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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5

90화

배회하는 불꽃— 바그로켈트와의 전투를 끝마친 이후.

나는 정신을 되찾은 뇌제 알렉스와 함께 필드의 탐색을 재개하게 되었다.

내가 해당 S급 게이트에 단독으로 찾아와야만 했던 목적.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해서 탐색을 이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

물론 탐색이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 나와 알렉스 사이에 아주 사소한 문제가 벌어지기는 했다.

몇가지 키워드의 발설을 금지하는 특별한 조치라거나.

그가 요깃거리로 챙겨온 샌드위치를 뺏어먹은 일이라거나.

누가 보더라도 별것 아닌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 소속의 어떤 헌터 입장에서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대국적으로 보았을때는 상당히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러한 과정들을 거친 뒤에야, 나는 이렇듯 알렉스와 둘이서 유적 탐색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 상대했던 놈이 절멸종이라고 불리는 괴물들 중 하나라고?"

터벅, 터벅-.

아무도 없는 유적의 안쪽에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번갈아 울려퍼졌다.

어두운 유적 안을 앞장서서 걷는 내 뒤에는, 고글을 들어올린 채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알렉스가 있었다.

뇌제 알렉스가 나에게 던진 질문.

그 내용은 이번에 우리가 마주했던 '절멸종'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 맞아. 그것도 이미 한차례 다른 세계를 멸망시켰던 괴물들이지."

나는 그런 알렉스를 향해서 솔직하게 그에 대한 답변을 전해주었다.

그것도 절멸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알렉스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을 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게이트는, 이미 멸망한 세계가 찢어져 나누어진 조각들이야."

"세계가 찢어진 조각······?"

"그리고 그 세계를 멸망시킨 원인들 중 하나가 바로 절멸종이고 말이야."

절멸종. 멸망한 세계.

그리고 게이트에 얽혀있는 비밀.

알렉스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퍽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트에 얽힌 비사들을 들은 알렉스가 고민에 빠져있던 것도 잠시.

그는 머지않아 의심에 젖은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복잡한 이야기야 그렇다고 치고서, 당신은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괴물에 대한 흥미는 곧장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게이트에 난입한 정체불명의 S급 헌터.

바로 지금 그의 눈앞을 걷고 있는 나에 대한 흥미가 피어오른 모양이었다.

"헌터협회조차도 게이트 너머의 역사까지는 관심이 없을거야. 기껏해야 과학적으로 분석할 방법이나 고민하겠지."

"뭐,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당신은 그런 내용들을 어디서 배운거야? 대체 정체가 뭔데 그래?"

나는 그런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토벌이 끝나면 폐쇄절차에 들어가는 게이트의 특성상, 게이트 너머의 역사를 궁금해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더군다나 그 너머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상위 헌터는 더더욱 적은 편이었다.

조금 더 나아가 오래된 문자를 해독하는 일정도 되면, S급 헌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러니 알렉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게이트 너머의 비사를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정체가 그렇게 궁금해?"

나 역시도 레델이 남긴 서적들과 온갖 유적을 통해 섭렵한 지식이 아니던가.

그런만큼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에 가더라도 듣기 힘든 것들이었다.

스윽-.

벽면에 그려져있는 그림들을 확인하던 나는, 알렉스를 향해 적당한 이야기로 자신을 설명했다.

"잊혀진 신들을 섬기는 성자."

"······뭐? 성자?"

"그러니까 이런 일을 하는거지. 찢겨져나간 세계를 탐색하면서,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나서는거야."

내가 알렉스에게 한 이야기에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알렉스의 입장에서도 유튜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할 터였다.

미국의 뇌제에게 구독과 좋아요를 받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150만 유튜버쯤 되면 절제와 인내를 알기 마련이었다.

"내 나름대로 신들을 향해서 경외를 표하는 과정인 셈이지."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빛을 움직였다.

그런 내 발언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띠링-.

성좌 하나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온 모습이었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

허공에 나타난 블렌도어의 메세지를 확인하는 것도 잠시.

나는 주변에 있던 알렉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블렌도어의 메세지를 웃으며 닫아버렸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예배실에서 헤비메탈이라도 한곡 불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성좌 블렌도어에 대한 평가를 마친 나는, 다시금 발걸음을 움직여 통로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을 모시는 성자라··· 마법사인 내 입장에서는 감이 잘 안오는 편인데."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옆에 있던 구체를 힐끔 보았다.

파앗!

신성주문으로 만들어낸 빛이 내 주변을 돌면서 시야를 밝히는 중이었다.

마법사의 마법과는 근본을 달리하는 현상이었다.

"다른 것보다도 믿음과 고결함이 중요한 직업이거든.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자격은 아니지."

나는 빛나는 구체를 벽면쪽으로 움직이며 알렉스에게 답했다.

스윽-.

구체가 벽면에 가까이 달라붙자, 벽면에 새겨진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관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짐승들이 그려져있는 그림.

그것들은 하나로 이어지며 무언가를 숭배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래 전에 그려진 벽화인건가?"

중요한 신전에나 그려질법한 화려한 색감의 그림.

그 모습으로부터 무언가를 짐작한 나는, 진지한 눈으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열심히 뒤쫓았다.

이 그림들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대체 뭘 찾길래 그래?"

손가락 끝으로 벽을 더듬는 나를 따라서, 다급해진 알렉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계속해서 손끝을 움직여 그림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수렴했을 즈음.

나는 비로소 그 한가운데 존재하는 붉은 보석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건, 설마······."

툭-.

벽면을 더듬던 내 손길이 보석의 한가운데에 닿았다.

그 직후, 미약한 신성력이 보석의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이었다.

"······!"

나는 놀란 눈으로 눈앞의 보석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궁-.

진동하기 시작하는 통로.

그와 동시에 두터운 벽이 양옆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갈라지는 벽의 안쪽에서는 환한 빛이 새어나왔다.

벽 너머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

'벽 너머에 공간이 숨어있었나.'

아무래도 특별한 장치를 통해 비밀공간을 마련해놓은 모양이었다.

숨겨진 공간의 문이 완전히 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비좁은 방 하나를 숨겨두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좌우로 갈라지던 돌벽이 완전히 열려버린 이후, 나는 그제서야 빛이 사그라든 방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제단의 위에 놓여있는 책 한권.

그리고 무수한 글씨가 새겨진 채, 벽면에 붙어있는 거대한 석판 하나.

제단을 둘러보던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석판으로 향했다.

"······."

매끄러운 석판 위에 정갈하게 새겨져있는 글자들.

글씨를 뒤덮은 금박은 석판을 만들기 위한 정성을 짐작케 했다.

그 장엄한 풍경을 마주한 내 눈앞에, 이윽고 반투명한 화면 하나가 떠오르면서 시야를 가렸다.

'이건··· 신성주문을 발동하기 위한 기도문인건가?'

[자동번역 기능]이 만들어낸 기도문에 대한 해석.

나는 눈앞에 떠오른 기도문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을 열어 그것을 읽었다.

한껏 들이마신 숨결과 함께 무거운 기도문이 밖으로 흘러나갔다.

"—순환하는 황금. 모든 것을 흐리는 위대한 백색이여."

우우우우웅-.

기도문을 읊어나가는 자신을 중심으로 막대한 신성력이 소용돌이 치는 모습이었다.

진동하는 복도.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신성한 파문을 바라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신을 향한 기도를 이어나갔다.

"—믿음의 계승자가 바라노니, 그 거대한 의지로 눈을 가려주소서. 우둔한 지혜를 흐리게 하소서."

기도문이 이어질 때마다 사방의 빛이 흐트러지는 모습이었다.

갈라지는 형상.

흐릿해지는 경계선.

그 속에서 나는 한마디씩 기도문을 읊어나갔다.

그리고 이윽고, 내 입에서 마지막 한마디가 밖으로 흘러나왔을 때.

"—빛을 가리소서."

파아앗-!

흐릿해지는 풍경속에서 나는 두 갈래로 나뉘어진 자신을 볼 수 있었다.

—환영(幻影).

스스로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진 형태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 <아딜레아의 영광(S+)>이 새로운 신성주문을 기록했습니다!

- 두번째 잎사귀에 [신성주문 : 형상분열]이 등록되었습니다.

* 대상과 동일한 환영을 만들어 옮길 수 있습니다.

* 환영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 저장된 힘을 모두 소진하면 사라집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한 직후, 나는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나오는 감정을 느꼈다.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자인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앞에 떠오른 창을 조용히 응시했다.

'터무니없는 신성주문을 손에 넣은 것 같은데······?'

S급 홀리 엘프 폭군 성좌 유튜버, 신유호.

그 투철한 신앙심에 걸맞은 강력한 신성주문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 * * * * *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불가사의한 일을 겪게 되기 마련.

그것은 미국의 S급 헌터, 알렉스 오브라이어에게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뇌제'라는 이명으로 유명한 최강의 마법사.

오늘은 그런 알렉스에게 있어서 상당히 골치아픈 일들로 가득차있는 하루였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당연하게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남기고 사라져버린 어떤 남자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아무리 운이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무도 없는 유적의 안쪽.

그곳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있던 알렉스는,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다.

퉤-.

돌바닥을 향해 침을 뱉은 그는 신경질적인 눈매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란스러운 게이트를 가득채웠던 몬스터는 어느새 대부분 알렉스의 마법에 타죽은지 오래인 상황.

그와 동행하던 인물도 방금 전에 이곳을 떠나갔으니, 이제 게이트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알렉스 하나뿐이었다.

"분명 성자라고 했었나? 대체 뭐하는 인간이었던 거야?"

알렉스는 멍이 들었는지 욱신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부여잡았다.

인상을 쓴 알렉스의 머릿속에 방금전까지 그와 유적을 탐색하던 헌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스로 알렉스를 향해 '성자'라고 소개하던 헌터.

허나, 그런 그의 행적은 성자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딴 인간을 성자라고 부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지."

그도 그럴 것이, 끔찍한 비명이 울려퍼지는 검을 들고서 괴물을 도륙낸 것이 한참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엑소시스트를 정반대로 뒤집는다면 그러한 모습이 될 것인가.

그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저주가 넘실거리는 검을 자신의 무기로 삼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전력을 내보이던 순간, 귓가에 들리던 귀곡성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일반적인 성직자와는 백만광년쯤 거리가 떨어져있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

그렇지만 그가 만난 성자는 무척이나 강한 헌터였다.

그는 단 일격으로 '절멸종'이라 불리는 괴물을 도륙할만한 실력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성자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알렉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단지 제자리에 묶인 채로, 두려움에 떨며 바닥을 기어야만 했던 시간.

절멸종과의 전투가 시작되어 끝날때까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심지어 전투가 끝났음에도 아직까지 알렉스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 정도 되는 헌터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건가······."

가슴속에 피어올랐던 압도적인 무력감을 떠올린 알렉스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성자가 가지고 있던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모두를 압도하는 인물이었다.

마법사들 중에서 최강이라고 불리는 알렉스가 압도당했다.

허나, 그런데도 알렉스는 그가 보았던 남자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신창이나 검성, 수라같은 유명한 헌터라면 알렉스가 이미 알고 있었을 터.

그러니 그가 마주했던 성자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강자라는 의미였다.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헌터라면, 배후에도 거대한 조직이 존재하고 있겠지."

알렉스의 귓가에 지나가다 얼핏 들었던 150만이라는 숫자가 스쳐지나갔다.

혹시나 그것이 그가 엮여있는 조직과 관련되어있는 키워드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성자.

그와 연결되어있는 거대한 규모의 조직.

자연스럽게 사고를 확장해가던 알렉스는 무릎 위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워드프로세서가 켜져있는 화면을 바라보면서, 어떤 방식으로 보고를 올려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S급 게이트. 그랜드 캐니언. 150만명. 검은 칼을 든 성자. 절멸종······."

타닥, 타다닥-.

알렉스의 손가락이 오늘 그가 경험했던 기억들을 적어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지않아 알렉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우스 커서를 앞으로 되돌렸다.

"단어가 좀 마음에 안드는데······."

흐음.

그는 입술을 곱씹으며 한참동안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다시금 움직여서는, 앞서 적어두었던 묘사를 정정했다.

'검은 칼을 든 성자'가 지워지면서, 그 자리를 새로운 단어가 대신했다.

"이쪽이 더 낫겠어."

—검은 성자.

그날 밤, 해당 단어가 미국 헌터협회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었다.

91화

누구나가 어제보다 나은 하루를 위해 살아가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같은 S급 헌터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사람마다 기준은 어느 정도 다르겠지만, 헌터들 대부분이 지향하는 목표는 비슷하다는 이야기였다.

지금보다도 한층 더 강해지는 것.

끝없는 향상심과 성장에 대한 욕구만이 최상위 헌터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란 사실은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증명된 것이었다.

내가 운영하는 커뮤니티의 [리워드] 시스템만 하더라도, 그러한 성장욕구 위에서 성립되는 시스템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얻은 수확은 전반적으로 마음에 드는 편이긴 한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나 역시 어제보다 확실히 나아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게이트 탐색으로 내가 얻은 수확이 적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번에 얻은 가장 큰 수확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당연하게도 새로운 신성주문에 대한 것이었다.

—신성주문 [형상분열].

내가 이번에 얻은 신성주문은 상대의 눈을 속이는데 특화된 주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블렌도어의 성자다운 주문이기도 했다.

"신성주문이야 뭐, 내 전투 스타일에 어울리는 편이니까 나쁘지는 않아보이고."

이전에 얻었던 신성주문보다도 한층 더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성능은 물론이거니와, 분위기를 잡기에도 썩 나쁘지 않은 주문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수확물 중에서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책 한권이었다.

은신처의 책상에 놓여있는 새하얀 표지의 경전.

은색 쇠사슬로 묶여있는 이것은 내가 신성주문이 적혀있던 비밀의 방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건 이쪽인데······."

나는 책상에 놓여있는 은색 경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범상치 않는 느낌이 드는 물건이었다.

단단히 매여있는 사슬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으면, 머지않아 내 눈앞에 아이템의 상세정보가 출력되는 모습이었다.

< 신성경전 아데르노트(EX) >

[ 아이템 설명 ]

- 오랜 세월동안 비밀공간에 보관되어있던 특별한 경전입니다.

- 신성 능력치가 A를 넘어선 종교지도자만이 다룰 수 있습니다.

[ 아이템 효과 ]

- 빛의 인도 : 신성주문, 성물, 신수의 출력이 195% 증폭됩니다.

- 무결성 : 모든 신성효과가 왜곡되거나 중단되지 않습니다.

- 양면성 : 마력을 신성력으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 이단지정 : 이단으로 지정한 대상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 성광 아데르노트 : 모든 공격에 [성광]이 부여되어, 절삭력이 상승하고 마력연소를 발생시키며 부정적인 효과를 약화시킵니다.

해당 아이템의 이름은 <신성경전 아데르노트(EX)>.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던 EX등급의 아이템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강력한 효과들로 도배되어있는 아이템이다.

더군다나 해당 아이템에는 근접계열 특성의 [오러]에 필적하는 효과, [성광] 효과가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나같은 신실한 성자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아이템이라는 이야기였다.

"신성 능력치 A를 대체 어떻게 달성하냐."

해당 아이템의 착용제한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필이면 이 아이템에는 능력치에 따른 착용제한이 달려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능력치 제한이 말이다.

게다가 신성 능력치의 경우, 성좌들이 내주는 시험을 통과하더라도 무척이나 미약하게 오르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A급까지 올리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계산이 들었던 것이다.

"······."

나는 눈앞에 놓여있는 책의 사슬을 붙잡고 흔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허나 내가 손으로 사슬을 잡고 흔든다고 해서, 책에 묶여있던 사슬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EX급의 아이템을 얻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기쁘지만,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사실상 계륵인 셈이었다.

그렇게 사슬을 잡아당기면서 물리적인 한계를 시험해보기를 수차례.

나는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사슬을 놓아버리면서 탄식하고야 말았다.

"하··· 내 고결함은 이미 S급에 닿았는데 성물이 반응을 안하는구나."

요구 능력치를 달성하는 것 이외에는 도저히 사용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였다.

경전 언박싱을 포기한 채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런 내 귓가에 익숙한 알림음이 울려퍼졌다.

띠링-.

커뮤니티를 통해 1:1 대화가 도착했음을 알려오는 소리.

화면을 조작해 메세지를 보낸 상대를 확인해보니, 대화창에 '마산사나이 최두식'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불사기사 최두식으로부터의 메세지였다.

"마산사나이 최두식······?"

스윽-.

화면을 조작한 나는 최두식이 보낸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 마산사나이 최두식 : 아우야.

- 마산사나이 최두식 : 부탁했던거.전부.끝냈다. ^^

- 마산사나이 최두식 : (사진)

- 마산사나이 최두식 : 이제.길드쪽.문제없이.승인날거다~

불사기사 최두식이 나에게 보낸 메세지의 내용.

그것은 내가 최근에 준비하고 있던 길드창설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최두식이 보낸 사진에는 수많은 서류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길드 설립에 대한 내용이었나."

천둥 길드의 임시 길드장이 된 최두식이 나를 위해 신경을 써준 셈이었다.

협회를 통해 진행되어야하는 절차의 대부분을 미리 해결해둔 것이다.

그중에는 천시예쪽에서 따로 최두식에게 부탁했던 내용도 대거 포함되어있었다.

"천시예쪽도 이제 계약이 며칠 안남았으니, 나도 드디어 길드장이 되는 셈인가."

더군다나 천시예의 계약이 만료되기까지는 이제 며칠 남아있지 않은 상황.

그러니 이제는 정말로 길드설립을 공표할 차례였다.

미등록 헌터로 지내오길 수개월.

헌터가 된 이후 처음으로 길드에 몸을 담게 되는 셈이었다.

"길드 이름··· 비교적 멀쩡한걸로 지어왔겠지······?"

S급 길드마스터, 신유호.

점점 길어져가는 자신의 수식어에 경외를 느끼며, 나는 최두식에게 감사의 메세지를 전송했다.

* * * * * *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지상을 밝게 비추는 어느 아침.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운명의 날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오랜 시간동안 그토록 고대해왔던 길드 설립 당일.

새로운 길드의 탄생을 축하하는 두 사람의 기념식이 내 사무실에서 열렸던 것이다.

"어때? 깜짝 놀랐지?"

두명밖에 참석하지 않은 조촐한 기념식 현장.

나는 자신의 눈앞에 선 채, 케이크를 들고 있는 천시예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씌워져있는 고깔모자.

평소에 쓰던 선글라스를 대신해 착용한 장난감 선글라스.

마지막으로 상당히 비싸보이는 거대한 생크림 케이크까지.

전부 천시예가 기념식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었다.

"······설마 저 이름을 보고서 안놀랄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지?"

그리고 나는 그런 천시예와 똑같은 고깔모자를 쓴 채, 벽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손으로 가리키는 중이었다.

천시예의 뒷쪽에 걸려있는 큼지막한 현수막.

거기에는 새로 설립한 길드의 이름이 적혀있었으니까 말이다.

—다크어비스.

뒷면에 적혀있는 길드의 이름을 지적하며 꺼낸 내 이야기에, 천시예는 태연해보이는 태도로 케이크를 내밀면서 이야기했다.

"길드 이름, 굉장히 멋지지 않아?"

"······."

"나름대로 무난해보이는 이름을 고심해서 지은거야."

가슴을 펴고서 자신만만하게 멋진 이름임을 주장하는 천시예의 모습.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어둠의 조직 이름이니?"

"왜? 마음에 안들어?"

"그야 당연히 마음에 안들지."

나는 천시예가 지어온 '다크어비스'에 대해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내가 비록 커뮤니티에서 거품판독기같은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크어비스'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이름이었다.

어디가서 내 입으로 직접 길드 이름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한 번 상상해보자.

내가 비즈니스 목적으로 밖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을때, 그 사람한테 자신을 무엇이라 소개해야 할 것인가.

- "다크어비스 길드장, 신유호입니다."

- "어떻게 길드 이름이··· 다킄어비슼··· 케헥, 켁······."

그 이야기를 듣고 상대가 웃으면서 자지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다크어비스.

그런 단어를 대체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거기에 EX급 헌터가 소속되어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한층 더 이상해지는 마법같은 효과가 있었다.

결국 나는 천시예를 향해 조그마한 불만을 토로했다.

"천시예 사우님. 이럴거면 그냥 내가 짓는게 낫지 않았을까?"

"우리 길드장님이 직접 지으면 '헌잘알 길드', '헌잘알의 헌터스쿨'같은 이름으로 지을거잖아."

"······."

"그런 이름들보다는 이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

움찔-.

나는 정곡을 찌르는 천시예의 이야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을 한차례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내 마음속에 있던 이름을 그대로 내뱉는 천시예였다.

"······케이크나 먹자."

결국 나는 대응을 포기하고 얌전히 테이블에 착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시예 역시 가져온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는 모습이었다.

쿵-.

묵직한 케이크가 올라온 이후.

검귀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빵칼을 손끝에서 가볍게 회전시켰다.

"몇등분으로 나눌까?"

"양도 많으니 조금은 작게 잘라도 될 것 같은데?"

"알았어. 가능한 작게 잘라볼게."

천시예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있던 케이크를 나누었다.

원래부터 검을 다루는데 능숙한 인물인 덕분이었을까.

그녀의 빵칼은 케이크를 16등분으로 깔끔하게 잘라낸 모습이었다.

그에 더해 케이크 받침대까지 함께 잘리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검귀가 직접 검을 잡았던만큼 이는 무척이나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스윽-.

나는 천시예가 잘라준 케이크를 포크로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케이크가 맛있긴 하네."

어디서 사온 케이크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맛있는 편에 속하는 케이크였다.

천시예 역시도 그런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껏 퍼서 입에 밀어넣는 모습이었다.

우물, 우물-.

길드 설립 기념 케이크를 입에 넣은 천시예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커피를 마시며 만족을 표했다.

"하루에 100개밖에 안파는 한정 케이크인데 잘 구해온 것 같아."

"그러게 말이다."

나 역시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며 조촐한 기념식을 보냈다.

그렇게 나와 천시예가 한정판 케이크의 맛을 즐기고 있던 것도 잠시.

머지않아 맞은 편에 있던 천시예가 나를 향해 물어왔다.

"그런데 우리 길드장님은 앞으로 바빠서 괜찮겠어?"

"괜찮냐니, 어떤 부분 말이야?"

갑작스러운 천시예의 질문.

내가 그런 그녀를 향해 되물으면, 천시예가 장난감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길드장들한테 주어지는 일이 적은 편이 아니었거든."

"······."

"협회랑 처리해야하는 일도 많은 편이고, 정부에 제출하는 서류도 많은 편이야."

길드장으로서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하는 업무.

조만간 찾아올 지옥같은 시간들에 대한 경고였다.

한차례 진득한 경고를 늘어놓은 그녀는, 거기에 한마디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자그마치 EX급 헌터가 길드에 있으니까, 길드에 대한 기자들의 관심이 생각보다 많을걸?"

제아무리 우리가 신생길드라고는 하지만, 명색이 EX급 헌터가 몸을 담고 있는 길드였다.

거기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뭐,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해봐야겠지."

그럼에도 나 자신이 직접 받아들인 무게가 아니겠는가.

왕관을 쓰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만 한다.

그것은 폭군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이야기였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천시예의 이야기에 화답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거야. 구독자 150만 유튜버도 아무나 되는건 아니거든."

길드 설립 1일차.

길드장으로서의 무게를 견뎌나갈 시간이었다.

* * * * * *

결과적으로 말해서, 천시예가 말했던 것처럼 소규모 길드의 길드장이 처리해야하는 일은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헌터길드 자체가 사방으로부터 견제를 받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제약도 많고 증명해야하는 내용도 많은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그러한 일들을 처리하는데 나름대로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을까.

나는 빠른 속도로 업무에 적응해 유튜버 생활과 길드장 생활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말이다.

"······하."

그리고 오늘.

갑작스럽게 내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그 계기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딸깍, 딸깍-.

아무리 새로고침을 눌러도 유튜브에 접속되지 않게 된 것이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느리게나마 접속은 가능했건만, 오늘부터는 그조차도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

나 혼자만이 앉아있던 사무실 안을 마우스 소리가 분주하게 헤집었다.

딸깍. 딸깍. 딸깍.

반복해서 울려퍼지는 클릭음.

허나, 그럼에도 내 눈앞에 보이는 화면은 여전히 하얗게 물들어있었다.

유튜브의 공식 홈페이지 주소.

해당 페이지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내 절망스러운 심정을 대변하듯이, TV에서는 한창 뉴스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 "닷새 전부터 태평양 인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해저 게이트 브레이크가 아직까지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 "일부 몬스터들의 경우 수면까지 올라오는 경우가 관측되었으며, 태평양을 지나가던 몇몇 선박들 역시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아 침몰했습니다."

-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로 인해 해저케이블이 상당수 파손되었으며, 현재 수많은 사이트의 접속장애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트래픽 허용량이 큰폭으로 감소했으며······."

- "미국의 SPACE X사를 운영하는 머스크 CEO는 이런때일수록 전세계가 스타링크에 가입해야한다고 주장······."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의 내용.

그것은 며칠 전부터 심해에서 시작된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해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게이트 브레이크가 해저 케이블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세계적인 플랫폼, 유튜브 역시 해저케이블 파손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일부 국가에서 서비스 문제가 발생하며 연결이 중단된 것이다.

"전세계 헌터계에 이렇게 인재가 없었나······."

나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며 힘없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의 가장 큰 문제를 뽑아보자면, 게이트가 해저에 위치한만큼 공략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게이트 브레이크가 벌어진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작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운좋게 게이트를 찾아낸다고 한들, 해당 게이트에 걸맞은 인선을 정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 사태가 장기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로 보였다.

"다크어비스 길드 채널도 개설해야되는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유튜브쯤 되는 대기업은 각 지역에 서버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을까.

유튜브쪽에서 빠르게 조치를 취해준다면, 그때부터는 다시 유튜브를 이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150만 헌터 유튜버, 헌잘알의 역할이 아직 완전히 끝난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유튜브는 내 인생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끝나버려서야 심히 곤란했다.

유튜브라는 대기업의 역량을 생각해보면, 머지않아 금세 서비스를 재개할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아무래도 금방 다시 열겠지? 고작 케이블 파손된거가지고 얼마나 오래 점검을 하겠냐."

그렇게 내가 허전함에 젖어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잠시.

띠링-.

머지않아 그런 나에게 누군가 메세지를 보내왔다.

나는 자신에게 메세지를 보낸 인물의 이름을 확인해보았다.

"뭐야. 주선호가 보낸 메세지인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이용자의 닉네임은 '망원동불주먹'.

신창 주선호가 오랜만에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무언가 개인적으로 할말이라도 있던 것이었을까.

나는 화면을 터치해 주선호의 메세지를 확인해보았다.

"······벌써 그걸 진행하겠다고?"

그리고는 머지않아 난감한 얼굴로 눈앞에 떠오른 화면을 노려보았다.

주선호가 나에게 보낸 메세지의 내용.

그곳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있었던 까닭이다.

- 망원동불주먹 : 헌터협회의 정관 개정은 이미 끝내두었다.

- 망원동불주먹 : 지금으로부터 3주 후에 헌터협회의 임시총회가 열릴거다.

- 망원동불주먹 : 길드의 길드장 자격으로 총회에 참석해라.

- 망원동불주먹 : 나와 이지성이 손을 써뒀으니 자리를 마련하는데에는 문제가 없을거다.

주선호가 보낸 메세지의 내용.

그곳에는 헌터협회에서 개최될 임시총회에 대한 메세지가 적혀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해당 메세지를 바라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길드 만든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헌터협회 임원 자리에 앉으라고?"

조만간 내 이름앞에 붙는 기나긴 수식어에, 새로운 단어 하나가 더 추가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92화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헌터.

그러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EX급 헌터, 신창 주선호는 [커뮤니티]를 상당히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안되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커뮤니티]에서도 주선호가 특히나 좋아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커뮤니티]에 새로 도입된 기능이었다.

[단체 대화방]을 통한 가상공간에서의 대화.

대화방에 소속되어있는 이들과 언제 어디서든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다."

대화방의 멤버, 'nabi242'가 포인트를 써서 꾸며놓은 방.

푸른 날개를 가진 나비가 날아다니는 방은, 창밖에서부터 따스한 햇살이 비춰들어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선호는 그곳에서 자신의 동료 중 하나, S급 헌터 이지성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그는 주선호와 함께 오랫동안 대계를 준비해왔던 인물이었다.

그만큼 주선호가 신뢰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마 바다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틀어막는건 더 이상 불가능하겠지."

주선호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지성을 앞에 두고서, 계속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이야기했다.

헌터협회와 깊게 엮여있는 주선호는 다른 이들보다도 정보의 습득이 빠른 편이었다.

그런만큼 아직까지 세간에 공표되어있지 않은 내용들 역시 미리 알아내는 것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조만간 해상물류가 완전히 마비될거다. 더 이상 바다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게 될거야."

"······."

"바다를 빼앗기면 하늘조차 안전하다고 볼 수 없겠지. 머지 않아 국가간 교류에도 지장이 생길거다."

신창, 주선호가 생각하기에 세계는 현재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빠르게 늘어나는 게이트의 숫자를 헌터들의 토벌속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특히나 오래전부터 잠재적인 위협으로 평가되어왔던 해저게이트가 본격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헌터 시대의 개막이후 오랫동안 위험으로부터 눈을 돌려왔던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인류가 몬스터를 상대로 제공권까지 빼앗길거라고······?"

"분명 그렇게 될거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다."

주선호의 시선이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의 형상을 한 가짜 조형물.

그것을 응시하던 주선호는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차피 EX급 게이트가 무너지면 더 이상 군은 의미가 없어. 그러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만한 선에서 군사적인 움직임을 억누르는게 최선이다."

"······대장."

"어떤 수단으로도 정신지배에 저항이 불가능한 부류들이야. 헌터협회만 장악하면 사실상 나머지는 필요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는 오래전부터 헌터협회에 공을 들여왔다.

다가올 몬스터 재해에서 비각성자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거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EX급 게이트가 열린 이후에는, 더 많은 헌터를 이끄는 것이 더 강한 권력이 될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조만간 완전히 마무리되어 결실을 맺을 터였다.

"그러니 임시총회에서 신유호에 대한 안건을 의결한 뒤에, 다음 정기총회에서 협회장을 갈아치울 생각이다."

헌터협회의 완전한 장악.

그러한 대의를 앞두고 있는 주선호를 향해서,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던 이지성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유호를 벌써 협회에 집어넣는건 너무 그림이······."

"더 이상 주변의 눈치나 신경썼다간 늦어질거다, 형제."

이지성의 걱정에 대한 주선호의 대답은 칼같은 편이었다.

단호한 부정.

그 뒤에 주선호가 이지성을 향해 자신의 결론을 전했다.

"의심할 생각이라면 멋대로 의심하라고 해라. 정부쪽에서 절차대로 처리하는 것보다 세상이 뒤집히는게 더 빠를테니."

최초의 EX급 헌터.

인류 최강이라고 불리는 남자에게 있어서, 비각성자는 더 이상 가치가 없는 부품이었다.

머지않아 각성자들의 시대가 찾아올 터였다.

기존의 도덕관이 모두 무너져버린 세계에 걸맞은 새로운 시대가 말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각성자들을 경계해왔듯이, 나 역시 그들의 경계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줄 생각이다."

—신창(神槍).

유일하게 신의 이명을 받은 헌터는 그 마음속에 날카로운 창을 벼려내었다.

* * * * * *

유튜브가 완전히 먹통이 된 이후로 어느덧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온갖 뉴스에서는 ICANN이니, 13개 루트 서버니 하는 해괴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봤더니 결국은 당분간 유튜브가 안된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내 몇안되는 삶의 낙들 중 하나가 사라지고서, 커뮤니티의 역할은 이전보다 한층 더 비대해졌다.

원래도 커뮤니티에 자주 방문하는 편이었지만, 최근에 들어서 커뮤니티에 할애하는 시간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나는 커뮤니티에 접속해 게시판의 게시글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최근에 성좌한테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제법 많나보네."

커뮤니티 게시판의 가장 뜨거운 화제는 당연히 최근에 커뮤니티에 업데이트 된 기능에 대한 내용이었다.

<성좌 후원>을 통한 아이템 선물.

성좌들이 포인트 후원 기능을 이용해 아이템을 선물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해당 기능이 추가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성좌에게 선물을 받아본 것이었을까.

게시판에는 많은 후기들이 올라와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선물을 안보냈지?"

스윽-.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게시글 목록을 훑어보았다.

- 선물 받는게 다 좋은게 아니라 [1] (frz0777)

- 마산사나이 최두식 죽으십시오. [3] (xkingx)

- 와 저도 선물 받고싶어요ㅜㅜㅜㅜㅜ [4] (nabi242)

- 요새.경매장.잘팔립니다.^^~ [1] (마산사나이 최두식)

- 성좌가 자꾸 오크 생식기를 보내오고 있습니다.[5] (xkingx)

- 오늘 후원으로 신기한 물건 받았습니다. [3] (artea)

해당 기능이 개방된 이후 본격적으로 경매장의 소비물결이 가속화되기 시작한 것이었을까.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후원과 관련된 수많은 게시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글중에서도 유독 한가지 글에 시선이 가는 것을 느꼈다.

커뮤니티 이용자명, 'xkingx'가 남긴 게시글.

그곳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한 것이다.

"성좌가 뭘··· 보낸다고······?"

흠칫-.

해당 게시글의 제목을 마주하기 무섭게 나는 왠지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경매장이 처음 열렸을 때에 이러한 유형의 게시글을 보았던 것 같은 기억이 들었던 것이다.

툭.

나는 화면을 터치해 해당 게시글을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게시글의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았다.

[ 제목 ] 성좌가 자꾸 오크 생식기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 작성자 ] xkingx

[ 이용자 정보 ] 첸다오(36) / S급 / 나선창

저는 얼마전에 성좌 하나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좌에게 신창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 뒤로 해당 성좌가 매일같이 '오크 생식기'를 저에게 선물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선물이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애초에 성좌가 직접 수확한 물건이라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습니다.

대체 이 '오크 생식기'는 어디서 튀어나온 물건인 것입니까?

대체 어떻게 해야 성좌로부터 제대로 된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까.

[ 댓글 5개 ]

- tex11 : ㅋㅋ

- frz0777 : 그거 마산사나이 최두식이 맨날 경매장에서 팔고 있던데

- artea : 바로 위에 게시글 읽어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ㄴ xkingx : 아.

- yamazaki : 당장 구매해야겠어.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중국의 S급 헌터, 나선창 첸다오가 남긴 게시글의 내용.

그것을 확인한 나는 뒷골이 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좌중에도 경매장을 자주 이용하는 부류가 생길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경매장에서 최두식이 올린 쓰레기 부산물들을 구매할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아··· 저게 팔리기는 하는 물건이었어?"

아무런 효과도 없는 단순한 몬스터의 부산물.

단순히 경매장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 영영 팔리는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성좌 하나의 악취미에 쓰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대단한 아이템이었네."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화면을 주시하는 것도 잠시.

띠링-.

머지않아 그런 내 시야에 후원 메세지 하나가 출력되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실로 경박한 존재들이 인간의 별빛을 자처하고 있으니 걱정이로구나."

엘프들을 사랑하는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

그녀가 명예 엘프인 나에게 걱정이 담긴 메세지를 보내온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아딜레아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다.

성좌의 체면이라는건 무척이나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말이다.

"예. 명예 엘프인 저도 아딜레아님의 그 말씀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 ······.

"다른 헌터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후원하는 기능이니, 조금 더 성좌님들의 품격에 걸맞은 물건이 오고가는게 좋겠죠."

나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아딜레아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아딜레아에게서 더 이상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불만이었던 것일까.

나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아딜레아의 답변을 기다리며 깔끔하게 면도를 마친 턱을 쓰다듬었다.

"후······."

"······."

짧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기를 잠시.

나는 그런 내 시야 한구석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시야에 비추어지던 누군가 역시 나를 발견했다.

"······."

검은 머리카락의 사이사이에 색이 바래있는 인상적인 얼굴의 헌터.

EX급 헌터 천시예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흐음-.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정적을 깨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었다.

"······명예 엘프?"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거야?"

나를 빤히 바라보는 천시예의 눈동자.

천시예는 내 질문을 무시한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엘프? 대체 어딜 봐야 엘프인거지······?"

마치 어려운 국어지문을 마주한 듯한 천시예의 진지한 눈초리.

그것을 마주한 나는 조용히 사무실 의자를 회전시켰다.

매끄럽게 회전한 의자는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책장을 보여주었다.

나는 20점짜리 서술형 문제를 푸는 천시예를 놓아둔 채, 얌전히 나에 대한 천시예의 답안을 경청했다.

"아무래도 하루 빨리 유튜브가 복구되어야 우리 길드장이 정신을 차리려나······."

하나뿐인 길드원이 아무래도 나에 대해서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내가 심각한 나르시스트는 아닌가 하는 오해를 말이다.

하늘에 걸고 맹세하자면, 나는 일반적인 나르시스트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단지 수많은 신들을 모시는 신실한 성직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정말로.

* * * * * *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

바깥에 밝혀진다면 커다란 문제가 생길만한 진실들.

그럼에도 지금의 상황을 이어가기 위해선 숨겨야하는, 무척이나 중요하고 무거운 비밀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천시예는 나에게 있어서 그러한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이게 바로 세계수구나?"

S급 게이트, 버려진 영물들의 낙원.

이제는 수많은 신성력과 녹음으로 가득차있는 공간에서, 천시예는 바닥에 쪼그려앉은 채로 잎사귀를 만지고 있었다.

아딜레아의 명령에 따라 낙원의 바닥에 심어두었던 식물.

어느새 내 무릎까지 피어오르기 시작한 세계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지간히도 낙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응. 마음에 들어."

그리고 내가 그런 천시예에게 세계수를 포함한 낙원을 공개한 이유.

그것은 이전에 S급 게이트를 공략하며 벌어졌던 전투에서, 내가 이미 한차례 낙원을 그녀에게 노출했던 까닭이었다.

기왕 그녀에게 S급 게이트의 존재를 공개한 이상, 조금 더 자세하게 보여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느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있는 오늘, 서로 사무실을 나서기에 앞서 시간을 내어 잠시 낙원에 찾아온 것이었다.

툭, 툭-.

조심스럽게 잎사귀를 어루만지던 천시예는, 머지않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에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소환수들도 다들 귀여워서 마음에 드네."

- 왈왈!

"특히 이 백구라는 아이가 무척 마음에 드는걸."

천시예는 그렇게 말하며 뒤에 있던 백구의 털을 쓰다듬었다.

푹신푹신한 털에 손길이 스쳐지나가기 무섭게, 백구는 그에 호응하듯이 목청껏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만난 다른 사람의 손길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었을까.

신관들에게 대접받던 시절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인지, 백구는 기분좋게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소환수들 털은 매일 관리해주고 있는거야?"

천시예는 근처에 있던 백구의 털을 쓰다듬으며 나에게 물었다.

백구의 털 관리.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나는 고민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신수도 털 관리를 해줘야하나?'

신성한 짐승, 그것도 거의 몬스터화된 녀석을 상대로 관리를 해줘야만 하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보였다.

신체가 절단되더라도 잘만 재생시키는 녀석들이 아니던가.

그런만큼 별다른 관리까지는 필요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백구는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의외로-."

그렇게 내가 천시예에게 신수의 위생관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던 찰나.

띠링-.

갑작스럽게 내 귓가에 알림이 울려퍼졌다.

새로운 1:1 대화가 들어왔음을 알려오는 메세지였다.

"······잠깐만."

나는 자신에게 날아온 메세지의 발신자를 확인해보았다.

이용자명 'engine555'.

이지성으로부터의 메세지였다.

어떤 내용이 도착했는지까지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지성이 나에게 메세지를 보낼만한 용건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 대신에 나는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확인해보았다.

"······."

툭-.

화면을 켜자 1시 37분이라는 시간이 보였다.

슬슬 약속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낙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이제 끝내야만 한다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거의 다됐네. 슬슬 게이트 구경은 여기에서 끝내자."

"그러고보니 오늘 협회에 방문해야하는 일정이 있다고 했지?"

내가 이전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었을까.

천시예는 나를 향해서 그렇게 물어보는 모습이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시예에게 이야기했다.

"조금 있다가 곧바로 협회에 가야돼."

"우리 길드장님이 무척 고생이 많아보이네."

그녀는 아쉬움이 남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백구를 쓰다듬던 손을 떼어놓는 모습이었다.

백구는 그런 나와 천시예를 번갈아보다가, 이내 하품을 내뱉으며 샘을 향해 걸어갔다.

세계수의 앞에서 쓰다듬어지던 백구를 떠나보낸 이후.

천시예는 드넓은 낙원의 풍경을 둘러보면서 이야기했다.

"오늘 가면 아저씨도 만나는거지?"

"아무래도 천둥 길드장 대행이신 분이니 그렇게 되겠지."

"잘 다녀와. 나도 슬슬 게이트에 찾아갈 준비를 해야겠는걸."

당연하지만 오늘 일이 있는건 나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길드 소속의 유일한 합법헌터인 검귀에게도 토벌 임무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사무실로 돌아간 이후에는, 각자 갈라져서 자기 할일을 하러나갈 차례였다.

나는 그런 EX급 헌터의 배웅을 받으며, 이지성과의 1:1 대화방에 직접 접속했다.

"나가서 돈 많이 벌어오십쇼. 천시예 사우님."

오랫동안 신문기사로만 접해왔던 헌터협회의 임시총회.

그 현장에 내가 직접 발을 내딛을 차례였다.

93화

대한민국의 상위등급 헌터라면 누구나 반드시 의무등록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어져온 규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등록절차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헌터협회였다.

헌터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방문하게 되는 곳.

그런 장소가 바로 헌터협회라는 이야기였다.

"여기가 협회에서 회의가 이루어지는 회의장인건가······."

나는 그런 헌터협회에 S급 헌터들 중 유일하게 의무등록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로 들어와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야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오늘 헌터협회의 회의장에서 진행되는 대의원총회.

그곳에서 나에 대한 안건이 표결되는 까닭이었다.

"한참동안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할거야."

오늘 진행될 회의에 대한 기대감을 꺾어놓기 위함이었을까.

양복을 입은 채 내 옆에 서있던 이지성이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회의에 내가 바로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스윽-.

손목에 찬 값비싼 시계를 바라보던 이지성은 무심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정이 조금 있어서 텀을 두고 들여보내기로 했어."

"회의가 시작된 이후에도 내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거야?"

"시끄러운 인간들이 조금 있어서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예정대로 처리하는데에는 문제가 없을거야."

고개를 들어올린 이지성의 시선이 나와 마주했다.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맹세'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을까.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적당한 말을 꺼내는 모습이었다.

"너무 불쾌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주인공은 나중에 나타나는게 더 극적인 연출에 도움이 되잖아."

이지성의 말을 들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헌터협회 내부에는 돈이 제법 들었겠구나 싶은 곳들이 많이 있었다.

잠시 후에 회의가 벌어진다는 회의실만 하더라도 그렇게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협회에 소속된 헌터길드들의 수익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거치고 우리 이지성 길드장님은 이 상황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얼굴인데."

다만 화려한 시설과는 다르게 이지성의 표정은 그리 썩 내키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얼핏보면 나를 이 화려한 장소에 놓아두는 것 자체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이지성은 자신의 입술을 곱씹으며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지성은 무너져내리던 표정을 애써 원래대로 되돌렸다.

"이번에 자리를 마련하는데 지나치게 무리를 해서 그래."

"······."

"그나마 [커뮤니티]에 새로 생긴 기능 덕분에 의사소통이라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기에 망정이지."

이지성은 그렇게 말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올린 이지성은 자신의 양복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었다.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점검을 마친 이지성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가 굳이 당신같은 사람한테 이런것까지 경고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가능한 회의장에서는 문제가 될만한 이야기를 안꺼내주길 바라고 있어."

"뭐, 그래. 그렇게 해야지."

"부디, 안에서 아무런 사고가 없길 바라지."

마지막 경고를 마친 이후.

이지성은 오래전에나 마주했던 장난기어린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며 가볍게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런 이지성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협회 임원이라······."

아무래도 오늘은 나에게 있어 제법 피곤한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 * *

한국헌터협회.

강남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은 대한민국 헌터계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런 헌터협회의 회의실에서는 현재 중요한 회의가 열리는 중이었다.

—대의원총회.

헌터협회 소속의 대의원들이 참석하는 임시총회가 개최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총회에 참석한 대의원 중 하나, 유준규는 현재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한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의 헌터길드 중 하나, 대광길드의 길드장 유준규.

그가 보기에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리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까닭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협회에 가입한지 한달도 안된 애송이를 후보에 올리겠다니요!"

유준규는 격분한 목소리로 회의장에 있는 대의원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그가 이렇게 격분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번 임시총회에서 선출해야할 감사 후보에 협회에 가입한지 한달조차 되지 않은 애송이를 앉혀놓은 까닭이었다.

더군다나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애송이의 정체였다.

"고작해야 유튜버입니다! 예? 겨우 유튜버란 말입니다! 게다가 이제 유튜브에 접속도 안되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감사 자리에······!"

"유준규 길드장님. 정숙해주십시오."

"내가 지금 정숙하게 생겼습니까! 원래 후보로 나오기로 했던 최우철 그 인간은 또 어디로 사라진겁니까!"

유준규가 지적하고 있는 후보자의 정체.

그 정체가 바로 유튜버에 불과한 까닭이었다.

'헌잘알'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150만 구독자의 유튜버.

해당 채널의 동영상이야 유준규 자신도 몇번 보긴 했다지만, 그래봤자 고작 일개 유튜버에 불과한 인간이었다.

'유튜브에 접속도 안되는 마당에 150만 유튜버 명함이 무슨 소용이야?'

게다가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 유튜브조차 연결이 안되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런만큼 유준규가 보기에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 불과했다.

지금 자료화면에 보이는 순진해보이는 얼굴부터가 그랬다.

저런 인간이 뭘 알아서 협회의 임원자리에 앉으려고 들겠는가.

분명 주위에서 헛된 바람을 넣으려고 들었을게 분명해보였던 것이다.

"유준규 길드장님. 신유호 길드장은 현재 '다크어비스'라는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그런 유준규를 설득하고자 의장이 입을 열었지만, 유준규는 곧바로 의장의 말을 끊었다.

"그게 무슨 길드장입니까! 천시예 헌터의 1인 길드에서 잡무나 처리하는 시다바리지!"

"어허, 유준규 길드장님! 말씀을 삼가세요!"

"애초에 정관은 왜 개정한겁니까? 설마 뭣도 모르는 녀석을 임원자리에 앉히자고 한건 아닐거 아닙니까!"

격정에 찬 유준규의 목소리.

그러한 그의 태도에 일부 대의원은 이해한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단독으로 입후보한 신유호의 존재.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회의에 참석한 대의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도 잠시.

머지않아 얼굴을 찌푸린 의장이 회의장의 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하··· 알겠습니다. 일단 후보자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의장님, 지금까지의 관례상 대의원총회에는······."

"당사자가 있어야 무슨 이야기가 될거 아닙니까. 당장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듣다 못한 의장이 당사자를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것이었을까.

그런 의장의 모습을 보던 유준규 길드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차피 상대방은 질낮은 유튜브 영상이나 제작하는 유튜버.

회의장에 직접 데려와서 적당히 압박하다보면, 그 밑바닥을 대의원들에게 전부 내보일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무슨 생각으로 감사 자리에 앉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민낯을 이 자리의 모두 앞에서 내 능력으로 샅샅이 파헤쳐주마.'

후우-.

유준규 길드장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냉수를 들이켰다.

그가 차가운 물을 한모금 하고 있으면, 머지않아 문이 열리면서 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유준규는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청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미약한 영체나 사람에게 붙은 원혼을 볼 수 있는 각성자였다.

그리고 그 능력은 때때로 사람을 걸러내기에 좋은 편이었다.

오죽하면 대광길드의 면접 대부분에 유준규 본인이 직접 참여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래, 어디 그 뻔뻔한 낮짝이나 한 번 구경해봅시다."

어디 한 번 두고보자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유준규의 시선이 청년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직후.

툭. 데구르르-.

유준규는 자신의 손에 있던 냉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아······."

청년을 마주한 유준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순진해보이는 얼굴.

어딘가 평범해보이는 인상.

그러한 외견은 유준규가 평소에도 익히 마주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유준규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아, 아······."

"유준규 길드장?"

옆자리에서 부르는 목소리조차 무시한 채, 유준규의 시선이 청년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신유호의 등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표정과는 정반대되는, 무척이나 짙고 강렬한 원혼의 아우라.

그것은 은퇴한 헌터 유준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풍경이었다.

"······."

유준규의 눈이 현실을 의심하듯이 수차례 깜빡였다.

그럼에도 유준규의 눈에 비추어진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지독하리만치 강렬하고 파괴적인 원혼의 아우라.

그 모든 것이 신유호라는 이름의 청년을 저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저주를 짊어지고 있는 신유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태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유준규는 지금 자신의 눈에 비추어지는 풍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 정도의 원한을 짊어질 수가······!'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며 영적인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지독하게 서린 원한도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일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영의 무게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신유호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그것'은, 누구라도 그에 짓눌린다면 미쳐버릴듯한 증오와 저주를 담고 있었다.

'저 인간이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키던 원흉이라도 된단 말인가······?'

고작해야 사람 몇명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저만한 저주를 짊어질 수 없었다.

몇백만명쯤 되는 인간을 몰살한 도살자나 짊어질법한 저주였다.

유준규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반갑습니다. 신유호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유호의 인사가 소란스럽던 회의장 안에 울려퍼졌다.

신유호의 인사를 들은 유준규는 방금 전에 물을 마셨음에도 목이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고작해야 한낱 유튜버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를 마주하고 나니, 대체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저건 틀림없는 악이었다.

—거악(巨惡).

일개 인간이 일생 달성하지 못할만한 원한을 짊어지고 사는 존재라는 이야기였다.

"유준규 길드장님. 후보자에게 질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까?"

"······."

"유준규 길드장님?"

유준규는 입을 다문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부터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유준규 자신이 막으려는 생각이었다.

다만 그들이 데려오려는 존재를 실제로 보고나니, 입에서 제대로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위험한 존재를 앞에 두고서, 유준규는 더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럼 질의할 내용이 없으신걸로 알고 넘어가겠습니다."

"······."

"곧바로 표결로 넘어갑시다."

땅, 땅-.

의사봉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좌절감에 잠겨있던 유준규의 시선이 한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방향에는 오늘 대의원 회의에 참석한 천둥 길드의 길드장, 불사기사 최두식이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아직은 희망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최두식이라면 이 상황을 두고서 얌전히 넘어가지 않을거다.'

유준규는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대신해, 맞은편에 있던 최두식에게 기대를 걸었다.

최두식은 대한민국의 헌터들 중에서도 원로헌터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유준규 자신과는 다르게 본신의 실력이 S급에 다다른 강자이기도 했다.

그런 최두식이라면 거리낌없이 반대의견을 표출할 수 있을 터.

그러니 최두식이 표결에 앞서 회의장의 모두를 향해 반대의견을 꺼내리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고민에 빠진 유준규가 분주하게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의장은 성실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이었다.

"입후보한 후보자가 한명이므로 거수표결을 진행하겠습니다."

"뭐? 협회임원 선출을 거수표결로 하자고? 지금 바쁜사람 앉혀놓고서 뭐하자는거야?"

"왜 그럽니까, 이호준 길드장님. 절차상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거수표결.

누군가의 의문어린 목소리를 들은 유준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어 눈앞의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상식적인 머리가 달려있는 인간이라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찬성에 손을 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최두식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오히려 이 방법이 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신유호 길드장의 감사 선임에 대한 가부를 묻겠습니다. 찬성하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의사봉을 든 의장의 시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은 협회.

그 속에서 유준규의 시선이 최두식을 바라보았다.

최두식의 얼굴은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기도 했다.

그에 유준규는 기대감을 가지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내가 아는 최두식이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렇게 최두식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유준규가 기대하던 순간.

스윽-.

유준규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최두식이 불쑥 손을 들어올렸다.

"천둥 길드는 찬성하도록 하지. 우리 협회에도 젊은 피가 어느 정도 필요할거 아냐?"

"최두식 길드장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

의문이 뒤섞인 목소리가 회의장 안에 수도 없이 울려퍼졌다.

유준규는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사기사 최두식이 신유호의 감사 선임에 찬성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않던 최두식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유준규는 뒷통수를 강하게 두드려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곳에 일어난 이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좋네요. 저도 찬성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손을 들어올린 것은 이지성이었다.

S급 헌터, 그림자사냥꾼.

그가 직접 이 말도 안되는 안건에 동의한 것이다.

"······."

무거운 침묵속에서 유준규의 시선이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 이지성의 옆에는 다른 길드의 길드장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더스트 길드를 이끄는 길드장.

A급 헌터, 철권 강석구.

그 역시 찬성을 위해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런 강석구의 시선은 애써 신유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강석구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것도 저 유튜버를······?'

유준규의 시선이 강석구와 신유호를 번갈아보았다.

피식-.

강석구를 바라보던 신유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유준규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강석구 정도면 헌터계에서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마저 신유호를 두려워하며 눈을 피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신유호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저도 찬성하죠."

"길드장님······?"

"당신들 미쳤어? 단체로 대체 왜 이러는거야!"

회의장에 일어난 이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표결의 연쇄.

신유호를 감사로 선임하는 의견에 수많은 대의원이 손을 들어 동의했다.

척, 척-.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숫자가 신유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있었다.

"마, 말도 안돼······."

그리고 그러한 연쇄 끝에 과반수의 대의원이 거수를 마쳤을 때.

유준규는 자신의 주변에 가득 차있는 무수한 손을 보며 좌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은··· 대체······."

드높이 들어올려진 의사봉.

신유호의 새로운 감사 선임을 선포하려는 의장.

소란에 뒤덮힌 회의장.

그 속에서 유준규의 눈이 회의장에 서있는 한 청년에게 향했다.

"······."

그 순간, 그는 이해했다.

저 의사봉을 완전히 내려찍는 순간, 헌터협회 안에 터무니 없는 괴물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비추어지는 거악(巨惡)이, 그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숙한 이해관계에 얽혀있음을 말이다.

땅, 땅-.

거칠게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

그것을 들으며 유준규는 자신의 두눈을 질끈 감았다.

"이로써 신유호 길드장이 헌터협회의 새로운 감사로 선임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헌터협회.

그곳에 새로운 임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94화

국가직속헌터길드, HETX.

강필중은 그런 HETX의 길드장 자리에 낙하산으로 앉은 인물이었다.

흔히 말하는 '라인'을 잘잡아서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앉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길드장 강필중의 일과는 여타 다른 길드의 길드장들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한가한 편이었다.

당연하게도 HETX가 가지는 특별한 특성 덕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길드장 강필중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 원인은 그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에 있었다.

"뭐? 신유호라는 놈에 대해서 당장 조사해봐야 한다고?"

헌터협회의 대의원총회가 끝난 이후에 그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

해당 전화가 강필중의 심기를 크게 거스른 것이다.

강필중과 평소부터 골프 친구로 지내던 길드장으로부터 걸려온 통화의 내용.

그것은 강필중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 "강 사장님, 이 신유호라는 놈이 생긴건 순박한데, 아무래도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 사람아, 신유호가 대체 누군데 그래?"

- "어디 헌터업계에선 유명한 유튜버라고 하던데, 이번에 검귀에게 붙어서 길드를 하나 차린 모양입니다."

유튜버 신유호.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의 인물이 다짜고짜 협회에 들어와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것도 한국 헌터계의 초신성, 검귀를 끼고 들어와서 말이다.

강필중이 듣기에는 무척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따로 없었다.

아무리 검귀가 엮여있어도 그렇지, 고작 유튜버 따위가 어떻게 협회에 비집고 들어오려고 한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은 강필중은 인상을 쓰며 이야기했다.

"그런 놈한테 불사기사 최두식이 직접 힘을 보태줬단거야?"

- "최두식 그 인간이 원래 검귀랑 가까운 사이 아닙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이··· 사람이 순번이라는게 있는건데······."

- "그래서 저는 강 사장님이 그 신유호란 놈을 조심하셔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겁니다."

귓가에 울려퍼지는 익숙한 목소리.

그것을 듣던 강필중은 깊은 한숨을 밖으로 내쉬었다.

세상에 말세가 다가오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온갖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강필중이 보기에는 썩 상식적인 일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고민하던 강필중은 자신에게 전화를 건 길드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았어, 박 길드장. 내가 직접 사람 시켜서 알아볼테니까 일단 끊어봐."

- "예. 뭔가 알아내시면 귀띔 좀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당연한거고, 이 사람아. 일단 끊어."

툭.

대화를 마무리 지은 강필중의 통화가 끊겼다.

그 직후 강필중은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의 전화번호부를 뒤져보았다.

강필중의 부하중에서 그가 직통으로 연락하는 몇안되는 인물.

S급 헌터, 독왕 구성현에게 전화하기 위함이었다.

"구성현. 그놈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군."

띠리링-.

다이얼 소리와 함께 발신음이 스마트폰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지겨운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오기를 몇초.

머지않아 스마트폰의 스피커 너머에서 강필중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예. 토벌 1팀 구성현입니다."

"구 팀장, 자네 신유호라고 알고 있나?"

강필중은 전화를 받은 구성현을 향해 곧바로 신유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 직후, 강필중의 스마트폰 너머에서 정적이 흘렀다.

- "······."

짧은 정적.

그 뒤에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에 강필중은 자신의 전화기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다시 한 번 구성현을 향해 이야기를 전해보았다.

"구 팀장? 내 말 잘 안들리나?"

- "예. 듣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구성현과의 통화에는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강필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뭐야, 잘 연결되는구만. 아무튼 자네, 신유호라는 놈에 대해 알고 있나? 유명한 유튜버라던데."

-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도 잘 모른다고? 평소에 유튜브를 많이 본다더니 아니었나?"

- "······말씀하신 유튜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구성현은 강필중의 질문에 기대이하의 답을 돌려주는 모습이었다.

유튜버, 신유호에 대해서 모른다.

그런 대답을 들은 강필중의 머릿속에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지않아 강필중은 구성현을 향해 다시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구 팀장, 자네 부하들 시켜서 좀 알아봐봐. 혹시 아나? 그놈이 최근에 C급정도 되는 특성을 각성했을지 말이야."

- "······예."

신유호에 대해 조사해오라는 지시.

그에 구성현으로부터 작게 대답이 되돌아왔다.

강필중은 눈쌀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구 팀장, 자네 오늘 컨디션이 좀 안좋나? 아까부터 목소리가 왜 그래?"

S급 헌터나 되는 인간이 몸에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구성현의 대답은 강필중에게 있어서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강필중에게 이전보다는 조금 더 커진 구성현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죄송합니다. 최근에 무리했더니 몸이 좀 안좋아져서."

"거, S급 헌터라는 사람이 무식하게 컨디션 망가질때까지 그래서야 되겠나?"

- "······."

"당분간은 급한일만 직접 나서고 무리 안가게 좀 설렁설렁 해. 알았나?"

- "······예."

툭.

강필중과 구성현의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강필중은 한차례 이어진 통화에 꺼림칙한 기분을 억누른 채, 통화가 꺼진 스마트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담배나 피우면서 머리를 좀 비워두고 싶은 기분이었다.

"구성현, 이놈이 설마 딴생각 하는건 아니겠지."

후우-.

짙은 한숨이 새어나오는 아래.

강필중은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드넓은 도시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이 지긋한 사옥에서 유일하게 강필중의 마음에 드는 풍경이 저것이었다.

수많은 노력끝에 얻은 HETX의 길드장 자리이지만, 강필중은 예나 지금이나 헌터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강필중 자신이 각성자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 * * * * *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다.

그것은 헌터 유튜버 '헌잘알'이 처음으로 헌터협회에 데뷔한 회의장 역시 그러했다.

회의장을 가득 채운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임시총회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튜브가 접속되던 시절의 '헌잘알'을 그리워하던 이들이 많았던 것일까.

이지성과 주선호의 입김을 어느 정도 고려하더라도, 나는 비교적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협회에 몸을 담게 되면서, 나는 무척이나 긴 타이틀에 비로소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된 것이다.

—헌터협회 임원.

S급 헌터 신유호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단어였다.

"이것저것 일이 좀 많긴 하네."

물론 헌터협회의 감사로 선임되었다고 해도, 내가 처리해야하는 일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틈틈히 협회일을 일부 처리하거나, 주선호에게 부탁받은 일을 해결해주는 정도였을까.

그 이외에는 원래 길드장으로서 진행해야하는 업무들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나는 책상에 앉아서 지루하게 서류나 작성하는 중이었다.

"하··· 마음같아선 유튜브 컨텐츠나 하나 찍어서 올리고 싶은데."

최근 들어서 내 소중한 취미 중 하나인 유튜버 활동이 막힌 것도 커다란 문제였다.

언론에서는 조만간 유튜브가 복구될거라 연일 떠드는 중이지만, 그마저도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소리들 뿐이었다.

하루빨리 유튜브가 고쳐져야 이런 피로감이 조금은 날아갈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타닥, 타다닥-.

그렇게 지루한 타이핑을 이어가며 서류를 작업하던 것도 잠시.

머지않아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헌터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토벌 끝나고 돌아왔어."

한국의 두번째 EX급 헌터, 천시예.

우리 사무실의 유일한 직원이 토벌을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방금 전에 '방치형 검귀 키우기'의 퀘스트를 하나 클리어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상당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천시예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네며 다시금 키보드를 두드렸다.

"고생했어. 사무실에서 쉬고 있어."

"냉장고에 뭐 넣어놓은거 있어?"

"지난번에 아이스크림 사다놓은거 아직 남아있을걸."

"그거나 하나 꺼내먹어야겠네."

스윽.

천시예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벽에 기대놓고서는, 곧장 사무실의 냉장고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직원이 없는 길드의 특성상, 냉장고는 두 사람의 공용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들어서는, 곧장 사무실의 소파에 드러눕는 것을 선택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한 가구는 천시예의 전용공간으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천시예 사우님. 오늘은 뭐, 게이트에서 절멸종이나 그런거 안나왔나?"

나는 소파를 차지하고서 아이스크림을 음미하는 천시예를 향해 물었다.

흐음-.

그러자 천시예는 잠시동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나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냥 자주 나오는 유형은 아닌 것 같아. 필드보스와는 느낌부터가 다르다고 해야하나······."

"별일 없었다니 그거 다행이네."

그런 천시예의 대답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를 마무리지으려던 찰나.

소파에서 나를 바라보던 천시예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 그런데 나 우리 길드장님한테 할말이 있어."

"나한테 할말이 있다고?"

나는 그런 천시예의 질문에 의문을 표했다.

최근에 내가 직원을 서운하게 했던 부분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면, 천시예가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여 무언가를 전송했다.

띠링-.

천시예가 1:1 대화를 통해 나에게 전송한 사진.

그것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미완성 게이트의 모습이었다.

"이건······?"

"내가 이번에 나가서 발견한 EX급 게이트야."

"EX급 게이트?"

나는 천시예의 이야기를 듣고서 전송된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미 한차례 주선호와 EX급 게이트를 공략한 경험이 있던 나였다.

그 경험에 비추어 게이트를 살펴보자, 확실히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응. 오늘 발견해서 찍어둔거야."

"그런데 EX급 게이트는 왜?"

"다음에 같이 들어가보자."

"뭐?"

"우리 길드장님도 S급 헌터잖아? 같이 들어가서 한 번 안쪽을 탐색해보자."

더군다나 천시예는 그런 EX급 게이트를 손으로 가리키며, 함께 게이트 내부를 탐험해보자고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EX급 헌터가 되었으니 EX급 게이트에도 한 번 도전해볼 생각인 것이었을까.

함께 안으로 진입하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천시예의 모습에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나도 S급이 되었으니, 별 문제는 없을거라고 생각하지만······.'

EX급 게이트는 여타 게이트와는 수준부터가 다른 편이었다.

그 공략이 마냥 쉬울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내 고민을 이해한 것이었는지, 천시예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떠먹으면서 말했다.

"굳이 끝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어. 그냥 내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가늠해보고 싶은거야."

반드시 토벌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한 천시예의 이야기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거라면 상관없겠지."

EX급 헌터인 천시예가 그리 무리한 조건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길드 소속의 헌터가 성장을 원하고 있으니, 길드장으로서도 어느 정도는 맞춰주는 것이 좋을 터.

그렇기에 나는 천시예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 토벌에 나설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들어갈땐 들어가더라도 준비 좀 하고가자."

"응, 알았어."

평균 헌터 등급 S급의 초호화 길드, 다크어비스.

길드를 설립한 후 처음으로 길드원과 게이트 공략을 약속한 순간이었다.

* * * * * *

처음 예지몽을 마주했던 순간부터, 나는 이러한 고민들을 가슴속에 줄곧 품어왔다.

슬슬 세계에 망조가 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 세상이 어느날 갑작스럽게 망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불타는 도시의 풍경이 재현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불안을 부채질하듯이, 최근 들어서 뉴스에서는 안타까운 소식만이 계속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것도 주로 게이트와 관련된 내용들이 말이다.

- "최근 들어서 비행형 몬스터의 출현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 "국방부는 태평양의 일부 섬을 거점으로 삼은 비행형 몬스터가 대거 발생했다 주장하고 있으며······."

- "우리나라를 포함한 상당수 국가가 비행형 몬스터의 습격을 이유로 결항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지난번에 바다에서 이루어졌던 게이트 브레이크가 끝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것이었을까.

최근에 들어서는 비행형 몬스터의 습격이 빈번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다를 돌아다니는 몬스터들 때문에 섬에 있는 게이트까지 토벌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비행형 몬스터를 이유로 결항이 연달아 이어질 정도였다.

쯧-.

휴일을 맞이해 집에서 TV를 보던 나는 그러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혀를 찼다.

"게이트 브레이크의 피해가 갈수록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한 나는 손에 든 따뜻한 커피를 홀짝였다.

평소부터 TV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유튜브가 망가진 이후로는 이것 역시 하나의 취미가 된 상황이었다.

유튜브가 고쳐질 때까지는 커뮤니티와 TV가 얼마 안되는 삶의 낙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홀짝이며 화면을 보던 것도 잠시.

나는 손에 든 커피를 얌전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래서 헌터계의 지도부에 유능한 인재가 앉아있어야 하는건데······."

그리고는 무능한 헌터계에 대한 감상을 조용히 이야기했다.

물론 누군가는 내가 그 헌터계의 지도층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다.

나는 최상위 헌터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의 관리자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헌터들을 전두지휘할 권한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주선호만 하더라도 원하는대로 상황을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무수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던가.

그런만큼 내 입장에서도 하고 싶은 말은 많은 편이었다.

"뭐, 헌터들이나 키워서 가능한 미래를 대비하는게 내 입장에서 최선이겠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천시예를 비롯한 헌터들의 성장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었을까.

가능한 전력을 키워서 나중을 대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터였다.

그렇게 내가 TV를 보며 느긋한 여유를 즐기던 도중.

띠링-.

갑작스럽게 내 눈앞에 반투명한 화면이 출력되었다.

"······."

나는 눈앞에 나타난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의 의미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깜빡, 깜빡-.

수차례 눈을 깜빡이던 나는 눈앞에 나타난 메세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 별자리 시험 : 이끄는 자의 자격 >

* [ 폐쇄형 커뮤니티 : 자격 시험 4 ]

- 당신은 84명의 커뮤니티 구성원을 이끄는 자로서, 그 자격을 증명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 멸망에 대비할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를 허락받을 수 있습니다.

- 성좌 : [전지의 오르미르]가 당신에게 걸맞은 시험을 개방했습니다.

- 시험에 통과하는 경우, 민첩 능력치가 다음과 같이 조정됩니다.

* 민첩 : C+ → A+

- 시험에 실패하는 경우, [커스텀 네트워크]의 모든 기능이 정지합니다.

- 시험 내용 :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십시오.

- 제한시간 : 59일 23시간 59분

고유특성 [커스텀 네트워크]가 제시하는 네번째 시험.

민첩 능력치를 보상으로 제공하는 해당 시험의 내용은 무척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십시오.

그도 그럴 것이 이 한문장이 시험 내용의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대체 뭘 어떻게 증명하라는거야?"

S급 헌터, 신유호.

나는 헌터가 되고서 처음으로 마주한 서술형 문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9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