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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0

85화

이번 시험에 걸려있는 막대한 보상을 확인한 이후.

나는 자신의 안에 있던 망설임을 빠르게 걷어버릴 수 있었다.

"이렇게되면 무조건 길드를 차리는 수밖에 없겠지."

해당 시험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천시예를 승급시키면 나도 함께 승급할 수 있다.

S급 헌터, 검귀의 성장에 내 명운이 달려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검귀를 EX급까지 성장시킬 생각이라면, 그렇게 키운 검귀를 내 영향력 아래에 놓아두는 편이 나을 터.

그러니 길드의 설립은 사실상 필수가 되는 셈이었다.

"옆에 두고서 움직이다보면 이해도나 영향력도 같이 오를거고··· 내가 일선에 나선다는 점만 아니면 마다할 이유는 없어."

천시예 본인도 자율성이 강한 소규모 길드를 원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내가 사업적인 부분만 알아서 처리한다면 그녀의 입장에서도 큰 불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조금 더 바빠지게 될거라는 사소한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부터 진정으로 고민해야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천시예를 키울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헌터 등급 EX의 벽.

그 벽을 뚫어내기 위한 직관적인 방법에 대해 고민할 차례였다.

"성좌 시스템을 활용하면 그렇게까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까지 내가 성좌 '인피니튜드'를 활용하던 방법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이미 S급 헌터 오지아를 육성하면서 성좌의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 끝마친 상황.

더군다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서 끊임없이 개선방안을 강구해왔다.

성좌의 이름을 이용해서 헌터들을 육성한다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윤곽이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

성좌를 통한 육성 프로그램은 헌터들에게 있어서 비교적 거부감이 덜한 편이었다.

막대한 포인트를 자연스럽게 건네주기에도 좋았다.

물론 아직까지 내 연기가 완벽한 편은 아니긴 했다.

천시예에게 직접 써먹으려면 어느 정도 조정이 필요할거라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어."

신생 길드장, 신유호.

다가올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며 나는 제법 복잡한 고민을 이어나갔다.

* * * * * *

역앞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평일 오후이기 때문인지, 카페의 내부는 다소 한산한 편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그런 카페안에서 선글라스 차림의 천시예와 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완전무장을 마친 천시예의 앞에는, 씁쓸한 커피가 부어져있는 아포가토가 놓여있었다.

"그래서, 나보고 새로 만들 길드에 들어오라는거지?"

스윽-.

아포가토를 앞에 둔 채, 선글라스를 살짝 조정한 천시예가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오늘 내가 그녀와 마주하게된 용건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런 천시예의 질문에 나는 커피잔을 붙잡으며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뭐, 그런 셈이지."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홀짝였다.

오늘 내가 천시예와 이곳에서 단둘이 대면하게 된 이유야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최두식이 말했던 길드의 설립.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하기 위함이었다.

최두식으로부터 천시예에게 무언가 언질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계약의 당사자가 되는건 어디까지나 나와 천시예였으니까 말이다.

둘이 직접 만나서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저씨가 먼저 권유한 내용이라고 들었어."

천시예는 그렇게 말하며 차가운 젤라또를 한스푼 떠냈다.

"아저씨의 괜한 걱정에 휘말릴 필요는 없어."

"······."

"어차피 돈이야 벌만큼 번 것 같고, 나도 적당히 작은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

천시예 나름대로 나를 배려하려는 모양이었을까.

부담스러우면 거절하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물론 부담스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부담의 원인은 최두식의 부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이번 일은 나에게 있어서도 헌터업계에 조금 더 직접적인 방향으로 진출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부탁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때문에 길드를 만드려는건 아니야."

허나, 언제까지고 뒤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다.

때로는 헌터업계의 전면에 나서서 자신을 내보일 필요도 있었다.

그것이 자신만의 세력을 만드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내가 직접 필요하다고 느껴서 진행하는 일이거든."

"길드를 만드는게······?"

"그래. 그래서 진행하는거야."

내 말을 들은 천시예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언제까지고 헌터업계 바깥에서 겉돌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그건··· 확실히 그렇긴 하겠네."

"이쪽도 믿을 수 있는 아군이 필요한건 마찬가지야."

내가 지금 천시예에게 하는 이야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다가올 멸망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아군이 필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 그리고 이번에 만들 길드도 그런 곳이 되어야겠지."

믿을 수 있는 아군.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천시예정도면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EX급 헌터가 된 천시예라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주선호를 견제할 수 있는 몇안되는 수단이기도 하고.'

적어도 주선호나 이지성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러운 편이기도 했다.

주선호와 관련되어있는 일만 아니라면, 천시예가 통제할 수 없이 엇나가는 일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그런 내 이야기가 의외였던 것이었을까.

천시예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무, 물론··· 나도 당신을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기는 한데······."

"······."

"아저씨가 왜 당신을 추천했는지도 알고 있고, 같이 게이트에 들어갔던 경험도 몇번이나 있고······."

푹-.

천시예는 자신의 표정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듯이, 스푼으로 젤라토를 크게 한스푼 떠냈다.

그렇게 조금 떨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던 천시예가 이야기했다.

"당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어."

"그럼 문제 없겠네. 이대로 길드를 만들면 되겠어."

—당신은 나름대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천시예가 나에 대해 그렇게 말했으니 대강은 마음이 정리된 셈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번 이야기에 대한 결론을 매듭지으려던 순간.

턱-.

천시예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아 멈춰세웠다.

"잠깐만. 아직 할말이 안끝났어."

"어떤 말이 하고싶은거야?"

"당신이 길드를 창설하려고 하는거, 저번에 말했던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거야?"

천시예가 나에게 던진 질문.

이번에는 그것이 내가 미등록 헌터로 남아있는 이유와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이유와 관련이 있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그게 사실이기는 했다.

내가 최두식의 부탁을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가 [커스텀 네트워크]와 커다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나는 주선호가 헌터들에게 주장하는 것처럼, 헌터들끼리 뭉쳐야한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내가 주선호의 모든 사상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주선호를 배제하려고 하는 천시예의 생각에 대해서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내가 주도권을 쥐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대한민국 헌터계의 전면에 나서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그 생각이 맞아. 비슷한 이유 때문이야."

"그렇다면··· 알았어."

끄덕-.

짧게 수긍한 천시예가 스푼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입에 집어넣었다.

우물, 우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천시예가 고민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머지않아 나를 바라보면서 손가락 세개를 펼쳤다.

"내가 길드에 원하는건 딱 세가지야."

"세가지?"

"응. 세가지만 들어주면 나머지는 어떻게 하더라도 상관없어."

천시예가 나에게 요구하는 세가지의 조건.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요구사항을 하나씩 경청했다.

스윽-.

천시예는 활짝 펼쳐진 손가락들 중 하나를 접었다.

"하나. 스케줄은 나와 상의해서 충분히 여유롭게 잡을 것."

"그거야 문제없어. 중요한 상황에만 같이 나서주면 되니까."

"둘. 길드 소속 헌터니까 곤란할때 도와줄 수는 있어. 하지만 유튜브는··· 너무 자주 찍으려고 하지말자."

흠칫.

천시예의 두번째 조건을 듣던 나는 예상치 못한 조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천시예의 두번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래. 두번째 조건도 문제없어."

두번째 조건도 수긍했으니 이제 마지막 조건을 들어볼 차례였다.

툭.

마지막으로 손가락 하나만을 남긴 천시예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묻겠는데··· 길드 이름은 뭘로 지을건데?"

"헌잘—."

"그냥 내가 지어올게."

읍, 읍-.

천시예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녀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한국에서 두번째로 강한 헌터의 입막음을 벗겨내기에는 엿부족이었다.

길드의 작명권은 그렇게 천시예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럼 이 내용대로 약속한거야."

"······예. 그럽시다. 천시예 헌터님."

결국 나는 천시예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고 계약을 체결했다.

S급 길드장, 신유호.

그 첫번째 발걸음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 * * * * *

불이 꺼진채로 반투명한 화면만이 빛을 발하고 있는 방안.

그곳에서 천시예는 고개를 들어 [커뮤니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EX급 헌터인 주선호를 포함해서, 전세계의 S급들이 모여있는 비밀 커뮤니티.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저 반투명한 화면은 천시예가 가지고 있는 몇안되는 취미였다.

"이제 새로운 길드에 가게되는거구나······."

파자마 차림의 천시예는 멍하니 커뮤니티 화면을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천시예가 헌터생활을 이어나가는 동안, 그녀의 집은 계속해서 넓어져왔다.

그리고 그녀는 넓어져가는 집의 적막함을 해결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방에 인형들을 하나씩 채워왔었다.

유망주 시절부터 셀레스티아 길드에서 보내온 시간동안, 천시예의 방에는 점점 인형이 하나씩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방의 절반정도는 인형들이 가득채우고 있었다.

"그동안 셀레스티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던걸까."

게시판의 게시글 목록을 바라보던 천시예의 머릿속에,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하나씩 스쳐지나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채, 혼자만이 이 세상에 남아버렸다고 생각하던 시절.

그때는 돈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우선순위는 하나씩 바뀌어갔다.

어느 날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또 어느 날은 어떤 사람보다도 강해지고 싶었다.

그러한 시간속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으며, 그중에는 조금 특이하지만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아저씨가 바쁘게 된건 조금 아쉽게 됐네."

원래 그녀와 함께 길드를 만들기로 했던 최두식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조금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럼에도 예전부터 그녀를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물론 최두식이 말했던 것들 중, 복수심을 버리라는 이야기만큼은 끝까지 듣지 않았지만 말이다.

최두식이 오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쉽지만, 지금의 동업자도 충분히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사람 정도면··· 나쁘지 않은 동료인거겠지."

헌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면서, 상당한 실력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비록 천시예와 마찬가지로 기구한 사연을 숨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어느쪽이든 평범하게 살기에는 글러먹은 인생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천시예가 고민하고 있던 도중.

띠링-.

갑작스럽게 천시예의 시야에 메세지 하나가 떠올랐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서 특별한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침대에 누워 [커뮤니티]를 보고 있던 천시예의 눈앞에, 낯선 성좌 하나가 메세지를 보내온 것이다.

화들짝 놀란 천시예는 곧장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메세지를 보낸 성좌를 향해서 이야기했다.

"누, 누구야······?"

어딘가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성좌를 향한 질문.

그 직후 곧장 천시예에게 답장이 날아왔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이라면 EX급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특별한 헌터에게 특별한 행운이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성좌, 인피니튜드.

지상에 있는 헌터들을 관찰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천시예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것도 그녀라면 EX급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메세지와 함께 말이다.

"내가 EX급에 도달할 수 있다고······?"

헌터 등급, EX.

지난번에 새롭게 개방된 최상위 헌터등급이지만, 천시예로서는 아직까지 인연이 먼 등급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녀가 언젠가 그곳에 도달하길 갈망한다는 것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내가 EX급에 도달할 수 있는건데······?"

혹시나 눈앞의 성좌라면 자신이 EX급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까.

그런 마음을 담아 천시예가 하늘에 질문을 전하면, 다시금 천시예의 눈앞에 메세지가 떠올랐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이 원한다면 스스로 돕겠다고 주장합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대신에 당신이 한가지 조건에 동의해야한다고 요구합니다.

한가지 조건.

성좌는 천시예를 향해 어떠한 조건을 요구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무거운 조건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일까.

천시예는 성좌가 제시할 다음 조건을 기다리며 침묵했다.

"······."

그리고 그런 천시예를 향해서, 성좌는 그녀에게 자신의 조건을 전달했다.

성좌가 천시예의 성장을 돕기 위한 유일한 조건.

그것은 무척이나 간단한 것이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는 언젠가 한 번, 당신이 부탁을 들어줄 것을 원합니다.

단 한번의 부탁.

그것이 성좌 인피니튜드가 원하는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86화

[커스텀 네트워크(A)].

처음 이 능력을 각성했을때부터, 나는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언젠가 내가 작정하고 커뮤니티에 포인트를 풀어야만 하는 순간이 오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

그러한 고민을 통해 만들어냈던 뼈대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점점 살을 덧붙여나갔다.

더군다나 며칠간의 고민을 더한 끝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완성된 계획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정도면 계획을 진행하기 위한 준비로는 충분하려나."

나는 눈앞에 띄워진 화면에 비추어지는 천시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시예를 EX급 헌터로 육성하기 위해 내가 준비한 계획.

나는 해당 계획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방치형 검귀 키우기 프로젝트.

물론 이번 계획에 이러한 이름을 붙여놓은 것은, 육성에 있어서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부분이 한정되어있는 까닭이었다.

"앞으로는 <성좌 임무> 기능을 통해서 행동을 유도하면 되겠지."

커뮤니티에 소속되어있는 성좌들에게 주어지는 기능, <성좌 임무>.

나는 해당 기능을 통해서 천시예에게 개별적으로 임무를 전달할 생각이었다.

천시예에게 무작정 대량의 포인트를 퍼주기보다는, 적당한 목표를 제시하며 포인트를 보상으로 내걸기로 한 것이다.

성좌 임무를 통해 단계적인 임무를 제시하면서 천시예의 성장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오지아때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천시예에게 요구한 조건의 경우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고 말이다.

"그럼 첫번째 퀘스트로 뭘 내줘야하나······."

흐음-.

책상에 앉은 채로 짧은 고민을 하던 나는, 머지않아 반투명한 키보드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성좌 임무>를 이용해 천시예에게 제안할 첫번째 퀘스트를 입력했다.

어떤 퀘스트를 내는 것이 좋을까.

그러한 고민 끝에 내가 떠올린 것은 비교적 간단한 워밍업 퀘스트였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가는게 좋겠지."

타닥, 타다닥-.

내가 손가락을 움직여서 내용을 입력하자, 천시예에게 새로운 <성좌 임무>가 전달되는 모습이었다.

- 새로운 <성좌 임무>가 개방되었습니다.

- 임무 내용 : 검을 휘둘러 동일한 모양과 크기의 검흔을 100개만큼 새기십시오.

- 달성 보상 : 1,000 포인트

- 제한시간 : 1시간 59분 59초

내가 처음으로 천시예에게 제시한 임무의 내용.

그것은 인내심이 부족한 천시예에게 도움이 되어줄만한 내용이었다.

그런 내 퀘스트 내용이 의외였던 것이었을까.

화면의 너머에선 당황한 천시예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지, 지금 바로 시작하는거였어······?!"

<성좌 임무>의 제한시간을 확인한 천시예는, 곧장 이불을 걷으며 침대를 뛰쳐나가는 모습이었다.

빠르게 검을 찾아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있으면, 생각보다 의외의 일면이 있구나 싶기도 했다.

뭐, 누구나가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는가.

S급 유튜버인 나조차도 그러하듯이 말이다.

끼익-.

한껏 의자를 기울여젖힌 나는, 화면 너머에 있는 천시예의 모습을 보며 감상에 젖었다.

"내가 신생길드의 길드장이 되어서, S급 헌터인 천시예를 육성하는 날이 오게 될줄이야."

내가 내리는 퀘스트를 받아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검귀.

그리고 그런 검귀를 지켜보면서, 그녀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나 자신.

지금의 이 풍경을 반년전의 누군가에게 말했더라면, 누구라도 헛소리로 치부하고선 믿으려고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만큼 내 눈앞에 비추어지는 풍경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런 날이 올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게임같은 풍경이었다.

그렇기에 '방치형 검귀 키우기'같은 우스운 이름을 붙인거지만 말이다.

쉬익, 쉬익-.

이렇게 내가 방에서 홀로 궁상에 잠겨있는 와중에도, 화면속의 천시예는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귀 키우기 1일차였다.

* * * * * *

한국 최연소 S급 헌터이자, 셀레스티아 길드의 간판스타들 중 하나.

검귀, 천시예가 생각하기에 S급 헌터의 하루는 굉장히 바쁜 편이었다.

토벌에 인터뷰, 긴급출동에 CF와 방송출연까지.

눈코뜰새없이 분주한 일정들로 가득차있는 것이다.

무척이나 살인적인 일정들은 천시예가 길드의 이동을 고려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

그러나 그런 천시예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하루는 최근 들어서 한층 더 바빠진 편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당연하게도 지금 천시예의 눈앞에 띄워져있는 반투명한 화면에 있었다.

- 새로운 <성좌 임무>가 개방되었습니다.

- 임무 내용 : S급 게이트에서 [필드 보스]를 처치하십시오. (0/2)

- 달성 보상 : 200,000 포인트

- 제한시간 : 23시간 59분 59초

시스템이 그녀에게만 보여주고 있는 특별한 화면.

그곳에 적혀있는 내용을 바라보던 천시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천시예의 눈앞에 보이는 <성좌 임무>의 내용.

그 내용은 S급 게이트에서 [필드 보스]를 잡아오라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무려 두마리나 말이다.

평소라면 한달에 한 번 갈까말까한 S급 게이트에 들어가서는, 검귀 혼자서 보스를 두마리나 쓰러뜨리고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막대한 포인트를 준다는 점은 좋았지만, 저 빡빡한 시간제한만큼은 몇번을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 화면이 나올때마다 머리가 다 아파오는걸······."

아무래도 오늘은 혼자서 게이트를 세탕이나 뛰어야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시예가 길드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으면, 그녀의 옆에서 걸어가던 직원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헌터님, 요즘 들어서 유독 피곤해보이시네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

"다크서클도 보이는 것 같고··· 혹시 최근에 잠이라도 설치신건가요?"

오죽하면 비각성자인 직원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전해올 정도였다.

천시예는 그런 직원의 이야기에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해보았다.

셀프 카메라로 보이는 얼굴이 확실히 며칠 전보다는 지쳐보이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며칠동안 <성좌 임무>에 시달린 여파가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동안 쌓인 피로가 겉으로도 드러날 정도인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많이 피곤하신거면 메디컬 팀에 연락을 해서······."

"별거 아니야. S급 헌터라서 몸은 튼튼할테니까."

다만, 그러한 상황에 대해 불평을 오랫동안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성좌가 제시하는 임무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EX급이 되고 싶어서 성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천시예 자신이었다.

그러니 그 압박감을 감당해야하는 것도 당연히 그녀의 몫이었다.

'어떻게 얻은 강해질 기회인데, 이대로 놓칠 수는 없어.'

<성좌 임무>를 통해 지금까지 받은 포인트만 하더라도 무려 100만 포인트를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100만 포인트.

어지간한 헌터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만한 포인트를 손에 넣었다.

성좌는 막대한 포인트를 퍼부어가면서 그녀를 성장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천시예 자신이 EX랭크에 도달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서 말이다.

아직은 메디컬팀까지 찾아가서 엄살을 피울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헌터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네요."

"개인실에 가서 좀 쉬고 있을게."

"네. 차량이 준비되면 바로 부를게요!"

결국 천시예는 직원과 적당한 대화를 마치고서, 개인실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선택했다.

토벌과 전투. 그리고 또 토벌.

매일같이 피비린내가 나는 나날이었지만, 어떻게든 참고 견뎌야 할 필요가 있었다.

EX급 헌터, 신창(神槍)— 주선호를 넘어서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천시예는 악마와도 거래할 자신이 있었다.

"하암······."

자그마한 하품을 내뱉은 그녀는 휴게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철컥-.

그렇게 그녀가 개인 휴게실 안에 들어서자, 번쩍거리는 최신형 안마의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계약 당시에 길드장 양호종이 그녀에게 약속했던 특급대우의 일부였다.

천시예는 휴게실 안에 놓여있던 최신형 안마의자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러 안마의자를 실행시켰다.

"······."

반쯤 눈을 감은 천시예가 그렇게 안마의자를 만끽하고 있으면, 머지않아 천시예의 눈앞에 메세지 하나가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띠링-.

천시예의 시선이 자신에게 날아온 메세지의 내용을 훑었다.

- 성좌 [인피니튜드]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인피니튜드]가 당신이 지쳤다면 하루정도는 휴식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성좌, 인피니튜드가 그녀에게 보낸 메세지의 내용.

그것은 그녀 자신이 원한다면 하루 정도는 휴식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휴식.

오랜만에 그녀에게 유독 그립게 다가오는 단어였으나, 천시예는 고개를 저어 성좌의 너그러운 제안을 거절했다.

"휴식까지 할 필요는 없어."

- ······.

"그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멈춰있을 수는 없으니까."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단 하나의 소원.

그것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정진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녀 자신을 불태우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휴식제안을 거절한 천시예는 의자가 전해주는 안락함을 다시금 만끽해나갔다.

그렇게 의자에 누워있는 채로, 천시예의 눈동자는 서서히 닫혀가기 시작했다.

"흐음··· 으으음······."

침묵이 내려앉은 휴게실.

그 속에서 자그마한 숨소리만이 방안을 맴돌았다.

* * * * * *

짧은 꿈을 꾸었다.

그 내용은 굉장히 모호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단 하나의 장면만큼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꿈속에서 마주했던 후드를 뒤집어 쓴 어떤 여자의 모습.

얼핏 보기엔 점쟁이라고 생각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만난 점쟁이에게서 한마디의 말을 들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불쾌하고 섬뜩한 이야기를 말이다.

- "당신은 조만간 가장 사랑하던 무언가를 잃어버릴거예요."

점쟁이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한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는, 당연히 언제나와 똑같은 아침을 마주할 뿐이었다.

짹짹, 짹짹-.

창밖으로 새소리가 들려오는 익숙한 침대의 모습.

나는 그곳에서 이불을 걷어낸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난밤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었을까.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은 그리 썩 상쾌하지 못한 편이었다.

"별 개꿈을 다꿔보겠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한차례 스트레칭을 한 나는 아침의 일과를 위해 손을 움직였다.

아침을 맞이한 내가 가장 먼저 하는 하루 루틴.

그것은 바로 커뮤니티의 성좌 기능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어제 내줬던 퀘스트의 결과부터 확인해볼까."

방치형 검귀 키우기가 시작된 이후로 어느덧 열흘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지속적으로 천시예에게 퀘스트를 제시해왔다.

내가 설정한 훈련방향으로 직접 유도하면서, 천시예를 계속해서 단련시켜왔던 것이다.

내 탁월한 훈련프로그램이 적중한 덕분이었을까.

천시예는 슬슬 훈련의 성과를 보여가는 모습이었다.

"어디보자··· 내가 어제 내줬던 임무는 전부 끝내뒀나보네."

나름대로 성실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

천시예는 내가 제시한 퀘스트들을 빠짐없이 클리어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제시한 보상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말이다.

검귀에게 있어서 단점이라고 할만한 부분들도 어느정도 보완되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스마트폰의 메모앱에 적어놓았던 단점 대부분이 지워도 상관없는 내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보상으로 받은 포인트도 내가 알려준 방향으로 사용한 것 같고 말이야."

더군다나 천시예와 나 사이의 소통은 성좌 대 헌터의 형식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그녀와 함께 길드를 이끌어나갈 길드장이 된 까닭이었을까.

천시예는 이전보다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에게 포인트 사용 방향을 자문해왔던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런 그녀의 요청에 친절하게 답변해주었고 말이다.

성좌와 길드장.

양쪽에서 물심양면 천시예를 돕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궁수 키우기로 넘어가는 것도 괜찮겠어."

스윽, 슥-.

나는 스마트폰의 메모앱을 열어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고민했다.

천시예의 육성이 끝나면 오지후에 대한 육성계획 역시 고려해보려는 생각이었다.

전사 키우기와 도적 키우기에 이어서, 방치형 궁수 키우기까지 도전해볼까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메모를 적으며 천시예의 상황을 분석해나가던 도중.

띠링-.

갑작스럽게 내 눈앞에 장문의 메세지가 출력되는 모습이었다.

"이건······."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의 내용.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서 손가락을 멈춰세웠다.

- 새로운 EX급 헌터를 탄생시켰습니다!

- [폐쇄형 커뮤니티 : 자격 시험 3]이 종료됩니다.

- [성채의 오르도]가 시험을 통과한 당신의 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 신성 능력치가 다음과 같이 변화합니다.

- 신성 : D → D+

내가 새로운 EX급 헌터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의 메세지.

그와 함께 시험이 종료되었다는 알림이 출력된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S급 헌터, 천시예가 이시간부로 EX급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아."

그녀가 열흘동안 이어왔던 뼈를 깎는듯한 노력.

거기에 막대한 양의 포인트가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내가 이 손으로 새로운 EX급 헌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고작해야 헌터 유튜버로 시작했던 내가 이뤄낸 성과치고는 굉장히 고무적인 것이었다.

허나, 내 시선은 거기에서 멈추어서지 않았다.

내 눈앞에 떠오른 메세지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 [커스텀 네트워크(A)]에 충분한 에너지가 축적되었습니다.

- [커스텀 네트워크(A)]의 등급을 다음과 같이 조정할 수 있습니다.

- 특성 등급 : A → S

- 경고! 해당 선택은 당신에게 불가역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 등급을 조정한 이후에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 등급을 조정하시겠습니까?

- [ 예 / 아니오 ]

자그마한 착각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이제는 나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랜 착각을 현실로 뒤바꿀 기회.

그것을 마주한 나는 눈앞의 화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S급, 헌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동경해왔던 S급 헌터들.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던 나 자신.

부끄러운 비밀들을 감춘 채 바쁘게 살아왔던 시간들.

그 속에서 자신이 이뤄냈던 수많은 기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들과 만들어냈던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될 것이다.

오랜 세월 가슴에 품어왔던 무수한 부끄러움에 작별을 고하듯이-.

나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화면속에 보이는 버튼을 터치했다.

툭-.

손가락이 닿은 화면이 빛을 잃은 채로 눈앞에서 무너져내렸다.

"······너무 긴 시간이었나."

처음의 반짝임. 그로부터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S급 헌터 커뮤니티의 관리자가 되었다.

87화

햇볕이 내리쬐는 낙원.

무수한 풀내음이 코를 간질이고, 새하얀 짐승들이 뛰어다니는 낙원의 풀밭.

나는 현재 그곳에서 커다란 물뿌리개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것도 방금 전에 경매장에서 구매한 C+등급의 고급 물뿌리개를 말이다.

당연하지만 이 거대한 낙원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구입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료해진 시간을 달래기 위한 나름대로의 일탈에 가까웠다.

"할건 해야지······."

- 왈왈!

나는 옆에서 짖기 시작하는 백구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물뿌리개 안에 성수를 가득 채워넣기 시작했다.

툭. 쪼르르륵-.

최고급 물뿌리개에 차오르기 시작하는 성수를 보면서, 나는 허탈함이 가득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열번째로 S급 헌터에 도달한 내가 어째서 물뿌리개에 성수를 가득 채워넣고 있는가.

그 이유야 당연히 하나밖에 없었다.

"백구야. 이틀동안 나는 버섯이다."

- 왈왈, 왈왈왈!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이지."

지금 내 눈앞에 띄워져있는 반투명한 시스템 메세지.

바로 그곳에 적혀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 [커스텀 네트워크(S)]의 안정화를 위해 다음 시간동안 모든 기능이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 남은 예상 시간 : 45시간 18분 27초

이제는 S급에 도달해버린 고유특성, [커스텀 네트워크].

해당 특성과 함께 커뮤니티가 일시적으로 서버점검에 들어가버린 까닭이었다.

등급이 높아질수록 점검시간이 서서히 늘어나더니, 이제는 아예 이틀이나 점검을 진행해버리는 모습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이틀동안 헌터들과의 소통창구를 압류당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틀동안 내가 무능력자가 됐다는 의미였다.

"[커스텀 네트워크]는 쑥쑥 자라서 벌써 S급까지 성장했는데, 여기 심어놓은 식물은 왜 아직도 이거밖에 안자랐을까."

관리메뉴가 닫혀 방치형 검귀 키우기도 불가능할 뿐더러, 커뮤니티의 [인기 게시글]조차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번 점검시간이 S급 헌터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사실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틀동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낙원에 있는 식물을 보살피고자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세계수의 씨앗(A)>.

이전에 아딜레아의 부탁을 받아 낙원에 심어놓았던 씨앗의 이름이다.

세계수를 키워내기 위해 만들어진 아이템은 어느덧 뿌리를 내려, 이제는 묘목이라고 부를만한 크기까지 성장한 모습이었다.

잎이 자라난 미니 세계수의 주변에서는 은은하게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

"성수값이 얼마나 들어가고 있는데, 조금 더 빨리 자라야만 하는거 아닌가."

허나, 애석하게도 나는 식물을 기르는 지루한 일과는 그리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식물의 성장주기는 나같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비교적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였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살아간다는 선인장조차 말라 비틀어지게 만들었던 것이 내 식물 기르는 실력이었다.

아딜레아와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식물 키우기에는 두 번 다시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구야. 역시 나는 식물이랑 안맞나보다."

나는 눈앞에 놓여있는 세계수를 향해 물뿌리개의 입구를 기울였다.

성수를 가득 채운 물뿌리개로부터 신성한 빛이 흩뿌려졌다.

그렇게 흘러나온 빛은 나무를 적시며 영양분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고급 물뿌리개에 고급 물.

거기에다가 양지바른 토양까지.

최고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할말은 많은 편이었다.

"······."

띠링-.

그렇게 내가 식물에 물을 주며 고민하고 있으면, 머지않아 성좌로부터 메세지 하나가 날아왔다.

저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성좌 아딜레아의 전언이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가 세계수를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성좌 [청록의 아딜레아]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청록의 아딜레아]는 새롭게 싹을 틔운 세계수가 머지않아 이 땅과 당신의 신수들을 특별하게 만들거라 이야기합니다.

아딜레아는 세계수에 물을 주고 있는 나를 향해, 이것이 나와 신수들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이었다.

낙원에 심어진 세계수.

세계수가 성장하면 그것이 뿌리내린 게이트를 비롯해, 이곳에 있는 신수들 전체에게 영향을 끼칠거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아딜레아의 이야기를 들은 내가 그 내용을 곱씹는 것도 잠시.

나는 머지않아 한가지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예?"

세계수가 성장하면 게이트에 특별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헌터 전문가의 머릿속에 한가지 가능성이 스쳐지나갔다.

특별한 일.

그것도 성좌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장담할만한 일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게이트의 변화를 지켜봐왔던 내가 생각하기에, 세계수가 만들어낼 특별한 변화라고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특별한 변화라는게······?"

게이트의 가치 제고.

그 가능성을 떠올린 나는 아딜레아를 바라보았다.

허나, 아딜레아로부터 추가적인 답변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

나는 아딜레아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면서, 물뿌리개에 들어있는 성수를 더욱 격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주선호가 알면 눈이 뒤집힐만한 비밀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겠다.

* * * * * *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커뮤니티의 서버점검이 자주 이어진 덕분인지, 다섯번째 점검에 이르러서는 나도 슬슬 적응이 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틀이라는 점검시간을 무척이나 알차게 보내는데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킬링타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무척이나 급격하게 비대해진 내 유튜브 채널이었다.

지난 이틀동안 나는 자신의 채널에 자라나기 시작한 악성 댓글들을 삭제하며 시간을 보낸 것이다.

"채널이 커져서 그런가, 뭐 이렇게 악성 유저가 많이 꼬이지."

나는 난감한 얼굴로 눈앞에 놓여있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구독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헌잘알' 채널의 구독자가 어느덧 150만명을 돌파한 상황.

그 덕분인지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도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황이었다.

알량한 지식으로 내가 가진 권위에 도전하는 댓글부터, 작정하고 스팸 목적으로 달린 댓글까지 그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전문용어로 '깨진 유리창 이론' 이라고 하던가.

이렇게 망가진 댓글이 많을수록 악성 댓글의 숫자가 많아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악성 구독자들의 댓글을 잘라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내 프사 누르면 대박영상있음? 최두식의 우람한 근육 대박이다? 무슨 헛소리야."

딸깍, 딸깍-.

나는 계속해서 마우스를 움직이며 문제가 되는 댓글들을 삭제했다.

정의의 심판이 화면에 내려꽂힐 때마다 댓글창이 점점 깨끗하게 변해가는 모습이었다.

"······이만하면 됐나."

그렇게 내가 더러워진 유튜브 댓글창을 관리하기를 한참.

오늘도 분주하게 사이버 악마들과 싸우던 내 눈앞에서, 이틀동안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점검 메세지가 사라졌다.

띠링-.

이제서야 지난 이틀간의 점검이 끝나고서, 닫혀있던 커뮤니티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후, 드디어······."

점검 메세지가 사라진 직후.

나는 곧장 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를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눈앞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커뮤니티에 생긴 변화를 확인할 시간이 됐구나."

어떤 물건을 사더라도 박스를 뜯을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하던가.

게다가 이번에는 무려 S급 고유특성의 언박싱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 S급 특성으로 성장한 [커스텀 네트워크].

과연 그것이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인가.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커뮤니티를 호출했다.

"—[네트워크 접속]."

짧은 시동어.

그 직후, 내 눈앞에 무수한 메세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자신의 눈앞에 쏟아지는 기나긴 메세지들의 향연.

나는 그것들을 가장 위에서부터 하나씩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 [신규 기능 : 소모임 게시판]이 추가되었습니다.

- [소모임 게시판]은 특정 주제를 공유하는 게시판을 개설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 커뮤니티 레벨 10 이상의 이용자만이 [소모임 게시판]을 개설할 수 있습니다.

- [특수 기능 : 경매장]이 강화되었습니다.

- 이제부터 <별자리 등록>을 끝마친 성좌들은 [경매장]의 등록, 입찰, 취득, 정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성좌 후원>을 통해 성좌들이 조금 더 특별한 선물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 <성좌 후원>을 통해 성좌들이 조금 더 직접적인 표현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 <성좌 후원>을 통해 특정한 성좌에게 공물을 바칠 수 있게 됩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기능.

그것은 [소모임 게시판]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능이었다.

해당 기능은 커뮤니티 내부에 특정한 주제를 가진 게시판을 만드는 기능이었다.

기존에 있던 [단체 대화방]과는 다르게 접근이 열려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소모임 게시판]. 아무래도 하위 게시판을 만드는 기능처럼 보이는데."

평소에 게시판에서 배척되는 주제를 다루는 유저들도 있었던만큼, 그런 이들에게는 만족스러운 패치가 될거라 생각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경매장] 기능에 대한 변화가 적혀있었다.

기존에는 커뮤니티 이용자들만이 사용가능했던 [경매장] 기능.

해당 기능에 특별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성좌들이 경매장에 접근이 가능해졌다고? 게다가 이제 아이템 거래도 가능해진거야?"

이제부터는 성좌들이 경매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취득한 아이템을 헌터들에게 후원하는 일도 가능해진 것이다.

경매장에 막대한 포인트를 가진 새로운 고객이 생긴만큼,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두고봐야 알 것 같았다.

물론 헌터들 입장에서는 아이템 후원보다도 포인트 후원을 더 선호할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후원을 통한 표현범위 역시 늘어났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리 중요한 변화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스윽-.

나는 손가락을 뻗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그 아래에서는 조금 더 많은 내용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특수 기능 : 긴급방어]가 강화되었습니다.

- 저장된 에너지를 소모해 [긴급방어]의 적용범위를 확장할 수 있게 됩니다.

- 이제부터 [긴급방어]를 사용하더라도 재사용 대기시간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 [특수 기능 : 강력경고]가 강화되었습니다.

- 저장된 에너지를 소모해 [강력경고]의 적용범위를 확장할 수 있게 됩니다.

- 이제부터 [강력경고]를 사용하더라도 재사용 대기시간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 [특수 기능 : 에너지 증폭]이 삭제되었습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메세지의 향연.

그 내용은 대부분 [커스텀 네트워크]와 연결되어있는 스킬에 대한 변경점이었다.

특성이 성장하는 것으로 기존에 있던 스킬들 역시 강화된 모양이었다.

나는 시선을 옮겨 내가 가지고 있던 스킬들에 생긴 변화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내 시선이 한차례 그 내용을 훑고 지나간 이후.

나는 경악에 젖은 얼굴로 다시금 반투명한 화면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스킬 쿨타임이 사라졌다고?"

믿기지 않는 내용을 확인한 나는 수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허나 몇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더라도, 화면에 적혀있는 내용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 [긴급방어]와 [강력경고].

S급 헌터가 되면서 해당 스킬의 쿨타임이 완전히 삭제된 것이다.

"아니, 그러면··· 이제부터 온동네 사람들한테 [강력경고]를 남발하고 다니는 것도 가능하다는 건가?"

두가지 스킬들은 내가 하위등급의 헌터였던 시절부터 애용해오던 스킬이었다.

다른 S급 특성들과 비교해보아도 탁월한 성능을 보이는 스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스킬에 쿨타임마저 사라진 것이다.

더군다나 [강력경고]의 경우 원래부터 범용성이 탁월했던만큼, 쿨타임이 사라진 스킬을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해진 셈이었다.

무척이나 터무니없는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스킬들이 성장하면서 [에너지 증폭]이 삭제된걸테고······."

기존에 [강력경고]와 [긴급방어]를 강화하는데 사용하던 [에너지 증폭] 스킬 역시 삭제되었다.

해당 스킬의 기능이 다른 스킬에 자체적으로 내장된 까닭으로 보였다.

이렇게되면 사실상 [징벌]을 제외한 모든 스킬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징벌] 스킬에는 여전히 쿨타임이 남아있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구조적으로 쿨타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스킬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징벌]이야 에너지 충전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있으니, 쿨타임을 없애버리더라도 사실상 큰 차이는 없겠지."

고유특성 [커스텀 네트워크]와 연결되어있는 스킬들은 해당 특성으로부터 필요한 에너지를 끌어다쓴다.

그런만큼 쿨타임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스킬을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거야 다른 S급 헌터들도 똑같은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징벌] 난사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마지막 남은 변경사항을 읽어나갔다.

- [특수 기능 : 단체 대화방]이 강화되었습니다.

- 이제부터 의식공간에 접속해 [단체 대화방]의 구성원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 포인트를 소모해 [단체 대화방]의 환경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커뮤니티에 생긴 변화는, 기존에 있던 [단체 대화방]과 관련된 것이었다.

[소규모 게시판] 기능이 새롭게 추가된 대신에, 지금까지 그 역할을 맡고 있던 [단체 대화방]의 기능을 강화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단체 대화방]을 통해 의식공간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의식공간에서의 대화.

다시 말해서 멀리 떨어져있는 커뮤니티 구성원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게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사실상 비공개 화상회의같은 느낌인가?"

의식공간이 어떤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사용해봐야 알겠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도 주선호가 유독 좋아할만한 기능으로 보였다.

외부의 감시없이 동료들과의 대면대화가 가능해지는 셈이었으니까 말이다.

해당 기능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단체 대화방]의 수요가 점점 더 늘어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히 S급이 되서 그런가, 변화가 많이 생기기는 했네."

고유특성에 생긴 변화를 확인한 나는 기나긴 메세지가 띄워져있던 화면을 닫았다.

대략적인 변화는 전부 확인했으니, 이제는 커뮤니티에 들어가볼 생각이었다.

스윽-.

그렇게 내가 커뮤니티 화면에 손가락을 가져가려던 찰나.

띠링.

갑작스럽게 성좌 하나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왔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포인트 필요."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급함."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성좌의 정체는 '허광의 블렌도어'.

처음으로 나를 성자로 임명했던 성좌였다.

나는 그런 성좌의 메세지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좌가 보낸 메세지의 내용이 상당히 직설적이었던 까닭이다.

"······조금 더 직설적인 표현이 가능하단게 이런거였냐."

이번에 [성좌 후원] 기능에 생긴 새로운 변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생각해서 넘어갔건만, 막상 메세지를 받아보니 생각보다 큰 변화처럼 보였다.

성좌들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

다시 말해서 조금 더 직관적이고 본질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였다.

"포인트··· 포인트가 많으면 좋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갑작스럽게 성좌의 품격을 내려버리는 격조없는 말투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성자 자리는 성자 자리인거고, 포인트는 그와 별개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저런 말투로 나에게 포인트를 요구해온다고 한들,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가 블렌도어의 부탁을 거절하려던 순간.

블렌도어가 나에게 몇마디를 더 덧붙여왔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또 하나의 신성주문이 있는 장소로 믿음의 아이를 이끌어주겠다."

- 성좌 [허광의 블렌도어]가 당신에게 100포인트를 후원했습니다.

- "다만 그러한 기적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안타깝게도 1만 포인트의 공물을 채워야만 한다."

블렌도어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허공을 향해 뻗었던 손가락을 멈춰세웠다.

아무리 성좌라도 대뜸 포인트를 달라고 하는걸 들어주는건 곤란한 일이었다.

다만 그 뒤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새로운 신성주문.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손을 공손히 접어들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블렌도어님께 헌금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처럼 신앙심이 투철한 인물도 드문 편이었다.

아무래도 그 사실을 증명할 시간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88화

EX급 헌터, 아서 테브란트.

세계에서 두번째로 규격외의 등급에 도달한 그에게는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권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레이트 브리튼이 가장 위대한 기사를 존중하며 그에게 헌정한 권한이었다.

그리고 지금, 검성 아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사용하기 위해 낯선 장소에 방문한 상황이었다.

런던 근교에 위치한 거대한 탑.

오래전에 시작되었던 현인회의(Witenagemot)의 이름을 딴 이곳은, 수많은 세월동안 국가의 비밀을 기록해온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만간 커다란 격변이 일어날겁니다, 아서."

그런 아서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눈에 붕대를 감고 있는 여자였다.

S급 헌터, 현자(賢者)— 릴리 스트링거.

그녀는 새하얀 천을 옷위에 두른 채로, 붕대에 가려진 눈을 아서에게 향하고 있었다.

현자 릴리는 아서가 생각하기에 S급 헌터들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허나, 그 이질감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서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었다.

특히나 황금의 성좌, 라스테리오에게 무거운 경고를 받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커다란 격변이 벌어질거라고?"

"네. 멸망에 집어삼켜진 황제가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겁니다."

"······."

"온세상이 쑥대밭이 되어 어지럽게 변해버릴테고, 그 속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자신의 길을 찾게 되겠지요."

스윽-.

현자 릴리의 손이 반짝이는 수정구를 스쳐지나갔다.

아서의 눈에는 단지 자줏빛으로 물든 구슬에 불과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릴리는 그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낼줄 아는 사람이었다.

수정구를 쓰다듬던 릴리가 아서를 향해 무거운 이야기를 전했다.

"아서. 혼란이 벌어지고 수많은 의지가 당신을 시험할겁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당신은 진정한 기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테죠."

"릴리, 그 이야기는 내가······."

"그리고 당신이 격랑속에서 엮이게 될 사람중에는, 동쪽에 거주하는 '검은 성자' 역시 포함되어 있을겁니다."

"검은 성자? 그게 누구지?"

"그는 세상 누구보다도 많은 악운을 타고났으며, 또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저주를 짊어지게될 인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악운을 타고난 인간.

그리고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저주받을 인물.

그 이야기를 듣던 아서는 씁쓸함이 서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건 성자라기보단 그냥 불쌍한 사람인거 아니야?"

설명만 들어서는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다만, 릴리는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부정했다.

그녀는 자줏빛 수정구를 쓰다듬은 채로 아서를 향해 충고했다.

"그는 수많은 헌터들에게 암중에서 영향을 끼치며, 더 많은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움직이게 될 인물입니다. 절대 가볍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단 말이지. 성자라는 이름과는 안어울리는 녀석인데?"

검은 성자.

그 이름에 대해 고민하던 아서의 머릿속에 어떤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EX급 헌터, 신창 주선호.

그가 생각하기에 해당 설명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성자라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주선호가 검은 성자일 것인가.

그러한 고민을 하던 아서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한 채,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릴리. 검은 성자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 알겠고, 황제라는 괴물이 나타날거라는 사실도 이해했어."

"네, 아서. 조만간 세상이 완전히 뒤집힐겁니다."

"그리고 온세상이 쑥대밭이 될거라는 이야기도 잘 알아들었어."

현자 릴리의 이야기를 듣던 아서는 멋쩍은 얼굴로 떨어져내리는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그가 현자와 대화를 나누는데 허락된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였다.

이제는 시계속의 모래가 완전히 떨어져내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떨어지는 모래를 확인하던 아서가 릴리를 향해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냈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게 중요한건데?"

"아서 테브란트. 위대한 옛 영웅의 이름을 타고난 당신이 해야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빠른 속도로 떨어져내리는 모래.

사그라드는 수정구의 빛을 앞에 두고서, 릴리 스트링거는 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훌륭한 기사로 남아있기 위해 노력하세요."

"······뭐?"

"오직 그것만이 당신을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할겁니다."

투둑, 툭-.

모래시계 안에서 흘러내리던 모래가 전부 떨어져내린 이후.

현자의 손에 닿은 수정구의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빛이 사라진 수정구를 응시하던 릴리는, 아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위대한 기사에게 행운이 따르기를."

현자와의 대화.

기사 아서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한이 끝을 맺은 순간이었다.

* * * * * *

오래전부터 나는 S급 헌터들에게 랭킹을 매겨왔다.

한국의 신창, 주선호.

영국의 검성, 아서 테브란트.

인도의 수라, 아카쉬 찬드라.

수많은 국가에 있는 헌터들의 장점과 단점을 분석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순위를 배정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랭킹에 이제는 한명의 S급 헌터가 더 추가되어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S급 헌터, 폭군 신유호.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순위를 매겨도 공표할 수 없다는게 참 안타까운 일이긴 하네."

한강뷰 아파트와 연결되어있는 은신처의 안쪽.

나는 현재 그곳에서 커뮤니티 이용자 'swordmaster'가 보낸 메세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 전에 그녀가 EX급 헌터에 도달했기 때문이었을까.

나에게 오랜만에 헌터랭킹을 갱신하자는 이야기를 전해온 것이다.

- swordmaster : EX급. 검귀 등장. ^O^

- swordmaster : 길드장님~~

- swordmaster : 슬슬. 헌터랭킹. 갱신하는거. 어때요?¿?¿

- 거품판독기 : ㅎㅎㅎㅎㅎ

- 거품판독기 : 천시예 사우님 ㅎㅎ

나는 눈앞에 보이는 메세지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나 역시도 천시예의 부탁처럼 랭킹을 갱신하고 싶을 정도였다.

허나, 나는 유튜브에서 흔히 말하는 '사이버 렉카'들과는 다르게, 투철한 저널리즘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S급 유튜버였다.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랭킹은 유튜브에 업로드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EX급이 열린 이후로 최신자료가 끊긴 헌터가 너무 많아서 힘들 것 같은데."

그런 내가 어떻게 'S급 헌터 폭군 신유호'가 빠진 랭킹 영상을 올려서, 수많은 시청자들을 속이고 기만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천시예가 기대하는 헌터랭킹 TOP 10 영상은 한동안 올라오기 어려워보였다.

나는 그런 내 정직함을 가득 담아서, 천시예를 향해 정성스러운 답장을 전송했다.

- 거품판독기 : 제 마음속에선 사우님이 최고!!!

- 거품판독기 : 언제나 천시예 헌터님이 1등이세요 bb

- swordmaster : 우와 ^O^

- swordmaster : 너무 조와용 ㅎㅅㅎ

- swordmaster : 근데.객관적으로는.몇위 ?¿?¿

- 거품판독기 : ㅎㅎㅎㅎㅎㅎㅎ

- 거품판독기 : ㅎㅎㅎㅎ

- swordmaster : 왜. 대답. 안해줘. ¿¿¿¿¿

툭.

나는 화면을 눌러서 채팅창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이정도면 내 생각이 천시예에게 충분히 전달됐을 터.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할 생각이었다.

"혼자서 게이트 공략에 도전하는건 이번이 처음인건가."

성좌 블렌도어에게서 받은 두번째 신성주문의 좌표.

그곳으로 직접 이동해 새로운 신성주문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찰칵-.

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블렌도어의 약속(S+)>의 금속프레임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신성력이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찾아오기는 하는구나."

나는 손바닥을 펼쳐 허공을 향해 겨누었다.

내가 끼고 있는 반지는 잊혀진 신 블렌도어의 권능을 빌어 만들어진 물건.

그런만큼 블렌도어가 직접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반지에 등록된 것이, 지금부터 내가 들어갈 S급 게이트였다.

"—[공간연동]."

손바닥을 펼친 내가 허공을 향해 게이트 생성의 권능을 사용한 이후.

우우우우웅-.

회전하는 황금의 원이 피어오르면서, 그 너머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동하며 갈라지는 공간.

그리고 게이트의 너머로 펼쳐지는 이질적인 회색의 풍경.

빠른 속도로 완성되어가던 게이트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머지않아 완성된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자, 그럼··· 어디 게이트 안쪽을 확인해볼까."

정면을 향해 내딛은 한걸음.

그 직후, 내가 발을 딛고 있던 은신처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 [게이트 : 잿더미에 뒤덮힌 기억]이 실체화됩니다.

- 판정 등급 : S

- 통신 효과 및 탐지 효과가 해당 공간에서 금지됩니다.

녹음으로 가득차있던 은신처의 풍경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회색에 뒤덮혀버린 오래된 풍경이 대신했다.

잿빛에 잠식되어버린 건물들.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길목에서는 황량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여기는··· 오래된 유적인건가?"

적막함으로 가득차버린 낡은 유적.

나는 그러한 풍경을 둘러보면서, 홀로 잿더미에 뒤덮힌 유적을 나아갔다.

터벅, 터벅-.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잿빛의 풍경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반복되는 잿빛의 풍경 너머로 왠지 모를 싸늘함이 느껴졌다.

"분위기가 다소 칙칙하기는 한데, 지난번에 주선호랑 들어갔던 곳보다는 나아보인단 말이지."

나는 정면을 향해 나아가면서, 틈날때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헌터들만큼 기감이 예리하게 발달하지 못한 까닭이었을까.

애석하게도 앞을 보면서 뒤에 있는 적의 존재까지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태껏 다른 헌터들을 보조하면서 전투를 치뤄왔던 까닭인지, 혼자서 다니는 일이 이상하리만치 어색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

물론 S급 헌터나 되어서 동료가 없다고 겁이나 집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러한 어색함을 참고 걸어가는 것이 헌터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잿빛의 도시를 헤쳐나가며, 필드의 심부를 향해서 발걸음을 이어나가길 한참.

쐐애애애액!

멈추지않고 앞을 향해서 나아가던 내 시야에, 갑작스럽게 검은 그림자 하나가 뛰어들었다.

"······뭐야?"

쿠웅-!

측면에서부터 강하게 터져나오는 충돌음.

아무런 전조조차도 없이 내 옆쪽에서 튀어나온 것은, 입가에 불을 품고 있는 거대한 늑대의 형상이었다.

- 크르르르······!

- [긴급보호]가 활성화됩니다.

늑대의 형상을 한 몬스터와 충돌한 직후.

나와 몬스터 사이에 반투명한 벽이 생기며 녀석의 공격을 차단하는 모습이었다.

쿵! 쿠웅-!

몬스터가 충돌하는 자리로부터 자그마한 파문이 퍼져나갔다.

눈앞에 피어오른 마력의 장벽을 뚫기 위해서, 녀석이 반복해서 나를 노려온 것이다.

나는 방어막을 공격하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그렇지. 왜 안튀어나오나 했네."

휘익-.

허공에 손을 흔들기 무섭게, 검은 칼날이 내 손아귀에서 피어올랐다.

——<파멸검 트리바키아(S+)>.

최근 들어서 내 애검이 된 무기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크르륵······?

어둠에 물든 검신으로부터 불길함을 느낀 것이었을까.

나를 마주한 녀석은 곧장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회색털을 바짝 세운 채, 나를 경계하기 시작한 짐승의 모습.

하지만 내 시야에 들어와버린 이상, 녀석이 직면하게될 운명은 바로 하나밖에 없었다.

"······."

죽음.

나는 감히 성자에게 이빨을 들어낸 짐승을 단죄하기 위해, 녀석을 향해서 [강력경고]를 사용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날카로운 시선을 타고 확산하기 시작하는 공포.

내 시야에 들어온 짐승의 눈동자가 풀려버리더니, 이내 눈을 까뒤집고서 입에 거품을 무는 모습이었다.

끄륵, 끄르르륵-.

거품을 문 녀석은 제자리에 선 채 좌우로 비틀거렸다.

[강력경고]에 휘말린 탓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섰다.

"미안하지만 난 털이 시커먼 짐승은 안키우거든."

역수로 쥔 검은 칼날.

저주가 서린 파멸검이 맥동하며 짐승을 노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죽어라."

콰직! 콰드드득-!

두터운 두개골을 꿰뚫고 깊숙히 파고드는 칼날.

회색 털을 헤집은 칼날로부터 붉은 핏물이 튀어올랐다.

그 직후, 짧게 경련하던 괴물의 몸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 그으으윽······.

쿵-.

회색 털을 가진 괴물이 쓰러진 자리에서는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풍경을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S급 게이트 안에서 출현한 일반 몬스터.

그런 녀석을 내가 [징벌]이나 스크롤 없이 쓰러뜨린 것이다.

"이제는 이정도 몬스터는 문제없이 잡을 수 있게 된건가."

옛날의 자신이었다면 상상조차 못했을만한 일이었다.

허나, 이제는 이것조차도 S급 헌터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 된 것이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스킬들을 한번씩 사용했음에도, 여전히 스킬에 쿨타임이 적용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새삼 자신이 얻은 스킬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쿨타임 없이 [강력경고]를 난사할 수 있다는게 진짜 말도 안되는데."

S급 헌터들이 평소에 보고 다니던 경치를, 이제는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괴물을 쓰러뜨린 이후.

나는 파멸검을 저주의 형태로 되돌리고선, 다시금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한차례 몬스터와 싸우고나니, 더는 뒷통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긴급보호]가 나를 지켜줄거라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하··· 이게 S급 헌터들이 가지고 있던 자신감의 비결인가. 공기의 냄새부터가 완전히 다른데."

가슴속을 채운 강력한 자신감.

나는 그것을 만끽하며 적막에 잠긴 잿빛 도시를 걸어나갔다.

터벅, 터벅-.

그런 내 발걸음이 지나간 자리에 새겨진 발자국에는, S급 헌터의 당당한 기백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 * * * * *

도시의 중심부에 접근하기까지, 나는 몬스터의 습격을 수차례 더 맞닥뜨렸다.

물론 그 결과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S급 게이트의 일반 몬스터들로는 더 이상 S급 헌터가 되어버린 나를 막아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몬스터들에게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한참.

나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야, 도시의 중심부에 세워진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음··· 겉으로 보기에는 신전의 입구처럼 보이는데."

거대한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에 세워진 문.

그것은 오랜 세월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잿더미에 뒤덮히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그를 대신해서 테두리에 살짝 그을린 자국이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잿빛에 물든 도시에서 유일하게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문.

누가 보더라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이걸 열고 들어가면 신성주문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건가."

그을음이 남은 문을 보며 고민하기를 잠시.

나는 머지않아 손에 힘을 주면서, 힘껏 문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오래된 경첩으로부터 섬뜩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굳게 닫혀있던 문이 좌우로 열리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두터운 문을 완전히 열어젖힌 직후.

그을음이 남은 문을 열어버린 나는 무언가와 마주하고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어?"

활짝 열어젖힌 문의 너머.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고글을 쓴 채 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낯선 남자의 모습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낯선 상대.

허나, 그럼에도 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거지?"

툭, 데구르르-.

바닥에 주저앉아 도시락을 먹던 남자의 손에서 샌드위치 하나가 떨어져내렸다.

고글을 쓴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런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헌터는 오래전부터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던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알렉스 오브라이어."

"당신, 대체 누구야?"

미국의 S급 헌터, 뇌제(雷帝).

알렉스 오브라이어.

나는 최강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남자와 게이트 안에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89화

하나의 필드로 연결되는 둘 이상의 게이트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래전부터 헌터계에 대두되어왔던 내용이지만, 오랜 세월을 걸쳐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 사안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필드 내부에 생성되는 출구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하나의 필드에 하나의 게이트만이 연결된다는 이야기였다.

나처럼 특수한 예외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당신, 대체 누구야······?"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존재하는 알렉스의 모습은, 내가 하필이면 미국에 생성된 게이트에 들어왔다는 의미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기존에 먼저 들어온 선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헌터를 게이트 내부에서 마주했다면 상대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눈앞의 S급 헌터가 보일만한 반응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예를 들자면, 지금 알렉스가 나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최근에 그랜드 캐니언 주변에서 게이트에 접근을 허가받은건 나밖에 없을텐데?"

"······."

"인가받은 헌터가 아니라면 빨리 밖으로 나가는게 좋을거야. 여기서 죽더라도 내가 책임은 못지니까 말이야."

뇌제, 알렉스 오브라이어.

그는 경계의 기색을 가라앉히지 않은 채로 고글을 내리는 모습이었다.

아직까지는 나와 이렇다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나를 동양계 미국인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한 착각마저도 내가 대화를 시도하는 순간 완전히 무너져내릴테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미국에서 게이트를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나는 눈앞의 알렉스가 보이는 태도로부터 이 상황을 분석했다.

뇌제 알렉스가 나를 보면서 그런 착각을 품은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내가 미국인이 아니라 타국의 헌터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테니까 말이다.

동일한 필드에 여러개의 게이트가 열렸거나, 혹은 모종의 방법으로 게이트를 뚫고 들어왔거나.

어느쪽이든 전략적으로 이용될 여지가 다분한 상황이었다.

알렉스의 보고가 소속된 길드에 올라가는 순간, 미국의 헌터협회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는 사안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계속 그렇게 있으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말없이 서있는 나를 압박하려는 것이었을까.

알렉스는 푸른 빛을 띄는 고글의 너머로 나를 응시했다.

파직, 파지직-.

그런 알렉스의 주변에서는 푸른 스파크가 튀어오르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조용히 넘어가기에는 글러먹은 것 같은데.'

최악의 경우에는 실력행사를 하는 것조차 불사하겠다.

알렉스의 태도는 나에게 그런 의미로 보이고 있었다.

미국의 뇌제와 조우하게 된 것은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려나.'

후우-.

입밖으로 헛웃음을 내뱉은 나는 알렉스를 앞에 두고서 고개를 저었다.

어떤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다분해보이는 상황.

조금은 강경한 수단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잠깐, 이 소리는······!"

대치상황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알렉스의 시선이었다.

나를 바라보던 알렉스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문의 뒷편에 놓여있던 석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서 내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석상을 향해 이끌렸다.

"빌어먹을, 저게 대체 뭐야?"

"저건, 설마······."

나와 알렉스의 시선이 향한 석상.

그것은 검붉은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쩌적, 쩌저적-.

사방으로 갈라지며 퍼져나가는 균열의 모습.

그리고 그 틈새로부터 불길한 빛이 번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몇차례 마주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쩌저저저저적!

나는 빛을 퍼뜨리는 균열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절멸종."

절멸종의 전조.

그것을 발견한 내가 알렉스를 향해 무어라 이야기하려던 순간.

쩌저적. 콰아아아앙-!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지던 석상이 굉음과 함께 폭발하는 모습이었다.

그와 동시에 갈라진 균열의 너머에서 기이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 잿더미에 쌓인 도시에 침묵이 내려앉으며 [절멸종]이 출현합니다.

- [절멸종 : 배회하는 불꽃 바그로켈트]가 출현했습니다.

화르르륵-!

균열의 너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푸른 불꽃.

일렁이는 청염의 사이에서 번뜩이는 안광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륵, 화르륵!

무수한 불길이 사방에 피어오르면서, 그 숫자만큼 많은 눈동자들이 출현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작열하며 들끓는 대지.

그 사이에서 전신이 불꽃에 휩싸인 인간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

그것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로, 단지 열기만을 퍼뜨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산하는 열기속에서 무엇인가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절멸종, 바그로켈트.

필드의 너머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우주 바깥의 괴물이 찾아온 것이다.

수많은 눈동자를 가진 괴물의 모습에 나는 곧장 목걸이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재빠르게 마력을 끌어올리던 알렉스가 나를 가로막았다.

"절멸종? 분류가 필드보스가 아니라 절멸종이라고?"

"······."

"거기 머저리같은 녀석! 여긴 내가 해결할테니까 살고싶으면 당장 꺼져!"

파직, 파지직-.

나와 괴물 사이에 서있던 알렉스의 주변에서 뇌전이 터져나왔다.

번져나가는 푸른 번개.

강렬한 번개를 전신에 짊어진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잡는 모습이었다.

"—[라이트닝 스피어]."

치지지지직-.

알렉스의 손끝에서부터 피어오른 번개가 그 덩치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푸른 뇌광.

응집하는 전류는 빠른 속도로 뒤엉키며 거대한 창의 형상을 이루었다.

파직-!

알렉스의 손에 만들어진 묵직한 창대.

그것은 고작해야 창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커다란 물건이었다.

'창보다는 전봇대라고 부르는게 더 울릴법한 크기인데.'

거대한 창을 힘껏 움켜쥔 채,

알렉스는 눈앞의 괴물을 향해 뇌전의 창을 집어던지는 모습이었다.

"꺼져라, 괴물 녀석!"

손끝에서 터져나가는 푸른 궤적.

그것은 알렉스와 불꽃 사이를 잇는 일직선의 섬광을 만들어냈다.

콰과과과과광—!

허공을 수놓는 푸른 빛줄기는 흉성을 터뜨리며 바그로켈트에게 쇄도했다.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접근한 뇌창.

그것이 괴물에게 가까워지기 직전.

거대한 불꽃에 휘감겨있던 인간의 형상이 손을 들어올렸다.

- 아··· 아아아······.

기이한 음성이 울려퍼지는 것과 동시에, 불꽃의 장벽이 바그로켈트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청염이 솟아오르며 두터운 장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직후, 푸른 불꽃과 푸른 번개가 허공에서 충돌하는 모습이었다.

콰앙! 화르륵!

파지지지지직-!

타오르는 불꽃과 파고드는 뇌격.

맹렬하게 격돌하던 마력은 한참동안 뒤엉키며 그 위력을 해소했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나서야 힘을 잃어버리고서 완전히 사그라들고 마는 모습이었다.

"이걸 완전히 막아냈다고······?"

치이이익-.

불꽃을 머금은 바그로켈트의 손은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녀석은 일말의 상처조차도 보이지 않는 상황.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렉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아귀를 노려보았다.

"아니, 아무리 필드보스라도 상처 하나 안남을수는-."

- 아, 아아··· 아아아아아······.

경악한 알렉스가 다시금 마력을 끌어올리는 사이.

알렉스를 바라보던 바그로켈트는 그 손을 허공에 휘젓는 모습이었다.

휘익-.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가르듯이 움직이는 손아귀.

그것을 따라서 절멸종의 주변에 머무르던 불씨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번 절멸종은 불꽃을 이용해 공격하는 타입인건가.'

나는 눈앞에 나타난 절멸종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손을 따라 움직인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진 이후.

그것들은 유도 기능이 달린 것마냥 알렉스를 노리고서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체인 라이트닝]!"

알렉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불꽃을 보며, 마력이 엉켜있는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모습이었다.

파직, 파지직-.

스파크가 튀어오르던 알렉스의 손가락이 불꽃을 겨누었다.

이윽고 허공에 있던 불꽃이 연쇄적으로 번개에 꿰여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앙! 쾅! 콰아앙-!

전격에 엮일 때마다 굉음을 내며 터져나가는 푸른 불꽃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결국 이 게이트에서 비슷한 녀석들끼리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야 말았다.

'가만히 놓아두면 끝날때까지 두 사람의 화력대결이 이어지겠어.'

만약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알렉스의 뇌전과 절멸종의 불꽃이 승부를 겨루기 위해 화력대결에 들어섰을 터였다.

고유특성 [영구기관(S)]을 가지고 있는 알렉스는 최고출력을 장시간 투사할 수 있는 최강의 마법사.

그러니 화력면에 있어서는 절멸종을 상대로도 쉽게 밀리지 않을 터였다.

- 아··· 으··· 아아아······.

"—[기가 라이트닝]."

지금만 하더라도 마력을 끌어모은 알렉스의 주위에 뇌운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뇌제 알렉스가 작정하고 이 주변에 낙뢰를 퍼부으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막지한 마력을 계속해서 투사해 화력으로 이 자리를 지배하겠다는 생각이 분명해보였다.

주변에 있는 건물들과 함께 절멸종 바그로켈트를 통째로 지워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어지간하면 조용히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려서야 내 입장에서도 좀 곤란하지.'

허나,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썩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유적의 내부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고작해야 몬스터나 잡자고 찾아온게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다짜고짜 낙뢰를 퍼부어 건물을 통째로 쓸어버린다면 무척이나 곤란했다.

알렉스에게는 무척이나 미안한 일이지만, 더는 이 상황을 두고볼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만."

"뭐? 당신 무슨 헛소리를······."

"알렉스 오브라이어. 이제 여기까지만 하지."

그렇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소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키지는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난장판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이상 일을 키우면 내가 곤란해질 것 같으니까."

날카로운 시선이 시야에 비추어진 두 존재를 담았다.

불길에 휩싸인 외계의 괴물.

그리고 뇌전에 휩싸인 이국의 사냥꾼.

두 형상이 내 눈동자에 온전히 담겨버린 이후.

죽음의 공포가 주변에 내려앉았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본질적인 공포.

생존본능이 거세된 존재에게조차 소멸을 인지시키는 공포가, 모든 제약이 해제된 채로 사방을 향해 뻗어나갔다.

압도적인 공포가 내려앉은 자리.

그 속에서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두 존재가 동시에 소리를 터뜨렸다.

"허억, 헉··· 끄으윽······!"

- 아··· 아? 아아? 아아아······.

그것은 이 자리의 모든 존재를 향해 발해지는 거대한 경고였다.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위협적이며 직접적인 경고.

막을 수도 없으며 저항할 수도 없는 공포의 격류가 주변을 휩쓸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인지 뇌리에 직접 새겨넣는 과정.

그 과정의 끝에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케헥, 끅··· 아아아악······!"

두려움에 젖은 채 침을 흘리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허공을 향해 비어버린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휘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칠흑의 칼날이 저주받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쥐어든 채로, 눈앞에 보이는 절멸종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파멸검을 붙잡은 내가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잿더미 위에 자리한 이들은 누구 하나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단지 스스로를 해체하는 공포에 질린 채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터벅, 터벅-.

이 자리의 모두가 절규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절멸종을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죽음과 소멸.

반복되는 충격속에서 절멸종이 공포에 몸부림쳤다.

- 아, 아아? 아아아··· 아······.

지나친 공포에 머리가 망가지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푸른 불꽃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로 일렁이는 모습이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나와 절멸종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줄어드는 거리.

그 속에서 파멸검을 역수로 움켜쥔 내가, 불타오르는 바그로켈트의 머리에 그것을 겨누었다.

- 아아아··· 아아아아······!

콰드드득-!

두꺼운 뼈를 꿰뚫고 깊숙히 파고드는 칼날.

불변성을 가진 검은 바그로켈트의 머리를 수직으로 꿰뚫었다.

치이이이익!

저주에 닿은 청염이 연기를 퍼뜨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파멸검을 붙잡은 채,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절멸종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트리바키아]."

나지막이 울려퍼지는 목소리.

그 직후, 저주가 속삭였다.

엉키고 흔들리며 흩뿌려지는 원념이 형을 갖추고, 바닥을 기는 바깥세계의 괴물을 집어삼켰다.

우우우우우우웅-.

여태껏 짊어져온 수많은 악의를 일거에 해방시키는 끔찍한 파동.

육안으로 보이는 풍경 전체를 뒤덮는 섬뜩한 웃음소리가 확산했다.

- 끼에에에에에엑!

- 끼에에엑-!

눈을 가리는 어둠.

귀와 정신을 어지럽히는 광기.

그 섬뜩한 순환은 검을 타고 주변을 잠식해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파멸검을 붙잡은 채로 이 모든 풍경을 지켜보았다.

"······."

확산하는 저주가 육신을 집어삼켰으며, 뒤틀린 원혼은 외계의 불꽃을 흩어놓았다.

무자비한 흐름이 이어지기를 한참.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질적인 흐름이 다시금 검으로 되돌아왔을 때.

서걱!

나는 불꽃이 사그라든 채로, 반으로 양단당한 괴물의 머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 [절멸종 : 배회하는 불꽃 바그로켈트]의 침공을 저지했습니다.

- [절멸종]을 처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검이 꽂힌 부분을 중심으로 어긋난 채 갈라지는 단면.

그 아래에서 저주가 엉겨붙은 검신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파멸검 트리바키아(S+)>의 본질.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끄으, 윽······!"

내가 파멸검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겨있던 것도 잠시.

머지않아 멀찍이 떨어진 곳에 엎어져있던 뇌제가 몸을 비틀었다.

계속해서 주변을 잠식하던 공포가 거두어진 까닭이었을까.

그는 스파크가 튀는 손끝을 거칠게 떨더니, 이내 침을 흘리던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 대체··· 이건··· 아, 아, 아니··· 당신은······?"

바닥을 기어다니던 알렉스는 나를 올려다보며 의문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커뮤니티의 동료를 상대로 심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건 나에게 있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뇌제라는 역할이 주어져있듯이, 나에게도 자신과 어울리는 역할이 주어져있으니 말이다.

"내가 누구냐고?"

내 정체를 묻는 알렉스의 질문.

그가 품은 모든 의문에 답하듯이, 나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알렉스를 향해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야, 폭군이지."

폭군에게는 폭군의 방식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과격한 편이었다.

9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