 사과하는 태도가 대사의 속마음을 얼마나 뒤흔드는지 딱히 예상하지도 않았다.

'나는 외교적 협상을 하러 온 게 아니니까.'

협상은 자신의 전문 영역이 아니다. 그걸로 협상의 전문가인 대사와 맞설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은?

'협상이 아닌 일방적인 요구만 던져야겠지.'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그럴 자신이 있다. 그럴 수단이 있다. 스스로의 판단을 굳게 믿으며 라키엘은 말했다.

"어쨌건, 앞으로 건강 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시길 바라며 오늘 회담의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사님은 물론이고, 앙부아즈 왕가 측에서도 지난 크레모에서의 사고가 일어난 경위를 모두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예,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요구입니다."

"마젠타노 황가 측에서는 무엇을 요구하고 싶으신 겁니까."

"앙부아즈의 제1 왕위 계승자인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 왕녀께서 향후 6개월간 황도 마젠타에 체류하시길 원합니다."

"...예?"

대사가 어깨를 흠칫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설마 미친 거 아닐까.

'우리 왕녀님을? 왜?'

혹시 인질로 삼겠다는 걸까. 그렇게 앙부아즈 왕가에 능욕을 안겨주겠다는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라키엘을 보는 대사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이 요구는 너무나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아무런 실리도, 명분도 느껴지지 않는 치욕적인 요구였다.

차라리 무역관세를 없애달라는 요구라면, 국경의 영토 일부를 떼어달라는 요구였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한데 그때였다.

라키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 요구 사항이 미친 것처럼 들리셨겠지요. 하지만 이 요구에는 엄연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젠타노 황가와 앙부아즈 왕가, 양쪽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한 합리적인 이유가 말입니다."

"...그 이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물론이다. 앞으로 벌어질 대전쟁을 막아야 하니까. 그러자면 앙부아즈의 왕녀가 죽으면 안 되니까. 왕녀를 6개월간 황도로 불러들여 머무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모두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 자신의 황족 라이프와 노후가 보장될 수 있다.

야물딱진 일념으로 라키엘은 입술을 촵촵 적셨다. 새빨간 거짓말 한마디를 혓바닥 위에 장전했다. 비장의 카드를 거짓말에 슬며시 붙였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알뜰살뜰 모아두었던 거짓말 이용권이었다.

딩동!

[거짓말 이용권 1장을 소모합니다.]

[지정된 대상 : 앙부아즈 대사 뱅자맹 백작은 당신의 거짓말 한 가지를 무조건적으로, 영구적으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89화. 거짓말 이용권 (1)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

왕가의 실세이자, 제1 왕위 계승자. 또한, 그녀는 '앙부아즈의 미소 천사'라는 애칭을 지니고 있었다.

마더 테레사 같은 자비로운 사람이라서? 자애롭고 따스한 인품을 지니고 있어서? 아니었다.

그녀는 일류 격투가였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 수준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팰 때 독특한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면서 상대를 짓밟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미소 천사라고 불리게 된 이유였다.

'어쨌건, 그런 독특한 성향과는 별개로 그녀는 정치적으로는 평화주의자였다고 했지.'

라키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원작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왕녀 아델린이 직접 소설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다만, 소설 내의 인물의 대사나 기록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된 부분은 꽤 있었다. 그 내용들을 종합해서 추론하자면....

'지기 싫어하는 호전적인 성격이었지만, 의외로 전쟁보다는 평화를 선호했다고 했어. 현명한 자질을 지녔다고도 했고. 하지만... 그런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지. 바로, 자신이 지닌 여러 장점을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일찍 죽었다는 것.'

요절.

그것이 왕녀 아델린이 보인 최악의 단점이었다. 더없이 건강하고, 튼튼하고, 강력했던 그녀였지만 왕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하고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그 결과 방계 혈족의 다른 이가 앙부아즈의 왕이 되었다.

어부지리였다. 또한, 마젠타노에게는 재앙이었다. 새로 왕이 된 방계 혈족의 인물이 아델린과는 전혀 다른,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확장적 군국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거의 집착증 수준이었지. 전쟁을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굴었어. 덕분에 원래부터도 상승세를 타고 있던 앙부아즈 왕국의 모든 역량이 군사력 확장에 집중됐어. 그런 움직임에 마젠타노는 경계심을 느꼈고, 둘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다가 결국엔 쾅.'

갈등이 터졌다.

마젠타노의 몰락을 불러온 사건, 대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두어선 안 돼.'

라키엘은 다짐했다. 그리고 계산했다. 지금 시점에서 대전쟁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급진적 군국주의자가 앙부아즈의 왕이 될 수 없도록 저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왕녀 아델린이 요절하지 않는 거지.'

그녀가 안 죽으면 된다.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니까. 죽지만 않으면 그녀가 왕이 될 것이다. 앙부아즈 왕국이 급진적 군국주의의 길을 걷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대전쟁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거의 확실해. 소설에서도 그런 언급들이 있었으니까.'

소설 마검황 속 역사가들이 평하던 내용이 떠올랐다. 만약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예정대로 왕의 자리에 등극했다면?

그녀는 강성해진 국력을 백성의 풍요로움을 위해 썼으리라고.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마젠타노를 비롯한 주변국과 평화로운 상생의 길을 걸었으리라고. 그렇게, 애꿎은 젊은이들이 대전쟁에 동원되어 무수히 죽어나가는 참극을 만들지는 않았으리라고 평가했던가.

'그러니까 왕녀 아델린이 죽지 않으면 돼. 그건 내가 해줄 수 있을 거고.'

라키엘은 더욱 깊은 곳까지 기억을 더듬었다. 소설 마검황의 사소한 언급까지 되짚었다. 왕녀 아델린이 요절했던 원인이 떠올랐다. 정확한 병명이 밝혀지진 않았더랬다. 다만, 그녀가 어떤 증상을 겪으며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묘사된 바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환이라고 했지. 평소처럼 훈련과 식사를 마친 저녁에 격한 복통을 호소했다고 했어. 명치 오른쪽 어름을 부여잡고서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했다고....'

그 뒤로 며칠도 되지 않아 급격한 황달 증세를 보였다고 했다. 그렇게 쇠약해지다가 그대로 사망했다. 그 내용을 짚어보니 문득,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왕녀 아델린이 겪은 그 증상, 아무래도 담석에 의한 담도 폐쇄 같단 말이지.'

아무리 봐도 그거였다.

실제로 주변 지인 중에 똑같은 증상을 겪은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 있던 당시의 절친 원호와 은수. 녀석들을 한 다리 통해서 알던 웹소설가.

이름이 백경 씨였던가.

백경 씨가 앙부아즈의 왕녀와 똑같은 증상을 겪었다고 했다. 어느 날 저녁, 명치 오른쪽의 갑작스러운 격통을 느꼈다고 했다. 축구 게임을 하다가 명치를 부여잡고 아이고, 아이고. 그 와중에 팀이 골을 넣어서 아이고, 아이... 고오올!

...을 외치며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했다.

'그 양반 결국엔 담낭을 통째로 제거했댔지. 수술하는 날 아침에 원고 마감 떼고, 점심에는 내장 떼고, 마취 풀린 저녁에는 돌아온 원고 교정 뗐다고 자랑하던데.'

하여간 세상엔 별별 신기한 인간들이 많다.

'어쨌건, 왕녀 아델린이 겪었다는 증상을 보면 거의 확실해. 담석 때문에 담즙이 흘러나오는 담관이 막혔던 거야. 거의 출산에 버금가는 엄청난 고통을 며칠간 계속 겪었을 거고. 하지만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게 따로 있지.'

원래는 담관을 통해 십이지장으로 흘러나가야 할 담즙, 쓸개즙이다. 하지만 담관이 막히게 되면? 꽉 막힌 하수구와 똑같이 된다. 담즙이 역류한다. 역류의 끝에는? 간이 있다.

'답즙이 간을 침범하게 되지. 간이 망가져. 간경화, 간경변이 진행되고. 비장과 췌장이 망가지고. 결국엔 손 쓸 수도 없이 죽는 거야.'

실제로도 지인이었던 백경 씨는? 병원에 갔을 때 이미 간수치가 정상인의 무려 40배가 나왔다고 했던가. 그만큼 담석에 의한 담관 폐쇄는 장난으로 볼 질환이 아니었다.

정확한 진료를 받지 못하면? 거의 죽는다고 보아야 할 질환이었다. 그러니까 왕녀 아델린을 이곳으로 불러야 한다. 자신이 직접 진맥하고, 상태를 보아야 한다.

'만약 담낭 안에 담석이 어느 정도 생성된 상태라면 담석을 제거하고, 한편으로는 앞으로 담석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해줘야겠지.'

그러면 될 것이다.

그녀가 요절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로운 왕이 되어 대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마젠타노 황가가 무너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지. 내 아름답고 부유한 황족라이프도 지켜지는 거고.'

...완벽한 계획이다.

라키엘은 내심 만족했다. 협상 테이블 맞은편의 앙부아즈 대사를 쳐다보았다.

대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포커페이스 아래로 숨긴 은은한 분노가 엿보였다. 아마도 방금 이쪽이 요구한 내용 때문일 터다.

'자신들의 왕녀를 향후 6개월간 이곳 황도에 체류시키라는 거. 아마 상국이 신하국의 왕족을 볼모로 삼는 행위로 여겨서 저렇게 화가 난 거겠지.'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사의 분노를 잠재울 고민 또한 하지도 않았다. 대신 거짓말을 준비했다.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을 황도를 불러들일 수 있을 거짓말. 그 거짓말에 자신이 지닌 '거짓말 이용권'을 사용했다.

[거짓말 이용권 1장을 소모합니다.]

[지정된 대상 : 앙부아즈 대사 뱅자맹 백작은 당신의 거짓말 한 가지를 무조건적으로, 영구적으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좋아.'

준비는 다 됐다. 이제는 거짓말 이용권의 위력(?)을 확인할 때다. 라키엘은 입술을 촵촵 적시고는 입을 열었다. 꽉 찬 명란처럼 알차게 장전된 거짓말을 발사했다.

"사실은 내가, 우리 마젠타노와 귀측 앙부아즈 사이의 건설적이고도 평화로운 우호적 관계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예?"

대사가 멈칫했다.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도 잠시에 불과했다.

딩동!

[앙부아즈 대사 뱅자맹 백작이 당신의 거짓말에 홀라당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역시, 그러셨던 겁니까...?"

얼떨떨하게 되묻는 대사. 대사의 굳었던 표정이 차츰 풀렸다. 이제야 이쪽의 진짜 뜻을 이해했다는 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걸 보며 라키엘은 확신했다.

'된다. 좋아.'

거짓말 이용권. 긴가민가했는데 진짜인 듯했다. 라키엘의 거짓말에 탄력이 붙었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저 또한 기쁩니다. 어쨌건, 전부터 저는 고민했습니다. 우리 마젠타노와 귀측 앙부아즈가 더욱 긴밀하고도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려면, 앞으로의 항구적인 평화를 지속할 수 있으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하여서, 떠올리신 방법이 있는 겁니까?"

"예. 다행히도 떠올렸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앙부아즈의 왕녀를 황도로 초빙하여 6개월간 체류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면...."

"서로의 문화와 교양을 나누며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겠지요. 아니, 사실은 개인적으로 친교를 다지고도 싶습니다."

"친교를... 말입니까?"

"예. 저는 장차 마젠타노의 황제가 될 몸입니다. 왕녀 또한 앙부아즈의 왕이 될 분이시지요. 하니 미래의 양국을 이끌 지도자가, 미리 개인적인 친교를 돈독히 다지게 된다면 양국의 미래 또한 더욱 평화로워지지 않겠습니까?"

"아, 역시, 그렇군요. 그런 복안이 있으셨을 줄이야...."

대사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평소라면 절대 이러지 않을 사람이었다. 라키엘의 말을 듣는 즉시 '무슨 미친 개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의심부터 했을 인간이 바로 대사, 뱅자맹 백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라키엘이 사용한 거짓말 이용권. 그 절대적 권능 때문에 그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라키엘의 거짓말을 향한 맹목적 믿음만을 품게 되었다. 오히려 라키엘의 거짓말을 스스로 오해하기까지 했다.

'...설마,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우리 왕녀님께 마음이 있는 것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의 생각이 상상의 나래를 뻗쳐갔다.

'왕녀께서 황도로 오시고... 6개월간 체류하시다가...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황태자와 마음이 통하고 눈이 맞으신다면?'

어쩌면.

진짜로 어쩌면.

혼인을 통한 강력한 동맹, 혹은 연합체가 성사될지도 모른다. 전통의 강자인 마젠타노 제국과 신흥 강국인 자신의 조국. 둘이 결합한, 전무후무한 대제국이 건설될 수도 있으리라.

'허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세워질 대제국의 출발점에 자신과 황태자의 회담이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내 이름이 역사서에 영원히 새겨질지도 모르고.'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 대제국의 초석을 세운 회담. 그 회담을 이끈 위대한 외교관 뱅자맹!

"...."

대사의 들숨과 날숨이 절로 거칠어졌다. 덕분에 그걸 지켜보던 라키엘은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거짓말 이용권 이거, 성능 확실하구만.'

대사가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쪽의 거짓말에 홀라당 넘어왔기 때문에 저러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는 자신감을 과자 봉지 속 질소처럼 빵빵하게 채우며 거짓말을 이어갔다.

"예.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양국의 건설적인 미래를 꿈꾸는 제 입장에서는, 결국엔 이렇게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간절히 바라는 평화니까 말입니다. 그래서였습니다."

촵촵, 이쯤에서 혓바닥 한 번 축이면서 감속하고.

다시 풀악셀.

"크레모의 사태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거나, 혹은 무역 관세를 일방적으로 조정해달라거나 하는 요구는 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런 요구를 하는 순간 양국의 관계는 그저 이해타산에 따라 반목과 전략적 협조를 반복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각별하게 돈독한 동맹국의 관계는 영영 바랄 수 없게도 될 테고요."

"허어... 그런 생각까지 하셨을 줄은...."

"예, 조금은 뜻밖이실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다만 이것이면 족합니다. 왕녀님과의 교류를 통한 양국의 우호 증진. 이것보다 더욱 값진 보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마무리로 촉촉한 눈빛을 반짝였다. 대사의 눈을 바라보며 호소력(?) 짙은 거짓말을 콕콕 던졌다.

"제 진심은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대사님께서 조금은 낯뜨거운 제 진심을 헤아려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후우."

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함 때문에?

당혹스러워서?

모두 아니었다. 감동을 받아서였다.

"설마, 황태자께서 앙부아즈를 그토록 중히 여겨주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욱 감사합니다."

대사는 진심이었다.

이제는 황태자의 저 말들이 너무나 진실되게 들렸다. 한편으로는 회담장에 오기 전에 자신이 했던 준비들이 너무나 쪼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저 크레모 사태의 배상을 어떻게 해야 손해가 덜 생길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황태자가 우리에게 이토록 우호적인 인사였을 줄이야. 게다가 저렇게나 깊고도 원대한 시야를 지녔다니.'

대사는 혼자만의 김칫국을 연신 들이켰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황태자와 자신들의 왕녀가 혼인도장을 쾅 찍은 뒤에 부케까지 던지고 있었다. 자신은 그 옆에서 역사적인 혼인을 성사시킨 위대한 외교관으로 존경을 가득 받고 있었다.

그럼 내 이름은 역사서에 어떻게 새겨질까. 지금이라도 그럴듯한 초상화 한 점쯤 남겨둬야 하나. 어쨌건, 결론은 명확하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다. 이 요구를 안 받으면 바보다. 대사는 행복한 망상 끝에 계산을 마쳤다.

"황태자께서 하신 말씀을 잘 알겠습니다. 어떤 뜻이신지도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예. 하여 황태자께서 주신 요구에 대해, 앙부아즈의 외교권을 위임받은 제가 대답을 드리자면...."

"드리자면?"

"황태자께서 주신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흐음, 검토라니요?"

라키엘은 짐짓 미간을 찡그렸다. 물론 그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과연 돌아오는 대사의 대답이 예상 그대로였다.

"다른 이가 아닌, 왕녀께서 무려 6개월간 타국에 체류하게 되실 일입니다. 제가 아무리 외교권을 위임받은 바 있다고는 하나...."

"역시. 그걸 독단적으로 결정하실 수는 없겠지요. 이해합니다."

"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여 제가 조금 염려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염려되는 부분이요?"

"예."

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저는 황태자께서 밝히신 진심을 믿습니다. 양국의 우호를 위해 내리신 큰 결단을 신뢰하고, 존경합니다. 하지만... 제 주군과 본국의 여러 대신들이 그걸 믿어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조금은 회의적인 우려만 떠오릅니다."

"그들까지 내 마음을 믿어주진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애석하지만, 그렇습니다."

대사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잘만 하면 양국의 미래를 탄탄하게 다져둘 수 있을 협상이었다. 자신을 역사적인 외교관으로 만들어줄 엄청난 딜이었다.

한데 황태자의 요구가 현실적으로 조금 과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녀를 타국의 황도에서 6개월간 체류하게 해달라니.

냉정하게 따진다면?

정신 나간 수준의 요구였다.

자신이야 황태자의 진심을 믿으니 그 요구를 수용했을 때 따라올 장기적인 이득을 계산했지만 다른 이들은? 앙부아즈의 수많은 신하들은? 그리고 자신의 주군인 국왕은?

'코웃음만 칠 것이야.'

오히려 감정적인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양국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역효과가 나올 수도 있다.

대사는 그런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안타까웠다. 황태자의 저토록 고마운 진심을 사람들이 몰라줄 것이란 사실이 못내 애석했다. 이 협상을 반드시 성사시키고 싶었다. 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저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줄 방법이 있으면 참 좋겠건만.'

그런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뭐, 그건 괜찮습니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마치 이쪽의 속마음을 읽기라고 한 듯,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정말로 별거 아니라는 듯. 그런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기색으로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깔끔하게 밀봉된 서신 한 장이었다.

"이건...."

"앙부아즈의 지배자이신 왕에게 보내는 제 서신입니다."

"제 주군께 말입니까?"

"예. 여기에 제 진심을 담았습니다. 그러니 이걸 전해주시지요."

그러면 될 것이다.

이건 무조건 된다.

확신할 수밖에 없다.

'앙부아즈의 왕에게 보내는 이 서신. 여기 담긴 내용에도 마지막 남은 거짓말 이용권을 썼으니까.'

라키엘의 상큼한 미소가 사악하게 반짝, 빛났다.

90화. 거짓말 이용권 (2)

"어떠셨습니까. 생각하셨던 대로 회담은 잘 진행되었는지요."

"뭐, 그럭저럭?"

회담장을 뒤로하고 나오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 이쪽을 향해 물어오는 데미안 녀석.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다행히 앙부아즈 대사가 내 진심을 아주 잘 알아주더라고."

"전하의 진심...을 말입니까?"

"어."

"대체 어떤 진심을 보이셨기에...."

"말 그대로 상호존중과 평화를 위한 내 마음을 보였달까."

"사실은 호구 획득과 착취를 위한 마음은 아니셨고 말입니까?"

"어허. 날 뭘로 보고."

"크레모에서 약속하셨던 위험수당 지급을 아직 안 해주신 악덕업주...."

"...어?"

라키엘은 멈칫했다. 뜨끔하는 심정으로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아직 안 줬어? 내가?"

"예."

"...."

"황도로 돌아오면 바로 지급한다고 하셨는데, 그 뒤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어, 음, 미안. 내가 좀 정신이 없었네."

사실이었다. 황도에 돌아와 별궁 한의원을 정비하자마자 황제가 쓰러졌더랬다. 그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말로 정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약속했던 수당을 까먹고 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딱히 변명할 구석이 없었다.

'이 녀석, 오늘 어쩐지 뚱한 기색이다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라키엘은 데미안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때 마침 데미안이 툭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는데 표정은 아니다. 삐친 걸까. 라키엘은 겸연쩍게 웃었다.

"내가 면목이 없네. 별궁에 돌아가면 바로 지급 받을 수 있게 조치할게. 아, 그리고...."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앙부아즈 대사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거짓말 이용권을 묻힌 서신을 앙부아즈 국왕에게 보내두었다. 그러니 앙부아즈의 왕녀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이쪽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당분간 그쪽 걱정은 할 일이 없다.

그러니 이제는?

'황제를 챙겨야지.'

참 바쁘다, 바빠.

라키엘은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데미안에게 바짝 다가갔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오늘, 별궁에 아주 중요한 환자가 입원할 거야."

"...예?"

"쉿. 목소리 죽여. 아무도 못 듣게."

"환자가 누구이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황제 폐하."

"...."

"그러니까 먼저 별궁에 돌아가 있어."

"특근대 전원에게 비상근무를 준비시켜두면 되겠습니까?"

"어. 정답."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요즘 한창 훈련에 매진하는 중인 듯하던데, 미안하게 됐어."

"괜찮습니다. 훈련보다는 중요인사의 보호가 제 우선적인 임무니까요."

데미안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살짝 맺혔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부쩍 훈련량을 늘린 그였다. 호위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 이외에는? 거의 별궁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한계를 느낀 까닭이었다.

'크레모에서. 그렇게 벽을 느낄 줄은 몰랐어.'

우루스.

그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의 습격을 받았던 밤이 떠올랐다. 아직도 자려고 누우면 그때 당시의 순간들이 생생했다.

잊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앞에서 역부족이었던 자신의 모습. 당시에 느꼈던 거대한 벽과 무력감. 생전 처음으로 당해본 패배였다. 그런 굴욕 또한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다.

황도에 돌아온 이후, 틈만 나면 검을 쥐었다.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며 특훈에 매진했다. 더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하지만... 아직은 길이 보이지가 않아.'

솔직히 조금은 막막했다. 여기서 뭘 더 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체계적 검술을 익혀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누군가에게 배움을 받는 건 소용이 없겠지. 날 가르칠 수준의 기사? 그런 이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

하여 철벽에 머리를 들이받는 기분으로 매일 땀을 흘리는 요즘이었다. 언젠가는 자신만의 검술과 마나 운용법을 정립하리라. 그 목표만을 되새기며 정진하고 있었다. 라키엘도 그런 데미안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왜 모르겠냐.'

그는 묘한 시선으로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읽은 소설, 마검황. 그 이야기의 주인공 데미안 카이엔.

사실 녀석은 이야기 속 초반엔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그저 불법도박판 지하 검투장의 챔피언 정도에 불과했다.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보면 압도적이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계기가 녀석을 바꾸게 되지.'

녀석이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그 본질에 걸맞은 마나 운용법을 갖추는 순간.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됐다. 엄청난 폭풍 성장을 보여주었다. 진정한 최강자로 거듭났다.

'슬슬 때가 오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살짝 곤혹스러웠다. 최대한 그걸 늦추거나 방해하고 싶었다. 그래야 녀석이 얌전히 곁에 머물러 줄 테니까. 이런 핑계를 대어서라도 녀석의 훈련에 태클을 걸어둠이 좋을 듯했다.

라키엘은 속내를 숨기며 말했다.

"어쨌건, 그런 이유로 특훈은 잠시 멈추고 임무에 충실해 줘야겠어. 미안하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비상근무 수당만 챙겨주시면 됩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이번에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 미안."

본의 아니게 악덕업주(?)가 되어 버린 기분이 이런 걸까.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럼 저는 먼저 별궁으로 돌아가 준비를 갖춰두고 있겠습니다."

데미안이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라키엘도 할 일을 시작했다. 별궁으로 황제를 옮기는 일이었다.

'저대로 황궁에 둘 수는 없어. 황제의 측근 중에 누가 딴마음을 품었는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황제는 아직 중증 환자다. 언제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1개월 뒤, 대주교의 신성 축원 쿨타임(?)이 돌아오기 전까지 최대한 자신이 곁에 붙어서 보살펴야 한다.

한데 황제를 황궁에 놔두면?

'나도 덩달아 온종일 황궁에 머물러야 해. 그러면 안 돼. 사람들이 의심하게 될 테니까.'

황제가 단순한 감기몸살로 쉬고 있노라 알렸다. 한데 자신이 온종일 황제의 거처를 들락거리면?

모두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사실은 황제의 상태가 많이 나쁜 거 아닐까, 라고. 그래서 치료에 조예가 있다는 황태자가 전에 없이 저토록 온종일 황제의 거처를 들락거리는 게 아니겠느냐고.

'그런 상황은 피하는 게 좋지.'

다행히 황제를 몰래 황궁에서 데리고 나오는 일은 쉬웠다. 황제와 최측근만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를 이용했다. 비밀통로 출구에 마차도 미리 준비해두었다. 덕분에 황궁의 눈과 귀를 피해서 황제를 별궁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이제 당분간 여기서 제가 직접 보살펴드리겠습니다, 폐하. 아까 설명해 드렸다시피, 이곳에서 요양하시는 편이 모두에게 나을 듯해서 말입니다. 괜찮으시겠지요?"

"...."

무사히 입원을 시킨 직후, 병상에 누운 황제를 향해 물었다. 아직 황제는 거동이 불편했다.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쪽을 향해 천천히 깜빡이는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하라고.

너를 믿겠노라고.

그 눈빛을 보며 라키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황제를 무사히 별궁까지 데려왔으니... 이제 다음 VIP 손님을 맞이할 준비도 슬슬 해둬야겠구만.'

자신이 앙부아즈의 국왕에게 보낸 서신. 그 서신에 묻힌(?) 거짓말 이용권이 슬슬 효력을 드러내고 있으리라. 라키엘은 곧 이곳에 오게 될 앙부아즈의 왕녀를 떠올렸다.

"아바마마, 아니, 전하. 저는 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앙부아즈의 왕도, 앙부즈.

그곳의 왕성에서 왕녀,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는 인상을 찡그렸다. 감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부왕이자 앙부아즈의 국왕인 메로뱅거 발루아 앙부아즈를 바라보았다.

불끈.

치켜든 고개 아래, 탄탄하게 발달한 그녀의 승모근이 꿈틀거렸다. 수없는 수련으로 타격에 최적화된 광배근도 수축했다.

그녀의 입에서 불만 가득한 물음이 나왔다.

"저는 정녕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젠타노 제국의 요구에 그리 쉽게 응하시다니요. 저더러 황도 마젠타에서 무려 6개월을 체류하라니요. 아무리 마젠타노 제국이 우리보다 강성한 제국이라 한들, 왕족인 저를 그토록 쉽게 볼모로 보내실 결정을 내리시다니요."

그녀의 서릿발 같은 물음이 쏟아졌다.

사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왕족이었다. 동시에 국왕의 외동딸이었다. 공식적인 왕위 승계서열 1위의 왕녀였다. 즉, 장차 앙부아즈의 왕이 될 몸이었다. 한데 이렇듯, 마젠타노 제국에 6개월이나 볼모로 잡혀가는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결정은 부당합니다. 아니, 옳지 못합니다. 우리 앙부아즈는 엄연한 독립국이며, 왕조의 정통성과 지배의 정당성을 주변국으로부터도 두루 인정받는 왕가입니다. 한데 양국 사이의 사소한 마찰이 있었다고 하여 이렇듯 쉽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시다니요. 이러면 아니 되십니다."

진심이었다.

비록 마젠타노 제국이 대륙의 패권국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앙부아즈의 힘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굴욕적인 외교를 할 이유는 없었다. 국왕을 바라보는 왕녀 아델린의 얼굴에 분통과 답답함이 떠올랐다.

그제야 국왕의 입이 열렸다.

"아델린, 나의 외동딸이여."

"예, 전하."

"너는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마젠타노의 위세에 눌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리라 여기는 것이더냐?"

"그건...."

"역시 그렇겠지. 하니 그토록 내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항변하는 것이겠지."

"...."

아델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부왕의 손을 향했다. 부왕의 손에 서신이 들려 있었다 .마젠타노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부왕에게 보낸 친서였다.

'대체 저 서신이 무슨 내용이기에....'

부왕께서 이토록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내리신 걸까. 혹시 마젠타노의 황태자에게 약점이라도 잡히신 걸까. 혹은 자신이 상상도 못하는 종류의 협박이 쓰인 걸까. 그렇기에 강직하신 부왕께서 저토록 손쉽게 황태자의 요구를 수락하시게 된 것일까.

'궁금해.'

절로 걱정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용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국왕은 그런 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신을 야무지게 접어 품속에 쏙 갈무리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그래.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너의 억울한 심정을 알겠다. 이 아비를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외치는 마음 또한 알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에게 일러두자면, 언젠가는 이 아비가 내린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며 감사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 의문 또한 시간이 지나면 풀리게 될 터. 더는 너의 반론을 듣지 않겠다."

"하오나, 저는...."

"그만. 거기까지."

국왕의 단호한 명이 떨어졌다.

그는 내심 안타까운 심정을 삼켰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것이 너와 왕국을 위한 길이란다.'

그는 문득,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보낸 친필 서신을 떠올렸다. 그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 장인어른,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

평소라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헛소리. 미친놈 아니냐며 길길이 날뛰었을 개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딩동!

[거짓말 이용권이 성공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목표대상 : 국왕 메로뱅거가 서신의 내용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알림음이 울리는 순간.

국왕이 근엄한 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서 국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의 딸이자 미래의 왕위 계승자인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는 현시간부로 즉시, 마젠타노 제국의 황도 마젠타로 이동하여 6개월간 체류하도록 하라."

"아, 아바마마?"

"명을 시행하도록."

반론할 틈도 없었다.

국왕의 명을 받은 근위기사들이 왕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팔을 붙잡았다. 물론 격투술로 단련된 건장한 왕녀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퍽! 투콱!

그녀의 주먹과 팔꿈치가 사납게 움직였다. 근위기사들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국왕의 눈짓을 받은 궁정마법사가 주문을 읊었다. 왕녀에게 강력한 속박 마법이 걸렸다.

"...으읍! 읍읍!"

꿈틀거리는 왕녀가 순식간에 밖으로 옮겨졌다. 미리 대기 중이던 마차에 실렸다.

"출발하도록."

국왕의 명이 떨어졌다. 마차와 수행원 무리가 움직였다. 마차 안쪽에서 왕녀의 다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아바마마! 아바마마아!"

쿵! 쿠콱! 쿵!

육중한 주먹질이 마차를 내부에서부터 들썩이게 했다. 하지만 마차에 걸린 3중 방어마법을 깨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은 졸지에 황도 마젠타로 마차배송(?)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91화. 기만자의 낚시법 (1)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저 멀리서 대체 누가 날 부른 것인가.

왕녀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

그녀는 심장 속에서 분노와 울분이 듀스의 대접전을 벌이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었다. 살짝 열린 마차 창문 너머. 낯선 도시의 웅장한 광경이 보였다.

황도 마젠타였다.

"...."

설마 내가 여길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강제로 마차에 태워졌던 게 어제 같은데. 그런데 벌써 열흘이나 시간이 지나 버렸다. 그 사이 자신은 속절없이 이곳 황도 마젠타까지 끌려와 버렸다.

물론 탈출(?) 시도도 해보았다. 하지만 금방 체념했다. 황도 마젠타에서의 6개월간의 체류. 그것이 아바마마의 왕명이었다.

기껏 탈출하여 왕도로 돌아가 보았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 뻔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반쯤 체념했다. 매도 일찍 맞는 것이 낫다고, 어차피 다녀와야 할 길이라면 후딱 다녀오자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쾌한 건 아니었다.

'후우.'

절로 나오는 한숨.

이내 마차가 멈추었다. 벌써 황궁에 도착한 걸까. 마차 문이 열렸다. 근엄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까지 자신을 충실하게 수행한 앙부아즈의 기사단장이었다.

"왕녀시여, 부디 당당하시길."

"...."

기사단장의 굳은 당부.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한 각오를 힘껏 다졌다. 이 마차에서 나가는 순간부터 자신은 적지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다. 앙부아즈에서부터 함께 온 수행단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자신은 볼모로 끌려왔으니까. 적들의 전리품 취급을 받을 테니까.

'그래도 절대로 고개 숙이지 않아.'

자신은 위대한 왕가의 왕녀다. 장차 왕이 되어 앙부아즈를 이끌 몸이다. 선조, 선왕들의 영광을 이어받은 자신이 함부로 적들에게 나약한 꼴을 보일 수는 없노라고 생각했다.

눈에 힘을 주었다.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렇게 마차에서 내렸다. 적지(?)에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첫 적을 바라보았다.

빈약한 체격의 은발 남자였다. 제법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왕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저 얼굴,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듯한데....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앙부아즈의 왕녀시여. 반갑습니다. 저는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입니다."

"...."

그래, 기억났다. 타국의 주요 인사들에 대해 공부할 때 본 초상화. 그때 봤던 얼굴이다. 그래서였다. 왕녀는 고개를 아주 조금 까딱, 기울였다.

'그림이랑은 많이 다른데.'

초상화에서는 다 죽어가는 병자 같은 모습이었다. 한데 지금 눈앞의 황태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비쩍 말라서 빈약하게 보이긴 하지만.

'뭐 어쨌건. 저자가 아바마마를 능욕했지.'

라키엘을 보는 왕녀의 눈이 서늘해졌다.

저놈이다.

저놈이 아바마마에게 친필 서신을 썼다. 그 서신 때문에 자신이 여기까지 끌려왔다. 서신의 내용이 무엇이었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아바마마를 압박했겠지. 제국의 국력, 혹은 아바마마의 약점 등을 들먹이며. 외교적인 무례를 저지르며 아바마마를 협박하고, 굴복시켰을 거야.'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바마마께서 이토록 쉽게 자신을 이곳까지 보내셨을 리가 없다. 나름의 확신을 품은 왕녀 아델린은 주먹을 불끈 말아쥐었다. 황태자의 면상을 후려치지 않도록 자제력을 발휘하며 인사했다.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입니다."

섭씨 영하 50도급 칼바람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당황하지 않았다. 왕녀가 주는 서늘한 압박감에 전혀 주눅 들지도 않았다. 비결은 간단했다.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날 쌀쌀하게 대하는 여자라니. 이런 거 엄청 많이 겪어봤거든. 후후후!'

한국에선 항상 이랬다.

소개팅을 나가도.

선을 보러 나가도.

자신을 대하는 여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덕분에 항상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여자 마음이 뭐가 어렵단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그냥 척 보면 날 싫어하는 걸 바로 알 수 있잖아!'

지금도 마찬가지다. 라키엘은 전혀 상처받지 않은 튼튼한(?) 멘탈로 새삼 무장하며 말했다.

"그렇군요. 먼 길 오시느라 노곤하실 텐데 이쪽으로."

왕녀를 직접 안내했다. 정원을 지나, 별궁 본채로 들어갔다. 그곳에 미리 마련해둔 오찬장으로 향했다. 나름 신경 써서 마련한 진수성찬이 왕녀를 맞이했다.

"우선 식사부터 드시지요. 그 후에 앞으로 지내실 이곳 별궁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왕녀는 포크를 들지도 않았다. 마치 적국의 음식을 무방비하게 먹지는 않겠다는 듯. 경계심 서린 싸늘한 눈빛만을 기다란 테이블 너머로 쏘아 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이 또한 익숙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왕녀도 밥을 제때 안 먹는 타입이구나.'

여자들은 다 저런 걸까.

한국에서도 그렇던데.

점심이나 저녁에 밥 먹자고 연락을 하면? 이미 먹었다거나, 다이어트 때문에 어렵겠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아마 왕녀도 비슷한 것 같았다.

'쓰읍. 이러면 곤란한데.'

라키엘은 쓴웃음을 삼켰다. 생각보다 자신을 대하는 왕녀의 태도가 너무나 차가웠다. 마치 원수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곤란했다.

'이래서는 진료하기가 빡쎄지는데.'

의료인과 환자의 관계는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야 한다. 그래야 환자가 의료인에게 선뜻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있다. 의료인 또한 더욱 큰 책임감을 품고서 환자를 대할 수 있다.

누군가는 고작 마음가짐의 차이가 뭐가 대단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하다.

정말로 중요하다.

그게 없으면 어떤 진료도 헛수고가 되니까.

'그런데 왕녀가 생각보다 날 너무 싫어하는데. 차라리 앙부아즈 국왕한테 보내는 서신의 내용을 다르게 할 걸 그랬나.'

왕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투의 서신을 보냈다.

양국의 우호를 다지고 싶다고. 왕녀와 만남을 가지고 싶다고. 그게 서로에게 이득이지 않겠느냐고. 가장 확실하게 왕녀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 멘트만 쏙쏙 골라서 썼더랬다. 한데 그게 이토록 왕녀의 미움을 살 줄은 몰랐다.

'쓰읍. 그냥 소설 마검황에서 대전쟁을 일으킨 앙부아즈의 방계 왕족 전쟁광. 그놈한테 반란 누명이라도 확 씌울걸.'

그놈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국왕께서는 얼른 그놈을 숙청해야 한다고. 그렇게 썼으면 일이 편해지지 않았을까. 손쉽게 대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잠깐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방법은 좀 아니야. 변수가 너무 많아.'

자칫 그 방계 왕족 전쟁광이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켜 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안 된다. 원작 소설과 너무나 다른 전개가 되어 버린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이쪽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선 곤란하지.'

사실은 그런 이유 때문에 선택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라키엘은 접어둔 선택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내 선택에 자신을 가지자. 이게 가장 유리한 길이야. 왕녀를 불렀으니 담석 치료를 해주면 돼. 담석 때문에 죽는 걸 예방해 주면 돼. 그러면 왕녀가 앙부아즈의 왕이 될 거고.'

자연스럽게 대전쟁의 발발을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자. 자신감을 가지자. 일단 왕녀의 호감과 신뢰부터 얻어 보자. 다짐하며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건너편의 왕녀에게 말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긴 여정을 마치고 도착하자마자 식사라니. 소화에 부담이 되셨나 보군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

"가르딘 경?"

이쪽의 부름에 가르딘 경이 오찬장으로 들어왔다. 그 손에는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경이 왕녀 앞에 쟁반을 놓았다.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자기 그릇에 담긴 시커먼....

"탕약입니다. 특별히 몸에 좋은 귀비탕(歸脾湯)으로 준비했지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쌓인 피로를 푸는 데에 도움이 될 겁니다."

"...."

왕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탕약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 탕약 그릇이 민망해질 정도로 냉랭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묵묵히 왕녀의 리액션을 기다렸다.

그 압박(?)이 통한 걸까. 탕약 그릇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던 김이 사라졌을 무렵. 마침내 왕녀의 입이 열렸다.

"이건 무슨 형태의 모욕일까요."

"...예?"

"저를 여기까지 불러와 앉혀둔 것으로는 모자랐던 것입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라키엘이 물었다.

왕녀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오라고 하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앙부아즈에게는 크나큰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그걸 모르십니까?"

"...."

"그러니 미리 말해두지요. 6개월간 머무르라 하니 머무르겠습니다. 황태자께서 저의 부왕께 요청했던 대로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의 요구를 할 생각은 마십시오. 이렇게 식탁 앞에 앉히지도, 뭔가를 먹으라는 권유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시지요."

"으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 같은 건 없습니다. 이만."

드르륵!

왕녀가 거친 몸짓으로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왕녀께서는 겁을 먹으신 겁니까?"

라키엘의 일침이 콕, 왕녀의 고막을 찔렀다. 몸을 돌리려던 왕녀가 멈칫했다.

"...뭐라고요?"

"겁을 먹은 거냐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아무 짓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식사를 권했고, 피로 회복에 좋은 탕약을 드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무섭고 두려워서 자리를 피하는 겁니까?"

"나는 두려움 따위는...."

"혹시 탕약에 독이라도 탔을까 봐 걱정이 되는 겁니까? 가르딘 경. 그거 이리로 가져다줘."

가르딘 경에게 눈짓했다.

경에게서 귀비탕을 받아들었다.

"후우. 이거 진짜 귀한 걸로 달인 건데."

씁쓸한 독백과 함께 원샷했다. 깨끗이 비운 그릇을 왕녀에게 보여주었다.

"독 같은 건 없습니다. 생각을 해보시지요. 설마 제국의 황태자인 제가, 공식석상에서 왕녀께 드리는 약에 독을 타겠습니까?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왕녀께서 이렇게 저를 믿지 않고 무안만 주시는데. 안 그렇습니까?"

일부러 슬픈 척. 마음의 상처를 잔뜩 받은 척. 나름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말했다. 사실 그것은 도발이었다.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 지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했거든.'

그녀가 소설 마검황에 직접 등장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간접적인 언급은 몇 번 있었다. 지는 걸 엄청나게 싫어한다고 했다. 겁쟁이와 비겁자를 지극히 경멸한다고도 했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그녀에게 '혹시 쫄아서 빤쓰런을 시전하십니까?'라는 말을 고급지게 포장해서 던졌다. 대놓고 겁쟁이 취급을 했다. 성격 맞춤형 도발 폭탄이었다.

그 효과(?)는 굉장했다.

드르륵!

왕녀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서늘했던 아까와 달리, 어쩐지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다.

"방금, 황태자께서는 무슨 말씀을 한 것이신지?"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무얼 그렇게 두려워하십니까?"

"저는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공식석상에서 제가 드리는 탕약을 먹을 용기는 내지 못하셨군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럼 다시 권해 드리면 드시겠습니까?"

"...."

왕녀 아델린은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깨달아야 했다. 상대의 술수에 말려들었다. 만약 이제 또다시 약을 거절한다면? 자신에게 겁쟁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그건 싫었다.

그래서 더욱 울분이 쌓였다.

'음흉한 자 같으니라고.'

자신이 약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의 판을 짰다는 게 느껴졌다. 지극히 교묘하고 악랄한 판짜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시지요. 단, 황태자께 드릴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말씀하시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제가 드리는 약을 먹는 게 말입니까?"

"네."

"그건 일단 드셔 보시고 판단하시지요."

라키엘이 빙긋 웃었다. 가르딘 경에게 눈짓했다. 경이 다시 쟁반을 가지고 왔다. 아까와 똑같은 탕약이었다.

"...."

탕약을 받은 왕녀가 콧등을 찡그렸다. 냄새가 이상했다. 낯설고, 역했다. 그러고 보니 탕약의 색깔도 온통 시커멓고 칙칙했다. 이런 걸 먹어도 되는 걸까. 몸에 좋다는 거, 거짓말인 듯한데.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릇을 들었다. 입가로 가져왔다. 기울였다.

꿀꺽.

"...!"

순간, 왕녀 아델린은 입안에 들어온 탕약을 뿜어 버리고 싶은 웅장한 충동을 느꼈다. 그릇을 황태자의 머리에 집어 던지고 싶은 파괴적 살의 또한 느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맛이 없었다. 진짜로 없었다!

'그, 그웁!'

세상에 이런 쓴맛이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냥 쓰기만 한 게 아니었다.

비렸다. 묘한 비린내가 입천장과 콧속을 온통 휘저었다. 게다가 기괴한 알싸함마저 느껴졌다. 쓰고 비리고 알싸한 맛의 끔찍한 조화가 지옥의 오케스트라처럼 혓바닥을 유린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으읍!'

꿀꺽! 꿀꺽!

가까스로 참으며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토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 모금, 네 모금, 마지막 다섯 모금!

"...코, 콜록! 우... 우욱... 콜록!"

던지듯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오려는 욕지기를 간신히 삼켰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이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종류의 음식이 아니라고. 아예 음식마저도 아닌 '무언가'라고. 이딴 걸 자신한테 먹인 황태자 또한 인간도 아니라고.

그녀는 저주를 퍼붓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저 너머 건너편. 황태자의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황태자가 없었다. 대신 바로 옆에서, 느닷없이,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다 드셨으면 얼른 이거."

삽시간에 불쑥 다가와 있는 황태자. 언제 온 걸까. 내가 약을 마시는 사이에? 지독한 맛을 참느라 눈을 질끈 감은 사이에? 그런데 황태자가 왜... 무언가를 이쪽으로 건네고 있는 걸까. 대체 어째서, 저렇듯 익숙하고도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걸까.

"사탕입니다. 쓴 약을 먹은 직후의 사탕은 국룰이죠. 안 그래요?"

"...."

"자두맛."

"...."

삽시간에 취향 저격을 당한 왕녀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살짝 붉어지고 말았다.

92화. 기만자의 낚시법 (2)

흠칫.

왕녀 아델린은 멈칫했다. 자신의 면전에 내밀어진 물체를 쳐다보았다. 분홍색 사탕. 달콤한 향이 났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자두맛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라키엘을 향했다.

"...."

이거 우연일까. 아니면 이 인간, 설마 내 취향을 파악해둔 걸까.

'후자겠지.'

이쪽의 환심을 사려고. 경계심을 무너뜨리려고. 수작을 걸어대는 것일 터다. 왕녀는 미간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이거, 뭐죠?"

"사탕입니다. 자두맛."

"그러니까 이거, 무슨 뜻이죠?"

"쓴 약을 먹은 뒤엔 달달한 사탕. 그게 국룰이니까요."

"...."

"안 드실 겁니까?"

"...."

아델린은 번민했다.

어쩔 수 없이 약을 먹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결국엔 먹었다. 한데 너무 썼다. 비리고 쓰고 시큼했다. 코끼리 겨드랑이를 핥으면 이런 맛이 날까. 연달아 속이 울렁거렸다. 당장에라도 속의 것을 게워내고 싶었다.

그런데 눈앞에 사탕이 내밀어져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맛이었다.

본능이 외쳤다.

그냥 받으라고.

당장 먹으라고.

녹이지도 말고 아주 그냥 와자작 씹어먹으라고.

반대로 이성이 고개를 저었다.

'미쳤어? 저걸 받게?'

그러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어쩐지 저 황태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기분이 한없이 더러워졌다. 사탕을 내밀고 있는 저 가녀린 손바닥을 당장에라도 찰싹 후려치고 싶었다.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각 테러에서 벗어나고픈 본능. 그럼에도 자존심만은 챙기자고 외치는 이성. 둘 사이에서 맹렬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아델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식은땀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라키엘의 한마디가 그녀의 번민에 결정타를 가했다.

"여기, 청포도맛도 있습니다."

...덥석!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델린의 손이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라키엘이 내민 두 가지 사탕을 낚아챘다. 한 큐에 입에 털어 넣었다.

와그작!

"하아...."

입안 가득 퍼지는 천상의 단맛!

하드코어한 시궁창에 처박혔던 입맛이 구원을 받았다. 대지모신이 앞길을 비추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자두와 청포도에게 설탕신의 축복을. 극락에 한쪽 발가락을 걸친 안도의 미소가 입술 사이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아델린은 깨달았다. 라키엘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흠! 흠! 흠!"

그녀는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빨개진 얼굴빛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흠흠! 마, 마젠타노의 사탕은 엉망이로군요.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맛이라 아주 조금은 기대를 하였는데, 이렇게 수준 이하일 줄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실망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다마다요. 이런 엉망진창인 디저트를 먹어보니 권해주신 식사를 거절하길 잘했다는 생각부터 드는군요."

"하지만 점심을 아직 안 드신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습니다. 격이 떨어지는 음식을 보면 식욕도 함께 떨어지는 편이라서."

"그런가요?"

"네."

"정말로요?"

"네. 확실히."

아델린은 애써 표정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내걸고서 라키엘을 빤히 마주 보았다.

그때였다.

...꼬르르륵?

침묵 속에서 별안간 터진 웅장한(?) 외침. 눈치 없는 그녀의 위장이 밥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

아델린은 굳어 버렸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황태자 라키엘. 그의 눈이 슬쩍 웃고 있음을.

'...크읏.'

어디라도 좋으니까 숨고 싶다. 아니, 저 인간의 면상을 딱 한 대만 투쾅 때려보고 싶다.

그녀는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지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티를 내지 않았다. 조금 더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권해주신 약과 디저트는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벌써 가십니까?"

"네. 제가 여기에 더 있어야 할 이유라도?"

"물론 없지요. 머무르실 숙소는 시종장이 안내할 겁니다. 부디 편히 푹 쉬시길."

"감사합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아델린은 진땀을 털어내듯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오찬장에서 빠져나왔다. 한편으로 내심 다짐했다.

앞으로 이곳 별궁에서 지내야 할 6개월. 그 시간 동안 가급적 저 황태자와 마주치지 말자고. 다시 만나면 저 인간을 잘근잘근 짓밟는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다고.

'후우!'

거친 숨을 내뱉는 그녀의 주먹에 힘줄이 불끈 섰다. 물론 그녀는 까맣게 몰랐다. 지금 품고 있는 다짐이 딸랑 하루 뒤에 무너지게 되리라는 것을.

하루가 지났다.

별궁에 딸린 부속 별채. 그곳의 호화로운 방에서 왕녀 아델린은 낯선 아침을 맞이했다.

"...."

이곳은 적지다. 적들이 득시글거리는 중심부다. 자신은 그런 곳에 내던져졌고, 앞으로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짝! 짜악!

그녀는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양 볼을 거칠게 쳤다. 정신을 무장했다. 호화로운 숙소의 면면에 현혹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본국에서와 똑같이 꽉 짜여진 아침을 시작했다.

별채에 딸린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호위기사들을 사열했다. 아침 훈련으로 땀을 흘렸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뭐지? 몸이 왜 이렇게 가뿐하지?'

뜻밖에도 컨디션이 좋았다. 아주 그냥 날아갈 듯이 몸이 가벼웠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장거리 여행을 마친 다음 날 아침에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제법 피로할 것을 예상했다. 하여 평소보다 훈련 강도를 낮추려 했다. 그런데 컨디션이 너무나 좋았다.

'설마. 어제 먹은 그 약 덕분에?'

불현듯 코끼리 겨드랑이맛 탕약이 떠올랐다. '피로 회복에 좋은 탕약'이라던 황태자의 말도 떠올랐다.

"...."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고작 탕약 한 번 마셨다고 피로가 싹 날아가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훈련에 집중했다. 탕약을 잊고, 황태자를 지웠다.

하지만 훈련 후의 아침 식사를 마주하며 다시금 끔찍했던 전날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식사 후의 디저트와 함께 그 탕약이 제공됐기 때문이었다!

"...치워."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다. 그녀는 기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도망치듯 별채를 나섰다.

훈련 후의 근육 회복을 위한 저강도의 산책을 했다. 마침 정원이 광활했다. 걷기에 좋았다. 마음을 다스렸다.

한데 그러던 도중이었다. 이상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제법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뭐지?'

그녀는 괴상함을 느꼈다.

이곳은 제국의 황태자가 머무르는 별궁이었다. 한데 그런 별궁의 정원을 저런 차림의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니.

'정원 관리사인가? 아닌데. 늙은 노파에 어린아이까지 있잖아. 그렇다고 잡일꾼도 아닌 것 같고.'

그녀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문득,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노파는 절뚝거리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어디가 아픈지 어미의 등에 업혀서 울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중년 사내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즉, 다들 어딘가가 아픈 사람들. 병자들이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별궁 본채가 있는 방향이었다.

"...."

대체 뭘까. 병자들이 왜 별궁 본채로 가는 걸까. 몹시 궁금해졌다. 아델린은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따라갔다. 덕분에 목격하게 되었다.

"...허?"

그것은 매우 기이한 광경이었다.

사람들.

별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수십 명의 환자들이 줄을 서서 본채로 들어갔다. 아델린도 그들과 섞여 들어갔다.

궁금해서.

홀린 듯이.

환자들의 행렬을 지나쳤다.

그 행렬의 끝에 방이 있었다.

'여긴 뭘 하는 곳이기에 환자들이 차례로 들어가는 걸까.'

그녀는 방으로 슬며시 들어갔다.

그리고 목격했다.

"...으음, 간에 열이 차서 그러는 겁니다. 일단 당분간 술을 끊으세요. 기름진 음식을 줄이고, 지나치게 피로해지는 행위도 가급적 삼가야 할 겁니다."

"그, 그렇습니까요, 전하?"

황태자 라키엘이 노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더없이 진지하고도 친절한 표정으로 노인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물론이지요. 그러니 일단 오늘은 뜸으로 기혈을 다스리겠습니다. 처방해주는 탕약은 빼먹지 말고 같은 시간에 꼬박꼬박. 아시겠죠?"

"명심하겠습니다요, 전하."

"그럼 뜸부터 맞으러 갑시다. 자 이쪽으로... 어?"

"...!"

라키엘과 눈이 마주쳤다.

설마 저 인간, 또 어제처럼 이쪽을 농락하는 건 아닐까.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려던 순간이었다.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마치 선수를 치듯.

라키엘이 굳은 눈길로 따지듯 물어왔다. 덕분에 아델린은 당황하고 말았다.

"네?"

"네, 라니요. 여긴 진료실입니다. 진료 접수증 작성했습니까? 줄은 제대로 섰어요?"

"그게 무슨...."

당혹감이 더욱 커졌다.

자신은 왕녀인데. 설마 이름도 모를 허름한 환자들의 줄을 무시했다고 저러는 걸까. 그런 그녀의 생각을 깨부수듯 라키엘의 일침이 꽂혔다.

"지금 제가 장난을 하는 걸로 보입니까? 이곳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곳입니다. 그만큼 평등한 곳입니다.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는 신분도,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까?"

"그럼...."

"여기 들어오고 싶으면 진료 접수증부터 작성하세요. 줄 서서 순서대로. 알겠습니까?"

"...."

꿀꺽.

아델린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뭔가 굴욕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졌다.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왕족. 그런 무개념한 종류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쫓겨나듯 진료실에서 나왔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지는 않았다.

'이대로 떠나면 내가 지는 거 같잖아.'

그건 싫었다.

특히나 황태자, 저 인간에게 이상한 인상만 남기는 굴욕을 겪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를 깔끔하게 만회하고 싶었다.

자신은 그런 사람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야 찜찜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녀는 환자들의 행렬 끝으로 갔다. 진료 접수증이라는 것을 정식으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환자들의 틈바구니에 함께 줄을 섰다. 지루함과 초조함을 동시에 인내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려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정식으로 진료실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입장하자마자 따지듯 말했다.

"자, 절차대로 순서를 지켜서 들어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그런 왕족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까?"

"네. 아까의 경험은 충분히 굴욕적이었으니까요."

"그랬나요. 어쨌건 잘 왔군요. 한 번쯤은 반드시 왕녀님과 진료실에서 진지하게 마주하고 싶었는데."

"...네?"

아델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저게 무슨 소리일까.

의문을 품는 순간이었다.

"제가 왜 당신을 황도까지 불러서 6개월이나 머무르게 한 건지. 진짜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라키엘이 웃음기라곤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93화. 기만자의 낚시법 (3)

"제가 왜 당신을 황도까지 불러서 6개월이나 머무르게 한 건지. 진짜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

웃음기라곤 없는 라키엘의 얼굴. 그 눈빛과 마주한 왕녀 아델린은 멈칫했다.

'날 황도로 부른 이유?'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불안한 마음도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저 부왕과 왕실을 압박한 줄 알았다. 크레모에서의 사건을 빌미로 굴욕을 주려는 건가 싶었다. 한데 자신을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따로 있다니.

'무슨 속셈이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묵묵히 라키엘을 마주 보았다. 따로 꿍꿍이가 있다면 밝히라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 모습에 라키엘은 내심 싱긋 웃었다.

'잘됐네. 이런 기회가 이렇게 일찍 오다니.'

그는 만족감을 느꼈다.

모처럼 왕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어제부터 그토록 원하던 자리였다.

'담석증을 치료해줘야 하니까. 담낭에 가득 차 있을 담석을 없애줘야 하니까. 그러려면 우선 왕녀가 자신의 증상을 자각해야 하니까.'

증상의 자각.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를 제대로 깨닫는 것. 질환이 있음을 인정하고 치료에 임하는 것. 그것이 모든 치료의 첫걸음이라고 라키엘은 생각했다.

'당연하지. 의사나 한의사, 약사가 아무리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려도 환자 본인이 치료 의지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무엇보다도 환자가 스스로 건강해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치료에 임하겠다는 마음가짐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원활한 치료가 가능해진다.

한데 지금 왕녀는? 그 첫 단계가 안 되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담석증은 자각 증상이 거의 없으니까.'

어디 특정한 부위가 무진장 아프다거나. 열이 펄펄 난다거나. 불편해 죽겠다거나. 그런 류의 증상이 거의 없는 것이 담석증의 특징이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한 다리 건너 알고 지내던 웹소설가 백경 씨도 그랬다. 그냥 평범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죽을 것 같은 복통이 뽷! 응급실로 실려가서 검사를 받고 나서야 담석이 담도를 완벽하게 틀어막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던가.

'아마 왕녀도 비슷하겠지. 담석 때문에 생긴 증상이라고는 그저 식사 후에 종종 속이 더부룩한 정도? 그 외엔 딱히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없을 거야. 백경 씨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그게 바로 담석증이 까다로운 점이다. 증상도 모른 채 그냥 있다가, 상태가 심각해져서야 병원에 실려 오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사례를 보자면, 전체 성인 인구 중에 담석을 지닌 사람이 15-20%나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중에 자신이 담석을 지니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거고.'

물론 한국인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왕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담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 한데 다짜고짜 치료를 시작하자고 하면? 치료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코웃음만 칠 것이다.

그래서였다.

'일단은 자신의 병을 자각하는 것부터.'

라키엘은 다짐했다.

오래 기다린 기회. 그걸 붙잡으려 세심하게 준비한 멘트를 혓바닥에 촵촵 올렸다.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 소프트하게 노래하듯 섬세하고 부드럽게 발사했다.

"우선 말씀드리자면, 왕녀님께선 2년 안에 죽을 겁니다."

"...네?"

"농담이 아닙니다."

"네. 농담이 아니라 악담이겠죠."

왕녀 아델린의 표정이 싹 굳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악담이라 여겨도 좋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이건 제국 황실의 직속 첩보부가 알려온 정보에 따라 추론한 결과니까 말입니다."

"뭐라고요?"

"당신의 목숨이 2년도 남지 않았다는 거, 황실의 직속 첩보부가 보고한 최고 등급의 정보라는 뜻입니다."

라키엘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황실의 직속 첩보부?

최고 등급의 정보?

물론 모조리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뻔뻔한 티타늄 철판을 얼굴 가득 3중 엠보싱으로 깔고서 말했다.

"왕녀,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리 황실의 첩보부는 세상의 거의 모든 곳에 눈과 귀가 닿아 있습니다. 앙부아즈의 왕실도, 당신의 일거수일투족도 예외가 아니지요. 그런 덕분입니다. 당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질환의 사소한 징후를 우리가 먼저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었던 건 말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당신의 몸속에서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심각한 병이 자라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병 때문에 제가 2년 안에 죽는다는 건가요?"

"예."

"하. 참."

왕녀 아델린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가 산책 중에 우연히 발길이 닿은 이곳이었다. 궁금해서 들어왔다가 분위기에 휘말려 줄을 서고, 황태자와 마주 앉게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황태자를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던 자신이었다. 뜻밖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환자들. 헐벗은 이들을 대가 없이 치료해주는 사람일 줄은 몰랐으니까.'

실은 마젠타노의 황태자에 대한 소문을 일찌감치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을 치료한다고 했더랬다. 물론 그저 조금 특이한 취미활동 정도의 수준이겠거니 싶었다.

한데 오늘 본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본격적이었다. 아니, 앙부아즈의 어떤 유명한 의사도 이렇게 대규모의 의료 시설을 운영하는 이는 없었다.

뜻밖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황태자가 색다르게 보였다. 그가 꺼내려는 말이 무엇일지.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황도로 불렀는지. 이제야 제대로 들어볼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한데 막상 들어보니 실망스러웠다.

"고약하군요, 당신은."

아델린의 목소리가 한층 싸늘해졌다. 라키엘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진실은 때론 고약한 법이니까요."

"첩보부라니요. 그들이 제공한 정보 속에 제가 자각도 못 한 심각한 병의 증상이 있다니요. 황태자께서는 저를 바보로 여기시나 봅니다?"

"전혀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가 믿을 줄 아셨는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절 농락하고 싶은 건가요?"

"농락이 아니라 치료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 그런 말이 농락인 건 모르시는지?"

"그거야 왕녀께서 제 말을 전혀 믿지 않으시니 농락으로 받아들이는 거고 말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그럼 믿게 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라키엘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물었다. 그제야 아델린은 깨달았다. 황태자 라키엘, 그가 아까부터 시종일관, 내내 진지한 눈빛이었음을.

"...대체 어떻게 믿게 해주겠다는 거죠?"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라키엘이 자신 있게 말했다. 자고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자각 증상이 없는 병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방법은 이게 최고지. 직접 두 눈으로 보게 해주는 거.'

세상만사가 그렇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다. 부정하고 싶은 사실도 두 눈으로 보면 인정하게 된다.

가령 예를 들자면?

달랑 세 자리 숫자만 찍힌 통장 잔고가 그러하다. 힘차게 수직으로 파란색 번지점프를 시전하는 보유 주식시세가 그러하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왕녀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지닌 담석. 그걸 부정할 수 없도록 명백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도록 확실하게.

"뽀복아?"

라키엘이 외투 안주머니를 향해 물었다. 안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뽀복!"

주먹 크기의 덩치. 동글동글한 외모. 하늘거리는 불꽃 지느러미. 약품 성분 분석 담당인 불사조 개복치 환상종, 뽀복이였다.

라키엘이 뽀복이에게 말했다.

"요즘 좀 심심했지? 모처럼 할 일이 생겼는데."

"뽀보복? 뽀복!"

"아니아니. 오늘은 뭘 먹는 건 아니고."

"뽀복?"

"일단 환자분께 인사부터 하자. 이쪽은 왕녀 아델린. 오늘 진료를 받을 환자셔."

"뽀보복?"

뽀복이가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자신을 향한 경악의 시선을 깨달았다.

"뽀보복? 뽀복?"

"...."

왕녀 아델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과 라키엘 사이에 불꽃 지느러미를 하늘거리며 동실동실 떠 있는 뽀복이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안녕?"

"뽀복! 뽀보복!"

뽀복이가 반가워하며 지느러미를 내밀었다. 아델린은 얼결에 뽀복이와 악수까지 나누었다.

라키엘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쪽은 뽀복 경입니다. 제 별궁 한의원의 약품 성분 분석 담당자죠."

"약품... 성분 분석이요?"

"예.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역할을 맡을 예정입니다."

"그게 무슨...."

아델린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황태자가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가 죽을 거라며. 자각 못 하는 병을 가지고 있다며. 그래서 악담하지 말라고 따졌는데. 증거를 직접 보여주겠다며.'

그런데 왜 난데없이 처음 보는 환상종을 꺼내서 소개해 주는 걸까. 이 환상종에게 무슨 역할을 맡기겠다는 걸까.

짐작되는 곳이 없었다.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뽀복아? 시작하자."

"뽀보?"

"알잖아. 그거."

"뽀!"

라키엘의 의미심장한 눈빛. 뽀복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꽃 지느러미를 최대한 활짝 펼쳤다.

"뽀보복!"

화아악-!

뽀복이의 지느러미가 16:9의 반듯한 비율로 펼쳐졌다. 마치 허공에 태블릿을 띄워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델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녀가 느껴야 할 놀라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손을 좀."

라키엘이 한 걸음 다가섰다. 아델린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아델린이 깜짝 놀랐다.

"...!"

찰싹!

그녀가 반사적으로 라키엘의 손을 쳐냈다. 라키엘을 노려보는 눈길 또한 살벌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실례했습니다. 그래도 검사를 위한 자료는 방금 다 수집됐으니 안심하고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네?"

아델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사를 위한 자료?

수집이 다 됐다고?

뭐가?

어떤 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너무나 알쏭달쏭했다. 이 황태자라는 인간,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다. 아니, 어쩌면 겉으로만 멀쩡한 미친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했다.

드르륵!

거칠게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황태자의 괴상한 장단에 맞춰주기 싫었다.

당장 진료실을 나서리라. 붙잡아도 뿌리치리라. 다시는 상종도 하지 않으리라. 행여나 멀리서 보이더라도 기필코 무시하리라.

다짐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뽀보보보보보보보보!"

별안간, 뽀복이가 요란한 소리로 기합성을 외쳤다. 동시에 16:9의 비율로 반듯하게 펼쳤던 불꽃 지느러미에 변화가 생겨났다. 불꽃이 현란하게 일렁거렸다. 마구잡이로 색상이 변화했다. 이윽고 뭔가를 비추듯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다란 모양의 주머니였다. 주머니가 주기적으로 꿈틀거렸다. 그 속에 잔뜩 담긴 갈색 구슬도 보였다. 온통 울퉁불퉁한 형상의 못생긴 구슬이었다.

'저게 무슨.'

아델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는 이쪽에게 병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 보여주는 저 이상한 영상은 대체....

"왕녀님, 이게 바로 CT로 촬영한 당신의 담낭입니다."

"...네?"

아델린이 멈칫했다.

라키엘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문득, 오늘의 이 CT 촬영을 위해 며칠 전의 자신이 야물딱지게 준비한 것들을 떠올렸다.

94화. 체외충격파 치료법 (1)

며칠 전 저녁. 라키엘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왕녀 아델린에 대한 고민이었다.

"후우...."

슥삭삭!

나름 떠오르는 방법들을 종이에 슥삭삭.

쓰고, 또 쓰고. 정리하고, 궁리하다가. 종이를 확 뭉쳐서 버리고. 또 끄적거리며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밤이 깊었다. 그의 고민도 함께 깊어졌다. 자정이 지나며 몸이 피로해졌다. 오장육부의 투덜거림이 귓가를 콕콕 찔러왔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불규칙한 수면 패턴에 불만을 표시합니다.]

[심장 : 야? 안 자냐?]

[허파 : 후우... 프흐흐....]

[대장 : 요즘 수면 복지 개판이지 말입니다. 피곤해 죽겠네.]

[간장 : 아 퇴근하고 싶다!]

[위장 : 이럴 거면 인생도 퇴근하라고 아ㅋㅋㅋ]

"...."

아주 그냥 아우성이었다.

처음엔 무시하려 했다. 그러면 알아서 조용해지겠거니 싶었다. 한데 녀석들의 소란은 잠잠해지긴커녕 더 심해지기만 했다.

딩동!

[오장육부가 파업을 모의합니다]

[심장 : 비상사태! 심박수 강약중강약! 메이데이! 메이데이! 출력이 떨어집니다! 심호흡 전개!]

[허파 : 허! 파! 허! 파!]

[대장 : 괄약근 전면 개방!]

[간장 : 간 기능 사출!]

[위장 : 융털돌기 발사!]

"...니들 뭐하냐."

결국, 못 참고 물었다. 대답이 곧바로 띠링 돌아왔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행동을 노골적으로 규탄합니다.]

[심장 : 뭐하긴. 이렇게라도 해야 네가 쉴 거 아니냐.]

[허파 : 허허허... 파하....]

[대장 : 우리 전부 졸리지 말입니다.]

[간장 : 잠도 안 재우고 굴릴 거면 야근 수당이라도 주든가.]

[위장 : 야식! 결단코 야식!]

"...."

녀석들의 불만이 상당히 쌓인 듯했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쯧. 그럴 법도 하네. 최근엔 황제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까.'

뇌졸중으로 쓰러진 황제를 돌보느라 솔직히 힘들었다. 언제 어떤 사태가 생길지 몰라 거의 온종일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잠도 쪼개서 잘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피로에 전 채로 보낸 최근이었다.

한데 오늘은 고민에 휩싸인 채로 자정이 넘도록 날밤을 새우고 있으니, 오장육부가 노골적으로 항의할 만했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래서 다들 불만이었던 거야? 그런데 어떡하냐. 나도 어쩔 수가 없는데.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풀려야 편하게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딩동!

[오장육부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심장 : 고민?]

"어."

아마도 오장육부를 대표하여 총대를 메고 나선 듯한 심장. 녀석의 물음에 대답했다.

"사실은 오늘 앙부아즈 왕국에서 파발이 왔거든. 내가 저쪽 국왕한테 보냈던 서신에 대한 대답이었어."

[심장 : 대답이 뭐였길래?]

"내가 요청한 대로 왕녀를 보내겠다더라. 아마 사흘쯤 후에 여기 도착할 거래. 그래서 고민이야."

딩동!

[오장육부가 반색합니다.]

[심장 : 고백하려고?]

[허파 : 허! 파학!]

[대장 : 올ㅋ 융털돌기가 웅장해지지 말입니다.]

[간장 : 상남자 공개 프러포즈 가즈아!]

[위장 : 첫 만남부터 옥상에서 왕녀야 사랑흐애 샤우팅 가즈아!]

[오장육부가 당신의 모쏠 탈출 프로젝트를 적극 격려하며 1,0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500]

"...아니, 아니. 고백 같은 거 아니고."

라키엘은 재빨리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사실은 왕녀가 아프거든. 그 여자가 죽으면 대전쟁이 일어날 거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 치료를 해주고 싶은데. 자기가 아픈 걸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게 할까 고민 중인 거야. 그래야 치료에 협력할 거니까."

[오장육부가 실망합니다.]

[오장육부가 방금 후원한 HP 환불을 요구합니다.]

"환불은 개뿔."

라키엘은 콧김을 풍 뿜어냈다. 오히려 얼굴 가득 철판을 깔며 오장육부에게 요구했다.

"어쨌건 그게 고민인데. 일찍 자고 싶으면 너희도 날 좀 돕자. 어디 좋은 방법 없을까?"

[오장육부가 당신을 가자미눈으로 째려봅니다.]

"아, 좀. 고민이 풀려야 나도 잘 거고, 너희도 쉴 거 아니냐."

녀석들을 향해 말했다. 같이 고민하자고. 상담 좀 하자고. 대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딩동!

[오장육부가 회의를 마쳤습니다.]

[심장이 당신에게 회의의 결론을 알려줍니다.]

[심장 : 그냥 꽁꽁 묶어 놓고 강제로 치료하면 안 돼?]

"...."

[심장 : 치료해야 한다며. 그냥 강제로 건강하게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거든."

[심장 : 왜?]

"그런 식으로 치료했다간 오히려 그 여자가 개빡쳐서 대전쟁 일으키겠다. 내 생각엔 그게 더 감당 안 될 거 같은데."

[심장 : ....]

심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라키엘이 물었다.

"그러니까 묶어두고 치료하니 마니 하는 이상한 의견 말고. 좀 참신하고 괜찮은 방법 떠오르는 거 없냐?"

[심장 : 어쨌건 왕녀가 치료에 협조해야 한다는 거지?]

"그렇지."

[심장 : 그럼 좋은 방법이 있는데.]

"뭔데."

이번엔 제대로 된 방법일까. 라키엘은 기대감을 품었다. 심장의 대답이 돌아왔다.

[심장 : 물을 쓰자.]

"뭐?"

[심장 : 물은 만능 특효약이잖아. 살을 빼고 싶으면 물을 마시면 되고, 피부가 안 좋으면 물을 마시면 되고, 옷에 피가 묻어도 찬물에 담가두면 되고.]

"그게 왕녀랑 무슨 상관이야?"

[심장 : 왕녀를 물에 담가두면 치료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을까.]

[허파 : 허... 푸흡! 첨벙첨벙! 허풉! 허푸풉!]

[대장 : 이거 레알이지 말입니다. 분노조절장애도 코에 물 몇 번 부어주면 분노조절 장인 된다던데 말입니다.]

[간장 : 서울대생의 99.9%도 매일 물을 마신다더라.]

[위장 : 키야. 물은 정답을 알고 있구나.]

[대장 : 근데 형님들? 조용한 사람을 물에 넣으면 오히려 시끄러워지던데 말입니다?]

[위장 : 오래 안 담가서 그래!]

"...이런 x발."

라키엘은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진한 빡침을 느꼈다. 오장육부를 향해 째릿한 눈빛을 던지며 으르렁거렸다.

"부탁인데, 나 지금 진지하거든?"

[심장 : 우리도 진지한데.]

"그래서 꺼낸 대답이 물고문이냐."

[심장 : 싫으면 진맥 스킬이라도 성장시켜 보든가.]

"뭐?"

라키엘은 멈칫했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진맥 스킬을 성장시켜 보라니. 심장의 조언이 이어졌다.

[심장 : 왕녀한테 자기 증상을 믿게 해주고 싶다며. 그럼 귀찮은 설명은 건너뛰고 직접 보여주는 게 최선 아닌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라키엘은 되물었다.

"그럼 설마, 진맥 스킬을 성장시키면 그걸 보여줄 수 있다는 거야?"

[심장 : 해보면 알겠지ㅋ]

"...."

그는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대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뭔가 있다는 것을.

'아무래도 그냥 꺼낸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문득, 두 번째 환상종인 뽀복이를 뽑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도 진료와 관련된 고민에 빠졌던 자신이었다. 그때도 오장육부가 비슷한 조언을 했더랬다. 환상종을 뽑아보라고. 이쪽이 원하는 능력을 갖춘 환상종을 대기실에서 본 적이 있노라고.

하여 자신은 그 조언에 따라 환상종 뽑기를 시도했고, 뽀복이를 뽑았고, 당시의 고민을 말끔히 해결했지 않았던가.

"...."

어쩐지, 이번에도 비슷할 것 같다.

'한번 해볼까.'

진맥 스킬을 성장시키면 뭔가 새로운 기능이 생기지 않을까.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손해 볼 일은 없을 듯했다. 어차피 주구장창 써먹을 진맥 스킬이니까. 일단 성장시켜두면 계속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니까.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해보자.'

라키엘은 결심했다. 진맥 스킬 정보창을 열었다.

딩동!

[스킬명 : 진맥 Lv. 6]

[대상의 맥을 짚어 건강 상태를 진단합니다. 진맥 결과는 <종합검진표>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이 일깨운 오장육부가 환자의 같은 부위 오장육부와의 상담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환자의 병증을 더욱 자세히 진단할 수 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300]

[현재 보유 중인 HP : 2,500]

"...."

그동안 별궁 한의원에서 열심히 진료에 매진한 덕분에 진맥 스킬 레벨이 제법 올라 있었다.

마침 HP도 충분했다. 그는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스킬 레벨업> 버튼이 그곳에 있었다.

딩동!

[진맥 스킬 레벨업에 300 HP를 투자합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딩동!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진맥 Lv.7]

레벨이 올랐다.

하지만 별다른 추가 메시지는 없었다. 새로운 옵션이 생성되었다거나 하는 언급도 없었다. 그저 레벨이 올라서 변한 것이라고는....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350]

...이라는 딱 한 줄이 다였다.

"쓰읍."

역시 레벨업 한 번으로는 안 되는구나.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갈 데까지 가보자.'

탁! 타다닷!

스킬 레벨업 버튼을 연달아 선택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HP가 쭉쭉 소모되었다. 그만큼 진맥 스킬 레벨이 상승했다.

7레벨에서 8레벨로.

8레벨에서 9레벨로.

10레벨을 넘어서.

총 2,000 HP를 소모하는 순간, 진맥 스킬이 11레벨이 되었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상념을 일깨우는 소리.

고막을 숑숑 찔러오는 알림음에 라키엘의 의식이 현재로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당황한 왕녀 아델린의 모습이 보였다. 몹시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향하는 곳. 그곳에 뽀복이가 동실동실 떠올라 있었다. 가슴지느러미 대신 돋아난 커다란 불꽃 날개를 16:9의 아름다운(?) 비율로 펼치고서. 화면 가득 검사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전 이쪽이 경혈 스캐닝과 잠깐의 손목 터치로 검사한 왕녀의 담낭. 그렇게 촬영한 CT 검사의 결과물이었다.

파츠즈즈즈즈!

일렁이며 타오르는 불꽃 지느러미.

그 화면에 괴상한 주머니가 있었다. 주머니 속에 가득한 갈색 구슬도 보였다. 그걸 보자 며칠 전, 진맥 스킬을 중급으로 올린 직후에 확인했던 메시지가 생각났다.

[진맥 스킬 레벨이 11에 도달하였습니다.]

[진맥 스킬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초급 Lv.10 -> 중급 Lv.1]

[당신은 수많은 경험과 포인트 투자를 통하여 진맥 스킬에 한층 능숙해졌습니다. 이제 당신은 진맥 스킬을 통해 환자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 그 결과를 환자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스킬 등급 상승에 따라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CT 출력 -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진단한 결과를 외부의 화면으로 송출하여 환자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단, 외부의 화면은 일정하게 밝혀진 광원을 필요로 합니다.]

...라고 하였던가.

그런 덕분이었다.

지금, 왕녀에게 본인의 담낭 상태를 어떠한 조작도 없이, 1그램의 포샵조차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저게... 제 담낭의 모습이라고요?"

"예."

왕녀가 물어왔다.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이 되시면 본인의 명치 오른쪽을 꾹 눌러보시지요."

"...."

여전히 이쪽이 농간을 부린다고 여기는 걸까. 왕녀가 잠깐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손을 들었다.

꾸욱!

그녀의 손길이 명치 오른쪽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뽀복이가 지느러미 화면에 띄워둔 담낭 영상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꿀렁!

담낭 한쪽이 찌그러(?)졌다. 왕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그녀가 손을 떼었다. 그러자 영상 속의 찌그러진 담낭도 다시 제모습을 찾았다.

꿀러덩!

"...."

그녀의 얼굴에서 의심이 빛이 아주 조금, 흐려졌다. 그녀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꿀렁, 명치를 눌렀다가. 꿀러덩, 떼었다가. 그때마다 영상 속 담낭이 어김없이 찌그러졌다가 제 모양으로 돌아왔다.

"...."

왕녀가 침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직감했다.

'된다. 넘어오고 있어.'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백 마디의 설명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 지금이 바로 그러하다. 왕녀가 신기한 듯, 경악한 듯, 자신의 명치를 계속해서 눌러보고 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 지금이 기회다. 그는 혓바닥을 촵촵 적셨다. 준비된 멘트를 차곡차곡 발사했다.

"놀라셨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자신의 장기를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건 진실입니다."

"...."

"환상종이 지닌 힘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왕녀님의 담낭과 내부를 관찰할 수 있고, 그 안에 가득 담긴 담석도 확인할 수 있는 거지요."

"설마 이게...."

"예. 아까 말했던 담석입니다. 저 덩어리들이 언젠가는 왕녀님의 담관을 틀어막을 거고 말입니다."

"그래서 죽을 거라는 건가요? 제가?"

"예."

"...."

"이제는 어째서 제가 당신을 치료해주려는지 궁금해지셨을 겁니다. 맞죠?"

"네. 솔직히."

아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정말로 그랬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설령 제가 아픈 곳이 있다 한들, 황태자께서 굳이 왜 저를 치료해 주겠다는 거지요?"

과연 어떤 이득이 있기에 황태자가 이러는 걸까. 라키엘의 대답은 그녀의 짐작을 뛰어넘어 있었다.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평화요?"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왕녀 당신이 건강한 몸으로 앙부아즈의 왕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 황가와 귀측 왕실의 미래가 평화로워질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불렀습니다. 당신을 설득하고 싶습니다."

나름 진심을 담았다. 포심 패스트볼의 시원한 궤적으로 직구 승부를 꽂았다.

"한 번만, 저를 믿고 치료에 협조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아델린은 황태자를 마주 보았다.

이쪽을 쳐다보는 황태자의 눈빛. 진지하고 진솔했다.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고.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라고. 호소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럼, 만약 제가 치료에 협조하겠다고 대답을 한다면, 황태자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저를 치료할 생각이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진중한 눈길로 황태자를 마주 보았다. 황태자 또한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건 간단합니다."

"네."

"왕녀께서는 수준급의 격투가이시지요?"

"네?"

"그럼 주먹, 정권으로 마나를 쏘아낼 수 있으시겠지요?"

"아, 네. 조금은."

"역시. 참으로 잘됐습니다."

"네?"

아델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잘됐다니?

대체 뭐가?

그녀가 아리송한 의문을 떠올리는 순간. 라키엘이 온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내려놓고 해답을 찾은 듯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왕녀님의 그 정권으로 명치에 셀프샷을 치면 되는 거라서 말입니다."

"...네에?"

아델린의 동공이 진도 10.0의 팝핀을 추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더욱 생긋 웃었다. 동시에 그는 떠올렸다.

'왕녀가 쏘는 기파와 내 아스라한 심법. 두 가지가 있으면 할 수 있어.'

구현할 수 있다.

자신 있다.

'체외충격파 치료. 체내의 결석을 깨는 데는 이게 최선이니까.'

라키엘의 미소에 자신감이 배어났다.

95화. 체외충격파 치료법 (2)

"왕녀님의 정권으로 명치에 셀프샷을 치면 되는 거라서 말입니다."

"...네에?"

왕녀 아델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 이 인간,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야?'

셀프샷?

명치를?

스스로 치라고? 그러면 담낭 속의 담석이라는 게 치료될 거라고?

"...."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도 잠깐은 믿으려 했는데. 역시나 고약한 농담이었던 거구나. 끝까지 이쪽을 농락하려는 거였구나.

라키엘을 향해 가까스로 생겨나려던 그녀의 신뢰감이 짜게 팍 식었다. 아니, 식으려는 순간이었다. 라키엘이 그녀의 실망감 그래프에 야물딱진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제부터 저는 왕녀님의 담석 치료를 위해 체외충격파 치료를 할 겁니다."

"체외충격파라니요?"

"왕녀님이 정권으로 쏘아 내는 마나에 제 아스라한 심법을 덧씌울 겁니다. 마나 충격파의 경로를 유도할 겁니다. 그러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

무슨 소리일까, 저게. 왕녀가 아리송함에 빠졌다. 라키엘의 설명이 이어졌다.

"왕녀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아스라한 심법은 마나를 흡수하거나 유도하는 데에 특화된 특성을 지녔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왕녀님께서 본인의 명치를 향해 약간의 마나를 발출하면 제가 그걸 유도할 겁니다."

"유도한다니. 어디로 말이죠?"

"왕녀님의 담낭 속 담석으로요."

라키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마나를 유도해서 담석을 정확하게 때리면 된다. 그렇게 수차례만 타격하면? 담석이 뽀각 부서질 것이다. 그것이 체외충격파치료(ESWT : Extracorporeal Shock Wave Therapy)의 원리였다.

'체외충격파. 어깨 통증이나 요로결석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병원에서 한 번은 접해보는 단어지.'

사실 체외충격파 치료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그 시초는? 세계대전 무렵이었다.

전쟁터에서, 폭약에 직접 신체 손상을 입지 않은 병사가 폭발의 충격파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람들은 그 원리를 여러 분야에 써먹을 궁리를 시작했다. 의료 분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과학자들이 여차저차 어기영차. 마침내 독일 국방부의 지원을 받던 과학자가 인체실험에 성공을 했다. 1984년에 미국 식품의약청에서 승인을 받았다. 그 기술을 다듬고 개량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체외충격파(ESWT) 치료였다. 말 그대로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생성한 충격파를 신체 내부의 특정한 국소부위에 전달하여 결석을 깨거나, 신체조직의 회복을 돕는 치료법이었다.

'그리고 그거, 여기서도 가능해. 데미안을 데리고 연습도 해봤으니까.'

왕녀가 황도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데미안을 불러다가 연습도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커다란 돼지고기 덩이를 두고 실험했지. 데미안에게 고깃덩이를 향해 마나 충격파를 쏘게 했어. 나는 그걸 아스라한 심법으로 유도했고. 고깃덩이 뒤쪽에 붙여둔 5mm 크기의 완두콩에 마나를 충돌시켰지.'

처음엔 어려웠다.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마지막엔 보란 듯이 완두콩만 뽀갰다. 앞에 놓인 고깃덩이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희미한 멍조차 들지 않았다. 깔끔한 성공이었다.

'성공의 관건은 섬세한 컨트롤이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서 마나를 끝까지 유도하는 게 중요하더라고.'

마치 뉴클리어 발사를 유도하는 테랑 종족의 고스트처럼. 혹은 신호위반 차량을 생활불편신고 앱에 정확하게 신고해서 벌금 딱지를 알뜰하게 보내주는 것처럼.

마나를 정확하게 끌어올 자신이 있었다. 담석을 제거해줄 확신 또한 있었다. 그러한 자신과 확신을 담고서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담석, 제거될 수 있습니다. 건강해지실 수 있습니다."

"...."

아델린은 얼떨떨함을 느꼈다.

나, 이미 충분히 건강한데. 매일 아침마다 15킬로미터씩 달리는데. 이 자리에서 300킬로그램 스쿼트도 가능한데. 지금 당장 아무 산적 소굴에나 던져놓아도 그런 곳 따위, 혼자서 가볍게 토벌할 자신도 있는데.

하지만 라키엘의 뻔뻔한 설득은 계속되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희망을 놓기에도 너무 이릅니다."

"...."

"세상엔 아직 아름다운 것들이 많습니다."

"...."

"그러니 제발."

"제발, 어쩌라는 거죠?"

"체외충격파 치료, 일단 받아보시죠."

"그러니까, 황태자께서 말하신 대로 제 명치를 스스로 치라는 건가요?"

"예."

"...."

너무나 당당하고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아델린은 쉽게 휘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기로 했다.

"만약 제가 순순히 그쪽의 요구에 응하여 체외충...."

"격파 치료입니다."

"네. 제가 체외충격파 치료에 응하면 말입니다. 황태자께서도 제 요구를 한 가지는 들어주셔야겠는데요."

"협상입니까?"

"네."

"뭘 원합니까?"

"담석이라는 거, 다 치료가 되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죠. 6개월의 기한이 채워지지 않아도 말입니다."

"좋습니다."

라키엘은 듣자마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린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너무 쉽게 동의하시는데요?"

"저야 왕녀님의 담석만 치료가 된다면 더 오래 붙잡아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

"그럼 치료에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네."

뭔가 말려든 느낌이다. 아델린의 미간이 더욱 찡그려졌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뭘 하면 되죠?"

"일단 뒤돌아서시죠."

"이렇게요?"

아델린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자리에서 돌아섰다. 황태자가 뒤로 접근해 왔다. 이쪽의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움찔!

"제 지시 없이 움직이지 마시고요. 잠깐만 숨 참으세요. 일단 담석 위치와 크기부터 자세히 파악해야 하니까."

"...."

"됐습니다. 숨 쉬시고. 자, 그럼 오른손 주먹을 쥐어보세요."

"이렇게 말인가요?"

"네. 주먹을 명치 오른쪽에 갖다 대어 보시죠."

"...여기?"

"조금 아래쪽으로. 약간만. 살짝 왼쪽. 네. 됐습니다."

"...."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아델린은 자신의 명치 오른쪽에 주먹을 갖다 댄 채로 한숨을 삼켰다. 괜히 이상한 노릇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한 건 아닌가 싶었다. 시간 낭비 같았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책을 읽거나 훈련을 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그녀는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지는 회의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이제부터 아까 말씀드린 셀프 명치샷을 할 겁니다. 우선 그 전에, 명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라키엘의 당부가 이어졌다.

"정권으로 쏘아 내는 마나를 아주 좁게 만들어야 합니다. 바늘처럼 단단하고 뾰족하게. 한 점에 집중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

"할 수 있겠어요?"

"네. 물론."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가슴 속 마나하트가 눈을 떴다.

쿠우우우...!

앙부아즈 왕조의 비전 심법이 포효했다. 묵직하고도 빈틈없이 견고한 성질의 마나가 혈맥을 따라 움직였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빨라지며. 성큼성큼. 한층 빠르게. 내달리다가.

쿠그극!

아델린의 주먹에 힘줄이 돋아났다. 정권 가득 마나가 실렸다. 그 순간, 라키엘의 신호가 들려왔다.

"준비됐으면, 쏘세요."

대답은 필요 없었다.

투쿵!

첫발이니까 조금 약하게. 아직은 황태자를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까 나름 조절을 해서. 자신의 명치를 향해 마나를 쏘아냈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흡!'

호흡도 조절했다. 깊이 들이마신 호흡으로 복부의 모든 면을 크게 밀어냈다. 코어의 근육을 모조리 활성화시켰다. 자신의 명치에 가해질 엄청난 타격. 그걸 최대한 버텨내기 위한 준비였다.

'내 타격력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나름 조절해서 아주 살살 치긴 했다. 그럼에도 이건 결코 만만하게 볼 타격이 아니었다. 제대로 맞으면 숨이 턱 막힌다. 운이 나쁘면 갈빗대가 부러진다. 하여 그녀는 각오했다.

'이건 맷집 훈련이야.'

꿋꿋하게 버티자고 다짐했다. 독한 마음가짐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

뭘까.

이 스펀지를 친 듯한 기분은. 아니, 허공에 주먹질을 한 느낌은.

'대체 뭐지?'

복부에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 정권으로 마나를 발출했는데. 그게 명치로 정확히 들어왔는데.

아프지 않았다.

해머로 후려치는 듯한 충격? 없었다. 내부가 진탕되며 속이 뒤집히는 감각? 그것도 없었다. 마치, 자신이 발출한 마나가 어딘가로 흡수되어 종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

참으로 기이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좋습니다. 잘 쏘셨습니다. 앞에 있는 뽀복이, 보이시죠?"

"...."

황태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도동실 떠올라 있는 환상종이 보였다. 불꽃 지느러미 화면을 활짝 펼치고 있는 뽀복이였다. 그 화면을 통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까부터 비춰주던 자신의 담낭. 그 속에 있는 수많은 담석. 그중의 하나가 확대되어 보였다.

한데 담석 옆구리에 아까는 없던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큰 균열은 아니었다. 아주 작은, 실낱같은 균열이었다.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담석에 균열이 생겨난 게 보일 겁니다. 방금 발출한 마나가 저길 정확히 때렸거든요."

"...."

정말일까.

"그러니 이번에도 방금과 똑같이. 쏘세요."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황태자의 말대로 했다. 그녀의 주먹에 한결 힘이 들어갔다. 아까보다 많은 마나를 묵직하게 실었다. 발출했다.

투쿡-!

이번엔 어떨까.

궁금했다.

기대했다.

역시나 복부에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대신 뽀복이의 지느러미 화면 속 담석이 크게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에 거세게 얻어맞듯이.

...카득!

균열이 아주 조금, 커졌다.

"...."

이제는 확실하다. 황태자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좋습니다. 잘하고 있어요. 계속 갑시다."

"...."

그렇다면 기꺼이.

아델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결 묵직한 마나를 실었다. 자신의 명치를 향해 연달아 내쏘았다. 그럼에도 아무런 타격이 느껴지지 않는 감각에 놀라며. 화면 속에서 점점 커지는 담석의 균열을 바라보며. 이러한 진귀한 경험에 신기해하며.

내쏘고, 또 쏘았다.

투컥! 투훅!

몇 번이나 명치를 타격했을까. 몇 번이나 감탄을 삼켰을까. 정확히 세지는 않았다. 대략 스무 번은 넘게 내쏜 것 같았다. 그 순간, 마침내 화면 속 담석이 박살 났다.

콰즉...!

'후우!'

해냈다.

아델린은 말로는 표현 못 할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뱃속에 생겨나 있던 저 흉측한 덩어리를 박살 냈다는 쾌감. 그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뜻밖의 경험이 그녀를 고양시켰다.

큰 성취감이 느껴졌다. 뒤에서 들려오는 황태자의 칭찬도 그러한 기분을 더욱 북돋아 주었다.

"자, 됐습니다. 보시다시피 담석이 제대로 부스러졌습니다. 처음치고는 정말 잘하셨어요."

"그런가요?"

"예. 저 부스러진 조각들은 담관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출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오늘 치료는 여기까지로 하겠습니다."

"네?"

...벌써?

끝이라고?

아델린은 까닭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기왕 시작한 거, 담석 한 개만 더 깨보면 안 될까 싶었다. 더 하자고. 그냥 오늘 다 깨보자고. 황태자에게 말하려 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발견할 수 있었다.

"...어?"

황태자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얼굴 가득 식은땀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마치, 당장 쓰러지기 직전인 사람처럼.

'...어째서? 왜?'

처음엔 놀랐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자신의 명치를 향해 발출했던 마나의 기파. 그럼에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았던 자신. 그래서 충격파가 말끔하게 사라졌다고 여겼는데.

과연, 정말로, 사라졌던 걸까.

"...."

그녀는 흠칫했다.

사라진 게 아니다. 사라질 수가 없다. 불가능하니까. 하다못해 손바닥으로 평범하게 책상을 내리쳐도 그 충격력이 주위로 퍼지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자신이 뱃속에서 아무런 충격력을 느끼지 못했다면? 담석을 후려치며 생성된 충격력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사라진 걸까.

사라진 게 아니라면?

어디로 갔을까.

"설마, 당신...."

삽시간에 찾아온 무거운 깨달음. 그녀의 눈동자가 경악에 휩싸여 흔들렸다.

96화. 정성과 신뢰 사이 (1)

착각했다.

내가 잘못 알았다. 아니,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그쯤은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는데. 뻔한 사실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신, 설마...."

왕녀 아델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라키엘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했다. 식은땀 가득한 얼굴 아래, 입술마저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째서?

왜?

보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나 때문에.'

아니, 나 대신 충격파를 감당하느라고. 명치를 향해 발출했던 마나가 주었던 충격. 담석을 수차례 때리고 깨부수었던 충격. 그 충격의 여파를 모두 라키엘이, 황태자가 받아내고 감당한 거였다.

'충격파가 사라진 게 아니었어.'

실은 그게 당연했다.

단순히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기만 해도 그 충격이 주위에 번지는데. 그런데 뱃속으로 발출한 강력한 마나의 여파가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사라질까.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발생한 충격은 반드시 어딘가로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그 충격을 전부 황태자가 감당하느라, 사력을 다해서 버텨내느라 이런 모습이 된 거다.

"황태자 당신, 괜찮아요?"

아델린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라키엘은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쓴웃음만 입술 끝에 희미하게 내걸었을 뿐.

'이거... 생각보다 엄청나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머릿속이 온통 윙윙 울렸다. 피부는 차갑고, 가슴은 쿵쿵 뛰었다. 어지러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데미안과의 연습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왕녀의 마나... 이렇게까지 엄청날 줄은 몰랐는데.'

아스라한 심법으로 왕녀의 마나를 끌어들였다. 담석을 정확하게 때리게 유도했다.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마나와 담석이 부딪치며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충격파가 문제였다. 그걸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충격파가 번지면 담낭과 주위의 내장 조직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간, 췌장, 십이지장, 복막까지. 다른 애꿎은 장기에 타격이 가면 곤란했다. 무조건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였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충격파를 끌어들였다. 흡수했다. 자신의 마나써클로 유도했다. 감당하고, 중화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쿨룩, 콜록!"

한 번 흡수할 때마다.

한 대씩 감당해낼 때마다.

몽둥이로 가슴을 때리는 듯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강맹한 마나의 여파가 가슴을 통해 전신의 혈맥으로 번졌다. 후려쳤다. 온몸이 아프도록. 기절할 만큼이나.

"황태자님? 이봐요?"

왕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만족스러웠다.

"다행...."

힘겹게 웃었다.

왕녀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대체 왜? 어째서?"

이쪽이 한 짓(?)을 비로소 깨달은 걸까. 허물어지려는 이쪽을 붙잡고 그녀가 물어왔다. 대답으로 떠오르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내 환자니까."

"...네?"

"진료를 받기로 결정한 이상... 당신은 내 환자니까."

그게 당연한 거다.

환자와 나.

둘 중에 하나가 아파야 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한다. 환자는 자신의 아픔을 덜기 위해 날 찾아온 사람이니까.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각오했다. 이렇게 하자고. 힘껏 버텨 보자고.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독려하며. 무너지고 싶을 때는 독촉하고 채찍질하며. 그렇게 버텼다. 버텨냈다. 해냈다. 첫 담석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뿌듯했다.

"그러니까 난 좀...."

쉬어야겠다.

더는 못 버티겠으니까. 너무 어지러워서 눈이라도 감고 싶으니까.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있으니까.

졸리다.

이제 더는.

"...황태자님?"

다리가 풀렸다.

중력이 온몸을 끌어당기는 감각. 내리깔리는 눈꺼풀 속에 짓눌리는 기분. 의식이 흐려졌다. 왕녀의 무어라 외치는 소리와 오장육부가 놀라며 꺼내는 아우성. 그 모든 감각이 삽시간에 멀어졌다.

눈앞이 어둠에 잠겼다. 이곳에서 나는 편안할까.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잠깐은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

그거면 됐어.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