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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떻게 할까. 입술을 깨물며 라온을 보다가 그 아래에 있는 꽃을 보았다.

'살짝만 밟을까.'

이런 시간에 화단을 가꾸는 걸 보면 꽃을 아끼는 게 분명했다. 조금 건드려서 자극하면 덤벼들지도 모른다.

"어울리지 않게 꽃을 좋아하나 보네."

마르타가 화단 쪽으로 슬쩍 발을 움직였다.

"별로."

예상과 달리 라온은 모종삽을 툭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뭐?"

"꽃 안 좋아한다고,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머니 때문에 조금 다듬어줬을 뿐이야."

"...."

화단의 꽃을 밟으려던 마르타가 우뚝 멈췄다.

"왜? 안 밟아?"

라온은 이쪽의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옅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빌어먹을."

마르타가 욕을 내뱉으며 발을 뺐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화단을 가꿨다는 소리에 꽃을 밟을 마음이 사라졌다.

"젠장."

혀를 차고 등을 돌리려 할 때 별관의 문이 열리고 긴 금발을 뒤로 묶은 미모의 여성이 달려 나왔다.

"라온!"

"어?"

얼음장처럼 냉정했던 라온의 눈빛에 당황이 비쳤다.

"어, 엄마."

"안 보인다 했는데, 화단을 가꿔주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니?"

여성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렸다.

'이 사람이 실비아 지그하르트인가.'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가문을 떠난 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돌아온 가문의 망신이자, 폐급이라 불리는 여자.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

마르타에겐 폐급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용기를 낸 어머니로만 보였다.

"치, 친구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야. 내가 정리할 테니 들어가."

라온이 드물게도 말을 더듬었다.

"이 친구도 예쁘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아! 네가 마르타구나!"

실비아는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

마르타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였다.

"라온하고 대련했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없니?"

그리운 엄마의 눈빛과 같았기에 알 수 있다. 실비아의 장밋빛 눈동자는 정말 자신의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실비아가 옅게 웃었다.

"데니어 오라버니가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들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그녀는 자신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정말 예쁘다고, 너무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니?"

"잠깐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다 끝났으니 가볼게요."

마르타가 다시 고개를 꾸벅이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꼬르르륵.

새벽 수련 후 아침을 굶었던 대가가 찾아왔다.

"아…."

마르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뒤돌아서 달려가려고 할 때 따스한 무언가가 손목을 잡았다.

실비아였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손을 까딱였다.

"밥 먹고 가렴."

마르타는 왜인지 모르게, 그 가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 * *

이게 뭐지?

라온은 식탁 앞에 마주 앉은 마르타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도통 모르겠네.'

실비아가 배꼽시계가 울린 마르타에게 밥을 먹고 가라고 한 건 이해할 수 있다. 워낙에 착한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저 광녀가 실비아에게 끌려와 식탁에 앉고, 조신하게 음식을 기다리는 모습은 생각도 못 한 장면이다.

머리카락을 자르더니, 성깔도 같이 잘린 게 아닌가 싶다.

"라온이 고기 스튜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우리 식탁에는 스튜 하나는 꼭 있어."

"아, 네."

실비아는 뭐가 그리 기쁜지 방실방실 웃었고, 마르타는 부끄러운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대답만 했다.

-저 계집 지금 뭐 하는 거냐?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지 않느냐.

'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지그하르트 가문에서 태어난 이후 이렇게까지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 건 처음이었다.

곧 식사가 나왔다. 스튜와 소고기구이 그리고 채소와 데운 빵이었다.

"라온보다 한 살이 많지?"

"네."

"훈련할 때 어려운 건 없니?"

"별로 없어요."

실비아는 식사하면서 마르타에게 말을 걸었고, 마르타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질문에 곧잘 답을 해주었다.

'허….'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 진짜 왜 저래?'

마르타는 남이 말을 걸면 일단 욕부터 나오는 인간이다. 저렇게 호의적인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음…."

라온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스튜를 꿀떡 넘겼다.

"우리가 요리는 정말 잘하는데, 고기 질이 본관에 비해 좀 떨어져.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으렴."

"...."

실비아의 조언에 포크를 쥔 마르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발작을 일으킬지도 몰라서 막을 준비를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후 다시 고기를 찍어 먹었다.

사람의 감정은 잘 모르지만, 그녀의 손에서 뭔지 모를 서글픔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잘 먹었어요."

그렇게 어색한 식사가 끝나고 마르타가 일어섰다.

"맛은 어땠니?"

"맛있었어요."

"다행이네. 앞으로는 라온과 친하게 지내주렴."

실비아는 문 앞에서 마르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네."

마르타는 의외로 정상적인 대답을 하고 별관을 떠났다.

'진짜 뭐지?'

시비를 걸러 왔던 게 분명한데, 갑자기 저런 태도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뭐 잘못 먹은 건가?

'그럴지도.'

인간의 감정이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 * *

마르타는 별관을 나오자마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바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닮았다.

얼굴도, 머리 색도, 입은 옷도, 목소리도 달랐지만, 장미색 눈빛이 실종된 엄마와 너무도 닮았다.

그래서 그녀가 손목을 잡았을 때 뿌리치질 못했다.

라온은 날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녀석의 눈빛이 그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 보았다.

늦게라도 나갈까 고민했지만, 밥을 먹고 나가길 잘했다. 실비아의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꼭꼭 씹어 먹으라는 엄마가 가장 많이 했던 잔소리를 들었을 땐 정말 엄마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엄마를 찾고 싶었다.

'백혈교. 이 개새끼들.'

엄마를 납치해 간 놈들은 오마 중 하나 백혈교다. 그 광신도들을 모조리 죽여서라도 엄마를 찾아낼 것이다.

마르타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본관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어딜 다녀오신…어? 혹시 우셨습니까?"

문 앞을 쓸고 있던 카멜이 눈을 부릅떴다.

"뭔 소리야! 울기는 누가 울어!"

마르타가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빠르게 문을 열고 저택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카멜. 혹시 질 좋은 소고기 좀 구해줄 수 있어?"

"소고기요? 그거야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런데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쓸데가 있으니까. 구해서 내 방 앞에 놔줘!"

마르타는 대답을 하자마자 문을 닫고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훗."

카멜은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는 걸 아실까 모르겠군."

* * *

다음날.

라온은 새벽 연공을 끝내자마자 연무장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 찾아온 마르타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볍게 몸을 푼 뒤 연성검 수련을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며 아이들이 하나둘씩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수련생들의 잡담 소리를 들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갑자기 모든 소리가 확 꺼졌다.

고개를 돌리니, 활짝 열린 연무장으로 마르타가 걸어왔다.

단발로 자른 머리 때문인지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마르타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섰다.

"흘러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 그동안 시비를 걸었던 걸 어설픈 사과로 퉁 치진 않겠다."

그녀의 눈빛은 어제보다도 더 잔잔했다. 멈춰 있는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대신 약속은 지킨다."

"약속?"

"대련을 하기 전에 했던 패자가 승자의 말에 복종한다는 약속."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뒤를 돌았다. 눈을 보니, 완벽하게 패배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 큰데….'

그 짧은 시간에 변했다니, 그녀 역시 보통 그릇이 아니었다. 다만 어제 왜 밥을 먹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왜 길을 막고 지랄이야. 꺼져!"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르타가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도리안을 걷어찼다.

"아욱! 죄, 죄송합니다."

"쯧."

그녀는 혀를 차고서 평소의 자리로 돌아갔다.

라온이 픽 웃었다. 아무래도 변한 건 자신에 대한 태도뿐인 것 같았다.

'여긴 전부 특이한 녀석들 뿐이라니까.'

제38화

새해가 밝았다.

14살이 된 라온의 생활은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수련. 가장 먼저 연무장에 도착해서 가장 늦게 돌아가는 수련 귀신의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루난의 눈은 여전히 맹했지만, 검술의 예리함과 수속성 오러의 서늘함은 비할 수 없이 깊어졌다.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한 버렌은 많은 수련생의 마음을 확실하게 휘어잡았고, 수석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밤낮으로 절치부심 검을 휘둘렀다.

마르타는 첫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휴식조차 마다하고 검을 휘두르고, 오러를 연공했다.

다만 가뜩이나 더러웠던 성격이 더 난폭해져 이젠 그녀에게 가까이 오려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한 명. 라온 앞에서는 달랐다.

교관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마르타가 라온의 말이라면 입을 다물고 그대로 따랐다. 옆에서 보면 충실한 하인처럼 보일 정도.

수련생들은 저 태도가 내기의 약속이라는 걸 알아서 며칠 안 가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마르타는 새해가 밝아도 라온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다.

모두가 당황했다.

입이 걸고, 성격이 더러운 마르타가 라온과의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게 라온은 마지막 방해꾼마저 굴복시켜 5 연무장 수련생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 * *

"집합."

라온의 부름에 연무장 이곳저곳에서 몸을 풀던 수련생들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쯥."

"응."

버렌이 살짝 혀를 차고서 라온의 앞에 섰고, 루난은 주인을 본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

마르타는 살벌한 눈빛을 번쩍였지만, 별말 없이 두 사람의 옆에 섰다.

연무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루난과 버렌, 마르타가 라온의 지시대로 움직이니, 다른 수련생들은 당연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 모이라고 했지?"

버렌이 고개를 틀어 텅 빈 단상을 보았다.

"오늘 오전은 개인 수련이잖아."

"아니. 오늘은 정규 훈련이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수석 교관님이 전하는 걸 깜빡했다고 하시더군."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리메르는 어제저녁에 갑자기 찾아와서 오전에 수련생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모아놓아 지시했었다.

"하여튼 그 남자는…."

버렌이 이를 갈았다. 여전히 리메르를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오늘은 정규 수련이니 여기서 대기하도록. 몸만 가볍게 풀어."

"에이."

"까마귀고기를 삶아 먹었나. 뭘 매일 까먹지?"

"술 먹고 노느라 그랬을걸. 어제 술집에 있었다던데."

"하루이틀이냐. 그냥 준비나 하자."

수련생들은 작게 툴툴거렸지만 라온의 지시를 따라 연무장 중앙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잠시 후 수련 시간이 5분 정도 지났을 때 연무장의 문이 끼익 열리고, 교관들이 들어왔다.

"하아암."

맨 뒤에 있던 리메르는 손으로 다 가리지 못할 정도로 큰 하품을 하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지각입니다. 교관님"

버렌이 손을 들고 외쳤다.

"에, 오늘은 원래 자율 수련이지만, 우리 교관이 너희들을 위해서 준비를 하다가 늦었으니, 딱히 지각은 아니지."

"그거랑 이건 상관이 없…."

"자, 늦은 만큼 바로 수련을 시작하자!"

리메르가 버렌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흔들었다.

뒤에서 버렌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도 저 둘의 관계는 변하질 않았다.

"오늘 너희들의 개인 수련 시간을 뺏은 건 다름이 아니라,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걸 전수해주기 위해서다."

"거,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게 뭐지?"

"새로운 검술?"

"검술 비기?"

"연공법?"

기대감이 어린 수련생들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흐음!"

리메르는 그 눈빛을 한참 동안 즐기다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을 때 천천히 입을 뗐다.

"바로 보법이다."

"엑?"

"보법이요?"

"그게 왜 검사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어휴, 이럴 줄 알았어."

보법이라는 소리에 수련생들은 실망 어린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역시 보법이었군.'

하지만 라온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법이란 걷는 법.

검술이나 권법을 펼칠 때 더 공격적이거나, 더 방어적 혹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만든 체계적인 걸음이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권법과 검술에 익숙해졌고, 오러도 적당히 만들었으니, 보법을 배울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중급 수준의 검술을 익힌 녀석은 꽤 되지만, 보법을 제대로 익힌 경우는 거의 없더라고."

"음…."

"그건 그렇죠."

수련생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렌과 루난, 마르타 역시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의 목표가 검사이니, 검술이 중요한 건 맞다. 하지만!"

리메르는 씩 웃으며 단상 위에서 뛰어내렸다. 촛불을 끈 듯 그의 몸이 훅 사라졌다.

"그 검술을 더 날카롭고 빠르게 만들어주고, 훗날 목숨까지 구해주는 건 보법. 즉, 발놀림이다."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앞에서 사라졌던 리메르가 맨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헉!"

"어, 언제…."

"뭐지?"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리메르가 바람 소리 하나 없이 뒤에서 나타난 모습에 혀가 절로 튀어나왔다.

"너희는 대련을 하며 홀로 수련할 때와 상대에게 검을 휘두를 때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건…."

"맞아.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지."

"검도 궤도대로 흐르지 않았고."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는 대련을 겪으며 실전과 수련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검술 이상으로 보법을 단련해야 한다. 난 일대일 대련에서 가장 중요한 무학은 검술도, 오러도 아닌 보법이라 생각해. 가주님도 그 의견에 동의하셨지."

"가, 가주님이?"

"헉!"

"그분이 그러셨다면…."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가장 존경하는 글렌이 보법이 중요하다고 했다고 하니, 리메르가 말할 때와는 무게감이 달랐다.

"보법…."

버렌이 척추를 똑바로 세웠다.

'그래. 그때 보법이 있었다면….'

자신의 장점은 예리함과 정확성 그리고 속도다. 라온과 대련을 할 때도 기본 발놀림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보법을 운용했다면 그렇게 맥없이 패배하진 않았을 거다.

"과연…."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버렌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르타가 주먹을 말아쥔 채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똑같군.'

조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르타는 겉이 아닌 가슴 속에 라온을 꺾겠다는 열의를 태우고 있었다.

"보법은 강물의 흐름을 담은 가람보법부터 시작한다."

리메르가 강가의 자갈밭을 걷듯 가볍게 다리를 튕기자, 그의 몸이 단상 위로 펄쩍 올라섰다.

"음…."

그는 보법을 시연할 것처럼 자세를 잡다가 귀찮네라고 중얼거리며 드러누웠다.

"숙련된 조교 앞으로."

리메르가 손벽을 치자 뒤에 있던 교관이 앞으로 나와서 가람보법의 자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뚜둑.

버렌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보법을 확실하게 익혀서 언젠가 저 게으른 교관의 콧대를 눌러버리겠다고 다짐하며 가람보법의 자세를 확실하게 눈에 익혔다.

* * *

가람보법의 형은 12개뿐이었고, 자세 역시 간단해서 시범을 보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기본이로군.'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가람보법의 형태와 자세, 흐름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보법이지만, 기본자세에 충실했고, 흐름이 부드러워 어디에도 끼워 넣을 수 있는 보법이었다.

"교관들이 돌아다니며 자세를 잡아줄 테니, 일단 보고 느꼈던 대로 보법을 펼쳐보아라."

"예!"

수련생들은 연무장에 넓게 펴져서 가람보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만 라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불의 고리를 휘돌리며 교관이 보여주었던 가람보법을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방어 6에 공격 4.'

가람보법은 기본 보법답게 공격과 수비의 비율이 비슷했다. 방어 쪽이 조금 더 높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연계가 장점인 보법이야.'

가람보법의 특징은 보법이 강물처럼 부드럽게 흐른다는 점이다. 짜 맞춘 듯한 딱딱함보다 조금 흐트러지더라도 쭉 연결되는 흐름이 중요하다.

"후…."

라온이 들뜬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열린 시야 사이로 가람보법의 모든 것이 보이고 있었다.

턱.

먼저 오른발을 뻗었다.

잘 다져진 연무장 바닥을 짓누르는 감각을 즐기며 왼발을 따라 붙였다.

양쪽 발이 부드럽게 교차하며 가람보법의 첫 번째 형 유화가 펼쳐졌다.

투웅!

바닥을 가볍게 스치며 몸을 우측으로 회전시켰다. 적의 공격을 회피하고, 검을 내지르는 두 번째 형 개류가 연무장 모래를 울렸다.

교관이 보여주었던 자세보다 더욱 완성에 가까운 모습.

치잉!

라온은 어깨 위로 흘러가는 쾌감을 즐기며 미소를 피워냈다. 그의 발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람보법을 알고 있던 것처럼 그 유연한 흐름을 그대로 재연했다.

* * *

"흐아아암!"

리메르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고서 눈을 꿈뻑였다.

"졸리구만."

며칠 동안 수련생들에게 적합한 보법을 찾고 보완하느라, 잠을 못 잤더니, 온몸이 나른했다.

'나도 늙긴 늙었나 보네.'

픽 웃으며 단상 아래를 내려보았다.

가운데 선 라온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교관의 보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방법이긴 하지….'

심상 속에서 무학을 그려보는 건 분명 좋은 수련법이다. 다만 그건 어느 정도 실력이 무르익었을 이후여야 한다.

방금 보법을 배웠기 때문에 지금은 머리에 그리기보다 몸을 움직일 때였다.

'나중에 똥폼 잡지 말라고 해야겠네.'

리메르는 놀릴 게 생겼다고 중얼거리고 버렌 쪽을 보았다.

'꽤 잘하는군.'

버렌은 이전에 보법을 익힌 경험이 있는지 가람보법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따라 했다. 진의는 없지만, 자세는 얼마 안 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쪽도 마찬가지고.'

마르타 역시 보법을 한참 동안 익힌 사람처럼 가뿐하게 발을 내뻗고 몸을 회전시켰다. 버렌보다 더 나은 자세였다.

"하."

리메르가 버렌과 마르타의 보법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라온을 생각하고 있군.'

두 사람은 보법을 배우는 와중에도 라온과 대련했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일대일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보법이라고 말했던 게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그리고….'

우측에서 가람보법을 연습하는 루난을 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앞선 두 명과는 달랐다.

상대를 두기보다는 보조하는 듯한 움직임. 루난이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히 보였다.

리메르는 그 뒤로도 수련생 모두를 살펴보고, 말해줘야 할 장점과 단점을 기억해두었다.

'재밌다니까.'

아직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일까. 수련생들이 훈련하는 걸 지켜만 보아도 각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으아아."

리메르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길게 기지개를 피며 일어섰다.

번뜩.

수련생들에게 기억해두었던 지적을 하려고 할 때 석상처럼 서 있던 라온이 두 눈을 뜨고 발을 뒤로 뺐다.

'아….'

선명한 붉은 눈 그리고 학처럼 뻗어간 발에 오싹 소름이 돋아올랐다.

라온이 발이 천천히 전진한다. 가람보법의 첫 번째 유화가 강물의 흐름을 담아 연무장 바닥을 흘러갔다.

터엉!

그가 두 번째 자세를 취한다. 불길처럼 전진하며 몸을 펼치는 모습에서 시퍼런 칼날이 비치는 듯했다.

"허!"

리메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라온의 유화는 자신이 직접 보법을 전수해준 교관보다 더 완성에 가까워 있었다.

그 뒤로 라온은 가람 보법의 열두 가지 형태를 물 흐르듯이 펼쳐냈다. 조금의 실수도, 부족함도 없이 완벽에 가까운 자세였다.

"어…."

"뭐, 뭐야."

수련생들 그리고 교관까지 모조리 멈춰서서 라온의 보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상으로 보법을 익혔다고?"

리메르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전신으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 괴물의 끝은 대체 어디야….'

제39화

"후욱."

라온은 가람 보법의 열두 가지 형태를 모조리 펼쳐낸 뒤 이 사이로 옅은 숨을 뱉어냈다.

'괜찮은데?'

머릿속에서 그렸던 보법의 자세와 흐름대로 몸이 움직였다.

타인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관조한 듯한 기분.

앞으로 무학을 수련할 때 불의 고리를 이용하여 먼저 그 흐름을 확실하게 파악한 뒤 몸을 움직이는 방식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보법 수련을 하느라 한창 시끄러워야 할 연무장이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라온은 이상한 시선을 느끼며 뒤를 돌았다.

"미친…."

"뭐, 뭐야…."

버렌과 마르타는 입을 떡 벌린 채 반쯤 넋이 나가 있었고, 루난은 주먹 쥔 손을 흔들었다. 입 모양을 보니 알려줘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 사람만이 아니다. 연무장에 있는 수련생들과 교관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있었다.

"왜들…."

"라온."

라온은 놀람이 담긴 부름에 다시 뒤를 돌았다. 단상 위에 누워있던 리메르가 어느새 내려와 앞에 서 있었다.

"너 가람보법을 알고 있었던 거냐?"

그의 녹색 눈동자가 하프 현을 튕긴 듯 가늘게 떨렸다. 확연한 놀람이었다.

"아뇨. 처음 보았습니다."

전생에 익힌 그림자 보법과 흐름이 비슷할 뿐 가람보법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리메르의 말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표정 덕분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라온이 입술을 긁적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흐름이 읽히더군요."

"흐름이 읽혀?"

"네. 교관님이 보법을 보여줄 때 전 자세와 순서가 아니라, 그 흐름을 보았습니다."

가람보법은 전생에 익혔던 그림자 보법과 흐름이 비슷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보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더군요."

"하, 나참."

리메르는 할 말을 잃었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감탄사만 터트렸다.

"못해도 일주일은 버틸 줄 알았는데."

그는 어렵게 찾은 보법이 이렇게 쉽게 뚫릴 줄 몰랐다고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죄송할 건 없지. 그저 놀랐을 뿐이다."

"음…."

라온이 들리지 않게 입맛을 다셨다.

'너무 빨랐나?'

보법을 본 순간 느낀 흐름에 희열을 느껴서 그걸 그대로 재연했을 뿐인데 저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하긴 전생에도 보법 하나는 자신 있었으니까.'

암살자로 살았던 전생에서 무력 자체는 마스터가 아니었지만, 보법만큼은 마스터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고작 저런 걸음에 놀라다니, 인간들은 참으로 한심하도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만든 얼음꽃 걸음은 한 번 내딛는 것만으로 한 산과 바다를 얼린….

'아, 예.'

갑자기 튀어나와 지 자랑을 하는 라스를 툭 쳐냈다.

"커험."

리메르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뒷짐을 지고 뒤를 돌았다.

"확실히 처음치고는 잘하긴 했는데, 아직 자세는 부족하다. 흐름은 괜찮으니 각각의 형태를 신경을 쓰도록. 질문은 나 말고 교관들에게 해."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확실히 처음 펼쳐보았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꽤 느껴졌다.

"헉!"

"저, 저걸 가르치라고?"

"나보다 잘하는 거 같은데…."

교관들은 눈썹이 볼까지 내려올 정도로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 * *

마르타는 가람 보법의 수련을 끝낸 뒤 집사 카멜과 함께 연무장을 떠났다.

"그 보법 괜찮아 보이더군요."

카멜은 턱을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의 보법을 전수받기 전까지 기초를 닦기에 적당합니다. 제대로 익혀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어."

마르타는 본관으로 걸어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카멜이 그녀의 바로 옆에 붙었다.

"후…."

침묵을 유지하던 마르타가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보법 습득 난이도는 어느 정도지?"

"흐음, 기초 보법은 분명하지만, 흐름이 꽤 난해해서 익히기 쉬운 수준은 아닙니다."

카멜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가씨는 보법에도 재능이 있으시니, 사흘 정도면 흐름을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흘? 시발…."

마르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그럼 수련생이 그 보법을 한 번에 익혀낼 수도 있을까?"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보자마자 따라 하겠지만, 수련생은 불가능합니다. 보법에 대한 이론, 지식, 경험도 전무하고, 무학의 두께 자체가 얇으니까요."

"그걸 해낸 녀석이 있어."

"네? 그게 무슨…."

카멜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된다고?'

가람 보법이 아무리 기초적인 걸음을 담고 있는 보법이라고 해도 담긴 무학의 흐름은 정심하다.

그걸 바로 익히는 수련생이라니, 태어났을 때부터 보법을 익힌 괴물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마르타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도 놀람이 사라지지 않은 표정.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으로 한 수련생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 수련생이 라온 님입니까?"

"그 미친놈 아니면 누가 있겠어."

"뭐, 그런…."

카멜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입을 막아서 간신히 참아냈다.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보법 시범이 끝난 뒤 모두 연습을 시작했을 때 그 녀석은 혼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수련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눈을 떴지. 그 이후에…."

마르타는 연무장에서 보았던 그 놀라운 모습을 카멜에게 모두 말해주었다.

"허…."

카멜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정신 나갔군.'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는 건 머릿속으로 가람보법을 익혔다는 뜻이다.

'그 나이에 심상을 운용할 줄 알다니….'

그저 재능이 약간 뛰어나다고만 생각했다. 별관에 다시 빛이 드리울 정도.

하지만 아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본관의 빛을 별관에 이을 수 있는 다리가 될 괴물이었다.

'바로 보고를 드려야겠어.'

이건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마르타를 본관에 데려다준 후 바로 데니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할 것 같다.

"음?"

걷다 보니 옆에 마르타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고개를 숙인 채로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쯧. 너무 무신경했군.'

마르타가 라온에게 패한 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다.

"아가씨. 라온 님과 아가씨의 재능은 결이 다릅니다. 누가 높고 낮고가 아니라…."

위로의 말을 건네던 카밀은 고개를 들어 올린 마르타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저 눈.'

마르타의 눈빛은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도전자.

앞서가는 자의 등을 뜯어 먹을 짐승이자, 도전자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를 처음 만났던 백혈교의 지부에서의 눈빛과 같았다.

"다행이야."

마르타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날 이긴 놈이 가짜가 아니라서."

단아한 외모에서 피어난 살벌한 미소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잘못 생각했군.'

카멜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르타는 라온과의 재능 차이에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하고 재능 넘치는 라온을 꺾을 생각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마르타는 걱정해 줄 필요도, 생각해 줄 필요도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가씨."

카멜이 고개를 숙였고, 마르타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작지만 당당한 등과 자신감으로 뻗어나가는 걸음을 보자, 그녀의 미래가 그려졌다.

가장 높은 옥좌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검사의 모습이.

* * *

"…그렇게 됐다니까요. 그 나이에 머릿속으로 보법을 익힌다는 게 말이 됩니까? 가주님의 손자는 천재가 분명해요!"

리메르는 매번 글렌과 만났던 북망산의 호랑이 바위를 보며 히죽 웃었다.

"네가 라온의 집사라도 되느냐. 만날 때마다 그 아이의 이야기만 하는군."

바위 위에서 엄숙함을 자아내는 목소리가 쏟아지며 글렌의 무표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전 가주님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것뿐 인데요."

리메르는 글렌의 차가운 분위기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손자가 심상으로 보법을 익혔는데, 놀랍지 않으십니까?"

"진짜 심상은 아닐 거다. 심상으로 무학을 익히려면 최소 익스퍼트 최상급은 되어야 하니까."

글렌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다만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는 건 감추지 못했다.

"녀석이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았다는 말대로 보법의 흐름을 읽었겠지. 가람보법은 흐름이 중심이 되는 보법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대단한 거 아닙니까? 그런 녀석이 어디 있겠어요!"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로 산 아래의 본관을 지켜만 보았다.

"기쁘신가 보네요. 역시 말씀드리러 오길 잘했어."

리메르는 눈동자를 힐끔 돌려 글렌의 표정을 살피고서 미소를 지었다.

"시끄럽다. 할 말 다 했으면 그만 내려가라. 매번 말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신경 쓰고."

"저 못 믿으십니까. 저 광검입니다. 광검. 알아서 잘하고 있다구요."

"다 죽어가는 놈이 광검은 무슨."

글렌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지만, 리메르는 내려가지 않고 호랑이 바위에 등을 기댔다.

"음, 본관 쪽 사용인들이 평소보다 좀 바쁘네요. 무슨 준비 하십니까?"

리메르는 본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준비가 아니라, 찾아오는 녀석들이 있다."

"찾아오는 녀석들이요?"

"며칠 뒤에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오기로 되어 있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

리메르가 눈매를 좁혔다. 오웬은 대륙 중앙에 위치한 왕국으로 지그하르트와 함께 육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어쩐지."

지그하르트와 친분을 유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다. 손님이 온다고 하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친분이 있는 오웬 왕국이었다.

"사절단 대표는 누굽니까?"

"삼왕자라고 하더군. 실제로는 타르탄 공작이겠지만."

"오호, 그 미친놈이 결국 공작이 됐군요."

타르탄 공작이라는 말을 들은 리메르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 잠깐! 카르텐의 삼왕자면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라온이나, 버렌 나이일 텐데…."

"그것까지는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군."

"그렇군요."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절단으로 오웬 국왕이 오지 않는 이상 글렌이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언제 보여도 당당할 수 있도록 수련생들에게 정돈된 자세를 유지하라고 지시해라."

"예? 저희도요?"

"3왕자와 함께 왕국의 수련 기사들이 함께 오는데, 검사와 수련생들의 훈련 모습을 참관하고 싶다고 하더군."

"그걸 허락하셨습니까?"

"당연하다."

글렌의 붉고 짙은 시선이 리메르를 향했다.

"보여준다고 약해지면 지그하르트의 검이 아니다. 우린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요."

리메르는 예전에 매일같이 들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증을 풀었으면 내려가라. 수석 교관이라는 놈이 언제까지 연무장을 비우는 거냐."

글렌이 입매를 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옙!"

리메르는 경례를 하듯이 손을 올리고서 허리를 굽혔다. 등을 돌리고 내려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흐음…."

그는 멀리 보이는 5 연무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3왕자와 수련 기사라….'

오웬 왕국의 사절단에 라온의 또래들이 있다고 하니, 아주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리메르는 고개를 돌려 글렌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 표정.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군."

글렌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콧등을 찡그렸다.

"아뇨. 이상하진 않을 겁니다."

리메르는 더욱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지그하르트의 새싹들에게 도움이 될 일이니까요."

제40화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새하얀 눈발 사이로 은빛의 선이 흘러간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행군이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곰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대한 덩치의 중년 기사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소년을 내려보았다.

"아직은 괜찮소. 다만 예상보다 눈발이 거세 수련 기사들이 버거운 것 같소."

왕자라 불린 소년이 뒤를 돌았다. 담담한 표정의 왕자와 달리 수련 기사들은 티가 날 정도로 지쳐있었다.

"지그하르트까진 아직 멀었소?"

"폭설이 점점 거세지는 걸 보니, 거의 도착한 것 같군요."

"거의 도착했다니, 그럼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매일같이 이런 눈발을 견딘단 말이오?"

"그건 아닙니다."

중년 기사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로 가면 갈수록 날씨가 사나워지지만…."

그의 입을 떼기 무섭게 쏟아지던 눈덩이가 그치고, 회색 구름 뒤에 숨었던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그하르트 내부의 날씨는 청아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기온 자체는 더 내려가지만요."

"허…."

왕자는 헛바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던 눈 폭풍이 꿈이라 생각될 정도로 하늘이 맑았다.

"우와!"

"누, 눈이 단번에 그쳤어."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타르탄 공작. 이 날씨는 대체…."

"마법 같지만, 마법이 아닙니다. 이런 괴이한 자연환경 때문에 지그하르트를 천혜의 요새라고 말하는 겁니다."

타르탄 공작이라 불린 중년 기사가 빙긋 웃으며 전방에 보이는 거대한 성벽을 가리켰다.

"물론 이런 지그하르트도 뚫린 적이 있지만요."

"음…."

왕자는 그게 언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도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은 들어가시죠."

타르탄 공작이 지그하르트의 성벽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거인이 드나들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철문 앞에 붉은색 코트를 두른 검사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소."

왕자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지그하르트의 문지기들이 서 있는 철문으로 향했다.

* * *

라온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가다가 멈춰 섰다.

'뭐지?'

정문 방향에서 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갑옷과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 평소 지그하르트에선 들기 힘든 금속음이었다.

잠시 후 외총관 일리운이 모습을 드러냈고, 은빛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오웬 왕국….'

은빛 갑옷의 왼쪽에 사자 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오웬 왕국의 문양이었다.

다른 수련생들이나 검사들도 멈춰서서 오웬 왕국의 기사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네요."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오며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사절단?"

"며칠 전부터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도착한다고 하다고 가문 구석구석 청소했었잖아요. 모르셨나요?"

"몰랐어. 그런데 사절단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좀 작은데."

라온이 기사들 뒤에 있는 체구가 작은 아이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아, 저들은 오웬 왕국의 3왕자와 함께 온 수련 기사들이에요. 경험을 늘리기 위해서 함께 왔겠죠."

"아는 것도 많군."

"이미 소문이 돌았으니까요. 다들 아는 표정이잖아요."

"그렇긴 하네."

모르는 사람은 수련에 빠져 있던 자신과 평소엔 그저 멍한 루난 뿐인 것 같았다.

라온이 왕국 사절단을 쭉 살펴보았다.

'꽤 강하네.'

같은 육황임을 증명하듯 수련 기사들의 무력은 5연무장의 수련생들과 비슷할 정도였다.

'강하던 말던 나랑은 상관없지만…음?'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가 수련 기사 중 가장 앞에 선 자와 눈을 마주쳤다.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에 굳건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무력이군.'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알았다. 저 수련 기사가 저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걸.

'그렇지만.'

그건 10대 수준에서의 평가일 뿐. 자신의 눈에 차기에는 한참 멀었다.

예상대로 푸른 눈의 아이는 자신의 기운을 읽지 못하고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런 거에 신경 쓸 시간은 없지.'

보법과 검법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바쁘다. 왕국 사절단과는 부딪칠 일이 없으니 잠시 본 것으로 족했다.

라온은 머릿속에 보법의 흐름만을 생각하며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 * *

'뭐야 이건….'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척추가 곤두서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위를 향할수록 숨통이 조여왔다.

그 모든 것은 저 위에 앉은 남자 때문이다.

북패왕 글렌 지그하르트. 대륙 최강의 검사라는 남자의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 손발에 힘이 빠졌다.

"오느라 수고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들린 타르탄 공작의 목소리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선왕의 어린 시절이라 해도 믿을 법하구나. 그가 아끼는 이유를 알겠어."

자신의 얼굴을 본 글렌 지그하르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가, 감사드립니다."

입안에 침이 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그마한 기세도 피우지 않았는데 저런 존재감이라니, 왕국 제일검을 마주했을 때도 느끼지 못한 경험이었다.

"저, 전하께서 전해주신 서신이 있습니다."

삼왕자는 품에서 금색의 봉투를 꺼냈다. 휘청이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서 일어섰다.

"끄읍…."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단상으로 다가가 글렌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흠."

그 모습에 글렌의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발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자네들이 요구했던 대로 수련생들의 훈련을 참관할 수 있도록 조치했네."

글렌이 편지를 옆에 놓으며 느릿하게 입을 뗐다.

"저녁 연회를 준비했으니, 오늘은 편히 쉬고 내일부터 돌아보도록 하라."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예."

삼왕자는 뒤로 세 걸음 물러선 후 허리를 숙인 후 일어섰다.

"공작은…."

"저는 가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쉬고 계십시오."

타르탄 공작이 옅게 웃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알겠소."

삼왕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알현실을 떠났다.

"재능이 뛰어난 아이로군. 왕위보다 검좌에 오르는 게 빠르겠어."

잠시간의 침묵 후 글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한눈에 파악하시는군요. 삼왕자께선 차기 왕국 제일검이라 불리고 계십니다."

"확실히 보기 드문 재능이야."

"재능만이 아니라, 의지도 굳건합니다. 로베르트 검술을 견식하기 위해 남쪽에도 가셨었죠."

타르탄 공작은 삼왕자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기껍다는 듯 웃었다.

"흐음."

글렌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재능과 노력 그리고 의지라….'

삼왕자의 눈만 봐도 그가 어떤 재능을 가졌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보였다.

어린 나이에 많은 경험을 쌓고, 노력해왔을 것이다. 다만 글렌은 그보다 더한 녀석을 알고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해온 노력과 의지를 알고 있으니, 삼왕자의 대단함이 그리 눈에 차지 않았다.

"왕자를 자랑하러 오진 않았을 테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글렌의 손에 들린 편지가 화르륵 소리와 함께 타올랐다.

"보지도 않고 태워버리시는군요."

편지가 타버렸음에도 타르탄 공작의 표정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 남자가 중요한 편지를 애송이에게 맡겼을 리 없으니까."

"역시."

타르탄 공작은 삼왕자를 자랑할 때와 달리 진중한 기세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웬 왕국의 국왕 레크로스 알버른 드 오웬 2세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의 눈빛에 엄숙함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다섯 개의 어둠(五魔)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 *

투웅!

라온의 오른발이 물살을 가르는 연어처럼 부드럽게 전진한다.

그 뒤를 이어 왼발이 따라붙는다. 하체의 움직임에 수풀을 누비는 사슴처럼 유려했다.

빠르지 않지만 부드럽고, 강하지 않지만 표홀하다.

그가 펼치는 가람보법의 12가지 형은 바람을 탄 나뭇잎처럼 경쾌한 자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쿵!

라온은 땅을 울리는 진각을 끝으로 가람보법의 수련을 끝냈다.

"후욱…."

들뜬 숨을 뱉어내며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보고 있군.'

뒤를 돌아보자, 자신의 보법 훈련을 보고 있던 수련생들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가람보법을 배운 첫날 이후 수련생들은 교관이 아니라, 자신을 보며 보법을 수련해왔다.

그건 버렌이나, 루난, 마르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음!"

"흥."

눈을 마주친 버렌과 마르타는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응."

물론 루난은 뭐 어쩔 거냐는 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서 보법을 펼쳤다. 가르쳐 달라는 뜻이었다.

"하여튼."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루난의 보법에서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주었다.

"도련님. 저도 좀 봐주실 수 있나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살살 긁으며 다가와 보법을 보여주었다.

"일단 넌 자세가 높다. 조금 더 낮추고…."

그에게 문제점을 말해줄 때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리메르가 들어왔다.

'웬일이지?'

라온이 리메르의 종종걸음을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휴식 시간에 찾아온 건 또 처음이었다.

"오늘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온 건 전부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버렌이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그 역시 휴식 시간에 찾아온 리메르가 놀라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저녁에 사절단을 위한 연회를 연다고 한다. 수련 기사들도 있어서 또래인 너희도 참여 가능하다고 하더군."

"오!"

"연회요?"

오웬 왕국의 기사들을 보고, 수련 기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련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리메르가 쓱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아직도 가람보법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잖아. 나라면 창피해서 그런데 못가지. 암!"

"윽!"

"그, 그건…."

수련생들은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 설마 가려고 한 거야? 수련할 게 많이 남았는데? 검술도, 보법도 완성 못 했는데?"

그가 얼굴을 쭉 내밀고, 수련생들을 놀리듯이 훑어보았다.

"제, 젠장!"

"후우…."

수련생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축 내렸다.

"여기서 갈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인데."

리메르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넌 어떻게 할 거지?"

"관심 없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젓고, 수련검을 챙겼다. 가람보법은 거의 완벽해졌지만 검술과의 조화시키려면 아직 멀었다.

지금은 연회에 가서 인맥을 쌓을 때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수련할 시기였다.

"좋은 자세야."

리메르가 빙긋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만족이 담긴 웃음이다.

"뭐, 정 가고 싶으면 보내는 줄 텐데, 가고 싶은 사람?"

그는 라온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제일 강한 라온도 수련을 하겠다고 남았는데, 너희들이 가려는 거냐는 듯한 모습이다.

"흥!"

"…없습니다."

마르타와 버렌이 고개를 돌리고 수련을 위해 뒤로 물러섰다.

"...."

루난은 처음부터 리메르의 말을 듣고 있지 않고, 보법만 밟고 있었다.

"그럼 계속 수련하도록. 강해지면 연회에 참석할 기회는 수없이 많을 거야! 난 그럼 간다."

리메르는 수련생들을 놀리듯이 손을 휘젓고서 연무장을 떠났다.

"음…."

라온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평소 리메르의 성격상 연회 정도는 보내줄 만한데, 막은 게 조금 이상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 *

격렬한 폭설 대신 찬란한 조명이 쏟아져 내리는 지그하르트 본관 연회장.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입맛을 다시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피곤하군.'

몇 시간 째 지그하르트의 인사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역시 이런 자리는 불편하다 그냥 검이나 휘두르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분위기와 장소에 온 이유는 국왕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그하르트의 검.

그리고 그 검을 연마하는 검사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후우."

삼왕자가 테이블에 놓인 음료를 단번에 들이켜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대단한 무인들이야.'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가진 기파는 고고하고, 강렬했다. 오웬 왕국의 기사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력에 가슴이 뛸 정도.

'하지만.'

정작 보려고 했던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들의 무력은 실망 그 자체였다.

다른 가문이나, 왕국이라면 분명 뛰어난 인재라 불릴 만한 아이들이지만, 육황의 수련생이라기엔 모자람이 보였다.

'로베르트에도 미치지 못하겠어.'

지그하르트에 오기 전에 갔었던 남방의 주인 로베르트 가문의 어린 검사들이 더 뛰어났던 것 같다.

"내일 돌아볼 필요도 없겠군."

글렌이 수련생들의 훈련을 참관할 수 있게 배려해줬지만, 저 정도면 딱히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실망스러우신 모양이군요."

"헉!"

뒤에서 들린 가벼운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에, 엘프?"

붉은 머리에 진녹색 눈동자를 가진 엘프가 뒷짐을 진 채로 빙긋 웃고 있었다.

"진짜를 보여드릴까요?"

제41화

"진짜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삼왕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나타난 엘프의 정체와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일단 거리를 두었다.

"그리 겁먹으실 필요 없습니다."

"겁먹지 않았소."

붉은 머리 엘프를 올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질문에 먼저 답하시오. 진짜라는 게 무엇이오."

"그건…."

"잠깐."

엘프가 대답하려 할 때 타르탄 공작이 바닥에서 솟구쳤다. 흡사 조명에 비친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 네가 여기엔 무슨 일이지?"

"헉!"

그리어는 타르탄 공작이 뱉은 칭호를 듣고 눈을 부릅떴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면!'

이제야 저 엘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광속의 검을 휘둘렀다는 글렌 지그하르트의 심복 중 하나였다.

'근데 이 자가 왜 나를….'

부상 때문에 은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아아, 그렇게 견제할 필요 없어."

리메르는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네놈이 미친 짓을 하는 걸 봤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마음을 놓을 수가 있나."

"보시다시피 많이 달라졌거든."

"흠…."

타르탄 공작은 기세를 거두지 않은 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왕자님. 이 미친 엘프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진짜를 보고 싶냐고 했소."

"진짜? 그게 무슨 말이지?"

"음,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게 됐는데?"

리메르가 팔을 펼치며 주변을 가리켰다. 어느새 연회는 조용해졌고,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내가 불청객이 맞긴 하거든."

그는 주변에서 쏘아지는 시선을 웃음으로 흘려넘기며 몸을 돌렸다.

"오웬의 왕자님."

출구로 향하던 리메르가 멈춰서서 다시 뒤를 돌았다.

"진짜를 보고 싶다면 내일 훈련 참관을 할 때 5 연무장에 가보고 싶다고 하세요."

그는 그 말만 남기고 그대로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스스로 불청객이라 말한 리메르가 사라지자, 연회장에 다시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어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건 리메르가 말했던 마지막 말뿐이었다.

'5연무장에 진짜가 있다고?'

* * *

"흐흐흥!"

"음."

라온은 리메르의 콧노래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러는 거지?'

다른 교관에게 지시를 내린 뒤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어야 할 리메르가 웬일로 두 눈을 번쩍 뜨고 직접 수련을 지시했다. 뭔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저 인간 왜 저래?"

"그러게요."

"뭐 잘못 먹었나?"

"어제 도박장에서 돈이라도 땄나 봅니다."

버렌과 다른 수련생들도 검을 휘두르면서 리메르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수석 교관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겁이 많은 주제에 호기심도 많은 도리안이 리메르 옆으로 다가갔다.

"손님이 올 거거든."

'손님?'

귀찮은 걸 제일 싫어하는 리메르가 손님을 기다린다니,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냥 수련이나 하자.'

워낙에 특이한 엘프라 행동이나, 생각이 예측이 안 된다. 수련에 집중하는 게 정답이다.

라온은 단전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오러를 끌어 올리며 오른발을 뻗었다.

쿵!

대지를 부수는 듯한 진각 소리를 시작으로 가람보법과 연성검법을 동시에 펼쳐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보법 사이로 날카로운 검광이 솟구쳤다.

촤아악!

방어적인 보법과 공격적인 검술이 어우러졌지만 둘 다 흐름과 연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부조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하나의 무학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제 익숙해진 수련생들의 시선을 등으로 받으며 검술과 보법을 끝까지 펼쳐냈다.

"후욱."

검술과 보법을 연달아 펼쳐낸 라온이 숨을 뱉어내며 검을 내렸다.

'아직 모자라.'

검술과 보법 그리고 오러의 운용을 동시에 하니, 조금씩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실전에서 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더 연습하려고 할 때였다. 연무장 정문 쪽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음?"

"뭐지?"

라온보다 한발 늦게 교관들이 반응하고 그 뒤에 수련생들이 검을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연무장 문을 향하고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봐."

"예."

리메르는 미소를 유지한 채 교관에게 턱짓했다. 중앙에 서 있던 교관이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총관부의 게스만입니다."

정복을 입은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 얼굴을 내밀었고, 그 뒤에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우르르 대기하고 있었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분들이 5 연무장의 훈련을 참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건 알지만 가능하겠습니까?"

"들어와요.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야."

리메르는 순식간에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들어오시죠."

게스만이 고개를 숙였다.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오웬 왕국의 사절단을 연무장 안으로 이끌었다.

"허."

라온이 수련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손님은 환영?'

리메르는 같은 가문의 검사들에게도 훈련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 손님을 환영한다니 개소리도 저런 개소리가 없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수련생들도 놀라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들이 귀한 시간을 내서 이곳에 와주셨다. 지그하르트 수련생들이 어떤 무학을 익혔는지 보여주도록."

문 앞에 있던 리메르는 갑자기 단상 위에 나타났다. 바람을 넘어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갑자기 저러면 뭘 어쩌라는 건데."

"으음…."

"뭐,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수련생들은 옆에서 쏘아지는 오웬 왕국 사절단의 시선에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제 실력을 발휘해!"

버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은 움직임을 보이면서 수련생들을 이끌었다.

'제대로 먹혔군.'

지그하르트에 죽고 못 사는 녀석답게 지금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광대는 사양이야."

마르타는 콧방귀를 끼고서 팔짱을 꼈다. 적을 마주친 듯 강렬한 기세를 피워내며 오웬 왕국의 사절단을 대놓고 노려보았다. 덤비려면 덤비라는 표정이다.

'이쪽도 변하지 않았네.'

마르타는 자신에게만 유해졌을 뿐 여전히 입이 험했고, 사나운 기세를 내뿜었다.

루난은 처음부터 저쪽에 관심이 없었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보법을 밟고 검을 휘둘렀다.

'어떻게 보면 저 녀석이 최강일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난잡한 분위기에서 집중력이 끊기지 않는다는 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이었다.

라온이 오웬 왕국의 사절단을 차례로 훑었다. 이전에 눈을 마주친 푸른 눈의 수련 기사가 버렌, 마르타, 루난을 차례를 살피고 있었다.

입이 살짝 벌어진 걸 보니, 세 사람의 무력에 꽤 놀란 것 같았다.

'역시 난 알아보지 못하는군.'

그 셋은 파악했어도 자신의 무력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라온이 옅게 웃으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수련검을 뽑았다.

'나도 시작해볼까.'

가람보법이나, 연성검술 모두 형과 자세는 간단하기 그지없다.

보인다고 해도 약해지지 않는 것이 두 무학의 장점이니, 관찰당해도 문제는 없었다.

후웅!

라온은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검과 보법의 흐름에 녹아들었다.

* * *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5 연무장에 오기 전에 두 곳을 들렸다.

첫 번째는 이미 검사의 칭호를 받은 자들이 수련하는 2 연무장이었다.

'대단했지.'

2 연무장의 검사들은 지그하르트라는 위대한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무력을 갖췄다.

검세, 기세, 육체, 정신 모두 오웬 왕국의 기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은 강자들이었다.

'다만 수련생들이 있는 6 연무장은 실망스러웠어.'

6 연무장 수련생들의 재능은 확실히 뛰어났지만, 단련 자체가 부족했다.

원래 대련을 청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가 뻔히 보여서 그만두었다.

'그때 생각났지.'

그냥 돌아가려고 할 때 리메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진짜를 보고 싶냐는 그 말이.

그래서 다른 곳으로 안내하려는 총관부의 사무관에게 부탁했다. 5 연무장을 보고 싶다고.

그는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5 연무장에 데려다주었다.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5 연무장이라고 6 연무장과 별다를 게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연무장에 들어온 순간 깨달았다. 여긴 다르다는 걸.

수련생들의 재능과 단련 정도가 6연무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는 바로 이곳이었어.'

리메르의 말대로 이곳이 진짜였다. 5 연무장 수련생들의 무력은 수련 기사에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청발의 소년과 은발 소녀의 무력은 다른 이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쪽을 노려보는 흑발의 미소녀 역시 압도적인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저 셋 모두 현재의 자신이나 수련 기사 중 최강이라는 세툰에 필적할 정도의 무력을 가졌다.

"확실히 이쪽이 진짜였군요."

타르탄 공작이 수련생들을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런 것 같소."

"다만 몇몇을 빼면 재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단련의 차이죠."

"음…."

그리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5 연무장은 공기 자체가 달랐다. 수련생들이 피와 땀이 맺혀 있는 열의의 냄새가 났다.

"특히 저 세 명이 엄청나군요."

수련 기사 세툰의 눈이 호승심으로 반짝였다. 그 역시 자신이 파악했던 세 명의 강자를 보고 있었다.

"한번 싸워보고 싶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삼왕자와 세툰은 5 연무장에서 최강이라 생각되는 세 명의 남녀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어떠십니까? 제 말대로 진짜는 여기 있죠?"

뒤에서 시원한 바람이 담긴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음?"

뒤를 돌아보니, 리메르가 어제 보여준 미소를 그대로 지은 채 서 있었다.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겠소."

그리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근질근질하신 거 같은데. 우리 애들과 대련 한번 어떻겠습니까."

"이게 목적이었소?"

"육황의 재능들과 안전하게 부딪칠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쪽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리메르는 검에 정신을 집중한 수련생들을 가리켰다.

"음…."

그리어가 고개를 돌려 타르탄 공작을 보았다. 실제 리더는 그였기에 허가가 필요했다.

"괜찮겠죠."

타르탄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싸늘한 눈으로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허튼짓을 하면 바로 베겠다는 표정이었다.

"단순히 대련하고 싶을 뿐이야. 그렇지만."

리메르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작은 내기 정도는 괜찮지?"

"내기?"

"그래. 20번의 대련을 진행하고, 승자에게 보상을 주는 거지."

"하, 너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호, 믿음이 꽤 큰데?"

"물론이다. 저 아이들은 오웬에서도 정예로 키워진 수련 기사들이니까!"

타르탄 공작이 자부심이 어린 눈빛으로 수련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잘됐네."

리메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진녹색 안광이 선명하게 빛났다.

"우리 애들을 믿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제42화

"자, 주목!"

리메르가 단상 위로 올라가 손뼉을 쳤다. 수련에 빠져 있던 수련생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저분들 보이지?"

그는 연무장 우측에 서 있는 오웬 왕국의 기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웬 왕국의 손님들이 우리에게 대련을 신청하셨다."

"대, 대련이요?"

"이렇게 갑자기?"

수련생들은 생각지도 못한 대련이라는 단어에 당황하여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뭘 갑자기야. 내가 항상 말했잖냐. 검사란 자다가 일어나도 바로 검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리메르는 혀를 차며 너희는 아직 멀었어라고 중얼거렸다.

"으음!"

"그래도 오웬 왕국인데…."

"조금 준비하고 싸우는 게 나, 낫지 않을까요?"

리메르의 조언에도 수련생들의 긴장 어린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다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한 수련생도 있었다.

버렌과 마르타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루난은 앞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수련만 계속했다.

"흐흐!"

수련생들의 당황을 즐기던 리메르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넌 어때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흠…."

라온이 쓱 고개를 돌려 오웬 왕국의 수련기사들을 살폈다.

'대련이라….'

기사라면 모를까 수련 기사 중에 자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저 중심에 있는 왕자라면 가람보법과 연성 검술의 조화를 연습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하게 치솟았다.

"모두 동의했으니, 시작해도 되겠네. 인원은 20명이다. 그리고…."

리메르는 수련생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내 월급 전부 내기에 걸었으니까. 무조건 이겨라. 지면 진짜 뒤진다."

"어엉?"

"예? 그, 그게 무슨…."

"대련을 준비해라!"

수련생들이 입을 쩍 벌렸다. 따지려고 했지만 리메르가 먼저 몸을 돌리며 교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예!"

교관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수련생들을 퍼뜨리고 연무장의 중앙에 대련을 위한 판과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하."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이거였군.'

며칠동안 리메르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던 게 모두 이 대련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의 대련을 준비했을 것이다.

'대단하다니까.'

아직 검사나 기사의 자격을 얻지 못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육황끼리의 대련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저리 물 흐르듯 대련을 진행하다니 리메르는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집합."

라온은 뒤를 돌며 모두를 불러 모았다.

"응."

지금까지 그 누구의 말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루난이 검을 멈추고 가장 먼저 다가왔다.

"쯧."

"...."

버렌과 마르타. 수련생들도 루난의 옆에 섰다. 라온을 중심으로 5 연무장의 수련생 모두가 원을 그리고 모였다.

"들었듯이 대련은 이미 결정됐다. 20명을 뽑아야 하니, 지원할 사람은 거수하도록."

"나는 무조건 나간다."

"마찬가지. 다 날려버려서라도 나갈 거야."

버렌과 마르타가 동시에 손을 들어올렸다.

"라온도 할 거야?"

"그래."

"그럼 나도 할게."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었다. 그 뒤로 수련생 10명 정도가 손을 들어 올렸다.

"...."

"으음…."

다만 다른 수련생들은 섣부르게 손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겁을 먹은 건가.'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은 정식 작위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에 완연한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수련 기사들의 위압감에 몸과 마음이 굳은 것 같았다.

"쯧."

귀찮지만 수석의 자리에 있으니, 수련생들을 움직이는 것도 자신의 역할이었다.

"저들이 당당해 보이나?"

라온은 대련을 준비하는 오웬 왕국 수련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게 좀 그렇잖아."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요."

수련생들은 슬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 기사들의 손을 자세히 봐라."

"응?"

수련생들의 시선이 라온의 손가락을 따라 수련 기사들의 손으로 향했다.

"음?"

"사, 살짝 떨리는 거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떨리고 있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수련생들은 다른 수련 기사들의 손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저들이 멋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는 건 맞지만, 대련 전의 떨림과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수련생일 뿐이다."

"아…."

"즉, 너희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아이라는 거지."

라온이 몸을 돌리고 수련생들을 바라보았다.

"겁먹을 필요 없다. 너희는 다른 육황이나, 오마에 절대 밀리지 않는 훈련을 해왔어. 배운 대로 싸우면 꼴사납게 지는 일은 없을 거다."

"으음!"

"하, 하긴 우리만큼 수련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훈련하며 흘린 피와 땀은 누구에게도 안 밀리지."

라온이 진중한 목소리로 전하는 인정에 수련생들의 눈동자에 생기와 투지가 타올랐다.

"다시 묻겠다. 대련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거수해라."

훅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수련생 모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버렌과 루난, 마르타를 포함한 20명의 수련생을 뽑았다.

뽑힌 수련생도, 뽑히지 않은 수련생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로 오웬 왕국을 보았다.

'귀찮군.'

어린아이들을 챙겨주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다.

다만 수련생들과 시간, 공간을 공유하다 보니, 약간이나마 정이 들었나 보다. 아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대련 순서를 정하겠다. 첫 번째는 마르타. 할 수 있겠지?"

"조지고 올게."

마르타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봉은 수련생들의 사기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에 5 연무장에서 두 번째로 강한 마르타가 가는 게 맞았다.

"그 뒤로…."

수련생들의 대련 순서를 하나하나 정했다. 루난이 18번째, 버렌이 19번째 그리고 마지막이 자신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가운데로 모여주십시오."

"가자."

라온은 리메르의 얄미운 목소리를 들으며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 * *

마르타는 대련장 위에 올라온 수련 기사를 보고 턱을 모로 틀었다. 잘 닦인 은빛 갑옷, 큼지막한 덩치는 완연한 기사를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자신을 힘으로 짓눌러버린 그 망할 놈에 비하면 조금도 커 보이지 않았다.

"타르스요."

덩치 큰 수련 기사가 검집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마르타는 이름을 밝히고서 발을 어깨의 절반 너비로 벌렸다.

"성장하지 않은 육체가 무섭도록 단련되어 있군. 좋은 승부를 부탁하겠소."

타르스라 이름을 밝힌 수련 기사는 마르타의 단아한 외모와 작은 체구에도 방심하지 않고 그녀의 기운을 파악했다. 괜히 수련 기사 중 선봉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좋은 승부? 어차피 얻어터질 텐데, 똥폼 잡지 말고 덤벼."

마르타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흠."

타르스가 콧김을 내뿜으며 검을 뽑았다. 일반적인 기사의 검보다 두꺼운 대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보다 입이 험하군. 검술도 그 정도 되기를 바라겠소."

"주절주절 말 많네. 안 오면 내가 간다!"

마르타가 땅을 박참과 동시에 검을 뽑았다. 새하얀 칼날이 달아오른 열기를 갈랐다.

"멍청한!"

타르스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대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둔탁한 대검의 날에서 강렬한 풍압이 치솟았다.

화아아악!

묵직한 바람이 마르타의 육체를 짓누르려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쿠웅!

마르타는 진각을 밟으며 검을 올려 쳤다. 폭포를 오르는 연어처럼 풍압을 가르고 대검과 맞부딪쳤다.

쩌어어엉!

쇳덩이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타르스의 대검이 튕겨 나가 땅에 꽂혔다.

"허억!"

타르스가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뺐지만, 마르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따라붙어서 검면으로 타르스의 복부를 후려쳤다.

"끄르륵!"

배를 얻어맞은 타르스는 거품을 뿜어내며 뒤로 넘어갔다.

"힘으로 싸우는 놈이 일격에 모든 걸 담지 않다니 한심하네."

마르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마르타 승리!"

리메르는 흡족한 웃음을 그리며 마르타쪽의 손을 들어 올렸다.

"흐음…."

라온은 마르타의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군.'

자신에게 패한 이후 마르타가 검술에 부드러움을 담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부드러움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 힘과 속도를 더 올려서 위력을 강화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단순함이다.

'꺾이지 않는 의지인가.'

마르타의 타협하지 않는 성격은 분명 그녀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 것이다.

'꽤 재밌는데?'

-재미? 어린 개미들의 싸움을 보고 있는 게 재밌나? 본왕이 볼 때는 지루하기만 하다.

'개미들도 항상 어린 것만은 아니니까.'

-한심하군.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어린 마족들을 불러다가 대련을 시켰을 때도 이런 허접함은 보이지 않았… 컥!

라온은 꽃팔찌를 건드려서 라스의 입을 다물게 한 후 다음 대련을 기다렸다.

'난 재밌으니까. 조용히 좀 해.'

* * *

마르타가 최고의 시작을 선보였지만,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은 만만치 않았다.

정예만 온 것인지 5 연무장의 수련생들과 승리와 패배를 번갈아 하며 접전을 벌였다.

그렇게 17번의 대련이 진행되며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은 8승 9패의 결과를 만들었고, 18번째 루난의 차례가 되었다.

"루난 네 차례야."

"응."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대련장 위에는 루난과 비슷한 키의 여성 기사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에델리아."

"루난 슬리온."

루난과 에델리아는 각자 기사와 검사의 예의를 차리고서 마주 섰다.

"...."

루난은 검조차 뽑지 않고, 평소처럼 멍한 눈으로 에델리아를 보았다.

"그 맹한 눈 왠지 마음에 안 드네."

에델리아가 콧등을 찡그리고서 루난을 향해 돌진했다. 창처럼 세운 검 끝에 붉은 화염이 치솟았다.

후우욱!

화염의 오러. 에델리아가 작은 체구로도 후반에 나온 이유를 보여주는 한 수였다.

"불은 싫어."

루난은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입을 내밀며 검을 뽑았다.

화아아!

은빛 칼날보다 더 새하얀 서리가 허공을 뒤덮었다.

찌이잉!

화염의 검과 냉기의 검이 맞부딪치며 새하얀 수증기가 치솟았다.

루난은 가람보법을 밟아 냉기와 연기 사이로 몸을 숨겼다.

"냉기 따위 지워버리면 그만이야!"

에델리아는 검신 위에 차오른 불꽃을 횃불처럼 휘둘러 냉기와 연기를 동시에 지워버렸다.

"거기!"

그녀는 냉기 사이의 일렁임을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어?"

에델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검 끝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고, 검에 꿰뚫린 허공은 텅 비어있었다.

"윽!"

그녀는 목 부근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치이잉.

루난이 시퍼런 눈빛을 발하며 에델리아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졌어."

에델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검을 떨궜다.

루난은 그녀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치워 검집에 넣었다.

"좋은 싸움…어?"

에델리아가 손을 내밀었지만 루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서 라온의 앞에 섰다.

"봤어?"

"보법이 익숙해졌네. 잘했어."

"응."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라온의 옆에 푹 주저앉았다.

라온은 루난의 차가운 기세를 느끼며 옅게 웃었다.

'내 보법을 실전에서 사용하다니.'

이번에 루난이 사용한 보법은 혼자 수련할 때 연습했던 가람보법의 은신형이었다.

약간의 조언만 해줬을 뿐인데, 루난은 그것만으로 색다른 응용보법을 만들어냈다.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저리 잘 따라오는 걸 보니, 괜히 뿌듯했다.

"양쪽 9승 9패라. 이거 재밌게 돌아가네요. 그럼 19번째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는 흥미로운지 히죽히죽 웃으며 버렌과 수련 기사를 불렀다.

"흐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꽤 강하네.'

버렌과 마주 선 수련 기사의 자세는 안정되어 있고, 눈빛에 정광이 흐른다. 삼왕자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본 수련 기사 중 가장 강했다.

두 사람의 무력은 비슷했다. 순간의 실수로 결과가 정해질 수준. 저쪽에서도 비밀병기라고 할 법한 수련 기사를 내보낸 것 같았다.

"수련 기사 세툰 카젤이라고 합니다."

"수련생 버렌 지그하르트입니다."

수련 기사와 버렌은 서로에게 정중한 인사를 한 뒤 검집에 손을 올렸다.

"19번째 대련을 시작한다!"

리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련장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졌다.

콰앙!

보법으로 땅을 박차고 나선 버렌과 세툰이 중앙에서 검을 맞부딪쳤다.

'알고 있군.'

두 사람도 아는 것이다. 서로의 힘이 호각이며 방심하는 순간 바로 끝난다는 것을.

쩡! 쩌정!

버렌의 검은 빠르면서 정확했고, 세툰의 검은 무겁고 강했다.

두 검사는 상대를 짓누르기 위해 스스로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검을 내리쳤다.

그야말로 접전. 수련생만이 아니라, 검사들마저 대련에 빠져들었다.

피이익!

버렌의 어깨에서 피가 튀고, 세툰의 흉갑이 쩍 갈라졌다.

검사와 기사는 피가 흐르고, 살이 뜯어져도 검을 놓치지 않았다.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상대의 약점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트드득!

세툰의 묵직한 검격에 뒤로 밀려난 버렌이 이를 악물었다. 검을 세우고,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흡!"

세툰도 버렌의 기운을 느끼고 단전의 오러를 모조리 운용했다.

"흐아압!"

버렌이 바람에 몸을 실어 나아갔고, 세툰은 두 다리를 땅에 박은 채 검을 내리쳤다.

콰아앙!

대련장이 뭉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회색 연기가 치솟았다.

잔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후우웅!

리메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녹색 바람이 불어와 대련장의 연기를 밀어냈다.

버렌과 세툰은 주먹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섰고, 두 사람의 검은 반으로 갈라져 땅에 박혀 있었다.

"어?"

"저, 저렇게 되면…."

"비긴 거잖아."

수련생들의 말대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체력과 오러를 모조리 사용해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19번째 대련은 무승부!"

리메르의 선언을 들으며 버렌이 억지로 몸을 세워 대련장을 내려왔다.

"젠장…."

그는 이를 악문 채로 인상을 구겼다.

"잘했다. 저 수련 기사 오웬 쪽에서 가장 강했어."

"그게 무슨 소용이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걸고 나갔다면 무조건 이겼어야 했어!"

버렌은 말아쥔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힘이 없어서 피부가 찢겨나갔다.

"흐음."

라온은 버렌과 싸웠던 세툰을 보았다. 그 역시 분했는지 점잖았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구겨져 있었다.

'명예라….'

전생이고, 현생이고 살기 위해 바빴기 때문인지 아직도 명예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 승패를 결정할 마지막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의 경쾌한 음성을 들으며 일어섰다.

"걱정하지 마."

라온은 입술을 구기는 버렌을 돌아보았다.

"내가 이길테니까."

"...."

버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믿는다는 표현 같았다.

라온은 몸을 돌려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명예 따윈 모르겠지만,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으니 이겨줄 생각이다. 아니, 이기고 싶었다.

"지그하르트의 직계인가?"

대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왕자가 검병을 두드리며 고개를 틀었다.

"아닙니다. 방계입니다."

"쯧, 버리는 말과 싸우게 되다니."

방계라고 하자 삼왕자의 이마가 구겨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무력을 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제안이 있소."

삼왕자는 라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메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 제안이십니까?"

"저쪽의 둘."

그가 대련장을 지켜보는 루난과 마르타를 가리켰다.

"제대로 힘을 쓴 거 같지도 않은데 내가 이자를 꺾으면 재대련을 하는 게 어떻겠소?"

"흐음…."

리메르가 떨리는 턱을 긁적였다. 표정을 보니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 그렇게 하죠. 이.기.신.다.면요."

"그럼 저들에게 몸을 풀라고 하시오. 금방 끝날 테니까."

삼왕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게 빨리 끝나겠네."

라온의 눈동자에 서늘한 한기가 번뜩였다.

내가 이기겠지만.

제43화

리메르는 대련장 위에서 마주 선 라온과 삼왕자를 보고 히죽 웃었다. 두 사람의 대련이 기대되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물론 보상도.'

대련 이후에 오웬에게 얻을 내기 보상의 기대는 덤이었다.

그는 라온이 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타르탄 공작이 표정 없이 다가와 옆에 섰다.

"즐겁지. 어린 재능들이 전력으로 부딪치는 걸 보는 게 즐겁지 않을 리 있나."

"미친 검귀가 많이도 변했군."

"너 같은 망나니도 때깔 좋은 공작이 되었는데, 나라고 그대로겠냐."

리메르가 타르탄 공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제 왕자님께 다가온 것도 전부 이 대련을 위해서였겠지?"

"물론."

"대체 무슨 생각이냐. 너답지 않게 왜 그런 거추장스러운 짓을 하는 거지?"

타르탄 공작이 몸을 돌리며 강렬한 압박을 보내왔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당장에 검을 내리칠 기세였다.

"저 녀석들이 성장할 기회잖냐. 오마라면 모를까. 다른 육황의 아이들과 싸울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리메르는 타르탄을 돌아보지 않으며 대답했다.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진중함이 가득했다.

"…진심이냐?"

"그래."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변했군."

타르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대련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대련에 나선 수련 기사들은 전부 오웬에서 밀어주는 아이들이다. 그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니, 꽤 수준이 높군."

"당연하지. 누가 키웠는데."

"흥, 잘난 척은. 그런데 저 아이…."

그가 대련장에서 손목과 발목을 돌리며 몸을 푸는 라온을 가리켰다.

"아니, 저 괴물은 뭐냐. 존재감이 흐릿해서 나도 놓칠 뻔했다. 검술과 보법의 연계가 수련생 수준이 아니야."

"역시 뱁새눈은 아니네."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반대편에서 여유를 부리는 삼왕자를 가리켰다.

"그런데 알고 있으면서 왜 경고를 하지 않은 거지? 삼왕자는 라온이 버리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만."

"저분은 오웬 왕국의 미래가 되실 분이지만 아직 패배를 모르신다. 안전한 곳에서 당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타르탄이 라온의 무력을 파악하고도 삼왕자에게 언질을 주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는 삼왕자에게 패배를 알려주어 한층 더 높이 올라가길 바랐다.

"다만 삼왕자님은 강하다. 저 천재 검사라도 쉽게 꺾지는 못할 거다."

"글쎄…."

리메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좀 많이 달라."

"고집은 변하지 않았군"

"그럼 내기 하나만 더 할까?"

"또?"

타르탄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기 한번 더럽게 좋아하는군."

"그럼 간단한 술 내기로."

"좋다. 그런데 어떤 내기를 하겠다는…."

리메르가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올렸다.

"라온이 너희들의 희망을 다섯 합 안에 끝낼 거야."

"개소리! 저 녀석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다섯 합은 무리다!"

타르탄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럼 내기하자고. 콜?"

"좋다! 얼마든지 받아주마."

"역시 화끈하네."

리메르가 키득 웃으며 손을 비볐다.

'오랜만에 공짜 술 좀 먹겠는데.'

* * *

"흠."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바로 앞에 있는 라온이 아니라, 대련장 아래에 있는 루난과 마르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싸울 맛 나겠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저 둘 그리고 세툰과 호각의 승부를 보였던 청발의 남자에게만 관심이 갔다.

바면 마주 선 방계에겐 조그마한 관심도 없었다. 얼굴은 기깔나게 잘 생겼지만, 그뿐이다. 느껴지는 무력이 너무 평범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앞에 있는 방계에겐 오러를 사용하는 것도 아까웠다. 육체의 힘만으로 가볍게 꺾은 뒤 다음 대련에서 전력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가 앞으로 다가와 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대련. 시작!"

"흐읍!"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그리어가 검을 뽑았다.

터엉!

땅을 박차고 라온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검을 내리쳐 단번에 끝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

눈앞에 있던 라온이 찰나의 순간 사라졌다.

'어, 어디에…흡!'

라온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우측에서 살벌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검!'

그리어는 검에서 이는 바람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후웅!

라온의 수련검이 머리칼을 스치는 오싹함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치잇!"

그리어가 몸을 회전시키며 오른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후웅!

라온의 위치를 계산한 정확한 검격. 하지만 이번에도 라온은 그 자리에 없었다.

스스윽.

놈은 뱀이 땅을 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뭐, 저런!'

그리어가 이를 악물었다. 재빠르게 왕국 보법을 밟아 라온의 뒤를 쫓았다.

"흐아압!"

물러서는 라온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강대한 기운이 담긴 검이 대지를 향해 쏟아졌다.

'끝났어!'

피할 공간을 막아선 뒤 내리친 공격이다. 도망칠 공간은 없었다.

"어?"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정지된 눈을 본 순간 등골 사이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터엉!

라온의 몸이 갈대처럼 휘며 앞으로 나아가고, 검이 반월을 그리며 회전했다.

그의 검과 함께 세상이 돌아갔다.

뭔지 모를 상황에 입만 벌리고 있을 때 등에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커헉!"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라온이 자신보다 한참 위에 서 있었다.

그리어는 그제야 본인이 대련장 밖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끄으윽…아!"

삼왕자는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굳어버렸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라온의 붉은 눈. 그걸 본 순간 이 땅의 절대자 글렌 지그하르트가 떠올랐다.

'저, 저놈이야.'

삼왕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떨었다.

'진짜는 저놈이었어!'

* * *

"이것 참."

리메르가 웃음을 참듯이 입을 가리며 타르탄을 보았다.

"어쩌나? 다섯 합도 아니고, 두 합만에 대련이 끝나버렸네."

"...."

타르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쓰러진 삼왕자가 아니라, 라온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그만이 아니다. 이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타르탄은 한참 뒤에서야 헛바람을 뱉으며 허리를 폈다.

"저건 뭐냐. 무슨 보법을 저렇게 부드럽게 밟는 거지? 검술 역시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갔어.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니었다니."

타르탄의 시선은 여전히 라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보여준 보법과 검술은 수련생의 그것을 이미 벗어나 있었다.

강력한 무력이 아니라, 그 순간에 맞는 적절한 움직임으로 삼왕자를 꺾었다는 게 더 경악스러웠다.

라온이라는 아이는 가진 실력 이상의 것을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라온이 이길 거라고."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삼왕자께서 제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저렇게 쉽게 질지는 몰랐지만…."

"술집 예약해 놓을 테니까. 저녁에 보자고, 나 비싼 술만 먹는 거 알지?"

"쯧!"

"자, 잠깐!"

타르탄이 혀를 차고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삼왕자가 버둥거리며 일어섰다.

"아, 아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와, 왕자님!"

"호오."

타르탄은 당황한 눈빛으로 삼왕자에게 다가갔고, 리메르는 턱을 긁적이며 흥미로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이러시면 안…."

"공작. 난 아직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소!"

삼왕자는 말리려던 타르탄을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본래의 힘을 처음부터 썼다면…."

"아, 시벌! 존나게 찌질하네!"

마르타가 대련장에 발을 걸치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왕자라는 놈이 승패도 인정 못 하고 왜 그렇게 비벼대. 꼭 어떤 놈을 보는 것처럼."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있던 버렌을 내려보았다.

"윽…."

버렌은 했던 일이 있었기에 입술을 깨물고 인상을 구겼다.

"넌…."

"어이, 왕자 나리. 내가 지금 최대한 좋은 말만 해주고 있거든. 쌍욕 박기 전에 짐 싸서 꺼져."

마르타는 뒤에서 버렌이 노려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삼왕자를 조롱했다.

"말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그쪽이 오웬의 왕위 계승자면 나도 지그하르트의 직계야. 꿇릴 게 없거든."

마르타는 타르탄 공작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

리메르가 대련장 위로 올라가 손을 펼쳐서 두 사람의 얼굴을 가렸다.

"대련이 끝나긴 했지만, 당사자들이 어떤지는 이야기되지 않았으니, 물어보자고. 라온."

"예."

계속 가만히 있던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래? 네가 당사자니까 직접 결정해."

라온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턱을 틀었다.

"교관님이 이번 대련에 내기가 있다고 하셨죠. 승부는 났고 더 싸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끄윽…."

삼왕자가 말아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왕자님. 그만하고 가시…."

"패한 건 인정한다!"

타르탄 공작이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삼왕자가 앞으로 나왔다.

"난 네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싸우기 전부터 무시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어. 하지만 이대로 떠난다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만 같다. 한 번만 다시 싸워다오!"

삼왕자가 검을 내려놓고 고개를 직각으로 숙였다.

"와, 왕자님!"

타르탄 공작이 다가가 일으키려 했지만, 왕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음…."

라온은 삼왕자의 푸른 눈을 통해 그의 진심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다니.'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것도 타르탄 공작의 호위를 받는 왕자라면 지지 세력이 단단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대놓고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야. 삼왕자고 자시고. 추한 짓 그만하고 꺼…."

"마르타."

"칫."

라온의 부름에 마르타가 혀를 차고 뒤로 물러났다.

"음…."

타르탄 공작은 그 모습을 보고 침음성을 삼켰다.

'그저 무력만이 아니라니….'

자신에게도 덤비려 들었던 저 직계 여아를 말 한마디로 물러서게 했다. 저 라온이라는 아이를 잘못 보고 있던 건 삼왕자만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련장 뒤로 물러섰다.

"다만 이게 마지막입니다."

"무, 물론이오!"

삼왕자는 더 이상 말을 놓지 않았다. 무인으로서 존중하겠다는 뜻 같았다.

"준비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리메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대련장 위로 올라왔다.

"으음…."

삼왕자는 갑옷 안에서 사자 모양의 목걸이를 꺼내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내 무언가를 결정한 듯 이를 악물고 목걸이를 그대로 뜯어버렸다.

우우우웅!

그의 중심에서 막강한 풍압이 치솟으며 그의 기세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부풀었다. 단순히 오러만이 아니라, 단련된 육체의 기운마저 느껴졌다.

"저런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고?"

"허!"

버렌과 마르타는 삼왕자에게서 뿜어진 막강한 기세에 눈썹을 찡그렸다.

"사, 삼왕자님! 그건…."

"힘을 숨기고 있을 때가 아니오. 저자와 전력을 다해서 싸우고 싶소."

삼왕자는 이 사이로 바람을 흘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방심 따위 없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는 의지를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상대가 힘을 숨기는 것도 모르다니, 멍청한 놈이로다.

'그래도 이길 수 있어.'

-오러의 양이 너보다 훨씬 많고, 육체의 완성도도 저쪽이 위인데 이길 수 있다고?

'그럼 내기라도 할까?'

라온이 턱을 까딱였다.

-하! 물론이다! 얼마든지 받아주마.

라스가 코웃음과 동시에 내기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가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에게 승리.

성공시 : 모든 능력치 +4

실패시 : <분노>의 감정 10포인트 생성.

'받아들인다.'

메시지가 뜨자마자 내기를 받아들였다.

'호구가 또 왔군.'

지그하르트 도박장의 호구가 리메르라면 라온의 호구는 라스였다.

나오려는 미소를 참고 검을 뽑았다. 처음부터 삼왕자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승리의 의지를 세우고, 숨겨둔 힘을 개방한 삼왕자와 싸우면 수련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두 번째 도전을 받아들인 건데, 예상과 달리 호구 한 마리가 붙었다.

"그럼 가겠소."

삼왕자가 끌어 올린 힘을 다리에 집중하여 진각을 밟았다. 대련장 한 축을 무너뜨리며 맹수처럼 돌진해왔다.

"이번엔 싸울 맛 좀 나겠군."

얻을 게 있으니까.

라온이 앞으로 나아가며 휘돌린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하늘처럼 푸른 오러에 휩싸인 삼왕자의 검과 붉은 불꽃을 두른 라온의 검이 격돌했다.

제44화

끼이이잉!

라온과 삼왕자의 기운이 정면에서 부딪치며 서로의 검이 비명을 내질렀다.

찌지지잉!

발목에서부터 올라온 힘이 라온의 전완근에 담겼다. 바위를 업은 듯한 묵직함이 검면에서 폭발했다.

"끄읍!"

검을 쥔 삼왕자의 양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이런 미친!'

한 번의 패배를 통해 라온이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정면에서도 압도할 무력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크어어어!"

삼왕자는 이를 악문 채 기합을 내질렀다.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는 각오로 끝까지 검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수련검과 수련검이 비껴나가며 라온이 좌측으로 삼왕자가 우측으로 밀려났다.

"윽!"

삼왕자가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빠르고 정립된 움직임. 어떤 공격이라도 받아낼 기세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예측을 벗어났다.

투웅!

라온은 가람보법을 밟아 자세를 다잡으며 이동을 함께했다. 미끄러지듯 움직여 삼왕자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삼왕자도 제 실력을 발휘했기에 이전보다 반응 속도가 빨라졌다. 뒤로 물러서며 검을 내질렀다.

치이잉!

라온은 검면을 틀어 손목을 노린 삼왕자의 검을 밀어냈다.

"아직이야!"

삼왕자의 검이 살아 있는 뱀처럼 휘어지며 손목이 아닌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그의 눈동자에 승리에 대한 갈망이 담겼다.

캬앙!

라온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련검에 역회전을 걸어 삼왕자의 검에 담긴 회전을 풀어버렸다.

"크흡!"

삼왕자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밀려났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턱을 떨었다.

"어, 어떻게…."

"한번 경험해 봤거든."

라온이 삼왕자의 뒤에 보이는 버렌을 흘낏 보았다. 녀석과 싸울 때처럼 검에 담긴 있는 회전을 지워버렸을 뿐이었다.

"괴물인지, 천재인지…."

삼왕자가 입술을 깨물며 자세를 낮췄다. 검을 양손으로 잡고 사선으로 틀었다. 계속 보았던 자세지만, 이전과는 다른 기세가 풍겨 나왔다.

'페레스 검술.'

오웬 왕국의 미래만이 익힌다는 세 가지 왕국 검술 중 하나 페레스 검술이었다.

수백 년 전 대륙제일검사 페레스가 남긴 검술로 하늘의 흐름을 담아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승의 무학이었다.

"하압!"

삼왕자가 단단한 기합을 내지르며 발을 굴렀다. 질풍처럼 달려와 검을 올려 친다.

터엉!

라온은 삼왕자의 검에 맞서지 않고 가람보법을 운용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처럼 검을 스쳐 지나갔다.

삼왕자가 올라간 검을 내리치며 따라붙었다. 오러의 운용이 정심해 속도가 빠르면서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캬앙!

라온은 연성검법으로 삼왕자의 검을 튕겨내면서 뒤로 물러섰다.

"이젠 놓치지 않는다!"

삼왕자는 추적을 늦추지 않으며 더 완성도 높은 페레스 검술을 펼쳐냈다. 하늘을 담았다는 뜻대로 검날에 웅장하면서도 현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나쁘지 않군.'

라온은 이마 위로 스쳐 지나가는 삼왕자의 검을 느끼며 픽 웃었다.

'아까와는 달라.'

이전에 싸웠을 때와는 무력도 의지도 달라졌다.

'역시 명문 왕국인가….'

괜히 육황의 한 축인 오웬 왕국에서 인정을 받는 자가 아니었다. 저 어린 나이에 싸움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언젠가 오웬 왕국과 싸울 가능성도 있다. 그날을 위해서 왕국의 상급 검술을 눈에 익혀둘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공부가 되고 있었다.

거기다 삼왕자는 싸우면서 계속 생각을 하고 움직임을 조절한다. 재밌는 상대였다.

쩌엉!

라온이 목을 노리고 휘어진 삼왕자의 검을 격하게 쳐냈다. 날카로운 검격. 하지만 파악은 이미 끝났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면서 싸웠기 때문에 그의 검술을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다. 삼왕자가 펼친 검술은 모두 자신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쩡! 쩌저정!

라온은 더 이상 보법을 밟지 않았다. 다 다리로 대지를 누르며 삼왕자의 검술을 모조리 받아냈다.

"허…."

"미친!"

삼왕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고, 타르탄 공작이 입을 떡 벌렸다.

"후욱…."

삼왕자가 긴 숨을 뱉어내며 한발 물러섰다. 어깨를 펴며 검을 다잡았다.

"아직이오. 마지막 한 수가 남았어."

그 말과 함께 검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받치는 상단의 자세. 그대로 땅을 박찼다.

'비기인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상급 검술에는 그 이름값을 할 비기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삼왕자는 페레스 검술의 비기를 사용하려는 것 같았다.

후우웅!

삼왕자의 전신에서 퍼진 기류가 몸을 압박해왔다. 상대의 회피를 막고, 정면에서 검을 내리치는 돌진형 검술이었다.

'받아주지.'

라온이 검을 좌측으로 젖혔다. 검술 구경은 할 만큼 했으니 끝낼 시간이다.

만화공 일화.

회축.

검 끝에서 피어난 새빨간 불꽃이 톱니처럼 회전하며 대련장의 열기를 갈랐다.

"하아압!"

삼왕자는 라온의 검에서 솟구친 불꽃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본인의 오러와 검을 믿는 것이다.

치이이잉!

가늘게 치솟은 불꽃이 삼왕자의 오러를 가른다.

"허!"

갈라지는 푸른 오러 사이로 삼왕자의 쩍 벌어진 눈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괜히 오웬 왕국의 삼왕자가 아니었다.

마지막 오러를 끌어올려 갈라진 오러를 메꿨다.

"소용없어."

라온이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수련검을 끝까지 베어냈다.

"아직이다! 내 검은…어?"

삼왕자가 턱을 떨며 내리치던 검을 멈춰 세웠다.

아니,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검은 이미 부러졌으니까.

라온의 회축은 삼왕자의 오러만이 아니라, 그의 수련검까지 베어버렸다.

"허…."

삼왕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멍한 눈으로 부러진 검을 바라본다.

"히, 힘과 속도는 내가 유리했는데…."

"보법을 밟고 물러난다고 하여 무조건 힘이 밀려서는 아닙니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 일부러 물러나기도 하죠."

"…확실히 느꼈소."

삼왕자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는 부러진 검을 챙기고, 갑옷과 머리를 정돈한 뒤 다시 라온의 앞에 섰다.

"고맙소. 두 번째 대련을 받아준 덕분에 많은 것을 느꼈소. 세상이 넓다는 말은 진실이었군."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왕자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중한 몸짓이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라온도 삼왕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 무시해서 미안하오. 이 못난 놈이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해주시오."

"괜찮습니다."

"몇 살이오?"

"14살입니다."

"하, 나보다 어린 검사에게 검으로도, 인성으로도 졌구려."

삼왕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원래 성격이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소."

그는 갑옷 안쪽에 손을 넣어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사자가 그려진 패를 꺼냈다. 뒤에는 그리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받아주시오."

"이건…."

"오웬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이 그 어떠한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증거요."

"네?"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삼왕자가 넘겨준 건 왕자를 상징하는 패로 그의 말대로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걸 왜 제게…."

"패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시원해졌소. 이런 적은 처음이야. 뭔가를 깨달은 듯한 기분이오."

삼왕자는 그 대가에 비하면 저 패는 싼 거라고 중얼거렸다.

"음…."

라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패를 받아들였다.

"당신과는 훗날 다시 만나겠지. 그때도 지금처럼 내 위에 있어 주길 바라오. 따라잡는 재미가 있을 것 같소."

삼왕자는 구김 없이 웃었다. 대련장에서 내려와 리메르의 앞에 섰다.

"리메르 교관. 우리가 패했소. 내기는 이야기한 대로 이루어질 거요."

"알겠습니다."

리메르는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탄 공작."

"예."

"돌아갑시다.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났소."

"예!"

삼왕자와 타르탄 공작은 수련 기사들을 이끌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흥! 끝까지 잰 척하네. 짜증나게!"

마르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무너진 대련장을 걷어찼다.

"있어 보이는 척이라…."

라온은 사라지는 삼왕자의 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삼왕자의 눈에 어지러움은 없었다.

'아닐 거야.'

그는 변했고, 변할 것이다. 버렌과 마르타가 그랬듯이.

'그리고….'

라온이 손에 들린 패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저 수련을 위해 대련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물건을 받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신기하네.'

대가도 없이 암살만 하던 전생을 겪어서 그런지 이런 갑작스러운 대가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의도로, 왜 줬는지 모르겠다. 다만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번 삶도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는 않는군.'

* * *

삼왕자는 그 길로 알현실을 찾아갔다. 예정보다 빠르게 돌아가겠다고 전했을 때 알현실 문이 열리고 수석 집사 로엔이 걸어 나왔다.

"가주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알겠소."

삼왕자는 침을 꼴깍 삼키고서 로엔을 따라 알현실로 들어갔다.

"흡…."

처음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한 글렌의 눈을 마주한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눈빛이 변했군."

한쪽 무릎을 꿇으려 할 때 글렌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럽지만 전 스스로를 최고라 생각했습니다. 오웬 왕국만이 아니라, 다른 육황의 재능들과 부딪쳐도 꺾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삼왕자는 가라앉은 눈빛을 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건 이곳 지그하르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무장을 돌아보았지만, 마음에 차는 수련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건 5 연무장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 세 명의 강자가 있었지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삼왕자가 라온에게 얻어맞았던 오른 손목을 문질렀다.

"그곳에는 제가 파악조차 못 한 강자가 있었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저보다 어린 수련생의 무력을 무시했다가 일방적으로 패했습니다. 억지로 우겨서 치렀던 두 번째 대련 역시 패했습니다."

"흐음."

글렌의 반응에 삼왕자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알현실의 분위기가 살짝 부드러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더 해보라는 것처럼. 어서 말해보라는 것처럼.

"음, 전 육황 중 세 곳을 돌아보았고, 대련도 해보았지만 라온 같은 수련생은 보지 못했습니다. 무력, 인성, 정신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된 무인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패했기 때문인지 기분이 나쁘긴커녕 오히려 깨우친 기분이었습니다."

삼왕자는 말을 이어갈수록 알현실 분위기가 봄처럼 따스해졌다.

"저보다 어리지만 배울 점이 많은 검사였습니다."

"그런가?"

"예. 그래서 지금 당장 돌아가려는 겁니다. 그 아이를 보고 깨달은 점을 당장 체화시키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알겠다. 현왕에게 편지는 잘 받아보았다고 전해주도록."

"감사합니다."

삼왕자는 글렌에게 예를 갖춘 인사를 건넨 뒤 알현실을 벗어났다.

"…흡."

둘이 남은 알현실에서 웃음을 참든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이 글렌을 보며 입을 막고 있었다.

"왜 웃는 게냐."

"가주님이 미소를 짓고 계신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습니다."

"미소?"

글렌이 손을 가져다가 입매를 만져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오웬 왕국의 삼왕자가 라온 도련님의 이름을 말했을 때부터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손자가 타국의 왕자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착각이다."

글렌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왼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흐흡."

"웃지 마라."

"옙!"

로엔이 더 크게 웃음을 흘렸지만, 글렌의 말에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요즘 리메르랑 붙어 다니더니, 그놈의 병이 옮았군."

글렌은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감아버렸고, 로엔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 * *

"삼왕자님.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삼왕자가 가주전을 나왔을 때 타르탄 공작이 다가왔다.

"수고하셨소. 인사는 드렸으니, 바로 돌아가도 될 거 같소."

"알겠습니다. 모두 열을 맞춰라."

"예!"

타르탄 공작의 말에 기사와 수련 기사들이 그의 뒤로 붙었다.

"가자."

"음…."

삼왕자가 가장 앞에서 걸어갔고, 타르탄 공작은 그 옆에 붙어 입맛을 다셨다.

"무슨 할 말 있소?"

"그 라온이라는 수련생과 대련을 할 때 말입니다. 감춰둔 힘을 개방하고, 페레스 검술까지 사용했던 건 조금 과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힘은 적당히 숨기는 게…."

"나도 알고 있소. 확실히 과했지."

"예. 페레스 검술은 왕국의 최상급 검술. 공개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거기다 신패를 내놓으시다니 너무 과한…."

"그건 아니오."

타르탄 공작의 말이 삼왕자의 손에 의해 막혔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내게 호의를 베풀었소. 이쪽이 무시로 시작했지만, 예의로 대해주었지."

"음…."

"나도 그에게 예의를 차렸을 뿐이오. 거기다 그 친구 역시 비기라고 할 법한 검술을 보였잖소."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패를 준 건 투자요."

"투자라고 하신다면?"

타르탄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무력과 인성, 정신력이면 방계라고 해도 대륙 전체에 이름을 날릴 거물이 될 거요. 그런 이와 친분을 만들어 둔다면 훗날 내게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소."

"그렇군요. 그 순간에 거기까지 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가슴과 혀에 칼을 달고 사는 왕국에서 자랐는데, 그 정도 계산도 못 하면 죽어야지."

삼왕자는 픽 웃고서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흠…."

타르탄 공작이 턱을 긁적였다. 조금 전 삼왕자의 옆에 있을 때와 달리 표정엔 냉정함만이 가득했다.

'확실히 달라지셨군.'

이곳에 오기 전 삼왕자의 기질에 어린 자만심은 아예 사라졌다. 지금 그의 눈빛에서 새어나오는 건 발전을 위한 열의였다.

"정말 술이라도 사야겠는데?"

타르탄 공작은 옆에 보이는 5 연무장을 보며 픽 웃었다.

"나중에 만난다면 말이야. 그리고…."

그는 연무장 내부에 있을 라온을 생각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궁금하군.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어떤 괴물이 되어 있을지도.'

제45화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떠난 이후에도 수련생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서 라온의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매일매일 라온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항상 물처럼 부드럽게만 움직여서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고, 강한 검격을 쏟아낼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어, 어어…."

"저렇게 강했다고?"

"어, 어째 점점 차이가 벌어지는…."

수련생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단상 위에서 시원한 손뼉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수고했다."

리메르가 단상 위에 걸터앉은 채로 씩 웃었다.

"갑작스러운 대련에도 최선을 다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와 대련할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련생들은 오히려 대련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행이고."

리메르는 씩 웃으며 허공에서 발장구를 쳤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 다 끝났으니까. 몇 가지 말해줘야지. 일단 오늘 너희와 붙었던 오웬의 수련 기사들 있지? 걔들 단순한 수련 기사가 아니다."

"네?"

"그럼 어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자, 수련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녀석들 오웬 왕국이 각 잡고 키우는 정예들이야. 그대로 성장한다면 근위기사나, 은기사가 될 인재들이지."

"헉!"

"근위기사와 은기사!"

"어쩐지 너무 강했어…."

수련생들이 입을 쩍 벌어졌다.

정예 중의 정예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웬 왕국의 근위기사단과 은기사단이다.

근위기사는 왕성에서 국왕을 지키는 방패. 은기사는 왕국을 위협하는 적을 베는 칼.

두 기사단은 오웬왕국의 최정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련생들은 그런 곳에 들어갈 것이 확실시되는 수련 기사들과 비슷하게 싸웠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아이들과 비슷하게 싸웠다는 건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다. 모두 자기 자신에게 박수!"

"이야야야!"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수련생들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환호를 터트렸다.

"흐흠!"

"수석 교관님."

리메르가 기분 좋게 환호성을 즐기고 있을 때 중앙에서 손 하나가 올라왔다. 버렌이 비틀거리면서 일어서 있었다.

"그들과 다시 싸워볼 수 있습니까?"

버렌의 표정은 바로 앞에 적이 있는 것처럼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누가 보면 진 줄 알겠네."

"이기지 못했으면 진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자세야."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와 붙었던 수련 기사는 미래의 근위기사 단장이라고 했었다. 네가 계속 발전해나가면 만나기 싫어도 만나게 되겠지. 물론 그때는 수련 기사가 아니라, 기사일 테지. 그러면…."

"전 검사가 되어야겠군요."

버렌의 녹색 눈동자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잘 알고 있네."

"하나만 더."

"뭐지?"

"저와 붙은 수련 기사가 미래의 근위기사 단장이라면 삼왕자는 뭡니까? 왕족 수준의 검술이 아니었습니다."

버렌의 질문은 타당했다. 아무리 15살이라고 해도 삼왕자의 무력은 기이할 정도로 강했다.

"삼왕자는 미래의 왕국제일검이라고 하더군."

"헉!"

"와…."

리메르의 답변과 동시에 연무장에 침묵이 찾아왔다. 수련생들은 부릅뜬 눈으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훗날 왕국제일검이 될 거라 칭해지는 자를 가볍게 꺾어버린 라온은 대체 무슨 괴물이냐는 표정이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평소보다 체력을 많이 썼으니, 돌아가서 쉬도록."

리메르는 다시 손뼉을 치고 단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수련생들의 눈동자에는 라온에 대한 놀라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 *

라온은 경악이 어린 수련생들의 눈빛을 뒤로하고 가장 먼저 연무장을 떠났다.

평소라면 돌아가라고 해도 남아서 훈련을 하겠지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빠르게 숙소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앉아서 꽃팔찌를 툭툭 두드렸다.

화아아아!

팔찌에서 푸른색 냉기가 꽃봉오리처럼 피어났다. 다만 냉기는 분노에 찬 듯 바르르 떨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고 너한테 질 수가 있는 거냐! 왕족이라 믿었건만 멍청하고 하등하도다!

라스가 방 전체를 서늘한 냉기로 채우며 이를 갈았다.

-본왕이 그놈이었다면 너는 지금 얼음덩어리가 되어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다. 가진 힘도 이용 못 하는 주제에 왕자? 한심하기 짝이 없어!

라스는 본인이 마계의 왕이다 보니 왕자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내기에 진 게 굉장히 분했는지 분노와 수다가 동시에 터졌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당시 더 적은 마나로도 큰 적을 손쉽게 제압했다. 나중에 군주 대 군주 대결에서는….

"아, 네. 거기까지."

라온이 팔찌를 치자, 라스의 말이 끊겼다.

'저건 무조건 끊어야 해.'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라는 말이 나오면 일단 끊고 봐야 한다. 저걸 들어줬다간 내일 아침에나 보상을 받을 거다.

"떠드는 건 나중에 하시고 내기 보상이나 주시지?"

-이건 사기다. 그놈이 가진 힘도 이용 못 할 줄 몰랐다.

사실 삼왕자는 잘 싸웠다. 만화공이 오러의 양과 상관없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했을 뿐.

"그래서 안 주려고? 마계의 군주나 되셔서?"

-본왕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인 줄 아느냐. 말한 건 지킨다. 그게 사기라도!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 보상이 지급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4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감전된 듯 전신이 잘게 떨렸다.

"후우우우."

육체와 정신이 단번에 성장하는 이 희열은 매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만큼 황홀했다. 이 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임무라도 할 수 있었다.

꾸욱.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능력치 4포인트가 한 번에 오르니, 악력과 근육의 탄력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여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2성) 만화공(2성), 혹한의 냉기(2성), 화속성 저항력(2성).

근력 : 47

민첩성 : 47

체력 : 48

기력 : 36

감각 : 58

이번 보상만이 아니라, 계속 수련한 덕분에 능력치가 많이 상승해 있었다. 높아진 수치 때문에 상태창만 봐도 뿌듯함이 밀려왔다.

-쯧.

라스는 보이지도 않는 상태창을 쭉 살피며 짧게 혀를 찼다.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은 눈빛이다.

-좋냐?

'좋아.'

라온이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그리 좋아할 필요 없다. 네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결국 본왕의 빙의체에 불과하니까. 본왕이 이루지 못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녀석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며 냉기를 뿜어냈다.

"아, 그래."

피부 위로 서리가 내릴 정도로 온도가 내려갔지만, 수속성 저항력 때문에 차갑지도 않았다.

"열심히 해봐."

가볍게 어깨를 털어 라스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본왕을 무시하지 마라. 100년이 걸려서라도 네놈의 육체를 차지할 터이니.

'네.'

-끄아아악!

라온은 라스의 냉기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시라고?

무시를 할 리가 있겠는가.

라스는 적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적.

매일 불의 고리를 연성하고,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이유가 놈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여유 있는 척하지만, 방심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허무한 죽음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복수하기 위해서 더 강해져야 한다.

라온은 숙소를 나와 모두가 떠난 연무장으로 돌아가 밤새 검을 휘둘렀다.

* * *

라온이 오웬 왕국의 삼왕자와 대련을 한 지 세 달이 지났다.

차기 왕국제일검이라는 삼왕자를 가볍게 꺾었지만, 라온은 승리 따위는 이미 지난 일이라는 듯 수련에만 몰두했다.

수련생들은 요즘 라온에게 수련 귀신이니, 수련 천재니 하는 별명까지 붙였다. 물론 뒤에서만 부르지만.

"이제 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네."

"저 인간 더 강해진 거 같지 않냐? 뭔가 검술도 보법도 더 자연스러워졌어."

"더 강해진 거 같은 게 아니라, 강해졌겠지."

"질린다. 질려."

방계 수련생들은 홀린 듯이 수련에 몰두하는 라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조금은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턱도 없겠어."

"그러게. 이쪽도 신발 밑창이 헤지도록 수련했는데…."

수련생들은 오웬 왕국과의 대련이 아니라, 라온이 마르타를 꺾었을 때부터 감격해서 수련 시간을 많이 늘렸다.

열심히 수련했으니, 라온과의 실력 차이가 조금은 줄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실력 차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압도적인 차이만 벌어졌다.

"이거는 그니까…."

"재능 차이지."

"그래.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달라. 노력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

"고작 신발 하나 헤졌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응?"

각진 목소리에 수련생들이 뒤를 돌았다.

"헉!"

"어어…."

"버, 버렌 님!"

버렌이 팔짱을 낀 채로 입매를 비틀고 있었다.

"재능이라는 멋진 단어 하나로 상대를 높이면 참 편하지. 최선을 다 해도 안 된다고 나 자신을 합리화시킬 수 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는 수련생들을 스쳐 지나가며 말을 이었다.

"그건 신발 한 개가 아니라 열 개 정도는 뜯어먹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그 말은 수련생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에게. 라온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모르고 그를 질투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 맞습니다."

"죄송…."

"내게 죄송할 건 없다. 너희들의 인생이니까."

버렌은 수련생들의 뒤에 있던 수련검을 챙겨서 연무장 중앙으로 행했다.

"버렌 도련님. 조금 부드러워지신 거 같지 않냐?"

"예전이라면 아예 무시했을 텐데…."

"야. 온다. 입 다 물어!"

"흡!"

수련생들은 좌측에서 걸어오는 마르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턱.

마르타는 수련검을 꺼낸 뒤 어깨에 걸쳤다. 어깨에 닿을 듯한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연무장으로 가다가 멈춰 섰다.

"저놈이 부드러워졌다고?"

그녀는 수련생들에게 노골적으로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인데 부드러워졌다니, 너희들 눈깔은 썩은 오크만도 못하네."

마르타는 비웃음을 흘리고서 검을 휘돌리며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라온과 루난은 쉬지도 않고 몸을 움직였고, 버렌과 마르타는 그 둘에 지지 않겠다는 듯 강력한 기세를 일으키며 검을 내리쳤다.

"어우, 숨 막혀."

수련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5 연무장엔 괴물이 산다. 그것도 4마리나….

"그래. 그렇지만."

수련생 중 한 명이 본인의 수련화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실력을 늘리기엔 여기만 한 곳이 없지 않냐."

"음, 그건 그렇지."

"맞아."

다른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5 연무장에 온 뒤로 실력이 느는 속도가 훨씬 빨라진 건 확실했다.

"우리도 가자."

수련생들은 짧은 휴식을 끝내고 수련검을 쥔 채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좋구만."

리메르는 그들의 뒤편에 있는 나무에 걸터앉아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둥들이 잘 버텨주니, 알아서들 따라가잖아."

연무장 중앙에서 검을 휘두르는 라온, 버렌, 루난, 마르타를 차례로 보았다. 색이 다른 네 아이가 전력으로 달려가니, 뒤에 있는 아이들이 그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저 넷은 교관 이상으로 아이들의 실력 발전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

"흐음."

리메르는 나무에 걸터앉은 채 손가락으로 붉은 머리를 빙글 돌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실전을 시켜봐도 되겠어."

제46화

라온이 전방으로 쇄도해 검을 내리그었다. 붉게 타오른 칼날이 저녁 공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찌지직!

대기를 가르고도 남은 오러의 잔향이 짐승의 발톱처럼 연무장을 긁어냈다.

연성검술과 가람보법의 마지막 초식을 합친 돌진형 검술이었다.

'나쁘지 않네.'

라온이 검을 휘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력이 좋고, 속도가 빨라 보고도 막기 힘든 검술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지만.'

이 초식은 등 뒤에 숨겨둔 칼처럼 언제, 어느 때라도 펼칠 수 있는 기습형이다.

아직 암살자의 기질이 남아 있는지, 기습을 염두에 두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흥흥.

뒤에서 들린 콧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맹한 눈으로 자신의 검을 보고 있었다.

다란 그 맹한 눈동자의 아랫부분이 살짝 반짝인다. 기대감이 어린 표정. 검술을 알려달라는 것 같았다.

"흡!"

루난은 따라 하려는 듯 땅을 박차고 허공에 검을 내질렀다.

속도도, 위력도, 기습의 묘도 없이 자세뿐이다. 다만 워낙에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녀석이다 보니 웬만해선 막기 힘들 초식이 되었다.

"맞아?"

루난은 몇 번 더 검을 휘두른 뒤 고개를 살짝 꺾고 이게 맞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일단 다리부터…."

저대로라면 대련하다가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서 자세만 살짝 봐주었다.

후우웅!

루난의 자세를 어느 정도 잡아줬을 때 연무장 담장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리메르였다.

그는 정시에 도착하면 문을 걷어차며 들어오고, 늦으면 담벼락을 넘어온다.

즉, 지금은 훈련 종료 시간이 조금 지나갔다는 뜻이다.

"음!"

리메르는 단상 위에 걸터앉아 수련생들을 내려보았다.

"교관님. 10분 늦으셨습니다."

"오늘 훈련 수고했다."

그는 버렌의 지적을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10분이면 검을 만 번 휘두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윽!"

버렌의 어이없는 말에 대답한 리메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커흠, 어쨌든 오늘 전해줄 소식은 두 가지. 첫 번째는 6 연무장에 관한 이야기다."

"6 연무장이요?"

"거길 갑자기 왜?"

"여기서 떨어진 녀석들이 간 곳이잖아요."

수련생들은 떨어진 녀석들이 간 연무장을 왜 말하냐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웬 왕국 사절단이 6 연무장을 무시하고 5 연무장에만 대련을 신청해서 자존심이 상한 것 같더군.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서 피나도록 수련한다고 한다."

리메르는 6 연무장의 수련생들이 대견하다며 씩 웃었다.

"부상 때문에 낙오되었던 직계와 방계도 새로 들어갔고, 힘든 수련만 골라서 진행 중이라고 하니, 방심해선 안 된다. 그 아이들에게 따라잡히지 않도록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라."

"예."

"에에…."

"뭐, 따라잡힐 수 있어야 말이지."

수련생들이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이미 한참 차이가 나는데, 뭐하러 대비하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훗."

리메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두 번째 소식을 전했다.

"다음 주에 아주 특별한 훈련을 할 생각이다."

"어, 어떤 겁니까?"

벌써 겁을 집어먹은 도리안이 어깨를 달달 떨었다.

"특별한 훈련이라."

"뭐지? 뭘 할 게 남았나?"

리메르가 워낙에 별난 일을 벌인 적이 많았기 때문에 도리안만이 아니라, 수련생 모두가 불안해했다.

"그거야 비밀이지."

"아…."

"교관님. 어떤 훈련인지 미리 말씀을 해주셔야 그에 따른 대비를 하지 않겠습니까."

버렌이 손을 들어 올리며 정론을 말했지만 리메르에겐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알려주면 재미없잖냐. 열심히 수련하면 뭐가 되었든 해낼 수 있어."

"음…."

맞는 말이긴 해서 버렌이 입을 삐죽이며 손을 내렸다.

"그래도 힌트를 하나 주자면…."

리메르가 손가락을 펴며 웃었다. 평소처럼 가볍거나 경쾌한 웃음이 아닌, 진한 투지가 비치는 미소였다.

"실전이다."

"실전이요?"

"갑자기?"

대련이 아니라, 실전이라고 말하니 수련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가 아니라, 이제 할 때도 됐지. 준비한다고 했으니 확실하게 말해주마."

리메르의 입매를 맴돌았던 능글맞음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진지함 그 이상의 섬뜩함이 미소에 어렸다.

"이번에는 피를 볼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 * *

리메르는 훈련을 끝낸 뒤 가문을 나와 서쪽 외곽 유흥 거리로 향했다.

유흥 거리는 검사들과 사용인들이 휴식을 위해 찾는 곳으로 다양한 상점과 식당, 주점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걷다가 동쪽 끝 목련이라는 이름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단아한 이름과 달리 주점은 낡았고, 너저분했다. 자리는 만석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리메르는 그 난잡한 분위기를 즐기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측에 홀로 앉아 있는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빨리 왔네."

그가 중년인의 앞자리에 앉으며 씩 웃었다.

"마법사들은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검은색 로브를 입은 채로 책을 읽던 중년인이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리메르 님."

"술친구. 잘 지냈어?"

"저야 뭐 잘 놀고, 먹고 있습니다."

"부탑주가 되더니 아주 여유롭네?"

"허허, 여유가 넘치는 건 리메르 님 아니십니까. 월급 도둑이라는 말이 누구 때문에 생겨났는데."

중년인이 책을 덮으며 픽 웃었다.

"요즘엔 좀 바쁘다 보니, 너랑 술만 마시던 시절이 그립다."

"수련생들에게 시간을 많이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돌보신다고."

"그 정도는 아니고."

깊은 친분이 있는지 두 사람의 대화는 벨벳처럼 매끄러웠다.

"베르빈. 넌 요즘 뭐해?"

"리메르 님이 술자리에 나오시질 않으니, 책 읽는 낙으로 살고 있죠."

베르빈이라고 불린 남자가 손에 든 책을 흔들었다.

"마탑에서 할 일이라고는 연구와 책 읽는 것뿐이니까요."

"하긴."

리메르가 베르빈의 손에 들린 마법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표정을 보니 단순히 술이나 마시자는 건 아닌 것 같고."

"술이 좀 당기기도 했고, 부탁이 있어서."

"부탁이요?"

"우리 애들 실력이 꽤 올라와서 몬스터와 실전을 시켜보려고."

"음, 그거라면 정식 요청하셔도 될 텐데요."

베르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련생들에게 몬스터와 대전을 시켜주는 건 정식 커리큘럼 중 하나다. 이렇게 찾아와 부탁할 필요 없었다.

"거기에 몇 가지 추가를 해보고 싶어."

"추가라고 하신다면?"

"우리 애들이 좀 강해서 그냥 몬스터는 별로 도움이 안 돼."

"아,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을 때려눕혔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지."

리메르가 콧대를 들어 올리며 히죽거렸다. 오랜 친구에게 제자들의 칭찬을 들으니, 술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수련생들과 대련을 할 몬스터들을 강화시키고 싶어. 소드 비기너 상급 수준으로."

"가능합니다. 몇 년 전에 입탑 한 녀석의 전문 분야가 몬스터 소환과 운용이거든요. 지렁이를 용처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그게 된다고?"

"농담인데요."

"아, 넌 진짜…."

"지렁이를 용처럼 만들 수는 없지만, 오크를 비기너 상급으로 만드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물론 다수는 안 되고, 한 번에 한 마리씩만."

베르빈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리고 하나만 더."

"뭐죠?"

"몬스터가 인간처럼 보이도록 환상 마법을 걸 수도 있지?"

"그것도 쉬운 일이죠. 아직 익스퍼트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니까. 환상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 하나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잘됐네. 그럼 그것도 그렇게 해줘."

리메르가 손가락을 튕기고,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런데 강화와 환상을 동시에 사용하면 수련생들이 이겨내기 힘든 시련 아닐까요?"

베르빈이 술잔을 매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육체 능력이 강화된 오크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텐데, 놈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인다면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겁니다."

"캬아아! 이 맛에 살지!"

리메르는 테이블에 맥주잔을 쾅 내려놓으며 탄성을 흘렸다.

"뭐라고 했어?"

"수련생들이 이기기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몬스터 강화야 그렇다 치겠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몬스터를 죽이는 건 어린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이니까요."

"괜찮아. 우리 애들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검사니까. 그리고…."

리메르가 씩 웃었다. 진녹색 눈동자에 기대감과 즐거움이 어우러졌다.

"그 녀석들 강해. 몸도 마음도."

* * *

마법등이 5 연무장에 내려앉은 어둠을 걷어냈다.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본가로 돌아갔지만, 아직 남아서 검을 휘두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루난 슬리온도 그중 하나였다. 연무장에 남아 라온이 보여주었던 찌르기를 연습했다.

파앙!

루난이 자세를 낮추고 검을 내질렀다. 빠르고, 강맹한 검격이 허공을 꿰뚫었지만, 이 느낌이 아니었다.

'잘 안 돼.'

라온의 찌르기는 강하다기보다는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너무 자연스러워 찌르기가 온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몇 번을 해봐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실내 수련장 쪽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지금 근력 단련을 하는 중이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몇 번 더 해보자.'

루난은 새롭게 자세를 잡고 허공으로 검을 찔렀다. 자세를 바꿔보았지만, 검세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칼날이 공기를 꿰뚫는 소리가 살짝 변했다. 속도와 위력은 조금 줄었지만, 검 끝에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조금 됐어.'

루난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고쳐 잡았다. 계속해서 같은 자세를 반복하며 검을 내질렀다.

그녀는 동쪽에서 떠오른 달이 손가락 두 마리 위로 올라가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후우."

루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금은 됐어.'

라온을 따라잡으려면 멀었지만, 연성검술의 마지막 초식은 확실히 변했다. 위력과 속도가 줄어들었지만, 연계와 부드러움은 훨씬 나아졌다.

"음."

루난이 다시 실내 단련장을 보았다. 불은 여전히 켜져 있고, 라온과 버렌, 마르타가 기합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할 때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구슬 아이스크림 사놓을 테니까. 주말에 빨리 오렴.

'가야지.'

루난이 바로 수련검을 집어넣었다. 모자란 부분은 다음 주에 물어보기로 하고 연무장을 나왔다.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연무장 외곽으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어둑한 골목에서 한 남자의 그림자가 비쳤다.

"루난."

무시하고 가려고 할 때 그림자가 한 발 걸어 나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

루난이 우뚝 멈췄다. 항상 맹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듯 흔들렸다.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자른 은발과 진한 보라색 눈동자. 루난과 비슷한 외모의 미청년이었다.

"오…빠?"

"오랜만이구나."

루난이 입술을 떨며 한발 물러섰고,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 걸음 다가왔다.

시리아 슬리온.

루난의 오빠이자, 슬리온 가문의 역대급 천재라 불리며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려놓은 남자였다.

"아…."

다만 오랜만에 시리아를 본 루난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오빠가 아니라, 강대한 적을 마주한 것처럼.

"루난. 내가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했지?"

시리아가 빙긋 웃었다. 미소는 여유롭고, 말투는 부드럽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본 사람은 무언가 섬뜩함을 느끼게 될 거다. 입매와 달리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으니까.

"으…."

루난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고개를 숙였다. 흔들리는 감정을 억지로 가라앉혔는지 떨리던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래야지."

시리아가 미소를 유지한 채 다가와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메르의 훈련이 괜찮나 보네. 생각보다 강해졌어."

그가 허리를 숙여서 루난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시리아의 얼굴에서 가면이 떨어져 나갔다. 표정은 썩은 나무처럼 굳어졌고, 눈동자에서 색이 사라졌다. 감정이 마모된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전장에 나간다던가, 목숨을 건 대련을 하는 건 아니겠지?"

목소리도 변한다. 생명을 말려 죽이는 사막의 삭풍처럼 지독하리만큼 건조한 음성이다.

"아아…."

루난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손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흠, 조금 풀렸나? 다시 각인시켜줘야겠는데."

시리아가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눈이 동그란 다람쥐가 한 마리 잡혀 나왔다.

"네가 옛날에 키우던 다람쥐 이름이 루비였었지?"

"오, 오빠?"

루난이 뒷걸음질을 멈췄다. 다람쥐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이제 기억날 거야. 루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네가 왜 피를 무서워하게 됐는지."

"자, 잠깐!"

시리아는 멈춰버린 눈으로 웃으며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퍼엉 소리와 함께 다람쥐가 잡혀 있던 그의 손에는 한 줌 핏물만 남았다.

"아아아악!"

루난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지만, 시리아가 설치한 기막 때문에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루난."

시리아가 주저앉은 루난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생기 없는 목소리를 속삭였다.

"넌 내 거다. 정해진 날이 올 때까지. 위험한 일도, 어려운 일도 하지 마."

"아…."

"내가 원할 때까지는 그저 숨만…."

콰앙!

시리아가 루난에게 세뇌의 말을 새기려고 할 때 골목의 굉음이 울렸다.

바닥이 뭉개지며 솟구친 모래 먼지를 가르고 금발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붉은 눈동자로 시리아를 틀어보았다.

"너 뭐냐."

제47화

라온은 실내 단련장에서 근력과 민첩성 훈련을 끝낸 뒤 실외 훈련장으로 나왔다.

'없네.'

밖에서 검을 내지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서 루난이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웬일로 먼저 집에 간 것 같다.

'있을 땐 귀찮은데, 없으니까 조금 아쉽군.'

루난은 항상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꾸벅이는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평소에는 별 느낌 없었는데, 그 인사를 못 받으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게 아쉽다니, 세뇌라도 당한 건가.'

라온은 피식 웃으며 연무장을 나왔다. 안에 아직 버렌과 마르타가 있으니, 평소처럼 마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한심한 놈.

'뭐?'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닐 텐데?

'무슨 말이지?'

-....

라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서쪽만 보고 있었다.

'뭐지?'

라온이 라스가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기분이 미묘했다.

'혹시 모르니까.'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만화공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설화의 감각까지 발동시켜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티익!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뜻은.

'누군가가 기막을 썼다는 거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오러를 이용해서 소리와 기척을 차단했다는 의미다.

'가야겠지.'

평소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라스의 반응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도록 그림자 보법을 사용해서 완벽하게 기척을 죽이고 기막이 설치된 곳으로 달렸다.

가문의 경계 검사들도 보이지 않는 어둑한 골목 안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루난이었고, 반대편에는 키가 큰 남자가 있었다.

'쟤가 왜 저기에 있지? 그리고 저 표정은….'

집에 돌아간 줄 알았던 루난이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지만,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반대편의 남자를 보았다.

실비아와 같은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가 등에 대검을 매고 있었다.

'시리아 슬리온.'

전생에서도 들었던 이름이다.

슬리온 가문의 천재이자, 차기 대륙십천이 될 거라 예상되는 열두 명의 괴물.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린 남자.

'그런데 왜 겁을 먹고 있지?'

루난은 오빠를 보았음에도 웃거나, 반가워하지 않고 맹수를 만난 토끼처럼 겁을 먹고 있었다.

시리온이 루난에게 뭐라 말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품에서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를 꺼내서 루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루난이 손을 내밀 때 다람쥐를 터트려버렸다.

아아아악!

기막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루난이 비명을 지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시리온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건조한 표정으로 루난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막아야 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저 말이 계속되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라온이 만화공의 오러를 가득 담아 진각을 밟았다.

콰앙!

바닥이 뭉개지며 굉음이 터졌다. 시리아가 루난에게 떨어지며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너 뭐냐?"

라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난의 앞에 섰다. 고개를 비딱하게 틀며 시리아를 노려보았다.

"뭔데 루난을 괴롭히고 있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해야 해.

시리아와 루난이 가족이라는 걸 아는 상태라면 끼어들 수가 없다. 남의 가족이니까.

하지만 모른 척한다면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

"남의 이름을 물으려면 먼저 본인의 이름을 밝히는 게 순서 아닌가?"

시리아가 여유롭게 웃었다.

"이런 골목에서 기막을 설치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 도둑놈이냐?"

"음…."

라온의 조롱에 시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뭐랄까.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진짜 당황하거나 화난 게 아니라, 화난 연기를 하는 느낌.

'이런 놈이 어떤 인간인지 알지.'

전생의 자신을 죽였던 데루스 로베르트. 시리아에게서 그놈과 같은 악취가 풍겼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난 도둑도, 남도 아니고 그 아이의 오빠거든."

시리아가 라온의 뒤에 있는 루난을 가리켰다.

"...."

라온은 시리아의 시선을 막고, 루난을 슬쩍 보았다. 멍한 표정이지만 평소의 멍함이 아니라, 심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작은 어깨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데요? 정말 오빠가 맞습니까?"

"아, 오랜만에 봐서 장난을 좀 쳤더니 저러라고."

"다람쥐를 손에 쥐고 터트리는 게 장난입니까?"

"아, 이거 진짜 아니야. 장난감일 뿐이야."

시리아가 손을 휘돌리자, 그의 손과 바닥에 깔린 핏물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오러로 핏물과 살덩이를 모조리 녹여버린 것이다.

"내가 진짜 다람쥐를 죽일 리가 있겠어?"

그의 전신에서 섬뜩한 기세가 피어난다. 죽음의 악취. 데루스에게 죽기 전에 느꼈던 그 향과 비슷했다.

-건방지도다. 인간 따위가 감히 본왕의 빙의체에 협박을 해?

라온은 답을 하지 않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라스의 말대로 저건 협박이다. 네놈도 이렇게 죽일 수 있으니 물러나라는 경고.

하지만 이 자리에 그냥 온 건 아니었다.

"라온! 너 이 자식 가문의 기물을 부순 거냐!"

연무장에 있던 버렌이 튀어나왔고, 경계를 서는 검사들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수련을 방해했다는 마르타의 욕설도 들려왔다.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였구나. 어쩐지."

시리아의 눈동자가 먹물을 바른 구슬처럼 껌껌해졌다. 감정이 마모된 듯한 눈빛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근데 정말 오해야. 복구하자마자 장기 임무를 받아서 동생에게 간식을 주려고 왔을 뿐이니까."

그는 품에서 직사각형 상자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형태와 무늬는 조금 달랐지만,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였다.

"루난."

시리아의 눈동자가 또 한 번 변했다. 사랑스러운 동생을 바라보는 오빠는 눈빛이다.

"아주 좋은 친구를 뒀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도록 해."

"으응."

"오빠가 장난이 심해서 미안해. 건강하게 지내. 다음에 보자."

그는 손을 흔들고 그대로 사라졌다. 흡사 바람으로 화한 것처럼.

"설마 저 남자 대륙십이성 시리아 슬리온이야?"

버렌이 시리아가 있던 곳을 보고 헉 소리를 뱉었다.

"분위기가 다르네. 괜히 십이성이 아니야."

"그래. 다르더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이자, 영웅이라 불리는 그가 저런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루난."

뒤를 돌아 루난을 보았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지만,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직도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가자. 바래다줄게."

시리아가 임무를 받았다고 했으니, 가문에는 없을 거다.

"…응."

루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버렌이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별일 없었어."

라온은 상자를 대신 받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냐."

버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같은 수련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도와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골목을 떠났다.

'진짜 많이 컸네.'

버렌은 보는 사람이 뿌듯해질 정도로 달라졌다.

-그래도 본왕은 저놈의 눈깔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고맙다.'

-뭐?

'네 덕분에 루난을 구할 수 있었어. 정말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커험! 저 아이는 본왕의 아이스크림 소녀가 아니더냐. 문제가 생기면 아이스크림을 못 먹을 것 같아서 말해줬을 뿐이다.

'그니까 그게 고맙다고.'

-그럼 저 아이스크림 좀 달라고 하면….

'그 말만 아니어도 널 다시 볼 뻔했는데.'

라온이 손바닥으로 라스를 쳐냈다. 정말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군주놈이다.

"가자."

"응."

루난을 슬리온 가문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라온은 루난의 옆에서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의 가족. 더군다나 정확한 상황도 모르는데 어설픈 위로를 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루난의 걸음이 느려지면 느려진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그저 조용히, 발을 맞춰서 그녀의 옆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리온 가문의 마차와 시녀들이 보였다.

라온은 루난이 마차에 탈 때까지 지켜보다가 손에 든 아이스크림 상자를 넘겨주었다.

"고마워."

루난은 예전에 들뜬 음성으로 했던 단어를 침울한 목소리로 말한 뒤 떠났다.

* * *

루난이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 로칸 슬리온이 마중을 나왔다.

"루난! 훈련하느라 수고했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네 오빠는 봤니? 직접 선물을 주고 간다고 했었는데."

"…응."

루난은 심호흡을 한 뒤 손에 든 아이스크림 상자를 보여주었다. 평소처럼 멍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네. 그 녀석 임무와 수련으로 바쁜 와중에도 꼭 너는 생각하더라."

로칸이 내 선물은 없다고 중얼거리며 껄껄 웃었다.

루난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모든 사실을 밝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지켜온 것들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나 쉴게."

할 말을 목구멍에 가두고, 천천히 저택의 계단을 올랐다.

"그래. 피곤할 텐데, 푹 쉬어라."

"응."

로칸은 어서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아."

방에 들어간 루난이 깊은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을 꾹 깨물며 아이스크림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오빠의 얼굴만 생각났다.

'또 왔어. 그대로야.'

시리아 슬리온이 처음부터 저런 건 아니었다.

두 번째 임무에서 혼자 살아서 돌아온 이후 사람이 바뀐 것처럼 저렇게 변해버렸다. 그것도 내게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예의 바르고, 친절한 천재 검사였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집착의 괴물이 되었다.

'루비….'

그가 말했던 루비는 어렸을 때 근처 나무에 살던 빨간 눈동자의 다람쥐다.

친해지게 되어 루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함께 놀았었는데, 어느 날 루비가 손등을 할퀴었다.

임신 중이라 스트레스 때문에 아주 작은 상처를 입혔을 뿐인데, 시리아는 그걸 보고 루비와 근처에 있던 다람쥐들을 모조리 잡아 눈앞에서 터트려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넌 내 거라고. 다치면 안 된다고. 숨만 쉬고 살아가라고.

이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면 가문도 박살 낼 거라고. 너만 살리고 모조리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날 이후 루난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서 사람도, 동물도 가까이하지 않고, 말수도 극단적으로 줄였다.

그렇게 홀로 살다가 똑같은 외톨이를. 아니, 나 보다도 더 외롭고 괴로울 것 같은 소년을 만났다.

라온.

처음엔 빨리 성장하는 방법과 좋지 않은 체질과 체력으로 어떻게 버티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그냥 호기심. 그의 성장이 조금 궁금해서 다가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라온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버텼는지를.

노력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 바꾸는 그 아이의 모습에 나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고, 변하기 시작했다.

라온과 5 연무장의 수련생들 덕분에 시리아에 대한 두려움이 잊혀지고 있었는데, 오늘로 그 공포가 되살아났다.

루난은 상자 안에 담긴 아이스크림 전부 녹을 때까지 그저 지켜만 보았다.

"나만."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인 채 물기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만 참으면 돼. 괜찮아."

아무래도 다시는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것 같다.

* * *

라온이 루난을 데려다준 뒤 숙소로 돌아갈 때 라스가 팔찌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놈 정말 인간이었냐?

'뭐?'

-아이스크림 소녀의 오빠라는 놈 말이다.

'아, 이상한 놈이긴 하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아는 분명 친근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남자였지만, 어둠을 마주한 듯한 섬뜩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특히 협박할 때 그의 눈빛은 말라버린 풀처럼 생기가 빠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

다만 연기 하나는 잘했다. 만약 다람쥐를 터트리고, 루난을 협박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조차 속아 넘어갔을 거다.

'데루스 같은 미친놈이야.'

시리아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처럼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망가진 인간 같았다.

'그래도 장기 임무라고 했으니, 한동안은 안 오겠지.'

-그놈이 아이스크림 소녀의 오빠인 이상 문제는 계속 생길 거다.

'그건 그렇지.'

시리아가 가문에 몇 년 후에 온다고 해도 루난과 가족이니 계속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아니, 계속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건조한 눈빛에 담긴 건 분명 집착이었으니까.

-몸을 넘겨라. 그놈만 죽이고 돌려주마.

'어?'

-본왕은 은혜는 2배로 원수는 10배로 갚는다. 그 아이가 구슬 아이스크림이라는 신세계를 보여주었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웃기고 있네.'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진심이다!

'진심이라고 해도 그건 안 돼.'

-왜지?

'놈은 루난에게 트라우마를 걸었어. 네가 죽여도 그건 풀리지 않지. 오히려 더 옥죄일 수도 있고. 이런 경우는 스스로 일어서야 해. 그리고….'

라온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놈을 죽이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루난은 전생과 현생의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자신을 배려해준 타인이다.

큰 도움을 받았으니, 시리아를 죽여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네가 제대로 미쳤구나. 그놈은 네가 100명이 있어도 이길 수 없다. 이미 경지에 오른 놈이다.

라스가 개소리하지 말라며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확실히 강하긴 해.'

-그걸 알고 있으면서 무슨 헛소리냐.

'그렇다고 목에 칼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라온이 검집을 두드리며 서늘한 기운을 피워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야."

제48화

지그하르트는 검사 위주의 가문이지만, 여러 필요성에 의해서 독립적인 마탑을 운용하고 있었다.

마탑 마법사들의 대우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검사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마탑에 속한 5서클 마법사 제이크 역시 그런 점을 아쉬워했다.

급여, 자유시간, 연구비 모두 상급의 직장이지만, 검사들에게 무시를 받거나, 이 집단의 주요 라인이 아니라는 게 답답했다.

그런 그는 처음으로 지그하르트의 주역 중 주역인 카룬 지그하르트가 기거하는 중무전에 초대되었다.

꿀꺽.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카룬 지그하르트가 가공할 위압감을 뿜어내며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저절로 목이 떨려왔다.

'날 대체 왜 부른 거지?'

카룬과 자신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고, 자그마한 관계도 없었다. 그가 왜 자신을 호출했는지 이해가질 않았다.

"다음 주에 5 연무장의 실전 훈련 지원을 나간다고 하던데."

"아, 예! 그렇습니다."

제이크가 떨리는 목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탑주 베르빈의 지시로 5 연무장에 실전 훈련 지원을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자네를 불렀네."

"부탁…."

카룬은 지그하르트의 실세 중 한 명이다.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마, 말씀하십시오."

제이크가 말을 살짝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실전 훈련. 아이들을 상대로 오크를 소환한다지?"

"그렇습니다."

"그 오크 말이야. 강화시킬 수 있나?"

"그건 이미 5 연무장의 수석 교관에게 부탁받았습니다. 수련생들의 무력이 뛰어나서 일반 오크로는 훈련이 되지 않는다더군요."

"아, 그 정도가 아니야. 아예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화시킬 수 있냐는 말일세."

'이기지 못할 정도로?'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노리는 아이가 있는 건가?'

카룬은 5 연무장의 아이 중 하나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가능합니다! 노리는 수련생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시면…."

"노린다? 자네 말이 이상하군."

카룬의 차가운 목소리가 넓고 높은 중무전을 아릿하게 울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가끔 제 마력이 어긋나서 주의가 필요한데, 어떤 수련생에게 신경을 쓰면 좋겠습니까?"

"음, 라온일세."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룬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제이크가 눈을 빛냈다. 라온은 카룬의 아들인 버렌을 꺾은 적이 있다. 이제야 카룬의 의도가 이해되었다.

'라온을 노리고 있었어.'

그는 얼마 전 오웬 왕국 삼왕자를 꺾어 수련생 중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카룬이 노리는 사람은 라온 지그하르트가 확실했다.

"아무리 훈련이라고 해도 실전 연습을 하다 보면 부상을 입는 경우는 흔한 편이지. 아주 가끔은 영구적인 부상이 있을 수도 있고."

"맞습니다. 저도 몇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괜찮은 몬스터 하나를 구해놓았네."

카룬이 손가락을 튕기자, 우측에 있던 집사가 2m가 넘는 오크 한 마리를 앞으로 끌고 왔다.

꿀꺽.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수많은 오크를 다뤄보았기에 알 수 있다. 앞의 오크는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의 격에 오른 놈이다.

"돌란 산맥에서 데리고 온 오크일세."

"돌란 산맥…."

돌란 산맥은 강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험지다. 그곳에서 살아온 오크라면 일반적인 오크와 강함의 격이 달랐다.

"그 아이에게 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 오크를 내보내서 잘 챙겨주길 바라겠네."

카룬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챙겨주라 말하지만, 저 오크를 이용해서 영구적인 부상을 입히라는 말이었다.

"아, 혹시라도 오크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바로 처리하게. 이번 일을 잘 끝낸다면 훗날 자네를 마탑의 부탑주로 추천하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도록."

"예!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제이크는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꾸벅였다. 세이빙 몬스터 마법으로 돌란 산맥의 오크를 저장한 뒤 카룬의 방을 떠났다.

"오는 길에 본 사람은 없겠지?"

카룬이 오크를 데리고 왔던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쪽으로 돌아왔으니, 저 마법사가 이곳에 온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치가 빠른 놈이야.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밀어주도록 해."

"부탑주까지 올려줍니까?"

"그럴 리가 있나. 놈이 아쉬워서 간이고 쓸개고 빼주려 할 정도로만."

"알겠습니다."

집사가 빙그레 웃었다. 고개를 조아리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카룬이 라온의 이름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놈은 자신의 아들인 버렌을 이기고, 마르타를 꺾고, 오웬의 미래라는 삼왕자마저 무릎 꿇렸다.

중무전주이자, 전마대주인 자신의 입장에서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놈의 움직임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가주인 아버지의 시선이 조금씩 라온에게 향한다는 것이다.

가주가 되는 데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거슬리는 건 빨리 치워버리는 게 정답이다.

'더 크기 전에 처리해버리는 게 좋겠지.'

그게 지금까지 이곳에서 성장해온 방식이고, 이 차가운 대지에서 배웠던 방법이었다.

* * *

라온은 연무장에서 야간 훈련을 끝낸 뒤 별관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라 조용히 복도를 지나갈 때 실비아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라온!"

문이 벽을 침과 동시에 눈에 새빨간 불을 켠 실비아가 튀어나왔다.

"윽!"

"엄마를 보고 윽? 으으으윽?"

"아니, 그게…."

"오늘 엄마랑 정원 산책하기로 약속했어? 안 했어?"

"아!"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까먹었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수련에 정신이 팔려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까먹었구만! 까먹었어!"

"그게 아니라."

"아니기는! 3일 동안 네가 깨어있는 얼굴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야!"

실비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들었다.

"어, 엄마?"

라온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러섰다.

"내가 왜 산책 약속을 하자고 했게?"

"응?"

"훈련도 좋지만, 쉬는 것도 중요해. 휴식은 훈련의 일환이거든."

실비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연무장에서 매일 같이 단련하고 있으니까. 이곳에 와서는 좀 쉬어. 반나절만이라도."

"아, 응."

라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어쩔 줄을 모르겠어.'

실비아도, 헬렌도, 시녀들도 싫은 게 아니다.

정말 싫었다면 진즉에 도망갔겠지.

태어났을 때부터 만난 저들에게 애정이 점점 커지는 게 무서워서 억지로 거리를 두는 중이었다.

"다친 곳은 없지?"

"올 때마다 그 말을 하네."

"아들의 목표가 검사인데 당연히 물어봐야지!"

그녀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다고 대답해도 무시하고 확인이 끝난 뒤에야 놓아주었다.

"다친 곳 없다고 했잖아. 난 그럼 들어…."

"아직이야."

실비아는 고개를 젓고서 라온을 꼭 끌어안았다.

"땀냄새 나는데."

훈련 후 씻지 않고 바로 왔기 때문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실비아는 떨어지지 않았다.

"전혀 안 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음…."

"오랜만에 아들 안아보니까 좋네. 얼마나 컸는지도 알 수 있고."

실비아는 한참 동안 자신을 안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기껍다는 듯 별처럼 반짝였다.

"밥은 먹었어?"

"당연히 먹고 왔지."

"훈련하느라 수고했어. 가서 쉬렴."

실비아는 오랜만에 아들을 안아봐서 꿀잠을 자겠다고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복도 끝에 서 있던 헬렌과 눈이 마주쳤다.

"도련님. 물 받아놓을 테니, 씻고 쉬세요."

그녀는 빙그레 웃고서 옆으로 귀신처럼 사라졌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웃음이 흘렀다.

"하아…."

이곳에만 오면 제 능력도, 감정도 통제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싫지도 않으니 애매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라온은 훈련을 했던 것보다 더한 피로를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 피곤해…."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도련님. 목욕물을 받아놓았습니다."

헬렌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디엘의 머리가 쑥 들어왔다.

"알겠어."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려 할 때 주디엘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중무전에 관한 일입니다."

"중무전?"

중무전은 카룬 지그하르트의 성이자, 주디엘을 이곳에 보낸 곳이었다.

"말해."

라온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붉은 눈을 빛냈다.

"예."

주디엘이 라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과 신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중무전에서 라온 도련님이 별관에 돌아온다면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무언가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뜻이겠군."

"그런 것 같습니다."

"…실전인가."

라온이 오늘 리메르가 말해주었던 단어를 읊었다.

"실전이라면…."

"리메르 교관이 다음 주에 실전 훈련을 한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그 훈련에 손을 쓰려는 것 같군."

"아!"

주디엘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수련생들의 실전이라 하면 몬스터와 결투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나도 들었어."

오늘 훈련을 끝낼 때 도리안이 몬스터와 결투를 할 것 같다고 비명을 지른 게 기억났다.

"그럼 몬스터에 손을 쓰거나 몬스터를 다룰 마법사에게 손을 쓰거나 혹은…."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 둘 다일 수도 있겠군."

* * *

다음 주 월요일.

제이크는 원래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5 연무장으로 향했다.

'잘해야 해.'

이 망할 대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줄을 잘 타야 한다.

지금까지는 썩어 문드러진 줄도 떨어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내려온 건 단단한 줄 정도가 아니라,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였다.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라온에게 큰 부상을 입혀야 한다. 그래야 카룬 지그하르트의 눈에 들 수 있다.

'뒷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

라온 지그하르트의 뒷배경은 없다시피하고, 카룬은 차기 가주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다. 누구를 위해 움직여야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후…."

제이크는 숨을 고르고서 5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얇은 모래 먼지 뒤로 검을 수련하는 수련생들이 보였다.

아직 훈련 시작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무장 외곽으로 걸어가 수련생들을 지켜보았다.

'저 아이가 버렌, 옆이 마르타인가.'

제이크는 이전에 들었던 인상착의를 통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주요 수련생들을 파악했다.

'저쪽이 슬리온 가의 막내 루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연무장 우측에서 검을 내리치는 금발의 아이에게 향했다.

'저 녀석이 라온인가? 잘 생기긴 기가 막히게 잘 생겼군.'

발을 휘돌리고 검을 내지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죽이지는 않으마.'

제이크는 입술을 깨문 채로 라온에게 아주 자그마한 살의를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미약한 기세. 감각이 좋은 검사나, 야생동물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얕았다.

하지만.

한 명은 반응했다.

검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라온의 두 눈동자가 제이크를 향했다.

"으헉!"

제이크가 기겁하며 벽에 등을 부딪치고 주저앉았다. 라온의 붉은 눈을 본 순간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끄윽…."

발가벗은 채 맹수 앞에 선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저놈 뭐야….'

제49화

'무, 무슨 어린놈의 눈깔이….'

제이크가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할 때 경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탑에서 오셨죠? 이야, 일찍 오셨네요."

발걸음만큼이나 가벼운 목소리에 굳어 있던 고개가 움직였다. 붉은 머리 엘프가 웃고 있었다.

"리, 리메르 수석 교관?"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훈련 전에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리메르가 팔을 툭툭 치며 수석 교관실을 가리켰다.

"으음,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다시 라온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후…."

제이크는 가뿜 숨을 뱉어내고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늦었다가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몸이 안 좋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가시죠."

"넵!"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메르를 따라 수석 교관실로 들어갔다. 방은 그의 깔끔한 얼굴과 달리 지저분해 앉을 곳도 없었다.

"앉으세요."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만…."

"아, 그렇긴 하네."

리메르는 가볍게 웃고서 흔들의자에서 일어섰다.

"뭐, 오래 걸리는 건 아니니까. 이대로 하죠. 수련생들이 상대할 오크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주셔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제 가르침이 워낙에 탁월해서 수련생들의 무력이 나이대를 뛰어넘었습니다. 평범한 오크로는 훈련조차 되지 않을 거예요."

"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자랑에 머리가 멍해졌다.

"제가 아이들의 무력 수위를 알려드릴 테니, 그 정도에 따라 몬스터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주세요. 가능하시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제 주 전공이 몬스터 소환과 운용이니까요."

"하긴 베르빈 부탑주님도 마법사님 칭찬을 하시더라구요."

"아…."

리메르가 부탑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제이크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비틀렸다.

"하나만 더 몬스터를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환상 마법은…."

"아, 그건 이걸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이크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중지에 낀 반지를 보여주었다.

"부탑주께서 내어주신 환상계열 아티팩트입니다. 이 반지를 이용한다면 수련생들에게 환상을 거는 것도 간단합니다."

"오, 딱이네요."

리메르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되면 나중에 부탑주님과 함께 술 한 잔 사죠."

그는 그 말을 하고서 교관 교관실을 나가버렸다.

'일이 편해지겠어.'

리메르는 몬스터에 관한 일을 모두 자신에게 맡겼다. 이대로라면 그 오크를 소환해서 라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일도, 핑계를 대며 도망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놈…."

제이크가 조금 전에 보았던 라온을 떠올렸다. 처음엔 알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부상을 입혀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 미안했지만, 이젠 아니다.

자신에게 망신을 준 그 망할 꼬마에게 더 심한 부상 새겨줄 것이다.

빠득.

제이크는 어금니를 꾹 깨물고서 교관실을 나섰다.

* * *

라온은 리메르를 따라 교관실로 향하는 중년 마법사를 보고 눈빛을 가라앉혔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저 마법사에게서 살의가 느껴졌다. 죽인다기보다는 건드린다는 기세.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을 거다.

-그 나이에 원한도 많군. 대체 무얼 하고 살았던 거냐.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모든 마족이 본왕을 경배하기만….

'시끄러.'

라온은 비웃음을 흘리는 라스를 발로 밀어냈다.

'저놈인가 보네.'

주디엘이 말해주었던 카룬이 준비한 술수가 바로 저 마법사인 것 같았다.

-본인의 기세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하다니, 새끼 고양이만도 못한 놈이다.

'새끼 고양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저런 놈은 쓸 곳도 없어.'

라온은 교관실을 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몬스터를 강화시키겠지.'

저 마법사는 카룬의 지시를 받아 자신과 상대할 몬스터를 특별할 정도로 강화시킬 게 분명했다.

'나를 죽이던가 혹은 심각한 부상을 입히려 들 테고.'

너무 한심한 계획이라 웃음만 나온다. 아들에 비해 과분한 아버지였다.

'한심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다가 연무장에 들어오던 루난과 눈을 마주쳤다. 이틀 만에 본 루난의 눈빛은 평소와 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쓰렸다.

"아빠가 오늘 훈련은 몬스터와의 전투라고 했어."

그녀는 그때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바로 오늘 훈련에 대해 말했다.

"그래?"

"응."

루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평상시를 연기하는 게 분명했지만, 본인이 그 일을 잊으려 하는 것 같아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훈련 준비를 하겠다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한마디도 안 하는 거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가족의 일이니까.'

나 자신의 감정도 잘 모르는데 상대 가족에 관한 조언을 어떻게 하겠는가.

다만 시리아가 루난에게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고 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해결할 수 있다.

"도, 도련님. 그거 아십니까?"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도리안이 불안한 듯 배를 만지며 다가왔다.

"뭘?"

"오늘 실전 훈련. 다, 단순히 몬스터와 싸우는 게 아닙니다."

"그럼?"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진짜 피를 봐야한다구요! 어, 어떻게 하죠?"

그는 손톱을 딱딱 깨물며 눈동자를 두르륵 굴렸다.

"피를 본다라…."

"예에! 숨통을 끊는 게 훈련 목표래요! 진짜 미쳤어요!"

"잘됐네."

"에에엑!"

라온은 비명을 지르는 도리안을 뒤로하고 루난이 들어간 휴게실을 보았다.

저주를 한 번 풀어볼까.

* * *

"자, 주목!"

교관실에 들어갔던 리메르가 어느새 단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시원하게 손뼉을 쳐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오늘 실전 훈련을 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었지?"

"예!"

수련생들이 연무장 중앙으로 모이며 대답했다. 기대감이 꽉 차오른 표정들이었다.

"이제 내 말에 신뢰가 좀 생긴 모양이네. 눈빛이 반짝반짝해."

리메르의 농담에 수련생들이 킥킥 웃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이젠 수련생들도 리메르의 진심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았다.

"힌트 그리고 몇몇 교관이 정보를 퍼트린 덕분에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설명은 해야겠지. 오늘 훈련은 몬스터와의 실전 전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가 어려 있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연무장의 분위기 자체가 무거워졌다.

"몬스터의 도끼엔 자비가 없다. 너희끼리 혹은 수련 기사와 대련할 때와 달리 절대 멈추지 않아. 방심하지도, 긴장하지도 마라. 평소와 같이 차분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예!"

수련생들이 주먹을 말아쥐며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이분이 오늘 우리 수련을 도와주실 마탑의 마법사 제이크 님이다. 인사드려라."

"잘 부탁드립니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이크가 마주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눈을 돌려 라온을 찾았다.

'지금은 괜찮은데?'

아까 심장을 조였던 그 기이한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눈이었다.

'하지만….'

아까의 그 기세가 착각일 리가 없다. 카룬이 노리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저 아이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그럼 마법사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제이크는 손을 흔드는 리메르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단상 앞으로 나갔다.

"서먼 몬스터."

제이크가 영창을 외운 뒤 지팡이로 땅을 찍자, 연무장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원을 그리며 생성된 푸른 문자 위로 녹색의 빛이 솟구쳤다.

우우웅!

천천히 빛이 사라지고, 거대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2m가 넘는 신장, 부풀어 오른 근육, 입 밖으로 튀어나온 뻐드렁니와 녹색 피부까지.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몬스터 오크였다.

"크르르륵!"

"흡!"

"으억!"

오크가 손에 든 도끼를 들어 올리며 이를 갈았다. 갑작스럽게 치솟은 야생의 살기와 노린내에 수련생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은 제 통제하에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이크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오크가 그 방향대로 몸을 돌렸다.

"오늘 여러분들이 상대할 몬스터가 바로 이 오크입니다."

"역시 오크였어!"

"드디어 실전인가…."

"후우."

수련생들은 긴장과 흥분이 반반씩 섞인 얼굴로 제이크를 올려보았다.

"교관님이 말씀하셨듯이 오크라고 방심을 해선 안 됩니다. 제가 멈출 수 없는 순간이 있기에 항상 집중력을 유지해주세요. 그리고…."

제이크가 오른손에 착용한 반지로 오크를 가리켰다.

우웅.

오크를 휘감고 있던 마법진이 덩굴처럼 꼬이며 찬란한 오색 빛을 뿜어내자, 오크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뻐드렁니가 쑥 들어가고, 녹색 피부가 허옇게 타올랐다. 몇 초 지나기도 전에 오크는 갈색 머리칼에 도끼를 든 평범한 중년 남자가 되어 있었다.

"사, 사람?"

"뭐야 이거!"

"왜 갑자기 사람이…."

"여러분들은 그냥 오크가 아니라, 마법으로 인간의 모습이 된 오크를 상대하셔야 합니다."

제이크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 오크의 도끼를 움직여 수련생들을 겨누었다.

"허억!"

"으윽!"

"저, 저건 그냥 사람이잖아!"

수련생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라 넋이 나간 얼굴로 사람이 된 오크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나만 더 말하지."

리메르가 제이크의 앞으로 나오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오늘 전투는 그저 오크를 꺾거나, 무력화시키는 게 다가 아니다. 저놈의 목을 베어야 끝난다."

그는 올린 손가락으로 인간의 모습을 한 오크를 가리켰다.

"아…."

"그, 그런…."

수련생들은 당황하여 서로 눈치만 보고 나서지 못했다.

"마법사에게 잡힌 오크는 대부분 사람을 죽였던 놈들이다. 자비를 베풀 필요 없으니, 전력을 다해 싸워 이겨라."

리메르는 평소와 달리 무거운 음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도리안의 정보가 정확했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훈련이야.'

대부분의 검사는 사람과의 첫 실전에서 검을 끝까지 내리치지 못한다.

실제로 뛰어난 무력을 갖추고도 첫 실전을 넘지 못해 죽는 비운의 천재들도 많았다.

오늘 전투는 그런 허무한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서 단순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훗날 사람과의 실전을 대비하기 위한 이중훈련이었다.

'그리고….'

라온이 옆에 붙어 있는 루난을 보았다. 목을 베어야 한다는 말에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이 녀석의 저주를 풀기에 딱 좋아.'

리메르는 몰랐겠지만, 이 훈련 덕분에 루난의 뇌리에 심어진 시리아의 세뇌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버러지 마법사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냐?

'당연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끽해봐야 어디서 구해온 조금 사나운 오크를 강화시켜서 덤빌 게 뻔하다.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루난의 머리에 박힌 피의 공포를 제거하는 거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싸울 분은…."

"제가 하겠습니다."

제이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시죠? 중무전주의 아들입니다. 오크의 육체 능력을 많이 강화시켜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리메르의 말을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 일을 준 사람의 아들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룹 어질리티, 룹 스트렝스."

민첩성과 근력 강화 주문을 외우자, 오크의 주변으로 푸른빛이 노닐었다. 놈의 노란 눈빛이 더 흉악한 기세를 띄었다.

"가라."

제이크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자, 중년인의 외모를 한 오크가 묵직한 걸음 소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