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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 후작령의 남쪽으로는 더 남쪽에 위치한 대수림과 이어지는 드넓은 늪지대가 있다. 제국에서도 개척을 포기한 험지 중의 험지로, 끔찍한 외형의 여러 괴물을 포함한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땅이다.

하여 사람들은 프로스 후작령 서남쪽에 자리한 솔페인 백작령으로 이동할 때 항상 정해진 관도만 이용했다.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남쪽으로 향하면 제국령 내에서 보이는 평범한 맹수나 괴물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놈들이 출몰했기 때문이다.

광활한 늪지대에서 끊임없이 태어나 세를 불리는 괴물들은 저들끼리 싸우면서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밀려난 놈들이 북상하며 항상 프로스 후작령의 골칫거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건 동쪽으로 늪지대를 접한 솔페인 백작령도 겪는 문제였다. 하여 두 영지는 이 문제를 협력해 처리하길 반복했고 인접한 여타 영지들과는 달리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언뜻 지금 라온의 상황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정보들이다. 하나 깊이 생각해보면 프로스 후작령에서 발생한 사건이 훨씬 더 빨리 자세하게 전파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했다.

그렇다고 반대편 동쪽으로 가자니 바로 그 프로스 후작령과 도일 후작령의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고, 북쪽으로도 이미 도망쳐왔던 영주성이 있는 쪽인 데다가, 그보다 더 북쪽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어 도망갈 길이 없었다.

결국 라온은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물론 그냥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신성교 측에서 백금쥐라는 환수를 부려 자신을 추적한다는 걸 알았으니 그에 적당한 조치를 했다.

강렬한 풀냄새가 나는 마법재료를 상태변화 마법으로 액화시켜 온몸에 뒤집어썼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각종 나무토막이나 돌조각 따위에 마력의 기척을 감추는 마법진을 빼곡하게 새겨 몸 곳곳에 보관했다.

덕분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깔끔함을 유지하던 라온의 모습은 상당히 추레하고 기이해졌다.

그러고도 라온은 이 정도로 충분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백금쥐라는 환수를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안 하는 것보단 낫다고 위안하며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장소에 이르자 그는 하탈딤도 역소환한 채 직접 두 발로 걸었다.

근처에 하천이 있어 그곳에 발을 담그고 흔적을 지운 채 얼마나 거슬러 올라갔을까.

작은 언덕보다는 조금 큰 수준의 야산이 나타났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그 야산은 어디로도 길이 없어 오르기가 상당히 불편해보였다.

"음······."

뭔가를 고민하던 라온은 발을 담그고 있던 하천에서 벗어나 수풀을 밟으며 빠르게 나아갔다. 그가 밟고 지나간 풀들은 살짝 눌렸다가 금방 다시 몸을 일으키켜 멀쩡해졌다.

공간중력 마법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어 수월히 산을 오르는 라온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당연히 부상과 피로 탓이었다.

쉬고 싶다. 아니, 쉬어야 한다.

백금쥐에 대한 조치가 완벽했다면 모를까, 이대로 계속 쫓기다가 주교 아달란 같은 자를 다시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때야말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다시 엄청난 행운이 찾아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면 모를까, 당연하지만 그런 기대는 망상에 불과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도박을 해야 한다.

야산 깊은 곳에 들어갈수록 평화롭던 숲의 풍경이 점점 망가져 갔다. 나무는 썩어가고 있었고 땅은 헤집어져 꽃과 풀들이 자라지 못하고 있는 광경.

키르르륵-

그렇게 횡포를 부려 이 작은 야산을 망가뜨린 놈이, 인기척을 느낀 듯 커다란 땅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미를 닮은 곰만 한 크기의 곤충형 몬스터였다. 반투명한 껍질 내부에서 은은하게 흐르는 진녹색 마력의 빛깔이 역겨운 느낌을 들게 만든다.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놈은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난 먹잇감이 신기했는지 까만 구슬 같은 눈 달린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대며 라온을 살폈다.

키르륵-

다시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낸 녀석이 막 주둥이를 벌리며 달려들려는 때.

라온의 손에서 검이 나타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쏘아졌다. 한 걸음에 수 미터를 줄여 번개처럼 내지른 검 끝이 채 반응하지 못한 거미 괴물의 미간을 정확하게 관통해 헤집었다.

끼익··· 이익···

곤충형 괴물은 질긴 생명력으로 유명하다. 그걸 증명하려는 듯 놈은 뇌가 파괴되었음에도 네 쌍의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금방 죽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꺼져가는 마력의 빛깔이 이미 죽은 상태임을 보여줬다.

검을 회수한 라온은 놈이 멈추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놈이 튀어나왔던 땅굴을 살피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후······."

온갖 이름 모를 생명체들의 잔해가 썩어가는 땅굴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절대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깊고 복잡한 구조는 그런 불쾌함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불호를 따지는 것은 사치다.

라온은 이곳에 숨기로 결심하고는 땅굴의 가장 깊은 곳, 아마도 그 거미 괴물이 잠자리로 쓰던 곳이 분명한 장소에 털썩 주저앉았다.

뭔지 모를 액체로 축축한 흙바닥이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다.

정화 마법으로 청소하는 건 당연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백금쥐에게서 마력의 자취를 숨기려고 어떤 고생을 했는데, 고작 더러운 걸 조금 못 참아서 들킬 여지를 만드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다.

그는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아차원에서 신속하게 재료들을 꺼냈다. 부상을 치료할 포션 제조를 위한 재료들이었다.

모든 연금술 비약은 재료가 귀하고 강력할수록 더 많은 섬세함이 필요하다. 특히 치유 포션의 경우 효과가 강력할수록 그만큼 위험해져서 엘릭서 제조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었다.

라온은 가장 핵심적인 재료라 할 수 있는 용혈수와 하얀악마꽃잎을 내려다보며 머릿속으로 각 재료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를 계산했다.

오래 고민하진 못했다. 언제 적들이 여기 들이닥칠지 모르는 지금, 약간의 부작용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후···."

짧은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재료들을 염동력으로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상태변화 마법과 융합촉진 마법을 사용해 포션 제조를 시작했다.

마력수와 열기를 뿜어내는 재료를 중심으로 정화와 치유의 힘을 품은 것들을 액화시켜 첨가하고 융합하는 과정.

마력수와 융합한 샛노란 불길에 재료들이 하나둘씩 녹아 스며들 때마다 불꽃의 색이 다양하게 변화하며 희미하게 독특한 냄새를 풍긴다. 그 희미한 냄새는 다행히 멀리 가지 못하고 땅굴의 악취에 대부분 집어삼켜졌다.

우연이 아니라 전부 라온이 계산하고 재료를 배합한 덕이었다. 이 정도 기교는 연금술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겐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꼬박 한 시간에 걸쳐 연금술에 집중한 후.

라온은 모든 과정을 마치고 융합촉진 마법에 집중하며 비약을 식히는 과정에 들어갔다.

용혈수가 첨가된 치유 포션은 과연 그 빛깔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은빛으로 빛나다가 금빛으로 물들고, 다시 은빛으로 빛나다가 연한 분홍빛을 발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포션이 안정되면서 완성됐다.

라온은 자신의 완성품을 감상할 시간도 없이 즉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끔찍스러운 통증을 한시라도 빨리 없애고 싶었고 또 시간이 별로 없기도 했다.

"후우···!"

포션을 전부 마시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정화와 치유의 힘이 그의 내부에서부터 외부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가 직접 시전하는 정화 및 치유와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전신이 은빛과 금빛으로 뒤덮일 지경이었다.

화상이 빠르게 아물어간다. 타격에 뒤흔들렸던 뼈와 장기들도 제자리를 찾는다. 무리한 움직임에 보이지 않는 손상이 쌓였던 근육들이 전부 생기를 되찾는다.

"흐읍···!"

그리고 라온은 예상했던 부작용이 닥쳐옴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화상이 치유되다 못해 살점이 우둘투둘 부풀어 오르며 흉한 모습이 됐다. 뼈와 장기들에 과도한 힘이 쏠리며 통증이 느껴졌고, 근육들에는 생기가 넘치다 못해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다가 다른 근육과 엉겨 붙었다.

다행히 그런 부작용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 부상이 완전히 치유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 이 정도는 당장의 위급함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정도였다.

급한 불을 껐으니 이제 다음을 실행할 차례다.

여태 미뤄오던 선택을 내릴 때였다. 육체와 정신, 둘 중 무엇을 중심으로 초월을 추구할 것인가.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엘릭서를 만들어도 복용할 수 없다. 그러면 지금의 실력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이고, 그건 지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리라는 뜻이다.

다행히 라온은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주교 아달란과 싸우면서 얻었던 깨달음이 판단의 근거가 됐다.

어떤 선택을 내려도 결국 초월에 닿을 수 있다면, 이런 위급상황에선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해지는 쪽으로 선택을 내리는 게 당연할 터.

그가 깨달은 고유시간가속 마법은 정신보다는 육체에 큰 부하를 가한다. 하니 육체를 중심으로 강화하는 선택을 내린다면 당장의 실력을 크게 증폭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민해본 라온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가진 마법재료를 떠올리며 어떻게 조합해야 최고로 적합한 엘릭서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번에는 방금 마셨던 치유 포션처럼 부작용이 있어서는 안 됐다. 엘릭서의 특성상 감당할 수 없는 영구적인 피해를 남길 수도 있었으니까.

'시간만 충분했다면······.'

정말로 한 점의 후회도 없는 선택을 내리고 완벽한 엘릭서를 만들어 복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불평해봤자 어쩔 수 없다.

전부 신성교 놈들 때문이었다.

잠시 이를 갈던 라온은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원래 하던 고민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그런 감정을 되새기는 것조차 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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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라온은 가늠하지 못했다. 굳이 계산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시간을 가늠해봤자 초조해질 뿐이었다.

라온은 가진 재료를 최선을 다해 조합하며 엘릭서를 만들어갔다.

처음 한두 번은 불완전한 결과물이 나와 실패작으로 처리했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성공작이 나왔다.

그렇게 중급 엘릭서를 12병이나 연속으로 만들어 낸 후, 그는 멈추지 않고 바로 상급 엘릭서 제작에 들어갔다.

중급 엘릭서 12병은 전부 중급 중에서도 상품이라 할 만큼 뛰어났다. 이는 명백히 라온의 연금술 실력을 벗어난 결과물이었고, 전적으로 재료의 수준이 뛰어난 덕이었다.

만약 라온의 실력이 대가라 불릴 정도였다면, 같은 재료로 중급이 아닌 상급 엘릭서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터다.

중급과 상급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면 지금 라온의 행동은 귀한 재료를 심각하게 낭비하고 있는 꼴이었다.

이 역시 전부 신성교 놈들 때문이다.

분노와 증오를 집중력으로 승화시킨다. 라온은 치유 포션의 부작용으로 우둘투둘 흉하게 부풀어 오른 얼굴을 씰룩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엘릭서 제조에 집중했다.

어쩌면 지금 당장 저 중급 엘릭서들을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 더 심하면 이미 추격대가 근처까지 와서 저것들조차 마실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엘릭서 제조를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이번 기회를 최대한 살리려는 생각이었고, 그런 초조함을 잊어버릴 정도로 대단한 집중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재료의 특성을 파악하는 식별, 그것의 상태를 액체로 바꿔 조합하기 용이하게 해주는 상태변화, 재료가 서로 어우러지며 서로의 특성이 상승작용 혹은 반발작용을 일으켜 원하는 효과를 이끌어내는 융합촉진.

식별하고 액화시켜 융합하는 언뜻 단순한 세 과정으로 보이지만 이 안에는 수많은 변화와 변수가 포함돼있다.

단순히 재료를 식별하는 과정에도 노하우가 필요하고, 상태변화를 시전할 때는 재료의 상태를 꾸준히 관찰하며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며, 융합촉진 역시 강도를 조절하는 것은 물론 감각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여태 연금술을 하면서 지금만큼 이 과정이 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라온은 어느새 상황마저 잊고 상급 엘릭서 제조에 빠져들었다. 그가 펼치는 연금술은 단 한 치의 머뭇거림이나 버벅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과정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진행되길 얼마나 지났을까.

"아."

라온은 어느새 자신이 목표했던 상급 엘릭서 8병을 모두 제조했음을 깨달았다.

손에 들린 마지막으로 제조한 상급 엘릭서에서 따뜻하면서 동시에 차가운 기묘한 감각이 전해진다.

붉은빛과 황금빛이 절묘하게 섞인 아름다운 액체가 수정병 안을 천천히 회오리치는 모습으로,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귓가에 알 수 없는 선율이 들려온다. 동시에 분명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향기가 맡아지는 느낌이었다.

예전 비전성에서 처음으로 엘릭서를 마셨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엘릭서를 마시고서야 느껴지던 감각이 지금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나타나고 있었다. 상급 엘릭서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려주겠다는 것처럼.

라온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는 상급 엘릭서를 한쪽에 내려놓고 이전에 완성해 놨던 중급 엘릭서들 중 한 병을 염동력으로 끌어와 손에 쥐었다.

"후···."

눈을 감고 짧은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후.

그는 바로 수정병의 마개를 열고 엘릭서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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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 찍-

누군가의 손바닥 위, 전신이 반짝이는 은빛 털로 뒤덮인 작은 쥐가 연신 코를 벌름거리다가 한쪽을 빤히 쳐다본다.

그 쥐를 들고 있던 주교 아달란은 한숨을 내쉬며 살짝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손을 털어내자, 쥐가 한순간에 빛줄기로 변해서는 그의 팔찌 안으로 스며들었다. 환수의 특성으로 역소환된 것이다.

그는 지금 기분이 매우 저조했다.

교단에서 진심으로 잡고자 하는 목표물을 마주친 후 잡지 못했고, 위치와 상황적 이유들로 인해 그가 추격대의 책임자를 맡게 됐다.

이는 단순히 귀찮거나 부담스러운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주교의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차기 대주교로 공인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대주교에 오르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번의 포획 실패는 그런 자들에게 빌미를 줬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새 인상을 쓴 아달란은 머릿속으로 요안즈를 떠올렸다.

처음 대주교 사라칸이 일을 맡긴 것이 바로 그녀다. 고작 비전성의 상급제자 하나를 잡는 일이었으니, 이단심문관의 지원을 받고 광휘 성기사단까지 동원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선 누구라도 성공을 자신하며 주어진 기회에 기뻐했을 터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 상급제자가 평균을 아득히 초월한 실력과 장비를 갖췄으리라고.

그래서 요안즈는 죽었다. 그렇게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 어그러졌다.

덕분에 지금 많은 부분에서 일이 틀어지는 중이었다.

여태 교단에서 라온을 요란하게 쫓았던 만큼, 슬슬 다른 세력들이 이목을 집중하며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어디서 새어나갔는지 모를 보물에 대한 소문이 그런 흐름을 부추겼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아니, 한 번이라도 더 목표물을 놓친다면 그때는 정말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특히 비전성에서 눈치챈다면 큰일이다.'

그들은 이 사태에 바로 끼어들 수 있는 명분이 있다. 목표물인 라온이 바로 그곳의 상급제자였으니까.

그러니 보수적으로 판단하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사실 이건 아달란에게 꼭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교단이 다른 세력들의 눈길을 너무 심하게 끌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 탓에 예상보다 더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충분히 그렇게 시간을 끌 만한 가치가 있는 지원이었다.

그러고서도 교단에선 만에 하나 실패할 때를 대비해 대주교 알카람이 직접 나서기로 예정돼 있었다. 현재 다른 세력의 시선을 끌지 않으면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대주교였으니까.

물론 아달란으로선 그 대주교가 나서기 전 무조건 일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차기 대주교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 터였다.

이번엔 반드시 잡겠노라 다짐하면서 아달란은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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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퍼펑!

나직하면서 묵직한 폭음과 함께 허공에 뜬 라온의 몸이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처럼 울룩불룩 형태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막상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몸에 걸쳤던 옷은 진즉 마력의 여파로 불타오르듯 증발했다. 머리카락과 눈썹 등 전신의 털 역시 모조리 불타올라 사라졌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빛이 뿜어져 나와 위험한 느낌을 풍겼고, 비단 눈꺼풀 안쪽에서만이 아니라 전신 혈관에서 빛이 번쩍이며 주위를 밝혔다.

그렇게 밝혀진 주변 바닥엔 비어버린 엘릭서 병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겨우 상급 엘릭서 셋이었다.

우드드득-!

거대한 무언가가 붙잡고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번쩍이는 혈관 안쪽으로 강렬한 청백색 빛줄기가 뿜어지며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뼈의 형태가 드러나고, 그것이 실시간으로 으스러졌다가 다시 재생하며 복원된다.

인간이 버틸 수 있는 변화가 아니었다. 하지만 라온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을 넘어 쾌감까지 느끼는 듯했다.

이전에 용혈수로 목욕했던 일이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변화의 폭이 한결 크게끔, 그것이 작용하는 것이 느껴진다.

신비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뼈의 변화에 이어 심장과 폐 등을 포함한 모든 내장 기관이 불타오르듯 발광하며 요동쳤다. 동시에 뼈를 중심으로 인대와 힘줄과 근육이, 또한 처음부터 발광하고 있던 핏줄과 신경계가 도저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빛을 뿜어냈다.

그 격렬한 변화의 와중, 라온의 본능적 의지에 따라 염동력이 발휘됐다.

셋 남았던 상급 엘릭서 중 하나가 날아올라 저절로 마개가 열리며 내용물이 쏟아진다. 루비와 황금을 함께 녹여낸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내용물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라온의 입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펑-! 퍼펑!

재차 라온의 몸이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처럼 울룩불룩하다 멀쩡해지길 반복했다.

피부가 모조리 마력에 타올라 증발해 버리더니 곧, 뽀얗고 매끄러운 새 피부가 꽃이 만개하듯 곳곳에서 재생했다. 밤하늘처럼 심유한 느낌의 검은 머리카락이 엄청난 속도로 허리까지 자라났고 눈썹 역시 멀쩡하게 자라났다.

미친 듯이 뿜어지던 빛이 어느 순간부터 잠잠해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던 불안정한 모습도 사라졌다.

두근··· 두근··· 두근···

조용해진 어두운 땅굴에서 우주의 별처럼 창백한 빛을 품은 라온을 중심으로 심장소리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다시 한 번, 염동력이 발휘되고 둘 남은 상급 엘릭서 중 하나의 내용물이 허공으로 남김없이 쏟아져 라온의 입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체내 고유 아스트랄계는 이미 격렬한 변화를 겪으면서 엄청나게 확장됐다. 전신 구석구석 퍼져 더는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롭게 복용한 엘릭서의 힘이 부드럽게 스며들어 아직 불안정한 부분을 안정시켰다.

초월적인 집중상태에 빠져듬에따라 끝없이 광활해지는 체내 고유 아스트랄계의 모습은, 예전의 작은 별무리가 떠돌아다니던 모습에서 이제는 은하수가 흐르는 모습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후우······

계속해서 땅굴 내부를 울리는 심장 소리 속, 어느 거대한 존재처럼 긴 호흡을 내쉰 라온이 눈을 떴다.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에서 더없이 밝은 청백색 별이 떠오른다. 그 별을 중심으로 점점이 빛이 반짝이며 흐르는 모습은 우주를 그대로 담아놓은 듯했다.

중력을 무시하듯 허공에 떠 있던 그의 맨발이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비정상적으로 크게 울리던 심장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눈동자도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지막까지 희미하게 반짝이던 청백색 빛무리도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

라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며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땅굴의 출입구가 있는 쪽이었다.

"···아주 기가 막히게 딱 맞춰서 왔군."

도박이 절묘하게 성공한 것에 희열감마저 느껴진다.

아공간 팔찌에서 여분의 옷을 꺼내 입으며 라온은 쓰고 남은 상급 엘릭서 하나도 마저 챙겼다.

콰르르릉-!

바로 그때, 땅굴이 굉음을 내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악마처럼(1)

주교 아달란이 두 손을 땅에 대고 신성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나무의 뿌리처럼 뻗어나간 백색 빛줄기들이 전방에 자리한 작은 야산 하나를 통째로 휘감아 뒤흔든다.

우르르릉···!

일개 인간이 일으켰다고는 믿기 힘든 진동이 사방을 울렸다. 흡사 땅속에 갇힌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그렇게 아달란이 힘을 쓰는 동안, 요안즈와 닮은 여자, 주교 카린즈는 야산을 둘러싸는 형태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휘하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을 부려 마법진을 만들었다.

카린즈의 반대편엔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 주교 코린이 마찬가지로 마법진을 구성하며 포위망을 완성하고 있었다.

후우웅-

그런 그들의 위로 돌풍이 불어왔다. 두 개의 머리와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전신에 칠흑빛 비늘을 두른 비룡이 네 개의 황금빛 눈동자로 아래를 광범위하게 살피면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교단의 유명한 성수 중 하나인 '드로카브'였다.

지능이 몹시 뛰어나고 어지간한 주교와 비견될 만한 힘을 가졌으며, 백 년 가까이 교단의 여러 중요한 일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심판의 비룡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얼마나 유명한지 드로카브를 주인공으로 한 문학 소설마저 있을 정도였다.

크릉-

게다가 다른 성수도 있었다. 전신이 연녹색 털로 뒤덮여 부드럽고 고결한 느낌을 주는, 말과 비슷한 몸에 늑대를 닮은 머리를 가졌고 길게 갈라져 휘날리는 꼬리가 인상적인 '닉세라'였다.

드로카브와 비슷할 정도로 유명하며 특히 성녀만이 탈 수 있는 성수로 알려졌는데, 현재 교단에는 성녀가 없는지라 아무도 탈 수 없었다.

그 닉세라의 옆쪽에는 광휘 성기사단의 단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을 탄 채 대기하고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부단장이 있었다.

"드디어 그놈 낯짝을 보겠네요. 놈이 어떤 식으로 놀랄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단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부단장이 자못 유쾌하게 말했다. 생김새부터 진중함과는 거리가 있었고 본래 성격도 다르지 않았기에, 그를 익히 아는 단장은 뭐라 지적하는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부단장의 이런 가벼운 태도는 단장이 그의 숙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가 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전력인데, 이거 너무 영광스럽게 잡아주는 거 아닙니까?"

"방심하지 마라. 네 말마따나 결국 이런 전력을 동원하게 만든 놈이니까."

"아, 네··· 그렇긴 하죠."

살짝 멋쩍게 답하는 부단장을 일견한 단장은 괜히 주위를 한 번 살폈다.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고서도 성기사와 이단심문관 및 사제들을 합해 거진 300에 달하는 인원이었다.

고작 한 명을 잡기 위해 이 정도 전력이 동원된 적이 교단 역사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이 정도면 확실하게 생포할 수 있다. 새삼 교단에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실감할 때였다.

퍼벙-!

아달란에 의해 모든 수풀이 땅속으로 묻혀 그저 커다란 흙더미로 변해버린 야산 한곳에서, 갑작스러운 폭발과 함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산을 평지로 만들 기세였던 진동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어느새 바닥에서 손을 뗀 아달란은 모습을 드러낸 라온을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라온, 마지막 휴식은 잘 취했나?"

나직하게 말하는 듯했으나 마력을 담은 목소리는 주위 사방으로 퍼져 누구에게나 또렷하게 들렸다. 원시마법의 일종이었다.

"네가 또 도망치기 전에 보여줄 게 있다."

아달란이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팔찌를 내보였다.

"이 팔찌는 지금껏 너를 추적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마도구다. 이게 있는 한 너는 이 대륙 어디로 도망치든 영원히 쫓길 수밖에 없어. 무슨 뜻인지 알겠나?"

크와아아악-!

하늘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날던 성수 드로카브가 포효했다.

라온은 그 포효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가, 이어 주변을 둘러보며 그를 잡기 위해 온 신성교 인원들을 살폈다.

"많이도 몰려왔군. 애완동물까지 데리고선 말이야."

"또한 네가 아무리 빨라도 비룡 드로카브를 따돌릴 순 없을 거다. 그러니 내가 신의 이름으로 하나 약속하마. 지금 얌전히 투항하면, 네가 최대한 고통받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잠시 침묵하던 라온이 별안간 큭큭 웃기 시작했다. 신성교 인원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얼마 전 한 현상금 사냥꾼과 싸운 적 있는데 말이야."

라온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너희들에게 쫓기는 이유, 그렇게 쫓기면서도 안 잡힐 수 있었던 이유, 그게 아주 대단한 보물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말해주더군."

"쓸데없는 이야기는···."

"덕분에 내가 계속 살아남으면서 도망치면 어떻게 될지를 좀 생각해 봤지."

아달란이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그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을 라온이 건드렸다.

"이 대륙이 너희 신성교의 안마당도 아닐진대, 내 가치가 한 번이라도 알려지면 그때도 너희가 지금처럼 나를 쫓을 수 있을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지금 이 전력이 안 보이느냐?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기서 도망칠 수 없어. 만에 하나 설령 도망치더라도 더 대단한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서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북동쪽으로 쭉 올라가서 황금검에 의탁해 볼까 한 번 생각해 봤는데, 어떤가?"

라온의 여유만만한 태도에 아달란의 눈썹 꼬리가 미약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음대로 해보거라. 너는 꿈에서조차 그 야만인들한테 갈 수 없을 테니까."

"근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라온은 말과 함께 검을 소환해 들었다. 그에 모두가 긴장을 끌어올리기도 전 뒷말이 이어졌다.

"이제 도망치는 건 지긋지긋해."

훅-

그 마지막 말이 모두의 귀에 들리기도 전, 이미 라온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사라졌다.

콰과광-!!

직후 아달란의 앞쪽으로 땅이 폭발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

콰드드드득-!!

거센 기세로 치솟고 날아드는 수많은 바윗덩이를 모조리 쳐내고 베어내면서, 청백색 검광이 한 호흡 만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온다.

콰릉-!

아달란의 바로 앞에서 라온을 가로막으며 새까만 대지의 정수가 치솟았다. 직후 그것이 라온의 청백색 마력을 휘감은 검과 부딪히며 한순간에 폭발했다.

강력한 충격파와 단단하고 날카로운 파편 세례가 라온을 덮친다. 동시에 사방에서 수도 없이 많은 마법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공격 마법은 몇 없었고 대부분 행동을 제약하거나 정신에 충격을 가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살상력이 없다고 그것이 약하다는 뜻은 아닌지라, 일단 적중하면 연이어 수십 가지 마법을 연타로 얻어맞고 단숨에 위기에 빠질 터였다.

하지만 그 모든 마법은 그저 라온의 잔상만 스쳤다. 심지어 코앞에서 대적하고 있던 아달란마저 잠시 라온의 움직임을 놓쳤다.

"엇···!"

아달란의 눈이 한발 늦게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라온을 쫓는다.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재차 대지의 정수 벽이 두껍게 치솟았으나, 라온의 목표는 그가 아니었다.

라온의 신형이 스쳐 지나간 주변으로 검광이 폭풍처럼 흩뿌려졌다.

절삭음 대신 폭음과 부서지는 소리가 난무한다. 그 경로에 걸쳐진 이들의 머리와 몸통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피와 살점과 뼛조각으로 이뤄진 아주 잔혹하기 짝이 없는 폭죽이었다.

라온이 일부러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적들을 후려쳐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버린 것이다.

그는 지금 여태 참아왔던 분노와 증오를 모조리 폭발시키고 있었다.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너희가 나를 악마의 종자라 매도했었지.

그렇게 바란다면 정말로 악마가 되어주마.

그르르릉···!

은빛의 검신에 담긴 청백색 마력이 도저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빛을 뿜으며 신화 속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토한다.

어리고 무고했던 자신을 해부하려던 것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모함으로 애써 자리 잡은 곳에서 도망치도록 만든 것도, 누명을 씌우고 널리 퍼뜨려 대륙에서 발붙이고 살기 어렵게 만든 것도, 짐승처럼 몰아붙이며 사냥하려던 것도.

전부 이 신성함을 자칭하는 오만무도한 미치광이들의 짓이다.

쩌어어억-!!

공간이 통째로 갈라지는 듯한 기묘한 소음이 쩌렁쩌렁 울린다. 가공할 속도로 돌풍처럼 은빛 신형이 스쳐 지나간 자리로 하나의 선이 길게 이어진다. 그 선에 걸쳐진 모든 이들이 찢어발겨지며 처참한 고깃덩이로 화했다.

"죽어-!!"

살기 어린 포효를 토해내며 사방을 휘젓는 그를 누구도 가로막지 못했다.

다급하게 그를 쫓으며 대지계 신성마법을 부리는 아달란도, 온갖 보조계 신성마법을 부여받고 앞을 가로막는 성기사도, 힘을 합쳐 마법을 짜내던 사제와 이단심문관도, 미리 바닥에 깔아놨던 온갖 방해물들도.

라온이 아무리 빨라도 모든 마법을 회피하고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어지간한 공격은 갑옷에 공깃돌처럼 튕겨 나갈 뿐이었고, 간간이 적중하는 방해마법은 진화한 육신의 힘을 조금도 억제하지 못했다.

그렇게 살육을 벌이며 내달리던 라온의 앞을 전신이 연녹색 털로 뒤덮인 성수 닉세라가 가로막았다.

쩍 벌린 입속에서 빛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한줄기 섬광이 허공에 그려낸 듯 라온의 머리를 노리고 쏘아졌다.

쩌엉!

하지만 그 가공할 속도의 섬광조차 어느새 휘둘러진 손등에 튕겨 나가 근처의 애꿎은 다른 성기사들을 꿰뚫고 폭발을 일으킬 뿐이었다.

"같잖은 짐승새끼가···!"

거의 동시에 닉세라의 코앞까지 닥쳐든 라온의 검이 천지를 가르듯 빛을 뿜어내며 떨어져 내렸다.

"합-!"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검격을 한 인형이 가로막으며 방패를 내밀었다. 교단의 성물 '수호성벽' 방패를 든 광휘 성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꽈르릉-!!

성물은 과연 성물이었다.

여태 누구도 막지 못했던 라온의 검격이 최초로 튕겨 나가며 불꽃처럼 타오르던 청백색 빛이 잠시 깜빡인다.

하지만 그 공격을 막아낸 단장은 방패를 들었던 팔이 부러진 채 피를 토하며 수십 걸음이나 밀려나고 있었다. 뒤편에 있던 닉세라가 찰나지간 힘을 보탰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태세를 정비할 시간은 없었다.

어느새 빛으로 된 꼬리만을 남기며 재차 돌진한 라온의 검이 단장의 목을 가차 없이 꿰뚫었다.

콰드득-!

검날이 무자비하게 회전하며 주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력자이자 권력자의 머리가 참혹하게 찢겨진 채 허공을 난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쓰러지는 몸뚱어리를 발로 걷어차 박살 내며 라온의 검이 닉세라의 머리를 쪼개갔다.

"숙부-!!"

누군가의 절규를 배경으로 닉세라가 발악하듯 전신에서 연녹색 빛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그 폭발에 맞고 날아갔어야 할 적은 모든 충격을 꿈쩍도 없이 받아내며 그대로 검을 마저 내리찍었다.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터지고, 마력의 폭발음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이백 년 가까이 교단에 속해 유명세를 떨치던 성수의 머리가 흉하게 쪼개진 채 대량의 피와 뇌수를 쏟아내며 형편없이 튕겨 나가 나뒹굴었다.

"감히-!! 감히-!!"

그리고 그런 라온에게 누군가가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

분노로 표정이 일그러진 채 양손으로 검을 꼬나쥐고 달려들던 광휘 성기사단의 부단장은, 순간 자신에게 고정되는 라온의 기이한 눈에 담긴 무시무시한 살기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라온은 그 제발 죽여달라면서 달려든 하찮은 부나방을 기꺼이 마중했다.

검이 아닌 손으로, 머리통을 붙잡으며 발로는 가슴팍을 걷어차자, 주제도 모르고 달려들었던 교단의 인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통에서 머리통이 뜯겨나가며 목 아래로 척수 다발을 늘어뜨린 흉측한 고깃덩이가 됐다.

그리고 라온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마법들을 향해 그 머리통을 쓰레기처럼 던져버리고는 재차 움직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당황하지 마라! 진형을 갖춰!"

마법이 쏟아지고 대지가 갈아엎어지는 폭음 사이로 주교 아달란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런 최선을 다한 지휘는 처음부터 그랬듯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날뛰는 라온을 아무도 가로막지 못하고, 들이닥치면 바로 뚫리고 빠져나가면 누구도 붙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며 늑대무리에게 사냥당하는 양 떼처럼 무력하기 짝이 없다.

전부 라온의 무력이 그들의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한 탓이었다.

악마처럼(2)

신성교의 추격대는 작전과 계획이 있었다.

일단 전방에는 라온이 들이닥칠 상황을 대비한 십여 개의 마법진이 중첩되어 깔려있었다. 발동하면 설령 주교급 강자라도 위험할 수준으로.

하나 그건 라온이 빛살처럼 아달란 옆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무용지물이 됐다.

이곳에서 가장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아달란조차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지 못했으니, 마법진을 발동시켜야 할 사제들이 어찌 때를 맞춰 마법진을 발동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뒤처짐'은 마법을 직접 쏟아내는 사제와 이단심문관들도 마찬가지였고, 무기를 들고 직접 뒤를 쫓는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온의 속도는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는 무언가였다.

일단 눈으로 볼 수 있어야 공격을 할 텐데 그게 안 된다. 근접해서 공격해야 하는 성기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봤다고 생각한 이들은 모두 이미 코앞까지 날아든 검날에 참혹하게 찢기고 쪼개져 죽었다.

누군가가 막거나 발을 묶어준다면 모르겠으나 그게 불가능했다. 성기사단의 단장이 성물 방패를 들고 성수 닉세라의 도움까지 받으면서도 일격을 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었으니까.

야산을 포위하며 자리하던 주교 카린즈와 주교 코린의 무리가 허겁지겁 합류했을 때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새 삼백에 달하던 인원이 눈에 띄게 줄어 지금도 실시간으로 도륙당하는 중이었다.

"다들 물러나라-!!"

결국 아달란이 결단을 내렸다. 평범한 하이랜더는 어떤 수를 써도 라온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물러나? 누구 마음대로?"

하지만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적은 없는 법.

라온은 진형 갖추기를 포기하고 반쯤 공포에 질려 허둥지둥 도망치는 이들을 제대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콰릉-! 콰과광-!

아달란이 최선을 다해 마법을 부려 바윗덩이를 날리고 벽을 세우는 등 라온을 막으려 시도했으나, 모두 부질없었다.

날아드는 공격은 잔상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가로막으려 세운 벽은 가공할 힘에 종잇장처럼 뚫리고 찢기고 박살 나며 쓸모를 잃었다.

바로 그때, 주교 코린의 손에서 스태프 하나가 나타났다.

은회색 금속 몸체에 새까만 글리프가 장식처럼 아름답게 휘감으며 새겨졌고, 머리에 하늘색 구형 수정체가 박혀 빛을 흘리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물건.

그것에서 번쩍이는 빛과 함께 머리통만 한 날카로운 반월형 청록빛 투사체들이 수십 넘게 튀어나와 빠른 속도로 라온을 향해 날아들어 왔다.

가볍게 피하려던 라온이 순간, 우주를 담은 듯한 눈을 움직이며 멈칫했다.

고유시간가속 마법은 단순히 움직임 속도를 증가시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시전자의 고유한 시간을 가속시켜 사고마저 빠르고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

덕분에 그는 날아드는 청록빛 칼날들이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 최단거리로 경로를 튼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포착했다.

어디까지 쫓아올 수 있을까.

시험을 겸해, 라온은 계속 빠르게 움직이며 주변 적들을 사냥했다. 여전히 분노에 찬 상태였기에 검날로 베어낼 필요가 없는 이들은 검면으로 후려쳐 최대한 잔혹하게 부수고 찢었다.

이건 단순히 화를 풀어내는 과정만이 아니었다. 공포를 퍼뜨리려는 의도 역시 있었다.

바로 그때쯤 주교 코린의 공격이 라온을 따라잡았다. 속도는 느렸지만 라온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움직여야 했던 반면, 투사체는 언제나 최단거리로 그를 쫓은 탓이었다.

카가가가가강-!

청백색 마력을 휘감은 검이 한순간에 십여 번 넘게 휘둘러지며 날아들던 모든 공격을 자르고 부순다. 어설프게 쳐냈다간 그것이 다시 방향을 틀어 공격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펑-! 퍼버벙! 펑-!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예외 없이 폭발하며 라온에게 충격을 가했다. 공간중력 마법이 아니었더라면 몸이 이리저리 튕겨 나갔을 법한 가볍지 않은 위력으로.

다시 한 번 주교 코린의 스태프에서 스물이 넘는 투사체가 뿜어져 라온에게 날아들었다. 바로 그 순간, 라온은 목표를 바꿔 코린을 향해 번개처럼 돌진했다.

공간을 단축하듯 엄청난 속도로, 동시에 뻗어지는 검격이 그를 중심으로 사방에 쩍 쩍 그어지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고 찢고 부수고 날려버린다.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라온의 모습을 본 코린이 기겁하며 스태프를 내밀었다. 그가 사력을 다해 마력을 주입하자 그 성가시기 짝이 없는 투사체들이 연속해서 쏟아졌다.

땅굴에 들어가기 전 라온이었다면 감히 정면 돌파를 시도하지 못했을 위협적인 공세.

하나 지금은 아니다.

매섭게 쏟아지는 우박폭풍을 한 마리 청백색 괴물이 빛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지나는 경로를 따라 무수한 폭발이 일어나며 빛이 번쩍이고 부서진 투사체 파편들로 땅거죽이 뒤집어졌다.

"아, 안 돼···!!"

누가 도와줄 새도 없이 라온의 검이 쏘아졌다. 빛과 폭발을 두르고 거침없이 나아간 검날이 코린의 가슴을 꿰뚫고 회전하며 그를 서너 조각의 고깃덩이로 만들어버렸다.

그 잔인한 살육의 흔적 속에서 라온은 스태프를 낚아챘다. 그렇게 손에 들어 살피기 무섭게 깨달았다.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던전에서, 소울 아티팩트들이 가득하던 그 방에서, 누군가가 두 번째로 방문해 가져갔던 바로 그 물건.

"하하···!"

라온은 순식간에 짐작해 냈다. 그 던전에 들어온 신성교 인원 중 이걸 얻을 만했던 이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바로, 성자.

자신을 잡으려고 성자의 물건까지 빌려온 게 분명했다. 교단의 성수까지 두 마리나 동원한 마당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예전에 얻지 못해서 크게 아쉬웠던, 원거리 공격수단이 없는 그에게 큰 쓸모를 가진 물건이 이런 식으로 손에 들어오니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다. 더욱이 신성교의 손에서 뺏었다는 게 엄청나게 통쾌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부족해··· 부족하고 말고···."

라온은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스태프를 아차원에 수납했다. 당장은 주교 코린의 귀속화 마법이 남아있어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꼭 지금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죽어라! 이 악마 같은 놈아!"

계속 움직여 살육을 벌이려는데 누군가의 찢어지는 고함이 들렸다. 주교 카린즈,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라온은 바로 방향을 틀어 돌진했다.

어쩐지 요안즈를 닮은 여자였다. 공교롭게도 부리는 마법조차 백색 화염이다.

하나, 카린즈가 쏟아내는 백색 화염에선 요안즈와 달리 어지간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세찬 돌풍이 섞여 있었다.

"이 가증스러운 악마 놈! 어디 계속 날뛰어봐라!"

뭐가 그리 화났는지 카린즈는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너 죽고 나 죽자는 기세로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전력으로 뿜어내는 화염 돌풍은, 현상금 사냥꾼 테르바우어의 화염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라온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까드득-

이제 더는 인간의 신체라고 부를 수 없는 몸에서 거인 같은 힘이 뿜어진다.

화염 돌풍의 거세게 밀어내는 공격을 공간중력 마법으로 단 한 걸음도 밀리지 않고 모조리 받아내면서, 어떤 꼼수도 없이 그저 힘 하나로 정직하게 뚫고 나아간다.

힘겹게가 아니라 아주 가뿐하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물리력이라곤 전혀 없는 환상을 통과하는 것처럼.

분노하다가 경악한 카린즈의 멱살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라온이 틀어잡았다. 그리고 반대편 손에 들린 검이 한순간에 그녀의 두 발을 자르고 몸통에 꽂혔다.

"끄하악···!"

"이 늙은이야, 네 죄는 일단 혀를 잘못 놀린 거고, 또 요안즈를 닮은 거다."

라온은 말과 함께 그녀의 목에 걸려 강렬한 빛을 발하는 투명한 수정 펜듈럼을 거칠게 뜯어냈다. 딱 봐도 카린즈의 화염에 위력적인 돌풍을 더할 수 있게 해준 최상급 아티팩트였다.

그걸 아차원에 수납하면서 라온은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 움직였다. 여전히 카린즈의 멱살을 잡고 검으로는 배를 찔러 관통시킨 채로.

라온의 움직이는 속도는 쏘아진 화살보다도 빨라 가히 내리치는 벼락에 비견될만했다. 그런 속도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관성만으로도 버티기 힘들다. 아니, 단순히 힘든 정도를 넘어 치명적이다. 설령 하이랜더라고 해도.

카린즈는 순식간에 뱃가죽이 너덜너덜해지고 온몸의 관절이란 관절이 전부 부서질 듯 덜그럭거리는 상태가 됐다.

"악···! 억···!"

비명은커녕 호흡조차 힘들 속도, 라온은 그녀가 금방 죽어버리길 원치 않아 검을 역소환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심지어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까지 약간씩 조정했다. 절대 쉽게 죽지 않도록.

물론 언제까지고 들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라온은 카린즈를 증오에 찬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윽고 손을 뻗었다.

콰지직-!

볼품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던 카린즈의 한쪽 다리를 잡아 그대로 잡아 뜯는다. 그녀가 비명 대신 바들바들 경련하는 것이 느껴지고 라온은 그만큼 분노와 증오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부족했다.

콰득-!

이번엔 반대편 다리를 잡아 뜯어 내던졌다. 원래 귀부인처럼 품위 있던 카린즈는 지금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눈을 까뒤집고 거품까지 물며 경련하는 추한 몰골이었다.

"버러지 같은 늙다리 년이, 감히 나를 악마라고 불러? 너희가 나를?"

콰드득-!

울분에 찬 욕설과 함께 카린즈의 왼쪽 팔을 뜯어 내던지며, 라온은 발밑에서 폭발하는 아달란의 마법을 피했다. 그리고 주변 사방을 덮쳐오는 마법을 그저 속도만으로 깔끔하게 회피했다.

"나를 언제든지 갖고 놀 수 있는 쥐새끼라고 생각했겠지. 지금껏 너희가 해부해 죽여왔던 다른 순진무구한 애새끼들처럼. 감히 주제도 모르고···!"

콰직-!

마지막 남은 오른팔이 흉물스럽게 찢겨 내던져진다. 이제 머리와 몸통만 남은 카린즈는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내가 잔인한 게 아니야. 이 모든 건 전부 너희 잘못이야. 그러니 행여나 남 탓하지 말고 달게 죽어라. 너희처럼 악독한 것들이 이 정도면 호사스럽게 죽는 거니까!"

크와아아악-!

직후, 라온의 머리 위에서 여태 제대로 참전할 기회를 잡지 못했던 성수 비룡 드로카브가 덮쳐왔다.

라온은 머리와 몸통만 남은 카린즈를 그 드로카브를 향해 집어 던졌다. 어찌나 강력한 힘으로 던졌는지, 던져진 순간 카린즈의 목이 부러지고 피부가 반쯤 찢겨질 정도였다. 머리통이 떨어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입을 벌리고 용족 특유의 숨결 공격을 준비하던 드로카브는 미처 그걸 피하지 못했다.

비룡은 두 개의 아가리 중 하나에 정통으로 틀어박힌 교단 주교의 시체를 반사적으로 씹어 너덜너덜하게 만들고서야 황급히 뱉어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당황한 사이 다시 공격의 기회를 놓친 채 그저 하늘로 날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드로카브는 이런 전장에서 활약하기엔 애매한 성수였다. 그는 그저 라온이 도망치는 상황에서 추격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라온은 어느 순간, 자신을 향하던 공격이 다수 사라진 것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살아남은 이들 중 태반이 비명과 함께 도망치고 있었다.

악마처럼(3)

그래, 어디 한 번 도망쳐봐라.

사냥감을 쫓듯 추격하던 이들이 이제는 반대로 사냥당하는 처지가 됐다. 그리고 그들을 쫓는 사냥꾼은 어마어마한 속도를 가진 괴물이었다.

단순히 속도만 가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 괴물은 모두를 죽이려는 분노와 증오 또한 품었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지성까지 갖췄으니까.

지금 라온을 조금이라도 방해할 수 있는 이들은 주교 아달란과 비룡 드로카브뿐이었다. 하나 어디까지나 조금 방해할 수 있을 뿐, 발목을 잡는 일은 불가능했다.

"아아악-!"

"억···!"

찢어지는 비명, 숨이 막힌 비명, 채 비명조차 되지 못한 짧은 신음 등.

땅이 갈라지고 마력이 휘몰아치고 온갖 마법이 날아와 폭발하는 와중에도 그런 소리들은 꽤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이미 용기를 잃고 도망치는 자들의 두려움을 계속해서 증폭시켰다.

공포는 전염된다.

굳은 심지로 버티던 이들마저 동요하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다. 라온의 신형이 언뜻 가까워졌다고 느끼면 뭔가를 당하기도 전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만둬라-!! 이 악마 같은 놈아-!!"

아달란의 모든 시도는 번번이 목표의 뒤꽁무니만 쫓을 뿐이었다. 경로를 예상해 마법을 사용하면 라온이 귀신같이 방향을 틀어 헛손질을 하게 만들었다.

"피하지 말고 나와 싸워라-!!"

"네 차례는 나중이다."

라온은 아달란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그의 주변을 한차례 휩쓸고는, 다시금 놀라 흩어지는 신성교 인원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분노로 머리꼭지가 돌아버린 아달란이 무차별적으로 주변 대지를 폭발시키고 갈아엎었을 땐, 여태 그랬던 것처럼 라온은 모조리 베고 쳐내고 피하며 빠져나간 후였다. 애꿎은 아군만 일부 휩쓸려 죽었을 뿐이었다.

크와아아악-!

그 살육을 견디지 못한 것은 비단 아달란만이 아니었다. 다시금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는지 비룡 드로카브가 숨결을 머금으며 급강하했다.

한순간 번쩍임과 함께 빛의 기둥이 쏘아진다. 돌풍을 동반한 그 섬광은 목표한 곳에 닿기도 전 주변의 마력을 맹렬하게 빨아들이며 대상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꽈르릉-!!

낙뢰가 떨어진 듯한 섬광과 굉음이 폭발한다.

그 중심부에서 뭉게뭉게 치솟는 회백색 마력의 화염 위를 드로카브가 스쳐 지나가려는 때.

쏘아진 화살처럼 화염을 뚫고 뛰어오른 라온의 손이 저지할 새 없이 드로카브의 한쪽 날갯죽지를 붙잡았다.

직후 비룡의 고통에 찬 괴성이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종잇장처럼 찢겨나간 날개 한쪽과 함께 비룡의 몸이 형편없이 추락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드로카브는 제 두 머리 중 하나를 등 쪽으로 돌려 어느새 몸에 올라탄 라온을 물어뜯으려 했으나, 그 머리를 마중한 건 청백색 마력을 휘감고 유성처럼 날아드는 주먹이었다.

콰드드득-!

커다란 소 한 마리도 몇 입 만에 먹어 치울 크기의 머리가 튕겨 나가다 못해 아예 반쯤 뜯겨진다. 엄청난 양의 피보라가 뿜어지는 와중 추락이 끝나고, 대지에 처박히는 충격이 비룡과 라온을 덮쳤다.

"똑똑하다더니, 그래봤자 짐승에 불과하지."

조롱과 함께 발작을 일으키는 남은 머리를 짓밟는다. 묵직한 굉음과 함께 비룡의 머리가 산산이 박살 남은 물론 그 아래 대지까지 쩌저적 균열이 가며 흔들렸다.

그 무지막지한 짓밟기를 추진력으로 다시금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안 돼-!!"

드로카브의 죽음마저 막지 못한 아달란이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이건 불가능해-!! 이럴 수는 없어-!!"

이미 상황은 그가 예상했던 최악을 한참이나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대주교는커녕 주교 자리조차 보존하기 힘들다.

아니, 주교 자리를 생각하기 전 목숨부터가 위험했다. 설령 여기서 살아남더라도 교단에서 그를 죽이려 들지 몰랐다.

이처럼 커다란 실패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이번 일의 책임자는 바로 아달란 자신이었다.

그는 불가항력적으로 라온을 저지하는 것도 잊고 혼이 빠져나갔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의 발목조차 붙잡을 수 없으니 인간이라면 좌절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라온은 쉬지 않고 번개처럼 움직이며 남은 신성교 인원들을 도살하고 있었다. 가장 멀리까지 도망쳤던 이도 순식간에 따라잡혀 검면에 머리가 부서지는 잔인한 장면이 펼쳐진다.

결국 아달란은 그를 쫓아 움직이던 것마저 잊고 우뚝 멈춰 서버렸다.

간간이 들리던 비명이 점점 잦아든다. 이제는 마력의 폭풍도, 날아드는 마법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도망치는 자들의 공포와 그 공포를 마무리 짓는 비명만이 들렸다.

"정녕 악마를 건드렸단 말인가···?"

그는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수백에 달하던 이들이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고 전부 죽었다. 엉망으로 갈라지고 부서지고 뒤엎어진 대지에 피와 시체만이 보인다. 마계에 가본 적은 없으나 그곳의 풍경도 이곳보다 참혹하진 않을 터였다.

이제 살아남은 이는 딱 하나였다.

바로 아달란, 자신뿐이었다.

정말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상대에게 완벽히 농락당해 버린 무능한 자신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리 강해졌을 수가 있지···?"

전번의 조우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그때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이런 차원이 다른 힘을 보여줄 수 있는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라온이 아달란의 눈앞에 나타났다.

"말해라. 대체 어찌 이리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지?"

아달란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라온은 짧게 웃었다.

"알면 뭐가 달라지나?"

쾅!

어느새 빛살처럼 내질러진 주먹이 아달란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 직전 껍질처럼 생성된 새까만 대지의 정수도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형편없이 바닥을 나뒹굴던 아달란이 비틀대며 일어나기도 전.

"상황 파악이 잘 안되는 모양이니, 내가 좀 도와주마."

주먹이 연속해서 작렬하고 폭음이 이어졌다. 아달란은 죽을힘을 다해 대지의 정수를 둘러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한편 반격을 꾀했다.

물론 전혀 효과가 없었다.

애초에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주변을 학살할 때부터 그랬다. 이미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본 후인데 지금이라고 다를 게 없다.

거리가 가깝고 자신이 직접적인 공격목표가 되었다는 차이점은, 두들겨 맞는 충격과 코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듯한 엄청난 속도에 오히려 악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달란은 어쩔 수 없이 공포에 빠져들었다. 항거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윽고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

어느 순간.

불쌍할 정도로 얻어맞던 아달란의 신형이 갑작스레 땅속으로 잠겨 들었다. 물속에 잠겨 드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하나 라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빨라진 사고속도로 아달란의 표정에 두려움이 떠오를 때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했다.

콰각-!

아달란이 막 스며든 대지에 한쪽 발을 박아넣는다. 그 발을 중심으로 푸른빛이 순식간에 드넓게 퍼져나갔다.

처음 아달란과의 전투에서 생각했듯, 땅속의 대지계 마법사를 끌어낼 방법은 없지 않다. 단지 마력 소모가 좀 크고 접근한 상태여야 할 뿐이다.

쐐기 마법은 접촉한 마력 구성체를 끊임없이 파고들어 갉아먹는 효용이 있다. 방어막 류의 마법을 파훼하는 데 가장 유용하지만 다른 마법에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한다.

정화 마법 역시 비슷하다. 쐐기 마법보다 그 공격성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마력 배열을 흐트러트려 마법의 힘을 해소하는 데 효과가 있다.

라온은 그 두 가지 마법을 엮어 녹여낸 마력을 대지에 광범위하게 투사했다.

그의 성장은 단순히 육체적인 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던지라, 아달란은 채 깊이 가라앉기도 전 사방에서 조여오는 무시무시한 마력의 파동에 휩싸여 갇혀버렸다. 단 한 방향, 위쪽을 제외한 상태로.

그 상태로 라온이 손에 든 검을 들어 올리자 땅속에 있던 아달란은 순간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유일하게 막히지 않은 위쪽을 향해 가장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펑!

수면을 뚫고 튀어 오르듯 지상으로 나온 아달란은 전신에 대지의 정수를 두르며 공격을 대비했다. 그와 동시에 라온의 주먹이 날아들어 그의 얼굴을 부숴버릴 기세로 작렬했다.

쾅-!

"컥···!"

그 충격에 나가떨어져 바닥을 나뒹굴다가 튀어 오르는 때, 다시 반대편에서 들이닥친 라온의 주먹이 재차 얼굴을 후려친다. 거대한 바위끼리 부딪치는 듯한 굉음이 터지고 채 쓰러지기도 전 또다시 들이닥친 라온의 주먹이 안면 중심부에 틀어박힌다.

쾅! 쾅! 콰광-!

아달란을 중심으로 청백색 빛줄기가 흔적만 남기며 가공할 속도로 휘몰아쳤다. 그 중심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몇 번이나 얻어맞은 아달란은 전력을 다한 방어에도 빠르게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주먹을 날리는 상대의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 아직 방어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았음에도 두려움에 질려가는 아달란의 의지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린 의지가 기어코 마법에까지 영향을 미쳐 방어가 저절로 무너질 때쯤, 마침내 라온의 주먹질이 멈췄다.

"헉··· 허억······."

쓰러진 후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애써 일어서려는 그의 바로 앞에, 은빛 그리브와 사바톤에 감싸인 라온의 다리가 보였다. 아달란은 더는 감히 일어날 생각을 못 하고 덜덜 떨기만 했다.

"그렇게 무서우면 중간에 도망쳤어야지. 그럼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라온은 아달란이 그러지 못 하리라 예상했다.

결과가 나오기도 전 책임자인 그가 홀로 도망치면, 굳이 그가 죽이지 않아도 신성교에서 직접 처벌할 터였으니까.

"하나 물어보마. 대체 왜 나를 이렇게까지 하면서 쫓기 시작한 거냐? 뭘 알아낸 거지?"

라온은 여태 풀지 못한 의문을 던졌다. 잠시 엎드린 채 굳어있던 아달란은 곧, 마지막 남은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짓씹듯 답했다.

"지금 충분히 우쭐거려 둬라. 곧 대주교께서 직접 나서시면, 너 정도를 죽이는 건 한순간이니까."

"하."

라온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그가 처음 정확한 이유를 궁금해했던 건 그걸 알면 어떻게든 상황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게 됐다. 이유를 알아도, 설령 그걸로 상황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다고 해도, 더는 라온 자신부터가 그러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그 대주교 나부랭이들을 퍽 믿는 모양이야."

"너는 감히 그분들의 힘을 짐작도··· 큭!"

라온이 아달란의 머리를 밟아 땅에 짓눌렀다.

"여기 있지도 않은 사람으로 같잖은 자존심 세우지 마라."

라온은 검을 역소환했다. 그리고 아차원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너희 교단에서 벌어지는 인체실험을 알고 있겠지? 그럼 한 번 보자고. 네가 직접 그걸 당할 때도 시킬 때처럼 태연할 수 있는지."

라온은 살기 충만한 눈으로 자신의 발에 밟힌 아달란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죽여야 후회가 안 남을지 고민하면서.

뜻밖의 만남(1)

라온은 고문과 살인을 즐기는 변태가 아니었지만, 증오하는 적을 편히 죽여줄 정도의 호인도 아니었다.

어디까지가 정당한 복수인지는 누구도 선뜻 정할 수 없는 문제다. 다만 '이미 당했거나 당했을 뻔한 만큼' 갚아주는 정도면 많은 이들이 납득할 수 있을 터다. 여기에 만약 억울하게 먼저 당한 상황이라면 이자를 좀 더 쳐주는 정도까지도.

물론 여기서 다시 그 이자를 어느 정도 계산해야 할지가 문제지만, 배보다 배꼽이 큰 정도만 아니면 무난할 것이다.

탱그랑-

피에 절은 단검을 내던진 라온은 지친 기색이 완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 그의 발치에는 최후까지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 분명한 시체가 하나 있었다.

당연히 아달란이었다.

살을 저미고 손발톱을 뽑았다. 손과 발과 팔과 다리를 순서대로 몇 차례에 걸쳐 자르고 불로 지지면서 상처를 지혈했다. 부릅뜬 눈을 뽑아내고 귀와 코를 잘랐다.

그 정도 고문하자 아달란은 이미 죽은 상태와 다를 것 없이 변했다. 중간중간 거센 발악이 있었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라, 그는 결국 몇 가지 질문에 답하고야 말았다.

일단 신성교가 라온의 마력이 신의 것임을 눈치챘음은 확실해졌다. 정확히 어떤 신의 것인지는 몰라도 그건 별로 중요치 않은 듯했다.

또한 이번 추격의 시작이 대주교 사라칸의 명령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를 잡기 위해 보증서를 작성했다던 바로 그 대주교였다.

하나 거기까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달란은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고통을 제외한 그 어떤 외부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죽어가면서도 주기도문을 웅얼거리는 모습에선 광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따지자면 고문에 익숙하지 못한 라온의 실수였다. 강약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치유 마법으로 더 살리면서 계속 고문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다.

슬슬 고문이 괴롭게 느껴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복수도 좋지만 그 복수가 자신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어서야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꼴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라온은 아달란의 심장을 찔러 단번에 죽였다. 그러고서야 지금 일어선 참이었다.

"후우······."

사람을 죽인 적은 많지만 이렇듯 잔인하게 고문하다가 죽인 적은 처음이다.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은 꽤 많이 풀어졌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찝찝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쨌든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제 뭘 해야 하지?

멍하니 하늘을 보던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전투를 치렀으면 당연히 전리품을 챙겨야 한다. 그냥 쓱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챙길 것들이 아주 많았다.

가장 먼저 교단에서 성물로 지정한 아티팩트가 있었다. 기사단장이 그를 가로막았을 때 앞세웠던 방패는 성물이 분명하다. 아달란의 백금쥐 소환 마도구도 희귀도만 따지자면 아티팩트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성수의 시체들이 있었다. 죽으면 평범해지는 사람의 시체와 달리 여러 곳에 쓸모가 많을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는 교단 인원들이 가진 장비와 개인물품이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거나 수납량에 제한이 있었다면 적당히 버렸겠지만, 지금 라온에겐 둘 다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는 반복 노동을 하는 것처럼 전리품을 수거했다.

모든 일을 끝마쳤을 땐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

라온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으로 노을을 보며 침묵에 잠겼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다시 고민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신성교의 수작으로 그는 대륙적인 범죄자가 됐다. 웬만한 세력에선 그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소울 아티팩트를 탐내면서 죽이려 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설령 받아주겠다는 세력이 있어도 그 의도가 순수할 리 없다. 일단 자신들의 안마당에 들이면 어떻게든 소울 아티팩트를 뺏으려 들 것이고, 더 나아가 그의 마력이 특수하다는 사실까지 파악하면 신성교처럼 해부하려 들지도 모른다.

보물은 그것을 지킬 힘이 없는 자에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

그가 비록 굉장히 강해졌다고는 하나 한 세력을 홀로 상대할 정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또한 각 세력에 그보다 강한 하이랜더가 없지도 않을 터였다.

'나는 여전히 약자인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어쩔 수 없는 무기력감이 차오른다. 방금 막 신성교의 강력한 추격대를 전멸시켰음에도 이미 반쯤 짓밟힌 기분이었다.

물론 언젠가 반드시 이 원한을 모두 갚아줄 생각이었지만, 그게 과연 언제가 될는지는 그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다.

"후우······."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쉰 라온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셈이지만 이래야 추후 운신이 자유로웠고, 방금 막 상당한 규모의 추격대를 끊어냈으니 당분간은 오히려 안전하리란 생각에서였다.

푸르륵-

하탈딤을 소환해 타자 녀석은 작게 투레질한 후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어둑한 밤하늘이 펼쳐졌다. 휘영청 떠오른 달과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있자니 알 수 없게도 조금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그러던 라온의 시선이 어느 순간 앞쪽으로 향했다.

전방의 야트막한 언덕 위,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하탈딤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은 상태로 꾸준히 나아갔다.

마침내 둘 사이의 거리가 십여 걸음 정도로 매우 가까워졌을 때, 라온은 하탈딤을 멈춰 세웠다.

"안녕."

상대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평범한 다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하나 빛을 머금은 듯 하얗고 투명한 피부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젊은 여자였다.

외모만큼 차림새도 비범했다.

착용자를 위해 섬세하게 조율된 고급스러운 가죽갑옷, 허리춤에 매달린 금빛 화려한 손잡이의 세검, 긴 머리를 넘겨 드러난 한쪽 귀에 보이는 수정 장신구, 손가락이 드러나는 형태의 고동색 반장갑, 발등을 포함한 몇 부분이 흑빛 강철로 보강된 부츠.

눈에 보이는 모든 장비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의 파동이 감지된다. 그것들 전부가 명백히 마도구 수준을 넘어선 아티팩트였다.

라온은 그녀의 정체를 조금 늦게 짐작해 냈다.

"다일린 유슬디온······."

라온보다 훨씬 더 빨리 대륙적인 범죄자로 현상수배되어 지금까지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그것만으로도 가진 능력이 악명보다 못하지 않음을 증명한 여자.

현상수배지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곳에 그려진 초상화는 그녀의 미모와 분위기를 조금도 담아내지 못했다.

"그 유슬디온이라는 성은 떼고 불러주면 고맙겠어. 이미 내 스스로 결별한 지 오래니까."

확실히 그렇긴 했다. 유슬디온 자작가는 바로 그녀의 손에 완벽하게 몰락했으니까.

"나를 찾아온 건가?"

"정확히는 기다리고 있었지."

"내가 이곳을 지날지 어떻게 알고?"

그녀는 외모와 조금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미소를 지었다.

"예지 마법으로."

"······."

믿기 힘든 말이었다. 이 대륙에서 진실로 예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이는 오직 한 명뿐이었으니까.

대륙 북쪽의 미개척지역, 제국의 영원한 골칫거리인 야만오크들과의 경계 부근에서 교역을 독점하고 패자로 군림하는 중립 세력 '황금검'의 수장 헥사트로우.

하지만 그런 헥사트로우조차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중에서도 위험에 대한 것만 예지할 수 있다고 했다.

눈앞의 이 여자처럼 남이 언제 어디를 지날지 따위를 예지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못 믿는 모양이네.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너를 기다린 이유 아닐까?"

"···그 이유가 뭐지?"

"일단 하나 말해둘게. 넌 나한테 빚을 졌어."

무슨 빚?

의문을 내뱉기도 전 바로 말이 이어진다.

"그 산간마을에서, 내가 때맞춰 발견돼 줬잖아. 네가 수월히 도망칠 수 있도록."

라온은 속으로 조금 동요했다.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이었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다. 그저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당시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이 걸린다.

"내 생각에 그건 가볍지 않은 빚이야."

"······."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당시 그녀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그곳에 있던 비전성 인원들은 감찰사 윌리언 카슬의 명령에 그의 도주를 막아섰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상황은 매우 어렵게 흘러갔을 터였다.

이후로 쉬지 않고 이어졌던 위험천만한 추격전까지 고려하면 정말로 위험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 치면?"

라온은 반박하는 대신 그렇게 물었다. 다일린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네. 사실 그때 널 도와주면서도 이후에 붙잡힐 거라 생각했었거든. 그래서 일단 나부터 추격을 뿌리친 후에 어떻게든 다시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일이 잘 풀렸으니 다행인 거겠지? 덕분에 내 첫인상을 좋게 만들 기회는 사라진 듯하지만."

"······."

라온은 순간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그 위험천만했던 추격전들에서, 설령 재수 없이 붙잡혔더라도 눈앞의 이 여자가 구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든다.

"어쨌든 부탁이 하나 있어. 남쪽 제도로 같이 가줘. 거기서 내가 뭘 얻는 걸 도와줬으면 해."

"남쪽 제도?"

정신을 차리고 잠시 생각하던 라온이 되물었다.

"칼라르파 제국?"

"맞아. 입국하기 힘들다지만 내가 방법을 알아."

다일린은 잠시 침묵하며 라온의 표정을 살폈다.

"어차피 너도 여기선 딱히 발붙일 곳 없는 신세잖아. 일단 넘어가서 안전하게 힘을 기르는 게 좋지 않을까? 거긴 신성교가 손 뻗기 힘든 곳이니 아예 눌러앉아도 상관없을 거고."

"왜 하필 내게 부탁하는 거지?"

"네가 유일하게 나를 도와줄 수 있으니까. 현실적으로."

무슨 뜻인가, 침묵하며 가만히 쳐다보자니 그녀가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내가 얻어야 한다는 물건이 내 목숨과 연관된 건데, 예지로 살펴본 결과 네가 도와줘서 그걸 얻는 미래가 가장 현실적이었다는 말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예지 마법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느낌에 라온의 미심쩍음이 오히려 더 커졌다. 다일린도 그런 기색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흠······. 믿기 어려운 말인 거 나도 알아. 갑자기 나타나선 대뜸 빚 운운하며 도와달라 했으니, 불쾌했다면 사과할게."

"······."

"근데, 일단은 나를 믿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너한테 큰 빚 하나를 더 지울 예정이거든."

그렇게 말하며 다일린은 라온이 향하려던 방향을 가리켰다.

"네가 이대로 반나절 정도 이동했으면 대주교 알카람을 만났을 거야.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붙잡히거나 죽었겠지."

"하··· 대주교 알카람? 죽었을 거라고? 내가?"

"알카람은 대주교에 오른 지 200년도 더 지난 노괴물이야. 대륙의 그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그런 괴물이 혼자도 아니고 직속 호위대를 끌고 다녀. 네가 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라온은 순간 짜증이 나면서도 호승심이 치솟았다. 자신은 방금 수백 명이나 되는 추격대를 몰살시키고 오는 길이 아니던가? 그런데 질 거라고?

그래서 그는 여태 하지 않던 반박을 시도했다.

"예지 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다. 자신과 관련된, 그중에서도 위험과 관련된 것만 볼 수 있다던데, 너는 흡사 세상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음? 당연히 그런 건 아니야."

다일린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예지 마법은··· 나를 중심으로 무수히 뻗어나가는 시공간을 살피는 마법이야. 위험과 관련된 것만 볼 수 있다는 건 부분적으로 맞는 말인데, 내가 특정한 이유로 죽게 되면 그 시공간 갈래는 잘려 존재하지 않게 되고 당연히 볼 수 없게 되는 원리거든."

"···뭐라고?"

"만약 가까운 내 미래에 아주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내게서 뻗어나가는 무수한 시공간 갈래 중 대부분이 잘려 사라지겠지? 그럼 내가 볼 수 있는 시공간 갈래는 일부밖에 남지 않고, 그게 바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되는 거야. 즉, 지금의 경우는 네 안위가 내 안위와 큰 연관이 있어서 볼 수 있었다는 말이지. 아주 희귀하게도, 동시에 내 처지가 그만큼 위태롭게도."

"···아."

순간 라온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지난날 던전에서 심연에 오염될뻔했을 때,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수천수만 갈래로 찢어지며 무한한 경우의 수가 중첩되어 가던 그 경험.

"······."

라온이 뭔가 이해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자 다일린이 되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시공간 감각이 있어?"

뜻밖의 만남(2)

라온이 느끼기에 다소 껄끄러운 동행이 시작됐다.

둘은 합의를 봤다. 원래 라온이 향하려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서, 정말로 대주교 알카람과 조우해 싸우게 되면, 거기서 도움을 받았을 때 그 역시 다일린을 도와주기로.

"잘하면 죽일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제대로 협력할 수 있다면."

다일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나도 신성교에 원한이 좀 있어서, 이왕이면 죽이고 싶네."

"원한이라면?"

"내가 칼라르파까지 가야 할 이유를 반쯤 그들이 제공했거든."

라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생각에 잠겼다.

다일린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절대 약할 리는 없다. 그리고 그는 현재 스스로의 힘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대주교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전혀 이견이 없었다.

푸르륵-

그때 다일린이 탄 유령마가 투레질했다. 그런 녀석을 라온의 정령마 하탈딤이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다일린이 탄 유령마는 그녀가 가진 장비만큼이나 범상치 않았다.

일단 전신이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칠흑빛으로 이뤄졌다. 착용한 마구 역시 검은색인데도 대비로 인해 회색처럼 보일 정도였고, 눈은 피처럼 붉은빛을 흘리며 언뜻 위압감마저 풍겼다.

하탈딤이 정령마가 되기 전 유령마였을 때보다 몇 수준은 더 뛰어나다. 지금의 하탈딤과 비교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듯했다.

"헤브네르(Hevner)야."

"···뭐가?"

"내 말 이름. 고대어로 복수자라는 뜻이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컸던 말이기도 하고."

그녀는 말하면서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유령마는 그 손길을 느낀 듯 다시 작게 투레질하며 눈을 깜빡였다.

"어쩌다 유령마가 된 거지?"

"내가 유슬디온가를 무너뜨린 것과 관련 있지. 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지금은 더 캐묻지 말라는 뜻이다. 라온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네 말대로라면 곧 알카람이 나타날 텐데, 그자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없어. 강하다는 것 말고는.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서."

"왜 여기서 마주치게 되는지는 모른다고 했지."

"그래."

이런 면에선 확실히 라온이 원래 알던 것과 부합했다. 예지 마법은 오직 시전자 자신과 관련된 것만 볼 수 있다는.

위험한 인물을 만난다는 것까진 알 수 있어도, 상대가 왜 거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것.

"혹시 직접 싸워본 대주교가 있나?"

"사라칸. 맡은 업무 분야 때문인지 외부 활동이 가장 활발한 대주교야. 그자 역시 강하기로는 손에 꼽아. 대주교가 된 지 100년이 넘었기도 하고."

"어땠지?"

"못 이겼어. 후퇴할 수 있는 상황이라 다행이었지."

이후 그녀는 당시의 싸움 상황을 천천히 묘사하기 시작했다. 장황하지 않으면서 핵심은 전부 포함된 유려한 말솜씨였다.

라온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대주교급 힘을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음···."

다일린이 말을 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라온도 반사적으로 같이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에 구름 한 점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봤던 장면이야."

"···곧 조우한다는 말이군."

"대비해."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거의 동시에, 길 반대편 야트막한 오르막 너머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마리 백마가 이끄는 크고 튼튼한 고동빛 쌍두마차를 중심으로 차림새가 제각각인 인원 6명이 백마를 탄 채 호위하듯 자리했다. 그들 역시 라온과 다일린을 발견하곤 시선을 고정해왔다.

하이랜더의 거리감각은 일반인과 확연히 다르다.

화살은커녕 마법조차 닿지 않을 거리였지만, 뛰어난 시력으로 서로를 식별한 그들은 이미 지척에서 마주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다가왔다. 반대로 라온와 다일린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상대를 가늠했다.

거리가 반 정도 줄어들었을 때, 마차의 문이 덜컥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허공을 밟으며 원래 마차가 이동하던 속도 그대로 성큼성큼 미끄러지듯 계속해서 다가왔다.

건장한 체격에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와 가슴께까지 기른 풍성한 수염을 가진 노인이었다. 금실이 수놓아진 백색 화려한 의복은 누가 봐도 자신이 대주교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가라앉은 은회색 눈동자가 세상 모든 것을 경시하는 느낌을 풍긴다.

외모를 확인하는 사이, 노인이 타고 왔던 마차가 두 마리 말과 함께 순식간에 줄어들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노인은 다짜고짜 라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둠을 찢는 섬광과 함께 백색 빛줄기가 뿜어진다.

아니, 뿜어졌다 싶은 순간 이미 도달했다.

그것이 한순간에 방어 태세를 취한 라온의 검과 충돌하여 귀청을 찢는 폭음을 터뜨렸다.

꽈르릉-!!

라온이 상체를 휘청이다 못해 그를 태운 하탈딤마저 비틀거리며 뒤로 수 걸음이나 밀려났다.

놀랍도록 빠르고 강했다. 미처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정도로.

그가 자세를 회복하기도 전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게다가 대주교 알카람의 직속 호위대 6명까지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며 빠른 속도로 돌진해 왔다.

그에 다일린이 움직였다.

어느새 유령마를 역소환하고 세검을 뽑아 든 그녀의 신형이 수십여 개의 잔상을 남기며 비현실적으로 공간을 가로지른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달려들던 6인의 호위대 코앞까지 들이닥쳐 세검을 내질렀다.

한 번의 찌르기에 허공에 여섯 개의 점이 찍혔다.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여섯 호위대 중 다섯이 몸통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고 하나만 간신히 방어하며 밀려났다.

"응?"

하지만 치명적인 공격을 성공시킨 다일린은 의문을 흘리며 몸을 피했다. 그녀의 신형이 다시 흐릿해지며 잔상이 늘어지듯 기묘하게 이동하고, 그렇게 이동한 빈자리를 여섯 호위대의 공격이 제각각 할퀴고 갈랐다.

"골렘?"

몸통에 구멍이 뚫린 이들은 그 구멍에서 피 대신 신성력의 빛을 흘리고 있었다. 외양과 움직임 모두 진짜 사람 같았으니 더 기괴한 모습이었다.

"죽어라!"

골렘 중 하나가 진짜 사람인 듯 고함치며 다일린에게 자신이 든 대검을 휘둘렀다. 그 대검을 중심으로 다른 골렘들이 제각각 무기와 마법을 날려 퇴로를 차단한다.

꽈릉-!!

그사이 라온은 다섯 번째로 날아드는 알카람의 백색 빛줄기를 상대로 어렵게 전진하는 중이었다. 하탈딤은 진즉에 역소환한 상태로 필요한 모든 마법을 시전한 채였다.

그럼에도 알카람의 공격은 간신히 대처할 수 있을 수준으로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흘려낼 때마다 몇 걸음씩 밀려날 정도였다.

"라온, 확실히 재간이 있구나."

조우 후 처음으로 알카람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공격에도 별 피해 없이 거리를 좁혀오는 모습이 의외였던 듯, 한쪽 눈썹이 올라간 불쾌한 표정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건 바로 라온이었다.

추적대를 몰살시키며 거의 전능감까지 느꼈던 그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주교의 힘에 간담이 서늘해진 상태였다.

다시 공격을 가하려던 알카람이 순간, 색다른 폭음과 섬광에 고개를 돌렸다. 다일린이 있는 쪽이었다.

세검에서 폭발하듯 쏘아진 연보라색 마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사지가 제멋대로 꺾이고 찢겨나간 골렘들이 있었다. 그렇게 되고서도 움직이려는 모습이 조금 질릴 정도였으나 전혀 위협이 되진 않는 상태였다.

호위대가 약한 건지 다일린이 강한 건지 알 수 없는 모습.

직후 다일린은 다시 잔상을 남기며 허공을 관통하듯 알카람에게 돌진했다.

자연히 라온에게 향했어야 할 공격이 즉시 다일린에게로 향했다. 발사와 적중의 순간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극쾌의 강격, 다일린 역시 피하기는 애매한지 세검을 중심으로 작은 육각판 형태의 마력방벽을 만들어 공격을 막았다.

쩡-!

그렇게 막았고 생각하기 무섭게,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지고 알카람의 공격이 그대로 반전되어 주인을 향해 날아갔다.

"음···!"

콰릉-!!

알카람이 반사된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는 사이, 방해 없이 순식간에 접근한 라온의 검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비슷하게 도착한 다일린의 세검 역시 다른 방향에서 독사처럼 찔러 들어갔다.

찰나지간, 고유시간가속으로 세상을 보다 빠르게 인지하는 라온의 눈에 알카람의 은회색 눈동자가 자신과 다일린을 한 차례씩 훑는 것이 보인다.

직후 그의 등에서 기묘한 파육음과 함께 빛으로 이뤄진 여섯 쌍의 팔이 나타나 방어와 공격에 나섰다.

각각의 팔은 인간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길쭉하고, 억세고, 날카로운 느낌으로.

서너 개의 손이 각각 라온과 다일린의 검을 붙잡아 제지하고 나머지 손이 주먹과 손날을 뻗어 급소를 노린다. 뻗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노도처럼 밀려드는 백색 신성력의 파동이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콰가가각-!

일순간, 라온과 다일린의 검이 변화를 일으키며 손의 구속을 떨쳐내고 날아드는 팔을 공격했다.

번쩍이는 섬광과 칼날의 서늘함, 마력의 충돌음과 폭음이 연속으로 터지며 그들을 둘러싸고 반구형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순간 다일린의 움직임이 녹아들듯 기묘하게 번지면서 수십의 잔상이 일었다. 초감각까지 교란되는 사이 한 번의 찌르기가 환상처럼 분열하며 알카람의 전신 급소를 노리고 쏘아진다.

그에 호응하여 라온은 진화한 육신의 모든 힘을 끌어올려 공간중력으로 증폭시켰다. 보호로 강도를 올리고 절단으로 예기를 더한 내려베기가 고유시간가속에 힘입어 산을 쪼갤 기세로 떨어진다.

그에 맞서 알카람의 모든 팔이 순간 질서정연하게 몸을 감싸며 움츠러들었다가, 한순간 꽃이 만개하듯 순차적으로 번개처럼 뻗어졌다.

그 모든 손에서 현묘하게까지 느껴지는 움직임이 펼쳐졌다.

다일린의 모든 찌르기가 각각의 손에 부드럽게 밀쳐지고 튕겨 나가면서 그중 일부는 라온의 내려베기와 충돌해 경로를 비튼다. 귀청을 찢는 충돌음이 연속해서 터져 나오고 공격 후 빈틈이 생긴 둘을 노리며 알카람의 진짜 두 손에서 예의 백색 빛줄기가 쏘아졌다.

흡사 검술의 고수가 칼집에서 회심의 일격을 뽑아내듯, 날카롭기 그지없는 반격.

라온은 그 백색 빛줄기를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어깨에 적중당했다. 다일린은 순간 허공에 녹아들듯 기묘한 잔상을 퍼뜨리며 비현실적인 움직임으로 아슬아슬하게 회피했다.

"큭···!"

충격과 통증에 휘청이며 물러선 라온은 일단 치유 마법부터 끌어올렸다. 다행히 갑옷 경사면으로 최대한 흘려냈기에 큰 피해는 아니었다.

하나 균형을 회복하기도 전 연속해서 날아드는 빛줄기에 정신없이 막아내며 십여 걸음 넘게 밀려나야 했다.

콰광-! 쾅! 꽈릉-!

폭음의 잔향이 스러질 때쯤엔 라온의 검이 비명처럼 공명음을 토하고 있었고, 다일린은 표정이 창백해진 채 라온보다 두 배는 더 먼 거리를 밀려난 상태였다.

"누군가 했더니 다일린 유슬디온이었군. 어째서 너희가 함께 있는지 모르겠다만······."

낮게 말하는 알카람의 신형이 백색 신성력으로 물들어 타오른다. 주변의 마력이 호응하듯 끓어오르며 대지가 진동하고 돌풍이 일었다.

"그냥 지금 둘 다 없애주마."

우르릉···!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동시에 바로 지척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한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환하게 불타오르는 알카람의 신형과 반대로 세상이 한층 더 어두워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어 뭔가를 대처하기도 전 상상도 못한 기현상이 벌어졌다.

쿠르르릉···!!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위쪽으로 들었다. 그리고 별빛 총총한 하늘이 누군가가 잡아당기듯 급속도로 크고 뚜렷해지면서 통째로 '내려앉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마법이지?

의문과 동시에 전신이 뭉개지는 듯한 압박감이 밀려든다.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이 압착되며 그 사이에 끼어버린 느낌이었다.

호흡조차 버거워져 간신히 헐떡이는 그때, 하늘을 무너뜨리는 위압감을 두르고 오연하게 선 알카람의 바로 뒤에서 갑작스레 검날이 튀어나왔다.

분명 라온보다 배는 더 멀리 밀려났던 다일린의 세검이었다.

알카람의 반응은 기민했다. 하나 애초에 '불가능한' 공격이 들어온 상황에선 수백 년 묵은 노괴물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급속도로 몸이 회전함과 동시에 빛으로 된 팔들이 모조리 찔러 들어오는 세검을 붙잡으려 달려든다. 하나 그 세검에 이어 모습을 드러낸 다일린의 표정엔 희미한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이만 죽어."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 직후.

질기고 거대한 무언가가 꿰뚫리는 소음이 사방을 섬뜩하게 울렸다.

세검에서 폭발한 자색빛 마력이 오싹할 정도의 기세를 풍기며 한 줄기 선으로 화한다.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애초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던 듯한 느낌의 선.

그 선에 걸쳐져 명치 부근에 구멍이 뚫린 알카람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내려앉던 밤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바탕 꿈에서 깨어난 느낌이었다.

콰득-!

다만 그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 와중에도 알카람의 손에서 빛이 번쩍이며 다일린을 후려쳤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도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나가떨어지는 그녀의 신형이 채 땅에 닿기도 전.

압박에서 벗어난 라온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알카람에게 접근해 검을 내리찍고 있었다.

타오르는 청백색 마력에 휘감긴 칼날이 눈 한 번 깜짝일 사이에 알카람의 목을 노리고 빛살처럼 떨어져 내린다. 그를 목격한 알카람의 은회색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한없이 늘어지는 세상 속, 그럼에도 여전히 빠른 속도로 내리쳐지는 검을 향해 알카람이 입을 벌렸다. 포효하듯 일그러지는 노인의 표정을 본 순간 라온은 전신의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위험을 감지했다.

그럼에도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갑옷을 믿고 모든 힘을 끌어올리면서 그대로 검을 내리쳐갔다.

푸화아아악-!!

거의 동시에 알카람의 입에서 용의 숨결을 연상시키는 신성력의 폭풍이 뿜어졌다.

밀항(1)

- 으으우우우오오오오오···!!!

라온이 형편없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거인이 울부짖는 듯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사방이 빛으로 차오르고 거센 진동이 폭발하듯 퍼져나가며 땅거죽이 해일처럼 뒤집어졌다.

그 가공할 신성력의 폭풍 속에서, 뿜어지는 핏줄기 위로 한 덩이 백색 빛무리가 떠올랐다.

- 내가··· 이 내가···?

알카람의 형상을 한 그 빛무리는, 돌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기색으로 위쪽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내려 라온과 다일린을 향해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연다.

하나, 그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새하얀 구멍이 나타나 그를 빨아들이는 것이 한 발 빨랐다.

구멍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졌다.

"···죽었네?"

어느새 몸을 가누고 일어선 다일린의 시선이 모든 신성력의 여파가 흩어져 가는 중심부를 살폈다.

그곳엔 분명 어딘가로 사라졌던 알카람의 시체가 있었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상태로.

다일린이 손을 들어 입가를 훔쳤다. 손등에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피가 이제 막 몸을 일으키는 라온의 눈에도 보였다.

"크으······."

당연히 라온도 멀쩡하지 못했다. 갑옷이 아니었더라면 전신이 피떡으로 화했을 공격을 정면에서 맞았으니,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나 다행히 공격은 그저 위력적이었을 뿐 딱히 저주 따위가 깃든 것은 아니었다. 하여 실시간으로 치유의 힘에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방금··· 마지막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 그거."

다일린은 뭔가를 아는 기색이었다.

"나도 지나가듯 들은 이야기인데, 대주교들이 힘을 얻는 방법은 그들 자신이 수련해서가 아니라고 알고 있어. 신과 계약해서 축복처럼 내려받는다고 하더라."

"···그게 방금 전 현상과 연관이 있나?"

"모든 계약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자기들끼리는 그 대가조차 죽음 후 신이 다스리는 낙원에서 무궁무진한 행복을 누리는 거라던데······."

라온이 순간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혼을 가져간다는 건가? 악마의 계약처럼?"

"그게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집단들이 신성교를 공격하는 명분이지. 저들의 신이 사실 악마일 거라고. 근데, 내가 알기로 그런 건 아니야. 방식이 비슷하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다일린은 다시금 입가의 피를 닦아낸 후 라온을 향해 예의 건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쨌든 진짜 대주교를 죽이는 데 성공할 줄은 몰랐어. 너 생각보다 강하구나?"

"너 역시."

만약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가늠하는 눈빛으로 살폈다. 그에 다일린의 건조하던 미소가 살짝 진해졌다.

"왜, 지금 공격하면 죽일 수 있을지 궁금해?"

"···아니. 그런 생각까진 안 했다."

"다행이네. 이제 네가 날 도와줘야 할 차례인데, 조금 섭섭할 뻔했잖아."

어쩌면 무례했던 태도를 거둔 라온은 마저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다일린 역시 아공간 마도구에서 뭔가를 꺼내 들이키는 등 정비에 나섰다.

조금이지만 밀린 느낌이다.

알카람과의 전투를 되짚어 보던 라온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카람을 죽일 수 있었던 건 상당 부분 다일린 덕이라는 사실을.

허공에 번지듯 잔상이 남으며 공간을 관통하던 움직임, 연보라색 마력을 두르고 한순간에 점을 찍듯 과정을 파악할 수 없던 찌르기, 분명 멀리 밀려났었음에도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듯 뒤에서 나타나 검으로 쏘아냈던 빛줄기.

도무지 능력의 종류와 원리를 짐작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예지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라온은 복잡해지는 머릿속 생각에 너무 빠져들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면서 반쯤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일린에 의해 전투력을 상실한 알카람의 호위대 골렘 여섯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 고장 났음에도 열심히 꿈틀거리던 움직임은 모두 멎은 상태였다.

"저거, 내가 가져가도 되나? 골렘 제작에 좀 관심이 있어서."

다일린은 라온이 가리킨 골렘들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즉시 골렘들에게 향한 라온은 완전히 작동을 멈춘 그것들을 자세히 살폈다.

가까이서 하이랜더의 눈썰미로 살펴도 겉모습은 사람과 전혀 구분할 수 없다. 다일린의 공격으로 망가진 부분을 봐야만 그것이 골렘임을 알 수 있을 정도여서 조금 섬뜩했다.

잠시 생각하던 라온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다일린에게 물었다.

"네가 워낙 순식간에 처리해서 잘 모르겠는데, 이것들 수준이 어느 정도였지?"

"유명 기사단 소속 하이랜더 정도, 황실 기사단 소속 하이랜더보단 좀 못하고."

"···비전성으로 치면 상급제자 정도인가?"

"상급제자? 아니, 그것보단 훨씬 강하지. 감찰사보단 살짝 떨어질 수 있어도 관리사는 확실히 이길 수 있을 정도?"

그 정도나 된다고?

라온은 순간 자신과 악연으로 얽힌 알드 베르시와 윌리언 카슬을 떠올렸다.

그놈들과 얼추 비슷하게 강한 골렘 여섯을 순식간에 처리해 버린 다일린의 강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자신도 이제 그들 여섯 정도는 빠르게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여섯 골렘을 아차원에 수납하자 옆에 선 다일린이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아공간에 넣은 게 아닌데?"

그에 이번엔 라온이 놀랐다.

그는 항상 위장용으로 아공간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고, 아차원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또한 아차원은 원래 누구도 감지할 수 없어야 정상이다. 그가 아는 바에 의하면.

한데 다일린이 감지했다. 대체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시공간 감각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금방 놀라움을 수습한 라온이 대주교 알카람의 시신을 향해 움직였다.

대주교 알카람의 아공간 마도구는 목걸이 형태였다. 살펴본 내부에는 당연하게도 아주 많은 물건이 있었다.

알카람이 처음 등장했을 때 타고 있던 마차에서부터, 예전 던전에서 얻은 것과 비교할 수 있을 수준의 귀한 마법재료들, 한 번도 손에 넣어본 적 없는 대량의 화폐, 마법을 포함한 각종 신비학 지식을 담고 있을 리베르들, 여러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일 각종 스크롤과 마도구들······.

과연 대주교답다.

라온은 그런 감상과 함께 목걸이를 옆에 다가온 다일린에게 건넸다.

"너도 한 번 살펴봐라."

다일린히 순순이 그것을 건네받아 내부를 살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라온에게 건넸다.

"네가 갖고 있어."

"내가?"

"부상을 감수하고 목을 벤 게 너잖아. 그게 아니었더라면 분명 놓쳤을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분배하더라도 일단 네가 갖고 있어."

"···알겠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라온은 목걸이를 받아 아차원에 수납했다.

다시금 아차원의 개폐를 느꼈는지, 잠시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다일린은 자신의 아공간 마도구에서 지도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렇게 경유해서 그라스 자작령까지 갈 거야."

손으로 그리는 경로는 대륙적인 범죄자 둘이 함께 움직이기엔 상당히 대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예지 마법의 존재를 고려하면 더없이 효율적인 경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최대한 빨리 이 대륙을 뜨는 게 좋을 듯해서. 혹시 떠나기 전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잠시 생각하던 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신성교에 대한 복수는 지금 여기 남는다고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차라리 대륙을 벗어나서 안전하게 힘을 기른 후 돌아오는 게 나을 것이다.

"바로 가지."

"잘됐네."

다일린은 유령마를 소환해 올라탔다. 라온도 정령마 하탈딤을 소환해 올라탄 후 함께 움직였다.

@

탁- 타닥-

불길에 나뭇가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라온은 그 작은 모닥불의 춤을 멍하니 구경하며 상념에 잠겼다.

대주교 알카람을 죽인 그 전투 후로 열흘이 지났다. 목표한 그라스 자작령까진 절반이 조금 안 되게 남은 상태였다.

아마도 신성교는 지금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신이 번쩍 든 상태일 것이다. 절대 가볍지 않은 전력을 동원했음에도 상대를 잡기는커녕 전멸해 버렸고, 심지어 대주교 하나가 죽기까지 했으니까.

신성교는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를 잡거나 죽여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면서도 다른 세력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 터였다.

추격대 삼백여 명이 죽은 일은 결코 쉽게 감출 수 없다. 다른 많은 세력들이 라온이 평범한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라온은 그중에서도 특히 비전성이 어떻게 나올지가 조금 궁금했다. 한때 라온이 자신들의 소속원이었음을 명분으로 끼어들려 하지 않을까? 윌리언 카슬은 지금도 무사할까? 알드 베르시는?

아쉽게도 머릿속으로 짐작만 해볼 뿐 소식을 알 수는 없었다. 여태 작은 마을조차 들리지 않고 인적없는 곳으로만 다녔기 때문이다.

지금껏 추격이 없었던 건 그러한 이동 경로와 함께 다일린이 가르쳐준 '흔적 제거' 마법 덕분이었다.

대륙 제일의 도망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직접 개발한 마법으로, 백금쥐 따위에게 쫓기는 일을 막아줄 수 있는 굉장히 유용하면서 창의적인 원리의 마법이었다.

다만 그 유용성만큼 까다로워서 라온조차 익히는 데 애를 먹었다.

특히 아스트랄 계면에 퍼뜨리는 중화 파장을 구현하는 것이 힘들었다. 사용할 때마다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약간의 조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추적자들이 이 마법의 존재를 안다면 분명 파훼법을 찾아내겠지만, 여태 다일린이 잘 사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뜻일 터다.

어쨌든 덕분에 쫓길 염려는 많이 사라졌다. 설령 있더라도 예지 마법을 쓸 수 있는 다일린이라면 큰 위기는 없을 터였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라도 생긴 것일까.

밤하늘을 지붕 삼아 주변이 바윗덩이로 둘러싸인 아늑한 지형에서 야영하고 있자니 괜히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모닥불 건너편으로 두터운 고급 침낭에 파묻혀 잠든 다일린의 얼굴이 보인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부정할 수 없이 아름다운 외모였다. 라온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 분명한데도 오히려 더 어려 보인다. 눈을 감고 잠든 상태여서인지 더더욱.

깨어있을 땐 전혀 어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예쁘긴 하군.'

칭찬이지만 잠든 동행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건 별로 떳떳지 못한 느낌이라, 그를 자각한 라온은 시선을 다시 모닥불로 돌렸다. 하지만 생각은 이미 다일린에게로 향한 뒤였다.

다일린은 내심 각오했던 것보다 편한 동행자였다. 서로 불신 가득했을 초기부터 항상 먼저 손을 뻗는 식으로 관계의 진전을 이룬 것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덕분에 지금은 상대를 믿고 잠들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 정도면 단순한 동행자가 아닌 동료라 칭해도 무리 없을 수준.

물론 이제 겨우 보름이라, 상대를 속이려고 작정했다면 얼마든지 계산된 모습만 보여줄 수 있는 짧은 기간이긴 하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내리자 반쯤 멍한 기색으로 눈을 뜬 다일린이 보인다. 웬일인지 아직 깰 때가 아닌데 깬 모습이다.

"···아."

자신을 보는 라온을 마주 본 다일린이 몇 번 눈을 깜빡이곤 스르륵 눈을 감았다. 다시 자려는 건가 싶을 때, 그녀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꿈을 꿨어···."

꿈에 대한 미신은 각종 신비가 횡행하는 이 대륙에서 거의 신성교 신앙에 비할 정도로 강력하다. 라온조차도 그런 미신에선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지라,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어떤?"

"네가 혼자 칼라르파로 떠나는 꿈···."

개꿈이다. 애초에 칼라르파 제국으로 가는 이유가 다일린에게 있는데 왜 자신이 혼자 가겠는가.

라온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일린이 다시 혼잣말처럼 해몽을 중얼댔다.

"누군가 곁을 떠나는 꿈은 그 상대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심리라던데··· 알 수가 없네···."

그러더니 곧 조용해졌다.

숨소리마저 원래대로 느려지고 규칙적으로 변한 것이, 다시금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꼬아서 생각하면 상당히 심각한 발언이다. 하지만 라온은 한 번 헛웃고는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잠결이라지만 그녀 정도 되는 하이랜더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막 내뱉었을 리는 없다. 그러니 오히려 저 발언은 일종의 증명이었다. 이제 이런 정도로는 기본적인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관계라는.

나쁘지 않다.

라온은 그런 감상을 느끼면서 앞으로에 대해 생각했다.

할 일이 정말 많았다.

이제 막 선택지를 골라 쭉쭉 뻗어나갈 일만 남은 수련법 진도, 진화된 육신 덕에 좀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시공간 감각에 대한 탐구, 비슷한 이유로 개선할 점이 보이는 마력과 마법의 운용, 이제는 확신이 생긴 소울 아티팩트 개조, 신성교 추적대를 몰살시키고 얻은 전리품 정리 등······.

'나는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다.'

그렇게 되뇌면서 그는 우울해지려는 심정을 다독였다.

밀항(2)

"이걸로··· 바다를 건넌다고?"

라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작은 조각배를 보고 머뭇거렸다. 바다는커녕 규모 있는 강에서조차 바람 좀 세게 불면 바로 침수될 것 같은 크기의 배였다.

"생긴 건 이래도 성능은 확실해. 이미 밀수업자들이 몇 번이고 왕복하면서 안전을 확인해 준 물건이야."

바다와 접한 그라스 자작령엔 당연하게도 항구가 있다. 그리고 이 항구의 부두 중 절반은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칼라르파 제국과의 정식 교역이 이뤄지는 특별부두였다.

예로부터 이 항구를 두고 엄청난 수준의 권력다툼이 끊임없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라스 자작가의 '해양탐사'에 대한 특수성이 아니었다면 진즉 황실에 빼앗겼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하나 이와 관련된, 자세하게 파고들면 끝이 없을 이야기는 라온과 다일린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제국의 힘으로도 완전히 억누를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었다.

바로, 탐욕.

수없이 많은 실패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어가면서도, 결국 개척해 내고야 만 밀무역 항로.

다일린은 이미 예전에 정보를 모아두었다는 듯 그라스 자작령에 들어서자마자 거침없이 움직였다.

뒷골목 어딘가를 방문하고, 누군가를 만나 돈을 건네고, 다시 다른 이를 방문해 협박을 곁들인 거래를 하고, 안내인을 끌고 다니듯 붙잡아 이동해 영지 외곽으로 빠져나온 후.

반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을 지나 작은 해안가에 도착했다. 정말로 비밀스럽게 운용되는 듯 지키는 이가 채 열을 넘지 않는 아주 작고 조악한 도선장이었다.

대체 이 작은 조각배로 뭘 밀수하는 걸까.

잠깐 생각하던 라온은 곧 쓸데없는 호기심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대신 조각배에 식별 마법을 사용하여 이 배가 대체 어떻게 바다를 안전히 건널 수 있는지 확인했다.

"음···."

"어때? 창의적이지 않아?"

조각배의 판자 하나하나마다 각종 마법이 부여되어 조잡한 듯하면서도 굉장히 효율적이고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또한 바로 그래서 하나하나 분해하지 않고는 완벽히 파악할 수도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대가의 솜씨였다.

"밀수용 배라는 게 아까울 지경이군. 들어간 재료도 만만찮을 텐데."

"모르는 소리."

그때, 여태 거리를 두고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짙은 구릿빛 피부에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이 작은 도선장을 운영하는 음지 조직 달그림자 클랜의 일원이자 이 배의 하나뿐인 항해사였다.

"이게 어지간한 상단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준다면 믿으시겠소?"

"그 정도나 되나? 뭘 다루길래?"

"당연히 비밀···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는 잠시 다일린의 눈치를 살피더니 곧 입을 열었다.

"뭐, 어차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품목이긴 하지. 환희의 꽃이라고 들어봤소?"

"마법재료인가?"

"그렇소. 남해제도에서 나오는 마약의 일종인데, 그걸로 끝내주는 포션을 만들 수 있다오. 잠자리에서 느끼는 쾌감을 몇 배 이상 높여주고 더 오래 즐길 수 있도록 해주지."

잠시 생각하던 라온은 곧 이해가 된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돈과 시간이 썩어 넘치는 귀족들이 환장하고 달려들 만한 물건이다. 물론 부작용이 있겠지만, 원래 마약류는 그럼에도 수요가 끊이지 않는 물품이다.

"슬슬 출발하지."

항해사가 먼저 배에 오르고 그 뒤를 따라 라온과 다일린도 배에 올랐다.

"예지로도 안전한 거겠지?"

라온이 항해사에게 들리지 않도록 은밀히 물었다. 다일린은 당연하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한 거 맞아.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

예지 마법의 원리는 시전자를 중심으로 무수히 중첩되어 뻗어나가는 시공간을 살피는 것이다. 라온은 그러한 시공간 전개를 살피는 일이 원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대부분의 시공간 갈래가 사라지지 않는 한은.

"지금 상황과는 별개로, 혹시 네가 예지 마법에 너무 의존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흠, 전혀."

다일린은 다소 불쾌할 수도 있을 그 질문에 담담히 답했다.

"이건 그러니까,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타고난 감각을 당연히 사용하는 일과 같아. 요컨대 네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면서 너무 시각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처럼."

그것참 편리하고 유용하겠군.

라온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물었다.

"혹시 나도 배울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가능할 거야. 넌 이미 시공간 감각을 깨우쳤잖아. 그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요소인데."

그녀는 힐끗 라온을 쳐다보곤 작게 웃었다.

"나중에 알려줄까? 도착하고 여유 있을 때."

"···진심인가?"

"알려줄게."

"고, 고맙다."

예상치 못한 큰 호의에 라온이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혹시 내게 궁금하거나 부탁할 거라도?"

"있긴 한데 당장 급하진 않아.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다일린은 외부자인 항해사를 힐끗 보며 말했다. 합당한 이유였기에 라온도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바깥을 쳐다봤다.

쏴아아···

작은 조각배가 파도와 부딪힐 때마다 마법이 발동하며 균형이 맞춰진다. 뱃전을 넘어 안쪽으로 들이치려는 물은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혀 그대로 튕겨 나간다. 제법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생각해 보면 라온은 생전 처음 배를 타는 것이었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며 잠시간 마음 놓고 자연의 경이에 젖었다.

@

겉보기와 달리 꽤나 안정적이고 빠른 속도의 항해는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항해사는 확실히 항해사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아무리 이 조각배가 범상치 않은 물건이어도 다루는 사람의 실력이 부족했다면 진즉에 침몰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느껴질 만한 위기가 두어 번 있었다.

그는 거의 잠도 자지 않고 배를 몰았고, 막판에는 꽤 실력 있는 하이랜더임에도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듯했다.

다행히 그때쯤 전방에서 육지가 보였다. 한눈에 크기를 파악할 수 없는 아주 큰 섬이었다.

"후우······."

항해사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거의 다 왔소. 이 짓은 어째 할 때마다 더 힘들어지는 느낌이군."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배를 몰아 섬으로 다가갔다. 당연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항구가 아닌 섬 으슥한 곳을 향해서였다.

라온은 평온하게 앉아있었지만 슬그머니 긴장을 끌어올리며 만약을 대비했다.

다일린의 예지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위험이 닥쳐오면 시공간 갈래의 대부분은 변화가 없고, 따라서 위험이 없을 때와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즉, 예지 마법만 믿고 안심하는 일은 그냥 눈을 감고 다니는 짓과 다를 게 없었다.

빠른 속도로 섬에 접근한 배는 절벽을 따라 돌무더기가 날카롭게 솟은 암초 지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이동한 끝에 정말로 눈에 띄지 않는 비밀스러운 도선장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때를 맞춰 나온 듯한 사람 다섯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모두 하이랜더였고 음지 조직원 특유의 거칠고 껄렁한 분위기를 풍겼다.

배가 도선장에 완전히 멈추고 배에서 내리자, 항해사와 다섯 하이랜더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노골적인 시선이 몇 번 라온과 다일린에게 와닿았지만 그밖에 다른 수작 같은 건 없었다.

"따라오시오."

한 남자가 그렇게 말한 후, 라온과 다일린은 다섯 하이랜더의 안내를 받아 복잡한 동굴을 지나고 작은 숲을 지났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걸어 제법 뚜렷하게 난 오솔길까지 도착했다.

"이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로로톤이라는 도시가 나올 거요. 혹 대륙으로 돌아갈 일이 있거든 거기서 다시 우리를 찾으시고. 방법은 아실 거라 믿소."

"그래. 잘 지내라고."

다일린이 여상하게 답한 후 먼저 앞장서서 길을 내려갔다. 라온도 힐끗 남자를 쳐다본 후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둘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몇 분 후.

자리에 남아있던 다섯 하이랜더가 긴장이 탁 풀린 기색으로 목을 주무르고 어깨를 터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저 둘이 대륙에서 그렇게 유명한 범죄자라고? 각자 거기 황실과 종교집단에 쫓긴다는? 대체 어쩌다 같이 다니게 된 거야?"

"알 게 뭐냐. 도망 다니다가 눈이라도 맞았나 보지. 보고는?"

"진즉 했다. 두목이 알아서 잘 사리겠지. 건드리면 안 될 놈들이니까."

한 하이랜더가 언제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마도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 둘이 제도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좀 기대되는데, 안 그러냐?"

"안 그런다. 그냥 조용한 게 최고야."

"잡소리 말고 이만 가자."

그들은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로로톤 도시는 과연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컸다. 또한 길가의 건물과 사람들의 의복 등 많은 부분에서 대륙과 다른 양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다일린을 따라 걷던 라온이 물었다.

"일단··· 배를 채우자. 며칠간 보존식만 먹느라 지쳤잖아. 제대로 된 해산물 요리로 기분전환부터 하자고."

"흠."

괜찮은 제안이었기에 라온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들 수준의 하이랜더는 사실 한 달 정도 식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괜찮다는 것이 결코 편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다음엔?"

"남동쪽의 델카랑 도시로 갈 거야. 예전에 알던 사람이 있는데 나름 유명한 상단의 주인이 됐다더라고. 한동안 거기서 신세 지게 될 듯해. 몇 가지 부탁을 들어줘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유명 상단의 주인이라.

잠시 생각하던 라온이 물었다.

"거기서 방해받지 않고 수련할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애매하면 도시 밖에 직접 거주지를 만드는 방법도 있고."

확실히 평범한 사람이 아닌 라온은 그런 식으로도 충분히 '방해받지 않을' 장소를 만들 수 있었다. 조금 번거롭겠지만.

대화를 나누는 도중 다일린은 한 식당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숙박업을 겸하지 않는, 정말로 순수하게 음식과 술을 파는 곳이었다. 보통 이렇게 겸업하지 않는 곳이 실력이 뛰어났다.

들어서기도 전부터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온다. 식당 안의 손님은 대부분 생활 수준이 풍족한 이들로 보였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잠시 후.

마침내 나오기 시작한 풍성한 해산물 요리를 라온과 다일린은 정신없이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해산물 요리의 유일한 단점인 먹기 불편한 갑각과 가시 등은 염동력을 사용하는 하이랜더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다소 게걸스럽기까지 한 식사를 거의 마무리했을 때.

식당 출입구에서 제법 괜찮은 장비를 갖춘 남자 셋이 들어섰다. 그는 식당 내부를 휘휘 둘러보더니 다일린의 얼굴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이 멈췄다.

이후 저들끼리 한 번씩 마주 보더니 실실 웃으면서 다가온다. 순간 다일린의 미모에 꼬인 날파리들임을 깨달은 라온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

그들이 말을 꺼내는 순간, 희미하게 보랏빛이 돌기 시작한 다일린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더니 석상처럼 굳었다.

직접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라온조차 은밀하게 피어오르는 살기 가득한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끔찍한 괴물이 곁에 도사린 것처럼 전신의 털이 곤두선다. 어렴풋이 피비린내를 포함한 섬뜩한 환청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그··· 시, 실례했습니다."

그러한 기세를 정면에서 받은 세 남자는 언제 실실 웃으며 다가왔냐는 듯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몸 돌려 멀어져갔다. 누가 봐도 겁에 질려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멀어지자 다일린의 태도는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그래."

다일린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여자다. 그중엔 그녀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새삼 위험한 여자라는 것을 자각하며, 라온은 다일린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그 비슷한 느낌이 났지?'

그는 앞서 움직이는 다일린의 뒷모습을 보며 던전에서 경험했던 심연 마력을 떠올리고 있었다.

델카랑 도시로(1)

다각- 다그닥- 다각- 다각-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사뭇 경쾌하다. 크고 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고 분위기 또한 그러했다.

마차의 내부는 널찍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바닥엔 부드러운 양탄자가 깔렸고, 고정식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길고 푹신한 소파가 양쪽 벽에 붙어 자리했으며, 뒤쪽으로는 업무 따위를 볼 수 있는 넓은 원목 탁자가 설치돼 있고, 앞쪽에는 두 사람은 족히 누울 수 있는 침대까지 놓여있다.

바로 알카람이 타고 나타났던 그 쌍두마차의 내부였다. 공간확장 및 흔들림 감소 등의 온갖 마법이 걸려있어 여행길을 더없이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마차를 끄는 두 마리 말까지 놀랍도록 정교한 골렘이었기에 마부가 따로 필요 없었다.

일단 마차 앞쪽으로 시원하게 뚫린 유리창이 내부에서도 방향을 알 수 있게끔 만들어줬고, 말 골렘은 생각보다 지능이 뛰어나서 명령을 내리기가 아주 수월했다.

당연히 원래 마차와 말에 깃들어 있던 알카람의 귀속화 마법은 라온의 것으로 완전히 대체된 상태였다. 내부 역시 정화 마법으로 한차례 청소하여 찝찝함을 덜어낸 후였고.

촤르륵-

"여기까진 잡스러운 업무 서류야."

다일린이 소파 사이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던 물건 중 서류 일부를 치우며 말했다. 가볍게 살핀 라온은 별말 없이 그것들을 바닥에 놓아둔 분류용 상자로 쓸어 넣었다.

"이것도 업무 서류긴 한데 읽어볼 가치가 있어. 보니까 로암달 제국 정계와 관련된 정보가 좀 있네."

"음."

라온은 이번에도 별말 없이 그 서류들을 받아 한 번씩 읽어 내려갔다.

과연 다일린의 말처럼 알아두면 나쁘지 않을 정보들이 몇 있었다. 물론 지금 당장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부 읽은 후 그것들도 아래쪽 분류용 상자에 쓸어 넣은 라온은, 손에 쥔 리베르를 살피는 작업을 계속했다.

현재 둘은 대주교 알카람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유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해 나누려는 목적에서였다.

"신성마법에 대한 리베르다."

라온은 리베르를 다일린에게 한 번 보라고 넘긴 후 다른 리베르를 살폈다.

이번의 것은 골렘 제작술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소름 끼치도록 사람을 닮은 골렘 제작술, 은근히 그에 대한 욕심이 있던 라온은 내용을 읽다가 그만 인상을 찌푸렸다.

"왜?"

"골렘이 사람을 닮은 이유가, 사람을 재료로 썼기 때문이었군."

"그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마차를 끌고 있는 두 마리 말 골렘을 쳐다봤다.

저것들도 한때는 진짜 말이었음이 분명했다.

"사람의 영혼 일부를 위령으로 영락시켜 사용··· 이건 그냥 사령술이라고 해도 믿겠어."

물론 진짜 사령술만큼 악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표방하는 '신성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근데 효과적이겠네. 그렇지?"

그의 손에서 리베르를 건네받아 가볍게 살핀 다일린이 말했다.

"그래. 그건 확실한 것 같다."

"너 가져. 난 골렘 같은 거에 관심 없어. 사람 시체로 만드는 거라면 더더욱."

라온도 딱히 만들 생각은 없었으나 어쨌든 관심은 있었기에, 별말 하지 않고 다일린에게서 돌려받은 리베르를 아차원에 수납했다.

골렘에 대한 리베르는 이후로도 몇 개가 더 나왔다. 각각 다른 골렘 제작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모두 라온의 흥미를 끄는 것들이었다.

"윽······."

그러던 다일린이 질색을 하며 리베르 하나를 라온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 살핀 라온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주교 알카람이 왜 이렇게 골렘에 집착하나 했더니만, 인형에 대한 성도착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건네받은 리베르엔 배울 점이 많지만 목적이 매우 불순한 골렘 제작술이 담겨있었다. 직접 새겨넣었을 몇 줄의 남사스러운 주석과 함께.

라온이 그것까지 아차원에 넣는 것을 본 다일린이 잠시 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신경 쓰지 않으려던 라온은 결국 멈칫하며 그녀를 마주 쳐다봤다.

"설마 이걸 내가 마음에 들어서 챙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장난 좀 쳐볼까 싶은 충동이 들었어서?"

장난을 쳐볼까 싶었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라온이 잠시 말을 잃었다. 다일린은 짧게 피식 웃더니 원래 하던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거 알아? 전에 말했다시피, 예지 마법으로는 내 목숨이 위태롭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어. 그런데······."

"···그런데?"

"그래도 대략적인 느낌을 받을 수는 있거든. 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그림을 봤다고 쳤을 때, 그게 보기 좋은지 아니면 거북한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잖아. 명화인지 낙서인지는 모르더라도."

"그렇겠지."

"아니면 온갖 복합적인 것들이 섞인 냄새를 맡았을 때도, 그 냄새가 향기로운지 아니면 역한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지. 정확히 어떤 것들의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고, 그게 몸에 좋은지 나쁜지는 몰라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라온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자 다시금 시선이 마주쳤다.

"내 예지력도 마찬가지야. 특정한 위험으로 대부분의 미래가 잘려 사라지는 구간을 제외하면, 그 밖의 무한한 시공간 갈래를 제대로 살피기란 불가능해. 근데,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느낌을 받을 수는 있어."

"나한테서 특정한 느낌이 든단 말인가?"

"맞아. 너한테서는··· 음···."

그녀는 표현을 고르는 듯했다. 그렇게 꽤 오래 시간을 끌었다.

"아무튼 괜찮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결국 다소 싱겁게 말을 끝냈다.

"···나쁘지 않다면 됐다."

라온은 어쨌든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라는 것에 만족하며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전리품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리베르들이었다. 그 특성상 남과 공유한다고 닳거나 없어지는 게 아닌.

하여 분배 도중 얼굴을 붉히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아예 그럴 낌새조차 없었다. 마법재료와 재화 및 스크롤과 마도구들을 분배하는 것조차 상당히 깔끔하게 끝났다.

그렇게 슬슬 일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라온과 다일린의 고개가 순차적으로 한쪽을 향해 돌아갔다. 동시에 명령을 받은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완전히 멈춰 섰다.

덜컥-

문을 열고 나선 라온은 매캐한 타는 냄새와 약간의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푸르른 하늘과 평화로운 자연경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관도 옆쪽으로, 온통 부서지고 망가진 마차 몇 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마법에 맞아 죽었는지 온통 조각난 말 몇 마리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처참하게 훼손된 사람들의 시체가 함께였다.

그런 참혹한 광경 옆에서, 이제 겨우 10살이 넘었을까 싶은 어린 남자아이 둘이 열심히 땅을 파다가 멈춘 상태였다. 손에 들린 건 제대로 된 삽도 아닌 부서진 마차 파편과 길쭉한 소형방패다.

"강도를 만난 거냐?"

라온이 가장 합리적인 추측에 의한 질문을 던졌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두 아이 중 키가 좀 더 큰 쪽이 먼저 말해왔다.

"괜찮으시다면··· 도,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시신들을 묻는 것만이라도···."

"아니지."

그때 라온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나온 다일린이 말했다.

"꼬마야, 그 시체들을 묻는 게 중요하니? 아니면 너희가 사는 게 더 중요하니?"

"······."

"근데 너희 어떻게 산 거야?"

합당한 의문이다. 하나 그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해석했는지 두 아이는 긴장한 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라온은 직접 움직여 참사가 일어난 현장을 살폈다.

얼마 살피지 않았음에도 이들이 상인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털린 상태였고, 상단주로 짐작되는 이가 타고 있던 마차 바닥에 성인 한 명이 간신히 숨을만한 비밀공간이 드러나 있었다.

기척을 차단하는 조악한 수준의 마법진이 보인다. 아마도 상단주가 최후의 순간 지금 살아있는 두 아이를 숨겼던 장소일 것이다.

고작 이 정도 마법진이 새겨진 비밀공간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을 보면, 이들을 공격해 몰살시킨 자들도 그리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가족이냐?"

라온의 질문에 이번에도 두 아이 중 키 큰 쪽이 반응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다른 분들도 전부 가족 같은··· 그런 분들이었는데······."

"그래서 시체라도 묻어주려고 땅을 파고 있었어? 빵도 물도 없는 상황에, 말을 타고도 하루는 족히 달려야 사람 사는 곳이 나오는 이 평야에서?"

애써 구한 목숨을 다시 버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물론, 어떤 심정으로 그러고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기에 라온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내가 좀 도와주마. 시체를 수습하는 것만이라면 매장도 있고 화장도 있다. 어느 쪽이 좋으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두 아이를 잠시 지켜보던 라온은 그냥 매장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시체가 타들어 가는 모습과 냄새가 별로 좋지 못하리란 판단에서였다.

순간, 라온이 딛고 선 발을 중심으로 은은한 청백색 마력이 드넓게 퍼져나가고, 의지가 담긴 마력이 반응하여 원시마법이 펼쳐졌다.

쿠르르륵···

다소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적당한 자리에 여러 개의 구덩이가 천천히 만들어진다. 이어 시체들이 염동력에 의해 두둥실 떠올라 각 구덩이로 들어갔다.

"히익···."

여태 말이 없던 작은 키의 아이가 기겁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흙더미들이 구덩이를 빈틈없이 메워 여러 개의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아, 유품은 따로 챙겼나?"

"감사합니다··· 네, 유품은 따로 이미··· 감사합니다 정말로··· 제가··· 제가 꼭··· 어떻게든······."

키 큰 아이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연신 허리를 숙여댔고, 그에 작은 아이 역시 덩달아 울기 시작하며 라온에게 허리를 숙였다.

"너 선천마력 보유자구나."

그리고 라온은 키 큰 아이를 보며 말했다.

@

다그닥- 다각- 다그닥-

다시금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마차 안.

우연히 만난 두 아이는 라온에 의해 구조받아 얻어탄 상태였다.

키가 작은 쪽은 예상대로 동생이었다. 충격을 많이 받았는지 자신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기 무섭게 꾸벅꾸벅 졸다가 지금은 아예 침대 위에서 웅크려 자고 있었다.

자연히 키가 큰 쪽은 형으로, 현재 라온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지시대로 손끝에 마력을 피워올리는 중이었다.

희미하게 아지랑이처럼 타오르는 마력의 빛깔은 꽤 선명한 주홍빛이었다.

교단 지부에서 도망친 후 선천마력 보유자를 보기는 처음이다.

아니, 사실 이전에도 몇 번 마주쳤을지 모른다. 하나 일정 수준 이상 힘을 기른 하이랜더라면 그 자신이 밝히기 전엔 선천마력 보유자임을 알아채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세상엔 매우 다양한 수련법이 존재하고 그만큼 많은 종류의 특수마력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가 마음 놓고 비전성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아이는 딱히 명문가 출신도 아닌데 어린 나이에 마력을 갖고 있어 선천마력 보유자라고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다.

'짐작이 맞다면 이 마력 역시 신의 것이다.'

하나 물론 라온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대략 만분의 일 확률로 태어난다는 선천마력 보유자들이 전부 그처럼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아이의 선천마력은 기원이 신의 것인지는 몰라도 그 특성이 너무 희박하여 의미가 없다고 봐야 했다.

어쨌든 지금 이렇게 선천마력을 가진 아이를 눈앞에 두고 있자니, 이 마력의 숨겨진 가능성을 전부 밝혀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델카랑 도시로(2)

이후로도 라온의 지시에 따라 몇 번이고 계속 마력을 피워내던 아이는 곧 지치고 말았다.

"고생했다. 너도 가서 쉬어라."

라온은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아이를 대충 칭찬해 주고는 생각에 잠겼다.

꾸벅 고개를 숙인 아이가 제 동생이 잠든 침대 한쪽에 올라 쓰러지듯 눕는 것을 일견하며, 다일린이 라온에게 물었다.

"뭐 특별한 점이라도 발견한 거야?"

"딱히. 화염계 쪽 느낌을 풍긴다는 것 말고는."

"선천마력 보유자를 처음 봐서 그래?"

"그런 셈이지."

라온은 어째서 신성교가 인체실험까지 벌이는지 이해했다. 그저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뭔가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뭘 알아내긴 힘들겠군.'

결국 라온은 아이의 선천마력 탐구에 대한 욕심을 접었다. 사제 데임이 그에게 했던 것처럼, 곁에 두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이런저런 연구를 해본다면 또 모르겠으나······.

어차피 처음 탐구해 보려던 것도 그냥 호기심에 불과했으니 문제 될 건 없다.

라온은 어느새 둘 다 잠에 빠진 아이들을 보다가 다일린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제대로 알려줄 때가 된 것 같다. 여기서 얻어야 한다는 게 뭔지."

"아··· 그렇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말을 골랐다.

"칼라르파 제국 영토가 일곱 개의 큰 섬과 십여 개의 중간 규모 섬, 그리고 수백 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졌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제국이라 불리지만 하나의 대륙을 지배하는 로암달 제국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육로로 이어져 있지 않고 바닷길은 때때로 끊기며 해양 몬스터와 해적 따위로 항상 불안정한 만큼, 중앙의 지배력이 약한 편이었다.

또한 이런 지배력 약화엔 야망 넘치는 다섯 대공의 존재 역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칼라르파 제국 소속임을 부정하진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지배하는 섬을 공국으로 분리하여 자치권을 확립했다.

사실상 칼라르파 제국은 황실과 다섯 대공가를 각각 하나의 왕국으로 쳐서 여섯 왕국의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큰 섬은 일곱 개인데 칼라르파의 핵심 세력은 여섯이야. 그럼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 하나의 큰 섬엔 뭐가 있는지 알아?"

"책에서 본 것 같군. 화산계곡섬이었나?"

"맞아."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금지였다.

화산활동이 매우 활발하여 그 지독한 열기와 화산재가 잦아드는 특정한 시기에만 출입할 수 있고, 한 번 들어가면 어지간해선 살아나올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보물들이 수없이 잠들어 있다는 장소.

"설마 거기서 뭘 얻어야 하는 건가?"

다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정한 물건을 얻는 게 아니야. 들어봤으면 알겠지만 그곳은 고대에 화염 쌍둥이 마탑이었어. 그 중심부에 아직도 화염의 세례 제단이 남아있는데, 그 제단의 기능이 필요해."

"···어떤 기능이기에?"

"하이랜더의 마력 특성을 체내 고유 아스트랄계와 함께 뒤바꿀 수 있어. 신체 역시 특별하게 변한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고."

이야기만 들어도 굉장히 특별한 제단이었다.

하이랜더가 특정 수련법에 의해 구성하고 쌓아온 체내 고유 아스트랄계와 마력 특성을 뒤바꿀 수 있는 제단이라니.

"위험하게 들리는군. 꼭 좋다고만도 할 수 없을 듯하고."

"맞아. 그런 큰 변화는 그만한 부작용을 동반하기 마련이지. 처음부터 그걸 염두에 두고 수련했다면 모를까."

"하면 왜 굳이 그게 필요하다는 거지?"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필요한 이야기니까 해줄게. 내가 유슬디온 자작가를 멸망시킨 이유와 관련 있어. 신성교에서 제공한 어떤 고대의 아티팩트 때문에··· 내가 금단의 수련법을 익혀야 했거든."

"금단의 수련법?"

"심연과 연관된 수련법이야. 내게 시공간 감각과 지금의 힘을 선사했지만, 비참한 죽음까지 예정 지은 수련법이지."

심연, 그것과 아주 얕게나마 접촉한 적 있는 라온은 단번에 심각성을 알아챘다.

동시에 그때 식당에서 느꼈던 감각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런 걸 익히고도 여태 멀쩡했다고?"

"그 연관된 정도가 심하지는 않은 덕이야. 그래도 물론 처참한 결말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근데, 보니까 심연에 대해 꽤 잘 아는 모양이네?"

그러더니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설마 네가 시공간 감각이 있는 이유가, 너도 심연과 어떤 연관이 있어서야?"

"한 번 오염될 뻔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겨냈지만."

"이겨냈다고? 그 심연오염을?"

"운이 좋았지. 보통은 절대 이겨낼 수 없다는 거 나도 잘 안다."

이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수련법을··· 유슬디온 자작가에서 강제로 익히게 한 건가?"

"맞아. 어떻게든 예지 마법을 이용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야.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그냥 어린 여자애 하나 폐기처분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그 말만으로도 라온은 유슬디온 자작가가 대략 어떤 분위기를 갖고 있었는지, 거기서 다일린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래서 내 고유 아스트랄계와 마력 특성을 바꿔야 해. 슬슬 버티기 힘들어지는 단계까지 왔거든."

"그걸 바꾸면 괜찮은 거고?"

"나도 모르지. 일단 예지로 봤을 땐 괜찮은 듯했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나는 더 이상 예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고, 더 먼 미래에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은 어차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담담하게 말하는 다일린의 얼굴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냥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야.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알겠다. 그럼 거기서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 거지?"

"내가 본 장면에 의하면 그 제단엔···."

말을 하던 다일린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라온 역시 비슷했다.

"흠."

이야기가 끊겨서 짜증 났는지, 다일린이 직접 세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며 일어섰다. 그때 라온이 침대에 누운 아이들을 힐끗 보곤 말했다.

"아무래도 저 애들의 상단을 습격했던 놈들 같은데."

"아, 그런가?"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만하지."

라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침대로 다가가 두 아이를 염동력으로 흔들어 깨웠다.

자면서도 긴장한 상태였는지 바로 깨어나는 두 아이를 보며 라온이 마차 한쪽 유리창을 가리켰다.

"지금 웬 이상한 놈들이 다가오는 중인데, 너희 상단을 습격했던 놈들인지 한 번 봐라."

그에 두 아이가 경기하듯 놀라며 완전히 일어났다. 유리창에 딱 달라붙어서는 안색이 동시에 창백해지는 모습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만했다.

"다, 당장 도망쳐야 해요! 빨리요! 저놈들은, 저놈들은···!"

"쉿, 조용히 하렴."

비명처럼 나오던 소리가 다일린의 말에 끊겼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두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짝 성가시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처리하지."

라온은 선천마력을 가진 아이에게 앞으로도 몇 번 더 마력을 끌어올리는 일을 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니 직접 대가를 지불하고 싶었다.

마차 문을 열고 위쪽 틀을 붙잡은 채 깃털처럼 뛰어오른 그가 사뿐히 천장에 안착했다.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이제는 꽤 가까워진 강도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수는 정확히 서른일곱이었다. 말을 탄 채 열심히 달려오던 그들은 마차 위로 올라선 라온을 발견하곤 저들끼리 낄낄 웃었다. 그러더니 몇 놈이 바로 쇠뇌를 겨누고 발사했다.

팡! 파팡!

날아든 화살은 굳이 라온이 방어할 것도 없었다. 마차에 기본적으로 설치된 방어 마법진이 발동하여 튕겨냈으니까.

어떻게 할지 잠깐 생각하던 라온은 아차원에서 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전에 던전에서 자브칸이 선물해 줬던 그 바람칼날 마법검이었다.

닭을 잡을 땐 닭 잡는 칼을 써야 효율적인 법.

그는 검에 마력을 불어넣고 가볍게 휘둘렀다.

후웅!

순간 검신에서 연녹빛이 번쩍이고 희미한 바람칼날이 매섭게 쏘아졌다. 흔한 강도무리 따위가 감히 피할 수 있는 속도의 공격이 아니었다.

"끄아악···!"

"억···!"

한 번의 공격에 다섯 명이 피를 뿜으며 낙마한다. 그들은 전부 뒤따라오던 동료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즉사했다.

"흐, 흩어져!"

"바람 마법이다!"

강도무리는 나름 투지가 있는지 바로 도망치지 않고 산개하며 라온을 노렸다. 각자 말안장에 걸쳐놨던 쇠뇌를 꺼내 들어 쏘거나 어떤 이는 꼴에 하이랜더라고 화염계 마법을 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하지만 그것들 모두 대주교가 타고 다니던 마차의 보호마법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 마법진의 동력원은 공짜가 아닌 마력석인지라 라온은 더 이상 맞아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재차 마력을 불어넣은 검을 들어 올리던 그는 순간 아티팩트 개조에 대한 흥미로운 발상을 떠올렸다.

바람칼날 마법의 위력은 썩 뛰어나지 못하다. 마도구 수준에 불과한 재료와 만듦새의 한계 탓이다. 다만 그가 직접 휘둘러서 발사시키는 만큼 그 속도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원리는 생각보다 중요할 수 있었다.

'어디 한 번···.'

라온은 아예 고유시간가속 마법까지 사용한 후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한순간 그의 팔과 검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전면을 휩쓸고, 연녹색 빛이 번쩍였다 싶은 순간 전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속도로 바람 칼날들이 쏘아졌다.

직후 고함치며 달려들던 강도무리 전부가 곳곳에서 피를 뿜어내며 대지를 나뒹굴었다.

놀랍게도 살아남은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강도가 목숨은 건진 상태였다.

비명이 곳곳에서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오는 가운데 그들의 경악이 생생히 느껴진다. 일부는 뒤늦게 건드려선 안 될 자를 건드렸음을 깨닫고 공황에 빠져 허우적댔다.

말 골렘에게 명령을 내려 마차를 멈추게 한 라온은, 가볍게 뛰어내려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경악과 두려움 섞인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죽지는 않았어도 검상을 입고 전력으로 달리던 말에서 낙마해 나뒹굴었으니, 제대로 설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사지가 멀쩡한 이조차 드물었다.

"살려··· 살려줘···."

한 강도는 제법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지 입에서 피거품을 뿜어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를 힐끗 쳐다본 라온은 직접 마무리하지 않고 위험 요소가 있는지 한 번 훑기만 했다.

그런 후, 아직 팔팔한 듯한 놈들에게 몇 차례 가벼운 칼질을 선사했다.

"아악!"

"억···!"

그렇게 마저 무력화를 마치고는 마차 쪽을 쳐다봤다.

"직접 복수하고 싶으면 말해라. 일부러 많이 살려뒀으니까."

"······."

마차 창문에 달라붙어 있던 두 아이가 동시에 움찔 놀란다. 이후 서로를 쳐다보더니, 의외로 둘 다 강단 있게 마차 밖으로 나왔다. 긴장했으면서도 분노와 증오가 엿보이는 눈빛을 띤 채였다.

몸을 떨면서도 꿋꿋이 다가온 두 아이에게 라온은 아차원에서 단검을 하나씩 꺼내 건넸다.

"목을 찔러. 대부분 무력화됐지만, 마지막 발악을 할 수도 있으니 긴장을 놓진 말고."

"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키 작은 동생 쪽도 라온에게 감사를 표한다. 둘은 손이 하얘져라 단검을 꼬나쥔 채 끙끙대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강도들을 향해 다가갔다.

"꺼, 꺼져! 이 빌어먹을 애새끼가··· 컥···!"

"안돼···! 살려줘··· 살려, 억···!"

두 아이는 죽은 가족과 가족처럼 소중했던 이들의 원한을 대신하여, 아주 결단력 넘치는 태도로 하나하나 힘껏 목을 찔러 죽여나갔다.

심지어 시체에 대고 확인 사살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칭찬이 아깝지 않은 꼼꼼한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어린아이에게 잔혹한 복수의 기회를 주는 것이 문제라고 할지 모른다. 하나 그건 이런 세상에서 야만스러운 강도질에 가족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어본 적 없는 자의 속 편한 말에 불과할 것이다.

적어도 두 아이는 지금 복수를 끝마침으로써 그 굴레에 얽매일 일이 사라졌다. 충격과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강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던 라온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아차원에서 한 수정병을 꺼냈다. 팔각기둥 형태의 팔뚝만 한 크기를 가진 수정병이었다.

대주교 알카람의 아공간 목걸이에 있던, 골렘 제작을 위해 사람의 영혼 일부를 추출하여 보관할 수 있는 마도구다. 겉면과 안쪽에 새겨진 섬세하고도 복잡한 글리프가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죽어도 싼 놈들의 영혼 일부를 재료로 쓰는 것이 과연 문제일까?

시체는 찜찜하니까 그렇다 쳐도, 영혼은 전부도 아닌 영혼적 특성을 쉽게 그려낼 수 있는 바탕체, 즉 핵심을 제외한 껍질 정도에 불과한데?

라온은 이 순간 대주교 알카람의 사고방식을 조금 이해했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골렘을 만들어 사용해 왔을 것이다.

'영혼 일부라고 해도 사실 찜찜하긴 마찬가지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굳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딱히 없다. 반대로 사용해야 할 이유는 명확했다.

시체는 어떻게든 어렵게나마 완전히 대체할 수 있지만, 위령의 질을 크게 높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재료인 영혼 일부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라온은 골렘 제작술 리베르를 읽어 시체에서 영혼 일부를 추출해 보관하는 방법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다일린이 라온의 손에 들린 그 리베르를 보고선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로 골렘 제작술에 관심이 많았구나."

"······."

라온은 굳이 답하지 않고 집중해서 내용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델카랑 도시로(3)

처음 몇 번은 당연히 실패했다. 하나 빠르게 요령을 파악한 라온은 겨우 네 번째 시도에서부터 성공했다.

골렘의 위령 제작에 필요한 영혼 일부, 굳이 비유하자면 껍질 부위를 추출해서 수정병에 담는 일이다.

라온이 뻗은 손끝에서 나타난 희끄무레한 빛줄기가 시체 머리 부근으로 스며들더니 곧, 새하얀 거품 같은 것을 휘감고 빠져나왔다.

거품은 빛줄기에 휩싸인 채 수정병 안쪽으로 얌전히 안착했다. 당연하지만 껍질 정도에 불과한 터라 특별한 움직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시체들에서 하나하나 영혼 일부를 떼어내 수정병에 담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보는 두 아이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원수들의 영혼이 죽어서도 수정병에 담겨 이용당하게 될 것이 고소하면서도, 그런 일을 벌이는 라온에 대한 꺼림칙함과 두려움이 혼재된 반응이었다.

라온은 순간 이건 영혼 전체가 아닌 일부에 불과하다고, 사령술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고 변명하고 싶어졌다.

물론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듯해서 진짜로 시도하진 않았다. 조만간 헤어질 예정이기도 하고.

작업은 갈수록 능숙해졌다. 한 번에 하나씩만 영혼 일부를 거두던 것이 슬슬 한 번에 두 개씩, 끝에 이르러선 한 번에 네 개씩 거둘 수 있었다.

라온은 서른이 넘는 백색빛 거품들이 담긴 수정병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후 아차원에 수납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다른 쓸만한 전리품이 있는지 찾았다.

이들은 라온이 최근 만나왔던 적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당연히 높은 쪽으로가 아닌 낮은 쪽으로.

즉, 가진 장비들이 거진 재료값도 건지기 힘들 정도로 쓰레기 같았다. 주워다 팔면 돈이야 되겠지만 그런 수고를 기울일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질만한 건 하나밖에 없는 아공간 마도구였다. 강도단 두목으로 짐작되는 이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에는, 상품성 있는 여러 생필품과 마법재료 따위가 잘 분류된 채 들어있었다.

당연히 이들의 것이 아닌 강도질로 빼앗은 물건일 터다. 라온은 염동력으로 가져왔던 그 팔찌를 아이에게 다가가 건네줬다.

"가져라."

"예···?"

"원래 너희 물건이었을 테니까. 추가로 좀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잠시 멍해져 있던 두 아이가 곧 눈물을 쏟아내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라온은 그 감사 인사를 대충 흘려 받으면서 그들을 마차에 태웠다.

작은 사건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마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남동쪽의 델카랑 도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라온과 다일린은 마침내 두 아이들과 통성명했다.

키가 큰 쪽이 11살로 형이었고 이름은 에드윈이었다. 키가 작은 쪽은 당연히 동생이었고 9살에 이름은 프랜스였다.

둘 다 형제임을 증명하듯 똑같은 황갈색 머리에 청회색 눈동자를 가졌다. 대륙에서 매우 흔한 머리색과 눈동자인데 제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도시에 도착하면 내려주마."

"그······."

에드윈이 긴장한 기색으로 라온을 쳐다봤다.

"라온 경, 그···."

딱히 경이라는 칭호를 들을 작위 같은 게 없는 라온이었지만 굳이 딴지를 걸진 않았다. 일종의 예의를 차리는 표현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런 말··· 이런 말 드리기가 염치없다는 거 알지만··· 호, 혹시···."

무슨 말을 하려는지 굉장히 망설이면서 뜸을 들인다.

"제가 라온 경을, 그, 스, 스승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아, 아니··· 스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갑자기? 내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라온은 곧장 이해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도 만약 자신이 에드윈이었다면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제자 같은 걸 받고 싶지는 않은지라 거절의 말을 하려는 때, 그 낌새를 눈치챈 에드윈이 다급하게 말을 바꿨다.

"제자가 아니어도 돼요. 잡일 하는 시동으로라도 좋아요. 제발 따라다닐 수 있게만 해주세요!"

눈치는 좋다. 여전히 참 갑작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요청이지만.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에드윈은 고작 11살에 불과했다. 나이를 고려했을 때 이 정도면 사실 훌륭한 편이었다. 놓쳐선 안 될 기회임을 아는 판단력도 그렇고, 용기내어 시도해 보는 결단력도 그렇고.

가족과 친지를 잃은 슬픔에 하루 종일 질질 짜다가 지쳐 잠들기를 반복해도 이해해 줄 수 있는 나이 아닌가.

잠시 생각하던 라온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일린의 부탁에 의해 당분간 상단에 머물기로 했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정 그러면 내가 머물게 될 곳에 자리를 알아봐 주마. 될지 안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형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상황 파악이 잘 안된 동생 프랜스도 연신 허리 숙여 감사하다고 말했다.

라온은 그런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일린을 쳐다봤다.

"뭐··· 설마 애 둘이 머물 자리도 없겠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금 들고 있던 알카람의 리베르에 집중했다.

라온은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원래는 금방 헤어질 거라 생각해서 선천마력에 대한 호기심을 접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곁에 두고 연구해 볼 수 있을 터다.

물론 특별한 기대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만나기 힘든 선천마력 보유자가 나타났으니 할 수 있을 때 정보를 좀 모아두려는 생각일 뿐이다.

'제자라······.'

다시 생각해 봐도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그는 지금 제자를 둘 상황이 아니었다. 그 자신의 성장을 도모하기에도 엄청나게 바빴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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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카랑은 로로톤보다 더 번화한 도시였다. 물론 상대적인 이야기였고, 그가 경험했던 도시 중 가장 크고 번화했던 프로스 후작령의 영주성 도시만은 못했다.

성문의 검문은 그리 빡빡하지 않은 편이었다. 애초에 평범한 마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병사들은 흡사 자신들의 상급자를 대하듯 친절하기까지 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쉽고 빠르게 성문을 통과한 후, 라온은 잠시 마차를 멈춰 세우고 성문 근처를 살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말을 증명하듯, 이곳에서도 길을 안내하는 꼬맹이들이 있었다. 라온은 그 아이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치고는 손짓하여 불렀다.

잽싸게 달려온 까무잡잡한 소년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나으리! 숙소를 찾으시나요? 이 정도 크기 마차를 댈 수 있는 여관은 두 군데가 있는데···."

"숙소는 됐고, 일단 타봐라. 계속 여기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길을 막고 있었기에 일단 안내인 꼬맹이를 태운 후 마차를 출발시켰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 마차 안에서 눈이 휘둥그레져 내부를 살피는 녀석에게 라온이 말했다.

"이 도시에 상단 건물이 몇 개가 있지? 그곳 상단주들 이름은?"

"어··· 상단 건물이라면···."

소년은 곧 정신을 차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다일린이 막상 상단 이름을 알지 못했기에 필요한 과정이었는데, 다행히 소년은 과연 안내인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하여 세 번째로 언급된 '둑카' 상단의 상단주 '볼드완'이 다일린의 지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둑카 상단으로 가자."

"그··· 가면서 방향을 알려드리면 될까요?"

"그래. 보수로는 이걸 주마."

라온은 통 크게 은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꼬맹이의 눈동자가 다시금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이다.

안내를 시작한 소년은 마부도 없는 말들이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척척 길을 트는 모습이 썩 신기한 듯했다. 그 와중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에드윈과 프랜스를 힐끔 쳐다보기도 했다.

라온은 딱히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도 그 순간 스치는 질투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마차를 타고 다닐 정도면 귀족은 아니어도 아주 부유한 집안의 자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들이 어떤 비극을 겪었는지도 모르고.

에드윈과 프랜스는 그러한 길 안내 소년의 태도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자신들의 처지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도 바쁜 모습이었다.

잠시 후.

"감사합니다 나으리! 복 받으실 거예요!"

은화 하나를 주머니에 넣은 소년은 신이 나서 마차에서 내려 어딘가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흡사 도망치는 듯한 기세였다.

상단 건물은 석재와 목재가 뒤섞여 만들어진 제법 커다란 건물이었다. 울타리를 둘러싸고 몇 개의 건물이 추가로 붙어 과연 상단 건물 역할을 할 수 있을 법했다.

입구에서 멈춘 마차의 모습에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원들이 다가온다. 그에 다일린이 움직여 마차 문을 열었다.

"어··· 저희 둑카 상단을 찾아오셨습니까?"

다일린의 외모에 잠깐 당황한 경비가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상단주 볼드완을 찾아왔어. 다일린이 찾아왔다고 말해."

"상단주님을요? 미리 약속이 돼있으십니까?"

"아니. 다일린이 찾아왔다고 전하면 알아서 할 거야."

잠시 서로를 쳐다본 경비원들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적어도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뺏으려는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리라고 판단한 듯했다. 마차도 그렇고, 착용한 장비도 그렇고, 외모와 분위기도 그렇고.

두 경비원이 떠나간 후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진다.

"아는 사람이라고 했지."

라온의 말에 다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슬디온 자작가의 보조집사였어."

"···친했나?"

"친했지. 거의 유일하게 내게 잘해준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부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날에, 나는 내 계획을 볼드완에게 말했어. 그리고··· 그는 다음날까지 침묵하며 비밀을 지켰지. 그래서 나도 보상을 해준 거야. 어차피 버려질 자작가의 재산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게 여기였나 보군."

"장소는 본인이 선택한 거야. 그는··· 내가 일을 저지른 후엔 대륙에서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봐. 자기가 제도에 미리 자리를 잡아 놓겠다고, 해야 할 일을 마치면 꼭 찾아오라고 말했었지."

그렇다면 단순히 친하다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가 볼드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볼드완은 그녀를 가족처럼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로 대륙까지 사람을 보내서 가문 저택 폐허에 편지를 숨겨놨더라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게 기억나서, 한 번 가봤더니 정말로 있더라."

이 도시에 상단을 세웠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된 모양이다.

그런 정도의 친분이면 볼드완이 만남을 거절할 리 없다.

오가는 대화를 에드윈과 프랜스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진지한 내용의 대화라는 것만은 알았는지, 조용히 유리창 너머로 상단 건물을 보며 앞으로 자신들이 지내게 될 곳인지 가늠하는 모습이었다.

"약속대로 곧 예지 마법을 알려줄게. 당분간 여유가 생길 테니까."

"아, 그래··· 고맙다."

"감사 인사를 또 할 필요는 없어."

그 대화가 끝나고 잠시 후.

얼마 기다리지 않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경비와 함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봐도 의복이 고급스러운 게 평범한 직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라온은 다일린의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로 그가 상단주 볼드완임을 짐작해 냈다.

가까이 다가온 볼드완은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걸친 나이대로 보였다. 색이 희미한 금발에 적갈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다일린을 보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가씨···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뭐, 생각보다는?"

"남은 일은 잘 끝마치셨고요?"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는."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그는 그제야 다일린에게서 시선을 떼고 마차 안쪽의 라온과 두 아이를 차례로 살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실까요?"

"그래. 근데 내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거든. 화산계곡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언제 열리는지 알아?"

그에 차츰 부드럽게 퍼지고 있던 상단주 볼드완의 미소에 균열이 생겼다.

"화산··· 계곡··· 섬이요?"

제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금지에 대해 많이 들어봤을 그의 얼굴로 먹장구름이 드리웠다.

수련계획(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