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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화] 합류 (2)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짐을 푼 에단은, 각자 활동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혼자는 위험...."

"위험하다고?"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가토는 빠르게 수긍했다.

걱정할 사람이 따로 있지, 에단은 걱정할 대상이 아니었다.

가토가 보기에 에단은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산맥에서도 잘 먹고 잘살 위인이었다. 고작 용병들 따위가 넘볼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용병들이 위험하면 모를까....'

"나이가 나이인지라 여행이 고되더군요."

네이드도 어울리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며 객실 위로 올라갔다.

에단은 혼자 도시로 나왔다. 저녁을 넘어 밤이 되자 다른 의미로 시끄러워진 도시였다.

일단 주정뱅이의 숫자가 늘어났다.

가뜩이나 거칠고 사나운 용병들이다. 거기에 술이 더해지자 곳곳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다. 단순한 싸움판이 아니었다. 관중이 있고 돈이 오가는 놀음판이 되었다.

"개자식아!"

"오늘 죽어 보자!"

주먹이 오갔다. 환호성과 함께 웃음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신기한 일은, 싸움이 과열될지언정 검을 뽑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곳의 규율인가 보네.'

재밌었다. 싸움의 수준은 저열했다.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싸움이지만 보는 맛이 있었다.

에단은 제일 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장소에 비집고 들어갔다. 역시나 싸움판이었다.

"나는 마킨한테 10실버 건다!"

"멍청한 놈! 딱 봐도 잭슨이 승기를 잡은 거 안 보여? 나는 잭슨한테 20실버!"

결투 중인 사람들은 도시 내에서도 꽤나 유명 인사인 듯 이름을 모르는 자들이 없었다.

베팅한 돈을 걷는 자가 에단에게도 다가왔다. 막상 에단의 앞에 서자 작게 움찔거렸지만, 돈에 대한 탐욕이 더 큰지 한 발짝 더 내디뎠다.

"처음 보는 형씨네? 눈빛 한번 살벌해라. 용병 같지는 않은데... 형씨도 베팅할 거유?"

말없이 둘의 싸움을 바라보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마른 녀석의 이름이 뭐지?"

"정말 여기 처음 왔나 보네? 검은 옷 입은 녀석 말하는 거지? 그러면 잭슨 맞아. 잭슨한테 베팅하려고? 돈 벌려면 잭슨 말고 마킨한테 거는 걸 추천하는데. 무식하게 보여도 마킨이 싸움 실력은 꽤 좋아."

"잭슨한테 10골드 베팅하지."

에단이 품에서 금화를 꺼냈다.

'냄새가 나는데.'

싸움판에서 싸우고 있는 마른 몸의 남자.

촉이 느껴졌다. 에단은 정석적인 루트로 정보 길드를 찾아 나설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무모하고 직관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지, 진심이야?!"

남자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에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끔뻑이던 남자가 골드를 받아 들었다.

"후회해도 난 몰라."

거액의 베팅에 놀란 것은 돈을 받은 남자뿐이 아니었다.

"10골드? 미친 진짜라고?"

"아니, 잭슨한테 10골드를 걸었다고?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싸움판에 몰리던 시선이 순식간에 분산되었다. 뜬금없이 등장해서 고액의 돈을 베팅한 에단에게로 주목이 쏠렸다.

"지금 상황은 딱 봐도, 잭슨이 불리한 상황이야! 돈을 버릴 생각인가?"

"버릴 생각이면 나도 좀 줘!"

"닥쳐! 잭슨이 이길 거니까!"

"넌 매번 되도 않는 녀석한테 걸어서 다 잃는 주제에 뭔 개소리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에단은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 다들 보는 눈이 애꾸 수준이구나.

'동감입니다.'

언뜻 본다면 일방적인 싸움이다. 하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달랐다.

마킨이라고 불린 남자는 큰 체격을 믿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반면 잭슨이라고 불린 남자는 방어 일변도였지만, 모든 공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사소한 동작도 놓치지 않았다.

보고, 피하고, 막았다.

예측할 수 있는 공격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에단이 보기에 잭슨은 지금 상대의 공격을 받아 주고 있었다.

끝낼 기회는 아까부터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잭슨은 의도적으로 싸움을 늘어뜨렸다.

'돈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싸움은 잭슨이 승리할 것이다.

그만큼 실력의 차이가 극명했다.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다면 이 대결의 승자는 잭슨이라고 확신할 것이다.

'저 녀석이 진다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거겠지만, 질 것 같지는 않군.'

10골드라는 목돈을 걸기는 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에단에게는 그리 뼈아픈 지출이 아니었다.

가문에서 들고 온 돈도 적지 않았을뿐더러, 산적들을 털면서 얻은 수확도 상당했다.

10골드 정도면 충분히 베팅할 만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에단의 의도는 따로 있었다.

'내 촉이 맞다면 말이지.'

"마킨한테 전 재산 올인!"

"나도 마킨한테 건다! 50실버!"

"빨리 돈 받아!"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판돈을 걸지 않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돈을 걸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판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결과가 빤히 보이는 대결이었다. 평범한 이들이 보는 기준으로 불리한 쪽에 큰돈이 걸렸다.

'이걸 놓치면 병신이다!'

10골드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가 되더라도 며칠 술값을 충당하고도 남을 돈이었다.

"마킨, 빨리 끝내!"

"잭슨! 개고생 그만하고 빨리 처맞고 쓰러지기나 해!"

대다수의 사람이 마킨을 응원하고 잭슨에게 야유를 보냈다.

"후욱, 후욱! 뒈져!"

거친 숨을 내뱉던 마킨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보기만 해도 위력적으로 보였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찰나의 순간, 잭슨이 마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킨의 팔 사이로 잭슨의 주먹이 비집고 들어갔다.

무방비로 노출된 마킨의 턱에 잭슨의 주먹이 제대로 꽂혔다.

'호오.'

에단이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빈틈을 발견하고 그사이를 파고든다.

단순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시도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역시 꽤나 하는 놈이군.'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길거리 싸움을 전전하던 과거의 기억.

에단은 이내 잡념을 떨쳐 내고 다시 눈앞에 집중했다.

"끄윽!"

마킨은 몸을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잭슨을 꽉 붙잡았다.

"이익! 넌 이제 뒈졌어!"

마킨이 그대로 잭슨을 집어던지려고 하자, 잭슨이 무릎으로 마킨의 고환을 찼다.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남들에겐 잭슨이 몸부림친다고 보일 정도로.

"우우우! 추하다!"

"발악하지 말고 빨리 끝내라고!"

하지만 에단은 잭슨의 움직임을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밌네.'

잭슨의 무릎이 사타구니를 지속적으로 타격하자, 마킨의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결국 마킨은 붙잡은 손을 놓았다.

"끄으으, 이런 비겁한...!"

"뭐가?"

잭슨이 씨익 웃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마킨의 육신이 그대로 쓰러졌다.

털썩!

순간 싸움판에 침묵이 맴돌았다.

그토록 시끄럽게 소리치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정적이 지속되던 와중, 한 남자가 목소리를 냈다.

"조, 조작이다!"

"시발, 이건 개수작이야! 너희들 짜고 쳤지?!"

"너도 범인이지?!"

돈을 잃을 위기에 처한 용병들이 모두 현실을 부정하며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에단도 그들의 타깃 중 하나였다.

'어이가 없군.'

용병들은 태생부터 돈을 좇는 망자들이었다. 돈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모두 눈이 돌아갔다.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잭슨의 표정도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 새끼들 왜 이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싸움에는 변수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반전은 늘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평소와 달랐다. 돈을 잃는 자들이 분개하는 건 같았지만 그 정도가 달랐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에단을 향해 있는 걸 보고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건 사기야!"

"내 돈 내놔!"

"저 사기꾼 새끼!"

원망의 화살이 몰려들었지만, 에단은 팔장을 낀 채 심드렁하게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할 말 다 했냐, 이 머저리 새끼들아?"

"뭐, 뭐라고?"

"이 우라질 새끼가!"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기세를 풍겼다. 용병들은 태생부터 뒤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규율 따위는 허울뿐인 울타리에 불과했다. 언제든지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단이 그 울타리에 불을 지른 것이다.

에단이 조소를 지으며 중지를 올렸다.

"지들 눈이 병신인 걸 나를 탓하네. 맘에 안 들면 덤비든가. 아니면 나도 한판 할까? 내가 지면 방금 낸 골드의 열 배를 뿌려 줄게."

"여, 열 배?"

"100골드?!"

돈이 거론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눈에 탐욕이 감돌았다.

"왜? 내가 거짓말 치는 거 같아? 궁금하면 덤벼 봐. 나한테 이기면 100골드 던져 줄 테니까."

"나, 나랑 싸워!"

"닥쳐 새끼야! 내가 싸울 거야!"

이번에는 다른 의미의 소란이 번졌다.

에단이 걸음을 옮겼다. 용병들이 둘러싸고 있던 공간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잭슨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이 다가서자, 잭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누구야?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잭슨의 물음에 에단이 말없이 잭슨을 바라봤다.

"그러는 너는 마나 유저쯤 되는 녀석이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단순한 취미 생활인가?"

"...!"

잭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진짜 누구야?"

잭슨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에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나가던 사람."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다가 우연찮게 본 것이었지만, 잭슨을 본 뒤로 의심이 생겼을 뿐이다.

잭슨과 마킨의 싸움은 단순한 실력 차이 수준이 아니었다. 마킨을 마무리할 때 미세하지만 마나의 흔적이 엿보였다.

마나를 사용하는 수준의 용병이라면 이런 길거리 싸움에 발을 들일 이유도 없었다. 그것도 일부러 수준을 맞춰 주면서.

그렇기에 녀석을 의심한 것이었다.

'인상착의도 모르겠는 걸로 봐서는 원작에서 비중 있는 녀석은 아닌 것 같고.'

잭슨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명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애초에 원작에서 남자 캐릭터의 비중은 없다시피 하지만.'

그나마 있는 비중은 주인공한테 대들다가 깨지는 캐릭터 정도였다.

떠오르는 캐릭터를 대입해 봐도 눈앞에 있는 잭슨과 유사한 캐릭터는 없었다.

여러 가지 가정이 들었다. 하지만 확신은 들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가설이 떠오르긴 했지만 조급하게 굴지는 않았다.

지금 가장 거슬리는 것은 용병들의 이기적인 태도였다.

에단은 호구처럼 당해 줄 성격이 되지 못했다.

"얼굴은 험악한 놈들이 계집아이처럼 말만 많네."

에단이 용병들을 상대로 광범위한 도발을 던졌다.

"저, 미친 새끼가!"

용병들이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함부로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용병은 기본적으로 돈에 환장하는 족속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목숨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늘 사선을 넘어 다니는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생명의 위협을 빠르게 감지해 낸다.

이번이 그런 상황이었다.

에단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피어가 용병들을 망설이도록 만들었다.

"다들 비켜! 병신들이 겁이나 집어먹고 말이야."

"어떤 새끼...."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용병이 입을 다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거구의 사내였다. 쓰러져 있는 마킨도 거대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마킨이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방금 한 말은 사실이겠지?"

"뭐? 돈? 그래 뭐.... 줄게. 물론 이기면 말이야."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 [64화] 정보 길드 (1)

"흐흐, 만일 그 말이 거짓말이면 모가지를 비틀어 주겠어."

"모가지도 안 보이는 돼지 새끼가 모가지 운운하니까 거참 신기하네."

"...."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은 되게 솔직하네?"

"그래, 모가지를 비틀어서 죽여 주마. 돈은 죽이고 나서 가져가지."

"할 수 있으면 해 봐."

에단이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은 권태로워 보이기 그지없었다.

에단의 조롱이 기폭제가 되어 남자가 성난 황소처럼 뛰어들었다.

에단을 그대로 밟아 죽일 기세였다.

"뭐 하고 있어!"

잭슨이 다급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잭슨과 다르게 에단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비켜 있어."

― ...또 뭔 짓을 하려고....

페온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가 없었다.

황소같이 달려든 남자가 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에단을 밟아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쿵!

굉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시간이 지나 먼지구름이 걷히며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거한의 발은 에단을 짓밟지 못했다.

에단의 다리가 남자의 발을 뱀처럼 휘감았다.

그 상태로 다리에 힘을 주자, 남자의 신형이 기우뚱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남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개수작을!"

남자의 몸이 쓰러졌다.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조여 왔다.

"주, 죽기 싫으면 당장 놔, 이 새끼야!"

"방금까지 죽인다고 하지 않았냐?"

"자, 잠깐."

"싸움에 잠깐이 어딨어."

에단이 그립을 확고하게 잡았다. 에단의 근력은 이미 범인의 수준을 초월했다.

남자의 힘도 덩치에 걸맞게 강한 편이겠지만, 블란테의 혈통이며 블랙 오우거의 마나를 흡수한 에단에 비교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힐 훅(Heel Hook).

에단이 거한의 다리를 비틀었다.

우드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며 남자의 무릎 연골이 종이 찢어지듯 찢어졌다.

"끄아아아악!"

연골이 찢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거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그 시각, 휴고와 가토는 여관 앞 작은 공터에서 가벼운 대련을 하고 있었다.

둘의 실력은 비등했다.

마나 수련 이전까지는 휴고가 조금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토가 마나를 깨우친 이후로는 오히려 가토가 우위를 점했다.

쉬익!

가토의 목검이 휴고의 뺨을 스쳤다.

휴고가 발을 내디디며 흐름을 바꾸려고 하자, 가토가 몸을 빙그르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에 휴고가 몸을 크게 낮추며 공격을 피한 뒤 거리를 벌렸다.

"우와.... 오빠들 엄청 강하구나...."

둘의 대련을 지켜보던 다비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익숙지 않은 칭찬에 휴고가 머리를 긁으며 민망해했다.

"헤, 헤헤.... 고마워."

그런 휴고를 가토가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본 뒤 목검을 정리했다.

땀은 충분히 흘렀다. 휴고와의 대련은 언제나 큰 양분이 되었다. 휴고의 공격은 매우 변칙적이고 동물적이었다.

그와 대련을 할 때면 마치 짐승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예측하기 힘든 타이밍과 공격.

덕분에 휴고와 매일 대련하며 자연스럽게 임기응변도 크게 늘었다.

임기응변은 실전을 통해서만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휴고와의 대련은 실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괜찮겠지?"

휴식을 취하던 도중 휴고가 가토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설마 에단 도련님을 걱정하는 거야?"

"그럴 리가. 내가 도련님을 걱정하겠어? 도련님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도련님이 또 뭔가 일을 벌일까 봐 걱정하는 거야. 시비 걸리면 어떻게 될지 빤히 예상이 가잖아."

"아.... 확실히 그렇기는 하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또 일이 생겼겠어?"

"...그렇지?"

"...."

가토는 휴고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 * *

거한의 십자인대를 찢어 버린 에단이 손을 털면서 일어났다.

"끄아아악! 주, 죽여 버릴 거야!"

거한이 비틀린 다리를 부여잡으며 에단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에단이 발을 높이 들었다.

콰직, 콰직, 콰직.

에단의 발이 거한을 몇 차례 짓밟았다. 처음에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렸지만, 거한은 얼마 안 가 잠잠해졌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만족스럽다는 듯이 에단이 웃었다.

'미, 미친.'

에단을 바라보던 용병 한 명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 거한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존재였다.

포악하고 잔혹한 성격 탓에 늘 사건 사고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한 앞에서 싫은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우악스러운 성격만큼 실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용병들에게는 힘이 곧 진리이자 법이었다.

모든 사람의 두려움을 한 몸에 받는 거한의 다리를, 마치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 듯이 가볍게 비틀어 버렸다.

인간 같지 않던 거한이 바닥에 뒹굴며 순식간에 전투 불능이 됐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고 무심하게 확인 사살까지 끝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히 분노를 토해 내던 용병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다른 놈들은 안 와? 내가 가?"

에단이 한 걸음 내딛자, 용병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기세라는 게 있다. 기세는 한번 형성되기 시작하면 거스르기 어려웠다.

에단의 기세는 이미 저지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야, 너. 이쪽으로 와 봐."

에단이 사람 하나를 가리켰다. 사람들의 돈을 걷던 남자였다.

"저, 저요...? 저는 왜...."

"빨리 안 와?"

에단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잔뜩 기가 죽은 남자가 에단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낚아챘다.

"내가 이겼으니까. 이 돈은 내가 가진다."

"네, 네? 하지만 배분을."

"왜? 100골드 때는 아우성치더니 불만이야? 나도 내가 느낀 서러움과 슬픔에 대한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하지만 거한을 순식간에 박살 내 버린 에단의 말은 단순한 억지로 치부할 수 없었다.

"불만 있으면 나오든가."

"...대, 대체 정체가 뭐지?"

어느 용병의 물음에 에단이 코웃음을 쳤다.

"뭐야, 그 식상한 질문은. 좀 참신한 걸로 해 보지 그랬어? 불만 있으면 '질긴 가죽'으로 와. 며칠간은 머무를 생각이니까."

"질긴 가죽?"

"질긴 가죽이면 소문의...."

용병들이 웅성거렸다. 질긴 가죽이라는 여관에 대해 따로 아는 것이 있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보를 캐내고 싶지만.'

에단이 힐긋 잭슨을 바라봤다.

잭슨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에단이 잭슨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내 말대로 끝났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럽니까."

"갑자기 경어 쓰니까 어색하잖아."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용병들은 뒤끝이 강해,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괜찮아. 별로 신경 안 쓰니까."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막무가내인 겁니까? 저명한 귀족가의 자제라도 되나 본데 여긴 페르나니엄입니다. 용병과 상인의 도시란 말입니다."

"뭐, 저명 비슷한 거긴 하지. 그러는 너는 억지로 용병들 사이에 들어가려는 거 보니까. 정보 길드인가?"

잭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뒤늦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에단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에단의 입가가 크게 휘었다. 잭슨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정보 길드라니, 넘겨짚기가 과하군요."

"큭큭, 그래? 용병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쟤네들한테 화두를 던지면서 물어볼까?"

"...하,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왜 이렇게 방해하는 건지 들어나 봅시다."

"너희들을 찾아다니던 중이었거든."

"우리를? 대체 무엇 때문에?"

"아까부터 묻는 게 참 많네. 정보 길드라는 놈들이 너무 정보를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일단 여기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당신 덕에 내 계획도 모두 허사가 돼 버렸습니다."

"뭘 어떡해. 그냥 가는 거지."

에단이 잭슨의 목덜미를 붙잡은 채 지나가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순간 고민했다. 여기서 에단을 그냥 놓아줘도 되는가.

에단의 행동은 분명 도를 넘었다. 검을 뽑아도 규율에 어긋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지면? 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두려움이 치밀었다.

그들은 에단이 상대를 어떻게 짓밟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단순히 패배가 끝이 아니었다. 저 정도의 부상이라면 복귀는 힘들지도 모른다. 용병의 삶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용병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원한도 많이 사게 된다. 그러니 큰 부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돈 몇 푼에 목을 걸고 싶지 않았다.

원래 용병이라는 족속은 돈에 목숨을 베팅하는 직업이었지만, 에단에게 대항하는 것은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에단이 발을 내딛자 주춤주춤 물러서던 용병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뒤를 노리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선뜻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에단이 풍기는 분위기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어.

완벽한 피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블랙 오우거를 흡수하면서 얻은 부가 효과.

에단이 살기를 끌어올리자, 자연스럽게 피어가 강해졌다.

자신보다 약한 자들의 감정을 압도하는 힘.

피어에 노출되면 대항이라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든다.

홍해처럼 갈라진 인파 사이를 에단이 태연하게 지나쳤다.

* * *

에단은 질긴 가죽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미 체념한 잭슨은 축 늘어진 건어물처럼 에단에게 질질 끌려왔다.

여관에 휴고와 가토는 없었다. 다비도 없는 것으로 보아 동네를 구경하기 위해 함께 나간 것 같았다.

'잘됐군.'

적어도 둘만 있는 게 대화하기는 수월했다.

때마침 여관 안도 조용했다. 사람도 딱 한 명뿐이었다. 있는 사람이라고는 취기가 잔뜩 올라서 엎드려 있는 헨리.

"...한심하군."

한숨을 내쉰 에단이 잭슨을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이제 용건을 말해 보시죠."

"좀 기다려. 성급하기는."

하지만 급하기는 에단도 다르지 않았다.

에단이 여관 주인에게 말해, 마실 것 두 잔을 준비했다.

"붉은 곰, 그리고 곰 발. 아는 거 있지? 용병이랑 산적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아카데미."

"말을 잘못했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겁니까?"

"원하는 건 없어. 얘네가 서로 협력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궁금한 건 바로 너희들이야."

"...그걸 알아서 무엇을 하려고?"

"뭘 하기는, 협력하려고 하는 거지."

"하, 협력? 대체 당신의 뭘 믿고요?"

"왜 그걸 네가 판단하는 거지? 더 위가 있잖아."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글쎄, 여기부터는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은데."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연스레 풍기는 압도감에 잭슨이 움찔 몸을 떨었다.

"...대체 뒤에 누가 있는 거죠? 당신이 무슨 블란테라도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오, 드디어 정답이군."

"그게 무슨...."

에단이 품에서 휘장을 꺼냈다.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사자.

블란테의 상징이었다.

'시간이 없어.'

촉박한 시간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잭슨의 부릅뜬 눈을 보며 에단이 씨익 웃었다.

"이제야 감이 와?"

◈ [65화] 정보 길드 (2)

"이게 무슨...! 설마 블란테가 페르나니엄을 노리고?!"

"무슨 헛소리야. 이딴 촌구석을 블란테가 먹어서 어디에다가 쓴다고.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용무일 뿐이야."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습니까?"

"시작은 산적 새끼들, 그리고 그 이후는...."

에단이 잠시 침묵했다. 여기서는 말을 꺼내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규모가 조금 커야지.'

원래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한데 원작 주인공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일이 꼬였다.

그걸 생각하자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몰라도 돼."

"지금 그걸 말이라고...."

"미안한데 내가 시간이 없거든? 좋게 가면 안 될까?"

"정말 산적까지 연관되어 있습니까?"

"뭐야? 정보 길드라는 녀석이 그것도 몰라? 그렇다면 실망인데."

에단의 말에 잭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증뿐이었습니다. 붉은 곰은 최근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용병단입니다."

"그건 알고 있지."

"끝까지 으시죠. 용병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상품성?"

에단은 의미 없는 질의응답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그것도 정답이기는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답은 위상이었습니다. 명성이나 위상 따위는 용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죠. 소문은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르니까요. 하지만 붉은 곰 용병단의 소문은 너무 빠릅니다. 등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 용병단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속도죠."

"한마디로 작위적이다?"

"맞습니다. 용병이라는 전투 집단은 한쪽 권력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야 용병의 가치가 없어지기만 하죠. 장기 말이 될 바에는 귀족 가문의 병졸이 되는 게 나을 정도니까요. 어쨌든 붉은 곰 길드의 소문을 따라 올라가니 끝이 없었습니다."

"근원지가 어딘데?"

"귀족들의 소행으로 알고 있었는데, 전혀 뜻밖의 루트가 보여서 파 봤더니...."

"아카데미?"

잭슨이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의뢰와 완벽하게 해결되는 사건, 그리고 그 정도의 실력자가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질 가능성. 모든 게 아카데미의 조작이라고 판단됐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단서는 없고 모조리 심증뿐이었죠. 그래서 물밑 작업을 준비 중이었고요."

"그 물밑 작업이 용병계에 발을 들이는 거였나 보네?"

"맞습니다.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요."

"다른 용병 인맥은 없었나? 명색이 정보 길드면서."

조롱이 섞인 에단의 말에 잭슨이 고개를 저었다.

"용병처럼 입이 가벼운 자들을 신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거래 상대일 뿐이죠."

"큭큭, 그럼 나는 어떤 사람 같은데?"

"...모르겠군요. 대체 당신은 뭘 원하는 겁니까?"

잭슨이 진심을 담아 물었다.

다리를 꼰 에단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너는 말해도 몰라."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에단이 읊조리자, 잭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에단은 지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은 원작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정보 길드도, 붉은 곰 용병단도 마찬가지였다.

'가진 걸 이용하기 위해서는.'

탁탁.

에단이 검지로 탁자를 두드렸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에단 블란테."

"에단...? 그 망나... 아니, 말썽쟁이 둘째 말입니까?"

잭슨의 중얼거림에 에단이 씨익 웃었다.

"걔가 나야."

그 순간 잭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에단은 분명 돼지에 불퉁한 인상을...."

에단의 눈을 말없이 바라보던 잭슨이 미간을 좁혔다.

"...인상이 사납긴 하군요."

잭슨의 반응에 에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잭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죠. 에단이라는 도련님이 무슨 바람인지 몰라도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고 치자고요. 그런데 고작 정보원 나부랭이를 붙잡은 이유가 뭡니까? 그것도 심증 하나만 가지고."

"아까 말했잖아. 정보 길드가 필요하다고."

"그 이유를 묻는 거잖습니까. 블란테 정도의 가문이 왜 정보 길드에 집착하죠? 그리고 정식 루트를 통해서도 아닌, 이렇게 정보원 하나를 붙잡아 두는 방식으로요."

'시간이 없거든.'

사실 이 대화도 생략하고 싶었다. 오늘 중에 일을 정리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히 시도한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패를 보여 주지 않으면 의심을 살 테고, 협박만으로는 신용을 얻기는커녕 협상도 되지 않을 테다.

'이쯤이면 됐다.'

유순하고 온건한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고압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면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유를 알려 줄 수는 있어."

에단의 대답에 잭슨의 표정이 돌변했다.

"하지만 공짜로 줄 수는 없지."

"...허?"

"이유를 발설하면 나한테도 위험이 따르거든. 너희가 책임질 녀석을 데려와야지."

에단이 히죽 웃더니 말을 이었다.

"가면 쓴 아가씨 있지? 걔한테 데려가 줘."

순간 잭슨의 표정이 살벌하게 바뀌었다. 잭슨의 신형이 순간 자취를 감췄다.

고개를 돌린 에단의 눈앞에 날붙이가 번뜩이는 게 보였다.

에단은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비수를 피해 낸 뒤, 곧장 팔꿈치를 뒤쪽으로 꽂았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잭슨의 신형이 뒤로 물러났다.

"아까 좀 치더라고."

에단이 씨익 웃었다. 천진한 웃음, 마치 장난감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아가씨에 대해 알고 있지?"

"하하, 이 새끼. 아까부터 날로 먹으려고 드네? 미안한데 내가 좀 바쁘거든?"

에단이 한 걸음 다가갔다.

잭슨이 물러나는 척하며 달려들었다. 한 손에는 비수를 들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빨리 끝내자."

에단이 가벼운 스텝으로 사이드로 물러났다. 그러자 잭슨이 숨겨 둔 비수가 빛을 발했다.

퍼억!

그때 에단의 발이 잭슨의 손목을 그대로 가격했고, 그는 손에 쥔 비수를 놓쳤다.

빙그르.

에단의 몸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회전력이 더해진 에단의 뒤 차기가 잭슨의 복부에 꽂혔다.

퍼억―!

"크윽!"

잭슨이 신음을 흘리며 허공을 날았다. 잭슨의 눈은 에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눈이 아니었다.

에단은 조급해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서 손을 뻗었다.

그 타이밍을 노리던 잭슨이 마주 손을 뻗었지만, 에단이 뻗은 손은 눈속임이었다.

후웅!

뒤에 숨겨 놨던 에단의 주먹이 반원을 그리며 잭슨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체중이 실린 러시안 훅에 잭슨의 목이 크게 꺾였다.

주먹을 얻어맞자 장막이 펼쳐진 것처럼 시야가 뚝― 하고 끊어졌다.

털썩, 잭슨의 신형이 무너졌다.

그 순간, 멀리서 곰 같은 체격의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질긴 가죽의 주인이었다.

"남의 여관에서 꽤나 소란을 일으키는군요."

여관 주인이 풍기는 기백이 매서웠다.

용병 출신이라는 말답게 산전수전을 겪은 자의 살기였다.

에단은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손을 들었다.

"정당방위였습니다."

에단의 대처에 여관 주인이 한숨을 내쉬며 거품을 물고 쓰러진 잭슨을 바라봤다.

"쯧쯧, 정보원이라는 놈이 이렇게 칠칠치 못해서야."

"이 녀석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크게 떠드는데 못 듣는 게 이상하지 않나?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귀는 잘 들립니다."

"하하, 그래 보이는군요."

확실히 잭슨은 안일하게 행동했다. 여관에 사람이 없어 보인다고 하여 꽤나 큰 목소리로 자신의 정보를 떠들어 댔으니.

"...그나저나 제가 묻고 싶군요. 정보 길드는 왜 건드는 거죠?"

여관 주인의 물음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단이 올린 손을 내렸다.

"그 대답은 왜 듣고 싶지?"

에단의 말이 평대로 바뀌었다.

"그 위상 높은 블란테 가문의 도련님께서 정보 길드에 신경을 쓰니, 의심을 할 수밖에. 비록 미천한 용병 출신이지만 거기에 친구가 있거든요."

예상 못 한 여관 주인의 대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 자신을 낮추는 것치고는 상당히 강하군.

'저도 알고 있습니다.'

풍겨 오는 기백.

자신을 낮춰서 말하고 있지만,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겸손한 태도치고는 숨기는 게 있어 보이는데?"

"나이 먹은 아줌마가 뭘 숨기겠어요.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저도 이제 지켜야 할 게 있어서 말이에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딸이 있었으니까.

그때 때마침 잭슨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뜨려는 전조였다. 잭슨은 눈을 뜨자마자 화들짝 놀라 몸을 움직였다.

콰직!

그 순간, 에단의 발이 잭슨의 복부를 짓밟았다.

"큭!"

잭슨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에단이 쪼그려 앉아서 잭슨을 바라봤다.

"더 하려면 해도 되고."

"대체 목적이...."

"아까부터 왜 다들 그 소리지?"

에단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일어났다.

"나한테 큰 목적이 있어 보여?"

물론 목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발설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무뢰배처럼 막무가내로 일관했다. 격조 없이, 사납게, 망나니처럼.

쓰러져 있는 잭슨의 배 위에 에단이 발을 얹었다.

"왜? 후환으로 협박하게?"

"...정보 길드를 우습게 보지 마라."

"하, 우습게 보는 건 너 아닌가?"

에단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짜증이 치밀었다. 협상 따위는 역시나 귀찮았다.

"블란테가 우스워? 용병들이 가득한 이딴 영지? 오늘이라도 쓸어버릴 수 있어."

페르나니엄은 상인들과 용병들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다.

용병들이 바글거리는 탓에 웬만한 무력 집단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이다.

용병들은 거칠고 사나운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블란테라면 얘기가 달랐다.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블란테와 견줄 만한 무력 집단은 찾기 힘들었다.

블란테 개인의 힘만으로도 이따위 영지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었다.

"너희의 정보? 자신들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당장 나도 너희 우두머리를 알고 있는데?"

"...."

에단의 말은 반쯤은 과장이었다. 블란테의 무력이 엄청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에단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었다.

한 도시를 괴멸한다는 결정은 가주도 내리기 어려운 사안이다.

수많은 외압과 지탄을 받을 테고, 그로 인해 입게 될 손해도 적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에단의 패기와 거친 언행이 설득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래도 의도는 알아야 합니다."

잭슨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흥분이 가라앉은 잭슨의 모습에 에단의 기세도 누그러졌다.

"그저 대화하고 싶을 뿐이야. 다른 목적은 없어. 해를 끼치지도 않을 거다. 맹세하지."

"...알겠습니다. 일단 발부터 치워 주시죠."

잭슨의 말에 에단이 발을 치웠다. 눈앞에 서 있는 여관 주인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제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여관 주인의 말에 잭슨이 그녀를 힐긋 바라봤다.

"...검은 도끼?"

"한참 전에 버린 이름입니다."

"허, 여기가... '질긴 가죽'이었군요."

둘만 아는 것 같은 얘기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할애해 들을 생각은 없었다.

'이름은 들어 본 거 같은데 가물가물하네. 뭐, 지금 궁금해할 건 아니지.'

"슬슬 가지?"

에단이 재촉하자,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잭슨이 여관 문을 향해 걸었다.

"...실례했습니다."

"다음에는 좀 조용히 있다가 가시죠."

"유의하죠."

진지해 보이는 둘의 대화를 에단이 똥 씹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머쓱한 표정을 지은 잭슨이 여관 밖으로 나섰다.

"알고 있었습니까?"

"뭘."

"여관 주인에 대해 말입니다."

"아니."

"저 여자는 과거에 검은 도끼라는 아명으로...."

"야."

에단이 잭슨을 바라봤다.

"시끄러우니까, 길이나 안내해."

"...."

◈ [66화] 정보 길드 (3)

에단의 말에 잭슨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

"아니, 왜죠? 그녀는 전설적인 용병...."

"아, 좀."

에단이 눈을 부라리자, 잭슨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 새끼는 뭔 정보 길드라는 녀석이 말이 이렇게 많아.'

자고로 정보 길드라 하면 입이 무겁고, 작은 정보 하나라도 돈을 받고 파는 족속들 아니던가.

그런데 잭슨은 입이 싸도 너무 쌌다.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길은 미로 같았다.

골목의 구석으로 향한 잭슨은 숨겨진 맨홀을 열고 지하도로 향했다.

'...에휴, 진짜.'

예상은 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이 그녀를 만날 때 지하도를 거쳤으니.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악취가 진동했고 공기는 끈적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잭슨의 발은 거침이 없었다. 에단도 어렵지 않게 잭슨을 따라나섰다.

에단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주변을 인지할 수 있었다.

찰박찰박.

꽤나 먼 거리를 안내한 잭슨이 옆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더니 천장을 두드렸다.

"흘리는 말을 주의해라."

잭슨의 말과 동시에 천장에서 사람 하나 지나갈 법한 통로가 생겨났다.

잭슨이 먼저 올라갔고, 그 뒤를 에단이 따라갔다.

통로 위로 올라가자 좁은 통로에 계단이 있었다. 잭슨은 말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에단도 그 뒤를 따라 올랐다. 한참을 그렇게 오르자 검은 벽이 나타났다.

"귀를 막으시죠. 암호를 말해야 하니."

"괜찮아."

"괜찮지 않습니다. 여긴 암호가 없으면...."

"꼬리 없는 쥐. 눈 없는 까마귀."

"...!"

잭슨의 눈이 커졌다. 순간 막혀 있던 벽이 사라지고 동굴 같은 복도가 생겨났다.

"...대체 어떻게?"

"잘. 난 간다."

에단이 걷기 시작했다.

좁은 복도와 긴 계단, 그리고 은은한 조명이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잭슨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였다.

'아가씨에 대한 것도 모자라... 통로의 암호까지 알고 있다고?'

위험했다.

본래라면 외부인의 출입은 통제해야 한다. 그것도 에단처럼 뭘 할지 모르는 존재라면 더더욱.

하지만 에단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잭슨의 발을 붙잡았다.

일전의 전투, 잭슨은 자신의 무력을 믿고 있었다.

정보 길드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실전에서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수 싸움에서 압도당했다. 가진 패를 드러내기도 전에 짓밟혔다.

실전이라면 반드시 죽었을 터.

그걸 생각하니 두려움이 치밀었다.

'그래, 허튼짓을 하지는 않겠지.'

미심쩍은 것투성이였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말은 에단이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후회한다고 한들 이미 늦었다.

"부디 실수하지를 않길 바랍니다."

잭슨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 나왔다.

"내가 그렇게 경우가 없지는 않아."

"...."

그간 에단의 태도를 보았을 때 신용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에단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조명은 점차 어두워졌다.

'진짜 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보 길드로 가는 길을 왜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놨단 말인가?

계단을 모두 오르자, 문 하나가 나타났다. 에단이 무심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 * *

문을 열자 꽤나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동양풍이었다. 앞을 가리는 은근한 가림막과, 한복인지 기모노인지 알기 힘든 동양식 전통복을 입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

에단이 할 말을 잃었다.

책으로 읽었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막상 마주하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서 오세요, 귀인이시여."

묘령의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은한 목소리였다.

"그만."

"저를 찾아오셨다는 말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만하라고."

― ...쟤는 왜 저러는 거냐?

이런 상황에 내성이 없기는 페온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여 소녀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요? 귀...."

"데릴라."

"...."

여자가 갑자기 침묵했다.

"...데릴라가 뭔가요?"

"뭐긴 네 이름이잖아."

"뭔가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데릴라."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치기 시작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

"가면 쓴 여인으로 부르세요. 분명히 말합니다. 저는 데릴라가 아닙니다."

"장난해? 언제 그걸 다 부르고 있어? 데릴라면 충분하지 않나?"

"당신...!"

그 순간 여자의 눈에서 살기가 쏘아졌다.

에단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면 쓴 여인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냥 메이라고 부르세요."

"그래, 뭐.... 정 원한다면야."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죠? 그것도 블란테의 유명 인사께서."

"오, 나를 알고 있나?"

"모르는 게 이상하죠. 버림받은 망나니에서 한순간에 경쟁자를 짓누르고 우뚝 선 강자가 되었으니 말이죠. 심지어 아카데미의 꽃도 꺾었다죠?"

"걔가 꽃인가?"

"그분도 유명 인사죠. 아카데미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명예를 가지고 있고, 그만큼의 실력도 겸비한 분이니까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인데."

"그럴 리가요. 저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어두운 과거를 이겨 낸 분이니까요."

"어두운 과거는 뭐, 어쌔신 시절을 말하는 건가?"

"...당신은 대체 뭔가요? 보고를 받았을 때도 믿기 어려웠습니다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뒤바뀔 수가 있는 거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단이 눈살을 찌푸리자, 메이가 입을 다물었다.

"말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주제를 바꾸겠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던 것이죠? 블란테의 정보력이 그렇게나 뛰어났었나요?"

'그럴 리가.'

에단의 가진 지식은 모두 원작 소설의 힘이었다.

메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메이는 원작의 중요 인물 중 하나였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조력자이자 정보 길드의 수장이었다. 가녀린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저래 보여도 상당히 강하겠지.'

일단 메이는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이를 걸고넘어지면 메이는 결코 지금처럼 곱게 대화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정보를 원하는 건가?"

"후후, 확실히 쉽지 않군요. 역시 귀인...."

"그만하라고. 귀인이니 뭐니 개소리 지껄이면 네 이름을 동네방네 까발린다?"

빠득.

메이는 이를 갈았다.

"좋습니다.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 캐물을 만큼 양심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 저한테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죠?"

"강혁에 대해 알고 있나?"

"...강혁? 그게 누구죠?"

메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단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네.'

정보 길드의 수장도 강혁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강혁은 사라졌다.

그 탓에 세계를 구원할 용사 자리에 엑스트라 악역인 망나니가 서게 되었다.

이건 자신이 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강혁만 있다면 옆에서 조력자 역할을 하며 꿀을 빨면 됐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이 처리하지 않으면 이 세계가 무너질 판이었다.

에단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휴고, 가토, 네이드, 빈센트, 첸....

새로운 인연들의 목숨까지 모두 달려 있었다.

에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세계수는 지금 상태가 어떻지?"

가림막 너머로 메이의 몸이 움찔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반응을 보니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 정도."

"...그렇다면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에단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모르겠어?"

주인공이 없다는 건 중대한 사항이었다.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세계수.'

주인공이 초반에 해결해야 할 이벤트였다.

'그게 남아 있다면.'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있을 뿐.'

하지만 그렇다면.

'도서관에서의 기연은 무엇이지?'

룬어의 습득.

그리고 거기 써져 있던 내용.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기는커녕, 부정적인 내용만 적혀 있었다.

뭐가 바뀐 것일까? 주인공은 또 어디 간 거고?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민보다 행동을 해야 할 때. 붉은 곰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온 에단이었다.

운이 좋게도 잭슨을 발견했고, 메이와 대면할 기회가 생겼다.

'정보 길드의 수장과 대면할 기회는 쉽지 않지.'

메이는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였다. 원작 주인공도 갖은 우연이 겹쳐 그녀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이것도 블란테의 힘이겠지.'

그저 본신의 힘을 믿고 설치는 애송이였다면 메이는 에단을 만나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블란테.'

현시점, 대륙에서 수위에 오른 무력 집단.

그게 블란테가 가진 이름의 힘이었다.

'그 머저리 새끼들은.'

에단의 형제들은 블란테의 힘에 취해 상대를 짓누를 생각만 할 뿐, 이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할지가 관건이었다.

'상대는 나를 건들지 못해.'

정보 길드.

정보 거래가 그들의 주 수입원이긴 했지만, 하는 일이 일인 만큼 무력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여기서 안면을 트고 도움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족해.'

그러기에는 아쉬웠다. 에단은 안전한 이득만 취하는 일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에단이 의자에 걸터앉은 채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지금 무엇을 하는 거죠?"

메이는 권위를 중요시한다. 에단은 그 권위와 마주 서고 있었다.

"검은 웅덩이, 요정의 속삭임, 지하의 탑."

"...!"

앉아 있던 메이가 몸을 들썩이며 일어났다.

에단이 거론한 것들은 모두 정보 길드의 핵심 지부였다.

"...당신, 대체 뭐야?"

"글쎄, 뭘까?"

에단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자신은 있다. 여기서 틀어져도 상대의 목줄을 붙잡을 자신이.

'놓칠 생각은 없지.'

얕보이지 않는 것.

그건 현대에서나 이곳에서나 똑같이 통용되는 진리였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군요. 제 앞에서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도 오랜만이구요."

"적어도 가면과 장막 사이에서 정체를 감추는 너보단 내가 낫지 않을까 싶은데."

에단의 말에 메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건...."

"왜? 또 변명을 늘어놓고 싶어서?"

"...어쩔 수 없군요."

그녀가 가림막을 치우고 천천히 여우 가면을 벗었다. 가면을 벗자 희고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외모, 하지만 눈빛과 표정만큼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 같았다.

에단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메이가 얼굴을 드러내는 건 주인공이 꽤나 고생을 한 뒤에야 나오는 에피소드다.

'그런데 이제 내가 고생을 해야 해서 문제지.'

그 생각에 순간 짜증이 났다.

세계수과 관련된 일은 벌써 진행이 꽤나 됐을 터.

메이가 얼굴을 드러낸다는 건 상대를 완전히 신용하고, 상대에 감격했다는 일종의 증명.

정보 길드의 간부 중에도 메이의 본얼굴을 본 자들은 드물었다.

메이는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의 여유로운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숨기던 본명, 그리고 정보 길드의 주요 거점. 얼굴을 드러냈음에도 조금도 바뀌지 않는 표정.

그렇기에 에단의 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숨겨 둔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대화할 마음이 생기는군."

에단이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뭐죠?"

메이의 물음은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과거의 행보부터, 변화, 그리고 앞으로의 목적.

당연히 에단은 모든 것을 말해 줄 생각이 없었고, 메이도 대답을 원해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에단이 몸을 일으켜서 천천히 다가갔다.

메이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속셈이죠? 더 다가오지 마세요."

메이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에단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라고 하지...!"

메이가 대응을 하려는 그 순간.

에단이 말없이 손을 뻗었다.

"협력하자고. 후회는 없을 테니까."

에단이 미소 지었다.

◈ [67화] 정보 길드 (4)

"그 얘기가 사실인가요?"

메이의 얼굴에서 의심의 기색이 묻어났다.

에단이 꺼낸 말 자체가 쉽게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왜? 너희도 그게 의심돼서 조사하던 것 아니었나?"

에단이 말한 것처럼 갑자기 등장한 세력인 아카데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블란테와 세계수, 용병들에게까지 마수를 뻗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이상한 점을 느끼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신 말씀은...."

정도가 과했다. 그 사실에는 에단도 동감했다.

'그러니까 주인공 녀석한테 막혔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에단은 그저 메이가 미리 대비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말에 대한 근거는...?"

"당연히 없지."

에단의 당당한 태도에 메이가 미간을 좁혔다.

"아까 내가 말한 것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

메이가 침묵했다. 확실히 에단이 말한 것들은 정보 길드에서도 통제되던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에단의 말을 모두 신용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치부할 수도 없어.'

메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너희도 성의를 보일 시간이군."

"한 가지만 더 묻죠."

"흠.... 뭐가 더 궁금하지?"

"잭슨을 만나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 모두 계획이었습니까?"

메이의 물음에 에단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그걸 다 계산해서 움직였으면 천재지.

에단의 대답에 메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목적을 이룬 에단이 몸을 일으키자, 메이가 물었다.

"약속은... 지킬 건가요?"

"난 거짓말은 안 해."

대답을 끝으로 에단이 몸을 돌렸다. 메이가 쓰게 웃었다. 그녀답지 않게 협상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말려들었다. 정보의 우위는 물론이고, 상대에게 저의를 내보이지 않는 자신감까지.

모든 부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입맛이 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들었다. 에단은 약속했다.

'받고 싶은 것도, 해 줄 것도 딱히 없지만.... 한 번, 네가 원할 때 도와주지.'

명확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조건이었다.

평소 메이의 성격대로라면 결코 수락하지 않을 조항이었지만, 메이는 어째서인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에단에 대해... 전면 수정할 필요성이 있겠어.'

에단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였다.

사람이 너무 급격하게 바뀌어 등급을 조정 중이었지만 잘못 생각했다.

에단에 대한 정보 등급은 격상해야 할 것 같았다. 메이가 보기에 에단은 대륙에 큰 파장을 일으킬 사람이었다.

'저런 자가... 아카데미의 교수로 간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아카데미 교수가 블란테에 방문한 이유는 아직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방금 대화에서 에단에게 직접 들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 막무가내의 성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카데미....'

의심스러운 게 많은 집단이다. 그렇기에 최근 정보 길드도 아카데미라는 집단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블란테라....'

블란테는 거룡이었다.

가진 힘이 강할수록 주변을 살피지 않는 우를 저지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에단은 달랐다. 아카데미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단의 존재가 더욱 무서웠다.

'척을 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 상대가 블란테라면 더더욱.

* * *

입구의 문을 닫은 잭슨은 근처 골목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블란테라는 이름에 짓눌려 버렸다.

아니, 에단이라는 존재에게 기가 죽었다. 더 정확히는, 압도되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에단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보여 주는 태도와 확신이 두려웠다. 그런 사람을 메이와 만나게 한 건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함이 치밀었다.

물론 정보 길드의 수장인 메이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나름의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내고 만 것 같았다.

"제길...."

잭슨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거리를 배회할 때, 한 남자가 그에게 다가섰다.

정보 길드의 간부로, 잭슨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후던, 무슨 볼일이지?"

"무슨 볼일? 지금 그게 네놈 입에서 나올 말이냐?"

"...."

잭슨이 입을 다물자, 후던은 잭슨의 멱살을 붙잡았다. 분노한 그의 얼굴은 사나웠다.

"따라와."

후던이 쓰레기를 내던지듯 잭슨을 밀어냈다. 잭슨은 말없이 후던을 따라나섰다.

'그것 때문인가?'

짐작이 가는 바는 하나였다. 에단, 그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입이 썼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후던이 잭슨의 몸을 밀치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잭슨, 정신이 나갔나?!"

"...어쩔 수 없었어. 상대는 블란테였다."

잭슨은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란테는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후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 역시 잭슨에 맞춰 목소리를 줄였다.

"블란테? 그 잘난 블란테가 여기까지 행차했다고? 그 증거는?"

"...블란테가 아니면 보여 줄 수 없는 무위였다."

잭슨은 대답을 하고도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빈약한 근거였다.

후던의 주먹이 잭슨의 얼굴을 스치며 벽에 꽂혔다.

"만일 아가씨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는 그날로 죽는다."

"...."

후던의 경고에 잭슨은 차마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성급하게 행동했다는 것은 잭슨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제를 모르고 나댄 그 새끼는 오늘 내 손에 죽는다."

"뭐라고? 잠깐 그는 블란테의 적...."

"닥쳐. 나에게 간섭할 권리 따윈 네게 없으니까."

재차 에단의 정체를 밝히려던 잭슨이었지만, 후던이 말을 끊는 바람에 말을 채 내뱉지 못했다.

아니, 말한다 해도 후던은 에단을 공격할 것이 빤했다.

그는 잭슨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고 있었으니까.

"...정녕 블란테의 원한을 살 셈이냐?"

"하, 블란테란 개소리는 차치하고. 원한?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걸 따졌지? 목숨을 내놓고 시작한 일 아니던가? 나는 내 목숨보다 아가씨가 더 중요해."

후던이 씹어뱉듯 읊조렸다.

잭슨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잭슨이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기척이 다수 느껴졌다.

'숫자가....'

자그마치 일곱.

하나같이 실력이 검증된 정보원들이었다.

"감히 우리와 아가씨를 얕잡아 보고 능멸한 그 새끼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후던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 * *

에단이 밖으로 나섰다.

"신기하군."

밖에 나온 에단이 감탄 섞인 휘파람을 불었다. 들어간 입구와 같은 방향으로 나왔을 뿐인데 전혀 다른 장소가 눈앞에 펼쳐졌다.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평범한 건물이었고, 문밖은 대로변이었다.

시끌벅적하던 소리도 없어졌다. 보이는 사람들이라곤 만취한 취객밖에 없었다.

― 같이 있던 녀석은 꽤나 강하더구나.

'그래 보이더라고요.'

메이와 만난 장소.

그곳에는 메이 외에도 또 다른 이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일종의 안전장치겠지.'

정보 길드의 수장인 만큼, 안전장치 하나 없이 외부인과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번에도 책을 보고 알았다고 할 게냐?

페온의 추궁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글쎄요. 꿈에서 봤습니다."

― 쯧, 말을 말자.

에단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거닐던 에단이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 찝찝함이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은데....'

― 감이 좋구나. 숫자가 꽤 많아. 하나하나의 수준을 따지자면 충분히 상대할 만하지만.... 위험하겠구나.

에단은 페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수의 습격.

실력이 어떤가를 떠나, 합을 맞춘 무리는 위험했다.

단순한 배가 아닌, 몇 곱절 이상으로 상대하기 껄끄러웠으니.

에단이 인기척을 느끼고 경계를 하기 시작하자,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존나 없어 보이네."

에단이 피식 웃자, 가장 앞에 선 이가 발끈했는지 몸을 움찔했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너희들 너무 식상한 거 아니냐?"

"...자신감이 넘치는군. 실력도 그만큼 뛰어난지 확인해 보마!"

남자가 에단에게 달려들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습격자의 얼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좋아, 너는 기억했어.'

에단이 몸을 틀자, 그가 반격하리라 생각한 후던이 긴장한 채 대비했다.

하지만 에단은 곧장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예상 못 한 에단의 반응에, 후던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을 간다고?"

"그럼 병신같이 싸워 주리? 쫓아와 보든가!"

에단이 중지를 들어 올리며 혀를 내밀었다. 후던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쫓아!"

은밀한 습격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후던과 그 일행들이 에단을 쫓기 시작했다.

'흠.... 어찌한다.'

에단이 달리면서 머리를 굴렸다. 성가신 상황임이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 자리에서 습격당하길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에단은 전투를 즐겼지만, 무모함까지 즐기지는 않았다.

'룬어를 사용하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실전에서 사용해 보기는커녕 연습도 해 본 적 없는 룬어는 너무 도박 수였다.

'일단 좀 낚아 볼까?'

도망을 가고 있었지만, 그다지 큰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단이 자신 있는 것은 격투만이 아니었다.

타다다다닷!

에단이 발을 움직이자, 따가운 바람이 그의 볼을 스쳤다. 주위 사물이 빠르게 지나갔다.

에단의 속도는 가히 경이로웠다. 웨어울프의 피가 섞인 휴고에게도 밀리지 않는 신체 능력을 지닌 에단이었다.

'기초 체력은 중요하지.'

에단이 호흡에 집중했다.

허벅지에 혈류가 몰리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마나를 주입했다.

마나까지 이용하자, 에단의 스피드는 어지간한 명마의 수준을 초월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호흡은 고르게 유지되었다.

에단의 심장은 강철과도 같았다. 매일같이 행한 고강도 트레이닝은 에단의 신체를 강철로 만들어 냈다.

"미친, 무슨 속도가!"

쫓아오던 후던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마나를 사용했음에도 에단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은밀함과 민첩함이라면 자신이 있었지만, 에단은 그 궤를 달리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후던이 이를 악물고 쫓자, 에단은 속도를 확 줄였다.

"병신들. 평소에 놀았냐?"

에단이 중지를 다시 치켜들자, 후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는지, 후던이 괴성을 토해 냈다.

"크아아아! 죽인다!"

'좋아 입질은 충분하고.'

이제 유인만 하면 되는 일. 에단은 도심에서 떨어진 여관을 향해 달렸다.

* * *

대련을 끝낸 가토와 휴고는 다비와 함께 도시를 구경했다.

"...슬슬 돌아갈까?"

"그래, 좀 가자."

휴고가 슬그머니 꺼낸 말에 가토가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변 노점상은 모두 다 경험한 것 같았다.

상인들과 용병들의 도시답게 밤에도 활기를 띠고 있었고, 그만큼 볼거리들도 풍부했으며 먹을거리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 과했다.

"힝, 벌써?"

다비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성장기인 다비의 위장은 휴고와 가토에 뒤지지 않았다.

"이제 문도 다 닫았잖아. 다음에 또 오자."

"정말요?"

다비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지만, 휴고는 다비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장 날이 밝으면 일행은 또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휴고가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다비가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가토가 대신 대답했다.

"...다음에 꼭 다시 오자."

그제야 다비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가토도 쓰게 웃으며 다비와 휴고를 바라봤다.

평생 검만을 수련한 가토이기에 아이의 말을 모질게 끊기가 어려웠다.

"이만 돌아가자."

"응, 그래."

가토의 말에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도 슬슬 돌아오셨겠지?"

"그러지 않을까?"

"하하, 또 무슨 사건을 벌이신 건 아닌가 몰라."

"설마.... 잠깐 일을 보고 온다고 하셨으니 별일 없을 거야."

"...."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침묵했다.

셋은 말없이 걸었다. 어느덧 여관 근처까지 도착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저거 설마...?"

"이런 제기랄."

빠르게 다가오는 에단의 모습에 가토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토가 검을 붙잡았다. 휴고는 다비를 보호하며 한 발자국 앞에 섰다.

"타이밍 좋고."

달리는 에단이 말했다.

◈ [68화] 정보 길드 (5)

정보 길드의 간부들이 에단을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에단은 숨조차 가빠 보이지 않았다.

에단의 체력은 규격 외였고, 아무리 간부들의 무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체력적인 부분에서는 에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온 에단이, 숨조차 고르지 않고 휴고와 가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은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가라!"

에단의 외침.

당혹감을 떨치지 못한 가토가 우물쭈물하다가 앞으로 뛰어들었고, 휴고는 다비를 보호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흥, 아직 젖도 못 뗀 애송이가!"

가토의 얼굴은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했다.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간부들 입장에서는 그가 같잖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새 가토는 평정을 되찾았다. 휴고와의 대련에서 패배한 뒤로, 가토는 평정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간부 하나가 검을 뽑아 들었다. 가토를 향해 휘둘러지는 검은 매서웠다.

하지만 가토는 얼마 전까지 첸과 수련했다.

첸이 가볍게 휘두르던 목검이 지금 눈앞에서 내리꽂히는 검보다 수배는 위협적이고 매서웠다.

가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순식간에 검이 출수됐다.

서걱―

간부의 검이 그대로 양단되었다. 하지만 간부의 득의양양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할 역량조차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검을 양단한 가토의 몸이 빙그르 회전하며 그대로 간부의 복부를 가격했다.

팡!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간부의 몸이 그대로 비행했다.

다른 간부들이 순간 몸을 멈칫했다. 후던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본능이 경고하는 듯했다.

새로 나타난 애송이는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라고.

"다들 저 새끼 먼저...."

"...쯧쯧."

후던을 바라보던 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가토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눈빛의 의미를 이해 못 한 후던이 고개를 돌렸다. 본능적으로 감지한 살기였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너 뭐하냐?"

"...!"

후던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빼려고 했으나, 에단의 손아귀가 먼저였다.

후던의 멱살을 잡은 에단의 얼굴이 악귀처럼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에단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후던은 저항해 보려 했지만, 무게 중심에 대한 이해도는 일반인 수준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공간과 무게 중심은 에단의 통제하에 있었다. 심지어 신체 능력조차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에단이 우위인 상태.

후던의 저항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에단은 발을 후던의 다리 사이로 넣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후던은 공중에 뜨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부웅―

몸이 공중에 떠오른 그 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바닥에 꽂히는 건 찰나였다.

쾅!

완벽한 업어치기에 후던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콰직!

이어 에단이 무릎을 후던의 가슴팍에 얹자, 후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모습에 다른 간부들이 급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을 가토가 아니었다.

곧장 가토가 적들을 향해 뛰어들며 베테랑 간부들과 교전을 시작했다. 가토는 능수능란하게 협공에 대처했다.

정보 길드의 간부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애송이로만 보였던 가토의 움직임이 너무 노련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휴고와 도련님을 상대로 싸워 봤어?'

가토는 울분을 토해 내듯 검을 휘둘렀다.

속임 동작, 변칙.

에단은 상대의 심리를 읽으며 가지고 놀 줄 아는 베테랑 선수였고, 휴고는 짐승 같은 직감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괴물이었다.

두 괴물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토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훌륭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가토의 성장세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가토의 검이 빛을 발할 때마다 정보 길드 간부들은 하나씩 제압당했다.

그러는 사이 에단은 신음을 내뱉고 있는 후던을 흘겨봤다.

에단의 싸늘한 표정에 후던은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으리란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너 그래도 한가락 하는 애지? 그렇다면 후환을 남겨 두면 안 되지."

그 말과 동시에 에단이 후던의 발목을 그대로 짓밟았다.

콰직!

"크아아악!"

후던이 비명을 내질렀다. 에단은 무심하게 다리를 한 번 더 들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발도 그대로 지르밟았다.

콰직!

"끄, 끄으으윽!"

에단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이, 이 개자식들, 이러고도...!"

"그 대사들은 질리지도 않냐?"

에단이 터덜거리며 다른 간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수명이 다해 가는 가로등이 깜빡이며 에단을 비췄다.

에단의 표정에서 불안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희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지?"

"우리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간부 하나가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에단의 손이 더 빨랐다.

쫘악―!

에단의 손바닥이 간부의 뺨을 후려쳤다. 짜릿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밤중에 시끄럽게."

"커헉."

남자의 입에서 뽑힌 이와 함께 진득한 핏물이 흘러나왔다.

"...보지 마."

휴고가 다비의 눈을 가렸다. 에단이 저 상태에 돌입한 이상, 휴고나 가토는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너희들은 이게 잘한 짓 같지?"

에단이 슬금슬금 몸을 빼고 있는 다른 간부에게 다가갔다. 에단의 손이 간부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런데 왜 그 생각은 못 하냐? 남을 죽이려 들면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쫘악―!

에단의 손찌검에 간부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우, 우리는...."

"너희는 정보 길드 뭐시기라고? 뒤에 귀족들도 끼고 있고? 뭐, 용병들도 우릴 쫓는다고?"

"그래.... 이제 시작일 뿐...."

"야."

에단이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너희들, 그거 벗어."

휴고와 가토가 머뭇거리자, 에단이 눈을 부라렸다. 둘의 행동이 민첩해졌다.

두 사람이 로브를 벗자 가려져 있던 정복이 드러났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흑색 정복, 그리고 가슴팍에 수놓아진 검은 사자.

그 누구도 감히 사칭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대륙의 포식자.

"브, 블란테?"

다른 간부들은 잭슨과 후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후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왜? 이제야 상황이 파악돼?"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용병들? 귀족들? 그래, 뒷배가 있다면 죄다 불러 봐."

"이, 이럴 수는...."

"그리고 잘 숨어야겠다. 블란테의 적통을 협박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저, 적통이라고?"

한편 뒤쪽에서 에단의 말을 듣고 있던 후던의 표정은 아연해졌다.

처음 잭슨이 블란테라는 이름을 언급했을 때, 후던은 믿지 않았다.

블란테가 누구던가.

대륙을 호령하는 고고한 사자. 사나운 몬스터를 막아서는 살아 있는 방벽.

그것이 블란테였다. 그런 블란테가 고작 정보 길드에 관심을 가지다니.

겁을 상실한 어떤 간 큰 녀석이 블란테를 사칭했다고 생각해, 다른 간부들에게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만에 하나, 사칭범이 아니고 진짜 블란테의 끄나풀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상대를 제압하고, 증거를 인멸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정보 길드의 간부들은 산전수전 모두 겪은 베테랑이었다.

전투에 있어서는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증거 인멸?

정보를 사고파는 이들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지부를 옮기고 잠시 몸을 숨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애새끼들한테.

그들의 자존심이 산산이 조각났다.

처음 공중에 붕 떠올라 바닥에 내팽개쳐질 때만 해도, 기회를 엿보려 했다. 무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아직 실전 경험은 부족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판이었다.

두 다리를 산산이 부숴 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말의 기회도 노릴 수 없게끔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블란테의 적통이라니.'

에단의 눈빛.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며, 후던은 깊이 후회했다.

'잘못 건드렸다.'

이런 눈빛을 한 자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

음지에 숨어 있던 기억을 잊은 채 자만해 버렸다.

힘을 과신하는 순간, 이런 날이 오기 마련이었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후던은 자신의 목숨으로 이 일을 끝내야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꽉 감았다. 에단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후던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너, 지금 뭐 하냐?"

"...!"

후던의 동공이 미미하게 떨렸다.

에단이 입꼬리를 비틀며 후던의 손목을 붙잡았다. 후던이 저항하려고 했지만, 이미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에단의 근력은 저항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게 후던의 손목을 꺾는 행위는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수월했다.

기무라 락? 키 락?

기술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 손으로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비틀면 된다.

콰드득.

들려서는 안 될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손목의 뼈가 손쉽게 조각났다.

"왜? 네 목숨 하나로 끝낼 생각이었어? 네 목숨이 그렇게 가치가 높나?"

소름 돋는 목소리. 에단은 웃으면서 협박했다.

그때 멀리서 한 인영이 다가왔다.

어둠에 가려진 얼굴이 가로등 빛과 달빛에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에단이 잭슨에게 인사했다.

"...그쯤 하면 안 되겠습니까."

"어, 안 돼."

에단의 단호한 대답에 잭슨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곤란해집니다."

"곤란하게 해 봐."

에단의 태도는 삐딱했다.

잭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정보 길드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겁니다."

에단이 굳은 표정의 잭슨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큭, 뭐라고? 적으로 돌려?"

"정보 길드를 우습게 보지 않는 게...."

몸을 일으킨 에단이 후던의 반대편 팔꿈치를 밟았다.

콰직!

"끄아아악!"

사지가 모두 박살 난 후던이 몸을 꿈틀거렸다.

"허리도 쓰기 싫어?"

에단이 조용히 읊조리자, 후던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후던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그는 이제야 에단이 어떤 인물인지 깨달았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휴고와 가토를 바라봤다.

"경험도 있겠다. 할 수 있지?"

에단이 턱짓했다.

"전부 묶어."

두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부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가토와 휴고가 나선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단이었으면 제압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

에단은 천천히 잭슨에게 다가갔다.

굳이 화를 숨기지 않았다. 분노한 감정에 따라, 몸에서 자연스럽게 피어가 흘러나왔다.

― 무서운 녀석.

고작 블랙 오우거의 마나를 흡수했을 뿐인데 이 정도였다.

에단은 여기서 멈출 녀석이 아니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뗐을 뿐이다.

페온은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앞으로는 어디까지 나아가게 될지.

― 이 녀석이라면....

자신의 목표를 대신 이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페온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에단은 잭슨의 앞에 도착했다.

에단의 검은 동공이 잭슨의 갈색 동공을 응시했다.

잭슨은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저도 블란테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아는 놈이 그래?"

"하지만 여기서 굴복하면 어차피 무너집니다."

"그래, 뭐 납득은 되네. 그런데 이해도 해 줘야 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잭슨이 침을 삼켰다.

더 이상 뒤가 없었다. 양지와 음지 사이, 중간 지점에서 살아가는 게 그들이었다.

한 번 실패해, 얕잡혀 보이면 끝장이었다.

잭슨이 주위를 둘러봤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없었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는 용병과 상인의 도시. 그 누구보다 빠르게 소문이 퍼지는 곳이었다.

여기서 굴복할 수 없었다.

"미리 조치를...."

쾅!

큰 굉음이 일어났다.

◈ [69화] 상대를 잘못 골랐어

쾅!

굉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다.

잭슨의 볼이 꿈틀거렸다.

'드디어 시작인가.'

잭슨은 언뜻 가벼워 보일 수 있는 자였지만, 그 또한 정보 길드의 간부였다.

짧은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에단.

만난 지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적으로 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어쩔 수 없어.'

그러나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후던이 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했다. 잠깐이지만 자신이 봐 온 바로, 에단은 결코 곱게 넘어가지 않을 인물이었다.

'블란테의 압박이 들어오면 우리는 끝이야.'

그것만은 막아야 했기에 잭슨은 미리 움직였다.

검은 도끼.

은퇴했지만 여전히 전설적인 용병으로 회자되는 그녀에게 의뢰했다. 당연히 그녀는 거절했다. 에단이 블란테 가문 사람이라는 걸 알고서도 건들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과거가 있었고, 잃을 게 있었다.

먼지구름이 일어난 장소는 그녀의 여관, 질긴 가죽이었다.

"여기까지 합시다. 일행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몰라도 돼. 그런데 그것도 알고 있었어? 우리 일행 중에 노인네가 하나 있거든."

"...무슨 소리죠?"

쾅콰과과광!

먼지구름 뒤에서 살벌한 금속음이 이어졌다.

콰직!

슈우우우웅!

도끼를 짊어 든 거구가 튀어나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먼지 사이로 흰머리의 남성이 장갑을 매만지며 걸어 나왔다.

"아직 노인네 취급은 이릅니다, 도련님."

"하여튼 귀는 밝아요."

"...!"

잭슨의 눈이 부릅떠졌다.

네이드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평온하지 않았다.

잔잔한 분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어?"

"휴식을 방해받아서 조금 불쾌하군요."

"나도 안 쉬고 있는데 쉬려고 그런 거야?"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나 보군요."

"헨리는 어디 있어?"

"아직 안에 있습니다."

에단이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챙겨 와."

고개를 끄덕인 휴고와 가토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에단이 잭슨을 바라봤다.

"선을 넘었네."

"당신들은 대체...."

에단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자신을 건드린 것으로 모자라 일행에까지 손을 뻗었다.

에단이 약했다면, 네이드가 없었다면....

낭패를 본 쪽은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아마 여기서 목숨을 잃었겠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이드."

"네, 도련님."

"제압할 수 있겠어? 전설적인 용병이라던데."

"그래 봤자 용병 아니겠습니까."

에단이 뒤를 바라봤다. 다비가 몸을 떨고 있었다.

입이 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애는 죄가 없지."

에단이 다비에게 다가갔다.

"손 좀 줄래?"

에단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말하자, 다비가 오들오들 몸을 떨면서 한 손을 내밀었다.

"이거 쥐고 있어."

에단이 목걸이를 벗어서 건넸다. 세계수의 목걸이다.

"지켜라."

정해진 시동어는 없다. 에단의 의지가 곧 시동어다.

지이잉.

지금껏 쌓여 온 마나가 다비의 주위에 펼쳐졌다.

"미안하게 됐다."

에단이 몸을 일으켜 무릎을 털었다.

"애는 죄가 없지만... 어른은 그러면 안 되지."

에단이 전방을 바라봤다.

몸이 묶인 간부들, 사지가 부서져서 미세하게 몸을 떠는 후던.

그리고 비장의 수가 수포로 돌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잭슨.

"...미안하게 됐네요."

그때, 벽에 처박혔던 거대한 그림자가 멀쩡히 걸어왔다.

거구의 여자.

그 덩치는 단순한 살덩이가 아니었다. 투박하고 거대한 양손 도끼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오는 여관 주인.

"제압할 수 있다고 했지?"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래, 죽이지는 마라."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

"정이 많으시군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네이드가 침묵하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제압이나 해."

여관 주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꽤나 나이를 먹었군요. 이런 취급을 받게 될 줄이야."

"세월이 야속한 건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네이드도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서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뭐죠?"

"통성명을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네이드의 말에 여관 주인이 호방하게 웃었다.

"하하, 맞는 말이죠. 우리의 시대는 이미 끝났으니. 그리고 보아하니... 다비에게 해를 가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요."

"그쪽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불쾌하군요. 먼저 손을 뻗은 건 그쪽 아닙니까?"

"...할 말이 없군요."

여관 주인이 투박한 도끼를 뻗었다. 도끼의 끝이 네이드에게로 향했다.

그걸 본 네이드도 허리춤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스산했다.

― 결과는 정해져 있군.

네이드는 대륙에서 수위에 드는 강자다.

검은 도끼.

그녀 역시, 한때 이름을 떨쳤던 용병으로 원작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하지만 네이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

네이드는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담근 강자다.

비록 첸과 빈센트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순 있지만, 여기서 용병 따위에게 패배할 위치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판이 날 터.

에단은 이제 다른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왜? 더 부를 애들 있어?"

"...여기는 블란테의 영지가 아닙니다."

"반대로 말하면, 블란테의 구역이 아닌 곳에서 고작 우리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하는데."

에단이 잭슨을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가문에 돌아가면 어떻게 하려고?"

블란테는 은원을 잊지 않는다. 은원을 행하는 데 있어 비난과 손가락질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그게 블란테의 방식이었다.

'제기랄.'

잭슨이 고개를 숙였다.

판단을 잘못했다. 에단은 적이 되지 않는다면 위험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이 한번 적대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상대보다 위험하고 흉포했다.

오판했다.

에단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음에도 방심해 버렸다.

에단에게 압도된 것은 사실이지만, 에단은 아직 어렸다.

하여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다.

이건 모두 정보 길드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가져온 참상이었다.

'이제 끝이다.'

돌이킬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소란이 커져 용병들이 개입하고, 정보 길드의 인원들이 더해지면 목숨은 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뒤는?

정보 길드의 연줄은 거미줄처럼 광범위했다.

귀족, 상인, 용병, 어쌔신.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치부는 있기 마련이고,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자는 없다.

정보 길드는 그 '비밀 정보'를 자기의 무기로 삼았다.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이자, 상대의 목을 노릴 비수로써.

하여 정보 길드를 비호하는 세력은 다양했다.

하지만 정보 길드의 적이 '블란테'라도, 계속 비호할 수 있을까?

블란테는 원한을 잊지 않고,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 불똥이 튀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쭙잖게 옹호하려 들었다가 목이 뜯기는 건 자신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 텐데, 누가 감히 블란테를 막아선다는 말인가.

'여기서 위험의 씨앗을 제거하는 게 마지막 희망이었어.'

이 이상 어떠한 변명을 늘어놓은들 궁색하기만 했다.

잭슨의 체념하는 듯한 표정에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단은 잭슨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콰직.

"왜 저 녀석이나 너나 멋대로 체념하는 거지? 너희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나?"

저따위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힘이 약했다면.

가진 게 없었더라면.

싸늘한 주검이 되는 것은 에단 자신과 일행이었을 터.

먼저 선을 넘은 쪽은 이들임에도 마지막 태도는 저따위라니.

그 점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빨리 끝내."

에단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네이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스.

네이드 주위에 흐르는 마나가 농밀해졌다.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음이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네이드가 마치 흩어지는 안개처럼 희미해졌다.

보이긴 하나 잡을 수 없는 그림자처럼.

"하앗!"

거대한 도끼가 네이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흉악한 기세였다.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하지만 네이드는 연기가 흩어지듯 검은 도끼의 앞에 다가섰다.

손에 든 작은 단검.

검은 도끼는 네이드가 손을 쓰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어느새 단검이 검은 도끼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검은 도끼의 몸이 움찔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움직였으면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평온하고 따스한 목소리.

그렇기에 더 오금이 저렸다.

검은 도끼가 무기를 손에서 놓고는 무릎을 꿇었다.

"...괴물이로군."

"평범한 인간입니다."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다비는 입을 틀어막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

휴고와 가토가 헨리를 데리고 돌아왔다. 헨리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겁에 질린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저기에 집어넣어 놔."

에단이 손짓하자, 보호막이 잠시 해제되었다.

헨리가 다비 곁에 들어서자, 에단이 재차 손짓했다.

지잉―

그러자 다시 보호막이 빛을 발했다.

― ...정말이지 좋은 기물을 얻었군.

'그럴 수밖에. 주인공의 사기템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에단은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잭슨이 몸을 바동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휴고가 떨리는 눈으로 가토를 바라봤다.

"가토...."

"왜?"

"이래도 되는 걸까?"

가토가 차가운 눈으로 휴고를 노려봤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도련님의 검이야. 블란테의 기사라고. 도련님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 도련님을 지켜야 해."

"...."

"상황 파악이 안 돼? 실력이 약했으면 오늘 죽은 건 우리야. 기억해. 마구간에서 말보다 못한 너의 삶을 구해 준 건 도련님이야. 설마... 사사로운 정의감과 정에 휘둘리는 건 아니겠지?"

"...미안."

가토가 눈을 흘겼다.

"만약 네가 머뭇거리면 내가 너를 대적할 거야."

가토가 휴고의 왼쪽 가슴팍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붙잡았다.

"명심해. 그 문양은 가볍지 않으니까."

"...알겠어."

휴고의 표정이 굳었다. 휴고가 힐끗 다비를 바라봤다.

안타까운 감정은 여전했지만, 이제 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가토의 말은 사실이었다.

옳고 그름보다 에단의 명령이 우선이었고, 힘이 없었다면 죽는 것은 일행이었다.

약육강식.

그게 블란테의 방식이었고, 세계의 진리였다.

에단이 잭슨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또다시 누군가 나타나고 있었다.

"똑같은 등장이군."

네이드가 슬며시 에단의 곁에 붙었다.

"도련님."

"그래, 얘네 상대로는 방심하면 안 되지."

정보 길드의 수장.

그리고 그를 따르는 그림자들.

쟤네가 진짜였다.

뚜뚝.

에단은 자신의 목을 비틀었다.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쾅!

에단의 발이 잭슨의 배에 꽂히자, 그는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벽에 박힌 잭슨의 고개가 뚝 하고 떨어졌다.

"이제 협상을 시작해 볼까?"

당연히 갑은 자신이었다.

◈ [70화] 협상 (1)

"...제압 가능할까요?"

메이가 정면을 향해 걸어 나가면서 말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메이가 눈을 감았다.

"그 정도인가요?"

"옆에 있는 중년 남성이 위험합니다. 만일 교전이 벌어지면... 아가씨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블란테라지만 대체 저 정도의 사람을 어디에서...."

메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까마귀.

정보 길드의 수장인 자신을 지키는 수호대.

무력으로는 그 어떤 집단에게도 꿀리지 않고, 난전에서는 그 누구보다 위협적인 자들.

냉정한 판단력과 뛰어난 분석 능력을 가진 까마귀들이 승산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희박한 것이었다.

눈앞의 남자.

'에단 블란테.'

블란테 가문의 둘째이자, 골칫덩이인 망나니.

'완전히 틀려먹은 정보군.'

망나니라는 점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거침없이 정보 길드를 들이박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단순한 망나니였다면 저런 세력과 무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권력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고 있어.'

뒷배만이 아니다. 이렇게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은 에단 본인의 무력일 터.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번 일은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썩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에단과 얘기가 잘 끝난 상태였다.

한데 수하를 컨트롤하지 못해, 일이 이 지경까지 흘러갔다.

그러니 책임 소재는 자신에게 있었다.

'대가를 치러야지.'

하지만 저 어린 사자에게 어떤 대가를 제시해야 한단 말인가.

처음엔 최후의 수단으로 교전도 생각했다. 에단은 아직 장성하지 못한 블란테였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자신과 까마귀들로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까마귀들은 승산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에단의 곁에 있는 저 중년 때문에.

정보 길드의 수장인 메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위험한 사내였다.

싸우게 되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메이는 수없이 많은 괴물을 만나 왔지만, 기가 죽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괴물이라고 한들 한낱 사람이었고, 그녀는 사람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모르겠어.'

검은 단색의 정복을 입은 노신사.

얼핏 보면 별다를 것 없는 외관이었지만, 메이의 본능은 다급하게 경종을 치고 있었다.

문제는 저 노신사만이 아니었다.

에단, 단순한 망나니인 줄 알았지만 잘못 생각했다.

막무가내인 듯하면서 냉정했다.

욕심은 많아 보였지만, 욕심을 뒷받침하는 힘과 권력을 쥐고 있었다.

'앞으로 어디까지 커질지.'

예측조차 되질 않는다.

에단은 아직 어린 사자였다. 지금도 이럴진대 후에는 어떤 폭풍이 일어날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에단이 메이를 향해 다가가자, 까마귀가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네이드가 미끄러지듯 따라붙었다.

"움직이면 죽습니다."

소름 돋는 목소리.

어둠에 숨은 까마귀들을 네이드는 정확히 인지했다.

네이드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달빛과 마나를 머금은 단검은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났다.

'짜증 나는군.'

에단은 메이를 향해 걸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예정이 어긋났다.

주인공은 홀연히 사라졌고, 상대는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강자존.

에단은 격투기 선수 시절부터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약하면 잡아먹힌다.

모두가 에단의 이빨이 빠지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블란테라는 뒷배가 있었음에도 에단은 오늘 목숨이 위험했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자신의 행위를 명예로운 희생으로 여겼다.

그 점이 화가 났다.

체념, 결의.

그 표정은 저 녀석들이 지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차라리 끝까지 이기적인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에단이 왼손에 힘을 줬다.

뿌드득.

에단의 손에 착용된 타이탄의 장갑은 아무리 강하게 움켜쥐어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 에단을 바라보던 메이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그 말은 곧 책임을 지겠다는 소리지?"

"네. 수하의 잘못이 곧 제 잘못이니까요."

메이의 표정은 담담했다.

에단이 그 담대한 표정을 보고 코웃음 쳤다.

"그럼 제시해."

"네?"

"내가 너한테 물어야 하나? 네가 할 수 있는 걸 먼저 말해."

"...그게 무슨."

"만약 내 성에 차지 않으면."

에단의 입가가 비틀렸다.

"오늘 너희들은 전부 죽어."

그가 내뱉은 말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 말씀, 진심이신가요?"

"그럼 내가 한 말이 우스갯소리로 들려?"

― ...위험하지 않겠느냐?

'블란테가 언제 굽히는 것을 봤습니까?'

에단의 곁에는 네이드가 있었다.

휴고와 가토는 훌륭한 전력이다.

에단도 전투에 돌입하면 사용할 수 있는 패를 가지고 있었다.

룬어, 페온.

그리고 상대가 모르는 장비들도 있었다. 승산은 충분했다.

위험? 감수할 수 있었다.

메이가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에단의 눈을 바라봤지만, 그 눈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적대하려 들고 있어.'

보복 따위는 가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정보 길드가 보복을 두려워해야 했다.

상대는 블란테니까.

메이가 고개를 돌려, 묶여 있는 간부들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후던을 바라봤다.

후던이 수치심에 고개를 푹 숙이자, 메이는 눈을 감았다.

"...정보 몇 개로는 성에 안 차시겠죠."

"당연한 소리 아닌가? 네 목숨이 그렇게 헐값은 아닐 거 아니야. 내 목은 너보다 비싼데?"

에단의 비아냥거림에 메이를 지키는 그림자가 꿈틀거리자, 네이드에게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표정은 평온했으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은 진심이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메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얼 제시하지? 어떤 걸 내걸어야 에단의 분이 누그러지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해.'

어쭙잖게 이득을 취하려 들면 에단은 곧바로 눈치챌 것이 빤했다.

그녀의 말에 정보 길드의 명운이 걸려 있었기에 말과 행동에 주의를 가져야만 했다.

"...자리를 이동하시지 않겠습니까?"

메이가 그렇게 말하자, 에단이 잠시 고민했다.

"네이드."

"네, 도련님."

"자신 있어?"

"노인네를 너무 부려 먹으시는 것 아닙니까?"

"왜 말을 돌려? 아까는 정정하다더니."

"위험합니다."

"좋아, 이동하지."

듣는 척도 하지 않는 에단의 모습에 네이드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자신 있으니까 아까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허허,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닌가 봅니다."

네이드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에단이 몸을 돌려 다비에게 다가갔다.

세계수의 목걸이가 펼쳐진 장막. 장막은 주인을 인식하는 건지, 에단을 자연스럽게 통과시켰다.

장막으로 들어온 에단이 손을 뻗었다.

"고생했다."

"...."

다비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뒤편을 바라봤다.

여관 주인이 먼지를 털어 내고 일어서며 쓰게 웃었다.

맷집은 좋은 것 같았다.

"괜찮은 것 같네. 빨리 가 봐."

에단은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모든 건 자신의 선택이었고, 시간을 돌리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에단이 여관 주인을 흘겨봤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얼마나 애절한 사연이 있는지는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각자 자신만의 사연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번은 없어."

경고였다.

이번에는 한 번 넘어갔지만, 이후에도 같은 선택을 한다면 에단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에단이 세계수의 목걸이를 목에 걸고 메이 앞에 섰다.

"이제 가지?"

메이가 슬며시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렸다.

이곳에는 듣는 귀가 많았다.

* * *

메이는 에단을 데리고 아지트 중 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의 모든 인원은 정보 길드에 소속된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에단과 일행을 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아지트로 이동한 메이는 곧바로 직원을 통해 후던과 잭슨, 그 외 부상당한 인원을 후송했다.

"...상태가 좋지 않군요."

치료사로 보이는 직원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치료하세요. 낫게 한 뒤 책임을 물어야 하니까."

메이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후던과 간부들은 차마 메이를 마주 볼 수 없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을 무시하고 시선을 돌린 메이가 계단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혼자 다녀올게."

"도련님."

"걱정 마."

에단이 씨익 웃었다.

"내가 그렇게 허접하지는 않으니까."

네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메이를 바라봤다.

"부디 실수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싸늘한 경고. 메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길을 안내했다.

꽤나 넓은 방. 메이의 집무실인지 응접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단은 메이가 말하기도 전에 의자를 빼 와 걸터앉았다.

에단의 행동을 바라보던 메이의 볼이 꿈틀거렸다.

"여기는 손님을 불러 놓고 차 한잔 대접 안 하나?"

협상 테이블.

에단이 가장 귀찮아하면서도 자신 있어 하는 분야 중 하나였다.

메이는 눈썹을 미묘하게 꿈틀거렸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맞은편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지만 차는 따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네요. 다음부터는 유의하겠습니다."

"그냥 해 본 소리야. 뭘 믿고 너희가 주는 걸 덥석 먹겠어?"

에단의 말에 메이의 볼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하하....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농담 같아?"

"...협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어, 있어. 그런데 마음에 안 드네."

"...어떠한 점이 불쾌하게 느껴지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너무 목이 뻣뻣해."

쾅!

에단이 테이블 위에 발을 얹었다.

그리고 최대한 거만한 표정으로 메이를 바라봤다.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돼?"

여기서는 망나니처럼 나가야 한다.

― 미친놈.

페온이 혀를 찼다.

메이는 에단의 태도를 보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뭐지?'

정보 길드의 수장이 되기까지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메이였다.

가장 천대받는 직업들부터, 가장 고고해 보이는 귀족까지.

연기하지 않은 직업이 없었고, 모두를 속이고 현혹했다.

그렇게 메이는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온갖 더러운 일들을 처리하며 한 무리의 수장이 된 것이다.

정보 길드의 수장이 되고 난 뒤 이러한 취급을 받은 적은 없었다.

에단에 대한 평판은 알고 있었다.

'블란테의 망나니.'

하지만 최근 행보가 바뀌고 있었다.

없다시피 하던 입지를 크게 늘렸는데, 늘린 방법도 파격적이었다.

악명 높은 몬스터인 블랙 오우거를 단독으로 토벌하고, 아카데미의 유명 인사인 에밀라를 굴복시켰다.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다 망신당했던 에단이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도 교수로 말이다.

'최근에 벌인 일도....'

얼마 전에 입수한 정보가 있다.

블라디미르 크러쉬.

마법 가문 블라디미르의 적자이자, 아카데미의 교수인 크러쉬를 학생들 앞에서 무참히 박살 냈다는 정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에단의 행보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또 뭘 원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과거와 달라지긴 했지만 망나니 같은 행보는 변화하지 않았다.

메이는 사람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단에게서는 그 무엇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그 탓에 벌써부터 협상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원하는 거지...?'

상대는 블란테였다.

재물, 권력, 힘.

정보 길드가 가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풍족했다.

그렇다면 줄 수 있는 것은....

메이가 주먹을 쥐었다.

"저희를 원하는 겁니까?"

메이의 대답에 테이블 위에 얹힌 다리가 슬며시 내려가며, 에단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제야 대화가 조금 통할 것 같네."

'이거였구나....'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탐욕을 부릴 줄은 몰랐다.

'...기가 차는군.'

블란테는, 아니, 에단은 지금 정보 길드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 [71화] 협상 (2)

에단은 원래 정보 길드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고 했었다.

블란테는 지금 에단의 소유가 아닐뿐더러,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힘을 과신하는 만큼 주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단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사건들은 주인공이 처리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원래라면 에단은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마련하면 그만이었다. 그 과정 중에 주인공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 주고 많은 것을 가져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주인공이 사라졌다.

당연히 이미 해결되어 있어야 할 일이 해결되지 않았다.

'룬어의 내용도 바뀌었어.'

이번에 얻은 룬어가 주인공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기능을 할지도 의문이었다.

에단은 자신의 왼손을 힐긋 바라봤다.

타이탄의 장갑.

떡밥이 풀리려면 한참이나 남은 고대의 산물.

게다가 레벨린과 붉은 곰까지.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이 엉키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단에게는 세력이 부족했다. 뒷배와 권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가문의 것이었다.

블란테에게 칼을 들이민다면 그들은 움직이겠지만, 에단의 독단으로는 이끌 수 없었다.

그래서 에단은 과격한 행보를 결심했다.

'호구처럼 넘어가 줄 생각도 없었고.'

애당초 명분은 에단에게 있었다. 그들은 에단이 블란테라는 신분을 밝혔음에도 이빨을 드러냈다.

힘이 부족했다면 오늘 죽는 쪽은 에단이었을 터.

당한 게 있다면 배로 갚아 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 바로 에단이다.

에단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메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블란테가 저희 따위를 탐낼 줄은 몰랐군요."

"착각하는 게 있군. 블란테가 아니라 내가 탐내는 거야."

"이유가 뭐죠?"

"해야 할 일이 많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빌어먹을 세계수, 붉은 곰, 아카데미. 귀찮기는 하지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

여기서 모든 미래를 늘어놓을 순 없었다. 설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해시킬 수도 없는 일.

'그럴 시간도 아깝고.'

그렇다면 최대한 단순하고 간략하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해야 했다.

"내가 해결할 테니까 내 밑으로 들어와."

"...무엇을 믿고요?"

"이미 나한테 깨졌잖아?"

에단이 곧바로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하늘 높은 자신감으로 무장한 정보 길드원이 오늘 에단에게 쓴맛을 봤다.

그래서 지금 메이는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강압적으로 데리고 간들 따를 자들은 없을 겁니다."

"강압적으로 할 생각은 없어. 그냥 내가 묻는 것에 대답만 해 주면 돼. 장담하지. 내 말을 따라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야."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아직 실패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에단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결하신다는 건지 들을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 바쁜 몸이라 당장 움직일 수가 없어. 나 대신 수하들을 보내도록 하지."

"그 정도로는...."

말을 이으려던 메이가 입을 다물었다. 네이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대체 누구시죠?"

"내 집사야."

"...."

에단에게 대답할 의사가 없어 보이자, 메이가 입을 다물었다.

"왜 자꾸 간을 보지?"

에단이 턱을 괬다.

"너희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지금 세계수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프지 않나?"

머리가 아픈 건 에단도 다르지 않았지만.

"우리가 해결한다. 그리고 아직 말하기엔 이르지만 조만간 사건이 하나 더 생길 거야."

"그게 무슨...."

"궁금하면 결정해."

내 밑으로 들어올지.

에단의 번들거리는 눈이 메이를 응시했다.

* * *

대화를 끝낸 에단이 계단을 내려왔다. 아래에는 네이드와 휴고, 가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자."

"대화는 잘 끝나셨습니까?"

네이드가 물어오자, 에단은 피식 웃었다.

"이제 표정 좀 풀지?"

에단의 말이 대답이 되었는지 네이드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또 일 좀 해야겠다."

에단의 말에 네이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 부려 먹으시는 것 아닙니까?"

"여행지니까 휴양이나 하다가 와. 너한테도 익숙한 장소니까."

"무슨...."

"세계의 중심."

에단이 가토를 바라봤다.

"들어 본 적 있지?"

"...엘프들의 숲 아닙니까?"

"그래, 우리 영지랑 맞닿아 있는 산맥이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지. 우리 영지에는 몬스터들만 득시글거리잖아."

에단이 농담조로 말하자, 가토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거기로 가 있어. 안내해 줄 사람도 붙여 줄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고."

"...도련님은 아카데미로 복귀하시는 건가요?"

"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 말이야."

아직 아카데미에서 얻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제기랄, 학교 생활 좀 즐기나 했더니.'

그럴 여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헨리는 어딨어?"

"아."

* * *

헨리는 멍한 표정으로 여관 주인과 다비를 따라서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다비의 표정은 어두웠고, 여관 주인도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뭐라 변명해도 할 말이 없군요."

여관 주인은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었다.

헨리는 멍한 표정으로 여관 주인과 다비를 뒤따랐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내 기준에서의 사정이지, 괜한 사람을 말려들게 한 건 사실이죠."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사미라."

"...설마 그 사미라이신가요?"

"알고 있나 보군요."

"모를 리가요! 검은 도끼 사미라를...."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세상에는 괴물이 많더군요."

사미라가 쓰게 웃었다. 헨리는 네이드의 살벌한 표정을 떠올렸다.

"...거기는 워낙 괴물밖에 없어서 그래요."

"전설이니 뭐니 해 봤자, 한낱 용병 나부랭이라는 거겠죠. 진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

헨리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는 길에 정적이 감돌았다.

어느새 여관에 도착했다.

"잘 생각 없죠? 그럼 먹을 거나 좀 준비해 드리죠. 사과의 의미라고 하긴 뭐하지만...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헨리가 고개를 까딱하면서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런데... 나를 버리고 그냥 간 거야?'

워낙 분위기가 살벌했기에 말을 걸지도 못했다.

묘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아카데미에서도, 여기에서도 성과를 내기는커녕 짐만 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음식이 나왔다. 헨리의 옆에 다비가 걸터앉았다.

"...죄송해요."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먹음직한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순식간에 음식을 완성한 사미라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돈 안 받을 거니까 같이 먹어도 괜찮겠죠?"

"그럼요."

그때 여관의 문이 열렸다.

"나도 맛 좀 봐 볼까?"

에단이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휴고와 가토가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헨리 씨....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요."

"음식을 더 준비해야겠군."

일행들의 식사량을 알고 있는 사미라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에 들어갔던 사마리는 아예 거대한 솥을 들고나왔다.

헨리가 뜨악한 표정으로 사미라를 바라봤다.

"이걸 다 먹을 수는...."

사미라를 바라보던 헨리가 에단과 휴고, 그리고 가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 먹겠네요."

헨리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 *

순식간에 전투적으로 식사를 끝낸 에단은 사미라를 바라봤다.

"이걸로 입 닦을 생각은 아니지?"

"...원하는 게 있습니까?"

"어, 일 하나 해 줘. 염치가 있으면 거절하진 못하겠지?"

에단의 말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일이죠?"

"붉은 곰, 걔네 좀 방해하고 있어 줘."

"이유는... 물은들 대답하지 않겠군요."

"물론 공짜는 아니야. 다비 때문에 신경 쓰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에단이 다비를 바라봤다.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은 생각 있어?"

"...."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비가 사미라를 바라봤다.

당황한 건 사미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카데미라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내가 이래 봬도 아카데미 교수거든."

"당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사미라의 반응에, 에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 잘 어울리나?"

"아니, 블란테의 적자가 왜 교수 일을 하고 있는 거죠?"

"그건 영업 비밀이고. 어때? 다비를 여기서 평생 종업원이나 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잖아?"

"...."

정곡을 찌른 에단의 말에 사미라가 잠시 침묵하다 다비를 바라봤다.

"아카데미 다니고 싶어?"

다비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결정됐네."

멀뚱거리며 바라보던 휴고도 입을 열었다.

"저도...."

"너는 안 돼."

에단의 단호한 대답에 휴고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해야 할 일이 많거든."

이제 얼추 정리도 됐고.

속으로 중얼거린 에단이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날이 밝으면 바로 이동하지."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 * *

날이 밝자 에단은 곧바로 게이트를 이용했다.

요금이 상당했지만, 에단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비를 떠나보내는 사미라의 표정은 복잡했다.

하지만 다비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단이 떠나기 전에 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내 던졌다.

"통신 수정구."

정보 길드에서 뜯어 온 것들이다.

"이용법은 그쪽 애들한테 물어보고, 너희들 것도 있으니까. 놀지 말고 일하고 있어."

에단이 휴고에게도 수정구 하나를 던지고는 다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간다."

"...다녀올게요, 엄마."

다비가 사미라에게 고개를 숙였고, 이내 게이트가 빛을 내뿜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네이드는 남은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움직일까요?"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드가 축 처진 휴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막상 그곳에 가 보면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휴고가 반색하자, 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엘프와 정령의 도시니까요."

"그래, 놀러 가는 건 아니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어."

"네, 맞아요. 세계의 중심.... 이름처럼 아름다운 도시예요."

헨리가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야 휴고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럼 가시죠."

가토가 쓸쓸하게 서 있는 사미라를 바라봤다.

"괜찮겠습니까?"

"하하, 살다 보니 동정을 받아 보는 일도 있군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가려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요."

기지개를 편 사미라가 몸을 돌렸다.

"그럼 고생들 하시죠."

대충 인사를 한 사미라가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토가 입을 열었다.

"강한 분이군요."

"그러게요."

헨리의 대답을 끝으로 일행은 여행길에 올랐다.

* * *

게이트를 타고 이동하자 에단의 앞에는 거대한 방벽과 문이 보였다.

"와...."

다비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아카데미 안에서는 못 챙겨 준다."

"네, 괜찮습니다!"

다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방벽을 바라봤다. 아직 들어서지도 않았지만, 설렘을 감추기 힘든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거대한 문을 향해 다가서자, 문지기가 에단을 바라봤다.

문지기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안녕?"

에단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문지기는 뒷걸음치기 바빴다.

"나 바쁜데 문 좀 열지?"

"아, 알겠다."

― 완전히 겁에 질렸군. 쯧쯧.

페온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문지기가 다급하게 문을 열자, 이내 아카데미의 경관이 훤히 드러났다.

'자, 또 움직여 볼까.'

이제 시간이 별로 없었다.

◈ [72화] 블란테의 괴담

최근 블란테의 영지에선 괴담이 떠돌고 있었다.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밤만 되면 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소문 말이야. 처음엔 안 믿었는데, 나도 얼마 전에 직접 들었단 말이지."

"몬스터 소리 아니야?"

"예끼, 이 사람아. 몬스터 소리를 내가 착각하겠어? 분명히 사람 소리라니까."

"사람 소리가 그 시간에 거기서 왜 나?"

"그거야 나도 모르지."

"설마 귀신이라도 나온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잘못 들었겠지?"

영지민들 사이에서 괴담이 점점 퍼지고 있었다.

늦은 밤 울려 퍼지는 괴이한 소리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했기에 블란테 측에서는 조사단을 꾸리지 않았다.

"귀신이 자리를 잡아도 블란테에 잡을 리가 없지."

"그건 그래. 블란테가 누구야? 신성 기사들도 한 수 접는 기사들이잖아."

"그렇지?"

하지만 그럼에도 밤에 들리는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으....

으아....

살려줘....

한 서린 소리들은 몬스터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여 괴담에는 점점 살이 붙었고, 영지민은 공포에 떨었다.

물론 괴담의 내용에는 맞는 말도 있었다.

한 서린 목소리도 맞았고, 괴이한 존재도 있었으니까.

벨몬트.

에단에게 덜미를 잡힌 흡혈귀.

밤의 일족으로 악명을 떨치던 그가 에단에게 굴복한 것이다.

― 내가 애들 보낼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하고 있어.

벨몬트는 흡혈귀로서 자부심이 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블란테의 기사들이 얼마나 위험한 녀석들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간 크게 모습을 드러내거나 하지 않고, 산 깊숙한 곳에 은둔해 있었다.

'내 팔자야....'

그러다가 재수가 없게도 에단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에단은 무서운 인간이었다. 흡혈귀인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협박을 했다.

'...힘을 비축해서 일족을 부흥시키려 한 내 야망이.'

벨몬트가 위험한 블란테의 영지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있었다.

죽은 나무.

강한 음의 기운을 내뿜는 죽은 나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죽은 마나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나가 정화된 이 시대에, 질 좋은 죽은 마나를 공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흑마법사들도 음지에 숨어서 연명하는 상황이었다.

흑마법 같은 사술을 대륙 전역에서 강하게 제재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당연히 흡혈귀는 멸족의 위기까지 갔고, 벨몬트는 운 좋게 살아남은 흡혈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벨몬트는 자부심을 잃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밤의 일족이자 고고한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흡혈귀는 몬스터를 지배 아래 둘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밤의 귀족이라는 이명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이게 맞나?'

벨몬트는 몬스터와 함께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에단에게 수십 수백 번 조언 받은 정자세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 또 왔을 때 만족할 만한 성장이 없으면 운동 안 한 걸로 안다? 점진적 과부하 몰라? 쓰러져서 못할 때까지 하는 거야.

벨몬트는 고블린, 오크와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끄으으윽!

취이이이익!

키에에에엑!

각자 고유의 추임새를 넣으며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그들.

벨몬트의 가느다란 팔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하아.... 하아...."

구슬땀을 흘리며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벨몬트의 옆에는 각기 다른 종족이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자신은 본디 고고한 밤의 일족. 타인의 명령을 듣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 너, 도망치거나 그러진 않겠지?

― ....

― 궁금하면 한번 시도해 봐.

아직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웨어울프 녀석을 반죽음으로 만든 후,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는 손.

어두운 동굴 속에서 요사스럽게 빛나는 섬뜩한 안광.

그때만큼은 귀족의 권위고 나발이고,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상기한 벨몬트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벨몬트가 바들바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흠.... 좀 붙은 건가?"

거울 앞에 선 벨몬트는 자신의 몸을 훑었다.

창백하고 빈약한 몸뚱이. 조금 과장하면 뼈밖에 없어 보였다.

벨몬트가 팔을 접어 이두를 만들어 냈다. 봉긋 솟은 귀여운 이두가 보였다.

"흐흐, 역시 몸이 빠르게 변화하는군.... 이 몸의 재능이란.... 그렇지 않나?"

벨몬트가 몬스터 무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취, 취익!"

"키에에엑!"

오크와 고블린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오크도 거울 앞에 섰다. 흉포하기로 소문만 블란테 영지 출신의 오크였다.

"취익!"

오크가 팔을 접자 우악스러운 근육이 드러났다.

근육의 크기도 거대했지만, 체지방이 낮아 혈관도 불거져 있었다.

"...."

벨몬트가 째리는 눈으로 오크를 바라보자, 오크가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멀어졌다.

"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참...."

이전에는 하루하루가 권태로웠다면 요즘에는 하루가 짧았다.

에단이 정해 준 루틴을 소화하기가 버거웠으니까.

에단의 명대로 몬스터 몇 마리를 데려와도 매한가지였다.

몬스터는 어디까지나 몬스터.

벨몬트의 권능으로 지배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 가면 갈수록 건방져지는 거 같은데....'

벨몬트가 가늘게 뜬 눈으로 몬스터들을 바라봤다.

마치 서로의 근육을 칭찬하는 것 같은 몬스터들을 보자니 뭔가 아니꼬웠다.

"여, 여긴가?"

그때 근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벨몬트가 화들짝 놀라며 경계했다.

"제길 방심했군."

평소의 벨몬트라면 침입자가 들어오는 순간 인지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반응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방심과 체력의 저하 때문이었다.

벨몬트가 망토를 감았다. 한계를 맞이한 다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정제되어 있었다.

"나의 수하들아, 침입자를 맞이해라."

취이익!

키에엑!

몬스터들이 우렁찬 목청을 올렸다.

* * *

"여기가 맞나?"

줄리엔이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시선을 내리깔아 약도를 바라봤다. 약도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수준으로 조악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지만, 줄리엔은 꿀꺽 삼켜 버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여기까지 찾아오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영지에 출입하는 일이야 에단이 전해 준 증표로 가능했지만, 진짜 문제는 블란테의 산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살다 살다 여기에 발을 들일 줄이야...."

명색이 산적단이었지만, 기껏해야 고블린 한두 마리씩 출몰하는 산에 자리 잡은 줄리엔과 산적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진짜 산에 발을 들이자, 쉽사리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두목,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안 되겠습니까?"

"...자신 있어?"

줄리엔이 수하 산적을 바라봤다.

덥수룩한 수염이 밀린 줄리엔의 얼굴은 상당히 곱상했다.

곱상한 줄리엔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은 산적이 고개를 돌렸다.

"그 새끼는... 사람이 아니야. 산적보다 더한 놈이라고.... 여기서 더 척졌다가는...."

줄리엔은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떨었다. 산적들도 그런 그가 이해가 된다는 듯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여기만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뭐가 준비돼 있다고 하니까, 가 보자."

"...알겠습니다."

줄리엔을 필두로 산적들이 조심히 발을 옮겼다.

그래도 산에서 살아온 짬밥이 있어서인지 크게 어렵지 않게 동굴 입구까지 도착했다.

"...여기가 맞겠지?"

"마, 맞는 것 같습니다."

어둡고 음침한 동굴 내부를 보고 나니 거북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여기서 밖으로 나간다면 몬스터의 한 끼 식사가 될 것이다.

"그, 그럼 간다?"

줄리엔이 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섰다.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후욱, 후욱.

산적들의 호흡 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하, 하하, 왜 이렇게 긴장해 있어? 그런 담력으로 산적질은 어떻게 한 거야?"

"그, 그러게 말입니다. 아늑하고 좋기만 한데. 킬킬."

"...오우거라도 있으면 어떡하죠?"

"...."

순식간에 산적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줄리엔이 말을 내뱉은 산적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 녀석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산적들이 침묵한 채 동굴 안에 더욱 깊숙이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그 외엔 짙은 적막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적막은 오래가지 않고 깨지게 되었다.

키에에엑!

고블린 한 마리가 어둠을 헤치고 뛰쳐나왔다.

"뭐, 뭐야?!"

"꺄아아악!"

산적들이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화들짝 놀란 줄리엔이 그나마 정신을 빨리 차렸다.

줄리엔과 고블린이 바닥에 뒤엉켰다.

"어, 어떡하지?"

"자, 잘 안 보여! 무슨 일이야?"

줄리엔과 고블린이 힘 싸움을 했다. 줄리엔은 나름대로 경험이 있는 산적으로서 고블린을 사냥한 경험도 적지 않았다.

'근데 뭔 놈의 고블린 힘이 이렇게 세!'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고블린은 교활하고 영악하여 까다로운 몬스터이지, 정면으로 부딪혀 힘을 겨룬다면 상대하기 그리 어려운 몬스터는 아니었다.

고블린의 신체 능력은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 줄리엔은 건장한 체형을 가진 장성이었고, 힘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줄리엔과 고블린은 지금 치열한 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서, 설마?'

순간 에단에게 전해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베, 벨몬트 씨?"

줄리엔의 말에 순간 고블린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키에엑?

고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쩍 멀어졌다.

"...벨몬트 씨가 맞습니까?"

고블린이 멀어지자, 충격받은 얼굴을 한 줄리엔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하던 산적 하나가 다가와서 줄리엔에게 물었다.

"두목님, 지금 무슨 소리를...."

"기다리고 있어 봐."

혼란스럽기는 줄리엔도 매한가지였다.

설마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고블린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대화가 통하는 고블린이라니.

충격적이었다.

'이, 이걸 어떻게....'

줄리엔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어둠의 장막을 거둬 내고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고한 밤의 일족, 벨몬트였다.

"인간 놈이 감히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벨몬트의 등장에 산적들이 다시 한번 자지러졌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벨몬트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참된 반응이 아니던가.

'그, 괴물 같은 인간 놈....'

에단을 떠올리자 소름이 끼쳤다.

벨몬트는 머릿속에서 끔찍한 에단의 기억을 지워 내고 눈앞의 침입자를 바라봤다.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건가?"

"아! 죄, 죄송합니다."

예의 바른 대답에 조금 마음이 풀린 벨몬트가 줄리엔을 바라봤다.

줄리엔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저 사람이 벨몬트구나!'

그렇다면 빠르게 입장을 밝히는 게 사는 길이었다.

"저희는 에단 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흠칫.

줄리엔의 말에 벨몬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에단이라고?"

벨몬트의 표정이 좋지 않자, 덩달아 줄리엔도 당황했다.

'반응이 왜 저러지?'

"...저, 잘못 찾아왔을까요?"

"아니.... 그 이름을 들으니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다."

"설마 벨몬트 님도?"

"설마 너도?"

줄리엔과 벨몬트,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눈이 촉촉해지며 둘 사이에 동질감이라는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랑 같은 처지구나!''

서러움이 북받쳤다.

◈ [73화] 불량 교수 (1)

갑작스러운 무단결근.

떠날 때야 월차라고 말했지만, 출근 하루 만에 월차가 생길 리가 전무했다.

변명할 것도 없이 에단의 완벽한 실수였다. 하지만 에단은 알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철면피를 깔아야 한다는 사실을.

"와아...."

아카데미의 내부에 들어온 다비가 눈을 빛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군.'

휴고는 선망의 눈빛으로 아카데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다비를 데려온 것도 같은 맥락이지.'

검은 도끼 사미라.

원작에서 몇 번 언급은 된 걸로 기억한다.

'관계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비와 사미라가 어떤 관계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딸인지, 친인척인지, 아니면 남인지.

하지만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용병이니까 빨리 찾겠지.'

붉은 곰.

에단이 용병들을 찾는 데에는 레벨린의 수족을 자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지.'

원작 주인공은 세계수를 복구할 때 성검의 힘을 빌렸다.

하지만 성검은 선택받은 자만이 뽑을 수 있는 검.

'내가 그걸 뽑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희박한 확률이었다. 더군다나 뽑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뽑으면 얼마나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

벌써 머리가 아파 왔다.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수인을 모아야 해.'

먼저 휴고는 조건을 충족했다. 비록 반쪽이기는 했으나 웨어울프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그리고 붉은 곰. 그곳의 용병대장도 수인이었다.

'그리고 가장 빨리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카데미였다.

정체를 숨기고 아카데미에 다니는 수인.

'원래라면 한참 뒤에 알게 되겠지만.'

에단은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짜증 나는군.'

시간이 촉박했다. 여기서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그때가 되면 늦는다. 이미 사태는 상당히 진전이 되었을 터.

에단이 다비를 옆구리에 안아 들었다.

"...?"

"시간이 없어서."

에단이 지면을 박차자, 다비가 비명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도착한 곳은 레벨린의 집무실 앞.

땅에 내려선 다비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다비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집무실의 문만 바라봤다.

"저기, 시선이 너무 신경 쓰이는데요...."

지나가는 학생과 아카데미의 직원들이 에단과 다비를 힐긋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관계야?'

'모르겠는데? 누구지?'

'설마 딸인가...?'

'그럼 무단결근도 그것 때문이야?'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다비가 주눅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에단은 개의치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돌아오시긴 하셨군요."

레벨린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가갔다.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하게 됐어."

"말뿐인가요?"

레벨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의 에단이라면 들이박고 보겠지만, 이번 일의 책임 소재는 어디까지나 에단에게 있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군. 사과하지. 네 말대로 말뿐이면 조금 그렇고.... 뭘 해야 하지?"

에단이 레벨린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큰 건 바라지 않습니다. 한 번, 딱 한 번만 제 지시를 따라 주시죠."

레벨린의 말을 들은 에단이 피식 웃었다.

'이 여우 녀석이 무슨 짓을 벌이려고.'

이미 전제 조건이 달라졌다. 원작 주인공은 사라지고 원작 주인공이 해결해야 할 일들을 에단이 떠안게 됐다.

이 사건으로 어떠한 나비 효과가 벌어질지 에단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레벨린의 말을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명분은 레벨린에게 있었으니까.

에단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지시는 거절할 테니 알아 두라고."

"설마요. 제가 그 정도의 무뢰한으로 보이십니까?"

"어. 그래 보여."

레벨린의 가식적인 미소에 금이 쩍 갔다.

하지만 금세 가식의 가면을 쓴 레벨린이 다비를 바라봤다.

"그쪽 분은 누구신가요?"

"얘를 아카데미에 입학시켰으면 하는데."

레벨린이 에단과 다비를 번갈아 바라봤다. 레벨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설마...."

"그런 거 아니니까 넘겨짚지 말고. 아는 녀석일 뿐이니까, 대충 아래 학년 진도부터 교육이나 시켜 줘. 물론 숙식도 처리해 주고."

"...이번 일도 대가가 따르는 건가요?"

레벨린의 물음에 에단이 코웃음 쳤다.

"왜? 교육 한번 개판으로 해 줄까?"

에단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렇게 말하자, 레벨린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좋습니다. 대가는 받지 않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저희 아카데미는 엘리트들만 모이는 곳입니다만...."

에단이 주눅이 들어 있는 다비를 바라봤다.

"자신 없어?"

"...."

다비는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 없으면 지금 말해. 일자리야 구해 줄 수 있으니까."

에단의 가문은 블란테였다. 그깟 하녀 자리 하나쯤은 쉽게 구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비는 고개를 저었다.

'잡아야 해.'

다비는 멍청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다가온 기회가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할 수 있어요!"

다비의 대답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여기서 포기했다면 에단은 다비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렇다는데?"

"뭐.... 그러면 좋습니다. 아카데미 입학에 나이 제한은 별도로 없으니까요. 다만, 시험을 통해 적절한 반과 학년을 배정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건 상관없어."

거기에까지 에단이 개입하면 그것은 월권이었다. 오히려 다비가 힘들어질 확률이 높았다.

에단이 다비를 바라봤다. 다비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에단이 피식 웃으면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오늘부터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그럼 일정을 맞춰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전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연하지."

에단이 웃었다.

* * *

수업을 끝낸 에밀라가 벤치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에밀라를 힐긋거렸다. 하지만 함부로 다가가는 학생은 없었다.

에밀라는 아카데미의 스타나 다름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엄격하고 어려운 교수였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에밀라라는 사람을 더욱 선망하고 동경하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상념에 잠겨 있는 에밀라의 모습은 그림 같았고, 학생들은 더욱 에밀라라는 인물에 대한 환상을 키워 갔다.

하지만 에밀라는 한 인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일은 저질러 놓고 대체 어딜 간 거야?!'

에단 블란테.

블란테 가문의 문제아이자 망나니로 에밀라에게 완전한 패배를 안겨 준 사람이었다.

충격이었다.

처음 패배를 마주했을 때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에밀라는 천재였다. 자만에 빠진 평가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자신을 인지했을 때도 그러했다.

그녀는 모든 것에 능했고, 실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재능도 충만했다.

물론 그간 패배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밀라가 패배한 상대들은 모두가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들이었다.

에밀라는 그들에게 패배할 때마다 확신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승리하리라고.

하지만 에단과의 결투는....

분명 경지로 따지면 에밀라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둘의 역량 차이는 확연했다.

에단은 에밀라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도 에단은 에밀라의 속을 간파하고 압도했다.

결과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에밀라의 이성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에단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언급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하지만 에단은 그 뒤로 에밀라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애가 탔다. 일을 벌인 쪽은 에단인데 정작 에단은 유유자적 사라졌다.

갑자기 두통이 느껴진 에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건지....'

"여기서 뭐 하냐?"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밀라가 고개를 들자 멀리서 에단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 여자아이와 같이.

순간 에밀라의 볼이 꿈틀거렸다.

"이제 오신 겁니까?"

날이 서 있는 목소리에도 에단은 아랑곳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지금 왔어. 그런데 기분이 안 좋나 본데?"

"...옆에는 누구죠?"

에단은 다비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다비를 설명하기가 꽤나 난처했다. 다비가 에단을 올려다봤다.

"아빠?"

"재미없어."

에단이 그렇게 말하자, 다비가 울상을 지었다.

"...아빠?"

순간 에밀라가 몸을 일으켰다. 에밀라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너 왜 그러냐?"

"...딸입니까?"

순간 에밀라가 비틀거렸다. 에단은 헛웃음을 지었다.

"딸로 보이냐?"

"설마...."

"애먼 사람 애 아빠로 만들지 말지?"

에단이 다비를 바라보며 딱밤을 날렸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다비가 울상을 지었다.

"그냥 아는 애 맡아 준 거야. 아카데미에 오고 싶다길래 데려온 거고."

"...월권입니다."

"그렇긴 하네. 그래서?"

뻔뻔하게 나오는 에단을 바라보던 에밀라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야, 너 온 김에 얘 좀 데리고 가라."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내가 데리고 다니니까 다들 수군거리더라고."

"하아.... 알겠습니다."

에단이 에밀라를 향해 턱짓했다. 하지만 다비는 가만히 서 있었다.

"아빠, 나 저 아줌마 싫어."

"...아줌마?"

에밀라의 낯빛이 순간 창백해졌다. 에단이 이마를 찌푸리며 다비의 등을 밀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힝.... 진짠데...."

다비가 울상을 지으며 에밀라에게 다가갔다.

"...."

에밀라가 말없이 다비를 바라봤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작은 이목구비가 꽤나 귀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북했다.

"그럼 난 간다."

다비를 보낸 에단이 훌쩍 사라졌다.

에밀라가 다비를 바라봤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갈까?"

"...네."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길을 걸었다.

"에단 교수님과는 무슨 사이니?"

먼저 입을 연 건 에밀라였다.

그녀의 물음에 다비가 눈을 깜박거리며 에밀라를 지그시 바라봤다.

다비의 입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언니, 그 오빠 좋아해요?"

"지금 무슨 소리를...!"

에밀라가 발끈하자, 다비가 피식 웃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발끈하세요?"

"...그래, 발끈할 일은 아니지."

에밀라가 먼저 앞서 나갔고, 다비가 히죽 웃으며 따라나섰다.

다비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여관의 종업원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파악하는 것에는 도가 텄다.

말투, 표정, 행동, 눈빛.

하나하나가 다비에게는 훌륭한 정보였다.

"앞으로 저한테 잘하세요."

"...."

기가 찬 에밀라가 다비를 바라봤다.

'...진짜 딸인가?'

말하는 투가 에단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 순간, 다비가 고개를 들어 에밀라를 응시했다.

"지금 제가 진짜 에단 오빠 딸인가 고민했죠?"

"...아니야."

"거짓말."

"아니라니까."

"네에, 그런 걸로 할게요."

다비가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에밀라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편 다비는 겪어 보지 못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이전의 삶에도 크게 불만을 가지진 않았지만, 다비의 또래라면 누구나 가슴 한편에 아카데미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으니까.

"빨리 가요!"

한껏 들뜬 다비가 에밀라를 재촉했다.

◈ [74화] 불량 교수 (2)

수업을 기다리던 로만은 턱을 괸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큭큭, 크러쉬 교수님을 쓰러뜨렸다길래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잖아?'

로만은 감히 귀족에게 대항하던 에단을 응징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준비한 것들을 채 다 보여 주기도 전에 에단은 도망쳤다.

그것도 수업 도중에 아주 꼴사나운 모습으로.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그 장면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평민 교수님, 정말 안 오시는 거 같은데? 큭큭."

"로만,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말한 대로 바로 도망가게 만들어?"

"크러쉬 교수님을 이긴 사람인데 그렇게 순식간에...."

로만이 주축으로 있는 무리가 하나같이 그를 칭송했다.

덕분에 로만의 콧대는 끝없이 높아지고 있었다.

"글쎄? 생각보다 싱거워서 실망했어."

"그러게. 큭큭."

"크러쉬 교수님도 별거 없는 거 아니야? 하핫."

"그래도 평민들이랑 비교할 건 아니지."

친구들의 말을 듣던 로만이 힐긋거리며 한 여자를 바라봤다.

흔치 않은 검은 머리의 여학생.

'평민 주제에 오늘도 봐줄 만한 얼굴이군.'

리사.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성이 없다는 것은 리사가 평민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렇기에 로만은 리사를 가볍게 여겼다.

어쨌든 평민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리사는 평민이라는 신분의 벽에도 굴하지 않고 뛰어난 성적을 보여 줬다.

교양, 검술, 지식, 마법까지.

모든 수업에서 리사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로만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리사에게 흥미가 생겼다.

게다가 리사는 객관적으로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로만은 입맛을 다시며 리사를 바라봤다. 리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음욕이 가득했다.

반면 리사는 고민에 빠진 듯 멍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이전에 찾아온 신임 교수, 에단.

낯익은 이름이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에단 블란테. 패악질을 일삼는 가문의 망나니이자 문제아.

아카데미로 떠나온 데에도 그 망나니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아니겠지.'

리사가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떨쳐 냈다.

그녀가 기억하는 에단은 푸짐한 지방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최근 찾아온 같은 이름의 교수는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련된 몸과 그 푸짐한 지방 덩어리의 돼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녀석은 눈빛부터 글러 먹었으니까.'

음욕과 시기와 질투.

온갖 나쁜 감정들로 물들어 있던 에단의 눈빛.

하지만 이번에 교수로 부임한 에단의 눈빛에선 날카로우며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엿보였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같은 게 조금 특이하지만.'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대륙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희귀한 편에 속했다.

'...설마, 방계?'

에단이라는 이름은 꽤나 흔했고, 블란테는 오래된 명문가답게 수많은 방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그리고 그중에 에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방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애초 블란테의 본가는 방계와 그리 많은 교류를 갖지 않았기에, 리사로서는 신임 교수가 방계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닐 거야.'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가문에 편지까지 보냈다.

자신이 아는 아버지라면 굳이 아카데미에 사람을 붙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가문이 블란테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름대로 생각을 마친 리사가 머리를 흔들었다.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애초에 소문 때문에 도망간 녀석이기도 하고.'

일을 벌여 놓고 도망치듯 자리를 뜬 에단이다.

그 정도로 나약할 줄이야.

'그것만큼은 내가 아는 에단과 똑같은 것 같네.'

리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귓가에 여러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그 교수님 돌아왔다던데?"

"누구?"

"왜, 그 새로 오신 교수님 있잖아. 수업 도중에 나가신 분."

"아.... 그 무섭게 생긴 분."

"어, 그래. 크러쉬 교수님 입원시킨 분."

"뭐야? 그 교수님, 실체가 탄로 나서 도망친 거 아니었어?"

"글쎄 오늘 그 교수님 본 사람들이 꽤나 있더라고."

"정신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리사는 귀를 쫑긋거리며 이야기를 엿들었다.

'사실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리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어린아이랑 같이 있다던데?"

"뭐야? 유부남이야?"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르지."

"헐, 대박이네. 교수님도 어려 보이던데. 동안인 건가?"

학생들의 수다는 로만의 귀에도 들어갔다.

'뭐야? 진짜 돌아왔다고?'

이렇게나 구체적인 말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사실인 듯했다.

'겁도 없네.'

안타깝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너무 손쉬워서 아쉬웠으니까.

'돌아온 걸 후회하게 해 주지. 큭큭.'

로만이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곁에 있던 동급생이 찔끔거리는 표정으로 멀어졌다.

'또 시작이네.'

'저럴 때마다 정떨어진다니까.'

때마침 강의실의 문이 덜컥 열렸다. 이전과 같은 요란한 등장이었다.

"반갑다, 애들아."

에단이 교탁 앞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은 저마다 궁금증이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이전에는 미안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말이지."

에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만이 손을 들었다.

"급한 용무 때문이 아니라 도망친 거 아닌가요?"

순식간에 시선이 로만에게로 쏠렸다. 로만은 쏠리는 시선을 즐기는지 오히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에단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도망가? 내가 왜 도망을 가지?"

'뻔뻔하기는,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로만은 에단이 어떤 자세를 취하기로 정했는지 깨달았다.

'우둔한 평민 놈이 철면피를 깔기로 마음먹었구나.'

같잖았다. 그래 봐야 진실은 머지않아 밝혀지기 마련이었다.

"크러쉬 교수님 일 말이에요. 제대로 된 대련이 아니라 비겁한 방법으로 쓰러트렸다고 하던데요?"

로만의 말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왜, 할 말 없지? 그게 사실이니까.'

로만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평민이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찌그러질 모습을 상상하니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에단은 아무렇지 않았다.

'질린다, 질려.'

이따위 도발성 질문.

류태신이었던 선수 시절, 기자들에게 수도 없이 시달렸었다.

에단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하는 게 베스트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건방진데 조금 끌어내 볼까?'

도발은 상대가 먼저 했으니, 에단도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비겁한 수라.... 그거참 신선한데? 혹시 그 비겁한 방법이 뭔지 알 수 있나?"

에단이 역으로 되묻자, 당황한 것은 로만이었다.

그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로만은 에단이 비겁한 방법으로 크러쉬에게 승리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겁한 방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거야.... 방심을 유도한다거나... 전투 중에 상대를 속여서...."

한껏 작아진 로만의 목소리를 듣던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전투 중에 상대를 속이는 게 잘못된 행위인가?"

"...."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침묵했다. 침묵한 학생들을 바라보던 에단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방심은, 방심한 상대 탓 아닌가? 본인이 정신 안 차리고 있던 걸 왜 남 탓으로 돌리지? 혹시 머리에 매직 미사일이라도 맞았나?"

어이없다는 어조로 말하는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로만이 얼굴을 붉히며, 모멸과 치욕에 몸을 떨었다.

'감히...! 평민 주제에... 나를 조롱해?!'

에단은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로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런 말을 내뱉은 것인지도 알고 있었고, 지금 로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진즉에 눈치챘다.

"참 머릿속이 꽃밭인 애들이 많다니까? 거기 그 미안한데 아직 이름은 모르겠고, 출석을 불러야 하니까 앉아 주겠어?"

"...."

빠득.

로만은 이를 갈면서 자리에 앉았다. 에단의 조롱에 꼭지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에단은 태연하게 단상에 팔을 걸쳐 놓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레벨린에게 미리 자료를 인계받았기에, 출석을 부르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출석 확인을 마친 에단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내 소개는 이미 한 것 같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소개하지. 내 이름은 에단이고, 성은 없어. 자 이제 질문을 받아 보지."

에단이 칠판에 이름 두 글자를 써 놓고 말했다.

여자 학생 중 하나가 손을 치켜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그래, 말해 봐."

"오늘 정원에서 어린 여자아이와 같이 있었다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혹시 딸인가요?"

예상 못 한 물음에 에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방금 전 일인데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돌았나?"

"여기 소문은 10분이면 전부 돌아요! 대답해 주세요!"

"상황상 불가피하게 맡게 된 아이니까 신경 쓰지 말도록."

에단의 대답에 흥미가 깨진 학생이 손을 내렸다.

출석 확인을 끝마친 에단이 학생들을 스캔하듯 둘러봤다.

개중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고, 흥미 어린 눈빛들도 있었다.

그중 압권은 역시 로만이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에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귀여운 놈.'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다.

에단은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 옮겨진 대상은 리사였다.

― 저 녀석이 네 여동생이냐? 정말 판박이로구나.

'그렇습니까?'

에단으로서는 떨떠름한 감정이 들었다.

리사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카론과 모룬도 피를 나눈 형제였지만, 그들과는 처음부터 대립했다.

하지만 리사와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리사는 에단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고, 에단은 리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디 한번 제대로 하나 지켜봐야겠군.'

기회가 되면 적당히 골려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남은 주요 인물들은....'

에단은 시선을 돌려 대략적인 원작 인물들을 체크했다.

'처음에는 너겠구나.'

로만은 원래라면 주인공에게 깨지게 되는 엑스트라 악역이었다.

'나랑 비슷한 케이스지.'

하지만 주인공이 없어진 관계로 로만의 타깃은 에단으로 정정된 모양이었다.

'가문이 밝혀지면 아주 자지러지겠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흥미가 생겼다. 어디까지 기어오를지가 궁금해졌다.

스캔을 마친 에단이 입을 열었다.

"이제 질문은 없는 걸로 알고 수업을 시작하겠다. 불만 없겠지?"

에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만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그래, 매직 미사일. 질문하도록."

푸하핫!

에단의 말에 곳곳에서 폭소가 터졌다. 로만이 이를 악문 채 에단을 노려봤다.

"...제 이름은 로만입니다."

"아, 그랬지. 미안하다. 내가 아직 이름을 전부 못 외워서. 첫 수업이니까 너그럽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다.

로만은 목젖까지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억눌러 냈다.

로만이 꿈틀거리는 볼을 진정하며 에단에게 물었다.

"...교수님은 어떤 수업을 하시나요?"

"어떤 수업을 할 것 같은데?"

에단이 씨익 웃으면서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평민에게 배울 게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교수님이 저희에게 뭘 알려 줄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적의가 가득한 로만의 말.

학생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로만과 에단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은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있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거."

"...뭐죠?"

"너같이 건방진 새끼에게 정신 교육 제대로 해 주는 거."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75화] 불량 교수 (3)

에단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이해한다. 이미 이 아카데미에는 자체적인 체계가 완성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야."

깊은 속사정은 알지 못한다.

여러 정치적 이유와 인력난 따위는 에단이 고려할 문제가 아닐뿐더러, 학생들이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다.

'에밀라가 검술을 담당하고 있지만 대륙에서 유명하지는 않지.'

아카데미에서 블란테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에밀라는 실력이 뛰어났고, 장래가 유망한 스타 교수였지만, 이는 아카데미 내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대륙 전체로 보면 아직 명성과 입지가 부족했다.

'근본이 어쌔신이니까 그럴 수밖에.'

그렇기에 블란테라는 이름값을 빌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블란테는 여전히 아카데미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에단도 그다지 아카데미에 힘을 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문을 숨기는 방향으로 결정한 거지.'

덕분에 레벨린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에단이라는 폭탄을 떠안게 됨과 더불어, 블란테라는 명성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애써 블란테를 끌어온 이유도 사라졌고, 아카데미의 평판에도 악영향이 갈 것이 분명했다.

이름이 알려진 적 없는 평민이 교수로 부임했으니까.

검술의 상징성.

그건 현재 에단이 가지지 못한 자격이다.

그렇다고 궁술이나, 기타 무기술을 가르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쪽 분야는 에단도 완전히 문외한이었으니까.

'본 거라고는 양궁밖에 없는데, 뭐.'

애당초 가문에서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지원을 할 리도 만무하고.

자연스럽게 마법이나 다른 분야도 기각.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나는 체육을 담당한다."

"...체육?"

"체육이라고?"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에단은 얼추 예상하던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로 그때, 리사가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좋다. 질문하도록."

이렇게 대답하니까 진짜 교수가 된 기분이었다.

하필 손을 든 사람도 리사였고.

"체육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 거죠?"

리사의 목소리에는 호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반감이 가득해 보였다.

"말 그대로 '체육'이다. 몸을 쓰는 법, 그리고 단련하는 법을 알려 주지."

"...그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까?"

리사의 말에 학생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무기술도 아니고 체육이 뭐야...."

"그 시간에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교수로 온 거지?"

불신과 반감이 가득 찬 반응들.

에단은 피식 미소 지으며 마나를 싣고 그대로 발을 굴렀다.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학생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다들 건방이 하늘을 찌르네."

"...."

예상 못 한 에단의 말에 학생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건방을 떠는 거지?"

에단이 교탁에 몸을 기댄 채 학생들을 바라봤다.

무형의 압박감이 학생들을 짓눌렀다. 에단의 검은 눈동자가 리사를 향했다.

"몸을 쓰는 데에 자신이 있다라.... 정말 자신이 있나?"

에단은 측면에 준비된 목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검만 휘두를 줄 알면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가?"

에단의 말에 리사가 입을 열었다.

"물론 검을 다루는 것에 있어 체력과 근력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쉿."

에단이 검지를 들어 올려 입에 가져다 댔다.

"아직 내 얘기는 끝나지 않았어. 내가 이 반 수업은 처음이니 물어보지. 여기서 가장 검을 잘 다루는 사람이 누구지?"

학생들이 힐긋거리며 리사를 바라봤다.

― 호오, 역시 블란테의 핏줄이라 그건가.

"좋아. 그러면 리사에게 묻지.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지?"

에단의 질문에 고민에 빠져 있던 리사가 대답했다.

"실전 경험입니다."

리사의 대답에 대다수의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에단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모두 관점이 다르고 각자의 주관이 있으니."

"그렇다면...."

"그러니까 주관을 관철하기 위해선 증명해 내야겠지?"

에단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리사의 표정이 굳었다.

"...진심이십니까?"

"당연히 진심이 아니지. 교수인 내가 학생을 진심으로 상대할까?"

장난기 어린 어투. 그 모습이 리사를 더욱 자극했다.

"알겠습니다. 후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리사가 몸을 움직이려는 그때, 로만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참을 수가 없군!"

갑작스럽게 흥분하며 일어선 로만.

"제가 그 오만함을 짓눌러 드리죠."

"...."

멍하니 로만을 바라보던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 * *

첫 수업부터 또다시 에단의 반 전체가 이동했다.

익숙한 풍경의 훈련장, 이전에는 같은 교수인 크러쉬와 마주 섰지만, 이번에는 학생과 섰다.

― 설마 진심으로 상대하진 않겠지?

'설마요. 제가 그렇게나 개념 없는 놈으로 보이는 겁니까?'

― ...아니었나?

'....'

에단은 목검을 붕붕 휘둘렀다.

낯설지는 않았다. 에단은 검의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검술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할 이유도 있고.'

주인공이 없어진 탓에 에단이 해야 할 일들이 늘어났다.

'골치 아프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학생들을 제대로 통제해야 했다.

이 일은 그 초석이었다.

로만은 에단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건방진 평민 녀석...!'

감히 고귀한 귀족이자 학장의 핏줄인 자신을 수많은 학생 앞에서 무시하고 조롱했다.

그 사실만 해도 에단의 죄질은 무거웠다.

더군다나 에단은 말도 안 되는 수업을 진행하려고 했다.

체육이라니.

기가 찼다. 명망 높은 아카데미에서 체육을 가르치려 들었다.

물을 흐리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오늘 제대로 교육을 해 줘야 하겠어.'

로만이 리사를 바라봤다. 리사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에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흐흐.... 그 상황에서 내가 나서 줬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지?'

로만이 음흉한 시선으로 리사를 흘겨봤다.

건방진 평민 녀석의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그 보상으로 리사를 가져갈 생각이었다.

당연히 리사는 알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않을 계획이었지만, 로만의 머릿속은 이미 꽃밭이었다.

머릿속이 꽃밭인 그와 달리, 로만의 패거리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로만을 바라봤다.

"로만, 괜찮겠어?"

"아무리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어도 어쨌든 크러쉬 교수님을 이긴 사람이잖아."

"맞아, 아무리 그래도 교수인데...."

그러나 조언 따위는 로만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로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무리를 바라봤다.

"너희들, 나를 못 믿는 거야?"

"그건 아닌데...."

"그럼 조용히 지켜보고 있어. 저 건방진 평민 녀석이 바닥을 기게 만들 테니까."

로만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에단은 로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 정신 나간 애송이군.

'귀엽지 않습니까?'

― 너도 정신이 나간 게냐?

'설마요.'

―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살살할 생각이지...?

'그럼요.'

― ....

왠지 불안한 페온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에단은 페온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목을 비틀며 몸을 풀었다.

에단의 미소는 묘하게 섬뜩했다.

하지만 로만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우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앞으로 나섰다.

"하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은 소리 내어 웃었다.

― ...큰일 났군.

참담한 미래를 예상한 페온이 혀를 찼다.

로만이 천천히 에단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에단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평민 아닙니까?"

"평민 맞아."

"그런데 대체 뭘 믿고 그렇게 건방을 떠는 거죠?"

― ...아이고.

로만의 도발에 페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글쎄, 실력 아닐까?"

"하, 설마 그쪽이 크러쉬 교수님을 이겼다고 그렇게 자만하는 겁니까?"

"아닌데?"

에단이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자, 로만의 볼이 꿈틀댔다.

"그 여유가 언제까지 지속되나 보죠."

'식상한 대사네.'

지금껏 에단이 상대해 온 모두가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래, 로만 학생. 슬슬 수업을 시작할까?"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에단.

명백한 조롱조였다. 로만은 이를 악문 채 목검을 들었다.

"아, 그래도 교수가 학생 상대로 하는 수업인데 어드밴티지는 줘야겠지. 여기 검 한 자루 있나?"

"검은 지금 들고 있는...."

"아, 목검 말고, 진짜 검."

에단이 로만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그 정도는 해 줘야 수업이 될 거 같아서."

로만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딴 거 필요 없어!"

존칭도 잊은 채 로만이 뛰어들었다.

"기회를 줘도 마다하네."

에단이 목검을 쥔 손을 들며 헛웃음을 지었다.

쾅!

두 목검이 맞부딪쳤다.

힘의 흐름은 팽팽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에단이 순간적으로 목검을 회수하자 팽팽한 줄다리기가 끝나 버렸고, 그 탓에 로만은 순간 중심을 잃었다.

"어어?"

로만이 다급하게 중심을 잡으려고 했지만, 로만의 경로에는 에단의 다리가 있었다.

결국 로만은 균형을 잃고 볼썽사납게 고꾸라졌다.

"풋."

"푸훕."

웃음소리가 훈련장에 퍼지자, 로만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일부러 웃기는 거냐?"

로만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빠드득.

이를 악문 로만이 목검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이 개자식이!"

"교수한테 개자식이라니."

로만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 마나를 운용하는구나.

마나의 운용.

에단은 로만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그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날 죽이려고 하네?'

그렇다면 이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아도 된다.

에단의 입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로만은 마나를 사용했지만 그뿐이었다.

검에 마나를 싣지도 못했고, 움직임도 서툴렀다.

보폭, 타이밍, 발의 움직임, 시선 처리.

그 외의 것들까지.

모든 동작이 조잡했다.

쾅!

다시 한번 검과 검이 부딪쳤다.

이번에도 균형은 팽팽해 보였다. 에단이 그렇게 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단은 지금 마나를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반면 로만은 전력으로 마나를 운용하고 있었다.

"벌써 지쳤어?"

"닥쳐...!"

"버릇이 없네."

에단이 검에 힘을 줬다.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 무게중심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순식간에 검의 균형이 깨졌다. 로만이 형편없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익!"

"검술을 보여 줄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힘 싸움이야?"

에단이 한 차례 더 힘을 주자, 로만이 나동그라졌다.

"자, 검술 한번 봐 볼까?"

에단이 검을 휘둘렀다.

검술을 보여 주는 게 아니었다.

아주 기본 중의 기본 동작들.

가로 베기, 세로 베기, 내려 베기, 찌르기.

연계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딱 로만이 대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스피드를 유지했다.

쾅! 쾅! 쾅!

로만이 다급하게 목검을 휘둘러 에단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는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탓에, 흐름을 끊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반면 에단은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하품을 했다.

"슬슬 지루하지? 속도를 좀 올릴까?"

"잠깐...!"

"잠깐이 어딨어?"

에단의 검이 빨라졌지만, 로만의 대응은 늦어지고 있었다.

로만의 호흡이 순식간에 거칠어지고, 자세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왜? 내 주제를 알게 해 준다면서?"

― ...악마 같은 놈.

◈ [76화] 불량 교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