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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2층, 루윈 대륙

길드에 가입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네메시스, 특히 윤서희와의 친분은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대전쟁이 일어난 원인이니까.'

플레이어 간의 대전쟁.

그걸 일으킨 건 네메시스였다. 그 뜻은 이해하고, 분명히 필요한 전쟁인 건 맞았다.

하지만 그 피해가 너무 컸다.

'이번에도 대전쟁을 일으킬지 아닐지, 가능하면 근처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친분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것 말고도 대형 길드와 친분이 있어서 나쁠 건 없다. 특히 윤서희는 진현우를 마음에 들어 하는 상황이니까 도움을 줄 확률이 높다.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게끔 해야 한다.'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 * *

윤서희와 만나고 이틀 뒤.

원룸을 정리하고 있던 진현우는 네메시스로부터 돈이 들어온 걸 확인했다.

'12억? 내 생각보다 큰 금액이잖아.'

플레이어 협회를 통해서 전해진 돈.

진현우가 금액을 확인하자, 그의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전송됐다.

―판매 대금을 보냈습니다. 감사의 뜻을 담아서 대금을 조금 더 챙겨서 보냅니다.

유민혁의 문자였다.

대충 2억 정도를 더 챙겨 준 모양이다.

'잘 보이려는 건가? 뭐든 상관없지.'

중요한 건 돈이 생겼다는 것.

진현우는 곧바로 부동산 사무소로 향했고 괜찮은 지역에 있는 주택을 구했다.

지금 가진 돈으로는 조금 부족했기에 플레이어 협회를 통해서 대출을 조금 받았다.

"…큰돈이 들어오자마자 나갔네."

세금이니 뭐니 처리하고 나니까 아이템을 팔아서 번 돈들이 죄다 사라졌다.

진현우는 입맛을 다셨다.

'딱히 고생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아그니스 놈들을 털어서 얻은 거니까, 뭐.'

나쁘지 않다.

진현우는 원룸에 있던 짐들을 차로 옮겼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원룸의 주인 아줌마였다.

"아유, 총각. 벌써 떠나?"

"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감사하고 뭐고 그럴 게 있나. 근데 어디로 이사 가는데? 아파트? 주택?"

"단독주택이요."

진현우가 어디 있는 주택인지 말하자 주인 아줌마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빛에 살짝 부러움이 어렸다.

"총각이 플레이어라고 했던가?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그만큼 벌었어?"

"운이 좀 좋았네요."

"아휴, 우리 아들도 그랬으면...."

주인 아줌마의 아들도 얼마 전에 플레이어가 됐는데, 영 속을 썩이는 모양이었다.

자꾸 장비 욕심만 내서 주인 아줌마한테 돈을 빌려서 아이템을 산다나, 뭐라나.

"됐다, 됐어. 총각한테 한풀이해서 뭐 해. 가서 잘 살아. 좋은 세입자였는데 아쉽네."

"아주머니도요."

진현우는 마지막 짐을 차에 실었고, 주인 아줌마는 그가 갈 때까지 배웅해 줬다.

그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끼이익.

진현우의 새집은 서대문구에 있었다.

플레이어 협회로부터 엄청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멀지도 않은 곳.

"음, 내 집이라...."

자신의 집을 올려다봤다.

최근에 유행하는 디자인으로 지어진 모던한 단독주택. 2층이고, 집도 나름 넓다.

'전생에서는 기억 감정을 익히기 전까지는 계속 원룸에서 지냈었는데.'

인생이 꽤 많이 달라졌다.

진현우는 정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정원이 있었지만 관리가 안 되어서 엉망이다.

'실내는… 삭막하네.'

집 안에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전에 살던 원룸에서 가져올 살림살이가 딱히 없었으니, 전부 새로 사야 한다.

"일단 나중에 사고."

진현우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 바깥에서 더 할 일은 없다. 집도 샀으니 안에 들일 가구를 살 돈도 필요하다.

슬슬 탑 2층으로 갈 때가 됐다.

"루윈 대륙이라, 오랜만이군."

진현우는 탑으로 향했다.

* * *

저 앞에 익숙한 탑이 보인다.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세계의 탑. 그리고 입구의 옆에 세워진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현재 침식률: 40%.

'5% 올랐나. 아직까지는 괜찮아.'

50%를 넘어가면 그때부터 귀찮아진다.

게이트가 더 많이 나타나고,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수준이 올라가게 되니까.

'전생에는 네메시스가 공략했었던가.'

진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탑 7층의 공략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7층이 좀 까다로운 편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네메시스가 총대를 메고 여러 길드를 모아서 클리어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진현우는 탑의 문 앞에 섰다.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거대한 문. 그의 눈앞에 여러 줄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세계의 탑에 방문한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탑은 7층까지 개방되었습니다. 당신이 방문할 수 있는 층은 2층까지입니다.

―2층으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2층: 루윈 대륙으로 향합니다.

―입장 가능 레벨: Lv.20~Lv.50.

문이 열린다.

진현우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문 너머로 몸을 내던졌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이 사라졌을 때.

―수도 '아빌론'으로 진입합니다.

"서쪽에서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공격! 화살을 퍼부어라! 어서!"

전쟁 소리가 진현우를 반겼다.

그는 서쪽의 성벽을 봤다. 수많은 병사가 성벽을 지키면서 화살을 쏘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군단을 향해서.

―크라아아아!

―키아아악!

바로 몬스터 군단을 향해서.

병사들과 몬스터들 간의 격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 진현우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도 아빌론.]

―권장 레벨: Lv.20~Lv.40.

―설명: 한때는 크게 번영했던 프레아 왕국의 수도다. 하지만 어느 날을 기점으로 범람하기 시작한 몬스터들에 의해 그 번영도 모두 쇠퇴했다. 하지만 이 대도시의 사람들은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티고 있다.

―점령 길드: 없음.

* 주기적으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남.

프레아 왕국의 수도, '아빌론'.

그게 지금 진현우가 있는 도시의 이름이자, 탑의 2층 루윈 대륙의 스타팅 포인트다.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수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지만.'

대도시인데도 다니는 사람이 없다.

소수의 플레이어만 다니고 있을 뿐, 대부분의 가게나 민가도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몬스터 웨이브.

몬스터 군단이 습격해 오기 때문이다.

일정 주기가 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몬스터 군단이 프레아 왕국을 공격한다.

진현우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어디 한번 볼까.'

성벽에서 격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몬스터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고블린, 오크, 트롤,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뒤섞였다.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크르아아아!

'눈이 완전히 맛이 갔군.'

눈이 완전히 광기로 물들었다는 것.

새빨간 것이 누가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놈들의 행동 역시도 그러했다.

수많은 화살과 마법이 공격해 오는데도 두려움 하나 없이 성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푸우욱! 콰아아앙!

"제길, 저놈들은 겁이라는 게 없나...!"

아빌론의 병사들은 몬스터들과 여러 번 싸웠지만, 저 광기에는 적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놈들이 이성이 없는 게 도움이 됐다.

―캬아아악!

"좋아! 놈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 어차피 이성이 없는 놈들이다! 침착하게 싸워라!"

광기에 물든 만큼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단순했다. 왕국의 수도라서 방비가 튼튼한 아빌론은 놈들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었다.

―그르르… 우오오오!

"적들이 물러난다!"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건지, 숫자가 크게 줄어든 몬스터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머저리 같은 놈들아! 매번 이렇게 당할 거면 그만 좀 찾아와라! 지겨우니까!"

"썩 꺼져!"

"성녀님이 없다고 못 막을 것 같냐!"

병사들의 사기는 나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공격당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피해 없이 잘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색대, 저놈들의 뒤를 쫓아라. 몬스터 웨이브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니."

"예, 알렉산더 님!"

그리고 이렇게 막다 보면 몬스터 웨이브를 없앨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고생했다, 용사들이여! 적들의 공세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우리가 놈들을 완전히 몰아낼 날도 멀지 않았다! 희망을 잃지 마라!"

알렉산더라고 불린 지휘관이 크게 외쳤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빌론 도시는 결국 함락당한다.'

그리 멀지는 않은 미래.

언데드를 포한한 몬스터들이 이 대도시를 함락하는 데 성공하고, 프레아 왕국은 멸망한다.

멸망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가능하면 멸망은 피해야 하는데....'

이 도시가 몬스터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2층 플레이어들의 생활이 고달파졌다.

특히 카오틱들이 문제였다.

1층과는 달리 2층에서는 카오틱들이 세력을 구축하고, 활동하고 있다. 프레아 왕국이 멸망한 뒤부터는 아예 자기 땅처럼 날뛴다.

'일단 상황을 좀 봐야겠군.'

프레아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자신의 성장을 도모할 때다.

'직업 퀘스트는 아마 30레벨에 나올 거야.'

웨펀 마스터는 직업 퀘스트가 있다.

브로큰 월드를 해 봤던 경험으로 보건대, 아마 직업 퀘스트는 30레벨에 나올 것이다.

우선 30레벨부터 찍고 봐야 한다.

'레벨을 빨리 올릴 수 있는 퀘스트.'

잠깐 생각하던 진현우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있는 대검, '오크 슬레이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2층에 퀘스트가 있다.

'공격대 퀘스트가 있었지.'

대규모 공격대를 꾸려서 하는 퀘스트다.

이런 퀘스트는 게이트처럼 기여도를 측정하는데, 그 정도에 따라서 보상이 달라진다.

높은 기여도를 달성하면 더 많은 경험치를 받을 수 있을 터.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다.

"어디 보자...."

진현우는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플레이어는 마을에 있을 경우, 플레이어만이 쓸 수 있는 커뮤니티를 이용할 수 있다.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인데, 여기서 파티원을 모집하거나 길드원을 구인할 수 있다.

―칼리스타 길드가 가족을 구합니다.

―뭐, 가족 같은 기업 그거냐? 칼리스타 쟤네는 맨날 길드원만 구하는 것 같더라?

―아, 2층 진짜 빨리 떠나고 싶다. 시작의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음. 고통스럽다....

―2층? ㅋㅋ 요즘 언데드도 나온다던데? 그 누구냐, 랭커도 2층 떠나서 더 힘들다며?

―ㅇㅇ; 성녀라는 랭커 있었는데 잠적했음. 성녀 있을 때는 그래도 버틸 만했는데 ㅠㅠ

커뮤니티는 여러 얘기로 시끄러웠다.

근데 그중에 익숙한 단어가 보였다.

'성녀.'

익숙할 수밖에 없다.

진현우와 전생에 동료였던 플레이어니까.

살짝 흥미가 생겼지만, 지금은 저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진현우는 스크롤을 내려서 '파티/공격대 구인' 게시판으로 들어갔다.

―오크 부족 전쟁. (공격대 퀘스트)

―난이도: A.

―입장 레벨: Lv.20~Lv.40.

―설명: 루윈 대륙, 수도 아빌론 서쪽의 대수림에 퀘스트 발생. 게이트와 비슷한 장막이 나타나서 대수림에 입장할 수 없는 상황. 내부에서는 여러 오크 부족이 전쟁을 벌이는 듯. 놈들이 아빌론으로 오기 전에 처리해 달라는 프레아 왕국의 포고령이 내려옴.

―최대 인원: 80명.

* 참가자가 너무 저조한 관계로, 참가하는 플레이어에게는 기여도에 따라서 플레이어 협회가 보상과 별도로 포상금을 전달할 예정.

탑에는 '공격대'라는 것이 있다.

브로큰 월드, 아니 그것 말고도 여러 MMORPG에 존재하고 있는 시스템.

대규모 인원으로 공략하는 퀘스트를 깰 때, 플레이어들은 공격대를 구성한다.

'공격대만이 할 수 있는 퀘스트. 이런 퀘스트들이 대개 경험치 보상이 좋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오크 부족 전쟁이라는 공격대 퀘스트가 지금 진현우에게 적합했다.

이 퀘스트로 챙길 것도 있었고.

'이것부터 해야겠군.'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43화

이번에는 다를 거다

수도 아빌론은 점령한 길드가 없다.

한 국가의 수도니 점령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점령하려고 시도하는 길드도 없었다.

일정 주기마다 공격받는 도시를 누가 점령하겠는가? 관리하느라 죽어날 텐데.

"누구 없소! 황금 기사단의 로랑스요! 이번에 교환할 보급품 때문에 왔소만!"

"예, 예.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아빌론은 도움이 필요하다.

2층의 플레이어가 활동하는 중심 지역이기 때문에 몬스터에게 함락당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플레이어 협회 소속의 플레이어가 길드처럼 머무르면서 아빌론을 돕고 있었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를 막으면서 얻은 몬스터들의 부산물들이오. 처리해 줄 수 있겠소?"

"예, 물론이지요. 그건 여기 두시고, 저번에 말씀하신 식량과 자재들은 여기 있습니다."

"음, 고맙소."

"대금은 늘상 그랬듯이 이 아이템들로 치르고, 남으면 나중에 기사단으로 보내지요."

"그렇게 하시오."

병사들이 엄청난 숫자의 아이템을 내려놓고 식량과 약재들을 바깥으로 옮겼다.

직원은 익숙한 듯 골드를 옮겼다.

"다음에도 또 거래하지, 우석형."

"예, 살펴 가십시오."

우석형이라 불린 직원이 기사를 배웅했다.

쿠웅! 닫히는 문. 등을 돌린 우석형은 산더미처럼 쌓인 아이템을 보며 한숨을 토했다.

"이것들을 또 언제 다 계산하냐...."

언제나 해 오는 일이지만 힘들다.

아빌론에는 주기적으로 몬스터가 공격해 온다. 당연하지만, 많은 아이템이 드롭된다.

프레아 왕국은 그런 아이템들을 플레이어 협회에 팔고 필요한 물건들을 받는다.

'플레이어 협회는 그 과정에서 수수료를 얻고, 아빌론은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고.'

서로가 이득인 셈이었다.

직원인 우석형에게는 아니었지만.

"드르렁, 푸휴우우… 커억!"

"...."

우석형의 뒤에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중년의 남성이 술 냄새를 풍기면서 자고 있었다. 우석형의 상사인 박명준 부장이다.

"개새끼."

우석형은 욕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여기 있는 인력은 죄다 일한다고 정신이 없는 상황인데.

저 박명준 부장 혼자만 여유롭다.

"에휴, 인생아."

우석형은 한숨을 내쉬면서 작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가 일정표를 보고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크 부족 전쟁이 얼마 안 남지 않았나? 박명준이 맡겠다고 했었는데.'

우석형은 힐끔 박명준을 봤다.

믿고 맡기기에는 너무 불안하다. 고민하던 우석형은 박명준을 깨워서 물어보기로 했다.

"부장님, 박명준 부장님. 주무시고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음, 으음… 커억!"

"...."

청년이 조심스레 몸을 흔들자, 중년의 남성이 콧물을 삼키면서 일어났다.

그는 입가의 침을 닦더니 짜증이 가득 섞인 눈동자로 청년을 노려봤다.

"하, 우석형 과장. 내가 자고 있을 때는 깨우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잊었나?"

"죄송합니다, 박명준 부장님."

"어제 접대하고 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박명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플레이어라고 모두 모험을 즐기는 건 아니다. 그중에는 협회 같은 곳에 공무원 신분으로 소속되어서 안정된 삶을 즐기는 이도 있다.

박명준, 우석형이 그런 케이스였다.

"그래서 뭐? 왜 깨운 건데?"

"아, 오크 부족 전쟁 있잖습니까. 그거 퀘스트 시작 날짜가 얼마 안 남아서요. 부장님이 맡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돼 가나...."

"오크 부족 전쟁? 아오."

박명준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예. 그거, 퀘스트 인기가 좀 없지 않습니까. 안 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걱정이 돼서요."

그랬다.

오크 부족 전쟁의 난이도는 A 등급.

난이도가 너무 어려운 것도 문제인데, 문제는 공격대의 참가 인원이 많다는 것이었다.

'2층에서 80명 규모면 너무 많아.'

2층에서는 20~30명 정도 규모로 공격대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보상도 좋다.

공격대 퀘스트에서 참가 인원이 너무 많아지면 기여도가 골고루 나뉠 수밖에 없다.

기여도에 따라서 보상을 주는 시스템상,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보상이 줄어들게 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보상은 제대로 못 받을 것 같으니 아예 안 하고 마는 거지.'

그래서 협회 차원에서 추가 보상을 내걸었지만, 이미 안 좋은 인식이 박힌 후였다.

"이 퀘스트 어떻게든 안 하면 오크들이 왕국 쪽으로 몰려올 수도 있는데...."

"나도 알아. 안 그래도 칼리 길드한테 부탁했어. 3층에서 노는 플레이어 보내 준다더라."

"칼리 길드요?"

우석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근 유명한 길드다. 이미지는 좋지 않지만, 소속 인원의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길드.

꽤 오만하다고 들었는데.

"…그냥은 안 도와줄 텐데요?"

"그래서 돈을 줬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흐아암. 아, 됐어! 부르면 된 거 아냐?"

"예, 뭐… 그렇죠."

우석형은 그리 대답하면서 의아해했다.

'왜 칼리 길드지?'

공짜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부르는 건데, 칼리 길드를 부를 필요가 있나?

비슷한 체급이면서 이미지도 좋은 길드가 많은데. 왜 하필 칼리 길드를 부른 걸까.

그뿐만이 아니다.

'뭐 일거리만 생기면 칼리 길드한테 밀어주는 거 같은데, 내 기분 탓인가?'

2층에서 플레이어 협회가 나설 일이 생기면 칼리 길드한테 일을 부탁하고는 했다.

그것도 적지 않은 포상금을 주고서.

근본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이거 모레 출발하는 거 맞지?"

"예. 내일 참가 플레이어가 모일 겁니다."

"어후, 그래. 난 방에 가서 좀 더 자야겠다. 뒷일은 우리 우 과장이 좀 수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좋아. 오늘은 그래도 좀 따겠지...."

박명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석형은 떠나는 박명준의 등을 혐오스럽다는 듯 봤다.

'접대는 개뿔이, 도박이나 하다가 왔겠지.'

박명준의 도박 중독은 유명하다.

빚을 져서 도박한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탑 내부에서도 도박을 할 정도니까.

우석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잘돼야 할 텐데."

오크 부족 전쟁 퀘스트를 걱정하면서, 우석형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수도 아빌론에 있는 플레이어 협회 지부. 진현우는 그 건물의 강당에 와 있었다.

'50명 정도인가? 생각보다 적은데.'

강당에 모인 플레이어의 인원은 적었다.

최대 인원이 80명이니 한참 모자라는 수준.

"흐아아암."

그중에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남자. 큰 덩치에 사나운 인상이 눈에 띄는 플레이어였다.

근데, 꽤 강해 보인다.

"형, 피곤하세요?"

"아, 어제 클럽 가서 놀다가 온다고."

"에이, 그래도 돈 받고 온 건데. 이거 그래도 A 등급 퀘스트 아니에요? 어렵지 않나?"

남자의 곁에는 일행이 있었다.

대강 15명 정도. 아무래도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어디 길드 소속인 모양이었다.

곁에 있는 이들은 같은 길드원일 것이다.

"야, 내 레벨이 몇인데? 이딴 공격대 퀘스트 한다고 전날에 긴장하고 그래야 하냐?"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흐흐."

"맞아. 오빠면 여기 퀘스트는 너무 쉽지."

"잘 아네. 근처에 모인 놈들 얼굴부터 봐라. 병신 같은 놈들만 한가득 모여서...."

남자가 자기 일행과 함께 웃었다.

그 얘기를 들은 플레이어들은 짜증이 난 눈치였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 있을 만한 놈이 아니니까.'

진현우는 저 남자가 누군지 안다.

칼리 길드 소속의 최유성. 대전쟁 이전에 유명했던 플레이어로, 랭커에 오를 놈이다.

아마 3층에서 활동하는 놈일 건데.

'보정을 적용받고 내려온 건가.'

3층에 입장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2층으로 내려갈 경우 보정 시스템이 적용된다.

능력치나 숙련도, 장비가 2층의 최대 레벨 플레이어의 수준으로 약화되는 시스템이다.

고층의 플레이어가 저층으로 내려와서 깽판을 부리는 걸 막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아, 다 모이셨네. 조금 늦었죠? 저희가 이것저것 준비할 게 있어서. 하하하!"

협회 소속 플레이어들이 들어왔다.

박명준 부장과 우석형 과장. 박명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최유성에게 다가갔다.

"아, 최유성 님! 와 주셨군요. 칼리 길드에서 지원을 보낼 거라고 해서 기다렸습니다."

"길드장이 가라는데 가야지, 별수 있나."

"최유성 님이 와 주셔서 든든합니다. 89레벨 플레이어 아니십니까? 최유성 님을 보내 주신 칼리 길드한테는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어, 그래."

서로 안면이 있는지 꽤 친숙하다.

박명준은 술을 꺾는 듯한 제스쳐를 했다.

"그럼, 최유성 님. 나중에 또...."

"어어, 날 좋을 때 방 잡아서. 응?"

"크, 좋죠. 좋습니다."

박명준은 히죽 웃으면서 우석형을 앞으로 보냈다. 단상 위에 올라서는 우석형.

플레이어들을 돌아보던 그의 눈이 커졌다.

'응? 저 사람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봤기 때문이었다.

바로 진현우였다.

'A 등급 게이트 공략한 사람 아냐?'

박명준이나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은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우석형은 알고 있었다.

A 등급 게이트에서 여태껏 나온 적 없는 기여도로, 사실상 혼자 게이트를 공략한 사람.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우석형 과장, 뭐 하나?"

"예? 아, 아뇨! 크흠. 죄송합니다."

단상 위에 선 채 침묵하던 우석형을 박명준이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봤다.

'나만 알고 있는 거야? 아그니스가 언론 통제한 것 때문에 기사가 안 터져서 그런가?'

우석형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당시에 한성원과 길드원이 보인 추태 때문에 아그니스가 언론을 통제했었다.

그러면서 진현우를 영입할 욕심에 그의 정보가 널리 퍼지는 것까지 막았었다.

'하여튼, 길드 놈들.'

아그니스의 행동은 진현우의 얼굴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경쟁 길드를 차단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우석형은 헛기침을 터트렸다.

"크흠! 이번 공격대 퀘스트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2층의 플레이어 협회 지부에 소속된 우석형 과장이라고 합니다."

그가 손짓하자 대기하던 직원들이 플레이어들에게 서류와 보급품을 나눠 줬다.

서류에는 이번 퀘스트에 대한 설명 그리고 오크들의 특징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퀘스트는 대수림에 모인 오크들을 섬멸하는 것입니다. 놈들을 모두 죽이면 퀘스트는 완료됩니다."

우석형이 잠깐 숨을 삼켰다.

"왕국에서 저희한테 부탁한 퀘스트인데요. 정찰병 말로는 대수림 안에 여러 오크 부족이 뒤섞여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더군요."

"동족들끼리 싸운다, 이 말인가요?"

"예. 오크 부족들끼리 싸우는 겁니다. 왜 그러는 건지는 저희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뭐야, 크게 대단할 게 없는데?"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2층에서 오크는 그리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기껏 해 봤자 30레벨 수준의 몬스터.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 봤자 40레벨이다.

"이 정도면 쉬운 거 아냐?"

"그러니까. 오크만 많이 죽이면 되잖아."

"인원도 50명이니까 잘 싸우면...."

"게다가...."

플레이어들이 최유성 일행을 봤다.

어쨌든 고레벨의 플레이어들이 있다. 저들을 믿으면 쉽게 깰 수 있지 않을까.

우석형이 헛기침을 했다.

"현재 대수림은 게이트처럼 장막이 펼쳐져 있습니다. 한번 입장하고 나면 퀘스트를 포기하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석형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외부의 지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최대한 신중하게 임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이 잘못돼도 저희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절대 방심하지 말라는 의미.

최유성은 코웃음을 쳤다.

"아시다시피 공격대 퀘스트 보상은 '기여도'에 따라서 제공됩니다. 그와 별개로 협회에서 기여도에 따라 포상금을 제공할 겁니다."

"돈을 받고 싶으면 열심히 하라? 좋네."

최유성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건 너무 쉽지, 나한테는."

"맞아, 오빠가 있는데 뭘. 탑 3층에서 노는 플레이어인데 오크 따위가 대수야?"

"형님만 믿겠습니다."

최유성의 일행이 그에게 아부했다.

그리고 그건 박명준도 마찬가지였다.

"자, 자. 여러분. 여기서 플레이어로서의 경험이 제일 많은 분이 누굽니까? 최유성 플레이어님이죠?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거든 최유성 님만 믿고 따라 주십시오, 예?"

"뭐… 레벨도 높으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지?"

딱히 반대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박명준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대수림으로 출발하죠! 우석형 과장, 저분들 데리고 대수림으로 가."

"…예, 알겠습니다."

우석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박명준도 같이 가야 하는데 가기에는 너무 머니까 우석형만 보내는 것이다.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자, 여러분! 이 왕국의 미래가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시고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여기서 믿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출발하죠."

플레이어들은 수도 아빌론을 떠났다.

* * *

아빌론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

넓게 펼쳐진 숲, 대수림이 보였다. 그리고 대수림을 완전히 에워싼 푸른 장막도.

바깥의 게이트에서 봤던 것이다.

"저거 게이트 장막 아니에요?"

"예. 인원 제한이 있는 퀘스트 같은 경우에는 저런 식으로 장막이 생기고는 합니다. 제한 인원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못 들어오게요."

"허, 원래는 게임이었다더니...."

흡사 게임 같다.

하지만 이상한 건 아니다. 세계의 탑 내부는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으로 되어 있으니까.

우석형이 크게 박수를 쳤다.

"자, 일단 퀘스트부터 공유하죠! 제일 레벨이 높으신 최유성 님이 공격대장입니다!"

"쓰읍, 귀찮게."

최유성은 공격대 인원들과 손을 잡았다. 그러자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최유성 공격대'에 가입하시겠습니까?

―'최유성 공격대'에 가입했습니다. 공격대가 맡은 퀘스트가 공유됩니다.

그리고 나타나는 퀘스트창.

[오크 부족 전쟁.]

―분류: 공격대 전용 퀘스트.

―난이도: A.

―인원 제한: 80명.

―설명: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아빌론의 서쪽 대수림에 여러 오크 부족이 나타났다. 놈들을 처리해서 아빌론의 위협이 되지 않게끔 하라.

―보상: 기여도에 따른 차등 보상.

* 이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대수림에는 오크들에게 적용되는 특수 효과가 부여됨.

* 현재 대수림에는 '장막'이 적용되는 중. 인원 제한 이상의 인원은 입장 불가능.

최유성은 파티창을 확인했다.

공격대장이 되었기에 공격대원들의 레벨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는 그중에서 제일 레벨이 낮은 이들을 빠르게 추려 냈다.

"흠, 좋아. 들어가자고."

"수고하십시오, 공격대 여러분!"

우석형이 배웅하는 가운데,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대수림 안으로 진입했다.

진현우는 장막에 휩싸인 대수림을 봤다.

'부족 전쟁. 인기가 없는 퀘스트였는데.'

부족 전쟁은 기피되는 퀘스트였다. 참가 인원이 많아서 기여도가 분산될 거고, 자연스레 보상이 적어질 것이라 추측해서였다.

실제로 전생에서도 보상은 좋지 않았다.

퀘스트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최유성, 저놈이 일을 대충 했었지.'

편법으로 퀘스트를 처리하려다가 실패했고, 오크들이 수도 아빌론을 덮쳤었다.

어떻게든 막았지만 피해는 극심했었다.

'보상이 적다고? 그럴 리가 있나.'

명색이 A 등급의 퀘스트다.

진현우는 이 퀘스트에서 높은 비율로 최고 기여도를 달성하면 어떤 보상을 주는지 안다.

이유는 간단했다.

'브로큰 월드에서 해 본 퀘스트니까.'

전생에서도 공격대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그때의 그는 2층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진현우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기억 감정을 익히고 난 뒤였으니까.

'이번에는 다를 거다.'

대수림으로 들어가는 최유성 일행.

진현우는 그들을 쫓아 대수림에 들어섰다.

44화

오크 부족 전쟁 (1)

소리가 들린다.

―쿵! 쿵! 쿠웅! 쿵!

우렁찬 전쟁 북의 소리.

그에 맞춰서 진군하는 전사들의 소리.

짐승들의 털과 가죽을 엮은 갑옷을 입은 녹색 피부의 전사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크'라 불리는 몬스터였다.

―카아! 송곳니 부족의 전사들이여! 매서운 송곳니를 가진 전사들이여! 들어라!

행진하는 전사들의 가장 선두.

거대한 덩치에,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진 부족장 칼마칵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오늘은 영광스러운 날이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신탁'을 내리셨나니! 대답하라, 그분께서 내리신 신탁은 무엇인가!

―차아! 이 땅을 피로 적시는 것이다!

―저놈들의 피를 마시는 것이다!

칼마칵은 고개를 높이 들었다.

평원의 저 너머, 또 다른 오크들이 행진하고 있다. 다른 부족의 오크들이다.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그렇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 용맹함과 잔혹함을 증명한다면 우리 역시 그분의 곁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송곳니 부족의 행진이 멈췄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행진하던 오크들 역시,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정지했다.

―그분께서 가호를 내리실 것이라고! 칼날 부족, 네놈들 같은 약골들이 아니라!

―카아아! 헛소리! 칼마칵, 네놈들이 가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닥쳐라, 발묵!

송곳니 부족을 이끄는 칼마칵.

칼날 부족을 이끄는 발묵.

그들은 같은 동족임에도 서로를 흡사 원수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

―우우우우우....

―우우우우....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에 걸고 있던 뿔피리를 있는 힘껏 불었다.

아군을 고취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두 부족의 전사들이 서로를 마주봤다.

전쟁 북의 소리가 멈췄다. 부족장이 불어 대던 뿔피리의 소리도 어느새 멈췄다.

기묘한 침묵이 평원에 감돌았다.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저놈들을 죽여라!

―승천은 바로 우리의 것이다!

그 침묵이 깨진 순간.

평원에는 잔혹한 전쟁이 벌어졌다.

―카아아아아아!

―췩, 크오오!

두 부족의 오크들은 일제히 돌진하면서 맞부딪쳤고,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팔을 잃은 오크는 다리로 적을 공격했으며, 다리마저 잃자 적을 물어뜯으려 했다.

―크아아아아악!

오크들은 신체의 결손은, 하물며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싸웠다.

평원에 모인 오크들이 모두 그러했다.

그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을 저절로 위축되게끔 하는, 그런 처절함이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미, 미친놈들. 뭐 저렇게 싸워?"

그 모습을 플레이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할 말을 잃은 채.

그중에서 여유로운 건 오직 둘뿐이었다.

"참 나, 오크 주제에 별의별 개짓거리를 하네. 저걸로 쪼는 새끼들이나… 흐아아암."

하나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최유성. 그리고.

'어쩌다가 실패했는지 한번 지켜볼까.'

그를 관찰하는 진현우였다.

* * *

―카아, 크아아! 놈들을 죽여라!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먹어라, 피를 마셔라! 반드시 그분을 즐겁게 해 드려야 한다!

―차아! 밀려서는 안 된다!

오크들의 전투는 더욱 격해졌다.

서로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모습은 흡사 불나방을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뭐가 어찌 됐든.

"으, 으음...."

"저것들을 우리가 잡을 수 있나?"

"오, 오크들이 원래 저랬었나? 내가 아는 오크는 좀 멍청하고 그런 놈들인데...."

플레이어들은 위축된 상태였다.

그들이 평소에 만났던 오크들과 저 오크들은 너무도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왜 저렇게 싸우는 거죠?"

"최, 최유성 님. 혹시 뭔가 아시는 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최유성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냥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거겠지. 오크 새끼들이 뭐 지능이 뛰어난 놈들이냐? 근육 덩어리에 멍청한 걸로 유명한 거 몰라?"

"그, 그건 그렇긴 한데요."

"흐아암...."

플레이어 하나가 괜히 질문했다가 타박만 들었다. 최유성은 술 냄새 나는 숨을 내뱉으면서 오크들이 싸우는 모습을 봤다.

"아마 저게 전부가 아닐 거다. 놈들의 부락이 있을 거야. 뭐어, 내가 나서면 저놈들을 다 죽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만."

'힘들 것 같은데....'

진현우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3층에서의 최유성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는 보정이 적용된 상태. 저 정도 오크를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지. 놔두면 알아서 숫자가 줄어들 텐데 싸울 필요가 있나?"

"맞아, 오빠. 귀찮게 뭐 하러 싸워?"

"그래. 우리는 숲에서 대기하면서 적들의 숫자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충분히 숫자가 줄어들었으면, 그때...."

최유성이 대검을 들며 히죽 웃었다.

"남은 놈들을 죽이는 거지. 어부지리로."

"좋습니다, 형님."

"그렇게 하죠? 그게 안전할 거 같은데."

최유성과 함께 온 일행들이 그를 지지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저게 맞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굳이 나서서 싸울 필요가 있나?'

'괜히 위험하기만 하잖아.'

최유성은 대수림에 진입하자마자 무력을 과시하면서 무리의 주도권을 꽉 쥐었다.

말하는 것도 합리적이니, 경험이 적은 플레이어로서는 반박할 이유도 없다.

그럴 용기도 없었고.

"어이, 내 의견에 불만 있는 사람?"

"없습니다."

"저, 저희도 그게 좋아 보여요."

플레이어들은 동의했고,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최유성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좋아.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하고 가지. 이번 퀘스트에서는 내가 리더 역할을 맡는다. 너희들은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알겠냐?"

"네, 최유성 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벨이 높다는 건 경험이 많다는 것.

플레이어들은 최유성이 리더 역할을 맡는 것을 조금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합리적인 선택이기는 하다.

"우선 간단하게 야영지부터 만들지. 진현우, 정지유, 정수현. 너희는 잡일꾼이다."

"예? 저 말입니까?"

"그래, 너. 20레벨."

최유성이 진현우에게 자기 짐을 던졌다. 플레이어 협회에서 받은 보급품이다.

여기로 들어오기 전, 최유성은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들의 명단을 미리 확인해 뒀었다.

그들에게 짐꾼 역할을 시키는 것이다.

"레벨이 제일 낮은 놈들이 잡일꾼 역할을 해야지, 아니면 누가 하랴? 뭐, 불만이냐?"

"아뇨, 뭐 불만은...."

"다른 두 놈은 어디 있어?"

최유성이 윽박지르자 플레이어 무리에서 한 쌍의 남녀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여자는 진현우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아하하, 여기서 다시 만나네요."

"...."

정지유.

1층의 개미굴에서 진현우가 카오틱으로부터 구해 줬던 플레이어 파티 중 한 명.

그 옆에는 키가 작고 앳된 소년이 있었다.

"뭐야, 잡일꾼들끼리 서로 아는 사이인가? 어쨌든, 거기 안에 보면 천막이 있을 거다. 고급 천막이니까 조심해서 설치하고. 알겠냐?"

"어? 우리는 천막이 없는데?"

"뭐야, 저 사람들만 챙겨 준 거야?"

최유성 일행의 보급품에는 천막이 있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것에는 없었다.

진현우는 조금 전 유독 최유성과 가까운 모습을 보이던 박명준을 떠올렸다.

'그놈이 따로 챙겨 줬겠군.'

아주 긴밀한 사이인 모양이다.

진현우는 무식한 짐승 같은 최유성의 눈을 마주하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물론이죠. 맡겨 주세요. 레벨이 낮은 만큼 최선을 다해서 일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보기 좋네. 저래야지."

"쓸 만한 잡일꾼들이 생겼네, 오빠."

"자기 주제를 잘 아는 놈이네요."

최유성 일행이 히죽거리면서 진현우에게 자기들의 짐을 던지기 시작했다.

10명이 넘었기에 짐도 많았다.

"일단 저놈들 숫자가 줄어들 때까지 머물 야영지 터나 찾으러 가지. 현철아, 앞장서라."

"예, 형님."

정현철이라는 이름의 도적이 앞장 서면서 일행이 머물 야영지를 찾으러 갔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진현우를 보더니 짐을 나르는 걸 도와주려고 했지만.

"괜히 힘 빼지 말고 따라와라."

최유성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플레이어들은 그들을 뒤따랐고, 진현우는 혼자서 짐을 수습하는 척하다가....

"갔나?"

최유성의 모습이 안 보이자 수습하는 척하던 짐들을 모조리 내버렸다.

퉷, 진현우가 침을 뱉었다.

"새끼, 성격 한번 지랄맞네."

"그러니까요. 아 씨, 레벨 더 올리고 올걸."

진현우의 곁에 있던 정지유가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그를 보고는 반갑다는 듯 웃었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요즘 뷰튜브에서 유명한 사람을 만나서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영광은 무슨… 옆에 있는 분은 누굽니까?"

"아, 제 동생이에요. 정수현. 직업은 도적이고요. 저희 파티 신입이죠. 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정수현이라고 불린 소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현우도 화답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둘이서 온 겁니까?"

"아니요, 둘이서 온 건 아니고...."

"저희도 같이 왔습니다."

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일찍이 개미굴에서 본 적이 있는 전사와 사제가 보였다.

이대건과 박동욱이다.

"오랜만입니다. 또 뵙네요."

"그러게요.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요. 파티로 공격대에 참가한 겁니까?"

"예. 공격대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 2층으로 올라온 김에 한번 겪어 보려고 했죠."

이대건은 인원 공석이 생긴 파티에 정수현을 영입하고 파티 활동을 지속해 왔다.

1층의 플로어 마스터를 공략하고 2층으로 올라와서 아빌론 공략을 도왔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때마침 공격대 퀘스트 인원을 모집하고 있다길래 경험을 쌓을 겸 신청했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하하하!"

"오빠, 이게 웃을 일이야?"

"…맞아. 우리 둘은 짐꾼이라니까?"

호탕하게 웃는 이대건을 정지유와 정수현이 타박했다. 박동욱은 웃으며 지켜봤다.

오래 지내서 그런지 서로 친밀해 보였다.

'흠, 이 사람들… 도움이 되겠는데.'

이 퀘스트에서 진현우는 공격대, 특히 최유성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를 도와주기에 딱인 인원들이다.

"근데 진현우 씨,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예? 아, 잠깐 할 일이 있어서요."

"할 일이요? 짐을 왜...."

진현우는 최유성과 그의 일행들이 맡긴 짐을 뒤지더니 천막들을 꺼냈다.

확실히, 꽤 고급 천막이다.

"다른 사람들은 천막도 없이 자는데 자기들만 천막에서 자면 불공평해서 쓰나."

"잠깐, 아니 불을...!"

진현우는 보급품을 뒤적거리더니 아이템을 꺼냈다. 불을 피울 수 있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그걸로 불을 일으키더니.

―화르르륵!

"으음, 잘 타네. 따뜻하구만."

천막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돌멩이처럼 생긴 아이템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천막으로 옮겨붙더니 활활 타올랐다.

진현우는 그걸 흐뭇하게 지켜봤다. 다른 이들은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퀘스트가 실패한 이유를 알겠네.'

부족 전쟁.

오크는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고, 처음에는 부족들끼리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생에서 플레이어들은 오크 부족들끼리 싸우는 것을 그냥 방관했었겠지.'

놈들이 저렇게 싸우면서 숫자가 줄어들면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숫자가 줄어들었을 때 싸우면 된다. 뭐 하러 쓸데없이 지금 힘을 빼느냐?

조금 전 최유성이 말한 내용이다.

'그게 치명적인 실수가 된 거고.'

지금 이곳, 대수림은 평범한 숲이 아니다.

특수한 가호가 깃들어 있다. 오크들이 섬기는 신이 축복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퀘스트의 설명에 있던 대수림의 오크들에게 특수한 효과가 적용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전사들이여, 피의 축제를 벌여라. 서로를 죽이고 적들의 피를 머금어라. 그리하는 자에게는 기꺼이 내 축복을 내릴 것이니.

오크들이 섬기는 신이 축복을 내린 성지.

서로 싸우고,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오크는 상대방이 가진 힘을 흡수하게 된다.

'부족들은 계속해서 싸우면서 서로를 죽이고, 더 강한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생존하게 된 부족은 말 그대로 괴물이 된다. 해당 레벨대의 플레이어로는 상대할 수가 없는 괴물이.

당시의 플레이어들은 그 사실을 몰랐기에 오크들의 부족 전쟁을 방치했고, 그 결과 괴물이 된 놈들을 전혀 막아 내지 못했다.

'그 오크들이 아빌론을 덮쳤었지.'

아빌론은 여러 길드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수도를 지키기는 했으나, 피해가 너무 컸다.

진현우는 그 미래를 바꿀 생각이었다.

"좋아, 천막은 다 탔네."

"와, 이걸 태울 생각을 했어요?"

"…알면 저희를 가만히 안 둘 건데요."

정지유와 정수현에게서 각각 황당하다는 반응과 걱정스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진현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야영지로 안 돌아갈 겁니다. 저는 최유성하고 떨어져서 개별 행동을 할 생각입니다."

"혼자서요? 여기 A 등급 퀘스트에요."

"압니다. 근데 뭐, 돌아가면 짐꾼 노릇밖에 더 합니까? 차라리 혼자 움직이는 게 낫지."

이대건 파티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진현우는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건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개미굴에서 히든 던전을 발견하고 사실상 혼자 깨지 않았던가.

'뭔가 아시는 게 있는 거 같지?'

'어. 그런 거 같은데. 그럼....'

그리고 또 하나.

이대건 파티는 이전에 개미굴에서 받은 은혜가 있었기에, 언제나 그걸 갚고 싶어 했다.

지금이 그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저하고 수현이도 갈게요! 저희도 돌아가 봤자 짐꾼 노릇밖에 더 하겠어요?"

"…어? 난 같이 간다는 말 안 했는데?"

"누나가 가면 따라오는 거지, 말이 많아!"

진현우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지유, 정수현 두 분은 절 따라오시고 남은 두 분은 야영지로 가 주세요. 최유성이 물어보거든 잘 둘러대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받으세요."

진현우는 이대건에게 수정구를 건넸다.

먼 거리에서도 서로 통신할 수 있게끔 해 주는 마법 아이템이다. 이전에 알헨 묘지의 보물 상자를 털면서 몇 개 얻었었다.

"야영지에 머무르면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싶으면 수정구로 말해 주세요."

"오, 할 일이 생겼네요. 좋습니다."

"특히 칼리 길드, 그놈들이 뭘 하는지 유심하게 지켜보세요. 분명 사고를 칠 겁니다."

쿵, 쿵! 이대건이 자기 가슴을 쳤다.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그러면 그걸 핑계로 반쯤 죽여 둬야지.'

미래에도 악명을 떨치는 최유성.

놈이 여기서 멀쩡하게 나갈 수 있게끔 둘 생각은 진현우에게는 조금도 없었다.

"자, 그럼 갑시다."

"아, 네!"

"…따라갈게요."

진현우는 숲속으로 향했다.

정지유와 정수현이 그를 뒤따랐다.

* * *

그리고 몇 시간 후.

"뭐? 없어졌다고?!"

"네, 네. 형님. 그 레벨 20짜리 있잖습니까. 하도 안 와서 찾아보러 갔더니…."

"이, 이미 사라지고 없던데?"

야영지를 만들 터를 찾은 최유성은 진현우를 찾았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최유성이 분통을 터트렸다.

"이 개새끼가! 감히 도망을 쳐? 어디야!"

"그, 그리고 형님. 말씀드릴 것이...."

"오, 오빠! 잠깐만!"

최유성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마지막으로 진현우를 만났던 곳으로 갔다.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

완전히 불타서 재가 된 천막.

그리고 짐승들이 파헤친 보급품들이었다.

"이, 이, 이...."

최유성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크아아아악!"

그는 난동을 부리며 진현우를 데리고 오라고 외쳤지만, 무의미한 말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대건과 박동욱은 서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뭘 불태우나 했더니...."

"흐흐, 활활 잘 타던데요? 지금은 저놈 속이 더 타들어 갈 것 같기는 한데요."

"…난 모르겠다. 들키면 난리 날 텐데."

"우리는 모르는 척합시다."

이대건이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45화

오크 부족 전쟁 (2)

대수림은 광활한 숲이다.

숲 내부에 초원이나 공터도 있으며, 오크가 아닌 다양한 몬스터도 서식하고 있다.

진현우는 우선 대수림을 돌아다니면서 숲에 머물고 있는 부족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총 다섯 부족인가. 달라진 건 없고.'

진현우가 아는 것과 똑같은 숫자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 대수림에 있는 공터에서 오크들이 싸우는 게 보였다.

"와, 진짜 열심히 싸운다."

"…그러게."

다섯 개의 부족들은 미친 듯이 싸우는 중이었다. 마치 서로가 원수인 것처럼.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놈들이 섬기는 신이 명령한 거니까.'

동족상잔이고 뭐고 간에, 여기 있는 오크들에게는 신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또 무엇보다.

"근데 저 붉은 기운은 대체 뭐지?"

"…나도 조금 전부터 궁금했어."

동족을 죽이면 놈들은 강해진다.

오크 하나가 동족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죽은 동족에게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그를 죽인 오크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우오오오오오!

"죽인 오크의 힘을 흡수하는 거야."

"흡수한다고요?"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는 오크.

정지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제로 오크의 외형이 조금이지만 달라진 거 같았다.

조금 더 근육이 탄탄해진 느낌.

"아까 퀘스트 설명에 적혀 있었잖아. 오크들한테 특수한 효과가 부여된다고. 그게 저거야. 그래서 기다리면 안 된다는 거고."

"아, 진짜? 그럼 사람들한테 알려 주지."

"내가 말한다고 걔들이 들어 주겠냐? 버스 타러 온 20레벨 플레이어가 설치는데? 헛소리한다고 뭐라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건 그렇네요."

정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매는 진현우보다 나이가 어린데, 먼저 나서서 서로 편하게 부르자고 제안했다.

씨나 님 같은 호칭을 붙이기 귀찮다나.

진현우로서도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 거만한 놈들이 들어 주겠어?"

"흐음, 그건 우리 동생 말이 맞는 것 같네. 그래서 오빠, 이제 우린 뭐 하는 거예요?"

"오크 부족들 위치도 다 파악했으니까."

진현우는 지도를 꺼냈다.

그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만든, 부족들의 위치나 특징이 모두 적힌 지도였다.

그는 지도를 보면서, 정수현과 정지유를 이끌고 숲속 어딘가로 향했다.

"부족들부터 처리해야지."

"…셋이서 가능합니까, 그거?"

"아니. 부족마다 못해도 몇백 마리는 있을 테니까 정면에서 싸우는 건 힘들어."

숲 곳곳에서는 오크들이 다발적으로 싸우는 중이었다. 자신의 목숨마저 돌보지 않으면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벌이는 전투.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다른 방법을 써야지."

"다른 방법이요?"

"그래. 이 숲에 있는 게 오크들뿐이냐? 다른 몬스터들도 있는 거 기억나지?"

"…있기는 했죠."

셋이서 함께 숲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몬스터들을 봤다. 주로 짐승형의 몬스터.

그중에 진현우의 목표가 있다. 그는 한참을 걸었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저거 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대수림의 초원.

거기에는 사람만 한 덩치의 멧돼지들이 풀을 뜯어 먹으면서 서식하고 있었다.

"…혼 보어군요."

"와, 뿔 엄청 크다."

정수리에 거대한 뿔이 난 것이 특징인 놈들인데, 생긴 거하고 다르게 초식 동물이다.

다만 누군가 자신을 건드리면 저 뿔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들이박아 버린다.

"저놈들을 이용할 거다."

"네에? 혼 보어를요? 어떻게요?"

"잘 봐."

진현우는 혼 보어들을 관찰했다.

때마침 다른 몬스터가 혼 보어들을 발견하고는 놈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부오오오오!

―키, 키이익?!

혼 보어가 격노하면서 몬스터를 쫓아냈다.

깜짝 놀란 몬스터가 도망쳤지만, 혼 보어는 놈을 끈질기게 추적하기 시작했다.

"봤지? 성격이 아주 지랄맞아. 영역 본능이 굉장히 강한 데다가 호전성도 높거든."

"...."

혼 보어의 추적이 멈춘 것은 도망치던 몬스터가 놈의 뿔에 꿰뚫리고 난 후였다.

정지유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잘 자극하면 분이 풀릴 때까지 날뛸 거야."

"…그럼 자극만 하면 되겠네요. 근데, 놈들을 자극하는 건 누가 하는 거죠?"

"누가 하기는, 너희가 해야지."

정지유와 정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저희가요?"

"그럼 내가 할까? 재빠른 걸로 유명한 궁수하고 도적이 있는데 내가 왜 해?"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그동안 형은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진현우가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오크들의 머리를 쳐야지."

"머리라면… 부족장 말하는 거 맞죠?"

"어, 부족장. 근처에 있는 부족 둘이 조만간 부딪칠 거 같거든. 그 기회를 이용할 거야."

오크들을 이끄는 부족장.

부족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놈들의 힘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진다.

여기서 미리 처리해 둬야 한다.

"너희가 혼 보어들을 데리고 와서 난장판을 만들고, 난 그사이에 두 부족의 머리를 친다. 어때, 간단하지?"

"...."

"...."

진현우가 온화하게 웃었다.

처음 본 사이지만, 그 미소를 본 정수현은 뭐라 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 * *

대수림 동부.

그곳에는 강철 부족과 늑대 부족이라는 두 오크 부족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늑대 부족의 부족장, 모르칵은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숲 저 너머를 바라봤다.

―강철 부족, 그놈들은 느리다. 우리는 늑대처럼 재빠르게 놈들을 사냥할 것이다.

모르칵은 곁의 늑대를 매만졌다.

사람만 한 덩치를 가진 거대한 늑대.

한때는 늑대들을 이끌었던 이 늑대처럼 강철 부족도 자신에게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선택을 받아, 우리는 더더욱 강하고 용맹한 전사가 될 것이다.

모르칵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동족인 오크와 싸우는 것은 달갑지 않으나, 그걸로 강해질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오크는 강함을 숭상하는 종족이니까.

―동족들이여! 전투를 준비하라! 강철 부족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쿵, 쿠웅!

모르칵의 외침을 들은 늑대 부족의 오크들이 무기를 맞부딪치며 호응했다.

그리고 저 너머에서 적들이 나타났다.

―모르칵! 여기 있었구나! 카아아!

―울마! 네놈의 목숨은 여기까지다!

강철 부족의 오크들.

그리고 놈들의 부족장인 울마였다.

두 부족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적의를 드러냈다. 잠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죽여라! 강철 부족을 쳐 죽여라!

―저놈들을 늑대 가죽으로 만들리라! 가라, 용감한 전사들이여!

전투를 벌였다. 망설임 없이 돌진한 두 부족이 충돌했고 격한 전투가 벌어졌다.

모르칵과 울마는 가장 후방에서 아군을 지휘하면서 전투를 이끌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카아아! 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영광스럽게 죽으면 그분이 우리를 반기실 것이다! 그분의 곁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전투는 점점 더 격해졌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소모전. 모르칵과 울마는 서로 끝장을 볼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결정적인 기회가 생길 것이다.'

'빈틈을 보여라, 울마. 그러면 우리 늑대들이 네놈의 목을 물어뜯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빈틈을 찾기 위한 전투.

이런 형태의 전투는 여태껏 몇 번이고 일어났다.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좀 달랐다.

―두두두두두두....

―무, 무슨 소리냐? 땅이 울린다!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땅.

―강철 부족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아닌가?! 저놈들이 이상한 짓을 벌이고 있다!

―무슨 소리! 늑대 부족, 네놈들이겠지!

상대 부족이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한 오크들이 더욱 격하게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쿠우웅!

―부우우우우우!

수많은 나무가 갑자기 쓰러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꿰뚫려서 부러졌다. 오크들은 나무 너머에 있는 걸 봤다.

바로 엄청난 숫자의 혼 보어를.

―저, 저건....

―우아아아악!

―부오오오오오!

순간 검은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뿔이 달린 거대한 멧돼지들이 일직선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강철 부족과 늑대 부족, 정확히 두 부족이 전투를 벌이는 격전지 한가운데를.

―크아아악!

―짐승 따위가… 커헉!

―뿔이...!

오크들을 뿔로 꿰뚫는 혼 보어들.

오크들이 놈들을 막기 위해서 반격하자, 혼 보어들이 광분하여 미쳐 날뛰었다.

순식간에 전장이 난장판이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모르칵이 분통을 터트렸다.

저 성질 더러운 짐승들이 왜 갑자기 나타났단 말이냐. 누가 자극이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강철 부족, 저놈들이.... 아니,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모르칵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 들어라! 지금 바로....

"어딜 가려고?"

소리가 들렸다.

모르칵의 바로 등 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인간, 적...!

―커허엉!

대검이 보였다.

불길한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대검.

높이 솟은 대검이 단두대처럼 모르칵의 머리에 내리꽂혔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콰드득!

―크아아아악!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대검이 모르칵의 머리를 베기 직전, 곁에 있던 늑대가 그의 몸을 들이박았다.

대검이 머리가 아닌 그의 팔을 베었다.

―끄윽, 허억...! 헉!

모르칵이 바닥을 더듬거리며 물러났다.

진현우는 그 옆에 있는 늑대를 흘깃 보더니, 왼손에 검은 화살을 만들어서 쐈다.

화살이 모르칵의 발목을 꿰뚫었다.

―카아아악! 저, 저놈을 물어라!

―크르르… 크허어엉!

늑대가 진현우를 향해 돌진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다. 진현우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놈을 지켜봤다.

이윽고 놈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자.

―끄륵...!

늑대의 입안에 냅다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건틀릿이 놈의 이빨을 붙잡았다. 진현우는 놈의 턱을 붙잡고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쿠웅! 바닥에 꽂히는 늑대의 거구.

―콰드득!

진현우는 왼손을 뻗어 도끼를 붙잡고, 번개처럼 늑대의 머리를 내리쳤다.

살을 꿰뚫는 끔찍한 소리.

그걸로 끝이었다.

―...!

그걸 지켜보던 모르칵은 경악했다.

저 늑대가 어떤 늑대인가. 수많은 늑대를 이끌면서 '늑대왕'이라 불렸던 놈이다.

그런 늑대를.

'한낱 짐승 도축하는 것처럼.'

모르칵은 어떻게든 물러나려고 했다.

오른팔이 날아갔다. 이대로는 싸울 수 없다. 그런데 몸의 움직임이 너무 느리다.

무언가가 신체를 둔화하는 것처럼.

―설마, 이 화살....

모르칵은 자신의 발목을 꿰뚫은 검은 화살을 바라봤다. 그리고 바로 그때.

―카아아악!

모르칵에게 도끼가 날아들었다.

진현우가 투척한 도끼가 분열하더니, 그의 남은 팔과 두 발목에 그대로 꽂혔다.

모르칵의 거구가 쓰러졌다.

―큭, 으윽, 잠깐, 잠...!

진현우는 대검을 쥔 채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모르칵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서걱!

놈의 목을 베었다.

대검에 오크의 피가 한가득 묻었다. 그러자 대검이 빛을 내뿜더니 피를 흡수했다.

더없이 불길한 빛이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복수의 룬이 강인한 피를 흡수했습니다. 오크 슬레이어가 크게 강화됩니다.

"더럽게 불길한 검일세."

진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최유성 일행으로부터 떨어져서 오크 부족들을 사냥하려는 또 다른 이유.

바로 이 복수의 룬 때문이었다.

[오크 슬레이어 (고급)]

―설명: 오크들에게 가족을 잃었던 복수귀가 사용했던 대검이다. 수많은 오크의 피로 새긴 룬 문자가 검신에 새겨져 있다.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효과: 오크 사냥꾼, 복수의 룬, 공포.

* 오크 사냥꾼: 오크와 싸울 때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하며 대미지가 25% 상승한다.

* 복수의 룬: 오크의 피를 머금을 때마다 대검에 새겨진 룬 문자가 진해진다. 피를 흡수할 때마다 대검이 강화되며, 모든 피를 흡수했을 때 대검이 새로운 형상으로 변한다.

* 공포: 오크들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이전에 네메시스의 빌딩 지하에서 얻어서 기억을 감정했던 대검, 오크 슬레이어.

진현우는 최대한 많은 오크들을 사냥해서 이 복수의 룬을 활성화할 생각이었다.

'능력치하고 대미지 퍼센트가 5씩 오른 건가? 이 정도면 꽤 괜찮은데....'

그 정도에 따라서 이번 퀘스트를 깨기가 쉬워지느냐, 어려워지느냐가 갈릴 것이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그림의 부탁 ―복수.]

· 난이도: A.

· 설명: 오크 슬레이어에 깃든 사념, 호그림이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가 만족할 때까지 오크들을 죽여야 한다.

· 보상: 능력치 보상, 스킬 강화.

무려 능력치 보상이 있는 퀘스트다.

게다가 스킬, 아마도 피에는 피를 강화해 준다고 하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부, 부족장! 카아아아!

―저놈이 우리 부족장을 죽였다!

―모여라, 전사들이여! 복수해야 한다!

저 멀리서 오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현우는 대검을 높이 들었다.

'새 무기 테스트를 할 좋은 기회네.'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다.

46화

오크 부족 전쟁 (3)

모르칵이 죽었다.

늑대 부족의 부족장이 죽었다는 사실은 강철 부족의 부족장에게도 금방 전해졌다.

―모르칵이 죽었다고?! 누구 손에 말이냐!

―이, 인간의 손에 죽었습니다!

―인간이라고!

울마가 기함했다.

같은 오크도 아니고 인간의 손에 죽다니. 그건 오크로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으음, 으으으음...!

울마는 전장을 바라봤다.

아군, 적군 그리고 혼 보어가 뒤섞여서 난장판이 된 전장. 게다가 이 틈을 타서 정체 모를 인간이 모르칵까지 죽였다.

여기서 더 싸우는 것이 옳은가?

―물러난다!

―부족장! 정말인가?

―그래! 여기서 더 싸우는 건 손해다!

울마는 큰 위협을 느꼈다.

그는 혼란에 빠진 부하들을 추스른 후 황급히 전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렇게 숲에 발을 내디딘 순간.

―퍼어엉!

―크아아아악!

갑자기 폭음이 터졌다.

가장 앞장서서 나아가던 울마의 발밑에서 빙결 덫이 작동한 것이었다.

―크으윽! 내, 내 발목이!

―아악! 부족장! 다리가 얼었다!

빙결 덫이 폭발하면서 오크들의 발목을 얼렸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곧이어 폭발 덫이 터지더니, 발이 얼어붙은 오크들을 단번에 휩쓸었다.

―카아아아악!

―젠장, 이것들은 대체 뭐냐!

―커헉...!

푸슈욱! 발목이 얼어붙은 오크들의 머리에 화살과 단검들이 날아와 꽂혔다.

―끄아아악!

―큭, 적들의 모습이 안 보인다...!

허둥대는 오크들.

얼어붙은 발목을 움직이려고 하던 울마는 자신의 감각이 경고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 이놈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는 인간이 보였다.

진현우. 그는 거대한 대검을 높이 들어 올리면서 자신의 목걸이를 만졌다.

―파아아앙!

―크아악! 내 눈이!

묘지기의 목걸이가 강렬한 빛을 내뿜었고 그 빛에 오크들이 순간 시력을 잃었다.

울마 역시 그러했고, 울마를 지키려고 했던 주변의 오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서걱!

―크, 하악...!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진현우는 그 힘을 그대로 대검에 실었다. 엄청난 힘이 담긴 대검이 울마의 어깨를 크게 베었다.

휘청거리는 울마. 진현우는 곧바로 땅에 착지하면서 몸을 크게 회전했다.

―...!

몸을 회전하면서 휘두른 대검이 휘청거리던 울마의 목을 단번에 베어 냈다.

그걸로 끝이었다.

―우, 우아아아악!

―울마, 울마가 죽었다! 부족장이!

―저, 저 인간을 어서 죽여라!

울마의 사체가 쓰러졌다.

뒤늦게 시력을 회복한 오크들이 울마의 죽음에 경악하며 진현우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진현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크아아악!

―도끼...!

대검과 도끼.

진현우는 두 무기를 움켜쥔 채 오크들과의 전투에 몸을 내던졌다.

"와…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야?"

정지유와 정수현은 나무 위에서 진현우가 전투를 벌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이곳까지 혼 보어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너무 위험한 역할을 맡는 거 아니냐며 불평했었는데.

"…저렇게 싸울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저 오빠가 더 위험하잖아?"

혼자서 오크들과 싸울 줄 알았겠는가.

부족장들의 머리를 친다길래 어떻게 치나 했더니, 저런 식으로 머리를 칠 줄이야.

"진짜 말이 안 된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식으로 싸워? 20레벨이라면서?"

"…누나, 확실히 20레벨인 건 맞지?"

"어, 20레벨 맞을걸?"

"…진짜로 말이 안 되는데."

진현우가 싸우는 걸 본 정지유가 혀를 내둘렀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힘들다.

단신으로 대검을 들고 오크들 한복판으로 돌진하더니 적들을 도륙하고 있으니.

'이제 막 2층으로 올라온 신인 플레이어가, 저 정도의 오크들을 상대로 혼자서 싸운다고? 그것도 당황하지도 않고?'

정수현은 진현우를 유심히 지켜봤다.

동시에 달려드는 수많은 오크. 진현우는 물러서지 않고 두 팔에 힘을 집중했다.

그리고 일섬.

'그게 가능해? 난… 불가능해.'

그러자 오크들이 단번에 베였다. 하나도 아니고 다수의 오크가, 단 일격에.

저게 20레벨의 근력이란 말인가?

'칭호작을 한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뿐만이 아니다.

정수현은 진현우의 신체 능력만이 아니라 그가 싸우는 방식도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오랫동안 전투 경험을 쌓은 것 같은....'

누나를 카오틱한테서 구해 줬다길래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저건 좀 예상 밖이었다.

"근데 있잖아, 저 사람 전사인가?"

"…몰라. 누나가 아는 거 아니었어?"

"나도 몰라. 이제 두 번째 만났는걸. 근데 전사라면 저 덫 스킬은 어떻게 쓰는 거지?"

"...."

정수현도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전사인 것 같은데 쓰는 스킬이 특이하다. 도끼를 투척하는 것도 그러했다.

'평범한 직업이 아닐 수도 있겠어.'

20레벨에 어쩌면 히든 클래스.

그리고 상식을 넘어서는 능력치.

"…저런 괴물이 어디서 나온 거야?"

정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메시스 길드가, 그 윤서희가 탐을 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 * *

진현우는 오크 부족들을 사냥했다.

적들의 숫자는 확실히 많았다. 하지만 머리인 부족장을 처리하면서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오크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흐, 흐아아악!

―무섭다! 저, 저놈 무섭다!

"…도망치는데요?"

오크 슬레이어의 효과가 엄청났다.

대검이 가진 옵션 중 하나, 공포. 오크들은 진현우를 보면 겁에 질려 제힘을 못 냈다.

도망치기까지 하는 놈들도 있을 정도.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복수의 룬이 강인한 피를 흡수했습니다. 오크 슬레이어가 강화됩니다.

* 오크 사냥꾼: 오크와 싸울 때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하며 대미지가 30% 상승한다.

오크들의 피를 착실히 흡수한 오크 슬레이어의 효과 역시 크게 성장했다.

성장이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오빠, 그거 비싼 무기예요?"

"가격은 몰라. 비싸게 팔릴 수도 있겠지."

"귀속 아이템인가?"

감정 아이템은 오직 진현우만 쓸 수 있다.

사실 그런 제한이 없었더라도 감정 아이템을 다른 이에게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걸 왜 팔아?'

감정 아이템은 특이한 옵션을 가진 게 많아서 챙겨 두면 어디든 쓸데가 생긴다.

진현우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퍼어어엉!

―크아악! 함정, 어디서...!

사냥꾼의 장갑이다.

덫의 위력이 증가하며 설치한 덫을 적이 알아채기 힘들어지는 옵션이 붙은 장갑.

이 장갑으로 강화한 덫 덕분에 오크 부족들을 사냥하는 것이 더더욱 쉬워졌다.

"오빠, 쟤네들 도망쳐요. 쫓을 거예요?"

"그냥 도망가게 놔둬."

"괜찮아요?"

격렬하게 부딪치던 강철 부족과 늑대 부족은 부족장을 잃고 와해됐다.

용감하던 전사들은 겁에 질려서, 혹은 혼 보어에 쫓겨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가면 자기들 야영지로 가겠지. 그러면 부족장을 잃은 놈들이 뭘 하겠냐?"

"…새 부족장을 뽑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자기가 부족장이 되겠다고 나서는 놈들이 생길 테고, 결국 의견 충돌이 일어나겠지. 그러다가 싸우게 될 거고."

그게 진현우가 노리는 것이었다. 같은 부족끼리 싸워서 오크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

"그러면 이제 기다리면 되겠네요. 놔두면 저 오크들 숫자도 줄어드는 거잖아요."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진현우는 어제 받은 연락을 떠올렸다.

―진현우 씨, 이 근방에 있는 오크 부족이 다른 부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근데 갑자기 다른 부족도 전투에 참가해서....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그래도 우리한테는 잘된 거 같은데요? 누가 일방적이라기보다는 세 부족이 맞부딪치는 상황입니다.

이대건의 연락이었다.

포털을 넘은 플레이어들이 처음으로 본 부족들, 송곳니 부족과 칼날 부족.

그 전투에서 송곳니가 승리한 모양이다.

'그리고 새로운 부족이 전투에 참가했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시간이 부족하다.

'우리 셋이서 제거할 수 있는 부족은 둘이 한계야. 서로 싸우면서 시간이 끌리면 좋지.'

이 숲에 있는 오크들은 동족들을 죽이면 그들의 힘을 흡수하여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한 부족이 다른 부족과 전투를 벌여서 놈들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면.

'부족 전체에 버프가 걸린다.'

버프는 멸망시킨 부족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강해진다. 진현우가 알기로는 그렇다.

특히 부족장 같은 경우에는 부족 하나만 멸망시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세진다.

'내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면 좋은데, 칼리 길드가 뭔가 사고를 칠 것 같단 말이지.'

특히 최유성.

그놈은 인내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 놈이 오크들이 서로 싸우는 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까? 놈들도 꽤 신중한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진현우의 수정구가 울렸다. 그는 수정구를 꺼냈다.

"예, 이대건 씨. 무슨 일입니까?"

―어, 그게 말입니다. 음....

수정구 너머의 이대건이 난감한 목소리로 자신이 본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걸 들은 진현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뭘 한다고요?"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응? 생각해 보니까 나쁘지 않은데?'

진현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칼리 길드가 그렇게 하게 놔두세요. 저희는 저희대로 따로 대처하겠습니다."

―예? 정말로요?

수정구 너머에서 들리는 당황한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정지유와 정수현이 그를 뒤따랐다.

"가자. 혼 보어들 더 몰아야겠다."

"네에?! 또요?"

"…안 하고 싶은데."

그들은 숲을 나아갔다.

* * *

진현우가 오크들과의 전투를 벌이는 동안, 최유성은 한가롭게 쉬는 중이었다.

물론 마냥 좋지만은 아니었다.

"X발, 내 천막!"

박명준이 따로 챙겨 줬던 고급 천막이 사라진 바람에 잠자리가 불편해져서였다.

그 탓에 다른 놈들처럼 바닥에서 불편하게 침낭에 들어가서 자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이걸 참아야 하냐? 민주야, 어떻게 생각하냐? 우리가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

"그러니까, 오빠."

최유성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이런 불편한 숲에서, 땅바닥에서 침낭으로 자는 생활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서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퀘스트를 빨리 끝내야 하는데.'

최유성은 방법을 생각했다.

부족 전쟁 퀘스트를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크들을 다 죽여야만 한다.

하지만 오크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하는 걸 기다리려고 했는데 너무 오래 걸린단 말이지.'

생각보다 놈들이 신중하게 싸운다.

오크 주제에. 그냥 무식하게 싸우면 될 것을. 그것도 최유성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곰곰히 생각하던 최유성의 머릿속으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히죽 웃더니 동료들을 모았다.

"야, 슬슬 기다리는 것도 지겹지 않냐?"

"그러게요, 형님.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심까?"

"당연히 있지."

최유성의 계획은 간단했다.

"이번 퀘스트 이름이 뭐냐? 부족 전쟁이잖아. 우리가 부족 하나를 골라서 놈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끔 도와주자고."

"어떤 식으로 말임까?"

최유성은 야영지에서 빈둥거리던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숲 깊은 곳으로 향했다.

얼마 전에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놈들이 싸우게끔 유도해야지."

거기서 떨어진 곳에 송곳니 부족의 오크들이 쓰던 장비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가죽 갑옷이나 무기, 그런 것들.

"…위장해서 말이야."

최유성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47화

예상치 못한 것

깊은 저녁, 한 무리가 움직였다.

―밤이다! 적을 경계해라. 송곳니나 칼날 놈들이 오지 않게끔 주변을 살펴라!

숲의 서쪽에 있는 야영지.

송곳니 부족과 칼날 부족의 전투에 뒤늦게 끼어든 까마귀 부족이 머무는 곳이다.

―적, 보이나?

―보이지 않는다.

부족의 전사들은 다른 부족들을 경계해서 밤늦은 시간에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지금은 소강 상태이기에 적들도 공격해 오지 않았고, 오크들도 살짝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그때.

―푸욱!

―컥, 끄르륵....

―카아, 카아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든 화살이 오크의 목을 꿰뚫었다.

곁에 있던 오크가 비명을 내질렀다.

―푸슉! 푸우욱!

―저, 적습… 커억!

―적습이다! 적이 공격해 왔다!

계속해서 쏘아지는 화살에 경계병이 적습을 알렸다. 그러자 야영지에 있던 전사들이 뛰쳐나왔지만, 적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크윽! 누구냐? 대체 어떤 놈들이!

―너희들은 적들의 흔적을 쫓아라! 얼른!

―부, 부족장. 할 말이 있다.

분노를 터트리는 부족장에게 경계를 서던 오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도망치던 놈들이 입은 갑옷을 봤다. 칼날 부족… 칼날 부족 놈들이었다!

―확실한가?

―맞다! 내가 두 눈으로 봤다!

오크는 자신이 본 것을 확신했다.

습격자들은 분명 칼날 부족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다른 오크들도 증언했다.

―기억난다. 분명히 칼날 부족이었다.

―감히, 그놈들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친 적들을 추적한 오크들이 돌아왔다.

―부족장! 놈들을 놓쳤다. 그런데 마지막 흔적이 남은 곳 근처에 칼날 부족이 있었다!

―놈들의 야영지가 있었나?

―맞다!

까드득! 부족장이 이를 악물었다.

모든 정황이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켰다.

―칼날 부족, 비겁한 놈들! 그놈들이 우리를 기습했다!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지.

부족장이 주먹을 높이 들었다.

―전사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적을 친다!

칼날 부족과 싸우기 위해 나서는 오크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최유성과 플레이어들이었다.

"야, 봤냐? 흐흐, 멍청한 놈들."

"오크라서 그런가 정말 단순하네요, 형님."

"그러니까. 저런 멍청한 놈들을 잡는 게 A 등급 퀘스트라니. 퀘스트 수준하고는."

최유성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몇십 분 후, 칼날 부족과 까마귀 부족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 * *

지겹던 숲 생활이 즐거워졌다.

최유성은 오크 부족들 간의 전투를 유도하면서 놈들의 숫자를 줄여 나갔다.

"와, 이거 기여도 많이 오르겠는데?"

"그래야지. 오크를 저 정도로 줄였는데."

"흐흐, 다른 놈들은 놔두고 우리끼리만 오길 잘했네요. 기여도 나눠 줄 필요도 없고."

최유성과 칼리 길드원들은 세 오크 부족들로 위장해서 서로가 싸우게끔 했다.

그렇게 전투가 이어졌고, 세 부족 중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리기 시작했다.

―카아아! 저놈들이 마지막이다!

―죽여라! 까마귀 부족은 오늘 사라진다!

"오, 송곳니 부족 저놈들 잘 싸우네."

송곳니 부족이었다.

놈들은 부족장인 칼마칵의 지휘 아래에 적 부족들을 하나씩 제압하고 있었다.

―칼마칵, 네놈… 크허억!

―까마귀 부족장을 이 칼마칵이 죽였다!

칼마칵이 까마귀 부족장을 죽였고, 남은 부족원들도 송곳니 부족의 손에 죽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칼날 부족, 이전에는 운이 좋아서 살았지!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칼마칵...!

다시 한번 송곳니 부족과 칼날 부족이 붙었다. 결과는 너무도 빠르게 나왔다.

―어, 어떻게 이리 강할 수가...!

―가호… 크아아악!

까마귀 부족을 멸망시키면서 그들의 힘을 흡수한 송곳니 부족은 한층 강해졌다.

그전에도 칼날 부족이 밀리는 형국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상대조차 할 수 없었다.

―발묵, 내 힘의 일부가 되어라.

―칼, 마칵....

발묵이 칼마칵의 손에 죽었다.

칼날 부족의 다른 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송곳니 부족의 손에 쓰러졌다.

―우오오오오오!

―칼마칵이 발묵을 죽였다! 송곳니 부족이 칼날 부족을 상대로 또다시 승리했다!

칼리 길드원들은 당황했지만, 최유성의 의연한 태도를 보고는 금방 진정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저것들 부족 하나 족쳤으니까 또 축제나 벌이겠지. 우리도 슬슬 돌아가자."

"아, 예. 형님."

최유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부하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야영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송곳니 부족이 있는 곳을 봤을 때, 칼마칵과 눈을 마주쳤다.

"…뭐야, 저놈."

칼마칵이 최유성을 보고 있었다.

다른 오크들은 쳐다보지 않는데, 칼마칵 혼자서 정확히 최유성을 바라봤다.

'우리를 쳐다보는 건가?'

최유성은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기분 탓이겠지.

최유성은 야영지로 돌아갔다.

―용맹한 전사들이여.

다시 조용해진 숲속.

칼마칵은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는 전사들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때가 됐다. 진화를 준비하라.

오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 * *

그리고 밤이 되었다.

야영지로 돌아간 최유성은 거하게 식사를 한 후, 이 근방의 지도를 펼쳤다.

"꺼억. 어디 보자, 부족 두 개는 족쳤고."

최유성은 함께 온 칼리 길드원들을 이용해서 숲의 지리를 파악했다.

이곳에 머무는 부족은 총 다섯.

"어오, 새끼들. 더럽게 많네."

"그러게요. 그래도 이제 송곳니 놈들한테 두 부족만 더 처리하게 시키면 되겠네요."

"그렇지. 그놈들이 우리 대신 일해 주니까 얼마나 고맙냐? 동족도 알아서 잘 죽이고."

"헤헤, 맞습니다. 한잔하시죠."

이렇게 쉬운 퀘스트가 또 있겠는가.

최유성은 히죽거리면서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천막이 없는 건 불편하지만, 편하게 돈을 벌어 갈 생각을 하니 참을 만도 했다.

"흐, X발. 참을 만하기는 개뿔이. 빨리 돌아가서 클럽이나 가고 싶네. 후우...."

최유성은 야영지를 돌아봤다.

어떻게 된 게 같이 온 플레이어 중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하나도 없다.

'전에 잡일꾼으로 쓰기로 했던 년은 꽤 예뻤는데. 망할 년이 도망을 쳐 버렸으니.'

최유성은 쯧, 혀를 찼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는 칼리 길드원인 여성 한 명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 오빠. 또 왜 이래?"

"왜 이러긴. 유진아, 오늘 밤에...."

살짝 꺼리는 여자.

전혀 개의치 않는 최유성은 그녀를 데리고 숲속 어딘가로 향하려고 했다.

그걸 본 길드원들이 혀를 찼다.

'저놈의 여성 편력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있었던 일.

최유성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야영지는 오늘도 이렇게 평화롭게 흘러갈 것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쏴라!

―저 빌어먹을 인간 놈들을 죽여라!

바로 근처에서 들린 외침과 함께.

―슈우욱! 푸욱!

"악, 아아악!"

하늘에서 화살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사방의 숲에서 엄청난 숫자의 화살이 쏟아지더니 야영지의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화살에 맞은 이들이 쓰러졌다.

―여기다! 인간 놈들이 여기 있다!

―칼마칵의 말이 맞았다! 우리를 갖고 놀려고 하는 인간 놈들이 있었다! 죽여라!

―인간들을 죽여라!

사방의 숲에서 오크들의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놈들이 다가오는 소리도.

"…어?"

너무도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

사방에서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이 적의 가득한 눈으로 인간을 봤다.

그들에게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위대한 부족장, 칼마칵의 지휘 아래에!

송곳니 부족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리더니 그들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 혀, 형님."

"저놈들, 몸이… 커지는데요?"

"…스테로이드라도 맞았나?"

오크들의 신체가 한층 커졌다.

안 그래도 근육질이던 몸은 스테로이드라도 맞은 듯, 터질 것처럼 거대해졌다.

그리고 놈들의 피부색.

"뭐, 뭐야. 피부색이 바뀌는데?"

"붉은색...?"

오크들이 가졌던 초록색의 피부색이 새빨갛게 변해 가고 있었다.

놈들의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르으....

―카아아아! 인간을 죽여라!

변화한 오크들.

놈들이 광기에 젖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면서 플레이어들에게 돌진했다.

* * *

칼마칵은 알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누가 부족들 사이에서 전투를 부추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칼마칵의 느낌은 정확했다.

그는 직접 나서서 조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그러는 건지 알아냈다.

―빌어먹을 인간 놈들....

인간들이 송곳니 부족을 이용해서 다른 부족들을 처리하려 하고 있다.

처음에 칼마칵은 크게 분노했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걸 잘 이용한다면 송곳니 부족이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마칵은 최유성 일행의 움직임을 역으로 이용했고, 부족 전쟁에서 큰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지금.

―이제 우리는 강하다! 저 인간 놈들을 이용할 필요도 없다. 우리를 이용하려고 한 인간 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여라!

칼마칵은 인간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용도를 다한 사냥개를 살려 둘 필요는 없으니까.

그의 명령을 받은 오크들은 미리 파악해 둔 플레이어들의 야영지를 공격했다.

―카아! 저쪽이다!

―건방진 인간 놈들, 우리를 이용하려는 걸 모를 줄 알았나! 모습을 드러내라!

"오, 오크다! 사방이 오크야!"

갑작스러운 기습.

오크들이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플레이어들은 제대로 대처도 하지 못했다.

"형님! 오크들이… 이익!"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최유성도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칼마칵과 눈이 마주쳤을 때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그는 대검을 움켜쥐었다.

"...."

"오, 오빠! 어떻게 할 거야?"

"주변에 오크밖에 없어요!"

최유성은 빠르게 생각했다.

이 장소는 탁 트였다. 거기에 사방이 오크에게 포위된 상황. 너무 불리하다.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저놈들의 머리를 쳐야겠어."

"예? 머리를 친다고요?"

"그래, 부족장 말이다. 칼마칵, 그놈!"

최유성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당황한 길드원들이 그를 황급히 뒤따랐다.

"저 사람들은 그냥 둡니까?"

"우리가 머리를 칠 동안 시간을 벌어 줄 놈들이 있어야지. 그냥 저렇게 놔둬."

"흐흐, 그것도 괜찮네요."

그들은 플레이어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데리고 가 봤자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자신들끼리 움직여서 칼마칵을 처리하는 게 낫다. 무엇보다 구하는 게 귀찮기도 했다.

"좋아, 가자!"

"예!"

그렇게 최유성이 부하들을 데리고 칼마칵을 처리하러 떠났을 때.

플레이어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카아아! 인간, 찢어 죽여 주마!

"꺄아아아악!"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서른 남짓.

반면에 오크는 백 마리를 족히 넘었고, 사방에서 플레이어들을 포위한 상태였다.

불리해도 너무 불리하다.

"오, 오지 마! 이 개새끼들아! 크아악!"

"모두 여기로 모이세요! 젠장, 최유성하고 다른 놈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플레이어들이 오크들에게 당하고 있다.

이대건은 박동욱과 협력하여 부상자들을 추스르고 사람들을 모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다급히 최유성을 찾았지만.

"이, 이대건 씨. 저거 보세요."

"…최유성 저 개새끼들!"

"저거 도망치는 거 아니에요?!"

이대건이 보게 된 것은 자기들끼리 어딘가로 떠나는 최유성의 뒷모습이었다.

그들은 칼마칵을 처리하려는 것이었지만, 이대건에게는 이곳의 사람들을 버리고 자신들만 살려고 도망치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카아아! 인간들이 여기 있다!

―모두 모여라! 저놈들을 죽여야 한다!

'젠장,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이대건은 어떻게든 야영지 안의 사람들을 모았지만, 오크들도 그들을 눈치챘다.

놈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럴 때 진현우 씨라도 있었다면!'

다른 오크 부족들을 처리하고 있을 텐데, 그 사람이 있었다면 뭐라도 되지 않았을까.

이대건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다.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길을 뚫어서 도망치는 수밖에.'

이대건은 빠르게 판단을 끝내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획을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크아아아악!

―뭐, 뭐냐! 뒤에서… 카아악!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플레이어들을 포위하고 있는 오크들. 놈들의 배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더없이 반가운 목소리도.

"비켜, 이 새끼들아!"

"이 목소리는...."

이대건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에서 거대한 굉음이 들리더니 거대한 충격파가 터졌다. 그러자 오크들의 한복판에 모세의 강처럼 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지, 진현우 씨!"

검은 대검을 쥔 진현우가 나타났다.

이대건이 환희에 찬 외침을 내질렀다.

48화

오크 슬레이어

오크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우리는 많은 오크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겼다! 두 부족을 멸망시키기도 했다!

―송곳니 부족은 강하다, 동족들이여!

여태껏 승리를 거듭해 온 송곳니 부족.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그들은 어떤 적을 상대로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이제 저놈들과 같은 오크가 아니다!

두 부족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 송곳니 부족의 오크들은 한 단계 진화했다.

평범한 오크가 아닌 '블러드 오크'라 불리는 우월종, 평균 70레벨의 플레이어는 되어야 사냥할 수 있는 몬스터로.

당연한 자신감이라 할 수 있었다.

―건방진 인간 놈, 혼자서… 크아아악!

―너, 너무 강하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지금 무너졌다.

그들의 배후에서 나타난 검은 대검을 쥔 남자, 진현우라는 플레이어에 의해서.

―카드드득!

진현우는 거칠게 대검을 휘둘렀다.

아무런 기교도 없었다. 그저 힘에 의존하기만 하는 베기였지만,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그 대검을 받아 내려던 오크의 도끼가 부서졌고, 놈을 보호하던 갑옷이 갈라졌다.

―카아아아악!

오크의 곁에 있던 다른 오크들도 그 일격에 휩쓸렸고, 단번에 목숨을 잃었다.

어떠한 기교도 없는 공격이거늘 저 공격에 담긴 힘을 오크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블러드 오크로 진화했음에도.

―뭐, 뭐냐, 이 힘은....

―그리고…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진현우는 오크들을 학살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본 오크들은 두려움을 느꼈고,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는 대검을 있는 힘껏 투척했다.

―콰드드득!

일직선으로 쏘아진 대검이 다수의 오크들을 꿰뚫고 땅에 처박혔다.

곧바로 돌진한 진현우는 대검을 회수하고,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흐으읍!"

―콰아아앙!

진현우가 땅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대검에서부터 거대한 충격파가 일어나더니, 땅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충격파에 휘말린 오크들이 갈기갈기 찢어지면서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으, 으아아아아!

―괴물, 저놈은 괴물이다!

겁에 질린 오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진현우는 놈들을 도끼로 죽이면서,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대건에게 다가갔다.

"...."

"왜 그렇게 쳐다봐요?"

"그러면 안 쳐다보게 생겼습니까?"

이대건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그의 곁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진현우가 보여 준 전투가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20레벨이라면서...?'

'저런 20레벨이 세상에 어딨어?'

'진현우? 들어 본 적 없는 사람인데?'

진현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무명. 게다가 분명 레벨은 20레벨이라고 했다.

그런 남자가, 자신들도 상대하기 버겁던 저 빨간 오크들을 학살했다. 그것도 혼자서.

물론 그게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오크 슬레이어 (영웅)]

―효과: 오크 학살자, 복수의 룬 (해방), 광역 공포, 피에는 피를.

―스킬: 쇼크 웨이브.

* 오크 학살자: 오크와 싸울 때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하며 대미지가 40% 상승한다. 또한 신체 속도가 30% 빨라진다.

* 복수의 룬 (해방)

* 광역 공포: 오크들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공포에 걸린 오크는 능력치가 감소한다.

* 피에는 피를: 스킬, '피에는 피'가 부상을 입지 않았어도 최대 효과로 발동한다.

* 쇼크 웨이브: 땅을 타고 전방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킨다.

오크 슬레이어.

시간을 들여서 오크들을 처리한 진현우는 복수의 룬을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물이 저것이었다.

'이거 해방하려고 오크 몇 마리를 잡았냐.'

게다가 지속 시간도 길지 않다.

이제 기껏해야 몇십 분 정도만 남았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사용자는 강화하면서 오크들은 약화하는 효과였으니까.

"이대건 씨, 그런 눈으로 그만 쳐다보시고 사람들 치료나 좀 해 주세요."

"아, 예. 그래야죠."

"근데 진현우 님, 지유하고 수현이가 안 보이는 거 같습니다? 어디 갔습니까?"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박동욱이 그리 물었다. 진현우가 어색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따로 맡은 일이 있어요. 걔들이 뿔에 치여 죽기 전에 빨리 가야 합니다."

"뿔에 치여 죽는다고요?"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 숨겨 두고 다른 분들은 절 따라오세요."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진현우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았지만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그는 숲 저 너머를 바라봤다.

"최유성이 간 곳으로 가야죠. 그놈, 아마 지금쯤 칼마칵한테 죽기 직전일 겁니다."

* * *

사방이 오크다.

최유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X발, X발… 이런 X발!"

수많은 오크가 몰려들고 있다.

피부는 시뻘겋고, 평범한 초록색의 오크보다 1.5배 정도 덩치가 더 큰 놈들이.

최유성은 이를 악물며 대검을 내질렀다.

"이 개새끼들이! 우리를 어떻게 안 거야!"

―멍청한 인간 놈, 모를 것 같았나!

―칼마칵은 네놈들보다 똑똑하다!

최유성은 오크들의 너머에 있는 놈, 오크 중에서도 유독 큰 덩치를 가진 놈을 봤다.

칼마칵, 송곳니 부족의 부족장.

놈이 히죽 웃었다.

―고맙다, 인간! 네놈들의 도움이 있어서 다른 부족들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우, 우리를 이용했다는 거야?"

"오크 주제에...!"

칼리 길드원들은 최유성을 중심으로 뭉쳐서, 몰려드는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나약하다!

"아아악!"

오크들의 힘이 너무 강하다.

길드원이 내지른 검이 오크의 도끼에 부딪쳤다. 놈은 시시하다는 듯이 히죽 웃더니, 힘을 실어서 검을 힘껏 밀쳐 냈다.

도끼가 길드원의 어깨를 강타했다.

"X발, 내 어깨가! 크으윽!"

"스, 승현아!"

"이놈들 왜 이리 센 거야!"

다른 길드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숫자도 적은 상황인데, 이쪽이 오크들보다 강하다고 확언할 수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오크들은 부족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실전을 겪은 놈들.

―칼날 부족보다도 약한 놈들!

―인간의 살점이 무슨 맛인지 궁금하구나!

"이, 이게 오크라고?!"

"형! 저것들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있다면서요! 칼마칵 죽이러 온 거 아니었… 끄악!"

칼리 길드원이 송곳니 부족의 오크들을 막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건 최유성뿐이었다. 80레벨의 장래가 유망한 플레이어.

하지만.

'제길, 신체 능력이....'

이 망할 놈의 보정.

보정이 적용된 신체는 3층에 있을 때보다 약하고, 훨씬 느리게 느껴졌다.

덕분에 신체 감각이 이상하다.

―그 대검을 칼마칵에게 바치겠다!

"오크 새끼가...."

달려드는 오크들.

최유성은 이를 악물며 스킬을 썼다. 대검에 마력이 모였고, 검신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일섬.

"…건방지게!"

―화르르륵!

대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붉게 물든 검신이 타오르더니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검기를 내뿜었다.

검기가 달려들던 오크의 허리를 반으로 가르고, 그 뒤에 있던 오크들도 덮쳤다.

'오크 따위가, 뭐? 날 이용해?'

순식간에 빈자리를 메우는 오크들.

최유성은 대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면서, 자신의 앞을 막는 오크들을 베어 넘겼다.

"덤벼, 이 개새끼들아!"

최유성은 대검을 높이 들어 올렸고 붉은 마력이 다시금 검신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가 땅을 내리치자, 대검을 중심으로 화염 폭풍이 일어나 적들을 덮쳤다.

―카아아악!

―뜨, 뜨겁다! 아아악!

불길에 휘말린 오크들이 타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 길드원들이 감탄했다. 최유성은 그들이 보기에도 개차반인 인성을 갖고 있지만, 실력은 확실하다.

칼리 길드가 최유성이 계속 터트리는 논란을 감안하고 데리고 있는 이유다.

'최유성만 있으면 어떻게든 안 될까?'

'저 오크 놈들도 어떻게든...!'

칼리 길드원들이 희망을 가졌다.

최유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라면 저 오크들을 다 죽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여기가 너희들 무덤이다, 이 새...!"

그렇게 외치면서 미친 듯이 대검을 휘두르던 최유성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그의 직감이 뭔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쿠우웅!

"...!"

최유성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도끼가 꽂히면서 충격파가 일어났다.

―네놈은 내가 직접 처리해 주마.

"시건방진 새끼가!"

칼마칵이었다.

격노한 최유성이 곧바로 돌진했고, 둘 사이에서 격한 전투가 벌어졌다.

대검과 도끼가 맞부딪친다.

―카앙! 카드드득!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맞부딪치고 튕기는 두 무기. 그때마다 최유성과 칼마칵의 팔이 크게 밀려났다.

근처에 있는 이들이 보기에는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팽팽한 공방이었다.

"크윽...!"

―카아아! 인간, 팔이 떨리는구나!

하지만 아니었다.

여유롭기 그지없는 칼마칵과는 달리 최유성의 얼굴이 힘겨운 듯 일그러졌다.

'이 힘은, 대체...!'

도끼를 쳐 낼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손이 얼얼하고 팔이 떨릴 정도다.

칼마칵보다 자신의 근력이 낮다는 증거다.

'그럴 리가! 아무리 보정이 있다고 해도!'

권장 레벨 30 수준밖에 되지 않는 오크를 상대로 자신의 힘이 밀린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이 안 된다.

"큭, 으으으윽!"

근데 그게 벌어지고 있었다.

맞부딪치는 도끼와 대검. 최유성은 칼마칵과 힘을 겨뤘다. 처음에는 팽팽해 보였지만, 점점 대검이 뒤로 밀리고 있다.

'이, 이게, 오크라고?'

믿기지 않는 괴력.

원래 이렇게 강했던가? 아니다. 처음 봤던 칼마칵은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놈은 성장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으아아아아!"

그렇다고 질 수는 없다.

최유성은 마지막 힘을 짜내서 도끼를 쳐 내려고 했다. 그러자 칼마칵이 어딘가에 숨어 있던 부하에게 눈짓했다.

―푸욱!

"크아악!"

갑자기 날아든 화살이 최유성의 옆구리를 찔렀다. 갑자기 엄습한 통증에 대검을 쥐고 있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빠졌고.

―서걱!

"어, 어어?"

그건 치명적이었다.

칼마칵은 최유성의 대검을 밀쳐 냈고, 마력을 머금은 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날카로운 절삭음. 최유성은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으아아아악!"

최유성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손에 쥐었던 대검이 땅을 나뒹굴었다. 그는 어깨를 부여잡으면서 신음했다.

여태껏 느낀 적 없는 끔찍한 고통.

"비, 비겁...!"

―크흐흐, 멍청한 인간 놈. 정정당당하게 일대일 승부라도 해 줄 줄 알았나?

칼마칵이 최유성의 배를 걷어찼다.

바닥을 나뒹구는 몸뚱어리. 최유성이 떨리는 눈동자로 칼마칵을 올려다봤다.

―여기서 끝이다, 인간.

칼마칵이 천천히 걸어온다.

최유성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봤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이는 없는가?

아무도 없었다. 칼리 길드원들은 오크들한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죽는다.'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고 난 후부터는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생각.

그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으, 으으...."

칼마칵이 점점 다가온다.

최유성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아!"

칼마칵이 바로 코앞까지 왔을 때, 최유성의 신음은 이윽고 비명으로 바뀌었다.

놈이 도끼를 높이 들었다. 서늘하게 빛나는 도끼날이 최유성의 머리를 내리친다.

―파아아앙!

"허억!"

바로 그때.

―크으윽?!

―아악! 눈, 내 눈이!

어디선가 빛이 터졌다.

마치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폭음이 울렸고, 순간적으로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오크들이 눈을 감싸며 신음했다.

―두두두두두두....

그리고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무언가가 뛰어오는 소리. 동시에 격하게 진동하는 땅.

칼마칵은 소리가 들린 곳을 봤다.

―콰지직!

―부오오오오오!

그가 본 것은 나무들이 부러지는 것.

그리고 나무들을 뿔로 꿰뚫으면서 돌진해 오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혼 보어들이었다.

―크아아아악!

―호, 혼 보어가 왜… 으아악!

돌진하는 혼 보어들에게 휩쓸리는 오크들. 당황한 칼마칵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돌진했다.

"선물이다, 이 새끼들아!"

진현우.

그가 칼마칵에게 달려들었다.

49화

뭘 잘했다고 눈을 떠?

혼 보어들과 함께 돌진하는 진현우.

당황한 칼마칵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우, 우욱?!

순식간에 칼마칵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인영. 그가 땅을 짓밟으며 진각을 밟았다.

동시에 크게 젖힌 주먹을 내질렀다.

―쿠우우웅!

―커, 헉...!

어마어마한 충격이 칼마칵의 복부를 엄습했다. 웬만한 충격은 무시할 수 있는 두꺼운 강철 갑옷을 입었는데도.

칼마칵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이, 이게 무슨....

건틀릿을 낀 주먹이 칼마칵의 복부를 강타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일격에 고물처럼 짓이겨진 자신의 강철 갑옷도.

칼마칵의 입이 벌어졌다.

―크으윽!

―카드드득!

충격을 추스를 틈도 없이 검은 대검이 칼마칵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황급히 도끼를 세워 대검을 막아 냈지만.

'말도 안 되는 괴력...!'

공격을 받아 낸 칼마칵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황당함에 젖은 눈동자로 진현우를 봤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숲에 침묵이 감돌았다.

수많은 오크와 소수의 플레이어가 있는 숲속, 진현우와 칼마칵이 서로 대치했다.

"으, 으으… 저, 저 새끼가 왜...."

쓰러진 최유성은 오른팔이 있던 자리를 감싼 채, 떨리는 눈으로 진현우를 봤다.

첫날 도망쳤던 놈 아닌가. 그놈이 왜.

"...."

진현우의 무심한 시선이 최유성을 향했다. 오른팔을 잃고 만신창이가 된 그를.

'쟤가 원래 팔을 잃었던가?'

최유성을 보니 조금 의아했다. 분명 전생에서는 두 팔이 멀쩡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황이 달라졌나. 뭐가 어찌 됐든.'

진현우는 눈앞의 적을 봤다.

송곳니 부족의 부족장, 칼마칵. 자신이 할 일은 저놈을 이곳에서 죽이는 것이다.

―크윽....

칼마칵은 자신의 복부를 감쌌다.

특수한 방법을 써서 만든 갑옷이거늘, 주먹질 한 방을 못 견디고 찌그러졌다.

그뿐인가.

'조금 전의 그 힘은 대체 무엇이냐?'

다른 부족의 오크들을 흡수하면서 신의 가호를 받은 자신을 밀어 낼 정도의 근력.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럴 리가.

칼마칵이 이를 갈았다.

그럴 리가 없다. 평범한 오크에서 몇 단계를 진화한 자신을 근력으로 이기다니.

그가 도끼를 움켜쥐었다.

―카아아!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칼마칵이 노성을 터트리며 돌진했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진현우는 검은 대검을 꽉 쥐면서 놈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일섬.

―카드드득!

―크으윽?!

거대한 대검이 도끼를 강타했다.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 칼마칵의 오른팔을 엄습했다. 놈은 두 팔에 힘을 담으며 도끼에 마력을 실었다.

―크아아아!

붉은 기운을 머금은 도끼가 진현우의 목을 노렸다. 그리고 정확하게 동시에 검은 대검이 칼마칵의 도끼와 맞부딪쳤다.

―파아앙!

두 무기가 맞부딪치며 충격파가 일어났다.

하지만 진현우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반면 칼마칵의 팔은 미세하게 떨렸다.

―우오오오오!

칼마칵은 신체 능력을 고취하는 워 크라이를 내지르면서 도끼를 미친 듯이 내질렀다.

숨 쉴 틈 없는 연속 베기가 진현우를 덮쳤다. 그리고 거기서 그가 선택한 것은.

―이놈...!

밀어닥치는 공격을 맞받아치는 것.

진현우는 계속해서 밀어닥치는 공격을 침착하게 모조리 대검으로 받아쳤다.

팽팽한 공방이 펼쳐졌다.

―오오, 칼마칵! 대단한 실력이다!

―이전보다 더 발전했다! 저 인간 놈이 칼마칵의 도끼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진현우와 맞서는 칼마칵은 직감했다. 이 공방은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고.

'몸이 이상할 정도로 무겁다. 왜냐?!'

진현우, 저 인간이 예상 밖의 근력을 가진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칼마칵이 자신이 가졌던 힘을 다 못 내는 것도 컸다.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소리, 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소리까지 들렸다.

누군가의 원한 가득한 목소리. 강인한 칼마칵에게도 공포를 느끼게 하는 목소리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칼마칵은 치열한 공방을 펼치면서, 그걸 지켜보던 부하들에게 다급히 눈짓했다.

놈들이 독이 묻은 화살을 장전했다.

'쏴라, 지금!'

그리고 화살을 쏘려는 순간.

―커윽!

―끄아아악!

진현우의 왼손에서 검은 화살들이 나타나더니 화살을 쏘려는 오크들을 덮쳤다.

정확히 손목을 강타하는 검은 화살들. 오크들이 그 충격에 활을 놓치고 말았다.

―어, 어떻게!

"그대로 돌려줄게."

진현우가 쏘아 낸 검은 화살들이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칼마칵의 살을 찔렀다.

생각보다 통증은 크지 않다. 그런데.

―허, 허억!

검은 화살에 찔린 순간, 칼마칵의 전신에 까닭 모를 탈력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도끼를 쥔 손의 힘이 빠졌다.

―크아아악!

그리고 그건 치명적이었다.

진현우는 두 팔에 힘을 실었다. 푸른 마력이 어린 대검에 날카로운 검기가 어렸다.

―카아앙!

―...!

대검이 칼마칵의 도끼를 강타했다.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칼마칵이 도끼를 놓쳤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허억!

순식간에 좁혀지는 거리.

휘둘러지는 대검이 칼마칵의 복부를 베었다. 저절로 놈의 허리가 굽혀졌다.

그리고 그 목을 내리치려는 순간.

―카, 칼마칵! 위험하다!

―그아아악!

지켜보던 칼마칵의 부하들이 난입했다.

오크 하나가 칼마칵을 밀치더니 놈을 대신해서 진현우의 대검을 받아 냈다.

다른 놈들은 진현우를 포위하여 공격하려 했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커헉!

―끄어어....

크게 휘두른 대검이 오크들을 낙엽처럼 베어 냈다. 진현우는 자신을 가로막는 오크들을 베어 내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부, 부족장을 지켜야 한다!

―크아아악!

칼마칵의 앞을 수많은 오크가 지켰지만, 그 누구도 진현우를 막아서지 못했다.

적을 베고, 도끼를 투척하고, 주먹으로 짓이기면서 단신으로 적들을 학살했다.

그 모습을 본 칼리 길드원들이 경악했다.

"야, 저게… 가능한 거냐?"

"나, 나도 몰라. 나한테 물어보지 마."

"최유성도 못 했던 걸...."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최유성은 칼마칵을 이기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하지만 저 남자는 칼마칵을 꺾고 다른 오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혼자서 어떻게 저럴 수가.'

칼마칵도 경악한 건 매한가지였다.

자신의 앞을 지키던 오크들이 쓰러지고 있다.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진현우는 금방이라도 그에게 도달할 것만 같았다.

그뿐인가.

―아, 안 돼! 저놈은 이길 수 없다!

―으아아아악!

―어딜 가는 거냐! 돌아와!

겁에 질린 오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칼마칵이 그들을 불러 세웠지만, 도망치는 오크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로서는 황당할 노릇이었다.

'안 된다. 이대로는 불리하다.'

칼마칵은 빠르게 판단했다.

여기서 물러나서 야영지로 가야 한다. 그리고 남은 전사들과 합류해서 반격해야 한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너희는 이 자리를 사수해라! 저놈이 쫓아오지 못하게끔 시간을 끌어라!

―하, 하지만, 칼마칵!

―부족장의 말을 들어라!

칼마칵은 당황한 부하들에게 강제로 명령을 내리고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이 자식들이, 어딜 가려고!"

―큭...! 저놈들은!

칼마칵이 도망칠 수 있는 퇴로를 갑자기 나타난 플레이어들이 틀어막았다.

이대건을 비롯한 야영지에 있던 플레이어들.

―내 앞을 막지 마라!

칼마칵은 황급히 길을 뚫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진현우의 행동이 빨랐다.

―크아악!

회전하면서 날아온 다수의 도끼가 칼마칵의 두 발목을 강타했다.

끔찍한 고통에 무릎을 꿇은 칼마칵.

―커헉!

―으으윽....

칼마칵의 곁을 지키던 오크들의 허리가 갈라졌다. 그리고 피로 흠뻑 젖은 거대한 대검이 칼마칵의 바로 옆에 꽂혔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대검을 봤다.

"어딜 도망치려고?"

―자, 잠...!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킨 진현우의 대검이 칼마칵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만신창이가 된 칼마칵의 몸이 축 늘어졌다. 오크 슬레이어가 그 목을 내리쳤다.

그걸로 끝이었다.

―우아아악!

―부, 부족장이 죽었다!

겁에 질린 오크들이 도망쳤다.

진현우는 놈들을 바로 추적하기보다는 먼저 플레이어들을 추스르는 것을 택했다.

"거기, 괜찮습니까?"

"네? 아, 예, 예...."

"그거 다행이네요."

칼리 길드원들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들이 진현우를 보는 시선은 묘했다. 고마움과 두려움이 절반씩 섞인 눈빛.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최유성, 이 개새끼. 저런 사람을 상대로 쓸데없이 갑질은 왜 해서는!'

그래도 챙겨 주는 걸 보면 최유성이 갑질했던 걸로 뭐라 할 것 같지는....

―푸욱!

"그럼 거리낄 것 없이 캐낼 수 있겠네."

"히이익!"

칼리 길드원들이 그리 생각한 순간, 거대한 대검이 그들의 바로 앞에 꽂혔다.

수많은 오크의 피를 머금은, 그리고 지금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대검이.

"캐, 캐낸다니, 뭘요?"

"그걸 몰라서 물어? 너희하고 박명준, 그 새끼가 뒤에서 맺은 계약 말이야."

"계약이라니...."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박명준은 왜 하필이면 칼리 길드를 선택했는가? 더 번듯한 길드들도 많이 있는데.

그 배후에는 놈들만이 아는 계약이 있을 터.

"계약? 계약은 무슨 얼어 죽을 계약이야!"

"오, 발뺌을 하시겠다?"

진현우는 최유성에게 다가갔다.

놈이 분노 어린 눈을 치떴다.

"이 개새끼가! 우리 천막도 다 불태우고 도망가더니 이제야 모습을… 억!"

"뭘 잘했다고 눈을 떠? 엉?"

"커헉!"

진현우는 가차 없이 최유성의 명치를 걷어찼다. 놈의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연이어 주먹질이 그를 덮쳤다.

"공격대 퀘스트를 터트릴 뻔한 새끼들이 뭘 잘했다고 웃어? 야, 말 안 해?"

"컥! 어억! 아아악!"

진현우의 손길에는 자비가 없었다.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최유성은 이런 치욕을 겪은 적이 없다.

그는 도와줄 사람을 찾았지만.

"꼴 좋다, 개새끼들."

"자기들이 퀘스트 해결해 줄 거라면서 온갖 갑질은 다 하더니, 참 나."

그럴 사람은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진현우와 마찬가지로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마칵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지만 자신들을 버리고 간 이를 왜 돕겠는가?

"...."

"...."

칼리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현우가 무섭기도 했고, 자신들을 이 처지로 몰아넣은 최유성이 밉기도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

"억! 어어억!"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겁에 질린 최유성이 다급히 외쳤다.

"그, 그래! 계약했어! 계약했다고!"

"이제야 입을 여네. 확실해?"

"확실해! 내, 내가 직접 들었어!"

진현우는 그제서야 주먹질을 멈췄다.

그리고 불길한 미소를 짓더니 기록용 수정구를 최유성의 코앞까지 들이댔다.

"너희가 한 짓을 다 증언해라."

"...."

최유성은 눈앞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증언하라고? 칼리 길드가 박명준하고 뒤에서 맺었던 계약을? 그러면 난 끝이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저놈한테 끝장나겠지.'

선택지가 없었다.

최유성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 * *

최유성과 칼리 길드원들은 자신들의 길드가 박명준과 맺었던 계약을 털어놨다.

―도, 돈의 일부를 박명준한테 주기로 했어. 우리한테 일거리를 밀어주는 대가로!

진현우는 최유성에게 계약의 상세한 내용을 캐냈고, 그 사실을 모두 기록했다.

'이게 칼리 길드한테 치명적이진 않겠지.'

다만 박명준한테는 치명적일 것이다.

길드인 칼리와는 다르게 박명준은 개인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 터.

"진현우 씨, 봤습니까? 저놈들 바짝 쫄았던데요. 흐흐, 보니까 속이 통쾌하네요."

이대건이 진현우에게 다가왔다.

칼리 길드원들이 골탕을 먹는 게 기분이 좋았는지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쉽게 말 안 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입이 가벼운 놈들이더군요."

"입이 가볍다기보다는, 그야 뭐...."

이대건이 진현우의 대검을 흘깃 봤다.

조금 전에 저걸로 인간 흉기처럼 오크들을 난도질하고 다녔는데 겁을 안 먹겠는가.

"아니, 근데 언제 그렇게 강해진 겁니까? 폐광에서 만났을 때도 강하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좀, 예상 밖인데요?"

"음...."

이대건은 크게 놀란 눈치였다.

진현우의 전투력은 20레벨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보정을 받았다고는 하나 80레벨의 플레이어인 최유성보다 강하다고 느낄 정도.

"템빨이죠, 뭐."

"템빨이라고요? 거짓말도 참."

진현우는 솔직하게 밝혔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람들 추스르세요. 남은 오크들 처리하고 돌아가야죠. 아, 그리고...."

진현우는 숲 저 너머를 봤다.

―아아아악! 언제까지 도망쳐야 하는 거야!

―이 망할 멧돼지들이...!

"…지유하고 수현이도 도우러 갑시다."

진현우와 함께 여기까지 혼 보어를 끌고 왔던 정지유와 정수현이 아직 쫓기고 있다.

그들을 혼 보어들로부터 구해 줘야 한다.

50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기여도

진현우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협력하여 도망친 오크들을 추적해서 사냥했다.

모든 부족이 부족장을 잃은 상황. 남은 오크들을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저놈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는데요?"

"내분이 일어난 거겠죠."

진현우가 예측했던 대로 강철 부족과 늑대 부족은 내분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누가 새로운 부족장이 될 것이냐. 그 문제를 놓고 강한 오크들이 서로 자기가 부족장이 될 것이라면서 나선 결과였다.

―크아아악!

―빌어먹을 인간 놈들!

진현우는 놈들을 착실하게 처리했다.

제일 까다로운 진화한 송곳니 부족은 진현우가 앞장서서 전투를 이끌어 나갔다.

이번에는 혼 보어를 이용하지 않았다.

"대건 오빠! 저 오빠 또라이야!"

"헉, 허억...."

정지유와 정수현이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달려드는 멧돼지 떼들을 투우사처럼 피해 다녔으니 질릴 수밖에.

―커헉...!

"진현우 씨, 이놈이 마지막 아닙니까?"

"글쎄요."

플레이어 중 하나가 송곳니 부족의 마지막으로 남은 오크를 처리했다.

다른 부족은 다 처리한 상황. 송곳니 부족 말고는 이 숲에 남은 부족은 없다.

주변에 오크들 역시 없었다.

"끝났으면 메시지가...."

진현우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나서였다.

―'대수림'에 남은 오크들이 전투 의욕을 잃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오크들이 벌이던 부족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나올 텐데, 나왔네요."

퀘스트의 끝을 알리는 메시지.

생각보다 평범한 메시지다. 하지만 이 뒤에 이어지는 보상은 평범하지 않았다.

―'오크 부족 전쟁'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이번 공격대 퀘스트 공략에 각 플레이어가 기여한 정도를 측정합니다. 그 정도에 따라서 각기 다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기여도 측정 중.... 최고 기여도를 달성한 사람을 선정하고 있습니다.

뭔가를 로딩 하는 듯한 메시지가 나왔다.

그러자 흐릿한 빛무리가 나타나더니 모여 있던 플레이어 사이를 바삐 오갔다.

점점 빛무리가 짙어지고 있다.

'최고 기여도? 뻔한 거 아냐?'

'진현우, 저 사람이겠지.'

플레이어들은 모두 그리 생각했다.

그 생각대로, 사람들 사이를 오가던 빛무리가 진현우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파아앙!

―축하드립니다. 이번 공격대 퀘스트에서 가장 높은 기여도를 달성하셨습니다.

―진현우: 91.15%.

진현우의 머리 위에서 빛무리가 터지더니 맥 빠지는 빵빠레 소리를 냈다.

그는 시야를 가리는 가루를 털어 냈다.

"...."

"...."

주변에 침묵이 감돌았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기여도를 확인했고 놀란 눈으로 진현우를 응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91%라고?'

'높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로 높다고? 저 수치가 가능한 거야?'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수친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여도.

91%면 사실상 이번 퀘스트를 혼자서 깼다는 거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당연하지만.

―기여도에 적합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영웅 등급의 아이템 '실피르' 그리고 30,000G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91%의 보상은 남달랐다.

진현우의 머리 위에서 폭발한 빛무리. 그 가루가 뭉치더니 형상을 갖추었다.

바로 아이템의 형상을.

[실피르 (영웅)]

· 설명: 엘프 여왕이 사용했던 활이다. 그녀의 힘 일부가 활에 담겨 있다.

·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 옵션: 여풍의 화살, 분열 화살, 저격.

* 여풍의 화살: 쏘아지는 화살에 바람이 깃들어 위력과 속도가 향상된다. 또한 화살의 관통력이 크게 강화된다.

* 분열 화살: 정신을 집중하여 활을 쏠 경우, 화살이 분열하여 쏘아진다.

* 저격: 표적과의 거리가 멀수록 화살의 위력이 최대 50%까지 강화된다.

무려 영웅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지금 진현우에게는 궁술과 관련된 스킬이 없다. 하지만 그건 배우기만 하면 될 일.

'실피르면 꽤 오래 쓸 수 있는 무기지.'

진현우는 실피르를 만족스럽게 챙겼다.

그리고 또 다른 보상들이 주어졌다.

―공격대 퀘스트에서 90%의 기여도를 달성한 보상으로 칭호, 공격대의 영웅 (영웅)을 획득했습니다.

[공격대의 영웅 (영웅)]

―효과: 공격대 퀘스트를 수행할 때 능력치와 대미지가 +5% 증가함.

이전에 게이트를 공략한 보상으로 받았던 '나 혼자서 한다' 칭호와 비슷한 효과였다.

차이가 있다면 이건 퍼센트가 적다는 것.

어쨌든 좋은 보상이었다.

―퀘스트 '호그림의 부탁 – 복수'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하며 '피에는 피' 스킬이 강화됩니다.

· 피에는 피 (B, Lv.2): 사용자가 입은 부상의 정도에 따라서 신체 능력을 강화한다. 사용자가 다쳤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

* 강화: 신체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된다.

가장 먼저 것은 사념 퀘스트의 보상.

그리고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다.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크 300마리를 죽일 것.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오크 학살자 (효과: 오크에게 주는 대미지 +15%, 오크들 사이에서 악명이 퍼짐)]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3단계 상승했습니다!

진현우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번 퀘스트 하나로 능력치가 얼마나 오른 건지. 게다가 레벨도 꽤나 올랐다.

그는 메시지를 끄고 실피르를 손에 쥐었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보상이네.'

실피르.

나무로 만든 활이었는데, 신비로운 청록색의 기운이 활을 감싸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아 보였기에 주변 플레이어들이 부러운 눈으로 봤다.

"뭐 많이 얻으셨습니까?"

"와, 오빠. 그 활 엄청 좋아 보여요."

"…내 기여도가 3%밖에 안 된다고? 그래도 칭호를 얻었으니 다행인가...."

"저도 1%대밖에 안 되는군요. 으음...."

진현우 곁에 있던 이대건 파티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그 말에 대답하려 했지만.

―파아앗!

'그래. 아직 보상이 남았단 말이지.'

갑자기 시야가 아득해졌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더니 빨간색의 물감을 뿌린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카아… 재밌군, 참으로 재밌구나!

낯선 목소리다.

하지만 말하는 어투가 익숙했다. 진현우가 질리도록 사냥한 오크의 어투다.

―인간! 내가 만든 전장에 멋대로 끼어들었구나. 원래라면 내쫓는 것이 옳으나, 즐거웠으니 이번만큼은 예외로 하겠노라!

광기에 젖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새빨갛게 물든 풍경 속에, 이치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음을 직감했다.

신. 바로 오크들이 섬기는 신이다.

―흐흐, 나는 약속을 지킨다. 너는 훌륭한 전사이며 수많은 적의 피를 머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재밌게 만들었지!

그는 말했었다.

전사들이 피의 축제를 벌일 것을. 그리고 서로를 죽이고 적들의 피를 머금을 것을.

다만 그 주체나 대상이 '오크'로 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전사일 뿐.

―축하한다, 인간.

그렇기에 진현우는.

―너는 내 축복을 받았노라.

원래라면 부족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받아야 할 축복을 대신 받게 되었다.

새빨갛게 물든 풍경 속에서 불길할 정도로 붉은 한 송이 꽃이 나타났다.

진현우는 그 꽃을 받았다.

"…진현우 씨, 진현우 씨!"

누군가 몸을 흔드는 게 느껴졌다.

진현우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옆에서 이대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갑자기 멍하니 서 있던데."

"제가 그러고 있던가요?"

"예. 갑자기 그러시더라고요. 근데… 응?"

"오빠, 그 꽃은 뭐에요? 특이하게 생겼네."

정지유가 진현우의 손을 가리켰다.

그의 손아귀에는 줄기가 없는 꽃이 있었다. 피를 머금은 것처럼 새빨간 꽃이.

[전장에 핀 꽃 (전설)]

· 설명: 전장에 흐른 수많은 피를 머금고 핀 꽃이다. 오크들이 섬기는 신이 당신을 위하여 축복 대신 내린 선물이다.

이 아이템은 진현우에게 귀속되었다.

· 효과: 모든 능력치 +10, 두 개의 공통 스킬을 상위 등급의 스킬로 강화할 수 있음.

전장에 핀 꼿.

진현우가 브로큰 월드를 했던 당시에 받은 적이 있는 아이템이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과연 신이라고 해야 하나.'

브로큰 월드에는 신들이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존재는 한다는 수준이고 게임 내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주로 유저에게 퀘스트를 내리는 역할을 맡는데, 그 보상이 후하기로 유명했다.

'이것도 일종의 퀘스트라 볼 수 있겠지.'

원래는 오크들에게 내렸던 퀘스트를 진현우가 빼앗아서 완수한 형태가 됐지만.

아무래도 좋다.

"…보상으로 얻은 거야. 야, 돌아가는 게이트 열렸다. 최유성 저놈부터 챙기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칼리 길드원들이 최유성을 챙겼다.

그는 오른팔을 잃은 상태. 혼 보어들이 날뛰면서 오른팔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지금 의학이 발전했어도 아예 사라진 팔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단 말이지.'

주로 쓰던 무기도 대검이었으니 왼손 하나만으로 다루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최유성의 플레이어 생활이 힘들 것이 뻔히 보였다. 진현우 역시 의수와 의족으로 생활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 그게 내 알 바냐.'

미래에 큰 걸림돌이 될 최유성의 성장 가능성을 꺾어 둔 셈이니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얻은 게 많은 퀘스트였어."

"그래요?"

"어."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거대한 문이 만들어졌다. 들어올 때 봤던 것과 똑같이 생긴 문이었다.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렸다.

"돌아가자."

플레이어들은 게이트를 넘었다.

* * *

탑 2층의 플레이어 협회 지부.

박명준과 우석형은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면서 최유성 공격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 씨, 돈 엄청 꼴았네. 아! 이번에는 진짜 느낌 좋았는데. 이번에는 될 것 같았는데!"

"...."

정확하게 말하면 우석형만 일했다.

박명준은 잠깐 갈 데가 있다면서 나가더니, 어디서 또 도박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큰돈을 잃은 채로.

"아오, 우 과장. 오늘로 며칠째야?"

"정확하게 일주일입니다, 부장님."

"하, X발. 최유성 그 인간 히든 클래스라고 빨리 깨고 나올 거라고 하더니만."

박명준은 혀를 찼다.

여태껏 칼리 길드한테 일을 몰아주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그들이 실력이 있으니까.

만약 그 전제가 깨진다면 앞으로 칼리 길드한테 일을 몰아주기가 힘들어진다.

"우 과장, 칼리 길드가 잘하고 있겠지?"

"예? 뭐, 그렇지 않을까요?"

우석형은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진현우, 그 사람이 대단하긴 하던데.'

예상 밖의 변수.

A 등급 게이트를 혼자서 공략하다시피 한 사람인데 이번에도 사고를 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였다.

"에이 씨, 몰라. 그 새끼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아, 우 과장. 나는 조금 잘 테니까...."

그들이 돌아오거든 깨워라.

박명준이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쿠우웅!

"으헉!"

포털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해먹에 누워 있던 박명준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협회에 있던 포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스으으윽!

포털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주일 동안 대수림에서 싸우느라 만신창이가 된 플레이어들. 당장 나서서 그들을 반기려던 박명준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저놈이 왜 제일 앞에 있어?'

최유성과 칼리 길드원들이 아닌, 진현우와 이대건 파티가 가장 앞에 있었다.

박명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뛰쳐나갔다.

"오오! 돌아오셨군요, 최유성 님! 다른 칼리 길드원분들도 수고하셨습니다!"

박명준은 선두에 있던 진현우와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후방에 있던 이들에게 갔다.

바로 최유성과 칼리 길드원들에게.

"잘 오셨습니다. 자, 일단 다 같이 기록구로 사진 한 장 찍고… 응? 분위기가 왜...."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다.

칼리 길드원들은 어색한 듯 눈을 돌리고 있었고, 최유성은 넋을 잃은 상태.

"하하, 분위기가 왜 이렇습니까? A 등급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오셨는데. 여러분이 힘쓰셔서 공략한 퀘스트 아닙니까!"

박명준은 칼리 길드만 신경 쓰고 진현우 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어? 최유성 님, 오른팔이...."

망토를 두른 최유성의 오른팔 부분이 부자연스럽게 펄럭거리는 걸 알아챈 것이다.

마치 오른팔이 없는 것처럼.

"...."

"...."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칼리의 길드원인 정현철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공략한 거 아닙니다."

"예? 그게 무슨...."

"아저씨, 귀먹었어? 우리가 공략한 거 아니라고. 저기, 저 사람이 공략했어요."

정현철이 진현우를 가리켰다.

그제야 진현우가 있는 곳을 본 박명준의 얼굴이 당황한 듯 구겨졌다.

"농담도… 겨우 20레벨인 플레이어가 어떻게 A 등급 퀘스트를 공략했다는 겁니까?"

"하, X발. 말을 못 알아 처먹네. 우리가 한 거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해!"

"저, 정현철 님? 어억!"

정현철이 거칠게 박명준을 밀쳤다.

바닥에 나자빠진 그를 놔두고 칼리 길드원들은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났다.

최유성은 아예 챙기지도 않았다.

"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박명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진현우였다.

"박명준 부장, 맞나?"

박명준의 시선이 진현우를 향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품속에서 기록용 수정구를 꺼내서 보여 줬다.

수정구가 화면을 비췄다.

―박명준, 그놈이 먼저 제안했어! 지원금을 몰아줄 테니까 자신한테 좀 나눠 달라고!

"...."

박명준에게는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는 멍하니 수정구를 봤다.

진현우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걱정 마. 깨어나면 감옥일 테니까."

"무, 무슨… 커헉!"

뻐억!

무슨 일인지 따지려던 박명준의 안면을 진현우의 주먹이 강타했다.

날아가는 이빨.

"끄어어...."

박명준은 그대로 기절했다.

51화

전장에 핀 꽃

다음 날, 탑 2층의 숙소.

플레이어 협회가 소유한 숙소에서 자고 있던 진현우는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제길, 은퇴하고 지내던 생활이 그립다."

플레이어 활동을 하던 동안 밀렸던 문화생활을 즐기던 시간. 말 그대로 백수 생활이었지만, 진현우에게는 꽤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얼마나 굴러야지 은퇴할 수 있을까.'

진현우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구석에 있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그 안에서 꽃을 한 송이 꺼냈다.

불길할 정도로 붉은 꽃이었다.

[전장에 핀 꽃 (전설)]

· 설명: 전장에 흐른 수많은 피를 머금고 핀 꽃이다. 오크들이 섬기는 신이 당신을 위하여 축복 대신 내린 선물이다.

· 효과: 모든 능력치 +10, 두 개의 공통 스킬을 상위 등급의 스킬로 강화할 수 있음.

공격대 퀘스트에서 얻은 보상.

오크들이 섬기는 신이 자신을 즐겁게 한 대가로 진현우에게 준 것이었다.

'참 절묘하네.'

지금 진현우가 가진 공통 스킬이 딱 두 개였다. 바로 강타와 돌진 스킬.

아마도 오크의 신이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선물을 준 게 아닐까.

뭐가 됐든 간에 나쁘지 않다.

"딱히 고민할 게 있나?"

진현우는 꽃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러자 꽃이 마치 설탕처럼 녹아내렸고 혀끝으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이윽고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으으!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동시에 귓가에 수많은 원혼의 울부짖음과 저주가 들렸다. 아마도 이 꽃이 머금은 피의 주인들이 내뱉는 절규가 아닐까.

'이런 소리는 이미 익숙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정신적으로 흔들렸겠지만, 진현우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수없이 많이 들은 소리다.

―전장에 핀 꽃 (전설)을 복용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보유한 공통 스킬, 강타 (C)와 돌진 (C)을 상위 등급의 스킬로 강화합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들.

진현우는 엄청난 힘이 신체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가 바뀌는 것도.

―축하드립니다. 새로이 대분쇄 (B)와 섬광 (A)을 익혔습니다!

"오, A 등급 스킬이라고?"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둘 다 B 등급 스킬로 강화될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A 등급 스킬이 생길 줄이야.

'첫 A 등급 스킬인가?'

진현우는 강화된 스킬을 확인했다.

· 대분쇄 (B, Lv.1): 강력한 힘으로 적을 분쇄한다. 스킬을 사용한 채로 땅을 타격할 경우 주변의 땅을 뒤흔든다.

· 섬광 (A, Lv.1): 섬광과 같은 속도로 돌진한다. 이 스킬이 발동한 다음에 쓰는 스킬의 시전 속도가 굉장히 빨라진다.

둘 다 유용한 스킬이다.

특히 섬광. 상대방을 공격할 때 예상치 못한 일격을 날리기에 좋은 스킬이었다.

진현우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26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폐성의 정복자

· 근력: 103 (+17) · 민첩: 95 (+17)

· 체력: 97 (+17) · 마력: 73 (+8)

[특성]

· 노련한 사냥꾼 (B), 야만 전사 (B), 무기의 달인 (B), 약점 파악 (B), 재능 개화 (B), 격투의 달인 (B), 각인된 심장 (B)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섬광 (A, Lv.1)

· 특제 덫 (B, Lv.4), 분열 투척 (B, Lv. 4), 진각 (B, Lv.4), 파쇄권 (B, Lv.4), 피에는 피 (B, Lv.2), 검은 화살 (B, Lv.2), 대분쇄 (B, Lv.1)

말이 안 나오는 상태창이었다.

칭호 같은 것까지 다 고려하면 40, 50레벨대의 플레이어에 버금가는 수준.

거기서도 상위권엔 들 것이다.

'숙련도가 5레벨이 될 때가 됐는데.'

진현우가 가진 스킬들 대부분의 숙련도가 4레벨이었다. 이 숙련도가 5레벨이 되면 스킬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다.

'기대되네.'

진현우는 상태창을 닫았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건물 1층으로 내려가자 한창 업무를 보고 있는 우석형이 보였다.

그가 진현우를 알아챘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숙소 별로죠?"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래요? 전 침대가 너무 별로라서 자기 힘들던데. 바꿔 달라고 해도 안 바꿔 주거든요."

우석형이 툴툴거렸다.

플레이어 협회 2층 지부에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없었다. 원래라면 그의 뒷자리에서 코를 골며 졸고 있을 박명준도 안 보였다.

"맞다. 박명준 말인데요. 지금 협회에서 조사받고 있잖습니까. 대충 윤곽이 나왔는데, 아무래도 감옥으로 갈 거 같다네요."

"감옥이요? 몇 년인지는 나왔고요?"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근데 뭐, 뇌물이나 이것저것 좀 한 게 많아서 형이 좀 세게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추측하더라고요."

박명준은 평소 행실이 별로 안 좋았다.

애초에 협회도 인맥으로 들어온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그의 몰락을 반기는 이가 많았다.

우석형도 그중 하나였다.

"최유성은요?"

"물어보실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죠."

우석형이 씨익 웃으면서 신문을 보여 줬다. 탑 바깥에서 가지고 온 신문이었다.

신문의 첫 페이지부터 인상적이었다.

―칼리 길드와 협회와의 은밀한 거래!

―포상금의 일정 비율을 나눠 주는 조건으로 탑 2층의 길드 단위의 업무를 몰아 받은 것으로 알려져.... 2층 협회 담당자 전격 구속.

―협회 담당자, '칼리 길드가 먼저 접근해 왔다. 도박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칼리 길드와 플레이어 협회, 정확히는 박명준 사이에 있었던 계약이 세간에 알려졌다.

"빚이 많았나 보군요."

"예. 도박 중독이었거든요."

이유는 도박 빚 때문이었다.

박명준은 빚까지 내서 할 정도로 도박 중독이었는데, 빚을 갚을 수단이 필요했다고 한다.

최유성과 칼리 길드원이라면 충분히 깰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밀어준 거였는데.

'실패할 줄은 몰랐겠지.'

그리고 최유성이 박명준의 이름을 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칼리 길드 소속 플레이어 '최유성' 구속 영장 청구. 치료가 끝나는 대로 수사 예정.

―랭커급으로 성장할 거라고 기대받던 플레이어의 처참한 몰락! 오른팔 회복 불가 판정.

―칼리 길드는 모든 일은 최유성의 독단이라고 밝히며, 일이 해결되는 대로 그를 길드에서 탈퇴시킬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최유성.

오른팔을 잃은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회복 불가 판정을 받았다.

평생 외팔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칼리 길드가 최유성을 팔았네요."

"눈 가리고 아웅이죠. 협회도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겁니다."

우석형이 진현우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 들어가 보셨어요? 엄청 유명해지셨던데요? 난리도 아니에요."

"...."

진현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플레이어 커뮤니티를 켰다. 자유 게시판으로 들어가자 온갖 글들이 보였다.

―플레이어 협회 레전드네 ㅋㅋ 일 밀어준 놈도 레전드고 그걸 모르는 협회도 레전드;

―최유성 차기 랭커니 어쩌니 안 했음? 뭔 2층 공격대 퀘스트도 못 깨서 팔이 날아가냐.

―팔만 날아갔겠음? 보스 못 잡을 거 같으니까 혼자서 도망치려고 ㅋㅋ

―그럼 누가 깬 거임? 거기 최유성 말고는 다 고만고만했다며. 깰 사람이 있나?

―20레벨 플레이어가 깼다던데?

누군가의 몰락은 좋은 안줏거리가 된다.

커뮤니티의 플레이어들은 최유성의 몰락을 즐기고 있었다. 애초에 좋은 놈도 아니었으니.

그리고 진현우의 얘기도 나왔다.

―거기 오크들 진화해서 블러드 오크도 나왔다던데 그걸 20레벨이 어케 잡음?

―말이 되나 ㅋㅋ 그런 사람이 진짜로 있었으면 길드들이 영입하려고 난리가 났겠지.

―퀘스트 참가한 사람들 인증 글 쓴 거 보니까 맞는 거 같음. 20레벨이고 원래는 최유성이 짐꾼으로 부리려고 했다더라.

―짐꾼? ㅋㅋㅋㅋ 개웃기네; 그래놓고 지는 오른팔 잘려서 병원 입원하고 ㅋㅋ

―그 사람 이름이....

진현우는 커뮤니티를 껐다.

어차피 플레이어 활동을 하다 보면 유명세는 따라올 수밖에 없다. 유명세를 얻으면 돈이 따라오니, 크게 보면 나쁠 것도 없고.

문제는.

'칼리 길드가 가만 안 있겠군.'

칼리 길드다.

자기들의 잘못을 진현우가 파헤쳤다. 놈들이 그 원한을 잊을 리가 없다.

분명 원한을 갚으려고 할 터.

'귀찮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딱히 무서운 건 아니었다. 칼리 길드를 상대하는 게 귀찮을 뿐이었지.

"아, 포상금은 따로 계좌로 보내 두겠습니다. 칼리 길드가 받을 몫까지 같이 해서요."

"감사합니다."

진현우는 협회 내부를 둘러봤다.

이런 곳은 보통 플레이어들이 받을 만한 퀘스트들을 게시판에 걸어 두는 경우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포고문이 하나 있었다.

―그리폰을 처치할 용사를 구한다!

―북쪽의 고산지대에 흉포한 그리폰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놈을 처치하는 용사에게는 성대한 포상을 내리겠다.

―기사단장, 알렉산더.

그리폰.

진현우는 입가를 매만졌다.

'샤먼의 사념이 있는 곳이었지.'

샤먼. 자연 계통의 마법과 소환 스킬을 주로 사용하는, 마법사 계통의 특수 클래스.

퀘스트를 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말도 안 되게 좋은 스킬을 주는 사념이다.

물론, 그리폰은 힘든 상대다.

"그 퀘스트 하시려고요? 혼자서는 힘드실 텐데요. 저기 그리폰이 필드 보스거든요."

"하러 가는 사람이 많습니까?"

"적지는 않은 걸로 알아요. 북쪽 고산지대가 루윈 대륙에서 인기가 많은 곳이거든요."

루윈 대륙은 몬스터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고산지대는 산악 지대라는 특성상 몬스터들이 대규모로 공격하기가 힘든 곳이다.

덕분에 몬스터 웨이브로부터 나름대로 안전하고, 퀘스트나 괜찮은 사냥터도 많은 곳이라서 플레이어들이 주로 레벨을 올리러 가곤 했다.

"근데 성공한 사람은 없는 거 같더라고요."

"그렇군요."

진현우는 포고문을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퀘스트를 받겠냐는 메시지가 나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퀘스트를 받았다.

[고산지대의 그리폰 퇴치.]

· 난이도: A.

· 설명: 고산지대에 나타난 흉포한 그리폰을 처치하고 알렉산더에게 보고해야 한다.

· 보상: 아이템, 경험치, 명성.

명성.

루윈 대륙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시스템이다. 높을수록 사람들이 존경을 표하고, 특수한 상황에는 명령까지 내릴 수 있다.

특정 퀘스트를 수행하면 오르는 수치인데.

'일단 올려 두면 어디든 쓸데가 있다.'

아이템으로도 바꿀 수 있으니까.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갈게요."

"예. 아, 이것도 가져가세요!"

우석형이 진현우에게 작은 종이를 건넸다.

"통행증입니다! 고산지대에 있는 마을에 들어갈 때 필요할 겁니다. 잘 가세요!"

"고맙습니다."

우석형이 밝게 배웅했다.

그로서는 진현우에게 좋은 마음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꼴 보기 싫던 박명준을 치워 줬고, 덕분에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됐으니.

진현우는 협회를 떠났다.

* * *

프레아 왕국은 몬스터 웨이브에 시달리면서 여러 지역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북쪽의 고산지대는 그나마 프레아 왕국이 여전히 통제권을 갖고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일까.

"고산지대로 가는 마차입니다! 어서 옵쇼!"

수도 아빌론에서 고산지대로 가는 마차들이 있었다. 힘들게 걸어서 가는 것보다는 편하니까, 진현우는 마차로 가는 걸 택했다.

하지만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가다가 몬스터나 카오틱을 만날 수도 있슴다. 그때는 여러분이 힘 좀 써 주셔야 합니다!"

"아, 편하게 가고 싶었는데...."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진현우와 같이 탄 플레이어들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차를 안 타면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게 마차보다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럼 갑니다!"

―히이잉!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격하게 흔들리는 마차. 진현우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은 후, 두 눈을 감았다.

'아, 은퇴하고 쉬고 싶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52화

고산지대

탑 3층의 어느 사냥터.

칼리 길드가 독점하고 있는 사냥터에서 어떤 남자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후우! 덥다, 더워. 진짜 쪄 죽겠네."

남자가 할버드를 땅에 내리찍었다.

그의 곁에는 몇십 마리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몬스터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한 여성이 걸어왔다.

"임천우 님, 사냥 끝나셨습니까?"

"엉? 아니, 쉬는 시간. 우리 민선 비서님 말씀이라면 사냥 중에도 들어야지. 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휴식을 취하던 남자, 임천우에게 여성이 걸어왔다. 밝게 웃는 임천우와는 달리 여성은 한껏 조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최유성이 사고를 쳤습니다."

"사고라고?"

"예, 그게...."

임천우, 칼리 길드의 길드장.

하위 랭커지만 뛰어난 실력으로 유명한 그는 비서의 보고에 더욱 밝게 웃었다.

"하, 최유성 이 새끼. 사고 하나 제대로 터트렸네. 뒷수습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최유성이 박명준과 뒷거래를 했고, 공격대 퀘스트 공략에 실패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정작 퀘스트는 다른 놈이 깼고.

그 사실을 들은 임천우는 혀를 찼다.

"A 등급 퀘스트라고 해 봤자 2층 퀘스트 아냐? 그걸, 하! 우리 길드가 차기 랭커라고 밀어줬던 놈이 못 깨고 실패했다는 거지?"

"맞습니다."

"X발, 그 새끼 영입했던 놈부터 밀어주라고 했던 새끼들까지 전부 내 앞으로 불러와."

"지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웃고 있던 임천우의 표정이 돌변했다.

확 구겨진 얼굴.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지금 뒷거래 때문에 우리 길드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거지?"

"네, 그렇습니다."

"돈을 주든 인맥을 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길드와 관련된 기사들은 다 내려."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비서에게 들은 보고 내용을 상기하던 임천우는 불현듯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야, 잠깐만. 최유성 그놈이 실패했는데 공격대 퀘스트는 어떻게 성공한 거야? 걔 그래도 랭커가 될 인재라고 주목받았던 놈인데."

임천우도 그 재능을 믿었기에 최유성의 개차반 같은 인성을 참아 넘겼었다.

그런 놈이 실패했는데 퀘스트는 성공했다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에 참가했던 다른 플레이어가 사람들을 지휘해서 클리어 했다고 합니다."

"호오, 그거 난놈인데? 레벨은?"

"20레벨입니다. 지금은 더 올랐을 겁니다."

"뭐?"

비서가 진현우의 사진을 보여 줬다.

"이놈이냐?"

"네, 진현우라고 합니다. 알아보니 꽤 유명한 사람이더군요. A 등급 게이트를 공략했습니다. 그리고 굴락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1층 플로어 마스터. 그게 왜?"

"그걸 혼자서 공략한 사람이 나와서 화제가 됐는데, 그것도 진현우인 것 같습니다."

임천우의 눈이 커졌다.

"혼자서? 허, 그거 난놈이네!"

"그리고 최유성과 박명준 사이에 있었던 뒷거래를 고발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임천우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문제는 그 난놈이 우리한테 이빨을 들이밀었다는 건가? 다른 길드도 난리겠군."

"영입하려고 접근 중이랍니다. 그중에는 네메시스와 아그니스도 있다는 소문이...."

"하! 그 콧대 높은 놈들이?"

대형 길드 두 개가 영입하려는 플레이어라니. 임천우의 생각보다 큰 물고기였다.

최유성하고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래도 쓸 만한 놈을 잃었단 말이지.'

최유성.

인성은 개차반이지만 재능은 확실한 놈. 미래에 랭커가 될 놈을 잃었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진현우, 그놈한테 스카우터 몇 명 보내 봐. 원하는 조건 물어보고. 지금 2층에 있나?"

"예. 고산지대로 향한 것 같습니다. 저희 길드 하우스가 있는 곳입니다. 바로 스카우터들을 보내서 대화할 수 있게끔 하겠습니다."

"어. 그리고 너는 2층으로 가서 몰락한 고원에 있는 카오틱 새끼들하고 접촉해."

"카오틱들 말입니까?"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천우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만약에 영입을 거절하거든 카오틱들한테 현상금 풀고 손 좀 봐주라고 하라고. 몰락한 고원에 카오틱들 많잖아. 안 그래?"

"…예, 맞습니다."

임천우는 할버드를 낚아채더니 땅을 내리쳤다. 카드득!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

핏물이 그의 얼굴에 튀었다.

―카아악...!

"안 온다고 한다면...."

사체들의 산에서 죽은 척 위장하던 몬스터의 목이 단번에 날아갔다.

임천우는 피를 닦으며 히죽 웃었다.

"오게끔 만들어야지."

* * *

마차는 고산지대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야아, 손님들은 운이 좋으시군요! 가는 길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줄이야!"

마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가는 길에 몬스터나 카오틱을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자, 자. 비용은 1,000골드입니다!"

"마차 값이 뭐 이리 비싸?"

"더럽게 비싸네...."

위험한 길을 오가는 마차인 만큼 비용도 비쌌다. 진현우는 마부에게 돈을 주고 내렸다.

고개를 들자 거대한 산이 보였다.

'진짜 더럽게 높네.'

고산지대라는 이름답게 더럽게 높은 산이.

진현우는 산을 올려다봤다. 그와 함께 내린 플레이어들이 쑥덕거리는 게 들렸다.

"와, 꼭대기에 눈도 있네?"

"저기 중턱에 마을 하나 있다더라. 거기서 퀘스트 좀 받고 사냥하면 될 거야."

"응. 으으, 여긴 좀 쌀쌀하다."

드높은 고산지대의 꼭대기에 새하얗게 만년설이 내린 것이 보였다.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난 산이 너무 싫어.'

오랫동안 플레이어로 활동했지만, 산을 오르는 건 영 적성에 안 맞았다.

진현우는 힘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헉, 허억! 이 망할!"

산을 오르는 길은 험난했다.

가파르고, 제대로 된 길이 없어서 스스로 길을 만들면서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숨이 거칠어졌다.

"등산은, 내 취향이 아니야...."

진현우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산지대의 마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오랫동안 산을 오르던 진현우는 저 너머에 보이는 마을을 발견했다.

'아, 드디어.'

높은 목책이 지키고 있는 마을.

활을 든 경비병들이 입구를 지켰다. 다가오는 진현우를 인지한 경비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활을 겨눴다.

바로 진현우를 향해서.

"...!"

진현우가 뭔가를 직감한 것도 그때였다.

그는 손바닥을 크게 펼치면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후방에 있던 몬스터들이 보였다.

거대한 맹금류의 몸 그리고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 여자의 머리를 가진 괴물.

―키아아… 커억!

"귀청 떨어지겠다, 자식아."

하피였다.

괴성을 내지르며 진현우를 발톱으로 낚아채려는 하피였지만, 그보다 진현우가 빨랐다.

벼락처럼 던진 도끼가 하피의 이마를 꿰뚫었다. 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절명. 그걸로 끝이었다.

"휘유! 얼빠진 놈인줄 알았는데!"

"실력이 대단하구만, 친구!"

경비들이 활을 내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위기를 직감하자마자 바로 몸을 돌리는 순발력 그리고 그 상황에서 도끼를 던져서 정확하게 목표를 맞히기까지 하는 침착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큰일 날 뻔했네요."

"하하! 감사는 무슨 감사인가? 우리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잘 처리했을 것 같은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친구구만, 이거!"

경비병이 웃으면서 진현우의 어깨를 퍽퍽 두들겼다.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경비병은 그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흠,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인가?"

"일단 이것부터 봐 주십시오."

진현우는 통행증을 보여 줬다. 통행증을 꼼꼼히 확인한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폰을 잡으러 온 여행자였나!"

"이걸로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그래도 이번 여행자는 다른 놈들보단 낫지 않겠어?"

"그건 모르겠다만, 그랬으면 좋겠군!"

"그리폰을 잡으러 온 사람이 많습니까?"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지. 지금도 그리폰을 노리고 있는 여행자들이 있을 거야. 성과는 없지만 말이야!"

"다 실패했나 보군요."

"음! 그래도 나쁠 건 없지. 여행자들이 마을의 일거리들을 많이 처리해 주고 있거든."

고산지대는 인기가 많은 지역이다.

루윈 대륙의 스타팅 포인트인 수도 아빌론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특히 막 2층에 도착한 플레이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님들, 저 2층 올라왔는데 뭐 해요? 여기 몬스터 공격해 오고 난리도 아닌데요?

―거기 보면 마차 있거든요? 마차 타고 북쪽에 있는 고산지대로 가세요. 고산지대 오르면 마을 하나 있는데 거기서 레벨 업 하시면 됨.

―고산지대요? 아빌론은 놔두고요?

―ㅇㅇ; 아빌론은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위험함. 고산지대는 몬스터 웨이브가 없어서 안전하고 플레이어들도 많음. 퀘스트도 많고.

플레이어 커뮤니티에 흔히 올라오는 질문과 그 대답이었다. 이러면 또 의아해진다.

―그럼 아빌론은 갈 일 없는 거네요?

―고산지대에서 레벨 업 좀 했으면 아빌론 가서 퀘스트 깨고 명성 올리면 됨. 명성 잘 쌓아 두면 나중에 템으로 바꿔 먹을 수 있음.

―감사합니다!

―아! 몰락한 고원이라는 지역 있는데 거기는 절대로 가지 마세요! 진짜! 절대로!

고산지대에서 레벨을 올리고 아빌론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여러 퀘스트를 수행해서 명성을 쌓고, 그걸로 필요한 아이템을 산다.

그리고 플로어 마스터를 공략하고 3층으로 올라간다. 그게 2층의 정석 루트였다.

'몰락한 고원은, 음....'

카오틱들이 점령하다시피 한 지역이다.

게다가 서쪽에서 엄청난 사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몬스터들이 그 영향을 받아 흉폭하다.

그러니 가지 말라고 할 수밖에.

"자! 안으로 들어가게! 우리 촌장한테 그리폰 잡으러 왔다고 하면 잘 가르쳐 줄 거야."

"감사합니다."

"음, 우리 호크스 마을에 온 걸 환영한다!"

호크스 마을.

그게 고산지대 유일한 마을의 이름이었다.

진현우는 마을에 진입했다.

"같이 하피 잡으러 가실 궁수! 궁수분 구합니다! 님만 오면 바로 출발합니다!"

"아이템 이것저것 팔아요. 보고 가세요."

"카오틱 현상금 사냥하러 가실 분 계십니까? 실력에 자신 있는 분만 모십니다!"

그러자 활기찬 광장이 그를 반겼다.

호크스 마을은 그리 넓은 마을은 아니다. 수도 아빌론에 비하면 시골이나 다름없는 수준.

하지만 적막하고 삼엄한 아빌론과는 달리 호크스는 활기차고, 사람들로 넘쳐 났다.

'누가 보면 스타팅 포인트인 줄 알겠네.'

2층의 스타팅 포인트인 아빌론은 사람이 없는데 호크스는 사람으로 넘쳐 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너무 위험한 아빌론과 비교하면 호크스는 안전한 편이고, 성장하기에도 좋았으니.

진현우는 마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폰! 그리폰 퀘스트 주세요!"

"크아악! 알았으니 줄이나 좀 서라!"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마을에서 그나마 좀 커 보이는 집. 그 앞에 여러 플레이어들이 진을 치고 대기 중이었다.

그 맞은편에 노인이 화를 내고 있었다.

노인답지 않게 근육질인 남자였다.

"모두 앉아라! 그리폰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 설명을 듣고 나면 사냥하러 가도 좋다.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이, 촌장님. 우리 무시하는 거예요?"

"그만큼 어렵다는 거다!"

촌장이라 불린 노인이 화를 버럭 냈다.

그는 하나둘씩 앉는 플레이어들을 못마땅하다는 듯 보더니 막 도착한 진현우를 봤다.

"거기 자네도 앉게!"

진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53화

미끼

흔히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고 한다.

호크스 마을의 촌장이 그러했다. 그 얘기를 듣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졸음이 묻어났다.

"그러니까 그리폰은 말이다...."

촌장의 얘기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옛날부터 고산지대에 살던 놈인데, 요즘 들어서 갑자기 사람을 기습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강한 놈이고 하피들이 놈을 따른다.

―누구든 좋으니 그리폰을 처리하는 전사가 나온다면 마을의 보물을 보상으로 주겠다.

이 정도였다.

그런데 이 정도로 끝날 말을 한 시간이 넘도록 하고 있으니 듣는 사람이 질릴 수밖에.

"그리폰은 정말 흉포한 놈이다. 우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샤먼도… 패배했지."

"샤먼이요?"

"그래. 가족을 잃은 샤먼이었다."

호크스는 오래전부터 샤먼의 핏줄이 이어져 오던 마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샤먼이 그리폰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촌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실력에 자신이 없는 자는 그리폰은 포기하고 마을의 일이나 도와줬으면 한다. 그럼에도 그리폰을 상대하고 싶다면...."

촌장이 양팔을 크게 펼쳤다.

"가도 좋다! 전사들이여! 이번에는 꼭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다."

"어오...."

"교장 쌤 훈화 말씀 듣는 줄 알았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촌장은 커다란 지도를 펼치더니 그리폰이 주로 나타나는 영역을 표시해서 보여 줬다.

진현우는 그 영역을 머릿속에 새겨 뒀다.

'일단 퀘스트부터 받아야겠군.'

진현우는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리폰을 처리하면서 처리할 퀘스트를 받기 위함이었다.

"이 근방에 최근 하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놈들을 20마리 정도 처리해 주세요."

"하피 깃털이 방한성이 좋다는 사실 알고 있나? 고산지대에서 유용한 재료지. 하피 깃털을 40개 모아서 가져와 줬으면 좋겠군."

"식량이 부족해요! 뭐든 고기를...."

"하피 둥지 2개만 처리해 주시오!"

호크스 마을은 퀘스트가 다양하고 많았다.

그리고 난이도도 적당하다. 루윈 대륙에서 고산지대가 인기가 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진현우는 받을 수 있는 퀘스트는 다 받았다.

"파티 구합니다! 파티!"

"궁수, 마법사분! 우대합니다!"

"제발 좀 와 주세요!"

호크스 마을은 플레이어들로 북적거렸다.

같이 사냥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는데, 특히 인기가 많은 건 마법사와 궁수 클래스였다.

아무래도 비행형 몬스터인 하피를 상대하는 것이다 보니 그런 클래스들이 유용할 수밖에.

'하피를 잡는 게 귀찮기는 하지.'

진현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피르를 얻기 전까지는.

"흠, 일단… 골드 거래소나 써 볼까."

세계의 탑에서는 '골드'를 얻을 수 있다.

탑 내부에서 통용되는 화폐다. NPC들한테 뭔가를 사거나, 대가로 줄 때 쓸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골드 거래소를 개방합니다.

골드 거래소라는 걸 이용할 수 있다.

온라인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매장 같은 것이다. 플레이어들끼리 자유롭게 아이템을 등록하고, 판매할 수 있는 그런 거래소.

'1층에서는 쓸 필요가 없어서 안 썼는데.'

2층부터는 쓸 필요가 있다.

디버프를 쓰는 몬스터들이 나오기 때문.

―서리 갑옷 (영웅): 1,000,000G.

―패왕의 검 (전설): 220,111,000G.

―마법사의 보옥 (고급): 30,000G.

거래소를 켜자 온갖 아이템이 보였다.

눈에 띄는 건 S 등급의 기상천외한 가격이었다. 가격이 무려 2억 골드를 넘은 아이템.

'이걸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나?'

7층에서 활동하는 최전선의 대형 길드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진현우는 비뚜름하게 웃었다.

'하여튼, 부를 독식하고 있으니.'

통제로 온갖 돈을 벌고 있으니 저런 가격으로 올려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씁쓸한 현실이었다.

'그건 됐고.'

진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거래소를 조작하더니 한 가지 아이템을 찾아냈다.

―귀 먼 자의 귀걸이 (일반): 100G.

· 설명: 저주가 깃든 귀걸이다. 이 귀걸이를 착용하는 자는 청각이 크게 약화된다.

· 옵션: 저주.

* 저주: 어떤 흑마법사가 내린 저주가 담겨 있다. 착용하면 청각이 크게 약화한다.

아무런 장점도 없는 쓰레기 아이템.

솔직하게 말해서 이걸 100 골드를 주고 사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바가지나 다름없다.

하나 특정 상황에서는 유용한 아이템이다.

특히 이곳, 고산지대에서는.

―귀 먼 자의 귀걸이를 구매했습니다.

―100G를 지불했습니다.

진현우는 귀걸이를 주머니에 챙겨 뒀다.

이제 하피를 잡으러 갈 때다.

그는 마을을 떠났다.

"...."

"...."

그런 진현우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을을 떠난 진현우의 뒤를 쫓았다.

* * *

하피들은 둥지를 이루고 산다.

둥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데, 둥지에 가까워질수록 공격이 거세진다.

알을 지키기 위함이다.

―샤아아아아!

"우아악! 으아아아!"

하피는 상대하기 쉬운 몬스터가 아니다.

일단 비행형 몬스터라는 점이 가장 크다. 날아다니면서 빈틈을 노리다가 공격해 오는데, 처음 상대하는 사람이면 대처하기 까다롭다.

지금 보는 플레이어들도 그랬다.

"살려 줘! 사, 살려 줘어!"

"그러니까 궁수 없이는 오지 말쟀잖아!"

"아악! 다른 몬스터 잡으러 갈걸!"

하피들에게 쫓기고 있는 플레이어들.

전사하고 도적 같은 클래스로만 이루어진 파티였는데, 그래서 하피한테 무력했다.

하지만 하피한테서 도망치는 건 힘들다.

―끼이이....

도망치는 플레이어들을 분노한 눈으로 보던 하피가 목젖을 힘껏 죄었다.

그리고.

―키이이이아아아아아!

"허, 허억!"

"내 귀! 자, 잠깐. 몸이...."

끔찍한 괴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플레이어들은 귀를 움켜잡고 괴로워했다. 동시에 가해지는 디버프.

하피는 괴성 스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스킬에 당하면 신체 능력이 감소하게 된다.

―키히히히....

"윽, 으윽...."

"오지 마! X발, 오지 말라고!"

웃으면서 다가오는 하피들.

겁에 질린 먹잇감을 둥지로 가지고 갈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좋은 시연 무대군.'

진현우는 실피르를 꺼냈다.

부족 전쟁을 끝내면서 보상으로 얻은 활.

'스킬이 없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진현우는 활을 쥐었다.

전생에서도 활은 그렇게 선호하는 무기가 아니라서 자주 쓰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색할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손에 잘 맞는데?"

무기의 달인 특성의 효과였다.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끔 해 주는 웨펀 마스터의 직업 특성의 효과.

진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

조용히 숨을 죽였다.

하피들이 보인다. 플레이어들의 목숨을 끊고, 그들을 낚아채려는 괴물들의 모습이.

진현우는 놈들을 겨냥했다.

―끼이익!

진현우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그의 손에 마력이 모였고, 마력을 흡수한 실피르가 청록색의 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화살이 쏘아졌다.

―슈우욱!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쏘아지는 화살. 마력은 바람으로 변하여 화살에 깃들었다.

바람을 휘감은 화살은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쏘아졌고, 세 갈래로 나뉘었다.

―키익?! 캬아… 키에에엑!

하피들도 날아오는 화살을 인지했다.

하지만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하피들이 반응할 새도 없이 날아든 화살들이 놈들의 몸을 꿰뚫었다. 누군가는 가슴, 누군가는 목 그리고 누군가는 다리.

―카드드득!

―크아아아악!

화살에 어린 마력이 날카로운 바람으로 변해 하피들들의 살점을 찢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짐승들.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스으으으!

―카아악!

그의 손아귀에서 음산한 화살들이 나타나 하피들을 꿰뚫었다.

상대를 둔하게 만드는 검은 화살.

진현우는 곧바로 도끼를 들었다.

―콰아앙!

도끼로 힘껏 땅을 내리치자 주변의 땅이 뒤흔들렸다. 스킬, 대분쇄의 효과였다.

플레이어들을 낚아채려고 착지했던 하피들이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쏘아지는 도끼가 놈들을 처리했다.

―키이이… 키에아아아아!

살아남은 하피가 괴성을 내질렀다.

듣는 이의 신체 능력을 저하하고 균형 감각을 어지럽히는 괴성. 하피들은 눈앞의 적의 움직임이 멈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콰드득!

―캬아아악?!

진현우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라진 것처럼 하피 사이를 번개처럼 노닐며 놈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순식간에 줄어드는 하피들의 숫자.

―까아악! 까아아악!

―시이이...!

몇 남지 않은 하피들이 전의를 상실했다.

자신들의 둥지로 도망치는 하피들. 활로 쏴 죽일 수 있지만, 일부러 도망치게끔 놔뒀다.

놈들의 둥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와, 뭐 하는 사람이길래 저렇게 세?'

'활 되게 비싸 보이는데....'

'도끼도 쓰고 활도 쓴다고? 무슨 클래스지?'

플레이어들이 진현우를 보며 감탄했다.

조금 전 그의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진현우는 하피가 도망친 방향을 말없이 봤고, 플레이어가 그에게 접근했다.

"저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아, 잠깐만요."

플레이어가 진현우의 등을 건드렸다.

그제야 그들의 존재를 알아챈 진현우가 귀를 만지작거리더니, 귀걸이를 벗었다.

귀 먼 자의 귀걸이다.

"잠깐 청각을 막아 둬서요. 뭐라고 했죠?"

"아,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안 도와주셨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겁니다. 궁수하고 마법사가 하도 안 구해져서 우리끼리 왔는데."

"자살행위였습니다...."

플레이어들이 한탄했다.

일부 사냥터에서는 특정 클래스가 너무 유용해서 구하기 힘들어질 때가 있다.

유용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제 어쩔 겁니까?"

"돌아가야죠. 골드를 주든가, 아니면 정산 비율을 높여서라도 궁수를 구하는 수밖에."

"그게 맞아. 아, 맞다. 이거 받으세요."

플레이어가 진현우에게 지도를 건넸다. 고산지대 일부에 표식이 새겨진 지도였다.

"하피 둥지가 있는 위치를 표시해 둔 지도입니다. 퀘스트 때문에 산 건데, 하하."

"이 퀘스트는 좀 무리가 아닌가...."

플레이어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진현우는 그들이 건넨 지도를 받았다.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잘 쓸게요."

"예. 도와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플레이어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떠났다.

진현우는 지도를 확인했다. 여기로 오기 전에 하피 둥지를 부수는 퀘스트도 받았다.

2개만 부수면 퀘스트는 완료다.

'흠, 그리폰도 잡아야 하는데.'

그리폰을 잡으면 얻을 게 많다.

하지만 실피르 하나로 잡기에는 조금 귀찮은 상대다. 일이 많아진다고 해야 하나.

'사념을 하나 챙기고 처리하는 게 낫겠어.'

그리폰의 둥지.

거기에 있는 사념 아이템이 그리폰을 잡을 때 도움이 될 만한 스킬을 준다.

그뿐만 아니라 기억 감정을 할 때 퀘스트를 주는데, 그것 때문에라도 사념을 먼저 찾고 난 후에 그리폰을 처리하는 게 맞다.

그리고 또 하나.

'스토커들도 슬슬 처리해야지.'

진현우는 먼 곳에 있는 나무를 봤다.

마을을 나설 때부터 따라붙은 놈들이 있다. 방송에서 얼굴을 봐서 따라온다든가, 그런게 아니다. 뭔가 목적이 있어서 따라오는 놈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칼리 길드일 확률이 높다.'

최근 큰 망신을 당한 칼리 길드.

놈들의 행동 패턴은 뻔하다. 유망주였던 최유성이 못 쓰게 됐으니, 그 대체로 진현우를 영입하자. 그러니 스카우터들을 보내자.

만약에 영입을 거절한다면?

'억지로 가입하게끔 만들겠지.'

진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저놈들을 미끼로 써야겠군."

고산지대의 필드 보스, 그리폰을 강제로 유인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걸 이용해서 그리폰을 불러내고, 저놈들을 처리하면서 둥지의 아이템을 챙겨야겠다.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54화

처맞는 소리, 이 자식아

고산지대, 그림자가 가득 진 곳.

한 무리의 플레이어가 진현우를 관찰했다.

"저놈이 맞나?"

"그래. 진현우 그놈이 맞아."

"길드장님이 영입하라고 한 놈 말이지."

칼리 길드 소속의 스카우터였다.

나머지는 일을 그르쳤을 때를 대비해서 무력을 쓰기 위해 데리고 온 이들이었고.

"보통 녀석이 아니긴 하군. 특히 저 활."

"공격대 퀘스트에서 얻었다고 하던데. 그런데 궁수 클래스는 아니라고 들었다만...."

"그런 놈이 활을 저렇게 다룬다, 이건가."

스카우터, 오웬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는 미국인으로, 악독한 수법으로 인재들을 영입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 수법을 높이 산 칼리 길드장, 임천우가 그를 영입했다.

"화려하게도 움직이는군."

"민첩 능력치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진현우는 하피 둥지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공격하는 하피들과 싸웠는데, 움직임이 경쾌하면서도 요란스러웠다.

재빠른 속도로 사방을 누비고 있었다.

―캬아아악!

화살이 하피들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걸 본 오웬이 감탄했다.

"와우, 길드장님이 탐을 낼 만도 해."

"아그니스와 네메시스의 제안도 거절한 놈이라고 하는데, 너희가 영입할 수 있나?"

"당연히 힘들겠지."

오웬이 카오틱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때가 너희가 나설 때다. 여섯 손가락, 비싼 돈을 줬으니 그 값어치는 하겠지?"

"물론. 우리 일 처리는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가? 목표는 목숨만 살려 두면 되나?"

"영입을 받아들인다면. 끝까지 영입을 거절한다면 경고의 의미로 죽여도 상관없다."

"그건 우리 전문이지."

카오틱 길드, 여섯 손가락의 길드원들이 비열하게 웃었다. 그들은 2층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많은 플레이어를 해친 베테랑이었다.

칼리 길드와도 오랫동안 일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실력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못 오게 해 뒀나?"

"스크롤을 썼다. 한동안은 사람들이 안 올 거다. 그사이에 빠르게 처리하지."

"좋아, 가자."

진현우의 전투가 끝났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전투를 치른 상황. 컨디션이 정상이 아닐 때가 오웬이 나설 때였다.

* * *

진현우는 죽은 하피에게서 아이템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왔나.'

스토커처럼 계속 지켜보고 있더니, 이제 나설 때가 됐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진현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계속 하피가 드롭 한 아이템만 챙겼다.

"진현우 님, 맞습니까?"

"...."

진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건장한 체격의 미국인, 오웬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예, 맞는데요. 누구십니까?"

"하하, 너무 경계하지는 마시고요. 칼리 길드 소속의 스카우터입니다. 진현우 님에게 좋은 제안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종교 안 믿습니다."

오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진현우에게 다가갔다.

"진현우 님, 당신의 활약을 눈여겨봤습니다. 놀랍더군요. A 등급 게이트, 1층의 플로어 마스터 그리고 이번 부족 전쟁까지."

사람들은 굴락을 공략한 게 진현우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확신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 길드는 그일 거라고 확신했다.

"네메시스와 아그니스가 접근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른 길드도 많이 접근했겠죠. 저희는 그 어떤 길드보다 높은 제안을...."

"이미 여러 번 들은 제안이군요."

"그렇습니까?"

다른 길드가 당신에게 어떤 제안을 했든 그것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 주겠다.

진현우도 질리도록 들은 얘기다.

오웬은 조용히 웃었다.

"지금까지는 같은 제안을 들었어도 거절하셨겠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안 될 겁니다."

"왜죠?"

"칼리 길드는 원한을 잊지 않으니까요."

오웬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당신이 부족 전쟁에서 했던 일 때문에 저희는 큰 손해를 봤습니다. 만약 저희 길드에 가입한다면 그 일을 불문에 부칠 겁니다."

"만약 가입하지 않는다면?"

"아까도 말했지만, 저희는 원한을 잊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되갚고 말죠."

오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차갑고 무감정한 눈동자가 진현우를 응시했다. 보통 플레이어라면 위축될 만한 눈빛.

진현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참신하군요. 협박해서 영입하겠다?"

"협박이라니, 듣기 안 좋군요. 어디까지나 경고를 드리고, 정중히 제안하는 겁니다."

"정중한 제안이라, 흠...."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웬이 진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가득해졌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칼리 길드라."

진현우는 활을 등에 걸며 마주 웃었다.

그리고 잡으라는 듯 손을 흔들고 있는 오웬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그니스? 네메시스? 그런 길드에 가입하면 당신을 제대로 밀어줄 것 같습니까? 들어가면 말이 달라질 겁니다. 저희는 다릅니다."

오웬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당신을 길드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밀어드릴 겁니다. 그러니 저희 길드와 함께하시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요."

"후회하지 않는다...."

오웬의 앞에 선 진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호적인 분위기에 오웬이 활짝 웃었다.

진현우가 오른손을 펼쳤다.

"맞는 소리네요."

휘릭, 뭔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손아귀로 날아오는 도끼를 잡았다. 그리고 오웬이 반응할 새도 없이.

"처맞는 소리, 이 자식아."

―콰드득!

오웬의 목을 도끼로 후려쳤다.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도끼가 날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반응할 수도 없었다.

"컥, 끄륵… 끄으윽!"

"아까 뭐랬더라? 칼리 길드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되갚는다고 했던가?"

오웬이 목을 움켜쥐며 휘청거렸다.

거친 발길질이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바닥을 나뒹구는 오웬이 쉰 소리를 토해 냈다.

진현우가 고개를 숙여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나도 그렇거든."

지독할 정도로 무감정한 눈동자.

오웬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푸욱! 진현우는 그의 목에서 도끼를 빼냈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오웬! 저 미친놈이! 저 새끼 잡아!"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카오틱.

오웬이 큰 부상을 당하자 주변 나무에서 대기하던 카오틱들이 황급히 뛰쳐나왔다.

―철컥!

"응?"

그때, 뭔가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 오웬이 발을 내려다보려는 순간, 발밑이 폭발했다.

―슈륵! 퍼어엉!

"뭐… 덫?!"

속박의 덫.

카오틱들의 예상 경로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덫이 작동하면서 그들을 묶었다.

속박의 덫에 빙결의 덫까지.

그들의 발이 완전히 묶였다.

"너 이 새끼, 이게 뭐 하는...!"

"그래도 칼리 길드의 스카우터쯤 되는 놈들이면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겠지."

"뭐라고?!"

진현우가 씨익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캬아아아아!

"우아아아악!"

하늘에서 거센 포효가 들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들이닥치더니 카오틱 하나를 낚아채고 사라졌다.

그리고 들리는 끔찍한 소리.

"사, 살려… 커헉...!"

―우득, 콰드득!

무언가를 씹어 먹는 소리.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저, 저건...."

"그리폰이다! 그리폰!"

거대한 괴물.

매의 머리 그리고 사자의 몸통과 거대한 날개를 가진 괴물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입에서는 누군가의 피를 흘리면서.

―키아아아아아!

"이, 이런 미친! 그리폰이...!"

그리폰은 포효를 내지르면서 다시 땅으로 돌진했다. 진현우를 잡으려고 모였던 카오틱들은 기겁하면서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놈의 움직임이 너무도 빠르다.

"제기랄! 막아!"

"못 움직이는데 어떻게 막… 아아악!"

그리폰은 날개를 크게 웅크리더니 한껏 펼쳤다. 그러자 수많은 깃털이 쏘아지더니, 도망치던 카오틱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놈이 다시금 포효를 내질렀다.

―캬아아아아!

"큭, 으윽! 귀, 귀가!"

하피의 괴성과도 비슷한 포효.

그걸 들은 카오틱들이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리폰의 후속타가 이어졌다.

―화아악! 카드드득!

"크아아악!"

그리폰이 날개를 펄럭이자 소용돌이가 일어나더니, 지상의 카오틱들을 덮쳤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소용돌이였다.

"X발! 침착해! 저놈부터 상대한다!"

카오틱들은 계획을 바꿨다.

원래는 진현우를 사냥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저 그리폰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면 자신들부터 죽을 것이다.

그리폰과 카오틱이 맞부딪쳤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오웬이 고개를 돌렸다.

그와 진현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현우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처음부터… 예상하고....'

오웬은 시야가 어두워짐을 느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리폰과 싸우는 카오틱들, 어딘가로 향하는 진현우였다.

'잘못, 판단했....'

오웬의 시야가 완전히 닫혔다.

이윽고 숨소리마저도.

* * *

카오틱들과 그리폰을 싸우게끔 만든 진현우는 고산지대의 꼭대기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폰의 둥지가 있는 곳이다.

'그 카오틱들, 꽤 실력이 있는 놈들이었어. 그리폰 상대로 제법 시간을 끌어 주겠지.'

그리폰의 둥지는 잘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소용없었다. 이미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는 능숙하게 둥지가 있는 길로 향했다.

"여기군."

고산지대의 꼭대기에, 주변의 자연을 이용해서 잘 숨겨 놓은 둥지가 보였다.

그리폰이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둥지였다.

진현우는 둥지의 중심부를 파헤쳤다.

'그리폰한테는 특이한 습성이 있지.'

전리품을 모으는 습성이다.

싸워서 이긴 적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둥지에 모으는 습성.

사실 대부분은 잡동사니다.

'몬스터가 아이템 가치를 알 리가 있나.'

실제로 둥지 중심부에 숨겨진 아이템들의 대부분도 잡동사니였다. 아니면 부러지거나.

그런데 그중에 딱 하나.

"찾았다."

사념이 담긴 목걸이가 있었다.

진현우는 둥지의 중심부에서 낡은 목걸이를 꺼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목걸이였다.

여기에 드루이드의 사념이 담겨 있다.

'기억 감정.'

진현우는 스킬을 사용했다.

시야가 새하얘지면서 한 남자의 일생이 보였다. 고산지대의 마을에서 특수한 핏줄로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가족을 꾸린 남자.

―그리폰… 으아아아아!

그리고 그리폰에게 가족을 잃은 남자.

남자는 처참한 형태가 된 가족들의 시체 앞에서 그리폰에게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실제로 그럴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침착하지 못했다. 감정에… 지배당했다.

강력한 상대인 그리폰을 상대하려면 침착했어야 했는데,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자신의 목을 물어뜯고 전리품을 챙겨 가는 그리폰을 보면서 남자는 절규했다.

―그리폰… 그리폰...! 복수하겠다! 반드시! 죽어서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강한 원한을 가진 남자는 사념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사념이 진현우 앞에 서 있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그리폰을, 제 가족을 앗아 간 놈을!

사념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죽여 주십시오!

"얼마든지."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념의 형상이 사라지면서, 그를 대신하듯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호크스의 샤먼, '모케라'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원한이 담긴 목걸이 (일반)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스킬, '영혼 동물 소환 (B+)'을 익혔습니다. 마력이 +4 상승했습니다.

· 영혼 동물 소환 (B+, Lv.1): 주술의 힘으로 영혼 동물을 정해진 숫자만큼 소환할 수 있다. 소환한 동물은 특수한 스킬을 쓴다.

* 현재 소환 가능한 목록: 늑대 (1), 매 (1).

영혼 동물 소환.

브로큰 월드에서 소환 마법은 얻기 힘든 마법 중 하나였다. 그만큼 유용하다.

늑대라는 이름 뒤에 붙은 (1)이라는 숫자는 소환할 수 있는 숫자를 의미했다.

진현우는 바뀐 아이템을 확인했다.

[영혼의 목걸이 (고급)]

―설명: 오랫동안 대를 이어 온 샤먼들의 보물. 크게 파손됐지만 다시 힘을 되찾았다.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효과: 영혼 친화, 달이 뜬 밤.

―스킬: 자연의 속박.

* 영혼 친화: '영혼 동물 소환' 스킬로 소환할 수 있는 늑대와 매의 숫자가 1마리 늘어난다.

* 달이 뜬 밤: 달이 뜬 밤, 하루에 한 번 사용자와 그를 따르는 동물들을 강화한다.

* 자연의 속박: 바닥에서 나무뿌리와 줄기를 일으켜 전방의 적들을 구속한다.

여러 짐승의 이빨이나 발톱 따위를 엮어서 만든 목걸이였다.

그리고 마지막.

[모케라의 부탁 ―원한.]

· 난이도: A.

· 설명: 영혼의 목걸이에 깃든 사념, 모케라가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의 원수인 그리폰을 죽여야 한다.

· 보상: 아이템, 스킬 등급 상승, 추가 특성.

사념이 준 퀘스트까지.

보상으로 아이템과 스킬 등급을 올려 주는 퀘스트였다. 진현우가 그리폰을 먼저 잡지 않고 퀘스트부터 받으러 온 이유였다.

'영웅 등급 아이템에 A 등급 스킬, 특성까지 얻을 기회인데 이걸 놓칠 수는 없지.'

진현우는 퀘스트창을 닫았다. 그리폰의 둥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

이제 남은 건.

"그리폰을 잡으러 가 볼까."

55화

직업 퀘스트

어느새 저녁이 된 고산지대.

달이 어슴푸레하게 뜨는 가운데, 그리폰과 카오틱들의 전투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황은 이미 기운 상태였다.

―카루루루!

"윽, 크아아악!"

그리폰이 카오틱의 어깨를 낚아채면서 날아올랐다. 그리고 하늘 높은 곳까지 도달한 후, 낚아챈 카오틱을 땅에 내던졌다.

쿠웅! 그대로 땅에 처박히는 카오틱.

"저 망할 놈이!"

"대장님, 상황이 너무 안 좋습니다!"

"나도 알아, 멍청아!"

카오틱의 숫자는 절반 넘게 줄어들었다.

그리폰은 철저하게 공중에 머무르면서, 지상의 카오틱들을 농락하듯이 사냥해 나갔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 그러면.'

이 숲은 넓다.

하늘을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그리폰에게 각개격파 당해서 모두 죽을 위험이 크다.

거기에 하피들까지 있으니, 가능하면 도망은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 두고 싶었는데.

'피해가 너무 크다. 방법이… 없다.'

카오틱 길드, 여섯 손가락의 행동 대장인 제이드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물론 그리폰이라고 멀쩡한 건 아니었다. 카오틱들의 공격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죽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망할 놈 때문에!

진현우, 그놈이 남긴 덫에 걸린 탓이다.

뒤늦게 덫의 디버프가 풀리기는 했지만, 이미 많은 동료가 그리폰에게 당한 후였다.

그것도 궁수와 마법사들이.

'이 멤버로는 날아다니는 그리폰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 제길,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일은 실패했다.

그리고 의뢰한 오웬도 죽었다. 제이드는 싸늘하게 식어 있는 오웬의 시체를 흘깃 봤다.

여기서 더 싸우는 건 개죽음이다.

"의뢰는 실패했다! 물러난다!"

"대장님, 저 녀석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냥 버려 두고 가!"

카오틱이 아직 그리폰과 싸우는 동료들을 가리켰지만, 제이드는 차갑게 무시했다.

어차피 카오틱. 동료애는 없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다.

제이드는 바로 물러나려고 했다.

―카루루루!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이드는 소리가 들린 곳을 봤다. 저 하늘 너머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폰이 매를 인지했다.

―카르르....

푸른색의 털을 지닌 반투명한 매.

얼마 전 그리폰이 사냥했던 인간이 다루던 매들과 똑같이 생긴 매다. 그리폰에게 그 인간은 쉽지 않은 난적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캬아아아아아!

저 매들부터 처리해야 한다.

그리폰은 분노하며 날아올랐다.

―휘이익!

그 덩치로는 믿을 수 없는 속도.

그리폰은 순식간에 매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놈이 거대한 발을 힘껏 휘둘렀다.

―피루루루루!

―캬아아악!

매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지만, 그리폰은 분노하면서 거센 공격을 이어 나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제이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매가 나타나서 그리폰과 싸우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저 매들이 그리폰을 이길 수는 없다.'

매가 열심히 그리폰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미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놈의 두꺼운 가죽에 막힐 뿐.

―퓨, 퓨르르...!

―캬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금방 균형이 무너졌다.

매의 움직임이 굼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그리폰이 빠르게 맹공을 퍼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퍼억!

―피유우우!

거대한 발이 매를 강타했다.

그 일격을 버티지 못한 매가 땅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걸 추격하는 그리폰.

"잘됐군. 저놈들이 시간을 끌어 줬어. 그리폰이 저놈들과 싸우는 동안에 빠진다!"

"예!"

매가 추락하고 있다.

순식간에 땅에 가까워지는 몸뚱어리. 그리폰보다 먼저 매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매는 꿈틀거릴 뿐, 움직이지 못했다.

―캬아아아아아!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인다.

이게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한 그리폰은 매가 추락한 지점을 향해서 하강했다.

놈의 날카로운 발톱이 서늘하게 빛났다.

―철컥!

매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그리폰이 매를 두 발톱으로 낚아채려는 순간, 소리가 들렸다.

덫이 작동하는 소리가.

―퍼어엉!

―캬하아악?!

바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빙결 덫이 폭발하면서 냉기가 사방으로 퍼졌고, 그리폰의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

도망칠 준비를 하던 카오틱이 당황했다.

"저, 저거!"

"그 새끼가 쓴 덫 아닙니까, 대장님!"

"...."

바로 그때, 화살이 쏘아졌다.

매가 추락한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수풀에서 쏘아진 화살.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 일직선으로 쏘아졌고, 날아가던 도중에 분열했다.

―크아아아악!

그 화살들이 그리폰의 날개를 꿰뚫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리폰. 땅에 무력하게 처박혀 있던 매가 재빨리 일어났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매가 나타나더니, 녀석들의 등 뒤로 달빛이 쏟아졌다.

―스으으....

하늘에 뜬 푸른 달.

매의 몸이 푸르게 빛나면서 커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그리폰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알 수 없지만, 눈앞의 적이 강해지고 있다. 그리폰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캬아아아아!

날개가 꿰뚫리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그리폰은 다시금 날아오르려 했다.

두 마리의 매가 놈을 막았다.

―퓨르르르!

그리폰을 에워싼 매들의 발톱에 마력이 깃들었다. 마력은 곧 바람으로 바뀌었고, 발톱을 휘두르자 칼날이 되어 적을 덮쳤다.

영혼 동물의 스킬이다.

―키아아악...!

이대로는 위험하다.

그리폰은 필사적으로 날개를 움직였다.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물론.

"어딜 도망가려고?"

―...!

놈이 그러게 둘 생각은 없었지만.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진현우가 '자연의 속박'을 발동했다. 그리폰의 발아래에서 나무뿌리와 줄기가 일어나더니 놈의 사지를 묶었다.

―키아아아아!

격하게 저항하는 그리폰.

진현우는 돌진하면서 도끼를 투척했다. 쏘아진 도끼가 그리폰의 날갯죽지를 덮쳤다.

푸욱! 가죽에 깊숙이 꽂히는 도끼.

"눈을 노려!"

―피유우우!

기회를 엿보던 매들이 그리폰의 얼굴로 돌진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놈의 눈을 할퀴었다.

―캬아아악!

조금 전까지는 제대로 된 대미지를 입히지 못했지만, 지금의 매는 달랐다.

'달이 뜬 밤' 옵션 덕분에 능력치가 강화된 상태. 충분히 대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그리폰이 눈을 감으며 고통스러워했다.

"후욱...!"

그 탓에 그리폰이 진현우를 놓쳤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놈의 가슴께까지 돌진하면서 진각을 밟았다.

―쿠우웅!

―캬, 하악!

그리고 일격.

파쇄권이 그리폰의 가슴을 강타했다. 건틀릿이 가죽을 뚫고 내부를 뒤흔들었다.

그리폰이 그 충격에 고개를 처박았다.

―타악!

진현우는 놈의 머리를 짓밟으면서 등 위로 올라탔다. 그의 손아귀로 돌아오는 도끼.

도끼에 붉은 마력이 어렸다.

―캬아아악!

진현우가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그가 노리는 것은 그리폰의 날갯죽지. 단 일격에 날갯죽지의 절반이 날아갔다.

하지만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콰득! 콰드득!

―키아아아아아!

진현우가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렀다.

사방에 튀는 피. 고통스러워하는 그리폰. 도끼가 놈의 날갯죽지를 끊어 냈다.

쿠웅! 날개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후우, 더럽게 질기네."

―피유우!

그리폰의 몸에서 내려온 진현우는 놈의 머리 앞에 섰다. 핏발이 선 그리폰의 눈동자와 진현우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뭘 봐?"

―키… 끄르륵...!

콰직! 도끼가 그리폰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게 끝이었다. 몇 번 꿈틀거리던 그리폰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이내 축 늘어졌다.

진현우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쉽게 잡았네."

―퓨우우.

그리폰은 꽤 까다로운 몬스터다.

거대한 덩치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형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매가 놈을 땅으로 유인해 준 덕분에 상대적으로 쉽게 잡을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꽤 까다로웠을 거야.'

진현우는 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이 기뻐하면서 작게 울었다.

"자, 그럼...."

진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달아나는 카오틱들이 남았다.

"일단 저것들부터 처리하고 볼까."

스으윽!

진현우의 갑옷이 보호색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