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마수 군단
다음 날 아침.
베카샤에 한 무리의 플레이어가 도착했다.
"뭐야, 난 오자마자 전쟁이야?"
"오히려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오자마자 공헌도 쌓고 바로 4층으로 갈 수 있으니."
"좋은 일 맞아요?"
성녀, 샬럿 로즈우드.
그리고 그녀와 큰 친분이 있는 이수경의 연금술사 길드, 파라켈수스 길드원들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흠, 크흠! 진현우 님은 오랜만에 만나는군. 이거, 괜히 긴장되는데...."
"그런 걸로 뭘 긴장하고 그래요, 오빠는."
"아니, 너무 유명해지셔서."
"긴장할 거 없습니다. 갑시다."
네메시스 길드 소속의 파티.
이대건과 정지유, 박동욱 그리고 정수현이었다. 그들 말고도 네메시스의 길드원이 여럿 있었다. 진현우가 따로 부탁한 이들이었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 천만에요. 이런 자리에 불러 주시는 건데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죠."
"오랜만이에요, 오빠. 안 위험한 일이죠?"
"생각보다는 덜 위험할 거야."
아마도.
정지유의 말에 진현우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 있던 샬럿을 바라봤다.
"루윈 대륙 쪽 일은?"
"으흠, 아직 할 일이 좀 남았어. 내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래도 뭐, 얼마 안 남았지."
"잘됐네. 오랜만에 일이나 좀 해라."
"나 2층에서 엄청 바쁘게 일하거든?!"
샬럿이 으르렁거렸다.
그녀와 파라켈수스 길드가 루윈 대륙의 복구를 도우면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고 들었다.
으르렁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진현우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니, 뭔가 영적인 기운이... 여기구나!"
- 캬아아앗?!
샬럿이 미호의 꼬리를 정확히 붙잡았다.
진현우의 어깨 위에서 졸고 있던 미호가 화들짝 놀랐다. 영체 상태였던 미호가 실체화했고, 그 모습을 본 샬럿의 눈이 동그래졌다.
- 미친 것이냐, 계집!
"여우? 어머, 악령이 붙은 줄 알았는데."
- 악령이라니! 이 요호를 잡귀 취급을!
"애가 좀 앙칼지다. 현우야, 네 펫이야? 아, 너 2층에서 영혼석 얻었었지. 그거구나."
샬럿이 미호를 빤히 들여다봤다.
그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미호는 마안까지 써 가면서 저항했지만 무의미했다.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 이, 인간. 인가아아안... 날 이 미친 계집의 손에서부터 구해 다오! 얼른!
"야, 애 운다. 너도 펫 얻지 않았었냐?"
"알? 으응... 신성력은 계속 먹이고 있는데 어째 늦네. 애가 식탐이 좀 많은가 봐."
샬럿은 2층에서 백색의 알을 얻었었다.
그때부터 긴 시간이 지났는데 부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현우는 미호를 돌려받았다.
- 크흐응, 이 굴욕은 잊지 않겠느니라. 내가 먹은 정기만 다 흡수하면, 저 계집은....
"입만 살아 가지고."
미호는 고요한 구덩이에서 먹은 정기를 아직 다 흡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워낙 정기의 양이 방대한 탓이었다.
아무튼.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진현우는 왕궁으로 향했다.
샬럿과 이대건 파티가 그를 뒤따랐고, 일행은 왕궁에서 가장 조용한 방에 도착했다.
방에는 하이드가 앉아 있었다.
"저 남자는 누굽니까?"
"하이드. 3층에서 유명한 플레이어입니다."
하이드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의 앞에는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테이블 위에 뭔가가 가득 든 주머니가 있었다.
"여러분에게 맡기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진현우가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걸 본 이들의 눈이 커졌다.
"이건... 소환석이군요."
"아니, 그보다 이 숫자는...."
"잠깐만, 오빠. 숫자가 문제가 아냐."
주머니 안에 담긴 건 소환석이었다.
놀라울 정도의 숫자. 하지만 놀랄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정지유는 소환석을 쥐었다.
그리고 그 설명을 읽으며 경악했다.
[소환석: 사이클롭스 (전설)]
· 설명: 사이클롭스가 깃든 소환석이다. 하이아칸 대륙에서만 쓸 수 있으며, 전쟁이 벌어졌을 때 특수한 장소에서 사이클롭스를 소환할 수 있다.
전설 등급의 소환석.
그것도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 사이클롭스. 보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런 소환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죄, 죄다 영웅 등급 소환석이잖아요. 오빠, 이런 소환석들은 어디서 난 거예요?"
"던전에서. 뭐,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건 나한테 주고. 샬럿, 네가 이걸 써라."
"내가? 히드라... 이건 뭐 하는 몬스터야? 으흠, 뭔가 내가 히드라한테 버프를 줘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알겠어."
진현우는 히드라의 소환석을 샬럿에게 줬다. 그녀가 알겠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는 소환석들을 꺼냈다.
"지금부터 여러분한테 이 소환석들을 나눠 줄 겁니다. 그리고 특정 지점으로 가서, 정확한 타이밍에 이 소환석을 쓰면 됩니다."
"저희가 말입니까? 그 타이밍은...."
"타이밍은 엘프들이 알려 줄 겁니다."
진현우가 손짓하자 바깥에서 대기하던 라시드와 이리샤, 아드네아가 들어왔다.
그들을 비롯한 엘프 수색대가 도울 것이다.
"하이아칸 대륙은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린 곳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는...."
진현우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 전쟁을 끝낼 겁니다."
마족.
이번 전쟁에서, 놈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 * *
짙은 밤.
진현우는 접경 지역에 도착했다.
그가 마족들의 손아귀에서 구했던 드라이어드의 숲. 그곳에 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족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맹우여. 저 너머에서... 마족들의 더러운 숨결이 느껴진다."
접경 지역을 지키던 장막은 사라졌다.
그 너머, 짙은 마기가 넘실거리는 초원에서 엄청난 숫자의 마족이 숲을 노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기세다.
"빌어먹을 놈들. 우리 동족들을...."
마족들의 선두에는 마기에 잠식된 드라이어드들을 비롯한 여러 종족이 있었다.
그리고 마인들 역시도.
'강한 마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마인이라고 다 같은 힘을 가진 건 아니다.
대적자에게 어느 정도의 힘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마인의 강함은 달라진다. 선두에 선 마인들은 대적자에게 많은 힘을 받지는 않았다.
하나, 까다로운 상대임에는 분명했다.
"하엘, 제단은요?"
"설치해 뒀다.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
"좋네요."
제단.
소환석을 쓰는 데 필요한 도구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단을 일부 거점에 설치할 수 있는데, 드라이어드의 숲이 그것이었다.
진현우는 제단 위에 섰다.
"좋아, 그럼."
그 손에 쥐인 것은 사이클롭스의 소환석.
제단이 연록빛을 내뿜었다.
"나와라, 사이클롭스."
카드득!
그에 화답하듯 소환석이 쪼개졌다.
* * *
드라이어드의 숲 너머의 초원에는 엄청난 숫자의 마족 군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일반적인 마족과는 달리 짐승 같은 모습을 한 마족이라는 것.
마수로만 이루어진 군단이었다.
- 크르르르... 언제까지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 모두 불태우고 싶구나!
마계의 사나운 짐승 무리를 이끄는 자는 쉬지 않고 불타는 지옥의 겁화를 몸에 두른, 집채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늑대였다.
마수 군단장, 헬하운드였다.
- 더는 기다릴 수 없다. 그놈은, 그 히드라라는 괴물은 대체 언제 나타나는 것이냐....
- 헬하운드 님, 가르르!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저 나약한 놈들을 찢어 죽이겠습니다!
- 조금만, 조금만 더....
마수 군단장, 헬하운드는 저 너머에 보이는 드라이어드의 숲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악마, 헬만이 직접 내린 명령이었으니까.
히드라가 나오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마라.
- 우우우우우!
바로 그때, 소리가 들렸다.
우렁찬 뿔피리 소리. 그리고 땅을 울리는 진동과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까지.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 헬하운드 님, 저건....
- 기사단?
그건 기사단이었다.
전신이 반투명한, 기수와 기마까지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단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족히 백은 넘는 숫자.
"왕국을 위하여!"
"루윈 대륙의 영웅을 위하여!"
오로지 왕국을 위해 싸우고 명예롭게 전사했던 기사단. 그들의 영혼이, 자신들을 소환한 진현우를 돕기 위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 속도는 눈으로 좇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적을 짓밟아라! 차징!"
순식간에 돌진한 기사단이 초원의 선두에 있던 마기에 잠식당한 적들을 덮쳤다.
그리고 충돌.
- 콰드득!
- 캬하아아악!
- 끄아아아아아!
강렬한 랜스 차지가 살을 꿰뚫었다. 중무장한 기마의 발길질이 적들을 짓밟았다.
중무장한 기사단이 적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고, 그대로 회군하면서 물러났다.
남은 것은 처참히 짓밟힌 시체뿐.
- 이, 이게... 저, 저 씹어 먹을 놈들이!
그 광경에 분노한 헬하운드가 불길을 토해 내면서 으르렁거렸다. 저 기사단이 노예들을 죽이고 달아나는 꼴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놈이 허공에 불길을 내뿜었다.
- 크하아아아! 이 헬하운드를 따르는 마수의 군단이여! 너희의 야성을 해방시켜라!
- 아오오오!
먼저 공격당하는 상황.
헬만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참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헬하운드는 땅을 박차며 돌진했다.
선두에 나선 놈의 뒤를 군단이 뒤따랐다.
- 저 느려 터진 인간 놈들을 씹어 먹어라!
영혼 기사단이 달아나는 속도는 빨랐지만, 헬하운드의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수 군단은 아름다운 자연을 마기로 물들이면서 영혼 기사단을 빠르게 뒤쫓았다.
두 집단 사이의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 인간... 죽여 주마! 캬하아아!
화르륵!
헬하운드가 거센 불길을 토해 냈다.
영혼 기사단에게로 쏘아지는 불길. 기사단은 그 자리에서 멈추더니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헬하운드가 비웃었다.
'멍청한 놈들. 더 죽이기가 쉬워졌군!'
달아나도 모자랄 마당에 멈추다니.
헬하운드와 마수 군단은 광소를 터트리면서, 불길을 방어하는 기사단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때, 헬하운드는 봤다.
"멍청한 놈들."
- 뭣....
그를 비웃는 기사의 얼굴을.
쿠웅! 그 순간, 땅이 크게 진동했다. 헬하운드의 바로 지척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진동.
놈은 진동이 느껴진 곳을 봤다.
- 크흐으으!
- 이, 이건....
보이는 것은 외눈의 거인.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돋아 있고, 푸른 피부의 몸뚱어리는 근육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한 손에 쥔 거대한 몽둥이까지.
- 크, 크르르...?
사이클롭스였다.
자신보다도 더 거대한 괴물을 목도한 헬하운드는 당황한 나머지 입을 벌렸다.
웅장한 거인은 이미 몽둥이를 든 상태였다.
그리고.
- 콰아아아앙!
- 카학! 그하아아아!
몽둥이가 땅을 내리쳤다.
단번에 짓뭉개지면서 크레이터가 파이는 땅.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충격파가 헬하운드와 놈을 따르던 마수 군단을 덮쳤다. 그 살이 단번에 짓뭉개졌다.
- 가아아아악!
- 크하악! 헤, 헬하운... 끄르르...!
- 아, 안 돼! 캬학!
단 일격.
그 일격에 다수의 마수가 살이 짓이겨지고 뼈가 부러졌다.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헬하운드는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 무, 무슨! 거인, 어, 어디서! 어디서 저런 거인이 나타났단 말이냐!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다, 더러운 마수."
- 크윽! 네, 네년!
기사단의 뒤에서 드라이어드들이 나타났다.
그 선두에 있던 하엘이, 피를 토하는 헬하운드를 혐오스럽다는 듯 보면서 이를 드러냈다.
"세계수가 내린 축복."
나타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엘을 뒤따르듯 수많은 몬스터가 나타났다. 수많은 오크를 이끄는 오크 로드. 하늘을 비행하는 레드 와이번을 비롯한 몬스터들.
- 저런, 몬스터들을 어떻게....
"맹우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지."
어느 던전에서든 보스 몬스터 취급을 받기에 충분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숫자가.
그 광경을 본 헬하운드가 할 말을 잃었다.
"내 동족들의, 우리 동맹의, 그리고 네놈들의 손에 죽었던 모든 이의 핏값을...."
콰르르르!
하엘의 분노에 반응하듯 땅이 일어났고, 나무와 수풀들이 급성장하며 솟구쳤다.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지금 받겠다, 마수!"
- 이, 빌어먹을...!
헬하운드는 느꼈다.
무언가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음을.
그리고 그와 같은 사태가 엘프와 마족이 대치하는 모든 접경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130화
시선을 끄는 방법
드라이어드의 숲에 사이클롭스가 나타났을 무렵,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마족들에게 포위당한 고요한 구덩이.
"이, 이게 무슨... 끄아아아아!"
"시발, 숨 쉬지 마! 독이다! 독이라고!"
- 키이이이익!
독을 내뿜는 거대한 전갈, 스퀴토스가 그 갑피를 앞세우며 카오틱들을 짓밟고 있었다.
그 뒤를 수많은 고블린과 설인, 사마귀와 뱀의 특성을 동시에 가진 라가가 뒤따랐다.
그밖에도 다양한 몬스터가 있었다.
"뭔데! 뭐냐고! 다 보스 몬스터들이잖아!"
"저, 저런 놈들이 어디서...!"
- 침착해라! 당황하면... 크허억!
다른 거점에서는 거대한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나 적진 한복판을 헤집는 중이었다.
그 같은 일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 우아아아악!
"시바아알!"
엘프의 거점을 공격하려던 마족들의 앞에, 플레이어들의 공격으로부터 거점을 사수하려던 카오틱들의 앞에, 접경 지역 전역에서.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것도 죄다 보스 몬스터가.
- 우리 몬스터들을 내보내라! 빨리!
"내, 내보냈어! 다 죽은 거 안 보여?!"
- 다 죽었다니, 무슨...!
"시발, 버프 때문에 쟤네가 더 세다고!"
소환석으로 소환된 몬스터들은 엘프가 점령한 거점이 주는 버프를 받을 수가 있다.
진현우가 점령한 거점들의 버프를.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능력치와 스킬 대미지를 30%나 올려 주는 신전의 버프를 몬스터들도 적용받았다는 뜻이었다.
- 크하아아아악!
"사, 상대가 안 돼."
그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온갖 버프로 강력해진, 대도의 보관고에 갇혀 있었던 몬스터들이 전장을 휩쓸었다.
그 앞을 막던 마족도, 카오틱들도.
그리고 마족 측의 몬스터들까지.
"허, 진현우 님이 준 소환석. 이거...."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난 거래?"
"이것들을 다 사냥해서 얻었다는 거 아닙니까? 대체 어디서 사냥한 건지도 궁금하군요."
진현우에게 몬스터를 소환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이대건 파티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괴물들을 어떻게 사냥한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크아아아아! 다 쳐 죽여 주마!"
"아, 하이드! 제발! 말 좀 들어, 미친놈아!"
"샬럿 씨한테 보고... 하! 내가 대신 할게!"
한편, 다른 곳에서 미노타우로스와 몬스터들을 소환한 하이드는 날뛰고 있었다.
몬스터들과 뒤섞여서 광전사처럼 날뛰고 있었는데, 동료의 말도 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마족과 카오틱들이 그들에게 휩쓸렸다.
"하 씨, 샬럿 씨! 몬스터 소환 끝났어요! 이제 그쪽만 소환하면 끝입니다!"
- 네, 알겠어요.
그리고 마지막.
태양의 대장간.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 도달한 샬럿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엘프 수색대와 파라켈수스의 길드원, 믿을 수 있는 플레이어가 그녀의 곁에 있었다.
"경계가 삼엄하네요, 이리샤 씨."
"맞아. 정면에서는 절대로 못 뚫을 거야. 우리도 매번 되찾고 싶었는데, 결국 포기했지."
"그렇군요."
이리샤가 복잡한 눈으로 대장간을 봤다.
거대한 장벽이 지키는 대장간에는 수많은 마족이 보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략할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에 포기했던 거점.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제단이 준비됐어."
"네."
지금 있는 언덕은 마지막 제단을 설치할 수 있는 거점이었다. 샬럿은 진현우에게서 받았던 소환석을 쥐고 제단 위에 섰다.
그리고 소환석을 사용했다.
"히드라."
- 콰드득!
단번에 쪼개지는 소환석.
세계수가 잠이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힘이 그에 반응하듯 소환석에 깃들었다.
작은 돌에 담긴 영혼이 저 너머에 있는 장벽까지 흘러가더니 실체화하기 시작했다.
- 쿠우웅!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거대한 몸통.
드높은 건물을 보는 듯한 몸체가, 무엇이든 튕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갑피가 보였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수많은 머리.
- 크흐으으으으....
여덟 개의 뱀 머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인간 머리가 눈을 떴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저 너머의 적을 인지했다.
대장간을 에워싼 장벽 그 위에서, 갑자기 나타난 히드라를 넋을 잃은 채 보는 적들을.
- 키하아아아아악!
신화 속의 괴물, 히드라가 포효했다.
용과 비견될 만큼의 힘이 담긴 피어. 장벽 위에 있던 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여덟 머리가 숨을 가득 삼켰다.
- 화아아아악!
- 흐아아아아아!
"도, 독! 독이... 우욱, 쿠하악!"
뱀의 머리가 숨결을 토해 냈다.
지독한 극독이 담긴 브레스가 장벽 위를 휩쓸었고, 그곳을 지키던 적들을 중독시켰다.
적들이 피를 토하며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저, 저게 뭐야...."
- 히, 히드라. 대악마님이 말씀하신....
고대의 신전에서 불완전한 상태로 부활했던 때와는 달리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한 히드라.
놈이 태양의 대장간을 보며 포효했다.
- 헤, 헬만 님! 얼른 헬만 님에게 보고해라!
콰아앙!
히드라의 꼬리에 장벽이 단번에 무너졌다.
대장간을 수호하던 마족이 다급히 외쳤다.
- 태양의 대장간에 히드라가 나타났다고!
그걸 본 샬럿이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녀의 등 뒤에 나타난 천사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고, 신성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졌다.
부정한 것을 멸하고 아군을 강화하는 파동.
- 키히아아아악!
"이 신성력은...!"
마족과 카오틱들이 샬럿을 인지했다.
그녀의 곁에 있던 이들이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들이 맡은 일은 샬럿을 지키는 것.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희가 할 일은 대악마가 올 때까지 시선을 끄는 것."
샬럿이 찬란한 십자가를 들었다.
"그때까지, 요란스럽게 시선을 끌어 보죠."
신성력이 사방을 뒤덮었다.
* * *
엘프의 옛 수도, 헤이시스.
헬만은 마기의 늪에 잠긴 채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여러 거점의 상황을 보여 주는 수정구의 화면이 떠 있었다.
- 까드득!
헬만이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헤, 헬만 님! 적들이 접경 지역 사방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몬스터들이...!"
- 알고 있다. 조용히 하라.
눈앞에 비치는 것은 접경 지역의 광경.
넓은 초원을 달리는 기사단, 마족들을 학살하는 외눈의 거인, 아군 한복판을 헤집고 있는 미노타우로스 그리고 수많은 몬스터까지.
플레이어와 엘프들이 놈들을 보조했다.
- 우리가... 밀리고 있다는 건가.
"그, 그렇습니다."
곁에 있던 자인이 떨면서 말을 이었다.
"접경 지역 사방에서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하나같이 강력한 보스 몬스터들이 선두에 있습니다. 저희 거점이... 밀리고 있습니다."
- 우리 측의 몬스터들은 어떻게 됐나?
"상대도 되지 않았습니다."
마족 역시 다양한 몬스터들을 마기로 잠식시켜서 소환석에 대항하려고 해 왔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효과적이었다.
문제는 이번 적들이 규격 외였다는 것.
'어디서 저런 몬스터들을 구한 것이지?'
사이클롭스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괴물들이 있는 던전이 이 대륙에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디서 저런 놈들을.
- 히드라는? 그리고 진현우, 그놈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측건대, 중요 거점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 중요 거점이라면....
헬만과 자인의 머릿속에 한 거점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전령이 들어왔다.
전령이 부복하며 다급히 외쳤다.
"자, 자인 님! 히드라가 나타났습니다! 태양의 대장간에, 히드라가 단독으로!"
"뭐? 히드라가...!"
- 태양의 대장간이라, 역시 그렇군.
헬만은 코웃음을 쳤다.
- 흥, 가장 중요한 거점을 노리겠다는 건가. 현명한 판단이지만, 그래서 어리석군.
태양의 대장간은 그 중요성 때문에 평소에도 우수한 방어 병력이 지키는 곳이었다.
대악마 헬만은 마기의 늪에서 일어섰다.
- 자인 그리고 군단장이여, 차출했던 정예 병력들을 접경 지역으로 돌리도록. 이 이상 거점을 빼앗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혼자서 싸우시겠다는 겁니까?"
- 날 따르는 친위대와 태양의 대장간을 지키는 병력.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헬만은 영상에 비치는, 엘프 측의 몬스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마족들을 봤다.
그 눈빛에 경멸이 어렸다.
- 마계를 정벌했던 강대한 군단이 어쩌다가, 이런 꼴로 영락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군.
군단장들의 거듭된 실패.
그리고 마족들의 저 추태까지.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헬만은 자신의 장비를 갖추고 걸음을 옮겼다.
- 계집!
"무월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주시지요."
- 되다 만 년을 이름으로 부를 일은 없다.
그림자 속에서 마인, 무월이 나타났다. 노골적인 멸시에 그녀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 너와 같은 되다 만 놈들을 태양의 대장간으로 보내라.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예, 마인들에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약속.
마인이 왕궁의 지하를 파헤치고,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찾을 수 있게끔 돕겠다는 약속.
그 대가로 대적자는 협력을 약속했다.
- 네 주인이 내게 약속했던 걸 잊지 마라. 넌 그리고 마인들은 날 위해 싸워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 네가 찾고 있던 것은 찾았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 진현우라는 인간을 찾는다면...."
헬만이 코웃음을 치며 등을 돌렸다.
- 진현우라는 인간을 포획하고 싶다면 네놈들이 직접 나서서 싸워라. 나는 그 버러지 같은 인간 놈을 살려 둘 생각이 없으니.
"...알겠습니다."
- 좋다.
쿠웅!
헬만이 날개를 펼쳤다.
거대한 대악마의 마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 출정이다! 친위대여, 나를 따르라!
그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악마 헬만이 사라진 방향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무월은 등을 돌렸다.
'이 굴욕도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오랫동안 무월을 애먹였던 결계.
조각을 지키던 결계의 파괴가 코앞이다. 무월은 굴욕을 삼키면서 지하로 향했다.
* * *
그리고 그 무렵.
진현우는 지하 통로의 입구에 도착했다.
옛날, 마족이 하이아칸 대륙을 침공했을 때 엘프 여왕이 탈출하는 용도로 쓴 통로였다.
"문은... 열리는군요."
드르륵!
수많은 나무 사이, 짙은 수풀 아래에 숨겨져 있던 입구가 굉음을 내면서 열렸다.
오랫동안 누구도 드나들지 않은 듯했다.
"이 통로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복잡해지는군요, 도망쳤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여왕님...."
여왕의 곁에는 수색대가 함께 있었다.
아드네아를 비롯한 수색대 중에서도 최정예들만 모아서 여왕의 경호 역할을 맡았다.
라시드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여왕의 뜻이 너무도 확고했다.
"회상은 거기까지 하고 들어갑시다. 근데, 뭔가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은인이시여,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아드네아가 스킬을 사용했다.
반투명한 올빼미가 나타나더니 통로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의 인상이 금방 구겨졌다.
"통로 안이 마기와 독으로 절여져 있습니다. 누구도 못 들어오게끔 막아 뒀군요."
"으음... 간단하지만 효과적이군요. 마기에 독이면 접근하고 싶어도 못 할 테니까요."
엘프 여왕이 탈출하는 용도로 썼던 지하 통로는 마기와 독으로 절여져 있었다.
그 누구도 통과할 수 없는 마경.
하지만.
'이 정도면 지나갈 만하겠는데.'
진현우라면 지나갈 수 있다.
그가 가진 흑뢰의 회동 그리고 만독불침 덕분에 마기와 독에 큰 저항력을 가졌기 때문.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 싶었다.
"아드네아, 내부 상황은 어떻습니까?"
"일부 마수가 통로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리 많지는 않군요. 마기는... 마기의 근원을 제거하면 없앨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을 제거할 방법은요?"
"있어요."
여왕이 대답했다.
"지하 통로에 내부를 환기시킬 수 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지금 위치를 그려 드리죠."
엘프는 오랜 세월을 사는 만큼 기억력이 좋다. 여왕은 통로 내부의 지도를 그렸다.
바로 그때였다.
"윽!"
"여왕님! 괜찮으십니까?"
여왕이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깜짝 놀란 수색대원들이 그녀를 부축했다.
"결계가...."
여왕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결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아니, 파괴되기 직전이에요. 지금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이 정도면 오래 버텼지.'
진작에 안 깨진 게 다행이다 싶었다.
131화
마인, 무월
오랫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지하 통로.
그곳을 한 무리의 마수가 배회하고 있었다. 마기와 독기를 먹이로 삼는 마수들이었다.
- 키르르르....
새까만, 거대한 뱀처럼 생긴 마수들.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어떤 침입자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마수들은 평온한 마음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 쿠우웅!
하나 그 평온도 끝날 때가 됐다.
강렬한 진동이 지하 통로를 울렸다. 마기를 섭취하던 마수가 놀라서 통로 너머를 봤다.
거기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 시, 시이익...?
마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 콰득! 콰지지직!
- 캬하아아악!
보이는 것은 마수의 목덜미를 쥔 채 걸어오고 있는 인간의 모습. 인간은 맹독을 내뿜는 마수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쥐고 있었다.
그리고 마수의 목을, 뽑아 버렸다.
- 저, 저 인간은 대체...?
인간은 지하 통로를 지키는 마수들을 주먹으로 때려 죽이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통로를 가득 채운 마기도, 맹독도 그 인간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 치, 치이이익!
"아이 씨, 더럽게."
마지막으로 남은 마수가 발악하듯 독을 내뱉었지만, 역시나 아무 의미도 없었다.
몸에 묻은 독을 더럽다는 듯 털어 낸 진현우의 주먹이 마지막 마수의 얼굴을 으깼다.
"어디 보자, 마기의 근원이...."
마수들 사체 사이에서 결정체가 보였다.
진현우는 결정체를 파괴한 후 성역을 펼쳤다. 그러자 지하 통로의 마기가 싹 사라졌다.
그는 금방 환기 작업까지 끝마쳤고, 엘프 여왕을 비롯한 엘프 일행이 통로에 들어왔다.
"결계가 있는 위치는 기억하고 계시죠?"
"엘프는 기억력이 좋습니다. 잊을 리가요. 통로가 낡기는 했지만, 바뀌진 않았습니다."
"그럼 빠르게 움직입시다."
진현우는 엘프 여왕의 인도를 따라 통로를 걸었다. 조각이 봉인된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왕궁의 지하로 향할 필요가 있다.
일행은 빠르게 움직였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군요."
"조금 전에 바깥쪽의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헤이시스 쪽에서 대악마와 다수의 마족이 출정했다고 합니다. 마족들은 따로 흩어져서 접경 지역으로 가는 것 같다는군요."
"몬스터들을 막으러 가는 거겠죠."
인기척이 적을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숫자, 거기에 강함을 가진 몬스터들이 나타났으니. 수도의 방비를 포기해서라도 병력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거점을 더 빼앗길 상황이니까.
"이쪽입니다."
일행은 통로를 지나 왕궁에 도달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열자, 왕궁의 지하가 나왔다. 빛 하나 없이 어둠만이 자리한 공간.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이건...."
"큭, 마족 놈들!"
지하에는 수많은 시체가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서 백골이 된 시체들. 그 시체들을 본 엘프들이 이를 갈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족의 시체입니다. 아마, 마족에게 침공당했을 때 여기 남았던 동족들일 겁니다."
"...."
엘프 여왕이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합니다. 모두 내가... 후우. 나중에, 이곳을 되찾거든 위령제를... 치르죠."
"예, 여왕님."
"갑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엘프들의 시체를 수습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일행은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
왕궁의 지하. 그곳에 있는 비밀 통로를 지나서, 더욱 깊은 지하로 내려가면 나오는 공간.
웨펀 마스터의 조각이 봉인된 곳으로.
"헤이시스, 하아...."
지하를 걷던 여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을 탈환할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요. 이 정도로 마기에 찌들었으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됩니까?"
"헤이시스의 방어 시설이 있습니다. 지금은 마기에 잠식되어서 마족들이 이용하고 있죠. 마기만 없앤다면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마기만 없애면 된다, 이거군요."
그러면 얘기는 쉽다.
진현우는 품속의 성배를 만지작거렸다.
"그 부분은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일단 결계가 있는 곳부터 빠르게 가죠."
"네."
여왕은 인상을 찡그렸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결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최악을 상정해야겠군요."
진현우는 도끼를 움켜쥐었다.
일행은 더 깊은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 * *
왕궁의 지하에는 넓은 공동이 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결정체가 있었다. 한때는 찬란한 빛을 내뿜었을 결정체는 마기로 오염되어 있었다.
"결계가...."
결정체는 결계를 구축하는 핵이었다.
그 핵이 완전히 마기에 오염되었다는 것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가 늦었군요."
결계가 파괴되었다는 것.
여왕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게끔 만든 결계를 이렇게 파훼할 줄이야.
지독한 마기 때문에 숨 쉬기도 힘들었다.
"은인이시여, 조심하십시오.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적들이 있을 겁니다."
"예. 일단...."
진현우는 성배를 꺼내 성역을 전개했다.
성배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지하의 마기를 몰아냈다. 그리고 그때,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후... 재밌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군."
"누구냐?"
공동의 저 너머.
더욱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여인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괴물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는 여인.
마인이었다.
"보면 모르겠어? 마인이지."
마인은 도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소매가 넓은 도복.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인의 형체는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 피부는 그림자처럼 새까맸고, 몸에서 검보랏빛의 마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강렬한 압박감.
"그리고 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 네가 찾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마인이 손아귀에 쥔 것을 보여 줬다.
웨펀 마스터의 유산, 부서진 검의 조각이었다. 진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 콰아아앙!
그의 손에서 도끼가 쏘아졌다.
순식간에 투척된 도끼가 마인을 노렸다. 그녀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손끝에서 쏘아진 마탄이 도끼와 충돌했다. 그대로 힘을 잃은 도끼가 되돌아왔다.
"통성명도 없이 다짜고짜 공격이라. 생각보다 예의가 없는 놈이로군, 진현우."
"마인과 통성명을 할 필요가 있나?"
"없긴 하... 지!"
마인의 소매가 크게 펄럭였다.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인지하기 힘든 속도로 무언가가 쇄도했다.
진현우는 방패를 들었다. 공격을 인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었다.
- 콰지지직!
뱀 같은 무언가가 방패를 덮쳤다.
방패가 굉음을 내면서 갉혔다. 아니, 베였다. 빛의 수호에 커다란 상처가 새겨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촤르륵!
"크윽!"
방패에 막힌 무언가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진현우의 두 팔을 베었다.
기이한 움직임. 반응할 새도 없었다.
진현우는 팔을 벤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사복검.'
그건 사복검이었다.
피를 머금은 새빨간 사복검. 칼날이 다시금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려 하고 있다.
건틀릿으로 잡을까? 아니, 위험하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우우웅!
손아귀의 아공간에서 튀어나온 부서진 검이 검기를 내뿜었다. 진현우는 다시금 움직이려 하는 사복검을 검으로 올려쳤다.
카드득! 검기와 충돌한 사복검의 늘어진 마디가 조여지더니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검의 주인, 마인이 히죽 웃었다.
"감각이 좋네.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네 뒤에 있는 귀쟁이들이 죄다 죽었을 텐데."
사복검이 노린 건 진현우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 있던 엘프들이었다. 방패를 들지 않았더라면 엘프들이 공격에 당했을 것이다.
마인의 눈동자가 진현우의 검을 봤다.
"주인님이 말씀하신 검이 그 검이로군."
진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님. 아마도 저 마인이 섬기는 대적자를 말하는 것일 터. 대적자가 이 검을 말했다?
"너한테 제안을 하나 하지, 인간. 그 검을 얌전히 내려놓고 떠난다면 너희의 목숨은 살려 주지. 나, 무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어."
마인, 무월은 부서진 검을 보고 있었다.
저 마인은, 대적자는 이 검을 탐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저 조각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이 검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오랫동안 플레이어로 활동해 왔던 진현우의 감이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뭔가가 더 있다.
이 검에, 그조차도 모르는 비밀이.
"글쎄, 오히려 내가 제안을 하고 싶은데. 그 조각을 두고 가면 고통 없이 죽여 주지. 어때?"
"하!"
무월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네가, 날?"
무월에게는 여유가 보였다.
가진 힘에 자신이 있는 강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 힘을 가졌기에 나오는 자신감.
실제로도 그러했다.
'저 마인,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다.'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물론 모든 수단을 쓴다면 이길 수는 있다. 성배의 잔해에 남은 횟수를 모두 소모한다면, 저 마인을 처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어.'
성배는 여기서 쓸 물건이 아니다. 대악마, 헬만을 상대할 때 쓰여야 할 아이템이다.
결국은 성배 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
그래서는 승산이 없다.
'먹을 수밖에 없겠군.'
만개의 숫자는 둘.
엘프 조제사에게 부탁해서 두 알의 만개를 만들었다.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제일 좋은 타이밍에 써야겠어.'
진현우는 검을 쥐었다.
무월이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봤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자격이 있음에도 모든 걸 거부한 어리석은 자라고 하시더군."
"그 어리석은 자의 유산이 그리 탐나나?"
"유산에 담긴 힘이 위협적이거든."
무월은 자신이 쥔 조각을 바라봤다.
그리고 진현우가 움켜쥔 부서진 검 역시.
"너 역시 마찬가지야, 진현우. 어리석은 자의 자격을 이어받은 플레이어. 네가 가진 힘은 한낱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될 힘."
무월이 두 팔을 펼쳤다.
그러자 공동의 벽이 열리더니, 그 너머에 숨어 있던 카오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프들이 예상했다는 듯 활을 들었다.
"너는 여기서 죽어 줘야겠어."
"돌격! 저 귀쟁이 년들을 다 죽여라!"
"칫,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카오틱들이 엘프들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무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진현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진현우는 손가락을 튕겼다.
- 쿠어어어어엉!
"크으윽?!"
갑자기 소환된 그리즐리 베어가 달려들던 카오틱들을 위에서부터 짓눌렀다.
진현우는 곧바로 방패를 높이 들었고, 빛이 터지면서 아군에게 버프가 들어갔다.
능력치를 향상하는 '빛의 수호' 옵션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버티는 식으로 싸우세요. 미호, 너도 나 말고 엘프들을 도와줘."
- 알겠느니라. 저 마인을 상대로는 나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구나....
카오틱은 인간.
미호가 도움이 될 것이다. 진현우에게 떨어진 미호가 엘프 여왕의 어깨에 올라탔다.
여왕이 진현우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진현우, 괜찮겠습니까?"
"괜찮겠어요?"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오자마자 저런 까다로운 적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래도 해 봐야죠, 뭐."
진현우는 앞으로 걸어갔다.
무월이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포기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 거야, 인간. 넌 꽤 강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무월의 소매가 펄럭였다.
두 소매에서 기다란 사복검이 나타났다.
"나에 비하면 한참 부족...!"
무월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진현우의 신형이 번뜩이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한 줄기의 섬광이 무월의 앞까지 왔다가 다시 번쩍이며 배후로 돌았다.
"넌 말이 많아."
"하!"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입가에 광소를 머금은 무월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반기는 것은 거대한 해일.
수없이 쏟아지는 검기였다.
- 콰르르르르!
"진현우...!"
해일을 향해 무월이 검을 내질렀다.
이윽고, 엄청난 굉음이 공동을 가득 메웠다.
132화
한계를 넘어서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해일이 덮쳐 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검기가 무월을 향해 쏘아졌다.
그녀가 선택한 대항법은 간단했다.
- 촤르르륵!
무월이 사복검을 내질렀다.
그 검끝이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수십 개의 칼날로 증식해 진현우를 덮쳤다.
마기를 휘감은 칼날들이 검기와 충돌했다.
- 콰아앙!
강렬한 굉음이 공동을 울렸다.
두 검기가 맞부딪치면서 일어난 파동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무월은 히죽 웃으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몸을 비틀었다.
그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하."
푸른 검기가 그녀의 어깨를 베었다.
마인의 갑피를 단번에 벨 정도의 예기.
그게 뜻하는 것은 간단했다. 진현우의 검기를 막아서던 무월의 마기가 패배했다는 것.
"흥미롭군. 하지만!"
촤르륵! 무월의 사복검이 흔들렸다.
다시금 진현우에게 검기가 쏟아지고, 해일이 그걸 제압하고 역습하는 그림이 반복됐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네 마력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
진현우의 마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
부서진 검으로 일으키는 검기, 해일이라는 스킬. 둘 다 엄청난 마력을 필요로 한다.
여러 특성에 탄생의 꽃을 보유한 진현우라고 할지라도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다.
'저 마인은 다르지.'
마인의 힘은 쉽게 고갈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환경. 그나마 이 방은 성역의 효과로 마기가 사라졌지만, 다른 곳은 아니다.
힘이 고갈됐으면 보충하면 된다. 그렇기에 소모전으로 가면 무월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월이 사복검으로 땅을 내리쳤다.
땅으로 파고드는 사복검. 불길함을 느낀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그가 서 있던 자리의 땅 밑에서 사복검이 뱀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칼날이 노리는 건 그가 아니었다.
- 카아앙!
"으흐윽...!"
"저 짐 덩어리들도 있잖아. 응?"
사복검이 후방의 엘프를 덮쳤다.
다행인 것은 스치는 정도였다는 것. 뒤늦게 눈치챈 진현우가 도끼를 투척해서 궤적을 틀지 않았다면 치명상을 입고도 남았을 것이다.
"피할 생각은 하지 마. 네가 피해서 저 귀쟁이들이 죽는 꼴을 보기 싫으면!"
무월이 땅을 박찼다.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한 줄기의 마기가 들이닥치는 것뿐.
진현우는 본능에 의존해 검을 휘둘렀다.
- 쉬이이익!
보이는 것은 쏘아지는 사복검.
진현우의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사복검이 꺾이면서 그의 목 뒤로 돌아갔다.
각도를 튼 칼날이 무방비한 목을 노렸다.
"큭!"
진현우는 황급히 몸을 굴렸다.
하지만 다소 늦었다. 사복검이 그의 목 대신 어깨를 깊숙이 베고 지나갔다.
작열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땅을 힘껏 내리쳤다.
- 콰아아앙!
충격파가 땅을 짓이겼다.
동시에 일어나는 자욱한 먼지. 무월의 시야가 순간 가려졌다. 그 먼지 사이를 가로지른 섬광이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갔다.
검기를 두른 검이 그녀의 목을 노렸다.
"똑같이 되갚아 주겠다는 거냐?"
하지만 늦었다.
무월의 소매가 펄럭였다. 왼쪽의 소매에 숨겨져 있던 사복검이 그녀의 목을 감쌌다.
카아앙! 검기가 튕겨졌다. 하지만 진현우는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왼손을 움직였다.
- 푸우욱!
"크흑! 하, 아하하하!"
어느새 왼손으로 돌아온, 붉은 기운을 머금은 도끼가 무월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도끼는 갑피에 가로막혔다. 재밌다는 듯 웃은 무월이 도끼를 움켜쥐었다.
"재밌네...!"
진현우는 곧바로 도끼를 놓고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무월의 행동이 빨랐다.
그녀의 몸에서 마기가 채찍 같은 형태로 뿜어져 나오더니 사방에서 진현우를 내리쳤다.
- 카드드득!
진현우가 입은 갑옷, 폭정의 상징이 채찍들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충격 때문에 뒤로 물러나려고 했던 움직임이 멈췄다.
무월의 사복검이 들썩였다.
"어딜 가려고!"
"크윽!"
사복검이 진현우의 갑옷을 낚아챘다. 강한 힘이 그를 강제로 무월에게 끌려오게끔 했다.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 퍼어어엉!
"...!"
마기가 응축된 주먹이 진현우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옷이 단번에 짓이겨지면서 살을 관통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이를 악물며 스킬을 사용했다.
- 파아아아앗!
손아귀에서 터진 광휘가 공동을 밝혔다.
사악한 존재를 불태우는 찬란한 빛. 마인, 무월은 몸이 불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물러났다.
진현우는 곧장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래, 이리 와!"
맞부딪치는 칼날.
서로의 칼날이 튕기고 팔이 크게 젖혀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빈틈을 노리고, 막아 내고, 맞부딪치고, 튕기고. 숨 쉴 틈 없는 치열한 검합이 이어졌다.
"후욱...!"
얼핏 보기에는 팽팽해 보이는 검합.
하지만 승자는 명백했다. 진현우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그의 검기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어.'
부서진 검에 검기를 일으킨다는 행위 자체가 진현우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치열한 검합을 계속 교환하고 있었으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조금만 더.'
이대로면 패배는 필연.
무월도 그걸 느꼈다. 눈앞의 인간이 한계에 다다랐고, 자신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 생각이야말로, 무월에게 그 생각을 심는 것이야말로 진현우가 노리던 것이었다.
"생각보다 약하구나, 진현우. 아니!"
사복검이 흔들리는 검기를 강타했다.
진현우의 팔이 크게 밀려났다. 또 한 자루의 사복검이 그의 복부를 크게 베고 지나갔다.
피가 요란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인간치고는 잘 버텼다고 해야겠지!"
무월이 광소를 터트리면서 사복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아무런 기교도 없는, 그저 자신의 힘에 의존해서 내리치기만 할 뿐인 공격.
진현우는 황급히 유수를 펼쳤다.
- 촤르르륵!
"큭, 아아아악!"
하지만 흘릴 수 없었다.
흔들리는 검기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참격이 진현우를 덮치고 있었다.
그의 전신이 무참하게 베였다.
- 쿠우웅!
"커헉...!"
진현우의 몸이 요란스럽게 날아갔다.
벽에 처박히는 몸뚱어리. 카오틱과 싸우고 있던 엘프들이 그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아드네아가 그를 도우려고 했지만.
"아드네아, 잠깐만요."
"여왕님! 지금 은인을 도와야...!"
"아니요, 기다려 보죠. 괜찮을 겁니다."
여왕이 그녀를 막았다.
엘프 왕궁의 조제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왕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저건 아마도 노린 것.
"믿고 지켜봅시다."
"...네."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입가에 잔혹한 미소를 띤 무월이 벽에 처박힌 진현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둘의 거리가 금방 좁혀졌다.
"2층에서 조각을 탐색하던 얼간이가 죽었다고 하더군. 누구한테 죽었나 했더니...."
"우욱, 카하악!"
진현우가 입에서 피를 왈칵 토했다.
무월이 히죽 웃었다.
"그게 너였군. 그분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은 나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 정도면... 그 얼간이를 죽이기에는 충분한 실력이지."
촤르륵! 사복검이 단단히 조여졌다. 평범한 칼처럼 변한 칼날이 진현우의 목을 겨눴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진현우."
무월의 두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내 주인님이 널 원하신다. 마인이 되어라. 그러면 널 죽이지 않고 살려 주지."
"...."
"대답은?"
진현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이 더듬거리면서 움직였다. 하지만 너무 작아서 무월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까."
"뭐라고?"
무월이 고개를 가까이했다.
이윽고 서로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진현우가 작게 속삭였다.
"X 까라고."
들리는 것은 아주 작은 욕설.
무월은 패배한 개의 추한 발버둥을 비웃으면서 사복검을 쥔 팔을 크게 젖혔다.
바로 그때.
-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이 들렸다.
검을 움직이려던 무월은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서늘한 통증도.
무월은 자신의 팔을 봤다.
"...어?"
오른팔.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것은 땅을 구르는 살덩어리뿐. 소매에 감춰졌던 사복검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왜...!"
보이지 않았다.
아예 감지하지도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조금도 상상한 적 없는 속도로 들어온 일격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검광이 번뜩였다.
- 카아앙!
"아악!"
무월이 황급하게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가 피하는 것보다 빠르게, 예리한 검광이 그녀의 왼팔을 베고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다면 왼팔이 날아갔을 것이다.
"대체, 무슨!"
무월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경악한 그녀의 눈동자가 저 너머를 바라봤다. 검광을 쏘아 낸 자가 있는 곳.
진현우가 처박혀 있던 벽을.
"스으읍...."
진현우가 휘청거리면서 일어났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 정도로 그의 전신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그 모습은 흡사 다 죽은 시체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무월에게 더없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 만개를 복용했습니다. 당신에게 한계를 초월할 정도의 강력한 힘이 주어집니다.
- 그 대가는 치명적일 것입니다.
- 피에는 피 스킬을 발동합니다.
"후우우!"
진현우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귀기 어린 눈빛. 한계에 달했던 몸이, 메말라 가던 심지가 다시금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치 회광반조의 그것처럼.
- 화아아악!
"크윽?!"
진현우가 강렬한 마력을 내뿜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빠진 풍선처럼 마력이 고갈되어 가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오히려 더 많은 마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가 땅을 박찼다.
- 파아아앗!
'빠르다. 이 속도는...!'
카아앙!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
순식간에 무월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진현우의 검격을 사복검으로 가까스로 쳐 냈다.
무월은 팔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안 보여!'
진현우의 신형이 다시금 사라졌다.
무월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섬광이 사방을 누비고 있다는 것뿐. 그리고 잠시 후.
"이, 미친!"
그녀에게 도끼가 날아들었다.
쏘아지면서 분열하는, 냉기를 휘감은 도끼. 그리고 그보다 빠른 섬광이 그녀에게 닿았다.
투척한 도끼보다도 더 빠르게 무월의 코앞까지 도달한 진현우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 카드드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위태롭게 흔들리던 검기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막아야 한다. 막을 수밖에 없다.
무월은 마기를 가득 일으키며,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복검으로 그 검기를 막아 냈다.
- 퍼어억!
"아아아악!"
무월의 왼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곧이어 날아온 도끼들이 무월의 사지에 꽂혔다. 일부는 뒤늦게 일으킨 마기의 채찍으로 튕겨 냈지만, 모두 튕겨 낼 수는 없었다.
명중한 도끼가 상처를 얼어붙게끔 했다.
'대체 뭐야? 뭐가 어떻게!'
도끼가 진현우의 손아귀로 되돌아갔다.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도끼를 쥔 진현우가 무월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맹공에 무월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다 죽어 가던 시체가 왜!'
쫓을 수 없는 속도, 압도적인 힘.
모든 것이 조금 전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그 사실이 무월을 혼란스럽게 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월의 옆구리를 도끼가 강타했다.
장작이라도 패는 것 같은 무식한 손놀림. 마인의 갑피가 그 일격에 무력하게 꿰뚫렸다.
쩌저적! 상처가 얼어붙었다.
- 콰앙! 쾅!
진현우가 미친 것처럼 도끼를 휘둘렀다.
경악스러운 것은 그럴 때마다 도끼를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무월도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학! 컥, 끄아아아아!"
조금 전과 같은 양상이다.
서로 치열하게 검합을 나누던 때와 같은 흐름. 하지만 결과는 그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놈, 양손을 어떻게... 이리 자유롭게!'
진현우는 양손에 각기 다른 무기를 쥐고 있었지만, 너무도 자유롭게 다루고 있었다.
검을 크게 내리친다. 맞부딪치는 사복검. 빈틈이 드러난 무월의 옆구리를 도끼로 친다.
그리고 곧바로 도끼로 사복검을 올려 치면서, 날카로운 검기로 허벅지를 크게 벤다.
'대응할 수가...!'
조금 전이었다면.
눈앞의 인간이 갑자기 생기를 되찾기 전이었다면 무월도 충분히 대응했을 것이다.
그때는 진현우의 신체 능력이 그녀보다 한참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해졌다. 어째서?'
힘이, 마력이, 신체 능력이, 모두가. 그녀와 비등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강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돼, 이대로는!'
무월은 큰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는 죽을 수도 있다. 아니, 죽는다. 그럴 수는 없다. 그녀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크... 으아아아아아!"
무월이 발작하듯 마기를 일으켰다.
화아아악! 검은 불길처럼 솟구친 마기가 주변을 덮쳤다. 마기가 그녀의 몸을 뒤덮었고, 결손된 부위를 마기로 대체하려고 했다.
강렬한 마기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마기로 잠식될 정도.
"뭐...!"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무의미했다.
진현우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무월에게 달려들더니, 퍼어억! 그녀의 어깨에 도끼를 내리꽂고는 가슴께를 걷어찼다.
그 힘에 떠밀리듯 무월이 밀려났다.
- 꽈아아앙!
"크흐윽?!"
진현우가 허공을 후려쳤다.
그러자 밀려나던 무월의 오른팔을 충격파가 강타했다. 진현우의 주먹, 파쇄권이 마기가 만들어 내던 오른팔을 단번에 짓이겼다.
그의 몸에서 검은 화살들이 쏘아졌다.
- 쉬이이익!
"이 화살은...!"
검은 화살 다발이 밀려난 그녀를 덮쳤다.
무월은 신체 능력이 저하하는 것을 느꼈다. 디버프다. 그에 대응할 새도 없이, 어느새 활을 꺼내 든 진현우가 시위를 힘껏 당겼다.
- 콰지지지직!
"...!"
순식간에 쏘아진 폭풍시가 무월의 몸에 착탄했다. 닿는 것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는 폭풍이 일어나면서, 바람의 칼날이 그녀를 베었다.
그 몸을 뒤덮던 마기가 흩어졌다.
'지금.'
진현우는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리고 검기를 한계치까지 일으키면서,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무월에게로 돌진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 푸우욱!
"으, 하악...!"
무월의 심장을 부서진 검이 꿰뚫었다.
마기로 물든 심장을 파괴하는 검기. 검을 비틀면서 심장을 짓이긴 진현우가 팔을 젖혔다.
검이 탐욕스레 마력을 흡수했다.
- 서걱!
진현우는 허공을 베었다.
순간 흐르는 정적. 그리고 잠시 후, 정적을 깨트리는 거센 해일의 소리가 들리더니.
- 콰르르르!
"아아아아악!"
수많은 검기가 무월을 덮쳤다.
한계까지 응축한 검기가 셀 수 없는 참격이 되어 마인, 무월을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처절한 비명이 공동에 가득 울렸다.
133화
대적자
처절한 비명이 공동을 가득 울렸다.
격한 전투를 벌이던 카오틱과 엘프들도 무심코 돌아보게 될 정도로 처절한 비명이었다.
"무, 무월 님이...."
"마인이, 죽었다고? 플레이어 손에?"
상황을 확인한 카오틱들이 경악했다.
평범한 마인도 아니다. 무월이라면 대적자의 관심을 사서 큰 은총을 받은 마인이다.
그런 마인이, 플레이어 손에 죽다니.
"크, 흐아아아...!"
검기에 온몸을 베이고, 심장마저 짓이겨진 무월이 처참한 꼴로 땅을 나뒹굴었다.
그 앞에 진현우가 섰다.
"어떻게, 마기, 를...."
무월의 떨리는 눈동자가 진현우를 봤다.
인간 주제에 어떻게 마기를 무시하고 공격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 그는 코웃음을 쳤다.
"군단장 하나가 좋은 아이템을 줬거든."
"하, 그 빌어, 먹을...."
무월은 최근에 죽은 아스튼을 떠올리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 모습을 싸늘하게 응시하던 진현우가 검을 내리그었다.
푸욱! 피가 요란스럽게 튀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허."
진현우는 상황에 맞지 않은 메시지를 치우면서 다시금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 검기가 카오틱들을 덮쳤다.
"아아아악!"
"아, 안 돼! 도망쳐! 못 이긴다고!"
"쏴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다수의 카오틱이 일거에 휩쓸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엘프들이 도망치던 카오틱을 공격했다. 두 집단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진현우가 개입하자 균형이 깨졌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 강해지셨어.'
그 강함을 목도한 아드네아가 감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현우의 상처를 확인하고는 부하들을 시켜서 치료하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여왕이 막았다.
"됐습니다. 의미 없어요."
"예? 여왕님, 의미가 없다는 건...."
"저 남자가 잘 알 겁니다."
엘프 여왕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진현우에게서 엄청난 힘이 느껴진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언젠가 불길은 꺼지기 마련.
'방법이 있으니까 먹은 거라 믿겠습니다.'
오랫동안 본 것은 아니지만, 엘프 여왕이 본 진현우는 헛되게 목숨을 버릴 사람은 아니다.
그녀가 준 탄생의 꽃도 있다. 뭔가 대처할 방법이 있어서 저랬을 거라 믿는 수밖에.
"생존자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남은 적들을 처리하고 부상자들을 회복하세요. 빨리!"
"예!"
엘프들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동안 진현우는 무월의 시체를 바라봤다.
'이 마인, 이상할 정도로 강하다.'
진현우도 3층에서는 규격 외에 속하는 플레이어다. 여태껏 쌓아 온 업적의 보상, 특성의 효과 그리고 여러 영약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 진현우도 무월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아무리 마인이라도 불가능해.'
만개라는 목숨을 대가로 한 수단을 써서야 압도할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대적자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았나?'
진현우는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게 맞는다면, 조금 있으면 또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그 전에 할 일부터 해야 한다.
'일단 조각부터 챙겨야겠군.'
진현우는 무월에게서 조각을 챙겼다.
그리고 한 손에는 부서진 검을, 또 한 손에는 웨펀 마스터의 비급을 쥔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목소리가 들렸다.
- 나는 제안을 거절했다. 놈이 뿌린 씨앗들이 날 적으로 인식하겠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익숙한 목소리다.
이 비급의 주인의 목소리.
- 이 조각들은 그때를 위한 것이다. 언젠가, '대적자'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목소리가 흐릿해진다.
진현우는 감았던 눈을 떴다.
- 이건 널 위한 것이다.
시야를 가득 메웠던 빛이 사라졌다. 조각의 빛이 두 아이템에 깃드는 것이 보였다.
- 필요한 조건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부서진 검과 웨펀 마스터의 비급이 강화됩니다.
- 화아악!
원래는 칼날의 밑동만 있던 부서진 검.
그 칼날이 중간 부분까지 복구되었다.
[부서진 검 (영웅)]
- 설명: 오래전에 부서진 검이다. 조각의 일부를 되찾아 칼날의 절반을 복구했다.
- 착용 제한: 웨펀 마스터만 착용 가능.
- 효과: 탐식의 검, 천변, 안배.
* 탐식의 검: 마력과 마기를 베고 흡수하는, 엄청난 예기를 지닌 검기를 일으킨다. 마족과 마인에게 특히 효과적이다. 검기를 일으켰을 때만 웨펀 마스터의 스킬을 쓸 수 있다.
* 천변: 검 종류의 무기를 흡수해서 형상을 기억할 수 있다. 형상을 불러올 경우, 기억한 검의 옵션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 안배: 누군가가 훗날을 위해 마련해 둔 안배. 특정 존재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아직 불완전하며, 조각을 갖추었을 때 완성된다.
옵션을 본 진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정 존재?'
천변과 안배라는 옵션이 생겼다. 그런데 이 안배라는 옵션이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 넘기고.'
신경 쓸 시간이 없다.
진현우는 비급을 펼쳐서 스킬을 익혔다. 머리에 새로운 지식이 새겨지는 게 느껴졌다.
- 웨펀 마스터의 비급을 읽었습니다. 안에 담긴 깨달음이 머릿속에 새겨집니다....
- 제3식: 침잠 (S, Lv.1)을 익혔습니다.
- 제4식: 환검 (S, Lv.1)을 익혔습니다.
진현우는 스킬을 익히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바로 스킬창을 열었다.
[웨펀 마스터]
· 제3식: 침잠 (S, Lv.1): 그 검격은 깊은 물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이. 사라졌다가 상대방의 사각에서 나타나는 검기를 쏘아 낸다.
· 제4식: 환검 (S, Lv.1): 그 형상은 붙잡을 수 없는 환상과도 같이. 수많은 환검을 소환해 사방의 적을 공격한다.
익힌 스킬은 두 가지.
머릿속으로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하는지 방법이 떠올랐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진현우는 무월이 썼던 사복검을 챙겼다.
그리고 부서진 검에 먹였다.
- 부서진 검이 사복검을 흡수했습니다. 천변이 사복검의 형상을 기억합니다.
'시간이 없다. 일단 빨리....'
자세하게 뭘 확인할 시간도 없다.
움직이려던 진현우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러다가 심장 터지겠네.'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다.
온몸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 혈관과 장기가 손상되는 것 역시도.
- 만개를 복용했습니다. 당신의 한계를 초월할 정도의 강력한 힘이 주어집니다.
- 그 대가는 치명적일 것입니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진현우가 복용한 만개는 힘을 주는 대신 복용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맹독.
수명이 빠르게 깎이는 것이 느껴졌다.
- 탄생의 꽃이 만개와 공명합니다. 만개의 지속 시간이 더욱 증가했습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진현우는 만개를 조제할 때 탄생의 꽃잎을 사용했다. 그 덕분인지, 만개의 지속 시간이 평소보다 더욱 증가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더 고통받다가 죽으라는 건가?"
"진현우, 괜찮습니까?"
"괜찮을 리가요. 일단 빠르게 움직...."
진현우는 피식 웃었다.
엘프들도 정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그는 엘프들과 합류해서 바로 움직이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감각이 뭔가를 경고했다.
- 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는 느낌.
진현우는 뒤를 돌아봤다. 보이는 것은 목숨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무월의 시체뿐.
그 시체가.
"무, 무슨...!"
"시, 시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무월은 살아날 여지 없이, 확실히 죽었다.
'역시.'
모두 경악하는 가운데, 진현우는 자신이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는 검을 휘두르려다가 멈췄다.
'조금 전에 들었던 선대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린다. 뭔가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지.'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다.
진현우는 검을 아공간에 감췄다.
- 무월이 죽었는가.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저 깊은 곳에서 올라온 것 같은 끔찍한 목소리. 무월의 것과는 명백히 다른 목소리.
공허한 눈동자가 진현우를 직시했다.
- 또 한 번, 운명이 바뀌었군.
무월의 신형이 흔들렸다.
진현우가 반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들이닥친 무월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 진현우, 널 만나고 싶었다.
"...!"
강력한 악력이 느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의 악력. 아니, 더 나아가서 목을 아예 짓이길 것 같은 힘이다.
무월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었다.
- 예정된 운명대로였더라면 이곳에서 무월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명령대로, 어리석은 자가 남긴 유산을 가지고 돌아왔겠지.
무월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 하지만 이번에도 바뀌었군. 2층에서, 내 은총을 받은 자가 실패했던 것처럼. 또.
"너...."
그 말을 들은 진현우는 직감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이 맞았다.
"대적자, 로군. 날 직접, 만나러 오셨나?"
- 흠.
무표정하던 무월. 아니, 대적자의 입가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내 추측으로는, 아마...."
탑에 있는 여러 대적자.
그중에서 하나, 짐작 가는 놈이 있었다.
"멸망의 목도자."
- 훌륭하군. 아주 정확하다, 진현우.
대적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마인은 대적자에게 힘을 하사받은 존재. 대적자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탑 내부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가능하다.
'마인의 몸을 빌린다면.'
특별한 과정을 거친 마인이라면, 그 마인의 목숨을 대가로 잠깐이나마 강림할 수 있다.
그 마인이 죽은 상태에서도 역시.
"날 어지간히도, 만나고 싶었나 보군."
- 물론, 만나고 싶었다. 정해진 운명을 계속해서 비트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으니까.
"정해진, 운명이라고?"
- 그래, 운명 말이다.
진현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적자가 그에게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 네가 가진 그 힘의 운명은 우리가 뒤틀었다. 자격이 없는 자가, 어리석은 자가, 원하지 않을 자가 힘을 가지게끔 안배해 뒀었지.
힘의 운명은 우리가 뒤틀었다.
자격이 없는 자.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전생에서 웨펀 마스터로 전직한 놈은 카오틱이었지. 그것도 아주 악명이 높은 놈.'
그 카오틱은 웨펀 마스터의 직업 퀘스트를 찾지 못했다.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현우는 지금까지 그게 불운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나 어쩌면, 아니 확실하게.
'그걸 대적자들이 유도한 거였나?'
진현우는 꽉 쥐었던 주먹을 펼쳤다.
그 손아귀에 나타난 아공간이 번뜩였다.
- 그 운명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왜?
대적자가 무감정하게 물었다.
진현우는 왼 주먹에 마력을 집중하면서 오른손으로는 부서진 검을 움켜쥐었다.
- 네놈은... 누구냐?
"알면서 뭘 물어?"
꽈아아앙!
거인의 괴력이 깃든 파쇄권이 대적자의 복부를 강타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진현우의 목을 움켜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빠졌다.
땅을 디딘 진현우는 검을 내질렀다.
"너희는 말이 너무 많아."
검이 허공을 베었다.
파쇄권 때문에 흐트러진 자세를 다잡던 대적자는 검기가 날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검기를 쏘아 낸 것은 맞다.
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현듯 무언가를 느낀 대적자가 고개를 홱 돌렸다.
바로 그의 등 뒤.
- 서걱!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대적자가 반응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한 줄기의 검기가 쏘아졌다.
침잠. 모습을 감췄다가 상대방의 사각에서 나타나는 검기가 대적자의 몸을 갈랐다.
- 이건, 어떻게....
비웃음 외에는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던 대적자가 처음으로 놀란 감정을 내보였다.
놈은 자신을 가른 검기를 놀란 듯 봤다.
- 나와 마인의 연결을... 끊었나. 그 검의 힘인가? 어리석은 자가, 많은 걸 준비해 뒀군.
무월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베였으나 다시금 붙었던 목이 떨어지고, 온몸에서 검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대적자가 무릎을 꿇었다.
- 다시....
무월에게서 검은 기운이 빠져나갔다.
완전히 허물어지는 시체. 쓰러지기 직전, 대적자는 고개를 들어 진현우를 응시했다.
그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 만나게 될 것이다, 진현우.
"말 더럽게 많네, 진짜."
진현우가 그 몸을 반으로 베었다.
털썩! 더는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무월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는 혀를 찼다.
'제길, 시간 낭비만 더럽게 했군.'
안 그래도 심장 아파 죽겠는데.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마인과 대적자의 연결을 끊었다고?'
대적자가 강림한 마인은 좀비나 다름없다.
웬만한 공격은 버티고, 재생하면서 싸운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도 쉽게 죽일 수 있었다.
하나 짚이는 게 있었다.
'이 안배라는 옵션 때문인가.'
특정 존재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옵션.
어쩌면 그 존재라는 게 대적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진현우는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던 엘프들에게 손짓했다.
"빨리 움직입시다. 시간 없어요."
"예? 아, 아아! 알겠습니다."
"지, 진현우. 조금 전의 그건...."
"시간 없다니까요. 일단 올라가고 봅시다."
진현우와 일행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의 대적자가 신경 쓰이는 말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빠르게 왕궁으로 가야 한다.
'대악마를 유인해야겠어.'
성배의 잔해.
이 아이템의 마지막 옵션을 써야 한다.
134화
빛이 있으라
엘프와 마족 간의 전투는 점점 격해졌다.
접경 지역에서는 격전이 벌어졌으며 많은 이의 피가 흘렀다. 그리고 정말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 피의 대부분은 마족의 것이었다.
- 크아아아악!
- 제기랄! 누구든 저 외눈박이를 죽여!
진현우의 몬스터 군단 때문이었다.
사이클롭스를 비롯한 보스 몬스터들이 선두에서 무자비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자 처음에는 지켜만 보던 플레이어도 나서기 시작했다.
"야, 이거 우리가 유리한 거 아냐?"
"상황 되게 좋은데? 아니, 무리해서 싸울 것도 없이 저 몬스터들 뒤에서 싸우면 되잖아."
"공헌도! 엘프가 저 몬스터들을 지원하면 평소보다 공헌도 두 배로 더 많이 준답니다!"
도망치지 않고 전쟁에 남은 이들은 대부분 공헌도가 목적이었다. 이 상황을 예측한 여왕의 결단에 플레이어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싸워!"
"무리하지 마! 몬스터들 지원만 해!"
"마족 이 X새끼들아! 다 뒈져!"
오랫동안 마족과 카오틱들에게 고통받던 플레이어들이 한을 풀듯이 날뛰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금방 드러났다.
- '루카시 고원'을 탈환했습니다. 고원의 기운이 아군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마력의 동굴'을 탈환했습니다. 동굴의 마력이 아군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벌레굴'을....
거점들을 빼앗겼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더 많은 버프를 얻은 엘프 진영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세에 나섰던 마족들은 꼼짝없이 방어에 집중해야만 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
카오틱, 자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몬스터 군단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자신들이 가진 수단으로는 대응할 수가 없다.
남은 방법이라면 대악마가 나서는 것.
'진현우, 그놈도 보이지 않아.'
자인을 가장 심란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최근 엄청난 활약을 보이면서 엘프 진영을 이끌었던 진현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게 굉장히 불안하게 느껴졌다.
'어디에 있는 거지? 생각해라, 자인. 너라면 이 상황에 어디로 갈 거냐. 어디로....'
분명히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자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진현우가 어디로 갔는지를 고민하던 그때, 부하가 들어왔다.
"자인 님! 헤이시스가!"
그것도 또 다른 비보를 들고.
"수도 헤이시스에 엘프 여왕을 포함한 엘프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그중에 진현우도 있다고 합니다!"
"헤이시스라고? 숫자는!"
"수십 단위입니다!"
진현우의 선택은 수도 헤이시스였다.
그게 자인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이 전쟁은 수도를 탈환한다고 끝날 전쟁이 아니다.
가장 지독한 마기로 절여진 곳이 수도다. 거기에 수십 단위면 탈환도 할 수 없을 터.
"도대체 무슨...."
그런데 불길하다.
불길해도 너무도 불길했다. 무시하면 되는데, 무시하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진현우라는 남자가 여태껏 보였던 행보가, 자인이 그를 무시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엘프 여왕의 존재도 그러했다.
"자인 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큭...."
자인은 고민에 빠졌다.
수도 헤이시스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오히려 위협적인 전력이 빠졌으니 이 기회를 타서 반격에 나서는 것도....
아니, 하지만 엘프 여왕이....
"헬만 님에게 보고해라. 진현우와 엘프 여왕이 수도, 헤이시스로 침입했다고."
자인은 이내 결심을 굳혔다.
진현우는 둘째 치더라도 엘프 여왕, 그 여자는 이번 전쟁을 지더라도 죽여야 한다.
다음 전쟁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터.
"그분에게 판단을 맡기겠다."
자인은 헬만에게 판단을 맡기기로 했다.
* * *
- 키하아아아아!
태양의 대장간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헬만과 히드라 간의 전투. 신화의 괴물과 대악마 간의 전투. 우세를 점한 자는 분명했다.
- 하찮은 뱀 따위가!
- 크르르륵...!
우세를 점한 것은 대악마 헬만이었다.
히드라에 버금갈 정도로 덩치를 불린 그는 독을 내뿜는 히드라의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엄청난 악력으로 머리를 말 그대로 뽑아 버리고, 상처를 마기로 물들여 버렸다.
- 크하아아아악!
- 재생 따위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대악마가 엄청난 마기를 내뿜었다.
그 마기들은 수많은 형상의 무기로 변했고, 사방에서 히드라를 포위하여 난도질했다.
거대한 몸이 무자비하게 베였다.
- 키하아아아!
- 독, 산성? 나에게는 무의미하다...!
소환된 몬스터는 일반 생명체처럼 마기로 잠식되지는 않지만, 그 영향은 받는다.
생명의 상극이나 다름없는 대악마의 마기가 히드라의 재생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신이시여! 제 기도에 응해 주소서!"
- 저 빌어먹을 계집이...!
히드라에게는 성녀가 있었다.
샬럿 로즈우드. 그녀가 모든 신성력을 써 가면서 히드라를 지원하고, 헬만을 견제했다.
마기가 생명의 상극이듯이, 신성력은 마기에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 캬하아아아아!
- 발버둥을!
신성력이 마기를 몰아냈다.
그 틈을 타서 뒤로 물러난 히드라가 상처를 빠르게 재생했다. 그리고 독과 산성을 사방에 흩뿌리면서 대장간을 지키는 병력을 덮쳤다.
- 계집... 네년들부터 죽여 주마.
"이리샤!"
헬만이 목표를 바꾸었다.
히드라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적이다. 저 계집만 죽인다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을 눈치챈 샬럿은 이리샤와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달아났다.
- 흥, 무의미한....
- 헬만 님! 자인의 보고입니다!
바로 그때, 자인의 보고가 도착했다.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메시지. 헤이시스에 엘프 여왕을 비롯한 엘프들이 침입했다.
그리고 그중에 진현우도 함께 있다.
헬만은 빠르게 판단했다.
'엘프 여왕을 죽일 수만 있다면 엘프 놈들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을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계속 헬만을 거슬리게 만들었던 진현우라는 존재도 완전히 지울 수 있다.
저 히드라를 처리하고 가는 게 확실하지만, 그러면 늦는다. 진현우와 엘프 여왕이 헤이시스에서 뭘 노리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까.
- 대장간의 방벽을 전개해라. 너희는 목숨을 걸고 이곳을 저놈들로부터 사수하라.
"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헬만 님!"
- 수도 헤이시스. 금방 돌아오지.
헬만은 빠르게 판단했다.
태양의 대장간에 있는 방어 시설이면 히드라의 공격이라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그사이에 모든 걸 끝내고 오면 된다.
- 화아아악!
검은 마기가 헬만의 몸을 감쌌다. 거대한 신형이 사라졌고 전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대장간에 있던 마족들은 전의를 다졌지만, 카오틱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지금이에요. 남은 소환석을 모두 쓰죠."
그리고 샬럿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라켈수스 여러분, 소환된 몬스터들에게 준비된 물품들을 모두 사용해 주세요."
순식간에 소환되는 몬스터들.
파라켈수스 길드가 준비한 영약과 각종 연금 물품이 소환된 몬스터들을 강화했다.
샬럿은 두 손을 모았다.
"태양의 대장간을 반드시 점령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현우를 도울 수 있을 거예요."
전장을 가득 채우는 신성력.
"움직이죠. 빨리."
- 키하아아아아!
히드라가 대장간을 향해 포효하는 가운데, 엘프 측의 군대가 대장간으로 진군했다.
* * *
- 크하아악!
- 저, 저놈들이 여기는 왜...!
수도 헤이시스에 비명이 울렸다.
통로를 지키던 마족이 칼질 한 번에 온몸이 난도질되어 쓰러졌고, 그 뒤를 지키던 카오틱들이 쏟아지는 검기에 무참히 베였다.
달아나려던 마족들은 도끼에 쓰러졌다.
- 괴, 괴물 같은 놈....
"이게 말이 돼? 수도에 저놈들이 어떻게 오냐고! 우리야 특별한 처치를 받았다지만!"
- 제길, 또 온다!
상당수의 병력이 접경 지역의 몬스터들을 막으러 떠난 탓에 수도의 방비는 약해졌다.
애초에 방비를 강하게 할 이유도 없었다.
마기로 절여진 헤이시스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접근할 수 없는 마경 같은 곳이었으니까.
- 저 빛...!
"저놈이 가진 아이템을 파괴해야 돼!"
진현우와 엘프가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성배의 효과 덕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 크아아아악!
"흐허억...."
진현우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만개로 강화된 그는 헤이시스의 방어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재앙 같은 존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버프: 마력 및 마력 재생 속도 +30%.
- 버프: 공격력 +10%, 속도 +5%.
- 버프: 모든 능력치가....
몬스터 군단과 엘프 진영이 협력하면서 여러 거점을 점령하고 있었고, 그렇게 점령한 거점들이 주는 버프가 계속 추가되고 있었다.
진현우는 검을 내질렀다.
- 촤르르륵!
검기가 사복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땅을 뱀처럼 기면서 움직인 사복검이 앞을 가로막던 적 병력들을 무참히 베어 냈다.
"여왕님! 어느 쪽입니까!"
"저쪽! 위로 올라가면 됩니다!"
"아드네아! 여왕님 지키면서 따라와!"
"네, 은인이시여!"
일행은 헤이시스의 방어 시설로 향했다.
"방어 시설이 도움이 되는 건 맞죠?"
"무시하지 마세요. 선조님들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고, 발전시킨 방어 시설입니다."
"근데 마족들한테 왜 졌습니까?"
"그건...!"
진현우의 질문에 여왕이 이를 갈았다.
"이익! 마기 때문에 아예 못 쓰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그렇습니다! 시끄럽고, 일단 믿어 보세요!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기를 바라... 크흡!"
"괘, 괜찮습니까?"
계단을 오르던 진현우가 피를 토했다.
여왕과 아드네아는 그제야 그의 얼굴색이 새파랗다는 것을 알아챘다. 눈 밑은 까맣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은인이시여,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에요."
"진현우, 당신이 조제사에게 시켜서 만든 그 약... 방법이 있으니까 쓴 거라 믿어요."
진현우의 어깨 위에 있던 미호도 그가 토한 피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허공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 크하아악!
기습할 기회를 엿보던 마족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진현우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죽으려고 쓴 거 아닙니다. 갑시다."
일행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헤이시스의 방어 시설 중추석이 있는 곳. 사방이 마기로 물들어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성배를 비추자 원래 모습이 보였다.
"잠깐만요. 상태를...."
여왕은 중추석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기로 물들기는 했지만, 작동에는 큰 문제가 없어요. 중추석을 구속하고 있는 마기만 어떻게든 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여기 계세요. 마기가 사라지면 방어 시설을 바로 작동해 주시고. 성역이 한동안은 유지될 테니까 괜찮을 겁니다."
"예? 은인께서는...."
진현우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 방어 시설에는 옥상이 있다. 마침 위치도 수도의 중앙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성배를 쓰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미끼를 문 고기를 낚아야지."
* * *
진현우는 곧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시설 곳곳에 있던 마족들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검기가 마족들을 베어 냈다.
- 크하아아악!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비명.
진현우는 검기를 쓸 때마다 심장이 쥐어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위태로워졌다.
- 이, 인간. 정말로 괜찮은 것이냐?
"괜찮아 보이냐?"
- 아니...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구나.
"맞아. 근데 괜찮아."
전생에서 수많은 일을 겪었다.
죽음을 목도한 적도 많았고, 죽음을 각오한 적도 많았다. 이 정도면 익숙한 일이다.
진현우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 녀석들도 이런 기분이었겠군.'
만개는 전생에 개발된 약이었다.
탑 공략이 난관에 부딪쳤을 때, 공략대가 크게 실패해서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핵심 공략대를 후퇴시키려고, 상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먹었었지.'
오로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였다.
적지 않은 플레이어가 죽을 걸 알면서도 이걸 먹었었다. 그렇게 죽은 이들 중에는 진현우가 알고 지내던 사람도 많이 있었다.
'나는... 구해지는 대상이었지.'
진현우는 언제나 핵심 전력이었다.
공략에 실패하면 반드시 탈출시켜야 하는 대상. 만개를 복용했던 플레이어들은 진현우를, 그리고 다른 이들을 탈출시켰었다.
그렇게 남겨진 플레이어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진현우는 언제나 그걸 고민했었다.
"그걸 이렇게 느끼게 될 줄이야."
- 응? 무슨 말이라도 했느냐?
"아무것도 아니야."
진현우는 계단의 끝에 도달했다.
저 너머로 문이 보였다. 흐릿해진 시야를 억지로 바로잡으면서, 닫힌 문을 열었다.
탁 트인 넓은 광경이 보였다.
"높군."
건물의 옥상은 드높은 전망대였다.
사방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전망대. 그래서 왕국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한때는 아름다웠겠지만, 지금은 마기로 물든 수도. 건물도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좋아, 그럼...."
진현우를 전방을 응시했다.
만개 때문에 예리해진 감각이 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성벽 저 너머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모였다. 전이 마법의 발현이다.
- 드디어 만나는군.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겁에 질리게끔 만들 것 같은 형상.
대악마, 헬만이었다.
- 널 만나고 싶었다, 진현우.
"그럼 번호표부터 뽑고 와야겠는데. 날 만나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워낙 많아서."
진현우는 씨익 웃었다.
- 재밌는....
"근데."
헬만의 말을 끊으면서 진현우는 성배를 꺼냈다. 신성한 기운이 가득 담긴 성배.
대악마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저 성배에 담긴 신성력으로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
"나도 널 만나고 싶었다, 대악마 헬만."
- 흠, 뭘 하려는 건지는 모....
진현우를 비웃으려던 헬만이 멈췄다.
그 손아귀에 있던 성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헬만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이 다른 신성력이 그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 잠...!
"빛이 있으라."
성배의 잔해.
그에 담긴 마지막 힘.
'재림'이 수도 헤이시스를 뒤덮었다.
135화
넌 여기서 죽는다
빛이 있으라.
성배는 그 말에 응답했다. 초라하게 생긴 항아리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하늘이 갈라졌다. 드높은 곳까지 도달한 빛의 기둥이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 화아아아악!
사방으로 흩어진 빛의 가루가 수도 헤이시스를 뒤덮고 남을 정도의 장막을 형성했다.
헬만은 갈라진 하늘 너머를 봤다.
그곳에, 무언가가 보였다.
- 이, 이건.
대악마 헬만조차도 인지할 수 없는 존재.
초월적인 신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언가가 지상을 뒤덮은 타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존재가 두 손을 맞잡았다.
- 멈춰! 당장 멈추란 말이다!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간다는 걸 느낀 헬만이 진현우를 막으려고 들었다.
하지만 늦었다.
헬만이 다가오려는 순간, 갈라진 하늘 너머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아아아아아아....
파스스, 부서지는 성배.
하늘 너머에서 수많은 빛줄기가 내리쬐었다. 그리고 그 빛줄기가 지상에 닿은 순간.
- 콰아아아앙!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내리쬐는 빛줄기가 지상에 닿자 그 일대를 뒤덮는, 빛으로 된 신성한 폭발이 일어났다.
신성력이 사악한 자들을 불태웠고, 폭발의 범위에 있던 마족의 몸이 단번에 녹아내렸다.
- 으, 으아아아악!
- 무슨, 빛이...!
- 몸이, 내 몸이... 녹아내리고 있어!
그건 분노였다.
재림한 존재가 지상에 만연한 타락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내린 천벌인 것만 같았다.
형벌을 받는 죄인, 마족이 비명을 내질렀다.
- 흐아아아아아아!
- 도, 도망쳐! 건물로 들어가라고!
그걸 보고 기겁한 마족들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내리쬐는 빛줄기는 한둘이 아니었다.
수많은 빛줄기가 놈들의 퇴로를 빼앗았다.
천벌은 죄인을 용서하지 않았다.
- 꽈아앙! 콰아아앙!
- 크, 으으으윽!
헬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대한 몸이 지금은 단점이 됐다. 빛줄기에 닿은 대악마의 몸이 신성력으로 불탔다.
놈은 어떻게든 진현우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몸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인간...!
헬만이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났다.
대악마는 수도의 상황을 돌아봤다. 거센 폭발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폭발에게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마족들뿐이었다.
건물도, 땅도 어떠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마족에게만 피해를 입히는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헬만은 자신의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수도 헤이시스를 감싸고 있는 저 거대한 장막이 디버프를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헤이시스의 마기가, 사라졌다.'
성배에 담긴 신성력이, 수도 헤이시스를 잠식하고 있던 마기를 모두 몰아냈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다.
- 위이이잉!
- 이 소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헬만은 소리의 정체를 단번에 깨달았다.
헤이시스의 성벽. 그 아래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방어 시설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후, 후후훗! 이 빌어먹을 마족 놈들!"
"여, 여왕님. 올라가시면 위험...."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수많은 발리스타.
일반적인 것들과는 다르게 청록색의 마력으로 된 거대한 화살을 장전한 발리스타였다.
다음으로 수도 곳곳에서 수많은 마력 탑이 솟구쳤다. 강한 마력을 품은 탑들이었다.
"네놈들이 침공해 왔을 때는 마기 때문에 써먹지를 못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선조님들께서 만드신 방어 시설의 효과를...!"
발리스타들이 일제히 헬만을 겨눴다.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민 엘프 여왕이 여태껏 느낀 분노를 토하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너희도 맛보거라!"
- 우둔한 짓을 하는구나, 여왕!
쿠우웅!
발리스타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화살이 반응할 새도 없이 헬만에게 쇄도했다. 처음 그 화살들을 본 헬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딴 발리스타로 무엇을 하겠다고.'
헤이시스에 있던 방어 시설의 파악은 이미 끝났다. 저 발리스타의 위력도 마찬가지다.
무시해도 무방할 정도의 위력이다.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할 것은....'
역습하는 것.
방어 시설에 의존하면서 의기양양해하는 저 인간을, 그리고 엘프 여왕을 죽이면 된다.
그런데.
- 콰아아앙!
- 커헉!
예상치 못한 충격이 엄습했다.
쏘아진 발리스타의 화살이 헬만을 꿰뚫었다. 팔을, 다리를, 그리고 몸통까지도.
그게 그를 경악게 만들었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마기를, 이깟 화살이 뚫었다고?
- 크하악! 이 마력은...!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청록색의 마력으로 빚어진 발리스타의 화살. 그 마력은 바로 세계수의 마력이었다.
마기를 상쇄할 정도로 강력한 생명력.
세계수의 힘이 헬만을 침범했다.
"아하핫! 중추석은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면 제힘을 낼 수 없다! 대악마 헬만, 잘난 네놈이라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을걸!"
- 계집! 흥, 이까짓 마력 따위!
"네놈은 그렇겠지!"
마력 탑에 모인 마력이 발현되었다.
세계수의 마력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땅에 스며들었다. 한때는 아름다운 자연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죽은 땅이 된 헤이시스.
죽었던 자연이 되살아났다.
- 드르르륵!
- 무, 무슨... 으아아아아!
- 빌어먹을! 이 짓거리를 여기서!
순식간에 되살아난 자연.
세계수의 마력을 머금은 나무가, 수풀이, 땅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울창한 수풀이 마족들의 발목을 붙잡았고, 가시처럼 변한 나뭇가지가 놈들을 꿰뚫었다.
드높이 일어난 땅이 마족들을 덮쳤다.
-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상의 마족들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쓰레기처럼.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헬만이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 어떻게, 인간...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뭐긴 뭐야, 새끼야. 널 낚은 거지."
섬광이 번쩍였다.
헬만은 본능에 따라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카드득! 들이닥친 칼날이 방어진을 파괴했다.
그 칼날이 헬만의 팔을 내리그었다.
"여기가 네가 죽을 곳이다."
- 건방진...!
꽈아앙!
사람만 한 크기를 가진 주먹이 진현우의 몸통을 강타했다. 부서진 검과 성검을 교차해서 주먹을 막아 낸 진현우가 크게 날아갔다.
헬만이 이를 드러내며 마법을 펼쳤다.
- 인간 따위가, 나를 죽이겠다고!
"크윽...!"
날아가는 진현우의 사방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검은 마법진이 순식간에 발현되었고, 수많은 낙뢰가 진현우를 향해 쏘아졌다.
신성한 방패가 낙뢰들을 막아 냈다. 하나 미처 막아 내지 못한 낙뢰가 그를 강타했다.
- 감히! 인간 따위가!
헬만이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이 상황이 예기치 못한 상황인 것은 맞다. 하지만, 감히 인간 따위가 날 죽이겠다고?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 시체나 다름없는 놈이, 주제를 알라!
"하, 어지간히도... 화가 많이 나셨군...."
진현우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 안색이 파리했다. 이유는 몰라도 신체 곳곳에서 피가 흘렀고, 몸은 축 늘어졌다.
가장 중요한 생기가 없었다. 저 인간에게 느껴지는 것은 죽은 자에게서 느낄 만한 기운.
- 화아아아악!
대악마 헬만이 마기를 내뿜었다.
그가 내뿜은 마기가 수도를 뒤덮으면서 장벽을 형성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줄기를 짧은 시간이나마 막기 위한 장벽이었다.
-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라 했나?
헬만이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진현우의 몸을 움켜잡았다. 다시금 사방에서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수많은 사슬이 나와 그를 속박했다.
- 아니! 여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지상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진이 갈라지면서, 그 너머로 끔찍이도 어두운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칠흑처럼 어두운 구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구체가.
- 화르르르륵!
- 그대로 죽어라!
구체들이 검게 타올랐다.
마치 쏟아지는 유성우처럼, 하늘에서 수많은 구체가 진현우를 향해서 하강했다.
그는 그걸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인간이 가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저놈은 더 움직일 수 없다.'
헬만은 진현우의 상태를 정확히 꿰뚫었다.
움직일 여력도 없는 시체. 저놈은 자신이 처리하면 된다. 지금 우선시할 일은 따로 있다.
- 라히암, 남은 마족들을 수습하고 방어 시설을 제압하라. 그 안에 엘프들이 있을 것이다. 모두 죽이고, 여왕을 데리고 오도록.
- 예, 대악마님. 저 인간은....
- 시체나 다름없는 놈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저놈이 죽는 걸 내 눈으로 지켜보겠다.
- 따르겠습니다.
수도의 방어를 맡은 군단장.
수많은 팔을 가진 거인, 라히암이 마족과 카오틱들을 이끌고 방어 시설로 향했다.
그 모습에 진현우가 눈매를 찌푸렸다.
"이 새끼들이...."
신체는 한계에 달했다.
만개를 복용한 대가가 신체를 말 그대로 찢어 버리고 있다. 심장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이, 온몸의 혈관이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끔찍한 통증도.
"건방지게 날 무시해?"
모두가 진현우를 신경 쓰지 않는 가운데.
진현우는 또 하나의 만개를 섭취했다.
- 만개를 복용했습니다. 당신에게 한계를 초월할 정도의 강력한 힘이 주어집니다.
- 이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지속 시간이 대폭 짧아지며, 효과가 더욱 강해집니다.
검은 유성우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진현우를 속박하고 있던 헬만은 가증스러운 인간의 몸이 찢기는 순간을 기대했다.
그리고 곧.
- 화아아악!
- ...!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진현우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다 죽어 가던 시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양의 마력.
그를 구속하던 속박이 사라졌다.
"후우...!"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하늘. 그를 짓뭉개기 위해서 다가오는, 화염을 두른 유성우들.
그는 검을 움켜쥐었다.
"흐읍!"
검격이 허공을 갈랐다.
철썩! 해일이 치는 소리. 공간이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검기가 쏘아졌다.
검기가 추락하는 유성우들과 충돌했다.
- 무의미하다. 네놈의 검기로는... 뭣!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로 압축된 구체다.
저깟 검기로 베일 리가 없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헬만의 기대는 다시금 깨졌다.
하늘로 솟구치는 수많은 검기가.
- 서걱!
- 이, 무슨....
일섬.
추락하던 유성우들을 베었다.
부서진 검에 새로이 부여된 옵션, 마기를 베는 탐식의 검이 그를 가능케끔 했다.
믿을 수 없는 기적에 헬만이 경악했다.
- 인간 따위가, 베어 냈다고?!
- 콰아아앙!
갈라진 유성우가 목표를 잃고 땅에 추락했다. 그에 휘말린 마족들이 비명을 토했다.
진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방어 시설로 접근하는 적들이 보였다.
- 두근!
"큭, 카하악!"
진현우는 피를 토하며 마력을 일으켰다.
부서진 검이 화답하듯 검기를 일으켰다. 그렇게 검기가 일어난 검을 천천히 손에서 놨다.
그러자 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촤르르륵!
검이 강한 마력을 내뿜으며 분열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열여섯으로. 끝없이 늘어난 검이 허공을 뒤덮었다.
그 광경을 본 마족들이 걸음을 멈췄다.
"가라."
제4식, 환검.
환상으로 만들어졌으나 분명한 실체를 가진 환검들이 진현우의 사방에 도열했다.
마족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그리고 검들이, 놈들을 겨눴다.
"저놈들을 모두 죽여라."
진현우가 손을 내리그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수많은 환검이 사방의 마족들을 향해 쏘아졌다.
- 쉬이이익!
푸른 섬광이 허공을 수놓았다.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쏘아진 환검들이 진현우를 포위한 마족들을 일제히 덮쳤다.
- 캬아아아악!
- 크하악...!
환검이 마족의 몸을 갈랐다.
등 뒤에서 날아온 환검이 몸을 꿰뚫었다. 사각에서 쇄도한 환검이 팔을 베어 냈다.
수많은 환검이 마족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미호! 일 좀 해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 카, 카오틱! 미친 것이냐!
"으, 으으... 흐아아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잔뜩 겁에 질린 카오틱들이 마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던 여우가 작게 웃었다.
- 쿠후훗! 정기가 많은 곳이로구나.
미호의 매혹이 카오틱들을 홀리고 있었다.
지금 카오틱들은 몹시 취약해진 상태. 녀석의 매혹과 마안에 저항할 힘이 거의 없었다.
요호는 이 상황을 아주 잘 활용했다.
- 네놈, 진현우!
헬만과 마족들은 미호의 존재를 알아챘지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진현우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래, 그게 내 이름이지."
헬만의 분노한 눈동자가 보였다.
진현우는 온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시야를 가리는 핏물을 닦아 냈다.
"아까 말했었지."
그리고 두 손에 검을 쥐었다.
한쪽에는 부서진 검을, 나머지에는 성검을. 진현우는 마력을 일으키며 무릎을 구부렸다.
"넌 여기서 죽는다, 헬만."
- 인간 따위가!
지상을 내달리는 한 줄기 섬광.
헬만의 두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136화
그거면 충분해
헬만의 두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이게 대체, 무슨...!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섬광.
헬만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섬광이 순식간에 등 뒤로 돌아갔다. 거대한 악마의 등에 올라탄 진현우가 그 어깨에 성검을 내리꽂았다.
화아악! 빛이 대악마의 몸을 불태웠다.
'이게,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대악마의 마법이 구현되었다.
허공과 지상에서 동시에 마법진이 펼쳐지면서 자그마한 암흑 구체들이 나타났다.
그 구체가 폭발하면서 일대를 휩쓸어 버릴 정도의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속도, 이 힘, 이게...!'
빠르다.
진현우의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
구체가 나타나고 폭발이 일어나기까지 불과 몇 초의 시간. 회피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시간인데도, 진현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콰르르르!
- 으윽! 크하악!
그리고 쏘아지는 폭풍시.
역으로 반격을 가한 진현우의 화살이 헬만의 명치에 꽂혔고 작은 폭풍을 일으켰다.
헬만은 고통을 씹어 삼키면서 마법을 펼쳤다. 허공을 수많은 검은 화살이 수놓았다.
- 건방 떨지 마라, 인간!
헬만의 신형이 사라졌다.
전이 마법의 발현. 순식간에 진현우의 등 뒤에 나타난 헬만이 거대한 주먹을 내질렀다.
동시에 그를 향해서 쏘아지는 검은 화살들.
"후웁...!"
진현우는 알고 있었다는 듯 무기를 교체했고, 그 손끝에서 달인의 손놀림이 펼쳐졌다.
그리고 곧바로 두 검을 교차시켰다.
- 크아아아아아!
순식간에 펼쳐진 해일이 쇄도했다.
수많은 검기가 진현우에게로 쏘아지던 검은 화살들을 모조리 베어 내면서 헬만을 덮쳤다.
동시에 거대한 주먹이 진현우에게 닿았다.
- 쿠우우웅!
"커헉!"
충돌하는 주먹과 두 자루의 검.
어마어마한 충격이 진현우의 몸을 덮쳤다. 단순한 충돌의 여파로 팔의 살점이 터졌다.
하지만 진현우는 밀리지 않았다.
"흐으읍!"
- 크으으윽!
오히려 헬만의 주먹을 밀어냈다.
검기를 두른 두 자루의 검이 대악마의 주먹을 쳐 냈다. 그리고 곧바로 도끼를 쥐고 투척.
회전하는 도끼가 대악마의 사지를 덮쳤다.
'인간이, 저 정도의 마력을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저렇게 쉬지 않고 공격하는 것이...!'
검기가, 그리고 도끼가 헬만을 꿰뚫었다.
그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던 헬만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렸다. 인간이, 힘으로 자신을 밀어내고 오히려 역공을 가하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저 몸으로, 움직이는 게 가능한 것인가?'
헬만은 진현우의 몸을 봤다.
진현우는 헬만의 주먹을 쳐 냈지만, 그 여파로 두 팔의 살점이 짓이겨지고 뼈가 부러졌다.
그런데도 놈은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의 통증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 대체, 어떻게! 그하아악!
"왜,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어?"
- 이놈...!
진현우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침잠. 쏘아지던 도중에 사라진 검기가 헬만의 목 뒤를 노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헬만이 고개를 돌린 사이, 진현우가 땅을 박찼다.
도약한 그의 검이 헬만의 팔을 베었다.
- 쿠우우웅!
- 이, 이익...!
거대한 팔이 땅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대악마, 헬만은 마기로 자신의 몸을 재생할 수 있다. 하지만.
- 허억, 그흐아아악!
진현우가 숨 쉴 틈 없는 맹공을 이어 나갔다.
성검을 내지른다. 추격해 오는 마법을 유수로 흘려 낸다. 되돌아온 도끼를 다시 투척한다.
그리고 부서진 검을 놓으면서, 거인의 괴력이 어린 파쇄권으로 헬만의 턱을 강타했다.
- 콰르르르르!
- ...!
예상치 못한 공격에 휘청거리는 거대한 몸.
사복검이 놈의 남은 팔을 묶었다. 그리고 수많은 환검이 사방에서 헬만의 몸을 꿰뚫었다.
헬만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 있을 수 없다! 이건, 불가능하단 말이다!
"말 한번 더럽게 많네."
마기만 있으면 언제든 몸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기는 무한하지 않다.
수도를 감싼 성역 때문에 약화된 상태에 빛줄기를 막기 위해 마기로 장막까지 펼쳤다.
헬만은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설마, 이대로면 이 내가....'
질 수도 있다.
마계를 호령했던 대악마가, 한낱 인간에게.
- 있을 수 없는 추태!
헬만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이런 대륙에서 패배하는 추태를 마왕에게 보일 수는 없다.
그는 하늘을 덮은 마기를 치웠다.
- 콰아아앙!
- 크하악! 헤, 헬만 님!
마기의 장막에 막혔던 빛줄기가 다시금 지상을 강타했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두근! 헬만의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 화아아악!
헬만이 압도적인 마기를 내뿜었다.
몸에 입었던 부상이 순식간에 회복되었고, 거대한 몸통이 인간의 범주까지 압축되었다.
하나, 느껴지는 존재감이 달랐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저놈을 죽인다.'
모든 마기를 끌어냈다.
이 전투에서 이기든, 지든 헬만은 한동안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전투에서 이겨야 한다.
- 쿠웅!
헬만이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공간이 접혔다. 진현우와 헬만 사이에 있던 거리가 단번에 줄어들었다.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 진현우의 코앞까지 도달한 헬만의 주먹이 그를 타격했다.
- 콰아아앙!
"크으윽!"
충돌한 순간 강렬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뒤로 밀려나는 진현우. 사방에 나타난 수많은 마법진이 그를 노리고 마법을 시전했다.
헬만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 화르륵!
그 손아귀에 검은 창이 만들어졌다.
불길한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창. 헬만은 마법을 방어하는 진현우를 향해 창을 투척했다.
꽈앙! 창이 충격파를 일으키며 쇄도했다.
- 카드드득!
"커헉!"
내밀었던 방패가 단번에 꿰뚫렸다.
복부를 관통하는 창. 헬만이 다시금 거리를 좁혔다. 놈의 두 손에 검은 창이 쥐였다.
-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라!
그리고 광풍이 불었다.
헬만이 두 창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아무런 기교도 없는, 단순히 힘에만 의존한 공격.
하나 그렇기에 더욱 위력적이었다.
- 카앙! 쿠우웅!
'괴물 같은 새끼. 힘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대악마에게 그런 기교 따위가 필요할 리 없다.
하지만 진현우도 밀리지 않았다.
목을 노리는 창을 쳐 냈다. 광휘를 터트려 헬만의 시야를 가렸다. 진각을 밟으며, 거인의 괴력이 담긴 파쇄권으로 복부를 강타했다.
- 꽈아아앙!
- 쿠훅...!
헬만의 복부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대악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피를 토하면서 진현우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창이 허벅지를 관통했다.
"크아아아악!"
- 두 발이 휘청거리는군, 인간!
서로 피가 튀는 공방이 이어졌다.
지켜보던 이들이 넋을 잃을 정도로 치열한 공방이었다. 엘프 여왕도 그러했다.
"여, 여왕님.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네. 대악마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전사가 있을 줄이야. 저도 보고도 못 믿겠네요."
"저 괴물을...."
엘프들은 헬만의 힘을 잘 알았다.
마족의 침공이 있었던 날, 지상에 강림한 대악마가 동족들을 학살하는 것을 봤으니까.
창과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놈을 막으려던 엘프들을 일방적으로 죽였었다.
'그때 얼마나 무력함을 느꼈던가.'
아드네아는 지상의 마족들을 견제하면서, 대악마와 싸우는 진현우를 응원했다.
하지만 엘프 여왕은 달랐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 거죠?"
그녀는 진현우의 상태를 잘 알았다.
그가 자신의 생명을 불사르고 있고, 그 불꽃이 지금 정말로 꺼지려 하고 있다는 것을.
"크하악!"
- 이놈....
진현우와 싸우던 헬만도 눈치챘다.
처음에는 치열하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추가 조금씩 헬만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만개의 효과가 끝나 가기 때문이었다.
- 그렇군. 네 목숨이 대가였나?
헬만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시체나 다름없는 몸 상태, 믿기지 않는 강함. 그게 목숨을 대가로 얻은 힘 덕분이라면.
그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해결된다.
- 어리석은 놈이로군. 같은 종족도 아니고, 엘프들을 위해서 네 목숨을 바치는 것이냐?
"...."
- 말이 없어졌구나, 인가안!
헬만이 조소하며 마법을 펼쳤다.
마법진에서 쏟아지는 구체. 진현우는 다시금 해일을 썼지만, 그 기세는 너무도 약했다.
연이은 폭발이 그를 덮쳤다.
"크... 커허억!"
- 후, 후하하하하!
밀려나는 진현우를 창이 쫓았다.
하나의 창이 분열하면서 수십의 창으로 변했고, 그것들이 일제히 진현우를 덮쳤다.
유수로 흘려 내려고 했지만 급소를 방어하는 게 고작이었다. 창이 그의 사지를 꿰뚫었다.
"...."
진현우는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핏물이 웅덩이처럼 고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만개의 효과가 끝났다.
- 쿵, 쿵....
거세게 뛰던 심장의 박동도 느려졌다.
아득해지는 정신. 온몸이 무겁다. 진현우는 땅에 검을 꽂으며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이제 끝났다, 인간.
그 앞에 대악마가 섰다.
헬만은 진현우의 목에 창을 겨눴다.
- 목숨을 불태우면서 싸우는 그 집념은 인정하지. 하지만, 너는 너무... 설쳤어.
헬만이 창을 쥔 손을 크게 젖혔다.
그리고.
- 푸우욱!
"크, 헉...!"
창이 진현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헬만이 창을 힘껏 내던졌다. 꿰뚫린 진현우는 창과 함께 수도의 성벽에 처박혔다.
자욱한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 고통스럽게 죽어라, 인간. 거기서 네놈이 지키려 했던 엘프들이 죽는 걸 지켜봐라.
헬만이 진현우를 비웃으며 등을 돌렸다.
저 인간은 죽었다. 저건 회생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목을 쳐도 괜찮지만, 저렇게 둬서 더욱 고통받게끔 놔두는 것이 낫다.
그리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욱, 크흐으으...."
진현우는 심장을 꿰뚫은 창을 빼냈다.
그 순간 한계에 달한 몸이 무너져 내렸다. 무릎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닥에 닿았다.
그의 얼굴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훅, 허억! 끄륵...."
진현우는 움직이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은 더욱 무거워졌고 시야는 어두워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고개가 이내 축 늘어졌다.
"...."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도 들리지 않는다. 지독한 통증도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끔찍한 적막.
그리고 무(無).
'내가 왜....'
적막 속에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짓거리를 또 하고 있는 거지?'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언제나 그랬다. 이렇게 회귀하기 전부터, 전생에서 몸이 고장 나기 전부터, 끝까지.
'이렇게까지 하면서 탑을 올라야 하나?'
플레이어든, 카오틱이든, 다 그렇다.
살아남기 위해서 플레이어를 팔아먹었던 내통자 놈들. 당장 닥칠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일삼는 머저리들.
- 플레이어들은 뭘 하는 거야? 빨리 탑이나 공략하라고! 침식률을 낮추란 말이야!
- 너희 때문에 내 가족이 죽었어! 너희들이 탑만 공략했다면 그 X같은 게이트도!
그리고 플레이어들을 비난하던 사람들도.
모두가 진현우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 놈들을 구해야 하나? 그딴 놈들을 위해서 내가, 또 이 짓거리를 해야 하나?'
그럴 가치가 없다.
이놈들은 멸망해도 싼 놈들이다. 진현우는 혐오감을 가졌고, 언제나 그리 생각했다.
은퇴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몸의 부상이 극심해 전력 외 판정을 받은 것도 있지만, 그런 회의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녀석들은 왜 죽어야 했지?'
저 너머에 있는 샬럿이 보였다.
환각이 보였다. 그녀의 등 뒤로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메사이어, 멸망을 향해 내달리던 세상을 구하겠다고 목숨을 던졌던 이들.
'결국 모두 실패했다. 탑에도 오르지 못했다. 녀석들의 죽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어.'
모두 무의미하게 죽었다.
누군가가 탑을 구해 주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구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왜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는 거지?'
전생에서부터 품은 의문이었다.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 그나마 남은 이들도 더는 희망이 없다는 걸, 멸망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진현우가 전력 외의 판정을 받았을 때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탑 공략에 지원해서 목숨을 바칠 생각이었다. 그런 그를 백승현이 막았다.
- 나머지는 저희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형님은 은퇴하시고 탑 밖에서 좀 쉬세요.
- 내가 없으면....
- 형님이 있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그 시한부 몸으로 뭐가 가능해요? 알잖아요, 형님. 이 세상은 끝났습니다. 더는 희망이 없어요.
몸이 만신창이가 된 진현우가 남아 있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백승현은 다른 선택을 했다.
-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형님이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마도 형님에게는 가혹한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 형님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
하지만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백승현은 그전부터 큐브를 가지고 있었고, 진현우를 과거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죽음이었다.'
동료들의 죽음이, 정말로 그랬나?
진현우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아니.'
동료들은, 백승현은 왜 목숨을 바쳤던가?
남은 플레이어가, 그리고 진현우가 탑을 공략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얘기는 간단하다.
'살아서, 탑을 공략한다.'
그럼 동료들의 죽음이 의미를 가진다.
진현우가 살아서 탑을 공략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희생이 가치 있음을 증명했다.
"그거면 됐어."
왜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는가?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너희들 때문이지.'
이 세상이 어찌 되든 그딴 건 상관없다.
다만 바라기를, 동료들이 이번 생에서는 전생과 같은 결말을 맞지 않기를 원했다.
그 희생이 가치가 있기를 바랐다.
그들에게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니까.
- 미래를... 부탁합니다.
진현우가 아직까지 싸우는 이유가 있다면, 오직 그 이유가 전부이리라.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거면 충분해."
이 지옥 같은 탑을 다시금 오르는 이유는 그거면 됐다. 그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진현우는 검을 쥐었다.
- 폭군의 힘이 죽음을 거부합니다.
시야가 백색으로 물들었다.
137화
전쟁의 끝
콰아아앙!
수도 헤이시스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끈질긴 적이었던 진현우를 죽인 헬만이 자신을 노리는 방어 시설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 버러지 같은 놈들이!
마력 탑이 파괴되고 발리스타가 부서졌다.
엘프들은 어떻게든 헬만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진현우가 없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 마법이 멈췄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
- 미친 카오틱 놈들은 무시해라! 죽여도 좋다! 어떻게든 방어 시설을 정지시켜야 돼!
"크윽! 이 자리는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어떻게든 중추석이 있는 건물을 지키려고 하는 엘프. 그걸 뚫으려고 하는 마족들.
둘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아드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 여왕님! 적들이 올라옵니다! 헬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일단 도망치셔야!"
"여기서 도망치면 어디로 갈 수 있죠?"
"그건, 그렇군요."
아드네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당황했습니다."
"알면 됐어요. 그리고 저 가증스러운 괴물, 헬만도 기세가 약해졌습니다. 보이시나요?"
"그렇, 기는 합니다만...."
여왕의 말대로였다.
두 개의 만개를 복용한 진현우를 상대하느라 헬만도 가진 힘을 많이 소비한 상태였다.
놈의 힘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게 보였다.
"버티면 됩니다. 지금이 대악마 헬만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예요, 아드네아."
"하지만, 여왕님."
어떻게?
여기 있는 엘프들로는 헬만을 이길 수 없다. 그게 가능한 것은 오직 진현우뿐이다.
하지만 진현우는 죽었다.
"은인은... 죽었습니다, 여왕님."
"저도 알아요."
"그분이 없는 이상, 방법은...."
방법은 없다.
헬만도, 엘프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마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엘프 여왕뿐이었다.
'죽으려고 쓴 게 아니라고 했었지.'
믿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여기서 죽는 수밖에. 엘프 여왕은 마족들에게 화살을 쏘면서 결심을 굳혔다.
그녀의 시선이 진현우를 향했다.
"이, 인간, 인간! 일어나거라!"
진현우의 곁에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미호가 그의 몸을 격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느껴지는 생기도 없었다.
"으, 으으. 정말로 죽은 것이냐? 날 이런 곳에 놔두고 죽어 버리면 어쩌자는 것이냐!"
진현우가 죽었다.
미호는 코를 훌쩍였다. 슬퍼서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억울해서였다.
"이이익! 날 구미호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어쩔 수 없구나. 정기라도...."
- 파아아앗!
"후끼야악!"
미호가 눈을 닦는 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시야를 찬란한 빛이 가득 메웠다. 백색으로 물든 미호의 시선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진현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으, 으응?"
미호는 멍하니 섬광의 궤적을 좇았다.
그 궤적이 수도의 중심으로 향했다. 바로 엘프들이 지키는 건물을 노리는 헬만에게로.
헬만이 창을 쥐었다.
- 이깟 건물에 숨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나?
"헬만...!"
마기를 머금은 창이 점점 거대해졌다.
공성 병기와 버금가는 창. 헬만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엘프 여왕을 보며 사납게 웃었다.
- 걱정 마라, 여왕. 너는 죽이지 않겠다. 대신 살려서 마족 통치의 상징으로 삼아 주마.
"듣기만 해도 기분 나쁜 소리를!"
- 기뻐하게 될 것이다.
쿠웅! 헬만이 발을 크게 내디뎠다.
그리고 그 손에서 거대한 창이 쏘아졌다.
- 콰드드득!
- ...!
쏘아졌어야 했는데.
창을 쏘아 내려던 헬만은 팔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날카로운 통증도.
그의 시선이 팔을 향했다.
- 무슨!
있어야 할 팔이 보이지 않았다.
창을 쥐고 있던 팔은 사라지고 없었다. 창을 꽉 움켜쥔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을 뿐.
날카로운 검기가 그의 팔을 베어 냈다.
- 크하악!
쏘아진 성검이 그의 복부를 꿰뚫었다.
헬만이 공격에 반응하기도 전에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검기가 그를 덮쳤다.
- 콰르르르르!
- 끄윽, 이, 건... 설마...!
수많은 검기에 난도질당하면서, 헬만은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아니,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 줄기 섬광이 그의 앞에 도달했다.
- 진현, 우...! 어, 어떻게!
"왜, 내가 죽은 줄 알았냐?"
도끼가 헬만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그 도끼의 주인은 당연히 진현우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현우는 심장이 부서져서 죽었다. 헬만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시체가 살아났다.
- 말도 안 돼! 너는 죽었단 말이다!
"그랬었지. 지금은 다시 살아났고!"
진현우가 손에서 검을 놓았다.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을 정도로 분열한 환검이 헬만을 겨누었고, 일제히 쏘아졌다.
그걸 뒤쫓듯이 진현우도 땅을 박찼다.
- 크하악! 시체 주제에!
헬만이 화염 기둥을 일으키며 물러났다.
팔이 베인 자리에서 마기가 일어나며 새로운 팔이 자라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진현우가 불길을 뚫으며 돌진해 왔다.
- 어떻게!
거리가 좁혀진다.
진현우의 손에 쥐인 무기는 없었다. 그는 대신 건틀릿을 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쏘아지는 주먹. 헬만이 그에 응했다.
- 꽈아아앙!
- ...!
서로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강력한 충격파가 일어나면서 주변의 땅이 짓이겨졌다. 대악마와 플레이어 간의 힘겨루기. 누가 이길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랬을 터인데.
'내가, 밀린다고?'
헬만의 팔이 밀리고 있었다.
진현우가 더욱 힘을 싣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밀쳐졌다. 대악마의 복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연이은 공격이 닥쳤다.
- 큭, 으... 크아아아!
주먹이 헬만의 턱을 강타했다. 젖혀지는 고개. 훤히 드러난 복부가 주먹에 가격당했다.
어깨 그리고 팔까지. 진현우는 마치 샌드백을 치듯이 헬만의 전신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 주먹 하나하나가 파쇄권이었다.
'믿을 수 없다. 내가, 힘으로 밀린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대악마인 자신이.
짚이는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늘을 에워싼 저 성역, 마기를 과하게 소진한 것.
설령 그렇더라도 인간에게 밀릴 건 아니다.
- 크하악!
하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진현우가 손을 뻗었다. 그 손아귀에 돌아온 도끼가 붉게 물들었고, 헬만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대악마가 고통에 찬 비명을 토했다.
진현우는 눈앞에 뜬 메시지를 봤다.
- '태양의 대장간'을 점령했습니다. 이곳의 대장간이 강력한 힘을 제공합니다.
- 해당 지역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군에게 특수한 버프를 제공하는 지역입니다.
- 버프: 장비한 모든 아이템의 효과 +150%. 무기가 더욱 치명적인 피해를 입힘.
거점, 태양의 대장간의 효과였다.
샬럿이, 헬만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서 태양의 대장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또 하나.
- 폭군의 힘이 착용자가 입은 상처를 회복합니다. 모든 능력치를 크게 강화합니다.
폭군 세트의 효과로 부활한 진현우는 능력치를 크게 강화하는 버프를 받은 상태였다.
이 버프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 저리, 꺼지란 말이다!
헬만이 필사적으로 팔을 재생했다.
그 손아귀에 쥐이는 검은 창. 대악마는 이를 악물며 진현우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 철컥!
헬만이 발을 내디딘 순간,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 아래에서 지독한 냉기가 폭발했다. 진현우가 설치한 빙결 덫들의 효과였다.
- 화아아악!
헬만의 다리가 순간 얼어붙었다.
날카로운 검기가 그의 마창을 베어 냈다. 땅을 나뒹구는 창을 본 헬만이 경악했다.
진현우는 두 손에 검을 쥐면서, 후방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여왕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곧장 검을 내질렀다.
"작아져서 좋네."
- 빌어먹을, 인간 놈이...!
두 검이 헬만의 어깨를 꿰뚫었다.
엄청난 힘이 헬만을 벽까지 밀어붙였다. 진현우는 놈을 성벽에 고정하며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발리스타가 움직였다.
"발리스타!"
- 투콰아아앙!
거대한 화살들이 고정된 헬만을 노렸다.
놈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두 팔을 잃었고 상체가 고정된 상태였기에 불가능했다.
발리스타의 화살이 헬만을 관통했다.
- 쿠하아악!
대악마의 몸이 순식간에 짓이겨졌다.
동시에 하늘 높은 곳에서 내리쬐던 빛줄기가 헬만을 덮쳤다. 그의 몸이 짓이겨지고, 강력한 신성력에 의해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크흐아아아아아!
헬만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깨에 꽂힌 검 때문에 고정됐고, 두 발은 얼어붙기까지 한 상태. 대악마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모든 공격을 받아들여야 했다.
- 아, 안 돼! 헬만 님을 지켜라!
- 군단은 나를 따르라! 대악마님을...!
헬만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는 걸 알아챈 마족들이 진현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뻗었다. 그 손에 거대하고, 불길한 깃발이 나타났다.
- 쿠우웅!
거대한 깃발을 땅에 내리꽂았다.
주변 일대를 뒤덮는 영역이 전개되었다. 죽은 자들을 소환하고, 또 일으키는 영역 선포.
그런데 이번에는 변화가 있었다.
- 영역 선포가 당신의 몸에 깃든 폭군의 힘에 반응합니다. 일시적으로 영역 선포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하여 발동합니다.
진현우는 '폭군'이라는 세트 아이템의 효과로 부활했다. 아직 몸에 남아 있는 기운이 폭군의 기술인 영역 선포와 반응하고 있었다.
그 결과물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 구우우우....
- 캬하아아아!
나타난 것은 언데드 군단.
가장 선두에는 해골마를 탄 기수들이, 그 뒤에는 불길한 갑옷을 입은 해골 기사들이, 가장 후열에는 다수의 리치가 도열해 있었다.
군단이 다가오는 마족들과 마주했다.
- 무, 무슨... 언데드가 이렇게 많이....
- 그래 봤자 언데드다! 겁먹... 끄아아악!
- 바, 발밑에 언데드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데드 군단과 대치하고 있던 마족들의 주변에 있던 사체들이 언데드로 되살아났다.
- 크하아아아!
- 우아아아아악!
언데드 군단이 돌진했다.
마족들은 헬만을 돕기는커녕, 살아남기 위해서 언데드와 싸워야만 했다.
카오틱들은 모두 쓰러진 지 오래.
헬만을 도울 이는 없었다.
- 으, 끄으... 크아아아아악!
몸이 붕괴하던 헬만이 노성을 토했다.
그 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사방을 뒤덮었다. 성역도 감당하지 못할 마기에 발리스타도, 마력 탑도 움직임을 멈췄다.
헬만의 몸이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 끄르르, 인간... 반드시, 죽이겠다!
하지만 헬만의 신체 내부는 엉망이었다.
이미 마기를 끌어낼 대로 끌어낸 상황. 한계에 달해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진현우도 그걸 잘 알았다.
- 그아아아악!
"다 죽은 시체 같은 놈이."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헬만이 발악하듯 진현우에게 돌진했다. 허공을 수많은 마법진이 수놓았고, 그 손아귀에 나타난 마창으로 진현우에게 맹공을 펼쳤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 콰르르르!
하늘을 뒤덮는 검기가 마법들을 베어 냈다.
미처 베어 내지 못한 마법들은 거대한 빛의 방패가 흡수했다. 한계치까지 흡수한 마력이 신성한 파동이 되어 헬만을 강타했다.
- 끄, 으...!
휘청거리는 대악마의 몸.
진현우의 검이 놈의 오른팔을 베어 냈다. 성검이 헬만의 허벅지를 찔렀다. 곧장 투척한 도끼가 헬만의 사지를 꿰뚫고 고정했다.
"스읍...!"
부서진 검이 찬란한 검기를 내뿜었다.
한계치까지 마력을 머금은 헬만의 심장을 꿰뚫었다. 조금 전에 진현우가 당했던 것처럼, 심장이 짓이겨진 헬만이 피를 토해 냈다.
- 커헉! 큭, 아아아아....
헬만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그 눈동자에 당혹과 절망이 어렸다.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대악마는 이 순간 직감했다.
'저 인간을, 이길 수 없다.'
머릿속으로 여러 조건이 떠올랐다.
여기서 도망쳐서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소진한 마기를 어떻게든 회복할 수만 있다면.
모두 지금 와서는 의미 없는 망상이다.
대악마 헬만은 패배했다.
'마왕님.'
한낱 인간에게 이런 꼴을.
마계의 지배자가 본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치. 헬만도 용납할 수 없는 수치였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
- 적어도 네놈들이라도 데려가겠다.
두근!
짓이겨진 심장이 뛰었다. 헬만에게 남은 마기들이 과부하하면서 들끓기 시작했다.
대악마의 몸이 추하게 부풀었다.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하게 구네."
그걸 본 진현우가 인상을 구겼다.
저 몸에 깃든 것은 지독한 마기.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폭탄처럼 바로 터질 것이다.
터진 마기는 수도를 뒤덮을 것이고, 헤이시스 일대는 누구도 못 사는 땅이 될 터.
- 크, 흐흐흐! 날 죽여 봐라, 인간! 날 공격하는 순간 내 몸 안의 마기가 터질 것이다!
"진현우! 이걸 받으세요!"
헬만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때, 엘프 여왕이 진현우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바로 방어 시설의 중추석이었다.
그걸 쥐자마자 강력한 세계수의 마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안에 담긴 여러 영혼도.
"화살을!"
- 네년, 여왕...!
진현우는 실피르를 쥐었다.
중추석이 청록색으로 빛나며 공명했다. 그는 헬만을 겨누면서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그 손아귀에 강렬한 바람이 일어났다.
- 세계수의 마력이 화살에 깃듭니다.
- 선조의 영혼이 당신을 돕습니다....
여러 영혼이 진현우의 등 뒤에 나타났다.
엘프와 비슷한 형상을 한 영혼들이었다. 그들이 시위를 당기는 진현우의 팔을 거들었다.
활의 시위가 한계치까지 당겨졌다.
"나보고 고통스럽게 죽으라고 했던가?"
진현우와 헬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입가에 짙은 비웃음이 어렸다.
"너도 한번 겪어 봐."
- 무의미한, 모두 무의미한 짓을...!
- 화아아아악!
거대한 바람이 쏘아졌다.
추하게 부풀어 가던 헬만이 다가오는 바람을 보며 비명을 토했다. 인지하기 힘든 속도로 쏘아진 거대한 바람이 헬만의 몸을 감쌌다.
- 크아아아아아악!
콰드드득!
강렬한 바람이 헬만의 몸을 베고, 짓이겼다. 부풀어 가던 몸을 압축하기 시작했다.
헬만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무의미했다.
- 안 돼, 이건, 이런 미래는! 난!
- 아니, 이것이 네 미래다.
- ...!
짓이겨지던 헬만은 목소리를 들었다.
따사로우면서도 무엇보다 차가운 목소리. 헬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저 너머에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 넌, 설마....
- 콰지직!
헬만이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그의 몸이 완전히 짓이겨졌다. 그리고 허공에 자그마한 공간이 나타나더니 그 몸을 완전히 삼켰다.
그걸로 끝이었다.
"질긴 놈. 하...."
대악마, 헬만은 죽었다.
진현우는 그 사실을 인지하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이제 그만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 대, 대악마 헬만 님이....
- 인간에게, 죽었어?
아직 마족들이 남아 있었다.
언데드 군단과 싸우던 마족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진현우를 바라봤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쥐었다.
"피곤하다. 빠르게 끝내자."
- 우, 우아아악!
다시금 헤이시스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138화
이제 좀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