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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화] 헨리 (2)

리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리사가 얼굴을 찌푸린 채 에단을 향해 말했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화가 서린 목소리였다.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본 리사가 말을 이었다.

"나도 블란테야. 내 것으로 정해 둔 거는 누구한테도 뺏기지 않아."

블란테는 욕심이 많았다. 리사의 대답을 들은 에단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래야 내 여동생이지. 그런데... 언제부터 반장이 네 소유물이 됐냐?"

"그, 그건...!"

리사가 얼굴을 붉혔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간다."

담백한 인사였다. 리사가 묘한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뭐야? 그 마지막 같은 인사는."

"이상한 소리 한다 또. 나중에 보자."

에단이 고개를 돌려 리사를 바라봤다. 에단의 입꼬리가 휘었다.

"고생 좀 하고."

"...짜증 나."

에단이 발을 내딛자,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뭐야."

오늘따라 에단이 멀게 느껴졌다. 잠시 에단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리사는 이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애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 * *

에단이 아카데미를 떠나기 위해 달려 나갈 때, 정원에서 크러쉬의 얼굴이 보였다. 그간 에단을 피해 다녔기에 얼굴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에단이 발을 멈췄다. 크러쉬의 표정이 미묘했는데,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침 잘됐군.'

에단도 크러쉬에게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에단 교수님."

"이제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러 주시는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에밀라 씨는...."

크러쉬의 말에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크러쉬 교수님. 아니, 야."

에단이 사나운 눈초리로 크러쉬를 노려봤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크러쉬는 몸을 떨었다. 마치 사자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원래 원한을 잘 잊지 못하는 성격이거든?"

"그게 무슨...."

"내가 너희들이 벌인 일이 뭔지 모를 거 같아?"

순간 크러쉬의 동공이 흔들렸다. 에단은 크러쉬가 어떤 성향을 가진 자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감과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자에게는 꼬리를 내리는 게 바로 크러쉬와 같은 부류였다.

"평민을 싫어한다고 했지? 미천한 새끼들이니까."

"그건 오해가...."

"이제 와서 포장하려 하지 마. 엿 같으니까.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평민이 아닌데 말이야."

"...평민이 아니라구요?"

"어, 아니야. 내 가문은 블란테거든."

"...!"

순간 크러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크러쉬가 충격받은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 그게 대체...."

"마음 같아서는 너네 가문까지 싸잡아서 족치고 싶은데 지금 그럴 형편이 안 돼."

아카데미의 인력은 크게 부족했다. 사건을 수습할 인원은커녕 수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교수의 숫자도 부족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잘해. 너도 귀족이잖아."

"...."

크러쉬가 고개를 숙였다. 에단의 말이 내포한 뜻이 무엇인지 느껴졌다.

"나 간다."

에단이 다시 지면을 박찼다. 에단이 달리면서 뒤를 힐긋 바라봤다. 크러쉬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 ...바뀔 거라고 보는 거냐?

"모르죠."

에단은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바뀌든 바뀌지 않든 알 바인가?

"바뀌지 않으면 제 손에 뒤질 겁니다."

그대로면 뒤질 건데.

* * *

"헤, 헨리 씨...."

헨리가 멍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하자, 휴고는 그런 그녀를 뒤쫓았다.

가토는 잠시 망설이며 흐릿한 말의 눈을 바라보고는 네이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이드 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우리도 따라가 봅시다."

네이드가 마차에서 간단한 짐을 집어 드는 걸 본 가토가 따라서 적당한 물건들을 챙겼다.

"가시죠."

가토가 휴고가 향한 방향으로 따라나섰다. 앞서간 두 사람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역시 이상하군.'

네이드는 전설적인 어쌔신이었다. 어쌔신은 어둠에 녹아들며, 그 누구보다 흔적을 잘 지우는 자들이었다.

그 말은 반대로 그만큼 흔적을 잘 찾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 자리에 머무르거나 움직이게 되면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긴 시간이 흐른다면 당연히 흔적이 사라지겠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따라붙었다. 그 짧은 텀을 가지고 시간이 흘렀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스락.

네이드가 발을 내딛자 풀이 밟히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곧바로 뒤를 돌아 바닥을 바라봤지만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네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가토 씨."

"네?"

가토가 고개를 돌렸다. 네이드가 품에서 단검을 한 자루 꺼냈다.

"아무래도 갇힌 것 같군요."

"갇히다니요?"

"이 숲 평범하지 않습니다. 일단 휴고와 헨리 씨를 찾는 일은 보류해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가토는 네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숲의 한복판이라 사방이 트여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갇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벌써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네이드가 가토의 어깨너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어 가토가 몸을 돌렸다.

"저게 무슨...."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동물이 있었다. 외향은 영락없는 사슴이었지만, 전신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만 놓고 보면 크게 놀랍지 않은 일이었지만.

"무슨 크기가...."

이전에 마주했던 블랙 오우거와 비슷한 크기의 사슴이었다. 게다가 붉은 안광까지 있어 음산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저 괴물 같은 사슴이 지금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가토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네이드가 가토의 어깨의 손을 얹었다.

"기다리고 있으세요."

네이드의 신형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이내 사슴의 앞에 나타났다.

아아아아아아!

사슴이 기이한 소리로 포효했다. 네이드가 표정의 변화 없이 단검을 휘두르자, 단검에 서린 마나의 빛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쾅!

순간 사슴의 주위로 장막이 쳐지며 네이드의 일격을 막아 냈다. 네이드가 미간을 좁혔다.

'...검은 장막.'

방금 헨리의 주위에 펼쳐진 장막과 흡사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그것보다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

도약한 네이드가 역수로 쥔 단검과 팔에 마나를 집어넣어 휘둘렀다.

슥, 슥, 슥.

마치 붓 칠을 하는 것 같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움직이었다. 파문은 나중에 일어났다.

콰앙!

장막이 갈라졌다. 네이드가 순식간에 장막 안으로 침투해 사슴의 목을 베어 냈다.

툭.

거대한 검은 사슴의 머리가 떨어졌다.

가토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보고 나서도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네이드의 저력이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네이드가 고개를 돌려 가토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거 좀 쉽지 않겠군요."

이곳에 있는 검은 짐승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 * *

타다닷!

주위 배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헨리는 분명 천천히 걷는 듯 보였지만, 휴고가 야생 동물처럼 질주하고 있음에도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따라잡을 수가 없어....'

이유가 뭐지?

휴고는 달리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전반적인 신체 능력은 에단에게 밀렸으나 오직 달리기 하나에서만큼은 에단을 미세하게 뛰어넘었다.

그런 그가 전력으로 내달리고 있는데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헨리는 걸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휴고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쳐서 그런 게 아닌, 불길함과 섬뜩함이 느껴진 탓이었다.

휴고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크르릉―

휴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 내가 뭘 한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목소리는 처음 내봤다.

머리가 뜨거워지며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휴고가 이를 악물고 달리며 소리쳤다.

"헨리 씨!"

"...."

하지만 헨리는 휴고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헨리는 서서히 멀어졌고,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쿵.

헨리가 사라지자마자 어둠이 드리웠다. 그리고 스산하고 사특한 기운이 숲을 잠식해 나갔다.

두근두근.

휴고의 심장 박동 수가 더욱 빨라졌다. 휴고의 눈이 노랗게 물들었다. 주둥이가 길어지면서 전신에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

휴고의 야성이 폭발했다. 완전히 야수로 변모한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쿠르륵.

먹잇감을 찾은 휴고의 입에서 침이 흐르기 시작했다.

검고, 거대한 크기의 멧돼지였다.

크기는 상관없었다. 휴고는 지금 이 굶주림을 해소하고 싶었다.

쿠어어!

검은 멧돼지가 휴고를 향해 돌진했다. 엄청난 질량을 무기로 삼은 멧돼지의 기세는 살벌했다.

파밧!

하지만 휴고는 그런 멧돼지를 비웃듯 공중으로 도약했다. 휴고의 몸이 순식간의 멧돼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니, 올라타려 했다.

쾅!

휴고의 팔이 검은 장막에 가로막혔다.

크릉?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에 허기를 채울 먹잇감이 있는데 방해물이 있었다.

판단은 빨랐다. 방해물이야 치우면 그만이었다.

쾅! 쾅! 쾅!

휴고가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멧돼지가 휴고를 바라봤다.

크르르!

휴고의 사나운 야성이 멧돼지에게로 향했다. 체급의 차이는 명백했지만 멧돼지는 오히려 기가 죽었다.

검게 물든 멧돼지의 눈이 휴고를 바라보지 못했다. 짧은 꼬리가 말리며 멧돼지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휴고의 팔은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쾅!

휴고가 연신 검은 장막을 두드렸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검은 장막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장막이 완전히 깨졌다.

콰지직!

휴고의 손이 장막을 꿰뚫었다. 날카로운 발톱에는 은은한 마나가 서려 있었다. 휴고가 반대 손을 들이밀며 구멍 난 장막을 억지로 넓혔다.

크르르.

휴고의 누런 눈동자가 멧돼지를 포착했다.

콰지직!

휴고가 장막을 완전히 찢어발긴 채 멧돼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멧돼지가 등을 돌렸다. 하지만 휴고에게는 보기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멧돼지의 등 위에 올라탄 휴고가 그대로 살점을 물어뜯었다.

와그작!

살점이 한 움큼 떨어져 나가자 멧돼지가 구슬픈 비명을 내질렀다.

꾸에에에에에엑!

크르르르.

멧돼지의 비명 소리에 휴고가 즐겁다는 듯 낮게 울었다. 휴고의 날카로운 발톱이 멧돼지의 살점을 헤집었다. 휴고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약점을 찾아냈다.

쿵!

멧돼지의 거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휴고가 전리품인 고기를 탐하려 했다. 하지만 휴고는 고개를 들었다.

먹잇감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 [114화] 헨리 (3)

정처 없이 숲을 지나고 있는 헨리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풀과 덩굴과 나무가 길을 열어 줬다.

'...나는 누구지?'

알 수 없었다.

헨리가 과거를 떠올리려 해 봤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기억만이 일렁였다.

― 언니... 도와줘....

― 나, 무서워....

― 살려 줘....

동생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동생...?'

동생은 헨리의 아픈 손가락이었지만 정작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목소리가 메아리침에도 명확하지 않았다. 모든 게 혼잡했다.

나이는 어느 정도인지, 성별은 무엇인지 등.

무엇 하나 명확한 게 없었다.

헨리는 정처 없이 앞으로 향했고, 이내 앞에 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거대한 나무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하지만 웅장하거나, 성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뼈대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나무인 탓에 오히려 섬뜩했다.

세상의 모든 사기와 절망을 흡수한 듯한 모습.

헨리는 이 나무가 죽어 가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타깝구나."

헨리가 죽어 가는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멈추세요."

앙상한 나무를 향해 홀리듯 다가가던 헨리가 자리에 멈춰 시선을 돌렸다.

헨리의 흐릿한 눈이 자신에게 말을 건 존재들에게로 돌아갔다.

"당신은 대체...."

활시위를 당긴 르니엘이 헨리를 향해 경계심을 내비쳤다. 르니엘의 손에 피가 맺혔다. 본래라면 이 정도 장력에는 상처도 입지 않을 손이었지만, 과도한 긴장감으로 인해 힘을 너무 준 탓이었다.

르니엘은 손을 벌벌 떨었다. 헨리에게 활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 거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쌍한 아이구나."

헨리가 안쓰럽다는 듯 말하자, 르니엘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네가 대체 뭘 안다고...."

꽈아악!

활시위 장력이 더욱 팽팽해지며 언제라도 화살이 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르니엘의 화살은 쏘아지지 않았다.

털썩.

그대로 쓰러진 헨리를 바라본 르니엘의 표정이 바뀌었다.

조준하던 활을 회수했지만, 경계심을 늦춘 건 아니었다. 르니엘이 천천히 헨리에게 다가갔다.

"...뭐야?"

거친 헨리의 숨소리가 르니엘의 귀에 파고들었다.

르니엘은 붉게 물든 얼굴의 헨리를 외면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심코 뻗은 그녀의 손이 헨리의 이마에 닿았다.

"무슨 열이...."

헨리의 이마는 들끓고 있었다.

"옮겨야겠어."

르니엘이 헨리를 안아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정령이 있었으면....'

정령의 힘을 빌린다면 이런 건 일도 아니었다. 엘프와 정령은 한 몸이나 매한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르니엘은 정령의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르니엘이 헨리를 안아 들고 자리를 이동했다. 그녀가 이동한 곳은 엘프의 보금자리였다.

원래라면 활기와 생기가 넘쳐흘러야 할 엘프들의 마을은 황량했다.

당장 보이는 엘프들의 숫자도 적었고, 그마저도 모두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변을 쓱 둘러본 르니엘은 마음이 아팠다. 정령들과 뛰놀던 과거는 찾아볼 수 없었고, 모든 것은 메말라 있었다.

"헉헉...."

르니엘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목으로 이루어진 집 앞에 섰다.

"...툰나 님."

르니엘이 앞에서 이름을 불렀다. 잠시 뒤 천천히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노쇠한 엘프가 르니엘을 지그시 바라봤다.

"르니엘이구나."

"네."

르니엘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툰나는 장로였다. 장로인 만큼 나이가 많긴 했지만, 원래 이 정도로 노쇠하지는 않았다.

툰나가 급격히 기력이 쇠하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툰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자는 설마 인간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나무로 다가가길래 막아섰더니 갑자기...."

"인간이 생명의 나무로?"

이해할 수 없었다. 생명의 나무는 외지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오염이 시작된 이후로는 평생을 공생해 오던 엘프들에게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접근이 가능한 자는 마을의 유일한 하이엘프인 르니엘뿐이었다. 장로인 툰나조차 생명의 나무로 다가가면 길을 잃었다.

"일단 이곳에 눕히거라."

"알겠습니다."

르니엘이 헨리를 안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나무 덩굴과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헨리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상태가 좋지는 않구나."

"...그렇습니까?"

르니엘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맴돌았다. 툰나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르니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르니엘은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가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대는 침입자였다. 그것도 인간 침입자.

증오해야 마땅한 존재였지만 헨리를 보면 르니엘의 가슴이 아파 왔다. 그리고 불덩이같이 달아오른 헨리의 몸 상태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툰나는 말없이 헨리를 바라봤다.

"...가호가 있기를."

지혜로운 툰나의 말에는 영성이 깃든다. 툰나의 말은 곧 씨앗이 되고 싹이 트게 만든다. 그게 장로가 가진 언령의 힘이었다.

툰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언령의 힘을 잃은 상태였다.

"미안하구나. 일단 여기서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하니 일단 너는 조금 쉬도록 하거라."

툰나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르니엘은 가슴이 아려 왔다. 르니엘이 애써 울컥한 감정을 숨긴 채 고개를 숙였다.

"...네, 장로님.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문밖으로 나선 르니엘의 눈에 삭막한 풍경이 담겼다.

"르니엘, 또 이상한 짓을 벌이는 거냐?"

"...리트마."

르니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가온 엘프는 초췌한 얼굴을 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활력이 돌았다.

르니엘은 그런 리트마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각자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엘프들에게 있어 당연한 규칙이니까.

"...별일 아니니까 신경 꺼."

르니엘에 대답에 리트마가 코웃음을 쳤다.

"별일이 아니기는 왜 아니야? 너는 책임감도 느끼지 못해? 너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이 꼴이 되고, 생명의 나무도 오염됐는데?"

"...."

르니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몸을 떨면서 리트마를 노려봤다.

"뭘 잘했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리트마가 천천히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르니엘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

"쯧, 빨리 마을에서 꺼지기나 해."

혀를 찬 리트마가 몸을 돌려 멀어졌다. 르니엘은 굴욕감과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돌아가자.'

외부에 대한 경계.

그것이 르니엘이 아직 마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

르니엘이 활을 움켜쥐었다.

* * *

에단이 밤길을 질주하면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통신을 할 시간도 아까웠다. 에단이 마나를 집중시키자 수정구가 연결되었다.

― 그간 평안하셨나요, 에단 씨.

수정구에서 메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라면 골려 주고 싶은 말투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 세계수의 상태를 모두 나열해."

― 대뜸 무슨....

"시간 없어."

― ...저희도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세계수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파악한 뒤부터 계속해서 접촉을 시도 중입니다만, 경계가 너무 심해서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그들과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더군요. 하지만 타 지역 엘프들과 정령들의 상태를 보면... 상황이 정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계가 많이 심한 편인가?"

― 네. 애초에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듯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

"대충 예상이 되는군. 그 외의 특이 사항은 없나?"

―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상당한 수의 길드원을 세계수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에 투입하며 알아차린 건데... 수상한 세력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상한 세력?"

― 엘프들의 경계는 극심한 게 분명합니다. 외부와의 단절을 택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그곳을 드나드는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가?"

― 아직은 의심에 불과합니다. 숲에 조금만 들어서려 해도 환각에 빠져서 탐색이 쉽지가 않습니다.

"아는 건 그게 전부겠지?"

― 네. 제가 아는 바로는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에단 님은 정말 세계수를 치료할 방법을....

뚝.

에단이 메이와 연결된 회신을 끊었다. 특별히 도움이 되는 얘기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려던 그때, 카이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 엘프들이 외부와 단절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 한시가 촉박하군....

여유가 없다는 사실은 에단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드나드는 애들은 대충 그놈들이겠네.'

얼추 예상이 가는 녀석들이다. 욕심을 채우기 바쁜 끄나풀들.

에단이 수정구를 바라봤다. 다음으로 연결할 대상은 아버지였다.

에단이 마력을 주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의 얼굴이 수정구에 비쳤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

빈센트가 의심의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아들을 의심하는 것 같아 섭섭합니다."

― 잔말 말고 본론을 꺼내거라.

"이전에 말한 대로 계획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버지의 도움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내 도움 말이더냐?

빈센트의 목소리에는 실망스럽다는 듯한 느낌이 포함돼 있었다. 가문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을 바라다니.

"리사가 죽을 뻔했습니다."

― 뭣이?! 그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개자식들이 도대체 누구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노호성이 튀어나왔다.

'이런 딸바보 같으니라고.'

에단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놈들입니다."

― 빠득, 당장 기사단의 출전을 준비하겠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 녀석은 이미 리사에게 죽었으니까요."

― ...죽었다고?

"네. 그리고 남은 주동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지금 아카데미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아카데미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인력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 ....

"적당한 애들 좀 추려서 보내 주시죠. 물론 아버지도 오셔야 합니다. 오신 김에 리사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죠."

―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나?

"겸사겸사라고 할 수 있죠.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카데미는 이제 블란테의 것입니다."

―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텐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색이 블란테 아니겠습니까?"

― 아무리 우리가 주변을 겁내지 않는다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아는 사실 아니더냐?

"그거야 당연히 알죠."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블란테라고 할지라도 막무가내로 들이박을 수는 없었다.

명분과 절차.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했다.

'그것들은 이미 얻었고.'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준비물은 리사에게 전해 줬으니까 아버지께서는 기사단만 이끌고 오시면 됩니다."

― ...그러면 영지의 수호는 누가 하란 말이냐?

빈센트의 물음에 에단이 눈을 끔뻑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블란테를 습격하는 정신 나간 놈들이 있답니까?"

◈ [115화] 용사의 등장? (1)

뚝.

수정구의 통신을 끊은 에단이 다시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확실히 마스터에 오르니까 지치지를 않는군.'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 체력 안배까지 고려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꽤나 난감했을 터.

'여동생아, 말 좀 잘 부탁한다.'

대부분의 전달 사항과 해야 할 것들은 리사에게 모두 전달했다.

지금 아카데미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핵심 인원들이 대거 이탈했지만, 아직 학생들은 그러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카데미가 붕괴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지.'

아카데미는 에단의 지지 세력이 될 것이다.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운 자원이었다.

'반발이 상당하겠지.'

아카데미는 표면상 자유와 평등을 표방했다. 그렇기에 각국의 지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축은 언제나 레벨린이었다. 그런데 레벨린이 사라지고 대뜸 블란테가 나서서 운영권을 쥐겠다고 선언한다면 반발이 적지 않을 터.

그래서 밑밥을 깔고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는 미끼를 물었다.

마크와 로만의 죄명은 무거웠고, 대외적인 책임자로서 사퇴를 선언했다.

마크가 학장직을 포기한다는 녹음본은 에단이 쥐고 있었다.

이건 명분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를 흡수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명분이다.

학장의 직위를 얻는다고 해도 실질적인 실세로서 경영권을 휘두르는 이는 레벨린일 터.

일단 학장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기다리면 다시금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벨린은 도박 수를 던졌다. 아니, 그녀는 도박 수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터.

에단이 아무리 에밀라를 쓰러뜨렸다고 한들 에단의 나이는 아직 10대에 불과했다.

베오드라도의 패배를 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반전이 벌어졌고, 에단은 베오드라도에게 승리했다.

'만일 내가 죽은 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더 조심했겠지.'

레벨린은 그런 캐릭터였다. 결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었을 때만 패를 보여 주는 자였다.

'위험하긴 했지.'

정말 위험했다. 만일 페온이 없었다면, 룬어의 능력이 전투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에단에게 죽은 나무의 능력이 없었다면.

뭐 하나라도 부족했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쪽은 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다. 에단은 결국 승리했고, 레벨린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어디서 뭘 준비할지 모르겠군.'

에단이 알고 있던 미래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버렸다. 도망친 그녀가 과연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먼저.'

그녀의 기반을 부수어야 한다. 에단이 정면을 바라봤다. 날은 어두웠고, 앞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질적이고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했다.

에단은 자신이 왜 편안함을 느끼는지 알고 있었다.

스르르.

품속에서 힘이 꿈틀거렸다.

죽은 나무의 기운이 눈앞의 기운에 동조하고 있었다.

"상황이 더럽게 됐네."

가장 상극이어야 할 두 녀석이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을 의미했다.

숲에는 은은한 마나가 둘려 있었다. 자세히 지켜봐도 눈치채기 힘든, 숲에 녹아든 마나였다.

에단이 죽은 마나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리치 베오드라도의 힘을 흡수한 뒤로 죽은 마나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키에에에에!

죽은 나무가 귀곡성을 흘리자, 에단의 몸에 죽은 마나가 둘렸다.

이윽고 침임을 막아서던 숲의 환영이 사라졌다.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대충 어디로 갔는지는 알겠군."

* * *

"허억, 허억!"

가토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짐승들이 계속 몰려왔다.

'...정말 이걸 짐승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가토는 최근 실력에 자신이 붙었다. 하여 웬만한 몬스터는 일격에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나는 이질적인 짐승들은 몬스터보다 상대하기 힘들었다.

'나는 비교적 약한 놈들을 맡고 있지만....'

가토가 네이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이드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나무를 밟으며 종횡무진하며 짐승들을 상대했다.

괴물 같은 움직임이기는 했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몸놀림이 상당히 느려졌다.

'...네이드 님도 지쳤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만한 마음에 불과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가토가 이를 악물며 검을 움켜쥐었다.

'...뭐가 기사란 말이야.'

기사 서임을 받고 블란테의 인장을 가슴팍에 새겼다. 에단의 직속 기사로서 명예와 충의를 맹세했다.

기사는 강해야 했고, 블란테의 기사는 더욱 강해야 했다. 약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

하지만 가토는 약했다. 음울한 기운이 마음을 파고들자, 가토의 눈빛이 서서히 흐려졌다.

숲에는 마성이 있었다. 평소 가토의 마음가짐이라면 마성이 깃들 틈이 없었겠지만, 자괴감이라는 늪에 빠진 지금은 마성이 침투할 수 있었다.

가토의 눈이 흐릿해졌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스르륵, 검이 떨어지려는 그 순간.

"야, 뭐 하냐?"

주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하던 가토의 눈이 제 색을 되찾았다.

가토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이의 목소리.

"...에단 님?"

가토가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는 온통 검은 짐승만이 보이는 탓에 가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느새?'

되지도 않는 방심을 하고 말았다.

이미 검은 짐승들은 가토를 표적으로 삼았다. 완전히 포위당하여 피하기에는 늦은 듯싶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도련님의 목소리는 환청이었나?'

"왜 그러고 있냐니까?"

다시 한번 들려오는 에단의 목소리에 가토는 환청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아차렸다.

화르륵!

포악하고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에 마수들이 고개를 돌려 표적을 바꾸었다.

"눈 안 깔아?"

에단이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마수들의 심령이 흔들렸다. 죽음을 불사르며 달려들던 마수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에단이 오른손에 쥐어진 성검을 바라봤다.

"성능 한번 시험해 봐도 되겠습니까?"

― ...말 안 해도 할 거 아니야?

카이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도 이제 에단이 어떤 인물인지 알 것 같았다.

"잘 알고 계시네요."

후웅!

에단이 검을 휘둘렀다. 성스러운 정화의 기운이 마수들을 덮쳤다.

화악!

마수들의 몸이 꼿꼿하게 굳었다. 그리고 일제히 각목처럼 쓰러졌다.

쓰러진 마수들의 붉은 안광이 사라지고, 크기가 줄어들었으며, 검던 피부색이 본래대로 되돌아갔다.

에단이 성검을 바라봤다.

"성능 확실하네."

한편 가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먼저 가 있으면 따라온다고 말하긴 했지만 벌써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련님?"

가토의 부름에 에단의 시선이 돌아갔다.

에단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죄송합니다."

가토가 고개를 숙였다. 에단은 지나가면서 가토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에단은 멀리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네이드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네이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에단을 발견하고는 눈이 커졌다.

에단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확실히 몸이 예전 같지는 않나 봐?"

에단이 다시 한번 성검을 들고는 기운을 둘러 휘둘렀다.

그와 함께 방금과 같은 정화의 힘이 마수를 덮쳤고, 이내 마수의 몸이 경직되며 쓰러졌다.

주변을 둘러본 네이드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확실히 몸이 예전 같지는 않군요."

네이드의 말에 에단이 씨익 웃었다.

"그렇다고 엄살 부리면 안 돼."

"그럴 정도로 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에단이 네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뒤에 서 있던 가토도 에단에게 붙었다.

네이드는 다가오는 에단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평소와 같은 에단이었지만, 무언가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에단의 손에는 본 적 없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네이드가 느끼는 차이점은 에단의 내면이었다. 사납고 거대한 힘이 에단의 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에단을 본 지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에단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 있는 법이다.

한데 단 며칠 만에 에단은 수십 개의 벽을 넘어섰다. 지금의 에단은 네이드가 알고 있던 에단이 아니었다.

'나와 동등한가...?'

아니, 느껴지는 기운만 놓고 본다면 그 이상이었다. 네이드가 충격받은 얼굴로 가만히 서 있자,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네이드의 물음에 에단이 턱을 매만졌다. 설명하기에는 애매하고 추상적인 질문이었다.

"뭐, 다사다난했지."

"...."

네이드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에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헨리랑 휴고는 어디 있어?"

"헨리와 휴고 씨는...."

네이드가 말끝을 흐리자, 뒤에 서 있던 가토가 다가왔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련님."

가토가 일련의 상황을 에단에게 전달했다.

'흠, 예상과는 다른데... 뭐 상관없으려나?'

에단에게는 길이 보이기 때문에 평범한 숲길에 불과했다.

"길 잃지 말고 잘 따라와."

죽은 나무가 에단의 이정표가 되었다.

* * *

르니엘은 세계수라고 불리는 생명의 나무에 다가갔다. 언제나 생명력이 충만하던 아름다운 거목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병들고 마른 생명의 나무는 더 이상 생명을 낳지 않았고, 신성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어 가는 나무의 불과할 뿐.

"...죄송합니다."

르니엘이 서글픈 표정으로 나무에 손을 얹었다. 생명의 나무는 비록 죽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그것이 본능인지 자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삶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엘프와 공존하며 엘프들에게 무한한 생명력을 나눠 주던 생명의 나무가 아닌, 르니엘을 제외하고서는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상처받은 나무가 되었다.

"...왜 저는 허락해 주신 거죠?"

왜 나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생명의 나무가 이렇게 된 원인을 찾는다면 그 책임은 르니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생명의 나무는 르니엘은 막아서지 않았다. 다른 엘프들과 인간들의 침입은 철저히 막으면서도 르니엘은 들어올 수 있게끔 했다.

"...한 명 더 있지."

르니엘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생명의 나무에 발을 들인 인간이었다.

르니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엘프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 생명의 나무가 인간을 허용하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르니엘이 앙상한 나무를 쓰다듬었다. 사무치게 그리운 과거를 떠올리자 마음이 아파 왔다.

바로 그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르니엘이 활을 잡았다.

'...침입자?'

또다시 침입자가 나타났다.

◈ [116화] 용사의 등장? (2)

거침없이 전진하는 에단의 뒤에서 가토가 눈을 부릅떴다.

'대체 도련님의 저력은 어디까지지?'

방금까지만 해도 숲에 갇힌 채 마수들과 혈전을 펼쳤다. 하지만 에단이 도착한 이후로는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무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이로운 힘을 지닌 네이드도 마수를 막아서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런데 에단의 등장과 동시에 모든 게 바뀌었다.

에단은 순식간에 마수들을 정리한 채 앞장섰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침없는 발걸음이었지만, 확실히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가토의 충성심은 더욱 깊어졌다.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던 가토는 순간 휴고가 떠올랐다. 휴고도 이 모습을 본다면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낄까?

그런 걸 떠올리다 보니 언제쯤 떨어진 일행을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도련님."

"왜 불러."

"...헨리 씨와 휴고는 어디에 있을까요?"

걸어가던 에단이 시선을 돌려 가토를 바라봤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알고 계셔서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아닌데? 알아서 잘 있겠지 뭐."

"...그, 그러면 지금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세계수."

"세, 세계수요?"

"어.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니까."

"그렇군요...."

에단의 담백한 대답에 가토가 쭈그러들었다. 휴고와 헨리가 걱정됐지만, 에단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언급하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걷자, 거대한 나무 덩굴이 보였다. 에단은 직감적으로 이 너머에 세계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단이 품속에서 세계수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자 몰골이 말이 아닌 네이드와 가토가 눈에 띄었다. 휴고에 대한 걱정은 들지 않았다.

'녀석한테는 오히려 성장의 기회가 되겠군.'

에단이 덩굴 앞에 서자 세계수의 목걸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나가 놀라워하며 입을 열었다.

― 준비는 해 뒀군.

― ...이걸 알고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나와 페온의 말에 에단은 대답하지 않은 채 꽉 막힌 앞만을 바라봤다. 이내 덩굴이 벌어지며 길이 열렸고, 저 앞에 앙상한 거목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심각해 보이는군.'

세계수의 본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비교를 할 순 없었지만, 지금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세계수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이 덩굴을 헤쳐 들어서자, 가토와 네이드도 뒤따랐다.

'이게 세계수....'

네이드가 미간을 좁혔다. 세계수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륙 차원에서 불가침 영역으로 지정한 엘프의 숲에 있는 나무였다.

소문으로 듣기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신성함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나무라고 했다. 웅장하고 위엄 있는 자태에 대해서 수많은 음유 시인들이 노래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건....'

듣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검게 물든 껍질과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나무 주위에는 식물 하나 없이 황폐했다.

아름답고 신성하기는커녕, 음산하고 불길했다.

가토의 표정도 네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수가 오염됐다고는 들었지만....'

반신반의했다. 에단의 말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세계수라는 이름 자체가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실물로 보니 세계수는 지금 병들어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체감되었다.

"쯧."

에단이 혀를 차며 세계수를 향해 다가가려는 그때, 엘프 여성 하나가 나타나 에단과 일행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이곳은 인간들이 침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르니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단호한 말투였지만, 정작 르니엘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또 세계수의 결계가 발동하지 않다니.

그간 겪어 보지 않은 일을 오늘 두 번이나 연달아 겪었다.

르니엘을 제외하면 엘프들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는 세계수가 인간에게 길을 터 준 상황에 혼란스러웠으나, 그렇다고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목숨을 잃기 싫으면 당장 나가."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르니엘의 눈은 목표를 주시하고 하고 있었다.

"흠...."

에단이 팔짱을 낀 채 일그러진 표정의 르니엘을 바라봤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당장 나가라고!"

르니엘의 호통을 들은 네이드가 품으로 손을 넣었다.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어째 말투가 조금 살벌하다?"

"그것이 도련님의 뜻이라면."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내가 언제 쟤를 죽이라고 했어?"

둘의 대화를 들은 르니엘이 몸을 흠칫 떨었다. 자기도 모르게 활시위가 떨렸다.

"이, 이 자식들이...!"

르니엘이 목표를 조준했다. 시위에 걸쳐진 화살은 하나지만 인원은 셋.

에단은 그런 르니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은 있고? 그거 놓으면 넌 죽는 건데."

에단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르니엘이 침을 삼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자신이 없었다. 엘프들의 힘은 대부분 정령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세계수가 병든 뒤 정령들은 엘프들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정령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엘프는 빈말로라도 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르니엘은 엘프들의 전사였다. 그렇기에 상대의 역량을 가늠하는 안목도 가지고 있었다.

'...모두 강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르니엘은 지금 저들 중 누구와 싸워도 승리할 수 없었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르니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싸워야....'

르니엘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활시위를 놓으려고 하는 그때.

"우리 나쁜 사람들 아니거든? 얘기라도 한번 들어 보는 게 어때?"

―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건 알고 있냐?

― 확실히 그 발언은 조금 그렇구나....

카이나와 페온의 말을 무시한 에단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화살 끝만을 바라봤다.

"...그럴까?"

르니엘이 활을 내리며 한 말에 일행은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 들어 보고 결정해. 어차피 너도 알잖아? 그거 놓았으면 죽었을 거라는 거."

에단이 웃으며 말하자, 르니엘이 흠칫 몸을 떨었다.

"거기서 뭐 해. 얘기할 거 아니야?"

"...여기서 얘기하면 안 돼?"

"장난해?"

에단이 얼굴을 찌푸리자, 르니엘이 잔뜩 얼어 있는 모습으로 슬금슬금 일행에게 다가왔다. 르니엘의 귀는 축 늘어져 있었다.

가토는 말없이 그런 르니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귀여워....'

엘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본 엘프는 듣던 것처럼 신비롭기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이 컸다.

"와, 왔어...."

르니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단이 씨익 웃으며 지면에 성검을 푹 하고 박아 넣었다. 에단의 돌발 행동에 르니엘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갖춰졌네."

"...진짜지?"

"그럼."

에단이 음흉하게 웃었다. 르니엘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이런 성격인 줄 알고 있었지.'

르니엘은 원작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캐릭터였다. 원작 주인공과 처음으로 조우하는 여자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백치미가 가득하다고 하더니.'

단순하고 순진한 캐릭터라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일단 우린 나쁜 의도로 온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줄게."

"...그걸 어떻게 믿어?"

르니엘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확실히 이제는 조금 경계를 하네.'

한번 데였기 때문인가. 르니엘은 원작에서처럼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람을 믿지 않았다.

"뭐, 딱히 증명할 방법은 없는데."

에단이 성검을 쥐었다.

르니엘이 화들짝 놀라며 활을 붙잡았다. 에단이 왼손을 들어 경계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그대로 세계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금 무슨...!"

르니엘이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에단이 생명의 나무에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에단의 성검에서 빛이 퍼져 나가 세계수를 감쌌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포근한 빛이었다. 성검의 정화를 받았지만 세계수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었다.

'뭐야 반응이 없는데?'

하지만 르니엘의 반응은 달랐다.

"생명의 나무가... 치유받고 있어...."

르니엘은 감격에 젖은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었다.

"설마 당신이 용사인가요?!"

"아닌데?"

에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용사라니. 누구한테 그딴 걸 들이밀고 있어.

예상외의 답변에 르니엘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뭐, 용사는 아니지만 도움을 주러 왔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도움이라고?"

"어."

에단이 턱 끝으로 세계수를 가리켰다.

"얘 낫게 하러 왔어."

"정말이야?"

르니엘의 눈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진짜 단순하네.'

이렇게 단순한 캐릭터는 처음 만나 봤기에 신선함을 느꼈다.

'아니다. 단순한 걸로 따지면 모룬도 만만치 않지....'

하지만 모룬은 외모와 성격 문제가 심각했고, 르니엘은 누가 봐도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으니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에단이 세계수를 바라봤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군.'

그러면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소리였다. 에단이 성검을 응시하자, 카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좋지 않아. 내 힘만으로는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예상했던 부분이다. 성검 한 번 휘두르는 거로 세계수의 정화와 회복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에단이 르니엘을 바라봤다.

"장로 좀 소개해 줘."

"...장로님을 보러 간다고?"

르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할 말이 있거든."

* * *

르니엘은 주위를 경계하며 길을 안내했다.

'...이상하네.'

마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마수화된 숲의 짐승들이다.

몬스터보다 훨씬 강한 힘을 지녔기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습을 보면 반드시 피해야 했다. 엘프들이 마을에 고립되어 있는 이유에는 마수의 출몰도 지대한 영향을 차지하고 있었다.

르니엘은 언제나 마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긴장하며 길을 지나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수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르니엘이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웬만한 애들은 다 잡았거든."

"...진짜?"

"어."

"...역시 용사 맞지?"

"아니라고."

에단이 정색했다. 용사 취급을 받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어딜 비교하고 있어.'

에단의 반응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르니엘이 다시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에단은 르니엘을 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자... 이제 어떻게 해 볼까.'

에단은 머릿속으로 세계수의 오염을 주도한 배신자를 어떻게 족칠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덜미가 안 잡힐 테니까.'

미끼를 준비해야겠다. 에단이 음흉하게 웃었다. 에단의 바로 뒤를 따라가던 가토가 미묘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또 무슨 짓을 벌이시려고....'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 [117화] 용사의 등장? (3)

르니엘의 뒤를 따라가던 에단이 고민에 빠졌다.

'조지는 건 조지는 거고 어떤 명분을 만들어 둘까.'

힘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지금 에단이 가진 힘이라면 무력으로 짓누르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반발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힘 앞에서 당장은 불만을 삼키고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튀어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는 안 됐다. 최대한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둬야 지속적인 세계수의 관찰이 가능했다.

'귀찮은 건 질색인데.'

자신이 일일이 나서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에단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앞서 나가던 르니엘이 말했다.

"용사... 아니... 구원자? 호칭을 어떻게...."

"...에단이라고 불러라."

"음... 알겠어. 에단,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말해 봐."

"오늘 생명의 나무를 찾아온 건 너희뿐이 아니었어. 어떤 여자가 생명의 나무 앞에서 기절했더라고."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그거 신기하네. 그 인간은 지금 어디 있지?"

"우리 마을에서 쉬고 있어. 그런데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

르니엘이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엘프들은 원래 폐쇄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이 사건 이후로는 거의 인간을 증오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에단은 르니엘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잘됐군.'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뒤에서 따라가던 가토가 눈을 끔뻑였다.

'...그 사람이 혹시 헨리 씨인가?'

르니엘이 말한 여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맞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무사하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그럼 휴고 그 녀석은 어디로 간 거야.'

분명 휴고는 헨리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발견된 사람은 헨리 혼자라고 하니 휴고에 대한 걱정이 싹텄다.

'별일 없겠지?'

가토는 휴고를 믿고 있었다. 이제 휴고는 단순한 하인이 아니었다. 가토가 진심으로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였다.

'도련님은 휴고가 걱정되지도 않으신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보다 먼저 수하로 받아들였던 이가 휴고 아닌가. 그런데 에단은 휴고를 걱정하기는커녕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에단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놈은 오래간만에 포식하겠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날을 잡은 김에 충분히 성장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이쪽이야."

르니엘이 앞을 가리켰다. 에단이 정면을 바라봤다.

* * *

'쓸데없는 짓을 하기는.'

리트마가 혀를 찼다. 르니엘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을의 상태가 이 꼴이 난 거지.'

한심했다.

마을을 둘러봐도 르니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엘프들이 득실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간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빠르게 발전한다. 엘프와 비교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이다. 한데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엘프는 어떠한가.

'버러지 같은 놈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한다는 같잖은 가치관을 앞세워 이 좁아터진 숲속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리트마는 그런 삶이 혐오스러웠다. 그에게는 미래가 보였다.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미래가.

'이게 전부 그 나무 따위에 집착하기 때문이야.'

세계수.

엘프들은 생명의 나무라고 칭하는 거목.

힘의 원천이자, 그들이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이유였다.

엘프들은 모두 생명의 나무를 사랑했지만 리트마는 다르게 생각했다.

'고작 나무 하나에 종속되어 있는 놈들!'

생명의 나무에 집착하여 그곳을 떠나지 않는 마을 사람들과 나무를 수호하는 수호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트마의 안에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여 가고 있었다.

결국 리트마는 숲을 나갔다. 그리고 '그들'과 접촉했다.

그들의 원대한 계획을 들은 리트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어.'

우물 안의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그곳에서 만족하고 살고 있었다. 리트마는 그 우물을 부수고 싶었다.

'...나도 이 계획에 동참하고 싶어.'

그들의 계획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물부터 부숴야 했다. 그 우물은 바로 엘프들의 보물인 생명의 나무였다.

생명의 나무만 없으면 엘프들이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리트마도 바보는 아니었다. 생명의 나무가 엘프들의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생명의 나무가 죽게 되면 엘프들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리트마에게 새로운 힘을 맛보게 해 줬다.

'...정령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이야.'

'죽은 마나'라고 불리는 사특한 힘. 하지만 일반적인 죽은 마나보다 훨씬 정순하고 강렬한 힘이었다. 새로운 힘을 얻게 된 리트마는 그것에 매료되었다.

힘이라는 것은 중독성이 있었고, 이미 리트마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 버렸다.

'이 힘을 전파해야 해.'

그들은 리트마에게 계획을 공유했고, 리트마는 그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덕분에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생명의 나무는 죽어 가고 있었으며, 그만큼 숲에 죽은 마나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달콤했다. 생명의 나무가 병들면 병들수록 리트마는 더욱 강해졌다.

'머저리 같은 르니엘.'

르니엘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의심할 것도 없는 것이 오늘도 인간 침입자를 마을로 데려왔다.

'예전부터 그랬지.'

순진한 주제에 모두의 총애를 받았다. 리트마는 그런 르니엘만 보면 화가 치밀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계획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명의 나무라는 사슬을 끊을 때가.

* * *

르니엘이 불안한 표정으로 마을에 들어섰고, 에단과 일행이 뒤따랐다.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군.'

르니엘은 그나마 양호한 상태였다. 다른 엘프들의 얼굴은 초췌하다 못해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음울한 기운이 마을 전역에 만연해 있었다.

멍하니 있던 엘프들의 시선이 에단 일행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맺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어, 알고 있어."

에단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세계수를 병들게 만든 원흉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마을을 찾아왔으니까.

"미안 지금 상황이...."

"괜찮아."

에단이 르니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왔다. 예견했던 상황이다. 지금부터는 이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장로는 어디 있지?"

"...이쪽."

르니엘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에단을 안내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에단의 능력을 보고 난 후 르니엘은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이 우리의 용사구나!

그렇게 생각해 망설임 없이 마을로 이끌고 오긴 했지만,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니야. 이번에는 내 눈으로 봤잖아.'

심지어 세계수도 길을 열어 준 자들이 아닌가.

르니엘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 녀석들은 누구지?"

가장 듣기 힘든 목소리에 르니엘이 몸을 떨었다.

"...리트마."

"너 지금 제정신이야?"

리트마가 살벌한 표정으로 르니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실수 때문에 생명의 나무가 병들고, 마을이 이 꼬라지가 됐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외지인을 데려와? 아까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그때 에단이 앞으로 나섰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에단의 말에 리트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리트마가 쌍심지를 켠 채 에단을 노려봤다.

"오해? 지금 오해라고 지껄이는 건가? 인간 주제에?"

'뻔뻔한 건 대단하군.'

에단이 내심 감탄했다. 에단은 리트마가 어떤 놈인지 안다.

그가 세계수를 오염시키는 일을 주도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르니엘에게 죄를 덮어씌웠다는 사실도 알았다.

"너희 인간 놈들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기나 하고 지껄이는 건가?"

에단이 눈을 껌뻑이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 나는 지금 이곳에서 동료를 보호 중이라고 해서 찾아온 건데 말이야. 생명의 나무라면... 세계수를 말하는 건가? 세계수가 병들었다고?"

"하! 뻔뻔하기 그지없군. 너희 인간들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모른 척을 하겠다는 말인가?"

"모른 척이 아니라. 몰라서 묻는 거다. 세계수가 병들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인간들이 세계수를 오염시켰다고? 애당초 세계수를 오염시킬 방법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걸 우리가 어떻게...!"

리트마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고함을 내지르려 할 때, 에단이 리트마의 말을 자르며 말을 이었다.

"만일 세계수가 병들었다고 하면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에단의 말에 리트마의 눈이 커졌다. 리트마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개,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또 무슨 헛소리로 우리에게 피해를...."

"그 말이 사실입니까?"

그때 멀리서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는 노인이 있었다. 르니엘이 노인을 보고 말했다.

"툰나님...."

툰나라고 불린 나이 많은 엘프가 간절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보잘것없지만 저는 이 마을의 장로인 툰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명의 나무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에단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툰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장로님! 또 인간 놈들의 입바른 소리에 현혹되시는 겁니까!"

리트마가 소리쳤다. 하지만 툰나는 리트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에단을 응시했다.

"...실례되는 말씀이긴 하나, 믿기지 않기에 재차 묻습니다. 정말 생명의 나무를 낫게 할 수 있으십니까?"

툰나의 얼굴에는 간절함과 동시에 의심의 기색이 가득 차 있었다. 에단의 말만을 믿기에는 그간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그 전에 제 동료가 이곳에 있는 게 사실입니까?"

"갈색 머리의 여성이라고 한다면 맞습니다."

"먼저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툰나가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장로님!"

리트마가 소리쳤다. 툰나가 고개를 돌려 리트마와 시선을 마주쳤다. 리트마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또다시 인간들에게 배신당할 생각이십니까? 지긋지긋하지도 않습니까?"

"...이유 없는 의심은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 의심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꼴이 된 게 누구 때문에...."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그건...."

"우리에겐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헛돼 보이는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합니다."

툰나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리트마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에단이 리트마의 얼굴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배우가 따로 없군.'

감탄이 절로 나오는 뻔뻔함이었다.

◈ [118화] 배신자 찾기 (1)

'신기할 정도의 철면피군.'

엘프의 얼굴 가죽은 인간보다 두터운가?

그런 원초적인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에단은 리트마가 무슨 일을 행했고, 이후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주인공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악역이었으니까 당연했다.

'원작에서 이 녀석이 외부와 내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도 어이가 없지.'

에단이 가늘게 뜬 눈으로 리트마를 훑어봤다.

'이걸 왜 모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리트마는 외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티를 풀풀 내고 있었으니까.

반짝이는 반지, 목걸이, 귀걸이, 의복.

다른 엘프들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의 사치품이다.

저게 자기 나름대로 자중한 것일 텐데....

'얘네는 눈이 없어?'

엘프들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생각이 없는 거다.

다른 엘프들의 겉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천으로 이루어진 특색 없이 평범한 옷.

당연히 장신구 따위는 있을 리가 만무했다. 평생을 숲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이 어디서 저런 장신구를 구해 오겠는가.

하지만 리트마는 달랐다. 비단 같은 옷을 걸친 채 수많은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다.

모르는 게 머저리였다. 리트마는 대놓고 외부와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떠들고 다니는 셈이었다.

'뭐, 일단 두고 보자고.'

여기서 터트려서야 재미를 볼 수가 없으니까.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먼저 일행분에게로 안내해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이미 손을 쓰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리트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결국 또다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저주 같은 악담을 퍼부은 리트마가 자리를 떴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르니엘의 표정은 어두웠고, 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입니다."

멀어져 가는 리트마에게서 시선을 돌린 툰나가 일행을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일행은 툰나를 따라 이동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검소한 집이었다.

"여기 안에 제 일행이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툰나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고, 에단이 그 뒤를 따랐다.

'여기 있었군.'

침대에는 헨리가 누워 있었다. 일행들도 놀란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헨리는 일행이 찾아왔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가토가 불안한 표정으로 툰나를 바라봤다.

"...상태가 많이 심각한 건가요?"

"면목이 없습니다만... 저도 이분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도련님, 헨리 씨를 빨리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요?"

"기다려."

에단은 가토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헨리를 지켜보았다.

헨리의 호흡은 일정했다. 붉게 상기되어 있는 얼굴은 심상치 않아 보였지만,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죽을 녀석도 아니고.'

헨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에단이 몸을 돌려 툰나를 바라봤다.

"제 일행이 어디서 처음 발견된 거죠?"

"그건 내가 설명할게."

뒤에서 지켜보던 르니엘이 앞으로 나왔다. 르니엘은 헨리와 어디서 조우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자아가 발현된 건가.'

혹은 생존 본능일 수도 있었다. 세계수는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까. 에단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 헨리의 몸 위에 올려 두었다.

지이잉―

목걸이가 진동하며 은은한 빛을 발산했다. 툰나의 눈이 점차 커졌다.

"이건...."

"세계수의 목걸이."

에단의 대답에 르니엘의 눈도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건...."

"훔친 건 아니니까 그런 표정을 지을 건 없어."

에단이 르니엘을 향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툰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제 생각보다 더욱 특별한 분이셨군요."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보다는 이 녀석이 더 특별한 녀석이죠."

에단이 헨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헨리의 주위에는 은은한 장막이 펼쳐진 것 같았다.

"이분은 대체... 평범한 인간이라기에는...."

툰나가 해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은 툰나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럼 이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정화를 한다는 것인지...."

"그것도 이따 함께 보여 드리죠."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제기랄!"

리트마가 분노를 토해 냈다.

"르니엘 그 머저리 같은 녀석이 또...!"

모든 계획이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곧 있으면 생명의 나무는 완전히 오염될 것이다.

이제 생명의 나무는 생명을 낳고 마나를 순환하는 것이 아닌, 동물을 오염시키고 죽은 마나를 배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리트마는 더욱 강해지게 될 것이고, 당연히 엘프들도 숲 밖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더 이상 숲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생명의 나무라는 존재에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다.

리트마가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거처에는 수많은 사치품들이 가득했다.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 선물들은 인간들의 성의였다. 리트마는 구태여 이런 선물들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협조했을 뿐인데 그들이 먼저 건네기 시작한 것이었고, 리트마는 그러한 것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나무를 정화한다고?

불가능한 소리였다. 이미 씨앗은 싹을 틔웠고, 숲에는 마수들이 들끓었다. 현재 숲의 주인은 엘프가 아니었다. 엘프들도 마수를 피해 다녔고, 마수에게 목숨을 잃은 엘프들도 적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해하게 둘 수는 없지.'

리트마의 얼굴은 살벌했다.

* * *

"한 번 올 때마다 고역이 아닐 수가 없군."

"그러게 말이야."

로브를 걸치고 있는 남자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낮추거라."

"어차피 저희 주변에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있어 봤자 마수 몇 마리가 전부일 텐데...."

"내 말이 우습나?"

파이론의 서늘한 음성에 보헨이 입을 다물었다. 파이론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

"너희들은 지금 여기 놀러 온 건가?"

"...아닙니다."

"안일한 생각은 집어치우도록. 우리는 임무를 수행하러 온 것이니 할 일만 하면 된다."

파이론의 어조는 고저가 없었지만 무거웠다.

"...죄송합니다."

"준비는 끝났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보헨이 대답하자 파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론의 시선이 보헨의 옆에 있는 키얀에게로 옮겨졌다.

"그럼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키얀의 대답과 동시에 보헨과 키얀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키얀과 보헨은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실력이 뛰어나면 그만큼 자아가 강한 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헨과 키얀이라도 파이론의 말은 거역하지 못했다.

단순한 직위 때문이 아니었다. 파이론은 괴물이었고, 괴물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위험해.'

보헨은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오며 산전수전 모두 겪은 이였다.

하지만 그런 보헨에게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자가 바로 파이론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오면서도 파이론 같은 자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두고 볼 수는 없지.'

상대가 아무리 괴물이라고 한들 공략법은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보헨은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얻게 되면 그게 마지막일 거다.'

보헨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고양감이 치솟았다. 마치 황홀경 같았다.

보헨이 품에서 작은 보석 파편 같은 것을 꺼냈다. 검게 물들어 있는 보석이었다.

"씁,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군."

수많은 자들이 갈구하는 보석이었다. 이 보석의 힘을 흡수하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보헨은 욕망을 억눌러 냈다. 보석은 계획의 일부였다.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파이론은 곧바로 보헨을 의심할 터였다.

그리고 보헨은 파이론의 의심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보헨이 발끝으로 흙을 차올리자, 바닥이 한 움큼 파지며 꽤나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안에 보석을 떨구는 보헨의 눈에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이걸로 하나.'

아직 세 개가 더 남아 있었다. 순간 욕망이 치솟았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힘에 대한 갈망을 이겨 내기가 어려웠다. 마치 약에 중독된 듯이.

'겨우 짐승 따위가 이 힘을... 부러운 새끼들.'

보헨이 주변의 기운을 느꼈다. 보석은 짐승을 마수로 변하게 만들며, 마수화가 된 짐승은 몬스터보다도 아득히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마수는 숲을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세계수를 오염시키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마수가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에서 죽은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세계수가 완전히 침식되어 타락한다면 이제 보석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터.

마나는 사멸하고 죽은 마나만이 숲에 만연할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움직여야겠지.'

그것은 보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 평생 파이론을 앞지를 수 없었다. 파이론 또한 강해질 테니까.

'그 전에.'

보헨이 품속에 있는 검은 파편을 움켜쥐었다. 기회가 보인다면 언제든지 힘을 흡수할 생각이다. 협력자도 구했다. 키얀도 보헨과 같은 뜻을 공유하고 있었다. 혼자서라면 힘들지 몰라도 둘이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게 진작 융통성을 가졌으면 좋잖아?'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게 숲은 고된 장소였다. 편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모든 부분이 불편했으며, 씻는 일은 꿈조차 꿀 수도 없다. 심한 일교차는 단련된 이들도 견디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지원한 이유는 하나였다.

엘프의 존재 때문이다. 엘프는 미관상 매우 아름다운 종족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와 큰 눈, 그리고 비단 같은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다.

무릇 남성이라면 욕정을 자제하기 어려울 터.

하지만 파이론은 이를 일언지하에 묵살했다. 임무에 방해될 뿐이라고.

그때 보헨은 파이론의 명령에 처음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고, 파이론은 보헨을 힘으로 억눌렀다.

보헨이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날의 공포가 아직 뇌리에 남아 있는지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기랄.'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그놈은 대화가 통하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그들에게 협조적인 엘프가 하나 있었다. 엘프답지 않게 속물적인 녀석이라 다루기가 매우 수월했다.

'그 머저리 같은 녀석은 헛된 희망을 품고 있겠지?'

큭큭.

조소가 새어 나왔다. 똑같이 미개한 엘프 주제에 욕망이 가득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엘프가 바라는 욕망은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전에 잘 구슬리면 하나쯤은 얻을 수 있을 거야.'

큰 욕심은 가지지 않았다. 그저 엘프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한 보헨은 머릿속으로 어떤 뇌물을 준비할까 고민했다.

◈ [119화] 배신자 찾기 (2)

검을 든 에단이 숲을 걸었다. 그 모습을 네이드와 가토가 묘하게 바라봤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에단의 물음에 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도련님이 검을 든 모습이 신기해서...."

가토의 시선이 에단의 검으로 향했다. 에단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검 쓰는 걸 싫어한다고 했어? 그래도 블란테의 자제인데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에단에게서 느껴지는 낯섦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에단이 검을 다루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에단의 검술 실력은 출중한 편에 속했다.

블랙 오우거를 처치할 때도, 아카데미의 교수와 겨룰 때도 에단은 검을 썼다.

하지만 에단에게 검은 수단에 불과했다. 에단이 승리해 온 이유는 뛰어난 검술 때문이 아닌, 에단 본인의 강함 때문이었다.

그런 에단이 계속 검을 쥐고 있으니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 ...크흠. 격투가가 검을 들어서 쓰나.

한편 페온은 그런 에단이 못마땅했다. 물론 에단은 페온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쯤일까.'

에단이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감각에 집중했다. 천천히 주변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고요하지만 풍기는 누린내는 숨길 수가 없었다. 어둡고 음험한 기운은 죽은 나무에 이끌리게 된다.

'숫자가 적군.'

개체 수가 줄었다. 에단이 줄인 것도 원인이겠지만 다른 이유가 무엇일지도 예상이 갔다.

'휴고 녀석이 실컷 포식하고 있나 본데.'

휴고가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과식은 몸에 좋지 않지만.'

죽은 마나는 생명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죽은 마나에 과다 노출되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에단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당한 중독이야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에단은 위기를 발판 삼아 더욱 성장했다. 에단에게 죽은 마나는 더 이상 양날의 검이 아니었다.

오히려 먹음직한 음식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꽤나 머네."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수가 감지되었지만 거리가 문제였다.

에단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툰나가 물었다.

"설마 타락한 짐승을 찾고 계신 겁니까?"

"타락한 짐승이요?"

툰나의 말뜻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명백히 마수를 가리키는 단어였으니까.

'아니, 얘네들은 말을 왜 이렇게 꼬아서 하지?'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게 종족 특성인가?

세계수는 생명의 나무, 마수는 타락한 짐승.

구태여 추상적인 말을 섞어서 말한다. 하지만 그걸 지적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에단은 장단을 맞췄다.

"네, 맞습니다. 뭐... 타락한 짐승...."

"역시 그러시군요.... 저희를 대신해 그 순수한 아이들을 구원해 주시려는 겁니까?"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에단이 멋쩍은 눈으로 툰나를 바라봤다. 그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했다.

뭐라 말을 잇기 힘들어 가만히 있자, 이윽고 툰나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용사이십니까?"

"...."

에단은 순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오늘만 용사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다.

― ...이 새끼가 용사면 세상은 망했어.

'제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카이나의 말에 짧게 반박을 한 에단이 툰나와 눈을 마주했다.

"저는 용사가 아닙니다."

에단은 용사라는 과업을 짊어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망나니면 족했다.

답답하게 지내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으니까.

에단의 단호한 대답에 툰나의 눈빛이 순간 음울해졌다.

"그러시군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툰나의 목소리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먼저 가장 가까이 있는 마수... 아니, 타락한 짐승을 찾으러 갑시다."

감각에 걸리는 기운이 있었다. 에단은 망설이지 않고 목적지로 향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툰나였지만,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은 어디 가지 않는 듯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왔다.

"저기 있군요."

툰나는 동정심이 가득한 눈으로 절벽 아래 무리 지어 있는 마수를 바라보았다.

'마수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군.'

이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툰나의 얼굴에 걱정과 긴장감, 그리고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정말 가능하시겠습니까?"

의심과 걱정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마수들 하나하나가 웬만한 몬스터보다도 위협적인 놈들이었으니까.

놈들이 한 번에 달려들기라도 하면 정말 위험했다.

"지켜보고 계시죠."

검을 든 에단이 카이나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가능하시죠?'

―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시끄러운 검?'

― 썩을 놈이....

'그래서 가능합니까?'

― 충분하다. 저 정도 오염쯤이야 한 번의 참격으로 모두 정화할 수 있어.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검을 치켜들자, 툰나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분명 타락한 짐승들을 구원한다고...."

자기가 언제 구원한다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네. 뭐 까짓것 구원해 주죠."

에단이 앞발을 내밀었다.

체중이 사선으로 이동하며 원심력을 더한다. 에단의 뒷발이 회전하며 그와 동시에 등 근육이 강하게 수축하여 폭발적으로 이완했다.

콰앙!

에단이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후웅!

순간 광풍이 휘몰아치며 지면이 격동하는 것 같았다. 휘두른 검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화아악!

쏟아지는 광채가 마수들을 덮쳤다. 강한 공격도 쉽게 막아 내는 마수들의 장벽은 성검의 광채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털썩.

마수들이 광채를 얻어맞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수들은 점차 크기가 작아지며 검게 물든 피부색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수들이 쓰러지면서 그 근원인 죽은 마나가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에단은 손을 뻗어 죽은 마나를 흡수했다.

"대충 끝났나."

숲에 만연하던 죽은 마나가 약해졌다. 아직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간다면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을 터였다.

에단이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눈이 에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들 그래? 장로님은 또 왜 그러시고요."

"...오, 구원자시여."

툰나가 무릎을 꿇고 에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어나시죠."

"...그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이래서 별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예상은 했다. 엘프와 자신은 상성이 나쁠 것이라고. 하지만 예상보다 더 나빴다.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르니엘도 탄성을 터트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르니엘의 절절한 눈빛에 에단의 얼굴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가토."

"구원자...."

"뒈질래?"

에단의 살벌한 목소리에 가토가 곧장 시선을 내리깔았다. 둘의 대화에 네이드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언제 이렇게까지.'

에단의 재능은 알고 있었고,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보여 줬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에단은 또 한 번 자신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나이가 들어 버린 모양이군.'

네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에단이 네이드를 응시했다.

"왜 이렇게 죽상이야?"

"나이를 먹은 모양입니다."

"새삼스럽기는. 아직 정정하잖아? 난 은퇴시켜 줄 생각 없으니, 기대는 접어 둬."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에단이 가파른 절벽을 순식간에 타고 내려갔다. 네이드와 가토도 뒤를 따랐다.

"르니엘."

르니엘이 막 에단을 뒤따르려 하는 순간, 툰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네, 장로님."

"고맙구나."

"그게 무슨...."

"네가 인연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번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르니엘의 말에 툰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르니엘. 삶은 선택의 연속이야. 가끔은 실수가 있을지 몰라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툰나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르니엘은 어째서인지 가슴이 먹먹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장로님."

르니엘이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에단이 밑에 도착하자 동물들이 하나둘 눈을 뜨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마수가 아닌 산짐승에 불과했다.

'흠, 뭔가 아직 거슬리는데.'

죽은 나무 덕분에 에단은 죽은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했다. 그런 에단의 감각에 아직 죽은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잔여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짙어.'

에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훑어봤다. 그때 에단의 시야에 무언가가 걸렸다.

인위적으로 뒤집힌 땅이 보였다. 에단이 망설임 없이 다가가 걷어차자, 땅이 움푹 파이며 거슬리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빙고."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이제 거의 끝났군."

보헨이 이마를 쓸어내렸다. 몸이 고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보헨이 자신의 손에 들린 보석 조각을 바라봤다. 이것만 땅에 묻어 두면 이번 일은 끝이었다.

'일은 끝났지만....'

보헨은 숲을 바로 떠날 생각이 없었다. 보헨의 머리는 이미 음욕에 절여져 있었다.

'그 녀석은 한 번 보고 가야겠어.'

뒤에서 자신들을 도와주는 끄나풀 역할을 하는 엘프였다.

보헨이 자신의 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상당히 고가의 사치품이었지만, 이 일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다.

'고작 이딴 걸로 세계수를 얻을 수 있다니.'

웃음만 나왔다. 이제 곧 준비된 것이 발현되면 이딴 보석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질 터.

'그러니까 그 전에 즐겨야지.'

보헨이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슬슬 시간이 됐나?"

이전 접선 때 따로 말을 해 둔 장소가 있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이 숲을 찾아왔으니, 지금쯤 가면 딱 만날 수 있을 터.

"적당한 엘프를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보헨은 부푼 꿈을 안고 자리를 이동했다.

하지만 그때,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가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자마자 머리 위로 강한 바람이 일었다.

'뭐야?!'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보헨이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보헨의 눈앞에는 야수 한 마리가 서 있었다.

크르르르.

"이게 무슨...."

그는 당황하며 검을 쥐었다. 보헨의 본능이 위험하다 경고하고 있었다.

교활하고 잔혹한 은빛 늑대.

늑대의 입에서 누린내와 함께 침이 뚝뚝 떨어졌다. 저 늑대는 지금 자신을 먹잇감으로 보고 있었다.

보헨은 침을 삼켰다. 은빛 늑대의 살기에 몸이 떨렸다.

[120화] 배신자 찾기 (3)

'...뭐지 이 괴물은?'

눈앞에 있는 괴물은 마수가 아니었다. 이 숲에 존재하는 마수는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수냐, 아니냐 따위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본능이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위험하다. 상대하면 안 된다.

파이론이 진심을 내비칠 때와 흡사한 감각이었다.

'이 짐승 새끼가 그 정도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헨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았고, 용기라는 이름의 만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피해야 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원을 해 줄 인력도 없었다. 여기서 부상을 입어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그러나 보헨은 함부로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지금 몸을 돌리면 곧바로 목이 물어뜯길 것 같았다.

보헨이 검을 뽑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기회가 보이면 당장에라도 내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빛 늑대는 보헨이 도망치려는 낌새를 눈치챘다는 듯 비웃음 섞인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크르르르."

"저 개새끼가...."

자존심이 상했다. 이 정도 힘을 얻고서 저딴 몬스터에게 겁을 집어먹다니.

하지만 보헨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보헨이 눈을 빠르게 굴렸다.

'어디 쓸 만한 거 없나?'

그때 보헨의 눈에 돌멩이 하나가 보였다. 그는 자세를 틀어 돌멩이를 그대로 걷어찼다.

빠악―!

걷어찬 돌멩이가 은빛 늑대를 향해 쇄도했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파밧!

크아아!

자신을 향한 공격에 휴고의 야성이 폭발했다.

휴고가 사족 보행으로 거칠게 내달렸다. 그 모습을 본 보헨이 아연실색하며 몸을 돌렸다.

"제, 제기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그러면 개죽음이다.

하지만 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보헨은 몸을 빼면서 검을 찔러 넣었다. 앞뒤 없이 돌진하는 몬스터들에게는 곧잘 먹히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휴고는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몸을 슬며시 비틀며 마치 비웃듯 공격을 피해 냈다. 손톱이 돋아 있는 휴고의 손이 보헨의 검을 붙잡았다.

콰지직!

마나 어린 검이 단번에 분질러졌다. 그것으로 보헨은 전의를 잃었다.

"제기라아아알―!"

보헨이 괴성을 내지르며 도주했다. 은밀함과 임무의 수행은 지금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보헨은 본능적으로 생존 가능성이 제일 높은 방향으로 뛰었다.

협조하는 엘프와의 접선 장소, 그 인근에는 키얀도 있을 테니 그곳에만 도착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터였다.

크르릉!

야수화한 휴고가 방해물을 모두 산산조각 내며 보헨을 쫓았다. 휴고의 손에 닿는 모든 게 가루가 되었다. 압도적인 살기가 뒤에서 들이닥치자, 보헨은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느꼈다.

"살려 줘―!"

보헨이 간절하게 소리쳤다.

* * *

"흠, 대충 이쯤인가."

에단이 땅을 파헤치며 근방에 있는 보석들을 모두 회수했다. 이 보석이 마수를 만든 원흉이었다.

에단이 손바닥 위에 있는 보석을 바라보다 주먹을 쥐었다. 파편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파편에 잔재하던 기운은 에단에게로 흡수되었다.

― ...마음에 들지 않는군.

카이나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나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성검과 죽은 마나는 상극의 기운.

자신의 힘을 다루면서 동시에 죽은 마나의 힘을 흡수하려는 에단을 아니꼽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에단은 원래 타인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았다.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에단은 파편의 마나를 흡수하는 것을 포기했다.

'저질이군.'

마나의 질이 상당히 저급했기 때문이다.

과거 마나의 양이 아쉬웠던 상황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보석의 힘을 흡수했겠지만, 지금의 에단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저품질의 마나는 에단이 힘을 쌓는 데 방해가 되었다. 그가 지금껏 흡수한 죽은 마나는 모두 상급이었다.

밤의 일족인 벨몬트와 블랙 오우거의 마나는 모두 정순하고 농도 높은 죽은 마나였다.

'고유의 특성도 있고 말이야.'

전부터 느껴 왔다.

벨몬트에게서 죽은 마나를 흡수한 이후로 어둠에 있어 제약이 사라져 밤 또한 낮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블랙 오우거의 마나를 흡수했을 때는 녀석의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피어를 얻었다.

그 이후 데스 나이트와 리치의 힘을 흡수했을 때는 벽을 부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권능감과 예리한 감각을 깨우쳤다.

그런 순도 높은 죽은 마나만 흡수하던 에단에게 이딴 저급한 기운이 눈에 찰 리 만무했다.

'그래도 다 부수기는 아까우니.'

에단이 작은 주머니에 파편을 모아 뒀다.

'자, 그러면 대충 상태는 알았네.'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숲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제 분위기를 반전시켜 볼까.'

지금껏 거침없이 뚜드려 맞던 세계수였다.

상태가 어찌나 안 좋은지 헨리 또한 가수면 상태였다.

'먼저 배신자부터 척살해야지.'

이쯤 되면 명분은 필요 없었다. 이미 장로와 르니엘의 지지를 얻은 상태다. 대충 상대하다가 정 안 되면 뒤집어엎으면 되었다.

파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고, 성검의 정화 능력이 있는 한 에단은 이미 명분을 얻은 상태다.

'이것만으로는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하기에는 상황이 안 좋았다.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에단이 의식을 집중하고 감각을 퍼트렸다. 가장 먼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뭐 하냐?"

에단이 르니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르니엘이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에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용사...."

"야, 얘 좀 치워."

에단이 무심하게 말하자, 가토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용사님의 뜻이라면...."

꽈드득.

에단이 주먹을 움켜쥐자 살벌한 소리가 퍼졌다. 눈에서 살기가 줄줄 흐르는 모습을 본 가토가 화들짝 놀라며 르니엘을 붙잡았다.

"바, 방해하지 마시죠."

르니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든 말든 에단은 집중하여 감각을 넓혔다.

살려 줘―!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이의 목소리였는데 동시에 익숙한 기운도 느껴졌다.

거칠고 흉포한 기운이었다. 에단에게는 익숙한 휴고의 기운이었다. 에단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찾았다."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았다.

* * *

리트마는 예정된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들....'

리트마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는 외지인을, 협력자들을 이용해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접선 장소에는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히 인간 주제에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다는 사실에 짜증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이번에는 약소한 것으로 끝내지 않을 거다.'

리트마는 이미 인간이 건네는 뇌물에 익숙해져 있었다.

소박하고 소소한 삶을 영위하는 엘프들과는 다르게, 리트마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인간들의 사치품에 매료되었다.

바라보고, 몸에 두르는 것만으로도 고양감이 치솟았다. 리트마는 점점 사치품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지만, 리트마의 몸에는 점점 인간들의 사치품이 걸리기 시작했다.

'...두고 보자고.'

리트마가 이를 갈았다. 인간 놈들이 오는 순간 짜증을 토해 낼 생각이었다.

살려 줘―!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목소리였다. 리트마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무, 무슨...."

자신과 인간들이 접선한다는 사실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사항이었다.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만남에서 갑자기 괴성을 지르다니.

리트마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사태를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인간의 목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거친 살기가 느껴졌다.

'마수?'

아니 마수 따위가 아니었다.

"제, 제기랄!"

수풀을 헤치며 보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야수화한 늑대가 달려들었다. 순간 리트마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사, 살려 줘!"

"크르릉!"

휴고가 팔을 휘둘렀다. 리트마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거대한 나무가 수수깡 부서지듯 산산이 조각났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진 리트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 제기랄!"

보헨이 다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하자, 리트마도 우왕좌왕하다가 그의 뒤를 쫓았다.

"이, 인간 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나도 몰라 귀쟁이년아!"

오히려 보헨이 묻고 싶은 상황이었다. 이런 돌발 상황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니까.

'이 새끼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한시가 촉박한 상황에 동료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초조함이 앞섰다.

'차, 찾았다.'

그때 멀리서 키얀의 모습이 보였다. 파이론 만큼은 아니어도 키얀이라면 힘을 합쳐 늑대를 상대할 순 있을 것 같았다.

"키, 키얀!"

"뭐, 뭐야?!"

키얀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보헨에게는 지금 상황을 설명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 새끼 좀 어떻게 해 봐!"

뒤에서 미친 듯이 쫓아오는 늑대를 발견한 키얀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윽고 보헨이 몸을 던져 지면을 굴렀다.

휴고의 앞발이 한 끗 차이로 보헨의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보헨이 자세를 잡았다. 경험이 많은 만큼 노련한 대처였다.

"후욱, 후욱."

보헨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 옆에는 리트마도 같이 있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키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보헨이 짜증을 냈다.

"나도 몰라! 갑자기 저 늑대 새끼가 날 덮쳤다고!"

"후, 빨리 처리하자. 이거 파이론한테 걸렸다가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지 키얀이 몸을 떨었다. 보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는 무리였지만 둘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귀쟁, 아니, 리트마 씨?"

보헨이 리트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트마의 얼굴에는 당혹과 짜증이 가득했다.

"지금 이게 무슨...."

"저희도 당혹스러운 상황인 건 마찬가지니까 일단 눈앞에 있는 저것부터 처리하시죠."

"하... 알겠다."

리트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리트마는 엘프였다. 하지만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는 더 이상 엘프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지 않았다.

대신 리트마는 다른 것을 얻었다.

리트마의 손에서 죽은 마나가 피어올랐고, 눈도 검게 물들었다. 그의 손끝이 늑대를 향했다. 죽은 마나로 형성된 화살이 목표물을 포착했다.

화살이 쏘아져 나가려는 그때, 또 다른 외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쾅!

에단이 거칠게 검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에단의 검에 주변 나무들이 사정없이 뭉개졌다.

"누가 우리 댕댕이 건드렸어?"

뒈질라고.

에단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 [121화] 세계수 (1)

크르르르.

야수화한 휴고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한 상태였다.

마수를 포식하면서 체내에 죽은 마나가 상당량 쌓였기 때문이다.

죽은 마나는 휴고를 더욱 포악하게 만들었다.

그 탓에 손짓 한 번에 찢기거나 날카로운 어금니에 으깨질 녀석들이 도망가고 있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내 군침을 흘렸다. 열심히 도망쳐 봤자 어차피 곧 자신의 먹잇감이 될 녀석들이니까.

그런데 놈들의 앞을 막아서는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났다.

검을 든 채 사나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저 인간에게서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다른 먹잇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쾌했다.

이성을 잃은 휴고는 그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턱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휴고는 이빨을 딱딱거리며 이 이상한 기분을 털어 내려 했다.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에단과 제대로 눈이 마주치자, 휴고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크르르...."

"아이고, 많이 무서웠나 보네."

에단이 부드러운 어조로 휴고에게 말했다.

"크아아!"

에단이 손을 뻗으려고 하자, 휴고가 살기를 폭사시켰다. 그와 동시에 에단의 손이 치켜 올라갔다.

"씁!"

"...크르."

"크르? 너 이빨 드러내려고?"

에단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최근 죽은 마나를 포식하면서 에단의 존재감은 과거와 차원이 달라졌다.

게다가 휴고는 각인된 트라우마 탓에 본능적으로 에단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휴고는 포식자였다. 하지만 포식자 간에도 서열이 있는 법이다.

고양이는 호랑이를 두려워하고, 개는 결코 늑대를 넘지 못한다.

휴고의 꼬리가 말리기 시작했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트마와 보헨, 키얀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방금 전까지 긴박하게 쫓기고 있던 보헨과 키얀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휴고를 바라봤다.

에단의 시선이 휴고에게서 리트마로 돌아가자,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에단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어, 아까 마을에서 뵌 분 아닙니까?"

"...."

리트마가 입을 다물었다. 에단이 익살맞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분들과는 아시는 분입니까? 분명 외지인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

에단의 말에 리트마의 얼굴이 짜증과 분노로 물들었다. 그의 시선이 보헨과 키얀에게로 향했다.

눈치가 빠른 보헨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일이 귀찮아졌군.'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었으나, 저 인간 때문에 일이 꼬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어때.'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그럴 때마다 목격자와 증거를 지우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상대의 실력인데.'

은연중에 서로 간의 서열이 드러났다. 저 괴물 같은 짐승보다 서열이 높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고, 기회는 지금뿐이다. 저 늑대 짐승이 잠잠해진 지금 이 순간을 노려야 했다.

보헨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가 키얀을 향해 힐긋 시선을 던지자, 키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트마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분위기의 흐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싸늘해진 공기로 인해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에 감돌았다.

물론 에단에게는 예외였다. 에단이 여유를 잃지 않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왜 대답이 없으시죠?"

"...알 필요 없다."

리트마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보헨과 키얀이 뛰쳐나가려는 순간.

바스락.

수풀 속에서 또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한둘이 아니었다.

"...리트마?"

르니엘이 리트마를 보며 말했다. 리트마의 얼굴이 다시금 굳었다.

"네가 여긴 왜...."

'...제기랄.'

리트마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저 인간 하나쯤이야 죽여서 입을 봉할 수 있었지만 르니엘은 경우가 달랐다.

르니엘의 기동력은 마을에서 최상위권이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마을에 소문이 퍼질 게 분명했다.

어색한 침묵을 바라보던 에단이 씩 웃으며 르니엘에게 물었다.

"장로님은?"

르니엘이 뒤를 바라봤다. 어느새 툰나와 함께 네이드와 가토도 도착해 있었다.

한 걸음 뒤에 있던 툰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곤 빠르게 눈치챘다.

"...리트마."

늘 인자하게 웃으며 말하던 그였는데, 이번엔 엄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네.'

그렇지 않아도 리트마의 정체를 어떻게 까발려야 할까 고민하던 에단이었다.

한데 현장에서 리트마를 발견한 덕분에 생각보다 상황이 쉽게 흘러갈 듯싶었다.

에단은 놈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휴고를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에단이 손으로 휴고의 머리를 쓰다듬자, 휴고의 몸이 흠칫 떨렸다.

휴고는 지금 간신히 야성을 억누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턱이 아려 오고, 심장이 옥죄였다. 원초적인 두려움이 휴고의 발을 묶어 놨다.

마치 사자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에 휴고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끼, 끼잉...."

휴고가 신음을 흘렸다. 에단의 눈이 다시금 살벌해졌다.

'감히 내 귀여운 멍멍이를.'

때릴 곳 하나 없는 애를 얼마나 복날 개 두들겨 패듯 팼으면, 이렇게 겁에 질려 있단 말인가.

에단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야."

에단이 쌍심지를 켠 채 노려보자, 세 사람의 몸이 떨렸다.

피부가 저릿했다. 숨통을 짓누르는 살기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다.

몸이 얼어 버린 세 사람을 바라보던 에단은 짜증이 치솟았다.

'명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우호적인 관계 따위는 나중으로 밀어 놔도 됐다.

'내가 가진 걸 이용하면 그만이야.'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 쓰며 판단했단 말인가.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툰나를 바라봤다.

"아시죠?"

"...괜찮습니다."

툰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건 곧 툰나의 허락이라는 소리였다. 그 속뜻을 알아차린 에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에단이 휴고에게 다가가자, 휴고의 몸이 흠칫 떨렸다.

에단의 손이 다시금 휴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휴고는 잠자코 에단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빈틈투성이처럼 보였지만 에단을 공격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에단의 손길이 닿자 다리를 후들거렸다.

"네이드."

"네, 도련님."

에단의 부름에 네이드가 곧장 대답했다.

"방해하는 새끼들이 나타나면 알아서 처리해. 내 말 알지?"

"알겠습니다."

네이드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에단이 손에 들려 있는 성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로 쓰고 싶지 않네.'

짜증을 풀 때는 역시 맨손이 제격이었다.

푹!

― ...너 진짜.

에단이 지면에 성검을 박아 넣자, 카이나가 짜증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에단은 가볍게 무시하고는 손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키얀과 보헨이 뒷걸음질을 쳤다. 에단의 기백에 압도당한 것이다.

'이 녀석은 뭐지?'

처음 마주하는 감각이다. 사자 앞의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그 괴물 같은 파이론과 마주했을 때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보헨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칼밥을 먹고 자란 이들은 모두 기민한 눈치를 자랑한다.

그런 그가 봤을 때 눈앞에 있는 자는 절대 대적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보헨이 리트마를 향해 물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리트마는 입을 다물었다.

르니엘이 데려온 인간 놈들 때문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르니엘 혼자였다면 그녀를 처리하면 그만이다. 일이야 좀 복잡해지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잠깐.'

리트마의 표정이 돌변했다. 증거의 인멸이라는 전제를 놓는다면 이번 일도 해결할 수 있었다.

리트마는 정체되어 있는 마을과 일족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머저리 같은 르니엘과 머저리를 두둔하는 툰나가 있었다.

'이번 일은 기회다.'

리트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에단은 바뀐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해 냈다.

저렇게 대놓고 살기를 흩뿌리고 있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면 이상한 일일 터.

타닷!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순간 당황한 리트마가 무언가를 하려고 했지만, 에단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에단의 발끝이 리트마의 명치에 꽂혔다. 깔끔한 프론트 킥이었다.

명치가 관통되는 것 같은 강한 충격에 리트마의 허리가 크게 휘었다.

"커헉!"

리트마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겪어 본 적 없는 강렬한 고통이었다.

에단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어디서 눈깔을 굴리고 있어?"

뒈질라고 새끼가.

갑작스러운 에단의 돌발 행동에 일행이 화들짝 놀랐다.

보헨과 키얀이 뒤늦게 몸을 움직이려 해 봤지만, 에단의 눈과 마주치자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 순간 가토가 두 사람에게로 달려들었다.

네이드도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에단의 명령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네이드는 그 자리에 있어!"

뛰어가던 가토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나 혼자서 가능할까?'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의심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 의심을 잘라 낸 이는 에단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그만해!"

그 짧은 말 한마디에 가토의 머릿속 상념이 모두 지워졌다.

"쪽팔리지 않게 해."

에단이 경고하듯 으르렁거리자, 가토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나는 지금 할 일에만 집중하면 돼.'

마음을 다잡은 가토가 검을 뽑아 들었다.

관리되지 못한 명검. 하지만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검에는 가토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빠르게 달려든 가토가 근처까지 다가오자, 보헨과 키얀의 고개가 돌아갔다.

보헨과 키얀은 경험이 풍부했다. 그리고 그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경지보다도 경험이었다.

가토의 앳된 얼굴만 봐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머릿수에서도 그들이 앞섰다.

'저 녀석이라면.'

머리가 기민하게 회전했다.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승부가 늘어지면 안 된다. 최대한 빠르게 저 애송이를 제압하고 인질로 이용해야 했다.

"키얀!"

보헨이 키얀을 향해 눈을 흘겼다. 키얀은 보헨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파앗!

키얀이 지면을 걷어찼다. 흙더미가 가토의 안면을 향해 튀었다.

'기사라는 족속들은 이딴 변칙에 약하지!'

명예와 신의를 중요시하는 기사들은 이런 변수에 대응을 못 하기 마련이다.

보헨과 키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지만 그 순간.

쐐액!

흙더미를 관통한 가토의 검이 그대로 쏘아져 왔다. 갑작스레 등장한 검에 당황한 보헨이 팔을 들어 올렸다.

푸욱!

팔에 검이 들이박히자, 화끈한 통증에 보헨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개...!"

보헨이 분노를 터트리려 하는 그때, 모래를 뚫고 나온 가토가 달려들었다. 가토의 얼굴에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왜? 이런 거에 처음 당해 봐?"

나는 많이 당해 봤는데.

가토가 지면을 박차며 무릎을 들었다. 에단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는 동작이었지만 깔끔한 플라잉 니 킥이었다.

콰직!

가토의 무릎이 보헨의 턱에 적중했고, 이내 그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가토는 방심하지 않았다.

바닥에 엎어진 보헨의 얼굴을 발바닥으로 내려찍었다.

그러고는 보헨의 팔에 박혀 있는 검을 뽑아냈다.

가토는 한 손에 검을 든 채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키얀이 서 있었다.

◈ [122화] 세계수 (2)

'뭐야, 이 녀석은...!'

키얀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기세에서 밀린 탓에 이미 승세는 기울었다.

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은 키얀은 기세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고 있었다.

키얀이 빠르게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보헨은 이미 끝이 났고, 남은 전력은 리트마 하나였는데....

콰직! 콰직!

리트마의 아름다운 얼굴은 지금 곤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리트마를 짓밟고 있는 에단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이건 미쳤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키얀이 재빠르게 몸을 돌렸지만, 그와 동시에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닷!

그대로 등을 보이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키얀은 재빠르게 몸을 돌려 검을 빼 들었다.

채앵!

검과 검이 부딪치며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자, 키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힘 싸움은 키얀의 주특기나 다름없었다.

"나를 얕잡아 보지 말...."

그 순간, 키얀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꽈드드득!

키얀의 검이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밀리다 못해 키얀은 이윽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쿵!

무릎을 꿇은 키얀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가토의 힘은 키안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무, 무슨 힘이...!'

믿기지가 않았다. 가토의 덩치는 평범했다. 눈에 띄게 건장한 체격이 아님에도 가토는 규격 외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키얀을 찍어 누르던 가토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왜? 당황스러워?"

"이, 이 애송이가!"

키얀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당장 할 수 있는 대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가토의 검을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그러게 운동 좀 하지 그랬어!"

말을 마친 가토가 이를 악물고 힘을 더했다. 키얀은 더는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검을 포기하고 몸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촤악!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한 키얀의 팔에 상흔이 생겼고, 곧이어 팔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상처가 그리 깊진 않았으나, 전투의 양상에 확실히 지장을 줄 정도는 되었다.

'...제기랄.'

키얀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젖살도 안 빠진 애송이에게 이런 수모를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키얀이 고개를 돌렸다.

흉포하기 그지없던 저 늑대 놈은 무슨 이윤지 갑자기 얌전해졌고, 일행은 모두 당해 버린 암담한 상황이었다.

도주를 꾀하자니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적들이 많았다. 이 많은 사람을 뚫고 몸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영향력이 약해졌다 한들 숲은 엘프의 편이었다. 리트마의 도움이 없이는 무사히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때 리트마를 밟고 있던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좀 쓸 만해졌군.'

백 프로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조금 전의 가토는 기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는 될 일도 되지 않을 터.

그렇기에 가토를 사지에 던졌고, 예상했던 대로 그는 에단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한편 전투를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모두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저 인간도 평범한 자가 아니야.'

마을의 전투원 중 하나인 르니엘은 가토의 실력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뛰어난 기본기와 변수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평정심, 그리고 상대를 찍어 누르는 완력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르니엘이 가토를 주시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의 뒤에서 굉음이 터졌다.

쾅!

그와 동시에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바람이 휘몰아쳤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기는 다른 이들도 매한가지였다.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건장한 체격,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갈색 머리와 갈색빛 눈.

소란 속에서도 무심해 보이는 눈빛과 다문 입술에는 우직함과 더불어 위엄이 서려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거무죽죽하던 키얀의 안색이 환해졌다.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외향적인 특징을 보면 대충 누군지 예상이 가는 인물이었다.

"네이드."

"네, 도련님."

네이드의 표정이 돌변했다.

부드럽고 인자하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살기를 머금고 있는 눈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네이드는 곧장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우웅!

단검이 공명하며 마나가 밀집되었고, 이내 완성된 마나 소드가 나타났다.

'이런 미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얀의 입이 벌어졌다.

마나 소드.

그것도 불안정한 상태가 아닌, 제대로 구현된 마나 소드였다.

'마스터가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가 차원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 존재가 바로 마스터였다. 그런 자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키얀이 파이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웅!

파이론이 검을 뽑자 새하얀 검신이 검게 물들었다. 죽은 마나로 형성된 마나 소드였다.

키얀의 입이 한 차례 더 벌어졌다.

'저, 저 양반도 마스터....'

강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마스터의 경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스터씩이나 되는 놈들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키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때.

쐐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얀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바닥에 엎어졌다.

"어딜 보고 있는 거지?"

네 상대는 나인데.

가토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스터 둘과 비교해서 손색이 있을 뿐, 가토 또한 맹수였다. 키얀이 빠득 이를 갈았다.

"...오냐. 상대해 주지."

키얀이 허리춤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가토와 키얀을 슬쩍 바라본 에단이 다시 네이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역량은 네이드가 위고.'

네이드는 마스터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노련한 이였다.

비록 어쌔신이라는 특성 탓에 대인전에서는 다른 마스터들보다는 조금 취약한 편이지만.

'그것도 상대가 첸이나 아버지일 경우에나 해당되는 말이지.'

그 둘을 제외한다면 네이드는 최강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마스터가 아니었다.

검신에 돋아 있는 죽은 마나.

요사스러운 기운을 줄기차게 흘리고 있는 저 죽은 마나는 낯이 익었다.

데스 나이트가 사용하던 기운이다.

그때는 에단이 가진 특성 덕에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었지만 네이드는 쉽지 않을 터였다.

데스 나이트는 아니지만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남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이잉.

성검이 진동하는 소리에 에단이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예상이 갔지만, 에단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리트마 위에 걸터앉았다.

털썩.

그러고는 팔장을 낀 채 네이드의 결투를 지켜보았다.

"어디, 우리 집사가 얼마나 강한지 볼까?"

에단의 태도에 르니엘과 툰나가 눈을 끔뻑였다.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챙! 채재재재재쟁!

연신 불똥이 튀겼다. 검이 맞부딪치며 일어나는 충격파와 풍압에 몸이 밀려났고, 대지가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쟁터를 떠올리게 하는 굉음의 연속이었다. 귀가 멀 것 같았으며, 몸은 소리에 맞춰 연신 움찔거렸다.

전투는 점차 과열되었다. 르니엘은 두 마스터에게 압도되어 뒷걸음질 쳤다.

그때, 툰나가 르니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리를 옮기자꾸나."

툰나의 말에 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리는 너무 가까웠다. 툰나와 르니엘이 에단의 곁으로 다가갔다.

"좋은 구경하시는군요."

에단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하자, 툰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대체...."

"쉿."

에단이 검지를 들었다.

"지금은 지켜보기만 하시죠."

잠시 전투를 지켜보던 에단이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몸이 달아오른 것이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휴고였다.

휴고는 아직까지도 야수화를 벗어나지 못했다.

'흡수한 죽은 마나가 원인이겠지.'

에단이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휴고가 성장할 수 없었다.

지금 휴고는 죽은 마나의 탁기(濁氣)를 모두 태워 내야 했다.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 미친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구나.

에단의 생각을 읽은 페온이 혀를 찼다.

수인의 내구력은 인간과 궤를 달리하며, 성장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그들은 전투와 포식을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그 힘을 온전히 체득하기 위해서는 실전이 필요했다.

'암, 실전만 한 게 없지.'

그런 점에서는 블란테의 교육 방침과 이상하리만큼 흡사했다. 에단이 휴고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휴고!"

에단의 부름에 휴고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서는 번들거리는 안광이 줄줄 흘렀고,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멈추지 않고 새어 나왔다.

"가서 도와."

휴고는 에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마치 이해했다는 듯이 귀를 쫑긋했다.

크르르!

휴고가 상체를 숙였다. 마치 도약을 위한 준비 자세 같았다.

파밧!

휴고가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네이드는 휴고가 달려드는 타이밍에 맞춰 슬쩍 몸을 빼 길을 만들어 줬고, 덕분에 휴고의 날카로운 발톱이 파이론의 가슴팍을 노릴 수 있었다.

콰앙!

파이론이 검을 들어 휴고의 공격을 막았다. 지금껏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파이론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공격이 생각보다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휴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휘릭!

휴고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유연하게 휘었다.

휘익!

딸려 오는 휴고의 다리가 파이론의 턱을 노렸고, 파이론은 검을 회수하며 거리를 벌렸다. 간발의 차이로 휴고의 발이 파이론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칠 네이드가 아니었다.

스르륵.

그림자처럼 파이론의 뒤를 잡은 네이드가 단검을 찔러 넣었다. 푸른 마나가 둘린 네이드의 단검은, 강철도 두부 썰듯 썰어 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후웅!

파이론의 미간이 좁혀졌다. 돌파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스터급의 경지에 이르면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결정된다.

더군다나 역량에서 또한 네이드가 앞선다는 걸 파이론은 알았다. 그런 상황에 빈틈을 보였으니 네이드가 놓칠 리 만무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파이론은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여기서 쓸 게 아니었지만."

파이론이 검을 지면에 찔러 넣었다.

쿠웅!

그 순간 죽은 마나가 폭사되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반발력이 네이드와 휴고를 밀어냈다.

"지금이냐?!"

바로 그때, 에단이 활짝 웃으며 달려들었다. 성검 대신 세계수의 목걸이를 쥐고 있던 에단이 목걸이를 힘껏 던졌다.

지이잉!

목걸이를 기점으로 보호막이 전개되며 파이론이 일으킨 죽은 마나의 폭풍과 맞부딪쳤다.

에단은 펼쳐진 보호막을 지나쳤고, 그대로 파이론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힘 다 썼어?"

그럼 이제 내놔야지.

에단의 품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죽은 나무가 꿈틀거렸다.

◈ [123화] 세계수 (3)

에단이 자신의 팔을 붙잡았을 때, 파이론은 조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파이론은 지금 죽은 마나를 발산하고 있었다.

죽은 마나는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는 극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겁도 없이 달려들다니.

보지 않아도 결과가 예상됐다.

파이론의 무미건조한 입술이 미약하게 비틀렸다. 에단은 파이론의 웃음기를 읽어 냈다.

"웃겨?"

건방지네.

꽈드드득!

에단이 왼손으로 잡았던 멱살을 놓고 파이론의 목을 움켜쥐었다. 에단의 악력은 이미 범인의 경지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

"크윽!"

파이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에단의 무모한 행동을 보고 방심을 했다.

파이론이 팔을 들어 에단을 떨쳐 내려 했지만, 꽉 쥐어진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단의 사나운 안광이 파이론을 주시했다.

"야."

으르렁거리는 듯한 에단의 목소리와 함께 죽은 나무의 힘이 발현되었다.

끼에에에에엑!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에단과 맞닿아 있는 파이론에게는 뚜렷하게 보였다.

빼빼 마른 고목.

하지만 죽기 직전의 피폐한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저건 지금 생명을 탐하고 있었다. 요사스럽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나무는 자신에게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파이론은 본능적으로 저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죽은 나무!'

파이론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던 힘을 애송이가 쥐고 있었다.

'저게 어째서!'

죽은 마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파이론은 엄청난 고통과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다.

본래 죽은 마나는 산 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이론의 몸은 인간과 달라졌다. 이미 반쯤은 언데드라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그러한 대가를 치러 얻은 힘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파괴적이고 패도적인 힘을 무한히 발산할 수 있었다.

평생 넘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벽도 단숨에 부술 수 있었다.

전능함과 함께 갈증을 느꼈고, 그만큼 힘을 더욱 찾게 되었다.

신체의 욕망은 점차 옅어졌다.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고, 열량은 최소한만 섭취해도 충분했으며, 감정의 기복도 옅어졌다.

파이론을 움직이는 것은 힘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가장 원초적으로 포식할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죽은 나무였다.

파이론의 눈에 검은 혈관이 돋아났다. 파이론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 힘은 네놈 따위가...!"

"가질 게 아니라고?"

에단의 입이 반달처럼 휘었다.

"너 그거 존나 식상한 말인 거 알아?"

에단이 비아냥거리며 파이론의 고간을 걷어찼다.

끔찍한 고통에 파이론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숙였다. 상체를 숙인 파이론은 에단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에단이 파이론의 턱을 걷어차자, 파이론이 뒤로 밀려났다.

곧바로 에단이 지면을 박찼다. 파이론의 동공이 움직였다. 비록 편법으로 벽을 부쉈지만 파이론도 마스터였다. 에단의 움직임에 대응할 기량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윽고 파이론의 팔이 꿈틀거리자 검이 휘둘러졌다.

쾅!

하지만 에단의 오른발이 파이론의 검을 걷어차는 바람에 그의 공격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뭐 하냐?"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에단의 다리가 한 번 더 움직였다. 이번에는 파이론의 가슴팍을 향해 딮 킥(Deep Kick)을 날렸다.

딮 킥은 타격을 입히기보다는 상대를 밀어내기 위한 발차기였다. 에단은 상대를 넘어트릴 생각이었다.

강한 충격에 파이론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발을 내디뎠지만 그걸 두고 보고 있을 에단이 아니었다.

"어쭈."

에단이 파이론의 목을 움켜쥔 채로 다리를 걸었다.

화악―!

파이론의 시야가 반전됐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지면으로 향했다.

파이론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재빠르게 일어서려 했지만 에단의 발이 더 빨랐다.

빠악!

에단이 그대로 파이론의 얼굴을 걷어찼다.

"어휴 시원해."

수위 높은 반칙 공격인 사커 킥은 에단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

파이론의 고개가 들렸다.

흰자위가 드러나려 했지만 파이론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곧장 몸을 굴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볼 에단이 아니었다.

에단은 파이론을 따라가 다시금 발을 들어 올렸다.

퍼억!

에단의 발이 복부에 꽂혔고, 파이론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에단이 무릎으로 파이론의 가슴팍을 짓눌렀다.

"어딜 가려고?"

에단의 왼손이 다시금 파이론의 목덜미를 짓눌렀다.

키에에에에에―!

죽은 나무가 파이론의 힘을 갉아먹고 있었다. 파이론은 에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지만, 에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가 볼 테면 나가 보든가."

이미 승기는 기울었다. 파이론의 체력은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편 네이드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에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에단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의 벽은 그리 쉬운 게 아니야.'

에단의 움직임은 분명 마스터의 것이었다. 저자는 네이드에게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마스터의 비기를 꺼내야 이길 수 있는 상대.

물론 자신이 비기를 꺼내면 저자도 똑같이 꺼내 들 테지만, 더욱 오랜 시간 마스터로 있었기에 비기 싸움에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마스터의 비기를 꺼내지도 않은 채 손쉽게 제압하고 짓누르고 있었다.

정체 모를 힘을 사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한다. 패자는 말을 하지 못하니까.

'...지금 도련님과 겨룬다면.'

이길 수 있을까?

비기를 빼고 생각하면 회의적이었다.

네이드는 어쌔신이었다. 정면 승부는 그의 주특기가 아니었다. 빈센트나 첸과는 결이 달랐다.

하지만 네이드도 엄연한 마스터였고, 노련한 전사였다.

관록은 편법으로 얻을 수 없는 법이다. 네이드가 보기에 에단은 노련했고 교활했다.

상대의 심리를 관통하고 있는 저 완숙함은 재능만으로 얻을 수가 없었다.

네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야수화한 휴고가 멀뚱멀뚱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네이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휴고 씨."

네이드가 휴고를 부르자 그의 귀가 쫑긋거렸다. 누렇게 물든 동공이 네이드를 향했다.

눈을 마주친 네이드가 쓰게 웃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어째서 말들이 휴고를 기피했는지, 어째서 휴고의 신체 능력이 그렇게 뛰어났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크릉."

휴고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네이드와 휴고는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가토를 바라봤다.

"같이 감상해 볼까요?"

"...."

네이드의 말에 휴고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의도는 이해했는지 가토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챙! 채재쟁!

가토는 지금 전투를 통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열 번의 연습보다 한 번의 실전이 유익했다.

그는 지금 스펀지처럼 경험을 흡수하고 있었다.

키얀은 사선을 넘어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비록 파이론과는 비교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어디 가서 칼밥으로는 꿀리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토의 기본기는 탄탄했다. 체계적인 수련을 거듭해 온 것이 움직임에서 보였다.

하지만 흐름을 끊는 것은 키얀 같은 이들의 주특기였다.

변초와 허초를 섞어 상대를 교란하면 흐름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토는 흔들리지 않았고, 진실을 판별해 검을 찔러 넣었다.

'이런 애송이에게 이 정도의 판별력이 있다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키얀은 점점 초조해졌다. 가토는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키얀에겐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 그래 파이론은....'

파이론을 향해 힐긋 시선을 던진 키얀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파이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위에 있는 자는 에단이었다.

'제, 제기랄! 저 새끼는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온갖 유세를 떨며 무게 잡던 파이론도 쓰러졌다. 희망의 빛이 점점 사라졌다.

'이, 이런 괴물 새끼들이 도대체 어디서....'

마음이 꺾이니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피부에 하나둘 자상이 생겨나며 키얀의 몸이 피에 젖어 갔다. 안색이 파리해지며 동공이 불안함에 떨렸다.

'아, 안 되겠어.'

키얀이 다시 한번 모래 더미를 발로 찼다. 먼지구름이 일었음에도 가토는 눈살만 찌푸릴 뿐 당황하지 않았다.

키얀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가토가 코웃음을 쳤다.

이윽고 가토의 상체가 숙어지더니 그대로 질주했다. 도주하는 키얀을 향해 달려 나가던 가토가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평소 같았다면 대응했을 키얀이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도주를 택한 순간 가토의 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키얀의 입에서 진한 선혈이 흘러나왔다.

"끄아악!"

키얀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지면을 기어 다니며 삶을 갈구했다.

가토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판별할 수 없었다.

실망감인지 동정심인지, 감정을 알 수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가토는 기사였다. 그리고 주군의 명을 받은 기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가토가 무심한 눈으로 검을 붙잡아 뽑아냈다.

촤악!

"끄아아악!"

피가 솟구치며 키얀이 다시금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에단에게서 힘을 갈취당하던 파이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파이론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그걸 듣고 있던 에단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때 페온과 카이나가 동시에 소리쳤다.

― 막아라!

― 빨리 막아!

에단은 자세를 바로잡아 엘보우로 파이론의 얼굴을 찍었다.

콰지직!

"커헉!"

파이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주문을 막았나 싶던 그 순간.

파이론은 검은 잿더미가 되어 잘게 부서져 내렸다. 이윽고 잿더미 사이에서 음산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에단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뒤편에서 지켜보던 툰나와 르니엘이 몸을 떨었다.

"지금 무슨 일이...."

소름 끼치는 기운이었다.

비단 연기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숲 곳곳에 저것과 같은 기운이 만연해 있었다.

화아아악!

검은 연기가 모여들어 그 크기가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에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토!"

에단이 빠르게 달려가 가토의 뒷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가토가 뒤로 끌려오며 바닥을 굴렀다. 몸집을 불린 검은 연기가 죽어 가는 키얀에게 흡수되었다. 키얀의 동공이 검게 물들었다.

에단이 지면에 박혀 있는 성검을 잡아 뽑았다.

― 너...!

카이나가 분통을 터트렸지만, 에단은 가볍게 무시했다. 에단의 팔에 힘줄이 돋아났다.

마나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미 에단의 몸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죽은 마나였다. 죽은 마나는 성검과 상극이었다.

지금 사용 가능한 것은 순수한 완력과 성검 자체의 능력.

촤아악!

성검이 휘둘러지며 성스러운 기운이 키얀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검게 물든 키얀은 그 일격을 피해 냈다.

"쯧."

에단이 혀를 찼다. 귀찮아지기 전에 처리하기에는 늦어 버렸다.

"■■■■■."

키얀의 검은 눈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입을 열 때마다 검은 연기가 넘실거리는 것이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상태 안 좋으면 곱게 뒤지지 그러냐."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오히려 편해진 걸 수도 있으니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은 감 잡았다.

'저건 지금 힘을 당겨쓴 거잖아?'

뿌려 둔 씨앗이 싹트기도 전에 힘을 모조리 끌어온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불리했기 때문에 한 선택이겠지만.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휴고가 인간의 형상을 되찾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쯧, 이건 아쉽네.'

휴고는 오히려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뭐, 대신에 내가 크면 되지.'

입맛이 돋은 에단의 눈꼬리가 휘었다.

◈ [124화] 세계수 (4)