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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력 102년.

거대한 도시의 고속도로를 한 대의 바이크가 달리고 있었다. 딱히 폭주족 같은 건 아니고, 착실히 교통 법규 따르면서 평범하게 달리는 중이었다. 탑승자 역시 바이커용 슈트에 헬멧을 쓴, 전혀 특이해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헬멧 속은 주위의 은발 운전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뾰족한 귀에 푸른 머리칼을 지닌 젊은 사내, 올해로 백 살이 된 세이어였다.

백 살 생일 선물로 받은 바이크를 몰며 세이어는 느긋하게 도시 정경을 바라보았다. 주위로 다양한 지상용 차들이 쌩쌩 달리는 것이 보였다.

온갖 비행용 탈것이 발달한 엘드라스에서도 여전히 일반적인 이동 수단은 지상 차였다. 도시 내에서 일반인에게까지 비행을 허용해 버리면 교통이 너무 혼잡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사고가 일어날 경우 그 피해는 비행체 쪽이 월등히 높다. 어차피 철저한 관제 시스템과 체계적인 도로망 덕분에 러시아워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 비행에 비해 지상 이동이 딱히 불편하지도 않다.

차들의 흐름을 따라 세이어는 느긋하게 달렸다.

드라이브를 즐기러 나온 거라 딱히 목적지 같은 건 없었다. 스피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서 속도도 내지 않았다. 이미 8서클의 경지에 든 세이어는 마음만 먹으면 마법으로 이보다 몇십 배나 빠르게 스스로 비행할 수 있다. 고작 바이크 정도 속력으로 스피드를 즐길 이유가 없다.

세이어가 진짜 즐기는 건 바이크 쪽이 아니라, 바이크를 타기 위한 복장 쪽이었다.

메테우스 박사는 딱히 세이어를 감금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외출 허가를 내주었다. 물론 허가를 받기 위해 '위치 추적 및 육체 제어용 넥클리스', 일명 개 목걸이를 차긴 해야 했지만 외출 자체는 원한다면 예전에도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이어는 그다지 외출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어릴 적부터 심부름 명목의 사회 적응 훈련을 경험해 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사방에서 쏘아지는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개나 원숭이가 사람 옷을 입고 심부름을 하는 걸 보는 듯한 그 잔혹한 시선들을.

그렇다고 얼굴을 숨기고 나갈 수도 없다. 복면인이 거리를 서성댄다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것이다. 무슨 강도 같은 게 아닌가 싶어 당장 경찰에 신고가 빗발치겠지.

하지만 바이크를 선물받은 뒤론 상황이 달라졌다. 바이크를 모는 이가 헬멧을 쓰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잖아?

부아아앙!

굉음을 울리며 세이어는 자유를 즐겼다.

헬멧을 쓰고 있는 이 순간만은 아무도 그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전신을 가린 세이어는 평범한 엘드라스의 시민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 도시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이들과 달릴 수 있었다.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비참하네."

유쾌하고 비참하다. 이렇게 해서야 겨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모든 걸 감추고 나서야 겨우 저들과 같아질 수 있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불쌍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행위는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어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 바이크를 꺾어 고속도로를 벗어나던 차였다. 문득 세이어의 안색이 굳었다.

"음?"

저 멀리 건물 하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화재가 난 모양이다. 엘드라스의 화재 제어 시스템은 우수하니, 보통 화재는 몇 분 안에 진화가 된다.

'이제 막 사고가 일어난 모양이지?'

호기심에 세이어가 그쪽으로 향했다.

☆ ☆ ☆

도착해 보니 한창 불길이 건물을 에워싸고 타오르는 중이었다. 사방에 구경꾼들이 모여 있고, 소방서에 연락하는 이들도 다수 보였다. 건물 위쪽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저걸 어째?"

"아직 아이가 있는데!"

건물 30층 정도쯤 되는 곳에서 작은 소녀 하나가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사방이 불길이라 금방이라도 소녀를 집어삼킬 듯했다. 시공과 차원을 넘나드는 이 문명에서도, 사고는 여전히 일어나고 사람은 여전히 죽어 간다. 보아하니 소방 시스템이 제 시간을 못 맞출 것 같다.

'내버려 두면 죽겠는데?'

세이어가 마법을 발동했다.

"플라이."

빠른 속도로 그가 허공을 날아올랐다. 뒤이어 전신에 화염 결계와 공기 순환 결계를 건다. 세이어가 가볍게 불길 속에 발을 디뎠다. 혀를 날름거리며 덮쳐 오던 화마가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쉽게도 소녀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콜록거리며 가쁜 숨을 쉬는 소녀를 쉽게도 안아 든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허공으로 날아올라 30층이나 되는 높이에서 가볍게 착지한다.

소녀를 내려놓으며 자상하게 묻는다.

"괜찮습니까?"

눈물을 글썽이며 소녀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발만 동동 구르던 구경꾼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살았다!"

"저 사람이 애를 구했어!"

세이어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목숨 걸고 구한 거라면 뿌듯하기라도 하겠는데, 8서클의 경지에 든 마법사인 그에게 이건 식전 운동도 안 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땀 한 방울 안 났다.

아니, 땀은 났다. 그래도 불길 속을 들어갔다 나왔는데 헬멧까지 쓰고 있었으니 땀 정도야 당연히 나지.

무심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세이어가 헬멧을 벗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후우...."

순간 주위의 반응이 달라졌다.

"어? 저거...."

"선주 종족이잖아?"

세이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차....'

실수다. 평소처럼 마법을 쓰다 보니 이곳이 외부라는 사실을 깜빡해 버렸다.

세이어가 움찔하며 소녀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두려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얼굴을 드러낸 이상 이제 와서 헬멧을 써 봤자였다.

과연, 사람들이 움찔거리며 하나 둘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저 미개인이 여기에?"

"누가 선주종을 저렇게 멋대로 풀어 놓은 거야?"

"목걸이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주인은 있는 것 같은데...."

난폭한 들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조심스레 세이어로부터 멀어진다. 분명 조금 전 그가 저 소녀를 구한 걸 보았으면서도.

하긴, 저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도덕도 윤리도 없는 원시인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눈앞에서 방실방실 웃다가도 바로 몽둥이를 휘두를지 모른다는 소리다.

저들의 두려움은 공포라기보다는 조심성 쪽에 가깝다. 야생동물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는 것과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래,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지만....'

왠지 분해 세이어가 소녀에게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다친 덴 없나요?"

소녀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주위의 반응도 달라진다.

"말을 했어?"

"그것도 굉장히 유창하게 하는데?"

"누가 주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훈련을 잘 시켰나 본데."

선입관이란 실로 무섭다. 눈앞에서 보고도, 분명 신기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세이어를 동물처럼 보는 시선이 달라지진 않는다.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역시.'

세이어는 말없이 헬멧을 도로 썼다. 그리고 말없이 등을 돌렸다.

마법을 써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저 멀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방금 마법 같은 것도 쓰지 않았나?"

"에이, 뭔가 도구를 썼겠지. 동물이 어떻게 마법을 쓰나?"

☆ ☆ ☆

선주 종족은 특별 보호종으로 제정되었다.

아무리 원시적이라지만, 아무리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제정한 법이라지만 저들이 사람이란 건 법을 제정한 정치가들도, 그 법에 찬동한 선량한 시민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짐승이라 부르긴 했어도 정말 짐승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선주종의 서식지는 제도적으로 보호받았고, 선주종을 학대하거나 사냥하는 행위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속담이 있던가? 가식적인 행동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주 인류에게 이 정도 양심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사회적 분위기도 점차 바뀌어 갔다.

제도적으로 보호한다 해도 분명 선주종이 사는 곳은 '서식지'지 '생활 터전'이 아니었다. 선주종을 살해하는 행위도 '사냥'이었지 '살인'이 아니었다. 단순히 법적 근거일 뿐이던 제도가 어느새 보편화된 사회적 분위기가 되었다.

사회적 분위기란 때론 실로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여인의 발이나 다리를 드러내는 것조차 수치로 여기던 관습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변했듯이, 사람들의 인식은 사회상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법이다.

'아무리 원시적이라지만 그래도 사람인데.'라던 이들이 '저렇게 원시적이라니, 역시 동물이야.'라며 말을 바꾸었다. 용감한 몇몇 기업가가 선주종을 붙잡아 동물원에 전시했다. 대다수의 시민들도 별 느낌 없이 선주종을 구경하러 동물원에 향했다.

양식 있는 식자들이 목소리를 높여 이를 성토했지만, 동물원은 늘어난 입장객의 숫자에 환호할 뿐이었다.

그렇게 사회적 인식이 변하자 조금씩 관련 범죄도 생겨났다.

아무리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인식적으로 선주 종족을 동물로 본다지만 어쨌건 그들의 외모는 인간과 흡사하며 벌거벗은 여인은 내용물이 어찌 되었건 외모만으로 충분히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법이다.

그리고 인류는 같은 인간끼리도 욕망에 따라 짐승처럼 취급하며 사고파는 종족이었다. 고대에도 중세에도, 문명이 발달한 시대는 물론 우주에 진출할 정도로 진보했을 때도 저런 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선주 종족을 이용해 음습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수요가 점차 늘어났다.

☆ ☆ ☆

어두운 방에 네모난 화면이 빛을 발한다.

"오늘의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평범한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유쾌한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내 화면이 바뀐다.

뾰족한 귀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소녀가 원피스 차림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을 걷다 유리창에 부딪히고, 멍하니 아픈 표정을 짓다 다시 종종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상점에 도착하자 대뜸 물건 하나를 집고 카운터로 간다. 점원이 돈을 요구하자 목에 건 지갑을 열려 낑낑대더니, 답답한지 옷을 훌렁훌렁 벗고 그대로 내민다. 물물교환을 하자는 의미다.

화면 전체가 크게 웃는다.

"아하하하!"

"깔깔깔깔!"

선주 종족에게 심부름을 시킨 뒤 반응을 보는 성인용 프로그램이었다. 겉으로는 다큐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선주 종족 소녀의 알몸을 보여 주는 선정적인 방송일 뿐이다.

화면을 보고 있던 세이어가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돌렸다.

저 프로그램은 그래도 무난한 편이다. 이미 음지에서는 선주 종족을 이용한 어덜트 비디오가 신나게 돌고 있었다. 와일드한 교미 광경이라며 마니아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이다.

밀수 루트를 이용해 선주종을 불법으로 구입, 집에서 애완용으로 키우거나 더치와이프로 사용하는 이들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괜히 세이어가 구해 준 소녀가 자연스럽게 그의 주인부터 찾은 것이 아니다.

분명 선주 종족은 보호종이지만, 원래 모든 인간이 전부 법을 지키며 살지는 않는 법. 뒤로 호박씨 까는 저 습성은 모성이 사멸하고 우주로 진출하고 새로운 세상에 안착한 지금에도 인류의 정신 한 귀퉁이에 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영적으로 진화해도, 인류의 정신 한구석에는 여전히 가학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건전한 프로그램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바뀐 채널에서 다큐 프로그램이 나온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선주 종족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습성과 생태를 알려 주는 교육용 프로그램이다.

자연 속을 살아가는 선주 종족 무리 하나가 나온다. 돌도끼를 들고 짐승 가죽을 걸친 그들은 그나마 사람다워 보였다. 하지만 이 광경은 바로 다음에 이어진 장면으로 깨져 버렸다.

선주종끼리 전투를 벌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돌도끼를 휘두르며 피를 흘리고 살점을 뜯어낸다.

이후 승리한 이들이 환호를 하며 상대의 시체에 손을 뻗는다. 줄줄 흐르는 뇌수를 입가로 가져가고 시뻘건 생고기를 강제로 뜯는다.

불에 굽거나 하는 일은 없다. 아직 이들은 그 정도로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다.

식인食人의 광경이 '잔혹해 보이겠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적자생존의 이치일 뿐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펼쳐진다.

어둠 속에서 세이어가 중얼거렸다.

"그래, 짐승은 짐승이지...."

저걸 보면, 세이어 본인조차도 저들을 도저히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 자신과 같은 종족인 저들을.

'하지만 그럼 난 뭐야?'

세이어는 얼굴을 감쌌다.

그는 분명 짐승이었다. 그와 같은 피가 흐르는 모든 이들이 짐승이니 자신 역시 짐승이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은 지성이 있었고 지혜가 있었다. 수치를 알고 도리를 알며 삶과 죽음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는 짐승이었지만 그 영혼은 인간보다도 더욱 사람다웠다.

"아아아아!"

세이어는 비명을 터트렸다. 들끓는 울분이 무의미한 괴성이 되어 터져 나왔다.

차라리, 차라리 처음부터 짐승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와 함께 태어난 형제, 자매들, 그들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으아아아!"

격정이 힘이 되어 물리적으로 구현된다. 그의 정신이 물질 자체에 영향력을 끼치며 돌풍이 되어 방 안을 휩쓴다.

"이런."

흥분한 와중에서도 세이어는 힘을 거뒀다. 이내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술식을 연산하며 흐트러진 내부를 마법으로 정돈한다. 여기서 세이어가 자기 통제를 못 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에 대한 연구소의 구속이 더 심해지겠지.

"후우...."

순식간에 차분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토록 들끓던 감정이 이렇게 가라앉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난... 짐승조차도 될 수 없는 거군."

☆ ☆ ☆

이후에도 세이어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좌절과 절망을 느낀 건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저 쌓이고 쌓여 결국 울분이 터졌을 뿐. 아무리 좌절해 봐야 선주 종족은 여전히 짐승이었고 그는 여전히 연구소의 실험체일 뿐이었다.

생활도, 세상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외출도 하지 않고 세이어는 연구소 내에서 빈둥대며 시간을 보냈다. 예전엔 그래도 마법을 익히는 목적이라도 있었지만 8서클에 달한 후엔 그마저 없어졌다.

9, 10서클 주문은 이주 인류에게도 허가가 쉽게 나지 않는, 세상을 통째로 뒤흔들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마법뿐이다. 고작 실험체인 세이어에게 허락될 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지금 경지도 메테우스 박사가 열심히 로비를 거듭해 어렵게 전한 것이었다.

하도 심심해 마법을 새롭게 연구하는 마학자의 길을 걸어 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이어의 재능은 빠르게 습득하고 통달하는 쪽에 특화되어 있었다. 연구와 실험을 통해 새로운 걸 창조하는 마학자의 재능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주체할 수 없이 시간이 남아돈다. 그저 주는 밥 먹고, 방 안에 처박혀 네트워크 방송에 심취하고, 습관이 된 마법 훈련과 육체 단련만을 꾸준히 행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메테우스 연구소에 변화가 생겼다.

세이어가 이 연구소에서 산 지가 벌써 100년이다. 이미 그가 아이일 적에 근무하던 연구원은 대부분 은퇴하고 노후를 즐기고 있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나 연구원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그 긴 시간 속에서도 메테우스 박사만은 여전히 세이어 곁에 있었다. 그는 불로불사화 시술로 영원의 수명을 지닌 자, 이 행성에 도착하기 전에도 이미 1400년이란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이였다. 고작 100년 정도는 인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메테우스 박사가 연구소를 떠나게 되었다.

"...연구소 이름이 메테우스 연구소인데 박사님이 떠나는 게 말이 되나요?"

박사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세이어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박사가 헛웃음을 흘렸다.

"난 쫓겨나는 게 아니다. 이 연구소 역시 여전히 내 관할하에 있어."

딱히 박사가 전출된다거나 한 건 아니다. 단순한 박사의 개인적 사정이었다.

그를 지탱하고 있던 현재의 육신이 슬슬 수명이 다한 것이다. 이미 이 육체로 200년 가까이 살아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엘디아 의회는 박사에게 아직 인류를 위한 연구 책임이 많이 남아 있다는 판단을 내렸고, 제8차 영혼 전이술을 시술하기로 합의했다.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뿐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렴. 새로 오는 소장님 말 잘 듣고."

"네, 박사님."

아쉬움 속에서 세이어는 메테우스 박사를 떠나보냈다. 어차피 영혼 전이술을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이라 둘 다 아쉬운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이어를 둘러싼 환경은 이후 크게 달라졌다.

☆ ☆ ☆

"네가 세이어구나? 반갑다. 난 연구소 임시 소장 단하임이다."

새로운 연구소장은 9서클의 마법사이자 메테우스 박사의 제자이기도 한 생명 공학자였다. 다른 엘드라스인들처럼 젊고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본 세이어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저 눈....'

그는 메테우스 박사와 달랐다. 말을 하고, 지성을 지녔고, 심지어 높은 마법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뛰어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철저하게 세이어를 실험체로만 보고 있었다.

다른 연구원들 사이에선 겪어 보지 못한 시선이었다. 아무리 법적으로 짐승이라지만, 세이어를 곁에서 봐 온 이라면 절대 그를 짐승으로 간주하진 못할 테니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결국 적중했다.

어느 날 밤, 세이어는 소장에게 불려 한 실험실로 향했다.

"왜 부르셨나요, 단하임 소장님?"

"네가 해야 할 실험이 있다, 세이어."

사무적인 어조로 단하임이 손가락을 튀겼다. 마력에 의해 실험실 한쪽 우리가 열리고 벌거벗은 여인 하나가 눈치를 보며 걸어 나왔다.

"아우, 아아?"

흠칫 놀라며 세이어는 뒷걸음질을 쳤다. 여인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묘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성적 흥분 상태다.

"이건...."

단하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짝이다. 여러 요소를 종합한 결과 이 실험체가 가장 확률 높은 결과를 낼 것이란 데이터가 나왔다."

"짝...이라니...."

여인이 다가오더니 세이어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그의 다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선주종 특유의 구애 행동이었다. 보통은 남성이 여성에게 하지, 반대 경우는 그리 없지만 여인의 눈에 비친 세이어는 실로 월등히 뛰어난 수컷인 것이다. 그녀의 본능이 무조건 씨를 받고 싶어 할 정도로.

"저 실험체를 임신시켜라."

머릿속이 폭발했다. 세이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극도의 분노가 심장을 찢어발길 것 같았다.

애써 진정하며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미 제 정자를 이용한 실험이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유일한 성공 사례인 세이어, 그의 씨앗을 이용해 영적으로 진화한 다른 선주종 개체를 만들려는 연구는 메테우스 박사도 시도했다.

"그래, 전부 실패했지."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여성체에 직접 정자를 투입해도, 난자를 추출해 인공 자궁에서 키워도 나온 아이들은 평범한 선주종일 뿐이었다. 세이어 수준은 고사하고 평균 이상의 지능을 지닌 아이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선주종 역시 트롤과 비슷할지도 모르니까."

선주종과 마찬가지로 이 행성의 원시 인류인 오크와 트롤, 그중에서 트롤은 인공적인 수정이 되질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재생력을 지닌 서로의 세포가 서로를 공격해 사산해 버린다. 인공 수정을 시켜도, 트롤 암수를 잡아다 강제 교미를 시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자연 속의 트롤 암수가 교미하는 모습이 촬영되고서야 이유가 밝혀졌다. 트롤은 사마귀처럼 교미 시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으며, 상대의 재생력을 암컷이 흡수하는 교미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야 겨우 난자 세포의 재생력이 상대를 압도해 무사히 수정이 되는 것이다.

인상을 쓰며 세이어가 다시 따졌다.

"하지만 선주종의 직접적 교미 실험은 이미 몇 번이나 하지 않았습니까? 별 특별한 인자는 없는 걸로 결론이 났을 텐데요?"

교미 실험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선주종을 이용한 AV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이제 와서 대체 왜 세이어에게 그런 실험을 시키려는 건가?

단하임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기존의 선주종과 다른 부분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진화 레벨이지. 그러니 직접 교미를 통한 영자의 교환 과정에서 발견되지 않은 특질이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 대체 메테우스 박사는 왜 이런 생각을 못 한 건지 모르겠군."

단하임이 콧방귀를 뀌었다. 세이어의 안색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메테우스 박사가 그 생각을 못 했다고?

'못 했을 리가 있냐!'

당연히 박사도 그런 방안쯤은 떠올렸다. 하지만 실행하진 않았다. 그는 세이어를 존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 차가운 눈동자의 소유자, 단하임 소장에겐 존중의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다.

이를 갈며 세이어가 물었다.

"제가 못 한다고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의외로 단하임 소장의 반응이 심드렁했다.

"실험을 할 수 없겠지."

"그게 다입니까?"

"메테우스 박사의 평판에 악영향은 좀 있겠군. 네가 그토록 많은 마법을 배울 수 있었던 건 박사가 너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신뢰가 있어서니까."

세이어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단하임이 메테우스 박사를 이용해 그를 협박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눈빛과 어조를 보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진짜로,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세이어가 따르건 따르지 않건 그에 따른 감정 변화는 없다. 보통 연구원이 실험에 쓸 개가 말을 안 들으면 다른 실험체를 찾거나 다른 연구 방식을 찾지, 개가 말 안 듣는다고 분노하진 않는다.

그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세이어를 실험체로만 보는 것이다.

세이어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저 차가운 태도가 오히려 그의 위치를 실감시켜 주었다.

그래, 자신은 단순한 실험체일 뿐이다.

눈을 감고 세이어는 상념에 잠겼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눈을 떴다.

눈빛이 변해 있었다. 뭔가 각오를 다진, 이제까지처럼 수동적으로 흘러가던 때와는 전혀 다른 굳건한 눈빛이.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연구소 네트워크 제3기관에 접속하게 해 주세요."

황당해하며 단하임이 되물었다.

"그건 무엇하러?"

제3기관은 기밀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애초에 연구원들끼리 휴식 시간에 즐기기 위한 유희용 프로그램을 모아 놓은 연구소 내의 별개 네트워크일 뿐이었다. 뭐, 연구원들도 성인이고, 그런 만큼 성인 전용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세이어에겐 그동안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애들 정서 교육에 안 좋으니까.

세이어가 대답했다.

"헤븐 프로그램에 접속하고 싶어요."

단하임이 피식 웃었다. 헤븐 프로그램은 쉽게 말해 가상현실 체험 프로그램, 그중에서도 상당히 망상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불건전한 물건이었다. 보통 사회 적응 못한 니트족이 현실 도피할 때 쓰는 물건인데....

'하긴 저놈도 따지고 보면 방구석 폐인이긴 하지?'

100년이나 이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방구석 폐인 중에서도 최상위라 하겠다.

"좋다."

단하임은 흔쾌히 승낙했다. 세이어의 내심이 짐작이 간 탓이었다.

저 실험체는 자신의 종족과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들 수가 없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종족과 산다는 건, 인간이 침팬지를 아내로 맞는 소리와 똑같다.

그렇다고 짐승이나 다름없는 선주종을 받아들일 이주 인류가 있을 리도 없으니 저렇게라도 대리만족이라도 해 보고 싶겠지.

'메테우스 박사도 너무하는군. 이 정도쯤은 허락해 주지 그랬나.'

덕분에 세이어를 통제할 좋은 약점을 찾았다.

내심 즐거워하며 단하임이 발길을 돌렸다.

"그럼 난 자리를 피해 주지. 저 실험체야 상관없겠지만 넌 신경이 쓰일 테니."

텅 빈 방에 세이어와 알몸의 선주종 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그동안 세이어와 단하임의 분위기 때문에 눈치만 보고 있던 여인이, 그제야 흥분해 다시 그에게 접근한다.

"하아, 하아...."

연신 세이어의 다리를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다가, 살포시 몸을 돌려 엎드린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인의 엉덩이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야말로 짐승의 모습이다.

양어깨를 짓누르는 굴욕감에 세이어는 얼굴을 감쌌다.

"아아...."

각오를 다졌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그래도 눈앞의 참상을 보니 한탄이 절로 나온다.

비참하고 비참하고 하염없이 비참해서,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

하지만 이미 그는 선택을 했다.

"빌어먹을...."

☆ ☆ ☆

"거참...."

레펜하르트는 멀뚱한 표정으로 실험실 안을 보고 있었다. 실험실 중앙에서 귀 뾰족한 청년과 여인이 열심히 그 뭐시냐, 하여튼 그걸(?) 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별꼴 다 보게 되는구먼."

원래 드림 다이브 상태에선 온갖 못 볼 꼴 적나라하게 전부 드러나는 게 상식이다만, 그래도 역시 저런 꼴을 대놓고 보긴 좀 그렇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하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거 인류의 신 이야기가 맞긴 한 건가?"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 귀 뾰족한 선주종이 엘프와 드워프의 선조고, 저 세이어란 소년이 유독 특별한 개체인 것 같은데....

"뭔가 인류의 신과는 눈곱만큼도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

저 소년이 인류의 신 세이어라면 대체 왜 엘프와 드워프를 박대하고 인류의 편을 든다는 건가? 지금 보니 오히려 인류를 탄압해도 모자랄 판인데?

'아우, 한 다리 건너 전해 받는 거라 직접 찾아볼 수도 없고.'

레펜하르트가 세이어의 꿈에 직접 다이브한 거라면 보다 빨리 해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테스론을 통해 세이어를 간접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 보니 기억의 주체에게 쫓길 일이 없는 대신, 기억을 능동적으로 탐사할 수도 없다.

'테스론이 보여 주는 걸 마냥 받아먹을 수밖에 없겠네, 이거.'

어쨌건 정보는 소중하고, 지금 그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테스론이 흘려주는 이것뿐이다. 레펜하르트는 상황이 바뀌길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실험실 내엔 여성의 교성이 울려 퍼진다.

"하악! 하아악!"

민망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아, 테스론 자식, 이런 건 좀 스킵(?)하지, 왜 다 틀고 난리야?"

제72장 Catastrophy

1

단하임 소장은 약속을 지켰다. 흔쾌히 세이어에게 연구소 내 제3네트워크 접속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세이어는 정해진 훈련 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새까만 큐브만을 붙잡고 살았다.

마법장을 펼쳐 시전자의 감각과 신경계에 직접 작용해 리얼한 환상과 환각을 부여해 주는 이 '가상현실 구현화 큐브'는 엘디아와 알 포트, 양쪽에서 널리 퍼진 마학 하드웨어였다. 수많은 소프트들이 이 큐브에 맞춰 제작되어 흥행했고, 세이어도 어릴 적 그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메테우스 박사가 직접 만든 마법 교육용 게임, '맞혀라! 패널!'이 그것이다. 마력 증폭 및 뇌 발달 가속 능력이 있는 이 소프트는 재미와 교육,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며 박사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으로 시전자에게 보다 빠른 마법 습득력을 길러 주는 놀라운 물건이었다.

'나중에 특허 내고 팔아먹어 짭짤한 부수입을 건지기도 하셨지, 아마?'

어쨌거나, 지금 세이어가 접속한 것은 저 '맞혀라! 패널!'이 아니다. 헤븐 프로그램, 명칭만 보면 묘하게 성스럽고 거룩한 듯하지만 사실은 사용자가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조정한 뒤 그 속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수 있게 만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다.

다른 가상현실과 다른 점은 한계가 없는 점이랄까?

대부분의 가상현실은 엄연히 도덕적 제어 아래, 엄밀한 규제를 통해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이 헤븐 프로그램은 음지에서 개발되어 정규 루트가 아닌 뒷세계 쪽으로 퍼진 게임이다. 쉽게 말해 불법이란 소리다.

살인, 강간, 강도질, 고문, 학대 등 법과 도덕의 굴레 아래 있는 건전한 시민은 결코 행하지 못할 일을 헤븐 프로그램은 여과 없이 허용한다. 마음만 먹으면 그 안에서 얼마든지 음란방탕, 잔혹무비한 짓도 해 버릴 수 있다.

그 세계는 분명 지옥이지만 사용자 본인에게는 천국, 그래서 헤븐 프로그램이라는 이중적인 이름이 붙었다.

큐브를 쥐고 세이어가 시동어를 중얼거렸다.

"스위치 온."

메테우스 연구소의 한 룸일 뿐인 주위가 삽시간에 울창한 자연 속의 다른 세계로 바뀐다. 중세풍 도시가 펼쳐지고 수많은 NPC가 거리를 오간다. 인간도 있고 엘프, 드워프도 있다. 가상의 종족이지만 현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종족이기도 하니 그런 캐릭터를 안 넣을 이유가 없다. 팔아먹긴 해야 하니까.

헤븐 프로그램에 접속한 세이어는 어느새 주변과 어울리는 중세풍 복장을 하고 있었다. 도시를 둘러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좋아, 가 볼까!"

그리고 도시 사이로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세이어 관점에서나 걷는 것이지, 외부에서 볼 땐 그저 침대에 누워 큐브가 내뿜는 검푸른 마력장에 폭 감싸인 걸로밖에 안 보인다.

지나가던 연구원 몇몇이 창 너머로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저거 완전 빠져 있구먼. 대체 며칠째야?"

"역시 게임 중독 무섭다니까. 저 녀석이라고 뭐, 별수 있나?"

"그래도 세이어 저 녀석, 요새 너무 저거에만 빠져 사는데?"

"좀 자제시켜야 하지 않을까?"

"훈련 일정엔 지장 없잖나? 그냥 내버려 두지? 우리도 신경 쓸 필요 없어서 편한데."

"그건 그렇군."

"솔직히 헤븐 프로그램이 재밌긴 재밌잖소?"

"그건 그렇지. 재밌긴 하지."

이들 역시 시간 날 때마다 종종 제3네트워크에 접속, 헤븐 프로그램으로 '사나이의 유희'를 즐긴 경험이 있는 것이다. 연구원 중 하나가 세이어를 보며 농을 던졌다.

"이 녀석아! 작작 좀 해! 그러다 밤중에 몰래 팬티 빨 일 생긴다?"

물론 가상현실에 접속 중인 세이어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연구원들은 키득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 저놈도 남자는 남자야."

"사내놈은 다 똑같구먼. 끌끌."

하지만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세이어는 이 저열한 프로그램 속에서, 정작 저열한 행위 따윈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 ☆ ☆

도시를 걷는다. 주위로 온갖 풍경이 펼쳐진다. 아리따운 여인이 요염한 옷을 입고 유혹하는 창녀촌이 나온다.

엘드라스인, 알하트란인, 엘프, 드워프 등은 물론 모성의 여러 인종조차도 철저히 구현되어 있다. 입맛대로 골라 드시라는(?) 친절한 배려다. 물론 그 속에도 선주종이나 오크, 트롤 등은 없다. 아무리 가상현실이어도 사람이 아닌 짐승과의 관계를 꿈꾸는 이는 없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있긴 있는데 그런 놈들은 굳이 가상현실에서 욕구를 채우는 게 아니라 그냥 현실에서 저질러 버린다. 그쪽이 훨씬 싸고 편하거든!

하여튼, 세이어는 창녀촌을 지나 계속 걸었다. 점점 골목이 으슥해져 꽤 위험해 보이는 분위기가 되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는 바로 세이어 자신이 창조한 세계, 이곳에서 그는 신이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을 학살할 수도 있고, 다정하게 살고 있던 여염집에 침입해 아낙과 어린 딸을 동시에 강간할 수도 있으며, 성자라 추앙받는 이를 납치해 끔찍한 비인도적인 고문을 행할 수도 있다.

애초에 그런 변태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이 헤븐 프로그램인 것이다.

그런 만큼 이 프로그램의 보안은 실로 철저했다.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해야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상현실 환경 구축을 위한 소스 제공을 받는 용도고, 게임을 실행할 때는 철저하게 큐브 자체만으로 구현된다. 온라인 게임이 아니라 콘솔 게임인 격이랄까?

'그래서, 박사가 이 게임을 선택한 거지.'

미소를 머금은 채 세이어는 골목길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 건물로 들어갔다. 허름한 펍 지하로 걸어 내려가자 갑자기 주위 환경이 바뀌었다. 1층은 분명 퀴퀴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와 거미줄이 군데군데 보이는 중세풍 술집이었는데, 지하는 사방이 최첨단인 실내 공간이다.

그렇게, 세이어 현 시대의 연구실로 변한 건물 지하를 내려오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발로 세수를 하며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내뱉었다.

"어서 오세요, 메테우스 박사님."

세이어는 현실 도피를 위해 제3네트워크 접속 허가를 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현실을 보게 되었기에 이를 원했다.

그가 진짜 원한 것은 이 네트워크 속 데이터 공간, 저 고양이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이곳의 정보였다.

메테우스 박사는 뛰어난 연구자이자 동시에 엘드라스 최강의 마법사이며 마학자다. 대부분의 편집증적인 연구자며 마학자가 그렇듯, 그도 철저하게 자신의 연구 결과 및 마법 술식 등을 전부 백업해 놓았다. 이곳은 메테우스 박사가 1500년이란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쌓아 놓은 지식과 지혜의 저장고인 것이다.

고양이가 세이어의 외모를 보고 잠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녀가 아는 박사의 모습이 아닌 탓이었다.

"본인 인증을 위해 패스워드를 입력해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새 땅은, 대체, 언제쯤, 발견되는, 거냐?"

"패스워드 확인. 개체 확인을 위한 마력장 패턴과 영자 구조 패턴 검색에 들어가겠습니다."

"어서 해."

손짓을 하며 세이어가 허공에 빛의 콘솔을 띄우고 뭔가를 조작했다. 미리 준비한 박사의 마력 패턴과 영자 패턴 카피 파장이 자연스레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온다. 이미 몇 번이나 해 온 일이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고양이가 다시 한 번 야옹 하고 세수를 했다.

"본인 확인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이어는 오늘도 연구소 제3네트워크에 위치한, 백업용 정보 저장고의 시크릿 도어로 들어섰다.

이는 메테우스 박사가 철저하게 숨겨 온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당연히 박사는 그 누구에게도, 당연히 세이어에게도 이 가상 정보 창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당연히 접속 코드라든가 접속 방법도 말해 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세이어는 몇 년 전부터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평소 박사가 무의식적으로 내비치는 언행을 통해서.

그가 메테우스 박사와 같이 산 지도 벌써 100년이다. 부부도 그 정도로 오래 함께 살진 않는다. 아무리 철저히 숨기려 해도, 100년이란 시간은 비밀을 감추기엔 너무 긴 세월이다.

하찮은 단어, 손짓, 행동 하나하나가 세월이 쌓이며 의미가 되고 정보가 된다. 물론 그동안 세이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은 신경 쓸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박사가 자리를 비운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네.'

박사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면 이런 굴욕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이런 각오를 다질 일도 없었겠지.

모든 관문을 통과한 세이어가 빠르게 지하실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급했다. 저녁 먹을 때가 되면 도로 접속을 끊어야 하니 유예 시간은 네 시간 정도밖에 없다. 어서 어제 익히다 만 9서클 주문을 마저 습득해야 한다.

이내 메테우스 박사가 감춰 놓은 9, 10서클 마법 이론이 세이어의 눈앞 가득 펼쳐졌다.

☆ ☆ ☆

신세력 107년.

메테우스 박사가 연구소를 비운 지 4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세이어는 계속 가상현실 속을 헤맸다. 단하임 소장도, 다른 연구자들도 그런 세이어를 딱히 괴이쩍게 여기지는 않았다.

원래 게임 폐인 한번 되면 몇 년씩 붙잡고 사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하물며 세이어는 이주 인류보다 수명도 네 배나 길지 않은가? 16년을 붙잡고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

모두가 무시하는 가운데, 세이어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게걸스럽게 지식과 지혜를 빨아들였다. 새로운 걸 창조하는 재능은 그리 없을지 몰라도 이미 존재하는 것을 숙달하는 측면에선 그가 메테우스 박사보다도 뛰어나다. 고작 4년 만에 9서클을 통과하고 10서클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렇게 힘을 키우며, 세이어는 조금씩 원래 계획을 수정했다.

사실 그가 제3네트워크를 원한 건, 메테우스 박사의 지식과 지혜를 노린 목적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단순하고 보편적인 이유였다.

'이 연구소를 탈출하겠어!'

갇혀 사는 실험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빤한 이유로 세이어는 힘을, 보다 고도의 마법을 원했다. 세이어의 연구적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리고 메테우스 박사의 영향력을 떠올리면 그가 도망칠 경우 군대가 총출동해도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둘 다 그 정도 가치와 힘은 있다.

적어도 10서클에 들어, 박사의 시야를 피할 정도는 되어야 겨우 탈출할 자격이 생긴다.

그러나 연구소를 성공적으로 탈출한다 한들 동족에게 돌아갈 순 없다. 아무리 동족이라지만, 세이어와 선주종 사이엔 인간과 원숭이만큼의 영적 차이가 있다. 그 속에 끼어 그들의 무리가 될 바엔 차라리 실험체로 남는 게 낫지.

'그리고, 짐승이 아닌 사람의 일원이 되겠어!'

육체 개조나 외모 변환은 마학적으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며, 엘드라스나 알하트란에 그 정도 성형 기술은 흔해 빠졌다. 동부인 중엔 성형을 통해 서부인과 외모적으로 흡사해진 경우도 제법 존재한다.

그래서 세이어도 그걸 노렸다.

골격 재구성을 통해 특유의 인상을 바꾸고, 뾰족한 귓바퀴를 둥글게 만들고, 눈동자와 체모 색을 변환시키면 선주종이나 이주 인류나 겉보기엔 전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 선주종을 육체 개조해 이주 인류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든 뒤 여자 친구 생겼다며 좋아하는 우울한 변태도 세상엔 간혹 있었다.

우선 연구소를 탈출한다. 평생을 익힌 마법의 힘으로 추적대를 따돌리고 자취를 감춘다. 이후 외모를 바꾸어 이름 없는 엘드라스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원래 세이어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정보를 접하며 그 야심은 깨졌다.

그가 제3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건 박사의 지식과 지혜뿐만이 아니었다. 박사의 아이디 코드는 엘디아에서도 최고위급이다. 언론에 의해 통제된 이면의 진실에도 접속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다.

그제야 알 게 되었다. 단순히 외모를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엘드라스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걸.

전 시민을 총괄, 관리하는 두 문명의 중앙 제어 시스템 엘디아와 알 포트.

이들은 지문이나 홍채 등의 생체 요소로 각 시민을 확인하지 않는다. 이미 두 문명은 종족조차 바꿔 버릴 정도로 육체 개조 기술이 극에 달했다. 그까짓 지문이나 홍채 따윈 간단히 바꿔 버릴 수 있다.

엘디아와 알 포트는 시민의 특유 영적 인자를 기준으로 그들을 판별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그 영혼에 자신만의 특유 영적 인자를 지니고 있다. 개성, 혹은 인격을 발현시키는 이 인자는 쌍둥이조차도 전혀 다른 패턴을 지니는, 그야말로 영혼의 지문이라 할 만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이어는 좌절했다. 아무리 외모를 바꾸어 봤자 이 세계는 속일 수 없었다. 단순한 검문 한 번만 걸려도 바로 선주 종족이란 게 들통이 난다.

그의 영혼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엘드라스의 일원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바꾼다는 건, 곧 자살을 의미한다.

"제기랄!"

세이어는 욕설을 내뱉었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감히 세상을 바꾸겠다는 오만을 떤 것도 아닌데, 그저 소박하게 자신이 변화하고 이 세상에 조용히 묻어 들기만을 원한 것뿐인데....

이 굳건한 세상은 그 작은 소망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늘을 가르고 땅을 쪼개는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어도, 이 거대한 사회의 아주 작은 주춧돌 하나 뽑을 수가 없다!

이후, 세이어가 제3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일은 점점 뜸해졌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으니 의욕도 꺾인 것이다. 메테우스 박사가 연구소를 비운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단하임 소장이며 연구원들은 이번에도 그 광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한 게임 6년 했으면 질릴 때도 됐지."

"새거 하지 않을라나? 헬 프로그램이라고 신작 나왔던데."

"그건 무슨 내용이오?"

"자신이 마왕이 되어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게임이라던데?"

"...그게 헤븐 프로그램이랑 뭔 차이가 있는데?"

"후속작이란 게 다 그렇지, 뭘."

주위의 시선을 무시한 채 세이어는 다시 허송세월로 돌아갔다. 그래도 워낙 심심하다 보니 간간히 헤븐 프로그램에는 접속을 했다. 단지,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박사의 아이디 코드로 자질구레한 정보를 구경하려는 의미에서.

그러던 중이었다.

평소처럼 화면을 멍하니 넘기던 세이어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 무의미하게 나열된 쓰레기 정보, 그 속에 또 다른 정보가 숨어 있었다.

'이건 대체?'

이 정보 저장고 자체가 이미 메테우스 박사가 극도로 비밀스럽게 숨겨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또 비밀이 있다고?

호기심에 세이어는 그 코드를 해독했다. 천재 중의 천재인 그도 무려 한 달이 걸릴 정도로 복잡한 암호였다. 하지만 어차피 시간은 남아돌았고, 그는 할 일이 없었다.

결국 해독에 성공했다. 숨겨진 정보가 화면에 여실히 비치게 되었다.

"뭐지, 이건?"

그것은 보석처럼 빛나는 마학 회로 집적형 결정체였다. 보통 인간이 다루기엔 너무나 복잡하고 큰 마법을 구현시킬 때 중추 회로로 쓰이는 부품이다.

그 부품에 붙은 명칭을 보며 세이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공의 눈물?"

☆ ☆ ☆

세이어의 꿈을 관조하던 레펜하르트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건?"

저 부품의 형태가 낯익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시공의 눈이잖아?"

자신을 이 시대로 회귀 전생시킨 시공 회귀 주문. 시공을 뒤틀어 시전자의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보내 주는 마법이 담겨 있던 바로 그 고대의 아티팩트다!

'심지어 이름도 비슷하네? 그냥 내가 대충 붙인 이름이었는데.'

당연한 이야기였다. 원래 좀 잘나가는 보석이면 제일 흔하게 붙은 별명이 눈이나 눈물이다. 거기에 시공과 관련된 마법이 담겨 있으니 결과물도 비슷할 밖에.

어쨌거나, 상황을 보니 세이어는 저 시공의 눈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 말은 세이어 역시 시공 회귀 주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

"이런...."

긴장하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부릅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

모성의 인류는 팽창하는 태양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탐구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결과물 중에선 실로 인류의 상식을 초월하는 강력한 테크놀로지도 제법 개발되었다.

시공의 눈물.

이 역시 그런 결과물 중 하나였다. 결정체에 입력된 시공 제어 주문을 아카식 드라이브를 통해 발동, 수명이 다해 가는 태양 자체를 시공 회귀시켜 젊고 활기찬 항성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중추핵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자료를 검색하던 세이어는 혀를 내둘렀다. 모성의 인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였는지 보면 볼수록 실감이 난다. 저 시공 제어 주문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워, 10서클에 든 세이어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난해한 부분은 일단 무시하고 세이어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시공의 눈물과 그 속에 담긴 시공 제어 주문, 이 난해한 마학 이론을 실험하기 위해 모성에서 450광년 떨어진 적색 거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모성은 적색 거성에 시공 회귀 마법을 발동했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시공 회귀 마법이 발동된 항성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모성에도 도망친 거지? 실험은 성공했다며?'

과연, 이내 그 이유가 나왔다.

분명 항성은 과거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한 4초쯤 과거로.

"...."

시공 제어 주문 자체는 완성되었다. 문제는 거기에 드는 에너지였다.

한 개인이라면 수만 년의 시공도 넘나들 수 있고 행성이라도 수십 년 단위로 되돌릴 수 있는 에너지지만 저 거대한 태양이란 존재 앞에선 그야말로 조족지혈인 것이다. 아카식 드라이브로 신의 힘마저 손에 넣은 인류지만, 모성의 모든 에너지를 써 봐야 현재의 태양을 고작 230년 전으로 돌리는 게 전부라는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이 주문엔 무시무시한 부작용도 있었다.

행성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시공 제어 주문을 쓸 경우에 대해서였다. 시전자 개인이 미래로 갈 땐 별 상관이 없지만 시공 회귀, 즉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 현재의 모든 시간이 부정된다는 의미였다. 악의를 가진 자의 손에 들어갈 경우 행성 규모의 시공간을 소멸시키는 가공한 시간 폭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계획은 폐기되었고, 제작된 시공의 눈물도 모두 파기되었다. 관련 정보는 모두 소멸되고 프로젝트 자체가 없던 것이 되었다.

'그런데 박사가 빼돌려 놨다는 거구먼.'

데이터를 살펴보며 세이어는 피식 웃었다.

과거의 메테우스 박사는 저 놀라운 위업이 사라지는 걸 아까워한 모양이었다. 지금 이 비밀의 데이터 저장고엔, 시공 회귀 주문 술식과 결정체 제조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몰래 빼돌려 데이터화해 숨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 양반도 은근 음흉한 구석이 있긴 하지.'

박사의 다른 면을 봤다고 생각하며 세이어가 별생각 없이 데이터 창을 닫으려 할 때였다.

'가만?'

순간 섬광처럼 무엇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전자 개인이라면....'

세이어가 다시 데이터창에 달라붙었다. 순간 떠오른 아이디어가 희망이 되어 그의 뇌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수만 년 단위로 시공을 넘나들 수 있다고?'

세이어는 유심히 결정체 제조법을 살폈다.

시공의 눈물을 다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시공의 눈물은 마법 술식을 담기 위한 기록 매체일 뿐이다. 버튼 누르면 자동 녹화되는 식의 흔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귀한 소재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애당초 안에 든 술식이 기밀인 거지, 데이터 용기가 기밀은 아닌 것이다.

'이 정도면 나도 만들 수 있겠는데?'

엘디아에서도 손꼽히는 최고위 마학 연구소인 이곳에는 온갖 희귀 소재와 제조 장비가 널려 있다. 남들 눈을 피해 몰래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는 게 좀 문제긴 하지만....

'일급 기밀도 아니고 그냥 부품 제조실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갈 방법이 있고.'

연구소에서만 100년 넘게 살아온 세이어에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정체에 시공 제어 술식을 카피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10서클의 종사자 정도 되어야 가능한 고도의 작업이지만, 이젠 세이어도 10서클의 마법사다.

두근거리며 세이어는 데이터 창을 따로 저장했다.

희망이 보였다.

현 시대의 선주종은 너무도 원시적이다. 그래서 세이어는 그들과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다. 마그림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연적이라면 수만 년, 적어도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야 겨우 선주종이 문명인으로서의 영적 진화를 이룰 것이라고.

'하지만, 만약 내 자신이 수천, 수만 년 뒤의 미래로 넘어간다면?'

그 시대엔 모든 선주종이 문명을 구가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문명 수준이 어찌 될지는 모른다. 고도로 발달했을 수도,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고 원시적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처지가 되었건 그들의 영혼은 충분히 진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사람답게 생각하고, 사람답게 행동하는 이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성 따윈 없이 본능만으로 행동하는 지금의 선주종은 아닐 것이다.

희망에 차 세이어는 눈을 빛냈다.

'나도 사람 속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어!'

☆ ☆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몰래 연구실에 들어가, 몰래 결정체를 제조하고, 시공 제어 술식을 카피하는 한편, 시공 회귀에 맞춰져 있는 마법의 방향성을 미래로 바꾸기 위해 술식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세이어의 모습이 빠르게 돌린 필름처럼 레펜하르트의 눈앞을 정신없이 스쳐 지나간다.

"흐음...."

문득 레펜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공 제어 술식을 개조하는 세이어를 보던 중이었다.

'저거, 틀렸는데....'

아무래도 세이어는 레펜하르트보다 마법적 이해도가 떨어지는 듯했다. 대충대충 흘려 넘기듯 보는데도 술식 여기저기서 오류가 보인다.

"어이, 거기서 그걸 그 술식에 갖다 붙이면 안 되지?"

물론 이건 과거의 기억일 뿐이니 레펜하르트가 아무리 훈수를 놓는다고 뭐가 변하지는 않는다. 들릴 리도 없고. 레펜하르트도 모르는 건 아닌데, 보다 보니 답답해서 마법사의 습성이 나온 거랄까?

술식 여기저기 오류를 만드는 세이어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그 오류 술식들이 낯이 익었다.

"어쩐지 주문이 앞뒤가 안 맞더라. 저 자식이 도중에 왕창 망쳐 놓았구먼."

시공의 눈에 담겨 있던 시공 회귀 주문, 반의반도 이해가 안 가서 나머지는 직접 채워 넣었는데 알고 보니 채워 넣은 쪽이 오리지널에 가까운 것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이어 저거, 한 종족의 궁극 진화체라며? 그런데 어째 그렇게까지 뛰어나 보이진 않는데? 왜 저리 실수가 많지?'

솔직히 레펜하르트가 보기엔 세이어나 자신이나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아니, 마학자로서의 측면은 레펜하르트가 더 낫다.

'...그냥 내가 그만큼 잘난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가가 또 있는 건가?'

스스로도 재수 없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은 뒤 레펜하르트는 계속 상황을 지켜보았다.

2년여 뒤, 결국 세이어는 시공의 눈물을 완성시켰다. 그 속에 미래로 방향성을 바꾼 시공 제어 주문도 입력했다.

"겨우 시간을 맞췄다."

시공의 눈물을 든 채 세이어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건 아카식 드라이브뿐인가?"

2

신세력 112년.

세이어는 바이크를 타고 엘디아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민 선단의 모함, 엘디아는 이제 대지에 완전히 안착해 엘드라스의 수도가 되었다. 이미 많은 도시가 대지 곳곳에 세워졌지만 여전히 엘디아는 그들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였다.

그렇게 달리고 있는데 웬 피켓을 든 한 무리의 데모대가 보인다.

-선주종은 짐승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과거의 악습을 철폐하자!

선주종 동물 등록법에 반대하는 이들의 시위였다. 아무리 사회적, 문화적으로 고정되었다지만 여전히 세상엔 올바른 시각을 지닌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데모대는 멀쩡한 옷을 입힌 선주종을 앞으로 내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보십시오! 이들이 과연 우리와 다릅니까?"

앞장선 선주종이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무리 봐도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 이해 못 하는 얼굴이다.

지나가던 다른 선주종이 그 모습을 힐끔거린다. 이주 인류의 애완용 펫으로 길러지는 선주 종족이다. 그들 역시 똑같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관심을 끊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쳐 버린다. 이들에겐 저 '이해할 수 없는 시위'보다는 주인이 명한 '보드카 한 병 사 오너라' 심부름이 훨씬 중요한 지상 과제다.

헬멧 속의 세이어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르잖아.'

저 모습, 저 광경이 바로 그의 절망이었다.

차라리 자신의 종족이 노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학대받는 동족을 이끌고 분기탱천해 일어나 혁명을 꿈꾼다면, 실패해 참수당해도 웃으며 죽을 수 있으리라.

소나 말이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긴 해도, 도축이 두려워 작당을 하고 우리를 뛰쳐나가진 않는다. 그의 동족들은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저 눈앞의 고통을 피해 먹이를 받아먹으면 하루가 행복할 뿐.

그의 동족은 너무도 미개했다. 그들에게 이주 인류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정말 신이긴 하지. 신의 힘을 다루고 있으니.'

마법을 손에 넣은 모성의 인류는 이미 시간과 공간, 물질의 일부를 제한적으로나마 다루는 것이 가능했다. 궁극의 마법, 10서클은 인류에게 '신의 힘'이나 다름없는 이적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멸망을 앞에 둔 인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끝없는 연구와 탐구로 마법을 초월해 그 너머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 세상을 하나의 가상현실 게임으로 본다면, 물리 법칙은 곧 프로그램이 허용하는 물리 엔진 범위 내의 움직임이다. 그리고 마법은 프로그램 속에 숨은 코드를 찾아내 버그 플레이를 하는 격이다.

그렇다면, 아예 프로그램 자체를 조작하는 힘이 있다면 어떨까? 가상현실의 신인 프로그래머처럼.

놀랍게도 프로그램이나 네트워크조차 없던 모성의 아득한 고대엔 이미 저 개념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은 정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정보를 다루는 것이 곧 신의 존재에 다가간다는 종교적 개념.

우주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허공록, 아카식 레코드.

마법의 끝에 달한 인류는 결국 저 법칙 자체를 조작하는 힘까지 손을 뻗쳤다. 원소로 구성되는 물질, 영자로 구성되는 영혼을 넘어서 무상유상無上有相의 정보 그 자체로 이루어진, 법칙을 지탱하고 새롭게 지우거나 쓰는 초월적인 에너지원이 발견되었다.

제한 없이 시간과 공간, 물질을 다룰 수 있는 이 강력한 에너지원은 고대 전설에서 따와 아카식이라 이름 붙여졌고, 그 에너지원을 다루는 시스템은 아카식 드라이브라 명명되었다.

인류는 결국 신의 힘을 손에 넣었다.

비록 그 신의 힘으로도 멸망을 막을 순 없었지만, 대신 인류는 아카식 드라이브로 시공과 차원을 뛰어넘어 우주로 나갈 수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원이 있기에 수십억의 인류가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 그 아카식 드라이브가 필요해.'

바이크 속도를 높이며 세이어는 품에 숨겨 둔 시공의 눈물을 떠올렸다. 이 결정체를 작동시키려면 시공 제어 술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카식 드라이브의 확률 연산력과 법칙 재조정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마법이 발동될 수 있다.

그렇게 계속 세이어는 도로를 달렸다. 일반 거리를 지나, 연구 거리를 통해, 엘디아 내에서도 출입이 통제된 주요 기밀 지역까지 달린다.

이윽고 거대한 돔이 보였다.

높이 850미터에 1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직경을 지닌, 수많은 거대한 건물이 산재한 엘디아 내에서도 유독 웅장한 사이즈를 자랑하는 저 건물은 멀리서 보면 마치 커다란 알처럼도 보인다. 실제로 저 돔은 '우주의 알'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저 돔이야말로 이민 선단 엘디아의 모든 것을 통괄하는 아카식 드라이브 시스템 제어 플랜트인 것이다.

플랜트로 들어서는 출입 통제 검문소에는 잘 단련된 거한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세이어가 바이크를 멈추자 정중하게 용건을 묻는다.

"이곳은 통제 구역입니다. 미리 허가를 받으셨습니까?"

"예, 아마 연락이 갔을 건데요."

세이어가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여기 I.D 카드. 뭐, 이런 게 없어도 어차피 스캔하면 통과되겠지만."

동시에 헬멧을 벗는다. 푸른 머리칼과 뾰족한 귀, 선주종 특유의 인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경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게 그거구나."

"오늘 온다던...."

신분을 확인한 경비가 흔쾌히 안으로 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거라."

얌전히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세이어는 바이크를 몰고 연구소 안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경비 두 사람이 떠들어 댔다.

"허, 진짜 사람 같네. 세상에, 운전도 할 줄 알아?"

"이미 듣긴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네."

☆ ☆ ☆

평화 협정을 맺은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엘디아와 알 포트의 아카식 드라이브 시스템의 중추는 통합되었다.

딱히 이들이 서로를 신뢰해서는 아니었다. 거꾸로, 서로를 불신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궁극 병기를 감시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심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통합 방식 역시 물리적으로 두 기관을 합치는 것이 아닌, 시스템 제어 라인의 공유 형식을 띠게 되었다. 수틀리면 바로 연락 끊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겠다.

하여튼 덕분에 엘디아에서도 알 포트의, 알 포트에서도 엘디아의 아카식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메테우스 박사는 이 제어 플랜트 내에서 10년째 불로불사화 시술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는 1,2년 정도면 되었었는데 말이지."

온갖 연구용 자료를 비추는 단말 화면을 보며 메테우스 박사는 툴툴거렸다.

불로불사화 시술, 다른 말로 영혼 전이술이라 불리는 이 시술은 오직 아카식 드라이브를 통해서만 구현이 된다.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자아를 옮기는 것은 이미 모성에서도 너무나 오래된, 케케묵은 낡은 개념이었지만 실제로 가능하게 된 것은 멸망의 시대가 되어서였다.

한때, 전기 신호를 이용해 기억을 카피함으로써 인격을 옮기려는 연구가 있었다.

한때, 클론 육체를 만들고 두뇌를 동일하게 복제해 완벽히 같은 인간을 만들려는 실험도 있었다.

그러나 개중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의 인격이 두뇌에 저장된다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탓이었다.

머리에 사고를 당한 뒤 기억을 잃거나, 성격이 바뀌거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다. 또 사람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 때마다 두뇌 각 부위가 활발히 반응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 인류는 뇌야말로 사고와 지성, 감정을 담당하는 영역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뇌 일부가 망가진 이가 갑자기 멀쩡한 의식을 되찾는다거나, 수두증에 걸려 뇌 대부분이 존재치 않고 물에 둥둥 떠 있는 경우에도 비교적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이들의 경우 해명이 되지 않는다.

모든 건 영자학, 영혼에 대한 구체적인 학문이 발달한 후에야 밝혀졌다.

인간의 지성, 즉 정보는 영혼에 저장되며 그 육체를 지탱하는 본능은 두뇌에 저장된다. 그리고 두뇌는 영혼의 정보를 받아들여 현실에 인격을 구현한다.

뇌가 손상되어 인격이 변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두뇌가 저장하는 본능의 정보가 훼손되거나 혹은 영혼에서 수신되는 정보 처리 부분이 망가져 오류가 일어난 탓이었다. 강제로 뇌에 전기 정보를 주입해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뇌가 영혼으로 그 정보를 송신해 영혼의 오염이 일어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인격을 진정으로 정의하는 것은 두뇌가 아닌 영혼이다. 영혼이 두뇌와 결합될 때만이 비로소 인격은 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뇌와 영혼을 결합하는 힘이야말로 신의 권능, 아카식이었다.

신의 존재는 의외로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성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신의 권능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엘디아와 알 포트는 아카식을 이용해 진정한 의미의 불로불사를 완성시켰다. 불로화 시술만으로는 결국 육체의 열화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동일한 육체의 젊은 클론을 제조한 뒤, 아카식 드라이브로 영혼을 고정시킨다면 이론상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이 불로불사의 영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불로불사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퍼진다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온다. 소수의, 진정 인류를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증명이 된 자만이 불로불사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메테우스 박사 역시 그 영광을 입은 이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1,2년 기다리는 것 가지고는 불평하지 않는다고."

아카식을 이용한 영혼 전이술, 이는 그냥 단순히 기구 안에 들어가 버튼 누르면 '짠! 어머나? 새 몸이 생겼네?'란 식으로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단 자신의 현 육체와 완벽히 동일한 새 육체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육체 정보를 추출해 클론을 만든다고 쉽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육체는 영혼을, 영혼은 육체를 따라가는 법.

육체가 바뀌면 성격, 감정, 사상 등에도 영향이 온다. 영혼이 바뀌면 외모, 체질, 육체 인자에도 변화가 온다.

클론이란 건 엄밀히 말해서 자신의 일란성 쌍둥이 형제다. 쌍둥이라고 서로가 동일인은 아니지 않은가? 육체 정보가 동일하다 해도 인간이란 생활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법이다. 심지어 자궁 위쪽이냐, 아래쪽이냐, 만으로도 쌍둥이의 신체 조건은 의외로 차이가 커진다.

이런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막기 위해선 실로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수시로 시술 당사자의 육체와 영자 상태를 체크해 천천히 클론 육체를 키우며 몇 년에 걸쳐 조정 작업을 해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메테우스 박사는 벌써 영혼 전이술을 여덟 번째 받고 있었다. 몇 번이나 겪은 일이니 1,2년 대기하는 것쯤은 이젠 예사다.

"하지만 인간들의 바보짓 때문에 10년이나 기다리는 건 좀 너무하잖아?"

손가락을 튀겨 박사는 연구 자료를 허공으로 날렸다. 빛의 화면이 입자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해 사라졌다.

"그놈의 아카식 통합 정책 때문에 서로 다른 시스템을 강제로 규격화시켰으니 관련 작업이 지지부진해질밖에...."

고개를 돌리며 박사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10년이나 널 안 찾은 건 다 이유가 있단 소리다, 세이어. 혹시 서운한 건 아니지?"

박사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 푸른 머리의 청년이 마주 웃으며 대꾸했다.

"여기가 감방도 아니고, 박사님이 중병 걸려 입원한 것도 아니고, 육체 스캐닝을 24시간 내리 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듣자하니 그동안에도 여기저기 잘도 싸돌아다니셨던데 대체 뭐가 그리 바빠서 연구소 한번 안 들르셨대요?"

"아, 그게 그냥 한가해진 김에 여행도 좀 하고, 취미 생활도 즐기고 하다 보니...."

박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솔직히 세이어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마음먹었으면 연구소 한 번쯤은 찾을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데 잊고 산 이유는....

"너도 1500년쯤 살아 봐라. 10년쯤 안 보고 살아도 별로 오래 안 본 것 같은 느낌이 안 든다니까? 아니, 너도 벌써 백 살 넘었지? 그럼 좀 이해가 가지 않냐?"

"그래서 제가 그냥 웃으며 구박하는 거예요. 이해가 안 갔으면 지금 웃고나 있을 줄 알아요?"

"하하하...."

웃으며 박사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세이어도 팔을 벌리며 다가갔다.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세이어."

"네, 메테우스 박사님."

둘은 그렇게 서로를 껴안았다. 10년 만의 재회였다.

☆ ☆ ☆

"이제 사흘 남은 거예요?"

"그렇단다. 이미 아카식 드라이브엔 모든 술식이 입력되었고, 클론 육체도 최적화가 끝났으니까. 시술할 일만 남았지."

깎아 놓은 과일을 먹으며 세이어와 메테우스 박사는 대화를 나눴다. 문득 세이어가 궁금해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왜 사흘이나 더 기다리는 건데요?"

"그날이 길일吉日이라더라."

"우와, 세상의 모든 과학과 마학이 집결된 이곳에서도 그런 미신을 믿는 거예요?"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지.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은 다르지 않니? 그리고, 아무리 문명이 발전해도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니까, 이왕이면 운수 좋은 날을 고르는 거지."

"그걸 왜 몰라요? 알 포트의 시공 관찰 시스템으로 그냥 알아보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시공 예지조차도 현재를 기점으로 미래를 확률 연산하는 것이지 않느냐? 예측한 행위 자체도 변수가 되고. 결국 시공을 볼 수 있어도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지."

"그것도 그런가?"

그렇게 좀 더 대화를 나누다 세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일단 숙소로 돌아가 볼게요. 면회 시간도 끝나 가고."

"그래, 내일 보자꾸나."

문밖으로 향하며 세이어가 빙긋 웃었다.

"내일이라... 그러고 보니, 내일 꼭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은 아니라죠?"

"응? 무슨 소리니?"

"아뇨, 아무것도. 그냥 어제 본 드라마 대사가 생각나서."

"녀석, 싱겁긴."

웃으며 둘은 헤어졌다. 박사의 방을 떠난 세이어는 미리 배정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마저 짐을 풀었다. 정리를 끝낸 뒤 그가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후우...."

오랜만에, 10년 만에 본 박사의 얼굴은 역시 반가웠다. 오래 사는 그에게도 10년이란 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차가운 조소로 바뀌었다.

"좋아, 들어오는 데 성공했어."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세이어는 연구소 윗선에 특별 요청을 넣었다.

-10년이나 못 만난 메테우스 박사가 너무 그립다. 곧 불로불사화 시술이라는 큰일을 겪을 박사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

세이어가 신청한 이 요구는, 사실 본인도 그리 받아들여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카식 드라이브는 엘드라스와 알 포트, 양 문명의 중추이며 잘못 다룰 경우 세상을 깔끔히 소멸시킬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물건이다. 만약 악의를 가진 10서클 마법사가 있어 멋대로 아카식 드라이브를 폭주시키기라도 하면 그땐 세상 정도가 아니라 이 항성계는 물론 인근 우주까지 송두리째 말아먹을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아카식 드라이브 제어 플랜트의 출입은 엄중히 통제되었다. 세이어 스스로가 생각해도, 고작 실험체인 자신을 저 금단의 구역에 넣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밑져 봐야 본전, 시도해서 손해 볼 것이 없기에 행한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 간단히 통과되었단 말이지? 역시 대외적으로는 내가 8서클일 뿐이라서인가?"

8서클의 마법사 정도면 설사 아카식 드라이브에 접근하더라도 손을 쓸 실력이 안 되니, 딱히 윗선에서 경계하지 않을 법하다.

'하긴,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직원들도 제법 들락거리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실은 이 사회에서 선주종이 받는 취급이 진짜 이유였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하나 있다 치자. 그리고 그 주인이 원자력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대형 프로젝트가 생겨 한 달쯤 집을 비웠다 치자.

주인이 걱정된 개가 시름시름 앓고 밥도 안 먹으며 마냥 주인만 기다린다. 그래서 동료 몇몇이 그 개를 주인이 있는 원자력 연구소로 몰래 데려다 주었다. 주인을 만난 개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 날뛴다.

이 얼마나 훈훈한 미담인가? 설마 저 상황에서, 개가 원자로를 폭주시켜 핵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선입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말을 하고, 지성이 있고, 심지어 강력한 마법의 힘을 지녔다는 걸 알면서도 윗선은 세이어를 그저 선주종 실험체로만 보았던 것이다.

뭐, 세이어 입장에선 확실히 행운이긴 하다. 그가 세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감시 장치 따위 있을 리 없나?'

감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면, 애초에 들여보내지도 않았겠지.

세이어는 품에서 작은 보석을 꺼냈다. 시공의 눈물을 매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예상대로 알 포트는 이걸 파악하지 못했어."

알 포트의 시공 관찰 시스템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그 정보로 인해 확률 연산으로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물론 그 미래는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일 뿐이니 100퍼센트 들어맞는다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알 포트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과거, 그리고 현재.

이미 고정된 시간축의 사건에 한해서 알 포트는 정말 신처럼 전지全知의 힘을 발휘한다. 이는 빅 브라더 따윈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라 알하트란에선 설사 국왕이라도 알 포트의 전지 영역을 보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저 확률 계산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 것만이 허용되어 있다.

'하지만 그 알 포트조차도 보지 못하는 분야가 있지. 바로 10서클의 종사자들.'

10서클의 종사자들은 스스로 세상을 뒤바꿀 힘이 있는 괴물들뿐이다. 또한 극히 일부긴 하지만 시간과 공간, 물질을 다루는 자이기도 하다. 이는 아카식의 하위 개념이기도 하기에 알 포트로서도 저들에 대해서만큼은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이 일으킨 현상을 통해 유추할 뿐.

예전의 세이어가 그렇게 10서클을 익히려 노력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적어도 10서클은 되어야 알 포트의 눈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쓸데없는 목표가 되어 버렸지만, 어쨌거나 손해 본 건 없지. 안 익혔으면 이것도 시도하지 못했을 테니.'

세이어는 가볍게 시공의 눈물을 허공에 던졌다. 그리고 낚아채며 두 눈을 이글거렸다.

'오늘 밤. 오늘 밤에 모든 걸 끝낸다!'

3

어둠이 깔린 금속질의 복도, 그 사이에 굳게 닫힌 방어벽이 소리 없이 열린다. 원칙대로라면 방어벽이 해제된 순간 경고음이 울리며 중앙 시스템에 바로 연락이 가야 하지만 사방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I.D 제어 카드를 든 채 세이어가 싱긋 웃었다.

"역시 이 양반 음흉해."

그는 메테우스 박사의 총괄 관리자 코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민 선단 엘디아의 모든 생태계를 창조한 메테우스 박사는 이곳, 아카식 드라이브 플랜트 역시 제작에 참여했었고 그 과정에서 남 몰래 백도어용 코드를 시스템에 숨겨 놓았다. 연구자라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사실 이는 엘드라스 국법상 사형에 해당하는 엄청난 중죄다.

이미 박사의 기밀 데이터를 접한 세이어로서는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평소엔 점잖은 척, 선량한 시민인 척 굴면서 뒤로는 이런 걸 준비해 놓았단 말이지?'

그렇다고 메테우스 박사가 실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였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일종의 보험이었다.

1500년이나 살아오며 엘디아 최고위층으로 온갖 일 다 겪은 메테우스 박사다. 국민의 대표인 의회 정부가 반드시 현명한 선택만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만큼 오래 살기도 했다.

물론 엘디아의 문명은 극도로 발달했으니 뭔 짓을 저지르건 어지간해선 다 복구가 된다. 하지만 아카식 드라이브쯤 되면 다르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닥치기 전에 제어할 방법은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박사 본인은 순수한 선의로 행한 일이겠지만....

'애초에 수많은 시민들에게 뽑힌 수많은 의원들보다 개인일 뿐인 자신이 더 바른 선택을 할 거라 확신하는 이유는 뭔데? 역시 사람은 너무 오래 살면 오만해질 수밖에 없나?'

세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오만이라기보다는, 저게 바로 너무 잘난 인간이 너무 오래 살았을 때 보이는 일종의 겸손일 터였다. 박사 입장에선 나름대로 '아무리 나라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막지 못해!'라며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은 결과일 테니까.

'어쨌거나 덕분에 나야 편하게 됐지.'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문명,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방어 시스템 안을 세이어는 자기 안방처럼 돌아다녔다. 아무 문제없이 외곽 구역을 통과해 감시 장치를 속이고 특급 기밀 구역, 아카식 접속 플랜트까지 접근한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리 박사의 코드라도 만능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며 코드 자체는 여전히 만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경비 체제가 갖추어 있다는 쪽이 옳다.

그 어떤 문명, 그 어떤 시대에서도 결국 최고로 뛰어난 경비 체제는 훈련된 인간인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나 감시 시스템도 순간 판단력과 임기응변에 있어선 잘 훈련된 인간을 따라오지 못한다.

'두 명인가?'

복도의 코너에 숨어 세이어는 방어벽 앞을 살폈다. 두 명의 제복 차림 사내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사내지만 둘 다 기이한 기운이 느껴진다.

'기공술사로군.'

엘디아와 알 포트에는 마법사 외에도 또 다른 특이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었다. 인간을 구축하는 세 요소, 심心, 기氣, 체體 중 생명력에 해당하는 기를 다루는 기공술사들이 그것이다. 먼 훗날 오러 능력이라 불리게 되는, 알하트란의 오랜 전통 문화에서 비롯된 이 기공술은 한때 미신 취급을 받았지만 후기 영자학의 발달로 인해 지금은 마법과 함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세이어는 긴장했다.

'만만찮은데....'

심에 해당하는 마법처럼 기에 해당하는 기공술 역시 놀라운 능력을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경지에 다다른 기공술사는 마법사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무서운 상대다. 역시 최고의 기밀 구역답게 일개 경비조차도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젠 물러설 수도 없다.

각오하며 세이어가 코너를 뛰쳐나와 바로 마법을 날렸다.

"업그레이드 라이트닝 체인!"

강화된 전격 주문이 두 기공술사를 단숨에 휘감는다. 당황하면서 두 경비가 붉고 푸른 기운을 전신에 둘렀다.

"윽?"

"누구냐!"

강렬한 기공의 힘이 전격을 튕겨 낸다. 동시에 경비들이 비호처럼 바닥을 박차고 반격에 나선다. 세이어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먹히지 않을 거란 건 이미 각오했다.

"술식 연환! 화火! 천天! 뢰雷! 트리플 부스트!"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의 술식을 섞어 만든 세이어 특유의 조합 마법이 뒤를 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두 경비의 기공보다 세이어의 마법이 한발 앞섰다. 강력한 기운이 정확히 두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폭발을 일으킨다. 어찌나 정밀한 제어인지 폭음이 복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도 않았다.

"컥!"

짧은 단말마와 함께 두 경비는 그대로 혼절했다. 세이어가 숨을 고르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순식간에 전투가 끝난 것이다. 첫 실전이란 걸 감안하면, 압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내가 강해지긴 강해졌구나. 하긴 유명한 기공술사라도 8서클 마법사 수준이랬지.'

애초에 10서클 마법사를 감당할 정도로 강력한 기공술사면 여기서 경비나 서고 있겠냐? 자기 도장 차리고 제자 수만 명 키우며 호의호식하지.

'하지만 이걸로 시간이 촉박해졌어. 저들의 정기 연락이 없다면 중앙 시스템도 의문을 품겠지.'

더욱 빨리 움직여야 한다. 세이어는 서둘러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미리 파악한 대로 아카식 드라이브의 중추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한다. 그 와중에 계속 경비와 마주쳤지만 이미 자신감이 붙은 세이어는 그들 역시 깔끔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여 분 정도 더 지났을 때였다.

세이어가 한 커다란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내부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아...."

그것은 거대한 원통처럼 생긴 공간이었다. 높이는 거의 600미터에 달하고 지름도 200미터가 넘어 보였다.

곡면을 이루는 재질은 전부 현 문명에서도 희귀한 마법 금속뿐이다.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내구성과 물성을 지닌 진철眞鐵 아다만티움이 벽 전체의 토대를 지탱한다. 마력 전도율이 제로에 달하는 최고의 마력 회로 소재, 진동眞銅 오리하르콘이 벽면 전체에 빼곡하게 문양을 그리고 있다. 그 원형의 벽면에서 진은眞銀 미스릴이 석순처럼 뻗어 중앙으로 향한다. 그 끝에는 진금眞金 엘드릴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거대한 타원형 링이 천구의처럼 3차원적으로 얽혀 천천히 돌아간다.

그 천구天球의 중심에 그것이 있었다.

허공에 떠 푸르게 빛나는 수십 미터 크기의 거대한 빛의 문양, 마치 눈의 결정처럼 아름다운 기하학적 모양을 지닌 그것은 그 끝에 수많은 작은 결정을 연결해 외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세이어는 오히려 두려움에 떨었다.

10서클의 마법사인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빛의 결정에 얼마나 엄청난 초월의 힘이 집약되어 있는지를.

저 빛나는 거대한 결정은 물질이면서, 동시에 물질이 아니다.

물질화될 때까지 압축된 빛이 고도의 에너지체가 되어 결정의 토대를 형성하고, 물질화될 때까지 압축한 영자가 결정의 면을 뒤덮는다. 그 속에 깃든 것은 그야말로 세상 자체를 존재케 하는 무상 유상의 정보 에너지.

경이와 희열,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세이어가 중얼거렸다.

"저것이...."

저것이 바로 아카식 드라이브.

신이 창조한 인류, 그 인류가 창조한 신이었다.

☆ ☆ ☆

'조, 좋아. 이제부터 시작이야.

각오를 다지며 세이어는 빠르게 빛의 결정 하부의 제어 데스크로 다가갔다.

아카식 드라이브에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휩쓸릴 것만 같은 끔찍한 공포가 느껴진다. 아니, 그냥 기분상이 아니라 진짜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약해지고 있다. 철저히 제어되는 아카식, 그 아주 사소한 여파만으로도 한낱 사람 수천쯤은 가볍게 소멸시킬 수 있다.

"크윽!"

이를 악물며 세이어는 전신에 마력을 둘렀다. 이것이 10서클 마법사가 아니곤 아카식 드라이브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적어도 10서클은 되어야 저 무시무시한 아카식 파동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어 데스크로 다가간 뒤 중추 회로를 찾는다. 이 아카식 드라이브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모든 마력과 에너지가 오가는 핵심 부품.

'여기 있구나, 사신수四神獸 시스템.'

원래는 알하트란의 전설에서 비롯된 네 방향을 지킨다는 사신수, 그러나 문화는 교류되는 것이고 사방의 수호자는 이제 엘디아에서도 전통적으로 믿는 설화가 되었다. 그 사신수의 이름이 붙은 네모난 패널을 향해 세이어는 손을 뻗었다.

이제 이 패널에 정해진 마력 술식을 입력한 뒤 그 마력을 시공의 눈물을 통해 변환해 아카식 드라이브와 연결하기만 하면....

'이 빌어먹을 시대와도 안녕이다!'

광기에 물든 눈으로 세이어가 막 패널을 떼어 낼 때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세이어!"

요란한 호통이 세이어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순간 세이어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

세이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메테우스 박사님...."

중년의 은발인이 분노와 의문,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1500년이나 살아온 그조차도 눈앞의 사태엔 어떤 해답도 내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세이어!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끝났다.

모든 게 끝나 버렸다.

아무것 하나 제대로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결국 이걸로 끝이다.

자포자기한 채 세이어는 웃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하하, 어째서 박사님이 이곳에 계시죠? 어떻게 절 찾으신 건가요?"

"네 녀석의 영자 코드를 찾는 전용 술식이 있으니까. 굳이 마도구가 없어도 마법만으로 난 네가 어디 있든 알아낼 수 있어."

박사의 답변에 세이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생각해 보니 10서클에는 그런 마법도 있었다. 그리고 그 추적을 차단하는 마법도.

물론 세이어 역시 추적 차단 마법을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첫 번째 목표, 연구소 탈출을 위해 제일 열심히 익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그는 그 차단 마법을 걸어 놓지 않은 상태였다. 메테우스 박사가 자신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왜? 왜 그 마법을 쓰신 거죠? 제가 제 방에서 그냥 자고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하신 이유가 있나요?"

"내가 네놈을 한두 해 보았느냐?"

박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더라고. 네 녀석이 나 몇 년 못 봤다고 그리움에 찾아올 놈이더냐? 아니잖아?"

뜻밖의 답변에 세이어는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와 박사가 지낸 시간이 무려 100년이다. 서로를 알기에 지나치게 긴 시간이기도 하다. 그 덕에 세이어도 박사의 비밀을 알아챈 것 아닌가?

세이어가 박사의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박사도 세이어의 모든 걸 알고 있다.

아, 물론 정말 모든 걸 아는 건 아니겠지만.

"모르겠구나,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거냐? 게다가 무슨 수로 여기 들어온 게야?"

세이어와 아카식 드라이브를 번갈아 보며 박사가 물었다. 그는 그중에도 두려움에 감히 세이어 근처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카식의 힘은 10서클의 마스터인 메테우스 박사에게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한 손에 사신수의 패널을 든 채 세이어가 대답했다.

"이제 와서 그 이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어서 경비 시켜 저 잡아가라고 하세요."

모든 것이 끝난 마당이다. 절망이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어 입 놀릴 기력조차 없다.

그렇게 축 처져 있던 중이다. 문득 세이어가 눈을 빛냈다.

뭔가 상황이 이상했다. 아직도 박사 뒤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박사님, 혹시 혼자 오신 건가요?"

"당연하지 않느냐? 이 사실을 남이 알면 넌 그대로 폐기처분될 거다! 죽는단 말이다!"

안타까워하며 박사가 손짓했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자. 아직은 늦지 않았다. 내 힘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여기 있었던 일을 시스템 기록에서 다 지울 수 있어. 혹시나 해서 감춰 두길 잘했구나."

물론 박사가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건 세이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힘 덕분에 자신도 여기까지 무사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쓰러진 경비들에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아카식 드라이브 근처엔 원래 상식 밖의 일이 종종 일어나니까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을 거다."

세이어는 말없이 박사를 바라보았다. 박사의 얼굴엔 분노와 당혹, 흥분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격정은 틀림없이 단 하나의 순수한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아아, 나의 아버지여...."

세이어가 슬픈 듯 중얼거렸다.

"당신은 아직도 절 사랑하시는군요."

"당연하지 않느냐? 널 자식처럼 여기며 여기까지 키운 게 나다!"

그렇다. 박사는 이 상황이 되어서까지 세이어를 버리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자식을 지키는 부모처럼, 사회도 법도 도덕도, 자신의 지위도 미래도 모두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어떻게 해야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무사히 넘겨 세이어를 지킬 수 있을지만 고민하고 있다.

슬프고, 또 기쁜 일이었다.

"다행이네요."

슬픔을 딛고 세이어가 미소를 지었다. 박사가 의아해했다.

"응?"

그 미소는 기이할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기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열에 가까운 미소.

"덕분에 아직... 당신의 사랑을 배신할 기회가 남아 있어서."

갑자기 세이어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박사 몰래 준비해 두었던 술식이 그의 마력을 기반으로 현실에 구현되었다.

"임페리얼 템페스트!"

눈앞 가득 몰려오는 폭염을 보며 박사가 경악했다. 이 엄청난 마법의 힘이 낯이 익었다.

"9서클? 저 애가 어떻게?"

☆ ☆ ☆

지름 200미터의 거대한 공간 속을 무자비한 마법이 오간다. 온갖 속성의 마법이 아카식 드라이브 주위를 스쳐 지나가며 폭발하고 뒤섞여 또다시 폭발한다. 그 엄청난 위력에 아카식을 지탱하는 이 원통의 공간조차도 흔들릴 정도다.

그러나 휘말리기만 해도 폭사할 듯한 이 끔찍한 광경 속에서도, 레펜하르트는 느긋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굉장하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마법이라도 결국 꿈속의 일이다. 아무리 장대한 폭발이라도 결국 환영일 뿐이다. 한 다리 건너 관조하는 레펜하르트에겐 저 두 대마법사의 사투도 기록 영상 이상의 의미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둘의 전투를 보며 솔직하게 감탄할 수 있었다.

"고대의 마법사는 저 정도였단 말인가...."

세이어가 선수를 쳤음에도 메테우스 박사는 가뿐히 그 마법을 막아 냈다. 이후 계속 세이어가 발악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친다. 철저히 방어 위주로 나가며 조금씩, 천천히 세이어의 마력 자체를 옭아맨다. 그 광경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공부가 되네."

메테우스 박사, 은의 시대 10서클 마스터의 기량은 실로 놀라웠다. 타고난 천재인 레펜하르트조차도 보며 감탄할 정도로 독특한 수법이 끊이질 않는다. 역시 마스터가 괜히 마스터는 아니다. 메테우스 박사는 분명 레펜하르트보다 윗줄에 있는 마법사였다.

전투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세이어가 절대 못 이기겠는데?'

☆ ☆ ☆

같은 10서클이라지만 세이어와 박사의 기량 차는 현저했다. 이제까지 세이어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박사가 한참 봐주었기 때문일 뿐이다.

"크윽! 제기랄!"

마법이 계속 먹히지 않자 세이어가 욕설을 흘렸다.

"네가 이 마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알겠구나, 세이어. 제3네트워크에 접속했더냐?"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곳의 정보는 100년 전에 마지막으로 갱신한 거란다. 그 이후에도 난 계속 발전했고. 그런데 네가 내 상대가 될 것 같으냐?"

점점 박사의 공세가 거세진다. 세이어가 정신없이 뒤로 밀린다. 마력 소모가 눈에 띠게 커진다. 박사가 혀를 찼다.

"그만 포기하거라."

세이어가 숨을 헐떡이며 마법 공세를 멈췄다. 반격하지 않고 박사도 일단 손을 내렸다.

"대체 왜 이러느냐? 반항기냐? 아니, 그렇다기엔 나이가 너무 많잖아?"

이 상황 되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반항기라니? 세이어는 실소했다. 역시 마학자도 학자일 뿐이었다. 사람 마음 따윈 모르는 것이다.

숨을 고르며 세이어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한창 정신없이 싸우는 중이라 몰랐는데, 어느새 제어 데스크에 도로 가까이 와 있다. 손 뻗으면 닿을 정도다.

'어쩌다 보니 위치가 이렇게 됐군.'

힐끔 제어 데스크를 보고, 시선을 올려 아카식 드라이브를 바라본다. 저 빛나는 푸른 결정은 수많은 고위 마법의 난무 속에서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찮은 인간들의 싸움 따위 아랑곳 않는 고귀한 신의 자태처럼.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박사님."

입을 열며 세이어가 슬그머니 손에 쥔 사신수의 패널을 데스크 위로 올려놓았다.

"제게 공격당할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박사가 눈을 껌벅거렸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의미다. 그 틈에 세이어가 다시, 시공의 눈물을 보이지 않게 사신수의 패널로 가져갔다.

"자식에게 배반당한 부모의 심정이었나요? 아니면 기르던 개에게 물린 주인의 심정이었나요?"

박사가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그, 그건...."

"머뭇거리셨네요."

세이어가 피식 웃었다. 저걸로 대답은 들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만약 박사가 정말 자신을 자식으로 생각했다면, 그가 보일 반응은 '당황'이 아니라 '황당'과 '어이없음'이었겠지. 자식에게 기르던 개 운운 소리를 들은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그래, 그는 자신을 자식으로 '생각'한 게 아니다. 그저 자식처럼 '여겼을' 뿐이지. 늘그막에 고양이 키우는 노부인처럼!

이걸로 결심이 섰다.

"박사님...."

이미 사신수의 패널은 제 위치로 옮겨졌다. 시공의 눈물도 패널 중앙의 정 위치에 놓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이건 그냥 시스템에 부품 끼운 것에 불과하다. 제대로 시공 제어 마법을 발동하려면 이후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 시공의 눈물과 사신수 패널을 동기동조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럴 시간 따윈 없지.'

세이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만약 여기서 실패한다면 어떻게 되지?'

실패한다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뭐, 그래 봤자 최악의 사태가 죽음이겠지.

'만약 여기서 포기한다면 어떻게 되지?'

포기한다면 다시 박사의 온정과 사랑에 기대어, 충실한 애완동물의 삶을 살아가겠지.

'그래, 가끔은 죽음보다 못한 삶도 있는 법.'

세이어는 결정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죄송하지 않네요."

"그게 무슨...."

박사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세이어가 시공의 눈물을 패널로 깊이 박았다. 순간 제어 데스크가 빛나며 사신수 패널과 시공의 눈물을 시스템에 연결시킨다.

"라 페르데 탄 타스테드 세피아... 나, 정명한 운명을 비틀어 시간의 눈을 속일지니...."

그 주문을 듣자마자 박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녀석이!"

저 주문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낳을 결과가 무엇인지도. 더 이상 세이어의 안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역천의 법 아래 시공의 흐름을 따라...."

"미쳤느냐, 세이어!"

바로 박사가 마력을 끌어 올리며 세이어에게 날아들었다. 동시에 마법이 준비되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스피드의, 조금도 봐줌이 없는 확실한 죽음의 마법이 막 쏟아지려는 찰나였다.

콰앙!

하필 그 타이밍에 아카식 드라이브가 파동을 쏘아 내었다. 시스템이 아카식과 연결되며 잠깐 오류가 생긴 것이다. 운도 없게 그 파동이 정확히 박사를 노리고 날아들기도 했다.

"크윽!"

날아들던 박사가 그 충격에 뒤로 밀려났다. 몇 초의 틈이 생겼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희열에 차 세이어가 주문을 마저 완성시켰다.

"...나, 시공 초월자의 업을 잇노라!"

4

푸른 파동이 터져 나와 원통의 공간을 투과해 세상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굉음이 울리며 발밑이 크게 흔들렸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세이어는 애써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주문은 완성되었다. 마법은 발동되었다.

그런데....

'변한 게 없어?'

눈앞엔 여전히 아카식 드라이브의 푸른 결정이 보인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치는 그 모습은 마법을 발동하기 전과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직인가? 혹시 마법이 발동되어도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건가?'

하지만 더 기다려 봐도 변화가 없다. 시공을 뛰어넘는다는 게 어떤 건지야 세이어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렇게 아무것도 못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때, 등 뒤에서 더듬거리는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성공할 리가 없잖느냐, 세이어...."

방금 전 읊은 세이어의 주문을 통해 메테우스 박사는 이미 상황의 유추를 끝냈다. 10서클의 마스터인 그는 주문과 시동어만으로도 세이어가 저 시공 회귀 주문을 어떤 식으로 바꾸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시공을 초월해 미래로 가려 했더냐? 그것이 네가 원한 것이었느냐?"

세이어가 박사를 돌아보았다. 그는 양손으로 어깨를 쥔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며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마치 학질에라도 걸린 것 같다.

"...박사님?"

"과거와 미래는... 단순한 역방향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다른 루트의 전혀 다른 시공으로 보아야 하지. 회귀로 방향성을 맞춘 시공을 역전한다고 미래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게 아니란 말이다. 세이어, 아직 그 수준까진 시공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네게 마학자의 자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박사가 혼잣말을 잇는다.

"시간 제어에 관련된 술식은 모두 파훼되고 공간 술식만 남았구나. 시간은 흔들림이 없으되 공간은 행성 자체를 모조리 잠식해 버렸어...."

세이어의 안색이 점차 굳었다. 메테우스 박사는 더 이상 그를 저지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압박을 받듯이 더더욱 인상을 구길 뿐.

"무슨 말이죠, 박사님? 제가 실패했다는 건가요?"

"차라리 실패한 걸로 끝났다면 좋겠구나!"

박사가 호통을 터트렸다.

"넌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지도 모르고 있으니까!"

콰아아앙!

아카식 결정이 다시 한 번 장대한 파문을 터트렸다. 푸른빛의 파문이 보이는 모든 것을 뒤덮으며 원통의 공간 너머로 사라진다. 점점 발치의 흔들림이 심해진다. 지진이라도 난 듯 구조물 전체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기형적인 형태로 끝없이 변화하는 빛의 결정을 보며 메테우스 박사는 절망에 빠졌다.

"아아, 아카식 드라이브가...."

신의 권능을 손에 넣은 인류는 결코 그 힘을 과신하지 않았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인류는 큰 힘을 손에 넣으면 그만큼 큰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아카식 드라이브에는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총동원되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단순한 접속만으로도 수많은 방어벽과 제어 코드를 필요로 했고, 그마저도 수천, 수만 개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최악의 순간에도 그 힘의 극히 일부만을 다룰 수 있게 했다.

그제야 인류는 자신했다. 자신들은 신의 힘을 확실히 제어하고 있다고.

그 아카식 드라이브가 폭주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메테우스 박사는 한탄했다.

설사 박사 자신이 직접 총괄 제어 코드를 쓴다 해도, 아카식 드라이브를 폭주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지켜지는 곳이었다. 현존하는 모든 마도구와 모든 술식에 대처할 수 있는 완벽한 방어 시스템이 아카식 드라이브를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저 시공의 눈물은 그 방어 시스템 이전에 존재한 모성 시대의 물건이었다. 현 방어 시스템이 아무리 철저하다 해도, 이미 오래전 잊힌 구시대 시스템까지 염두에 두진 않았다.

하필이면 세이어는 수백, 수천만 가지 경우 중 아카식 드라이브에 통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을 들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박사 본인조차도 저런 약점이 있을 줄 미처 몰랐을 정도인데!

콰아앙!

연거푸 파동이 터지고 또 터져 나왔다. 몇 차례나 빛의 파문이 박사와 세이어를 뚫고 지나갔다. 다섯 번째 파문에 뒤덮인 순간, 갑자기 세이어가 비명을 질렀다.

"으윽!"

그의 전신이 빳빳하게 굳었다. 머릿속으로 어마어마한 정보량이 멋대로 폭주해 전해져 왔다. 술식을 시전한 당사자, 세이어가 아카식 드라이브의 정보 시스템 일부와 강제 결합된 것이다.

"크으으으으!"

눈을 까뒤집고 침을 질질 흘리며 세이어는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동시에 폭주하는 뇌내로부터 수많은 외침이 들려왔다.

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은 수천, 수만, 아니 수천만, 수억에 달하는 비명이었다. 지성을 가진 인격체의 진신眞身, 수억의 영혼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고 또 질러 댄다.

아아아아아아아-!

비명에 묻히고 또 묻혀, 세이어의 정신이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저 멀리 메테우스 박사의 침통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 술식은 실패했다. 공간 점유 술식만이 이 행성을 뒤덮었지. 그리고 원래 아카식 드라이브에 입력된 최우선 술식은 바로 내 불로불사화 시술을 위한 영혼 전이술이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박사가 치를 떨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되겠느냐?"

비명을 터트리며 세이어가 눈을 부릅떴다.

"커억!"

아카식 드라이브를 통해 연결된 한 사람의 영혼.

세이어의 정신 전체에 행성 전체가 비쳤다.

☆ ☆ ☆

세이어가 원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미래로 가는 것, 그것을 위해 그는 시공 회귀에 맞춘 술식 중 시간 관련 부분을 역전시켰다. 하지만 이는 전혀 통하지 않는 오류 코드였고, 그래서 시공 중 시간에 관련된 술식은 모두 침묵해 버렸다.

남은 것은 공간 제어 술식뿐, 미완성의 술식은 그대로 아카식 드라이브 시스템에 입력되었고 미리 입력되어 있던 영혼 전이 술식과 충돌했다. 고도의 두 술식이 충돌하며 복잡다단한 오류가 연거푸 일어나니 정상적이라면 아무 일 없이 시스템이 침묵해야 하리라.

하지만 아카식 드라이브는 너무나 뛰어났다. 이는 이주 인류조차도 아직 그 전모를 전부 밝히지 못한 신의 권능이자 자연 그 자체였다.

자연은 그릇됨을 두고 보지 않는다. 모자람은 채우고, 과함은 버리며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이끈다.

불완전한 두 술식이 결합해, 전혀 다른 제3의 술식이 되었다.

드워프의 형상을 지닌 인공의 신, 알 포트가 절규의 비명을 터트렸다.

-행성 전역 공간 점유 개시.

엘프의 형상을 지닌 인공 여신, 엘디아가 비탄의 통곡을 터트렸다.

-영혼 전이 술식 개시.

한없이 인간에 가까운 가상 인격인 둘조차도 그들의 기반인 아카식 자체를 거역하진 못했다. 그저 모순과 공포, 경악 속에서 입력된 술식을 세상에 뿌려 댄다.

-危險! 危機! 威脅! 破局!

-DaNGeR! dAngEr! danGER! DanGer!

파아아앙!

아카식 파동, 인간이 만든 신의 외침이 행성 전역을 휩쓸었다. 거대한 해일처럼 푸른 파문이 구형의 지표면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달리며 존재하는 모든 걸 뒤덮어 버렸다.

그 빛 속에서 모든 이주 인류가 울부짖었다.

으아아아-!

일억 오천만의 엘드라스인, 그들의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끊겼다.

일억 오천만의 알하트란인, 그들의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끊겼다.

수억에 달하는 이주 인류의 육체가 그 순간 정지했다.

대지를 달리는 지상차가 운전자를 잃고 서로 충돌해 수천만의 폭발을 일궜다. 하늘을 날던 비행체가 제어를 잃고 낙하해 끔찍한 피해를 낳았다. 수많은 재해가 끝없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 재해를 막을 인류는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자동 제어 시스템만이 주어진 명령대로 기계적인 뒷수습에 나설 뿐.

수억의 비명과 함께 세상은 멈췄다. 수억에 달하는 영혼이 거대한 폭풍이 되어 행성의 대기권에 휘몰아쳤다.

그러나 아카식 드라이브는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충실하게 입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계속해 주어진 명령을 수행한다.

아직 명령은 끝나지 않았다. '결합'이 끊겼으니 '전이'할 차례였다. 아카식 드라이브에는 그 대상이 입력되어 있었다. 제3의 술식, 그 시전자인 세이어의 육체 인자가 명확하게 아카식에 반영되었다.

행성의 모든 선주 종족, 그들의 영혼이 육체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텅 빈 육신을 향해 수억에 달하는 이주 인류의 영혼이 장대한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이주 인류와 선주 종족, 그들의 영혼이 뒤바뀌었다.

"으어?"

"아?"

원시인이 문명인의 육신을 입고 문명 속에 우뚝 섰다. 그리고 코앞에 닥친 무수한 폭발과 재난을 보며 공포에 질렀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야?"

문명인이 원시의 육신을 입고 원시 속에 우뚝 섰다. 그리고 코앞에 닥친 무수한 맹수와 험한 자연을 보며 절망의 외침을 터트렸다.

"으아아악!"

문명에 내던져진 원시와 원시에 내던져진 문명, 그들이 그 대격변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수한 죽음이 뒤를 이었다. 이미 한 번 육신을 떠난 영혼이,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행위로 인해 두 번째로 육신을 떠나간다.

행성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아카식 드라이브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 상당한 인구를 잃은 엘드라스와 알하트란, 그러나 이후 평화의 시대가 오며 이주 인류의 수는 크게 늘었다. 이미 이들의 인구수는 삼억에 달한다.

반면, 선주 종족의 수는 행성 전체를 합쳐도 삼천만이 채 되지 않았다. 험한 자연 속에서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 쉽게 수를 늘릴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인류의 영혼이 뒤바뀌었다. 한마디로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억 칠천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영혼이 갈 곳을 잃었다.

이억 칠천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육신이 텅 빈 껍데기가 되었다.

명령과 충돌하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카식 드라이브는 차선책을 찾았다.

오크,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알하트란 인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한계선에 있었다.

트롤, 그들도 아슬아슬하게 엘드라스 인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한계선에 있었다.

오크와 트롤의 영혼이 육체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를 이주 인류가 대신했다. 쫓겨난 오크와 트롤의 영혼이 이주 인류의 육체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는 모두 합쳐 봐야 사천만이 채 되지 않았다. 여전히 이억 삼천만의 영혼, 이억 삼천만의 텅 빈 육체가 남아 있었다.

이 행성엔 더 이상 이주 인류의 영혼을 담을 만큼 진화한 육체가 없었다. 그래서 아카식 드라이브는 대책을 마련했다.

차원계면을 열고 이차원異次元으로 힘을 뻗었다. 물질이 아닌 특정 속성 에너지로 존재하는 그 차원은 물질에 근거하지 않고도 영자 기반의 정보체 구축이 가능한, 현 물질계와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아카식 드라이브는 그곳에 이억 삼천만의 영혼을 옮기고 영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육신을 창조했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명明, 암暗, 뢰雷.

이억 삼천만의 영혼이 다양한 에너지 속성을 띤 새로운 존재가 되어 차원에 안착했다. 이로서 삼억의 이주 인류에 대한 모든 영혼 전이술이 끝이 났다.

그래도 아카식 드라이브의 업무는 계속되었다.

삼천만의 선주 종족, 사천만의 오크와 트롤이 칠천만의 이주 인류의 육신을 입었다. 그리고 세상엔 여전히 이억 삼천만의 '영혼 없는 육체'가 남았다. 이 육체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건 '명령'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융통성 없는 인공 신에게 명령은 절대적이다. 무조건 이 육체에 영혼을 담아야 한다.

진화한 영혼을 미발달한 육신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미발달한 영혼을 진화한 육신에 담는 것은 가능하다.

이억 삼천만의 육신을 생존시키기 위해, 아카식 드라이브는 행성의 모든 생명체의 영혼을 무작위로 채집하기 시작했다. 소, 닭, 개, 말, 호랑이, 사자, 온갖 동물이며 심지어 이미 죽어 세상의 흐름으로 돌아간 영혼들에까지 손을 뻗었다.

소의 영혼이 이주 인류의 껍데기를 입었다.

새의 영혼이 이주 인류의 껍데기를 입었다.

개, 말, 호랑이, 사자, 온갖 동물과 사령邪靈이 이주 인류의 껍데기를 입었다.

엉망진창의 무수한 영자 정보가 이억 삼천만의 육신에 닥치는 대로 주입되었다. 끔찍한 대학살이 고요하고 품위 있게 행성 전역에서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 영혼을 잃은 수억의 동물, 그 육신에 대해선 아카식 드라이브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받은 명령의 대상은 '지성체'였다. 지성 없는 존재의 상황은 술식 밖의 일이었다.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럼에도 아카식 드라이브의 폭주 자체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 ☆ ☆

현실이 아카식을 통해 세이어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옮겨진다. 그것은 끔찍하다는 표현조차 부족할 정도로 끔찍한 참상이었다.

"아아아!"

세이어는 악을 터트렸다. 경악과 공포, 회한이 푸른 머리칼의 청년의 가슴속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내,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야...."

그저 이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이 시대를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난 이러려고 한 게 아니야!"

메테우스 박사가 호통을 터트렸다.

"당연하겠지, 이 멍청한 녀석아!"

이 강렬한 영혼 전이 파동 속에서도 박사는 아직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손발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려 아카식 파동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력이 고갈되는 게 느껴진다. 10서클 마스터라지만 상대는 신이었다. 신의 힘 앞에선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다.

절망 속에서 박사는 폭주하는 아카식 드라이브와 넋이 나가 있는 세이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리석었구나.'

고작 한 사람에 의해 위대한 두 문명이 종말을 맞는다. 고작 한 사람에 의해 거대한 행성 자체가 죽음으로 달려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이 고도화된 문명사회에서 한낱 개인이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분명 이 시대엔 그런 능력을 가진 개인이 있었다.

바로 메테우스 박사 자신!

'아아, 어리석었구나....'

자신이 세이어를 창조했고, 그로 하여금 세계를 멸할 힘을 가지게 해 주었다. 고의는 아니었다 해도 분명 세이어는 박사가 숨겨 둔 힘으로 인해 이 사태를 이끌어 냈다.

박사 자신의 방심과 태만이 이 모든 걸 낳았다.

'...세상이 멸할 게 두려워 숨겨 놓았던 힘이, 세상을 멸하는구나!'

그러는 동안에도 아카식 드라이브의 폭주는 더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입력된 술식이 끝났음에도 전혀 멈추지 않는다. 술식의 결과가 세이어가 원했던 것과 다른 탓이다. 세이어가 원한 것은 시공 제어일 뿐이었다. 이런 결과를 원한 게 아니다.

오류가 오류를 끌어낸다. 모순이 모순을 끌어낸다.

정보와 정보가 충돌하고 법칙과 법칙이 부딪친다.

연달아 시스템 에러가 일어나며 고정되어 있던 아카식의 권능이 극도로 날뛰기 시작했다. 이미 저 신의 힘은 인류의 손아귀에 있지 않았다. 아무런 규칙도 규율도 없이 날뛰는 우주적 재난일 뿐이다.

스스로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엘디아의 아카식이 시스템을 거부했다.

스스로의 오류를 견디지 못하고 알 포트의 아카식이 시스템에서 벗어났다.

제어되어 있던 신의 권능이 멋대로 폭주하며 행성 전체를 날뛰었다. 대지가 흔들리고 대기가 찢어지고 지각이 뒤틀리고 바다와 산이 뒤바뀐다. 이조차도 아카식이 지닌 진정한 힘에 비하면 하찮은 소동이었다. 이대로 아카식이 완전히 제어에서 벗어나면 행성 규모의 재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모든 상황을 세이어는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아카식에 연결되어 이 모든 걸 보고 있음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저 극심한 신의 분노 앞에서 하찮은 인간처럼 벌벌 떨 뿐.

"바, 박사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듯, 세이어가 간절한 눈으로 메테우스 박사를 바라보았다.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세이어, 이 바보 같은 것아...."

한탄하면서도 박사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1500년간 쌓아 온 지식과 지혜를 총 동원해 이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찾고 또 찾는다.

'내겐 더 이상 방법이 없구나.'

지금 박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전력을 다해 자신의 영혼을 지탱하기만도 벅차다. 그마저도 앞으로 몇 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세이어라면....'

반면 세이어는 저 영혼 전이 파동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의 육체 인자가 대상 선택에 반영되었음에도 여전히 아카식은 세이어를 영혼 전이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세이어가 입력한 명령은 시공 제어였지 영혼 전이가 아니니까. 명령의 우선권 수립에서 제외 대상이 된 것이다.

'아직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각오를 굳히고 박사가 호신 마력의 일부를 접속 술식으로 돌렸다. 그 덕에 그의 죽음이 몇 분 더 빨라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예정된 죽음일 뿐이다. 그대로 박사가 빠르게 아카식 시스템의 잔여 부분을 제어해 커다란 빛의 구슬을 만들어 냈다.

"세이어! 손을 뻗어라!"

"네?"

"내가 가진 오리지널 시스템 총괄 제어권, 그것을 네게 통째로 넘기겠다. 넌 이미 시스템에 접속된 상태다! 이 제어권이 있다면 아카식 폭주를 가라앉힐 수 있을 거다!"

세이어는 공포에 질렸다. 이 어마어마한 힘을 자신더러 다스리라고?

"그런 건 배운 적 없어요!"

그는 배우고 습득하는 자였다. 응용하고 창조하는 자가 아니다!

'난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해!'

울상을 짓는 세이어를 향해 박사가 일갈을 날렸다.

"그럼 이대로 행성 전체를 날려 버릴 셈이냐!"

박사가 빛의 구술을 세이어에게 던졌다. 구슬이 세이어의 코앞까지 날아든다. 그러나 세이어는 구슬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워하며 피했다.

메테우스 박사가 치를 떨었다.

"이 병신 같은 놈이!"

이제 더 이상 남은 마력이 없었다. 저 제어 술식구를 생성하기 위해 그나마 없는 마력 전부를 끌어 썼으니, 더 이상 영혼 전이 파동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도 없다.

"엎지른 물을 주워 담지 못할 거면, 최소한 닦기라도 하란 말이다아아아!"

단말마와 함께 메테우스 박사의 영혼이 결국 그 육신을 떠났다.

"박사니임!"

그리고, 그 육신을 개의 영혼이 대신했다.

"...박사님?"

그 누구보다도 지적이고 고상하고 품위 있던 엘디아 최강의 마법사이자 마학자였던 메테우스 박사, 그가 바닥에 엎드리더니 네 발로 서서 입을 연다.

"멍! 멍멍!"

"...으아아아아!"

세이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그 해학적인 광경은 실로 처절한 악몽이었다. 세계를 다루는 지식과 지혜를 내뱉던 그 혀에서 짐승의 울음이 연거푸 터져 나온다.

"왈! 왈왈왈왈!"

세이어는 주저앉았다. 이제 더 이상 메테우스 박사는 없었다. 이곳엔 오직 자신뿐이다.

'나밖에....'

세이어가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나밖에 없어....'

아카식 파동 속에서 연신 흔들리는 빛의 구슬이 보인다. 당장이라도 꺼질 듯 연약한 촛불처럼 흔들리는 마력의 구체,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구원의 유산.

"크윽!"

이를 악물며 세이어가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선택지 따윈 없었다. 구슬을 향해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으아아아!"

빛의 구슬이 세이어를 뒤덮었다. 그의 의식이 아카식 드라이브 시스템 최하 심도까지 굴러 떨어졌다.

☆ ☆ ☆

메테우스 박사의 제어권은 단순히 아카식의 제어 권한만을 담고 있지 않았다. 시스템 접속뿐 아니라 엘디아와 알 포트, 두 아카식 드라이브가 지닌 무한의 지식마저 열람할 수 있었다.

막대한 양의 정보 속에서 세이어는 아카식 드라이브의 구조와 사용 방식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그는 배우고 습득하는 자, 일단 존재하는 것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익힐 수 있다.

'일단 폭주의 흐름을 바꾸자.'

정신없이 세이어는 시스템 속의 모순된 정보와 오류 코드를 지웠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폭주한 아카식의 광풍 속에선 열람고의 정보마저도 무사하지 않았다. 상당수가 유실된 탓에 정보 사이사이에 틈이 워낙 많았다.

메테우스 박사라면 그 빈틈을 스스로의 응용력으로 새롭게 채워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10서클의 마법사라도 세이어에겐 그런 응용력은 없다. 그리고 현존하는 정보만으로는 저 거대한 권능을 전부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세이어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술식으로 처리가 안 된다면, 감으로 때운다!'

인간이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때, 그 근육과 피부, 혈관의 흐름 등을 모두 인식하고 수치화해서 움직이진 않는다. 그냥 움직이고 싶으니까 움직이는 것뿐이지.

"타아아앗!"

죽음을 각오하고 세이어는 아카식 자체에 자신의 영혼을 내던졌다. 저 거대한 아카식 자체를 자신의 수족으로 삼는다면 모자란 제어 술식을 채울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스스로의 인격을 오염시키는 지극히 미친 짓이다.

'하지만 실패해도 어차피 끝이잖아!'

간신히 세이어는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한 종족의 궁극 진화체다운 재능과 박사가 건넨 제어권의 자기 보호 술식, 두 가지가 합쳐 생긴 기적이었다.

신의 영혼에 깃들어 세이어는 두 아카식 드라이브를 움직였다.

'일어서라!'

세이어가 깃든 엘디아의 아카식이 그의 명령을 따랐다. 행성 반대쪽에 있는 알 포트의 아카식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이어져라!'

행성 절반을 잇는 거대한 빛의 다리가 생겨났다. 간신히 두 문명의 아카식 전체가 그의 제어하에 들어왔다. 들끓던 행성의 재해가 일단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걸론 부족했다. 모인 신의 권능이 거대해도 너무 거대했다. 도저히 세이어 혼자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잠깐 진정시켰을 뿐, 금방 그의 제어에서 벗어나 다시 광포한 재앙이 되어 날뛸 것이 뻔했다.

'이젠 어쩌지?'

전전긍긍하던 세이어가 없는 응용력을 억지로 발휘했다. 그건 응용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너무 크면 쪼개면 되잖아?'

모든 아카식을 전부 제어하는 건은 만용이다. 버릴 건 버려야 한다.

세이어는 응집된 아카식에서 엘디아와 알 포트의 중추를 과감히 분리시켰다. 이미 오랜 세월 존재한 저 두 가상 인격과 그에 깃든 아카식은 너무 고정화되어 도저히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지를 쳐 내고 대부분의 힘을 빼앗은 뒤 중추만을 뽑아 시공 저편으로 날려 버렸다.

'떠나라! 인공의 신과 여신이여!'

엘디아의 아카식이 엘드라스 이민 선단의 중추, 차원 모함의 시스템에 강제 주입되었다. 그 상태로 그 거대한 모함이 통째로 차원 이동을 시도했다. 그렇게 엘디아는 차원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알 포트의 아카식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알하트란의 시공모함 시스템은 이미 세이어의 시간 제어 술식의 영향으로 마비된 상태였다. 시공 저편으로 날릴 방법이 없었다. 대신 차원 결계를 두른 뒤 공간 이동을 시켜 행성 지저의 깊숙한 곳에 파묻었다. 이 정도면 알 포트의 아카식이 지표면에 미치는 영향도 극히 미비하리라.

엘디아와 알 포트를 분리하니 그제야 좀 상황이 나아졌다. 중추를 잃은 아카식 드라이브가 자연스레 세이어의 영혼을 주축으로 삼아 합일을 시도했다. 두 아카식 드라이브가 하나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너무 많아.'

엘디아와 알 포트를 분리했음에도, 의지 없는 권능만 남은 아카식임에도 여전히 그 힘이 너무 거대하다. 아직도 다루기엔 아득히 먼 수준이다.

세이어는 남은 아카식을 쪼개고 또 쪼갰다. 응용력 없는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것밖에 없었다. 그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계속 버리고 또 버리는 수밖에.

아카식 드라이브의 테라포밍 영역, 이것은 강제 분리되어 위성 궤도를 도는 4대 무인 스테이션에 분배되었다. 행성 전역을 관찰하는 바메트, 파르가, 사타르, 티아논 시스템에 자연 현상을 관장하는 신의 힘이 깃들었다.

그 외에도 초과된 아카식을 담을 만한 제어 시스템을 계속 찾았다. 망가진 아카식 드라이브를 간신히 수복하긴 했지만 그 허용량이 너무 적었다. 이를 대신할 거대 시스템이나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문제는 아카식 드라이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군軍, 관官 쪽 시스템은 대부분 폭주에 휩쓸려 망가진 상태란 것이다. 그나마 멀쩡했던 우주 스테이션 시스템은 이미 사용해 버렸고.

'남은 건 민간 시스템뿐인가?'

엘드라스와 알하트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지닌 국제 결혼 알선 회사, 필라넨스의 네트워크에 강제로 아카식이 주입되었다.

지질 조사 및 시추, 채굴, 채광 사업을 하는 다목적 종합 기업, 레단티 주식회사의 네트워크에 강제로 아카식이 주입되었다.

그 외에도 닥치는 대로, 네트워크에 손이 닿기만 하면 성향을 가리지 않고 선택했다. 장례 대행 회사 탈로스, 국제 이종 격투기 단체 아레스, 산악 관련 용품 판매회사 아틀라스, 국제 법률 회사 젠트랄, 해양 생물학 연구소 넵퓨리아스, 국제 항공 에어리어스에 여분의 아카식이 주입되었다.

여덟 네트워크 시스템에 신의 힘을 떠넘긴 뒤 세이어는 그 모두를 엘디아의 차원함에 옮겼다. 알 포트는 무리지만 민간 시스템인 이것들은 얼마든지 엘드라스의 차원함에 승선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여덞 차원함이 우주로 향해, 이차원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남은 것은 세이어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축소화된 아카식 드라이브뿐이었다. 세이어는 남아 있는 모든 아카식을 우주의 알로 모았다. 무한의 지식과 정보를 잃고서야 약해진 신성은 그의 의지하에 놓였다.

간신히, 날뛰는 신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세이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

그리고 그대로 무한한 잠 속으로 침잠해 갔다.

5

천 년의 동면이 지나고야 세이어는 다시 깨어났다. 평범한 생명체라면 멀쩡할 리가 없겠지만 그는 아카식 드라이브와 연결된 존재였다. 신성이 그의 시간을 동결시켜 저 긴 세월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다시 깨어난 세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일단, 그토록 많던 이주 인류의 도시는 거의 다 사라졌다.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허물어진 것도 있었고, 아카식 파동의 영향으로 차원 존재력이 불완전해 별 차원으로 떠나 버린 것도 있었다. 남은 것은 그가 잠들어 있던 우주의 알, 엘디아의 아카식 드라이브 시스템 제어 플랜트 정도였다.

'내 동족은? 그들은 어찌 되었지?'

다행히 이주 인류의 육신을 입은 그들은 천 년 후에도 존재했다. 심지어 꽤나 수준 높은 문명기에 들어서기도 했다.

대륙 곳곳에 인류의 왕국이 건립되어 있었다. 고작 천 년이란 시간 만에 이 정도 영적 진화를 이룬 것이다. 역시 마그림의 말대로 이주 인류의 영적 수준이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특이한 건 그들의 인종적 분화였다.

"이미 이주 인류의 모습이 아니구나. 저들은."

엘드라스인과 알하트란인의 육신에 무작위로 주입된 선주 종족들, 초기만 해도 그들은 여전히 은발과 흑발의 육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 세대가 지닌 지금은 온갖 다양한 머리색과 눈동자 색, 체형과 인상으로 분화되었다. 선주종의 영혼에 영향을 받아 육체가 변모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더 이상 선주 종족의 영혼이라 할 수도 없겠군."

이주 인류의 육신을 입은 건 선주 종족뿐이 아니다. 오크와 트롤 또한 이주 인류와 육체가 뒤바뀌었다. 동종의 육체에 서로 다른 세 인류의 영혼이 들어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 서로 관계하며 섞이고 또 섞였다.

이미 그들의 영혼은 선주종도, 오크나 트롤도 아니었다. 동일한 영적 무의식을 공유하는 하나의 인류가 되었다.

놀랐지만 이내 세이어는 진정했다. 모성의 진화 과정을 떠올려 보면, 이 행성의 여러 원시 인류 역시 자연스레 하나로 통합될 것이었다. 그 과정이 좀 빨라졌을 뿐 딱히 부자연스러운 결과는 아니다.

더 이상 그의 동족이라 할 순 없겠지만, 여전히 저들은 자신의 후손, 자신의 형제자매들이었다.

"그런데 저건 뭐지?"

전지全知의 시야로 그들을 관조하던 세이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양한 민족, 다양한 인종의 인류가 저마다 뭔가를 섬기고 있었다.

그것은 신과 여신이었다.

사람이라면 죽음 앞에서 누구나 초월적 존재를 상상하니 저들이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이리라. 그러나 그 상상 속의 존재가 정말로 '기적'을 내려 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랑의 여신이라며 필라넨스를 섬기고, 그녀에게 기도를 올려 기적을 행하는 교단이 있다.

대지의 여신이라며 레단티의 이름을 부르고, 신성 주문으로 환자를 치유하는 신관이 있다.

천 년 전에는 존재치 않았던 현상이다.

'필라넨스에 레단티?'

세이어는 실소했다. 익숙한 이름이잖은가?

어찌 된 일인가 했더니, 차원 저편으로 건너간 아카식의 파편이 네트워크 시스템과 융합해 별개의 인격체로 바뀐 현상이었다. 신성을 입은 인공 지능이 법칙대로라면 존재할 수 없는 인격신이 되어, 그들의 근원이 되었던 시스템 속성을 기반으로 여전히 자신의 임무를 이행 중이었던 것이다.

'좀 더 먼 차원으로 보낼 걸 그랬나? 아직도 영향력을 미치다니.'

엘디아를 차원 추방시킬 때 너무 심력을 소모한 탓에 나머지는 대충 했더니 이런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보고 있자니 꼭 인류에게 나쁜 것도 아닌 듯했다. 어쨌거나 저 시스템의 존재 목적은 인류를 돕기 위한 것이고, 신성을 띤 지금도 그 성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괴물들이 날뛰는 험한 세상이었다. 저 정도 조력은 있어야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겠지....

"응? 괴물?"

그제야 세이어는 처음 보는 생물체가 대지를 걷고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과 소를 합쳐 놓은 듯한, 미노타우르스라 불리는 괴물이 인류와 싸우고 있었다.

인간과 새를 합쳐 놓은 듯한, 하피라 불리는 괴물이 인류와 싸우고 있었다.

심지어는 좀비, 구울, 흡혈귀 등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괴상한 존재조차도 인류와 싸우고 있었다.

온갖 다양한 형태의, 분명 그가 잠들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괴물들이 엄청난 숫자로 행성 전역에 번성하고 있다. 그것들의 정체를 깨닫고 세이어는 경악했다.

"맙소사...."

버려진 이억 삼천만의 이주 인류, 그 껍데기에 짐승과 죽은 자의 영혼이 들어간 결과였다.

짐승의 영혼이 인류의 육신에 깃들고, 세월이 지나 변화하며 완전히 새로운 종이 되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의 육신에 깃들며 행성 규모의 영적 무의식과 현실의 경계가 약해졌다. 그 탓에 원래는 실험실에서나 일어나던 '잔존 영자 정보체의 현실 반영화 현상', 즉 악령이나 사령이라 불리는 존재가 나타났다.

이성을 지닌 것도 아니고 본능만 가진 것도 아닌, 그야말로 부자연스러움의 극치인 저들은 마물, 몬스터라 불리며 추악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문명을 구사했던 저들이!

허탈감에 잠시 세이어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가 저들을 위해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주 인류는 어찌 되었지?'

아카식 드라이브를 조작해 세이어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거?'

엘프가 보였다.

드워프가 보였다.

분명 영화에서나 나오던 가상의 종족, 그들이 무리를 이루고 지상을 걸으며 심지어 인류보다 훨씬 더 번영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엘프, 그들은 선주 종족의 육신에 들어간 엘드라스인의 후예였다.

비록 육체가 바뀌었다 해도 그 내용물은 틀림없는 엘드라스인이다. 그들의 지식과 지혜 역시 그대로 존재했다. 갑작스러운 천재지변 속에서도 엘드라스의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해답을 구했다.

그들은 사라진 엘디아의 아카식 드라이브를 찾아 끝없이 연구했고, 차원 저편에 존재하는 것까지 알아냈다. 이후 바이오 플랜트 시스템을 이용해 거대한 식물 형태의 차원 간 전이 송수신기를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다. 새 시대를 연 옛 엘디아의 함장, 엘븐하임의 이름을 딴 바이오 아티팩트, 세계수를 통해 그들은 다시 엘디아의 아카식 일부와 접속했다.

세월이 흐르며 선주종의 육신에 들어간 엘드라스인의 모습은 서서히 변화했다. 그 변화한 모습이 엘프와 흡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많은 정보를 잃은 엘디아 시스템이 아카식에 직접 입력된 자신의 가상 육체를 엘드라스인의 육체 기본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이젠 엘드라스인조차도 스스로를 자연스레 엘프라 부르게 되었다.

세계수 엘븐하임, 그리고 전해져 오는 마법의 힘으로 엘프들은 여전히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비록 과거의 영광만큼은 못해도 여전히 이들은 강력한 문명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엘디아는 이들에게 마법 못지않은 새로운 능력도 전해 주었다.

정령술이 그것이었다.

이억 삼천만의 영혼 잃은 육체는 몬스터와 언데드가 되었다. 그렇다면 2억 3천만의 육체 잃은 영혼은?

아카식 드라이브에 의해 이차원에 보내진 그들은 다속성 영자형 에너지체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래는 있지도 않던 정령이란 존재가 세상에 나타나고, 엘디아의 신성에 의해 엘프들의 조력자가 되었다.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군.'

묘한 기분 속에서 세이어는 다른 쪽을 보았다.

드워프, 그들 역시 엘프처럼 선주종과 뒤바뀐 알하트란인의 후손이었다. 저들이 드워프의 모습을 띤 것 역시 엘드라스인과 비슷한 이유였다.

하지만 문명 형태는 엘프와 꽤 달랐다. 일단, 그들은 정말 전설 속 드워프처럼 땅 파는 데 환장한 종족이 되어 있었다.

알 포트의 영향도 영향이지만 실질적 이유가 있었다. 엘디아와 달리 알 포트는 타 차원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엄연히 이 행성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그저 강력한 차원 결계에 싸여 땅속 깊숙이 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알 포트의 아카식에 접속하려면 땅 파고 들어갈수록 편해지는 것이다.

정령의 이용 방법 역시 엘프와 다른 방식이었다.

세계수로 인해 다이렉트로 정령 소환이 가능한 엘프와 달리 드워프는 다른 사용 방식을 터득했다. 대지 공명이라는, 지하의 알 포트 아카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힘을 부여받는 방식이었다.

'그 외에도 상당히 차이가 많네.'

의회제인 엘드라스와 입헌군주제인 알하트란의 제도는 각각의 아카식 드라이브에 반영되었다. 다수의 공리를 중요시하는 엘디아는 자신의 권능을 정령술이란 형태로, 엘프라면 누구나 구사할 수 있게 퍼트렸다. 반면 알 포트는 명확히 관리자 등급을 설정하고, 접속 자격에 따라 권능을 차등 지급한다.

그래서 드워프는 엘프에겐 없는 신관과 종교 개념이 생겨 있었다. 알 포트의 아카식 드라이브, 그 최우선 접속 권한자는 하이 프리스트, 교황이라 불리며 종교와 사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엘드라스인과 알하트란인이 아니었다.

이 행성의 주민인 엘프와 드워프였다.

'그럼 혹시 다른 이들도?'

궁금해하며 세이어는 시선을 돌렸다. 이 행성의 주민에 들어간 이주 인류는 엘프와 드워프뿐이 아니다.

오크와 트롤, 그들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래도 기본 육체 자체의 진화가 뒤떨어지는 만큼 엘프와 드워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제법 수준 높은 문명과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오크의 사나운 흉성은 알하트란인의 이성에 의해 전사의 긍지와 고결함으로 바뀌었다. 현 시대의 오크는 더 이상 미개한 괴물만은 아니었다. 힘을 숭상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나름 문화적 종족이었다.

엘드라스인이 깃든 트롤은 모성의 도인道人이나 선인仙人 같은 삶을 추구하는 주술 문화로 발전했다. 원래부터 무리 짓지 않는 본능을 지닌 트롤이다. 게다가 그들은 흥분이나 감정적 고조로 인해 광폭화하는 습성이 있다. 이를 다스리며 살다 보면 자연스레 정신 수양, 마음을 다스리는 주술이 발전할 수밖에.

단 천 년 만에 세상은 놀랄 정도로 변해 버렸다. 세이어는 멍하니 변해 버린 세상을 바라보고 또 보았다.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문득 세이어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나쁘지 않아."

세상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했다. 동족은 물론이고 자신을 길러 준 이들까지 모조리 멸망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 중 멸망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록 형태는 달라졌지만 모두 대지 위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천 년 만에, 세이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나쁘지 않아...."

☆ ☆ ☆

세상이 흘러간다.

위도 아래도, 오른쪽도 왼쪽도 없는 무한의 공간 속에서 온갖 시간과 공간의 파편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흐르고 또 흐른다. 인류가 번성하고, 엘프가 살아가고, 드워프가, 오크가, 트롤이, 몬스터와 언데드, 정령마저 저마다 살고 또 살아간다.

수많은 시간의 환영 속을 부유하며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아...."

엄청난 이야기였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진실이었다.

문득 제라드에게 들었던, 세이어가 했다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리고 신과 여신의 아버지이며, 인류의 창조자이다.

의미는 모르겠지만 똑똑한 제자라면 뭔가 건지지 않을까 싶어 사부가 특별히 전해 준 말.

-너희들이 믿고 따르는 신이 내 의지에서 비롯되었으며 너희들의 삶과 죽음이 내 손에서 비롯되었다. 이 세상을 조율하고 이끄는 것이 바로 나다. 나는 사람이며, 동시에 신이다.

그렇다. 세이어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신과 여신, 대륙의 모든 '사람'과 대륙의 모든 '현재'를 창조했다. 그리고 분명 사람이면서 신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확실히 거짓말은 아닌데, 좀 과대포장하긴 하셨구먼."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사고 거하게 친 다음 죽어라 수습한 걸 가지고 세상의 조물주처럼 행세하면 안 되지? 너무 뻔뻔하잖아?"

하지만 비웃는 레펜하르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무리 세이어를 비웃으며 긴장을 풀려 해도 이제껏 본 것들이 너무도 엄청났다.

"신성, 아카식... 신의 권능...."

신성, 그것은 전생의 레펜하르트조차도 말년에나 간신히 존재를 느낀 것에 불과한 힘이었다. 당시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다며 상당히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은의 시대 고대인들은 이미 그 힘을 완벽히 손에 넣었다. 천재 중의 천재라 자부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또한 자신의 적은 이미 그 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 너무도 거대한 벽 앞에 그저 한숨만 나오고 또 나올 뿐이다.

"후우...."

그러는 동안에도 시공의 역사는 사방에서 파편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 년 만에 눈을 뜬 세이어는 그의 거주지인 우주의 알을 얼어붙은 북쪽 극지로 공간 이동시켜 인류의 손을 피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 인류를 위해 힘을 썼다. 인류의 뒤에서 조금씩 지식과 지혜를 전해 주고, 또 과도한 고대 문명의 유산을 인류가 손에 넣을 경우 다시 거두기도 했다.

이 모든 걸 혼자 하려니 너무 벅차 몇몇 영리한 이들을 선택해 자신의 사도로 삼기도 했다. 그로 인해 은의 현자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들의 영향으로 세이어의 존재가 세상에 흘러 나가고, 어느새 그는 지상의 열두 신처럼 인류를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인류의 신 세이어를 섬기는 교단 역시 세상에 나타났다.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인류의 모습에 세이어도 처음엔 어색해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적응하기 나름이라던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인류의 기도를 받아들였다. 차원 너머의 다른 아카식 시스템들, 즉 신과 여신처럼 아카식 일부를 그들에게 할애해 '기적'을 하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엘프며 드워프, 오크나 트롤을 대하는 세이어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엔 세이어도 저들을 적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을 가지고 인류와 함께 그들도 돌보려 했다.

하지만 딱히 할 게 없었다.

인류보다 월등한 문명을 지닌 엘프와 드워프는 세이어 없이도 충분히 잘살고 있었다. 인류보다 월등한 육체 조건을 지닌 오크와 트롤도 굳이 그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오직 인류만이 그를 신으로 섬기고, 그의 도움을 갈구했다.

자신의 동족, 그 후예의 섬김을 받으며 점점 세이어의 의식도 변했다. 어느새 그는 오직 '인류만을 위한' 신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갔다. 인류는 계속 번성했다. 그 와중에 아름다운 엘프를 숭배하고 드워프의 손재주를 부러워하고 오크의 육체에 경탄하며 트롤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 모습은 세이어로 하여금 오랜 과거를 반추하게 만들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후손들의 모습에, 엘드라스인을 섬기던 선주종이 겹쳐 보였다. 자신의 트라우마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세이어는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용납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나의 후손들이 보다 높은 곳으로 향하길 원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엘프와 드워프가 득세할 때마다, 세이어가 전해 준 고대 유물을 든 인류가 나타나 그들과 대적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많은 인류와 이종족이 죽어 갔다.

엘프나 드워프의 문명을 부러워해 저들과 손잡는 인간의 왕국이 나타났다. 편협해진 인류의 신은 그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엘프도, 드워프도, 저들과 손잡은 인간의 왕국도 모두 신벌을 받았다.

적을 죽이고, 적과 손잡은 아군을 죽이고, 적을 본받으려는 개척자를 죽이고, 적을 이해하려는 철학자를 죽였다. 죽이고 또 죽였다. 수천, 수만의 죽음은 그에겐 그리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수백 년만 지나도 원상태로 복구될 숫자였다.

"아름다운 숲을 가꾸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아까워해선 안 되는 법이지."

수천, 수만의 죽음을 아까워하다가 훗날 다가올 수십, 수백만의 '인류'의 미래가 헝클어지는 걸 방치할 순 없는 것이다. 아카식의 전지 영역 속 확률 연산을 통해 미래를 예지한 세이어는 이런 자신의 판단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미처 느끼지 못했다.

이는 자연nature의 사고방식이지, 사람human의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걸.

어느새 자신이 아카식 그 자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일만 이천 년이 지났다. 수없이 육체를 바꾸고 영혼을 전이하며 세이어는 인류의 뒤편에서 신으로 군림했다.

세상은 깨끗하고 아름다워졌다. 인류의 신이 보시기에 심히 흡족한 세상이었다.

신은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