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커뮤니티의 [리워드] 시스템에는 일정한 갱신주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갱신주기가 한차례 지나간 이후에는, [리워드] 상점에 새로운 물품들이 입고된다.
다시 말해서 한 번 상점에 물품이 들어오고나서, 새로운 물품이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였다.
[리워드] 상점에서 판매중인 물건을 모두 구입한 이후에는, 한동안 포인트 소모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동안 경매장에 풀리는 포인트의 양을 신중하게 관리해왔다.
경매장 수수료 10%로 매일 소각되는 양을 감안하더라도, 포인트 경제가 유지되기 위한 유통량에는 적정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한 내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었을까.
[리워드] 상점 갱신일이 다가오기 전까지,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 인물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를 증명하듯이 현재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이번 상점에 대한 아쉬움을 성토하는 이들이 많이있었다.
- 갱신 8시간 남았는데 포인트 어떻게 모아야 할까요? [1] (firefox)
- 그냥 포기하면 편하다 얘들아 [7] (tex11)
- 방금 점심.머것서요 ^ O ^ [2] (swordmaster)
- 왜 저는 갱신주기가 혼자 다른 것입니까? [3] (thundershock)
- 구매완료 ( *˘╰╯˘) [21] (yamazaki)
- 리워드 초기화권에 대해서 [3] (frz0777)
나는 갱신을 앞두고서 이번 [리워드] 상점에 대한 정산을 진행하는 이용자들의 게시글을 훑어보았다.
대부분의 이용자들이 이번 [리워드] 상점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게시판의 이용자들 중에는 그러한 여파에서 벗어난 이들도 일부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에 내 권능으로 갱신주기를 뒤틀어버린 'thundershock'나, 게시판을 도배해가며 포인트를 매입하던 'yamazaki'가 그러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반응은 결이 다소 다른 편이었지만 말이다.
"저번에 작정하고 상점 돌려놨더니, 매번 혼자만 이야기에 못끼어들고 있네."
이용자명 'thundershock'— 뇌제 알렉스의 경우에는 순전히 본인의 업보였다.
며칠동안 [리워드]에 대한 내용으로 게시판을 도배하기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상점을 돌려버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혼자서 주기가 다른 것은 어디까지나 'thundershock'가 감내해야할 일이었다.
다만 게시판 이용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건데, 아무래도 [리워드] 상점 내부에는 <상점 초기화권>같은 상품도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이용자들의 포인트가 점점 쌓이기 시작하면, 뇌제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타이밍이 어긋나는 이들도 존재할 터.
그 뒤부터는 뇌제도 마냥 외로운 시간을 보내지만은 않게 될 것이다.
"[리워드] 이야기만 주구장창 나오니까 볼 글이 없네. [개인의뢰] 게시판이나 한 번 들어가볼까."
나는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게시글들을 대부분 사랑하는 편이지만, 유독 [리워드]에 대한 부분만큼은 어울리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나 자신이 [리워드] 상점에서 아무것도 구매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오늘같은 날은 유독 게시판에 흥미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은 게시판에서 시선을 돌려, 얼마전에 새롭게 추가된 [개인의뢰] 기능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툭-.
손가락을 옮겨 [개인의뢰] 메뉴를 터치하면, 이내 화면이 전환되며 각종 의뢰내용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개인의뢰] 게시판에 올라온 게시글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의뢰를 한가지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대체 왜 이런걸 포인트 주고서 시켜?"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개인의뢰] 게시판의 한 게시글.
거기에는 터무니 없는 내용이 적혀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해당 게시글을 홀린듯이 클릭했다.
[ 의뢰명 ] 일본 방위상 엑스(X)에 악플달기
[ 보상 ] 건당 10 포인트
[ 이용자 정보 ] 야마자키 아오 (34) / S급 / 귀령
[ 내용 ]
방위대신 이 대머리 자식
매번 나한테만 긴급출동 명령 내리고는 말이야
빌어먹을 녀석
( ◞•̀д•́)◞
정기 회의에서도 조금 더 성실하게 하세요 같은 이야기나 하고
이쪽은 매일 목숨을 걸고 있단 말이야
책상에서 보고만 듣는 사람이 대체 뭘 알고 있겠어
ヾ(.`Д´.)ノ
마음같아선 저주라도 걸고 싶지만
그러면 내가 했다는게 너무 티나니까
이 대머리 독수리한테 댓글로 따끔한 말을 남겨줄 친구들을 구하고 있어
너희가 하는 말이라면 방위대신도 조금은 진지하게 듣겠지
[ 수정 / 삭제 ]
경악스러운 시선이 해당 의뢰글의 마지막에 내려갔을 즈음.
나는 익숙한 관리메뉴를 발견하고서 스크롤을 멈춰세울 수 있었다.
해당 의뢰를 게시한 인물은 바로 이용자명 'yamazaki'.
일본의 '귀령'이 자국의 방위상— 우리나라로 치면 장관급 인물에 해당하는 사람의 SNS에 비난을 남겨달라고 의뢰를 한 것이다.
더군다나 해당 의뢰의 보상은 10포인트.
악플 하나에 10포인트라는 터무니 없는 보상이었다.
"상점에 있는거 얼추 다 사고나니까, 이제 포인트가 남아서 이런 의뢰까지 걸기 시작하는건가."
의뢰글을 보고 있던 나는 'yamazaki'의 기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방위상과 감정의 골이 있어도 그렇지, 그걸 대신 욕해달라고 의뢰까지 올린단 말인가.
나는 그런 'yamazaki'의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모습에 미약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으면 이런 선택을 했겠는가.
비록 내가 정체를 숨기고 있다지만, 나름 이 커뮤니티의 관리자가 아니던가.
곤란해하는 커뮤니티 구성원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이었다.
"하··· 커뮤니티 구성원이 이렇게까지 억울해하는데 관리자인 내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그렇기에 나는 'yamazaki'를 위해 대신 방위상의 SNS에 댓글을 남겨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언어가 다르다보니 번역기의 도움을 조금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나는 'yamazaki'의 울분을 풀어주기 위해, SNS에 새로운 계정을 생성했다.
해당 계정의 닉네임은 'YAMAZAKI99'.
본인의 울분을 풀어주기 위한 일인만큼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는 방위상의 SNS 계정에 들어가서는, 최근 게시글에 그를 비난하는 댓글을 달았다.
- YAMAZAKI99 : 나 yamazaki인데 대머리 독수리는 반성해라
타닥, 타다닥-.
키보드를 두드려 메세지를 입력하고서는, 해당 메세지를 번역기를 통해 번역했다.
짧은 메세지를 번역해 게시한 이후에는, 곧바로 내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 [의뢰 : 일본 방위상 엑스(X)에 악플달기]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 1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내가 S급 헌터 '귀령'의 의뢰를 무사히 해결했다는 이야기였다.
그에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인터넷 브라우저를 종료했다.
처음으로 의뢰를 해결하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 받은 10포인트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없을테지만 말이다.
"후우··· 솔직히 나처럼 착한 사람 별로 없어."
다음날 오후.
일본에서는 S급 헌터 '귀령'의 뒷계정 논란이 보도되었다.
* * * * * *
재벌 3세.
인스타그램 58만 팔로워.
그리고 300만 구독자의 특급 유튜버.
이 모든 수식어는 전부 한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헌터마스터, 박우성.
거창한 유튜브 채널명을 가진 그는 현재 청담동에 위치한 작업실에 있었다.
그가 마련한 호화 스튜디오 안쪽에 따로 준비되어있는 개인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최실장'이라고 부르는 인물과 통화하는 중이었다.
"최실장님. 파천궁 오지후 섭외해온다고 분명히 장담하셨잖아요. 설마 아직까지도 그 문제가 해결이 안된겁니까?"
300만 구독자의 채널을 운영하는 그가 최실장에게 부탁했던 것.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S급 헌터들 중 하나, 파천궁 오지후를 섭외해오는 일이었다.
파천궁의 경우 다른 S급 헌터들에 비해 방송출연이나 광고촬영이 적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헌터마스터 채널에서 충분한 대가만 지불한다면, 일정이 비교적 여유로운 파천궁을 데려올 수 있을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 박우성의 이야기에, 스피커 너머에서 미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직까지 섭외하는데 애를 먹고있어서······."
"대체 무슨 이유인데 그런겁니까? 그 인간 방송 출연 일정도 거의 없다면서, 돈만 주면 무조건 오는거 아니었습니까?"
- "······."
"편하게 예능 찍으면서 돈 받으면 그 사람도 좋고, 나도 좋고 그렇잖아요. 대체 뭐가 불만이랍니까?"
- "그게 말입니다, 도련님."
스마트폰 스피커의 너머.
잠시동안 내려앉았던 침묵의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박우성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현금에는 관심이 없어서, 포인트로 지급하는게 아니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예? 포인트라면 설마······."
- "[커뮤니티] 포인트에 대한 이야기더군요. S급들만 아는 내용처럼 보였습니다."
파천궁 오지후.
그가 현금 대신 포인트를 주는 경우에만 참여를 고려해보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박우성이 듣기에는 실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대체 그 포인트라는 물건을 어디에서 구해온다는 말인가.
박우성 자신이 S급 헌터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그 포인트라는거··· 애초에 S급이 아니면 구하기는 커녕 받는 것조차 못하는거 아닙니까? 그걸 왜 우리한테 달라고 하는겁니까?"
- "그게··· 포인트도 못챙겨줄거면 그 시간에 몬스터나 잡는게 더 이득이라면서······."
더군다나 최실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이었다.
헌터마스터 채널에 출연할 시간에 몬스터를 토벌하는 편이 더 이득이라니.
사실상 그럴 시간 없다는걸 돌려말한 셈이었다.
"오지후 그 인간이 그런 식으로 거절했다고요? 하··· 진짜 내 꼴이 말이 아니네."
후우-.
박우성의 입가에서 짙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S급 헌터들은 재벌은 커녕 국회의원이 와도 고개를 빳빳하게 세울 수 있는 이들이었다.
오지후가 헌터마스터의 요청을 거절했다면,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박우성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수화기 너머의 최실장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다른 S급 헌터라도 섭외해보세요. 요새 검귀가 특히 인기가 많은 편이던데, 어떻게든 일정만 받아낼 수 있으면 조회수가 제법 나오겠죠."
- "알겠습니다, 도련님. 검귀의 스케줄을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파천궁 오지후를 섭외하는걸 포기하고 물러선 박우성이었다.
그는 그 대신 다른 S급 헌터들을 섭외할 것을 최실장에게 요구했다.
최실장이 박우성의 지시를 받아들인 이후.
박우성은 최실장에게 그가 얼마 전에 내린 '어떤 부탁'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고보니 최실장님. 제가 저번에 이야기했던 유튜버들에 대한건 어떻게 됐습니까?"
헌잘알. 그리고 헌터사전.
두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에 대한 부탁이었다.
그에 방금 전보다 한층 밝아진 최실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헌잘알과 헌터사전에 대한 건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대형 길드의 임원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해놨습니다."
"그래요?"
- "예. 그러니 앞으로는 S급 헌터는 커녕, A급이나 B급 헌터들조차 제대로 촬영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최실장 자신이 직접 움직여 두 유튜버의 촬영을 막아놓았다는 이야기였다.
박우성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뭐, 최실장님이 다른건 몰라도 그런건 잘하니까. 알아서 잘 해놓으셨겠죠."
-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최실장님 이야기만 믿고 가겠습니다. 고생했습니다."
- "예, 도련님. 분부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시길."
보고를 받던 박우성은 손가락을 움직여 스마트폰의 통화를 끊었다.
툭-.
통화가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화면이 떠오른 이후.
박우성은 작업실에 놓여있던 컴퓨터를 이용해 유튜브에 접속했다.
유튜브에 접속해 '헌잘알' 채널의 근황을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날 이후로 대형길드쪽은 전부 다 끊겼을테니, 뭐 보잘것 없는 애들이나 찍고 있겠지."
헌터마스터 박우성과 헌잘알 신유호가 만난지 제법 시간이 지난 상황.
그런만큼 그 기간동안 대단한 컨텐츠가 올라오지는 못했을거라는 판단이었다.
어쩌면 한동안은 유튜브 활동을 쉬고있을지도 모를 터.
그러니 그 모습을 보고서 비웃어주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헌잘알' 채널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해당 채널에 올라온 동영상들의 제목을 확인해보았다.
"어······?"
깜빡, 깜빡-.
박우성은 눈앞의 풍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수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허나 그가 아무리 눈을 감았다 뜨더라도, 그의 시야에 보이는 내용들은 전혀 바뀌지 않는 모습이었다.
눈이 휘둥그래진 박우성의 시선이 영상의 제목들을 읽어나갔다.
- [인터뷰] 초신성 S급 헌터 천시예 단독 인터뷰!
- [인터뷰] 불사기사 최두식, 그 사건 이후의 심경을 밝히다
- [분석] B급 헌터 최태진 특성 및 헌터장비 분석 리포트
- [인터뷰] S급 헌터 파천궁 오지후, 헌잘알 채널 구독자들에게 전하는 이야기
- [근황] A급 헌터 유서하 최근 근황 및 전투패턴 변화
- [분석] S급 헌터 불사기사 최두식 특성 및 헌터장비 분석 리포트
위에서부터 화려한 알파벳들이 박우성의 시야를 스쳐지나갔다.
S급. S급. B급. S급. A급. S급.
하나같이 상위 등급 헌터들의 영상만 올라와있는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그중에는 해당 목록에 있어서는 안될 이름도 보이고 있었다.
—파천궁 오지후.
헌터마스터 채널의 섭외를 거절한 빌어먹을 헌터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있었던 것이다.
"오, 오지후가··· 왜 여기에······."
까득-.
눈앞에 보이는 영상의 제목들에 헌터마스터 박우성이 이를 갈았다.
한동안 제대로 된 촬영은 못할거라고 들었건만, 그러기는 커녕 이전보다 라인업이 더 화려해진 모습이었다.
하물며 그를 거절한 오지후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은 실로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도 못따낸 오지후 인터뷰를 고작 저딴 놈이 따냈다고?"
헌터마스터는 300만 구독자를 가진 거대한 채널이었다.
그리고 헌잘알은 보는 사람만 보는 구독자 65만명짜리 채널에 불과했다.
이런 결과는 어떻게 보더라도 무언가 잘못되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결과가 눈앞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뜨거워지는 머리를 한손으로 감싸쥐던 박우성의 입에서 거센 고함이 터져나왔다.
"최실자아아아아앙—!"
그날 저녁.
헌터마스터 박우성의 작업실에서는 한참동안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21화
세상에 유명한 헌터는 많이 있지만, 그 정점에 선 인물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S급 헌터, 신창(神槍) 주선호.
한국의 신창은 모든 헌터들의 우상이 되는 인물이면서, 전세계 헌터들이 동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주선호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취미가 하나 있었다.
바로 토벌 작전이 끝날때마다 차에서 혼자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설마했더니, 오늘도 기어이 글을 올린건가."
오늘도 주선호는 리무진의 뒷좌석에서 커뮤니티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다만, 그런 주선호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은 편이었다.
신창 주선호의 이름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었을까.
그의 이름은 [커뮤니티]의 S급 헌터들 사이에서도 자주 오르내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그리 마음에 드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 주선호의 눈앞에 보이고 있는 어떤 게시글의 내용처럼 말이다.
[ 제목 ] 신창.이 사람.너무 폼 잡아여 ^ O ^
[ 작성자 ] swordmaster
(사진)
오늘.인터뷰
자기가.히어로인줄.아나봐여 ㅎㅅ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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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한 창에 띄워져있는 게시글은 주선호가 지나치게 겉멋이 들어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해당 게시글의 작성자 닉네임은 'swordmaster'.
주기적으로 신창에 대한 비난글을 작성하는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주선호 자신을 비난하는데 있어서 딱히 그럴듯한 이유도 없었다.
어느 날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그를 비난했으며, 어느 날은 웃는게 느끼하다고 그를 비난했다.
또 어느 날은 그가 가식적이라며 비난하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이쯤되면 일단 욕하고 보려고 핑계거리를 찾는게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 대체 누구지?"
주선호는 난감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매번 그를 비난하는 해당 유저의 행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민하던 주선호의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의 헌터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그가 아는 한 S급들 중에서는 가장 짖궂기로 유명한 헌터였다.
"진짜 오지후 그놈인가?"
파천궁(破天弓)— 오지후.
주선호가 추측하기로는 그나마 'swordmaster'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닉네임 'swordmaster'가 사용하는 얄미운 문체를 오지후라면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주선호의 그런 생각은 그 아래에 나온 게시글을 보고 금세 뒤바뀌었다.
"······."
주선호 자신을 비난하는 게시글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래.
그곳에서 그는 신창과 관련된 글을 다시 한 번 찾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눈살을 찌푸린 주선호의 시선이 게시글의 제목을 훑었다.
- 신창, 시대가 낳은 역대급 거품 [4] (거품판독기)
해당 게시글의 제목에 적힌 내용.
그것은 신창 주선호의 실력이 거품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대놓고 주선호 본인을 자극하려고 적은 게시글이 분명했다.
게다가 해당 게시글의 작성자 닉네임은 무려 '거품판독기'였다.
어떻게 보아도 'swordmaster'보다 더한 악질이었다.
매번 게시판에 지적허영심을 채우려는 듯한 글을 적는 탓에, 주선호도 한차례 그를 비난하는 게시글을 적은 기억이 있을 정도였다.
"거품판독기··· 분명 매번 이상한 글만 올리던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닉네임에서부터 불순한 의도가 가득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이런 닉네임을 사용하는 유저라면, 그 성격이 뒤틀려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터.
이제 주선호에게 있어서는 해당 이용자가 'swordmaster'보다도 오지후에 더 가까워보였다.
"설마 거품판독기가 오지후인가?"
앞선 게시물의 작성자를 가리키던 주선호의 촉이, 이번에는 '거품판독기'를 향해 기우는 모습이었다.
해당 이용자의 경우에는 한국의 S급 헌터일 가능성이 100%에 가까운 상황.
그러니 앞서 고민하던 'swordmaster'보다 이쪽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익명이라도 품격있게 살아야지. 못배운 것들이 말하는 수준하고는······."
쯧-.
혀를 차며 [커뮤니티]를 바라보던 주선호가 손에 든 커피를 들이켰다.
방금 전에 길드의 직원에게서 받아온 아이스 커피였다.
빨대를 이용해 시원하게 커피를 들이킨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조금 더 아래로 스크롤을 내렸다.
스윽.
주선호의 손가락이 조금 더 내려간 아래.
이번에는 그곳에서 또 하나의 제목이 주선호의 심기를 거슬렀다.
- 신창 생각보다 별거없는 이유 [7] (frz0777)
해당 게시물의 제목은 '신창 생각보다 별거없는 이유'.
그리고 그 작성자는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싸움꾼으로 유명한 'frz0777'이었다.
"이건 또 뭐야."
이해할 수 없는 제목에 주선호는 굳은 얼굴로 해당 게시글을 클릭했다.
툭-.
주선호의 손가락이 홀린듯이 게시글의 제목을 클릭한 이후.
이내 해당 게시글의 내용이 주선호의 눈앞에 출력되었다.
[ 제목 ] 신창 생각보다 별거없는 이유
[ 작성자 ] frz0777
창만 뺏으면 나한테 못이기잖아
[ 댓글 7개 ]
유저 닉네임, 'frz0777'이 작성한 게시글을 마주한 직후.
주선호는 참지 못하고 [커뮤니티]의 키보드를 활성화시켰다.
"······."
타닥, 타다닥-.
반투명한 화면을 비추는 주선호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두터운 손가락이 계속해서 그 내용을 적어나갔다.
주선호의 손가락이 일련의 댓글을 작성한 이후.
그는 등록 버튼을 눌러 해당 게시글에 새로운 댓글을 등록했다.
- 망원동불주먹 : 너 어디사냐?
커뮤니티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
그가 처음으로 밖에 내보이기 부끄러운 댓글을 적은 날이었다.
* * * * * *
경기도에 위치한 게이트의 너머.
나는 현재 그곳에서 카메라를 들고있는 채로, 활을 겨누는 오지후를 촬영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오지후와 함께 게이트 너머에 들어와있는 이유는 하나.
오늘이 내가 이전에 최우현과 약속했던 오지후의 토벌작전 촬영일인 까닭이었다.
다만 평소와는 조금 다른점이 있다면, 오늘의 오지후에게는 동료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가 속해있는 길드의 동료들 없이 오지후 혼자서 토벌작전에 나선 것이다.
"유호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위험한거 아니냐?"
피잉! 피이잉-!
오지후가 시위를 손에서 놓을 때마다, 바람이 터져나오며 몬스터를 향해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혼자서 몬스터를 격퇴하는 오지후의 모습에, 내 옆에 서있던 최우현은 걱정의 시선을 보내오는 모습이었다.
오지후 혼자 토벌에 나선 이 상황이 문제가 되지는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일반적인 파티 포지션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으니, 헌터가 아닌 최우현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허나, 나는 최우현과 다르게 별다른 걱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지후를 포함해 커뮤니티에 속한 S급 헌터들의 경우, [정기의뢰]나 [부산물 매각]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 혼자 사냥에 나서는 경우가 잦은 편이었다.
길드나 정부기관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서 홀로 토벌에 나서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토벌작전의 경우 국토부에서 정식으로 인가까지 내려온 상황.
그런만큼 커다란 문제는 없으리라는게 내 예상이었다.
"어차피 국토부에 허가도 받은 상황이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S급 헌터가 옆에 있는데 설마 큰 문제야 생기겠어?"
"그러냐?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오늘 동행한 헌터는 시야가 넓기로 유명한 파천궁이잖아. 적어도 거리유지만 잘하면 크게 위험한 일은 없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늘어서있는 아이언 골렘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재 우리가 찾아온 게이트는 B등급의 아이언 골렘들이 서식하는 영역.
오지후가 자신의 [정기의뢰] 해결을 위해 찾아온 게이트였다.
아이언 골렘의 경우 공격 자체는 위력적이지만, 그 속도는 굉장히 느린편에 속하는 몬스터였다.
그런 이유로 원거리 딜러인 오지후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상성을 발휘하는 공간인 것이다.
'게다가 오지후의 경우에는 주변 반경을 색적할 수 있는 [심안(S)]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S급의 원거리 딜러라는 오지후의 특성상, 그의 파티원들은 대부분 적의 접근을 차단하는 탱커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접근 자체가 어려운 아이언 골렘이 상대라면 그러한 탱커조차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오지후가 골렘을 놓쳐 접근을 허용한다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오지후는 탐색과 저격에 뛰어난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실수로라도 아이언 골렘의 접근을 놓칠 가능성은 없을 터였다.
"유호야. 저거 설마··· 오지후의 트레이드 마크인 그 기술 아니야?"
그렇게 내가 오지후의 전투영상을 촬영하며 그의 전투 스타일을 분석하고 있으면, 오지후가 갑작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강하게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었다.
피식-.
나와 최우현의 이야기를 엿듣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로, 활시위 끝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휘이이이잉-.
폭풍이 오지후의 활을 휘감았다.
강대한 마력이 그의 손끝을 타고 뻗어나왔으며, 오지후의 눈동자에서는 선명한 청광이 맴도는 모습이었다.
"후우······."
입밖으로 흘러나오는 묵직한 숨소리.
그는 자신에 대한 걱정이 우습다는 듯이, 제 실력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지이잉-.
확산하는 마력이 거친 맥동을 흩뿌린다.
격렬하게 떨리는 활은 하늘을 향해 겨누어지더니, 이내 푸른 섬광이 하늘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하늘을 가르고 올라간 화살은 하나의 푸른 별이 되었다.
"—[꿰뚫는 유성우]."
그 직후, 무수한 갈래의 섬광이 지상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콰앙! 쾅! 콰아앙-!
느린 발걸음으로 전진하던 아이언 골렘들을 헤집는 마력의 폭격.
파천궁의 성명절기이자 오지후의 고유스킬 중 하나인 [꿰뚫는 유성우]였다.
번쩍이는 빛들이 골렘들의 사이에 떨어지며 지상을 난타하는 모습이었다.
- 기이이이익.
- 기익, 기이익.
쿵-.
거대한 체구의 골렘들이 마력의 반짝임과 함께 금속 파편으로 변해 무너져내렸다.
광범위한 영역에 퍼붓는 오지후의 폭격은 단단한 아이언 골렘마저 박살내버릴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그가 한국에서 최강의 궁수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전에 봤던 범위보다 조금 더 넓어보이는데. 그 사이에 벌써 저만큼이나 출력이 늘어난건가."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장엄한 풍경을 카메라로 담으며, 방금 전의 오지후에게 보였던 변화들을 낱낱히 분석했다.
성장하는 헌터들의 모습을 담아내는건 유튜버로서의 내가 해야하는 사명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걸로 걱정은 좀 덜었어?"
치이이익-.
순간적인 부하를 받아낸 오지후의 헌터장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지후는 연기가 나오는 활을 한손에 든 채, 전투를 촬영하고 있던 나와 최우현을 향해 다가왔다.
자신을 촬영하는 카메라들을 바라보는 오지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터벅, 터벅.
나와 최우현을 향해 가까이 다가온 그는, 방금 전까지 그를 걱정하던 최우현을 향해 이야기했다.
"혹시 유튜버 채널명이 뭐라고 했었지? 저번에 들었던 것 같은데."
"예, 예! 헌터사전 채널을 운영하는 최우현입니다."
"그래··· 헌터사전이었지. 아무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여긴 고작 B급밖에 안되는 게이트니까. S급인 내가 여기 있는 한, 적어도 당신이 위험해질만한 상황은 전혀 없을거야."
"아······."
"그래서 국토부에서도 나한테 허가를 내준거고. 뭐, 여차하면 우리를 도와줄 보험도 근처에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오지후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 얼굴을 보건대, 아무래도 내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지후에게 있어서 나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S급 헌터였으니까 말이다.
오지후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게이트지만, 혹시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가 도울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오지후가 이야기하는 '보험'은 나 자신을 가리키는 의미인게 분명했다.
"안 그래? 65만 유튜버님?"
나와 오지후,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하는 비밀인 셈이었다.
그런 오지후의 태도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후의 말이 진실인지에 대한 여부와는 별개로, 오지후 혼자서 B급 게이트 전체를 컨트롤 가능한 것만큼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 유명한 파천궁이 옆에 있는데, B급 게이트쯤은 괜찮겠지."
"이거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데, S급이라는 등급이 아무한테나 나오는게 아니거든. 그런 내가 옆에서 무기 들고서 서있는데, B급 게이트 정도면 당연히 안전······."
그렇게 내가 오지후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난감한 연극이 끝나기를 소망하던 도중.
———.
나와 오지후는 갑작스럽게 살갗을 통해 느껴지는 무언가를 감지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
일순간 뒤바뀐 분위기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
"······."
그 존재감을 느낀건 최우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의 주변에는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짧은 정적.
그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해 이끌렸다.
드넓은 하늘의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의 정체는 뒤틀린 균열이었다.
하늘을 찢어내듯이 새겨진 검은 균열.
박동을 내뿜으며 흔들리는 그것을 마주한 오지후가 입을 열었다.
"안전··· 안전해야··· 하는데······."
어느새인가 모습을 드러낸 채로 꿈틀거리던 그것은, 이내 그 입을 쩌억 벌리며 자신의 실체를 바깥에 내보였다.
- 새로운 [게이트]가 개방되었습니다.
- 이전에 연결되어있던 [게이트]의 내용이 새롭게 갱신됩니다.
- [게이트 : 타락한 검의 영역]이 실체화됩니다.
- 판정 등급 : A+
처음으로 마주하는 메세지의 향연.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던 내 머릿속에는, 일찍이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어떤 단어가 스쳐지나갔다.
신창 주선호가 그 존재를 주장하던 게이트 너머의 특이현상.
그럼에도 S급 헌터들이 존재를 부정하던 그것이 이곳에 나타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중 게이트."
[이중 게이트]가 도래했다.
22화
이전에 한 번 이중 게이트 현상에 대한 주선호의 커뮤니티 게시글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봤던 주선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말하는 이중 게이트가 동반하는 핵심 현상은 하나였다.
내부에 존재하는 게이트 하나가 기존 게이트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
두가지 게이트가 연결되어 궁극적으로 병합된다는 이야기였다.
즉, 내부에 존재하는 게이트의 공략 난이도를 기준으로, 기존 게이트의 난이도가 조정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마주한 시스템 메세지가 가리키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 [게이트 : 타락한 검의 영역]이 실체화됩니다.
- 판정 등급 : A+
기존에 있던 B급 게이트가 오염되어, A+급의 게이트로 난이도가 갱신된 것이다.
판정 등급 A랭크 오버, 즉 마경(魔景)이었다.
더 이상 해당 게이트에서 아이언 골렘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찢어진 균열 너머에서 음산한 기운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확산해나가는 어둠.
무수한 어둠이 훑고 지나가는 땅에서는 풀 한포기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파스스스스-.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운이 지평선 끝까지 뻗어나갔다.
균열에서 쏟아져나온 힘은 게이트의 풍경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하늘의 모습에, 당황한 얼굴의 오지후가 나와 최우현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당장 뒤돌아서 뛰어!"
"허, 헌터님··· 이게 대체······!"
"설명할 시간 없어! 마경자체가 탱커 없이는 어떻게 해볼만한 곳이 아니라고!"
그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최우현을 향해 험악한 얼굴로 일갈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만큼, 오지후 혼자서 커버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이야기였다.
더 이상 우리를 쫓아오는건 아이언 골렘이 아니라, 그보다 더 빠르고 영악한 녀석들이 될테니 말이다.
오지후가 머뭇거리는 최우현을 노려보면, 최우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런 최우현을 따라서 게이트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언데드 계열 몬스터가 나오는 게이트로 변화한 것 같은데······!"
오지후는 우리의 뒤를 지키듯이 바짝 붙어서는, 후방을 향해 화살을 겨누며 이야기했다.
언제 어디서 쫓아올지 모르는 몬스터의 습격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오지후의 걱정을 현실로 바꾸듯이, 이내 사방에서 녹슨 칼을 든 해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덜그럭. 덜그럭.
흔들리는 뼈 소리를 내며 이쪽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한 몬스터들.
마경에서 출현하는 언데드 계열 몬스터, 스켈레톤 워리어였다.
"—[심안]."
몬스터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오지후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뒤를 돌아본 채로 시위를 매긴 그는 곧바로 화살 몇발을 쏘아내었다.
피잉! 피이잉-!
오지후가 쏘아낸 화살이 마력을 머금은 채로 뻗어나갔다.
선명한 화살들이 파공음을 터뜨리며 날아갔고, 그 궤도에 있던 해골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파삭-.
S급 헌터의 일격에 머리가 사라진 언데드들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연속으로 화살을 쏘아낸 오지후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보스나 엘리트급이 나오면 저 사람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려워질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벗어나라고 이야기해."
"······."
"정체를 숨기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서. 이런 곳에서 정체를 들켜서야 마음에 들지 않을거 아니야."
오지후는 쫓아오는 몬스터들을 정리하면서도, 나를 향해 조용히 이야기를 전해오는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 역시도 촬영을 이어갈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기에, 조용히 오지후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마경에 들어온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위험에 머리를 들이밀었던 적은 없었다.
위험한 곳일수록 전적으로 헌터에게 맡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오지후의 요청에 응하며, 내달리고 있던 최우현을 향해 이야기를 전했다.
"후우··· 형, 아무래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허억, 헉······."
전력으로 질주하던 최우현이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뜀박질과는 담을 쌓아두고 살아온 모양이다.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얼굴을 보건데, 이미 심박수가 극한에 도달한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등급은 낮다지만 나도 역시 헌터는 헌터인 모양이었다.
최우현보다는 도망가는게 조금 더 여유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허어억··· 허억······!"
서서히 흐트러져가는 호흡.
그리고 달아오르기 시작한 전신.
이미 진작에 촬영을 포기한 카메라를 움켜쥔 채, 나는 달려가는 최우현의 주변을 경계했다.
그렇게 나와 최우현이 빠르게 도망치고 있으면, 후방에서 몬스터들을 격퇴하던 오지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전방에 한마리! 곧 나올테니까 조심해!"
몬스터의 접근을 경고하는 목소리.
그 직후, 우리가 목표하는 방향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덜그럭. 덜그럭.
녹슨 무기를 쥐어든 채 우리를 기다리는 스켈레톤 워리어가 나타난 것이다.
"허억··· 유, 유호야······!"
전방에 나타난 몬스터를 확인한 최우현은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도망가야하는 방향에 몬스터가 나타났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이었다.
그는 헌터가 아니라 단순한 유튜버에 불과했으니, 이 상황 자체가 당혹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나는 도망치는 최우현을 바라보다가, 옆에 걸쳐맨 가방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오지후가 바쁜 상황이니만큼, 나도 어느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만 했다.
'소모성 아이템 증폭 효과가 있으면, 저 녀석을 상대로도 어느 정도는 통하겠지.'
판단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 있던 스크롤을 뭉텅이로 뽑아들었다.
대충 보아도 10장은 넘을 법한 숫자였다.
나는 손에 잡힌 스크롤을 붙잡아서는, 그것을 한번에 모두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도망치던 최우현을 향해 외쳤다.
"신경쓰지말고 계속 뛰어!"
파아아아앗-.
눈부신 빛무리가 나를 휘감으며, 막대한 중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스크롤에 담겨있던 마력이 일제히 풀려나온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확인한 최우현은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질주했다.
나는 질주하는 최우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던 스켈레톤을 향해 손을 겨누었다.
자신을 휘감고 있는 마법을 쏘아내는 듯한 감각.
전신에 깃든 마력을 한곳에 겨누어, 그것들을 일거에 전부 쏟아부었다.
- 그어어어······!
나와 최우현을 보고 달려들던 스켈레톤 워리어를 향해 무수한 빛의 마법이 뻗어나갔다.
폭풍과 불꽃, 그리고 얼음과 칼날.
형형색색의 빛이 시야를 뒤덮으며 날아가더니, 우리를 가로막던 몬스터의 머리에 직격하는 모습이었다.
콰아아아앙-!
열개가 넘는 마법이 중첩되어 한점에서 터져나갔다.
아무리 낮은 등급의 마법이라고 해도, 증폭된 상태로 열개를 넘게 쏘아낸 공격이었다.
내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스켈레톤 워리어의 머리가 날아가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대체 얼마짜리 공격이지.'
얼마나 많은 현금이 있어야지, 방금 전의 공격을 쏘아낼 수 있는 것인가.
거기에 대해 생각하자 실소가 터져나왔다.
헌터로 각성해서 얻은 능력 자체보다도, 값비싼 스크롤을 무더기로 퍼부을 수 있는 이 상황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스크롤을 이용해 몬스터를 격퇴한 뒤에는, 나와 최우현의 다리가 계속해서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갔다.
"허억, 허어억······."
"하아, 하······."
나와 최우현의 거친 숨소리가 나란히 울려퍼졌다.
거칠어진 호흡속에서 우리가 이동한 거리도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게이트가 보이는 지점이 나올 터.
그 너머로 향하면 마경에서의 여정은 끝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채로, 나와 최우현이 발걸음을 내딛고 있던 도중—.
쩌저저저적.
기이한 파열음과 함께 이변이 일어났다.
- 죽음의 기운이 내려앉으며 [엘리트 개체]가 등장합니다.
- [엘리트 : 데스나이트 비르칸]이 출현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의 경고 메세지가 갱신되었다.
엘리트 개체의 등장을 알리는 메세지.
조건이 충족되며 해당 필드에 새로운 엘리트 개체가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원거리 계열의 천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데스나이트'였다.
해당 메세지를 들은 S급 헌터, 오지후의 입에서 경악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하필이면 데스나이트라고······?"
쿠우웅-.
나와 오지후의 시선이 동시에 맥동하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균열로부터 쏟아져나오는 진득한 기운이 바닥에 모여 덩어리를 빚어내었다.
어둠을 모아 응축시켜놓은 것과 같은 질척한 기운.
그것들이 한점으로 모여 뒤틀리더니, 머지않아 인간의 형상을 이룩하는 모습이었다.
- ······.
파스스스스-.
거두어지는 어둠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칠흑의 갑주와 검은 칼날이 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휘감은 어둠은 망토와도 같이 펄럭이는 모습이었다.
인간형 엘리트 개체, 데스나이트.
원거리 딜러에게 있어 공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여기서 데스나이트가 나오냐!"
오지후는 이를 악문채로 눈앞의 데스나이트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하필이면 파티원이 없는 상황에서, 데스나이트가 나타났다는 상황에 치를 떠는 오지후였다.
더군다나 데스나이트는 저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오지후를 선명하게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벅. 저벅.
앞으로 향하는 그 발걸음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노려올거라는 이야기였다.
"—[관통화살]."
시위를 최대로 당긴 오지후가 자신의 화살중에서 가장 관통력이 높은 물건을 꺼내왔다.
데스나이트의 특성을 알고 있는 오지후였기에, 나름대로 최선의 수단이라 생각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허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큰 의미가 있어보이는 선택지는 아니었다.
데스나이트가 원거리 딜러에게 천적과도 같은 이유는, 녀석의 방어력이 단순히 높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고랭크의 인간형만이 보여줄 수 있는 테크닉에서 기인하는 문제였다.
적어도 1대1에서 원거리 딜러가 데스나이트를 꺾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발, 맞아라······."
타다다다닥-.
지면을 박차고 질주하기 시작한 데스나이트를 겨눈 채, 오지후의 입이 긴장에 가득찬 이야기를 흘려내었다.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데스나이트를 노리고서는, 오지후의 손이 붙잡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피이잉-!
경쾌한 파공음과 함께 오지후의 [관통화살]이 데스나이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런 [관통화살]을 마주한 채,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검을 들어올렸다.
- ······.
입가에서 진득한 어둠을 흘리던 데스나이트의 검이 휘둘러졌다.
카앙!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경쾌한 충돌음.
그와 동시에 오지후의 공격이 꺾인 채로 엇나갔다.
데스나이트의 검이 날아오는 화살을 쳐낸 것이다.
데스나이트가 원거리 딜러들의 공포로서 군림할 수 있는 이유.
무기를 기반으로 한 투사체 대응 능력이었다.
"아오, 그럼 그렇지······!"
오지후는 불만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다시금 화살을 겨누었다.
피잉! 피이잉-!
오지후의 화살이 연달아 쏘아져나갔지만, 데스나이트의 대응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앙! 캉!
빠르게 휘두르는 검으로 화살들을 모두 튕겨낸 채로, 오지후를 향해 곧바로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격을 쏘아내는 오지후만 배제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빠르게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둘이서 도망가봐야, 금방 데스나이트가 쫓아오겠지. 여기서 오지후만 놓아두고서 빠져나갈 수는 없어.'
지금의 상황은 오지후의 입장에서도 명백히 위험한 상황이다.
고민을 하는 순간조차도 데스나이트는 오지후의 화살을 튕겨내며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카아앙-!
오지후가 광범위 폭격을 섞어서 공격하고 있었음에도, 데스나이트는 날아오는 파편들을 쳐내면서 돌진하는 중이었다.
전력으로 도망간다고 해서 그가 무사할지도 장담하기 어려웠으며, 혹여라도 오지후가 무사한 경우에는 내 입지가 위험했다.
오지후가 나를 S급 헌터라고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그를 버리고 도망간 셈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오지후를 도와야만 한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그리고는 화살을 날리며 데스나이트를 견제하던 오지후를 바라보았다.
카앙! 카아앙-!
그는 튕겨나오는 화살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연사하는 중이었다.
뒤로 물러서며 사격하던 오지후는 후방을 힐끔거리더니, 머지않아 멈춰선 나를 보고서 이야기했다.
"뭐야, 설마 너 여기서······."
나는 오지후의 이야기를 흘려들은 채로,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다른 헌터의 지원을 받으면 늦는다.
그러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만 했다.
남들보다 부족한 무력을 가진 내가, 오지후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끼익-.
발걸음을 멈춰선 나를 따라서, 오지후 역시 긴장한 얼굴로 다리를 멈춰세웠다.
"오지후. 가장 강한 공격으로 준비해."
"뭐······?"
"지금 쏘아낼 수 있는 공격중에서, 가장 강력한 한방으로 준비하라고."
나는 멈춰선 오지후를 향해 한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멀리 떨어진 데스나이트를 바라보았다.
데스나이트는 분명 강력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구력 자체가 높은 편은 아니다.
아무리 오지후의 공격을 튕겨낼 수 있다고 한들,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받아내고서까지 견딜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오지후는 화살을 시위에 건 채, 나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화살을 튕겨내면 어쩌게?"
"내가 해결할테니까 믿고 움직여."
"······."
"지금 쏘면 무조건 맞을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테니까."
나는 원거리 딜러로서의 오지후를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수많은 자료를 통해 그를 분석해왔으니까 말이다.
그는 다른 헌터와 비교해 단독전투에 강점을 가질 수 없는 유형이었다.
그 탓에 내가 그에게 71위라는 랭킹을 책정하기도 했고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화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왜곡화살]이 한방이라도 제대로 적중한다면 가능성이 있어.'
전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고 해도, 그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원거리 딜러중에 하나다.
그 공격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기회였다.
아무런 방해없이 자신의 화력을 온전히 때려박을 기회.
나는 그 기회를 만들어야만 했다.
"—[왜곡화살]."
시위를 당긴 오지후의 눈이 진지한 얼굴로 데스나이트를 노려보았다.
대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지후가 겨누고 있는 화살에는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S급 헌터 파천궁이 전력으로 빚어낸 한발의 화살.
그것을 데스나이트에게 겨누고 있는 것이다.
- ······.
그가 강력한 일격을 준비하는 순간에도, 데스나이트는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줄어들어가는 거리.
어느새 그 위협이 선명하게 살갗을 타고 느껴지는 거리에서, 오지후는 집중을 놓지 않은 채로 시위를 쥐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속에서 긴장에 젖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지금!"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오지후가 손에 쥐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선명한 빛이 반짝이는 것과 동시에, 나 역시 그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강력경고]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내 시선이 데스나이트를 노려본 직후.
한순간,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그리고 오지후의 화살은 그런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꿰뚫었다.
날카롭게 파고든 화살촉.
그것을 중심으로 퍼져나오는 일련의 흐름이 공간을 뒤틀었다.
끼기기기긱-.
귓가를 어지럽히는 파열음.
데스나이트의 머리가 있는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주변에 폭풍이 터져나오는 모습이었다.
- 그어어어어······!
콰앙! 콰아앙!
콰아아아아앙-!
왜곡된 공간에 순식간에 공기가 빨려들어가며, 강렬한 풍압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오지후가 전력으로 쏘아낸 [왜곡화살].
S급 헌터의 진심이 그 여파를 드러낸 것이다.
후우우우웅-.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드는 강풍.
그 속에서 무너져가는 데스나이트의 형체가 나와 오지후의 눈에 비추어졌다.
산산히 부서져 바스라진 채로, 흩날리는 검은 파편이 눈앞에 보이고 있었다.
- [엘리트 : 데스나이트 비르칸]을 처치했습니다.
엘리트 개체, 데스나이트 비르칸.
그것이 C급 헌터의 조력으로 최후를 맞이한 순간이었다.
23화
이중 게이트에서의 여정이 끝난 이후.
나는 게이트 안에서 촬영했던 오지후의 전투영상을 헌터협회에 제출해야만 했다.
이중 게이트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기 위한 자료로 해당 영상이 채택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게이트에 이변이 생긴 이후 내가 영상촬영을 종료했다는 점이었을까.
해당 영상에는 게이트가 오염된 이후의 내용은 찍혀있지 않았다.
내가 오지후와 나누었던 대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덕분에 데스나이트를 토벌할 당시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호야. 아무래도 오늘은 나 먼저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헌터협회에서의 일을 완전히 마무리지은 이후.
최우현은 지나치게 피곤했던 것인지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걸 선택했다.
헌터가 아닌 최우현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힘든 경험이었을 것이다.
최우현이 운영하는 채널, '헌터사전'은 나와 다르게 잔잔한 영상 위주의 채널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중 게이트에 대한 영상을 편집해 나올 조회수를 기대하며, 토벌작전의 여파로 피곤해보이는 최우현을 조용히 배웅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피곤하겠지. 고생했어, 형."
"······아까는 구해줘서 고마웠다."
"비싼 물건이긴 해도 100만 유튜버 목숨 구한거에 비하면 싸게 먹힌거지, 뭘."
게이트안에서 사용했던 스크롤에 대한 감사인사를 남기는 최우현이었다.
비싼 스크롤 써서 사람 목숨 하나 구했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일 터였다.
그렇게 피로에 찌든 최우현이 돌아간 이후에는, 게이트 공략의 일등공신이었던 오지후와 함께 뒷풀이 시간을 가졌다.
뒷풀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동네 중국집에서 같이 소주나 마시는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크으··· 오늘 게이트 안에서 꼼짝없이 죽는줄 알았는데, 그래도 누구 덕분에 무사히 나올 수 있었네."
나와 오지후만이 식사를 하고 있는 중국집의 프라이빗 룸.
그곳에서 오지후는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이야기했다.
데스나이트를 상대하던 도중, 내가 오지후의 공격을 보조한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오지후의 이야기에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했다.
"별거 아니었어. 그냥 잠깐 움직임만 방해하고 말았던거니까 말이야."
"그렇게까지 겸손할 필요 없잖아? 듣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오지후는 그런 내 행동을 겸손으로 치부했지만, 실제로도 나는 딱히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데스나이트에게 잠깐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줬을 뿐이니까 말이다.
언데드인 데스나이트가 무엇을 그리 두려워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허나, 오지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을까.
그는 짬뽕국물을 한스푼 입에 넣고서는,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말이 쉽지 행동이 쉬운건 아니지. 내가 가진 [심안]으로도 네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
"내가 움직임이는 것조차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사람은 '신창'을 제외하고는 네가 처음이야."
오지후가 가지고 있는 탐지계열 고유특성, [심안(S)].
해당 특성으로도 내 움직임을 간파하지 못했으니, 그만큼 내 실력이 대단하다는게 오지후의 주장이었다.
허나, 파천궁 오지후가 내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 나는 제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적당히 눈빛만 한 번 날리고 말았으니 당연히 안보였겠지.'
내가 데스나이트에게 했던 일이라고는, 시선을 향하며 [강력경고]를 활성화시킨게 고작이었다.
애초에 움직이질 않았는데 그 장면을 포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나는 그런 오지후의 오해를 해소시킬 자신이 없었다.
이제와서는 부정하기에도 늦어버린 까닭이었다.
나에 대한 S급 헌터들의 오해가 서서히 하나씩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요새 헌잘알 채널에 헌터랭킹 영상이란거 올리고 있잖아?"
"뭐, 그렇지."
"그 영상이랑 같은 기준에서 따져봤을때, 헌잘알이 보는 본인의 순위는 몇위쯤이야?"
그리고 그런 오해에 방점을 찍은 것이, 내가 매긴 전세계 헌터랭킹에 대한 오지후의 질문이었다.
전세계의 S급 헌터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
그 속에서 '거품판독기'의 강함은 몇위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오지후가 던진 질문의 내용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당연히 83위지.'
물론 내 입장에서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커뮤니티의 S급 헌터들 중 누구랑 싸워도 패배할 자신이 있었다.
프랑스의 지원계 S급 헌터인 성휘(聖輝) 에두아르와 맞붙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정정당당하게 커뮤니티에서 키보드로 맞붙는다면 내가 이기겠지만, 비겁하게 바깥에서 혈겁을 벌인다면 나에게는 승산이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기나긴 고민끝에, 난감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오지후에게 말했다.
"내 순위는 83위정도 되겠네."
"뭐? 네가 그것밖에 안된다고?"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서 말이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
그런 내 변명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었을까.
오지후는 안쓰럽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연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이해해."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오지후였다.
보나마나 머릿속에서 적당한 사연을 창작하는 중일 것이다.
오지후는 복잡한 사연을 캐묻는 것을 대신해서, 나를 향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른 질문이나 해볼게. 오늘 본 전투를 기준으로 한다면, 나는 헌터랭킹에서 정확히 몇위정도야?"
이번에는 오지후 자신의 랭킹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에 망설임 없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68위."
"······술이나 먹자."
오지후는 조용히 소주잔을 들어올렸다.
그 이후로 식사가 끝나기까지, 오지후가 두 번 다시 랭킹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 * * * * *
미디어 매체와 인플루언서의 시대.
이런 시대에는 수많은 플랫폼들이 새로운 광고판이 되기 마련이었다.
유튜브나 틱톡.
혹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이르기까지.
온갖 매체에서 수많은 광고를 내보내고는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적 흐름에 편승한 것은 우리 커뮤니티 게시판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 눈앞에는 같은 유형의 게시글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올라오는 중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또 뭐하는 인간이야."
게시글을 가장한 위장광고.
이른바 바이럴 마케팅 게시글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나는 참담한 표정으로 이마를 감싸쥔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몇시간째 같은 내용으로 비슷한 글을 작성하는 낯선 이용자의 게시글을 말이다.
- 경매장에 있는 레디아의 바람칼날 이거 너무 좋아보이지 않나요? [4] (nabi242)
- 우와.... 바람칼날이 이렇게 저렴하게 올라와도 괜찮은건가요 [4] (nabi242)
- 저 예전부터 레디아의 바람칼날이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싶었는데 [2] (nabi242)
- 레디아의 바람칼날이 사기인 이유 알고 계시나요? [7] (nabi242)
지금 내 눈앞에 보이고 있는 게시글들의 작성자명은 'nabi242'.
그리고 업로드한 게시글의 내용들은 하나같이 경매장에 있는 아이템을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S급 헌터장비, <레디아의 바람칼날(S)>.
누군가는 이 게시글들을 보며 해당 아이템이 사실은 좋은 아이템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각종 온라인 게임을 섭렵하며 온갖 종류의 사기를 경험해본 내 식견에 따르면 아니었다.
저건 틀림없이 안팔리는 비선호 장비를 비싼 값에 넘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홍보도 적당히 해야지. 안팔리면 가격이나 내리던지,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후우-.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게시글들 중 하나를 클릭했다.
정확한 내용을 확인해보고 어떤 조치를 취할지 검토해보기 위함이었다.
툭.
내가 화면속의 게시물을 클릭하자, 이윽고 내 앞에 게시글의 내용이 출력되었다.
[ 제목 ] 경매장에 있는 레디아의 바람칼날 이거 너무 좋아보이지 않나요?
[ 작성자 ] nabi242
[ 이용자 정보 ] 서유화(28) / S급 / 풍랑
(사진)
이거 정말 좋은 아이템이라서 저도 꼭 사고싶었는데.....
이번달 월세 내야해서 포인트 파느라 구매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ㅜㅜ
꼭! 좋은 분이 구매하시면 좋겠네요!
아 정말 아깝다아 ㅠㅠㅠㅠ
[ 댓글 4개 ]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게시글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건 경악스러운 게시글의 내용이었다.
월세를 내야되서 포인트를 매각했느니 하는, 대놓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가득차있었던 것이다.
애당초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S급 헌터가 대체 월세를 밀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당사자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 위해 게시글을 작성한 것이다.
더군다나 해당 게시글을 작성한 인물의 정체는 한국의 S급 헌터, 풍랑(風狼) 서유화였다.
그녀는 한국에서도 나름대로 유명한 메이지형 딜러 중 하나였다.
"하··· 누군가 했더니 풍랑이야?"
내 머릿속 헌터랭킹에서는 14위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S급 헌터였다.
한국에서는 불사기사 최두식 바로 다음으로 평가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인물이 이렇게 추잡한 방식으로 장비를 매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니.
나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댓글에 뭐라 적혀있는지나 한 번 읽어볼까."
그런 'nabi242'의 게시글에는 댓글이 4개나 달려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해당 게시글에 달린 사람들의 반응을 한 번 확인해보았다.
[ 댓글 4개 ]
ronaldo_7 :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누군가요?
ㄴ nabi242 : 어.. 저는 메시라는 선수가 유명해서 좋아요!
ㄴ ronaldo_7 : 안사
xkingx : 월세 내면서 거주하시는 곳 이름이 혹시 자금성인가요?
"아무도 속는 사람이 없는데 대체 왜 이런짓을······."
게시글의 댓글창을 보자 하나같이 'nabi242'를 향한 비난의 댓글들이 적혀있는 모습이었다.
저마다 경매장의 아이템을 홍보하려는 그녀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평소에 댓글을 잘 달지않는 'xkingx'가 한마디를 하고 나갈 정도였다.
댓글창에 달려있는 댓글들을 바라보던 나는, 결국 'nabi242'에게 내릴 조치를 결정하고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에휴. 적당히 일주일 정도만 조치하면 되겠지."
대한민국의 S급 마법사에게 내가 내린 조치.
그것은 7일간의 게시글 작성 금지 조치였다.
- [이용자 : nabi242]의 게시글 작성 권한을 박탈하시겠습니까?
- [이용자 : nabi242]의 게시글 작성 권한이 박탈되었습니다.
- 해당 조치는 7일간 적용됩니다.
아이템을 홍보하던 'nabi242'에게서 게시글 작성 권한을 박탈한 이후.
나는 그녀가 작성한 홍보 게시글들을 전부 삭제했다.
바깥에서는 고작해야 C급 헌터에 불과하지만, 이 커뮤니티에서는 내가 S급 헌터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제아무리 랭킹 14위의 풍랑이라고 한들, 내 게시글 삭제에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다들 관리자가 없는줄 알고 막나가는 경향이 있단말이지."
S급 헌터들을 통제하는 관리자의 역할은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다.
내가 없었다면 진작에 커뮤니티의 게시판이 아수라장이 되었을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오늘도 커뮤니티 게시판의 평화를 지켜낸 이후.
내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게시글 목록으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띠링-.
커뮤니티 게시판을 바라보던 내 귓가에 갑작스럽게 익숙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메세지?"
커뮤니티의 1:1 메세지 기능.
해당 기능을 이용해 누군가 나에게 메세지를 전송해온 것이다.
나는 1:1 대화창을 클릭해 전송된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 망원동불주먹 : 너
- 망원동불주먹 : 대체 누구냐?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인물의 정체.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 '망원동불주먹' 주선호였다.
24화
커뮤니티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
S급 헌터, 신창(神槍)과 나 사이에는 이렇다할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커뮤니티 안에서 나와 신창의 접점이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서로 한차례 비난글을 작성한 것이 전부.
적어도 신창 주선호가 나에게 이런식으로 1:1 대화를 신청할만한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선호가 메세지를 보내온 것은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다.
"뭐지? 나한테 키보드 대결이라도 신청하는건가?"
그나마 짐작이 가는 이유라고 해봐야, 얼마전에 '망원동불주먹'과 커뮤니티에서 벌였던 신경전 정도였다.
그러니 주선호가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왔다면, 1:1 대화를 통한 논검신청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이야기였다.
감히 구독자 66만 2천명의 S급 유튜버, '헌잘알'에게 논검을 걸어오다니.
주선호는 어리석게도 대결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나 들어볼까."
나는 본격적인 논검에 나서기에 앞서, 주선호의 의도를 알아보기위해 그에게 짧은 채팅을 남겼다.
- 거품판독기 : ?
- 거품판독기 : 무슨 일이시죠?
타닥, 타다닥-.
허공에 나타난 키보드를 두드려 주선호에게 보낼 메세지를 입력했다.
그렇게 작성한 메세지를 전송하고 나면, 머지않아 주선호에게서 답장이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 망원동불주먹 : 너 대체 누구야?
- 망원동불주먹 : 지금까지 네가 커뮤니티에 남긴 게시글들 전부 확인해보고 왔는데
- 망원동불주먹 :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되거든.
주선호가 나에게 보낸 답장.
그 안에는 주선호가 내 게시글들을 전부 살펴보고 왔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내 게시글을 보고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내용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렇게 주선호와 싸우게 되는 날이 찾아오는건가."
나는 주선호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랭킹 1위와의 키보드 대결을 준비해야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내가 주선호와의 대결에 앞서, 손목 스트레칭을 하며 맞대결을 준비하려던 찰나.
띠링-.
주선호에게서 새로운 메세지가 도착했다.
- 망원동불주먹 : 이중게이트에 대해서 너가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 망원동불주먹 : 너 파천궁 아니잖아.
- 망원동불주먹 : 내가 그날 게이트 출입기록 전부 다 확인해봤는데
- 망원동불주먹 : 그날 이중게이트에 출입한 헌터는 파천궁 하나밖에 없었어.
그런 주선호가 나에게 꺼낸 이야기.
그건 내가 공략이 끝나고 며칠후에 커뮤니티에 남긴 '이중 게이트' 관련 게시글에 대한 것이었다.
오지후와의 일정을 마치고서 며칠 뒤에, 이중 게이트 현상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하게 커뮤니티에 남긴 것이다.
물론 내가 그것을 경험했다는 내용을 적어놓기보다는, 이론적인 토대에 대한 생각을 올려놓은 것에 불과했다.
S급 헌터가 많이 산재하고 있는 커뮤니티인만큼, 이정도 이야기는 가볍게 적어도 될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른바 가벼운 생각거리를 던져놓은 셈이었다.
해당 게시글은 S급 헌터들의 무시속에 파묻혔지만,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의 생각만큼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올린 게시글들을 전부 검색해본건가."
해당 게시글로부터 흥미를 느껴 내가 적은 게시글들까지 전부 뒤져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눈앞의 1:1대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망원동불주먹'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망원동불주먹 : 그런데 너 파천궁 아니잖아?
- 망원동불주먹 : 방금 풍랑한테 연락해서 전부 듣고왔어.
- 망원동불주먹 : 파천궁이 쓰고 있는 닉네임은 tex11이라고.
- 망원동불주먹 : 그럼 지금 내가 대화하고 있는 거품판독기는 오지후가 아니라는 이야기지.
- 망원동불주먹 : 너 대체 누구야?
- 거품판독기 : ?
- 망원동불주먹 : 단순히 네 생각을 게시판에 적어봤다는 변명은 하지마.
- 망원동불주먹 : 자료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내용까지 적혀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신창 주선호의 주장은 점점 그 근거를 덧붙여가고 있었다.
이중 게이트 현상을 직접 체험하고서, 누구보다도 먼저 그 현상에 대해 주장해왔던 '망원동불주먹'이다.
그런 그가 내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서, 같은 S급 헌터인 풍랑에게까지 오지후의 닉네임을 물어본 것이다.
설마하니 다른 헌터에게 연락해서 닉네임까지 물어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고작해야 게시글 하나에 이렇게까지 집착해올줄이야.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슬슬 어떤 대답을 내려야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망원동불주먹 : 출입기록도 안남는데 이중게이트를 직접보고온 한국인 S급 헌터?
- 망원동불주먹 : 그럼 백퍼센트 미등록 헌터겠지.
- 망원동불주먹 : 너 정체가 뭐야?
- 망원동불주먹 : 너가 한국의 아홉번째 S급 헌터냐?
점점 날카롭게 다듬어져가던 '망원동불주먹'의 추론이 기어코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미등록 헌터이자 한국의 아홉번째 S급 헌터.
그것이 신창 주선호가 나에 대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허나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주선호의 추리는 해답에서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그야, 나는 S급 헌터는 커녕 C급 특성을 가진 밑바닥 헌터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하··· 나도 그냥 내가 아홉번째 S급 헌터였으면 좋겠다."
이러한 오해를 지금까지 도대체 몇사람에게 심어왔던가.
이제는 하다못해 최고의 헌터 중 하나인 신창에게까지 오해받는 상황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는 커뮤니티 관리자 권한뿐인데도, 모두가 나를 미등록 S급 헌터라고 착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라리 진짜 S급 헌터였으면 헌터협회에 등록하고서 당당하게 돈벌고 다녔을텐데 말이다.
이제와서는 더 이상 무를 수도 없는 거짓말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에휴, 모르겠다. 그냥 믿고 싶은대로 믿으라지."
옛말에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 말을 맞추면 호랑이 한마리도 능히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S급 헌터라고 인정한 나는, 이미 한명의 S급 헌터라고 볼 수 있는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냥 대놓고 S급 헌터 행세를 하기로 했다.
나는 1:1 대화를 신청해온 '망원동불주먹'을 향해 자신감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 거품판독기 : 하....
- 거품판독기 : 역시 신창정도 되는 헌터를 상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나
- 거품판독기 : 당신 생각대로야
- 거품판독기 : 이미 들킨마당에 더 부정해봐야 뭐하겠어
- 망원동불주먹 : 역시나 미등록 헌터였나?
- 망원동불주먹 : 그럴줄 알았지.
신창 주선호가 원하는 대로 S급 헌터 행세를 하자, 그는 그제서야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추리가 적중했다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망원동불주먹'을 향해 몇줄의 채팅을 더 적어나갔다.
그가 나를 헌터협회에 신고해 포상금을 받아갈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망원동불주먹'에게 포상금이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나를 신고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오지후와의 동행기록을 확보해 나를 헌터협회에 신고한다면 큰일이었다.
- 거품판독기 : 그래서 이제 헌터협회에 신고라도 할 생각이야?
- 거품판독기 : 신창정도 되는 헌터가 겨우 협회에서 주는 포상금 따위에 만족하지는 않을거같은데
- 망원동불주먹 : 고작해야 포상금 받자고 신고해서 팔아넘길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라.
- 망원동불주먹 : 본인이 직접 나한테 말해줬으니 굳이 신고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 거품판독기 : 그럼 대체 왜 나한테 아홉번째냐고 물어본거야?
다행히도 '망원동불주먹'은 헌터협회에 나를 신고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드는 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에게 나를 신고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대체 왜 나에게 정체를 물어보았던 것이었을까.
내가 그에 대한 의문을 '망원동불주먹'에게 표하면, 머지않아 주선호의 답장이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 망원동불주먹 : 이중게이트 침식현상을 눈으로 직접 봤다면 너도 잘 알겠지.
- 망원동불주먹 : 시간이 지날수록 게이트가 점점 위험한 형태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야.
- 망원동불주먹 : 게이트에서 나오는 보스들도 마찬가지고.
- 망원동불주먹 : 머지않아 S급 헌터 한명의 가치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높아지는 시대가 올거야.
게이트가 위험하게 변화할수록, S급 헌터들의 가치는 점점 더 올라갈 것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주선호가 다가올 격동의 시대에 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 망원동불주먹 : 나는 그런 시대가 온다면 헌터가 아닌 일반인들로 구성된 정부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미등록 S급 헌터라고 납득한 주선호가 꺼낸 이야기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비밀스러운 이야기였다.
그것도 다른 이들에게 결코 발설해서는 안되는 무척이나 위험한 이야기 말이다.
적어도 커뮤니티의 1:1 대화를 제외한다면, 그 어떠한 연락수단으로도 꺼낼 수 없는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아··· 설마 아니겠지?"
나는 주선호가 다른 S급 헌터에게 전하는 이야기의 분위기로부터 등골이 싸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만은 아니기를.
그런 마음을 가지고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망원동불주먹'의 메세지는 내 불길한 추측을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 망원동불주먹 : 위험이 다가올수록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가진 지도자들이 필요해지는 법이지.
- 망원동불주먹 : 나는 그게 우리같은 S급 헌터들이라고 생각한다.
- 망원동불주먹 : 몇년 안으로 S급 헌터들로 구성된 정부를 만들 계획이야.
- 망원동불주먹 : 너도 S급 헌터라면 우리들의 계획에 참여할만한 자격은 충분하겠지.
세계 최강의 사나이, 신창 주선호가 전해온 계획에 나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나는 분명 S급 헌터들이 숨기고 있는 특급정보들을 알고 싶어서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허나, 이정도 수준의 비밀정보까지 손에 넣기를 바란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건 지나치게 비밀스러운 정보가 아니던가.
적어도 S급 헌터조차 아닌 내가 듣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이야기였다.
나는 '망원동불주먹'의 거창한 계획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 망원동불주먹 : 물론 지금 당장 답변할 필요는 없어.
- 망원동불주먹 : 계획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를 끼칠 생각도 없고.
- 망원동불주먹 : 귀중한 S급 동료를 내 손으로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 망원동불주먹 : 다가올 재난을 극복하려면 한명이라도 더 S급 헌터가 남아있는 편이 좋겠지.
- 망원동불주먹 : 다만 오늘 들은 이야기만큼은 함구하는 편이 좋을거야.
- 망원동불주먹 : 여기서 나눈 이야기가 바깥에 새어나가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죽여버릴거니까.
머리를 짓누르는 두통속에서도 진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정보가 유출되면 나를 죽이겠다는 주선호의 협박과 함께 말이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비밀들이 계속해서 내 눈앞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 망원동불주먹 : 너도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정체를 숨기고 있는거겠지.
- 망원동불주먹 : 그런만큼 다른 헌터들처럼 전면에서 나서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아.
- 망원동불주먹 : 다만 포인트를 지원해주는 정도로도 충분히 우리에게는 도움이 될거야.
- 망원동불주먹 : 다가올 게이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포인트가 필요해질테니까.
'망원동불주먹'의 마지막 채팅 이후.
1:1 대화창에는 한동안 정적이 내려앉았다.
커뮤니티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 신창 주선호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내용을 처음부터 듣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정보를 듣게된 이상 반드시 선택해야만 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계획에 동참하고 싶으면 포인트라도 보내달라고?"
지금의 대화에 대해 완전히 묻어버리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조용히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선호에게 포인트를 주고서 주기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어느쪽이든 쉬운 결단은 아닐뿐더러, 적지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선택지였다.
후우-.
깊은 한숨을 푹 내쉬던 나는 이윽고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무늬만 헌터인 내가 가지고 있는거라고 해봐야 S급 커뮤니티와 포인트가 전부였다.
그러니 사용할 수 있는건 전부 사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주선호에게 5천 포인트를 선물했다.
포인트를 받은 주선호의 답장이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망원동불주먹 : 고맙다. 형제.
- 망원동불주먹 : 분명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거야.
- 망원동불주먹 : 중요한 대화가 있을때마다 연락하도록 할게.
주선호에게 답장을 받은 이후.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은 채로 커뮤니티 화면을 닫아버렸다.
말도 안되는 대화를 듣고나니 온몸에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드르르르륵-.
뒤로 밀려난 의자와 함께 벽에 달라붙은 나는, 등받이에 기댄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금에서야 어째서 최두식이 주선호를 위험하다고 이야기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누구나가 자신의 의도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건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순간이 찾아온 계기는 어쩌면 오늘의 선택뿐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고유 특성 [커스텀 네트워크]를 각성한 첫날.
전세계의 S급 헌터들을 커뮤니티에 초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수많은 풍파가 다가올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거지."
무제한 화폐발행권을 틀어쥐고서 헌터세계의 경제를 지배하는 큰손.
시스템의 탈을 뒤집어쓴 채로 다른 헌터들에게 경험치를 수급시키는 수탈자.
최상위 헌터들을 연결하는 폐쇄형 커뮤니티의 관리자.
마지막으로 헌터가 지배하는 국가를 꿈꾸는 '신창'을 후원하는 비밀단체의 일원.
그렇게 나는──.
"······이거 이렇게 쓰라고 있는 특성이 맞나?"
어느새인가 S급 헌터들의 배후에 군림하는 흑막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25화
역 근처에 위치한 프랜차이즈 카페.
나는 현재 그곳에서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무장한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눈가를 가린 선글라스 위로 가로지르는 빛바랜 머리카락.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듯 턱을 가리고 있는 새하얀 마스크.
해당 패션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대한민국의 S급 헌터들 중 하나인 검귀(劍鬼) 천시예였다.
셀레스티아 길드의 S급 헌터가 멘토인 나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말이야······."
천시예는 주변을 힐끔거리며 카라멜 마끼아또를 한모금 들이켰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는 기색은 여전했다.
차가운 커피를 마신 천시예는 나에게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물어오는 모습이었다.
"오지후와 둘이 게이트에 들어가서 문제가 생겼다면서?"
"이중 게이트에 대해서 물어보는 거야?"
"응, 그거 말이야. 지금 그거때문에 헌터학계가 한바탕 뒤집혔다던데?"
천시예가 커피를 마시던 나를 향해 던진 질문.
그것은 이전에 오지후와 경험했던 '이중 게이트 현상'에 대한 것이었다.
학회에서 몇차례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나온 적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해당 현상을 촬영한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빼도박도 못할 증거가 생겼으니 학자들 사이에서도 수많은 논쟁이 터져나왔을 터.
그 덕분에 해당 영상을 게시하고 있는 내 유튜브 채널에서도 화끈한 반응들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이중 게이트를 영상으로 찍어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말이야. 나같은 S급 유튜버가 처음으로 한 건 벌인 셈이지."
"S급 유튜버··· 그렇게 이야기하기엔 구독자가 엄청 높은 편은 아니지않아?"
"유튜버가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구독자 숫자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가치가 있는거야."
반쯤은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또 반쯤은 진심이 담겨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지금 천시예의 눈앞에 앉아있는 C급 헌터만 하더라도, 등급을 넘어서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신창 주선호가 '형제'라고 불렀던 사람이 누구던가.
그게 바로 나다.
검귀가 천시예가 가르침을 받고 있는 멘토가 누구던가.
그것도 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등급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헌터인 셈이었다.
'솔직히 다 필요없고 그냥 S급 헌터나 하고 싶다.'
물론 마음같아서는 그런거 다 내다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S급 헌터가 되고 싶은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가 이중 게이트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면, 천시예는 한손으로 턱을 괴면서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차가운 커피를 내려놓은 천시예가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듣자하니 게이트에서 데스나이트가 나왔다고 하던데, 오지후 혼자서는 데스나이트를 잡기 어려웠겠네?"
"······."
"이번에 게이트에 같이 들어갔다면서. 직접 손을 거들어주고 나온거야?"
천시예가 나에게 던진 또 다른 질문.
그것은 내가 게이트 안에서 직접 전투에 관여했느냐는 이야기였다.
천시예도 그렇고, 최두식도 그렇고.
저마다 S급 헌터의 탈을 쓰고 있는 내 실력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조금은 기대치를 충족시켜주고 가는게 맞겠지.'
게이트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은, 어찌보면 내 활약상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나는 게이트 너머에서 있었던 자그마한 활약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아무리 오지후라도 준비없이 데스나이트를 상대하기는 힘들지."
"그래서, 원거리 딜러인 오지후가 어떻게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린건데?"
"잠깐 나서서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을 멈춰줬을 뿐이야. 그 뒤에는 오지후가 알아서 처리한거지."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에게 [강력경고]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도움은 커녕 오지후와 함께 험한 꼴을 당했을테니 말이다.
오지후의 화력이 부족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냉정한 판단과 맞물린 상황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었다.
"그렇구나. 오지후가 안에서 애를 먹은 표정이 나름 볼만했겠네."
다만, 눈앞의 천시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천시예는 당황한 오지후의 얼굴이 눈에 보인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검귀와 파천궁의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지후가 골탕먹었다는 사실에 저리도 좋아하는걸 보니 말이다.
"그렇게 좋아할 것까지야 있나?"
"그 사람, 엄청나게 성가신 성격이거든."
"오지후가 그 정도야?"
"헌터계에서는 나름 유명할거야. 아저씨도 걔 별로 안좋아해."
성가신 성격.
그런 이야기를 듣자, 언젠가 보았던 '망원동불주먹'의 댓글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당히 고약한 내용의 게시글에 '너 오지후냐?'라는 내용의 댓글을 달았던가.
헌터들 사이에서 오지후의 이미지가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파천궁에 대한 악명이 자자하네."
"그런 사람이거든. 당신도 자주 만나다보면 나름 골치아픈 일을 겪을지도 몰라."
그 이후에는 파천궁 오지후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흘러나왔다.
그가 S급 헌터들 사이에서 악명을 얻게 된 계기라던가.
솔직히 말하면 실력은 형편없다던가.
천시예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에게 꺼내왔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끝나며 슬슬 커피잔의 얼음이 녹아갈 즈음에는, 언제나와 같은 주제로 되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아, 맞아. 그런데 말이야."
"······."
"다음 영상은 언제 올라오는거야? 헌터 랭킹이랑 관련된 영상말이야."
S급 헌터 랭킹 TOP 10.
천시예가 그토록 기다리는 영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평소같았으면 그냥 웃고 넘겼겠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대응을 보일 차례였다.
스윽-.
나는 유튜브 페이지가 띄워져있는 스마트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여기 나오기 전에 업로드한거야."
천시예의 기대감 가득한 시선이 향하는 스마트폰의 화면.
그곳에는 그녀가 그토록 고대하던 헌터 랭킹 영상이 띄워져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카페에 나오기 전, 유튜브에 업로드한 새로운 랭킹 영상이었다.
이번 영상에는 천시예의 랭킹이 무려 6위에 랭크되어있었다.
그동안의 성장세를 감안해 내가 새롭게 매긴 헌터 랭킹이었다.
새로 업로드된 영상에 천시예가 침을 삼키면, 나는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집에 돌아가면 좋아요 버튼 누르고서 다시 봐라."
끄덕-.
천시예의 고개가 조용히 움직였다.
* * * * * *
카페에서의 시간이 끝나고서 몇시간 후.
나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천시예와 함께 번화가 한복판을 걸었다.
분명 헌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을, 어쩌다보니 백화점 쇼핑에까지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조금이라도 마음의 빚을 덜어낼겸 선물을 사준다더니, 막상 들어가고나선 본인이 사고 싶은 것만 구경하는 모습이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천시예의 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이었다.
S급 헌터라 신체 능력치가 높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법 무게가 나가는걸 깃털마냥 잘도 들고다니는 모습이었다.
"선물은 마음에 들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천시예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내 손목에는 이천만원짜리 명품시계가 채워져있었으니까 말이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상당히 비싼 시계라고 들은 물건이었다.
이만한 고급시계를 선물받은건 처음이었기에, 내 입장에선 이질감이 크게 느껴지는 물건이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야. 고맙다."
"조언 받은거에 비하면 별거 아니긴 하겠지만, 그래도 만족했다니 다행이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평소에 내색은 잘 안해도 나름대로 상당한 부채감을 안고 있던 모양이었다.
천시예도 사실 주선호 못지않게 내 포인트를 받아먹은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시계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진 않아도, 조금은 부담감을 덜어내고 싶었을 터였다.
"너무 부담갖지마라. 헌터생활 하다보면 언젠가는 다 갚겠지."
"······혹시 사채업자 행세하려는건 아니지?"
"나처럼 자비로운 사채업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나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면서, 손목에 찬 고급시계를 바라보았다.
커뮤니티를 개설하고서 S급 헌터들과 어울리게 된 이후, 점차 터무니없는 물건들과 엮이게 되는 기분이다.
지금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오르타의 은총(S)>이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S급 헌터들과 지내다보니 나 자신도 S급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능력치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물론 당연히 갚을 생각이야. 나는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 아."
그렇게 내가 천시예와 빚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가던 도중.
나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던 천시예의 입이 갑작스럽게 다물어졌다.
번화가의 한복판은 여전히 소란스러운 채였지만, 왠지 모르게 이 장소가 조용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천시예의 변화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천시예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크게 떨리는 모습이었다.
"······."
침묵에 젖은 눈동자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나는 맞은편에서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무심한 듯한 얼굴로 번화가 한복판을 걸어가는 시선.
허나 그런 걸음걸이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발걸음은 어딘가 세속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나. 그리고 천시예.
무심한 눈동자가 두 사람을 차례대로 바라보고서 지나쳐갔다.
"저희 매장 새로 오픈했습니다!"
"거기, 길 막지 마세요!"
소란스러운 번화가 한복판.
그 속에서 범상치 않은 걸음을 내딛은 채 나아가던 남자는, 머지않아 번화가의 골목길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터벅. 터벅.
기이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던 남자가 골목길로 사라진 이후.
나는 그제서야 자신이 누구를 마주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주선호."
—S급 헌터, 신창 주선호.
이상하리만치 인지가 뒤틀린 탓에 판단이 늦어졌지만, 방금 지나간 사람은 틀림없이 신창 본인이었다.
얼마전에 나와 채팅으로 메세지를 주고받았던 주선호가 번화가를 지나쳐간 것이다.
내가 그런 주선호에 대해 뒤늦게 깨닫고 나면, 그제서야 내 옆자리에 있던 천시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안. 나 먼저 돌아가볼게."
먼저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하는 천시예의 목소리.
툭-.
그와 동시에 천시예의 손이 쇼핑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마주한 나는 당황한 채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만, 지금 어딜 가려고······!"
허나, 그런 내 목소리가 전해지는 것보다도 천시예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스윽-.
쇼핑백을 내려놓은 천시예는 어느새인가 인적이 없는 골목으로 사라져버린 모습이었다.
천시예가 사라진 자리.
그곳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쇼핑백들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
사라진 천시예를 바라보던 내 머릿속에 최두식의 이야기가 스쳐지나갔다.
나에게 신창과 검귀의 사이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했던가.
그런 최두식의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눈앞에 있던 천시예가 신창을 보고 뛰쳐나간 것도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같이 비싼 물건들인데.'
나는 옆자리에 남겨진 쇼핑백들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천시예는 이 물건들보다 주선호를 뒤쫓는걸 중요하게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몇천만원짜리 물건들을 그냥 놓아두고 가는건 내 심기가 불편했다.
"일단 챙기자."
차마 쇼핑백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던 나는, 묵직한 쇼핑백들을 전부 챙겨들었다.
그리고는 사라진 천시예를 뒤쫓아 전속력으로 어두운 골목을 향해 달렸다.
타다다다닥-.
천시예보다 5배쯤 느린 발걸음이 달려나가며, 주선호와 천시예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하아, 하··· 대체 어디까지 간거야······?"
두 사람의 발걸음이 지나치게 빠른 탓에, 그들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편이었다.
깊숙한 골목길의 갈림길을 몇번이나 꺾어나갔을까.
걸음을 재촉하던 내 입가에서 거칠어진 호흡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을 즈음.
나는 모퉁이 너머에서 자신이 찾던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퉁이의 너머.
그곳에서 짙은 압박감을 풍긴 채로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직까지도 과거의 사고에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거냐."
낙서가 그려진 벽면의 옆쪽.
그곳에서 낮게 깔린 주선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헌터계의 정점. 그리고 모든 S급 헌터들의 우상.
신창 주선호가 내뱉는 선명한 목소리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짓을 벌여놓고서··· 모든게 고작 사고에 불과하다고 말하는거야······?"
그런 주선호의 맞은편에서는, 짙은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천시예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S급 헌터가 전력으로 이끌어낸 마력.
그러한 마력의 파동에서는 숨이 막힐듯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파직-.
공기를 짓누르는 마력이 맞닿는 경계선에서, 스파크가 튀어오르며 반투명한 경계가 드러났다.
랭킹 최상위권에 위치한 두 헌터의 대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그날의 일은 단순한 사고였다."
"······주선호!"
"설령 사고가 아니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건 없을거야."
귓가에 울려퍼지는 차가운 목소리.
그와 함께 서늘한 공기가 살갗에 선명하게 전해져왔다.
피부를 타고 기어오르는 살기.
S급 헌터, 신창(神槍)이 진심으로 발하는 살기가 터져나온 것이다.
주선호가 흘리는 살기에 접하기 무섭게,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단순히 살기를 마주했을 뿐인데도, 숨통이 조여진 채 서있는 듯한 감각.
전신에 수많은 창날이 겨누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쿠웅-.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살기에, 심장이 거친 고동을 퍼뜨렸다.
지금 이 순간의 생사여탈 전체가 주선호의 손아귀에 달려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선호.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그런 주선호에게 대항하기 위해, 천시예 역시 짙은 살기를 퍼뜨렸다.
대기를 타고 확산하는 살의.
두 초인의 기운이 뒤엉키며, 내 전신을 강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근처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무지막지한 압박감이 전해져왔다.
육체의 생존본능이 나를 향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숨이 제대로 안쉬어져······!'
이대로 가다가는 죽는다.
그러한 경각심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미 두 사람 다 진작에 내 기척을 느꼈겠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나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친 헌터들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신경전을 벌여 나를 짓눌러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젠 진짜 모르겠다.'
살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게 비록 정신나간 짓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입을 크게 벌려, 나오지 않는 공기를 억지로 터뜨렸다.
그런 내 목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커다랗게 골목에 울려퍼졌다.
"······그만!"
- [강력경고]가 활성화됩니다.
- 오늘은 더 이상 [강력경고]를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짧은 정적.
그와 동시에 [강력경고]에 적중당한 주선호의 동공이 커다랗게 변했다.
전신을 짓누르던 압력이 한순간에 거두어지고, 틀어막혀있던 호흡이 그제서야 터져나왔다.
후우-.
막혀있던 호흡을 몰아쉬듯이, 깊은 숨을 한번에 들이킨 이후.
"너는, 설마······."
의문에 젖은 주선호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26화
S급헌터, 신창 주선호.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서, 단 한번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생명의 위기에 직면해본 적이 없었다.
창을 쥐는 순간부터 그것을 어떻게 휘둘러야할지 이해했으며, 적과 마주하면 상대를 어떻게 죽여야할지 깨달았다.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불세출의 천재.
더군다나 그는 끝없는 성실함마저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타고난 재능에 부단한 노력까지 더해졌으니, 그 무엇도 주선호를 위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령 사고가 아니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건 없을거야."
그리고 그것은 초신성이라고 일컬어지는 S급 헌터, 검귀 천시예가 상대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주선호는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검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뚤어진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증오로 가득차있는 눈동자.
첫단추부터 잘못끼워진 악연은 여전히 주선호를 뒤쫓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인연이었다.
가능하다면 주선호 자신의 손으로 이곳에서 악연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주선호.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
눈앞의 검객은 여전히 주선호를 향해 살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감정을 제어하는데 미숙하다.
감정적이고 파괴적이며 충동적이다.
그러한 점이 천시예의 검을 여전히 그 수준에 묶어두고 있는 속박일 터였다.
'여전히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건가.'
우우우우웅-.
대기를 타고 확산하는 살기가 주선호의 살갗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마주하고 있는 두 헌터의 상황은 점점 격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조용히 천시예를 지나쳐가기는 글러먹은 상황.
더군다나 천시예의 뒤쪽에는 그녀의 일행으로 추정되는 인물마저 서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주선호는 한껏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적당히 손을 써둬야겠어.'
파직-.
두 사람의 마력이 맞닿는 경계에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상대가 이 상황을 끝낼 생각이 없다면, 주선호가 먼저 손을 써야할 필요가 있었다.
협회의 늙은이들에게서 잔소리를 듣는건 피할 수 없겠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참고 넘어가는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렇게 대치상황을 마주한 주선호가 끝내 손을 움직이려던 순간—.
"······그만!"
처음듣는 낯선 목소리가 비좁은 골목길에 메아리쳤다.
휘이이이잉-.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싸늘한 바람소리.
그 직후, 주선호는 모든 마력을 되돌리고서 손을 들어올렸다.
'이건······!'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선호의 모든 경계를 돌파하고서, 그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듯한 감각.
이해할 수 없는 패배의 형상이 주선호를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매서운 칼날.
서늘하게 드리워진 금속.
그리고 그 끝에 자신에게 도래한 명백한 죽음.
쿠웅-.
한순간 그의 심장이 멈춰선 듯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내가··· 제대로 반응조차 못했다고······?'
마비되었던 이성이 순식간에 되돌아오며, 방금전의 풍경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로, 낯선 상대에게 무방비하게 빈틈을 노출했다.
창을 쥐지 않은 손가락 끝에서는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죽음.
그것은 틀림없이 죽음이었다.
주선호가 경계를 풀고 있던 짧은 순간, 그는 골목에 서있던 누군가에게 자신의 목을 내어줄뻔 한 것이다.
'진심으로 나를 공격하려고 했다면 틀림없이 목이 베였을거다.'
아무리 그의 손에 창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창잡이의 빈틈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그것은 눈앞의 천시예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선호의 시선이 자신에게 살기를 내비친 인물을 쫓았다.
당황한 얼굴로 멈추어선 천시예의 너머.
그곳에는 백화점 쇼핑백을 잔뜩 끌어안고 있는 남자 하나가 서있었다.
"······."
주선호의 시야에 비추어진 것은 처음보는 낯선 얼굴의 청년이었다.
재능의 편린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범인의 기척.
신체의 모든 곳이 전부 다 빈틈처럼 보이는 무방비의 결정체.
그럼에도 방금 전에 주선호의 빈틈을 파고든 살의는, 틀림없이 눈앞의 청년이 발산한 것이었다.
자신은 무해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서있는 모습이지만, 저 남자가 주선호의 빈틈을 찔러들어온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허나 남자의 얼굴은 주선호가 알고있는 S급 헌터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설마, 너는······."
낯선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기 무섭게, 주선호의 머릿속에 한가지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얼마전에 [커뮤니티]의 채팅을 통해 뜻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또 하나의 동료.
아직 그 존재가 대한민국의 헌터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홉번째 S급 헌터.
눈앞의 헌터에게 주선호의 빈틈을 뚫고 들어올만한 실력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저 남자의 정체는 단 하나뿐이었다.
커뮤니티 이용자명, '거품판독기'.
주선호가 맞아들인 새로운 동료였다.
"그만··· 이쯤에서, 서로 그만합시다."
주선호가 아홉번째 S급 헌터의 존재에 놀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 이내 그의 눈앞에 서있던 '거품판독기'가 숨을 고르며 이야기했다.
방금 전에 그를 노렸던 기척과는 확연하게 다른 나약한 기척.
지나치게 빈틈이 많은 탓에 대놓고 빈틈을 보여주는건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짧은 순간이나마 주선호 자신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든 실력자였다.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헌터가 제 실력을 감추는데 능숙하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대화했던 그 녀석이 틀림없다.'
그에게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 미등록 헌터를 자처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거품판독기'가 상당한 실력을 가진 헌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주선호의 계획에 호의적인 지원을 약속한 상태.
여기서 후원자에게 반감을 사봤자 주선호 자신에게 좋을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주선호는 얌전히 '거품판독기'의 이야기에 맞춰주는 것을 선택했다.
"원한다면 그렇게하지. 나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거 참 다행이네요. 주선호씨."
주선호는 반사적으로 움직였던 손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있던 청년, '거품판독기' 역시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검귀는 여전히 불만이 남아있는 모양이었지만, 마지못해 혀를 차며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검귀 역시 다른 S급 헌터의 만류를 뿌리치면서까지 충돌을 강행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일단락되자, 요란스럽던 골목길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선호는 조용해진 골목길에 발걸음을 내딛으며, 자신을 가로막던 천시예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가능하면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없길 바라지."
"큭······."
이를 악무는 천시예를 무시한 채, 그는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터벅, 터벅-.
적막한 골목길에 주선호의 구두소리가 울려퍼졌다.
천시예를 지나친 주선호를 낯선 헌터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뒤쫓았다.
주선호의 발걸음이 아홉번째 S급 헌터를 지나갈 즈음에는, 주선호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름은?"
"······신유호."
"나는 주선호다. 편한대로 불러라."
주선호는 신유호를 지나쳐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비좁은 골목길에 더 이상 그를 막으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좁은 골목길의 모퉁이를 벗어나기 직전.
주선호는 신유호에게만 들릴법한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두었다.
"조만간 다시 연락하지. 형제."
그 말을 끝으로 주선호는 소란스러웠던 골목길을 완전히 벗어났다.
* * * * * *
주선호와의 강렬한 만남이 끝난 이후.
나는 천시예와 상황을 정리하고서 집에 돌아왔다.
천시예는 불만이 전혀 없어보이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이야기에 마지못해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오늘 하루동안 벌어졌던 일들 때문에, 현관문 앞에 섰을때는 온몸에 진이 다 빠져버린 상황이었다.
철컥. 끼이이익-.
짧은 비밀번호를 누르고서 문을 열어젖히면, 얼마전에 입주한 한강뷰 아파트가 적막과 함께 나를 맞이해주는 모습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커다란 소파에 곧장 몸을 던져서 드러누웠다.
오늘 하루동안 누적된 피로에 몸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진 탓이었을까.
잠시동안은 이렇게 소파에 드러누워서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 설마하니 그 유명한 신창을 길에서 마주할 줄이야."
차가운 가죽소파에 드러눕기 무섭게, 오늘 있었던 신창과의 만남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S급 헌터, 신창 주선호.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헌터에게서는 말도 안되는 기백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강력경고] 스킬이 아니었다면, 대치상황을 종료시키기는 커녕 전투에 휘말려서 죽었을 터였다.
S급 헌터를 상대로도 [강력경고]가 통했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S급이라는 인간들이 정도라는게 있어야지. 하마터면 숨막혀서 죽는줄 알았네."
한차례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보니, S급 헌터로 착각받는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차라리 내가 단순한 민간인이었다면 천시예가 알아서 자제했을 것을, 내가 S급이라고 착각한 덕분에 작정하고 힘을 끌어올리지 않았던가.
천시예나 주선호나 하나같이 무자비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S급 헌터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허탈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아무도 없는 장소에 돌아왔으니, 자기 전에 커뮤니티에 한 번 접속해볼 생각이었다.
"—[네트워크 접속]."
띠링-.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반투명한 화면이 내 시야에 떠올랐다.
그 직후, 나는 커뮤니티의 메세지 탭에 있는 알림 표시를 발견했다.
내가 커뮤니티에 접속하지 않은 사이에 누군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뭐야. 누가 나한테 메세지를 보낸거지."
나는 자신에게 1:1 메세지를 보낸 이용자들의 닉네임을 확인해보았다.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인원은 도합 세명.
이용자명 'swordmaster'와 '망원동불주먹', 그리고 'yamazaki'였다.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일때문에 두 사람이 따로 메세지를 보내온 모양이었다.
이전에 나를 차단했던 'yamazaki'가 무슨 이유로 메세지를 보낸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단 천시예가 보낸 것부터 확인해볼까."
툭-.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swordmaster'가 보낸 메세지부터 확인해보았다.
- swordmaster : 오늘 일은 미안해 ㅜ O ㅜ
- swordmaster : 그 사람이랑. 원래 사이가 안좋아서....
- swordmaster : 시간날때. 밥살테니까. 용서해줘 ㅎㅅㅎ
이용자명 'swordmaster'가 나에게 보낸 메세지.
거기에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천시예의 짧은 사과가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날 버려두고서 주선호를 뒤쫓아간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내 입으로 직접 이런말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사실 상당히 대인배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천시예의 사과를 깔끔하게 받아주었다.
- swordmaster : 시간날때. 밥살테니까. 용서해줘 ㅎㅅㅎ
- 거품판독기 : ㅇ
"한국에서 제일 비싼 음식점이 어딘지 찾아봐야겠네."
대인배다운 답장을 보낸 나는 천시예와의 대화창을 닫았다.
천시예의 사과를 받아줬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의 메세지를 확인해볼 차례였다.
"······망원동불주먹."
천시예가 보낸 메세지의 바로 아래에는 '망원동불주먹'과의 대화버튼이 띄워져있었다.
망원동의 전설, S급 헌터 주선호.
그가 나에게 1:1 대화를 신청해온 것이다.
"얘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지."
나는 주선호와의 대화버튼을 클릭해 그가 보낸 메세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 망원동불주먹 : 오늘은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다. 형제.
- 망원동불주먹 : 검귀와는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야.
- 망원동불주먹 : 조만간 다른 동료들과 회합을 가질 계획이다.
- 망원동불주먹 : 내키면 찾아와라.
이용자명 '망원동불주먹'.
주선호가 보낸 메세지 역시 'swordmaster'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천시예와 마찬가지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나름대로 신경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조만간 밥이나 한번 먹자는 멘트까지 비슷한 모습이었다.
천하의 주선호가 나한테 사과하는 모습을 보게될줄이야.
아무래도 내가 후원하는 포인트가 끊어질까봐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이야··· 내가 천시예랑 주선호한테 사과를 받는 날이 다 찾아올줄이야."
자신에게 날아온 메세지를 보고있으니, 새삼 내가 어떤 입지를 가지게 되었는지 실감이 들었다.
내가 누구던가.
바로 두명의 S급 헌터들조차 눈치를 보는 유튜버였다.
물론 그 입지의 대부분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것도 내 입으로 진실을 밝히면 후환이 두려워지는 거대한 오해말이다.
검귀와 신창.
두 사람의 메세지를 확인한 나는, 스크롤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 세번째 대화창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귀령··· 얘는 대체 무슨 용건이 있어서 보낸거지? 설마 저번에 차단했던거 해결하려고 보낸건가?"
마지막 메세지는 일본에 거주하는 S급 헌터, 'yamazaki'가 나에게 보낸 것이었다.
S급 헌터, 귀령(鬼靈).
이전에 한차례 나를 차단했던 야마자키 아오로부터의 메세지였다.
혹시나 내 차단을 완전히 풀어버리고서, 무언가 급하게 전해야하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yamazaki'의 메세지를 열어보았다.
그 직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의 메세지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 yamazaki : 이거 너가 올린거냐?
- yamazaki : (╬●∀●)
- yamazaki : 빨리 안지우면 저주날린다
- yamazaki :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UJ0Z8JBFIYw ]
격노한 'yamazaki'가 보낸 메세지의 내용.
그것은 어떤 유튜브 영상의 링크와 함께, 당장 영상을 내리지 않으면 저주를 날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yamazaki'의 반응에 나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뭘 보낸거지? 설마 오늘 올린 랭킹 영상인가?"
내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들중에 귀령과 관련된 영상은 극히 드문 편이었다.
끽해야 오늘 올린 랭킹 영상 정도일까.
그런만큼 'yamazaki'가 나에게 화를 낼만한 요소도 거의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물며 'yamazaki'는 내 유튜브 채널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
그가 어떤 영상을 보냈는지 의문을 가진 채로 링크에 접속하자, 나는 익숙한 채널명이 보이는 영상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헌터마스터 특종] S급 헌터 귀령, 그 정체는 사실 동성애자였다? 충격적인 속보!
링크를 통해 접속한 영상의 제목은 'S급 헌터 귀령, 사실은 동성애자였다?'.
더군다나 해당 영상을 올린 채널은 다름아닌 대한민국의 300만 유튜버, '헌터마스터'였다.
헌터마스터 채널을 운영하는 박우성이 귀령의 사진과 함께 말도 안되는 정보를 게시한 것이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영상의 모습에 헌터마스터가 드디어 사고를 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와··· 이걸 기어이 유튜브에 올렸네. 헌터마스터 이 사람 진짜 제정신인가?"
검증도 안된 허위정보가 300만 유튜버에 의해 게시된 상황.
해당 영상의 조회수도 낮지 않은 탓에, 어느새 일본에도 이 소식이 전파된 모양이었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헌터마스터의 영상에 경악하면서도, 커뮤니티의 동료인 'yamazaki'가 느낄 고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런 마음을 가득 눌러담아서, 'yamazaki'를 향해 위로의 답장을 보냈다.
- 거품판독기 : ㅋ
- yamazaki : (╬●∀●)
- yamazaki : 진짜 너 사진 찾아서 저주날린다????
- yamazaki : 난 이미 제단까지 준비 끝냈어
1:1 대화창의 'yamazaki'는 울분을 토하며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런 그의 메세지를 무시한 채로 대화창을 닫았다.
"이야, 헌터마스터 이제 큰일났네."
아무래도 한동안은 헌터마스터 박우성이 저주때문에 제법 고생하게 될 것 같았다.
통쾌하면서도 시원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27화
대한민국에는 8명의 S급 헌터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모두가 입을 모아 한국 최고의 마법사로 꼽는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S급 헌터, 풍랑(風狼)— 서유화.
미국의 뇌제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기 전까지는, 뇌제 알렉스 오브라이어에 비견된다 일컬어지던 마법사이기도 했다.
비록 뇌제의 고유특성 [영구기관(S)]의 포텐셜을 넘지 못한 채, 이제는 수준 차이가 상당히 벌어져버렸지만 말이다.
그런 서유화는 현재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부채, <오더라이트의 가림막(S)>을 쥔 채 반투명한 화면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 망원동불주먹 :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던 아홉번째 녀석과 만났다.
- 망원동불주먹 : 아무래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걸로 보였어.
서유화의 눈앞에 띄워져있는 [커뮤니티]의 1:1 대화창.
그곳에서는 그녀에게 있어 무척이나 익숙한 닉네임, '망원동불주먹'이 메세지를 보내오고 있었다.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그녀에게 대화를 요청해온 것이다.
서유화는 볼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난감해지는 괴팍한 닉네임을 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발 저 닉네임 좀 바꾸면 안되나? 볼때마다 엄청 거슬리는데."
이용자 닉네임, '망원동불주먹'.
신창이라는 이명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보이는 닉네임이었다.
나름대로 센스있게 지었다고 생각하는 서유화 자신의 'nabi242'와는 상당한 수준차이가 나는 것이다.
다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고작 닉네임때문에 언성을 높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유화는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망원동불주먹'의 메세지를 읽어나갔다.
"그나저나, 아홉번째 S급 헌터라··· 용케도 지금까지 정체를 숨겨온 모양이네."
괴팍한 닉네임때문에 의미가 다소 퇴색되기는 했지만, 주선호가 그녀에게 남긴 메세지의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아홉번째 S급 헌터.
정체를 숨기고 있는 미등록 헌터가 그들의 계획에 합류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S급 헌터는 그 자체가 '전략병기'로 취급받는 전력이다.
그런 존재가 미등록상태로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면, 대한민국 정부를 포함해 모두가 등골이 오싹해질 터였다.
"주선호가 저렇게까지 말할정도면 실력도 나름 괜찮은 인물이라는 소리인데······."
더군다나 아홉번째 헌터의 실력은 천하의 주선호가 인정할만한 수준이었다.
지금도 세명의 S급들이 계획에 동참하고 있는 가운데, 괜찮은 실력을 가진 S급 헌터 하나가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다.
네명이나 되는 S급 헌터가 함께 움직인다면, 그들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주선호의 이야기를 듣고서 고민하던 서유화는, 이내 키보드를 두드려 '망원동불주먹'을 향한 메세지를 적어나갔다.
타닥, 타다닥-.
서유화의 손가락이 반투명한 키보드 위를 분주하게 움직였다.
- nabi242 : 많이 강한 사람인 모양이네요
- nabi242 : 무기는 어떤걸 쓰는데요?
- 망원동불주먹 : 그건 모른다.
- nabi242 : ?
아홉번째 S급 헌터가 주로 어떤 무기를 사용하냐는 질문.
허나, 그런 서유화의 질문에 돌아온 답변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싸우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는 뜻인데, 대체 어떤 모습을 보고서 그 실력을 판단했다는 말인가.
말을 잃어버린 서유화가 의문을 표하려던 찰나.
그보다도 빠르게 '망원동불주먹'의 답장이 돌아왔다.
- 망원동불주먹 : 한순간이지만 내 빈틈을 포착하고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어.
- 망원동불주먹 : 본인이 원했다면 내 목을 노리는 것도 가능했겠지.
- nabi242 : 아홉번째가 그정도 수준이라구요?
- 망원동불주먹 : 포인트도 많고 헌터로서의 실력도 뛰어난 편이야.
- 망원동불주먹 : 왜 헌터 활동을 하지 않는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 망원동불주먹 : 그래도 아마 우리 계획에는 적지 않은 도움이 되겠지.
본신의 무력도 강하고 포인트도 많이 가지고 있는 헌터.
그 이야기를 듣던 서유화의 머릿속에서 포인트에 대한 이야기가 메아리쳤다.
"포인트가 많은 사람이라고?"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포인트.
전세계를 통틀어 포인트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인물을 꼽자면, 신창 주선호나 검성 아서같은 이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선호는 현재 벌어들이는 것 이상으로 막대한 포인트를 소모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혼자서 사용하는 포인트의 자릿수부터가 다른 것이다.
"그 주선호가 포인트가 많다고 이야기할 정도면······."
이제는 출석체크 포인트 따위로는 기별도 가지 않을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포인트가 많다고 이야기할 정도의 상대였다.
적어도 몇천포인트 단위의 거래가 오고갔음은 틀림없었다.
대화를 나누던 서유화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동료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로 향했다.
- nabi242 : 그렇게 포인트가 많아요?
- 망원동불주먹 : 적어도 내가 볼땐 상당한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게 분명해.
- 망원동불주먹 : 매일 악착같이 벌어들이면서도 꼭 필요한 일에만 사용하고 있는거겠지.
- 망원동불주먹 : 그런 녀석이 나에게 과감하게 포인트를 후원한거니까 충분히 믿을 수 있는거고.
- 망원동불주먹 : 장기적으로 게이트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만한 사람인건 틀림없어보인다.
포인트가 많은 사람.
그리고 그만한 포인트를 망설임없이 주선호에게 후원할 수 있는 사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서유화— 'nabi242'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이끌렸다.
<레디아의 바람칼날(S)>.
서유화 자신이 몇번이고 경매장에 올렸지만, 여태껏 팔리지 않은 악성매물.
혹시나 그 아홉번째 S급 헌터가 상대라면 판매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타닥, 타다닥-.
서유화의 손가락이 빠른 속도로 대화창에 새로운 메세지를 전달했다.
- nabi242 : 혹시 말인데요
- 망원동불주먹 : 그 녀석한테 용건이라도 있는거냐?
- nabi242 : 레디아의 바람칼날
- nabi242 : 경매장에서 정말 저렴한 가격에 판매중인데
- nabi242 : 그 사람한테 구매할 생각 없냐고 물어봐주면 안돼요?
미등록 헌터라면 혹시라도 이 아이템을 비싸게 사줄지도 모른다.
서유화는 그런 기대를 하며 주선호에게서 돌아올 답장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 대량의 포인트가 필요한건 서유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디아의 바람칼날(S)>을 현금으로 매각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서유화가 십수분동안 답장을 기다리면, 머지않아 '망원동불주먹'으로부터 답장이──.
"뭐야? 왜 내 말 무시해? 이게 얼마나 좋은 아이템인데······!"
답장이 돌아오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긍정이나 부정의 대답은 커녕 제대로 된 답장조차 돌아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열이 뻗친 서유화는 계속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그녀의 분노를 채팅창에 쏟아내었다.
- nabi242 : 레디아의 바람칼날
- nabi242 : 그 사람한테 구매할 생각 없냐고 물어봐주면 안돼요?
- nabi242 : 레디아의 바람칼날
- nabi242 : 레디아의 바람칼날
- nabi242 : 레디아의 바람칼날
- nabi242 : 우와 너무 저렴해 ㅜㅜㅜㅜㅜㅜ
- nabi242 : 레디아의 바람칼날
- nabi242 : 그 사람한테 구매할 생각 없냐고 물어봐주면 안돼요?
- nabi242 : 그 사람한테 구매할 생각 없냐고 물어봐주면 안돼요?
- nabi242 : 그 사람한테 구매할 생각 없냐고 물어봐주면 안돼요?????????
서유화는 자신의 울분이 풀릴때까지 계속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런 서유화의 메세지에 답장이 돌아온 것은, 마지막 대화로부터 29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 * * * * *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또 이렇게 제가 의미있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네요."
카메라가 켜져있는 스마트폰의 바로 앞쪽.
그곳에서 나는 현재 라이브 방송을 켜둔 채로, 방송에 들어온 시청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내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오늘부로 70만을 달성한 까닭이었다.
구독자 70만명.
100만명을 달성하기까지 고작 30만명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기념비적인 순간을 즐기고자, 오늘은 특별히 짧은 라이브 방송을 킨 것이다.
"구독자 70만 131명··· 처음 유튜브를 시작할때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했던 숫자인데 말이죠."
내가 감동에 젖은 채로 구독자수를 읽어나가자, 라이브 방송의 채팅창에서 수많은 메세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빠른 속도로 올라오기 시작한 채팅 메세지들을 살펴보았다.
- @sfdhiwtwtbl : ㅊㅊㅊㅊㅊㅊ
- @dgfdhne521 : 축하드립니다 헌잘알님! 100만까지 가시죠!
- @hwntlq : 축하드립니다!
- @yeturq111 : 헌잘알! (박수 이모티콘)
- @tnwqod : 와 저만 알던 채널이 벌써 구독자가 70만이나 되다니....
내가 제공하는 훌륭한 영상들을 시청하는 지적인 사람들만 방송에 들어온 덕분이었을까.
다들 하나같이 교양있고 매너있는 채팅을 입력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구독자들의 채팅에 환호하며 짧은 박수를 쳤다.
"이게 전부 다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짝. 짝. 짝. 짝.
가벼운 박수소리가 카메라 너머로 전해지는 것도 잠시.
머지않아 라이브 방송의 채팅중에 유독 눈에 띄는 채팅 하나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엄청난 속도로 파묻힌 채팅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뇌리에 박히는 내용이었다.
- @dhwlgn99 : 70만으로 호들갑은 ㅋㅋ 누가 보면 100만이라도 달성한줄 알겠네
누가 보더라도 내 방송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분자가 분명했다.
70만. 호들갑. 100만.
핵심 키워드들을 확인한 나는 번개같은 반응속도로 해당 유저를 차단했다.
내 재빠른 반응속도 덕분에, 해당 유저는 더 이상 채팅을 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해당 채팅을 본 내 텐션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가라앉은 상황이었다.
질이 나쁜 채팅을 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나름대로 건전한 방송인 내 채널이라고 해도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예의 없는 놈들때문에 분위기 이상해졌다고요?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들만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시청자들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채팅창을 통해 해당 유저를 비난하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흐름속에서 나는 슬슬 방송을 종료해야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번 라이브 자체가 구독자 70만명을 기념해 진행한 특별 라이브였을뿐, 나는 원래 편집한 영상을 올리는게 더 익숙한 유형의 유튜버였다.
이미 방송을 킨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쯤에서 라이브 방송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구독자 100만까지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참고로 다음 영상은 3일 뒤에 업로드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방송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다음에 업로드될 영상에 대한 짤막한 홍보를 전했다.
그 뒤에는 스마트폰을 향해 짧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어플리케이션의 촬영 기능을 종료했다.
툭-.
손가락을 터치하자 스마트폰의 화면이 완전히 뒤바뀌는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70만 구독자 기념 라이브 방송은 완전히 끝난 셈이었다.
짧은 라이브 방송을 종료한 이후, 나는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실시간 방송을 할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아무래도 라이브 방송이다보니 표정관리가 쉽지만은 않았다.
"에휴, 라이브도 진짜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나."
오랜만에 벌인 특별 라이브방송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은 직후.
띠링-.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나에게 누군가 메세지를 보내왔다.
커뮤니티의 1:1 대화 기능을 통해 전달된 메세지였다.
커뮤니티를 통해 메세지를 보내온 사람의 이름을 확인해보면, '마산사나이 최두식'이라는 익숙한 닉네임이 보였다.
"······불사기사 최두식?"
대한민국의 원로 헌터, 최두식.
그가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온 것이다.
나는 곧장 대화창에 들어가 '마산사나이 최두식'이 보낸 메세지를 확인해보았다.
- 마산사나이 최두식 : 오늘.방송.잘봤네. ^^
- 마산사나이 최두식 : 70만.구독자.축하한다 ~~~
불사기사 최두식이 나에게 보낸 메세지.
그것은 내 유튜브 구독자가 70만이 넘은 것에 대한 축하인사였다.
아무래도 최두식이 방금 전의 라이브 방송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가 내 유튜브를 챙겨보고 있다는 말이 마냥 거짓말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최두식의 메세지에 감격하며, 한국 최고의 탱커를 향해 감사의 답장을 날렸다.
- 거품판독기 : 감사합니다 형님 ㅎㅎ
- 마산사나이 최두식 : 그래 아우야~ 앞으로도.잘하고.^^
- 마산사나이 최두식 : 담에.밥이나.먹자~ ^^
내가 손가락을 움직여 메세지를 전송하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최두식의 답장이 돌아왔다.
내 건승을 빌어주며 나중에 밥이나 먹자고 하는 모습이었다.
예전같았으면 촬영허가도 간신히 받았을만한 헌터가, 이제는 내 채널 70만 구독자 달성을 축하해주고 있는 것이다.
커뮤니티가 아니었다면 결코 마주하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최두식과의 대화를 종료했다.
"내가 벌써 70만 구독자가 됐나. 생각보다 빠르게 달성했네."
S급 헌터들과의 인연이 생기기 전까지, 내 채널의 구독자 수는 그리 빠르게 늘어나는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과 비교하면 훨씬 느린 템포로 늘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허나 처음으로 천시예와 독대했던 그날부터 많은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단독으로 S급 헌터를 섭외하고, 심지어는 그들과의 인터뷰를 촬영해서 편집해 업로드했다.
헌터로서의 내가 어떤지와는 별개로, 유튜버로서의 나를 커뮤니티가 성장시킨건 틀림없었다.
"오늘은 게시판에 어떤 글이 올라왔는지 확인해볼까."
헌터로 각성하고서 겪었던 경험들을 되새겨보던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접속했다.
방송을 종료한 김에 오늘 하루동안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들을 확인하고 읽어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내가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접속하자, 하루동안 작성된 수많은 게시글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런 게시글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최근에 나와 짧은 논쟁을 벌였던 인물의 글이었다.
- 꼴보기 싫은 녀석한테 저주 걸고왔어 (yamazaki)
커뮤니티 이용자명, 'yamazaki'.
얼마전에 나를 헌터마스터로 의심하던 일본의 귀령이 올린 글이었다.
평소라면 해당 게시글을 봐도 그냥 무덤덤하게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제목만 보더라도 게시글의 내용이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저주를 걸고 온거지?"
나는 'yamazaki'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알았음에도, 그가 적어놓은 게시글의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스윽-.
나는 해당 게시물을 터치해 귀령이 커뮤니티에 작성한 글을 확인해보았다.
[ 제목 ] 꼴보기 싫은 녀석한테 저주 걸고왔어
[ 작성자 ] yamazaki
[ 이용자 정보 ] 야마자키 아오 (34) / S급 / 귀령
탈모. 변비. 발기부전.
무려 3개나 걸었으니 당분간은 편히 지내지 못하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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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zaki'의 게시글을 확인하던 내 입에서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귀령이 저주를 걸었다는 대상이야 뻔한 것이었다.
보나마나 '헌터마스터' 채널을 운영하는 박우성에게 저주를 걸었을 터였다.
다만 녀석이 걸었다는 저주의 내용이 상당히 악독한 편이었다.
"귀령한테 저런 저주도 있었나? 헌터마스터도 상당히 고생하겠네."
탈모. 변비. 발기부전.
이야기만 들어도 상당히 끔찍하게 느껴지는 저주의 콤비네이션이었다.
하나만 찾아오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저주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던 수위보다도 악랄하긴 하네."
저런 저주를 뒤집어쓸 박우성을 생각하니 조금은 가슴이 아파오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내 솔직한 심경을 담아서, 'yamazaki'의 게시글에 댓글을 달아두었다.
[ 댓글 1개 ]
- 거품판독기 : ㅋㅋ
짧은 댓글을 해당 게시글에 등록한 이후.
나는 다시금 게시판의 메인 페이지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렇게 내가 게시글 목록 버튼을 터치하려던 순간.
띠링-.
익숙한 알림음이 또 한차례 내 귓가를 뒤흔들었다.
"뭐야? 이번에는 또 누가······."
이번에도 1:1 메세지가 왔을거라 생각해 시선을 돌리던 나는, 금세 무언가를 확인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알림음을 들은 내 눈앞에는 어느새 반투명한 화면이 떠올라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화면에는 이미 몇차례나 보아 익숙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시야를 가리고 있던 반투명한 화면의 내용물을 읽어보았다.
- 커뮤니티의 누적 활동치가 기준치를 돌파했습니다!
- [커스텀 네트워크(C)]가 당신의 커뮤니티에 첫번째 분기점을 제시합니다!
- '개방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커뮤니티의 최대 인원이 증가하며 높은 확장성을 얻게됩니다.
-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추가 기능이 해금되며 커뮤니티의 최대 인원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안내메세지의 내용.
그것을 살펴보던 내 입에서 의문에 젖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분기점? 나보고 직접 선택하라고······?"
첫번째 분기점.
S급 헌터 커뮤니티의 관리자인 나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선택의 순간이었다.
28화
커뮤니티의 누적 활동치가 늘어나면서 나에게 제시된 선택지는 단 두가지였다.
하나는 '개방형 커뮤니티'.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폐쇄형 커뮤니티'.
이름만 봐서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성을 가진 선택지들이었다.
[커스텀 네트워크]가 이러한 선택지들을 나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당연히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앞으로 내가 키워나갈 커뮤니티의 방향성을 결정하라는 건가?"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앞으로의 커뮤니티의 방향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내가 관리자로서 어떤 커뮤니티를 지향하는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만큼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신중하게 분석해보고, 앞으로의 계획에 도움이 될만한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개방형과 폐쇄형··· 둘중에 어떤 커뮤니티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런 질문이겠네."
나는 주어진 2개의 선택지 중에서, 가장 먼저 '개방형 커뮤니티'에 대한 설명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 '개방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커뮤니티의 최대 인원이 증가하며 높은 확장성을 얻게됩니다.
개방형 커뮤니티의 경우, 그 이름에 걸맞게 대규모 커뮤니티에 특화된 메리트가 주어지는 편이었다.
커뮤니티의 최대 인원 증가.
그리고 새로운 이용자들을 바탕으로 한 높은 확장성.
다시 말해서 더 많은 인원들을 포용하기에 적합한 유형의 커뮤니티였다.
내가 지금 S급 헌터들만으로 커뮤니티를 꾸려나가고 있는 것에 반해, 그 아랫등급인 A급 헌터들 역시 커뮤니티에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개방형의 장점은 역시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진다는 점이겠네."
규모가 큰 커뮤니티는 적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정보의 확산속도가 빠르고, 더욱 다양한 정보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무]와 [경매장]을 바탕으로 하는 커뮤니티 경제에 강한 활력을 불어넣기 마련이었다.
물론 규모에 따른 단점 역시 적은 편은 아니었다.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지는만큼, 커뮤니티를 관리하기가 더욱 어려워질테니까 말이다.
"단점은 그만큼 관리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겠고."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그만큼 악성 이용자의 숫자가 늘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만한 악성 이용자들을 통제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그렇게 유입된 이용자들이 바꿔놓을 분위기에도 적응해야만 했다.
"포인트 풀리는 속도랑 게시글 작성하는 속도를 조절하기 어려운건 좀 문제가 되겠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정보의 확산과 시장의 흐름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커뮤니티 생태계가 내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는 경우, 추가 기능이 해금되며 커뮤니티의 최대 인원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반면 폐쇄형 커뮤니티의 경우, 개방형과는 완전히 반대에 가까운 메리트를 제공하고 있었다.
커뮤니티의 최대 수용 인원을 증가시키지 않는 대신, 커뮤니티 내부에서 이용가능한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S급 헌터 커뮤니티로서의 방향성을 계속해서 가져가는 것이다.
이른바 현상유지인 셈이었다.
"지금 커뮤니티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현재 운영하는 커뮤니티는 모든 헌터들 중에서도 최상위 등급에 해당하는 S급들만 이용가능한 형태였다.
이른바 특권계층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이야기였다.
커뮤니티 내부에서는 이미 S급들 사이에 동질감이 형성되었으며, 그들간에 비밀이나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커뮤니티 내부의 내용이 외부에 유출될 수 있을 가능성이 제한적인 까닭이었다.
"주선호가 나한테 접근한 것도, 어디까지나 커뮤니티의 폐쇄성이랑 같은 S급이라는 동질감 때문이었으니······."
내가 신창 주선호와의 접점을 가지게 된 것도, 폐쇄적인 커뮤니티의 특성이 크게 작용한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커뮤니티 내부의 포인트 흐름은 내 의지에 따라 흘러가는 상태였다.
커뮤니티 내부의 경제를 관리하면서, 내가 반사적으로 얻는 이익 역시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통제 가능한 규모의 커뮤니티를 원한다면, 지금의 최대 수용 인원으로도 크게 지장은 없었다.
"······."
단점이라면 새로운 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고여갈거라는 사실 정도였다.
커뮤니티를 개방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폐쇄적인 구조를 계속해서 유지할 것인가.
나는 두가지 방향성을 저울질하며 커뮤니티의 미래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정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현상유지가 낫겠지."
이미 커뮤니티를 확장하기에는 너무 멀리 돌아온 상황이었다.
그러니 폐쇄적인 방향성을 유지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커뮤니티는 어디까지나 S급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으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폐쇄형 커뮤니티'로 향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툭-.
내 손가락이 화면에 닿기 무섭게, 새로운 메세지가 화면에 연달아 출력되었다.
- '폐쇄형 커뮤니티'를 선택하셨습니다.
- 다음 분기점이 나오기 전까지, 더 이상 최대 인원을 확장할 수 없습니다.
- 새로운 기능, [단체 대화방]이 활성화됩니다.
- [단체 대화방] 기능은 특정한 주제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개설 가능한 소규모 모임입니다.
- [단체 대화방]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500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내가 '폐쇄형 커뮤니티'를 고르자, 커뮤니티의 새로운 기능에 대한 안내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새로운 커뮤니티 기능의 이름은 [단체 대화방].
그리고 해당 기능의 역할은 그저 단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채팅방을 개설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해당 기능을 보기 무섭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그냥··· 단톡방 아니야?"
500 포인트를 지불해야 개설할 수 있는 사설 대화 공간.
이른바 유료 단톡방이 생긴 셈이었다.
후우-.
나는 해당 기능의 존재에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안그래도 폐쇄적인 커뮤니티인데, 거기에 조금 더 폐쇄적인 기능이 추가되었다.
유료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출석체크 5일치 보상이면 충분한 금액이었다.
이용할 사람은 얼마든지 이용할거라는 이야기였다.
"아니, 이런게 신규 기능이야? 미치겠네."
나는 허탈한 얼굴로 눈앞의 신규 기능을 바라보았다.
과연 어떤 이용자가 가장 먼저 해당 기능을 이용하게 될 것인가.
그런 궁금증을 가지면서 말이다.
* * * * * *
결과적으로 말해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단체 대화방]에 처음으로 초대받게 된건 나 자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초대받은 대화방을 개설한게 다름아닌 '망원동불주먹'이었으니까 말이다.
신창 주선호.
그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한 헌터들과 대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포인트를 지불하고 대화방을 개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화면이었다.
- 망원동불주먹 : 이걸로 전부 초대했다.
- engine555 : 저 사람이 아홉번째 S급 헌터야?
- 망원동불주먹 : 그래.
- nabi242 : 거품판독기님~~
- nabi242 : 혹시 레디아의 바람칼날 구매하실 생각 있으신가요!
- nabi242 : 우와 너무 저렴해 ㅜㅜㅜㅜㅜㅜ
'망원동불주먹'이 개설한 대화방에 네명의 S급 헌터들이 모인 것이다.
다가올 게이트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모인 S급 헌터들의 비밀모임.
그런 모임에 내가 초대를 받게 된 것이었다.
정확히는 나를 제외하고는 세명의 S급 헌터였지만 말이다.
나는 해당 대화방에 들어온 헌터들의 닉네임을 하나씩 확인해보았다.
"nabi242··· 서유화가 쓰던 닉네임 아니었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건 어떻게든 쓰레기 아이템을 처분하려고 노력하는 'nabi242'였다.
S급 헌터, 풍랑 서유화.
그녀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 헌터였다.
원거리 딜러들 중에서도 전투지속능력과 난전에 특화된 헌터인 것이다.
"하기야, 오지후의 커뮤니티 닉네임을 알려준 것도 서유화라고 했었나."
아무래도 서유화가 주선호의 계획에 한발 거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전에 나와 주선호의 대화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명의 경우, 'engine555'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헌터였다.
"이 사람은 또 누구지?"
이용자명 'engine555'.
낯선 인물의 닉네임을 바라보던 나는 곧장 커뮤니티 게시판으로 이동했다.
본인한테 정체를 물어보는 것보다, 직접 닉네임을 검색해 정체를 찾아보는게 빠를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타닥, 타다닥-.
내가 키보드에 해당 닉네임을 검색하자, 'engine555'가 작성한 게시글들이 차례대로 목록에 출력되었다.
- 신창 vs 검성 누가 이길까? [2] (engine555)
- 뇌제 vs 불사기사 누가 이길까? [2] (engine555)
- 나선창 vs 화염술사 누가 이길까 [4] (engine555)
- 아 긴급출동 [2] (engine555)
- 검귀 vs 귀령 누가 이길까? [5] (engine555)
- 이번 리워드 맛없네 퉤퉤 [2] (engine555)
나는 'engine555'가 작성한 게시글 목록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스크롤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커뮤니티 이용자명, 'engine555'의 게시글은 대부분 비슷한 래퍼토리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두명의 헌터를 서로 맞붙여놓고, 둘 중 누가 우위에 서있는지를 가리는 토론.
이른바 vs놀이 전문가였던 것이다.
"대체 누구길래 하나같이 이런 글들만 적어놨냐?"
나는 경악스러운 'engine555'의 게시글들을 보며, 그중에 하나를 터치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툭-.
내가 게시글을 터치하자 해당 게시글의 내용이 눈앞에 출력되었다.
[ 제목 ] 뇌제 vs 불사기사 누가 이길까?
[ 작성자 ] engine555
[ 이용자 정보 ] 이지성(30) / S급 / 그림자사냥꾼
뇌제랑 불사기사 둘 다 전투지속력에서는 수위에 꼽히는 헌터들이잖아.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내 생각에는 화력이 압도적인 뇌제가 이기지 않을까?
[ 댓글 2개 ]
- 마산사나이 최두식 : 최두식.헌터님이.다이깁니다.^^
ㄴ thundershock : ???
[ 공지사항 / 수정 / 삭제 ]
해당 게시글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작성자의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engine555'의 정체는 S급 헌터,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탐색과 은신, 그리고 암습에 있어서는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척후에 가까운 유형의 근거리 딜러인 셈이었다.
"engine555가 사실 그림자사냥꾼이었다고?"
나는 'engine555'의 정체가 이지성이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자사냥꾼의 경우 내 객관적인 헌터 랭킹에서 18위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이것은 전반적인 토벌 기여도를 비교했을때 산출되는 랭킹일뿐.
헌터들간의 상성을 놓고서 비교해보면, 이지성은 자신의 랭킹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은신과 암습에 최적화된 유형의 헌터인 까닭이었다.
"이지성 본인이 일대일 전문가라서 매번 vs 놀이만 하는거였나."
적어도 1:1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상위권의 마법사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유형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인물이 주선호의 계획에 붙었다는 사실을 보고서, 그날 주선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에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민간인 수준으로는 이지성을 저지할만한 방법이 없는 까닭이었다.
탱커가 아닌 내가 이지성에게 기습을 당한다면,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목숨을 내어줘야만 할테니까 말이다.
"S급 헌터라는 인간들이, 참···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고 말이야."
게시글만 봤을때는 그저 할일없는 한량이었는데, 그 정체를 보고나니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온전히 붙어있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다시금 주선호가 만든 대화방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게시글을 검색하고 오느라 제법 시간을 소모했던 것이었을까.
헌터들의 정부를 꿈꾸는 4인방의 대화에 합류하면, 어느새인가 주선호가 모종의 조치를 취해놓은 상황이었다.
- nabi242 : 거품판독기님~~
- nabi242 : 거품판독기님~~
- 방장이 [nabi242]의 대화를 1시간동안 금지시켰습니다.
- engine555 : 유화야
- engine555 : 여기 너 혼자 쓰는곳 아니잖아 ㅎㅎ
내가 없는 사이에 대화방의 방장 권한을 이용해, 'nabi242'에게 대화금지 조치를 걸어놓은 것이다.
저런 권한이 존재하는지는 나조차 몰랐기에 의외의 상황인 셈이었다.
'nabi242'가 워낙 시끄러웠던 탓에, 해당 조치를 취하는게 맞긴 하겠지만 말이다.
주선호 나름대로 공과 사는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방해되는 인물을 정리한 주선호는, 대화방에 계속 채팅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 망원동불주먹 :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어쨌든 우리 계획에 합류한걸 환영한다.
- 망원동불주먹 : 아무래도 내가 감시받는 입장이다보니 자주 만나기는 힘들겠지만.
- 망원동불주먹 : 당분간은 이런식으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전할 계획이야.
- engine555 : 잘 부탁한다 신입
- engine555 : 내 정체는 나중에 얼굴보면 알려줄게 ㅎㅎ
정부의 감시를 받는 주선호의 입장을 생각해서, 대부분은 이런식으로 메세지를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주선호의 짧은 공지와 함께, 이지성 역시 나에게 환영인사를 건네는 모습이었다.
커뮤니티 게시판에 적었던 게시글들과는 다르게, 대화방에 들어오자 나름 멀쩡해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이지성이었다.
어느쪽이든 둘 중 한곳에서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막상 여기서 대화하는걸 보면 또 사람이 멀쩡해보인단 말이지."
나는 'engine555'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남기고서는, 키보드를 이용해 비밀 대화방에 채팅을 입력했다.
해당 모임의 구성원들이 생각하고 있는 '위험한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묻기 위해서였다.
띠링-.
내가 대화방에 메세지를 입력하기 무섭게, 곧바로 '망원동불주먹'의 답장이 돌아왔다.
- 거품판독기 : 그 계획이라는거
- 거품판독기 : 조금 더 자세히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 망원동불주먹 : 지금 당장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야.
- 망원동불주먹 : 다만 정계와 군부 양쪽에 나와 연결되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 망원동불주먹 : 일단은 그 정도만 말해두도록 하지.
- engine555 : 내가 있으니까 어지간해서 실패는 안할거야 ㅎㅎ
- engine555 : 우리 신입처럼 근접전투에 능숙한 헌터가 나 막으러 오는 것만 아니면 말이야
주선호는 지금 당장 무언가를 늘어놓기보다는, 말을 아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이지성의 경우에는 자신이 있으니 문제가 없을거라는 주장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주선호가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으려는건 아니었다.
주선호가 세부계획에 대한 답변을 회피한 직후.
그가 엄청난 정보를 대화방에 게시했으니까 말이다.
- 망원동불주먹 : 30분 전에 협회에서 게이트 브레이크의 전조를 관측했다.
- 망원동불주먹 : 이미 왜곡현상때문에 해당 게이트의 입장이 불가능해졌어.
- 망원동불주먹 : 적어도 사흘 안에는 필드보스가 밖으로 나올거야.
- 망원동불주먹 :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에는 우리 모임에 있는 사람들 위주로 긴급출동 명령이 나오게 조치해둘 생각이다.
- 망원동불주먹 : 기껏해야 최두식 한명 정도 더해지겠지.
- 망원동불주먹 : 그러니 다들 그렇게 알고 준비해라.
게이트 브레이크.
게이트 내부에 있는 필드보스가 외부로 역류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서 신창 주선호가 대규모 재해의 발생을 예고해온 것이다.
그것도 주선호 자신이 조치를 취해 인선을 정하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열린다고?"
70만 유튜버, '헌잘알'.
내 안에 숨어있던 저널리즘이 다시금 들끓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29화
게이트 브레이크(Gate Break).
'게이트 역류 현상'이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은 오랫동안 헌터계에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해온 재해였다.
게이트 브레이크의 전조증상이 나타나는 경우, 가장 먼저 왜곡현상이 발생해 해당 게이트의 진입이 봉쇄된다.
그렇게 특정 시간동안 게이트의 접근이 봉쇄된 이후에는, 판정 등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게이트 외부로 역류하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씩 몬스터 몇마리가 탈출하는 사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각한 재해라는 이야기였다.
"게이트 브레이크라···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 나타난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주선호를 포함한 3명의 S급 헌터들과 대화를 나눈 다음날.
나는 '망원동불주먹'에게 들었던 게이트 브레이크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며 고민에 잠겼다.
적어도 최근 1년간은 대한민국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해외라면 몰라도 국내에서 게이트 브레이크를 촬영할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 사태의 경우, 무려 신창 주선호의 싸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기회였다.
S급 헌터들의 전투장면을 촬영하지 못한다면 일생일대의 손해인 셈이었다.
"일단은 커뮤니티에 관련 글을 한 번 검색해볼까."
나는 게이트 브레이크에 접근할 방법을 고민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들을 검색해보기로 했다.
커뮤니티에는 전세계의 S급 헌터들이 모여있는만큼, 다양한 게시글들이 매일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게이트 브레이크와 관련된 글도 있기 마련이었다.
타닥, 타다닥-.
내가 키보드를 이용해 '게이트 브레이크'를 검색하면, 몇가지 검색결과가 화면에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 방위대신이 또 불렀어 [2] (yamazaki)
- 텍사스 게이트 브레이크 처리 [3] (thundershock)
- 주지사 미쳤습니까? [4] (thundershock)
- 어제 쓰촨성에서 있었던 일 [2] (xkingx)
- 게이트 브레이크 긴급출동 나올때마다 혼자 나가는데 [7] (ronaldo_7)
게이트 브레이크 자체가 국가에 상관없이 발생하는 까닭이었을까.
검색 결과에서는 세계 각국의 헌터들이 게이트 브레이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본. 미국. 중국. 영국.
국가에 상관없이 수많은 헌터들이 게이트 브레이크의 처리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제목은 'thundershock'가 적은 게이트 브레이크 관련 게시글이었다.
"저게 미국의 뇌제가 쓰던 아이디였나."
S급 헌터, 뇌제 알렉스.
그가 자신이 텍사스의 게이트 브레이크에 투입되며 경험했던 일에 대해 적어놓은 것이다.
헌터와 관련된 정보를 다루는 유튜버인 내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게시글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해당 게시글에 손가락을 가져가서는, 뇌제 알렉스가 어떤 이야기를 적어놨는지 확인해보았다.
[ 제목 ] 텍사스 게이트 브레이크 처리
[ 작성자 ] thundershock
[ 이용자 정보 ] 알렉스 오브라이어(29) / S급 / 뇌제
방금 전에 텍사스의 게이트 브레이크를 처리하고 돌아왔습니다.
해당 게이트의 경우 판정 등급 B급이었는데,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로 A+급까지 격상된 것 같았습니다.
현장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주지사랑 짜증나는 문제가 좀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또 화나네요.
빌어먹을 에릭.
그 인간 말대로 했으면 대체 몇명이 죽었을지 끔찍하네요.
이번 게이트에서는 비행종 몬스터가 많이 출몰해서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최근 들어서 이런곳에 파견될때마다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몇몇 분들은 제가 누군지 짐작하고 계시는 모양이지만, 저는 이러한 유형의 게이트를 처리하는데 특화된 유형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조금씩 처리속도가 늦어지는 느낌입니다.
동일한 등급의 게이트인데도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조금 더 지능적으로 변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헌터가 이곳에 왔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을겁니다.
몇년 전부터 게이트 내부의 몬스터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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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제 알렉스가 작성한 게시글을 쭉 읽어보니, 몇가지 키워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엄격한 현장 통제.
비행형 몬스터의 출현.
마지막으로 몬스터들의 움직임에 대한 내용까지.
하나같이 고민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모습이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라··· 주선호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데."
세계 최강의 헌터라고 불리는 신창 주선호조차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게이트를 방어하는게 어려워질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만큼 본인의 성장을 위해 과도한 투자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말이다.
뇌제 알렉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걸 보면, 최상위권 헌터들은 그러한 상황을 체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천시예만큼은 자기계발의 동기가 다른쪽에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주변 통제를 철저하게 진행하겠지.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들어가기 어렵겠는데."
게이트 브레이크 발생 직전의 현장통제 역시 고려해야할 요소였다.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피난유도를 진행할테니까 말이다.
그런만큼 공식적인 방법으로 현장에 들어갈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툭-. 툭-.
나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어떻게 해야 현장에 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주선호에게 부탁하는건··· 아무래도 좀 곤란하겠지."
실질적으로 토벌 현장을 책임지는건 주선호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선호와 지나치게 잦은 접촉을 하는 것도 곤란했다.
일단은 나 역시도 비밀모임의 동료가 아니던가.
그러니 여기서는 좀 더 온건한 방법으로 가는게 좋을 것 같았다.
바로 나와 '헌잘알' 채널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구독자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결심을 마친 나는 곧장 커뮤니티의 1:1 대화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또 하나의 S급 헌터, 불사기사 최두식에게 연락을 넣었다.
- 거품판독기 : 형님
- 거품판독기 :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 마산사나이 최두식 : 그래.아우야.^^
- 마산사나이 최두식 : 오늘은.무슨.일이냐?~
중증의 커뮤니티 중독답게 이미 커뮤니티에 접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산사나이 최두식'은 빠르게 답장을 보내오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최두식을 향해 자신의 요구를 남자답고 진솔하게 전달했다.
- 거품판독기 :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에 형님이 나간다는 소식을 빠르게 접했습니다
- 거품판독기 : 형님과 다른 헌터들이 몬스터를 멋지게 쓰러뜨리는 모습을 찍어보고 싶은데
- 거품판독기 : 혹시 전투보조원 자리에 넣어주실 수 있습니까?
내가 게이트 브레이크 현장에 접근할 수단으로 선택한 방법.
그것은 바로 전투보조원 자리를 이용해 최두식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보통이라면 길드의 직원들이 도맡아 헌터들에게 장비나 소모품을 전달하겠지만, 지금같은 긴급출동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많이 다른 편이었다.
최두식 본인이 원한다면 나를 얼마든지 동행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나이다운 접근 방법으로 최두식에게 직구를 꽂으면, 머지않아 최두식이 장문의 답장을 보내오는 모습이었다.
- 마산사나이 최두식 : 흐흐~
- 마산사나이 최두식 : 그렇다면.당연히.들어와야지.^^
- 마산사나이 최두식 : 아우도.나름.S급.헌터아닌가????
- 마산사나이 최두식 : 제.한몸은.보신하겟지.
- 거품판독기 : 역시 형님이십니다
- 거품판독기 :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 마산사나이 최두식 : 멋지게.찍어주게.^^~
그런 내 남자다운 접근법에 감탄한 것이었을까.
최두식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수락하는 모습이었다.
불사기사의 답장을 확인한 나는 주먹을 쥐면서 환호했다.
구독자 70만 1782명 유튜버 '헌잘알'.
이번 영상을 계기로 100만 유튜버의 고지를 바라볼 수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창에 풍랑에 불사기사까지 나온다? 이번 영상은 절대 망할수가 없지."
헌잘알 채널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토벌 영상.
나는 다가올 게이트 브레이크를 기대하며, 촬영을 위한 준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 * * * *
S급 헌터들의 권위는 평소에도 드높은 편이지만, 토벌 현장에 이르러서는 절대적인 것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다시 말해서 게이트 앞에서는 그 누구도 S급 헌터의 지시에 거스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게이트 브레이크를 앞두고 있는 지금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후······."
왜곡현상이 일어난 게이트로부터 한참 뒤쪽에 위치한 장소.
나는 현재 그곳에서 한계까지 줌을 당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중이었다.
불사기사 최두식의 전투보조원이라는 명목 아래에, 그에게 장비와 소모품을 전달해주기 위해 입장한 것이다.
최두식의 이름을 빌린 덕분에 현장의 그 누구도 나에게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탱커 포지션에 속하는 최두식의 특성상, 장비를 전해준 시점에서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뒤에는 전투보조원이 최두식에게 도움이 될만한 부분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유튜브에 올릴때는 익명의 전투보조원에게 제보받은 영상이라고 올려야겠어.'
그 다음에는 나 혼자 단독촬영의 시간을 누릴 뿐이었다.
천하의 헌터마스터조차 얻어낼 수 없는 촬영기회.
그것을 S급 헌터의 인맥으로 얻어낸 셈이었다.
'물론 S급 헌터라고 오해하고 있는게 아니었다면 당연히 들여보내주진 않았겠지.'
당연하지만 내가 아무리 최두식과 친분이 있다고 해서, 최두식이 나를 곱게 들여보내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러한 수단을 용인한 이유는 단 하나.
S급 헌터라면 스스로 제 한몸쯤은 건사할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최악의 상황에는 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계산도 섰을테고 말이다.
"······."
나는 혼자만의 여유로운 촬영시간을 즐기며, 비교적 안전한 장소에서 카메라를 움직여 신창을 비추었다.
대포와도 같이 길어진 카메라 렌즈의 너머.
그곳에서는 두터운 창들을 잔뜩 세워놓은 신창 주선호가 서있었다.
주선호의 뒤에 세워진 물건들은 C급의 헌터 장비, <파르센트의 강철창(C)>.
게이트에서 비교적 자주 발견되는 물건들이었다.
"뭐지? 소모품 대용으로 하급 장비를 가져온건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창들을 세워놓은 모습을 보건데, 초반에는 주선호가 투창을 이용해 원거리 딜러 역할까지 겸할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카메라를 향하고 있으면, 머지않아 주선호의 시선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띠링-.
상태창의 알림음과 함께 내 눈앞에는 1:1 대화창이 띄워졌다.
- 망원동불주먹 : 아무말 없더니 혼자서 여기까지 찾아온건가?
- 망원동불주먹 : 지금부터 어떤 동료와 함께하고 있는지 제대로 지켜보길 바라지. 형제.
주선호쯤 되는 헌터면 멀리서도 나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는 저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도 용케 내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런 주선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주선호는 웃으면서 창을 집어드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괴물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네명이나 되는 S급 헌터들이 토벌 작전 하나에 모일 기회가 흔하지는 않지."
나는 그런 주선호를 넘어서, 현장에 있는 다른 헌터들을 향해서도 카메라를 돌렸다.
건물 위에 있는 주선호와는 다르게, 아래에 있는 길목을 지키는 헌터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불사기사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국내 최고의 탱커 최두식.
그가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저지하기 위해, 게이트 앞을 단단히 지키고 서있었던 것이다.
"최두식이랑 서유화가 같이 서있는 장면을 보게 될줄이야."
그런 최두식의 뒤에서는 부채를 활짝 펴고있는 서유화가 대기하고 있었다.
풍랑(風狼)이라는 그녀의 거창한 칭호에 어울리게, 서유화의 근처에서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늑대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서유화가 마법으로 불러낸 바람의 정령들이었다.
그녀는 정령을 이용해 몸을 지키면서, 강력한 바람마법으로 전장을 쓸어버리는 전투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만 충분하면 광범위 공격을 난사할 수 있을테니, 최두식이 전열을 맡는다면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금방 쓸어버리겠지."
불사기사 최두식이 전열에서 서유화를 보조한다면, 그녀가 아무런 제약없이 마법을 난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만능에 가까운 주선호까지 이번 전투에 동참했으니, 전투의 결과가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예상이 가능했다.
주선호. 최두식. 서유화.
세명의 S급 헌터들을 카메라에 담은 나는, 아직 화면에 담지 못한 네번째 S급 헌터를 찾아서 움직였다.
세 사람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니, 긴급출동을 명령받은 이지성 역시 저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뭐야. 어디갔어?"
나는 그런 생각으로 카메라를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막상 게이트 주변의 어디에서도 네번째 헌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네번째 헌터는 커녕 그 그림자조차도 잡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은신과 암습에 특화된 S급 헌터이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번 토벌 작전에 참여했을 이지성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낼 수 없었다.
계속해서 이지성의 모습을 찾아보던 나는, 결국 난감한 얼굴로 카메라에서 눈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내가 카메라에서 얼굴을 떼어낸 직후.
툭-.
나는 자신의 옆쪽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혼자 뭐해?"
귓가에 들리는 낯선 목소리.
그 목소리를 따라서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의 헌터 하나가 서있었다.
이미 수차례나 TV를 통해 그 모습을 보아왔던 유명한 얼굴.
그리고 전장에 있는 헌터들을 따라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어야할 S급 헌터.
단검을 쥐고 있는 그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나 찾고 있었던거야?"
그림자사냥꾼, 이지성.
내 카메라가 그토록 쫓고 있었던 남자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3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