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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화

[프롤로그] 환영합니다!

"선택받은 용사님들! 판타지아 세 계에 온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 다!"

그 이변은, 담임선생님이 종례 도중 에 잠시 교실을 비운 사이에 벌어졌

다.

"헉! 엄청난 미녀..."

"몰래카메라?" "대박! 이건 설마...?" "여긴 어디야?"

나를 포함해서 교실에 있던 학생들 은 혼란에 휩싸였다. 호주머니에 넣어뒀던 스마트폰은 먹 통이고, 주위에는 그 흔한 콘크리트 건물은커녕 먼지조차 보이지 않았으 니까. 맑고 푸른 하늘만 한없이 펼쳐 져 있다.

그리고 발아래는... "...어머니."

나는 물리법칙과 중력을 무시한 채 구름을 밟고 있었다.

우리를 '용사'라고 칭한 아름다운 여 자가 우아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 다.

"경계하지 마세요. 저는 대마왕의 야욕으로 위기에 빠진 판타지아 세계 를 구하기 위해 여러분을 소환한 여 신입니다."

여신(女神). 무신론자인 내게는 너무나 허무맹랑 하게 들리는 자기소개.

하지만 그녀의 주장을 부정할 근거

가 부족했다. "이세계 전이라니..." "장난 아니지?" "발밑을 봐. 장난 같냐?" "이 전개 실화냐..."

완벽한 미모의 여성과 허공이란 초 현실적인 장소.

그 둘만으로도 이 상황이 몰래카메 라나 홀로그램이 아님을 알 수 있었 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녹색 별 지구에서 다른 세계로 소환된 것

이다. "판타지가 실존했구나..." "평행세계인가?" "진짜 여신이라니..." "아얏! 꿈은 아닌데." 지나치게 상식을 벗어난 상황 탓일 까?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 등을 접해본 적 없는 녀석들도 현실을 부정하는 대신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자는 분위

기.

우리가 충분히 진정됐다고 판단한

여신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러분은 곧 판타지아 대륙의 한 신전으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그곳 에는 제 신탁을 받은 성녀가 대기 중 이며, 여러분이 판타지아 세계에 적 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겁니다. "여신님!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 요!"

조별과제 때를 제외하면 반에서 눈 에 띄지 않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 며 앞으로 나섰다.

이름이 아마... 오한우.

교복의 명찰을 보고 기억났다. 저렇게 적극적인 태도의 오한우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여신은 상냥한 말투로 그의 질문을 허락했다. "게임처럼 레벨, 스킬, 상태창, 몬스 터가 존재하나요?" "네."

"좋았어...!"

여신의 짤막한 대답을 들은 오한우 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진짜 이상한 녀석.

친하게 안 지내길 잘했다.

"저도 질문요!"

오한우의 뒤를 이어서, 염색한 긴 금 발이 돋보이는 화려한 스타일의 여학 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여기가 판타지 세계면, 소설처럼 중세시대 배경이죠? 왕자와 기사도 있나요?" "있습니다." "와아! 그러면 재미있을지도..."

어린 종달새 같은 명랑한 목소리로

영양가 없는 질문을 던진 녀석의 이 름은 장미연. 가수 지망생으로, 결석을 밥 먹듯 하 는 미모의 여학생이다. 내신 점수를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 로지만, 학교에 있는 시간이 드물어 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손에 꼽을 정 도로 적다.

일단, 학교에서 한 번이라도 문제를 일으킨 시점에 평범하고는 거리가 멀 다고 보지만.

"고귀한 여신님. 저도 질문이 있습 니다."

평범한 오한우와 대조되는 비범한 외모와 분위기를 풍기는 남학생이 가 볍게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훈남을 발견한 여신의 목소리가 오 한우 때보다 부드러워졌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저희 중에 가장 뛰어난 인재가 용 사로 발탁되는 겁니까?"

"아니요." "능력이랑 상관없이 모두가 용사라 는 뜻이군요."

"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힘을 부

여받는 건 아닙니다. 판타지아 세계 의 여러 신(神)에게 인정받고, 그들의 가호를 받아야만 진정한 용사로 거듭 날 수 있습니다." "신의 인정과 가호. 답변 감사합니

다."

"후후! 자신만만한 용사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최강민입니다."

"최강민 용사님. 당신의 맹활약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최강민.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만능형 친구다.

객관적으로 잘생겼고, 공부도 잘하 고, 운동도 잘하고, 게임도 잘하고, 평판도 좋고...

가끔 잘난 척하긴 하지만, 그 유일한 흠마저 인간미로 덧씌워져서 플러스 로 작용한 인간. 일단은 친구이긴 한데, 최강민 주위 에는 늘 여학생들이 바글바글해서 대 화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친구가 맞지? 원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여신님.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되

겠습니까?"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 그 말투만으로도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 다. 저는 이 학급의 반장을 맡은 유보 라입니다." 반장 유보라. 투표가 아닌 성적으로 담임선생님이 고른 반장이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모범생이다.

금송아지처럼 화려한 장미연이 없을 때는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인기인이기도 하다. 정작 본인은 모르지만. "유보라 용사님의 질문은 무엇인가

요?"

"이 세계가 위기에 빠졌고, 저희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갑작스럽게 소환되는 바람에 가족과 선생님이 걱정하고 계 실 겁니다. 연락할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언제쯤 돌아갈 수

있습니까?"

"대마왕을 쓰러트리면, 여러분께 가 호를 내린 신들이 직접 소원을 들어 줄 겁니다."

반장 유보라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 지만, 주위가 시끄러워지는 바람에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저도...!" "여신님. 저도..." "저도 질문이...!" 기세를 탄 나머지 녀석들도 여신에 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 같으면 짜증 나서 중간에 잘랐을 텐데, 여신은 우리의 모든 질문에 성 실하게 답했다. 물론, 뒤로 갈수록 대답이 간결해지 긴 했지만. "더 없나요?"

길고 길었던 질의응답으로 기진맥진 해진 여신이 우리를 즉 돌아보며 확 인했다.

척!

이때까지 쭉 가만히 듣기만 했던 나 는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하세요."

"질문이 아닌 요청입니다. 지구로 돌려 보내주세요."

"조금 전에 설명해드렸을 텐데요? 대마왕을 쓰러트리면 소원을 이루어 드린다고." "저는 용사가 될 마음이 없기에 지 구로 곧장 돌아가길 희망한다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여태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여신 이 처음으로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

다.

나는 확인차 질문했다.

"설마, 지구로 돌려보내는 건 불가 능한가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전 에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수많은 생명이 사는 세계가 멸망할 위기로부터 눈을 돌리고, 평범한 인 생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요?"

"가족에게 걱정이나 끼치는 놈이 어 떻게 세계를 구합니까? 이것이 제 생 각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강한수입니다."

강한수. 사랑하는 부모님께서 심사숙고 끝에 지어주신 나의 이름. 친구들은 생판 모르는 세계를 구하 고 싶어서 안달인 모양이지만, 나는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동네 양아치도 무서워하는 내가 세 계를 구한다고?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 "저분처럼 용사가 되길 원치 않으시 는 분은 지금 말씀해주세요. 강요하 지 않습니다."

"..."

어? 정말로? 나 혼자뿐?

지구로, 가족의 품으로 당장 돌아가 고 싶은 사람이 더 없다는 사실이 살 짝 충격적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친 구마저 있었다. "실화냐..."

나 때문에 살짝 불편했던 여신의 미

소가 회복됐다. "강한수 씨? 위대한 용사님들을 위 한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당신은 이만 퇴장해줘야겠습니다." "아, 네."

충격적이긴 해도 불만은 없다.

지금부터 용사가 될 예정인 친구들 이 내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부모님께 안부 부탁해!"

"내 부모님께도...!"

"한수야! 나도 부탁한다!" "영희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금방 돌아갈게!"

번쩍!

신비한 빛에 휩싸인 나는 불효자식 들에게 손을 흔들며 그 장소에서 이 탈했다.

판타지 세계에서 고향별 지구로!

*

*

*

...그 일이 있었던 뒤로 시간이 얼마 나 흘렀을까?

나는 매연으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녹색별 지구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갔어야 했다. "이 빌어먹을 사기꾼 년이...!"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여신부터 족 치리라! "맛있는 고기!" "인간 고기!" "멈춰라! 고기!" 나는 식인괴물이 넘쳐나는 위험한

세계에 버려졌다.

002화

[1장] 프롤로그(?)

판타지아 세계는 핫도그처럼 생긴 하나의 대륙, 판게아(Pangaea)로 이루 어져 있다. 그런 대륙의 서쪽 끝에는 성역(聖域) 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시작의 도시, 프롤로기나!

그 정중앙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이 오랜만에 시끌벅적했다. "우와!" "굉장해..."

"대박!"

"멋지다..."

신전 한복판에 소환된 고등학생들이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감탄사를 연 발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여신에게 이것저 것 물어본 덕분일까? 그들은 혼란 대신 외국인 관광객 같

은 마음으로 주위를 구경하기 바빴

도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판타지아 차원에 온 용사님들을 진 심으로 환영합니다." "또 미녀..." "여신...?" "성녀님이 아닐까?" "예쁘다..." 남학생들의 반응은 솔직했다. 하지만 여학생들도 그들을 비난할

처지는 못 됐다.

"저 뒤를 봐."

"왜? 헛?! 와아아!" "진짜 잘생겼다..." "왕자님일까?" 학생들을 환대해준 여인의 뒤편에 대기 중인 소년의 준수한 외모에 푹 빠져버린 까닭이다. 이유야 어쨌든, 용사들의 시선이 자 신 쪽으로 모인 걸 확인한 여인이 다 시 입술을 뗐다. "저는 여신님의 신탁을 받고 신전에

서 여러분이 오길 기다리고 있던 성 녀입니다."

자신을 성녀라고, 이름 빼고 대충 소 개한 여인이 한걸음 옆으로 살짝 비

켜섰다.

그러자 여학생들의 주목을 받았던 소년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전설의 용사님들을 뵙게 되어 무한 한 영광입니다. 저는 이 신전의 북부 영토를 다스리는 소드마스타 왕국의 제1 왕자, 알서스 소드마스타라고 합 니다."

"꺅!"

"진짜 왕자님이야!"

"꿈은 아니지?!"

열광하는 여학생들에게 멋진 미소를 날려주는 알서스 왕자. 하지만 그 열기는 갑작스러운 소음 으로 단번에 깨져버렸다.

쾅-!

정숙해야 할 신전의 대문을 부술 기 세로 열어젖히며 등장한 소녀가 커다 란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외쳤다.

"정말 죄송합니다! 숙취로 늦잠 자 는 바람에 그만...!"

"...에테나 공주. 당신의 솔직함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입니다. 뒷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는데요." "예?! 제가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꺄앗?!"

콰당!

귀엽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달려오던 소녀는, 자기 치마를 밟고 시원하게 미끄러졌다.

괜찮은 걸까?

하지만 모두의 걱정을 배신하듯 아

무렇지 않게 벌떡 일어선 소녀는 변 명하기 바빴다. "신전 바닥이 미끄럽네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안 넘어졌으니 틀 림없어요!"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자, 소녀의 얼 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남학생들이 격하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귀여워!"

"귀엽잖아! "공주님, 귀엽다!" "판타지 만세!"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용사들 의 태도에 주위의 기사와 신관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좀..."

그러나 최고책임자인 성녀와 왕자가 잠자코 있었기에 그 이상의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소녀도 처음 겪어보는 무례(?)에 적

잖게 당황한 눈치.

"어... 음. 감사합니다?"

"우와!"

"와아아!"

그녀의 순진무구한 반응을 본 남학 생들이 더욱 광분했다. 이대로는 아무리 기다려도 진행이 안 된다고 판단한 걸까? 성녀의 인내심은 여신처럼 무한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전의 남쪽 땅을 다스리는 아크메이징 왕국의 공주인 에테나 아

크메이징입니다. 알서스 왕자와 함께 용사 여러분의 모험을 지원할 겁니

다."

"오오!"

"와아!"

여기저기서 환호하는 목소리가 들렸

다.

동경하던 아이돌과 수학여행을 떠난 다고 하면 딱 이럴까?

하지만 모두가 이 분위기에 편승한 건 아니었다.

[이름] 오한우

[레벨] 1

[가호] 용사F [저주] - [배당] 0.64

"저주는 뭐지...?"

판타지 소설, 만화, 게임 등을 통달 했다고 자부하는 용사 오한우. 그는 판타지 창작물 '주인공' 처럼 남 들보다 앞서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 설명해주지도 않은 '상 태창'을 자력으로 열어서 열심히 살 펴보는 중.

왕자? 공주?

레벨과 스킬을 올려서 강해지면 얼 마든지 만날 수 있다.

저 멍청이들처럼 열광하며 왕자와 공주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건 시 간 낭비!

오한우는 상태창을 손끝으로 콕콕 찌르며 하나하나 확인했다. "우선... 용사의 가호부터 살펴볼

까."

[용사] ▶용사에게 우호적인 종족의 언어가 자동으로 번역됩니다.

▶사냥과 업적으로 획득하는 경험치가 대폭 증가합니다!

경험치가 대폭 증가한다고? 그 '대폭'의 정확한 효율은 모르겠지 만, 레벨의 한계가 없다면 진짜 사기 적인 효과였다. 언어를 자동으로 번역해주는 기능도 쓸모가 많으리라.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용사의 가호를 받은 경쟁자가 주위 에 많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경 쓰이는 몇 명

이 있었다. "성녀님. 여신께서는 저희에게 신의 가호를 받으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최강민.

이 잘생긴 소년은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현재 상황을 대단히 달가 워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동네에서도... 모두가 그의 외모와 재능을 칭찬해 줬지만, 만족스럽지 않았으니까! 그는 변변찮은 동년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등한 대접을 받는 사 회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 반면에 이 세계는 어떤가? 계급과 능력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불평등한 사회다. 그만큼 노약자에게 불친절하고 험난 한 세계지만, 최강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였으 니까!

그렇기에 그는 확신했다.

판타지아 세계는 나만을 위해 준비 된 무대라고.

"좋은 질문입니다, 용사님. 신의 가 호를 받으려면 신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 기준은 신마다 다르지만, 신들 께서 대마왕을 쓰러트릴 재목(材木)을 찾고 계신다는 건 확실합니다. 답이 되었나요?"

"충분합니다."

최강민은 만족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신이 대마왕 을 쓰러트릴 용사로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었으니까.

반장 유보라가 살짝 신경 쓰이긴 했 지만, 결국에는 여자.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연약한 몸으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신들이 제정신이라면 여자에게 관심 을 가질 리... 『어떤 남신이 흐뭇하게 바라봅니

다는

『성급한 어떤 마신이 흐뭇하게 바 라봅니다.

『어떤 악신이 흐뭇하게 바라봅니 다.

『순진한 어떤 여신이 뭘 보냐고 묻

습니다.

『어떤 수신이 몰라도 된다고 친구 를 위해 조언합니다.

『어떤 신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메 시지의 향연! 당황한 최강민이 성녀에게 물어볼 틈도 없이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이 메시지는 뭐야?" "어떤 신? 신...?" "정말로 신? 이게?" 모든 학생이, 용사가 똑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성녀가 손을 모으며 기도하듯, 노래 하듯 말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신들께서 용 사님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분들 은 지금처럼 신탁으로 의사를 전달하 시지요." "신? 정말로?" "이게 신?"

"하지만 그분들의 관심이 영원하진 않다는 걸 명심해주세요. 여러분이 신의 가호를 획득하길 빌겠습니다." "저기요! 가호를 하나도 못 얻으면

어떻게 하나요?"

학생 중 누군가가 무척 귀찮다는 어 조로 질문했다.

이에 성녀는 황홀한 눈웃음을 지으 며 되물었다.

"제가 쓰레기까지 신경 써야 하나

요?"

꿈과 희망이 가득한 판타지 세계의 모험이 시작됐다!

*

*

*

젠장! 이런 미래가 올 줄 알았다면 열심히 운동해둘걸! 나는 어두컴컴한 숲을 달리고 있었 다.

"헉헉!"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한시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 리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고기! 인간 고기!"

"내 점심!"

"고기! 멈춰라!" 이족보행 하이에나들이 조잡한 무기 를 들고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 다. 사람처럼 도구를 사용하고, 두 발로 뛰며, 심지어 말도 할 수 있는 하이에 나라니? 지구에는 없는 생명체. 내가 고향별 지구로 돌아가지 못했 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탁, 탁, 탁.

가방으로 머리를 보호하지 않았다 면, 놈들의 돌팔매질에 진즉 뇌진탕

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위험해! 진짜 위험해! 나는 마라톤 선수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먼저 지쳐서 쓰러지리 란 건 자명했다. "생각, 생각해라, 강한수...!" 저 하이에나들의 뱃속에 들어가기 싫다면, 마법 같은 기적이라도 써야 한다. 마법(魔法). 여기가 지구였다면 허무맹랑한 생각 이지만, 나는 사악한 여신의 농간으 로 여전히 판타지 세계에 머물고 있

었다.

뭐든 좋으니 제발...!

[이름] 강한수

[레벨] 1 [가호] - [저주] 용사E [배당] 2.56

어? 정말로 튀어나왔네? 내 눈앞에 반투명한 홀로그램처럼 표시된 개인정보.

사악한 여신이 설명해줬던 상태창이 틀림없었다.

여기에 돌파구가 있으리라.

"...아닌가?"

상태창의 저주 목록에 있는 '용사'를 살펴본 내 입에서 허탈한 웃음밖에 안 나왔다.

[용사]

용사에게 적대적인 종족의 언어가 자 동으로 번역됩니다. 사냥과 업적으로 획득하는 경험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나를 판타지 세계에 매장하겠다는 악의로 똘똘 뭉친 저주!

게임 시스템에서 '레벨'의 중요성은

목숨과 동급이다. 그런데 레벨을 올 리는 필수조건인 경험치에 영구적인 페널티를 적용하다니?

판타지 세계의 꽃인 상태창을 포기 하란 거나 다름없다.

"언어 기능도 참..." 이건 저주답지 않게 좋은 효과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꼭 그렇 지도 않았다.

"심장을 줘!"

"고기! 인간 고기!"

"뼈를 씹자!"

저 판타지 하이에나들이 나를 어떻 게 요리할지,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중이었다. 욱신욱신! 이렇게 듣는 것만으로도 내 심장에 무리가 오고 있었다. 교통사고만 조심하면 안전한 지구의 평화로운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 로선 달갑지 않은 번역.

"고기 좋아하는 친구들! 우리 대화

로...!"

"점심이 말했다!" "고기! 말하는 고기!"

"먹고 대화하자!"

저주 덕분에 언어가 통해도 정상적 인 대화는 또 다른 문제였다.

"허억, 허억..."

숨이 가빠지면서 세상이 노랗게 보 이기 시작했다. 내 체력이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암 담한 경보.

이대로 나는 판타지 세계에 뼈를 묻 는 걸까? 어머니, 아버지. 먼저 가는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하세요. 이게 다 빌어먹 을 사악한 여신 때문...

"□□□□□...!" "□□□? □□□□□!"

"□□□!"

그때, 어두컴컴한 수풀 안쪽에서 다 수의 외침이 들렸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피용- 푹!

"악?!"

강렬한 통증에 다리가 꼬인 나는 비 명을 지르며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 다.

화살?! 진짜 아프잖아?!

내 오른쪽 허벅지에 화살이 박힌 게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요정! 요정 고기!" "나무 위! 비겁한 요정!"

"화살이다! 새 점심!" 판타지 하이에나들이 무력해진 나를 놔두고 새로운 사냥감을 향해 일제히 돌격했다. "OO! D!" "고기! 요정 고기!"

"□□□!"

"내 요정! 고기~!"

난장판 속에서 '고기' 다음으로 자주 들리는 단어가 있었다. 요정(Elf). 판타지 세계관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환상의 종족.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 망할 야만인들!" 식인괴물에게 쫓기고 있는 민간인을 공격하다니! 언어가 안 통한다고 해도, 정상적인 사고가 박힌 문명인이라면 이럴 수

없다.

나는 요정과 하이에나들이 싸우는 틈을 이용해서 커다란 나무 뒤편으로 몸을 피했다.

나도 안다.

이 장소는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것

하지만 체력이 고갈되고 다리마저 다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神)에게 기도라도 할까? "아니지."

내가 이렇게 된 원흉이 여신인데 누 구에게 기도한단 말인가?

인간 강한수, 신에게 기도할 바에 죽 음을 택하겠다.

『어떤 신이 빼꼼합니다』 ...이건 뭐야?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살려주세요!" 인간 강한수,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 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003화

『어떤 신이 혼자인 이유를 묻습니 다』 내가 혼자인 이유.

지구에서 잘 살던 문명인을 납치한 빌어먹을 여신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고백 할 순 없다. 내게 특이한 화법으로 질

문하는 이 존재가 사악한 여신의 친 구일 수도 있으니까. "우선 살려주세요!" 화살이 박힌 내 허벅지에서 흘러나 온 대량의 피가 교복을 붉게 물들이 고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아프다! 이게 가장 중 요하다. 『어떤 신이 갈등합니다.

위기에 빠진 사람을 무조건 도와주 는 착한 신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신들은...? 용사들을 도울 성녀가 대기 중인 신 전이 아닌 장소에 불시착한 내 존재 조차 모르는 게 아닐까.

아무튼, 이 신만 홀로 떨어져 있었

다.

"아싸인가?"

『어떤 신이 아싸가 뭔지 궁금해합 니다. 이크! 말실수. 아싸는 무리 밖을 겉도는 사람을 뜻 하는 아웃사이더(Outsider)의 준말이

다.

아싸가 뭔지 설명해주면, 신성모독 으로 천벌 받지 않을까?

이걸 뭐라고 둘러대면 무사히 넘어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 떠올랐다.

"아싸란, 황야를 질주하는 고독한 늑대란 뜻입니다." 고독한 늑대!

굉장히 좋은 어감이다. 『어떤 신이 아싸의 의미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좋아. 잘 넘어갔다.

『어떤 신이 자기는 아싸라고 확신 합니다. 어... 이거 괜찮으려나?

일생일대의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저 좀 살려주세요." 『어떤 신이 너도 아싸냐고 묻습니

다.

그럴 리가!

나는 아싸가 아니라 '인싸'다. 아웃사이더의 반대어인 인사이더 (Insider)의 줄임말.

학급 녀석들이 전부 불효자식이라서 아싸처럼 되고 말았지만, 나는 분명 한 인싸다.

그렇지만,

"저도 아싸입니다. 그래서 동료들은 신전으로 소환되고, 저만 이곳에 떨 어졌어요." 살아남기 위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나는 자존심과 정체성을 버리고 거 짓말을 택했다.

『어떤 신이 가여운 아싸를 도와줄 지 고민합니다.

『어떤 신이 씁쓸한 과거를 회상하 며 갈등합니다』

『어떤 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망설입니다.

『어떤 신이....

이까짓 문제는 신님이 손가락 한 번 튕기면 간단히 해결될 텐데, 너무 깐 깐한 거 아니야? 이대로는 안 된다.

저 판타지 하이에나들이 야만인들을 쫓아내고 나면, 다음은 내 차례일 터.

요정의 화살이 박힌 다리도 내 생명 을 빠르게 좀먹고 있었다. 즉, 시간이 없다. 그러니 슬쩍 운을 떼보자. "아싸끼리 돕고 사는 게 인지상정인 데. 인간이 아닌 신님께는 소용없는 얘기겠지요?"

『어떤 신이 아싸에 귀천은 없다고 합니다』 "그, 그렇죠. 네." 아싸가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 무래도 좋은 것이다! 『어떤 신이 결정합니다』

『어떤 신이 가여운 아싸를 도와주 기로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의문을 내뱉을 틈도 없이 내 신 체에 변화가 생겼다. 스르르. "와우! 진짜 신이었네!"

도와준 신이 매우 섭섭해할 발언이 내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앞에서 다리의 상처와 통증이 말 끔히 사라지는 '기적'을 목격해버렸

다. 이건 물리법칙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현상.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었다. 『어떤 신이 건강해진 아싸를 보며 뿌듯해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 어? 피로도 풀렸네?" 장소는 바뀌었지만, 이 숲에 불시착 해서 하이에나들에게 쫓기기 직전으 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그리고 새롭게 얻은 '힘'을 자연스럽 게 깨닫게 됐다.

[이름] 강한수

[레벨] 1

[가호 아싸F

[저] 용사 [배당] 2.98

아싸의 가호...?" 나를 구해준 신님이 급조한 티가 풀 풀 풍기는 이름. 가호의 상세한 설명도 역시나...

[아

]

▶ 아싸는 죽음을 제외한 모든 상태가 초 기화됩니다.

▶고독한 늑대가 황야를 벗어나면 무서

운 일이 벌어집니다!

황야를 질주하는 고독한 늑대가 무 척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내가 괜히 이상한 말을 해서 가호의 설명도 이상해졌지만, 이해 못 할 수 준은 아니었다.

모든 상태 초기화. 곧 죽을 것처럼 빌빌거리다가 순식 간에 멀쩡해진 내 육체에 일어난 기 적을 뜻하리라.

그리고 두 번째 문장.

내가 '아싸'를 그만두면 배신으로 간 주해서 천벌을 내리겠단다.

"너무하네."

나를 도와줄지 한참 동안 고민할 때 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신님의 배포 는 무척 작았다.

『어떤 신이 아싸만 돕는다고 못을 박습니다. "아, 네."

딱히 불만은 없다.

저 조건 탓에 강제로 아싸가 되긴 했 지만, 어차피 판타지 원주민하고는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저 괴물들 빼고,

사람 사귀긴 글렀다.

"일단 가죠."

탁.

손바닥으로 땅을 박차며 일어선 나 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체력 분배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전 속력으로,

아싸] 내 업보라고 할 수 있는 가호의 유감 스러운 이름이랑 별개로, 그 성능은 확실했다.

체력이 줄어들 때마다 초기화 되면 서 빠르게 회복됐다.

"점심! 도망친다!"

"인간 고기! 대화하자!" "고기! 빠른 고기!"

요정 무리와 싸우던 하이에나들이 도망치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에 불 을 켜고 추적해왔다.

그러나!

"헥헥..."

요정이랑 싸우느라 지친 놈들은 내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어디 그뿐이랴!

"죽어...!"

"고기- 꾸엑?!"

나처럼 요정의 화살에 맞고 퇴각 중 이던 판타지 하이에나를 힘껏 걷어찼 다.

부상자라고? 비겁하다고? 나를 잡아먹으려던 놈들에게 베풀 아량 따위는 없...

사각지대에서 날아온 돌멩이가 무방 비한 내 머리를 힘껏 때렸다.

머리를 보호하던 학교 가방을 잃어 버리며 생긴 허점.

"큭!"

뇌진탕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온 몸이 힘이 탁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일 뿐. [아싸기 신의 가호는 위대했다. 거짓말처럼 뇌진탕이 사라지며 원상 태로 회복된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다 시 달렸다.

『어떤 신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봅니다』 "이거, 굉장한데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이 가호는 육체의 부상과 피로만 회 복해주는 게 아니었다. 모든 상태.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감정마저 억 제해주는 것 같았다.

엄밀히 따지면, 공포에 삼켜지기 전 에 초기화해서 '멀쩡한 상태로 되돌 리는 원리.

이런 아싸의 가호를 요약하면...

생명력 무한!

상태 이상 면역!

기력 무한! 찾아보면 더 있을 것 같지만, 현재만 으로도 굉장했다. 신의 가호는 다 이런 걸까? 완전 사기다. "고기가 이상하다!"

"점심! 내 점심!" "안 죽는다! 고기!"

나를 간단히 포획할 줄 알고 여태 방 심했던 놈들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 했다.

나한테 무슨 원수 졌냐?!

"O! □□...!" "... □..." 수많은 판타지 하이에나가 요정의 화살에 맞고 죽었지만, 요정도 피해 가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놈들의 돌팔매질에 맞고 나무에서 떨어진 극소수 요정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OOOOO!" "OO! □□□□□"

요정들은 식인괴물의 먹이로 전락하 게 생긴 동족들을 나무 위에서 멀뚱 멀뚱 지켜보지 않았다.

휙~ 휙~ 그들은 원숭이처럼 민첩하게 나무를 타며, 나를 쫓아오는 판타지 하이에 나들을 추격했다.

쫓고 쫓는 상황!

가호 덕분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 었지만, 붙잡히면 어떻게 될지 알기 에 등골이 서늘했다. "자식들아! 이만 포기해!" "말하는 고기!"

"고기! 이상한 고기!"

나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판타지

하이에나들은 지옥 끝까지 따라올 기

세.

안 멈추면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협박도 들려왔다.

"흠. 그냥 혀를 깨물까?"

저 식인괴물들에게 생포되어 끔찍한 꼴을 당하기 전에 일찌감치 자살하는 편이 현명할지도?

나는 자해조차 못 하는 겁쟁이지만, 공포심이 억제된 지금이라면 서슴없 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신이 그 정도로는 안 죽는다 고 조언합니다.

"암울한 조언 감사요!"

죽음을 제외한 모든 상태.

한 방에 죽지 않으면 치명상도 초기 화해버리는 모양이다. 그러면 이건 어떨까?

"아찔한 절벽이네."

뚜렷한 대책 없이 무작정 달렸던 나 는 가파른 낭떠러지에 가로막히고 말 았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신이 이 높이라면 죽는다고

축하해줍니다.

진짜 매정한 신이네!

등에 천사의 날개를 달아주길 기대 했던 나는 절벽 아래를 힐끔 내려다 보았다.

휘이잉~

수심이 깊은 강물이라도 흐른다면 살 가망이 있겠지만, 완충재 하나 없 는 맨땅이었다. 이건 100% 사망 확정! 내가 낭떠러지 앞에서 고민하는 사

이, 판타지 하이에나들이 포위하듯 내 주위를 둘러쌌다.

앞에는 절벽.

뒤에는 괴물.

선택지는 둘이었다. 놈들에게 생포되기 전에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여기서 전부 쓰러트리 며 버티거나. 그래. 결정했다.

용사 "자! 모두 주목! 나를 가장 먼저 붙 잡는 녀석에게 가장 맛있는 부위를

줄게!"

"말하는 고기!" "가장 맛있는 인간?!"

"내 고기! 맛있는 부위!"

"고기! 내 거다!" 용사의 저주 덕분에 내 말을 똑바로 알아들은 판타지 하이에나들이 일제 히 달려들었다.

단순한 놈들.

덥석! 덥석! 덥석! 덥석...! 놈들이 회색 털가죽으로 뒤덮인 양 팔로 내 몸을 빈틈없이 끌어안기 시

작했다. 할짝~!

긴 혓바닥으로 내 뺨과 목을 핥는 변 태마저 있었다. "하핫!"

웃음이 절로 나왔다. 판타지 세계에 납치된 내 인생은 어 떻게 돼가는 걸까? 빠르게 미쳐가는 기분이다.

"고기!"

"고기...!"

놈들은 내 고기를 사랑한다.

나도 놈들의 집착이 싫지 않다.

탁! 그래서 다 같이 얼싸안고 마지막까 지 함께하기로 했다.

"고기! 미쳤냐?!" "점심이 떨어진다.!" "미친 고기?!"

"하하하!"

사랑과 우정으로 똘똘 뭉친 우리는 한 뭉텅이가 되어 절벽 아래로 추락 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죽지 않고 멀쩡했다.

강렬한 충격으로 온몸이 납작하게 짓뭉개졌던 것 같지만, 내 기분 탓일 것이다. [아싸]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선 나 는 함께 떨어진 친구들의 상태를 살 펴보았다. "미, 미친... 고기..."

"고기... 내 점심..."

계속 고기를 외쳐대는 이 식인괴물 들의 생명력은 엄청났다. 나는 놈들의 몸뚱이를 완충재 삼았 음에도 아슬아슬하게 즉사만 면할 수 있었는데, 놈들은 단단한 흙바닥에 맨몸으로 처박혔는데도 죽지 않았다. 진짜 괴물이잖아? 그렇다고 몸이 멀쩡한 건 아니었지 만, 저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아직 숨 이 붙어있다는 게 놀랍다.

『어떤 신이 아싸의 생존력에 감탄 합니다』

"별말씀을."

아싸의 가호가 없었다면, 나도 놈들 처럼 산송장이 되었을 것이다. "고기! 팔팔하다!" "인간 고기! 신선한 고기!" "나도 뛰어내린다!" 절벽 위에서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 걸 확인한 몇 마리가 단독으로 낙하 를 시도했다.

퍽!

퍼억!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

동족들이 허무하게 죽는 걸 확인한 판타지 하이에나들은 무모한 짓을 그 만뒀다. "이상한 고기...!"

"요정 고기! 온다!"

"분하다! 고기!"

놈들은 무척 아쉽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포기하고 하나둘 절벽을 떠났다. 자, 그러면... "오! 이게 좋겠네."

덥석.

식인괴물들의 피를 뒤집어쓴 나는 방금 발견한 뾰족한 돌멩이를 주워들 었다. 복습의 시간이다. 여기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판타 지 세계. 재능과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레 벨을 올려서 최강, 최고가 될 수 있

다.

기가 막히게 운이 따라준다면!

"고기..."

"약한 고기..."

"내 점심..."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다. 강자를 상대로 살아남 았으니까. 여태까지 살아남기 바빠서 신경 못 썼던 놈들의 상태창이 내 시야에 잡 혔다.

[이름] 푸른 달의 고기 절단기

[레벨] 3

[가호] - [저

3레벨.

손에 단검을 쥔 식인 괴물 '푸른 달 의 고기 절단기'의 레벨은 나보다 높 았다. 아직 살아있는 나머지 두 놈도 마찬가지. "이름이 낭만적인걸?" 하지만 이놈이 푸른 달빛 아래에서 고기를 절단하는 일은 앞으로 영영 없으리라.

즉. 나는 돌멩이를 치켜들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여신의 설명에 따르면, 롤플레잉게 임처럼 사냥해서 얻은 경험치로 레벨

을 올릴 수 있으니까. 강해질 시간이다.

"고마워. 너희 덕분에 살았어. 그러 니 잘 가." "고, 고기가..." "내가 고기....?"

빡!

꿈과 희망을 담아서 힘껏! 허접한 내 레벨을 올릴 시간이다.

004화

[2장] 가호&저주

눈물겨운 효자 강한수가 절벽에서 뛰어내린 그 시각!

가족보다 판타지 세계가 중요한 불 효자식들은 수많은 신상(神像)이 세워 진 공중정원에 둘러앉아서 성녀의 설 명을 듣고 있었다. "여러분이 강해지는 방법은 크게 2

가지입니다. 레벨과 가호, 상태창을 보유한 존재를 살해해서 얻은 경험치 로 레벨을 올리거나, 신들께 가호를 받는 겁니다." 하지만 모든 용사가 성실하게 듣고 있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학원에서 선행학습 해온 학생처럼 다 안다는 듯이 거만한 태도를 보이 는 용사 오한우. "신이시여. 저에게 가호를..." 신들에게 가호를 받기 위해 끊임없 이 말을 걸며 친해지려고 애쓰는 용

사 최강민.

그밖에도...

"슬슬 졸린걸." "화장실은 어디죠?" "밥은 언제 주려나~" "뭔 말인지 도통..."

다양한 이유로 집중하지 못하는 용 사가 많았다.

하지만 성녀는 이런 산만한 분위기 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계속했 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무래도 상 관없다는 듯이.

"명심하세요. 가호를 받았다고 끝이 아닙니다. 신들께서 항상 여러분을 지켜보시니까요." "성녀님! 질문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신들께서 저희를 온종일 지켜본다. 는 겁니까?"

기계처럼 줄줄 읊는 성녀의 설명 도 중에 손을 들며 질문한 용사는 반장 유보라였다.

반장.

판타지아 세계로 넘어오면서 무의미 해진 직함이지만, 그녀가 학급 반장

을 맡게 된 이유까지 사라진 건 아니

그녀는 성실한 모범생.

지금도 성녀의 설명을 하나도 놓치 지 않으려고 노트에 꼼꼼히 필기하며, 듣고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의문점이 생기자마자 학교 에서처럼 바로 질문했다.

"네. 그렇게 말했습니다." 말이 끊긴 성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

"볼일을 보거나 씻을 때도 지켜본다 는 겁니까?"

"예외는 없습니다." "그런...!" "용사님. 그분들은 인간이 아닙니 다. 저속한 인간의 잣대로 신을 재단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떤 남신이 우리는 신경 쓰지 말 라고 합니다.

『어떤 신이 저속한 볼거리에 관심 없는 척합니다.

『어떤 풍신이 공기나 다름없다고 주장합니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그런 유보라의 걱정을 비웃듯, 화려 한 미모의 용사 장미연이 딴죽을 걸 었다. "반장. 보여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 잖아? 물론, 관람료로 가호를 받아야 겠지만." 판타지 세계의 진짜 공주님에게 꿀 리지 않는 외모와 매력의 소유자다운 자신감.

『어떤 악신이 엄지를 치켜들며 칭 찬합니다』 『어떤 신이 흐뭇해합니다.

『어떤 풍신이 명쾌한 판단을 높이 평가합니다』

장미연의 발언을 들은 신들의 반응 은 나쁘지 않았다.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어떤 토신이 메마른 사막 같은 시 선을 보냅니다』 『어떤 신이 불편해합니다. 『어떤 수신이 달갑지 않게 바라봅 니다』 그렇게 호불호가 갈렸지만, 장미연 이 다른 용사들보다 한걸음 앞서간 건 틀림없었다.

그녀의 상태창이 증명해줬다.

[이름] 장미연

[레벨]1

[가호회 용사F 매혹F

[저주] -

[배당] 1.03

"야호! 가호다!"

장미연이 양팔을 벌리며 다 들으란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뭐...." "이런!"

힘에 굶주린 두 남자, 오한우와 최강 민이 선두를 빼앗긴 패배자 같은 표 정을 지었다.

바로 그 직후, 살랄라~

"킁킁." "이건 무슨 향기지?" "꽃향기? 킁킁."

"진짜 좋은 냄새네."

용사들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갑작 스럽게 몰아닥친 신비한 향기의 출처 를 찾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묘한 향기군..."

용사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성기 사와 신관들도 그 향기에 취하긴 마 찬가지. "후후!" 장미연은 그들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 신비한 향기를 퍼트린 원흉이 그 녀였기에.

매혹)

▶ 당신의 몸에서 매혹적인 체취가 항상 발산됩니다.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지배할 확률 이 대폭 상승합니다!

전투에 도움 안 되는 효과지만, 소환 된 순간부터 '로맨스 판타지'를 기대 했던 용사 장미연에게는 최고의 가호 였다.

취미에 딱 맞는다고 할까!!

『어떤 신이 약속을 꼭 지키라고 신 신당부합니다』

"물론이죠."

신에게 관람료를 받은 그녀는 지구

의 연기학원에서 배운 뇌쇄적인 포즈 를 취했다. "오오..."

"최고..."

용사 중 절반이 정신 못 차리고 해롱 거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성녀가 칭찬이 담긴 어 조로 말했다.

"장미연 용사님은 벌써 이해하신 듯 하군요. 훌륭하십니다." "호호! 칭찬 감사합니다." 최초로 가호를 획득한 용사의 이름

을 머릿속에 담은 성녀가 진지한 어 조로 경고했다. "장미연 용사님. 매혹의 가호를 슬 슬 멈추세요." "어머! 멈추는 방법을 모르겠는데요

장미연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순진한 어떤 여신이 불순한 교제 를 싫어합니다. "이런... 이미 늦었군요." "뭐가요? 제 매력에 푹 빠진 남자들 이요?"

"상태창을 다시 보세요." "제 상태창이 어쨌... 어?! 이게 뭐야 아아!"

방금까지 미소가 만발했던 장미연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매혹의 가호에 사로잡혔던 용사들도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상태창을 훔쳐 보았다.

[이름] 장미연 [레벨] 1

[가회 용사F 매혹F

[저주] 응징F [배당] 1.83

아무것도 없었던 공란에 저주가 새 롭게 추가되어 있었다. "응징의 저주?"

"저주라고?" "우리는 용사인데?" "저주가 왜...?" 지금까지 가호만 생각하고 있었던 용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악마라도 나타난 걸까?

성녀는 혼란에 빠진 장미연을 다그 치듯 말했다.

"신은 여러분께 가호만 내리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용사에 게는 저주도 내립니다."

"그런 얘기는 못 들었어요!"

여전히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소녀가 항의했다. "당연합니다. 지금부터 설명할 예정 이었으니까요."

"이건 무효예요! 전 몰랐다고요! 그 러니 얼른 지워주세요!"

고개를 하늘 높이 치켜든 장미연이 신에게 청원했지만,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K응징]

당신이 받는 모든 피해와 악평이 대폭 증가합니다. ▷불순한 교제를 시도할 때마다 매서운 응징을 받습니다!

그 저주의 효과는 판타지 로맨스를 꿈꾸는 장미연에게 치사성 맹독이나 다름없었다.

응징] "꺅~?!"

장미연은 누가 때리지 않았음에도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자기 엉덩이 를 열심히 문질렀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주 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매혹]

살랄라..

가호도 바로 해제했다. 다시 쓸 엄두 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아팠으 니까!

『순진한 어떤 여신이 빤히 쳐다봅 니다. 『어떤 신이 죽은 척합니다. 『어떤 풍신이 휘파람을 붑니다.

『어떤 남신이 딴청부립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소녀를 내려다 보며, 성녀가 끔찍한 사실을 알려줬 다.

"한 번 받은 가호와 저주는 죽어도 풀리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용사 장미연은 망연자실했다. 이런 고통스러운 저주를 끌어안고 평생? 차라리 지금 죽는 편이 낫지 않 을까? 그녀가 절망하든 말든, 성녀는 본분 에만 충실했다.

"가호와 저주는 등급이 오를수록 효 과가 상승합니다. 그리고 절대 내려 가지 않습니다." "자, 잠깐! 잠깐만요! F등급 저주도 죽을 만큼 아픈데, 등급이 올라가면 더 아파진다고요?!"

"네."

"아아! 나는 끝났어... 완전히 끝났 어...!"

단시간에 천국과 지옥을 연달아 경 험하고 넋을 잃은 장미연. 그녀의 처량한 모습이 안타까웠던 걸까?

여태까지 쭉 침묵하고 있던 에테나 공주가 끼어들었다. "용사님! 포기하지 마세요! 저주는 가호로 상쇄할 수 있어요. 레벨이 오 르면 몸과 마음이 강해져서 통증도 완화되고요." "그,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이에요!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다행, 다행이다..." "예쁜 용사님! 힘내세요!" "네."

"아침마다 기도할게요!"

"네? 네."

"옆에서 항상 응원을...!" "네! 네! 알겠으니 그만 말씀하셔도 돼요!" "앗!!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죄송 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지는..." 장미연이 얌전해지면서 성녀의 설명 은 급물살을 탔다.

아니, 몸소 시범을 보여준 그녀의 희 생 덕분에 자세한 설명이 불필요해졌

다는 게 좋으리라.

해야 할 일을 마친 성녀가 몸을 돌리 며 작별을 고했다.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보 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알서스 왕자가 여러분을 인솔할 겁니다."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겨주셔서 감 사합니다, 성녀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성녀가 고고한 뒤태를 뽐내며 공중 정원을 떠났다. 그녀를 배웅한 알서스 왕자가 용사 들을 향해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외

쳤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환영 만찬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부담 없이 즐겨주 십시오!"

"와우!"

"드디어!"

배고팠던 용사들은 누구라 할 것 없 이 환호했다. 알서스 왕자는 식당까지 직접 그들 을 안내하며 앞으로의 일정을 차근차 근 설명했다. "본격적인 훈련은 내일부터 진행됩 니다. 검술은 저에게. 마법은 에테나

공주님께. 용사님들은 둘 중 원하시 는 분야를 자유롭게 선택하시면 됩니

다."

"둘 다 받아도 됩니까?" 용사 최강민이 자신만만한 말투로 질문했다.

"물론입니다. 힘들면 중도에 포기하 셔도 됩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믿겠습니다."

알서스 왕자는 의욕적인 용사에게 미소로 회답했다.

그 직후, "둘 다 빠져도 되나요?" 거만한 용사 오한우가 찬물을 끼얹 듯 물었다. 알서스 왕자가 질문의 의도를 모르 겠다는 얼굴로 답했다. "판타지아 대륙 최고의 검술과 마법 이 필요 없으시면 그렇게 하셔도 무 방합니다." "오! 그러면 빈 훈련 시간에 신전 밖 으로 나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좋았어!"

판타지 박사라고 자부하는 오한우에 게는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훈련?

사기적인 치트키 능력이 없는 엑스 트라들이나 하는 짓이다. 판타지 주인공인 자신은 귀엽고 사 랑스러운 동료들을 모아서 유적과 미 궁을 탐색할 계획.

"오한우 용사님. 다른 질문이 있으 십니까?"

"없습니다. 흐흐."

『유치한 어떤 주신이 짙은 흥미를 보입니다.

인간의 적응력은 굉장했다! 지구에서는 바퀴벌레도 무서워서 못 잡던 인간 강한수. 그러나 지금은 망설임 없이 판타지 하이에나들을 경험치로 치환했다. 상태창은 그대로였지만. "뭐가 문제지?"

여전히 1레벨! 레벨에 변화가 없었다. 용사의 저주 때문이거나, 원래 레벨 업이 힘들거나, 둘 다이거나! 원인이 뭐든 간에 안 좋은 소식이란 건 틀림없었다. "고독한 늑대 같은 신님. 쓸만한 정 보 없어요?"

『어떤 신이 아싸라고 부르길 요구 합니다. "...아싸 신님. 쓸만한 정보 없어

『어떤 신이 가르쳐줄 수 없다고 못 을 박습니다. "아, 네."

가호 외에는 정말 도움 안 되는 신님 이네.

하지만 그 유일한 장점이 너무 좋아 서 내가 참는다.

『어떤 신이 뛰기만 해서 따분하다. 고 투덜댑니다. "저도 그래요."

『어떤 신이 다른 일도 해보라고 제 안합니다』

"사람부터 찾고요."

판타지 괴물들을 따돌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싸] 사기적인 가호 덕분에 식사와 휴식 이 불필요하지만, 여기는 여전히 위 험하니까. 그래도 우호적인 인간의 마을을 찾는 중이다. 『어떤 신이 하품합니다. "큰일인데..."

여기는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

인간을 한 방에 죽이는 강력한 괴물

이 틀림없이 존재하리라. 회복할 틈을 안 주면 사기적인 가호 도 소용없다.

"신님."

『어떤 신이 안 도와준다고 못을 박 습니다. "아, 네." 그렇기에 의식주와 상관없이 안전한 인간의 터전을 거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지도까진 바라지 않고, 내가 가야 할 방향만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 데...

의외로 해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인간 냄새!" "고기! 인간 고기!" "배고프다! 고기!" 죽은 동족들의 지독한 피 냄새에 이 끌려온 판타지 하이에나들. 나는 수풀에 숨어서 놈들이 지나가 길 기다렸다.

『어떤 신이 힘없는 아싸가 편안히 잠들길 빌어줍니다』 신에게 기도를 받다니! 굉장히 황당 한 영광이네!

옆에 있었으면 그 가벼운 턱주가리 를 날려줬을 것이다. "아싸 신님. 저도 싸우면서 조금은 강해졌습니다."

슥 판타지 하이에나 '푸른 달의 고기 절 단기의 손에 쥐어져 있던 전리품을 만지작거렸다.

스틸레토(stiletto).

찌르기에 특화된 단검. 하지만 전 소유자에게 절단기'란 흉 흉한 이름을 붙여줄 만큼 칼날도 예 사롭지 않은 특제품이었다.

"내 인생도 참 기구하구나."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대학입 시 준비로 바쁜 평범한 고등학생A였 는데.

족보를 알 수 없는 판타지 하이에나 들이랑 목숨 걸고 싸워야 할 팔자가 됐다.

인간의 주거지.

온종일 고기를 찾아다니는 놈들이라 면 알고 있으리라.

『어떤 신이 아싸의 명복을 빌어줍 니다』

"안 죽을 거라니까요."

아직 들키진 않았지만, 이리저리 수 풀을 헤집으며 수색하는 놈들이랑 조 금씩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

그래서 놈들에게 발각되기 전에 먼 저 기습할 생각인데, 사기적인 아싸 의 가호만 믿고 돌격하는 건 너무나 어리석다. 나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구의 문화 시민이니까. 그 지혜를 활용할 생각 이다. 툭, 툭 단검을 써서 근처에 보이는 덩굴을

적당한 길이로 잘랐다. 이어서 야구공 크기의 단단한 돌멩 이를 주워들었다. 『어떤 신이 두 눈을 게슴츠레 뜹니

다』

"원심력이라고 아세요?"

판타지 세계에서 판타지만 쓰라는 법은 없잖아? 야만적인 판타지 괴물들에게 과학의 힘(물리)을 보여주겠다.

005화

부우웅~

나는 돌멩이를 매단 덩굴을 쥐고 빙 글빙글 돌렸다.

"읔!"

이거, 생각보다 힘든데?! 무거운 돌멩이가 도는 방향으로 몸 이 계속 쏠리는 바람에 무게중심을

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싸]

다행스럽게도 가호의 효과 덕분에 후들거리던 다리가 빠르게 안정됐다.

잠깐이지만. 편안, 불편, 편안, 불편... 지치고 회복되길 계속 반복했다.

아싸의 가호를 활용하는 방법을 이 제 좀 이해했다고 할까? 절대로 죽지 않을 만큼만 무리하며 싸우면 될 것 같다.

"고기!"

"고기다!"

부우웅~ 돌멩이가 빙빙 돌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발생했고, 그걸 들은 판타지 하이에나들이 몰려왔다.

"...해볼까."

공포는 없었다.

머리로는 무서우니 도망치자고 생각 하지만, 몸은 잔떨림조차 없이 평온 그 자체.

"고기! 고- 꾸엑?!"

무턱대고 덤비는 놈의 머리통을 돌 멩이로 후려쳤다.

빠각! 원심력이 실린 통렬한 한 방에 고꾸 라진 판타지 하이에나는 다시 일어서 질 못했다.

"위험! 아프다!"

"곧 지친다! 고기!"

"돌! 돌을 던져!" 판타지 세계의 하이에나들은 굉장히 비열하고 성가셨다!

놈들은 동족이 허무하게 당하는 걸 보자마자 전략을 수정했다.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후, 바닥에 굴 러다니는 돌을 주워서 내게 강속구로 던져댔다.

퍽! 퍽! 퍽! "악?! 비겁한 새끼들!" 맞을 때마다 무지막지하게 아팠지 만, 꾹 참았다.

이 새끼들, 머릿수도 많으면서 너무 얍삽한 거 아니야?!

나는 무방비하게 맞으며 버티다가 지친 시늉을 했다.

"인간 고기!" "내 저녁...!"

"내가 먼저다!"

지능은 있지만, 인내심이 부족했던 놈들은 내가 빈틈을 보이자마자 돌을 내려놓고 달려들었다.

본능에 참 솔직하네.

연기를 멈추고 돌멩이를 다시 힘차 게 돌렸다.

"고기! 고기- 켁!" "뼈를 씹- 끄악?!" 시작부터 일제히 돌격했으면 위험하

지 않았을까? 전략은 나쁘지 않았지만, 몸을 사리 며 돌팔매질하느라 지친 놈들은 내 상대가 못 됐다. 시간은 나의 편! 내 앞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주절주 절 떠든 것도 패착이었다. 다 알아듣거든?

"고기! 무서운 고기!"

"어딜 도망가!"

"말하는 고기다?!"

빡!

도망치려는 마지막 녀석의 뒤통수에 돌멩이가 명중했다. 이걸로 상황 종료.

뇌진탕으로 한 방에 죽은 녀석도 있 지만, 대부분은 실신하거나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휴우..."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매연으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고향 별 지구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당장 은 살았다는 게 중요.

『어떤 신이 아싸의 평가를 아주 조 금 상향합니다.

"굉장히 짜네요!" 사기적인 신의 가호 덕분에 살았지 만, 빈말로라도 평가가 너무 짠 것 아 닙니까?

곧바로 품에서 단검을 꺼낸 나는 경 험치 작업을 시작했다. "살려 끄륵?!"

푹!

지는 쪽이 먹히는 야만적인 세계에 서 후환을 남길 생각은 없다.

"고기? 왜...?"

그래도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장 멀쩡 한 한 마리를 남겨뒀다. 나는 놈의 반격에 대비하여 거리를 살짝 벌린 후, 언제든 녀석의 머리통 에 돌멩이를 던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어이. 움직이지 마."

"말하는 고기?!"

"아프기 싫으면 인간들이 사는 곳을 말해." 무의미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놈이 내게 앙심을 품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는 보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다른 하이에나를 또 생포해서 확인 하는 식으로 정보의 정확도를 올리면 되기에.

이건 그 시작일 뿐이다. 『어떤 신이 상당히 건방진 아싸가 됐다고 합니다. "...남자는 원래 그래요." 작은 승리에도 기고만장해지는 것이 수컷의 본능이다. "남자? 수컷?" "너는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인간들

이 사는 곳은 어디지?" "저쪽이다." 판타지 하이에나가 손끝으로 해가 지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긴, 서쪽인가? 판타지아 차원의 자연법칙을 모르니 동쪽일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내가 지금부터 가야 할 방향 이란 건 틀림없다.

다음 질문.

"너희는 무슨 종족이냐?" "고기는 바보?"

"머리통 깨지기 싫으면 묻는 말에나 대답해." "놀." "놀이라..." 예전에 잠깐 즐겼던 게임에서 이 놈들이랑 비슷하게 생긴 폴리곤 (Polygon)을 본 것 같다.

그래서 용사의 저주가 놀이라고 번 역한 건가? 아니면 종족의 이름이 정 말로 놀?

"고기! 살려줘!"

"하여간 가르쳐줘서 고맙고, 잘 가 라."

빡.

성실히 대답하면 살려준다고 약속한 적은 없으니 문제없다!

『어떤 신이 의심 많은 아싸에게 놀 이라고 알려줍니다. "제가 알아냈거든요?"

놀(Gnoll). 내 머릿속에 든 판타지 지식에 따르 면, 놀은 하이에나를 닮은 이족보행 괴물이다. 알면서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 는 3D와 2D, 현실과 가상의 비주얼 차이 때문이다.

상업성을 추구한 전체연령 게임의 놀은 '멍멍이'처럼 귀엽게 생긴 편이 었으니까. 반면, 나를 볼 때마다 고기를 외쳐대 며 달려온 진짜 놀은 하이에나의 탈 을 쓴 살인귀! 아름다운 판타지 세계의 토종생물다 운 풍모였다.

『어떤 신이 놀의 새끼는 귀엽다고 조언합니다』 "오우! 쓸모없는 정보제공 감사합니 다!"

나는 놀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부지

런히 달렸다.

레벨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판타지 창작물은 산업혁명 이전의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유?

그 시대가 인류사에서 가장 낭만적 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의 백마 탄 왕자님이 추악한 약혼

자가 쏜 총에 맞고 어이없게 죽어버 리면 곤란하잖아? 먼치킨 주인공이 방앗간에 들어간 사이에 핵미사일이 떨어지면 이야기 가 진행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 마법이 실존하는 진짜 판타지 세계 의 문명 수준은 어떨까? "요강이라니..." "샴푸와 린스가 없어." "나는 좋았는데?" "너도? 진짜 최고더라!"

근사한 만찬을 대접받고 판타지 세 계에서 하룻밤을 보낸 용사들의 평가 는 극적으로 갈렸다.

"정말 예뻤지."

"또 해주면 좋겠다..."

"꿈만 같더라." 난생처음 목욕시중이란 걸 받아본 미성년자들은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 관없음!'이란 태도였다. 달관한 현자 같다고 할까? "몸이 찜찜해." "양변기가 아니야..."

"안 씻은 기분." 하지만 비위가 약한 용사들은 피할 수 없는 생리현상을 처리한 뒤부터 표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왜? 좋은 점도 있잖아?"

"약간은 감수해야지." "중세시대니까." 아침에 안마해준 미소년, 미소년들 을 떠올린 일부 용사들이 판타지 세 계를 옹호했다. 결론, 장단점이 있음! 일단은 그 정도로 판타지 첫날을 평

가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불평한다고 당장 개선되는 것도 아 니었으니까.

"용사님들. 밤새 편안히 주무셨습니 까?"

"네!"

"최고였습니다!"

"좋았어요!"

각방에서 가벼운 아침을 먹고 모인 용사들에게 인사한 알서스 왕자가 오 늘 일정을 진행했다. "검사의 길을 추구하는 용사님들은

지금부터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시면 언 제든 바꾸실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 지 마십시오."

왕자님. 마법은요?" "마법은 어디서 배우나요?"

용사들의 질문을 받은 왕자가 쓴웃 음을 지었다.

"어젯밤에 에테나 공주님이 살짝 과 음하신 모양입니다. 성실한 분이니 금방 오실 겁니다."

"아, 네."

"그렇군요."

마법을 배우고 싶은 용사들은 남고, 그 외의 용사들은 알서스 왕자의 뒤 를 따라갔다. 그리고 딱 한 명.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신나게 뛰어가는 소년이 있

었다.

"흐흐!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신전 밖으로 향하는 용사 오한우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판타지 주인공에게 어울릴 법한 특 별한 가호'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름] 오한우

[레벨] 1

[가호] 용사F 특별F

[저주] -

[배당] 1.17

판타지아 차원의 신들도 이미 아는 것이리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 소환한 용사는 많지만, 강력한 대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진정한 용사는 단 한 명뿐이 란 것을.

이게 바로 그 증거였다.

(특별) ▶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운명의 주인공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이 특별한 가호를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특별한 운명의 주인공!! 답이 딱 나왔잖아? "최강민은 자기가 여전히 최고인 줄 알겠지? 열심히 해라. 그러면 주인공 라이벌A 포지션쯤은 얻을 수 있을 테 니. 하하하!" 신전을 빠져나온 '주인공' 오한우는 거친 사내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건

물로 힘차게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떤 용무로 용병 길 드를 방문하셨나요?" 귀여운 안내원이 영업용 미소로 초 면의 소년을 환대해줬다. 오한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 며 씩씩하게 답했다. "용병 등록을 하러 왔습니다!" 용병! 수많은 판타지 주인공이 채택한 정 석 루트.

어딘가에 소속되어 얽매이기 싫다면 필수라고 해도 좋을 직업이다.

그때, 경쾌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특별] "이봐요. 여기는 당신 같은 햇병아 리가 오는 곳이 아니에요. 일찍 죽고 싶나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허리에 검을 찬 미소녀가 있었다. "앗! 이 전개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당장 고 향으로 돌아가요. 당신처럼 객기로

용병이 됐다가 죽은 소년을 여럿 봤 다고요."

좋았어! 오한우는 가호의 효과가 제대로 발 동했다고 확신했다.

오지랖 넓은 이 용병 미소녀는 정체 를 감춘 일국의 공주나 공녀가 틀림 없으리라.

미소녀를 발견한 주인공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돌아가기 싫은데요?" "정말..."

"영 걱정되시면 한 번 동행해보시 는 게 어떤가요?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안 그런가요? 자주 겪어보셨을 것 같은 데..."

지구에서는 여학생들 앞에서 제대로 말도 못 하던 오한우.

[특별]

그러나 이 특별한 가호가 그에게 자 신감을 듬뿍 심어줬다. ".....한 방 먹었네요. 좋아요."

역시!

쥐뿔도 없는 용사 오한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치한 어떤 주신이 배꼽을 단단 히 붙잡습니다.

*

*

*

"말하는 고기!"

"고기! 강하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정말 처절하게 놀과 싸워 서 이겼지만, 이기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사냥이 간결해졌다.

그렇다.

이건 단순한 사냥. 손쉬운 먹잇감이었던 나는 하룻밤 사이에 능숙한 사냥꾼이 되었다. 내게 숨겨진 재능이...? 그럴 리가.

아싸] 가호가 없었다면 절대로 이만큼 발 전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죽음을 맞이 했을 것이다. 치명상만 몇 번이었더라? 무한히 회복하는 나의 승리는 기정

사실에 가깝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 히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 이때마다 후회하고 반성하면 서 '싸움'을 배웠다.

"고기! 고- 꾸엑?!" "이 녀석들, 의외로 정직하단 말이

지."

사고가 단순하기 때문일까? 내가 지금까지 마주친 놀들은 거짓 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굉장히 허술했다.

"서쪽에 안 산다! 고기!"

"고기 마을! 저기에 없다!" "마을! 저쪽은 멀다!" 인간의 마을이 서쪽에 있다. 수많은 놀에게 물어보며 확인했으니 틀림없으리라.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모르지만, 인간의 마을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건 확실했다.

『어떤 신이 무척 유감이라고 투덜 댑니다.

"제가 죽길 바라세요?"

『어떤 신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

다고 합니다. 심한 말을 막 하시네!

그래도 고기만 찾는 놀보다는 훌륭 한 대화상대다.

"고기다!"

"인간 고기!"

놈들이랑 밤새 투덕거리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놀은 후각이 발달해서 완벽히 따돌리기란 불가능했다.

내 몸에 묻은 놀의 피.

이걸 싹 씻어내기 전에는 끊임없이 몰려오리라.

"하아... 이놈들은 죽여도 죽여도 끝 이 없네."

내 몸에 달라붙은 놀의 피 냄새가 끊 임없이 새로운 놀을 불러들이고 있었 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나는 절대로 지치지 않는 몸. 포위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 있다.

푸욱!

나를 여전히 사냥감 취급하는 놀들

의 머리통에 '푸른 절단기'를 박아줬

푸른 절단기. 이 단검의 이전 주인 '푸른 달의 고 기 절단기를 기리는 의미로 붙인 이 름이다.

"커억?!" "켁!" "이상하단 말이지. 너희는 어떻게 레벨을 올렸냐?"

[이름] 강한수

[레벨] 1

[가] 아싸F

[저용사E [배당] 3.15

놀을 아무리 잡아도 레벨이 전혀 오 르질 않았다.

뭐가 문제인 거지? 『어떤 신이 불안해합니다.

성격 나쁜 신께서 뜬금없이 이상한 메시지를 띄우셨다. 그래서 불안한 이유를 물어보려고 할 때, 저 멀리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가 들렸다.

"... □□□□□." "OO OOOO." ..또 요정인가? 나는 요정의 화살을 경계하며 천천 히, 목소리의 근원지로 살금살금 접 근했다. .....아!" 사람이다!

우락부락한 남성 검사 둘과 늘씬한 여성 궁수로 구성된 2남 1녀 용병 파

티.

내가 밤새도록 찾아 헤맸던 판타지 원주민이었다. "OOO?!"

"□□□□□!" "□□□□?"

한 박자 늦게 나를 발견한 용병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잠깐만요! 저는 마을을... 아! 말이 안 통하지." 그러면 이판사판이다! 쏙

푸른 절단기를 호주머니에 넣고 양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

폭력 반대!

이 외계인은 사람을 물지 않아요!

"□□□...?" " ?" " ." 용병들이 천천히 무기를 내리기 시

작했다.

좋았어! 자신감이 생긴 나는 손끝으로 내 가 슴을 가리키며 외쳤다.

"강! 한! 수!"

내 보디랭귀지(body language)가 판 타지 야만인들에게 통하길 기도해보

『어떤 신이 조금 웃겼다고 칭찬합 니다.

정말 성격 나쁜 신님이다.

006화

"강한수. OOO." "□ 강한수 □□ □□□□?" " " "...나는 이과라고." 제2외국어는 내 평균 성적을 갉아먹 는 취약과목이었다.

차라리 판타지 세계의 미적분이나 화학식을 배우라고 하면 잘할 자신 있는데.

『어떤 신이 아싸답지 않다고 못을 박습니다』 "네네." 『어떤 신이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 라고 투덜댑니다 "신님. 친해지면 말투가 가벼워지는 법이에요."

『어떤 신이 친한 척하지 말라고 못 을 박습니다.

"..."

드디어 사람을 만났지만, 내가 제대 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여전히 이 신(神)밖에 없었다. 슬프구먼. 그래도 우호적인 인간들을 만나서 한시름 놓았다.

상태창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단히 무장한 용병들이 1레벨 최약체인 나 보다 약할 리 없으니까. 게리, 콜, 미사.

동행하게 된 용병들의 이름이다. " ."

"□□□□!"

"O

"

선두에서 걷는 털북숭이 중년 남성 의 이름은 게리.

이 파티의 리더다. 등에 멘 커다란 검을 힘든 기색 없이 드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괴력의 소 유자로 짐작된다.

"코끼리도 베겠네." 그의 무기는 베기에 특화된 양날의 대검, 브로드소드(broad sword)와 흡 사했지만, 두께와 길이가 완전히 달 랐다.

이것이 판타지 스타일! 초대형 괴물을 사냥하려면 저 정도 는 돼야겠지. "게리는 얼마나 강하려나..."

『어떤 신이 매우 약하다고 못을 박 습니다.

신님이랑 비교하면 당연히 미세먼지 같은 수준이죠.

"강한수."

"왜요?"

"OOO OOO! 하하!"

우락부락한 게리보다 체격이 조금 작고, 웃음이 많은 이 용병 청년의 이 름은 콜. 가죽 허리띠 좌우에 평범한 크기의 검을 한 자루씩 차고 있다.

가벼운 한손검과 무거운 양손검 의 장점을 고루 갖춘 바스타드소드 (bastard sword).

판타지의 로망 중 하나인 쌍수를 다 루는 걸까?

두고 봐야 알 것 같다.

톡톡.

"네?" " ." 내 어깨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부른 묘령의 여성은 미사. 등이 아닌 허벅지 좌우에 화살통을 차고, 등에는 상당히 큰 석궁을 메고 있다. 이 파티의 유일한 원거리 공격수.

석궁의 크기만 보더라도 사람을 상 대하는 용도가 아니었다. "미사. 무슨 말인지... 아!"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기쁨의 탄성을 터 트렸다. 연기다!

산불이 아니라면, 가정집의 굴뚝에 서 피어오른 것이리라. 사람이 사는 장소가 저 부근이란 의

미.

『어떤 신이 아싸답지 않다고 지적 합니다.

『어떤 신이 불편해합니다. "이 숲에서 탈출하기 위해 친한 척 하는 중일 뿐이에요."

『어떤 신이 굉장히 불편해합니 다.

부스럭! 내가 인간의 마을에 간다는 기대로 한껏 들뜬 그때, 수풀에서 수십 마리 의 놀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며 우리를 습격했다. "고기...!"

"뼈를 내놔!"

"내 고기!"

절벽에서 따돌린 뒤로, 이렇게 많은

수가 덤빈 건 처음이었다. "□! 강한수 □□□□!"

"게리! □ □ □□□!"

"OOO! □□ □□□□!" "미사. 콜! OOO!" 내가 못 알아듣는 언어로 자기들끼 리 빠르게 전략을 짠 용병들이 놀 무 리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푸웅~

푹! 서걱!

게리가 대검을 휘두르면서 놀의 진 영을 무너트리고, 그렇게 무리에서

이탈한 놈들은 콜이 장검으로 각개격 파했다.

"□□!" 두 검사가 앞장서서 놀들을 상대하 는 사이, 살짝 거리를 벌린 궁수 미사 가 석궁을 쐈다.

슝!

판타지 만화와 영화에서는 활시위 를 당기는 모습이 멋져서 활이 자주 쓰이지만, 역사책을 조금만 살펴봐도 석궁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흉악한 무 기인지 알 수 있다. 위력의 격이 다르다.

퍼억!

놀 한 마리가 반응도 못 하고 픽 쓰 러졌다. "고기?! 뭔 일이냐?!" "저 암컷이다!" "암컷 고기! 빠른 무기!" "이상한 활! 강하다!" 사람의 힘만으로 당기는 활은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지만, 석궁은 활대 끝에 달린 작은 도르래를 감고 방아 쇠를 당기면 끝.

소형화한 투석기라고 할 수 있는 석

궁의 화살 볼트는, 중세시대의 꽃이 라고 불리는 거의 모든 기사의 갑옷 을 꿰뚫었다. 그래서 석궁을 악마의 무기, 명예를 모르는 이단의 힘 등으로 부르던 시 절도 있었다고...

"나도 석궁 갖고 싶다..."

지구에서 무술이나 궁술을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 석궁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나는 위협적인 석궁을 재장

전 중인 미사에게 접근하려는 놀들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고기!"

"수컷 고기!" "방해다!"

석궁은 기사의 갑옷도 뚫을 만큼 강 력한 대신, 재장전 시간이 길다는 단 점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가 석궁을 재장전 할 때까지 보호하며 시간을 벌어줄 생각이다.

호주머니에 넣어둔 푸른 절단기로 놀의 목젖을 찌르고 비틀었다. "켁켁!"

우리는 동료나 친구는 아니지만, 언 어가 안 통하는 내가 판타지 원주민 마을에 녹아들려면 이 용병들의 협조 가 필수다. 여기서 함께 싸운다면 신뢰가 조금 은 올라갈 터. "고기 줘~!" "고기? 고기!" "강한 고기!"

그런 계산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숫자는 나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물론, 이들과 동행하지 않고 나 혼자 였다면 방심한 놀들이 이처럼 협공하 지도 않았겠지만.

『어떤 신이 불편해합니다』

신님은 내가 사람들을 돕는 게 굉장 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아싸 신님. 이 정도는 봐주세요. 인 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 이라고요."

『어떤 신이 알 바 아니라고 못을 박

습니다』

"뭐... 그렇긴 하죠."

판타지 창작물에서는 괴물들이 겁도 없이 무모하게 습격해오는 장면이 자 주 등장한다. 하지만 여긴 현실.

인간처럼 놈들도 돌아갈 집과 사랑 하는 가족이 있기에 자기 목숨 아까 운 줄 안다. 그렇기에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 아 니면 습격하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

놀들은 충분하다고 판단될 전력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를 습격 했다. " ...!" "콜! O OOO!" " ?!" 그 탓에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싸움은 굉장히 치열했다. 먹잇감을 상대로 희생이 크면 사냥 하는 의미가 없잖는가?

그렇기에 우리를 습격한 놀들의 준 비는 탄탄했다.

다만,

"약한 고기! 강하다!" "무서운 고기!" "이 고기는 괴물?!"

나를 깔본 게 패착이었다.

여전히 1레벨에 머무는 나는 여기서 가장 약하다. 하지만 사기적인 가호 덕분에 나는 1레벨 이상의 전력.

이걸 계산하지 못한 놀들은 예상 밖 의 큰 피해에 당황했다. 그리고 빠른 후퇴를 결심했다.

"포기! 고기!"

"고기는 포기!" "나쁜 고기!" 나는 썰물처럼 빠지는 놀 무리를 보 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용병들이 다 죽고 나 혼자 남았으면 진짜 위험할 뻔했으니까. 놀들이 그 전에 빠져줘서 살았다. "□□□□." "□□. □□□." 게리와 콜은 생명에 지장이 없어 보

였다. 놀의 조잡한 무기와 손톱으로는 그 들의 갑옷을 완전히 뚫을 수 없었던 덕분. 대신, 크고 작은 상처와 함께 탈진 직전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호하고 있었던 미사 는... "O "

석궁으로 나를 조준하고 있었다.

"왜....?"

-

지척에서 직선으로 날아온 볼트가 내 가슴에 틀어박혔다.

*

*

*

놀들의 대규모 습격으로 죽을 뻔한 용병 게리는 바닥에 쓰러진 이방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놀 때문에 계획이 살짝 틀어졌지 만, 잘 처리했어. 미사."

"나도 동감. 몸이 비실비실해서 약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싸우더 라고."

콜이 허리춤에 찬 수통을 입에 물며 동의했다. 석궁을 내려놓은 미사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모르는 언어로 계속 혼잣말하는 게 기분 나빴어." 게리가 입맛을 다셨다. "그건 참으라고 했잖아. 노예로 팔 때까지만." "맞아. 신관들은 이런 인간을 악마 의 하수인으로 몰아서 화형(火刑) 하 는 걸 좋아한다고, 죽어버렸지만." 콜이 무척 아쉽다는 얼굴로 투덜댔

다. "흥!" 미사는 두 남자의 가벼운 비난을 코 웃음으로 받아쳤다.

그들의 원래 계획은 마을까지 동행 한 후에 강한수'를 처리하는 것.

그 사실도 모르고, 자신들이랑 친해 지려고 애쓰며 고분고분 따라오는 모 습이 너무나 웃겼다. 게리가 상황을 정리했다. "노예로 팔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 만, 강한수가 우리의 예상보다 강했 던 건 사실이다. 미사의 판단은 나쁘

지 않았어."

"어이, 미사. 이 녀석이 동화 속 흑 기사님처럼 지켜줘서 고마웠던 거 아 니야?"

"어머! 어떻게 알았어? 자기 몸을 아 끼지 않고 공주님을 지켜주는 모습에 확 반해버렸다니까?" "그래서 노예가 되기 전에 죽여줬구 나! 질투 나는걸?"

"삐지지 마. 오늘 밤에는 안 쉬어도 되니까." "오! 약속한 거다?" "그래도 씻고 와. 그냥 오면 너도 죽

여버릴 거야." 사적으로 연인 관계인 콜과 미사가 농담을 주고받았다. 조금 전에 죽을 뻔했지만, 용병의 삶 은 원래 그렇기에 그들은 태연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함께 싸운 이방인을 배신하는 짓도 포함해서. "콜. 강한수의 단검을 챙겨."

"비싼 거라고 했지?"

"확실하다. 손잡이에 양각된 파란색 사슴뿔. 그건 뿔이 아니라 어느 영웅 가문의 가계도를 축소해놓은 거다.

요정 왕족만 사용할 수 있는 왕가의 문장이지." "즉, 요정의 보물이란 거네?" "설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싸 게 팔리겠지."

"이해했어."

"서둘러. 피 냄새를 맡은 놀들이 또 몰려올지도 몰라." 게리의 지시를 받은 콜이 강한수에 게 접근했다. "이 근처에 떨어져... 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단검을 찾던

그는 이방인의 오른손을 보고는 감탄 사를 터트렸다.

"와우! 이 녀석, 죽는 순간까지 무기 에서 손을 안 뗀 건가? 진짜 대단한

걸?"

"콜. 방심하지 마. 내 볼트가 가슴에 명중하긴 했지만, 심장을 관통한 건 아니니까.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어."

미사에게 주의받은 콜이 고개를 끄 덕였다. "이러면 문제없지?"

푹! 푹!

콜은 피투성이인 강한수의 등을 두

차례 연속으로 찔렀다.

기적적으로 여태 숨이 붙어있었더라 도 방금 공격으로 확실하게 죽었으리

라.

"자, 그러면 이제... 헛?!"

단검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콜 이 두 눈을 부릅떴다. 보여선 안 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 다.

[이름] 강한수

[레벨] 1

[가] 아싸F [저주] 용사E

남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조건은 크 게 2가지. 상대가 보라고 공개해뒀거나, 특수 한 가호로 훔쳐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건들은 대상이 살아있 음'을 대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이 녀석, 아직 살...!"

댕강

식겁한 콜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 지 못했다.

상체를 바짝 숙인 무방비한 자세로

목이 잘린 청년의 몸뚱이가 허무하게 고꾸라졌다. "어떻게?!"

"콜~?!"

갑작스럽게 동료를 잃었음에도 두 용병의 대응은 신속했다.

다만, "제, 젠장!"

놀들을 막 상대하고 지친 게리의 움 직임은 굼떴다.

반면에 이방인 강한수는 방금까지 치열하게 싸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쌩쌩했다.

푹!

휴식을 위해 투구를 벗고 있었던 게 리의 목젖에 단검이 박혔다. "커억...!"

몸만 멀쩡했다면...!

너무나 분했던 용병 게리는 죽어서 도 눈을 감지 못했다. "O , 미사." 게리의 목에서 단검을 뽑은 이방인 이 몸을 돌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

겁에 질린 미사는 석궁으로 강한수 를 겨눈 채 경고했다. 분명히 죽였는데! 그런데 이방인은 멀쩡히 살아있고, 역으로 콜과 게리가 죽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악몽이라도 꾸는 기분.

피용미사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강한 수에게 석궁을 쐈다.

양팔로 머리와 심장을 보호하는 그 의 기동력을 빼앗기 위해 다리를 노 렸다.

푹!

볼트를 피하지 못한 강한수의 몸이 휘청하며 쓰러졌다. "다음이 끝이야!"

"□□?"

그러나 곧바로 아무렇지 않게 일어 선다. "회, 회복했다고...? 설마! 치유의 가 호리

휙!

무거운 석궁을 버리고 도주하는 길 을 선택한 미사.

그녀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덥석!

"꺅?!" 먼저 떠난 두 용병 못지않게 지친 미 사는 금방 따라잡혔다. "미사. □□□□."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쥔 이방인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요, 용서해줘!" "미사. OOO?" "제가 잘못했어요! 시키는 건 뭐든

할 테니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 □□□." 이 순간, 두 사람은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며 소통했다.

007화

[3장] 마을

미사는 일상생활에서 유용한 회화 몇 가지를 보디랭귀지로 내게 가르쳐 줬다. 미안해, 살살해, 그만해, 아파, 용서 해줘, 살려줘...

그 외에도 의미 모를 욕을 서너 개쯤 배웠지만, 지구의 선량한 문화시민인

내가 쓸 일은 없으리라.

[이름] 미사

[레벨] 6

[가호] 명중F [저] -

내게 완전히 굴복한 뒤부터 보이기 시작한 미사의 상태창. 신의 가호라는 건 흔한 걸까? 그녀에게는 F등급 가호가 태연하게 걸려 있었다.

명중)

▶어떤 식으로든 목표물에 명중할 확률 이 매우 상승합니다!

▶ 어떤 식으로든 목표물이 이동할수록 확률이 감소합니다.

"이런 가호도 있구나." 천재적인 재능의 명사수인 줄 알았 는데, 가호의 효과였잖아? 미사가 괜히 석궁을 이용한 게 아니

었다. 그때,

" ... □.." "뭐라고? 어?"

방금까지 보이던 그녀의 상태창이

흐지부지 사라졌다. "미사, 고마워."

나를 공격한 이유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녀는 사죄의 뜻으로 나 에게 석궁과 옷을 줬다. "흠... 여성용 옷이라서 움직임이 좀 불편하네."

『어떤 신이 아싸의 취미를 존중해 줍니다. "아니거든요?!"

게리와 콜의 남성용 갑옷이 지나치

게 크고 무거워서 나에게 맞지 않았 던 탓이다.

반면, 호리호리한 미사의 갑옷은 여 기저기 끼긴 해도 내가 못 입을 정도 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좀... 찜찜하네." 외계인이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 없는 지구의 교복을 게리의 여행자용 배낭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교복 대신 미사의 가죽옷을 속옷 위에 걸쳤다.

판타지 원주민의 옷을 입은 나는 어 떤 모습일까?

거울이 없는 게 아쉽다. 『어떤 신이 거침없이 웃음을 터트 려줍니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워요?"

상상은 간다.

초보자가 옷만 번지르르하게 입으면 그 괴리감이 상당하니까.

짤랑! 세 용병이 모아놓은 빵빵한 돈주머 니를 볼 때마다 내 마음도 덩달아 풍 성해졌다. "이제, 마을로 가볼까나~"

언어의 장벽은 이제 걱정되지 않았

다.

돈은 그 어떤 보디랭귀지보다 확실 한 공용어니까.

과음으로 첫 수업부터 지각한 에테 나 공주.

이래저래 불안한 면모를 연달아 보 여주고 있지만, 그녀는 아크메이징 마법왕국에서 정략결혼을 단념할 정 도로 뛰어난 마법사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천재.

"정말 죄송해요! 늦은 만큼 열심히 할게요! 어... 그러면 우선, 마법이 무 엇인지부터 설명해야겠죠? 옛날옛적 에 판타지아 대륙에는 마법이 없었다. 고 해요."

마법!

판타지의 꽃이라고 불리는 초현실적 인 힘.

에테나 공주가 간단한 마법을 보여 주며 흥미롭게 설명했지만, 용사들은 마법의 역사 같은 이론에는 눈곱만큼 도 관심 없었다.

오직 실전! 실용!

그리고 몇몇 용사는 다 안다는 듯이 뒤에서 속닥거렸다.

"내가 소설에서 본 적 있지. 마법에 미적분을 적용하면 단번에 대마법사 가 될 수 있어." "흐흐.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지금까지 동정을 지켜왔지." "한심하긴. 마법은 화학이야. 내가 너희에게 판타지 최초의 원자폭탄 마 법을 보여줄게."

각자의 판타지 지식을 뽐내거나 주 장하기 시작한 용사들.

"조용히 해. 수업에 집중하는 친구 들에게 방해되잖아."

반장 유보라가 핀잔을 줬지만, 역효 과만 났다. "쯧쯧. 반장은 모범생이라서 판타지 를 너무 모르네." "마법의 역사를 안다고 대마법사가 되는 건 아니야." "마법은 재능이지. 마나(Mana)에 친 숙해야 해."

용사들은 반장의 참견으로 조용해지 긴커녕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지구에서는 반장 유보라가 완벽에

가까운 모범생이었지만, 판타지 세계 에서는 자신들이 더 뛰어나다는 자신 감의 발로,

그때였다.

짝짝!

이론 설명을 멈춘 에테나 공주가 박 수로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저도 불필요한 이론은 좋아하지 않 아요. 재능이 최고죠! 그렇기에 마법 의 시조만큼은 지루해도 설명했던 거 예요."

"마법의 시조...?"

"그런 얘기를 했었어?"

"나도 못 들었는데..." 용사들의 논리처럼 재능을 강조하는 에테나 공주. 그녀가 재차 단언했다. "마법은 재능이 매우 중요한 학문이 에요. 이 재능은 선천적인 혈연과 후 천적인 학연으로 결정돼요." "재능?" "동정은?"

"혈통...?"

자신들의 판타지 지식에서 살짝 어 긋나는 낌새를 느낀 용사들이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우리는 선택받은 용사인데? 재능이 넘쳐나는 존재 아니었나?

에테나 공주가 혼란에 빠진 용사들 에게 말했다.

"저는 에테나 아크메이징. 시조의 12번째 제자이자 3번째 남편이셨던 시온 아크메이징의 직계 후손이에요. 혈연과 학연을 모두 갖춘 셈이죠."

"오!"

"아하!"

그래서 우리는?

용사들의 의문 담긴 시선을 받은 에 테나 공주가 답했다. "혈연이 어려운 여러분은 저와 학연 을 맺을 거예요. 후천적인 재능은 스 승의 능력으로 결정되는데, 용사님들 은 제 제자가 됨으로써 높은 잠재력 을 갖게 될 거예요. 참 쉽죠?" "헐..."

"대박..." 혈연과 학연으로 실력이 결정되는

마법사.

너무 부조리하잖아?

이런 마법의 특징에 반발심을 품은

용사는 반장 유보라였다.

"에테나 공주님. 중요한 설명 중에 죄송하지만,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 다."

"네! 말씀하세요!" "혈연과 학연, 그 무엇도 없는 사람 은 마법사가 될 수 없습니까?" 모두가 궁금한 내용. 하지만 이미 '우수한 학연이 확정된 용사들에게는 신경 쓸 필요 없는 문 제이기도 했다. 에테나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능해요." "그건...?" "나중에 설명할 생각이었는데, 우선 보여드릴게요. 유보라 용사님?" "네." "지금부터 유보라 용사님과 사제관 계를 맺을게요."

우웅

공주의 발밑에 기하학적인 문양의 원형 마법진이 생겼다.

우웅

이어서 유보라의 발밑에도 비슷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당신을 에테나 아크메이징의 첫 번 째 제자로 인정합니다. 유보라 용사 님. 마법에 걸고 맹세하세요." ".....맹세합니다? 앗!" 마법진이 유보라의 그림자에 흡수되 어 사라졌다. 짝짝짝!

에테나 공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 쳤다. "축하드려요, 유보라 용사님! 오늘 부터 당신은 어엿한 마법사예요. 아 차! 미리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는데,

요. 제자는 순서가 빠를수록 재능을 많이 물려받아요." "그 재능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 까?"

"상태창을 보세요."

"...아!"

[이름] 유보라 [레벨] 1 [가회 용사F 마법C

[저주] - [배당] 1.65

마법의 가호!

에테나 공주가 지금까지 설명했던 재능이란 건, 이 가호의 등급을 의미 하는 게 아닐까? 그녀는 뛰어난 마법사의 제자가 됐 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C등급 마법의 가호를 획득했다.

"유보라 용사님. 재능이 중요한 이 유가 이해되셨나요?"

"네."

가호의 상세한 설명문을 읽어본 유 보라는 깨달았다.

마법]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합니다!

▶ 당신의 꿈과 희망을 후손과 제자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마법의 가호를 보유한 부모나 스승 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마법사가 될 수 없었다.

화르륵! 에테나 공주가 오른손 위에 작은 불 꽃을 만들며 말했다. "마법의 신(神)이 된 시조께서는 후 손과 후학들이 마법을 익히기 쉽도록 가호를 남기셨어요. 그것이 일반적인 마법사가 쓰는 마법, 백마법(白魔法)

이에요. 그리고..."

화르륵.

말끝을 흐린 그녀는 왼손에도 똑같 은 불꽃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크기는 오른손의 불꽃보 다 훨씬 작았으며... "공주님의 손이?!" "헉! 저게 뭐야?!" 구경하고 있던 용사들은 하나 같이 식겁했다. 방금까지 멀쩡했던 에테나 공주님의 고운 왼손이 시커멓게 변하며 썩어가

기 시작한 까닭.

뚝, 두둑.

급기야 손톱마저 빠져버렸다.

하지만 소녀는 고통의 식은땀을 흘 리면서 수업을 강행했다. "윽! 오른손이 백마법. 왼손이 흑마 법이에요... 아얏?!" "공주님! 흑마법을 절대 쓰지 말라 는 폐하의 엄명을 벌써 잊으셨나요!" 공주의 시중을 들던 연상의 아가씨 가 쌍심지를 켜며 나무랐다. "저는 용사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만..."

"아, 네. 그러셨군요. 왕비님께 이 사실을 고하도록..."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어마마마 께는 이르지 마세요!"

방금까지 진지했던 에테나 공주는 시녀에게 꼬집힌 옆구리를 문지르며 싹싹 빌었다.

[치유]

(성법]

끔찍한 몰골이 됐던 그녀의 왼손은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신관이 와서 빠르게 치료해줬다.

"죄, 죄송합니다." 자기 탓에 일이 커졌다고 판단한 용 사 유보라가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 했다. 에테나 공주는 방긋 미소 지으며 손 사래 쳤다. "괜찮아요. 여러분이 흑마법의 위험 성을 안 것만으로 만족해요."

"흑마법은 대체...?"

"흑마법이 나쁜 건 절대 아니에요!! 불을 지피기 위해선 마른 장작이 필 요하잖아요? 제 왼손이 그 장작 역할 을 한 것뿐이에요."

"아..."

"자연스러운 마법. 그게 흑마법의 본질이에요."

*

*

*

우락부락한 검사 게리, 덜 우락부락 한 검사 콜, 아낌없이 주는 궁수 미

사!

개성적인 세 용병이랑 뜨거운 피를 나누며 헤어진 나는 인간의 마을을 찾아갔다.

놀의 침범이 잦은 탓일까? 높은 목책(木柵)으로 둘러싸인 마을 은 요새처럼 견고했고, 유일한 출입 구의 검문도 철저한 편이었다. "그래도 역시 돈이야." 돈으로 검문을 넘고, 돈으로 신뢰를 쌓고, 돈으로 대화하고, 돈으로 여관 방을 빌리고, 돈으로 친구도 사귀었 다!

멋진데?

『어떤 신이 불편해합니다. "...저도 씻는 중이라서 불편한데요. 아싸 신님은 성별이 어떻게 되세요?

남성? 여성? 중성? 양성?" 『어떤 신이 더욱 불편해합니다. "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남성으로 해둘게요."

쓱쓱.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욕 조를 기대했던 나는, 물에 적신 헝겊 으로 알몸을 닦고 있었다. 불리지 않은 피부의 때를 억지로 미 는 기분이다.

판타지 서민의 목욕법. 기대했던 욕조는 없었지만,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몸에 달라붙은 놀의 피를 깨끗이 씻어내지 않으면 마을에 체류할 수 없으니까. "앞으로 어쩔까나...?" 놀들에게 쫓기던 나는 안전한 인간 의 터전을 찾아간다는 원초의 목표를 달성했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다. 여신을 죽인다. 실종된 아들을 찾고 계실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여신에게 복수하고 지구 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

다.

그런데 어떻게 복수하지?

초월적인 존재를 쓰러트리려면 일단 강해져야 하는데, 강해질 기미가 보 이지 않았다. "여전히 1레벨..."

이래선 사악한 여신에게 복수하긴 커녕 판타지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 닐 수조차 없다. 내가 너무 조급한 걸까? 금방 레벨 이 오르는 게임처럼 쉽게 생각한 걸 까?

『어떤 신이 불안해합니다. "뭐가 불안하신데요?"

『어떤 신이 비밀이라고 못을 박습 니다. "못은 좀 그만... 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수많은 숙박객이 드나드는 여 관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문제는 내 가 그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는 점 이다. 마치, 놀의 언어처럼. "이 방인가?" "□□□□□□."

"고맙네. 일 보시게. 여기서부터는

촌장인 내가 알아서 하지."

"□.

□."

똑똑.

여관 주인의 발소리가 멀어진 직후 에 노크가 들렸다.

나는 시험 삼아서 잠긴 문밖을 향해 말했다.

"씻던 중이라 잠시만 기다려주세 요."

"음? 말을 못 하던 게... 어흠. 알겠 네."

역시!

나는 미사의 가죽옷을 입고 푸른 절 단기를 꽉 쥐었다. 완벽한 전투태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용사)

▷ 용사에게 적대적인 종족의 언어가 자 동으로 번역됩니다.

사냥과 업적으로 획득하는 경험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문밖의 손님은 '적대적인 종족'이었

다.

008화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 다.

나에게 적대적인 종족'이었던 요정 과 용병들의 언어도 알아들을 수 없 었다는 점이다.

즉, 저주의 조건은 개별이 아닌 종족 전체의 평균!

그렇기에 상대가 적대적인 종족이라 고 해서 무조건 나에게 적대적이란 보장은 없다. 하물며 여긴 인간의 마을. 사고가 터지면 말이 통하지 않는 내 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지금은 성급한 편견은 버리고 자중 해야 하지 않을까?

슥 그래서 푸른 절단기를 침대의 베개 밑에 숨겼다. 유사시에 언제든 쓸 수 있도록.

『어떤 신이 빤히 지켜봅니다.

딸각.

나는 여관방의 잠금장치를 풀고 문 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잠시 실례하겠네." 손님은 회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 는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 저주의 조 건이 아니었다면, 그가 인간이 아니 란 사실을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것 이다. "무슨 일이신가요?"

"경계하지 말게. 나는 이 마을의 촌 장으로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여행 자가 왔다는 보고를 받고 확인차 방 문한 걸세."

"그러시군요."

인간 행세를 하면서 인간의 마을을 다스린다는 점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 만, 정보가 부족하기에 그러려니 넘 어갔다. 판타지아 차원이 원래 그런 세상일 수도 있잖아?

사악한 여신을 모시는 천사 같은 종 족이 지상의 우매한 인간들을 다스리

는 걸지도... "강한수? 특이한 이름이군." "뭐..."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는 가명을 짓는 것도 고려했었지만, 부 모님께서 주신 이름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도, 가르쳐주지도 않은 내 신 상정보가 생판 남에게 노출돼서 굉장 히 불편했다. 내 상태창이 보이는 걸까? "나처럼 관찰의 가호를 보유한 자에 게는 소용없지만, 웬만하면 상태창을

감추고 다니게." 진짜냐! "어떻게 감추나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

군."

"네."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 2일차 새내기 라서 죄송합니다. "흐음. 언어가 안 통한다기에 세상 물정 모르는 멍청한 요정이 숨어든 줄 알았는데, 단순히 먼 타지에서 온 촌놈이었나..."

"실망하신 것 같네요."

"티가 났나?" "조금..." 조금이 아니다. 헛걸음해서 짜증 난 다고 얼굴에 쓰여 있다. "요정들의 욕심으로 서식지를 잃은 놀들이 인간의 터전까지 흘러들어왔 네. 그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복수 하기 위해 뭉치며 형성된 마을이 여 기지." "그래서 용병이 많았군요." "꽤 오래된 일이네. 당시의 원한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얼마

안 남았지. 지금은 경력을 쌓기 위해 도시에서 찾아온 햇병아리 용병이 대 부분이야."

"헤에~"

언어가 통하니 확실히 좋네!! 이 마을의 탄생 배경에는 관심 없지 만, 사람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감동이다.

겸사겸사 상태창을 감추는 방법도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는데...

『어떤 신이 매우 답답하게 바라봅 니다. 음? 왜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촌장이 앞에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만 해도 되겠나?"

"네."

정치와 종교 빼고는 뭐든지요!! 그가 호주머니에서 빈 유리병을 꺼 내며 질문했다.

"내 마취약에 걸리고도 멀쩡한 이유 가 뭐지?"

"

예?"

한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 지만, 놀의 습격에 이골이 난 몸이 먼 저 반응했다.

휙!

베개 밑에 숨겨둔 푸른 절단기로 촌 장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제법이군."

칼날이 그의 목젖을 가르기 직전에 투명한 무언가에 몸이 속박되는 바람

에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

간발의 차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 한 나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촌 장을 노려봤다. 촌장이 그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 며 놀리듯 말했다. "가증스러운 요정들은 태생적으로 내성이 높아서 약이 잘 안 들지. 그래 서 고안해낸 마법일세."

"끙...!"

"포기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 의 밧줄로 온몸을 묶어놨으니. 요정

처럼 내성만 높아서는 절대 풀 수 없

"

"어째서?"

내가 촌장에게 공격당한 이유를 도 무지 모르겠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자네에게 잘못은 없네. 순전히 운 이 나빴을 뿐이지."

"단순한 얘기네. 말보다는 직접 보 여주는 편이 빠르겠군."

[이름] 크림슨

[레벨] 16

[가] 광기E [저] 요정C

촌장의 상태창에는 나처럼 저주가 있었다. "여신의 짓인가요?" "여전히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걸 보 니 이해를 못 했군. 이 저주는 나에게 살해된 요정들의 원한이 쌓인 결과 네. 명예로운 흉터 같은 것이지!" "아하!"

저주는 사악한 여신만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건부라고 할까?

(요정)

요정의 원수로 지목된 당신의 수명과 젊음이 줄어듭니다!

요정에게 받는 모든 피해와 악평이 대 폭 증가합니다.

수명과 젊음이 줄어든다는 대목 때 문에 무시무시한 저주라고 생각했는 데, 촌장의 외모를 보면 그렇지도 않 은 것 같다.

"사람들은 가족을 해치고 고향을 빼

앗은 놀들에게 분노했네. 하지만 나 는 생각했지. 저 놀들도 똑같은 피해 자라고. 놀의 서식지를 빼앗아서 분 쟁을 조장한 요정이야말로 우리의 진 짜 원수라고...!" "하지만 저는 촌장님이 증오하는 요 정이 아닙니다. 애꿎은 사람을 공격 하고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남의 원한에 휘말려서 개죽음당하게 생겼다. ....진짜로 죽겠는데?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내 상황은 명백한 위기

였다.

촌장의 심기가 나빠지면 언제든지 꼼짝없이 죽을 목숨. 심장이 쫄깃했다. "사실, 이렇게 말을 많이 할 생각이 없었네. 하지만 자네의 단검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 이건 어디서 얻었 지?" 그가 푸른 절단기를 가리키며 질문 했다. 이거?

"저에게 다짜고짜 활을 쏜 요정을 죽이고 빼앗았습니다."

눈치라는 게 있다.

푸른 절단기는 '푸른 달의 고기 절단 기'란 놀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지 만, 여기서 살려면 나도 요정의 원수 인 척해야 한다. "그 실력으로 용케도 요정 왕족을 죽였군." "왕족이었나요...." 날이 잘 드는 정말 좋은 단검이라고 쭉 생각했었지만, 요정 왕족의 물건 일 줄은 몰랐다.

"하하! 가관이군! 왕족인 줄도 모르 고 죽였다니! 자네를 죽이기가 점점

아까워지는군." "그러면 살려주세요!" "유감이네. 상태창을 봐서 알겠지 만, 나는 마법의 가호가 없는 마법사 라서 말일세. 설마? 그 의미조차 모르 는 건가?"

"아싸라서요."

내게 친절히 가르쳐줄 사람(+신)이 주위에 없다.

"아싸?"

"황야를 질주하는 고독한 늑대라는 뜻입니다."

"정말 멋진 단어로군. 자네가 황야 를 질주하는 일은 앞으로 영영 없을 테지만."

『어떤 신이 아싸의 명복을 빌어줍 니다.

촌장이 푸른 절단기를 내 손에서 빼 앗으며 말했다. "나는 흑마법사라네. 자네는 내 수 명을 늘려줄 흑마법의 제물이 돼줘야

겠네."

*

*

*

에테나 아크메이징 공주. 아크메이징 마법왕국에서 '마법 천 재'로 불리는 그녀는 '노력하는 사람 을 동경해왔다. 체면과 겉치레를 신경 써야 하는 공 주라는 신분이 그녀에게 연구할 시간 을 빼앗고, 엄청난 재능이 노력을 불 필요하게 한 탓이다.

배부른 투정이라고?

맞다. 그녀도 안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가능한 무언가를 동경하는 게 잘못 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공주님. 마법이 상상만으로 구현된 다고 하셨는데요. 효율을 높이는 조 건이나 공식은 없습니까?"

마법은 혈연과 학연으로 결정된다고 설명해줬음에도 노력하는 용사 유보

라.

에테나 공주는 이 '첫 번째 제자'가 좋았다. 그래서 첫 번째 제자로 받은 거였지만.

화륵!

용사 유보라의 손바닥 위에 생동감 넘치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재능과 노력.

그 둘이 합쳐져서 탄생한 아름다운 마법이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유보라 용사님. 마법을 강화하려면 가호를 내려준 스 승이나 부모님의 마법을 답습하면 돼 요."

"그것 말고는 없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쩌저적!

에테나 공주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과 상반된 차가운 얼음덩이를 손바닥 위에 생성했다.

귀여운 토끼 모양!

제작자와 묘하게 어울렸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말했다.

"전쟁의 꽃이라고 불리는 화염 마법 은 아크메이징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전문분야예요. 가호로 선대의 재능 일부를 계승한 덕분이죠. 반면에 이 얼음 토끼는 저만의 고유마법이에요!! 한 번 흉내 내보실래요?" "음... 안 되네요." 유보라의 손바닥 위에는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았다.

에테나 공주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 며 고백했다.

"스승인 제가 아직 미숙해서 그래 요. 제 숙련도가 높아지면 제자인 유 보라 용사님도 쉽게 만들 수 있을 거 예요. 이해되셨나요?" "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때, 사제(師弟)의 훈훈한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공주님. 저처럼 가호가 없는 사람 은 어떻게 하죠?" 몸이 고달플 게 뻔한 기사 대신 마법

사를 선택한 용사 장미연.

하지만 에테나 공주의 제자가 아니 라서 마법을 못 쓰는 그녀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만이 아니다.

"가호가 정말 필요합니다!" "공주님! 마법을 쓰고 싶어요!"

"저에게 마법의 가호를...!"

유보라 개인과외나 다름없는 수업방 식이 마음에 안 들었던 다른 용사들 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리고 점점 거세졌다.

"이건 불공평합니다!" "편애는 나빠요!" "똑같은 대우를 요구합니다!" "매우 불편하네요!"

멋대로 떠들며 폭주하기 시작한 용 사들. 오도독, 오독.

에테나 공주는 자기가 만든 얼음 토 끼를 깨물어 먹으며 순진무구한 얼굴 로 질문했다.

"그러면 어떤 용사님이 저의 두 번 째 제자가 되시겠어요?"

"저요! 저요!"

"당연히 저입니다!" "새치기하지 마!" "내가 먼저야!"

합심해서 에테나 공주에게 탄원했던 용사들.

하지만 그녀의 한마디에 모래성처럼 동맹이 깨지고, 서로 물어뜯기 바빴

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제자가 되는 순서가 밀릴수록 재능 도 떨어지기 때문에 아무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너보다...!" "공부도 못 하는 게...!" "누가 할 소리...!"

도저히 세상을 구할 용사로 안 보이 는 한심한 작태. 하지만 에테나 공주는 말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정되면 말씀해주세요!"

"...에테나 공주님.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보라의 질문에 공주는 귀엽게 고 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그러면 하던 수업을 마저 할까 요... 어머!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었 죠?" "얼음 토끼요." "아! 고맙습니다! 고유마법은 수많 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끊임없이 연습 해야 습득할 수 있어요." "흑마법처럼요?"

"공주님?"

한순간 경직된 에테나 공주가 표정 을 풀며 답했다. "흑마법은 백마법이랑 달라요. 혼자 서 꾸준히 연습하는 게 불가능해요." "어째서입니까?"

"마법을 쓸 때마다 희생양이 필요하 거든요."

y.

등가교환의 법칙.

동등한 가치의 상품끼리는 교환할 수 있다는 경제학 이론이다. 그런데 이게 왜 판타지 세계의 마법 에 적용된 걸까?

아무튼, 그 개떡 같은 법칙 때문에 나는 위기에 빠졌다.

"마법의 밧줄을 조금 풀었네. 이제 말할 수 있을 거야."

"...지하실이 정말 멋지네요!"

"고맙군."

흑마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촌장은

'여관방에 쓰러져 있던 여행자'를 치 료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업어서 자기 집까지 데려왔다.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 넘어간 여관 주인도 한통속이 아닐까?

이 문제는 내가 안 죽으면 생각해보 기로 하고... "촌장님. 저도 이 사람들처럼 고통 받다가 죽나요?"

지하실에는 선객이 많았다. "□, □, 아응..." "큭! □□, 꼭..."

", 하악...!"

정육점 고기처럼 허공에 매달린 그 들의 몸에는 피멍과 화상, 채찍 자국 이 빼곡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양쪽 귀가 잘려서 없었다. "...자네는 겉보기와 다르게 강단 있 군. 보통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질 질 싸기 바쁜데." "그러게요."

[아싸]

이 가호가 없었다면 나도 그 '보통' 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을까.

내 상태는?

세 번쯤 보고 지겨워진 공포영화를 또 감상하는 기분이다. 남의 일이 아 닌데도. "걱정하지 말게. 요정이 아닌 여행 자들에게는 내 취미를 강요하지 않으

니."

"불행 중 다행이네요." 납치한 인간은 바로 죽이고, 요정은 저들처럼 오래오래 괴롭히다가 죽 는 모양이다.

촌장이 선심 쓰듯 말했다.

"왕족을 살해한 자네는 특별히 고통

스럽지 않게 보내주지." "오! 아픈 건 질색인데 정말 감사합 니다." "하하하! 정말 유쾌한 친구군! 함께 할 수 없어서 참 아쉬워." "저도 아쉽습니다." 촌장은 진심으로 내가 마음에 든 모 양이다. 그래도 살려줄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 이제 어쩌면 좋지? 『어떤 신이 짐을 쌉니다. 『어떤 신이 아싸의 명복을 빌어줍

니다. "...너무하시네." 성격 나쁜 신님에게 헌신짝처럼 버 림받았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내 주둥이는 아직 팔팔하니까!

비겁한 가호는 잠시 내려놓고 정정 당당하게 가보자. "촌장님." "뭐지? 살려달라고 애원할 셈이라면 포기하게." "설마요. 다른 겁니다. 나는 선량한 지구인의 미소를 그리

며 대화의 장을 열었다.

009화

"말해보게. 곧 죽을 사람의 유언 하 나 못 들어주겠... 잠시만. 벌레들이 좀 시끄럽군." "박?! , 미 ..." "커억! DO... 컥?!" " , 하악!" 촌장은 채찍으로 요정들을 사정없이

매질했다.

짝! 짝! 짝....! 곤충의 다리와 날개를 뜯으며 즐거 워하는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한 그 의 얼굴은 100번 양보하더라도 정상 이 아니었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말해도 좋네."

요정의 피와 살점이 달라붙은 흉기 를 내려놓은 촌장은 열심히 운동해서

뿌듯하다는 말투였다.

일부러 내게 보여준 걸까?

내가 심리학자나 심리치료사는 아니 지만, 자기가 '정의'라고 굳게 믿는 행 위를 제삼자가 인정해주길 바라는 걸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해줄 말은 정해져 있 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걷느라 힘드시겠어요."

"...이해해주는 건가?"

"저는 아싸라서요."

"아싸... 황야를 질주하는 고독한 늑 대라고 했던가? 그랬군. 나도 아싸였 던 것인가..."

『어떤 신이 그건 아니라고 못을 박 습니다.

저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의도대로 동질감 형성에 성공한 걸까?

내게 동료 의식을 느낀 촌장은 피로 그린 원형 마법진 위에 세워뒀던 나 를 옆으로 이동시켰다.

오!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그런 내 희망을 촌장이 바로 부정했

다.

"자네가 정말 마음에 들었네! 하지 만 나는 아싸. 앞으로도 고독하지 않 으면 안 돼."

이건 대체 무슨 논리지...? 처음에는 대의(大意)를 위해 죽이고, 이젠 아싸로 남기 위해 나를 죽이겠 단다.

『어떤 신이 잃어버린 배꼽을 찾습 니다.

"웃을 일이 아닌데요..."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야! 드디어 내 숭고한 뜻을 알아주는 이해자(理解 者)를 만나다니! 친애하는 강한수 동 지! 거기서 보고 있게!"

"아, 네."

촌장이 나도 아싸다!'라고 선언한 순간부터 엉망진창이 됐다. 나도 이젠 모르겠다. "흠... 요즘 상태가 시원찮은 이 녀 석으로 할까."

앙상한 몰골의 요정 수컷이 지목됐 다.

"□□, □...!"

"그럴 순 없지. 네 암컷은 살아서 좀 더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 거든." "O! DO! □ □□!" "하하하! 그래! 더욱 욕해라! 나에게 는 찬사나 다름없으니!" "OO O!O~!" 요정들은 촌장에게 선택받은 동족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죽음.

피비린내로 가득한 이 지옥에 붙잡 혀있는 모든 요정의 소망.

그 지옥의 주인이 선언했다.

"시작하지." 내가 방금까지 위치했던 마법진 위 에 요정 수컷을 눕힌 촌장이 경건하 게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도였다. "생명의 어머니시여! 운명의 주관자 시여! 이 요정의 남은 삶을 저에게 허 락해주소서!"

위이이잉

검붉은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은은 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신기하네."

기도만으로 저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면, 지구의 수많은 종교인이 마 법사로 입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법진에 그려진 저 기하 학적인 문양된 특별한 장치나 의미가 있는 걸까? 내가 이 위기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에 빠져있을 때, 촌장이 요정에 게 요구했다.

"네 수명을 나에게 넘기겠다고 선언 해라."

"넘긴다면 네 암컷도 금방 곁으로 보내준다고 약속하마. 나의 자비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전에 봐 서 알겠지?"

입 다물고 있던 요정은 아내로 짐작 되는 동족 암컷을 한 차례 돌아보고 는 짧게 답했다. "... ."

"계약이 성립됐다."

파앗-! 마법진의 빛이 폭발했다. 그 뒤에 남은 건, 몸이 미라처럼 바 짝 마른 요정의 시신이었다.

수명을 빼앗긴 자의 말로,

요정 수컷을 협박해서 수명을 빼앗 은 촌장은 어떤 상태일까? 그만큼 젊 어졌을까?

"....실패?"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30대 인간 남성의 모습 그대

촌장이 요정의 시체를 마법진에서 끌어내며 답했다. "친애하는 강한수 동지. 나의 흑마 법은 성공했네."

"전혀 안 젊어지셨는데요?" "하하하! 그건 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 "아하!"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처음 부터 알고 있었다. 어떤 종족인지 모 를 뿐. 촌장은 거대한 비밀을 알려준다는 뉘앙스로 우쭐대며 고백했다. "나는 수명을 늘리기 위해 요정을 제물로 바친 게 아니네!"

"그러면요?"

"내가 이 마을에 살면서 얼마나 많 은 요정과 여행자의 수명을 빼앗은 줄 아는가? 요정의 저주는 정말 가소 로운 수준이지!"

"멋지네요."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다. 그 방식은 글렀지만, 저주에 굴복하 지 않고 이겨냈다는 점은 칭찬해줄 만했다.

"하하!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 았지!"

"인간이었던 나는 요정의 저주를 받

자마자 순식간에 늙고 병들어서 손쓸 도리가 없었다네. 그때, 마을에 잠시 머물던 떠돌이 마법사가 한 가지 실 험을 제안했지."

찌익!

촌장이 갑자기 입고 있던 상의를 양 손으로 잡아 찢었다.

연출로는 멋지지만, 옷이 너무 아깝 다고 생각하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

웃통을 벗은 촌장의 가슴 정중앙에 는 하이에나처럼 생긴 놀의 얼굴이

살가죽에 파묻힌 모양새로 붙어있었

"나는 놀이네." "하아?"

가호 덕분에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 안 하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혼종(混種)은 대체 뭘까? 기괴한 가슴을 내게 보여준 촌장이 외쳤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요정에게 원 한을 품은 두 종족의 결합! 인간의 지 혜와 놀의 육체를 가진 나의 복수가

멀지 않았어!" "혼자서요?" 하나보다는 둘이 더 좋을 텐데? "충분하네! 수많은 요정의 수명을 흡수한 나의 흑마법은 최강이니! 요 정의 힘으로 요정을 사냥한다! 최고 의 복수라고 생각하지 않나?!" "저는 요정이 아닌데요?"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말게."

촌장이 내 어깨에 피 묻은 손을 얹으 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말 고맙네, 강한수 동지." "뭐가요?" "이건 진심이야. 자네가 아싸를 가 르쳐준 덕분에 내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었어. 나야말로 진정한 아싸. 황 야를 질주하는 고독한 놀..." "그건..." 아싸는 종족이 아닙니다만?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 준 자네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감 사의 뜻으로, 자네의 생명을 소중히 써주겠네." "죽이는 건 변함없군요?"

"물론이네. 나는 아싸니까."

"..."

진지한 아싸는 정말 위험하다는 걸

배웠다.

에테나 공주의 제자 문제로 용사들 사이에서 유치한 다툼이 있었지만, 스승으로 맞이할 우수한 마법사들이 우르르 등장하면서 상황이 빠르게 정 리됐다.

용사의 스승!

이 명예로운 칭호를 탐내는 마법사 는 판타지아 대륙에 모래알처럼 많았 으니까. 그 결과, 모든 용사가 '마법의 가호' 를 하나씩 받은 상태로 수업이 재개 됐다.

"마법은 꿈과 희망의 결정체예요. 그래서 머릿속으로 형태를 구체화하 지 못하면 실패한답니다! 집중력과 정신력이 매우 중요~"

"공주님!" "질문하세요."

"수학식(數學式)은 어디에 적용하면 됩니까?"

가호 덕분에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면 서 의욕이 급상승한 어떤 용사가 질 문했다. 에테나 공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 물었다. "수학식을 마법에요?" "네."

"상인들이 주로 공부하는 학문을 말 씀하시는 거죠?" "네."

질문한 용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

TH

그의 예상대로, 판타지 세계의 마법 은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리가 너무 주먹구구식이잖아?

에테나 공주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나름의 해답에 도달했다.

"으음... 마법은 하나보다 둘이 강력 해요. 하지만 효율은 급격히 떨어져

"저는 마법의 발현에 필요한 수학식 을 질문한 겁니다. 미적분을 적용해 서 간소화하고 싶어서..."

"그런 건 없는데요?" "예?"

유식한 척하던 용사가 멍청한 표정 이 되었다.

"마법은 재능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어요. 위력은 꿈과 희망, 효율 은 반복과 경험으로 끌어올리는 거고 요."

"수학식이 필요 없다고요?!"

"용사님은 그 불덩이를 만드시면서 덧셈이나 뺄셈을 쓰셨나요?" "이, 이거야 간단한 마법이니..."

"불덩이를 잘 만드는 훌륭한 스승님 을 둔 덕분이에요." "..."

"이 세상에 어려운 마법이란 없어 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생소한 마법만 있을 뿐."

"그럴 수가..."

판타지 세계에서 간단히 대마법사 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용사들이 좌절했다. 그때, 용사들을 제자로 들인 마법사 중 하나가 참견했다.

"에테나 공주님. 용사님께 잘못 설

명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요?"

"그렇습니다. 마법에도 수학식이 들 어갑니다." "오오!"

"오오!"

마법사의 한마디에 용사들의 기대가 다시금 타올랐다. 그와 반대로 당황한 에테나 공주는 얼굴을 붉혔다.

"가르침을 부탁드려요."

"허허허! 불덩이를 예로 드셨기에

이걸로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불덩이 를 멀리 쏘려면 각도가 매우 중요합 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도 고려해 야지요."

"아!"

"또한, 적군의 숫자와 능력에 맞춰 서 마법의 위력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필요한 정신력 낭비는 피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전쟁..." "왕궁에서 이론으로만 배우신 공주 님은 모르시겠지만, 저희는 마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진즉부터 수학식

을 도입해왔습니다. 영특한 용사님은 그걸 질문하신 거지요. 안 그렇습니

까?"

"마, 맞습니다!" 완전히 잘못 짚었지만, 용사는 자신 의 스승에게 창피를 줄 배짱이 없었 다.

『어떤 풍신이 수학식을 괘씸하게 바라봅니다.

『어떤 풍신이 바람의 방향을 바꿔 버립니다.

『유치한 어떤 주신이 탈주한 배꼽 을 잡고 키득거립니다』

『어떤 수신이 풀죽은 누군가를 응 원합니다. 『어떤 신이...』

"에테나 공주님. 이 늙은이가 수업 을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전장 의 실용 마법은 공주님께도 큰 공부 가 될 겁니다." "네. 부탁드려요..." 자신의 실수를 통감한 에테나 공주 가 침울한 표정으로 한걸음 물러섰

다.

그와 반대로, 용사의 스승들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실용마법이란..."

"우수한 마법사란..." "실전에서는..."

용사들은 훌륭한 스승들의 지도편달 아래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마법을 습 득해나갔다!

『어떤 법신이 후학들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성급한 어떤 마신이 속옷을 슬쩍 합니다.

『어떤 법신이 울먹이며 추적합니

다.

파직! 쾅! 번쩍...! 오늘은 판타지아 대륙 전역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칠 것 같 았다.

*

*

*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왔다!

우우웅

나는 교수대나 다름없는 피의 마법 진 위에 서 있었다.

마법진의 주문을 다 읊은 촌장이 요

정 수컷에게 했던 요구를 협박 빼고 내게 말했다.

"자네의 생명을 나에게 넘긴다고 선 언하게."

"흑마법은 제물의 동의가 중요한 모 양이군요?" "육체를 물리적으로 구속할 순 있어 도 소유한 건 아니니 말일세. 자! 얼 른 선언을..." "그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흠... 뭐지?" 촌장은 무척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 었지만, 그간 쌓인 호감 때문에 광분

하진 않았다. "영광스럽게 죽기 전에 미사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미사? 커다란 석궁을 다루는 용병 말인가?" "네. 잘 아시네요." "어째서 그 여자를 찾는 거지?" "연인이니까요." "허튼소리! 나는 촌장일세. 이 마을 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지. 미사의 애인이 콜 이란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내 호의를 이용해서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게."

조금 감탄했다.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는데, 촌장 일 은 똑바로 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그 덕분에 얘기가 좀 더 수월 해졌다. "콜은 전 남자친구죠. 최근에 바뀌 었습니다."

"...지금은 자네란 건가?" "네." "증거는?"

"제 몸의 냄새를 맡아보세요. 후각

이 발달한 놀이시니 바로 아시겠지

요?"

촌장은 가슴에 달린 놀의 얼굴로 킁 킁거리기 시작했다.

"...틀림없군. 이건 내가 기억하는 미사의 체취야. 연인이 아니라면 자 네의 온몸에서 진동할 리 없지." "그렇죠."

그녀가 입던 옷이니 진동할 수밖에 없죠.

무안해진 촌장이 헛기침했다.

"어흠! 자네를 의심해서 정말 미안 하네."

"그러면 미사를..." "그 부탁도 미안하네. 미사가 실종 되면 게리와 콜이 의심할 거야. 그러 면 일이 너무 복잡해져."

촌장은 만남을 빌미로 미사까지 처 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짜 대단하다.

"대신, 다른 소원을 말해보게. 웬만 하면 들어주지."

소원! 나는 이 말을 기다렸다.

지금쯤 놀의 똥이 되었을 미사를 들 먹이며 감정에 호소한 것도 다 이것 을 위해서다. 내 소원은... "제가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자유롭 게 풀어주세요. 미사를 다시 만날 때 까지." "수명을 잃은 생명은 살아남지 못 해."

"그래도요. 그것 외에는 달리 생각 나는 소원이 없어서요." "흠... 약속하지." "그러면 저도 선언합니다."

"거래가 성립됐군!"

파아앗~!

요정 수컷이 희생됐을 때보다 환한 빛이 마법진에서 쏟아졌다.

그 직후,

"아아아악!"

내 상상을 가볍게 초월한 고통이 엄 습했다. 촌장 새끼! 안 아프게 해준다며?! 죽고 싶을 만큼 아팠다. "잘 가게. 미사에게는 멀리 떠났다. 고 전해주지."

"...그건 힘들 겁니다. 미사가 먼저 떠났거든요." "그게 무슨 커억!" 빡!

온 힘을 실은 나의 주먹이 무방비한 촌장의 얼굴에 꽂혔다.

010화

지금까지 나를 옭아맸던 마법의 속 박이 풀렸다.

촌장에게 주워들은 단편적인 판타지 지식을 활용한 나의 계획이 먹혀들었 다는 방증.

솔직히 도박이었다. 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것도

사실. "이놈! 나를 속였구나...!"

"내가 할 소리!"

내가 겪은 고통은, 불알친구도 철천 지원수로 만들 위력이었다.

안 아프게 해준다던 촌장의 말만 믿 고 방심했다가 완전히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어떤 신이 속은 아싸의 잘못이라 고 합니다. 뼈를 때려주셔서 감사요! "이, 이놈이...!"

얼굴을 맞자마자 뒷걸음치며 물러선 촌장이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그게 다이기도 했다. 내 주먹은 촌장에게 피해다운 피해 를 주지 못했다. 촌장의 레벨이 높아서? 그가 인간이 아니라서?

이유가 뭐든 간에 촌장을 쓰러트리 지 못한 이상, 여기서 탈출하는 것에 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 마법은 이제 안 통해!"

우리는 수명을 거래하는 흑마법으로 약속했으니까.

내가 살아남으면 자유롭게 풀어주겠 다고.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지금부터는 촌장이 약속을 이행할 차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지?!"

"죽으면 가르쳐주마!" [아싸] 아싸의 가호는 줄어든 내 수명마저 초기화해줬다.

처음부터 예상하고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너무 사기잖아?

"허! 간신히 살아남은 애송이 따위 가...!"

"촌장. 약속을 잊지 말라고." "큭!" 나는 다양한 흉기들 사이에 진열된 푸른 절단기를 회수했다. 맨손으로는 촌장의 상대가 안 되니까. 다음 할 일은...

"당첨."

여기서 가장 왜소한 요정을 눈대중 으로 찾았다.

서걱

에메랄드색 생머리를 길게 기른 요 정 암컷의 결박을 잘랐다. " ...?"

"증인 확보."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내가 마을주민 들에게 설명하려면, 이 지하실에 감 금되어있던 요정의 증언이 꼭 필요하 니까. 휘청~ 털썩. 하지만 오랫동안 혹사당한 요정은 스스로 걷지 못했다. "□, □□..."

"어쩔 수 없지."

이 정도의 난관은 처음부터 예상했 으니까. 그래서 가장 가벼울 것 같은 왜소한 요정을 고른 거고. 탁!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요정 암컷을 들어서 짐짝처럼 왼쪽 어깨에 얹었 다. 그리고 지하실 출입구로 빠르게 달렸다.

"안 돼...!"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촌장이 아니었 다. 내가 밖으로 나가서 지하실의 실 태를 마을주민들에게 공개하면 끝장

이니까. "하하! 촌장님! 약속을 잊은 건 아니 겠지?" 계약은 절대적이다. 촌장은 내가 '미사'를 만날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 물론, 놀의 똥이 된 그녀를 찾을 방 법 같은 건 없지만. "약속? 흥! 네놈에게 받은 수명을 포기하고 파기하면 그만이다!" "어?! 그런 거야?!" 절대적일 줄 알았던 흑마법의 계약

에 굉장한 허점이 있었다. 허세? 아니었다.

뚝.

지하실 출입구에 도달한 나는 촌장 의 마법에 다시 걸려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하하하! 강한수 동지. 자네에게 무 척 실망했네. 그러니 편안히 죽을 생 각은 단념하게." "...단념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은

데."

"아직도 헛소리를... 쿨럭! 뭐, 뭐 지?!"

털썩!

새빨간 피를 토한 촌장이 맥없이 무 릎을 꿇었다. 이유는 짐작됐다. 내 자유를 억압한 직후부터 그의 몸 에서 무언가가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촌장. 이 판타지는 뭐야?" 그것은 극지방의 오로라(Aurora)처럼 무척 신비로웠다. "아, 안 돼! 나의 힘이...!" "힘이군?"

나는 끔찍한 흑마법에 당한 뒤부터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감각기관에 눈 을 떴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설명 불가. 참으로 판타지다운 전개다. "이, 이럴 수가! 네놈의 정체는 대체 뭐냐?!" "인간." "그럴 리 없다! 인간이라면 이토록 많은 힘을 빼앗기고도 멀쩡할 수 없 어! 마왕이라도 되는 거냐?!"

"나는..." 『어떤 신이 분위기 잡지 말라고 핀 잔줍니다. 진짜 너무한 신님이네! 결정했다. "나는 아싸의 사도다!"

『어떤 신이 부끄러움에 몸부림칩 니다. 매우 기뻐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기 쁘네요!

*

*

*

알서스 왕자는 멋진 검사가 되고 싶 어 하는 용사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했

짜잔! 빤짝빤짝!

테이블마다 고급스러운 다과가 준비 되어 있었다.

"이, 이건 대체..." "갑자기 웬 과자와 차?" "시작부터 휴식?" 흙먼지 풀풀 풍기는 훈련장에서 연 습용 목검으로 허수아비를 때릴 줄

알았던 용사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쪽으로."

"여기에 앉으십시오." "용사님은 여기." 동행한 기사들이 그런 용사들에게 자리를 안내해주면서 소란을 빠르게 잠재웠다. 상석에 앉은 알서스 왕자가 멋지게 찻잔을 들며 외쳤다. "검사의 길을 선택한 용사님들께 축 배를!"

"축배를!"

"축배를!"

연회장 외각에 준비된 자리에 앉은 기사들이 우렁찬 기세로 후창(後唱)했

다.

(

그 열기에 압도되어 입도 뻥긋 못 하 는 용사들에게 알서스 왕자가 설명했

다.

"본의 아니게 용사님들의 대화를 엿 들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무식한 수련은 검술이 아

니기 때문입니다."

"뭐?"

"엥?"

용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돌아볼 뿐이었다.

이에 알서스 왕자가 웃는 얼굴로 자 리에서 일어섰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 한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기사단 장."

"네!"

"나와 대련을 부탁하네."

"영광입니다!"

흑곰처럼 생긴 사내가 성큼성큼 단 상 위로 올라왔다.

"우선은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검술 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단장. 검술은 봉인하게."

"알겠습니다."

왕자와 기사단장이 연극배우처럼 연 회장 단상에서 검을 맞댔다.

챙! 챙! 챙! 챙! 때로는 막고, 때로는 흘리고,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쳐내고...

두 검사의 아슬아슬한 공방이 숨 돌 릴 틈 없이 진행됐다. 용사들은 하나 같이 생각했다. 누가 봐도 검술이잖아? ..라고.

-

그 치열한 접전의 승자는 체급이 압 도적인 기사단장이었다. "멋진 검무(劍舞)였네, 단장." "과찬이십니다." 손아귀가 찢어지며 검을 놓친 알서 스 왕자가 기사단장을 칭찬했다.

스르르,

대기 중인 신관의 도움으로 손의 부 상을 빠르게 치료한 왕자가 다시 검 을 쥐었다.

"용사님들. 잘 봐주십시오. 이게 여 러분이 배울 검술입니다. 단장. 이번 에는 전력으로 부탁하네."

"영광입니다!" 체급에서 압도적인 기사단장이 다시 한번 왕자에게 돌진했다. 이전이랑 차이가 있다면?

휘이잉!

휘이이잉! 두 사람의 검에 새하얀 회오리가 휘 감겨있었다.

칼날끼리 정면충돌했다.

댕강

그리고 부러졌다.

두 번째 충돌은 없었다. 무기를 잃은 기사단장이 칼자루만 남은 검을 놓으며 말했다.

"졌습니다."

"단장. 검술이 많이 늘었군." "하하하! 그래도 왕자님의 발밑에도

못 미칩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아부는 자제하

게."

"아부가 아닌 사실입니다. 알서스 왕자님은 소드마스타 기사왕국의 자 랑이십니다!"

"이 사람이..."

허무하게 끝난 두 번째 승부.

멋진 대결을 기대했던 용사들은 어 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야?"

"이걸로 끝?

너무 순식간에 끝나서 상황파악이 늦는 용사들을 향해 알서스 왕자가 설명했다. "상대의 모든 수단을 일격에 베어버 리는 힘! 이것이 검술입니다. 그럴싸 한 칼질만으로는 마왕은커녕 본국이 자랑하는 철갑기병조차 이길 수 없습

니다."

"아하!" "그, 그렇군!" 지구의 문화시민이었던 용사들은 이 해가 매우 빨랐다.

판타지 소설과 만화에서도 찔끔찔끔 싸우며 분량을 채우다가 필살기 한 방으로 끝내니까.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낭만이 아닌 효율. 알서스 왕자가 다시 찻잔을 들며 말 했다.

"이해하신 듯하니, 지금부터 검술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한 분도 빠지지 말고 마셔주십시오." "우엑?!" "뭐, 뭔 맛이?!"

"퉤퉤퉤!"

왕자를 따라서 대수롭지 않게 찻물 을 들이켠 용사들은 하나같이 식겁했

세상에 이런 맛이?!

똥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검술을 익히려면 전사의 가호가 필 수입니다. 이 약은 매우 빠르면서도 안전하게 가호를 습득하는 편법 다."

[전사]

▶ 수많은 사선을 넘긴 당신은 강해질 자 격이 충분합니다.

▶가로막는 모든 적을 사랑과 정의의 힘 으로 물리치십시오!

"으으..."

"우욱...!"

용사들은 이해했다.

혀는 물론이고 영혼까지 죽어버리는 이 맛은 '죽음의 고비가 틀림없다고. 차라리 독약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 을 것 같았다.

"여러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절대 로 흘리거나 뱉지 마십시오. 앞으로

검술을 배우려면 그 맛에 익숙해지셔 야 합니다." "신이시여..." "어머니..."

『순진한 어떤 여신이 무슨 맛인지 궁금해합니다.

『어떤 수신이 호기심 많은 친구를 말립니다.

『다정한 어떤 사신이 안타깝게 바 라봅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곡소리를 내는 그때, 한 소년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 로 외쳤다.

"한 잔 더...!"

텅!

찻잔을 깔끔하게 비운 그의 눈동자 는 반쯤 풀려있었다. 잘생긴 얼굴도 한껏 일그러지면서 10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괜찮은 걸까? 모두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가운 데, 알서스 왕자가 살짝 감탄한 어조 로 말했다. "앞에 놓인 달콤한 과자를 드시면 좀 나아지실 겁니다."

"아! 네!"

"단장. 경의를 담아서 최강민 용사 님께 한 잔 더 따라드리게." "물론입니다!"

주옥같은 검술 수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

*

"촌장님. 안 붙잡으시면 이대로 그 냥 도망갑니다?"

상황 종료.

처참한 몰골의 요정 암컷을 증인으 로 내세워서 마을주민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콜록! 크으윽..." 피를 토하며 쓰러진 촌장의 상태가 그만큼 좋지 않았던 까닭이다.

도망치지 말고 13레벨인 그의 먹을 따서 경험치를 꿀꺽하는 편이 더 좋 지 않을까?

...아니지. 한순간 그런 과감한 생각을 했지만, 욕심을 버리고 안전하게 지하실을 탈 출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면 나중에 봅시다." "용서 못 해...!"

"헛?!"

다 죽어가던 촌장이 벌떡 일어서더 니 믿기지 않는 속도로 내게 달려들 었다. "고기! 너만은 죽이겠다! 내 꿈을 망 친 네놈만은 반드시 다진 고기로 만 들어주겠다! 고기! 고기...!"

촌장은 인간의 머리로 말하고 있지

않았다.

번뜩!

가슴에 달린 놀의 머리가 새빨개진 두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광폭하게 외치고 있었다. "미친...!"

나는 어깨에 짊어진 요정을 내팽개 치면서 바닥을 굴렀다. 촤악내 가슴을 훑고 지나간 그의 손이 미 사의 가죽옷을 찢고 복부에 큰 상처 를 줬다.

저건 또 뭐야? 촌장의 양손에는 빨간 젤리가 권투 글러브처럼 뭉쳐있었다.

그가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한껏 우쭐댔다.

"놀랐느냐? 놀랐겠지! 이 힘은 놀만 가능한 놀의 검술이니까! 원래는 요 정을 사냥하려고 비축해둔 힘이었는 데, 네놈 때문에...!"

"미안하게 됐네." ", 어떻게?! 분명히 치명타였거

늘...!"

아무렇지 않게 일어선 나를 본 촌장 이 경악했다. 상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

"그러게. 정말 위험했어." 가호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남은 생명을 불태워서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한 촌장이었지만, 다음까지 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큭! 두고 보자!"

방금 공격으로 힘을 소진한 그는 도 망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 □□...!"

안중에 없었던 요정 암컷이 양손으

로 그의 발목을 덥석 붙잡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이 벌레 년이...!?"

댕강!

그 틈에 파고든 내가 휘두른 푸른 절 단기가 촌장의 목을 정확히 베어 넘 겼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다. 그에게는 머리가 하나 더 있으니까.

푹! 여전히 눈이 새빨간 놀의 이마를 찌 르고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잘 가쇼." "분하다... 마법사... 힘을... 마법 을... 나의 딸... 아빠가 원수를... 미안 해... 사랑..."

목이 잘린 촌장의 머리가 천천히 눈 을 감았다. 『어떤 신이 무척 유감이라고 합니

"그러게 말이에요."

명복까지 빌어준 내가 살아서 무척 유감이신 모양이다. 자, 그러면...

"여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 □□□." " . ᄆᄆ..." "OOO? □□."

숨죽인 채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요 정들이 한마디씩 했다.

감사한다, 정말 고맙다, 너는 누구 냐, 얼른 풀어달라, 잃어버린 보따리 를 내놔라... 대충 이런 의미가 아닐까? 나는 묵묵히 요정들의 속박을 풀어

주고 마을주민을 불렀다. 지하실을 보고 경악한 주민A가 뛰 쳐나가서 주민B를 부르고, 마찬가지 로 경악한 주민B는 주민C를 부르고, 주민C는 주민D를... 마지막에는 마을의 자경대가 우르르 몰려와서 사태를 수습했다. 그리하여 상황이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까지는.

"OO!"

"□□□!"

"죽여버린다, 요정 새끼들...!"

마을에서 탈출한 나는 다시 한번 절 벽에서 뛰어내렸다.

011화

[4장] 업보

에소프레쏘. 요정의 고대어로 '어여쁜 봄비'란 이 름의 요정 여인은 원시적인 치료를 받고 있었다. "으윽." "약을 거의 다 발랐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마을의 약사가 바르는 약은 조금 전 에 생긴 상처의 고통을 덜어줄 뿐이 었다. 그녀의 온몸에 빼곡한 흉터는 마법 으로도 지울 수 없다. 귀와 함께 도려 진 존엄성도... "괜찮으십니까?" "괜찮은 것 같나요?" "죄, 죄송합니다."

죽은 자도 되살리는 성녀의 기적만

이 그녀의 몸을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건 헛된 희망이다. 세상에 단 둘뿐인 고귀한 성녀가 왕 족도 아닌 일개 요정에게 기적을 베 풀 리 없기 때문이다.

"안정을 취하십시오. 그 인간은 저 희가 반드시 붙잡을 테니 염려 놓으 셔도 됩니다."

에소프레쏘는 조용히 방을 나가는 약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았

그녀의 몸을 망가트린 원흉은 이 마 을의 촌장 크림슨이지만, 여태까지 관망만 한 주민들도 다를 게 없으니 까.

어쩌면 공범일지도 모른다. 일이 틀어지자 입을 싹 닦고 몰랐던 척하는 걸지도...

똑똑.

"...누구시죠?"

상념을 깨우는 노크 소리에 에소프 레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지하실 문을 열 고 들어오는 촌장의 모습이 아른거렸

던 탓이다. "에소프레쏘. 저예요."

"들어와요."

에소프레쏘는 동료의 방문을 허락했

다.

고향에서부터 알던 사이는 아니다. 그 끔찍한 지하실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며 생긴 동료의식의 결과일 뿐.

이 요정 외에도 동료라고 부를 수 있 는 동족이 많았다. 예전에는 더 많았 지만, 모두가 촌장에게 장난감처럼 농락당하다가 하나둘 그녀의 곁을 먼 저 떠났다.

"마을의 용병들이 그를 놓쳤다는 것 같아요."

"그 얘기를 왜 하죠?"

"우리를 구해준 분이라서..." "인간들의 문제예요. 우리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는 촌장의 마수로부터 우 리를 구해줬어요..."

동료의 소심한 반론에 에소프레쏘는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러면 그 인간이 소유한 공주님의 단검은요?"

"그, 그건..."

그녀는 우물쭈물하는 동료에게 확신 에 찬 어조로 외쳤다. "또 속고 싶나요?!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짐승이에요....!" "에소프레쏘. 하지만 그는 우리를 구해줬어요..." "그래서 입 다물고 있잖아요? 우리 가 그를 죽이라고 했나요? 짐승들끼 리 서로 물어뜯는 거잖아요." "짐승이라니..."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눈앞에서 잃었지만, 에소프레쏘처럼 모든 인간

을 증오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포함한 모든 요정이 은인을 외면했다. 이유는 단 하나.

"에소프레쏘. 그 단검이 정말로 공 주님의 물건인가요?"

"네. 확실해요. 지금은 이런 몰골이 지만, 과거의 저는 미모만으로 발탁 되어 왕궁에서 일했었어요. 덕분에 공주님을 볼 기회도 많았죠. 그러니 믿으세요." "네..."

"아직도 불안한가요? 그러면 촌장과

그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보세요."

"공주님을 살해하고 단검을 빼앗았 다고 했었죠..." "맞아요."

드디어 수긍하는 동료의 모습을 본 에소프레쏘는 만족했다.

바로 그때,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면서 삐쩍 마른 요 정이 방으로 들어왔다.

에소프레쏘의 몸 상태가 나쁜 건 틀 림없지만, 지금 들어온 요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에소프레쏘! 이게 대체 무슨 짓이 냐!" "세레브레쓰 원로님. 몸은 좀 괜찮 으신가요?" "묻는 말에나 대답- 크윽...!" 무리해서 움직인 요정이 지푸라기처 럼 쓰러지기 직전에 벽을 짚으며 간 신히 버텼다. 세레브레쓰, 고대어로 '신성한 태양' 이란 이름을 쓰는 요정 왕족이다.

방계이긴 해도 무한한 수명을 가진 까닭에 촌장 크림슨이 특별히 아꼈던 장난감.

그래서 가장 오랫동안 그곳에 감금 되어 있었던 요정이기도 했다. "진정하세요, 원로님." "진정?! 이 상황에 진정하란 말이 나 오느 크윽..." "이젠 안전해요. 본국에 소식을 알 리면 다 끝나요." 이 마을의 인간들도 수상하다.

에소프레쏘는 본국에 돌아가면 이 마을부터 고발할 생각이다.

진정한 끝을 위해. "무엇이 끝났다는 게냐!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진정하세요."

"...그분은 혼자 도망칠 수 있었음에 도 나를 풀어줬다."

"원로님의 무한한 수명을 노린 거예 요. 화를 가라앉히시고 냉정하게 생 각해보세요."

"허어...!"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댄 세레브레쓰 는 눈을 감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촌장 크림슨의 흑마법에 속수무책이 었던 강한수는 계약위반'을 이용했

다.

흑마법의 계약.

이것을 어기면 받은 대가만큼 역으 로 잃게 된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받은 대가가 크면 클수록 위험부담 또한 커진다. 계약위반으로 '무한한 수명을 잃은 촌장 크림슨처럼. "원로님?" "은인께서 흑마법의 계약을 이용했 다는 건 아느냐?"

"네. 그 인간이 계약 조건으로 걸었 던 미사라는 용병이 행방불명되어 여 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요. 수상하 지 않나요?"

세레브레쓰는 말문이 막혔다.

계약위반을 유도당한 촌장 크림슨은 강한수의 수명을 얕잡아보다가 자멸 했다. 이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세레브레쓰 원로님. 이제 좀 진정 되셨나요?" "...불쌍한 에소프레쏘."

"예?" "왕궁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 던 어여쁜 시녀의 모습이 아직도 어 른거리는데... 이제는 과거의 잔재가 돼버린 듯하여 슬프구나."

"당신은... 제 마음을 몰라요. 제가 느낀 절망과 굴욕을...!" "그렇겠지. 나는 네가 아닌데 어찌 알겠느냐?" 세레브레쓰는 여태 감고 있던 무거 운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는 나직 이 탄식했다. "내가 잠깐 잠든 사이에 일이 이 지

경이 되어있을 줄이야..." "다시 주무세요, 원로님. 깨어나시 면 다 끝나있을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면. 나는 지금부터 그분을 찾 으러 가겠다."

"워, 원로님...?!" 요정들에게 있어서 '원로'란 존재는 존경받아야 마땅한 어른. 살아있는 역사책이나 다름없는 그들 의 지혜가 동족들을 슬기롭게 이끌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원로는 '꽉 막힌 노인네'

라는 소리를 듣지만, 세레브레쓰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약해진 몸으로 돌아다 니다가 객사하기라도 하면? 꽉 막힌 노인네들밖에 환영하지 않 는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나를 원로라고 부르지 마라. 쉽게 흥분하는 늙은이 에게 과분한 호칭이니."

세레브레쓰는 동족들을 뒤로하고 비 틀비틀 방을 떠났다.

『어떤 신이 살금살금 현장을 떠납 니다』

*

*

*

『어떤 신이 아싸에게 살아있냐고 묻습니다. "보시면 알잖아요."

이번에는 충격을 완화해줄 놀들이 없었지만, 그 대신에 울창한 숲이 절 벽 아래에 깔려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인간의 마을을 찾으면서 대략적인 지형을 머릿속에 틈틈이 저장해두길 잘했다.

"OOO □?"

"□□□□□."

"OO. OOO."

마을의 여관방에서부터 나를 끈질기 게 추적해온 용병들. 대화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 지만, 빼곡한 수풀에 가려진 나를 찾 지 못한 그들은 빠르게 포기하고 철 수했다.

"...위험했네."

인간은 전략이 단순한 놀을 상대할 때랑 확실히 달랐다. 돈으로 친구가 된 경비병이 마을의 입구를 열어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붙잡혔을 것이다. 그 뒤에도 아찔했던 순간이 몇 번이 나 있었다.

『어떤 신이 엉덩이를 보라고 충고 합니다. "...엉덩이요? 헉!" 무사히 착지한 줄 알았던 내 엉덩이 에 굵고 단단한 나뭇가지가 박혀 있 었다.

나, 죽을 뻔한 거?

까딱 잘못했으면 정말 치욕적인 최 후를 맞이할 뻔했다.

『어떤 신이 무척 한심하게 바라봅 니다.

"그만 보세요! 이 일은 무덤까지 비 밀로..."

"고기! 고기다!"

"나무에 고기! 고기!" "고기! 내려와라!"

마을을 떠나자마자 정겨운 인사로 나를 환영해주는 놀들.

다짜고짜 공격해온 인간과 요정보다 훨씬 신뢰가 간다는 점이 실로 아이 러니하다. "...아! 그렇지." 안 그래도 녀석들에게 물어보고 싶 은 게 있었다.

급히 도망치느라 푸른 절단기와 너 덜너덜한 가죽옷이 전부지만, 놀 몇 마리는 가뿐하다.

나도 상당히 건방져졌는걸? 여전히 1레벨에 머무는 판타지 새내기 주제

에.

"고기! 고- 꾸엑!"

예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나무 위에 서 뛰어내린 나는 놀의 정수리를 무 릎으로 찍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고- 켁!"

쓰러지는 놀의 어깨를 밟으며 재차 발돋움한 후, 옆의 친구 안면을 왼팔 팔꿈치로 후려치고... "인간 고 아악?!"

동시에 오른손에 쥔 푸른 절단기로 또 다른 친구의 먹을 가볍게 따줬다.

털썩! 털썩! 털썩!

놈들이 '고기!'를 다시 외칠 틈도 안 주고 상황 종료.

3마리는 간단하군?

『어떤 신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아 싸를 봅니다』

"그러게요. 확실히 이전보다 몸이 날렵해진 것 같아요."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쭉 함께해온 똥배도 여전한데 말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안 본 사이에 레벨이라도 올랐나?

[이름] 강한수 [레벨] 1 [가] 아싸F [저 용사E

[배당] 3.43

유감스럽게도 바뀐 건 없었다.

아니, 딱 하나 있었다.

"아싸 신님. 상태창에 이 배당이란 건 뭐예요? 숫자가 조금씩 계속 올라 가는데."

『어떤 신이 배당도 모르냐고 비웃 습니다. "알기야 하죠."

내가 아는 '배당'이란? 주식, 투기, 경마 등에 돈을 걸어서 벌어들일 수 있는 기대수익의 배율이 다.

『어떤 신이 높을수록 좋다고 특별 히 조언해줍니다.

"눈물 나게 감사합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아싸 신 님이 판타지 정보를 제공해준 건 이 번이 처음이니까.

아무튼, "고, 고기?"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 게 신기했던 놀이 어리둥절했다.

그야 그렇겠지. 이놈들에게는 생포 란 개념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 니다.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말하는 고기?!"

"꼭 좀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요정들 때문에 엄청나게 화난 상태거

"요정 고기?" "그래. 요정 고기."

지금의 나는 너무나 약하다.

부지런히 경험치를 모아서 2레벨이 되더라도 복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 다.

그래서 고민했고, 그럴싸한 해법을 발견했다. "요정 고기. 주냐?" "그래." "오! 말하는 고기! 질문! 질문! 질문 해라! 요정 고기! 어서!" 요정의 고기를 준다는 말에 놀이 흥 분하기 시작했다.

"진정해." 나는 놈을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빡!

"아, 아프다! 나쁜 고기!"

머리를 부여잡으며 으르렁거리는 놀 의 항의를 무시한 나는 질문을 시작 했다.

"손이 빨개지는 놀의 검술. 어떻게 쓰냐?"

내가 찾은 해법.

촌장이 마지막에 사용했던 강력한

공격을 익히고 싶다. 놀만 쓸 수 있는 '놀의 검술'이라서 어렵다면 흉내라도 좋다. 적어도 지 금보다는 강해질 테니까. "빨간 고기?"

"신선해서 좋다!" 아무래도 모르는 듯했다. 놀의 엉뚱한 대답을 듣고 실망했지 만, 촌장이 그 상황에서 내게 거짓말 했을 것 같진 않다. 놀의 검술.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다 른 특징을 말했다. "눈이 빨개지는 거." "안다! 안다!" 처음부터 이렇게 물어볼 걸 그랬네! 촌장이 말한 '검술'이란 표현은 인간 의 관점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뭐라고 불러? "고기의 힘!" "그, 그렇군." 참으로 놀다운 작명이다. 중2병 감

성으로 멋진 이름을 상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거짓말이면 요정 고기는 없어." "진짜다! 요정 고기! 빨리!" 놀은 거짓말이 매우 서툴다. 그러니 진실일 터. 촌장이 죽기 전에 발악하듯 사용했 던 '놀의 검술이 실존한다면 다음은 간단하다.

"고기의 힘은 어떻게 써?"

"고기를 많이!" "많이?"

배부르면 된다!"

"흐음..."

사람은 배가 부르다고 눈이 빨개지 진 않는다.

그래서 놀의 검술인 걸까? 하지만 촌장은 딱히 무언가를 먹지 않고도 원하는 타이밍에 '고기의 힘' 을 사용했다.

그 뒤에 급속도로 힘을 소진하면서 탈진했었지.

"고기! 요정 고기! 빨리!"

"...배고픈 모양이네."

"고기! 약속! 고기!" 이 놀에게 요정 고기를 준다고 약속 하긴 했지만, 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무효...

『어떤 신이 약속은 소중하다고 못 을 박습니다. "어흠! 내가 고기의 힘을 보고 싶은 데, 너희는 평소에 뭘 먹냐?" "고기!" "미안. 멍청한 질문이었네." 놀의 검술.

고기의 힘.

정보가 여전히 부족하다.

원활한 복수를 위해 놀의 생태계를 연구해보도록 하자.

012화

"고기! 고기!"

"너희는 단백질이면 뭐든 잘 먹는구 나?" 나는 '고기의 힘'을 관찰하기 위해 놀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사 냥하는 중이다.

물론,

"고- 꾸엑?!"

"기어오르지 마."

녀석은 틈만 나면 나를 사냥하려고 달려들었지만, 성공할 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상태창을 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이름] 화살에 깨진 송곳니

[레벨] 6

[가호] - [저주] -

놈은 요정이 쏜 화살이 우연히 송곳 니에 맞고 튕겨서 기적적으로 산 적 이 있다고 한다. 그때부터 화살에 깨진 송곳니란 이 름이 생겼다고... 정말로 송곳니가 깨져 있다. "너, 6레벨 맞아?" "맞다! 증거!" 녀석은 손목에 팔찌처럼 감겨있는 갈색, 초록색 머리카락을 보여주며 내게 자랑했다.

놀의 명예훈장이라고 할까?

사냥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놀이 요정의 머리를 갖고, 머리가 썩으면 이렇게 머리카락만 챙긴다고 한다.

"요정 고기! 요정 머리!" "진정해." "약속! 요정 머리!" "내 질문에나 대답해. 요정을 둘이 나 사냥했다는 녀석이 왜 이렇게 약 하냐?" "억울하다! 말하는 고기! 강하다! 이 상한 고기!"

"흠..."

놀 화살에 깨진 송곳니는 요정을 두 번이나 사냥한 강자.

그래서 젊고 아름다운 족장의 13번 째 남편이 될 수 있었다고, 내게 또 자랑했다.

....실화냐?

놀의 족장은 여성향 로맨스 판타지 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불효자식만 모아놓은 학급 여학생들 이 놀로 환생했으면 무척 기뻐했겠는 걸? "말하는 고기! 약한 고기! 그런데 강 하다!"

"너는 내 레벨이 보여?" "안 보인다! 그래도 안다! 1레벨 고 기! 만만한 고기!" "본능적으로 아는 건가..." 나는 놀의 특징 외에도 다양한 정보 를 얻을 수 있었다.

가령...

"저쪽! 저쪽!" "저쪽에 뭐가 있는데?" "요정 고기! 많다!"

"그래?"

첫날에 나를 습격했던 요정들이 모

여 사는 마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 었다.

덤으로...

"고기에게 뺏겼다!"

"요정에게?"

"요정 고기! 나쁘다!"

촌장이 설명했던 과거가 미치광이의 망상이 아닌 엄연한 진실임도 확인했 다.

판타지 세계의 먹이사슬 따위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고기- 꾸엑?!"

"질리지도 않는구나?"

틈만 나면 덤비는 녀석을 죽이지 않 은 내 인내심에 박수! "거의 다 됐네."

내게는 녀석의 몸에 생긴 변화가 뚜 렷하게 보였다.

토끼, 사슴, 벌레, 알, 꿩...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놀의 뱃속에 힘이 조금씩 차올랐다. 흑마법의 계약으로 상대의 수명을 빼앗던 촌장의 방식보다 훨씬 단순하 고 쉬웠다. 효율은 떨어지지만.

"고기! 좋다! 토끼 고기!"

방금 잡은 산토끼를 한입에 꿀꺽 삼 킨 놀의 배가 출렁거렸다.

내 도움으로 단시간에 폭식해서 풍 선처럼 부푼 놀의 모습은 꽤 우스꽝 스러웠다. "이제 배부르냐?" 녀석은 대답 대신 털을 곤두세우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포효했다. "배부르다! 기분 최고다! 배고프기 싫다! 지금이 좋다! 고기! 고기가 더 필요해! 더 많은 고기...!"

번뜩! 놀의 두 눈동자가 신호등처럼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끈불끈!

풍선처럼 통통했던 몸이 순식간에 압축되며 보디빌더 같은 우람한 근육 질로 바뀌었다. "멋지네." "말하는 고기! 내 고기!"

팟!

변화한 체형만큼 확연히 빨라진 놀

의 기습. 지금까지 틈만 보이면 하던 짓이라 서 놀랍지도 않았다. 그보다... "정말 고마워." 녀석 덕분에 놀들이 이것을 고기의 힘'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고, 고기?!"

나는 피하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내 디디며 거리를 좁힌 후, 칼날처럼 세 운 오른손으로 놈의 복부를 찔렀다.

푸확! 놀의 두꺼운 털가죽이 찢기며 허리 가 양단됐다.

후두둑, 두둑... 뭉개진 내장과 부러진 척추 등이 사 방으로 튀었고, 절단면에서 흘러나온 대량의 피가 놀의 회색 털가죽을 붉 게 물들였다. "마, 말하는 고기. 강하다?"

"당연하지."

"어떻게...?" "짧은 동행이었지만, 유익한 시간이

었어. 화살에 깨진 송곳니, 네 덕분이

야."

스르르...

하반신과 힘을 잃자마자 원래 모습 으로 돌아온 놀이 두 눈을 연신 깜빡 였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 녀석은 남은 생명을 쥐어짜며 내게 질문했다. "고기도 놀...?" "아니. 나는 인간이야." 그렇게 대답하는 내 눈은 놀처럼 붉

게 빛나고 있었다.

찻잔을 끝내 못 비운 과반수의 용사 가 검사의 길을 포기하고 마법 수업 으로 이탈했다. 하지만 알서스 왕자는 실망하지 않 고 수업을 계속했다.

"마법은 재능이 필요하지만, 검술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습니다."

혀를 달래기 위해 달콤한 과자를 잔 뜩 먹고 식곤증에 빠진 용사들은 꾸 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래도 알서스 왕자의 미소는 흐트 러지지 않았다. "하, 한 잔 더...!" 도태되는 자가 있으면, 앞서가는 자 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앞서간 자들이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으면 일기 당천(一騎當千)의 '전사'로, 더 나아가

'기사'로 거듭난다.

"하하! 최강민 용사님. 오늘은 그만 드셔도 됩니다. 한꺼번에 많이 드시 면 효력이 떨어집니다." "아..."

눈물, 콧물 흘려가며 약을 마시던 용 사 최강민이 아쉬워했다. 하루빨리 강해져야 하는데! 그는 다른 용사들이랑 똑같이 취급 받는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 고 싶었으니까. 알서스 왕자가 최강민에게 평범한 꿀차를 권하며 말했다.

"꾸준한 장복이 중요합니다. 하루에 한 잔. 욕심을 부린다면 두 잔까진 괜 찮습니다." "매일 두 잔. 해보겠습니다." "최강민 용사님. 전사의 가호는 서 두른다고 단시간에 해결되지 않습니 다. 아이가 잘 먹는다고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 없듯이." "얼마나...?" "개인차가 심한 편입니다.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으신다면 1년 안에 얻 으실 겁니다." "1년이나... 어?"

알서스 왕자와 대화하던 용사 최강 민은 신비한 감각을 느끼고는 서둘러 상태창을 살펴봤다.

[이름] 최강민

[레벨]1

[가용사F 투지F

[저] -

[배당] 1.11

가호다! 마음 같아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팔 팔 뛰고 싶은 그였지만, 겉으로는 태 연한 척했다.

가호를 얻었다고 우쭐대던 장미연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았잖는가?

그는 한 차례 심호흡한 후, 주택복권 의 은박지를 긁듯 조심스럽게 가호를 살펴봤다.

[지] ▶ 당신은 싸움이 길어질수록 강해지고

위대해집니다! ▶ 싸우려는 의지가 꺾이거나 패배하면 효과는 초기화됩니다.

"굉장해..."

태연한 척하려고 했던 최강민은 가 호의 효과를 보자마자 무심코 중얼거

렸다.

『어떤 투신이 굉장하다고 우쭐댑 니다.

『어떤 무신이 콧방귀를 낍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최강민 용사 님. 투신의 가호라니! 기대가 매우 큽

니다."

"과찬이십니다." 겸손하게 대답한 최강민은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나는 이걸 원했어! 친구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꽂힐

때마다 짜르르 전류가 온몸을 관통하 듯 흥분됐다.

"용사님. 앞으로는 상태창을 숨기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가호는 감출수록 유리합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가신과 가족에게도 보여주기 싫다고 간절히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호의 효과로 훔쳐보는 건 막지 못하지만, 대부분 상황에서는 상태창을 감출 수 있습니다." "아!"

뿅! 뿅! 뿅! 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용사들의 상 태창이 자취를 감췄다. 썩은 동태 같은 눈깔로 수업을 들으 면서도, 당장 쓸만한 정보는 귀신같 이 잡아내는 게 용했다. 알서스 왕자는 그런 용사들을 만족 스럽게 바라본 후, 자리에서 일어섰 다. "지금부터 명상의 방으로 이동하겠 습니다. 가호가 없어서 이해가 쉽지 않겠지만, 힘을 얻자마자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왕자님! 검은 언제부터 휘두릅니

까? 계속 앉아만 있었더니 몸이 근질 거립니다!"

운동선수처럼 몸이 좋은 체육계 용 사가 명상이란 말에 질색하며 서둘러 질문했다.

이에 왕자는 조금 난감하다는 어조 로 답했다.

"흠. 검을 멋지게 휘두르는 방법은 따로 가르치지 않습니다만... 원하신 다면 자유시간에 배울 수 있도록 조 치해드리겠습니다." "그건 좀..."

체육계 용사는 더욱 싫다는 얼굴로

얌전히 물러났다.

귀중한 자유시간에 남아서 보충수업 이라니?

절대로 사양이다. "다른 질문이 없으면 빠르게 이동하 겠습니다. 심신(心身)을 안정시키는 고급 차를 준비했으니 기대하셔도 좋 습니다." "아..." "네..."

내가 생각했던 검술수업은 이런 게 아닌데...

모든 용사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어떤 검신이 눈에 띄게 실망합니 다.

『어떤 수신이 친구의 어깨를 토닥 여줍니다.

*

*

*

죽은 놀의 각막에 비친 내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기하네."

내가 방금 써놓고도 정확한 원리를

규명할 수 없었다. 포만감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놀 의 욕망.

그 격한 감정에 휩쓸린 놀의 육체가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감정이라..."

논리적인 분석은 포기했다.

수명을 거래하고 이용하는 판타지부 터 이미 과학적으로 접근하긴 글렀으 니까.

지금 중요한 건? 뿌우우!

증기기관에 넣은 석탄처럼 요란하게 타는 내 힘이 느껴진다.

아싸기 줄어든 힘은 완전히 고갈되기 직전 에 가호로 초기화됐다. 그리고 다시 줄어든다. 무한 반복! 『어떤 신이 아싸의 변화에 당혹스 러워합니다.

『어떤 신이 고기의 힘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아무나 못 쓰겠는데요?"

사기적인 가호가 없으면 고기의 힘 을 쓰자마자 수명이 고갈되어 죽을 테니까.

판타지가 판타지 했을 뿐인데 무슨 판타지라도?

진지하게 생각하면 지는 거다. "흠. 은근히 멋지네." 번뜩! 붉게 빛나는 내 눈동자를 볼 때마다 숨겨왔던 중2병 감성이 튀어나올 것 만 같다.

이런 거에 열광할 나이는 지난 줄 알 았는데...

『어떤 신이 매우 유치하다고 핀잔 줍니다. "흠흠. 얼른 가죠."

나는 '고기의 힘'을 활성화한 상태로 인간의 마을이 있는 서쪽으로 달렸

다. 다

시간이 별로 없다.

내 뒤통수를 친 요정들이 뿔뿔이 흩 어져서 찾기 힘들어지기 전에 처리하 려면 서둘러야 하니까.

[아싸]

다행히도 나는 지치지 않는다. 수면, 휴식이 불필요!

놀의 생태계를 연구하느라 시간을 꽤 허비했지만, 몸에 성한 곳 없는 요 정들이 벌써 마을을 떠났을 것 같진 않다.

하물며 지금은 한밤중. 식인 괴물이 바글바글한 숲을 가로지르기에는 시 간대가 좋지 않다. 반면에 나는? "거참..."

번뜩!

붉게 빛나는 두 눈이 손전등처럼 전 방을 비췄다.

뽀대용 장식인 줄 알았던 중2병 효 과의 쓰임새를 발견한 셈!

어젯밤에는 스마트폰의 손전등 기능 으로 밤을 버텼었다. 액정이 깨지고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서 반나절 만에 고철로 전락했지만. "운이 좋아." 마을 근처에 잠복해있다가 새벽을 노릴 예정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사 라졌다. "고, 고기?"

"고기? 어디?"

숲을 가로지르는 내 앞을 우연히 막 아선 놀들을 발견했다. "비켜."

퍽! 퍽!

달리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팔꿈치 와 주먹으로 놈들을 한 대씩 때렸더 니 간단히 죽어버렸다. 『어떤 신이 매우 황당해합니다.

"그러게요."

너무 강해졌는데?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애초

에 내가 지구에 있었다면 이런 힘도 불필요했을 테니까. 이 시간대면? 학교 숙제를 마치고 편안히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 을 때다. 스윽 이렇게 흉흉한 단검을 들고, 식인괴 물이 득실거리는 숲을 헤매지 않으리

『어떤 신이 왼쪽을 가리킵니다. "오! 감사요."

빼곡한 나무 틈새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숲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마을 을 찾아왔다는 방증. "자, 그러면..." 판타지 힘으로 판타지 야만인들을 응징하러 가보자!

013화

"□□?"

"□, □□."

당당하게 정문으로 침투할 수 있으 면 좋겠지만, 나 혼자서 마을의 모든 용병을 상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 였다.

그래서 개구멍을 팔 계획이었는데,

횃불을 든 마을의 경비병들이 두 사 람씩 짝을 지어서 목책 주위를 순찰 하고 있었다. "흠." 무시무시한 식인괴물이 득실거리는 위험지역 한복판에 세워진 마을인 까 닭일까? 경비가 철저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촌장에게 납치 당하기 전에 관광객처럼 마을 여기저 기 둘러보며 지형을 대략 익혀뒀었다. 는 점이다.

『어떤 신이 지금이 적기라고 다그

칩니다.

"오...."

비협조적이고 삐딱하던 신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준다.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이유를 물어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 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목책을 향해 돌진했다.

밤에 경비병들이 순찰한다는 걸 확 인한 이상, 개구멍을 파거나 목책을 파손시키는 건 무리. 누군가가 마을

에 침투했다고 노골적으로 알려주는 꼴이니까. "할 수 있으려나?" 목책에 올가미를 걸어서 벽을 타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내 본능이 속 삭였다. 아싸 신님의 말씀처럼 '지금'이 아니 면 다음 기회는 한참 뒤라고.

통나무를 일렬로 세운 장벽 앞에서 수직으로 뛰어올랐다.

푹!

이어서 푸른 절단기로 목책 중간을 찍고 팔을 안으로 당기며, 한 번 더

도약했다.

척!

"휘유~" 경비병에게 들키지 않고 마을에 침 투 성공!

마을의 전역이 내려다보이는 망루가 있었지만, 경비병이 볼일을 보러 갔 는지 텅텅 비어있었다.

운이 좋은걸?

『어떤 신이 고마운 줄 알라고 우쭐 댑니다. "네. 압도적 감사요."

갑자기 협조적으로 변한 신이 굉장 히 수상했지만, 지금은 감사한 마음 으로 이용해주자.

다음 순서는...

푹!

건물 밖 공용뒷간으로 향하는 용병 의 뒤로 돌아가서 목덜미를 찌르고 비틀었다. 내가 제대로 공부했다면 연수(延髓) 가 있는 부위.

"...!"

연수는 심장과 혈관 운동, 호흡 등의 반사중추들을 관리한다.

그런 연수가 잘못되면?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사망에 이르 겠지. 나보다 레벨이 높은 판타지 야 만인일지라도.

"용병 친구. 절벽 아래까지 확실하 게 확인하고 떠났어야지." "..."

털썩.

마을 안은 안전하다고 방심한 용병 이 맥없이 죽었다. 낮에 요정들의 말만 듣고 나를 죽이 려고 했던 용병 중 하나.

나는 그 용병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 하고 있다. 요정에게 속은 것뿐이라고?

그런 식으로 변명을 다 들어주면 세 상에 나쁜 인간은 하나도 없을 것이 다.

"...좀 씁쓸하네."

사람을 죽였음에도 놀이랑 별 차이 를 못 느끼는 내가 싫어졌다. 게리, 콜, 미사. 그 셋을 죽였을 때는 그래도 이들을 안 죽이면 내가 죽는다!'라는 절박함 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원한을 묻어두고 그냥 다른 지역으 로 떠났어도 상관없었다. 이 넓은 땅 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며, 이 용병이 죽으면 슬퍼 할 가족과 친구가 어딘가에 분명 있 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이들에게 복수하고자 다시 돌아왔다. "야. 너만 사람이 아니야."

질질...

죽은 용병의 시신을 어두컴컴한 골 목으로 옮기며 말을 걸었다.

나에게도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인연들이 있다. 그런데 이 판타지 야 만인들 때문에 영원히 못 만날 뻔했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어떤 신이 묘한 시선으로 바라봅 니다. "...멋졌나요?"

『어떤 신이 하던 일이나 마저 하라 고 핀잔줍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밤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

*

용사들은 판타지 모험 3일째를 맞이 했다. 모험이라기보다는 합숙 훈련에 가까 웠지만, 온종일 극상의 서비스를 받 고 있어서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 "마법사에게 가호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옷이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등 급과 레벨이 높아질수록 마법사의 역 량도 상승해요."

"가호를 습득하기 전에는 가르쳐드 릴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부 터는 명상 후에 사냥으로 레벨을 올 릴 겁니다." 수업을 시작하고 이틀 만에 다시 모 인 에테나 공주와 알서스 왕자가 한 마디씩 했다. "레벨!"

"사냥인가!"

"오2 "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지만, 그 사실 을 조금 전에 처음 알게 된 용사들은 흥분했다.

액션을 좋아하는 남자들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드디어..."

"정말로 예뻐질까?

"후후, 후후후!"

레벨이 높아지면 피부가 고와지고 몸매가 좋아지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 가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시녀들로 부터 입수한 여자들도 싱글벙글하긴 마찬가지. 예뻐지는 걸 싫어할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적어도 용사 중에 는 없었다.

"슬라임이다!" "내 경험치!" "좋았어! 나도!" 일부 용사들이 둥글둥글한 젤리 모 양의 생명체를 발견하자마자 용감하 게 돌격했다.

그들의 손에는 목검이 하나씩 쥐어 져 있었는데, 롤플레잉게임에 곧잘 등장하는 낡은 목검' 같은 초보자용 싸구려가 아니다.

마법 코팅으로 절삭력을 강화한 극 상품!

아직 1레벨이고 기초체력도 약한 용

사들에게 철검은 너무 무거워서 고안 된 '가벼운 무기'였다.

말랑?!

말라앙?! 목검 든 용사들의 무시무시한 기세 에 사냥감들이 화들짝 놀라며 말랑거 렸다.

"멈추세요!"

"멈추십시오!"

그 야만적인 광경을 보고 식겁한 공 주와 왕자가 서둘러 용사들을 만류했

다.

"왜요?"

"위험한가요?"

"내 경험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질 문하는 용사들에게 알서스 왕자가 말 했다. "여러분의 말씀처럼 이 생명체의 이 름은 슬라임입니다. 인간을 해치지 않는 이로운 생물이지요." "이로운...?" "슬라임이...?" "그렇습니다. 슬라임이 없었다면 도

시 전역이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 찼 을 겁니다. 또한, 슬라임은 해충과 시 체도 먹습니다. 그래서 슬라임이 많 이 사는 도시와 마을은 역병이 창궐 할 확률도 감소합니다."

용사들은 말문을 잃었다.

판타지 게임, 소설, 만화 등에서 아 무렇지 않게 경험치로 치환했던 슬라 임이?

마, 말랑...

에테나 공주가 말랑말랑 떠는 슬라

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절대로 슬라임을 공격하시면 안 돼 요! 애완동물로 키우는 가정집도 많 은걸요? 슬라임을 사냥하면 전설의 용사님이라도 야만인으로 매도당할 수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네..."

"주의하겠습니다..."

따끔한 훈계를 듣고 반성한 용사들 은 의문이 들었다. 만만한 슬라임이 아니면 뭘 처치해 서 레벨을 올리란 걸까?

그들의 생각을 눈치챈 알서스 왕자

가 숲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설명했

다.

"평균 2레벨의 고블린이 가장 적합 하지만, 이 근방의 고블린은 고대의 용사님들이 씨를 말려놔서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목표는 평균 4레벨의 놀입니다." 4레벨?!" "우리는 1레벨인데?"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러게. 놀은 좀..." 용사들의 걱정 섞인 목소리를 들은 에테나 공주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에게는 성녀 님이 계시니까요. 죽어도 부활할 수 있어요." "죽어?" "죽는다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안심하긴커녕 더 욱 공황에 빠진 용사들.

한숨을 푹 내쉰 알서스 왕자가 서둘 러 그들을 진정시켰다.

"여러분은 숫자가 많습니다. 이 인 원이면 평균 6레벨의 오크도 처치할 수 있습니다. 죽는 상황은... 운이 정 말 없지 않으면 어지간해선 벌어지지

않습니다."

어디 운뿐일까? 심각하게 무능해도 죽지만, 알서스 왕자는 말을 아꼈다.

부스럭.

■■■■!" 때마침, 수풀을 헤치며 놀 2마리가 튀어나왔다. 놈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인간의 숫 자를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 알서스 왕자가 도망치려는 놈들의

뒤편을 막아서며 외쳤다. "공격하십시오! 숲에 먼저 들어간 기사단이 몰이한 놀들입니다! 경험치 는 공적이 높을수록 많이 오르니 주 저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는 경쟁입 니다!" "좋았어!"

"내가 먼저다!"

"나부터야!"

경쟁! 머뭇거리면 경험치를 빼앗긴다고 판 단한 용사들이 놀들을 향해 용맹하게 돌진했다.

무시무시한 인간이 퇴로를 막는 바 람에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한 놀들 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부웅놀은 목검을 잽싸게 피한 후, 바짝 세운 손톱으로 인간의 얼굴을 사정없 이 긁었다. "아악?! 내, 내 눈~?!" 댕그랑. 용사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트린 목

검을 주워든 놀.

다른 한 놈도 사정이 비슷하긴 마찬 가지였다. 용사에게서 빼앗은 목검을 쥐고 있었다. "■■■?"

서로를 돌아보며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은 놀들이 빼앗은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꺄악?!" "내 팔이! 팔이....!"

"사, 살려줘!"

놀 2마리에 의해 그 10배가 넘는 용 사가 유린당했다.

놈들은 똥오줌 지리며 도망치는 용 사들을 추적해서 목검으로 내리치고 목을 물어뜯었다.

마법?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느긋하게 불 덩이를 생성할 수 있는 용사는 별로 없었다.

펑.

"어, 어째서... 꺄앗?!"

간신히 성공하더라도 위력이 너무 약해서 놀의 회색 털가죽조차 태우지 못했다. "...거기까지."

"■■?!"

용사들의 공적을 빼앗지 않기 위해 관망만 하던 알서스 왕자가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서걱

단 일격에, 용사들을 농락하던 놀들

이 양단됐다.

"흑, 흑흑..."

"엄마... 엄마아아..." "내 다리! 다리가?!" "아파! 아파...!"

놀 2마리가 휩쓸고 간 자리는 실로 참혹했다.

놈들이 날뛰게 더 놔뒀으면 사망자 와 중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리

라.

"어떻게 이런 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알서스

왕자는 혼란에 빠졌다.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용사님들을 인솔하느라 정말 수고 했어요, 알서스 왕자."

"성녀님!"

멀리서 사냥(?)을 지켜보던 성녀가 호위도 없이 다가왔다.

왕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라 정말 드릴 말씀 이 없습니다. 전설의 용사님들이 이 렇게... 그러니까..." "어설프죠."

"그, 그렇습니다!" 무능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알서스 왕자는 성녀의 표현'에 동의 했다.

파앗!

오른손이 새하얀 빛에 휩싸인 성녀 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의 신께서 이분들을 용사로 선 택하여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분명 있을 겁니다."

『어떤 남신이 있었냐고 묻습니 다.

『어떤 신이 물음표를 띄웁니다.

『순진한 어떤 여신이 어리둥절합 니다.

『어떤 악신이 어깨를 으쓱합니 다』

벌떡! 벌떡! 성녀가 생성한 치유의 빛에 닿은 용 사들이 하나둘 부활했다. "으으..."

"흑, 흐윽..."

"엉엉!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과 상처까지는 치료할 수 없었다.

그런 용사들을 한 차례 슥 훑어본 성 녀가 선언했다.

"위대한 용사들이여. 죽을힘을 다해 싸우세요. 죽을 때마다 제가 부활해 드리겠습니다."

"히익?!" "헉!"

바퀴벌레보다 질긴 용사들의 진짜 모험이 드디어 시작됐다!

나도 게임, 소설, 만화 등을 보면서 판타지 세계의 모험을 동경하던 시절 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전개는 없 었다.

턱!

"...?!" 내 손아귀에 목을 붙잡힌 용병이 무 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우득.

시커먼 엉덩이를 박박 긁으며 골목

을 걷던 그는 비명도 못 지르고 축 늘 어졌다. 나는 목뼈가 부러지며 즉사한 용병 의 시신을 먼저 간 동료들 위에 샌드 위치처럼 포갔다.

"...너무 조용하네." 용병이 이만큼 죽었으면 수상하게 여길 법도 한데, 마을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어째서 용병만 잡고 있느냐?

내 잘못이다.

호기롭게 마을에 침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에는 어떻게 요정을

찾을지 막막했던 까닭.

나는 전문적으로 배운 살수나 암살 자가 아니니까. 사람들에게 안 들키 면서 표적만 죽이고 빠져나오는 기술 이나 방법 따위 모른다. "이걸 어쩐다?"

그렇게 머뭇거리다 보니, 뒷간으로 향하는 용병만 하염없이 처리하고 있 었다.

『어떤 신이 굉장히 한심하게 바라 봅니다』

"그러게요."

내가 생각해봐도 참 한심하다.

요정에게 복수한다면서 용병만 잡고 있으니... 음? "요정이 왜 없지?" 뒷간으로 향하는 마을주민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까지 '요정'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 다.

요정의 방광은 인간의 것보다 용량 이 큰 걸까?

『어떤 신이 이제야 눈치챘냐고 비 웃습니다.

"너무하시네."

요정만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유가

뭘까? 벌써 마을을 떠났다면 큰일인 데...

내가 그 문제로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OOD."

"O. □□□." " ." 용병이 아닌 순수한 마을주민들이 횃불도 없이 밤길을 살금살금 이동하 는 게 보였다.

그뿐이면 별 신경 안 쓸 텐데...

",

"

주민들은 머리에 포대를 씌운 요정 들을 강제로, 촌장의 집으로 데려가 고 있었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는걸."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끼워 달라고 해보자.

014화 [5장] 착각은 자유

끼이익

잠결에 눈을 뜬 에소프레쏘는 누군 가가 접근하는 소리를 듣고 비명을 지르려 했다.

"우, 우웁.!"

하지만 단단한 손이 그녀의 입에 천 을 욱여넣으며 틀어막는 바람에 무산

됐다. 그녀는 범인의 얼굴이라도 확인하려 고 했지만, 머리에 포대가 씌워지면 서 시야마저 차단됐다.

어째서?!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있을 줄 알았 던 그녀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범인이 으스스한 어조로 그녀를 협 박했다.

"조용히 움직여. 허튼짓하면 좋은 꼴을 못 볼 거다."

망연자실한 에소프레쏘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지시를 따랐다. 얼마 안 가서 공범으로 짐작되는 남 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은?" "문제없다. 그런데 손의 상처는?" "...입을 막으려다가 물렸어."

"그런가. 가자고." 범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생포되 어 끌려가는 요정이 그녀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또각, 또각, 또각...

"웁!! 우웁?!"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자마 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는 촌장의 집! 심지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지 하실로 향하고 있었다. "얌전히 있어." "우웃!" 질질 끌려간 에소프레쏘는 낮에 자 신을 치료해준 치유사의 목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크림슨은 저희가 아무것도 모른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여겨도 어쩔 수 없지요. 새로운 고향과 가족 이 생긴 저희가 애써 외면해왔으니까

요."

그녀를 납치한 자가 치유사의 독백 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의 업보요. 새로운 고 향을 함께 일군 친구가 혼자 싸우도 록 놔둔 죄. 우리는 그를 원망할 자격 이 없소."

에소프레쏘에게 죽을 끓여준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낮에 식당에서 들었어. 이 요정들 은 인간을 증오하고 있어. 살려두면 또다시 우리의 가족과 고향을 빼앗을 거야."

그 뒤를 이어서, 마을의 경비대장이 보고했다. "오늘은 마을이 어수선하니 순찰시 간 외에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 고 일렀네. 용병들도 잘 타일러서 돌 아다니지 않게 했고." 한마디씩 주고받은 마을주민들은 한 동안 대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각오를 다진 어조로 치유

사가 운을 뗐다. "시작하지." "...그래." "크림슨에게 명복을." "친우를 위해."

푹!

마을의 경비대장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에소프레쏘의 심장에 칼을 꽂았 다.

여기로 다시 끌려오기 전부터 이미 상당히 약해져 있었던 그녀는 허무하

게 절명(絶命)했다.

푹! 푹! 푹! 지하실로 끌려온 다른 요정들도 차 례대로 에소프레쏘의 운명을 뒤따라

갔다.

"이제..." "하나 남았군."

"어쩌지?"

시선을 교환한 네 사람은 의자에 손 발을 묶어놓은 요정 여성을 돌아보았

다.

그녀는 다른 요정들처럼 머리에 포 대를 씌우거나 입에 재갈이 물려있지 않았다.

전쟁포로로 붙잡힌 귀족에 버금가는 정중한 대우.

그 요정이 여태까지 다물고 있던 입 술을 뗐다. "...그대들의 목적은 나까지 죽여야 완수되는 것 아니더냐?"

눈앞에서 동족이 학살당했음에도 요 정의 말투는 초연했다.

"그게 참..."

"하아..."

"난감하군." "흐음..." 그녀는 절벽에서 떨어진 은인의 시 신을 수습하겠다고 고집부리며 마을 을 나섰던 요정. 물론, 그녀는 나가자마자 납치되어 이 지하실에 감금됐다. 그리고 여태 까지 방치됐다.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거물 중의 거물 이었던 까닭! "그대들의 범행 동기는 충분히 이해 하느니라. 하지만 입을 막기 위해 은 인의 목숨까지 빼앗은 것에는 분노가

치미는구나." "그것이..." "죄송합니다."

네 사람은 이 요정의 목숨을 쥐고 있 음에도 어깨를 펴지 못하고 움츠렸 다.

대원로 세레브레쓰.

원래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수조 차 없는 고귀한 신분이다.

하물며 납치?

들키는 날에는 마을주민이 몰살당하 는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무엇을 망설이느냐? 그대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을 텐데." "원로님." "불가." 세레브레쓰는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 고 거절했다.

"...이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 해주신다면 바로 풀어드리겠습니다."

맹세.

수천 년을 사는 요정들이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가치.

세레브레쓰는 차갑게 응수했다.

"협박으로 한 맹세에 효과가 있다고 보느냐?"

"그런...!" "못 믿겠으면 시험해보겠느냐?" "세레브레쓰 원로님. 어째서 그 사 실을 가르쳐주시는 겁니까? 숨겼다 면 저희는 안심하고 풀어드렸을 텐데 요."

마을에서 가장 똑똑한 치유사가 그 녀에게 질문했다. 세레브레쓰는 웃었다. "이 기회에 잘 알아두거라. 요정은 하찮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거짓말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당당하게 말한 그녀도 잘 알 고 있다.

살기 위해 거짓말하는 요정도 얼마 든지 있다는 사실을.

또한, 자신처럼 죽음으로 속죄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요정도 있다.

"...그러시면 어쩔 수 없지요. 세레 브레쓰 원로님. 최대한 고통 없이 보 내드리겠습니다."

스릉. 경비대장이 요정들의 피로 얼룩진 칼을 그녀에게 겨누었다.

(

)

세레브레쓰는 편안히 눈을 감고 최 후를 기다렸다.

"뒤...!"

"조심!"

"헉?!"

"무슨?!" 바로 그때, 경악과 공포에 휩싸인 네 사람의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렸 다.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뜬 세레브레 쓰는 보았다.

푸확! 목이 잘린 경비대장의 머리가 허공 으로 날아가는 광경을. 물론, 그녀가 놀란 이유는 그것 때문 이 아니었다. "어떻게...?"

"OOO?"

절벽에 떨어져서 죽었다던 은인이 다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